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산대사의 시 인생이란 <추석선물>

서산대사께서 85세의 나이로
1604년에 입적하시면서 마지막으로 읊으신 시.


人 生

근심 걱정 없는 사람 누군고.
출세 하기 싫은 사람 누군고.
시기 질투 없는 사람 누군고.
흉허물 없는 사람 어디 있겠소.

가난하다
서러워 말고,
장애를 가졌다 기죽지 말고
못 배웠다
주눅 들지 마소
세상살이 다 거기서 거기외다.


가진 것 많다
유세 떨지 말고,

건강하다
큰소리 치지말고

명예 얻었다
목에 힘주지 마소.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더이다


잠시 잠깐
다니러 온 이 세상,

있고 없음을
편 가르지 말고,

잘나고 못남을
평가 하지 말고,

얼기 설기
어우러져 살다나 가세.




다 바람같은 거라오
뭘 그렇게 고민하오.

만남의 기쁨이건
이별의 슬픔이건
다 한 순간이오.

사랑이
아무리 깊어도
산들 바람이고

외로움이
아무리 지독해도
눈보라일 뿐이오.

폭풍이 아무리 세도
지난 뒤엔 고요하듯

아무리
지극한 사연도
지난 뒤엔
쓸쓸한 바람 만 맴 돈다오.

다 바람이라오.

버릴 것은 버려야지

내 것이 아닌 것을

가지고 있으면 무엇하리요.

줄게 있으면 줘야지.
가지고 있으면 뭐하겠소.

내 것도 아닌데...
삶도 내 것이라고 하지마소.

잠시 머물다
가는 것일 뿐인데
묶어 둔다고 그냥 있겠오.

흐르는 세월

붙잡는다고 아니 가겠소.

그저
부질없는 욕심 일 뿐,

삶에 억눌려
허리 한번 못피고

인생 계급장
이마에 붙이고

뭐 그리 잘 났다고
남의 것 탐내시요.


훤한
대낮이 있으면

까만
밤하늘도 있지 않소.

낮과 밤이 바뀐다고
뭐 다른게 있소.

살다 보면 기쁜 일도
슬픈일도 있다만은,

잠시 대역 연기 하는 것일 뿐,

슬픈 표정 짓는다 하여
뭐 달라지는게 있소.

기쁜 표정 짓는다 하여
모든게 기쁜 것 만은 아니요.

내 인생 네 인생
뭐 별거랍니까...

바람처럼 구름처럼
흐르고 불다 보면
멈추기도 하지 않소.

그냥
그렇게 사는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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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 유대교(탈무드, 카발라), 이스라엘 이해하기

 

 

 

성경의 유대인은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아브라함의 후손이요, 하나님의 백성이다.

이런 이유로, 우리 믿는 사람들은 유대인이나 이스라엘을 좋게 여기고, 우리와 친근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생각 때문에, 유대인에 대한 예언을 낙관적으로 해석하게 된다.
 
하지만,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은 유대인의 타락을 보여줄 뿐, 회개했다는 기록이 없다. 

구약성경은 '하나님께서 유대인을 버리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왕하 23:27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이스라엘을 물리친 것 같이 유다도 내 앞에서 물리치며, 내가 택한 이 성 예루살렘과 ‘내 이름을 거기에 두리라!’ 한 이 성전을 버리리라!” 하셨더라.
호 4:6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말 1: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제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가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로마에서 유대인들을 만나 복음을 전한 바울은 유대인들이 복음을 거부하는 것을 보고 '구원이 이방인에게로 보내졌다!'고 선언했습니다.

행 28:28 "그런즉 하나님의 이 구원이 이방인에게로 보내어진 줄 알라! 그들은 그것을 들으리라!" 하더라.

유대교는 구약성경대로 믿는 신앙이 아니다.

엄격한 의미에서 유대교는 주후85년 바리새파의 얌니아 회의 이후에 노선이 결정된 바리새파 전통을 따르는 랍비종교를 말한다.
‘유대교의 경전은 율법, 지도자는 랍비, 모이는 곳은 회당’으로 알려졌지만, 유대교는 혼합종교이고, 율법보다는 탈무드와 카발라를 더 중시한다. 랍비는 율법전문가가 아니라 탈무드전문가이고, 유대회당의 건축양식이나 사용하는 문양에 사탄숭배적인 것들이 많다.

태양 마차를 타고 있는 헬리오스(태양신)를 중심으로 원형으로 된 12별자리의 상징(점성술)은 이스라엘에 남아있는 7개의 고대 회당유적에서 발견되었다. 유대교의 종교혼합을 보여준다.
 
두 기둥, 태양창, 아치 등 프리메이슨 양식으로 지어진 유대교 회당

자력구원을 가르치는 생명나무 문양의 파로켓(성경두루마리 보관함 가리개)

두 기둥 양식으로 지은 회당 – 육각성 창문, 원과 두 돌판과 아치 디자인 창문  ​

Magen David Synagogue, Kolkata – 체크무늬 바닥, 중앙의 제단은 사탄을 숭배하는 프리메이슨 로지와 같다.


유대교 심벌 - 육각성(사탄)은 정삼각형(남신, 태양, 하늘)과 역삼각형(여신, 달, 땅)이 합해진 것이다. 이는 카발라가 가르치는 자력구원을 설명하는 '생명나무 세피로드'를 기호로 나타낸 것이다.

탈무드는 바벨론에서 본 종교들과 사상들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율법을 해석한다. 그래서 혼합종교문서이고, 하나님의 뜻과 다른 결론을 내리고, 성경과 반대되게 가르치기도 한다.
'유대인이 유대교로 세상을 지배하는 것이 최종목표'라고 가르친다. 여기서 단일종교와 NWO(신세계질서)가 나왔다.

카발라는 여러 종교들과 사상들의 영적인 가르침을 종합한 혼합종교 문서이다. 여호와 대신에 ‘아인 소프(무한자)’를 최고존재로 가르친다.
인간이 스스로 구원을 얻는 방법을 가르친 도표가 생명나무 세피로드다.

생명나무 세피로드

세 기둥이 되는 생명나무

육각성이 되는 세 기둥

생명나무 세피로드를 건축물로 표현한 것이 두 기둥, 첨탑, 탑이다. 두 기둥이 건물에 합해진 형태가 고딕 양식이다.

힌두교 심벌 - 육각성 속에 십자가 있다. 십자가 교회의 기호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유대교 심벌이 힌두교처럼 육각성인 것은 내용이 같다는 뜻이다. 생명나무 세피로드를 기호로 나타낸 것이 육각성이다. 생명나무 세피로드가 힌두교의 구원관과 같다는 뜻이다.

카발라는 종교다원주의체제다. 카발라의 가르침이 헤겔철학에 반영되었다. ‘정반합, 절대정신, 제일원인’은 모두 카발라의 가르침이다.

카발라는 현재 사탄숭배자들이 지침서로 쓰고 있다.

종교다원주의, 종교통합(단일종교)운동, 단일정부운동이 모두 유대교(유대인)에서 나왔다.
신약성경은 유대인들의 타락을 말할 뿐, 그런 행동을 하는 이유를 자세하게 설명해놓지 않았다. 이를 이해해야, 유대인들이 왜 주님을 죽이고, 복음전파를 그렇게 방해했는지 이해할 수 있다.

성경의 이스라엘과 지금의 이스라엘은 다르다.
성경의 이스라엘은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이룬 나라였다.

하지만, 하나님의 징벌로, 나라가 망하고 지도자들이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하기도 했다.

성전은 하나님의 징벌로 파괴된 후, 재건되었고, 개축한 후, 다시 파괴되었다. 성전파괴는 하나님께서 '그런 타락한 제사를 받지 않겠다!'고 하신 뜻임을 보여준다.

주후70년에 로마에 의해 유다가 망하자, 많은 유대인들이 유대땅을 떠나 디아스포라가 되어 2,000여 년을 이방에서 떠돌며 살았다. 이 기간 동안 유대인들은 탈무드의 가르침을 따라 유대인우선주의를 추구하며 비윤리적으로 살았기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당했다. 신앙과 윤리에서는 용납할 수 없었다.

