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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겸손과 눈물의 사람, 바울

 

에베소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를 읽으면서 우리는 지난 1월호에 이어 다시 사도 바울을 만난다. 그는 한때 온 힘을 다해 나사렛 예수와 그를 믿는 자들을 박해했고, 그렇게 하는 것이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믿음의 길이라고 믿었었다(행 8:3, 9:1~2, 참조 요 16:2).

 

 

하지만 무지와 오해에서 출발한 왜곡된 열심의 사람이었던 바울은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행 9:5) 하는 음성과 더불어 나타나신 주님을 만난 이후, 예수 때문에 박해를 받는 자리에도 기꺼이 나아가는 사람으로 바뀐다. 에베소교회가 그 증거물 가운데 하나이고, 에베소서가 그 증거문서다.

 

 

에베소교회와 바울의 관계는 참으로 특별하다. 에베소라는 도시 자체가 당시 아시아에서 매우 중요한 도시였을 뿐 아니라(그랜트 오스본은 『에베소서 주석』 13p에서 “로마를 제외하고 에베소는 바울이 방문한 도시 가운데 가장 중요한 도시였다”라고 기록), ‘온 아시아와 천하가 위하는’(행 19:27) 아데미 신전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그만큼 에베소에서 바울의 사역은 충분히 주목할 만하다.

 

 

사역적으로 보면, 바울에게 에베소는 세 번의 전도여행 중 두 번이나 방문한 곳일 뿐만 아니라(행 18:19~21, 19:1) 2~3년 동안 지속된 그 유명한 두란노 서원 강론이 있었던 곳이다(행 19:9~10). 또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해서 치유와 축사(逐邪)가 일어나 급기야는 마술사들이 은 오만이나 되는 분량의 책을 불사르는 일이 일어나기도 한 반면, 에베소 온 시민의 분노와 핍박에 직면했던 곳이기도 하다(행 19:11~41).

 

 

신학적으로 보면, 성령에 대해 가르쳤고(행 19:2~6) 하나님 나라를 강론했으며(행 19:8) 귀신의 정체를 드러내기도 했다(행 19:12). 이처럼 중요한 진리들이 드러난 곳이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에베소서를 통해 다음의 두 가지의 내용을 나누고 싶다. 첫째, 에베소교회 사역에는 바울의 눈물과 겸손 그리고 인내가 흥건하게 배어 있다는 점이다.

 

 

바울은 에베소교회 지도자들과 이별할 때가 되었을 때 그곳에서의 사역을 돌아보며 이렇게 말한다.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행 20:31).

“…내가 항상 여러분 가운데서 어떻게 행하였는지를 여러분도 아는 바니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 거리낌이 없이 여러분에게 전하여 가르치고”(행 20:18~20).

 

 

바울은 눈물의 사역자였고, 겸손과 인내의 사역자였다. 이러한 바울의 모습은 “여러분도 아는 바니”라는 말처럼 공개된 것이었고 에베소 지도자들이 다 아는 것이었다. 바울의 이와 같은 인물됨에서 우리는 사역자의 자세뿐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의 자세를 배우게 된다.

 

 

둘째, 눈물과 인내와 핍박의 고통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얼마나 복음에 집중했는지를 발견하게 된다는 점이다.

 

 

에베소서의 구조를 본문 내용을 따라 1~3장과 4~5장으로 나눌 때, 1~3장의 주제를 ‘두 기도’와 ‘하나의 십자가 복음’을 설명하는 구조로 볼 수 있다. 즉, 1장 15~23절의 첫 번째 기도와 3장 14~21절의 두 번째 기도, 그리고 그 사이에 놓인 2장 1절~3장 13절에서 십자가의 복음과 그 복음을 드러내는 일꾼으로 바울 자신을 언급해 결국 복음이 중심에서 빛나도록 하는 구조다.

 

 

물론 바울의 기도 역시 십자가를 통해 증명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십자가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지 아는 것을 간구하는 것이어서 그가 얼마나 복음에 집중하고 있었는지를 보여 준다.

 

 

한편, 바울은 그리 길지 않은 이 편지에서 자신이 갇혀 있음을 세 번이나 언급할 만큼(엡 3:1, 4:1, 6:20) 고난 가운데 있었다. 그는 자신의 고난과 어려움에 대해 그 어느 교회보다 잘 이해해 줄 곳이 바로 에베소교회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자신의 어려움에 대해 호소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바울은 마치 아무 일도 아닌 양 오직 십자가 복음에 집중하고, 복음이 가져오는 삶에 집중한다.

 

 

에베소서를 통해 이러한 바울의 모습을 발견하고, 우리와 성정이 같은 그를 통해 복음이 중심 되는 삶을 향해 세상이 흥분할 발걸음을 또 한 걸음 내딛는 도전을 받으면 좋겠다. 

 

- 날마다 솟는 샘물 박삼열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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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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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교의 기본교리

 

1.이슬람교의 6

 

A. 유일신이자 창조주 알라(Allah)를 믿는다.

 

·알라의 출처와 의미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하나님은 과연 같은가?

 

무슬림들의 주장 "그 성서의 백성들을 인도함에 가장좋은 방법으로 인도하되 논쟁하지말라. 그러나 그들중에 사악함으로 대적하는 자가 있 다면 일러 가로되 우리에게 계시된 것과 너희에게 계시된것을 믿느니 라. 우리의 하나님과 너희의 하나님은 같은 하나님이시니 우리는 그분 께 순종함이라" (코란 29:46)

 

·6일 동안의 창조 "실로 주님께서 엿새 동안에 천지를 창조하신후 권좌 에 오르신 하나님이시라. 그 분은 밤을 두어 낮을 가리고 또 서둘러 밤 을 쫓으며 태양과 달과 별들을 창조하시어 그분의 권능아래 두셨느니 라. 창조하시고 자비하심이 그분이 아니뇨"(코란 7:54)

 

"흙으로 부터 너희들을 창조하신후 한 운명을 주신 분이 그분이시거 늘 또 하나의 운명이 그분께 있느니라"(코란 6:2)

 

·예배의 특징

 

자비하시고 관대하신 알라의 이름으로

 

코란의 개경장(fatha)

 

"자비하시고 관대하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온 우주의 주인이신 하나님 께 찬미를 드리나이다. 그 분은 자애로우시고 자비로우시며 심판의 날을 주관하시도다. 우리는 당신만을 경배하오며 당신에게만 구원을 구하나니 저희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그 길은 당신 께서 축복을 내리신 길이며 노여움을 받지 않는 자나 방황하는 자들 이 걷지 않는 가장 올바른 길이옵니다"(코란 1:1-7)

 

·삼위일체의 해석

 

"하나님께서 마리아의 아들 예수야 네가 백성에게 말하여 하나님을 제 외하고 너(예 수)와 너의 어머니를 경배하라고 하였는냐? 하시니 영광 을 받으소서 결코 그렇게 말하지 아니하였으며 그렇게 할 권리도 없나 이다. 제가 그렇게 하였다면 당신께서 알고 계실 것입니다"(코란 5:119)

 

콜리리디안파 기독교에서 숭배하는 마리아를 봄.

 

삼신론(tritheism)은 코란에서 철저히 배척됨.

 

·알라의 속성들 : 99개의 이름들이 코란에 언급

 

B. 예언자들 (prophet, nabi)

 

·창조주 알라의 말씀을 인류에게 설명하고 해석하는 임무만을 받은 인간 들 아담, 노 아, 아브라함, 이슬마엘, 이삭, 야곱, 요셉, 모세, 아론, , 요나, 엘리야, 다윗, 솔로몬, 엘리사, 스가랴, 요한, 예수, 무함마드 등

 

·이슬람만의 예언자 : 후드, 살리흐, 루끄만, 둘 가르나인, 에베소의 일곱 잠자는 자 들

 

·124,000명중 28명이 코란에 기록

 

·라술(rasul, messenger) : 창조주의 말씀을 설명하고 해석하는 엄무외에 그 복음을 인류에게 전달하여 가르치는 것과 인도하는 임무까지 부여받 은 선택된 자들 : 모세, 다윗왕, 예수, 무함마드

 

·무함마드는 예언자및 선지자들을 구별하지 아니하고 믿으며 예언자 및 선지자들의 행적을 지켜야 한다는 것임 - 인류의 지도자로서 알라의 선 택을 받은 훌륭한 인간들 임으로 믿고 따라야 한다는 것이 이슬람의 보 편적인 견해

 

C. 성서들 (scriptures, kutub)

 

성경

 

·코란은 성경을 재확인하는 것 "하나님은 그대에게 계시를 내렸고 이를 예증하시었도다. 또한 모세에게 율법을 예수에게 복음을 내려 인류의 지침으로 하셨으며 정과 부의 지표로 하셨으니" (코란 3:23)

 

"우리가 그대에게 계시한 것에 대해 그대가 의심한다면 그대 이전에 성서를 읽은 자들에게 물어 보라. 실로 그대의 주님으로부터 진리가 그대에게 이르렀나니 의심 하는 자가 되지말라" (코란 10: 94) 유대교 경전, 기독교인들은 신약성경에 기초해 심판 받을 것을 명시 "우리가 구약을 내리사 복음과 빛이 그안에 있음이니라. 그리하여 이슬람을 믿는 예언자들은 그것으로 판결하였으며 율법학자들과 유대학자들도 그들의 성서에의 함이라" (코란 5:47)

 

"그리고 신약의 백성들로 하여금 알라께서 계시한 대로 판결케하라 했 으니 알라께서 계시한 대로 판결치 아니한자 그들은 죄인이니라"(코 란 5:50)

 

·무슬림들도 기독교의 경전을 믿도록 요구됨 "무함마드여! 우리는 알라 를 믿고 우리에게 내려진 계시와 아브라함, 이삭, 이스마엘, 야곱과 그 자손들에게 내려진 율법 을 믿으며 주님으로부터 모세와 예수와 예언자 들에게 내려진 율법을 믿으며" (코란 3:84)

 

·무슬림들도 기독교의 경전(, 구약)을 보전했고 알라의 말씀은 영원불 멸함을 주장 "우리는 마리아의 아들인 예수로 하여금 구약 이전에 계시 된 것을 확증하면서 그들 의 발자취를 따르도록 했느니라. 또한 신약을 계시하여 구약 이전에 계시된 것을 확증하면서 그안에 복음과 광명을 주었으니 이는 복음이요 정의에 사는 자들의 교훈이라"(코란 5:49)

 

·"우리는 그대에게 그 이전에 계시된 것을 확증하고 증언하여 성서를 계 시하나니" (코란 5:51)

 

·코란은 유대인들이나 기독교인들이 왜곡된 경전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

 

- 경전을 숨김 "너희는 아브라함과 이스마엘, 이삭, 야곱과 그의 후손들 이 유대인 또는 기독교인들이라 말하느뇨? 일러 가로되 너희들이 알 라보다 더 잘 아느뇨? 알라로 부터 계시받은 증언을 숨기는 자보다 더 사악한 자가 누구뇨?"(코란 2:140) "그 성서의 백성들은 그들의 자손들을 알고 있듯이 그(무함마드)를 알고 있으면서 실로 그들이 알 고 있는 그 사실을 숨기도 있도다"(코란 2:146)

 

- 경전을 고침 "너희들은 그들(우대인들)이 너희와 더불어 믿음을 같이 하기를 바라느뇨? 그들의 무리가 알라의 말씀을 듣고 이해하면서도 그 말씀을 왜곡하고 있도다" (코란 2:75)

 

- 무슬림들에게 판매키 위해 거짓 경전들을 썼음 "그들 손으로 성서를 써서 이것은 알라로부터 온 것이니 값싸게 사소서 라고 말하는 그들 에게 재앙이 있을 것이며 그 것을 쓴 그들의 손에 또 재앙이 올 것이 며 그로서 금전을 모으는 자들에게 또 한 큰 재앙이 있을 것이라"(코 란 2:79)

 

코란

 

·전통적인 무슬림들의 관점

 

- 즉시 쓰여진 계시

 

천사 가브리엘이 매년 검사 및 비교했음.

