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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 중심의 이슬람 천국

 


 
꾸란 전체에 흐르고 있는 또 하나의 사상은 천국이 남성중심의 세계라는 것이다.
  
동일한 신앙을 가지고 천국에 가게될 여성을 위한 배려는 거의 없으며, 이슬람의 천국은 남성들이 잘먹고 마실 수 있는 남성을 위한 세계나 마찬가지이다.

 

꾸란52:20 “줄지어 늘어선 소파에 기대어 쉬게 하며: 우리(알라)는 그들에게 순수한 처녀들을 줄 것이다”
  
세일(Sale)은 “순수한 처녀들”을 커다란 검은 눈동자를 가진 처녀들“로 번역하고 있다(p.506)
  
꾸란 37:44 “충성된 자들은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과일을 즐기고 큰 영화를 누리게 될 것이며, 아래로 샘물이 흐르는 곳에서 소파에 누워 순결한 처녀들과 함께 할 것이다”
  
꾸란 38:52은 처녀들이 남성들과 같은 나이라는 사실을 확인해 준다.
  
남성들은 풍성한 과일을 즐기고 처녀들은 그 주위에서 시선을 억제하며 서 있다고 한다.
  
세일(Sale)은 처녀들에 대하여 “그들의 배우자 외에 다른 어떤 사람도 쳐다 보지 않는다”(p.447)고 덧붙여 설명하고 있다.
 
“알라를 경외하는 사람은 정원들과 샘들이 있는 안전한 장소에 거하게 될 것이며, 아름다운 실크 옷을 입고 서로 마주하게 될 것이다. 게다가 우리(알라)는 그들에게 큰 눈을 가진 아름다운 처녀들(houri)을 배우자로 줄 것이며, 거기서 그들은 온갖 과일을 평화롭게 즐기게 될 것이다.”
  
꾸란 56:23에서 이슬람의 천국은 과일, 소파, 시선을 아래로 향하는 처녀들, 진(Jinn - 이슬람에서 믿는 초자연적인 영적인 존재), 루비같은 보석, 산호 등이 있는 곳으로 묘사된다.
  
나중에 다른 부분에서는 “착하고 아름다운... 차가운 건물에서 은둔생활을 한...어떤 남자나 진(jinn)도 가까이 하지 않은 처녀들(houri)"이라고 묘사하고 있다.
  
꾸란 56:10~25은 이땅에서의 수고에 대한 보상으로 가게 될 천국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쇼파에 누워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즐길 수 있는 곳, 그곳에서 영원히 사는 (immortal)소년들이 술잔과 주전자 그리고 가득한 잔을 들고 시중드는 곳, 원하는 과일과 고기를 먹을 수 있고 감추어진 진주와 같은 큰 눈을 가진 처녀들((houri)이 있는 곳”
  
이 장에서는 알라께서 “요염하고, 아름다우며, 나이가 같은 오른손의 동반자(The companions of the right) 로서” 흠없는 처녀들을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계속 강조한다.
  
꾸란 78:32~33은 또 다시 알라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안전한 장소, 즉 “여러 정원과 포도원, 그리고 나이가 같은 처녀들, 넘치는 잔”이 있는 곳을 보상으로 약속하고 있다.
  
무슬림이 아닌 사람들이 이 구절들을 읽는다면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 의문을 갖게 될 것이다.
 
 
첫째로,
신실한 여성들에 대한 보상은 무엇인가?
그들도 천국에 들어갈 수는 있으나 그들에 대한 보상은 거의 나와 있지 않다.
  
둘째로,
남자들은 나이가 같은 아름다운 젊은 처녀들을 보상으로 받는 것 같은데, 여성들은 보상에서 제외되는 것 같다.
  
몇몇 구절에서 여성들이 남성들과 동등하게 천국에 환영받는 것처럼 말하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검은 눈을 가진 처녀들(houri)로 대체되는 것처럼 보인다.
  
셋째로,
위 질문에 대한 대답이 어떻든 간에 천국은 분명히 여성들이 아니라 남성들을 위한 보상의 장소라는 점이다.
 
다음은 여성들을 위한 천국과 관련된 이슈들이다.
  
이 땅에서의 이슈들은 아주 다르나 여러 가지 면에서 크게 나은 것은 없다.
  
아내들은 남편들의 정원 또는 경작지에 비유되면, 꾸란 2:223은 “네가 원하는 만큼 너의 경작지로 가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성적인 생활에 대한 이런 일반적인 견해에도 불구하고 약간의 제한사항도 있다.
  
성지순례를 가는 남성들은 “성적인 관계를 가져서는 안되며 불경건한 생활과 언쟁에 빠져서도 안된다”(꾸란2:197)
  
여성들은 월경기간에는 “정결하지” 않기 때문에 남편들과 성적인 관계를 가져서는 안된다.(꾸란 2:222)
  
심판의 날은 모든 남자와 여자들에게 정결함을 기본적으로 요구한다.
  
“징벌 때문에 어떤 사람도 안심할 수 없을 것이며, 그들의 순결을 지켜야 할 것이다. 단 아내들과 오른손이 소유하고 있는 것(What their right hand owns, 즉 전쟁포로들 중에서 취한 여성 노예나 첩)들은 제외로 한다.”(꾸란 70:29~31)

 
세일(sale)은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번역하였다.
  
“그들의 아내들 또는 그들의 오른손이 소유하고 있는 것들(종)을 제외한 다른 여자들을 육체적으로 아는 것을 삼가야 한다(아내들과 오른 손이 소유하고 있는 종들에 대해서는 잘못이 없다. 그러나 그 외 다른 여자들을 향하는 음심을 품는 것은 죄를 범하는 것이다.”)(sale, p.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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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men in the Quran] 남성과 여성의 지위

 

 

 

 

 

1. 남성과 여성의 지위

오늘날 이슬람 국가에 살고 있는 여성들의 삶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꾸란과 하디스, 그리고 이슬람법(꾸란을 기초로한 법)을 잘 살펴보아야 한다.
  
꾸란에는 남자와 여자에 관한 주제의 구절이 많이 있으며 신이 남자와 여자를 창조했다는 구절도 있다.
 
 
처음에는 약간 평등을 보장하는 것 같아 보이지만, 깊이 들어가 보면 여자는 결코 남자와 평등한 존재가 아니다.
  
신앙(이슬람)을 갖는 것에 있어서는 남녀가 평등하나 이 신앙은 결코 여자들에게 평등을 보장해 주지 않는다.
  
꾸란2:124은 “남자든 여자든 의로운 행동을 한 신자는 천국에 들어갈 것이며, 조금도 불공평하게 심판 받지 않을 것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동일한 내용이 꾸란 16:97절에 약간 다른 표현으로 기록되고 있다.
  
“남자든 여자든 의로운 행동을 한 신자에게 우리(알라)는 복된 삶을 허락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행위에 따라 최선으로 보상해 줄 것이다.”
 
이 내용은 꾸란 40:40에도 있으며 53:45에도 신이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다는 구절이 있다(꾸란92:3, 75:39)
 
 
그러나,

여성의 지위에 관한 꾸란의 시각에 있어서 약간 다른 의미를 갖고 있는 구절들도 여러 개 있다.
  
꾸란 2:25은 이땅에서의 아내들은 천국에서도 동일하게 아내들인데 단 월경으로 인한 부정함은 없어지게 된다고 기록하고 있다.
  
월경을 더 이상 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꾸란이 여성들에게 주는 비교적 좋은 약속 중 하나이다.
  
이 땅에서 여성들은 중년이 되면 폐경기를 맞게 되는데 천국에서는 남편들과 같이 영원히 늙지 않고 동일한 나이로 살 것이라고 믿는다.
  
이슬람 전통은 남편과 아내가 천국에서 영원히 30세에서 33세 나이로 살게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천국에서 30세나 33세 정도의 여자가 부정하지 않다는 선언은 의도가 있는 말이다.
  
이 땅에서 임신을 원하지 않는 30세나 33세 정도의 여자에게 부정하지 않은(즉, 월경을 하지 않는)기간은 성적인 관계를 통한 임신 가능성에 대해 부담스러운 시간이기 때문이다.(꾸란 3:15와 4:57 반복)
  
무슬림 여성들은 꾸란 전체 본문 중에서 이 구절들을 자신을 위한 좋은 소식으로 받아들이겠지만. 그것은 오히려 남자들에게 좋은 소식이라고 하는 것이 맞다.
  

 
왜냐하면, 여성이 더 이상 월경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남편의 성관계 요구를 거절 할 수 있는 정당한 이유가 없어진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꾸란 2:25, 3:15, 4:57에서 믿는 자들에게 약속하고 있는 천국의 순결한 여인들이 바로 땅에서의 아내들(천국에서 순결한 모습으로 변한 아내들)인지, 아니면 천국에 가는 무슬림 남자들에게 주어질 천국의 처녀들(HOURI : 이슬람에서 믿는 아름다운 천국의 처녀들)인지 분명하게 나와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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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의 경전 꾸란은 어떻게 탄생했나?

