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7년 대 부흥운동   

    

Ⅰ. 序 論


  韓國에 基督敎가 들어와서 100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한국의 기독교는 상당한 成長을 이루었다1). 이는  아마도 하나님의 攝理라고 여겨지지만 굳이 이유를 들어보자면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그 중 하나가 査經會요 그 부흥회의 모범이 1907년 1월의 평양 장대현교회에서의 사경회라는 데에는 대부분의 학자들이 同意하고 있다. 한편, 한국 기독교가 일제 식민지하에서 救國運動을 펼 수 있었던 것은 평양 장대현교회에서의 査經會를 전후한 韓末 基督敎2) 大復興運動을 통한 信仰成熟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고 한다3).

  이러한 까닭에 本考의 주제인 한말 基督敎 大復興運動은 基督敎 神學者들과 歷史學者들의 많은 관심을 끌어왔다. 이들의 연구성과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4).

  한국 敎會史學의 泰斗이며 宣敎史觀의 大家라 할 白樂濬은 그의 著書에서 한말의 大復興運動이 한국 교회 쪽의 心靈的 新生의 표적이 되었으며, 크리스찬 사회의 道義心을 가져왔으며, 査經會, 祈禱會 등 종교적 慣習이 형성되었다고 하면서, 한국기독교의 信仰性格이 형성되었다고 보았다5). 그러나 그는 宣敎의 전개과정을 중심으로 사건을 記述하였기에 한국 교회의 證言과 告白이 缺如된 평면적 현상만을 서술하였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비록 이러한 약점이 있다 하더라도 그의 견해는 이후 연구자들에 의하여 답습되었다. 그의 저서는 宣敎史觀을 가지고 쓰여진 저술 중에서는 最善의 著述이었기 때문이다.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한국사를 民族主義的 視覺으로 照明하려는 時流에 자극받아 기독교계에서도 한국 교회사의 새로운 意義를 찾으려 하는 조류가 발생한다. 대표자는 閔庚培로 그는 대부흥운동을 그의 ‘民族敎會史觀’을 통하여 信仰의 內延이 있고 나서 그것이 뿜어나는 外延에 의하여 擴張되어 歷史 속에 참여하는 절차 논리를 확립시켰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그는 대부흥운동의 性格을 교회의 非政治化를 圖謀한 것이었으나 오히려 以後에 닥칠 民族的 苦難을 견디게 한 精神的 支柱로서 民族敎會의 形成過程이라고 주장하였다6). 하지만 그의 견해는 ‘內燃-外延’ 도식의 적용에서 외연의 범위를 外勢에 국한시키려 하였고 이로 말미암아 외세와의 政治的 對決에 문제의 초점이 두어지다보니 한국 사회내의 광범위한 社會經濟的 요인이 연구의 초점거리에서 벗어났을 뿐 아니라7) 일부 宣敎師들의 附日行爲를 문제삼아 대다수 선교사의 한국을 위한 熱情을 無意味하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문제시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민경배의 논의를 이어받아 徐正敏은 <초기 한국교회 대부흥 운동의 이해>에서 비민족화로서의 표현과 민족화의 내재를 발견할 수 있음을 주장하고 견고한 민족교회화로의 재편성으로서 대부흥운동을 규정하였다8).

  한편 前述한 민족교회사관의 극복을 위하여 여러가지 시도가 이루어지는데 대표적인 것으로 주재용의 ‘民衆敎會史觀’을 들 수 있다. 그는 1907년을 전후한 부흥운동으로 인하여 교회가 靈的으로 거듭나 한국의 지도세력화하여 民衆을 이끌었다고 보고 있다9). 그렇지만 그의 서술은 구체적인 역사적 사실로부터의 논증이 부족하다는 약점을 안고 있다10).

  한국기독교사의 주체를 누구로 볼 것이냐는 문제를 가지고 ‘민족교회사관’과 ‘민중교회사관’의 대립을 극복하고 새로운 기독교사 서술 및 사관정립을 위해 모인 韓國基督敎歷史硏究所는 實證主義的 總體的 연구를 진행하면서 順機能과 逆機能이 모두 밝혀져야 한다는 의식을 갖고 1907년을 전후한 한말의 기독교 대부흥운동은 信仰成熟의 계기가 되었지만 당시의 민족적 아픔과 분노를 성령운동이라는 종교적 카타르시스를 통하여 희석시켰다고 주장하였다11). 또한 우완용은 그의 저서에서 1907년의 기독교 대부흥운동을 통하여 民族主義的인 기독교인과 非民族主義的인 기독교인들이 갈려나갔고 민족주의적 기독교인들만이 敎會를 빠져나와 105인사건과 3·1운동에 참여하였기에 대부흥운동은 ‘非民族化의 典型’이라고 주장하고 있다12). 그렇지만 이들은 實證的 연구를 증폭시겼다고 하면서 부흥운동의 참여계층에 대한 연구가 부족하였을 뿐 아니라13) 교회를 政治集團이라 하는 잘못된 이해를 심어주고야 말았다.

  한편 一般 槪說書의 구한말 대부흥운동에 대한 認識을 살펴보면 李基白의 《韓國史新論》에서는 한말 대부흥운동 자체는 언급되어 있지 않으나 査經會와 百萬人救靈運動이 언급되어 있으며14)이는 邊太燮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15). 이들은 앞서 언급한 사항들을 愛國啓蒙運動이라는 範疇下에서 설명하고 있으며 基督敎 開化運動의 특징을 자세히 다루어주었다는 것이 특징이다. 그리고 進步的인 槪說書로 알려진 한국역사연구회에서 편찬한 《한국사강의》에서도 愛國啓蒙運動의 일환으로 대부흥운동을 다루고는 있으나 宣敎師에 대한 偏見을 가지고 있으며 이로 말미암아 信仰運動이 民族意識 除去에 영향을 끼쳤다고 敍述되어졌다16). 또한 최근에 출판된 한길사의 《한국사》에서는 《한국사강의》의 입장을 거의 비슷하게 서술하고 있으면서 기독교계의 항일운동으로 査經會와 1909년의 百萬人救靈運動을 제시하고 있다.17). 어쨌든 이러한 一般槪說書들은 基督敎에 대한 理解가 제대로 되지 않아서인지 한말 기독교 대부흥운동을 다룬 분량이 짧다. 그리고 進步的이라는 개설서들은 이에 대한 부정적 평가를 내리고 있다.

  本考에서는 이러한 認識들을 留念하면서 한말 기독교 대부흥운동의 歷史的 考察을 시도하고자 한다. 여기에는 敎會史의 사건이 神學者들만의 專有物이라는 인식에 제고를 기하려는 필자의 의도가 작용하였다18).


Ⅱ. 韓末 基督敎 大復興運動의 時代的 背景 에서는 먼저 부흥운동이 일어나게 된 背景을 살피려고 한다.

  첫째로 당시 朝鮮의 상황이 어떠하였는가를 알아봄으로써 百姓19)들의 고통이 심하였음을 알아보고자 하였다. 여기서는 조선의 滅亡의 원인이 19세기말의 世道政治로부터 싹텄음을 보이고 그 후의 흥선대원군과 그 외의 정치인들의 失政을 통하여 深化되었음을 주장하였다.

  둘째로 이러한 상황에서 무엇 때문에 백성들이 傳來의 다른 宗敎를 놔두고 기독교를 信仰의 대상으로 삼았는지를 儒敎, 佛敎, Shamanism, 天主敎, 東學의 교리 자체와 기독교와의 관계를 통하여 이해하고자 하였다.

  셋째로 한말 기독교 대부흥운동의 震原地인 平安都 지방의 성격을 살피면서 무엇 때문에 평안도 지역의 교회가 성장하게 되었는가를 地域的 背景과 社會的 背景을 통하여 조명하였다.

  넷째로 한국에서의 기독교가 어떻게 성장할 수 있었는가를 聖經基督敎라는 한국기독교의 특징과 대부흥운동이라는 사건의 직접적인 동기이며 그 자체라 할 査經會에 대한 분석을 통하여 알아보고자 하였다. 또한 기독교인들이 어떻게 이를 통하여 信仰과 民族의 문제를 해결하려 하였는가를 알아봄으로 말미암아 부흥운동의 배경을 이해하고자 하였다.

Ⅲ. 大復興運動의 展開와 結果 에서는 대부흥운동의 전개과정을 각 지역별로 설명하고 宣敎師들과 한국인 중 대표적 復興說敎家인 吉善宙 목사20)의 활동과 메세지를 알아보고자 하였고 당시 狀況을 점검함으로써 대부흥운동의 성격을 규명하고자 하였다.

Ⅳ. 大復興運動의 結果와 影響에서는 대부흥운동이 교회에 미친 影響을 먼저 알아보고자 하였다. 첫째로 부흥운동으로 말미암아 기독교가 한국에 정착된 계기가 되었음을 보이고자 하였다. 둘째로 초창기에 신도수가 성장하지만 교회사학자들이 대부흥이라 하는 1907년의 復興査經會 자체를 통하여 신도수가 늘지는 않았음을 증명하고자 하였다. 세째로 선교사들과 한국교인들간의 화해가 이루어졌음을 보이고자 하였다. 네째로 현세적인 신앙목적이 내세적으로 변화한 과정과 그 결과를 보이고자 하였다. 다섯째로 한국인 교역자의 증가를 유발하여 진정한 한국인의 교회로 변화함과 아울러 교파별로 교회의 구형이 이루어졌음을 보이고자 하였다.

