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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사 / 천주교, 언제 어떻게 한국 전래됐나

 

임란때 왜군 종군신부 한국 땅 처음 밟아

앞에서 우리는 경교의 신라시대 전래설에 대해 검토하였다. 그렇다면 천주교는 어떻게 한국에까지 전래되었을까? 일반적으로 한국과 천주교와의 가장 오래된 접촉은 임진왜란(1592-1598) 당시인 1593년으로 알려져 있다. 일본에 천주교가 소개된 때는 종교개혁이 시작되고 30여년이 지난 1549년 7월이었다.

예수회(Jesuit) 선교사들은 로마 가톨릭 신앙 회복과 확산을 위해 아직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아시아로 진출했는데, 그 결과로 자비에르(Francisco de Xavier, 1506-1552)에 의해 이미 16세기에 일본에 천주교회가 소개된 것이다.

자비에르는 1541년 이래로 인도 고아(Goa)지방에서 활동하던 중 일본을 ‘땅 끝’으로 인식하고 1549년 7월에는 일본 규슈(九州)에 도착했는데, 이것이 일본에서의 천주교회와의 첫 접촉이 된다. 이때로부터 약 40년 후인 1592년 4월 14일(선조 25년)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조선을 침공했고, 약 20만 명의 왜군이 부산에 상륙했다. 이 중 약 2000여명은 천주교도로 알려져 있는데, 이들의 주둔지가 진해 근처 웅천(熊川)이었다.

천주교도로서 아우구스티누스라는 세례명을 가졌던 왜장 고시니 유키나가(小西行長)는 조선에 와 있는 천주교도들을 위해 일본 예수회의 코메즈(Pierre Comez)에게 신부 파견을 요청했고, 이 요청에 의해 내한한 신부가 세스페데스(Gregorio de Cespedes)였다. 스페인 신부였던 그가 조선의 남해안에 도착한 날이 1593년 12월 27일이었고, 웅천에 도착한 것은 다음날인 28일이었다.

그는 한국 땅을 밟은 첫 천주교 성직자이자 임진왜란을 목격한 유일한 서양인이었다. 이것이 한국과 천주교와의 첫 접촉이었다. 세스페데스는 종군신부의 자격으로 내한했으나 약 1년간 체류하면서 조선인에 대한 선교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밝혀졌다. 그는 경상도 일대의 해안지방에 머물면서 당시의 상황에 대한 4통의 서간문을 남겼는데, 이 편지는 한국외국어대학교 박철 총장에 의해 발굴되어 당시의 정황을 헤아리는 데 있어서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7년간 계속된 전화 속에서 일본에 잡혀간 조선인 포로 혹은 노예 중에 천주교에 입교한 이들이 많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1542-1616) 치하에서 천주교가 심한 탄압을 받았을 때 다수의 조선인들이 신앙을 지키며 순교자의 길을 선택하기도 했다. 더 세심한 연구가 요구되지만 임란 중에 일본에 잡혀간 조선인 중의 한 사람은 이탈리아로 가서 신학을 공부했다는 주장도 있다.

임진왜란을 통해 천주교, 그리고 천주교 신부와 접촉하게 되었지만 그 이상의 접촉이나 발전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이때부터 조선의 상황은 극동으로 진출했던 예수회 신부들에 의해 서구사회에 점차 소개되기 시작하였다. 또 조선에서도 서양에 대하여 그리고 서양 기독교에 대해 점차 눈을 뜨기 시작한다. 제한적이고 일부의 계층이라 할지라도. 이 점을 보여주는 한 가지 사례를 17세기 중엽의 문헌에서 확인할 수 있다. 비록 서양 기독교에 대한 인식은 보편적이지 못했지만 적어도 1653년 이전에 우리나라 관계(官界)가 그리스도교를 알고 있었음은 분명하다. 그 한 가지 흥미로운 단서를 하멜 일행의 내한과 그 심문 기록에서 찾을 수 있다. ‘네덜란드의 마르코 폴로’로 일컬어지는 하멜(Hendrick Hamel)과 그의 일행 64명이 1653년 7월 30일 대만을 떠나 일본 나가사키로 항해하던 중 예상치 못한 암초에 부딪혀 표류하던 중 그해 8월 16일 36명이 제주도에 상륙했다. 이들은 8월 21일 조선인 ‘총독’의 심문을 받았는데 하멜이 ‘총독’으로 칭했던 이가 다름 아닌 제주목사 이원진(李元鎭)이었다.

이원진은 이들을 조사한 보고서를 조정에 올렸는데, 이 보고서가 효종실록 제11권, 효종 4년 8월 6일(戊辰)조에 기재되어 있다. 이 날을 양력으로 환산하면 1653년 9월 26일이었다. 이 보고서에는 아주 흥미로운 대목이 나와 있다. 배가 좌초한 경위, 언어와 풍습의 차이, 선적물, 화란인들의 복장 등에 대해 보고한 후, “왜말 하는 자들을 시켜 ‘당신들은 서양의 길리시단자들인가?’라고 물어 보았더니 일동 모두가 ‘야야’라고 대답했다.”(使解 倭語者問之曰 爾是西洋吉利是段者乎 衆皆曰 耶耶)고 보고했다. 사실 이들은 암스테르담 출신으로 기독교신자였으니 이것은 거짓이 아니었다.

우리에게 흥미를 끄는 부분이 바로 이 ‘길리시단자’(吉利是段者)라는 단어인데, 이 말은 크리스천을 의미한다. ‘다시 읽는 하멜 표류’를 쓴 강준식씨에 의하면 이 단어는 포르투갈어 ‘크리스땅’의 음가를 복사한 일본어 기리시딴(吉利支丹)에서 온 말이라고 한다. 그 기원이야 어떻든 길리시단이라는 말은 야소(耶蘇), 곧 예수라는 말과 임진왜란 후 왜나라 관계의 실록에 자주 등장하는 단어라는 점에서 한국의 조정이나 관리들이 기독교의 실체를 어느 정도 인식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이원진이 ‘서양의’라는 수식어를 쓰고 있는 것을 그가 기독교를 서양에서 기원한 종교로 인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원진이 천주교와 개신교를 구별할 수 있는 안목이 있었는가는 알 수 없으나 당시 조선 관리들이 기독교를 인식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때는 알렌이 입국하기 231년 전의 일이었다.

(고신대 교수·역사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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