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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사 /  도전과 응전의 시대

 

한국교회협의회의 조직과 변천을 살펴보려면 1912년 한국개신교 복음주의연합공의회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당시 출발할 때에는 장감의 신앙은 어느 정도 통일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렇게 연합할 수 있었던 것은 한반도에 개신교 전체를 대변하는 연합운동의 협의체 구성의 필요성이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또 선교의 목적이 같았던 블레어와 하디 선교사의 제의가 채택되었고 캐나다 장로교선교회의 윌리엄 스캇이 적극적인 추진으로 교회협의회(FCC)가 결성되었던 것이다. 이 협의회가 공헌 한 것은 한국교회와 세계교회를 연결하는 통로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국의 복음운동에 한국의 각 교단의 교회들과 협력하는 일에 앞장섰다는 것이다. 또 한 가지는 일본에 있는 40만의 한국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일본연합공의회, 입본의 캐나다장로교회와 협력하도록 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1927년을 기점으로 북장로교선교회는 한국교회연합을 통한 장감의 연합운동에 깊은 회의를 느끼기 시작하고 결국 탈퇴하기로 결정하여 연합체는 심각한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이렇게 하면서 한국의 교회는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새로운 질서로 재편되어 나가기 시작한다. 1930년대에는 그동안 한국교회를 주도하는 중심세력이었던 장로교와 감리교에 이어서 성결교가 한국교회의 중심세력으로 자리 잡기 시작한다. 이는 복음주의에 입각한 회개 운동과 부흥운동에 혼연일체가 되어 부흥운동에 전력투구하였기 때문이다. 성결교회의 복음전파 방식은 그들이 소중하게 간직하는 중생과 성결의 체험 교리인 그리스도의 보혈로 원죄의 씻음과 신유와 부활과 재림과 영생을 전하는 것이었다. 특히 이들이 중점을 둔 것은 중생 성결 신유 재림의 사중복음은 놀라운 부흥운동을 경험한 한국교회 교인들에게 어렵지 않게 수용될 수 있는 가르침이었기 때문에 더욱 호소력이 있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성령의 내주하심과 죄에서의 자유에 대한 새로운 체험을 강조하는 성결교회의 가르침은 대 부흥운동을 거치면서 역동적인 신앙의 체험을 강조하는 이들에게 적지 않은 도전을 주었다.

 

이 시대 한국교회가 만나 또 하나의 움직임은 신학적 변천이다. 한국교회는 1930년에 접어들어 이단, 신흥종교, 자유주의, 신비주의 부흥운동, 그리고 무교회주의의 등장으로 그 동안 견지해 왔던 신학적 통일성이 깨지고 다양한 신학사상들이 발흥하기 시작했다. 1934년 한국 북장로교 선교 희년을 맞으면서 블레어가 신학적 변천에 깊은 우려를 표명했던 것처럼 수많은 이단들이 등장, 이 시대의 기독교를 위협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사상적 변천은 리더십의 전환과 별도로 진행된 것이 아니라 상호 깊은 연계성을 지니고 진행되었다. 1920년대 중반 이후부터 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했다. 장로교의 남궁혁, 백낙준, 박형룡, 이서휘, 송창근, 채필근, 김재준, 윤인구, 김치선과 감리교의 전영택, 임영빈, 변홍규, 정경옥, 류형기, 그리고 갈홍기는 그 대표적인 인물들이라고 할 수 있다.

 

1955, 전성천 박사는 한국개신교의 분열과 일치라는 예일대학의 박사학위논문에서 한국에는 언더우드, 알렌, 헤론, 앨러스 등 4명의 북장로교 선교사들이 있었으며, 4명의 선교사들 주에서 전통적인 장로교 신학에 동의했던 사람들은 언더우드 한 사람밖에 없었다고 했다. 언더우드 외에 다른 사람들은 신학적으로 동의하지 않았다는 것은 이들이 북장로교 내의 주류 곧 구학파의 전통, 성경의 무오성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이들의 4명의 선교사들 가운데 신학교육을 제대로 받은 선교사는 언더우드 밖에 없었고, 나머지 사람들은 의사나 간호사였기 때문에 좀 더 개방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었던 것이다. 비록 신학교육을 받은 이들이기는 하지만 다수의 개척 선교사들이 그 같은 입장을 가졌다는 것은 선교 초기 신학적 분위기를 꼭 보수적인 것 많은 아니었음을 말해준다. 그러나 1889년 마포삼열을 비롯한 보수적인 맥코믹 출신 북장로교선교사들과 1892년 이눌서를 비롯한 남부의 보수주의를 대변하는 남장로교 출신 선교사들이 국내에 대거 입국하면서 1890년대에 접어들면서 전반적인 장로교 선교회의 신학적 성향은 보수적인 분위기로 바뀌었다.

 

그러나 193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자유주의는 하나의 세력을 형성하였고 한국교회는 심각한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다. 자유주의 도전이 주는 가장 큰 교훈은 1930년대 들어 지금까지 정통신학의 토대 위에 확고하게 서 있던 한국교회에 진보적인 신학이 하나의 세력으로 형성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이 같은 진보적인 세력은 얼마 후 신사참배문제로 평양신학교가 폐교되자 조선신학교 설립을 통해 한국교회에 깊숙이 영향력을 확대하기 시작했다.

 

1920년대까지 한 목소리를 내던 장로교와 감리교의 신학적 통일성이 서서히 깨어지고 다양한 신학이 역사에 부상하기 시작했다. 정경옥의 자유주의, 김재준의 진보주의, 박형룡의 정통주의, 김교신의 무교회주의 그리고 이용도의 신비주의가 그것이다.

 

감리교 신학자 정경옥이 한국교회에 자유주의를 정착시킨 주인공라면 김재준은 한국교회에 진보주의를 정착시킨 인물이었다. 김양선의 말을 빌린다면 그는 파괴적인 성경비판을 감행하는 극단의 자유주의 신학자는 아니었으나 성경의 축자적 영감과 성경의 완전무오를 거부하고 그 같은 사상과 대결하여 싸우려는 철저한 자유주의 신학자였다. 그는 정경옥의 자유주의와 박형룡의 정통주의 사이에 진보주의라는 중도적 입장을 개척하는데 성공했다.

 

박형룡 박사는 신학적인 색깔뿐만 아니라 삶의 스타일이나 사고방식에 있어서 김재준 목사와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김재준 목사가 개방적이었다면 박형룡 박사는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절제하고 철저하게 칼빈주의 입장에서 정통주의를 변호하는 일에 혼신의 힘을 다했다. 김재준에게 정통주의가 갖고 있는 문제점은 바로 신학을 사변적이고 객관적인 굴레 속에 가두어 두고 삶 속에 구체적으로 연계시키지 않는 데 있었다. 반면에 박형룡에게 진보주의는 성경의 권위를 파괴하고 교회와 그리스도인을 성경과 기독교의 전통에서 벗어나게 만들어 결국 기독교 유일성마저 흔들어 놓는다는 점이었다.

 

1930년대 박형룡은 정통주의 대변자로 주로 교단 장로교회에서 만인의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 그의 화려한 학력, 탁월한 근면성, 한국에서의 선교사 1세대와의 두터운 교분, 그리고 무엇보다도 복음의 순수성을 지키려는 강력한 의지는 그를 일약 한국교회 정통의 대변자로 부상시키기에 충분했다. 더구나 귀국 후 한국교회 안에 일고 있던 정경오류로 대변되는 자유주의 신학과 김재준으로 대변되는 진보주의 신학, 김교신의 무교회주의와 이용도의 신비주의 부흥운동의 발흥은 기왕에 한국교회에 바른 신앙과 바른 신학을 구축하는 일에 자신의 생애를 바치기로 다짐했던 박형룡의 신학적 방향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신학 논쟁과 교회의 응전이 1930년부터 1935년까지 한국교회를 특징짓는 중요한 사건이었다면, 1935년부터 1945년 해방될 때까지 한국교회를 특징짓는 사건은 신사참배 논쟁이었다.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 앞에 한국교회는 신사참배를 하느냐 반대하느냐라는 양자택일의 기로에 처했다. 호주장로교선교회가 보고한 것처럼신사참배문제는 한국의 교회가 직면하였던 가장 중대한 문제였다.”

 

신사참배는 1911년의 105인 사건이나 1919년의 3.1운동 탄압보다도 더 크고 직접적으로 기독교 신앙에 위협을 가했던 문제이다. 그것은 105인 사건이나 3·1운동으로 인한 탄압이 민족의 독립운동과 관련된 일제의 탄압이었다면, 신사참배 강요는 신앙의 자유를 박탈당하고 신앙 양심을 유린당하는 본격적인 종교박해였고, 교회 전체가 당한 대 박해였고, 전 민족이 당한 일대 수난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신사참배 문제는 세속권력을 절대화하고 인간을 신격화하는 일제의 천황제 이데올로기와 관련된 것으로 저이, 종교, 교육, 문화 등 여러 부분에 걸친 복합적인 문제였기 때문이다. 한국교회는 신사참배 강요에 대해 순응 또는 타협함으로 신앙의 본질을 왜곡하느냐 아니면 끝까지 신상참배의 강요에 맞서 신앙을 지키느냐 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한국교회의 신사참배 문제는 신앙의 본질과 그 해석, 더 나아가 그 적용과 실천에 관한 문제와 깊숙이 연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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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주의의 발흥과 기독교의 사회개혁

 

동아시아의 패권국으로 부상한 일본은 한국을 중국과 러시아의 지배로부터 분리시키고 영국과 미국의 양해 하에보호조약과 합병이라는 허울 좋은 명분을 내세우며 조선을 자신들의 속국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한일합방 이후 1945년 해방되기까지 “36년 간 무단정치에서 문화정치, 황국신민화정책으로 그 통치방법이 변화되어 왔지만 식민지 지배와 수탈이라고 하는 점에서는 추호도 변함이 없었다.

