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이후 한반도 국내외 정세
48년 5.10 총선으로 출범한 이승만 정부는 경제난까지 겹쳐 신임을 거의 얻지 못하고 있었다.

48년 제주 4.3사건 과 여. 순 사건 까지 일어나 남한은 거의 내전 상태였으며 이승만 정부가 조직한 서북청년회 등 극우 청년 단체에 의존하여 정권 유지에 바빴다. 

제헌국회의 임기가 끝나고, 50년. 5. 30총선에서 이승만 지지세력은 210명의 의석 중 겨우 30석 을 차지하였다.

설상가상 미군은 군사고문단만 남고 철수(49.6) 하였다.

중국은 국민당 장제스가 공산당에 패하여 대만으로 쫓겨나고 중화인민공화국이 들어섰다.(49.10) 

또한 미 국무장관 애치슨은 태평양 지역 방위선에서 한국과 대만을 제외한다고 선언(애치슨 선언 50.1)을 하여 남한에 불리한 사태가 계속 전개되었다.

애치슨 라인
6.25 전쟁과 휴전협정
그러나 남한과 달리 북한은 급속도로 성장하였다. 소련의 스탈린, 중국의 모택동이 김일성 정권을 적극적으로 지지하였다. 병력이나 군사면에서 북한은 남한을 월등하게 앞지르고 있었다. 

1950년 6.25 전쟁 때 화력이 월등한 북한은 사흘 만에 서울을 점령하고 두 달 후에는 낙동강 주변까지 밀고 내려왔다.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하여 9. 28일 서울을 탈환하고 북진을 하였지만 중국의 북한 지원으로 다시 역전되었다. 

전쟁은 51년 여름부터 휴전선 부근에서 교착 상태에 빠져 휴전회담이 2년여 동안 계속되었다.


휴전협정 서명
 53년 7월 27일 휴전 협정이 체결되었지만 쌍방의 인명피해는 헤아리기 어려웠고 산업시설, 주택, 학교 등 특히 서울과 평양은 모두 참혹한 폐허로 변했다. 

밀고 밀리는 전쟁 과정에서 이데올로기가 뭔지 모르는 일반 국민들은 부역자로 몰려 희생되고 반동으로 몰려 인민재판을 받고 무고한 수많은 주민들이 처형되었다.

6.25전쟁으로 남. 북 상호 간에 불신의 벽이 높아지고 통일은 요원해져 갔다.

판문점 
발췌개헌과 사사오입궤변
이승만은 임시수도 부산에서 반공 정서를 이용하여 우익단체를 토대로 자유당을 조직(51. 12) 하였다. 장기집권을 위한 포석으로....

 간첩잡는다는 명목으로 52. 7월(6.25 전쟁중)계엄령을 선포하였다. 
지난 50년 총선에서 자유당이 패했기 때문에 간선제로 대통령 선거가 불리해지자 직선제 개헌안( 발췌개헌 )을 통과시키기 위해서였다

이때 백골단,땃벌대등을 동원하여 내각제를 원하는 야당 의원들을 헌병대로 연행하고 압력단체들을 동원 유혈사태가 벌어졌다. (부산정치파동)

이런 험악한 분위기에서 전쟁중에 새 헌법에 의거 제2대 대통령에 이승만, 부통령에 함태영 이 당선되었다. 

국회의원버스연행하는 헌병대

재선에 성공한 이승만 은 이범석 계열의 민족 청년당은 자유당에서 축출하고 이기붕이 자유당 을 이끌었다.

이번에는 이승만의 영구집권을 위한 포석 을 준비하였다. 자유당은 대통령의 중임 제한을 철폐 하는 개헌안을 표결에 부쳤다(54.11). 

재적의원 203명의 2/3인 136명이 찬성해야 법안이 통과하는데 135.333명(135명)이었기 때문에 부결되었다

그러나 사사오입 의 궤변으로 초대 대통령은 중임 제한을 철폐 하는 법안을 불법적으로 통과시켰다.


사사오입 반올림의 궤변
사사오입 개헌 으로 보수 야당 계열은 연대하여 '호헌동지회 '를 구성하여 독재에 맞섰으며 무소속 의원들은 이를 토대로 민주당 을 창당하게 되었다(1955)

국민들의 빈축을 샀던 사사오입 헌법에 기초하여 이승만은 제3대 대통령으로 당선 되었다.(56. 5.15)

이때 신익희 후보(민주당 )가 '못 살겠다, 갈아보자'라는 구호를 내걸고 인기가 높아가는 과정 중 갑자기 타계하였다.
 대통령 후보 무소속의 조봉암 후보가 30%를 차지하였고, 부통령은 민주당의 장면 후보가 이기붕을 누르고 당선되었다.

 3대 대통령 선거 벽보
진보당 사건
3대 정.부통령 선거결과 부통령에 민주당의 장면이 당선 되자 위기에 몰린 이승만 정부는 혁신 정당인 진보당 (1956.11 창당)을 탄압하여 당 간부들을 간첩으로 잡아들였다. 

야당 의원들을 감금한 상태에서 '신 국가 보안법'을 제정하고, '반공 청년당'을 조직하였으며 
진보당의 조봉암을 간첩으로 사형 에 처하였다( 1959.7 진보당 사건) 

또 장면을 지지한 <경향신문>을 폐간시켜 언론과 야당을 탄압하였다.

진보당 조봉암
3.15 부정선거와 4.19혁명
1960년 3월. 15일 제4대 정. 부통령 선거 에서 민주당 후보 조병옥 이 선거 1개월 전에 미국에서 수술을 받다 갑자기 사망하였다. 

4대 대통령 후보로 85세의 이승만은 단일후보 가 되었다.

그러나 부통령 후보 이기붕이 민주당의 장면 에게 뒤지고 있었다. 

자유당은 정권을 지키기 위해 이기붕을 당선시키려는 부정 을 자행하게 되었다. 

자유당 충성파들은 사전투표와 공무원과 기관단체를 동원하여 이기붕 표가 100% 가까이 나오자 하향 조절 하기도 하였다. 

이기붕

이 3.15 부정선거로 인해 4.19 학생 시민혁명이 유발 하였다. 특히 마산 중앙 부두에서 최루탄이 눈에 박혀 사망한 김주열 군(17세) 시체가 떠오르자 국민들 분노가 절정에 달했다.

학생들의 독재 정권 타도 시위와 '학생들의 피에 보답하라'라는 대학교수단의 시국선언문(4.25) 미국 측의 퇴진 압력으로 이승만은 4.26일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겠다."라는 성명서를 내고 하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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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사 / 평양 대부흥운동

 

 

 

1907년 평양을 중심으로 일어나 전국 교회로 확산된 한국 교회의 대표적 부흥운동. 이 부흥운동은 1월 6일(주일)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평양 시내 네 교회 연합집회 형태로 시작되었다. 교회 장소가 협소하여 여자 교인은 자기 교회에, 남녀 중학생과 소학생들은 자기 학교 강당에 모였고, 남자 교인들만 2천여 명이 장대현교회당에 모였다.

이때만 해도 한국인 목사가 없어 부흥회는 선교사들 주관으로 진행되었다. 한 주간 동안 길선주 장로(당시 목사 안수를 받지 않음)는 한국 최초의 새벽기도회를 통해 큰 은혜를 끼쳤다. 무엇보다 그는 자신이 '아간'과 같은 죄인임을 고백하며 회개했고, 이를 계기로 수많은 교인들의 회개가 터져나왔다. 1주간 내내 회개가 계속되자 소문을 들은 방은덕(方恩德)이라는 순포(경찰)가 흉악범을 잡으러 집회에 참석했다 자신도 회개하고 예수를 믿게 된 일화도 있다.

무르익은 집회는 1월 14일 월요일 저녁 미국 북장로교회 선교사 블레어(W.N. Blair)의 설교로 절정에 달했다. 고린도전서 12장 27절 말씀으로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그리스도의 지체들이라'는 블레어 선교사의 설교가 끝나고

 수백 명의 성도가 통성으로 기도할 때 성령의 큰 역사가 임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죄를 대중 앞에서 구체적으로 자복하며 눈물로 회개했다. 반목과 질시하던 자들이 껴안고 화해하는 모습도 나타났다. 이런 감동적인 회개 역사는 새벽 2시까지 지속되었다.

이를 목격한 한 여자 선교사는 "입으로 고백하기 어려운 상상할 수 없는 무섭고 추한 죄악들이 쏟아져 나왔다. 마치 지옥 지붕이 젖혀진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고 술회했다. 또, 당시 런던타임즈는 "마치 밖으로부터 뭔가 물밀듯 밀려드는 강력한 힘의 임재에 압도당한 듯했다."고 보도했다.

이런 역사는 화요일 아침 숭의여학교에서, 수요일 아침에는 숭덕학교에서도 일어났다. 김찬성 조사가 설교할 때 어린 학생들이 큰 은혜를 받고 수업을 중지한 채 오후 1시까지 통회 자복의 기도회가 지속되었다. 각 곳의 여자중학교와 부녀자들의 모임에서도 이런 역사는 계속되었다.

선교사들만 모이는 정오 기도회에도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 기도회를 30분간 연장하여 오후 2시까지 할 정도였다. 이 놀라운 평양 대부흥회는 그 해 봄 길선주 장로의 서울 집회에서도 나타났고, 이런 부흥의 불길은 전국으로 번져나갔다.

평양 대부흥운동은 1903년 원산 부흥운동, 1909년 백만인 구령운동과 더불어 경건하고 건전한 부흥운동의 모델을 제시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한국 교회를 질적으로 한 단계 도약시키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출처 : 교회용어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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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산 부흥운동

 

 

 

정의

1903년 원산에서 일어난 부흥회와 그에 따른 한국 교회의 영적 각성운동.

개설

원산 부흥운동은 좁은 의미로 1903년 원산에서 남감리회 선교사 로버트 하디(R. A. Hardie, 1865∼1949)가 인도한 사경회와 부흥회를 지칭하지만, 넓은 의미로는 1903년 하디 부흥회 이후 1907년 평양 대부흥운동이 일어나기 전까지 지속된 한국 교회 부흥운동을 지칭한다.

역사적 배경

원산 부흥운동이 일어났던 시기(1903∼1906년)는 한국에서 개신교 선교가 시작된 지 20년이 되었지만, 기대했던 선교 결과가 나타나지 않았고, 중국 의화단사건(1900년) 여파로 선교사 배척 분위기가 확산되어 선교사들이 실망과 위기를 느끼던 때였다. 또한 한국 사회에서도 신축년 대기근(1901년) 이후 민중의 경제적 파탄이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고, 러일전쟁(1904년)을 앞두고 정치적 불안도 가중되던 상황이었다. 이처럼 정치사회적 불안과 신앙적 위기가 점증되던 시기에 원산에서 부흥운동이 일어났다.

경과

원산 부흥운동은 1903년 여름 중국에서 사역하다 한국을 방문한 미국 남감리회 여선교사 화이트(M. C. White)가 원산에서 사역하던 남감리회 여선교사 캐롤(A. Carroll)과 노울즈(M. Knowles), 하운셀(J. Hounshell), 그리고 캐나다장로회 여선교사 매컬리(I. H. McCully) 등과 함께 한 사경회에서 시작되었다. 이들은 8월 24일부터 한 주간 동안 사경회를 갖기로 하고, 하디에게 성경공부 인도를 부탁하였다. 당시 한국 선교 13년 차였던 하디는 선교 실적 부진으로 인한 실망감과 피로감으로 지쳐 있던 상태였다. 그런데 사경회를 인도하는 중 하디는 선교 실패와 부진의 원인이 밖에 있지 않고 ‘성령의 인도와 능력’을 따르지 않은 자신에게 있음을 깨닫고 회개하는 순간 ‘성령 충만’과 믿음의 확신이 생겼다. 당시 하디와 함께 집회에 참석했던 선교사들도 같은 경험을 하였다.

선교사 사경회를 마친 다음 주일예배 때 하디는 한국인 회중 앞에서 자신의 교만과 실수를 공개적으로 자복하였고, 그것이 ‘회개의 본’이 되어 한국 교인들의 공개 자백을 이끌어냈다. 9월 초 하디가 인도한 원산교회 직원 부흥회, 10월에 원산을 방문한 미국 스칸디나비아선교회 지도자 프랜슨(F. Franson)이 인도한 부흥회, 그리고 프랜슨 부흥회 직후 하디가 인도한 특별 부흥회에서도 교인들의 공개적 자복현상이 나타났다. 당시 교인들이 자복한 죄는 주로 횡령과 절도, 간음, 강간, 위선, 미움, 증오, 질투와 같은 ‘윤리적’ 내용이었다. 그리고 미워하고 증오했던 교인들 사이에 화해와 용서가 이루어졌고, 과거에 훔치거나 횡령한 것을 보상하거나 배상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김화 새술막교회 윤성근(일명 윤승근) 전도사는 원산 부흥회에 참석했다가 과거(기독교인이 되기 전) 인천주전소에 근무하던 시절 되돌려주어야 했던 회사(정부) 돈을 사용했던 것을 기억하고, 그 돈을 마련해 탁지부에 되돌려 줌으로 ‘양심전’(良心錢)이란 별명을 얻게 되었다. 이런 공개 자복과 윤리적 갱신이 원산 부흥운동의 특징적 현상이 되었다.

이렇게 원산에서 시작된 하디의 부흥운동는 1904년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하디는 1904년 1월에 개성 지방 사경회를 인도하였고, 2월에 김화 새술막교회와 지경터교회, 4월에 서울 자골교회 부흥회를 인도하였는데, 여기서도 공개 자복 현상이 나타났다. 이때까지 부흥의 범위는 하디가 속한 남감리회 소속 교회들로 한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해 9월 서울 정동제일교회 부흥회를 시작으로 10월 평양 지방, 11월 인천 지방에서 연합부흥회를 인도하였는데, 이곳은 교단이 다른 미감리회 구역이었다. 하디는 인천 지방 연합부흥회를 마치고 안식년 휴가를 얻어 미국으로 돌아갔고 그가 없는 사이 크램(W. G. Cram)과 캐롤, 하운셀 등 다른 남감리회 선교사들이 1905년 개성과 원산, 서울 등지에서 부흥회를 인도하였다. 그리고 1905년 9월 장로교와 감리교 6개 선교부가 조직한 한국복음주의선교회연합공의회에서는 매년 연초에 각 지방별로 실시하는 사경회를 연합부흥회로 진행하기로 결의하였고, 그에 따라 1906년 1∼2월 서울과 원산, 평양 등지에서 초교파 연합 부흥회가 개최되어 원산부흥운동의 열기를 이어나갔다.

1906년 8월 안식년 휴가를 마치고 귀환한 하디는 곧바로 평양에 가서 선교사 연합사경회를 인도하였는데, 거기 참석했던 블레어(W. N. Blair)와 그레이엄 리(Graham Lee) 등 장로교 선교사들이 ‘성령 충만’을 경험했다. 그리고 한 달 후 미국 부흥운동 지도자 존스턴(H. A. Johnston)이 평양을 방문해서 영국 웨일즈와 인도에서 일어난 부흥운동 소식을 전함으로 평양의 선교사와 한국 교인들은 교회 부흥을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3개월 기도로 준비한 끝에 1907년 1월 평양 장대현교회와 숭덕학교에서 개최된 연합사경회에서 교인들이 공개적으로 통회 자복하는 부흥운동이 일어났다. 그리하여 초기 한국기독교사에 큰 획을 긋는 1907년 평양 대부흥운동이 시작되었다.

의의와 평가

원산 부흥운동의 역사적, 종교적 의미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선교사의 회개로 시작해서 한국교회 지도자들의 회개로 이어져 교인들이 회개와 중생(거듭남), 성화(성결)로 이루어지는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체득하였다.

둘째, 처음에는 남감리회 선교구역인 원산에서 시작되었지만, 점차 미감리회와 장로회 선교구역으로 확산되어 초교파 연합운동을 촉진시켰다.

셋째, 회개한 기독교인들의 ‘양심전’ 같은 윤리적 갱신이 이루어지고, 새벽기도와 통성기도 같은 ‘토착적’ 신앙양태가 나타나면서 선교사들이 소개한 기독교가 한국의 토착 교회로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그러나 원산 부흥운동이 전개된 시기는 러일전쟁(1904년)과 을사5조약 체결(1905년)로 인한 민족적 위기 상황이었는데, 기독교인들이 정치·사회적 현실을 외면하고, ‘초월적’ 신앙에만 집착함으로써 교회의 ‘비정치화’(非政治化)를 심화시켰다는 비판적인 견해도 있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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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펜젤러의선교활동과 '한국 감리교회'의 설립

 

 


1. 머리말 - '한국 교회'

 

한국 교회의 시작을 언제로 보아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한국기독교사에서 오랫동안 숙제로 남겨져 왔다. 이 문제에 대한 답은 교회마다 다를 수 있으나, 물음은 감리교·장로교 등 모든 교파에 던져지는 것이다.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이, 한국 교회의 경우, 각기 다른 기준에 의해 제시되어 자기 교회의 설립 상한선을 높이려는 작의성(作意性)으로 종종 나타났다.

 

우선 교회란 어떻게 정의되며 교회의 시작은 언제부터라고 할 수 있는가.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사람들의 공동체'를 말한다. 그 공동체가 체계적인 조직을 갖출 수도 있고 미처 그렇게 되지 않을 수도 있다. 또 그 공동체가 일정한 회집 장소나 건물을 가질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교회를 이렇게 정의할 수 있다면, 따라서, 외적 조건들의 갖추어짐에 관계없이,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어떤 형태로든 공동체를 지속시켜 나간다고 할 때 이미 교회는 시작되었다고 할 것이다. 이 말은 '믿는 이들'이 존재하는 것이 곧 교회 성립의 제일 요건이라는 뜻이다.


공동체를 이루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우선 공동체를 이룩할 구성원, 곧 일정한 신급(信級 : 자격)을 갖춘 교인이 있어야 한다. 구성원이 있다는 것과 공동체를 형성했다는 것은 공동체적 의식(행위)에 의해 확인된다. 곧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이는 회집과 예배,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상징(세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됨의 증거(성찬)를 통해 확인될 수 있다.

 

이러한 공동체적 행위는 공시(共時)적 혹은 교호(交互)적으로 이루어 질 수도 있고, 지속적 혹은 간헐적으로 이루어질 수도 있다. 이러한 공동체적 행위들이 동시에 이뤄진다면, 그것은 교회가 이뤄졌다는 명백한 증거로서 제시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교적인 불신사회에 복음이 전파될 때, 그러한 공동체적인 행위들이 동시에 이뤄지기를 기대한다는 것은 곤란하다. 이런 점을 전제로 할 때, 교회의 시작(성립)의 근거를 어디에 두어야 할 것인가. 필자는 앞서 열거한 공동체적인 의식이 지속적 혹은 교호적으로 이뤄질 때 교회가 이미 시작되었다고 말하고 싶다.


여기서 문제를 더 심화시킬 필요가 있다. 한국 교회의 시작(성립)을 언제로 보아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다. 만주에서 수세(受洗)한 한국인들이 거기서 번역된 성경을 가지고 들어와 전도한 결과 이루어진 신앙공동체(교회)를 거론할 경우, 서간도의 한인촌교회[金靑松]와 서울교회[徐相崙], 의주교회[白鴻俊], 그리고 소래교회[徐景祚] 등이 거론될 수 있으나, 일반적으로는 1885년경에 설립되었을 황해도 소래교회를 그 시작으로 보고 있다. 만주를 통해 들여온 성경에 의해 이룩했을 신앙공동체에 대하여는 필자가 이미 언급한 바가 있다. 그것은 한국 감리교회의 설립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고 또 이 글이 의도하는 바도 아니므로 여기서는 더 언급하지 않겠다.