  民族運動과 基督敎와의 관계를 논함에 있어서 非政治化의 문제를 다루었는데 대부흥운동이 비정치화의 일환이었다는 기존의 견해를 비정치화라는 용어 자체의 분석과 대부흥운동 이후의 교회의 행적을 통하여 비판하였다. 곧 무엇 때문에 대부흥운동이 그뒤에 이어질 民族的 苦難을 이기는 훈련의 도구로 사용되었는지, 또한 여기서 은혜를 받은 이들이 主要한 獨立運動에서 어떻게 활약하였는지를 살피었다. 이는 주로 參與者와 參與階層에 대한 연구를 통하여 밝히고자 하였다. 곧 부흥운동의 참여계층과 이후의 운동들의 참여계층과의 연관성을 밝힘으로 말미암아 한말 기독교 대부흥운동이 해당 운동에 영향을 미쳤다는 명제를 성립시키고자 한 것이다. 이는 이전의 연구들이 단순히 新民會나 3·1운동에 기독교인들이 많이 참여하였다는 식으로 대부흥운동과의 관계를 다룸으로 말미암아 진정한 歷史理解와 기독교 이해에 障碍物이 되었다는 약점을 극복하고자 하여 시도하고자 하는 것이다21). 이러한 분석으로 말미암아 韓末의 상황을 드러낼 뿐 아니라 한국 기독교가 신도들의 신앙성장과 민족의 독립을 위하여 노력하게 된 까닭을 照明하고 이러한 행동이 한국교회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 알아보고자 하였다. 물론 이는 歷史의 主體가 하나님이요 대부흥운동은 인간의 갈구 때문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攝理가 작용하였기에 이루어졌다는 기본 인식하에 연구가 진행되었음을 전제해 두고자 한다.


Ⅱ. 韓末 基督敎 大復興運動의 時代的 背景

  韓末 大復興運動을 이해하기 위하여 우리는 韓末의 상황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聖靈運動이라는 것이 대체로 인간의 渴求에 대한 하나님의 應答으로 이루어지는 만큼22) 왜 간구하였는지를 살피는 것은 聖靈 하나님께서 役事하시는 이유로 생각될 수 있기에 復興運動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기둥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1.정치적 배경

  보통 韓末의 어려운 상황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연구자들은 단순히 1905년 乙巳保護條約으로 인한 백성들의 失望感, 挫折, 愛國心을 주요한 復興運動의 動機로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필자가 생각하기에는 이러한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왜 어려운 지경에 이르기까지 되었을까가 먼저 이해되어진 뒤에 한말의 기독교 대부흥운동이 설명되어지는 것이 穩當하다 여겨지기에 한말의 政治的 상황을 알아보고자 한다.

  朝鮮王朝의 어려움이 시작된 까닭을 알아보는 데에는 여러가지 學說이 있을 수 있으나 필자는 勢道政治 기간을 조선의 멸망원인이 싹튼 遠因으로 이해하고자 한다. 물론 그 위로 올려잡을수도 있겠으나 필자가 생각하기에는 그러하다. 그 이유는 그전의 朋黨政治가 勢道政治시기에 들어와서는 외척이 정치에 간섭함으로 말미암아 견제세력이 없어지게 되었다23).  이로 말미암아 정치적으로는 여러가지 民弊들이 나타날 뿐 아니라 여기에 격분한 백성들이 民亂을 자주 일으켰기에24) 국가기강이 혼란하여질 수 밖에 없었다. 또한 學文에 있어서는 영정조 때의 학문의 꽃을 말살시킨 결과를 가져와25) 발전이 정체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開港의 시기에 이르러서는 興善大阮君의 時代錯誤的 鎖國政策26)으로 말미암아 외국과의 交涉은 물론 외국의 學文을 연구하는 것조차 賣國視되어 국력을 기를 수 없었다27). 이러한 상황에서 갑자기 開港을 하다보니 우리의 資源들이 해외로 나가는 것은 물론 백성들이 외국 상인 특히 日本商人으로 말미암아 많은 고통을 당하게 되어28)여러가지 문제가 발생하였다. 이러한 원인들이 겹쳐 東學農民戰爭29)이 일어났으나 이는 日本軍에 의하여 失敗하였고 淸日戰爭을 우리나라에서 벌어지게 하는 결과를 가져와 우리의 많은 資源들이 훼손되었다. 여기에 우리를 침략하고자 하였던 日本은 러·일전쟁을 일으켜 승리하였고 그 와중에서 1905년 乙巳保護條約으로 외교권이 일본에게 빼앗김으로 말미암아 실제적으로 1905년 이후는 우리의 國權을 빼앗긴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이 되고 만 것이었다.


2.종교적 배경

  우리가 대부흥운동의 宗敎的 배경을 다루는 데 있어서 중점을 두어야 할 것은 他 宗敎의 문제점을 基督敎가 어떻게 解決하였는가를 파악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본장에서는 儒敎, 佛敎, Shamanism, 東學, 天主敎30)의 문제점과 大復興運動에의 貢獻을 중심으로 살피기로 한다.

  첫째로 儒敎를 살펴보면 한말 당시의 유교는 朱子學을 根幹으로 하고 있었다. 이 주자학 그 자체가 지나친 논리적 整合性의 추구가 있었다31). 이것이 조선에 들어와서는 支配層의 ideology로 변질되었으며 유교의 성질 자체가 現世中心의 현실주의로 인한 선비들의 出世指向, 利己的 家族中心主義로 인한 개인의 創意性 박탈, 체면과 형식의 중시, 지나친 孝의 강조로 인한 보수적 權威意識 등으로 말미암아 많은 문제점을 일으켰다32). 하지만 유교는 基督敎의 敎理와 聖經耽讀, 깊은 信仰心과 服從, 교회의 조직참여 등의 형성에 큰 기여를 하였다33).

  佛敎는 朝鮮時代 以前에는 護國佛敎라 하여 官과의 관계가 깊었고 이로 말미암아 상당히 발전하였다. 하지만 불교의 弊端을 체험한 麗末鮮初의 性理學者들의 斥佛意識에 의하여 탄압받는 지경에 이르렀다. 잠시 普雨 등의 집권과 壬辰倭亂에서의 僧兵長들의 활약으로 인하여 敎勢가 올라가는 듯 하였으나 斥佛意識은 계속되었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불교는 근근히 命脈을 이어가는데 이는 조선시대의 근본이념인 儒敎가 政治的 이론이면서 道德이었지 宗敎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정부에 대항하지 않으면서 존재를 보존한다는 消極性이 존속을 가져왔던 것이라고 보여진다34). 어쨌든 불교에 대한 탄압은 계속되어 불교가 婦女子의 종교로 轉落하는 지경에 이르렀고 이들 역시 불교존속에 힘을 다하였다. 이러한 理由들로 말미암아 佛敎의 命脈은 근근히 이어져 왔던 것이다. 이러한 불교의 他界主義的 신앙은 기독교가 來世를 바라보는 신앙을 확립하는 데 기여하였다. 하지만 現世의 重要性을 잊게 만들어 진정한 교회발전에 障碍를 가져오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漢文聖經에 불교의 用語가 많이 사용됨으로 말미암아 기독교 전파에 큰 역할을 감당하였고 불교의 善의 추구와 진리탐구, 성령의 役事懇求 등으로 말미암아 역시 기독교 전파와 부흥운동에 큰 역할을 하였다고 여겨진다35).

  Shamanism은 우리 민족과 같이 성장한 民俗宗敎로 조직된 종교는 아니었지만 그 사상이 超自然的 存在에 의한 救援과 神靈의 능력이 인간보다 강하다는 古代人의 認識으로부터 시작한 것으로 自然崇拜思想과 소위 神과의 중개인인 Shaman(무당)을 봄으로써 알 수 있다. 韓國人들은 초자연적 존재이며 신비한 ‘하느님’을 主神으로 믿고 있었다. 그러다가 基督敎가 傳來되었는데 宣敎師들이 믿던 ‘하나님’이 Shamanism의 主神인 ‘하느님’도 다스리시는 것을 인식함으로 말미암아 基督敎를 믿게 되었고 이로 말미암아 敎會復興과 성령님의 능력을 의존하는 신앙확립에 공헌하였다. 그러나 呪術的 起伏信仰, 倫理的 要所缺乏 등으로 말미암아 복음이해와 교회발전에 악형향을 미친 것도 사실이다36).

  東學은 최제우가 西學(天主敎)에 반대하여 세운 종교로 여러가지 形態로 天主敎와는 反目을 거듭하여 왔다37). 그렇지만 이들은 東學農民戰爭 제 2차 蜂起때부터 우리의 최대의 敵이 日帝임을 간파하고 나서는 일제타도를 외치게 되었고38) 전봉준 자신이 심문받는 과정에서 다른 외국인을 쫓아낼 意思는 없었다고 밝히고 있다39). 물론 기독교의 세력이 강하게 퍼지고 있던 서북지방에서의 東學徒들의 기독교에 대한 迫害가 없지 않았고 천주교의 교폐문제40)에 대한 동학도들의 반발로 천주교가 수난당하기는 하였으나41) 東學徒들이 미국인 선교사42)에게 도움을 받은 일이 있고 선교사들이 동학도들에게 ‘自由의 觀念’을 가르침으로 말미암아 東學敎徒들이 基督敎 믿음의 必要性을 認識하였다. 그리고 인간의 평등성을 주장하는 동학과 기독교의 교리가 비슷함으로 말미암아 많은 東學敎徒들이 基督敎에 入敎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天主敎는 朝鮮 後期 實學者들에 의하여 學問的으로 소개된 뒤 그것이 信仰으로 변하여 지속되었다. 초기의 信徒들은 여러 敎理書 등을 갖고 들어와 宣敎하였으나 祖上祭禮問題43)와 西洋船舶請願問題44)로 말미암아 환난을 맞았다. 그렇지만 平等思想의 主唱 등으로 中人層과 婦女子에게 쉽게 뿌리내려졌고 여기서 생겨난 信徒들이 基督敎 福音의 理解와 宣敎活動의 준비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45). 하지만 지나친 기독교와의 宣敎活動의 경쟁은 양자의 反目을 불러오게 되고 여기에 洋大人 意識을 지닌 天主敎人들이 加勢함으로 말미암아 두 宗敎간에는 反目이 계속되었던 것이다46).