 

 

이슬람 학자들은 이구동성으로 꾸란(Quran)1)은 천상(天上)에 원본(原本)이 있으며 무함마드(Muhammad, 571?-632, 이슬람교 시조)에게 계시된 완벽한 경전이라고 주장한다. 그뿐 아니라 이들은 또 꾸란으로 신구약성경의 진위(眞僞, 참과 거짓)를 구별하는 기준을 삼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 신구약성경은 여러 사람이 천 오백여 년 동안 쓴 것을 모은 것이기 때문에 오류가 많지만 꾸란은 알라(Allah, 이슬람의 하나님)가 무함마드2) 한 사람에게 계시한 것이기 때문에 혼돈과 오류가 없고, 무함마드가 처음 계시를 받은 때부터 지금까지 일점일획도 변치 않고 원본이 그대로 보존돼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만일 이점에 의심을 품으면 거룩한 꾸란을 모독하는 행위로 간주하며 꾸란이 변질되었다거나 한 구절이나 한 단어라도 추가되거나 삭제되었다고 말하는 자체가 알라(Allah)의 저주를 자초하는 행위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게 믿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모순이 이슬람의 가르침 속에 들어 있다는 것을 모르는 이슬람 학자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그들은 절대로 그 사실을 말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이슬람의 확장을 위해 그리고 이슬람권에서의 자신의 영향력과 신분 유지를 위해 또 사실을 말했을 경우 직면하게 될 핍박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이맘 부카리(Bukhari)3)나 이맘 무슬림(Muslim)3)이 수집한 하디스(Hadith, 무함마드의 언행 집)4)는 이슬람교에서 공식적인 경전은 아니지만 꾸란 경전에 버금가는 권위를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때로는 꾸란 보다 더한 권위가 부여되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면 이슬람교의 교리를 설명할 때 제일 먼저 무슬림들이 의무적으로 행해야 할 다섯 기둥에 대해서 가르친다. 그러나 꾸란에는 이 다섯 가지 의무를 모아 놓은 곳이 없다. 이는 이맘 부카리가 편집한 하디스에서만 찾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이슬람의 교리나 가르침에서 문제점을 제기할 때 어떤 학자들의 주장에 근거하여 말하기 보다는 꾸란과 이맘 부카리 혹은 이맘 무슬림의 하디스의 내용을 인용하여 반증한다면 아무도 반박할 수 없을 것이다. 이슬람의 경전 꾸란이 어떻게 만들어 졌는지에 대해서는 하디스에 비교적 많은 자료가 있다. 그런데 그 자료들은 지금 우리가 주변에서 듣고 있는 내용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제일 먼저 생각해 보고 싶은 것은 무함마드는 신(神)으로부터 책을 받은 일도 없고, 그가 죽을 때까지 꾸란을 책으로 만든 일도 없고, 후대 무슬림들에게 자신이 받은 계시를 책으로 묶어 만들라고 명령한 일도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꾸란에는 알라(Allah)가 무함마드에게 책(꾸란)을 내려 보냈다고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꾸란은 알라가 무함마드에게 성경의 모체가 되는 책을 내려주셨다고 말한다. “그대에게 그 책을 계시하신 분은 알라이시며 그 안에는 근본의 말씀이 있어 성경의 모체가 되고…”(꾸란 3:7) “그분의 종(무함마드)에게 그 책(꾸란)을 계시한 알라께 찬미를 드리나니 그 안에는 일점의 왜곡됨도 없노라.”(꾸란 18:1) 이 두 구절 외에도 꾸란에는 여러 곳에서 알라는 무함마드에게 책(al-kitab, the Book)을 내려주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슬람의 꾸란이라는 경전은 주후 632년 무함마드가 죽을 때까지 없었다. 즉 이슬람의 역사와 하디스에 의하면 무함마드는 죽을 때까지 꾸란을 책의 형태로 만든 일이 없었다. 다만 그가 간헐적으로 계시를 받았다고 암송하는 소리를 들었던 제자들이 그 내용을 나뭇잎이나 돌 등에 새겨놓고 암기하기도 했던 것들이 남아있을 뿐이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고 꾸란의 내용을 암기하던 사람들이 전쟁에 나가서 죽게 되어 무함마드의 계시가 소멸될 위기에 놓이게 되자 우마르(Umar)의 제안에 이슬람의 첫 칼리프 아부 바크르(Abu Bakr, 573-634)가 그것들을 모으게 하였고, 1차 수집한 것을 우마르의 딸 하프사에게 맡겼다가 결국 3대 칼리프 우트만(Uthman, 577-656)의 명에 의해서 하프사가 가지고 있는 것과 흩어져 있던 꾸란의 구절들을 수집하여 종합 편집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외에는 어떤 종류의 완본이든지 조각 본이든지 모두 불태우도록 명령했다.(Sahih al Bukhari: Volume 6, Book 61, Number 510)

 

 

초기 무슬림들은 꾸란을 책으로 만들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부카리의 하디스에 의하면 무함마드가 죽은 후 전쟁터에서 꾸란을 암송하던 사람들이 죽고 전쟁이 더 심해져 꾸란 암송 자들이 다 죽어버리면 꾸란 자체가 없어질 것을 두려워하여 그 구절들을 수집하여 책으로 묶자는 제안이 나왔을 때 사람들이 두려워하며 주저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무함마드가 살아있을 때 명하지 않았던 일을 그의 허락 없이 행한다는 것은 그것이 비록 자기들이 볼 때는 좋은 일이지만 알라가 나중에 그 일을 어떻게 심판하실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좋은 일이라는 확신이 들자 아부 바크르는 자이드 빈 타비트(Zaid bin Thabit, ?-665)에게 명하여 꾸란의 조각들을 모으라고 명했던 것이었다. 아부 바크르의 이 같은 명령을 받은 타비트는 산을 옮기라는 명령보다 더 어려운 명령을 받았다고 생각하며 두려워했다고 한다.(Sahih al Bukhari: Volume 6, Book 61, Number 509)

무함마드는 자기가 계시 받았다고 말했던 꾸란 구절들을 잊어버리기도 했다. 무함마드는 계시를 받았다고 하면서 사람들에게 낭송해 준 구절들을 나중에 망각하고 잊었는데 다른 사람들이 낭송하는 것을 듣고 생각났다고 하는 경우들이 종종 있었다. 다음의 하디스 구절이 그 증거다. “메신저(무함마드)께서는 사원에서 낭송 자가 꾸란을 낭송하는 소리를 들으시고 말씀하시기를 ‘그는 내가 잊었던 그것을 생각나게 했으니 나는 알라께서 그에게 자비를 베푸시기를 원한다.’고 말했다.”(Sahih al Bukhari:Volume 6, Book 61, Number 562) 꾸란의 구절을 망각하는데 대한 계시는 꾸란 자체에서도 찾을 수 있다. “우리가 취소하거나 망각케 한 어떤 계시의 구절이 있다면 우리는 그보다 더 낫거나 비슷한 것을 가지고 온다. 알라(Allah)는 모든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너희는 모르느냐?”(꾸란 2:106, 힐럴리 역)

 


꾸란을 낭송하는 방법은 원래 여러 가지였다. “알라의 메신저(무함마드)께서 가브리엘 천사가 내게 꾸란을 어떤 식으로 낭송해 주기에 내가 다른 식으로 낭송해달라고 계속 부탁을 했더니 결국은 7가지 방법으로 낭송해 주셨다.”고 말했다.(Sahih al Bukhari-Volume 6, Book 61, Number 513) 꾸란은 원래 다양한 방법으로 낭송할 수 있도록 계시되었다고 이슬람의 제 2경전이라고 하는 부카리의 하디스에게 말하고 있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무함마드는 가브리엘 천사가 내려준 꾸란을 그대로 받은 것이 아니라 무함마드의 요청에 의해서 가브리엘 천사가 낭송하는 방법을 7가지로 다시 계시해 줬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무슬림들은 7세기에 무함마드가 낭송하던 한 가지 억양과 발음과 악센트로 낭송해야 한다고 고집하면서 의미도 모르는 아랍어로 꾸란을 낭송하게 하는 것일까?

우트만 꾸란의 편집이 완료되었을 때 꾸라이시 족들이 교정을 보았다. 우트만은 3명의 꾸라이시 사람들에게 “자이드 빈 타비트의 꾸란 중 어느 부분이라도 동의하지 않는 부분이 있으면 꾸라이시 방언으로 기록하라. 왜냐하면 꾸란은 그들의 방언으로 계시되었기 때문이다.”고 말했다.(Sahih al Bukhari Volume 6, Book 61, Number 507)

꾸란을 수집할 때 실수로 빠뜨렸던 구절들이 있었다. 무함마드가 살아있을 때 꾸란을 가장 잘 외우고 있었던 4사람이 있었다. 무함마드는 사람들에게 압둘라 빈 마수드, 쌀림, 무아드, 우바이 빈 카압 이 네 사람에게 꾸란을 배우라고 명했다.(Sahih al Bukhari Volume 6, Book 61, Number 521)

그러나 무함마드 사후 초대 칼리프를 역임했던 아부 바크르는 자이드 빈 타비트에게 꾸란을 모으라고 명령했다.(Sahih al Bukhari Volume 6, Book 61, Number 509) 타비트는 실수로 꾸란의 한 구절을 빠뜨렸다고 고백하고는 나중에 무함마드가 낭송하던 것을 들었던 생각이 나서 그 구절을 찾아 나섰다가 결국은 쿠자이마 빈 타비트 알 안싸리가 가지고 있는 것을 발견했는데 그 구절은 꾸란 쑤라 타우바(9:128~129)였다고 기록되어 있다.(Sahih al Bukhari Volume 6, Book 61, Number 510)

계시된 꾸란 구절이 즉시 수정된 경우도 있다. 꾸란 4:95에 “무슬림 중 알라를 위해서 전쟁에 나가 싸우는 자들과 집에 앉아 있는 자는 동등하지 않다.”는 구절이 무함마드에게 계시되었다고 하여 자이드가 기록하려는데 그 때 아므르 빈 움막툼(Amr bin Um Maktum)이라는 소경이 무함마드 뒤에 있다가 그 소리를 듣고 “오 알라의 메신저여 나 같은 소경에 대한 당신의 명령은 무엇입니까?”라고 묻자 다음과 같은 계시가 다시 내려왔다는 것이다. “무슬림 중 알라를 위해서 전쟁에 나가 싸우는 자들과 불구자도 아닌데 집에 앉아 있는 자는 동등하지 않다.”(꾸란4:95)(Sahih al Bukhari Volume 6, Book 61, Number 512)

 

 

꾸란에는 사탄에게 받은 계시도 있다. 무함마드가 소속되어 있던 메카의 꾸라이시 족이 섬기던 신 알라(Allah)에게는 세 딸 신(神)이 있었는데 그 이름은 라트, 우짜, 마나트였다. 그들에 대한 꾸란이 계시되었는데 “너희는 라트, 우짜, 마나트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느냐? 저들은 하늘 높이 나는 학과 같아서 그들의 중재는 알라께서 열납하시느니라”(꾸란53:19~23)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얼마 후에 알라의 단일신론을 주장하면서 딸 신들을 인정하는 것은 교리적으로 맞지 않는 것을 발견하고는 그 계시를 취소하는 새로운 계시가 내려왔다는 것이다. 그 새로운 계시는 지금 꾸란에 있는 것처럼 세 딸들의 권위를 부인한다.(꾸란 53:19~23) 그러자 사람들이 왜 알라의 계시가 바뀌었냐고 물었을 때 “그 구절은 사탄이 내 혀에 넣어준 것이었기 때문에 가브리엘 천사의 계시에 의해서 취소되었다.”고 대답했다는 것이다.(Al Tabari Hadith Book6 No. 107)

그와 같은 것을 보편화시키면서 인정하는 구절도 있다. “그대 이전에 우리가 보낸 선지자나 예언자들이 계시를 낭송할 때 사탄이 거짓을 그 속에 섞어 넣지 않은 자는 없다. 그러나 알라께서는 사탄이 섞은 것을 취소하시고 자신의 계시를 세우셨다. 알라는 모든 것을 아시고 지혜로우시다.”(꾸란 22:52 힐럴리 역)

꾸란에서 사라진 구절도 있다. “알라의 말씀을 다른 것으로 대체할 때 그 계시함이 무엇인가는 알라만 아심이라. 이에 그들이 그대는 위조자라고 말하나 그들 대다수는 알지 못하더라.”(꾸란 16:101 최영길 역) 대체라는 말은 하나를 취소하고 다른 것으로 바꾼다는 말인데 하늘에 원본이 있다면 어떻게 그럴 수가 있겠는가?

