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펜젤러의선교활동과 '한국 감리교회'의 설립
1. 머리말 - '한국 교회'
한국 교회의 시작을 언제로 보아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한국기독교사에서 오랫동안 숙제로 남겨져 왔다. 이 문제에 대한 답은 교회마다 다를 수 있으나, 물음은 감리교·장로교 등 모든 교파에 던져지는 것이다.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이, 한국 교회의 경우, 각기 다른 기준에 의해 제시되어 자기 교회의 설립 상한선을 높이려는 작의성(作意性)으로 종종 나타났다.
우선 교회란 어떻게 정의되며 교회의 시작은 언제부터라고 할 수 있는가.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사람들의 공동체'를 말한다. 그 공동체가 체계적인 조직을 갖출 수도 있고 미처 그렇게 되지 않을 수도 있다. 또 그 공동체가 일정한 회집 장소나 건물을 가질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교회를 이렇게 정의할 수 있다면, 따라서, 외적 조건들의 갖추어짐에 관계없이,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어떤 형태로든 공동체를 지속시켜 나간다고 할 때 이미 교회는 시작되었다고 할 것이다. 이 말은 '믿는 이들'이 존재하는 것이 곧 교회 성립의 제일 요건이라는 뜻이다.
공동체를 이루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우선 공동체를 이룩할 구성원, 곧 일정한 신급(信級 : 자격)을 갖춘 교인이 있어야 한다. 구성원이 있다는 것과 공동체를 형성했다는 것은 공동체적 의식(행위)에 의해 확인된다. 곧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이는 회집과 예배,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상징(세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됨의 증거(성찬)를 통해 확인될 수 있다.
이러한 공동체적 행위는 공시(共時)적 혹은 교호(交互)적으로 이루어 질 수도 있고, 지속적 혹은 간헐적으로 이루어질 수도 있다. 이러한 공동체적 행위들이 동시에 이뤄진다면, 그것은 교회가 이뤄졌다는 명백한 증거로서 제시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교적인 불신사회에 복음이 전파될 때, 그러한 공동체적인 행위들이 동시에 이뤄지기를 기대한다는 것은 곤란하다. 이런 점을 전제로 할 때, 교회의 시작(성립)의 근거를 어디에 두어야 할 것인가. 필자는 앞서 열거한 공동체적인 의식이 지속적 혹은 교호적으로 이뤄질 때 교회가 이미 시작되었다고 말하고 싶다.
여기서 문제를 더 심화시킬 필요가 있다. 한국 교회의 시작(성립)을 언제로 보아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다. 만주에서 수세(受洗)한 한국인들이 거기서 번역된 성경을 가지고 들어와 전도한 결과 이루어진 신앙공동체(교회)를 거론할 경우, 서간도의 한인촌교회[金靑松]와 서울교회[徐相崙], 의주교회[白鴻俊], 그리고 소래교회[徐景祚] 등이 거론될 수 있으나, 일반적으로는 1885년경에 설립되었을 황해도 소래교회를 그 시작으로 보고 있다. 만주를 통해 들여온 성경에 의해 이룩했을 신앙공동체에 대하여는 필자가 이미 언급한 바가 있다. 그것은 한국 감리교회의 설립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고 또 이 글이 의도하는 바도 아니므로 여기서는 더 언급하지 않겠다.
이 글에서 목표로 하는 것은 선교사를 통하여 이루어진 한국 교회 특히 한국 감리교회의 경우, 신앙공동체인 교회가 어떤 과정을 거쳐 이루어져 갔는가를 살펴보자는 것이다. 한말에 입국한 선교사들과 외국인들이 이룩했을 신앙공동체는 1885년 6월 28일 저녁에 한국에서 가진 최초의 종교적 집회와 관련시킬 수 있을 것이다. 이날 저녁 8시에 헤론 부부와 알렌 부부, 그리고 스크랜튼 대부인이 모여 '공식 주일예배'를 드렸다. 늦어도 1년 반의 시간이 경과한 후에는 외국인들의 집회에 한국인도 합석하여 예배를 드린 것 같다. 1887년 2월 27일(주일), 아펜젤러가 인도한 예배에는 50여 명의 외국인들이 참여하여 방이 꽉 찼으며 "한국인들이 우리 예배에 큰 관심을 가졌다"고 한 데서 어렴풋이 엿보인다. 문제는 외국인들만이 모였거나 외국인들이 주체가 되어 이룩한 공동체를 '한국 교회'로 볼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필자는 외국인들이 한국에서 가졌던 신앙공동체를 한국 교회사의 한 영역으로 수렴하는 것이 타당하다고는 생각하지만, 그것을 한국인이 주체가 된 '한국 교회'로 인식할 수 있겠는가에 관해서는 회의적이다. 그 공동체는 한국에서 세워졌지만 아직 한국인과 접맥되지 않았거나, 공동체의 형성과정과 운영에서 한국인이 주도적인 역할을 감당하였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한국 교회'는 한국에 있는 교회라기보다는 한국인이 그 공동체에서 주체적인 역할을 감당한 교회를 가리킨다. 초기에 외국인만으로 이루어진 공동체는 '한국 교회'라기보다는 한국에 있는 '외국인 교회'라고 해야 할 것이다. 1885년에 시작된, 외국인들만으로 이룩된 신앙공동체는 '한국 교회'의 출발로 보기는 곤란하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둔다면 이 글이 의도하는 바는, 첫째, 한국인이 주체가 된 초기 '한국 감리교회'는 어떤 과정을 거쳐 성립되어 갔는가 하는 질문을 전제로, 둘째, 한국 감리교회 성립에 초석이 된 미감리회 선교사 아펜젤러(Henry Gerhard Appenzeller, 1858∼1902)의 역할은 어떠하였는가, 그리고 그 해답에 대한 실마리로 아펜젤러의 초기 선교활동에서 신앙공동체 성립의 중요한 요건인 구도자 훈련과 세례, 공중예배와 성찬 등의 공동체 의식(행위)이 언제부터 나타나게 되었는가를 중점적으로 살펴보자는 것이 된다. 여기에 사족을 달자면, 한국 감리교회의 요람이라 할 정동제일교회의 설립을 1885년 10월로 잡았던 결정에 대하여 새로운 검토를 요청하는 뜻도 없지 않다.
아펜젤러는 미 북장로회의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1859∼1916)와 함께 1885년 4월 5일 부활주일 오후에 제물포에 도착하여 선교활동을 전개한 최초의 미 감리회 선교사 가운데 한 분이다.
아펜젤러에 관해서는 이미 전기와 논문들, 자료들이 발표된 바 있다. 그러나 그가 남긴 일기와 다른 여러 기록들을 면밀히 검토하여 한국 선교 초기의 실상과 한국 교회가 성립되어 가는 과정을 밝히는 것은 아직 연구를 기다리고 있는 형편이다. 아펜젤러의 기록은 한국 선교 초기에 관한 자료로서는 그만한 가치를 가진 것이 없다고 할 정도로 중요한 것인데도 그 자료에 대한 분석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필자는 그리피스(WM. E. Griffis)의 '아펜젤러 전기'(A MODERN PIONEER IN KOREA : The Life Story of Henry G. Appenzeller)를 번역하고 그의 초기 교육·선교 활동을 중심으로 몇 편의 글을 발표한 바 있다. 그 글 가운데서 배재학당의 설립 경위와, 교육의 이념과 제도, 신앙 훈련과 학생활동 등 그의 교육·선교 활동은 비교적 자세히 언급하였으므로, 여기서는 교육활동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고 그의 복음전도 활동을 중점적으로 다룰 것이다. 이 글은 복음전도 활동에 관해 이미 발표했던 글을 새로 보완하고 수정한 것이다. 이미 언급한 문제를 다시 논의하는 이유는 앞서의 글이 소략하게 다루어진 면도 있지만, 그의 초기 복음전도 활동을 정동교회를 중심으로 한 한국 감리교회의 성립에 초점을 맞춰보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이 글의 초점이 한국 감리교회의 성립과정에 있는 만큼, 그 시기도 아펜젤러의 입국 이후 3년간(1885∼1888)의 활동에 국한하였다. 이 기간에 구도자 훈련과 세례, 예배와 성찬 등의 신앙공동체의 의식(행위)이 모두 나타나고 있는데, 이 점은 바로 신앙공동체인 한국 감리교회가 형성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 글에 사용된 자료는 '아펜젤러 문서'(H. G. APPENZELLER PAPERS) 중에서도 주로 '아펜젤러 일기' 부분이다. 그는 매일 일기를 쓰지는 않았지만, 중요한 일이 있을 때에는 그답게 띄엄띄엄, 그러나 비교적 자세하게 기록해 두었다. '아펜젤러 일기'에는 중간 중간에 '최초의 세례식', '최초의 감리교인' 등 그가 개척적인 선교사로서 중요한 기록과 평가를 남겨 놓아, 한국의 초대 교회가 어떻게 성립되었는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 군데군데 보인다. 이 자료를 이용하면서, 첫 선교사의 분주한 일상생활 중에서도 자신의 기록을 남긴 아펜젤러 목사께 감사와 존경을 드린다.
