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새롭게 읽는 한국교회사

쇄국 빗장이 열리다

19세기 말은 조선 역사의 격변기였다. 만주와 일본에서 성경이 번역되는 등 기독교와의 접촉이 이루어지고 있을 때 국내의 정치적 상황에도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국제적인 정치질서의 개편과 아시아의 변화는 은둔의 왕국에도 변화를 재촉하고 있었고, 미국의 아시아 진출과 함께 인접한 중국과 일본 그리고 러시아의 변화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개국(開國)과 개항(開港)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심각한 현안으로 대두되었다.

 

1. 흥선 대원군의 하야와 강화도 조약

 

1863년 집권한 흥선 대원군은 안으로는 왕권 강화를 위해 봉건체제를 유지하고 밖으로는 쇄국정책을 강화하였으나 19세기 말 배외척사론(排外斥邪論)의 울타리를 넘어 새로운 대외관계를 모색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된 것이다. 따지자면 이런 변화는 1866년의 제너럴셔먼호 사건 때로부터 시작되지만 점차 세력을 확보해 갔다. 오늘 우리는 개국을 주

1876226일 조선 대표 신헌과 일본 대표 구로다 사이에 병자수호조약(강화도조약) 체결

 

장한 이들을 개화파라고 부르고, 개국을 반대한 이들을 척사위정파(斥邪衛正派)라고 부른다. 또 개화파 중에서 온건 개화론자들을 동도서기파(東道西器派), 급진적인 개화파를 개화당(開化黨)이라고 부른다.

 

이들의 논쟁은 1873년 대원군 실각과 민비 세력 등장으로 변화되었고, 1875(고종 12) 운양호(雲揚號) 사건은 조선의 개국을 강요하게 된다. 대원군이 하야하자 무력으로라도 조선의 문호를 개방시킬 구실을 만들기 위해 일본은 해안 측량이란 이유로 운양호를 보내 영흥만과 서해안의 강화도 일대를 측량·조사하며 한강으로 접근하게 되자 우리나라 수비군과 충돌하게 된다. 조선 수비군의 공격을 받고 퇴각하던 이들은 영종도에 불을 지르고 도주했다. 일본은 이를 트집 잡아 통상을 요구하였고 그 결과로 맺은 조약이 강화도 조약이다. 조선과 일본 사이에 맺어진 이 최초의 불평등 조약을 병자수호조약(丙子修好條約)이라고도 부른다.

 

그 내용은 크게 5개 항으로 요약될 수 있다. 이 조약에서는 조선이 자주국임을 선언하고, 사절의 교환, 부산 외 2개항 개항, 개항장에서의 일본 상인의 무역활동 보장, 일본의 조선 연해 측정의 자유 보장, 그리고 일본인의 치외법권 인정이 그것이다. 이와 같은 조약의 결과로 1876년 부산과 제물포 그리고 원산항이 개항하게 되었고, 우리나라는 개국의 길을 가게 된 것이다. 비록 강압에 의한 결과였다 할지라도 이런 일련의 변화는 조선에서의 기독교 선교를 가능하게 했다. 말하자면 한국에서의 기독교 선교의 때는 성숙해 가고 있었다.

 

2. 조선의 개국으로 선교의 서장을 열다

 

일본과 조약을 체결한 조선은 1876년 수신사(修信使)라는 이름의 외교사절을 파견하였다. 이전까지는 통신사(通信使)라고 하였으나 강화도 조약 이후 수신사로 개칭된 것이다. 1881년에는 박정양 어윤중 홍영식 등과 수행원들로 구성된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을 일본에 파견하였는데, 이들은 정부 각 부처와 세관, 조폐, 산업을 두루 시찰하고 돌아왔다.

 

일본과의 조약이 체결됨으로써 개국의 길을 간 우리나라는 1882522일에는 미국과 한미수호통상조약’(韓美修好通商條約·Treaty of Amity and Commerce between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and Corea)을 체결하게 되었다. 이것은 구미 각국 중 최초의 조약으로서 청의 중재로 이루어졌다. 청은 일본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조선의 개국을 권고하였고, 이홍장의 주선으로 미국 대표 슈펠트(Robert W Shufeldt)는 인천에 도착하여 조선 대표 김홍집, 신헌(申櫶)과 조약을 체결한 것이다. 이 조약의 체결과 함께 18835월에는 미국 공사관이 설치되고 민영익이 초대 공사로 파견되었다.

 

미국에 이어 1884년에는 영국 독일 이탈리아 러시아와 조약을 체결하였고, 1886년에는 프랑스 오스트리아 덴마크 벨기에와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조선은 근대국가의 일원으로 소위 국제무대에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결국 쇄국의 녹슨 빗장을 열게 되자 서구인들, 특히 선교사들의 내왕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비록 이상과 같은 외국과의 조약에서 종교의 자유나 기독교 선교에 대한 언급은 전무했으나, 이러한 일련의 개국 과정에서 기독교 선교는 서서히 이루어져 갔다. 이렇게 볼 때 1876년의 개항은 기독교의 한국선교를 가능케 해주는 역사의 전기였다고 하겠다.

 

3. 각국 선교사들의 조선입국

한미수호통상조약 미국 대표 Robert W. Shufeldt

 

1882522, 한미수호통상조약 미국 대표 Robert W. Shufeldt와 서양 선교사들의 조선 선교를 가능케 한 한미수호통상조약 영문 조약문

 

개항 이전까지는 기독교가 국법으로 금지된 상태에서 주로 만주지방을 거점으로 유럽 교회 선교사들과의 접촉이 있었으나, 1880년대 이후에는 선교사가 공식적으로 내한하는 등 적극적으로 기독교가 전파되고 수용되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개항 및 외국과의 외교관계 수립 등 국내외 변화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변화의 길목에서 중국과 일본에 파견되어 일하고 있던 미국 선교사들과 일본의 이수정은 한국선교의 필요성을 강조하였고 선교사 파송을 호소하기 시작하였다. 이런 호소가 마케도니아의 부름이 되어 1884년 이래로 한국에 여러 선교사들이 입국하기 시작하였다.

 

한국에서 선교사역을 시작한 교회는 미국의 북장로교(1884) 북감리회(1885) 호주장로교(1889) 침례교(1889) 성공회(1890) 미국 남장로교(1892) 미국 남감리교(1896) 캐나다 장로교회(1898) 등이었다. 이 시기에는 미국교회가 한국선교를 주도했다.(*) 글쓴 이 / 이상규(고신대 역사신학 교수) 출처 / 국민일보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
반응형

 

1. 미국 각 교단, 한국에 선교사 파송

 

18849월 알렌의 입국을 시작으로 외국의 한국 파송이 시작된다. 첫 선교부는 1789년 조직된 미국 북장로교회(PCUSA, The Presbyterian Church in the USA)로서 중국 일본에 이어 한국 선교를 시작했다. 미국 북장로교는 알렌에 이어 언더우드 선교사를 파송했다.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元杜于, 1859-1916)188545일 미국 북감리회의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 1858-1902)와 함께 제물포항을 통해 입국했다. 당시 국내 정세가 불안해 미국 대리공사 폴크(Foulk)의 만류로 아펜젤러 부부는 곧 일본으로 돌아갔다가 2개월 후 다시 입국하게 된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는 비록 교파는 달랐으나 일생을 통해 가장 친근한 선교의 반려자로서 상호 협력했다. 영국 런던 출생인 언더우드는 13세세 때 미국으로 이주해 뉴욕대학에서 문학을 공부하고, 뉴저지 주에 있는 화란개혁교회의 뉴브런즈윅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한 후 목사 안수를 받고

미국과 호주 각 교단이 파송한 최초의 한국 선교사들(우로부터 좌로) : 미국 북장로교 언더우드 선교사, 미국 북감리회 아펜젤러 선교사, 미국 남장로교 레이놀즈 선교사, 호주 장로교 데이비스 선교사

 

한국에 파송 된 첫 목사요 선교사였다. 그해 6월에는 의사 헤론(Dr. John Heron)이 내한했고, 북장로교 한국선교부가 조직됐다. 이들은 서울을 중심으로 개척전도, 의료, 교육사업을 시작했다.

 

그 후 마포삼열(Rev. S. A. Moffett, 1890), 배위량(Rev. W. M. Baird, 1891), 소안론(Rev. W. L. Swallen, 1892), 이길함(Rev. Graham Lee, 1892) 선교사 등이 내한하여 평양과 부산에 선교지부를 개설하고 선교지역을 확대해 갔다. 또 애덤스(Rev. J. E. Adams·1895) 목사 부부는 대구에, 밀러(Rev. F. S. Miller, 1892) 목사는 청주에 각각 선교지부를 개설했다. 그 후 계속하여 선천(1901), 안동(1909) 등지에 선교지부가 설립됐다.

 

2. 호주 장로교 한국에 선교사 파송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한 두 번째 장로교 선교부는 호주 장로교였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호주의 빅토리아주 장로교회(PCV, Presbyterian Church of Victoria)인데 한국 선교는 188910월 데이비스(Rev. Joseph Henry Davies) 목사와 그의 누이 데이비스(Mary T. Davies)에 의해 시작됐다.

 

데이비스는 한때 인도 선교사였으나 건강이 좋지 못해 귀국 후 멜버른대학교를 졸업하고 카오필드 문법학교를 설립, 교장으로 일했다. 그는 다시 인도로 가고자 했으나 한국 선교의 긴박성을 알리는 북중국 주재 영국교회 선교사 월프(John R Wolfe) 주교의 편지를 읽고 한국 선교를 자원하게 됐다. 성공회에 속해 있던 그는 장로교로 이적한 후 에든버러 뉴칼리지에서 신학수업을 받고 18898월 목사 안수를 받았다. 빅토리아주

교파별 한국선교 구역분할

1차 합의 : 1892, 미국 북장, 남장

2차 합의 : 1909, 미국 북장, 남장, 남감, 북감

 

미국 남 감리교

강원도 2/3, 연안, 해주, 원산 이남지역

 

미국 북 감리교

평북, 대천, 박천, 연변, 강원도 1/3, 서울 남부, 충남지역

기타 / 5천 명 이상의 읍 지역은 장, 감 두 교파가 함께 전도하여 교회를 세울 수 있게 했고, 1936년까지 지켜졌다.

 

청년연합회(Young Men’s Fellowship Union) 지원으로 그는 102일 부산을 거쳐 104일 그의 누이와 함께 제물포로 입국하였다. 서울에 도착한 데이비스는 언더우드, 헤론 등과 함께 5개월간 지내며 한국어를 습득했다.

 

선교사가 없는 지방으로 가서 일하기로 작정한 데이비스는 1890314일 서울을 떠나 부산으로 향했다. 20일간 500에 이르는 여행을 마치고 44일 부산에 도착했으나 천연두와 폐렴에 감염돼 부산에 도착한 다음날인 45일 사망했다. 그의 죽음은 호주 장로교회의 한국 선교를 시작하는 계기가 됐다. 빅토리아주 장로교 청년연합회와 여전도회연합회(PWMU)는 한국 선교를 계속 지원했다. 그 결과 189110월에는 매카이(Rev. J Mackay) 목사 부부와 세 사람의 미혼 여선교사, 곧 멘지스(B. Menzies), 페리(J. Perry), 퍼셋(M. Fawcett) 5명이 한국에 파송되었다. 이들은 부산을 거점으로 경남지역에서 활동했다. 후일 호주 장로교는

1890년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의 순회전도 일행

 

부산, 마산, 진주, 거창, 통영 등 5개 지역에 선교지부를 설치하고 전도, 교육, 자선, 의료 활동을 전개했다.

