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립과 분열의 시대
한국은 해방의 기쁨을 맛보기도 전에 남북으로 갈라지는 아픔을 겪게 된다. 그리고 비극인 6.25를 겪게 된다. 이 전쟁은 우리 민족에게 이데올로기 대립의 극단을 달리게 했다. 뿐만 아니라 일제 만행의 몇 갑절이나 더 가혹한 공산주의 탄압 속에서 한국교회는 존폐의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특히 소련 공산당이 지배하게 된 북한은 실재로 교회의 재산을 박탈하거나 몰수해갔다. 이러한 야만적인 행위들은 김일성이 소련의 시녀로 정권을 잡고부터 더욱 극심해졌다. 그리고 용의주도하게 기독교를 뿌리 채 뽑아내는 작업을 진행했다.
공산주의는 무실론주의이기 때문에 기독교와는 공존할 수 없었다. 그래서 기독교는 조선민주당, 기독교사회민주당, 기독교 자유당을 결성하고 기독교 세력을 결집하여 공산당에 대항하고 반공투쟁을 했지만 조직적인 무력 탄압을 당해낼 수 없었다. 한편 남한교회는 일제에 의해서 급조된 일본기독교조선선교단이라는 이름으로 혼란 가운데서도 기왕 하나된 교회를 해방 후에도 계속 유지하려고 했다. 그래서 이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반민족적 작태를 회개하거나 반성하기는커녕 자신들의 간판인 일본기독교조선교단을 조선기독교회로 바꿔 달고 한국교회의 주도권 장악에 나섰다. 그래서 1945년 9월 새문안교회에서 남한만이라는 이름의 남부대회라는 이름으로 교단총회를 개최했다. 그리고 11월에 정동제일교회에서 조선기독교 남부대회가 열렸고 ‘일본기독교조선교단’에 관여했던 자들이 여전히 요직을 맡아서 자신들의 의견을 표출하였다. 그러나 1946년 정동제일교회에서 열린 제2회 조선기독교 남부대회를 끝으로 해체되고 각 교파교회로 환원되었다. 이와는 별도로 출옥한 성도들이 중심이 되어 교회를 재건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그리고 그해 6월 12일 서울의 승동교회에서 남부대회가 개최되었다.
여기서 결의한 사항은 헌법은 남북이 통일될 때까지 개정하지 않고 그대로 사용한다. 제 27회 총회가 범과한 신사참배 결의는 이를 취소한다. 여자장로직의 설정문제는 남북통일 총회 시까지 보류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신사참배에 대한 사과나 처리문제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었고 기록조차도 없었다. 더구나 신사참배를 반대한 이들이 주류에서 밀려나고 여전히 친일파들에 의해 교단이 움직여지자 총회에 대한 불신은 더욱 가중되었다. 돌이켜 볼 때 신사참배를 주도한 이들이 회개하고 자숙하면서 좀더 겸손하게 총회의 일치와 발전을 위해 협력했더라면 장로교 총회는 한층 더 발전했을 것이라는 안타까움이 남는다. 그러나 이들이 어물쩍 넘겨버리자 온간 고문과 협박 속에서도 순수한 신앙을 지키며 투쟁해왔던 사람들이 설자리가 없어져 버린 것이다. 이러한 와중에 북한에서 자유를 찾아온 목회자들이 가세하여 교회의 재건에 박차를 가했다. 그중 가장 활발한 곳은 김치선 목사의 남대문교회와 한경직목사의 영락교회가 있었다. 남대문교회는 복음전파와 사역과 구령사업에 전념했고 영락교회는 베다니 청년회를 조직하여 교회 봉사를 넘어서 혼탁한 사회문제까지도 뛰어들었다.
