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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 유대교(탈무드, 카발라), 이스라엘 이해하기

 

 

 

성경의 유대인은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아브라함의 후손이요, 하나님의 백성이다.

이런 이유로, 우리 믿는 사람들은 유대인이나 이스라엘을 좋게 여기고, 우리와 친근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생각 때문에, 유대인에 대한 예언을 낙관적으로 해석하게 된다.
 
하지만,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은 유대인의 타락을 보여줄 뿐, 회개했다는 기록이 없다. 

구약성경은 '하나님께서 유대인을 버리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왕하 23:27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이스라엘을 물리친 것 같이 유다도 내 앞에서 물리치며, 내가 택한 이 성 예루살렘과 ‘내 이름을 거기에 두리라!’ 한 이 성전을 버리리라!” 하셨더라.
호 4:6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말 1: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제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가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로마에서 유대인들을 만나 복음을 전한 바울은 유대인들이 복음을 거부하는 것을 보고 '구원이 이방인에게로 보내졌다!'고 선언했습니다.

행 28:28 "그런즉 하나님의 이 구원이 이방인에게로 보내어진 줄 알라! 그들은 그것을 들으리라!" 하더라.

유대교는 구약성경대로 믿는 신앙이 아니다.

엄격한 의미에서 유대교는 주후85년 바리새파의 얌니아 회의 이후에 노선이 결정된 바리새파 전통을 따르는 랍비종교를 말한다.
‘유대교의 경전은 율법, 지도자는 랍비, 모이는 곳은 회당’으로 알려졌지만, 유대교는 혼합종교이고, 율법보다는 탈무드와 카발라를 더 중시한다. 랍비는 율법전문가가 아니라 탈무드전문가이고, 유대회당의 건축양식이나 사용하는 문양에 사탄숭배적인 것들이 많다.

태양 마차를 타고 있는 헬리오스(태양신)를 중심으로 원형으로 된 12별자리의 상징(점성술)은 이스라엘에 남아있는 7개의 고대 회당유적에서 발견되었다. 유대교의 종교혼합을 보여준다.
 
두 기둥, 태양창, 아치 등 프리메이슨 양식으로 지어진 유대교 회당

자력구원을 가르치는 생명나무 문양의 파로켓(성경두루마리 보관함 가리개)

두 기둥 양식으로 지은 회당 – 육각성 창문, 원과 두 돌판과 아치 디자인 창문  ​

Magen David Synagogue, Kolkata – 체크무늬 바닥, 중앙의 제단은 사탄을 숭배하는 프리메이슨 로지와 같다.


유대교 심벌 - 육각성(사탄)은 정삼각형(남신, 태양, 하늘)과 역삼각형(여신, 달, 땅)이 합해진 것이다. 이는 카발라가 가르치는 자력구원을 설명하는 '생명나무 세피로드'를 기호로 나타낸 것이다.

탈무드는 바벨론에서 본 종교들과 사상들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율법을 해석한다. 그래서 혼합종교문서이고, 하나님의 뜻과 다른 결론을 내리고, 성경과 반대되게 가르치기도 한다.
'유대인이 유대교로 세상을 지배하는 것이 최종목표'라고 가르친다. 여기서 단일종교와 NWO(신세계질서)가 나왔다.

카발라는 여러 종교들과 사상들의 영적인 가르침을 종합한 혼합종교 문서이다. 여호와 대신에 ‘아인 소프(무한자)’를 최고존재로 가르친다.
인간이 스스로 구원을 얻는 방법을 가르친 도표가 생명나무 세피로드다.

생명나무 세피로드

세 기둥이 되는 생명나무

육각성이 되는 세 기둥

생명나무 세피로드를 건축물로 표현한 것이 두 기둥, 첨탑, 탑이다. 두 기둥이 건물에 합해진 형태가 고딕 양식이다.

힌두교 심벌 - 육각성 속에 십자가 있다. 십자가 교회의 기호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유대교 심벌이 힌두교처럼 육각성인 것은 내용이 같다는 뜻이다. 생명나무 세피로드를 기호로 나타낸 것이 육각성이다. 생명나무 세피로드가 힌두교의 구원관과 같다는 뜻이다.

카발라는 종교다원주의체제다. 카발라의 가르침이 헤겔철학에 반영되었다. ‘정반합, 절대정신, 제일원인’은 모두 카발라의 가르침이다.

카발라는 현재 사탄숭배자들이 지침서로 쓰고 있다.

종교다원주의, 종교통합(단일종교)운동, 단일정부운동이 모두 유대교(유대인)에서 나왔다.
신약성경은 유대인들의 타락을 말할 뿐, 그런 행동을 하는 이유를 자세하게 설명해놓지 않았다. 이를 이해해야, 유대인들이 왜 주님을 죽이고, 복음전파를 그렇게 방해했는지 이해할 수 있다.

성경의 이스라엘과 지금의 이스라엘은 다르다.
성경의 이스라엘은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이룬 나라였다.

하지만, 하나님의 징벌로, 나라가 망하고 지도자들이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하기도 했다.

성전은 하나님의 징벌로 파괴된 후, 재건되었고, 개축한 후, 다시 파괴되었다. 성전파괴는 하나님께서 '그런 타락한 제사를 받지 않겠다!'고 하신 뜻임을 보여준다.

주후70년에 로마에 의해 유다가 망하자, 많은 유대인들이 유대땅을 떠나 디아스포라가 되어 2,000여 년을 이방에서 떠돌며 살았다. 이 기간 동안 유대인들은 탈무드의 가르침을 따라 유대인우선주의를 추구하며 비윤리적으로 살았기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당했다. 신앙과 윤리에서는 용납할 수 없었다.

유대인들은 이를 ‘핍박당했다.’고 주장한다. 정치나 경제적인 면에서는 불이익을 당하고 재산을 뺏겼으므로, 그런 면이 있었다. 유대인들은 성경이 금하는 고리대금업이나 정착농업인들이 하지 않던 상거래로 재산을 축적했다.

혈통적으로 가장 정통성이 있는 유대인들은 프리메이슨 국가인 미국에서 살면서 미국과 세계를 움직이고 있다.
시오니즘운동으로 재건된 현재의 이스라엘은 순혈 유대인이 아니라 혼혈 또는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 유대교인들로 구성되었다. 출신배경에 따라 신분차별이 있다고 한다.
이스라엘의 건국초기에 형성된 집단농장(기부츠)은 사회주의방식부터 자본주의방식까지 다양하다는 것은 잘 알려졌다. 하지만, 시오니즘운동의 주축세력이 러시아에서 볼세비키혁명을 일으킨 공산사회주의자들이었고, 그로 인해, 재건된 이스라엘은 공산사회주의 체제라는 사실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지금의 이스라엘은 노골적으로 사탄을 숭배한다.

두 개의 삼각형을 겹쳐서 만든 사탄을 상징하는 6각성을 국기로 쓴다. - 사탄숭배국이란 공식표시다.

로스 차일드 가문의 재정지원으로 건축한 안팎으로 사탄적 상징이 가득한 이스라엘의 대법원 청사

이스라엘 에일라트에 있는 프리메이슨 피라미드와 두 기둥, 전시안

이스라엘 제1도시 텔아비브는 정부의 지원을 받는 세계최대의 동성애축제로 유명하다. - 동성애자들의 육각성과 이스라엘국기의 육각성이 같다.

현재, 세계의 정치, 경제, 문화를 장악하고 사탄숭배체제로 만드는 일에 힘쓰는 프리메이슨의 핵심지배세력이 유대인 자본가들이며, 프리메이슨의 모든 행동원리를 탈무드와 카발라가 제공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이나 유대인을 미화하고,‘탈무드를 가르치자!’ ‘유대인의 교육법인 하브루타(토론학습법)를 도입하자!’ ‘유대문화가 부럽다!’는 사람들이 있다.

​성경은 ‘이스라엘이나 유대인을 사랑하라!’거나 ‘본받아라!’고 하시지 않는다.
성경은 구약에서 신약까지 '유대인들이 타락했고, 하나님을 떠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바울이 안타까워한 이유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리셨다는 것만 말씀하신다.

성경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회복’은 그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와 하나님만 섬길 때 베푸실 은혜이지, 지금처럼 사탄숭배에 빠진 유대교를 붙잡고 있는 한은 안 될 것이다.

이스라엘에 ‘성지순례(聖地巡禮)’를 가는 사람들도 있다.
성경의 정황을 이해하기 위해, 이스라엘을 '답사(踏査)'하는 것은 성경을 바로 이해하는데 유익한 일이지만, 현재의 이스라엘은 결코 성지라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믿음을 위해,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아야 하거나, 성경에 나오는 역사적인 장소를 찾아가야 하는 것은 아니다.

‘성지’라 부르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미화하는 효과가 생기게 된다.

​‘순례(巡禮)’는 ‘종교상의 특정장소를 찾아가 참배(參拜)하는 것’을 말한다. 즉, 우상종교의 예배행위이다.
‘성지순례(하즈)’는 이슬람교도의 기본의무로, 모든 이슬람교도는 평생에 한 번은 반드시 그들의 성지인 메카를 찾아가 참배해야 한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왜 그들의 용어를 쓰면서, 그들의 행위를 따르고 있는가?

심지어, 스페인에 있는 카톨릭의 '산띠아고 길' 순례를 미화하는 사람들도 있다. 많은 시간과 돈을 들여 그 길을 찾아가 걸으면, 천국에 다다르는가? 카톨릭이 가르치는 구원에 유익한 '공덕'을 쌓는 일일 뿐이다.

중세 카톨릭은 '구원에 이르는 공덕'을 내걸어 사람들을 십자군에 동원했다.


산띠아고(=야고보의 스페인식 이름) 길 870km 약도

가리비는 비너스(아세라의 그리스식 이름)를 상징한다.  가리비 위의 빨간 십자는 '산티아고(=야고보) 십자가'라고 하는데, 뜨레스 디아스에서도 쓴다. 예수회가 만든 프로그램이라는 증거다.


'꾸르시요'는 '짧은 코스(단기강습회)'란 뜻으로, '뜨레스 다아스(3일)' 프로그램의 원래 이름이다.