 

책의 형태는 아니라도 무함마드의 사후 즉시 고정된 내용

 

·칼리프 아부 바크르 (A.D. 632-634)하에 쓰여짐. 칼리프 우스만 (A.D.644-656)이 하프사의 사본을 표준으로 택하고 나머지는 불살라 소 각시킴. 일부는 쓰여졌고, 일부는 암송되어 구전됨. 그러나 A.D.634에 많은 하피즈들이 죽음

 

·계시의 신빙성 주장

 

"실로 이것이 영광의 코란으로 보호된 곳에 보관된 것이라"(코란 85:21-22)

 

"일러 가로되 가브리엘 천사의 적은 알라의 적이라 말하여라. 알라는 천사를 통하여 그대에게 알라의 의지에 따라 코란을 계시하셨나니...." (코란 2:97)

 

"어떤말씀도 폐기되지 안니하며 망각케 하지 아니하되 보다 나은 혹은 그와 동등한 말씀으로 대체하시나니 알라의 전지전능하심을 너희는 모 르느뇨?"(코란 2:106)

 

다른 성서들

 

이슬람 이전의 다른 선지자들의 경전을 받아들임 "알라께서 예언자들과 성약을 맺으사 성서와 주셨도다. 그런다음 한 선지자가 진리와 함께 너 희들에게 오나니 그를 믿고 그를 도울지어다" (코란 3:81)

 

모세의 토라, 다윗왕의 시편(Zabur), 예수의 복음(Injil)

 

읽혀지지 않고 사라진 경전 "명령을 이행한 아브라함의 성서(suhuf)에서 도 알지 못하였단 말이뇨?"(코란 53:36)

 

출처들(source)

 

·유대교와 기독교

 

·초기에 계시된 내용은 당시의 아랍 점장이들의 구전 형태를 취함.

 

·동화 이야기(코란 18:8-26) : 에베소의 잠자는 7인의 이야기

 

바나바의 복음(The Gospel of Barnabas)

 

·통용 : 영어 - 1973년 초판이후 여러번 출판. 불어 - 1977, 아랍어 - 1907 이후 여러차례, 우르드어 - 1916, 1974, 인도네시아어 - 1970, 이란 어 등으로 출판

 

·내용 :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다. 예수는 십자가에 못박혀 죽지 않았다. 예수는 무함마드의 출현을 예언했다. 복음서는 예수에게 주어졌 으나 애당초 예수에게 주어진 성서와는 다르다

 

"천사 가브리엘이 예수에게 빛나는 거울과 같은 한 권의 책을 주었는데 그것은 예수의 마음을 꿰뚫고 내려왔다"(바나바 복음 10)

 

본래 예수에게 주어진 복음이 신약성경으로 대체 되었다.

 

·전체적인 특징 : 가르치는 내용이 신약 성경과 상반된다.

 

"많은 사람들이 사탄에 사로잡혀 불경스러운 교리를 전파하고 있다. 즉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르고 하나님에 의해 영원히 명령된 할례 를 거부하고 불결한 고기들을 먹으며.... 그 중에 바울도 속하는지라" (서문)

 

"다른 자들은 예수가 정말로 죽고 다시 살아났다고 믿는다. 그 중에 바 울도 속하느니라"(바나바 복음 223)

 

D. 천사들

 

·천사는 빛으로 창조된 가장 고귀한 피조물중의 하나

 

·창조주의 명령에 순종할뿐 거역하지 않는 속성을 부여받음.

 

·인간이 알수 없는 임무를 부여받음 : 양식, 풍우, 선과 악을 주관, 천국 과 지옥을 담당, 심판과 부활의 날을 담당.

 

·가브리엘 : 창조주의 명령에 따라 모든 천사들을 주관하고 모세나 예 수, 무함마드에게 창조주의 계시를 전함.

 

이드완 - 천국의 문을 지킴

 

말리카 - 지옥의 문을 담당.

 

라킵 - 인간의 오른쪽 어깨에서 선행의 업보를 기록

 

아띠드 - 인간의 왼쪽 어깨에서 악행을 기록

 

문카르 - 인간이 죽어서 무덤에 오게 되면 죽기전의 그 인간의 종교 에 대하여 질문 및 결과에 따라 두들겨 팸

 

나키르 - 창조주를 안믿고 선행을 실천하지 못한 인간에게 고통을 줌

 

우즈라엘 - 죽음 담당, 인간의 생명을 앗아감

 

이스라필 - 심판의 날에 나팔을 가지고 와서 두번 나팔을 부는데 첫번 째 나팔을 불때는 그때까지의 모든 인간이 죽게 되며 두번 째 나팔을 불때는 아담부터 시작해서 죽었던 모든 인간이 일어나 창조주의 심판을 받게 되는데 이를 담당함.

 

천사들의 기능

 

- 인간은 평생동안 악령이나 마귀 또는 사탄의 행악으로부터 보호받음. 이것은 창조주의 명령에 따라 천사들이 보호하기 때문, 인간의 시력 으로는 못봄.

 

- 따우히드 (창조주 하나님만을 경배하는 유일신 사상)를 가장 순수하게 보호하면서 쉬르크(창조주 하나님에게 어떠한 다른 것을 동격으로 비 유하는 다신론)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해 줌.

 

- 천사들은 선택받은 하나님의 종복임으로 인간들을 천사들을 숭배하거 나 신성화 해서는 안됨.

 

- 알라는 인간을 창조하신 다음날에 천사로 하여금 아담에게 허리 구부 려 인사를 하도록 했고 아담에게 천사들보다 많은 지식과 지혜를 주 었고 지산을 관리하는 대리권을 주심, 인간은 천사보다 더 높은 위치 에 있음. 이때 아담에게 경배하기를 거부해서 쫓겨난 천사가 이블리 스, 즉 사탄임.

 

E. 심판과 부활

 

·인간의 은 현세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사후에도 계속해서 생이 지속

 

·현세의 생은 유한적이고 사후의 생은 영원하며 이 생명은 창조주의 심 판을 통하여 천국에서 영원히 사는 생명과 지옥에서 영원히 사는 생명

 

·우주와 그 안에 있는 모든 피조물들을 창조주께서 소멸할 어느날(yawm al-qiyama)이 심판날이며, 창조주는 모든 피조물들을 자기앞에 모이게 하니 이날은 부활의 날 (yawm al-bahth)이라 하며, 살아난 인간들은 모 두가 창조주의 심판앞에 서게 되니 이때 인간이 현세에서 행하였던 선 과악이 증감하지 아니하고 그대로 제시되매, 창조주는 인간이 실천한 선과 악의 결과를 비유하시니 선행이 많은 자에게는 관용이 베풀어 질 것이요, 악행이 많은 자는 그에 대한 형벌이 있을 것이며, 용서를 받는 자는 곧 천국으로 들어갈 것이요, 벌을 받는 자는 지옥으로 들어감.

 

·부활의 날에 창조주의 명령에 따라 무덤에서 부활한 육체에 영혼이 들 어오면 다시 생명을 부여받고 인간의 영혼과 육체가 동시에 승천함. 이 사실을 부정 내지 의심하는 자들은 모두 불신자(카피르, kafir)로서 지옥 의 불에 떨어짐. 사후의 생명을 부인하는 것은 심판주로서의 창조주의 권위에 대한 도전임.

 

F. 알라의 법칙과 정명사상

 

·인간의 현세 생활을 영위하고 규정하며 제한하는 창조주의 법칙에 대한 완전한 순종과 어떤 특정한 기간에 특정한 방법에 의하여 어떤 물체를 창조하는 알라의 창조를 믿는것

 

·세상의 창조, 일어나는 모든 행운과 불행도 창조주의 뜻이고 창조주가 기록하여 두지 아니했던 것은 인간에게 절대 발생하지 않으므로 창조주 를 믿는 자들은 알라께 의지해야함.

 

·우주의 운행질서도 모두 창조주의 권능안에 있으며 인간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탄생하여 언제 어디서 어떻게 임종할 것인가는 알라의 뜻에 따 라 행하여 짐으로 알라외에는 창조되는 시간과 임종하는 시간을 아무도 알수가 없음

 

·존재하는 모든 사물과 인간이 선택하여 행하는 모든 행위까지도 창조주 알라께서 알기 전에는 발생치 않음.

 

이슬람교의 5(Five Pillars of Islam)

 

A. 신앙고백 (confession of faith)(Shah da)

 

·"알라외에는 신이 없고, 무함마드는 알라의 사도다."

 

·발음 : La - il - la - la - il - lal - lah wa

 

Mu - ham - ma - dur - ra - su - lul - lah

 

·사용 : 출생, 사망, 기도에의 부름, 하루 5회씩의 기도, 근무중의 찬송

 

수피교단에서는 반복 외침속에 신접(trance) - 신비주의

 

·증거 : 나는 증거한다 (I bear witness that )

 

·의미

 

-"알라외에는 신이 없고":다신교의 배척, 중재자의 존재를 철저히 배척

 

-"무함마드는 알라의 사도다":

 

무함마드의 신분 - 이슬람교를 다른 일신교들과 구별지음

 

무함마드의 기능 - 무엇인가 구원의 메세지를 인간에게 전해주려는 알라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중재자

 

   

 

 

B.기 도 (Prayer, Sal t)

 

기도를 행하기 전의 전제조건들

 

·규정된 세정의식 :

 

 

1) 손을 씻음 2) 입안을 헹굼 3) 코안을 씻음 4) 얼굴을 씻음 5) 팔뚝을 씻음 6) 물묻은 손으로 머리를 쓰다듬기 7) 귀를 씻음

 

8) 발을 씻음

 

 

청결은 신앙의 근본이요, 청결하지 않은 기도는 수락되지 않으며, 청결 은 신앙생활의 절반이다.

 

·내적 청결 : 죄악으로 부터 마음과 양심을 정화하는 것. 실수로 인한 죄악에 대해서 진실되게 회개하고 타인을 의심치 아니하고 증오하거 나 시기하지 아니하며 유혹하지 아니하는것. 거만하지 아니하고 남을 안 속이는 것등

 

·외적 청결 : 인간의 신체중에서 노출되어 더러워지기 쉬운 부분을 깨끗 한 물로써 깨끗하게 하는 행위를 말하며 우두(wud ')라고 함. 물이 없는경우 우두 대신 행하는 행위를 '따얌뭄'이라고 함.