이 같은 꾸란에 대해 미화 된 홍보용 자료들이 순진한 사람들을 속이고 있다. 꾸란은 사실 무함마드가 살아있을 때부터 수시로 취소 또는 첨가되기도 하며 대체되기도 하는 변화를 거듭해 왔기 때문에 아무도 그것을 책으로 묶을 생각을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무함마드가 죽은 후 꾸란의 구절들을 수집하는 과정에서도 많은 문제가 있었다. 간음한 여인을 돌로 쳐 죽이라는 계시가 분명히 꾸란에 있었고 무함마드도 투석(投石) 형(刑)을 집행했고 그의 후계자들인 칼리프들도 투석 형을 알라의 명령으로 알고 집행했는데 지금은 꾸란에 그 구절이 없다는 것을 보더라도 양심 있는 무슬림 학자들이라면 꾸란이 하늘에 원본이 있었던 것이 그대로 책으로 계시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글쓴 이 / 이만석 목사(한국이란인교회)

출처 / 기독일보 2010.9.15.

1) The Quran is the central religious text of Islam, which Muslims believe to be a revelation from God. It is widely regarded by Muslims as the finest piece of literature in the Arabic language . Quranic chapters are called suras and verses, ayahs.
 2) Muhammad Prophet is considered in Islam to be the greatest messenger and prophet sent by God to guide humanity to the right way. Born: Mecca, Saudi Arabia, Died: June 8, 632 AD, Medina, Saudi Arabia, Full name: Abū al-Qāsim Muḥammad ibn ʿ Abd Allāh ibn ʿAbd al-Muṭṭalib ibn Hāshim, Buried: Green Dome, Medina, Saudi Arabia, Spouse: Maymunah bint al-Harith (m. 629 AD–632 AD)
 3) 이맘 부카리(Bukhari) : 하디스를 수집한 유명한 이슬람 학자로는 이맘 부카리, 이맘 무슬 림 등이 있다.
4) Hadith are collections of the reports claiming to quote what the prophet Muhammad said verbatim on any matter. The term comes from the Arabic meaning “report”, “account” or “narrative”. Wikipedia 하디스(아랍어: حديث نبوي)는 무함마드가 말하고(Qaul), 행동하고(Fi’ul), 다른 사람의 행위를 묵인한(Taqreer) 내용을 기록한 책이며 꾸란(코란), 이 즈마, 끼야쓰와 함께 샤리아(sharia law, 이슬람법)의 4대 원천이다. 무슬림은 알라의 말씀인 꾸란과 더불어 하디스에 기록된 무함마드의 언행(순나)에 따라 행동함을 삶의 기반으로 한다. 종교의 시조의 말을 담은 종교적인 어록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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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전쟁

십자군 운동의 두가지 주제 십자군 운동의 성쇠는 중세 전성기 교황 군주국가의 운명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제1차 십자군은 교황에 의해 시작되었으며, 그 운동의 성공은 교황군주국가의 커다란 승리였다. 그러나 그후 이어진 십자군 운동의 쇠퇴는 교황의 세속적 권위를 약화시키는데 기여했다. 그러므로 십자군은 교회사 및 종교사의 한 부분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십자군은 서유럽 식민주의 역사의 첫장을 여는 것이었다.

제1차 십자군의 직접적 원인

제1차 십자군의 직접적 원인은 1095년 비잔틴 황제 알렉시우스 콤네누스가 지원을 호소한 데 있었다. 알렉시우스는 얼마 전 투르크족에게 빼앗긴 소아시아의 비잔틴 영토를 되찾고자 했다. 그는 서유럽의 용병을 원군으로 사용하는데 이미 익숙해 있었던 터라 서유럽으로부터 얼마간 군사적 지원을 얻기 위해 교황에게 도움을 청한 것이었다. 그러나 황제는 단순한 지원군 정도를 넘어선 십자군을 맞이하게 되었으니 그로서는 경악할 일이었음이 분명하다. 다시 말해서 소아시아에서 싸워줄 용병군 대신 서유럽의 예루살렘을 이슬람의 수중에서 탈환할 목적으로 대규모의 자원군을 파견한 것이다. 알렉시우스의 지원 요청을 십자군 파병으로 전환시킨 것은 어디까지나 교황의 결단에 의한 것이었으므로, 교황의 동기가 과연 무엇이었는가를 알아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레고리우스의 성전 사상

1095년 당시의 로마 교황은 우르바누스2세로서 그는 그레고리우스7세의 수제자였다. 따라서 우르바누스 역시 그레고리우스의 정책을 구현하고자 제1차 십자군을 제창했다. 기독교적 전쟁 행위에 대한 우르바누스의 생각은 그레고리우스의 사상을 이어받은 것이었다. 초대 기독교는 평화주의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 예를 들면 4세기의 존경받는 기독교 성인인 성 마르탱은 군인었지만, 개종과 함께 이런 말을 남기고는 군대를 떠났다. "나는 그리스도의 병사이므로 전쟁을 할 수 없다." 라틴 교부인 성 아우구스티누스와 성그레고리우스는 기독교인의 전쟁 행위를 정당화하는 이론을 수립했다. 그러나 그것이 실천에 옮겨진 것은 11세기에 이르러 그레고리우스의 개혁운동에 힘입어서였다. 그레고리우스7세는 교황이 되기 전에도 노르만 정복에 대한 교황권의 지원을 주선했다. 그리고 그와 그의 영향하에 있던 교황들은 에스파니아의 이슬람교도에 대한, 이탈리아의 그리스인에 대한, 그리고 독일 동부의 슬라브족에 대한 기독교인의 전쟁에 축복을 내린 바도 있었다. 그레고리우스와 그의 추종자들은 이러한 모든 전쟁을 "세상의 올바른 질서"를 확립하기 위한 조치로 간주했다.

우르바누스의 동기

그레고리우스7세의 정책을 답습한 우르바누스2세의 성지 십자군 운동에는 적어도 네 가지 목적이 있었다. 그 하나는 그리스 정교회를 로마 교회로 통합시키고자 하는 것이었다. 막강한 자원군을 동방에 파견함으로써 우르바누스는 비잔틴으로 하여금 서유럽의 위력에 압도당하도록 하고, 나아가 그들로 하여금 로마 교회의 우위를 다시금 받아들이게 하고 싶었던 것이다. 만일 이 계획이 성공한다면 그는 그레고리우스가 추구한 교황 군주국가 정책에 커다란 승리를 가져올 수 있었다.

두번째 동기는 교황 최대의 적인 독일 황제를 곤경에 빠뜨리기 위한 것이었다. 1095년에 이르러 하인리히4세는 군사적으로 지극히 강대해져서 우르바누스는 그에게 쫓겨 이탈리아를 떠나 프랑스로 도망을 가지 않으면 안 될 정도였다. 그러므로 교황은 독일인을 제외한 모든 서유럽인에게 십자군을 호소함으로써 황제가 편협하고도 비기독교적인 박해자임을 알리고, 아울러 서유럽의 영적 지도자로서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고 싶었던 것이다.(십자군의 지휘관은 모두 프랑스 귀족들이었다)

셋째로 우르바누스는 대규모 병력을 외부로 방출시킴으로써 유럽의 대내적 평화를 이룰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이미 10세기 말부터 프랑스 교회는 봉건기사들의 전투를 줄이기 위해 "평화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즉 "신의 평화"라 하여 비전투원에 대한 공격을 금지했고, "신의 휴전"이라 하여 특정한 축일에 전투행위를 금지했던 것이다. 우르바누스는 제1차 십자군 소집 직전에 이 평화운동을 교황령에 의해 승인한다고 처음으로 발표했고 이를 확대시킬 것을 공표했다. 분명히 십자군은 평화운동과 연관되어 있었다. 사실 우르바누스는 거칠기 짝이 없는 전사들에게, 정말로 싸우기를 원한다면 해외로 나가 기독교의 대의를 위해 십자군으로서 정당하게 싸울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끝으로 예루살렘 성지의 회복이라는 목표 그 자체가 우르바누스에게 중요한 동기가 되었음이 틀림없다. 예루살렘은 지구의 중심이자 기독교의 가장 거룩한 성지였다. 예루살렘 순례는 결코 방해받아서는 아니 되었고, 예루살렘에 대한 지배권은 기독교인이 직접 가져야만 했다. "세상의 올바른 질서"는 바로 그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제1차 십자군의 경제·정치적 원인

비잔틴 황제의 요청을 받으지 8개월 후인 1095년 11월에 우르바누스가 프랑스의 클레르몽시에서 종교회의를 개최하고 십자군을 요청했을 때, 그는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열렬한 반응을 얻게 되었다. 많은 군중은 누가 시킨 것도 아니건만 "신께서 원하신다"며 너무 열렬히 외쳐되는 바람에 교황이 연설을 중단할 수 밖에 없을 정도였다. 그러고는 바로 수많은 사람들이 동방으로 향했다. 대략 10만 명의 인원이 십자군 주력부대에 가담했는데, 그것은 당시로서는 엄청난 숫자였다. 그러므로 우르바누스의 호소가 어떻게 그토록 성공적인 반응을 얻을 수 있었는가 하는 의문이 제기된다. 여기에는 경제·정치적 이유가 있었다.

십자군에 가담한 빈민중 많은 사람들은 1095년 당시 인구가 과밀했던 지역의 출신자들이었다. 이들 십자군은 인구가 조밀한 유럽보다는 동방에서 더 나은 생활을 누릴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다. 마찬가지로 상당수 귀족들은 정치가 점차 안정되고 장자 상속제가 널리 수용되면서 압박을 느끼고 있었다. 그때까지 차남 이하의 귀족 자제는 서유럽 내에서의 국지전쟁을 통해 재산을 모으거나, 최소한 작은 땅이나마 상속받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이들 형제들의 수가 늘어났고, 수명도길어졌으며, 전쟁은 점차 줄어들었고, 장자만이 부친의 토지를 상속받게 되었다. 분명 동방으로 떠난다는 것은 고향에서 따분하게 지내던 귀족들에게 매혹적인 일이었다.