 

인장은 빛을 발하는 태양이다. 예수회의 심볼도 태양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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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의 이스라엘과 유대인들

 

 

 

 a) 이스라엘

면적은 2만 425㎢, 인구는 625만 8000명(2001), 인구밀도는 306.4명/㎢(2001)이다.
수도는 예루살렘이고 공용어로는 헤브라이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지중해 동쪽 팔레스타인 지방의 아랍 세계에 존재하는 유대인 공화국이다.
이스라엘이란 헤브라이어로 ‘하나님이 지배하신다’는 뜻으로, 구약성서(창세 32)에 나오는 이사악의 둘째 아들
야곱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19세기 유럽에서 일기 시작한 시오니즘 운동을 배경으로 세계 각지의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 땅으로 이주하여
1948년 5월에 국가를 수립하였으므로 주변 아랍 여러 나라와 적대 관계에 있으며 분쟁이 끊이지 않는다.
1967년의 중동전쟁으로 옛 예루살렘시(요르단령)를 비롯한 요르단, 시리아, 이집트 등 인접한 아랍 여러 나라
영토를 점령하였으나 점령지역을 자국의 영토라고 주장하며 이스라엘화하려고 하는 노력은 국제적으로 승인받지
못하고 있다.
이들 지역을 합치면 이스라엘 영토는 3배로 불어나고 133만의 아랍인 인구를 수용하게 된다.
 

 b) 가자지구

면적은 363㎢, 인구는 75만 5200명(1994)이다.
해안선 길이는 40km, 평균너비는 8km로, 지중해 연안에 위치하며 남북으로 길쭉하다.
중심도시는 가자이고 가자 주변에 약간의 과수원과 경작지가 있다. 

1948년 팔레스타인 전쟁에서 이스라엘군과 이집트군의 격전지가 되었으나, 1949년 UN의 이스라엘-이집트
휴전협정에 의하여 이집트 측에 편입되었다.

인구의 절반 이상이 아랍 난민촌에 살고 있으며, 게릴라의 중요한 기지였다.
1956년 수에즈 전쟁으로 이스라엘이 점령하였으나 1957년 다시 이집트의 영토가 되었고, 1967년 중동전쟁에서
다시 이스라엘이 시나이 반도와 함께 점령하였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라빈 총리는 1993년 9월 13일,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와 이스라엘 점령지의 잠정자치에
관한 원칙선언에 합의했다.
이에 따라 1994년 5월 가자와 예리코에서 잠정자치가 시작되었다.
 

 c) 팔레스타인

면적은 2만 6,300㎢이며, 영어로는 팔레스티나(Palestina)라고 한다.
동쪽은 요르단강(江), 남서쪽은 시나이반도, 북쪽은 레바논, 북동쪽은 시리아에 접한다. 

지중해를 따라 좁고 긴 평야가 펄쳐지고, 동쪽으로 갈수록 지대가 높아져 중앙은 구릉지대이다.
이 지역의 동쪽은 경사가 급한 계곡을 이루며, 그 계곡을 요르단강이 흐르고 있다.
남쪽은 네게브 사막지대이다.
기후는 지중해성 기후이고 비는 적다. 

현재 이 지역의 80%는 이스라엘 영토이다.
1948년의 팔레스타인 전쟁 및 1967년의 제3차 중동전쟁 결과 요르단 ·이집트령(領)이 되었던 요르단강 서쪽
연안지역과 가자 지구도 이스라엘이 차지하였다.
이 가운데 베들레헴은 1995년 12월 이스라엘로부터 반환되었다. 

팔레스타인이라고 부른 것은 BC 12세기에 팔레스타인인(人)들의 지배를 받게 된 뒤부터이다.
BC 11세기에 헤브라이인들이 이스라엘 왕국을 건설하여 솔로몬왕 시대에는 찬란한 영화를 누렸으나 솔로몬이
죽은 뒤 이스라엘과 유다로 분열되었다.
그 후 이스라엘은 앗시리아에(BC 8세기), 유다 왕국은 신(新)바빌로니아에(BC 6세기) 멸망당하였다.

이 지역은 또한 BC 4세기에 알렉산드로스 대왕 군대의 통치를 받게 되었으며, BC 1세기에는 로마제국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636년 이슬람교를 바탕으로 뭉쳐진 아랍인들이 로마를 격파한 이후 팔레스타인은 오스만투르크령 시대
(1516~1917)를 포함, 이슬람교도들의 지배가 계속되었다.

다만 그 동안에도 12세기의 제1차 십자군(十字軍)이 예루살렘 왕국을 건설하여 이곳을 통치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역사적 과정으로 말미암아 팔레스타인에는 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의 성지(聖地)가 함께 있는
복잡한 종교적 ‘숙명(宿命)’을 안고 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팔레스타인은 영국의 위임통치령이 되었으나 세계대전 기간 중 팔레스타인 처리문제를
두고 영국이 두 가지의 모순된 선언을 발표함으로써 팔레스타인을 둘러싸고 아랍 ·유대인 사이에 심한 대립을
빚게 되었다.

유대인들은 강력한 시오니즘을 바탕으로 삼아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이주(移住)와 국가수립을 위한 준비를
실력으로 추진하고 미국의 지원도 얻어내어 1948년에는 이스라엘을 건국하였다.

1967년의 중동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전역을 비롯하여 부근 여러 나라 영토의 일부를
점령하였다.
이 전쟁으로 인하여 약 20만 명의 아랍인들이 요르단 ·레바논으로 달아났으며, 1948년의 전쟁 이후 이곳을 떠난
사람들을 합하여 이른바 팔레스타인 난민의 숫자는 300만 명이나 된다.

이들 사이에는 조상들이 살던 땅으로 돌아가려는 강렬한 소망이 있다.
1964년 이후 그들은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를 통일적 모체로 삼고 여러 게릴라 조직을 만들어 팔레스타인
해방운동에 나섰다.
1973년의 제4차 중동전쟁을 계기로 PLO의 싸움은 아랍세계의 석유전략과 결부됨으로써 비약적인 진전을 보았다.

같은 해 라바트에서 개최된 아랍 수뇌회의에서 요르단의 후세인왕은 요르단강 서쪽 연안에 대한 PLO의 주권을
인정하였으며, 1975년 국제연합은 팔레스타인의 민족자결권과 PLO를 준국가(準國家)로 인정하는 결의안을
채택하였다.
현재 108개국이 PLO를 승인하고 있다.

1979년 3월에는 이집트 ·이스라엘 평화조약이 조인되어 요르단강 서쪽 연안 및 가자지구의 팔레스타인 주민
자치문제를 두고 양국간의 협의가 진행되기에 이르렀다.
  

d) 유대인 (Jew)

보통 헤브라이인·이스라엘인이라고 부른다.
고대에 유대인은 원래 유다, 즉 유다 지파(약속의 땅을 점령한 12지파 중의 하나) 혹은 유다 왕국의(북이스라엘
왕국과 대비되는) 구성원을 의미했다.
바빌론 유수기를 거쳐 고향으로 돌아온 이스라엘인을 모두 유대인이라 불렀고, 스스로 이스라엘인이라고
부르기를 좋아하였다.

그 후 유대교 신봉자들을 가리키는 말로 예후디라는 용어(라틴어 Judaeus, 고대 프랑스어 Gyu, 현대 프랑스어
Juif, 독일어 Jude, 영어 Jew)가 사용되었는데, 유수 이후의 생존자들(과거 유다 왕국의 주민들)만이
이스라엘인으로서 고유의 주체성을 유지했기 때문이다.
(북이스라엘 왕국의 10지파는 BC 721년 아시리아에게 정복된 후 뿔뿔이 흩어졌고 점차로 다른 민족들에게
동화되었음)

유대인이라는 용어는 라틴어의 유다이우스(Judaeus)와 히브리어의 예후디(Yehd)에서 비롯된 그리스어
이우다이오스(Ioudaios)에서 나온 말이다.
예후디라는 말은 〈구약성서〉의 뒷부분에만 나오는 형용사로서 이복형제인 베냐민의 자손과 함께 유다 왕국을
이루고 있던 야곱의 넷째 아들 예후다(유다)의 후손을 가리킨다.

디아스포라(離散)로 자손은 세계 각지로 유랑하여, 그 땅의 인종·민족과 혼교(混交)를 거듭하여 왔기 때문에
형질·문화·종교는 다종 다양하다.
즉 형질상 다수의 유대인은 백인이지만 일부는 유색인(有色人:인도의 Black Jews)이며, 흔히 유대코라고 불리는
갈고리 모양의 코도 지배적인 특징은 아니다.

종교적으로 유대교에서 다른 종교로 개종하거나 무신론자가 된 사람도 많다.
이디시어(語)·헤브라이어 사용자, 유대적 문화(유대曆, 시나고그, 특유의 풍속·요리 등)의 보존자는 점점 감소하고
있다.
또한 디아스포라 뒤에 가속화한 유랑 때문에 유대인은 민족을 구성할 수가 없었다.

더욱이 이스라엘 국민 중에는 많은 아랍인이 포함되어 있으며, 대다수의 유대인은 전세계에 분산되어 있으므로,
유대인은 현재 민족이 아니다.
유대인이란 형질·언어·문화·국적을 막론하고, 비교적 최근까지 유대교도인 자의 자손이라는 조건을 첨가할 수도
있겠지만, 단적으로 말하면 자신을 유대인이라 생각하고 타인으로부터 유대인 취급을 받고 있는 자이다.

이스라엘도 유대인을 이와 비슷하게 규정한다.
따라서 유대인의 인구는 정확히 파악할 수 없으나, 약 1,300만∼1,400만으로 그 반수는 아메리카 대륙에 있다.
이것은 유럽의 유대인이 19세기에 세계 유대인 총수의 약 80%, 1930년에 약 60%였던 것과 대조적이며, 그 변화의
원인은 유럽의 유대인 박해를 피하여 이주한 때문이다.
학자·예술가의 수는 상대적으로 많지만, 대부분의 유대인은 도시에 사는 노동자·중산계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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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전쟁] 아랍 대 이스라엘 전쟁

 

 

 

아랍 대 이스라엘 전쟁이라고도 한다.
긴 역사적 배경과 복잡한 국제적 관계가 얽혀서 제2차 세계대전 후 중동지역에 끊임없는 긴장을 몰고 왔으며,
4차에 걸친 전쟁까지 겪어야 했던 이 중동분쟁은 아랍·이스라엘 양민족의 숙명적인 대립에서 유래한다.
즉, 기원전 팔레스타인 땅에 건국한 유대인은 망국 후 유랑의 민족으로 전락하였으나 조상의 땅인 가나안의
언덕으로 돌아갈 것을 민족의 비원(悲願)으로 삼아 왔다.

