얀 후스 - 세계선교 잉태한 종교개혁 선구자

 

 

 

 

 

블타바(몰다우)강의 정경이 아름다운 선율로 수놓아진 스메타나의 ‘나의 조국(MA VLAST)’은 체코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널리 사랑받고 있는 얀 후스(Jan Hus)와 그의 사상,그를 따르는 후스파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교회사를 세밀하게 검토하노라면 16세기 종교개혁이 이루어지기 전에도 타락한 교회를 개혁하고자 했던 개혁운동들이 끊임없이 이어졌음을 알 수 있다. 근래의 교회사 연구가들은 이 교회개혁운동들을 ‘첫번째(과격한) 종교개혁운동’ 이라고 부른다.

 

이 중 가장 대표적인 개혁운동은 13세기 발덴저와 15세기 보헤미아의 종교개혁운동이다. 이같은 개혁운동들은 교회사 가운데서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했다.

 

오늘 소개할 후스도 1415년 7월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이단자로 낙인찍혀 화형당한 체코인으로만 알려져 있을 뿐이다. 얀 후스는 1370년 남보헤미안 후시네크 지방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사제의 길에 들어서서 프라하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을 연구하였다.


그가 사제가 되고자 했던 동기는 그 당시 농부의 아들들이 그랬듯이 안정된 생활기반을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는 신학수업 과정에서 철저한 변화를 경험하고 열정적인 진리의 탐구자요 신학자로 거듭났다. 체코 종교개혁의 아버지로 일컬어지고 있는 얀 밀리치 크로메리즈와 마티아스 본 야노프가 후스의 신학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결정적으로 후스에게 영향을 미친 사상가는 영국 옥스퍼드 대학의 교수였던 존 위클리프(1330∼1384)였다. 위클리프는 성경에 입각해 기존 교회질서에 준열한 비판을 가하고 철저한 교회개혁을 부르짖었던 종교개혁의 선구자였다. 영국유학에서 돌아온 후스는 1398년부터 프라하대학 철학부에서 강의했다.


1402년부터는 3000명가량이 모였던 프라하 베들레헴성당에서 설교자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는 체코 선현들의 개혁 전통에 굳건히 선 민족 설교자로서의 면모를 과시했다.

 

당시 유럽 문화의 중심지였던 프라하에는 황제 카를4세가 자신의 이름을 따 독일어로 교육하는 대학을 세워 독일어와 독일문화가 헤게모니를 쥐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주체적인 신앙고백과 모국어를 중심한 신학운동을 전개한 후스의 개혁운동은 체코 민중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후스는 1409년 프라하대학 총장에 취임한다.
그는 체코어 라틴어로 수많은 글을 남겼는데 설교만 해도 무려 3000편이 넘는다.
그의 설교는 평민들로부터 왕족과 귀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청종했다.
그의 교회개혁과 사회윤리적 내용을 지닌 설교는 청중을 열광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후스의 비판이 중세교회의 치부였던 면죄부 판매에까지 이르자 교황,왕,귀족,교회지도자들 등 기득권층이 강력하게 견제했다.


후스는 프라하에서 모든 교회활동을 금지당하는 처분을 받았다.
후스는 부패한 교회의 기득권 세력과 타협하지 않고 남뵈멘지역으로 가 들판과 광장에서 민중을 향해 진리를 설교했다. 이 무렵 후스가 로마교회의 잘못을 지적하기 위하여 라틴어로 쓴 대작이 ‘교회론(De ecclesia)’이다.

 
후스를 제거하기 위한 음모는 교황권 분열에 직면하여 ‘교회의 개혁과 일치’를 명분으로 콘스탄츠에서 열렸던 공의회를 기점으로 구체화된다.


공의회는 이단자로 처형된 위클리프와 후스 사상과의 관련성을 조사한다는 명분으로 후스를 불렀다.

 

후스의 친구들은 공의회가 명분으로 내세우는 교회일치와 개혁의 이면에는 커다란 음모가 도사리고 있음을 간파하고 후스가 콘스탄츠에 가는 것을 한사코 만류하였다.

 

그러나 후스는 교회 지도자들과 맞붙게 될 논쟁에 대비해 그의 입장을 철저히 준비한 후 콘스탄츠로 향한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보헤미아왕을 겸하고 있던 지그문트 황제도 그의 신변과 언론의 자유를 보장해주는 편지를 써주기까지 한다. 그러나 후스는 도착하자마자 감옥에 갇히고 만다.


공의회를 주관한 교황청측에서는 후스의 교회비판을 무조건 철회하라고 요구했다.
후스의 신변안전을 보장했던 황제 지그문트는 기회주의적으로 추기경들의 눈치를 살피다가 마침내는 후스를 처벌하라는 입장에 서게 된다.

 

후스에게는 주장을 내세우거나 대화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도리어 후스가 쓰지도 않았던 글들을 빌미로 법정에 고소당하고 이단자로 판결받았다.
후스는 끈질기게 그가 주장했던 입장을 철회하도록 강요받았지만 사람보다는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에 대한 순종의 길을 선택했다.

 

마침내 그는 1415년 7월6일 콘스탄츠의 화형대에서 이단자의 누명을 쓴 채 죽어갔다.
후스와 같은 신학적 입장에서 후스의 입장을 대변했던 히로니무스 폰 프라하도 같은 이유로 같은 방법에 의해 같은 장소에서 화형대의 연기로 사라졌다.


지금도 독일 콘스탄츠에는 두 사람의 이름이 새겨진 큰 바위가 그 날의 비정한 사건을 말없이 증언하고 있다. 후스의 생애와 사상은 한마디로 진리에 대한 탐구와 열정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가 화형되기 전 남긴 글은 그가 전 생애를 통해 추구했던 진리가 무엇인지를 증언하고 있다.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여, 진리를 찾으라! 진리를 들으라! 진리를 배우라! 진리를 사랑하라! 진리를 말하라! 진리를 지키라! 죽기까지 진리를 수호하라! 그것은 진리가 너를 죄와 악마와 영혼의 죽음과 마침내 영원한 죽음으로부터 자유롭게 하기 때문이다”

 

후스의 처형 뒤 후스의 사상과 뜻을 이어받은 강력한 신앙공동체인 보헤미안 동포단이 형성돼 이들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부활의 복음이 체코 민중의 가슴에 심어졌다.


보헤미안 동포단은 경건주의의 모태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세계선교의 아방가르드 역할을 했다.

1432년 후스파 교도들은 공의회가 열리는 바젤에 와서 후스가 지향했던 종교개혁의 정당성을 변호하고 그 정당성을 인정받았다.


후스는 단순히 교회개혁의 선구자로서 뿐 아니라 주체적인 민족정신을 고양시킨 애국자로 지금까지 체코인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다.

 
1915년 후스 사후 500년을 맞아 프라하 구시가 중심부에 후스의 기념비가 세워져 이곳을 찾는 이들에게 민족 주체성과 독립정신을 증언하고 있다.

 
◇ 필자약력

△한국신학대학 신학과 졸업

△연세대 연합신대원 석사

△스위스 바젤대학 신학박사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교육원장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 상임총무
 
김원배 (기독교장로회 총회교육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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