 

어용사가 유세비우스가 콘스탄틴 대제의 통치에 아부했던 것처럼 일본의 기독교 지도자들은 하나같이 일본의 한국 합병을 예찬했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서도 양심의 소리는 있었다. “조선합병이라는 글에서 우찌무라 간조는 이렇게 말했다. “불쌍한 한국 사람들은 그들의 나라를 잃었습니다. 아무도 그들의 손실을 위로할 수는 없습니다. 나는 일본이 한국을 합병한 일은 곧 또 하나의 폴란드를 합병한 일이며, 결국 이 먹이를 완전히 소화할 수 있으리라고는 바랄 수 없지 않겠는가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한일합방과 국권의 상실로 한국기독교는 위기를 맞는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는 어려움 가운데도 항일운동을 주도하고 민족주의를 고취시키는 역할을 활발하게 전개해 나간다. 이런 기독교의 활동은 일본 정부로 하여금 한국 개신교인들과 개신교 선교사들에게 차가운 눈총을 보내기 시작하는 원인을 제공한다. 그러나 안, 밖으로 저항을 하면서 한국 기독교는 한국근대화와 민족계몽을 통한 민족주의 사상의 고취에 크게 기여한다. 더 이상 보고만 있을 수 없는 일본 정부는 통감부를 통해 새로운 학교령을 공포하고 신민지 교육시책을 강요함은 물로 관공립 보통학교에 일본인 교사를 폐지시키고 사립학교 설립을 인가제로 전환시켜 일제의 관할 하에 두면서 학교 설립을 규제했다. 이에 대해서 한국에 파송 된 선교회는 내용적으로는 비정치화의 입장을 취하고 있었으나 실제적으로는 적지 않은 선교사들이 일본의 한국 지배를 예찬하는 경우가 많았다. 외국 선교사들은 일본의 한국 통치를 정당하게 받아들이는 경향이 짙었다. 그러나 일제의 기독교 탄압의 가속화로 한국기독교와 선교사들의 입장은 저항으로 바뀌기 시작한다.

 

갑신정변, 청일전쟁, 러일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청과 일본의 무력에 의해 수난 당하는 현장을 목도하던 국내의 외국 선교사들 중에는 한국에 대한 일본의 무단정치를 우려하며 그것을 노골적으로 폭로하는 이들도 있었다. 미 감리회 소속 케이블 선교사는 1908년에 일제의 무단정치를 폭로하는 한 보고서를 미국 선교본부에 보냈다. 일제가 한국기독교에 대해 가했던 폭행과 살해 사건은 일제가 교회를 어떻게 보았으며, 그들이 얼마나 반기독교적 탄압정책을 썼는지를 말해 준다. 일제는 선교사들을 직접적으로 공격하지 못하고 그들의 선교구에 있는 한인교회들에게 박해를 가함으로써 자신들의 의지를 전달했고 이와 같은 기독교 박해는 통감부가 설치된 후 더 구체적이고 노골적으로 진행되었다.

 

105인 사건은 대부흥 운동을 거치면서 거대한 규모로 성장한 한국기독교가 일본 식민 정권에 대항할 수 있는 잠재적 반정부 단체라는 일제의 인식에서 기인되었다. 한국 선교의 개척자 제임스 게일이 전환기의 한국에서 말한 것처럼 한국은 정치적 존재로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선교사들의 세계에서는 제일류의 세력으로 인정받을 만큼 세계 기독교계로부터 주목 받는 대상이었다. 그것은 한국교회가 1903년 원산부흥운동, 1907년 평양 대부흥 운동, 그리고 1909년 백만인 구령 운동을 통해 세계 선교지에서 유래를 찾기 힘들 만큼 놀랍게 성장한 데다 신학교 설립, 노회와 총회의 설립 등으로 하나의 전국적인 조직을 갖춘 큰 세력으로 발전했기 때문이었다. 1884년 알렌에 의해 시작된 한국선교가 과거 지배권 쟁탈을 다투는 강대국들의 포성이 두 번이나 진동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선교 25주년이 지난 후 “1910년대의 기독교는 정립된 종교요, 기독교회는 큰 능력을 내포한 민족적 기관으로발돋음한 것이다.

 

3·1운동 당시 마침 극동을 방문, 현장을 확인한 블랜드가 중국, 일본, 그리고 한국에서 지적한 것처럼 3·1운동은 일본의 무단정치에 대한 국민의 분노, 러시아 혁명으로 인한 민족국가의 출현,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의 선언에 자극 받아 일어난 한국 민족의 비폭력 독립운동이었다. 그리고 그 위대한 결집력은 민족 종교와 같은 특징을 지닌, 민족의 자유, 독립의 원동력이었던 기독교에서 나왔다.

 

3·1운동 이후, 제임스 부컬크가 말한 반기독교 운동이 거세게 일기 시작하여 1922년에 정점에 달했던 것이다. 특히 반 기독교적 성격을 지닌 휴머니즘, 사회주의, 공산주의의 발흥으로 젊은이들 사이에는 반기독교적 움직임이 강하게 일고 있었고, 가치관의 차이로 인한 젊은이들과 기성세대의 충돌, 자유결혼, 여권운동, 교회의 사회참여 문제가 중요한 시재적 현안으로 부사했다. 또한 경제 공항으로 젊은이들의 심리상태는 극도로 불안했고, 이로 인한 사회적 불안이 고조되어 교회의 영적침체가 더욱 심화 되었다. 더구나 진화론과 고등비평의 유입으로 전통적인 창조론과 성경관이 일대 도전을 맞기 시작했다. 볼셰비키혁명 이후 조직된 조선 공산주의 및 사회주의 운동, 춘원 이광수의 기독교 비판, 김장호의 자유주의 사건은 그 전형적인 예다. 3년간의 미국 연구를 마치고 1912년에 돌아온 연희전문학교의 벡커가 지적한 것처럼 한국 청년들 사이에는 격세의 감을 느낄 정도로 커다란 사상적 변화가 일고 있었다.

 

이와 같은 새로운 사조들의 유입과 새로운 차원으로 전개되는 일본의 한국 식민정책 속에서 교회는 이러한 대내외적인 문제들에 대처해야 했고, 동시에 변천하는 사회의 움직임에도 민감하게 적응하면서 복음을 전해야 하는 이중적인 사명을 부여받았다.

 

한일합방 이후 조국이 일제에 의해 강점되자 한국 기독교인들이 정치적인 소망 대신 종교적인 소망으로 방향을 선회하면서 한국교회에는 사회적인 책임과 정치적인 문제에 대한 관심을 의도적으로 배제하고 신앙을 내향화시키려는 경향이 나타났다. 그 결과 한국교회에는 세대주의 종말론이 놀랍게 확산되기 시작했고, 성경 중심의 기독교가 더욱 강조되었다.

 

세대주의 종말론의 발흥은 한국의 개신교, 특히 선교를 주도했던 장로교, 성경교, 대한기독교, 동양선교회 등의 신앙을 타세적인 신앙으로 만들어 주었으며, 보의 아니게 하회적인 책임을 간과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3·1운동의 전후로 공산주의 및 사회주의와 춘원 이광수의 기독교 비판처럼 교회 밖으로부터의 기독교 비판이 강하게 일어나던 그 즈음, 교회 내부에서도 전통적인 신앙에 대한 강한 도전이 일어났다. 그것은 자유주의 도전과 이단의 발흥이었다. 1910년 한일합방 이후의 사회 경제적 혼란, 3.1운동의 실패, 공산주의 및 사회주의의 발흥, 일제의 통치에 편승하는 어용 교단의 출현 등 끊임없이 계속된 사회적 혼란을 틈타 자유주의와 반선교사의 기치를 내걸고 주류에서 벗어난 수많은 종파들이 태동되기 시작했다. 이렇게 등장한 이단들은 해방이 될 때까지 지칠 줄 모르고 계속되었다. 마치 예일 대학의 교회사가 시드니 알스트롬이 그의 저서 미국의 종교사에서 미국 제 2차 대각성운동 이후 수많은 이단들이 등장하는 그 시대를 가리켜 이단의 전성시대라고 명명했던 것과 같은 시대상이 출현한 것이다. ”

 

1919, 브라운은 자신의 극동의 정복에서 한국교회가 세계에서 유래를 찾을 수 없을 만큼 성경을 사랑하고 구령의 열정에 불타고 있으며 성령의 역사를 경험하는 교회라고 인정하면서도 한국기독교의 사회적 관심의 결여에 대해서는 강도 높게 비판했다. 한국교회는 복음의 사회적 적용에 비교적 무관심하고, “교회의 사상이 내세에 고정되어 있으며, “현 세상은 너무도 완전히 상실되어 이 세대에서는 구원받을 수 없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브라운이 한국에서 활동하는 한 선교사에게 사회 개혁의 방식에 대해 당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가?” 라고 질문하자 그는 전혀 못합니다.”, “우리는 복음을 전하기에 너무 바쁩니다.” 라고 답변했다. 브라운은 한국의 사회적 관심의 결여가 선교사들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확실히 191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교회는 사회적 관심이 줄어들고 있었다. 원산부흥운동과 평양 대부흥 운동, 그리고 이어 진행된 백만인 구령 운동을 전후하여 한국 사회를 주도했던 교회의 모습과는 확실히 차이가 있었다.

