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의주요인물  - 총명한 미모의 여인 - 아비가일

 

 

 

인적사항

1. 아비가일은 내 아버지가 기뻐하심이라는 뜻

2. 마온의 부호 나발의 아내

3. 나발이 죽은 후 다윗의 아내가 됨

시대적 배경

다윗이 사울의 칼을 피해 광야로 유랑하던 시기 대략 B.C 11세기 초기로 추정됨

생 애

1. 행실이 악한 나발과 결혼하여 남편을 잘 섬김.

2. 도움을 청하는 다윗을 모욕하여 화를 자초한 남편 대신 다윗을 찾아가 용서를

    구함

3. 하나님의 심판으로 남편이 죽은 뒤 다윗의 아내가 됨 (삼상25:39-42)

성품과 행적

1. 격노하여 납말을 치러 오는 다윗 일행을 맞아 생면부지의 다윗에게 은총을 구하고

     그의 발걸음을 돌이키게 한 것을 볼 때 지혜롭고 판단력이 뛰어날 뿐 아니라 언변이

    능한 여자임을 알 수 있다.

2. 많은 물질을 의지하여 거만하고 방자한 태도를 보이는 남편을 잘 섬기며 생명이

    위험을 당할 때도 남편을 보호하기 위해 끝까지 노력한 것은 아내로서의 덕망을

    갖춘 여인임을 보여준다.

평가 및 교훈

1. 격노하여 남편 나발을 죽이려는 다윗 일행을 맞아 떡과 음료로 접대하며 그 잘못을

     눈감아 주도록 공순하게 간청한 아비가일은 그 지혜로운 행위로 나발의 생명뿐 아니라

     그의 모든 가산을 지켰다. 이처럼 지혜로운 여인은 그 집을 세운다(잠14:1)

2. 물질을 매개로 하여 맺어진 지혜롭고 용모가 뛰어난 아비가일과 행사가 악한 나발의

    결혼은 결국 파국을 맞을 수 밖에 없었다. 여기서 사랑과 인격보다 물질이 앞선 바람직하지

    못한 결혼의 불행한 결말을 볼 수 있다.

3. 다윗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자비를 구한 아비가일의 유순한 언행은 다윗의 격한 분보를

    가라앉히기에 충부했다. 이처럼 유순한 태도는 노를 그치게 한다(잠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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얀 후스 - 세계선교 잉태한 종교개혁 선구자

 

 

 

 

 

블타바(몰다우)강의 정경이 아름다운 선율로 수놓아진 스메타나의 ‘나의 조국(MA VLAST)’은 체코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널리 사랑받고 있는 얀 후스(Jan Hus)와 그의 사상,그를 따르는 후스파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교회사를 세밀하게 검토하노라면 16세기 종교개혁이 이루어지기 전에도 타락한 교회를 개혁하고자 했던 개혁운동들이 끊임없이 이어졌음을 알 수 있다. 근래의 교회사 연구가들은 이 교회개혁운동들을 ‘첫번째(과격한) 종교개혁운동’ 이라고 부른다.

 

이 중 가장 대표적인 개혁운동은 13세기 발덴저와 15세기 보헤미아의 종교개혁운동이다. 이같은 개혁운동들은 교회사 가운데서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했다.

 

오늘 소개할 후스도 1415년 7월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이단자로 낙인찍혀 화형당한 체코인으로만 알려져 있을 뿐이다. 얀 후스는 1370년 남보헤미안 후시네크 지방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사제의 길에 들어서서 프라하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을 연구하였다.


그가 사제가 되고자 했던 동기는 그 당시 농부의 아들들이 그랬듯이 안정된 생활기반을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는 신학수업 과정에서 철저한 변화를 경험하고 열정적인 진리의 탐구자요 신학자로 거듭났다. 체코 종교개혁의 아버지로 일컬어지고 있는 얀 밀리치 크로메리즈와 마티아스 본 야노프가 후스의 신학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결정적으로 후스에게 영향을 미친 사상가는 영국 옥스퍼드 대학의 교수였던 존 위클리프(1330∼1384)였다. 위클리프는 성경에 입각해 기존 교회질서에 준열한 비판을 가하고 철저한 교회개혁을 부르짖었던 종교개혁의 선구자였다. 영국유학에서 돌아온 후스는 1398년부터 프라하대학 철학부에서 강의했다.


1402년부터는 3000명가량이 모였던 프라하 베들레헴성당에서 설교자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는 체코 선현들의 개혁 전통에 굳건히 선 민족 설교자로서의 면모를 과시했다.

 

당시 유럽 문화의 중심지였던 프라하에는 황제 카를4세가 자신의 이름을 따 독일어로 교육하는 대학을 세워 독일어와 독일문화가 헤게모니를 쥐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주체적인 신앙고백과 모국어를 중심한 신학운동을 전개한 후스의 개혁운동은 체코 민중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후스는 1409년 프라하대학 총장에 취임한다.
그는 체코어 라틴어로 수많은 글을 남겼는데 설교만 해도 무려 3000편이 넘는다.
그의 설교는 평민들로부터 왕족과 귀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청종했다.
그의 교회개혁과 사회윤리적 내용을 지닌 설교는 청중을 열광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후스의 비판이 중세교회의 치부였던 면죄부 판매에까지 이르자 교황,왕,귀족,교회지도자들 등 기득권층이 강력하게 견제했다.


후스는 프라하에서 모든 교회활동을 금지당하는 처분을 받았다.
후스는 부패한 교회의 기득권 세력과 타협하지 않고 남뵈멘지역으로 가 들판과 광장에서 민중을 향해 진리를 설교했다. 이 무렵 후스가 로마교회의 잘못을 지적하기 위하여 라틴어로 쓴 대작이 ‘교회론(De ecclesia)’이다.

 
후스를 제거하기 위한 음모는 교황권 분열에 직면하여 ‘교회의 개혁과 일치’를 명분으로 콘스탄츠에서 열렸던 공의회를 기점으로 구체화된다.


공의회는 이단자로 처형된 위클리프와 후스 사상과의 관련성을 조사한다는 명분으로 후스를 불렀다.

 

후스의 친구들은 공의회가 명분으로 내세우는 교회일치와 개혁의 이면에는 커다란 음모가 도사리고 있음을 간파하고 후스가 콘스탄츠에 가는 것을 한사코 만류하였다.

 

그러나 후스는 교회 지도자들과 맞붙게 될 논쟁에 대비해 그의 입장을 철저히 준비한 후 콘스탄츠로 향한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보헤미아왕을 겸하고 있던 지그문트 황제도 그의 신변과 언론의 자유를 보장해주는 편지를 써주기까지 한다. 그러나 후스는 도착하자마자 감옥에 갇히고 만다.


공의회를 주관한 교황청측에서는 후스의 교회비판을 무조건 철회하라고 요구했다.
후스의 신변안전을 보장했던 황제 지그문트는 기회주의적으로 추기경들의 눈치를 살피다가 마침내는 후스를 처벌하라는 입장에 서게 된다.

 

후스에게는 주장을 내세우거나 대화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도리어 후스가 쓰지도 않았던 글들을 빌미로 법정에 고소당하고 이단자로 판결받았다.
후스는 끈질기게 그가 주장했던 입장을 철회하도록 강요받았지만 사람보다는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에 대한 순종의 길을 선택했다.

 

마침내 그는 1415년 7월6일 콘스탄츠의 화형대에서 이단자의 누명을 쓴 채 죽어갔다.
후스와 같은 신학적 입장에서 후스의 입장을 대변했던 히로니무스 폰 프라하도 같은 이유로 같은 방법에 의해 같은 장소에서 화형대의 연기로 사라졌다.


