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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사] 국내에서의 성경번역 신약

 

언더우드·아펜젤러, 성경번역 첫 단추 끼우다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성경이 전래된 때는 1816(순조 16) 95일로 알려져 있다. 영국 정부로부터 조선 서해안 해도(海圖) 작성 명령을 받은 해안 탐사선 알레스트호와 리라호가 충남 서천군 서면의 마량진(갈곶)에 상륙했는데, 함장 머레이 맥스웰과 바질 홀 대령이 마량진 첨사 조대복과 현감 이승렬에게 화려한 장정의 책 한 권을 선물했다. 이것이 한반도에 전해진 최초의 성경인데, 흠정역(KJV) 성경이었을 것이다.

 

 

그 후 18327월 귀츨라프와 186566년 토마스에 의해 중국어 성경이 조선에 소개됐다. 성경의 도래와 함께 1880년대 만주와 일본에서는 은밀하게 성경이 번역되기 시작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이미 소개한 바 있다. 그런데 국내에서는 어떤 과정을 거쳐 성경이 번역되었고 오늘 우리 손에 들려지게 되었을까?

 

국내 첫 번역성경은?

 

내한한 선교사들에게 있어 가장 시급한 과제는 성경 번역이었다. 그래서 서울에 있던 5명의 선교사들, 곧 언더우드 아펜젤러 알렌 스트랜톤, 그리고 헤론은 188727일 성서번역위원회를 구성하고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를 번역 책임자로 임명했다. 이들이 펴낸 첫 성경이 1887년 간행된 마가의 젼한복음셔 언해였다. 제목이 암시하듯 이 책은 이수정의 신약 마가젼 복음셔 언해’(1885)의 개역본이었다. 한글성경이 없는 상태에서 이 책을 잠정적으로 이용하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 위원회 차원에서 역간 작업은 더 이상 추진되지 못했으나 아펜젤러의 보라달로마인셔(保羅達羅馬人書)’(1890), ‘마태복음젼’(1892), 게일의 사도행젼’(1892), 펜윅(M C Fenwick)요한복음젼등 사역본(私譯本)이 발행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영국성서공회는 한국성서위원회에 로스역 성경의 수정을 요청했다. 번역보다는 수정이 용이했기 때문이다. 이 요청에 부응해 아펜젤러가 로스역 누가복음을 수정했는데, 이것이 1890년에 나온 누가복음전이다. 수정본으로 만족할 수 없게 되자 성서번역위원회는 국내에서 완전한 새로운 성경을 번역하기로 결정했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에게 이 일이 위임되었다. 그러나 작업은 지연되었고 후에는 언더우드 대신 게일이, 아펜젤러 대신 스크랜톤이 이 일을 추진해 1892120마태복음전이 나왔다. 이 책은 기존 성경의 수정본이 아니라 국내에서 번역된 첫 한국어 성경이었다. 이 성경은 30만부 간행됐다.

 

성경번역자회의 조직과 열매

 

한국어 성경번역사에 있어 중요한 변화는 18935상임성서실행위원회가 조직되고 그 휘하에 성경번역자회를 설립한 일이다. 언더우드 게일 아펜젤러 스크랜톤이 번역위원이었고, 1895년에는 레이놀즈가 추가됐다. 1895년 성서공회가 설립된 일 또한 획기적인 발전이었다. 번역위원들은 분배된 신약 책들을 그리스어 성경과 영어개역성경(RV)을 대본으로 번역하되 한국인 조사들은 한문 및 일본어 성경 대본을 참고해 선교사들을 돕고, 번역을 완성하면 다른 번역자들에게 보내 의견을 청취하고, 이를 다시 원번역자들에게 보내 검토하게 한 뒤 전체 번역자들이 참가하는 번역자회에서 토론과 표결을 거쳐 번역자회에서 통과된 대본을 시안본으로 채택하기로 했다.

 

이런 번역 과정이 충실하게 지켜졌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런 노력의 결과로 1895년 마태복음, 마가복음, 요한복음, 사도행전이 간행됐다. 마태복음은 아펜젤러가 1892년 번역한 마태복음젼을 번역자회가 시안본으로 승인한 것이지만 마가복음(아펜젤러), 요한복음(게일), 사도행전(게일)은 개인 역본이었다. 곧 누가복음(1896), 갈라디아서, 야고보서, 베드로전후서(이상 1897), 로마서, 고린도전후서, 골로새서, 빌립보서, 데살로니가전후서, 디모데전후서, 디도서, 빌레몬서, 히브리서, 요한1, 2, 3서와 유다서(이상 1898), 에베소서(1899), 그리고 요한계시록(1900)이 번역됐다. 신약의 모든 책이 번역되자 낱권을 묶어 한 권의 책으로 출판됐다. 이것이 국내에서 번역된 최초의 신약전서인 신약젼셔’(1900). 마태복음부터 로마서까지는 번역자회의 공식적인 의결을 거친 시안본이었으나 그 이후의 책들은 개인 역본들이었다. 그러나 국내에서 최초로 신약을 완역한 일은 감격스러운 일이었다. 이를 기념해 190099일 서울 정동감리교회에서 신약성경 봉헌감사예배가 드려졌다.

 

성경 번역 헌신했던 아펜젤러, 결국 순직

 

비록 신약전서가 출판되었으나 고린도전서 이후의 책들은 번역위원회의 수정이나 독회를 거치지 않은 개인역에 불과했으므로 출판과 함께 수정 작업이 시작됐다. 이 일은 아펜젤러, 레이놀즈, 그리고 게일에게 위임됐다. 이 작업을 위해 아펜젤러는 인천을 출발해 번역자회가 모이는 목포로 가던 중 조난 사고로 한국인 조사 조성규(趙成奎, 趙漢奎라고도 불림)와 함께 순직했다. 1902611일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북장로교 선교부는 게일과 언더우드를, 남장로교는 레이놀즈를 성경번역 사업에 전념토록 배려했다. 결국 이 세 사람의 노고로 수정 작업이 추진돼 1906년에는 성경번역자회가 공인한 공인역본 신약젼서가 출판됐다. 이 성경이 1938개역신약성서가 출판되기까지 한국교회 강단과 성도들이 사용했던 공인본 신약성경이다. 성경번역 사업은 선교사들만이 아니라 한국인 조력자의 수고 또한 적지 않았다. 아펜젤러의 어학선생이자 조사였던 조성규, 게일의 일생 동안의 동료였던 이창직(李昌稙) 정동명(鄭東鳴), 언더우드의 조사였던 송덕조(宋德祚), 레이놀드의 조사였던 김정삼(金鼎三) 이승두(李承斗) 등이 바로 그들이다.

 

(고신대· 이상규 /역사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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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사 초기 한국교회의 찬송가

 

 

 

 

·英語로 부르다가한글 찬송가 1892햇빛

 

기독교가 처음 한국에 소개되고 예배가 드려졌을 때 어떤 찬송을 불렀을까? 이번에는 이런 질문에 답하면서 한국교회 초기 찬송가에 대해 소개하고자 한다. 기독교가 소개되던 초기에는 우리말 찬송이 없었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한문으로 된 중국어 찬송가를 이용했다. 1887년 백홍준, 서상륜을 중심으로 시작된 새문안교회도 처음에는 중국어 찬송을 불렀다. 백홍준의 딸 백성관은 이렇게 회상했다. “내가 어렸을 때 나의 아버지는 만주로부터 돌아오셔서 매일 새벽이면 기도하시고는 나지막한 소리로 쥬 예쑤 아이워(主耶蘇愛我)’를 부르시던 기억이 난다.” 아펜젤러는 자신이 편집한 찬송가 서문에서 조선말로 찬미를 쓰기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나니 조선교회에서 처음에는 지나(支那)찬미가에서 얼마를 써 보았으나 가사의 뜻을 잘 알 수 없었으며라고 하여 한글 찬송이 보급되기 전에는 중국어 찬송이 사용되었음을 말하고 있다. 이화학당이나 배재학당의 채플에서는 영어 찬송을 불렀다고 한다. 한국어 찬송이 없던 당시로서는 불가피한 일이었을 것이다. 이런 현실에서 한글 찬송가 편찬은 시급한 과제였다.

