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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인물탐구 - 오직 예수만 드러내고 사라진 인물, 세례 요한

 

복음서는 의당 예수님께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 초점은 예수께서 어떤 분이신지 드러내는 것을 목표로 한다. 복음서들은 이 목표에 이르기 위해 각각 차별화된 특징이나 강조점을 띠고 있지만, 모든 복음서는 초반에 세례 요한을 다루면서 예수님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이 가운데 마가복음은 세례 요한을 가장 빠르게 등장시킨다.

복음서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기 위해 세례 요한을 매우 중요하게 다루고 있지만, 그중 마가복음은 사실상 세례 요한을 언급하는 것을 시작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다루고 있어 이번 달에는 세례 요한을 탐구해 보고자 한다.

 

경건한 부모·불임 가정에서의 출생

먼저, 세례 요한의 출생부터 살펴보자. 그는 제사장 가문의 경건한 부모 곧 사가랴와 엘리사벳에게서 태어났다. 이들 부부는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하는 하나님 앞에서 의인’이었다(눅 1:6). 대단한 믿음의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들은 스스로는 해결할 수 없는 불임의 절망스럽고 아픈 문제를 안고 있었고, 그러한 상황은 나이 들어 늙기까지 지속됐다.

임신이 불가능한 부부에게서 세례 요한이 태어났다. 요한은 육신적으로는 경건한 부모에게서 태어났으며, 불임의 절망을 넘어 하나님께서 초월적 능력을 행하심으로 태어난 것이다. 그의 출생에서 우리는 ‘출생은 하나님의 역사’라는 진리도 꼭 배워야 하지만, 믿음의 성장에는 절망적인 현실이 함께할 수 있다는 진리도 분명히 배워야 한다. 그것도 나이 들어 점점 늙어 가는 상황에서도 예외가 없음을 말이다.

 

메시아의 오실 길을 준비하는 자

우리는 세례 요한의 등장을 구속사의 맥락으로도 봐야 한다. 그의 등장은 오래전 구약 선지자들의 메시아 비전과 믿음의 기대가 이뤄지는 것이었다. 세례 요한은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성취되는 과정에서 등장한 것이다.

특히 세례 요한은 메시아의 오실 길을 준비하는 것을 자신의 사역으로 삼았다. 특히 회개를 촉구하는 메시지를 거침없이 선포함으로써 그렇게 했다. 그는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다’라는 섬뜩한 표현을 쓰면서 “독사의 자식들아…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고 선포했고,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고 경고했다(눅 3:7~9).

요한은 또 헤롯 왕의 악행에 대해 책망하기를 멈추지 않았고, 이 일로 결국 순교에 이른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가 이 땅에 존재하는 것에 대한 하나님의 뜻과 소명을 물어야 할 뿐 아니라, 그 소명을 따라 사는 것이 우리의 삶의 방향이라는 진리를 붙잡게 된다.

 

예수를 드러내고 사라진 인물

한편, 복음서들은 세례 요한에 대해 이사야서를 인용하면서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로 이해했는데, 이것은 무엇보다 그의 요단 강 근처에서의 회개와 세례를 두고 하는 말이다. 곧 요한은 하나님의 통치 앞에서 회개의 필연성을 간과하지 않았다.

더 나아가 자신은 ‘뒤에 오시는 이의 신발 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하면서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 3:30)는 고백은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자로서의 요한을 선명하게 보여 준다.

물론 그가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일을 기다리오리이까”(마 11:3)라고 예수님께 질문한 것에서 엿볼 수 있는 것처럼 흔들리는 모습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는 예수 오직 한 분만을 드러내고 사라진 인물로서 우리에게 각인되기에 충분하다.

마가복음 묵상을 통해 우리 모두 세례 요한처럼 예수만을 드러내는 제자의 길, 섬김의 삶을 향해 한 걸음 더 기쁘게 옮겨가기를 기대한다. 노예가 무엇인지 너무도 잘 알고 있던 시대 속에 스스로 종으로 오셔서 마침내 구속을 완성하시고 부활하신 예수만이 우리의 생명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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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인물 - 잊혀진 이름이지만 빛나는 믿음의 사람 수로보니게 여인

 

이번 달 본문에는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지만 그 가운데서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수로보니게 여인(막 7:24~30)을 탐구하고자 한다. 수로보니게는 팔레스타인 땅 북쪽 수리아 지역의 베니게를 일컫는 말로서 수리아와 베니게의 합성어다. 예수님께서 바로 그 지역의 해안 도시 두로 지방에 가셨을 때,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가 예수님을 찾아온다. 그녀는 자신의 딸에게서 귀신을 쫓아내 주기를 간구했고, 이 간구대로 예수님은 귀신을 쫓아내 주셨다. 

이야기 자체만으로도 놀랄 일이지만, 예수님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고려해 본다면 그녀의 등장은 더욱 놀랍다. 여자요, 귀신 들린 딸의 어머니요, 이름도 알려지지 않을 정도로 미미한 존재였으며, 심지어 이방인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복음이 무엇인지를 선명하게 드러내는 인물이 되었다.

무명의 여인 등장

우선 그녀의 이름에 대한 이야기를 좀 더 해 보자. 그녀는 무명이다. 성경에 이름이 소개되지 않았다는 것 자체가 그리 놀랄 일만은 아니다. 하지만 아무런 내용 없이 단지 이름만 소개된 사람들도 수없이 많다는 점에서,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의 이야기가 주는 메시지가 적잖이 충격적이라는 점에서 무명의 여인이라는 사실 자체에 대해 묵상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본다. 그녀는 어쩌면 당시 사회의 통념상 무시되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인정되는 인물이었는지 모른다. 아니면, 인생의 오랜 세월 동안 무시 받는 신분으로 살았기 때문에 이름이 잊혀 갔을 수도 있겠다.

바리새인과 무명의 여인의 믿음

한편 마가복음 6~9장의 문맥을 보면, 수로보니게 여인 이야기는 바리새인의 불신앙과 교만한 태도의 이야기들(막 7:1~23, 8:10~13) 사이에 위치한다. 이와 같은 구조를 통해 마가는 이 여인의 이야기를 훨씬 도드라지도록 만들고 싶었던 게 분명해 보이며, 이 때문에 독자들은 당시 배경 속에서 최고의 종교지도자인 바리새인과는 감히 비교할 수 없는 이름 없는 이방 여인의 믿음이 얼마나 빛나는지를 기억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가장 초라하고 불쌍하다 여겨지던 모습 속에서 믿음의 힘을 목도한다. 곧 당시 최고의 사람들이라 자타가 인정하던 바리새인과 가장 낮은 사람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었던 귀신 들린 딸의 어머니인 무명의 여인의 믿음이 역전되는, 마치 반역과도 같은 현장을 만나게 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모습이며,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 나라의 도전이다.

