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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의 발전과 확대

 

제1장 3.1운동과 교회의 주동역할
1. 십자가를 진 기독교인들
2. 3.1운동을 통한 교회의 애국활동
3. 3.1운동에서의 기독교정신의 결정

제2장 일제 탄압에 불굴한 교회의 진흥
1. 일제 종교정책의 시행 착오
2. 전국 교회진흥운동의 팽배
3. 성경.찬송가 발간에서 민족교회관 수립

 

제1장 3.1운동과 교회의 주동역할

 

*1.십자가를 진 기독교인들
한국의 민족 운동이나 독립운동은 교회의 움직임과 불가분리의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발전하였다. 그것은 기독교의 교리는 인간의 존엄과 자유 평등 사상을 기본으로 한 것이므로 기독교인드른 개인적으로나 민족적으로 다른 민족의 부당한 구속과 압박에 그냥 머물러 있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를 통하여 민족 자주정신이 크게 일어났으며 그것이 다시 독립 운동에로 약진되었다.

1910년 8월 22일,일본은 아주 비열한 방법으로 한국을 병참하였다. 나라 잃은 설음과 통분을 가장 뼈저리게 느끼고 깊이 체험하기는 그 누구보다 기독교인이었음은 두말할 것 없다. 기독교인들은 일본 관헌이 잡아다가 취조하면서 주모자가 누구냐고 물으면 한결같이 하나님이 시켜서 독립운동 하였다고 대답하였다.이는 민족의 독립과 자유의 향유를 위해 하나님의 거룩한 뜻에 따라 행동했다는 말이 되며, 이리하여 교회야말로 일본의 침략 정치에 항거하는 강력한 단체가 되어진 것이다. 이러한 사정을 알아채린 일제 침략자들은 민족 활동의 정신적 원천이 되어있는 기독교 신앙을 없이하려고 온갖 흉게를 꾸미면서 한 걸음 두 걸음 목조르듯 박해의 손길을 뻗쳐 들였다.

일제의 흉계가 대규모적으로 조작된 것으로서 소위 '105인 사건'이란 것이 있다. 일본인 조선총독 대라우찌가 1910년 12월 27일 압록강 철교 개통식에 참석하기 위해 가는 도중에 선천역에 정거하였을 때 한국 기독교인들이 그를 암살하려고 음모를 꾸몄다는 내용인 것이다. 그러나 그는 원래 날조된 사건이었기 때문에 모순 당착이 너무나 많이 노출되어 완전히 허위가 드러났다.

결국,이 조작된 사건은 형식적으로나 윤치호등 6명에게 유죄 판결을 내려 사태를 미봉하였다. 형고를 받은 인사들은 그동안 여러 차례에 걸친 감형으로 1915년까지는 모두 석방되기는 하였으나 그들은 기력을 회복하지 못하였다. 어느 한 날,감옥에서 석방된 이들이 평양역에 도착하였을 때 역 앞에 운집한 8천명 군중들은 민족을 위해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고난과 수욕을 겪은 교회 지도자들을 바라보면서 열렬한 환영을 퍼부었으나 그들의 모습은 슬픔과 울분이 뒤섞여 너무나 처절하였다.

 

2. 3.1운동을 통한 교회의 애국활동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파리에서 강화회의가 열렸을 때 미국의 윌슨(Thomas W.Wilson)대통령은 민족 자결론(Self Determination of Nations)을 내세워 이때야말로 한국 기독교인들은 민족의 살길이 트였다고 생각하고 일제의 기반을 벗어나 조국의 독립을 이룩할 수 있는 호기회가 온 것으로 자각하였다.