종교적 원인 :

무장 순례단 그러나 제1차 십자군의 가장 중요한 동기는 역시 종교적인 것이었다. 아무도 순수한 이해타산에 의해 십자군에 가담할 수는 없었다. 당시로서는 누구도 새로운 땅을 얻을 수 있으리라고 확실하게 예측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아무리 합리적으로 따져보아도 십자군 참여는 잘해야 소득없는 귀환이요, 대개는 무슬림의 손에 죽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십자군 참여는 기독교인의 영혼에 커다란 위안을 주었다.

여러 세기에 걸쳐 순례는 기독교인들 사이에 가장 널리 행해지던 고해방식이었다. 특히 예루살렘 순례는 순례 가운데서도 가장 성스럽고 효과있는 것으로 손꼽히고 있었다. 하물며 기독교 최고의 성지를 이교도의 수중에서 되찾기 위한 예루살렘 무장 순례는 단연 최대의 영적보상을 가져다주는 일이었다. 이 점을 분명히 하기 위해 클레르몽에서 우르바누스2세는 십자군 참가자 전원에게 교회에서 부과하는 다른 모든 고해를 면제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교황의 약속이 있은 후로 십자군 설교자들은 우르바누스의 재가도 받지 않은 채 더욱 큰 약속을 하고 말았다. 대사(大赦)를 약속했던 것이다. 이것은 십자군 참가자 전원에게는 내세에서 연옥의 형벌이 완전히 면제되며, 십자군 참가 도중 사망한 자의 영혼은 곧장 천국으로 갈 수 있다는 약속이었다. 대사는 실로 파격적인 은사였으며 그것을 얻고자 군중이 쇄도했다. 일단 군중이 한자리에 모이게 되자, 그들은 설교자의 언변에 고부되어 종교적 열광에 빠진 채 집단적 히스테리 증상까지 보이게 되었다. 그들은 자신들이야말로 불신자들의 세상을 일소하기 위해 선택받았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로 말미암은 가공할 결과로서 그들은 동방으로 원정을 떠나기도 전에 유럽의 유대인들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서유럽 반유대주의의 효시였다.

십자군의 만행

크나큰 역경에도 불구하고 제1차 십자군은 완벽한 성공이었다. 1098년에 십자군은 안티오크를 함락했고, 그와 더불어 시리아의 대부분을 정복했다. 1099년에 그들은 예루살렘을 탈환했다. 그들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때마침 무슬림 세력이 내부적으로 분열되어 있었던데다가, 무슬림들이 기괴하고 야만적인 서유럽인의 모습을 처음 대하고는 크게 놀랐기 때문이다. 성지에서 십자군은 처음부터 제국주의자처럼 행동했다. 새로운 영토를 정복하자마자 그들은 이를 자기네의 소유로 삼고 4개의 공국으로 분할했다. 그들은 또한 난폭한 행동을 자행했다. 안티오크를 점령했을 때 그들은 사로잡은투르크인들을 포로로 삼지 않고 닥치는대로 학살했다. 예루살렘을 정복했을 때에도 그들은 그리스도의 평화주의적인 가르침을 묵살하고, 이 도시에 거주하던 모든 무스림들을 무자비하게 살육했다. 몇몇 십자군들은 그들의 고향에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은 자랑을 늘어 놓았다. "솔로몬 궁의 회랑과 성전에서 우리 군대는 말을 타고 달렸는데, 말의 무릎까지 사라센인의 피로 젖었다." 성지에 머무른 십자군들은 점차 유순해지고 관대해졌다. 그러나 서유럽으로부터 새롭게 밀어닥치는 무장 순례단은 계속해서 야만스런 행동을 자행했다. 더욱이 정착한 십자군들은 지방 주민들과 완전히 융합하지 못한채 이슬람 세계의 한 복판에서 별개의 착취적인 외국인으로 남아 있었다.

그 후의 십자군 운동 실패 :

프리드리히2세의 외교정책 성공 십자군이 건설한 기독교 국가들은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해안선에 위치한 인구가 희박하고 좁다란 지역이었으므로 그 지역이 이슬람 세력에 의해 탈환되는 것은 시간 문제일 뿐이었다. 1144년에 이르러 최북단에 위치한 공국이 함락되었다. 그러자 프랑스 왕과 독일 황제의 지휘하에 동방으로 온 제2차 십자군의 기독교 전사들은 실지를 회복하고자 했으나, 그들은 내부적으로 너무나 분열되어 있어서 도저히 승리를 거둘 수 없었다. 그후 얼마 되지 않아 그 지역의 이슬람 영토는 술탄 살라딘에 의해 통합되었으며, 그는 1187년 예루살렘을 함락했다. 다시 한번 서유럽은 손실을 복구하고자 했으니 제3차 십자군이 그것이다. 제3차 십자군은 독일 황제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 프랑스의 존엄왕 필립, 잉글랜드의 사자왕 리차드에 의해 주도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대군을 거느리고도 승리를 거둘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도 경쟁관계에 있던 국왕들 사이에 다시 내분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이노켄티우스가 교황이 되었을 때 그의 야심은 예루살렘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그는 이를 위해 제4차 십자군을 소집했다. 그러나 그 십자군은 통합된 기독교 세계의 관점에서 본다면 미증유의 재난이었다. 교황은 십자군의 진로를 통제할 수 없었고, 십자군은 1204년 성지로 진군하는 대신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행동은 결과적으로 비잔틴 제국의 멸망을 재촉했으며, 오스만투르크족에게 동유럽으로의 진입로를 열어주는 결과를 가져다 주었다.

이노켄티우스가 1215년 제4차 라테란 종교회의를 소집한 것은 부분적으로 교황이 직접 지휘할 또 한 차례의 십자군을 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제5차 십자군은 무슬림 세력의 본거지를 무찌르기 위해 이집트를 향해 바다로부터 출발했다. 그러나 위풍당당한 출진에도 불구하고 이 역시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오직 1228년에서 1229년까지 황제 프리드리히2세에 의해 지휘된 제6차 십자군만이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이 성공은 군사적 원정에 힘입은 것이 아니었다. 아랍어를 구사할 줄 알아 이집트의 술탄과 쉽사리 교신할 수 있었던 프리드리히는 무력으로 싸우는 대신 교묘한 협상을 통해 예루살렘 및 예루살렘으로 가는 좁은 접근 통로를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전쟁으로 실패한 것을 외교로써 이루어낸 셈이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그들이 획득한 것을 지켜내지 못했고, 결국 예루살렘은 1244년 다시 함락되어 1917년에 이르도록 유럽인에 의해 탈한되지 못했다. 오늘날에는 팔레스타인 에커시 부근의 작은 영토만이 기독교 국가로 남아잇을 뿐이다.

정치적 이익을 위해 십자군의 이상을 희생시킨 교황들 프리드리히2세가 예루살렘을 얻기 위해 협상을 벌이고 있을 당시 그는 교황으로부터 파문당해 있는 상태였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에 입성했을 때에도 그는 성묘교회(Church of the Holy Sepulcher)에서 자기 손으로 직접 예루살렘 왕의 왕관을 써야만 했다. 이것은 당시의 교황이 성지 회복보다는 유럽에서 정치적 목적을 추구하는데 더욱 골몰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제1차 십자군의 승리는 교황 군주국가의 위신과 세력을 크게 증대시켰다. 그러나 그후의 잇따른 실패로 말미암아 대규모 사업을 위해 서유럽을 결속시킬 수 있는 교황의 능력에 점차 의문이 제기되었다. 1208년 이노켄티우스에 의해 소집된 알비주아 십자군은 신자가 유럽 내의 십자군에 참여하기만 해도 훨씬 더 멀고 위험한 동방에서의 십자군 참여와 동일한 영적보상을 받을 수 있다는 중대한 선례를 확립했다. 그러나 알비주아 십자군은 교황의 종교적 이미지에 손상을 주지는 않았다. 알비주아 이단은 교회에 대한 명백한 위협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황이 프리드리히2세와 그의 후계자들에 대한 십자군에 착수하게 되면서 십자군의 이상은 정치적 이해관계에 철저히 희생되고 말았다.

십자군의 쇠퇴와 교황권의 쇠퇴

십자운 운동의 쇠퇴와 교황권의 쇠퇴가 가장 밀접하게 상호 연관된 것은 바로 그 무렵이었다. 프리드리히와 그 후계자들에 대한 십자군에서, 그리고 그 후에는 아라곤 왕에 대한 십자군에서, 교황은 그때까지 이슬람에 맞서 싸운 모든 십자군에게 공식적으로 제공했던 것과 동일한 대사(大赦)를 허용했다. 사태를 더욱 악화시켰던 것은, 교황은 원정을 떠나는 십자군을 무장시키기 위해 많은 돈을 기부한 사람에게도 똑같은 사면을 허용했다. 결국 이것은 사면의 남발을 초래했다. 1291년 성지에 남은 기독교인의 마지막 전초 기지가 서유럽으로부터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한 채 함락되고 말았다. 그때 교황은 아라곤에서 실패한 십자군을 구출하려던 중이었다. 1300년에 보니파키우스 8세가 주재한 성년(聖年) 행사는 로마를 순례하는 모든 이에게 대사를 허용했는데, 그것은 향후 성지가 아닌 영원의 도시가 기독교 순례의 가장 중요한 목적지가 되어야 할 것임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보니파키우스는 1년 후 권좌에서 밀려났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즉 십자군의 남용과 실패로 말미암아 교황의 위신이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실추되었던 것이다.