 

·기도장소는 모든 불결한 것을 제거해야 함

 

·몸과 복장은 깨끗하고 청결해야 함

 

·얼굴은 반드시 메카(Mecca)를 향해야 함

 

·기도는 규율을 지키는 근엄한 태도로 하되 잡담, 웃음, 놀기, 먹는것 등 이 있으면 기도의 효력이 상실됨

   

하루 다섯차례의 기도

   

파즈르 (아침) 2

 

주흐르 (정오) 4

 

아스루 (오후 4시경) 4

 

아그립 (해질무렵) 3

 

이샤 (저녁) 4

 

17번 반복

 

A.D 619년 무함마드가 하늘로 7층의 하늘중 마지막 7층에서 아브 라함을 만난 후,천사를 통하여 기도 방법과 하루 5차례의 기도 수행 명령을 전달 받음.

 

금요예배 (juma)

 

·금요예배는 코란과 하디스에 의해 의무화

 

·금요예배는 노예,여성,소년,환자를 제외한 남성,자유인,성인,건강한 자 및 거주민을 포함한 모든 무슬림에게 의무

 

"가장 훌륭한 날이 금요일이라. 그날 태양이 떠 올랐고 그날 아담이 창조 되었고 그날 그가 천국 으로 들어가는 것이 허용되었으며 그날 그곳으로 부터 추방되었으니 그날 심판이 일어나리라"

 

·반드시 성권 안에서 이루어져야 함.

 

·반드시 이맘의 설교가 있어야 함.

   

·예배를 알려주는 무엣진(Muezzin)의 아잔(az n)을 들은 사람(반경 4.5Km이 내)은 의무로 행함

 

·금요일날 공동예배의 기도는 반드시 알라가 응답해 준다고 믿음(하디스 에 의하면 평상시의 기도보다 27배의 응답 효과가 있다고 함.)

 

기도의 순서 (아침기도)

 

1) 서서 Mecca를 향해 양손을 귀에 대고 "알라는 가장 위대하시다"라 고 외침

 

2) 조용히 al-Fatiha(개경장)을 암송한다

 

3) "알라는 가장 위대하시다"라고 외친 후 "주님 찬미 받으소서"를 머리 숙인채 세번 반복함

 

4) 선채 "알라는 자기를 찬미하는 자의 말을 들으신다"라고 외침

 

5) "알라는 가장 위대하시다"라고 외친 후 이마가 땅에 닿도록 절을 하고 "가장 높으신 주님 찬미 받으소서" 세번 외침

 

6) "알라는 가장 위대하시다"라고 외친 후 상체를 들고 무릎을 꿇는 다

 

7) 다시 절을 한채 "가장 높으신 주님, 찬미 받으소서"를 세번 외침

 

8) "알라는 가장 위대하시다"라고 외친 후 조용히 al-Fatiha(개경장)을 암송한다

 

9) "알라는 가장 위대하시다"라고 외친 후 "주님 찬미 받으소서"를 머리를 숙인채 세번 반복함

 

10) 선채 "알라는 자기를 찬미하는 자의 말을 들으신다"라고 외침

 

11) "알라는 가장 위대하시다"라고 외친 후 이마가 바닥에 닿도록 절 을 하고 "가장 높으신 주님 찬미 받으소서"를 세번 외침

 

12) "알라는 가장 위대하시다"라고 외친 후 상체를 들고 무릎을 꿇는 다.

 

13) 다시 절을 한채 "가장 높으신 주님 찬미 받으소서"를 세번 외침

 

14) 상체를 들고 무릎을 꿇은 후 외친다

 

"알라여! 우리의 인사와 헌납과 시주와 기도를 받아 주소서. ! 예언자여! 그대위에 알라의 자비와 축복이 있을지어다. 알라의 평화가 우리와 알라께 충실히 예배드리는 모든 자들위에 함께 할 지어다. 나는 알라외에는 신이 없음을 증거한다. 알라는 유일하 시고 어떤 동등한 것도 가질 수 없다. 나는 무함마드가 알라의 종이고 사도임을 증거한다"

 

15) 무릎을 꿇고 머리를 우측으로 향하여 "알라의 평화와 자비가 당 신들과 함께 하시기를"이라 외침

 

하루에 5회씩 메카를 향해 기도를 행하는 가운데, 모슬렘은 알라를 향 해 34회 절을 하고 다음의 귀절을 암송한다.

 

·알라는 가장 위대 하시다 68

 

·가장 높으신 주님, 찬미 받으소서 102

 

·주님 찬미 받으소서 51

 

·알라는 자기를 찬미하는 자의 말을 들으신다 17

 

·al-F tiha(개경장) 17

 

·이슬람의 신앙고백 (14) 5

 

·모든 이슬람들에게 평화를 기원 5

 

C. 희사 (almsgiving, zak t) - 구제

 

·수입의 2.5%(1/40)을 희사. 가난한 자를 도움

 

zak t - 의무로 내야 하는 희사

 

sad qa- 자발적으로 내는 희사(히브리어로 tsedeg : 정의를 뜻하나 랍비 들에 의해 '희사'로 사용됨)

 

·"실로 '사다까'는 가난한자, 불쌍한자, 노예, 채무인자, 하나님의 길에 있는 자, 그리고 여행자들을 위한 것이니" (9:60)

 

·비공개로 비밀히 행하라

 

"그들의 재산을 바치되 타인에게 보이려 함이니 이들은 하나님과 내세 를 믿지 아니하고 사탄을 친구로 하나니 가증한 친구이로다" (4:38)

 

·알라의 보상

 

"친척과 필요로 하는 자와 여행자에게 자선을 베풀라. 그것이 하나님의 기쁨을 얻고자 하는 이들에게 가장 좋은 것이라. 그리하매 그들은 번 영하느니라. 타인의 재산으로 이익을 증가시킨 것은 하나님 곁에서는 아무런 증가도 될수 없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기쁨을 구하기 위하여 '자카트'로 이익을 증가함은 여러배의 보상을 받게 되니라" (30:38-39)

 

D. 금 식 (fasting, sawm)

 

발전

 

: 무함마드가 메디나로 이주한후(A.D.622, 히즈라) 유대인의 속죄일 단식을 봄.

 

이듬해 유대인들과의 관계가 악화 되었을때 계시가 옴.

 

"정하여진 날에 단식을 행하면 되나" (2:184)

 

- 유대인들 처럼 24시간 내내 단식하다 10일으로 연장 변경

 

"인류의 복음인 코란과 그 복음의 설명과 기준이 내려진 달이 라마단달 이거늘 단식을 실천하라 하셨도다" (2:185)

 

- 10일 동안에서 한달 내내로 연장 변경

 

기능

 

·지옥의 문이 닫히고 천국의 문이 열림(기도가 평상시 보다 30배 효력 가짐) - 유대인들의 속죄일(욤 키푸르) 단식처럼 죄사함에 주된 목적을 둠.

 

실천

 

·몸에 들어가는 모든것 삼가:음식, 음료수, 담배, , 부부관계, 주사 등

 

·단식의 시작과 끝 : '까디'가 본 새로운 달이 뜰때부터 - 대포나 총 혹 은 깃발로 알림

 

·단식이 면제 되는자 : 어린아이들(13세 미만), 노약자들, 여행자, 임신부, 모유가 필요한 어머니, 병자

 

·단식 달의 마지막 10일간은 모스크에 감. 특히 27일째되는 날은 기도하 고 코란 암송

   

 

단식으로 간주되지 않는자

 

·정신 이상자

 

·정신적 성년이 되지 아니한자

 

·잠에서 깨어나지 아니한자

 

·여성이 생리기간 내지 출혈할 경우

 

·단식중에 부모나 배우자가 사망한 경우 그 후계자가 채우지 못한 날수 만큼 대신 단식을 해야 한다.

 

"하나님에 대한 부채는 지불하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이요"

 

E. 순례와 희생제물 (pilgrimage, hajj)

 

실천

 

: 모든 무슬림들은 일생에 한번은 메카를 방문

 

·성지 메카의 카바신전 "믿는 자들이여! 실로 불신자들은 불결하나니 그 들로 하여금 그해 이후 '하람' 성원에 접근하지 않도록 하리니 " (9:28)

 

·"우리는 그대에게 아랍어로 된 코란을 계시하니 이로 인하여 그대가 '어머니 도시' 주민들과 그 주변의 모든 백성들에게 경고하고 일부는 천국에 있게 될 것이요" (42:7)

 

·아브라함과의 연관 : Mina, 메카교외

 

·하나님의 집 : Bayt All h

 

순례의 과정

 

·카바신전 주위를 7번 돈다

 

·사파와 마르와 언덕 사이를 7번 왕복  

 

·Dh al-hijja달의 9일째날 : 메카에서 25Km 떨어진 아라파트산에 모든

 

순례객들이 모여 정오에서 해질때까지 기도,코란암송,설교듣는다. 죄용 서 간구

 

·같은날 밤 Muzdalifa에 모여 잠을 잔다

 

·10일째날 메카에서 6-7Km 떨어진 Mina에 모여 이틀을 보냄. Mina에 도 착 즉시 Satan을 상징하는 돌에 투석,악마추방의식을 행하고, 번제물(순 양)을 도살한다

 

·11,12일째 날에 계속 돌 7개씩을 투석,악마를 쫓는다. Mecca에 돌아와 Kaba 주위를 다시 7번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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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인물 - 회복의 미래를 꿈꾼 사람, 요엘

 

요엘은 전체 3장 73절이라는 짧은 길이의 메시지를 전하고 사라진 이스라엘의 선지자다. 비록 선포한 메시지의 길이는 짧지만 내용에 있어서는 그 누구보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포괄적으로 전망한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 요엘 선지자가 어떤 인물인지에 대해 언급한 자료가 요엘 본문 이외에는 없기에 본문을 찬찬히 들여다보는 것으로서 그가 어떤 인물인지를 탐구하는 것이 가장 분명한 길이라고 할 수 있다.

우선 1장 1절에 ‘브두엘의 아들 요엘’로 소개된다. ‘브두엘’이 ‘성실하신 하나님’ 혹은 ‘성실한 성품으로 설득하시는 하나님’을 뜻한다면, 요엘은 경건한 집안의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게다가 본문에서 제사 및 절기와 관련된 소재들(소제, 전제, 제사장, 성전, 낭실, 제단, 성회 등)을 많이 언급한다는 점에서 그가 제사장 가문의 사람일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요엘은 누구보다도 이스라엘 민족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성전에 대한 신학적이고 실제적인 의미인 ‘하나님의 임재’(욜 3:17, 21)를 선포하는 자로서 딱 맞는 인물인 셈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여호와가 하나님이시다’라는 이름의 뜻에 걸맞게 요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호와를 드러내기에 충분한 사람이다.

요엘은 이스라엘의 문제를 뿌리부터 바라보는 시야를 갖고 있었다. 그는 요엘 2장 3절에서 “그들의 예전의 땅은 에덴동산 같았으나 그들의 나중의 땅은 황폐한 들 같으니”라고 언급함으로써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 문제가 창세기 2장과 3장이 말하는 창조와 타락 사건을 배경으로 하는 것임을 보여 준다. 즉 요엘은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이 범죄와 관련된 것임을 알았고, 그것을 선포하려고 했던 것이다.

요엘은 또한 새로운 시대가 어떻게 오는지를 내다본 인물이다. 베드로는 신약의 교회 시대를 여는 출발점이 된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을 설명하는 자리에서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로 시작하는 요엘 2장 28~32절의 말씀을 인용한다.