근 10년이나 일제의 압박을 받아 온 우리 민족은 이에 자극되어 1919년 3월 1일 독립운동을 일으키고야 말았다. 이 날을 기점으로 하여 온 겨레는 민족자결의 횃불을 높이 치켜들고,자주 독립을 선언하면서 독립 만세를 힘차게 부르고 또 불렀다. 3.1운동에서 기독교인들은 단연히 앞장섰다. 독립선언문에 서명한 33인 가운데 16인이 기독교인임을 보아 벌써 이러한 애국심을 뚜렷히 알 수 있다. 운동의 진행은 시종일관하여 비폭력 무저항주의로 행동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헌병과 경찰은 교인을 보는대로 짓밟았고 감옥에 가두고 매질했으며 교회당을 때려 부수고 불질렀다.

3.1운동이 한창 막바지에 이르렀던 4월 15일 낮 12시경,수원 부근의 제암리로 일본 헌병의 일대가 달려들었다. 그들은 총을 휘두르며 약 30명의 기독교인을 모두 교회당 안으로 모아 들였다. 교인들이 다 들어간 다음,헌병들은 문을 잠그고 교회당에 불을 질렀다. 견디다 못하여 창문을 부수고 나오는 교인들에게 총을 겨누어 쏘아 죽였다. 이러한 학살과 만행은 다른 여러 고장에서도 감행되었다. 강서 사천교회,정주교회,강계교회,위원교회의 학살 사건 그리고 서울의 시자가 사형 사건,북간도 노루바위교회의 학살 사건 등이 그것이며,이러한 모습은 한국 독립운동사상 너무나 참혹하고 잔인하여 감히 눈뜨고 볼 수 없는 처참한 광경이었다.

일본 경찰이 그렇게도 심하게 경꼐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대규모의 전국적 운동이 사전에 발각되지 않았다는 점,그리고 기독교인의 주장에 의하여 비폭력 무저항주의로 독립운동을 이끌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한 사항이다. 그토록 우심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는 결코 굴복하지 않았다.교인들은 땅에 엎어지고 교회당은 불타 버렷으나 살아남은 교인들은 한 마음 한 뜻으로 굳데 뭉치어 뒤로 물러서지 아니하였다. 3.1운동을 통하여 기독교인의 애국적인 참 모습을 본 많은 사람들은 기독교에 대한 인식을 새로이 하였다. 이리하여 한국교회는 3.1운동을 계기로 하여 민족 교회로서의 걸음을 또 한번 힘차게 내딛었다.

기독교인들이 앞장서 기치를 높이 든 3.1독립운동은 한국 민족의 기개를 널리 만방에 떨쳤을 뿐 아니라 한국 민족이 독립된 민족임을 뚜렷히 세게에 알려 주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어떤 사람은 독립 운동이 실패하였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때에 한국 민족의 독립성을 세계에 알려주지 아니하였더라면 1945년 8월 15일의 연합군에 의한 무조건 해방이 그렇게 쉽게 오지 아니했을 것만은 틀림이 없다.

*3. 3.1운동에서의 기독교정신의 결정
지금까지 3.1운동의 원인 및 동기,그 경과 그리고 그 결과등에 관하여 보았다. 다음은 3.1운동의 성격이라 할까, 3.1정신에 관하여 살피므로 귀중한 교훈을 얻고자 한다.

첫째로, 3.1정신에 있어서는 신앙심이 포함되어 있었다.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일본의 철통같은 구속과 탄압 속에서 결코 굴하지 아니하였다. 반드시 한국 민족이 독립할 것과 국권을 회복하고 신앙의 자유를 획득하게 될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틀림없이 이를 신앙하였다.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인 신석구목사는 일제의 법정에서 다음과 같은 발언을 하였다.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불의 불신한 일본 사람게 우리 민족을 오래 맡기시지 아니할 것으로 굳게 빋는다."
이러한 강한 신앙이 있었기에 전국 방방곡곡에서 교인들은 일제히 일어나 붉은 피를 아낌없이 쏟으면서 이 강토는 내 것이라고 소리치며 행동할 수 있었다.

