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북장로교 한국선교의 주춧돌 맥윌리암스
 

   미국 선교 잡지에 이수정이 기고한 한국 선교의 제창에 자극을 받은 미국의 각 교단 해외 선교부는 감리교가 먼저 눈을 떠 한국 선교를 차분히 준비하였다. 그때 미국 북 장로교회 역시 한국선교사업의 가능성을 엄밀히 타진하고 있었다.

 

   그러나 해외 선교 본부의 분위기는 두 갈래의 반응이었다. 하나는 시기상조라는 의견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즉시 선교활동을 개시해야 한다는 의견이었다. 그런데 미국 북 장로교회 해외선교부 총무 엘린우드(F. F. Elinwood)가 한국 선교는 곧바로 착수해야 한다는 생각을 간직하고 있었다.


   이수정의 한국 선교에 대한 이 호소는 곧바로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이때 감동을 받은 사람이 맥윌리암스(David W. Mcwilliams)였다.


   그는 뉴욕 라파이에트(Lafayette)장로교회를 섬기고 있었고 북 장로교 해외 선교부의 일을 돌보고 있었다. 그는 선교 잡지에 게재된 한국 선교에 관한 글을 읽고 엘린우드 총무에게 한국 선교의 가능성을 질문했다. 엘린우드는 그에게 한국 선교의 가능성을 확인해 주게 되었다. 맥윌리암스는 기쁜 마음으로 누구든지 한국 선교를 희망하는 선교사가 있다면 선교사 두 사람의 년간 생활비로 5,000달러를 헌금하겠다는 뜻을 북 장로교 해외선교부에 전달했다.


   미국 북 장로교 해외선교부는 이 제의에 크게 고무되어 한국 선교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이것이 출발점이 되어 많은 미국 성도들이 선교 헌금을 하게 되었고 해외 선교부는 한국 선교사역을 구체화하였다. 그리하여 1884년 봄에 장로교 계통학교에서 중등교육을 받고 메리빌대학을 거쳐 테네시 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한 의사 헤론(John. W. Heron)을 한국 선교를 위한 첫 선교사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북 장로교는 아직 한국의 형편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고 곧장 입국하는 것이 여의치 못하다고 판단하여 일본에서 한국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한국어를 익히면서 기회를 엿보도록 조치하였다.


   헤론은 테네시 대학교에서 교수로 봉직하도록 여러 차례 권유를 받았으나 한국 선교를 희망하여 그의 뜻을 관철하였다. 그는 1885년 6월 21일에 한국에 상륙하였다. 그때는 한국이 기독교 신앙을 허락하지 않을 때였지만 외국인끼리의 예배는 가능한 것이어서 그가 입국한지 한주일 후 6월 28일 저녁8시에 예배를 드렸는데 이 예배에 참석한 이들은 알렌(H. N. Allen)의사부부, 헤론 의사부부 그리고 스크렌톤 의사의 어머니(Mrs, Mary F. Scranton)등이었다. 그는 입국하자 곧 바로 알렌 선교사가 그해 2월에 개원한 광혜원에서 일하게 되었다.


   헤론은 1887년 알렌이 미국 워싱턴 주재 한국 공사관의 서기직을 맡으면서 선교사직을 사임하고 말았다. 이 일로 인해 헤론은 이병원의 후임자가 되어 운영의 책임을 맡게 되었다. 그는 당시 한국에 체류하고 있던 언더우드, 아펜젤러, 스크랜톤, 알렌과 함께 성서 번역 사업에 큰 공헌을 하게 되었다.


   1889년 호주 장로교회가 선교사 데이비스(J. H. Davis)를 파견, 내한하자 선교사 공의회가 조직 되었고 초대 회장직을 맡았다. 그는 문서선교사업 추진을 위해 문서 사업기관을 설립했는데 이것이 1890년 ‘대한 성교서회’였으며 후에 ‘대한 기독교서회’로 개명하였다. 이 모든 사업을 가능케 한 인물이 바로 맥윌리암스였다. 그는 진실로 한국 기독교의 주춧돌로서 영원히 한국교회에 기억될 것이다. (2004. 3. 6. 한국장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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