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인물 /  ‘오직 믿음’의 사람 바울, 율법 완성의 길을 말하다

 

 

바울이 기독교와 교회에 끼친 영향은 그야말로 절대적이다. 그는 예수님이 왜 구세주가 되시는지, 십자가와 복음이 무엇인지, 구원이 어떻게 가능한지, 교회가 무엇인지, 은사와 직분은 무엇인지 등 기독교 교리는 물론, 그리스도인의 교회 및 신앙생활의 기둥들을 세웠다고 할 수 있다. 그중에서도 믿음으로 얻는 구원의 도리를 로마서만큼 잘 말하고 있는 책도 없을 것이다.

 

믿음의 길, 새로운 삶의 길

 

인간에게 가장 심각한 문제인 구원이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된다는 것을 가장 선명하게 말하는 로마서에서 바울은 율법의 폐기가 아니라 ‘율법의 완성’을 말한다.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까지 바울은 그야말로 율법 전문가였다. 율법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학자로서의 전문가일 뿐 아니라 율법을 지켜내는 의지와 행함에 있어서도 최고의 전문가였다(행 22:3; 갈 1:14; 빌 3:6 등). 그런 그가 ‘율법으로가 아니라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의인이 되고 구원을 얻는다는 것을 확신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가르치는 자가 됐다는 것은 참으로 놀랍다.

 

그런데 바울의 가르침으로 그리스도인들이 구원의 확신을 얻기도 하지만, 종종 행함의 문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잘 알지 못한 채 엉거주춤해 할 때가 적지 않다. 이런 이해와 상황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오직 믿음’이기 때문에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하다는 방종이라는 극단적 입장에서부터, 그래도 그리스도인으로서 요구되는 행함을 지켜야 한다는 새로운 율법주의적 입장까지 그 중간 어디쯤에 서 있게 하곤 한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12:1)라는 말씀으로 시작하는 이번 호 묵상 본문에서 바울은 이 문제에 대해 명쾌하게 가르친다. 율법이 무엇인지를 가장 확실하게 아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바울은 여기서 율법의 완성을 말한다.

 

그것은 ‘사랑’이다.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13:8). 바울은 이 가르침을 반복한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13:10).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이전 율법의 전문가로 있을 때조차 찾지 못했던 율법 완성의 길을 ‘오직 믿음’의 복음 안에서 발견한 것이다. 바울은 편지를 쓸 때마다 주로 전반부에서는 복음의 진리를 서술하는 교리를 다루고, 후반부에서는 행동해야 할 것들을 명령하는 윤리를 다룬다. 종종 이 둘 사이의 관계가 어떤 것인지는 오래된 신학적 난제로 지금도 첨예한 토론의 주제가 되고 있다.

 

하지만 바울에게 이 둘은 하나다. 로마서에서 이른바 윤리에 관한 내용을 시작하는 12장은 11장까지의 ‘이신칭의’ 교리에 기초해 있으며, 동시에 필연적 지향점이다. 이 윤리는 율법으로부터는 나올 수 없는 윤리다. 즉 교리는 윤리를 위한 것이고, 윤리는 교리 때문에 가능하다. 따라서 바울은 오직 믿음의 위대한 교리에서 율법의 완성을 말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율법의 완성은 사랑

 

바울은 그 자신이 이신칭의의 복음을 통해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영적 예배’(12:1)를 드린 인물이었다. 이 영적 예배는 로마서 12~15장을 통해 잘 드려진다. 이 4개의 장에서 바울이 말하는 영적 예배란 한마디로 ‘이웃을 향한 사랑’이다. 그리고 이것은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는 것’(15:5)이다. 바울은 누구보다 이 예수를 본받으려 한 사람(고전 11:1; 엡 5:1; 빌 3:17 등)이었다. 이 때문에 바울은 ‘하나님의 일을 자랑하는 것’이 주된 관심이기도 했지만 이것조차 오직 그리스도께서 역사하신 것이라고 말하는 인물이었다(15:17~19).

 

결국 바울이 말하는 ‘믿음으로’는 ‘사랑으로’를 뜻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본받아서 말이다. 이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바울은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로마교회 성도들의 이름을 적어도 30명 이상 외울 뿐 아니라, 그들의 형편들까지 속속들이 나열하면서 목자의 심정을 드러내는 것으로 로마서를 마무리한다. 로마서의 남은 본문 묵상을 통해 이신칭의의 은혜가 율법의 완성인 사랑의 길로 나타나기를 기도한다.

 

- 박삼열 목사 : 날마다 솟는 샘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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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인물 / 다니엘, 적진에서도 기도와 말씀이 답임을 외치다


 

다니엘은 한마디로 ‘기도와 말씀의 사람’이다. 그것도 적진 한가운데서 온몸으로 기도와 말씀의 신앙을 외친 인물이다. 기도와 말씀, 이 두 가지는 사도들이 결정한 초대 교회 성도들의 신앙생활의 방향(행 6:4)인 동시에, 오늘날 우리에게도 매우 중요한 신앙생활의 두 기둥이다. 이 때문에 다니엘을 탐구하는 것이야말로 우리에게 필요하고 중요하다.


다니엘, 기도의 사람

 

다니엘은 유다의 왕족 혹은 귀족 출신이었고(1:3), 흠이 없고, 용모가 아름다웠으며, 지혜와 통찰력이 있는 인물이었다. 또한 지식에 통달하고 학문에 익숙해 왕궁에서 일할 만한 자였다. 게다가 당대 최고의 학문인 갈대아 사람의 학문과 언어를 배웠고, 왕궁에서 훈련을 받았다(1:4~5). 결과는 괄목할 만했다. 바벨론 제국의 최고 인재들보다 10배나 뛰어났다(1:18~20). 이쯤 되면 얼마든지 기도에 그렇게 목숨 걸지 않을 법도 하다.

 

하지만 다니엘은 기도의 사람이었다. 조국 예루살렘과 하나님의 성전이 멸망하는 것을 두 눈으로 목격했고(1:1~2), 자신은 적국 바벨론의 포로가 된 현실(1:4)이 다니엘로 하여금 기도밖에는 할 것이 없는 인물로 준비시켰는지도 모른다.

 

한번은 느부갓네살 왕이 자신이 꾼 꿈을 알아내지 못하는 바벨론의 모든 지혜자들을 다 죽이라는 명령을 내린다. 다니엘은 이 일을 친구들에게 알려 기도하게 하고, 자신도 하나님께 엎드린다(2:12~18). 그리고 밤에 환상으로 임한 하나님의 대답을 듣는다.

