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장로교회사

the historical Presbyterian Church in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1. 서론

 

  남북전쟁(1861~65) 이후 미국사회는 큰 변화를 체험했다. 내연기관(engine)의 발달로 공업의 기계화가 시작되었고 수송수단, 통신수단이 발달하였다. 이것은 도시화를 촉진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남북전쟁 당시 미국의 도시인구는 총인구의 20%정도였지만 1900년에는 40%, 1920년에는 50%로 증가했다.

  급격한 도시화는 국내에서의 인구이동, 즉 농촌에서 도시로의 이동 뿐 만 아니라 외국으로부터의 이민의 결과였다. 수송수단의 발달과 경제의 성장으로 인해 1860년 이후부터 1900년까지 북유럽과 서유럽에서 미국으로 약 1,400만 명이 이주했다. 1900년에서 1914년 사이에 온 이민자들은 주로 동유럽과 남유럽에서 이주한 사람들이었다. 이들로 인해 미국의 종교인구 구성은 다양화되었다.

  공업화와 도시화와 이민 덕분에 1860년에서 1900년 사이에 기독교인의 숫자는 500만 명에서 1,600만 명으로 3배 이상 증가했다. 이는 가난한 자, 노동자, 이민자에 대한 교회의 관심 때문이 아니었다. 급격한 사회적 변화로 방황하던 사람들이 이 기간 중에 교회로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회적으로 안정되자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났고 불신자들의 수도 증가하기 시작했다. 세속주의의 확산, 물질만능주의, 과학만능주의로 인해 미국에서 종교의 영향력은 더욱 축소되어갔다.

  이제 남북전쟁 이후부터 제2차 세계대전 전이 일어나기 전까지(1865~1939) 이러한 요인들이 미국 장로교회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중요한 사건을 중심으로 살펴보도록 하겠다.

 

2. 장로교회에 대한 공격

 

  장로교에서 자유주의 신학은 뉴욕 유니온신학교(Union Theological Seminary) 교수 찰스 브릭스(Charles Briggs)로부터 시작되었다.

  브릭스는 1880년대부터 성경의 고등비평을 옹호하고 전통적인 신학을 부인하는 글을 발표했다. 그의 사상은 1891년 1월에 있었던 유니온 신학교의 성경교수 취임 강의로 소개되었다. “성경의 권위”라는 주제 하에 진행된 강의에서 브릭스는 기독교가 성경의 권위에 기초하고 있지만, 교회사를 볼 때 아니라고 주장했다. 축자영감설, 성경의 자증, 성경 무오설과 같은 사상이 성경의 이해에 장애가 되기 때문에 이 교리를 벗어나야 성경의 올바른 의미를 깨달을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이 강연에서 오경의 모세 저작, 이사야서의 단일 저작, 미래에 대한 자세한 예보로서의 예언 개념을 부정했다.

  이에 대해 프린스턴신학교(Princeton Theological Seminary) 교수 알렉산더 하지(Archibald Alexander Hodge)와 벤자민 워필드(Benjamin B. Warfield) 등은 성경의 영감과 무오를 옹호하면서 브릭스의 주장에 맞섰다.

  하지와 워필드의 가르침을 따른 장로교 총회는 1891년 총회에서 브릭스의 교수직에 대한 지명을 거부했고, 1892년 총회에서는 그의 교수 지명을 철회하는 “포틀랜드 성명서”(Portland Deliverance)를 발표했다. 이 성명서의 내용은 총회가 성경의 축자적 영감과 무오를 지지하며 총회의 직분자는 이 교리를 받아들여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신앙양심에 따라 사직해야 한다는 것이다. 1893년 총회는 지난해의 성경관을 재확인했고 브릭스의 교수직을 정직시켰다. 마침내 1895년 총회에서 브릭스는 제명되었다.

  이외에도 신비주의와 세대주의의 공격이 있었다. 먼저 신비주의는 오순절 운동으로 그 모습을 드러냈다. 오순절 운동은 1901년 캔자스의 토페카(Topeka)에 있는 벧엘성경학교(Bethel Bible College)에서 있었던 은사 집회에서 시작되었다. 이 집회는 사도행전의 역사를 재현하자는 의도에서 열린 집회였다. 이 집회에서 아그네스 오즈만(Agnes Ozman)이라는 여학생이 다른 학생에게 안수를 요청하면서 안수와 방언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오순절 운동은 정통 신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오순절 운동은 성경의 권위보다 영적 체험을 중시한다. 이로 인해 객관성과 성경 중심의 신앙을 강조하는 장로교회가 타격을 입게 되었다.

