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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대한감리회(Korean Methodist Church)는 1884년 6월에, 미국 감리교선교사 R.S. 매클레이가 서울에 와서 1884년 7월 3일 고종으로부터 선교 개시의 허가를 받고 교육사업과 의료사업을 통해 선교를 시작하였다. 공식적인 미감리회 국외선교부는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 부부와 스크랜턴(William B. Scranton) 부부, 국외여선교부는 스크랜턴 대부인(Mary F. Scranton)을 초대하여 한국 선교사로 임명하였고, 이들 중 아펜젤러 부부가 1885년 4월 5일 부활주일에 장로교 언더우드 목사와 함께 내한하였다.

 

그 해 6월에는 아펜젤러가 학생 6명을 데리고 배재학당()을 개교하였으며 스크랜턴은 같은 해 9월 처음으로 서울 정동()에 교회와 병원을 열고, 그의 부인은 단 1명의 여학생으로써 1886년에 이화학당()을 개설하였다. 1887년 1월 정동교회에 처음 한국에서 주일학교()를 열었고, 12월에는 북감리회를 조직하였다. 한편 남감리회도 독자적으로 한국에 선교를 시작하였다.

 

감리교회의 신앙은 1930년 발표한 기독교 조선감리회의 교리적 선언을 중심으로 전개되었고, 1997년 새롭게 신앙고백을 하고, 이 사회에 대한 봉사와 책임의지를 발표한 사회신경 역시 현대적 의의를 담아 발표하였다. 기독교대한감리회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WCC)에 가입되어 있다.

 

현재의 한국 감리교는 4년에 한 번 열리는 총회와, 총회 밑에 5개 연회(서울·중부·동부·남부·삼남)가 있고 연회 밑에 100여 개 지방회가 있는데 평균 한 지방회에 30여 개의 교회가 소속되어 있다(1983).

현재 총회는 100-101 서울 중구 태평로 1가 64-8 감리회관(광화문빌딩) 16층에 두고 있다. 감리교는 장로교와 함께 역사가 제일 오래되었을 뿐만 아니라 제일 많은 교회를 가지고 있다.

 

 

    ○ 요한웨슬리

    ○ 아펜젤러

    ○ 프란시스 애즈버리

 

    ○ 감리교

 

    ○ 기독교대한감리회 약사

    ○ 감리교회 조직

    ○ 교리적 선언

    ○ 사회신경

 

    ○ 엡윗청년회

 

    ○ 기독교대한감리회 본부선교국

    ○ 기독교타임즈

 

   ○ 학교

       감리교신학대학교 

         목원대학교

 

   ○ 교회

          내리교회(1885. 7.25)  

          정동제일교회(1885.10.11)

          상동교회(1888.10. 9)

          강화교산교회(1893)

          부천제일교회(소사교회, 1930. 11. 1)

 

출처 : http://kcm.kr/dic_view.php?nid=39429&page=1&kword=&k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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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사 /  기독교대한감리회

 

그리스도의 복음이 이 땅에 들어온 19세기 말, 우리 민족은 봉건적 체제의 붕괴와 외세 침략으로 인한 정치적 사회적 위기를 맞고 있었다. 봉건적 사회 체제를 이념적으로 지탱해 오던 전통 종교는 변화를 갈망하는 민족의 영적 윤리적 갈증을 해소시켜 주지 못하고 있었다. 이러한 때에 여러 경로로 전파된 복음은 우리 민족을 죄에서 구원하였고 새로운 역사의 원동력이 되었다.
 

미감리회·남감리회 선교부 선교 시대

 

1. 복음 수용과 선교사 내한
 1870∼1880년대 새로운 사상과 종교를 갈망하는 한국인들은 만주와 일본에서 기독교 복음을 접하고 성서를 우리말로 번역하였다. 이들이 해외에서 출판한 한글 성서들은 매서인을 통해 국내에 들여와 읽혔고 그 결과 많은 세례 지원자들이 나왔다. 이러한 상황에서 1883년 9월 미감리회 볼티모어 연회 소속인 가우처(John F. Goucher) 목사는 외교사절단을 이끌고 미국을 방문 중이던 민영익을 만난 후 한국 선교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가우처 목사는 미감리회 국외선교부에 한국 선교 착수를 촉구하였고 일본 주재 미감리회 선교사 매클레이(Robert S. Maclay)로 하여금 한국 선교 가능성을 모색하도록 하였다. 중국과 일본에서 감리회선교를 개척했던 매클레이는 1884년 6월 24일 내한해서 ‘학교와 병원 사업을 해도 좋다.’는 국왕의 허락을 받았다. 이에 미감리회 국외선교부는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 부부와 스크랜턴(William B. Scranton) 부부, 국외여선교부는 스크랜턴 대부인(Mary F. Scranton)을 초대하여 한국 선교사로 임명하였고, 이들 중 아펜젤러 부부가 제일 먼저 1885년 4월 5일 부활주일에 내한하였다.

 

2. 미감리회의 한국 선교
 미감리회의 선교는 교육과 의료, 문서 사업으로 시작되었다. 배재학당과 이화학당은 한국 근대 교육의 요람이 되어 많은 지도자들을 배출하였으며, 시병원과 보구여관은 한국 근대 의료사업의 요람이 되었다. 감리회 출판사에서 펴낸 성서와 서적은 복음 전도에 유효한 도구가 되었고 한글문화의 발전을 촉진시켰다. 1887년 7월 24일 배재학당 학생 박중상이 첫 감리교 세례교인이 되었고, 1887년 10월 9일 서울에서 오늘의 정동제일교회의 모체인 ‘벧엘예배당’이 설립되었다. 1897년 서울과 인천, 평양에서 엡윗청년회가 창설되었는데 이는 오늘의 감리교 청년회와 청장년선교회 및 남·여 선교회의 모체다. 선교 초기부터 신학반과 신학회를 조직하고 한국인 목회자 양성을 추진하여 1901년 최초 한국인 목사로 김창식 목사, 김기범 목사를 배출했다. 미감리회에서는 1902년 하와이 이민 선교를 시작으로 북만주와 몽고, 일본 지역에 선교사를 파송하였다.

 

3. 남감리회의 한국 선교
 남감리회 선교의 시작은  개화파 지도자 윤치호가 망명중인 1887년 4월 중국 상해에서 세례 받고 한국 최초의 남감리교인이 되면서 부터이다. 그는 미국에 유학할 때부터 남감리회 국외선교부에 한국 선교를 촉구하였다. 이에 1895년 10월 18일 중국에 있던 헨드릭스(E. R. Hendrix) 감독과 리드(C.  F. Reid) 선교사가 내한하였고 이듬해 8월 리드 부부가 서울에 정착하여 선교활동을 시작했다. 그 결과 1897년 5월 2일 고양읍에 첫 남감리교회가 설립되었다. 남감리회에서도 배화여학교, 한영서원, 호수돈여학교, 구세병원 등 학교와 병원을 설립하였고, 태화여자관을 비롯하여 개성, 원산, 춘천 등지에 여자사회관을 설립하여 한국 근대 사회복지사업의 문을 열었다. 남감리회는 선교 초기부터 신학교육에 있어서 미감리회와 협력하였고, 1907년에 두 교회 연합으로 협성신학교를 설립하였다. 남감리회는 1907년 동만주 선교를 시작으로 만주, 시베리아에 선교사를 파송하였다.

 

4. 부흥운동과 토착 신학
 1903년  원산에서 남감리회 선교사 하디(Robert A. Hardie)의 회개로 시작된 부흥운동은 1907년 평양 대부흥운동을 거쳐 1909년 백만명구령운동으로 연결되었다. 한국인들은 이 부흥운동을 통해 회개와 중생과 성결을 체험하였고, 기독교적 가치와 윤리 의식을 바탕으로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하였다. 이러한 신앙체험을 바탕으로 복음을 주체적으로 해석하려는 토착 신학이 감리교 신학자들에 의해 수립되었다. 노병선 목사는 기독교를 동양과 서양을 포괄하는 ‘하늘의 종교’이자 한국의 근대화를 촉진시킨 ‘은혜의 종교’로 변증하였다. 최병헌 목사는 동양 전통 종교와의 대화를 통해 ‘기독교의 절대성’을 규명하였다. 이같은 토착 신학은 성서와 기독교 신앙 전통에서 동양의 문화·종교 전통을 새롭게 해석하여 수구 세력의 기독교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해소시켰으며, 기독교가 민족 문화와 종교 전통 속에 뿌리를 내릴 수 있는 문화선교의 길을 열어 주었다.

 

5. 민족운동과 사회운동
 일제의 침략과 지배에 저항하는 감리교인들의 민족운동은 구국기도회로 시작하여 다양한 항일 투쟁으로 발전하였다. 전덕기 목사는 상동교회 엡윗청년회와 상동청년학원을 중심으로 많은 민족운동가들을 규합하여 국권 회복운동과 애국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1907년 경기도 이천지방 구연영 전도사는 교회 청년들로 구국회를 조직하여 민족 계몽운동을 벌이다가 아들과 함께 일본군에 체포되어 희생되었고, 같은 해 강화읍교회 김동수 권사도 의병운동과 관련되어 두 동생과 함께 일본군에 희생되었다. 1911년 105인사건 때 윤치호, 서기풍, 안경록 등이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고, 3·1운동 때 이필주 목사, 신홍식 목사, 정춘수 목사, 최성모 목사, 오화영 목사, 신석구 목사, 박동완 전도사, 박희도 전도사, 김창준 전도사 9명이 민족대표로 참여하여 옥고를 치루었다. 3·1운동 당시 교회는 만세운동의 구심점이 되었고 그로 인한 희생도 컸다. 수원지방의 제암리와 수촌리, 화수리를 비롯하여 많은 교회당이 일본군의 방화로 불탔고 교인들이 희생되었으며, 이화학당 학생 유관순과 평양 남산현교회 부목사 박석훈 등이 옥중 순국하였다. 3·1운동 이후에도 감리교인들은 상해 임시정부와 독립운동단체, 애국부인회 등 민족운동 단체에 적극 참여하였고, 농촌계몽운동, 절제운동 같은 민족주의적 사회운동을 전개하였다.

 

기독교조선감리회 자치 선교 시대

 

6. 남북 감리회 합동
 3·1운동 이후 한국 교회의 자립 의지가 높아지면서 미감리회와 남감리회 지도자들은 교회 합동을 논의하기 시작하였다. 1924년 두 교회 ‘교회진흥방침연구회’를 중심으로 교회 합동을 추진키로 하고 1925년 ‘남북 감리교연합기성위원회’가 조직되어 교회 합동을 위한 실무작업에 착수하였다. 미감리회와 미남감리회 총회에서도 한국 교회의 합동운동을 인정하였고 1930년 11월 18일 남북 감리회 대표 22명으로 합동전권위원회가 구성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1930년 12월 2일 ‘기독교조선감리회’ 창립 총회가 서울에서 열려 초대총리사로 양주삼 목사를 선출하고 한국 감리교회의 ‘자치교회 시대’를 열었다. 한국 감리교회는 그 설립 취지로 ‘진정한 기독교회’, ‘진정한 감리교회’, ‘조선적 교회’의 3대 원칙을 선포하였으며 신앙 및 신학 원리로 8개조 “교리적 선언”과 16개조 “사회신경”을 채택하였다. 그리고 모든 의회 구성을 평신도와 성직자 동수로 하여 평신도의 역할을 증대시켰으며, 여성 성직의 문호를 개방하여 1931년 연합연회에서 한국 최초로 여선교사 14명이 목사 안수를 받았다.

 

7. 교회의 영적 갱신과 신학의 발전
 1930년대 한국교회가 점차 신앙적 영성과 사회적 지도력을 상실한 채 비판을 받고 있을 때, 이용도 목사는 부흥회를 통해 영적 각성과 교회의 갱신을 촉구하였다. 그의 몰아적이고 체험 중심적인 신비주의 신앙이 일부 교회로부터 견제와 비판을 받았지만, 그가 보여 준 진솔한 ‘예수 중심’의 신앙과 삶은 큰 위기에 처한 한국교회의 영성 회복에 중요한 전기가 되었다. 또한 1930년대 한국 교회는 진보·보수 신학 사이에 첨예한 갈등을 겪고 있었다. 그러나 웨슬리 복음주의 전통에서 진보적 신학을 수용하였던 정경옥 목사는 ‘신앙에서는 보수주의, 신학에서는 자유주의’ 입장을 취하면서 ‘신학의 현대화’와 ‘신학의 향토화’를 추구했고, 경건적 신앙 실천을 바탕으로 성서의 절대 권위를 강조했던  변홍규 목사는 보수적 신학 전통을 계승하며 한국 감리교회의 신학 발전에 기여했다.

 

8. 일제 말기 교회 수난
 일제 말기 교회는 ‘신사참배’를 비롯한 일본의 국가 종교의식을 강요받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부 교회 지도자들은 일제의 회유와 위협에 굴복하여 신사참배를 수용하는 오류를 범하기도 하였다. 점차 강력해지는 일제의 억압 하에 한국 감리교회는 1943년 ‘일본기독교조선감리교단’이 되었다가 1945년 7월 말 ‘일본기독교조선교단’에 흡수되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신앙양심과 민족의식에 투철한 신앙인들은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투쟁하였다. 예산제일교회 청년·학생들이 ‘학생속회’를 통해 신사참배 거부운동을 전개하다가 발각되어 투옥되었고, 모곡교회의 민족운동가 남궁억 전도사에게 영향을 받은 홍천과 춘천 지방 목회자들과 평신도들은 ‘십자가당’을 만들어 항일투쟁을 벌이다가 투옥되었다. 그리고 동부연회의 철원읍교회 강종근 목사, 회양읍교회 권원호 전도사, 천곡교회 최인규 권사 등도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투쟁하다가 옥중 순교하였다.