 

다니엘에게 닥친 위기의 정점은 다리오 왕 시절 고관들이 일치단결해 빈틈없이 꾸민 계략이었다. 그는 사자 굴에 던져졌다. 그런데 이 덫이 놓이게 된 이유는 다름 아닌 기도였다.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6:10~12). 하지만 이 결정적 위기는 계략을 꾸민 자들이 사자의 밥이 됨으로써 극적이지만 필연적 반전으로 끝이 난다.

 

더 나아가 다니엘의 기도는 하나님께서 하실 일에 대한 마음 깊은 번민이었고(4:19, 7:28), 아픔이었으며(8:27), 동족의 죄로 인한 회개요 금식이요 슬픔이었다(9:3~20, 10:2~3). 기도가 만만한 게 아님을 단번에 느끼게 하는 대목이다. 그럼에도 확실한 것은 그리스도인이라면 기도의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는 결론이다.

 

주의할 것은 그 기도가 자기 자신을 드높이는 수단이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고 믿는 믿음의 반응으로서의 기도라는 점이다. 최고의 석학 다니엘이 자신의 대답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반복해 고백한 것이나(2:28, 30), 사자 굴에서 살아 나온 다니엘에 대해 “이는 그가 자기의 하나님을 믿음이었더라”(단 6:23)고 덧붙인 것을 보면 그렇다.

 

다니엘, 말씀의 사람

 

다니엘에게서 발견하는 또 하나의 특징은 그가 철저히 말씀의 사람이 되려고 했다는 점이다. 다니엘은 철두철미하게 하나님께 의논했고,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듣고서야 움직였다. 하나님의 뜻, 곧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그의 삶을 형성하는 근거요 이유가 됐다는 것이다(1:17). 이처럼 말씀의 사람은 반드시 기도와 함께 가는 것이다.

 

게다가 구약 시대에 환상이 하나님의 뜻을 말씀하시는 특별계시의 중요한 수단이라는 점에서 다니엘이 본 환상들은 결국 그가 말씀의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 준다. 물론 그가 환상에만 의존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다니엘은 ‘책’을 통해 여호와께서 말씀으로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알려 주신 그 연수를 깨달았다(9:2).

 

다니엘의 회개와 금식과 슬픔의 기도는 ‘주의 법도와 규례를 떠남’ 때문이었다(9:5). 이같이 율법을 소홀히 한 백성들의 죄를 다니엘은 더욱 사실적으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를 듣지 아니한 것’이라고 했고, ‘여호와께서 그의 종 선지자들에게 부탁해 우리 앞에 세우신 율법을 행하지 아니함’이라고 애통해 한다(9:10~11, 14).

 

다니엘은 말씀에 철저한 인물이었고, 기도로 온전히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복종시킨 인물이었다. 환상도 그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계시였다. 이런 다니엘의 모습을 보면서 기도와 말씀의 세계를 새롭게 열어가기를 간구한다.

 

- 날마다 솟는 샘물 박삼열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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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인물 / 디모데, 어떻게 그리스도의 좋은 병사가 됐는가?

 

 

우리는 사도 바울이 없는 신약의 교회를 도저히 생각할 수 없다. 그런데 이 위대한 사도 바울과 함께했던 여러 동역자들을 고려하지 않고는 충분히 그는 사역을 이해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 가운데 디모데는 단연 앞선 동역자다. 사도행전과 서신서들을 볼 때 바울의 사역에 디모데가 없었다면 신약의 교회는 세워질 수 없었다. 바울의 사역에, 또 초대 교회가 세워지는 데 있어 꼭 필요했던 인물인 디모데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이번 달에 묵상하는 디모데전·후서를 중심으로 디모데를 탐구해 보고자 한다.

 

디모데, 성경을 만나다

 

바울에게 ‘아들’로 불리는(딤전 1:2, 18; 딤후 1:2, 2:1; 참조 고전 4:17) 디모데가 성경에 처음 등장하는 곳은 사도행전 16장이다. 바울은 2차 전도여행 중 루스드라에 갔을 때, 거기서 ‘디모데라 하는 제자’(행 16:1)를 만났다. 이것이 ‘믿음 안에서 참 아들 된’ 디모데의 등장에 대한 첫 기록이다. 첫 기록에서 그를 ‘제자’라고 호칭한 것은 의아할 정도다.

 

우리는 사도행전의 이 본문에서 디모데에 관해 주목해야 할 또 하나의 기록을 보는데, 그것은 “디모데는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 있는 형제들에게 칭찬받는 자”(행 16:2)라는 것이다. ‘제자’라는 호칭에 이어 그를 아는 사람들에게 ‘칭찬받는 자’로 기록됐다는 점도 눈에 띈다. 디모데는 과연 무엇 때문에 그렇게 불릴 수 있었을까?

 

첫 번째는 그가 성경을 만났기 때문이다. 그 흔적을 디모데후서에서 발견할 수 있는데, 그는 어머니 유니게와 외할머니 로이스에게 영향을 받았다. 바울은 디모데후서의 중심 메시지이자 모든 사역자에게 매우 중요한 지침인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딤후 1:8)는 말씀으로 디모데에게 교훈한다. 영적 부담이 큰 이 도전을 바울은 디모데가 어머니와 외할머니로부터 믿음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근거로 제시한 것이다.

 

디모데가 받은 영향을 한마디로 말하면 바로 ‘구약’이다. 구약성경이 디모데에게는 예수님을 향한 믿음을 갖도록 할 뿐 아니라 제자요, 칭찬받는 자로 변하도록 한 것이 분명하다. 이런 점에서 디모데후서에서 바울이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 3:16~17)라고 쓴 것은 매우 적절해 보인다. 하지만 디모데가 ‘제자’요, ‘칭찬받는 자’가 될 수 있었던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디모데, 바울을 만나다

 

두 번째는 그가 사도 바울을 만났기 때문이다. 바울이 디모데를 동역자로 부른 곳이 바울의 2차 전도여행 때 들린 루스드라였는데, 이때 이미 디모데는 ‘제자’로 불리고 있었다. 그렇다면 디모데는 언제 제자가 됐을까? 바울의 1차 전도여행을 기록한 사도행전 14장을 보면, 바울이 루스드라를 방문해 복음을 전한다. 이때 제자들이 많이 생겨났는데, 디모데도 그 가운데 있었음이 틀림없다.

 

“복음을 그 성에서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으로 돌아가서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행 14:21~22). 그러므로 디모데가 ‘제자’요, ‘칭찬받는 자’가 됐던 것은 바울을 만나 그를 통해 복음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바울은 디모데전·후서에서 디모데에게 십자가 복음을 반복해 강조할 수 있었고(딤전 1:3~20, 2:5, 6:3; 딤후 1:10, 2:8~13 등), ‘내게 들은 바’ 혹은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딤후 1:13~14), 곧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고난을 받으라고 도전할 수 있었다. 이 도전을 받아들여 디모데는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딤후 2:3)로 섰던 것이다.

