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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독교 100년사

제1편  한국 민족기독교의 출발
제2편  한국교회의 형성과 부흥
제3편  한국교회의 발전과 확대
제4편  한국교회의 고난과 순교
제5편  한국교회의 재건과 분열
제6편  민족 복음화를 향한 교회의 협력
제7편  맺는 말


*제1편  한국 민족기독교의 출발

(서론)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한국 민족은 인습과 형식 빈곤의 멍에를 메고 언제까지 그대로 살 수는 없었다. 이 멍에는 진리만이 풀어 놓을 수 있었다. 기독교 진리인 복음을 우리 민족에게 주려고 목숨을 바친 전도자가 있는가 하면 국외로 나가 목숨을 내걸고 복음을 받아들인 겨레들도 있었다. 한국 민족이 복음을 접수한 시기는 다른 민족보다 뒤졌으나 그 마음가짐과 행동은 어느 민족보다 강하고 열망적이었음을 알아야 한다.

제1장 유럽 기독교인의 전래
1. 벨트브레와 하멜 일행의 표착(漂着)
2. 바실 홀과 맥스웰의 來航

제2장 선교 개탁자(開拓者)들의 한국인 接近
1. 꾸쯔라프목사의 서해안 전도
2. 토마스목사의 대동강 순교
3. 로쓰.매킨타이어 목사의 고려문(高麗門) 전도

제3장 한국 기독교인의 발생과 예배집회
1.백홍준,서상륜의 수세(受洗)와 전도활동
2. 이수정의 개정과 기독교 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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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유럽 기독교인의 전래

*1.벨트브레와 하멜 일행의 표착(漂着)
한국인이 프레테스탄트와 최초로 접촉하기는 1627년 네덜란드 사람인 벨트브레(Jan Janse Weltevree,朴) 일행 세 사람이 한국 동해안에 상륙한 사실로부터 비롯된다. 당시 한국의 사정은 서양인과 교제가 일체 두절되어 있어,그러한 시기에 네덜란드 사람들이 경주앞 바다에 모습을 나타낸 것은 신기하기만 하였다.

그 세사람은 벨트브레 외에 디렉 게이스베르즈(Direk Geijsbertz)와 얀 피이터(Jean Pieterz)이었다. 벨트브레1)는 1626년 동양에서의 무역을 위해 배를 타고 본국을 출발하였고 그 이듬해에 일본을 향해 항해하는 도중 난파하여 경주 앞 바다에 표착한 것이다. 그들은 선내에 결핍한 음료수를 얻기 위하여 한국 땅에 상륙하였다가,일단 나라 안에 발을 들여 놓으면 좀처럼 돌려 보내주지 않는 당시의 법속으로 인하여 억류되었다.2)

동료 두사람은 1636년 병자호란에 출전하였다가 전사하였고 벨트브레 혼자만 살아 남았다.그에게는 전공에 의하여 신안이식지하는 생활에 여자를 취하게 하는 행상이 따르게 되었으며, 구인후 대장 휘하에서 한왜군의 통솔자가3) 되는 출세를 하였다.그 자손들에게도 훈련도감에 편속되는 특전이 부여되어 군인일가를 이루었다.

벨트브레가 기독교 신자인지 여부에 관하여는 한국 문헌에도 몇가지의 기사가 있다. 즉 그는 탁월한 인격의 소유자인 동시에 생각이 깊고 교양을 갖춘 인물4)이라 하였고 생사화복과 천보의 이치5)를 설하였으며 또한 가히 그의 말이나 행위가 도를 가진 사람에 유하다6)는 표현으로 그의 신앙심을 표시하였다. 하물며 그의 국적이 당시 프로테스탄트 국가로서 흥융 도상에 있는 네덜란드인 임을 감안할 때 벨트브레의 기독교인이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이 분명하다.