지금도 독일 콘스탄츠에는 두 사람의 이름이 새겨진 큰 바위가 그 날의 비정한 사건을 말없이 증언하고 있다. 후스의 생애와 사상은 한마디로 진리에 대한 탐구와 열정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가 화형되기 전 남긴 글은 그가 전 생애를 통해 추구했던 진리가 무엇인지를 증언하고 있다.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여, 진리를 찾으라! 진리를 들으라! 진리를 배우라! 진리를 사랑하라! 진리를 말하라! 진리를 지키라! 죽기까지 진리를 수호하라! 그것은 진리가 너를 죄와 악마와 영혼의 죽음과 마침내 영원한 죽음으로부터 자유롭게 하기 때문이다”

 

후스의 처형 뒤 후스의 사상과 뜻을 이어받은 강력한 신앙공동체인 보헤미안 동포단이 형성돼 이들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부활의 복음이 체코 민중의 가슴에 심어졌다.


보헤미안 동포단은 경건주의의 모태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세계선교의 아방가르드 역할을 했다.

1432년 후스파 교도들은 공의회가 열리는 바젤에 와서 후스가 지향했던 종교개혁의 정당성을 변호하고 그 정당성을 인정받았다.


후스는 단순히 교회개혁의 선구자로서 뿐 아니라 주체적인 민족정신을 고양시킨 애국자로 지금까지 체코인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다.

 
1915년 후스 사후 500년을 맞아 프라하 구시가 중심부에 후스의 기념비가 세워져 이곳을 찾는 이들에게 민족 주체성과 독립정신을 증언하고 있다.

 
◇ 필자약력

△한국신학대학 신학과 졸업

△연세대 연합신대원 석사

△스위스 바젤대학 신학박사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교육원장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 상임총무
 
김원배 (기독교장로회 총회교육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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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뉴톤 - 탕자처럼 돌아온  


 

존 뉴톤은 1725년 경건하고 체험있는 그리스도인 - 어머니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뉴톤의 어머니는 대부분의 시간을 아들교육에 드렸습니다.


많은 기도와 눈물로 아들을 돌보며, 그를 목사로 기르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뉴톤이 여섯 살때 그녀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소천하였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뱃사람이었고 뉴톤의 어머니가 죽자 그 다음해에 곧바로 재혼을 하였습니다.
이 일 이후 뉴톤의 행실은 삐뚤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열 한 살때부터 아버지를 따라 항해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종교에 거의 관심이 없었으며, 쉽게 매우 나쁜영향들을 받아들였습니다.

한 번은 그의 친구와 같이 군함을 승선하기로 되어있었습니다.


그러나 뉴톤은 약속시간에 너무 늦게 나가게 되었고, 미리 떠난 배는 전복되어 그의 친구와 많은 사람이 죽게 되었습니다. 이 일을 통해 그는 자신의 생명을 보전하신 하나님에 대해 깨달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후로 그는 경건한 생활을 하고자 결심했습니다.

 

그는 자주 금식하며, 채식을 하고 많은 시간을 성경 읽기와 묵상 그리고 기도를 하며 하나님을 위한 시간으로 드렸습니다. 그러나 또 다시 그는 다시 밤새도록 술을 마시며, 창기들과 어울렸습니다.
항해 중 못된 선원들과 어울리며 악한 행실을 일삼았습니다. 자신의 자리를 찾지 못하고 방황을 하기 일쑤였습니다.

 

전쟁이 일어나자 뉴톤은 군인이 되어 군함에 승선케 되었고, 사악한 행동을 낙과 습관으로 삼았습니다.
얼마후 그는 탈영했다가 붙잡혀 중범죄자가 되기도 했습니다.
풀려난 후 그는 거만하게 죄를 지었으며, 다른 사람까지 유혹하고 타락시켰습니다.
후에 그는 15개월 동안 포로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포로생활동안 노예무역의 일꾼으로 일했습니다.
많은 시간들을 하나님을 저버린 행동 타락한 삶을 살던 그는 포로생활 기간동안 굶주림과 헐벗음 그리고 종과 같은 비천한 삶으로 인해 마음이 낮아졌습니다.

 

그는 그의 여가 시간을 주로 성경을 읽고 묵상하며 주님께 자비와 지도를 간구하는데 보냈으며, 신약 성경을 통독하면서 몇몇 구절들로 인해 충격을 받았습니다.


특히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에서 그 탕자가 너무나도 자기 자신을 예시(豫示)해 준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탕자를 받아들이는 아버지의 선하심, 그와 같은 아들을 맞으러 달려 나가는 모습은 죄인들을 돌이키시는 주님의 선하심의 충분한 설명이 되어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그는 계속하여 많은 기도를 드렸고 자신이 신자(信者)로 죽을 수만 있다면 먹을 것이 없어 죽는 것까지도 만족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아일랜드에 도착하기 전에 그는 복음의 진리와 그의 모든 필요를 충족시키는 복음의 정확한 적합성에 관하여 만족할 만한 증거를 얻게 되고 "하나님께서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려고 육체로 나타나셨다"는 지고(至高)한 원리를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한 놀라운 일을 이루셨고 나는 더 이상 불신자가 아니었습니다. 나는 즐거이 과거의 불경(不敬)을 버렸고 진지하고 기꺼운 마음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

 

이제 그는 잘못 보낸 과거의 삶을 뉘우쳤고 하나님의 말씀에 어떤 가치를 두었으며, 더 이상 과거와 같은 방탕자는 아니었으나 그의 생활은 쉽게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그의 입에서 나가는 말은 헛되고 어리석은 말이었으며 자주 마음속에서 송사가 있었지만 급히 타락의 길로 떨어져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 외에는 과거와 거의 다름없이 나빠졌다.

 

그는 끔찍한 욕설꾼이 되어 보통의 저주와 맹세의 말들로 만족하지 않고 매일 새로운 욕설을 만들어냈습니다. 더우기 노예선에서 노예와 같이 일했던 그가, 이제는 노예선의 선장이 되어 노예를 사고 팔았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도 하나님의 때가 이르렀습니다. 그는 노예무역을 끝내고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에 큰 폭풍우를 만났습니다. 배는 파선되었습니다.


그는 이러한 상황에서 '주여 우리에게 자비를'이라고 다급하게 말하였습니다.
그는 임박한 죽음 앞에 성경말씀을 떠올리며 자신의 영혼의 종말에 대해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직 완전한 죄의 깨달음이 없이, 절망과 조바심이 뒤섞인 침울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면 자신은 용서받을 수 없다고 생각하며 최악의 상황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회개치 못하는 뉴톤의 영혼을 불쌍히 여겼습니다.
배가 물의 위험에서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를 하나님의 손길로 믿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믿음의 기도를 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었습니다.


그의 기도는 까마귀 울음소리 같았지만, 주님은 멸시치 않고 그의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배가 파선된지 4주만에, 뉴톤과 선원들은 모두 구조되었습니다.

 

이 일을 통해 그는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어떠한 죄인이라도 영접해 주심으로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을 만날수가 있었습니다.
그의 삶에 큰 전환점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하나님의 종이 되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내가 수원(水源)으로부터 신선한 능력과 은혜를 계속 공급받지 않는 한, 나 스스로는 한 시간도 서 있을 수 없는 얼마나 불쌍한 존재인가 하는 것을 일깨워주셨습니다. "

 

마침내 그는 비인도적인 노예사업을 포기하고 1750년 2월 어머니의 옛 친구의 딸인 메리 케틀렛과 결혼합니다. 그는 이 결혼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합당한 때-주께서 그의 마음을 변화시키신 후-연결된 것으로 믿었습니다. 후에 그는 리버풀에서 조수(潮水) 측량사 직에 임명되었는데 그가 생각지도 못했던 측량 기사의 자리는 그가 원하던 자리였고, 그것은 그에게 많은 여가와 스스로의 방법대로 살 수 있는 자유를 주었습니다.

