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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 주간 예배 설교     / Passion Week Worship preaching           
 

 

 

 

예수님을 부인한 베드로(마 26:69-75)  

 

 베드로는 주님의 제자 중 열심있는 수제자로, 예수께서 제자들의 배신을 예언하실 때도 자신만은 주님을 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호언 장담했던 사람입니다. 그런 그도 예수님을 부인했을 뿐 아니라 저주까지 했습니다. 예수님을 부인한 베드로를 통해 우리 성도들이 알아야 할 교훈은 무엇인지 살펴보도록 합시다.

 

  ① 우리는 약한 자입니다(롬 5:6) - 우리에게 다른 사람보다 뛰어난 능력과 열심히 있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연약한 육신을 입고 있는 인간일 뿐입니다. 따라서 우리 자신의 능력만을 의지하고 승리의 주님, 도우시는 성령을 의지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언제라도 또다시 넘어질 수밖에 없는 약한 자들인 것입니다.

  ② 소망에 대한 확신이 없으면 넘어집니다(롬 8:24,25) - 우리가 복음을 인하여 핍박과 환난을 받지만 기쁭으로 인내하여 견디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질 천국에 대한 소망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에 대한 소망과 확신이 없다면 이 세상을 살아 나가는 도안 겪게 될 수많은 고난에 우리는 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③ 실패해도 다시 일어나야 합니다(고후 12:9,10) - 우리는 연약한 인간이기 때문에 우리의 삶 가운데는 크고 작은 실패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주님은 우리 자신들보다도 이 사실을 더 절 아십니다. 베드로도 주님을 부인함으로 실패자가 되었지만, 다시 회개하고 일어나 사도직을 잘 감당했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실패의 아픔을 딛고 일어나는 용기와 결단이 있어야 최후의 승리자가 됩니다.

 

  주님을 향해 가다 육신의 연약함을 인해 넘어졌습니까? 그렇다면 그 나약한 모습 그대로 주님 앞에 나오십시오.그러면 승리의 주님이 연약한 당신을 이끌어 승리하는 삶을 얻게 하실 것입니다.
 

   영원한 실패자 가룟 유다(마 27:3-8)  

 

  가룟 유다는 영광스런 주님의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은 삼십에 팔아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시게 했습니다. 결국 이 어리석은 자는 스스로 목매달아 죽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유다의 죽음은 어떤 것이었는지 살펴봄으로 주의 제자로서의 우리의 자세를 바르게 합시다.

 

  ① 육신이 비참하게 주었습니다(5절) - 주님을 십자가에 달려 돌아 가시게 한 가룟 유다는 양심의 가책으로 인해 스스로 목매달아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팔아 얻은 은 삼십은 그가 죽은 후 그의 묘지를 사는데 쓰여졌습니다. 때로 우리의 마음을 사로 잡는 세상적인 욕심의 결국은 이처럼 허무한 것입니다.

  ② 명예가 죽었습니다(6-8절) -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욕된 이름은 그의 명예를 죽일 뿐입니다. 기룟 유다의 이름은 그의 죄악된 행동으로 인해 2000년이 지난 지금은 물론 영원히 저주의 대명사로 불려질 것입니다.

  ③ 영혼이 죽었습니다(약 1:15) - 예수님을 판 가룟 유다의 죄는 진정 용서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은혜의 주님은 그가 돌이켜 주님 앞에 회개했다면 그를 용서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돌이키지도, 용서를 구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죄책감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죽음을 택했을 뿐입니다. 이에 그의 영혼은 영원한 지옥불에 던져지고 말았습니다.

 

  가룟 유다는 결국 잠시 세상의 달콤한 유혹을 따라가다 돌이키지도 못할 인생의 영원한 실패자로 비참한 말로를 맞이했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주님을 잘 따라 왔습니다. 앞으로도 주님만을 바라보며 따라갑시다. 혹 세상적인 유혹으로 인해 주님의 제자로서의 삶의 노선에서 잠시 빗나갔을지라도 즉시 회개하고 돌아옵시다. 승리의 삶을 주시는 주님께로.
 

   고난의 종으로 오신 예수님(사 53:4-6)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도 피조물의 육신을 입으시고 이 땅에서 고난을 받으시며, 핍박하는 자들을 위해 도리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 고난 주간을 맞이해 이땅에 오신 주님이 당하신 고난은 어떤 것이었는지 생각해 봅시다.

 

  ① 고난 받은 예수님(4절) - 예수님은 아무 흠도 없는 거룩한 분이십니다. 그런데 그분이 그의 백성들의 더러운 죄로 인해 조롱받으시고, 채찍에 맞으시고, 십자가에 못박히는 육체적인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② 버림 받은 예수님(5절) - 죄인인 인간들을 사랑하셨기에 고난을 받으시는 예수님을, 인간들은 오히려 욕하며 배척했습니다. 똫나 주님을 따르던 제자들마저 주님을 버리고 도망감으로 처절한 배반을 경험하셨습니다.

  ③ 죽음을 당하신 예수님(6절) - 죽음은 범죄로 인한 심판입니다. 그런데 아무 흠도, 죄도 없는 깨끗한 주님께서 하나님께 버림받는 죽음의 심판을 받으셨습니다. 이로 인해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가 생명을 얻었습니다.

 

  주님은 2000년전에 하나님의 종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대속의 사역을 다 이루어 놓으셨습니다. 그리하여 이 대속의 십자가 죽음의 사역을 믿기만 하면 모든 자들이 다 영생을 얻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가 이러한 주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온전히 살지 못한다면 주님을 또다시 십자가에 못박는 것이 되지 않겠습니까?
 

   바울이 경험한 전화 위복(행 9:4; 고후 12:7; 빌 1:13)  

 

  예수님은 외롭고 고통스러운 십자가 사역을 마치신 후에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때로 성도에게 고난을 허락하시고 고난의 과정을 통해 당신의 계획을 이루십니다. 자신의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짐을 보고 감사했던 바울을 통해 고난을 주시는 깊은 하나님의 뜻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① 소경됨을 인해 영적 눈을 떳습니다(행 9:4) - 주님을 핍박하던 사울이 하나님의 섭리하심으로 잠시 소경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암울함 속에서 그는 오히려 빛이신 그리스도를 발견했습니다. 육체의 한 지체를 잃음으로 그는 영혼을 얻었습니다.

  ② 육체의 가시로 겸손을 배웠습니다(고후 12:7) - 하나님은 바울에게 육체의 아픔과 고통을 허락하셨습니다. 바울은 육신의 연약함을 통해 자신의 무능함과 크신 하나님의 권능을 깨달았습니다. 이로 인해 그는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한 삶의 자세를 배웠습니다.

  ③ 감옥에 갇힘이 전도의 기회가 되었습니다(빌 1:13) -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전파하는 바울이 옥에 갇히도록 허락하셨습니다. 잠시 잠깐 복음이 막히는 듯했으나, 이는 또다른 복음 증거의 기회가 되었습니다. 감옥에서도 담대히 복음을 전파하는 바울로 인해 많은 사람이 영혼의 해방을 얻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예기치 않은 고난이 임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고난 가운데는 하나님의 깊은 뜻이 감추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고난 속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살펴 고난 중에도 감사하며 인내함으로 승리하는 삶을 사는 성도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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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로와 삼계탕(내적치유, 죄책감, 자유) 기독교유머

 

베드로가 사역을 하다가

 

몸과 마음이 아주 힘들어져서

 

몸져 누웠다.

 

한의사가 와서 진맥을 하더니 말했다.

 

삼계탕을 먹으면 낫습니다.

 

그 말대로 했더니 베드로는 거뜬하게 나았다.

 

사람들이 놀라서 그 용한 한의사에게

 

이유를 물었더니 그가 대답했다.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한 죄책감이 치유되지 않아서

 

닭이 울 때마다 몸과 마음에 엄청 스트레스를 받았더군요.

 

그래서 그 놈의 닭을 잡아먹으면

 

몸과 마음이 회복될 것 같았지요....zzz

 

 

 

직장을 다니면서 투잡(재택알바/부업)으로 월급만큼 수익을 얻을 수 있는 곳을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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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영리(四靈理)에 대하여 들어 보셨습니까?

 

표지에 있는 제목을 그대로 각자에게 묻는다. 필자의 경험에 의하면 "4영리에 대하여 들어" 본 경험이 있는 신자는 약 5분의 1정도이다. 4영리는 1974년 대학생 선교회(C.C.C.)에서 소개한 전도지인데 믿는 신자 대다수가 들어보지 못하였다고 대답할 때 교육의 필요뿐 아니라 전도에 대하여도 많은 도전을 받는다.