물론 벨트브레의 신분은 상인이었고 선교사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신앙인으로서의 언어와 행동으로 기독교적 감화를 끼쳤음은 존경과 추대를 받을 자격이 충분히 있었다. 1627년 한국에 상륙한 벨트브레가 한국에 들어온 최초의 프로테스탄트 였음이 틀림없다고 한다면, 이는 한국교회사 상에 중요한 의의를 지니고 있음에 상당한 주목을 기울여야 한다.

벨트브레의 표도 이후 26년이 지난 1653년 제주도에 표착한 네덜란드인들이 또 있었다. 그들 하멜(Hendrick Hamel,)일행도 역시 프로테스탄트이었다. 이들도 극동 교역의 임무를 띠고 일본으로 가는 도중에 폭풍우를 만나 8월 15일 제주도 화순포 앞 바다에서 파선되어 일행 64명 중 많은 사람이 익사하고 36명만이 살아남았다. 그들은 한국 땅에서 억류생활 14년이 지나 그 중 15인이 탈출하여 본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멜 일행도 벨트브레와 같은 프로테스탄트 국가인 네덜란드의 국민이었으므로 프로테스탄트라고 하는데 이의가 있을 수 없다. 그들의 신앙에 관하여는 당시의 한국의 문헌과 일본 문헌과 그리고 하멜이 직접 손 그의 표류기8)속에 많이 나타나 있다.한국인 관리가 그들을 향하여 "기독교인(Christian)이냐"고 물으니 모두가"야야(耶耶)하면서 시인하였다는 내용이 있다.9) 일본 문헌에는 대마도주의 글에서 한국에 구류되어 있다가 일본으로 도망 온 네덜란드인들이 모두 기독교인에 틀림없을 것이라고 언급하였다.10)

하멜표류기에는 하멜 자신이 기독교 신자임을 글의 내용 여러 곳에서 선언하고 있다. 11) 그는 난파에서부터 일본으로 도망하여 귀국할때까지,14년 동안 어려움과 기쁨을 당할 때마다 시종일관 하나님께 간구와 감사를 아울러 드려,훌륭한 신앙의 소유자였음을 여실히 표현하고 있다. 특히 하멜 일행이 소선에 몸을 싣고 한국 해안을 탈출하면서 "온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께 전부를 의탁하였다"는 귀절에 이르러는 감격어린 바도 없지 않아 있다.12)

실로 그들의 생활이야말로 하나님을 완전히 믿었고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기도로 생활했다고 해서 결코 잘못이 아니다. 1832년 네덜란드 선교회 파송의 프로테스탄트 선교사 꾸쯔라프가 한국 서해안을 방문하였다. 그의 내한 동기가 하멜표류기로부터 영향받은 것이 전혀 없었다고 단언할 수 있을 것인가,이 하멜표류기는 한국 사회의 제반 사정과 생활의 면모를 최초로 유럽인에게 소개하였다는 점에서 한동안 유럽의 독서계를 풍미하였다. 꾸쯔라프 목사가 한국에 내항하기에 앞서 하멜표류기와 접촉한 일이 있었다고 한단면, 그러한 점에서 그의 교회사적 가치에 대한 새로운 평가가 가해져야 할 것으로 안다.
(* 주 = 벨트브레가 표류한지 이십몇년이 지나 1653년에 하멜 일행이 본국을 떠나 일본으로 오다가 또 표류해 제주도로 오게 되었다. 일행 64명중 36명만이 살아 남 았고 제주도에서 14년간 억류되 살다가 15명이 탈출하여 본국으로 돌아갔다. - 하멜의 기사에서 보면 그들이 프로테스탄트 였음을 알수있다.