 

뉴톤은 자신에게 주어진 여가시간을 어떻게 하면 잘 이용할 수 있을까를 생각했고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를 작정하곤 이 주목적에 도움이 되는 외에는 아무 것도 추구하지 않기로 결심합니다.

 

이러한 목적에 대한 첫 시도는 신약과 그리이스어 역(譯) 구약성경(SeBt-uagint)을 이해할 수 있도록 그리이스어를 충분히 배우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어느 정도 진보를 이룬 후, 다음 해에는 히브리어를 배웠고 2년 후에는 시리아어 공부를 시작하여 성경을 깊이 연구하였습니다.

 

이 모든 연구들과 더불어 라틴어, 영어, 그리고 배에 있을 때 혼자서 배운 불어로 신학 부분의 최고 서적들을 계속 읽어 나갔습니다.


2∼3년 후에는 주로 글을 쓰는데 시간을 보냈고 성경 외의 다른 책들을 많이 읽을 시간은 갖지 못했습니다. 뉴톤은 "다만 우리를 핍박하던 자가 전에 잔해하던 그 믿음을 지금 전한다 함을 듣고 나로 말미암아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니라"라는 갈라디아서 1장 23∼24절 말씀을 묵상하던 중에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을 공중 앞에서 증거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겼고 이 희망 때문에 성경 원본을 계속적으로 연구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좀더 광범위하게 일할 수 있도록 목사의 직에 종사할 것을 희망하는 많은 이들의 요청에 따라 1758년 요크의 대감독에게 안수를 신청했으나 거절당합니다. 그 후 1764년에, 뉴톤은 오올리의 목사로 와달라는 제의를 받고 오올리 교구의 목사가 되어 15년간 목회사역을 감당하였으며, 자신의 마지막 일터에 대한 커다란 감회를 이렇게 말합니다.

 

"가장 무지하고 가장 비천하고 가장 무참히 버려진 노예 중의 하나인 내가, 아프리카 연안의 참흑한 생활로부터 건지워져 마침내 세계의 도시 중에서도 으뜸 가는 교구 목사로 지명된 것은 여기서 그러한 은혜를 증거할 뿐만 아니라 그 은혜의 특이한 실증과 기념으로 서기 위함이요, 역사 설교 그리고 저술을 통하여 널리 세계에 그 은혜를 나타내기 위함이다. 이것은 결코 내가 자격이 있어서 되었다고는 평가할 수 없는 사건이다. "

 

실제로 이러한 감회는 그의 생각 가운데 너무도 깊이 들어 있어서 어떤 곳에서든 단 하루도 그 기이한 사건을 어떤 방법으로든지 이야기하지 않고 지나는 법이 없었습니다.


다정하고 이야기하기 좋아하는 성격인 그는, 그의 집을 모든 계층과 교파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개방하여 아버지가 자녀에게 하듯 그의 친구들 특히 젊은 목사들 흑은 목사 지망생들에게 격려와 교훈을 주곤하였습니다. 1780년 그는 런던의 성 메리울노쓰 교회로 옮겨서 생을 마칠 때까지 28년간을성도들의 신앙성장을 위해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그는 목회사역을 하는 동안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든 성도들에게 끊임없이 회개를 촉구하였는데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그의 설교는 많은 이들에게 큰 감화를 주었습니다.

 

뉴톤이 팔십이 넘자 그의 친구들 중에서는 그가 공중 사역을 너무 오래 계속하는 것이 아닐까 하여 "그만 두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라고 물을 때 그는 음성을 높이며 단호하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멈출 수 없습니다. 아니! 어떻게 옛 아프리카의 신성모독자가 말을 할 수 있는데도 입을 다물 수 있다는 말입니까?"

 

1807년 12월 21일 죽기 한달 전에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죽는다는 것은 위대한 일입니다. 그리고 육체와 마음이 쇠할 때 우리 마음의 힘이요, 우리의 기업으로써 영원히 하나님을 모시고 있다는 것은 위대한 일입니다. 나는 내가 의뢰한 분을 알며 그 분이 내가 그에게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지켜 주실 수 있다는 것을 압니다. 이후로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니 그것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신 주께서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입니다. "

 

또 한번은 이렇게 말했다.

 

"더 밝은 빛, 더 큰 사랑, 더 큰 자유며, 이 후에 내 눈이 이 세상에서 눈 감을 때에, 나는 더 좋은 세상에서 눈을 뜨게 될 것을 기대합니다. 전능하신 자의 날개 그늘 아래 사는 것은 얼마나 좋습니까?"

 

그가 운명하기 전 수요일, 그의 마음이 평안하느냐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주님의 뜻으로 만족합니다"라고.

 

그는 추악하고 더러운 범죄 가운데서 자신은 구원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일생 간직하였습니다. 놀라운 은혜에 기초하여, 찬송가 405장 "나같은 죄인 살리신"(amazing grace) 등의 찬송가를 썼습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그리고 1807년 12월 21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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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젠 도르프 - 모라비안 경건주의의 선구자

 

 


1700년 5월 26일에 드레스덴에서 오스트리아 가문 출신인 한 작센 선 제후국 장관의 아들로 태어난 진젠도르프는 아버지의 죽음과 어머니의 재혼으로 인해 경건주의자 슈패너와 친밀하였으며, 프랑케와 함께 대중교육과 성경배포 그리고 선교를 장려하였던 외할머니 헨리테 카타리나폰 게르스도르프(Henriette Katharina von Gersdorf)밑에서 자라나게 되었다.

진젠도르프는 10세가 되던 해에 할레대학에 입학하여 17세까지 그곳에서 공부하였는데 이때
프랑케와 깊은 유대 관계를 갖게 되었으며, 그의 경건주의에 대한 기본적인 이상인 순결한 교회와
순결한 영적 생활에 대한 뿌리가 내면에 자리잡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할레 대학 출신의 선교사 지겐발크와 플뤼차우가 보낸 동 인도 선교에 관한 보고들을 접하게 되었고 1713년에는 플뤼차우가 할레를 방문했을 때 그를 직접 만나기도 하였다.

이처럼 진젠도르프는 할레 재단의 선교적 지원을 보면서 깊은 영향을 받게 되었다.

그리하여 진젠도르프는 다섯 명의 친구들과 함께 '겨자씨 모임(the Order of the Grain of Mustard Seed)'을 결성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증거하고 신앙문제로 고민하는 형제들을 도우며 아직까지 복음을 들어 보지 못한 해외에 복음을 전하는 것을 그들 모임의 목적으로 삼고 활동하였다.
 
그 후 1719년 진젠도르프는 네델란드와 프랑스로 연구여행을 떠나게 되었는데 도중에 뒤셀도르프에서 화가인 도메니코페티(Domenico Feti)가 그린 "내가 너를 위하여 이것을 당했건만 너는 나를 위하여 무엇을 하였는가?" 라는 각명(刻銘)이 달린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모습이 그를 사로잡게 되었고 진젠도르프는 이 그림으로부터 그의 필생의 사역에 있어서 상당히 주요한 자극을 받게 되었다.
 
진젠도르프가 이룩한 괄목할만한 업적은 바로 모라비안 교회를 설립하여 발전시킨 것이다.