둘째로는 협동과 단결심이 강하게 있었다. 3.1운동은 종파와 계급,남녀,노소의 장벽을 뚫고 온 교회와 겨레가 일치 단합한 거룩한 운동이었다. 이는 한국 민족사에서 일찌기 찾아보기 어려운 행동이었다. 실은 독립선언서가 2월 28일에 일본 경찰에게 발각되었다. 그들은 경찰력을 총동원하여 살폈으나 3월 1일에 거사가 있을줄은 전혀 탐지하지 못하였다. 한국인 밀정도 이 사실만은 일경에게 알려주지 않았다. 이는 민족이 하나로 뭉쳐 입을 꽉 다물었기 때문이다.

셋째는, 정의와 진실이 그 가운데 있었다. 독립은 한국 민족의 정의에 입각한 참된 소원이었고 3.1운동은 독립을 위한 진실한 행동이었다. 이 거룩한 운동에 누구도 명예나 욕심을 탐하지 아니하였다. 그토록 강포한 일본 침략자들은 이 정의와 진실의 발로를 그 무엇으로 당해내지 못하였던 것이다.

민족 대표 33인이 2월 28일 저녁에 손병희 댁에 최후로 모여서 거사를 의론하면서 "체포된 후의 모든 진술은 각자가 사실대로 말하기로 하자"고 최종적으로 합의하였다. 이 한가지만 보더라도 3.1운동이 진실과 정의로 일관하였음을 잘 알 수 있다.

넷째로는 평화와 무저항으로 일관하였다. 어떤 분은 말하기를 3.1운동이 실패했다고 말하면서 그 중요한 원인은 비폭력화 평화운동이었기 때문이라고 비판한다. 천도교 측에서는 필요시에는 무력 행사도 불사하자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기독교측은 완강히 이를 거부하면서 끝가지 비폭력과 무저항으로 운동을 이끌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만약 이때에 자칫 잘못하였더라면 제2의 동학란같은 것이 발생하여 죽도 밥도 안되었을런지 모른다. 3.1운동의 특출한 정신은 맨주먹으로 또 붉은 피로 물들이면서도 끝까지 평화의 정신으로 밀고 나간데 있다. 한 자루의 총검도 없이 재정의 후원도 없이 원조하는 우방도 없이 세계 최강국과 항쟁한 그 저력은 끝까지 평화의 정신으로 밀고 나갔다는 데 있었다. 그런고로 세계는 이 불상한 민족을 동정하였고 이 평화 운동을 지지했던 것이다.

다섯째로는 3.1정신 속에는 끊임없는 전진이 있었다. 손에 태극기 하나만을 들고 일제의 총칼 앞에서 제1진이 쓰러지면서 제2진이 뒤를 따랐다. 제2진이 쓰러지면 그 시체를 밟고 또 다시 제3진이 전진하여 끄칠 줄을 몰랐다. 이러한 불퇴전의 전진은 민족 자격 아니면 민족자멸의 양단간의 결단을 앞에 놓고 전국의 골짜기마다 어디에서나 일어나 계속된 것이었다. 일본, 만주, 시베리아,상하이,하와이,미국 등지에 이르기까지 널리 퍼지면서 전개되고 그리고 또 계속 되었다.

3.1운동의 진전으로 말미암아 기독교인들의 민족 정신과 독립 정신은 더욱 더 확고히 다듬어졌다. 한국교회는 3.1운동이래 한국 민족이 신뢰할만한 봉사자로 보다 더 뚜렷이 부각되었다. 이는 한국교회가 민족 교회로서 성장하는 속도에 가일층 박차를 가하였으므로 크나 큰 수확이 되었음을 인식해야 한다.

*제2장 일제 탄압에 불굴한 교회의 진흥

*1.일제 종교정책의 시행 착오
거족적인 3.1운동의 여파는 무단 일변도로 일관한 일본의 정책을 변경시켜지 않을 수 없는 절박한 상태로 몰고 갔다. 따라서 일제는 외형적으로나마 정책 노선을 변경하여서 기만과 가식의 방법으로 한국인에 대한 식민 통치를 진행하기로 방침을 바꿔 세웠다.