  세대주의는 장로교회의 성경 해석에 혼란을 가져왔다. 세대주의는 1840년 영국의 존 넬슨 다비(John Nelson Darby)에 의해 시작되었다. 다비는 역사를 7세대로 나누고 전천년적 세대주의를 전파했다. 그에 따르면 마지막 세대인 현재는 교회의 은밀한 휴거와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함께 종결되는데, 그때까지 세상에 점진적인 타락이 있다고 했다. 그의 사상은 1909년에 출판된 『스코필드 관주성경』(Scofield Reference Bible)을 통해 넓게 퍼져나갔다. 세대주의는 장로교회의 전통적인 언약신학을 부정하고 비관적 종말론과 배타주의적 문화관을 보급했다.

 

3. 근본주의 논쟁 

 

1) 근본주의 운동

  장로교회에 대한 자유주의, 오순절 운동, 세대주의의 공격은 목회자 후보생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그래서 장로교회는 1910년 총회에서 목사 임직을 받는 후보생들은 “본질적이고 필수적인” 5개의 교리들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결정했다. 그것은 성경무오,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그리스도의 대속적 속죄, 그리스도의 육체적 부활, 성경에 기록된 기적들의 사실성이었다. 이것은 1916년 총회와 1923년 총회에서 재확인되었다.물론, 이 교리들은 개혁주의 교리의 체계를 전체적으로 설명해주지는 않는다. 하지만 목회자 후보생의 신학을 시험할 수 있는 방법과 신조의 ‘울타리’를 제공해주었다.

  한편, 1910년에서 1915년 사이에 『근본적인 것들 : 진리의 증언』(The Fundamentals : A Testimony of the Truth)이 출판되었다. 이 책은 12권으로 구성되었는데 당시 저명한 신학자들이 제출한 100여 편의 논문이 포함되어 있다. 이들은 성경에 대한 고등비평과 현대과학사상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기독교 신앙의 근본적이고 기본적인 교리들을 옹호했다. 이 책은 미국 전역에 250여만 부가 배포되었다. 이로부터 근본주의 논쟁이 시작되었다.

 

2) 해리 에머슨 포스딕과 클라렌스 맥카트니의 논쟁

  1920년대 초 근본주의와 자유주의 사이에 충돌이 일어났다. 그 시작은 뉴욕의 제일장로교회(First Prebyterian Church)에서 목회하던 해리 에머슨 포스딕(Harry Emerson Fosdick)에 의해서였다.1921년 5월 21일 주일 강단에서 그는 “근본주의자가 승리할 것인가?”(Shall the Fundamentalist Win?)라는 제목의 설교를 했다. 그는 이 설교에서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이 자유주의 신학에 대해 관용하지 않는다고 비난했고, 근본주의자들의 오류를 지적했다. 그는 근본주의의 본질적인 문제는 편협하고 관용을 허락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으며 교회가 분열되지 않고 통일을 유지하려면 예정론이나 성경의 영감과 같은 특정 교리만 내세워서는 안 되고 다양한 신학 사상을 수용해야 한다고 했다. 그의 설교는 “새로운 지식과 기독교 신앙”이라는 제목의 소책자 형식으로 출판되어 미국 전역에 목회자들에게 13만 부가 배포되었다.

  포스딕의 설교에 대해 필라델피아 아치 스트리트 장로교회(Arch Street Presbyterian Church)의 목사인 클라렌스 맥카트니(Clarence E. N. Macartney)가 “불신앙이 승리할 것인가?”(Shall Unbelief Win?)라는 설교로 대답했다. 이 설교에서 맥카트니는 자유주의 신학은 장로교회의 교리와 조화될 수 없으며, 동정녀 탄생은 역사적 사실이고, 성경은 하나님에 의해 영감된 권위 있는 말씀이라고 했다. 그리고 자유주의를 제재하지 않으면 “하나님과 그리스도가 없는 기독교가”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 설교는 1922년 「The Prebyterian」에 기고되었다.

 

3) 존 그래스햄 메이첸의 지원

  프린스턴신학교의 존 그래스햄 메이첸(John Gresham Machen)도 자유주의에 대해 강도 높은 비판을 했다. 그는 포스딕의 설교가 있기 전에 『바울종교의 기원』(The Origin of Paul's Religion)을 통해 자유주의의 잘못된 주장을 논박했다. 이 책에서 메이첸은 기독교는 역사적 예수 위에 세워졌음을 주장했다. 그가 말하는 예수는 자유주의자들에 의해 재구성된 예수가 아니라 신약성경과 기독교의 예수라고 주장했다.