하나님은 믿음, 오직 믿음으로만 만날 수 있는 분이다. 그러면 이름조차 잊힌 슬픔을 넘어 아픔의 여인이었을 수로보니게 여인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만나게 한 믿음은 어떤 것인가? 이는 예수님과 여인 사이의 대화에서 드러난다. 여인이 자신의 딸에게서 귀신 쫓아 주기를 간구하자 예수님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고 답하셨다. 얼마나 치욕스러운 말인가! 하지만 여인은 오히려 자신이 이방인이요, 개로 비유되는 존재요, 상에서 떡 먹을 자격이 없는 자라는 자기 이해를 충분히 받아들인다.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죄인임을 인정한 수로보니게 여인

자신이 죄인임을 하나님 앞에서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는 믿음의 진수가 보인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막 7:15~16)이라는 위대한 진리를 존재론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 무명하고 슬픈 수로보니게 여인을 만난다.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기에,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는 것이 사는 길이라는 겸손의 여인을 통해 우리는 복음을 만난다. 그리고 개들도 오직 주인으로부터 나오는 것을 먹어야 한다며, 주님에게만 매달리는 여인을 통해 우리의 영혼을 살리는 생명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는 복음을 듣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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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인물 - 겸손과 눈물의 사람, 바울

 

에베소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를 읽으면서 우리는 지난 1월호에 이어 다시 사도 바울을 만난다. 그는 한때 온 힘을 다해 나사렛 예수와 그를 믿는 자들을 박해했고, 그렇게 하는 것이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믿음의 길이라고 믿었었다(행 8:3, 9:1~2, 참조 요 16:2).

 

 

하지만 무지와 오해에서 출발한 왜곡된 열심의 사람이었던 바울은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행 9:5) 하는 음성과 더불어 나타나신 주님을 만난 이후, 예수 때문에 박해를 받는 자리에도 기꺼이 나아가는 사람으로 바뀐다. 에베소교회가 그 증거물 가운데 하나이고, 에베소서가 그 증거문서다.

 

 

에베소교회와 바울의 관계는 참으로 특별하다. 에베소라는 도시 자체가 당시 아시아에서 매우 중요한 도시였을 뿐 아니라(그랜트 오스본은 『에베소서 주석』 13p에서 “로마를 제외하고 에베소는 바울이 방문한 도시 가운데 가장 중요한 도시였다”라고 기록), ‘온 아시아와 천하가 위하는’(행 19:27) 아데미 신전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그만큼 에베소에서 바울의 사역은 충분히 주목할 만하다.

 

 

사역적으로 보면, 바울에게 에베소는 세 번의 전도여행 중 두 번이나 방문한 곳일 뿐만 아니라(행 18:19~21, 19:1) 2~3년 동안 지속된 그 유명한 두란노 서원 강론이 있었던 곳이다(행 19:9~10). 또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해서 치유와 축사(逐邪)가 일어나 급기야는 마술사들이 은 오만이나 되는 분량의 책을 불사르는 일이 일어나기도 한 반면, 에베소 온 시민의 분노와 핍박에 직면했던 곳이기도 하다(행 19:11~41).

 

 

신학적으로 보면, 성령에 대해 가르쳤고(행 19:2~6) 하나님 나라를 강론했으며(행 19:8) 귀신의 정체를 드러내기도 했다(행 19:12). 이처럼 중요한 진리들이 드러난 곳이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에베소서를 통해 다음의 두 가지의 내용을 나누고 싶다. 첫째, 에베소교회 사역에는 바울의 눈물과 겸손 그리고 인내가 흥건하게 배어 있다는 점이다.

 

 

바울은 에베소교회 지도자들과 이별할 때가 되었을 때 그곳에서의 사역을 돌아보며 이렇게 말한다.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행 20:31).

“…내가 항상 여러분 가운데서 어떻게 행하였는지를 여러분도 아는 바니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 거리낌이 없이 여러분에게 전하여 가르치고”(행 20:18~20).

 

 

바울은 눈물의 사역자였고, 겸손과 인내의 사역자였다. 이러한 바울의 모습은 “여러분도 아는 바니”라는 말처럼 공개된 것이었고 에베소 지도자들이 다 아는 것이었다. 바울의 이와 같은 인물됨에서 우리는 사역자의 자세뿐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의 자세를 배우게 된다.

 

 

둘째, 눈물과 인내와 핍박의 고통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얼마나 복음에 집중했는지를 발견하게 된다는 점이다.

 

 

에베소서의 구조를 본문 내용을 따라 1~3장과 4~5장으로 나눌 때, 1~3장의 주제를 ‘두 기도’와 ‘하나의 십자가 복음’을 설명하는 구조로 볼 수 있다. 즉, 1장 15~23절의 첫 번째 기도와 3장 14~21절의 두 번째 기도, 그리고 그 사이에 놓인 2장 1절~3장 13절에서 십자가의 복음과 그 복음을 드러내는 일꾼으로 바울 자신을 언급해 결국 복음이 중심에서 빛나도록 하는 구조다.

 

 

물론 바울의 기도 역시 십자가를 통해 증명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십자가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지 아는 것을 간구하는 것이어서 그가 얼마나 복음에 집중하고 있었는지를 보여 준다.

 

 

한편, 바울은 그리 길지 않은 이 편지에서 자신이 갇혀 있음을 세 번이나 언급할 만큼(엡 3:1, 4:1, 6:20) 고난 가운데 있었다. 그는 자신의 고난과 어려움에 대해 그 어느 교회보다 잘 이해해 줄 곳이 바로 에베소교회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자신의 어려움에 대해 호소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바울은 마치 아무 일도 아닌 양 오직 십자가 복음에 집중하고, 복음이 가져오는 삶에 집중한다.

 

 

에베소서를 통해 이러한 바울의 모습을 발견하고, 우리와 성정이 같은 그를 통해 복음이 중심 되는 삶을 향해 세상이 흥분할 발걸음을 또 한 걸음 내딛는 도전을 받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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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서신] 디모데 전서로 본 사도 바울


계시와 편지 (딤전 1:1-2)

 

특별한 것은 평범한 것에서 위대해진다. 사도 바울은 특별한 인물이다. 왜
냐하면 그는 계시의 사람으로서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살기 때문이다. 사
도 바울은 이 사실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딤전 1:1)라는 말로 설명한
다. 이것은 사도 바울의 자의식이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라는 말에는 두
가지 생각이 들어있다. 첫째로 그는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서 자신의 모
든 것을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설명한다. 예수가 없이 바울도 없다. 바
울은 단지 예수와 관련되어 있을 때 의미가 있다. 그는 예수께 부속된 사람이
다. 예수 그리스도은 사도 바울의 중심이다. 둘째로 그는 예수 그리스도
의 "사도"로서 자신의 모든 것을 세상의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이해한다. 그
는 사도이다. 따라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머물지 않고 세상의 사
람들과의 관계로 나아간다. 세상은 바울의 영역이다. 이렇게 예수는 바울의
중심이기에 바울은 예수에게 한없이 집중하며, 세상은 바울의 영역이기에 바
울은 세상으로 한없이 전진한다.

