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전과 응전의 시대

 

한국교회협의회의 조직과 변천을 살펴보려면 1912년 한국개신교 복음주의연합공의회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당시 출발할 때에는 장감의 신앙은 어느 정도 통일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렇게 연합할 수 있었던 것은 한반도에 개신교 전체를 대변하는 연합운동의 협의체 구성의 필요성이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또 선교의 목적이 같았던 블레어와 하디 선교사의 제의가 채택되었고 캐나다 장로교선교회의 윌리엄 스캇이 적극적인 추진으로 교회협의회(FCC)가 결성되었던 것이다. 이 협의회가 공헌 한 것은 한국교회와 세계교회를 연결하는 통로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국의 복음운동에 한국의 각 교단의 교회들과 협력하는 일에 앞장섰다는 것이다. 또 한 가지는 일본에 있는 40만의 한국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일본연합공의회, 입본의 캐나다장로교회와 협력하도록 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1927년을 기점으로 북장로교선교회는 한국교회연합을 통한 장감의 연합운동에 깊은 회의를 느끼기 시작하고 결국 탈퇴하기로 결정하여 연합체는 심각한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이렇게 하면서 한국의 교회는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새로운 질서로 재편되어 나가기 시작한다. 1930년대에는 그동안 한국교회를 주도하는 중심세력이었던 장로교와 감리교에 이어서 성결교가 한국교회의 중심세력으로 자리 잡기 시작한다. 이는 복음주의에 입각한 회개 운동과 부흥운동에 혼연일체가 되어 부흥운동에 전력투구하였기 때문이다. 성결교회의 복음전파 방식은 그들이 소중하게 간직하는 중생과 성결의 체험 교리인 그리스도의 보혈로 원죄의 씻음과 신유와 부활과 재림과 영생을 전하는 것이었다. 특히 이들이 중점을 둔 것은 중생 성결 신유 재림의 사중복음은 놀라운 부흥운동을 경험한 한국교회 교인들에게 어렵지 않게 수용될 수 있는 가르침이었기 때문에 더욱 호소력이 있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성령의 내주하심과 죄에서의 자유에 대한 새로운 체험을 강조하는 성결교회의 가르침은 대 부흥운동을 거치면서 역동적인 신앙의 체험을 강조하는 이들에게 적지 않은 도전을 주었다.

 

이 시대 한국교회가 만나 또 하나의 움직임은 신학적 변천이다. 한국교회는 1930년에 접어들어 이단, 신흥종교, 자유주의, 신비주의 부흥운동, 그리고 무교회주의의 등장으로 그 동안 견지해 왔던 신학적 통일성이 깨지고 다양한 신학사상들이 발흥하기 시작했다. 1934년 한국 북장로교 선교 희년을 맞으면서 블레어가 신학적 변천에 깊은 우려를 표명했던 것처럼 수많은 이단들이 등장, 이 시대의 기독교를 위협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사상적 변천은 리더십의 전환과 별도로 진행된 것이 아니라 상호 깊은 연계성을 지니고 진행되었다. 1920년대 중반 이후부터 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했다. 장로교의 남궁혁, 백낙준, 박형룡, 이서휘, 송창근, 채필근, 김재준, 윤인구, 김치선과 감리교의 전영택, 임영빈, 변홍규, 정경옥, 류형기, 그리고 갈홍기는 그 대표적인 인물들이라고 할 수 있다.

 

1955년, 전성천 박사는 “한국개신교의 분열과 일치”라는 예일대학의 박사학위논문에서 한국에는 언더우드, 알렌, 헤론, 앨러스 등 4명의 북장로교 선교사들이 있었으며, 이 4명의 선교사들 주에서 전통적인 장로교 신학에 동의했던 사람들은 언더우드 한 사람밖에 없었다고 했다. 언더우드 외에 다른 사람들은 신학적으로 동의하지 않았다는 것은 이들이 북장로교 내의 주류 곧 구학파의 전통, 성경의 무오성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이들의 4명의 선교사들 가운데 신학교육을 제대로 받은 선교사는 언더우드 밖에 없었고, 나머지 사람들은 의사나 간호사였기 때문에 좀 더 개방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었던 것이다. 비록 신학교육을 받은 이들이기는 하지만 다수의 개척 선교사들이 그 같은 입장을 가졌다는 것은 선교 초기 신학적 분위기를 꼭 보수적인 것 많은 아니었음을 말해준다. 그러나 1889년 마포삼열을 비롯한 보수적인 맥코믹 출신 북장로교선교사들과 1892년 이눌서를 비롯한 남부의 보수주의를 대변하는 남장로교 출신 선교사들이 국내에 대거 입국하면서 1890년대에 접어들면서 전반적인 장로교 선교회의 신학적 성향은 보수적인 분위기로 바뀌었다.

 

그러나 193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자유주의는 하나의 세력을 형성하였고 한국교회는 심각한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다. 자유주의 도전이 주는 가장 큰 교훈은 1930년대 들어 지금까지 정통신학의 토대 위에 확고하게 서 있던 한국교회에 진보적인 신학이 하나의 세력으로 형성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이 같은 진보적인 세력은 얼마 후 신사참배문제로 평양신학교가 폐교되자 조선신학교 설립을 통해 한국교회에 깊숙이 영향력을 확대하기 시작했다.

 

1920년대까지 한 목소리를 내던 장로교와 감리교의 신학적 통일성이 서서히 깨어지고 다양한 신학이 역사에 부상하기 시작했다. 정경옥의 자유주의, 김재준의 진보주의, 박형룡의 정통주의, 김교신의 무교회주의 그리고 이용도의 신비주의가 그것이다.

 

감리교 신학자 정경옥이 한국교회에 자유주의를 정착시킨 주인공라면 김재준은 한국교회에 진보주의를 정착시킨 인물이었다. 김양선의 말을 빌린다면 “그는 파괴적인 성경비판을 감행하는 극단의 자유주의 신학자”는 아니었으나 성경의 축자적 영감과 성경의 완전무오를 거부하고 그 같은 사상과 “대결하여 싸우려는 철저한 자유주의 신학자”였다. 그는 정경옥의 자유주의와 박형룡의 정통주의 사이에 진보주의라는 중도적 입장을 개척하는데 성공했다.

 

박형룡 박사는 신학적인 색깔뿐만 아니라 삶의 스타일이나 사고방식에 있어서 김재준 목사와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김재준 목사가 개방적이었다면 박형룡 박사는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절제하고 철저하게 칼빈주의 입장에서 정통주의를 변호하는 일에 혼신의 힘을 다했다. 김재준에게 정통주의가 갖고 있는 문제점은 바로 신학을 사변적이고 객관적인 굴레 속에 가두어 두고 삶 속에 구체적으로 연계시키지 않는 데 있었다. 반면에 박형룡에게 진보주의는 성경의 권위를 파괴하고 교회와 그리스도인을 성경과 기독교의 전통에서 벗어나게 만들어 결국 기독교 유일성마저 흔들어 놓는다는 점이었다.

 

1930년대 박형룡은 정통주의 대변자로 주로 교단 장로교회에서 만인의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 그의 화려한 학력, 탁월한 근면성, 한국에서의 선교사 1세대와의 두터운 교분, 그리고 무엇보다도 복음의 순수성을 지키려는 강력한 의지는 그를 일약 한국교회 정통의 대변자로 부상시키기에 충분했다. 더구나 귀국 후 한국교회 안에 일고 있던 정경오류로 대변되는 자유주의 신학과 김재준으로 대변되는 진보주의 신학, 김교신의 무교회주의와 이용도의 신비주의 부흥운동의 발흥은 기왕에 한국교회에 바른 신앙과 바른 신학을 구축하는 일에 자신의 생애를 바치기로 다짐했던 박형룡의 신학적 방향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신학 논쟁과 교회의 응전이 1930년부터 1935년까지 한국교회를 특징짓는 중요한 사건이었다면, 1935년부터 1945년 해방될 때까지 한국교회를 특징짓는 사건은 신사참배 논쟁이었다.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 앞에 한국교회는 신사참배를 하느냐 반대하느냐라는 양자택일의 기로에 처했다. 호주장로교선교회가 보고한 것처럼“신사참배문제는 한국의 교회가 직면하였던 가장 중대한 문제였다.”

 

신사참배는 1911년의 105인 사건이나 1919년의 3.1운동 탄압보다도 더 크고 직접적으로 기독교 신앙에 위협을 가했던 문제이다. 그것은 105인 사건이나 3·1운동으로 인한 탄압이 민족의 독립운동과 관련된 일제의 탄압이었다면, 신사참배 강요는 “신앙의 자유를 박탈당하고 신앙 양심을 유린당하는 본격적인 종교박해였고, 교회 전체가 당한 대 박해였고, 전 민족이 당한 일대 수난”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신사참배 문제는 “세속권력을 절대화하고 인간을 신격화하는 일제의 천황제 이데올로기와 관련된 것으로 저이, 종교, 교육, 문화 등 여러 부분에 걸친 복합적인 문제”였기 때문이다. 한국교회는 신사참배 강요에 대해 순응 또는 타협함으로 신앙의 본질을 왜곡하느냐 아니면 끝까지 신상참배의 강요에 맞서 신앙을 지키느냐 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한국교회의 신사참배 문제는 신앙의 본질과 그 해석, 더 나아가 그 적용과 실천에 관한 문제와 깊숙이 연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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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주의 발흥과 기독교 사회개혁

 

동아시아의 패권국으로 부상한 일본은 “한국을 중국과 러시아의 지배로부터 분리시키고 영국과 미국의 양해 하에” 보호조약과 합병이라는 허울 좋은 명분을 내세우며 조선을 자신들의 속국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한일합방 이후 1945년 해방되기까지 “36년 간 무단정치에서 문화정치, 황국신민화정책으로 그 통치방법이 변화되어 왔지만 식민지 지배와 수탈이라고 하는 점”에서는 추호도 변함이 없었다.

 

어용사가 유세비우스가 콘스탄틴 대제의 통치에 아부했던 것처럼 일본의 기독교 지도자들은 하나같이 일본의 한국 합병을 예찬했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서도 양심의 소리는 있었다. “조선합병”이라는 글에서 우찌무라 간조는 이렇게 말했다. “불쌍한 한국 사람들은 그들의 나라를 잃었습니다. 아무도 그들의 손실을 위로할 수는 없습니다. 나는 일본이 한국을 합병한 일은 곧 또 하나의 폴란드를 합병한 일이며, 결국 이 먹이를 완전히 소화할 수 있으리라고는 바랄 수 없지 않겠는가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한일합방과 국권의 상실로 한국기독교는 위기를 맞는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는 어려움 가운데도 항일운동을 주도하고 민족주의를 고취시키는 역할을 활발하게 전개해 나간다. 이런 기독교의 활동은 일본 정부로 하여금 한국 개신교인들과 개신교 선교사들에게 차가운 눈총을 보내기 시작하는 원인을 제공한다. 그러나 안, 밖으로 저항을 하면서 한국 기독교는 한국근대화와 민족계몽을 통한 민족주의 사상의 고취에 크게 기여한다. 더 이상 보고만 있을 수 없는 일본 정부는 통감부를 통해 새로운 학교령을 공포하고 신민지 교육시책을 강요함은 물로 관공립 보통학교에 일본인 교사를 폐지시키고 사립학교 설립을 인가제로 전환시켜 일제의 관할 하에 두면서 학교 설립을 규제했다. 이에 대해서 한국에 파송 된 선교회는 내용적으로는 비정치화의 입장을 취하고 있었으나 실제적으로는 적지 않은 선교사들이 일본의 한국 지배를 예찬하는 경우가 많았다. 외국 선교사들은 일본의 한국 통치를 정당하게 받아들이는 경향이 짙었다. 그러나 일제의 기독교 탄압의 가속화로 한국기독교와 선교사들의 입장은 저항으로 바뀌기 시작한다.

 

갑신정변, 청일전쟁, 러일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청과 일본의 무력에 의해 수난 당하는 현장을 목도하던 국내의 외국 선교사들 중에는 한국에 대한 일본의 무단정치를 우려하며 그것을 노골적으로 폭로하는 이들도 있었다. 미 감리회 소속 케이블 선교사는 1908년에 일제의 무단정치를 폭로하는 한 보고서를 미국 선교본부에 보냈다. 일제가 한국기독교에 대해 가했던 폭행과 살해 사건은 일제가 교회를 어떻게 보았으며, 그들이 얼마나 반기독교적 탄압정책을 썼는지를 말해 준다. 일제는 선교사들을 직접적으로 공격하지 못하고 그들의 선교구에 있는 한인교회들에게 박해를 가함으로써 자신들의 의지를 전달했고 이와 같은 기독교 박해는 통감부가 설치된 후 더 구체적이고 노골적으로 진행되었다.

 

105인 사건은 대부흥 운동을 거치면서 거대한 규모로 성장한 한국기독교가 일본 식민 정권에 대항할 수 있는 잠재적 반정부 단체라는 일제의 인식에서 기인되었다. 한국 선교의 개척자 제임스 게일이 전환기의 한국에서 말한 것처럼 “한국은 정치적 존재로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선교사들의 세계에서는 제일류의 세력”으로 인정받을 만큼 세계 기독교계로부터 주목 받는 대상이었다. 그것은 한국교회가 1903년 원산부흥운동, 1907년 평양 대부흥 운동, 그리고 1909년 백만인 구령 운동을 통해 세계 선교지에서 유래를 찾기 힘들 만큼 놀랍게 성장한 데다 신학교 설립, 노회와 총회의 설립 등으로 하나의 전국적인 조직을 갖춘 큰 세력으로 발전했기 때문이었다. 1884년 알렌에 의해 시작된 한국선교가 과거 “지배권 쟁탈을 다투는 강대국들의 포성이 두 번이나 진동”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선교 25주년이 지난 후 “1910년대의 기독교는 정립된 종교요, 기독교회는 큰 능력을 내포한 민족적 기관으로” 발돋음한 것이다.

 

3·1운동 당시 마침 극동을 방문, 현장을 확인한 블랜드가 중국, 일본, 그리고 한국에서 지적한 것처럼 3·1운동은 일본의 무단정치에 대한 국민의 분노, 러시아 혁명으로 인한 민족국가의 출현,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의 선언에 자극 받아 일어난 한국 민족의 비폭력 독립운동이었다. 그리고 그 위대한 결집력은 “민족 종교와 같은 특징을 지닌, 민족의 자유, 독립의 원동력”이었던 기독교에서 나왔다.

 

3·1운동 이후, 제임스 부컬크가 말한 “반기독교 운동”이 거세게 일기 시작하여 1922년에 정점에 달했던 것이다. 특히 반 기독교적 성격을 지닌 휴머니즘, 사회주의, 공산주의의 발흥으로 젊은이들 사이에는 반기독교적 움직임이 강하게 일고 있었고, 가치관의 차이로 인한 젊은이들과 기성세대의 충돌, 자유결혼, 여권운동, 교회의 사회참여 문제가 중요한 시재적 현안으로 부사했다. 또한 경제 공항으로 젊은이들의 심리상태는 극도로 불안했고, 이로 인한 사회적 불안이 고조되어 교회의 영적침체가 더욱 심화 되었다. 더구나 진화론과 고등비평의 유입으로 전통적인 창조론과 성경관이 일대 도전을 맞기 시작했다. 볼셰비키혁명 이후 조직된 조선 공산주의 및 사회주의 운동, 춘원 이광수의 기독교 비판, 김장호의 자유주의 사건은 그 전형적인 예다. 3년간의 미국 연구를 마치고 1912년에 돌아온 연희전문학교의 벡커가 지적한 것처럼 한국 청년들 사이에는 “격세의 감”을 느낄 정도로 커다란 사상적 변화가 일고 있었다.

 

이와 같은 새로운 사조들의 유입과 새로운 차원으로 전개되는 일본의 한국 식민정책 속에서 교회는 이러한 대내외적인 문제들에 대처해야 했고, 동시에 변천하는 사회의 움직임에도 민감하게 적응하면서 복음을 전해야 하는 이중적인 사명을 부여받았다.

한일합방 이후 조국이 일제에 의해 강점되자 한국 기독교인들이 정치적인 소망 대신 종교적인 소망으로 방향을 선회하면서 한국교회에는 사회적인 책임과 정치적인 문제에 대한 관심을 의도적으로 배제하고 신앙을 내향화시키려는 경향이 나타났다. 그 결과 한국교회에는 세대주의 종말론이 놀랍게 확산되기 시작했고, 성경 중심의 기독교가 더욱 강조되었다.

 

세대주의 종말론의 발흥은 한국의 개신교, 특히 선교를 주도했던 장로교, 성경교, 대한기독교, 동양선교회 등의 신앙을 타세적인 신앙으로 만들어 주었으며, 보의 아니게 하회적인 책임을 간과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3·1운동의 전후로 공산주의 및 사회주의와 춘원 이광수의 기독교 비판처럼 교회 밖으로부터의 기독교 비판이 강하게 일어나던 그 즈음, 교회 내부에서도 전통적인 신앙에 대한 강한 도전이 일어났다. 그것은 자유주의 도전과 이단의 발흥이었다. 1910년 한일합방 이후의 사회 경제적 혼란, 3.1운동의 실패, 공산주의 및 사회주의의 발흥, 일제의 통치에 편승하는 어용 교단의 출현 등 끊임없이 계속된 사회적 혼란을 틈타 자유주의와 반선교사의 기치를 내걸고 주류에서 벗어난 수많은 종파들이 태동되기 시작했다. 이렇게 등장한 이단들은 해방이 될 때까지 지칠 줄 모르고 계속되었다. 마치 예일 대학의 교회사가 시드니 알스트롬이 그의 저서 미국의 종교사에서 미국 제 2차 대각성운동 이후 수많은 이단들이 등장하는 그 시대를 가리켜 “이단의 전성시대라고 명명했던 것과 같은 시대상이 출현한 것이다. ”

 

1919년, 브라운은 자신의 극동의 정복에서 한국교회가 세계에서 유래를 찾을 수 없을 만큼 성경을 사랑하고 구령의 열정에 불타고 있으며 성령의 역사를 경험하는 교회라고 인정하면서도 한국기독교의 사회적 관심의 결여에 대해서는 강도 높게 비판했다. 한국교회는 “복음의 사회적 적용에 비교적 무관심”하고, “교회의 사상이 내세에 고정”되어 있으며, “현 세상은 너무도 완전히 상실되어 이 세대에서는 구원받을 수 없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브라운이 한국에서 활동하는 한 선교사에게 “사회 개혁의 방식에 대해 당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가?” 라고 질문하자 그는 “전혀 못합니다.”, “우리는 복음을 전하기에 너무 바쁩니다.” 라고 답변했다. 브라운은 한국의 사회적 관심의 결여가 선교사들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확실히 191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교회는 사회적 관심이 줄어들고 있었다. 원산부흥운동과 평양 대부흥 운동, 그리고 이어 진행된 백만인 구령 운동을 전후하여 한국 사회를 주도했던 교회의 모습과는 확실히 차이가 있었다.

 

주지하다시피 1917년 춘원이 한국교회의 사회적 관심을 촉구했고, 1922년 이후 동아일보가 사설을 통해 이 문제를 끊임없이 환기시켰으며, 1928년 예루살렘 국제 선교협의회에서는 교회의 사회적 관심을 중요한 주제로 다루었다. 이와 같은 노력에 힘입어 1918년 남감리교가 사회신경장정을 편입시켰고, 1920년 장감연합공의회는 사회봉사실현 프로그램을 확정했으며, 1912년에는 만주와 조선 주재 장로교 선교사 100명이 평양 장로회 신학교에서 5일 간 회합을 갖고 조선인 교역자의 미국 유학 프로그램을 논의했고, 1925년에는 조선야소교 연합공의회에 사회부를 상설했고, 1·932년에는 사회신경을 채택했다. 그 시대 속에서 이와 같은 교회의 대 사회적 책임의식은 교회의 기독교문화 사업과 사회복지사업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전기가 되었다. 이것은 새로운 운동이 아니라 한국교회가 처음부터 가지고 있었던 간접선교와 직접선교의 균형의 필요성을 재인식한 것이다.

 

이렇듯 한국장로교회가 공산주의 및 사회주의의 도전, 교회 밖으로부터의 비판, 교회내부로부터 이단의 도전을 받고 있는 동안 한국에 파송 된 선교사들 가운데 특히 평양 주재 선교사들과 서울 주재 선교사들 사이에 뚜렷한 대립과 갈등이 표출되고 있었다. 이는 자신들에게 유리한 곳에 학교를 옮기는 문제와 교단의 색이 반영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한국교회와 사회의 계몽운동, 절제운동, 농촌운동, 진흥운동에 많은 기여를 하게 된다.

 

그리고 1920년에 이르러 길선주 목사와 김익두 목사로부터 시작된 영적부흥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이것으로 한국교회는 엄청난 양적인 성장을 가져왔다. 이와 함께 청소년운동과 주일학교운동에 관심을 갖기에 이른다. 이는 젊은이들을 깊은 영적 잠에서 깨워서 교회와 사회에 위대한 봉사자가 되어야 한다는 복음 본래의 성격들을 고취시키기 위해서이다. 이 운동은 YMCA, YWCA등이 주도해 나갔다. 한편 주일학교도 활성화 하여 아이들 신앙교육에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방학 중에 수련회를 통해서 이들을 교육하였다. 이밖에도 출판문화운동, 대 사회사업운동을 전개해 나갔을 뿐만 아니라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고아들을 위한 고아원 운영을 하였고 나환자들과 폐결핵 한자들을 위한 수용소와 병원의 설립 운영과 같은 사회사업을 지속적으로 추진하였다. 이는 한국교회가 사회 속에서 단순히 복음만 전한 단체가 아니라 복음을 통한 개인 구원의 영역을 넘어 사회적 책임의 실천을 통해 사회와 문화 속에 기독교 정신을 실천하는 하나의 장이었던 것이다. 한국의 기독교대 대사회적인 책임을 결코 간과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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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도적인 틀을 다지는 한국교회

 

1907년 평양에서 대부흥운동이 일어나던 그 해 최초의 독노회가 결성됨으로써 한국장로교회는 명실상부하게 민족교회로서 발돋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1929년 남북감리교회가 하나로 합동하여 협성신학교와 별도로 운영해오던 여자신학교를 합해 감리교 신학교를 태동시키게 되었다.

 

대한예수교 장로회의 조직은 1905년 3월 처음으로 개강하게 된 평양장로회신학교의 설립과 신학교로서의 견실한 틀을 갖추어 가면서 구체화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처음 평양신학교를 주도한 선교사들은 마펫(마포삼열), 언더우드, 클락(곽안련) 등이었다. 이들은 1907년 6월에 길선주, 양전백, 서경조, 한석진, 송이서, 방기창, 이기풍 등 7명의 첫 졸업생을 배출해서 그해 독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게 했다.

 

평양신학교는 네비우스 선교정책과 관련하여 설립되고 육성되었던 것이다. 여기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으로 나타난 것은 바로 성경공부와 사경회였다는 것이다. 이렇게 평양신학교가 명실상부한 신학교로서의 자리를 잡아가면서 대한예수교장로회 독노회 조직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으로 한국교회가 놀랍게 성장하면서 1907년 가을 독노회를 조직하기로 결정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독노회가 결성되면서 한국교회는 소위 12신조로 알려진 장로교신앙에 기초한 신앙고백을 채택한다.

 

초기 한국교회 해외선교는 살펴보면 대한예수교장로교는 1907년 첫 졸업생인 이기풍을 선교사로 제주에 파송함으로 시작된다. 평양에 복음을 들고 온 선교사들에게 돌을 던지며 복음을 방해했던 이기풍이 신학교를 졸업하고 복음의 불모지인 제주도에 선교사로 떠나리라는 것을 누구도 상상도 못했던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이러한 선교의 역사는 한국교회로 하여금 해외선교 열을 강하게 불어넣는 전기가 되었고 그 결과 일본으로 확대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열정이 멀리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선교까지 이어졌고 만주와 중국선교에까지 선교사를 파송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간도까지도 복음의 열정이 전해지게 되었는데 그곳은 중국인보다 더 많은 한국인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사실 간도는 존 로스와 존 맥킨타이어의 선교활동으로 널리 알려진 곳이다. 한국교회가 이곳으로 사역자를 파송하여 복음을 삶 속에서 실천하며 신앙의 모델을 보여 준 곳이다. 그리고 이 지역에 살고 있는 상당수의 한국인들이 중국 시민으로 귀화하거나 혹은 중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하여 동족만이 아니라 중국인 선교에도 유익하게 작용하여 만주선교는 곧 이어 진행된 중국선교를 위한 초석이 되도록 했던 곳이었다.

 

한국 장로교의 가장 큰 특징은 바로 선교에 힘쓰는 것이다. 선교사들이 흘린 복음의 선혈이 이런 선교의 열정이라는 열매로 나타나는 것이다. 바울이 말한 복음에 빚진 자.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복음에 빚진 자이지만 한국의 기독교는 어느 누구보다도 더 복음에 빚진 자이다. 그리고 지형학적인 위치에 있어서도 유라시아로 출발하는 전초 기지의 역할을 감당하기에 더할 나위없는 좋은 곳이다. 21세기 한국 교회의 사명은 바로 선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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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개신교 전래의 준비(1832 - 1884)

 

상업과 정치적이 목적으로 조선과 연관을 맺은 사람들도 있었지만 네덜란드 선교회의 파송을 받고 입국한 칼 귀츨라프 선교사, 런던 선교회 소속 로버트 토마스, 그리고 스코틀랜드 성서공회 소속 알렉산더 윌리엄슨은 선교를 목적으로 입국하거나 한국선교를 측면에서 지원한 이들이었다.

 

독일에서 발흥한 경건주의 운동의 저변 확대, 요한 웨스리 형제의 조지휫필드를 통한 영국의 부흥운동, 그리고 1740년대 조나단 에드워즈를 중심으로 일어난 미국의 1차 대각성운도은 교회의 영적인 생명력을 더욱 견고하게 만들어 주었고, 이와 같은 영적인 생명력은 선교열을 가속화시키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고 귀츨라프, 토마스, 그리고 윌리엄슨의 한국선교의 준비 역시 그와 맥을 같이한다.

1832년 7월 통역인, 의사 및 선교를 위해 로드암허스트호를 타고 충청도의 홍주 고대도시에 정박한 귀츠라프는 선교 목적으로 조선에 입국한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였다. 따라서 그의 입국은 비록 직접적인 결실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선교를 목적으로 한 순수한 입국이었다. 또한 1866년 대동강에서 순교한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 로버트 토마스 선교사와 그를 배후에서 지원하면서 한국선교의 장을 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알렉산더 윌리엄슨 선교사 모두 한국개신교 선교의 문호를 여는데 크게 기여한 인물들이다.