이 '시오니즘(Zionism)'은 후에 팔레스타인에 유대국가를 재건하려는 정치운동으로 전환해 갔다.


한편 예루살렘은 636년 이슬람에게 공략되었고, 이후 팔레스타인 지역의 대부분은 이슬람교도에 의해
점거됨으로써 이슬람교도에게도 성지(聖地)가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중 영국은 전쟁수행을 위해 시오니즘을 지지함과 동시에 독일측인 오스만 투르크의 후방교란을
위해 아랍인의 협력을 요청하였고, 양자에 대해 팔레스타인을 내주겠다는 모순된 언질(아랍에 대해서는
맥마흔선언, 유대에 대해서는 밸푸어선언)을 주었던 것이 이 비극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전 후 팔레스타인은 영국의 위임통치하에 들어갔으며, 밸푸어선언으로 팔레스타인에 국가재건을 약속받은
유대인이 내주(來住)하면서 이곳에 정착하고 있던 아랍인과 충돌이 생기게 되었다. 
 

 c) 1차 중동전쟁

제2차 세계대전 후 유대 난민의 대량 유입으로 분쟁이 격화되자 영국은 분쟁의 해결을 국제연합에 위양하였다.
1947년 제2차 국제연합 총회는 팔레스타인을 아랍과 유대의 쌍방에 분할하는 결의를 채택하였다.
1948년 5월 14일 유대인은 영국군의 철수와 동시에 이스라엘의 독립을 선언하였다.
그러자 5월 16일 이집트를 비롯한 아랍측 약 2만의 병력이 팔레스타인에 침입, 전세는 당초 아랍측이
우세하였으나 이스라엘의 공세로 아랍측은 패퇴를 거듭하였다.

이 사이 국제연합의 팔레스타인 조정관 백작 B.W.베르나도테가 유대인 과격분자에게 암살되는 불상사도 있었으나
국제연합의 조정으로 1949년 2월 휴전이 성립하였다.
그러나 이 전쟁 결과 100만의 팔레스타인 난민이 발생하고 이른바 아랍게릴라가 조직되었다.  
 

d) 2차 중동전쟁

제1차 중동전쟁의 휴전 후에도 사태는 악화를 거듭하여 쌍방은 군사력 증강에 광분하였다.
1952년 7월 이집트에서는 혁명이 발발, 왕제가 붕괴되고 공화제가 실시되었다.
1956년 초대 대통령에 취임한 G.A.나세르는 그해 7월 수에즈운하의 국유화를 단행하여 이스라엘로 향하는
선박의 통항을 거부하고 티란해협을 봉쇄하였다.

이로써 큰 타격을 입게 된 영국 ·프랑스는 10월 29일 이스라엘이 시나이반도를 침공한 2일 후에 수에즈운하를
공격하였다.
전세는 3국측에 유리하게 전개되었으나 미국의 압력, 소련의 위협, 국제여론의 악화 등으로 영국 ·프랑스는
정치적으로 매우 불리하게 되었다.

국제연합은 긴급특별총회를 소집하여 11월 14일 즉시 철수와 유엔군 파견 결의를 채택, 정전(停戰)과 감시를
위한 유엔긴급군을 편성 ·파견하였다.
이에 따라 사태는 진정되었고, 영국 ·프랑스는 연내에, 이스라엘은 1957년 3월에 점령지로부터 철수하였다. 
 

e) 3차 중동전쟁

제2차 중동전쟁 후 1964년경부터 아랍게릴라의 활동이 시작되어, 게릴라의 기지가 된 시리아에 대해
이스라엘은 1967년 4월 대규모 공격을 감행하였다.
이에 대해 붕괴에 직면한 아랍의 결속강화를 이스라엘과의 대결에서 회복하려는 이집트 대통령 나세르는
대군을 시나이반도에 투입, 유엔긴급군의 철수를 요청하고 아카바만(灣)의 봉쇄를 선언하였다.

6월 5일 이집트-이스라엘 간에 전투가 개시되었고, 전란은 시리아 ·요르단으로 확대, 전면적인 전쟁으로
확대되었다.
서전의 기습공격으로 아랍측 공군력을 괴멸시킨 이스라엘군은 압도적인 우세 속에서 4일 만에 시나이반도를
점령하였으며, 요르단강 서안(西岸)지역, 시리아 국경의 골란고원을 공략하였다.

국제연합안전보장이사회는 6월 6일 즉시 정전을 결의하였고, 쌍방의 수락에 의해 6월 9일 정전이 실현되었다.
또한 안전보장이사회는 그해 11월 중동분쟁의 정치적 해결을 위한 결의 242호를 채택하였다. 
 

f) 4차 중동전쟁

이집트 대통령 나세르는 전력의 재건을 서둘렀고, 아랍게릴라는 1969년경부터 파괴활동을 격화하였다.
요르단에서는 1970년 9월 화평에 반대하는 게릴라와 정부군 사이에 내전이 있었다.
1970년 9월 28일 대통령 나세르의 급사로 M.A.사다트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사다트는 이스라엘 기습을 계획하여 1973년 10월 6일 선제공격을 가함으로써 이스라엘 공군과 탱크대를 소련제
미사일과 로켓으로 격파, 서전을 승리하였으나, 북부에서는 시리아군이 패퇴하여 전선은 고착화되었다.

이에 유엔안전보장이사회에서는 22일 미 ·소공동제안에 의한 즉시정전, 1967년의 안전보장이사회 결의 242호의
이행 등을 골자로 하는 결의안이 채택되고, 당사국의 수락을 얻어 같은 날 정전을 성립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연말에는 제네바에서 중동평화회의가 개최되고, 1974년 1월 이집트-이스라엘 간에 병력격리협정이 조인되어
그 이행을 감시하기 위한 유엔군이 파견되었다.

이 전쟁 중에 아랍석유수출국기구(OAPEC)는 석유전략을 발동, 생산제한과 금수(禁輸)를 실시했기 때문에
세계는 심각한 석유위기를 겪어야 했으며, 각국 경제는 막심한 타격을 입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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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온운동으로 인한 이스라엘 회복

 

 

 

1.시온운동 (Zionism)

 

고대 유대인들이 고국 팔레스타인에 유대 민족국가를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한 유대민족주의 운동

19세기 후반 동유럽 및 중부유럽에서 시작되었는데, 여러 면에서 이것은 고대 예루살렘 중심부의 시온이라는
약속된 땅, 즉 팔레스타인에 대한 유대인과 유대 종교의 민족주의적인 염원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에 앞서 16∼17세기에는 수많은 ‘메시아’들이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복귀를 지원하였다.

한편 18세기 말의 하스칼라(계몽)운동은 유대인들이 서양의 세속문화에 동화되도록 유도하였으나, 동유럽의
유대인들은 동화되지 않았을 뿐더러 제정 러시아의 유대인 학살에 대한 반발로서 ‘호베베 시온(시온을 사랑하는
자들)’을 결성하여 유대 농민들 및 기술자들의 팔레스타인 이주운동을 촉진시켰다.

이러한 시오니즘에 대해 정치적 성향을 부여한 인물은 오스트리아의 저널리스트인 T.헤르츨이었다.
그의 유토피아적인 정치소설 《유대인 국가》(1896)와 《오래 된 새로운 땅》(1903)은 시오니즘을 촉진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1897년 헤르츨은 스위스의 바젤에서 제1차 시오니스트회의를 소집하여 바젤계획안을 작성하였다.
이 시오니스트회의는 1901년까지 5차례 개최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이전에는 시오니즘이 단지 러시아 출신의 유대인 소수파만을 대표하였으나, 그 이후 오스트리아
및 독일의 유대인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시오니즘은 전세계에 걸쳐서 자발적으로 규합된 유대인 조직으로서 연설 및 안내책자, 여러 언어로 발행되는
신문들을 통해서 적극적인 선전활동을 전개하였다.

1905년 러시아혁명이 실패하고 유대인에 대한 학살과 억압이 뒤따르자 러시아의 젊은 유대인들은 선구적인
이주자들로서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1914년에는 팔레스타인에 9만 명에 달하는 유대인들이 있었고, 이 가운데 1만 3000명에 이르는
이주자들은 43개의 유대인 정착촌에서 생활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정치적인 시오니즘이 재주창되었고, 그 주도 역할은 영국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이 맡게
되었다.
이러한 시온주의자들로서 C.A.바이츠만과 N.소콜로는 1917년 11월 2일, 영국으로부터 팔레스타인 내의 유대
민족국가 건설에 대한 영국의 지지를 약속하는 밸푸어선언을 얻어내는 데 주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뒤이어 시온주의자들은 팔레스타인의 도시 및 농촌에서 유대인 정착촌을 건설하여 유대인 자치조직을 완성하였고,
그들의 문화생활과 헤브라이어 교육을 강화하였다.
1925년 3월 당시 팔레스타인 내의 유대인 수는 공식적으로 10만 8000명에 달하였고, 1933년에는 23만 8000명으로
증가하였다.

아랍인들은 팔레스타인이 결국 유대인 국가가 되는 것을 우려하였고, 따라서 시오니즘과 이를 지원하는 영국의
정책에 강력하게 반발하였다.
특히 1929년과 1936~1939년에는 아랍인들이 반란을 일으켜 영국은 아랍의 요구와 시온주의자들의 요구를
조정하기 위한 계획을 마련하게 되었다.

히틀러주의가 대두되고 그에 의한 유대인 학살이 자행되자 유대인들도 도피처로서 팔레스타인과 그 밖의 지역,
특히 시오니즘을 옹호하는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아랍인들과 시온주의자들 간의 긴장이 고조됨에 따라 영국은 팔레스타인 문제를 처음에는 미국과 협의하였으나,
후에는 국제연합에 일임하였다.

1947년 10월 27일 국제연합은 팔레스타인을 아랍 국가 및 유대 국가로 각각 분할할 것과 예루살렘을 국제화할
것을 제안하였다.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 국가가 정식으로 성립하자 1948~1949년에는 아랍-이스라엘전쟁이 발발하였고,
전쟁 결과 이스라엘은 국제연합의 결의에 따라 제공받은 땅보다 많은 부분을 아랍으로부터 획득하였다.