 

국내 최초의 찬송가

 

처음에는 지역이나 선교부에 따라 각기 다른 찬송을 지어 불렀는데,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찬송가가 편찬된 때는 선교사가 입국한 지 8년이 지난 1892년이었다. 그것이 감리교의 존스(G A Jones)와 로드와일러(L C Rothweiler)가 편집한 찬미가였다. 27편이 수록된 악보 없는 수형본(手形本) 찬송가였다. 2년 후인 1894년에는 장로교의 언더우드에 의해 117곡으로 편집된 찬양가가 출판되었는데, 이 찬송가 상단부에는 사성부(四聲部) 악보가 그려져 있고 하단부에는 가사를 기록한 형태였다. 이것이 한국에서 서양식 악보가 인쇄된 최초의 음악책이었다. 이 찬양가는 주로 서울지방에서 사용되었다. 선교 초기에는 지역적으로 다른 노래가 불리기도 했고, 편집된 찬송가가 널리 보급되지도 못했다. 말하자면 첫 10여년 동안 통일된 찬송가가 없이 예배를 드렸음을 알 수 있다. 1895년에는 장로교 선교사 그래함 리(Graham Lee)와 기포드(Gifford) 부인이 편집한 찬셩시가 출판되었는데 54편의 곡을 수록하고 있었다. 이 책은 서북지역에서 주로 사용되었는데, 계속 증보되어 1902년에는 장로교공의회에 의해 공식 찬송가로 채택되었고, 이후 개정 증보되어 1905년에는 이를 기초로 마펫이 곡보찬셩시를 간행했다. 137곡을 수록한 이 찬송가가 장·(장로교·감리교)의 합동 찬송가가 출판되기까지 장로교의 공식찬송가로 자리 잡았다.

 

감리교의 존스와 로드와일러의 찬미가도 계속 증보되어 1902년에는 207곡으로 늘어나 감리교회의 찬송가로 자리 잡았다. 흥미로운 점은 선교사와 무관하게 15편의 노래를 수록한 찬미가1905년 간행되었다는 점이다. 윤치호가 역술한 무악보의 이 찬미가의 제1장이 황제폐하송이었고, 14장은 애국가였다. 이 노래는 지금의 애국가와 거의 동일한데, 곡은 스코틀랜드의 민요 올드 랭 사인’(Auld Lang Syne)에 맞추어 부르도록 표시되어 있었다. 후에는 찬송가에서 삭제되고 곡도 안익태 곡으로 바뀌었다. 이 찬미가가 교회의 공적인 찬송가로 채택되지는 않았으나 1908년 재판까지 발행되었다. 국운이 기울던 당시의 충군애국적인 신앙을 보여주고 있다.

 

·감 연합 찬숑가

 

한국에서의 찬송가 편찬에 기여한 인물은 침례교선교사 펜윅(M C Fenwick)이었다. 그는 14장의 찬송을 편집한 복음찬미1899년 독자적으로 발행한 바 있다. 이 찬송도 계속 증보되어 1939년 판에는 274곡을 수록하였다. 이 찬송이 동아기독교(침례교)의 공식 찬송가가 되었다.

 

한국에서의 주도적 두 교회인 장로교회와 감리교회는 연합과 일치를 위해 통일된 찬송가를 불러야 한다는 인식이 열매를 맺어 1908년에는 장·감 연합의 찬숑가가 발행되었다. 262곡을 수록한 이 찬송가는 이전에 번역을 다듬고 세련된 가사로 개작했다. 6곡은 한국 고유의 곡조로 부르도록 배려했다. 편집위원은 베어드부인(Annie Baird), 밀러 (F S Miller), 벙커(D A Bunker)였다. 1908년 초판은 6만부, 1910년까지 225000, 1911년 한 해 동안 5만부가 발행되었다. 이 찬송이 오늘까지 불리는 찬송가의 모태가 되었다.

 

찬송가는 한국음악에도 영향을 끼쳤고 교회는 서양 음악인을 키워낸 온상이었다. 최초의 피아니스트 김영환, 최초의 서양음악교사 김인식, 현제명, 박태준, 안익태 등도 교회가 배출한 음악가들이다.

 

(고신대 이상규교수 /역사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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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사 한국에서 기독교 부흥 배경

 

기독교와 민족주의

 

앞에서 한국에서의 급속한 기독교 성장에 대한 자료를 제시하고, 1895년 이후의 급속한 성장은 청일전쟁 이후 민족자강의식이 영향을 주었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사실 교회 성장은 어느 한 가지 요인으로만 설명할 수 없는 복합적인 요인이 있다. 한국이라는 동일 문화권에서조차도 지역에 따라 기독교 수용 정도가 달랐다는 사실은 이 점을 암시한다.

 

일반적으로 한국교회 성장의 원인으로 다음의 몇 가지가 지적되어 왔다. 가장 대표적인 설명이 선교정책설인데, 한국교회 성장의 주된 요인이 선교사들의 고유한 선교정책 때문이었다는 주장이다. 복음전도와 함께 시행된 교육, 의료 활동이 영향을 끼쳤고, 1890년대 이후 채용된 네비우스 정책과 선교지역 분담정책이 한국교회 성장의 주된 요인이라고 말한다. 소열도(Stanley T Soltau), 왕영덕(Alfred W Wasson), 곽안련(Charles A Clark) 등 선교사들이 이런 입장을 대변한다. 김양선 김재준 강근환 등도 이에 동조한다. 그러나 정대위(鄭大爲)는 선교사 중심의 선교정책설에 강한 의문을 제기하고 한국교회 성장을 한국의 기층문화인 샤머니즘, 곧 무교적(巫敎的) 세계관에서 기독교를 받아들인 결과로 주장한다. 그는 예일대학교에 제출한 박사학위 청구논문 한국 사회에서의 종교혼합 현상’(Religious Syncretism in Korean Society, 1959)에서 한국교회의 급속한 성장은 샤머니즘과 기독교와의 종교혼합 현상의 결과였다고 주장했다. 박봉배, 스펜서 팔머(Spencer Palmer)도 비슷한 입장이다.

 

한국교회 성장의 몇 가지 원인

 

이와는 달리 감리교적 배경의 윤성범, 유동식 등은 한국인의 심성(心性) 혹은 종교성(宗敎性)에서 그 원인을 찾고 있다. 사회학자 정재식은 한국 개신교의 성장은 19세기 한국의 정치적 상황에 기인한다고 주장한다. 한국의 지형학적 위치 때문에 외세의 침략을 받아 왔고, 정치적 환경에서 조성된 사회적 불안과 혼란은 종교적 욕구를 강화시켜 왔다고 주장한다. 쉬리어, 왓슨(Alfred W Wasson), 서고도(William Scott), 라토렛(K. S. Latourette) 등도 이 견해에 동조하고 있다. 이런 입장은 교회성장은 그 시대의 역사 환경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는 역사환경론(歷史環境論)과 동일하다.

 

정치적 정황론이 정치적 상황이라는 한 측면을 강조한다면 역사환경론은 정치적 상황뿐 아니라 그 시대의 사회 경제 문화 등 다양한 요인을 포괄적으로 보아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런 주장이 나름대로 설득력을 지니지만 한국에서의 기독교 수용과 성장에 대한 논의에서 간과할 수 없는 한 가지 기본적 전제는 한국이 일제의 식민 지배 하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직접적으로 일제의 통치를 받기 시작한 것은 1910년 이후지만, 기독교가 전래될 당시 한국은 점증하는 일제의 침략 하에 있었다. 병자수호조약의 체결(1876)을 통해 조선 진출의 발판을 확보한 일제는 청일전쟁과 노일전쟁에서 승리함으로 한반도에서 청과 러시아 세력을 물리쳤다. 1905년에는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하고 이듬해 통감부를 설치하였다. 1910년에는 한국을 병합하였다. 이때부터 조선은 일제의 식민지가 되었고, 흔히 ‘15년 전쟁이라고 부르는 만주사변(1931), 상해사변(1932), 중일전쟁(1937) 그리고 태평양전쟁(1941)을 거쳐 1945년까지 일제의 지배를 받았다. 이와 같은 일제의 식민 지배 하에서 기독교가 한국에 전래, 수용되어 갔다. 말하자면 일제의 강압적 식민 지배와 수탈 과정에서 기독교는 서구 문화나 교육, 의료 활동 등을 통해 민족의 필요를 채워주고 있었다.

 

기독교와 민족주의의 결혼

 

정리하면 우리나라는 아아(亞阿) 제국의 다른 나라와는 달리 기독교 국가의 식민 통치를 받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기독교 국가의 식민 지배를 받았던 나라에서의 민족주의는 대체적으로 반()기독교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기독교 신자가 되는 것은 어떤 점에서 반민족적 행위로 인식되기까지 했다.

 

그 대표적인 나라가 인도네시아였다. 300여년간 네덜란드의 지배를 받았던 인도네시아의 민족주의는 두 가지 성격이 있는데, 첫째는 반 외자(外資)운동이었고, 다른 하나는 반기독교운동이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그 반대적 상황이었다. 우리는 반기독교적인 일본의 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한국에서의 민족주의는 기독교 신앙과 융합될 수 있었다. 일제에게 우리는 수탈을 경험했으나, 기독교는 우리에게 수혜자였다. 기독교 신앙은 반일적 국민의식의 정신적 기초를 제공하였고, 때로 그리스도인과 교회는 반일운동의 중심에 서기도 했다. 그래서 교회는 민족과 유리된 배타적 집단이 아니라 민족의 아픔과 고난의 동반자였다.