 

우리는 디모데를 통해 말씀의 중요성을 재확인하는 동시에 영적 지도자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발견한다. 복음은 반드시 사람, 그리스도의 제자 된 믿음의 사람을 통해 또 다른 사람에게 전해진다. 교회는 바울과 디모데처럼 복음을 받고 전하는 일꾼들을 통해 세워지고 이어진다. 디모데전·후서를 묵상하는 동안 성경을 향한 뜨거운 마음이 일어날 뿐 아니라, 복음을 모르는 또 다른 사람이 제자 되도록 섬기는 하나님 나라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기도한다. 

 
- 날마다 솟는 샘물 박삼열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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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은 꾸란 외에도 무함마드의 언행이 담긴 하디스에 근거하여 행동한다.

꾸란에서 알라는 무슬림들에게 무함마드의 말에 따를 것을 명령하고 있기에

무슬림들은 하디스의 가르침에 복종한다. 

 

 

무함마드가 메디나를 다스리던 시절, 사람들은 논쟁을 해결하려면 무함마드에게 갔다.

어느 날 한 무슬림 남자가 유대인 남자와의 사이에서 생긴 문제를 판결해줄 누군가가 필요했다.

유대인 남자가 말했다.

"선지자 무함마드에게 갑시다. 그가 판결해줄 것이오." 

 

 

무슬림 남자는 이를 거부하고 무함마드의 군대 지도자들 중 한 사람이자 유대인을 싫어한다고 알려진

우마르 이븐 알-카탑에게 가서 판결을 구하자고 말했다.

우마르가 말했다. "나한테 오지 말고 선지자 무함마드에게 가시오."

무슬림이 말했다. "아닙니다. 당신이 판결해주십시오."

  

그러자 우마르가 "잠깐 기다리시오."라고 말한 뒤

자신의 집 안으로 들어가 칼을 갖고 나와서 무슬림 남자의 목을 베어 죽였다. 

 

이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매우 슬퍼했는데,

그 이유는 무슬림들은 다른 무슬림을 죽여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무함마드도 슬퍼했다.

우마르는 무함마드가 가장 아끼는 충직스런 부하였기 때문이다.

그때 무함마드는 또 다른 계시를 받는다.

  

 

"그들이 그들 사이에 일어난 모든 분쟁을 그대(무함마드)에게 가지고 와서 판결해달라고 부탁하고,

그대의 판결에 아무런 불만 없이 전적으로 그 판결을 받아들일 때에야

비로소 그들에게 믿음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전까지는 참된 무슬림이 아니다. (꾸란 4:65, 4:59)

  

다시 말해 무함마드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판결을 구하는 사람은

'믿음이 없는'사람이므로 그는 무슬림이 아니다.

따라서 우마르가 죽인 사람은 무슬림이 아니었기 때문에 죽여도 괜찮다는 것이다.

 

무슬림들은 알라의 계시를 직접 들을 수 없으므로

무함마드의 말을 거부해서는 안 된다.

  

만일 무슬림들이 자신의 종교에 대해 알고 있다면

이와 같은 내용도 인지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저 전승에 의해 이슬람을 믿는 무슬림들이라면

이것을 잘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슬람에 대해 부정확한 묘사를 하는 이유는

하디스의 가르침을 염두에 두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마치 무함마드가 이슬람의 대표자가 아닌 것처럼 행동한다.

무슬림의 시각에서 이런 태도는 이단이다. chw

 

- 마크 A. 가브리엘 <이슬람과 유대인 - 그 끝나지 않은 전쟁>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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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경전 한글꾸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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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경장 (알파티하)

 

1. 자비로우시고 자애로우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2. 온 우주의 주님이신 하나님께 찬미를 드리나이다

3. 그분은 자애로우시고 자비로 우시며

4. 심판의 날을 주관하시도다

5. 우리는 당신만을 경배하오며 당신에게만 구원을 비노니

6. 저희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7. 그 길은 당신께서 축복을 내리신 길이며 노여움을 받은 자나 방황하는 자들이 걷지않는 가장 올바른 길이옵니다



메카에서 계시된 7절로 자주 낭송되는 꾸란의 진수다. 몇번이고 반복해서 읽을 7절이라고 꾸란(15:87)은 언급하고 있다. 무슬림이 하루 다섯 차례의 예배를 통해서 최소한 17회 이상 암송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본장을 암송하지 않는 예배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이바다 이븐 사미트」는 전하고 있다.

본 장은 이슬람의 기본원리를 비롯하여, 우주만물의 운행질서를 주관하는 주체자에 대한 인간의 태도, 내세관, 경배와 구원의 대상자,인류가 걸어야 할 바른 길, 무한한 사랑과 자비의 수여자이신 하나님의 속성, 신의 노여움을 받았던 민족과 방황했던 민족에 대한 역사적 사건 등을 언급하고 있다.

본 장의 명칭은「알파티하」외에도 책중의 책(Ummul Kitab), 찬양(alHamdu), 질병의 치료(al Shifa'a), 무궁무진한 지식의 창고(al Kanj) 등 12가지 이름을 갖고 있다.

모든 예배는 본 장이 제일 먼저 암송됨으로써 시작되고 예배의 효력이 발생한다. 즉 본 장이 암송됨으로써 신앙의 문이 열린다는 의미에서 개경장(Fatiha, or the Opening Chapter)이라 불리워지게 된 것으로 본다. 본 장이 서두에 있으나 그것은 계시된 순서가 아니라 편집상의 순서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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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최영길교수/꾸란해설 번역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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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쓰밀라 히르라흐마 니르라힘

 

꾸란은 인류가 가지고 있는 마음이나 영혼, 정신, 그리고 육체라고 하는 특징을 감안해서, 이들 인류의 훌륭한 가치에 상응한 형태로 최고로부터 내려진 것입니다.

오늘날 10억이라는 사람들이 따르고 있는 꾸란에는, 알라로부터 받은 영원한 동시에 보편의 원리원칙이 기록되어 있으며, 최단거리로 행복으로 연결되는, 빛으로 비추어진 길로 사람들을 데려가고 있습니다.

꾸란은 지금까지 세계를 인솔하고 장려한 문명을 발달시킨 많은 사회에서 빛의 근원으로서의 역할을 다해 왔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사회는 현재에 이르기까지 몇천몇만이라는 학자나 철학자, 사상가를 배출해 왔습니다. 이 의미에서, 이 이외의 어떠한 규범도 꾸란의 규범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처음으로 계시가 이루어진 날 이래, 꾸란은 수많은 이의나 비판에 처해져 왔습니다. 그러나 꾸란은 상처를 입는 일 없이 항상 승리에 빛나고 있습니다.

