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전쟁] 아랍 대 이스라엘 전쟁

 

 

 

아랍 대 이스라엘 전쟁이라고도 한다.
긴 역사적 배경과 복잡한 국제적 관계가 얽혀서 제2차 세계대전 후 중동지역에 끊임없는 긴장을 몰고 왔으며,
4차에 걸친 전쟁까지 겪어야 했던 이 중동분쟁은 아랍·이스라엘 양민족의 숙명적인 대립에서 유래한다.
즉, 기원전 팔레스타인 땅에 건국한 유대인은 망국 후 유랑의 민족으로 전락하였으나 조상의 땅인 가나안의
언덕으로 돌아갈 것을 민족의 비원(悲願)으로 삼아 왔다.

이 '시오니즘(Zionism)'은 후에 팔레스타인에 유대국가를 재건하려는 정치운동으로 전환해 갔다.


한편 예루살렘은 636년 이슬람에게 공략되었고, 이후 팔레스타인 지역의 대부분은 이슬람교도에 의해
점거됨으로써 이슬람교도에게도 성지(聖地)가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중 영국은 전쟁수행을 위해 시오니즘을 지지함과 동시에 독일측인 오스만 투르크의 후방교란을
위해 아랍인의 협력을 요청하였고, 양자에 대해 팔레스타인을 내주겠다는 모순된 언질(아랍에 대해서는
맥마흔선언, 유대에 대해서는 밸푸어선언)을 주었던 것이 이 비극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전 후 팔레스타인은 영국의 위임통치하에 들어갔으며, 밸푸어선언으로 팔레스타인에 국가재건을 약속받은
유대인이 내주(來住)하면서 이곳에 정착하고 있던 아랍인과 충돌이 생기게 되었다. 
 

 c) 1차 중동전쟁

제2차 세계대전 후 유대 난민의 대량 유입으로 분쟁이 격화되자 영국은 분쟁의 해결을 국제연합에 위양하였다.
1947년 제2차 국제연합 총회는 팔레스타인을 아랍과 유대의 쌍방에 분할하는 결의를 채택하였다.
1948년 5월 14일 유대인은 영국군의 철수와 동시에 이스라엘의 독립을 선언하였다.
그러자 5월 16일 이집트를 비롯한 아랍측 약 2만의 병력이 팔레스타인에 침입, 전세는 당초 아랍측이
우세하였으나 이스라엘의 공세로 아랍측은 패퇴를 거듭하였다.

이 사이 국제연합의 팔레스타인 조정관 백작 B.W.베르나도테가 유대인 과격분자에게 암살되는 불상사도 있었으나
국제연합의 조정으로 1949년 2월 휴전이 성립하였다.
그러나 이 전쟁 결과 100만의 팔레스타인 난민이 발생하고 이른바 아랍게릴라가 조직되었다.  
 

d) 2차 중동전쟁

제1차 중동전쟁의 휴전 후에도 사태는 악화를 거듭하여 쌍방은 군사력 증강에 광분하였다.
1952년 7월 이집트에서는 혁명이 발발, 왕제가 붕괴되고 공화제가 실시되었다.
1956년 초대 대통령에 취임한 G.A.나세르는 그해 7월 수에즈운하의 국유화를 단행하여 이스라엘로 향하는
선박의 통항을 거부하고 티란해협을 봉쇄하였다.

이로써 큰 타격을 입게 된 영국 ·프랑스는 10월 29일 이스라엘이 시나이반도를 침공한 2일 후에 수에즈운하를
공격하였다.
전세는 3국측에 유리하게 전개되었으나 미국의 압력, 소련의 위협, 국제여론의 악화 등으로 영국 ·프랑스는
정치적으로 매우 불리하게 되었다.

국제연합은 긴급특별총회를 소집하여 11월 14일 즉시 철수와 유엔군 파견 결의를 채택, 정전(停戰)과 감시를
위한 유엔긴급군을 편성 ·파견하였다.
이에 따라 사태는 진정되었고, 영국 ·프랑스는 연내에, 이스라엘은 1957년 3월에 점령지로부터 철수하였다. 
 

e) 3차 중동전쟁

제2차 중동전쟁 후 1964년경부터 아랍게릴라의 활동이 시작되어, 게릴라의 기지가 된 시리아에 대해
이스라엘은 1967년 4월 대규모 공격을 감행하였다.
이에 대해 붕괴에 직면한 아랍의 결속강화를 이스라엘과의 대결에서 회복하려는 이집트 대통령 나세르는
대군을 시나이반도에 투입, 유엔긴급군의 철수를 요청하고 아카바만(灣)의 봉쇄를 선언하였다.

6월 5일 이집트-이스라엘 간에 전투가 개시되었고, 전란은 시리아 ·요르단으로 확대, 전면적인 전쟁으로
확대되었다.
서전의 기습공격으로 아랍측 공군력을 괴멸시킨 이스라엘군은 압도적인 우세 속에서 4일 만에 시나이반도를
점령하였으며, 요르단강 서안(西岸)지역, 시리아 국경의 골란고원을 공략하였다.

국제연합안전보장이사회는 6월 6일 즉시 정전을 결의하였고, 쌍방의 수락에 의해 6월 9일 정전이 실현되었다.
또한 안전보장이사회는 그해 11월 중동분쟁의 정치적 해결을 위한 결의 242호를 채택하였다. 
 

f) 4차 중동전쟁

이집트 대통령 나세르는 전력의 재건을 서둘렀고, 아랍게릴라는 1969년경부터 파괴활동을 격화하였다.
요르단에서는 1970년 9월 화평에 반대하는 게릴라와 정부군 사이에 내전이 있었다.
1970년 9월 28일 대통령 나세르의 급사로 M.A.사다트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사다트는 이스라엘 기습을 계획하여 1973년 10월 6일 선제공격을 가함으로써 이스라엘 공군과 탱크대를 소련제
미사일과 로켓으로 격파, 서전을 승리하였으나, 북부에서는 시리아군이 패퇴하여 전선은 고착화되었다.

이에 유엔안전보장이사회에서는 22일 미 ·소공동제안에 의한 즉시정전, 1967년의 안전보장이사회 결의 242호의
이행 등을 골자로 하는 결의안이 채택되고, 당사국의 수락을 얻어 같은 날 정전을 성립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연말에는 제네바에서 중동평화회의가 개최되고, 1974년 1월 이집트-이스라엘 간에 병력격리협정이 조인되어
그 이행을 감시하기 위한 유엔군이 파견되었다.

이 전쟁 중에 아랍석유수출국기구(OAPEC)는 석유전략을 발동, 생산제한과 금수(禁輸)를 실시했기 때문에
세계는 심각한 석유위기를 겪어야 했으며, 각국 경제는 막심한 타격을 입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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