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뉴톤 - 탕자처럼 돌아온
존 뉴톤은 1725년 경건하고 체험있는 그리스도인 - 어머니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뉴톤의 어머니는 대부분의 시간을 아들교육에 드렸습니다.
많은 기도와 눈물로 아들을 돌보며, 그를 목사로 기르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뉴톤이 여섯 살때 그녀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소천하였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뱃사람이었고 뉴톤의 어머니가 죽자 그 다음해에 곧바로 재혼을 하였습니다.
이 일 이후 뉴톤의 행실은 삐뚤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열 한 살때부터 아버지를 따라 항해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종교에 거의 관심이 없었으며, 쉽게 매우 나쁜영향들을 받아들였습니다.
한 번은 그의 친구와 같이 군함을 승선하기로 되어있었습니다.
그러나 뉴톤은 약속시간에 너무 늦게 나가게 되었고, 미리 떠난 배는 전복되어 그의 친구와 많은 사람이 죽게 되었습니다. 이 일을 통해 그는 자신의 생명을 보전하신 하나님에 대해 깨달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후로 그는 경건한 생활을 하고자 결심했습니다.
그는 자주 금식하며, 채식을 하고 많은 시간을 성경 읽기와 묵상 그리고 기도를 하며 하나님을 위한 시간으로 드렸습니다. 그러나 또 다시 그는 다시 밤새도록 술을 마시며, 창기들과 어울렸습니다.
항해 중 못된 선원들과 어울리며 악한 행실을 일삼았습니다. 자신의 자리를 찾지 못하고 방황을 하기 일쑤였습니다.
전쟁이 일어나자 뉴톤은 군인이 되어 군함에 승선케 되었고, 사악한 행동을 낙과 습관으로 삼았습니다.
얼마후 그는 탈영했다가 붙잡혀 중범죄자가 되기도 했습니다.
풀려난 후 그는 거만하게 죄를 지었으며, 다른 사람까지 유혹하고 타락시켰습니다.
후에 그는 15개월 동안 포로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포로생활동안 노예무역의 일꾼으로 일했습니다.
많은 시간들을 하나님을 저버린 행동 타락한 삶을 살던 그는 포로생활 기간동안 굶주림과 헐벗음 그리고 종과 같은 비천한 삶으로 인해 마음이 낮아졌습니다.
그는 그의 여가 시간을 주로 성경을 읽고 묵상하며 주님께 자비와 지도를 간구하는데 보냈으며, 신약 성경을 통독하면서 몇몇 구절들로 인해 충격을 받았습니다.
특히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에서 그 탕자가 너무나도 자기 자신을 예시(豫示)해 준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탕자를 받아들이는 아버지의 선하심, 그와 같은 아들을 맞으러 달려 나가는 모습은 죄인들을 돌이키시는 주님의 선하심의 충분한 설명이 되어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그는 계속하여 많은 기도를 드렸고 자신이 신자(信者)로 죽을 수만 있다면 먹을 것이 없어 죽는 것까지도 만족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아일랜드에 도착하기 전에 그는 복음의 진리와 그의 모든 필요를 충족시키는 복음의 정확한 적합성에 관하여 만족할 만한 증거를 얻게 되고 "하나님께서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려고 육체로 나타나셨다"는 지고(至高)한 원리를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한 놀라운 일을 이루셨고 나는 더 이상 불신자가 아니었습니다. 나는 즐거이 과거의 불경(不敬)을 버렸고 진지하고 기꺼운 마음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
이제 그는 잘못 보낸 과거의 삶을 뉘우쳤고 하나님의 말씀에 어떤 가치를 두었으며, 더 이상 과거와 같은 방탕자는 아니었으나 그의 생활은 쉽게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그의 입에서 나가는 말은 헛되고 어리석은 말이었으며 자주 마음속에서 송사가 있었지만 급히 타락의 길로 떨어져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 외에는 과거와 거의 다름없이 나빠졌다.
그는 끔찍한 욕설꾼이 되어 보통의 저주와 맹세의 말들로 만족하지 않고 매일 새로운 욕설을 만들어냈습니다. 더우기 노예선에서 노예와 같이 일했던 그가, 이제는 노예선의 선장이 되어 노예를 사고 팔았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도 하나님의 때가 이르렀습니다. 그는 노예무역을 끝내고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에 큰 폭풍우를 만났습니다. 배는 파선되었습니다.
그는 이러한 상황에서 '주여 우리에게 자비를'이라고 다급하게 말하였습니다.
그는 임박한 죽음 앞에 성경말씀을 떠올리며 자신의 영혼의 종말에 대해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직 완전한 죄의 깨달음이 없이, 절망과 조바심이 뒤섞인 침울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면 자신은 용서받을 수 없다고 생각하며 최악의 상황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회개치 못하는 뉴톤의 영혼을 불쌍히 여겼습니다.
배가 물의 위험에서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를 하나님의 손길로 믿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믿음의 기도를 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었습니다.
그의 기도는 까마귀 울음소리 같았지만, 주님은 멸시치 않고 그의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배가 파선된지 4주만에, 뉴톤과 선원들은 모두 구조되었습니다.
이 일을 통해 그는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어떠한 죄인이라도 영접해 주심으로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을 만날수가 있었습니다.