꾸란은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결정화되어, 정신을 개발하고, 시종일관 진실을 명시합니다. 한 송이의 꽃 안에 우주의 온갖 미를 찾아내는, 그리고 한 방울의 물방울에서 세찬 폭풍우를  마음속에 그릴 수 있는 신자만이 그 참다운 용모를 알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랍인뿐만 아니라 아랍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외국의 언어학자・문학자는 꾸란의 운문을 듣고 칭찬한 나머지 항복이라는 마음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진정함을 인식하고 내용을 이해한 자는 이 웅변적인 걸작 앞에서 복종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무슬림들은 꾸란에 확신을 갖고, 마음속으로부터 믿는 것을 통해서만 단결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할 수 없는 자는 무슬림일 수 없고, 또 동료들과 강고한 약속을 수립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신앙이란 양심의 문제이다" 라는 의미는, "나는 알라를 믿으며, 그 예언자와 꾸란도 믿습니다" 라고 혀와 양심의 쌍방에 따라서 단언합니다. 이것들을 이해한 연후에 행해지는 숭배행위의 하나 하나가, 이 선서를 진실로 증명해 줍니다.

인류가 무지와 불신앙이라는 야만함의 한가운데에서 바둥거리며 괴로워하고 있을 때에 꾸란은 이 세상에 용솟음치며 나와서, 계몽이라는 홍수에 의해 온세계를 빛으로 흘러 넘치게 했습니다. 꾸란은 비류가 없는 방법으로 혁명이 일어나게 했습니다. 증인을 찾으라면 역사가 웅변적으로 이야기해 줄 것입니다.

꾸란은 인류가 존재하는 의미와 그 성질, 진실과 지혜, 그리고 신(神)의 본질과 속성・아름다운 이름에 대해서, 말할 수 없이 균형잡힌 방법으로 가르쳐 보여줍니다. 이 점에서 이 보다 우수한 책은 달리 없습니다. 학식있는 성자가 널리 알린 예지나 참다운 현인들이 보인 철학에 접하면 일목요연할 것입니다.

꾸란은 진짜의 정의, 참다운 자유, 균형잡힌 평등, 선량함, 존경, 미덕, 그리고 자비의 실천을 모든 창조물에게 명령하고 있는 유례가 드문 책입니다. 그것은 동시에, 억압과 다신교, 부정, 무지하게 있는 것, 오직(汚職) , 이자, 거짓말, 그리고 위증을 금지한 비류가 없는 책이기도 합니다.

또 꾸란은 고아와 가난한 사람, 억압된 사람들을 옹호하고 있는 유일한 책입니다. 그리고 왕도 노예도, 사령관도 병졸도, 원고도 피고도, 똑같은 의자에 앉혀서 재판을 받게 하는 오직 하나의 책입니다.

꾸란이 미신의 근원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무명시대 아랍인이 14세기전에 했던 말을 되풀이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와 같은 견해는 지혜와 참다운 철학을 우롱하는 것입니다.

꾸란과 그것이 가져온 것을 비판한다면 그 사람들은, 인간생활에서의 질서와 조화, 평화와 안전을 아주 단기간, 아니 한 순간이라도 유지할 수 있을 것 같은 어떠한 방법을 갖고 올 수 있는 것일까요? ・・・꾸란과는 관계가 없는 원리원칙을 바탕으로 한 문명의 비참함, 불안정을 접할 때 마다, 또 빛을 빼앗겨 곤란에 처하고, 타격을 받아 신음소리를 내는 수많은 마음을 눈으로 볼 때 마다, 그들처럼 비뚤어진 생각・옹고집은 전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인류에게 있어서 최고로 질서가 있는, 정연한 생활이라는 것은 꾸란의 숨결이 가져 오는 생활입니다. 실제, 오늘날의 세계에서 보편적으로 높은 평가・칭찬을 받고, 훌륭하다고 여겨지는 일 중에는 몇세기도 전에 바로 꾸란속에서 장려되던 일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무슬림이 비참한 상황에 놓여있는 것은 누구의 탓일까요?

마치 직업인냥 꾸란을 계속 공격하는 사람들은 대개, 그 내용에 관해서는 애매하고 표면적인 지식밖에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꾸란을 면밀하게 알아보지 않고, 또는 읽어 보는 것 조차 하지 않고 스스로의 생각을 제멋대로 내퍼붓는 것은 짓궂지 않습니까? 그와 같은 사람들의 태도와 일부 무지한 사람들이 실증적 과학에 대해서 보이는 옹고집과의 사이에 전혀 차이가 없습니다. 우리들은 사람들이 진실에 눈을 떠 주기만을 기다릴 수 밖에 없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언자 무함마드 (그에게 평화와 축복이 있으소서)를 믿고, 그리고 꾸란을 믿는 사람은 알라에 대한 신앙을 갖게 됩니다. 꾸란을 믿지 않는 사람은 예언자 무함마드를 믿지 않는 것이 되고, 예언자 무함마드를 믿지 않는다면 알라를 믿지 않는 것이 됩니다. 이것이 무슬림이라고 하는 것의 본질적인 양상입니다.

꾸란의 힘에 의해서 사람들은 최고의 수준, 즉 알라께서 말을 걸어 주시는 것  같은 지위에까지 이를 수 있게 됩니다. 이 수준에 도달해 있음을 의식할 수 있는 사람들은, 주님이 꾸란을 통해서 자기에게 이야기해 주시는 것을 귀로 들을 수 있습니다. 그들이 만일, 저는 맹세코 알라와 이야기할 수 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결코 거짓말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들은 아직 이 세상에 살고 있는데, 꾸란의 계몽적인 세계에 발을 들여 놓을 수 있다면, 우리들이 무덤, 그리고 이 세상과 저 세상의 중간지점을 마치 통과하고 있는 중인 것 같이 느낄 것입니다. 그리고 또, 최후의 심판의 날을 지나 시라-트의 다리 (천국으로의 다리)를 건너는 체험, 지옥에 대한 공포에서 오는 격심한 몸서리, 천국의 완만한 언덕에서 나아가는 평온한 걸음 이라고 하는 경험들을 몸소하게 될 것입니다.

무슬림이 꾸란을 이해하고 깊은 곳에서 그것을 감지하는 것을 방해한 자들은, 그 결과 무슬림을 이슬람의 정신과 정수로부터도 멀어지게 하는 데에 성공한 것입니다.

가까운 장래에, 지식과 기술, 예술의 추세는 꾸란이라는 대양을 향하는 격류가 되고, 실제 그것들의 근원이었던 그 대양으로 흘러들어가서 융합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인류는 칭찬과 경악으로 그것을 직접 보게 될 것입니다.