 

<본문1>자연계에 자연법칙이 있듯이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도 영적인 원리가 있습니다

<해설>자연법칙이 있고 영적인 원리가 있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러나 이 법칙과 원리가 왜 있는지 그 이유에 대하여 알아야 한다. 법칙 혹은 원리는 그것에 순응할 때 편해진다는 사실이다. 자연법칙을 따르는 것이 일상생활에 생활에 편리한 것처럼 영적원리를 알고 따르는 신앙생활이 편하고 성장도 빠르다. 겨울에 여름 옷을 입지 않고, 여름에 씨 뿌리는 농부가 없는 이유는 자연 법칙에 순응하여야 편하고 소득이 많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신앙생활도 원리에 따라야 신앙이 빠르게 성장 할 수 있다.

<본문2>1원리 :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시며, 당신을 위한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해설>4영리는 전도지이다. 그래서 전도를 받는 사람을 지칭하는 2인층 대명사 "당신"이 사용되였다. 그러나 교육을 받을 때는 "당신"이 아니라 ""로 받아 들여야 한다. 그래서 이 부분을 ""로 고쳐 다같이 읽는다.

 

<본문1>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요한복음 316).

<해설>요한 복음 3:16은 매우 중요하다.

많은 신자들이 이 구절을 암송하고 또 주일학생들은 노래로 부르기도 한다. 이 구절이 왜 중요할까? 성도들에게 "왜 중요한가"라고 질문하면 보통 "예수가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물론 정답이다. 그러나 좀더 깊이가 있는 신앙을 위해서 다음과 같은 것을 알아야 한다.

이 구절이 중요한 이유는 구원을 위한 모든 요소가 다 들어 있기 때문이다.

1) "하나님"이란 구원의 주체가 하나님이심을 가르치며,

2) "세상"이란 구원의 대상이 세상이란 뜻이며,

3) "사랑"이란 구원의 동기가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이란 뜻이며,

4) "독생자를 주심"은 하나님께서 구원을 주시는 방편이 독생자를 주신 것이란 뜻이고,

5) 믿는 자, 곧 믿음은 구원을 얻는 방법이 믿음이란 뜻이며,

6)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는 것"은 구원의 결과이다.

이상과 같이 요한 복음 316절을 이해할 때 이 구절이 갖고 있는 진수를 알게 될 것이다.

질문 1.

영생이란 무엇인가?

많은 신자들이 영생이란 오래 사는 것, 혹은 죽음 다음에 영혼이 천국에서 영원히 사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면 불신자의 영혼은 소멸하는가? 만일 불신자의 영혼은 소멸하고 성도의 영혼은 영생한다고 믿는 것은 이단적인 생각이다. 이 부분을 분명히 알기 위해 우선 영생이란 부분에 표시를 하도록 한다.

<본문2>하나님의 계획 :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해설>"양으로 생명을 얻게 한다"는 것은 구원을 뜻한다. 그리고 생명과 영생을 같은 것이다.

3:16"영생"과 함께 생명에도 표시를 한다.

풍성"의 개념은 물질적인 소유의 풍성보다 인격적 풍성으로 해석하도록 한다. 소유의 개념은 동양적인 복 ()과 부()의 개념으로 소유의 넉넉함을 뜻한다. 그러나 성경의 복의 개념은 "통한다"의 개념이다. 따라서 복의 개념을 하나님과의 교제에 초점을 맞추어야 하고 "예수 믿고 복 받으시오"의 뜻도 부자가 되라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과 교제의 길을 여는 자가 되라는 뜻으로 해석해야 한다.

<본문3>그런데 왜 많은 사람들이 이 풍성한 삶을 누리지 못하고 있을까요? 그 이유는....

 

<본문1>2원리 : 사람은 죄에 빠져 하나님으로부터 떠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과 계획을 알 수 없고, 또 그것을 체험할 수 없습니다.

사람은 죄에 빠져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했습니다. (로마서 323) 본래 사람은 하나님과 사귀며 살도록 창조되었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자기 마음대로 살려고 했기 때문에 마침내 하나님과의 사귐은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하나님 없이 제 마음대로 사는 사람은 적극적일 때는 하나님께 반항하게 되며, 소극적일 때는 하나님에 대하여 무관심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죄의 증거입니다.

<해설>

하나님께 대하여 소극적인 것이 죄가 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결혼한 자녀가 자신들의 행복에 취하여 부모에게 무관심하면 부모는 서운 할 것이다. 이와 같이 창조주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무관심은 그를 서운하게 하는 것이다. 무관심은 하나님의 마음을 서운하게 하는 죄가 되는 것이다.

 

<본문1>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떠나 있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사망이란 영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떠나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로마서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해설>

죽음에 대한 개념을 정확히 정립해야 한다. 죽음은 소멸도 기능마비도 아니라 "분리" 혹은 "단절"을 뜻한다.육신의 사망은 육신과 영혼의 분리(떠남)이며, 영혼의 사망은 영혼의 기능마비가 아니라 하나님과 관계가 단절되는 것을 의미한다. 영혼이 죽은 상태(하나님과 관계가 단절된 상태)로 육신의 생명이 있는 사람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3:2)이다. 그러나 이 영혼은 살아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이런 상태에서 세상을 떠나면 그 영혼은 살아날 기회를 영원히 상실하고 만다. 이를 "영원한 죽음"이라고 한다.죽음에는 세가지가 있는데 1) 육신의 죽음, 2) 영혼의 죽음, 3) 영원한 죽음이다. <본문>하나님은 거룩하시며 사람은 죄에 빠져 있습니다. 그리하여 이 둘 사이에는 커다란 간격이 생겼습니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선행, 철학, 종교 등의 자기 힘으로 하나님께 도달하여 풍성한 삶을 누려 보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선행, 철학, 종교 등의 자기 힘으로 하나님께 .......

<해설>

사람들이 끊임없이 영원에 도전하는 방편인 요소 중에 종교가 있는데 이 종교에는 기독교를 제외할 것이 아니라 인본주의적 기독교를 포함시켜야 한다. <본문>

 

3원리예수 그리스도만이 사람의 죄를 해결할 수 있는 하나님의 유일한 길입니다. 당신은 그를 통하여 당신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계획을 알게 되며, 또 그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는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습니다. 그는 또한 죽음에서 살아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태반이나 살아 있고 어떤이는 잠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고린도 전서 15:3-8)

사영리 해설

<해설>

부활의 역사성을 증거하기 위하여 이 구절에는 많은 증인들이 채택되어 있다.

첫 번째 증인은 베드로이다. 그러나 1인의 증인은 증인으로서의 확실성이 결여된다.두 번째로 12제자가 동원된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예수의 제자이기 때문에 역시 증인으로는 약하다.

세 번째는 "일시에"란 단어와 함께 500여명의 증인이 동원된다. 500명이나 되는 많은 신자들이 동일한 장소에서 동일한 환상을 볼 수 없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부활의 역사성을 증명하고 있다. 그러나 증인이 측근자만으로 구성될 때 역시 확실성이 결여된다. 네 번째로 "야고보"(7)라는 예수의 동생을 등장시킨다. 그는 예수의 생존 시, 예수를 구주로 믿지 않았으나 부활한 예수를 만난 후 믿게 되었다. 그도 부활의 증인으로서 가치는 충분히 인정되나 측근인 것만은 사실이다.

최후로 바울이 증인으로 채택되었는데, 그는 극단적인 반대자였으나 부활하신 예수를 만난 후 믿은 사람이다. 그의 변화는 부활이 역사적인 사실이라는 것을 확증하는 것이다. 기독교는 환상이나 이론이나 교훈에 근거한 것이 아니고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

<본문>

 

예수 그리스도 만이 하나님께 이르는 유일한 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6).질문 1.예수는 자신을 길이라고 하였는가,

사영리 해설

니면 길에 대하여 설명을 하겠다고 하였는가?

질문 2. 예수는 자신을 진리라고 하였는가, 아니면 진리에 대하여 가르쳐 주겠다고 하였는가?

그는 진리 자체이다. 그러기에 그를 아는 것은 진리를 아는 것이다.

질문 3. 그는 자신을 생명이라고 하였는가, 아니면 생명 얻는 방법을 가르치겠다고 하였는가?

<해설 1>예수는 길에 대하여, 진리에 대하여, 생명 얻는 방법에 대하여 가르친 것이 아니라 자신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였다. 기독교를 독선적인 종교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 말은 사실이다. 기독교가 독선적 종교가 된 이유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 자신에게 있다. 그는 분명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고 선언하였다. 이것처럼 독선적인 말이 또 어디 있겠는가?