 

선교사였던 존스(G. H. Jones)기독교 신앙에 대한 실질적 집착보다 더 강력한 애국충군의 보루는 찾기 어렵다고 평가했을 만큼 서양인의 눈에도 이런 현실이 읽혀지고 있었다. 이런 역사적 상황에서 기독교와 민족주의는 결합될 수 있다. 그래서 한국에서는 기독교적 민족주의(Christian nationalism)’을 형성하게 된다. 김세윤은 이런 특수한 상황을 기독교와 민족주의의 결혼이라고 불렀다.

 

바로 이런 특수한 상황이 한국에서 기독교 수용을 보다 용이하게 했고, 일제 지배 하에서도 기독교가 건재할 수 있는 힘이었다. 아이로니컬하게도 우리 역사에서의 일제의 현존은 기독교의 수용과 성장을 촉진하는 배후세력이었다.

 

(고신대 이상규교수 /역사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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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교회사 기독교의 수용과 성장

 

 

청일전쟁 이후 한국교회 들불처럼 성장

 

외래 종교에 대해 배타적이었던 전통과는 달리 한국에서의 기독교의 수용(受容)은 아아(亞阿)제국의 다른 나라들과는 비견될 수 없는 특별한 경우였다. 기포드(Gifford)189691일자로 미국 북장로교 선교본부에 보낸 서신에서 한국교회의 성장을 들판을 태워가는 들불(wildfire)’에 비유했다. 로이 쉬리어(Shearer) 또한 지역적 편차가 있었음을 고려한다 할지라도 한국교회의 성장은 요원지화라는 점을 인정했다. 이것은 서양 선교사들의 중요한 관심사가 되었고, 1910년 에든버러에서 열린 세계선교대회(IMC)에서도 한국교회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비교할 수 없는 한국교회의 성장

 

개신교 선교사가 입국해 공식적인 활동을 시작한 첫 10년간(18841894)고투의 시기였다. 이 시기의 신자 증가율은 미미했다. 기독교에 대한 오해, 유가적(儒家的) 전통문화와의 갈등, 정치적 정황이 복음전도의 장애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노도사라고 불린 노춘경(盧春京)의 세례(1886711) 이후 수세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1886년 말, 수세자는 전국적으로 9명에 불과했으나 다음 해에는 25명으로 불어났다. 1888년에는 65, 1889년에는 100명에 달했다. 1890년 당시 11명의 장로교와 감리교 선교사들이 활동하고 있었는데, 이 해의 수세자는 장로교 119, 감리교 36명 등 155명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1895년부터 수적 성장이 현저해졌다. 1894년까지만 해도 신자는 불과 500명 전후로 추정되지만 1895년에는 746명으로 성장했다. 1895년에서 1896년 사이에는 2500여명으로, 18967년에는 3300여명으로 증가했다. 1900년에는 약 12000명으로, 1905년에는 26057, 1920년에는 92510, 1930년에는 125479명으로 성장했다. 민경배 교수는 1930년대 한국교회 신자가 38만명에 이르렀다고 분석한다. 물론 통계자료의 정확성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없지 않지만 분명한 사실은 한국교회의 성장은 아아제국의 다른 나라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특별한 경우라는 점이다.

 

그런데 주목할 사실은 선교사의 입국 이후 첫 10년간의 성장은 미미했으나 1895년 이후 급속한 성장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여세가 그 이후 계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백낙준은 특히 1897년부터 1906년까지 성장이 뚜렷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그 이유를 밝히지는 않았다. 우리에게 있어 커다란 숙제는 왜 이때 갑작스런 성장이 나타났는가 하는 점이다.

 

청일전쟁, 그리고 기독교 수용

 

1895년 이후라는 말은 청일전쟁(18941895) 이후라는 의미인데, 이 전쟁이 기독교에 대한 인식 변화에 유효한 의미를 주었음을 알 수 있다. 1894725일에는 일본군이 남양만 풍도 앞바다에서 청국 군함에 포격을 가함으로써 시작된 청일전쟁의 전장(戰場)은 우리나라였고, 우리의 주권을 침탈하려는 싸움이었다. 이때 조야(朝野)는 일본의 승리를 예견하지 못했다. 그러나 전쟁이 시작된 지 불과 두 달이 못돼 일본이 승기를 잡았다. 816일 평양전투에서, 다음 날은 압록강 입구에서 청의 육군과 해군을 격파했다.

 

청의 패배와 일본의 승리는 우리에게 커다란 충격이었다. 곧 그 원인은 일본이 서양문물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런 인식은 당시로서는 중대한 발견이었다. 조선의 조야는 이제 세계질서, 그리고 극동의 새로운 정세에 눈을 뜨게 되었다. 점증하는 열강들의 야욕을 희미하게 인식하기 시작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우리도 서양문물을 받아들이지 않고는 민족적 자강(自强)을 이룰 수 없다는 인식에 이르게 된다. 그렇다면 서구와 손잡는 방법은 무엇인가? 당시로서는 기독교라는 통로뿐이었다. 결과적으로 청일전쟁 이후 서양기술에 대한 인식과 기독교에 대한 관심은 자연스런 것이었다. 소수의 엘리트 그룹의 기독교 영입론은 그 시대의 요청이었다.

 

기독교를 통한 민족의식 고취

 

코리안 리포지토리(Korean Repository)에서는 이렇게 기록했다. “이 가련한 조선인들은 고난과 불안의 와중에서 두 손을 뻗쳐 하나님을 찾고 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아직 미미한 서양종교로만 이해되던 기독교에 대해 새로운 관심이 일었고 청일전쟁이 끝난 1895년부터 신자 수는 급증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기독교는 서구문화의 도관(導管)으로 이해되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청일전쟁 이후 기독교에 대한 관심과 신자의 급증은 기독교를 통한 민족 자강의식의 발현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을 호주의 역사가 케네드 웰즈(K M Wells)자강 민족주의(self-reconstruction nationalism)’이라고 불렀다.

 

적어도 1895년 이후 1910년대의 한국교회의 급속한 성장은 기독교를 통해 민족적 자강을 이루는 의지와 무관하지 않다. 을미사변(乙未事變) 또한 이런 인식에 영향을 주었다. 1895108, 국모로 일컫던 명성왕후가 일본 낭인들에 의해 살해된 것은 단순히 한 여인의 죽음이 아니라 국가 변란을 시도한 사변이었다. 일본의 조선침탈 야욕을 선명하게 노출한 이 사건은 심각한 국가적 위기였다. 이 위기에서 탈출하려는 의식은 서양문물에 대한 관심을 노출하였고, 고종은 선교사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기독교 집단 스스로 충군애국의 종교로 민족의 과제를 거부하지 않았다. 이렇게 볼 때 교회성장은 그 시대의 정치적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고신대  이상규교수·/역사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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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사] 의료활동과 병원의 설립

 

복음 실은 현대의술로 조선인 마음을 잡다

 

학교의 설립과 함께 의료활동은 기독교의 값진 봉사였다. 아아(亞阿)제국의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한국에서도 시약소의 설치, 환경위생 교육, 병원의 설립 등 의료활동은 선교의 장애물을 제거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책으로 인식되었다. 그래서 1830년대를 전후하여 의료선교사들이 파송되기 시작했다. 마테오 리치(Matteo Ricci·1552∼1610)에게서 예시되듯이 예수회 선교사들이 천문학을 통해 중국인의 마음을 움직이려 했다면, 개신교 선교사들은 현대의학을 통해 사람의 마음을 사고자 했다.


한국 선교는 병원과 함께 

한국에서의 의료활동은 한국 선교와 더불어 시작되었다. 장로교와 감리교 그리고 다른 교파에서도 의료선교는 중요한 위치를 점했다. 최초의 의료선교사였던 알렌은 미국 공사관 대리공사 폴크를 통해 한국 정부에 서양식 병원 건립을 제의했고, 고종의 윤허로 서울에 설립된 광혜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병원이었다. 북감리회의 스크랜턴, 북장로교의 헤론 의사가 이 병원에서 일했고, 1886년에는 부녀과를 신설하여 엘러스(Annie J Ellers)가 진료를 맡았다. 후에는 홀턴(Lillias Horton)이 이 일을 계승했다. 알렌의 뒤를 이어 헤론(J Heron), 빈톤(C Vinton), 하디(R A Hardie), 에비슨(O R

Avison) 등이 원장으로 봉사하였다. 