 

주지하다시피 1917년 춘원이 한국교회의 사회적 관심을 촉구했고, 1922년 이후 동아일보가 사설을 통해 이 문제를 끊임없이 환기시켰으며, 1928년 예루살렘 국제 선교협의회에서는 교회의 사회적 관심을 중요한 주제로 다루었다. 이와 같은 노력에 힘입어 1918년 남감리교가 사회신경장정을 편입시켰고, 1920년 장감연합공의회는 사회봉사실현 프로그램을 확정했으며, 1912년에는 만주와 조선 주재 장로교 선교사 100명이 평양 장로회 신학교에서 5일 간 회합을 갖고 조선인 교역자의 미국 유학 프로그램을 논의했고, 1925년에는 조선야소교 연합공의회에 사회부를 상설했고, 1·932년에는 사회신경을 채택했다. 그 시대 속에서 이와 같은 교회의 대 사회적 책임의식은 교회의 기독교문화 사업과 사회복지사업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전기가 되었다. 이것은 새로운 운동이 아니라 한국교회가 처음부터 가지고 있었던 간접선교와 직접선교의 균형의 필요성을 재인식한 것이다.

 

이렇듯 한국장로교회가 공산주의 및 사회주의의 도전, 교회 밖으로부터의 비판, 교회내부로부터 이단의 도전을 받고 있는 동안 한국에 파송 된 선교사들 가운데 특히 평양 주재 선교사들과 서울 주재 선교사들 사이에 뚜렷한 대립과 갈등이 표출되고 있었다. 이는 자신들에게 유리한 곳에 학교를 옮기는 문제와 교단의 색이 반영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한국교회와 사회의 계몽운동, 절제운동, 농촌운동, 진흥운동에 많은 기여를 하게 된다.

 

그리고 1920년에 이르러 길선주 목사와 김익두 목사로부터 시작된 영적부흥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이것으로 한국교회는 엄청난 양적인 성장을 가져왔다. 이와 함께 청소년운동과 주일학교운동에 관심을 갖기에 이른다. 이는 젊은이들을 깊은 영적 잠에서 깨워서 교회와 사회에 위대한 봉사자가 되어야 한다는 복음 본래의 성격들을 고취시키기 위해서이다. 이 운동은 YMCA, YWCA등이 주도해 나갔다. 한편 주일학교도 활성화 하여 아이들 신앙교육에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방학 중에 수련회를 통해서 이들을 교육하였다. 이밖에도 출판문화운동, 대 사회사업운동을 전개해 나갔을 뿐만 아니라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고아들을 위한 고아원 운영을 하였고 나환자들과 폐결핵 한자들을 위한 수용소와 병원의 설립 운영과 같은 사회사업을 지속적으로 추진하였다. 이는 한국교회가 사회 속에서 단순히 복음만 전한 단체가 아니라 복음을 통한 개인 구원의 영역을 넘어 사회적 책임의 실천을 통해 사회와 문화 속에 기독교 정신을 실천하는 하나의 장이었던 것이다. 한국의 기독교대 대사회적인 책임을 결코 간과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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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도적인 틀을 다지는 한국교회

 

1907년 평양에서 대부흥운동이 일어나던 그 해 최초의 독노회가 결성됨으로써 한국장로교회는 명실상부하게 민족교회로서 발돋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1929년 남북감리교회가 하나로 합동하여 협성신학교와 별도로 운영해오던 여자신학교를 합해 감리교 신학교를 태동시키게 되었다.

 

대한예수교 장로회의 조직은 19053월 처음으로 개강하게 된 평양장로회신학교의 설립과 신학교로서의 견실한 틀을 갖추어 가면서 구체화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처음 평양신학교를 주도한 선교사들은 마펫(마포삼열), 언더우드, 클락(곽안련) 등이었다. 이들은 19076월에 길선주, 양전백, 서경조, 한석진, 송이서, 방기창, 이기풍 등 7명의 첫 졸업생을 배출해서 그해 독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게 했다.

 

평양신학교는 네비우스 선교정책과 관련하여 설립되고 육성되었던 것이다. 여기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으로 나타난 것은 바로 성경공부와 사경회였다는 것이다. 이렇게 평양신학교가 명실상부한 신학교로서의 자리를 잡아가면서 대한예수교장로회 독노회 조직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으로 한국교회가 놀랍게 성장하면서 1907년 가을 독노회를 조직하기로 결정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독노회가 결성되면서 한국교회는 소위 12신조로 알려진 장로교신앙에 기초한 신앙고백을 채택한다.

 

초기 한국교회 해외선교는 살펴보면 대한예수교장로교는 1907년 첫 졸업생인 이기풍을 선교사로 제주에 파송함으로 시작된다. 평양에 복음을 들고 온 선교사들에게 돌을 던지며 복음을 방해했던 이기풍이 신학교를 졸업하고 복음의 불모지인 제주도에 선교사로 떠나리라는 것을 누구도 상상도 못했던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이러한 선교의 역사는 한국교회로 하여금 해외선교 열을 강하게 불어넣는 전기가 되었고 그 결과 일본으로 확대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열정이 멀리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선교까지 이어졌고 만주와 중국선교에까지 선교사를 파송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간도까지도 복음의 열정이 전해지게 되었는데 그곳은 중국인보다 더 많은 한국인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사실 간도는 존 로스와 존 맥킨타이어의 선교활동으로 널리 알려진 곳이다. 한국교회가 이곳으로 사역자를 파송하여 복음을 삶 속에서 실천하며 신앙의 모델을 보여 준 곳이다. 그리고 이 지역에 살고 있는 상당수의 한국인들이 중국 시민으로 귀화하거나 혹은 중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하여 동족만이 아니라 중국인 선교에도 유익하게 작용하여 만주선교는 곧 이어 진행된 중국선교를 위한 초석이 되도록 했던 곳이었다.

 

한국 장로교의 가장 큰 특징은 바로 선교에 힘쓰는 것이다. 선교사들이 흘린 복음의 선혈이 이런 선교의 열정이라는 열매로 나타나는 것이다. 바울이 말한 복음에 빚진 자.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복음에 빚진 자이지만 한국의 기독교는 어느 누구보다도 더 복음에 빚진 자이다. 그리고 지형학적인 위치에 있어서도 유라시아로 출발하는 전초 기지의 역할을 감당하기에 더할 나위없는 좋은 곳이다. 21세기 한국 교회의 사명은 바로 선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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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사] 1907년 평양서 일어난 대부흥

 

길선주 친구 돈 사취고백이 대부흥 불 댕겨

 

1903년 원산에서 시작된 부흥의 불길은 평양, 개성, 서울, 목포 등지로 확산되었고, 19071월에는 평양 대부흥으로 발전하였다. 대부흥은 갑작스럽게 나타난 현상이 아니었다. 수많은 샛강이 모여 큰 강을 이루고, 큰 강물이 모여 대하(大河)를 이루듯 평양에서의 부흥은 그동안 간헐적으로 전개되어 왔던 성령의 특별한 역사가 결집된 것이었다.

 

 

<figcaption class="wp-caption-text">19071월 평양 대부흥의 불을 지핀 길선주 목사(앞줄 중앙)와 마펫(마포삼열) 선교사() 그래함 리(이길함) 선교사()</figcaption>

 

 

그해 12일부터 15일까지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평안남도 도사경회가 개최되었다. 1000여명이 회집한 이 집회에서 그래함 리, 스왈른, 번하이젤, 윌리엄 헌트, 블레어 등이 강사였다. 길선주 또한 이 사경회의 강사이자 이때의 부흥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였다.

190712일부터 15일까지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평안남도 도사경회가 개최되었다. 1,000여명이 회집한 이 집회는 그래함 리, 스왈른, 번하이젤, 윌리엄 헌트, 블레어 등이 강사였다. 길선주 또한 이 사경회의 강사이자 이때의 부흥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였다. 이렇게 집회가 계속 되는 중 16일 저녁 집회에는 무려 1,500여명이 참석하였다. 당시 평양의 겨울은 영하 30도까지 내려가는 엄동설한이었으나 뜨거운 집회의 열기를 막지는 못했다.

낮에는 분반으로 나눠 성경을 공부하였고, 저녁에는 대중집회 형식으로 모였다. 16일부터 시작된 저녁 집회에는 1500여명이 참석하였다. 당시 평양의 겨울은 영하 30도까지 내려가는 엄동설한이었으나 집회는 계속됐다.