이 글에서 목표로 하는 것은 선교사를 통하여 이루어진 한국 교회 특히 한국 감리교회의 경우, 신앙공동체인 교회가 어떤 과정을 거쳐 이루어져 갔는가를 살펴보자는 것이다. 한말에 입국한 선교사들과 외국인들이 이룩했을 신앙공동체는 1885년 6월 28일 저녁에 한국에서 가진 최초의 종교적 집회와 관련시킬 수 있을 것이다. 이날 저녁 8시에 헤론 부부와 알렌 부부, 그리고 스크랜튼 대부인이 모여 '공식 주일예배'를 드렸다. 늦어도 1년 반의 시간이 경과한 후에는 외국인들의 집회에 한국인도 합석하여 예배를 드린 것 같다. 1887년 2월 27일(주일), 아펜젤러가 인도한 예배에는 50여 명의 외국인들이 참여하여 방이 꽉 찼으며 "한국인들이 우리 예배에 큰 관심을 가졌다"고 한 데서 어렴풋이 엿보인다. 문제는 외국인들만이 모였거나 외국인들이 주체가 되어 이룩한 공동체를 '한국 교회'로 볼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필자는 외국인들이 한국에서 가졌던 신앙공동체를 한국 교회사의 한 영역으로 수렴하는 것이 타당하다고는 생각하지만, 그것을 한국인이 주체가 된 '한국 교회'로 인식할 수 있겠는가에 관해서는 회의적이다. 그 공동체는 한국에서 세워졌지만 아직 한국인과 접맥되지 않았거나, 공동체의 형성과정과 운영에서 한국인이 주도적인 역할을 감당하였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한국 교회'는 한국에 있는 교회라기보다는 한국인이 그 공동체에서 주체적인 역할을 감당한 교회를 가리킨다. 초기에 외국인만으로 이루어진 공동체는 '한국 교회'라기보다는 한국에 있는 '외국인 교회'라고 해야 할 것이다. 1885년에 시작된, 외국인들만으로 이룩된 신앙공동체는 '한국 교회'의 출발로 보기는 곤란하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둔다면 이 글이 의도하는 바는, 첫째, 한국인이 주체가 된 초기 '한국 감리교회'는 어떤 과정을 거쳐 성립되어 갔는가 하는 질문을 전제로, 둘째, 한국 감리교회 성립에 초석이 된 미감리회 선교사 아펜젤러(Henry Gerhard Appenzeller, 1858∼1902)의 역할은 어떠하였는가, 그리고 그 해답에 대한 실마리로 아펜젤러의 초기 선교활동에서 신앙공동체 성립의 중요한 요건인 구도자 훈련과 세례, 공중예배와 성찬 등의 공동체 의식(행위)이 언제부터 나타나게 되었는가를 중점적으로 살펴보자는 것이 된다. 여기에 사족을 달자면, 한국 감리교회의 요람이라 할 정동제일교회의 설립을 1885년 10월로 잡았던 결정에 대하여 새로운 검토를 요청하는 뜻도 없지 않다.

 

아펜젤러는 미 북장로회의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1859∼1916)와 함께 1885년 4월 5일 부활주일 오후에 제물포에 도착하여 선교활동을 전개한 최초의 미 감리회 선교사 가운데 한 분이다.


아펜젤러에 관해서는 이미 전기와 논문들, 자료들이 발표된 바 있다. 그러나 그가 남긴 일기와 다른 여러 기록들을 면밀히 검토하여 한국 선교 초기의 실상과 한국 교회가 성립되어 가는 과정을 밝히는 것은 아직 연구를 기다리고 있는 형편이다. 아펜젤러의 기록은 한국 선교 초기에 관한 자료로서는 그만한 가치를 가진 것이 없다고 할 정도로 중요한 것인데도 그 자료에 대한 분석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필자는 그리피스(WM. E. Griffis)의 '아펜젤러 전기'(A MODERN PIONEER IN KOREA : The Life Story of Henry G. Appenzeller)를 번역하고 그의 초기 교육·선교 활동을 중심으로 몇 편의 글을 발표한 바 있다. 그 글 가운데서 배재학당의 설립 경위와, 교육의 이념과 제도, 신앙 훈련과 학생활동 등 그의 교육·선교 활동은 비교적 자세히 언급하였으므로, 여기서는 교육활동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고 그의 복음전도 활동을 중점적으로 다룰 것이다. 이 글은 복음전도 활동에 관해 이미 발표했던 글을 새로 보완하고 수정한 것이다. 이미 언급한 문제를 다시 논의하는 이유는 앞서의 글이 소략하게 다루어진 면도 있지만, 그의 초기 복음전도 활동을 정동교회를 중심으로 한 한국 감리교회의 성립에 초점을 맞춰보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이 글의 초점이 한국 감리교회의 성립과정에 있는 만큼, 그 시기도 아펜젤러의 입국 이후 3년간(1885∼1888)의 활동에 국한하였다. 이 기간에 구도자 훈련과 세례, 예배와 성찬 등의 신앙공동체의 의식(행위)이 모두 나타나고 있는데, 이 점은 바로 신앙공동체인 한국 감리교회가 형성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 글에 사용된 자료는 '아펜젤러 문서'(H. G. APPENZELLER PAPERS) 중에서도 주로 '아펜젤러 일기' 부분이다. 그는 매일 일기를 쓰지는 않았지만, 중요한 일이 있을 때에는 그답게 띄엄띄엄, 그러나 비교적 자세하게 기록해 두었다. '아펜젤러 일기'에는 중간 중간에 '최초의 세례식', '최초의 감리교인' 등 그가 개척적인 선교사로서 중요한 기록과 평가를 남겨 놓아, 한국의 초대 교회가 어떻게 성립되었는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 군데군데 보인다. 이 자료를 이용하면서, 첫 선교사의 분주한 일상생활 중에서도 자신의 기록을 남긴 아펜젤러 목사께 감사와 존경을 드린다.

 

2. 초기의 전도활동 - 외국인

 

아펜젤러의 전기를 쓴 그리피스는 아펜젤러의 신앙과 선교활동과 관련하여 이렇게 썼다.

 

"한국에서 나의 사랑하는 교회의 초석을 놓는 데에 내 평생을 기꺼이 바치겠다. 아직 건물을 바라보지 말라. 실망할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 건물을 위해 기도하라. 그러면 감리교가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서 꽃 피게 될 것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야망이란 이 나라 전체에서 그리스도를 설교하는 것이다.……내가 그것을 위하여 사는 기간이 최소한 1910년까지는 계속될 것이다. 그러나 주여, 그 기간 동안에 내가 이 한국인들 사이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당신만 알도록 도와주소서. 나는 주께서 내가 이곳에서 한 메시지를 전하라고 나를 보내신 것으로 믿고 있다. 그것은 생명의 메시지이기에 나는 그것을 충실하게 전파하기를 원한다.……영혼을 구원하는 것, 이것이 우리의 유일한 위대한 일이다.……그것은 영광된 일이 아니겠는가. 악마는 자신이 세워 놓은 조상숭배, 관습, 방탕 등으로 열심히 우리를 침범하나, 우리는 그를 공격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누구의 이름으로 일을 하고 있는지 우리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영광된 복음의 능력을 알고 있다.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아펜젤러는 북쪽의 호랑이 사냥꾼 등에게며 그리고 남쪽의 농사꾼들에게 그들의 말로 복음을 설교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

 

위의 글은 아펜젤러의 한국에서의 선교활동의 핵심을 잘 드러내는 말이다. 그는, 당시 북감리교 해외선교부가 매클레이 목사를 통해 한국 정부로부터 교육과 의료 사업을 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기 때문에 거기에 따라 처음에는 복음선교를 위한 교육에 전념하는 듯이 보였으나, 그의 중심에는 기독교 신앙의 복음 진리를 널리 전파하는 것이 선교사로서의 그의 주된 임무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복음을 통해서라야만 이 땅의 민족을 죄와 사망에서 해방시키고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이 염원은 일찍이 그의 제물포 도착을 알리는 1885년 4월 9일자 편지에 보였으니, 1885년 4월 5일 부활주일에 도착했음을 알리면서 그는 "오늘 사망의 빗장을 산산이 깨뜨리시고 부활하신 주께서 이 나라 백성들이 얽매어 있는 굴레를 끊으사 그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누리는 빛과 자유를 허락해 주옵소서!"라고 간구했던 것이다.


 그의 이러한 뜨겁고 간절한 신앙은 그의 가문의 신앙 전통에 뿌리한 것이다. 그의 부계(父系)는 스위스에서 이민 온 루터파의 신앙을 가졌고, 모계(母系)는 타락한 현대 문명의 이기(利器)를 거부하는 독일계의 메노나이트(Menonite)파의 신앙을 갖고 있었다. 대대로 내려온 이러한 뿌리깊은 신앙이 이 젊은 펜실베니아인을 뜨겁게 하였다. 그는 프랭클린 마샬대학 재학 시절, 감리교회에 출석하는 신앙적 결단을 내렸다. 이렇게 한 것은 그 전에 출석했던 교회보다 감리교회의 분위기가 이 젊은 열정의 신앙인에게 뜨거움을 안겨 주었기 때문이다.


 한국에 선교사로 왔던 아펜젤러는 초기에는 복음선교사가 행하여야 할 전도활동을 펼 수가 없었다. 복음전도는 입국후 상당한 기간이 경과한 후에 가능하였다. 1885년에 미 북감리교 선교사로 왔던 그와 스크랜튼은, 교육과 의료 사업에 한해서 활동할 수 있었다. 이것은 그 전 해 매클레이 목사가 와서 한국 정부로부터 허락받은 내용에 따른 것이었다.


복음전도 활동에 어려움을 느끼고 있던 아펜젤러는 한국 정부의 권위를 최대한 인정하면서 전도를 위한 집회를 조심스럽게 전개하였다. 그는 한국인에게 복음을 전하기 전에 언더우드 등과 함께 재한(在韓) 외국인의 예배를 인도하는 한편 일본인들의 성경공부를 인도하게 되었다.


아펜젤러가 한국에 두번째로 도착한 그 해(1885) 8월과 그 이듬해 4월에 이미 학교 일을 시작했다고 지적한 바 있다. 이에 앞서 1885년 복음선교사들의 입국에 맞춰, 알렌(Horace N. Allen)이 최초의 공식 주일예배라고 말한 주일예배가 1885년 6월 28일에 거행되었다. 선교사들만으로 모이는 주일예배가 정기적인 성격을 띈 것으로 확인되는 것은 "그후 우리는 언더우드 형제 집에서 '정기예배'(regular service)를 드렸다"고 한 기록에서다.

 

아펜젤러는 같은 기록에서 "우리는 지금 외국인을 위한 예배당을 건축하고" 있으며, "이 교회는 연합의 기초 위에 이루어질 것"이라고 했다. 1886년 8월부터는 미국 공사관에서 주일예배를 드렸다. 이 정기예배 모임이 교회로 발전하게 되는 것은 1886년 10월말부터인데, 아펜젤러는 다음에서 보여주는 바와 같이 재한 외국인들의 '연합교회'(The Union Church)의 목회자가 되는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하였다.   

 

"지난 주와 그 전 주에는 연합교회의 헌법을 마련하기 위한 위원회에서 봉사하였다. 지난 수요일 저녁에는 우리의 보고서가 약간의 수정을 거쳐 회중들에 의해 채택되었다. 오늘 밤에는 교회의 임원을 선출하기 위한 다른 모임이 있었는데 결과는 다음과 같다. 담임목사 아펜젤러……구성원간의 조화가 잘 이뤄지고 있는 연합교회의 목회자가 된다는 것은 영광스럽다. 하나님께서 번영되고 성공적인 해를 우리에게 허락하시기를 빈다."

 

재한 외국인 연합교회의 담임목사는 아펜젤러였지만, 그만이 예배와 설교를 주관한 것은 아니다. 설교의 경우, 언더우드와 교대했으며 다른 목사들도 설교하였다. 1886년 11월 추수감사주일에는 언더우드 목사가 '한국 기독교사상 최초의 추수감사절 설교'를 했다. 그 이듬해 2월말에는 50여 명이 모여 예배실이 꽉찰 정도로 성장하였다. 1887년 12월 25일(주일)에도 교회는 만원이었다.


 아펜젤러는 오전에 연합교회에서 담임목사로 봉사하는 한편 1886년초부터 오후에는 일본인을 위한 성경공부를 지도하기 시작하였다. 이 성경공부는 1885년에 한국에 온 일본 공사관의 직원 하야카와 데찌야(Hayakawa Tetzya)와 그의 동료 두 사람과 함께 시작하였던 것이다. 일본인 성경공부를 같이 시작한 하야카와에 대하여 그는 이렇게 썼다.

 

"그는 지난 가을에 이 도시에 와서 우리와 친교를 맺고 주일에는 우리와 함께 성경을 연구하였으며 우리 기도회에도 참석했고 내가 그에게 교회 출석을 권하자 그는 기꺼이 응했다. 일본 북부에 있는 대학을 다닐 때 그는 이미 기독교에 관해서 배워 알고 있었다. 믿음 좋은 총장이 씨를 뿌렸고 나는 지금 그 열매를 거두는 기쁨을 누리고 있는 셈이다. 그는 또 우리 교회의 준회원으로 받아들여졌다. 감리교회가 한국에서도 교인을 얻은 셈이다. 이곳 주민들이 하나님을 찾고 그들을 교회와 하나되게 할 날이 어서 오게 하옵소서."

 

일본인을 위한 이 성경공부는 이 해 4월초에도 3명으로 진행되었다. 이들은 여전히 일요일 오후 모임에 정기적으로 참석하여 마태복음으로 성경공부를 시작했다. 아펜젤러는 그 해 부활절에 그들 가운데 한 명에게 세례를 베풀기를 기대하였고, 이런 예비적인 모임이 있은 후에 1886년 4월 25일 부활주일 오후 3시에 '한국 최초의 세례'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아펜젤러 일기에 의하면, 그는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의 도움을 받아 처음으로 스크랜튼 박사의 딸 마리온(Marion Fitch Scranton)과 자신의 첫딸인 앨리스(Alice Rebecca), 그리고 일본인 하야카와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마리온은 적어도 서울에서 최초 수세자의 영예를 얻었는데, 아마도 이 나라 전체에서도 그랬을 것이었다.  


일본인들을 중심으로 한 이 성경공부 모임을 두고 그는 자신들의 선교사업이 이미 시작되었다고 자부하였다.  이렇게 계속되던 정기적인 성경공부는 1886년 9월에 이르러 일본 영사 유키 씨의 집에서 모이게 되었는데, 이 때는 7명이 모이게 되었다.

 

"오후에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기 위해 일본 영사관에서 성경공부반을 열었다. 영사 유키(Yuki) 씨는 종교에 관심이 많은데, 그렇지 않았으면 그의 집을 개방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부인은 기독교인으로서 복음이 다시 설명되는 것을 듣고 매우 기뻐하는 것 같았다. 두 명의 경찰관 혹은 무관이 들어와 함께 성경을 읽었다. 출석 인원이 모두 7명이지만 아마도 늘어날 것이다."

 

성경공부반이 영사의 집으로 옮긴 후에, 그의 예언대로, 1886년 가을에는 한 모임에 12명이 참석하였다. 이 사실은 일본 기독교계의 The Christian지에 소개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 해 크리스마스를 지난 다음날 주일(26일) 오후에는 일본인들과 함께 즐거운 예배를 드릴 수 있었다. 성경공부가 이제는 주일예배로 발전해 갔던 것이다. 일본인들을 상대로 한 그의 성경공부반은 그 이듬해까지도 잘 운영되어 개종자들이 나왔다. 1887년 4월 10일 부활주일에는 일본 영사관의 무관 수기바시 고이치로(Sugibashi Koichiro) 씨가 세례를 받았다. 이 또한 꾸준히 계속된 성경공부와 아펜젤러의 설득의 결과였다.


아펜젤러가 한국인 선교에 앞서서 일본인들에 대한 선교를 강화했던 것은 선교전략적인 측면이 없지 않다. 한국 정부가 아직도 선교사들의 복음전도를 허락하지 않은 상황에서 일본인에 대한 선교는 한국인 전도를 위한 분위기 조성의 방법이 될 수도 있고 자신이 선교사임을 노골화시키는 기회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가 1887년 8월말까지 일본인들을 위한 예배 처소를 먼저 마련하려고 노력한 것과 관련, "일본인을 통해 들어가기를 추구하는 가능성은 우리에게 열려 있다. 그것은 일본인들의 예배를 위해 잡아놓은 장소를 먼저 구입하고 그 후에 조용히 한국인들에게 접근하는 것이다. 이것은 가능한 한 정당하게 이뤄져야 하고 이뤄질 것이다"고 한 것은 바로 재한 일본인 선교가 한국인 선교에 연결되는 전략임을 알게 한다. 


여기서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일본인 성경공부반이 진행되어 가는 중에 서울에는 한 일본인이 '기독교서적판매소'를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성경판매인인 기요노(Kiyono) 씨는 앞서 The Christian지에 아펜젤러를 소개한 데 이어 자신의 사업을 이렇게 소개하였다.

 

"나는 일본인 거주지역에 가게를 얻었는데, 그곳에는 한국 정부의 관리들과 다른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다. 나는 '기독교서적판매소'라고 쓴 내 가게 간판을 많은 사람들이 신기하게 쳐다보는 것을 알았다. 일본 영사가 나를 방문하여 그 간판을 당분간 철거해 줄 것을 정중히 요구하면서 그러나 판매는 전처럼 계속해도 좋다고 했다. 한국 정부가 일본 영사에게 그런 요구를 했던 것이다. 내가 기꺼이 그 요구에 응했으나, 내 사업은 전처럼 번창하고 있다. 한문과 일본어·한국어로 번역된 성경이 매일 다량 판매되는 것으로 보아 서울에는 벌써 상당량의 성경과 소책자가 퍼져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일본인 권서의 성경판매소에 관한 언급은 1887년 8월말에도 보이는데 내용은 위의 인용과 비슷하다. 1886년 12월 현재 일본인이 경영하는 성경판매소가 서울에 설립되었다는 것은 아펜젤러 자료를 통해 확인되는 것으로 다른 자료에는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위의 글에서 확인되는 대로 1886년말에 다량의 성경이 서울에 배포되어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은 과장이라고 할 수 없다. 이미 중국을 통해 한문성경이 수입되었고 만주와 일본을 통해서는 한국어 성경과 일본어 성경이 들어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3. 한국인에 대한 전도활동

 

아펜젤러가 배재학당의 개설을 준비하면서 일본인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있을 무렵, 한국인에게도 복음선교를 위한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세운 학교의 출석인원이 3명밖에 되지 않던 1886년 6월 중순까지도 아펜젤러는 "종교를 가르칠 생각은 아직 하지 못하고 매일 한 시간씩 영어만 가르쳤던" 것이다. 선교사들은 한국 정부가 선교의 자유를 허락하지 않았다고 보고 불안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불안은 그의 일기 여러 곳에서 산견(散見)된다. 이런 불안한 상황에서는 한국인들에 대한 선교를 적극화할 수 없었다. 그가 재한서양인 신앙공동체(교회)를 인도하면서 재한 일본인의 성경공부반을 이끄는 데에 남달리 노력한 것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한국 사회의 경색된 분위기로 알렌(H. N. Allen)이나 미국 공사관은 아직 선교의 때가 이르지 않았다고 계속 만류하였고, 그런 상황에서는 재한 외국인에 대한 선교만이 그 젊은 선교사들의 숨통을 틔워 주었다.


그러다가 1887년에 들어서서 한국인에 대한 선교를 적극화한다. 물론 그 결과로 한국 감리교회의 효시인 정동교회도 이 해에 탄생하게 된다. 이 해에 한국인에 대한 선교를 적극화한 것과 관련, 우리는 몇가지를 우선 유념할 수 있다. 우선 한국 사회가 기독교 선교사를 호의적으로 맞아들인다는 증거들이 보인다. 1월 11일 고종의 왕비가 엘러즈(Ellers) 양을 통해 외국인을 초청, 궁안의 호수에서 스케이트를 타도록 하고 고종 내외는 정자에 앉아 구경하며 정중한 식사까지 제공하였다.

 

아펜젤러는 이 초청 기록과 함께 "학교 일에 순조로운 한 주였다"고 썼다. 초청된 대부분이 기독교 선교사들임을 감안할 때, 이들이 내한한 후에 일관되게 취했던 의료와 교육 선교의 효과가 1887년에 들어서서 이렇게 왕실의 호의를 끌어내고 한국 사회의 기독교에 대한 편견을 약화시키고 있다는 점을 엿볼 수 있다. 또 1887년에 효력을 발휘하기 시작한 한불(韓佛)조약의 영향으로 선교활동에 어느 정도의 여유가 나타나고 있음도 과소평가할 수 없다.


이같은 변화의 조짐이 나타나는 것과 때를 같이하여 아펜젤러 자신은 1887년에 한국인 선교를 적극화하게 되는 계기를 자신의 업무와 관련된 곳에서 두 가지로 찾고 있다. 첫째, 그는 1887년 2월 21일에 왕으로부터 '배재학당'이란 이름을 하사받음으로 자신이 이제는 "정부의 인정을 받아 한국인 앞에 떳떳이 설 자리를 마련"하였다고 이해하였다. 이것은 그가 선교사로서 행하고 있는 선교학교에 대한 정부의 공식적인 인정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따라서 그에게는 복음선교의 공간을 확보하는 데에 좋은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국왕의 허락이 있은 지 20여 일이 지난 후 아펜젤러는 김주사를 시켜 '기독교를 가르칠 집을 구입하는 계획'을 세웠는데, 이것은 단순히 우연의 일치라고만 볼 수 없다.