결국 제1차 시오니스트회의 이후 50년이 지난 후, 또한 밸푸어선언 이후 30년 만에 시오니즘은 팔레스타인에
유대국가를 건설하려는 목표를 달성하였다.
그 후 20여 년에 걸쳐 세계에 흩어져 있는 시오니즘 조직들은 이스라엘에 대해 재정적 지원을 계속하였고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이주를 장려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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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전쟁

십자군 운동의 두가지 주제 십자군 운동의 성쇠는 중세 전성기 교황 군주국가의 운명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제1차 십자군은 교황에 의해 시작되었으며, 그 운동의 성공은 교황군주국가의 커다란 승리였다. 그러나 그후 이어진 십자군 운동의 쇠퇴는 교황의 세속적 권위를 약화시키는데 기여했다. 그러므로 십자군은 교회사 및 종교사의 한 부분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십자군은 서유럽 식민주의 역사의 첫장을 여는 것이었다.

제1차 십자군의 직접적 원인

제1차 십자군의 직접적 원인은 1095년 비잔틴 황제 알렉시우스 콤네누스가 지원을 호소한 데 있었다. 알렉시우스는 얼마 전 투르크족에게 빼앗긴 소아시아의 비잔틴 영토를 되찾고자 했다. 그는 서유럽의 용병을 원군으로 사용하는데 이미 익숙해 있었던 터라 서유럽으로부터 얼마간 군사적 지원을 얻기 위해 교황에게 도움을 청한 것이었다. 그러나 황제는 단순한 지원군 정도를 넘어선 십자군을 맞이하게 되었으니 그로서는 경악할 일이었음이 분명하다. 다시 말해서 소아시아에서 싸워줄 용병군 대신 서유럽의 예루살렘을 이슬람의 수중에서 탈환할 목적으로 대규모의 자원군을 파견한 것이다. 알렉시우스의 지원 요청을 십자군 파병으로 전환시킨 것은 어디까지나 교황의 결단에 의한 것이었으므로, 교황의 동기가 과연 무엇이었는가를 알아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레고리우스의 성전 사상

1095년 당시의 로마 교황은 우르바누스2세로서 그는 그레고리우스7세의 수제자였다. 따라서 우르바누스 역시 그레고리우스의 정책을 구현하고자 제1차 십자군을 제창했다. 기독교적 전쟁 행위에 대한 우르바누스의 생각은 그레고리우스의 사상을 이어받은 것이었다. 초대 기독교는 평화주의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 예를 들면 4세기의 존경받는 기독교 성인인 성 마르탱은 군인었지만, 개종과 함께 이런 말을 남기고는 군대를 떠났다. "나는 그리스도의 병사이므로 전쟁을 할 수 없다." 라틴 교부인 성 아우구스티누스와 성그레고리우스는 기독교인의 전쟁 행위를 정당화하는 이론을 수립했다. 그러나 그것이 실천에 옮겨진 것은 11세기에 이르러 그레고리우스의 개혁운동에 힘입어서였다. 그레고리우스7세는 교황이 되기 전에도 노르만 정복에 대한 교황권의 지원을 주선했다. 그리고 그와 그의 영향하에 있던 교황들은 에스파니아의 이슬람교도에 대한, 이탈리아의 그리스인에 대한, 그리고 독일 동부의 슬라브족에 대한 기독교인의 전쟁에 축복을 내린 바도 있었다. 그레고리우스와 그의 추종자들은 이러한 모든 전쟁을 "세상의 올바른 질서"를 확립하기 위한 조치로 간주했다.

우르바누스의 동기

그레고리우스7세의 정책을 답습한 우르바누스2세의 성지 십자군 운동에는 적어도 네 가지 목적이 있었다. 그 하나는 그리스 정교회를 로마 교회로 통합시키고자 하는 것이었다. 막강한 자원군을 동방에 파견함으로써 우르바누스는 비잔틴으로 하여금 서유럽의 위력에 압도당하도록 하고, 나아가 그들로 하여금 로마 교회의 우위를 다시금 받아들이게 하고 싶었던 것이다. 만일 이 계획이 성공한다면 그는 그레고리우스가 추구한 교황 군주국가 정책에 커다란 승리를 가져올 수 있었다.

두번째 동기는 교황 최대의 적인 독일 황제를 곤경에 빠뜨리기 위한 것이었다. 1095년에 이르러 하인리히4세는 군사적으로 지극히 강대해져서 우르바누스는 그에게 쫓겨 이탈리아를 떠나 프랑스로 도망을 가지 않으면 안 될 정도였다. 그러므로 교황은 독일인을 제외한 모든 서유럽인에게 십자군을 호소함으로써 황제가 편협하고도 비기독교적인 박해자임을 알리고, 아울러 서유럽의 영적 지도자로서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고 싶었던 것이다.(십자군의 지휘관은 모두 프랑스 귀족들이었다)

셋째로 우르바누스는 대규모 병력을 외부로 방출시킴으로써 유럽의 대내적 평화를 이룰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이미 10세기 말부터 프랑스 교회는 봉건기사들의 전투를 줄이기 위해 "평화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즉 "신의 평화"라 하여 비전투원에 대한 공격을 금지했고, "신의 휴전"이라 하여 특정한 축일에 전투행위를 금지했던 것이다. 우르바누스는 제1차 십자군 소집 직전에 이 평화운동을 교황령에 의해 승인한다고 처음으로 발표했고 이를 확대시킬 것을 공표했다. 분명히 십자군은 평화운동과 연관되어 있었다. 사실 우르바누스는 거칠기 짝이 없는 전사들에게, 정말로 싸우기를 원한다면 해외로 나가 기독교의 대의를 위해 십자군으로서 정당하게 싸울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끝으로 예루살렘 성지의 회복이라는 목표 그 자체가 우르바누스에게 중요한 동기가 되었음이 틀림없다. 예루살렘은 지구의 중심이자 기독교의 가장 거룩한 성지였다. 예루살렘 순례는 결코 방해받아서는 아니 되었고, 예루살렘에 대한 지배권은 기독교인이 직접 가져야만 했다. "세상의 올바른 질서"는 바로 그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제1차 십자군의 경제·정치적 원인

비잔틴 황제의 요청을 받으지 8개월 후인 1095년 11월에 우르바누스가 프랑스의 클레르몽시에서 종교회의를 개최하고 십자군을 요청했을 때, 그는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열렬한 반응을 얻게 되었다. 많은 군중은 누가 시킨 것도 아니건만 "신께서 원하신다"며 너무 열렬히 외쳐되는 바람에 교황이 연설을 중단할 수 밖에 없을 정도였다. 그러고는 바로 수많은 사람들이 동방으로 향했다. 대략 10만 명의 인원이 십자군 주력부대에 가담했는데, 그것은 당시로서는 엄청난 숫자였다. 그러므로 우르바누스의 호소가 어떻게 그토록 성공적인 반응을 얻을 수 있었는가 하는 의문이 제기된다. 여기에는 경제·정치적 이유가 있었다.

십자군에 가담한 빈민중 많은 사람들은 1095년 당시 인구가 과밀했던 지역의 출신자들이었다. 이들 십자군은 인구가 조밀한 유럽보다는 동방에서 더 나은 생활을 누릴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다. 마찬가지로 상당수 귀족들은 정치가 점차 안정되고 장자 상속제가 널리 수용되면서 압박을 느끼고 있었다. 그때까지 차남 이하의 귀족 자제는 서유럽 내에서의 국지전쟁을 통해 재산을 모으거나, 최소한 작은 땅이나마 상속받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이들 형제들의 수가 늘어났고, 수명도길어졌으며, 전쟁은 점차 줄어들었고, 장자만이 부친의 토지를 상속받게 되었다. 분명 동방으로 떠난다는 것은 고향에서 따분하게 지내던 귀족들에게 매혹적인 일이었다.

종교적 원인 :

무장 순례단 그러나 제1차 십자군의 가장 중요한 동기는 역시 종교적인 것이었다. 아무도 순수한 이해타산에 의해 십자군에 가담할 수는 없었다. 당시로서는 누구도 새로운 땅을 얻을 수 있으리라고 확실하게 예측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아무리 합리적으로 따져보아도 십자군 참여는 잘해야 소득없는 귀환이요, 대개는 무슬림의 손에 죽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십자군 참여는 기독교인의 영혼에 커다란 위안을 주었다.

여러 세기에 걸쳐 순례는 기독교인들 사이에 가장 널리 행해지던 고해방식이었다. 특히 예루살렘 순례는 순례 가운데서도 가장 성스럽고 효과있는 것으로 손꼽히고 있었다. 하물며 기독교 최고의 성지를 이교도의 수중에서 되찾기 위한 예루살렘 무장 순례는 단연 최대의 영적보상을 가져다주는 일이었다. 이 점을 분명히 하기 위해 클레르몽에서 우르바누스2세는 십자군 참가자 전원에게 교회에서 부과하는 다른 모든 고해를 면제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교황의 약속이 있은 후로 십자군 설교자들은 우르바누스의 재가도 받지 않은 채 더욱 큰 약속을 하고 말았다. 대사(大赦)를 약속했던 것이다. 이것은 십자군 참가자 전원에게는 내세에서 연옥의 형벌이 완전히 면제되며, 십자군 참가 도중 사망한 자의 영혼은 곧장 천국으로 갈 수 있다는 약속이었다. 대사는 실로 파격적인 은사였으며 그것을 얻고자 군중이 쇄도했다. 일단 군중이 한자리에 모이게 되자, 그들은 설교자의 언변에 고부되어 종교적 열광에 빠진 채 집단적 히스테리 증상까지 보이게 되었다. 그들은 자신들이야말로 불신자들의 세상을 일소하기 위해 선택받았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로 말미암은 가공할 결과로서 그들은 동방으로 원정을 떠나기도 전에 유럽의 유대인들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서유럽 반유대주의의 효시였다.