 

북감리교의 의료선교사인 스크랜턴(William Scranton)은 서울 정동에서 1885년 9월 민간병원을 설립했는데, 고종은 이 병원에 ‘시(施)병원’이란 이름을 하사했다(1886. 6). 1888년 12월에는 아현동과 상동에 분원이라 할 수 있는 진료소를 설치하기도 했다. 미 감리회는 남녀를 한 병원에서 진료하기 어려운 현실을 고려하여 정동 이화학당 구내에서 여성과 어린이만을 위한 진료소를 개설하는데, 이것이 최초의 여성만을 위한 병원이었다. 명성황후는 ‘보구녀관(保救女館)’이라는 병원 이름을 하사하였다. 하워드(Meta Howard), 셔우드(Rosetta Sherwood), 커틀러(Mary Cutler), 해리스(Lillian Harris), 에른스버거(Emma Ernsberger) 등이 이 병원에서 봉사했는데, 현재의 이화여자대학교 부속병원으로 발전하고 있다. 

 

각 지역의 선교병원  

 

의료활동은 서울에서만 아니라 각 선교부에 의해 지방으로 확산되었다. 평양에는 래드병원(Ladd Hospital)을 설립했는데 평양기독병원으로 개칭되었고, 후일 감리교의 기홀병원과 합병하여 1923년에는 평양연합기독병원이 되었다. 부산에서는 1891년 12월 브라운(Hugh M. Brown)에 의해 시작된 시약소가 어빈(Charles Irvin) 의사 등의 봉사로 정킨기념병원(Junkin Memorial Hospital)으로 발전하였다. 대구에서는 1899년 존슨(W O Johnson) 의사에 의해 시작된 진료소가 동산병원으로 발전하였다. 

또 선천(미동병원), 강계(계례지병원), 원산(원산구세병원), 해주(구세병원), 개성(남성), 원주(서미감병원), 전주(예수병원), 진주(배돈병원), 심지어는 간도(용정, 제창병원) 등지에도 선교병원이 설립되었다. 특히 대구, 부산, 광주에 나병환자들을 위한 보호시설(병원)을 설립하고 가련한 이들을 보살폈다. 그래서 1913년까지 전국에는 3개의 진료소를 포함하여 33개의 선교병원이 설립되어 있었다(표 참고). 

 

1884년 알렌 의사의 입국 이후 많은 의료선교사들이 내한했다. 1907년에는 한국의료선교사협의회(The Korea Medical Missionary Society)가 조직되어 의료선교사들 간 긴밀한 협조가 이루어졌다. 1938년 당시 의료선교사 수는 328명에 달했다. 교파별로 보면 북장로교 84명, 남장로교 44명, 북감리회 59명, 남감리회 32명, 성공회 31명, 캐나다연합교회 22명, 안식교 10명, 독립선교사 35명 등이었다. 한국에 왔던 의료선교사 중 헤론, 홀, 랜디스(Eli Barr Landis), 오웬(C C Owen) 등은 격무와 과로로 순직하기도 했다. 

 

의료선교가 끼친 영향 

 

의료선교는 궁극적으로 복음 증거를 위한 방편이었으나 한국의 의학 발전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는 점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한다. 한국에서 의료선교 사역이 남긴 가장 큰 공헌은 첫째로 시료(施療)와 시약(施藥)을 통해 한국인들의 육체적·정신적 혹은 심리적 아픔을 치료하고 재활, 재생의 길을 가도록 도움을 준 일일 것이다. 한국에서의 의료실태가 경험적 의술의 일종인 한의학 외에는 비과학적 샤머니즘과 관련된 무속신앙과 민간요법에 의존하는 전근대적 의료수준에 머물고 있었음을 고려해볼 때 더욱 그렇다. 둘째, 서양의술의 전파를 통해 한국의학의 발전에 기여했다는 점이다. 셋째, 의학교육과 의료인의 양성에 기여했다는 점이다.

 

에비슨 박사는 초기 의료선교가 남긴 공헌을 5가지로 설명했다. 첫째로 호열자나 각종 전염병이 발생했을 때 의료선교사들의 시약, 시료, 종두 등 예방과 치료활동을 통해 병이 미신과 악신(惡神)의 결과가 아니라는 점을 보여줌으로써 인간을 미신적 공포에서 해방한 점, 둘째로 종두(種痘)의 보급에 의한 어린이 사망률의 급격한 감소, 셋째로 이웃을 돕는 사랑의 정신을 구현함으로써 구제사업을 실천할 수 있는 힘을 제공한 점, 넷째로 예방, 시약, 치료, 공중위생 및 보건증진 등 각종 의료활동을 통해 기독교 신앙이 전파되고 수용된 점, 다섯째로 의학교재의 번역 및 의료관계 저술을 통해 한국의 과학교육 혹은 의학교육에 영향을 준 점을 지적하였다.

(고신대 이상규교수·역사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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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사]  선교학교와 기독교교육

 

 

미션스쿨 활짝… 1909년 전국에 950여개

 

19세기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수행된 선교운동은 복음 전파만이 아니라 서구문화의 이기(利器)들, 곧 교육, 의료 혹은 서양 과학을 이용했다. 한국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한국에서의 선교는 기독교 복음 전파와 함께 서구문화 전파라는 성격을 띤 것이었다. 선교사들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서구문화의 전파자로서 역할을 했다.


당시 한국사회의 현실적 필요와 요청 때문에 학교교육이나 의료활동은 각광을 받았고, 이를 통해 선교의 지평을 넓혀갈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한국의 개화와 계몽, 사회변화, 민주의식, 구습 타파, 여권 신장 등 다양한 영역에 있어서 변화와 개혁을 가져왔다. 말하자면 기독교는 한국사회 변화에 커다란 영향을 준 것이다.

선교지에서 최초로 선교학교, 곧 미션스쿨을 설립했던 인물은 스코틀랜드의 첫 해외선교사였던 알렉산더 더프(Alexander Duff·1806∼1878)였다. 1830년 23세의 나이로 인도 캘커타로 파송된 그는 선교 사역에 있어서 기독교 교육의 중요성을 입증해준 대표적 인물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교육은 복음을 전하는 최상의 수단이었다. 19세기 말 우리나라에 입국한 이들도 의료활동과 함께 교육활동을 복음 전도를 위한 중요한 방편으로 인식했다. 이것은 ‘개화’(開化)라는 우리나라의 역사적 당면과제와도 부합되는 일이다. 그러기에 조선 정부도 신교육 수용에 적극적이었다.

 

국내 최초의 기독교학교 배재학당

 

이런 상황에서 1884년 6월 24일부터 7월 4일까지 선교의 가능성을 탐색하기 위해 내한했던 일본 주재 감리교 선교사 매클레이(Robert S Maclay)는 조선 정부와 접촉을 시도했고, 고종으로부터 미국 북감리회가 국내에서 교육과 의료사업을 실시해도 좋다는 최초의 윤허를 받았다. 그래서 입국한 선교사들은 학교 설립을 우선 과제로 여겼다.

그 결과

1885년 우리나라 최초의 기독교 학교인 배재학당이 아펜젤러에 의해 설립되었다.

1886년에는 언더우드에 의해 경신학교와 감리교의 스크랜턴 여사에 의해 최초의 여자 학교인 이화학당이 설립됐다.

이화학당은 1887년 2월 고종황제가 하사한 이름이었다. 경신학교는 예수교학당, 민로아학당, 구세학당 등으로 불리기도 했으나 경신학교라는 이름으로 현존하고 있다.

1887년에는 여선교사 엘러스(A J Ellers)에 의해 정신여학교가, 캠벨(J P Campbell)에 의해

1898년에는 배화여학교가 각각 서울에 설립되었다.

1886년부터 시작된 세브란스에서의 의학 교육은 한국사회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1899년 정식 의학교로 출범했고, 1901년에는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가 되었는데, 1908년에 최초로 7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이들이 우리나라 최초의 의사였다. 이 학교는 1915년 설립된 연희전문학교와 1957년 병합되어 연세대학교로 발전했다.

 

한반도 전역에 세워진 기독교학교

 

또 평양에서는 1897년 베어드(W Baird)에 의해 숭실학교가, 1894년에는 모펫(S Moffett)에 의해 숭인상업학교가, 1899년에는 감리교의 노블(W A Noble)에 의해 정의여학교가, 1903년에는 모펫에 의해 숭의여학교가 각각 설립되었다. 대구에서는 1903년 브루엔(H M Bruen)에 의해 신명여학교가, 1906년 아담스(J E Adams)에 의해 계성학교가 설립됐다. 그 외에도 선천, 강계, 재령 등지에 여러 기독교 학교가 설립되었다. 부산의 경우 1895년 멘지스에 의해 일신여학교가, 1906년에는 마산에 아담스와 이승규에 의해 창신학교가 세워졌다. 남장로교 선교부가 일한 호남 지방의 경우 전주에는 신흥학교(1900) 기전여학교(1902)가, 광주에는 숭일학교(1907) 수피아여학교(1908)가, 목포에서는 정명여학교(1902) 영흥학교(1903)가, 순천에는 매산학교(1913)가 각각 설립됐다. 캐나다선교부는 함흥에 영생여학교(1903) 영생남학교(1907)를, 간도에는 은진중학교 명신여자중학교를 설립하기도 했다. 그 외에 감리교회는 서울 외에도 인천 수원 공주 등지에 기독교 학교를 설립했다.