 

기독교대한감리회 자립 선교 시대

 

9. 민족 분단과 교회 분열  우리 민족은 8·15해방과  함께 남북 분단의 비극을 맞았다. 38선 이북에 있던 교인들은 1946년 서부연회를 재건하였으나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서면서 극심한 수난을 받았다. 많은 교회 지도자들이 공산정권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투옥되었고, 철원에서는 장흥교회 청년들이 애국청년단을 조직하여 반공투쟁을 벌이다가 투옥되었다. 결국 북한에 있던 많은 교인들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 월남하였고, 이후 북한 교회는 ‘침묵의 교회’가 되었다. 6·25 전쟁으로 많은 예배당이 파괴되었고 수많은 인명 피해를 입었다. 전쟁을 겪은 후 남과 북사이에 정치·문화·종교적 갈등과 대립 구조는 더욱 심화되었다. 이런 민족의 분단상황에서 교회는 내적 갈등과 분열로 어려움을 겪었다. 한국 감리교회도 해방 직후 재건파·복흥파 분열을 시작으로 1954년, 1970년, 1974년에 각각 교회 분열의 아픔을 겪었으나 오래지 않아 다시 합동함으로 ‘하나된 감리교회’ 전통을 이어 나갔다.

 

10. 교회성장과 해외선교
 전쟁 후 감리교회는 미연합감리회 선교부의 재정 지원을 받아 재건과 복구 작업을 신속하게 전개하였다. 그리고 1968년 온양에서 개최된 한·미 선교정책협의회를 계기로 한·미 감리교회는 선교의 동반자 관계를 정립하게 되었다. 이와 함께 감리교회는 교회 부흥과 민족 구원의 선교적 사명에 충실하고자 노력했다. 1964년 김활란, 홍현설의 발의로 시작된 민족복음화운동은 초교파적 대중부흥운동으로 연결되었고, 1974년 시작된 ‘5천 교회 1백만 신도운동’과 1987년 시작된 ‘7천 교회 2백만 신도운동’은 교회 성장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그 결과 해방 당시 5만 명 수준이던 교세가 1984년에 90만 명, 1996년 현재 7개 연회, 국외선교연회, 서부연회, 183개 지방, 4,700교회, 135만 명 교인을 넘게 되었다. 이처럼 교회 성장을 이룩한 한국 교회는 해외 선교를  통한 세계복음화에 적극 참여하였다. 1958년 볼리비아 선교를 시작하였고, 1965년 ‘감리교 선교 80주년 기념사업’으로 사라왁 선교가 시작되었으며, 1970년대 태평양 동아시아 지역, 1980년대 동남아시아 중동 지역과 아프리카 지역, 그리고 1990년대 러시아와 동유럽, 중국 등 옛 공산권 지역으로 선교가 확산되었다.

 

11. 교회 일치운동과 사회 참여
 ‘하나된 교회’를 지향하는 한국 감리교회는 해방 후에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대한성서공회, 대한기독교서회, 한국찬송가위원회, 기독교방송, 대한기독교교육협회, 기독교청년회, 여자기독교청년회를 통한 초교파 연합사업에 적극 참여하였다. 그리고 아시아교회협의회, 세계교회협의회, 세계감리교협의회 등 국제적 교회일치운동 기구에 참여하면서 아시아와 세계 교회 신학과의 교류를 통해 감리교회의 선교 및 신학적 과제를 확인하였다. 1960년대 이후 감리교 신학자들에 의해 제기된 ‘토착화 신학’은 기독교 신학 전통에서 한민족의 종교·문화 전통을 재해석함으로 동·서 신학의 교류와 대화의 길을 열었다. 그리고 신앙인의 적극적인 사회 현실참여를 촉구하는 ‘하나님의 선교’ 신학 입장에서 1961년부터 산업선교가 시작되었다. 산업화 과정에서 소외된 노동자들의 인권 회복과 노동 환경의 구조적인 개선을 위한 노력으로 발전된 산업 선교는 1970년대 들어서 사회정의 구현운동, 민주화운동으로 발전하였으며, 1980년대 노동운동, 농민운동, 도시빈민운동, 환경운동, 통일운동으로 이어졌다.

 

12. 선교 100주년과 자치 60주년
 한국 감리교회는 ‘선교 1백주년’을 맞아 1984년 6월 24일 ‘기독교대한감리회 1백주년 기념 연합예배’를 개최하고 “기독교대한감리회 1백주년 신앙선언”을 발표하였으며 1985년 4월 5일에 개최된 ‘기독교대한감리회 1백주년 기념대회’에서는 “기독교대한감리회 1백주년 기념대회 선언문”을 채택하여 선교 1세기를 정리하고 선교 2세기를 전망하는 신앙과 신학적 결의를 밝혔다. 그리고 1990년 10월 29일 ‘기독교대한감리회 자치 60주년 기념대회’를 개최하고 “기독교대한감리회 자치 60주년 선언문”을 통해 한국 감리교인들은, ‘역사적 전환점에 서 있는 교회와 민족 앞에서 그리고 나아가서 세계의 참된 평화를 위하여 우리의 선교적 사명을 마음 속에 되새기면서’ ‘새로운 각성과 결단을 가지고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할 것’을 다짐하였다.
한국 감리교회는 한 세기 역사를 통해 1)성서 전통 이성 체험을 바탕으로 개인구원과 사회구원의 균형과 조화를 추구하는 웨슬리 복음주의 신앙 전통 2)한말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민족이 처한 사회·국가적 상황과 현실에 적극 참여하여 민족의 구원을 구현하는 민족주의 신앙 전통 3)기독교 복음을 한민족의 역사·문화적 전통에서 주체적으로 수용·해석하는 토착적 신학전통 4)‘하나의 복음’, ‘하나의 교회’를 지향하는 교회 일치운동 정신에 입각하여 다른 교파 교회와 대화와 협력을 추구하는 에큐메니칼 신앙 전통을 수립하였다. 이러한 역사 및 신앙 전통을 계승한 오늘의 한국 감리교회는 민족과 세계 복음화, 민족의 평화 통일 그리고 세계 인류의 평화공동체 구현을 위한 선교 사명이 있음을 확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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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美 북장로교 한국선교의 주춧돌 맥윌리암스
 

   미국 선교 잡지에 이수정이 기고한 한국 선교의 제창에 자극을 받은 미국의 각 교단 해외 선교부는 감리교가 먼저 눈을 떠 한국 선교를 차분히 준비하였다. 그때 미국 북 장로교회 역시 한국선교사업의 가능성을 엄밀히 타진하고 있었다.

 

   그러나 해외 선교 본부의 분위기는 두 갈래의 반응이었다. 하나는 시기상조라는 의견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즉시 선교활동을 개시해야 한다는 의견이었다. 그런데 미국 북 장로교회 해외선교부 총무 엘린우드(F. F. Elinwood)가 한국 선교는 곧바로 착수해야 한다는 생각을 간직하고 있었다.


   이수정의 한국 선교에 대한 이 호소는 곧바로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이때 감동을 받은 사람이 맥윌리암스(David W. Mcwilliams)였다.


   그는 뉴욕 라파이에트(Lafayette)장로교회를 섬기고 있었고 북 장로교 해외 선교부의 일을 돌보고 있었다. 그는 선교 잡지에 게재된 한국 선교에 관한 글을 읽고 엘린우드 총무에게 한국 선교의 가능성을 질문했다. 엘린우드는 그에게 한국 선교의 가능성을 확인해 주게 되었다. 맥윌리암스는 기쁜 마음으로 누구든지 한국 선교를 희망하는 선교사가 있다면 선교사 두 사람의 년간 생활비로 5,000달러를 헌금하겠다는 뜻을 북 장로교 해외선교부에 전달했다.


   미국 북 장로교 해외선교부는 이 제의에 크게 고무되어 한국 선교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이것이 출발점이 되어 많은 미국 성도들이 선교 헌금을 하게 되었고 해외 선교부는 한국 선교사역을 구체화하였다. 그리하여 1884년 봄에 장로교 계통학교에서 중등교육을 받고 메리빌대학을 거쳐 테네시 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한 의사 헤론(John. W. Heron)을 한국 선교를 위한 첫 선교사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북 장로교는 아직 한국의 형편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고 곧장 입국하는 것이 여의치 못하다고 판단하여 일본에서 한국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한국어를 익히면서 기회를 엿보도록 조치하였다.


   헤론은 테네시 대학교에서 교수로 봉직하도록 여러 차례 권유를 받았으나 한국 선교를 희망하여 그의 뜻을 관철하였다. 그는 1885년 6월 21일에 한국에 상륙하였다. 그때는 한국이 기독교 신앙을 허락하지 않을 때였지만 외국인끼리의 예배는 가능한 것이어서 그가 입국한지 한주일 후 6월 28일 저녁8시에 예배를 드렸는데 이 예배에 참석한 이들은 알렌(H. N. Allen)의사부부, 헤론 의사부부 그리고 스크렌톤 의사의 어머니(Mrs, Mary F. Scranton)등이었다. 그는 입국하자 곧 바로 알렌 선교사가 그해 2월에 개원한 광혜원에서 일하게 되었다.


   헤론은 1887년 알렌이 미국 워싱턴 주재 한국 공사관의 서기직을 맡으면서 선교사직을 사임하고 말았다. 이 일로 인해 헤론은 이병원의 후임자가 되어 운영의 책임을 맡게 되었다. 그는 당시 한국에 체류하고 있던 언더우드, 아펜젤러, 스크랜톤, 알렌과 함께 성서 번역 사업에 큰 공헌을 하게 되었다.


   1889년 호주 장로교회가 선교사 데이비스(J. H. Davis)를 파견, 내한하자 선교사 공의회가 조직 되었고 초대 회장직을 맡았다. 그는 문서선교사업 추진을 위해 문서 사업기관을 설립했는데 이것이 1890년 ‘대한 성교서회’였으며 후에 ‘대한 기독교서회’로 개명하였다. 이 모든 사업을 가능케 한 인물이 바로 맥윌리암스였다. 그는 진실로 한국 기독교의 주춧돌로서 영원히 한국교회에 기억될 것이다. (2004. 3. 6. 한국장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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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장로교회 역사와 정체성

 

서론

 

올해는 종교개혁기념 487주년을 맞이하는 해입니다. 종교개혁의 후손으로서 종교개혁의 중요한 정신을 이해하고 계승해 가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우리의 신앙을 위해서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올해는 종교개혁의 정신을 계승한 한국장로교회의 역사에 대해서 살펴보면서 장로교회의 신앙적 역사와 정체성을 다시 한번 발견하는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이런 역사적 정체성을 찾을 때 가장 성경적인 원리의 장로교회가 앞으로 나가야 할 방향을 계속해서 발견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본론

 

1. 한국의 기독교 역사

 

한국장로교의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일반적인 기독교의 역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장로교보다 먼저 들어온 로마 카톨릭의 전파를 통해서 이 땅에 기독교의 역사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살펴보면 한국장로교회의 초기 선교를 좀더 깊이 있게 이해게 될 것입니다.

 

1) 중국과 일본의 로마 카톨릭 전파

 

16세기 이후로 로마 카톨릭은 선교의 영역을 동양으로 확대하여 한반도 주변의 중국과 일본에 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인도를 거점으로 하여 1549년에 일본 선교가 시작되었고, 1583년에 중국 선교가 시작되었습니다. 로마 카톨릭은 선교는 단순히 기독교만을 전파한 것이 아니라 서양의 발전된 과학문명을 통한 정치적인 힘과 함께 선교활동을 했기 때문에 일찍부터 중국과 일본은 로마 카톨릭을 받아들이면서 서양의 과학문명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문명의 발전과 함께 각국의 정치적인 형편이 혼란하게 됨으로 인해서 중국과 일본은 이 정치적 혼란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조선을 공격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일본은 오랜 전국시대를 끝내고 강력한 막부 통치시대가 열리면서 지배층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서 조선 정벌을 시작했는데 이것이 1592-1598년 동안 이루어진 임진왜란이었습니다. 그리고 중국은 만주족을 배경으로 한 후금(後金/여진족이며 후에 청나라)이 중국 본토의 󰡐명󰡑을 위협하기 시작했으며, 후금은 명을 치기 전에 명과 우호적 외교를 갖고 있는 조선을 먼지 공격했는데 이것이 󰡒병자호란󰡓입니다.

 

임진왜란의 선봉장 이었던 고니시 유키나가는 세례명이 󰡐아우구스티노󰡑라고 불리는 천주교인이었으며,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 장수들의 사기을 일으키기 위해서 예수회 일본 부관구장인 󰡐고메스󰡑 신부를 동행시켜서 미사를 행하기도 했을 정도로 일본은 천주교의 영향이 컸습니다. 이 전쟁으로 조선은 엄청난 피해를 입었지만 선교사가 조선 땅에 들어오기도하고 전쟁 중에 군인들을 통해서 기독교가 소개되기도 하며 포로로 잡혀갔던 사람들 중 천주교인으로 개종하는 등 하나님의 섭리적 역사가 있기도 했습니다. 또한 중국은 1627년 여진족의 조선 침략인 󰡒정묘호란󰡓을 일으켰으며, 이 전쟁은 1637에 󰡒병자호란󰡓까지 이어졌습니다. 이 전쟁으로 승리한 청나라는 조선에 막대한 전쟁물자를 요구하고 볼모로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잡아갔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소현세자가 중국에 머물면서 예수회 신부인 󰡒아담 샬󰡓과 사귀게 되었습니다. 소현세자는 기독교에 대해서 많은 흥미를 갖게 되었고 조선으로 돌아갈 때 중국인 궁녀 감독관으로 교인 5명을 동행해서 데리고 가게 되어서 이들을 통해서 기독교가 조선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일본과 중국을 통해서 들어온 천주교는 조선의 유교적 전통과 불교로 인해서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그러나 조금씩 성장하기 시작하여 1777년 천주교 교리연구회 모임이 시작되고, 1784년에는 이승훈의 세례를 통하여 한국천주교회가 창설되기도 했습니다. 1794년에는 중국인 신부 주문모가 입국하였으며, 정약용이 천주교 성경을 번역사업을 시작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발전을 통해서 1831년 정식으로 로마 교황청에 의한 조선교구가 창설되기도 합니다. 1845년에는 한국인 최초 사제서품을 받은 김대건 신부가 세워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발전의 역사 뒤에는 수많은 핍박과 피흘림이 있었습니다. 조선의 유교적 전통인 제사문제로 인해서 많은 반대에 부딪쳤고, 천주교가 서양의 정치적인 힘을 빌어서 선교를 했기 때문에 조선과 정치적인 마찰이 일어날 때마다 수많은 신부들과 교인들이 목숨을 잃기도 했습니다. 특히 천주교인을 색출하기 위한 방법으로 󰡒오가작통법(1801)󰡓을 실시하기도 했으며, 신유박해로 300명 이상이 순교하기도 했고, 경신박해, 병인박해, 신미양요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핍박을 통해서 많은 순교자가 발생되었습니다.