유대인들은 이를 ‘핍박당했다.’고 주장한다. 정치나 경제적인 면에서는 불이익을 당하고 재산을 뺏겼으므로, 그런 면이 있었다. 유대인들은 성경이 금하는 고리대금업이나 정착농업인들이 하지 않던 상거래로 재산을 축적했다.

혈통적으로 가장 정통성이 있는 유대인들은 프리메이슨 국가인 미국에서 살면서 미국과 세계를 움직이고 있다.
시오니즘운동으로 재건된 현재의 이스라엘은 순혈 유대인이 아니라 혼혈 또는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 유대교인들로 구성되었다. 출신배경에 따라 신분차별이 있다고 한다.
이스라엘의 건국초기에 형성된 집단농장(기부츠)은 사회주의방식부터 자본주의방식까지 다양하다는 것은 잘 알려졌다. 하지만, 시오니즘운동의 주축세력이 러시아에서 볼세비키혁명을 일으킨 공산사회주의자들이었고, 그로 인해, 재건된 이스라엘은 공산사회주의 체제라는 사실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지금의 이스라엘은 노골적으로 사탄을 숭배한다.

두 개의 삼각형을 겹쳐서 만든 사탄을 상징하는 6각성을 국기로 쓴다. - 사탄숭배국이란 공식표시다.

로스 차일드 가문의 재정지원으로 건축한 안팎으로 사탄적 상징이 가득한 이스라엘의 대법원 청사

이스라엘 에일라트에 있는 프리메이슨 피라미드와 두 기둥, 전시안

이스라엘 제1도시 텔아비브는 정부의 지원을 받는 세계최대의 동성애축제로 유명하다. - 동성애자들의 육각성과 이스라엘국기의 육각성이 같다.

현재, 세계의 정치, 경제, 문화를 장악하고 사탄숭배체제로 만드는 일에 힘쓰는 프리메이슨의 핵심지배세력이 유대인 자본가들이며, 프리메이슨의 모든 행동원리를 탈무드와 카발라가 제공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이나 유대인을 미화하고,‘탈무드를 가르치자!’ ‘유대인의 교육법인 하브루타(토론학습법)를 도입하자!’ ‘유대문화가 부럽다!’는 사람들이 있다.

​성경은 ‘이스라엘이나 유대인을 사랑하라!’거나 ‘본받아라!’고 하시지 않는다.
성경은 구약에서 신약까지 '유대인들이 타락했고, 하나님을 떠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바울이 안타까워한 이유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리셨다는 것만 말씀하신다.

성경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회복’은 그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와 하나님만 섬길 때 베푸실 은혜이지, 지금처럼 사탄숭배에 빠진 유대교를 붙잡고 있는 한은 안 될 것이다.

이스라엘에 ‘성지순례(聖地巡禮)’를 가는 사람들도 있다.
성경의 정황을 이해하기 위해, 이스라엘을 '답사(踏査)'하는 것은 성경을 바로 이해하는데 유익한 일이지만, 현재의 이스라엘은 결코 성지라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믿음을 위해,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아야 하거나, 성경에 나오는 역사적인 장소를 찾아가야 하는 것은 아니다.

‘성지’라 부르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미화하는 효과가 생기게 된다.

​‘순례(巡禮)’는 ‘종교상의 특정장소를 찾아가 참배(參拜)하는 것’을 말한다. 즉, 우상종교의 예배행위이다.
‘성지순례(하즈)’는 이슬람교도의 기본의무로, 모든 이슬람교도는 평생에 한 번은 반드시 그들의 성지인 메카를 찾아가 참배해야 한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왜 그들의 용어를 쓰면서, 그들의 행위를 따르고 있는가?

심지어, 스페인에 있는 카톨릭의 '산띠아고 길' 순례를 미화하는 사람들도 있다. 많은 시간과 돈을 들여 그 길을 찾아가 걸으면, 천국에 다다르는가? 카톨릭이 가르치는 구원에 유익한 '공덕'을 쌓는 일일 뿐이다.

중세 카톨릭은 '구원에 이르는 공덕'을 내걸어 사람들을 십자군에 동원했다.


산띠아고(=야고보의 스페인식 이름) 길 870km 약도

가리비는 비너스(아세라의 그리스식 이름)를 상징한다.  가리비 위의 빨간 십자는 '산티아고(=야고보) 십자가'라고 하는데, 뜨레스 디아스에서도 쓴다. 예수회가 만든 프로그램이라는 증거다.


'꾸르시요'는 '짧은 코스(단기강습회)'란 뜻으로, '뜨레스 다아스(3일)' 프로그램의 원래 이름이다.

 

인장은 빛을 발하는 태양이다. 예수회의 심볼도 태양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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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주요인물  - 총명한 미모의 여인 - 아비가일

 

 

 

인적사항

1. 아비가일은 내 아버지가 기뻐하심이라는 뜻

2. 마온의 부호 나발의 아내

3. 나발이 죽은 후 다윗의 아내가 됨

시대적 배경

다윗이 사울의 칼을 피해 광야로 유랑하던 시기 대략 B.C 11세기 초기로 추정됨

생 애

1. 행실이 악한 나발과 결혼하여 남편을 잘 섬김.

2. 도움을 청하는 다윗을 모욕하여 화를 자초한 남편 대신 다윗을 찾아가 용서를

    구함

3. 하나님의 심판으로 남편이 죽은 뒤 다윗의 아내가 됨 (삼상25:39-42)

성품과 행적

1. 격노하여 납말을 치러 오는 다윗 일행을 맞아 생면부지의 다윗에게 은총을 구하고

     그의 발걸음을 돌이키게 한 것을 볼 때 지혜롭고 판단력이 뛰어날 뿐 아니라 언변이

    능한 여자임을 알 수 있다.

2. 많은 물질을 의지하여 거만하고 방자한 태도를 보이는 남편을 잘 섬기며 생명이

    위험을 당할 때도 남편을 보호하기 위해 끝까지 노력한 것은 아내로서의 덕망을

    갖춘 여인임을 보여준다.

평가 및 교훈

1. 격노하여 남편 나발을 죽이려는 다윗 일행을 맞아 떡과 음료로 접대하며 그 잘못을

     눈감아 주도록 공순하게 간청한 아비가일은 그 지혜로운 행위로 나발의 생명뿐 아니라

     그의 모든 가산을 지켰다. 이처럼 지혜로운 여인은 그 집을 세운다(잠14:1)

2. 물질을 매개로 하여 맺어진 지혜롭고 용모가 뛰어난 아비가일과 행사가 악한 나발의

    결혼은 결국 파국을 맞을 수 밖에 없었다. 여기서 사랑과 인격보다 물질이 앞선 바람직하지

    못한 결혼의 불행한 결말을 볼 수 있다.

3. 다윗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자비를 구한 아비가일의 유순한 언행은 다윗의 격한 분보를

    가라앉히기에 충부했다. 이처럼 유순한 태도는 노를 그치게 한다(잠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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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의 이스라엘과 유대인들

 

 

 

 a) 이스라엘

면적은 2만 425㎢, 인구는 625만 8000명(2001), 인구밀도는 306.4명/㎢(2001)이다.
수도는 예루살렘이고 공용어로는 헤브라이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지중해 동쪽 팔레스타인 지방의 아랍 세계에 존재하는 유대인 공화국이다.
이스라엘이란 헤브라이어로 ‘하나님이 지배하신다’는 뜻으로, 구약성서(창세 32)에 나오는 이사악의 둘째 아들
야곱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19세기 유럽에서 일기 시작한 시오니즘 운동을 배경으로 세계 각지의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 땅으로 이주하여
1948년 5월에 국가를 수립하였으므로 주변 아랍 여러 나라와 적대 관계에 있으며 분쟁이 끊이지 않는다.
1967년의 중동전쟁으로 옛 예루살렘시(요르단령)를 비롯한 요르단, 시리아, 이집트 등 인접한 아랍 여러 나라
영토를 점령하였으나 점령지역을 자국의 영토라고 주장하며 이스라엘화하려고 하는 노력은 국제적으로 승인받지
못하고 있다.
이들 지역을 합치면 이스라엘 영토는 3배로 불어나고 133만의 아랍인 인구를 수용하게 된다.
 

 b) 가자지구

면적은 363㎢, 인구는 75만 5200명(1994)이다.
해안선 길이는 40km, 평균너비는 8km로, 지중해 연안에 위치하며 남북으로 길쭉하다.
중심도시는 가자이고 가자 주변에 약간의 과수원과 경작지가 있다. 