 

청일전쟁 후 한국에서의 교육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고, 그후 사립학교가 급증했는데 1909년에는 전국에 950여개의 기독교계 학교가 설립됐다. 그 가운데 장로교계가 605개교, 감리교계 학교는 200개교로 알려져 있다. 이렇게 설립된 선교학교는 한국에서의 사립학교 교육을 주도하게 된다. 통계의 차이가 있지만 1910년 일제가 조선을 병탄할 당시 조선총독부는 전국에 300여개 기독교 학교, 약 3만명을 헤아리는 학생이 있었던 것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기독교 학교에 의해 변화된 사회상

한국에서 기독교 학교는 세 가지 점에서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첫째, 교육은 특수한 계층의 일부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이를 위한 것임을 일깨워 주었다. 공교육(公敎育·public education) 개념을 심어준 것이다.

둘째, 교육은 남자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여성도 받을 권리가 있음을 일깨워 주었다. 선교부가 여자 학교를 설립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여자에게 있어서 무식은 덕이니라”는 고루한 의식은 여자 학교 설립과 함께 불식되었다.

셋째, 서구적 개념의 교육과정의 다양화였다. 과거 우리의 교육은 생의 가치나 삶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과거(科擧)라는 국가고시를 위한 것으로서 관직에 나가는 방편에 불과했다.

그러나 선교학교를 통해 교육은 건실한 민주시민을 양성하고 인간다움을 추구하는 교육임을, 그리고 다양한 교육과정을 통해 사회 여러 영역의 인재를 양성하는 것임을 일깨워 주었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 교육은 한국사회 변화를 주도했다.

(고신대 교수·이상규 /역사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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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사] 초기 선교정책: 선교지 분담 정책

 

 

 

복음 효율화 위해 교파별로 선교지 나눠

 

알렌의 입국 후 여러 선교단체가 한국에서 일하게 되자 특정 지역의 집중화를 막고 효과적인 선교사역을 위한 선교부 간의 조정이 필요했다. 이런 배경에서 선교지역 분담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다. 복수의 선교부가 한 지역에서 일하게 될 때 야기될 수 있는 불필요한 대립이나 경쟁을 막고 인적·재정적 낭비를 최소화하자는 취지에서 나온 것이다. 아펜젤러는 이미 1888년 장로교회와 북감리교회 선교부 간의 선교지 분담을 제안한 바 있고, 미국남장로교회가 한국선교를 시작했을 때(1892) 북장로교와 남장로교 간에도 선교지 분담 협정을 체결한 바 있다. 이런 점은 합리적인 선교지역 분할이 긴요했다는 점을 보여준다.


선교지 분담에 가장 적극적인 교파가 장로교였다. 미국 남장로교와 북장로교 선교부의 연합체인 ‘장로교 공의회’는 선교지 분담을 포함하여 한국에서는 하나의 장로교회를 세우도록 힘쓴다는 점에 합의했다.

후에 호주장로교회와 캐나다장로교회가 이 일에 동참하게 된다. 장로교공의회는 장로교치리회가 조직되기 이전까지 상회(上會) 역할을 했다. 이 장로교공의회는 1893년 1월 회원 선교부 간 합의를 거쳐 북장로교는 평안도 황해도 경상북도, 남장로교는 제주도를 포함한 전라도와 충청도, 캐나다장로교는 함경도 지방을 맡기로 했다. 부산과 경남지방은 호주와 미국북장로교 공동구역으로 했다.

 

미국북장로교와 북감리회의 선교지 분담안

 

1893년 6월에는 미국북장로교 선교부와 북감리회 선교부 간의 선교지 분담협의가 이루어졌다. 이 분담안은 인구 5000명 이상의 도시나 개항장(開港場)은 공동선교구역으로 하고, 5000명 이하의 지역의 경우 이미 선교를 개시한 선교부의 선취권을 인정해 주고 타 선교부는 가능한 한 이 지역을 피하고 미점유지역 선교를 권장한다는 내용이 중심이다.

또 교회권징은 상호 인정해 주고, 교회 지도자들이나 신도들의 교단 이동을 인정하되 이명서가 없는 이를 영입해서는 안 된다는 조항을 포함시켰다. 이런 합의에 대해 감리교 감독 포스터(R S Foster)가 찬성하지 않았기 때문에 감리교에서 공식적으로 수용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감리교회도 이 협정을 존중했다.

 

선교지역 분담 논의는 그 후에도 계속되었다. 경남지방에서는 1900년부터 미북장로교와 호주선교부 간의 협의를 시작하여 1903년 10월 20일 양 선교부 간의 지역조정에 합의하였다. 흔히 낙동강을 경계선으로 구분했다고 말하고 있으나 그렇지 않다. 경남지역의 남서쪽, 곧 울산 기장 언양 양산 거제 진해 고성 지역은 호주장로교가, 동북쪽, 곧 김해 웅천 밀양 영산 창녕 칠원 창원 지역은 북장로교 선교부가 맡기로 하였다. 그리고 인구집중지역인 부산 동래 마산은 양 선교부의 공동구역으로 하였다. 이때의 지역분담에 대해 왕길지가 그린 분담도를 필자가 보관하고 있다. 협의는 그 후에도 계속되었고 북장로교는 1913년 말 부산·경남지방에서 완전히 철수하게 된다.

 

장감연합공의회 조직

 

1905년에는 장감연합공의회가 조직되어 그동안 미온적이었던 감리교와도 선교지역 분담에 대해 협의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커다란 발전이었다. 일단 평안북도 지역에서 합의가 이루어졌다. 북장로교는 영변 지역을 북감리교에 이양하는 대신 북감리교는 안주지역을 북장로교 선교부에 이양했다. 각 선교부의 사역이 확대되고 새로운 선교사들이 내한하게 되자 선교지 조정의 필요성이 한층 높아졌다. 이런 필요에 따라 장로교와 감리교 간의 논의가 계속되었고, 1909년 9월 16일과 17일 양일간 모인 ‘지역분담협정위원회’에서는 주한 미국북장로교, 남장로교, 호주장로교, 캐나다장로교 등 4개 장로교 선교부와 미국북감리회와 남감리회 등 2개 감리교 선교부, 곧 6개 선교부가 참여하는 선교지 분담협정을 체결하기에 이르렀다.

 

이 협정은 선교부 간의 상호존중과 양보 차원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교계예양(敎界禮讓)’ 혹은 ‘예양협정(禮讓協定·Comity Arrangement)’이라고 불리고 있다. 몇 차례의 조정이 뒤따랐으나 대략 다음과 같이 분할되었다. 미국 북장로교는 강계 선천 평양 재령 서울 청주 안동 대구 등 평안도 황해도와 충청북도 일부 지역과 경상북도 지방을 맡았고, 미국 남장로교는 전주 군산 목포 광주 순천 등 전라도와 대전 부여 등 충청남도 일부와 제주도를, 캐나다장로교는 함경도 지방을, 그리고 호주장로교 선교부는 부산 진주 마산 거창 통영 등 경남지방을 맡았다.

또 미 북감리교 선교부는 영변 해주 평양 서울 인천 원주 영월 충주 원주 등 평안도 황해도 경기도 충북 강원도 일부지역을, 남감리회는 원산 서울 송도(개성) 춘천 등 함남 경기 강원 일부지역을 각각 담당하였다. 이상에서 본 바처럼 서울 평양 원산 등 세 도시 지역은 두개 이상의 선교부가 공동으로 선교한 곳이고, 나머지 지방은 대체로 중복을 피하도록 했다. 다른 교파들, 곧 침례교 성결교 구세군 그리고 성공회 등은 동참하지 않았고, 이들 교파는 자유롭게 선교하였다.

이 선교지 분할정책은 불필요한 마찰이나 재정적 인적 낭비를 줄이고 한국을 효과적으로 복음화하기 위한 선한 동기에서 시작되었으나 해당 선교회의 신학적 성격에 따라 각기 다른 신학을 이식하였고, 1930년대의 지방색에 의한 교권 대립, 해방 후 교회분열의 원인(遠因)이 되었다는 지적은 타당성이 있다.

(고신대 교수·역사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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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사 주한 외국선교부 선교정책

 

매서(賣書, 勸書人) 전도인이 한 농촌 가정을 방문하여 전도하고 있다

   

 

한국에 자리를 잡은 각국의 외국 선교부는 어떤 방식으로 선교활동을 펼쳐갔을까? 오늘의 한국교회 현상의 근원으로서 대단이 의미 있고 흥미로운 문제이다. 한국에 온 초기 선교사들의 가장 일반적인 방법은 순회 전도였다. 순행(巡行) 전도라고도 불리는 이 방식은 허드슨 테일러(J. H. Tayler, 1832-1905)와 중국 내지선교회(CIM)가 중국에서 시행했던 방식이었다. 순회전도는 선교지역을 답사하고, 개인전도 문서보급을 통해 신자들의 모임을 형성하여 교회를 설립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다.