 

2. 한국장로교회의 초기 선교

 

1) 19세기 말의 정치적인 상황

 

17세기 이후로 천주교가 조선에 정착을 했지만 많은 박해로 인해서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면서 침체기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19세기의 어려운 정치적 혼란을 통해서 이 땅에 복음이 흘러들어 올 수 있는 길을 준비해 주셨습니다. 19세기의 혼란한 정치적 어려움 가운데 조선은 강제적으로 서구문명을 받아들이게 되었으며, 이런 정치적 상황을 통해서 장로교 선교사들이 들어올 수 있는 길이 마련되었던 것입니다. 또한 정신적인 면에서 전쟁과 정치의 혼란으로 유교와 불교에 대한 신앙에 회의를 느끼던 사람들의 마음속에 새로운 신앙적 내용을 소망하게 되는 마음의 변화도 준비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일본은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고자 하는 욕망을 16세기 이후 포기하지 않고 계속 시도했습니다.임진왜란 이후 침체되었던 정치적 형편이 회복되자 1876년 조선의 문호를 개방하고자 하는 무력을 시도했고 급기야는 󰡒강화도조약󰡓을 강제로 체결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일본은 계속해서 조선의 모든 영역의 통치권을 얻기 위해서 청일전쟁(1894)과 러일전쟁(1904)을 조선 땅에서 일으켰습니다. 전쟁에 승리한 이후 영국과 미국의 동의를 얻어 일본은 을사조약(1905)을 체결하고 결국에는 1910년에 󰡐한일합방조약󰡑을 통해서 조선을 완전히 식민지 국가로 만듭니다. 이와 같은 격변기에 하나님께서 이 땅에 복음이 흘러들어올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정치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모든 희망을 빼앗긴 민족에서 참된

소망의 빛을 제시해 주신 것입니다.

 

2) 중국과 일본을 통한 성경 유입

 

한국장로교회의 독특한 역사는 1885년 본격적인 선교사의 입국 이전에 성경이 먼저 유입되고

그 성경을 통해서 자체적으로 교회가 형성되는 놀라운 일입니다.

성경번역과 소개는 중국과 일본을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

중국에는 천주교와 다른 나라의 기독교 선교회들이 많이 있었지만 그 중에 특히 스코틀랜드 연합장로교회와 성서공회를 통하여 성경번역 작업이 이루어졌습니다. 스코틀랜드 성서공회의 중국주재 책임자인 알렉산더 윌리암슨과 그 제자들인 로스(John Ross)와 매킨타이어를 통해서 한국선교의 문이 시작되는데 그 중 로스를 통하여 성경번역이 이루어집니다.

1878년 로스는 이응찬의 도움으로 요한복음과 마가복음을 번역하였고, 1887년 번역이 완성되어 󰡒예수셩교젼셔󰡓가 출판되었습니다. 성경번역이 이루어진 후에는 각양의 방식을 통해서 조선으로 성경이 보급되었으며

그 중 서상륜을 통해서 언더우드에게 찾아가서 세례를 받고 소래교회(1887)가 세워지기도 합니다.

 

일본을 통해서는 이수정이 성경번역의 일을 완성하는데,

그는 온건개화파에 속한 인물로서 임오군란 때 명성왕후를 구하고 신임을 얻어 일본수신사 박영효의 비공식 수행원으로 일본에 갔다가

1882년에 토교 축지교회의 예배에 참석하는 계기를 통해서 미국 장로교회 선교사 녹스에 의해서 세례를 받게 됩니다. 이후 김옥균의 인솔로 일본에 갔던 유학생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되고 이들을 중심으로

1883년말에 토교에 한인교회를 설립하기도 했습니다.

이수정은 1883년 5월부터 성경번역을 시작했으며,

1885년 신약성경을 출판하게 됩니다. 바로 이 시기에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일본을 거쳐서

이수정이 번역한 마가복음을 들고 1885년에 한국에 입국하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한국기독교는 중국과 일본에서 일어났던 장로교회의 선교활동을 통해서 성경이 번역되고

이 성경을 배포하면서 많은 회심자들을 얻게 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장로교회의 선교초기 활동은 이 땅에 기독교를 정착시키는데 매우 중요한 요소를 감당했던 것입니다.

 

3) 초기 선교사들의 입국과 활동

 

1882년 󰡐한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된 것을 계기로 미국의 많은 선교사들이 한국에 들어오게 됩니다. 1884년 알렌은 의사의 신분으로 한국 땅에 들어옵니다. 그는 1884년에 일어났던 갑신정변으로 부상을 당한 명성왕후의 가족인 민영익을 치료해줌으로 고종으로부터 신임을 얻어 광혜원(제중원)이라는 병원을 세우게 됩니다. 이 병원은 후에 미국인 실업가 세브란스에 의해서 새롭게 운영되면서 세브란스 병원으로 발전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선교사의 직함을 가지고 입국한 사람은 1885년 감리교의 아펜젤러와 함께 입국한 언더우드 목사입니다. 언더우드는 북장로교회 선교부의 소속을 둔 장로교 선교사입니다. 그가 선교사업으로서 가장 우선적으로 행한 일은 다른 여러 가지 일도 있지만 1893년 시작된 성경번역 사업과 성경교육을 들 수 있습니다. 이처럼 장로교는 처음부터 철저한 성경관에 입각한 정신을 기초로 성경을 제시하고 가르치는 사역을 통하여 교회가 세워져 간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1907년에는 장로교회의 역사 중에서 아주 중요한 작업이 이루어집니다. 북장로교회, 남장로교회, 호주장로교회, 카나다장로교회를 중심으로 장로교회 질서체계의 핵심이 되는 󰡒노회󰡓를 조직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독노회󰡓라고 합니다. 이처럼 장로교회는 선교가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면서 우선적으로 장로정치제도를 확립하여 성경적인 정치제도를 통한 성경적 교회 확립을 하기 위해서 힘쓴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독노회에서는 성경적인 장로정치제도를 체계화한 것에도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지만 장로교회의 정치에 있어서 근본적인 원리가 되는 신조를 본격적으로 확립해 줬다는 것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요약본으로 인도에서 사용되던 신조를 정리해서 󰡒12신조󰡓를 채택한 것입니다. 이 신조의 전문에는 다음과 같은 정통장로교회의 중요한 정신이 고백되고 있습니다.

 

대한예수교장로회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목사와 장로와 집사들이 동의해야 할 자체의 신앙고백으로 채택함에 있어서, 이로써 대한예수교장로회를 설립한 모(母)교회의 교리적인 표준을 거부하지 않으며, 반대로 그러한 교리적 표준들 특히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대소요리문답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값진 해석으로, 그리고 우리의 교회와 신학교에서 가르쳐야 할 교리체계로 기리는 바이다. 그리고 본 교단은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을 자체의 요리문답으로 채용하는 바이다.

 

4) 평양신학교와 네비우스 선교정책

 

장로교회는 교회를 세우는 것도 중요한 목표로 생각했지만 이 교회를 바르게 세워가기 위해서 철저한 개혁신앙으로 훈련된 지도자들을 길러내는 사역에도 힘을 기울였습니다. 그래서 1901년에 한국장로회신학교를 설립하게 되었습니다. 이 학교는 평양에 있다고 해서 󰡐평양신학교󰡑라고 칭하기도 합니다. 이 학교의 교수진은 미국의 북장로교회 소속의 선교사들이 주축을 이루었으며, 특히 구 프린스톤에서 신학수업을 마친 선교사들도 많았습니다. 대표적인 인물로서는 마포삼열, 곽안력, 이길함, 블레어, 무어, 로스, 버히슬, 아담스, 이눌서, 어도만, 구레인, 함일돈, 소안론 목사 등이 있습니다. 특히 함일돈 목사와 같은 사람은 1920년대의 미국 장로교회의 신.구학파 분리 때 메이첸을 따라서 메이첸이 주도하던 󰡒독립선교회󰡓로 자리를 옮겨서 선교사역을 할 정도로 개혁신앙에 철저했던 분이셨습니다. 그는 구프린스턴 시절 메이첸과 워필드에게서 신학수업을 받으면서 개혁신앙을 정립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마포삼열 목사는 자유주의자들이 󰡐어빙돈성경주석󰡑을 출판한 것에 대해서 반대하고 개혁신앙의 입장에서 󰡐표준성경주석󰡑을 발간하고 그 서문에 개혁신앙의 중요한 정신을 다음과 같이 제시해 주기도 했습니다.

 

본 주석의 집필자들은 성경 전부가 만서 지중에 최대서요, 신의 참된 말씀임을 믿을 뿐 아니라, 또한 성경에 계시된 진리의 체계가 장로교회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요리문답에 선히 개괄되어 있다고 믿는다. 웨스트민스터 교리적 표준은 한국장로교회의 신조를 구성하는바, 본 주석의 집필자들이 이 신조를 믿음은 이것이 신의 말씀에 교훈되었음을 믿는 때문이다. 집팔자들은 성경이 이 신조의 제개조를 완전히 지지한다고 믿는다.

 

초기 선교사들의 중요한 선교사역들 중에서 네비우스 선교정책이 장로교회의 기초를 확립하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기도 합니다. 이 선교정책은 󰡒자립, 자치, 자전󰡓이라고 하는 표어로 유명하기도 하지만 그 보다 더 중요한 내용은 이런 표어들이 나오게 된 신학적 기반을 들 수 있습니다. 네비우스 선교정책의 가장 중요한 선교정책은 성경중심의 신앙과 성경중심의 교회통치와 전도를 들 수 있습니다. 감리교나 로마 카톨릭은 주로 사회사업을 통해서 교회활동을 넓혀갔지만 장로교회는 철저하게 성경중심의 신앙, 교육, 교회정치확립, 전도를 세워갔던 것입니다. 주요한 내용들을 보면 요리문답 교육을 위한 주일학교, 일주일 동안의 온종일 사경회, 지교회에서의 학습교인반, 가정예배, 성경통신과정, 주일학교 연장, 기독교 면려운동(구제), 여름성경학교, 성경클럽, 상품을 내건 조직적인 암송 공부 등이다. 전체적인 내용은 교회 안에서 철저하게 성도들이 성경을 공부하고 신조를 배우는 과정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보게됩니다.

 

이와 같은 장로교회의 중요한 신학적 입장과 또한 장로정치의 확립을 통해서 초기한국장로교회는 미국의 구프린스턴의 개혁신앙적 입장을 계승한 철저한 보수주의, 칼빈주의 역사적 개혁파 교회의 특징을 세우게 되는 것을 봅니다. 장로교회의 철저한 보수주의적 신앙모습에 대한 예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은 것이 있습니다. 우선 입교를 위한 학습세례의 과정이 매우 엄격하고 어려웠던 것을 봅니다. 대상자가 성경에 대한 이해와 삶의 변화된 모습을 제시하지 못하면 세례를 보류했으며, 입교한 성도들도 철저하게 권징을 받기도 했습니다. 1900년에 행해졌던 입교문답의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당신은 주일을 성수합니까?, 당신은 음주를 합니까?, 나는 한 대 술고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 몸은 내 것이 아닙니다. 만일 내가 내 몸을 잘못 사용한다면 나는 영벌을 받을 것입니다. 이것들이 당신을 유혹하지 않던가요? 웬걸요. 물론 유혹하지요. 만일 내가 계속하여 성경을 읽지 않는다면 나는 끊임없이 노름, 간음죄 등에 유혹 받았을 것입니다.

 

위의 입교문답을 통해서 한국장로교회가 초창기부터 얼마나 경건하고 엄격한 신앙과 교회의 질서를 요구했지는 알 수 있습니다. 장로교회는 매춘과 흡연을 퇴치하는 일에 매우 적극적이었습니다. 웰본은 1904년 선교보고서에서 󰡒금주, 주일성수 파기, 그리고 다른 죄 때문에 세 명의 교인에게 교인자격을 정지시켜야만 했다󰡓고 보고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청교도적인 경건정신의 신앙과 삶을 계승한 한국장로교회는 초기부터 입교의 조건으로 음주, 흡연, 노름의 금지와 주일성수, 십일조 헌금 등의 생활을 요구했던 것입니다.

 

3. 한국장로교회의 발전과 분열

 

1) 자유주의의 도전과 1934년, 1935년 장로교 총회 결정

 

한국장로교회가 선교를 시작하는 시점부터 한국교회에는 자유주의신앙을 가지고 그 신앙을 전파하는 자유주의 목사들과 교회들도 세워졌습니다. 이들은 세력을 확장해 가면서 점점 더 보수주의적 입장을 세워가고 있는 개혁교회를 위협했습니다. 자유주의 목사들은 일본과 미국, 카나다에 가서 공부하고 돌아오면서 서구의 자유주의 사상을 많이 배워와서 한국교회에 급속히 퍼뜨리기 시작했습니다. 자유주의의 입장은 성경의 권위을 부정하고 신조교육의 필요성을 제외시켜버리기도 했습니다. 일본에서 신학공부를 한 목사들은 일본이 당시 바르트라고 하는 신학자를 가장 중요한 신학자로 인정하던 시대에 공부를 했기 때문에 이런 사상을 자연히 받아들이기 되었으며, 미국에서 신학공부를 한 사람들도 미국이 구 프린스턴과 신 프린스턴이 나누어지면서 신파를 중심으로 성경의 권위를 부정하고 예수님의 탄생, 부활, 재림, 기적 등을 부정하는 󰡒오번 선언서󰡓에 서명한 신학자들에게서 공부를 하면서 이들의 입장을 한국에 적극적으로 소개하게 됩니다.