예수는 자신이 생명이라고 하셨다. 이 말은 "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10:10)와 상통하는 말이다. 역시 표시를 한다.

<해설 2>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이신 그가 하나님의 성품을 그대로 가지고 세상에 태어나신다. 그래서 그는 완전한 사람이 된다. 이 사실은 그에게는 하나님의 성품과 사람의 성품을 모두 완전하게 가지고 계시다는 뜻이다.

그림에서 예수가 하나님과 사람을 십자가로 연결시키고 있는데, 이렇게 연결시키는 분을 중보자라고 한다.

중보란 하나님과 사람의 성품을 모두 가지고 있는 분만이 가능하다(딤전 2:5). 신성과 인성이 없는 자는 어떤 성자라도 중보가 될 수

사영리 해설

없다. 왜냐하면 그도 역시 그리스도가 필요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리아도 중보가 될 수 없다. 마리아를 중보로 생각하는 천주교는 비 성경적이다.

<해설 3>사람은 하나님께 직접 나갈 수 없다. 그러나 인성을 가진 예수와는 교통이 가능하다. 예수는 신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과 교통을 할 수 있다. 따라서 사람은 하나님께 직접 나갈 수 없으나 예수를 중간에 두면 하나님과 교재가 가능해 지는 것이다. 이런 원리에서 기도를 할 때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는 것이다.

<본문>

4 원리

우리 각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 나의 하나님'으로 영접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우리 각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계획을 알게 되며, 또 그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해설>

4영리에 대한 해설은 결론 부분에서 하기로 한다.

<본문>

9

우리는 각자의 초청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기를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고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고 하셨습니다. (요한계시록 320).

 

질문

사영리 해설

당신은 두가지 그림에서 어느 쪽에 속하는가?

<해설>

질문에 답하는 것을 먼저 듣고 해설을 한다.

예수는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마음의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리라"고 약속하였다. 이 약속을 믿고 마음의 문을 열면 주님은 약속대로 들어오실 것이다. 영접이란 우리가 맞이하는 행동이 아니라 주님을 향하여 마음을 여는 것 뿐이다.

<본문>10

당신은 바로 지금 이 자리에서 기도로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주 예수님, 나는 주님을 믿고 싶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내 죄 값을 담당하시니 감사합니다. 지금 나는 내 마음

의 문을 열고 예수님을 나의 구주, 나의 하나님으로 영접합니다. 나의 죄를 용서하 시고 영생을 주심을 감사합니다. 나를 다스려 주시고, 나를 주님이 원하시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옵소서.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해설 1>영접을 위한 기도문이다. 이 기도를 하기전 먼저 인도자가 기도를 하면서 진심으로 영접할 수 있도록 기도한 후 함께 기도를 한다.

<해설 2>기도를 한 후 주님께서 마음에 들어오신 것을 확인하는 질문을 한다.

질문 1.

진심으로 기도하였고 영접하였다고 확인을 하면 다음의 질문을 한다.

사영리 해설

당신은 지금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가"....

이 질문에 망설이는 경우가 있을 것이다.

<해설 3>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해야 합니다"가 아니라 "이미 영접하였다" 이다. 영접을 전제하여 다음의 질문을 한다. 하나님의 자녀가 될 것인가? 아니면 되었는가?

이제는 이런 질문에 망설일 이유가 없다. 왜냐하면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1:12)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영접한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될 것이 아니라 되었다. 이것이 구원의 확신이다.

질문 2.

예수를 영접하는 것과 믿는 것은 같은 의미인가 아니면 다른 의미인가?

지금까지는 다른 의미로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1:12)라고 하였다. 따라서 예수를 영접하였다는 것은 그를 주님으로 믿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믿는 것과 영접하는 것은 낱말은 다르나 의미는 같다.

<본문>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모든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고 있습니다."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내가 하나님 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사영리 해설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요한일서 511-13).<해설 1>

3:16, 10:10, 14:6 등에서 지금까지 생명과 영생이란 단어에 표시를 하였다. 이제는 이 부분을 명확히 할 자례가 되었다. 우선 생명부터 생각하도록 한다.

예수 자신이 생명(14:6)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따라서 그를 마음에 영접한다는 것은 생명을 받아 드린다는 뜻이다. 그래서"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다"(요일 5:12)고 한 것이다.

<해설 2>

영생이란 무엇인가? 죽은 후에 오래 사는 것이 아니고 예수와 함께 하는 삶을 영생이라고 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요일 5:13)고 기록한 것이다. 이런 삶은 예수를 영접하는 순간부터 누리는 것이지 사후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죽음 다음에 영생하는 것은 지금 영생을 소유한 사람들이 사후에도 그런 생명을 연장하는 것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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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주를 사랑하는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성경말씀 : 요한복음 11장 ~ 21장

은혜말씀 : 세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즈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요한복음 21장 17절)

 

예수님과 항상 함께 다니며 다른 제자보다 더 예수님께 많은 사랑을 받았던 베드로,

하지만 그는 예수님께서 잡히셨던 밤에 예수님을 3번이나 부인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자

아마도 그에게는 예수님이 돌아가셨다는 충격과

또 예수님을 부인했다는 죄책감에

마음은 슬픔으로 가득찼을거 같습니다.

 

하지만 믿을 수 없게도

슬픔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던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고기 잡던 제자들에게 손수 조반을 준비하시고

떡과 생선을 먹이셨습니다.

제자들에게 어떤 말씀을 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주님께서 준비하신 만찬을 먹으면서

제자들은 많은 위로와 은혜가 넘쳤을 겁니다.

 

특히 주님께서는 베드로를 향하여 특별한 관심을 주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론 베드로는 전에도 주님과 함께 죽음도 함께하겠다고 맹세한 제자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실수로 죄책감에 빠져있는 베드로에게

주님의 말씀은 오히려 나를 사랑하느냐고 묻는 것보다

난 너를 사랑한다라고 고백하시는 것 같습니다.

주님의 그 사랑에 베드로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그동안의 죄책감과 불안한 마음대신

주님의 은혜와 사랑이 차고 넘치질 않았을까?

 

오늘도 나의 실수로 인한 죄책감과 실망한 마음이 들때마다

우물가에서 간음한 여인을 용서하시던 주님이

또 바닷가에 실수하여 실망한 베드로를 위로하시던 주님이

나의 마음에 찾아오셔서 큰 위로와 치유가 됩니다.

 

주님 이젠 정말로 주님만 사랑합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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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기독교 10대 박해

 

1.고대최초의 핍박사건

 

1) 64년,네로(Nero)황제의 치하에서

2) * 로마와 그 변두리에서만 발생.

* 기독교인들이 로마방화의 희생양이 됨.

* 기독교인들을 불태워 네로 황제의 정원을 밝힐 정도.

3) 주요 순교자 - 바울, 베드로

 

2.두번째 박해

 

1) 약 90-96, 도미티안(Domitian) 황제치하에서

2) * 주로 로마와 소아시아지방

* 황제신에게 절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박해받음.

3) 주요순교자 - 로마의 클레멘트, 요한(밧모섬으로 유배)

 

3.세번째 박해

 

1) 98-111, 트라얀(Trajan) 황제치하

2) * 산발적으로 번짐

* 애국심에 대해서 의심받던 다른 단체들과 함께 수난당함

* 기독교인들은 발견되기만 하면 형집행당함. 그러나 쉽게 발각되지는

않았음.

3) 주요 순교자 - 이그나시우스, 시므온, 소지무스, 루푸스

 

4.네번째 박해

 

1) 117-138, 하드리안(Hadrian)황제치하

2) * 산발적으로 번짐

* 트라얀 황제의 정책이 고수됨

* 기독교인에 대해서 거짓 증거하는 자도 처벌

3) 주요 순교자 - 텔레스포루스

 

5.다섯번째 박해

 

1) 161-180,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Aurelius)황제 치하

2) * 황제 자신이 스토아철학자였기에 기독교를 반대함

* 자연재해의 원인이 기독교인들 때문이라고 생각하여 비난함.

3) 주요 순교자 - 순교자 저스틴, 포티누스, 블랜디나

 

6.여섯번째 박해

 

1) 202-211,셉티무스 세베루스(SeptimusSeverus) 황제치하

2) * 기독교에로의 개종이 금지

3) 주요순교자 - 레오니다스, 이레니우스, 페르페투아

 

7. 일곱번째 박해

 

1) 235-236, 트레스출신의 막시미누스(Maximinus)

2) * 기독교 성직자를 처형하라고 명령.