그런데 바울이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가 된 것은 원인을 가지고 있다. 그것
은 "우리 구주 하나님과 우리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명령을 따라" (딤전
1:1) 되었다. 바울이 사도가 된 것은 자발적인 의지에 의한 것이 아니다. 그
것은 명령에 의한 것이다. 명령이란 타의적인 것이며 강요적인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바울의 사도직은 필연성을 가지고 있다. 이 명령은 "우리 구주 하나
님과 우리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명령이다. 이 명령의 발령자는 하나님
과 예수이시다. 여기에 하나님은 "구주"로, 그리스도 예수는 "소망"으로 묘사
된다. 하나님은 구원의 주체자이시고, 예수 그리스도는 소망의 성취자이시
다. 하나님께만 구원이 있고 예수께만 소망이 있다. 따라서 하나님 밖에서 구
원을 찾고, 예수 밖에서 소망을 찾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사도 바울은 구
원이신 하나님과 소망이신 예수의 명령을 따라 사도의 삶을 산다. 사도 바울
은 하나님에 의존하여 사는 사람이며 예수에게 사로잡혀 사는 사람이다. 그
는 계시의 사람으로서 특별한 인물이다.

또한 사도 바울은 평범한 인물이다. 왜냐하면 그는 편지의 사람이기 때문이
다. 바울에게 특별함은 평범함으로 표현되고, 계시는 편지로 표현된다. 그는
디모데에게 편지를 보냈다. 편지란 예나 지금이나 그 자체가 일상적인 것이
다. 그것은 세상 속의 일이며 인간 사이의 일이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편지를 보냄으로써 지극히 평범한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사도
바울은 사람의 문제를 멀리하지 않고 사람의 문제에 참여한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으로부터 사람에게로 다가간다. 그는 하나님 쪽에만 서 있지 않고 사
람 쪽으로 접근한다. 하나님에게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사람에게 관심한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있기 때문에 사람을 가까이 한다.

사람에 대한 사도 바울의 관심은 무엇보다도 수신자인 디모데에 대한 표현
에서 두 가지로 나타난다. 첫째로 사도 바울은 다른 사람과 친근한 관계를 맺
을 수가 있다. 이 때문에 그는 디모데를 "믿음 안에서 참 아들" (딤전 1:2)이
라고 부른다. 바울과 디모데 사이에는 나이가 상이하다는 차이점이 있지만 그
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이 동일하다는 공통점이 있다. 사도 바울은 이런 공통점
으로 말미암아 차이점을 극복하고 디모데를 믿음의 아들로 가까이 한다. 둘째
로 사도 바울은 다른 사람에게 놀라운 축복을 말할 수가 있다. "하나님 아버
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
다" (딤전 1:2).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복이 사람에게 주어지기를 기원한다.
그가 보기에 사람은 하나님의 복을 받을만한 대상이다. 세상과 사람은 사도
바울의 관심사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세상에서 살며, 사람과 함께 산다.
그는 편지의 사람으로서 평범한 인물이다.

목회서신의 머리에서 바울은 사도라는 점에서 특별한 사람이며 편지를 쓴다
는 점에서 평범한 사람임을 보여주고 있다. 그에게서 가장 특별한 것이 가장
일반적인 것으로 표현되었다.

 

길과 벗 (딤전 1:3)

길은 가기 위하여 있는 것이며, 벗은 나누기 위하여 있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마게도냐로 간다. 그는 가는 사람이다. 그는 끊임없이 간다.
때때로 그는 자신의 영적 중심지인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지만 대체로 자신의
복음 사역지를 향해 나아갔다. 소아시아로, 그리스로, 로마로, 그리고 스페인
으로. 지금 사도 바울은 마게도냐로 간다. 마게도냐는 그에게 잠시의 행선지
일 뿐이다. 그의 발은 멈추지 않으며, 그의 길은 끝나지 않는다. 바울은 자신
의 발에 삶을 실었고, 자신의 길에 힘을 드렸다. 그는 서지도 않고 쉬지도 않
는다. 바울의 발은 정지하지 않는 발이며, 바울의 길은 휴식하지 않는 길이
다. 그의 기쁨은 걷는 발에 있다. 만일 바울이 운동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고
통이 될 것이다. 그의 휴식은 가는 길에 있다. 만일 바울이 여행하지 않는다
면 그것은 노동이 될 것이다. 바울에게는 일하는 것이 휴식이며, 쉬는 것은
노동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가고 또 간다.

디모데는 에베소에 남는다. 바울은 마게도냐로 가면서 디모데를 에베소에
남겼다. 마게도냐로 가는 바울에게 에베소는 여전히 그가 책임져야 할 대상이
었다. 에베소에는 아직도 일할 것이 많이 남아있다. 사도 바울이 마게도냐로
떠날 때쯤에 에베소에는 많은 문제거리들이 발생하였다. 특히 다른 교훈을 가
르치는 자들이 생겼다. 그렇다고 해서 에베소는 내버려야 할 도시가 아니며,
에베소 교회는 팽개쳐야 할 교회가 아니다. 비록 그곳에 수많은 문제가 벌어
진다고 해도 그곳은 여전히 사역해야 할 대상이다. 에베소는 사도 바울에게
사랑과 관심의 대상이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에 관심과 사랑을 보이기 위하
여 디모데를 남겨두었다. 그는 디모데가 가야 할 길을 보여주었고, 해야 할
일을 알려주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길을 고집하면서도 타인의 길을 열어주
었다. 나의 길을 고집하는 사람은 남의 길도 책임져야 한다.

