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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의 형성과 부흥

(서론)
누가 우리 한국 민족에게 소망을 줄 것인가, 그는 오직 우는 자의 위로가 되고 약한 자의 강함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뿐이었다. 1907년 이래 한국교회의 대부흥은 교파와 계급을 초월하고 우리 민족이 죄에서 거듭난 참다운 부흥이었다. 선교사들은 겸손과 희생의 사람이 되었고, 교인들은 성수주일, 성경연구, 헌금과 봉사, 사랑의 생활로 돌진함과 동시에 큰 전도 운동을 일으켰고 교회 연합사업을 시작하였다.

제1장 개국과 미국선교사들의 내한
1. 의료.교육사업의 전개
2. 선교의 활동과 조직교회의 출현
3. 네비우스 선교정책의 수립

제2장 성령강립과 교회의 일대부흥
1. 민족적 자각에 따른 신자의 증가
2. 애국 인사들의 기독교인 속출
3. 한국 최초의 대부흥운동

제3장 교회 행정기관 설정
1. 한미 장로회공의회의 발족
2. 대한독노회 설치와 해외선교의 착수
3. 장로회총회 창설과 조선강리회의 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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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개국과 미국선교사들의 내한

*1.의료.교육사업의 전개
쇄국정책으로 나라의 문을 닫고 오랫동안 서양인의 입국을 금하였기 때문에 우리 나라에서의 기독교 전파의 시기는 자연 늦어질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문호 개방의 시기는 드디어 도래하였다. 1882년 5월 22일 미국과의 수호조약의 체결을 비롯하여 그 이래로 영국 프랑스 등 여러 나라와도 교제의 길을 텄다. 미국의 교회가 가장 먼저 한국 선교의 손을 뻗치게 되었다.

그때에 일본에 체재하고 있은 감리교 선교사 매클레이(Robert Maclay)목사는 한국을 방문할 계획을 세웠다. 그는 김옥균을 통하여 고종황제를 알현하였으며, 이나라의 개화를 위하여 서양 과학과 문명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고종은 드디어 "한국 내에서 의료사업과 교육사업을 개시해도 좋다."고 하는 윤허를 내렸다. 기쁘메 넘친 매클레이 목사는 곧 본국 선교본부에 이 소식을 알리면서 한시 바삐 의사나 교사를 보내야 한다고 호소하였다.

한편, 중국에 와 있던 미국 선교사들도, 즉 산뚱성에 와 있은 장로교 선교사 레이드(Gilbon Reid) 목사는 선교 본부에 한국 선교를 위한 계획을 제시하여 선교 개시를 촉구하였다.

1884년 9월 20일 알렌(Horace Newton Allen,안동)이 제물포에 상륙하였다. 그는 한국을 찾기에 앞서 중국 상하이에서 의료 선교에 종사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한국 선교를 위한 인물을 물색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지원하였다. 한국의 사정이란 아직까지 선교사라는 신분을 밝힐 수 없었다. 때문에 그는 미국 영사관의 공의라는 명목으로 입국하였고 동시에 영국과 청국,일본영사관의 공의의 직분까지 맡아 보았다. 그의 입국은 의사가 긴급히 요구되고 있는 외교관들 사이에서 대호평이었다. 그러나 그의 본래의 사명은 선교사업인데,의사로사만 일해야 하니 답답하고 불만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러던 중에 돌발적인 사건이 터져 선교사업 수행을 위한 호기회가 도래하였다.

1884년 12월 4일 갑신정변이 일어났다. 왕족 중의 한 사람인 민영익이가 우체국 낙성식에 참석하였다가 쿠데타를 일으킨 개화당 자객의 칼에 맞아 중태에 빠졌다. 장안에서 유명하다는 한의들을 14명이나 불러들여 치료하였으나 효력이 없었다. 알렌 의사는 그를 정성껏 치료하였으며 생명을 구하는데 성공하였다. 결과에 대한 보상은 과연 놀라왔다. 그는 궁중의 시의가 되는 극진한 대우를 받았으며 서양 의술의 탁월함이 인정되어 병원을 개설해도 좋다는 윤허를 받았다.