 

대표적인 사람은 일본에서 바르트 신학을 공부한 김재준 목사입니다. 이 사람은 후에 정통장로교의 성경관과 신조관을 부정하고 자유주의적 입장을 확립하기 위해서 󰡒한국신학대학󰡓을 설립하여 대한기독교장로회를 세운 사람이기도 합니다. 김재준 목사는 바르트의 사상처럼 성경의 영감과 무오설을 부정하고 성경 안에는 하나님의 말씀도 있고 인간의 말도 있으며, 그 안에는 잘못된 부분도 많다고 언급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증거정도라고 권위를 낮추기도 했으며, 자유주의자들의 성경비평과 진화론 등을 받아들이기도 했습니다. 이 외에도 김춘배 목사는 자유주의 신학을 공부하고 돌아와서 교회내의 여권문제를 심각하게 도전했습니다. 즉, 그는 장로회 총회에 올리는 글이라는 제목으로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바울의 말은 2000년 전의 일 지방 교회의 교훈과 풍습이요, 만고불변의 진리는 아니다라고 비판하면서 교회내서 여성목사를 주장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장로교 안에서 자유주의 사상을 퍼뜨리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총회는 1934, 1935년에 거쳐서 중요한 결정들을 내립니다. 박형룡 목사를 연구위원으로 세워서 제시된 문제점들을 파악하고 난 후에 김재준 목사의 창세기 저자 문제나 김춘배 목사의 여권문제, 기독공보, 적극신앙단, 아빙돈 주석에 대한 입장을 모두 거부하기로 결정했던 것입니다. 창세기 저자 문제에 대해서는 󰡒창세기가 모세의 저작이 아니라고 하는 반대는 근대의 파괴적 성경 비평가들의 주장하는 이론인 바 그들은 과연 창세기의 모세 저작을 부인하는데 머물지 않고 오경 전부를 모세의 저작이 아니라고 주장하며 모세 시대로부터 여러 세기 후대 어떤 인물들이 기록한 위조문서로 돌립니다. 또 그들은 오경뿐만 아니라 구약 다른 여러 책과 신약 여러 책을 후대인의 위조문서로 인정하며 그 기록의 내용에 신화와, 고담(古談), 미신 등 각종 오류가 있다고 지적하여 냄으로 성경 대부분의 파괴를 모색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신조 제1조를 위반하는 자이므로 우리 교회의 교역자됨을 거절함이 가합니다.󰡓라고 결정했다. 또한 여성권리와 관련해서는 󰡒성경은 여자의 교권을 불허한 것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여권운동이 대두하는 현 시대 사조에 영합하기 위하여 성경을 자유롭게 해석하는 것은 그 정신 태도가 파괴적 성경비평의 정신태도와 다름이 없습니다.---그런 교훈을 하거든 노회가 그 교역자를 권징조례 제6장 제 42조와 43조에 의하여 처리케 할 것입니다.󰡓라고 결정했습니다.

 

2) 장로교의 분열

 

한국장로교회는 일제식민지라고 하는 혼란 속에서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성경적인 원리를 따라서 점차 자라왔습니다. 그러나 자유주의가 팽배하면서 장로교회는 심각한 위기에 빠지게 됩니다. 일본의 신사참배 요구를 거절하게됨으로 인해서 평양신학교는 1938년에 폐교하게 됩니다. 그러나 자유주의 목사와 교회들은 신사참배를 인정하고, 더 적극적으로 정치적인 협력을 통해서 1940년 󰡐조선신학교󰡑라고 하는 새로운 학교를 설립하게 됩니다. 이 학교는 김재준 목사와 더불어 자유주의적 신앙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학교입니다. 이 학교는 해방이후에 더욱 적극적으로 자유주의 사상을 전파하면서 한국장로교회에 심각한 위기를 갖게 했습니다. 그래서 장로교회는 1951년 이 학교와 속해 있는 목사들을 제명하게 됩니다. 이 일로 인해서 장로교회는 1차분열을 갖게 됩니다. 김재준 목사는 이 결정을 받아들이지 않고 독립적으로 학교를 세웁니다. 이것이 󰡐한국신학대학󰡑이며, 기독교장로회의 출발인 것입니다.

 

2차 분열은 신사참배의 문제로 갈라지게 됩니다. 신사참배를 총회차원에서 허락한 것은 한국장로교회의 가장 큰 죄이며, 아픔이었습니다. 해방 후 신사참배를 인정한 목사와 거부한 목사들 사이에서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에 대해서 많은 논쟁이 있었고 결국에는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서 한상동 목사를 중심으로 1952년에 고려신학교를 설립하고 교단은 대한예수교 장로회(고신측)이라는 형태로 새로운 교단을 형성하게 됩니다.

 

3차 분열은 WCC에 대한 입장이 갈라짐으로 인해서 장로교회 안에서 심각한 논쟁을 거친 후에 분열하게 됩니다. 종교다원주의적 성격을 가지고 있는 WCC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인 그룹들은 자신들의 입장을 따라서 1960년에 대한예수교 장로회(통합측)이라는 교단을 새롭게 형성합니다. 이 학교는 후에 바르트의 신학사상을 자신들의 공식적인 입장으로 드러내기도 합니다. 이처럼 철저하게 자유주의적인 신학사상으로 발전하게 되어 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나머지 교회들은 󰡒합동측󰡓이라는 형태로 기존의 보수주의적 입장을 계속해서 유지하게 됩니다.

 

결론

 

한국장로교회는 어려운 사회형편 속에서 시작하여 점차 뿌리를 내리며 발전해 왔습니다. 자유주의의 많은 도전을 받으면서 교회는 분열이라는 아픔을 겪기도 했지만 이 분열은 순수한 성경적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분열한 것이지 어떤 정치적인 목적 때문이 아니였던 것입니다. 그만큼 한국장로교회는 역사적 개혁파교회가 지켜왔던 성경적 교리를 지키기 위해서 끊임없는 고민과 아픔을 겪어왔던 것입니다. 교파가 단순히 하나로 있는 것 자체가 외형적으로 보면 더 중요한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유주의적인 신앙을 인정하면서까지 연합을 지켜가기 보다는 분열의 아픔이 있을지라도 진리의 순수성을 지켜가는 것이 더욱 중요한 것입니다. 이 정신을 짧은 기독교 역사 속에서 한국장로교회는 그대로 보여주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1960년 이후로 한국장로회는 다양한 자유주의적 신앙과 신비주의적인 신앙의 도전으로 많은 위기를 겪게 됩니다. 또한 장로교회 안에서도 역사적 개혁파 교회가 지켜왔던 성경적 교리를 소홀히 여기면서 장로교회의 정체성을 잃어버리는 심각한 위기를 맡게 됩니다. 이제는 장로교회안에 더 이상 선조들이 목숨처럼 지켜왔던 보수주의적 신앙관을 찾아볼 수 없고 여러 가지 혼합된 신앙의 모습을 보게됩니다. 이와 같이 혼탁한 시대에 우리는 장로교회의 역사를 다시한번 살펴보면서 장로교회의 정체성을 발견하고 이것을 회복하여 성경적인 신앙과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힘을 쏟아야 할 것입니다.(*)

출처 : 신원균 목사(한마음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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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론

 

  남북전쟁(1861~65) 이후 미국사회는 큰 변화를 체험했다. 내연기관(engine)의 발달로 공업의 기계화가 시작되었고 수송수단, 통신수단이 발달하였다. 이것은 도시화를 촉진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남북전쟁 당시 미국의 도시인구는 총인구의 20%정도였지만 1900년에는 40%, 1920년에는 50%로 증가했다.

  급격한 도시화는 국내에서의 인구이동, 즉 농촌에서 도시로의 이동 뿐 만 아니라 외국으로부터의 이민의 결과였다. 수송수단의 발달과 경제의 성장으로 인해 1860년 이후부터 1900년까지 북유럽과 서유럽에서 미국으로 약 1,400만 명이 이주했다. 1900년에서 1914년 사이에 온 이민자들은 주로 동유럽과 남유럽에서 이주한 사람들이었다. 이들로 인해 미국의 종교인구 구성은 다양화되었다.

  공업화와 도시화와 이민 덕분에 1860년에서 1900년 사이에 기독교인의 숫자는 500만 명에서 1,600만 명으로 3배 이상 증가했다. 이는 가난한 자, 노동자, 이민자에 대한 교회의 관심 때문이 아니었다. 급격한 사회적 변화로 방황하던 사람들이 이 기간 중에 교회로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회적으로 안정되자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났고 불신자들의 수도 증가하기 시작했다. 세속주의의 확산, 물질만능주의, 과학만능주의로 인해 미국에서 종교의 영향력은 더욱 축소되어갔다.

  이제 남북전쟁 이후부터 제2차 세계대전 전이 일어나기 전까지(1865~1939) 이러한 요인들이 미국 장로교회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중요한 사건을 중심으로 살펴보도록 하겠다.

 

2. 장로교회에 대한 공격

 

  장로교에서 자유주의 신학은 뉴욕 유니온신학교(Union Theological Seminary) 교수 찰스 브릭스(Charles Briggs)로부터 시작되었다.

  브릭스는 1880년대부터 성경의 고등비평을 옹호하고 전통적인 신학을 부인하는 글을 발표했다. 그의 사상은 1891년 1월에 있었던 유니온 신학교의 성경교수 취임 강의로 소개되었다. “성경의 권위”라는 주제 하에 진행된 강의에서 브릭스는 기독교가 성경의 권위에 기초하고 있지만, 교회사를 볼 때 아니라고 주장했다. 축자영감설, 성경의 자증, 성경 무오설과 같은 사상이 성경의 이해에 장애가 되기 때문에 이 교리를 벗어나야 성경의 올바른 의미를 깨달을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이 강연에서 오경의 모세 저작, 이사야서의 단일 저작, 미래에 대한 자세한 예보로서의 예언 개념을 부정했다.

  이에 대해 프린스턴신학교(Princeton Theological Seminary) 교수 알렉산더 하지(Archibald Alexander Hodge)와 벤자민 워필드(Benjamin B. Warfield) 등은 성경의 영감과 무오를 옹호하면서 브릭스의 주장에 맞섰다.

  하지와 워필드의 가르침을 따른 장로교 총회는 1891년 총회에서 브릭스의 교수직에 대한 지명을 거부했고, 1892년 총회에서는 그의 교수 지명을 철회하는 “포틀랜드 성명서”(Portland Deliverance)를 발표했다. 이 성명서의 내용은 총회가 성경의 축자적 영감과 무오를 지지하며 총회의 직분자는 이 교리를 받아들여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신앙양심에 따라 사직해야 한다는 것이다. 1893년 총회는 지난해의 성경관을 재확인했고 브릭스의 교수직을 정직시켰다. 마침내 1895년 총회에서 브릭스는 제명되었다.

  이외에도 신비주의와 세대주의의 공격이 있었다. 먼저 신비주의는 오순절 운동으로 그 모습을 드러냈다. 오순절 운동은 1901년 캔자스의 토페카(Topeka)에 있는 벧엘성경학교(Bethel Bible College)에서 있었던 은사 집회에서 시작되었다. 이 집회는 사도행전의 역사를 재현하자는 의도에서 열린 집회였다. 이 집회에서 아그네스 오즈만(Agnes Ozman)이라는 여학생이 다른 학생에게 안수를 요청하면서 안수와 방언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오순절 운동은 정통 신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오순절 운동은 성경의 권위보다 영적 체험을 중시한다. 이로 인해 객관성과 성경 중심의 신앙을 강조하는 장로교회가 타격을 입게 되었다.

  세대주의는 장로교회의 성경 해석에 혼란을 가져왔다. 세대주의는 1840년 영국의 존 넬슨 다비(John Nelson Darby)에 의해 시작되었다. 다비는 역사를 7세대로 나누고 전천년적 세대주의를 전파했다. 그에 따르면 마지막 세대인 현재는 교회의 은밀한 휴거와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함께 종결되는데, 그때까지 세상에 점진적인 타락이 있다고 했다. 그의 사상은 1909년에 출판된 『스코필드 관주성경』(Scofield Reference Bible)을 통해 넓게 퍼져나갔다. 세대주의는 장로교회의 전통적인 언약신학을 부정하고 비관적 종말론과 배타주의적 문화관을 보급했다.

 

3. 근본주의 논쟁 

 

1) 근본주의 운동

  장로교회에 대한 자유주의, 오순절 운동, 세대주의의 공격은 목회자 후보생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그래서 장로교회는 1910년 총회에서 목사 임직을 받는 후보생들은 “본질적이고 필수적인” 5개의 교리들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결정했다. 그것은 성경무오,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그리스도의 대속적 속죄, 그리스도의 육체적 부활, 성경에 기록된 기적들의 사실성이었다. 이것은 1916년 총회와 1923년 총회에서 재확인되었다.물론, 이 교리들은 개혁주의 교리의 체계를 전체적으로 설명해주지는 않는다. 하지만 목회자 후보생의 신학을 시험할 수 있는 방법과 신조의 ‘울타리’를 제공해주었다.

  한편, 1910년에서 1915년 사이에 『근본적인 것들 : 진리의 증언』(The Fundamentals : A Testimony of the Truth)이 출판되었다. 이 책은 12권으로 구성되었는데 당시 저명한 신학자들이 제출한 100여 편의 논문이 포함되어 있다. 이들은 성경에 대한 고등비평과 현대과학사상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기독교 신앙의 근본적이고 기본적인 교리들을 옹호했다. 이 책은 미국 전역에 250여만 부가 배포되었다. 이로부터 근본주의 논쟁이 시작되었다.