 

사경회가 회개기도회가 되기까지

 

처음부터 성령의 역사가 나타난 것은 아니었다. 때로 분위기는 냉담했고, 알 수 없는 불안이 엄습하기도 했다. 이런 가운데 112일 밤 블레어 선교사가 고린도전서 1227절을 본문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그의 한 지체라는 제목으로 설교했을 때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 다음날은 더욱 분명했다. 영적 분위기가 회중을 압도했고 길선주 전도사가 맛을 잃은 말라빠진 사람들아라고 외치며 신자다운 삶을 살지 못했음을 설교했을 때 회개의 기도가 터져 나오기도 했다. 14일에는 정오기도회를 열고 성령의 역사를 간구했다.

 

오늘 우리가 평양대부흥이라고 부르는 성령의 강권적인 역사는 사경회 마지막 날인 14일과 15일에 일어났다. 14일 저녁 길선주는 회중 앞에서, 1년 전 세상을 떠난 친구로부터 재산을 관리하도록 부탁받았으나 그 일부를 사취했던 죄를 고백했다. 이 고백이 회개의 역사를 불러일으켰고, 평양대부흥의 내적 동인이 되었다. 길선주의 회개에 이어 청일전쟁 당시 자기 아이를 죽였던 한 여인이 살인의 죄를 고백했다.

 

이때부터 죄의 고백은 계속되었고, 수많은 이들이 은밀한 창고 속에 숨겨 두었던 죄를 하나씩 고백하기 시작했다. 회개의 기도는 바다에 이는 파도소리 같았다. 김양선은 이렇게 기록하였다. “인간이 범할 가능성이 있는 모든 죄는 거의 다 고백되었다. 사람의 체면은 이제 다 잊어버리고 오직 이때까지 자기들이 배반하던 예수를 향하여 주여 나를 버리지 마옵소서라고 울부짖을 뿐이다. 국법에 의해 처벌 받는다든가 또 바로 죽임을 당한다 하더라도 문제가 아니었다. 다만 하나님의 용서를 받는 것만이 그들의 유일한 소원이었다.”

 

그래함 리는 115일자로 기록한 보고서에서 어제 있었던 집회는 내가 경험하지 못한, 어떤 말로도 형용할 수 없고 표현할 수 없는 집회였다고 했다.

 

조지 맥쿤 또한 115일자로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 총무 브라운에게 보낸 편지에서 우리는 매우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고 있다. 장대현교회에서 모인 지난 밤 집회는 최초의 실제적인 성령의 권능과 임재의 모임이었다. 우리 중 아무도 지금까지 이전에 그 같은 것을 경험하지 못했으며 우리가 웨일스, 인도에서 일어난 부흥에 대해 읽었지만 이번 장대현교회에서의 성령의 역사는 지금까지 읽었던 어떤 것도 능가할 것이라고 썼다.

 

 

 

1907년 대 부흥은 뜨거운 구령(救靈) 운동으로 이어져 국내는 물론 만주 중국 등지까지 복음의 확산을 가져왔다. 사진은 1907년 당시 평양 장대현교회 앞에 모인 성도들이다

 

죄 고백이 행동으로 옮겨가다

 

15일 저녁에도 성령께서 비상하게 역사하셨다. 선포된 말씀에 응답하여 교인들은 밤새워 눈물로 기도했고 온갖 죄악들이 숨김없이 고백되었다. 눈물은 가슴을 적셨고, 애통하는 회개는 격류를 이루며 평양의 거리를 파도치고 있었다.

 

 

 

이 회개의 물결을 목격한 여 선교사는 이렇게 썼다. “저런 고백들, 그것은 마치 감옥의 지붕을 열어젖힌 것이나 다름없다. 살인, 강간, 그리고 상상할 수도 없는 모든 종류의 죄가 고백되었다.” 블레어는 이 당시 회개는 진정한 의미의 죄의 청산이라고 보았다. “대부흥의 회개는 눈물을 흘리며 죄를 고백하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남에게 손해를 끼친 사람들은 그 손해를 끼친 사람들의 집을 찾아다니면서 상처를 준 사람들에게는 사과를 하고, 과거에 남의 재물이나 돈을 훔친 사람들은 그것을 갚아 주었는데 비단 교인들에게뿐 아니라 불신자에게도 그렇게 하였다.” 18, 19세기 영국, 미국의 부흥사에서 예시된 바처럼 죄에 대한 회개는 부흥의 가장 중요한 동력이었다.

 

장대현교회에서 일어난 부흥의 역사는 평양 전역으로 퍼졌고, 교파를 초월하여 다른 교회로 그리고 학교로 확산되었다. 부흥의 불길은 곧 타 지방으로 번져갔다. 그래함 리에 의해 선천으로, 스왈른에 의해 광주로, 윌리엄 헌트에 의해 대구로 전파되었다. 길선주는 의주와 서울로 갔다. 또 평양신학교 학생들에 의해 부흥의 소식이 각지로 전파되었고, 부흥의 역사는 신의주, 선천 등 북한 지역과 대전, 공주, 대구, 목포 등 남한의 다른 지역으로도 확산되어갔다.

 

성경연구와 기도, 전도, 봉사, 봉헌의 생활이 강조되었고 사경회가 열리는 곳에는 공적인 회개와 더불어 영적 변화가 일어났다. 이런 부흥은 19074월까지 계속되었다. 1908년에는 만주와 중국으로 확산되었다. 이때의 부흥은, 한국교회의 수적인 성장과 내적인 신앙 성숙을 가져왔고, 전도운동과 선교운동으로 발전하였고, 사회변혁에도 영향을 끼쳤다. 특히 1903년 이후 1907년 대부흥은 교회연합운동을 가능케 했고, 한국교회의 성격을 주형하였다.

 

이상규 (고신대 교수, 역사신학)

 

[출처] -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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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사] 부흥의 불길(19031906)

 

대각성 불길, 원산개성평양목포로

 

1900년대 초 한국교회는 변화를 경험하게 된다. 선교사의 내한 이래 첫 10년간은 고투의 날들이었으나 청일전쟁 이후 수적 성장을 보이더니, 1900년 이후 도처에서 사경회(査經會)가 개최되기 시작하였다. 정치적으로도 변화의 시기였다. 청일전쟁(19845), 을미사변(1895), 노일전쟁(19045), 을사늑약(1905), 그리고 1910년의 강점으로 이어지는 국권상실의 과정은 역사의 아픔이자 좌절의 시기였다. 감리교 선교사 무즈(J R Moose)는 자신의 관할지역에서 의지할 곳 도무지 없소”(Wei-chi hal kot tomochi oupso, There is altogether no place to trust)라는 조선인의 절망을 보았다며 이 땅에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황금 같은 시기가 도래했다고 썼다. 암울한 역사현실로부터 탈출하려는 욕구와 무언가 새로운 역사의 변혁에 대한 기대가 뒤엉킨 1900년대 첫 10년 동안 한국교회에는 몇 가지 형태의 신앙운동이 일어났는데, 그 대표적인 경우가 1903년부터 1907년에 이르는 신앙부흥, 그리고 1909년의 100만인 구령운동(救靈運動)이었다.

 

부흥이란

 

부흥이란 인간의 삶 속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포괄적인 개념인데, 근본적으로 부흥은 생명(life)과 각성(awakening)을 의미한다. 부흥운동사가인 에드윈 오르(Edwin Orr)는 부흥을 그리스도의 교회에서나 신앙공동체에서 나타나는 초대교회에서와 같은 성령의 역사라고 말하는데, 일반적으로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 가운데 행하시는 특별한 역사로 정의되어 왔다. 이렇게 볼 때 성장(growth)은 인간의 계획과 의도에 의해 이루어질 수 있는 점진적인 발전이라고 한다면, 부흥(revival)성령께서 비상하게 역사하실 때 교회의 생활 속에서 체험되는 현상으로서 혁명적인 요소가 있다. 부흥은 영적 각성과 함께 수적인 성장을 가져오기 때문에 웨일즈부흥(1859) 기간 중에는 부흥을 하나님으로 충만한 사람들, 사람들로 충만한 교회라는 말로 정의하기도 했다.

 

이런 부흥이 1900년대 한국에서 재현된 것이다. 그 시원이 1903년 원산에서 일어난 회개의 역사였다. 중국에서 일하던 남감리회의 화이트(Mary Cutler White)와 장로교의 매컬리(Louise H McCully)는 의화단(義和團) 사건을 피해 원산에 오게 되었는데, 이들은 부흥을 위해 기도하던 중 824일부터 1주일간 기도회를 개최하게 되었다. 이때 캐나다 출신의 감리교 선교사 하디(Dr. R A Hardie)는 효과적인 기도에 대해 강의하던 중 자신의 죄를 회개하게 되었다. 회개는 자신에게도 큰 변화를 주었고, 회중 가운데서 회개의 역사를 불러 일으켰다. 성령의 강권적인 역사였다. 이 작은 시작이 1903년 이후 이 강산을 부흥의 물결로 파도치게 만들었던 변화와 각성의 시작이었다. 부흥의 역사는 19038월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그해 10월 스웨덴에서 온 프란슨 목사(Rev F Franson)가 원산에서 장감침(長監浸) 연합사경회를 인도했을 때에도 회개를 동반한 성령의 역사가 나타났다.