 

3. 미국 남장로교의 한국 선교

 

1864년 조직된 미국 남장로교회(PCUS·The Presbyterian Church in the United States)는 북장로교 보다 8년 늦게 한국 선교에 동참했다. 189110월 언더우드가 첫 안식년으로 귀국해 내슈빌에서 모인 외국 선교를 위한 신학교협의회(Inter-Seminary Alliance for Foreign Mission)’ 연차대회에서 한국 선교에 동참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때 미국 벤더빌트대학에서 유학 중이던 윤치호도 한국 선교를 호소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당시 매코믹신학교 학생이었던 테이트(Lewis Boyd Tate)와 리치몬드의 유니온신학교 출신 정킨(William M Junkin), 레이놀즈(William D Reynolds) 등이 한국 선교를 자원했다. 처음 남장로교 선교부는 한국 선교 계획이 없었으나 이들의 자원과 선교기금의 후원으로 이들을 한국 선교사로 임명했다. 이들은 테이트(Miss Mattie Tate), 데이비스(Miss Linnie Davis), 볼링(Miss Pasty Bolling) 등 미혼 여선교사들과 함께 1892113일 입국했다. 이들은 서울에서 한국말을 배우기 시작했고, 그 후 전주에 첫 선교부를 설치했다. 이후 광주, 군산, 목포, 순천 등지에도 선교지부를 설치하고 전도, 교육, 의료, 자선사업 등을 전개했다.

글쓴 이 / 이상규(고신대 역사신학 교수) 출처 / 국민일보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
반응형

한국교회사 / 복음 전파의 선구자들


1870년대 복음사도 만나 처음 세례받은 조선인들 만주서 ‘한국 신앙공동체’ 꽃피웠다

한국에 복음을 전파하려는 노력은 여러 갈래로 이루어져 갔다. 앞서 소개했던 귀츨라프나 토머스 외에도 조선을 위해 기도하는 이들이 없지 않았다. 그중 한 사람이 만주에 주재했던 알렉산더 윌리엄슨(Alexander Williamson)이었다. 그는 비록 조선에 입국하지는 못했으나 만주에서 조선 선교를 위해 후원했다. 그는 1855년 런던선교회(LMS)의 파송을 받고 중국에서 일했지만 과로로 2년 뒤 귀국했다. 

1863년부터는 스코틀랜드성서공회 파송으로 다시 중국에서 사역했다. 1865년 무역을 목적으로 지푸에 온 조선의 천주교인 김자평(金子平)과 최선일(崔善一)을 통해 천주교 박해 소식을 접한 그는 조선 선교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 토머스 목사의 두 차례에 걸친 내한을 지원하기도 했다. 그가 북중국, 만주, 동몽고와 한국에 관한 자료를 수집하여 두 권의 책을 엮은 것을 보면 한국에 관한 그의 관심을 헤아릴 수 있다. 중국내지선교회(China Inland Mission) 소속 의료선교사 다우드웨이트(Arthur W Douthwaite)가 1883년 한국을 방문하고 선교를 시도한 일이 있는데, 이것도 윌리엄슨의 요청에 의한 것이었다.

로스와 매킨타이어

비록 우리나라에 입국하지는 못했으나 한국인을 위한 보다 구체적인 선교활동은 만주에 주둔하고 있던 스코틀랜드 선교사들에 의해 시도되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존 매킨타이어(John Macintyre, 馬勤泰, 1837∼1905)와 존 로스(John Ross, 羅約翰, 1841∼1915)였다. 스코틀랜드연합장로교회(United Presbyterian Church)는 1862년부터 중국 선교를 시작했다. 

1871년 이후로는 윌리엄슨의 지도로 산둥반도를 주 선교지로 정하고 만주에서 활동을 시작하였는데, 1871년 중국으로 파송된 매킨타이어와 1872년 중국에 온 존 로스 목사는 조선에도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스코틀랜드의 록 로먼드 지방의 루스(Luss) 출신인 매킨타이어는 에든버러의 연합장로교신학교를 졸업하고, 1865년 목사 안수를 받은 후 1871년 중국으로 왔고, 후에 로스의 여동생과 결혼하게 된다. 매킨타이어보다 4세 연하인 로스 또한 연합장로교신학교에서 신학교육을 받고, 1872년 2월에는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해 3월 25일에는 스튜어트(M A Stewart)와 결혼한 후 1872년 가을 중국에 왔다. 

이미 산둥반도에는 여러 선교사들이 있었으므로 그는 만주지방 선교를 계획하고 잉커우(營口)로 이주하였다. 여기서 그는 중국어를 공부하며 중국의 관습과 문화를 익혀갔다. 그해 그의 부인이 첫 아기를 출산하다가 사망하게 되자 아이의 양육을 위해 누이동생 캐서린을 임지로 오게 했는데, 그가 독신으로 있던 매킨타이어와 결혼함으로 로스와 매킨타이어는 처남·매부지간이 된 것이다. 이 두 선교사는 윌리엄슨으로부터 조선에서의 종교적 상황과 토머스의 순교 사실을 듣고 한국인과 한국 선교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한국인의 첫 수세자 세 청년 

로스는 압록강 상류인 린장(臨江)까지 여행한 일이 있으나 조선에 입국할 수는 없었다. 조선에 대한 영적 부담을 느낀 그는 한국인과 접촉하기 위해서 1873년 10월 잉커우를 떠나 가오리먼(高麗門)을 방문한 일이 있다. 가오리먼은 남만주 펑황청(鳳凰城) 투카라는 곳에 있는 책문(柵門)의 하나로 의주에서 약 120리 되는 곳이었다.

이곳은 조선과 청나라의 국경지역으로 시장이 열리는 곳이었다. 로스는 조선인을 만날 수 있다는 기대를 가지고 1874년 4월 말에 다시 가오리먼을 방문했다. 거기서 한국인 이응찬(李應贊)을 만나게 되었고, 곧 그를 통해 한글을 배우게 된다. 또 이응찬의 도움으로 1875년에는 한국인 김진기(金鎭基), 이성하(李成夏), 백홍준(白鴻俊, 1848∼1893) 등 세 사람의 의주청년과 접촉하게 된다. 

스코틀랜드 선교사들의 궁극적 목표는 한글성경 번역이었다. 이 일을 위해 한국인과 접촉하는 과정에서 네 사람의 조선청년은 신앙을 갖게 되었고, 1879년 매킨타이어 목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이것이 한국인의 첫 수세였다. 

존 로스는 이 역사적 사건을 스코틀랜드연합장로교 선교지(United Presbyterian Missionary Record)에 이렇게 보고했다. “매킨타이어는 네 사람의 조선인 유생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이들이야말로 장차 거두어들일 풍성한 수확의 첫 열매라고 확신한다. 현재로서는 조선이 서방세계와 철저히 단절되어 있지만 곧 쇄국의 빗장이 풀릴 것이다. 천성적으로 조선인은 중국인보다 덜 악하고 종교성이 깊으므로 기독교가 전파되기만 하면 급속도로 확산될 것으로 기대한다.” 곧 인삼 행상인이었던 서상륜(徐相崙)도 선교사와 접촉하게 되었고 1879년 만주 뉴좡(牛莊)에서 존 로스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로부터 4년 후인 1883년에는 서간도의 한인으로서 성경 인쇄를 위해 채용되었던 김청송(金靑松) 또한 세례를 받음으로 한국인 수세자는 6명으로 늘어났다. 이들이 공식적인 한국인 첫 수세자로서 후에 언급할 한국어 성경 번역에 기여하게 된다. 

한국인 수세자들과 함께 만주와 그 변방 지역을 중심으로 한국인에 의한 신앙공동체가 형성되어 갔다. 한국인들은 적어도 1879년 세례받기 이전부터 정기적인 집회를 가진 것으로 보이는데, 이것이 만주에서의 첫 신앙공동체였다. 선교사들이 공식적으로 내한하기에 앞서 한국인 스스로가 만주 지방에서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였다는 점에서 기독교영입운동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고신대 교수·역사신학)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
반응형

한국교회사 / 조선에 온 두번째 개신교 선교사

 

비극으로 끝난 토머스 선교사 숭고한 도전

귀츨라프에 이어 한국을 방문한 두 번째 개신교 선교사는 회중교회의 토머스 목사(Rev. Robert Jermain Thomas, 1840∼1866)였다. 웨일스의 회중교회 목사 아들로 출생한 토머스는 아홉 살 때 아버지의 목회지를 따라 하노버로 이사했다. 1859년에는 런던대학교 뉴칼리지에 입학하게 되는데, 언어능력이 탁월했다.

이미 라틴어, 그리스어 등 고전어와 프랑스어 등 유럽 언어를 이해하고 있었다. 1863년 이 학교를 졸업한 그는 그해 5월 29일 캐롤라인 갓프리와 결혼하였고, 그해 6월 4일 하노버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7월 21일에는 런던선교회(London Missionary Society) 파송으로 중국으로 향하게 된다. 그의 나이 23세였다.

그가 중국선교를 지원한 것은 중국이 런던선교회의 중요한 선교지역이기도 했지만 인도와 중국은 당시 젊은이들의 관심의 대상이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아마도 런던선교회의 첫 중국 파송 선교자인 로버트 모리슨(Robert Morrison, 1782∼1843)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민경배 교수는 토머스가 귀츨라프의 조선 방문기를 읽고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토머스의 제1차 조선 방문

토머스는 4개월에 걸친 여행 끝에 1863년 12월 부인과 함께 상하이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중국에서의 사역은 길지 못했다. 중국에 온 지 4개월 만에 아내가 사망하였고, 런던선교회 상하이 지부장인 무어헤드와의 관계도 불편했다. 1864년 12월 런던선교회를 사임한 그는 조선에서 천주교도들이 심한 핍박을 받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한국에 관심을 갖게 된다. 이때 스코틀랜드성서공회의 파송을 받고 만주에서 일하고 있던 알렉산더 윌리엄슨과 접촉하게 되었고, 그의 주선으로 1865년 조선 입국을 시도하였다. 즉 토머스는 9월 4일 산둥성 지푸를 떠나 ‘허락되지 않는 땅(terra incognito)’으로 향했고, 그달 13일 한국의 서해안에 도착하였다. 어떤 기록에는 이곳이 황해도 옹진 자라리(紫羅里) 근포(近浦)였다고 말한다. 한글을 공부하며 한문 쪽복음서를 나누어 주며 은밀하게 전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약 2개월 반 동안 조선에 체재한 후 1866년 1월 초 베이징으로 돌아갔는데, 이것이 제1차 조선 방문이었다.