그리하여 지금까지 육.해군 대장에 국한하였던 조선 총독의 자격을 문관 출신으로 바꾸었고 새로이 부임한 사이또 총독이 곧 무단정치에서 문화정치로 정책을 바꾼다고 선언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는 헌병 경찰제를 보통 경찰제로 바꾸었고 한국인에게도 일본인과 같은 교육의 균등화를 기한다는 뜻을 언명하였고 언론의 통제도 철폐한다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일제가 한국을 완전히 장악하기 위한 수단 방법의 변형일 뿐으로 본질적인 면에서는 무단 정치와 전혀 다를 바 없었으며, 그런고로 얼마 안가서 그 술책이 속속 탄로나게 되었다.

종교 정책에 있어서는 종교적 자유를 허용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교회의 교권을 외국 선교사들로부터 탈취하려 하였다. 그러기 위하여서 일부 한국교회의 불평 분자들을 포섭하여 이간책을 사용하여 교회 분열을 획책하여 약체화 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그렇게 잘 먹혀들어가지 않았다.

여기에서 한걸음 더한 적극책으로 한국 기독교의 일본화를 꾀한 방법이 있었다. 일제는 정부의 어용 기구가 되어 있는 일본 조합교회를 시켜 한국교회 지도자들을 회유하여 한국교회를 조합교회에 합병케 하여 단일 교회를 만들고 필경은 교회를 총독 문화 정책의 선전 기관으로 만들려고 기도하였다. 3.1운동이 일어나자 조합교회의 와다세 목사는 한국인 목사 20여명을 재빨리 4월 18일에 조선호텔에 소집하여 성대한 만찬으로 대접하였다. 그리고 나서 동 회의에서는 특별한 시국운동을 전국적으로 벌이기로 결의하였고 그 실천 방안으로서 선전 팜프렛의 발간 반포와 순회 강연 등을 시행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들은 3.1운동을 일종의 소요 사건으로 규정하는가 하면, 기독교인에 대한 일본 관헌의 만행과 박해를 규탄하는 선교사들의 언동을 크게 반박하여 비난을 퍼부었다. 그리고 장,감 양 기성교회의 교인들을 유인하여 자파 교세를 확장하기 위하여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포섭하려 했다. 그러나 교인들은 호응하려는 기세를 보이지 아니하였다. 조합교ㅗ히는 날로 교세가 쇠퇴하였고 마침내 유명 무실한 교회로 전락하여 일제의 기만적인 교회 정책은 일단 실페하고 말았다.

일제가 아무리 수단 방법을 강구하려 한국 교회를 교란하려고 시도하였지만 끝내 실패로 돌아가자 드디어 법적으로 교회 탄압을 감행하기로 결정하였다. 그것이 소위 1920년에 발표된 '개정포 규칙'이란 것이다. 이러한 온갖 악조거 하에서 한국 교회가 일시적으로나마 낙심하여 침체상태에 빠졌음은 유감이라고 말 아니 할 수 없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결코 완전히 후퇴하거나 쓰러지지 아니하였다. 한국교회는 모진 시련의 골짜기를 넘어서 칠전팔기의 신앙으로 다시 일어나 교회진흥운동을 대대적으로 일으켜 약세를 회복하였다.

*2.전국 교회진흥운동의 팽배
한국 백성의 반응이 새로와진 이 시기에 감리교와 장로회에 있어서는 모두 교세 확장을 위한 대규모 조직적인 운동을 추진하기에 인식하지 않았다. 감리교에서는 이 운동을 '백년 전진'(The Centuly Advance)이라 불렀고 장로회에서는 '전진 운동'(The Forward Movement)이라고 이름 붙였다.