바울에게는 에베소를 맡길만한 동역자가 있었다. 디모데는 바울의 길에 함
께 가는 사람이다. 디모데는 바울의 생각을 닮고, 언어를 닮고, 인생을 닮은
사람이다. 디모데는 바울의 뜻에 동의할 수 있는 사람이며, 바울의 길에 동행
할 수 있는 사람이며, 바울의 삶에 동참할 수 있는 사람이다. 디모데는 바울
이 일을 맡겼을 때 의심하거나 거부하지 않고 맡아줄 동역자이다. 디모데는
바울이 에베소를 맡기면 에베소를 맡고, 골로새를 맡기면 골로새를 맡을 사람
이다. 그는 바울이 맡기는 곳에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문제가 있어도 기꺼이
맡을 사람이다. 디모데는 신뢰가운데 바울과 함께 일하는 동역자이다. 사도
바울에게는 이렇게 함께 길을 갈 수 있는 디모데가 있었다. 그러므로 사도 바
울은 자신의 길을 혼자서 가지 않고 더불어 간다. 바울이 가는 길에는 함께
가는 벗이 있었다. 그는 일을 분배하며 사역을 나눈다. 그는 홀로 모든 것을
다하지 않는다. 권면을 받는 동역자를 가지고 있는 바울은 행복한 사람이다.

디모데에게는 에베소를 맡겨주는 지도자가 있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를
신뢰하였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뜻에 디모데가 동의하게 하며, 자신의 길에
디모데를 동행시키며, 자신의 삶에 디모데를 동참시켰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
를 도전하고 자극하는 지도자였다. 그는 디모데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았
다. 디모데에게 일을 시키고 일하도록 만들었다. 사도 바울은 다른 사람이 주
님을 위해서 움직이도록 만드는 지도자이다. 역으로 말하자면 디모데에게는
의심하지 않고 일을 맡기는 사도 바울이 있었던 것이다. 디모데에게는 이렇
게 함께 길을 가도록 요청하는 바울이 있었다. 디모데는 자신의 뜻을 정리해
주는 지도자, 자신의 길을 결정해주는 지도자, 자신의 삶을 인도해주는 지도
자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디모데는 자신의 길을 혼자서 가지 않고 더불
어 간다. 권면을 하는 지도자를 가지고 있는 디모데는 행복한 사람이다.

사도 바울에게는 기꺼이 가야 할 길이 있고, 사역을 나눌 수 있는 벗이 있
다. 그의 길은 그의 벗이 함께 가는 길이며, 그의 벗은 그의 길에 함께 가는
벗이다. 


빛에 가까운 어둠 (딤전 1:3-4)


그림자는 항상 빛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있다. 양지와 음지 사이의 거리는 그
리 멀지 않다.

정말 두려운 것은 거짓 교훈이 바른 교훈에 즉시 이어진다는 것이다. 곁길
(샛길)은 언제나 큰길에서 갈라진다. 거짓 길은 바른 길에서 시작된다. 이런
현상은 사도 바울이 세운 교회에도 나타났다. 사도 바울이 세운 교회에 다른
교훈이 일어난 것이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를 떠나 마게도냐로 가려고 할 때
이미 거짓 교훈이 교회에 발생하였다. 어떤 사람들이 다른 교훈을 가르쳤던
것이다. 이것이 얼마나 신속한 일인지 사도 바울은 마게도냐로 떠나면서 디모
데에게 명령을 할 수밖에 없었다. 더욱 두려운 것은 때로 거짓 교훈이 바른
교훈보다 더 강한 매력을 발휘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바른 길을 가는 것을
싫어하고 다른 길에 곁눈질을 한다. 사람들은 정로 (正路)보다 사로 (斜路)
에 이상한 매력을 느낀다. 몰래 먹는 떡에서 야릇한 맛을 느끼듯이 몰래 배우
는 거짓 교훈에 홀딱 넘어가며 형언할 수 없는 쾌감을 누린다. 이 땅에 이렇
게 끊임없이 거짓 교사들이 등장하는 것은 사람들의 이와 같은 경향 때문일
것이다. 사람들에게 곁길을 향한 강한 동경심이 있지 않고야 어떻게 이처럼
계속해서 거짓 교사들이 등장할 수 있겠는가. 사도 바울의 시대에 그랬다면
우리 시대에는 오죽하랴.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어떤 사람들을 명하여 다른 교훈을 가르치지 말게
할 것을 권면하였다 (딤전 1:3). 그러면 다른 교훈은 무엇인가. 사도 바울 자
신이 이에 대하여 설명을 주고 있다. 그것은 신화와 족보이다. 이 두 말은 상
이한 것이라기보다는 보충적인 것이라고 보는 것이 좋겠다. 신화의 성격은 신
약성경에 네 차례 나오는 진술을 살펴볼 때 어느 정도 발견할 수 있다. 무엇
보다도 신화는 망령되고 허탄한 것이다 (딤전 4:7). 망령되다는 것은 신화가
경건하거나 신앙적이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마치 할머니가 손주에
게 들려주는 옛날 이야기와 같이 별로 믿을만한 것이 되지 못한다 (본래 헬라
어에서 "허탄하다"는 말은 나이 많은 노파와 같다는 뜻이다). 따라서 신화는
진리와 반대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불구하고 말세에는 사람들이 진리에서 돌
이켜 신화를 좇게 된다 (딤후 4:4). 왜냐하면 신화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로 교묘하게 꾸며지기 때문이다 (벧후 1:16). 참으로 놀라운 것은 심지어 유
대인들 가운데서도 신화가 횡행한다는 사실이다 (딛 1:14). 위에서 말한 바
와 같이 신화와 족보가 서로 보충적인 것이라면, 신화의 내용은 족보에 관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족보는 사람의 계보를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고, 창
조의 설화를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다. 아마도 본문에서는 후자를 말하는 것
이라고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셨
다는 것을 믿지 못하고 다른 창조신화를 따르는 처사를 의미한다. 이런 처사
는 결국 변론과 분쟁과 다툼을 불러일으킬 뿐이다 (딛 3:9).

밝은 빛에 가장 근접하는 어둔 그늘이 사람들을 유혹하고, 바른 길에서 즉
시 파생하는 거짓 길이 사람들을 유인하는 힘은 대단히 강렬하다. 신화와 족
보로 이루어진 다른 교훈의 매력은 보통 강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마약과 같
은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신화와 족보에 맛이 들면 거기에서 헤어나지 못
하고 착념하게 된다. 다른 교훈에 대한 사람들의 집착력은 상상을 초월할 정
도로 억센 것이다. 그것은 마약중독과 같은 것이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거
짓 교훈을 바른 교훈보다 더 열정적으로 고집스럽게 추구한다. 본래 악에 대
한 추구는 선에 대한 추구 보다 지독하다. 그래서 사람을 바른 교훈에 들어서
게 하는 일보다 사람을 거짓 교훈에서 벗어나게 하는 일이 훨씬 더 어려운 것
이다. 이런 까닭에 사도 바울은 디모데를 에베소에 남겨두어 사람들이 신화
와 족보에 착념하지 않도록 바로 잡을 것을 엄중히 명령했던 것이다 (딤전
1:4).