 

1866년 제너럴 셔먼호 사건을 계기로 조선에는 외구과의 개항의 문제가 우리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줄기차게 지기되었다. 문호개방은 단순히 조선이 외국과 수교를 시작했다는 의미 그 이상이었다. 외국과의 개항 문제를 두고 우리나라가 어려움을 겪고 있는 동안 미국에서는 해외 선교열이 고조되고 있었고, 이미 일본과 청나라에 입국해 활동하고 있던 선교사들, 특히 미국 선교사들은 조선선교를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고 있었다. 본격적인 조선선교는 알렌의 입국으로 시작되었지만 이미 그 전에 존 로스 선교사를 통해 성경이 번역되고, 그를 통해 복음을 접한 한국인들이 매서인이 되어 자신들의 고향으로 돌아와 복음을 전하면서 복음은 한국인들 사이에 조용히 저변 확대되고 있었다. 되돌아보면 한국선교는 여러 가지 점에서 복음을 전하기에 좋은 토양이 조성되었고, 따라서 복음을 수용할 준비가 이루어진 적기에 시작되었다. 이와 같은 시대적 상황에서 강화도 조약과 그후의 정치적 대립, 개항의 문제를 두고 전개되는 영미의 해외선교운동, 존 로스와 맥킨타이아, 그리고 의주 청년들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만주에서의 복음의 준비, 이수정을 통한 일본에서의 선교 준비는 한국개신교 선교의 장을 여는 직간접적인 전기가 되었고, 국내선교를 저변 확대시키는 중요한 정치적, 종교적 토양을 제공해 주었다.

 

주변국에서는 한국선교 준비가 진행되고 있는 동안 다른 한편에서는 문호개방이 진행되고 있었다. 강화도조약 후 정치, 경제적인 일본의 침투를 막기 위해서라도 문호개방은 이제 피할 수 없었다. 강화도조약에 따라 1880년 원산항을 개항하고 3년 후인 1883년에는 제물포항을 개항하였고, 이들 항구를 통해 자행되는 일본 경제의 국내 침투에 대해 전혀 손을 쓸 수가 없었다. 일본인들의 독자적인 무역으로 인한 국내 시장의 잠식, 일본인들의 경제적인 수탈, 일본 화폐의 유통으로 인한 국내 화폐의 통화장애, 점점 더 강화되는 일본의 정치, 경제적인 개입에 대해 더 이상 좌시만 할 수 없다는 여론이 여기저기서 제기되었다.

 

차제에 열국과의 과감한 개항을 통해 그들이 힘을 빌려 일본의 세력을 견제해야 한다는 정서가 일부 정부 지도자들 사이에 강하게 일고 있었다. 개항을 반대하던 이들도 일본의 정치, 경제적인 개입이 강화되자 이를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선은 원하든 원치 않든 서양열국에 문호를 열지 않을 수 없었다. 서양에의 문호개방은 곧 서양 문물과 그들의 종교를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했다. 따라서 한국선교는 개항, 특히 조미수호조약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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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 입국과 복음의 전래(1884 - 1900)

 

1884년 들어서 한국선교를 위한 미국에서의 준비는 가속화 되었다. 감리교는 아편젤러와 스크렌톤을 한국 선교사로 내정하였고, 장로교는 언더우드를 한국 선교사로 임명하고 중국에서 활동하던 알렌을을 한국 선교사로 전임시켰다. 그리하여 1884년 9월 20일 미국 북장로교 선교회 소속 호레이스 알렌이 가장 먼저 한국에 입국하였고, 이어 1885년 4월 5일 북장로교 선교회 언더우드와 미 감리교 선교회 아편젤러가, 5월 1일에는 미 감리교 선교회 스크랜톤이, 그리고 6월 21일에는 북장로교 선교회 헤론이 입국하여 북장로교 선교회와 미 감리교 선교회가 가장 먼저 한국선교를 개시했다.

 

그 후 ·1889년에 호주 장로교가, 1890년 성공회가, 1892년에는 남장로교가 1896년에는 남감리교와 침례교의 전신 동아 기독교가, 그리고 1898년에는 캐나다 장로교, 러시아 정교회, 플리머스 형제단이 한국선교를 시작했다. 1904년에는 안식교가, 1907년에는 성결교의 전신 동양선교회가, 그리고 그 이듬해 1908년에는 구세군이 한국선교를 시작했다. 이리하여 한국은 알렌이 입국하던 1884년부터 구세군이 한국선교를 개시하던 1908년까지 짧은 기간 동안 개신교을 대표하는 장,감,성을 비롯한 수많은 개신교 교단들이 한국선교를 동시에 착수하는 특별한 나라가 되었다.

 

1884년에 입국한 알렌이 첫 개신교 선교사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면 그 이듬해 입국한 언더우드는 감리교의 아펜젤러와 더불어 개신교를 대표할 수 있는 선교사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 같다. 해리로즈가 표현한 것처럼, 언더우드는 “한국선교의 아버지이자 많은 개별 선교사들을 한국에 오개 한 지도자 ”였으며, 스피어 박사가 그를 가리켜 언급한 것처럼 “매번 그가 미국에 올 때 선교의 횃불을 드높이 불태웠고, 그는 지칠 줄 모르는, 참을성 있는, 불굴의 사람이었다.” 그는 실로 한국선교를 위해 하나님이 특별히 예비하신 시대를 앞서 간 선각자 한국의 근대선교의 아버지였다.

 

1885년 4월 5일 부활절 아침 아편젤러, 한국을 시찰하기 위해 입국한 일본 장로교 선교회의 스쿠터박사, 테일러 박사와 나란히 전선에 입국한 언더우드 선교사는 처음 얼마간은 알렌의 노력으로 개원된 제중원에서 화학을 가르치면서 한국선교를 조용히 준비하고 있었다. 그는 한국의 복음화를 위해 하나님이 보내 주신 위대한 선교사였다. 한국선교 반세기를 정리하는 1934년, 희년기념식에서 사무엘 마펫 선교사가 지적한 것처럼 “한국선교 초기 언더우드는 모든 면에서 끈기 있는 지도자였다.

 

1884년 북장로교 소속 선교사 알렌이 입국하고 그 이금해 같은 북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와 미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가 입국한 후 세계 각국의 선교사들이 은둔의 나라 조선에 속속 입국했다. 언더우드가 입국한 얼마 후 1885년 6월 의하 헤론부처가 입국했고, 1887년 7월 4일에는 후에 벙커의 아내가 된 앨러스가 입국해 한국에 이북구한 북장로교 선교사는 7명으로 늘어났다. 1887년 앨러스가 입국할 때, 뉴욕 유니온 신학교 출신 세 사람, 헐버트, 벙커, 그리고 길모어도 입국했는데 이들은 한국 정부의 요청으로 미국 정부가 파송한 선교사들로 후에 한국선교에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개혁파 복음주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맥코믹신학교, 프린스톤신학교, 리치몬드 유니온신학교, 토론토대학, 그리고 호주의 신학교 출신 장로교 선교사들은 물론이고 드루신학교를 비롯해 웨슬리안 복음주의 전통에서 카우만이나 길보른 모두 성경의 권위를 철저하게 확신하면서도 복음의 열정에 투철한 복음주의자들었다. 이들은 19세기 “복음주의 전통”속에서 교육을 받았고, 당시 영미를 지배했던 복음주의 이상을 공유했으며, 그리고 그런 방향에서 한국선교를 이끌었다. 1905년 복음주의 연합공의회를 조직 이들이 교파를 초월해 한국개신교 복음주의 연대를 구축할 수 있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라고 할 수 있다.

 

선교사들의 선교 정책은 한국인에게 개인 구원의 영역을 넘어 사회, 문화전반에 영향을 미쳐 복음을 통한 문화 변혁의 한 모델을 보여 주었다. 매켄지가 한국의 독립운동에서 한국에서 선교사들은 “기독교 개척자들이었을 뿐만 아니라 문명의 개척자들이었다.”고 말한 것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일본은 한국 내의 개화파들을 자신들의 세력 확장을 위한 도구로 이용하려고 하였고, 중국은 한국내의 보수주의자들을 지원하면서 자신들의 세력을 확대하려고 했다. 오랫동안 은둔의 나라로 알려진 한국을 자신들의 소유로 삼으려는 열국에 의해 한반도는 전에 없이 동요되기 시작했다. 한반도가 강대국들 사이의 전략적인 위치에 있다는 것과 한반도가 스스로를 방어하기에는 너무도 작다는 것은 불행이었다. 그러므로 한국은 더 강력한 이웃 국가들에 의해 끊임없이 침략을 당했고 강대국의 국제적인 권력 투쟁에서 힘없이 볼모가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한국을 둘러싼 열국의 한국 쟁탈전은 19세기 중엽부터 본격적으로 진행되었고, 반강제적으로 체결된 강화도 조약은 그와 같은 근대화 과정에서 한국이 열국에 의해 침략을 당하기 시작한 출발이었다. 제임스 게일이 전환기의 한국에서 언급한 대로 한국은 개항과 더불어 정치, 경제적으로 전환기를 맞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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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사 / 한국교회 부흥운동(1900 - 1910)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중엽까지 주변의 중국, 일본, 러시아, 그리고 미국, 영국, 프랑스를 비롯한 서양열국이 한국을 가운데 두고 벌인 각축전은 정치, 사회분야 뿐만 아니라 한국기독교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는 요인이 되었다. 라토렛이 한국교회의 놀라운 성장에 있어서 번성과 쇠퇴는 부분적으로 내외적인 정치적 상황을 반영한다고 말한 것은 결코 빗나간 평가가 아니었다.

 

1903년 원산부흥운도, 1907년 평양 대부흥 운동, 그리고 1909년의 백만인 구령운동을 통하여 한국교회는 전에 없는 놀라운 성장을 경험하게 되었다. 평양을 중심으로 청일전쟁 이후 일기 시작한 영적 각성의 움직임이 ·1903년에는 하디를 통해 원산부흥운동으로 촉발되었고, 이것이 다시 원산부흥운동의 저변확대와 1907년의 평양대부흥운동의 발흥으로 이어져 한국교회에는 조나단에드워즈로 대변되는 미국의 제 1차 대각성운동, 웨일즈부흥운동, 인도의 부흥운동과 견줄 수 있는 놀라운 영적대가성운동이 발흥했다. 평양대부흥운동이 일어나고 2년후 1909년 일종의 전도운동인 백만인구령운동이 전국적으로 전개되었던 것이다.

 

이 영적 대각성 운동은 세 가지 면에서 독특한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첫째는 이 대각성운동이 당시 세계기독교계에서 일고 있는 부흥운동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어져야 한다는 사실이고, 둘째는 포스터가 적절히 표현한 것처럼 강대국들이 노리고 있는 “나봇의 포도원” 한반도를 둘러싼 중국, 러시아, 일본의 패권주의로 인한 정치적 위기가 한국인들로 하여금 복음을 받아들이기에 적합한 토양을 제공해 주었다는 사리이고, 셋째는 한국의 부흥운동은 일차적으로 네비우스 선교 정책의 일환으로 채택된 사경회 운동과 밀접한 연계성을 지니며 발전했다는 사실이다.

 

1907년 한국교회에는 복음이 전래된 이후 알렌이 “놀라운 부흥 운동”이라고 말했던 가장 강력한 영적운동이 일어난 것이다. 1903년부터 간단없이 줄기차게 이어져 온 영적 각성의 움직임이 “한국의 오순절”이라 불렀던 놀라운 성령의 임재와 함께 전국적인 운동으로 발흥했다. 평양대부흥운동으로 널리 알려진 이 놀라운 영적대각성운동은 1907년 1월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열린 평안남도 겨울 남자 사경회 기간 동안에 발흥하기 시작했다.

 

1907년 북장로교 보고서가 밝힌 대로 과거 죄악의 공포를 깊숙이 깨닫지 못했던 한국인들은 이번 평양대부흥운동을 통해 자신들의 죄악의 무서운 결과, 죽기까지 죄인을 사랑하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의 은혜를 깨닫고 철저하게 자신들의 죄악을 통회했다. 그러나 단순히 통회로만 끝나지 않았다. 스왈른이 증언한 대로 사람들은 그 다음날 관련자들을 찾아다니며 용서를 구했다. “그 다음날 사람들이 거리에서 서로 죄를 고백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도둑맞은 물건들이 되돌아왔다. 도둑맞은 돈도 되돌아왔고, 오랫동안 갚지 않았던 빚이 청산되었으며, 부정한 방법들이 전반적으로 바로잡혀졌다.” 옛 생활을 청산하고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된 것이다. 제임스 게일이 표현한바 “외국인들뿐만 아니라 전 한국인 공동체를 움직인”이 같은 영적 변화는 그 후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선교사들이나 한국교회 지도자들이나 그곳에 참석한 모든 이들은 이와 같은 성령의 역사가 장대현교회에서 뿐만 아니라 평양 시내 전역, 더 나아가 한국교회 어느 곳에서나 이어지기를 간절히 바랐다.

 

평양에서 열렸던 열흘 동안의 북장로교 선교부의 사경회가 끝난 다음이 사경회에 참석하여 놀라운 성령의 역사를 직접 체험한 이들은 자신들의 고향으로 돌아가 이 놀라운 성령의 역사를 자신들이 다니는 교회의 다른 교우들에게도 전해 주었다. “이 소문이 각처에 전파됨에 따라 신령한 체험을 맛보고자 하는 열망과 기대는 지방 신자들의 마음속에 간절하여졌다.” 어떤 부흥도 회개의 역사 없이는 일어나지 않는다. 오늘날도 그 원리는 동일할 것이다. 이 땅 가운데 다시 한번 평양대부흥과 같은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길 기대해 본다.

 

 

원산 부흥운동과 평양대부흥운동에 이어 “부흥운동의 두 번째 기간”으로 알려진 백만 인구령 운동은 한국 민족 100만 명에게 복음을 전해 민족 복음화라는 거대한 공동의 목표를 이룩하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장로교와 감리교 6개 선교회가 힘을 결집하여 전국적으로 추진한 민족복음화 운동이었다. 로이 스위러가 백만인 구령운동을 가리켜 “전도운동”이라고 불렀던 것도 그 때문이다.

백만인구령운동은 기울어 가는 국운 앞에서도 기독교 신앙을 통해 흩어진 민족의 힘을 결집시키는 중요한 원동력이 되었다. 백만인 구령운동은 지위와 연령, 교파와 교단, 그리고 지역을 초월하여 전국의 기독교인들을 하나로 결집시키는 원동력이었다는 점에서 결코 실패한 운동이 아니었다. 한국교회는 원산부흥운동, 평양대부흥운동, 그리고 이어 진행된 백만인구령운동을 통해 일제의 무력적 탄압과 강요에 흔들리지 않고 맞설 수 있는 유일한 거족적 집단으로 발돋음 할 수 있었다.

 

또한 이 운동 이후 한국교회는 제도적인 틀을 다질 수 있었다. 1911년 제 5회 장로교 독노회는 1912년을 기해 총회를 조직할 것을 결의 하였고, 그 해 가을에 열린 장감 연합공회 총회도 1912년에 장감 6개 선교회와 각 성서공회, 그리고 성공회가 참여하는 연합공회로 확대 개편할 것을 결정했다. 그 동안 한국교회를 대변하는 장로교와 감리교가 전국적인 규모의 총회와 연회 조직을 통해 민족교회로서의 틀을 다지는 전기를 마련했고, 양 교파를 대변하는 평양신학교와 감리교의 협성신학교도 신학교로서의 모습을 갖출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민족복음화의 열정이 전국적으로 발화되면서 만주와 소련과 일본과 하와이에 거주하는 디아스포라 한인들을 대상으로 선교사를 파송하려는 노력들이 어느 때보다 강하게 이러났다. 이처럼 백만인 구령운동과 그 앞서 일어난 평양대부흥운동은 민족 복음화라는 거대한 비전과 꿈을 한국인들에게 깊숙이 심어 주어 민족교회로서의 틀을 다지는 전기를 마련해 주었다.

 

 

제임스 부스컬크가 지적한 것처럼 대부흥운동은 무엇보다도 을사조약과 고종 퇴위 한일 합방으로 대변되는 당시의 정치적인 암흑기를 극복하고 민족에 대한 새로운 희망을 다지게 만들어 준 중요한 종교적인 사건이었다. 이 시대만큼 우리 민족이 암흑의 시대를 걸었던 적도 드물었지만 가장 암울했던 이 시대, 일련의 놀라운 부흥운동이 전국을 휩쓸었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차원에서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한국의 역사 속에서 개입하시고 섭리하셨던 것이다. 돌이켜 볼 때 그것은 분명 하나님께서 죄로 무든 이 백성을 영적인 깊은 잠에서 깨우시려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였다. 그 결과는 참으로 놀라웠다. 한국교회는 대부흥운동으로 여러 가지 면에서 헤아릴 수 없는 은혜를 누리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영적 각성운동, 사회개혁운동, 전도열과 놀라운 교회 성장, 그리고 복음주의 연합운동은 이 시대 부흥운동이 한국교회에 가져다 준 두드러진 결실이었다.

 

전 세계적으로 부흥이 이렇게 집중적으로 일어난 시기는 없었다고 한다. 19세기 말과 20세기에 그렇게 부흥이 일어난 이유는 세계 선교를 위한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하나님의 크심, 그 광대하심을 느끼고 그 위엄에 굴복하는 은혜가 본서를 요약하면서 임한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이 역사 가운데 역동적으로 임하는 것을 보는 것은 정말로 축복이다. 특히 원산 대부흥 운동을 시발로 평양 대부흥 운동과 100만인 구령 운동으로 이어지는 놀라운 은혜의 증거들은 살아계신 하나님이 광대하심과 세밀함을 경험케 한다. 본인이 바로 그 자리에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그러나 한편, 그 때가 아니고 21세기 한국에 보내신 이유는 그 역사의 부흥이 단지 경험으로 끝나지 않고 계속 이어지길 원하시는 하나님의 크신 계획 가운데 있는 것이 아닐까? 오늘날도 동일하게 부흥 운동이 요구된다. 아니 부흥이 필요하다. 물론 그 어느 시대가 하나님의 부흥의 역사가 불필요하겠는가마는 온갖 이단의 사상이 넘실거리고, 윤리적 도덕적 판단의 준거를 잃어버린 이 시대에 너무나 절실히 요구된다. 역사적 사실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부흥 운동은 철저한 회개를 그 바탕으로 한다. 원산 대부흥도, 평양 대부흥도, 100만인 구령 운동도 찢어지는 심령을 하나님께 토설하며 자신의 환부를 도려내는 아픔 가운데 일어난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이것이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정직히 서 있는 것. 바로 이것이 필요하다. 역사가 이것을 증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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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개신교 전래이전 서양종교와의 관계

 

한국이 서양문화와 언제 접촉하였으며 언제 서방에 알려졌는가는 많은 사람들의 지대한 관심사이다. 특히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세계 역사의 큰 흐름에 한국이 등장한 시기에 대한 고찰은 세계사뿐 아니라 오늘의 한국사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알고 바른 역사관을 갖는 중요한 문제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서방 문화와의 접촉은 서양 종교와의 접촉과 결코 뗄 수 없이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기에 한국기독교회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도 아주 중요한 문제이다.

 

16세기 후반 유럽 열국이 종교개혁으로 심각한 종교적 갈등을 겪고 있는 동안 성격은 다르지만 한반도는 전에 없는 도전을 만나고 있었다. 1592년에 발생한 임진왜란, 1627년과1653년 표류로 인한 박연과 하멜의 입국, 그리고 1826년 머리 맥스웰 대령과 바실 홀 대력의 서해안 탐사가 바로 그 대표적인 사건들이다. 이들 사건들은 종교사적으로만 아니라 문화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세스페데스가 임진왜란 때 일본군을 대상으로 선교활동을 하기 위해 종국 신부로 내한하고, 일본 포로로 끌려간 조선인들 가운데 상당수의 예수회 신자가 생겨나면서 지극히 세속적인 임진왜란은 단순한 전쟁을 넘어 기독교와의 접촉점을 제공하는 전기를 마련해 주었다. 박연과 하멜의 입국과 맥스웰과 바실 홀의 서해안 탐사 역시 은둔의 나라 조선이 서양문화, 종교와 접촉하는 기회를 제공했다. 갑작스런 배의 난파로 조선에 입국했다 돌아간 하멜이 출간한 표류기, 서해안 탐사를 위해 입국했다 돌아가 맥스웰과 훌이 출간한 조선 항해기는 은둔의 나라 조선을 서방 세계에 알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것은 비록 공식적인 선교사 입국 이전에 있었던 이와 같은 복음의 접촉은 직접적인 선교의 결실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복음 전래의 길을 예비하는 준비였다. 한반도에 공식적으로 복음이 전래되기 오래전부터 하나님께서는 조선에 복음 전파를 준비하고 계셨던 것이다.

 

동양의 모든 나라와 마찬가지로 조선 역시 서양종교를 본격적으로 접한 것은 중국으로부터 전래된 천주교를 통해서였다. 일찍이 예수회 선교회 소속 선교사들이 오래 전부터 일본에서 선교 활동을 하고 있었던 것처럼 중국에서도 예수회 선교사들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그 중의 대표적인 인물이 1601년부터 중국 북경에 선교 거점을 마련하고 활동하며 중국 정부와 민중으로부터 상당한 존경을 받았던 이탈리아 귀족출신 마테오 리치 였다. 1582년 중국에 도착해 1601년 북경에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28년 동안 중국 선교에 헌신했던 마테오 리치가 이와 같은 인기를 끌 수 있었던 것은 서양 과학에 대한 식견이 풍부한 데다 수학과 천문학에 대한 조예가 깊었고 동양문화와 민족을 존중했기 때문이다. 마테오 리치는 중국의 문화를 깊이 연구하는 가운데 유교의 경전 시경과 서경에 있는 천제와 천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천주와 동질의 개념이라는 사실을 발견한 후 기독교와 유교는 배치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조화를 이룰 수 있는 가르침으로 받아들였다.

 

명나라 정부와 북경 사람들로부터 인기를 독차지할 정도로 영향력이 있었던 마테오 리치의 작품 다수가 중국에서 출판되었고, 이 중 일부가 중국북경에 파송된 조선국왕의 사절인 부연사를 통해 조선에 입수되었다. 서양 선교사들은 단순히 신앙만 전한 것이 아니라 서양의 과학도 함께 소개했기 때문에 북경주재 신부들로부터 부연사 일행은 천문, 지리, 역법 같은 서양의 새로운 학문을 접할 수 있었다. 임진왜란 후 세 번이나 중국에 사신으로 다녀온 지봉유설의 저자 이수광이 처음으로 서양 과학과 천주실의를 조선에 소개하고 1625년 인조 3년에 국왕에게 경제 개혁을 통한 국가 재건을 건의하였다. 그리고 이에 앞서 1575년에는 홍길동전의 저자인 교산 허균이 북경에서 세계지도와 게십이장을 가지고 돌아와 연구하고 실천에 옮긴 적이 있다. 1631년 부연사의 일행으로 명나라에 파송된 사절 중의 “한 사람인 정두원이 과학 서적, 서양의 화포, 천리경, 자명종 등을 비롯한 서양 풍속, 지리, 천문학에 관한 서적들과 함께 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를 가지고 귀국했다.”

 

그 후, 한 세기 동안 서학은 주자학과 쌍벽을 이루는 하나의 학문으로 조선 지식인의 사상계의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영조시대에 서학은 전성시대를 맞았다. 특히 벼슬을 하지 않고 초야에 묻혀 학문을 연마하는 남인계 학자들에게 인기가 있었으며, 이들에 의해 서학은 조선에서 전성시대를 구가하게 되었다. 성호 이익과 그의 제자 순암 안정복은 서학을 대변하면서 주자학 주도의 조선 사상계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 넣었다. 이와 같은 새로운 서양사상은 동양의 유교 사상과 근본적으로 배치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 또한 종교나 신앙의 대상이라기보다 학문의 대상이었다는 점에서 금기시하지 않았다. 이처럼 서학에 대한 관심은 공리공론만 일삼는 주자학과는 달리 근대지향적인 자의식을 불어넣어 주었고, 그것은 실학운동을 태동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박지원, 홍대용, 홍양호, 박제가, 이덕무로 대표되는 실학자들은 매년 3,4차례씩 파견되는 부연사의 일행에 끼여 북경를 방문하여 천주교 성당을 찾아 서양 신부와 교제하는 기회를 갖고 이들을 통해 서양 과학의 지식을 배우는 한편 천주교 교리에 대한 연구를 100년 이상이나 계속해왔다. 따라서 천주교는 이와 같은 남인계 실학자들을 토해 서학, 천주학, 천학, 양학이라는 이름으로 조선의 지식인 사이에 뚜렷한 한 부류의 사상을 지배하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는 북경을 통해 전래된 후부터 불란서와의 조약을 통해 종교의 자유를 허락받을 때까지의 조선천주교의 역사를 고찰하면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분명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 국내의 수용과정에서 조선천주교는 처음부터 종교로서 수용된 것이 아니라 서학이라는 학문의 한 조류로서 수용되어 오다 천주학을 거쳐 천주교로 정착되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왜 천주교가 선교사가 한 명도 없는 가운데서도 조선에 소개되고 정착하고 성장할 수 있었는가를 자연스럽게 설명해 준다. 그것은 사회적 영향력이 강했던 조선의 양반계층에 서학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소개되었기 때문에 보호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논리적인 비약이 있는지 모르지만 이것은 초대교회 때 기독교가 유대교의 보호를 받으며 저변 확대되었던 현상과도 유사하다.

 

둘째, 그러다 조선천주교는 천주의 신앙과 제사 제도가 배치되는 것으로 알려지면서 일대 위기를 만나게 되었다는 사리이다. 처음 천주교를 받아들이고 그 저변 확대에 주도적인 역활을 했던 이들이 배교하고, 지도자의 공백 상태에서 조선천주교는 한편으로는 박해에 대처해야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신앙의 배도를 극복하여야 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도전과 위협 속에서도 신앙적인 이유로 제사를 거부하며, 죽음으로 신앙을 지켰던 이들이 생겨나면서 비로서 조선천주교는 신앙 단체로서의 자리를 굳힐 수 있게 되었다.

