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사 / 개신교, 한국과 접촉하다


1832년 ‘짧은 방문’은둔의 땅에 복음 씨앗

서양인들은 한국에 대한 두 가지 상징적인 표현을 사용해 왔다. 첫째는 ‘조용한 아침의 나라(Land of Morning Calm)’였다. 한국의 옛 이름 ‘조선’(朝鮮)의 영역(英譯)이라고 할 수 있지만 동적이기보다는 정적인 19세기 조선에 대한 사실적 표현이었다. 다른 하나는 ‘은둔의 나라(Hermit Kingdom)’라는 표현이다. 일본 동경제국대학 동양학 교수였던 윌리엄 그리피스(William Griffis)가 처음 사용한 이 표현 또한 폐쇄적인 조선에 대한 외국인들의 인식을 반영하고 있었다.

조선말기 이양선(異樣船)이라고 불렀던 서양 선박이 출몰하였고, 탐험 혹은 측량이라는 이름으로 외국 함선이 한반도 연해로 접근해 오며 통상을 요구하자 쇄국은 우리 스스로를 지키는 방아책(防我策)으로 인식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믿음에 확신을 더해 준 사건이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에 침입한 병인양요(1866), 제너럴 셔먼호 사건을 기화로 미국의 아시아 함대를 강화도에 파견함으로 조선 관군과 충돌한 신미양요(1871), 독일 상인 오페르트의 남연군 묘 도굴사건(1869) 등이었다. 천주교의 박해도 따지고 보면 이런 서양을 배척하는 척양(斥洋)의 차원에서 이루어진 방아책의 일환이었다. 

대원군은 척화교서(斥和敎書)를 발표하고 서울 종로를 비롯하여 전국 곳곳에 척화비를 세우며 쇄국의 성을 쌓았으나 은둔의 나라로 향하는 복음의 빛을 거역할 수는 없었다. 조선은 약 10여 년간 지켜오던 쇄국의 녹슨 빗장을 열고 개항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때가 1876년이었다. 이 개국(開國)은 한국역사에서만이 아니라 한국교회사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역사의 변화의 시작이었다. 천주교에 이어서 기독교(개신교)가 서서히 한국으로 전파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개신교 복음의 사도 한국으로  

비록 한국에서 개신교와의 보다 구체적인 접촉은 개항 이후에 이루어지지만 그 이전에도 조선으로 향하는 복음의 사자들이 없지 않았다. 그 첫 인물이 1832년 7월 우리나라 해안으로 들어온 칼 귀츨라프(Karl Friedrich August Gutzlaff, 1803∼51)였다. 그는 우리나라에 온 첫 개신교 선교사였다. 내한 당시 귀츨라프는 중국 선교사였으나 그의 사역지는 중국만이 아니라 인도네시아의 자카르타, 태국, 일본, 티베트와 중앙아시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이었다. 그는 한자문화권에서는 곽실렵(郭實獵)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고, 중국을 사랑한 자(愛漢者) 혹은 선한 덕을 행하는 자(善德者)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귀츨라프는 독일 북부 프로이센 제국의 프리츠에서 출생한 유태계 독일인으로 루터교 목사였다. 경건주의의 지도자였던 프랑케가 설립한 학교에서 수학했다. 19세가 되는 1821년 4월부터 18개월 동안 베를린 선교신학교에서 공부했던 그는 경건주의의 깊은 영향을 받게 되고 선교에 대한 이상을 갖게 된다. 그가 접한 ‘바젤 선교잡지’도 그의 선교적 삶에 영향을 주었다. 그는 후에 베를린 대학에서도 짧은 기간 공부하게 되지만 언어적 재질이 있어 6개 국어를 작문할 수 있었고, 12개국의 언어를 구사할 수 있었다고 회고한 바 있다. 루터교 목사로서 선교사의 길을 갈망했던 그는 영국에서 모리슨 목사를 만난 이후 동양선교에 관심을 가졌고 1823년 ‘화란선교회’ 소속 선교사가 되었다. 

독일 경건주의의 영향을 받다

1826년 7월 이후에는 현재의 자카르타인 바타비아(Batavia)에서, 1828년에서 1831년까지는 현재의 태국인 사이암(Siam)에서, 그리고 1831년 이후에는 중국선교사로 일생 동안 봉사했다. 중국선교사인 그는 1831년과 1832년 그리고 1833년, 세 차례에 걸쳐 중국 해안을 탐색하였는데 한국 해안에 도착한 시기는 그의 두 번째 항해 때인 1832년 7월이었다. 상당한 의술까지 겸비했던 그는 동인도회사의 통역 겸 선의(船醫), 선목(船牧)으로 영국 상선 ‘로드 암허스트(Lord Amherst)’호를 타고 우리나라에까지 오게 된 것이다. 1832년 2월 27일 광둥(廣東)을 출발하여 타이완, 상하이 및 산둥반도를 거쳐 황해도를 가로질러 7월 17일 오전 10시경 황해도의 서해안 장산곶(長山串)에 도착하였다. 22일에는 녹도(鹿島)와 인근의 불모도(不毛島)를 거쳐 7월 25일 충남 보령시 오천면의 고대도(古代島)에 정박했다. 

귀츨라프는 홍주목사 이민회 등 조선 관리들에게 조선국왕에게 통상을 청원하는 서한과 선물을 보냈다. 선물은 한문으로 번역된 두 권의 성경과 전도책자로 추정되는 26종의 도리서(道理書), 그리고 망원경 등인데, 이를 순조왕에게 진상하도록 전달했다. 이들은 조정의 회신을 기다리는 동안, 곧 7월 25일부터 8월 11일까지 17일간 고대도 내항에 체류하면서 주민들에게 한문성경과 전도 문서를 배포했다. 또한 감자를 심어주고 재배법을 가르쳐 주기도 했다. 특히 이때 주기도문을 한글로 번역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비록 단편적인 것이지만 이것이 최초의 한글성경 번역이었다. 이것이 한국과 개신교 간 최초의 접촉이었다. 

조정으로부터 통상이 불가하다는 통보를 받은 귀츨라프 일행은 이곳을 떠나 남하하여 8월 17일 제주도 연안을 지나 오키나와를 거쳐 마카오로 돌아갔다. 귀츨라프가 우리나라에 체류한 기간은 꼭 한 달 정도에 지나지 않지만 이때의 방문 기록은 그의 ‘항해기’(Journal of the three voyages along the cost of China, in 1831, 1832 and 1833. With notices of Siam, Corea and Loo-Choo island)에 잘 나타나 있다.

(고신대 교수·역사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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