3.지역적 배경 - 평안도 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

  大復興運動의 지역적 背景을 살피려면 平安道 지역 사람들이 왜 基督敎에 入門하였는가를 살펴야 한다47). 그러니까 聖靈 하나님께서 어떻게 基督敎를 믿도록 平安道 地方에 背景을 조성하셨는지를 알아보아야 한다. 이는 한말 기독교 대부흥운동이 가장 강세를 보였던 지역이 평안도이기 때문이다.

  筆者의 所見은 조선시대 이래의 平安道 지역의 差別待遇로부터 원인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太祖 李成桂가 북방에서 지내면서 여진족의 信義가 부족함을 알았고 이로 말미암아 북부지역 사람들을 벼슬길에 오르지 못하게 하기에 이른다. 이로 말미암아 조선 전시대에 걸친 평안도 지역민의 ‘푸대접’이 이루어진다48). 예를 들어 科擧에는 많이 합격한 데 반하여 벼슬길에 오른 자는 極少數였다고 한다49). 이로 말미암아 兩班勢力의 相對的 不在現狀이 일어나 타지역에 비하여 두터운 ‘자립적 중산층’이 형성되기에 이른다50). 이들은 自營農이나 商人이었으며 이들 중 상당수가 近代的 商工業者로 전환되었다. 그리고 평안도 지방의 풍부한 地下資源의 개발로 말미암아 이 지역 經濟를 풍요롭게 만들었다. 이러한 배경으로 말미암아 近代的 市民意識이 상대적으로 발달하였고 이는 기독교가 확산될 수 있는 주요한 기반이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평안도 지역인들은 中國과의 地理的 要件 등으로 인하여 新文物을 많이 받아들였고 이로 말미암아 基督敎에 접하게 되었다. 여기서 기독교가 平等思想을 가지고 있고 강대한 서양세력의 精神的 支柱가 된다는 것을 알고 이로 말미암아 改宗하는 자들이 있었다. 게다가 북부지역 사람들은 漢文까지 배움으로 말미암아 文盲律이 낮았고 經濟的 條件으로 보아도 남부지역 사람들보다 사정이 좋아 봉사자들이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51). 또한 선교사가 들어가지 않은 지역에서는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온 家族이 교인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52). 그리고 이러한 경우가 擴大되어 마을 사람들의 集團的인 改宗도 있었다53). 물론 가족집단의 集團的 改宗이 평안도 지방에서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평안도 지역에서의 개종자는 타 지방에 비하여 많았다고 보여진다. 그러므로 이러한 요인들로 말미암아 평안도의 기독교는 성장할 수 있었고 이러한 배경하에서 한말 기독교 대부흥운동이 평안도를 중심으로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이었다.

 


4. 기독교적 배경 - 한국교회부흥의 까닭 -

  우리가 復興運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 때문에 한국 교회가 성장하였는지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렇기에 한국에서의 宣敎가 성공한 요인들을 정리하면 부흥운동의 기독교적 배경이 이해될 수 있으리라 믿는다.

  韓國敎會 成長의 첫째 요인은 聖經에의 애착이다. 한국기독교는 다른 지역에서의 선교와 달리 받아들이는 측의 積極性과 主體性이 엿보인다. 그것은 聖經의 飜譯科程에서부터 시작된다. 최초의 한글성경은 Ross Version으로 순한글로 쓰여졌다54). 이는 널리 보급되었으며 많은 개종자를 가져왔다. 이로 말미암아 ‘성경기독교’55)의 전통이 수립된다. 외국선교사들의 보고에 의하면 한국인들의 성경에 대한 熱情이 상당히 강하였다 한다56). 이러한 성경에의 열정을 선교개시 6년만에 작성된 선교보고서는 이렇게 전하고 있다.

  한문성경 외에는 현재 일부의 <성경>이 이용될 수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가능한 한 빨리 <성경>을 번역해 달아는 한국인들의 간절한 요구(crying need)가 있다57).

 


이러한 성경에의 열정을 도왔던 공로자로 勸書를 들 수 있다58). 이들은 聖經을 판매하는 직분을 감당하였는데 단순히 성경만 판 것이 아니라 福音을 전하는 데에도 열성이었다. 그리고 宣敎師와 일반 백성들 사이의 緩衝役割을 감당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한국 기독교의 특징인 성경기독교59) 확립에 기여하였다는 공로를 가지며 福音傳播에의 공헌으로 인하여 한국 기독교 발전에 큰 역할을 감당하였던 것이었다. 그리고 백성들이 이때 얻은 성경을 공부하고자 모인 것이 査經會이다60). 이는 농한기에 집중적으로 열렸는데 사경회에서는 성경말씀을 배울 뿐 아니라 일반지식도 배우면서 傳道, 부흥집회도 같이 이루어졌다. 흔히들 이 사경회에서의 부흥집회는 來世論을 강조하여 기독교의 民族宗敎化에 저해가 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는 학자들이 있다61). 성경의 啓示錄은 내세론을 강조한 부분으로 유명한데 이를 그냥 끝부분만 읽어보면 피안적인 내용이기는 하다. 하지만 계시록 전체를 읽었을 때 그 내용은 세상에서 ‘선한 싸움’을 싸운 뒤의 결과가 영광스런 천국이라는 내용이다. 그리고 실제로 사경회에서는 現實에서 잘 살아야 영원한 즐거운 내세가 있다고 가르쳤다. 참고로 1907년에 발간된 主日學校 敎本에서는 일본과 애굽을 동렬에 놓고 설명함으로써62) 간접적으로 獨立意識을 고취시켰다63). 그리고 뒤에서도 언급하겠지만 105인 사건과 3·1운동에의 많은 기독교인의 참여64)는 査經會의 역할을 암시해 준다. 곧 聖經工夫를 통하여 信仰의 基礎를 심어주면서 民族意識을 심어준 것이었다. 결국 韓國敎會의 부흥의 중요한 요인은 聖經에 대한 熱情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둘째로 우리는 宣敎師의 공로를 무시할 수 없다. 한국인들이 中國에서 선교사들에게 복음을 받았다는 사실을 제쳐두고라도 우리 나라에 온 선교사들이 우리나라의 福音化와 開化發展을 위하여 공헌하였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기 때문이다65). 여기서 잠시 우리는 선교사들의 派送 背景과 神學을 살필 필요가 있다. 19세기 말 미국에서는 제 1차·2차 대각성운동66)이 일어나 國內宣敎와 國外 宣敎熱이 발생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각 선교단체들이 해외선교에 나서는데 처음에는 中國·日本에 치우쳐 있었으나 韓國에도 선교사가 파송되기에 이르렀다67). 이들의 신학은 종래 철저한 淸敎徒的 信仰이라 규정되어져 왔다68). 그러나 필자는 여기에 대하여 다르게 평가하고자 한다. 한국의 초기 선교사들이 청교도적 내지 前千年說69)의 배경을 가졌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들은 그러한 神學思想을 극복하고 있다. 그 예로 한국에서 病院과 學校를 세워 장기적 선교의 틀을 만들었다는 점70)과 1905년 한국복음주의선교회연합공의회를 조직할 때 하나의 교회를 지향하기 위하여 敎理上의 차이를 나타내는 명칭과 상관없는 교회를 만들 것을 決議한 것으로 보아71)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보수적이라는 데에는 異意를 달기 어렵다. 성경적 진리를 믿으며 경험적인 성격을 지닐 수 있었던 것, 이것이 선교사들의 신학이라 할 수 있으며72) 여기에 세계 각지의 부흥운동이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부흥운동이 발생한 것이라고 보아진다.

  선교사들이 활동한 예를 들어보면 알렌 선교사의 경우 醫療事業을 통하여 복음을 전하였고73)언더우드 선교사는 1884년 부활절에 입국하여 여러 敎育機關을 세우고 서울 최초의 교회라 할만한 새문안교회를 세우는 등의 활동을 지속하였으며74) 이외의 無名의 선교사들도 우리의 복음이해와 개화를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한편 선교사들은 經驗不足과 선교상의 어려움으로 말미암아 여타 선교지의 경험이 필요하였는데 여기서 소위 Nevius방법이라 하여 自傳, 自治, 自給의 3원리를 익히게 되었다75). 이로 말미암아 한국교회는 큰 成長을 이루었다. 하지만 自主的인 敎會로 성장하지는 못하였다는 의견이 있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선교사들도 비난을 받아야 하지만 당시 敎人들의 入敎動機가 문제가 있었던 것이었다. 이러한 때에 자주적인 교회가 가지고 있어야 할 治理權까지 넘겨준다면 한국교회가 어떻게 될 것인가, 교회의 정치집단화가 우려될 수밖에 없었다76). 그렇기에 선교사들이 잘못하였다는 식의 논리는 제고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國際政勢가 일본의 조선침략을 묵인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러·일전쟁, 을사보호조약 등으로 말미암아 일부 선교사들은 民族運動을 주도하던 교인들을 정비하는 등의 조치를 취하여77)민족운동에 제동을 걸기에 이른다. 그리고 부흥회의 필요함을 느끼게 된다78). 이러한 背景들이 선교사 개인들의 문제와 어울려79) 부흥집회를 열게 되었던 것이었다. 여기에 聖靈 하나님의 役事가 임하였기에 한말의 기독교 대부흥운동이 일어나게 된 것이었다.