 

셋째, 이와 같은 조선천주교의 제사 금지는 토착화 선교 정책을 택했던 예수회의 전통부다는 카톨릭 내 프란스스칸 및 도미니칸 선교회 전통을 따른 것으로, 1936년 5월 25일 신사참배 문제가 제기되면서 일본, 독일과 동맹관계를 맺고 있는 이탈리아의 지원을 받은 교황청이 신사참배가 종교적인 행위가 아니라 국가적인 예의이기 때문에 신사에 참배해도 신앙에 위배되지 않는다는 선언이 나올 때까지 조선천주교는 신사참배와 제사 제도를 수용하지 않는 것을 공식적인 입장으로 하였다.

 

넷째, 황사영이 전형적으로 보여 주듯이 조선천주교는 외세의 개입, 정치적인 압력, 심지어 전쟁을 통해서라도 종교적인 자유를 쟁취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해 정부로부터 반정부단체, 반미족단체라는 의심을 받게 되었다. 이와 같은 천주교의 태도는 기왕에 갖고 있는 제사 제도 거부로 인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한층 강화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초기에 천주교의 박해가 제사 제도 거부라는 순수한 신앙적인 이유에서 비롯되었다면, 후기에 접어들면서 야기된 천주교의 박해는 종교적인 이유에서만이 아니라 정치적인 이유에서 발단되었다는 사시이다. 그리피스가 언급한 것처럼 황사영으로 대변되는 “로마 카톨릭의 조선 전도방식의 도덕적 약점”은 조선에서만 발견되는 것이 아닌 아시아에서 공통적으로 찾아볼 수 있는 것으로, 이는 분명히 개신교와 다른 선교 정책이었다. 천주교 선교사들은 조선 천주교인들이 교황의 권위에 순종할 뿐만 아니라 지상의 최고 권위에도 순종하도록 그들을 바르게 가르쳤어야 했다.

 

복음의 전래라는 측면에서 고찰 할 때 확실히 천주교는 개신교와 달랐다. 그것은 임진왜란 때 침략군을 지원하기 위해 입국했던 일본의 예수회 신부 세스페데스가 보여 준 것처럼 선교가 정치적 패권주의의 도구로 이용되었다는 사실이다. 성격과 정도는 다르지만 이 점에서 조선의 천주교도 어느 정도 비판을 면할 수 없다. 벨로네가 1866년 7우러 13일 불란서 왕에게 보낸 편지에서 “우리는 어떤 귄세도 인정하지 않습니다.”라고 밝힌 것처럼 조선의 파송된 선교사들은 정부의 권세를 인정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조선 천주교의 패권주의적 선교 정책이 직, 간접적으로 1866년에 발생한 불란서 원정과 연계되었다는 비판을 받는 것이다. 순수복음에서 출발하기보다는 학문으로, 후에 예전과 제도로 출발한 조선 천주교가 정치적인 성향을 띠면서 이들을 보는 정부의 시각이 달라졌고, 그 결과 정부로부터 박해를 피할 수 없었다.

 

조선천주교 전래 과정에서 우리는 조선천주교가 얼마나 복음에 충실했는지를 평해야 할 것이다. 성경 번역은 고사하고 평신도들에게 성경을 가르치지 않았고, 지나치게 정치적인 활동에 관여했으며, 제도적인 교회 조직을 지나치게 강조했다. 조선천주교 지도자들과 천주교 선교사들은 조선천주교 교세 확장과 세력 확장이라는 면에서는 생명을 아끼지 않았지만 복음을 충실하게 전달하려고 한 면에서는 너무도 미흡했다. 해리 로즈가 지적한 것처럼, “조선 개종자들에게 외국 세례명을 부여한 것, 서구로부터 외국의 간섭을 끌어들인 것, 비밀스럽고 때로는 거짓된 방법으로 선교 활동을 펼친 것, 신자들에게 성경을 배포하지 않은 것”등 초기 조선천주교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박해와 옥에 갇히는 것과 순교도 두려워하지 않는 조선천주교인들이 영웅적인 순교적 신앙에 찬사를 보내야 하지만 순교가 일종의 공로적인 수단으로 전락하고, 또한 그 결과 천주교 선교는 자연히 믿음으로 만의 구원이라는 성경과 개신교의 근본 이라는 물론 교회 복음 본래의 사명과 대 사회적 문화적 책임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 때문에 성경적 신앙을 그 모토로 했던 개신교 선교와는 처음부터 차이가 있었다. 비록 당시의 사회적인 제약과 장벽으로 한계가 있었겠지만 조선천주교가 천주교의 순수 신앙을 체계적으로 교육시키고 복음에 충실했다면 조선에서의 천주교 선교는 아마도 달라졌을 것이다.

 

이것은 후에 개신교 선교사들과 지도자들에게 조선개신교 선교의 방향에 대한 중요한 교훈을 남겨 주었다. 그것은 기독교가 복음 전파의 사명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정치적인 성향을 배제하면서 복음 본래의 순수성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거이었다. 후에 조선개신교는 정치적인 성향을 처음부터 자제하고 복음 전파, 교육, 의료사역, 그리고 자선사역과 함께 복음 본래의 사명에 충실하려고 노력했다. 그것은 성경 번역 및 복음 전파라는 직접선교뿐만 아니라 교육 및 의료선교 등 간접 선교를 통한 문화 변혁을 동시에 추구하였다는 의미이다. 그 결과 조선개신교는 천주교와는 달리 성경 번역과 직, 간접 선교의 균형을 통해 왕실의 마음과 민중의 마음을 동시에 사로잡는 가운데 선교를 시작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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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대 부흥운동   

    

Ⅰ. 序 論


  韓國에 基督敎가 들어와서 100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한국의 기독교는 상당한 成長을 이루었다1). 이는  아마도 하나님의 攝理라고 여겨지지만 굳이 이유를 들어보자면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그 중 하나가 査經會요 그 부흥회의 모범이 1907년 1월의 평양 장대현교회에서의 사경회라는 데에는 대부분의 학자들이 同意하고 있다. 한편, 한국 기독교가 일제 식민지하에서 救國運動을 펼 수 있었던 것은 평양 장대현교회에서의 査經會를 전후한 韓末 基督敎2) 大復興運動을 통한 信仰成熟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고 한다3).

  이러한 까닭에 本考의 주제인 한말 基督敎 大復興運動은 基督敎 神學者들과 歷史學者들의 많은 관심을 끌어왔다. 이들의 연구성과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4).

  한국 敎會史學의 泰斗이며 宣敎史觀의 大家라 할 白樂濬은 그의 著書에서 한말의 大復興運動이 한국 교회 쪽의 心靈的 新生의 표적이 되었으며, 크리스찬 사회의 道義心을 가져왔으며, 査經會, 祈禱會 등 종교적 慣習이 형성되었다고 하면서, 한국기독교의 信仰性格이 형성되었다고 보았다5). 그러나 그는 宣敎의 전개과정을 중심으로 사건을 記述하였기에 한국 교회의 證言과 告白이 缺如된 평면적 현상만을 서술하였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비록 이러한 약점이 있다 하더라도 그의 견해는 이후 연구자들에 의하여 답습되었다. 그의 저서는 宣敎史觀을 가지고 쓰여진 저술 중에서는 最善의 著述이었기 때문이다.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한국사를 民族主義的 視覺으로 照明하려는 時流에 자극받아 기독교계에서도 한국 교회사의 새로운 意義를 찾으려 하는 조류가 발생한다. 대표자는 閔庚培로 그는 대부흥운동을 그의 ‘民族敎會史觀’을 통하여 信仰의 內延이 있고 나서 그것이 뿜어나는 外延에 의하여 擴張되어 歷史 속에 참여하는 절차 논리를 확립시켰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그는 대부흥운동의 性格을 교회의 非政治化를 圖謀한 것이었으나 오히려 以後에 닥칠 民族的 苦難을 견디게 한 精神的 支柱로서 民族敎會의 形成過程이라고 주장하였다6). 하지만 그의 견해는 ‘內燃-外延’ 도식의 적용에서 외연의 범위를 外勢에 국한시키려 하였고 이로 말미암아 외세와의 政治的 對決에 문제의 초점이 두어지다보니 한국 사회내의 광범위한 社會經濟的 요인이 연구의 초점거리에서 벗어났을 뿐 아니라7) 일부 宣敎師들의 附日行爲를 문제삼아 대다수 선교사의 한국을 위한 熱情을 無意味하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문제시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민경배의 논의를 이어받아 徐正敏은 <초기 한국교회 대부흥 운동의 이해>에서 비민족화로서의 표현과 민족화의 내재를 발견할 수 있음을 주장하고 견고한 민족교회화로의 재편성으로서 대부흥운동을 규정하였다8).

  한편 前述한 민족교회사관의 극복을 위하여 여러가지 시도가 이루어지는데 대표적인 것으로 주재용의 ‘民衆敎會史觀’을 들 수 있다. 그는 1907년을 전후한 부흥운동으로 인하여 교회가 靈的으로 거듭나 한국의 지도세력화하여 民衆을 이끌었다고 보고 있다9). 그렇지만 그의 서술은 구체적인 역사적 사실로부터의 논증이 부족하다는 약점을 안고 있다10).

  한국기독교사의 주체를 누구로 볼 것이냐는 문제를 가지고 ‘민족교회사관’과 ‘민중교회사관’의 대립을 극복하고 새로운 기독교사 서술 및 사관정립을 위해 모인 韓國基督敎歷史硏究所는 實證主義的 總體的 연구를 진행하면서 順機能과 逆機能이 모두 밝혀져야 한다는 의식을 갖고 1907년을 전후한 한말의 기독교 대부흥운동은 信仰成熟의 계기가 되었지만 당시의 민족적 아픔과 분노를 성령운동이라는 종교적 카타르시스를 통하여 희석시켰다고 주장하였다11). 또한 우완용은 그의 저서에서 1907년의 기독교 대부흥운동을 통하여 民族主義的인 기독교인과 非民族主義的인 기독교인들이 갈려나갔고 민족주의적 기독교인들만이 敎會를 빠져나와 105인사건과 3·1운동에 참여하였기에 대부흥운동은 ‘非民族化의 典型’이라고 주장하고 있다12). 그렇지만 이들은 實證的 연구를 증폭시겼다고 하면서 부흥운동의 참여계층에 대한 연구가 부족하였을 뿐 아니라13) 교회를 政治集團이라 하는 잘못된 이해를 심어주고야 말았다.

  한편 一般 槪說書의 구한말 대부흥운동에 대한 認識을 살펴보면 李基白의 《韓國史新論》에서는 한말 대부흥운동 자체는 언급되어 있지 않으나 査經會와 百萬人救靈運動이 언급되어 있으며14)이는 邊太燮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15). 이들은 앞서 언급한 사항들을 愛國啓蒙運動이라는 範疇下에서 설명하고 있으며 基督敎 開化運動의 특징을 자세히 다루어주었다는 것이 특징이다. 그리고 進步的인 槪說書로 알려진 한국역사연구회에서 편찬한 《한국사강의》에서도 愛國啓蒙運動의 일환으로 대부흥운동을 다루고는 있으나 宣敎師에 대한 偏見을 가지고 있으며 이로 말미암아 信仰運動이 民族意識 除去에 영향을 끼쳤다고 敍述되어졌다16). 또한 최근에 출판된 한길사의 《한국사》에서는 《한국사강의》의 입장을 거의 비슷하게 서술하고 있으면서 기독교계의 항일운동으로 査經會와 1909년의 百萬人救靈運動을 제시하고 있다.17). 어쨌든 이러한 一般槪說書들은 基督敎에 대한 理解가 제대로 되지 않아서인지 한말 기독교 대부흥운동을 다룬 분량이 짧다. 그리고 進步的이라는 개설서들은 이에 대한 부정적 평가를 내리고 있다.

  本考에서는 이러한 認識들을 留念하면서 한말 기독교 대부흥운동의 歷史的 考察을 시도하고자 한다. 여기에는 敎會史의 사건이 神學者들만의 專有物이라는 인식에 제고를 기하려는 필자의 의도가 작용하였다18).


Ⅱ. 韓末 基督敎 大復興運動의 時代的 背景 에서는 먼저 부흥운동이 일어나게 된 背景을 살피려고 한다.

  첫째로 당시 朝鮮의 상황이 어떠하였는가를 알아봄으로써 百姓19)들의 고통이 심하였음을 알아보고자 하였다. 여기서는 조선의 滅亡의 원인이 19세기말의 世道政治로부터 싹텄음을 보이고 그 후의 흥선대원군과 그 외의 정치인들의 失政을 통하여 深化되었음을 주장하였다.

  둘째로 이러한 상황에서 무엇 때문에 백성들이 傳來의 다른 宗敎를 놔두고 기독교를 信仰의 대상으로 삼았는지를 儒敎, 佛敎, Shamanism, 天主敎, 東學의 교리 자체와 기독교와의 관계를 통하여 이해하고자 하였다.

  셋째로 한말 기독교 대부흥운동의 震原地인 平安都 지방의 성격을 살피면서 무엇 때문에 평안도 지역의 교회가 성장하게 되었는가를 地域的 背景과 社會的 背景을 통하여 조명하였다.

  넷째로 한국에서의 기독교가 어떻게 성장할 수 있었는가를 聖經基督敎라는 한국기독교의 특징과 대부흥운동이라는 사건의 직접적인 동기이며 그 자체라 할 査經會에 대한 분석을 통하여 알아보고자 하였다. 또한 기독교인들이 어떻게 이를 통하여 信仰과 民族의 문제를 해결하려 하였는가를 알아봄으로 말미암아 부흥운동의 배경을 이해하고자 하였다.

Ⅲ. 大復興運動의 展開와 結果 에서는 대부흥운동의 전개과정을 각 지역별로 설명하고 宣敎師들과 한국인 중 대표적 復興說敎家인 吉善宙 목사20)의 활동과 메세지를 알아보고자 하였고 당시 狀況을 점검함으로써 대부흥운동의 성격을 규명하고자 하였다.

Ⅳ. 大復興運動의 結果와 影響에서는 대부흥운동이 교회에 미친 影響을 먼저 알아보고자 하였다. 첫째로 부흥운동으로 말미암아 기독교가 한국에 정착된 계기가 되었음을 보이고자 하였다. 둘째로 초창기에 신도수가 성장하지만 교회사학자들이 대부흥이라 하는 1907년의 復興査經會 자체를 통하여 신도수가 늘지는 않았음을 증명하고자 하였다. 세째로 선교사들과 한국교인들간의 화해가 이루어졌음을 보이고자 하였다. 네째로 현세적인 신앙목적이 내세적으로 변화한 과정과 그 결과를 보이고자 하였다. 다섯째로 한국인 교역자의 증가를 유발하여 진정한 한국인의 교회로 변화함과 아울러 교파별로 교회의 구형이 이루어졌음을 보이고자 하였다.

  民族運動과 基督敎와의 관계를 논함에 있어서 非政治化의 문제를 다루었는데 대부흥운동이 비정치화의 일환이었다는 기존의 견해를 비정치화라는 용어 자체의 분석과 대부흥운동 이후의 교회의 행적을 통하여 비판하였다. 곧 무엇 때문에 대부흥운동이 그뒤에 이어질 民族的 苦難을 이기는 훈련의 도구로 사용되었는지, 또한 여기서 은혜를 받은 이들이 主要한 獨立運動에서 어떻게 활약하였는지를 살피었다. 이는 주로 參與者와 參與階層에 대한 연구를 통하여 밝히고자 하였다. 곧 부흥운동의 참여계층과 이후의 운동들의 참여계층과의 연관성을 밝힘으로 말미암아 한말 기독교 대부흥운동이 해당 운동에 영향을 미쳤다는 명제를 성립시키고자 한 것이다. 이는 이전의 연구들이 단순히 新民會나 3·1운동에 기독교인들이 많이 참여하였다는 식으로 대부흥운동과의 관계를 다룸으로 말미암아 진정한 歷史理解와 기독교 이해에 障碍物이 되었다는 약점을 극복하고자 하여 시도하고자 하는 것이다21). 이러한 분석으로 말미암아 韓末의 상황을 드러낼 뿐 아니라 한국 기독교가 신도들의 신앙성장과 민족의 독립을 위하여 노력하게 된 까닭을 照明하고 이러한 행동이 한국교회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 알아보고자 하였다. 물론 이는 歷史의 主體가 하나님이요 대부흥운동은 인간의 갈구 때문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攝理가 작용하였기에 이루어졌다는 기본 인식하에 연구가 진행되었음을 전제해 두고자 한다.


Ⅱ. 韓末 基督敎 大復興運動의 時代的 背景

  韓末 大復興運動을 이해하기 위하여 우리는 韓末의 상황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聖靈運動이라는 것이 대체로 인간의 渴求에 대한 하나님의 應答으로 이루어지는 만큼22) 왜 간구하였는지를 살피는 것은 聖靈 하나님께서 役事하시는 이유로 생각될 수 있기에 復興運動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기둥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1.정치적 배경

  보통 韓末의 어려운 상황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연구자들은 단순히 1905년 乙巳保護條約으로 인한 백성들의 失望感, 挫折, 愛國心을 주요한 復興運動의 動機로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필자가 생각하기에는 이러한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왜 어려운 지경에 이르기까지 되었을까가 먼저 이해되어진 뒤에 한말의 기독교 대부흥운동이 설명되어지는 것이 穩當하다 여겨지기에 한말의 政治的 상황을 알아보고자 한다.

  朝鮮王朝의 어려움이 시작된 까닭을 알아보는 데에는 여러가지 學說이 있을 수 있으나 필자는 勢道政治 기간을 조선의 멸망원인이 싹튼 遠因으로 이해하고자 한다. 물론 그 위로 올려잡을수도 있겠으나 필자가 생각하기에는 그러하다. 그 이유는 그전의 朋黨政治가 勢道政治시기에 들어와서는 외척이 정치에 간섭함으로 말미암아 견제세력이 없어지게 되었다23).  이로 말미암아 정치적으로는 여러가지 民弊들이 나타날 뿐 아니라 여기에 격분한 백성들이 民亂을 자주 일으켰기에24) 국가기강이 혼란하여질 수 밖에 없었다. 또한 學文에 있어서는 영정조 때의 학문의 꽃을 말살시킨 결과를 가져와25) 발전이 정체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開港의 시기에 이르러서는 興善大阮君의 時代錯誤的 鎖國政策26)으로 말미암아 외국과의 交涉은 물론 외국의 學文을 연구하는 것조차 賣國視되어 국력을 기를 수 없었다27). 이러한 상황에서 갑자기 開港을 하다보니 우리의 資源들이 해외로 나가는 것은 물론 백성들이 외국 상인 특히 日本商人으로 말미암아 많은 고통을 당하게 되어28)여러가지 문제가 발생하였다. 이러한 원인들이 겹쳐 東學農民戰爭29)이 일어났으나 이는 日本軍에 의하여 失敗하였고 淸日戰爭을 우리나라에서 벌어지게 하는 결과를 가져와 우리의 많은 資源들이 훼손되었다. 여기에 우리를 침략하고자 하였던 日本은 러·일전쟁을 일으켜 승리하였고 그 와중에서 1905년 乙巳保護條約으로 외교권이 일본에게 빼앗김으로 말미암아 실제적으로 1905년 이후는 우리의 國權을 빼앗긴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이 되고 만 것이었다.


2.종교적 배경

  우리가 대부흥운동의 宗敎的 배경을 다루는 데 있어서 중점을 두어야 할 것은 他 宗敎의 문제점을 基督敎가 어떻게 解決하였는가를 파악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본장에서는 儒敎, 佛敎, Shamanism, 東學, 天主敎30)의 문제점과 大復興運動에의 貢獻을 중심으로 살피기로 한다.

  첫째로 儒敎를 살펴보면 한말 당시의 유교는 朱子學을 根幹으로 하고 있었다. 이 주자학 그 자체가 지나친 논리적 整合性의 추구가 있었다31). 이것이 조선에 들어와서는 支配層의 ideology로 변질되었으며 유교의 성질 자체가 現世中心의 현실주의로 인한 선비들의 出世指向, 利己的 家族中心主義로 인한 개인의 創意性 박탈, 체면과 형식의 중시, 지나친 孝의 강조로 인한 보수적 權威意識 등으로 말미암아 많은 문제점을 일으켰다32). 하지만 유교는 基督敎의 敎理와 聖經耽讀, 깊은 信仰心과 服從, 교회의 조직참여 등의 형성에 큰 기여를 하였다33).

  佛敎는 朝鮮時代 以前에는 護國佛敎라 하여 官과의 관계가 깊었고 이로 말미암아 상당히 발전하였다. 하지만 불교의 弊端을 체험한 麗末鮮初의 性理學者들의 斥佛意識에 의하여 탄압받는 지경에 이르렀다. 잠시 普雨 등의 집권과 壬辰倭亂에서의 僧兵長들의 활약으로 인하여 敎勢가 올라가는 듯 하였으나 斥佛意識은 계속되었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불교는 근근히 命脈을 이어가는데 이는 조선시대의 근본이념인 儒敎가 政治的 이론이면서 道德이었지 宗敎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정부에 대항하지 않으면서 존재를 보존한다는 消極性이 존속을 가져왔던 것이라고 보여진다34). 어쨌든 불교에 대한 탄압은 계속되어 불교가 婦女子의 종교로 轉落하는 지경에 이르렀고 이들 역시 불교존속에 힘을 다하였다. 이러한 理由들로 말미암아 佛敎의 命脈은 근근히 이어져 왔던 것이다. 이러한 불교의 他界主義的 신앙은 기독교가 來世를 바라보는 신앙을 확립하는 데 기여하였다. 하지만 現世의 重要性을 잊게 만들어 진정한 교회발전에 障碍를 가져오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漢文聖經에 불교의 用語가 많이 사용됨으로 말미암아 기독교 전파에 큰 역할을 감당하였고 불교의 善의 추구와 진리탐구, 성령의 役事懇求 등으로 말미암아 역시 기독교 전파와 부흥운동에 큰 역할을 하였다고 여겨진다35).

  Shamanism은 우리 민족과 같이 성장한 民俗宗敎로 조직된 종교는 아니었지만 그 사상이 超自然的 存在에 의한 救援과 神靈의 능력이 인간보다 강하다는 古代人의 認識으로부터 시작한 것으로 自然崇拜思想과 소위 神과의 중개인인 Shaman(무당)을 봄으로써 알 수 있다. 韓國人들은 초자연적 존재이며 신비한 ‘하느님’을 主神으로 믿고 있었다. 그러다가 基督敎가 傳來되었는데 宣敎師들이 믿던 ‘하나님’이 Shamanism의 主神인 ‘하느님’도 다스리시는 것을 인식함으로 말미암아 基督敎를 믿게 되었고 이로 말미암아 敎會復興과 성령님의 능력을 의존하는 신앙확립에 공헌하였다. 그러나 呪術的 起伏信仰, 倫理的 要所缺乏 등으로 말미암아 복음이해와 교회발전에 악형향을 미친 것도 사실이다36).

  東學은 최제우가 西學(天主敎)에 반대하여 세운 종교로 여러가지 形態로 天主敎와는 反目을 거듭하여 왔다37). 그렇지만 이들은 東學農民戰爭 제 2차 蜂起때부터 우리의 최대의 敵이 日帝임을 간파하고 나서는 일제타도를 외치게 되었고38) 전봉준 자신이 심문받는 과정에서 다른 외국인을 쫓아낼 意思는 없었다고 밝히고 있다39). 물론 기독교의 세력이 강하게 퍼지고 있던 서북지방에서의 東學徒들의 기독교에 대한 迫害가 없지 않았고 천주교의 교폐문제40)에 대한 동학도들의 반발로 천주교가 수난당하기는 하였으나41) 東學徒들이 미국인 선교사42)에게 도움을 받은 일이 있고 선교사들이 동학도들에게 ‘自由의 觀念’을 가르침으로 말미암아 東學敎徒들이 基督敎 믿음의 必要性을 認識하였다. 그리고 인간의 평등성을 주장하는 동학과 기독교의 교리가 비슷함으로 말미암아 많은 東學敎徒들이 基督敎에 入敎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天主敎는 朝鮮 後期 實學者들에 의하여 學問的으로 소개된 뒤 그것이 信仰으로 변하여 지속되었다. 초기의 信徒들은 여러 敎理書 등을 갖고 들어와 宣敎하였으나 祖上祭禮問題43)와 西洋船舶請願問題44)로 말미암아 환난을 맞았다. 그렇지만 平等思想의 主唱 등으로 中人層과 婦女子에게 쉽게 뿌리내려졌고 여기서 생겨난 信徒들이 基督敎 福音의 理解와 宣敎活動의 준비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45). 하지만 지나친 기독교와의 宣敎活動의 경쟁은 양자의 反目을 불러오게 되고 여기에 洋大人 意識을 지닌 天主敎人들이 加勢함으로 말미암아 두 宗敎간에는 反目이 계속되었던 것이다46).


3.지역적 배경 - 평안도 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

  大復興運動의 지역적 背景을 살피려면 平安道 지역 사람들이 왜 基督敎에 入門하였는가를 살펴야 한다47). 그러니까 聖靈 하나님께서 어떻게 基督敎를 믿도록 平安道 地方에 背景을 조성하셨는지를 알아보아야 한다. 이는 한말 기독교 대부흥운동이 가장 강세를 보였던 지역이 평안도이기 때문이다.

  筆者의 所見은 조선시대 이래의 平安道 지역의 差別待遇로부터 원인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太祖 李成桂가 북방에서 지내면서 여진족의 信義가 부족함을 알았고 이로 말미암아 북부지역 사람들을 벼슬길에 오르지 못하게 하기에 이른다. 이로 말미암아 조선 전시대에 걸친 평안도 지역민의 ‘푸대접’이 이루어진다48). 예를 들어 科擧에는 많이 합격한 데 반하여 벼슬길에 오른 자는 極少數였다고 한다49). 이로 말미암아 兩班勢力의 相對的 不在現狀이 일어나 타지역에 비하여 두터운 ‘자립적 중산층’이 형성되기에 이른다50). 이들은 自營農이나 商人이었으며 이들 중 상당수가 近代的 商工業者로 전환되었다. 그리고 평안도 지방의 풍부한 地下資源의 개발로 말미암아 이 지역 經濟를 풍요롭게 만들었다. 이러한 배경으로 말미암아 近代的 市民意識이 상대적으로 발달하였고 이는 기독교가 확산될 수 있는 주요한 기반이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평안도 지역인들은 中國과의 地理的 要件 등으로 인하여 新文物을 많이 받아들였고 이로 말미암아 基督敎에 접하게 되었다. 여기서 기독교가 平等思想을 가지고 있고 강대한 서양세력의 精神的 支柱가 된다는 것을 알고 이로 말미암아 改宗하는 자들이 있었다. 게다가 북부지역 사람들은 漢文까지 배움으로 말미암아 文盲律이 낮았고 經濟的 條件으로 보아도 남부지역 사람들보다 사정이 좋아 봉사자들이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51). 또한 선교사가 들어가지 않은 지역에서는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온 家族이 교인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52). 그리고 이러한 경우가 擴大되어 마을 사람들의 集團的인 改宗도 있었다53). 물론 가족집단의 集團的 改宗이 평안도 지방에서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평안도 지역에서의 개종자는 타 지방에 비하여 많았다고 보여진다. 그러므로 이러한 요인들로 말미암아 평안도의 기독교는 성장할 수 있었고 이러한 배경하에서 한말 기독교 대부흥운동이 평안도를 중심으로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이었다.