둘째, 1887년 9월에 도착한 워렌 감독(Bishop Warren)의 내한이다. 워렌 감독은 배재학당 안에 건축하고 있는 건물을 '미국이 한국에 주는 선의와 형제애의 선물'이라고 했다. 아펜젤러는 1887년 9월 14일 한국의 고관들도 참석한 가운데 거행된 배재학당 대학부의 건물 개관식을 두고, 이는 "한국에서 최초로 종교의식 행사를 공개적으로 개최"한 것으로 이해하였다. 이것은 곧 한국 정부와 사회에 이제는 기독교적인 종교행사를 더 이상 감추지 않겠다는 그의 의지를 표명하는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거기에다 그는 워렌 감독에 대한 인상을 말하면서, "어떤 이들의 해석과는 달리 그는 기독교 활동에 대해서 한국 정부가 침묵을 지키는 것은 금지를 의미한다고 생각지 않는다.

 

그는 활동을 밀고 나가며 자꾸 일을 만들라고 우리에게 지시했다"고 썼다. 이것은 그와 감리교 선교사들이 워렌 감독의 이 말에 고무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선교사들은 이제 선교활동을 '밀어붙이라'는 본국 감독의 약속과 격려를 동시에 받은 셈이 된다. 워렌 감독의 이같은 격려가 있은 지 꼭 20일이 되는 10월 9일 주일날 오후, 아펜젤러는 네 사람의 한국인과 함께 '벧엘'에서 한국인 예배를 시작하였다. 이것이 어찌 우연의 일치라고만 볼 수 있겠는가. 물론 그 전 주에 만주에서 서울에 들린 로스(J. Ross ; 羅約翰)의 방문도 그에게는 큰 힘이 되었겠고, 그 전 주 14명의 한국인들과 더불어 장로교의 언더우드가 새 교회를 시작한 것도 큰 자극이 되었을 것이다.


이에 앞서 아펜젤러는 언더우드와 마찬가지로 비공개적인 장소에서 선교의 대상인 한국인을 접촉하고 있었다. 언더우드가 노 도사(춘경)에게 세례를 베풀 때에 그가 보좌한 것도 그 가운데 하나다. 그는 본국 선교부에 보낸 편지에서 우리가 흔히 한국 최초의 개신교 수세자(受洗者)로 이해하고 있는 노 도사에 대한 사실을 다음과 같이 써 놓았다.

 

"어떤 한국인 한 사람이 성경과 그 가르침에 대해 알고자 장로교 선교부에 왔습니다. 한국어로 번역된 복음서 몇 권(미국성교서회에 의해 요코하마에서 발간되었음)이 그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는 예수에 관한 간단한 이야기를 대단히 흥미롭게 기쁨으로 읽었습니다.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등과 같은 구절에 깊이 감동하여 '이것은 선하다'라고 말하면서 또한 감리교도에 부응되게 '여호와를 찬양하라'고 했습니다. 그는 끝까지 성경을 읽을 때까지 다른 일은 하지 않았으며, 지금(혹은 지난번 내가 들었을 때)은 한문 주석을 참고하여 복음서를 읽고 있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성경공부를 하고 싶어하는 친구들이 있지만, 기독교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 드러날까 봐서 두려워한다고 했습니다."

 

노 도사에 대한 아펜젤러의 증언은, 알렌이나 언더우드에 의해 증언된 바와 비슷하다. 그는 새 교리를 듣고 알렌 박사로부터 복음서 한 권을 몰래 가져다가 열심히 읽고, 더 배우려고 언더우드를 찾아갔으며, 주일날에는 외국인들의 기도모임에 참석했는데, 이 즈음에 와서 자원하여 세례 받기를 청원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펜젤러는 노 도사의 수세(受洗)가〈1886년 7월 18일〉에 헤론 박사 댁에서 언더우드 목사에 의해 집례되었음을 확언한다.
 
"지난 일요일, 7월 18일 오후 언더우드 형제가 서울에서는 처음으로 개신교 선교사에 의한 세례를 노씨에게 베풀었다. 나는 세례식을 도와주는 기쁨을 누렸다. 이 사람은 새로운 교리를 듣고는 알렌 박사로부터 복음서 한 권을 몰래 가져다가 조심하면서 열심히 읽고 더 많은 교훈을 받기 위해서 언더우드를 찾아갔으며, 또 일요일에는 우리의 기도모임에 참석했는데, 이번에 스스로 자원해서 세례를 받고 크리스천이 되기를 청원한 것이다. 세례식은 엄숙한 관심으로 가득 찼다. 그는 세례를 받음으로써 한국인의 분노 가운데 자신을 내어놓는 커다란 위험을 감행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를 불러 새 생명을 주신 주께서 그를 보호해 주시기를 기도했다.

 

아펜젤러는 초기에는 미국인 어린이와 일본인 등 재한 외국인들에게 세례를 베푸는 한편 한국인 노 도사에게 세례 베푸는 것을 도우면서, 전도활동이 금지되어 있는 한국인에게 차츰 용기를 갖고 전도의 기회를 모색하고 확대해 갔다. 복음전도는 그가 설립·경영하고 있는 학교를 이용하는 것이 용이하고 안전하였을 것이다.


그러던 차에,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국왕으로부터 배재학당(培材學堂)이라는 교명이 하사된(1887년 2월 21일) 것은 아펜젤러에게 커다란 용기를 주었다. 이것은 한국 정부가 학교를 승인하였다는 것이며 지금까지 갖지 못했던 한국인들 앞에서의 설 자리를 얻은 셈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힘입어 그는 복음전도 활동에도 박차를 가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한용경이라는 학생이 복음의 진리를 찾도록 인도했다.

 

한용경은 1886년 가을에 중국어 성경을 보고는 기독교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1887년 2월에 들어서서 몇 주간 일요일 저녁에 어둠이 깃든 후 빛을 찾아서 아펜젤러에게 갔던 것이다. "나는 그와 다른 사람들에게 하루 속히 빛이 오기를 기도했다." 그는 1885년 4월 5일 부활주일 날 제물포에 도착했을 때부터 한결같이 한국인들에게 빛이 임하기를 기원했다. 그것이 그의 간절한 소원이었다.


그의 소원은 그가 가르치는 학생을 통해 처음으로 나타났다. 1887년 7월 24일, 그는 그의 제자인 박중상이라는 학생에게 세례를 베풀었던 것이다. 그는 일본에 유학하는 동안 기독교에 입교한 듯하며 귀국해서 일본 공사관의 하야카와와 교제하다가 세례 권고를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아펜젤러는 그의 일기에서 이렇게 썼다.

 

"오늘 나는 우리 집에서 한국 최초의 감리교 신자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그의 이름은 '박즁상'인데, 우리 학교 학생으로 진지하고 총명한 젊은이다. 그는 일본에 갔다 왔으며, 그곳에서 기독교에 대해 처음으로 들었다. 한국에 돌아온 이후로 하야카와 형제와 교제를 나누고 있었는데 그로부터 세례 권고를 받은 것이다. 이것은 이곳에서 우리 일의 시작이다. 나는 그를 온전히 여호와의 손에 맡겼다. 왜냐하면 그곳에서만 오직 그가 안전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 교회에 나와 불어나게 하옵소서. 그는 약속의 사람이다.

 

여기서 말하는 '최초의 감리교 신자'란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라는 말일 것이다. 이 뜻은 대단히 중요하다. 그의 판단에 의하면 1887년 7월 24일에 와서 한국에서는 한국인으로서 최초의 감리교인이 탄생하였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 말은 반대로 그 이전에는 한국인 감리교인이 없었다는 말도 될 것이다. 한국인 감리교인이 없는 상황에서 한국인이 세운 '한국 감리교회'의 존재는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아펜젤러가 위의 기록에 보이는 '우리 교회'(our Church)라는 말에 유의해 본다. 그는 '한국 최초의 감리교 신자'에게 세례를 베풂으로 그 신자가 한 멤버가 되어 태어날 한국의 '우리 교회'를 상정한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믿는 이들의 공동체인 '교회'는 한 사람의 세례교인만으로는 부족하였다. 한국 교회의 형성을 위해서는 공동체를 이룰 신자들이 더 필요하였고 그것은 시간을 요하는 문제이기도 했다.


이 즈음에 그는 성경 번역에 종사하면서 어학선생을 고용하고 있었는데, 그를 권서 겸 전도인으로 세웠다. 이름이 Sye(서?)씨인 그는, 6년 전에 만주 우장(牛莊)에서 매킨타이어(John Macintyre : 馬勤泰) 목사에게서 세례를 받았다는 것이다. 아펜젤러는, Sye씨의 노력이 풍성한 결실을 얻을 수 있도록 축복해달라고 그의 일기에 써 놓았다.


이 무렵 한국 정부의 기독교에 대한 태도는, 선교사들의 의료·교육 부문의 우호적인 활동과 영향력으로 점차 개선되어 갔다. 이 점은 의료선교 부문의 여러 보고서에서 산견(散見)된다. 여기에다 1887년 효력이 발생되는 한불조약으로 한국 정부는 기독교에 대한 금제(禁制)를 약화 내지는 전면 수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1887년 3월경, 아펜젤러는 김 주사(Chusah)를 통해 한국인들에게 기독교를 가르칠 집을 구하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 장소는 학교에서 너무 가까우면 학생들에게 발견될 우려가 있기 때문에 좀 떨어진 곳을 물색하였다. 이 무렵 한 사람의 학생이 다시 기독교를 배우러 왔기 때문에 한국인 구도자(seekers)는 모두 세 사람이 되었다. 그는 한국인에게 다가갈 '합법적인 수단'을 강구하고 있었지만, 아직은 신중하게 대처하였다.

 

1887년 9월에 시내 남쪽에 조그마한 집 한 채를 사서 수리하기 시작했다. 그 안에서 한국인이 모여 예배드릴 수 있도록 꾸몄다. 이 무렵에 워렌 감독이 한국에 와서 아펜젤러 등에게 선교를 독려하고 있었다. 이때 교회당을 마련한 것을 보면 아펜젤러는 워렌 감독의 독려에 힘입어 한국인을 위한 전도활동과 교회 설립을 구체화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1887년 10월 2일 주일날 저녁, 아펜젤러는 그의 거실에서 배재학교 학생인 한용경에게 한국인으로서는 두번째로 세례를 베풀었다. 한용경은 약 8개월여의 수련기간을 가진 후에 세례를 받았던 셈이다. 주목되는 것은, "나는 언문으로 번역된 세례 예식서를 가졌으며, 한국말로 그에게 세례를 베풀었다"는 아펜젤러의 증언이다.

 

아펜젤러는 이 해 3월에 이미 한국어로 된 교리문답서를 처음으로 반포해 갖고 있었다고 증언한다. 그러니까 그는 '한글'로 번역된 세례 예식서에 의해 '한국어'로 세례를 베풀었던 것이다. 이것은 한국 교회사상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10월 2일 주일이 지난 그 주간에는 만주의 봉천에 있는 로스 목사가 두 사람의 신자를 데리고 서울을 방문했다.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은 학생이며, 또 한 사람은 로스 목사가 우수한 한국인이라고 추천해서 아펜젤러는 그를 두번째 권서로 채용했는데, 그는 고향이 의주인 장씨였다.

 

이 날 예배에는 2명의 권서와 강씨, 그리고 구도자요 진리를 믿고 있는 최씨의 아내 등 4명의 신자가 있었다. 이제 아펜젤러는 적어도 6명 이상의 신자와 함께 있었다. 예배에 참석한 4명과 세례를 받은 박중상과 한용경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 신자들과 함께 아펜젤러는 10월 9일 주일에는, 전에 성경사업(Bible work)을 위해 매입한 바 있는 '벧엘'(Bethel) 그 집에서 오후 예배를 시작했다.

 

아펜젤러가 그의 일기에서 '감리교 선교부에 의해 열린 최초의 종교집회'라고 쓴 이 모임이야말로 감리교 최초의 한국인 공중예배였다. 이 이전에는 한국인들은 가끔 50여 명까지 모이는 외국인들의 연합교회 예배에 같이 참석, 기독교에 대한 큰 관심을 나타내고 있었으나, 한국인만의 독자적인 모임은 아직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펜젤러에 의해 인도된 한국인들의 이 감리교 최초의 공중예배는 이렇게 묘사되어 있다.

 

"우리는 사방 8자 되는 방에 모여서 한국식으로 앉았다. 내가 영어로 기도하고 시작하였으며, 우리는 마가복음 1장부터 읽었다. 그 다음 장 형제가 마치는 기도를 인도했다. 모임은 우리들에게 깊은 관심으로 가득찬 것이었으며, 나는 하나님께 이 모임이 유용하게 사용되는 중심지가 되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이 날의 모임은, 일부 순서에서 외국어로 진행되었지만, 외국인 선교사와 한국인 신자들이 함께 모여 진행되었고 한국 최초의 감리교회의 예배였다. 이 예배모임은 "정동제일감리교회의 첫 예배인 동시에 한국 감리교회의 첫 예배가 되는 셈"이었고, 이를 계기로 정동제일교회는 10월 9일을 창립일로 잡고 있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한국인을 중심으로 첫 예배를 드린 '벧엘' 예배당이 지금의 정동제일교회 자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벧엘'의 위치와 관련하여, 1897년 12월 26일 새 예배당 봉헌식 때 아펜젤러가 읽은 다음 글을 주목한다.

 

"교회는 이리저리 옮겨졌다. 10년 전, 지금 스크랜튼 대부인의 소유로 되어 있는 달성 주택들의 뒷문에서 돌 하나 던질 만한 거리에 있는, 벧엘에서 예배를 드렸다. 1888년 나의 지방여행 중에 내려진 포교 금지령은 모임을 중지시켰고 벧엘은 처분되었으며 지금은 한국 사람들이 들어가 있다."

 

위의 글에서 스크랜튼 대부인의 집이 있던 달성은 지금의 남대문 상동 근처이며, 거기서 돌 던질 만한 거리는 "아무리 넓게 보아도 남창동-북창동-소공동 범주를 넘지 못한" 곳으로 지적된다. 벧엘에서 예배를 시작한 지 몇 주일 후에는 그 이웃 집을 사서 8×16자 되는 방에서 모임을 갖게 되었는데, 1888년 5월 왕명으로 중단할 때까지 주일마다 이곳에서 예배를 드렸다.


벧엘'에서 드린 첫 예배에 이어 아펜젤러는 10월 16일 주일에 29세의 최씨 부인에게 세례를 주었다. 그녀는 아펜젤러의 질문에 분명하게 대답하였다. 아펜젤러는 그 날의 일을 두고,

 

"그녀는 거의 틀림없이 이 나라에서 개신교 선교사에 의해 세례받은 최초의 여성이다. 나는 우리 감리교가 안방(An pang) 안으로 들어간 것이 무척 기쁘다. 말씀을 받은 다른 여성들도 있다. 이 첫 열매들에 하나님께서 축복하시기를 빈다."

 

고 감격해 하였다. 그 일 주일 후인 10월 23일에는, 뒤에서 언급될 바와 같이, '감리교의 요람'인 벧엘교회에서 한국에서 감리교 최초의 성찬식을 가졌다. 이 때 회중은 '우리의 기도문'(our liturgy)을 사용했으며 모두 경건하고 진지한 분위기를 느꼈다. 이제 '벧엘'에서 한국인 예배를 시작한 아펜젤러는 거기서 한국인 형제들과 더불어 교회 공동체가 누려야 할 성례 - 세례식과 성찬식 - 를 거행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조용한 방법으로 감리교는 은자의 나라에서 그 공중사업을 시작한 것이다." 그는 성찬식을 거행한 감격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이렇게 생명의 떡을 이 백성에게 떼어 주다니, 오 얼마나 큰 은혜인가! 감사함으로 우리의 마음이 그 떡을 먹고 살아가게 하옵소서."

 

아펜젤러의 그 염원과 감사는 오늘날 한국 교회가 본받아야 할 중요한 신앙고백이다.

 

4. 전도여행과 선교지역 분할 협의

 

서울을 중심으로 재한 외국인과 한국인에게 전도하고 세례를 베풀던 아펜젤러는 교금(敎禁)이 다소 풀려감을 의식하였던지 1887년 4월 13일부터 5월 7일까지 제1차로 우리나라 북쪽 지방의 전도여행에 나섰다. 이 여행에는 뒷날 모오스(James R. Morse)와 함께 한국의 광산사업에 투자하게 되는 헌트(Leigh S. J. Hunt)와 일행 8명이 지방관청의 객사에서 유숙할 수 있도록 외부(外部)에서 발행한 편지[護照]를 갖고 출발하였다.

 

그들은 4월 13일에 서울을 출발, 고양·파주·임진·송도·금천·통천·평산·서흥·봉상·황주 등을 거쳐 23일에는 평양에 도착하였다. 그들은 평안감사 남정철(南廷哲)의 영접을 받으며 평양의 풍물을 견문하였다. 그는 여행하는 동안 그가 견문한 당시의 풍물과 사정을 잘 기록해 두었다. 그 가운데 아펜젤러는 당시 7만 5천이 살고 있는 평양을 두루 살피면서, 복음의 전도자답게, 한국인의 도덕적 상태에 대한 절망과 이들을 구원하기 위한 결심을 동시에 갖게 된다.

 

"인간적인 관점에서 볼 때 사람들의 도덕 상태는 절망적인 듯하다. 그러나 나는 인간을 구원하시고 인간의 품위를 높여주는 하나님의 은혜를 믿는다. 그들의 심령에 쏟아 부으신 그리스도의 피가 아니고서는 아무 것도 그들을 죄에서 구원해 낼 수 없다. 그들은 그들의 세속적인 상황에 눈뜨고 있지만, 동시에 그들의 눈이 영적인 필요에 눈뜨게 되기를 바란다. 주님, 그날을 속히 허락하소서. 이곳에 당신의 제자들을 두고, 그들과 만나고, 가르쳐 달라고 요청받고, 그들이 다시 친구들을 불러오고 하는, 이 모든 것은 즐거운 일입니다. 지금은 씨뿌릴 시기, 좋은 씨가 싹이 나고 뒷날 풍성한 추수를 할 수 있게 하소서."

 

그 뒤 아펜젤러는 1888년 봄, 아마도 두번째인 듯한 북부지방 전도여행을 장로교의 언더우드와 같이 약 2주일간 감행하였다. 그들은 의약품과 책자와 소책자들을 팔면서 가는 곳마다 따뜻한 영접을 받았다. 사람들은 의약품을 사려고 안달이었고, 기독교에 관해 묻는 사람들에게는 책자가 주어졌다. 그러나 미처 예상하지 못한 문제가 일어났다. 한국 정부의 반대에 부딪히게 되자 서울의 미국 공사는 여행 중에 있는 그들을 소환했고 그들은 돌아오지 않을 수 없었다. 아펜젤러는 미국 공사로부터 받은 편지의 내용을 이렇게 설명했다. 

 

"이런 식으로 2주일 가량 전도여행을 했을 때 서울 주재 미국 공사(딘스모어 Hugh A. Dinsmore - 역자)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그는 우리가 서울을 떠난 후에 '대군주 전하의 명령이라 하여 한국 외부로부터 公翰을 받았는데 그 내용은 국내에 거주하는 미국인 중에 여러 가지 방법으로 그리스도교의 교리를 전파하고 있음을 한국 정부에서 알고 있다는 것, 이 사실을 정부 당국에서는 부당하게 여긴다는 것, 조약상 공인되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이러한 행동의 중지를 요구한다는 것 등이다. 여기에 대해 협조해달라는 요청을 받았으므로 미국 공사로서 나는 당신들이 한국인들에게 그리스도교를 전파하고 종교의식과 규례를 집행하는 것을 중지해 줄 것을 요청하는 바이다'라고 말했다."

 

기독교의 포교문제에 대해서는 양국간의 조약에서는 '침묵'하고 있었으나, 선교사들은 한국 정부의 묵인하에 선교활동을 지속하고 있었다. 그러나 여행 중에 이같은 한국 정부의 반대에 직면하게 되자 두 사람은 전도여행을 계속해야 할 지 그 여부를 결정하지 못하고 우선서울로 돌아왔던 것이다. 이것은 오히려 한국 정부에 대해 좋은 인상을 주었다. 그리하여 "우리의 즉각적인 순종이 정부에 매우 좋은 영향을 주었다는 말을 한 고관으로부터 들었다"고 그는 술회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그 뒤의 개신교의 선교활동을 용이하게 만든 또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1888년 5월 이후 한국 정부의 금교령(禁敎令)과 이 해 여름에 일어난 '영아소동'으로 인하여 선교사들은 지방 전도활동을 삼가하였다. 그러다가 그 해 8월에는 존스(G. H. Jones) 목사와 함께 15일간 원주·대구·부산으로 답사여행을 했고, 10월에는 의주를 방문했다. 의주 방문과 관련, 아펜젤러는 이렇게 보고했다.