2. 초기의 전도활동 - 외국인
아펜젤러의 전기를 쓴 그리피스는 아펜젤러의 신앙과 선교활동과 관련하여 이렇게 썼다.
"한국에서 나의 사랑하는 교회의 초석을 놓는 데에 내 평생을 기꺼이 바치겠다. 아직 건물을 바라보지 말라. 실망할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 건물을 위해 기도하라. 그러면 감리교가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서 꽃 피게 될 것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야망이란 이 나라 전체에서 그리스도를 설교하는 것이다.……내가 그것을 위하여 사는 기간이 최소한 1910년까지는 계속될 것이다. 그러나 주여, 그 기간 동안에 내가 이 한국인들 사이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당신만 알도록 도와주소서. 나는 주께서 내가 이곳에서 한 메시지를 전하라고 나를 보내신 것으로 믿고 있다. 그것은 생명의 메시지이기에 나는 그것을 충실하게 전파하기를 원한다.……영혼을 구원하는 것, 이것이 우리의 유일한 위대한 일이다.……그것은 영광된 일이 아니겠는가. 악마는 자신이 세워 놓은 조상숭배, 관습, 방탕 등으로 열심히 우리를 침범하나, 우리는 그를 공격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누구의 이름으로 일을 하고 있는지 우리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영광된 복음의 능력을 알고 있다.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아펜젤러는 북쪽의 호랑이 사냥꾼 등에게며 그리고 남쪽의 농사꾼들에게 그들의 말로 복음을 설교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
위의 글은 아펜젤러의 한국에서의 선교활동의 핵심을 잘 드러내는 말이다. 그는, 당시 북감리교 해외선교부가 매클레이 목사를 통해 한국 정부로부터 교육과 의료 사업을 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기 때문에 거기에 따라 처음에는 복음선교를 위한 교육에 전념하는 듯이 보였으나, 그의 중심에는 기독교 신앙의 복음 진리를 널리 전파하는 것이 선교사로서의 그의 주된 임무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복음을 통해서라야만 이 땅의 민족을 죄와 사망에서 해방시키고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이 염원은 일찍이 그의 제물포 도착을 알리는 1885년 4월 9일자 편지에 보였으니, 1885년 4월 5일 부활주일에 도착했음을 알리면서 그는 "오늘 사망의 빗장을 산산이 깨뜨리시고 부활하신 주께서 이 나라 백성들이 얽매어 있는 굴레를 끊으사 그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누리는 빛과 자유를 허락해 주옵소서!"라고 간구했던 것이다.
그의 이러한 뜨겁고 간절한 신앙은 그의 가문의 신앙 전통에 뿌리한 것이다. 그의 부계(父系)는 스위스에서 이민 온 루터파의 신앙을 가졌고, 모계(母系)는 타락한 현대 문명의 이기(利器)를 거부하는 독일계의 메노나이트(Menonite)파의 신앙을 갖고 있었다. 대대로 내려온 이러한 뿌리깊은 신앙이 이 젊은 펜실베니아인을 뜨겁게 하였다. 그는 프랭클린 마샬대학 재학 시절, 감리교회에 출석하는 신앙적 결단을 내렸다. 이렇게 한 것은 그 전에 출석했던 교회보다 감리교회의 분위기가 이 젊은 열정의 신앙인에게 뜨거움을 안겨 주었기 때문이다.
한국에 선교사로 왔던 아펜젤러는 초기에는 복음선교사가 행하여야 할 전도활동을 펼 수가 없었다. 복음전도는 입국후 상당한 기간이 경과한 후에 가능하였다. 1885년에 미 북감리교 선교사로 왔던 그와 스크랜튼은, 교육과 의료 사업에 한해서 활동할 수 있었다. 이것은 그 전 해 매클레이 목사가 와서 한국 정부로부터 허락받은 내용에 따른 것이었다.
복음전도 활동에 어려움을 느끼고 있던 아펜젤러는 한국 정부의 권위를 최대한 인정하면서 전도를 위한 집회를 조심스럽게 전개하였다. 그는 한국인에게 복음을 전하기 전에 언더우드 등과 함께 재한(在韓) 외국인의 예배를 인도하는 한편 일본인들의 성경공부를 인도하게 되었다.
아펜젤러가 한국에 두번째로 도착한 그 해(1885) 8월과 그 이듬해 4월에 이미 학교 일을 시작했다고 지적한 바 있다. 이에 앞서 1885년 복음선교사들의 입국에 맞춰, 알렌(Horace N. Allen)이 최초의 공식 주일예배라고 말한 주일예배가 1885년 6월 28일에 거행되었다. 선교사들만으로 모이는 주일예배가 정기적인 성격을 띈 것으로 확인되는 것은 "그후 우리는 언더우드 형제 집에서 '정기예배'(regular service)를 드렸다"고 한 기록에서다.
아펜젤러는 같은 기록에서 "우리는 지금 외국인을 위한 예배당을 건축하고" 있으며, "이 교회는 연합의 기초 위에 이루어질 것"이라고 했다. 1886년 8월부터는 미국 공사관에서 주일예배를 드렸다. 이 정기예배 모임이 교회로 발전하게 되는 것은 1886년 10월말부터인데, 아펜젤러는 다음에서 보여주는 바와 같이 재한 외국인들의 '연합교회'(The Union Church)의 목회자가 되는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하였다.
"지난 주와 그 전 주에는 연합교회의 헌법을 마련하기 위한 위원회에서 봉사하였다. 지난 수요일 저녁에는 우리의 보고서가 약간의 수정을 거쳐 회중들에 의해 채택되었다. 오늘 밤에는 교회의 임원을 선출하기 위한 다른 모임이 있었는데 결과는 다음과 같다. 담임목사 아펜젤러……구성원간의 조화가 잘 이뤄지고 있는 연합교회의 목회자가 된다는 것은 영광스럽다. 하나님께서 번영되고 성공적인 해를 우리에게 허락하시기를 빈다."
재한 외국인 연합교회의 담임목사는 아펜젤러였지만, 그만이 예배와 설교를 주관한 것은 아니다. 설교의 경우, 언더우드와 교대했으며 다른 목사들도 설교하였다. 1886년 11월 추수감사주일에는 언더우드 목사가 '한국 기독교사상 최초의 추수감사절 설교'를 했다. 그 이듬해 2월말에는 50여 명이 모여 예배실이 꽉찰 정도로 성장하였다. 1887년 12월 25일(주일)에도 교회는 만원이었다.
아펜젤러는 오전에 연합교회에서 담임목사로 봉사하는 한편 1886년초부터 오후에는 일본인을 위한 성경공부를 지도하기 시작하였다. 이 성경공부는 1885년에 한국에 온 일본 공사관의 직원 하야카와 데찌야(Hayakawa Tetzya)와 그의 동료 두 사람과 함께 시작하였던 것이다. 일본인 성경공부를 같이 시작한 하야카와에 대하여 그는 이렇게 썼다.
"그는 지난 가을에 이 도시에 와서 우리와 친교를 맺고 주일에는 우리와 함께 성경을 연구하였으며 우리 기도회에도 참석했고 내가 그에게 교회 출석을 권하자 그는 기꺼이 응했다. 일본 북부에 있는 대학을 다닐 때 그는 이미 기독교에 관해서 배워 알고 있었다. 믿음 좋은 총장이 씨를 뿌렸고 나는 지금 그 열매를 거두는 기쁨을 누리고 있는 셈이다. 그는 또 우리 교회의 준회원으로 받아들여졌다. 감리교회가 한국에서도 교인을 얻은 셈이다. 이곳 주민들이 하나님을 찾고 그들을 교회와 하나되게 할 날이 어서 오게 하옵소서."
일본인을 위한 이 성경공부는 이 해 4월초에도 3명으로 진행되었다. 이들은 여전히 일요일 오후 모임에 정기적으로 참석하여 마태복음으로 성경공부를 시작했다. 아펜젤러는 그 해 부활절에 그들 가운데 한 명에게 세례를 베풀기를 기대하였고, 이런 예비적인 모임이 있은 후에 1886년 4월 25일 부활주일 오후 3시에 '한국 최초의 세례'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아펜젤러 일기에 의하면, 그는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의 도움을 받아 처음으로 스크랜튼 박사의 딸 마리온(Marion Fitch Scranton)과 자신의 첫딸인 앨리스(Alice Rebecca), 그리고 일본인 하야카와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마리온은 적어도 서울에서 최초 수세자의 영예를 얻었는데, 아마도 이 나라 전체에서도 그랬을 것이었다.
일본인들을 중심으로 한 이 성경공부 모임을 두고 그는 자신들의 선교사업이 이미 시작되었다고 자부하였다. 이렇게 계속되던 정기적인 성경공부는 1886년 9월에 이르러 일본 영사 유키 씨의 집에서 모이게 되었는데, 이 때는 7명이 모이게 되었다.
"오후에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기 위해 일본 영사관에서 성경공부반을 열었다. 영사 유키(Yuki) 씨는 종교에 관심이 많은데, 그렇지 않았으면 그의 집을 개방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부인은 기독교인으로서 복음이 다시 설명되는 것을 듣고 매우 기뻐하는 것 같았다. 두 명의 경찰관 혹은 무관이 들어와 함께 성경을 읽었다. 출석 인원이 모두 7명이지만 아마도 늘어날 것이다."