십자군의 긍정적 결과

십자군의 이상은 한편으로는 교황 군주 국가의 건설에 기여한 바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파멸에도 기여했다. 그러면 그때에 십자군의 실질적인 의의는 무었이었는가? 긍정적인 측면에서 볼 때, 제1차 십자군의 믿을 수 없을 정도의 놀라운 성공은 중세 서유럽인의 자신감을 고취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수백 년 동안 서유럽은 이슬람 세력에 밀려 수세에 놓여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서유럽 군대가 이슬람 세력의 핵심 지역으로 진군해 들어가 마음대로 약탈·유린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극적인 승리로 말미암아 12세기의 유럽인 사이에는 낙관주의가 팽배해졌다. 서유럽의 기독교인들은 신이 그들의 편이라 믿고, 그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다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십자군은 또한 서유럽인의 시야를 넓혀 주었다. 성지의 유럽인들 가운데 아랍어를 배우거나 이슬람 사상, 또는 제도로부터 무언가 얻어내기 위해 힘쓴 사람은 거의 없었다. 기독교인과 무슬림 사이의 문화교류가 가장 활발히 이루어졌던 곳은 에스파니아와 시칠리아였다. 그러나 이슬람국을 통과하여 먼 지역을 여행한 십자군들은 어딘가 좀더 세련되지 않을 수 없었으며 십자군 운동은 특히 그때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사치품에 대한 관심을 자극했으며, 문학과 우화의 풍부한 소재를 제공했던 것이다.

무역과 세금, 경제적 관점에서 볼 때 제1차 십자군의 성공은 서유럽인에게 지중해를 새로운 무역 활동의 무대로 제공했다. 특히 베네치아 및 제노바 등 이탈리아 도시들이 이 해역의 상권을 제패하기 시작했고, 그로써 서유럽 경제의 번영에도 기여했다. 원격지로 대금을 송금할 필요성으로 인해 초보적 금융 기법의 발달 또한 자극했다. 정치적으로 서유럽 군주 국가들은 십자군에 필요한 자금 조달 명목으로 성직자에게 세금을 부과한 선례로 말미암아 직접적인 혜택을 받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국가에 의한 세금징수를 다양한 형태로 발달시켰다. 더욱이 자금과 식량 조달에 의해 국왕의 십자군을 돕고자 국가를 조직화하다 보니, 신흥 국민 국가들의 효율적 행정 제도 발달에도 중요한 자극제가 되었다.

부정적 결과

그러나 십자군에는 부정적 측면 또한 있었다. 유럽 내에서 유대인을, 그리고 유럽 밖에서 무슬림을 무자비하게 학살한 십자군의 만행에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 십자군은 서유럽과 비잔틴의 관계 단절을 더욱 가속화했고, 비잔틴 제국의 멸망과 잇따른 재난에 근본적인 영향을 미쳤다. 아울러 성지에서의 서유럽인들의 식민주의는 그후 근대에까지 이어지게 된 서유럽 식민주의의 기나긴 역사의 출발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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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 유태인의 격언

 

두툼한 돈지갑이 반드시 좋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빈지갑이 좋은 것도 아니다.

돈은 벌기는 쉽다. 하지만 돈을 쓰기는 더 어렵다.

돈은 기회를 만들어 준다.

가난하기 때문에 바르고, 부자이기 때문에 옳지 않다고 할 수는 없다.

돈이란 악함도 저주도 아니며, 인간을 축복하는 것이다.

돈이란 결코 모든 것을 좋게 할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모든 것을 썩게 하지도 않는다.

돈이란 인정없는 주인이기도 하지만, 반면 유익한 심부름 꾼일 수도 있다.

돌처럼 굳어진 마음은 황금망치로만 풀 수 있다.

자기가 갖고 있는 것을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파는 것은 상술이 아니다.

부자를 칭송하는 사람은 그 부자보다는 돈을 칭송하는 것이다.

필요한 돈을 빌리는 것은 마치 가려운 곳을 긁는 것과 같다.

많은 것을 가진 부자에게는 자식이 없고 상속인만이 있다.

돈이란 선인에게는 좋은것을, 악인에게는 나쁜것을 안겨준다.

재물이 많으면 그만큼 걱정거리도 늘어나지만, 재물이 전혀없으면 걱정거리가 더 많다.

돈이란, 옷이 우리에게 베푸는 역할 밖에는 해 주지 못한다.

가난함은 수치가 아니지만 그렇다고 명예로움도 아니다.

가난한 사람에게서 돈을 차용하는 것은 마치 추녀에게 키스하는것과 같다.

매춘부의 얼굴에 침을 뱉으면 그년는 비가 온다고 말한다.

남에게 돈을 빌려줄 때에는 증인을 세우고, 적선할 때는 아무도 보지 않는 데서 하라.

금전과 속담

 

2. 마음의 양식

 

하늘과 땅을 웃기려면 먼저 고아를 웃겨라. 고아가 웃으면 하늘과 땅도 웃을 것이다.

이보다 더한 불행은 얼마든지 있다고 생각하라

일생동안 울고 허송해서도 안 되고, 웃고만 보내서도 안된다.

이미 끝나버린 일을 후회하기 보다는 하고 싶었던 일을 하지 못한것을 후회하라.

하나님은 밝은 사람을 축복해 준다. 낙관하는 마음은 자기 뿐만 아니라 남들까지도 밝게 해 준다.

행복을 얻으려면 만족에서 멀어져야 한다.

어차피 같은 햄을 먹는 것이라면 즐거운 마음으로 먹어라.

남을 행복하게 해 주는 것은 마치 향수를 뿌리는 일과도 같다.

남의 강요에 의해 베푼 자선은 스스로 한 자선의 절반의 가치밖에 없다.

모르는 사람에게 베푸는 친절은 천사에게 베푸는 친절과 같다.

가장 훌륭한 지혜는 친절함과 겸허함이다.

만약 손님이 기침을 하면 수저를 내 놓아라.

자신의 결점을 찾아내는데 힘쓰는 사람은 남의 결점을 찾지않으며, 남의 결점만 찾아내는 사람은 자기 결점을 찾지못한다.

강철 보다는 강한 반면 파리보다도 약한 것이 인간이다.

마음을 가는 것은 두뇌를 가는 것보다 더 소중하다.

무거운 포도송이일수록 아래로 늘어진다.

신의 천지창조의 마지막 날 인간을 만드신 것은 인간의 오만함을 없애기 위해서였다.

몸을 닦는 것은 비누고, 마음을 닦아내는 것은 눈물이다.

사람들은 길에서 넘어지면 먼저 돌을 탓한다.

이미 행해진 행동은 변하지 않고 남게 되지만, 그러나 인간은 날마다 변해 간다.

신은 인간의 마음을 먼저 보고, 그 다음 그의 두뇌를 본다.

내일 일어날 일을 미리 걱정하지 말라. 오늘 현재의 앞일도 모르면서...

매일매일 자기 자신을 죽여가는 자는 이승도 저승도 갈 곳이 없다.

행복에서 불행으로 바뀌는 것은 순간적인 일이나, 반대로 불행을 행복으로 가꾸는 데는 오랸 시간이 필요하다.

신은 바르게 사는 자를 시험해 본다.

마음의 양식에 관한 격언

3. 교육의 길

 

이상이 없는 교육은 미래가 없는 현재와 같다.

금전의 차용은 거절해도 좋으나 책을 빌려 달랠 때 거절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다.

책으로부터 지식을 배우고, 인생에서 지혜를 배운다.

많은 사람들은 생각하는 것을 피하고 도망하기 위해 책을 읽는다.

지식이란 흐르는 물과 같다.

기도 시간은 짧게 하고, 학문에는 오랜 시간을 보내라.

예루살렘의 멸망은 잘못된 교육 때문이다.

살아있는 사람에게서 빼앗을 수 없는 것은 지식이다.

신은 인간이 만든 마을과 탑을 보기 위해 왔다.

자기 혀한테 '모른다'는 말을 열심히 가르쳐라.

옳은 것을 배워 나는 것보다 옳은 일을 몸소 행하는 것이 낫다.

자기 결점을 쉽게 고치지 못하더라도 자기 향상을 위한 노력은 계속하여야 한다.

생물 가운데 웃는 것은 인간뿐이다. 그 중에서도 영리한 사람이 웃는다.

세 종류의 어리석은 사람이 있다.

적당히 어리석은 자는 완전히 어리석은 자보다 더 어리석다.

산양이 수염이 있다 하여 랍비가 될 수는 없다.

당나귀가 예루살렘에 가도 역시 당나귀인 것이다.

자녀를 가르치는 최선의 교육은 자기 스스로 모범을 보이는 것이다.

아들에게 근면함을 가르치지 않는 부모는 아들에게 절도를 가르치는 거와 다를 게 없다.

신은 항상 어느곳에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신은 어머니를 창조하였다.

사람은 누구나 어른이 되지 않는다. 다만 아이로서 나이를 한살씩 먹을 뿐이다.

어린 아이일 때는 두통을 안겨 주지만, 크면 심통을 안겨 준다.

어리석은 자의 노년은 겨울이지만, 현자의 노년은 황금기이다.

노인을 공경하지 않는 젊은이의 노후는 결코 행복할 수 없다.

교육에 관한 격언

4. 남녀간의 교제

 

사랑이 아무리 멋저도 테니스에는 무용지물이다.

신은 새 부부가 생길 때마다 새로운 말을 해 준다.

금과 은은 불에 달궈진 다음에야 빛을 낸다.

뜨거운 정열로 결합하지만, 정열이란 결혼만큼 오래 가지 않는다.

결혼식의 연주 음악은 군악대의 음악처럼 활기차다.

정열은 불이다. 그래서 없어서는 안 되지만, 또 그만큼 위험하다.

사람은 쨈과 같이 달지만, 빵이 없으면 살 수 없다.

질투는 천 개의 눈을 가지고 있지만, 그 가운데 한개의 눈도 올바로 보이지 않는다.

보드라운 흙으로 빚은 남자를 기쁘게 하는 것이, 딱딱한 뼈로 빚은 여자를 기쁘게 하는 것보다 쉽다.

결혼이란 굴레는 무척 무겁다. 부부뿐만 아니라 자식 까지도 함께 운반해야 하니까.

좋은 말에 채찍이 있고, 현자에게 충고가 있다.

자식이 결혼할 때는 신부에게 혼인 증서를 주고, 어머니에게는 이연장을 주어야만 한다.

결혼할 때는 이혼까지도 예상해야 한다.

초혼은 하늘에 의해서, 재혼은 인간에 의해 맺어진다.

결혼을 위해서는 걷고, 이혼을 위해서는 달려라.

섹스는 냇물과 같다.

이상적인 남자는 남자의 강인함과 여자의 부드러움을 함께 갖고 있다.

남자는 두 볼 사이와 두 다리 사이에서 명성이 결정된다.

여자와 싸우는 것은 우산을 받쳐들고 샤워하는 것과 같다.

남녀 교제에 관한 격언

5. 입과 혀의 재앙

 

입을 다물 줄 모르는 사람은 대문이 닫히지 않는 짐과 같다.