라고 기술되어 있는 부분이 있는데, 이는 잘못된 기술이라고 생각됩니다. 하멜을 포함한 36명은 제주에 표착한 후 그 다음해에 서울로 압송되었으며, 서울에서 잠시 머무른후 다시 전라도 지역으로 이송되었습니다. 그리고 탈출한자는 일행중 하멜을 포함한 8명이며, 이 8명의 탈출후, 일본이 네덜란드인의 조선표착을 알게 되어 잔류 네덜란드인의 송환을 요구한 후, 나머지 생존자 7명도 일본으로 송환되었던 것입니다. 하멜의 기사에는 이 내용이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저는 이 하멜일행, 즉 네덜란드와 조선과의 관계사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특히, 일본의 조선에 대한 야소종문금제의 요구도 관심을 가지고 논문을 쓰고 있습니다만, 혹시 제가 잘못 알고 있는 건인가요? 참고로 저의 홈페이지에는 이와 관련된 논문과 사료, 선행연구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를 소개하고 있는데 참고로 방문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본 내용은 1998.10.15 신동규님이 알려주신 내용입니다. 좀더 자세한 사항을 알고싶은 분은


*2.바실 홀과 맥스웰의 來航
1816년,영국 정부가 중국에 파견하는 암헐스트(J.William Amherst)사절을 태운 알세스트(Alcest)호와 리라(Lyra)호의 함장은 맥스웰(Murry Maxwell)과 바실 홀(Basil Hall)의 두 해군대령이었다. 이들은 중국에 도착하여 사절단을 내리우고 광뚱에 정박하고 있는 기간에,본국 정보로부터 한국 서해안 일대를 탐사하라는 훈령을 받았다. 그리하여 두 함장은 각기 자기의 군함을 통솔하여 1816년 9월에 한국에 내항하여 서해안 일대를 시찰하고 해도를 작성하게 되었다.

그리고 특히 비인만 마량진 앞 갈곳에 들렸을 때에,문정을 위한 임무를 띠고서 접촉한 첨사 조대복에게 성경을 전달하였다. 바실 훌은 본국에 귀환하여 1818년 '한국 서해안 항해기'(A Voyage of Discovery to the West Coast of Corea and the Great Loochoo Island)를 출간하였으며 그 내용에서 첨사에게 전달한 책은 킹 제임스(King James)역본의 대형의 성경(The Holy Bible)이었다고 언급하였다.

" 첨사에 맥스웰 함장이 주는 성경을 정중히 받아가지고 마치 공식 문서를 다루는 모양으로 신중히 해안으로 옮겼다."13) 물론 그것이 성경 인줄은 알지 못하고 받았을 것이다. 이 성경은 외인에게서 받았다는 중대성에 비추어 곧 조정에 상송되었으며 그리고 관부혹은 규장각에 보관되었을 것이다.

이는 실로 한국에 성경이 전달된 최초의 사실로서 한국 교회사에 있어서나 일반 문화사에 있어서도 특필해야할 중대한 사건이 된다.


*제2장 선교 개탁자(開拓者)들의 한국인 接近

*1. 꾸쯔라프목사의 서해안 전도
한국을 최초로 방문한 프로테스탄트 선교사는 칼.꾸쯔라프(Karl F.A.Guzl-aff)목사이었다. 그는 1827년 네덜란드선교회의 파송을 받아 쟈바(Java)와 스마트라(Smartra)섬을 위한 선교사로 부임하였다.

그후에 그는 타일랜드(Thailand)로 갔다가 1831년 마카오로 선교지를 옮겨 자신의 소원인 중국인 상대로의 선교를 본격적으로 진행하였다.

꾸쯔라프 목사는 배를 타고 해안을 순회하는 선교여행을 좋아하였다. 그는 1831년에 중국 동해안 전역을 항행하면서 복음의 씨를 뿌린 일이 있었거니와 1832년에는 그 방향을 한국 서해안으로 돌려 7월 17일에 황해도 백령도에 도달하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또 남하하여 21일에는 군산만에 도달하였다. 그는 배가 군산만 북편의 창선도에 정박하자 곧 상륙하여 무릎꿇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이리하여 로마 카톨릭교회의 선교사인 모방(Piere Philibert Maubant,)신부보다 4년 앞서 꾸쯔라프 목사는 한국에 들어왔다. 배는 25일에는 홍주 고대도 안항으로 항행하였다.