 

"이 도시는 한국에서 중국으로 들어가는 관문이다. 한국인들은 수세기 동안 이곳을 통해서 중국에 들어갔다. 중국에서는 기독교 선교사들과 접촉할 수 있었다. 그 때 뿌려진 씨는 사라지지 않았다. 나는 9년 전에 세례받은 한 사람을 만났다. (내가 만난) 다른 사람들은 求道者들로 먼저 중국에서 진리를 배웠는데, 세례받기를 갈망하고 있었다. 우리는 이 도시에 1명의 正교인과 14명의 準교인으로 구성된 모임(society)을 갖고 있다. 평안도의 수도(평양)에는 몇 명의 구도자와 5명으로 된 모임이 있다. 평양은 한국의 소돔으로, 이 도시를 구원하기 위해서는 보통이 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아펜젤러는 1888년 한 해 동안 전도사업을 위해 1,830마일이나 지방 여행을 강행했는데, 그 가운데 1,400마일 이상은 승마 여행이었다. 1888년 10월과 11월에는 해주를 방문하였고, 1889년 2월에는 공주(公州)를 그리고 8월에는 대구를 거쳐 부산을 방문했다. 8개 도 가운데 6개 도를 방문한 셈이었다. 시골에 있는 사람들은 이방인을 친절하게 맞아 주었고, 최소한 괴롭히지는 않았다.


여기서 우리는 아펜젤러의 선교여행이 장로회의 언더우드와 동행했던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바로 1888년 봄, 두 선교사의 선교여행을 전후하여 두 교단 사이에는 새로운 협력이 모색되었기 때문이다. 연합예배가 이루어지고 선교지역 분할에 대한 협의가 진전되고 있었다.


우선 1888년 2월의 '한국인 형제들'의 제의에 의해 이루어진 연합적인 집회를 두고 아펜젤러는 복음전파에 새로운 서광이 비치는 것으로 판단하고 다음과 같이 썼다.

 

"음력 설날(Korean New Year)이 지난 후, 한국인 형제들이 일 주일의 '기도주간'을 가지자고 제의했다. 그래서 장로교와 감리교 두 선교부는 연합예배를 드렸다. 나는 2월 12일에 '신실한 말씀'이란 제목으로 설교했다. 모임들에 열심히 참석하고 관심도 대단하다. 비록 이곳에 공개된 종교 자유가 없지만, 한국인들은 마치 종교의 자유가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
 
장로교회와의 접촉은 여기서 끝난 것은 아니다. 이 집회 후에 감리교와 장로교는 서로 만나 한국의 선교지역 분할을 논의하게 되었다. 1888년 3월 9일 저녁에 두 교단의 대표들이 서로 만나 이 문제를 논의하는 한편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2주일 후에 보고서를 제출하기로 하였다. 이와 관련, 아펜젤러 자료에는 1888년 3월 날짜 미상의 〈한국의 장로교와 감리교〉라는 제목의 연설문이 있는데, 이 자료가 이 때 선교지역 분할을 논의할 때 제출한 보고서가 아닌가 생각된다.

 

아펜젤러는 한국에서 두 교파가 선교하기 위해서는 서로의 상이성을 인정하면서 공통된 바탕으로 일할 것과 서로 나란히 일할 것, 그리고 서로 협조하고 서로를 자극할 것 등을 기초로 하여 선교지역을 나누어 독특한 교리들과 통치 형태를 가질 수 있도록 운영할 것을 주장하였다.

 

선교지역 분할에 대한 그의 구체적인 제안은, 일부 모호한 부분이 있지만, 함경도와 평안도를 나누는 문제, 송도·평양·의주 등 대도시는 두 개의 선교회를 둘 수 있도록 하되 의료사업과 인쇄 등은 공동으로 하고 학교사업의 경우 송도는 두 선교회가 각각의 학교를 세우지 말 것 등을 제안했는가 하면, 이와는 달리 '인구 5만(5천?) 이하의 도시에는 두 선교회가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경기도는 공동의 선교구역으로 하면서 함경도·강원도 북부·충청도·전라도를 한 선교회가 맡고 다른 선교회는 황해도·평안도·강원도 남부·경상도를 맡도록 해야 한다는 안도 제안하고 있다.

 

그는 이런 제안을 하면서, "내가 믿기로는 이러한 분할이 현재로서는 최상이라고 믿습니다. 분할이 도 경계를 따라 되어 있으므로 간단하며, 각 선교회로 하여금 여러 계층의 사람들과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줍니다"고 하였다.


종래 한국에서 선교지역 분할에 관한 논의가 언제 시작되었는가 하는 문제는 명쾌하게 밝혀진 바는 없다. 미 북감리회와 미 북장로회 사이에 이루어진 선교지역 분할에 관한 협정이 1892년에 이루어진 것을 근거로 그 전 어느 시기에 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밖에 없었다. 장로교회의 경우, 여러 교단들의 입래(入來)로 그 중복과 경쟁을 피하기 위하여 공의회를 결성하였는데 거기에서 선교지역 분할 문제를 논의하지 않았을까를 추정할 수 있다. 그런 추정에 의하더라도 선교지역 분할 논의의 출발 시점은 미 북장로회와 호주 장로회 사이의 연합공의회 설립연도인 1889년을 앞당기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위의 아펜젤러의 자료에 의하면, 선교지역 분할에 관한 논의는 1888년 3월에 당시 한국에 들어와 있던 두 선교부(미 북감리회와 미 북장로회) 사이에서 시작되었는데,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두 선교회를 대표하여 이 문제를 논의하였다. 1892년 감·장 두 선교부 사이에 합의된 내용의 상당부분은 1888년 3월에 아펜젤러가 제안한 내용을 발전시킨 것으로 보인다. 아펜젤러는 선교 초기에 선교회간의 협력과 일치를 이룩할 수 있는 장치를 이렇게 미리 마련하였던 것이다.

 

5. 성례의 시행 - 신앙공동체

 

아펜젤러가 1885년부터 재한 외국인에게 세례를 베풀었다는 것은 앞에서 이미 언급하였는데, 같은 해에 그는 재한 외국인에게 성찬도 베풀었다. 1886년 7월 18일에 언더우드가 노씨에게 세례를 베푸는 것을 도운 아펜젤러는 1887년 7월 24일에는 자신이 배재학교 학생 박중상에게 세례를 베풀었는데, 그 해에 그는 한국인을 위한 성찬식도 집례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지방전도를 위하여 1887년 봄부터는 전도여행에 나섰다.


아펜젤러에게 보이는 일련의 선교활동의 한 유형은 먼저 세례를 베풀고 성찬을 같이 하는, '성례'를 중요시하는 점이었다. 성례는 '믿는 자들의 모임'인 교회가 교회됨을 확인하는 예식이기도 하다. 그는 먼저 믿는 자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세례받은 이들이 모여 주의 살과 피를 나누는 성찬식을 거행함으로써 교회설립을 구체화하는 과정을 취했다고 할 것이다.

 

 

그가 재한 외국인이나 한국인에게 세례를 준 사실에 대하여는 앞에서 이미 언급하였다. 여기서는 성찬식을 거행한 것을 중심으로 그가 교회설립을 구체화해 가는 과정을 살펴보기로 하자. 다음 기록은 그가 1885년 10월에 재한 외국인을 위한 성찬식을 시작하였음을 보여준다.

 

"지난 주 일요일, 이달 11일에 우리는 오후에 늘 가지는 기도와 간증 모임에서 성찬식을 거행했습니다. 내가 알기로는 이것이 개신교에 의해 거행된 한국 최초의 성찬식이었습니다. 미국성서공회에 소속되어 있는 요코하마의 루미스(Henry Loomis) 목사가 참석해서 이 모임을 인도했는데, '오직 예수'라는 제목으로 적절한 말씀이 있었습니다. 장로교회의 언더우드 목사와 제가 떡과 포도주를 나눠 주었는데, 참석한 사람은 11명이었습니다. 제물포에 입항해 있는 미국 선박 마리온(Marion) 호의 고급선원 두 사람이 함께 이 예식에 참석했습니다."

 

위의 기록이 중요한 것은 지금까지 한국교회사에서 한반도 안에서 최초의 성찬식이 언제 거행되었는지 명확하게 알려진 바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펜젤러의 위의 편지는 이 점을 분명하게 밝혀준다. 비록 외국인 중심으로 이루어진 것이긴 하지만, 한국에서 성찬식이 처음 거행된 것은 1885년 10월 11일 주일 오후였으며, 집례자는 일본에서 이미 이수정으로 하여금 마가복음을 번역토록 했고 뒷날 한국의 성경 번역 및 그 발간, 배포에 크게 공헌한 미국성서공회 일본주재 총무격인 헨리 루미스 목사였다.


한국인 중심의 감리교 최초의 성찬식이 이루어진 것은 외국인 중심의 성찬식이 거행된 후 2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 그것은 무엇보다 한국인 수세자가 나와야 했기 때문이다. 1887년에 들어 그의 제자인 박중상(7월 24일)과 한용경(10월 2일)이 세례를 받았고, 10월 9일에는,  '벧엘'에서 한국인의 오후 예배를 시작하였다. 그리고 10월 16일 여성에게 한국 최초로 세례가 베풀어졌다는 것은 의미가 깊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나누는 한국인 신앙공동체(교회)를 온전하게 이루기 위해서는 남성뿐만 아니라 여성도 수세자로서 참여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자신에게 세례를 받은 한국인 남녀 3명과 만주에서 세례받은 이들이 함께 모이게 되었을 때에 한국인 중심으로 이루어진 최초의 성찬식이 1887년 10월 23일 '벧엘'의 같은 방에서 거행되었던 것이다. 이 성찬식에는 스크랜튼 의사도 참석했다. 아펜젤러는 이 장면을 다음과 같이 간단하게 적어 놓았다.

 

"일 주일 후 10월 23일 우리는 한국에서 감리교 최초의 성찬식을 가졌다. 이것은 감리교의 요람인 벧엘의 같은 방에서 있었다. 참석자는 형제들로서 최·장·강·한씨 등과 최씨의 아내였는데, 한 사람 박 형제는 불참했다."

 

결국 1887년에 이르러 세례식은 물론 성찬식도 행하여져,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나누는 공동체, 즉 교회가 성립된 셈이다. 세례받은 신자가 있고 예배와 성찬이 있으며, 믿는 이들이 모일 장소(예배당)가 있는, 말하자면 형식과 내용이 갖추어진 명실상부한 한국 감리교회는 1887년 10월에 이렇게 탄생했던 것이다.

 

한국인 중심의 예배가 시작되면서 외국인들 예배와는 구분되었다.  이에 앞서 이루어진 외국인 예배는 아펜젤러와 언더우드가 번갈아 인도와 설교를 맡았다. 1887년 4월 10일 부활주일에는 아펜젤러가 고린도전서 15장 35절 말씀을 중심으로 설교했는데, '주는 나의 목자'를 감동적으로 부른 성가대의 찬송 속에 진행된 이 날 예배에는 데니(Denny) 판사와 몇 주 전에 부임한 딘스모어(V. A. Dinsmore) 공사도 참석했다. 1887년 10월에도 아펜젤러는 언더우드를 대신해서 외국인들 앞에서 요셉의 일생에 대해 설교를 했는데, 요셉이 형제들을 만나는 대목을 이야기할 때에는 듣는 이들 중에서 눈물을 흘리는 이도 있었다.


1887년 10월 9일 오후 한국인 중심의 한국 감리교회의 시작되자 아펜젤러는 주일날 오전에는 차례에 따라 외국인들의 예배에 봉사하고 오후에는 한국인들의 예배를 인도하게 되었다. 그것은 1887년 12월 25일자 아펜젤러 일기에서 소개하고 있는 두 차례의 예배에서 확인되는 바, 그 가운데 "만원인 교회에 예식서에 따른 예배, 길모어(Gilmore)가 사회를 보다. 설교는 짧았으나 적절했다"고 기록한 것은 외국인들만의 집회를 의미하는 것이요, 이어서 "오후 2시에 나는 한국어로 최초의 설교를 했다"라고 표현한 부분은 한국인 예배모임을 가리킨 것이다. 이제 아펜젤러는 더러 한국어 설교를 '읽게' 되는 등의 더 많은 부담을 지게 되었다.


아펜젤러는 배재학당의 학생들이 50명이 되고 한국인들의 예배를 인도하게 되는 1887년말에 와서는 한국어로 가르치고 설교해야 한다는 강한 의욕을 여러 번 피력하였다. "나는 한국어를 습득하여 그들의 언어로 이 백성들을 가르칠 수 있기를 열망한다." "나는 내가 이 나라 언어에 더욱 유창하게 되어 그들에게 한국어로 말하고 설교하게 되기를 기도한다." 때문에 아펜젤러는 이 해 크리스마스 때에 자신이 한국어로 설교를 하게 된 것을 두고 "이것은 '위대한 연설'(big talk)이다"라고 멋적게 평가했다. 그랬던 만큼 설교 작성과 이 날의 순서에 대하여 비교적 자세한 기록을 남겼다.

 

"나는 설교문을 쓸 수 없지만, 내 생각을 권서 최씨에게 말해 주면 그는 그것을 적당한 한국말로 표현해 주었다. 쓰는 데에 아주 짧은 시간이 걸렸지만 나는 설교 일을 시작하게 되어 기뻤다. 본문은 마태복음 1장 21절, '이름을 예수라 하라' 등이었다.


물론 나는 설교를 읽고, 오로지 읽을 수밖에 없었지만, 그러나 어느 정도 설교의 정신을 전할 수 있었다. 전체 예배순서는 다음과 같다.

 

1. 김명옥의 세례
2. 찬송
3. 스크랜턴 박사의 기도(읽음)
4. 말씀봉독 - 마태복음 2장
5. 말씀봉독 - 누가복음 2장(스크랜튼 박사)
6. 설교
7. 주기도문
8. 찬송 -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
9. 축도

 

나는 이것이 한국에서 있은 감리교 최초의 설교라고 확신하며, 아마 개신교 선교사에 의한 최초의 공식 설교가 아닌가 한다. 그러나 후자에 관해서는 단정할 수 없는데, 나보다 한국말을 더 많이 알고 있는 언더우드가 교인들에게 설교를 읽지 않고 '말로' 했는지 모르겠다.


나는 내가 한국에서 2년 반이 채 안 되게 생활하면서 한국말로 모임을 가질 뿐만 아니라 그들의 언어로 설교하려고 애썼는지 거의 깨달을 수 없다. 그 설교는 형편 없었지만, 그러나 주의 이름으로 행해진 것이기에 주께서 자신의 영광을 위한 그 노력을 축복해 주시리라 믿는다. 나와 듣는 이들이 어느 정도 편안하게 듣고 설교할 수 있을 때 그 날은 행복한 날이 될 것이다."

 

아펜젤러가 벧엘에서 두번째로 설교를 '읽은' 것은 그 이듬해 1월 13일 주일날 열 명의 교인들 앞에서였는데, 첫번째 한국어 설교가 있은 지 거의 20일이 지나서였다. 그 설교는 아직 원고에 한정되어 있어서 '자유롭지' 못했다. 새해에 이르러서는, 비록 권서 최씨가 아펜젤러가 부르는 말을 정확히 한국어로 받아서 써 준 원고를 읽는 데불과하였지만, 자주 한국어 설교를 시도하였다.

 

그러나 아펜젤러는 "나는 읽는 것과 올바른 문장 형태를 만드는 것에 진척을 나타내고 있다. 내 생각에는 차차로 원고에서 눈을 떼고, 간단한 메모만으로 하다가 마침내는 원고 없이 설교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한국어 설교에 대해 희망과 낙관을 표시하고 있었다. 이것은 그가 하루 2차례에 걸쳐 5시간씩 한국어 교육을 계획하고 있었고, 언어 습득에 뛰어난 능력을 갖고 있었다는 점에서 그 가능성이 충분히 엿보이기도 하였다.

 

아펜젤러의 복음전도 사역은 한국인을 중심한 벧엘교회의 창립을 계기로 한층 활발해졌던 것으로 보인다. 1887년 11월에는 최씨와 장씨 두 사람에게 권서업무와 전도사역을 맡겨 서북지방으로 파송하여 두 사람의 세례지원자를 얻게 되었고, 12월 4일 주일에는 8×16자 되는 새로 구입한 집, '진정한 의미의 벧엘'에서 유치겸·윤동규 두 학생에게 세례를 베풀었는데 매우 인상적이었다. 12월 7일(수) 저녁에는 한용경의 집에서 세례받은 학생들이 모두 모여 '최초의 학생 기도회'를 가졌는데 매우 진지하였다. 이듬해(1888) 1월 13일 주일에는 스크랜튼 의사의 개인 교사인 박승면과 학생인 문세익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토요일(12일)에는 다섯 명의 여성이 세례를 신청했는데, 이를 통해 "주께서 한국인들 가운데 역사하심"을 확신하고 있었다.

 

'벧엘'교회는 그 이름답게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점차 발전하였다. 그리하여 1888년 3월 11일 주일에는 14명이 모여 예배를 드렸고, 비록 영어로 진행된 것이긴 하지만 이 무렵 주일학교가 아펜젤러의 집에서 30분씩 인도되고 있었다. 이 때 스크랜톤 대부인이 여성들을 위한 저녁예배를 시작했는데, 이는 최초의 부인(저녁)예배로서, 첫째날에 21명이 참석했다.

 

아펜젤러는 이를 두고, "이처럼 주께서 우리의 수고와 그의 영광스런 사역의 번창함에 함께 하신다"고 적었다. 이어서 3월 14일(수) 저녁에는 감·장 선교부에서 온 하객들이 참석한 가운데 아펜젤러는 제자 한용경과 과부 박씨를 부부로 맺어주는 결혼식을 주례하였다. 이것은 아펜젤러가 주례한 최초의 결혼식이자, 개신교로서는 '한국 최초의 교회 결혼식'이기도 했다.

 

6. 맺는 말 - 정동교회의 성립

 

이 글은 필자 나름대로의 '기독교회의 정의'에서부터 시작하였다. 기독교회는 그리스도 예수를 구주로 믿는 이들의 신앙공동체다. 그 공동체가 성립되었다는 것은 구성원이 생겨나고 그 공동체가 갖는 신앙적인 의식(행위)이 나타날 때에 확인된다. 그 의식은 예배 혹은 공동체적인 회집이나 세례·성찬 등으로 나타난다. 때문에 교회가 설립되었다는 것은 이러한 신앙적인 의식(행위)들이 그 공동체 내에서 공시적 혹은 교차적으로, 간헐적 혹은 지속적으로 나타나야 한다.


이 글에서 거론한 교회는 '한국의' 감리교회인 바, 그것은 한국인이 주체가 되어 이룩한 것을 의미한다. 한국이라는 땅에서 이뤄졌다 하더라도 외국인만으로 이루어졌거나 외국인을 주체로 하여 이뤄졌다면 그것은 '한국 교회'라고 할 수 없다. 한국 감리교회는 한국의 기독교(감리교)인이 주체가 되어 형성한 교회다. 이 전제 위에서 이 글이 시작된다.


한국 감리교회의 설립은 첫 선교사로 내한한 미 북감리회 아펜젤러 선교사의 초기 헌신적인 활동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초기 한국 감리교회의 성립과정 또한 그의 초기활동과 깊은 관련이 있다. 이 글은, 그의 초기 3년간(1885∼1888)의 활동을, 신앙공동체의 성립을 확증하는 요건이라 할 집단적 의식(행위)과 관련시켜 살펴보자는 것이다.


위에 언급한 아펜젤러의 초기활동을 그의 일기를 중심으로 다음 표와 같이 정리해 보았다.

위의 표를 통해 아펜젤러의 활동을 다음과 같이 몇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그가 내한한 후 1886년말까지 배재학당에서 교육사업을 위해 한국인을 접촉한 것 외에는 한국인에 대한 전도는 거의 하지 않았다. 이 해 말까지 종교적인 행위와 관련, 한국인과 접촉한 것으로는 1886년 7월 18일, 언더우드가 헤론의 집에서 헤론의 어린 딸 사라 앤과 함께 한국인 노춘경에게 세례를 베풀 때, 이 세례식을 도운 것이 거의 유일한 것이다. 이 기간에 아펜젤러는 재한 서양인들의 연합교회를 세워 주일예배를 인도하고 성례를 집행하였으며, 1886년초부터는 재한 일본인들의 성경공부를 인도하고 역시 세례를 베풀었다. 