지금도 어두움은 빛에 가장 가까이 있다. 진리와 가장 가까운 곳에 거짓이
있다. 우리가 잠시라도 경성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진리
곁에는 항상 거짓이 있다.

 

(딤전 1:4) 인생을 걸다

우리는 무엇에 인생을 걸고 있는가? 우리의 심장을 뜨겁게 만들고, 우리의 언
어를 힘있게 만들며, 우리의 행동을 강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쓸
데없는 것을 추구하는 데 아까운 시간을 허비한다. 아무런 유익한 결론이 나
지 않을 것을 논의하면서 귀중한 인생을 낭비한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에게도
이런 위험이 접근하였던 것이다. 신화와 족보에 관하여 논쟁하느라고 많은 시
간을 써버리고 귀한 인생을 소모하는 불행한 일이 초대교회를 망치고 있었
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신화와 족보가 무가치한 천착 (穿鑿)을 낳는다는 것
을 알지 못하였던 것이다. 신화와 족보는 부질없는 공상을 일으키고 무의미
한 추측을 자아낸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런 것은 변론을 내는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여기에 언급된 변론이란 무익한 연구를 가리킨다. 이것은 얼마
나 어리석은 소치인가? 게다가 신화와 족보가 결론없는 연구를 야기시킬 뿐
아니라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지 못하는 것이라면 얼마나 쓸모
없는 것인가?

사도 바울이 신화와 족보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은 이것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
이다. 그의 초점은 "하나님의 경륜 (오이코노미아)"에 놓여져 있다. 하나님
의 경륜이란 무엇인가? 사도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여러 차례 "하나님의 경
륜"에 관하여 말한다. 하나님의 경륜은 은혜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래서 그
는 이것을 "하나님의 은혜의 경륜" (엡 3:2)이라고 설명한다. 그런데 하나님
의 경륜은 본래 비밀이었다. 그래서 이것은 "비밀의 경륜" (엡 3:9)라고 불린
다. 이 비밀은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취었던 것이다. 하지
만 하나님의 경륜은 시간 속에서 성취되었다. 그래서 이것은 "때가 찬 [시간
의 충만의] 경륜" (엡 1:10)이다. 하나님의 경륜은 인간의 구원을 위한 것이
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것이 "너희를 위하여" (엡 3:2; 골 1:25) 주어진
것이라고 역설한다. 하나님의 경륜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기 위
하여 그의 사역자들에게 주어진다 (엡 3:2; 골 1:25). 정리해서 말하자면 하
나님의 경륜은 은혜로 말미암아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영원한 세계에서
세우시고 시간의 세계에서 실현하시는 하나님의 우주적인 법칙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경륜은 누구든지 찾아서 깨닫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경
륜은 오직 믿음으로만 알게되고 이해된다. 이 때문에 사도 바울은 "믿음 안
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이라고 말한다. "믿음 안에 있는"이란 말은 "믿음 안
에서 발견되는" 또는 "믿음 안에서 인식되는"이라는 의미이다. 믿음 없이는
결코 하나님의 경륜이 발견되지 않으며, 믿음 외에는 결코 하나님의 경륜이
인식되지 않는다. 믿음 밖에서는 어떤 노력도 하나님의 경륜에 도달하는데 실
패할 뿐이다. 오직 믿음이라는 행동반경 안에서만 하나님의 경륜을 추적하고
파악하는 것이 가능하다.

사도 바울이 신화와 족보는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지 못한다
고 말하는 것은 그의 관심이 어디에 있는지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사
도 바울은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는 일에 인생을 걸었다. 그
는 은혜로 말미암아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영원한 세계에서 예정하시고
시간의 세계에서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우주적인 법칙에 인생을 맡겼다. 하나
님의 경륜이 사도 바울의 심장을 차지하고, 언어를 지배하고, 인생을 다스린
다. 그에게는 사는 이유도 분명하며 죽는 이유도 분명하다. 사나 죽으나 사
도 바울의 유일한 위로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경
륜을 이룰 수 있다면 사는 것에 연연하지 않으며 죽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경륜에 인생을 걸었다.

우리는 무엇에 인생을 걸고 있는가? 우리의 심장은 왜 뛰고 있으며, 우리
의 육체는 왜 움직이고 있는가? 왜 우리의 몸에 는 피가 흐르고 있으며, 왜
우리의 입에서 말이 나오고 있는가?

(딤전 1:5) 더욱 근본적으로


동력이 없으면 동작도 없다. 그래서 동작보다 더 근본적인 것은 동력이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가 어떤 사람들에게 명령을 하도록 에베소에 머물게 하였
다. 디모데의 명령은 다른 교훈을 가르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면 디모데가
이런 명령을 내리는 근본적인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사랑이었다. "경계
(명령)의 목적은 ... 사랑이거늘". 명령하는 위치에 서 있는 디모데는 무작
정 다른 교훈을 말하는 사람들을 추방하고 말살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아서는
안된다. 오히려 디모데가 사도 바울에게서 받은 명령의 지위는 다른 교훈을
말하는 사람들까지도 치료하고 회복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디모데에게
있어서 사랑은 권위보다 더욱 근본적인 것이다. 사랑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
니고서는 권위가 교회를 안전하고 안정되게 만들 수가 없다. 사랑은 교회를
움직이는 동력이다. 사랑을 동력으로 하여 교회가 동작한다. 이렇게 볼 때 교
회의 문제는 권위가 없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 기반을 둔 권위가 없는 것이
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야기를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또 한가지 질
문을 던지려는 듯이 보인다. 사랑이 명령하는 권위의 동력이라면, 사랑의 동
력은 무엇인가. 다시 말해서 사랑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사도 바울은 이 사랑
에 어떤 출처가 있다고 설명한다. 사랑은 "정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
이 없는 믿음으로부터" 나온다. 사도 바울은 사랑의 기원을 세 가지로 나누
어 말한다. 이 구절 외에도 사도 바울은 목회서신에서 자주 마음과 양심과 믿
음에 관하여 언급한다 (마음 - 딤후 2:22; 양심 - 딤전 1:19; 3:9; 4:2; 딤
후 1:3; 딛 1:15; 믿음 - 30번 이상 나옴). 이 세 단어는 짝을 이루어 사용되
기도 한다 (딛 1:1; 딤전 1:19). 사도 바울은 정확하게 알고 있다. 사랑에는
동력이 있다는 것을. 그가 말하는 사랑은 마음과 양심과 믿음에서 나오는 것
이기 때문이다. 마음은 외면과 반대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랑은 외면적인
동기로부터 실천되어서는 안된다. 사랑은 내면적인 이유에 의하여 실천될 때
가치가 있다. 일반적으로 양심은 상식을 비롯하여 기억력을 넘어 자의식에 이
르기까지 포괄적인 의미를 가지는 단어이다. 목회서신에서는 양심이 대체적으
로 옳은 것을 따르려는 비판적인 의식을 가리키는 것을 사용된다. 사랑은 반
드시 진위를 분별할 수 있는 양심을 동인으로 삼아야 한다. 믿음은 단순한 신
뢰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구원론적인 성격을 가지는 단어이다. 왜냐
하면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와 연관이 있는 것으로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
게 하기 때문이다 (참조. 딤전 3:13; 딤후 1:13; 3:15). 사도 바울이 말하는
사랑은 이와 같이 구원론적인 믿음을 출처로 삼는다. 사랑 그 자체가 동력이
지만, 사랑은 또한 동력을 필요로 한다. 참된 사랑은 마음과 양심과 믿음에
서 나온다. 우리가 자주 잊는 것은 사랑에 동력이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망
각증세 때문에 우리는 사랑보다 더 근본적인 것으로 들어가지를 못한다. 따라
서 우리의 사랑은 당연히 값싼 사랑이 되고 마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근본적인 것을 추구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는 사랑의 동력
인 마음과 양심과 믿음을 말할 때도 그것들이 무엇을 동력으로 삼고 있는지
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마음은 정결함을, 양심은 선함을, 믿음은 거짓이
없음을 동력으로 삼는다. 사랑이 내부에서 출원한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
라, 정결함을 근본성으로 삼는 내부에서 출원하는 것이 중요하다. 마찬가지
로 사랑은 선함에 바탕을 둔 양심과 거짓 없음에 바탕을 둔 믿음에서 출원해
야 하는 것이다. 아는가? 정결함과 선함과 거짓 없음은 오직 하나님의 속성이
라는 것을. 사도 바울은 근본적인 것을 추구하는 여정의 마지막 자리에서 하
나님을 발견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의 가장 궁극적인 동력은 하나님에게
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살 수 있을 뿐이다. 동력이 없으면 동작
도 없다. 사도 바울이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이다. 하나님이 없으면 우리도 없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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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인물 / 다윗, 결정권을 늘 하나님께 드린 인물