즉 초대 교회 사도들은 자신들이 경험한 성령 강림이라는 초유의 사건을 요엘 선지자의 말씀을 통해 이해한 것이다. 요엘은 구약시대를 살면서도 하나님이 만들어 주실 새 시대를 미리 전망한 인물이다.

더 나아가 요엘은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완성까지 내다본 인물로 보인다. 하나님 안에서 회복될 미래를 꿈꾸면서 그는 “그날에 산들이 단 포도주를 떨어뜨릴 것이며 작은 산들이 젖을 흘릴 것이며 유다 모든 시내가 물을 흘릴 것이며 여호와의 성전에서 샘이 흘러 나와서 싯딤 골짜기에 대리라”(욜 3:18)라고 예언한다.

단 포도주(암 9:13)와 젖(사 55:1)이 흘러넘친다는 표현은 요엘의 예언 속에 있었던 과거의 에덴동산에 대비해 미래에 새로워질 낙원을 보여 주는 상징이다. 또한 성전에서 솟아나는 샘도 에덴동산의 강들을 생각하게 하는 표현이다(겔 47:1~12). 이어서 요엘은 “유다는 영원히 있겠고 예루살렘은 대대로 있으리라 내가 전에는 그들의 피흘림 당한 것을 갚아 주지 아니하였거니와 이제는 갚아 주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시온에 거하심이니라”(욜 3:20~21)라며 자신의 예언을 모두 마무리한다.

 

지금까지 살핀 요엘 선지자를 통해 우리는 자신의 믿음과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전망을 보다 넓게 가져야 한다는 교훈과 함께, 매우 분명하게 나타난 영원한 회복에 대한 꿈을 단단히 배운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요엘이 어떻게 이와 같은 전망을 갖게 되었는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그 대답으로는 그가 선포한 말씀 가운데서 크게 두 가지를 발견할 수 있다.  첫째는 우리의 반응 곧 ‘참된 회개’이고, 둘째는 하나님의 진심 곧 ‘극진한 사랑’이다.

참된 회개란 마음을 다해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다(욜 2:12). 이것을 요엘은 회개하는 자의 모습으로, 흔히 등장하는 옷을 찢는 행위에 빗대어 마음을 찢어야 한다고 도전한다(욜 2:13). 또한 하나님의 진심은 은혜, 자비, 인애에 근거한 극진히 사랑이다(욜 2:13, 18). 이같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요엘이라는 인물을 통해 적어도 이 두 가지를 배우기 원하시고 도전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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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인물탐구 - 오직 예수만 드러내고 사라진 인물, 세례 요한

 

복음서는 의당 예수님께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 초점은 예수께서 어떤 분이신지 드러내는 것을 목표로 한다. 복음서들은 이 목표에 이르기 위해 각각 차별화된 특징이나 강조점을 띠고 있지만, 모든 복음서는 초반에 세례 요한을 다루면서 예수님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이 가운데 마가복음은 세례 요한을 가장 빠르게 등장시킨다.

복음서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기 위해 세례 요한을 매우 중요하게 다루고 있지만, 그중 마가복음은 사실상 세례 요한을 언급하는 것을 시작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다루고 있어 이번 달에는 세례 요한을 탐구해 보고자 한다.

 

경건한 부모·불임 가정에서의 출생

먼저, 세례 요한의 출생부터 살펴보자. 그는 제사장 가문의 경건한 부모 곧 사가랴와 엘리사벳에게서 태어났다. 이들 부부는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하는 하나님 앞에서 의인’이었다(눅 1:6). 대단한 믿음의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들은 스스로는 해결할 수 없는 불임의 절망스럽고 아픈 문제를 안고 있었고, 그러한 상황은 나이 들어 늙기까지 지속됐다.

임신이 불가능한 부부에게서 세례 요한이 태어났다. 요한은 육신적으로는 경건한 부모에게서 태어났으며, 불임의 절망을 넘어 하나님께서 초월적 능력을 행하심으로 태어난 것이다. 그의 출생에서 우리는 ‘출생은 하나님의 역사’라는 진리도 꼭 배워야 하지만, 믿음의 성장에는 절망적인 현실이 함께할 수 있다는 진리도 분명히 배워야 한다. 그것도 나이 들어 점점 늙어 가는 상황에서도 예외가 없음을 말이다.

 

메시아의 오실 길을 준비하는 자

우리는 세례 요한의 등장을 구속사의 맥락으로도 봐야 한다. 그의 등장은 오래전 구약 선지자들의 메시아 비전과 믿음의 기대가 이뤄지는 것이었다. 세례 요한은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성취되는 과정에서 등장한 것이다.

특히 세례 요한은 메시아의 오실 길을 준비하는 것을 자신의 사역으로 삼았다. 특히 회개를 촉구하는 메시지를 거침없이 선포함으로써 그렇게 했다. 그는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다’라는 섬뜩한 표현을 쓰면서 “독사의 자식들아…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고 선포했고,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고 경고했다(눅 3:7~9).

요한은 또 헤롯 왕의 악행에 대해 책망하기를 멈추지 않았고, 이 일로 결국 순교에 이른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가 이 땅에 존재하는 것에 대한 하나님의 뜻과 소명을 물어야 할 뿐 아니라, 그 소명을 따라 사는 것이 우리의 삶의 방향이라는 진리를 붙잡게 된다.

 

예수를 드러내고 사라진 인물

한편, 복음서들은 세례 요한에 대해 이사야서를 인용하면서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로 이해했는데, 이것은 무엇보다 그의 요단 강 근처에서의 회개와 세례를 두고 하는 말이다. 곧 요한은 하나님의 통치 앞에서 회개의 필연성을 간과하지 않았다.

더 나아가 자신은 ‘뒤에 오시는 이의 신발 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하면서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 3:30)는 고백은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자로서의 요한을 선명하게 보여 준다.

물론 그가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일을 기다리오리이까”(마 11:3)라고 예수님께 질문한 것에서 엿볼 수 있는 것처럼 흔들리는 모습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는 예수 오직 한 분만을 드러내고 사라진 인물로서 우리에게 각인되기에 충분하다.

마가복음 묵상을 통해 우리 모두 세례 요한처럼 예수만을 드러내는 제자의 길, 섬김의 삶을 향해 한 걸음 더 기쁘게 옮겨가기를 기대한다. 노예가 무엇인지 너무도 잘 알고 있던 시대 속에 스스로 종으로 오셔서 마침내 구속을 완성하시고 부활하신 예수만이 우리의 생명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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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인물 - 잊혀진 이름이지만 빛나는 믿음의 사람 수로보니게 여인

 

이번 달 본문에는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지만 그 가운데서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수로보니게 여인(막 7:24~30)을 탐구하고자 한다. 수로보니게는 팔레스타인 땅 북쪽 수리아 지역의 베니게를 일컫는 말로서 수리아와 베니게의 합성어다. 예수님께서 바로 그 지역의 해안 도시 두로 지방에 가셨을 때,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가 예수님을 찾아온다. 그녀는 자신의 딸에게서 귀신을 쫓아내 주기를 간구했고, 이 간구대로 예수님은 귀신을 쫓아내 주셨다. 

이야기 자체만으로도 놀랄 일이지만, 예수님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고려해 본다면 그녀의 등장은 더욱 놀랍다. 여자요, 귀신 들린 딸의 어머니요, 이름도 알려지지 않을 정도로 미미한 존재였으며, 심지어 이방인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복음이 무엇인지를 선명하게 드러내는 인물이 되었다.

무명의 여인 등장

우선 그녀의 이름에 대한 이야기를 좀 더 해 보자. 그녀는 무명이다. 성경에 이름이 소개되지 않았다는 것 자체가 그리 놀랄 일만은 아니다. 하지만 아무런 내용 없이 단지 이름만 소개된 사람들도 수없이 많다는 점에서,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의 이야기가 주는 메시지가 적잖이 충격적이라는 점에서 무명의 여인이라는 사실 자체에 대해 묵상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본다. 그녀는 어쩌면 당시 사회의 통념상 무시되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인정되는 인물이었는지 모른다. 아니면, 인생의 오랜 세월 동안 무시 받는 신분으로 살았기 때문에 이름이 잊혀 갔을 수도 있겠다.

바리새인과 무명의 여인의 믿음

한편 마가복음 6~9장의 문맥을 보면, 수로보니게 여인 이야기는 바리새인의 불신앙과 교만한 태도의 이야기들(막 7:1~23, 8:10~13) 사이에 위치한다. 이와 같은 구조를 통해 마가는 이 여인의 이야기를 훨씬 도드라지도록 만들고 싶었던 게 분명해 보이며, 이 때문에 독자들은 당시 배경 속에서 최고의 종교지도자인 바리새인과는 감히 비교할 수 없는 이름 없는 이방 여인의 믿음이 얼마나 빛나는지를 기억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가장 초라하고 불쌍하다 여겨지던 모습 속에서 믿음의 힘을 목도한다. 곧 당시 최고의 사람들이라 자타가 인정하던 바리새인과 가장 낮은 사람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었던 귀신 들린 딸의 어머니인 무명의 여인의 믿음이 역전되는, 마치 반역과도 같은 현장을 만나게 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모습이며,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 나라의 도전이다.

하나님은 믿음, 오직 믿음으로만 만날 수 있는 분이다. 그러면 이름조차 잊힌 슬픔을 넘어 아픔의 여인이었을 수로보니게 여인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만나게 한 믿음은 어떤 것인가? 이는 예수님과 여인 사이의 대화에서 드러난다. 여인이 자신의 딸에게서 귀신 쫓아 주기를 간구하자 예수님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고 답하셨다. 얼마나 치욕스러운 말인가! 하지만 여인은 오히려 자신이 이방인이요, 개로 비유되는 존재요, 상에서 떡 먹을 자격이 없는 자라는 자기 이해를 충분히 받아들인다.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죄인임을 인정한 수로보니게 여인

자신이 죄인임을 하나님 앞에서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는 믿음의 진수가 보인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막 7:15~16)이라는 위대한 진리를 존재론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 무명하고 슬픈 수로보니게 여인을 만난다.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기에,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는 것이 사는 길이라는 겸손의 여인을 통해 우리는 복음을 만난다. 그리고 개들도 오직 주인으로부터 나오는 것을 먹어야 한다며, 주님에게만 매달리는 여인을 통해 우리의 영혼을 살리는 생명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는 복음을 듣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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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인물 - 겸손과 눈물의 사람, 바울

 

에베소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를 읽으면서 우리는 지난 1월호에 이어 다시 사도 바울을 만난다. 그는 한때 온 힘을 다해 나사렛 예수와 그를 믿는 자들을 박해했고, 그렇게 하는 것이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믿음의 길이라고 믿었었다(행 8:3, 9:1~2, 참조 요 16:2).

 

 

하지만 무지와 오해에서 출발한 왜곡된 열심의 사람이었던 바울은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행 9:5) 하는 음성과 더불어 나타나신 주님을 만난 이후, 예수 때문에 박해를 받는 자리에도 기꺼이 나아가는 사람으로 바뀐다. 에베소교회가 그 증거물 가운데 하나이고, 에베소서가 그 증거문서다.