장래에 꾸란의 시대가 도래하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과거, 현재, 미래를 동시에 지켜보시는 분의 말씀에 의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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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과 기독교 비교

 


우리나라가 이제는 이슬람에 대하여 전혀 안전하지 않다는 데 모두 공감하는 듯하다. 2007년 아프가니스탄에서의 한국인 피랍과 살해, 그리고 2008년 모 공영방송의 <신의 길 인간의 길>은 이슬람도 기독교도 모두 왜곡된 채 방영되었고 2010년과 2011년은 정부가 면세를 골자로 한 수쿠크(이슬람 채권) 법을 통과시키려다 이 법안의 내용이 우리나라 세법에 안 맞는다하여 아직까지 본회의에 상정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정작 기독교인들은 무엇을 어떻게 하여야 할까? 이슬람이 참 중요하다고 하나 모두가 다 이슬람을 배워야 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이슬람에 대하여 전혀 지식이 없다보니 누군가이슬람에 대하여 말하면 금방 그쪽으로 쏠리고 만다. 심지어 아랍어를 전공하는 대학원 학생들도 이슬람에 대하여 정확하게 모른다. <이슬람은 반대하고 무슬림은 받아들이어야 한다>는 이상한 논리가 있다. 말이 그럴 듯하다. 그러나 무슬림들을 만나면 이슬람이 무슬림이고 무슬림이 이슬람이라고 한다. 다른 것은 이슬람이 종교를 가리키고 무슬림은 그 종교를 믿는 사람을 가리킨다. 그래서 우선 이슬람과 기독교의 비교는 다음과 같은 사항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 첫째, 무슬림이 본 이슬람과 기독교인이 본 이슬람을 따로 적어보는 것이다. 이슬람에 대한 기독교인과 무슬림의 시각이 다른 경우가 많다. 둘째, 기독교의 장점을 이슬람의 약점과 비교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동등한 저울 위에 올려놓고 서로를 비교하는 것이 공정한 태도이다. 셋째, 이슬람과 꾸란에서 사용되는 용어를 기독교용어로 바꾸지 말고 꾸란에 나오면 꾸란 그대로 사용하고, 성경과 기독교에서 사용하는 용어를 이슬람용어로바꾸지 말고 성경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다. 가령 꾸란에는 <이싸>라고 되어 있는데 성경의 예수와 다른 이싸를 굳이 <예수>라고 부를 필요가 없다. 꾸란의 알라와 기독교의 하나님이 서로 다른 부분이 있으므로 꾸란의 알라는 <알라>라고 하고 기독교의 하나님은 <하나님>이라고 한다. 성경의 아브라함과 꾸란의 이브라힘, 성경의 솔로몬과 꾸란의 술라이만 등으로 구분한다. 이슬람의 <지하드>는 <성전: 거룩한 전쟁>이 아니고 <이슬람식 투쟁>이고, <버즈 두바이>는 아랍어 그대로 <부르즈 두바이>라고 해야 한다.

무슬림들은 " 이슬람 역시 구약을 인정하고 이로부터 파생되었다. 이슬람 유대교 기독교의 뿌리는 같다"고 하는데 이 역시 정확하지 않다. 오늘날 무슬림들은 기독교인들의 성경이 변질되어 있다고 믿고 이슬람의 꾸란만이 최종 진리라고 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오직 우리가 알고 있는 성경 이외에 진리는 없다. 유대교와 기독교는 뿌리가 같을 수 있으나 이슬람은 그 뿌리가 다르다. 무슬림들은 이슬람과 기독교와 유대교가 아브라함의 종교라고 하지만 무슬림들이 믿는 꾸란 본문에는 < 이브라힘은유대교인도 아니고 기독교인도 아니고 하니프(일신론자)>라고 했다. 무슬림들은 자신들이 믿는 꾸란 속에 이브라힘이 유대교도 아니고 기독교도 아니라고 하면서 오늘날 무슬림이 기독교, 이슬람, 유대교의 3 종교가 뿌리가 같다고 하는 것은 서로 모순되는 말이다. 결국 우리의 이슬람에 대한 연구는 꾸란에서 뭐라고 하는지, 그리고 과거 이슬람학자들이 뭐라고 하는지 그리고 오늘날 무슬림들은 뭐라고 하는지 총체적으로 알아야 우리가 이슬람에 대한 정답을 말할 수 있다. 또 아랍 땅에 살고 있는 기독교인 혹은 무슬림이 아닌 사람들의 자료들도 참고해야 하고 서구 학자들의 이슬람에 대한 책들도 참고해야한다. 무슬림이 말하는 내용에는 왜곡된 부분도 있기 때문이다. 한 가지 더 우리가 알 것은 모든 무슬림이 이슬람을 다 잘 아는 게 아니고 한국말로 번역된 꾸란이 부정확한데도 기독교인들이 이 틀린 꾸란을 인용하는 것은 <이젠 그만 두어야 한다>. 제발 틀린 꾸란을 인용하여 글을 쓰지 마시라. 만일 쓰고 싶다면 그 틀린 인용문을 빼고 여러분이 이해하는 내용을 그냥 쓰시라. 넷째, 이슬람에 대하여 말할 때 오직 무슬림들의 생각만을 전하면 이슬람의 참 모습을 알기 어렵다. 그러므로 무슬림이 말하는 이슬람과 무슬림이 아닌 사람이 이슬람에 대하여 말하는 내용을 모두 써 보아야 한다. 꾸란을 읽어보면 메카에서 무함마드는 평화적인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만 메디나로 간 뒤에는 무함마드는 여러 차례 전쟁을 통하여 이슬람을 알리고 이슬람을 믿으라고 했다. 그러므로 이슬람을 전체적으로 보아야 한다. 어느 한 시기가 아니라 역사와 오늘의 이슬람을 모두 통털어 살펴봐야 그 본색을 알 수 있다. 다섯째, 우리가 이슬람연구를 하면서 이슬람만이 갖는 문화가 기독교에 미치는 영향 그리고 한국인들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들을 연구하고 또 자주 언급해야 한다. 오늘날 한국에서 이슬람이 왜곡된 것은 이슬람과 무슬림에 대하여 한쪽 면만 보여주는 매스컴의 영향이 크고 무슬림이 이슬람을 왜곡하고 비무슬림이 이슬람을 잘 모르고 쓴 내용이 이슬람을 바로 알지 못하게 한다. 여섯째, 우리의 이슬람, 무슬림에 대한 접근이 성경적인가를 확인해 보아야 한다.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인격적이고 감정적인 면까지도 다루셔서 성경을 통해서 기독교인들이 이슬람을 바르게 이해하도록 도와주실 것이다. 무슬림과 이웃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것이 뭘까? 꾸란, 이슬람의 용어는 성경, 기독교의 용어와 다른 경우가 많다. 일곱째, 이슬람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 등의 통합적인 제도(system)이지만 무슬림을 사람(People)으로 만나는 것이 필요하다. '무슬림'으로 그들을 만나기보다는 '사람'이라는 차원에서 만나는 것이다. 즉, 무슬림을 이슬람교의 대표로서 인식하고 만나는 것이 아니라 한 개인으로 그들과 인사를 나누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무슬림을 종교(이슬람)가 아닌 한 <인간people>으로 다가가서 어떻게 그들과 관계를 맺어갈 것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렇다고 우리가 이슬람의 진실fact을 왜곡해서도 안 되고 그 진실을 덮어두어서도 안 된다. 그렇지만 우리가 이웃을 알고자 하면 그의 지적인 수준 뿐만 아니라 그의 삶까지도 살펴봐야 한다. 무슬림에게 기독교를 그저 소개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무슬림의 마음 속 깊이 자리 잡고 있는 편견과 잘못된 선입견까지도 복음이 다루어줘야 한다. 우리의 삶이 그리스도의 인격과 삶이 드러난 모습으로 다가가면 어떨까? 무슬림들과 순수한 마음으로 만나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다음 누가복음의 말씀이 도움이 될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적용할 만한 원리는 무엇인가?(콜린 채프만,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pp. 20-22) 그들 사이에 앉으시고: 우리가 무슬림의 가정을 방문하거나 대학 내 동료로서 같이 앉아서 이야기하려 할 때 우리 관계에 영향을 미칠 정치, 문화적 요인 등 때문에 그들이 나에게 어떻게 반응할 것인지를 알고 있는가? 그들이 느끼는 감정까지도 속속들이 알고 있는가?