꾸쯔라프 목사는 처음 만나는 한국인들에게 의약품을 나눠주고 병을 고쳐줌으로써 전도에 착수하였고,또한 홍주목사 이민회와 수군우후,김영수를 통하여 국왕 순조에게 성경과 교리서를 헌상하였다.

꾸쯔라프 목사는 홍주목사의 서생으로 있은 양씨(Yang Chich)의 도움을 얻어 주기도문을 우리 말로 번역하는데 성공하였다. 이는 한글 성경 번역의 최초의 사실로서 실로 한국 성서 번역사 상 특필할만한 가치가 있다. 꾸쯔라프 목사는 주민들에게 감자 종자를 주고 그 재배됨을 가르쳐 줌으로 호감을 샀거니와, 복음 전달하는 사명을 결코 게을리 하지 아니하였다.

꾸쯔라프 목사는 귀로에 올라 한국 땅이 안계에서 사라질 그때까지,'예수 기독교'라고 쓴 깃발이 휘날리는 로드 암헐스트(Lord Amherst)호의 돛대 아래 갑판 위에 꿇어 앉아 하나님께 기도를 계속하였다.

"나의 전한 복음이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반드시 열매 맺게 되리라고 확신합니다. 나는 이것을 믿었는 고로 영광에 찬 십자가의 도를 한국인에게 전달하였습니다. 한국 국왕이 성경을 받아보게 될런지는 알 수 없으나 이곳 주민들은 이미 성경을 받고 있으니 저들을 통하여 복음이 한국 온 땅에 펴짐으로 광명의 아침이 찾아 오도록 하나님이 축복이 임하기를 기도할 따름입니다."

꾸쯔라프 목사의 한국 방문은 극히 짧은 기간이었기 때문에 그 이상의 성과를 얻기란 매우 어려웠던 것이고,그의 한국 선교를 위한 개척적인 열의에 만강의 찬사를 아낌없이 보내어 마땅하다 하겠다.

*2. 토마스목사의 대동강 순교
꾸쯔라프 목사가 최후의 기도를 남기고 한국을 다녀간지 33년이 지나 다른 한 프로테스탄트 선교사가 한국 땅에 와서 순교의 피를 흘림으로 한국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새로운 기초를 설정하였다. 그는 1866년 평양을 방문하였다가 대동강 상에서 자기의 목을 칼로 치는 한국인 병사에게 성경 책을 주면서 목숨을 바친 최초의 프로테스탄트 순교자 토마스(Robert Jermain Thomas,)목사이다.

그는 영국 런던선교의 파송으로 1863년 중국 상하이에 부임하였다가 1865년부터는 산뚱성 치푸로 자리를 옮겨 자급전도를 시작하였다. 이 시기에 우연히 만난 한국인 천주교 신자 김자평과 최선일과의 대화는 토마스 목사로 하여금 새로운 열의를 일으켜 주었고 한국 선교를 결행하게 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1866년 6월,토마스 목사는 미국의 상선'제너럴 셔면'(General Sherman)호가 한국으로 간다는 소식을 듣고 배에 타고 동행하기를 간청하였다. 제너럴 셔면 호의 방한은 목적은 서울에 들어가서 국왕을 만나뵙고 통상의 허락을 얻으려는데 있었다. 그러나 지리에 서투른 선원들은 대동강을 한강으로 오인하여 내륙으로 소상하다가,불행하게도 군사들의 화공을 만나 대동강 위에서 불타기 시작하였다. 선원들은 저마다 목숨을 구하려고 물 속으로 뛰어 들었다. 그러나 토마스 목사는 혼자 배 안에 남아 있었다. 그는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오,하나님이시여! 아직까지 복음을 듣지못한 저 불쌍한 백성들에게 은헤를 내려 주시옵소서"