로마 가톨릭 교회와 보헤미아 국가 교회의 박해를 피해 헤른후트(Herrnhut)로 피난온 형제단(The Unity of the Brethren)이라고 불리우던 모라비아의 후스파(Hussites) 개신교도들이 진젠도르프의 지도하에 기독교 공동체를 발전시켜 나갔는데 이 공동체가 '모라비아파'라고 불리워졌다.

진젠도르프는 모라비안의 형제단을 돌보기 위해 나중에는 드레스덴에서 법정 변호사로 일하던 공직을 버리고 형제단의 일에만 몰두하게 되었으며 루터교회의 신학자로서 인정되는 시험에 합격하고 1727년 모라비안의 감독으로 안수를 받게 된다.

진젠도르프에 의한 모라비안 교회는 선교지향적인 교회였다.
그들의 선교지향적인 모습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먼저, 전도하는 것이었다.

진젠도르프는 교회의 모든 회원들이 기독교의 기사(騎士)가 되어 복음을 전하는 것을 지도 이념으로 삼았다. 특별히 그는 모라비안 교회의 형제들을 작은 그룹으로 구성하여 주의 일을 하게 하였다.

그는 그 자신이 이러한 전도를 실천하였는데 암스테르담, 발틱 국가들, 베를린, 제네바등지에서 집회를 갖고 전도하였다. 그의 접촉은 다양하고 각계 각층에 이르러서 귀족들, 법원의 사람들, 대학생들, 교수들 모두가 그의 전도의 대상들이었다. 다음으로 중보기도를 들 수 있다.

1722년까지 90명이 헤른후트에 정착하고 1726년에 이르러서는 300명의 기독교 공동체를 형성하게 되었는데 1727년 서로를 권고하고 부흥을 위한 기도를 위해 작은 그룹들로 모임을 갖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24명의 형제와 24명의 자매가 자정부터 그 다음날까지 계속 기도하기 위해 각자 1시간씩 맡을 것을 서약하기에 이르렀다.

모라비안 교회의 시간 마다의 중보기도는 그 후 백년 이상 지속되었으며 이러한 중보기도는 그 다음 2백년 이상 수 많은 사람들이 모든 대륙으로 선교를 위해 파송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다음으로 모라비안 교회의 타문화권 선교를 들 수 있다.

모라비안 교회는 1732년 레온하르드 도버(Leonhard Dober)와 다비드 니츠만(David Nitschmann)을 서인도제도(the West Indies)에 파송하는 것을 시작으로 해서 그 뒤를 이어 1735년에는 그린랜드로, 1735년에는 수리남(Sirinam)으로, 1737년에는 아프리카에, 1740년에는 북아메리카의 인디언과 실론(Ceylon)에, 1742년에는 중국에, 1747년에는 페르시아에, 1754년에는 자메이카에, 1756년에는 안티구아(Antigua)에 선교사를 파송하였다.

1760년 진젠도르프가 죽기까지 모라비안 교회는 28년간의 활동을 통해 226명의 선교사를 배출해 내었고, 1760년 당시엔 그린랜드의 13개 지역과 중.북부 아메리카와 서인도제도에서 49명의 형제와 17명의 자매들이 약 6,125명의 영혼을 책임지고 있었다.

진젠도르프와 모라비안 교회의 이러한 선교는 독일 개신교안에서 가장 먼저 일어난 자발적인 선교운동으로서 많은 순교의 피를 흘리면서 세계 각처에서 사명을 완수한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진젠도르프와 모라비안 교회는 개신교 역사상 처음으로 전체 공동체의 전적인 지원을 통해 선교사를 파송했으며 "선교로서의 전체 교회" 라는 개념을 소개하였다.

아울러 개신교내에서 '선교에 대한 책임은 만일 어떤 주어진 지역내에 적법하게 세워진 교회가 있다면 그 교회를 통해 수행되어야 한다'는 생각과 함께 교회의 지역적인 견해(the territorial view)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역할을 감당하였다. 그때 이후로 심지어는 유럽 식민지의 권력자들의 외국 전초기지들도 새로운 선교사업을 시작하기 위한 곳이 되었다. 선교의 전진은 더 이상 전통적인 교구의 경계에 의해 제한되지 않게 되었던 것이다.

진젠도르프의 사후에도 모라비안 교회는 다른 교회로서는 이루지 못한 헌신적인 표준을 세워 놓았다.

뿐만 아니라 서인도제도로 건너간 모라비안들이 2백년에 걸쳐 3천명의 선교사를 지원하는 경이적인 기록을 낳았고 해외 선교구에 속한 신자의 수가 내지 교회의 신자의 수의 3배나 되는 특수한 예를 보여 주었다.

이들 모라비안 교회에서 파송된 선교사들은 개척적인 역할을 감당했을 뿐 아니라 어려움을 참고 이기며, 고난을 달게 받으며 전적으로 그리스도께 헌신하고 사람들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하여 활동하였다.

모라비안들은 그린랜드와 레브로돌(Labrador) 그리고 알라스카와 서인도제도, 동부 및 남부 아프리카와 빅토리아에서 선교활동을 계속했으며 국내 전도에도 매우 활동적이었다.

모라비안 교회는 비록 작은 교회였지만 그들이 다른 종파에게 미친 영향은 특별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모라비안 교회의 선교운동이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그 영향이 지역적으로 유럽의 여러 지역과 세계에 널리 미쳤다는 점에 있다.

그래서 로날드 녹스(Ronald Knox)는 모라비안 운동의 그런 점을 가리켜 "유럽 선교에 활력 있는 누룩"이라고 하였으며, 하세(Hasse) 주교는 "모라비안의 영향은 초기 영국 부흥의 중요한 요소들 가운데 하나"라고 평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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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 묻지 않았던 사울

 

 사무엘하는 사무엘상의 문맥 속에서 읽어야 하고, 또 사무엘하 본문을 묵상함에 있어 왕정시대의 문을 연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을 생각하지 않고는 풍성한 묵상과 바른 이해가 쉽지 않다. 하지만 이 짧은 글에서 사울 왕에 대해 다 살필 수 없기 때문에 사전적인 연구는 지양하고, 사무엘하 본문을 바르게 이해하고 묵상하는 데 유익하다고 생각하는 각도에서 사울을 다루려고 한다.

 

사무엘하에 언급된 사울에 관련된 직접적인 기록은 그의 죽음에 대한 것이다(삼하 1장). 그리고 이 죽음에 대한 기록만큼이나 중요하게 언급된 내용은 그의 집안 이야기다. 예컨대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에 대한 본문이다. 이스보셋은 사울의 군사령관 아브넬의 도움을 받아 왕위에 오르고, 2년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린다(삼하 2:8~10). 이스라엘이 본격적으로 분열되기 이전에 벌써 한 나라 안에 두 왕이 세워진 것이다.

 

그러나 본문은 “사울의 집과 다윗의 집 사이에 전쟁이 오래매 다윗은 점점 강하여 가고 사울의 집은 점점 약하여 가니라”(삼하 3:1, 참조 3:6, 10, 5:10)라고 말한다. 결국 본문은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이 아닌 다윗의 왕권이 확립되는 것을 긴 과정으로 설명한다.

 

다윗은 이미 사무엘상 16장 13절에서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지만 그가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공적으로 왕으로 세워지는 것은 사무엘하 5장 3절에 이르러서야 이루어진다.

 

그리고 계속해서 본문은 다윗이 언약궤를 옮긴 다음(삼하 6장) 7장에 나단이 등장하면서 사실상 다윗의 왕권이 완성되는 것을 보여 준다. 특히 나단 선지자가 대언한 여호와의 말씀(4~17절)은 다윗 왕권의 확립을 언급하는 것을 훨씬 넘어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설명해 주는 매우 중요한 계시다.