성경공부반이 영사의 집으로 옮긴 후에, 그의 예언대로, 1886년 가을에는 한 모임에 12명이 참석하였다. 이 사실은 일본 기독교계의 The Christian지에 소개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 해 크리스마스를 지난 다음날 주일(26일) 오후에는 일본인들과 함께 즐거운 예배를 드릴 수 있었다. 성경공부가 이제는 주일예배로 발전해 갔던 것이다. 일본인들을 상대로 한 그의 성경공부반은 그 이듬해까지도 잘 운영되어 개종자들이 나왔다. 1887년 4월 10일 부활주일에는 일본 영사관의 무관 수기바시 고이치로(Sugibashi Koichiro) 씨가 세례를 받았다. 이 또한 꾸준히 계속된 성경공부와 아펜젤러의 설득의 결과였다.
아펜젤러가 한국인 선교에 앞서서 일본인들에 대한 선교를 강화했던 것은 선교전략적인 측면이 없지 않다. 한국 정부가 아직도 선교사들의 복음전도를 허락하지 않은 상황에서 일본인에 대한 선교는 한국인 전도를 위한 분위기 조성의 방법이 될 수도 있고 자신이 선교사임을 노골화시키는 기회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가 1887년 8월말까지 일본인들을 위한 예배 처소를 먼저 마련하려고 노력한 것과 관련, "일본인을 통해 들어가기를 추구하는 가능성은 우리에게 열려 있다. 그것은 일본인들의 예배를 위해 잡아놓은 장소를 먼저 구입하고 그 후에 조용히 한국인들에게 접근하는 것이다. 이것은 가능한 한 정당하게 이뤄져야 하고 이뤄질 것이다"고 한 것은 바로 재한 일본인 선교가 한국인 선교에 연결되는 전략임을 알게 한다.
여기서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일본인 성경공부반이 진행되어 가는 중에 서울에는 한 일본인이 '기독교서적판매소'를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성경판매인인 기요노(Kiyono) 씨는 앞서 The Christian지에 아펜젤러를 소개한 데 이어 자신의 사업을 이렇게 소개하였다.
"나는 일본인 거주지역에 가게를 얻었는데, 그곳에는 한국 정부의 관리들과 다른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다. 나는 '기독교서적판매소'라고 쓴 내 가게 간판을 많은 사람들이 신기하게 쳐다보는 것을 알았다. 일본 영사가 나를 방문하여 그 간판을 당분간 철거해 줄 것을 정중히 요구하면서 그러나 판매는 전처럼 계속해도 좋다고 했다. 한국 정부가 일본 영사에게 그런 요구를 했던 것이다. 내가 기꺼이 그 요구에 응했으나, 내 사업은 전처럼 번창하고 있다. 한문과 일본어·한국어로 번역된 성경이 매일 다량 판매되는 것으로 보아 서울에는 벌써 상당량의 성경과 소책자가 퍼져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일본인 권서의 성경판매소에 관한 언급은 1887년 8월말에도 보이는데 내용은 위의 인용과 비슷하다. 1886년 12월 현재 일본인이 경영하는 성경판매소가 서울에 설립되었다는 것은 아펜젤러 자료를 통해 확인되는 것으로 다른 자료에는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위의 글에서 확인되는 대로 1886년말에 다량의 성경이 서울에 배포되어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은 과장이라고 할 수 없다. 이미 중국을 통해 한문성경이 수입되었고 만주와 일본을 통해서는 한국어 성경과 일본어 성경이 들어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3. 한국인에 대한 전도활동
아펜젤러가 배재학당의 개설을 준비하면서 일본인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있을 무렵, 한국인에게도 복음선교를 위한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세운 학교의 출석인원이 3명밖에 되지 않던 1886년 6월 중순까지도 아펜젤러는 "종교를 가르칠 생각은 아직 하지 못하고 매일 한 시간씩 영어만 가르쳤던" 것이다. 선교사들은 한국 정부가 선교의 자유를 허락하지 않았다고 보고 불안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불안은 그의 일기 여러 곳에서 산견(散見)된다. 이런 불안한 상황에서는 한국인들에 대한 선교를 적극화할 수 없었다. 그가 재한서양인 신앙공동체(교회)를 인도하면서 재한 일본인의 성경공부반을 이끄는 데에 남달리 노력한 것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한국 사회의 경색된 분위기로 알렌(H. N. Allen)이나 미국 공사관은 아직 선교의 때가 이르지 않았다고 계속 만류하였고, 그런 상황에서는 재한 외국인에 대한 선교만이 그 젊은 선교사들의 숨통을 틔워 주었다.
그러다가 1887년에 들어서서 한국인에 대한 선교를 적극화한다. 물론 그 결과로 한국 감리교회의 효시인 정동교회도 이 해에 탄생하게 된다. 이 해에 한국인에 대한 선교를 적극화한 것과 관련, 우리는 몇가지를 우선 유념할 수 있다. 우선 한국 사회가 기독교 선교사를 호의적으로 맞아들인다는 증거들이 보인다. 1월 11일 고종의 왕비가 엘러즈(Ellers) 양을 통해 외국인을 초청, 궁안의 호수에서 스케이트를 타도록 하고 고종 내외는 정자에 앉아 구경하며 정중한 식사까지 제공하였다.
아펜젤러는 이 초청 기록과 함께 "학교 일에 순조로운 한 주였다"고 썼다. 초청된 대부분이 기독교 선교사들임을 감안할 때, 이들이 내한한 후에 일관되게 취했던 의료와 교육 선교의 효과가 1887년에 들어서서 이렇게 왕실의 호의를 끌어내고 한국 사회의 기독교에 대한 편견을 약화시키고 있다는 점을 엿볼 수 있다. 또 1887년에 효력을 발휘하기 시작한 한불(韓佛)조약의 영향으로 선교활동에 어느 정도의 여유가 나타나고 있음도 과소평가할 수 없다.
이같은 변화의 조짐이 나타나는 것과 때를 같이하여 아펜젤러 자신은 1887년에 한국인 선교를 적극화하게 되는 계기를 자신의 업무와 관련된 곳에서 두 가지로 찾고 있다. 첫째, 그는 1887년 2월 21일에 왕으로부터 '배재학당'이란 이름을 하사받음으로 자신이 이제는 "정부의 인정을 받아 한국인 앞에 떳떳이 설 자리를 마련"하였다고 이해하였다. 이것은 그가 선교사로서 행하고 있는 선교학교에 대한 정부의 공식적인 인정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따라서 그에게는 복음선교의 공간을 확보하는 데에 좋은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국왕의 허락이 있은 지 20여 일이 지난 후 아펜젤러는 김주사를 시켜 '기독교를 가르칠 집을 구입하는 계획'을 세웠는데, 이것은 단순히 우연의 일치라고만 볼 수 없다.
둘째, 1887년 9월에 도착한 워렌 감독(Bishop Warren)의 내한이다. 워렌 감독은 배재학당 안에 건축하고 있는 건물을 '미국이 한국에 주는 선의와 형제애의 선물'이라고 했다. 아펜젤러는 1887년 9월 14일 한국의 고관들도 참석한 가운데 거행된 배재학당 대학부의 건물 개관식을 두고, 이는 "한국에서 최초로 종교의식 행사를 공개적으로 개최"한 것으로 이해하였다. 이것은 곧 한국 정부와 사회에 이제는 기독교적인 종교행사를 더 이상 감추지 않겠다는 그의 의지를 표명하는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거기에다 그는 워렌 감독에 대한 인상을 말하면서, "어떤 이들의 해석과는 달리 그는 기독교 활동에 대해서 한국 정부가 침묵을 지키는 것은 금지를 의미한다고 생각지 않는다.
그는 활동을 밀고 나가며 자꾸 일을 만들라고 우리에게 지시했다"고 썼다. 이것은 그와 감리교 선교사들이 워렌 감독의 이 말에 고무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선교사들은 이제 선교활동을 '밀어붙이라'는 본국 감독의 약속과 격려를 동시에 받은 셈이 된다. 워렌 감독의 이같은 격려가 있은 지 꼭 20일이 되는 10월 9일 주일날 오후, 아펜젤러는 네 사람의 한국인과 함께 '벧엘'에서 한국인 예배를 시작하였다. 이것이 어찌 우연의 일치라고만 볼 수 있겠는가. 물론 그 전 주에 만주에서 서울에 들린 로스(J. Ross ; 羅約翰)의 방문도 그에게는 큰 힘이 되었겠고, 그 전 주 14명의 한국인들과 더불어 장로교의 언더우드가 새 교회를 시작한 것도 큰 자극이 되었을 것이다.
이에 앞서 아펜젤러는 언더우드와 마찬가지로 비공개적인 장소에서 선교의 대상인 한국인을 접촉하고 있었다. 언더우드가 노 도사(춘경)에게 세례를 베풀 때에 그가 보좌한 것도 그 가운데 하나다. 그는 본국 선교부에 보낸 편지에서 우리가 흔히 한국 최초의 개신교 수세자(受洗者)로 이해하고 있는 노 도사에 대한 사실을 다음과 같이 써 놓았다.