 


4. 기독교적 배경 - 한국교회부흥의 까닭 -

  우리가 復興運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 때문에 한국 교회가 성장하였는지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렇기에 한국에서의 宣敎가 성공한 요인들을 정리하면 부흥운동의 기독교적 배경이 이해될 수 있으리라 믿는다.

  韓國敎會 成長의 첫째 요인은 聖經에의 애착이다. 한국기독교는 다른 지역에서의 선교와 달리 받아들이는 측의 積極性과 主體性이 엿보인다. 그것은 聖經의 飜譯科程에서부터 시작된다. 최초의 한글성경은 Ross Version으로 순한글로 쓰여졌다54). 이는 널리 보급되었으며 많은 개종자를 가져왔다. 이로 말미암아 ‘성경기독교’55)의 전통이 수립된다. 외국선교사들의 보고에 의하면 한국인들의 성경에 대한 熱情이 상당히 강하였다 한다56). 이러한 성경에의 열정을 선교개시 6년만에 작성된 선교보고서는 이렇게 전하고 있다.

  한문성경 외에는 현재 일부의 <성경>이 이용될 수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가능한 한 빨리 <성경>을 번역해 달아는 한국인들의 간절한 요구(crying need)가 있다57).

 


이러한 성경에의 열정을 도왔던 공로자로 勸書를 들 수 있다58). 이들은 聖經을 판매하는 직분을 감당하였는데 단순히 성경만 판 것이 아니라 福音을 전하는 데에도 열성이었다. 그리고 宣敎師와 일반 백성들 사이의 緩衝役割을 감당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한국 기독교의 특징인 성경기독교59) 확립에 기여하였다는 공로를 가지며 福音傳播에의 공헌으로 인하여 한국 기독교 발전에 큰 역할을 감당하였던 것이었다. 그리고 백성들이 이때 얻은 성경을 공부하고자 모인 것이 査經會이다60). 이는 농한기에 집중적으로 열렸는데 사경회에서는 성경말씀을 배울 뿐 아니라 일반지식도 배우면서 傳道, 부흥집회도 같이 이루어졌다. 흔히들 이 사경회에서의 부흥집회는 來世論을 강조하여 기독교의 民族宗敎化에 저해가 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는 학자들이 있다61). 성경의 啓示錄은 내세론을 강조한 부분으로 유명한데 이를 그냥 끝부분만 읽어보면 피안적인 내용이기는 하다. 하지만 계시록 전체를 읽었을 때 그 내용은 세상에서 ‘선한 싸움’을 싸운 뒤의 결과가 영광스런 천국이라는 내용이다. 그리고 실제로 사경회에서는 現實에서 잘 살아야 영원한 즐거운 내세가 있다고 가르쳤다. 참고로 1907년에 발간된 主日學校 敎本에서는 일본과 애굽을 동렬에 놓고 설명함으로써62) 간접적으로 獨立意識을 고취시켰다63). 그리고 뒤에서도 언급하겠지만 105인 사건과 3·1운동에의 많은 기독교인의 참여64)는 査經會의 역할을 암시해 준다. 곧 聖經工夫를 통하여 信仰의 基礎를 심어주면서 民族意識을 심어준 것이었다. 결국 韓國敎會의 부흥의 중요한 요인은 聖經에 대한 熱情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둘째로 우리는 宣敎師의 공로를 무시할 수 없다. 한국인들이 中國에서 선교사들에게 복음을 받았다는 사실을 제쳐두고라도 우리 나라에 온 선교사들이 우리나라의 福音化와 開化發展을 위하여 공헌하였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기 때문이다65). 여기서 잠시 우리는 선교사들의 派送 背景과 神學을 살필 필요가 있다. 19세기 말 미국에서는 제 1차·2차 대각성운동66)이 일어나 國內宣敎와 國外 宣敎熱이 발생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각 선교단체들이 해외선교에 나서는데 처음에는 中國·日本에 치우쳐 있었으나 韓國에도 선교사가 파송되기에 이르렀다67). 이들의 신학은 종래 철저한 淸敎徒的 信仰이라 규정되어져 왔다68). 그러나 필자는 여기에 대하여 다르게 평가하고자 한다. 한국의 초기 선교사들이 청교도적 내지 前千年說69)의 배경을 가졌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들은 그러한 神學思想을 극복하고 있다. 그 예로 한국에서 病院과 學校를 세워 장기적 선교의 틀을 만들었다는 점70)과 1905년 한국복음주의선교회연합공의회를 조직할 때 하나의 교회를 지향하기 위하여 敎理上의 차이를 나타내는 명칭과 상관없는 교회를 만들 것을 決議한 것으로 보아71)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보수적이라는 데에는 異意를 달기 어렵다. 성경적 진리를 믿으며 경험적인 성격을 지닐 수 있었던 것, 이것이 선교사들의 신학이라 할 수 있으며72) 여기에 세계 각지의 부흥운동이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부흥운동이 발생한 것이라고 보아진다.

  선교사들이 활동한 예를 들어보면 알렌 선교사의 경우 醫療事業을 통하여 복음을 전하였고73)언더우드 선교사는 1884년 부활절에 입국하여 여러 敎育機關을 세우고 서울 최초의 교회라 할만한 새문안교회를 세우는 등의 활동을 지속하였으며74) 이외의 無名의 선교사들도 우리의 복음이해와 개화를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한편 선교사들은 經驗不足과 선교상의 어려움으로 말미암아 여타 선교지의 경험이 필요하였는데 여기서 소위 Nevius방법이라 하여 自傳, 自治, 自給의 3원리를 익히게 되었다75). 이로 말미암아 한국교회는 큰 成長을 이루었다. 하지만 自主的인 敎會로 성장하지는 못하였다는 의견이 있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선교사들도 비난을 받아야 하지만 당시 敎人들의 入敎動機가 문제가 있었던 것이었다. 이러한 때에 자주적인 교회가 가지고 있어야 할 治理權까지 넘겨준다면 한국교회가 어떻게 될 것인가, 교회의 정치집단화가 우려될 수밖에 없었다76). 그렇기에 선교사들이 잘못하였다는 식의 논리는 제고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國際政勢가 일본의 조선침략을 묵인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러·일전쟁, 을사보호조약 등으로 말미암아 일부 선교사들은 民族運動을 주도하던 교인들을 정비하는 등의 조치를 취하여77)민족운동에 제동을 걸기에 이른다. 그리고 부흥회의 필요함을 느끼게 된다78). 이러한 背景들이 선교사 개인들의 문제와 어울려79) 부흥집회를 열게 되었던 것이었다. 여기에 聖靈 하나님의 役事가 임하였기에 한말의 기독교 대부흥운동이 일어나게 된 것이었다.

 


Ⅲ.韓末 基督敎 大復興運動의 展開와 結果

  韓末 基督敎 大復興運動은 보통 宣敎師들에 의하여 이루어졌다고 한다80).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기독교 대부흥운동의 중요한 骨子라 할 수 있는 평양사경회의 형태는 저녁에 있은 선교사들의 부흥회와 한국인 인도자 吉善宙장로의 부흥회의 양상이 약간 다르게 진행된다81). 그렇다고 구분지어 설명하기에도 문제점이 없지 않다. 물론 길선주목사의 부흥회와 선교사들의 부흥회는 같은 시기에 지속된다. 그렇기에 본장에서는 구한말 기독교 대부흥운동의 전개과정을 살피면서 특별히 1907년 1월82) 평양 章臺峴敎會에서의 부흥운동의 진행상황을 중심으로 하여 기독교 대부흥운동의 진행상황을 알아보기로 한다.

 


1.부흥운동의 발단

  앞장에서도 설명하였지만 당시 우리의 주변을 둘러싼 國際政勢는 우리가 일본의 植民地化하는 것을 黙認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1905년에는 乙巳條約이 체결됨으로 말미암아 우리 민족은 더욱 鬱憤에 싸여 있었던 시기였고 기독교인들도 抗日運動에 뛰어들게 된다83). 이를 본 선교사들은 이러한 상황이 계속된다면 한국교회가 滅絶될 것이라고 예상하였다. 그리하여 獨立運動에 制動을 거는 정책을 펴게 된다. 이를 단적으로 표현한 말은 Gale의 다음 표현이 적절할 것이다.

“위조 애국의 미친 광란이 몰아쳐, 자결 신체절단 허황된 맹세, 게릴라 테러적 의거 냉혈적인 저항이 교회를 침식한다”84)

이러한 표현과 함께 그 이전 1901년의 [교회와 정부 사이에 교제할 몇 가지 조건]85)을 비롯한 조치들이 선교사들이 민족운동을 저지한 대표적 예일 것이다.

  이러한 배경이 없지는 않지만 한말 기독교 대부흥운동의 始作은 1903년 선교사 R.A.Hardie에 의하여 시작되어진다. 사실 구한말의 기독교 대부흥운동이 어느 날 갑자기 백성들이 鬱憤을 머금고 교회로 몰려들어 기도함으로 말미암아 일어났다고만 하는 해석은 무리이기 때문이다. 물론 백성들의 슬픔이 重要한 要因이 될 수 있으나 필자는 Hardie 선교사를 비롯한 선교사들의 부흥운동이라는 토양아래 백성들의 울분이 겹쳐지고 여기에 하나님의 우리 한국을 향한 攝理가 있어 부흥운동이 가능하였다고 믿기 때문이다.

  선교사 Hardie는 열심히 傳道하였으나 여러가지의 자신과 생활환경이 만든 악조건 등으로 말미암아 ‘양떼를 거두는 데’ 실패하고 失意에 빠져 있었다. 그의 증언을 들어보자.

“나는 3년동안 강원도에 교회가 처음 세워진 지경터 지역에서 애써 일하였으나 나는 거기서 사업에 실패하였다. 이 실패감은 나에게 말할 수 없는 타격을 주었고, 나는 일을 더 할 수 없으리 만큼 기진맥진하였다.”86)

 


  그 뒤 그는 1903년 監理敎宣敎部 선교사들과 기도하는 도중 회개하여 솔직하게 잘못을 고백하였다. 이는 그에게는 “고통스럽고 모욕적인 경험”87)이었다. 이러한 솔직한 고백에 성령 하나님이 役事하여88) 한국교인들이 感化되고 은혜를 체험하였던 것이다. 여기서 일어난 불길은 평양에 영향을 주었다. 여기에 영국 웨일즈 지방과 인도 카시아 지방의 부흥운동의 소식89)을 뉴욕의 Johnson 목사로부터 들은 교인들은 그들도 은혜를 받고자 갈구하게 되었다90). 여기에 평양 장대현교회의 길선주 장로가 인도하는 새벽기도회가 연일 계속되었다. 이는 길선주장로가 시작한 것으로91) 사람들의 國家的 危機로 말미암은 福音活動에의 소홀에 대한 우려와 교회 자체에서 독립된 朝鮮敎會를 세우고자 하는 노력이 있었고 이로 말미암아 聖靈充滿을 받아야 한다고 느꼈기에 기도의 불길이 쉽게 타오를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렇기에 새벽기도회는 부흥운동의 原因이 될 수 있었고 부흥운동 이후에도 한국교회의 전통이 되어 내려왔던 것이었다92).

  한편 1904년 서울에서 Hardie 선교사가 인도하는 부흥집회가 崔炳憲 목사가 담임으로 있는 정동교회에서 열렸다93). 이에 대하여 당시의 The Korea Methodist 지에서는 다음과 같이 1904년 서울부흥회의 상황을 보도하고 있다.

  정동교회에서 하디가 주관하던 부흥회는 19일간의 집회를 끝내고 10월 9일에 끝났다. 이 부흥회는 본래 정동에 있는 두 남·여학교 학생들을 위한 것이었는데 교인들에게도 번져 마침내 서울에 있는 감리교인들이 모두 모여들게 되었다. 성령의 움직임으로 많은 이들이 공중 앞에서 자기 죄를 고백하고 진정한 회개를 하였다. 지적인 회심밖에 몰랐던 점잖은 교인들이 죄와 그리스도의 용서를 알게 되었다. 그들은 한국인 선생과 함께 새로운 믿음이 시작되었다94).

 


  그런데 이 서울지역의 부흥집회는 민족구국운동에 앞장섰던 최병헌 목사, 全德基 목사 등이 주축이 되었다는 데에서 큰 의의를 지닌다. 그리고 평양 부흥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 또하나의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95).

  그리고 1906년 남쪽지방인 木浦에서도 부흥이 일어나서 남감리교 소속인 Jerdine 목사의 사경회인도에서 참회와 기쁨이 흘러나왔던 것이었다. 그 광경을 목격한 J.F.Preston 선교사는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져다인 목사가 성경말씀을 읽고 공의와 절제와 심판, 그리고 죄의 무서움, 그 뉘우침을 강설하자 죽음과 같은 정숙이 여럿위에 내리덮었다. 그것은 마치 하나님의 말씀이 메스처럼 사람의 마음을 속 깊이 갈라 쪼개어서 죄를 통회, 자복하였으며, 힘센 어른이 어린애처럼 방곡하는 참회의 물결이 세차게 흘렀다. 이제 그들의 얼굴은 성령으로 빛났고 교회는 승리의 찬송 드높이 찬양과 영광의 종소리를 드높였다. 이 모임의 결과는 전라도 지방에 널리 그리고 깊숙이 파고드는 영향으로 작용할 것이다”96)

 


그 뒤 1907년 1월의 冬期査經會가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열렸다. 이러한 부흥회에 대해서는 대한매일신보의 다음 보도가 있다.

음력 11월 20일경에 평양 야소 교회당에서 성경 공부를 시작졔 황평 량도의 일반 교인들이 구름치 모혓 그 시에 착 사업에 경영이 만하 회당 교회는 익익 왕셩다 더라97)

 


그런데 저녁집회는 특별한 傳道 설교에 집중되었다98). 여기에서 성령 하나님의 役事가 일어났고 이럼으로 말미암아 구한말 기독교 대부흥운동이 평양 장대현교회의 사경회에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2.1907년 평양사경회의 전개과정

  復興會는 부르짖음의 시간이며 여기에 대한 聖靈 하나님의 應答의 時間이다. 그렇기에 성령 하나님의 역사없이 眞正한 復興會가 있을 수 없다99). 일은 사람이 계획하더라도 주관자는 하나님이신 것이다. 그렇기에 부흥회를 선교사가 操作했다느니 韓國人의 宗敎的 心性으로 말미암아 일어났다는 기존의 시각은 문제가 있다100).

  1906년 평양 장대현교회 冬期査經會가 1907년 1월에 시작되었다. 이 동기사경회는 길선주 장로101)가 인도하겠다고 나서서 이루어진 것인데 그는 서울을 방문하고 평양에 온 Johnson 선교사의 주일예배에서의 설교를 듣고 부흥회를 열 것을 결심하였다. 이는 聖靈의 역사가 태동하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담임목사였던 Graham Lee 선교사와 상의하여 동기사경회를 개최하기로 합의하였다102). 그리고 사경회가 1907년 1월 6일(양력)에 시작되었다. 이때 길선주 장로가 말씀을 전하자 사람들이 충격에 떨며 은혜를 받았는데 참석자인 장대현교회의 정익로 장로는 당시의 광경을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그날 밤 길선주목사의 얼굴은 위엄과 능력이 가득한 얼굴이었고 순결과 성결로 불붙은 얼굴이었다. 그는 길목사가 아니었고 바로 예수님이었다. 그는 눈이 소경이어서 나를 보지 못하였을 터이나 나는 그의 앞에서 도피할 수 없었다. 하나님이 나를 불러 놓은 것으로 생각되었다. 전에 경험하지 못한 죄에 대한 굉장한 두려움이 나를 엄습하였다. 어떻게 하면 이 죄를 떨어버릴 수 있고 도피할 수 있을까 나는 몹시 번민하였다. 어떤 사람은 마음이 너무 괴로워 예배당 밖으로 뛰어나갔다’103)

 


  이러한 집회는 계속되었고 그 후 성령을 영접하라, 이상한 귀빈과 괴이한 주인 등의 설교를 통하여 은혜가 임하였다. 1월 12일 Blair 선교사가 고란도전서 12:27의 말씀104)을 가지고 설교하여 공동체 의식을 강조하였다. 1월 13일 집회에도 많은 인원이 참석하였으나 그때는 조금은 무미한듯 하였고105) 1월 14일 이길함 선교사의 집회에서 성령의 은혜가 임하여 회개의 역사가 일어났다106). 告白의 정도를 어떤 여선교사는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그것은 마치 감옥의 지붕을 열어 제친 것이나 다름없다.’107)

 


  이를 보더라도 그날 悔改의 물결이 격렬했음을 알 수 있다. 1월 15일에는 점심에 선교사들이 모여서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그리고 저녁에 Blair 선교사를 미워했다는 고백이 나오면서 恩惠가 감돌고 이길함 선교사의 ‘나의 아버지여!’라는 고백이 있자마자 은혜가 임하였는데 경험자는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다.

  ‘.....비상한 힘이 밖으로부터 쏟아져 들어와 온 회중을 사로잡은 듯 하였다.....각 사람의 마음에는 자기의 죄가 자기생활에 정죄판결을 선언하여 주는 느낌을 가지게 하였다..... 저녁 여덟시부터 이튿날 다섯시까지 이러한 상태는 계속되었다..... ’108)

 


  이로 말미암아 聖靈의 役事가 임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로써 동기사경회는 마치고 일단 사람들은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돌아간 사람들은 고백만이 아닌 손해를 끼친 사람에 대한 損害賠償 등을 신자 뿐 아니라 불신자들에게까지 하여 성안에 소문이 자자했다 한다109)

  사실 처음에 선교사들은 感情에 치우친 회개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을 가졌지만 지켜본 이들은 진정으로 죄를 통회 자복하는 것임을 알았는데 영국의 세실경은 웨슬레의 부흥운동에 내린 성령의 역사와 유사하다 하였고110) 한국과 일본교회의 감리교 감독이었던 해리스는 정신이상 없이 바른 정신상태로 고백이 일어나 많은 사람이 새로 났다고 증언하고 있는 등111) 1907년 대부흥운동이 진정한 부흥운동이었음을 여러 사람들이 전하고 있다.

 


3.평양사경회 이후의 부흥운동

  이러한 장대현교회의 사경회의 소식을 전해들은 聖徒들은 부흥집회의 필요성을 깊이 인식하게 되는데112) 이로 말미암아 평양 査經會에서 성령의 종 역할을 감당했던 자들이 전국 각지로 흩어졌다. 길선주 장로는 서울로 떠나게 되는데 이때가 2월 16일이었다. 서울의 중앙교회(지금의 승동교회)에서 집회가 열렸는데 사회자가 있는지 없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깊었고 부흥의 불길은 계속 타올랐다고 한다. C.A.Clark 선교사는 서울 집회에 대한 다음과 같은 보고를 하고 있다.

  음력 명절을 준비하느라고 제각기 분주함에도 불구하고 길장로가 오기 전 2주일 동안 시내 각 교회는 매일 저녁 기도회를 열었다. 2월 16일 길장로가 서울에 도착하였다. 다음날 오후 모든 교인들이 연합으로 모인 집회에서 설교하는 밤에 중앙교회에서 설교했다. 첫날임에도 불구하고 신비스러운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그 다음날에 성령이 능력으로 임하셨다. 그로부터 성령의 역사는 날로 발전되었다. 둘째 날 이후부터는, 지도자가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을만큼, 사회자로서는 간신히 기회를 얻어 한마디씩 말을 했을 뿐 회중은 죄에 대한 혐오가 폭발되고 미친듯이 죄를 회개하여 무거운 짐을 벗어 버리려고 몸부림쳤다. 그들의 심령은 불타 오르기 시작했다113).

 


이외에도 서울의 여러 교회에서도 부흥의 불길은 다시 타올랐다. 그는 또한 의주로 가 11월 27일부터 집회를 인도하였다. 여기에도 聖靈의 役事가 임하였고 특기할 것은 최 재형이라는 열세살난 소학생(지금의 국민학생)이 죄를 痛悔하고 주님께 몸 바치기로 한 사실이 있었다. 훗날 그는 목사가 되어 일생을 주님께 바쳤다114). 이외에도 Graham Lee 선교사는 선천, 소알론은 광주로, 헌트는 대구로 가서 성령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게 하는데 도움을 주었다115).

  한편 학생들에게도 부흥의 물결이 몰아쳐 숭덕학교의 김찬성의 인도로 300여 학생들이 죄를 뉘우치는 한편 채정민 목사의 인도로 監理敎界 학생들에게도 부흥의 열기가 타올라 이들에 의한 전도운동이 전개되었다116). 또한 숭실대학에도 부흥의 물결이 타올랐다. 이러한 학생들 사이에 일어난 부흥운동의 시작과 발전에 대하여 숭실대학의 A.L.Becker는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학교 개학은 2월이었는데 그 직전에 집회 중이던 장로교 사경회에 성신 강림이 있었다. 우리는 이같은 은혜가 학교에도 내리기를 원하였다..... 학교가 개학되고 학생들이 등교한 다음 우리들은 평상시의 수업시간표를 일시 중지하고 오전, 오후, 저녁을 통하여 성경공부 및 기도회의 특별시간표를 마련하여 실행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였다. 우리들은 그저 학생들의 감정을 흥분시키려 하지 않았고 또 너무 이래라 저래라 하지도 않았다..... 우리는 다만 예수의 십자가에 마음 모으기만 노력하였다. 그러나 성령의 역사는 크게 나타나서 회의적인 태도를 가진 학생까지..... 죄를 회개하고 애통하였다. 한때 내가 세어보니 30명 이상의 학생들이 여러시간 서있으면서 죄의 무거운 짐을 벗어 버리는 기회를 얻으려 기다리는 것을 보았다..... 학생들의 약 10분의 9가 이때에 깊은 감화를 얻어 중생의 은혜를 받았다. 많은 학생들이 십자가의 도리를 전하는 열정적 전도인이 되어서 이 부흥의 불길은 온 성내와 인근 촌락에 전파되었을 뿐 아니라 멀리 제물포와 공주에까지 전파되었다117).

 


  그런데 이는 長老敎와 監理敎의 연합집회라는 데에서 의미를 지닌다. 사실 감리교 학생들은 처음에는 장로교 학생들에 비하여 은혜를 받지 못하였다가 감리교 교역자의 회개로 혼란이 진정된 뒤 은혜가 내렸다고 전해진다118). 또한 신학교에도 부흥의 물결이 몰아쳤는데 이는 선교사들이 神學生들도 성령충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3개월의 수업기간 매일저녁 부흥집회를 갖기로 하고 실행하였는데 이때에도 성령이 임하여 회개가 이루어졌다119).

  그리고 대부흥운동은 中國敎會에까지도 영향을 주었다. 당시 중국은 1900년의 의화단 사건으로 기독교가 위축되어 있었으나 한국의 대부흥운동을 체험한 Gorforth 선교사와 張賜禎, 胡万成, 劉金岳이 중국에서 부흥운동을 일으켜 교회 갱신과 성장에 기여하였다. 이는 1910년까지 계속되어 蒙古와 北京地方에까지 확산되었다. 이는 1880년대 중국을 통하여 기독교를 받아들였던 한국이 30년만에 성숙된 교회로서 신앙운동을 역으로 되돌려 보낸 획기적인 사건이었다120).

  지금까지 1907년을 전후한 대부흥운동의 진행 상황을 알아보았다. 그러면 우리는 이 부흥운동의 영향을 살피기에 앞서 이 부흥운동이 어떠한 성격을 지니는가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

  첫째로 이는 靈的이며 道德的인 개혁운동이었다. 이는 선교사들과 교인들이 같이 기도하고 悔改하였으며 또한 실생활의 회개가 일어났기에 그러하한 것이다. 여기에 성령 하나님의 역사가 있었기에 더욱 뜨거운 聖靈運動이 될 수 있었다고 사료되어지는 것이다.

  둘째로 敎會 聯合運動의 양상을 띠었다. 이는 선교사들과 한국인 신자들 사이의 和解와 국내에 있던 각 교파들 간의 연합움직임이었다. 사실 부흥운동 이전에는 선교사들과 한국인 신자들 사이에 서로간의 이해가 부족하였다. 그것은 文化의 차이와 아울러 특히 ‘교회와 정치’ 관계에 있어서 더욱 그러하였다. 그렇지만 부흥운동으로 말미암아 信仰에 있어서의 東西洋의 벽이 허물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각지에서의 부흥운동은 聯合集會의 성격이 짙었다. 그 후의 여러 집회도 비록 敎派가 다르다 할지라도 연합으로 모였고 이로 말미암아 성령 안에서 하나되는 은사를 지금까지 지키고 있다121).

 


Ⅳ.韓末 基督敎 大復興運動의 結果와 影響

  우리는 지금까지 1907년을 전후한 基督敎 大復興運動의 원인과 전개 과정에 대하여 알아보았다. 본장에서는 이 대부흥운동이 한국 교회에 끼친 영향을 敎會史的 입장 그리고 民族史的 입장에서 고찰하고자 한다. 지금까지의 연구성과를 살펴볼 때 교회 자체에 미친 영향에 대하여는 학자마다의 의견차이가 보이지 않는다. 그렇지만 大復興運動과 民族運動의 관계는 전자가 후자에의 참여를 방해하였다는 의견122)과 그렇지 않다는 의견123)이 대립되고 있다. 필자가 생각하기에는 전자의 말이 전혀 틀린 것은 아니지만 무언가를 간과하고 있다고 여겨졌다. 그리고 후자의 경우에는 사실의 證明 方法에 문제가 있다고 여겨졌다. 그래서 필자는 후자의 입장을 중심으로 하여 대부흥운동과 민족운동과의 관계를 다루되 이것이 각 민족운동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를 다른 사실의 증명 방법을 통하여 알아보고자 한다. 사실 각 사건별로 기독교인들이 관계되었기에 대부흥운동이 민족운동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고만 하는 서술만으로는 우리들의 논의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 본 장에서는 이미 연구되어졌던 교회에 대한 대부흥운동의 영향을 정리함과 아울러 대부흥운동과 민족운동의 관계를 각각의 민족운동의 參與者와 參與階層을 알아봄과 아울러 그들이 어떠한 思想을 갖고 민족운동에 참여하였는지를 살핌으로써 대부흥운동의 영향을 알아보기로 한다.