 

1. 한국교회 자립 땐 지도권 넘기고 조용히 퇴진

 

선교사들은 한국어 선생이나 통역관, 안내자 등과 함께 필요한 행장과 기독교 문서, 의약품을 배부하고 전도의 기회로 삼았다. 또 선교부는

 

중국에서 순회전도를 한 허드슨 테일러

 

 

네비우스 선교정책을 창안한 헨리 벤 영국교회 선교회 총무

   

한국인 전도자를 채용하여 성경이나 기독교 문서를 보급하게 했는데, 이를 매서(賣書) 전도라고 하고, 이 일에 종사하는 이들을 매서인(賣書人) 혹은 권서인(勸書人)이라고 불렀다. 이런 활동을 통해 신자가 생겨나면 집회를 시작하고 교회가 설립되도록 후원하였다.

 

선교사들의 순회전도는 공개적전도가 가능해진 1887년 언더우드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서울에서 개성, 황해도 장연군, 평양, 의주 등을 순회한 일이 있다. 그 후의 게일, 베어드 등도 동일한 방식을 취했다. 매서 혹은 권서활동은 주한 선교부 외에도 대영성서공회, 스코틀랜드성서공회 그리고 미국성공회에 의해서도 추진되었고, 지역교회 설립에 크게 기여하였다.

 

2. 네비우스 선교회의 3(三自) 원리

 

 

John L. Nevius

   

선교사들이 입국한 지 5년여 지났을 때 효과적인 선교를 위한 정책 수립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내한 선교사들은 거의 전부가 20대 청년들로 선교 경험이나 목회 경험이 거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일 선교의 풍성한 결실을 얻게 된 것은 선교사들의 열정이 미숙을 극복했기 때문이다.

선교 경험과 동양사회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주한 선교사들은 18906, 중국 산 둥성 지푸에서 일하던 네비우스(John L Nevius, 1829-1893)를 초빙하여 10일간 선교정책 세 미나를 열었다. 북장로교 소속 선교사로서 1854년 이래로 중국에서 일했던 네비우스가 제시한 선교방법을 네비우스 정책이라고 부 른다. 이 정책은 첫째, 자치적이고(Self-governing) 둘째, 자립적이며(Self-supporting) 셋째, 자전하는(Self-propagating) 토착교회 설립의 원리, 곧 삼자(三自, 3S) 원리를 기본골격으로 하고 있다. 한 마디로 외국선교부는 일정 기간이 지나면 한국인 스스로 교회를 세워갈 수 있는 자생력을 갖게 해야 한다는 정책이었다.

 

사실 이 정책은 네비우스의 독자적인 제안이 아니었다. 이런 선교정책을 제안한 첫 인물은 영국교회선교회(CMS)의 총무이자 선교 정책가였던 헨리 벤(Henry Venn, 1796-1873)이었다. 벤은 1841년부터 CMS 총무로 1872년까지 31년간 일했는데, 이미 1854년에 이 정책을 입안하고 토착교회 지도자 훈련을 강조했다. 그는 선교회의 임무는 목회가 아니라 개척이라고 했고, 토착교회가 선교부를 의존하기보다는 자립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선교의 임무는 궁극적으로 토착교회를 설립하고 토착교회가 지도력을 행사하도록 해야 한다는 점에서 3자 원리를 제창했던 것이다.

 

현지교회가 세워지고 어느 정도 자치할 수 있는 환경이 되면 선교부는 모든 지도력을 현지교회에 이양하고 조용히 물러나야 한다고 보았는데, 이를 벤은 선교부의 안락사’(the euthanasia of a mission)라고 불렀다.

 

19세기 중엽 서구인들의 우월의식이나 식민주의 의식(colonial complex)을 고려해 볼 때 벤의 정책은 매우 혁신적인 것이었다. 구미 선교사들은 선교지에서 가능한 한 오래 지도력과 주도력을 행사하고자 했다. 그들은 아직 개화되지 못했고, 자치능력이나 자립여건도 갖추지 않았다고 본 때문이다. 적어도 1910년 에든버러에서 열린 세계선교협의회(IMC) 이전까지는 대부분 서양 선교단체가 아시아나 아프리카 지역 선교를 해외선교’(foreign mission)라고 하지 않고 이교국 선교’(Heathen mission)라고 불렀던 점은 이런 인식을 암시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벤의 주장은 상당한 비판을 받았으나 되돌아보면 그는 매우 탁월한 정책 가였다.

 

3. 네비우스의 정신이 사경회로 이어지다.

 

19세기 말엽부터 벤의 정책은 설득력을 얻기 시작했다. 중국에서 일했던 네비우스는 한국 교회에 적용될 수 있다고 보아 이 정책을 제안한 것이다. 네비우스가 특별한 점은 위의 3자 원리와 함께 성경공부를 강조하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찰스 클라크(C. A. Clark)네비우스 정책은 자립교회를 목표하는 것으로, 자력전도와 자치제도 및 자급운영으로 요약할 수 있지만 이 선교정책의 진정한 강조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성경을 연구하고 거기서 터득한 것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할 수 있도록 격려하는 성경공부에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런 정책이 사경회와 같은 방식으로 널리 적용되었고 한국 교회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래서 사무엘 모펫은 1910년 한국선교 25주년을 회고하면서 네비우스로부터 자립정신과 사경회라는 두 가지 원리가 배태되었다고 말한 바 있다.

 

네비우스를 초청한 선교정책 세미나에 참석했던 선교사들은 장로교 중심의 10여명에 불과했으나 이 정책은 1891년 북장로교 선교부 제1차 연례대회에서 공식 채택되었고, 18931월 주한 장로교 공의회 제1차 회의에서는 네비우스 원리를 바탕으로 10개 항의 보다 구체화된 선교정책을 수립했다. 이후 주한 외국선교부의 가장 대표적인 정책으로 채용되었다. 이 정책에 대한 비판적 인식이 없지 않으나 한국교회 형성에 끼친 지대한 영향은 부인하지 못한다.

 

4. 네비우스 선교전략(Nevius Plan)

 

(1) 한국교회 삼자원칙(Three-Self of Church)

 

자립(Self-Supporting) / 신자들이 스스로 마련한 예배당을 소유하고, 개 교회 목사에게 외국의 자금으로 사례를 지불하지 않는다.

자치(Self-Governing) / 문화권 내에서 실제적으로 변화를 일으키는 사람 들은 현지인 이어야 함을 강조하였다. 순회 집회 시에는 교인들을 훈 련을 시켜 훗날 구역, 지방, 전국의 지도자가 되게 한다. 스스로의 치리 권을 사용한다.

 

자전(Self-Propagating) / 먼저 믿는 자들이 교회를 조직하고 이들이 나아가 전도하여 지 교회를 세운다. 모든 신자들은 성경에 대하여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는 자가 되며, 동시에 자기보다 나은 다른 사람으로 부터 성경을 배우는 자가 된다.

 

(2) 개인 순회전도 원칙

 

먼저 선교사가 개인적으로 널리 순회하며 전도한다. 게일(J. S. Gale) 선교사는 1889년부터 1897년까지 8년 동안 계절을 불문하고 매번 다른 길로 한반도를 12번이나 돌았다.

 

(3) 성경중심의 원칙

 

사역의 모든 분야에서 성경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

 

(4) 전 교인 성경공부 원칙

 

모든 신자는 그룹 영수와 순회 조사(Helper) 아래서 조직적인 성경 공부를 해야 한다.(자연히 교회 지도자는 성경을 통달해야만 했다.)

 

(5) 상호협력의 원칙

 

선교사간의 협력과 다른 선교 단체와 협력하고 연합한다.

 

(6) 성령 의존의 원칙

 

성령님의 역사에 대한 믿음: 주님은 성령의 특별한 은사를 주셔서 선지자들, 교사들, 능력자들, 돕는 자들, 다스리는 자들을 필요한 대로 주실 것을 믿는다.

장날 장터 길목에서 복음을 외치고 있는 미국 선교사(1891?)

  

 

(7) 언어훈련의 원칙

 

현지인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기 위해 현지어 습득훈련을 강조 했다.

 

(8) 법적인 문제 불간섭의 원칙

 

선교사는 현지 교회나 성도의 현지법에 의한 법적인 문제에 대하여는 불간섭의 원칙을 지킨다.

 

(9) 경제문제의 원칙

 

민중의 경제문제는 가능할 경우에 한하여 자립정신을 해하지 않는 범위의 일반적인 도움을 준다.

