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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사 / 평양 대부흥운동

 

 

 

1907년 평양을 중심으로 일어나 전국 교회로 확산된 한국 교회의 대표적 부흥운동. 이 부흥운동은 1월 6일(주일)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평양 시내 네 교회 연합집회 형태로 시작되었다. 교회 장소가 협소하여 여자 교인은 자기 교회에, 남녀 중학생과 소학생들은 자기 학교 강당에 모였고, 남자 교인들만 2천여 명이 장대현교회당에 모였다.

이때만 해도 한국인 목사가 없어 부흥회는 선교사들 주관으로 진행되었다. 한 주간 동안 길선주 장로(당시 목사 안수를 받지 않음)는 한국 최초의 새벽기도회를 통해 큰 은혜를 끼쳤다. 무엇보다 그는 자신이 '아간'과 같은 죄인임을 고백하며 회개했고, 이를 계기로 수많은 교인들의 회개가 터져나왔다. 1주간 내내 회개가 계속되자 소문을 들은 방은덕(方恩德)이라는 순포(경찰)가 흉악범을 잡으러 집회에 참석했다 자신도 회개하고 예수를 믿게 된 일화도 있다.

무르익은 집회는 1월 14일 월요일 저녁 미국 북장로교회 선교사 블레어(W.N. Blair)의 설교로 절정에 달했다. 고린도전서 12장 27절 말씀으로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그리스도의 지체들이라'는 블레어 선교사의 설교가 끝나고

 수백 명의 성도가 통성으로 기도할 때 성령의 큰 역사가 임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죄를 대중 앞에서 구체적으로 자복하며 눈물로 회개했다. 반목과 질시하던 자들이 껴안고 화해하는 모습도 나타났다. 이런 감동적인 회개 역사는 새벽 2시까지 지속되었다.

이를 목격한 한 여자 선교사는 "입으로 고백하기 어려운 상상할 수 없는 무섭고 추한 죄악들이 쏟아져 나왔다. 마치 지옥 지붕이 젖혀진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고 술회했다. 또, 당시 런던타임즈는 "마치 밖으로부터 뭔가 물밀듯 밀려드는 강력한 힘의 임재에 압도당한 듯했다."고 보도했다.

이런 역사는 화요일 아침 숭의여학교에서, 수요일 아침에는 숭덕학교에서도 일어났다. 김찬성 조사가 설교할 때 어린 학생들이 큰 은혜를 받고 수업을 중지한 채 오후 1시까지 통회 자복의 기도회가 지속되었다. 각 곳의 여자중학교와 부녀자들의 모임에서도 이런 역사는 계속되었다.

선교사들만 모이는 정오 기도회에도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 기도회를 30분간 연장하여 오후 2시까지 할 정도였다. 이 놀라운 평양 대부흥회는 그 해 봄 길선주 장로의 서울 집회에서도 나타났고, 이런 부흥의 불길은 전국으로 번져나갔다.

평양 대부흥운동은 1903년 원산 부흥운동, 1909년 백만인 구령운동과 더불어 경건하고 건전한 부흥운동의 모델을 제시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한국 교회를 질적으로 한 단계 도약시키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출처 : 교회용어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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