 


Ⅲ.韓末 基督敎 大復興運動의 展開와 結果

  韓末 基督敎 大復興運動은 보통 宣敎師들에 의하여 이루어졌다고 한다80).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기독교 대부흥운동의 중요한 骨子라 할 수 있는 평양사경회의 형태는 저녁에 있은 선교사들의 부흥회와 한국인 인도자 吉善宙장로의 부흥회의 양상이 약간 다르게 진행된다81). 그렇다고 구분지어 설명하기에도 문제점이 없지 않다. 물론 길선주목사의 부흥회와 선교사들의 부흥회는 같은 시기에 지속된다. 그렇기에 본장에서는 구한말 기독교 대부흥운동의 전개과정을 살피면서 특별히 1907년 1월82) 평양 章臺峴敎會에서의 부흥운동의 진행상황을 중심으로 하여 기독교 대부흥운동의 진행상황을 알아보기로 한다.

 


1.부흥운동의 발단

  앞장에서도 설명하였지만 당시 우리의 주변을 둘러싼 國際政勢는 우리가 일본의 植民地化하는 것을 黙認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1905년에는 乙巳條約이 체결됨으로 말미암아 우리 민족은 더욱 鬱憤에 싸여 있었던 시기였고 기독교인들도 抗日運動에 뛰어들게 된다83). 이를 본 선교사들은 이러한 상황이 계속된다면 한국교회가 滅絶될 것이라고 예상하였다. 그리하여 獨立運動에 制動을 거는 정책을 펴게 된다. 이를 단적으로 표현한 말은 Gale의 다음 표현이 적절할 것이다.

“위조 애국의 미친 광란이 몰아쳐, 자결 신체절단 허황된 맹세, 게릴라 테러적 의거 냉혈적인 저항이 교회를 침식한다”84)

이러한 표현과 함께 그 이전 1901년의 [교회와 정부 사이에 교제할 몇 가지 조건]85)을 비롯한 조치들이 선교사들이 민족운동을 저지한 대표적 예일 것이다.

  이러한 배경이 없지는 않지만 한말 기독교 대부흥운동의 始作은 1903년 선교사 R.A.Hardie에 의하여 시작되어진다. 사실 구한말의 기독교 대부흥운동이 어느 날 갑자기 백성들이 鬱憤을 머금고 교회로 몰려들어 기도함으로 말미암아 일어났다고만 하는 해석은 무리이기 때문이다. 물론 백성들의 슬픔이 重要한 要因이 될 수 있으나 필자는 Hardie 선교사를 비롯한 선교사들의 부흥운동이라는 토양아래 백성들의 울분이 겹쳐지고 여기에 하나님의 우리 한국을 향한 攝理가 있어 부흥운동이 가능하였다고 믿기 때문이다.

  선교사 Hardie는 열심히 傳道하였으나 여러가지의 자신과 생활환경이 만든 악조건 등으로 말미암아 ‘양떼를 거두는 데’ 실패하고 失意에 빠져 있었다. 그의 증언을 들어보자.

“나는 3년동안 강원도에 교회가 처음 세워진 지경터 지역에서 애써 일하였으나 나는 거기서 사업에 실패하였다. 이 실패감은 나에게 말할 수 없는 타격을 주었고, 나는 일을 더 할 수 없으리 만큼 기진맥진하였다.”86)

 


  그 뒤 그는 1903년 監理敎宣敎部 선교사들과 기도하는 도중 회개하여 솔직하게 잘못을 고백하였다. 이는 그에게는 “고통스럽고 모욕적인 경험”87)이었다. 이러한 솔직한 고백에 성령 하나님이 役事하여88) 한국교인들이 感化되고 은혜를 체험하였던 것이다. 여기서 일어난 불길은 평양에 영향을 주었다. 여기에 영국 웨일즈 지방과 인도 카시아 지방의 부흥운동의 소식89)을 뉴욕의 Johnson 목사로부터 들은 교인들은 그들도 은혜를 받고자 갈구하게 되었다90). 여기에 평양 장대현교회의 길선주 장로가 인도하는 새벽기도회가 연일 계속되었다. 이는 길선주장로가 시작한 것으로91) 사람들의 國家的 危機로 말미암은 福音活動에의 소홀에 대한 우려와 교회 자체에서 독립된 朝鮮敎會를 세우고자 하는 노력이 있었고 이로 말미암아 聖靈充滿을 받아야 한다고 느꼈기에 기도의 불길이 쉽게 타오를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렇기에 새벽기도회는 부흥운동의 原因이 될 수 있었고 부흥운동 이후에도 한국교회의 전통이 되어 내려왔던 것이었다92).

  한편 1904년 서울에서 Hardie 선교사가 인도하는 부흥집회가 崔炳憲 목사가 담임으로 있는 정동교회에서 열렸다93). 이에 대하여 당시의 The Korea Methodist 지에서는 다음과 같이 1904년 서울부흥회의 상황을 보도하고 있다.

  정동교회에서 하디가 주관하던 부흥회는 19일간의 집회를 끝내고 10월 9일에 끝났다. 이 부흥회는 본래 정동에 있는 두 남·여학교 학생들을 위한 것이었는데 교인들에게도 번져 마침내 서울에 있는 감리교인들이 모두 모여들게 되었다. 성령의 움직임으로 많은 이들이 공중 앞에서 자기 죄를 고백하고 진정한 회개를 하였다. 지적인 회심밖에 몰랐던 점잖은 교인들이 죄와 그리스도의 용서를 알게 되었다. 그들은 한국인 선생과 함께 새로운 믿음이 시작되었다94).

 


  그런데 이 서울지역의 부흥집회는 민족구국운동에 앞장섰던 최병헌 목사, 全德基 목사 등이 주축이 되었다는 데에서 큰 의의를 지닌다. 그리고 평양 부흥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 또하나의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95).

  그리고 1906년 남쪽지방인 木浦에서도 부흥이 일어나서 남감리교 소속인 Jerdine 목사의 사경회인도에서 참회와 기쁨이 흘러나왔던 것이었다. 그 광경을 목격한 J.F.Preston 선교사는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져다인 목사가 성경말씀을 읽고 공의와 절제와 심판, 그리고 죄의 무서움, 그 뉘우침을 강설하자 죽음과 같은 정숙이 여럿위에 내리덮었다. 그것은 마치 하나님의 말씀이 메스처럼 사람의 마음을 속 깊이 갈라 쪼개어서 죄를 통회, 자복하였으며, 힘센 어른이 어린애처럼 방곡하는 참회의 물결이 세차게 흘렀다. 이제 그들의 얼굴은 성령으로 빛났고 교회는 승리의 찬송 드높이 찬양과 영광의 종소리를 드높였다. 이 모임의 결과는 전라도 지방에 널리 그리고 깊숙이 파고드는 영향으로 작용할 것이다”96)

 


그 뒤 1907년 1월의 冬期査經會가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열렸다. 이러한 부흥회에 대해서는 대한매일신보의 다음 보도가 있다.

음력 11월 20일경에 평양 야소 교회당에서 성경 공부를 시작졔 황평 량도의 일반 교인들이 구름치 모혓 그 시에 착 사업에 경영이 만하 회당 교회는 익익 왕셩다 더라97)

 


그런데 저녁집회는 특별한 傳道 설교에 집중되었다98). 여기에서 성령 하나님의 役事가 일어났고 이럼으로 말미암아 구한말 기독교 대부흥운동이 평양 장대현교회의 사경회에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2.1907년 평양사경회의 전개과정

  復興會는 부르짖음의 시간이며 여기에 대한 聖靈 하나님의 應答의 時間이다. 그렇기에 성령 하나님의 역사없이 眞正한 復興會가 있을 수 없다99). 일은 사람이 계획하더라도 주관자는 하나님이신 것이다. 그렇기에 부흥회를 선교사가 操作했다느니 韓國人의 宗敎的 心性으로 말미암아 일어났다는 기존의 시각은 문제가 있다100).

  1906년 평양 장대현교회 冬期査經會가 1907년 1월에 시작되었다. 이 동기사경회는 길선주 장로101)가 인도하겠다고 나서서 이루어진 것인데 그는 서울을 방문하고 평양에 온 Johnson 선교사의 주일예배에서의 설교를 듣고 부흥회를 열 것을 결심하였다. 이는 聖靈의 역사가 태동하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담임목사였던 Graham Lee 선교사와 상의하여 동기사경회를 개최하기로 합의하였다102). 그리고 사경회가 1907년 1월 6일(양력)에 시작되었다. 이때 길선주 장로가 말씀을 전하자 사람들이 충격에 떨며 은혜를 받았는데 참석자인 장대현교회의 정익로 장로는 당시의 광경을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그날 밤 길선주목사의 얼굴은 위엄과 능력이 가득한 얼굴이었고 순결과 성결로 불붙은 얼굴이었다. 그는 길목사가 아니었고 바로 예수님이었다. 그는 눈이 소경이어서 나를 보지 못하였을 터이나 나는 그의 앞에서 도피할 수 없었다. 하나님이 나를 불러 놓은 것으로 생각되었다. 전에 경험하지 못한 죄에 대한 굉장한 두려움이 나를 엄습하였다. 어떻게 하면 이 죄를 떨어버릴 수 있고 도피할 수 있을까 나는 몹시 번민하였다. 어떤 사람은 마음이 너무 괴로워 예배당 밖으로 뛰어나갔다’103)

 


  이러한 집회는 계속되었고 그 후 성령을 영접하라, 이상한 귀빈과 괴이한 주인 등의 설교를 통하여 은혜가 임하였다. 1월 12일 Blair 선교사가 고란도전서 12:27의 말씀104)을 가지고 설교하여 공동체 의식을 강조하였다. 1월 13일 집회에도 많은 인원이 참석하였으나 그때는 조금은 무미한듯 하였고105) 1월 14일 이길함 선교사의 집회에서 성령의 은혜가 임하여 회개의 역사가 일어났다106). 告白의 정도를 어떤 여선교사는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그것은 마치 감옥의 지붕을 열어 제친 것이나 다름없다.’107)

 


  이를 보더라도 그날 悔改의 물결이 격렬했음을 알 수 있다. 1월 15일에는 점심에 선교사들이 모여서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그리고 저녁에 Blair 선교사를 미워했다는 고백이 나오면서 恩惠가 감돌고 이길함 선교사의 ‘나의 아버지여!’라는 고백이 있자마자 은혜가 임하였는데 경험자는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다.