1948년 팔레스타인 전쟁에서 이스라엘군과 이집트군의 격전지가 되었으나, 1949년 UN의 이스라엘-이집트
휴전협정에 의하여 이집트 측에 편입되었다.

인구의 절반 이상이 아랍 난민촌에 살고 있으며, 게릴라의 중요한 기지였다.
1956년 수에즈 전쟁으로 이스라엘이 점령하였으나 1957년 다시 이집트의 영토가 되었고, 1967년 중동전쟁에서
다시 이스라엘이 시나이 반도와 함께 점령하였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라빈 총리는 1993년 9월 13일,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와 이스라엘 점령지의 잠정자치에
관한 원칙선언에 합의했다.
이에 따라 1994년 5월 가자와 예리코에서 잠정자치가 시작되었다.
 

 c) 팔레스타인

면적은 2만 6,300㎢이며, 영어로는 팔레스티나(Palestina)라고 한다.
동쪽은 요르단강(江), 남서쪽은 시나이반도, 북쪽은 레바논, 북동쪽은 시리아에 접한다. 

지중해를 따라 좁고 긴 평야가 펄쳐지고, 동쪽으로 갈수록 지대가 높아져 중앙은 구릉지대이다.
이 지역의 동쪽은 경사가 급한 계곡을 이루며, 그 계곡을 요르단강이 흐르고 있다.
남쪽은 네게브 사막지대이다.
기후는 지중해성 기후이고 비는 적다. 

현재 이 지역의 80%는 이스라엘 영토이다.
1948년의 팔레스타인 전쟁 및 1967년의 제3차 중동전쟁 결과 요르단 ·이집트령(領)이 되었던 요르단강 서쪽
연안지역과 가자 지구도 이스라엘이 차지하였다.
이 가운데 베들레헴은 1995년 12월 이스라엘로부터 반환되었다. 

팔레스타인이라고 부른 것은 BC 12세기에 팔레스타인인(人)들의 지배를 받게 된 뒤부터이다.
BC 11세기에 헤브라이인들이 이스라엘 왕국을 건설하여 솔로몬왕 시대에는 찬란한 영화를 누렸으나 솔로몬이
죽은 뒤 이스라엘과 유다로 분열되었다.
그 후 이스라엘은 앗시리아에(BC 8세기), 유다 왕국은 신(新)바빌로니아에(BC 6세기) 멸망당하였다.

이 지역은 또한 BC 4세기에 알렉산드로스 대왕 군대의 통치를 받게 되었으며, BC 1세기에는 로마제국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636년 이슬람교를 바탕으로 뭉쳐진 아랍인들이 로마를 격파한 이후 팔레스타인은 오스만투르크령 시대
(1516~1917)를 포함, 이슬람교도들의 지배가 계속되었다.

다만 그 동안에도 12세기의 제1차 십자군(十字軍)이 예루살렘 왕국을 건설하여 이곳을 통치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역사적 과정으로 말미암아 팔레스타인에는 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의 성지(聖地)가 함께 있는
복잡한 종교적 ‘숙명(宿命)’을 안고 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팔레스타인은 영국의 위임통치령이 되었으나 세계대전 기간 중 팔레스타인 처리문제를
두고 영국이 두 가지의 모순된 선언을 발표함으로써 팔레스타인을 둘러싸고 아랍 ·유대인 사이에 심한 대립을
빚게 되었다.

유대인들은 강력한 시오니즘을 바탕으로 삼아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이주(移住)와 국가수립을 위한 준비를
실력으로 추진하고 미국의 지원도 얻어내어 1948년에는 이스라엘을 건국하였다.

1967년의 중동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전역을 비롯하여 부근 여러 나라 영토의 일부를
점령하였다.
이 전쟁으로 인하여 약 20만 명의 아랍인들이 요르단 ·레바논으로 달아났으며, 1948년의 전쟁 이후 이곳을 떠난
사람들을 합하여 이른바 팔레스타인 난민의 숫자는 300만 명이나 된다.

이들 사이에는 조상들이 살던 땅으로 돌아가려는 강렬한 소망이 있다.
1964년 이후 그들은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를 통일적 모체로 삼고 여러 게릴라 조직을 만들어 팔레스타인
해방운동에 나섰다.
1973년의 제4차 중동전쟁을 계기로 PLO의 싸움은 아랍세계의 석유전략과 결부됨으로써 비약적인 진전을 보았다.

같은 해 라바트에서 개최된 아랍 수뇌회의에서 요르단의 후세인왕은 요르단강 서쪽 연안에 대한 PLO의 주권을
인정하였으며, 1975년 국제연합은 팔레스타인의 민족자결권과 PLO를 준국가(準國家)로 인정하는 결의안을
채택하였다.
현재 108개국이 PLO를 승인하고 있다.

1979년 3월에는 이집트 ·이스라엘 평화조약이 조인되어 요르단강 서쪽 연안 및 가자지구의 팔레스타인 주민
자치문제를 두고 양국간의 협의가 진행되기에 이르렀다.
  

d) 유대인 (Jew)

보통 헤브라이인·이스라엘인이라고 부른다.
고대에 유대인은 원래 유다, 즉 유다 지파(약속의 땅을 점령한 12지파 중의 하나) 혹은 유다 왕국의(북이스라엘
왕국과 대비되는) 구성원을 의미했다.
바빌론 유수기를 거쳐 고향으로 돌아온 이스라엘인을 모두 유대인이라 불렀고, 스스로 이스라엘인이라고
부르기를 좋아하였다.

그 후 유대교 신봉자들을 가리키는 말로 예후디라는 용어(라틴어 Judaeus, 고대 프랑스어 Gyu, 현대 프랑스어
Juif, 독일어 Jude, 영어 Jew)가 사용되었는데, 유수 이후의 생존자들(과거 유다 왕국의 주민들)만이
이스라엘인으로서 고유의 주체성을 유지했기 때문이다.
(북이스라엘 왕국의 10지파는 BC 721년 아시리아에게 정복된 후 뿔뿔이 흩어졌고 점차로 다른 민족들에게
동화되었음)

유대인이라는 용어는 라틴어의 유다이우스(Judaeus)와 히브리어의 예후디(Yehd)에서 비롯된 그리스어
이우다이오스(Ioudaios)에서 나온 말이다.
예후디라는 말은 〈구약성서〉의 뒷부분에만 나오는 형용사로서 이복형제인 베냐민의 자손과 함께 유다 왕국을
이루고 있던 야곱의 넷째 아들 예후다(유다)의 후손을 가리킨다.

디아스포라(離散)로 자손은 세계 각지로 유랑하여, 그 땅의 인종·민족과 혼교(混交)를 거듭하여 왔기 때문에
형질·문화·종교는 다종 다양하다.
즉 형질상 다수의 유대인은 백인이지만 일부는 유색인(有色人:인도의 Black Jews)이며, 흔히 유대코라고 불리는
갈고리 모양의 코도 지배적인 특징은 아니다.

종교적으로 유대교에서 다른 종교로 개종하거나 무신론자가 된 사람도 많다.
이디시어(語)·헤브라이어 사용자, 유대적 문화(유대曆, 시나고그, 특유의 풍속·요리 등)의 보존자는 점점 감소하고
있다.
또한 디아스포라 뒤에 가속화한 유랑 때문에 유대인은 민족을 구성할 수가 없었다.