장로회교세(1917-1930)
1917년 - 149,526명
1918   - 160,919
1919   - 144,062
1920   - 153,915
1921   - 153,915
1922   - 179,158
1923   - 193,850
1924   - 191,887
1925   - 194,408
1926   - 519,060
1927   - 194,678

1919년 장로회 총회에서 진흥위원회 위원장이 된 방위량(William N.Blair)목사는 10개 종류의 소 책자를 만들어 전국 도처를 순회하면서 집회를 인도하였다. 각 교회에서는 진흥 비교표를 배부하였고 성적을 노회에 보고케 하였다. 그 내용에는 전도,성경 공부,새벽 기도회 등 9개 종목의 진흥 방법이 포함되어 있었고 우수한 교회에 대하여는 총회에서 성장을 수여하였다.
그러면서도 이러한 부흥 운동에 가장 큰 성과를 올린 것은 길선주 목사와 김익두 목사 등이 전국적으로 부흥집회를 인도함으로 얻게되었다. 그들은 설교와 능력을 통하여 한국교회에 새로운 희망과 광명을 던져 주었고 한국 사회를 향해 새로운 시대 정신을 불러 일으켜 다대한 공헌을 남겼다. 그들은 언제나 "한국 교인들이여 일어나라""진리는 반드시 승리한다"라고 절규하여 민족의 각성을 촉구하였고 한국 민족은 모진 비바람에도 꺼지지 않는 불멸의 찾아볼 수 있게 격려하였다.

1919년은 한국 민족에게 있어서 거족적인 3.1운동이 있은 중요한 해이기도 했지만 감리교에 있어서는 미국에서 해외 선교부가 발족한지 100주년에 해당하는 뜻있는 해였는고로 한국의 감리교는 '백년 전진'운동을 전개하기로 계획했던 것이다.편성된 전도대는 전도지와 쪽복음을 손에 들고 집집마다 방문하고 각처를 순회하면서 복음을 전달하였다. 교직자들은 청지기대회를 열어 사명자의 태도를 재확인하였으며 새 교회 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한 특별반을 조직하였다.

1923년은 동양 선교 75주년을 기념하여 특별 전도운동을 폈으며 그 다음해에는 남북 감리교가 합동하여 연합협의회를 조직하였고 전도,교육,문서 출판 등의 11개조의 진흥 방안을 구체화하여 추진하였다. 이때의 감리교의 유명한 부흥사로는 유한의 목사가 있었으며 그는 노방 전도와 함께 야시 전도의 특이성을 살려 전도의 성과를 크게 올렸다.

이 시기의 부흥 운동은 한국 국내 뿐 아니라 세계적 추세로서 전도단들이 세계를 두루 다니면서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열을 올렸다. 1923년에는 미국의 비더울프 목사를 단장으로 한 부흥단이 내한하였으며 서울을 비록하여 평양,선천,대구,광주 등 12개 도시를 두루 누비면서 순회 전도를 하여 어디에서나 대성황을 이루면서 수많은 결신자를 획득하였다.

특히 3.1운동 이후에 출감한 기독교 인사들의 영향으로 조직된 대.소 전도단의 활동은 주목할만 하였다.이들이 하는 강연및 설교의 내용은 주로 이스라엘 민족의 수난과 구원의 역사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인권의 자유와 인간의 존엄에 대한 정신을 은연 중에 강조하였다. 그런고로 일제 경찰들은 이를 중지시키기 위하여 뒤를 쫓아다니면서 여러모로 위협하였다. 그러나 연사들은 열띤 어조로 언제나 군중을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 넣으면서 민족정신을 고취하였다.

한국 민족은 절망적인 시련의 골짜기를 능히 교회의 진흥을 통하여 헤치면서 앞으로 앞으로 전진을 계속하였다.


*3. 성경.찬송가 발간에서 민족교회관 수립
선교사업 진행에 있어서 가장 먼저 요구되는 것은 성경 및 찬송가의 역간이라 하겠다. 하물며 프로테스탄트 교회야말로 성경을 중심한 교회이기 때문에 선교사들은 그 어디에나 선교지에 들어가기만 하면 성경을 번역하고 보급케 하는 과업을 먼저 수행하였다.