알렌 의사는 곧 현대식 병원을 세웠으며 광혜원(Wide spread Relief House)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는 중신들이나 함께 많은 가난한 사람들의 병을 그리스도의 사랑과 봉사의 정신으로 시료하였으므로 환자는 날로 늘어났다. 그가 한국인들로 부터 얻은 신임은 곧 선교사업을 전개하는데 필요한 전초 기지 구축에 성과를 올렸다. 그야말로 알렌이 개척한 그 길을 밟고 언더우드나 아펜셀라를 비롯한 여러 선교사들이 입국하여 일하게 되는데 어려움을 덜어 주었다.

한국에 들어온 선교사들은 의료사업과 교육사업을 병행하여 시행하였다. 서양의술에 대한 신망은 날로 깊어갔고 동시에 서양교육에 대한 원망도 점점 높아갔다. 한국 정부의 노력도 현대식 교육을 도입하려고 애쓴 것만은 틀림이 없었다. 특히 고종의 관심은 지대하였으며 일본을 비롯하여 중국과 미국 등 지에 몇 차례의 시찰단을 파송하여 또는 유학생을 보내어 세계의 정세를 연구 시찰케 하는데 열심을 기울였다.

1883년 6월,미국 시찰을 마치고 돌아온 민영익은 곧 고종에게 현대식 학교 설립의 필요성을 주달하였다. 그러했기에 그 해 7월에 서울을 방문한 매클레이 목사에게 그렇게 쉽게 교육사업의 윤허를 내리셨던 것이다.

한국에서의 최초의 현대식 교육기관은 몰렌돌프(P.G.Von Mollendorf)에 의하여 시작된 영어 강습소인 것 같다. 외교통역관을 양성할 목적으로 영국인 해리팩스(T.E. Hallifax)와 중국인 교사가 교수하였다. 그후, 한국정부로부터 현대식 교육의 지도자를 파송해 달라는 요청을 받은 미국정부의 문교부장관 이튼(John Eaten)은 헐버트(H.B.Hulbert)와 벙커(D.A.Bunker)와 길모아(Gearge W.Gilmore)의 세 사람을 보냈다. 이들을 중심하여 1884년 7월 4일에 육영공원이 설립되었다. 이는 한국 최초의 서양식 국립학교로서 여기에서는 정부에서 일할 관리를 양성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필요한 학교가 정쟁의 틈바구니에서 해어날 길이 없어 10년을 더 계속하지 못하고 문을 닫았다. 이에 선교사들은 직접 학교를 세우고 교육사업에 종사하게 되었다.

선교사들은 기독교 복음을 전달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교육사업에 착수한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면서도 건실하고 대중적인 현대 교육을 소개하였으므로 한국민으로부터 절대적인 지지와 열렬한 환영을 받게된 것이다. 정부가 다하지 못한 교육사업의 효과를 선교사가 수행하여 올리게 되었음은 한국 민족의 개화 계몽을 위하여 절대적으로 유익하였다.


*2. 선교의 활동과 조직교회의 출현
1885년 4월 5일,부활절 아침에 미국 장로회의 파송을 받은 언더우드(Horace G.Underwood,)선교사가 인천에 상륙하였다. 언더우드 목사는 처음 얼마동안 목사라는 신분을 밝히지 못하고 알렌이 세운 광혜원의 강사로 일하였다. 그는 한국어를 배워서 말을 좀 할 수 있게 되자, 길가에 나가 노방전도에 열을 올렸다.

바로 이러한 때에 황해도 장연의 솔내에서 전도를 시작했던 서상륜이 서울로 언더우드 목사를 찾아와 솔내교회를 한번 방문해 달라고 간청하였다. 얼마후 그곳을 방문한 언더우드 목사는 벅차게 소용돌이치는 감격을 누를 길이 없어 감개무량한 마음으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왜냐하면 이 나라에서 국법에서 금하는 기독교를 믿는다는 것도 어려운 일인데,자기네들 스스로의 힘으로 교회를 세웠고 또 그들 자신이 교히를 운영해 나가는 모습을 보게 되었으니, 언더우드 목사는 한국인을 향하는 뜨거운 애정이 저절로 솟아오름을 금하지 못하였다. 언더우드 목사는 1887년 가을에 솔내에서 7명의 신자들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서울에 돌아온 그는 서울에도 교회를 세워야 하겠다는 확고한 신념을 갖었다. 1887년 9월 27일에 언더우드 목사는 새문안의 자기 사랑방에 14명의 신자를 모아 놓고 예배를 드린 후 정식으로 교회의 설립을 공포하였다. 이것이 오늘의 새문안교회의 창립이다.