 

2) 해리 에머슨 포스딕과 클라렌스 맥카트니의 논쟁

  1920년대 초 근본주의와 자유주의 사이에 충돌이 일어났다. 그 시작은 뉴욕의 제일장로교회(First Prebyterian Church)에서 목회하던 해리 에머슨 포스딕(Harry Emerson Fosdick)에 의해서였다.1921년 5월 21일 주일 강단에서 그는 “근본주의자가 승리할 것인가?”(Shall the Fundamentalist Win?)라는 제목의 설교를 했다. 그는 이 설교에서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이 자유주의 신학에 대해 관용하지 않는다고 비난했고, 근본주의자들의 오류를 지적했다. 그는 근본주의의 본질적인 문제는 편협하고 관용을 허락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으며 교회가 분열되지 않고 통일을 유지하려면 예정론이나 성경의 영감과 같은 특정 교리만 내세워서는 안 되고 다양한 신학 사상을 수용해야 한다고 했다. 그의 설교는 “새로운 지식과 기독교 신앙”이라는 제목의 소책자 형식으로 출판되어 미국 전역에 목회자들에게 13만 부가 배포되었다.

  포스딕의 설교에 대해 필라델피아 아치 스트리트 장로교회(Arch Street Presbyterian Church)의 목사인 클라렌스 맥카트니(Clarence E. N. Macartney)가 “불신앙이 승리할 것인가?”(Shall Unbelief Win?)라는 설교로 대답했다. 이 설교에서 맥카트니는 자유주의 신학은 장로교회의 교리와 조화될 수 없으며, 동정녀 탄생은 역사적 사실이고, 성경은 하나님에 의해 영감된 권위 있는 말씀이라고 했다. 그리고 자유주의를 제재하지 않으면 “하나님과 그리스도가 없는 기독교가”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 설교는 1922년 「The Prebyterian」에 기고되었다.

 

3) 존 그래스햄 메이첸의 지원

  프린스턴신학교의 존 그래스햄 메이첸(John Gresham Machen)도 자유주의에 대해 강도 높은 비판을 했다. 그는 포스딕의 설교가 있기 전에 『바울종교의 기원』(The Origin of Paul's Religion)을 통해 자유주의의 잘못된 주장을 논박했다. 이 책에서 메이첸은 기독교는 역사적 예수 위에 세워졌음을 주장했다. 그가 말하는 예수는 자유주의자들에 의해 재구성된 예수가 아니라 신약성경과 기독교의 예수라고 주장했다.

  자유주의와의 논쟁에 있어서 이 책보다 더 큰 영향을 미친 책은 1923년에 출판된 『기독교와 자유주의』(Christianity and Liberalism)이다. 메이첸은 자유주의는 기독교가 아니라 새로운 형태의 종교라고 규정하고 기독교와 자유주의는 결코 공존할 수 없다고 했다.

 

4) 어번선언

  1923년 총회는 “본질적이고 필수적인” 5대 교리를 재확인했다. 이에 자유주의자들은 1924년에 1,274명이 서명한 “어번 선언”(Auburn Affirmation)을 발표했다. 이들은 정통교리를 고백하는 자에게만 목사 임직의 자격이 주어진다는 것은 잘못이라고 지적했다. 또한 총회가 노회의 의견을 받지 않고 5대 교리를 총회의 공식적인 입장으로 천명한 것은 헌법 위반이며, 기독교 안에서 자유의 보존과 교회의 연합이 이루어져야 하며 교회가 교리 문제로 싸우는 것은 명분 없는 행위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총회의 보수주의자들은 이들에 대해 적절한 대응을 하지 못했다. 이것은 나중에 보수주의자들이 총회 안에서 세력을 잃게 되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어번 선언에 서명한 자들은 총회에서 전혀 처벌을 받지 않았다. 이후 이들은 1920년대 후반에 총회에서 중요한 위치를 많이 차지하게 되었다.

 

5) 스코프스 재판 : 일명 ‘원숭이 재판’(monkey trial)

  1925년 당시 테네시 주는 공립학교에서 진화론을 가르치는 것을 법으로 금했다. 이때 테네시주 데이턴(Dayton)의 한 고등학교에서 생물을 가르치는 존 스코프스(John T. Scopes)가 법을 어기고 진화론을 가르쳐서 재판을 받게 되었다. 이 재판의 변호인은 근본주의를 반대하는 클라렌스 대로우(Clarence Darrow)였고, 기소는 근본주의를 옹호하는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William Jennings Bryan)이 담당했다. 이 재판의 과정은 전국적으로 중계되었다.

  이 재판에서 스코프스는 유죄가 확정되어 100달러의 벌금형을 받았다. 겉으로 보기에는 근본주의자의 승리처럼 보였으나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브라이언은 창조론을 옹호했지만 논증을 치밀하게 준비하지 못해 설득력이 약했다. 반면에 대로우는 뛰어난 논증과 과학적인 지식으로 브라이언을 궁지에 몰아넣었다. 법원은 스코프스의 유죄를 선고했지만 이 재판으로 인해 근본주의자들은 시대에 뒤떨어졌으며 시대의 지식의 추세를 따라가지 못하는 사람들, 자신들의 주장만 관철하기 위해 억지를 쓰는 완고하고 무지한 사람들이라는 이미지가 굳어졌다.

  이 재판 이후 이러한 인식은 현재까지 남아있게 되었고, 근본주의자들은 경멸과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 이 재판을 계기로 근본주의자들은 장로교 총회에서 입지가 더욱 좁아졌을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인정받지 못했다.

  

4. 프린스턴신학교의 개편

 

  당시 프린스턴신학교는 새로운 시대에 맞추어 변화를 하고자 했다. 왜냐하면 교과과정이 구시대적이었고, 실천신학이나 성경에 대한 연구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사회는 교장을 교체하면 신학교를 개혁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실천신학 교수인 로스 스티븐슨(Ross Stevenson)을 교장으로 임명하였다.

  프린스턴신학교는 전통적으로 교수들에 의해 운영되어 왔다. 하지만 스티븐슨이 1914년에 교장에 취임하면서부터 독단적으로 학교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교수와 교장 사이에 긴장이 벌어졌고, 교수들이 둘로 나뉘게 되었다. 스티븐슨을 지지하던 교수들은 소수파인데 자유주의 신학에 열린 태도를 보였다. 찰스 어드만(Charles Eerdman), 프레데릭 로에췌(Frederick Loetscher), 존 데이비스(John Davies), 존 스미스(John Ritchie Smith)등이 소수파에 속한 교수들이었다. 교장을 반대하는 교수들은 다수파를 이루었는데 여기에는 메이첸, 로버트 윌슨(Robert Wilson), 게할더스 보스(Geerhardus Vos), 카스파르 하지(Caspar Hodge), 윌리엄 그린(William Green), 오스월드 앨리스(Oswald T. Allis)등이었다. 교수진의 분열은 앞으로 프린스턴신학교에서 벌어질 사건의 발단이 되었다.

  1925년 변증학 교수인 그린이 정년퇴임하였다. 이에 다수파와 소수파는 그린을 대신하는 변증학 교수 임명을 놓고 대립하게 되었다. 당시 신학교 내의 보수와 진보의 세력이 비슷했기 때문에 누가 변증학 교수가 되느냐에 따라 학교의 장래가 결정될 수 있었다. 1925년 11월 20일 맥카트니가 그린의 뒤를 이어 변증학 교수로 추천되었다. 메이첸은 기뻐하면서 그에게 교수직을 받아들이도록 간청했다.

  하지만 맥카트니는 자신을 학자보다는  설교자로 보고 있었다. 그는 소수파인 로에췌에게 조언을 구했다. 로에췌는 맥카트니에게 목사로 남아있으라고 했다. 조언을 따른 맥카트니는 5월에 교수 지명을 거부했다. 이에 운영이사회는 메이첸을 변증학과 기독교 윤리학 교수로 임명했다. 메이첸은 자신의 전공이 신약신학이어서 망설이긴 했지만, 결국엔 이사회의 결정을 받아들였다.

  1926년 총회 마지막 날 신학교 상설위원회는 메이첸의 교수 지명에 대한 임명 유보안을 제출하였다. 이에 동의한 스티븐슨은 총회석상에서 “나는 프린스턴신학교를 어떤 특정한 당파의 학교가 아니라 전체 장로교회를 대표하는 학교로 만들 것이다.”라고 했었다. 어드만은 “메이첸은 변증학 교수에 적합하지 않은 기질을 갖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를 받아들인 총회는 1927년에 메이첸과 앨리스의 승진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때 스티븐슨은 눈물을 흘리며 총회의 결정에 감사를 표했다.

  이 결정은 1926년에 총회가 프린스턴신학교에서 발생된 문제를 해결하기위해 조직한 특별위원회의 보고에 의한 것이었다. 이 보고에 의하면 프린스턴신학교의 문제는 두 이사회(재단 이사회와 운영 이사회)에 있다는 것이다. “프린스턴의 심각한 문제점들의 원인과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는데 장애가 되는 것은 두 개의 운영 이사회의 운영 형태에 있다.”

  1927년의 총회는 특별위원회의 보고를 받고 그 제안을 채택하였다. 따라서 상술한 것과 같이 메이첸과 앨리스의 정교수 승진이 허락되지 않았다. 그리고 두 개의 이사회를 단일화시키는 정관을 수정하기로 했다. 11명의 위원들은 또한 하나로 개편된 이사회가 총회의 허락 없이도 학장이나 교수를 파면시킬 권한을 지닐 것과, 학장의 권한을 크게 강화시킬 것도 건의했다.

  이에 대해 메이첸은 신학교 이사회가 재조직된다면 프린스턴신학교는 파괴될 것이고 다른 형태의 새로운 조직이 프린스턴신학교를 대체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맥카트니도 1927년의 총회의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바로 프린스턴신학교의 소멸을 의미한다고 했다.

  그렇지만 1928년의 총회는 다수파의 반대가 있었음에도 위원회의 제안대로 할 것을 지시했다. 마침내 1929년에 프린스턴신학교의 통합이사회가 구성되었다. 통합이사회는 이전의 운영이사회와 재단이사회에서 각각 추천한 22명과 전체 교회에서 선출된 11명총 33명으로 구성되었다. 이들 중에 재단이사회에서 추천한 베티 제닝스(W. Beatty Jennings)와 전체 교회에서 추천한 아사 페리(Asa J. Ferry)는 어번선언에 서명했었던 사람이었다. 그럼에도「Prebyterian Banner」는 새로 구성된 이사회가 깨끗하고 보수적이라고 평했다. 이에 대해 메이첸은 새로 선출된 33명의 이사 중에서 선명한 보수신앙을 가진 사람은 6명밖에 없다고 비판했다.

 

5. 웨스트민스터신학교의 설립

 

  메이첸은 새롭게 구성된 신학교에서 봉사할 수 없다고 결론내렸다. 1929년 6월 27일 에 그와 뜻을 같이하는 목사, 평신도, 프린스턴신학교 교수진, 이전의 신학교 이사들이 뉴욕에 모여 프린스턴신학교의 전통을 계승할 학교의 설립을 논의했다. 7월 8일 찰스 샬(Charles Shall)목사는 새로운 학교의 설립의 토대를 마련하기 위해 메이첸, 앨리스, 윌슨, 몇 명의 장로교 실업가들의 모임을 소집했다.

  7월 18일에는 이전의 프린스턴신학교의 이사들, 교수진, 학생들을 포함한 70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여 “프린스턴신학교가 오랫동안 지켜왔던 하나님의 말씀과 웨스트민스터 신조에 대해 동요없이 계속하여 충성할” 새로운 학교를 설립하기로 결정했다. 이날에 윌슨, 앨리스, 메이첸을 자문으로 하는 15인으로 구성된 조직위원회가 만들어졌다. 7월 25일에 조직위원회는 ‘웨스트민스터’(Westminster)를 학교의 이름으로 정했다.

  1929년 9월 25일 웨스트민스터신학교가 필라델피아의 위더스푼 홀(Witherspoon Hall)에서 개교했다. 개교 당시 교수진은 메이첸, 윌슨, 앨리스, 코넬리우스 반 틸(Cornelius Van Til), 네드 스톤하우스(Ned Stonehouse), 알렌 맥크라이(Allen A. Macrae), 폴 울리(Paul Wooley), 리엔크 카이퍼(Rienk. B. Kuiper)였다. 이들과 함께 프린스턴신학교를 떠난 50명의 학생으로 웨스트민스터신학교의 첫 번째 학기가 시작되었다.

  메이첸은 개교 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친구들이여, 프린스턴신학교는 죽었으나 프린스턴신학교의 숭고한 전통은 살아있습니다. 웨스트민스터신학교는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그 전통을 손상하지 않고 계승하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애매함과 타협의 토대가 아닌 하나님의 말씀에 헌신하는 정직한 토대 위에서 옛 프린스턴이 유지했던 바로 그 원리를 유지하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메이첸은 웨스트민스터신학교가 옛 프린스턴신학교의 전통을 이어받은 학교라고 함으로써 신학교 설립의 당위성과 정통성을 선언한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총회 안에 있었다.

 

6. 독립선교부의 설립과 미국장로교회의 조직

 

  1932년 『선교의 재고 : 백년 후에 평신도의 평가』(Re-Thinking Missions : A Layman's Inquiry after One Hundred Years)라는 책이 출간되었다. 이 책은 자유주의적이고 관용적인 정신이 전체에 깔려있었다. 신학적인 부분은 저명한 철학자이자 자유주의적 회중주의자인 하버드 대학교의 윌리엄 어네스트 호킹(William Ernest Hocking)이 작성했다.

  이 책은 기독교의 메시지를 역사적 사실로 보지 않고 보편적 합리적 원리로 보았다. 이러한 의미에서 모든 종교는 얼마간의 진리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이 책은 세계의 종교들이 호전적이고 비판적인 기독교 운동으로 인해 동요되고 고통을 당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기독교가 통합적 진리를 위한 연구에서 다른 종교들과 연합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 책의 제안은 자유주의자들에게 주목할 만한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보수적인 신자들로부터는 큰 비판을 당했다.