"어떤 한국인 한 사람이 성경과 그 가르침에 대해 알고자 장로교 선교부에 왔습니다. 한국어로 번역된 복음서 몇 권(미국성교서회에 의해 요코하마에서 발간되었음)이 그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는 예수에 관한 간단한 이야기를 대단히 흥미롭게 기쁨으로 읽었습니다.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등과 같은 구절에 깊이 감동하여 '이것은 선하다'라고 말하면서 또한 감리교도에 부응되게 '여호와를 찬양하라'고 했습니다. 그는 끝까지 성경을 읽을 때까지 다른 일은 하지 않았으며, 지금(혹은 지난번 내가 들었을 때)은 한문 주석을 참고하여 복음서를 읽고 있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성경공부를 하고 싶어하는 친구들이 있지만, 기독교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 드러날까 봐서 두려워한다고 했습니다."
노 도사에 대한 아펜젤러의 증언은, 알렌이나 언더우드에 의해 증언된 바와 비슷하다. 그는 새 교리를 듣고 알렌 박사로부터 복음서 한 권을 몰래 가져다가 열심히 읽고, 더 배우려고 언더우드를 찾아갔으며, 주일날에는 외국인들의 기도모임에 참석했는데, 이 즈음에 와서 자원하여 세례 받기를 청원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펜젤러는 노 도사의 수세(受洗)가〈1886년 7월 18일〉에 헤론 박사 댁에서 언더우드 목사에 의해 집례되었음을 확언한다.
"지난 일요일, 7월 18일 오후 언더우드 형제가 서울에서는 처음으로 개신교 선교사에 의한 세례를 노씨에게 베풀었다. 나는 세례식을 도와주는 기쁨을 누렸다. 이 사람은 새로운 교리를 듣고는 알렌 박사로부터 복음서 한 권을 몰래 가져다가 조심하면서 열심히 읽고 더 많은 교훈을 받기 위해서 언더우드를 찾아갔으며, 또 일요일에는 우리의 기도모임에 참석했는데, 이번에 스스로 자원해서 세례를 받고 크리스천이 되기를 청원한 것이다. 세례식은 엄숙한 관심으로 가득 찼다. 그는 세례를 받음으로써 한국인의 분노 가운데 자신을 내어놓는 커다란 위험을 감행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를 불러 새 생명을 주신 주께서 그를 보호해 주시기를 기도했다.
아펜젤러는 초기에는 미국인 어린이와 일본인 등 재한 외국인들에게 세례를 베푸는 한편 한국인 노 도사에게 세례 베푸는 것을 도우면서, 전도활동이 금지되어 있는 한국인에게 차츰 용기를 갖고 전도의 기회를 모색하고 확대해 갔다. 복음전도는 그가 설립·경영하고 있는 학교를 이용하는 것이 용이하고 안전하였을 것이다.
그러던 차에,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국왕으로부터 배재학당(培材學堂)이라는 교명이 하사된(1887년 2월 21일) 것은 아펜젤러에게 커다란 용기를 주었다. 이것은 한국 정부가 학교를 승인하였다는 것이며 지금까지 갖지 못했던 한국인들 앞에서의 설 자리를 얻은 셈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힘입어 그는 복음전도 활동에도 박차를 가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한용경이라는 학생이 복음의 진리를 찾도록 인도했다.
한용경은 1886년 가을에 중국어 성경을 보고는 기독교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1887년 2월에 들어서서 몇 주간 일요일 저녁에 어둠이 깃든 후 빛을 찾아서 아펜젤러에게 갔던 것이다. "나는 그와 다른 사람들에게 하루 속히 빛이 오기를 기도했다." 그는 1885년 4월 5일 부활주일 날 제물포에 도착했을 때부터 한결같이 한국인들에게 빛이 임하기를 기원했다. 그것이 그의 간절한 소원이었다.
그의 소원은 그가 가르치는 학생을 통해 처음으로 나타났다. 1887년 7월 24일, 그는 그의 제자인 박중상이라는 학생에게 세례를 베풀었던 것이다. 그는 일본에 유학하는 동안 기독교에 입교한 듯하며 귀국해서 일본 공사관의 하야카와와 교제하다가 세례 권고를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아펜젤러는 그의 일기에서 이렇게 썼다.
"오늘 나는 우리 집에서 한국 최초의 감리교 신자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그의 이름은 '박즁상'인데, 우리 학교 학생으로 진지하고 총명한 젊은이다. 그는 일본에 갔다 왔으며, 그곳에서 기독교에 대해 처음으로 들었다. 한국에 돌아온 이후로 하야카와 형제와 교제를 나누고 있었는데 그로부터 세례 권고를 받은 것이다. 이것은 이곳에서 우리 일의 시작이다. 나는 그를 온전히 여호와의 손에 맡겼다. 왜냐하면 그곳에서만 오직 그가 안전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 교회에 나와 불어나게 하옵소서. 그는 약속의 사람이다.
여기서 말하는 '최초의 감리교 신자'란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라는 말일 것이다. 이 뜻은 대단히 중요하다. 그의 판단에 의하면 1887년 7월 24일에 와서 한국에서는 한국인으로서 최초의 감리교인이 탄생하였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 말은 반대로 그 이전에는 한국인 감리교인이 없었다는 말도 될 것이다. 한국인 감리교인이 없는 상황에서 한국인이 세운 '한국 감리교회'의 존재는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아펜젤러가 위의 기록에 보이는 '우리 교회'(our Church)라는 말에 유의해 본다. 그는 '한국 최초의 감리교 신자'에게 세례를 베풂으로 그 신자가 한 멤버가 되어 태어날 한국의 '우리 교회'를 상정한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믿는 이들의 공동체인 '교회'는 한 사람의 세례교인만으로는 부족하였다. 한국 교회의 형성을 위해서는 공동체를 이룰 신자들이 더 필요하였고 그것은 시간을 요하는 문제이기도 했다.
이 즈음에 그는 성경 번역에 종사하면서 어학선생을 고용하고 있었는데, 그를 권서 겸 전도인으로 세웠다. 이름이 Sye(서?)씨인 그는, 6년 전에 만주 우장(牛莊)에서 매킨타이어(John Macintyre : 馬勤泰) 목사에게서 세례를 받았다는 것이다. 아펜젤러는, Sye씨의 노력이 풍성한 결실을 얻을 수 있도록 축복해달라고 그의 일기에 써 놓았다.
이 무렵 한국 정부의 기독교에 대한 태도는, 선교사들의 의료·교육 부문의 우호적인 활동과 영향력으로 점차 개선되어 갔다. 이 점은 의료선교 부문의 여러 보고서에서 산견(散見)된다. 여기에다 1887년 효력이 발생되는 한불조약으로 한국 정부는 기독교에 대한 금제(禁制)를 약화 내지는 전면 수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1887년 3월경, 아펜젤러는 김 주사(Chusah)를 통해 한국인들에게 기독교를 가르칠 집을 구하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 장소는 학교에서 너무 가까우면 학생들에게 발견될 우려가 있기 때문에 좀 떨어진 곳을 물색하였다. 이 무렵 한 사람의 학생이 다시 기독교를 배우러 왔기 때문에 한국인 구도자(seekers)는 모두 세 사람이 되었다. 그는 한국인에게 다가갈 '합법적인 수단'을 강구하고 있었지만, 아직은 신중하게 대처하였다.
1887년 9월에 시내 남쪽에 조그마한 집 한 채를 사서 수리하기 시작했다. 그 안에서 한국인이 모여 예배드릴 수 있도록 꾸몄다. 이 무렵에 워렌 감독이 한국에 와서 아펜젤러 등에게 선교를 독려하고 있었다. 이때 교회당을 마련한 것을 보면 아펜젤러는 워렌 감독의 독려에 힘입어 한국인을 위한 전도활동과 교회 설립을 구체화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1887년 10월 2일 주일날 저녁, 아펜젤러는 그의 거실에서 배재학교 학생인 한용경에게 한국인으로서는 두번째로 세례를 베풀었다. 한용경은 약 8개월여의 수련기간을 가진 후에 세례를 받았던 셈이다. 주목되는 것은, "나는 언문으로 번역된 세례 예식서를 가졌으며, 한국말로 그에게 세례를 베풀었다"는 아펜젤러의 증언이다.
아펜젤러는 이 해 3월에 이미 한국어로 된 교리문답서를 처음으로 반포해 갖고 있었다고 증언한다. 그러니까 그는 '한글'로 번역된 세례 예식서에 의해 '한국어'로 세례를 베풀었던 것이다. 이것은 한국 교회사상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10월 2일 주일이 지난 그 주간에는 만주의 봉천에 있는 로스 목사가 두 사람의 신자를 데리고 서울을 방문했다.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은 학생이며, 또 한 사람은 로스 목사가 우수한 한국인이라고 추천해서 아펜젤러는 그를 두번째 권서로 채용했는데, 그는 고향이 의주인 장씨였다.