둘째, 1887년 1월의 왕비의 궁실 초청과 이 해 2월 21일의 '배재학당'의 당명(堂名) 하사를 계기로 그는 한국인에 대한 선교에 본격적으로 나서게 된다. 앞에서 본 바와 같이, 그는 이 당명 하사를 한국 정부가 자신의 일을 인정하는 것으로, 그리고 "지금까지 우리가 가지지 못했던 한국인들 앞에서의 설 자리를 얻은 것"으로 판단했다. 그는 이보다 두 주 전부터 배재학당 학생 한용경을 지도하는 한편 3월에는 '김주사'를 시켜 '기독교가 가르쳐질 집'을 구입하는 계획을 세웠다. 이 무렵 한용경을 포함, 구도자는 3명이었다. 배재학당의 당명을 하사받은 후에 아펜젤러는 4∼5월에 평안도 지방에 대한 선교여행을 떠나며, 7월에는 박중상에게 세례를 주어 '한국 최초의 감리교 신자'를 탄생시켰다. 따라서 그의 말대로 '한국 최초의 감리교 신자'가 이 때 태어났다면, 그 전에 한국 감리교회가 성립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다.


셋째, 1887년 9월, 워렌 감독의 내한은 아펜젤러에게 한국 교회 설립을 결정적으로 추진하게 만들었다. 워렌 감독이 내한, 대학 건물을 개관하는 식을 거행하게 되자, '의심할 것도 없이' '한국 최초의 종교의식'이 '공개적으로 열린 셈'이었다고 주장하였다. 이것은 기회 포착에 민감한 그의 예리한 통찰력을 드러내는 것이다. 워렌 감독은 한국 정부의 기독교에 대한 침묵이 전도 금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고 해석하고, 그와 동시에 주한 선교사들에게 활동을 강화시키고(push the work) 일을 저지르도록(make opportunities) 격려하였다. 워렌 감독의 선동에 가까운 격려는 이 용감한 젊은이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었고, 이 젊은이는 이 말에 깊이 공감한 듯하다. 10월 2일, 거의 8개월간 구도자로서 성실하게 훈련받아 온 한용경에게 세례를 베푼 아펜젤러는 워렌 감독이 떠난 지 20여 일이 채 안 되어 1887년 10월 9일 미리 사 두었던 '벧엘'에서 오후 예배(한국인 예배)를 따로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벧엘' 신앙공동체, 곧 정동감리교회의 출발이다.  

    

넷째, 한국인을 위한 예배를 시작한 아펜젤러는 그 다음 주일에 최성균의 부인에게 세례를 베풀어 '최초의 여성 수세자'를 탄생시켰다. 그 한 주일 후 한국 감리교 최초의 성찬식이 베풀어졌다. 이로써 신앙공동체(교회)의 설립은 이제 의심없이 완결되었다. 아펜젤러의 1887년 10월은 한국 감리교회 설립을 완결시키는 데에 매우 분주하였다. 한국인들이 주체가 된 '한국 감리교회'는 1887년 10월에 이르러 이렇게 세례, 공중예배, 성찬 등이 갖춰진 교회로 발전했다.


1887년 2월 세 사람의 한국인 구도자로 시작된 아펜젤러의 한국 교회 설립의 장정(長征)은 7월 24일과 10월 2일에 각각 한 사람의 수세자를 낸 데 이어 10월 9일 '벧엘'에서의 한국인 예배를 거쳐, 10월 16일의 최초의 여성 수세자를 탄생시켰고, 10월 23일에는 성찬식을 거행, 그리스도 예수의 살과 피를 나눔으로 종적으로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이루고 횡적으로는 신자들간의 공동체적인 한 몸을 이루는 기적을 만들어 냈던 것이다.


벧엘교회에서 연원한 정동감리교회와 한국 감리교회는 1887년 10월에 탄생하였다. 이 점은 탄생 10주년을 맞아 아펜젤러가 쓴 약사(略史)에 의해 이미 확인된 바 있다. 그는 1897년 12월 26일 헌당식에서, "이 총회(chapter)는 1889년 12월 7일 계삭회(Quarterly Conference)를 구성함으로써 조직을 시작하였습니다. 이에 앞서 세례와 입교가 있었습니다"라고 낭독했고, 또 머리돌에는 "이 교회는 1889년 12월 7일 계삭회를 구성함으로 조직되었다. 설교와 기도회는 그 2년 전에 시작되었다"라는 글귀를 넣어 한국 감리교회와 정동교회의 탄생 시기를 명확하게 밝혀 놓았던 것이다.


이렇게 1887년 10월에 시작된 한국 최초의 감리교회에서는 그 뒤 세례식이 잇달아 베풀어졌고, 설교는 한국어로 '읽혀'졌다. 1888년부터는 당시 한국에 내한해 있던 감리교와 장로교 사이에서 연합예배와 선교지역 분할 협의가 진행되었고, 주일학교와 부인저녁예배가 시작되었다. 교회에서 결혼식도 거행되었다. 이것이 정동감리교회가 처음 출발했을 때의 모습이자 한국 감리교회의 성립 때의 활동이었다. 따라서 1887년 10월 이전에 '한국 감리교회'가 성립되었다고 보고 그 연대를 교회의 전통으로 고수하고 있다면, 그것은 재고되어야 할 것이다.

 

【추기】이 원고를 넘기고 난 후에 숭실대학교 박물관장 柳永烈 교수의 호의로, 姜邁 著,《貞洞敎會三十年史》(1915.7.13)를 열람할 수 있었는데, 필자의 論旨를 바꿀 만한 내용은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나 姜邁의 기록에는 오류가 더러 보이는데, 이 논문과 관련하여 두 가지만 지적한다.


 첫째, "1887년 12월 5일 보고에는 셰례를 밧은 교인이 네 사람인대 그 중 한 사람은 녀자"라 하였는데, 1887년 12월 5일 현재 수세자는 네 사람이 아니고 다섯 사람이다.(본문의 표 참조)


 둘째, "최병흔(헌?) 목사는 말삼하되 1887년 보고셔에 셰례밧은 사람 넷 중에 한 사람은 녀인인데 그는 1887년 4월 8일, 즉 부활주일에 셰례를 밧앗다"고 했는데, 그 여인의 수세 일자는 1887년 10월 16일이다.(본문의 표 참조)* 

 
이만열(숙명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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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사] 이수정의 성서 번역

 

 

 

 

이수정이가 기독교인이 되었다고 하는 소식을 듣고 크게 기버한 사람은 누구 보다도 일본에 주재하고 있는 미국성서공회 총무인 헨리 루미스(Henry Loomis)목사이었다. 기독교가 엄격히 금지되어 있는 나라 사 람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인이 용감히 신자가 되었다고 하는 사실은 외 국선교사들의 마음을 흥분시키기에 충분하였다.

 

루미스목사는 즉시 이수정을 방문하여 성서를 한글로 번역 해달라고부 탁하였다. 이수정은 간곡한 요청을 받아들여 성서 번역에 착수하게 되 었으며 세례받은지 겨우 두달만에 한문성서에 토를 달은 소위 [현토한 한신약성서]의 작성을 완료하였다. 그는 계속하여 마가복음부터의 성 서한글 번역을 시작하였으며, 현토한한신약성서는 1884년에 출판되었 고 마가복음도 같은 해에 요꼬하마에서 출판되었다.

 

성서를 번역하는 일에 종사하면서 이수정은 상당한 경제적 난관에 봉 착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러한 어려움을 미국인 선교사나 일본인 목 사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다. 가족들이 그 소식을 듣고 일본으로 건너갔 다. 동생은 형에게 일금 만량을 전달하면서 귀국하라고 권유하였다.

이수정은 그때 [나는 돈이 필요하지 않다. 또 돌아가지 않겠다. 나는 동포를 위하여 철도나 전신기나 기선보다 더 좋은 것을 발견하였으니 까]라는 말로써 성서번역의 중요성을 역설하면서 귀국을 거절하였다. 이수정은 일본을 다녀와 자신에게 개화사상을 일깨워 준 이동인에게 전도하여 불교로부터 기독교로 개종케 하였으며 성서번역 사업을 위한 협조자가 되게 하였다.

 

또한 김옥균이가 기독교의 한국 도입을 정부에 진언한 일에 있어서도 이수정이가 배후에서 크게 노력한 사실을 잊어 서는 안될 것이다. (The Missionary Review of the World, 1884,Vol, 1,p.336) 이수정이가 일본에 체류하면서 성서번역과 교회활동에 몰두하고 있는 기간에 국내에서는 1884년 12월에 갑신정변이 일어났다. 정변은 삼일 천하로 실패하였고 개혁인사들은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당시 일본 동 경에는 유학생들이 적지않게 있어 이들은 자연히 망명인사들과 접촉을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을 못마땅히 여긴 본국정부에서는 유학생 전원에게 소환령을 내렸다. 유학생 20명중 3명은 곧 귀환하였으나 나 머지 사람들은 귀국을 불응하였다. 정부에서는 유학생들을 설득하기 위하여 안종수와 박준우를 쇄환사로 하여 일본에 특파하였다. 이수정은 그때 다른 유학생 5명과 함께 1886 년 5월 28일 귀국하였다.

 

귀국할 당시 그가 기독교신앙을 유지하고 있었는지에 관하여는 반론 이 우세하고 있다.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의 파슨 (Ellen C.Parson) 은 자신의 저서 [Fifteen Years in the Korea Mission,P.7) 에서 이수정 은 귀국을 앞두고 부득이 신앙을 버렸다고 말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수정은 이미 기독교신자로서 여러해 동안 기독교활동을 한것 은 사실이었다. 그러한 사실을 알고있는 정부로서는 국법을 어긴 위험 인물로 간주할 수 밖에 없었고 또한 개화인사였음이 분명하였는 고로 구는 귀국하자마자 보수파에 의하여 체포되었고 촌단의 극형으로 생명 을 잃었다. 이수정은 일본에 체재하는 기간에 조국의 기독교 선교를 염원하여 열 렬히 활동하였다. 1884년 3월에 그리고 12월 31일에 [세계 선교 평논] (The Missionary Review of the World)에 또한 같은 해 9월에는 [외국 선교지] (The Foreign Missionary)에 미국교회에 선교사를 꼭 한국에 보내야 한다고 애끓는 글로 기고하였다.

 

언더우드와 아펜셀라의 두 선교사는 한국으로 오는 도중 일본에 들 렸을 때 이수정이가 번역한 마가복음을 손에 들고 2개월간 동경에 체 류하면서 이수정으로부터 한국어를 배웠다. (L.H.Underwood, Underw- ood of Korea,PP,37-38) 그러기에 이수정이야말로 [한국의 마게도니아사람]이라는 말로 불려져 아주 적합한 인물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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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사 / 언더우드의 한국선교 소명 

 

 

 

1884년 봄에 의사 헤론(John H.Heron)을 한국 선교사로 임명하여 일본 에서 때를 기다리게 하였고, 9월에는 중국에 파송되어 있던 알렌(Alle- n) 을 한국으로 옮겨 일하게한 미국 장로교 선교본부에서는 그동안의한 국 선교에 대한 신중정책을 전환하여 본격적인 선교사업으로 착수하게 되었다.

 

이러한 결정을 내리게된 가장 큰 이유는 한국에서의 정세가 호전된 점 도 있었겠지만, 직접적으로 언더우드(H.G,Under wood)목사와 같은 인물 이 선교사를 지원 한국행을 희망하여 나섰기 때문이었다. 그가 한국을 찾게된 동기와 사정을 회상한 내용을 살표보면 다음과 같다.

 

[일본에 주재중인 올트맨(Allert Oltmans)이 1883년 겨울에 선교 지원 자들을 모아놓고 은사의 나라 한국에 관하여 설명해 주었다. 그의 주장 은 그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교회가 기도하고 있고 또 1882년에는 한미 조약이 체결되어 선교사가 들어갈 수 있는 조건이 구비되었에도불 구하고 미국 교회가 무관심하여 1년동안을 허송세월 하였다는 내용이었 다.

 

그러면서 그는 한국으로 갈 사람을 찾고 있다고 열변을 토하였다. 나는 그때 인도에 갈 생각으로 의학공부를 했으며 한국에 갈 사람은따 로 있을 것이라고 쉽게 생각하였다. 교회 기관지들은 아직도 한국에 들 어가는 것은 시기상조라는 기사로 나와있었다. 바로 이때에 나에게 하 늘의 메시지가 들려왔다. [너는 왜 못가느냐(Why not go yourself?) 이 었다.

 

그러나 인도에 대한 선교 희망이 한국행을 막고있었고 또 실제로 한국의문은 닫혀있는것 같았다. 나는 두차례나 선교본부에 가서 한국행 을 간청하였지만 쓸데없는 말이라고 핀잔을 받았다. 이제 나에게는 본 국에 머물러 목회를 하거나 인도에 가는 길밖에 없는것 같았다. 나는이 렇게 머뭇거리는 상태에서 뉴욕의 어느 교회로부터 청빙을 받았다. 나는 이 청빙에 응하기로 하여 수락하는 편지를 우체통에 넣으려고 하 였다. 그 순간에 [한국에 갈 사람은 없는가,(Not one for Korea)한국은 어찌할 터인가 (How about Korea?)라는 소리가 나의 귀에 쟁쟁하게 들 어왔다. 이때 나는 나도모르게 손에 쥐었던 편지를 호주머니에 집어넣 고 단숨에 중앙통에 있는 선교본부를 찾아갔다. 나는 수석서기인 엘린 우드(F.F.Ellin wood)를 만났다. 몇칠후 그에게서 받은 기별은 다음 회 의에서 내가 선교사로 일명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L.George Paik,The History of Protestant Missions in Korea,PP.100 101) 미국 장로교 선교본부에는 종래의 배외정책으로 복귀하지 않을 것이라 는 확정을 하였고, 1884년 7월 28일 언더우드를 한국을 위한 최초의 선 교목사로 임명하는데 합의하였다. 언더우드 선교사는 1885년 2월 3일미 국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태평양을 횡단하여 일본에 들렸다.

 

그가 일본으로 먼저 가게된 이유는 일본에서 한국말을 공부하기도 하고 또한 한국에 관한 지식을 습득하여 만반의 선교 준비를 갖추기 위함이었 으며, 혹 여의치아니하여 한국에서의 선교사업이 불가능하다고 판단될때 에는 한국에서 자유롭게 복음을 전할수 있게될 시기까지 일본에서 영어 학교 사업이라도 하기 위함이었다.

 

언더우드 목사는 일본에서 약 2개월동안 선배 선교사인 헤본(James C.H epburns)목사의 따뜻한 영접을 받으면서 그의 집에 기거하였다. 루미스목 사는 언더우드에 대하여 [그는 한국을 위한 적절한 인물]이라고 평가하였 다. (The Foreign Missionary,Vol.44,No,1,P,34) 언더우드 목사는 일본에 있는동안 한국인 유학생들과 교제하면서 한국풍 습을 익혔고 특히 이수정을 통하여 그의 번역서인 마가복음을 손에 들고 열심히 한국어를 배웠다.

선고사가 피선교지에 들어가 그나라말을 배우고 또 그 성경을 번역하기 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닌것인데 언더우드 목사는 이미 번역된 성서를손 에들고 한국말을 배우게 되었으니 그 감격이야말로 형언할 수 없으니 만 큼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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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사]아펜셀라의 인천상륙과 의료사업 
 


 

아펜셀라(Herry G.Appenxeller)는 드루우 신학교 재학시절에, 1883년 미국 하드포드에서 개최된 신학교연맹(The Hartgard Inter Seminaryconvention)집회에서 해외선교사가 되기를 결심하고 처음에는 일본에가려고희망하였다.

 

그러나 한국으로 가려고 했던 친우인 워드윌쓰(J.S.Wodaswoth)가 모친의중병으로 국내에 남아있을 사정이 되어 그를 대신하여 한국행을결심하게된 것이다.

 

미국 북감리교회지 선교회를 통하여 선교사의 임명을 받은 그는 1885년 2월 2일 한국을 향해 떠나기에 앞서 샌프란시코에서 목사 안수를받았다. 아펜셀라 목사와 동행으로 스크랜튼 의사 부부와 모친 스크랜튼여사가 있었다. 이들 감리교의 개척선교사 일행은 태평양을 횡단하여2월 27일 일본 요꼬하마에 도착하였다.

 

그들은 동경에 들려 선배 선교사인 매클레이 목사를 만났으며 3월 5일에는 뜻깊은 선교예배를 올렸다. 이때 매클레이 목사는 시편 121편에서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케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라는 구저를 읽고바울이 선교사업을 위해 맡은 일터로 떠나가는 모습을 연상케 하면서 한국을 향하여 선교사들의 장도를 격려하였다.

 

1885년 3월 31일에는 일본에서 재한선교회가 조직되었다. 파울러(C.H.Fowler) 감독은 감리사로 매클레이 목사, 부감리사에는 아펜셀라 목사,회계로는 스크랜튼 의사를 각각 임명하였다.

 

매클레이 감리사의 의견이 [여러사람이 함께 한국에 들어가면 의심을받을염려가 있으니 따로 따로 가는 것이 좋겠다]라고 하여 아펜셀라목사는 장로교 선교사인 언더우드목사와 함께 일본 나가사끼를 떠났으며 4월 2일 아침에는 한국땅의 모습을 바라보게 되었다. 그곳은 부산이었으며 남해안과서해안을 돌아 4월 5일 부활절 아침에 드디어 인천에 도달하였다.

 

얼마나 한국행을 갈망하였던지 그들은 상륙하자마자 땅위에 엎드려먼저하나님께 감사하는 기도를 올렸다. [우리는 부활절 아침에 이곳을상륙하였습니다.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주님이시여!! 어서속히 이 백성들을 얽어매고 있는 흑암의 사슬을 끊으시사 하나님의 자녀로서 의 빛과 자유를 베풀어주시옵소서] (R.S.Maclay,Comen cementof the Korea MethodistEpiscopal Mission,The Gospelin All Lands for 1885,P,328) 아펜셀라 목사는 선교회에 보내는 보고문 가운데 위의기도문을 실었다.

 

아펜셀라 목사는 상륙하던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나의 아내가 제일 먼저 배에서 내려 한국 땅을 밟았다] (Harry A.Rh-odes,TheKorea Mission Field No.4,April 1935,P 78)라고 아펜셀라목사 부부와 언더우드 목사는 함께 한국을 찾아왔으나 한국내의 실정은아직까지 외국인 여자의 거주를 허락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아펜셀라 목사는 부득이 부인을데리고 일본으로 되돌아가야 했고 언더우드목사만 서울에 들어갈 수 있었다.

 

미국 대리공사 포오크 (George C.F-oulk)가 아무리 애써보았지만 [서울에서양인 여자가 들어가기는 어려운 사정인고로 부인을 잠시 일본으로 가 있다가 후일을 기다려야 한다는 의견이었다.

하는 수 없이 아펜셀라는 인천에 도착한지 9일만인 4월 13일에 부인과함께 일본으로 되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일본에 도착 다음날인 4월 18일청국의 대표 이홍장 과 일본 대표 이또오가 중국에서 텐진조약을 체결하여우리나라 정세의 긴장이 완화되기는 하였지만, 그때에는 여둑으로 건강을상한 부인의 치료로 아펜셀라목사의 한국 입국은계속 늦어지고 있었다. 그러다가 6월 20일에 가서야 아펜셀라 목사는인천에 또한번 상륙하였고 서울에 들어가 선교활동을 개시하게 되었다.

 

천주교에서 한국에 선교하면서는 한국 고대의 전통 의식이나 문화양식을고려하지 않고 거의 독단적인 선교방법으로 강행하다가 오해와 박해와 부작용을 일으킨 것이 사실이었다. 반면에 프로테스탄트교회에선 매사에 극히조심스럽게 태도를 취하였고 최대한으로 충돌을 회피하면서 한국민의 호감을 사고 선교 본래의 사명을 수행하기 위한 방향으로 전진하였다. 그러기위하여 우선 의사를 보냈다. 이들은 육신의 병을 고쳐주어 친밀감을 느끼게 하였고 한국인의 신임을 얻으면서 복음을 전달할 기회를 포착하는데 성공하였다.