새장으로부터 도망친 새는 붙잡을 수가 있으나, 입에서 나간 말은 붙잡을 수가 없다.

당나귀는 긴 귀로써 알아보고, 어리석은 사람은 긴 혀로써 알아본다.

당신의 혀에는 뼈가 없다는 것을 항상 생각하라.

입보다 귀를 상석에 앉혀라

어리석은 수다는 초상집에 즐거운 음악이 울리는 것과 같다.

인간이 말을 하는 것은 태어나면서 곧 배우나, 입을 다무는 것은 어지간해서 배우기 힘들다.

겉치레 인사는 고양이처럼 핥는다.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진실 중에도 말해서는 안된는 것이 있다.

거짓말 쟁이는 뛰어난 기억력을 가져야 한다.

가장 큰 고통은 남에게 말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누에이다. 그들은 항상 입을 놀리고 있다.

당신의 친구는 친구를 가졌고...

물고기는 언제나 입으로 낚인다. 인간도 역시 입 때문에 걸려든다.

입과 혀에 대한 격언

6. 교제하는 방법

 

아무리 친한 벗이라도 너무 가까이 하지 말라

어떤 사람이고 가까와지면 작아지게 된다.

애매한 친구보다는 차라리 분명한 적이 낫다.

술집 여자와 키스를 하였거든 꼭 당신의 이빨을 세어 보아라.

술집에 간다고 하여 선인이 악하게 될 수는 없다.

늙은이가 젊은 아내를 맞으면, 늙은이는 젊어지고 아내는 늙는다.

꿀을 치다 보면 조금은 꿀맛을 볼 수가 있다.

향수 가게에 가면 향수 냄새가 옮는다.

손님과 생선은 사흘만 지나면 악취가 난다.

소문은 가장 좋은 소개장이다.

밀가루 장수와 굴뚝 청소부가 싸움을 하면...

서로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면 화해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낯선 사람의 백 마디의 모략보다도 친구 한 마디의 말이 깊은 상처를 남긴다.

자기 자신에 대해 웃을 수 있는 사람은 남의 웃음을 사지 않는다.

신 앞에서 울고, 사람 앞에서는 웃어라.

표정은 분명히 밀고자다.

음식은 냄비 속에서 만들어지나 , 사람은 접시를 칭찬한다.

투박한 항아리 속에도 귀한 술이 들어 있다.

지성만으로 사람들에게 존경받으려 하는 것은...

교제에 관한 격언

7. 삶의 지혜

 

꽃양배추에 사는 벌레는 꽃양뱌추를 자기 세상으로 생각한다.

인간의 탄생과 죽음은 책의 앞면과 뒷면같은 것이다.

길을 열 번 물어보는 것이 한 번 길을 헤매는 것보다 낫다.

휴일이 사람에게 주어진 것이지, 사람이 휴일에 주어진 것은 아니다.

단번에 바다를 만들려고 해서는 안된다.

0에서 1까지의 거리가 1에서 100까지의 거리보다 길다.

매일을 마지막 날이라고 생각하라.

오래 앉아 있으면 치질이 걸리고...

유태 민족이 안식일을 지켜온 것이라기보다는 안식일이 유태인을 지켜온 것이다.

이상 주의란...

우물에 침을 뱉는 자는 언젠가 반드시 그 물을 마시게 된다.

기적을 바라는 것은 좋지만 그 기적에 의지해서는 안된다.

행운에 모든 것을 맡긴 채 의지해서는 안된다.

운 없는 사람은 높은 곳에서 떨어져 등을 쳐도 코가 부러진다.

선행에 대한 가장 큰 댓가는 무엇인가?

선보다 악이 빨리 번진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사람들은 돈을 시간보다 소중하게 여기는데...

정원을 보면 그 집의 정원사를 알 수 있다.

악한 사람은 눈과 같아서 처음 만났을 때는...

위대한 학자가 창시자가 될 수 없듯이...

아무리 길고 훌륭한 쇠사슬이라도 고리 하나가 망가지면 못쓴다.

사람은 자기 고향에서는...

술이 들어가면 비밀은 밖으로 나온다.

식사는 자기의 기호에 맞추고 옷차림은 사회의 풍조를 따르라

자물쇠는 정직한 사람을 위해서 존재한다.

아무리 비싼 시계라도 바늘이 가르키는 한...

따분한 사람이 방을 나가면 누군가 방에 들어온 듯한 기분이 든다.

성공의 절반은 인내심이다.

성공의 문을 열려면 밀거나 당기거나 해야 한다.

삶의 지혜와 격언

돈의 가치 / 마음의 양식 / 교육의 길 / 남녀간의 교재 / 입과 혀의 재앙 / 교재 하는 방법 / 삶의 지혜

유태인의 격언

돈의 가치 / 마음의 양식 / 교육의 길 / 남녀간의 교재 / 입과 혀의 재앙 / 교재 하는 방법 / 삶의 지혜1. 돈의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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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 600만명이 살해될 때 하나님은 어디에 계셨나?

 

 

본문말씀에 " 구원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진실로 주는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 이시니이다" 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답변입니다.

해 아래의 부조리한 현실은 하나님이 부재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 숨어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 관한 형상을 만들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우상과 같이 인간의 지식과 기대와 형상에 제한되지 않으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지 나뭇조각으로 조각된 신상이 아닙니다.

유한한 형상이 무한한 하나님을 담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찍이 종교개혁가들은 '유한은 무한을 파악할 수 없다" 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계시하면서도 역설적으로 스스로 숨어 계십니다. 모세에게 하나님은 자신을 나타내셨지만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나타나셨지 가시적으로 나타나지는 않았습니다. 광야에서 동행한 구름기둥과 불기둥도 하나님의 계시의 수단이었을 뿐입니다. 시내산에서 여호와께서 임재하실 때에 "우뢰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이 산 위에 있고 나팔소리가 심히 크니 진중 모든 백성이 다 떨더라. 시내산에 연기가 자욱하니 여호와께서 불 가운데서 거기 강림하심이라. 온 산이 크게 진동했다고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에게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말게 하소서 우리가 죽을까 하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백성은 멀리 섰고 모세는 하나님의 계신 암흑으로 가까이 가니라"(20:21). 하나님의 계신 암흑은 바로 죄인인 인간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스스로 숨어 계신 하나님 자신을 말합니다.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도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친히 나를 위하여 증거 하셨느니라. 너희는 아무 때에도 그 음성을 듣지 못하였고 그 형용도 보지 못했다고 하셨습니다.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자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능력을 돌릴지어다" 중세나 동방교회의 삼위일체 성화를 보면 특이한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은 주위에서부터 가운데로 가면 갈수록 점차 어둡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출애굽기의 말씀처럼 하나님의 계신 암흑으로 하나님의 범접할 수 없는 신비를 묘사한 것입니다. 일찍이 종교개혁가 루터는 중세 카톨릭 신학을 영광의 신학이라고 비판하면서 십자가신학을 부르 짖었습니다. 그는 중세 카톨릭교회가 하나님을 창조세계에 나타나는 아름다운 하나님의 영광, 권능. 지혜, 선함만을 말함으로써 십자가의 고통과 모욕 속에 숨어 계신 하나님을 보지 못한다고 비판했습니다. 그도 물론 창조세계에 보여지는 하나님의 영광을 부인하지는 않았 습니다. 그러나 그는 고린도후서 46"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는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가장 찬란하게 빛난 곳은 바로 십자가에 달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슬픔의 얼굴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자연적 이성이 신적인 것으로 인식할 수 있는 영광과 권능이 아니라, 영광의 신성의 정반대인 인간예수의 모욕, 가난, 고통, 번뇌, 어리석음, 약함 그리고 죽음 속에서 자신의 영광을 계시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루터는 역설적인 표현으로 하나님은 계시 속에서도 스스로 숨어 계신 하나님이시라 했습니다. 죄인인 인간은 영적인 소경인고로 직접적으로 하나님을 인식할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은 그의 지혜로 하나님을 인식하지 못했고, 그렇기에 하나님의 영원한 능력과 신성은 이 세상에서는 은폐되어 있습니다. 십자가는 바로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권능은 직접적으로가 아니라 역설적으로 곧 무능과 비천함 속에서 계시된다. 이미 메시아가 이사야 53장에 예언처럼 그 얼굴이 타인보다 상하였고 그 모양이 인생보다 상하였으므로 무리가 그를 보고 놀랐고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어서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고,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고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고 사람들이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는 그런 모습으로 오실 것이라 예언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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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 묻지 않았던 사울

 

 사무엘하는 사무엘상의 문맥 속에서 읽어야 하고, 또 사무엘하 본문을 묵상함에 있어 왕정시대의 문을 연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을 생각하지 않고는 풍성한 묵상과 바른 이해가 쉽지 않다. 하지만 이 짧은 글에서 사울 왕에 대해 다 살필 수 없기 때문에 사전적인 연구는 지양하고, 사무엘하 본문을 바르게 이해하고 묵상하는 데 유익하다고 생각하는 각도에서 사울을 다루려고 한다.

 

사무엘하에 언급된 사울에 관련된 직접적인 기록은 그의 죽음에 대한 것이다(삼하 1장). 그리고 이 죽음에 대한 기록만큼이나 중요하게 언급된 내용은 그의 집안 이야기다. 예컨대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에 대한 본문이다. 이스보셋은 사울의 군사령관 아브넬의 도움을 받아 왕위에 오르고, 2년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린다(삼하 2:8~10). 이스라엘이 본격적으로 분열되기 이전에 벌써 한 나라 안에 두 왕이 세워진 것이다.

 

그러나 본문은 “사울의 집과 다윗의 집 사이에 전쟁이 오래매 다윗은 점점 강하여 가고 사울의 집은 점점 약하여 가니라”(삼하 3:1, 참조 3:6, 10, 5:10)라고 말한다. 결국 본문은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이 아닌 다윗의 왕권이 확립되는 것을 긴 과정으로 설명한다.

 

다윗은 이미 사무엘상 16장 13절에서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지만 그가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공적으로 왕으로 세워지는 것은 사무엘하 5장 3절에 이르러서야 이루어진다.

 

그리고 계속해서 본문은 다윗이 언약궤를 옮긴 다음(삼하 6장) 7장에 나단이 등장하면서 사실상 다윗의 왕권이 완성되는 것을 보여 준다. 특히 나단 선지자가 대언한 여호와의 말씀(4~17절)은 다윗 왕권의 확립을 언급하는 것을 훨씬 넘어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설명해 주는 매우 중요한 계시다.