십자군의 만행

크나큰 역경에도 불구하고 제1차 십자군은 완벽한 성공이었다. 1098년에 십자군은 안티오크를 함락했고, 그와 더불어 시리아의 대부분을 정복했다. 1099년에 그들은 예루살렘을 탈환했다. 그들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때마침 무슬림 세력이 내부적으로 분열되어 있었던데다가, 무슬림들이 기괴하고 야만적인 서유럽인의 모습을 처음 대하고는 크게 놀랐기 때문이다. 성지에서 십자군은 처음부터 제국주의자처럼 행동했다. 새로운 영토를 정복하자마자 그들은 이를 자기네의 소유로 삼고 4개의 공국으로 분할했다. 그들은 또한 난폭한 행동을 자행했다. 안티오크를 점령했을 때 그들은 사로잡은투르크인들을 포로로 삼지 않고 닥치는대로 학살했다. 예루살렘을 정복했을 때에도 그들은 그리스도의 평화주의적인 가르침을 묵살하고, 이 도시에 거주하던 모든 무스림들을 무자비하게 살육했다. 몇몇 십자군들은 그들의 고향에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은 자랑을 늘어 놓았다. "솔로몬 궁의 회랑과 성전에서 우리 군대는 말을 타고 달렸는데, 말의 무릎까지 사라센인의 피로 젖었다." 성지에 머무른 십자군들은 점차 유순해지고 관대해졌다. 그러나 서유럽으로부터 새롭게 밀어닥치는 무장 순례단은 계속해서 야만스런 행동을 자행했다. 더욱이 정착한 십자군들은 지방 주민들과 완전히 융합하지 못한채 이슬람 세계의 한 복판에서 별개의 착취적인 외국인으로 남아 있었다.

그 후의 십자군 운동 실패 :

프리드리히2세의 외교정책 성공 십자군이 건설한 기독교 국가들은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해안선에 위치한 인구가 희박하고 좁다란 지역이었으므로 그 지역이 이슬람 세력에 의해 탈환되는 것은 시간 문제일 뿐이었다. 1144년에 이르러 최북단에 위치한 공국이 함락되었다. 그러자 프랑스 왕과 독일 황제의 지휘하에 동방으로 온 제2차 십자군의 기독교 전사들은 실지를 회복하고자 했으나, 그들은 내부적으로 너무나 분열되어 있어서 도저히 승리를 거둘 수 없었다. 그후 얼마 되지 않아 그 지역의 이슬람 영토는 술탄 살라딘에 의해 통합되었으며, 그는 1187년 예루살렘을 함락했다. 다시 한번 서유럽은 손실을 복구하고자 했으니 제3차 십자군이 그것이다. 제3차 십자군은 독일 황제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 프랑스의 존엄왕 필립, 잉글랜드의 사자왕 리차드에 의해 주도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대군을 거느리고도 승리를 거둘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도 경쟁관계에 있던 국왕들 사이에 다시 내분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이노켄티우스가 교황이 되었을 때 그의 야심은 예루살렘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그는 이를 위해 제4차 십자군을 소집했다. 그러나 그 십자군은 통합된 기독교 세계의 관점에서 본다면 미증유의 재난이었다. 교황은 십자군의 진로를 통제할 수 없었고, 십자군은 1204년 성지로 진군하는 대신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행동은 결과적으로 비잔틴 제국의 멸망을 재촉했으며, 오스만투르크족에게 동유럽으로의 진입로를 열어주는 결과를 가져다 주었다.

이노켄티우스가 1215년 제4차 라테란 종교회의를 소집한 것은 부분적으로 교황이 직접 지휘할 또 한 차례의 십자군을 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제5차 십자군은 무슬림 세력의 본거지를 무찌르기 위해 이집트를 향해 바다로부터 출발했다. 그러나 위풍당당한 출진에도 불구하고 이 역시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오직 1228년에서 1229년까지 황제 프리드리히2세에 의해 지휘된 제6차 십자군만이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이 성공은 군사적 원정에 힘입은 것이 아니었다. 아랍어를 구사할 줄 알아 이집트의 술탄과 쉽사리 교신할 수 있었던 프리드리히는 무력으로 싸우는 대신 교묘한 협상을 통해 예루살렘 및 예루살렘으로 가는 좁은 접근 통로를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전쟁으로 실패한 것을 외교로써 이루어낸 셈이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그들이 획득한 것을 지켜내지 못했고, 결국 예루살렘은 1244년 다시 함락되어 1917년에 이르도록 유럽인에 의해 탈한되지 못했다. 오늘날에는 팔레스타인 에커시 부근의 작은 영토만이 기독교 국가로 남아잇을 뿐이다.

정치적 이익을 위해 십자군의 이상을 희생시킨 교황들 프리드리히2세가 예루살렘을 얻기 위해 협상을 벌이고 있을 당시 그는 교황으로부터 파문당해 있는 상태였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에 입성했을 때에도 그는 성묘교회(Church of the Holy Sepulcher)에서 자기 손으로 직접 예루살렘 왕의 왕관을 써야만 했다. 이것은 당시의 교황이 성지 회복보다는 유럽에서 정치적 목적을 추구하는데 더욱 골몰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제1차 십자군의 승리는 교황 군주국가의 위신과 세력을 크게 증대시켰다. 그러나 그후의 잇따른 실패로 말미암아 대규모 사업을 위해 서유럽을 결속시킬 수 있는 교황의 능력에 점차 의문이 제기되었다. 1208년 이노켄티우스에 의해 소집된 알비주아 십자군은 신자가 유럽 내의 십자군에 참여하기만 해도 훨씬 더 멀고 위험한 동방에서의 십자군 참여와 동일한 영적보상을 받을 수 있다는 중대한 선례를 확립했다. 그러나 알비주아 십자군은 교황의 종교적 이미지에 손상을 주지는 않았다. 알비주아 이단은 교회에 대한 명백한 위협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황이 프리드리히2세와 그의 후계자들에 대한 십자군에 착수하게 되면서 십자군의 이상은 정치적 이해관계에 철저히 희생되고 말았다.

십자군의 쇠퇴와 교황권의 쇠퇴

십자운 운동의 쇠퇴와 교황권의 쇠퇴가 가장 밀접하게 상호 연관된 것은 바로 그 무렵이었다. 프리드리히와 그 후계자들에 대한 십자군에서, 그리고 그 후에는 아라곤 왕에 대한 십자군에서, 교황은 그때까지 이슬람에 맞서 싸운 모든 십자군에게 공식적으로 제공했던 것과 동일한 대사(大赦)를 허용했다. 사태를 더욱 악화시켰던 것은, 교황은 원정을 떠나는 십자군을 무장시키기 위해 많은 돈을 기부한 사람에게도 똑같은 사면을 허용했다. 결국 이것은 사면의 남발을 초래했다. 1291년 성지에 남은 기독교인의 마지막 전초 기지가 서유럽으로부터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한 채 함락되고 말았다. 그때 교황은 아라곤에서 실패한 십자군을 구출하려던 중이었다. 1300년에 보니파키우스 8세가 주재한 성년(聖年) 행사는 로마를 순례하는 모든 이에게 대사를 허용했는데, 그것은 향후 성지가 아닌 영원의 도시가 기독교 순례의 가장 중요한 목적지가 되어야 할 것임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보니파키우스는 1년 후 권좌에서 밀려났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즉 십자군의 남용과 실패로 말미암아 교황의 위신이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실추되었던 것이다.

십자군의 긍정적 결과

십자군의 이상은 한편으로는 교황 군주 국가의 건설에 기여한 바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파멸에도 기여했다. 그러면 그때에 십자군의 실질적인 의의는 무었이었는가? 긍정적인 측면에서 볼 때, 제1차 십자군의 믿을 수 없을 정도의 놀라운 성공은 중세 서유럽인의 자신감을 고취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수백 년 동안 서유럽은 이슬람 세력에 밀려 수세에 놓여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서유럽 군대가 이슬람 세력의 핵심 지역으로 진군해 들어가 마음대로 약탈·유린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극적인 승리로 말미암아 12세기의 유럽인 사이에는 낙관주의가 팽배해졌다. 서유럽의 기독교인들은 신이 그들의 편이라 믿고, 그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다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십자군은 또한 서유럽인의 시야를 넓혀 주었다. 성지의 유럽인들 가운데 아랍어를 배우거나 이슬람 사상, 또는 제도로부터 무언가 얻어내기 위해 힘쓴 사람은 거의 없었다. 기독교인과 무슬림 사이의 문화교류가 가장 활발히 이루어졌던 곳은 에스파니아와 시칠리아였다. 그러나 이슬람국을 통과하여 먼 지역을 여행한 십자군들은 어딘가 좀더 세련되지 않을 수 없었으며 십자군 운동은 특히 그때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사치품에 대한 관심을 자극했으며, 문학과 우화의 풍부한 소재를 제공했던 것이다.

무역과 세금, 경제적 관점에서 볼 때 제1차 십자군의 성공은 서유럽인에게 지중해를 새로운 무역 활동의 무대로 제공했다. 특히 베네치아 및 제노바 등 이탈리아 도시들이 이 해역의 상권을 제패하기 시작했고, 그로써 서유럽 경제의 번영에도 기여했다. 원격지로 대금을 송금할 필요성으로 인해 초보적 금융 기법의 발달 또한 자극했다. 정치적으로 서유럽 군주 국가들은 십자군에 필요한 자금 조달 명목으로 성직자에게 세금을 부과한 선례로 말미암아 직접적인 혜택을 받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국가에 의한 세금징수를 다양한 형태로 발달시켰다. 더욱이 자금과 식량 조달에 의해 국왕의 십자군을 돕고자 국가를 조직화하다 보니, 신흥 국민 국가들의 효율적 행정 제도 발달에도 중요한 자극제가 되었다.

부정적 결과

그러나 십자군에는 부정적 측면 또한 있었다. 유럽 내에서 유대인을, 그리고 유럽 밖에서 무슬림을 무자비하게 학살한 십자군의 만행에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 십자군은 서유럽과 비잔틴의 관계 단절을 더욱 가속화했고, 비잔틴 제국의 멸망과 잇따른 재난에 근본적인 영향을 미쳤다. 아울러 성지에서의 서유럽인들의 식민주의는 그후 근대에까지 이어지게 된 서유럽 식민주의의 기나긴 역사의 출발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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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 유태인의 격언

 

두툼한 돈지갑이 반드시 좋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빈지갑이 좋은 것도 아니다.

돈은 벌기는 쉽다. 하지만 돈을 쓰기는 더 어렵다.

돈은 기회를 만들어 준다.

가난하기 때문에 바르고, 부자이기 때문에 옳지 않다고 할 수는 없다.

돈이란 악함도 저주도 아니며, 인간을 축복하는 것이다.

돈이란 결코 모든 것을 좋게 할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모든 것을 썩게 하지도 않는다.

돈이란 인정없는 주인이기도 하지만, 반면 유익한 심부름 꾼일 수도 있다.