6.25전쟁은 인명과 재산 손실과 강산의 초토화뿐만 아니라 일제 강점기 때 당했던 수난보다 더욱 더 치욕적이고도 무서운 박해를 한국교회는 당해야 했다. 총칼을 든 공산당 앞에서 주님과 기독교를 부인하고 공산당을 찬양해야 하든지 아니면 집단 학살을 당하든지 택일해야 하는 끔찍한 일이 내 땅 내 조국 내 민족, 심지어는 내형제 부자(父子)사이에서 일어났던 것이다. 비록 전쟁은 끝났지만 우리 민족사에 가장 부끄러운 6.25전쟁으로 인해 장로교 152교회, 감리교 84교회, 성결교 27교회 그리고 구세군 4교회를 비롯하여 수많은 교회들이 파손되거나 손실되었고 많은 교계지도자들이 순교를 당하거나 납북되었다. 이렇게 해서 생긴 전쟁고아와 과부와 빈민들에게 세계기독교와 각종 사회단체는 구호의 손길을 보냈다. 역설적이지만 전쟁은 영적인 측면에서는 우리 민족에게 특별한 기회로 작용했다. 전쟁으로 만신창이가 된 조국을 바라보면서 왜 이런 비극을 맞이해야 하는지 깊은 자성의 목소리가 나왔다. 그리고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민중의 심령을 옥토로 만들었다. 이로 인해 처참한 비극 속에서도 다가온 거대한 도전을 목도한 신앙인들은 영적인 깊은 잠에서 깨어나 주님 앞에 겸손히 무릎을 꿇기 시작했다. 민족의 비극과 위기 앞에 철저한 회개와 자성의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다. 곽인전의 말을 빌면 “영적인 신앙의 부흥”은 시대적인 요청이었다고 보는 것이다. 이와 같은 영적 각성은 한국교회의 자발적인 참여와 외국의 유명한 부흥사들에 의해 확산되었다. 이렇게 하여 전쟁복구와 각종사회사업과 부흥운동과 교회재건이 이루어져갔던 것이다. 물론 긍정적인 모습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전술한 바와 같이 극심한 사회적인 혼란이 있었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이 각종 이단들도 기승을 부리기 시작한 것이다. 대표적인 이단들은 나운몽 장로의 용문산기도원, 더욱 악영향을 끼치고 있는 신흥종교로 등장한 통일교, 남대문교회 김치선목사로부터 피택 되고 안수 받은 전도관의 박태선 장로가 있다.
이 시대 보수주의를 대변하는 인물은 박형룡과 박윤선 및 고려신학교였고, 현대주의를 대변하는 인물은 김재준과 조선신학교였다. 박형룡, 박윤선, 고려신학교는 평양신학교의 정통주의를 끝까지 계승하려는 일에 생명으로 내걸었고, 김재준과 조선신학교는 정통주의 신학에 전투적으로 반기를 들었다. 둘의 신학은 첨예한 정치적 대립 상황에서 점점 더 이데올로기화되어 갔다. 1945년부터 김재준과 조선신학교를 중심으로 한 사람들은 성경의 무오성과 성경의 축자영감을 전투적으로 반대하면서 신학이 점점 더 이데올로기로 흐르고 말았다. 그 결과 1945년부터 1960년까지 신학적 갈등과 대립이 한국교계에 첨예하게 부상하게 되었고 그 중심에는 성경관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런 논쟁은 전혀 예측하지 못한 갑작스럽게 발생한 사건은 아니었다. 1934년 허버트 블레어 선교사는 세게에서 유랠르 찾을 수 없는 보수주의 나라 한국,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철저히 지키는 이 나라에 논쟁이 발생한다면 그것은 성경에 관한 논쟁일 것이라고 예측했었다. 그의 예견은 10년이 지난 1945년 현실로 나타났다. 이 논쟁의 중심에는 김재준과 박형룡이 자리 잡고 있었고, 조선신학교, 고려신학교, 장로회 신학교, 51인 조선신학생, 그리고 총회가 그 무대를 장식해 주었다.
해방이후 진행된 신학적 갈등으로 한국장로교회는 1950년대에 세 차례의 대분열을 경험해야 했다. 그리고 그 분열의 무대를 제공해 준 것은 조선신학교와 해방 이후 설립된 고려신학교와 장로회신학교였다. 그러나 이것은 장로교에 국한된 현상은 아니었다. 해방 후 감리교와 성결교도 장로교와 유사한 분열의 아픔을 겪어야 했다.
1952년 고려파가 신사참배문제로, 1953년 기장이 성경관 문제로 분립해 나간 후 한국장로교는 적어도 겉으로는 평온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외국에서 들려오는 이야기는 한국장로교가 가입해 있는 한국교회협의회의 모체 세계교회협의회가 신학적으로 정통적인 입장에서 이탈하여 세계의 신학조류를 따라 소위 새로운 노선으로 선회하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한국장로교는 1954년 8월 15일부터 31일까지 미국 일노이주 에반스톤에서 열린 제 2차 W.C.C. 총회에 명신홍과 김현정 두 사람을 대표로 파송하여 W.C.C의 신학적 입장과 성격을 정확히 파악한 후 보고해 줄 것을 요청했다. 장로교 외에도 감리교가 정식 대표를 파송했고 한국기독교연합회와 YMCA가 대표를 파송했다. 이 대회는 “세계의 희망은 그리스도이다”라는 주제로 전 세계 163개 개신교단 가운데 132교단과 헬라정교에서 파송한 1,242명의 대표들과 499명의 방청객을 포함, 2,400명이 참석한 가운데 에반스토의 노스웨스턴 대학에서 열렸다. 1948년 화란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제1차 W.C.C 대회 이후 6년만에 열린 것이다.