 

 

 

1.기독교의 한국정착

  기독사학자 서정민은 그의 논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한국교회 역사의 한 분기점으로서 1907년은 늘 관심의 대상이 되곤 한다. 이는 그만큼 한국교회사상에 있어 1907년에 이루어진 역사적 사실과 그 의의가 중대하며, 또한 1907년은 그 이전의 한국 교회사를 수렴함과 동시에 새로운 역사를 전개하는 해가 되기 때문이다.”124)

 


  이는 참으로 맞는 지적이다. 韓國敎會는 19세기말 복음을 여러 경로를 통하여 받은 이래 계속 선교활동을 하여 왔다. 그리고 한국인 나름대로의 신앙형태를 확립하여 왔다. 그 예를 들자면 초창기에는 상류계층을 전도하는 데 힘썼지만 東學農民戰爭 이후 초기의 백성들의 박해를 이겨내면서125) 백성들을 위한 종교로서의 면모를 보였다. 그리고 길선주에 의한 새벽기도회와 査經會는 초창기부터 계속 뿌리내려져왔다. 또한 1905년 을사보호조약 때는 救國祈禱會와 각종 의거들을 통하여 민족과 함께하는 교회로의 면모를 보여왔다126). 이러한 것이 구한말의 부흥운동을 통하여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앙적으로 변화되고 강화되었다127). 사경회가 계속되었을 뿐 아니라128) 1909년에는 백만인구령운동129)이 일어났다. 그리고 새벽기도회는 계속 이어져 한국교회의 傳統이 되어 있다130). 한국교회의 애국운동은 계속 이어져 105인사건 뿐 아니라 3·1운동을 통하여 증명되었을 뿐 아니라 神社參拜拒否로써 일제에 계속 저항함으로 말미암아 애국적인 교회로의 면목이 지속되었다. 물론 구한말의 부흥운동이 전적으로 계속된 한국교회의 발전에 공헌하였다는 것은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그러나 기독교가 한국에 뿌리를 내리고 신앙을 지키게 하는 근거를 마련하였다는 점131) 곧 한국교회의 信仰傳統을 확립하였다는 점에 있어서는 한국기독교사가 이어지고 전해지는 한 不滅의 記錄으로 남을 것이다.

 


2.교세의 변화

  흔히들 구한말의 대부흥운동을 통하여 敎勢가 늘었다고 하고 그 증거로서 교회 출석자의 增加를 드는 경우가 많다132). 물론 부흥회에 많은 사람들이 참석한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놀라운 성장이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렇지만 그 부흥회는 단순한 1907년의 행사로의 의의를 가지는 것만은 아니다. 우리는 여기서 구한말의 대부흥운동이 사경회의 일환이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신도수의 성장을 다룬 그래프를 보면 1900년에서 1910년 사이에는 급격한 신도수 성장이 나타난다133). 그렇다고 대부흥운동의 절정이라 할 수 있는 1907년 이후 갑자기 늘어나지는 않는다134). 그러므로 구한말의 기독교 부흥운동으로 말미암아 교회가 성장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1907년의 부흥운동이 사경회의 일환이었음을 이해한다면 사경회가 한국 교회 부흥의 原動力이라 짐작할 수 있다135). 그렇지만 1907년의 대부흥 이후 감리교는 신도가 잠시 줄어들기도 한다136). 그렇다고 하여 1907년의 대부흥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교회의 성장은 단순한 사람이 많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信仰心의 성장이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1907년의 대부흥을 기점으로 하여 강력한 회개가 일어났을 뿐 아니라 信仰의 動機가 이전에는 현세적인 안녕을 위하여 기독교에 입교한 경우가 많았는데 1907년을 전후하여 내세를 바라보며 현세를 열심히 사는 신앙 형태로 바뀜으로 말미암아 그것이 의의를 지닌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3.선교사들과 한국교인들간의 화해

  宣敎師들과 한국인 교인들은 그들의 文化의 차이로 말미암아 같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도 衝突을 가져온 적이 있다. 또한 이는 상호 이해의 벽이 되기도 하였다137). 또한 의례히 선교사들은 복음을 전하여 주었다는 명목 하에 고자세로 지내기도 하였다. 그리고 한국인들은 선교사들을 보조하는 역할을 주로 맡았다. 그러다 보니 일부 신도들과의 反目이 생겨날 수밖에 없었다. 특히 民族運動을 보는 선교사들의 시각이 1905년을 전후하여 바뀌면서 더욱 심화되었다.

  그러나 부흥운동을 통하여 선교사 자신들의 悔改가 이루어졌고138) 신도들도 선교사와 함께 죄인임을 자복하였다. 여기에 대부흥 운동때 전파된 고린도전서 12장의 말씀은 신도들에게 변화의 계기를 주는데 이는 교회 안의 부조화와 교회와의 문제를 다룬 것으로 결국 하나님과의 만남의 장소는 공동체인 교회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이 말씀을 전한 Blair 목사는 말씀으로 말미암아 당시의 교인들이 ‘나뉘어져 있을 때 당하는 그리스도의 몸된 아픔’을 체험하였다고 전하고 있다139). 이로 말미암아 선교사들과 교인들간의 반목이 약화되면서 공동체 의식의 형성이 이루어지게 되었고 이럼으로 말미암아 교회의 교단 조직으로의 발달이 이루어져 1907년에 장로교 독로회가 조직되는 등의 교회발전이 이루어진다140).  하지만 이럼에도 불구하고 단일 민족교회로의 꿈은 무산되었다141).

 


4.신앙목적의 전환

  한국에서 기독교가 급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기독교를 開化의 手段으로, 독립의 수단으로 이용하고자 하는 자들이 교회에 들어온 것이 중요한 이유중 하나가 된다고 할 수 있다142). 하지만 계속된 査經會와 새벽기도는 진정한 기독교가 무엇인가를 가르쳐주었다. 그리고 선교사들은 1900년 이후 격화되어가는 교인들의 민족운동에 대한 제동을 걸 필요를 느꼈다143). 그리하여 査經會에서는 죄의 회개와 윤리적 생활강조, 내세집착이 강조되었다. 결국 이는 기독교와 政治的 意識과의 관계가 멀어짐으로 말미암아 현세에 굴복하는 교회로 발달하였다는 것인데 여기에 대하여 필자는 반론을 제기하고자 한다. 필자는 査經會 중 내세를 다룬 계시록이 많이 다루어졌음을 앞에서 논한 바 있다. 그런데 앞에서도 논하였듯이 사경회에서는 단순히 來世가 있다는 것만 가르치지는 않았다. 계시록 자체가 의로운 苦難의 필요성을 강조한데다 사경회에서도 이것이 강조되어 現世의 중요성이 來世의 중요성과 함께 강조되었다. 그렇기에 온전한 내세추구로의 신앙 곧 自己中心的 신앙이 아닌  來世追求를 위주로 한 兩者의 造化의 신앙이 이루어진 것이다. 부언하면 단순히 천국만을 바라보는 삶만이 아닌 구원을 감사하며 살음으로 말미암아 현세를 바르게 사는 삶이 윤리적으로 확립됨과 아울러 여기에 日本에 대한 惡의 勢力으로의 인식이 결합되었기에 윤리적이고 애국적인 한국교회의 전통이 수립될 수 있었던 것이다144).

 


5.교회 지도부의 변화와 교파교회의 구형

  韓國敎會의 傳統 중 하나는 한국인 自身들이 복음을 들여왔다는 점이다. 이로 말미암아 초기 한국 교회는 평신도와 선교사가 주축이 되어왔다. 그러나 대부흥운동으로 말미암아 한국교회는  한국인 牧會者中心의 교회로 바뀌어 갔다. 이는 교회의 종교성 강화로 말미암아 聖職者의 중요성이 강조된데다 대부흥운동의 과정에서 평생을 성직에 몸담기를 희망하는 청년들이 많아졌고 여기에 각 교파들이 한국인 성직자 양성을 본격화하여 그 배출이 이루어졌기 때문이었다. 이로 말미암아 본격적 治理組織을 갖추게 되었다. 이러한 결과로 말미암아 각 교단의 神學受業者들이 배출되었고 이들은 각 교회에서 성직자로 봉사하면서 지도권을 인수받기 시작하고 이로 말미암아 民族敎會로의 발전이 이루어지게 되었다145). 그런데 공동체적인 신앙의 강조에도 불구하고 각 교파가 따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는 선교사들이 한국 교회가 단일교회로 발전할 경우 政治化의 노정으로 쉽게 흐를 것을 우려하였기 때문다146). 그래서 교파교회가 구현되었으나 각 교파간의 聯合運動은 계속되었다147).

 


6.비정치화의 문제

  흔히들 대부흥운동이 비정치화의 성향을 띠었다는 증거로 내세워지는 것이 末世論에 대한 강조이다. 그리고 이로 말미암아 민족운동에의 기독교인들의 참여가 약화되었다는 의견이 있다. 물론 來世가 있다는 것을 가르친 것은 사실이며 성경을 믿는다면 내세가 있다는 것은 부인될 수 없다. 그렇다고 내세만 바라보고 현세는 소홀이 해야 한다고 그들이 가르친 것은 아니다. 역사적으로도 그렇지 않을 뿐더러 만약에 그렇게 가르쳤다면 罪의 悔改와 이후의 倫理的 發展은 의미가 없어진다. 그러니까 대부흥운동에서는 현세의 중요함을 같이 가르쳤다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기독교인들은 내세와 현세의 중요성을 이해하고 윤리적 회개와 아울러 ‘악의 세력’인 일본 타도에 앞장서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非政治化라는 개념에 대하여 알아보면 이는 정치에 무관심해졌다는 말이다. 쉽게 풀어 설명하면, 어떤 사건을 통하여 비정치화되었다면 어떤 사건 이전에는 정치적 활동에 많은 關心을 가졌다가 어떤 사건 이후에 정치에 無關心하게 되었으면 그 사건을 통하여 비정치화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이를 대부흥운동에 적용시켜보면, 或者의 주장대로 대부흥운동이 비정치화의 결과를 가져왔다고 주장하려면 대부흥운동 이전에는 정치에 관심을 가졌다가 대부흥운동 이후에는 관심이 줄어들어야 한다. 흔히들 비민족화되었다는 證據로 내세워지는 것 중 하나로 대부흥운동의 주역인 길선주목사가 ‘모든 권세는 하나님이 정하신 바’라 하여 교회의 항일운동을 막았다고 그러는데148) 이것이 그가 항일운동을 막았다 할 수 있는 증거라 할 수 있을까. 필자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가 반대한 것은 急進的인 義兵運動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또다른 항일운동의 방법이라 할 수 있는 救國祈禱會를 인도한 기록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부흥운동과 민족운동의 관계를 생각할 필요가 있는데 물론 대부흥운동을 통하여 표면적으로는 일제에 대한 적대의식이 사라진다149). 그렇지만 일본인을 미워하였던 것이 죄라는 고백은 있어도150) 민족운동 자체에 대한 죄의식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151). 그리고 대부흥운동의 주역들이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기독교적 정신으로 민족운동에 참여하는 것이 실제로 나타난다. 또한 1907년 이후라는 연대의 의미를 알 필요가 있는데 이때의 표면적 민족운동이 어려웠던 것은 彼岸的이라서가 아니라 어려운 상황이었음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152). 일제의 탄압이 심화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필자는 구국기도회를 政治的 모임이라고 본다. 이것은 우리나라를 日帝 植民地가 되지 못하게 기도하는 政治的 性向을 띤 모임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이 形式的이었으면 의미가 없다. 하지만 이 구국기도회는 지속되었고 여기서 생겨난 애국심이 3·1운동에 기독교인들이 참여하게 된 원동력이 되었다고 여겨지며 이로 말미암아 애국적인 민족교회로 발전할 수 있었다고 보아진다. 그러므로 대부흥운동이 非政治化의 경향을 띰으로 말미암아 民族運動(독립운동)에 부정적 영향을 끼쳤다는 의견은 찬성하기 어렵다는 것이 필자의 의견이다.

 


7.1900년대의 한말 구국운동과의 관계

  본고에서의 韓末 救國運動은 義兵運動과 愛國啓蒙運動을 가리킨다. 이는 방법론적인 측면에서는 차이가 나지만 1900년대에 이루어졌으며 일제로부터의 實際的 獨立을 목적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발견된다.

  의병운동은 武力으로 외부세력인 일본과 그 배후세력을 몰아내고 우리의 독립을 쟁취하고자 하는 운동이었다153). 이는 독립운동의 일환이었다. 그런데 의병운동과 기독교의 관계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두 의견이 존재하고 있다. 첫째로 이만열은 구한말의 기독교인들이 의병운동에 積極的으로 參與하였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154)고 주장하고 있다. 둘째로 오윤태는 ‘군대를 편성하여 일본군과 싸우다가 포로가된 사람 가운데서 주모자로 취급되어 처형된 사람이 18명인데, 그 대부분이 크리스찬이다.’155)라 주장하였다. 필자는 본장에서 대부흥운동과 의병과의 관계를 다루고자 하는데 필자는 한말 대부흥 운동의 기독교와 의병운동과의 관계가 있었는지는 의심스럽다고 생각한다. 대부흥운동 자체가 무력이라는 극단적 방법보다는 기도라는 온건한 방법으로의 독립운동을 추구하였다고 필자는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에 대한 사료를 구해 보지 못한 까닭에 단정적으로 주장할 수는 없다. 하지만 필자가 생각하기에는 대부흥운동 그 자체의 성격과 당시의 시대적 상황으로 보아 부흥운동이 의병운동을 약화시켰다고 생각되어진다. 이를 구체적으로 논하여 보면 단순히 ‘기독교인들이 전쟁을 싫어하니까’라고만 할 수는 없다고 본다. 이는 아마도 의병운동의 주체세력인 유생들과 농민들과의 항일운동에 대한 입장차이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156). 사실 의병운동이라는 것이 게릴라적 성격을 띠는데다 기독교에 배타적인 계층들이 섞인 가운데에서 주일마다 예배를 드린다는 것이 실제로 어려웠을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교회를 중심하는 기독교 신앙인들이 참여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물론 일부 선교사들의 附日的 作態가 이를 부채질하였다고 할 수 있다고 본다.

  愛國啓蒙運動은 우리 자신의 힘이 일본보다 약하다는 것을 인식한 사람들이 長期的인 안목에서 ‘최후의 승리’를 거두기 위하여 전개한 민족운동157)이었다. 그런데 애국계몽운동과 기독교와의 관계는 한마디로 설명하기 어렵다. 애국계몽운동이 의병운동보다 基督敎 理念에 가까운 것은 사실이지만 각각에서의 기독교도의 위치가 연구된 것이 많지는 않다. 기독교와 제일 관계깊은 것은 아마도 敎育이라 하겠다. 애국계몽운동으로의 교육은 1907년의 부흥운동을 통하여 변화받은 학생들과 교사들에 의하여 계속 진행된다158). 여기에서의 교육이 어떠하였음은 그 이후 학생들의 행적을 통하여 알 수 있을 것이다. 國債補償運動에서의 기독교인들의 활약159)도 좋은 예가 될 것이다. 新民會도 마찬가지였다. 그렇지만 다른 애국계몽운동의 경우에서는 기독교인들의 활동이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애국계몽운동과 대부흥운동과의 관계는 뭐라 단정짓기는 어렵되 관련성이 깊다고 여겨지는 것이 필자의 의견이다.

 


8.1910년대의 민족운동과의 관계

  1907년을 전후한 대부흥이 1910년대의 민족운동에 관계된 증거는 105인 사건과 3·1운동을 대표적으로 들 수 있다. 여기에는 많은 기독교인들이 참가하였는데 그들의 信仰的 決斷이 주요한 요인이 되었다.

  첫째로 105인 사건은 일제가 기독교인들을 뿌리뽑기 위하여 조작한 사건이다160). 왜 그러하였는가? 한말 특히 1907년의 대부흥 이후에도 구국기도회가 계속될 뿐 아니라 愛國啓蒙運動과 獨立軍 運動등을 통하여 항일운동이 계속되었고 1909년의 100만인 구령운동이 일본인들에게 공포감을 주었던 것이 사실이다161). 그리고 105인 사건의 연루자들 중 1907년의 대부흥과 관계있다고 여겨지는 인물들이 몇 보이는데 평양의 大成學校, 崇實學校, 선천의 信聖中學校에 속한 인물이 많은 편이다. 이들은 중 대성학교는 민족지도자가 세운 학교이지만 숭실학교와 신성중학교는 宣敎師들이 설립한 학교로 대부흥운동에 참여하였다고 보아지며 이들이 신앙의 힘으로 어려움을 이겨내었기에 대부흥운동이 신민회에 영향을 주었다고 볼 수 있다162). 그런데 신민회의 주도층이 교회를 이탈한 인사들이라 하면서 대부흥운동과 신민회와의 관계는 무방하다고 보는 주장이 있다163). 그렇지만 필자가 생각하기에는 新民會 자체가 대부흥운동이 발생하였던 평안도 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1907년에 조직되었고 애국심을 강조하였으며 많은 기독교인들이 참여한 것으로 보아164) 비록 사료가 부족하다 할지라도 대부흥운동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하기는 어렵다고 본다. 그리고 대부흥운동에 참여하였다고 여겨지는 洪成麟165)을 비롯하여 길선주목사의 아들인 吉鎭亨 등이 신민회에 가입하여 있는 것으로 보아166)대부흥운동이 신민회에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둘째로 105인사건 이후에 1915년 평안도에 조선국민회가 세워지는데 여기의 참여계층은 1907년을 전후한 대부흥의 영향을 받았던 평양신학교, 숭실학교 졸업생들과 재학생들, 그리고 기독교 신자들이었다. 이러한 점으로 보아 부흥운동으로 말미암아 民族意識이 성장했다 할 수 있으며 이로 말미암아 부흥운동 이후에 救國運動이 전개되었음을 알 수 있다167).

  세째로 3·1운동과 대부흥운동과의 관계에 대해서 알아보면 여기에는 기독교 세력에 의하여 수행되었다는 의견과 기독교와는 無關하다는 의견이 있다168). 특히 최근에 들어서 진보적이라 주장하는 학자들이 기독교와는 무관하다는 의견을 보이는 쪽이 많다169). 필자는 이러한 기독교와 무관하다는 의견을 비판하고자 한다.

  흔히들 이야기되어지는 것이 길선주 목사를 비롯한 몇몇 목사들이 獨立宣言文 낭독 때 불참하였다는 것으로 이로 말미암아 비난을 하는 경우이다. 이것은 당시 상황을 意圖的으로 이해하지 않으려 하였을 뿐 아니라 길선주목사의 평소의 행동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여 제기되었다고밖에는 볼 수 없는 일이다. 길선주목사와 3·1운동을 비롯한 민족운동과의 관계에 대하여 진보적이라 주장하는 학자들이 제시하는 증거는 로마서 13장의 국가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抗日運動을 말리고 다녔다는 것으로170) 앞서 언급하였지만 이러한 길선주 목사의 행동은 방법에 대한 觀點의 차이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길선주목사는 평소에 救國祈禱會를 많이 인도하였다171). 그러므로 3·1운동에의 참여는 이러한 기도를 하면서 얻은 나라사랑의 정신을 자신이 실천한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당시의 한국인 교계 지도자들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선교사들이 비정치화를 목적으로 여러 행사들을 벌일때 이들은 信仰의 軌道에 올라서는 작업을 하였다. 그러니 部分的으로는 선교사들과 행동이 일치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민족주의계 평신도들과는 입장이 달랐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독립운동에 공헌하지 않았다 할 수는 없다. 각종 잡지들을 통하여 공동체적이고 애국적인 논설들을 설파하였으며 이로 말미암아 기독교인의 3·1운동에의 적극적 참여가 가능하였던 것이다172) 鬪爭, 戰爭, 드러나는 항일운동만이 구국운동은 아니다. 실력을 양성하는 것, 하나님께 나라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도 구국운동이다173). 방향이 다르다고 무조건 백안시하는 것, 이것은 바른 역사이해가 아닐 것이다. 양편의 노력을 다 인정하고 問題點을 제시하는 것이 학자의 임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그리고 전국 각지에서의 기독교인의 蜂起는 제쳐두고라도, 가해자였던 일본의 기록에 “기독교도의 선동으로 말미암아 일어났다”라는 식의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基督敎人의 影響을 증명할 수 있고 기독교인들이 입은 피해는 기독교인들이 3·1운동에 관여하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174).

  그렇다고 3·1운동 以後의 교회의 대응 태도를 긍정적으로만 볼 수는 없다. 교회는 일제의 不法 蠻行에 대해서는 공동 대응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이후의 挫折과 妥協에 대해서도 긍정적으로는 볼 수 없는 일이다. 일제의 회유에 넘어가 그들의 약속을 믿은 것은 둘째 치고라도 3·1운동 참여자체를 후회하는 등의 행동을 보인 일부 인사들의 행적을 비판하면서 반성할 필요는 있다175). 그렇다고 해서 3·1운동에서의 기독교인들의 활약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다. 곧 3·1운동에 참여하기까지의 고뇌는 인정해 주어야 할 것이다. 신석구 목사의 경우 처음에는 고뇌하다가 참여하였는데176)이러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救國祈禱會의 독립운동에의 공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乙巳條約 이전부터 계속된 구국기도회177)는 1907년의 대부흥 이후에도 교회 내에서 계속되었으며 3·1운동때까지도 계속하여 이어져 내려왔다. 이것과 105인 사건, 3·1운동에의 참여야말로 진정한 기독교인의 나라사랑의 정신이 표출된 예가 되지 않았나 생각되어진다.

  3·1운동은 기독교인을 비롯한 종교인이 참여한 民族運動이지 宗敎運動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基督敎를 비롯한 각 종교의 3·1운동에의 공헌은 무시될 수 없다. 그리고 구한말의 기독교 대부흥운동은 3·1운동을 비롯한 구국운동에 信仰的 基礎를 제공한 점과 그 기초위에 행동하게 한 原動力이라는 점에서 평가를 받아야 한다고 필자는 생각하는 바이다.

 


Ⅴ. 結 論

 


  우리는 지금까지 韓末 基督敎 大復興運動의 原因, 經過, 結果 등을 알아보았다. 지금까지 다루어진 내용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韓末 基督敎 大復興運動에 대한 기존의 연구성과를 알아보고자 하였는데 여기에 대하여는 韓國敎會의 成長에 기여하였다는 敎會史學者들의 견해와 民族運動에 肯定的 또는 否定的 영향을 미쳤다는 일반사학자들의 견해를 살펴 보았다. 그리고 이러한 연구성과를 가지고 대부흥운동의 역사적 고찰을 시도하고자 함을 밝혔다.

  둘째로 대부흥운동이 우리 民族史內의 事件이면서 敎會史의 사건임을 증명하고자 하였다. 우선 대부흥운동의 時代的 背景이라 할 수 있는 朝鮮王朝의 滅亡背景을 백성을 못살게 한 勢道政治와 時代錯誤的인 興宣大院君의 鎖國政治, 그의 아들인 高宗代의 정치인들의 문제점을 중심으로 파헤침으로 알아보았다. 또한 平安道 지역이 조선시대에 차별받게 된 원인을 밝힘과 아울러 이로 말미암은 평안도 지역 知識人들의 活動을 살피면서 이들이 기독교에 입교하게 된 또다른 요인을 알아보고자 함으로써 부흥운동의 지역적 배경을 살피고자 하였다. 그리고 당시의 각 종교들의 문제점을 유교, 불교, 샤머니즘, 카톨릭의 기본교리와 우리 민족사에 끼친 영향과 초기 한국교회에 끼친 영향을 다룸으로써 당시의 기독교의 필요성의 이유를 알아보았다. 또한 기독교내의 배경을 다룸으로 말미암아 부흥회의 직접적인 원인을 알아보았다. 여기서는 선교사의 신학이 종래 우리가 이해하여 왔던 근본주의 신학은 아니며 보수적이되 경험적인 신학임을 밝혔다. 그리고 이러한 신학이 구한말 그리스도인들과 기독교 대부흥운동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가를 살펴보았다.

  세째로 대부흥운동의 展開過程을 다루었는데 평양 장대현 교회의 復興査經會를 중심으로 다루되 날자순으로 서술하면서 여기에서 전파된 message의 간략한 내용과 뜨거운 기도열기를 전함으로 부흥회의 특징을 알아보고자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1907년 전후의 대부흥이 靈的이고 道德的인 신앙부흥운동임을 증명하였고 이것이 각 지역의 復興會에서 어떠한 영향을 받았는지 그리고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 알아보았다.

  네째로 大復興運動의 影響을 다루었는데 대부흥운동의 영향을 첫째로 기독교가 한국에 정착된 계기라고 정리하였다. 둘째로 敎勢의 變化가 크지 않고 靈的·內實的 運動이었음을 증명하였다. 세째로 대부흥운동으로 말미암아 宣敎師들과 韓國人 敎人들간의 화해가 이루어졌음을 보였다. 네째로 信仰目的이 現世中心 특히 교회를 民族運動의 도구로서 인식함에서 벗어나 신앙 속의 민족운동이라는 정신이 확립되었음을 보였다. 다섯째로 부흥운동으로 말미암아 은혜받은 신도들이 牧師 되기를 청하여 神學校의 發展이 이루어지고 이로 말미암아 敎會 指導部의 변화가 이루어져 교회가 民族運動에 참여할 여지를 제공하였으나 선교사들의 우려로 말미암아 敎派敎會의 구형이 이루어졌음을 보였다. 여섯째로 非政治化의 문제를 다루면서 이러한 부흥운동으로 말미암은 비정치화가 교회의 眞正한 發展임을 보임과 아울러 교회가 민족운동에 무관심해졌다는 일부 識者들의 偏見에 대한 反駁을 제기하였으며 교회가 민족운동에 참가한 증거로 愛國啓蒙運動과의 관계, 그리고 105人 事件과 3·1운동과의 관계를 보였다. 또한 이에 대한 학자들의 偏見을 반박하기 위하여 대부흥운동과 이들 운동과의 관계를 參與階層의 문제를 중심하여 정리함으로 말미암아 한국교회가 대부흥운동으로 인하여 愛國敎會임이 증명되었다.