  장로교 선교사이자 『대지』(The Good Earth)의 작가로 유명한 펄 벅은 신학적으로는 자유주의자였다. 그녀는 이 책을 읽고 「Christian Century」에서 “내가 보기에 이 책은 모든 관찰이 문자 그대로 참되고 모든 결론이 옳은 책들 중에 유일한 책이다.”고 칭찬을 아까지 않았다. 그녀는 1933년 1월 「Harper」에 글을 실었다. 그 글에서 펄 벅은 장로교회의 선교정책과 선교사들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녀는 선교사들이 중국에서 미신적인 교리를 가르침으로써 사람들이 생활을 비참하게 만들었다고 했다.

  이 주장은 기독교 신앙 자체를 모독하는 것이었다. 이에 메이첸은 펄 벅을 포함하여 선교지의 자유주의자들에 대해 정당한 조치를 해야 한다는 제안을 자신이 속한 뉴브룬스윅(New Brunswick)노회에 제출했다. 그는 노회에 청원서를 제출하기 전에 110페이지 분량의 소책자를 출판했다. 그 중심내용은 선교부의 정책을 비판하는 것이었다. 메이첸의 제안은 뉴브룬스윅 노회에서 통과되지 못했다. 하지만 필라델피아 노회를 비롯한 다른 노회에서는 통과되었다.

  필라델피아노회는 메이첸의 제안을 해외선교부 상임위원회에 회부했다. 상임위원회는 메이첸의 제안을 45대 2로 부결시켰다. 1933년 총회는 해외선교부 상임위원회의 결정을 승인했다. 해외선교부를 신학적으로 정화하려던 메이첸의 노력은 이렇게 실패로 끝났다.

  이때 맥앨리스터 그리피스(McAllister Griffith)는 메이첸과 협력하여 새로운 선교부를 조직하겠다고 했다. 이것이 1933년 6월 27일에 조직된 ‘장로교 해외 독립선교부’(The Independent Board for Presbyterian Foreign Mission)이다. 10월 17일에 메이첸은 초대 회장이 되었다. 그는 이렇게라도 해서 해외 선교지를 올바른 신학으로 지키고자 했던 것이다.

  1934년 총회는 장로교 해외 독립선교부가 헌법에 위배된다고 선언하고 지시서를 보내어 독립선교부가 더 이상 활동하지 못하도록 했다. 메이첸은 이를 거부했다. 이에 뉴브룬스윅 노회는 1935년 3월 29일에 메이첸을 정죄하고 목사 정직을 선언했다. 마침내 1936년 총회는 메이첸과 독립선교부에 소속된 다른 목사들을 정죄하고 그들의 목사직을 정직시켰다.

  그 후 1936년 6월 11일 메이첸과 그와 뜻을 함께하는 100여명의 목사들과 함께 미합중국장로교회(PCUSA)를 탈퇴하고 새롭게 미국장로교회(Presbyterian Church of America)를 조직했다. 이 교단이 바로 현재의 정통장로교회(Orthodox Presbyterian Church)이다. 2012년 현재 정통장로교회는 17개 노회로 조직되어 있다.

 

7. 결론

 

  미국 장로교회는 찰스 브릭스가 전통적인 신학을 부인하는 글을 발표하는 것을 시작으로 도전받기 시작했다. 워필드와 하지의 노력으로 이 일은 잘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미국 장로교회에 대한 자유주의의 공격은 계속되었다. 1920~30년대에 있었던 근본주의와 자유주의의 논쟁은 그 절정이었다. 장로교회는 초기에 자유주의의 공격을 잘 견뎌내었지만, 장로교회 내에 자유주의를 받아들이고 자유주의에 대한 입장을 분명히 하지 못한 사람들로 인하여 장로교회는 교리적으로 크게 흔들리게 되었다. 결국 이 논쟁의 중심에 있었던 프린스턴신학교는 자유주의자들이 장악하게 되었고 신학은 그 순수성을 잃어버릴 위기에 처했다.

  이에 메이첸은 자신과 뜻을 함께하는 사람들과 함께 1929년에 웨스트민스터신학교를 설립하여 그들의 신앙의 선배들이 파수했던 정통신학을 계승하고자 했다. 그러나 자유주의가 장악한 장로교 총회는 이것을 달갑지 않게 여겼다. 결국 이들은 총회로부터 축출되었다. 그렇지만 새롭게 미국장로교회를 조직하여 진리파수운동이 끊어지지 않도록 했다. 적은 숫자로 시작한 미국장로교회와 웨스트민스터신학교는 소수이지만 여전히 살아남아 하나님이 그들에게 맡긴 사명을 충실히 감당하고 있다.

  미국 장로교회에 혼란을 일으킨 자유주의는 오늘날 한국교회에 교묘하게 침투하여 그 세력을 넓혀나가고 있다. 바로 이때에 우리는 지난 세기 미국 장로교회의 역사를 자세히 살펴보고 우리의 거울로 삼아야 한다. 당시 미국 장로교회와 현재 한국교회의 상황은 서로 다르지만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동일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진리를 파수하기 위해 희생을 거부하지 않는 자세이다. 그러한 희생은 미국 장로교회의 역사가 알려주는 것과 같이 진리에서 이탈한 자들과 갈라서는 것이다. 또한 그들과 계속하여 싸움할 수 있도록 새로운 공동체를 조직하고 운영하면서 경험하게 될 아픔이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무지몽매한 다수가 아니라 영적으로 민감하고 깨어있는 소수를 통해 자신의 일을 해 나가신다. 이는 성경이 그리고 교회의 역사가 우에게 계속하여 분명하게 알려주고 있는 사실이다. 이 사실은 진리운동을 하는 우리에게 큰 용기와 격려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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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교사] 미국 의료선교사 薛大偉(설대위)

                                           

병원에서 하는 암(癌)수술 중에 '코만도(COMMANDO)'라는 것이 있다. 입 안에 생긴 구강암을 치료하는 방법이다. 암 덩어리가 퍼진 턱뼈는 물론, 암세포가 전이된 목 주변의 림프절까지 몽땅 잘라내고 긁어내는 대(大)수술이다. 하필이면 수술 이름이 2차 세계대전 당시 위세를 떨쳤던 영국 특수부대 '코만도'와 같아 무시무시하게 들리는데, 두경부(頭頸部·머리와 목) 영역에서 가장 난도가 높은 외과 수술이다. 지금은 암 조기진단이 많아져서 이 수술을 받는 환자는 드물지만, 병세가 진행된 구강암 환자는 '코만도'를 받아야 생명을 건질 수 있다.

이 수술이 우리나라에 처음 도입된 것은 1960년대였다. 설대위(薛大偉)라는 외과의사가 최초로 선보였다. 그는 한국인이 아니다.

1954년부터 1990년까지 36년간 전주 예수병원에서 의료선교사로 활약한 미국인 의사 데이비드 존 실(David John Seel)의 한국 이름이 설대위다.

다음은 그의 제자가 회상한 당시 수술실 장면이다. 1967년, 아침부터 푹푹 찌는 무더운 여름. 혀에 암이 생겨 주변으로 퍼진 65세 남자 환자가 '코만도 수술대'에 누웠다. 설대위는 혈관과 신경, 근육을 일일이 확인하며 암 덩어리를 제거하기 시작했다. 요즘처럼 절개와 지혈(止血)이 동시에 이뤄지는 '전기 메스'가 있던 시절이 아니었다. CT나 MRI가 있어서 암이 어디까지 파고들었는지 정확히 알 수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수술은 눈과 손에 의지하며 더디게 진행됐다. 그럼에도 설대위는 뛰어난 절개 기술을 발휘해 수술 부위가 마치 해부학 교과서에 나오는 그림 같았다고 한다.

그는 점심을 빵으로 때웠고, 허기진 저녁에는 날계란을 섞은 우유를 마시며 수술에 임했다. 한시도 수술실을 떠나지 않았고 메스를 놓지 않았다. 수술실에 달랑 하나 붙은 에어컨으로는 감염을 방지하기 위해 겹겹이 입은 수술복 안의 열기를 식힐 수 없었다. 급기야 간호사들은 얼음 주머니를 그의 수술복 안으로 밀어 넣었다. 이마에 줄줄이 흐르는 땀이 시야를 가리자 주변에서 연방 그의 땀방울을 닦아냈다. 그렇게 16시간40분이 지난 다음 날 새벽 3시경, '코만도'는 끝났다. 잠시 눈을 붙인 설대위는 아침 5시 반에 다시 병원으로 나와 수술 환자의 상태를 제일 먼저 돌봤다고 한다.


 ▲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burbuck@chosun.com
설대위는 당시 의술 수준으로는 도저히 살릴 수 없는 환자들을 극적으로 회생시키는 드라마를 연출했다. 이런 신기(神技)와 헌신 탓에 전국에서 환자가 구름처럼 몰려왔다. 병원 복도와 계단까지 줄을 섰으며, 병원 주변 여관에 수술 대기 환자가 넘쳐났다. 그는 연일 계속되는 수술로 과로한 탓에 폐결핵에 걸리기도 했다.

설대위는 외과 수술로 명성을 날리던 미국 남부 뉴올리언스의 튜레인 의과대학을 수석졸업하고, 외과 의사의 길로 들어섰다. 미래가 촉망받는 젊은 의사였지만 전쟁으로 폐허가 된 한국 땅을 찾아와 외과 수술의 진수를 선보였다. 우리나라 최초로 종양 진찰실을 개설했고, 국내에서 처음으로 암 등록 사업을 펼쳤다. 대한두경부학회를 창립하고 초대 회장을 역임했으며, 최신 방사선 암 치료법도 소개했다.

그는 정년퇴임을 하고 미국으로 돌아가서는 집에 '설대위'라는 문패를 달고 '한국인'으로 살았다. 20억원 상당의 최신형 암 치료기를 예수병원에 보내주기도 했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쌓아 놓은 재산이 없어 노년에 응급실 당직 의사를 하며 생활비를 벌었다. 말년에 치매를 앓았는데, 미국 병원 중환자실에서 한국말로 뭔가를 계속 말해 미국 의료진을 당황하게 했다고 한다. 그러다 지난 2004년 79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물론 그의 한국행(行)은 선교가 목적이었다. 설대위와 같은 수많은 의료선교사가 이 땅에 있었기에 '울지마 톤즈'의 이태석 신부가 나왔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또한 실력과 품성을 갖춘 외과 의사의 전형이었다. 그에게 수술을 배운 제자들은 그가 외과 의사가 본받아야 할 최고·최선의 모델이었다고 입을 모은다.

요즘 젊은 의사들은 외과를 외면한다. 외과 의사의 삶이 힘들고 어려우면서, 상대적으로 보상은 적다는 이유다. 1970년대 초 미국에 유학 가서 그곳에서 의사 생활을 하려는 한국의 젊은 의사들에게 설대위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럼, 한국 환자는 누가 돌보는 것인가요?" 40년이 지난 지금, 첨단 의료를 자랑하는 한국에서 그의 반문(反問)은 여전히 유효하다. 이제 한국의 외과 수술은 누가 할 것인가.

 

/조선일보    김철중 의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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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사 / 신사참배와 한국교회


1. 서론

 


   일본은 식민통치 초기부터 한국 민족의 특성을 말살하여 일본에 동화시키려는 정책을 강력히 추진했다. 왜냐하면 경찰과 군사력만으로는 한국을 안정적으로 지배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그들은 식민지 민족의 특수성을 말살하여 ‘일본화’(日本化) 함으로써 식민지를 영구적으로 지배하려고 했다. 이러한 ‘동화정책’(同化政策)은 일본의 식민통치의 기본이었다. 1930년대에는 이 정책이 더욱 강화되어 ‘황국신민화정책’(皇國臣民化政策)으로 나타났다.

   이 정책은 1930년대에 ‘군국주의’(軍國主義)로 전환한 일본이 침략전쟁을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도록 하는 수단이 되었다. 이것은 ‘정신교화운동’(精神敎化運動) 에서 나온 정책이었다. 그 목표는 ‘천황 신앙’을 중심축으로 하여 민족의 정체성을 말살하는 것이다. 일본은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한국인에게 ‘신사참배(神社參拜)’, ‘황국신민서사(皇國臣民誓詞)’의 제창, ‘창씨개명’(創氏改名)과 일본어 사용 등을 강요했다.

   이 황국신민화정책 중에서 한국교회와 관련이 있는 것은 신사참배이다. 본고는 신사참배가 한국교회에 어떤 영향력을 미쳤는지 조망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를 위해 필자는 신사참배의 본질을 밝히고 그것이 1930년대의 한국교회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살펴 볼 것이다. 그 후에 신사참배에 대한 필자의 의견을 제시하겠다.


2. 신사참배의 본질

 
   고대 일본인들은 자연의 모든 것과 그들의 조상을 ‘신’(神, 가미)으로 숭배했고 인간과 자연을 구별하지 않았다. 이러한 신앙은 고대 일본의 천황(天皇)의 권력 강화와 더불어 천황가의 조상신으로 여겨졌던 ‘천조대신’(天照大神, 아마테라스 오미가미)을 중심으로 한 신화적 인물이나 영웅들을 신사에 봉하여 함께 숭배하는 신앙의 형태로 굳어졌다. 이것이 고대 신도(神道, 신토)인데 황실과 정치권력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발달했다.

  하지만 고대 신도는 관습적 의례에 치중했기 때문에 근대 이전에는 불교에 눌려 있었다. 하지만 17, 18세기에 들어와 일본의 유학자들에 의해 다시 주목을 받게 되었다. 그들은 ‘복고신도’(復古神道, 훗코신토)를 발전시켰고, 이들의 문하에서 신도사상에 입각한 국수주의와 왕정복고를 주창하는 학자들이 많이 나왔다. 이들은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1866~67)의 사상적 기반을 제공했다.

   메이지유신을 전후하여 신도는 천황을 절대신으로 하는 천황제 국가의 지도정신으로 이데올로기와 되었고 통치 원리로 채택되었다. 이때부터 신도는 일본 정부의 보호와 육성하에 급속히 발달하여 국교적 지위를 확립해갔다. 1871년 일본 정부는 일본의 모든 신도 사당, 즉 ‘신사’(神社)를 국가의 사당으로 하고, ‘사격제도’(社格制度)를 마련하여 신사를 체계화했다.

