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사] / 천주교 언제 한국에 본격 소개됐나
‘종교’라기보단 ‘西學’ 인식 17세기 실학파들 영입운동
임진왜란 중에 일본에 체류하던 천주교 신부가 내한하기까지 했으나 천주교가 한국에 소개된 것은 중국에서 선교하던 예수회 선교사들을 통해서였다. 중국 선교의 대표적 인물이 마테오 리치(Matteo Ricci·1552∼1610)다. 그는 1582년 마카오에 왔고 이곳에서 중국어와 중국의 역사, 풍습을 연구하면서 중국선교의 문이 열리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중국 본토 입국이 가능해지자 1601년 베이징으로 가 천주당을 설립하고 서역의 과학 및 천주교 서적을 역간하며 포교에 힘썼다. 그의 선교방법은 흔히 ‘적응론’이라고 말하는데, 중국의 고유한 문화나 풍습에 기독교신앙을 적응시키는 방식이었다. 말하자면 유교와 기독교를 절충하여 그 문화적 충격을 제거함으로써 유교적 배경의 중국인들로 하여금 입교과정의 이념적 차이를 제거하고자 하는 시도였다.
“유교는 불교와는 적대적이지만 기독교에 대해서는 호의적으로 해석될 수 있다”고 보았던 그는 기독교가 유교적 가치를 훼손하기보다는 보완해 준다는 보유론(補儒論)의 입장이었다. 이미 마카오에서 한문 3만자를 터득했던 마테오 리치는 1603년 중국어로 ‘천주실의(De Deo Verax Disputatio·天主實義)’를 저술했다. 문자적으로 ‘하늘의 주인에 대한 참다운 교리’라는 의미였다. 이 책에서도 천주교 교리를 유교적 용어로 표현하면서 기독교 교리와 중국 전통문화의 갈등을 피하려고 했다.
한자문화권에서 가장 많이 읽힌 교리서인 이 책이 이수광(芝峰·1563∼1628)의 ‘지봉유설(芝峰類說)’과 유몽인(柳夢寅·1559∼1623)의 ‘어우야담(於于野談)’을 통해 17세기 초에 조선에 소개되었다. 이때부터 천주교 선교사들의 작품들은 종교라기보다는 서학(西學)이라는 학문으로 소개되기 시작했다.
서학을 받아들였던 대표적인 인물이 앞의 두 사람 외에도 ‘홍길동전’을 쓴 허균(許筠), ‘성호사설(星湖歲說)’을 쓴 이익(李瀷), 그리고 박지원(朴趾源), 박제가(朴齋家) 등이었다. ‘천학문답(天學問答)’을 쓴 안정복(安鼎福)이나 이헌경(李獻慶) 등은 서학을 비판한 바 있으나 천주교를 인식하고 있었다. 이들을 통해 천주교는 천주학(天主學), 서학(西學) 혹은 양학(洋學)이란 이름으로 소개된 것이다. 말하자면 17세기 후반부터 중국을 징검다리로 실학파들의 천주교 영입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천주학에 대한 연구가 활발할 때 이를 학문으로만이 아니라 신앙의 대상으로 받아들인 첫 인물이 허균이라는 주장이 있지만, 프랑스의 달레 신부는 그보다 후대 인물 홍유한(洪有漢)이 첫 천주교 신앙인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베이징을 방문하는 조선 사신들을 통해서도 천주교와의 접촉이 이루어진다. 서양문물에 대한 관심이 컸던 사신들은 서양선교사와 접촉하게 되는데, 정두원(鄭斗源)은 그 첫 인물로 알려져 있다. 인조 9년(1631) 진주사(陳奏使)의 자격으로 베이징에 갔던 그는 이탈리아 선교사 로드리게스(J. Rodriquez· 陸若漠)를 만났고 그를 통해 천리경, 자명종 등과 과학서적을 얻어 귀국한 바 있다. 그 후에는 이신명(1720), 홍대용(1766) 등이 중국에 체재하던 선교사들과 접촉하는데, 이들의 관심은 서양 문명이었다. 그러나 병자호란의 결과로 중국에 인질로 잡혀갔던 인조의 아들 소현세자(昭顯世子)는 이와 달랐다. 1637년부터 1644년까지 8년간 심양(瀋陽)에서 지내다가 1644년 청이 명(明)을 정복하고 베이징으로 천도할 때 함께 베이징으로 옮겨간 소현세자는 이곳에서 독일인 신부 탕약망(蕩若望·Adam Shall·1591∼1666)과 접촉하게 된다. 그를 통해 천주교로 개종한 소현세자는 1644년 11월 26일 베이징을 떠나 이듬해 2월 18일 귀국하였으나 70여일 후 학질로 세상을 떠났다. 비록 그 자신은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으나 천주교를 한국에 소개하지는 못했다.
이상과 같이 일본과 중국을 통한 여러 차례 천주교와의 접촉이 있었으나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이고 처음으로 영세를 받은 인물은 이승훈(李承薰)이었다. 권일신·권철신 형제, 정약전·정약용 형제, 그리고 이벽 등과 함께 경기도의 천진암(天眞庵) 주어사(走魚寺)에 모여 비밀히 천주학을 연구했던 이승훈은 1783년 그의 아버지 이동욱(李東郁)을 따라 동지사(冬至使)의 일원으로 베이징에 갔다. 그곳에서 예수교 선교사 그라몽(Louis de Grammont)과 접촉한 그는 기독교의 오묘한 교리와 도덕적 교훈에 끌려 1784년 2월 영세를 받았다.
그해 3월 여러 교리서를 가지고 귀국한 그는 이벽, 권철신, 권일신, 김범우 등에게 영세를 베풀었고, 서울 명례동(明禮洞) 김범우 집에서 종교적 목적의 모임을 시작했는데 이것이 보통 한국천주교회의 기원으로 인식되고 있다. 이때를 보통 1784년 말로 추측하는데 천주교는 이때를 한국천주교가 설립된 해로 공식화하고 있다. 이 모임은 후에 적발되어 해산당했는데 이 사건을 ‘을사추조적발사건(乙巳秋曹摘發事件)’이라고 부른다.
이들이 모여 첫 종교집회를 가졌던 명례동 김범우의 집터에는 지금의 명동성당이 서 있다. 1984년의 한국천주교 200주년은 이때로부터 산정된 것이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1984년 내한한 것도 이때를 기념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렇게 시작된 한국 천주교는 신해(1791), 신유(1801), 기해(1839), 병오(1846), 병인(1866)교난이라 불리는 다섯 차례의 심한 박해를 받았으나 오늘의 교회로 발전하고 있다.
(고신대 교수·역사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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