 

 

 그리스도인으로서 꿈에서라도 한번 들어보고 싶은 말이 있다면 다윗이 하나님께로부터 들었던 “내 마음에 합한(맞는-개역개정) 사람이라”(행 13:22, 참조 삼상 13:14, 16:7)는 말이다. 다윗은 성경 인물들 가운데 한 사람의 일생으로서 가장 자세하게 그려지고, 가장 많은 지면이 할애되어 기록된 인물이다. 이와 같은 특징만으로도 다윗이 그만큼 큰 인물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지만 다윗의 신앙 단층들을 한 겹씩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가 얼마나 위대한 인물인지를 다시 보게 된다.

 

그러나 사무엘하 본문을 찬찬히 읽다 보면 우리는 도무지 위대하다고 할 수 없는 다윗의 모습도 만나게 된다. 대표적으로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범하고, 충신 우리아를 사지로 몰아넣은 것을 비롯해(11장), 아들 암논이 딸 다말을 강제로 취한 다음 미워하고 버렸음에도 불구하고 특별한 조치를 취하지 못하고(13장),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맨발로 몸을 피해야 했으며(15장), 압살롬의 죽음 앞에 슬픔에 젖는 모습(18~19장) 등이 그렇다. 이런 이야기들은 솔직히 좀 생략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들기도 하고, 다윗의 그러한 모습이 수치스럽다는 생각도 들게 된다.

 

물론 다윗에 대한 진솔한 기록은 그의 삶 전체를 뿌리째 휩쓸고 지나감으로써 정서적이고 영적인 내면세계의 동요까지 고스란히 보여 주기 때문에 오늘날 수많은 사람에게 꼭 필요한 영적 거울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다윗이 정말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요, 이스라엘 민족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요, 메시아의 모형으로 우뚝 설 수 있을 만한 인물인가? 다윗과 대조되는 불순종의 인물 사울과 비교할 때, 더 큰 악을 저지르고 더 큰 고통과 절망과 수치를 겪었다고 할 수 있는 다윗이 왜 위대한 인물로, 인류 역사를 관통하는 하나님의 거대한 구원의 역사 가운데 우뚝 설 수 있었던 것인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다윗이 이런 평가를 받을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그가 왕이지만 ‘왕이 아니기’를 끝까지 붙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 삶의 최고 결정권을 하나님께 드렸다. 다윗의 행동을 제한하고 이끌어갔던 기준은 자신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었다. 다윗은 사울을 죽일 수 있는 여러 번의 기회 앞에서도 단 하나의 이유, 즉 ‘여호와께서 기름 부어 세우셨다’(삼상 24:6, 26:9, 16; 삼하 1:14)는 이유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았다. 결정권이 자신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다는 자신의 믿음을 보여 준 것이다.

 

그는 자신이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기는 했지만 진짜 왕은 오직 하나님이시며, 자신은 하나님의 종일뿐임을 고백했고, 그 고백대로 살았다. 블레셋이나 아말렉과의 전투를 앞두고 전쟁을 시작할 수 있는 타당한 이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먼저 ‘여호와께 묻는다’(삼상 23:2, 30:8; 삼하 2:1, 5:19, 23, 참조 삼상 22:10~15). 만일 어떤 사람이 결정을 하기에 앞서 누군가에게 물어본다면 그것은 그 사람이 자신보다 권위가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다윗은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 왕이시라는 것을 삶으로 보여 주었다.

 

결국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사람이란 인간적인 차원에서 착하다거나 도덕적으로 모범이 되는 사람이라는 뜻이 아니라, 왕은 오직 하나님뿐이시라는 진리를 따라 자신을 이해하고 살아가는 사람, 그래서 결정권을 늘 하나님께 드리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우리 모두 사무엘서가 가르치는 다윗의 모습을 통해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되는 은혜를 간구한다. 

- 날마다 솟는 샘물 박삼열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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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인물 /  ‘오직 믿음’의 사람 바울, 율법 완성의 길을 말하다

 

 

바울이 기독교와 교회에 끼친 영향은 그야말로 절대적이다. 그는 예수님이 왜 구세주가 되시는지, 십자가와 복음이 무엇인지, 구원이 어떻게 가능한지, 교회가 무엇인지, 은사와 직분은 무엇인지 등 기독교 교리는 물론, 그리스도인의 교회 및 신앙생활의 기둥들을 세웠다고 할 수 있다. 그중에서도 믿음으로 얻는 구원의 도리를 로마서만큼 잘 말하고 있는 책도 없을 것이다.