 

여기에도 난관과 애로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한의사들의 시기와 멸시가있었고 환자들의 오해와 불평이 뒤따랐다. 선교본부로부터의 후원의빈약과때로는 선교의 의사들 사이에서 선교방법과 의견의 불일치로 어 려움을 격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이런것들이 바야흐로 열린 선교의 문호를 닫지는못하였다. 개척 선교사들의 의료사업은 한국민에게 과학문명의 혜택을 제공하면서 한국선교의 본격적 사업을 위한 시발대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수행하였다.

 

선교사에 의한 의료사업은 네가지 분야에서 진행되었다. 첫째로 외국의영사관 직원들과 거류민을 위하여 치료를 베풀었고 다음은 국왕과왕실을포함한 한국민들을 치료대상으로 살아야 했다.

 

셋째로는 정부 병원을 설립하고 운영 관리해야 했으며 그리고 넷째로는의학 교육을 베풀어 의사를 양성하는 일까지 담당해야 했다.

광헤원은 정부 소속의 병원이었다. 그러면서도 미국 선교회와의 합작운영이었던 관계로, 육의 병을 고치면서도 궁극적인 목표에 있어서 영장이었다고 보아 당연하다 하겠다.

 

알렌은 원장겸 의사의 책임을 맡고 바쁜 일과를 보냈다. 그는 일반 환자를 위하여 분주하였지만 왕실을 위하여 더 분주했다. 국왕의 시의가 된 그를 위하여 참판이라는 벼슬이 1885년 7월 19일에 내렸다. 알렌은벼슬을 받고 다음과 같이 술회하였다.

[국왕의 시의는 절대로 놀고먹는 직이 아니다. 자칫 잘못하면 엄하게책임을 추궁당해야했고 한의사들의 시기를 참아야 했다. 입시 하나는명령은밤 12시가 지나 더 늦게도 있었고, 그런 명령이 올 때에는 요란스럽게 가마를 보내와서 왕명이라는 고함 소리에 모두가 잠을 깨곤하였다. 더욱이 이나라의 관습은 정장하지 않고서는 국왕을 알현하지 못하는 법이 있어 반드시예복을 입고 입궐해야 하는 불편이 뒤따랐다]

[H.N.Allen, Things Korean,PP,193-195)

 

병원사업은 날로 번창하여 알렌 혼자서는 도저히 외래환자를 치료할수없을 정도로 분주하였졌다. 알렌은 불원내한하여 동료가 되어줄 혜론(gohn W.Heron,)의사에게 기대를 걸었다. 그런데 스크랜튼(W.B.Sc-ranton)의사가 먼저 들어와 병원에서 일하게 되었고 혜론 의사도 그뒤에도래하여병원사업에 동참하게 되었다.

 

스크랜튼은 1885년 6월에 병원을사퇴하였고, 알렌은 1887년에 원장을 혜론에게 넘겨주고, 한국정부가 박정양을 미국에 초대 공사로 파견할 때 참찬관의 직을 받고 그를 수행하여 갔다. 그러나 알렌은 1889년에 다시 병원사업의 임무를 맡아 제중원의 원장이 되었다.

한국에서의 복음선교에 앞선 의료사업의 개시와 활동은 한국인들의 육의생명을 건지는데 공헌했을 뿐만아니라.그 마음을 사게하여 한국정부의 기독교에 대한 금압정책을 완화케 하는데 결정적 효과를 올렸으며 전도의 길을 널리 개방하는데 크게 도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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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의 고난과 순교

 

(서론)
왜정 36년간 일제의 교회 박해는 강압과 회유 매수 등 가진 수단과 방법을 다했다. 신사참배 강요는 민족 전체에게 강요되었다. 그러나 교회만이 피를 흘려 항거하였다. 이로 인해 2백여처의 교회가 페문되었고 2천여명의 신도가 투옥되었고 50여명의 교역자가 순교하였다. 한국기독교는 민족을 위해 순교한 피 제사로 튼튼하고 흔들림 없는 민족교회로서의 대발전의 축복을 하나님으로부터 보장 받았다.

제1장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와 박해
1. 기독교학교에 대한 참배와 요구
2. 교회를 향한 신사참배 박해 개시

제2장 신사 불참배운동의 궐기 파급
1. 주기철 목사 시무한 산정현교회의 투쟁
2. 항거자들의 결사 반대운동 전개
3. 신사 불참배로 인한 순교자 속출

제3장 신사 불참배로 인한 순교자 속출
1. 전시하 기독교인들의 일대고난
2. '한국교회' 명칭의 박탈 소멸

*제1장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와 박해

*1.기독교학교에 대한 참배와 요구
1930년 일본은 대륙 침략의 제일보를 만주사변을 일으켰으며 부의를 황제로 세워 괴뢰 만주국을 건설하였다. 1936년에는 노구교 사건을 유발하여 본격적으로 중국 본토를 침략하는 전쟁을 수행하였다.

일제는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하여 어떤 정신적인 통일이 필요했던 모양으로,이러한 정신적인 지주를 신사 참배에서 찾으려고 했다.신사란 일본 역대의 천황들의 영과 국가를 위한 유공자 특히 전쟁에 참가하여 전사한 군인들의 영을 모신 곳이라 하면서, 한국 기독교인들을 향해서도 여기에 머리숙여 절하라고 강요하였다.

한국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행동이야말로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는 크나 큰 범죄가 되며,더우기 한국 민족의 긍지와 애국심을 상실 당하는 결과가 된다고 판단하여 한사코 이를 거부하였다. 그러나 일본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한국 기독교인들을 자기들의 종교에 끌어 넣어 신에게 머리 숙이게 하여 굴복케 하기 위하여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강요를 거듭하였다.

1935년 가을, 평안남도 일본인 야스다께 지사는 도내에 있는 중고등학교의 교장 회의를 소집하였고 그 자리에서 교장 일동은 평양신사에 참배하여야 한다고 명령하였다. 이때에 숭실학교 교장 윤산온(G.s.McCune)을 비롯하여 숭의여학교와 안식교 계통의 의명학교 교장 등은 종교의 교리상 그렇게 할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이에 야스다께 지사는 정식으로 공문을 방송하기를 '신사참배는 국민 교육상의 요건임으로 불응시에는 단호한 조치가 있을 것'이라고 하면서 답변을 요구하였다.

사태 추이의 중대성을 느낀 미국 북장로회 선교회에서는 신사참배 문제에 대한 대책을 수립하기 위하여 1935년 12월 23일 윤산온 교장 댁에서 실행위원회를 소집하였다. 문제의 심각성에 비추어 회의는 심야까지 계속되었으나 결국 신사참배는 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야스다께 지사는 이 사건의 보고를 총독에게 올리면서 총독부 학무국에서 처리해 줄 것을 의뢰하였다. 총독부에서는 곧 전국의 도지사와 경찰부장,경찰서장 연석회의를 소집하여 기독교 학교에 대하여 신사참배를 강요하기로 결정하고 불응 시에는 교장을 교체할 것과 학교 폐쇄의 두가지 방법으로 탄압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러한 험악한 사태 하에서 윤산은 교장은 학교를 살린다는 명분하에 학교 대표자 개인의 자격으로 신사참배를 하겠다는 내용의 답서를 발송하려고 마음 먹었다. 그러나 그는 답서 제출에 앞서 신사참배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는 평양 신학교 교수 박형룡 목사와 산정현교회의 주기철 목사를 만나 의견을 타진하였다. 그랬더니 그들은 개인의 참배라고 학교 대표자이니만큼 불가하다고 의결을 표시하였다. 이에 윤산온 교장은 단호한 결심을 갖게 되어 신사참배를 거부한다고 회신하였다.

이를 계기로 숭실,숭의의 두 학교는 교장직 인가가 취소되었고 뒤이어 학교가 폐쇄되고 말았다. 윤산온 교장은 파면된지 2개월이 지나 1936년 3월 한국을 떠나 미국으로 돌아갔으며,그는 미국에서도 계속 신사참배의 부당성을 강조하였다. 한국 주재 북장로회 선교사 가운데는 신사참배 문제는 개인의 신앙 야심에 맡기고 학교는 교육사업이니만큼 계속하여야 한다는 의견도 없은것이 아니었다.

미국 남장로회 선교회에서는 시종 강경한 태도로서 신사참배를 반대하였다. 그것은 미국 남장로회 외지 선교국의 태도가 강경하였기 때문이다. 당시 외지선교국의 총무로 있은 훌튼(C.Darly Fulton)박사는 신사참배는 종교 해우이라고 엄격히 규정하여 남장로회 경영의 학교는 폐교하는데 전혀 주저하지 않았다.

1938년 2월까지 미국 북장로회 경영의 8개 학교와 남장로회 경영의 10개 학교가 모두 문을 닫어야 하는 수난을 만났다.


*2.교회를 향한 신사참배 박해 개시


신사참배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기독교 학교를 폐교케 한 총독 당국은 이제는 제2차 단계로서 교회에 대하여 신사참배를 강요할 계획을 세웠다.

드디어 조선 총독은 한국교회에 대하여 신사참배를 강요하여 한국교회의 목을 졸라 질식케 하는 살인마적 작업에 돌입하였다. 이러한 때에 문제가 된 것은 교회 지도자들 가운데 차차로 신사참배를 국가 의식으로 인정하려는 기운이 일어나 의견의 불통일을 가져오게 된 것이었다. 이는 교히의 큰 비극이오 유간이 아닐 수 없었다.

안식교 계통의 의명중학교는 처음에는 신사참배를 거부하였으나 1936년 1월 교장 이희명은 신사참배 하기로 굴복함으로서 안식교의 신사참배 문제는 일단락을 고하였다. 천주교에서는 1918년 '신사는 다른 신들을 위하는 곳이므로 참배할 수 없다'라는 한국 천주교회의 장정을 작성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국세정서 하에서 이탈리아와 일본과의 친선을 유지하기 위한 방편으로 취한 로마 교황청 포교성의 '신사참배하는 종교적 행사가 아니고 애국적 행사에 지나지 않으므로 그 참배를 허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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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의 발전과 확대

 

제1장 3.1운동과 교회의 주동역할
1. 십자가를 진 기독교인들
2. 3.1운동을 통한 교회의 애국활동
3. 3.1운동에서의 기독교정신의 결정

제2장 일제 탄압에 불굴한 교회의 진흥
1. 일제 종교정책의 시행 착오
2. 전국 교회진흥운동의 팽배
3. 성경.찬송가 발간에서 민족교회관 수립

 

제1장 3.1운동과 교회의 주동역할

 

*1.십자가를 진 기독교인들
한국의 민족 운동이나 독립운동은 교회의 움직임과 불가분리의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발전하였다. 그것은 기독교의 교리는 인간의 존엄과 자유 평등 사상을 기본으로 한 것이므로 기독교인드른 개인적으로나 민족적으로 다른 민족의 부당한 구속과 압박에 그냥 머물러 있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를 통하여 민족 자주정신이 크게 일어났으며 그것이 다시 독립 운동에로 약진되었다.

1910년 8월 22일,일본은 아주 비열한 방법으로 한국을 병참하였다. 나라 잃은 설음과 통분을 가장 뼈저리게 느끼고 깊이 체험하기는 그 누구보다 기독교인이었음은 두말할 것 없다. 기독교인들은 일본 관헌이 잡아다가 취조하면서 주모자가 누구냐고 물으면 한결같이 하나님이 시켜서 독립운동 하였다고 대답하였다.이는 민족의 독립과 자유의 향유를 위해 하나님의 거룩한 뜻에 따라 행동했다는 말이 되며, 이리하여 교회야말로 일본의 침략 정치에 항거하는 강력한 단체가 되어진 것이다. 이러한 사정을 알아채린 일제 침략자들은 민족 활동의 정신적 원천이 되어있는 기독교 신앙을 없이하려고 온갖 흉게를 꾸미면서 한 걸음 두 걸음 목조르듯 박해의 손길을 뻗쳐 들였다.

일제의 흉계가 대규모적으로 조작된 것으로서 소위 '105인 사건'이란 것이 있다. 일본인 조선총독 대라우찌가 1910년 12월 27일 압록강 철교 개통식에 참석하기 위해 가는 도중에 선천역에 정거하였을 때 한국 기독교인들이 그를 암살하려고 음모를 꾸몄다는 내용인 것이다. 그러나 그는 원래 날조된 사건이었기 때문에 모순 당착이 너무나 많이 노출되어 완전히 허위가 드러났다.

결국,이 조작된 사건은 형식적으로나 윤치호등 6명에게 유죄 판결을 내려 사태를 미봉하였다. 형고를 받은 인사들은 그동안 여러 차례에 걸친 감형으로 1915년까지는 모두 석방되기는 하였으나 그들은 기력을 회복하지 못하였다. 어느 한 날,감옥에서 석방된 이들이 평양역에 도착하였을 때 역 앞에 운집한 8천명 군중들은 민족을 위해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고난과 수욕을 겪은 교회 지도자들을 바라보면서 열렬한 환영을 퍼부었으나 그들의 모습은 슬픔과 울분이 뒤섞여 너무나 처절하였다.

 

2. 3.1운동을 통한 교회의 애국활동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파리에서 강화회의가 열렸을 때 미국의 윌슨(Thomas W.Wilson)대통령은 민족 자결론(Self Determination of Nations)을 내세워 이때야말로 한국 기독교인들은 민족의 살길이 트였다고 생각하고 일제의 기반을 벗어나 조국의 독립을 이룩할 수 있는 호기회가 온 것으로 자각하였다.

근 10년이나 일제의 압박을 받아 온 우리 민족은 이에 자극되어 1919년 3월 1일 독립운동을 일으키고야 말았다. 이 날을 기점으로 하여 온 겨레는 민족자결의 횃불을 높이 치켜들고,자주 독립을 선언하면서 독립 만세를 힘차게 부르고 또 불렀다. 3.1운동에서 기독교인들은 단연히 앞장섰다. 독립선언문에 서명한 33인 가운데 16인이 기독교인임을 보아 벌써 이러한 애국심을 뚜렷히 알 수 있다. 운동의 진행은 시종일관하여 비폭력 무저항주의로 행동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헌병과 경찰은 교인을 보는대로 짓밟았고 감옥에 가두고 매질했으며 교회당을 때려 부수고 불질렀다.

3.1운동이 한창 막바지에 이르렀던 4월 15일 낮 12시경,수원 부근의 제암리로 일본 헌병의 일대가 달려들었다. 그들은 총을 휘두르며 약 30명의 기독교인을 모두 교회당 안으로 모아 들였다. 교인들이 다 들어간 다음,헌병들은 문을 잠그고 교회당에 불을 질렀다. 견디다 못하여 창문을 부수고 나오는 교인들에게 총을 겨누어 쏘아 죽였다. 이러한 학살과 만행은 다른 여러 고장에서도 감행되었다. 강서 사천교회,정주교회,강계교회,위원교회의 학살 사건 그리고 서울의 시자가 사형 사건,북간도 노루바위교회의 학살 사건 등이 그것이며,이러한 모습은 한국 독립운동사상 너무나 참혹하고 잔인하여 감히 눈뜨고 볼 수 없는 처참한 광경이었다.

일본 경찰이 그렇게도 심하게 경꼐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대규모의 전국적 운동이 사전에 발각되지 않았다는 점,그리고 기독교인의 주장에 의하여 비폭력 무저항주의로 독립운동을 이끌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한 사항이다. 그토록 우심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는 결코 굴복하지 않았다.교인들은 땅에 엎어지고 교회당은 불타 버렷으나 살아남은 교인들은 한 마음 한 뜻으로 굳데 뭉치어 뒤로 물러서지 아니하였다. 3.1운동을 통하여 기독교인의 애국적인 참 모습을 본 많은 사람들은 기독교에 대한 인식을 새로이 하였다. 이리하여 한국교회는 3.1운동을 계기로 하여 민족 교회로서의 걸음을 또 한번 힘차게 내딛었다.

기독교인들이 앞장서 기치를 높이 든 3.1독립운동은 한국 민족의 기개를 널리 만방에 떨쳤을 뿐 아니라 한국 민족이 독립된 민족임을 뚜렷히 세게에 알려 주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어떤 사람은 독립 운동이 실패하였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때에 한국 민족의 독립성을 세계에 알려주지 아니하였더라면 1945년 8월 15일의 연합군에 의한 무조건 해방이 그렇게 쉽게 오지 아니했을 것만은 틀림이 없다.

*3. 3.1운동에서의 기독교정신의 결정
지금까지 3.1운동의 원인 및 동기,그 경과 그리고 그 결과등에 관하여 보았다. 다음은 3.1운동의 성격이라 할까, 3.1정신에 관하여 살피므로 귀중한 교훈을 얻고자 한다.

첫째로, 3.1정신에 있어서는 신앙심이 포함되어 있었다.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일본의 철통같은 구속과 탄압 속에서 결코 굴하지 아니하였다. 반드시 한국 민족이 독립할 것과 국권을 회복하고 신앙의 자유를 획득하게 될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틀림없이 이를 신앙하였다.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인 신석구목사는 일제의 법정에서 다음과 같은 발언을 하였다.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불의 불신한 일본 사람게 우리 민족을 오래 맡기시지 아니할 것으로 굳게 빋는다."
이러한 강한 신앙이 있었기에 전국 방방곡곡에서 교인들은 일제히 일어나 붉은 피를 아낌없이 쏟으면서 이 강토는 내 것이라고 소리치며 행동할 수 있었다.

둘째로는 협동과 단결심이 강하게 있었다. 3.1운동은 종파와 계급,남녀,노소의 장벽을 뚫고 온 교회와 겨레가 일치 단합한 거룩한 운동이었다. 이는 한국 민족사에서 일찌기 찾아보기 어려운 행동이었다. 실은 독립선언서가 2월 28일에 일본 경찰에게 발각되었다. 그들은 경찰력을 총동원하여 살폈으나 3월 1일에 거사가 있을줄은 전혀 탐지하지 못하였다. 한국인 밀정도 이 사실만은 일경에게 알려주지 않았다. 이는 민족이 하나로 뭉쳐 입을 꽉 다물었기 때문이다.

셋째는, 정의와 진실이 그 가운데 있었다. 독립은 한국 민족의 정의에 입각한 참된 소원이었고 3.1운동은 독립을 위한 진실한 행동이었다. 이 거룩한 운동에 누구도 명예나 욕심을 탐하지 아니하였다. 그토록 강포한 일본 침략자들은 이 정의와 진실의 발로를 그 무엇으로 당해내지 못하였던 것이다.

민족 대표 33인이 2월 28일 저녁에 손병희 댁에 최후로 모여서 거사를 의론하면서 "체포된 후의 모든 진술은 각자가 사실대로 말하기로 하자"고 최종적으로 합의하였다. 이 한가지만 보더라도 3.1운동이 진실과 정의로 일관하였음을 잘 알 수 있다.

넷째로는 평화와 무저항으로 일관하였다. 어떤 분은 말하기를 3.1운동이 실패했다고 말하면서 그 중요한 원인은 비폭력화 평화운동이었기 때문이라고 비판한다. 천도교 측에서는 필요시에는 무력 행사도 불사하자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기독교측은 완강히 이를 거부하면서 끝가지 비폭력과 무저항으로 운동을 이끌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만약 이때에 자칫 잘못하였더라면 제2의 동학란같은 것이 발생하여 죽도 밥도 안되었을런지 모른다. 3.1운동의 특출한 정신은 맨주먹으로 또 붉은 피로 물들이면서도 끝까지 평화의 정신으로 밀고 나간데 있다. 한 자루의 총검도 없이 재정의 후원도 없이 원조하는 우방도 없이 세계 최강국과 항쟁한 그 저력은 끝까지 평화의 정신으로 밀고 나갔다는 데 있었다. 그런고로 세계는 이 불상한 민족을 동정하였고 이 평화 운동을 지지했던 것이다.

다섯째로는 3.1정신 속에는 끊임없는 전진이 있었다. 손에 태극기 하나만을 들고 일제의 총칼 앞에서 제1진이 쓰러지면서 제2진이 뒤를 따랐다. 제2진이 쓰러지면 그 시체를 밟고 또 다시 제3진이 전진하여 끄칠 줄을 몰랐다. 이러한 불퇴전의 전진은 민족 자격 아니면 민족자멸의 양단간의 결단을 앞에 놓고 전국의 골짜기마다 어디에서나 일어나 계속된 것이었다. 일본, 만주, 시베리아,상하이,하와이,미국 등지에 이르기까지 널리 퍼지면서 전개되고 그리고 또 계속 되었다.