 

본문은 왜 이미 죽은 사울이라는 인물에 대비해 다윗을 설명하려고 하는 것인가? 이스라엘에서 왕의 등장은 백성들의 요구로 촉발되었으며, 거기에 실제로 불을 붙인 것은 블레셋의 침략이었다(삼상 8:5, 9:16~17). 그런데 이 블레셋의 공격을 막아내는 인물은 사울이 아니라 다윗이었다(삼상 17장). 그리고 다윗은 마침내 사무엘하 5장에서 왕으로 세워지고 블레셋을 잠재운다. 이 과정에서 본문이 그리는 사울과 대비되는 다윗의 특징적인 모습은 ‘여호와께 묻는 것’(삼하 5:19, 23)이다.

 

반면 본문을 따라가면서 발견하게 되는 사울의 가장 특징적인 모습은(특별히 본문이 다윗과 대조시켜 기록하고 있다는 점에서) ‘하나님께 묻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곧 불순종을 뜻한다(삼상 15:22). 순종이란 하나님에게 물어보는 것이다. 여기서 물어본다는 것은 삶의 주도권을 자신에게 두지 않고, 물어보는 대상에게 둔다는 의미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을 떠올리면 마음이 애잔해진다. 그가 자신에 대해 처음으로 언급한 자기 이해는 “나는 이스라엘 지파의 가장 작은 지파 베냐민 사람이 아니니이까 또 나의 가족은 베냐민 지파 모든 가족 중에 가장 미약하지 아니하니이까”(삼상 9:21) 하는 것이었다. 또한 백성 중에서 다른 사람보다 어깨 위만큼 컸고, 모든 백성 중에 짝할 이가 없던(삼상 10:23~24) 그가 백성 앞에서 왕으로 세워질 때 ‘짐 보따리들 사이에 숨어 있던’(삼상 10:22) 모습은 그가 겸손한 자였음을 분명히 말해 준다.

 

사울에게는 하나님에 대한 이해와 체험도 결코 적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의 영에 크게 감동을 받은 영적 체험도 있었고(삼상 11:6), 다윗을 죽이려고 하는 자신의 행동이 잘못이라는 것을 알고 회개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삼상 24:22, 26:21). 또한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았던(삼상 24:21, 28:10) 율법의 사람, 이스라엘 왕이었다.

 

하지만 사울을 통해 우리는 과거의 성공했던 경험이 우리의 신앙을 이끌어 가는 것이 아니고, 또한 지난 시간 엄청난 영적 체험들이 지금의 바른 신앙을 보장해 주는 것도 아님을 배우게 된다. 나아가 우리 삶의 주권을 진정으로 하나님께 맡긴 자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재확인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성경 본문을 붙들고 읽고 묵상하는 것은 순종의 첫 걸음이요, 가장 안전한 걸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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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쓰는 은사를 지닌 선지자, 나훔

 

나훔, 그는 단 세 장, 마흔 일곱 절로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하고 사라졌다. 엘고스 사람이란 것 외에는 그에 관한 개인 신상도 밝혀지지 않았다. 비록 짧은 말씀을 기록해 전한 인물이지만 그는 자신이 활동하던 당시 최대의 제국 앗수르의 멸망을 거침없이 선포한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기록 목적은 하나님께서 모든 민족과 국가의 주가 되심을 밝히고, 앗수르로 표현된 불의한 국가와 백성은 반드시 심판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한 것이었다.

 

먼저, 나훔이 상대해야 했던 대상은 니느웨 곧 앗수르였다는 것을 생각해 보자. 본문에서 발견하는 단서들로 추정해볼 때, 나훔이 활동한 시대는 아마도 주전 664년(3:8의 노아몬이 멸망한 시기)에서 주전 612년(니느웨 멸망에 대한 예언이 있는데, 그것은 주전 612년에 일어남)일 것이다.

 

이 시기에 나훔이 상대했던 니느웨(앗수르)의 가장 큰 특징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잔혹성이다. 고고학의 도움으로 확인할 수 있는 앗수르의 모습은 잔혹함의 대명사와도 같다. 또 한 가지 특징은 당시 최강의 제국이었다는 점이다. 이미 주전 721년에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키고 사마리아를 초토화시킴으로써 그 힘과 잔혹함을 증명해 낸 초대형 나라가 앗수르지만, 그러한 앗수르를 향해 나훔은 하나님의 소명 앞에 순종해 강력한 심판의 경고를 거침없이 쏟아냈다.

 

오늘날 우리에게 물리적인 전쟁은 없을지라도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나훔과 같은 영적 거장이 되어야 할 사명에 초청받고 있다. 이 시대가 참으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상대해야 할 거대한 대상이 아닌가! 나훔이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받아 담대히 말씀을 선포한 것처럼 우리 모두 더욱 말씀에 붙들리고 말씀을 보여 주어야 할 도전을 받는다.

 

한편, 선지자의 기본적인 임무는 하나님께로부터 계시를 받아 그것을 들어야 할 대상에게 하나님을 대신해 전하는 것이다.

 

하지만 나훔은 조금 독특한 모습을 보이는데, 그것은 바로 첫 구절에 나오는 “나훔의 묵시의 글이라”(1:1)는 말씀이다. 이렇게 시작하는 선지서는 나훔밖에 없다. 선지자들이 전하는 말씀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라는 점에서는 누구도 예외가 없지만 나훔은 특이하게도 이렇게 ‘글’이라고 밝힌다. 이에 어울리듯 성경학자들은 나훔이 사용하는 비유의 표현들이 매우 탁월하다고 평가한다. 아마 나훔은 글을 쓰는 은사가 남달랐던 모양이다.

 

 

나훔이라는 인물을 연구하면서 지금 시대와 관련해 크게 두 가지를 생각해 보았다.

 

첫째는 의사소통 수단과 관련된 것으로서, 인터넷이라는 매체로부터 시작해서 SNS로 발전하더니 마침내 인구의 절반이 훨씬 넘는 수만큼 스마트폰이 보급된 세상에 대한 것이다. 우리는 이제 그런 세상 한가운데서 살고 있고, 그야말로 누구나 거의 제한 없이 자신의 생각을 글로 표현하고 나눌 수 있는 시대를 경험하고 있다.

 

둘째는 의사소통 내용과 관련된 것으로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이야기 가운데 캐내고 또 캐낼 수 있는 이야기, 그러면서도 일시적이고 필요에 따라 약간의 의미를 주는 그런 이야기가 아니라, 생명에 닿도록 하는 이야기는 사실 하나님에 관한 것밖에 없다. 이렇게 오늘의 우리는 하나님과 의사소통이 가능한 수단과 내용을 가졌다. 이제 우리 안에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글로 남기고, 그것으로 세상을 섬기는 것에 노력을 기울였으면 좋겠다.

 

나훔서에는 반드시 기억해야 할 나훔의 모습 두 가지가 있다. 먼저 나훔은 진노와 보복으로 점철된 메시지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속마음을 선명하게 보았다. 나훔은 불처럼 쏟아지고, 바위를 깨트리며, 산과 바다를 녹이고 말리시는 것으로 비유되는 그런 하나님의 분노 가운데서도, 마치 깜깜하게 드리워지는 먹구름 사이로 내비치는 햇살 같은 하나님의 속마음을 보았던 것이다. “여호와는 선하시며 환난 날에 산성이시라 그는 자기에게 피하는 자들을 아시느니라”(1:7).

 

한 가지 더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이 있다. 이렇게 살벌하고 철저한 니느웨를 향한 심판의 말씀은 아직 실행되지 않고 남아 있다. 그러면서 히스기야를 중심으로 신앙의 개혁과 부흥을 가져온 남유다 백성에게 엄청난 위로와 하나님 안에 있는 승리에 대한 확신을 주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나훔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그 어떤 무서운 심판에 대한 말씀이 선포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더욱 빛나는 구원과 위로를 확신하게 하는 인물로 기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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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을 잘 경청하는 선지자, 아모스

 

“정의를 물같이, 공의를 강같이!”라는 메시지를 선포한 선지자로 유명한 아모스. 1장 1절로 가늠해볼 때, 그는 대략 주전 763년부터 753년 사이에 활동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출신지는 남유다에 속한 드고아였지만, 사역은 북이스라엘에서 이루어졌다.

 

아모스, 그는 자신이 활동한 시대와 어떤 면에서 어울리지 않는 선지자라고 할 수 있다. 크게 두 가지의 이유가 있는데, 첫째는 당시 북이스라엘에 선지자나 제사장이라는 공적으로 세워진 성직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아모스의 등장은 어울리지 않았다.

 

둘째는 아모스 스스로가 밝혔듯이 그는 분명한 직업이 있는 사람이었다. 아모스의 말씀 선포 사역을 보면서 그를 대적하던 자들과 논쟁이 일어났을 때 그는 자신에 대해 “나는 목자요 뽕나무를 재배하는 자”(7:14)라고 밝혔고, 동시에 “나는 선지자가 아니며 선지자의 아들도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했다.

 

이미 성직의 조직이 갖춰져 있었고, 아모스는 해야 할 일이 많은 목자요, 농부였기에 그가 말씀을 선포한다는 것, 그것도 심판의 말씀을 선언해야 한다는 것은 너무도 어색한 모습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을 향해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 듣고 그것을 또 선포하라는 소명 앞에 순종했던 아모스를 통해 우리는 이미 기독교에 대해 널리 알려져 있고, 교회가 곳곳에 세워져 있고, 목회자가 넘쳐나는 시대일지라도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는 자가 소명자가 되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

 

 

아모스의 소명이 더욱 도전이 되는 이유가 있다. 아모스가 자신의 사역 시기에 대해 ‘지진 전 이 년’(1:1)이라고 하는 것을 두고 학자들은 그가 적어도 2년 이상 활동했겠지만 그리 길게 선지자로서 사역한 것 같지 않다고 한다. 그 이후에는 아마도 원래 하던 목자요, 뽕나무를 재배하는 일도 돌아갔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아모스는 왜 어쩌면 한시적이었을지도 모르는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자신이 해야 할 많은 일과 손해를 감수하면서 심판과 멸망을 전했을까? 왜 환대는커녕 ‘왕을 모반한다’(7:10)는 강력한 저항에 휘말려 억울하기 그지없는 길을 갔을까? 아모스의 행적을 따라가 보면 이 시대를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커다란 도전을 받게 된다.

 

 

이제 아모스의 사역을 살펴보자.