진정한 신앙의 일치에 토대를 두지 않은 교회의 연합은 복음의 순수성을 희생시켜 교회의 연합이 종교연합으로 흐를 위험이 항상 내재되어 왔다. 그렇다고 어떤 형태라고 할지라도 교회의 일치를 무시한 교권주의에 의한 분열이 정당화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신앙의 순수성 파괴 못지않게 교회의 일치를 파괴하는 행위는 교회가 경계해야 할 또 다른 기독교의 무서운 적이다. 기독교회는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며 동시에 교회의 일치를 존속시켜 가야 할 이중적인 책임을 부여 받았다. 이것은 1960년대 이후 정체성 파악의 시대로 돌입하는 한국교회가 감당해야 할 몫이다.
해방 후 장로교만 분열의 아픔을 겪은 것은 아니다. 한국의 주류교단으로 인정받고 있는 감리교, 성결교, 침례교 모두가 대립과 분열의 아픔을 겪었던 것이다. 이 교단들은 모두 재건과 대립과 분열이라는 수순을 겪고 오늘에 이른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들은 시대의 상황이 크게 작용한 것은 사실이지만 해방 후 신사참배 문제와 신학적인 문제와 정체성문제와 W.C.C. 에큐메니컬 문제, 그리고 주류와 비주류의 교권 문제에 직면했을 때마다 겸손히 엎드려 회개하고 낮아진 자세로 자신을 돌아보며 잘못을 서로 인정하고 화해하려는 노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일제의 탄압과 압박 속에 형극의 십자가, 어두운 터널을 통과했던 한국교회는 해방을 맞으면서 일제와 타협했던 이들과 끝까지 신앙을 지키려고 했던 이들, 교권주의자들과 반교권주의자들,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려고 하는 이들과 일치를 강조하는 자들 사이에 눈에 띄는 대립과 갈등이 표출되기 시작했다.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이 점에 있어서는 감리교, 성결교, 침례교 모두 예외가 아니었다.
역사는 우연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역사의 큰 수레를 돌리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이다. 그리고 인간을 그것의 도구로 사용하신다. 전혀 복음의 빛이 들어오지 않을 것 같았던 한국에 복음이 들어오고, 싹이 날 기미가 전혀 없는 척박한 환경임에도 불구하고 강력한 성려의 능력으로 은혜를 부어주신 하나님. 모질게 닥쳐오는 외부의 침략과 핍박 가운데서도 신앙으로 견디며 그 암흑의 시간을 기회의 시간으로 선하게 바꾸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다. 한국의 근대사를 말하면서 기독교를 언급하지 않는 것은 오히려 역사를 외면하는 것과 동일하다. 한국의 민족중의와 민주주의를 이끌었던 것, 그리고 애끓는 마음으로 해방을 외쳤던 모든 역사의 사건들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신앙에서 나온 것이다. 특별히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는 것은 쏟아져 들어오는 신학의 여러 사조들 가운데 성경만을 붙들고 자유주의에 굴복하지 않은 것이다. 이것은 정말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이다.
역사 가운데 일하시는 하나님을 보면서 소망을 갖는 것은 바른 신학을 유지하는 교단만이 건제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과연 무엇을 우리에게 보여주는가? 바른 신학만이 하나님의 일하시는 도구가 될 수 있으며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것이다. 개혁주의 신앙을 철저히 고수하는 총신의 신학이 얼마나 건전하며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는 것을 깨달았다. 바른 신학의 교단만이 그 명맥을 유지하며 신앙의 순결성을 지키는 역사적 사실을 보며 다시 한번 어깨가 무거워지짐을 느낀다.
한편 신앙을 지키는 일에 적극적인만큼 실천적인 면은 과연 하나님께서 기뻐하실까하는 반성을 해본다. 소위 보수신학이라는 교단의 약점이 바로 실천적인 문제이다. 실천이 없다면 바른 신학은 죽은 것과 방불하다. 세사의 기준으로 돌아가는 이 땅 가운데 오직 말씀을 붙들고 승부하는 실천적인 모습이 있어야 한다. 사회적인 책임에 대하여 뒷짐을 지고 있을 수는 없다. 세상의 빛이라고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처럼 사회적 책임에 민감해야 하며 소홀히 해서는 결코 안 된다.
또한 연합활동이 요구된다. 수없이 분열된 교단의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의 마음도 아프지 않겠는가? 그러나 연합을 위한 연합은 결코 안 된다. 순결성을 지키지 못하는 연합은 안 된는 것이다. 역사 가운데 일하시는 하나님의 열심이 본인으로 하여금 소망을 갖게 하며 다시 한번 창조주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겸손히 기도하게 만든다.
'신학과교회사 > 한국교회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국교회사] 천주교, 언제 어떻게 한국 전래됐나 (0) | 2017.09.15 |
---|---|
[한국교회사]한국교회의 새벽기도 유래 (1) | 2017.09.15 |
[한국기독교회사] 도전과 응전의 시대 (0) | 2017.09.13 |
[한국기독교회사] 민족주의 발흥과 기독교 사회개혁 (0) | 2017.09.13 |
[한국기독교회사] 제도적인 틀을 다지는 한국교회 (0) | 2017.09.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