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이후 한반도 국내외 정세
48년 5.10 총선으로 출범한 이승만 정부는 경제난까지 겹쳐 신임을 거의 얻지 못하고 있었다.
48년 제주 4.3사건 과 여. 순 사건 까지 일어나 남한은 거의 내전 상태였으며 이승만 정부가 조직한 서북청년회 등 극우 청년 단체에 의존하여 정권 유지에 바빴다.
제헌국회의 임기가 끝나고, 50년. 5. 30총선에서 이승만 지지세력은 210명의 의석 중 겨우 30석 을 차지하였다.
설상가상 미군은 군사고문단만 남고 철수(49.6) 하였다.
중국은 국민당 장제스가 공산당에 패하여 대만으로 쫓겨나고 중화인민공화국이 들어섰다.(49.10)
또한 미 국무장관 애치슨은 태평양 지역 방위선에서 한국과 대만을 제외한다고 선언(애치슨 선언 50.1)을 하여 남한에 불리한 사태가 계속 전개되었다.
애치슨 라인
6.25 전쟁과 휴전협정
그러나 남한과 달리 북한은 급속도로 성장하였다. 소련의 스탈린, 중국의 모택동이 김일성 정권을 적극적으로 지지하였다. 병력이나 군사면에서 북한은 남한을 월등하게 앞지르고 있었다.
1950년 6.25 전쟁 때 화력이 월등한 북한은 사흘 만에 서울을 점령하고 두 달 후에는 낙동강 주변까지 밀고 내려왔다.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하여 9. 28일 서울을 탈환하고 북진을 하였지만 중국의 북한 지원으로 다시 역전되었다.
전쟁은 51년 여름부터 휴전선 부근에서 교착 상태에 빠져 휴전회담이 2년여 동안 계속되었다.
휴전협정 서명
53년 7월 27일 휴전 협정이 체결되었지만 쌍방의 인명피해는 헤아리기 어려웠고 산업시설, 주택, 학교 등 특히 서울과 평양은 모두 참혹한 폐허로 변했다.
밀고 밀리는 전쟁 과정에서 이데올로기가 뭔지 모르는 일반 국민들은 부역자로 몰려 희생되고 반동으로 몰려 인민재판을 받고 무고한 수많은 주민들이 처형되었다.
6.25전쟁으로 남. 북 상호 간에 불신의 벽이 높아지고 통일은 요원해져 갔다.
판문점
발췌개헌과 사사오입궤변
이승만은 임시수도 부산에서 반공 정서를 이용하여 우익단체를 토대로 자유당을 조직(51. 12) 하였다. 장기집권을 위한 포석으로....
간첩잡는다는 명목으로 52. 7월(6.25 전쟁중)계엄령을 선포하였다.
지난 50년 총선에서 자유당이 패했기 때문에 간선제로 대통령 선거가 불리해지자 직선제 개헌안( 발췌개헌 )을 통과시키기 위해서였다
이때 백골단,땃벌대등을 동원하여 내각제를 원하는 야당 의원들을 헌병대로 연행하고 압력단체들을 동원 유혈사태가 벌어졌다. (부산정치파동)
이런 험악한 분위기에서 전쟁중에 새 헌법에 의거 제2대 대통령에 이승만, 부통령에 함태영 이 당선되었다.
국회의원버스연행하는 헌병대
재선에 성공한 이승만 은 이범석 계열의 민족 청년당은 자유당에서 축출하고 이기붕이 자유당 을 이끌었다.
이번에는 이승만의 영구집권을 위한 포석 을 준비하였다. 자유당은 대통령의 중임 제한을 철폐 하는 개헌안을 표결에 부쳤다(54.11).
재적의원 203명의 2/3인 136명이 찬성해야 법안이 통과하는데 135.333명(135명)이었기 때문에 부결되었다
그러나 사사오입 의 궤변으로 초대 대통령은 중임 제한을 철폐 하는 법안을 불법적으로 통과시켰다.
사사오입 반올림의 궤변
사사오입 개헌 으로 보수 야당 계열은 연대하여 '호헌동지회 '를 구성하여 독재에 맞섰으며 무소속 의원들은 이를 토대로 민주당 을 창당하게 되었다(1955)
국민들의 빈축을 샀던 사사오입 헌법에 기초하여 이승만은 제3대 대통령으로 당선 되었다.(56. 5.15)
이때 신익희 후보(민주당 )가 '못 살겠다, 갈아보자'라는 구호를 내걸고 인기가 높아가는 과정 중 갑자기 타계하였다.
대통령 후보 무소속의 조봉암 후보가 30%를 차지하였고, 부통령은 민주당의 장면 후보가 이기붕을 누르고 당선되었다.
3대 대통령 선거 벽보
진보당 사건
3대 정.부통령 선거결과 부통령에 민주당의 장면이 당선 되자 위기에 몰린 이승만 정부는 혁신 정당인 진보당 (1956.11 창당)을 탄압하여 당 간부들을 간첩으로 잡아들였다.
야당 의원들을 감금한 상태에서 '신 국가 보안법'을 제정하고, '반공 청년당'을 조직하였으며
진보당의 조봉암을 간첩으로 사형 에 처하였다( 1959.7 진보당 사건)
또 장면을 지지한 <경향신문>을 폐간시켜 언론과 야당을 탄압하였다.
진보당 조봉암
3.15 부정선거와 4.19혁명
1960년 3월. 15일 제4대 정. 부통령 선거 에서 민주당 후보 조병옥 이 선거 1개월 전에 미국에서 수술을 받다 갑자기 사망하였다.
4대 대통령 후보로 85세의 이승만은 단일후보 가 되었다.
그러나 부통령 후보 이기붕이 민주당의 장면 에게 뒤지고 있었다.
자유당은 정권을 지키기 위해 이기붕을 당선시키려는 부정 을 자행하게 되었다.
자유당 충성파들은 사전투표와 공무원과 기관단체를 동원하여 이기붕 표가 100% 가까이 나오자 하향 조절 하기도 하였다.
이기붕
이 3.15 부정선거로 인해 4.19 학생 시민혁명이 유발 하였다. 특히 마산 중앙 부두에서 최루탄이 눈에 박혀 사망한 김주열 군(17세) 시체가 떠오르자 국민들 분노가 절정에 달했다.
학생들의 독재 정권 타도 시위와 '학생들의 피에 보답하라'라는 대학교수단의 시국선언문(4.25) 미국 측의 퇴진 압력으로 이승만은 4.26일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겠다."라는 성명서를 내고 하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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