토머스의 제2차 조선 방문

베이징으로 돌아간 그는 조선의 사신들을 만나 교제하기도 했다. 이들을 통해 한글을 배웠고 조선의 천주교 상황에 대한 정보를 듣게 되었다. 비록 상당한 위험이 상존했으나 그는 조선에서의 선교활동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던 중 조선으로 가는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General Sherman)호에 승선하고 조선으로 향하게 되었다. 이 범선은 톈진(天津)에서 화물을 내려놓은 후 

‘조선이 필요로 할’ 면직의류, 유리 및 양은 그릇, 천리경(千里鏡), 바늘 등을 싣고 통상 개시의 가능성 유무를 시탐하기 위하여 파견된 무장 상선이었다. 이 배는 1866년 7월 29일 톈진을 떠나 8월 9일 지푸를 거쳐 조선으로 향하였는데, 이때 토머스는 통역관 및 항해 안내자의 자격으로 승선했다. 동시에 스코틀랜드성서공회(NBSS)의 파견원 자격이기도 했다. 승선원은 미국인 3명, 토머스를 포함한 영국인 2명, 그리고 중국인과 말레이시아인으로 구성된 19명 등 총 24명이었다. 이 배는 백령도를 거쳐 평양으로 항해해 8월 20일 대동강 하류에 있는 강서군 초리면(草里面) 포리(浦里)에 닻을 내렸다. 여기서 하루를 지낸 후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백령도에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한문성경과 전도 문서를 나눠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것이 토머스의 제2차 조선 방문이었다.

토머스의 ‘무모한 도전’

제너럴셔먼호는 교역을 요구했다. 조선 관리는 국법에 의해 금지된 점을 말했으나 배는 8월 22일 평양 만경대 근처의 두로도를 지나 27일에는 한사정(閑似亭)으로 향했다. 셔먼호는 조선 영토에 불법으로 침입한 경위를 조사하기 위해 온 조선인 관리 이현익(李玄益)을 인질로 잡고 발포하는 등 행패를 부리며 평양성 수비병과 대치하였다. 대동강 하류로 이동하던 중 양각도(羊角島) 서쪽 쑥섬에서 이 배는 좌초되어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수비병의 화공(火攻)으로 배는 불탔고 선원들은 살해되었다. 이때가 9월 4일이었다. 토머스 목사도 이때 사망했다. 그의 나이 26세였다. 토머스는 두 차례의 조선 방문을 통해 약 4개월간 조선 영토에 체재했으나 구체적인 성과는 없었다. 물론 토머스의 전도와 그 결실에 관한 몇 가지 확인할 수 없는 주장들이 있으나 신뢰하기 어렵다. 토머스가 조선으로 왔던 때는 천주교 금교령이 내려지고 12명의 프랑스 신부 중 9명이 체포되어 처형당하는 등 천주교 박해가 심각했던 때였다. 이런 박해 상황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무장한 상선을 타고 입국한 것은 무모한 도전이었다.

어떤 이는 토머스 목사가 무장한 상선을 타고 입국하였고 한국에서 구체적인 선교사역이 없었다는 점에서 순교자로 볼 수 없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비록 무모한 도전이기는 했으나 그 자신은 선교사이기를 원했다. 윌리엄슨으로부터 지원받은 ‘많은 양의 책’을 전파하고자 했던 것은 분명했다. 비록 뚜렷한 결실은 없었으나 그는 은둔의 나라에 대한 열정을 가진 선교사였다. 그래서 그는 ‘한국에서의 첫 개신교 순교자’로 불린다. 제너럴셔먼호는 미국 국적의 배였기에 미 해군은 이 배의 행방을 추적하였고, 뒷날 신미양요(辛未洋擾)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
반응형

한국교회사 / 개신교, 한국과 접촉하다


1832년 ‘짧은 방문’은둔의 땅에 복음 씨앗

서양인들은 한국에 대한 두 가지 상징적인 표현을 사용해 왔다. 첫째는 ‘조용한 아침의 나라(Land of Morning Calm)’였다. 한국의 옛 이름 ‘조선’(朝鮮)의 영역(英譯)이라고 할 수 있지만 동적이기보다는 정적인 19세기 조선에 대한 사실적 표현이었다. 다른 하나는 ‘은둔의 나라(Hermit Kingdom)’라는 표현이다. 일본 동경제국대학 동양학 교수였던 윌리엄 그리피스(William Griffis)가 처음 사용한 이 표현 또한 폐쇄적인 조선에 대한 외국인들의 인식을 반영하고 있었다.

조선말기 이양선(異樣船)이라고 불렀던 서양 선박이 출몰하였고, 탐험 혹은 측량이라는 이름으로 외국 함선이 한반도 연해로 접근해 오며 통상을 요구하자 쇄국은 우리 스스로를 지키는 방아책(防我策)으로 인식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믿음에 확신을 더해 준 사건이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에 침입한 병인양요(1866), 제너럴 셔먼호 사건을 기화로 미국의 아시아 함대를 강화도에 파견함으로 조선 관군과 충돌한 신미양요(1871), 독일 상인 오페르트의 남연군 묘 도굴사건(1869) 등이었다. 천주교의 박해도 따지고 보면 이런 서양을 배척하는 척양(斥洋)의 차원에서 이루어진 방아책의 일환이었다. 

대원군은 척화교서(斥和敎書)를 발표하고 서울 종로를 비롯하여 전국 곳곳에 척화비를 세우며 쇄국의 성을 쌓았으나 은둔의 나라로 향하는 복음의 빛을 거역할 수는 없었다. 조선은 약 10여 년간 지켜오던 쇄국의 녹슨 빗장을 열고 개항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때가 1876년이었다. 이 개국(開國)은 한국역사에서만이 아니라 한국교회사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역사의 변화의 시작이었다. 천주교에 이어서 기독교(개신교)가 서서히 한국으로 전파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개신교 복음의 사도 한국으로  

비록 한국에서 개신교와의 보다 구체적인 접촉은 개항 이후에 이루어지지만 그 이전에도 조선으로 향하는 복음의 사자들이 없지 않았다. 그 첫 인물이 1832년 7월 우리나라 해안으로 들어온 칼 귀츨라프(Karl Friedrich August Gutzlaff, 1803∼51)였다. 그는 우리나라에 온 첫 개신교 선교사였다. 내한 당시 귀츨라프는 중국 선교사였으나 그의 사역지는 중국만이 아니라 인도네시아의 자카르타, 태국, 일본, 티베트와 중앙아시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이었다. 그는 한자문화권에서는 곽실렵(郭實獵)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고, 중국을 사랑한 자(愛漢者) 혹은 선한 덕을 행하는 자(善德者)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귀츨라프는 독일 북부 프로이센 제국의 프리츠에서 출생한 유태계 독일인으로 루터교 목사였다. 경건주의의 지도자였던 프랑케가 설립한 학교에서 수학했다. 19세가 되는 1821년 4월부터 18개월 동안 베를린 선교신학교에서 공부했던 그는 경건주의의 깊은 영향을 받게 되고 선교에 대한 이상을 갖게 된다. 그가 접한 ‘바젤 선교잡지’도 그의 선교적 삶에 영향을 주었다. 그는 후에 베를린 대학에서도 짧은 기간 공부하게 되지만 언어적 재질이 있어 6개 국어를 작문할 수 있었고, 12개국의 언어를 구사할 수 있었다고 회고한 바 있다. 루터교 목사로서 선교사의 길을 갈망했던 그는 영국에서 모리슨 목사를 만난 이후 동양선교에 관심을 가졌고 1823년 ‘화란선교회’ 소속 선교사가 되었다. 

독일 경건주의의 영향을 받다

1826년 7월 이후에는 현재의 자카르타인 바타비아(Batavia)에서, 1828년에서 1831년까지는 현재의 태국인 사이암(Siam)에서, 그리고 1831년 이후에는 중국선교사로 일생 동안 봉사했다. 중국선교사인 그는 1831년과 1832년 그리고 1833년, 세 차례에 걸쳐 중국 해안을 탐색하였는데 한국 해안에 도착한 시기는 그의 두 번째 항해 때인 1832년 7월이었다. 상당한 의술까지 겸비했던 그는 동인도회사의 통역 겸 선의(船醫), 선목(船牧)으로 영국 상선 ‘로드 암허스트(Lord Amherst)’호를 타고 우리나라에까지 오게 된 것이다. 1832년 2월 27일 광둥(廣東)을 출발하여 타이완, 상하이 및 산둥반도를 거쳐 황해도를 가로질러 7월 17일 오전 10시경 황해도의 서해안 장산곶(長山串)에 도착하였다. 22일에는 녹도(鹿島)와 인근의 불모도(不毛島)를 거쳐 7월 25일 충남 보령시 오천면의 고대도(古代島)에 정박했다. 

귀츨라프는 홍주목사 이민회 등 조선 관리들에게 조선국왕에게 통상을 청원하는 서한과 선물을 보냈다. 선물은 한문으로 번역된 두 권의 성경과 전도책자로 추정되는 26종의 도리서(道理書), 그리고 망원경 등인데, 이를 순조왕에게 진상하도록 전달했다. 이들은 조정의 회신을 기다리는 동안, 곧 7월 25일부터 8월 11일까지 17일간 고대도 내항에 체류하면서 주민들에게 한문성경과 전도 문서를 배포했다. 또한 감자를 심어주고 재배법을 가르쳐 주기도 했다. 특히 이때 주기도문을 한글로 번역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비록 단편적인 것이지만 이것이 최초의 한글성경 번역이었다. 이것이 한국과 개신교 간 최초의 접촉이었다. 

조정으로부터 통상이 불가하다는 통보를 받은 귀츨라프 일행은 이곳을 떠나 남하하여 8월 17일 제주도 연안을 지나 오키나와를 거쳐 마카오로 돌아갔다. 귀츨라프가 우리나라에 체류한 기간은 꼭 한 달 정도에 지나지 않지만 이때의 방문 기록은 그의 ‘항해기’(Journal of the three voyages along the cost of China, in 1831, 1832 and 1833. With notices of Siam, Corea and Loo-Choo island)에 잘 나타나 있다.

(고신대 교수·역사신학)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
반응형

 한국교회사]  / 천주교 언제 한국에 본격 소개됐나


‘종교’라기보단 ‘西學’ 인식 17세기 실학파들 영입운동

임진왜란 중에 일본에 체류하던 천주교 신부가 내한하기까지 했으나 천주교가 한국에 소개된 것은 중국에서 선교하던 예수회 선교사들을 통해서였다. 중국 선교의 대표적 인물이 마테오 리치(Matteo Ricci·1552∼1610)다. 그는 1582년 마카오에 왔고 이곳에서 중국어와 중국의 역사, 풍습을 연구하면서 중국선교의 문이 열리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중국 본토 입국이 가능해지자 1601년 베이징으로 가 천주당을 설립하고 서역의 과학 및 천주교 서적을 역간하며 포교에 힘썼다. 그의 선교방법은 흔히 ‘적응론’이라고 말하는데, 중국의 고유한 문화나 풍습에 기독교신앙을 적응시키는 방식이었다. 말하자면 유교와 기독교를 절충하여 그 문화적 충격을 제거함으로써 유교적 배경의 중국인들로 하여금 입교과정의 이념적 차이를 제거하고자 하는 시도였다.

“유교는 불교와는 적대적이지만 기독교에 대해서는 호의적으로 해석될 수 있다”고 보았던 그는 기독교가 유교적 가치를 훼손하기보다는 보완해 준다는 보유론(補儒論)의 입장이었다. 이미 마카오에서 한문 3만자를 터득했던 마테오 리치는 1603년 중국어로 ‘천주실의(De Deo Verax Disputatio·天主實義)’를 저술했다. 문자적으로 ‘하늘의 주인에 대한 참다운 교리’라는 의미였다. 이 책에서도 천주교 교리를 유교적 용어로 표현하면서 기독교 교리와 중국 전통문화의 갈등을 피하려고 했다. 