  자유주의와의 논쟁에 있어서 이 책보다 더 큰 영향을 미친 책은 1923년에 출판된 『기독교와 자유주의』(Christianity and Liberalism)이다. 메이첸은 자유주의는 기독교가 아니라 새로운 형태의 종교라고 규정하고 기독교와 자유주의는 결코 공존할 수 없다고 했다.

 

4) 어번선언

  1923년 총회는 “본질적이고 필수적인” 5대 교리를 재확인했다. 이에 자유주의자들은 1924년에 1,274명이 서명한 “어번 선언”(Auburn Affirmation)을 발표했다. 이들은 정통교리를 고백하는 자에게만 목사 임직의 자격이 주어진다는 것은 잘못이라고 지적했다. 또한 총회가 노회의 의견을 받지 않고 5대 교리를 총회의 공식적인 입장으로 천명한 것은 헌법 위반이며, 기독교 안에서 자유의 보존과 교회의 연합이 이루어져야 하며 교회가 교리 문제로 싸우는 것은 명분 없는 행위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총회의 보수주의자들은 이들에 대해 적절한 대응을 하지 못했다. 이것은 나중에 보수주의자들이 총회 안에서 세력을 잃게 되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어번 선언에 서명한 자들은 총회에서 전혀 처벌을 받지 않았다. 이후 이들은 1920년대 후반에 총회에서 중요한 위치를 많이 차지하게 되었다.

 

5) 스코프스 재판 : 일명 ‘원숭이 재판’(monkey trial)

  1925년 당시 테네시 주는 공립학교에서 진화론을 가르치는 것을 법으로 금했다. 이때 테네시주 데이턴(Dayton)의 한 고등학교에서 생물을 가르치는 존 스코프스(John T. Scopes)가 법을 어기고 진화론을 가르쳐서 재판을 받게 되었다. 이 재판의 변호인은 근본주의를 반대하는 클라렌스 대로우(Clarence Darrow)였고, 기소는 근본주의를 옹호하는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William Jennings Bryan)이 담당했다. 이 재판의 과정은 전국적으로 중계되었다.

  이 재판에서 스코프스는 유죄가 확정되어 100달러의 벌금형을 받았다. 겉으로 보기에는 근본주의자의 승리처럼 보였으나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브라이언은 창조론을 옹호했지만 논증을 치밀하게 준비하지 못해 설득력이 약했다. 반면에 대로우는 뛰어난 논증과 과학적인 지식으로 브라이언을 궁지에 몰아넣었다. 법원은 스코프스의 유죄를 선고했지만 이 재판으로 인해 근본주의자들은 시대에 뒤떨어졌으며 시대의 지식의 추세를 따라가지 못하는 사람들, 자신들의 주장만 관철하기 위해 억지를 쓰는 완고하고 무지한 사람들이라는 이미지가 굳어졌다.

  이 재판 이후 이러한 인식은 현재까지 남아있게 되었고, 근본주의자들은 경멸과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 이 재판을 계기로 근본주의자들은 장로교 총회에서 입지가 더욱 좁아졌을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인정받지 못했다.

  

4. 프린스턴신학교의 개편

 

  당시 프린스턴신학교는 새로운 시대에 맞추어 변화를 하고자 했다. 왜냐하면 교과과정이 구시대적이었고, 실천신학이나 성경에 대한 연구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사회는 교장을 교체하면 신학교를 개혁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실천신학 교수인 로스 스티븐슨(Ross Stevenson)을 교장으로 임명하였다.

  프린스턴신학교는 전통적으로 교수들에 의해 운영되어 왔다. 하지만 스티븐슨이 1914년에 교장에 취임하면서부터 독단적으로 학교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교수와 교장 사이에 긴장이 벌어졌고, 교수들이 둘로 나뉘게 되었다. 스티븐슨을 지지하던 교수들은 소수파인데 자유주의 신학에 열린 태도를 보였다. 찰스 어드만(Charles Eerdman), 프레데릭 로에췌(Frederick Loetscher), 존 데이비스(John Davies), 존 스미스(John Ritchie Smith)등이 소수파에 속한 교수들이었다. 교장을 반대하는 교수들은 다수파를 이루었는데 여기에는 메이첸, 로버트 윌슨(Robert Wilson), 게할더스 보스(Geerhardus Vos), 카스파르 하지(Caspar Hodge), 윌리엄 그린(William Green), 오스월드 앨리스(Oswald T. Allis)등이었다. 교수진의 분열은 앞으로 프린스턴신학교에서 벌어질 사건의 발단이 되었다.