  ‘.....비상한 힘이 밖으로부터 쏟아져 들어와 온 회중을 사로잡은 듯 하였다.....각 사람의 마음에는 자기의 죄가 자기생활에 정죄판결을 선언하여 주는 느낌을 가지게 하였다..... 저녁 여덟시부터 이튿날 다섯시까지 이러한 상태는 계속되었다..... ’108)

 


  이로 말미암아 聖靈의 役事가 임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로써 동기사경회는 마치고 일단 사람들은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돌아간 사람들은 고백만이 아닌 손해를 끼친 사람에 대한 損害賠償 등을 신자 뿐 아니라 불신자들에게까지 하여 성안에 소문이 자자했다 한다109)

  사실 처음에 선교사들은 感情에 치우친 회개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을 가졌지만 지켜본 이들은 진정으로 죄를 통회 자복하는 것임을 알았는데 영국의 세실경은 웨슬레의 부흥운동에 내린 성령의 역사와 유사하다 하였고110) 한국과 일본교회의 감리교 감독이었던 해리스는 정신이상 없이 바른 정신상태로 고백이 일어나 많은 사람이 새로 났다고 증언하고 있는 등111) 1907년 대부흥운동이 진정한 부흥운동이었음을 여러 사람들이 전하고 있다.

 


3.평양사경회 이후의 부흥운동

  이러한 장대현교회의 사경회의 소식을 전해들은 聖徒들은 부흥집회의 필요성을 깊이 인식하게 되는데112) 이로 말미암아 평양 査經會에서 성령의 종 역할을 감당했던 자들이 전국 각지로 흩어졌다. 길선주 장로는 서울로 떠나게 되는데 이때가 2월 16일이었다. 서울의 중앙교회(지금의 승동교회)에서 집회가 열렸는데 사회자가 있는지 없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깊었고 부흥의 불길은 계속 타올랐다고 한다. C.A.Clark 선교사는 서울 집회에 대한 다음과 같은 보고를 하고 있다.

  음력 명절을 준비하느라고 제각기 분주함에도 불구하고 길장로가 오기 전 2주일 동안 시내 각 교회는 매일 저녁 기도회를 열었다. 2월 16일 길장로가 서울에 도착하였다. 다음날 오후 모든 교인들이 연합으로 모인 집회에서 설교하는 밤에 중앙교회에서 설교했다. 첫날임에도 불구하고 신비스러운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그 다음날에 성령이 능력으로 임하셨다. 그로부터 성령의 역사는 날로 발전되었다. 둘째 날 이후부터는, 지도자가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을만큼, 사회자로서는 간신히 기회를 얻어 한마디씩 말을 했을 뿐 회중은 죄에 대한 혐오가 폭발되고 미친듯이 죄를 회개하여 무거운 짐을 벗어 버리려고 몸부림쳤다. 그들의 심령은 불타 오르기 시작했다113).

 


이외에도 서울의 여러 교회에서도 부흥의 불길은 다시 타올랐다. 그는 또한 의주로 가 11월 27일부터 집회를 인도하였다. 여기에도 聖靈의 役事가 임하였고 특기할 것은 최 재형이라는 열세살난 소학생(지금의 국민학생)이 죄를 痛悔하고 주님께 몸 바치기로 한 사실이 있었다. 훗날 그는 목사가 되어 일생을 주님께 바쳤다114). 이외에도 Graham Lee 선교사는 선천, 소알론은 광주로, 헌트는 대구로 가서 성령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게 하는데 도움을 주었다115).

  한편 학생들에게도 부흥의 물결이 몰아쳐 숭덕학교의 김찬성의 인도로 300여 학생들이 죄를 뉘우치는 한편 채정민 목사의 인도로 監理敎界 학생들에게도 부흥의 열기가 타올라 이들에 의한 전도운동이 전개되었다116). 또한 숭실대학에도 부흥의 물결이 타올랐다. 이러한 학생들 사이에 일어난 부흥운동의 시작과 발전에 대하여 숭실대학의 A.L.Becker는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학교 개학은 2월이었는데 그 직전에 집회 중이던 장로교 사경회에 성신 강림이 있었다. 우리는 이같은 은혜가 학교에도 내리기를 원하였다..... 학교가 개학되고 학생들이 등교한 다음 우리들은 평상시의 수업시간표를 일시 중지하고 오전, 오후, 저녁을 통하여 성경공부 및 기도회의 특별시간표를 마련하여 실행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였다. 우리들은 그저 학생들의 감정을 흥분시키려 하지 않았고 또 너무 이래라 저래라 하지도 않았다..... 우리는 다만 예수의 십자가에 마음 모으기만 노력하였다. 그러나 성령의 역사는 크게 나타나서 회의적인 태도를 가진 학생까지..... 죄를 회개하고 애통하였다. 한때 내가 세어보니 30명 이상의 학생들이 여러시간 서있으면서 죄의 무거운 짐을 벗어 버리는 기회를 얻으려 기다리는 것을 보았다..... 학생들의 약 10분의 9가 이때에 깊은 감화를 얻어 중생의 은혜를 받았다. 많은 학생들이 십자가의 도리를 전하는 열정적 전도인이 되어서 이 부흥의 불길은 온 성내와 인근 촌락에 전파되었을 뿐 아니라 멀리 제물포와 공주에까지 전파되었다117).

 


  그런데 이는 長老敎와 監理敎의 연합집회라는 데에서 의미를 지닌다. 사실 감리교 학생들은 처음에는 장로교 학생들에 비하여 은혜를 받지 못하였다가 감리교 교역자의 회개로 혼란이 진정된 뒤 은혜가 내렸다고 전해진다118). 또한 신학교에도 부흥의 물결이 몰아쳤는데 이는 선교사들이 神學生들도 성령충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3개월의 수업기간 매일저녁 부흥집회를 갖기로 하고 실행하였는데 이때에도 성령이 임하여 회개가 이루어졌다119).

  그리고 대부흥운동은 中國敎會에까지도 영향을 주었다. 당시 중국은 1900년의 의화단 사건으로 기독교가 위축되어 있었으나 한국의 대부흥운동을 체험한 Gorforth 선교사와 張賜禎, 胡万成, 劉金岳이 중국에서 부흥운동을 일으켜 교회 갱신과 성장에 기여하였다. 이는 1910년까지 계속되어 蒙古와 北京地方에까지 확산되었다. 이는 1880년대 중국을 통하여 기독교를 받아들였던 한국이 30년만에 성숙된 교회로서 신앙운동을 역으로 되돌려 보낸 획기적인 사건이었다120).

  지금까지 1907년을 전후한 대부흥운동의 진행 상황을 알아보았다. 그러면 우리는 이 부흥운동의 영향을 살피기에 앞서 이 부흥운동이 어떠한 성격을 지니는가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

  첫째로 이는 靈的이며 道德的인 개혁운동이었다. 이는 선교사들과 교인들이 같이 기도하고 悔改하였으며 또한 실생활의 회개가 일어났기에 그러하한 것이다. 여기에 성령 하나님의 역사가 있었기에 더욱 뜨거운 聖靈運動이 될 수 있었다고 사료되어지는 것이다.

  둘째로 敎會 聯合運動의 양상을 띠었다. 이는 선교사들과 한국인 신자들 사이의 和解와 국내에 있던 각 교파들 간의 연합움직임이었다. 사실 부흥운동 이전에는 선교사들과 한국인 신자들 사이에 서로간의 이해가 부족하였다. 그것은 文化의 차이와 아울러 특히 ‘교회와 정치’ 관계에 있어서 더욱 그러하였다. 그렇지만 부흥운동으로 말미암아 信仰에 있어서의 東西洋의 벽이 허물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각지에서의 부흥운동은 聯合集會의 성격이 짙었다. 그 후의 여러 집회도 비록 敎派가 다르다 할지라도 연합으로 모였고 이로 말미암아 성령 안에서 하나되는 은사를 지금까지 지키고 있다121).

 


Ⅳ.韓末 基督敎 大復興運動의 結果와 影響

  우리는 지금까지 1907년을 전후한 基督敎 大復興運動의 원인과 전개 과정에 대하여 알아보았다. 본장에서는 이 대부흥운동이 한국 교회에 끼친 영향을 敎會史的 입장 그리고 民族史的 입장에서 고찰하고자 한다. 지금까지의 연구성과를 살펴볼 때 교회 자체에 미친 영향에 대하여는 학자마다의 의견차이가 보이지 않는다. 그렇지만 大復興運動과 民族運動의 관계는 전자가 후자에의 참여를 방해하였다는 의견122)과 그렇지 않다는 의견123)이 대립되고 있다. 필자가 생각하기에는 전자의 말이 전혀 틀린 것은 아니지만 무언가를 간과하고 있다고 여겨졌다. 그리고 후자의 경우에는 사실의 證明 方法에 문제가 있다고 여겨졌다. 그래서 필자는 후자의 입장을 중심으로 하여 대부흥운동과 민족운동과의 관계를 다루되 이것이 각 민족운동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를 다른 사실의 증명 방법을 통하여 알아보고자 한다. 사실 각 사건별로 기독교인들이 관계되었기에 대부흥운동이 민족운동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고만 하는 서술만으로는 우리들의 논의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 본 장에서는 이미 연구되어졌던 교회에 대한 대부흥운동의 영향을 정리함과 아울러 대부흥운동과 민족운동의 관계를 각각의 민족운동의 參與者와 參與階層을 알아봄과 아울러 그들이 어떠한 思想을 갖고 민족운동에 참여하였는지를 살핌으로써 대부흥운동의 영향을 알아보기로 한다.