이 날 예배에는 2명의 권서와 강씨, 그리고 구도자요 진리를 믿고 있는 최씨의 아내 등 4명의 신자가 있었다. 이제 아펜젤러는 적어도 6명 이상의 신자와 함께 있었다. 예배에 참석한 4명과 세례를 받은 박중상과 한용경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 신자들과 함께 아펜젤러는 10월 9일 주일에는, 전에 성경사업(Bible work)을 위해 매입한 바 있는 '벧엘'(Bethel) 그 집에서 오후 예배를 시작했다.
아펜젤러가 그의 일기에서 '감리교 선교부에 의해 열린 최초의 종교집회'라고 쓴 이 모임이야말로 감리교 최초의 한국인 공중예배였다. 이 이전에는 한국인들은 가끔 50여 명까지 모이는 외국인들의 연합교회 예배에 같이 참석, 기독교에 대한 큰 관심을 나타내고 있었으나, 한국인만의 독자적인 모임은 아직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펜젤러에 의해 인도된 한국인들의 이 감리교 최초의 공중예배는 이렇게 묘사되어 있다.
"우리는 사방 8자 되는 방에 모여서 한국식으로 앉았다. 내가 영어로 기도하고 시작하였으며, 우리는 마가복음 1장부터 읽었다. 그 다음 장 형제가 마치는 기도를 인도했다. 모임은 우리들에게 깊은 관심으로 가득찬 것이었으며, 나는 하나님께 이 모임이 유용하게 사용되는 중심지가 되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이 날의 모임은, 일부 순서에서 외국어로 진행되었지만, 외국인 선교사와 한국인 신자들이 함께 모여 진행되었고 한국 최초의 감리교회의 예배였다. 이 예배모임은 "정동제일감리교회의 첫 예배인 동시에 한국 감리교회의 첫 예배가 되는 셈"이었고, 이를 계기로 정동제일교회는 10월 9일을 창립일로 잡고 있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한국인을 중심으로 첫 예배를 드린 '벧엘' 예배당이 지금의 정동제일교회 자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벧엘'의 위치와 관련하여, 1897년 12월 26일 새 예배당 봉헌식 때 아펜젤러가 읽은 다음 글을 주목한다.
"교회는 이리저리 옮겨졌다. 10년 전, 지금 스크랜튼 대부인의 소유로 되어 있는 달성 주택들의 뒷문에서 돌 하나 던질 만한 거리에 있는, 벧엘에서 예배를 드렸다. 1888년 나의 지방여행 중에 내려진 포교 금지령은 모임을 중지시켰고 벧엘은 처분되었으며 지금은 한국 사람들이 들어가 있다."
위의 글에서 스크랜튼 대부인의 집이 있던 달성은 지금의 남대문 상동 근처이며, 거기서 돌 던질 만한 거리는 "아무리 넓게 보아도 남창동-북창동-소공동 범주를 넘지 못한" 곳으로 지적된다. 벧엘에서 예배를 시작한 지 몇 주일 후에는 그 이웃 집을 사서 8×16자 되는 방에서 모임을 갖게 되었는데, 1888년 5월 왕명으로 중단할 때까지 주일마다 이곳에서 예배를 드렸다.
벧엘'에서 드린 첫 예배에 이어 아펜젤러는 10월 16일 주일에 29세의 최씨 부인에게 세례를 주었다. 그녀는 아펜젤러의 질문에 분명하게 대답하였다. 아펜젤러는 그 날의 일을 두고,
"그녀는 거의 틀림없이 이 나라에서 개신교 선교사에 의해 세례받은 최초의 여성이다. 나는 우리 감리교가 안방(An pang) 안으로 들어간 것이 무척 기쁘다. 말씀을 받은 다른 여성들도 있다. 이 첫 열매들에 하나님께서 축복하시기를 빈다."
고 감격해 하였다. 그 일 주일 후인 10월 23일에는, 뒤에서 언급될 바와 같이, '감리교의 요람'인 벧엘교회에서 한국에서 감리교 최초의 성찬식을 가졌다. 이 때 회중은 '우리의 기도문'(our liturgy)을 사용했으며 모두 경건하고 진지한 분위기를 느꼈다. 이제 '벧엘'에서 한국인 예배를 시작한 아펜젤러는 거기서 한국인 형제들과 더불어 교회 공동체가 누려야 할 성례 - 세례식과 성찬식 - 를 거행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조용한 방법으로 감리교는 은자의 나라에서 그 공중사업을 시작한 것이다." 그는 성찬식을 거행한 감격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이렇게 생명의 떡을 이 백성에게 떼어 주다니, 오 얼마나 큰 은혜인가! 감사함으로 우리의 마음이 그 떡을 먹고 살아가게 하옵소서."
아펜젤러의 그 염원과 감사는 오늘날 한국 교회가 본받아야 할 중요한 신앙고백이다.
4. 전도여행과 선교지역 분할 협의
서울을 중심으로 재한 외국인과 한국인에게 전도하고 세례를 베풀던 아펜젤러는 교금(敎禁)이 다소 풀려감을 의식하였던지 1887년 4월 13일부터 5월 7일까지 제1차로 우리나라 북쪽 지방의 전도여행에 나섰다. 이 여행에는 뒷날 모오스(James R. Morse)와 함께 한국의 광산사업에 투자하게 되는 헌트(Leigh S. J. Hunt)와 일행 8명이 지방관청의 객사에서 유숙할 수 있도록 외부(外部)에서 발행한 편지[護照]를 갖고 출발하였다.
그들은 4월 13일에 서울을 출발, 고양·파주·임진·송도·금천·통천·평산·서흥·봉상·황주 등을 거쳐 23일에는 평양에 도착하였다. 그들은 평안감사 남정철(南廷哲)의 영접을 받으며 평양의 풍물을 견문하였다. 그는 여행하는 동안 그가 견문한 당시의 풍물과 사정을 잘 기록해 두었다. 그 가운데 아펜젤러는 당시 7만 5천이 살고 있는 평양을 두루 살피면서, 복음의 전도자답게, 한국인의 도덕적 상태에 대한 절망과 이들을 구원하기 위한 결심을 동시에 갖게 된다.
"인간적인 관점에서 볼 때 사람들의 도덕 상태는 절망적인 듯하다. 그러나 나는 인간을 구원하시고 인간의 품위를 높여주는 하나님의 은혜를 믿는다. 그들의 심령에 쏟아 부으신 그리스도의 피가 아니고서는 아무 것도 그들을 죄에서 구원해 낼 수 없다. 그들은 그들의 세속적인 상황에 눈뜨고 있지만, 동시에 그들의 눈이 영적인 필요에 눈뜨게 되기를 바란다. 주님, 그날을 속히 허락하소서. 이곳에 당신의 제자들을 두고, 그들과 만나고, 가르쳐 달라고 요청받고, 그들이 다시 친구들을 불러오고 하는, 이 모든 것은 즐거운 일입니다. 지금은 씨뿌릴 시기, 좋은 씨가 싹이 나고 뒷날 풍성한 추수를 할 수 있게 하소서."
그 뒤 아펜젤러는 1888년 봄, 아마도 두번째인 듯한 북부지방 전도여행을 장로교의 언더우드와 같이 약 2주일간 감행하였다. 그들은 의약품과 책자와 소책자들을 팔면서 가는 곳마다 따뜻한 영접을 받았다. 사람들은 의약품을 사려고 안달이었고, 기독교에 관해 묻는 사람들에게는 책자가 주어졌다. 그러나 미처 예상하지 못한 문제가 일어났다. 한국 정부의 반대에 부딪히게 되자 서울의 미국 공사는 여행 중에 있는 그들을 소환했고 그들은 돌아오지 않을 수 없었다. 아펜젤러는 미국 공사로부터 받은 편지의 내용을 이렇게 설명했다.
"이런 식으로 2주일 가량 전도여행을 했을 때 서울 주재 미국 공사(딘스모어 Hugh A. Dinsmore - 역자)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그는 우리가 서울을 떠난 후에 '대군주 전하의 명령이라 하여 한국 외부로부터 公翰을 받았는데 그 내용은 국내에 거주하는 미국인 중에 여러 가지 방법으로 그리스도교의 교리를 전파하고 있음을 한국 정부에서 알고 있다는 것, 이 사실을 정부 당국에서는 부당하게 여긴다는 것, 조약상 공인되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이러한 행동의 중지를 요구한다는 것 등이다. 여기에 대해 협조해달라는 요청을 받았으므로 미국 공사로서 나는 당신들이 한국인들에게 그리스도교를 전파하고 종교의식과 규례를 집행하는 것을 중지해 줄 것을 요청하는 바이다'라고 말했다."
기독교의 포교문제에 대해서는 양국간의 조약에서는 '침묵'하고 있었으나, 선교사들은 한국 정부의 묵인하에 선교활동을 지속하고 있었다. 그러나 여행 중에 이같은 한국 정부의 반대에 직면하게 되자 두 사람은 전도여행을 계속해야 할 지 그 여부를 결정하지 못하고 우선서울로 돌아왔던 것이다. 이것은 오히려 한국 정부에 대해 좋은 인상을 주었다. 그리하여 "우리의 즉각적인 순종이 정부에 매우 좋은 영향을 주었다는 말을 한 고관으로부터 들었다"고 그는 술회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그 뒤의 개신교의 선교활동을 용이하게 만든 또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1888년 5월 이후 한국 정부의 금교령(禁敎令)과 이 해 여름에 일어난 '영아소동'으로 인하여 선교사들은 지방 전도활동을 삼가하였다. 그러다가 그 해 8월에는 존스(G. H. Jones) 목사와 함께 15일간 원주·대구·부산으로 답사여행을 했고, 10월에는 의주를 방문했다. 의주 방문과 관련, 아펜젤러는 이렇게 보고했다.