* 기독교인들이 암살당했던 전임황제를 지지했다는 이유로 박해받음

3) 주요 순교자 - 우르술라, 히폴리투스

 

8. 여덟번째 박해

 

1) 249-251 ,데키우스(Decius)황제치하

2) * 처음으로 제국전역으로 박해가 번짐

* 황제신 외의 다른 신에게로의 경배가 금지

* 이교주의에로의 열정적인 복귀는 기독교를 박멸하고자 함.

3) 주요 순교자 - 파비아누스, 예루살렘의 알렉산더

 

9. 아홉번째 박해

 

1) 257-260, 발레리안(Valerian)황제치하

2) * 기독교인의 재산 압수

* 기독교인의 집회 금지

3) 주요 순교자 - 오리겐, 키프리안, 식스투스2세

 

10.열번째 박해

 

1) 303-311, 디오클레티안 갈레리우스 (DiocletianGalerius)황제 치하

2) * 이때가 최악의 박해시기

* 교회들은 무너지고, 성경이 불태워짐

* 모든 기독교인의 권리가 정지됨

* 기독교인은 이교신에 대한 희생제물이 됨

3) 주요 순교자 - 마우리티우스, 알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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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믿음의 글 /  배려하는 삶이 아름답다  

 

요한복음 21장 3∼7절

배려란 남을 이해하고, 말과 행동도 남을 위해서 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서로 배려하며 살도록 만드셨습니다. 그러나 죄는 인간 안에 배려의 마음 대신 자기를 위하는 마음을 갖게 했습니다. 오늘날 세상의 가르침들은 배려와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것이 많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신 일은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배려의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배려에는 온유 인내 겸손 용납(엡4:1∼3) 같은 성품이 포함됩니다. 죄로 무감각해지고 이기적이 된 세상에서 배려의 마음을 만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배려하는 것은 힘없는 자의 모습 같고 손해 보는 것같이 느껴집니다. 그러나 배려하는 삶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이 갖춰야 할 참 모습입니다.

오늘 본문은 절망에 빠진 베드로가 회복되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제자들을 만났습니다(20장). 이상하게도 베드로에게 어떤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이 붙잡히기 전 자신은 주님을 버리지 않겠다고 호언장담했다가 세 번이나 부인했던 베드로가 이때 어떤 생각을 가지겠습니까? 침묵하던 베드로가 마침내 한마디 했습니다.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이것은 의논이 아닙니다. 권고도 아닙니다. 이것은 선언이었습니다. “너희는 여기서 예수님을 기다려라. 그러나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라고 말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을 기다리고 만나는 것이 이제 베드로에게는 상관없는 일이라는 의미였습니다. 그것은 마음 아픈 절망의 외침이었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어떤 권면이나 설득도 하지 않았습니다. 비난도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들은 “우리도 함께 가겠다”(3절)고 했습니다. 함께 배를 탔습니다. 밤새 한 마리도 잡지 못했지만, 누구도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제자들은 베드로의 아픔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졌더니 고기가 많이 잡혔습니다. 요한이 예수님을 먼저 알아보고 베드로에게 알려주자 그는 겉옷을 두르고 바다로 뛰어들어 예수님께 왔습니다.

베드로는 몇 년 전 갈릴리 호수에서 예수님을 만난 날을 기억했을 것입니다. 그때도 지금처럼 밤새 수고했지만 소득이 없었습니다. 지쳐있던 그에게 예수님은 그물을 깊은 곳에 던지라고 했습니다. 그는 그대로 했고, 고기가 많이 잡혔습니다. 그날 그 일은 그의 인생을 바꿔놓았습니다. 처음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났을 때와 지금은 매우 차이가 있습니다. 처음 그때는 순수했지만 지금 깊은 상처로 절망 가운데 있고, 주님을 향한 사랑조차 차마 고백하기 어렵습니다. 그런 그에게 처음 예수님을 만났던 시간은 놀랍고 아름다운 추억의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겉옷을 두르고 바다에 뛰어내려 달려온 그 행동은 바로 예수님께 처음 가졌던 그 순수한 마음의 모습입니다. 또 사도 요한을 생각해 보십시다. 우뢰의 아들이란 별명을 갖고 있던 그는 예수님을 만난 뒤 사랑의 사도로 변했습니다. 그는 먼저 예수님을 알아보았지만, 베드로에게 “주시다”라고 알려주었습니다. 먼저 뛰어갈 수 있었고, 다른 제자들에게 말할 수도 있었지만 베드로에게 말하고 그가 예수님께 먼저 달려가도록 했습니다.

이 시간 우리의 배려가 필요한 이웃이 누가 있는지 생각해 보십시다. 주님은 우리가 그에게 어떤 배려를 보이기를 원하시는지, 어떻게 배려하기를 원하시는지 생각해 보십시다.

전재국 천우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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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Apostolus)와 장로(Presbyter)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 초대교회는 유대인 중심의 소규모로 이루어 졌습니다  그 후 고넬료 가정을 비롯하여 이방인 교회가 설립되는 등 교회의 규모가 점차 증대되고 확장되면서 조직적인 운영의 필요성이 제기되기에 이르렀습니다   베드로의 설교로 인하여 하루에 3,000명이 회개하고 세례를 받는 등 교회의 성장은 일시에 5,000명을 초과하는 수직적 상승세를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갑자기  많은 인원이 교회라는 공동체속으로 합류되었고, 또한 그 조직 안팍으로 로마라는 거대한 제국을 둘러싼 각종 사회문제들이 복합적으로 이루어진 구조안에서 무엇인가 정형화된 조직이 필요해 졌습니다  조직적이고 합리적인 운영과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필요성이 불가피해진 상황에서 그것을 구성하는 교회는 세상과 구별되는 교회 직분자에 대한 정의와 목적이 제기되었던 것입니다

 

 1) 사도(Apostolus)

 

사도(使徒, Apostolus)라는 말은 '파견된 자', '사자'라는 뜻의 히브리어 샬리아(shaliach)에서 유래하엿으며, 그리스어의 아포스톨로스(apostolos)의 동의어 입니다  또한 사도(Apostle)란 헬라어로"보냄을 받는다" 라는 뜻으로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아 복음 전하는 권세를 위임받은 직계 제자를 통칭하는 것이었습니다 (마태복음28:19~20, 누가복음6:13)   사도의 자격은 성육신하여 역사적인 인물로 살아간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적으로 만났고, 그 분의 가르침을 배운 사람이기 때문에, 4대 복음서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직제자 12명을 사도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마가복음3:16~19) 

 

그러나 그 가운데 예수님을 팔아 넘긴 가룟 유다가 자살하여 사도직을 버리자, 사도들은 '예수께서 활동하실때 우리와 같이 있던 사람' 중 하나인 "맛디아" 에게 사도직을 맡겼습니다 (사도행전1:21~26) 이후 성령강림주일에 탄생한 교회(사도행전 2:1~47)를 탄압하던 사울(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다고 말하여 자신을 사도로서의 권위를 주장하였습니다 (고린도전서15:10)   그래서 기독교에서는 바울을 사도로 인정할 뿐만 아니라 이방인 전도의 핵심 인물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스데반 집사의 순교 사건의 중심에 서 있던 바울의 회심은 다메섹 도상에서 일어난 신비한 체험에서 비롯된 역사적 전환기였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그의 일생의 전후가 완전히 뒤바뀐 것으로 바울이 사도가 될 수 있는가 하는 자격 문제는 오래동안 신학적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지만 그의 삶을 통해서 바울은 충분히 사도의 직분을 감당하였다고 보는 견해에 이의를 제기할 기독교인은 없을 것입니다  바울은 맛디아와 같이 선출된 것은 아니었지만 그의 사도적 정통성은 그의 삶을 통하여 충분히 인정되고 남음이 있을 것입니다

 