한자문화권에서 가장 많이 읽힌 교리서인 이 책이 이수광(芝峰·1563∼1628)의 ‘지봉유설(芝峰類說)’과 유몽인(柳夢寅·1559∼1623)의 ‘어우야담(於于野談)’을 통해 17세기 초에 조선에 소개되었다. 이때부터 천주교 선교사들의 작품들은 종교라기보다는 서학(西學)이라는 학문으로 소개되기 시작했다.  

서학을 받아들였던 대표적인 인물이 앞의 두 사람 외에도 ‘홍길동전’을 쓴 허균(許筠), ‘성호사설(星湖歲說)’을 쓴 이익(李瀷), 그리고 박지원(朴趾源), 박제가(朴齋家) 등이었다. ‘천학문답(天學問答)’을 쓴 안정복(安鼎福)이나 이헌경(李獻慶) 등은 서학을 비판한 바 있으나 천주교를 인식하고 있었다. 이들을 통해 천주교는 천주학(天主學), 서학(西學) 혹은 양학(洋學)이란 이름으로 소개된 것이다. 말하자면 17세기 후반부터 중국을 징검다리로 실학파들의 천주교 영입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천주학에 대한 연구가 활발할 때 이를 학문으로만이 아니라 신앙의 대상으로 받아들인 첫 인물이 허균이라는 주장이 있지만, 프랑스의 달레 신부는 그보다 후대 인물 홍유한(洪有漢)이 첫 천주교 신앙인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베이징을 방문하는 조선 사신들을 통해서도 천주교와의 접촉이 이루어진다. 서양문물에 대한 관심이 컸던 사신들은 서양선교사와 접촉하게 되는데, 정두원(鄭斗源)은 그 첫 인물로 알려져 있다. 인조 9년(1631) 진주사(陳奏使)의 자격으로 베이징에 갔던 그는 이탈리아 선교사 로드리게스(J. Rodriquez· 陸若漠)를 만났고 그를 통해 천리경, 자명종 등과 과학서적을 얻어 귀국한 바 있다. 그 후에는 이신명(1720), 홍대용(1766) 등이 중국에 체재하던 선교사들과 접촉하는데, 이들의 관심은 서양 문명이었다. 그러나 병자호란의 결과로 중국에 인질로 잡혀갔던 인조의 아들 소현세자(昭顯世子)는 이와 달랐다. 1637년부터 1644년까지 8년간 심양(瀋陽)에서 지내다가 1644년 청이 명(明)을 정복하고 베이징으로 천도할 때 함께 베이징으로 옮겨간 소현세자는 이곳에서 독일인 신부 탕약망(蕩若望·Adam Shall·1591∼1666)과 접촉하게 된다. 그를 통해 천주교로 개종한 소현세자는 1644년 11월 26일 베이징을 떠나 이듬해 2월 18일 귀국하였으나 70여일 후 학질로 세상을 떠났다. 비록 그 자신은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으나 천주교를 한국에 소개하지는 못했다. 

이상과 같이 일본과 중국을 통한 여러 차례 천주교와의 접촉이 있었으나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이고 처음으로 영세를 받은 인물은 이승훈(李承薰)이었다. 권일신·권철신 형제, 정약전·정약용 형제, 그리고 이벽 등과 함께 경기도의 천진암(天眞庵) 주어사(走魚寺)에 모여 비밀히 천주학을 연구했던 이승훈은 1783년 그의 아버지 이동욱(李東郁)을 따라 동지사(冬至使)의 일원으로 베이징에 갔다. 그곳에서 예수교 선교사 그라몽(Louis de Grammont)과 접촉한 그는 기독교의 오묘한 교리와 도덕적 교훈에 끌려 1784년 2월 영세를 받았다.

그해 3월 여러 교리서를 가지고 귀국한 그는 이벽, 권철신, 권일신, 김범우 등에게 영세를 베풀었고, 서울 명례동(明禮洞) 김범우 집에서 종교적 목적의 모임을 시작했는데 이것이 보통 한국천주교회의 기원으로 인식되고 있다. 이때를 보통 1784년 말로 추측하는데 천주교는 이때를 한국천주교가 설립된 해로 공식화하고 있다. 이 모임은 후에 적발되어 해산당했는데 이 사건을 ‘을사추조적발사건(乙巳秋曹摘發事件)’이라고 부른다.

이들이 모여 첫 종교집회를 가졌던 명례동 김범우의 집터에는 지금의 명동성당이 서 있다. 1984년의 한국천주교 200주년은 이때로부터 산정된 것이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1984년 내한한 것도 이때를 기념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렇게 시작된 한국 천주교는 신해(1791), 신유(1801), 기해(1839), 병오(1846), 병인(1866)교난이라 불리는 다섯 차례의 심한 박해를 받았으나 오늘의 교회로 발전하고 있다.

(고신대 교수·역사신학)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
반응형

한국교회사 / 천주교, 언제 어떻게 한국 전래됐나

 

임란때 왜군 종군신부 한국 땅 처음 밟아

앞에서 우리는 경교의 신라시대 전래설에 대해 검토하였다. 그렇다면 천주교는 어떻게 한국에까지 전래되었을까? 일반적으로 한국과 천주교와의 가장 오래된 접촉은 임진왜란(1592-1598) 당시인 1593년으로 알려져 있다. 일본에 천주교가 소개된 때는 종교개혁이 시작되고 30여년이 지난 1549년 7월이었다.

예수회(Jesuit) 선교사들은 로마 가톨릭 신앙 회복과 확산을 위해 아직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아시아로 진출했는데, 그 결과로 자비에르(Francisco de Xavier, 1506-1552)에 의해 이미 16세기에 일본에 천주교회가 소개된 것이다.

자비에르는 1541년 이래로 인도 고아(Goa)지방에서 활동하던 중 일본을 ‘땅 끝’으로 인식하고 1549년 7월에는 일본 규슈(九州)에 도착했는데, 이것이 일본에서의 천주교회와의 첫 접촉이 된다. 이때로부터 약 40년 후인 1592년 4월 14일(선조 25년)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조선을 침공했고, 약 20만 명의 왜군이 부산에 상륙했다. 이 중 약 2000여명은 천주교도로 알려져 있는데, 이들의 주둔지가 진해 근처 웅천(熊川)이었다.

천주교도로서 아우구스티누스라는 세례명을 가졌던 왜장 고시니 유키나가(小西行長)는 조선에 와 있는 천주교도들을 위해 일본 예수회의 코메즈(Pierre Comez)에게 신부 파견을 요청했고, 이 요청에 의해 내한한 신부가 세스페데스(Gregorio de Cespedes)였다. 스페인 신부였던 그가 조선의 남해안에 도착한 날이 1593년 12월 27일이었고, 웅천에 도착한 것은 다음날인 28일이었다.

그는 한국 땅을 밟은 첫 천주교 성직자이자 임진왜란을 목격한 유일한 서양인이었다. 이것이 한국과 천주교와의 첫 접촉이었다. 세스페데스는 종군신부의 자격으로 내한했으나 약 1년간 체류하면서 조선인에 대한 선교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밝혀졌다. 그는 경상도 일대의 해안지방에 머물면서 당시의 상황에 대한 4통의 서간문을 남겼는데, 이 편지는 한국외국어대학교 박철 총장에 의해 발굴되어 당시의 정황을 헤아리는 데 있어서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7년간 계속된 전화 속에서 일본에 잡혀간 조선인 포로 혹은 노예 중에 천주교에 입교한 이들이 많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1542-1616) 치하에서 천주교가 심한 탄압을 받았을 때 다수의 조선인들이 신앙을 지키며 순교자의 길을 선택하기도 했다. 더 세심한 연구가 요구되지만 임란 중에 일본에 잡혀간 조선인 중의 한 사람은 이탈리아로 가서 신학을 공부했다는 주장도 있다.

임진왜란을 통해 천주교, 그리고 천주교 신부와 접촉하게 되었지만 그 이상의 접촉이나 발전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이때부터 조선의 상황은 극동으로 진출했던 예수회 신부들에 의해 서구사회에 점차 소개되기 시작하였다. 또 조선에서도 서양에 대하여 그리고 서양 기독교에 대해 점차 눈을 뜨기 시작한다. 제한적이고 일부의 계층이라 할지라도. 이 점을 보여주는 한 가지 사례를 17세기 중엽의 문헌에서 확인할 수 있다. 비록 서양 기독교에 대한 인식은 보편적이지 못했지만 적어도 1653년 이전에 우리나라 관계(官界)가 그리스도교를 알고 있었음은 분명하다. 그 한 가지 흥미로운 단서를 하멜 일행의 내한과 그 심문 기록에서 찾을 수 있다. ‘네덜란드의 마르코 폴로’로 일컬어지는 하멜(Hendrick Hamel)과 그의 일행 64명이 1653년 7월 30일 대만을 떠나 일본 나가사키로 항해하던 중 예상치 못한 암초에 부딪혀 표류하던 중 그해 8월 16일 36명이 제주도에 상륙했다. 이들은 8월 21일 조선인 ‘총독’의 심문을 받았는데 하멜이 ‘총독’으로 칭했던 이가 다름 아닌 제주목사 이원진(李元鎭)이었다.

이원진은 이들을 조사한 보고서를 조정에 올렸는데, 이 보고서가 효종실록 제11권, 효종 4년 8월 6일(戊辰)조에 기재되어 있다. 이 날을 양력으로 환산하면 1653년 9월 26일이었다. 이 보고서에는 아주 흥미로운 대목이 나와 있다. 배가 좌초한 경위, 언어와 풍습의 차이, 선적물, 화란인들의 복장 등에 대해 보고한 후, “왜말 하는 자들을 시켜 ‘당신들은 서양의 길리시단자들인가?’라고 물어 보았더니 일동 모두가 ‘야야’라고 대답했다.”(使解 倭語者問之曰 爾是西洋吉利是段者乎 衆皆曰 耶耶)고 보고했다. 사실 이들은 암스테르담 출신으로 기독교신자였으니 이것은 거짓이 아니었다.

우리에게 흥미를 끄는 부분이 바로 이 ‘길리시단자’(吉利是段者)라는 단어인데, 이 말은 크리스천을 의미한다. ‘다시 읽는 하멜 표류’를 쓴 강준식씨에 의하면 이 단어는 포르투갈어 ‘크리스땅’의 음가를 복사한 일본어 기리시딴(吉利支丹)에서 온 말이라고 한다. 그 기원이야 어떻든 길리시단이라는 말은 야소(耶蘇), 곧 예수라는 말과 임진왜란 후 왜나라 관계의 실록에 자주 등장하는 단어라는 점에서 한국의 조정이나 관리들이 기독교의 실체를 어느 정도 인식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이원진이 ‘서양의’라는 수식어를 쓰고 있는 것을 그가 기독교를 서양에서 기원한 종교로 인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원진이 천주교와 개신교를 구별할 수 있는 안목이 있었는가는 알 수 없으나 당시 조선 관리들이 기독교를 인식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때는 알렌이 입국하기 231년 전의 일이었다.

(고신대 교수·역사신학)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
반응형

한국교회에 토착화된 새벽 기도의 유래와 본질
1909년 전주교회에 종을 설치하기 위해 소달구지로 종을 나르고 있다. 수직성을 확보한 종탑에서 나오는 종소리로 전주시의 시간이 성화(聖化)하기 시작했다.