"이 도시는 한국에서 중국으로 들어가는 관문이다. 한국인들은 수세기 동안 이곳을 통해서 중국에 들어갔다. 중국에서는 기독교 선교사들과 접촉할 수 있었다. 그 때 뿌려진 씨는 사라지지 않았다. 나는 9년 전에 세례받은 한 사람을 만났다. (내가 만난) 다른 사람들은 求道者들로 먼저 중국에서 진리를 배웠는데, 세례받기를 갈망하고 있었다. 우리는 이 도시에 1명의 正교인과 14명의 準교인으로 구성된 모임(society)을 갖고 있다. 평안도의 수도(평양)에는 몇 명의 구도자와 5명으로 된 모임이 있다. 평양은 한국의 소돔으로, 이 도시를 구원하기 위해서는 보통이 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아펜젤러는 1888년 한 해 동안 전도사업을 위해 1,830마일이나 지방 여행을 강행했는데, 그 가운데 1,400마일 이상은 승마 여행이었다. 1888년 10월과 11월에는 해주를 방문하였고, 1889년 2월에는 공주(公州)를 그리고 8월에는 대구를 거쳐 부산을 방문했다. 8개 도 가운데 6개 도를 방문한 셈이었다. 시골에 있는 사람들은 이방인을 친절하게 맞아 주었고, 최소한 괴롭히지는 않았다.
여기서 우리는 아펜젤러의 선교여행이 장로회의 언더우드와 동행했던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바로 1888년 봄, 두 선교사의 선교여행을 전후하여 두 교단 사이에는 새로운 협력이 모색되었기 때문이다. 연합예배가 이루어지고 선교지역 분할에 대한 협의가 진전되고 있었다.
우선 1888년 2월의 '한국인 형제들'의 제의에 의해 이루어진 연합적인 집회를 두고 아펜젤러는 복음전파에 새로운 서광이 비치는 것으로 판단하고 다음과 같이 썼다.
"음력 설날(Korean New Year)이 지난 후, 한국인 형제들이 일 주일의 '기도주간'을 가지자고 제의했다. 그래서 장로교와 감리교 두 선교부는 연합예배를 드렸다. 나는 2월 12일에 '신실한 말씀'이란 제목으로 설교했다. 모임들에 열심히 참석하고 관심도 대단하다. 비록 이곳에 공개된 종교 자유가 없지만, 한국인들은 마치 종교의 자유가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
장로교회와의 접촉은 여기서 끝난 것은 아니다. 이 집회 후에 감리교와 장로교는 서로 만나 한국의 선교지역 분할을 논의하게 되었다. 1888년 3월 9일 저녁에 두 교단의 대표들이 서로 만나 이 문제를 논의하는 한편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2주일 후에 보고서를 제출하기로 하였다. 이와 관련, 아펜젤러 자료에는 1888년 3월 날짜 미상의 〈한국의 장로교와 감리교〉라는 제목의 연설문이 있는데, 이 자료가 이 때 선교지역 분할을 논의할 때 제출한 보고서가 아닌가 생각된다.
아펜젤러는 한국에서 두 교파가 선교하기 위해서는 서로의 상이성을 인정하면서 공통된 바탕으로 일할 것과 서로 나란히 일할 것, 그리고 서로 협조하고 서로를 자극할 것 등을 기초로 하여 선교지역을 나누어 독특한 교리들과 통치 형태를 가질 수 있도록 운영할 것을 주장하였다.
선교지역 분할에 대한 그의 구체적인 제안은, 일부 모호한 부분이 있지만, 함경도와 평안도를 나누는 문제, 송도·평양·의주 등 대도시는 두 개의 선교회를 둘 수 있도록 하되 의료사업과 인쇄 등은 공동으로 하고 학교사업의 경우 송도는 두 선교회가 각각의 학교를 세우지 말 것 등을 제안했는가 하면, 이와는 달리 '인구 5만(5천?) 이하의 도시에는 두 선교회가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경기도는 공동의 선교구역으로 하면서 함경도·강원도 북부·충청도·전라도를 한 선교회가 맡고 다른 선교회는 황해도·평안도·강원도 남부·경상도를 맡도록 해야 한다는 안도 제안하고 있다.
그는 이런 제안을 하면서, "내가 믿기로는 이러한 분할이 현재로서는 최상이라고 믿습니다. 분할이 도 경계를 따라 되어 있으므로 간단하며, 각 선교회로 하여금 여러 계층의 사람들과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줍니다"고 하였다.
종래 한국에서 선교지역 분할에 관한 논의가 언제 시작되었는가 하는 문제는 명쾌하게 밝혀진 바는 없다. 미 북감리회와 미 북장로회 사이에 이루어진 선교지역 분할에 관한 협정이 1892년에 이루어진 것을 근거로 그 전 어느 시기에 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밖에 없었다. 장로교회의 경우, 여러 교단들의 입래(入來)로 그 중복과 경쟁을 피하기 위하여 공의회를 결성하였는데 거기에서 선교지역 분할 문제를 논의하지 않았을까를 추정할 수 있다. 그런 추정에 의하더라도 선교지역 분할 논의의 출발 시점은 미 북장로회와 호주 장로회 사이의 연합공의회 설립연도인 1889년을 앞당기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위의 아펜젤러의 자료에 의하면, 선교지역 분할에 관한 논의는 1888년 3월에 당시 한국에 들어와 있던 두 선교부(미 북감리회와 미 북장로회) 사이에서 시작되었는데,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두 선교회를 대표하여 이 문제를 논의하였다. 1892년 감·장 두 선교부 사이에 합의된 내용의 상당부분은 1888년 3월에 아펜젤러가 제안한 내용을 발전시킨 것으로 보인다. 아펜젤러는 선교 초기에 선교회간의 협력과 일치를 이룩할 수 있는 장치를 이렇게 미리 마련하였던 것이다.
5. 성례의 시행 - 신앙공동체
아펜젤러가 1885년부터 재한 외국인에게 세례를 베풀었다는 것은 앞에서 이미 언급하였는데, 같은 해에 그는 재한 외국인에게 성찬도 베풀었다. 1886년 7월 18일에 언더우드가 노씨에게 세례를 베푸는 것을 도운 아펜젤러는 1887년 7월 24일에는 자신이 배재학교 학생 박중상에게 세례를 베풀었는데, 그 해에 그는 한국인을 위한 성찬식도 집례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지방전도를 위하여 1887년 봄부터는 전도여행에 나섰다.
아펜젤러에게 보이는 일련의 선교활동의 한 유형은 먼저 세례를 베풀고 성찬을 같이 하는, '성례'를 중요시하는 점이었다. 성례는 '믿는 자들의 모임'인 교회가 교회됨을 확인하는 예식이기도 하다. 그는 먼저 믿는 자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세례받은 이들이 모여 주의 살과 피를 나누는 성찬식을 거행함으로써 교회설립을 구체화하는 과정을 취했다고 할 것이다.
그가 재한 외국인이나 한국인에게 세례를 준 사실에 대하여는 앞에서 이미 언급하였다. 여기서는 성찬식을 거행한 것을 중심으로 그가 교회설립을 구체화해 가는 과정을 살펴보기로 하자. 다음 기록은 그가 1885년 10월에 재한 외국인을 위한 성찬식을 시작하였음을 보여준다.
"지난 주 일요일, 이달 11일에 우리는 오후에 늘 가지는 기도와 간증 모임에서 성찬식을 거행했습니다. 내가 알기로는 이것이 개신교에 의해 거행된 한국 최초의 성찬식이었습니다. 미국성서공회에 소속되어 있는 요코하마의 루미스(Henry Loomis) 목사가 참석해서 이 모임을 인도했는데, '오직 예수'라는 제목으로 적절한 말씀이 있었습니다. 장로교회의 언더우드 목사와 제가 떡과 포도주를 나눠 주었는데, 참석한 사람은 11명이었습니다. 제물포에 입항해 있는 미국 선박 마리온(Marion) 호의 고급선원 두 사람이 함께 이 예식에 참석했습니다."
위의 기록이 중요한 것은 지금까지 한국교회사에서 한반도 안에서 최초의 성찬식이 언제 거행되었는지 명확하게 알려진 바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펜젤러의 위의 편지는 이 점을 분명하게 밝혀준다. 비록 외국인 중심으로 이루어진 것이긴 하지만, 한국에서 성찬식이 처음 거행된 것은 1885년 10월 11일 주일 오후였으며, 집례자는 일본에서 이미 이수정으로 하여금 마가복음을 번역토록 했고 뒷날 한국의 성경 번역 및 그 발간, 배포에 크게 공헌한 미국성서공회 일본주재 총무격인 헨리 루미스 목사였다.