 

 

에베소교회와 바울의 관계는 참으로 특별하다. 에베소라는 도시 자체가 당시 아시아에서 매우 중요한 도시였을 뿐 아니라(그랜트 오스본은 『에베소서 주석』 13p에서 “로마를 제외하고 에베소는 바울이 방문한 도시 가운데 가장 중요한 도시였다”라고 기록), ‘온 아시아와 천하가 위하는’(행 19:27) 아데미 신전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그만큼 에베소에서 바울의 사역은 충분히 주목할 만하다.

 

 

사역적으로 보면, 바울에게 에베소는 세 번의 전도여행 중 두 번이나 방문한 곳일 뿐만 아니라(행 18:19~21, 19:1) 2~3년 동안 지속된 그 유명한 두란노 서원 강론이 있었던 곳이다(행 19:9~10). 또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해서 치유와 축사(逐邪)가 일어나 급기야는 마술사들이 은 오만이나 되는 분량의 책을 불사르는 일이 일어나기도 한 반면, 에베소 온 시민의 분노와 핍박에 직면했던 곳이기도 하다(행 19:11~41).

 

 

신학적으로 보면, 성령에 대해 가르쳤고(행 19:2~6) 하나님 나라를 강론했으며(행 19:8) 귀신의 정체를 드러내기도 했다(행 19:12). 이처럼 중요한 진리들이 드러난 곳이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에베소서를 통해 다음의 두 가지의 내용을 나누고 싶다. 첫째, 에베소교회 사역에는 바울의 눈물과 겸손 그리고 인내가 흥건하게 배어 있다는 점이다.

 

 

바울은 에베소교회 지도자들과 이별할 때가 되었을 때 그곳에서의 사역을 돌아보며 이렇게 말한다.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행 20:31).

“…내가 항상 여러분 가운데서 어떻게 행하였는지를 여러분도 아는 바니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 거리낌이 없이 여러분에게 전하여 가르치고”(행 20:18~20).

 

 

바울은 눈물의 사역자였고, 겸손과 인내의 사역자였다. 이러한 바울의 모습은 “여러분도 아는 바니”라는 말처럼 공개된 것이었고 에베소 지도자들이 다 아는 것이었다. 바울의 이와 같은 인물됨에서 우리는 사역자의 자세뿐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의 자세를 배우게 된다.

 

 

둘째, 눈물과 인내와 핍박의 고통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얼마나 복음에 집중했는지를 발견하게 된다는 점이다.

 

 

에베소서의 구조를 본문 내용을 따라 1~3장과 4~5장으로 나눌 때, 1~3장의 주제를 ‘두 기도’와 ‘하나의 십자가 복음’을 설명하는 구조로 볼 수 있다. 즉, 1장 15~23절의 첫 번째 기도와 3장 14~21절의 두 번째 기도, 그리고 그 사이에 놓인 2장 1절~3장 13절에서 십자가의 복음과 그 복음을 드러내는 일꾼으로 바울 자신을 언급해 결국 복음이 중심에서 빛나도록 하는 구조다.

 

 

물론 바울의 기도 역시 십자가를 통해 증명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십자가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지 아는 것을 간구하는 것이어서 그가 얼마나 복음에 집중하고 있었는지를 보여 준다.

 

 

한편, 바울은 그리 길지 않은 이 편지에서 자신이 갇혀 있음을 세 번이나 언급할 만큼(엡 3:1, 4:1, 6:20) 고난 가운데 있었다. 그는 자신의 고난과 어려움에 대해 그 어느 교회보다 잘 이해해 줄 곳이 바로 에베소교회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자신의 어려움에 대해 호소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바울은 마치 아무 일도 아닌 양 오직 십자가 복음에 집중하고, 복음이 가져오는 삶에 집중한다.

 

 

에베소서를 통해 이러한 바울의 모습을 발견하고, 우리와 성정이 같은 그를 통해 복음이 중심 되는 삶을 향해 세상이 흥분할 발걸음을 또 한 걸음 내딛는 도전을 받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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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교 / 탈무드와 논리

 

끊임없이 탈무드를 놓고 토론하는 유대인, 그들 중에 위대한 법률가와 학자가 많이 배출되어 온 것은 탈무드를 통한 논리 공부와 무관하지 않다. 뛰어난 감성을 지닌 한국인에게 탈무드적 논리력이 추가된다면 어떤 놀라운 결과가 나올지 상상해 보라.

어느 젊은이가 탈무드를 공부하려고 랍비를 찾아왔습니다. 랍비가 물었습니다. “자네, 아람어(BC 4-5세기 경 유대 지역에서 쓰였던 공용어)를 아는가?” 젊은이가 대답하였습니다. “모릅니다.” “그래? 그렇다면 히브리어는 아는가?” 랍비가 물었습니다. “모릅니다.” 젊은이가 대답하였습니다. “그렇다면 토라(모세 오경)는 공부한 적이 있는가?” 랍비가 물었습니다. “없습니다. 하지만 걱정 마십시오. 저는 콜롬비아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하였고 하버드 대학에서 소크라테스 논리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이제 박사 후 과정으로 탈무드를 공부하러 왔습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랍비가 말했습니다. “젊은이, 그렇게 간청하니 내가 자네의 논리 능력을 한번 시험해 보겠네. 내가 내는 문제에 답하면 기회를 주겠네. 어떤가?” 젊은이는 자신 있게 문제를 내 달라고 하였습니다.

 

랍비가 문제를 냈습니다. “두 사람의 도둑이 굴뚝을 통하여 어느 집에 침입하였다네. 들어가 보니 한 도둑의 얼굴은 깨끗한데 다른 도둑의 얼굴은 검댕으로 더러웠다네.

그렇다면 둘 중 누가 얼굴을 씻었겠나?”

 젊은이가 대답했습니다. “그야 얼굴이 더러운 도둑이지요.” 랍비가 말했습니다. “틀렸네, 얼굴이 깨끗한 도둑이 씻었다네.” 젊은이가 물었습니다. “어떻게 그렇지요?” 랍비가 말했습니다. “논리적으로 생각해 보게. 얼굴이 더러운 도둑은 친구의 깨끗한 얼굴을 보고 자기의 얼굴도 깨끗한 줄 알고 닦지 않았다네. 그러나 얼굴이 깨끗한 도둑은 친구의 더러운 얼굴을 보고 자기의 얼굴도 더러운 줄 알고 닦았다네.” 젊은이가 대답했습니다. “아, 그렇군요. 한 문제 더 내 주세요.”

 

랍비가 똑같은 질문을 하였습니다, “두 사람 중 누가 얼굴을 씻었겠나?” 젊은이는 확신에 차서 답했습니다. “아 그거야 얼굴이 깨끗한 사람이지요. 좀 전에 냈던 문제 아닙니까?”

랍비가 대답하였습니다. “틀렸네,

두 사람 다 닦았다네. 논리적으로 생각해 보게.

얼굴이 더러운 도둑은 친구의 얼굴을 보고 자기가 깨끗한 줄 알았다네.

얼굴이 깨끗한 도둑은 친구의 얼굴을 보고 자기 얼굴이 더러운 줄 알았다네.

그래서 얼굴을 닦았다네. 그것을 본 친구는 '저 친구도 얼굴을 닦는데.' 하고는 따라서 얼굴을 닦았다네.” 젊은이가 답했습니다. “아 그럴 수도 있군요. 한 문제만 더 내 주세요.”

 

랍비가 똑같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래, 둘 중 누가 얼굴을 닦았겠나?”

젊은이는 답했습니다. “둘 다 닦았습니다.”

 랍비가 말했습니다. “틀렸네. 둘 다 닦지 않았네.

논리적으로 생각해 보게. 얼굴이 더러운 도둑은 얼굴이 깨끗한 도둑을 보고 자기 얼굴도 깨끗하다고 생각하였다네. 얼굴이 깨끗한 도둑은 얼굴이 더러운 도둑을 보고 자기 얼굴이 더러운 줄 알았다네. 얼굴이 더러운 도둑은 자기 얼굴이 깨끗한 줄 알고 안 닦았다네. 그것을 본 얼굴이 깨끗한 도둑은 저 친구도 안 닦는데 나만 닦을 필요 없지 하고 역시 안 닦았다네. 결국은 아무도 안 닦았지.”

젊은이는 사색이 되어 말했습니다, “선생님, 저는 꼭 탈무드를 공부해야 합니다.

저는 탈무드를 공부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한 문제만 더 내 주시기 바랍니다.”

랍비는 또 다시 똑같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둘 중 누가 얼굴을 닦았겠는가?”

젊은이가 답했습니다, “둘 다 닦지 않았습니다.” 랍비가 답했습니다. “틀렸네.

소크라테스의 논리학을 공부하였다고 하였는데

왜 자네에게 탈무드 공부가 불가능한지 이제 알겠나? 설명해 보게.

두 사람이 똑같은 굴뚝을 통해 들어갔는데 어떻게 한 사람은 더럽고 한 사람은 깨끗할 수 있단 말인가?

소크라테스 논리학을 공부했다는 사람이 그것도 모른단 말인가?”

젊은이는 포기하는 심정으로 마지막 회심의 일격을 랍비에게 날리기로 하였습니다.

“선생님, 선생님은 한 가지 질문에 세 가지 모순되는 답을 주셨습니다.

그건 철학적으로 불가능합니다.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고요!”

“그래? 그게 바로 탈무드라네.”라고 랍비가 답했습니다.(Aaron Parry, The Complete Idiot's Guide to the Talmud, Marie Butler-Knight, 2004. pp. 7-8에서 최명덕 번역·수정)

 

이 이야기를 잘 관찰해 보면 논리의 중요성을 설명하기 위한 랍비의 스토리텔링 구성이 논리적으로 얼마나 치밀한지 혀를 내두를 정도다.

탈무드는 법(할라하)과 이야기(아가다)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중 할라하라 불리는 법 부분이 탈무드의 요체다. 탈무드를 공부한다고 하면 법률을 연구한다고 보면 된다. 그런데 법률에 대한 공부는 상당 수준의 논리력이 요구된다. 현재 건대에서 탈무드 과목을 가르치고 있지만 학생들이 가장 고통스러워하면서도 흥미로워 하는 부분이 법률에 대한 논리적 논쟁이다. 복잡한 논리에 머리가 깨질 것 같은 고통을 호소하다가도 논리적 연결고리를 찾게 되면 문제를 푸는 실마리를 찾게 되고 탈무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게 된다.

 

유대인의 탈무드 학교인 예쉬바에 가보면 논리적 논쟁으로 얼마나 시끄러운지 모른다.

세계에서 가장 시끄러운 학교나 도서관을 예로 들라고 하면 단연 예쉬바다.

토론과 논쟁이 없는 교실 그래서 조용한 한국의 교실, 우리 학생들의 논리력이 실종되고 있지는 않은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

최명덕
건국대학교 문과대학 문화콘텐츠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한국이스라엘학회장, 한국이스라엘연구소장, 한국이스라엘친선협회 이사, 한국이스라엘문화원 이사로 섬기고 있다. 저서·역서로 《유대인 이야기》《지도로 보는 이스라엘 역사》《유대교의 기본진리》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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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교 / 탈무드와 이야기

 

건국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이자 ≪유대인 이야기≫의 저자인 최명덕 교수와 함께 탈무드 속으로 여행을 떠납니다. 재미난 이야기 속에 값진 진리를 담은 탈무드를 통해 오늘을 사는 명쾌한 지혜를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진리와 이야기가 누가 더 인기 있나 내기를 하였습니다. 진리와 이야기는 어느 유대인 마을로 갔습니다. 진리는 자신 있었습니다. 누구도 진리를 외면하지 못하리라 여겼기 때문입니다. 먼저 진리가 마을로 들어갔습니다. 사람들은 진리를 보더니 외면하였습니다. 그를 피했습니다. 열렸던 창문이 닫혔습니다. 마을 중앙에 도착할 즈음 주위를 둘러보니 길에는 아무도 없고 진리 혼자만 서 있었습니다. 진리는 혼자 쓸쓸히 마을을 통과했습니다. 이야기가 마을로 들어갔습니다.