더욱이 이스라엘 국민 중에는 많은 아랍인이 포함되어 있으며, 대다수의 유대인은 전세계에 분산되어 있으므로,
유대인은 현재 민족이 아니다.
유대인이란 형질·언어·문화·국적을 막론하고, 비교적 최근까지 유대교도인 자의 자손이라는 조건을 첨가할 수도
있겠지만, 단적으로 말하면 자신을 유대인이라 생각하고 타인으로부터 유대인 취급을 받고 있는 자이다.

이스라엘도 유대인을 이와 비슷하게 규정한다.
따라서 유대인의 인구는 정확히 파악할 수 없으나, 약 1,300만∼1,400만으로 그 반수는 아메리카 대륙에 있다.
이것은 유럽의 유대인이 19세기에 세계 유대인 총수의 약 80%, 1930년에 약 60%였던 것과 대조적이며, 그 변화의
원인은 유럽의 유대인 박해를 피하여 이주한 때문이다.
학자·예술가의 수는 상대적으로 많지만, 대부분의 유대인은 도시에 사는 노동자·중산계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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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전쟁] 아랍 대 이스라엘 전쟁

 

 

 

아랍 대 이스라엘 전쟁이라고도 한다.
긴 역사적 배경과 복잡한 국제적 관계가 얽혀서 제2차 세계대전 후 중동지역에 끊임없는 긴장을 몰고 왔으며,
4차에 걸친 전쟁까지 겪어야 했던 이 중동분쟁은 아랍·이스라엘 양민족의 숙명적인 대립에서 유래한다.
즉, 기원전 팔레스타인 땅에 건국한 유대인은 망국 후 유랑의 민족으로 전락하였으나 조상의 땅인 가나안의
언덕으로 돌아갈 것을 민족의 비원(悲願)으로 삼아 왔다.

이 '시오니즘(Zionism)'은 후에 팔레스타인에 유대국가를 재건하려는 정치운동으로 전환해 갔다.


한편 예루살렘은 636년 이슬람에게 공략되었고, 이후 팔레스타인 지역의 대부분은 이슬람교도에 의해
점거됨으로써 이슬람교도에게도 성지(聖地)가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중 영국은 전쟁수행을 위해 시오니즘을 지지함과 동시에 독일측인 오스만 투르크의 후방교란을
위해 아랍인의 협력을 요청하였고, 양자에 대해 팔레스타인을 내주겠다는 모순된 언질(아랍에 대해서는
맥마흔선언, 유대에 대해서는 밸푸어선언)을 주었던 것이 이 비극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전 후 팔레스타인은 영국의 위임통치하에 들어갔으며, 밸푸어선언으로 팔레스타인에 국가재건을 약속받은
유대인이 내주(來住)하면서 이곳에 정착하고 있던 아랍인과 충돌이 생기게 되었다. 
 

 c) 1차 중동전쟁

제2차 세계대전 후 유대 난민의 대량 유입으로 분쟁이 격화되자 영국은 분쟁의 해결을 국제연합에 위양하였다.
1947년 제2차 국제연합 총회는 팔레스타인을 아랍과 유대의 쌍방에 분할하는 결의를 채택하였다.
1948년 5월 14일 유대인은 영국군의 철수와 동시에 이스라엘의 독립을 선언하였다.
그러자 5월 16일 이집트를 비롯한 아랍측 약 2만의 병력이 팔레스타인에 침입, 전세는 당초 아랍측이
우세하였으나 이스라엘의 공세로 아랍측은 패퇴를 거듭하였다.

이 사이 국제연합의 팔레스타인 조정관 백작 B.W.베르나도테가 유대인 과격분자에게 암살되는 불상사도 있었으나
국제연합의 조정으로 1949년 2월 휴전이 성립하였다.
그러나 이 전쟁 결과 100만의 팔레스타인 난민이 발생하고 이른바 아랍게릴라가 조직되었다.  
 

d) 2차 중동전쟁

제1차 중동전쟁의 휴전 후에도 사태는 악화를 거듭하여 쌍방은 군사력 증강에 광분하였다.
1952년 7월 이집트에서는 혁명이 발발, 왕제가 붕괴되고 공화제가 실시되었다.
1956년 초대 대통령에 취임한 G.A.나세르는 그해 7월 수에즈운하의 국유화를 단행하여 이스라엘로 향하는
선박의 통항을 거부하고 티란해협을 봉쇄하였다.

이로써 큰 타격을 입게 된 영국 ·프랑스는 10월 29일 이스라엘이 시나이반도를 침공한 2일 후에 수에즈운하를
공격하였다.
전세는 3국측에 유리하게 전개되었으나 미국의 압력, 소련의 위협, 국제여론의 악화 등으로 영국 ·프랑스는
정치적으로 매우 불리하게 되었다.

국제연합은 긴급특별총회를 소집하여 11월 14일 즉시 철수와 유엔군 파견 결의를 채택, 정전(停戰)과 감시를
위한 유엔긴급군을 편성 ·파견하였다.
이에 따라 사태는 진정되었고, 영국 ·프랑스는 연내에, 이스라엘은 1957년 3월에 점령지로부터 철수하였다. 
 

e) 3차 중동전쟁

제2차 중동전쟁 후 1964년경부터 아랍게릴라의 활동이 시작되어, 게릴라의 기지가 된 시리아에 대해
이스라엘은 1967년 4월 대규모 공격을 감행하였다.
이에 대해 붕괴에 직면한 아랍의 결속강화를 이스라엘과의 대결에서 회복하려는 이집트 대통령 나세르는
대군을 시나이반도에 투입, 유엔긴급군의 철수를 요청하고 아카바만(灣)의 봉쇄를 선언하였다.

6월 5일 이집트-이스라엘 간에 전투가 개시되었고, 전란은 시리아 ·요르단으로 확대, 전면적인 전쟁으로
확대되었다.
서전의 기습공격으로 아랍측 공군력을 괴멸시킨 이스라엘군은 압도적인 우세 속에서 4일 만에 시나이반도를
점령하였으며, 요르단강 서안(西岸)지역, 시리아 국경의 골란고원을 공략하였다.

국제연합안전보장이사회는 6월 6일 즉시 정전을 결의하였고, 쌍방의 수락에 의해 6월 9일 정전이 실현되었다.
또한 안전보장이사회는 그해 11월 중동분쟁의 정치적 해결을 위한 결의 242호를 채택하였다. 
 

f) 4차 중동전쟁

이집트 대통령 나세르는 전력의 재건을 서둘렀고, 아랍게릴라는 1969년경부터 파괴활동을 격화하였다.
요르단에서는 1970년 9월 화평에 반대하는 게릴라와 정부군 사이에 내전이 있었다.
1970년 9월 28일 대통령 나세르의 급사로 M.A.사다트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사다트는 이스라엘 기습을 계획하여 1973년 10월 6일 선제공격을 가함으로써 이스라엘 공군과 탱크대를 소련제
미사일과 로켓으로 격파, 서전을 승리하였으나, 북부에서는 시리아군이 패퇴하여 전선은 고착화되었다.

이에 유엔안전보장이사회에서는 22일 미 ·소공동제안에 의한 즉시정전, 1967년의 안전보장이사회 결의 242호의
이행 등을 골자로 하는 결의안이 채택되고, 당사국의 수락을 얻어 같은 날 정전을 성립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연말에는 제네바에서 중동평화회의가 개최되고, 1974년 1월 이집트-이스라엘 간에 병력격리협정이 조인되어
그 이행을 감시하기 위한 유엔군이 파견되었다.

이 전쟁 중에 아랍석유수출국기구(OAPEC)는 석유전략을 발동, 생산제한과 금수(禁輸)를 실시했기 때문에
세계는 심각한 석유위기를 겪어야 했으며, 각국 경제는 막심한 타격을 입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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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온운동으로 인한 이스라엘 회복

 

 

 

1.시온운동 (Zionism)

 

고대 유대인들이 고국 팔레스타인에 유대 민족국가를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한 유대민족주의 운동

19세기 후반 동유럽 및 중부유럽에서 시작되었는데, 여러 면에서 이것은 고대 예루살렘 중심부의 시온이라는
약속된 땅, 즉 팔레스타인에 대한 유대인과 유대 종교의 민족주의적인 염원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에 앞서 16∼17세기에는 수많은 ‘메시아’들이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복귀를 지원하였다.