 

새벽 기도회는 한국 개신교를 대표하는 의례다. 지금 50대 중반을 넘은 분들은 젊었을 때 새벽을 깨우는 종소리를 들으며 일어나 교회에 나간 아름다운 추억들이 있을 것이다. 필자는 이 글을 통해 한국교회의 새벽기도가 무교(여성의 새벽 치성)나 불교(남녀 승려들의 새벽 예불)에서 유래되었다는 통설을 비판하고자 한다. 더 나아가 새벽기도가 남자들의 선도(仙道) 수련에서 유래했다고 주장하고 새벽기도의 기독교화 과정이 어땠는지도 서술할 생각이다. 유래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초기 새벽 기도회에 하나님과 깊은 영적 교제를 나누는 초월성과 나라와 민족을 위해 눈물로 기도한 역사성이 결합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1. 한국교회 새벽기도의 유래와 시작

(1) 한국교회 새벽기도가 불교나 무교에서 유래되었는가?

여러 글과 책에 초기 한국교회의 새벽기도가 불교 사찰 승려들의 새벽 예불에서 유래했다고 한 다. 또 민간 무속의 여성들이 새벽에 정화수를 떠 놓고 샛별(계명성)이나 칠성신에게 빌던 성수(星宿) 신앙, 고목 앞에서 빌던 신목(神木) 신앙 혹은 조왕신 (부엌 음식 신)에게 빌던 데서 왔다고 서술하기도 한다. 새벽 미명은 신령한 존재와 영적으로 교류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시간이었다. 여인들은 남편과 자식을 위해 새벽마다 정화수를 떠놓고 간절하게 빌고 치성을 드렸다. 그 기복적 가족 기도가 그대로 기독교로 넘어와서 새벽마다 교회에서 가족의 건강과 사업의 번창을 위해서 기도하는 ‘무교적 기독교인’이 많다고 비판해 왔다.
옥성득 교수

 

그러나 필자는 초대 한국교회에 관한 기록에서 새벽기도가 그런 연관성을 가졌다고 언급한 자료를 아직 본 적이 없다. 1970년대 이후에 급성장한 한국교회의 기복신앙을 비판하는 글들이 피상적으로 그 연결성을 유추하고 짐작한 것뿐이다. 그러한 글들은 구체적인 역사적 증거나 1차 사료(史料)를 가지고 쓴 것은 아니다.

(2) 도시 파루와 사찰 새벽종이 새벽기도 종의 기원인가?

대개 초대 한국교회의 새벽 기도회는 4시 30분이나 5시에 드렸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새벽 4시 30분이라는 시간은 도성(都城)의 새벽 파루(罷漏)와 관련이 있다. 조선시대 큰 도시는 4대 문과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세종 때 만든 자격루(自擊漏, 물시계)로 정확한 시간을 알았다. 따라서 같은 시각에 종을 쳐서 하루를 시작하고 하루를 마감했다. 새벽 4시에는 파루(罷漏)로 33번 종을 쳐서 성문을 열고 통행을 시작했다. 밤 10시에는 인정(人定, 인경)으로 28번 타종하여 우주의 일월성신 28개 별자리를 쉬게 하고 성문을 닫고 통행금지를 실시했다. 파루 때 했던 33번 타종은 불교의 세계관을 반영한 것이다. 수미산(須彌山) 정상에 있는 33개의 하늘을 깨우친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사찰처럼 새벽 3시나 5시가 아니라 도성에서 4시에 파루를 친 것은 해가 뜨기 전에 일어나 노동을 해야 했던 농경시대의 산물이었다. 수천 년 간 그때 일어나 일하던 인간의 생체리듬에 맞춘 것이었다. 새벽 기도회를 4시 30분이나 5시에 시작한 것은 4시에 통행이 시작되던 습관을 따라 한 것이다. 도성의 종각에서 타종하지 않아도 4시에 일어나 예배당에 오면 4시 30분이 되었고 먼 곳에서 오는 자들이 많으면 5시에 모여 기도할 수 있었다. 즉 파루와 연관한 하루 일상의 시작 시간에 일어나 교회로 와서 새벽 기도회로 모였다.

그러나 절에서는 하루 다섯 번 범종을 울리고 예불을 드렸다. 초경(밤 8시), 이경(밤 10시), 삼경(자정, 108번), 사경(새벽 3시, 5번), 오경(새벽 5시, 28번 타종으로 28세계가 깨달음을 얻기를 기원) 등이었다. 사찰의 상가 공동체는 성(城) 안에 있지 않고 산속에 떨어져 있었다. 그래서 새벽 3시에 예불, 다시 새벽 5시에 운판(나무판)을 치고 목어(목탁)를 울리고, 법고(북)를 울린 다음에 범종(梵鍾)을 28번치고 승려들이 함께 모여 부처님께 예를 올리고 중생들이 깨달음을 얻어 해탈하기를 구했다.

사찰의 그것은 일과에 따라 기도했던 중세 유럽 수도원의 수도사들처럼 생체리듬에 반하는 시간에 일어나 묵상하고 잠과 욕망을 끊는 행위로 드린 염불이었다. 즉 사찰의 새벽종은 세속 도시의 하루를 시작하는 파루와는 전혀 다른 성격의 종으로 속세를 떠난 수도승의 정좌와 묵상과 예불을 위한 시공간이었다. 그 피안의 공간에서 매일 자정과 새벽 3시에도 일어나 육체성을 거부하고 전문 종교인 집단의 집회를 만들었다. 따라서 그것은 새벽기도와 달랐고 둘 사이의 연관성은 적었다.

정리하면 새벽기도는 불교 사찰의 범종이나 전문 종교인들이 드린 피안적 예불과 상관이 없다. 오히려 세속 도성의 새벽 파루와 함께했던 하루 일상의 시작과 연관된다. 그와 같은 세속성 안에서 거룩성을 회복하고 경건하게 살려고 했던 신자들이 하루하루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던 데서 창출되었다. 긴장감이 있는 성속(聖俗)의 경계에서 밤에서 아침으로 넘어가는 문지방과 같은 틈새 시간에 새롭게 넣은 기도시간이었다.

(3) 한국교회 새벽기도는 무교적 민속신앙이 그 유래인가?

1905년 초 송도(개성)서 열린 남감리회 부인사경회 때 캐롤(A. Carroll)이 경험한 내용을 보자. “아침 여섯 시가 되자 마치 아침을 알리는 시계처럼 건너에 있던 여자 교인들이 일어나 찬송을 부르며 기도를 하는 바람에 나도 일어나야 했다. 그런데 다음 날은 새로 몇 사람이 더 오더니 새벽 4시에 사람들을 깨워 무려 한 시간 반 동안이나 그런 식으로 대화를 나누는 것이었다.”

이덕주 교수는 이 글을 해석하면서 과거 새벽에 정화수를 떠놓고 남편과 자녀들을 위해 조왕신(竈王神)에게 빌던 여자들의 습관이 사경회 기간 중에 새벽 기도회로 모습을 바꾸었다고 보았다.(이덕주, ‘한국 토착교회 형성사 연구’,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00, 348~350쪽) 그런데 이 자료를 가지고 그렇게 주장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새벽 6시에 일어나 부엌에서 조왕신에게 노래로 찬양을 드렸던가? 아니다. 새벽 4시에 일어나 치성(致誠)을 드릴 때 옆 사람들과 한 시간 반 동안 대화를 나누었던가? 아니다. 자료에 나오는 일시적인 새벽 기도회와 무속의 조왕신이나 치성사이에는 시공간, 성격, 의례 모든 면에서 연속성을 찾기 어렵다.

2. 한국교회 새벽기도의 시작

새벽기도의 유래에 대해서는 필자가 발표한 논문이 있다. 자세한 논의는 ‘평양 대부흥과 길선주 영성의 도교적 영향’(한국기독교와 역사, 25호, 2006년 9월, 7~35쪽)을 보라. 필자는 이 논문에서 선도(仙道)의 수행자였던 평양의 길선주와 그의 동료들이 청일전쟁 후에 개종하고 평소 수행(修行)을 하던 새벽기도, 통성기도, 철야기도 등을 1905년 전후 사경회(査經會)에 도입했으며, 1909년 전후에 교회 프로그램인 기도회로 만들기 시작했다고 주장했다. 새벽기도가 길선주와 그 친구들의 도교(道敎) 수행에서 유래했다는 나의 이 주장에 대해 아직 반론을 들은 적이 없다.

필자는 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길선주가 중심이 되어 선도(仙道)에서 기독교로 토착화한 새벽기도와 통성기도는 1910년 전후부터 한국교회에 정착하기 시작했는데 사적인 소원을 빌었던 도교(道敎)의 기도와 비교하면 개신교의 기도는 민족적 위기에 교회와 민족 공동체를 위한 공공성(公共性)을 지니고 있었다.”

이 논문에서는 또한 집단적인 ‘새벽기도’는 장로교회 사경회에서 시작되었다고 주장했다. 1898년 2월 황해도 강진교회 사경회에서 일반 교인들이 자발적으로 새벽 기도회를 시작했으며, 황해도의 다른 사경회(1901년 2월)에서도 교인들이 새벽 기도회를 시작한 것을 처음 소개했다. 이와 같이 사경회(査經會) 때 소규모 일시적으로 모이던 새벽 기도회가 1905년 평양 도(道) 사경회 때 정식 프로그램으로 채택되었으며 1909년에 개교회의 프로그램으로 전환되었다고 정리했다.

3. 1890~1905년 사경회와 새벽기도회

선교사들은 1892년 10명 정도의 한국인 남자 지도자들과 조사를 모아 한 달 정도 집중적으로 성경, 교리, 전도법, 설교법, 교회 치리법 등을 가르치는 사경회(査經會)를 조직했다. 1891년 채택한 네비어스의 방법에 따라 본토인 목회자와 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해서였다. 1892년 11월 28일부터 12월 24일까지 서울에서 열린 첫 신학반에 참석한 백홍준, 한석진 외 참석자들이 새벽에 일어나 자발적인 기도회로 모였다. 이후 이 조사 사경회(査經會)에서 새벽에 일어나 찬송하고 기도하는 모임이 계속되었다. 조사 사경회의 새벽 기도회가 황해도에서 일반 사경회 새벽 기도회로 발전했음을 알 수 있다.

이말테의 논문 ‘한국 개신교회 새벽기도의 초기에 대한 연구’(신학과 실천 31호, 2012년 5월, 183~225쪽)에는 1892년 조사 사경회(査經會) 전 백홍준, 마포삼열, 한석진 등의 새벽기도 사례를 소개한 후 여러 사경회에서 행해진 새벽 기도(회) 사례를 잘 정리해 놓았다. 후자는 필자가 소개한 황해도 강진교회 사경회 새벽기도(1898년 2월)와 다른 황해도 사경회 새벽기도(1901년 2월)에 이어 평북 초산(1901), 원산(1903), 평양(1904), 서울 이화학당(1904), 송도(1905) 등의 사경회(査經會)에서 이루어진 새벽기도 사례들을 정리했다.

그리고 이어서 필자가 정리한 1909년 길선주와 박치록 장로가 주도한 평양 장대현교회의 새벽 기도회를 마지막으로 언급했다. 이 가운데 1909년 새벽 기도회만 교회에서 광고한 후 일반 신도들이 모인 기도회였고 나머지는 사경회 때 이루어진 일주일 정도의 한시적인 기도회였다.