이 역사적인 한국교회 최초의 교회가 조직되던 날,새문안교회 창설예배에 한국교회 최초의 전도자인 백홍준과 서상륜,한국교회 최초의 선교사인 알렌과 언더우드 그리고 한국인에게 최초로 복음을 전달한 로쓰 목사등, 이렇게 거대한 인물들이 한자리에 앉았다. 이는 장차 한국 장로교회가 그 거보를 내딛고 됨을 축복하고 있는 듯 빛나는 영광의 모습이었다.

감리교인 아펜셀라 선교사는 교인들을 위한 예배 처소로 정동에 있는 집 한채를 구입하였으며 1887년 10월 9일에 정식으로 예배를 올렸다. 이 날에 교히 관리책임자의 아내 김씨(Pauline Kim)의 조모가 세례를 받았다. 이것이 오늘의 정동제일교회의 출발이다.

언더우드와 아펜셀라의 두 목사는 한국에 처음 들어와 기독교 복음을 직접 전하면서 교회를 세우는 일에 열심하는가 하면 학교를 세워 교육사업을 한느데도 남다른 정열을 기울여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그들은 기독교 진리에 입각한 새 과학 문명을 한국인들에게 교육하며 또 새로운 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하여 언더우드는 경신학교를 세웠고 아펜셀라는 배재학교를 시작하였다. 언더우드 목사는 또 아펜셀라 목사와 협력하여 대학을 세우는 일에 성공하였다. 연세대학교는 바로 그들이 설립한 것이다. 한편 감리교 선교사인 스크랜톤(Scranton)부인은 여성 교육을 위하여 이화학당을 개설하였는데 이것이 오늘의 이화여자대학교로 아시아 굴지의 대학으로 크게 발전하였다.

위에서 소개한 두 분 최초 선교사인 뒤를 이어 내한한 선교사는 호주 장로회 소속인 헨리 데이비스(J.Henry Davis) 목사였다. 그는 남한 지방을 여행하면서 전도하였는데 1890년 4월 15일 아깝게도 과로한 나머지 급성 폐염에 걸려 부산에서 객사하였다. 그의 뒤를 이어 호주 선교사들이 여럿이 도래하였다.

1892년에는 미국 남장로회에서 파송한 레이놀즈(W.D.Reinold,)를 비롯한 6명의 선교사가 함께 입국하여 주로 전라도 지방에서 선교하였다.

1895년에는 미국 남감리교에서 보낸 레이드(C.E.Reid)목사가 들어와 경기도 송도를 중심하여 선교사였다.

카나다 장로회에서는 1893년에 맥켄지(William John McKenzie)를 한국에 파송하여 선교사업에 착수케 하였다. 불행하게도 그는 솔내 지방에서 전도하다가 열병으로 별세하였다. 이 소식이 본국에 전해지자 교회는 뒤를 이어 5명의 선교사를 더 보내어 복음을 전파하게 하였다. 캐나다 장로회는 주로 함경도 지방을 중심하여 전도하였다.

1907년에는 성결교회 계통인 동양선교회(Oriental Missionary Society)에 카우만(C.E.Cowman)과 길보른(E.A.Gilborne)이 한국을 찾아왔고 그 이듬해에는 영국 구세군(The Salvation Army)의 선교사들이 들어왔다.

이처럼 한국교회 초창기에 각 교파의 여러 선교사들이 들어왔으나 모두 함께 고생하면서 각자가 맡은 선교구역에서 최선을 다해 전도한 결과, 오늘의 이 땅에 수많은 교회를 이룩하는데 성공하였다.


*3. 네비우스 선교정책의 수립
한국이라는 토양에 기독교 복음을 부식하는데 있어서 그 선교정책을 바로 설정하는 일이란 매우 중대한 과업임에 틀리없었다. 한국을 찾은 선교사들 중의 대부분은 보수적 신학 사상과 독실한 신앙을 소유하고 있어서 그리스도의 희생 봉사의 정신을 몸소 실천하면서 십자가의 도를 전하였기이 때문에, 수천년래 한국민의 마음 속에 뿌리박혀 잇던 샤마니즘(Sharmanism)의 무지와 또는 유교의 형식주의,불교의 미망을 타파하는데 상당한 성과를 올렷음은 좋은 평가를 받을만 하다.