한국인 중심의 감리교 최초의 성찬식이 이루어진 것은 외국인 중심의 성찬식이 거행된 후 2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 그것은 무엇보다 한국인 수세자가 나와야 했기 때문이다. 1887년에 들어 그의 제자인 박중상(7월 24일)과 한용경(10월 2일)이 세례를 받았고, 10월 9일에는, '벧엘'에서 한국인의 오후 예배를 시작하였다. 그리고 10월 16일 여성에게 한국 최초로 세례가 베풀어졌다는 것은 의미가 깊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나누는 한국인 신앙공동체(교회)를 온전하게 이루기 위해서는 남성뿐만 아니라 여성도 수세자로서 참여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자신에게 세례를 받은 한국인 남녀 3명과 만주에서 세례받은 이들이 함께 모이게 되었을 때에 한국인 중심으로 이루어진 최초의 성찬식이 1887년 10월 23일 '벧엘'의 같은 방에서 거행되었던 것이다. 이 성찬식에는 스크랜튼 의사도 참석했다. 아펜젤러는 이 장면을 다음과 같이 간단하게 적어 놓았다.
"일 주일 후 10월 23일 우리는 한국에서 감리교 최초의 성찬식을 가졌다. 이것은 감리교의 요람인 벧엘의 같은 방에서 있었다. 참석자는 형제들로서 최·장·강·한씨 등과 최씨의 아내였는데, 한 사람 박 형제는 불참했다."
결국 1887년에 이르러 세례식은 물론 성찬식도 행하여져,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나누는 공동체, 즉 교회가 성립된 셈이다. 세례받은 신자가 있고 예배와 성찬이 있으며, 믿는 이들이 모일 장소(예배당)가 있는, 말하자면 형식과 내용이 갖추어진 명실상부한 한국 감리교회는 1887년 10월에 이렇게 탄생했던 것이다.
한국인 중심의 예배가 시작되면서 외국인들 예배와는 구분되었다. 이에 앞서 이루어진 외국인 예배는 아펜젤러와 언더우드가 번갈아 인도와 설교를 맡았다. 1887년 4월 10일 부활주일에는 아펜젤러가 고린도전서 15장 35절 말씀을 중심으로 설교했는데, '주는 나의 목자'를 감동적으로 부른 성가대의 찬송 속에 진행된 이 날 예배에는 데니(Denny) 판사와 몇 주 전에 부임한 딘스모어(V. A. Dinsmore) 공사도 참석했다. 1887년 10월에도 아펜젤러는 언더우드를 대신해서 외국인들 앞에서 요셉의 일생에 대해 설교를 했는데, 요셉이 형제들을 만나는 대목을 이야기할 때에는 듣는 이들 중에서 눈물을 흘리는 이도 있었다.
1887년 10월 9일 오후 한국인 중심의 한국 감리교회의 시작되자 아펜젤러는 주일날 오전에는 차례에 따라 외국인들의 예배에 봉사하고 오후에는 한국인들의 예배를 인도하게 되었다. 그것은 1887년 12월 25일자 아펜젤러 일기에서 소개하고 있는 두 차례의 예배에서 확인되는 바, 그 가운데 "만원인 교회에 예식서에 따른 예배, 길모어(Gilmore)가 사회를 보다. 설교는 짧았으나 적절했다"고 기록한 것은 외국인들만의 집회를 의미하는 것이요, 이어서 "오후 2시에 나는 한국어로 최초의 설교를 했다"라고 표현한 부분은 한국인 예배모임을 가리킨 것이다. 이제 아펜젤러는 더러 한국어 설교를 '읽게' 되는 등의 더 많은 부담을 지게 되었다.
아펜젤러는 배재학당의 학생들이 50명이 되고 한국인들의 예배를 인도하게 되는 1887년말에 와서는 한국어로 가르치고 설교해야 한다는 강한 의욕을 여러 번 피력하였다. "나는 한국어를 습득하여 그들의 언어로 이 백성들을 가르칠 수 있기를 열망한다." "나는 내가 이 나라 언어에 더욱 유창하게 되어 그들에게 한국어로 말하고 설교하게 되기를 기도한다." 때문에 아펜젤러는 이 해 크리스마스 때에 자신이 한국어로 설교를 하게 된 것을 두고 "이것은 '위대한 연설'(big talk)이다"라고 멋적게 평가했다. 그랬던 만큼 설교 작성과 이 날의 순서에 대하여 비교적 자세한 기록을 남겼다.
"나는 설교문을 쓸 수 없지만, 내 생각을 권서 최씨에게 말해 주면 그는 그것을 적당한 한국말로 표현해 주었다. 쓰는 데에 아주 짧은 시간이 걸렸지만 나는 설교 일을 시작하게 되어 기뻤다. 본문은 마태복음 1장 21절, '이름을 예수라 하라' 등이었다.
물론 나는 설교를 읽고, 오로지 읽을 수밖에 없었지만, 그러나 어느 정도 설교의 정신을 전할 수 있었다. 전체 예배순서는 다음과 같다.
1. 김명옥의 세례
2. 찬송
3. 스크랜턴 박사의 기도(읽음)
4. 말씀봉독 - 마태복음 2장
5. 말씀봉독 - 누가복음 2장(스크랜튼 박사)
6. 설교
7. 주기도문
8. 찬송 -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
9. 축도
나는 이것이 한국에서 있은 감리교 최초의 설교라고 확신하며, 아마 개신교 선교사에 의한 최초의 공식 설교가 아닌가 한다. 그러나 후자에 관해서는 단정할 수 없는데, 나보다 한국말을 더 많이 알고 있는 언더우드가 교인들에게 설교를 읽지 않고 '말로' 했는지 모르겠다.
나는 내가 한국에서 2년 반이 채 안 되게 생활하면서 한국말로 모임을 가질 뿐만 아니라 그들의 언어로 설교하려고 애썼는지 거의 깨달을 수 없다. 그 설교는 형편 없었지만, 그러나 주의 이름으로 행해진 것이기에 주께서 자신의 영광을 위한 그 노력을 축복해 주시리라 믿는다. 나와 듣는 이들이 어느 정도 편안하게 듣고 설교할 수 있을 때 그 날은 행복한 날이 될 것이다."
아펜젤러가 벧엘에서 두번째로 설교를 '읽은' 것은 그 이듬해 1월 13일 주일날 열 명의 교인들 앞에서였는데, 첫번째 한국어 설교가 있은 지 거의 20일이 지나서였다. 그 설교는 아직 원고에 한정되어 있어서 '자유롭지' 못했다. 새해에 이르러서는, 비록 권서 최씨가 아펜젤러가 부르는 말을 정확히 한국어로 받아서 써 준 원고를 읽는 데불과하였지만, 자주 한국어 설교를 시도하였다.
그러나 아펜젤러는 "나는 읽는 것과 올바른 문장 형태를 만드는 것에 진척을 나타내고 있다. 내 생각에는 차차로 원고에서 눈을 떼고, 간단한 메모만으로 하다가 마침내는 원고 없이 설교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한국어 설교에 대해 희망과 낙관을 표시하고 있었다. 이것은 그가 하루 2차례에 걸쳐 5시간씩 한국어 교육을 계획하고 있었고, 언어 습득에 뛰어난 능력을 갖고 있었다는 점에서 그 가능성이 충분히 엿보이기도 하였다.
아펜젤러의 복음전도 사역은 한국인을 중심한 벧엘교회의 창립을 계기로 한층 활발해졌던 것으로 보인다. 1887년 11월에는 최씨와 장씨 두 사람에게 권서업무와 전도사역을 맡겨 서북지방으로 파송하여 두 사람의 세례지원자를 얻게 되었고, 12월 4일 주일에는 8×16자 되는 새로 구입한 집, '진정한 의미의 벧엘'에서 유치겸·윤동규 두 학생에게 세례를 베풀었는데 매우 인상적이었다. 12월 7일(수) 저녁에는 한용경의 집에서 세례받은 학생들이 모두 모여 '최초의 학생 기도회'를 가졌는데 매우 진지하였다. 이듬해(1888) 1월 13일 주일에는 스크랜튼 의사의 개인 교사인 박승면과 학생인 문세익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토요일(12일)에는 다섯 명의 여성이 세례를 신청했는데, 이를 통해 "주께서 한국인들 가운데 역사하심"을 확신하고 있었다.
'벧엘'교회는 그 이름답게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점차 발전하였다. 그리하여 1888년 3월 11일 주일에는 14명이 모여 예배를 드렸고, 비록 영어로 진행된 것이긴 하지만 이 무렵 주일학교가 아펜젤러의 집에서 30분씩 인도되고 있었다. 이 때 스크랜톤 대부인이 여성들을 위한 저녁예배를 시작했는데, 이는 최초의 부인(저녁)예배로서, 첫째날에 21명이 참석했다.