  1925년 변증학 교수인 그린이 정년퇴임하였다. 이에 다수파와 소수파는 그린을 대신하는 변증학 교수 임명을 놓고 대립하게 되었다. 당시 신학교 내의 보수와 진보의 세력이 비슷했기 때문에 누가 변증학 교수가 되느냐에 따라 학교의 장래가 결정될 수 있었다. 1925년 11월 20일 맥카트니가 그린의 뒤를 이어 변증학 교수로 추천되었다. 메이첸은 기뻐하면서 그에게 교수직을 받아들이도록 간청했다.

  하지만 맥카트니는 자신을 학자보다는  설교자로 보고 있었다. 그는 소수파인 로에췌에게 조언을 구했다. 로에췌는 맥카트니에게 목사로 남아있으라고 했다. 조언을 따른 맥카트니는 5월에 교수 지명을 거부했다. 이에 운영이사회는 메이첸을 변증학과 기독교 윤리학 교수로 임명했다. 메이첸은 자신의 전공이 신약신학이어서 망설이긴 했지만, 결국엔 이사회의 결정을 받아들였다.

  1926년 총회 마지막 날 신학교 상설위원회는 메이첸의 교수 지명에 대한 임명 유보안을 제출하였다. 이에 동의한 스티븐슨은 총회석상에서 “나는 프린스턴신학교를 어떤 특정한 당파의 학교가 아니라 전체 장로교회를 대표하는 학교로 만들 것이다.”라고 했었다. 어드만은 “메이첸은 변증학 교수에 적합하지 않은 기질을 갖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를 받아들인 총회는 1927년에 메이첸과 앨리스의 승진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때 스티븐슨은 눈물을 흘리며 총회의 결정에 감사를 표했다.

  이 결정은 1926년에 총회가 프린스턴신학교에서 발생된 문제를 해결하기위해 조직한 특별위원회의 보고에 의한 것이었다. 이 보고에 의하면 프린스턴신학교의 문제는 두 이사회(재단 이사회와 운영 이사회)에 있다는 것이다. “프린스턴의 심각한 문제점들의 원인과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는데 장애가 되는 것은 두 개의 운영 이사회의 운영 형태에 있다.”

  1927년의 총회는 특별위원회의 보고를 받고 그 제안을 채택하였다. 따라서 상술한 것과 같이 메이첸과 앨리스의 정교수 승진이 허락되지 않았다. 그리고 두 개의 이사회를 단일화시키는 정관을 수정하기로 했다. 11명의 위원들은 또한 하나로 개편된 이사회가 총회의 허락 없이도 학장이나 교수를 파면시킬 권한을 지닐 것과, 학장의 권한을 크게 강화시킬 것도 건의했다.

  이에 대해 메이첸은 신학교 이사회가 재조직된다면 프린스턴신학교는 파괴될 것이고 다른 형태의 새로운 조직이 프린스턴신학교를 대체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맥카트니도 1927년의 총회의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바로 프린스턴신학교의 소멸을 의미한다고 했다.

  그렇지만 1928년의 총회는 다수파의 반대가 있었음에도 위원회의 제안대로 할 것을 지시했다. 마침내 1929년에 프린스턴신학교의 통합이사회가 구성되었다. 통합이사회는 이전의 운영이사회와 재단이사회에서 각각 추천한 22명과 전체 교회에서 선출된 11명총 33명으로 구성되었다. 이들 중에 재단이사회에서 추천한 베티 제닝스(W. Beatty Jennings)와 전체 교회에서 추천한 아사 페리(Asa J. Ferry)는 어번선언에 서명했었던 사람이었다. 그럼에도「Prebyterian Banner」는 새로 구성된 이사회가 깨끗하고 보수적이라고 평했다. 이에 대해 메이첸은 새로 선출된 33명의 이사 중에서 선명한 보수신앙을 가진 사람은 6명밖에 없다고 비판했다.