사람들이 기웃거렸습니다. 창문이 열리고, 사람들은 무슨 말인가 들어보려고 귀를 쫑긋 세웠습니다. 마을 중앙에 도착해 뒤를 돌아보니 많은 사람이 따라오고 있었습니다. 이야기가 마을을 통과하는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몰려들었습니다. 마을을 통과한 후 이야기는 진리를 만났습니다. 진리가 이야기에게 말했습니다. “이야기야 네가 이겼다, 내가 졌다.” 이야기가 말했습니다. “진리야 그렇다면 네가 나를 옷으로 입으면 어떻겠니?” 진리는 이야기를 옷으로 입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마을로 갔습니다. 그랬더니 수많은 사람들이 진리에게 몰려들었습니다. 유대인 마을은 진리를 환영하였습니다. (고대 유대인 이야기 중에서, 최명덕 번역·수정본)

 

이 이야기만큼 탈무드의 성격을 잘 설명한 것이 있을까? 탈무드는 유대인이 그들의 진리를 후대에 전하기 위하여 오랜 세월 기술한 책이다. 그러나 진리를 대면하는 것은 모든 사람의 바람이겠지만 또한 버거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불편한 일일 수도 있다. 진리는 분석을 요구하고 통찰을 요구하지만 이러한 작업이 누구에게나 가능한 것도 아니다. 이를 일찍이 간파한 유대인들은 그들의 진리를 이야기와 함께 담았다. 탈무드의 진리는 이야기를 옷 입고 있으며 탈무드의 이야기는 그 안에 진리를 담고 있다. 다음의 이야기를 들어 보자.

 

어떤 사람이 헌 옷을 샀습니다. 집에 와 보니 옷에 다이아몬드가 들어 있었습니다. 이 다이아몬드가 누구의 것이지? 내가 가져도 될까? 그는 고민하다 랍비를 찾아가 물었습니다, “이 다이아몬드는 누구의 소유입니까?” 랍비는 대답했습니다. “자네 아이를 데리고 헌 옷을 판 사람에게 가서 다이아몬드를 돌려주게, 그러면 자네는 다이아몬드보다 더 귀한 교육을 자네 아이에게 선물로 주는 것이네.” (최명덕 번역·수정본)

이 이야기를 법률적으로 따지자면 여러 복잡한 논의가 있을 수 있겠으나 결론은 헌 옷 주인이 판 것은 헌 옷일 뿐 다이아몬드는 아니며 따라서 헌 옷을 산 사람에게는 다이아몬드에 대한 소유권이 없고 헌옷을 판 사람에게 그 소유권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진리이다. 진리는 칼과 같이 엄정하여야 하고 감정에 치우셔서는 안 된다. 때문에 진리를 세우기 위해서는 분석과 논의 과정이 필요하다. 그것은 때로 싸움을 불러오기도 한다. 진리를 세우는 일은 딱딱하고 재미없는 일이다. 그러나 싸움이 일어날 수 있는 상황에서 랍비가 들려준 이야기는 소유권 문제에 대한 해결은 물론 숭고한 교육적 효과까지 성취하고 있다. 법에서는 기대할 수 없는 감동까지 가져온다. 탈무드 이야기는 이야기 안에 진리를 담고 있다. 탈무드에서 진리는 이야기를 옷 입고 있고 이야기는 진리를 담고 있다.

 

최근 회자되는 중요 이슈 중의 하나가 소통이다. 정부와 국민 간의 소통, 회사 사장과 직원간의 소통, 경영자와 노동자 사이의 소통,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의 소통 등등, 소통은 이 시대 최고의 덕목으로 등장하였다. 하지만 최근 MIT에서는 소통을 넘어선 공감에 대한 연구가 한창 진행 중이다. MIT에서는 이를 인지과학과 연결하였는데, 각광받는 연구 분야 중 하나이다. 소통은 이해를 증진시키는 역할을 하지만 공감은 행동을 불러온다. 그렇다면 공감을 불러올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무엇일까? MIT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스토리텔링'이다. 사람이 어떻게 인지하고 행동에 옮기는가에 대한 뇌과학을 연구한 결과 인간이 경험하는 인지 과정 유형 중에 스토리텔링이야말로 공감을 불러오는 최고의 방법이라는 것이 판명되었다. 이에 힘입어 최근 미국에서는 마케팅에서도 소통보다는 공감을 중시하여 공감 스토리텔링을 마케팅에 적극 활용하고 있다.

 

유대인들은 탈무드 안에 이야기 콘텐츠를 넣었다. 이를 통하여 아버지나 선생은 자녀나 제자를 위한 스토리텔링 콘텐츠를 확보할 수 있었다. 탈무드의 삼분의 일이 법률에 대한 논의라면 삼분의 이는 이야기이다. 이야기 콘텐츠가 법률 콘텐츠보다 두 배나 많은 것이다. 탈무드의 법률 콘텐츠는 전문적인 학자가 아니라면 다루기 어려운 난제들이 수두룩하여 접근이 쉽지 않지만, 그 안에 들어있는 이야기 콘텐츠는 누구라도 듣고 싶어 할 만큼 흥미롭다. 수많은 출판사에서 이 이야기들만 따로 편집하여 탈무드라는 이름으로 출판하였고 이 이야기들은 세계적으로 사랑받고 있다.

 

할리우드 시나리오 작가들의 구루(Guru)로 불리는 로버트 맥기(Robert Mckee)는 이야기의 본질을, '갈등을 극복하고 그가 이루고자 하는 것을 성취하는 것에 대한 기술이나 구술'이라고 정의하였다. 탈무드에는 수많은 종류의 갈등이 기술되어 있다. 그리고 그 갈등을 해결하는 방법이 기록되어 있다. 어떻게 보면 탈무드는 갈등을 지혜롭게 해결하기 위한 매뉴얼이다. 나를 돌보는 것과 남을 돌보는 것 사이의 갈등에 대하여 어느 랍비는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나를 위하지 않으면 누가 나를 위할까? 내가 나만 위하면 나는 무엇이 될까?” 갈등은 인간을 성장하게 하는 명약이다. 어떻게 극복하느냐가 관건인데 탈무드는 수많은 종류의 갈등을 소개하고 갈등 극복의 지혜를 제공한다. 그렇다면 탈무드의 이야기는 갈등 극복의 이야기이다. 앞에 소개한 두 이야기는 진리가 겪게 되는 갈등과 소유권에 대한 갈등이 어떻게 해결되었는가를 보여 준다. 두 이야기를 더 깊이 분석해 보라. 많은 지혜를 얻게 될 것이다. 탈무드 이야기를 경청하라. 갈등 해결의 비책을 얻게 될 것이다.

 

최명덕
건국대학교 문과대학 문화콘텐츠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한국이스라엘학회장, 한국이스라엘연구소장, 한국이스라엘친선협회 이사, 한국이스라엘문화원 이사로 섬기고 있다. 저서·역서로 《유대인 이야기》《지도로 보는 이스라엘 역사》《유대교의 기본진리》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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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서신] 디모데 전서로 본 사도 바울


계시와 편지 (딤전 1:1-2)

 

특별한 것은 평범한 것에서 위대해진다. 사도 바울은 특별한 인물이다. 왜
냐하면 그는 계시의 사람으로서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살기 때문이다. 사
도 바울은 이 사실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딤전 1:1)라는 말로 설명한
다. 이것은 사도 바울의 자의식이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라는 말에는 두
가지 생각이 들어있다. 첫째로 그는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서 자신의 모
든 것을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설명한다. 예수가 없이 바울도 없다. 바
울은 단지 예수와 관련되어 있을 때 의미가 있다. 그는 예수께 부속된 사람이
다. 예수 그리스도은 사도 바울의 중심이다. 둘째로 그는 예수 그리스도
의 "사도"로서 자신의 모든 것을 세상의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이해한다. 그
는 사도이다. 따라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머물지 않고 세상의 사
람들과의 관계로 나아간다. 세상은 바울의 영역이다. 이렇게 예수는 바울의
중심이기에 바울은 예수에게 한없이 집중하며, 세상은 바울의 영역이기에 바
울은 세상으로 한없이 전진한다.

그런데 바울이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가 된 것은 원인을 가지고 있다. 그것
은 "우리 구주 하나님과 우리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명령을 따라" (딤전
1:1) 되었다. 바울이 사도가 된 것은 자발적인 의지에 의한 것이 아니다. 그
것은 명령에 의한 것이다. 명령이란 타의적인 것이며 강요적인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바울의 사도직은 필연성을 가지고 있다. 이 명령은 "우리 구주 하나
님과 우리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명령이다. 이 명령의 발령자는 하나님
과 예수이시다. 여기에 하나님은 "구주"로, 그리스도 예수는 "소망"으로 묘사
된다. 하나님은 구원의 주체자이시고, 예수 그리스도는 소망의 성취자이시
다. 하나님께만 구원이 있고 예수께만 소망이 있다. 따라서 하나님 밖에서 구
원을 찾고, 예수 밖에서 소망을 찾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사도 바울은 구
원이신 하나님과 소망이신 예수의 명령을 따라 사도의 삶을 산다. 사도 바울
은 하나님에 의존하여 사는 사람이며 예수에게 사로잡혀 사는 사람이다. 그
는 계시의 사람으로서 특별한 인물이다.

또한 사도 바울은 평범한 인물이다. 왜냐하면 그는 편지의 사람이기 때문이
다. 바울에게 특별함은 평범함으로 표현되고, 계시는 편지로 표현된다. 그는
디모데에게 편지를 보냈다. 편지란 예나 지금이나 그 자체가 일상적인 것이
다. 그것은 세상 속의 일이며 인간 사이의 일이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편지를 보냄으로써 지극히 평범한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사도
바울은 사람의 문제를 멀리하지 않고 사람의 문제에 참여한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으로부터 사람에게로 다가간다. 그는 하나님 쪽에만 서 있지 않고 사
람 쪽으로 접근한다. 하나님에게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사람에게 관심한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있기 때문에 사람을 가까이 한다.

사람에 대한 사도 바울의 관심은 무엇보다도 수신자인 디모데에 대한 표현
에서 두 가지로 나타난다. 첫째로 사도 바울은 다른 사람과 친근한 관계를 맺
을 수가 있다. 이 때문에 그는 디모데를 "믿음 안에서 참 아들" (딤전 1:2)이
라고 부른다. 바울과 디모데 사이에는 나이가 상이하다는 차이점이 있지만 그
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이 동일하다는 공통점이 있다. 사도 바울은 이런 공통점
으로 말미암아 차이점을 극복하고 디모데를 믿음의 아들로 가까이 한다. 둘째
로 사도 바울은 다른 사람에게 놀라운 축복을 말할 수가 있다. "하나님 아버
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
다" (딤전 1:2).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복이 사람에게 주어지기를 기원한다.
그가 보기에 사람은 하나님의 복을 받을만한 대상이다. 세상과 사람은 사도
바울의 관심사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세상에서 살며, 사람과 함께 산다.
그는 편지의 사람으로서 평범한 인물이다.