한국 주재 선교사 일동은 1890년 6월 말,중국에서 다년간 선교에 종사한 네비우스(John L.Nevius)목사를 초청하여 세미나를 열었다. 그 결과 한국 선교사업을 위한 기본 원칙을 다음과 같이 설정하였다.

첫째로, 한 사람을 그리스도에게 인도하였으면 끝까지 떠나지 말고 붙들어 그가 개인전도하는 일군이 될 때까지, 자기의 직업에 종사하면서,이웃에게 그리스도를 전할 수 있게 되기까지 끈질기게 지도해야 한다.

둘째로, 교회의 운영과 기구 조직은 그 교회 자체가 능히 감당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기획 실천하여 발전시키도록 한다.

셋째로, 교회에서 전도사업을 감당할만한 인물이 나오거나 재정을 공급할 수 있는 유자격자가 생기면 그들을 선임하여 교회의 지도 일군으로 세운다.

넷째로, 교회당 건축은 그 교인들 자신의 힘으로 하게 하되 건축의 구조나 모양은 한국 고유의 모습으로 지방의 교회당답게 한다. 교회사가인 마삼락(Samuel H.Moffett)은 여기에 두가지를 보충하여 설명하였다. 즉 성경연구반을 조직하여 성경 지식을 신도들에게 보급시키도록 할 것과 외국 선교사들에게는 개체교회의 담임을 삼가도록 한 내용이었다.

위가 일반적으로 네비우스 선교 방안이라고 불려지는 것이며 이를 대별할 때 자력 전도,자치 제도,자급 운영의 셋으로 요약하게 된다. 그 중심 이념은 한국교회로 하여금 피 선교지로서의 의타심이나 경제적 무능력을 배제케 하여 '자립하는 교회'로서의 토착화하는 기초를 닦게하려는데 목표가 있었다. 초기 한국교회 특히 장로회는 이 방안을 채택하므로 그 이후의 선교 정책에 직접적이고 깊은 영향을 미치게 하였으며 한국교회 성장을 위해 상당한 공헌을 남겼다.

1893년에 조직을 본 장로회에선교사공회는 이 네비우스 방안을 참고로 하여 보다 더 획심적인 몇가지 내용을 첨가 확대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상류 계층보다 서민층 전도를 우선한다.
(2) 부녀자 전도와 여성을 위한 교육에 주력한다.
(3) 지방에 초등 교육기관을 널리 설립한다.
(4) 교역자 양성에 특별 유의한다.
(5) 성경 번역의 진행과 보급에 노력한다.
(6) 모든 기독교 문서에 한글을 사용한다.
(7) 선교사가 돕는 교역자 수를 줄이고 자급하는 교회로 육성한다.
(8) 한국인 스스로 동족에게 전도하는 자립 전도의 훈련을 강화한다.
(9) 의료 선교사는 시료와 복음 전도를 병행한다.
(10) 퇴원 환자의 집을 방문 전도한다.

이 선교 정책은 당시 한국교회 발전을 위하여 매우 창조적이었고 고무적인 전도 방안으로서 교회,학교,병원의 세 면을 통한 입체적인 선교 형태를 갖추어 한국 교회사상 기여를 크게 남겼다.

*제2장 성령강립과 교회의 일대부흥

*1.민족적 자각에 따른 신자의 증가
우리 땅에서 치른 청일전쟁과 일본의 입김에 의하여 진행된 갑오경장은 모두가 다 한국 민족을 향한 심각한 반성과 커다란 각성을 일으키기에 충분하였다. 이로 인하여 국민들은 정부의 부패와 무능력을 뼈저리게 느꼈으며 타국 군대들이 우리 국토에서 싸우는데도 말 한마디 못하는 한심한 정세에 통탄하여 마지 않았다. 갑오경장은 청과의 일체의 관계를 단절하고 내정개혁을 선포하고 독립을 외쳤으나, 이것도 일본 제국주의가 적극적으로 한국에 침입하는 계기가 되었음에 불과하였다. 그런고로 이를 깨달은 뜻있는 인사들은 치를 떨며 일어설 수 밖에 없었다.