 

본문은 왜 이미 죽은 사울이라는 인물에 대비해 다윗을 설명하려고 하는 것인가? 이스라엘에서 왕의 등장은 백성들의 요구로 촉발되었으며, 거기에 실제로 불을 붙인 것은 블레셋의 침략이었다(삼상 8:5, 9:16~17). 그런데 이 블레셋의 공격을 막아내는 인물은 사울이 아니라 다윗이었다(삼상 17장). 그리고 다윗은 마침내 사무엘하 5장에서 왕으로 세워지고 블레셋을 잠재운다. 이 과정에서 본문이 그리는 사울과 대비되는 다윗의 특징적인 모습은 ‘여호와께 묻는 것’(삼하 5:19, 23)이다.

 

반면 본문을 따라가면서 발견하게 되는 사울의 가장 특징적인 모습은(특별히 본문이 다윗과 대조시켜 기록하고 있다는 점에서) ‘하나님께 묻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곧 불순종을 뜻한다(삼상 15:22). 순종이란 하나님에게 물어보는 것이다. 여기서 물어본다는 것은 삶의 주도권을 자신에게 두지 않고, 물어보는 대상에게 둔다는 의미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을 떠올리면 마음이 애잔해진다. 그가 자신에 대해 처음으로 언급한 자기 이해는 “나는 이스라엘 지파의 가장 작은 지파 베냐민 사람이 아니니이까 또 나의 가족은 베냐민 지파 모든 가족 중에 가장 미약하지 아니하니이까”(삼상 9:21) 하는 것이었다. 또한 백성 중에서 다른 사람보다 어깨 위만큼 컸고, 모든 백성 중에 짝할 이가 없던(삼상 10:23~24) 그가 백성 앞에서 왕으로 세워질 때 ‘짐 보따리들 사이에 숨어 있던’(삼상 10:22) 모습은 그가 겸손한 자였음을 분명히 말해 준다.

 

사울에게는 하나님에 대한 이해와 체험도 결코 적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의 영에 크게 감동을 받은 영적 체험도 있었고(삼상 11:6), 다윗을 죽이려고 하는 자신의 행동이 잘못이라는 것을 알고 회개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삼상 24:22, 26:21). 또한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았던(삼상 24:21, 28:10) 율법의 사람, 이스라엘 왕이었다.

 

하지만 사울을 통해 우리는 과거의 성공했던 경험이 우리의 신앙을 이끌어 가는 것이 아니고, 또한 지난 시간 엄청난 영적 체험들이 지금의 바른 신앙을 보장해 주는 것도 아님을 배우게 된다. 나아가 우리 삶의 주권을 진정으로 하나님께 맡긴 자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재확인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성경 본문을 붙들고 읽고 묵상하는 것은 순종의 첫 걸음이요, 가장 안전한 걸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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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쓰는 은사를 지닌 선지자, 나훔

 

나훔, 그는 단 세 장, 마흔 일곱 절로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하고 사라졌다. 엘고스 사람이란 것 외에는 그에 관한 개인 신상도 밝혀지지 않았다. 비록 짧은 말씀을 기록해 전한 인물이지만 그는 자신이 활동하던 당시 최대의 제국 앗수르의 멸망을 거침없이 선포한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기록 목적은 하나님께서 모든 민족과 국가의 주가 되심을 밝히고, 앗수르로 표현된 불의한 국가와 백성은 반드시 심판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한 것이었다.

 

먼저, 나훔이 상대해야 했던 대상은 니느웨 곧 앗수르였다는 것을 생각해 보자. 본문에서 발견하는 단서들로 추정해볼 때, 나훔이 활동한 시대는 아마도 주전 664년(3:8의 노아몬이 멸망한 시기)에서 주전 612년(니느웨 멸망에 대한 예언이 있는데, 그것은 주전 612년에 일어남)일 것이다.

 

이 시기에 나훔이 상대했던 니느웨(앗수르)의 가장 큰 특징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잔혹성이다. 고고학의 도움으로 확인할 수 있는 앗수르의 모습은 잔혹함의 대명사와도 같다. 또 한 가지 특징은 당시 최강의 제국이었다는 점이다. 이미 주전 721년에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키고 사마리아를 초토화시킴으로써 그 힘과 잔혹함을 증명해 낸 초대형 나라가 앗수르지만, 그러한 앗수르를 향해 나훔은 하나님의 소명 앞에 순종해 강력한 심판의 경고를 거침없이 쏟아냈다.

 

오늘날 우리에게 물리적인 전쟁은 없을지라도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나훔과 같은 영적 거장이 되어야 할 사명에 초청받고 있다. 이 시대가 참으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상대해야 할 거대한 대상이 아닌가! 나훔이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받아 담대히 말씀을 선포한 것처럼 우리 모두 더욱 말씀에 붙들리고 말씀을 보여 주어야 할 도전을 받는다.

 

한편, 선지자의 기본적인 임무는 하나님께로부터 계시를 받아 그것을 들어야 할 대상에게 하나님을 대신해 전하는 것이다.

 

하지만 나훔은 조금 독특한 모습을 보이는데, 그것은 바로 첫 구절에 나오는 “나훔의 묵시의 글이라”(1:1)는 말씀이다. 이렇게 시작하는 선지서는 나훔밖에 없다. 선지자들이 전하는 말씀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라는 점에서는 누구도 예외가 없지만 나훔은 특이하게도 이렇게 ‘글’이라고 밝힌다. 이에 어울리듯 성경학자들은 나훔이 사용하는 비유의 표현들이 매우 탁월하다고 평가한다. 아마 나훔은 글을 쓰는 은사가 남달랐던 모양이다.

 

 

나훔이라는 인물을 연구하면서 지금 시대와 관련해 크게 두 가지를 생각해 보았다.

 

첫째는 의사소통 수단과 관련된 것으로서, 인터넷이라는 매체로부터 시작해서 SNS로 발전하더니 마침내 인구의 절반이 훨씬 넘는 수만큼 스마트폰이 보급된 세상에 대한 것이다. 우리는 이제 그런 세상 한가운데서 살고 있고, 그야말로 누구나 거의 제한 없이 자신의 생각을 글로 표현하고 나눌 수 있는 시대를 경험하고 있다.

 

둘째는 의사소통 내용과 관련된 것으로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이야기 가운데 캐내고 또 캐낼 수 있는 이야기, 그러면서도 일시적이고 필요에 따라 약간의 의미를 주는 그런 이야기가 아니라, 생명에 닿도록 하는 이야기는 사실 하나님에 관한 것밖에 없다. 이렇게 오늘의 우리는 하나님과 의사소통이 가능한 수단과 내용을 가졌다. 이제 우리 안에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글로 남기고, 그것으로 세상을 섬기는 것에 노력을 기울였으면 좋겠다.

 

나훔서에는 반드시 기억해야 할 나훔의 모습 두 가지가 있다. 먼저 나훔은 진노와 보복으로 점철된 메시지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속마음을 선명하게 보았다. 나훔은 불처럼 쏟아지고, 바위를 깨트리며, 산과 바다를 녹이고 말리시는 것으로 비유되는 그런 하나님의 분노 가운데서도, 마치 깜깜하게 드리워지는 먹구름 사이로 내비치는 햇살 같은 하나님의 속마음을 보았던 것이다. “여호와는 선하시며 환난 날에 산성이시라 그는 자기에게 피하는 자들을 아시느니라”(1:7).