 

믿음의 길, 새로운 삶의 길

 

인간에게 가장 심각한 문제인 구원이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된다는 것을 가장 선명하게 말하는 로마서에서 바울은 율법의 폐기가 아니라 ‘율법의 완성’을 말한다.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까지 바울은 그야말로 율법 전문가였다. 율법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학자로서의 전문가일 뿐 아니라 율법을 지켜내는 의지와 행함에 있어서도 최고의 전문가였다(행 22:3; 갈 1:14; 빌 3:6 등). 그런 그가 ‘율법으로가 아니라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의인이 되고 구원을 얻는다는 것을 확신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가르치는 자가 됐다는 것은 참으로 놀랍다.

 

그런데 바울의 가르침으로 그리스도인들이 구원의 확신을 얻기도 하지만, 종종 행함의 문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잘 알지 못한 채 엉거주춤해 할 때가 적지 않다. 이런 이해와 상황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오직 믿음’이기 때문에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하다는 방종이라는 극단적 입장에서부터, 그래도 그리스도인으로서 요구되는 행함을 지켜야 한다는 새로운 율법주의적 입장까지 그 중간 어디쯤에 서 있게 하곤 한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12:1)라는 말씀으로 시작하는 이번 호 묵상 본문에서 바울은 이 문제에 대해 명쾌하게 가르친다. 율법이 무엇인지를 가장 확실하게 아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바울은 여기서 율법의 완성을 말한다.

 

그것은 ‘사랑’이다.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13:8). 바울은 이 가르침을 반복한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13:10).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이전 율법의 전문가로 있을 때조차 찾지 못했던 율법 완성의 길을 ‘오직 믿음’의 복음 안에서 발견한 것이다. 바울은 편지를 쓸 때마다 주로 전반부에서는 복음의 진리를 서술하는 교리를 다루고, 후반부에서는 행동해야 할 것들을 명령하는 윤리를 다룬다. 종종 이 둘 사이의 관계가 어떤 것인지는 오래된 신학적 난제로 지금도 첨예한 토론의 주제가 되고 있다.

 

하지만 바울에게 이 둘은 하나다. 로마서에서 이른바 윤리에 관한 내용을 시작하는 12장은 11장까지의 ‘이신칭의’ 교리에 기초해 있으며, 동시에 필연적 지향점이다. 이 윤리는 율법으로부터는 나올 수 없는 윤리다. 즉 교리는 윤리를 위한 것이고, 윤리는 교리 때문에 가능하다. 따라서 바울은 오직 믿음의 위대한 교리에서 율법의 완성을 말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율법의 완성은 사랑

 

바울은 그 자신이 이신칭의의 복음을 통해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영적 예배’(12:1)를 드린 인물이었다. 이 영적 예배는 로마서 12~15장을 통해 잘 드려진다. 이 4개의 장에서 바울이 말하는 영적 예배란 한마디로 ‘이웃을 향한 사랑’이다. 그리고 이것은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는 것’(15:5)이다. 바울은 누구보다 이 예수를 본받으려 한 사람(고전 11:1; 엡 5:1; 빌 3:17 등)이었다. 이 때문에 바울은 ‘하나님의 일을 자랑하는 것’이 주된 관심이기도 했지만 이것조차 오직 그리스도께서 역사하신 것이라고 말하는 인물이었다(15:17~19).

 

결국 바울이 말하는 ‘믿음으로’는 ‘사랑으로’를 뜻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본받아서 말이다. 이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바울은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로마교회 성도들의 이름을 적어도 30명 이상 외울 뿐 아니라, 그들의 형편들까지 속속들이 나열하면서 목자의 심정을 드러내는 것으로 로마서를 마무리한다. 로마서의 남은 본문 묵상을 통해 이신칭의의 은혜가 율법의 완성인 사랑의 길로 나타나기를 기도한다.

 

- 박삼열 목사 : 날마다 솟는 샘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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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인물 / 다니엘, 적진에서도 기도와 말씀이 답임을 외치다


 

다니엘은 한마디로 ‘기도와 말씀의 사람’이다. 그것도 적진 한가운데서 온몸으로 기도와 말씀의 신앙을 외친 인물이다. 기도와 말씀, 이 두 가지는 사도들이 결정한 초대 교회 성도들의 신앙생활의 방향(행 6:4)인 동시에, 오늘날 우리에게도 매우 중요한 신앙생활의 두 기둥이다. 이 때문에 다니엘을 탐구하는 것이야말로 우리에게 필요하고 중요하다.


다니엘, 기도의 사람

 

다니엘은 유다의 왕족 혹은 귀족 출신이었고(1:3), 흠이 없고, 용모가 아름다웠으며, 지혜와 통찰력이 있는 인물이었다. 또한 지식에 통달하고 학문에 익숙해 왕궁에서 일할 만한 자였다. 게다가 당대 최고의 학문인 갈대아 사람의 학문과 언어를 배웠고, 왕궁에서 훈련을 받았다(1:4~5). 결과는 괄목할 만했다. 바벨론 제국의 최고 인재들보다 10배나 뛰어났다(1:18~20). 이쯤 되면 얼마든지 기도에 그렇게 목숨 걸지 않을 법도 하다.

 

하지만 다니엘은 기도의 사람이었다. 조국 예루살렘과 하나님의 성전이 멸망하는 것을 두 눈으로 목격했고(1:1~2), 자신은 적국 바벨론의 포로가 된 현실(1:4)이 다니엘로 하여금 기도밖에는 할 것이 없는 인물로 준비시켰는지도 모른다.

 

한번은 느부갓네살 왕이 자신이 꾼 꿈을 알아내지 못하는 바벨론의 모든 지혜자들을 다 죽이라는 명령을 내린다. 다니엘은 이 일을 친구들에게 알려 기도하게 하고, 자신도 하나님께 엎드린다(2:12~18). 그리고 밤에 환상으로 임한 하나님의 대답을 듣는다.

 

다니엘에게 닥친 위기의 정점은 다리오 왕 시절 고관들이 일치단결해 빈틈없이 꾸민 계략이었다. 그는 사자 굴에 던져졌다. 그런데 이 덫이 놓이게 된 이유는 다름 아닌 기도였다.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6:10~12). 하지만 이 결정적 위기는 계략을 꾸민 자들이 사자의 밥이 됨으로써 극적이지만 필연적 반전으로 끝이 난다.

 

더 나아가 다니엘의 기도는 하나님께서 하실 일에 대한 마음 깊은 번민이었고(4:19, 7:28), 아픔이었으며(8:27), 동족의 죄로 인한 회개요 금식이요 슬픔이었다(9:3~20, 10:2~3). 기도가 만만한 게 아님을 단번에 느끼게 하는 대목이다. 그럼에도 확실한 것은 그리스도인이라면 기도의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는 결론이다.