베드로를 시작으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 빌립, 바돌로매, 도마, 마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다대오, 시몬, 그리고 가룟유다를 우리는 예수님의 12제자이며 사도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가운데 스승이신 예수님을 은 30세겔에 대적관계에 있던 유대인들에게 팔아 넘기고 자살을 선택한 가룟 유다를 대신하여 맛디아를 사도로 인정하였습니다  더 나아가 사도 바울에 이르기 까지 사도라는 칭호를 받은 사람은 모두 14명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는 아니지만  사도 바울과 함께하며 그의 가장 아름다운 동역자였던 "바나바" 와 유다의 기록자인 "유다" 등은 기독교사의 역사에 그 기록과 흔적이 선명하게 남아있을 인물들이었습니다   사도들은 예수님과 직접적으로 관계하며 그 분의 말씀과 생활을 가장 인접한 곳에서 가장 객관적인 입장에서 전달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그 중요성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측면에서 맛디아는 예수님의 직접적인 제자는 아니었지만 예수님을 가장 근접한 거리에서 항상 함께한 신실한 그리스도인이었으며, 그러한 삶의 모양과 흔적들을 관찰한 열 한명의 제자들이 만장일치로 선택한 사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사도들이라 할지라도 예수그리스도의 가르침과 교훈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거나 오용한다면 그것은 가장 치명적인 오류가 될 것입니다  사도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교훈의 순수성을 투명한 통로를 통하여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온 세상에 전달할 의무가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 또한 완전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베드로도 예수님을 세번씩이나 부인한 돌이킬 수 없는 과거가 있으며, 나머지 제자들도 부활한 예수님을 부인하거나 도피하여 세상의 생활로 돌아갔던 배신의 흔적들을 가지고 살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삶은 그렇게 세상 가운데 흔적없이 사라져가는 무의미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내 버려 두지 아니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에 그들을 다시 불러 모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용서하여 주셨으며 뜨거운 성령의 불길로 회생시켜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도의 직분적 사역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교훈과 삶을 여과없이 그대로 전달하는 것이며 이것이 세대와 후대에 이르기 까지 본질이 훼손되지 않고 연결되는 일들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사도의 사역은 복음전파(마태복음10:5~7)와 성경 말씀을 증거(누가복음24:45~48)하며, 그리스도의 부활과 사역을 증거하는 것입니다(사도행전1:8, 10:39~41요한일서1:1~3)   또한 교회를 설립하고(로마서15:17~20), 환자를 치유하며(마태복음10:1, 누가복음9:1~2),  귀신을 내쫓음과 동시에(마가복음6:9) 기사와 표적을 행하는 것입니다(사도행전2:43, 5:1)

 

사도의 첫번째 사역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교회를 세우는 일이었습니다  각지로 흩어져 버린 그리스도인들을 다시금 모여 들게 하는 구심점과 같은 역할을 감당할 터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교회를 세우고 교회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전파되게 하였으며, 생활과 구제와 복음의 전파기능을 담당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세월이 흘러 오늘날 우리 세대에 이르기까지 전파되어온 본질적인 것이었습니다 (로마서15:17~20)

 

초대교회의 풍습과 관습은 오늘날 끝없는 진화와 도전을 거쳐왔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대교회의 정신과 생활과 예배는 결코 무너질 수 없는 기초가 되었으며 그것이 오늘을 지탱하는 본질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의 직분은 예배를 세우는 것으로 끝난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복음을 전파하였습니다   복음은 목숨을 걸어야 하는 순교가 동반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았습니다  고난과 역경도 받아들이는 용기가 있었습니다  굶주림과 억울한 누명, 이유없는 감옥생활도 그들을 지체하게 하거나 중단하게 하지 못하였습니다  사도의 두번째 가치는 예수님과 동행하는 곳에서 일어나는 복음에 대한 확신과 용기였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스승은 죽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영원히 생존하는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래서 세상은 결코 그들을 막을 수 없는 것이 되었던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기적이 그들과 그들의 삶속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10:5~7)

 

사도의 세번째 역할은 그들이 가는 곳에 또 다른 예수님의 흔적, 교회가 세워지는 것이었습니다  이방인의 사회, 그들이 지켜온 토테미즘과 범신론적인 사상을 무너뜨리고 하나님과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결코 낙망하지 아니하였고, 지인 한명없이,  일푼의 물질도 없이 그러한 교회들을 세워 나갔던 것입니다 (사도행전1:8, 10:39~41요한일서1:1~3)

 

사도들이 일으킨 네번째 역할은 환자를 치유하고 귀신들린 사람들에게 있어서 귀신을 내쫓는 것이었습니다  가는 곳마다 질병과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수십년 동안 일어서지 못하는 사람들, 귀신들려서 평생을 고통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  빈곤의 악순환,  그러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은 가는 곳 마다 만날 수 있었고 사도들은 그들을 지나쳐 버릴 수 없었습니다  

 

사도들에겐 돈도 권력도, 물질도 부요함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평생을 걸쳐 어부로 살아온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사도들은 그들에게 어부라는 직업이 돈이 된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들 또한 가진 돈이 없지만 가지고 있는 돈을 나누어 준 것도 아니었습니다  권력이 있어서 로마의 힘을 빌린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말씀을 전파하고 기도하였으며, 예수님의 이름이 전파되는 곳에서 치유와 회복과 삶의 전환점이 일어나는 역사가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과 동행하였으며 예수님의 통로 역할을 한 사도의 힘이었습니다 (마태복음10:1, 누가복음9:1~2, 마가복음6:9, 사도행전2:43, 5:1)

 

2) 장로(Presbyter)

 

장로(長老)는 어원상 "턱수염이 있는 자"라는 뜻으로 이스라엘에서 지파와 가족의 어른들을 부르는 칭호였습니다 (출애굽기3:16)   구약성경에서는  부족의 지도자·촌로(村老), 회당의 장로라는 뜻으로 쓰이는데 이들이 주로 지파나 대가족을 대표하여 정치기구에 참여하였습니다   신약성경에서도 원로라는 의미로 계속 사용되었으며, 초대교회에서는 직분상 두가지로 분류하여 장로를 호칭하였습니다  그것은 신자의 영적 생활을 지도하며 설교와 예전을 집행하는 목사장로(디모데전서3:1~5)와 교회의 존경받는 연장자로 교회의 조직과 예산과 운영을 책임지는 평신도 장로(사도행전11:30)로 구별하는 것의 기초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사도들에 의해 교회가 설립되면서 그 개체 교회를 위하여 장로가 세워졌습니다  장로를 최초로 세운 교회는 예루살렘 교회였습니다   바울은 바나바와 함께 설립한 교회에 장로들을 택하여 세웠습니다  바울은 디도에게 목회를 권면하며 각 성에 교회를 설립하고 장로를 세울 것을 권장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 장로들에게 "성령이 저들 교회 회중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다" 라는 말씀으로 장로의 직분의 범위를 설명하였습니다  이러한 초대교회의 장로 피택은 구약시대의 제도를 계승한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유대인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의 지방 회당은 장로들에 의해 치리되었고 유대의 국가적인 문제는 산헤드린 공회에서 다루어 졌던 것입니다

 

그러나 구약의 장로와 신약의 장로가 동일한 기능을 갖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구약시대의 장로는 문자 그대로 연장자로서의 원로를 대우하며 그의 경험과 경륜을 존중한 반면에 초대교회의 장로는 연령보다 신령한 면을 강조하여 교우들에 의해 선출된 지도자였으므로 영적인 자격이 선행되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장로들이 말씀을 가르치는 일과 치리하는 직무를 맡아 양떼를 잘 보살피는 일을 감당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직무(Overseeing office)로 인하여 장로들을 감독(Bishop=Overseer)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던 것입니다   일례로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 장로들을 "밀레도" 로 불러 고별사를 전할때에 그들을 감독으로 칭하였던 것입니다   또한 "디도" 에게 "그레데 교회" 에 장로를 세울 것을 권면하면서 감독이라는 칭호를 쓰고 있었습니다

 

이와같이 신약성경에는 감독이라는 단어가 5회 기록되었는데 모두 장로와 동의어로 쓰여진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예는 "속사도" (Post-Apostolic, 사도들의 제자),  "교부" (敎父, Patristic,속사도들의 제자)들의 글에서도 발견되고 있습니다   신약성경에는 장로의 구분이 분명하지는 않으나 바울은 다스리는 장로와 말씀을 가르치는 장로를 구분한 것으로 보아 동일한 교회내에서 여러 장로가 있었을 경우에는 분담을 한 것으로 추정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교회를 가르치고 다스리는 일을 겸한 장소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에 의해 세워진 지교회에서 장로들을 세울때 모든 장로들이 가르치는 장로로 세움을 받은 것 같지는 않습니다  장로들을 세우는 방법에 있어서도 명확한 해석은 밝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를 대신할 사도를 세울때 예루살렘 교회가 선택한 방법이나 일곱 집사의 선택으로 추정할 때 장로들도 임명보다는 선거에 의해 선출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인 것입니다

 

사도행전 14장 23절에 바울이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였다" 고 했는데 이 때의 택함의 동사의 원어적 의미가 "손을 들어 선택한다" 는 뜻을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땅에서 우리에게 맡겨진 이러한 모든 직분들은 낮은자로 섬김을 위함이요 군림을 위한 권력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특히 목사장로와 치리장로들간에 일어나는 권력적 선점을 위한 분쟁과 갈등은 바로 이러한 힘의 논리의 축에 대한  욕망에서 나온 것이라는 점에서 이미 순수성을 잃어버린 태도라 할 것입니다