3.1운동의 진전으로 말미암아 기독교인들의 민족 정신과 독립 정신은 더욱 더 확고히 다듬어졌다. 한국교회는 3.1운동이래 한국 민족이 신뢰할만한 봉사자로 보다 더 뚜렷이 부각되었다. 이는 한국교회가 민족 교회로서 성장하는 속도에 가일층 박차를 가하였으므로 크나 큰 수확이 되었음을 인식해야 한다.

*제2장 일제 탄압에 불굴한 교회의 진흥

*1.일제 종교정책의 시행 착오
거족적인 3.1운동의 여파는 무단 일변도로 일관한 일본의 정책을 변경시켜지 않을 수 없는 절박한 상태로 몰고 갔다. 따라서 일제는 외형적으로나마 정책 노선을 변경하여서 기만과 가식의 방법으로 한국인에 대한 식민 통치를 진행하기로 방침을 바꿔 세웠다.

그리하여 지금까지 육.해군 대장에 국한하였던 조선 총독의 자격을 문관 출신으로 바꾸었고 새로이 부임한 사이또 총독이 곧 무단정치에서 문화정치로 정책을 바꾼다고 선언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는 헌병 경찰제를 보통 경찰제로 바꾸었고 한국인에게도 일본인과 같은 교육의 균등화를 기한다는 뜻을 언명하였고 언론의 통제도 철폐한다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일제가 한국을 완전히 장악하기 위한 수단 방법의 변형일 뿐으로 본질적인 면에서는 무단 정치와 전혀 다를 바 없었으며, 그런고로 얼마 안가서 그 술책이 속속 탄로나게 되었다.

종교 정책에 있어서는 종교적 자유를 허용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교회의 교권을 외국 선교사들로부터 탈취하려 하였다. 그러기 위하여서 일부 한국교회의 불평 분자들을 포섭하여 이간책을 사용하여 교회 분열을 획책하여 약체화 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그렇게 잘 먹혀들어가지 않았다.

여기에서 한걸음 더한 적극책으로 한국 기독교의 일본화를 꾀한 방법이 있었다. 일제는 정부의 어용 기구가 되어 있는 일본 조합교회를 시켜 한국교회 지도자들을 회유하여 한국교회를 조합교회에 합병케 하여 단일 교회를 만들고 필경은 교회를 총독 문화 정책의 선전 기관으로 만들려고 기도하였다. 3.1운동이 일어나자 조합교회의 와다세 목사는 한국인 목사 20여명을 재빨리 4월 18일에 조선호텔에 소집하여 성대한 만찬으로 대접하였다. 그리고 나서 동 회의에서는 특별한 시국운동을 전국적으로 벌이기로 결의하였고 그 실천 방안으로서 선전 팜프렛의 발간 반포와 순회 강연 등을 시행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들은 3.1운동을 일종의 소요 사건으로 규정하는가 하면, 기독교인에 대한 일본 관헌의 만행과 박해를 규탄하는 선교사들의 언동을 크게 반박하여 비난을 퍼부었다. 그리고 장,감 양 기성교회의 교인들을 유인하여 자파 교세를 확장하기 위하여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포섭하려 했다. 그러나 교인들은 호응하려는 기세를 보이지 아니하였다. 조합교ㅗ히는 날로 교세가 쇠퇴하였고 마침내 유명 무실한 교회로 전락하여 일제의 기만적인 교회 정책은 일단 실페하고 말았다.

일제가 아무리 수단 방법을 강구하려 한국 교회를 교란하려고 시도하였지만 끝내 실패로 돌아가자 드디어 법적으로 교회 탄압을 감행하기로 결정하였다. 그것이 소위 1920년에 발표된 '개정포 규칙'이란 것이다. 이러한 온갖 악조거 하에서 한국 교회가 일시적으로나마 낙심하여 침체상태에 빠졌음은 유감이라고 말 아니 할 수 없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결코 완전히 후퇴하거나 쓰러지지 아니하였다. 한국교회는 모진 시련의 골짜기를 넘어서 칠전팔기의 신앙으로 다시 일어나 교회진흥운동을 대대적으로 일으켜 약세를 회복하였다.

*2.전국 교회진흥운동의 팽배
한국 백성의 반응이 새로와진 이 시기에 감리교와 장로회에 있어서는 모두 교세 확장을 위한 대규모 조직적인 운동을 추진하기에 인식하지 않았다. 감리교에서는 이 운동을 '백년 전진'(The Centuly Advance)이라 불렀고 장로회에서는 '전진 운동'(The Forward Movement)이라고 이름 붙였다.


장로회교세(1917-1930)
1917년 - 149,526명
1918   - 160,919
1919   - 144,062
1920   - 153,915
1921   - 153,915
1922   - 179,158
1923   - 193,850
1924   - 191,887
1925   - 194,408
1926   - 519,060
1927   - 194,678

1919년 장로회 총회에서 진흥위원회 위원장이 된 방위량(William N.Blair)목사는 10개 종류의 소 책자를 만들어 전국 도처를 순회하면서 집회를 인도하였다. 각 교회에서는 진흥 비교표를 배부하였고 성적을 노회에 보고케 하였다. 그 내용에는 전도,성경 공부,새벽 기도회 등 9개 종목의 진흥 방법이 포함되어 있었고 우수한 교회에 대하여는 총회에서 성장을 수여하였다.
그러면서도 이러한 부흥 운동에 가장 큰 성과를 올린 것은 길선주 목사와 김익두 목사 등이 전국적으로 부흥집회를 인도함으로 얻게되었다. 그들은 설교와 능력을 통하여 한국교회에 새로운 희망과 광명을 던져 주었고 한국 사회를 향해 새로운 시대 정신을 불러 일으켜 다대한 공헌을 남겼다. 그들은 언제나 "한국 교인들이여 일어나라""진리는 반드시 승리한다"라고 절규하여 민족의 각성을 촉구하였고 한국 민족은 모진 비바람에도 꺼지지 않는 불멸의 찾아볼 수 있게 격려하였다.

1919년은 한국 민족에게 있어서 거족적인 3.1운동이 있은 중요한 해이기도 했지만 감리교에 있어서는 미국에서 해외 선교부가 발족한지 100주년에 해당하는 뜻있는 해였는고로 한국의 감리교는 '백년 전진'운동을 전개하기로 계획했던 것이다.편성된 전도대는 전도지와 쪽복음을 손에 들고 집집마다 방문하고 각처를 순회하면서 복음을 전달하였다. 교직자들은 청지기대회를 열어 사명자의 태도를 재확인하였으며 새 교회 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한 특별반을 조직하였다.

1923년은 동양 선교 75주년을 기념하여 특별 전도운동을 폈으며 그 다음해에는 남북 감리교가 합동하여 연합협의회를 조직하였고 전도,교육,문서 출판 등의 11개조의 진흥 방안을 구체화하여 추진하였다. 이때의 감리교의 유명한 부흥사로는 유한의 목사가 있었으며 그는 노방 전도와 함께 야시 전도의 특이성을 살려 전도의 성과를 크게 올렸다.

이 시기의 부흥 운동은 한국 국내 뿐 아니라 세계적 추세로서 전도단들이 세계를 두루 다니면서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열을 올렸다. 1923년에는 미국의 비더울프 목사를 단장으로 한 부흥단이 내한하였으며 서울을 비록하여 평양,선천,대구,광주 등 12개 도시를 두루 누비면서 순회 전도를 하여 어디에서나 대성황을 이루면서 수많은 결신자를 획득하였다.

특히 3.1운동 이후에 출감한 기독교 인사들의 영향으로 조직된 대.소 전도단의 활동은 주목할만 하였다.이들이 하는 강연및 설교의 내용은 주로 이스라엘 민족의 수난과 구원의 역사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인권의 자유와 인간의 존엄에 대한 정신을 은연 중에 강조하였다. 그런고로 일제 경찰들은 이를 중지시키기 위하여 뒤를 쫓아다니면서 여러모로 위협하였다. 그러나 연사들은 열띤 어조로 언제나 군중을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 넣으면서 민족정신을 고취하였다.

한국 민족은 절망적인 시련의 골짜기를 능히 교회의 진흥을 통하여 헤치면서 앞으로 앞으로 전진을 계속하였다.


*3. 성경.찬송가 발간에서 민족교회관 수립
선교사업 진행에 있어서 가장 먼저 요구되는 것은 성경 및 찬송가의 역간이라 하겠다. 하물며 프로테스탄트 교회야말로 성경을 중심한 교회이기 때문에 선교사들은 그 어디에나 선교지에 들어가기만 하면 성경을 번역하고 보급케 하는 과업을 먼저 수행하였다.

한국에 있어서는 유독 선교사가 정식으로 입국하기 전에 국외에서 성경이 번역 출판되었고 이것이 국내에 반입 전포되었다는데 특색이 있다. 그러나 만주에서 출간된 로쓰 번역(Ross Version) 성경이나 일본에서의 이수정 역 성경은 단시일에 너무 급하게 만들어졌기 때문에 오역이 많았다. 또 지방 사투리의 표현이 섞여 있었다. 그런고로 표준어로 되는 정확한 성경의 번역은 필수적 요청이었다.

1887년 언더우드,아펜셀라,스크랜톤,헤론의 네 사람으로 조직된 성서위원회는,한국에 온지 얼마 되지않는 외국인들이면서 참고 서적이나 한글 사전도 없는 상황에서 고생을 다하면서 번역사업에 착수하여 20년이 지난 1906년에 신약성경의 결정본을 출간하였다.

1908년에 김정식,김명준,김창식의 한국인 세 사람이 번역 위원으로 가담되었음은 한국민족 교회사 상에 있어서 하나의 획기적 사실로서 기뻐할만 하다. 1911년에는 구약성경의 번역이 끝나면서 출간되었고 또 그해에 신구약의 합본 성경도 간행되는 거사를 만났다.

성경이 나오기 전 해인 1910년은 국가적으로 한민족이 일본에게 합방 당한 너무나 슬픔에 가득찬 해이었다. 그러기에 당시의 수백만 한국인들은 한글로 된 성경을 보자 열렬히 애독하였다. 나라 잃고 멸시 당하는 힘겨운 처지에 빠질수록 더욱 우리말과 우리 글의 귀중함을 뼈아프게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성경은 교인들 뿐 아니라 일반 민중 사이에도 널리 보급되어 한글을 퍼쳐 한국 국문학사에도 불멸의 공을 세웠다. 뿐만 아니라 이 성경의 내용이 진리로서 무지와 몽매를 깨우치면서 겨레 사랑하는 마음을 함양하여 애국 애족심을 크게 일깨웠은 두말 할 것 없다.

찬송가의 편간도 한국교회의 문서 선교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사업이었다. 선교사들은 성경 번역과 거의 동시에 찬송가의 편간 사업에 착수하였다. 1896년에는 감리교 찬송가로 '찬미가'가 나왔고 1898년에는 장로회에서'찬셩시'를 출간하였다. 초대 교인들은 정확한 곡조로 유창하게 찬송가를 부르지는 못하였으나 나라 잃은 설음 속에서 그 얼마나 열심히 찬송을 불렀는지 모른다.

1.우리 황상폐하 천지일월 같이 만수무강
산높고 물고운 우리 대한국에 하나님 도우사 독립부강

2.이천만 동포난 한맘 한뜻으로 직분하세 사욕은 버리고 충의만 앞세워
임군과 나라를 보답하세

위는 초대교회에서 찬송으로 부른 애국가의 몇 절을 뽑은 것이다. 초대 교한국교회는 태극기와 십자가를 항상 걸엇으며 말하자면 태극기와 십자기는 애국하는 한국교회의 상징이 되어 있었다. 이러한 찬송의 연창은 우리 민족이 도탄의 고통 속에서 어떻게 해서든지 새 희망을 찾으려고 애쓴 그 모습을 연상하게 한다. 실로 이는 한국 민족교회관 수립에 있어서 크게 일익을 담당하였다고 봄이 옳을 것이다.


장로회교세(1884-1900)
1884-85 - 6 
1885-86 - 9  
1886-87 - 25  
1887-88 - 65  
1888-89 - 104   
1889-90 - 110  
1891-92 - 127     
1892-93 - 141  
1893-94 - 236 
1894-95 - 286 
1895-96 - 530 
1896-97 - 932 
1897-98 - 2079
1898-99 - 2804
1899-1900 -36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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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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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의 형성과 부흥

(서론)
누가 우리 한국 민족에게 소망을 줄 것인가, 그는 오직 우는 자의 위로가 되고 약한 자의 강함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뿐이었다. 1907년 이래 한국교회의 대부흥은 교파와 계급을 초월하고 우리 민족이 죄에서 거듭난 참다운 부흥이었다. 선교사들은 겸손과 희생의 사람이 되었고, 교인들은 성수주일, 성경연구, 헌금과 봉사, 사랑의 생활로 돌진함과 동시에 큰 전도 운동을 일으켰고 교회 연합사업을 시작하였다.

제1장 개국과 미국선교사들의 내한
1. 의료.교육사업의 전개
2. 선교의 활동과 조직교회의 출현
3. 네비우스 선교정책의 수립

제2장 성령강립과 교회의 일대부흥
1. 민족적 자각에 따른 신자의 증가
2. 애국 인사들의 기독교인 속출
3. 한국 최초의 대부흥운동

제3장 교회 행정기관 설정
1. 한미 장로회공의회의 발족
2. 대한독노회 설치와 해외선교의 착수
3. 장로회총회 창설과 조선강리회의 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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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개국과 미국선교사들의 내한

*1.의료.교육사업의 전개
쇄국정책으로 나라의 문을 닫고 오랫동안 서양인의 입국을 금하였기 때문에 우리 나라에서의 기독교 전파의 시기는 자연 늦어질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문호 개방의 시기는 드디어 도래하였다. 1882년 5월 22일 미국과의 수호조약의 체결을 비롯하여 그 이래로 영국 프랑스 등 여러 나라와도 교제의 길을 텄다. 미국의 교회가 가장 먼저 한국 선교의 손을 뻗치게 되었다.

그때에 일본에 체재하고 있은 감리교 선교사 매클레이(Robert Maclay)목사는 한국을 방문할 계획을 세웠다. 그는 김옥균을 통하여 고종황제를 알현하였으며, 이나라의 개화를 위하여 서양 과학과 문명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고종은 드디어 "한국 내에서 의료사업과 교육사업을 개시해도 좋다."고 하는 윤허를 내렸다. 기쁘메 넘친 매클레이 목사는 곧 본국 선교본부에 이 소식을 알리면서 한시 바삐 의사나 교사를 보내야 한다고 호소하였다.

한편, 중국에 와 있던 미국 선교사들도, 즉 산뚱성에 와 있은 장로교 선교사 레이드(Gilbon Reid) 목사는 선교 본부에 한국 선교를 위한 계획을 제시하여 선교 개시를 촉구하였다.

1884년 9월 20일 알렌(Horace Newton Allen,안동)이 제물포에 상륙하였다. 그는 한국을 찾기에 앞서 중국 상하이에서 의료 선교에 종사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한국 선교를 위한 인물을 물색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지원하였다. 한국의 사정이란 아직까지 선교사라는 신분을 밝힐 수 없었다. 때문에 그는 미국 영사관의 공의라는 명목으로 입국하였고 동시에 영국과 청국,일본영사관의 공의의 직분까지 맡아 보았다. 그의 입국은 의사가 긴급히 요구되고 있는 외교관들 사이에서 대호평이었다. 그러나 그의 본래의 사명은 선교사업인데,의사로사만 일해야 하니 답답하고 불만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러던 중에 돌발적인 사건이 터져 선교사업 수행을 위한 호기회가 도래하였다.

1884년 12월 4일 갑신정변이 일어났다. 왕족 중의 한 사람인 민영익이가 우체국 낙성식에 참석하였다가 쿠데타를 일으킨 개화당 자객의 칼에 맞아 중태에 빠졌다. 장안에서 유명하다는 한의들을 14명이나 불러들여 치료하였으나 효력이 없었다. 알렌 의사는 그를 정성껏 치료하였으며 생명을 구하는데 성공하였다. 결과에 대한 보상은 과연 놀라왔다. 그는 궁중의 시의가 되는 극진한 대우를 받았으며 서양 의술의 탁월함이 인정되어 병원을 개설해도 좋다는 윤허를 받았다.

알렌 의사는 곧 현대식 병원을 세웠으며 광혜원(Wide spread Relief House)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는 중신들이나 함께 많은 가난한 사람들의 병을 그리스도의 사랑과 봉사의 정신으로 시료하였으므로 환자는 날로 늘어났다. 그가 한국인들로 부터 얻은 신임은 곧 선교사업을 전개하는데 필요한 전초 기지 구축에 성과를 올렸다. 그야말로 알렌이 개척한 그 길을 밟고 언더우드나 아펜셀라를 비롯한 여러 선교사들이 입국하여 일하게 되는데 어려움을 덜어 주었다.

한국에 들어온 선교사들은 의료사업과 교육사업을 병행하여 시행하였다. 서양의술에 대한 신망은 날로 깊어갔고 동시에 서양교육에 대한 원망도 점점 높아갔다. 한국 정부의 노력도 현대식 교육을 도입하려고 애쓴 것만은 틀림이 없었다. 특히 고종의 관심은 지대하였으며 일본을 비롯하여 중국과 미국 등 지에 몇 차례의 시찰단을 파송하여 또는 유학생을 보내어 세계의 정세를 연구 시찰케 하는데 열심을 기울였다.

1883년 6월,미국 시찰을 마치고 돌아온 민영익은 곧 고종에게 현대식 학교 설립의 필요성을 주달하였다. 그러했기에 그 해 7월에 서울을 방문한 매클레이 목사에게 그렇게 쉽게 교육사업의 윤허를 내리셨던 것이다.

한국에서의 최초의 현대식 교육기관은 몰렌돌프(P.G.Von Mollendorf)에 의하여 시작된 영어 강습소인 것 같다. 외교통역관을 양성할 목적으로 영국인 해리팩스(T.E. Hallifax)와 중국인 교사가 교수하였다. 그후, 한국정부로부터 현대식 교육의 지도자를 파송해 달라는 요청을 받은 미국정부의 문교부장관 이튼(John Eaten)은 헐버트(H.B.Hulbert)와 벙커(D.A.Bunker)와 길모아(Gearge W.Gilmore)의 세 사람을 보냈다. 이들을 중심하여 1884년 7월 4일에 육영공원이 설립되었다. 이는 한국 최초의 서양식 국립학교로서 여기에서는 정부에서 일할 관리를 양성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필요한 학교가 정쟁의 틈바구니에서 해어날 길이 없어 10년을 더 계속하지 못하고 문을 닫았다. 이에 선교사들은 직접 학교를 세우고 교육사업에 종사하게 되었다.

선교사들은 기독교 복음을 전달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교육사업에 착수한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면서도 건실하고 대중적인 현대 교육을 소개하였으므로 한국민으로부터 절대적인 지지와 열렬한 환영을 받게된 것이다. 정부가 다하지 못한 교육사업의 효과를 선교사가 수행하여 올리게 되었음은 한국 민족의 개화 계몽을 위하여 절대적으로 유익하였다.


*2. 선교의 활동과 조직교회의 출현
1885년 4월 5일,부활절 아침에 미국 장로회의 파송을 받은 언더우드(Horace G.Underwood,)선교사가 인천에 상륙하였다. 언더우드 목사는 처음 얼마동안 목사라는 신분을 밝히지 못하고 알렌이 세운 광혜원의 강사로 일하였다. 그는 한국어를 배워서 말을 좀 할 수 있게 되자, 길가에 나가 노방전도에 열을 올렸다.

바로 이러한 때에 황해도 장연의 솔내에서 전도를 시작했던 서상륜이 서울로 언더우드 목사를 찾아와 솔내교회를 한번 방문해 달라고 간청하였다. 얼마후 그곳을 방문한 언더우드 목사는 벅차게 소용돌이치는 감격을 누를 길이 없어 감개무량한 마음으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왜냐하면 이 나라에서 국법에서 금하는 기독교를 믿는다는 것도 어려운 일인데,자기네들 스스로의 힘으로 교회를 세웠고 또 그들 자신이 교히를 운영해 나가는 모습을 보게 되었으니, 언더우드 목사는 한국인을 향하는 뜨거운 애정이 저절로 솟아오름을 금하지 못하였다. 언더우드 목사는 1887년 가을에 솔내에서 7명의 신자들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서울에 돌아온 그는 서울에도 교회를 세워야 하겠다는 확고한 신념을 갖었다. 1887년 9월 27일에 언더우드 목사는 새문안의 자기 사랑방에 14명의 신자를 모아 놓고 예배를 드린 후 정식으로 교회의 설립을 공포하였다. 이것이 오늘의 새문안교회의 창립이다.