  우리는 여기서 한말의 대부흥운동으로 말미암아 信仰의 目的이 순수하여지고 敎會의 진정한 발전이 이루어졌으며 신앙의 實踐이 愛國運動으로 표출되었음을 알아보았다.

  이러한 부흥운동은 韓國 敎會에 그리고 韓國 近代史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이 운동에서 어떠한 점을 배워야 할 것인가?

  아마도 신앙의 內燃에서 우러나오는 外延의 정신을 살리는 것이 根本 課題라 할 수 있을 것이다. 基督敎人은 물론이고 기독교인이 아니라 할 지라도 자신이 믿는 宗敎 또는 理念을 바르게 실천할 줄 알아야 할 것이다. 100여년 전 우리 조상들이 신앙을 키우기 위하여 노력하였고 그 신앙을 실천하였던 것을 보면 현대에 사는 우리도 비록 형태는 다를지라도 조상들의 근본 이념을 본받아 우리 세대에 적용하여야 할 것이 아닌가. 오늘날의 교회는 최근에 들어서 지나치게 支配者에게 屈從하는 面도 보여왔고 지나치게 反撥하는 面도 보여왔다. 이것은 왜 그러할까? 聖經을 自身의 뜻에 맞게 해석하는 牧會者와 여기에 분별없이 따르는 일부 平信徒, 그리고 여기에 사랑없이 반발하는 다른 평신도의 태도는 교회를 靈的 共同體로 만드는 데 실패하게 하였던 중요한 요인인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現實에 대하여 역사에서 배운 것을 적용함으로 말미암아 더 나은 교회, 더 나은 국민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해야 함이 옳지 않을까 한다.

  본고를 작성하여 놓고 보니 아쉬운 점이 없지 않다. 특히 대부흥운동과 그 이후의 민족운동과의 관계를 참여계층의 문제를 통하여 다루면서 구체적으로 증거를 많이 대지 못한 점이 아쉬우며 지나치게 호교론적이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또한 1907년 전후의 대부흥이 타 지역에 미친 영향과 민족운동과의 관계가 제대로 다루어지지 못한 점이 아쉽다. 하지만 필자는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왜곡하고자 하지는 않았고 널려진 사실들을 가지고 기존의 파괴적인 편견에 대한 반론을 시도하였다는 점으로 본고의 의의를 삼고자 한다. 끝으로 이 연구로 말미암아 한국 기독교사를 다른 역사적 측면과 관계시켜 연구하는 ‘사상사’적 고찰이 더욱 이루어지고 사실을 있는 그대로 전하는 사람들이 더 나왔으면 하며 본고를 맺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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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교회 100年 역사 / 장. 감. 침.(선교,활동,분열 ... ) 

 

   서 론
한국에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된지도 많은 세월이 지났으며,  개신교의  역사도 이제 100여년의 역사를 갖게 되었다. 복음의 불모지였던 이 땅에 많은 선조들의 복음 에 대한 열정으로 그들이 당한 핍박과 순교의 공로들로 한국 교회는 짧은 세월속에서 도 급속한 성장과 발전을 보게 되었다. 한국의 개신교는 기존의 천주교 보다는 늦게 복음의 사역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그 선교 사역이  외국 선교사들의 교단적

교세활동으로 인하여 각기 다른 모습으로 선교 의 활동을 하게 되어 발전의 모습 이외의 문제점들을 한국교회에 안겨 주게  되었다.
그리고 한국교회는 이러한 문제외에도  성장속에서 갈등 들을 스스로 해결 하지 못하 여 많은 분열과 아픔을 가져오게 되었다. 한국의 대표적인 교단인 장로교와 감리교를 비롯하여 침례교,성결교,하나님의성회등 많은 군소 교단의 모습  속에서 한국 교회는 초창기의 핍박 이후에 우리 스스로가 핍박하여 갈라진 모습의 교회가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분열된 한국교회의 모습속에서도 얼마전 하나님의 성회의 통합은  우 리에게 큰 의미를 안겨 주며, 우리에게 새로운 모습의 활력을 열어주는 계기가  된것 임은 확신할수가 있다. 본문에서는 한국의 개신교단중 대표적인 장로교와 감리교, 침례교의 종파운동과  활동, 분열원인에 대하여 기술하고 결과에 대하여 생각 해보기로 한다.  

  

  한국 장로교회의 선교의 시작

한국 개신교회의 첫 사역은 바로 장로교회의 의하여 이루어 졌다.먼저 한국인과 직접적으로 최초의  연관을 맺은 개신교의 선교사들인 로스와 매킨타이어는 스코틀랜 드 연합장로교회의 선교사들이었다. 이들은 1875년에 이미 성서의 한글번역에 착수하 였고 함께 성서번역에 참여하였던 이응찬, 백홍준, 서상륜, 김진기등이 한국  최초의 장로교인이 되었고 곧 매서인이 되어 국내에 잠입함으로 한국교회의 초석이 된것이다. 이와는 별도로 일본에 머물던 한국인 이 수정은 재일 장로교 선교사 녹스등과 교분을 맺고 이수정역 성서를 발간하는 한편 미국의 여러 선교잡지에 한국 선교의  필요성을 일깨워 주는 등 장로교회의 한국 진출의 성숙한 분위기를 조성한 바 있다. 한편 1884년에 한국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인 북장로회의 한국 선교사인 알렌 의사가 내한하였다.  비록 선교사라는 신분을 공식적으로 밝히지는 않고 미국 공사관의 공의 신분으로 입국하였으나 그의 목적은 선교사역이었고 마침내 왕실의 신임을 받아 그해 세브란스병원의 전신인 광혜원을 설립함으로 그의책무를 수행하였다.  뒤이어 1885년 부활절에는 본격적인 장로교 복음선교사인 언더우드가 내한하여 활동을 개시했다. 이렇듯 한국 개신교회는 나라밖에서 이룩된 스코틀랜드 장로 교회의 한국 선교 접촉 그리고 최초의 선교사로 입국한 미 북장로회 선교사들에 의해 비롯된것임을 살필수  있다. 그후 북 장로회는 한국 선교회를 조직 하는 한편 서울, 평양, 대구, 신천, 강계, 청주, 안동 등지에 선교부를 설치하고 복음선교는 물론 교육, 의료사업등을 대대적으 로 폈다. 언더우드 목사는 부임한후 얼마 안되어서 한국의 요단강세례라 불리우는 압록강에서의 33인에 대한 세례식을 베푸는 장거도 이룩하였다.초기에 설립된 장로교회 들은 장연의 소래 교회와 서울의 세문안,연동,승동,안동 교회, 평양의 장대현교회 등 이다. 이후 이들 교회는 대교회로 발전, 인근 교회의 모교회가 된 유서  깊은 교회들 이 되었다.1882년에는 북장로교회에 이어 미국 남 장로교회가 한국선교를 시작하였으며  테이트, 데이비스, 레이놀즈, 선교사등이 주축이 되어 한국의 호남지역에서 선교 하여 놀라운 선교 성과를 올렸으며,  교회와 교육,의료기관을 설립을 추진하며, 북장로회와의 협력으로 한국 장로교회의 발전에 기여 하였다. 또한 1889년 호주가 한국선교를 희망 데이비스 남매가 필두로 여러 선교사가 내한하여 경남지역에서 경건과보수 성에 입각한 장로교 교리를 심었는데 이후 서북지역 못지않은 한국장로교회의 중심지 로 발전하게 되는 원동력이 되었다. 한편 캐나다인 독립선교사 메켄지의 한국선교 착 수와 순직에 자극되어 1898년 캐나다 장로교회는 그리어슨 의사와 푸트, 맥레 목사를 필두로 함경북도와 간도 지역을 할당받아 원산,함흥,성진,회령 등을 선교부로 정하고 선교에 임한바 성과를 거두었다.  이렇듯 제각기 진출한 4개의 장로교 선교회는 한국 장로 교회의 창설을 위해 서로 긴밀한 협력을 취하였다.  우선 그 선교 지역의  분할 협정으로 서로간의 선교 권한을 보장 하였고 신학교육, 성서와 각종 문서 사업등에서 연합, 협력을 도모하였다. 이들은 장로교공의회를 조직하여 협력방안을 구체화하고 1901년에는 4개의 장로 교회가 협동으로 연합 장로교 신학교 (평양신학교)를 설립하여 한국인 교역자양성에 들어갔다.이로써 장로교회의 창설이 가능해졌고 선교부 조직이 아닌 한국교회 자체의 치리기구의 구현이 추진되기에 이르렀다.

 

장로 교회의 활동

한국의 장로교회는 1907년 평양의 장로회 신학교의 제1회 졸업생  7명을  배출 하고 그해 9월 17일 36명의 한국인 장로들이  평양 장대현 교회에 모여  한국 장로교 첫 노회를 창설하고 그 자리에서 신학교 졸업생 7명에게 목사안수를 베풀었다.  이로써 한국 장로 교회는  자체 치리 조직이 구형되었고  4개의 각기 다른 장로교파가 분할 선교한 한국 장로교회가 하나의 교회로 성립되는 쾌거를 이룩한것이다. 그리고 1907년의 한국교회에 몰아닥친 대 부흥운동은 장로교회가 그 중심체가 되었고  그 신앙의 구형과 교세성장에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다. 일제의 국권찬탈이 눈앞에 놓인 절망의 시점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던 한국 애국교회는 심오한 기독교적 섭리에  인도되어 불붙은  내면 신앙으로 현실적 절망을 극복하고 있었다. 사회적 관심과 현실적 기복, 국가적 안위에 목표를 둔듯한 교회신앙의 생리가 개인의  죄를 절실히 통회 하고  영혼의 구원에 이르며 나아가 하나님의 심묘한 섭리가 박동 치는 역사에의 개안을 맞으면서 뜨거운 부흥신앙으로 줄달음쳤다. 평양의 장대현교회와 한국인 길선주목사는 이 부흥의 한 핵이 되었고 평양을 진원지로 전국의 장로 교회로 나아가 여타의 개신  교
파에 까지 섬광처럼 번져 나갔다. 교회의 현실적 무력감에 발을 돌리던 민중 들이 되 돌아 오고 신앙의 열정에 목마른 많은 한국인들이 교회로 몰려들어 장로교회의  교세 는 크게 성장되었고 특히 서북지역의 교회는 세계 선교 사상 경의적인  일대  기록을 수립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한국의 중심교파인 장로교회가 현실적으로 비민 족파의 궤도로 돌아서며 현실도피적인 종교적 침잠에만 관심을 기울인다는 비판도 일 었다. 그러나 전 민족과 교회의 봉기로 민족적 의지를 고창한 1919년 3월 1일 운동에 이르러서는 장로교회의 혁혁한 공헌이 가늠 되고 있다. 그 지도자와 민중적 통로로서 확고한 이념의 제공처로서 교회의 역활은 이루 다 형언키 어려우며 이에 따른 일제의 보복과 억압은 상상을 초월한 것이었다. 수많은 교회당이 초토화되고 무죄한  교인들이 학살되었으며 대부분의 성직자들이 연행,투옥, 고문당하는 격동을 치렀다. 1920년 대에 접어든 한국 장로교회는 그 성숙의 모습은 드러내었으나 이미 역동의 기능이 현저히 줄었고 급변하는 사회적 변화 에 어두었으며 일제의 가공할 경제적 탄압에 기인한 곤궁, 유물사관에 입각한 사회주의의 도전등으로 하나의 위기를 맞았다.그러나 총 회 조직 이전 부터 왕성히 추진 되어 왔던 해외 선교와 국내 전도 활동 등은 계속 추진 되었고, 사회적 변화에 적응 하려는 광범위한 모든 노력,  농촌의  황폐와 농민의 좌절을 막아 보려는 농촌운동 등을 펴면서 지속적인 성장을 도모했다. 한편 장로교회는 점차 장로교 밖에 인물들의 종파운동과 성서 연구의 물결이 장로교회에 큰 영향을 미쳤고 장감 연합공의회를 기처로 한 연합운동에 대한 서북계 장로교회의 반발, 적극 신앙단문제등 성숙에 따른 여러 부산물적 문제가 끊이지 않았고 그 이후  점차적으로 장로교 내의 신학적 인 갈등이 심화되어 가고 있었다.그러나 장로교회는 새로운 신학 도전에 제압을 가했고 표면적 으로는 보수주의 신학 을 고수 하고 있다.

 

장로교회의 분열

장로 교회의 분열은 가장 큰 교단으로 큰 교단인 만큼 많은 분열의 아픔이  있 었다.  분열의 큰 원인 들을 살펴 보면 첫째로 신사참배 문제로 인한 분열이  있었으며, 둘째로는 자유주의 신학사상 대두로 인한 분열과  N.A.E.와 W.C.C의 대립으로 인한 분열의 세가지 큰 사건으로 나눌수 있다. 1945년 해방을 맞았을때 한국 교회는 해방 이전의 교회가 내포 했던 문제들을  극복 하면서 부흥 재건 하는 양상을 보였다.  그 하나는 주체성을 상실하고 교회로서의 정체를 상실 하였던 그리스도의 공동체를 본래의 한국 교회의 모습으로 재건 하는일 이 었다. 그중 하나가 교회의 정통이 일제하의 강요에 따라서 신사참배나 일본 기독교조 선교단으로서의 통합 때문에 패멸되었다고 보고, 그 이전의 순수 정통에로  회기한다 는 운동이었다. 그 이후 소위 고신파의 분립이 1950년 4월에 표면화되기 시작 하였고 이 즈음에 조신파 (현재의기독교 장로회) 역시 신학적 사상에 대한 성서의 소위 고등 비평과 역사적 비판등을 이유로 예장과 분립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조신파의 방법론 들은 보수주의나 근본주의 일색으로 목회자양성을 실시해온 장로교에 충격을 주었다. 김재준 목사와 박형용목사 두 거목의 사상은 대립하게 되었고 박목사는 김 교수가 한 국교회를 능욕한다고 까지 힐책 하였다. 이러한 문제로 장로교회는 총회에서  새로운 장로회 신학교를 개교하고 기존의 조선 신학교와(한국신학대학) 두개의 신학적  대립의 신학교가 탄생된것이다.이렇게 해서 예장총회는 "대한민국에는 예장 총회는  하나 밖에 없다"고 성명서를 제출하게 되었고 조선신학교 측은 새로운 대한 기독교 장로회 라는 교단을 조직하게 되었다.(1954) 그 이후 기장은 1957년 10월에 한국 기독교교회 연합회(NCC)에 가입하였고 같은해  한국 세계기독교봉사회에가입하였으며,1959년에는 동남아시아 기독교협의회(EACC,CCA의 전신) 그리고 세계교회협의회(WCC)에  가입하여 교단으로써 신학적 입장을 분명히 하고 독립된 교회의 기구로서의 출발을 다짐하였다. 그런데 1959년 예장은 다시 합동파와 통합파로 분립 하게 되었다. 합동파에서는 1960년 12월 비상 사태속에서 고신파와 합동해서 "대한예수교 장로회 합동 총회"를  조직하게 된것이다. NAE계의 목사들은 WCC가 용공적이라고 공격하고, 한국교회의 반공이념과 신앙의 순수성보존을 위해 WCC에서 탈퇴할것을 그동안 주장해 왔다.그런데 1959년 대전총회에서 경기노회의 총대 명단의 조작성 여부의 문제로 양쪽의 주장이 충돌하여 마침내 분립까지 치닫게 되었던것이다.통합파는 곧 서울 연동 교회에서 속회를 가지 고 비상사태를 선언하면서, WCC에서의 잠정적 탈퇴를 하면서 합동파와의 재결합을 모색 한다고 하였으나 그것이 그 시기에 제출된 제안은 아니었다.  반대로 합동파 에서는 서울 승동 교회 에서 속회하여 당장 WCC에서 영구 탈퇴 하고 어떠한 형태의  에큐 메니칼 운동도 반대하며, 한국NCC와도 관계를 단절한다고 선언 하였던것이다. 그런데 합동파의 역사도 그이후 기복이 많았다. 1962년에는 ICCC탈퇴 문제로 박병훈계가  호헌파로 분열되고 1963년 9월 고려파가 옛 고려파 총회로 그산하 노회들이 환원 되었다
그리고 같은해에 개혁파교회 세계대회에 가입하였다가 1972년 9원  57회 총회에서 이 곳으로 부터 탈퇴를 결의하였다. 합동파 교회가 다시 사당동파 와 방배동파로 다시 분열된 것은 1979년 9월 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교파들의 분립과 조직 과정을 정확 하게 말하기는 어렵다. 계보상 뚜렷한 파생 경로 없이 단독 생성된 장로교 교파들도 많았기 때문이다.

  

  한국 감리교회의 선교의 시작 

한국 감리교회의 시작 역시 한국 개신교회의 시작과 더불어 이루어 졌다.  한국 개신교는 천주교회와는 달리 그 시작부터 한국의 주권자 (고종황제) 의 선교  허락을 받고 시작되었다. 1882년에 한미 수호조약이 체결되면서 한국정부가 미국에 보빙사절 을 파견하였다.

이 사절단은 워싱턴으로 행하던 차중에서 미국 감리교 목사이며 교육가였던 가우쳐 박사를 만나게 된다. 가우쳐는 이들로 부터 한국의 국내 사정을  알고 곧 한국에 대한 선교를 미국 감리교 선교부에 호소 하였다. 동시에 그는 이미 일본에 서 에서 선교 하고 있던 감리교의 맥클레이 박사에게 연락 하여 새 선교지가 될 한국에 대한 현지답사를 받고  부탁하게 되고 맥클레이는 이 부탁을 받고 1884년 6월24일 에 서울에 와서 김옥균을 통해 고종 황제에게  한국에서의 선교 사역에  대한 요청을 윤허 하였다. 이렇게하여 감리 교회는  한국 황제로부터 의료사업과 교육사업에 대한 허락을 받은것이다. 이에 따라 미국 감리교 선교부는 한국선교사를 모집하였고 이 부름에 두 가정이 응하였다. 이들이 곧 아펜젤러가와 스크랜톤가 였는데  후자는  모자 선교사이기도 하였다. 이리하여 아펜젤러 목사 부부는 교육선교사로  장로교의  언더우드와 함께 1885년4월5일 부활절에 제물포에 상륙함으로써 한국에서의  감리교 선교 활동이 시작되었다. 서울에는 그해 5월3일 의료선교사인 스크렌톤 목사가 먼저  들어와서 정동에 자리를 잡으면서 후에 들어올 아펜젤러와  모친 스크렌토 대부인의 처소를 마련하였다. 아펜젤러는 정동의 자리 잡으며 자기집에서 학생에게 영어를  가르치기 시작하면서 한국의 신교육의 효시가 되는 배재 학당이 탄생하게 되었다.  한편 스크렌톤의 모친인 스크렌톤 대부인은 한명의 학생에게 영어를 가르치기  시작하였는데 이것이 이화학당의 시발점이 되었다. 1895년에는 미국 남 감리교회가 한국선교를 시작하였으며 20세기 접어들면서 선교지 역은 확대되고 교세도 늘어나서 선교구역을 분할하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지금까지는 전국이 한 구역으로 되어 있었으나 1901년 11월 이후부터는 전국을 세지방으로  분할 하였다. 즉 서울과 그 이남은 남부지방으로 인천,강화,황해도는 서부지방, 그리고 평 안도일대는 북부지방으로 편입 시켰다. 특히 1901년은 감리교회 뿐만 아니라 바로 한국최초의 목사가 탄생되었다. 이해 5월 새로 봉헌된 상동교회에서  김창식  김기범이 역사상 처음으로 목사안수를 받았다. 이들은 평양과 인천,원산에서 각기 사역하며,한국인 목사를 배출하여 인력이 부족한 선교사를 대신하여 이들이 복음 전파의 일선 에서 헌신적인 노력을 하였다. 그후 교세도 급성장하여 1904년에는 한국선교연회가  조직되고 1908년에는 한국연회가 정식으로 조직되면서 일본연회나  중국연회와  독립된 독자적 연회를 가지게 되었다. 좀 늦게 들어온 남 감리교회 에서는 1911년 10월에 와 서야 김홍순을 비롯한 세명의 목사를 배출하였다.

 

감리 교회의 활동

감리 교회가 20세기에 들어오면서  그 기구와 활동 분야가 확대되고 교회조직도 전국적인 것이 됨으로 민족에 대한 교회의 영향력이 커졌다.특히 서재필이  귀국하여 조지한 독립협회가 강재로 해산되고 이승만, 이상재, 정 교 등이 조직한  협회간부들이 투옥되었을때  이들 양반출신 독립지사들이 감옥에서 대거 그리스도교로 개종  하였다. 이들은 출감한후에도 계속 교회내에서 민족운동을 전개하여 교회는 당시  애국독립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중에서도 서울의 상동교회가 가장 대표적인 교회이었다. 이 교회의 전 덕기 목사는 소년 시절에 스크렌톤의 감화를 받고 기독교로 입교한 이후로 목회와 애국 독립운동을 하나로 결합시키면서 1905년의 을사보호조약을  전후하여 상동교회를 중심한 민족독립운동을 과감하게 전개하여 나갔다.따라서 그의 주위 에는 이필주,최성모 목사를 비롯한 김구, 이준, 이갑, 양기탁, 안창호, 이동휘, 이동녕, 이희영, 이승훈 등이 모여들어 활발한 독립운동을 펴나감으로 상동 교회는  한국 민족운동의 요람지가 되었다. 특히 전덕기가 상동교회내에 세운 상동청년학원에서 주 시경 최남선이 주동한 한글운동과 국사운동은 감리교회의 교육을 통한 민족 운동전개 의 대표적인 예의 하나이다.이후에도 감리교회는 어려웠던 시대의 정신적인 모체이며 애국 하고 선교하는 교회의 모습으로  큰 역활을 하였다. 한국 민족에게는 교회는 국가적 위기를 당할때에 자기 민족을 저버리지 않는 애국 애족의 집단임을 행동으로 보여주었으므로 불신사회의 존경을 받아왔고 교회의 권위가 크게 신장되어 교세도 상승 일로에 있었다.이러한 감리교회의 민족운동은 이교회의 심오한 영적체험신앙 및 감리 교회의 독특한 심령 부흥 운동과 평행 하면서 진행된 사실은 주목 할만 하다. 이러한 감리 교회의 성격은 3.1운동과 6.25사변을 겪는 우리 민족 가운데 같은 공감대를  형성 하였으나, 감리교회에서도 3.1운동 이후 사회주의사상이  침투되면서 당시의 세속 적인 유물론적 풍토와 합세하여 교회의 큰 위험세력으로 나타 나게 되는 갈등을 안겨주었다. 더우기 일제의 교회에 대한 가중된 압박은 위에 언급한 사상들과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교회의 성장과 민족운동을 질식시키기에는 충분하였다. 이런 그리스도교의 공동 적을 앞에 두고 더 효과적인 민족복음화가 이루어져야만 했는데 같은  웨슬레의 후예인 남북감리교회가 한국 에서 언제 까지나 갈라 져서 선교할 타당성을 채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비록 두 감리교회가 갈라져서 처음부터 활동하였다 하더라도 한국 이 라는 특수한 상황속에서는 합해서 일해야 하는것이 지상명령을 받아 들여 졌다. 더우기 1907년 부터 두 감리 교회가 합동 하여 신학교를 세우고 경영한 이후부터  협력의 기운이 더욱 촉진 되었다. 계속하여 두 교회는 합동 계획을 연구하며 일하다가  미국 의 두교회가 한국에서의 합동을 서로 승인하고 합동 전권 위원 까지 5명씩 선출 하였다. 1930년 12월2일 에 서대문의 냉천동의 협성신학교 강당에서 1백명의 두교회 대표들이 모여 역사적인 기독교 조선 감리 교회의 창립 총회를 열고 최초로 한국인감독을 선출하게 되었다.처음에 총리사로 불리우는 이감독의 자리에는 양주삼 목사가 선출되 었다. 이제부터 명실공히 한국인을 위한 한국인에 의한 한국인의 하나의 감리 교회가 탄생 되었고 이렇게 단결된후에는 국내선교는 물론이고 만주선교 연회까지  조직하여 만주에 흩어져 있는 교포들을 위한 선교에도 많은 힘을 기울이게 되는 감리교회의 새 로운 선교의 사역이 시작되었다.

 

감리 교회의 분열

감리 교회는 일제시대를 겨우 면하게 되는 기쁨을 잠시 느끼고 공산주의자들의 북의 점령으로로 북한의 감리교회 지도자와 교인들이 대거 남으로 피하여 남에서 감리교회의 재건에 힘썼다. 한편 남한에의 감리교회도 그리 평탄하지는 않았다. 일제 말기의 교회 탄압의 후유증은 해방된 조국의 교회에 그대로 물려줄수 밖에 없었다.일제  말기의 교권을 장악한 측은 그때의 교회 체제를 그대로 유지해 나가려고 하였고 이에 반하여 탄압을 받고 투옥되었거나 교직에서 물러난 측은 다시옛날의 감리교회의 체재와 조직으로 돌아가서 감리 교회를 재건하자며 1946년 1월에 동대문교회에서 모여서 감리교 재건측의 연합연회를 가졌다. 이에 맞서 같은해 9월에는 감리교 부흥측은 특별 총회를 소집하여 감독까지 선출하였다. 이렇게 되니 재 건측도 이듬해 1월에 총회를  열어 감 독을 선출하니 두명의 감독이 생긴것이다. 한국 감리 교회의 최초의 분열 이었다. 하지만 그 분열은 오래 가지 않았으며 뜻있는 목사들에 의해 1949년 4월에 합동  총회로 통합된 감리교회의 감독을 선출함으로 통합되었다.하지만 6.25로  인해 감리교회는 다시한번 어려움에 처해 있었고  감리교회는 피난처인 부산에서  복구사업에 힘쓰며재건을 서둘렀다. 부산에서 1951년 다시 총회 열어 유형기 목사를  감독으로 선출하고미국 감리교회와의 협조를 취하며 잿더미 상태인 감리교회의 재건과  복구에 힘썼다.그리고 1954년 3월 대전총회에서 유감독을 재선시키고 개정전의 헌법에는  감독의 자격은연회 정회원으로 6년 계속 시무해야 하는데 유감독이 일제 말기에 친미분자로  몰리어 투옥 되고 파면당하여서 6년 연속 시무 조항에 저촉된것이다.  이것이문제되어  이듬해 제2 분열이 있었다. 그러나 1958년 유감독이 은퇴하면서 분열된 감리 교단은 다시  합동을 호소하였고 드디어 호헌측과 합동이 그해 총회 에서 이뤄짐 으로써 3 년만에 감리교의 분열은 끝을 맺게 되어 다른 교단의 좋은 본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4.19가 1960년에 일어나면서 소장파 목사들에 의한 교회혁신을 부르짖게되며 교단내의 갈등은 심화되어 가고 있었다. 특히 1967년에는 감독선출에 135회의 투표끝에 감독이  선출되는등 사회 의 지탄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1970년 10월의 11회 총회에서는 역사상 처음으 로 1차 투표에 감독을 선출함으로써 단함된힘을 과시했으나 이에 불만을 품은  일부인 사들에 의해 감리교회는 제4의분열을 초래 하고 말았다. 이 분열도 4년후인 1978년 10 월 13차 총회에서 합동이 이루어지면서 감리교분열은 다른 교파와는 달리 4년 이상 지 속되지 않는다는 전통을 고수 하였다.