   그러나 이러한 ‘신도국교화정책’이 국내외의 비판을 받게 되었다. 이에 일본 정부는 1882년에 신도를 ‘국가의 제사’로서 일반 종교와 법적으로 분리시켰고, ‘국가의 제사인 신도’가 종교가 아닌 하나의 국가예식에 불과하다는 것을 국민들에게 강변했다. 그리고 동시에 천황의 충실한 백성과 신하로서 천황가의 조상들을 공경하는 마음으로 국가의식에 적극적으로 동참할 것을 촉구했다.

   이러한 일본의 전통 신앙인 신도에 입각하여 천황가의 조상신이나 신화적 인물과 영웅 등을 안치해 놓은 ‘신사’나 ‘신궁’등을 참배하는 행위가 신사참배이다. 이것은 국가 종교의 경향이 강한 신도를 천황이 다스리는 국가의 지배 원리로 확립시키려는 의도에서 시작된 것이다.

  
3. 신사참배 강요

 

   일본의 신사참배 요구는 1910년에 한국을 강제로 병합한 직후부터 있었다. 1876년 개항 이후 한국에 거주하는 일본인을 대상으로 하는 신사가 걸립되었다가 강제 병합 후에는 한국인을 일본화하기 위해 신사참배를 요구했다. 그러던 중에 1930년대에 들어와서 침략전쟁의 사상적 정당성을 확보하고 전쟁에 필요한 물자와 병력을 효과적으로 확보하기 위한 정책의 하나로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당시 강요된 신사참배의 핵심은 천황가의 신적 기원에 대한 경배, 천황가와 전쟁영웅들에 대한 경배였다.

   이러한 신사참배 강요가 가장 먼저 발생한 곳은 교육계였다. 일본는 1932년 1월에 전라남도 광주(光州)에서 ‘만주사변에 대한 기원제’를 개최하고 학생들을 참석하도록 했으나 기독교계 학교가 이를 거부하여 문제가 되었다. 또한 같은 해 9월 평양에서 있었던 ‘만주사변 1주년 기념 전몰자 위령제’를 개최하고 기독교계 학교도 참석하도록 공식문서를 보냈지만 숭실전문학교(崇實專門學校)를 포함한 10개의 학교가 불참했다. 또한1933년 9월 원산의 캐나다 장로회 소속 진성여자보통학교(進誠女子普通學校)도 ‘만주사변 2주년 기념 순란자(殉亂者) 위령제’의 참가를 거부하여 경고를 받았다.

   일본이 기독교계 학교에 대하여 신사참배 거부를 이류로 직접적인 제재를 가한 것은 ‘평양 기독교계 사립학교장 신사참배 거부사건’이었다. 1935년 11월 14일 평안남도 도청에서 개최된 도내 공 ․ 사립 중등학교 교장회의에 참석한 교장들에게 도지사 야스다케(安武)는 개회에 앞서 평양신사(平壤神社)에 참배할 것을 요구했다. 이때 숭실학교 교장 맥큔(G. S. McCune), 숭의여학교(崇義女學校) 교장 대리 정익성(鄭益成), 순안(順安) 의명학교(義明學校) 교장 리(H. M. Lee)는 신사참배가 기독교 교리에 반대되고 양심상 이에 응할 수 없다고 했다. 이를 계기로 평안남도 도당국과 조선총독부는 이전의 유화책을 버리고 강경책을 쓰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이후부터 학교장과 학생들의 참배 여부를 명확히 서면으로 답하도록 요구했다. 이에 따라 학교장의 파면과 학교를 폐교할 수 있다는 방침을 세웠다.

   이러한 총독부에 강경책에 대해 의명학교 교장은 신사참배를 하기로 했으나 숭실전문학교 교장 맥큔과 숭의여학교 교장 스눅(V. L. Snook)은 끝까지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1936년 1월에 교장직에서 파면되었다.

   1938년부터 조선총독부는 한국교회에 대해 직접적으로 일본적 전향을 요구하고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같은 해 2월 총독부는 ‘기독교에 대한 지도 대책’을 세워 기독교인의 신사참배를 지도하고 강화하도록 했다. 이에 따라 경찰력을 동원하여 개 교회에서부터 시작하여 노회와 총회에까지 압력을 가해 신사참배를 가결하도록 강요했다. 당시 총독부가 제시했던 신사참배 강요의 논리는 다음과 같다.

 
1. 신사참배는 종교의식이 아니라 국민의례이며, 예배행위가 아니고 조상에게 최대의 경의를 표하는 것일 뿐이다.

2. 교육의 목적은 학생들의 지적인 육성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로 하여금 천황의 신민(臣民)이 되게 하는 데 있다. 그러므로 교사와 학생들이 모두 함께 신사참배를 통하여 천황에 대한 경의를 표하여야 한다. 그러나 일반인들의 신사참배는 자유에 맡길 뿐이고 강제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러한 논리는 기만적인 것이었다. 따라서 한국교회는 종교적인 입장에서나 민족적인 입장에서든 신사참배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4. 기독교의 대응

 

   그렇지만 신사참배 강요에 대해 교회의 반응은 일치하지 않았다. 먼저 외국 선교부의 입장을 살펴보자.

   미국 북장교회 선교부는 신사참배에 대해 대체로 거부하는 입장에 있었다. 하지만 이 안에서도 신사참배는 우상숭배이니 기독교 교리와 교육목적에 위배되고 신앙양심에 반하는 것이므로 교육에서 물러나더라도 절대로 응할 수 없다는 입장과, 신사참배에 비록 종교적 요소가 있다고 하더라도 일본 당국에서는 이것이 국민교육상 요구하는 애국적 행위에 불과하다고 주장하고 있으므로 학교를 살리고 기독교교육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이에 순응해야 한다는 입장이 대립했다.

   선교부는 홀드크로프트(J. G. Holdcroft)와 솔타우(T. S. Soltau)등 실행위원들을 중심으로 총독부와 교섭을 진행했으나 여의치 않자, 신사참배를 끝까지 강요할 경우 학교를 폐쇄하고 교육에서 인퇴(引退)할 수밖에 없다는 강경론이 우세했다. 결국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는 1938년 5월 교육 인퇴를 결의하였다. 그리고 이에 따라 평양 3숭(三崇 : 崇實中學, 崇實專門, 崇義學校), 대구의 계성(啓聖) ․ 신명(信明), 재령의 명신(明信), 선천의 보성(保聖) ․ 신성(信聖), 강계의 영실(英實), 서울의 경신(儆新) ․ 정신(貞信)등의 학교를 폐교했다.

   미국 남장로교 선교부는 신사참배 문제에 대해 가장 강경한 반대입장을 표명했다. 총독부가 남장로교 산하 학교에 신사참배를 강요하자 신사에 참배하기 보다는 학교를 폐교하기로 방침을 정하고, 선교본부에 연락하여 실행위원회 풀턴(C. Darby Fulton)의 내한을 요청하였다. 1937년 2월에 내한한 풀턴은 이 문제를 검토하고 “한국 학교에 대한 정책.”을 발표했다. 그 주제는 “기독교 교리를 수정하지 않고는 교육사업을 계속할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학교를 폐쇄하고 교육에서 인퇴한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얼마 후 중일전쟁이 일어났고 총독부가 기독교계 학교에 본격적으로 신사참배를 강요하자 남장로교 산하의 학교들은 이제 저항하여 폐교 당하거나 자진 폐교했다. 이때 폐교당하거나 자진 폐교한 학교는 광주의 숭일(崇一) ․ 수피아(須彼亞), 목포의 영흥(永興) ․ 정명(貞明), 순천의 매산(梅山), 전주의 신흥(新興) 기전(紀全), 군산의 영명(永明)학교 등이었다.

   경상남도 지역에서 활동하던 빅토리아장로교(오스트레일리아) 선교부도 1936년 2월에 있었던 위원회 특별회합에서 신사참배를 반대하기로 결정했다. 신사참배 강요가 계속되자 1939년 1월에 위원회 특별회합에서 “교회와 학교에서 신사참배에 응하지 않는다.” 고 결의했고, 이해에 부산의 일신(日新), 마신의 창신(昌信) ․ 의신(義信), 진주의 시원여학교(柴園女學校)등이 폐교했다.

   하지만 감리교계 선교사들과 캐나다선교부에서 운영하는 학교들은 1930년대 초반에는 어느 정도 저항했지만, 중반이 지나면서 신사참배를 국가의식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총독부와 별 다른 마찰이 없었다.

 

한국교회도 교파에 따라 신사참배에 대해 입장을 달리했다. 감리교를 포함한 대부분의 교파는 일본에 굴복하여 신사참배를 인정했다. 장로교만이 반대하다가 1938년 9월에 있었던 27회 총회에서 결국 일본의 강요와 압력으로 인해 신사참배를 가결했다.

   이미 이 문제는 장로교 내에서 1915년부터 공식적으로 거론되었다. 그러다가 총회에서 대두되기 시작한 것은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였다. 1931년부터 장로교 총회에서는 이 문제를 매년 다루었다.

한편 일본은 거의 모든 교파들이 신사참배 강요에 굴복하고, 기독교계 학교에 대한 신사참배 문제도 마무리 되어가자 1938년 초부터 그때까지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장로교를 굴복시키기 위해 경찰력을 동원하여 핍박했다.

결국 장로교도 1938년 봄부터 노회별로 신사참배를 가결했고, 1938년 9월 평양의 서문외(西門外)교회에서 열린 27회 총회에서 일본 경찰의 삼엄한 감시와 통제 속에서 미리 짜놓은 각본에 따라 다음과 같은 신사참배 가결 성명서가 발표되었다.

 

성명서

 

   아등은 신사는 종교가 아니오 기독교의 교리에 위반하지 않는 본의를 이해하고 신사 참배가 애국적 국가의식임을 자각하며 또 이에 신사 참배를 솔선 여행하고 추히 국민정신동원에 참가하여 비상시국하에서 총후(銃後) 황국신민으로써 적성을 다하기로 기함.

 
소화 13년 9월 10일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장 홍택기


   이렇게 한국교회의 모든 교파들이 일본의 신사참배 강요에 굴복하였다. 이는 동시에 한국교회의 변질의 시작이기도 했다.

 
5. 한국교회의 변질 - 장로교를 중심으로


   마지막으로 신사참배강요에 굴복한 장로교는 이제 일본의 전쟁을 위한 협력단체 중 하나로 전락하였다. 1938년 10월 17일 서울에서 개최된 ‘시국대응기독교장로회 신도대회’에는 경기 ․ 경성노회 소속 신자들과 학생 3,000명이 모여 총독부 광장에서 미나미 지로(南次郞)의 연설을 듣고 행렬을 지어 남산에 있는 조선신궁을 참배하는 등의 행사를 치렀다. 같은 해 12월 12일에는 장로회 총회장 홍택기와 부총회장 김길창이 감리교 총리사 김종우와 전 총리사 양주삼(梁株三), 성결교 이사장 이명직과 함께 일본의 이세신궁, 메이지신궁(明治神宮), 가시하라신궁(橿原神宮), 아쓰다신궁(熱田神宮), 야스쿠니 신사(靖國神社)등을 참배하려고 일본으로 떠났다.

   1939년 9월 제28회 총회에서 장로교회는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예수교장로회 연맹’을 결성했다. 9월 28일 결성된 황동노회 지맹(支盟)을 시작으로 각 노회별로 지맹이 결성되어 총회연맹의 지시사항을 수행하고 보고했다.

1940년 9월 제29회 총회에서는 총독부의 지도에 순응하여 헌법을 개정하고 중앙상치위원회의 설치 등을 결의했다. 그 목적은 총독부의 명령과 지시를 원활히 수행하기 위함이었다. 10월 3일 총독부 관계자들은 간담회를 열어 장로교 상치위원 7명을 지도했다. 그 후 총회장 곽진근 목사는 일본을 다녀온 후 총회 임원들과 함께 “조선예수교 장로회 혁신요강”을 작성하여 상치위원의 의견을 구한 다음 11월 10일 총회장의 담화와 함께 발표했다. 그 중 ‘지도원리’에 따르면 장로교는 일본의 정책을 충실히 수행하는 ‘일본적 기독교’가 되도록 할 것이며 일본을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여 동아시아에 일본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질서가 수립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이를 따라 장로교의 헌법이 일본기독교단의 헌법을 참조하여 1943년 5월에 ‘일본지독교 조선장로교단 헌법’으로 개정되었고, 찬송가의 가사 개정과 삭제 작업은 1942년 초에 완료되어 같은 해 1월 20일부로 그대로 사용했다. 한편 외국 선교사들은 1941년 11월에 대부분 철수했고, 몇몇 남아있던 선교사들도 1942년 6월경에 강제 송환되었다. 이로써 외국선교사와 장로교회의 관계는 단절되었다.

   1940년 12월 6일부터 8일까지 서울의 부민관 중강당과 신문내 예배당에서는 ‘황기 2천 6백년 봉축 조선예수교 장로회 신도대회’가 열렸다. 이 대회 첫날에 ‘국민총력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연맹’이 결성되었고, 결성식 후에는 일동이 조선신궁에 참배했다. 신도대회 기간 중에는 시국 강연이 이어졌다. 이러한 신도대회는 서울을 시작으로 하여 노회조직을 따라 지역단위로 개최되었다. 각 지역의 신도대회는 서울과 마찬가지로 ‘노회연맹’의 결성식도 겸했다. 장로교의 ‘총회연맹과 노회연맹’은 ‘국민총력 조선연맹’의 충성스러운 산하기구였다. 왜냐하면 이들 연맹들이 ‘조선연맹’의 지시사항을 전달하고 홍보하기 때문이었다.

   1941년 8월 14일 총회 산하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중앙상치위원회’는 서울의 총회사무실에서 위원회로 모여 “전시체제 실천성명서”를 결의하고 발표했다. 그리고 상치위원회가 실제적으로 총회를 대행하는 기관이 되게 했다. 그리고 9월 20일에 예정된 총회를 “시국정세”를 이유로 무기 연기했다.