 

이처럼 네비우스 선교전략의 핵심은 자립, 자치, 자전의 3자 원칙을 통한 토착교회의 설립이며, 이를 이루기 위해서는 철저한 성경공부를 통한 변혁이 일어나야 하며, 선교사들은 이 변혁의 조력자들로서 이를 섬기기 위해 현지 언어습득, 문화이해를 해야 하고(언어 훈련 강조), 궁극적인 변혁의 주체들은 현지인 지도자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현지인 지도자들을 세우기 위해서는 토착적인 교육 방법을 이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글쓴 이 / 이상규(고신대 역사신학 교수) 출처 /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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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적으로 세워지는 교회들

 

1884년 매서인 서상륜에 의해 순수하게 한국인에 의한 한국 최초로 세워진 교회로 알려진 황해도 소래교회, 후에 한옥으로 신축되었다.

 

 

  화란의 칼뱅주의 신학자인 보에티우스(Gisbertus Voetius, 1588-1676)교회의 정치’(Politica Ecclesiastica)에서 선교의 목적을 이방인의 회심(conversio gentium)과 교회의 설립(plantatio ecclesiae) 그리고 이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확증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라고 했다. 그가 말하는 선교 개념은 오늘 우리가 이해하는 것보다 광범위한 것이었다. 선교란 기독교 복음운동 전반을 의미했다. 결국 선교란 구도자를 회심하게 하고 교회를 설립해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었다. 보에티우스가 말하는 선교의 목적은 고전적인 가르침으로 인식돼 왔다.

 

1. 한국 최초교회, 황해도 소래교회

 

한국에서도 한국인의 구도적 활동과 함께 선교사의 내한으로 복음이 전파되자 차츰 회심자가 생겨나게 되었고, 여러 지역에 교회가 설립되기

 

1887년 세워진 한국 최초의 장로교회 서울 새문안교회

 

   

시작했다. 이미 만주의 한인촌에서 회심자가 생겨나고 교회가 설립되었다는 주장이 없지 않으나, 한국에서 최초의 교회는 1884년에 설립된 소래교회였다.

 

만주에서 존 로스에게 세례를 받고 한국 최초의 개신교 신자가 된 서상륜(徐相崙, 1848-1926)은 존 로스와 매킨타이어의 성경 번역 작업에 깊이 관여하였고, 1882년에 역간된 예수셩교 누가복음 젼셔예수셩교 요안 복음젼셔를 가지고 압록강변에서 전도활동을 전개한 바 있다. 1883년에는 이 복음서를 가지고 의주(義州)로 돌아왔으나, 위험을 느낀 그는 동생 서경조(徐景祚, 1852-1938)와 함께 외가가 있는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 송천으로 이주해 복음서를 반포하였다. 그 결과 이곳에 한국에서의 최초 교회인 송천교회(松川敎會) 곧 소래교회가 설립된 것이다.

 

이 교회 설립연도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지 않으나 한국의 최초 교회라는 점에는 이견이 없다. 서상륜과 동생 서경조는 소래교회의 중심인물로 활동했다. 소래교회가 예배당을 건축하게 되었을 때 언더우드는 선교부에서 건축기금을 후원하고자 했으나 소래교회 신자들은 우리가 우리의 예배당을 세우면서 외국인의 원조를 받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며, 후세에도 떳떳하지 못하다.”고 정중히 사양했다. 언더우드는 그 뜻을 존중하면서 서양의 등인 램프 5개를 교회에 기증하였는데, 그 불빛이 얼마나 밝았는지 온 동리를 밝혔다는 일화가 남아 있다. 소래교회가 설립된 후 의주, 정주, 강계 등 북한 지역으로도 기독교가 전파되고 교회가 설립되기 시작했다.

소래 교회의 서상륜 장로와 가족들 , 동생인 서경조 목사( 한국 최초의 목사 중 1)

 

 

 

2. 한국 교회 최초의 세례, 장로 피택, 성찬식

 

서울에서도 회심자들이 생겨났다. 1886711일 알렌의 어학선생이었던 노춘경(盧春京)은 언더우드에게 세례를 받았는데, 이것이 국내에서의 첫 세례였다. 그로부터 6개월 후인 1887123일에는 서경조, 정공빈, 최명오 등 세 사람이 서울에서 세례를 받았다. 또 송천에 있던 서상륜이 서울로 옮겨와 전도한 결과로 신자들이 생겨나게 되자 1887927일 서울에서 첫 교회가 설립됐다. 이것이 한국에서의 두 번째 개신교회인 새문안교회였다. 당시 신자는 14명이었는데, 다수가 서상륜의 전도로 신자가 된 이들이었다. 그 다음 주일 서상륜과 백홍준은 한국 최초로 장로로 피택되었다.

 

그해 1223일에는 7명의 세례교인이 참석한 가운데 성찬식이 거행됐는데, 이것이 첫 장로교 성찬식이었다. 곧이어 남대문교회(1887), 승동교회(1893), 연동교회(1894) 등 장로교회가 설립됐다.

1887년에 세워진 한국 최초의 감리교회 서울 정동제일교회

   

 

 

3. 기도처로 시작한 정동제일교회

 

서울 정동에 정주한 아펜젤러는 1887724일 배재학당의 박중상에게, 102일에는 배재학당의 한용경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이처럼 회심자들이 생겨나게 되자 공식적으로 교회를 설립하게 됐다. 그 이전에 이미 자신의 집에서 집회를 해왔으나 성경공부에 참여하는 인원이 증가하자 1887109베델 기도소로 개칭하였는데, 이것이 정동제일교회의 시작이었다. 이것은 한국에서의 세 번째 개신교회이자 첫 감리교회였다.

 

아펜젤러는 1016일에는 만주에서 온 매서(賣書) 전도자 최성균(崔成均)의 아내에게 세례를 베풀었는데, 이 여성은 한국에서의 첫 여성 수세자로 알려져 있다. 1023일에는 성명 미상의 강씨, 장점화, 한용경, 그리고 최성균 내외가 참석한 가운데 감리교 첫 성찬식이 거행됐다. 정동교회에 이어 아현교회의 전신인 서문 밖 애오개교회와 상동교회(1888. 12), 동대문교회와 중앙교회(1890) 등의 감리교회가 서울에 설립됐다.

1893년에 세워진 북한의 모 교회 장대현교회(널다리골교회)

   

 

4. 북한의 모()교회, 장대현교회

 

평양에는 18936월 장대현교회가 설립됐다. 북장로교 선교부에서 평양지부 개척자로 임명된 마펫(Samuel Moffett)은 한석진, 최치량 등 7명의 신자들과 평양 널다리골의 한옥에서 첫 예배를 드렸는데, 이것이 널다리골교회로 불렸다. 1896년에는 300여명의 교인으로 증가했고, 19006월에는 새 예배당을 건축하고 장대현교회로 개명했다. 이 교회를 선교사들은 평양중앙교회라고 불렀다. 평양과 평안도지방 첫 교회였다.

 

이 교회를 모체로 평양의 남문밖교회(1903), 창동 교회(1905), 산정현교회(1906), 서문밖교회(1909) 그 리고 외성교회(1911)가 설립되었다. 그 후 부산에서 는 부산진교회(1892), 초량교회(1893), 제일영도교회 (1894)가 세워졌고, 대구에서는 대구제일교회(1893) 가 설립됐다. 이렇게 전국적으로 우후죽순처럼 한국 땅에 교회가 세워졌다. 이러한 교회설립은 곧 한국 사회변화의 시작이었다. 세워진 교회들을 통해 학교와 병원과 양로원 등의 사회사업이 시작되었다.

  

글쓴 이 / 이상규(고신대 역사신학 교수) 출처 /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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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국 선교사들의 선교활동

 

1. 캐나다 장로교회의 한국 선교

 

미국 북장로교, 호주 빅토리아장로교 그리고 미국 남장로교에 이어 1898년에는 캐나다 장로교회도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했다. 캐나다장로교회는 1897년 한국 선교에 동참키로 결의하고, 18989월 푸트(W R Foote, 富斗一) 목사 부부, 그리어손(Dr. Robert G Grierson, 具禮孫) 의사 부부, 그리고 맥래(D McRae, 馬具禮) 목사를 한국에 파송했다.

 

이들은 함경도와 간도 지방을 중심으로 선교를 시작했고 후에는 원산 함흥 용정 등에 선교지부를 설치하고 전도, 교육, 의료 등 세 분야에서 활동했다. 캐나다 장로교회는 1925년 감리교, 회중교회와 연합해 캐나다연합교회(United Church of Canada)를 구성했는데, 당시 주한 캐나다 장로교 선교사 중 한 사람인 루터 영(Luther L Young, 榮在馨)을 제외하고는 다 이 연합에 찬성해 1925년 이후에는 캐나나 연합교회라는 이름으로 한국에서 활동했다.