 

5. 웨스트민스터신학교의 설립

 

  메이첸은 새롭게 구성된 신학교에서 봉사할 수 없다고 결론내렸다. 1929년 6월 27일 에 그와 뜻을 같이하는 목사, 평신도, 프린스턴신학교 교수진, 이전의 신학교 이사들이 뉴욕에 모여 프린스턴신학교의 전통을 계승할 학교의 설립을 논의했다. 7월 8일 찰스 샬(Charles Shall)목사는 새로운 학교의 설립의 토대를 마련하기 위해 메이첸, 앨리스, 윌슨, 몇 명의 장로교 실업가들의 모임을 소집했다.

  7월 18일에는 이전의 프린스턴신학교의 이사들, 교수진, 학생들을 포함한 70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여 “프린스턴신학교가 오랫동안 지켜왔던 하나님의 말씀과 웨스트민스터 신조에 대해 동요없이 계속하여 충성할” 새로운 학교를 설립하기로 결정했다. 이날에 윌슨, 앨리스, 메이첸을 자문으로 하는 15인으로 구성된 조직위원회가 만들어졌다. 7월 25일에 조직위원회는 ‘웨스트민스터’(Westminster)를 학교의 이름으로 정했다.

  1929년 9월 25일 웨스트민스터신학교가 필라델피아의 위더스푼 홀(Witherspoon Hall)에서 개교했다. 개교 당시 교수진은 메이첸, 윌슨, 앨리스, 코넬리우스 반 틸(Cornelius Van Til), 네드 스톤하우스(Ned Stonehouse), 알렌 맥크라이(Allen A. Macrae), 폴 울리(Paul Wooley), 리엔크 카이퍼(Rienk. B. Kuiper)였다. 이들과 함께 프린스턴신학교를 떠난 50명의 학생으로 웨스트민스터신학교의 첫 번째 학기가 시작되었다.

  메이첸은 개교 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친구들이여, 프린스턴신학교는 죽었으나 프린스턴신학교의 숭고한 전통은 살아있습니다. 웨스트민스터신학교는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그 전통을 손상하지 않고 계승하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애매함과 타협의 토대가 아닌 하나님의 말씀에 헌신하는 정직한 토대 위에서 옛 프린스턴이 유지했던 바로 그 원리를 유지하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메이첸은 웨스트민스터신학교가 옛 프린스턴신학교의 전통을 이어받은 학교라고 함으로써 신학교 설립의 당위성과 정통성을 선언한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총회 안에 있었다.

 

6. 독립선교부의 설립과 미국장로교회의 조직

 

  1932년 『선교의 재고 : 백년 후에 평신도의 평가』(Re-Thinking Missions : A Layman's Inquiry after One Hundred Years)라는 책이 출간되었다. 이 책은 자유주의적이고 관용적인 정신이 전체에 깔려있었다. 신학적인 부분은 저명한 철학자이자 자유주의적 회중주의자인 하버드 대학교의 윌리엄 어네스트 호킹(William Ernest Hocking)이 작성했다.

  이 책은 기독교의 메시지를 역사적 사실로 보지 않고 보편적 합리적 원리로 보았다. 이러한 의미에서 모든 종교는 얼마간의 진리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이 책은 세계의 종교들이 호전적이고 비판적인 기독교 운동으로 인해 동요되고 고통을 당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기독교가 통합적 진리를 위한 연구에서 다른 종교들과 연합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 책의 제안은 자유주의자들에게 주목할 만한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보수적인 신자들로부터는 큰 비판을 당했다.

  장로교 선교사이자 『대지』(The Good Earth)의 작가로 유명한 펄 벅은 신학적으로는 자유주의자였다. 그녀는 이 책을 읽고 「Christian Century」에서 “내가 보기에 이 책은 모든 관찰이 문자 그대로 참되고 모든 결론이 옳은 책들 중에 유일한 책이다.”고 칭찬을 아까지 않았다. 그녀는 1933년 1월 「Harper」에 글을 실었다. 그 글에서 펄 벅은 장로교회의 선교정책과 선교사들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녀는 선교사들이 중국에서 미신적인 교리를 가르침으로써 사람들이 생활을 비참하게 만들었다고 했다.

  이 주장은 기독교 신앙 자체를 모독하는 것이었다. 이에 메이첸은 펄 벅을 포함하여 선교지의 자유주의자들에 대해 정당한 조치를 해야 한다는 제안을 자신이 속한 뉴브룬스윅(New Brunswick)노회에 제출했다. 그는 노회에 청원서를 제출하기 전에 110페이지 분량의 소책자를 출판했다. 그 중심내용은 선교부의 정책을 비판하는 것이었다. 메이첸의 제안은 뉴브룬스윅 노회에서 통과되지 못했다. 하지만 필라델피아 노회를 비롯한 다른 노회에서는 통과되었다.