 

한 가지 더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이 있다. 이렇게 살벌하고 철저한 니느웨를 향한 심판의 말씀은 아직 실행되지 않고 남아 있다. 그러면서 히스기야를 중심으로 신앙의 개혁과 부흥을 가져온 남유다 백성에게 엄청난 위로와 하나님 안에 있는 승리에 대한 확신을 주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나훔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그 어떤 무서운 심판에 대한 말씀이 선포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더욱 빛나는 구원과 위로를 확신하게 하는 인물로 기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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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을 잘 경청하는 선지자, 아모스

 

“정의를 물같이, 공의를 강같이!”라는 메시지를 선포한 선지자로 유명한 아모스. 1장 1절로 가늠해볼 때, 그는 대략 주전 763년부터 753년 사이에 활동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출신지는 남유다에 속한 드고아였지만, 사역은 북이스라엘에서 이루어졌다.

 

아모스, 그는 자신이 활동한 시대와 어떤 면에서 어울리지 않는 선지자라고 할 수 있다. 크게 두 가지의 이유가 있는데, 첫째는 당시 북이스라엘에 선지자나 제사장이라는 공적으로 세워진 성직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아모스의 등장은 어울리지 않았다.

 

둘째는 아모스 스스로가 밝혔듯이 그는 분명한 직업이 있는 사람이었다. 아모스의 말씀 선포 사역을 보면서 그를 대적하던 자들과 논쟁이 일어났을 때 그는 자신에 대해 “나는 목자요 뽕나무를 재배하는 자”(7:14)라고 밝혔고, 동시에 “나는 선지자가 아니며 선지자의 아들도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했다.

 

이미 성직의 조직이 갖춰져 있었고, 아모스는 해야 할 일이 많은 목자요, 농부였기에 그가 말씀을 선포한다는 것, 그것도 심판의 말씀을 선언해야 한다는 것은 너무도 어색한 모습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을 향해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 듣고 그것을 또 선포하라는 소명 앞에 순종했던 아모스를 통해 우리는 이미 기독교에 대해 널리 알려져 있고, 교회가 곳곳에 세워져 있고, 목회자가 넘쳐나는 시대일지라도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는 자가 소명자가 되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

 

 

아모스의 소명이 더욱 도전이 되는 이유가 있다. 아모스가 자신의 사역 시기에 대해 ‘지진 전 이 년’(1:1)이라고 하는 것을 두고 학자들은 그가 적어도 2년 이상 활동했겠지만 그리 길게 선지자로서 사역한 것 같지 않다고 한다. 그 이후에는 아마도 원래 하던 목자요, 뽕나무를 재배하는 일도 돌아갔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아모스는 왜 어쩌면 한시적이었을지도 모르는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자신이 해야 할 많은 일과 손해를 감수하면서 심판과 멸망을 전했을까? 왜 환대는커녕 ‘왕을 모반한다’(7:10)는 강력한 저항에 휘말려 억울하기 그지없는 길을 갔을까? 아모스의 행적을 따라가 보면 이 시대를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커다란 도전을 받게 된다.

 

 

이제 아모스의 사역을 살펴보자.

 

첫째, 그는 거대한 힘의 논리 및 거침없이 횡행하는 힘의 현실을 거슬러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다. 무자비함의 극치요 쾌락에 사로잡히게 하는 힘의 세상, 이방 나라들에 대해 아모스는 힘의 논리를 정면으로 거부하는 말씀을 선포했다(1장).

 

 

둘째, 그는 돈의 힘을 거슬러 선포했다.

 

“가난한 자를 삼키며 땅의 힘없는 자를 망하게 하려는 자들아”(8:4, 참조 2:6~7)라는 말씀처럼 당시 이스라엘은 한 마디로 ‘돈의 맛’을 아는 세상이 되었다. 사실 아모스가 이스라엘의 멸망을 선포하며 활동하던 시기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 버금갈 정도로 영토를 회복했다. 또 경제적으로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호황을 누리던 시대였다. 그만큼 돈의 힘은 더욱 위력을 발휘했고, 사람들은 돈이 더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낄 수밖에 없었던 때였다. 아모스는 이처럼 요즘 식으로 말하면 경제 양극화가 심해진 것을 여과 없이 지적했다. “은으로 힘없는 자를 사며 신 한 켤레로 가난한 자를 사며 찌꺼기 밀을 팔자 하는도다”(8:6).

 

 

셋째, 아모스는 진리를 떠난 관습과 관행 및 생명이 없는 전통과 맞서 싸웠다. 여전히 제사가 드려지고 있었고(5:22) 성직자도 있었지만(7:10), 실제로는 진리를 떠나 있었고 아무런 진정성이 없는 그야말로 관행이요 죽은 전통이 판을 치던 시대였다. 따라서 그는 ‘여호와의 율법을 멸시하며 그 율례를 지키지 아니하고’(2:4) 결국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는’(2:7) 세상을 거슬러 그들의 실상을 드러내며 거침없이 말씀을 선포했다.

 

 

이와 같은 사역에서 아모스의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사람됨을 더욱 절실하게 느끼게 하는 대목이 있다. 그는 이러한 선포가 필요한 이스라엘 백성의 본질적인 문제는 ‘여호와 하나님을 찾지 않음’이며(5:8)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임을(8:11)을 알았던 영성의 인물이었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 뿐 아니라 그것을 마치 아비의 심정으로 “돌아오라, 돌아오라”고 반복하여 간곡하게 눈물어린 호소를 하는(4:6~11) 긍휼의 영혼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는 지금도 우리에게 간곡하게 말한다.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5:6, 참조 5:4, 8).

 

- 날마다 솟는 샘물 박삼열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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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에게 미친 사람, 복음에 자신의 삶을 드린 사람

 

신약의 역사를 일군 복음의 사람

 

 

두말할 나위 없이 바울은 기독교 역사상 가장 유명한 인물 가운데 한 명이다. 바울은 신약성경 27권 가운데 적어도 13권, 그러니까 권수로 보아 신약성경의 거의 절반을 기록했다. 사실상 바울은 십자가의 복음이 유대인들만이 아니라 모든 민족을 위한 구원의 유일한 소식이 되도록 공헌했다. 만약 바울이 없었다면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완성된 하나님의 구원이 우리에게까지 전해질 수 없었다고 가정할 수도 있다.

 

무엇보다 우리의 마음을 놀라게 하고 감동시킨 것은 흐트러짐 없이 십자가의 복음에 집중한 그의 헌신적인 삶이었다. 바울을 통해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성도로서 믿어야 할 신앙의 교리와 삶의 교훈을 배울 수 있었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이루어 놓으신 구원의 복음이 실제로 사람들에게 전파되어 회개하고 구원을 받아 교회가 만들어진 이 신약시대를 설명하려면 바울을 고려하지 않고는 도무지 불가능하다. 하지만 이 짧은 글에서 바울에 관한 모든 것을 다룬다는 것은 처음부터 범위를 넘어서는 작업이다. 때문에 범위를 좁혀 바울을 바울 되도록 한 결정적인 회심의 사건을 살펴보면서 우리에게 주는 도전을 적용해 보고자 한다.

 

주님 만나기 전에는 신앙도 길을 잃어

 

신약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는 사도 바울에 관한 기록은 대부분 사도행전 9장에 비교적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는 이른바 ‘다메섹 회심 사건’ 이후에 관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바울을 탐구하면서 회심 이후의 모습을 찾아보고 정리하는 데 보다 많은 시간과 정성을 기울인다. 당연하기도 하고 필요한 방법이기도 하지만,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의 바울을 보다 충분히 이해하고 또 우리가 올바른 배움을 얻으려면, 그의 회심 사건 이전의 모습을 최대한 고려해야 한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회심하기 이전에 바울은 철저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적대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이런 태도는 단지 인간적인 선택이나 고집 같은 것이 아니었다.  회심 이전의 바울은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신앙과 열정으로 예수를 대적했고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을 핍박했던 것이다.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행 8:3).