그의 삶에 큰 전환점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하나님의 종이 되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내가 수원(水源)으로부터 신선한 능력과 은혜를 계속 공급받지 않는 한, 나 스스로는 한 시간도 서 있을 수 없는 얼마나 불쌍한 존재인가 하는 것을 일깨워주셨습니다. "
마침내 그는 비인도적인 노예사업을 포기하고 1750년 2월 어머니의 옛 친구의 딸인 메리 케틀렛과 결혼합니다. 그는 이 결혼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합당한 때-주께서 그의 마음을 변화시키신 후-연결된 것으로 믿었습니다. 후에 그는 리버풀에서 조수(潮水) 측량사 직에 임명되었는데 그가 생각지도 못했던 측량 기사의 자리는 그가 원하던 자리였고, 그것은 그에게 많은 여가와 스스로의 방법대로 살 수 있는 자유를 주었습니다.
뉴톤은 자신에게 주어진 여가시간을 어떻게 하면 잘 이용할 수 있을까를 생각했고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를 작정하곤 이 주목적에 도움이 되는 외에는 아무 것도 추구하지 않기로 결심합니다.
이러한 목적에 대한 첫 시도는 신약과 그리이스어 역(譯) 구약성경(SeBt-uagint)을 이해할 수 있도록 그리이스어를 충분히 배우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어느 정도 진보를 이룬 후, 다음 해에는 히브리어를 배웠고 2년 후에는 시리아어 공부를 시작하여 성경을 깊이 연구하였습니다.
이 모든 연구들과 더불어 라틴어, 영어, 그리고 배에 있을 때 혼자서 배운 불어로 신학 부분의 최고 서적들을 계속 읽어 나갔습니다.
2∼3년 후에는 주로 글을 쓰는데 시간을 보냈고 성경 외의 다른 책들을 많이 읽을 시간은 갖지 못했습니다. 뉴톤은 "다만 우리를 핍박하던 자가 전에 잔해하던 그 믿음을 지금 전한다 함을 듣고 나로 말미암아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니라"라는 갈라디아서 1장 23∼24절 말씀을 묵상하던 중에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을 공중 앞에서 증거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겼고 이 희망 때문에 성경 원본을 계속적으로 연구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좀더 광범위하게 일할 수 있도록 목사의 직에 종사할 것을 희망하는 많은 이들의 요청에 따라 1758년 요크의 대감독에게 안수를 신청했으나 거절당합니다. 그 후 1764년에, 뉴톤은 오올리의 목사로 와달라는 제의를 받고 오올리 교구의 목사가 되어 15년간 목회사역을 감당하였으며, 자신의 마지막 일터에 대한 커다란 감회를 이렇게 말합니다.
"가장 무지하고 가장 비천하고 가장 무참히 버려진 노예 중의 하나인 내가, 아프리카 연안의 참흑한 생활로부터 건지워져 마침내 세계의 도시 중에서도 으뜸 가는 교구 목사로 지명된 것은 여기서 그러한 은혜를 증거할 뿐만 아니라 그 은혜의 특이한 실증과 기념으로 서기 위함이요, 역사 설교 그리고 저술을 통하여 널리 세계에 그 은혜를 나타내기 위함이다. 이것은 결코 내가 자격이 있어서 되었다고는 평가할 수 없는 사건이다. "
실제로 이러한 감회는 그의 생각 가운데 너무도 깊이 들어 있어서 어떤 곳에서든 단 하루도 그 기이한 사건을 어떤 방법으로든지 이야기하지 않고 지나는 법이 없었습니다.
다정하고 이야기하기 좋아하는 성격인 그는, 그의 집을 모든 계층과 교파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개방하여 아버지가 자녀에게 하듯 그의 친구들 특히 젊은 목사들 흑은 목사 지망생들에게 격려와 교훈을 주곤하였습니다. 1780년 그는 런던의 성 메리울노쓰 교회로 옮겨서 생을 마칠 때까지 28년간을성도들의 신앙성장을 위해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그는 목회사역을 하는 동안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든 성도들에게 끊임없이 회개를 촉구하였는데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그의 설교는 많은 이들에게 큰 감화를 주었습니다.
뉴톤이 팔십이 넘자 그의 친구들 중에서는 그가 공중 사역을 너무 오래 계속하는 것이 아닐까 하여 "그만 두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라고 물을 때 그는 음성을 높이며 단호하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멈출 수 없습니다. 아니! 어떻게 옛 아프리카의 신성모독자가 말을 할 수 있는데도 입을 다물 수 있다는 말입니까?"
1807년 12월 21일 죽기 한달 전에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죽는다는 것은 위대한 일입니다. 그리고 육체와 마음이 쇠할 때 우리 마음의 힘이요, 우리의 기업으로써 영원히 하나님을 모시고 있다는 것은 위대한 일입니다. 나는 내가 의뢰한 분을 알며 그 분이 내가 그에게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지켜 주실 수 있다는 것을 압니다. 이후로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니 그것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신 주께서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입니다. "
또 한번은 이렇게 말했다.
"더 밝은 빛, 더 큰 사랑, 더 큰 자유며, 이 후에 내 눈이 이 세상에서 눈 감을 때에, 나는 더 좋은 세상에서 눈을 뜨게 될 것을 기대합니다. 전능하신 자의 날개 그늘 아래 사는 것은 얼마나 좋습니까?"
그가 운명하기 전 수요일, 그의 마음이 평안하느냐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주님의 뜻으로 만족합니다"라고.
그는 추악하고 더러운 범죄 가운데서 자신은 구원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일생 간직하였습니다. 놀라운 은혜에 기초하여, 찬송가 405장 "나같은 죄인 살리신"(amazing grace) 등의 찬송가를 썼습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그리고 1807년 12월 21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