  

3) 목사장로와 치리장로의 직분과 직무

 

목사장로는 그리스도의 양무리를 감시 감독하는 자라는 의미에서 "감독" 이라는 칭호를 쓰기도 합니다(사도행전20:28)  또한 신령한 양식으로 교인들에게 말씀을 전하므로 "목자"  또는 "목사" 라고 하기도 하며(에베소서4:11, 예레미야3:15, 베드로전서5:2~4), 또한 교인들의 모범이 되고 교회와 그 지역을 치리하는 자 이므로 "장로" 라고 합니다(베드로전서5:1~3)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봉사하고 헌신함으로서 "그리스도의 종", 흔히 전임 "사역자" 라고도 하며(고린도후서3:6),  하나님의 보내신 자라는 의미에서 "교회의 사자" (요한계시록2:1)라고 표현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전파하며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도록 권하는 자의 역할도 하므로 "그리스도의 사신" 이라고 합니다(고린도후서5:20, 에베소서6:20)

 

바른 교훈으로 권면하며 거역하는 자를 책망하여 깨닫게 하는 직무도 있어서 "교사" 라고도 하며(디모데전서2:7, 디모데후서1:11, 디도서1:9) 구원의 복된 소식을 전하는 "전도자" 라하여(디모데후서4:5),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청지기"(오이코노모스)라고도 합니다(누가복음12:42, 고린도전서4:1~2)

 

목사장로에 관한 직무는 교인을 위하여 기도하는 일과 하나님의 말씀을 봉독하고 설교하는 일, 그리고 찬송을 지도하며 성례를 거행하는 것, 하나님의 사자로서 축복권을 행사하는 것, 교인을 교육하고 심방하며 평신도장로와 협력하여 치리권을 행사하는 것입니다

 

평신도 장로는 설교와 교훈은 그의 전무책임이 아니지만 각 치리회에서는 목사장로와 같은 권한으로 제반 사무를 처리하는 것입니다(디모데전서5:17, 로마서12:7~8)  평신도 장로는 목사장로와 협력하여 행정과 권징을 관리하며, 교회의 영적관계를 확인하고 점검해야 합니다  교인을 심방, 위로, 권면, 교훈하며, 또한 교인들의 신앙생활을 보다 근접한 상태에서 점검하고 언약의 자녀들을 양육하며, 교인을 위해 항상 기도하고, 목회에 필요한 제반적인 사항들을 목사에게 알리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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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도서] 폭스의 순교사

 


책소개

 

그리스도인의 역사는 피뿌린 역사이다. 그 피는 먼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하신 피요, 그 다음으로는 그분을 따르는 성도들이 믿음을 지키기 위해 흘린 피이다. 이 피는 아벨의 피부터 시작하여 선지자들과 사도들의 피를 거쳐, 로마카톨릭의 시퍼런 칼날 끝으로 흘러내려, 오늘날 우리 가슴속까지 깊이 간직되어 있다.


이 책은 우리 주께서 고난받아 죽으신 이래로, 그분을 고백한 성도들이 있었던 모든 시대에 가해진 박해를 기록해 놓은 책이다. 로마 제국과 중세 시대 로마카톨릭에 의해 행해진 박해가 주로 다루어져 있으며, 특별히 로마카톨릭이 성도들에게 자행한 박해는 너무나 끔찍하고 잔인해서, 누구라도 그 집단을 지옥의 교회요 사탄의 교회라 부르지 않을 수 없다. 또한 그 박해와 순교의 모습들이 가장 처참하고 가장 극적이며 가장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어, 이 책을 읽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바로 그 순교의 현장에 들어가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것이다.

 

저자소개

존 폭스(1517-1587)는 영국 링컨셔 주 보스톤 출신으로 옥스포드대학에서 문학과 신학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수학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면서 그의 사상은 종교 개혁 쪽으로 진행되었고 결국 로마카톨릭의 오류를 깨닫고 그 교회사를 파헤치기로 마음먹었으며 학교에서는 퇴학당하게 된다.

폭스는 그의 생애에서 오랫동안 숨어 피해 다니는 삶을 살았다. 로마 카톨릭에서는 분리한 헨리 8세와 그의 아들 에드워드 6세 때에는 평안한 날을 보냈지만 곧 이어 등극한 메리 여왕은 철저한 로마카톨릭이었고 따라서 폭스는 다시 박해를 피해 다녀야 했다.

스위스에서 그는 〈행적과 유적들을 통해서 본 교회사,1554년〉를 집필했으며 엘리자베스 여왕이 등극하면서(1558년) 폭스는 고국으로 돌아가 이 책을 영어판으로 냈는데(1563년) 이때부터 이 책은 〈순교자들의 책〉으로 알려졌으며, 1570년에는 개정 증보판으로 완성되었고 그의 생애 중 두 번의 재판을 내게 된다(1576,1583).

그러는 과정에 그는 건강을 잃었지만 그의 숭고한 신앙과 당시 페스트가 창궐한 가운데서도 가난한 자들을 돌보는 그의 희생적 모습으로 인해 엘리자베스 여왕에 의해 ˝우리의 아버지 폭스˝라고 불리기까지 했다.


서문

성경 이외에 가장 뛰어난 기독교 고전이며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을 두 권 말하라 한다면, 누구라도 존 번연의 <천로역정>과 더불어 바로 이 책, <폭스의 순교사>라고 말할 것이다.


이 책은 우리 주께서 고난받아 죽으신 이래로, 그분을 고백하는 성도들이 있었던 모든 시대에 주어진 박해를 기록해 놓은 책이다. 박해와 순교에 대해서 기록한 많은 책들이 있지만, 이 책에는 그러한 박해의 모습들이 가장 처참하고 가장 극적이며 가장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어, 이 책을 읽는 누구라도 바로 그 순교의 현장에 들어가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것이다.


특별히 로마 제국과 중세 시대라는 대 박해의 기간을 중점으로 다루고 있는 이 책은 대부분의 교회사가들이 간과하는 내용들이 너무나도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들의 교회사들이 로마카톨릭을 중심으로 기록되고 있는 동안, 그 지옥같은 거짓 교회가 자행해 온 거대한 죄악은 결코 발견될 수 없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이 책을 통해서 참된 교회와 성도들의 피뿌린 역사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때로는 끔찍하리만치 잔인하게 묘사된 서술 속에서 슬픔과 고통을 억누르지 못하고 눈물짓기도 하겠지만, 그러한 고통 가운데서도 웃음 지으며 죽어가는 성도들의 의연한 모습 속에서 또한 진한 감동을 느끼기도 할 것이다. 무엇보다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과 미래의 영광에 대한 소망에 젖은 그들의 눈동자는 우리 모두에게 그리스도를 위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강한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다. 그들은 그들을 위해 죽으신 구주께 최상의 신실함을 보여 드렸던 것이다.


이 책의 저자인 존 폭스 자신도 메리 여왕의 통치라는 큰 박해의 기간을 살았던 성도로서, 성도들의 순교의 역사를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거니와, 그가 지은 원래의 저서인 <순교자들의 책, The Book of Martyrs>은 메리 여왕 때까지밖에 기록되어 있지 않아, 후대의 여러 사람들이 박해에 대한 그 뒷이야기들을 나름대로 묶어 편집하곤 했다. 본서는 그러한 내용들이 윌리엄 B. 폴부쉬의 편수로 이루어진 것인데, 원 저서의 충실도와 그 뒷 기사들에 대한 편집에 있어 윌리엄 폴부쉬의 것을 따라갈 책들은 없다.


말씀보존학회는 지금까지 진리의 서적들을 출간함에 있어서, 특별히 교회사와 연관된 책들로서 <신약교회사>, <피흘린 발자취>, <성경적 성별>을 펴냈었다. 이제 우리는 <폭스의 순교사>를 펴냄으로 인해 이 땅에 올바른 교회사와 참된 기독교 신앙의 모습을 한층 더 분명하게 제시할 수 있게 되었다.


참으로 그리스도인의 역사는 피뿌린 역사이다. 그 피는 먼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하신 피요, 그 다음으로는 그분을 따르는 성도들이 믿음을 지키기 위해 흘린 피이다. 이 피는 아벨의 피부터 시작하여 선지자들과 사도들의 피를 거쳐, 로마카톨릭의 시퍼런 칼날 끝으로 흘러 내려, 오늘날 우리 가슴 속에까지 깊이 간직되어 있는 것이다.