그 다음,그는 아주 침착한 태도로 큰 상자를 갑판 위로 끌어 올렸다. 그 속에는 한국인에게 전도하기 위하여 가지고 온 성경책으로 가득차 있었다. 그는 성경책을 불에 타지않게 갑판 위로 끌어올려 가지고 한권 한권 언덕을 향하여 힘껏 내던졌다. "복음을 받아 영원한 생명을 얻으라"는 애타는 마음에서 그는 던지고 또 던졌다. 그러나 대부분의 책은 언덕에까지 닿지 못하고 물속에 떨어졌다. 이제 불길은 배를 완전히 에워쌌다. 토마스 목사의 옷에도 불이 붙고 그의 머리칼도 타기 시작했다. 견디다 못한 토마스 목사는 물 속으로 넘어져 떨어졌다. 견디다 못한 토마스 목사는 물 속으로 넘어져 떨어졌다. 그는 헤엄쳐 언덕에 기어 올랐으나 군중들에게 체포되어 평양감사 박규수앞에 끌려 갔다가 다시 대동강 하류에 있는 양각도로 호송되어 참수 되었다.

이때에 칼을 들어 토마스 목사의 목을 친 박춘권은 후일 회개하여 1899년 세례를 받으므로 평양에서의 초대 교인이 되었다. 평양은 그 뒤에 한국의 예루살렘이 되었고 전국교회의 중심이 되었다. 토마스 목사의 순교의 피가 흐른 대동강 수를 마시는 많은 사람들이 그후 오래지 아니하여 기독교인이 되었다고 하는 사실은 결코 우연만이 아닌 것이다.


*3. 로쓰.매킨타이어 목사의 고려문(高麗門) 전도
중국 만주의 우장과 봉천 등지는 한국교회 수립을 위한 최초 기지가 되었다. 우장은 한국교회 최초의 신자를 낳은 곳이요 최초의 한글성경을 번역한 곳이며, 봉천은 최초의 한글 성경을 출판한 곳이며 한국인 전도자를 선택하여 파송한 곳이다.

이곳에는 스코틀랜드 일치자유교회(United Free Church of Scotland)의 죤 로쓰(John Ross,)목사와 죤 매킨타이어(J.McIntyre)목사가 1872년 이래 주재하여 선교사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그들이 만주 선교를 희망한 이유 중의 하나가 같은 영국인으로서 한국 선교를 하다가 순교한 토마스 목사의 유지를 계승하기 위함이었음을 부인하지 못한다. 로쓰 목사가 한국에 가까운 우장과 봉천을 택한 이유가 바로 그러한 데 있었다. 그의 선교 계획은 병인양요 이후로 대원군의 쇄국정책의 강화되어 한국 입국이란 도저히 불가능함을 알았는 고로 우선 만주 땅에 있는 한국인을 만나 그들을 교화하여 그들로 하여금 국내 전도에 종사케 하여 선교의 성과를 달성하고자 하였다.

1873년 가을에 로쓰목사는 만주 일대를 순회하는 전도여행을 떠났다. 그는 우장을 출발하여 봉천,흥경을 지나 압록강 상류 임강에까지 이르렀을 때 한국인들이 거주하는 한 마을에 들어갔다. 그곳은 바로 고구려의 고도인 즙안현의 이양자이었으며 약 3천호에 달하는 한국인 가구가 주거하였다. 그는 이곳에서 한국인들을 반가히 만났으며, 한국 입국의 가능성을 타진해 보았다. 그러나 아무도 한국 입국을 위한 길 안내를 수락치 않는 것을 보아 기독교를 금하는 국법의 준엄성을 가히 짐작할 수 있었다. 심지어 어떤 사람으로 로쓰 목사에 대하여 국가의 기밀을 살피러 온 정탐군으로 의심하기까지 하였다. 로쓰 목사는 이곳에서 압록강 건너의 한국 강산을 바라다 보는것 뿐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러던 로쓰 목사가 귀로에 고려문(Korean-Gate 에 들렸을 때 더 많은 한국인을 만나게 되자 한없는 기쁨을 느끼면서 꼭 한국 선교는 하고야 말겠다고 다시 한번 결심을 다짐하였다.