목회서신의 머리에서 바울은 사도라는 점에서 특별한 사람이며 편지를 쓴다
는 점에서 평범한 사람임을 보여주고 있다. 그에게서 가장 특별한 것이 가장
일반적인 것으로 표현되었다.

 

길과 벗 (딤전 1:3)

길은 가기 위하여 있는 것이며, 벗은 나누기 위하여 있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마게도냐로 간다. 그는 가는 사람이다. 그는 끊임없이 간다.
때때로 그는 자신의 영적 중심지인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지만 대체로 자신의
복음 사역지를 향해 나아갔다. 소아시아로, 그리스로, 로마로, 그리고 스페인
으로. 지금 사도 바울은 마게도냐로 간다. 마게도냐는 그에게 잠시의 행선지
일 뿐이다. 그의 발은 멈추지 않으며, 그의 길은 끝나지 않는다. 바울은 자신
의 발에 삶을 실었고, 자신의 길에 힘을 드렸다. 그는 서지도 않고 쉬지도 않
는다. 바울의 발은 정지하지 않는 발이며, 바울의 길은 휴식하지 않는 길이
다. 그의 기쁨은 걷는 발에 있다. 만일 바울이 운동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고
통이 될 것이다. 그의 휴식은 가는 길에 있다. 만일 바울이 여행하지 않는다
면 그것은 노동이 될 것이다. 바울에게는 일하는 것이 휴식이며, 쉬는 것은
노동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가고 또 간다.

디모데는 에베소에 남는다. 바울은 마게도냐로 가면서 디모데를 에베소에
남겼다. 마게도냐로 가는 바울에게 에베소는 여전히 그가 책임져야 할 대상이
었다. 에베소에는 아직도 일할 것이 많이 남아있다. 사도 바울이 마게도냐로
떠날 때쯤에 에베소에는 많은 문제거리들이 발생하였다. 특히 다른 교훈을 가
르치는 자들이 생겼다. 그렇다고 해서 에베소는 내버려야 할 도시가 아니며,
에베소 교회는 팽개쳐야 할 교회가 아니다. 비록 그곳에 수많은 문제가 벌어
진다고 해도 그곳은 여전히 사역해야 할 대상이다. 에베소는 사도 바울에게
사랑과 관심의 대상이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에 관심과 사랑을 보이기 위하
여 디모데를 남겨두었다. 그는 디모데가 가야 할 길을 보여주었고, 해야 할
일을 알려주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길을 고집하면서도 타인의 길을 열어주
었다. 나의 길을 고집하는 사람은 남의 길도 책임져야 한다.

바울에게는 에베소를 맡길만한 동역자가 있었다. 디모데는 바울의 길에 함
께 가는 사람이다. 디모데는 바울의 생각을 닮고, 언어를 닮고, 인생을 닮은
사람이다. 디모데는 바울의 뜻에 동의할 수 있는 사람이며, 바울의 길에 동행
할 수 있는 사람이며, 바울의 삶에 동참할 수 있는 사람이다. 디모데는 바울
이 일을 맡겼을 때 의심하거나 거부하지 않고 맡아줄 동역자이다. 디모데는
바울이 에베소를 맡기면 에베소를 맡고, 골로새를 맡기면 골로새를 맡을 사람
이다. 그는 바울이 맡기는 곳에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문제가 있어도 기꺼이
맡을 사람이다. 디모데는 신뢰가운데 바울과 함께 일하는 동역자이다. 사도
바울에게는 이렇게 함께 길을 갈 수 있는 디모데가 있었다. 그러므로 사도 바
울은 자신의 길을 혼자서 가지 않고 더불어 간다. 바울이 가는 길에는 함께
가는 벗이 있었다. 그는 일을 분배하며 사역을 나눈다. 그는 홀로 모든 것을
다하지 않는다. 권면을 받는 동역자를 가지고 있는 바울은 행복한 사람이다.

디모데에게는 에베소를 맡겨주는 지도자가 있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를
신뢰하였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뜻에 디모데가 동의하게 하며, 자신의 길에
디모데를 동행시키며, 자신의 삶에 디모데를 동참시켰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
를 도전하고 자극하는 지도자였다. 그는 디모데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았
다. 디모데에게 일을 시키고 일하도록 만들었다. 사도 바울은 다른 사람이 주
님을 위해서 움직이도록 만드는 지도자이다. 역으로 말하자면 디모데에게는
의심하지 않고 일을 맡기는 사도 바울이 있었던 것이다. 디모데에게는 이렇
게 함께 길을 가도록 요청하는 바울이 있었다. 디모데는 자신의 뜻을 정리해
주는 지도자, 자신의 길을 결정해주는 지도자, 자신의 삶을 인도해주는 지도
자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디모데는 자신의 길을 혼자서 가지 않고 더불
어 간다. 권면을 하는 지도자를 가지고 있는 디모데는 행복한 사람이다.

사도 바울에게는 기꺼이 가야 할 길이 있고, 사역을 나눌 수 있는 벗이 있
다. 그의 길은 그의 벗이 함께 가는 길이며, 그의 벗은 그의 길에 함께 가는
벗이다. 


빛에 가까운 어둠 (딤전 1:3-4)


그림자는 항상 빛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있다. 양지와 음지 사이의 거리는 그
리 멀지 않다.

정말 두려운 것은 거짓 교훈이 바른 교훈에 즉시 이어진다는 것이다. 곁길
(샛길)은 언제나 큰길에서 갈라진다. 거짓 길은 바른 길에서 시작된다. 이런
현상은 사도 바울이 세운 교회에도 나타났다. 사도 바울이 세운 교회에 다른
교훈이 일어난 것이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를 떠나 마게도냐로 가려고 할 때
이미 거짓 교훈이 교회에 발생하였다. 어떤 사람들이 다른 교훈을 가르쳤던
것이다. 이것이 얼마나 신속한 일인지 사도 바울은 마게도냐로 떠나면서 디모
데에게 명령을 할 수밖에 없었다. 더욱 두려운 것은 때로 거짓 교훈이 바른
교훈보다 더 강한 매력을 발휘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바른 길을 가는 것을
싫어하고 다른 길에 곁눈질을 한다. 사람들은 정로 (正路)보다 사로 (斜路)
에 이상한 매력을 느낀다. 몰래 먹는 떡에서 야릇한 맛을 느끼듯이 몰래 배우
는 거짓 교훈에 홀딱 넘어가며 형언할 수 없는 쾌감을 누린다. 이 땅에 이렇
게 끊임없이 거짓 교사들이 등장하는 것은 사람들의 이와 같은 경향 때문일
것이다. 사람들에게 곁길을 향한 강한 동경심이 있지 않고야 어떻게 이처럼
계속해서 거짓 교사들이 등장할 수 있겠는가. 사도 바울의 시대에 그랬다면
우리 시대에는 오죽하랴.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어떤 사람들을 명하여 다른 교훈을 가르치지 말게
할 것을 권면하였다 (딤전 1:3). 그러면 다른 교훈은 무엇인가. 사도 바울 자
신이 이에 대하여 설명을 주고 있다. 그것은 신화와 족보이다. 이 두 말은 상
이한 것이라기보다는 보충적인 것이라고 보는 것이 좋겠다. 신화의 성격은 신
약성경에 네 차례 나오는 진술을 살펴볼 때 어느 정도 발견할 수 있다. 무엇
보다도 신화는 망령되고 허탄한 것이다 (딤전 4:7). 망령되다는 것은 신화가
경건하거나 신앙적이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마치 할머니가 손주에
게 들려주는 옛날 이야기와 같이 별로 믿을만한 것이 되지 못한다 (본래 헬라
어에서 "허탄하다"는 말은 나이 많은 노파와 같다는 뜻이다). 따라서 신화는
진리와 반대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불구하고 말세에는 사람들이 진리에서 돌
이켜 신화를 좇게 된다 (딤후 4:4). 왜냐하면 신화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로 교묘하게 꾸며지기 때문이다 (벧후 1:16). 참으로 놀라운 것은 심지어 유
대인들 가운데서도 신화가 횡행한다는 사실이다 (딛 1:14). 위에서 말한 바
와 같이 신화와 족보가 서로 보충적인 것이라면, 신화의 내용은 족보에 관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족보는 사람의 계보를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고, 창
조의 설화를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다. 아마도 본문에서는 후자를 말하는 것
이라고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셨
다는 것을 믿지 못하고 다른 창조신화를 따르는 처사를 의미한다. 이런 처사
는 결국 변론과 분쟁과 다툼을 불러일으킬 뿐이다 (딛 3:9).

밝은 빛에 가장 근접하는 어둔 그늘이 사람들을 유혹하고, 바른 길에서 즉
시 파생하는 거짓 길이 사람들을 유인하는 힘은 대단히 강렬하다. 신화와 족
보로 이루어진 다른 교훈의 매력은 보통 강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마약과 같
은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신화와 족보에 맛이 들면 거기에서 헤어나지 못
하고 착념하게 된다. 다른 교훈에 대한 사람들의 집착력은 상상을 초월할 정
도로 억센 것이다. 그것은 마약중독과 같은 것이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거
짓 교훈을 바른 교훈보다 더 열정적으로 고집스럽게 추구한다. 본래 악에 대
한 추구는 선에 대한 추구 보다 지독하다. 그래서 사람을 바른 교훈에 들어서
게 하는 일보다 사람을 거짓 교훈에서 벗어나게 하는 일이 훨씬 더 어려운 것
이다. 이런 까닭에 사도 바울은 디모데를 에베소에 남겨두어 사람들이 신화
와 족보에 착념하지 않도록 바로 잡을 것을 엄중히 명령했던 것이다 (딤전
1:4).

지금도 어두움은 빛에 가장 가까이 있다. 진리와 가장 가까운 곳에 거짓이
있다. 우리가 잠시라도 경성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진리
곁에는 항상 거짓이 있다.

 

(딤전 1:4) 인생을 걸다

우리는 무엇에 인생을 걸고 있는가? 우리의 심장을 뜨겁게 만들고, 우리의 언
어를 힘있게 만들며, 우리의 행동을 강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쓸
데없는 것을 추구하는 데 아까운 시간을 허비한다. 아무런 유익한 결론이 나
지 않을 것을 논의하면서 귀중한 인생을 낭비한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에게도
이런 위험이 접근하였던 것이다. 신화와 족보에 관하여 논쟁하느라고 많은 시
간을 써버리고 귀한 인생을 소모하는 불행한 일이 초대교회를 망치고 있었
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신화와 족보가 무가치한 천착 (穿鑿)을 낳는다는 것
을 알지 못하였던 것이다. 신화와 족보는 부질없는 공상을 일으키고 무의미
한 추측을 자아낸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런 것은 변론을 내는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여기에 언급된 변론이란 무익한 연구를 가리킨다. 이것은 얼마
나 어리석은 소치인가? 게다가 신화와 족보가 결론없는 연구를 야기시킬 뿐
아니라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지 못하는 것이라면 얼마나 쓸모
없는 것인가?