 

 

 

1.기독교의 한국정착

  기독사학자 서정민은 그의 논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한국교회 역사의 한 분기점으로서 1907년은 늘 관심의 대상이 되곤 한다. 이는 그만큼 한국교회사상에 있어 1907년에 이루어진 역사적 사실과 그 의의가 중대하며, 또한 1907년은 그 이전의 한국 교회사를 수렴함과 동시에 새로운 역사를 전개하는 해가 되기 때문이다.”124)

 


  이는 참으로 맞는 지적이다. 韓國敎會는 19세기말 복음을 여러 경로를 통하여 받은 이래 계속 선교활동을 하여 왔다. 그리고 한국인 나름대로의 신앙형태를 확립하여 왔다. 그 예를 들자면 초창기에는 상류계층을 전도하는 데 힘썼지만 東學農民戰爭 이후 초기의 백성들의 박해를 이겨내면서125) 백성들을 위한 종교로서의 면모를 보였다. 그리고 길선주에 의한 새벽기도회와 査經會는 초창기부터 계속 뿌리내려져왔다. 또한 1905년 을사보호조약 때는 救國祈禱會와 각종 의거들을 통하여 민족과 함께하는 교회로의 면모를 보여왔다126). 이러한 것이 구한말의 부흥운동을 통하여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앙적으로 변화되고 강화되었다127). 사경회가 계속되었을 뿐 아니라128) 1909년에는 백만인구령운동129)이 일어났다. 그리고 새벽기도회는 계속 이어져 한국교회의 傳統이 되어 있다130). 한국교회의 애국운동은 계속 이어져 105인사건 뿐 아니라 3·1운동을 통하여 증명되었을 뿐 아니라 神社參拜拒否로써 일제에 계속 저항함으로 말미암아 애국적인 교회로의 면목이 지속되었다. 물론 구한말의 부흥운동이 전적으로 계속된 한국교회의 발전에 공헌하였다는 것은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그러나 기독교가 한국에 뿌리를 내리고 신앙을 지키게 하는 근거를 마련하였다는 점131) 곧 한국교회의 信仰傳統을 확립하였다는 점에 있어서는 한국기독교사가 이어지고 전해지는 한 不滅의 記錄으로 남을 것이다.

 


2.교세의 변화

  흔히들 구한말의 대부흥운동을 통하여 敎勢가 늘었다고 하고 그 증거로서 교회 출석자의 增加를 드는 경우가 많다132). 물론 부흥회에 많은 사람들이 참석한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놀라운 성장이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렇지만 그 부흥회는 단순한 1907년의 행사로의 의의를 가지는 것만은 아니다. 우리는 여기서 구한말의 대부흥운동이 사경회의 일환이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신도수의 성장을 다룬 그래프를 보면 1900년에서 1910년 사이에는 급격한 신도수 성장이 나타난다133). 그렇다고 대부흥운동의 절정이라 할 수 있는 1907년 이후 갑자기 늘어나지는 않는다134). 그러므로 구한말의 기독교 부흥운동으로 말미암아 교회가 성장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1907년의 부흥운동이 사경회의 일환이었음을 이해한다면 사경회가 한국 교회 부흥의 原動力이라 짐작할 수 있다135). 그렇지만 1907년의 대부흥 이후 감리교는 신도가 잠시 줄어들기도 한다136). 그렇다고 하여 1907년의 대부흥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교회의 성장은 단순한 사람이 많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信仰心의 성장이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1907년의 대부흥을 기점으로 하여 강력한 회개가 일어났을 뿐 아니라 信仰의 動機가 이전에는 현세적인 안녕을 위하여 기독교에 입교한 경우가 많았는데 1907년을 전후하여 내세를 바라보며 현세를 열심히 사는 신앙 형태로 바뀜으로 말미암아 그것이 의의를 지닌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3.선교사들과 한국교인들간의 화해

  宣敎師들과 한국인 교인들은 그들의 文化의 차이로 말미암아 같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도 衝突을 가져온 적이 있다. 또한 이는 상호 이해의 벽이 되기도 하였다137). 또한 의례히 선교사들은 복음을 전하여 주었다는 명목 하에 고자세로 지내기도 하였다. 그리고 한국인들은 선교사들을 보조하는 역할을 주로 맡았다. 그러다 보니 일부 신도들과의 反目이 생겨날 수밖에 없었다. 특히 民族運動을 보는 선교사들의 시각이 1905년을 전후하여 바뀌면서 더욱 심화되었다.

  그러나 부흥운동을 통하여 선교사 자신들의 悔改가 이루어졌고138) 신도들도 선교사와 함께 죄인임을 자복하였다. 여기에 대부흥 운동때 전파된 고린도전서 12장의 말씀은 신도들에게 변화의 계기를 주는데 이는 교회 안의 부조화와 교회와의 문제를 다룬 것으로 결국 하나님과의 만남의 장소는 공동체인 교회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이 말씀을 전한 Blair 목사는 말씀으로 말미암아 당시의 교인들이 ‘나뉘어져 있을 때 당하는 그리스도의 몸된 아픔’을 체험하였다고 전하고 있다139). 이로 말미암아 선교사들과 교인들간의 반목이 약화되면서 공동체 의식의 형성이 이루어지게 되었고 이럼으로 말미암아 교회의 교단 조직으로의 발달이 이루어져 1907년에 장로교 독로회가 조직되는 등의 교회발전이 이루어진다140).  하지만 이럼에도 불구하고 단일 민족교회로의 꿈은 무산되었다141).

 


4.신앙목적의 전환

  한국에서 기독교가 급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기독교를 開化의 手段으로, 독립의 수단으로 이용하고자 하는 자들이 교회에 들어온 것이 중요한 이유중 하나가 된다고 할 수 있다142). 하지만 계속된 査經會와 새벽기도는 진정한 기독교가 무엇인가를 가르쳐주었다. 그리고 선교사들은 1900년 이후 격화되어가는 교인들의 민족운동에 대한 제동을 걸 필요를 느꼈다143). 그리하여 査經會에서는 죄의 회개와 윤리적 생활강조, 내세집착이 강조되었다. 결국 이는 기독교와 政治的 意識과의 관계가 멀어짐으로 말미암아 현세에 굴복하는 교회로 발달하였다는 것인데 여기에 대하여 필자는 반론을 제기하고자 한다. 필자는 査經會 중 내세를 다룬 계시록이 많이 다루어졌음을 앞에서 논한 바 있다. 그런데 앞에서도 논하였듯이 사경회에서는 단순히 來世가 있다는 것만 가르치지는 않았다. 계시록 자체가 의로운 苦難의 필요성을 강조한데다 사경회에서도 이것이 강조되어 現世의 중요성이 來世의 중요성과 함께 강조되었다. 그렇기에 온전한 내세추구로의 신앙 곧 自己中心的 신앙이 아닌  來世追求를 위주로 한 兩者의 造化의 신앙이 이루어진 것이다. 부언하면 단순히 천국만을 바라보는 삶만이 아닌 구원을 감사하며 살음으로 말미암아 현세를 바르게 사는 삶이 윤리적으로 확립됨과 아울러 여기에 日本에 대한 惡의 勢力으로의 인식이 결합되었기에 윤리적이고 애국적인 한국교회의 전통이 수립될 수 있었던 것이다144).

 


5.교회 지도부의 변화와 교파교회의 구형

  韓國敎會의 傳統 중 하나는 한국인 自身들이 복음을 들여왔다는 점이다. 이로 말미암아 초기 한국 교회는 평신도와 선교사가 주축이 되어왔다. 그러나 대부흥운동으로 말미암아 한국교회는  한국인 牧會者中心의 교회로 바뀌어 갔다. 이는 교회의 종교성 강화로 말미암아 聖職者의 중요성이 강조된데다 대부흥운동의 과정에서 평생을 성직에 몸담기를 희망하는 청년들이 많아졌고 여기에 각 교파들이 한국인 성직자 양성을 본격화하여 그 배출이 이루어졌기 때문이었다. 이로 말미암아 본격적 治理組織을 갖추게 되었다. 이러한 결과로 말미암아 각 교단의 神學受業者들이 배출되었고 이들은 각 교회에서 성직자로 봉사하면서 지도권을 인수받기 시작하고 이로 말미암아 民族敎會로의 발전이 이루어지게 되었다145). 그런데 공동체적인 신앙의 강조에도 불구하고 각 교파가 따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는 선교사들이 한국 교회가 단일교회로 발전할 경우 政治化의 노정으로 쉽게 흐를 것을 우려하였기 때문다146). 그래서 교파교회가 구현되었으나 각 교파간의 聯合運動은 계속되었다147).