들으시고: 나의 신앙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그들의 이야기(그들의 신앙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고 그들을 알아가는데 도움이 되는 삶의 이야기)를 기꺼이 들어 줄 여유가 있는가? 묻기도 하시니: 우리가 그들을 알기 위해 꼭 필요한 질문은 무엇인가? 이해하셨다: 이슬람에 관해about Islam 아는 것과 이슬람 Islam을 직접 공부하고 이해하는 것과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뉴스에 나오는 정보와 우리의 통찰력으로 본 이슬람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가? 이런 통찰력을 우리가 어떻게 얻을 수 있는가? 대답하시고: 그들이 알고 싶어하는 의문이나 그들이 반드시 알아야 한다고 생각되는 그런 질문에 대한 답을 우리가 가지고 있거나 우리가 대답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는가?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우리 이웃을 사랑하라"(마 22: 37-40)는 명령은 "가서 모든 족속을 제자 삼으라"라는 명령보다 앞선 것(마 28:19-20)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만일 우리가 무슬림을 알지도 못하고 사랑하지도 못하고 그들을 우리 이웃으로 돌아 보지 않고서 무슬림들에게 복음을 나눌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는가? 그동안 우리가 공부한 이슬람에 대한 모든 연구가 도움이 될 때는 언제이겠는가?
출처 :공주일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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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선교 문제점과 장애요인

아랍 선교의 장애 요인과 해법

 

 

1. 이스라엘의 건국사건(1948)과 이스라엘의 동 예루살렘 탈환사건(1967)을 각각 성경예언의 성취적 사건이라고 주장하는 기독교 신학은? 세대주의

2. 이 시대에 성경예언성취의 주인공에 대한 세대주의적 이해는 아랍 선교의 큰 장애 요인이 된다. 세대주의에 따르면, 성경 예언 성취의 주인공은 야곱의 혈통적 후손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혁/언약신학에 따르면, 누가 그 주인공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

3. 세대주의는 개혁/언약신학에 대하여 대체신학이라고 비판한다. 그 의도가 무엇인가?

성경예언성취의 주인공은 야곱의 혈통적인 후손들인데, 개혁/대체신학은 이방인들이 섞여있는 교회 공동체가 감히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속함을 받았다는 점을 운운하면서, 그 주인공의 자리를 엿보는 가운데 마침내 교회로 대체시키고 있다.

4. 팔레스타인은 성전 터가 있는 동 예루살렘을 수도로 하는 국가 건설에 대한 계획을 진행하려고 한다. 그러나 세대주의에 따르면, 그 계획은 하나님의 계획이 성취되지 못하도록 하는 마귀의 계략이기 때문에 결코 성취될 수 없다. 그 하나님의 계획이란?

하나님께서는 동 예루살렘의 옛 성전 터에 세워진 이슬람의 두 사원이 무너지게 하시고, 그 자리에 다윗의 집과 여호와 하나님의 집(성전)의 재건으로 이스라엘이 온전히 회복되게 하신다는 것이다.


5. 예루살렘의 옛 성전 터에 이슬람의 알아끄사 사원과 바위 돔 사원이 세워져 있다. 이슬람에 따르면, 그 바위 돔 안의 바위는 아라비아 반도의 메카에 있던 무함마드가 환상 중에 행하였다는 두 개의 여행과 관련이 있다. 그 두 여행이란?

1) 알이스라: 메카에서 예루살렘의 그 바위가 있는 알아끄사 사원까지의 여행(코란17:1)

 2) 알미으라즈: 그 바위로부터 하늘까지 여행(코란 53:8-15).

6. 이슬람에 따르면, 무함마드는 그의 두 여행을 통해서, 최대. 최후의 사도(예언자)로 확정되었다. 이를 기초한 이슬람 신앙고백문(샤하다)이 탄생되었다. 그 고백문이란?

“알라 이외 다른 신은 없고, 무함마드는 알라의 사도이다”.

7. 빈 라덴과 그 일행은 2001년 9.11. 테러를 행하기 약 2년 반 전에(1998.2.23), 아주 중요한 선언을 하였다. 그 선언 내용은?

예루살렘의 알아끄사 사원을 수호하고 해방시키기 위한 지하드를 해야 한다.

8. 이슬람에 따르면, 아브라함은 메카에서 그의 아들을 대신하는 대체제물을 드렸다. 그 대체제물이란? “한 위대한 희생제물”(코란 37:107)

9. 코란에는 그 대체 제물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가 없다. 그러나 그 제물에 관한 한 아랍 민속 이야기가 있다. 그 대체 제물은 천국에서 40차례의 가을을 거쳐 길러진 살찐 양이었는데, 그 양은 한 천사에 의해서 메카의 아브라함에게까지 급히 공수되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그 양의 털이 모두 다 빠져 알몸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빠진 양의 털은 어떻게 되었다는 것인가?

아라비아 반도 위에 휘날리는 “푸른 하늘 은하수”

10. 이슬람은 그들 나름대로의 대체제물을 드리는 제사를 사우디 아라비아의 메카의 하람 사원에서 드리고 있다. ① 그 제사와 ② 그 제사에 참여한 자에 대한 각각 아랍어 명칭은?  ① “에이들 아드하”(이슬람의 최대 축제) ② 핫지(그 효과는 10만 배).