1895년 서울의 어느 선교사의 보고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한국의 실정은 변해가고 있다. 일반 백성들 사이에 각성의 기미가 점차 드러나고 있다.'
라고 하였고, 그래함(Graham Lee) 선교사는 자신의 1896년도 연례보고서에서
'전쟁은 한국인의 마음에 큰 충격을 주었다. 저들은 삶의 참길을 찾고자 애쓰고 있다.'

라고 말하여 한국민의 애타는 심정을 피력하였다. 이러한 때에 기독교 복음은 새로운 희망을 한국 민족에게 던져 주었다. 사람들은 교회로 몰려들어 신자 수는 급속도로 증가하였다. 1895년에 530명이던 신자가 1896년에 3,276명으로, 1900년에는 7,690명으로 대폭적으로 증가하였다.

1889년부터 1893년까지는 100명에서 150명 사이를 오르내렸다. 그때와 비교하면 너무나 현격한 차이를 나타내고 있다. 그때는 그리스도에게로 들어오고 있으면서도 탐색적인 경향이었지만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참 생명이 있음을 자각했기 때문이었다.

*2. 애국 인사들의 기독교인 속출
개화 인사들 중에 조국과 민족의 운명을 근심하면서 혁신운동을 진행한 인물들이 여럿이 일어났다. 1894년 배재학당의 교사인 이승만이나 1892년 언더우드 신학반 수료한 홍정후나 미국에서 최고 학부를 마치고 1895년 귀국한 윤치호등이 바로 그러한 인물들이었다. 그들은 1896년 협성회를 조직하였고 다수의 신진인물들을 규합하였다.

1896년 미국에서 귀국한 서재필은 독립신문을 창간하였다. 독립신문을 통하여 대중의 계몽에 성공한 서재필은 독립혐회를 구성하였다. 독립협회는 중국 사신이 오면 환영하던 모화관을 개수하여 독립관으로 만들었고 서재필,윤치호,홍정후 등은 주일마다 집회를 열어 백성들 사이에 자유 사상과 민주주의를 고취하였다. 또한 영은문을 헐고 독립문을 세워 국가 자주권의 회복을 역사 의식적으로 표방하며 나섰다.

독립신문과 독립협회가 행한 부정 부패의 공격은 정부 당국자들에게 심한 불쾌감을 일으켜 정부는 드디어 1898년 12월에 독립협회 해산을 명령하였으며 이승만 등 17명을 체포하였다.

선교사들은 감옥을 방문하여 애국 인사들에게 기독교 서적을 전달하면서 전도하였다. 이들은 새로운 설교를 듣고 새로운 책을 읽으면서 진리를 알게되어 드디어 1901년 3월에 12인이 함께 세례를 받았다. 이것이야말로 고관 인사 층에서 대량으로 기독교인이 된 시초이다.

옥중에서 신자가 된 독립협회의 지도자들은 출옥한 이후에도 신앙생활을 계속하면서 한국의 사회와 종교 정치 등 각 방면에 많은 업적을 쌓았다. 특히 사회와 교회를 접근시키는데 세운 공은 뚜렷하였다.

*3. 한국 최초의 대부흥운동
나라의 문호가 개방되자 열강들이 물밀듯이 들어와 저마다 침략의 기회를 노리고 호시탐탐하였다. 1905년 노일전쟁이 끝나자 승리한 일본은 모든 열강의 힘을 물리치고 정치,군사,경제 모든 면에서 이 나라에 대한 우선권을 차지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백의 민족은 이러한 정세에 안타까이 가슴을 쳤지만 약소 국가의 설움만이 닥쳐올 뿐,스스로 해결하지 못하는 궁지에서 더욱 더 몰려가고 있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 1907년 한국교회 최초의 대부흥운동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부흥운동의 불길은 190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원산에서 감리교 선교사 하아디(R.A.Hardie)목사가 기도하는 중의 새로운 영감을 받았다. 그는 이 체험을 동료 선교사들에게 간증한 것이 말할 수 없이 큰 은혜가 되었다. 소문이 퍼지자 평양에 있는 선교사들도 같은 모임을 가졌다. 여기에는 감리교나 장로회가 자리를 함께 하였으며 외국 선교사와 우리 나라 교인들도 한결같이 은혜를 사모하였다. 때마침 미국 뉴요크로부터 죤슨(Howard A. Johnson)목사가 달려와 인도와 영국에서 일어난 세계적 대부흥운동에 관하여 힘있게 전파하였다. 은혜를 갈망하여 간구하는 소리는 하늘에 닿아,1907년 정월에 접어들면서 그 절정에 도달하였다.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모인 이 집회는 낮에는 성경 공부, 밤에는 전도강연 집회로 대성황을 이루었다. 죄를 고백하는 기도는 천지를 진동하였으며 찬송은 폭포소리 같았고, 한날 밤에 일어난 성령의 역사는 드디어 폭발하여 크나 큰 위세를 떨치고야 말았다.