아펜젤러는 이를 두고, "이처럼 주께서 우리의 수고와 그의 영광스런 사역의 번창함에 함께 하신다"고 적었다. 이어서 3월 14일(수) 저녁에는 감·장 선교부에서 온 하객들이 참석한 가운데 아펜젤러는 제자 한용경과 과부 박씨를 부부로 맺어주는 결혼식을 주례하였다. 이것은 아펜젤러가 주례한 최초의 결혼식이자, 개신교로서는 '한국 최초의 교회 결혼식'이기도 했다.
6. 맺는 말 - 정동교회의 성립
이 글은 필자 나름대로의 '기독교회의 정의'에서부터 시작하였다. 기독교회는 그리스도 예수를 구주로 믿는 이들의 신앙공동체다. 그 공동체가 성립되었다는 것은 구성원이 생겨나고 그 공동체가 갖는 신앙적인 의식(행위)이 나타날 때에 확인된다. 그 의식은 예배 혹은 공동체적인 회집이나 세례·성찬 등으로 나타난다. 때문에 교회가 설립되었다는 것은 이러한 신앙적인 의식(행위)들이 그 공동체 내에서 공시적 혹은 교차적으로, 간헐적 혹은 지속적으로 나타나야 한다.
이 글에서 거론한 교회는 '한국의' 감리교회인 바, 그것은 한국인이 주체가 되어 이룩한 것을 의미한다. 한국이라는 땅에서 이뤄졌다 하더라도 외국인만으로 이루어졌거나 외국인을 주체로 하여 이뤄졌다면 그것은 '한국 교회'라고 할 수 없다. 한국 감리교회는 한국의 기독교(감리교)인이 주체가 되어 형성한 교회다. 이 전제 위에서 이 글이 시작된다.
한국 감리교회의 설립은 첫 선교사로 내한한 미 북감리회 아펜젤러 선교사의 초기 헌신적인 활동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초기 한국 감리교회의 성립과정 또한 그의 초기활동과 깊은 관련이 있다. 이 글은, 그의 초기 3년간(1885∼1888)의 활동을, 신앙공동체의 성립을 확증하는 요건이라 할 집단적 의식(행위)과 관련시켜 살펴보자는 것이다.
위에 언급한 아펜젤러의 초기활동을 그의 일기를 중심으로 다음 표와 같이 정리해 보았다.
위의 표를 통해 아펜젤러의 활동을 다음과 같이 몇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그가 내한한 후 1886년말까지 배재학당에서 교육사업을 위해 한국인을 접촉한 것 외에는 한국인에 대한 전도는 거의 하지 않았다. 이 해 말까지 종교적인 행위와 관련, 한국인과 접촉한 것으로는 1886년 7월 18일, 언더우드가 헤론의 집에서 헤론의 어린 딸 사라 앤과 함께 한국인 노춘경에게 세례를 베풀 때, 이 세례식을 도운 것이 거의 유일한 것이다. 이 기간에 아펜젤러는 재한 서양인들의 연합교회를 세워 주일예배를 인도하고 성례를 집행하였으며, 1886년초부터는 재한 일본인들의 성경공부를 인도하고 역시 세례를 베풀었다.
둘째, 1887년 1월의 왕비의 궁실 초청과 이 해 2월 21일의 '배재학당'의 당명(堂名) 하사를 계기로 그는 한국인에 대한 선교에 본격적으로 나서게 된다. 앞에서 본 바와 같이, 그는 이 당명 하사를 한국 정부가 자신의 일을 인정하는 것으로, 그리고 "지금까지 우리가 가지지 못했던 한국인들 앞에서의 설 자리를 얻은 것"으로 판단했다. 그는 이보다 두 주 전부터 배재학당 학생 한용경을 지도하는 한편 3월에는 '김주사'를 시켜 '기독교가 가르쳐질 집'을 구입하는 계획을 세웠다. 이 무렵 한용경을 포함, 구도자는 3명이었다. 배재학당의 당명을 하사받은 후에 아펜젤러는 4∼5월에 평안도 지방에 대한 선교여행을 떠나며, 7월에는 박중상에게 세례를 주어 '한국 최초의 감리교 신자'를 탄생시켰다. 따라서 그의 말대로 '한국 최초의 감리교 신자'가 이 때 태어났다면, 그 전에 한국 감리교회가 성립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다.
셋째, 1887년 9월, 워렌 감독의 내한은 아펜젤러에게 한국 교회 설립을 결정적으로 추진하게 만들었다. 워렌 감독이 내한, 대학 건물을 개관하는 식을 거행하게 되자, '의심할 것도 없이' '한국 최초의 종교의식'이 '공개적으로 열린 셈'이었다고 주장하였다. 이것은 기회 포착에 민감한 그의 예리한 통찰력을 드러내는 것이다. 워렌 감독은 한국 정부의 기독교에 대한 침묵이 전도 금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고 해석하고, 그와 동시에 주한 선교사들에게 활동을 강화시키고(push the work) 일을 저지르도록(make opportunities) 격려하였다. 워렌 감독의 선동에 가까운 격려는 이 용감한 젊은이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었고, 이 젊은이는 이 말에 깊이 공감한 듯하다. 10월 2일, 거의 8개월간 구도자로서 성실하게 훈련받아 온 한용경에게 세례를 베푼 아펜젤러는 워렌 감독이 떠난 지 20여 일이 채 안 되어 1887년 10월 9일 미리 사 두었던 '벧엘'에서 오후 예배(한국인 예배)를 따로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벧엘' 신앙공동체, 곧 정동감리교회의 출발이다.
넷째, 한국인을 위한 예배를 시작한 아펜젤러는 그 다음 주일에 최성균의 부인에게 세례를 베풀어 '최초의 여성 수세자'를 탄생시켰다. 그 한 주일 후 한국 감리교 최초의 성찬식이 베풀어졌다. 이로써 신앙공동체(교회)의 설립은 이제 의심없이 완결되었다. 아펜젤러의 1887년 10월은 한국 감리교회 설립을 완결시키는 데에 매우 분주하였다. 한국인들이 주체가 된 '한국 감리교회'는 1887년 10월에 이르러 이렇게 세례, 공중예배, 성찬 등이 갖춰진 교회로 발전했다.
1887년 2월 세 사람의 한국인 구도자로 시작된 아펜젤러의 한국 교회 설립의 장정(長征)은 7월 24일과 10월 2일에 각각 한 사람의 수세자를 낸 데 이어 10월 9일 '벧엘'에서의 한국인 예배를 거쳐, 10월 16일의 최초의 여성 수세자를 탄생시켰고, 10월 23일에는 성찬식을 거행, 그리스도 예수의 살과 피를 나눔으로 종적으로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이루고 횡적으로는 신자들간의 공동체적인 한 몸을 이루는 기적을 만들어 냈던 것이다.
벧엘교회에서 연원한 정동감리교회와 한국 감리교회는 1887년 10월에 탄생하였다. 이 점은 탄생 10주년을 맞아 아펜젤러가 쓴 약사(略史)에 의해 이미 확인된 바 있다. 그는 1897년 12월 26일 헌당식에서, "이 총회(chapter)는 1889년 12월 7일 계삭회(Quarterly Conference)를 구성함으로써 조직을 시작하였습니다. 이에 앞서 세례와 입교가 있었습니다"라고 낭독했고, 또 머리돌에는 "이 교회는 1889년 12월 7일 계삭회를 구성함으로 조직되었다. 설교와 기도회는 그 2년 전에 시작되었다"라는 글귀를 넣어 한국 감리교회와 정동교회의 탄생 시기를 명확하게 밝혀 놓았던 것이다.
이렇게 1887년 10월에 시작된 한국 최초의 감리교회에서는 그 뒤 세례식이 잇달아 베풀어졌고, 설교는 한국어로 '읽혀'졌다. 1888년부터는 당시 한국에 내한해 있던 감리교와 장로교 사이에서 연합예배와 선교지역 분할 협의가 진행되었고, 주일학교와 부인저녁예배가 시작되었다. 교회에서 결혼식도 거행되었다. 이것이 정동감리교회가 처음 출발했을 때의 모습이자 한국 감리교회의 성립 때의 활동이었다. 따라서 1887년 10월 이전에 '한국 감리교회'가 성립되었다고 보고 그 연대를 교회의 전통으로 고수하고 있다면, 그것은 재고되어야 할 것이다.
【추기】이 원고를 넘기고 난 후에 숭실대학교 박물관장 柳永烈 교수의 호의로, 姜邁 著,《貞洞敎會三十年史》(1915.7.13)를 열람할 수 있었는데, 필자의 論旨를 바꿀 만한 내용은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나 姜邁의 기록에는 오류가 더러 보이는데, 이 논문과 관련하여 두 가지만 지적한다.
첫째, "1887년 12월 5일 보고에는 셰례를 밧은 교인이 네 사람인대 그 중 한 사람은 녀자"라 하였는데, 1887년 12월 5일 현재 수세자는 네 사람이 아니고 다섯 사람이다.(본문의 표 참조)
둘째, "최병흔(헌?) 목사는 말삼하되 1887년 보고셔에 셰례밧은 사람 넷 중에 한 사람은 녀인인데 그는 1887년 4월 8일, 즉 부활주일에 셰례를 밧앗다"고 했는데, 그 여인의 수세 일자는 1887년 10월 16일이다.(본문의 표 참조)*
이만열(숙명여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