 


6.비정치화의 문제

  흔히들 대부흥운동이 비정치화의 성향을 띠었다는 증거로 내세워지는 것이 末世論에 대한 강조이다. 그리고 이로 말미암아 민족운동에의 기독교인들의 참여가 약화되었다는 의견이 있다. 물론 來世가 있다는 것을 가르친 것은 사실이며 성경을 믿는다면 내세가 있다는 것은 부인될 수 없다. 그렇다고 내세만 바라보고 현세는 소홀이 해야 한다고 그들이 가르친 것은 아니다. 역사적으로도 그렇지 않을 뿐더러 만약에 그렇게 가르쳤다면 罪의 悔改와 이후의 倫理的 發展은 의미가 없어진다. 그러니까 대부흥운동에서는 현세의 중요함을 같이 가르쳤다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기독교인들은 내세와 현세의 중요성을 이해하고 윤리적 회개와 아울러 ‘악의 세력’인 일본 타도에 앞장서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非政治化라는 개념에 대하여 알아보면 이는 정치에 무관심해졌다는 말이다. 쉽게 풀어 설명하면, 어떤 사건을 통하여 비정치화되었다면 어떤 사건 이전에는 정치적 활동에 많은 關心을 가졌다가 어떤 사건 이후에 정치에 無關心하게 되었으면 그 사건을 통하여 비정치화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이를 대부흥운동에 적용시켜보면, 或者의 주장대로 대부흥운동이 비정치화의 결과를 가져왔다고 주장하려면 대부흥운동 이전에는 정치에 관심을 가졌다가 대부흥운동 이후에는 관심이 줄어들어야 한다. 흔히들 비민족화되었다는 證據로 내세워지는 것 중 하나로 대부흥운동의 주역인 길선주목사가 ‘모든 권세는 하나님이 정하신 바’라 하여 교회의 항일운동을 막았다고 그러는데148) 이것이 그가 항일운동을 막았다 할 수 있는 증거라 할 수 있을까. 필자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가 반대한 것은 急進的인 義兵運動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또다른 항일운동의 방법이라 할 수 있는 救國祈禱會를 인도한 기록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부흥운동과 민족운동의 관계를 생각할 필요가 있는데 물론 대부흥운동을 통하여 표면적으로는 일제에 대한 적대의식이 사라진다149). 그렇지만 일본인을 미워하였던 것이 죄라는 고백은 있어도150) 민족운동 자체에 대한 죄의식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151). 그리고 대부흥운동의 주역들이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기독교적 정신으로 민족운동에 참여하는 것이 실제로 나타난다. 또한 1907년 이후라는 연대의 의미를 알 필요가 있는데 이때의 표면적 민족운동이 어려웠던 것은 彼岸的이라서가 아니라 어려운 상황이었음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152). 일제의 탄압이 심화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필자는 구국기도회를 政治的 모임이라고 본다. 이것은 우리나라를 日帝 植民地가 되지 못하게 기도하는 政治的 性向을 띤 모임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이 形式的이었으면 의미가 없다. 하지만 이 구국기도회는 지속되었고 여기서 생겨난 애국심이 3·1운동에 기독교인들이 참여하게 된 원동력이 되었다고 여겨지며 이로 말미암아 애국적인 민족교회로 발전할 수 있었다고 보아진다. 그러므로 대부흥운동이 非政治化의 경향을 띰으로 말미암아 民族運動(독립운동)에 부정적 영향을 끼쳤다는 의견은 찬성하기 어렵다는 것이 필자의 의견이다.

 


7.1900년대의 한말 구국운동과의 관계

  본고에서의 韓末 救國運動은 義兵運動과 愛國啓蒙運動을 가리킨다. 이는 방법론적인 측면에서는 차이가 나지만 1900년대에 이루어졌으며 일제로부터의 實際的 獨立을 목적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발견된다.

  의병운동은 武力으로 외부세력인 일본과 그 배후세력을 몰아내고 우리의 독립을 쟁취하고자 하는 운동이었다153). 이는 독립운동의 일환이었다. 그런데 의병운동과 기독교의 관계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두 의견이 존재하고 있다. 첫째로 이만열은 구한말의 기독교인들이 의병운동에 積極的으로 參與하였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154)고 주장하고 있다. 둘째로 오윤태는 ‘군대를 편성하여 일본군과 싸우다가 포로가된 사람 가운데서 주모자로 취급되어 처형된 사람이 18명인데, 그 대부분이 크리스찬이다.’155)라 주장하였다. 필자는 본장에서 대부흥운동과 의병과의 관계를 다루고자 하는데 필자는 한말 대부흥 운동의 기독교와 의병운동과의 관계가 있었는지는 의심스럽다고 생각한다. 대부흥운동 자체가 무력이라는 극단적 방법보다는 기도라는 온건한 방법으로의 독립운동을 추구하였다고 필자는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에 대한 사료를 구해 보지 못한 까닭에 단정적으로 주장할 수는 없다. 하지만 필자가 생각하기에는 대부흥운동 그 자체의 성격과 당시의 시대적 상황으로 보아 부흥운동이 의병운동을 약화시켰다고 생각되어진다. 이를 구체적으로 논하여 보면 단순히 ‘기독교인들이 전쟁을 싫어하니까’라고만 할 수는 없다고 본다. 이는 아마도 의병운동의 주체세력인 유생들과 농민들과의 항일운동에 대한 입장차이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156). 사실 의병운동이라는 것이 게릴라적 성격을 띠는데다 기독교에 배타적인 계층들이 섞인 가운데에서 주일마다 예배를 드린다는 것이 실제로 어려웠을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교회를 중심하는 기독교 신앙인들이 참여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물론 일부 선교사들의 附日的 作態가 이를 부채질하였다고 할 수 있다고 본다.

  愛國啓蒙運動은 우리 자신의 힘이 일본보다 약하다는 것을 인식한 사람들이 長期的인 안목에서 ‘최후의 승리’를 거두기 위하여 전개한 민족운동157)이었다. 그런데 애국계몽운동과 기독교와의 관계는 한마디로 설명하기 어렵다. 애국계몽운동이 의병운동보다 基督敎 理念에 가까운 것은 사실이지만 각각에서의 기독교도의 위치가 연구된 것이 많지는 않다. 기독교와 제일 관계깊은 것은 아마도 敎育이라 하겠다. 애국계몽운동으로의 교육은 1907년의 부흥운동을 통하여 변화받은 학생들과 교사들에 의하여 계속 진행된다158). 여기에서의 교육이 어떠하였음은 그 이후 학생들의 행적을 통하여 알 수 있을 것이다. 國債補償運動에서의 기독교인들의 활약159)도 좋은 예가 될 것이다. 新民會도 마찬가지였다. 그렇지만 다른 애국계몽운동의 경우에서는 기독교인들의 활동이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애국계몽운동과 대부흥운동과의 관계는 뭐라 단정짓기는 어렵되 관련성이 깊다고 여겨지는 것이 필자의 의견이다.

 


8.1910년대의 민족운동과의 관계

  1907년을 전후한 대부흥이 1910년대의 민족운동에 관계된 증거는 105인 사건과 3·1운동을 대표적으로 들 수 있다. 여기에는 많은 기독교인들이 참가하였는데 그들의 信仰的 決斷이 주요한 요인이 되었다.

  첫째로 105인 사건은 일제가 기독교인들을 뿌리뽑기 위하여 조작한 사건이다160). 왜 그러하였는가? 한말 특히 1907년의 대부흥 이후에도 구국기도회가 계속될 뿐 아니라 愛國啓蒙運動과 獨立軍 運動등을 통하여 항일운동이 계속되었고 1909년의 100만인 구령운동이 일본인들에게 공포감을 주었던 것이 사실이다161). 그리고 105인 사건의 연루자들 중 1907년의 대부흥과 관계있다고 여겨지는 인물들이 몇 보이는데 평양의 大成學校, 崇實學校, 선천의 信聖中學校에 속한 인물이 많은 편이다. 이들은 중 대성학교는 민족지도자가 세운 학교이지만 숭실학교와 신성중학교는 宣敎師들이 설립한 학교로 대부흥운동에 참여하였다고 보아지며 이들이 신앙의 힘으로 어려움을 이겨내었기에 대부흥운동이 신민회에 영향을 주었다고 볼 수 있다162). 그런데 신민회의 주도층이 교회를 이탈한 인사들이라 하면서 대부흥운동과 신민회와의 관계는 무방하다고 보는 주장이 있다163). 그렇지만 필자가 생각하기에는 新民會 자체가 대부흥운동이 발생하였던 평안도 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1907년에 조직되었고 애국심을 강조하였으며 많은 기독교인들이 참여한 것으로 보아164) 비록 사료가 부족하다 할지라도 대부흥운동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하기는 어렵다고 본다. 그리고 대부흥운동에 참여하였다고 여겨지는 洪成麟165)을 비롯하여 길선주목사의 아들인 吉鎭亨 등이 신민회에 가입하여 있는 것으로 보아166)대부흥운동이 신민회에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둘째로 105인사건 이후에 1915년 평안도에 조선국민회가 세워지는데 여기의 참여계층은 1907년을 전후한 대부흥의 영향을 받았던 평양신학교, 숭실학교 졸업생들과 재학생들, 그리고 기독교 신자들이었다. 이러한 점으로 보아 부흥운동으로 말미암아 民族意識이 성장했다 할 수 있으며 이로 말미암아 부흥운동 이후에 救國運動이 전개되었음을 알 수 있다167).

  세째로 3·1운동과 대부흥운동과의 관계에 대해서 알아보면 여기에는 기독교 세력에 의하여 수행되었다는 의견과 기독교와는 無關하다는 의견이 있다168). 특히 최근에 들어서 진보적이라 주장하는 학자들이 기독교와는 무관하다는 의견을 보이는 쪽이 많다169). 필자는 이러한 기독교와 무관하다는 의견을 비판하고자 한다.