한편 18세기 말의 하스칼라(계몽)운동은 유대인들이 서양의 세속문화에 동화되도록 유도하였으나, 동유럽의
유대인들은 동화되지 않았을 뿐더러 제정 러시아의 유대인 학살에 대한 반발로서 ‘호베베 시온(시온을 사랑하는
자들)’을 결성하여 유대 농민들 및 기술자들의 팔레스타인 이주운동을 촉진시켰다.

이러한 시오니즘에 대해 정치적 성향을 부여한 인물은 오스트리아의 저널리스트인 T.헤르츨이었다.
그의 유토피아적인 정치소설 《유대인 국가》(1896)와 《오래 된 새로운 땅》(1903)은 시오니즘을 촉진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1897년 헤르츨은 스위스의 바젤에서 제1차 시오니스트회의를 소집하여 바젤계획안을 작성하였다.
이 시오니스트회의는 1901년까지 5차례 개최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이전에는 시오니즘이 단지 러시아 출신의 유대인 소수파만을 대표하였으나, 그 이후 오스트리아
및 독일의 유대인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시오니즘은 전세계에 걸쳐서 자발적으로 규합된 유대인 조직으로서 연설 및 안내책자, 여러 언어로 발행되는
신문들을 통해서 적극적인 선전활동을 전개하였다.

1905년 러시아혁명이 실패하고 유대인에 대한 학살과 억압이 뒤따르자 러시아의 젊은 유대인들은 선구적인
이주자들로서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1914년에는 팔레스타인에 9만 명에 달하는 유대인들이 있었고, 이 가운데 1만 3000명에 이르는
이주자들은 43개의 유대인 정착촌에서 생활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정치적인 시오니즘이 재주창되었고, 그 주도 역할은 영국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이 맡게
되었다.
이러한 시온주의자들로서 C.A.바이츠만과 N.소콜로는 1917년 11월 2일, 영국으로부터 팔레스타인 내의 유대
민족국가 건설에 대한 영국의 지지를 약속하는 밸푸어선언을 얻어내는 데 주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뒤이어 시온주의자들은 팔레스타인의 도시 및 농촌에서 유대인 정착촌을 건설하여 유대인 자치조직을 완성하였고,
그들의 문화생활과 헤브라이어 교육을 강화하였다.
1925년 3월 당시 팔레스타인 내의 유대인 수는 공식적으로 10만 8000명에 달하였고, 1933년에는 23만 8000명으로
증가하였다.

아랍인들은 팔레스타인이 결국 유대인 국가가 되는 것을 우려하였고, 따라서 시오니즘과 이를 지원하는 영국의
정책에 강력하게 반발하였다.
특히 1929년과 1936~1939년에는 아랍인들이 반란을 일으켜 영국은 아랍의 요구와 시온주의자들의 요구를
조정하기 위한 계획을 마련하게 되었다.

히틀러주의가 대두되고 그에 의한 유대인 학살이 자행되자 유대인들도 도피처로서 팔레스타인과 그 밖의 지역,
특히 시오니즘을 옹호하는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아랍인들과 시온주의자들 간의 긴장이 고조됨에 따라 영국은 팔레스타인 문제를 처음에는 미국과 협의하였으나,
후에는 국제연합에 일임하였다.

1947년 10월 27일 국제연합은 팔레스타인을 아랍 국가 및 유대 국가로 각각 분할할 것과 예루살렘을 국제화할
것을 제안하였다.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 국가가 정식으로 성립하자 1948~1949년에는 아랍-이스라엘전쟁이 발발하였고,
전쟁 결과 이스라엘은 국제연합의 결의에 따라 제공받은 땅보다 많은 부분을 아랍으로부터 획득하였다.

결국 제1차 시오니스트회의 이후 50년이 지난 후, 또한 밸푸어선언 이후 30년 만에 시오니즘은 팔레스타인에
유대국가를 건설하려는 목표를 달성하였다.
그 후 20여 년에 걸쳐 세계에 흩어져 있는 시오니즘 조직들은 이스라엘에 대해 재정적 지원을 계속하였고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이주를 장려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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얀 후스 - 세계선교 잉태한 종교개혁 선구자

 

 

 

 

 

블타바(몰다우)강의 정경이 아름다운 선율로 수놓아진 스메타나의 ‘나의 조국(MA VLAST)’은 체코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널리 사랑받고 있는 얀 후스(Jan Hus)와 그의 사상,그를 따르는 후스파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교회사를 세밀하게 검토하노라면 16세기 종교개혁이 이루어지기 전에도 타락한 교회를 개혁하고자 했던 개혁운동들이 끊임없이 이어졌음을 알 수 있다. 근래의 교회사 연구가들은 이 교회개혁운동들을 ‘첫번째(과격한) 종교개혁운동’ 이라고 부른다.

 

이 중 가장 대표적인 개혁운동은 13세기 발덴저와 15세기 보헤미아의 종교개혁운동이다. 이같은 개혁운동들은 교회사 가운데서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했다.

 

오늘 소개할 후스도 1415년 7월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이단자로 낙인찍혀 화형당한 체코인으로만 알려져 있을 뿐이다. 얀 후스는 1370년 남보헤미안 후시네크 지방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사제의 길에 들어서서 프라하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을 연구하였다.


그가 사제가 되고자 했던 동기는 그 당시 농부의 아들들이 그랬듯이 안정된 생활기반을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는 신학수업 과정에서 철저한 변화를 경험하고 열정적인 진리의 탐구자요 신학자로 거듭났다. 체코 종교개혁의 아버지로 일컬어지고 있는 얀 밀리치 크로메리즈와 마티아스 본 야노프가 후스의 신학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결정적으로 후스에게 영향을 미친 사상가는 영국 옥스퍼드 대학의 교수였던 존 위클리프(1330∼1384)였다. 위클리프는 성경에 입각해 기존 교회질서에 준열한 비판을 가하고 철저한 교회개혁을 부르짖었던 종교개혁의 선구자였다. 영국유학에서 돌아온 후스는 1398년부터 프라하대학 철학부에서 강의했다.


1402년부터는 3000명가량이 모였던 프라하 베들레헴성당에서 설교자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는 체코 선현들의 개혁 전통에 굳건히 선 민족 설교자로서의 면모를 과시했다.

 

당시 유럽 문화의 중심지였던 프라하에는 황제 카를4세가 자신의 이름을 따 독일어로 교육하는 대학을 세워 독일어와 독일문화가 헤게모니를 쥐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주체적인 신앙고백과 모국어를 중심한 신학운동을 전개한 후스의 개혁운동은 체코 민중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후스는 1409년 프라하대학 총장에 취임한다.
그는 체코어 라틴어로 수많은 글을 남겼는데 설교만 해도 무려 3000편이 넘는다.
그의 설교는 평민들로부터 왕족과 귀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청종했다.
그의 교회개혁과 사회윤리적 내용을 지닌 설교는 청중을 열광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후스의 비판이 중세교회의 치부였던 면죄부 판매에까지 이르자 교황,왕,귀족,교회지도자들 등 기득권층이 강력하게 견제했다.


후스는 프라하에서 모든 교회활동을 금지당하는 처분을 받았다.
후스는 부패한 교회의 기득권 세력과 타협하지 않고 남뵈멘지역으로 가 들판과 광장에서 민중을 향해 진리를 설교했다. 이 무렵 후스가 로마교회의 잘못을 지적하기 위하여 라틴어로 쓴 대작이 ‘교회론(De ecclesia)’이다.

 
후스를 제거하기 위한 음모는 교황권 분열에 직면하여 ‘교회의 개혁과 일치’를 명분으로 콘스탄츠에서 열렸던 공의회를 기점으로 구체화된다.


공의회는 이단자로 처형된 위클리프와 후스 사상과의 관련성을 조사한다는 명분으로 후스를 불렀다.

