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사 / 한국교회 부흥운동(1900 - 1910)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중엽까지 주변의 중국, 일본, 러시아, 그리고 미국, 영국, 프랑스를 비롯한 서양열국이 한국을 가운데 두고 벌인 각축전은 정치, 사회분야 뿐만 아니라 한국기독교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는 요인이 되었다. 라토렛이 한국교회의 놀라운 성장에 있어서 번성과 쇠퇴는 부분적으로 내외적인 정치적 상황을 반영한다고 말한 것은 결코 빗나간 평가가 아니었다.
1903년 원산부흥운도, 1907년 평양 대부흥 운동, 그리고 1909년의 백만인 구령운동을 통하여 한국교회는 전에 없는 놀라운 성장을 경험하게 되었다. 평양을 중심으로 청일전쟁 이후 일기 시작한 영적 각성의 움직임이 ·1903년에는 하디를 통해 원산부흥운동으로 촉발되었고, 이것이 다시 원산부흥운동의 저변확대와 1907년의 평양대부흥운동의 발흥으로 이어져 한국교회에는 조나단에드워즈로 대변되는 미국의 제 1차 대각성운동, 웨일즈부흥운동, 인도의 부흥운동과 견줄 수 있는 놀라운 영적대가성운동이 발흥했다. 평양대부흥운동이 일어나고 2년후 1909년 일종의 전도운동인 백만인구령운동이 전국적으로 전개되었던 것이다.
이 영적 대각성 운동은 세 가지 면에서 독특한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첫째는 이 대각성운동이 당시 세계기독교계에서 일고 있는 부흥운동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어져야 한다는 사실이고, 둘째는 포스터가 적절히 표현한 것처럼 강대국들이 노리고 있는 “나봇의 포도원” 한반도를 둘러싼 중국, 러시아, 일본의 패권주의로 인한 정치적 위기가 한국인들로 하여금 복음을 받아들이기에 적합한 토양을 제공해 주었다는 사리이고, 셋째는 한국의 부흥운동은 일차적으로 네비우스 선교 정책의 일환으로 채택된 사경회 운동과 밀접한 연계성을 지니며 발전했다는 사실이다.
1907년 한국교회에는 복음이 전래된 이후 알렌이 “놀라운 부흥 운동”이라고 말했던 가장 강력한 영적운동이 일어난 것이다. 1903년부터 간단없이 줄기차게 이어져 온 영적 각성의 움직임이 “한국의 오순절”이라 불렀던 놀라운 성령의 임재와 함께 전국적인 운동으로 발흥했다. 평양대부흥운동으로 널리 알려진 이 놀라운 영적대각성운동은 1907년 1월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열린 평안남도 겨울 남자 사경회 기간 동안에 발흥하기 시작했다.
1907년 북장로교 보고서가 밝힌 대로 과거 죄악의 공포를 깊숙이 깨닫지 못했던 한국인들은 이번 평양대부흥운동을 통해 자신들의 죄악의 무서운 결과, 죽기까지 죄인을 사랑하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의 은혜를 깨닫고 철저하게 자신들의 죄악을 통회했다. 그러나 단순히 통회로만 끝나지 않았다. 스왈른이 증언한 대로 사람들은 그 다음날 관련자들을 찾아다니며 용서를 구했다. “그 다음날 사람들이 거리에서 서로 죄를 고백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도둑맞은 물건들이 되돌아왔다. 도둑맞은 돈도 되돌아왔고, 오랫동안 갚지 않았던 빚이 청산되었으며, 부정한 방법들이 전반적으로 바로잡혀졌다.” 옛 생활을 청산하고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된 것이다. 제임스 게일이 표현한바 “외국인들뿐만 아니라 전 한국인 공동체를 움직인”이 같은 영적 변화는 그 후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선교사들이나 한국교회 지도자들이나 그곳에 참석한 모든 이들은 이와 같은 성령의 역사가 장대현교회에서 뿐만 아니라 평양 시내 전역, 더 나아가 한국교회 어느 곳에서나 이어지기를 간절히 바랐다.
평양에서 열렸던 열흘 동안의 북장로교 선교부의 사경회가 끝난 다음이 사경회에 참석하여 놀라운 성령의 역사를 직접 체험한 이들은 자신들의 고향으로 돌아가 이 놀라운 성령의 역사를 자신들이 다니는 교회의 다른 교우들에게도 전해 주었다. “이 소문이 각처에 전파됨에 따라 신령한 체험을 맛보고자 하는 열망과 기대는 지방 신자들의 마음속에 간절하여졌다.” 어떤 부흥도 회개의 역사 없이는 일어나지 않는다. 오늘날도 그 원리는 동일할 것이다. 이 땅 가운데 다시 한번 평양대부흥과 같은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길 기대해 본다.