 

책 속으로

제 1 장 네로에 의해 자행된 첫 번째 총체적 박해

 

마태복음에서 다른 어떤 제자들보다도 먼저 주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시인한 시몬 베드로의 고백을 들으신 그리스도 우리 구주께서는, 지옥의 문들이 이기지 못할 정도로 견고한 교회를 반석 위에 세우시겠다고 하셨다. 이 말씀에는 세 가지 주목할 만한 사항들이 있다. 첫째,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교회를 세우실 것이다. 둘째, 그 교회는 세상뿐 아니라 극도로 강력한 지옥의 모든 힘과 권세들로부터 거센 비난과 공격을 받을 것이다. 셋째, 그러나 그 교회는 마귀와 그의 모든 악의가 극에 달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존속될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이 예언이 입증되는 것을 놀라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데, 오늘에 이르는 교회의 모든 역사가 다음에서 보는 것처럼 오로지 본 예언만을 입증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다. 첫째,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세우셨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둘째, 군소 왕들과 제왕들, 군주들, 지배자들 그리고 이 세상의 통치자들이 자신들의 부하들과 함께 공적으로든 사적으로든 교활하게 온 힘을 기울여 이 교회를 대적했던 그 세력이 얼마나 강력했던가! 그리고 셋째, 말씀하셨던 그 교회는 이 모든 박해에도 굴하지 않고 지금껏 어찌나 잘 버텨오고 있는지! 그것이 뚫고 지나 온 폭풍과 격동을 바라보자니 한마디로 기가 찰 지경이다. 그것에 관해 더 분명히 천명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 나는 다음과 같은 목적으로 이 현 역사를 다루어 놓았다. 즉 우선은 자신의 교회에 행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일들이 그분께 영광으로 돌려지게 하기 위함이요, 또한 교회의 존속과 진행 과정을 심심찮게 제시함으로써 더 풍부한 지식과 경험으로 읽는 이에게 유익을 주고 그리스도인의 믿음을 일깨우는 데에도 기여케 하려는 것이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처형되시기 전이 됐든 후가 됐든 우리 구주의 역사를 조목조목 설명하는 일은 우리에게 주어진 일이 아니기에, 우리는 이후에 일어난 주님의 부활로 인해 유대인들이 진땀을 뺐다는 것을 독자들에게 상기시켜 주기만 하면 된다. 한 제자는 주님을 배반하였고, 또 다른 이는 심각한 얼굴로 주님을 맹세코 부인했다. 그런가 하면 다른 모든 제자들은 주님을 버리고 내빼 버렸다. 하나 아무리 그렇다 해도 우리가 만일 “대제사장과 안면이 있는 제자”(요한, 요한복음 18:15 참조)를 이들의 대열에서 제외시키지 않는다면, 주님의 부활 사건이야말로 그 모든 이들의 가슴에 불을 지피며 새로운 방향을 제시해 주었고, 또 성령이 임하신 이후로 그들의 마음에 새로운 확신을 심어 주었음이 분명하다. 다시 말해 그들은 부여받은 권세로 주님의 이름을 담대하게 선포했으며, 이를 지켜보던 유대 지도자들은 혼란에 빠지고 이교 개종자들은 아연실색해 버렸던 것이다.

  1. 스테판(St. Stephen)
 : 스테판은 순서상 주님 다음으로 순교를 당했다. 그리스도를 배반하고 죽인 자들에게 복음을 전했던 그의 신실한 자세가 그의 죽음을 야기했다. 그들의 흥분은 광기에 가까웠는지라 그들은 그를 성읍 밖으로 끌어내어 돌로 쳐 죽였다. 그의 순교 시점은 일반적으로 유월절, 그러니까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 처형되시고 승천하신 후 이듬해 봄에 있었던 유월절로 잡고 있다. 이 일을 발단으로 그리스도를 메시아나 선지자로 믿고 고백하는 모든 이들에 대한 극심한 박해가 일었으며, 이 사건을 기록한 누가는 지체치 않고 우리에게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가해졌고, 모든 사람이 유대와 사마리아 전 지역으로 흩어졌다”고 일러 준다(행 8:1). 일곱 집사 중 하나인 니카놀(Nicanor)을 포함한 약 2,000명의 그리스도인들이 스테판에게 일어난 박해 때 순교했다.

  2. 큰 야고보(James the Great)
 : 사도들의 행적을 짚어 가는 누가의 말에 따라 우리가 만나는 다음 순교자는 세베대의 아들로서, 요한의 형제인 야고보이다. 그는 우리 주님의 친척이기도 한데, 이는 그의 모친 살로메가 주의 모친 마리아와 친사촌 지간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 순교는 스테판이 죽은 지 10년째 되던 해에 일어났다. 이 사건은 당시 유대 통치자로 임명된 헤롯 아그립파(Herod Agrippa)가 부임 즉시 유대인들의 비위를 맞추고자 일으킨 맹렬한 박해에서 비롯된 것으로, 그는 그리스도인들의 지도자들을 강타해서 그들에게 효과적인 일격을 가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에 대해 저명한 원저자 클레멘스 알렉산드리누스(Clemens Alexandrinus)가 제시한 기사를 우리는 빼놓지 말고 주목해야 한다. 즉 야고보가 자신이 순교당할 장소로 끌려갔을 때의 일이다. 그를 고소했던 자가 사도의 놀라운 용기와 담대함에 돌연 자신의 행위를 뉘우치더니 그의 발치에 풀석 주저앉아 용서를 구했다. 그는 자신도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백하면서 야고보와 함께 순교의 면류관을 쓰기로 결심했고, 그리하여 그 둘은 동시에 목이 베어졌다. 이와 같이 열두 사도 중 첫 번째 순교자는, 마실 준비가 돼 있노라고 우리 구주께 말씀드렸던 그 잔을 기꺼운 마음으로 의연하게 들이켰던 것이다. 티몬(Timon)과 파메나(Parmenas)도 동일한 시기에 각기 빌립보와 마케도니아에서 순교했다. 이 사건들은 A.D. 44년에 일어났다.

  3. 빌립(Philip)
 : 갈릴리의 벳새다 출신이며 최초로 “제자”라고 불린 사도이다. 그는 북부 아시아(Upper Asia)에서 힘써 일하다 프루기아(Phrygia)의 헬리오폴리스(Heliopolis)에서 순교했다. 그는 채찍질당하고 감옥에 던져진 후, A.D. 54년에 십자가에서 처형되었다.

  4. 마태(Matthew)
 : 세금 징수를 업으로 삼았던 그는 나사렛에서 태어났다. 그는 자신의 복음서를 히브리어로 기록했고, 후에 그것을 작은 야고보(James the Less)가 헬라어로 번역했다고 한다. 그가 땀 흘렸던 무대는 파대(Parthia)와 에디오피아(Ethiopia)였는데, 그는 A.D. 60년 이 에디오피아의 나다바(Nadabah) 성읍에서 미늘창(창과 도끼를 겸한 무기)에 찔려 순교했다.

  5. 작은 야고보(James the Less)
 : 어떤 사람들은 이 야고보를 요셉의 전 아내의 소생, 즉 우리 주님의 이복 형제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정말 어처구니없는 발상이며 어찌된 영문인지, 마리아는 우리 구주 외에 어떤 자녀도 낳은 적이 없다는 로마카톨릭의 미신을 쏙 빼닮았다. 이 작은 야고보는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들을 감독하는 자로 선출되었고, 94세의 고령에 유대인들에게 몰매 맞고 돌에 맞다가 결국 둥근 홈을 내는 반원형 망치로 두개골이 깨지고 뇌가 터져 나와 죽고 말았다.

  6. 맛디아(Matthias)
 : 다른 대부분의 제자들에 비해 알려진 바가 적으며, 유다의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 사도로 선출되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돌에 맞은 후 참수당했다.

  7. 안드레(Andrew)
 : 베드로의 형제였다. 그는 아시아의 수많은 민족들에게 복음을 설교했는데, 에뎃사(Edessa)에 도착하자마자 붙잡혀 두 끝이 땅에 가로로 고정되어 있는 십자가(모양이 ‘X’자임)에 못박혔다. ‘안드레의 십자가’(St. Andrew’s Cross)라는 말은 여기서 유래했다.

  8. 마가(St. Mark)
 : 레위 지파의 유대인 부모에게서 태어났다. 여겨지는 바로는 그가 베드로를 통해 회심하여 서기로서 그를 섬겼고, 그의 감독하에 자신의 복음서를 헬라어로 기록했다고 한다. 마가는 알렉산드리아인들에 의해 그들의 우상 세라피스(Serapis)를 위한 대제전일에 질질 끌려 다니며 갈가리 찢겨졌고, 그들의 무자비한 손길에 생을 마감했다.