 

후스의 친구들은 공의회가 명분으로 내세우는 교회일치와 개혁의 이면에는 커다란 음모가 도사리고 있음을 간파하고 후스가 콘스탄츠에 가는 것을 한사코 만류하였다.

 

그러나 후스는 교회 지도자들과 맞붙게 될 논쟁에 대비해 그의 입장을 철저히 준비한 후 콘스탄츠로 향한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보헤미아왕을 겸하고 있던 지그문트 황제도 그의 신변과 언론의 자유를 보장해주는 편지를 써주기까지 한다. 그러나 후스는 도착하자마자 감옥에 갇히고 만다.


공의회를 주관한 교황청측에서는 후스의 교회비판을 무조건 철회하라고 요구했다.
후스의 신변안전을 보장했던 황제 지그문트는 기회주의적으로 추기경들의 눈치를 살피다가 마침내는 후스를 처벌하라는 입장에 서게 된다.

 

후스에게는 주장을 내세우거나 대화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도리어 후스가 쓰지도 않았던 글들을 빌미로 법정에 고소당하고 이단자로 판결받았다.
후스는 끈질기게 그가 주장했던 입장을 철회하도록 강요받았지만 사람보다는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에 대한 순종의 길을 선택했다.

 

마침내 그는 1415년 7월6일 콘스탄츠의 화형대에서 이단자의 누명을 쓴 채 죽어갔다.
후스와 같은 신학적 입장에서 후스의 입장을 대변했던 히로니무스 폰 프라하도 같은 이유로 같은 방법에 의해 같은 장소에서 화형대의 연기로 사라졌다.


지금도 독일 콘스탄츠에는 두 사람의 이름이 새겨진 큰 바위가 그 날의 비정한 사건을 말없이 증언하고 있다. 후스의 생애와 사상은 한마디로 진리에 대한 탐구와 열정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가 화형되기 전 남긴 글은 그가 전 생애를 통해 추구했던 진리가 무엇인지를 증언하고 있다.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여, 진리를 찾으라! 진리를 들으라! 진리를 배우라! 진리를 사랑하라! 진리를 말하라! 진리를 지키라! 죽기까지 진리를 수호하라! 그것은 진리가 너를 죄와 악마와 영혼의 죽음과 마침내 영원한 죽음으로부터 자유롭게 하기 때문이다”

 

후스의 처형 뒤 후스의 사상과 뜻을 이어받은 강력한 신앙공동체인 보헤미안 동포단이 형성돼 이들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부활의 복음이 체코 민중의 가슴에 심어졌다.


보헤미안 동포단은 경건주의의 모태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세계선교의 아방가르드 역할을 했다.

1432년 후스파 교도들은 공의회가 열리는 바젤에 와서 후스가 지향했던 종교개혁의 정당성을 변호하고 그 정당성을 인정받았다.


후스는 단순히 교회개혁의 선구자로서 뿐 아니라 주체적인 민족정신을 고양시킨 애국자로 지금까지 체코인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다.

 
1915년 후스 사후 500년을 맞아 프라하 구시가 중심부에 후스의 기념비가 세워져 이곳을 찾는 이들에게 민족 주체성과 독립정신을 증언하고 있다.

 
◇ 필자약력

△한국신학대학 신학과 졸업

△연세대 연합신대원 석사

△스위스 바젤대학 신학박사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교육원장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 상임총무
 
김원배 (기독교장로회 총회교육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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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뉴톤 - 탕자처럼 돌아온  


 

존 뉴톤은 1725년 경건하고 체험있는 그리스도인 - 어머니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뉴톤의 어머니는 대부분의 시간을 아들교육에 드렸습니다.


많은 기도와 눈물로 아들을 돌보며, 그를 목사로 기르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뉴톤이 여섯 살때 그녀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소천하였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뱃사람이었고 뉴톤의 어머니가 죽자 그 다음해에 곧바로 재혼을 하였습니다.
이 일 이후 뉴톤의 행실은 삐뚤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열 한 살때부터 아버지를 따라 항해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종교에 거의 관심이 없었으며, 쉽게 매우 나쁜영향들을 받아들였습니다.

한 번은 그의 친구와 같이 군함을 승선하기로 되어있었습니다.


그러나 뉴톤은 약속시간에 너무 늦게 나가게 되었고, 미리 떠난 배는 전복되어 그의 친구와 많은 사람이 죽게 되었습니다. 이 일을 통해 그는 자신의 생명을 보전하신 하나님에 대해 깨달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후로 그는 경건한 생활을 하고자 결심했습니다.

 

그는 자주 금식하며, 채식을 하고 많은 시간을 성경 읽기와 묵상 그리고 기도를 하며 하나님을 위한 시간으로 드렸습니다. 그러나 또 다시 그는 다시 밤새도록 술을 마시며, 창기들과 어울렸습니다.
항해 중 못된 선원들과 어울리며 악한 행실을 일삼았습니다. 자신의 자리를 찾지 못하고 방황을 하기 일쑤였습니다.

 

전쟁이 일어나자 뉴톤은 군인이 되어 군함에 승선케 되었고, 사악한 행동을 낙과 습관으로 삼았습니다.
얼마후 그는 탈영했다가 붙잡혀 중범죄자가 되기도 했습니다.
풀려난 후 그는 거만하게 죄를 지었으며, 다른 사람까지 유혹하고 타락시켰습니다.
후에 그는 15개월 동안 포로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포로생활동안 노예무역의 일꾼으로 일했습니다.
많은 시간들을 하나님을 저버린 행동 타락한 삶을 살던 그는 포로생활 기간동안 굶주림과 헐벗음 그리고 종과 같은 비천한 삶으로 인해 마음이 낮아졌습니다.

 

그는 그의 여가 시간을 주로 성경을 읽고 묵상하며 주님께 자비와 지도를 간구하는데 보냈으며, 신약 성경을 통독하면서 몇몇 구절들로 인해 충격을 받았습니다.


특히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에서 그 탕자가 너무나도 자기 자신을 예시(豫示)해 준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탕자를 받아들이는 아버지의 선하심, 그와 같은 아들을 맞으러 달려 나가는 모습은 죄인들을 돌이키시는 주님의 선하심의 충분한 설명이 되어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그는 계속하여 많은 기도를 드렸고 자신이 신자(信者)로 죽을 수만 있다면 먹을 것이 없어 죽는 것까지도 만족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아일랜드에 도착하기 전에 그는 복음의 진리와 그의 모든 필요를 충족시키는 복음의 정확한 적합성에 관하여 만족할 만한 증거를 얻게 되고 "하나님께서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려고 육체로 나타나셨다"는 지고(至高)한 원리를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한 놀라운 일을 이루셨고 나는 더 이상 불신자가 아니었습니다. 나는 즐거이 과거의 불경(不敬)을 버렸고 진지하고 기꺼운 마음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

 

이제 그는 잘못 보낸 과거의 삶을 뉘우쳤고 하나님의 말씀에 어떤 가치를 두었으며, 더 이상 과거와 같은 방탕자는 아니었으나 그의 생활은 쉽게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그의 입에서 나가는 말은 헛되고 어리석은 말이었으며 자주 마음속에서 송사가 있었지만 급히 타락의 길로 떨어져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 외에는 과거와 거의 다름없이 나빠졌다.

 

그는 끔찍한 욕설꾼이 되어 보통의 저주와 맹세의 말들로 만족하지 않고 매일 새로운 욕설을 만들어냈습니다. 더우기 노예선에서 노예와 같이 일했던 그가, 이제는 노예선의 선장이 되어 노예를 사고 팔았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도 하나님의 때가 이르렀습니다. 그는 노예무역을 끝내고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에 큰 폭풍우를 만났습니다. 배는 파선되었습니다.


그는 이러한 상황에서 '주여 우리에게 자비를'이라고 다급하게 말하였습니다.
그는 임박한 죽음 앞에 성경말씀을 떠올리며 자신의 영혼의 종말에 대해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직 완전한 죄의 깨달음이 없이, 절망과 조바심이 뒤섞인 침울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면 자신은 용서받을 수 없다고 생각하며 최악의 상황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회개치 못하는 뉴톤의 영혼을 불쌍히 여겼습니다.
배가 물의 위험에서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를 하나님의 손길로 믿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믿음의 기도를 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었습니다.