 

  한국 침례교회의 선교의 시작

한국의 침례교의 역사는 1889년에 한국에 온 캐나다의 독립선교사인 펜윅과  더 불어 시작된다. 펜윅 선교사가 처음에 한국에 왔을때는 침례교란 명칭을 쓰지 않았다 펜윅은 10개월간 한국어를 공부하고 황해도 소래에 가서 일하다  1893년에  캐나다로 귀국하여 3년간 체류하였다. 이때 북침례교의 목사인 고든목사와 긴밀한 교분을 갖게 되었고, 그가 경영 하는 선교 학교에 참석한 후 침례교 신앙을 갖게된 것이  이 시기 였다.1894년에 그는 한국 순회 선교회를 조직하고 1896년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서 원산에서 선교사역을 시작했다. 그는 원산에서 사역중  자금난으로  돌아가버린 고든 목사의 교회의 집사인 딩을 비롯한 한국의 파송된 선교사들이  자금난으로  1900년이 전에 스테드만 선교사를 제외하고는 모든 선교사가 귀국하였다. 1902년에는 스테드만 선교사도 일본에 옮겨 가자 그들의 에라딩 선교회를 펜윅에게 이양 하고 말았다.  펜윅은  자신의 선교회와 엘라딩선교회를 병합하자 효과적인 사업을 위한 조직의  필요에 직면했다. 그는 다시 이 조직을 "대한기독교회"를 조직하고 선교하게 된것이다. 1890년에 한국의 장로교와 감리교가 교계예양 협정에 따라 선교지역을 분할하자, 펜윅 선교사는 기왕에 다른 교단에 손에 미치지 않는 만주,간도,시베리아,몽고지역으로 설정하고 그지역에 산제한 한국동포에게 주력했다. 그후 미국 침례교 한국선교회는  펜윅과 관계를 맺고 한국의 선교사역에 힘쓰기 시작하였다. 그후에 계속 에버내티 선교 사를 필두로 많은 선교사들이 6,25로 전후하여 한국의 선교사역에 힘썼다.  남침례교 한국선교부는 1954년에 공식적으로 조직되었고 초대 회장은 애버내티 선교사 였으며, 선교사 주재지는 부산, 대전, 서울에 설치 되었다. 선교 사역의 초창기는 피난민 가운데의 전도 사역과 난민 구호사역이었으며, 그들의 조직이 정식적으로 조직되자 복음전도와 신학교 사업 및 의료 사역에 국한하여  사역하였다.  

 

침례교회의 활동

침례교회는 펜휙이 조직한 대한기독교회는 1890년 기존의 장.감의 교단의  선교 지역이 아닌 만주,간도 시베리아, 몽고 지역에서의 개척 선교사업은 한국교회사에 있 어서 실로 불멸의 큰 업적 이었다. 이 당시 개척순회선교사들은 모두 자비량으로  이 선교사업에 헌신했다. 그들은 펜윅으로부터 한짐의 복음 책자를 공급 받아서  이것을 판매한 돈으로 선교비에 충당하면서 개척선교의 고난을 이겨 나갔다. 1940년에  이르러서는선교활동의 결과로 국내에 약100여개의 교회, 만주.간도 지역에 100여개  교회 시베리아에 40여개 교회 그리고 몽고에 수개의 개척전도소를 설립하는 교세확장을 이 루었다.그러나 일제 말기 교회에 대한 박해가 강화되었는데 신사참배와  황궁 요배를 강력히 반대하였던 대한기독교회는 보안법위반이라는 죄목으로 32명의 교단의 지도자 가 투옥당했다. 그러나 이들이 압제에 굴복 하지 않자 1944년에는  강압적으로  교단 해제 명령을 내리고 교회건물을 철폐 시키며 재산을 압류하여 국방 헌금으로 강제 헌납 시키고 말았다. 1945년 조국광복은 한민족은 물론 한국의 기독교계에 새로운 삶의 소망과 빛을 주었다. 그러나 1948년 북한정권의 수립 으로 본 교단의 근거지 였던 이 북 지역의 모든 교회를 일시에 상실 하고 말았다.  남한에 남은 교단 지도자들은  충남 칠산에서 모임을 갖고 충남 강경의 총회에서 교단 명칭을  "대한 기독교침례회"로 바꾸고  1950년 최초의 남침례회 선교사로 에버내티 박사 부처가 파송됨으로 한국 침 례회 선교사업의 서막이 열었다. 그러나 6.25 사변은 침례교회를 큰혼란을  빠뜨리게 하였고 6.25사변중 파송된 선교사들은 전화로 고통 받는 한국민의 구호사업에 치중하 면서 선교의 막을 열었다. 아직도 남 침례교회의 신앙원리와 신앙 행습에  생소한 한 국에 구호사업으로 시작된 선교사업은 그 이후에 배태하게 된 여러가지 비  침례교적 신앙의 씨앗을 처음부터 뿌려가고 있었다. 구호물자로 교인을 모으며 선교  보조금으로 교회가 세워지고 목회자의 사례금이 지급되었을때 침례교인의 숫자와 교회는 놀랍 도록 자라났다.그러나 질적향상을 병행하지 못한 단순한 양적 발전은 신앙 행습과 원리면에 있어서 침례교정체를 위협하는 숫자 결과를 빚었을뿐 아니라 이 시기에 타 교 단에서 유입된 교역자들의 비 침례교적인 교회의 행습은 그 이후 침례교 신앙 정립에 많은 대가를 치르게 하였다.

 

침례교회의 분열

1960 년대의 한국 침례 교단은 발전을 위한 여러가지 시련을 거쳐야 했다.  한국 지도자들간의 불목이 정치적으로  더욱 복잡성을 띠게 되고 한국 총회와 선교회  간의 협동 문제가 마침내 결여 되자 총회는 안타깝게도  두개로 분열 되고 말았다.1959년 3월 17일에 대전 대흥 교회 에서 개최된 실행 위원회는 총회 장소 결정을 둘 러싸고 양분 되었으며 3월18일의 한미 연석 회의에서는 선교부측에서 총회의 전도부장을 불신임 결의함으로써  총회와 선교부간의 대립이 격화 되었다. 그런 와중에서 두개의 분열 총 회가 충남 대전과 경북 포항 에서 각각 개최 되었다. 1959년 4월 28일 대전 대흥 교회 에서 개최된 이른바 대전 총회는 선교부의 지원을 받는 장일수 목사를 비롯한 몇몇 지도자와  타 교단 에서 들어온 전입 교역자 들이 주측을 이루고 있었다. 1959년 5월 25일  경북 포항 교회에서 개최된 포항 총회에서는 지금까지 총회를 주도해온 교단의 지 도자들이 주동이 되었다. 이 지도자들은 대개가 남침례회와 교단이 제휴 되기전에  펜 윅 선교사 밑에서 훈련을 받고 자라온  동아 기독교의  교역자들로서 교단의 주도권을 강조하며 선교부와는 흔히 대립적입장을 가졌었다. 결국 선교부가 대전 총회를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대전총회와 협동하게 되자 포항총회측은 대전 총회와 선교부의 주 동 인물을 불신임 결의함으로 교단은 두개로 분열되고 말았다. 향후 9년간은 교단  분열은 한국침례교회 발전을 위해서는 지극히 불행한 일이었으나 한편 한국침례교가  침례교 가 침례교 본연의 신앙 원리와 이상에 투철한 교회 발전과 신앙 정신을 정립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했던 역사의 한 변천 과정 이라 하지 않을수 없었다. 분열 이후  대전 총회는 선교부 주도로 미국 남침례교총회를 모본으로한 여러기관을 조직하고 그  기관 들을 통하여 교단 사업을 수행해 나갔다. 그러나 분열 이후 선교부의 재정 지원이  중 단된 포항 총회는 많은 재정적 어려움에 직면했다. 초 교단  적인 선교 단체들로 부터 재정적 지원을 받게된 포항 총회는 침례교의 정체를 간직하며  침례교의  신앙 정신과 원리에  입각한 교회로 발전해 나가는데 여러가지 어려움이 많았다. 하지만 교단 분열은 양 총회에 서로의 반성과 자구책을 마련하고 자립 정신을 함양 시키는 자극제가 되었다. 1960년대부터 성령의 은사 운동이 교회의 교역자들 에게 영적 으로나 재정적 으 로나 활기를 띠게 하였다. 60년대의 영적 부흥은 온 교회의 영적 각성과  형제간의 이해와 사랑을 알게 하였고 교단 통합의 불씨가 되었다.  1968년 4월16일 한국 침례회는 포항총회측과  대전총회측의 합동총회로 9년간 갈라졌었던 교단이 통합되었다. 갈라졌던 양측의 교역자들이 악수를 나누면서  김용해 목사를 총회장으로 선출 하였다. 이날은 침례회의 역사적인 날이며 한 세대가 물러가면서 세대 교체의  전환을 맞이한 화합의 세대가 등장한 것이다. 이후 침례 교단은 교단안에 신학대학에서 배출된 젊은 사역자들을 배출하였고 침례회의 신앙원리와 정신으로 한국에서의 복음 사역에 전력을 다하게 되었다.

  

   결 론  

위와 같이 세 교단의 선교 과정과 분열에 대하여 살펴 보았다. 한국에 있어서 교회의 역사는 정말로 어렵고 힘든 역사였으며, 수 많은 과정 속에서 아픔 또한 크다고 생각한다. 성격이 다른 세 교단의 역사 속에서 한국 교인들은  민족의 수난들로 인하여 너무나 많은 시련을 안게 되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삶 속에서 교단들은  자신의 의지를 끝까지 지키려는 마음이 자리 잡게 되고, 민족의 울분과 불만들이 해방후  한국 교회의 분열된 모습으로 표출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하게 된다. 어째든  한국 교회는 짧은 역사에 비하여 놀라운 성장과  많은 사연들이 있게 되었다. 그리고 한국 교회의 분열은 우리에게 진정한 교훈과 역사의 증거로 남게 되었으며  오히려 분열로 한국교회는 큰 부흥을 이루어 졌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장로교단은 한국 교회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큰 만큼 분열이 많았던것을 기억한다. 1980년대 탁명환 교수가 조사한 결과를 보면 49개교단의 장로교가 나누어져 있으며 현재는  거의 60여개의  분열되어 있다고 한다. 교단 만큼 신학교가 있고 서로 상반된 사상들이 신앙인들로 하여금  혼란케 하는 분열의 모습은 그리 좋은 모습 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반면 침례회의 분열속에서 통합을 이뤄 가는  모습은 진정한 그리스도의 용기를 알게 했음을  높이 평가 한다. 얼마전 하나님의 성회도 통합을 하게 되었다. 매우 고무적인 일이며, 하나님께 영광 돌릴일이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하는것은 그 통합 속에서 진정한 의미의 통합이 있어야 하겠다는 것이다. 감리 교회는 통합후 다시 분열 하는  사건들을 여러번 겪지 않았는가 통합은 되었으나 여전히 내적 갈등이 남아 있다면 그것은 진정 한 의미의 통합이 아닌것이기 때문이다. 아직 하나님의 성회는 분열된 교회가 남아있으며 함께 통합 된다는것이 얼마나 힘들다는것을 알게 해준다. 하지만 지금 우리  교단의 통합은 화합의 시작 단계라 생각 하며 우리가 진정코 하나님을 사랑하고 한국교회의 사명들을 실천하는 마음을 갖는다면 주님의 계획안에서 속히 이뤄지리라 생각된다.

자료출처 : 안디옥카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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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회사


제1장 : 근대 이전의 기독교와의 접촉


당나라를 통한 접촉

AD 431에 에배소에서 기독론에 대한 신학적 논쟁이 있었는데 그리스도는 인성과 신성을 함께 공유하지만 점진적 동화과정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했다가 에배소 회의에서 이단으로 정죄됨.
Netorius 퍼시아 에뎃사 AD635년- 인도와 중국을 전파. 중국에서는 경교라함.
nestorian 당시 중국 황제는 당태종, 당태종: 아라곤의 설교 감명, 파사사라는 교회 세워줌. 중국말로 아브라함. 왕이 관심을 가지므로 크게 번창. 그때 우리나라는 신라시대(삼국통일을 꿈꾸던때) 우리나라는 당나라 힘입어 통일 이루려함.(신라의 김춘추 여러번 방문) 불교의 고승들이 당나라 여러 번 방문.

* 1635 - 중국 서안부(북경)에서 대진 경교 유행 중국비 같은 수도 이 비문에는 중국어와 시리아어로 736자(중국어, 시리아)로 기록되었음.
* 1917년에 대진 경교 유행 중국비의 모조품이 금강산의 절에서 발견됨.
* 1956년 불국사 경내에서 돌 십자가가 발견됨.
쪾 1988년 경북 경산 지인면 일원리에서 어린양 안고 있는 것과 기도하는 석상이 발견됨.
* 마테오리치가 1595년에 어떤 서적을 대하게 됨. 거기서 당나라에 경교가 번창함을 알게됨.
* 이런 여러 가지 종합결과 당대 어떤 영향을 받았음이 틀림없음.


몽고를 통해 접촉

징기스칸이 몽고를 세우고 지중해 근처 모슬렘 격퇴할 때 기독교 국가들은 당시 큰 골치거리였던 모슬렘을 대신 물리쳐 줘서 고맙게 생각함. 몽고는 세계 제국을 제패하는데 모슬렘이 큰 장벽이라는 것을 깨달음.

* 당시 징기스칸은 야만인 - 서부 교회의 Innocent 4세는 1차로 선교사(카로핀)을 1246년에 보냄.

* Rubruc은 1253년 콘스탄티 노플을 떠나 몽고 수도 화림에 와서 사둔 탁(징기스칸의 아들)을 만남. 사둔탁이 기독교인인줄 알았으나 아니였다.

* 루부룩은 징기스칸에게 개종을 권유하나 거절당함. 몽고는 우리 나라 통해 일본까지 침략할 야욕.

* 루부룩이 최초로 한국(Caulei)을 서방에 서신으로 알림. Coree - Korea


일본을 통해 접촉

* 1517년 마틴 루터가 종교 개혁이 일어나서 루터교가 확장.
* Ignatiu Loyola / Francis Xavier
* 예수회 :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라.
* Francis Xavier 를 동방의 선교사로 파송함.
* 그는 인도의 고아 - 필리핀(80%이상이 카톨릭) - 일본으로가 구주에 상륙 1549년에 활공총이 복음과 함께 들어감.(1592년 임진란에 있어 타격적 무기)
* 그러나 일본을 통해 기독교 접촉.
* 오다노 부나가(일본 지도자) - 종교 관용책.
* 관용 이유 : 당시 불교가 강했기 때문에 한 종교가 커지면 강대해지므로 한쪽 약화를 위해 신학교 부지까지 마련해 줌. (17세기 당시 일본에 30만의 신자가 있었다고 함.)
* 도요또미 히데요시 : 오사까 (한국인이 제일 많은 곳)에서 예수회 신부들 을 모아 놓고 중국을 침공한 후 예수 믿겠다고 말함.
1592년 임진연에 전쟁 일으켜 우리 나라 쳐들어옴. (20-25만의 군인을 이끌고 쳐 들어옴. 명나라 가는 길을 확보하려는 명목으로.) 이때 일본의 1군단장(고니까 유찌나가)- 세례명 어거스틴이 선두로 쳐 들어 왔는데 그가 이끄는 많은 군인이 기독교인이었다. 이들이 20일 만에 서울에 다다르고 이들이 평양성까지 진격했다. 그러나 명나라 군대가 내려와서 경남 웅천으로 일본군은 퇴각을 해야 했다.

* 고니찌 유찌나가는 군인중 기독교인이 많으므로 교구장 피터 고메쯔에게 종군 신부를 보내 달라 부탁하니 세스 페데스 신부를 보내줌. 그는 우리 나라에 오자 고메쯔에게 2편의 편지를 보냈다.

* 내용 : ①웅천에 도착한 일과 여정내역 ②고니찌 유찌나가가 반갑게 맞아주었다는 내용과 일본 군인이 힘들게 있다는 말을 전함. 세스 페데스는 6개월 후 일본으로 돌아옴.

* 도꾸가와 이에야그 - 기독교 엄청 박해 이때 많은 순교자를 발생. 일본 신자와 조선인으로 끌려가 믿은 자도 순교함. 임진란 때문에 우리 나라는 쇄국 정책을 고수함.

* 결론 : 당나라, 몽고, 일본을 통해 우리 나라는 일찍 간접적으로 기독교 접촉.

 


제2장 : 한국의 protestant church


시대적 상황

반만년 역사를 가졌으나 근래에 들어 종교적으로 심한 허탈감을 느낌.(고려조 : 불교, 조선조 :유교)
그러나 기독교가 전래되기 약간 이전은 종교적 공백기였다. 당시 멕킨지는 당시 서울에는 종교적 행사가 없었다고 보고한다. 1866년 전쟁이 일어나고 1871년 로져스 함대와 전투를 벌이고 운양호를 몰고 온 일본군이 무력시위하여 1876년 한일 강화조약을 맺으며 계속해서 미, 일, 러시아와 수호조약을 맺음으로 당시 조선이 운둔국(세계속에서 알려지지 않은 나라)으로 알려지기 시작함.

* 1884년 갑신 정변을 계기로 해서 망명 생활 후 돌아온 일본 수신사 박영효가 일본 요꼬하마에서 조선 선교사로온 스크렌톤 목사(감리교)를 만남. 박영효는 당시에 우리 나라에 선교사가 필요하다고 느꼈다. 선교사들이 와서 교육 등 문화적인 필요를 채워달라고 부탁함. 우리 재래 종교는 한물 갔다고 말함. 1886년 한블 수호 조약에서 조약문 속에는 교회라는 말이 들어갔다. (이단어 하나 때문에 미국 선교사들이 전도할 때 쉬웠다.)


유럽 christian들의 도래

* 벨트브레와 하멜 일행이 오게됨. 1627년 네델란드 사람 벨트브레 일행 3사람이 동해안에 상륙함으로 시작. 이들은 동양에서 무역하고자 네델란드에서 일본으로 가다가 파선하여 경주 앞 바다에 표류. 이들은 물을 얻기 위해 표류했다가 억류되게 되고 살아가던 도중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 났을 때 같이 상륙한 2사람은 참전했다가 전사했고 벨트브레만 남았는데 전공이 인정되어 한부대를 이끄는 지휘관이다. 벨트브레가 표류한지 이십 몇 년이 지나 1653년에 하멜 일행이 본국을 떠나 일본으로 오다가 또 표류해 제주도로 오게 되었다. 일행 64명중 36명만이 살아 남았고 제주도에서 14년간 억류되어 살다가 15명이 탈출하여 본국으로 돌아갔다. 하멜의 기사에서 보면 그들이 프로테스탄트였음을 알 수 있다.


바실홀과 멕스웰의 내한

1816년 영국 정부가 중국에 파송하는 William이라는 군함이 있었는데 Amhert 사절단이 있었다. 함장은 Maxwell, Bashall 사절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중국에 도착하여 암 홀스트 사절을 내려놓고 본국에서는 한국 서해안을 탐사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같은 해에 한국 해안에 와서 해도를 작성했다.
이들이 마량진 앞 갈곳에 들렸을 때 문정의 임무를 띤 첨사(조대복)가 가서 물어 볼 때 이 조대복에게 성경을 줌.(King James Version) - 최초로 한국에 전달된 성경. 바실홀은 돌아가서 책을 씀.


선교 개척자들의 한국인 접근

(1) 칼 큐츠라프(한국을 방문한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
독일의 할례대학에서 졸업. 화란 교회 소속 선교사로서 일하기 시작함. 자바 수마트라(인도네시아)중심으로 중국인 상대로 선교함. 자바 수마트라에서 - 마카오로 선교지 옮김 - 네델란드 선교회를 떠나 프리렌쓰 미션네리로서 활동함. 1832년에 선교의 방향을 한국의 서해안으로 돌려 7월 17일에 황해도 - 백령도 - 원산도에 도착. 홍주 목사 이민회를 통해 왕에게 성경과 서적 보냄. 홍주 목사 서생 양씨의 도움을 얻어 최초로 성경번역(주기도문)


(2) 토마스 목사(정식적으로 안수 받아 오신 목사)의 내한
큐츠라프 목사가 아산만에 온지 33년만에 온 최초의 개신교 순교자는 스코틀랜드 사람 토마스이다(런던 선교회에서 1863년 중국 상해 선교사로 파송되어 왔는데 1865년 중국 지프로 옮겼다. 이때 한국 선교를 자청했다. 1866년 제너럴 셔먼호가 한국을 간다는 소리를 듣고 통역관으로 자청. 관군이 화공을 맞고 대동강에서 죽음) 이때 배가 타던 때 한문 성경을 강 언덕에 던졌는데 관군 중 하나가 한 권을 가지고 있는데 조카가 숭실학교를 졸업하고 (이영태) 나중 이늘서 박사가 성경번역시 도와주었다. 토마스 목사를 배에서 끌어내 한강 근처에서 목을 쳐 죽임. 목을 친 사람은 박춘곤인데 나중에 회개하여 1899년 세례받아 평양 초대 교인이 됨. 그후 평양은 한국 개신교의 예루살렘이라 일컬어짐.

(3) 로쓰와 멕킨타이어의 고려문 전도(런던 선교회 소속)
중국 만주의 우장과 봉천(심양)에는 한국 교회 설립에 전초기지 역할을 했다. 특별히 우장은 최초의 한인 수세자를 배출한 곳이다. 봉천은 최초의 한국 성서가 번역된 곳. 로쓰와 멕킨타이어는 처남 매부지간(중국 우장을 거점으로 한국 선교 연구함) 마침 조선의 의주 청년 4사람이, 한약 약장사를 위장하여 중국을 방문했다. 의주에서 강 건너 50킬로미터 떨어진 고려문에 갔는데 마침 1873년 봄 로쓰 목사가 중국인 서기를 대동하고 고려문 방문. 여기서 의주 청년들을 만남. 로쓰는 그들에게 후한 급료를 주는 대신 한국언어와 역사를 가르쳐 달라고 함.

 


제3장 : 한국 기독교인의 발생과 집회


백홍준과 서상륜의 수세와 전도 활동

우장으로 백홍준, 이응찬, 이성하, 김진기 4명이 따라감. 로쓰목사에게 한글을 가르쳐 주고 목사님은 이들에게 보수와 문물을 줌. 처음에는 4명이 잘 안받아 들였다. 왜냐하면 그때 서학은 국법으로 사학이라 하여 핍박했기 때문이다. 로쓰목사는 1874년에 한영회화라는 책을 만들었고 1875년에는 예수 성교 문답을 만들고 1879년에는 한국지 그 역사, 생활, 습관이라는 책을 씀. 만난지 3년째 1876년에 이들 4청년이 수세를 받음(우장에서)- 한국 최초의 개신교 세례자
이들이 세례 받은 후 로쓰와 4청년은 한국 성서 번역에 착수해서 1882년 봄에 요한, 누가복음을 번역 1883년에는 마태, 마가복음을 번역했다. 이때 의주청년 서상륜이 찾아옴. 서상륜은 일찍이 조실부모하고 친척을 따라 홍삼 장사하러 중국을 따라오가다 콜레라에 걸렸는데 맥킨타이어가 그를 살게해 줌. 그래서 이후에 성경번역을 로쓰와 4명과 함께 귀한 역할을 함. 그때 공관복음서를 번역 출판했는데 국내에 배포하기 힘든 상태였다. 서상륜이 이것을 짊어지고 여기저기 배포함. 이때 3000권 찍어낸 것을 로쓰역이라 한다. 이것이 관과에 알려져 위험해지자 서경조(서상륜삼춘)과 둘이서 황해도 송천으로 위험을 옮김. 여기서 송천 솔래 교회를 개척함(1884년- 조선 최초의 개신 교회) 1884년 또 다시 성경을 만들었는데 로쓰목사가 쪽복음 6천부를 제물포(인천)로 보냄(최초의 밀수품)
조선은 당시 독일사람인 멜렌 도르프라는 사람을 현재 관세청장이라는 자리를 줘서 이 사람으로 하여금 관세 업무를 맡게 함.(조선은 너무 외교를 못했기 때문) 이때 멜렌 도르프가 서상륜을 불렀다.(왜냐하면 제물포에 성경 6천권이 와 있어서) 로쓰는 백홍준과 이성하에게 편지를 써서 멜렌 도르프에게 잘봐 달라고 부탁. 폐지/노끈 성경 (성경을 안 들키기 위해 폐지처럼 하기 위해 제본 안하고 놔두고, 제본안하고 노끈처럼 꽈서 나둔 것)

일본을 통한 전도

이수정의 개종과 성서 번역 - 이수정은 한국에서 임오군란(군인들의 월급안에 모래석은 사건)후 일본에 사절단으로 파견 되는데 박영효, 이수정이 사절단으로 일본으로 가게 됨. 이수정은 현판이라는 자리에 있었는데 가서 안 돌아 오게 됨. 일본 동경 대학의 조선과 교수로 눌러 앉음. 쓰다 목사님을 만나게 되는데 그 집에 가서 마태복음 산상설교 벽화를 보고 감명 받고 영접함. 쓰다는 이수정을 야스까와 목사에게 소개한다. 1883년 4월에 마침내 야스까와 목사에게서 세례를 받음.
일본 성서 공회 루미스 목사가 이 소식에 기뻐함. 이수정을 만나 도움을 받아 성서 번역을 시작해서 1883년 - 4복음서와 행전 번역이 나왔고 1885년 마가복음이 출간되었다.(이수정판) 일본의 감리교, 장로교 선교사들이 본국에다가 조선에 선교사를 보내 달라고 부탁.
1885년 4월에 그래서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오게 되는데(그들은 제물포 도착당시 이수정판 성경을 갖고 있었다) 오기 전에 일본에서 조선 성경을 보고 기뻐했다.

*참조 : 우리 나라가 장로교는 미국, 세계보다 더 크다.