사도 바울이 신화와 족보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은 이것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
이다. 그의 초점은 "하나님의 경륜 (오이코노미아)"에 놓여져 있다. 하나님
의 경륜이란 무엇인가? 사도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여러 차례 "하나님의 경
륜"에 관하여 말한다. 하나님의 경륜은 은혜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래서 그
는 이것을 "하나님의 은혜의 경륜" (엡 3:2)이라고 설명한다. 그런데 하나님
의 경륜은 본래 비밀이었다. 그래서 이것은 "비밀의 경륜" (엡 3:9)라고 불린
다. 이 비밀은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취었던 것이다. 하지
만 하나님의 경륜은 시간 속에서 성취되었다. 그래서 이것은 "때가 찬 [시간
의 충만의] 경륜" (엡 1:10)이다. 하나님의 경륜은 인간의 구원을 위한 것이
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것이 "너희를 위하여" (엡 3:2; 골 1:25) 주어진
것이라고 역설한다. 하나님의 경륜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기 위
하여 그의 사역자들에게 주어진다 (엡 3:2; 골 1:25). 정리해서 말하자면 하
나님의 경륜은 은혜로 말미암아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영원한 세계에서
세우시고 시간의 세계에서 실현하시는 하나님의 우주적인 법칙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경륜은 누구든지 찾아서 깨닫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경
륜은 오직 믿음으로만 알게되고 이해된다. 이 때문에 사도 바울은 "믿음 안
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이라고 말한다. "믿음 안에 있는"이란 말은 "믿음 안
에서 발견되는" 또는 "믿음 안에서 인식되는"이라는 의미이다. 믿음 없이는
결코 하나님의 경륜이 발견되지 않으며, 믿음 외에는 결코 하나님의 경륜이
인식되지 않는다. 믿음 밖에서는 어떤 노력도 하나님의 경륜에 도달하는데 실
패할 뿐이다. 오직 믿음이라는 행동반경 안에서만 하나님의 경륜을 추적하고
파악하는 것이 가능하다.

사도 바울이 신화와 족보는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지 못한다
고 말하는 것은 그의 관심이 어디에 있는지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사
도 바울은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는 일에 인생을 걸었다. 그
는 은혜로 말미암아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영원한 세계에서 예정하시고
시간의 세계에서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우주적인 법칙에 인생을 맡겼다. 하나
님의 경륜이 사도 바울의 심장을 차지하고, 언어를 지배하고, 인생을 다스린
다. 그에게는 사는 이유도 분명하며 죽는 이유도 분명하다. 사나 죽으나 사
도 바울의 유일한 위로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경
륜을 이룰 수 있다면 사는 것에 연연하지 않으며 죽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경륜에 인생을 걸었다.

우리는 무엇에 인생을 걸고 있는가? 우리의 심장은 왜 뛰고 있으며, 우리
의 육체는 왜 움직이고 있는가? 왜 우리의 몸에 는 피가 흐르고 있으며, 왜
우리의 입에서 말이 나오고 있는가?

(딤전 1:5) 더욱 근본적으로


동력이 없으면 동작도 없다. 그래서 동작보다 더 근본적인 것은 동력이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가 어떤 사람들에게 명령을 하도록 에베소에 머물게 하였
다. 디모데의 명령은 다른 교훈을 가르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면 디모데가
이런 명령을 내리는 근본적인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사랑이었다. "경계
(명령)의 목적은 ... 사랑이거늘". 명령하는 위치에 서 있는 디모데는 무작
정 다른 교훈을 말하는 사람들을 추방하고 말살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아서는
안된다. 오히려 디모데가 사도 바울에게서 받은 명령의 지위는 다른 교훈을
말하는 사람들까지도 치료하고 회복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디모데에게
있어서 사랑은 권위보다 더욱 근본적인 것이다. 사랑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
니고서는 권위가 교회를 안전하고 안정되게 만들 수가 없다. 사랑은 교회를
움직이는 동력이다. 사랑을 동력으로 하여 교회가 동작한다. 이렇게 볼 때 교
회의 문제는 권위가 없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 기반을 둔 권위가 없는 것이
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야기를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또 한가지 질
문을 던지려는 듯이 보인다. 사랑이 명령하는 권위의 동력이라면, 사랑의 동
력은 무엇인가. 다시 말해서 사랑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사도 바울은 이 사랑
에 어떤 출처가 있다고 설명한다. 사랑은 "정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
이 없는 믿음으로부터" 나온다. 사도 바울은 사랑의 기원을 세 가지로 나누
어 말한다. 이 구절 외에도 사도 바울은 목회서신에서 자주 마음과 양심과 믿
음에 관하여 언급한다 (마음 - 딤후 2:22; 양심 - 딤전 1:19; 3:9; 4:2; 딤
후 1:3; 딛 1:15; 믿음 - 30번 이상 나옴). 이 세 단어는 짝을 이루어 사용되
기도 한다 (딛 1:1; 딤전 1:19). 사도 바울은 정확하게 알고 있다. 사랑에는
동력이 있다는 것을. 그가 말하는 사랑은 마음과 양심과 믿음에서 나오는 것
이기 때문이다. 마음은 외면과 반대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랑은 외면적인
동기로부터 실천되어서는 안된다. 사랑은 내면적인 이유에 의하여 실천될 때
가치가 있다. 일반적으로 양심은 상식을 비롯하여 기억력을 넘어 자의식에 이
르기까지 포괄적인 의미를 가지는 단어이다. 목회서신에서는 양심이 대체적으
로 옳은 것을 따르려는 비판적인 의식을 가리키는 것을 사용된다. 사랑은 반
드시 진위를 분별할 수 있는 양심을 동인으로 삼아야 한다. 믿음은 단순한 신
뢰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구원론적인 성격을 가지는 단어이다. 왜냐
하면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와 연관이 있는 것으로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
게 하기 때문이다 (참조. 딤전 3:13; 딤후 1:13; 3:15). 사도 바울이 말하는
사랑은 이와 같이 구원론적인 믿음을 출처로 삼는다. 사랑 그 자체가 동력이
지만, 사랑은 또한 동력을 필요로 한다. 참된 사랑은 마음과 양심과 믿음에
서 나온다. 우리가 자주 잊는 것은 사랑에 동력이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망
각증세 때문에 우리는 사랑보다 더 근본적인 것으로 들어가지를 못한다. 따라
서 우리의 사랑은 당연히 값싼 사랑이 되고 마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근본적인 것을 추구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는 사랑의 동력
인 마음과 양심과 믿음을 말할 때도 그것들이 무엇을 동력으로 삼고 있는지
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마음은 정결함을, 양심은 선함을, 믿음은 거짓이
없음을 동력으로 삼는다. 사랑이 내부에서 출원한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
라, 정결함을 근본성으로 삼는 내부에서 출원하는 것이 중요하다. 마찬가지
로 사랑은 선함에 바탕을 둔 양심과 거짓 없음에 바탕을 둔 믿음에서 출원해
야 하는 것이다. 아는가? 정결함과 선함과 거짓 없음은 오직 하나님의 속성이
라는 것을. 사도 바울은 근본적인 것을 추구하는 여정의 마지막 자리에서 하
나님을 발견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의 가장 궁극적인 동력은 하나님에게
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살 수 있을 뿐이다. 동력이 없으면 동작
도 없다. 사도 바울이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이다. 하나님이 없으면 우리도 없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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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인물 / 다윗, 결정권을 늘 하나님께 드린 인물

 

 

 그리스도인으로서 꿈에서라도 한번 들어보고 싶은 말이 있다면 다윗이 하나님께로부터 들었던 “내 마음에 합한(맞는-개역개정) 사람이라”(행 13:22, 참조 삼상 13:14, 16:7)는 말이다. 다윗은 성경 인물들 가운데 한 사람의 일생으로서 가장 자세하게 그려지고, 가장 많은 지면이 할애되어 기록된 인물이다. 이와 같은 특징만으로도 다윗이 그만큼 큰 인물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지만 다윗의 신앙 단층들을 한 겹씩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가 얼마나 위대한 인물인지를 다시 보게 된다.

 

그러나 사무엘하 본문을 찬찬히 읽다 보면 우리는 도무지 위대하다고 할 수 없는 다윗의 모습도 만나게 된다. 대표적으로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범하고, 충신 우리아를 사지로 몰아넣은 것을 비롯해(11장), 아들 암논이 딸 다말을 강제로 취한 다음 미워하고 버렸음에도 불구하고 특별한 조치를 취하지 못하고(13장),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맨발로 몸을 피해야 했으며(15장), 압살롬의 죽음 앞에 슬픔에 젖는 모습(18~19장) 등이 그렇다. 이런 이야기들은 솔직히 좀 생략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들기도 하고, 다윗의 그러한 모습이 수치스럽다는 생각도 들게 된다.

 

물론 다윗에 대한 진솔한 기록은 그의 삶 전체를 뿌리째 휩쓸고 지나감으로써 정서적이고 영적인 내면세계의 동요까지 고스란히 보여 주기 때문에 오늘날 수많은 사람에게 꼭 필요한 영적 거울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다윗이 정말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요, 이스라엘 민족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요, 메시아의 모형으로 우뚝 설 수 있을 만한 인물인가? 다윗과 대조되는 불순종의 인물 사울과 비교할 때, 더 큰 악을 저지르고 더 큰 고통과 절망과 수치를 겪었다고 할 수 있는 다윗이 왜 위대한 인물로, 인류 역사를 관통하는 하나님의 거대한 구원의 역사 가운데 우뚝 설 수 있었던 것인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다윗이 이런 평가를 받을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그가 왕이지만 ‘왕이 아니기’를 끝까지 붙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 삶의 최고 결정권을 하나님께 드렸다. 다윗의 행동을 제한하고 이끌어갔던 기준은 자신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었다. 다윗은 사울을 죽일 수 있는 여러 번의 기회 앞에서도 단 하나의 이유, 즉 ‘여호와께서 기름 부어 세우셨다’(삼상 24:6, 26:9, 16; 삼하 1:14)는 이유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았다. 결정권이 자신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다는 자신의 믿음을 보여 준 것이다.

 

그는 자신이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기는 했지만 진짜 왕은 오직 하나님이시며, 자신은 하나님의 종일뿐임을 고백했고, 그 고백대로 살았다. 블레셋이나 아말렉과의 전투를 앞두고 전쟁을 시작할 수 있는 타당한 이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먼저 ‘여호와께 묻는다’(삼상 23:2, 30:8; 삼하 2:1, 5:19, 23, 참조 삼상 22:10~15). 만일 어떤 사람이 결정을 하기에 앞서 누군가에게 물어본다면 그것은 그 사람이 자신보다 권위가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다윗은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 왕이시라는 것을 삶으로 보여 주었다.

 

결국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사람이란 인간적인 차원에서 착하다거나 도덕적으로 모범이 되는 사람이라는 뜻이 아니라, 왕은 오직 하나님뿐이시라는 진리를 따라 자신을 이해하고 살아가는 사람, 그래서 결정권을 늘 하나님께 드리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우리 모두 사무엘서가 가르치는 다윗의 모습을 통해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되는 은혜를 간구한다. 

- 날마다 솟는 샘물 박삼열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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