“내가 이 도를 박해하여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고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넘겼노니”(행 22:4).

 

이처럼 다메섹 사건 이전 바울의 모습은 매우 살벌하다. 바울은 철저하게 예수를 대적하고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했던 사람이었다. 바울이 이처럼 십자가의 원수(행 9:1, 참조 빌 3:18)로 행했던 이유는 그가 철저한 유대인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빌 3:5~6).

 

바울이 유대인이요 바리새인이었다는 의미를 보다 선명하게 이해하려면 복음서를 떠올리면 된다. 즉,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과 바리새인들의 갈등과 대립을 바울도 고스란히 공감한다는 뜻이다. 예컨대, 바리새인으로서 바울에게 나사렛 예수는 결코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과 같은 존재일 수 없었고, 이런 예수님의 주장은 그야말로 최고의 신성모독이었다(요 10:36). 게다가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메시아라는 주장은 있을 수도,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신 21:23, 갈 3:13).

 

참된 새로움은 오직 그리스도로부터

 

그러던 그가 사도행전 13장 이후 후반부에서 보여 주듯이, 그리고 그의 서신서들에서 밝혀 놓았듯이 자신이 박해하던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되었고(롬 1:1), 십자가의 복음만을 위해 사는 사람이 되었다(고전 1:18~31; 빌 1:18~28). 교회를 바로 세우기 위해 해산하는 수고를 기꺼이 하는 사람으로(고전 4:15; 갈 4:19) 바뀌었고, 마침내는 그 예수 때문에 이제는 자신이 박해받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행 20:24; 고후 1:3~11; 딤후 4:5~8).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빌 1:20).

 

이처럼 바울은 십자가의 복음을 박해하던 자리에서 복음을 위해 박해받는 자리에 기쁨으로 서는 사람으로 바뀌었다. 그 혁명적인 변화는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그리스도를 만남으로부터 시작됐다. 하지만 바울이라는 인물을 단지 어떤 ‘변화’의 카테고리로 설명하기에는 아쉬움이 매우 크다. 바울은 사실상 그리스도에게 미친 사람이었고, 십자가의 복음에 삶을 온전히 드린 사람이 되었다(행 20:24, 21:13, 26:24; 고후 5:13 등).

 

 

그랬기 때문에 이른바 ‘고난 목록’이라고 하는 고린도후서 1장 8~10절과 11장 23~27절 등에 기록된 고난이 그의 복음 전도를 막지 못했다. 일찍이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반대하고 그 따르는 무리와 교회를 박해하던 것에 정반대로 바울은 바로 그 십자가와 복음을 위해 위협받는 것을 오히려 기뻐했다. 마침내 신체적인 핍박과 위협 가운데서도 그것들이 바울을 어찌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다(빌 1:18, 2:17; 딤후 3:6~8). 

게다가 바울은 이렇게 십자가의 복음이 전파되는 일에 대한 전도자로서의 모습만이 아니라 우리의 눈시울을 붉히게 하는 참된 목사였다. 바울은 해산의 고통을 감내하면서까지 그리스도인들을 믿음으로 세우고자 힘을 다했다(갈 4:19; 살전 2:7). 목사로서 성도들과 교회를 향한 바울의 마음을 단적으로 느낄 수 있는 그의 고백이 있다.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하지 아니하더냐”(고후 11:28~29). 바울에게는 교회를 향한 자신의 염려가 그 모든 실제적인 고통보다도 오히려 더한 것이었다. 사도 바울의 모습이 역력하다.

 

폭행자에서 순교자로 만든 것은 말씀

 

 

마침내 사도 바울은 말 그대로 죽을 고생을 하며 다녔던 세 차례에 걸친 전도여행을 마감할 때 즈음, 주후 58년경 예루살렘에서 체포되어 로마법 아래 재판을 받는 죄수의 몸이 된다(행 21:33, 25:11). 그로부터 3년 정도 시간이 흐른 후 로마 감옥에 투옥되고, 모진 박해와 위협의 시절을 거쳐, 주후 67년 순교해 그렇게도 그리워하고 고대하던 주님 품에 안겼다.

 

 

십자가 복음에 대해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던 바울은 그 복음을 위한 전도자요 고난 받는 자요 눈물의 목사로서 산 인물이다. 바울 탐구를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를 만날 때 진정한 변화가 가능하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또한 변화를 가져오는 주님과의 만남은 그분이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은혜로 되는 것임을 깨닫는다. 더 나아가 복음에 헌신하는 삶을 향한 도전을 받는다.

 

 

참 변화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 따라서 십자가의 복음을 만나는 것이 진정한 새로움의 출발이다. 성경 말씀을 통해 이미 우리 곁에 와 계신 주님을 만남으로써 비로소 참 변화를 향한 시작이 가능하다. 유의할 점이 있다. 바울은 그냥 독립적이고 독창적인 사상가가 아니었다. 또 추론을 거듭해 궁극적인 진리를 찾아가는 사색적인 사상가도 아니다. 그의 모든 사고는 성경에 기초를 두고 있다. 그의 모든 사역과 가르침은 성경에서 계시로 받은 것에 굴복하고 순종했다. 이런 점에서 성경적 계시의 말씀은 바울이 생각하고 기도하는 도구였고, 그는 성경대로 실천하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았다는 유진 피터슨의 관찰은 적절하다.

 

 

말씀과 함께 오는 주님의 은혜로 말미암는 변화가 아니라면 바울과 같은 변화는 불가능하다. 살아 역사하시는 말씀에 의한 변화가 아닌 변화는 참된 변화가 아니다. 매일 말씀을 제대로 만나는 은혜가 모든 독자에게 있기를 간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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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겸손과 눈물의 사람, 바울

 

에베소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를 읽으면서 우리는 지난 1월호에 이어 다시 사도 바울을 만난다. 그는 한때 온 힘을 다해 나사렛 예수와 그를 믿는 자들을 박해했고, 그렇게 하는 것이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믿음의 길이라고 믿었었다(행 8:3, 9:1~2, 참조 요 16:2).

 

 

하지만 무지와 오해에서 출발한 왜곡된 열심의 사람이었던 바울은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행 9:5) 하는 음성과 더불어 나타나신 주님을 만난 이후, 예수 때문에 박해를 받는 자리에도 기꺼이 나아가는 사람으로 바뀐다. 에베소교회가 그 증거물 가운데 하나이고, 에베소서가 그 증거문서다.

 

 

에베소교회와 바울의 관계는 참으로 특별하다. 에베소라는 도시 자체가 당시 아시아에서 매우 중요한 도시였을 뿐 아니라(그랜트 오스본은 『에베소서 주석』 13p에서 “로마를 제외하고 에베소는 바울이 방문한 도시 가운데 가장 중요한 도시였다”라고 기록), ‘온 아시아와 천하가 위하는’(행 19:27) 아데미 신전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그만큼 에베소에서 바울의 사역은 충분히 주목할 만하다.

 

 

사역적으로 보면, 바울에게 에베소는 세 번의 전도여행 중 두 번이나 방문한 곳일 뿐만 아니라(행 18:19~21, 19:1) 2~3년 동안 지속된 그 유명한 두란노 서원 강론이 있었던 곳이다(행 19:9~10). 또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해서 치유와 축사(逐邪)가 일어나 급기야는 마술사들이 은 오만이나 되는 분량의 책을 불사르는 일이 일어나기도 한 반면, 에베소 온 시민의 분노와 핍박에 직면했던 곳이기도 하다(행 19:11~41).