돌처럼 굳어진 마음은 황금망치로만 풀 수 있다.

자기가 갖고 있는 것을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파는 것은 상술이 아니다.

부자를 칭송하는 사람은 그 부자보다는 돈을 칭송하는 것이다.

필요한 돈을 빌리는 것은 마치 가려운 곳을 긁는 것과 같다.

많은 것을 가진 부자에게는 자식이 없고 상속인만이 있다.

돈이란 선인에게는 좋은것을, 악인에게는 나쁜것을 안겨준다.

재물이 많으면 그만큼 걱정거리도 늘어나지만, 재물이 전혀없으면 걱정거리가 더 많다.

돈이란, 옷이 우리에게 베푸는 역할 밖에는 해 주지 못한다.

가난함은 수치가 아니지만 그렇다고 명예로움도 아니다.

가난한 사람에게서 돈을 차용하는 것은 마치 추녀에게 키스하는것과 같다.

매춘부의 얼굴에 침을 뱉으면 그년는 비가 온다고 말한다.

남에게 돈을 빌려줄 때에는 증인을 세우고, 적선할 때는 아무도 보지 않는 데서 하라.

금전과 속담

 

2. 마음의 양식

 

하늘과 땅을 웃기려면 먼저 고아를 웃겨라. 고아가 웃으면 하늘과 땅도 웃을 것이다.

이보다 더한 불행은 얼마든지 있다고 생각하라

일생동안 울고 허송해서도 안 되고, 웃고만 보내서도 안된다.

이미 끝나버린 일을 후회하기 보다는 하고 싶었던 일을 하지 못한것을 후회하라.

하나님은 밝은 사람을 축복해 준다. 낙관하는 마음은 자기 뿐만 아니라 남들까지도 밝게 해 준다.

행복을 얻으려면 만족에서 멀어져야 한다.

어차피 같은 햄을 먹는 것이라면 즐거운 마음으로 먹어라.

남을 행복하게 해 주는 것은 마치 향수를 뿌리는 일과도 같다.

남의 강요에 의해 베푼 자선은 스스로 한 자선의 절반의 가치밖에 없다.

모르는 사람에게 베푸는 친절은 천사에게 베푸는 친절과 같다.

가장 훌륭한 지혜는 친절함과 겸허함이다.

만약 손님이 기침을 하면 수저를 내 놓아라.

자신의 결점을 찾아내는데 힘쓰는 사람은 남의 결점을 찾지않으며, 남의 결점만 찾아내는 사람은 자기 결점을 찾지못한다.

강철 보다는 강한 반면 파리보다도 약한 것이 인간이다.

마음을 가는 것은 두뇌를 가는 것보다 더 소중하다.

무거운 포도송이일수록 아래로 늘어진다.

신의 천지창조의 마지막 날 인간을 만드신 것은 인간의 오만함을 없애기 위해서였다.

몸을 닦는 것은 비누고, 마음을 닦아내는 것은 눈물이다.

사람들은 길에서 넘어지면 먼저 돌을 탓한다.

이미 행해진 행동은 변하지 않고 남게 되지만, 그러나 인간은 날마다 변해 간다.

신은 인간의 마음을 먼저 보고, 그 다음 그의 두뇌를 본다.

내일 일어날 일을 미리 걱정하지 말라. 오늘 현재의 앞일도 모르면서...

매일매일 자기 자신을 죽여가는 자는 이승도 저승도 갈 곳이 없다.

행복에서 불행으로 바뀌는 것은 순간적인 일이나, 반대로 불행을 행복으로 가꾸는 데는 오랸 시간이 필요하다.

신은 바르게 사는 자를 시험해 본다.

마음의 양식에 관한 격언

3. 교육의 길

 

이상이 없는 교육은 미래가 없는 현재와 같다.

금전의 차용은 거절해도 좋으나 책을 빌려 달랠 때 거절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다.

책으로부터 지식을 배우고, 인생에서 지혜를 배운다.

많은 사람들은 생각하는 것을 피하고 도망하기 위해 책을 읽는다.

지식이란 흐르는 물과 같다.

기도 시간은 짧게 하고, 학문에는 오랜 시간을 보내라.

예루살렘의 멸망은 잘못된 교육 때문이다.

살아있는 사람에게서 빼앗을 수 없는 것은 지식이다.

신은 인간이 만든 마을과 탑을 보기 위해 왔다.

자기 혀한테 '모른다'는 말을 열심히 가르쳐라.

옳은 것을 배워 나는 것보다 옳은 일을 몸소 행하는 것이 낫다.

자기 결점을 쉽게 고치지 못하더라도 자기 향상을 위한 노력은 계속하여야 한다.

생물 가운데 웃는 것은 인간뿐이다. 그 중에서도 영리한 사람이 웃는다.

세 종류의 어리석은 사람이 있다.

적당히 어리석은 자는 완전히 어리석은 자보다 더 어리석다.

산양이 수염이 있다 하여 랍비가 될 수는 없다.

당나귀가 예루살렘에 가도 역시 당나귀인 것이다.

자녀를 가르치는 최선의 교육은 자기 스스로 모범을 보이는 것이다.

아들에게 근면함을 가르치지 않는 부모는 아들에게 절도를 가르치는 거와 다를 게 없다.

신은 항상 어느곳에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신은 어머니를 창조하였다.

사람은 누구나 어른이 되지 않는다. 다만 아이로서 나이를 한살씩 먹을 뿐이다.

어린 아이일 때는 두통을 안겨 주지만, 크면 심통을 안겨 준다.

어리석은 자의 노년은 겨울이지만, 현자의 노년은 황금기이다.

노인을 공경하지 않는 젊은이의 노후는 결코 행복할 수 없다.

교육에 관한 격언

4. 남녀간의 교제

 

사랑이 아무리 멋저도 테니스에는 무용지물이다.

신은 새 부부가 생길 때마다 새로운 말을 해 준다.

금과 은은 불에 달궈진 다음에야 빛을 낸다.

뜨거운 정열로 결합하지만, 정열이란 결혼만큼 오래 가지 않는다.

결혼식의 연주 음악은 군악대의 음악처럼 활기차다.

정열은 불이다. 그래서 없어서는 안 되지만, 또 그만큼 위험하다.

사람은 쨈과 같이 달지만, 빵이 없으면 살 수 없다.

질투는 천 개의 눈을 가지고 있지만, 그 가운데 한개의 눈도 올바로 보이지 않는다.

보드라운 흙으로 빚은 남자를 기쁘게 하는 것이, 딱딱한 뼈로 빚은 여자를 기쁘게 하는 것보다 쉽다.

결혼이란 굴레는 무척 무겁다. 부부뿐만 아니라 자식 까지도 함께 운반해야 하니까.

좋은 말에 채찍이 있고, 현자에게 충고가 있다.

자식이 결혼할 때는 신부에게 혼인 증서를 주고, 어머니에게는 이연장을 주어야만 한다.

결혼할 때는 이혼까지도 예상해야 한다.

초혼은 하늘에 의해서, 재혼은 인간에 의해 맺어진다.

결혼을 위해서는 걷고, 이혼을 위해서는 달려라.

섹스는 냇물과 같다.

이상적인 남자는 남자의 강인함과 여자의 부드러움을 함께 갖고 있다.

남자는 두 볼 사이와 두 다리 사이에서 명성이 결정된다.

여자와 싸우는 것은 우산을 받쳐들고 샤워하는 것과 같다.

남녀 교제에 관한 격언

5. 입과 혀의 재앙

 

입을 다물 줄 모르는 사람은 대문이 닫히지 않는 짐과 같다.

새장으로부터 도망친 새는 붙잡을 수가 있으나, 입에서 나간 말은 붙잡을 수가 없다.

당나귀는 긴 귀로써 알아보고, 어리석은 사람은 긴 혀로써 알아본다.

당신의 혀에는 뼈가 없다는 것을 항상 생각하라.

입보다 귀를 상석에 앉혀라

어리석은 수다는 초상집에 즐거운 음악이 울리는 것과 같다.

인간이 말을 하는 것은 태어나면서 곧 배우나, 입을 다무는 것은 어지간해서 배우기 힘들다.

겉치레 인사는 고양이처럼 핥는다.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진실 중에도 말해서는 안된는 것이 있다.

거짓말 쟁이는 뛰어난 기억력을 가져야 한다.

가장 큰 고통은 남에게 말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누에이다. 그들은 항상 입을 놀리고 있다.

당신의 친구는 친구를 가졌고...

물고기는 언제나 입으로 낚인다. 인간도 역시 입 때문에 걸려든다.

입과 혀에 대한 격언

6. 교제하는 방법

 

아무리 친한 벗이라도 너무 가까이 하지 말라

어떤 사람이고 가까와지면 작아지게 된다.

애매한 친구보다는 차라리 분명한 적이 낫다.

술집 여자와 키스를 하였거든 꼭 당신의 이빨을 세어 보아라.

술집에 간다고 하여 선인이 악하게 될 수는 없다.

늙은이가 젊은 아내를 맞으면, 늙은이는 젊어지고 아내는 늙는다.

꿀을 치다 보면 조금은 꿀맛을 볼 수가 있다.

향수 가게에 가면 향수 냄새가 옮는다.

손님과 생선은 사흘만 지나면 악취가 난다.

소문은 가장 좋은 소개장이다.

밀가루 장수와 굴뚝 청소부가 싸움을 하면...

서로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면 화해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낯선 사람의 백 마디의 모략보다도 친구 한 마디의 말이 깊은 상처를 남긴다.

자기 자신에 대해 웃을 수 있는 사람은 남의 웃음을 사지 않는다.

신 앞에서 울고, 사람 앞에서는 웃어라.

표정은 분명히 밀고자다.

음식은 냄비 속에서 만들어지나 , 사람은 접시를 칭찬한다.

투박한 항아리 속에도 귀한 술이 들어 있다.

지성만으로 사람들에게 존경받으려 하는 것은...

교제에 관한 격언

7. 삶의 지혜

 

꽃양배추에 사는 벌레는 꽃양뱌추를 자기 세상으로 생각한다.

인간의 탄생과 죽음은 책의 앞면과 뒷면같은 것이다.

길을 열 번 물어보는 것이 한 번 길을 헤매는 것보다 낫다.

휴일이 사람에게 주어진 것이지, 사람이 휴일에 주어진 것은 아니다.

단번에 바다를 만들려고 해서는 안된다.