11. 대체제물에 대한 개념은 구약 성경에 자세히 소개되고 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드리려던 순간, 대체제물 덕분에 이삭은 제물이 되지 않았다. 그 대체 제물이란?

그 두 뿔이 수풀에 걸린 숫양(창 22:13).

12. 다윗은 예루살렘에 그의 집을 건축한 후, 그의 백성들이 아브라함처럼 대체제물을 드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집인 성전을 건축하고자 하였다. 특별히 그는 성전 터를 어디로 확정하였는가(대하3:1)?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받쳤던 모리아 산.

13. 시편 122 저자가 예루살렘을 사랑하고 위하여 기도하는 이유(시 122:6)는?

예루살렘의 두 집, 즉 다윗의 집과 여호와 하나님의 집 때문이었다.

14. 때가 되매, 다윗의 집과 여호와 하나님의 집을 기초로 한 이스라엘의 전례가 생겨나게 되었다. 그 전례란(시 122:4)? 

이스라엘 백성들은 1년에 3차례(유월절, 초막절, 장막절) 예루살렘의 두 집을 방문한다. 다윗의 집에서는 그 왕국의 왕권에 대한 복종을 서약하고, 성전에서는 대체제물로 제사를 드린다. 

15. 예루살렘의 두 집이 모두 파괴됨으로 인하여 이스라엘이 멸망했다(주전 586년). 그렇게 멸망한 이스라엘을 회복시키는 자가 곧 메시아이다. 유대교에 따르면, 메시아가 아직 오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 회복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 그러나 기독교에 따르면, 메시아는? 나사렛 예수

16. 예수님은 그의 세례와 시험 사건 후에, 세례 요한에게 다시 찾아 오셨다. 그때 세례 요한은 그의 제자들에게 예수님을 어떻게 소개하셨는가(요1:29)?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17.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는 인식을 갖게 되는 결정적인 사건이 있었다. 그것은 곧 예수님의 세례사건이다. 그런 면에서 예수님의 세례식은 곧 죄의 양도식이기도 하다. 그 뜻이 무엇이겠는가?

회개할 죄가 전혀 없는 예수님이 죄인들이 받은 회개의 세례를 받음으로써 죄인들의 죄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양도받은 것이었다. 마침내 예수님은 그 죄 값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을 당하신 것이다.

18. 이삭이 제물 되기 직전에 그 뿔이 숲에 걸린 한 숫양으로 대체되었다. 그러나 기독교에 따르면 그 숫양의 실체는(참조 요1:29)?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님


19. 세대주의가 개혁/언약 신학에 대하여 대체신학이라고 비판하는 점에 대하여, 개혁/언약 신학의 답은?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가 “대체” 제물의 실체로 밝혀졌다는 사실은 그의 보혈로 구속함을 받는 교회 또한 실체이다. 다시 말해서, 교회는 대체가 아니라 실체이다.

 

20. 유대교와 세대주의적 기독교와 이슬람에 따르면, 예루살렘의 황금의 돔 사원 안의 바위가 본질이 되고 절대화 되고 있다. 그렇다면, 개혁/언약신학에 따르면, 무엇 또는 누가 본질이고 절대가 되는가?

그 바위 위에 드려진 대체제물로 예표가 되었던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

21.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대체가 아니라 실체라고 밝혔다는 사실은 구약, 또는 구약에 기초한 유대교는 그림자이고, 신약 또는 신약에 기초한 기독교는 실체라는 것이다. 여기서 골로새서 2:16,17을 표준 새 번역으로 찾아보자.

“그러므로 여러분은, 먹고 마시는 일이나 명절이나 초승달 축제나 안식일 문제로, 어떤 사람도 여러분을 심판하지 못하게 하십시오. 이런 것은 앞으로 올 것들의 그림자일 뿐이요, 그 실체는 그리스도에게 있습니다.”(골 2:16,17, 표준 새번역)

22. 예루살렘의 두 집, 즉 다윗의 집과 여호와 하나님의 집인 성전은 파괴되고 없다. 중요한 것은 그 두 집의 주인이 예수 그리스도 한 분으로 밝혀지셨다. 그리하여 그 두 집은 한 집으로 통합되었다. 그렇게 통합된 집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 (공동체)


23. 사도 요한의 새 하늘과 새 땅의 새 예루살렘에 대한 첫 인상은 그의 직감에 기초한 것이었다. 그 첫 인상은(계21:1-2)?

 "신랑을 위하여 단장한 신부와 같다".

24. 한 천사가 사도 요한의 직감이 옳았음에 대하여, 즉 새 예루살렘이 곧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의 아내임을 확증하여 주었다(계21:9). 그 천사는 요한을 높은 산으로 데리고 간 다음 그에게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산 성 새 예루살렘을 보여 주었다. 우리가 이를 통하여 알 수 있는 바는?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의 최종 완성된 모습이 곧 새 예루살렘이다.


25. “마누라가 예쁘면 처갓집 말뚝을 보고서도 절을 한다.”는 속담이 있다. 그 속담은 “마누라가 예쁘면 처갓집 '담벼락'을 보고 절을 한다” "If a man’s wife is pretty, he will even bow to 'the wall' of his (parents) in-laws’ house.”로 번역될 수가 있겠다. 여기서 처갓집이 이사를 갔다고 가정해 보자. 그렇다면, 그 사위는 새 처갓집 말뚝/담벼락을 보고 절을 해야 한다. 그런데, 이 시대에 “이사간 옛 처갓집 말뚝/담벼락”을 보고 계속해서 절을 하는 자들이 있다. ① 그들은? ② 그 말뚝/담벼락은? ③ 그 옛 처갓집의 주인은? ④ 새 처갓집은?

① 예루살렘 성전 터의 통곡의 벽

② 유대교과 세대주의적 기독교에 속한 자들

③ 이슬람

④ 새 예루살렘, 즉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

26. 인터넷에서 “처갓집”을 검색하면, “양념 치킨”, “통닭집” 등이 나온다. “이사간 옛 처갓집”을 검색하면, "정형남의 글/책 "이슬람과 메시아 왕국 이슈"/윤바울의 그 책에 대한 서평/ 왜 이사간 옛 처갓집 말뚝을 보고 절을 한다”/ "예루살렘 중심적 기독교는 새 예루살렘 중심적 기독교로 거듭나야 한다!"/ "예루살렘/이스라엘을 사랑하고 위하여 기도하는 운동이 아니라 새 예루살렘 또는 새 이스라엘인 교회와 우리의 이웃 – 유대교와 이슬람에 속한 자들 포함 - 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자."
출처 : 정형남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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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란 “계시”에 나타난 “가브리엘 천사”의 실체 이해

 
I. 서론

꾸란에서 "계시“전달자로 “가브리엘 천사”를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구절은 Sura 2:97-98과 Sura 66:4이다.