그의 기도는 까마귀 울음소리 같았지만, 주님은 멸시치 않고 그의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배가 파선된지 4주만에, 뉴톤과 선원들은 모두 구조되었습니다.

 

이 일을 통해 그는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어떠한 죄인이라도 영접해 주심으로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을 만날수가 있었습니다.
그의 삶에 큰 전환점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하나님의 종이 되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내가 수원(水源)으로부터 신선한 능력과 은혜를 계속 공급받지 않는 한, 나 스스로는 한 시간도 서 있을 수 없는 얼마나 불쌍한 존재인가 하는 것을 일깨워주셨습니다. "

 

마침내 그는 비인도적인 노예사업을 포기하고 1750년 2월 어머니의 옛 친구의 딸인 메리 케틀렛과 결혼합니다. 그는 이 결혼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합당한 때-주께서 그의 마음을 변화시키신 후-연결된 것으로 믿었습니다. 후에 그는 리버풀에서 조수(潮水) 측량사 직에 임명되었는데 그가 생각지도 못했던 측량 기사의 자리는 그가 원하던 자리였고, 그것은 그에게 많은 여가와 스스로의 방법대로 살 수 있는 자유를 주었습니다.

 

뉴톤은 자신에게 주어진 여가시간을 어떻게 하면 잘 이용할 수 있을까를 생각했고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를 작정하곤 이 주목적에 도움이 되는 외에는 아무 것도 추구하지 않기로 결심합니다.

 

이러한 목적에 대한 첫 시도는 신약과 그리이스어 역(譯) 구약성경(SeBt-uagint)을 이해할 수 있도록 그리이스어를 충분히 배우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어느 정도 진보를 이룬 후, 다음 해에는 히브리어를 배웠고 2년 후에는 시리아어 공부를 시작하여 성경을 깊이 연구하였습니다.

 

이 모든 연구들과 더불어 라틴어, 영어, 그리고 배에 있을 때 혼자서 배운 불어로 신학 부분의 최고 서적들을 계속 읽어 나갔습니다.


2∼3년 후에는 주로 글을 쓰는데 시간을 보냈고 성경 외의 다른 책들을 많이 읽을 시간은 갖지 못했습니다. 뉴톤은 "다만 우리를 핍박하던 자가 전에 잔해하던 그 믿음을 지금 전한다 함을 듣고 나로 말미암아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니라"라는 갈라디아서 1장 23∼24절 말씀을 묵상하던 중에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을 공중 앞에서 증거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겼고 이 희망 때문에 성경 원본을 계속적으로 연구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좀더 광범위하게 일할 수 있도록 목사의 직에 종사할 것을 희망하는 많은 이들의 요청에 따라 1758년 요크의 대감독에게 안수를 신청했으나 거절당합니다. 그 후 1764년에, 뉴톤은 오올리의 목사로 와달라는 제의를 받고 오올리 교구의 목사가 되어 15년간 목회사역을 감당하였으며, 자신의 마지막 일터에 대한 커다란 감회를 이렇게 말합니다.

 

"가장 무지하고 가장 비천하고 가장 무참히 버려진 노예 중의 하나인 내가, 아프리카 연안의 참흑한 생활로부터 건지워져 마침내 세계의 도시 중에서도 으뜸 가는 교구 목사로 지명된 것은 여기서 그러한 은혜를 증거할 뿐만 아니라 그 은혜의 특이한 실증과 기념으로 서기 위함이요, 역사 설교 그리고 저술을 통하여 널리 세계에 그 은혜를 나타내기 위함이다. 이것은 결코 내가 자격이 있어서 되었다고는 평가할 수 없는 사건이다. "

 

실제로 이러한 감회는 그의 생각 가운데 너무도 깊이 들어 있어서 어떤 곳에서든 단 하루도 그 기이한 사건을 어떤 방법으로든지 이야기하지 않고 지나는 법이 없었습니다.


다정하고 이야기하기 좋아하는 성격인 그는, 그의 집을 모든 계층과 교파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개방하여 아버지가 자녀에게 하듯 그의 친구들 특히 젊은 목사들 흑은 목사 지망생들에게 격려와 교훈을 주곤하였습니다. 1780년 그는 런던의 성 메리울노쓰 교회로 옮겨서 생을 마칠 때까지 28년간을성도들의 신앙성장을 위해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그는 목회사역을 하는 동안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든 성도들에게 끊임없이 회개를 촉구하였는데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그의 설교는 많은 이들에게 큰 감화를 주었습니다.

 

뉴톤이 팔십이 넘자 그의 친구들 중에서는 그가 공중 사역을 너무 오래 계속하는 것이 아닐까 하여 "그만 두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라고 물을 때 그는 음성을 높이며 단호하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멈출 수 없습니다. 아니! 어떻게 옛 아프리카의 신성모독자가 말을 할 수 있는데도 입을 다물 수 있다는 말입니까?"

 

1807년 12월 21일 죽기 한달 전에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죽는다는 것은 위대한 일입니다. 그리고 육체와 마음이 쇠할 때 우리 마음의 힘이요, 우리의 기업으로써 영원히 하나님을 모시고 있다는 것은 위대한 일입니다. 나는 내가 의뢰한 분을 알며 그 분이 내가 그에게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지켜 주실 수 있다는 것을 압니다. 이후로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니 그것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신 주께서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입니다. "

 

또 한번은 이렇게 말했다.

 

"더 밝은 빛, 더 큰 사랑, 더 큰 자유며, 이 후에 내 눈이 이 세상에서 눈 감을 때에, 나는 더 좋은 세상에서 눈을 뜨게 될 것을 기대합니다. 전능하신 자의 날개 그늘 아래 사는 것은 얼마나 좋습니까?"

 

그가 운명하기 전 수요일, 그의 마음이 평안하느냐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주님의 뜻으로 만족합니다"라고.

 

그는 추악하고 더러운 범죄 가운데서 자신은 구원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일생 간직하였습니다. 놀라운 은혜에 기초하여, 찬송가 405장 "나같은 죄인 살리신"(amazing grace) 등의 찬송가를 썼습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그리고 1807년 12월 21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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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젠 도르프 - 모라비안 경건주의의 선구자

 

 


1700년 5월 26일에 드레스덴에서 오스트리아 가문 출신인 한 작센 선 제후국 장관의 아들로 태어난 진젠도르프는 아버지의 죽음과 어머니의 재혼으로 인해 경건주의자 슈패너와 친밀하였으며, 프랑케와 함께 대중교육과 성경배포 그리고 선교를 장려하였던 외할머니 헨리테 카타리나폰 게르스도르프(Henriette Katharina von Gersdorf)밑에서 자라나게 되었다.

진젠도르프는 10세가 되던 해에 할레대학에 입학하여 17세까지 그곳에서 공부하였는데 이때
프랑케와 깊은 유대 관계를 갖게 되었으며, 그의 경건주의에 대한 기본적인 이상인 순결한 교회와
순결한 영적 생활에 대한 뿌리가 내면에 자리잡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할레 대학 출신의 선교사 지겐발크와 플뤼차우가 보낸 동 인도 선교에 관한 보고들을 접하게 되었고 1713년에는 플뤼차우가 할레를 방문했을 때 그를 직접 만나기도 하였다.

이처럼 진젠도르프는 할레 재단의 선교적 지원을 보면서 깊은 영향을 받게 되었다.

그리하여 진젠도르프는 다섯 명의 친구들과 함께 '겨자씨 모임(the Order of the Grain of Mustard Seed)'을 결성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증거하고 신앙문제로 고민하는 형제들을 도우며 아직까지 복음을 들어 보지 못한 해외에 복음을 전하는 것을 그들 모임의 목적으로 삼고 활동하였다.
 