 

비록 장로교회 선교사는 아니었지만 캐나다인으 로 내한한 첫 선교사는 게일(James S Gale, 1863-1937) 이었다. 캐나다 토론토대학 출신인 그는 동 대학 기 독교청년연합회(YMCA)의 파송으로 188812월 내한했다. 게일은 서울, 황해도 송천(소래), 부산에서 활동했고 후에는 북장로교로 이적해 원산, 서울 등지에서 활동했다.

 

게일은 한국 역사와 문화, 풍습 등 한국학 연구와 저술로 큰 업적을 남겼다. 게일의 뒤를 이어 18909월 내한한 의사 하디(Robert A Hardie, 河鯉永)는 부산 원산 등지에서 의사로, 전도자로, 협성신학교 교수로 활동했다. 특히 그는 1907년 전후 한국 교회 부흥의 중심인물로 활동했다.

 

189312월에는 캐나다인 매켄지(William J Mckenzie)가 독립선교사로 내한, 황해도 장연군 소래(松川)에 거주하면서 서경조의 도움을 받아 교회를 설립하는 등 헌신적으로 일했으나 18956233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죽음은 캐나다 장로교회의 한국 선교 동기가 됐다.

 

2. 미국 감리교회의 한국 선교

 

장로교와 함께 한국 선교를 주도한 교파는 감리교회다. 미국 북 감리회와 남 감리회가 선교사를 파송했다. 북 감리교회의 한국 선교는 1885년 입국한 아펜젤러로 시작되었음을 이미 언급한 바 있다. 프랭클린 마샬대학과 드루신학교에서 수학한 그는 188522일 북 감리교 파울러(Fowler) 감독에게 안수를 받았다. 이튿날 한국으로 향해 227일 요코하마를 거쳐 188545일 언더우드와 함께 내한했다. 그해 53일에는 스크랜턴(William B Scranton, 1856-1922) 내외와 스크랜턴의 어머니 메리 스크랜턴(Mary Fitch Scranton, 1832-1929)이 입국했다.

 

서울 정동에 정착한 아펜젤러는 영어학교를 시작으로 한국 선교에 나섰고, 정동감리교회와 배재학당 설립, 성경 번역, 신학교육, 문서 활동 등 다방면에서 한국 교회 형성에 기여했다. 1887년에는 존스(George Heber Jones)와 올링거(Franklin Ohlinger), 1889년에는 맥길(W B McGill)과 메타 하워드(Meta Howard)가 내한했다.

 

윤치호(1865-1945)

 

남 감리회는 1896년부터 한국 선교를 시작했 는데 윤치호의 역할이 컸다. 1888년 미국 밴더빌 트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한 그는 한국 근대인물 중 신학을 공부한 첫 인물로 알려져 있다. 윤치호는 남 감리회에 한국 선교를 요청했다. 그 결과 18951018일 중국 주재 선교사 헨드릭스(E. A. Hendrix) 감독과 리드(C. F. Reid, 李德)가 내한해 선교 가능성을 점검한 바 있다.

 

이듬해인 18965월 리드가 한국 선교사로 내한함으로써 남 감리교회의 한국 선교가 시작됐다. 1890년 내한했던 캐나다인 로버트 하디는 1898년에는 남 감리회로 이적해 목사 안수를 받고 의료활동보다는 복음 전도자로 활동했다.

 

3. 침례교, 성결교, 구세군의 한국 선교

 

장로교와 감리교 외에도 1890년에는 영국성공회가 콜페(C. J. Corfe, 高堯翰) 감독을 파송해 한국 선교에 동참했고, 미국 침례교 선교 단체인 엘라딩기념선교회는 폴링(E. C. Pauling), 가들라인(A. Gadelinre) 등을 한국에 파송했는데, 재정난으로 1900년 사역을 중단했다. 이들의 사업은 독립선교사였던 캐나다인 펜윅(Fenwick)에게 이양되고 후일 침례교회의 모체가 됐다.

 

성결교는 1907년 우리나라에 소개됐다. 감리교적 배경에서 생성된 성결교회의 모체는 동양선교회(Oriental Missionary Society)인데 카우만(Charles E. Cowman)과 킬보른(Ernest A. Kilbourne)에 의해 창립됐다. 이들은 190511월 일본 도쿄에 성서학원을 설립했는데 한국인 김상준과 정 빈이 1907년 이 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해 서울 종로 염곡에서 동양선교회 복음전도관을 설립했는데 이것이 한국 성결교회의 시작이 됐다.

 

구세군은 1908년부터 한국 선교를 시작했는데 한국에 온 첫 선교사는 호가드(R. Hoggard, 許加斗)였다. 그는 1908101일 입국해 한국 선교를 시작했다.

 

4. 한국 기독교 여성교육의 선구자 스크랜턴

 

1884년 스크랜턴(Mary F. Scranton, 1832-1909)은 미 감리회 해외 여선교부의 한국 파견 첫 여선교 사로 임명됐다. 스크랜턴은 52세라는 나이 때문에 한국행을 쉽게 결정짓지 못했다. 그러나 신앙심이 그를 움직였다. 스크랜튼은 의료 사업을 담당할 한국 파송 선교사로 임명된 그의 외아들 윌리엄 스 크랜턴(William B. Scranton)과 함께 한국으로 향했다. 1885620일 서울에 도착한 스크랜턴은 한 달 먼저 서울에 자리 잡은 아들의 집에 거하면서 선교사업 준비를 했다.

 

그러나 양인들을 불신하고, 서양을 두려워하던 한국인들은 파란 눈의 이방인들을 환영하지 않았다. “우리가 부녀자가 있는 집에 가까이 가기라도 하면 그녀들은 창문을 닫고 커튼 뒤로 숨어 버렸고 어린이들은 울부짖으며 달아났다.”고 본국에 보고했다. 당시 한국에서는 서양인들이 한국 아이를 살찌워 피를 빨아 먹는다는 등의 괴 소문이 횡행하고 있었다.

 

1886년 서울 정동에 여학교를 세웠지만 학생은 모으기 쉽지 않았다. 한국에는 여자는 교육할 필요가 없다.”라는 인식이 확고했고, 여성들의 외출은 밤에만 허락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콜레라까지 퍼졌다. 학교 건물이 완공되기 전인 5, 스크랜턴은 아들 집에서 첫 학생을 만났다. “영어를 배워 황후의 통역관이 되겠다.”는 꿈을 가진 관료의 소실(小室, )이었다. 그러나 첫 학생은 병으로 석 달 만에 학업을 접는다.

1886531일 개교한 한국 최초의 여성 교육기관 이화학당

 

6, 두 번째 학생으로 꽃님이라는 열 살배기 소녀가 찾아왔다. 가난한 여인이 딸을 부양할 수 없어 맡긴 것이다. 그러나 주변에서 처음에는 좋은 음식과 옷을 주지만 나중엔 미국으로 데려갈 것이라며 겁을 주자 곧 여인은 아이를 도로 데려가겠다고 했다. 꽃님이를 미국으로 데려가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작성한 후에야 아이를 두 번째 입학생이자 이화학당 최초의 영구학생(permanent pupil)으로 삼을 수 있었다.

 

1886년 여름 서울에 만연한 콜레라로 서대문 근처에 버려진 별단이라는 아이를 아들 의사가 치료했다. 별단이는 두 번째 영구학생이 됐다. 네 번째로 이화학당을 찾은 학생은 훗날 조선 최초의 여의사가 된 박 에스터(김점동)였다. 하나 둘 학생들이 늘어,

한국 최초 여의사 김점동(왼쪽)과 이화학당 학생들(1887)

 

1887년에는 학생이 11명이 되었다. 18862월 고종 23년에 이화학당(梨花學堂)’이라는 교명을 하사받았다. 이는 국가로부터 교육기관으로 인정됐다는 의미다.

 

스크랜턴은 교육이념을 가부장적 굴레 속에 고통 받는 여성들의 존엄성을 회복시켜 진정한 한국인으로 당당하게 서는 것을 제시했다. 이런 여성교육 목적은 파이크(L. G. Paik)의 저서 ‘The History of Protestant Mission in Korea’(1929)에서 볼 수 있다. “우리의 교육 목적은 한국 소녀들이 우리 외국 사람의 생활이나 의복, 환경에 적응하도록 변화시키는 데 있지 않다. 우리는 오로지 한국인을 보다 나은 한국 사람이 되게 하는 데 만족한다.” 양화진 선교사 묘지에 있는 스크랜턴 비문에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져 있다. “오늘 이 땅에 자유, 사랑, 평화의 여성교육이 열매 맺으니, 이는 스크랜턴 여사가 이화의 동산에 씨 뿌렸기 때문이다.”(*) 글쓴 이 / 이상규(고신대 역사신학 교수) 출처 /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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