  흔히들 이야기되어지는 것이 길선주 목사를 비롯한 몇몇 목사들이 獨立宣言文 낭독 때 불참하였다는 것으로 이로 말미암아 비난을 하는 경우이다. 이것은 당시 상황을 意圖的으로 이해하지 않으려 하였을 뿐 아니라 길선주목사의 평소의 행동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여 제기되었다고밖에는 볼 수 없는 일이다. 길선주목사와 3·1운동을 비롯한 민족운동과의 관계에 대하여 진보적이라 주장하는 학자들이 제시하는 증거는 로마서 13장의 국가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抗日運動을 말리고 다녔다는 것으로170) 앞서 언급하였지만 이러한 길선주 목사의 행동은 방법에 대한 觀點의 차이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길선주목사는 평소에 救國祈禱會를 많이 인도하였다171). 그러므로 3·1운동에의 참여는 이러한 기도를 하면서 얻은 나라사랑의 정신을 자신이 실천한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당시의 한국인 교계 지도자들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선교사들이 비정치화를 목적으로 여러 행사들을 벌일때 이들은 信仰의 軌道에 올라서는 작업을 하였다. 그러니 部分的으로는 선교사들과 행동이 일치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민족주의계 평신도들과는 입장이 달랐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독립운동에 공헌하지 않았다 할 수는 없다. 각종 잡지들을 통하여 공동체적이고 애국적인 논설들을 설파하였으며 이로 말미암아 기독교인의 3·1운동에의 적극적 참여가 가능하였던 것이다172) 鬪爭, 戰爭, 드러나는 항일운동만이 구국운동은 아니다. 실력을 양성하는 것, 하나님께 나라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도 구국운동이다173). 방향이 다르다고 무조건 백안시하는 것, 이것은 바른 역사이해가 아닐 것이다. 양편의 노력을 다 인정하고 問題點을 제시하는 것이 학자의 임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그리고 전국 각지에서의 기독교인의 蜂起는 제쳐두고라도, 가해자였던 일본의 기록에 “기독교도의 선동으로 말미암아 일어났다”라는 식의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基督敎人의 影響을 증명할 수 있고 기독교인들이 입은 피해는 기독교인들이 3·1운동에 관여하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174).

  그렇다고 3·1운동 以後의 교회의 대응 태도를 긍정적으로만 볼 수는 없다. 교회는 일제의 不法 蠻行에 대해서는 공동 대응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이후의 挫折과 妥協에 대해서도 긍정적으로는 볼 수 없는 일이다. 일제의 회유에 넘어가 그들의 약속을 믿은 것은 둘째 치고라도 3·1운동 참여자체를 후회하는 등의 행동을 보인 일부 인사들의 행적을 비판하면서 반성할 필요는 있다175). 그렇다고 해서 3·1운동에서의 기독교인들의 활약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다. 곧 3·1운동에 참여하기까지의 고뇌는 인정해 주어야 할 것이다. 신석구 목사의 경우 처음에는 고뇌하다가 참여하였는데176)이러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救國祈禱會의 독립운동에의 공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乙巳條約 이전부터 계속된 구국기도회177)는 1907년의 대부흥 이후에도 교회 내에서 계속되었으며 3·1운동때까지도 계속하여 이어져 내려왔다. 이것과 105인 사건, 3·1운동에의 참여야말로 진정한 기독교인의 나라사랑의 정신이 표출된 예가 되지 않았나 생각되어진다.

  3·1운동은 기독교인을 비롯한 종교인이 참여한 民族運動이지 宗敎運動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基督敎를 비롯한 각 종교의 3·1운동에의 공헌은 무시될 수 없다. 그리고 구한말의 기독교 대부흥운동은 3·1운동을 비롯한 구국운동에 信仰的 基礎를 제공한 점과 그 기초위에 행동하게 한 原動力이라는 점에서 평가를 받아야 한다고 필자는 생각하는 바이다.

 


Ⅴ. 結 論

 


  우리는 지금까지 韓末 基督敎 大復興運動의 原因, 經過, 結果 등을 알아보았다. 지금까지 다루어진 내용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韓末 基督敎 大復興運動에 대한 기존의 연구성과를 알아보고자 하였는데 여기에 대하여는 韓國敎會의 成長에 기여하였다는 敎會史學者들의 견해와 民族運動에 肯定的 또는 否定的 영향을 미쳤다는 일반사학자들의 견해를 살펴 보았다. 그리고 이러한 연구성과를 가지고 대부흥운동의 역사적 고찰을 시도하고자 함을 밝혔다.

  둘째로 대부흥운동이 우리 民族史內의 事件이면서 敎會史의 사건임을 증명하고자 하였다. 우선 대부흥운동의 時代的 背景이라 할 수 있는 朝鮮王朝의 滅亡背景을 백성을 못살게 한 勢道政治와 時代錯誤的인 興宣大院君의 鎖國政治, 그의 아들인 高宗代의 정치인들의 문제점을 중심으로 파헤침으로 알아보았다. 또한 平安道 지역이 조선시대에 차별받게 된 원인을 밝힘과 아울러 이로 말미암은 평안도 지역 知識人들의 活動을 살피면서 이들이 기독교에 입교하게 된 또다른 요인을 알아보고자 함으로써 부흥운동의 지역적 배경을 살피고자 하였다. 그리고 당시의 각 종교들의 문제점을 유교, 불교, 샤머니즘, 카톨릭의 기본교리와 우리 민족사에 끼친 영향과 초기 한국교회에 끼친 영향을 다룸으로써 당시의 기독교의 필요성의 이유를 알아보았다. 또한 기독교내의 배경을 다룸으로 말미암아 부흥회의 직접적인 원인을 알아보았다. 여기서는 선교사의 신학이 종래 우리가 이해하여 왔던 근본주의 신학은 아니며 보수적이되 경험적인 신학임을 밝혔다. 그리고 이러한 신학이 구한말 그리스도인들과 기독교 대부흥운동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가를 살펴보았다.

  세째로 대부흥운동의 展開過程을 다루었는데 평양 장대현 교회의 復興査經會를 중심으로 다루되 날자순으로 서술하면서 여기에서 전파된 message의 간략한 내용과 뜨거운 기도열기를 전함으로 부흥회의 특징을 알아보고자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1907년 전후의 대부흥이 靈的이고 道德的인 신앙부흥운동임을 증명하였고 이것이 각 지역의 復興會에서 어떠한 영향을 받았는지 그리고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 알아보았다.

  네째로 大復興運動의 影響을 다루었는데 대부흥운동의 영향을 첫째로 기독교가 한국에 정착된 계기라고 정리하였다. 둘째로 敎勢의 變化가 크지 않고 靈的·內實的 運動이었음을 증명하였다. 세째로 대부흥운동으로 말미암아 宣敎師들과 韓國人 敎人들간의 화해가 이루어졌음을 보였다. 네째로 信仰目的이 現世中心 특히 교회를 民族運動의 도구로서 인식함에서 벗어나 신앙 속의 민족운동이라는 정신이 확립되었음을 보였다. 다섯째로 부흥운동으로 말미암아 은혜받은 신도들이 牧師 되기를 청하여 神學校의 發展이 이루어지고 이로 말미암아 敎會 指導部의 변화가 이루어져 교회가 民族運動에 참여할 여지를 제공하였으나 선교사들의 우려로 말미암아 敎派敎會의 구형이 이루어졌음을 보였다. 여섯째로 非政治化의 문제를 다루면서 이러한 부흥운동으로 말미암은 비정치화가 교회의 眞正한 發展임을 보임과 아울러 교회가 민족운동에 무관심해졌다는 일부 識者들의 偏見에 대한 反駁을 제기하였으며 교회가 민족운동에 참가한 증거로 愛國啓蒙運動과의 관계, 그리고 105人 事件과 3·1운동과의 관계를 보였다. 또한 이에 대한 학자들의 偏見을 반박하기 위하여 대부흥운동과 이들 운동과의 관계를 參與階層의 문제를 중심하여 정리함으로 말미암아 한국교회가 대부흥운동으로 인하여 愛國敎會임이 증명되었다.

  우리는 여기서 한말의 대부흥운동으로 말미암아 信仰의 目的이 순수하여지고 敎會의 진정한 발전이 이루어졌으며 신앙의 實踐이 愛國運動으로 표출되었음을 알아보았다.

  이러한 부흥운동은 韓國 敎會에 그리고 韓國 近代史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이 운동에서 어떠한 점을 배워야 할 것인가?

  아마도 신앙의 內燃에서 우러나오는 外延의 정신을 살리는 것이 根本 課題라 할 수 있을 것이다. 基督敎人은 물론이고 기독교인이 아니라 할 지라도 자신이 믿는 宗敎 또는 理念을 바르게 실천할 줄 알아야 할 것이다. 100여년 전 우리 조상들이 신앙을 키우기 위하여 노력하였고 그 신앙을 실천하였던 것을 보면 현대에 사는 우리도 비록 형태는 다를지라도 조상들의 근본 이념을 본받아 우리 세대에 적용하여야 할 것이 아닌가. 오늘날의 교회는 최근에 들어서 지나치게 支配者에게 屈從하는 面도 보여왔고 지나치게 反撥하는 面도 보여왔다. 이것은 왜 그러할까? 聖經을 自身의 뜻에 맞게 해석하는 牧會者와 여기에 분별없이 따르는 일부 平信徒, 그리고 여기에 사랑없이 반발하는 다른 평신도의 태도는 교회를 靈的 共同體로 만드는 데 실패하게 하였던 중요한 요인인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現實에 대하여 역사에서 배운 것을 적용함으로 말미암아 더 나은 교회, 더 나은 국민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해야 함이 옳지 않을까 한다.

  본고를 작성하여 놓고 보니 아쉬운 점이 없지 않다. 특히 대부흥운동과 그 이후의 민족운동과의 관계를 참여계층의 문제를 통하여 다루면서 구체적으로 증거를 많이 대지 못한 점이 아쉬우며 지나치게 호교론적이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또한 1907년 전후의 대부흥이 타 지역에 미친 영향과 민족운동과의 관계가 제대로 다루어지지 못한 점이 아쉽다. 하지만 필자는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왜곡하고자 하지는 않았고 널려진 사실들을 가지고 기존의 파괴적인 편견에 대한 반론을 시도하였다는 점으로 본고의 의의를 삼고자 한다. 끝으로 이 연구로 말미암아 한국 기독교사를 다른 역사적 측면과 관계시켜 연구하는 ‘사상사’적 고찰이 더욱 이루어지고 사실을 있는 그대로 전하는 사람들이 더 나왔으면 하며 본고를 맺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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