이 역사적인 한국교회 최초의 교회가 조직되던 날,새문안교회 창설예배에 한국교회 최초의 전도자인 백홍준과 서상륜,한국교회 최초의 선교사인 알렌과 언더우드 그리고 한국인에게 최초로 복음을 전달한 로쓰 목사등, 이렇게 거대한 인물들이 한자리에 앉았다. 이는 장차 한국 장로교회가 그 거보를 내딛고 됨을 축복하고 있는 듯 빛나는 영광의 모습이었다.

감리교인 아펜셀라 선교사는 교인들을 위한 예배 처소로 정동에 있는 집 한채를 구입하였으며 1887년 10월 9일에 정식으로 예배를 올렸다. 이 날에 교히 관리책임자의 아내 김씨(Pauline Kim)의 조모가 세례를 받았다. 이것이 오늘의 정동제일교회의 출발이다.

언더우드와 아펜셀라의 두 목사는 한국에 처음 들어와 기독교 복음을 직접 전하면서 교회를 세우는 일에 열심하는가 하면 학교를 세워 교육사업을 한느데도 남다른 정열을 기울여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그들은 기독교 진리에 입각한 새 과학 문명을 한국인들에게 교육하며 또 새로운 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하여 언더우드는 경신학교를 세웠고 아펜셀라는 배재학교를 시작하였다. 언더우드 목사는 또 아펜셀라 목사와 협력하여 대학을 세우는 일에 성공하였다. 연세대학교는 바로 그들이 설립한 것이다. 한편 감리교 선교사인 스크랜톤(Scranton)부인은 여성 교육을 위하여 이화학당을 개설하였는데 이것이 오늘의 이화여자대학교로 아시아 굴지의 대학으로 크게 발전하였다.

위에서 소개한 두 분 최초 선교사인 뒤를 이어 내한한 선교사는 호주 장로회 소속인 헨리 데이비스(J.Henry Davis) 목사였다. 그는 남한 지방을 여행하면서 전도하였는데 1890년 4월 15일 아깝게도 과로한 나머지 급성 폐염에 걸려 부산에서 객사하였다. 그의 뒤를 이어 호주 선교사들이 여럿이 도래하였다.

1892년에는 미국 남장로회에서 파송한 레이놀즈(W.D.Reinold,)를 비롯한 6명의 선교사가 함께 입국하여 주로 전라도 지방에서 선교하였다.

1895년에는 미국 남감리교에서 보낸 레이드(C.E.Reid)목사가 들어와 경기도 송도를 중심하여 선교사였다.

카나다 장로회에서는 1893년에 맥켄지(William John McKenzie)를 한국에 파송하여 선교사업에 착수케 하였다. 불행하게도 그는 솔내 지방에서 전도하다가 열병으로 별세하였다. 이 소식이 본국에 전해지자 교회는 뒤를 이어 5명의 선교사를 더 보내어 복음을 전파하게 하였다. 캐나다 장로회는 주로 함경도 지방을 중심하여 전도하였다.

1907년에는 성결교회 계통인 동양선교회(Oriental Missionary Society)에 카우만(C.E.Cowman)과 길보른(E.A.Gilborne)이 한국을 찾아왔고 그 이듬해에는 영국 구세군(The Salvation Army)의 선교사들이 들어왔다.

이처럼 한국교회 초창기에 각 교파의 여러 선교사들이 들어왔으나 모두 함께 고생하면서 각자가 맡은 선교구역에서 최선을 다해 전도한 결과, 오늘의 이 땅에 수많은 교회를 이룩하는데 성공하였다.


*3. 네비우스 선교정책의 수립
한국이라는 토양에 기독교 복음을 부식하는데 있어서 그 선교정책을 바로 설정하는 일이란 매우 중대한 과업임에 틀리없었다. 한국을 찾은 선교사들 중의 대부분은 보수적 신학 사상과 독실한 신앙을 소유하고 있어서 그리스도의 희생 봉사의 정신을 몸소 실천하면서 십자가의 도를 전하였기이 때문에, 수천년래 한국민의 마음 속에 뿌리박혀 잇던 샤마니즘(Sharmanism)의 무지와 또는 유교의 형식주의,불교의 미망을 타파하는데 상당한 성과를 올렷음은 좋은 평가를 받을만 하다.

한국 주재 선교사 일동은 1890년 6월 말,중국에서 다년간 선교에 종사한 네비우스(John L.Nevius)목사를 초청하여 세미나를 열었다. 그 결과 한국 선교사업을 위한 기본 원칙을 다음과 같이 설정하였다.

첫째로, 한 사람을 그리스도에게 인도하였으면 끝까지 떠나지 말고 붙들어 그가 개인전도하는 일군이 될 때까지, 자기의 직업에 종사하면서,이웃에게 그리스도를 전할 수 있게 되기까지 끈질기게 지도해야 한다.

둘째로, 교회의 운영과 기구 조직은 그 교회 자체가 능히 감당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기획 실천하여 발전시키도록 한다.

셋째로, 교회에서 전도사업을 감당할만한 인물이 나오거나 재정을 공급할 수 있는 유자격자가 생기면 그들을 선임하여 교회의 지도 일군으로 세운다.

넷째로, 교회당 건축은 그 교인들 자신의 힘으로 하게 하되 건축의 구조나 모양은 한국 고유의 모습으로 지방의 교회당답게 한다. 교회사가인 마삼락(Samuel H.Moffett)은 여기에 두가지를 보충하여 설명하였다. 즉 성경연구반을 조직하여 성경 지식을 신도들에게 보급시키도록 할 것과 외국 선교사들에게는 개체교회의 담임을 삼가도록 한 내용이었다.

위가 일반적으로 네비우스 선교 방안이라고 불려지는 것이며 이를 대별할 때 자력 전도,자치 제도,자급 운영의 셋으로 요약하게 된다. 그 중심 이념은 한국교회로 하여금 피 선교지로서의 의타심이나 경제적 무능력을 배제케 하여 '자립하는 교회'로서의 토착화하는 기초를 닦게하려는데 목표가 있었다. 초기 한국교회 특히 장로회는 이 방안을 채택하므로 그 이후의 선교 정책에 직접적이고 깊은 영향을 미치게 하였으며 한국교회 성장을 위해 상당한 공헌을 남겼다.

1893년에 조직을 본 장로회에선교사공회는 이 네비우스 방안을 참고로 하여 보다 더 획심적인 몇가지 내용을 첨가 확대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상류 계층보다 서민층 전도를 우선한다.
(2) 부녀자 전도와 여성을 위한 교육에 주력한다.
(3) 지방에 초등 교육기관을 널리 설립한다.
(4) 교역자 양성에 특별 유의한다.
(5) 성경 번역의 진행과 보급에 노력한다.
(6) 모든 기독교 문서에 한글을 사용한다.
(7) 선교사가 돕는 교역자 수를 줄이고 자급하는 교회로 육성한다.
(8) 한국인 스스로 동족에게 전도하는 자립 전도의 훈련을 강화한다.
(9) 의료 선교사는 시료와 복음 전도를 병행한다.
(10) 퇴원 환자의 집을 방문 전도한다.

이 선교 정책은 당시 한국교회 발전을 위하여 매우 창조적이었고 고무적인 전도 방안으로서 교회,학교,병원의 세 면을 통한 입체적인 선교 형태를 갖추어 한국 교회사상 기여를 크게 남겼다.

*제2장 성령강립과 교회의 일대부흥

*1.민족적 자각에 따른 신자의 증가
우리 땅에서 치른 청일전쟁과 일본의 입김에 의하여 진행된 갑오경장은 모두가 다 한국 민족을 향한 심각한 반성과 커다란 각성을 일으키기에 충분하였다. 이로 인하여 국민들은 정부의 부패와 무능력을 뼈저리게 느꼈으며 타국 군대들이 우리 국토에서 싸우는데도 말 한마디 못하는 한심한 정세에 통탄하여 마지 않았다. 갑오경장은 청과의 일체의 관계를 단절하고 내정개혁을 선포하고 독립을 외쳤으나, 이것도 일본 제국주의가 적극적으로 한국에 침입하는 계기가 되었음에 불과하였다. 그런고로 이를 깨달은 뜻있는 인사들은 치를 떨며 일어설 수 밖에 없었다.

1895년 서울의 어느 선교사의 보고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한국의 실정은 변해가고 있다. 일반 백성들 사이에 각성의 기미가 점차 드러나고 있다.'
라고 하였고, 그래함(Graham Lee) 선교사는 자신의 1896년도 연례보고서에서
'전쟁은 한국인의 마음에 큰 충격을 주었다. 저들은 삶의 참길을 찾고자 애쓰고 있다.'

라고 말하여 한국민의 애타는 심정을 피력하였다. 이러한 때에 기독교 복음은 새로운 희망을 한국 민족에게 던져 주었다. 사람들은 교회로 몰려들어 신자 수는 급속도로 증가하였다. 1895년에 530명이던 신자가 1896년에 3,276명으로, 1900년에는 7,690명으로 대폭적으로 증가하였다.

1889년부터 1893년까지는 100명에서 150명 사이를 오르내렸다. 그때와 비교하면 너무나 현격한 차이를 나타내고 있다. 그때는 그리스도에게로 들어오고 있으면서도 탐색적인 경향이었지만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참 생명이 있음을 자각했기 때문이었다.

*2. 애국 인사들의 기독교인 속출
개화 인사들 중에 조국과 민족의 운명을 근심하면서 혁신운동을 진행한 인물들이 여럿이 일어났다. 1894년 배재학당의 교사인 이승만이나 1892년 언더우드 신학반 수료한 홍정후나 미국에서 최고 학부를 마치고 1895년 귀국한 윤치호등이 바로 그러한 인물들이었다. 그들은 1896년 협성회를 조직하였고 다수의 신진인물들을 규합하였다.

1896년 미국에서 귀국한 서재필은 독립신문을 창간하였다. 독립신문을 통하여 대중의 계몽에 성공한 서재필은 독립혐회를 구성하였다. 독립협회는 중국 사신이 오면 환영하던 모화관을 개수하여 독립관으로 만들었고 서재필,윤치호,홍정후 등은 주일마다 집회를 열어 백성들 사이에 자유 사상과 민주주의를 고취하였다. 또한 영은문을 헐고 독립문을 세워 국가 자주권의 회복을 역사 의식적으로 표방하며 나섰다.

독립신문과 독립협회가 행한 부정 부패의 공격은 정부 당국자들에게 심한 불쾌감을 일으켜 정부는 드디어 1898년 12월에 독립협회 해산을 명령하였으며 이승만 등 17명을 체포하였다.

선교사들은 감옥을 방문하여 애국 인사들에게 기독교 서적을 전달하면서 전도하였다. 이들은 새로운 설교를 듣고 새로운 책을 읽으면서 진리를 알게되어 드디어 1901년 3월에 12인이 함께 세례를 받았다. 이것이야말로 고관 인사 층에서 대량으로 기독교인이 된 시초이다.

옥중에서 신자가 된 독립협회의 지도자들은 출옥한 이후에도 신앙생활을 계속하면서 한국의 사회와 종교 정치 등 각 방면에 많은 업적을 쌓았다. 특히 사회와 교회를 접근시키는데 세운 공은 뚜렷하였다.

*3. 한국 최초의 대부흥운동
나라의 문호가 개방되자 열강들이 물밀듯이 들어와 저마다 침략의 기회를 노리고 호시탐탐하였다. 1905년 노일전쟁이 끝나자 승리한 일본은 모든 열강의 힘을 물리치고 정치,군사,경제 모든 면에서 이 나라에 대한 우선권을 차지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백의 민족은 이러한 정세에 안타까이 가슴을 쳤지만 약소 국가의 설움만이 닥쳐올 뿐,스스로 해결하지 못하는 궁지에서 더욱 더 몰려가고 있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 1907년 한국교회 최초의 대부흥운동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부흥운동의 불길은 190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원산에서 감리교 선교사 하아디(R.A.Hardie)목사가 기도하는 중의 새로운 영감을 받았다. 그는 이 체험을 동료 선교사들에게 간증한 것이 말할 수 없이 큰 은혜가 되었다. 소문이 퍼지자 평양에 있는 선교사들도 같은 모임을 가졌다. 여기에는 감리교나 장로회가 자리를 함께 하였으며 외국 선교사와 우리 나라 교인들도 한결같이 은혜를 사모하였다. 때마침 미국 뉴요크로부터 죤슨(Howard A. Johnson)목사가 달려와 인도와 영국에서 일어난 세계적 대부흥운동에 관하여 힘있게 전파하였다. 은혜를 갈망하여 간구하는 소리는 하늘에 닿아,1907년 정월에 접어들면서 그 절정에 도달하였다.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모인 이 집회는 낮에는 성경 공부, 밤에는 전도강연 집회로 대성황을 이루었다. 죄를 고백하는 기도는 천지를 진동하였으며 찬송은 폭포소리 같았고, 한날 밤에 일어난 성령의 역사는 드디어 폭발하여 크나 큰 위세를 떨치고야 말았다.

그날밤에 일어난 과정은,사람들은 다투어 일어나 자기의 죄를 고백하였다. 소리내어 울면서 마루에 엎드려 주먹으로 마룻강을 치면서 지은 죄를 통회하였다. 한 사람이 일어나 죄를 고백하면 온 회중이 소리를 내어 아멘을 연발하며 기도를 외치는데, 이처름 뜨거움이 또 있을 수가 없었다. 집회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밤이 지나고 새벽 먼동이 틀때까지 계속되었다. 여기에서 일어난 부흥의 불길은 전국적으로 퍼져 나갔다. 이로 인하여 그 얼마나 많은 사람이 신자가 되었으며 또 얼마나 많은 교회가 설립되었는지 모른다.

이후로 교인들은 성수 주일, 기독교 윤리의 엄수,성경공부,전도활동 등 그리고 주께 바치는 생활에 스스로 힘쓰게 되었으며 한국교회는 이 부흥운동에서 얻은 힘으로 그후 거듭 일어나는 일제 하에서 수난에 박해를 능히 견디며 참아 나가게 하였다. 특히 부흥사경회는 이 운동을 계기로 하여 한국교회 생활에 있어서 하나의 영속적인 연례적 행사처럼 되어지고 말았다.

*제3장 교회 행정기관 설정
(서론)
1919년 3.1독립 운동에 있어서 기독교가 그 중심 세력이 되었음은 세인 공지의 사실이다. 해외에서의 운동이나 국내에서의 독립운동의 거사와 행동이 모두 교회를 중심하여 추진되었기 때문이다. 일제의 박해와 탄압은 한국교회와 신도들에게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교회는 여기에 굴하지 않고 일어나 민족을 위한 길잡이가 되었고 또 봉사자가 되었다. 이는 오히려 한국 민족을 교회로 접근시키는데 주효하였으며 민족 기독교로 발전하는데 전화위복이 되었다.

*1.한미 장로회공의회의 발족
선교사의 증가와 선교 지구의 확장으로 선교사 공의회는 분화되어 공의회 위원회(Committee of Council)란 것을 설정하였다. 1895년에 서울 위원회와 평안 위원회가 조직되었고 1901년에는 전라 위원회(남장로회 선교회),경상 위원회(호주장로회 선교회) 가 그리고 1902년에는 함경 위원회(카나다장로회 선교회)가 또 조직되었다.

위의 선교사 공의회에는 1901년부터 한국인 대표가 동참하였다. 즉 그 해 9월 20일 서울 새문안교회에서의 제1회 장로회 공의회에 한국인 9명과 선교사 25명이 참석하였다. 장로회 공의회의 발족은 한국인 신자들이 역사상 처음으로 교회 최고 처리기관에 참가한 획기적 사실로서 한국 민족교회 발전 과정에 있어서 하나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한국에는 아직 노회가 없어서 우리는 임시로 장로회 공의회라는 전국적인 회의를 마련하였다. 그러나 이 회의는 앞으로 노회가 될 것임에 틀림이 없다.' 라고 한 것과 같이 장로회 공의회는 분명히 앞으로 한국인 스스로가 움직이는 대한예수교장로회 노회의 전신이었음에 틀림이 없었다.

*2. 대한독노회 설치와 해외선교의 착수
1907년 대부흥회의 불길이 전국적으로 퍼진 그 해에 한국교회는 또 다른 큰 수확으로 노회를 갖게 되었다. 1906년 선교사공의회는 다음 해에 7인의 목사 후보생이 안수 받게 될 것을 예견하여 목사 임직을 위한 절차를 결정해 놓았다. 즉 순서위원,신조 작성위원 및 교회정치 기구위원 등을 임명한 것이었다.

1907년 9월 17일 오전 9시,노회 창립의 역사적인 막이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열렸다. 여기에는 한국인 장로 36인과 선교사 33인과 찬성회원 9인등 모두 78인의 회원이 참석하여 대한예수교장로회 제1회 노회를 성립시켰다. 이 회합이야말로 한국민족 역사 상에 최초의 민주적 대의 회합이었다고 하는데 크나큰 의의가 있다.

이 독노회는 가장 중요한 안건으로서 1901년에 설립된 장로회 평양신학교 졸업생 7인을 안수하여 목사로 세웟으며 그주의 한 사람인 이기풍 목사를 제주도로 파송하여 선교사업에 종사케 하였다.

한국교회는 이렇게 출발하면서부터 '선교하는 교회'로 등장하였다. 블레어(W.N.Blair,)선교사는 "새로운 한국교회의 첫 모임은 사실상 선교사를 보내는 모임이었다"라고까지 언급하였다. 그때에 선교 정신은 온 교회에 넘쳐 있었고 곧 뒤를 이어 1909년에 최관흘 목사를 시베리아로,한석진 목사를 일본 도오꾜에 파송하였으며, 1910년에는 백만구령운동에 호응하여 김영제와 김진근의 두 목사를 만주 간도 지방으로 보냈다. 감리교에서는 1907년에 국내선교회를 조직하였으며 3년 후에는 이를 "내외지 선교회"로 확장하여 손정도 목사를 블라디보스톡에 파송하여 시베리아 선교에 종사케 하였고, 또 장로회에서는 방화중 목사를 멀리 美州로 보내어 캘리포니아와 멕시코에 있는 이민 동포를 위하여 선교케 하였다.

1907년부터 1910년 사이에 한국교회는 일본과 중국,만주와 시베리아 그리고 미국 대륙과 멕시코에 이르기까지 거창하게 선교사업을 일으켜 세계 교회로부터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3. 장로회총회 창설과 조선강리회의 결성
1907년 독노회가 창설된 이레 교세는 승승장구하여 불과 6년밖에 지나지 아니하여 총회의 결성을 보기에 이르렀다. 1911년에 모인 제5회 독노회는 다음 해에 총회를 조직할 것을 구상하여 그 준비 작업에 몰두하였다. 결국, 독노회 산하의 일곱 대리회가 승격되어 노회의 조직을 보았고 목사 52명,장로 125명과 선교사 44명 등 221명의 회원이 모여 총회가 조직되었다.

총회는 그 최초의 안건으로 독노회의 창립이 선교하는 교회를 지향한 것과 마찬가지로 선교 교회로서의 영광을 다시 한번 과시하였으며 그리고 중국 산뚱성에 선교사를 파송하기로 결의하였다. 이 총회를 위하여 만국장로회 연합총회와 미국 남장로회 총회로부터 문안과 축사가 답지하였으며,그리고 창립총회는 미국 남.북장로회와 카나다장로회,호주장로회의 각 총회를 향하여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가 성립되었음을 통고하였다. 이는 한국교회가 세계교회와의 유대를 도모한 현명한 처사로서, 총회 출발부터 세계 교회와의 연결을 우의깊게 모색하였는 고로 예의 바른 행동으로 칭찬을 받을만 하였다.

한국에 있어서의 감리교는 미국의 남.북 감리교에서 파송된 별개의 선교사들에 의하여 가각 독자적 노선을 걸었던 것이나 마침내 이 들이 합동하여 하나의 '조선 감리교'를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1907년 6월 남.북 감리교는 '조선인 교역자를 양성하기 위하여 신학당을 설립하기로 가결하므로', 이 결의가 곧 합동의 실마리가 되었고, 학교 이름은 남감리교와 북감리교가 합동하여 설립했다고 하여 협성신학교라 하였다.

1925년 미국 남.북 감리교의 대표들은 모두가 양 교파의 합동을 찬성하였고 수차의 애로를 극복하면서 1930년 기독교 조선 감리회(Korean Methodist Church)를 결성하는데 도달하였다. 이 남.북감리교의 합동은 한국에 있어서 교파 합동의 효시가 되었으며, 미국의 남.북 감리교의 합동보다 앞서 이루어져 세계 기독교 역사상에 매우 중요한 의의를 지니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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