 

주의할 것은 그 기도가 자기 자신을 드높이는 수단이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고 믿는 믿음의 반응으로서의 기도라는 점이다. 최고의 석학 다니엘이 자신의 대답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반복해 고백한 것이나(2:28, 30), 사자 굴에서 살아 나온 다니엘에 대해 “이는 그가 자기의 하나님을 믿음이었더라”(단 6:23)고 덧붙인 것을 보면 그렇다.

 

다니엘, 말씀의 사람

 

다니엘에게서 발견하는 또 하나의 특징은 그가 철저히 말씀의 사람이 되려고 했다는 점이다. 다니엘은 철두철미하게 하나님께 의논했고,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듣고서야 움직였다. 하나님의 뜻, 곧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그의 삶을 형성하는 근거요 이유가 됐다는 것이다(1:17). 이처럼 말씀의 사람은 반드시 기도와 함께 가는 것이다.

 

게다가 구약 시대에 환상이 하나님의 뜻을 말씀하시는 특별계시의 중요한 수단이라는 점에서 다니엘이 본 환상들은 결국 그가 말씀의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 준다. 물론 그가 환상에만 의존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다니엘은 ‘책’을 통해 여호와께서 말씀으로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알려 주신 그 연수를 깨달았다(9:2).

 

다니엘의 회개와 금식과 슬픔의 기도는 ‘주의 법도와 규례를 떠남’ 때문이었다(9:5). 이같이 율법을 소홀히 한 백성들의 죄를 다니엘은 더욱 사실적으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를 듣지 아니한 것’이라고 했고, ‘여호와께서 그의 종 선지자들에게 부탁해 우리 앞에 세우신 율법을 행하지 아니함’이라고 애통해 한다(9:10~11, 14).

 

다니엘은 말씀에 철저한 인물이었고, 기도로 온전히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복종시킨 인물이었다. 환상도 그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계시였다. 이런 다니엘의 모습을 보면서 기도와 말씀의 세계를 새롭게 열어가기를 간구한다.

 

- 날마다 솟는 샘물 박삼열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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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인물 / 디모데, 어떻게 그리스도의 좋은 병사가 됐는가?

 

 

우리는 사도 바울이 없는 신약의 교회를 도저히 생각할 수 없다. 그런데 이 위대한 사도 바울과 함께했던 여러 동역자들을 고려하지 않고는 충분히 그는 사역을 이해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 가운데 디모데는 단연 앞선 동역자다. 사도행전과 서신서들을 볼 때 바울의 사역에 디모데가 없었다면 신약의 교회는 세워질 수 없었다. 바울의 사역에, 또 초대 교회가 세워지는 데 있어 꼭 필요했던 인물인 디모데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이번 달에 묵상하는 디모데전·후서를 중심으로 디모데를 탐구해 보고자 한다.

 

디모데, 성경을 만나다

 

바울에게 ‘아들’로 불리는(딤전 1:2, 18; 딤후 1:2, 2:1; 참조 고전 4:17) 디모데가 성경에 처음 등장하는 곳은 사도행전 16장이다. 바울은 2차 전도여행 중 루스드라에 갔을 때, 거기서 ‘디모데라 하는 제자’(행 16:1)를 만났다. 이것이 ‘믿음 안에서 참 아들 된’ 디모데의 등장에 대한 첫 기록이다. 첫 기록에서 그를 ‘제자’라고 호칭한 것은 의아할 정도다.

 

우리는 사도행전의 이 본문에서 디모데에 관해 주목해야 할 또 하나의 기록을 보는데, 그것은 “디모데는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 있는 형제들에게 칭찬받는 자”(행 16:2)라는 것이다. ‘제자’라는 호칭에 이어 그를 아는 사람들에게 ‘칭찬받는 자’로 기록됐다는 점도 눈에 띈다. 디모데는 과연 무엇 때문에 그렇게 불릴 수 있었을까?

 

첫 번째는 그가 성경을 만났기 때문이다. 그 흔적을 디모데후서에서 발견할 수 있는데, 그는 어머니 유니게와 외할머니 로이스에게 영향을 받았다. 바울은 디모데후서의 중심 메시지이자 모든 사역자에게 매우 중요한 지침인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딤후 1:8)는 말씀으로 디모데에게 교훈한다. 영적 부담이 큰 이 도전을 바울은 디모데가 어머니와 외할머니로부터 믿음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근거로 제시한 것이다.

 

디모데가 받은 영향을 한마디로 말하면 바로 ‘구약’이다. 구약성경이 디모데에게는 예수님을 향한 믿음을 갖도록 할 뿐 아니라 제자요, 칭찬받는 자로 변하도록 한 것이 분명하다. 이런 점에서 디모데후서에서 바울이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 3:16~17)라고 쓴 것은 매우 적절해 보인다. 하지만 디모데가 ‘제자’요, ‘칭찬받는 자’가 될 수 있었던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디모데, 바울을 만나다

 

두 번째는 그가 사도 바울을 만났기 때문이다. 바울이 디모데를 동역자로 부른 곳이 바울의 2차 전도여행 때 들린 루스드라였는데, 이때 이미 디모데는 ‘제자’로 불리고 있었다. 그렇다면 디모데는 언제 제자가 됐을까? 바울의 1차 전도여행을 기록한 사도행전 14장을 보면, 바울이 루스드라를 방문해 복음을 전한다. 이때 제자들이 많이 생겨났는데, 디모데도 그 가운데 있었음이 틀림없다.

 

“복음을 그 성에서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으로 돌아가서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행 14:21~22). 그러므로 디모데가 ‘제자’요, ‘칭찬받는 자’가 됐던 것은 바울을 만나 그를 통해 복음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바울은 디모데전·후서에서 디모데에게 십자가 복음을 반복해 강조할 수 있었고(딤전 1:3~20, 2:5, 6:3; 딤후 1:10, 2:8~13 등), ‘내게 들은 바’ 혹은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딤후 1:13~14), 곧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고난을 받으라고 도전할 수 있었다. 이 도전을 받아들여 디모데는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딤후 2:3)로 섰던 것이다.

 

우리는 디모데를 통해 말씀의 중요성을 재확인하는 동시에 영적 지도자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발견한다. 복음은 반드시 사람, 그리스도의 제자 된 믿음의 사람을 통해 또 다른 사람에게 전해진다. 교회는 바울과 디모데처럼 복음을 받고 전하는 일꾼들을 통해 세워지고 이어진다. 디모데전·후서를 묵상하는 동안 성경을 향한 뜨거운 마음이 일어날 뿐 아니라, 복음을 모르는 또 다른 사람이 제자 되도록 섬기는 하나님 나라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기도한다. 

 
- 날마다 솟는 샘물 박삼열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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