 

한국에서의 부흥

 

이런 부흥의 역사는 1904년 봄 원산에서 다시 재현되었다. 이때의 초교파 사경회에서 장로교 선교사 롭(Alexander F Robb)과 장로교의 전계은(全啓恩), 감리교의 정춘수(鄭春洙) 목사도 성령충만을 경험했고, 부흥은 곧 개성 송도로 확산되었다. 그해 3월 서울에서 하디의 집회가 개최되었고, 여기서도 놀라운 각성이 일어났다. 1905년에도 개성을 중심으로 영적 각성이 일어났다. 이와 같은 부흥이 일어나고 있을 때인 19059월 주한 네 장로교선교부와 두 감리교선교부 선교사들은 한국복음주의 선교공의회’(The General Council of Evangelical Missions in Korea)를 조직하고, 한국교회의 진정한 부흥을 위해 기도했다.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 기도달력(Prayer Calender)이었다.

 

1903년에 이어 1906년에는 또 한 차례의 큰 부흥을 경험하게 된다. 1906년 개성의 송도(松都)에서 부흥을 경험했는데, 크램(W G Cram)은 이때에도 회개와 죄의 고백이 일어났다고 증언했다. 평양주재 선교사들은 1906826일부터 92일까지 하디를 초청하여 평양선교사 사경회를 개최하였는데, 하디가 요한1서를 설교하면서 자신의 죄를 회개했을 때 성령께서 자신을 변화시켰음을 증거 하였다. 이 집회에서도 성령께서 강하게 역사하셨다. 평양선교사 사경회 이후 서울에서 선교사연례대회(9. 29)가 개최되었다. 미국에서 온 존스톤 목사(Rev Howard Agnew Johnston)가 인도 카시아지방(Kassia hills)과 웨일즈에서 일어난 부흥에 대해 보고했을 때 한국인들과 선교사들에게 영적 깨달음을 주었다. 그 후 평양 장대현교회에서의 사경회, 10월에는 목포에서도 동일한 역사가 일어났다. 부흥 역사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관심(사경회)과 죄의 고백에서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때쯤 평양에서는 한국교회의 고유한 전통이 된 새벽기도회가 시작되었다. 평양 장대현교회 장로이자 전도사였던 길선주는 동료 장로인 박치록과 함께 19069월경부터 교회에서 새벽마다 기도하기 시작하였는데, 이것이 1907년 이후 교회의 공식적인 기도회로 발전되었다. 1907년의 대부흥은 이런 과정 속에서 준비되고 있었다.

 

(고신대 이상규교수, 역사신학)

 

[출처] -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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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사] 기독교 전파와 초기 수용자들

 

 

·하층 중심 전도가 기독교 대중화 이끌어

 

한국에서 기독교를 받아들였던 사람들은 대체로 어떤 부류의 사람들이었을까? 한국의 천주교는 양반중심의 공동체로 출발하였으나 조상제사 금지와 신해박해(1791)를 거치면서 차츰 중인층 중심으로 이동하기 시작한다. 문규현에 따르면 1784년부터 1791년에 이르는 기간 활동했던 권일신을 비롯한 12명의 지도층 인사 가운데 3분의 2가 양반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1791년부터 1801년 사이 활동했던 38명의 지도층 인사들 중 중인계급이 21명으로 55%에 달했으나 양반은 9명으로 24%에 지나지 않았다. 양반 중심의 구성이 점차 중인계급으로 이동해 갔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한국 개신교의 경우는 어떠했을까. 기독교(개신교)는 천주교와는 달리 주로 중산층과 하층민들을 중심으로 전개된 것으로 파악된다. 이 점은 일본과도 대조를 이룬다. 일본에서는 기독교가 지식층이라 할 수 있는 무사(武士) 계급으로 유입돼 주지주의적 경향을 띠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대중운동으로 발전하지 못했다.

 

하지만 한국에서 기독교는 중·하층민으로 유입돼 대중운동으로 발전하였고 점차 상승운동을 통해 상류층으로 확산됐다. 물론 소수 엘리트 그룹의 기독교 영입운동이 없지 않았고, 이들의 영향력이 적지 않았다.

 

상류층보다 중·하층민이 타깃

 

이런 점은 당시 선교정책에서도 암시되고 있다. 장로교선교공의회는 1893년에 모인 첫 회합에서 네비우스 정책에 기초한 10가지 선교정책을 채택했다. 이 문서는 한국에서의 기독교 전수통로(transmission)에 대한 선교사들의 의지를 반영하고 있다. 그 중심 사상은 제1항에서 명시하듯이 상류층보다 하류층을 일차적인 전도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이었다. 그 구체적인 사례가 모든 종교서적은 한글로 출판한다는 점이었다. 성경번역도 그러했다. 천주교는 처음부터 국·한문 혼용 성경을 발간했으나 개신교는 처음부터 순한글로 성경을 번역해 한문을 알지 못하는 이들도 성경을 읽을 수 있게 했다. 물론 점차적으로 상류층의 입교자가 생겨났지만 처음부터 중·하층민이 선교의 주된 대상이었다.

 

언더우드를 비롯한 초기 선교사들도 양반층보다는 전도가 비교적 용이한 중·하층민에 우선권을 두었다. 이것은 당시 보편화된 유가적(儒家的) 가치체계에서 불가피한 모색이었을 것이다. 초기 한국교회의 설교도 제목 중심의 간명한 설교가 중심을 이루고, 많은 예화가 사용되었던 것은 교회 구성원의 사회적 상황과 무관하지 않았다.

 

구스타프 바르넥은 특정 계층을 주된 선교 대상으로 하는 것은 건전한 국민층(die gesunden Volkselemente)’ 교회를 설립할 수 없다 하여 이상적인 정책일 수 없다고 지적한 바 있으나 한국에서의 경우 중·하층민 중심의 교회가 상당한 성장을 가져왔다. 이는 한국에서만의 현상은 아니었다. 1세기 기독교에서도 동일한 상황이었다(고전 1:2629 참고). 독일의 파피루스 학자인 아돌프 다이스만(Adolf Deissmann)은 초기 기독교는 절대 다수의 하층민들로 구성된 교회였다는 점을 지적했다. 막스 베버(Max Weber·18641920)에 따르면 어떤 집단의 사회적 신분이나 계급은 그 집단의 종교적 성향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요인이 된다. 그는 하층 계급의 집단일수록 새로운 사상, 이념, 종교에 보다 수용적이라고 분석했다. 그것은 새로운 이념이나 가치를 통해 신분 상승을 의도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도 기독교 신앙은 사회적 신분 상승을 추구하는 하층민들에게 상당히 매력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평양을 비롯한 관서지방이 서울·경기 등 중부지방보다, 서울·중부지방이 경상도나 전라도보다 복음에 대해 더 수용적이었던 것은 그 지역의 사회적 신분집단과 무관하지 않다.

 

기독교, 근대화와 자주독립의 도구

 

초기 한국에서의 기독교 수용은 중·하위 계층이 대세를 이루었으나, 소수 엘리트 계층의 기독교 영입운동이 없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했는데, 이들이 주로 개화지향적 민족자강론자들이었다. 급진 개화론 혹은 온건 개화론(東道西器論)의 전통을 잇는 이들은 기독교를 서구문화에 대한 도관으로 보아 기독교를 받아들임으로써 부국강병(富國强兵)을 이루고자 했다. 이런 인식은 청일전쟁(189495) 이후 분명하게 나타났는데, 기독교를 근대성(modernity) 혹은 문명의 기호(a sign of civilization)로 인식했다. 이런 인물이 서재필 윤치호 박영효 등과 같은 엘리트들이었다.

 

기독교를 통해 입헌민주국가를 건설하고, 일제의 침탈이 노골화된 이후에는 자주 독립을 쟁취해야 한다고 보았던 이들도 기독교를 도구로 인식했다. 서재필 윤치호 이상재 등을 중심으로 설립된 독립협회도 이런 범주에 속한다. 독립협회는 다수가 기독교인들로 구성되었고 안창호, 길선주 등은 평양지부에 속한 인물이었다. 189811월 독립협회가 해산되고 중심인물이 투옥되었는데, 이들도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이승만 이상재 이원긍 신흥우 김정식 등은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 이들 외에도 개화지향적인 혹은 민족자립과 독립을 추구하던 조만식 김구 등 다수의 지도자들이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한국에서 기독교를 수용한 대표적인 두 집단은 다수의 중·하위 계층과 개화지향의 민족자강을 추구하는 엘리트 그룹이었음을 알 수 있다.

 

(고신대 이상규교수·역사신학)

 

[출처] -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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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사금주·금연운동

 

 

초기 선교사들, ·담배 폐단 보며 운동 불붙여

 

한국에서 일했던 선교사들은 술과 담배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처음부터 이를 금한 것은 아니었다. 기독교가 소개된 초기에는 성탄절이 되면 술을 빚어서 교인들이 함께 나누어 마신 일이 있고, 예배당에 들어올 때 신발장 옆에 담뱃대를 정렬해 두었다가 예배가 폐하면 함께 담배를 피웠다는 기록도 있다.