이말테는 새벽 기도를 남성들이 시작한 것에 주목했다. 여성들의 무속적 새벽 치성에서 새벽 기도가 유래했다는 통설을 비판했다. 또한 1893년 평양 지부를 개척하던 마페트(S. A. Moffett) 선교사와 조사 한석진 가정의 새벽기도를 근거로 마페트가 새벽기도 창시에 큰 역할을 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마페트가 새벽기도를 시작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는 주장은 더 검토되어야 한다. 만일 그가 새벽기도에 관심이 많았다면 1895년 이후 가정에서 새벽기도를 꾸준히 드리거나 평양 널다리교회 혹은 장대현교회가 준공된 1900년에 새벽 기도회를 창시했을 것이다. 그러나 마페트가 남긴 글에는 그런 기록이 없다. 또한 개인적으로 잠시 드린 새벽기도를 교회의 ‘새벽 기도회’의 유래로 보기는 어렵다.

(1) 길선주의 첫 장대현교회 새벽 기도회는 1906년 아닌 1909년

많은 책이나 온라인 블로그에 보면 다음과 같은 잘못된 글이 나온다. “우리나라의 새벽기도는 1906년 가을 길선주 장로의 주도로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시작하였다. 이 새벽 기도회는 1907년 평양에서 촉발된 한국 기독교 부흥의 시발점이 되기도 했다. 길선주 장로는 국가가 어려운 상황(당시 일제강점기)에 놓여 있는 것을 걱정하여 새벽에 교회에 나가 기도하였고 많은 교인들이 같이 기도하기 시작하여 얼마 지나지 않아 300~500명에 이르는 교인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여기서 길선주의 새벽 기도회가 1906년 가을에 시작했다. 길선주의 새벽 기도회가 1907년 부흥의 시발점이 되었다. 당시는 일제강점기였다는 세 가지 주장은 오류다. 1906년으로 알려진 것은 김인서가 1930년대 ‘신앙생활’에 길선주 소전을 쓰면서 그렇게 잘못 기록했기 때문이다. 그 새벽 기도회는 부흥운동이 끝난 후 열기가 사라지고 사람들이 냉랭해졌을 때 다시 부흥의 불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1909년에 시작한 새로운 부흥회 방법이었다. 또한 아직 한국이 일제의 완전한 식민지가 되기 이전이었다.

(2) 새벽 기도회가 정착한 것은 1920년대 후반~1930년대 초반

1907년 대(大) 부흥 이후 1910년대에 새벽 기도회가 한국교회에 널리 시행되고 매일 새벽에 모인 것처럼 말하는 이들도 있지만 사실이 아니다. 그런 기록은 없다. 이덕주 교수가 지적한 대로 1914년에 시작한 강화도 마리산 부흥회 때나 여러 사경회 때의 새벽 기도회 모두 일주일을 사경회(査經會)와 부흥회 때 드린 것이 전부 다이다. 그러므로 아직 개 교회 차원에서 정착된 것은 아니었다. 또 교회에 홀로 새벽에 나가 30일이나 100일 개인 기도를 드린 예들이나 3·1운동이 일어나기 전 신석구 목사의 개인 새벽기도 등에서 보듯이 1919년 이전에는 매일 새벽 기도회로 모이는 교회가 없었다.

1920년대 후반에 정착하는 새벽 기도회 자료는 더 수집해서 정리해야 할 주제다. 이때 새벽 기도회가 매일 드리는 일상의 기도로 거의 모든 교회에서 자리 잡은 것은 식민지 치하에서 더욱 기도가 간절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기도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하루하루가 종말인 가난한 교인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3) 새벽 시간의 기독교화로 파루를 대신한 교회의 새벽 종소리

1910년대 사경회 때의 새벽 기도회는 도시의 새벽 시간을 기독교화하기 시작했다. 1910년 전후 일제 총독부는 문명의 발전과 도로 확장과 신작로 개설이라는 명목으로 서울과 다른 도시들의 성벽(城壁)을 다 허물었다. 사대문(四大門)을 지키는 일본 순경의 호각 소리와 칼 소리가 새벽 소리가 되었다. 성벽이 없는 경성(京城)에 보신각(普信閣)은 무용지물이라 폐쇄(閉鎖)되었다. 서울은 영혼(靈魂)의 종소리를 잃어버렸다. 성(城)이 없는 경성은 보신각 종소리(聲)가 사라진 경성이었고 종소리 없는 도시는 성스러움(聖)이 사라진 식민지의 경성이었다.

이러한 때에 도시와 시민들에게 다시 종소리를 준 것이 교회와 성당이었다. 명동성당에서는 아침 6시, 정오 12시, 저녁 6시에 하루 3번 종을 쳤다. 주일마다 각 도시 교회와 그리고 점차 교회마다 사경회를 다른 기간에 하면서 새벽에 종을 쳤다. 여러 교회에서 퍼져 나간 종소리는 다시 새벽시간을 구별하고 도시의 새벽을 살리는 영성(靈聲)이 되었다. 도시의 혼이 살아나는 소리였다. 성수주일이 일주일을 시작하는 안식일의 성화였다면 새벽기도는 하루를 시작하는 첫 시간의 성화였다.

3. 한국교회 새벽기도는 성도들이 확보한 시공간

성(城) 안에 사는 시민들은 새벽 4시에 성문이 열리면 일어나던 습관을 따라 성(城)의 종소리가 사라진 후에도 대개 4시에 거동을 시작했다. 그래서 교회에 도착하는 4시 30분이나 5시에 새벽 기도회로 모이고 이어 일하러 가면 시간이 적절했다. 따라서 4시 30분이나 5시에 시작한 교회의 새벽 기도회는 격리된 산속에 있는 사찰에서 새벽 3시나 5시에 승려들끼리 모여 조용하고 엄숙하게 예불을 드리는 것과 달랐다.

세속 도시 속에서 거룩성을 느끼고 영성을 유지하려는 노동자와 주부들의 기도회였다. 그 예배는 곧 다가올 일상의 무거움 앞에 하늘의 도움을 구하는 시간이었다. 어두움에서 빛으로 넘어가는 하루의 문지방과 같은 경계선의 시간의 사이(時間), 그래서 긴장이 팽팽한 틈새 시간, 변혁을 품고 있는 전이의 시공간에 새벽을 깨우는 자들이 모여 하나님을 구했다. 새벽에 일어나야 생존할 수 있는 하루 벌어 하루 사는 노동자들과 밤낮 쉼 없이 일하시는 하나님이 함께하는 공간이었다.

따라서 잠자는 하늘을 깨우거나 중생을 계몽하려는 사찰의 예불과 달랐으며 여성들이 홀로 칠성신(七星神)에게 비는 민간신앙의 치성과 달랐다. 전자에는 치열한 삶의 현장이 없었고 후자에는 남녀가 함께 하는 공동체성이 없었다. 양자 모두 공적(公的) 기도가 없었다. 새벽 기도회가 한국 개신교를 상징하는 의례가 된 것은 피안(彼岸)의 기도나 사적 기복인 기도와 달리 세속 안에서 일반 교인들이 함께 모여 드리는 공적(公的)인 기도회로 기독교화 했기 때문이다.

소리가 세상을 구한다. 거룩한 영혼의 종소리가 사라진 한국교회에 다시 종을 치는 종지기들이 필요하다. 남보다 조금 더 일찍 일어나 새벽마다 종을 치던 사찰 집사님의 매일의 헌신이 있던 교회 어릴 때 들었던 교회의 그 종소리가 그립다. 기도가 세상을 구한다. 새벽 미명에 무릎 꿇고 자녀를 위해 간절히 기도했던 어머니들의 눈물로 지금 청년과 장년들이 그나마 살고 교회가 살아 있다.

진정한 새벽기도가 세상을 구한다. 한 손에는 하나님과 영적으로 교제하는 수직성을 담고 다른 한 손에는 세속 성자로서 민족을 위해 도고하는 수평성을 담아 두 손을 모아 함께 드리는 새벽 기도로 교회가 산다.(*) 글쓴 이 / 옥성득(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주립대학교, UCLA, 아시아언어문화학과 석좌 부교수, 한국기독교). 서울대학교 영문학과와 국사학과를 졸업한 후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과 대학원을 거쳐 미국 프린스턴신학교와 보스턴대학교에서 기독교 역사를 공부했다. 2002년부터 UCLA에서 한국근대사와 한국종교사를 가르치고 있다. 저서로는 ‘한반도 대부흥’ 등이 있다.

 

90세의 김창근 집사님 39년 거제 어구교회 종지기


뎅그랑 뎅! 뎅그랑 뎅! 김창근
집사님이 거제시 둔덕면 어구리 어구교회 종을 울리고 있다. 병 색이 엿보이나 그래도 종지기로 서의 소명의식만큼은 철저하다. 새벽 4시 반 여명을 깨우는 교회 종소리가 새벽공기를 가르며 부 드럽게 포구를 감싼다. 마을을 돌아 나온 종소리는 이내 남해 바다를 건너 갯내읍을 타고 이순신의 섬 한산도까지 뻗어나간다. 한산도까지는 뱃길로 15분 바닷가를 따라 70여 호가 옹기종기 몰려있는 작은 포구 경남 거제시 둔덕면 어구리의 하루가 이렇게 시작된다.

날마다 새벽을 깨우는 주인공이 바로 39년 종지기 김창근(90년 은퇴) 집사님이다. 1967년 마을에 어구교회가 들어선 지 39년, 교회를 거쳐 간 목사가 10명이 넘지만 종지기만큼은 늘 집사님 몫이었다. 김 집사님은 과연 몇 번의 종을 칠까? 이전에는 매일 정확히 50번 씩 종을 쳤다. 그러나 집사님 귀가 어두워지면서 요즘은 70번, 100번을 치기도 한다. 그렇다고 불평하는 주민은 없다. 270여명의 주민 중 교인은 30여명에 불과하지만 교회 종소리는 이미 주민들의 일상이 되었다. 시계도 없던 가난하고 힘겨웠던 주민들에게 김 집사님이 치는 교회의 새벽종소리는 논밭일의 시작과 출어(出漁)를 알리는 하루의 시작이었다.

김 집사님은 어구교회 설립 성도 중 한 사람이다. 1967년 그 때는 종 대신 산소통을 소나무에 매달아 두들겼다. 1999년 새 교회당을 짓고 종을 철거하려했으나 집사님은 자식들이 준 쌈짓돈 70만원을 내놔 오히려 종탑까지 세웠다. 그런데 요즘은 종소리가 울리지 않는 날이 많아졌다. 집사님 건강 때문이다. 머지않아 집사님이 천국으로 떠나시면 사람들은 더 이상 종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될 것이다. 후계자가 없다. 하지만 김 집사님이 힘을 다해 쳤던 교회당 종소리를 주민들은 ‘천국의 소리’로 기억할 것이다.(*)

윤영찬기자 yyc11@donga.com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
반응형

 

 대립과 분열의 시대

 

한국은 해방의 기쁨을 맛보기도 전에 남북으로 갈라지는 아픔을 겪게 된다. 그리고 비극인 6.25를 겪게 된다. 이 전쟁은 우리 민족에게 이데올로기 대립의 극단을 달리게 했다. 뿐만 아니라 일제 만행의 몇 갑절이나 더 가혹한 공산주의 탄압 속에서 한국교회는 존폐의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특히 소련 공산당이 지배하게 된 북한은 실재로 교회의 재산을 박탈하거나 몰수해갔다. 이러한 야만적인 행위들은 김일성이 소련의 시녀로 정권을 잡고부터 더욱 극심해졌다. 그리고 용의주도하게 기독교를 뿌리 채 뽑아내는 작업을 진행했다.