한국에 있어서는 유독 선교사가 정식으로 입국하기 전에 국외에서 성경이 번역 출판되었고 이것이 국내에 반입 전포되었다는데 특색이 있다. 그러나 만주에서 출간된 로쓰 번역(Ross Version) 성경이나 일본에서의 이수정 역 성경은 단시일에 너무 급하게 만들어졌기 때문에 오역이 많았다. 또 지방 사투리의 표현이 섞여 있었다. 그런고로 표준어로 되는 정확한 성경의 번역은 필수적 요청이었다.

1887년 언더우드,아펜셀라,스크랜톤,헤론의 네 사람으로 조직된 성서위원회는,한국에 온지 얼마 되지않는 외국인들이면서 참고 서적이나 한글 사전도 없는 상황에서 고생을 다하면서 번역사업에 착수하여 20년이 지난 1906년에 신약성경의 결정본을 출간하였다.

1908년에 김정식,김명준,김창식의 한국인 세 사람이 번역 위원으로 가담되었음은 한국민족 교회사 상에 있어서 하나의 획기적 사실로서 기뻐할만 하다. 1911년에는 구약성경의 번역이 끝나면서 출간되었고 또 그해에 신구약의 합본 성경도 간행되는 거사를 만났다.

성경이 나오기 전 해인 1910년은 국가적으로 한민족이 일본에게 합방 당한 너무나 슬픔에 가득찬 해이었다. 그러기에 당시의 수백만 한국인들은 한글로 된 성경을 보자 열렬히 애독하였다. 나라 잃고 멸시 당하는 힘겨운 처지에 빠질수록 더욱 우리말과 우리 글의 귀중함을 뼈아프게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성경은 교인들 뿐 아니라 일반 민중 사이에도 널리 보급되어 한글을 퍼쳐 한국 국문학사에도 불멸의 공을 세웠다. 뿐만 아니라 이 성경의 내용이 진리로서 무지와 몽매를 깨우치면서 겨레 사랑하는 마음을 함양하여 애국 애족심을 크게 일깨웠은 두말 할 것 없다.

찬송가의 편간도 한국교회의 문서 선교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사업이었다. 선교사들은 성경 번역과 거의 동시에 찬송가의 편간 사업에 착수하였다. 1896년에는 감리교 찬송가로 '찬미가'가 나왔고 1898년에는 장로회에서'찬셩시'를 출간하였다. 초대 교인들은 정확한 곡조로 유창하게 찬송가를 부르지는 못하였으나 나라 잃은 설음 속에서 그 얼마나 열심히 찬송을 불렀는지 모른다.

1.우리 황상폐하 천지일월 같이 만수무강
산높고 물고운 우리 대한국에 하나님 도우사 독립부강

2.이천만 동포난 한맘 한뜻으로 직분하세 사욕은 버리고 충의만 앞세워
임군과 나라를 보답하세

위는 초대교회에서 찬송으로 부른 애국가의 몇 절을 뽑은 것이다. 초대 교한국교회는 태극기와 십자가를 항상 걸엇으며 말하자면 태극기와 십자기는 애국하는 한국교회의 상징이 되어 있었다. 이러한 찬송의 연창은 우리 민족이 도탄의 고통 속에서 어떻게 해서든지 새 희망을 찾으려고 애쓴 그 모습을 연상하게 한다. 실로 이는 한국 민족교회관 수립에 있어서 크게 일익을 담당하였다고 봄이 옳을 것이다.


장로회교세(1884-1900)
1884-85 - 6 
1885-86 - 9  
1886-87 - 25  
1887-88 - 65  
1888-89 - 104   
1889-90 - 110  
1891-92 - 127     
1892-93 - 141  
1893-94 - 236 
1894-95 - 286 
1895-96 - 530 
1896-97 - 932 
1897-98 - 2079
1898-99 - 2804
1899-1900 -36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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