0에서 1까지의 거리가 1에서 100까지의 거리보다 길다.

매일을 마지막 날이라고 생각하라.

오래 앉아 있으면 치질이 걸리고...

유태 민족이 안식일을 지켜온 것이라기보다는 안식일이 유태인을 지켜온 것이다.

이상 주의란...

우물에 침을 뱉는 자는 언젠가 반드시 그 물을 마시게 된다.

기적을 바라는 것은 좋지만 그 기적에 의지해서는 안된다.

행운에 모든 것을 맡긴 채 의지해서는 안된다.

운 없는 사람은 높은 곳에서 떨어져 등을 쳐도 코가 부러진다.

선행에 대한 가장 큰 댓가는 무엇인가?

선보다 악이 빨리 번진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사람들은 돈을 시간보다 소중하게 여기는데...

정원을 보면 그 집의 정원사를 알 수 있다.

악한 사람은 눈과 같아서 처음 만났을 때는...

위대한 학자가 창시자가 될 수 없듯이...

아무리 길고 훌륭한 쇠사슬이라도 고리 하나가 망가지면 못쓴다.

사람은 자기 고향에서는...

술이 들어가면 비밀은 밖으로 나온다.

식사는 자기의 기호에 맞추고 옷차림은 사회의 풍조를 따르라

자물쇠는 정직한 사람을 위해서 존재한다.

아무리 비싼 시계라도 바늘이 가르키는 한...

따분한 사람이 방을 나가면 누군가 방에 들어온 듯한 기분이 든다.

성공의 절반은 인내심이다.

성공의 문을 열려면 밀거나 당기거나 해야 한다.

삶의 지혜와 격언

돈의 가치 / 마음의 양식 / 교육의 길 / 남녀간의 교재 / 입과 혀의 재앙 / 교재 하는 방법 / 삶의 지혜

유태인의 격언

돈의 가치 / 마음의 양식 / 교육의 길 / 남녀간의 교재 / 입과 혀의 재앙 / 교재 하는 방법 / 삶의 지혜1. 돈의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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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 600만명이 살해될 때 하나님은 어디에 계셨나?

 

 

본문말씀에 " 구원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진실로 주는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 이시니이다" 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답변입니다.

해 아래의 부조리한 현실은 하나님이 부재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 숨어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 관한 형상을 만들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우상과 같이 인간의 지식과 기대와 형상에 제한되지 않으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지 나뭇조각으로 조각된 신상이 아닙니다.

유한한 형상이 무한한 하나님을 담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찍이 종교개혁가들은 '유한은 무한을 파악할 수 없다" 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계시하면서도 역설적으로 스스로 숨어 계십니다. 모세에게 하나님은 자신을 나타내셨지만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나타나셨지 가시적으로 나타나지는 않았습니다. 광야에서 동행한 구름기둥과 불기둥도 하나님의 계시의 수단이었을 뿐입니다. 시내산에서 여호와께서 임재하실 때에 "우뢰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이 산 위에 있고 나팔소리가 심히 크니 진중 모든 백성이 다 떨더라. 시내산에 연기가 자욱하니 여호와께서 불 가운데서 거기 강림하심이라. 온 산이 크게 진동했다고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에게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말게 하소서 우리가 죽을까 하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백성은 멀리 섰고 모세는 하나님의 계신 암흑으로 가까이 가니라"(20:21). 하나님의 계신 암흑은 바로 죄인인 인간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스스로 숨어 계신 하나님 자신을 말합니다.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도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친히 나를 위하여 증거 하셨느니라. 너희는 아무 때에도 그 음성을 듣지 못하였고 그 형용도 보지 못했다고 하셨습니다.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자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능력을 돌릴지어다" 중세나 동방교회의 삼위일체 성화를 보면 특이한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은 주위에서부터 가운데로 가면 갈수록 점차 어둡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출애굽기의 말씀처럼 하나님의 계신 암흑으로 하나님의 범접할 수 없는 신비를 묘사한 것입니다. 일찍이 종교개혁가 루터는 중세 카톨릭 신학을 영광의 신학이라고 비판하면서 십자가신학을 부르 짖었습니다. 그는 중세 카톨릭교회가 하나님을 창조세계에 나타나는 아름다운 하나님의 영광, 권능. 지혜, 선함만을 말함으로써 십자가의 고통과 모욕 속에 숨어 계신 하나님을 보지 못한다고 비판했습니다. 그도 물론 창조세계에 보여지는 하나님의 영광을 부인하지는 않았 습니다. 그러나 그는 고린도후서 46"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는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가장 찬란하게 빛난 곳은 바로 십자가에 달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슬픔의 얼굴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자연적 이성이 신적인 것으로 인식할 수 있는 영광과 권능이 아니라, 영광의 신성의 정반대인 인간예수의 모욕, 가난, 고통, 번뇌, 어리석음, 약함 그리고 죽음 속에서 자신의 영광을 계시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루터는 역설적인 표현으로 하나님은 계시 속에서도 스스로 숨어 계신 하나님이시라 했습니다. 죄인인 인간은 영적인 소경인고로 직접적으로 하나님을 인식할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은 그의 지혜로 하나님을 인식하지 못했고, 그렇기에 하나님의 영원한 능력과 신성은 이 세상에서는 은폐되어 있습니다. 십자가는 바로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권능은 직접적으로가 아니라 역설적으로 곧 무능과 비천함 속에서 계시된다. 이미 메시아가 이사야 53장에 예언처럼 그 얼굴이 타인보다 상하였고 그 모양이 인생보다 상하였으므로 무리가 그를 보고 놀랐고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어서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고,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고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고 사람들이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는 그런 모습으로 오실 것이라 예언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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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교 / 탈무드와 논리

 

끊임없이 탈무드를 놓고 토론하는 유대인, 그들 중에 위대한 법률가와 학자가 많이 배출되어 온 것은 탈무드를 통한 논리 공부와 무관하지 않다. 뛰어난 감성을 지닌 한국인에게 탈무드적 논리력이 추가된다면 어떤 놀라운 결과가 나올지 상상해 보라.

어느 젊은이가 탈무드를 공부하려고 랍비를 찾아왔습니다. 랍비가 물었습니다. “자네, 아람어(BC 4-5세기 경 유대 지역에서 쓰였던 공용어)를 아는가?” 젊은이가 대답하였습니다. “모릅니다.” “그래? 그렇다면 히브리어는 아는가?” 랍비가 물었습니다. “모릅니다.” 젊은이가 대답하였습니다. “그렇다면 토라(모세 오경)는 공부한 적이 있는가?” 랍비가 물었습니다. “없습니다. 하지만 걱정 마십시오. 저는 콜롬비아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하였고 하버드 대학에서 소크라테스 논리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이제 박사 후 과정으로 탈무드를 공부하러 왔습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랍비가 말했습니다. “젊은이, 그렇게 간청하니 내가 자네의 논리 능력을 한번 시험해 보겠네. 내가 내는 문제에 답하면 기회를 주겠네. 어떤가?” 젊은이는 자신 있게 문제를 내 달라고 하였습니다.

 

랍비가 문제를 냈습니다. “두 사람의 도둑이 굴뚝을 통하여 어느 집에 침입하였다네. 들어가 보니 한 도둑의 얼굴은 깨끗한데 다른 도둑의 얼굴은 검댕으로 더러웠다네.

그렇다면 둘 중 누가 얼굴을 씻었겠나?”

 젊은이가 대답했습니다. “그야 얼굴이 더러운 도둑이지요.” 랍비가 말했습니다. “틀렸네, 얼굴이 깨끗한 도둑이 씻었다네.” 젊은이가 물었습니다. “어떻게 그렇지요?” 랍비가 말했습니다. “논리적으로 생각해 보게. 얼굴이 더러운 도둑은 친구의 깨끗한 얼굴을 보고 자기의 얼굴도 깨끗한 줄 알고 닦지 않았다네. 그러나 얼굴이 깨끗한 도둑은 친구의 더러운 얼굴을 보고 자기의 얼굴도 더러운 줄 알고 닦았다네.” 젊은이가 대답했습니다. “아, 그렇군요. 한 문제 더 내 주세요.”

 

랍비가 똑같은 질문을 하였습니다, “두 사람 중 누가 얼굴을 씻었겠나?” 젊은이는 확신에 차서 답했습니다. “아 그거야 얼굴이 깨끗한 사람이지요. 좀 전에 냈던 문제 아닙니까?”

랍비가 대답하였습니다. “틀렸네,

두 사람 다 닦았다네. 논리적으로 생각해 보게.

얼굴이 더러운 도둑은 친구의 얼굴을 보고 자기가 깨끗한 줄 알았다네.

얼굴이 깨끗한 도둑은 친구의 얼굴을 보고 자기 얼굴이 더러운 줄 알았다네.

그래서 얼굴을 닦았다네. 그것을 본 친구는 '저 친구도 얼굴을 닦는데.' 하고는 따라서 얼굴을 닦았다네.” 젊은이가 답했습니다. “아 그럴 수도 있군요. 한 문제만 더 내 주세요.”

 

랍비가 똑같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래, 둘 중 누가 얼굴을 닦았겠나?”

젊은이는 답했습니다. “둘 다 닦았습니다.”

 랍비가 말했습니다. “틀렸네. 둘 다 닦지 않았네.

논리적으로 생각해 보게. 얼굴이 더러운 도둑은 얼굴이 깨끗한 도둑을 보고 자기 얼굴도 깨끗하다고 생각하였다네. 얼굴이 깨끗한 도둑은 얼굴이 더러운 도둑을 보고 자기 얼굴이 더러운 줄 알았다네. 얼굴이 더러운 도둑은 자기 얼굴이 깨끗한 줄 알고 안 닦았다네. 그것을 본 얼굴이 깨끗한 도둑은 저 친구도 안 닦는데 나만 닦을 필요 없지 하고 역시 안 닦았다네. 결국은 아무도 안 닦았지.”

젊은이는 사색이 되어 말했습니다, “선생님, 저는 꼭 탈무드를 공부해야 합니다.

저는 탈무드를 공부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한 문제만 더 내 주시기 바랍니다.”

랍비는 또 다시 똑같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둘 중 누가 얼굴을 닦았겠는가?”

젊은이가 답했습니다, “둘 다 닦지 않았습니다.” 랍비가 답했습니다. “틀렸네.