그 후 1719년 진젠도르프는 네델란드와 프랑스로 연구여행을 떠나게 되었는데 도중에 뒤셀도르프에서 화가인 도메니코페티(Domenico Feti)가 그린 "내가 너를 위하여 이것을 당했건만 너는 나를 위하여 무엇을 하였는가?" 라는 각명(刻銘)이 달린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모습이 그를 사로잡게 되었고 진젠도르프는 이 그림으로부터 그의 필생의 사역에 있어서 상당히 주요한 자극을 받게 되었다.
 
진젠도르프가 이룩한 괄목할만한 업적은 바로 모라비안 교회를 설립하여 발전시킨 것이다.

로마 가톨릭 교회와 보헤미아 국가 교회의 박해를 피해 헤른후트(Herrnhut)로 피난온 형제단(The Unity of the Brethren)이라고 불리우던 모라비아의 후스파(Hussites) 개신교도들이 진젠도르프의 지도하에 기독교 공동체를 발전시켜 나갔는데 이 공동체가 '모라비아파'라고 불리워졌다.

진젠도르프는 모라비안의 형제단을 돌보기 위해 나중에는 드레스덴에서 법정 변호사로 일하던 공직을 버리고 형제단의 일에만 몰두하게 되었으며 루터교회의 신학자로서 인정되는 시험에 합격하고 1727년 모라비안의 감독으로 안수를 받게 된다.

진젠도르프에 의한 모라비안 교회는 선교지향적인 교회였다.
그들의 선교지향적인 모습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먼저, 전도하는 것이었다.

진젠도르프는 교회의 모든 회원들이 기독교의 기사(騎士)가 되어 복음을 전하는 것을 지도 이념으로 삼았다. 특별히 그는 모라비안 교회의 형제들을 작은 그룹으로 구성하여 주의 일을 하게 하였다.

그는 그 자신이 이러한 전도를 실천하였는데 암스테르담, 발틱 국가들, 베를린, 제네바등지에서 집회를 갖고 전도하였다. 그의 접촉은 다양하고 각계 각층에 이르러서 귀족들, 법원의 사람들, 대학생들, 교수들 모두가 그의 전도의 대상들이었다. 다음으로 중보기도를 들 수 있다.

1722년까지 90명이 헤른후트에 정착하고 1726년에 이르러서는 300명의 기독교 공동체를 형성하게 되었는데 1727년 서로를 권고하고 부흥을 위한 기도를 위해 작은 그룹들로 모임을 갖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24명의 형제와 24명의 자매가 자정부터 그 다음날까지 계속 기도하기 위해 각자 1시간씩 맡을 것을 서약하기에 이르렀다.

모라비안 교회의 시간 마다의 중보기도는 그 후 백년 이상 지속되었으며 이러한 중보기도는 그 다음 2백년 이상 수 많은 사람들이 모든 대륙으로 선교를 위해 파송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다음으로 모라비안 교회의 타문화권 선교를 들 수 있다.

모라비안 교회는 1732년 레온하르드 도버(Leonhard Dober)와 다비드 니츠만(David Nitschmann)을 서인도제도(the West Indies)에 파송하는 것을 시작으로 해서 그 뒤를 이어 1735년에는 그린랜드로, 1735년에는 수리남(Sirinam)으로, 1737년에는 아프리카에, 1740년에는 북아메리카의 인디언과 실론(Ceylon)에, 1742년에는 중국에, 1747년에는 페르시아에, 1754년에는 자메이카에, 1756년에는 안티구아(Antigua)에 선교사를 파송하였다.

1760년 진젠도르프가 죽기까지 모라비안 교회는 28년간의 활동을 통해 226명의 선교사를 배출해 내었고, 1760년 당시엔 그린랜드의 13개 지역과 중.북부 아메리카와 서인도제도에서 49명의 형제와 17명의 자매들이 약 6,125명의 영혼을 책임지고 있었다.

진젠도르프와 모라비안 교회의 이러한 선교는 독일 개신교안에서 가장 먼저 일어난 자발적인 선교운동으로서 많은 순교의 피를 흘리면서 세계 각처에서 사명을 완수한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진젠도르프와 모라비안 교회는 개신교 역사상 처음으로 전체 공동체의 전적인 지원을 통해 선교사를 파송했으며 "선교로서의 전체 교회" 라는 개념을 소개하였다.

아울러 개신교내에서 '선교에 대한 책임은 만일 어떤 주어진 지역내에 적법하게 세워진 교회가 있다면 그 교회를 통해 수행되어야 한다'는 생각과 함께 교회의 지역적인 견해(the territorial view)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역할을 감당하였다. 그때 이후로 심지어는 유럽 식민지의 권력자들의 외국 전초기지들도 새로운 선교사업을 시작하기 위한 곳이 되었다. 선교의 전진은 더 이상 전통적인 교구의 경계에 의해 제한되지 않게 되었던 것이다.

진젠도르프의 사후에도 모라비안 교회는 다른 교회로서는 이루지 못한 헌신적인 표준을 세워 놓았다.

뿐만 아니라 서인도제도로 건너간 모라비안들이 2백년에 걸쳐 3천명의 선교사를 지원하는 경이적인 기록을 낳았고 해외 선교구에 속한 신자의 수가 내지 교회의 신자의 수의 3배나 되는 특수한 예를 보여 주었다.

이들 모라비안 교회에서 파송된 선교사들은 개척적인 역할을 감당했을 뿐 아니라 어려움을 참고 이기며, 고난을 달게 받으며 전적으로 그리스도께 헌신하고 사람들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하여 활동하였다.

모라비안들은 그린랜드와 레브로돌(Labrador) 그리고 알라스카와 서인도제도, 동부 및 남부 아프리카와 빅토리아에서 선교활동을 계속했으며 국내 전도에도 매우 활동적이었다.

모라비안 교회는 비록 작은 교회였지만 그들이 다른 종파에게 미친 영향은 특별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모라비안 교회의 선교운동이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그 영향이 지역적으로 유럽의 여러 지역과 세계에 널리 미쳤다는 점에 있다.

그래서 로날드 녹스(Ronald Knox)는 모라비안 운동의 그런 점을 가리켜 "유럽 선교에 활력 있는 누룩"이라고 하였으며, 하세(Hasse) 주교는 "모라비안의 영향은 초기 영국 부흥의 중요한 요소들 가운데 하나"라고 평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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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란에서 여성  ]베일 착용

 

 

  
우리는 지금까지 많은 무슬림 국가의 여성들이 얼굴과 몸을 거의 가리고 다니는 것을 보아왔다.
  
그 근거가 꾸란에 있다.

꾸란 33:59은 “오 선지자여, 그대의 아내들과 딸들, 믿는 여자들에게 베일을 쓰라고 말하라. 그렇게 함으로써 더 인정받게 될 것이며 상처를 받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세일(Sale)은 이에 대해 더 자세하게 다음과 같이 해석하여 번역하고 있다.
  

 

“여성들은 밖에 나갈 때 긴 겉옷을 걸쳐 입어야 한다. 이것이 그들에게 적정한 복장이다. 이로써 그들은 덕망있는 여자로 인정받게 될 것이며 심한 말과 행동의 공격을 받지 않게 될 것이다.”(p.417)

  
꾸란 24:30~31은 여성의 베일에 대하여 더 자세한 규정들을 기록하고 있다.
  
꾸란은 “믿는자들에게 그들의 눈을 아래로 향하고 정숙함을 잘 지키라고 말하라. 그것이 그들에게 순결한 태도이다. 알라는 그들의 행위를 아신다. 믿는 여자들에게 그들의 눈을 아래로 향하고 정숙함을 잘 지키며, 그들의 장신구(밖에다 하는 장신구를 제외하고)를 보이지 않게 하고 베일로 가슴을 덮도록 하며, 장신구가 남편, 아버지, 남편의 아버지, 아들, 남편의 아들, 자매들의 아들, 그들의 여인들, 그들의 오른손이 소유하고 있는 여종들, 성적인 욕망이 없는 하인들, 아직 성적인 부끄러움을 모르는 아이들을 제외하고는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도록 하라. 또한 그들의 감춰진 장신구를 보이게 하려고 발소리를 내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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