고려문은 책문이라고도 하며 국경 도시인 의주로부터 약 120리 지점에 위치하며, 말하자면 한국인이 중국에 들어가는 관문과 같았다. 이곳에서는 봄과 가을 두 절기에 걸쳐서 정기적으로 교역 시장이 열리면서 많은 한국인들이 모여들곤 하였다.

다음해, 봄에 로쓰 목사는 중국인 서기를 동반하고 한국인 전도를 목적하여 고려문에 도달하였다. 그의 느낌은 한국인들은 국법이 금하는 어려운 사정으로 인하여 사람의 눈에 뜨이는 곳에서는 서양인을 피한다는 사정이었다. 로쓰 목사는 중국인 서기를 시켜서 자기들이 유숙하고 있는 주막집으로 한국인들을 데려 오도록 일을 진행시켰다. 중국인 서기는 여러날 동안 시장에 나가 한국인을 데려 오려고 힘써 보았으나 대부분이 사람이 응하지 아니하여 헛 수고를 되풀이 하였다.

그러던 중, 드디어 한국인 청년 몇 사람을 포착할 기회가 도달하였다. 그들은 평안북도 의주 사람으로 상사를 핑계하여 선진 과학을 배우려고 청운의 뜻을 품고 이역을 헤매고 있었다. 그들은 서양인을 만나고 싶은 호기심이 가득차 있으면서도 국금을 어기는 두려움 때문에 쉽게 만날 용기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중국인 서기의 뒤를 따라 로쓰 목사를 만나게 되었다. 로쓰 목사는 열심히 저들을 설득하였다. 한국 말과 한국 역사를 가르쳐 주면 그 대가로 청년들에게 후한 월급을 주고 또 서양 과학을 가르쳐 주겠다고 그는 제의하였다.

마침내, 한국인 네 청년은 로쓰 목사를 따라 우장으로 갔다. 로쓰 목사와 매킨타이어 목사는 한국인을 동행한 그 기쁨을 억누를 길이 없었다. 그러나 두 목사는 서두르지 않고 반드시 생명의 말씀이 뿌리 박힌 날이 이를 것을 기대하면서 꾸준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마음 밭을 경작하는 작업에 착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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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한국 기독교인의 발생과 예배집회

*1.백홍준,서상륜의 수세(受洗)와 전도활동
로쓰 목사를 따라 우장으로 간 한국 청년들은 백홍준,이응찬,이성하,김진기의 네사람이었다.24)네 청년은 각각 로쓰 목사와 매킨타이어 목사,또 그곳에 있는 세관장과 병원장의 어학 선생이 되었으며 성심껏 일하면서 또 신문화를 배웠다. 그러면서도 이 네 청년은 예수를 믿는 문제에 대하여는 매우 완강하였다. 이유는 그들이 이후에 고국에 돌아가드라도 기독교 신자만 되지 아니하였으면 사형은 면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한편,로쓰 목사와 매킨타이어 목사는 열심히 한국에 관한 지식을 습득하였다. 1874년에는 '한영 회화'(A Korean English Primer)를 발간하였고 1879년에는 '한국지''그 역사.생활.습관'(Korea,It's History,Manners and Customs)를 간행하였으며 1875년에는 '예수성교문답','예수성교요령'의 두 책을 한글로 편찬하였다. 이는 참으로 그들의 한국 선교의 문호를 열기위한 노력이 얼마나 진지하였음을 알게 하고도 남는다.

백홍준을 비롯한 네 청년은 우장으로 들어간지 3년째인 1876년에 굳게 닫혔던 마음 문을 열고 드디어 세례를 받았다.25) 그들이야말로 한국 최초의 프로테스탄트가 도니 것이다.26) 신자가 된 네 청년은 곧 그때부터 로쓰 목사를 도와 한글 성서를 번역하는 일에 착수하였다. 이들의 번역사업은 꾸준히 계속되어 1879년에 먼저 요한복음과 누가복음을 번역하였고 1880년에는 4복음과 사도행전을 완역하였다.