  9. 베드로(Peter)
 : 어떤 이들은 베드로가 다른 수많은 성도들과 함께 로마에서 사형을 언도받고 십자가에 처형되었다고 말한다. 헤게시푸스(Hegesippus)의 말에 의하면, 네로가 베드로를 죽일 구실을 찾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챈 사람들이 어지간한 법석을 떨며 베드로에게 시를 떠나라고 간청했다고 한다. 결국 그들의 끈덕진 간청에 손을 든 베드로는 피신할 채비를 갖추었는데, 그가 성문에 이르렀을 때 그를 만나려고 오시는 주님을 뵌 베드로가 경배드리며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라고 여쭙자, 주님께서는 “십자가에 못박히기 위해 다시 왔노라.”고 대답하셨다는 것이다. 이에 베드로는 자신의 고난이 당연한 것임을 깨닫고 로마로 발길을 돌렸다는데, 제롬(Jerome)의 말에 따르면, 그는 머리와 발이 거꾸로 된 채 십자가에 못박혔으며, 이는 자신은 주님과 같은 모양과 방법으로 못박힐 가치가 없다는 생각에 자청한 것이었다 한다. 그러나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소 확실치 못한 부분이 없지 않은데, 이는 베드로가 로마에 갔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반론이 제기되며, 그러한 반론은 타당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10. 바울(Paul)
 : 이전엔 사울(Saul)이라 불리던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느라 겪은 극심한 고난과 이루 말할 수 없는 수고를 뒤로 한 채, 네로가 자행한 이 첫 번째 박해의 또 다른 희생양이 되었다. 압디아(Abdias)는 다음과 같이 단언한다. 바울에게 사형을 언도한 네로는 자신의 근위병들 중 페레가(Ferega)와 파르데미우스(Parthemius)라는 이들을 보내 그에게 사형을 선고케 했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말씀을 가르치고 있는 바울에게 다가간 그들은 자신들도 믿고 싶으니 위해서 기도해 주기를 그에게 요망했고, 그는 그들이 즉시 믿고 침례를 받아야 한다고 일러주었다. 그리고 일러준 대로 이 일을 마친 군인들은 와서 그를 처형장으로 데려갔으며, 그는 그곳에서 기도를 끝내고 자신의 목을 칼날에 내어주었다.

  11. 유다(Jude)
 : 야고보의 형제이며, 보통 다대오(Thaddeus)라고 불렸다. A.D. 72년, 에뎃사(Edessa)에서 십자가에 처형되었다.

  12. 바돌로매(Bartholomew)
 : 대여섯 나라들에서 말씀을 전파했고, 마태복음을 인도어로 번역하여 그것을 그 나라에 보급시켰다 한다. 결국 그를 못 죽여서 안달이 나 있던 우상 숭배자들에게 잔혹하게 두들겨 맞고 십자가에 처형되었다.

  13. 도마(Thomas)
 : 디두모(Didymus)라고도 불리며, 파대(Parthia)와 인도에서 복음을 전파했다. 그곳에서 이교도 제사장들의 분노를 산 그는 창에 찔려 순교했다.

  14. 누가(Luke)
 : 복음 전도자이자 그의 이름을 사용한 복음서의 저자이기도 하다. 바울과 함께 다양한 나라들을 여행했으며, 우상을 숭배하는 그리스 제사장들에 의해 올리브 나무에 목매여 죽임당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15. 시몬(Simon)
 : 다르게는 셀롯(Zelotes)이라고도 불리며, 아프리카의 모리타니아(Mauritania)뿐 아니라, 심지어 영국에서도 복음을 전했다. A.D. 74년에 영국에서 십자가에 처형되었다.

  16. 요한(John)
 : 이 “사랑하는 제자”는 큰 야고보의 형제였다. 스머나, 퍼가모, 사데, 필라델피아, 라오디케아, 두아티라 교회들은 그가 세운 교회들이다. 에베소에 있을 때 그를 로마로 보내라는 명령이 떨어졌고, 그리하여 거기서 펄펄 끓는 기름 가마솥에 던져 넣어졌다고 주장되고 있다. 그러나 그는 털끝 하나 안 상하고 기적적으로 탈출했다. 이후 도미시안(Domitian)에 의해 팟모섬으로 유배당한 그는 그곳에서 요한계시록을 썼고, 도미시안의 뒤를 이은 네르바(Nerva)가 그를 다시 불러들였다. 그는 잔혹한 죽음을 모면한 유일한 사도였다.

  17. 바나바(Barnabas)
 : 쿠프로(Cyprus) 태생이지만 유대인의 후손이며, A.D. 73년에 죽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이와 같이 온갖 끊이지 않는 박해와 등골을 오싹케 하는 처형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사도들과 그들로부터 배운 이들의 교리에 깊숙이 뿌리 내렸으며, 흘려진 성도들의 피를 자양분 삼아 나날이 강성해졌다(pp.17-23).

자료제공 : http://www.biblemaster.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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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재밌는 성경이야기 / 세계의 역사와 문화가 쉬워지는 

 

 

이책을 펴들면 우선 큰 책사이즈와 책내용의 삽화가 한눈에 들어온다. 이책의 삽화는 성경의 매 이야기마다 해당하는 삽화를 그려넣었는데 삽화 색상의 칼라풀한 그림체가 한눈에 들어와서 책속의 이야기들을 한눈에 파악 할 수 있어서 마음에 쏙 들었다. 특히나 이책은 초등학생 대상으로 눈높이에 해당하는 책이라고 본다면, 우선 삽화가 주는 강렬한 칼라색체가 이책에 대한 집중도를 높일수 있을것 같다. 삽화를 그린 작가는 '키노 마린'인데 미술을 전공한 그래픽 디자이너라고 직업이 설명되어 있는것 보면, 디자이너 다운 그림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이책은 성경을 시대적 흐름순으로 할아버지가 손녀(아나)에게 들려주는 방식으로 서술되어 있다. 아파서 밥을 잘먹지 못하는 아나에게 식사를 하는 조건으로 이야기를 하나씩 해주는 형식이다. 처음에는 손녀와 옆에서 이야기를 한마디씩 던지는 가사도우미 마를렌 두명이었지만 이야기를 듣는 인물은 아나의 친구 마테오, 하신타로 늘어나고 엄마도 이야기에 참여하곤 한다. 책은 구약의 창세기부터 성경의 순서대로 시대의 흐름대로 인물위주의 이야기들이 전개된다. 그리고 신약으로 넘어와서 예수님의 탄생부터는 예수님의 삶의 순서대로 이야기를 들려준다. 아이에게 들려주는 방식이다보니 성경속의 인물 중심으로 이야기가 흐르는것이 단점이기는 하지만 신약 예수님의 이야기에서는 사건중심으로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야기는 예수님의 부활, 승천으로 마무리 된다. 

 

책 전체적인 내용은 초등학생들이 성경을 이해할때 읽으면 좋을것 같다. 물론 성경의 내용을 자세히 모르는 어른이 읽어도 무방하게 서술되어 있다. 나역시도 내용을 재미있게 읽었으니 말이다. 개인적으로 한가지 많이 아쉬운것이라면 이책의 저자가 가톨릭 관점에서 작성을 하고, 한글 번역도 천주교중앙협의회에서 발간된 성경을 기초로 되어 있다보니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인물이름이나 지명과는 다소 차이가 있어 어색한 부분이 책을 읽는 중간중간에 방해로 작용한다. 구약의 인물들, 하가르(하갈), 이사악(이삭), 레베카(리브가), 에사우(에서), 포티파르(보디발), 파라오(바로), 예리코(여리고), 보아즈(보아스), 바쎄바(밧세바)........, 신약의 인물 필립보(빌립), 바로톨로메오(바돌로매), 마태오(마태), 토마스(도마), 타대오(다대오), 유다 이스카리옷(가롯 유다)등 열두제자이름은 마치 다른 사람으로 착각할 정도로 천주교식이름때문에 헷갈리고, 그외 제베대오(세베대), 바리사이인(바리세인).. 찾아보지 않으면 어떤이름인지 헷갈리기조차 한다. 내가 개신교인이라 더 헷갈리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책이 카톨릭관점의 서술이라 어쩔수 없다고 하더라도.. 내용상 예수님이 승천하시면서 베드로에게 최고성직자(교황)자리를 준다는 내용이나 성모 마리아를 부각시키는 내용은 쫌... 가톨릭은 워낙 이런가? 하는 의문점이 들기는 하지만, 이런 부분들을 제외하고 이책의 전체적인 성경적인 이야기는 초등학생들이 흥미롭게 읽을수 있게 구성되어 있는 책이 아닐까 생각한다.

 

출처: http://cafe.naver.com/booknbeanstalk/507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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