그날밤에 일어난 과정은,사람들은 다투어 일어나 자기의 죄를 고백하였다. 소리내어 울면서 마루에 엎드려 주먹으로 마룻강을 치면서 지은 죄를 통회하였다. 한 사람이 일어나 죄를 고백하면 온 회중이 소리를 내어 아멘을 연발하며 기도를 외치는데, 이처름 뜨거움이 또 있을 수가 없었다. 집회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밤이 지나고 새벽 먼동이 틀때까지 계속되었다. 여기에서 일어난 부흥의 불길은 전국적으로 퍼져 나갔다. 이로 인하여 그 얼마나 많은 사람이 신자가 되었으며 또 얼마나 많은 교회가 설립되었는지 모른다.

이후로 교인들은 성수 주일, 기독교 윤리의 엄수,성경공부,전도활동 등 그리고 주께 바치는 생활에 스스로 힘쓰게 되었으며 한국교회는 이 부흥운동에서 얻은 힘으로 그후 거듭 일어나는 일제 하에서 수난에 박해를 능히 견디며 참아 나가게 하였다. 특히 부흥사경회는 이 운동을 계기로 하여 한국교회 생활에 있어서 하나의 영속적인 연례적 행사처럼 되어지고 말았다.

*제3장 교회 행정기관 설정
(서론)
1919년 3.1독립 운동에 있어서 기독교가 그 중심 세력이 되었음은 세인 공지의 사실이다. 해외에서의 운동이나 국내에서의 독립운동의 거사와 행동이 모두 교회를 중심하여 추진되었기 때문이다. 일제의 박해와 탄압은 한국교회와 신도들에게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교회는 여기에 굴하지 않고 일어나 민족을 위한 길잡이가 되었고 또 봉사자가 되었다. 이는 오히려 한국 민족을 교회로 접근시키는데 주효하였으며 민족 기독교로 발전하는데 전화위복이 되었다.

*1.한미 장로회공의회의 발족
선교사의 증가와 선교 지구의 확장으로 선교사 공의회는 분화되어 공의회 위원회(Committee of Council)란 것을 설정하였다. 1895년에 서울 위원회와 평안 위원회가 조직되었고 1901년에는 전라 위원회(남장로회 선교회),경상 위원회(호주장로회 선교회) 가 그리고 1902년에는 함경 위원회(카나다장로회 선교회)가 또 조직되었다.

위의 선교사 공의회에는 1901년부터 한국인 대표가 동참하였다. 즉 그 해 9월 20일 서울 새문안교회에서의 제1회 장로회 공의회에 한국인 9명과 선교사 25명이 참석하였다. 장로회 공의회의 발족은 한국인 신자들이 역사상 처음으로 교회 최고 처리기관에 참가한 획기적 사실로서 한국 민족교회 발전 과정에 있어서 하나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한국에는 아직 노회가 없어서 우리는 임시로 장로회 공의회라는 전국적인 회의를 마련하였다. 그러나 이 회의는 앞으로 노회가 될 것임에 틀림이 없다.' 라고 한 것과 같이 장로회 공의회는 분명히 앞으로 한국인 스스로가 움직이는 대한예수교장로회 노회의 전신이었음에 틀림이 없었다.

*2. 대한독노회 설치와 해외선교의 착수
1907년 대부흥회의 불길이 전국적으로 퍼진 그 해에 한국교회는 또 다른 큰 수확으로 노회를 갖게 되었다. 1906년 선교사공의회는 다음 해에 7인의 목사 후보생이 안수 받게 될 것을 예견하여 목사 임직을 위한 절차를 결정해 놓았다. 즉 순서위원,신조 작성위원 및 교회정치 기구위원 등을 임명한 것이었다.