이러한 시기에 다른 한 의주 청년 서상륜이 우장으로 찾아와 성경번역 사업에 가담하였으며,그는 출판을 위한 목활자를 파는 일에 힘을 더 기울였다. 서간도에 살고 있은 김청송이가 인쇄 작업에 경험이 있다 하여 그를 식자공으로 채용하였는데 그는 뒤에 로쓰 목사에게 세례를 받고 신자가 되었다.

1882년에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이 간행되었고 1884년에는 마가 복음과 마태복음이,1887년에 가서는 완전한 신약의 전부가 '예수셩교전서'란 이름으로 출판되어 그 기쁨이야말로 하늘에 닿은 듯 하였다.27)

이제는 로쓰 목사가 뜻한 바 간접 선교의 방식으로 처음 믿기 시작한 한국인들에게 성경 책을 주어 국내에 들어가 선교케 하여야 했다. 1883년 이성하가 성경을 등에 지고 봉천을 떠났다. 그는 압록강 건너편까지 이르렀으나 성경 책을 그대로 가지고 무사히 들어설 것 같지 아니하여 잠시 밖으로 나가 주위의 사정을 살피기 시작하였다. 이성하의 거동을 수항히 여긴 주막집 주인이 방안에 놓아 둔 짐짝을 풀어보니 그 소에 국금의 책이 있어 너무나 겁에 질린 집 주인은 일부는 불에 태워 없이하고 나머지는 전부 압록강 물에 내던지었다.

뒤에 이 소식을 들은 로쓰 목사는 "하나님의 말씀이 던져진 그 강물을 마시는 한국 사람들은 생명수를 얻게 될 것이고, 불에 탄 성경은 한국교회를 자락데 하는 거름이 될 것이다" 라고 예언하였다.

뒤를 이어 백홍준이 다시 성경 책을 등에 지고 우장을 출발하였다. 그는 10일 만에 의주 거넌편에 있는 씨하지라는 마을에 도착하였다. 이곳에서 사정을 살펴 보는대로 역시 성경책을 그냥 가지고 들어가기란 매우 어려움을알았다. 백홍준은 가지고 온 책을 한장씩 한장씩 종이로 풀었고, 그 종이를 말아가지고 노끈을 꼬았다. 다음은 낡은 종이를 많이 사다가 그 속에 책을 감추고 끈으로 묶어 마치 종이를 사오는 것처럼 가장하여 국경을 넘었다.

집에 도착한 그는 성경으로 된 노끈을 종이로 펼쳐 다시 책으로 만들었다. 그는 이 책을 가지고 의주를 중심하여 위원과 강계 등지를 다니면서 전도하였다. 반년도 못되어 10여명의 신자가 생겨,이들은 주일마다 백홍준의 집에 모여 예배를 드렸다. 말하자면 이것이 곧 한국 최초의 프로테스탄트 교회이다. 물론 이는 정식의 교회라기보다 일종의 기도처소이었다.

최초 프로테스탄트의 한 사람인 서상륜은 입국할 때 고려문에서 한국 관리에게 체포되었다. 다행하게도 그곳에는 그의 친척되는 김효순과 김천련의 두 사람이 심부름꾼으로 있었다. 그래서 겨우 그들에게 구출되어 그날 밤으로 국경을 넘어섰다. 서상륜도 고향인 의주를 중심하여 열심으로 전도한 결과 그의 가족을 비롯하여 10여명의 친지들이 신자가 되었다.

그의 전도한다는 소문은 점차로 퍼지어 관가에까지 알려졌다. 신변의 위험을 느낀 서상륜과 동생 경조는 삼촌이 살고 있는 황해도 솔내로 비밀리에 몸을 피해갔다. 그러나 두 형제는 이곳에서 더욱 쉬지 않고 열심히 전도하였다. 얼마 안가서 솔내 마을 58세대 가운데 50세대를 믿게 할 정도로 전도는 크게 성공하였다. 예수를 믿기로 작정한 마을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전도에 나섰으며,1885년에는 순전히 자기들의 힘으로 여덜칸되는 한국의 최초의 프로테스탄트 교회당을 건축하였다. 이곳이야 말로,한국 프로테스탄의 요람지'(Cradle of Protestant Christianity in Korea)로서 영원히 기념할만한 고장이며 또한 한국교회의 발상지로서 세계교회의 이목을 크게 집중시켰다.