  필라델피아노회는 메이첸의 제안을 해외선교부 상임위원회에 회부했다. 상임위원회는 메이첸의 제안을 45대 2로 부결시켰다. 1933년 총회는 해외선교부 상임위원회의 결정을 승인했다. 해외선교부를 신학적으로 정화하려던 메이첸의 노력은 이렇게 실패로 끝났다.

  이때 맥앨리스터 그리피스(McAllister Griffith)는 메이첸과 협력하여 새로운 선교부를 조직하겠다고 했다. 이것이 1933년 6월 27일에 조직된 ‘장로교 해외 독립선교부’(The Independent Board for Presbyterian Foreign Mission)이다. 10월 17일에 메이첸은 초대 회장이 되었다. 그는 이렇게라도 해서 해외 선교지를 올바른 신학으로 지키고자 했던 것이다.

  1934년 총회는 장로교 해외 독립선교부가 헌법에 위배된다고 선언하고 지시서를 보내어 독립선교부가 더 이상 활동하지 못하도록 했다. 메이첸은 이를 거부했다. 이에 뉴브룬스윅 노회는 1935년 3월 29일에 메이첸을 정죄하고 목사 정직을 선언했다. 마침내 1936년 총회는 메이첸과 독립선교부에 소속된 다른 목사들을 정죄하고 그들의 목사직을 정직시켰다.

  그 후 1936년 6월 11일 메이첸과 그와 뜻을 함께하는 100여명의 목사들과 함께 미합중국장로교회(PCUSA)를 탈퇴하고 새롭게 미국장로교회(Presbyterian Church of America)를 조직했다. 이 교단이 바로 현재의 정통장로교회(Orthodox Presbyterian Church)이다. 2012년 현재 정통장로교회는 17개 노회로 조직되어 있다.

 

7. 결론

 

  미국 장로교회는 찰스 브릭스가 전통적인 신학을 부인하는 글을 발표하는 것을 시작으로 도전받기 시작했다. 워필드와 하지의 노력으로 이 일은 잘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미국 장로교회에 대한 자유주의의 공격은 계속되었다. 1920~30년대에 있었던 근본주의와 자유주의의 논쟁은 그 절정이었다. 장로교회는 초기에 자유주의의 공격을 잘 견뎌내었지만, 장로교회 내에 자유주의를 받아들이고 자유주의에 대한 입장을 분명히 하지 못한 사람들로 인하여 장로교회는 교리적으로 크게 흔들리게 되었다. 결국 이 논쟁의 중심에 있었던 프린스턴신학교는 자유주의자들이 장악하게 되었고 신학은 그 순수성을 잃어버릴 위기에 처했다.

  이에 메이첸은 자신과 뜻을 함께하는 사람들과 함께 1929년에 웨스트민스터신학교를 설립하여 그들의 신앙의 선배들이 파수했던 정통신학을 계승하고자 했다. 그러나 자유주의가 장악한 장로교 총회는 이것을 달갑지 않게 여겼다. 결국 이들은 총회로부터 축출되었다. 그렇지만 새롭게 미국장로교회를 조직하여 진리파수운동이 끊어지지 않도록 했다. 적은 숫자로 시작한 미국장로교회와 웨스트민스터신학교는 소수이지만 여전히 살아남아 하나님이 그들에게 맡긴 사명을 충실히 감당하고 있다.

  미국 장로교회에 혼란을 일으킨 자유주의는 오늘날 한국교회에 교묘하게 침투하여 그 세력을 넓혀나가고 있다. 바로 이때에 우리는 지난 세기 미국 장로교회의 역사를 자세히 살펴보고 우리의 거울로 삼아야 한다. 당시 미국 장로교회와 현재 한국교회의 상황은 서로 다르지만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동일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진리를 파수하기 위해 희생을 거부하지 않는 자세이다. 그러한 희생은 미국 장로교회의 역사가 알려주는 것과 같이 진리에서 이탈한 자들과 갈라서는 것이다. 또한 그들과 계속하여 싸움할 수 있도록 새로운 공동체를 조직하고 운영하면서 경험하게 될 아픔이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무지몽매한 다수가 아니라 영적으로 민감하고 깨어있는 소수를 통해 자신의 일을 해 나가신다. 이는 성경이 그리고 교회의 역사가 우에게 계속하여 분명하게 알려주고 있는 사실이다. 이 사실은 진리운동을 하는 우리에게 큰 용기와 격려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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