   또한 이 성명서는 시국봉사의 실천으로 ‘애국기 헌납’, ‘금속품 공출’, ‘폐품 회수’를 제시했다. 그 가운데 ‘애국기 헌납’을 실행하기 위해 ‘조선장로교도애국기헌납기성회’를 8월 20일에 조직했다. 총독부로부터 기부금모금 허가를 얻어 10월부터 본격적인 모금운동에 들어갔다. 노회조직을 이용한 모금은 순조롭게 이루어져 1942년 2월 10일에 육해군에 애국기 1대와 육전기관총 7정의 대금인 15만 317원 50전을 헌납했다. 6월 19일에는 기성회 위원대표단이 조선군사령부를 방문하여 육군용 자동차 2대의 기금으로 2만 3천 221원 28전을 헌납했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제31회 총회는 1942년 10월 16일부터 20일까지 신사참배를 가결했던 평양 서문외교회당에서 모였다. 회의록에 따르면 교회 총수는 전년도 3,624개 교회에서 2,543개 교회로 30%가 줄었고, 신자총수도 전년도 355,754명에서 249,666명으로 30%줄었다. 교회와 신자의 수가 급격히 줄어든 데에는 일본의 압력도 있었겠지만 무엇보다도 지도자들이 일본에 야합하는 것에 회의를 느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총회장이 된 김응순 목사는 “기독교의 일본화”에 힘쓰겠다고 말했다.

   이 말대로 일본화에 힘쓴 ‘조선예수교장로회’는 결국 1943년 5월 4일부터 7일까지 있었던 상치위원회에서 김응순에 의해 해체되었고 새롭게 ‘일본기독교 조선장로교단’이 조직되었다. 그리고 미리 준비했던 ‘실천요목’을 그대로 채택하여 발표하고 각 교회에 공문을 보냈다. 이 ‘실천요목’은 교단의 교회가 일본에 협력하는 지침이 되었다. 이 교단의 통리자로 후(後)평양신학교교장인 채필근 목사를 선임했다. 5월 7일에는 통리 취임식이 있었다. 곧이어 포교규칙에 따라 교파명칭 변경 및 포교자 변경계를 총독부에 제출하여 같은 해 6월 25일자 관보에 실림으로써 공식적인 신고 ․ 등록 절차를 마쳤다.

   1944년 7월 24일부로 아베(阿部信行)가 조선총독으로, 엔토(遠藤柳作)가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으로 임명되었다. 엔토는 9월 7일 기독교와 천주교 대표를 초청하여 교파간의 합동을 제시했다. 그럼에도 진척이 없자 엔토는 1945년 6월 25일에 장로교, 감리교, 구세군 지도자 55명을 초대하여 기독교계를 통합할 것을 촉구했다. 이에 그날 저녁에 통합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이들은 다음날인 26일부터 29일까지 회의를 계속하여 교단 규칙을 만들고 통합총회 일정을 포함하여 상세한 계획을 작성했다. 그리고 통합된 교단의 이름을 ‘일본기독교 조선교단’으로 하기로 했다. 이 교단은 임원과 직원을 세우는 등의 행정절차를 마무리 한 후에 1945년 8월 1일부터 공식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1938년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가결한 후 장로교회는 겉으로만 복음을 전하는 교회였다. 그 내면의 중심에는 신사참배라는 우상종교의식이 자리하고 있었다. 더 이상 교회에서는 참된 복음을 들을 수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장로교는 그 본질을 잃어갔다. 그리고 마침내 우상종교와 완전히 혼합되었다. 다른 교파도 장로교와 거의 비슷한 순서를 따라 ‘일본기독교 조선교단’으로 통합되었다.

 
6. 신사참배 반대운동


   신사참배 강요는 교육기관에서 먼저 시작되었다. 따라서 신사참배 반대도 기독교계 학교의 학생들과 교사와 학부형들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그 후 일본이 신사참배를 교회에까지 강요하자 목회자와 일반 교인들의 반대가 일어나게 되고, 그들이 서로 연합하여 대처하는 신사참배 반대운동으로까지 발전했다.

   한편, 1938년 9월 28일에 미국 남장로교 선교부가 신사참배 강요에 굴복한 조선예수교장로회를 탈퇴하기로 결의했고, 이어서 10월 5일에는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도 탈퇴를 결의했다. 미국 남장로교와 북장로교 선교부는 빅토리아 장로교 선교부와 함께 신사참배를 반대한다는 이유로 노회에서 제명당한 목사들을 지지하고 후원했다.

신사참배 반대운동은 크게 ‘신사참배 강요 금지 청원운동’과 ‘신사참배 거부 권유운동’이라는 두 가지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신사참배 강요가 기독교계 학교에서 해마다 문제가 되자 1934년 장로회 총회는 두 차례에 걸쳐 총독에게 청원서를 제출하려 했으나 총독부 당국에 의해 저지당했었다. 1935년에 있었던 ‘평양 기독교계 사립학교장 신사참배 거부사건’이후 총독부는 신사참배에 대한 공식적인 토의를 금지시켰다. 따라서 청원운동은 개인적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박관준(朴寬俊) 장로는 1935년부터 수차에 걸쳐 총독에게 청원서와 경고문을 보내 신사참배 강요의 부당성을 경고하다가 여러 차례 경찰서에 끌려갔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청원과 경고가 효력이 없자 1939년 일본 정계와 제국의회에 청원하기 위하여 선천 보성여학교 음악교사를 사퇴하고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하던 안이숙(安利淑) 선생과 함께 일본에 건너갔다. 박관준 장로는 아들 박영창(朴英昌)과 함께 일본의 기독교 지도자들과 군의 지도자들과 전(前) 조선총독 등을 방문하고, 정치지도자들과의 면담을 시도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래서 이들은 순교할 각오를 하고 제74회 일본제국회의 중의원 회의장에 방청객으로 들어가 일본의 종교정책을 반대하는 내용이 담긴 경고서를 단상에 던졌다. 두 사람은 현장에서 바로 체포되었고, 경시청에 구금되었다가 평양감옥으로 이송되었다. 박관준 장로는 6년간의 감옥생활로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다.

   장로교 총회가 신사참배를 가결하기 직전에도 이러한 청원운동이 있었다. 장로교 총회장을 지냈었던 김선두(金善斗) 목사는 신사참배 문제로 평양 경찰에 의해 체포되었다가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일본에서 공부하다가 사경회 강사로 일시 귀국한 김두영(金斗英)과 함께 1938년 8월에 일본으로 건너가 신사참배 강요 금지를 일본 정계에 청원하려 했다. 정계와 군부의 지도자들을 만나 그들과 함께 돌아온 김 목사는 총독부의 지시와 강압에 의한 장로교 총회의 신사참배 가결을 막으려 했다. 하지만 이 사실이 탄로나 김 목사는 종로경찰서에 구속되었고 총회는 총독부의 뜻대로 진행되어 신사참배를 가결했다.

 

   한국교회가 신사참배에 굴복한 후에 이에 반대하는 교역자와 성도들이 서로 연대를 맺고 조직적인 집단적 저항운동을 전개했다. 이들은 신사참배를 강요하는 일본과 신사참배에 굴복한 한국교회를 비판하는 동시에 성도들을 대상으로 신사참배 거부를 권유하고 반대자들 사이의 결속을 강화했다.

   그 중심인물은 평안남도의 주기철(朱基徹), 평안북도의 이기선(李基善), 경상남도의 한상동(韓尙東) ․ 이인재(李仁宰) ․ 주남선(朱南善), 전라남도의 손양원(孫良源)등으로 전국에 분포되어 있었다. 만주지역에서는 박의흠(朴義欽), 헌트(Bruce F. Hunt, 韓富善)등이 활동하였다. 초기에는 교회와 인적 관계에 따라 연대가 이루어졌으나 점차 지역 간의 연대가 이루어져 경남, 서북, 만주 봉천지역사이에 교류가 이루어졌다

   의주에서 목회를 하던 이기선은 1938년 7월 신사참배에 반대하여 교회를 사면하고 각지를 순회하며 신사참배 거부를 권유하면서 동지들을 규합하다가 1940년 6월경 일본 경찰에게 체포당했다.

   마산에서 목회를 하던 한상동은 신사참배를 반대하여 교회를 사면하고 이인재와 함께 경상도 지역의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주도했다. 이들은 빅토리아 장로교 소속 선교사인 호킹(D. Hocking, 許大是)와 트루딩거(M. Trudinger, 秋瑪田) 등과 협력하면서 서북지역의 신사참배 반대운동과 연대하여 조직적인 신사참배 거부운동을 전개했다.

이들은 신사참배 반대운동이 단지 종교운동으로만 그치면 그 목적을 달성하기 어려우므로 조속히 정치운동으로 전환시킬 필요가 있음을 인식하고 1939년 12월에 다음과 같은 방안을 정했다.

 

첫째, 신사참배를 긍정하는 노회를 파괴하도록 할 것.

둘째, 신사에 참배하지 않는 성도들로 새로운 노회를 조직할 것.

셋째, 신사참배를 긍정하는 목사에게 세례를 받지 못하게 할 것.

넷째, 신사에 참배하지 않는 동지들의 상호 원조를 도모할 것.

다섯째, 가정 예배 및 가정 기도회를 힘써 개최하는 한편 개인전도 등의 수단으로 동지들을 획득할 것.

 
   이들은 1940년 4월 20일 주기철이 잠시 옥에서 풀려 나왔을 때 평양으로 가서 이 운동을 전국적으로 확대시키기 위해 주기철을 비롯한 서북지역의 신사참대 반대운동 지지자들과 회합을 갖고 그 방안을 논의하고 돌아왔다. 한상동은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려는 노력을 하다가 1940년 7월 부산경찰서에 검속되었다.

   3 ․ 1운동 직후 독립군 군자금 모금과 지원병 모집운동을 벌이다가 감옥에 들어갔었던 주남선도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했다. 1938년 말 그는 거창읍교회를 사임하고 한상동과 이인재 등과 함께 조직적인 거부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경남 각 지역의 교회를 순회하며 신사참배를 거부할 것을 권유했다. 주남선은 이 일로 1940년 7월 16일에 검속되었다.

   평양에서는 주기철이 시무하던 산정현교회를 중심으로 신사참배 반대운동이 전개되었다. 그는 공개적으로 신사참배를 반대했기 때문에 일본의 주목을 받았다. 1938년부터 4차에 걸쳐 7년간의 옥고를 치르다가 1944년 4월 21일 순교했다. 산정현교회도 1940년 5월 이후에 폐교(廢敎) 되었다.

   만주에서는 미국 정통장로교회(Orthodox Presbyterian Chuch of America, OPC)의 헌트 선교사가 중심이 되어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이끌었다. 1938년 그는 조선예수교장로회 봉천노회의 총대 자격으로 27회 총회에 참석했다. 그때 총회의 불법적인 결의에 대해 저항했으나 일본 경찰에 의해 저지당했다. 이후 그는 신사참배를 반대했다는 이유로 노회에서 면직 당한다. 하지만 봉천노회의 23개 교회의 성도들 중에 일부는 이러한 노회의 결정을 부당하게 여기고 헌트를 지지하면서 그와 함께 신사참배 반대운동에 참여했다.

   그들은 자신의 자녀들을 신사참배를 실시하는 학교에 보내기를 거부했다. 그들은 가장 강력한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시도했으며, 이로 인해 세 명의 성도가 감옥에서 순교했다. 1941년 가을, 만주에서 70명의 성도들이 체포되었고 헌트도 같은 해 10월 22일에 체포되었다. 그는 다른 성도들과 함께 감옥에서 고난을 당할 결심을 하고 있었지만 그의 의지와 무관하게 미국과 일본의 포로교환 협정에 의해서 그의 가족들과 함께 1942년 7월 4일에 미국으로 추방당했다.

이들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기 위해 신사참배에 반대했다. 이근삼은 이들의 신사참배 반대 동기를 다음과 같이 네 가지로 제시한다.

 
1.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복종과 교회에 대한 사랑

2. 종말론적인 기대와 그리스도 왕권에 대한 개인적 언약

3. 신적 진리에 대한 비타협적인 증언과 교회와 국가에 대한 기독교적 책임성

4. 순교에 대한 높은 평가와 하나님의 영광

 
   이와 같이 신사참배 반대운동은 본질적으로 우상숭배를 거부하며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고 당시 교회의 변질을 경고하는 신앙운동이었다. 왜냐하면 신사참배 반대운동이 교회를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순수하게 유지하고 보존하고자 하는 의식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7. 결론


   1930년대 말에 있었던 일본의 신사참배 강요에 굴복한 한국교회는 그때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여 영혼을 구원하는 거룩한 공동체인 교회에서 인간인 천황과 그의 조상신을 섬기는 사상으로 무장된 일본의 침략전쟁을 수행하는 단체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때 한국교회의 생명은 이미 끝난 것처럼 보였다.

   그렇지만 한국교회의 생명은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통해 끊어지지 않고 여전히 유지되었다. 신사참배 반대운동은 한국교회가 복음의 진리를 완전히 버리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일본의 끊임없는 탄압으로 인해 이 운동도 완전히 사라지는 듯 보였지만, 결코 그러하지 않았다. 한국교회는 신사참배 반대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수감된 감옥에서, 깊은 산속에 숨어서 참된 신앙을 지키려 했던 사람들 가운데서 여전히 남아있었다.

   한국교회의 지난날의 역사는 우리에게 이와 같은 사실을 지금도 말해주고 있다. 이에 우리는 신사참배에 참여했던 분명한 사실을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아야 하며 동시에 신사참배 반대운동의 정신을 기억하고 보존하며 계승해야 한다. 왜냐하면 한국교회가 하나님의 은혜로 지금처럼 크게 부흥한 것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고 어찌하든지 성경대로 살려고 했던 신앙의 선배들이 신사참배라는 극한의 상황 속에서 한국교회를 지켜내었기 때문이다. 이는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의 시대적 과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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