최초의 미국인 선교사인 언더우드 목사가 한국에 들어온지 얼마 안되어 이곳을 찾아와 세례를 베풀게 되었다. 언더우드 선교사는 이미 신자가 되어있는 사람들의 신앙심을 확인한 것 뿐으로,한국인에 의하여 이루어진 교회에 와서 공식적인 의식을 집행한 데 불과하였다. 이와 같이 선교사가 피선교지에 입국하기에 앞서 그 나라 사람들이 국외에 나아가 먼저 신앙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이 국내로 돌아와 복음을 전하여 교회를 이룩한 사실은 너무나 기특한 내용이다. 또한 성경이 이미 피선교지의 나라 말로 번역되어 선교사를 기다리고 있는 상황 같은 것은 세계기독교 역사에 유례가 드문 일로서 우리 민족이 그 얼마나 복음을 접수하기에 열중하였는가를 입증하고도 남음이 있다. 이는 한국교회 역사상 영원히 남길만한 가치있는 내용 중의 뚜렷한 것으로 크게 자랑할만 하다.


*2. 이수정의 개정과 기독교 사업
하나님께서 한국에 복음의 문을 여시기 위하여 북쪽 중국에서만 준비하신 것이 아니라 동쪽 일본에서도 역사하신 것은 실로 오묘하기 그지없다.

1882년 한국 정부의 고관인 이수정이가 일본에 건너가게 되었다. 그는 곧 개화 일본을 위한 선각자요 교계의 인물로 유명한 쯔다박사를 만날 기회를 가졌다. 이수정이가 쯔다 박사의 집을 방문하였을 때에 벽에 걸린 마태복음 5장의 산상보훈을 기록한 족자를 읽고 큰 감동을 받게 되었음은 그가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함을 받는 계기가 되었다.

쯔다 박사는 이수정을 야스가와 목사에게 소개하였고 믿음이 자란 그는 1883년 4월 29일 자진하여 신앙을 고백하고 세례를 받았다.

이 소식을 듣고 가장 기뻐한 사람은 일본 주재 성서공회 총무인 헬리 루미스(Henry Loomis)목사였다. 루미스 목사는 곧 이수정을 찾아가 성경을 한글로 번역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이리하여 1883년 4복음과 사도행전의 번역이 나왔고 다음 해에는 마가복음을 출간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수정은 그때 일본에 와 있는 미국 장로회 선교사 녹스(George W.Knox)목사와 미국 감리교 선교사인 매클레이(Robert S.Maclay)목사와 친숙해져 그들을 통하여 한국에도 조속히 선교가 시작되야 한다고 미국 교회에 호소하였다.

한국 주재 최초의 목사 선교사인 언더우드와 아펜셀라의 두 사람은 한국으로 오는 도상에,일본 도오꾜에 들렸을 때 마침 이수정이가 역간한 한국어 성경을 보고 말할 수 없이 큰 감며에 휩싸이었다. 선교사들이 새로이 개척되는 선교지에 들어가 그 나라의 언어를 배우고 또 성경을 번역하는 일이란 여간 어려운 작업이 아닌 것인데, 한국인에게는 그 나라 말로 성경이 번역되어 있었으며 오히려 선교사를 기다리고 있는 사정이었으니,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이 아니었으랴! 그런고로 우리 땅에서는 복음의 씨가 속히 자라 열매를 거두기가 아주 손쉬었다. 두 사람의 미국인 선교사들은 희망이 넘치고 기쁨이 가득찬 가슴에 한국말 성경을 부등켜 안고 힘찬 발걸음으로 이 나라를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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