 

첫째, 그는 거대한 힘의 논리 및 거침없이 횡행하는 힘의 현실을 거슬러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다. 무자비함의 극치요 쾌락에 사로잡히게 하는 힘의 세상, 이방 나라들에 대해 아모스는 힘의 논리를 정면으로 거부하는 말씀을 선포했다(1장).

 

 

둘째, 그는 돈의 힘을 거슬러 선포했다.

 

“가난한 자를 삼키며 땅의 힘없는 자를 망하게 하려는 자들아”(8:4, 참조 2:6~7)라는 말씀처럼 당시 이스라엘은 한 마디로 ‘돈의 맛’을 아는 세상이 되었다. 사실 아모스가 이스라엘의 멸망을 선포하며 활동하던 시기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 버금갈 정도로 영토를 회복했다. 또 경제적으로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호황을 누리던 시대였다. 그만큼 돈의 힘은 더욱 위력을 발휘했고, 사람들은 돈이 더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낄 수밖에 없었던 때였다. 아모스는 이처럼 요즘 식으로 말하면 경제 양극화가 심해진 것을 여과 없이 지적했다. “은으로 힘없는 자를 사며 신 한 켤레로 가난한 자를 사며 찌꺼기 밀을 팔자 하는도다”(8:6).

 

 

셋째, 아모스는 진리를 떠난 관습과 관행 및 생명이 없는 전통과 맞서 싸웠다. 여전히 제사가 드려지고 있었고(5:22) 성직자도 있었지만(7:10), 실제로는 진리를 떠나 있었고 아무런 진정성이 없는 그야말로 관행이요 죽은 전통이 판을 치던 시대였다. 따라서 그는 ‘여호와의 율법을 멸시하며 그 율례를 지키지 아니하고’(2:4) 결국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는’(2:7) 세상을 거슬러 그들의 실상을 드러내며 거침없이 말씀을 선포했다.

 

 

이와 같은 사역에서 아모스의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사람됨을 더욱 절실하게 느끼게 하는 대목이 있다. 그는 이러한 선포가 필요한 이스라엘 백성의 본질적인 문제는 ‘여호와 하나님을 찾지 않음’이며(5:8)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임을(8:11)을 알았던 영성의 인물이었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 뿐 아니라 그것을 마치 아비의 심정으로 “돌아오라, 돌아오라”고 반복하여 간곡하게 눈물어린 호소를 하는(4:6~11) 긍휼의 영혼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는 지금도 우리에게 간곡하게 말한다.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5:6, 참조 5:4, 8).

 

- 날마다 솟는 샘물 박삼열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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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에게 미친 사람, 복음에 자신의 삶을 드린 사람

 

신약의 역사를 일군 복음의 사람

 

 

두말할 나위 없이 바울은 기독교 역사상 가장 유명한 인물 가운데 한 명이다. 바울은 신약성경 27권 가운데 적어도 13권, 그러니까 권수로 보아 신약성경의 거의 절반을 기록했다. 사실상 바울은 십자가의 복음이 유대인들만이 아니라 모든 민족을 위한 구원의 유일한 소식이 되도록 공헌했다. 만약 바울이 없었다면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완성된 하나님의 구원이 우리에게까지 전해질 수 없었다고 가정할 수도 있다.

 

무엇보다 우리의 마음을 놀라게 하고 감동시킨 것은 흐트러짐 없이 십자가의 복음에 집중한 그의 헌신적인 삶이었다. 바울을 통해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성도로서 믿어야 할 신앙의 교리와 삶의 교훈을 배울 수 있었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이루어 놓으신 구원의 복음이 실제로 사람들에게 전파되어 회개하고 구원을 받아 교회가 만들어진 이 신약시대를 설명하려면 바울을 고려하지 않고는 도무지 불가능하다. 하지만 이 짧은 글에서 바울에 관한 모든 것을 다룬다는 것은 처음부터 범위를 넘어서는 작업이다. 때문에 범위를 좁혀 바울을 바울 되도록 한 결정적인 회심의 사건을 살펴보면서 우리에게 주는 도전을 적용해 보고자 한다.

 

주님 만나기 전에는 신앙도 길을 잃어

 

신약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는 사도 바울에 관한 기록은 대부분 사도행전 9장에 비교적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는 이른바 ‘다메섹 회심 사건’ 이후에 관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바울을 탐구하면서 회심 이후의 모습을 찾아보고 정리하는 데 보다 많은 시간과 정성을 기울인다. 당연하기도 하고 필요한 방법이기도 하지만,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의 바울을 보다 충분히 이해하고 또 우리가 올바른 배움을 얻으려면, 그의 회심 사건 이전의 모습을 최대한 고려해야 한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회심하기 이전에 바울은 철저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적대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이런 태도는 단지 인간적인 선택이나 고집 같은 것이 아니었다.  회심 이전의 바울은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신앙과 열정으로 예수를 대적했고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을 핍박했던 것이다.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행 8:3).

“내가 이 도를 박해하여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고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넘겼노니”(행 22:4).

 

이처럼 다메섹 사건 이전 바울의 모습은 매우 살벌하다. 바울은 철저하게 예수를 대적하고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했던 사람이었다. 바울이 이처럼 십자가의 원수(행 9:1, 참조 빌 3:18)로 행했던 이유는 그가 철저한 유대인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빌 3:5~6).

 

바울이 유대인이요 바리새인이었다는 의미를 보다 선명하게 이해하려면 복음서를 떠올리면 된다. 즉,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과 바리새인들의 갈등과 대립을 바울도 고스란히 공감한다는 뜻이다. 예컨대, 바리새인으로서 바울에게 나사렛 예수는 결코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과 같은 존재일 수 없었고, 이런 예수님의 주장은 그야말로 최고의 신성모독이었다(요 10:36). 게다가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메시아라는 주장은 있을 수도,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신 21:23, 갈 3:13).

 

참된 새로움은 오직 그리스도로부터

 

그러던 그가 사도행전 13장 이후 후반부에서 보여 주듯이, 그리고 그의 서신서들에서 밝혀 놓았듯이 자신이 박해하던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되었고(롬 1:1), 십자가의 복음만을 위해 사는 사람이 되었다(고전 1:18~31; 빌 1:18~28). 교회를 바로 세우기 위해 해산하는 수고를 기꺼이 하는 사람으로(고전 4:15; 갈 4:19) 바뀌었고, 마침내는 그 예수 때문에 이제는 자신이 박해받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행 20:24; 고후 1:3~11; 딤후 4:5~8).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빌 1:20).

 

이처럼 바울은 십자가의 복음을 박해하던 자리에서 복음을 위해 박해받는 자리에 기쁨으로 서는 사람으로 바뀌었다. 그 혁명적인 변화는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그리스도를 만남으로부터 시작됐다. 하지만 바울이라는 인물을 단지 어떤 ‘변화’의 카테고리로 설명하기에는 아쉬움이 매우 크다. 바울은 사실상 그리스도에게 미친 사람이었고, 십자가의 복음에 삶을 온전히 드린 사람이 되었다(행 20:24, 21:13, 26:24; 고후 5:13 등).

 

 

그랬기 때문에 이른바 ‘고난 목록’이라고 하는 고린도후서 1장 8~10절과 11장 23~27절 등에 기록된 고난이 그의 복음 전도를 막지 못했다. 일찍이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반대하고 그 따르는 무리와 교회를 박해하던 것에 정반대로 바울은 바로 그 십자가와 복음을 위해 위협받는 것을 오히려 기뻐했다. 마침내 신체적인 핍박과 위협 가운데서도 그것들이 바울을 어찌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다(빌 1:18, 2:17; 딤후 3:6~8). 

게다가 바울은 이렇게 십자가의 복음이 전파되는 일에 대한 전도자로서의 모습만이 아니라 우리의 눈시울을 붉히게 하는 참된 목사였다. 바울은 해산의 고통을 감내하면서까지 그리스도인들을 믿음으로 세우고자 힘을 다했다(갈 4:19; 살전 2:7). 목사로서 성도들과 교회를 향한 바울의 마음을 단적으로 느낄 수 있는 그의 고백이 있다.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하지 아니하더냐”(고후 11:28~29). 바울에게는 교회를 향한 자신의 염려가 그 모든 실제적인 고통보다도 오히려 더한 것이었다. 사도 바울의 모습이 역력하다.

 

폭행자에서 순교자로 만든 것은 말씀

 

 

마침내 사도 바울은 말 그대로 죽을 고생을 하며 다녔던 세 차례에 걸친 전도여행을 마감할 때 즈음, 주후 58년경 예루살렘에서 체포되어 로마법 아래 재판을 받는 죄수의 몸이 된다(행 21:33, 25:11). 그로부터 3년 정도 시간이 흐른 후 로마 감옥에 투옥되고, 모진 박해와 위협의 시절을 거쳐, 주후 67년 순교해 그렇게도 그리워하고 고대하던 주님 품에 안겼다.

 

 

십자가 복음에 대해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던 바울은 그 복음을 위한 전도자요 고난 받는 자요 눈물의 목사로서 산 인물이다. 바울 탐구를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를 만날 때 진정한 변화가 가능하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또한 변화를 가져오는 주님과의 만남은 그분이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은혜로 되는 것임을 깨닫는다. 더 나아가 복음에 헌신하는 삶을 향한 도전을 받는다.

 

 

참 변화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 따라서 십자가의 복음을 만나는 것이 진정한 새로움의 출발이다. 성경 말씀을 통해 이미 우리 곁에 와 계신 주님을 만남으로써 비로소 참 변화를 향한 시작이 가능하다. 유의할 점이 있다. 바울은 그냥 독립적이고 독창적인 사상가가 아니었다. 또 추론을 거듭해 궁극적인 진리를 찾아가는 사색적인 사상가도 아니다. 그의 모든 사고는 성경에 기초를 두고 있다. 그의 모든 사역과 가르침은 성경에서 계시로 받은 것에 굴복하고 순종했다. 이런 점에서 성경적 계시의 말씀은 바울이 생각하고 기도하는 도구였고, 그는 성경대로 실천하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았다는 유진 피터슨의 관찰은 적절하다.

 

 

말씀과 함께 오는 주님의 은혜로 말미암는 변화가 아니라면 바울과 같은 변화는 불가능하다. 살아 역사하시는 말씀에 의한 변화가 아닌 변화는 참된 변화가 아니다. 매일 말씀을 제대로 만나는 은혜가 모든 독자에게 있기를 간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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