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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의 고난과 순교

 

(서론)
왜정 36년간 일제의 교회 박해는 강압과 회유 매수 등 가진 수단과 방법을 다했다. 신사참배 강요는 민족 전체에게 강요되었다. 그러나 교회만이 피를 흘려 항거하였다. 이로 인해 2백여처의 교회가 페문되었고 2천여명의 신도가 투옥되었고 50여명의 교역자가 순교하였다. 한국기독교는 민족을 위해 순교한 피 제사로 튼튼하고 흔들림 없는 민족교회로서의 대발전의 축복을 하나님으로부터 보장 받았다.

제1장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와 박해
1. 기독교학교에 대한 참배와 요구
2. 교회를 향한 신사참배 박해 개시

제2장 신사 불참배운동의 궐기 파급
1. 주기철 목사 시무한 산정현교회의 투쟁
2. 항거자들의 결사 반대운동 전개
3. 신사 불참배로 인한 순교자 속출

제3장 신사 불참배로 인한 순교자 속출
1. 전시하 기독교인들의 일대고난
2. '한국교회' 명칭의 박탈 소멸

*제1장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와 박해

*1.기독교학교에 대한 참배와 요구
1930년 일본은 대륙 침략의 제일보를 만주사변을 일으켰으며 부의를 황제로 세워 괴뢰 만주국을 건설하였다. 1936년에는 노구교 사건을 유발하여 본격적으로 중국 본토를 침략하는 전쟁을 수행하였다.

일제는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하여 어떤 정신적인 통일이 필요했던 모양으로,이러한 정신적인 지주를 신사 참배에서 찾으려고 했다.신사란 일본 역대의 천황들의 영과 국가를 위한 유공자 특히 전쟁에 참가하여 전사한 군인들의 영을 모신 곳이라 하면서, 한국 기독교인들을 향해서도 여기에 머리숙여 절하라고 강요하였다.

한국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행동이야말로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는 크나 큰 범죄가 되며,더우기 한국 민족의 긍지와 애국심을 상실 당하는 결과가 된다고 판단하여 한사코 이를 거부하였다. 그러나 일본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한국 기독교인들을 자기들의 종교에 끌어 넣어 신에게 머리 숙이게 하여 굴복케 하기 위하여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강요를 거듭하였다.

1935년 가을, 평안남도 일본인 야스다께 지사는 도내에 있는 중고등학교의 교장 회의를 소집하였고 그 자리에서 교장 일동은 평양신사에 참배하여야 한다고 명령하였다. 이때에 숭실학교 교장 윤산온(G.s.McCune)을 비롯하여 숭의여학교와 안식교 계통의 의명학교 교장 등은 종교의 교리상 그렇게 할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이에 야스다께 지사는 정식으로 공문을 방송하기를 '신사참배는 국민 교육상의 요건임으로 불응시에는 단호한 조치가 있을 것'이라고 하면서 답변을 요구하였다.

사태 추이의 중대성을 느낀 미국 북장로회 선교회에서는 신사참배 문제에 대한 대책을 수립하기 위하여 1935년 12월 23일 윤산온 교장 댁에서 실행위원회를 소집하였다. 문제의 심각성에 비추어 회의는 심야까지 계속되었으나 결국 신사참배는 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야스다께 지사는 이 사건의 보고를 총독에게 올리면서 총독부 학무국에서 처리해 줄 것을 의뢰하였다. 총독부에서는 곧 전국의 도지사와 경찰부장,경찰서장 연석회의를 소집하여 기독교 학교에 대하여 신사참배를 강요하기로 결정하고 불응 시에는 교장을 교체할 것과 학교 폐쇄의 두가지 방법으로 탄압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러한 험악한 사태 하에서 윤산은 교장은 학교를 살린다는 명분하에 학교 대표자 개인의 자격으로 신사참배를 하겠다는 내용의 답서를 발송하려고 마음 먹었다. 그러나 그는 답서 제출에 앞서 신사참배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는 평양 신학교 교수 박형룡 목사와 산정현교회의 주기철 목사를 만나 의견을 타진하였다. 그랬더니 그들은 개인의 참배라고 학교 대표자이니만큼 불가하다고 의결을 표시하였다. 이에 윤산온 교장은 단호한 결심을 갖게 되어 신사참배를 거부한다고 회신하였다.

이를 계기로 숭실,숭의의 두 학교는 교장직 인가가 취소되었고 뒤이어 학교가 폐쇄되고 말았다. 윤산온 교장은 파면된지 2개월이 지나 1936년 3월 한국을 떠나 미국으로 돌아갔으며,그는 미국에서도 계속 신사참배의 부당성을 강조하였다. 한국 주재 북장로회 선교사 가운데는 신사참배 문제는 개인의 신앙 야심에 맡기고 학교는 교육사업이니만큼 계속하여야 한다는 의견도 없은것이 아니었다.

미국 남장로회 선교회에서는 시종 강경한 태도로서 신사참배를 반대하였다. 그것은 미국 남장로회 외지 선교국의 태도가 강경하였기 때문이다. 당시 외지선교국의 총무로 있은 훌튼(C.Darly Fulton)박사는 신사참배는 종교 해우이라고 엄격히 규정하여 남장로회 경영의 학교는 폐교하는데 전혀 주저하지 않았다.

1938년 2월까지 미국 북장로회 경영의 8개 학교와 남장로회 경영의 10개 학교가 모두 문을 닫어야 하는 수난을 만났다.


*2.교회를 향한 신사참배 박해 개시


신사참배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기독교 학교를 폐교케 한 총독 당국은 이제는 제2차 단계로서 교회에 대하여 신사참배를 강요할 계획을 세웠다.

드디어 조선 총독은 한국교회에 대하여 신사참배를 강요하여 한국교회의 목을 졸라 질식케 하는 살인마적 작업에 돌입하였다. 이러한 때에 문제가 된 것은 교회 지도자들 가운데 차차로 신사참배를 국가 의식으로 인정하려는 기운이 일어나 의견의 불통일을 가져오게 된 것이었다. 이는 교히의 큰 비극이오 유간이 아닐 수 없었다.

안식교 계통의 의명중학교는 처음에는 신사참배를 거부하였으나 1936년 1월 교장 이희명은 신사참배 하기로 굴복함으로서 안식교의 신사참배 문제는 일단락을 고하였다. 천주교에서는 1918년 '신사는 다른 신들을 위하는 곳이므로 참배할 수 없다'라는 한국 천주교회의 장정을 작성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국세정서 하에서 이탈리아와 일본과의 친선을 유지하기 위한 방편으로 취한 로마 교황청 포교성의 '신사참배하는 종교적 행사가 아니고 애국적 행사에 지나지 않으므로 그 참배를 허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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