소크라테스의 논리학을 공부하였다고 하였는데

왜 자네에게 탈무드 공부가 불가능한지 이제 알겠나? 설명해 보게.

두 사람이 똑같은 굴뚝을 통해 들어갔는데 어떻게 한 사람은 더럽고 한 사람은 깨끗할 수 있단 말인가?

소크라테스 논리학을 공부했다는 사람이 그것도 모른단 말인가?”

젊은이는 포기하는 심정으로 마지막 회심의 일격을 랍비에게 날리기로 하였습니다.

“선생님, 선생님은 한 가지 질문에 세 가지 모순되는 답을 주셨습니다.

그건 철학적으로 불가능합니다.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고요!”

“그래? 그게 바로 탈무드라네.”라고 랍비가 답했습니다.(Aaron Parry, The Complete Idiot's Guide to the Talmud, Marie Butler-Knight, 2004. pp. 7-8에서 최명덕 번역·수정)

 

이 이야기를 잘 관찰해 보면 논리의 중요성을 설명하기 위한 랍비의 스토리텔링 구성이 논리적으로 얼마나 치밀한지 혀를 내두를 정도다.

탈무드는 법(할라하)과 이야기(아가다)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중 할라하라 불리는 법 부분이 탈무드의 요체다. 탈무드를 공부한다고 하면 법률을 연구한다고 보면 된다. 그런데 법률에 대한 공부는 상당 수준의 논리력이 요구된다. 현재 건대에서 탈무드 과목을 가르치고 있지만 학생들이 가장 고통스러워하면서도 흥미로워 하는 부분이 법률에 대한 논리적 논쟁이다. 복잡한 논리에 머리가 깨질 것 같은 고통을 호소하다가도 논리적 연결고리를 찾게 되면 문제를 푸는 실마리를 찾게 되고 탈무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게 된다.

 

유대인의 탈무드 학교인 예쉬바에 가보면 논리적 논쟁으로 얼마나 시끄러운지 모른다.

세계에서 가장 시끄러운 학교나 도서관을 예로 들라고 하면 단연 예쉬바다.

토론과 논쟁이 없는 교실 그래서 조용한 한국의 교실, 우리 학생들의 논리력이 실종되고 있지는 않은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

최명덕
건국대학교 문과대학 문화콘텐츠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한국이스라엘학회장, 한국이스라엘연구소장, 한국이스라엘친선협회 이사, 한국이스라엘문화원 이사로 섬기고 있다. 저서·역서로 《유대인 이야기》《지도로 보는 이스라엘 역사》《유대교의 기본진리》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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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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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교 / 탈무드와 이야기

 

건국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이자 ≪유대인 이야기≫의 저자인 최명덕 교수와 함께 탈무드 속으로 여행을 떠납니다. 재미난 이야기 속에 값진 진리를 담은 탈무드를 통해 오늘을 사는 명쾌한 지혜를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진리와 이야기가 누가 더 인기 있나 내기를 하였습니다. 진리와 이야기는 어느 유대인 마을로 갔습니다. 진리는 자신 있었습니다. 누구도 진리를 외면하지 못하리라 여겼기 때문입니다. 먼저 진리가 마을로 들어갔습니다. 사람들은 진리를 보더니 외면하였습니다. 그를 피했습니다. 열렸던 창문이 닫혔습니다. 마을 중앙에 도착할 즈음 주위를 둘러보니 길에는 아무도 없고 진리 혼자만 서 있었습니다. 진리는 혼자 쓸쓸히 마을을 통과했습니다. 이야기가 마을로 들어갔습니다.

사람들이 기웃거렸습니다. 창문이 열리고, 사람들은 무슨 말인가 들어보려고 귀를 쫑긋 세웠습니다. 마을 중앙에 도착해 뒤를 돌아보니 많은 사람이 따라오고 있었습니다. 이야기가 마을을 통과하는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몰려들었습니다. 마을을 통과한 후 이야기는 진리를 만났습니다. 진리가 이야기에게 말했습니다. “이야기야 네가 이겼다, 내가 졌다.” 이야기가 말했습니다. “진리야 그렇다면 네가 나를 옷으로 입으면 어떻겠니?” 진리는 이야기를 옷으로 입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마을로 갔습니다. 그랬더니 수많은 사람들이 진리에게 몰려들었습니다. 유대인 마을은 진리를 환영하였습니다. (고대 유대인 이야기 중에서, 최명덕 번역·수정본)

 

이 이야기만큼 탈무드의 성격을 잘 설명한 것이 있을까? 탈무드는 유대인이 그들의 진리를 후대에 전하기 위하여 오랜 세월 기술한 책이다. 그러나 진리를 대면하는 것은 모든 사람의 바람이겠지만 또한 버거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불편한 일일 수도 있다. 진리는 분석을 요구하고 통찰을 요구하지만 이러한 작업이 누구에게나 가능한 것도 아니다. 이를 일찍이 간파한 유대인들은 그들의 진리를 이야기와 함께 담았다. 탈무드의 진리는 이야기를 옷 입고 있으며 탈무드의 이야기는 그 안에 진리를 담고 있다. 다음의 이야기를 들어 보자.

 

어떤 사람이 헌 옷을 샀습니다. 집에 와 보니 옷에 다이아몬드가 들어 있었습니다. 이 다이아몬드가 누구의 것이지? 내가 가져도 될까? 그는 고민하다 랍비를 찾아가 물었습니다, “이 다이아몬드는 누구의 소유입니까?” 랍비는 대답했습니다. “자네 아이를 데리고 헌 옷을 판 사람에게 가서 다이아몬드를 돌려주게, 그러면 자네는 다이아몬드보다 더 귀한 교육을 자네 아이에게 선물로 주는 것이네.” (최명덕 번역·수정본)

이 이야기를 법률적으로 따지자면 여러 복잡한 논의가 있을 수 있겠으나 결론은 헌 옷 주인이 판 것은 헌 옷일 뿐 다이아몬드는 아니며 따라서 헌 옷을 산 사람에게는 다이아몬드에 대한 소유권이 없고 헌옷을 판 사람에게 그 소유권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진리이다. 진리는 칼과 같이 엄정하여야 하고 감정에 치우셔서는 안 된다. 때문에 진리를 세우기 위해서는 분석과 논의 과정이 필요하다. 그것은 때로 싸움을 불러오기도 한다. 진리를 세우는 일은 딱딱하고 재미없는 일이다. 그러나 싸움이 일어날 수 있는 상황에서 랍비가 들려준 이야기는 소유권 문제에 대한 해결은 물론 숭고한 교육적 효과까지 성취하고 있다. 법에서는 기대할 수 없는 감동까지 가져온다. 탈무드 이야기는 이야기 안에 진리를 담고 있다. 탈무드에서 진리는 이야기를 옷 입고 있고 이야기는 진리를 담고 있다.

 

최근 회자되는 중요 이슈 중의 하나가 소통이다. 정부와 국민 간의 소통, 회사 사장과 직원간의 소통, 경영자와 노동자 사이의 소통,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의 소통 등등, 소통은 이 시대 최고의 덕목으로 등장하였다. 하지만 최근 MIT에서는 소통을 넘어선 공감에 대한 연구가 한창 진행 중이다. MIT에서는 이를 인지과학과 연결하였는데, 각광받는 연구 분야 중 하나이다. 소통은 이해를 증진시키는 역할을 하지만 공감은 행동을 불러온다. 그렇다면 공감을 불러올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무엇일까? MIT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스토리텔링'이다. 사람이 어떻게 인지하고 행동에 옮기는가에 대한 뇌과학을 연구한 결과 인간이 경험하는 인지 과정 유형 중에 스토리텔링이야말로 공감을 불러오는 최고의 방법이라는 것이 판명되었다. 이에 힘입어 최근 미국에서는 마케팅에서도 소통보다는 공감을 중시하여 공감 스토리텔링을 마케팅에 적극 활용하고 있다.

 

유대인들은 탈무드 안에 이야기 콘텐츠를 넣었다. 이를 통하여 아버지나 선생은 자녀나 제자를 위한 스토리텔링 콘텐츠를 확보할 수 있었다. 탈무드의 삼분의 일이 법률에 대한 논의라면 삼분의 이는 이야기이다. 이야기 콘텐츠가 법률 콘텐츠보다 두 배나 많은 것이다. 탈무드의 법률 콘텐츠는 전문적인 학자가 아니라면 다루기 어려운 난제들이 수두룩하여 접근이 쉽지 않지만, 그 안에 들어있는 이야기 콘텐츠는 누구라도 듣고 싶어 할 만큼 흥미롭다. 수많은 출판사에서 이 이야기들만 따로 편집하여 탈무드라는 이름으로 출판하였고 이 이야기들은 세계적으로 사랑받고 있다.

 

할리우드 시나리오 작가들의 구루(Guru)로 불리는 로버트 맥기(Robert Mckee)는 이야기의 본질을, '갈등을 극복하고 그가 이루고자 하는 것을 성취하는 것에 대한 기술이나 구술'이라고 정의하였다. 탈무드에는 수많은 종류의 갈등이 기술되어 있다. 그리고 그 갈등을 해결하는 방법이 기록되어 있다. 어떻게 보면 탈무드는 갈등을 지혜롭게 해결하기 위한 매뉴얼이다. 나를 돌보는 것과 남을 돌보는 것 사이의 갈등에 대하여 어느 랍비는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나를 위하지 않으면 누가 나를 위할까? 내가 나만 위하면 나는 무엇이 될까?” 갈등은 인간을 성장하게 하는 명약이다. 어떻게 극복하느냐가 관건인데 탈무드는 수많은 종류의 갈등을 소개하고 갈등 극복의 지혜를 제공한다. 그렇다면 탈무드의 이야기는 갈등 극복의 이야기이다. 앞에 소개한 두 이야기는 진리가 겪게 되는 갈등과 소유권에 대한 갈등이 어떻게 해결되었는가를 보여 준다. 두 이야기를 더 깊이 분석해 보라. 많은 지혜를 얻게 될 것이다. 탈무드 이야기를 경청하라. 갈등 해결의 비책을 얻게 될 것이다.

 

최명덕
건국대학교 문과대학 문화콘텐츠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한국이스라엘학회장, 한국이스라엘연구소장, 한국이스라엘친선협회 이사, 한국이스라엘문화원 이사로 섬기고 있다. 저서·역서로 《유대인 이야기》《지도로 보는 이스라엘 역사》《유대교의 기본진리》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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