 

공산주의는 무실론주의이기 때문에 기독교와는 공존할 수 없었다. 그래서 기독교는 조선민주당, 기독교사회민주당, 기독교 자유당을 결성하고 기독교 세력을 결집하여 공산당에 대항하고 반공투쟁을 했지만 조직적인 무력 탄압을 당해낼 수 없었다. 한편 남한교회는 일제에 의해서 급조된 일본기독교조선선교단이라는 이름으로 혼란 가운데서도 기왕 하나된 교회를 해방 후에도 계속 유지하려고 했다. 그래서 이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반민족적 작태를 회개하거나 반성하기는커녕 자신들의 간판인 일본기독교조선교단을 조선기독교회로 바꿔 달고 한국교회의 주도권 장악에 나섰다. 그래서 1945년 9월 새문안교회에서 남한만이라는 이름의 남부대회라는 이름으로 교단총회를 개최했다. 그리고 11월에 정동제일교회에서 조선기독교 남부대회가 열렸고 ‘일본기독교조선교단’에 관여했던 자들이 여전히 요직을 맡아서 자신들의 의견을 표출하였다. 그러나 1946년 정동제일교회에서 열린 제2회 조선기독교 남부대회를 끝으로 해체되고 각 교파교회로 환원되었다. 이와는 별도로 출옥한 성도들이 중심이 되어 교회를 재건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그리고 그해 6월 12일 서울의 승동교회에서 남부대회가 개최되었다.

 

여기서 결의한 사항은 헌법은 남북이 통일될 때까지 개정하지 않고 그대로 사용한다. 제 27회 총회가 범과한 신사참배 결의는 이를 취소한다. 여자장로직의 설정문제는 남북통일 총회 시까지 보류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신사참배에 대한 사과나 처리문제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었고 기록조차도 없었다. 더구나 신사참배를 반대한 이들이 주류에서 밀려나고 여전히 친일파들에 의해 교단이 움직여지자 총회에 대한 불신은 더욱 가중되었다. 돌이켜 볼 때 신사참배를 주도한 이들이 회개하고 자숙하면서 좀더 겸손하게 총회의 일치와 발전을 위해 협력했더라면 장로교 총회는 한층 더 발전했을 것이라는 안타까움이 남는다. 그러나 이들이 어물쩍 넘겨버리자 온간 고문과 협박 속에서도 순수한 신앙을 지키며 투쟁해왔던 사람들이 설자리가 없어져 버린 것이다. 이러한 와중에 북한에서 자유를 찾아온 목회자들이 가세하여 교회의 재건에 박차를 가했다. 그중 가장 활발한 곳은 김치선 목사의 남대문교회와 한경직목사의 영락교회가 있었다. 남대문교회는 복음전파와 사역과 구령사업에 전념했고 영락교회는 베다니 청년회를 조직하여 교회 봉사를 넘어서 혼탁한 사회문제까지도 뛰어들었다.

 

6.25전쟁은 인명과 재산 손실과 강산의 초토화뿐만 아니라 일제 강점기 때 당했던 수난보다 더욱 더 치욕적이고도 무서운 박해를 한국교회는 당해야 했다. 총칼을 든 공산당 앞에서 주님과 기독교를 부인하고 공산당을 찬양해야 하든지 아니면 집단 학살을 당하든지 택일해야 하는 끔찍한 일이 내 땅 내 조국 내 민족, 심지어는 내형제 부자(父子)사이에서 일어났던 것이다. 비록 전쟁은 끝났지만 우리 민족사에 가장 부끄러운 6.25전쟁으로 인해 장로교 152교회, 감리교 84교회, 성결교 27교회 그리고 구세군 4교회를 비롯하여 수많은 교회들이 파손되거나 손실되었고 많은 교계지도자들이 순교를 당하거나 납북되었다. 이렇게 해서 생긴 전쟁고아와 과부와 빈민들에게 세계기독교와 각종 사회단체는 구호의 손길을 보냈다. 역설적이지만 전쟁은 영적인 측면에서는 우리 민족에게 특별한 기회로 작용했다. 전쟁으로 만신창이가 된 조국을 바라보면서 왜 이런 비극을 맞이해야 하는지 깊은 자성의 목소리가 나왔다. 그리고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민중의 심령을 옥토로 만들었다. 이로 인해 처참한 비극 속에서도 다가온 거대한 도전을 목도한 신앙인들은 영적인 깊은 잠에서 깨어나 주님 앞에 겸손히 무릎을 꿇기 시작했다. 민족의 비극과 위기 앞에 철저한 회개와 자성의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다. 곽인전의 말을 빌면 “영적인 신앙의 부흥”은 시대적인 요청이었다고 보는 것이다. 이와 같은 영적 각성은 한국교회의 자발적인 참여와 외국의 유명한 부흥사들에 의해 확산되었다. 이렇게 하여 전쟁복구와 각종사회사업과 부흥운동과 교회재건이 이루어져갔던 것이다. 물론 긍정적인 모습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전술한 바와 같이 극심한 사회적인 혼란이 있었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이 각종 이단들도 기승을 부리기 시작한 것이다. 대표적인 이단들은 나운몽 장로의 용문산기도원, 더욱 악영향을 끼치고 있는 신흥종교로 등장한 통일교, 남대문교회 김치선목사로부터 피택 되고 안수 받은 전도관의 박태선 장로가 있다.

 

이 시대 보수주의를 대변하는 인물은 박형룡과 박윤선 및 고려신학교였고, 현대주의를 대변하는 인물은 김재준과 조선신학교였다. 박형룡, 박윤선, 고려신학교는 평양신학교의 정통주의를 끝까지 계승하려는 일에 생명으로 내걸었고, 김재준과 조선신학교는 정통주의 신학에 전투적으로 반기를 들었다. 둘의 신학은 첨예한 정치적 대립 상황에서 점점 더 이데올로기화되어 갔다. 1945년부터 김재준과 조선신학교를 중심으로 한 사람들은 성경의 무오성과 성경의 축자영감을 전투적으로 반대하면서 신학이 점점 더 이데올로기로 흐르고 말았다. 그 결과 1945년부터 1960년까지 신학적 갈등과 대립이 한국교계에 첨예하게 부상하게 되었고 그 중심에는 성경관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런 논쟁은 전혀 예측하지 못한 갑작스럽게 발생한 사건은 아니었다. 1934년 허버트 블레어 선교사는 세게에서 유랠르 찾을 수 없는 보수주의 나라 한국,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철저히 지키는 이 나라에 논쟁이 발생한다면 그것은 성경에 관한 논쟁일 것이라고 예측했었다. 그의 예견은 10년이 지난 1945년 현실로 나타났다. 이 논쟁의 중심에는 김재준과 박형룡이 자리 잡고 있었고, 조선신학교, 고려신학교, 장로회 신학교, 51인 조선신학생, 그리고 총회가 그 무대를 장식해 주었다.

해방이후 진행된 신학적 갈등으로 한국장로교회는 1950년대에 세 차례의 대분열을 경험해야 했다. 그리고 그 분열의 무대를 제공해 준 것은 조선신학교와 해방 이후 설립된 고려신학교와 장로회신학교였다. 그러나 이것은 장로교에 국한된 현상은 아니었다. 해방 후 감리교와 성결교도 장로교와 유사한 분열의 아픔을 겪어야 했다.

 

1952년 고려파가 신사참배문제로, 1953년 기장이 성경관 문제로 분립해 나간 후 한국장로교는 적어도 겉으로는 평온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외국에서 들려오는 이야기는 한국장로교가 가입해 있는 한국교회협의회의 모체 세계교회협의회가 신학적으로 정통적인 입장에서 이탈하여 세계의 신학조류를 따라 소위 새로운 노선으로 선회하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한국장로교는 1954년 8월 15일부터 31일까지 미국 일노이주 에반스톤에서 열린 제 2차 W.C.C. 총회에 명신홍과 김현정 두 사람을 대표로 파송하여 W.C.C의 신학적 입장과 성격을 정확히 파악한 후 보고해 줄 것을 요청했다. 장로교 외에도 감리교가 정식 대표를 파송했고 한국기독교연합회와 YMCA가 대표를 파송했다. 이 대회는 “세계의 희망은 그리스도이다”라는 주제로 전 세계 163개 개신교단 가운데 132교단과 헬라정교에서 파송한 1,242명의 대표들과 499명의 방청객을 포함, 2,400명이 참석한 가운데 에반스토의 노스웨스턴 대학에서 열렸다. 1948년 화란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제1차 W.C.C 대회 이후 6년만에 열린 것이다.

 

진정한 신앙의 일치에 토대를 두지 않은 교회의 연합은 복음의 순수성을 희생시켜 교회의 연합이 종교연합으로 흐를 위험이 항상 내재되어 왔다. 그렇다고 어떤 형태라고 할지라도 교회의 일치를 무시한 교권주의에 의한 분열이 정당화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신앙의 순수성 파괴 못지않게 교회의 일치를 파괴하는 행위는 교회가 경계해야 할 또 다른 기독교의 무서운 적이다. 기독교회는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며 동시에 교회의 일치를 존속시켜 가야 할 이중적인 책임을 부여 받았다. 이것은 1960년대 이후 정체성 파악의 시대로 돌입하는 한국교회가 감당해야 할 몫이다.

 

해방 후 장로교만 분열의 아픔을 겪은 것은 아니다. 한국의 주류교단으로 인정받고 있는 감리교, 성결교, 침례교 모두가 대립과 분열의 아픔을 겪었던 것이다. 이 교단들은 모두 재건과 대립과 분열이라는 수순을 겪고 오늘에 이른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들은 시대의 상황이 크게 작용한 것은 사실이지만 해방 후 신사참배 문제와 신학적인 문제와 정체성문제와 W.C.C. 에큐메니컬 문제, 그리고 주류와 비주류의 교권 문제에 직면했을 때마다 겸손히 엎드려 회개하고 낮아진 자세로 자신을 돌아보며 잘못을 서로 인정하고 화해하려는 노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일제의 탄압과 압박 속에 형극의 십자가, 어두운 터널을 통과했던 한국교회는 해방을 맞으면서 일제와 타협했던 이들과 끝까지 신앙을 지키려고 했던 이들, 교권주의자들과 반교권주의자들,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려고 하는 이들과 일치를 강조하는 자들 사이에 눈에 띄는 대립과 갈등이 표출되기 시작했다.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이 점에 있어서는 감리교, 성결교, 침례교 모두 예외가 아니었다.

 

역사는 우연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역사의 큰 수레를 돌리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이다. 그리고 인간을 그것의 도구로 사용하신다. 전혀 복음의 빛이 들어오지 않을 것 같았던 한국에 복음이 들어오고, 싹이 날 기미가 전혀 없는 척박한 환경임에도 불구하고 강력한 성려의 능력으로 은혜를 부어주신 하나님. 모질게 닥쳐오는 외부의 침략과 핍박 가운데서도 신앙으로 견디며 그 암흑의 시간을 기회의 시간으로 선하게 바꾸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다. 한국의 근대사를 말하면서 기독교를 언급하지 않는 것은 오히려 역사를 외면하는 것과 동일하다. 한국의 민족중의와 민주주의를 이끌었던 것, 그리고 애끓는 마음으로 해방을 외쳤던 모든 역사의 사건들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신앙에서 나온 것이다. 특별히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는 것은 쏟아져 들어오는 신학의 여러 사조들 가운데 성경만을 붙들고 자유주의에 굴복하지 않은 것이다. 이것은 정말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이다.