원산 부흥운동과 평양대부흥운동에 이어 “부흥운동의 두 번째 기간”으로 알려진 백만 인구령 운동은 한국 민족 100만 명에게 복음을 전해 민족 복음화라는 거대한 공동의 목표를 이룩하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장로교와 감리교 6개 선교회가 힘을 결집하여 전국적으로 추진한 민족복음화 운동이었다. 로이 스위러가 백만인 구령운동을 가리켜 “전도운동”이라고 불렀던 것도 그 때문이다.
백만인구령운동은 기울어 가는 국운 앞에서도 기독교 신앙을 통해 흩어진 민족의 힘을 결집시키는 중요한 원동력이 되었다. 백만인 구령운동은 지위와 연령, 교파와 교단, 그리고 지역을 초월하여 전국의 기독교인들을 하나로 결집시키는 원동력이었다는 점에서 결코 실패한 운동이 아니었다. 한국교회는 원산부흥운동, 평양대부흥운동, 그리고 이어 진행된 백만인구령운동을 통해 일제의 무력적 탄압과 강요에 흔들리지 않고 맞설 수 있는 유일한 거족적 집단으로 발돋음 할 수 있었다.
또한 이 운동 이후 한국교회는 제도적인 틀을 다질 수 있었다. 1911년 제 5회 장로교 독노회는 1912년을 기해 총회를 조직할 것을 결의 하였고, 그 해 가을에 열린 장감 연합공회 총회도 1912년에 장감 6개 선교회와 각 성서공회, 그리고 성공회가 참여하는 연합공회로 확대 개편할 것을 결정했다. 그 동안 한국교회를 대변하는 장로교와 감리교가 전국적인 규모의 총회와 연회 조직을 통해 민족교회로서의 틀을 다지는 전기를 마련했고, 양 교파를 대변하는 평양신학교와 감리교의 협성신학교도 신학교로서의 모습을 갖출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민족복음화의 열정이 전국적으로 발화되면서 만주와 소련과 일본과 하와이에 거주하는 디아스포라 한인들을 대상으로 선교사를 파송하려는 노력들이 어느 때보다 강하게 이러났다. 이처럼 백만인 구령운동과 그 앞서 일어난 평양대부흥운동은 민족 복음화라는 거대한 비전과 꿈을 한국인들에게 깊숙이 심어 주어 민족교회로서의 틀을 다지는 전기를 마련해 주었다.
제임스 부스컬크가 지적한 것처럼 대부흥운동은 무엇보다도 을사조약과 고종 퇴위 한일 합방으로 대변되는 당시의 정치적인 암흑기를 극복하고 민족에 대한 새로운 희망을 다지게 만들어 준 중요한 종교적인 사건이었다. 이 시대만큼 우리 민족이 암흑의 시대를 걸었던 적도 드물었지만 가장 암울했던 이 시대, 일련의 놀라운 부흥운동이 전국을 휩쓸었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차원에서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한국의 역사 속에서 개입하시고 섭리하셨던 것이다. 돌이켜 볼 때 그것은 분명 하나님께서 죄로 무든 이 백성을 영적인 깊은 잠에서 깨우시려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였다. 그 결과는 참으로 놀라웠다. 한국교회는 대부흥운동으로 여러 가지 면에서 헤아릴 수 없는 은혜를 누리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영적 각성운동, 사회개혁운동, 전도열과 놀라운 교회 성장, 그리고 복음주의 연합운동은 이 시대 부흥운동이 한국교회에 가져다 준 두드러진 결실이었다.
전 세계적으로 부흥이 이렇게 집중적으로 일어난 시기는 없었다고 한다. 19세기 말과 20세기에 그렇게 부흥이 일어난 이유는 세계 선교를 위한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하나님의 크심, 그 광대하심을 느끼고 그 위엄에 굴복하는 은혜가 본서를 요약하면서 임한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이 역사 가운데 역동적으로 임하는 것을 보는 것은 정말로 축복이다. 특히 원산 대부흥 운동을 시발로 평양 대부흥 운동과 100만인 구령 운동으로 이어지는 놀라운 은혜의 증거들은 살아계신 하나님이 광대하심과 세밀함을 경험케 한다. 본인이 바로 그 자리에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그러나 한편, 그 때가 아니고 21세기 한국에 보내신 이유는 그 역사의 부흥이 단지 경험으로 끝나지 않고 계속 이어지길 원하시는 하나님의 크신 계획 가운데 있는 것이 아닐까? 오늘날도 동일하게 부흥 운동이 요구된다. 아니 부흥이 필요하다. 물론 그 어느 시대가 하나님의 부흥의 역사가 불필요하겠는가마는 온갖 이단의 사상이 넘실거리고, 윤리적 도덕적 판단의 준거를 잃어버린 이 시대에 너무나 절실히 요구된다. 역사적 사실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부흥 운동은 철저한 회개를 그 바탕으로 한다. 원산 대부흥도, 평양 대부흥도, 100만인 구령 운동도 찢어지는 심령을 하나님께 토설하며 자신의 환부를 도려내는 아픔 가운데 일어난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이것이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정직히 서 있는 것. 바로 이것이 필요하다. 역사가 이것을 증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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