   

선교사들 중에서도 음주나 흡연하는 이들이 있었다. 언더우드도 이 점에 대해 비교적 자유로웠다. 그가 화란개혁파 계통의 신학교에서 교육받았던 점을 고려해 본다면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초기 선교사들은 음주·흡연 문제는 아디아포라(adiaphora), 불간섭의 영역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선교사들은 일정기간 음주나 흡연에 대해 관망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한국 교회가 금주와 단연을 강조하기 시작한 것은 알렌이 입국한 후 10여년이 지난 때부터였다.

 

금주·금연운동의 시작

 

내한한 초기 선교사들이 금주(禁酒), 금연(禁煙)을 권고하게 된 것은 이의 폐단을 목격하였기 때문이다. 선교사들은 도박과 축첩을 금하고, 혼인 장례 등에서의 구습을 타파하고 비합리적인 인습, 비과학적인 의식을 개조하고자 노력하였는데, 금주·단연은 이런 측면에서 강조되었다. 한국 교회가 금주, 금연운동을 추진할 때 크게 세 가지 점에서 그 이유를 설명하였는데, 신앙상 유익하지 않다는 점, 건강에 해롭다는 의학적인 이유, 그리고 개화 혹은 국민의식계몽을 위한 의도가 있었다.

 

한국에서의 금주운동이 일어난 것은 1900년 이후로 볼 수 있지만 1895년을 전후한 때로부터 금주, 단연의 필요성을 강조하여 계주론(戒酒論)을 펴기 시작했다. 감리교는 이미 1894년부터 금주정책을 견지하고, 그해 8월에 모였던 감리교선교회에서 금주를 공식적으로 결의하였다. 당시 교회는 음주행위를 4중적 범죄로 규정하였다. 첫째는 하나님께 범죄하는 일, 둘째는 교회법을 어기는 일, 셋째 부모, 형제, 처자에게 광언지설(狂言至說)하는 일, 넷째 자기 몸을 망하게 하는 일로 보았다. 금연이 강조된 것도 동일한 이유였다. ‘그리스도 신문’ 189757일자에서는 담배 먹는 사람은 죽을 때까지 불편한 것시 만흐니라. 이런 사람은 여러 가지 병이 잇나니 힘줄이 약하고 가슴이 답답하고 념통이 더 벌덕 벌덕하고 슈전증이 나고, 안력에 대단히 해롭고 여러 가지 병이 만흐니라고 하면서 금연을 강조하였다.

 

금주·금연운동의 조직화

 

한국교회에서 금주, 단연운동이 조직화된 것은 1900년대 이후인데, 특히 절제운동을 통해 보다 구체화되었다. 1907년 이후에는 금주, 금연으로 절약한 재화로 외채 청산에 기여하자는 민족적 동기도 있었다. 1911년에는 주한 선교사들이 기독교 절제회를 조직하고 금주, 금연, 순결에 관한 문서를 제작 배포하기 시작하였고, 1912년에는 평양, 황해도 황주(黃州) 등지를 중심으로 계연회(戒煙會)가 조직되어 점차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이 계연회는 금연으로 절약한 돈을 모아 외지에 전도인을 파송하는 전도운동을 겸하였다.

 

1917년부터 1941년까지는 ·감 연합공의회가 발행하는 주일학교 장년 및 유년공과에 절제에 관한 내용을 삽입하여 교회학교에서 절제교육을 실시하였다. YMCA20년부터, 감리교는 1923년부터 금주, 금연회를 조직하여 절제운동을 전개하였다. 1933년에 공포된 감리교회의 사회신경에는 심신을 패망케 하는 주초와 아편의 제조, 판매, 사용금지조항이 삽입되었고, 감리교인 임배세(林培世)가 작사한 절제 계몽가인 금주가31년 간행의 신정 찬송가에 포함되기도 했다.

 

1. 금수강산 내 동포여 술을 입에 대지 마라/ 건강지력 손상하니 천치될가 늘 두렵다

 

2. 패가망신 될 독주는 빗도내어 마시면서/ 자녀교육 위하여는 일전한푼 안 쓰려네

 

3. 전국술값 다 합하여 곳곳마다 학교세워/ 자녀수양 늘 식히면 동서문명 잘 빗내리

 

4. 천부주신 네 제능과 부모님게 받은귀체/ 술의 독기 밧지말고 국가위해 일할지라

 

(후렴) 아 마시지 마라 그 술, 아 보지도 마라 그 술/우리나라 복 받기는 금주함에 잇나니라.

 

한국에서 절제운동과 사회교육을 가장 적극적으로 추진한 교단은 구세군이었다. 구세군은 한국선교 직후인 191010월부터 연 1구세신문금주호를 발행하고 전 국민을 대상으로 계몽운동을 전개했다. 특히 금주호에 첨부, 인쇄된 금주 서약서가 금주 결단을 촉발하였다. 이러한 금주, 단연운동은 1930년대 전국적 운동으로 전개되었다. 1935210일은 금주의 날로 선포되었고, 이때를 전후하여 조선 기독교여자절제회와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 등이 주최하는 금주 가두행렬, 금주 강연회 등이 전개되었다. 이때 불리던 절제운동가 중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1. 꿈을 깨어라 동포여 지금이/ 어느때라 술먹나/ 개인과 민족 멸망케 하는 자/ 그 이름 알콜이라

 

2. 입에 더러운 담배는 왜대리/ 용단하라 형제여/ 몸과 정신을 마비케 하는 것/ 담배란 독약이라.

 

(후렴) 술잔을 깨치라/ 담배대를 꺾어 버려라/ 2천만 사람의 살 길은/ 절제운동 만만세

 

이와 같은 금주, 단연 운동의 결과로 한국 교회 초기부터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술, 담배를 끊는다는 것과 동일한 것으로 이해되었다. 한국 교회 전통에서는 주일성수, 조상제사 중지, 노름(도박)의 금지, 축첩반대 등과 함께 금주·단연은 세례 받을 시 가장 중요하게 취급되었던 다짐이었다.

 

(고신대,이상규 /역사신학)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005266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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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사] 국내에서의 성경번역 / 구약

 

 

창세기말라기 완역, 10년 땀이 필요했다

 

국내에서 최초의 신약 번역본인 신약젼셔1900년 출판된 후 자연스럽게 구약성경 번역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보다 앞서 구약 시편이 번역되기 시작했는데, 그 첫 책이 1898년 삼문출판사가 펴낸 피터스(Alexander A Pieters·彼得·18721958)의 사역본 시편촬요였다. ‘촬요(撮要)’라는 말이 암시하듯이 이 책은 시편 전편을 번역한 것이 아니라 저주시편을 제외한 62편만을 번역한 역본이지만 한국에서의 구약번역의 효시가 된다. 시편은 구약 일부가 역간되기까지 8년간 유일한 구약역본으로 사용됐다. 피터스는 한국에 온 유일한 유대인 선교사로서 시편을 번역하기에 적절한 인물이었다. 그는 후에도 구약성경 번역위원, 혹은 수정위원으로 활동했다.

   

구약성경 번역 착수

 

1900년 이후 구약성경도 분담하여 번역하기 시작했는데 아펜젤러는 창세기를, 언더우드는 시편을, 게일은 잠언과 사무엘서를, 스크랜튼은 이사야서를, 레이놀즈는 여호수아서를 맡았다. 그러나 번역작업은 지체되거나 번역자들이 교체되기도 했다. 또 하디(R A Hardie) 마펫(S A Moffett) 노블(W A Noble) 등의 선교사들이 번역위원으로 선임되었으나 단기간 일하고 사임했다. 이런 상황에서 구약성경 번역을 신속히 추진하기 위해 레이놀즈와 두 사람의 한국인 김정삼과 이승두에게 구약성경 번역 책임을 일임했다. 두 한국인이 공식적인 성경번역 위원으로 참여하게 된 것이다. 이들은 레이놀즈가 거주하던 전주에서 번역작업에 몰두했다.

 

구약번역 작업은 10여년이 소요돼 191042일 드디어 번역을 완료했다. 그 결과 1911년에 이미 출판된 신약성경과 구약이 묶어져 셩경젼셔라는 이름으로 빛을 보게 됐다. 물론 구약젼셔가 출판되기 이전 낱권으로 창세기, 시편(1906), 잠언, 출애굽기, 사무엘전후서, 말라기(1907), 열왕기상하, 이사야서 번역본(1908)이 출판됐으나 이제 이 모든 책들이 한권으로 묶어 구약젼서로 간행된 것이다. 미국성서공회는 이 책을 상(창세기역대하), (에스라말라기) 두 권으로 출판했다. 이것이 한국에서 출간된 최초의 성경전서다. 그래서 올해는 한글성경 완역 100주년이 된다. 이 번역본은 성경원문을 참고했지만 1901년 미국에서 출판된 미국표준역(ASV)을 주로 참고했고, 한문성경을 참고한 흔적도 짙다. 이 번역이 이루어지기까지 언더우드, 게일, 레이놀즈, 그리고 한국인 김정삼, 이승두의 노고가 컸다.