1907년 9월 17일 오전 9시,노회 창립의 역사적인 막이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열렸다. 여기에는 한국인 장로 36인과 선교사 33인과 찬성회원 9인등 모두 78인의 회원이 참석하여 대한예수교장로회 제1회 노회를 성립시켰다. 이 회합이야말로 한국민족 역사 상에 최초의 민주적 대의 회합이었다고 하는데 크나큰 의의가 있다.

이 독노회는 가장 중요한 안건으로서 1901년에 설립된 장로회 평양신학교 졸업생 7인을 안수하여 목사로 세웟으며 그주의 한 사람인 이기풍 목사를 제주도로 파송하여 선교사업에 종사케 하였다.

한국교회는 이렇게 출발하면서부터 '선교하는 교회'로 등장하였다. 블레어(W.N.Blair,)선교사는 "새로운 한국교회의 첫 모임은 사실상 선교사를 보내는 모임이었다"라고까지 언급하였다. 그때에 선교 정신은 온 교회에 넘쳐 있었고 곧 뒤를 이어 1909년에 최관흘 목사를 시베리아로,한석진 목사를 일본 도오꾜에 파송하였으며, 1910년에는 백만구령운동에 호응하여 김영제와 김진근의 두 목사를 만주 간도 지방으로 보냈다. 감리교에서는 1907년에 국내선교회를 조직하였으며 3년 후에는 이를 "내외지 선교회"로 확장하여 손정도 목사를 블라디보스톡에 파송하여 시베리아 선교에 종사케 하였고, 또 장로회에서는 방화중 목사를 멀리 美州로 보내어 캘리포니아와 멕시코에 있는 이민 동포를 위하여 선교케 하였다.

1907년부터 1910년 사이에 한국교회는 일본과 중국,만주와 시베리아 그리고 미국 대륙과 멕시코에 이르기까지 거창하게 선교사업을 일으켜 세계 교회로부터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3. 장로회총회 창설과 조선강리회의 결성
1907년 독노회가 창설된 이레 교세는 승승장구하여 불과 6년밖에 지나지 아니하여 총회의 결성을 보기에 이르렀다. 1911년에 모인 제5회 독노회는 다음 해에 총회를 조직할 것을 구상하여 그 준비 작업에 몰두하였다. 결국, 독노회 산하의 일곱 대리회가 승격되어 노회의 조직을 보았고 목사 52명,장로 125명과 선교사 44명 등 221명의 회원이 모여 총회가 조직되었다.

총회는 그 최초의 안건으로 독노회의 창립이 선교하는 교회를 지향한 것과 마찬가지로 선교 교회로서의 영광을 다시 한번 과시하였으며 그리고 중국 산뚱성에 선교사를 파송하기로 결의하였다. 이 총회를 위하여 만국장로회 연합총회와 미국 남장로회 총회로부터 문안과 축사가 답지하였으며,그리고 창립총회는 미국 남.북장로회와 카나다장로회,호주장로회의 각 총회를 향하여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가 성립되었음을 통고하였다. 이는 한국교회가 세계교회와의 유대를 도모한 현명한 처사로서, 총회 출발부터 세계 교회와의 연결을 우의깊게 모색하였는 고로 예의 바른 행동으로 칭찬을 받을만 하였다.

한국에 있어서의 감리교는 미국의 남.북 감리교에서 파송된 별개의 선교사들에 의하여 가각 독자적 노선을 걸었던 것이나 마침내 이 들이 합동하여 하나의 '조선 감리교'를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1907년 6월 남.북 감리교는 '조선인 교역자를 양성하기 위하여 신학당을 설립하기로 가결하므로', 이 결의가 곧 합동의 실마리가 되었고, 학교 이름은 남감리교와 북감리교가 합동하여 설립했다고 하여 협성신학교라 하였다.

1925년 미국 남.북 감리교의 대표들은 모두가 양 교파의 합동을 찬성하였고 수차의 애로를 극복하면서 1930년 기독교 조선 감리회(Korean Methodist Church)를 결성하는데 도달하였다. 이 남.북감리교의 합동은 한국에 있어서 교파 합동의 효시가 되었으며, 미국의 남.북 감리교의 합동보다 앞서 이루어져 세계 기독교 역사상에 매우 중요한 의의를 지니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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