 

 

신학적으로 보면, 성령에 대해 가르쳤고(행 19:2~6) 하나님 나라를 강론했으며(행 19:8) 귀신의 정체를 드러내기도 했다(행 19:12). 이처럼 중요한 진리들이 드러난 곳이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에베소서를 통해 다음의 두 가지의 내용을 나누고 싶다. 첫째, 에베소교회 사역에는 바울의 눈물과 겸손 그리고 인내가 흥건하게 배어 있다는 점이다.

 

 

바울은 에베소교회 지도자들과 이별할 때가 되었을 때 그곳에서의 사역을 돌아보며 이렇게 말한다.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행 20:31).

“…내가 항상 여러분 가운데서 어떻게 행하였는지를 여러분도 아는 바니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 거리낌이 없이 여러분에게 전하여 가르치고”(행 20:18~20).

 

 

바울은 눈물의 사역자였고, 겸손과 인내의 사역자였다. 이러한 바울의 모습은 “여러분도 아는 바니”라는 말처럼 공개된 것이었고 에베소 지도자들이 다 아는 것이었다. 바울의 이와 같은 인물됨에서 우리는 사역자의 자세뿐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의 자세를 배우게 된다.

 

 

둘째, 눈물과 인내와 핍박의 고통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얼마나 복음에 집중했는지를 발견하게 된다는 점이다.

 

 

에베소서의 구조를 본문 내용을 따라 1~3장과 4~5장으로 나눌 때, 1~3장의 주제를 ‘두 기도’와 ‘하나의 십자가 복음’을 설명하는 구조로 볼 수 있다. 즉, 1장 15~23절의 첫 번째 기도와 3장 14~21절의 두 번째 기도, 그리고 그 사이에 놓인 2장 1절~3장 13절에서 십자가의 복음과 그 복음을 드러내는 일꾼으로 바울 자신을 언급해 결국 복음이 중심에서 빛나도록 하는 구조다.

 

 

물론 바울의 기도 역시 십자가를 통해 증명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십자가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지 아는 것을 간구하는 것이어서 그가 얼마나 복음에 집중하고 있었는지를 보여 준다.

 

 

한편, 바울은 그리 길지 않은 이 편지에서 자신이 갇혀 있음을 세 번이나 언급할 만큼(엡 3:1, 4:1, 6:20) 고난 가운데 있었다. 그는 자신의 고난과 어려움에 대해 그 어느 교회보다 잘 이해해 줄 곳이 바로 에베소교회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자신의 어려움에 대해 호소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바울은 마치 아무 일도 아닌 양 오직 십자가 복음에 집중하고, 복음이 가져오는 삶에 집중한다.

 

 

에베소서를 통해 이러한 바울의 모습을 발견하고, 우리와 성정이 같은 그를 통해 복음이 중심 되는 삶을 향해 세상이 흥분할 발걸음을 또 한 걸음 내딛는 도전을 받으면 좋겠다. 

 

- 날마다 솟는 샘물 박삼열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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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인물 - 회복의 미래를 꿈꾼 사람, 요엘

 

요엘은 전체 3장 73절이라는 짧은 길이의 메시지를 전하고 사라진 이스라엘의 선지자다. 비록 선포한 메시지의 길이는 짧지만 내용에 있어서는 그 누구보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포괄적으로 전망한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 요엘 선지자가 어떤 인물인지에 대해 언급한 자료가 요엘 본문 이외에는 없기에 본문을 찬찬히 들여다보는 것으로서 그가 어떤 인물인지를 탐구하는 것이 가장 분명한 길이라고 할 수 있다.

우선 1장 1절에 ‘브두엘의 아들 요엘’로 소개된다. ‘브두엘’이 ‘성실하신 하나님’ 혹은 ‘성실한 성품으로 설득하시는 하나님’을 뜻한다면, 요엘은 경건한 집안의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게다가 본문에서 제사 및 절기와 관련된 소재들(소제, 전제, 제사장, 성전, 낭실, 제단, 성회 등)을 많이 언급한다는 점에서 그가 제사장 가문의 사람일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요엘은 누구보다도 이스라엘 민족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성전에 대한 신학적이고 실제적인 의미인 ‘하나님의 임재’(욜 3:17, 21)를 선포하는 자로서 딱 맞는 인물인 셈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여호와가 하나님이시다’라는 이름의 뜻에 걸맞게 요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호와를 드러내기에 충분한 사람이다.

요엘은 이스라엘의 문제를 뿌리부터 바라보는 시야를 갖고 있었다. 그는 요엘 2장 3절에서 “그들의 예전의 땅은 에덴동산 같았으나 그들의 나중의 땅은 황폐한 들 같으니”라고 언급함으로써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 문제가 창세기 2장과 3장이 말하는 창조와 타락 사건을 배경으로 하는 것임을 보여 준다. 즉 요엘은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이 범죄와 관련된 것임을 알았고, 그것을 선포하려고 했던 것이다.

요엘은 또한 새로운 시대가 어떻게 오는지를 내다본 인물이다. 베드로는 신약의 교회 시대를 여는 출발점이 된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을 설명하는 자리에서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로 시작하는 요엘 2장 28~32절의 말씀을 인용한다.


즉 초대 교회 사도들은 자신들이 경험한 성령 강림이라는 초유의 사건을 요엘 선지자의 말씀을 통해 이해한 것이다. 요엘은 구약시대를 살면서도 하나님이 만들어 주실 새 시대를 미리 전망한 인물이다.

더 나아가 요엘은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완성까지 내다본 인물로 보인다. 하나님 안에서 회복될 미래를 꿈꾸면서 그는 “그날에 산들이 단 포도주를 떨어뜨릴 것이며 작은 산들이 젖을 흘릴 것이며 유다 모든 시내가 물을 흘릴 것이며 여호와의 성전에서 샘이 흘러 나와서 싯딤 골짜기에 대리라”(욜 3:18)라고 예언한다.

단 포도주(암 9:13)와 젖(사 55:1)이 흘러넘친다는 표현은 요엘의 예언 속에 있었던 과거의 에덴동산에 대비해 미래에 새로워질 낙원을 보여 주는 상징이다. 또한 성전에서 솟아나는 샘도 에덴동산의 강들을 생각하게 하는 표현이다(겔 47:1~12). 이어서 요엘은 “유다는 영원히 있겠고 예루살렘은 대대로 있으리라 내가 전에는 그들의 피흘림 당한 것을 갚아 주지 아니하였거니와 이제는 갚아 주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시온에 거하심이니라”(욜 3:20~21)라며 자신의 예언을 모두 마무리한다.

 

지금까지 살핀 요엘 선지자를 통해 우리는 자신의 믿음과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전망을 보다 넓게 가져야 한다는 교훈과 함께, 매우 분명하게 나타난 영원한 회복에 대한 꿈을 단단히 배운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요엘이 어떻게 이와 같은 전망을 갖게 되었는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그 대답으로는 그가 선포한 말씀 가운데서 크게 두 가지를 발견할 수 있다.  첫째는 우리의 반응 곧 ‘참된 회개’이고, 둘째는 하나님의 진심 곧 ‘극진한 사랑’이다.

참된 회개란 마음을 다해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다(욜 2:12). 이것을 요엘은 회개하는 자의 모습으로, 흔히 등장하는 옷을 찢는 행위에 빗대어 마음을 찢어야 한다고 도전한다(욜 2:13). 또한 하나님의 진심은 은혜, 자비, 인애에 근거한 극진히 사랑이다(욜 2:13, 18). 이같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요엘이라는 인물을 통해 적어도 이 두 가지를 배우기 원하시고 도전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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