 

구약성경 개역 착수

 

이 세상에서 그 어떤 성경도 완전한 것은 없다. 어떤 이들은 흠정역 성경은 완전한 것처럼 말하지만 이 책에도 여러 가지 오류가 있었고 계속적인 수정 작업이 필요했다. 최초의 한글성경 완역본 성경젼서가 출간되자마자 수정의 필요성이 제기됐다. 특히 구약개역이 시급했으므로 1911구약 개역자회(The Board of Revisers)’를 구성했다. 개역작업은 긴즈버그(C D Ginsburg·1908)가 편집한 대영성서공회 발행의 히브리어 성경이 사용됐다. 이 작업에 헌신한 이들이 언더우드와 게일 그리고 레이놀즈였다. 성경언어에 해박했던 레이놀즈는 성경번역 작업 때문에 다른 일을 할 수 없었다는 이유에서 사임했다. 언더우드는 1916년 일본에서 세상을 떠남으로써 개역작업도 순탄하지 않았다. 그러나 1924년 이후 레이놀즈가 다시 개역위원으로 동참했고, 후에는 감리교의 케이블(E M Cable), 하디, 북장로교의 베어드(W M Baird), 호주장로교의 엥겔(G Engel) 등이 위원으로 활동했다.

 

언더우드 사후 개역자회 회장이었던 게일은 조선어풍 번역을 지향했으나 자유역을 지향한다는 오해와 반발로 개역위원직을 사임하고 독자적인 구약성경 번역에 몰두했다. 그 결과 1925년 기독교창문사를 통해 신역신구약전서(新譯新舊約全書)’를 펴냈다. 한국인 조력자 이원모(李源謨), 이창직(李昌稙), 이교승(李敎承)의 도움이 컸다. 이 책이 우리나라 최초의 사역(私譯) 성경전서다. 비록 게일은 개역위원직을 사임했으나 한국성경 번역사에 큰 자취를 남겼다.

 

성경개역 출간

 

구약성경 개역작업은 지체됐으나 피터스, 베어드, 한국인 남궁혁, 김관식, 김인준, 이원모 등이 가담해 이 일을 추진, 무려 26년에 걸친 작업을 완료하고 마침내 1936구약젼셔 개역본이 간행됐다. 이 개역본을 일부 수정해 1938년에는 보다 완전한 번역본을 출판했다. 신약개역작업은 1926신약개역자회가 조직되면서 시작됐는데, 스톡스(M B Stokes), (S D Winn), 로스(C Ross), 커닝햄(F W Cunningham), 크레인(J C Crane), 레이놀즈 등에 의해 추진됐다. 대본으로는 네슬레의 1898년판 희랍어 성경이 사용됐다. 1937년 개정을 완료했고 1938신약개역이란 이름으로 발간됐다. 그래서 구약과 신약이 합본돼 성경개역1938년에 출간됐다.

 

이 공인역 개정 성경이 1952년 한글맞춤법 통일안에 의거해 수정을 거친 뒤 성경전서 개역한글판이란 이름으로 간행됐다. 1956년 다시 새로운 맞춤법에 따라 일부 수정됐고, 1961년에는 815개소의 자구수정을 거쳤다. 성경전서 개역한글판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국교회가 가장 오랫동안 사용하는 성경이 된 것이다.

 

(고신대· 이상규 /역사신학)

[원본링크] -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005246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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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사

 

2장 한국에 있어 카톨릭

 

 

북경 북천주당 : 중국 북경에 있는 북천주당은 조선사신들의 북경방문시 꼭 들려 보는 구경거리의 하나였다. 바로 이곳을 통해 많은 한역서학서들이 조 선에 전달되었고 그 속에는 천주교에 관한 서적. 문물들이 포함되어 있었 다.

 

   

곤여전도 :예수회 신부 베르비스트 (F.Verbiest)가 제작 (1674) 한 지도로 1722년에 국내에 유입되어 1860년 국내에서 중간 되었다. 8퍽 병풍. 한국기 독교박물관 4-5*173.3cm.

   

 

천진암터 : 한국 천주교의 발상지로 초기 서학(천주교)의 신앙회의 주역이 었던 이벽, 이승훈, 권철신, 귄일신, 정약종의묘가 조성되어있다. 경기도 광주 군 퇴촌면 우촌리 소재.

 

 

1) 선교사 들어 오기 전에 나가서 만나서 받아들임. * 병자호란과 소현세자 1636년에 국호를 청이라한 만주의 여진족은 자기들의 요구를 안들어 준다고 10 만을 이끌고 임진란 40여년 만에 한국을 침공. 이때(인조14)에 우리나라 조종 은 필사의 노력으로 대항 했지만 결국 남한산 성에 ㅉ겨가서 투항했다가 1637 년 정월에 남한산성에서 내려와서 삼정도에서 청 태종에게 3번 절하고 항복. 이때 인조의 소현세자와 대신들이 청의 심양으로 끌려감.

* 1644년에 끌려간지 7년만에 청이 명을 정복하고 수도를 심양에서 명 의 북경으로 천도(소현세자등도 같이 감)

 

* 그때에 베이징에 아담 샬(주교)이 묵고 있었는데 소현세자가 만나 친 분나눔.(2달동안) - 소현세자가 기독교 저술을 읽을 기회가 있었음.

 

* 아담 샬은 청나라 왕의 신임얻어 통감목사(벼슬)라는 위치에 까지감. 당시 예수회의 선교 정책은 어느나라에서 선교하든지 왕실과 고위층에 먼저 접촉하는 의도가 있었음.

 

* 소현세자가 귀국하게 됨. - 이때 서양문물, 기독교 서적을 아담 샬이 줌. 그것을 가지고 온 소현세자는 곧 죽게됨.

 

* 당시 척불 숭유로 인해 임진, 병자호란으로 당하자 조종에서는 이때부터 조선 경제의 개조책이라는 책도 만들고 새로운 학문들이 일어남.

 

2) 학자들의 교리연구 중국을 섬기던 조선에서는 사절단을 보내는 데 정초에 성절사, 원단사, 동지사, 천추사등을 북경에 파송했다.(사절단은 한 행차에 300- 500명 정도가 50일에걸 려 가서 50일 정도 머물고 돌아왔고 진상갈때에는 비단, , , 보석, 호피, 좋 은약 등을 가지고 갔다.)

* 1601년에 마태오리치가 설립한 성당이 있는데 그것이 남당이다.

아담 샬이 살던곳에 설립한 성당이 있는데 그것이 동당이다.

 

* 1603년 마태오리치가 쓴 '천주실의' 란 책을 그때 진상 갔던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져옴.

 

* 조선조 시대에 주자학이 당쟁에 질리고 허례허식 하던때에 나라 기강 이 안 잡혀서 이때에 학자들이 '천주실의'를 가져오자 연구했다.

 

* 조선조 이 수광 이라는 사람이 '지봉유설'을 썼다.

지봉유설 - 천주교에 대해 설명함. 윤회를 부정하고 착한일에 보상이 있고 악 하자는 지옥에 간다는 이야기와 교황은 임기가 끝나면 좋은 사람을 투표로 뽑 고 이웃을 제 2의 나라고 하는 이야기를 설명하였다. 이수광은 마태오리치와 동 시대의 사람이다. 임진란 전후로 3차례의 명에 사신으로 갔다. 그때 과학책, 천 주교책을 가져옴.

 

* 당시 천주교를 서학이라 했다.(사람들이 서학에 관심을 많이 가짐)

 

* 유인용 - '어우야담' 1권에서 마태오리치의 천주실의를 언급함.

허균이 천주교를 믿는 것을 말하고 그 교가 동남의 오랑케에게 퍼져 믿는 자가 많은데 우리만 모르고 있다고 밝힘.

 

* 허균은 만주국에서 언젠가 쳐들어 올지 모른다는 말을 했는데 그것 때문에 처형 당했다 (그는 천주교인)

 

* 상제 상서를 정하상이 책을 바침.

우리나라 카톨릭에 대한 최초의 변증서 = 상제 상서

내용 : 3400자로 되 있는데 천주교를 변증하는 부분과 잘못된 오해 부분을 설 명하고 마지막에는 우리도 임금의 자녀라고 긍휼을 구함.

 

* 당시 척불숭유 였는데 정하상은 이 책에서 불교를 공격했다. (즉 기독교가 불교와 다르다는 것을 말했다.- 강조)

 

3) 이승훈의 入信 한국 천주교의 발생지 : 경기도 광주, 양근(양평)

이벽, 이승훈, ..가 여기서 모여 교리를 연구하였다.

이벽의 누이 : 양근 고을의 정약전과 결혼 하였다.

* 이벽이라는 사람은 성격이 열화 같은 사람이다.

1777년 에 서학에 관심을 가진 학자들이 한강터에 외진곳 주어사라는 곳에서 교리 연구를 한다는 소리를 듣고 100리를 걸어 왔다고 함.

 

* 走魚寺에서 천주교 교리를 연구했는데 천주교 교리 서적이 너무 빈약 해 중국에 가서 도움 요청을 하자고 결정함.