 

역사 가운데 일하시는 하나님을 보면서 소망을 갖는 것은 바른 신학을 유지하는 교단만이 건제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과연 무엇을 우리에게 보여주는가? 바른 신학만이 하나님의 일하시는 도구가 될 수 있으며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것이다. 개혁주의 신앙을 철저히 고수하는 총신의 신학이 얼마나 건전하며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는 것을 깨달았다. 바른 신학의 교단만이 그 명맥을 유지하며 신앙의 순결성을 지키는 역사적 사실을 보며 다시 한번 어깨가 무거워지짐을 느낀다.

 

한편 신앙을 지키는 일에 적극적인만큼 실천적인 면은 과연 하나님께서 기뻐하실까하는 반성을 해본다. 소위 보수신학이라는 교단의 약점이 바로 실천적인 문제이다. 실천이 없다면 바른 신학은 죽은 것과 방불하다. 세사의 기준으로 돌아가는 이 땅 가운데 오직 말씀을 붙들고 승부하는 실천적인 모습이 있어야 한다. 사회적인 책임에 대하여 뒷짐을 지고 있을 수는 없다. 세상의 빛이라고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처럼 사회적 책임에 민감해야 하며 소홀히 해서는 결코 안 된다.

 

또한 연합활동이 요구된다. 수없이 분열된 교단의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의 마음도 아프지 않겠는가? 그러나 연합을 위한 연합은 결코 안 된다. 순결성을 지키지 못하는 연합은 안 된는 것이다. 역사 가운데 일하시는 하나님의 열심이 본인으로 하여금 소망을 갖게 하며 다시 한번 창조주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겸손히 기도하게 만든다.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
반응형

 도전과 응전의 시대

 

한국교회협의회의 조직과 변천을 살펴보려면 1912년 한국개신교 복음주의연합공의회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당시 출발할 때에는 장감의 신앙은 어느 정도 통일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렇게 연합할 수 있었던 것은 한반도에 개신교 전체를 대변하는 연합운동의 협의체 구성의 필요성이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또 선교의 목적이 같았던 블레어와 하디 선교사의 제의가 채택되었고 캐나다 장로교선교회의 윌리엄 스캇이 적극적인 추진으로 교회협의회(FCC)가 결성되었던 것이다. 이 협의회가 공헌 한 것은 한국교회와 세계교회를 연결하는 통로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국의 복음운동에 한국의 각 교단의 교회들과 협력하는 일에 앞장섰다는 것이다. 또 한 가지는 일본에 있는 40만의 한국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일본연합공의회, 입본의 캐나다장로교회와 협력하도록 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1927년을 기점으로 북장로교선교회는 한국교회연합을 통한 장감의 연합운동에 깊은 회의를 느끼기 시작하고 결국 탈퇴하기로 결정하여 연합체는 심각한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이렇게 하면서 한국의 교회는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새로운 질서로 재편되어 나가기 시작한다. 1930년대에는 그동안 한국교회를 주도하는 중심세력이었던 장로교와 감리교에 이어서 성결교가 한국교회의 중심세력으로 자리 잡기 시작한다. 이는 복음주의에 입각한 회개 운동과 부흥운동에 혼연일체가 되어 부흥운동에 전력투구하였기 때문이다. 성결교회의 복음전파 방식은 그들이 소중하게 간직하는 중생과 성결의 체험 교리인 그리스도의 보혈로 원죄의 씻음과 신유와 부활과 재림과 영생을 전하는 것이었다. 특히 이들이 중점을 둔 것은 중생 성결 신유 재림의 사중복음은 놀라운 부흥운동을 경험한 한국교회 교인들에게 어렵지 않게 수용될 수 있는 가르침이었기 때문에 더욱 호소력이 있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성령의 내주하심과 죄에서의 자유에 대한 새로운 체험을 강조하는 성결교회의 가르침은 대 부흥운동을 거치면서 역동적인 신앙의 체험을 강조하는 이들에게 적지 않은 도전을 주었다.

 

이 시대 한국교회가 만나 또 하나의 움직임은 신학적 변천이다. 한국교회는 1930년에 접어들어 이단, 신흥종교, 자유주의, 신비주의 부흥운동, 그리고 무교회주의의 등장으로 그 동안 견지해 왔던 신학적 통일성이 깨지고 다양한 신학사상들이 발흥하기 시작했다. 1934년 한국 북장로교 선교 희년을 맞으면서 블레어가 신학적 변천에 깊은 우려를 표명했던 것처럼 수많은 이단들이 등장, 이 시대의 기독교를 위협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사상적 변천은 리더십의 전환과 별도로 진행된 것이 아니라 상호 깊은 연계성을 지니고 진행되었다. 1920년대 중반 이후부터 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했다. 장로교의 남궁혁, 백낙준, 박형룡, 이서휘, 송창근, 채필근, 김재준, 윤인구, 김치선과 감리교의 전영택, 임영빈, 변홍규, 정경옥, 류형기, 그리고 갈홍기는 그 대표적인 인물들이라고 할 수 있다.

 

1955년, 전성천 박사는 “한국개신교의 분열과 일치”라는 예일대학의 박사학위논문에서 한국에는 언더우드, 알렌, 헤론, 앨러스 등 4명의 북장로교 선교사들이 있었으며, 이 4명의 선교사들 주에서 전통적인 장로교 신학에 동의했던 사람들은 언더우드 한 사람밖에 없었다고 했다. 언더우드 외에 다른 사람들은 신학적으로 동의하지 않았다는 것은 이들이 북장로교 내의 주류 곧 구학파의 전통, 성경의 무오성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이들의 4명의 선교사들 가운데 신학교육을 제대로 받은 선교사는 언더우드 밖에 없었고, 나머지 사람들은 의사나 간호사였기 때문에 좀 더 개방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었던 것이다. 비록 신학교육을 받은 이들이기는 하지만 다수의 개척 선교사들이 그 같은 입장을 가졌다는 것은 선교 초기 신학적 분위기를 꼭 보수적인 것 많은 아니었음을 말해준다. 그러나 1889년 마포삼열을 비롯한 보수적인 맥코믹 출신 북장로교선교사들과 1892년 이눌서를 비롯한 남부의 보수주의를 대변하는 남장로교 출신 선교사들이 국내에 대거 입국하면서 1890년대에 접어들면서 전반적인 장로교 선교회의 신학적 성향은 보수적인 분위기로 바뀌었다.

 

그러나 193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자유주의는 하나의 세력을 형성하였고 한국교회는 심각한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다. 자유주의 도전이 주는 가장 큰 교훈은 1930년대 들어 지금까지 정통신학의 토대 위에 확고하게 서 있던 한국교회에 진보적인 신학이 하나의 세력으로 형성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이 같은 진보적인 세력은 얼마 후 신사참배문제로 평양신학교가 폐교되자 조선신학교 설립을 통해 한국교회에 깊숙이 영향력을 확대하기 시작했다.

 

1920년대까지 한 목소리를 내던 장로교와 감리교의 신학적 통일성이 서서히 깨어지고 다양한 신학이 역사에 부상하기 시작했다. 정경옥의 자유주의, 김재준의 진보주의, 박형룡의 정통주의, 김교신의 무교회주의 그리고 이용도의 신비주의가 그것이다.

 

감리교 신학자 정경옥이 한국교회에 자유주의를 정착시킨 주인공라면 김재준은 한국교회에 진보주의를 정착시킨 인물이었다. 김양선의 말을 빌린다면 “그는 파괴적인 성경비판을 감행하는 극단의 자유주의 신학자”는 아니었으나 성경의 축자적 영감과 성경의 완전무오를 거부하고 그 같은 사상과 “대결하여 싸우려는 철저한 자유주의 신학자”였다. 그는 정경옥의 자유주의와 박형룡의 정통주의 사이에 진보주의라는 중도적 입장을 개척하는데 성공했다.

 

박형룡 박사는 신학적인 색깔뿐만 아니라 삶의 스타일이나 사고방식에 있어서 김재준 목사와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김재준 목사가 개방적이었다면 박형룡 박사는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절제하고 철저하게 칼빈주의 입장에서 정통주의를 변호하는 일에 혼신의 힘을 다했다. 김재준에게 정통주의가 갖고 있는 문제점은 바로 신학을 사변적이고 객관적인 굴레 속에 가두어 두고 삶 속에 구체적으로 연계시키지 않는 데 있었다. 반면에 박형룡에게 진보주의는 성경의 권위를 파괴하고 교회와 그리스도인을 성경과 기독교의 전통에서 벗어나게 만들어 결국 기독교 유일성마저 흔들어 놓는다는 점이었다.

 

1930년대 박형룡은 정통주의 대변자로 주로 교단 장로교회에서 만인의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 그의 화려한 학력, 탁월한 근면성, 한국에서의 선교사 1세대와의 두터운 교분, 그리고 무엇보다도 복음의 순수성을 지키려는 강력한 의지는 그를 일약 한국교회 정통의 대변자로 부상시키기에 충분했다. 더구나 귀국 후 한국교회 안에 일고 있던 정경오류로 대변되는 자유주의 신학과 김재준으로 대변되는 진보주의 신학, 김교신의 무교회주의와 이용도의 신비주의 부흥운동의 발흥은 기왕에 한국교회에 바른 신앙과 바른 신학을 구축하는 일에 자신의 생애를 바치기로 다짐했던 박형룡의 신학적 방향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신학 논쟁과 교회의 응전이 1930년부터 1935년까지 한국교회를 특징짓는 중요한 사건이었다면, 1935년부터 1945년 해방될 때까지 한국교회를 특징짓는 사건은 신사참배 논쟁이었다.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 앞에 한국교회는 신사참배를 하느냐 반대하느냐라는 양자택일의 기로에 처했다. 호주장로교선교회가 보고한 것처럼“신사참배문제는 한국의 교회가 직면하였던 가장 중대한 문제였다.”

 

신사참배는 1911년의 105인 사건이나 1919년의 3.1운동 탄압보다도 더 크고 직접적으로 기독교 신앙에 위협을 가했던 문제이다. 그것은 105인 사건이나 3·1운동으로 인한 탄압이 민족의 독립운동과 관련된 일제의 탄압이었다면, 신사참배 강요는 “신앙의 자유를 박탈당하고 신앙 양심을 유린당하는 본격적인 종교박해였고, 교회 전체가 당한 대 박해였고, 전 민족이 당한 일대 수난”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신사참배 문제는 “세속권력을 절대화하고 인간을 신격화하는 일제의 천황제 이데올로기와 관련된 것으로 저이, 종교, 교육, 문화 등 여러 부분에 걸친 복합적인 문제”였기 때문이다. 한국교회는 신사참배 강요에 대해 순응 또는 타협함으로 신앙의 본질을 왜곡하느냐 아니면 끝까지 신상참배의 강요에 맞서 신앙을 지키느냐 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한국교회의 신사참배 문제는 신앙의 본질과 그 해석, 더 나아가 그 적용과 실천에 관한 문제와 깊숙이 연계되었다.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