 

제4장 : 한국 프로 테스탄트 형성과 부흥


개국과 미국 선교사들의 내한

중국에 의료 선교하던 알렌 박사가 1884년 9월 20일에 의료 선교사로 자청해서 우리나라에 옴. 같은해 1884년 10월 4일에 갑신정변이 일어났다.

* 갑신정변 :우리 나라 최초의 우체국을 세워놓고 낙성식을 하는데 내노라 하는 우리 나라 인물들이 참석했는데 수구파와 개화당이 있었는데 개화당 사람 이 민영익을 칼로 찔렀음. 개화당이 3일 동안 천하를 이루다가 다시 흩어짐. 이때 알렌이 민영익을 고침. 이것 때문에 알렌의 인기는 치솟음. 알렌은 그래서 궁중 시의가 되어 모든 왕족, 고관을 치료함. 민영익은 알렌에게 고맙다는 표시로 10만냥을 사례함. 이 돈으로 알렌은 왕립 광혜원을 설립. 이 병원의 설립 2주 후 고종황제가 제중원이라는 이름을 줌.

* 제중원 - 나중 세브란스 병원으로 개명. 당시 의대가 파리 날렸는데 백정인 白哥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 아들이 콜레라에 걸려 죽게 되었는데 세브란스 의사들이 살려 주었다. 의사들이 그 아들을 세브란스 의사로 만듬. 1885년 4월 언더우드, 아펜젤러가 선교사로 오는데 문을 열어주는 도움을 주게 되는 배경은 알렌이 병원으로 정부에 호의를 준 영향이 크다.

* 교육(멜렌 도르프) : 영어 강습소 생김. 우리 나라 조정에서 외교관, 통역관 양성 목적.

* 한국정부 : 미국 정부에게 현대 교육자를 보내 달라고 요청. 헐버트 1884년에 육영공원(영재를 교육하는 공적인 학원)- 최초의 미국식 학교인데 주로 정부의 고위 관리들이 다님. 후에 나라에서 이런 학원을 닫게하자 선교사들이 교육에 직접뜀.


선교 활동과 조직 교회의 출현

1885년 4월 5일(부활절). 알렌의 뒤를 이어 호레스 언더우드와 아펜 젤러가 우리 나라에 도착함.(그때는 당장 전도할 수 있는 처지는 아니었다.) 1887년에 언더우드가 솔래 교회에 가서 7명의 신도에게 세례를 베품. 1887년 9 월 27일에 언드우드가 사랑방에서 예배를 드림.(14명과 같이)- 이 교회가 세문안 교회의 전신이다.

1887년 10월 9일에 아펜젤러는 또 언더우드처럼 사랑방에서 예배를 드렸다(정동 제일교회의 전신이다.) 1887년 아펜젤러는 정동 자택에서 교회만 아니라 학교를 세움(2명으로 시작)- 1주년이 되는 때에 고종황제께서 배재학당(인재를 배출하는)이라는 이름을 줌. (언더우드, 아펜젤러가 들어온 후 들어온 선교사) 스크렌턴(감리교 의료 선교사)의 어머니 미세스 스크렌턴이 자기 사랑방에서 정부 고관 부인 2사람을 데리고 학교 시작- 이화여대 전신(1885)
1886년에 고종 황비의 아내 민비가 이름을 줬는데 이화학당이라 했다. 이런 학교들에는 학생이 별로 없었는데 그 이유는 선교사들에 대한 오해가 많았다.
당시 선교사들은 모유보다 우유를 먹이는 등 자기들도 먹고(악성 우유통 루머 번짐) 광이문(서소문)밖에 콜레라 환자들을 버렸는데 스크렌턴의 모친이 그 중 1명의 소녀를 데리고 와서 아들이 고쳐서 이 학교 3회 졸업 소녀가 된다.
1886년 정동의 언더우드 사랑방에서 고아원 스타일의 학교를 시작했는데 1891년에 와서 예수교 학교로 바뀌고 1905년에 경신 중·고등학교로 바뀜. 나중에 정신 여자 중·고등학교로 바뀜. 북한에는 숭실 전문학교, 숭의 전문 학교, 광성 중고등학교. 1892년에는 미구 남 장로교에서 파송한 레이놀즈와 6명의 선교사가 입국해 전라도 쪽에서 선교활동을 했는데 “예수병원”을 설립했다.
1893년 카나다 연합교회에서 와서 함경도 선교함. 동년 동양 선교회가 들어와 성결교회를 시작. 동년은 영국 구세군이 들어와 선교 시작. 1903년에서 1905년 사이에 하와이로 이민가는 사람이 늘었다.(당시 7300명 정도였는데 이 중 윤은현, 손흥조가 일본에 들렸다가 안식교 전도사를 만나서 돌아와 한국에서 안식교가 시작된다.)


성서와 성례전

한국의 프로테스탄트 - 성서와 관련하여 출발했다고 얘기할 수 있다. 1885년 4월에 인천에 처음 도착한 언더우드와 아펜젤러의 손에는 이미 한국어로 번역된 성서가 있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성서 공부에 관한 열정이 대단하였다. 한 선교사가 말하길 “이세상의 모든 성서가 불타 없어져도 한국인 5명만 모이면 성서를 재구성할 수 있을 것이다.”


교회란

* 루터 : 하나님의 말씀이 바르게 선포되고 성례전이 올바르게 집행되어야 존재 가능하다고 힘.
* 칼빈 : 기독교 강요에서 제4부에 보면 루터와 마찬가지로 말씀과 성례전의 중요성을 얘기함.


선교지역의 분할과 선교 정책

한국에는 많은 선교회가 조직됨. 많은 교단에서 선교지 분할 정책을 쓰게 됨.
남장로교는 전라도와 충청도 선교. 이 외에 이미 선교가 시작된 곳은 북장로교가 맡음. 부산(경상도)은 호주 장로교, 함경도는 캐나다 장로교가 맡음. 1905년 을사보호 조약 체결. 장로교와 감리교 간에도 지역 조정이 있었다. 연변 중심의 지역은 북감리교, 평북 지역은 북장로교. 1908년 남감리교는 강원 북부 3분의 2와 경기도 서울 이북을 장로교로부터 모두 떠맡게 됨. 북장로교는 강원 남부 3분의 1, 서울 동부, 서울의 남감리교 지역을 다 떠 맡음.

* 선교 정책을 보면 - 한국에 온 선교사들의 신학 사상은 보수적, 경건주의자들 이었다.
이때 선교사들은 중국에 주재하던 선교사 John Nevius를 초청하여(1890년) 그들과 함께 지내면서 선교사업을 위한 원칙을 세웠다.

* 삼자(三自)정책
1)Self-propagation 자력전도 : 스스로 전도하게 한다.
2)Self-goverment 자치제도 : 스스로가 교회를 관리, 운영하게 한다. 자치제도 마련.
3)Self-suport 자치자립 : 자급목회를 하게 한다.


1907년대 부흥운동

1882년 임오군란(직업군의 군량미 부정 사건), 1884년 갑신정변(개혁파와 수구파간의 구테타)
1895년 청·일 전쟁. 1905년 러·일 전쟁
이러한 일로 해서 우리 나라 사람들은 소망이 없었고 의지할 것도 없었다. 정치, 경제, 도덕, 정신적으로 절망 가운데 빠짐. 그래서 평양에서 부흥운동이 일어났다. 1895년 서울에 주재하던 선교사가 “한국의 실정을 변해가며 일반 백성들 사이에 각성의 기미가 보인다”고 보고함. 1895년 당시 우리 나라 기독교 인구가 530명 1896년에는 3276명, 1900년대 와서는 7690명으로 늘어났다.

* 교회성장 요인들 - 당시 황실 고위층과 선교사들 간에 친밀한 관계였다. 1895년 일본 자객에 의해서 민비가 살해되자 위협을 느낀 고종황제는 피신을 하였는데 그 어느 누구도 믿지 못하였지만 선교사들의 말만은 믿었다. 한국에는 미국인들이 250명이 있었는데 그 중 절반 정도가 선교사였다. 선교사들은 선교 사역 뿐 아니라 조선 독립운동에도 힘썼다. 그래서 일본인들에게는 선교사들이 눈에 가시였다.
당시 배제학당의 교사였던 이승만을 비롯, 서재필, 윤치호를 중심으로 해서 배제학당 안에 소위 ‘협성회’를 조직해서 애국운동을 벌였다. 이 협성회가 우리나라 최초의 청년 운동의 시발이었다. 그러나 좀더 체계적인 것은 1893년 10월 ‘황성 기독교 청년회’가 조직됨.(오늘날의 Y.M.C.A가 됨) 서울 종로 2가에 ‘황성 기독교 청년회’는 3층 양옥을 건립하고 황태자(순종)가 여기에 참석해 낙성식을 치뤘다. 황제를 비롯해 이또오 히로부미와 그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기부금을 내었다. 이 청년회는 종교의 차원을 넘어 체육, 공업 교육에도 영향을 끼쳤다. 1896년에 서재필은 독립 신문을 발간한다. 그는 그 신문을 통해 대중계몽에 성공을 하고 ‘독립협회’를 조직한다. 그리고 중국 사신이 오면 환영하던 모화관을 없애고 그곳에 독립문을 세워 독립사상을 고취시킨다.
또한 서재필, 윤치호, 홍정우 등은 주일마다 집회를 열어 자유사상과 민주주의를 고취시킴. 우국열사들이 정부의 부정부패를 공격하자 저들은 심한 불쾌감을 갖고 마침내 1898년 12월 독립협회를 해산시켰다. 선교사들은 감옥을 방문해 그들에게 전도를 해서 1901년 3월에 17명중에 12사람이 함께 세례를 받는다. 선교사들은 계속해서 문서 전도와 문예 활동을 통해 우리나라 사람들의 개화 운동에 힘쓰게 되는데 1899년 언더우드와 뜻있는 사람들이 ‘성교서회’를 건립(후에 기독교 서회로 바뀜)하여 正音(한글)으로 문서를 발행한다. 1903년에는 이 기독교서회를 통한 출판부수가 25만부나 되었다. 마침내 1907년 우리 나라에서 부흥회가 일어났다.
이 부흥회가 일어나기 전 1903년에 원산에서 감리교 선교사인 하디가 기도하던 중 영감을 받았다고 그 체험을 동료선교사들에게 간증을 했는데 이것이 평양선교사들에게도 퍼져 그 이후 장로교, 감리교 선교사가 함께 모여 합동 집회를 연다. 그래서 이들은 마침내 1907년 1월 6일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집회를 연다. 이 교회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은혜를 사모한다.
블레오 선교사가 고전 12:27의 말씀을 읽자 불이 붙어서 길선주 장로의 간증을 통한 회개의 역사가 일어남. 이 부흥운동은 한국교회의 양상을 바꿔 놓았다. 인격적, 소박한, 공동체적신앙으로 바뀌어 졌다. 1900년대 영국 웨일즈 지방의 탄광. 무기력함과 무희망적인 삶을 살던 광부들. 그들에게 복음이 전해짐. 180도 달라지는 그들의 삶이 일이 미국을 통해 우리 나라에 들어와 1907년 부흥운동을 갖게 함.


교회 행정 기구의 설정

1907년 9월 평양에서 장로교 독노회 창설. 이때 평양 신학교에서 배출된 7인의 목사가 안수를 받는다. (서경조, 이기풍, 길선주, 한석진, 송인서, 방기창, 한승백) 1907년~1910년 사이에 한국 교회는 일본, 중국, 만주, 시베리아, 미국 등에 선교사를 파송한다. 그 후 100명 구령운동이 일어남.
감리교는 1901년 김창식과 김기방이 안수를 받는다. 감리교는 처음부터 남·북 감리교 선교사들에 의해서 선교가 시작되었는데 이들이 독자적인 노선을 걷다가 1907년에 합동해서 하나의 조선 감리교를 세우고 목회자 양성을 위해서 신학교를 세움. ‘협성 신학교’ 그 후에 와서 1930년대에 기독교 조선 감리회라 이름을 바꿈.

 

제5장 : 일제 치하에서의 교회


십자가를 걸머진 교회

우리 나라는 민족운동이나 독립운동은 교회의 움직임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기독교의 교리 유일신 사상과 또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았기 때문에 인간의 자유와 존엄성을 귀하게 여겼다. 이러한 사상 때문에 일제는 기독교를 다른 종교보다 더 탄압했다. 그 당시 교회는 일본 침략에 항거하는 강력한 조직체가 되었고 이를 눈치챈 일제는 기독교를 말살하려는 음모를 꾸밈.
쪾 기독교 말살 정책 - 1910년 12월 27일 일본의 데라우찌 총독이 압록강 철교를 놓고 그 준공식에 참석하러 갔다. 그 곳에 가던 기차는 선천역에 한 번 정지하게 된다. 이때 기독교 지도자들이 데라우찌를 암살한 음모를 꾸몄다고 거짓 소문을 퍼뜨려 많은 지도자들을 체포하였다. 그 당시 인구 2000만명 중 크리스챤이 18만명이 넘었다. 700명을 체포하고 그 가운데서 105인을 유죄 판결을 내렸다. 105인은 여러차례 감형으로 형기를 마치고 나오게 된다. 105인중 94명이 기독교인이었다. 이것이 105인 사건이다. 저들이 평양역에 도착했을 때 9000명이 나와서 그들을 환영했다.


3.1운동을 통한 교회의 애국 운동.

1918년 파리에서 세계 평화 회의가 열렸을 때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민족 자결 주의’를 내세웠다.
이것으로 인해 우리 민족은 여러 가지 생각을 하면서 ‘왜 우리가 일제의 압력 하에 살아야 하는가?’ 라는 회의를 품게됨. 그후 1년이 지난 1919년 3.1운동이 일어났을 때 33인중 16명이 크리스챤이었다.

대부분 기독교인이 앞장섰고 이 운동은 비폭력 무저항주의로 기독교 정신에 의해 진행되었다. 일본의 헌병과 경찰들은 기독교인들을 투옥시키고, 체포, 교회를 파괴시킴.
이 운동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4월 15일 12시경 수원 부근 제암리 교회에 일본헌병이 몰려와 교민들을 모이게 하고 창문에 못을 박고 교회 주변에 불을 지르고 나오려는 사람들은 칼로 찌르고 죽였다. 많은 교회가 이와 같은 일을 당함. 1919년 일본 보고에 의하면 파괴된 교회가 17개, 일부 파괴된 교회는 24개, 그 외에 교회에 큰 손해를 본 곳이 41개, 교회 재산 피해가 3만불이 었다.

장로교 보고에 의해 체포된 목사, 장로수가 134명 교인수가 3천 8백 4명, 사살된 신도수가 47명, 감리교 기타 다른 교회의 신도들을 합친수는 타종교의 신도 숫자를 합친 숫자보다 많았다. 이 일을 통해 교회는 많은 피해를 봤지만 또한 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돌아오게 되었다.
선교사의 관여도
일제는 독립운동 배후에 선교사들이 관여하고, 조종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당시 선교사들은 조선 독립운동의 열렬한 후원자였다. 평양 숭실학교에 모우리 모펫이라는 교수가 있었는데 일제가 그를 잡아갔다. 피신하는 학생들을 은둔시켜 준 죄였다. 호주에서 온 선교사들도 독립운동 시위에 동향을 미국 선교회에 보고하고 총독과 일제의 잔악상을 세계에 알렸다.

 

제6장 : 한국 교회의 수난사


신사참배의 강요와 박해

쪾 신사참배는 일본천왕과 전쟁 영웅들에 대한 경배이다.
쪾 1930년 만주사변 1936년 중국 본토 침략 전쟁 : 일본은 전쟁을 일으키고 ‘내선 일체’ 즉 일본과 조선이 하나가 될 수 있는 방법은 신사참배라고 생각하였다. 평양부터 점령해서 신사참배 시작 1935년 11월 평안남도 일본 지사 야스다께는 도내에 있는 각종학교장 회의를 소집하고 모든 학교는 신사참배를 해야 한다고 명령함. 이 회의에 참석했던 숭실전문학교 교장 Mccune은 한국인 목사, 장로를 소집하고 신사참배를 할 수 없다고 단호한 결의를 하게된다. 이러한 소식을 들은 야스다께는 Muccne를 면직시키고 미국으로 추방시킴. 그 후에도 일제는 대대적인 신사참배를 강요함. 미션 스쿨에 대해 많은 간섭을 하고 교단 총회 소집도 경찰의 허락 없이는 소집 할 수 없었고 예배도 일본 국회에서 일본 종교 단체법이 통과하게 된다.

* 신사란 : 종교의 범위를 초월한 것.

* 신도란 : 절대의 도로써 모든 일본 국민은 반드시 신사 참배를 해야하는 것. 이에 순종치 않는 자는 절대 용납할 수 없다는 내용도 포함함.

* 감리교 : 지도자의 대부분이 신사 참배가 국가적 의식이라는 것에 동의함. 감리교 존속 가능케 함.

* 장로교 : 굴복할 수 밖에 없었다. 1938년 9월 9일 서문밖교회에서 열린 장로교 27회 총회에서 여기에 참석한 사람들 모두에게 압력을 가해 신사참배를 합법화하게 함. 주기철, 이기선 등은 신사참배 반대. 일본 경찰은 총재를 만나 회유책을 쓰고 예배당 분위기는 일본 경찰이 안팎으로 감시하는 살벌한 분위기였다.
193명이 이 총회에 참석했는데 결론은 신사 참배를 하는 것으로 끝남. 그 후에도 일제는 계속 교활한 방법을 씀. 평양신학교 패쇄, 2천여 신도 투옥, 50여 명의 성직자 순교. 각 교단이 일제에 굴복한 다음 한국 교회 전체는 공식적으로 신사참배를 하는 양태를 보여줌.
전체 교회의 88%가 교회에다 일장기를 게양하는 탑을 세우고 일본기에 대한 경례를 하는 교회는 96%였고 동방 요배 실시 교회는 96%, 황국 시민 재창을 93%가 했고 예장은 애국 헌납 기성회를 조직해 그 기성회 이름으로 성금을 모아 일본 육군 비행기를 사주고, 총을 사주었으며, 교회의 종 1540개를 바쳤다.


일제의 단말마적 교회 탄압

1895년 청, 일 전쟁, 1905년 러,일 전쟁, 1930년 만주사변, 1936년 중,일전쟁, 1941년 태평양 전쟁
일본은 여러차례 승리로 기세 등등해짐. 우리 나라는 지리적으로 ‘샌드위치’였기 때문에 많은 피해를 봄. 이러한 때 일제는 신사참배 강요, 저항하면 투옥. 구약의 모세 5경과 요한계시록을 그들의 국시사상에 어긋남을 알고 읽지도, 가르치지도 못하게 함.

사도신조 중에 ‘저리로써 산자와 죽은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를 뺌. 찬송가도 거슬리는 것 모두 빼버리고 예배 중에도 천왕에게 목례하고, 일장기를 달고, 목사에게 일본 군복을 입도록 함. 1943년에는 주일 오후 예배와 삼일 예배를 막음.
침례교는 재림사상이 강한데 1942년 전국 모든 침례교를 폐쇄시킴. 성결교도 마찬가지로 재림 사상 때문에 1943에 문을 닫게 함. 그래서 모두 뿔뿔히 흩어지고 다른 교단으로 옮김. 많은 성결교 침례교 성직자들이 체포, 구금됨. 일제는 그들의 욕구 충족을 위해 탄압하고 전쟁을 일으키고 하는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역사는 계속 일어나고 있었다.


교회 분열의 징조

1930년대부터 분열의 징조가 생김.
쪾 징조는 지방적 요소와 신학적 요소
쪾 장로교 : 평양을 중심으로 관서지방이 장로교가 많았다. 이곳은 신학적으로 보수적인 경향이었다.

1911년 연희전문학교 보조문제로 총회를 열었는데 평양 중심의 교회들은 이 학교가 남쪽 지방에 있다는 이유로 보조를 반대했다. 1934년에 와서는 북쪽에서 남쪽의 총재들에게 진보 또는 근대주의자들이라고 비난 이에 맞서 남쪽은 북쪽교회에게 교회 전제주의자들이라고 혹평하였다.

그 당시 미국과 일본에 유학을 다녀온 사람들은 신학의 깊이와 넓이가 달랐다. 이들은 너무나도 근본적인 한국신학에 대해 비판을 하기 시작. 그래서 평양 신학교는 외국에서 공부하고 온 사람들을 싫어함. 평양신학교는 같은 교단의 사람이라도 유학생은 별과에 들어가 공부를 시킨 후 목사로 만들었다.

* 감리교 : 1930대에 제 1차 총회를 소집하고 여기서 채택한 것이 “기독교의 근본원리가 시대를 따라 다른 형식으로 표명되었고, 우리 교회의 회원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아무런 교리적 체험을 요구하지 않는다. 우리의 중요한 요구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충성과 그를 따르는 다짐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입회 조건은 신학적이기보다는 도덕적이요 신령적인 면을 강조한다.” 이러한 것을 볼 때 감리교는 좀 더 자유주의적이고 개방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평양신학교의 당시 교장이었던 박형용 박사와 그리고 숭인 상업학교의 김재준 박사는 그 당시 신학논쟁의 거두들이었다. 박형용은 미국 프린스턴 대학의 극 보수적인 신학교수의 영향을 받아 성서 무오설과 축자 영감설의 교육을 받았다. 김재준은 같은 곳에서 공부하였는데 박씨와는 달리 자유주의적이었다. 그는 한국교회 신학의 부재에 대해 비판하였다. 이 논쟁이 계속되다가 1934년과 1935년 장로교 총회의 문제로 대두함.

* 김영주 : 모세 5경 저작설 부인

* 김춘배 : 여권운동에 대한 자유주의적 해석을 함.(박씨는 이를 징계에 처함이 옳다고 했다) 1935년 Abingdon 주석이 나왔을 때 감리교의 류형기 감독이 그것을 편집, 번역하였다. 이 일을 채필근, 한경직, 송창근이 같이 했는데 이 책이 아주 자유주의적이어서 번역한 자들에게 공개사과를 요구하고 Abingdon주석을 교인들로 하여금 사지도 보지도 못하게 함. 점점 신학적으로 개방적이 되어갔다.


교회내의 난기류

1920년대부터 지적인 변화, 경제적 빈곤, 일제의 탄압심화등으로 목회자 양성이 쉽지 않았다.
그 당시 소설가 이광수 왈 “ 기독교는 이성을 경멸, 종교외의 과학, 모든 다른 사상을 경시하는 풍조를 낳아서 현세를 무시하고 죽어서 천당만 가려고 든다”라고 혹평. 그 때 사회는 소망이 없었으므로 목사들은 재림, 즉 이 세상 보다는 저 세상을 바라는 설교를 했다.
이러한 때 신비주의자들 등장 - 소망을 심어줌.

* 이용도 목사 : 협성신학교 졸업. 감리교 목사. 교파 초월 부흥사역. 각 교회를 돌아다니며 민족의 고난에 울었고 교회 형식주의를 비판. 전형적인 경건주의자의 모델. 진리는 말에 있지 않고 삶에 있다고 함. 종교는 설교가 아니라 곧 삶이다. 믿음보다 사랑에 진리가 있다. 요한 복음서를 제일로 생각. 그는 무조건적인 사랑을 표방했고 심지어는 사탄, 불경, 사회주의 책에도 진리가 있을 수 있다고 강조. 신학과 기독교 교리를 공격함으로서 신비주의 공통의 오류에 빠짐. 그의 절대적인 사랑은 나무랄 데가 없지만 사랑의 융합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혈관적 연관을 잇는다고 믿고 한걸음 더 나아가 그리스도와 자기 자신을 동일시 여김.
이때 한국교회는 이용도 목사에게 금종령을 내렸고 평양 장로교에서는 그를 부흥사로 초청하지 못하도록 함. 그리고 그가 속해있던 감리교는 1933년 그에게 휴직 처분함. 얼마후 결핵으로 사망.

* 길선주 목사 : 계시록 1만 2백번을 독파. 신구약 성서를 30독. 절망과 고통 가운데 헤매는 사람들에게 주예수의 강림에 대해 말하고 설교의 주제는 항상‘마라나타’였다. 그에 의해 세례 받은 자는 3천명 또한 그의 설교를 듣고 기독교로 돌아온 자가 7만을 헤아렸다.

 


제 7장 : 한국 교회 재건과 분열


민족 분열과 교회의 분열

공산당에 대항해 투쟁하던 목사들 순교. 6.25때 여순 반란사건시 두 아들을 잃은 손양원 목사, 김익두, 남궁혁, 송창근 목사, 그리고 많은 신학자들과 지도자들이 납북됨.
6.25를 거치면서 파괴되고 손실된 교회 수가 장로교 152개, 감리교 84개, 성결교 27개 구세군이 4개 교회였고 순교자도 많았다. 6.25때 서울은 북괴에 동조하는 교인들이 몇 있었다. 경동교회에 출석하는 김욱이라는 자는 기독교 민주 동맹을 Y.M.C.A 건물에 걸고 김일성이 서울에 왔을 때 환영식을 함. 6.25가 나기 전 기독교 사상범으로 투옥되었던 최근식 목사는 교도소에서 나와 목사들을 고발해 북괴군에 의해 끌려가도록 했다.
1950년 4월 경남 부산을 중심으로 해서 장로교에서 교회 재건 운동이 있었다. 6.25가 터져서 모든 지방이 공산화가 되었을 때 교회 지도자들이 모두 부산으로 모임. 1951년 5월 당시에 정기 총회를 소집했으나, 이 때 출옥성도들과 일제 때 영창에 들어가지 않았던 사람들간에 의견 대립이 생김.
비고려파와 고려파 간에 싸움이 일어나고 결국 비고려파가 장로교에서 갈라져 나감. 싸움이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라 같은해 7월 서로 무서운 공격을 하기 시작했고 고려파는 그 당시 국회의원 22명의 명의로 비고려파를 용공단체라고 비난함. 1953년 기장과 예장이 갈라짐. 조선신학교의 김재준목사의 신학이 신신학이라고 해서 그 문제를 총회에 제출했고 신학생 51명이 학교를 나가 장신대를 세움. 1953년 정기 총회에서 조선신학교를 나온 사람은 목사 안수를 예장에서 받을 수 없다고 해서 갈라짐. 1958년에 같은 예장에서 통합, 합동으로 나뉘게 됨. 학교 부지 관계 때문에, 부정이 있었음을 들고 일어나서 박형용 박사를 지지하는 사람들과 반대하는 자들로 각각 나뉘게 되었다. 그 후 합동에서 분열이 이어져 많은 교단이 생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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