 

* 이승훈은 아버지가 그당시 북경에 갈 일이 있어 같이 따라감.(이벽은 이때 이승훈에게 가서 이번에 갈때 천주교 교리서 많이 가져오라고 부탁함.)

 

* 이승훈은 북경에 가자마자 북경의 천주당에 갔다.

그래서 돌아올때는 많은 천주교 서적들을 가지고 옴.

 

* 이승훈은 강원도 평창 사람으로 25세에 진사 급제하고 1789년에 평택 현감이 ㄷ다.

 

* 이승훈은 북경의 남당에 찾아갔다.

(여기서 교리를 배우고 1784년에 예수회 신부였던 루이스 글라몽에게 영세를 받 는다.) 그래서 이승훈에게 영세명을 주었는데 베드로란 이름을 주었다.

 

* 이승훈이 영세 받고 돌아올때 성화, 묵주, 책 가지고 돌아옴.

 

* 이승훈의 전교 : 이승훈이 돌아온 5년만에 신도 4000명이 불어나고 이들은 1785년 봄 서울 진 고개에 중인(당시 천민, 중인, 양반) 김범우 라는 사람이 자기 집에서 교리 연구를 학자들과 하고 있었다. 여기서 중국 신부에게 안수 받을 신부를 요청함.

 

* 조선 정부 형조 판서는 진고개의 예배당을 급습하여 양반은 훈방하고 김범우 는 충청도를 유배하여 그곳에서 타계함. - 최초의 순교자. (김범우의 집에 지금 의 명동성당이 서있음)

 

4) 주문모 신부의 입국과 전교 * 1785년 김범우 집 급습으로 많은 사람이 배교 하기 시작함. 이때 이승훈, 이벽도 배교함.

* 시간이 지나 핍박이 줄어들자 다시 돌아옴. 그리고 성직자의 필요성을 느낌. 그래서 북경의 주교에게 요청.

* 주베아 주교는 중국사람 주문모 신부를 조선에 파견. 주 신부는 윤유일, 지향 의 인도로 밀입국함.(엽부로 가장)

 

* 17951월 한성에 잠입해 들어옴. 한성에서 조선말을 배우고 부활절 전날밤에 몇 사람에게 영세줌.

 

* 한영익이라는 개심을 가장한 자가 주 신부를 관가에 고발함. 그래서 조선 조정이 주신부의 체포령 내림.

 

* 믿음 좋은 신자 하나가 주신부를 가장해 자수함.(최이길 이라는 사람인데 턱수염이 없어 들켜서 처형당함.)

 

* 주 신부는 가장을 하는데 상복도 입기도 하고 남의집 헛간에서 있기도 하는 데 그러는 동안 신도는4천에서 1만으로 늘어남.

 

* 또 배교가 있자 주 신부는 국외 탈출 하려다 그냥 스스로 자수함. 1801년에 마침내 새해 남터에서 참수형 당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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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근대 이전의 기독교와의 접촉

   

 

대진경교유행비 : 781(당 건중 2) 중국 서안에 설립된 비로 중국에서의 경고 역사를 증명하는 귀중한 자료이다. 그 탁본이 서울의 한국기독교박물 관(숭전)에 소장되어 있다.88.8*177.8cm.

 

 

 

돌십자가 : 경주 불국사지에서 출토된 것으로 신라시대에 전래된 경교의 흔 적을 증명한다.한국기독교박물관 소장.24.5*24*9cm.

 

 

몽천포구 : 임진왜란 중(1594) 한국에 온 최초의 서야 신부 세스페데스가 상륙한 곳으로 추정되는 경남 웅천

 

 

 

오다 쥴리아의 묘 : 임잰왜란 중 일본에 잡혀 간 조선인 포로 중에는 기리 시단으로 개종하여 순교한 이들이 상당히 많았다. 왕가의 딸로 고시니에 의 해 끌려 갔다가 신앙의 절개를 지킨 오다 쥴리아의 묘. 서울 절두산 순교성 지 소재.

 

 

1) 당나라를 통한 접촉 AD 431 에 에배소에서 기독론에 대한 신학적 논쟁이 있었는데 그리스도는 인성과 신성을 함께 공유하지만 점진적 동화 과정을 통해 이루어 진다고 했다 가 에배소 회의에서 이단으로 정죄됨.

Netorius 퍼시아 에뎃사 AD635- 인도와 중국을 전파. 중국에서는 경교라함.

nestorian 당시 중국 황제는 당태종. 당태종: 아라곤의 설교 감명, 파사사라는 교회 세워줌. 중국말로 아브라함. 왕이 관심을 가지므로 크게 번창

* 그때 우리나라는 신라시대(삼국통일을 꿈꾸던때) 우리나라는 당나라 힘입어 통일 이루려함.(신라의 김춘추 여러번 방문)

 

* 불교의 고승들이 당나라 여러번 방문.

 

* 1635 - 중국 서안부(북경)에서 대진 경교 유행 중국비 같은수도 이 비문에는 중국어와 시리아어로 736(중국어, 시리아)로 기록되었음.

 

* 1917년에 대진 경교 유행 중국비의 모조품이 금강산의 절에서 발견됨.

 

* 1956년 불국사 경내에서 돌 십자가가 발견됨

 

* 1988년 경북 경산 지인면 일원리에서 어린양 안고 있는 것과 기도하는 석상이 발견됨.

 

* 마테오리치가 1595년에 어떤 서적을 대하게됨. 거기서 당나라에 경교 가 번창함을 알게됨.

 

* 이런 여러가지 종합결과 당대 어떤 영향을 받았음이 틀림없음.

 

2) 몽고를 통해 접촉 징기스칸이 몽고를 세우고 지중해 근처 모슬렘 격퇴 할때 기독교 국가들은 당시 큰 골치거리 였던 모슬렘을 대신 물리쳐 줘서 고맙게 생각함.

몽고는 세계 제국을 제패하는데 모슬렘이 큰 장벽이라는 것을 깨달음.

* 당시 징기스칸은 야만인 - 그래서 서부 교회의 Innocent 4세는 1차로 선교사(카로핀)1246년에 보냄.

 

* Rubruc1253년 콘스탄티 노플을 떠나 몽고 수도 화림에 와서 사둔 탁(징기스칸의 아들)을 만남. 사둔탁이 기독교인인줄 알았으나 아니였다.

 

* 루부룩은 징기스칸에게 개종을 권유하나 거절 당함.

당시 몽고는 우리나라 통해 일본까지 침략할 야욕.

 

* 루부룩이 최초로 한국(Caulei)을 서방에 서신으로 알림.

Coree - Korea

 

3) 일본을 통해 접촉 * 1517년 마틴 루터가 종교 개혁이 일어나서 루터교가 확장.

* Ignatiu Loyola / Francis Xavier

예수회 :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라.

Francis Xavier 를 동방의 선교사로 파송함.

그는 인도의 고아 - 필리핀(80%이상이 카톨릭) - 일본으로가 구주에 상륙 1549년에 활공총이 복음과 함께 들어감.(1592년 임진란에 있어 타격적 무기)

* 그러나 일본을 통해 기독교 접촉.

오다노 부나가(일본 지도자) - 종교 관용책.

관용 이유 : 당시 불교가 강했기 때문에 한 종교가 커지면 강대해 지므로 한쪽 약화를 위해 신학교 부지까지 마련해 줌.

(17세기 당시 일본에 30만의 신자가 있었다고 함.)

 

* 도요또미 히데요시 : 오사까 (한국인이 제일 많은곳)에서 예수회 신부들 을 모아 놓고 중국을 침공한 후 예수 믿겠다고 말함.

 

* 1592년 임진연에 전쟁 일으켜 우리나라 쳐들어옴. (20-25만의 군인을 이끌고 쳐 들어옴. 명나라 가는 길을 확보하려는 명목으로.)

 

* 이때 일본의 1군단장(고니까 유찌나가)- 세례명 어거스틴,이 선두로 쳐 들어 왔는데 그가 이끄는 많은 군인이 기독교인이 었다.

이들이 20일 만에 서울에 다다르고 이들이 평양성까지 진격했다.

그러나 명나라 군대가 내려와서 경남 웅천으로 일본군은 퇴각을 해야했다.

 

* 고니찌 유찌나가는 군인중 기독교인이 많으므로 교구장 피터 고메쯔에게 종군 신부를 보내 달라 부탁하니 세스 페데스 신부를 보내줌.

그는 우리나라에 오자 고메쯔에게 2편의 편지를 보냈다.

내용 : 1. 웅천에 도착한 일과 여정내역 2. 고니찌 유찌나가가 반갑게 맞 아주었 다는 내용과 일본 군인이 힘들게 있다는 말을 전함.

* 세스 페데스는 6개월 수 일본으로 돌아옴.

 

* 도꾸가와 이에야그(새통치자 출현함) - 기도교 엄청 박해 이때 많은 순교자를 발생. 일본 신자와 조선인으로 끌려가 믿은자도 순교함.

 

* 이 임진란 때문에 우리나라는 쇄국 정책을 고수함.(특히 일본에 대해)

결론 : 당나라, 몽고, 일본을 통해 우리나라는 일찍 간접적으로 기독교 접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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