그 밖에 Sura 53:5-7에서는 “가브리엘 천사”라는 이름은 나오지 않고 3인칭 대명사 “그(he)”에 대한 각주내용에서 “가브리엘 천사”를 다루고 있다. 또한 Sura 97에서는 “계시” 전달자로 ‘the Rū�ḥ€(the Spirit)’가 한국어 꾸란에 각각 “성령” 또는 “가브리엘 천사”라고 번역되어 나온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가브리엘 천사”가 직접적으로 언급되고 있는 Sura 2:97-98, 53:5-7은 모두 메디나 “계시”이고,

 

 “가브리엘 천사”가 직접적으로 언급되어 있지 않은 Sura 53:5-7과 97은 메카 “계시”라는 점이다. 이에 대하여 최영길은 “어느 날 밤 무함마드는 눈 앞에서 신의 모습을 대하고 신으로부터 직접 계시를 받았다고 생각 하였으나 메디나 이주 후 신의 모습을 볼 수가 없다는 유대교의 교리를 알고 천사 가브리엘의 강림이라고 해석하였다.”고 말한다.

 

이처럼 이슬람 학자조차도 무함마드가 “계시”를 받던 당시에 자신에게 “계시”를 전하여 준 “계시”전달자가 누구인지 확실히 알지 못했음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최영길은 무함마드가 “계시”전달자를 “가브리엘 천사”라고 확신하게 된 동기를 유대교의 교리를 알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그 이전에 부인 카디자의 사촌, ‘와라카 이븐 나우팔 (Waraqa Ibn Nawfal)의 영향이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와라카는 기독교인이었고 유대교와 기독교의 가르침을 듣고 성서내용의 일부를 읽어서 알고 있었던 사람이다.

‘이븐 히샴’에 의하면 무함마드는 카디자와 함께 와라카를 찾아가지 않았고 다만 카디자가 전해준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카디자로부터 무함마드가 보고 들었던 것들에 대하여 전해들은 와라카는 “It is the great Namus.”라고 하면서,

만약 무함마드에게 일어난 일이 사실이라면 무함마드는 선지자가 틀림없다고 하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Namus”라는 단어의 의미를 “가브리엘 천사”로 해석하게 되어 진 것이다.

아랍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Namus”5는 “비밀-secret” or “법-law”이라는 의미가 있지만

무슬림들에게는 “가브리엘 천사”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는 현대 이슬람사회에서 . “Namus” “명예”나 “권위”를 상징하는 단어로 가족구성원들 사이에서, 특별히 부인들이나 딸들, 여자형제들에 대한 남성의 명예를 의미하기도 하는데,

모세에게 율법이 임했듯이 무함마드에게 임한 “율법”을 “Namus”라고도 하고,

무함마드에게 “계시”를 주었다는 “가브리엘 천사”를 “Namus”라고도 한다는 것이다.

 

와라카는 카바신전을 돌아보고 있는 무함마드를 찾아가서

모세에게 주어졌던 계시가 무함마드에게도 임했음을 축하하였다.

그러나 와라카는 메카의 기독교 지도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성령을 체험한 사람도 아니었고

무함마드에게 임한 ‘영’을 정의해 줄만큼 영적으로 성숙한사람도 아니었다.

 

다음은 “가브리엘 천사”에 대한 언급이 있는 꾸란 구절들이다.

직접적인 언급이 있는 구절들과 간접적인 언급과 더불어 해설이 있는 꾸란 구절들을 고찰함으로 “가브리엘 천사”가 “계시”전달자로 소개된 과정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필자는 꾸란 “계시”자로 알려진 “가브리엘 천사”에 대한 실체를 각각 무함마드의 이해, 카디자의 이해, 민속 신앙적 이해로 나누어 고찰하였다.

이렇게 각기 다른 해석을 하는 이유는 꾸란 “가브리엘”의 “계시”에 관한 구절들8에서 볼 수 있듯이 “계시”자로 알려진 “가브리엘 천사”가 한 번도 자신을 가브리엘 천사라고 소개한 일이 없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꾸란은 “가브리엘 천사”를 “성령”이라고 정의하고 있어서, 꾸란 “계시”에 나타난 “가브리엘 천사”의 정체성 문제는 기독교 신관인 삼위일체에 대한 문제이기도 한다.

그러므로 필자는 꾸란의 “계시”자로 알려진 “가브리엘 천사”를 어떻게 해석하는 것이 가장 적합한지 생각해 보기로 한다.

 

 

II. 가브리엘 천사”에 대한 언급이 있는 꾸란 구절들

A. Sura 2: 97-98

Sura 2는 메디나에서 계시된 286절로 전체 114장 중 가장 긴 장이다.

Sura 2의 장명은 “바까라(암소)”인데 내용 중 삼분의 일 이상이 성서의 백성들이라 일컬어지는 이스라엘의 자손 유대인들과 메디나에서 거주하고 있는 무슬림들과의 관계, 그들 사이에서 빚어지는 음모, 죄악 등의 일련의 사건들이 기록되어

있다.

10 이는 무함마드가 받은 “계시”의 신빙성에 대한 논란 들이며 무함마드와 그의 추종세력들이 메디나에서 많은 핍박을 받았기 때문에, 그는 그러므로 Sura 2 : 97-98은 “가브리엘 천사”를 통한 “계시”의 권위를 피력하면서 자신들을 대적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적”이라고 말하고 있다. 다음은 Sura 2 : 97-98의 내용이다. 일러 가로되 가브리엘 천사의 적은 하나님의 적이라 말하라 하나님은 천사를 통하여 그대에게 하나님의 의지에 따라 꾸란을 계시하셨나니 그것은 이전에 확증되었노라 그것은 믿음이 진실한 자의 길이요 복음이니라 하나님과 그분 의 천사들과 가브리엘과 미카엘에게의 적은 누구든지 하나님의 적이거늘 실로 하나님은 믿음이 없는 자들의 대적이시라

다음은 아랍어 꾸란의 음역으로 아랍어 원전에 “Jibriila (지브릴-가브리엘의 아랍어 격변화)”가 분명

히 언급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Qul mań€-kaana 'aduw-walli-Jibriila fa-'innahuu nazzalahuu 'alaa qalbika bi-'iẓ�nillaahi muṣ€addiqal-limaa bayna ya-dayhi wa hudań�w-wa bushraa lil-Mu'-miniin,- (Sura 2:97) Mań€-kaana 'aduwwal-lil-laahi wa malaaa-'ikatihii warusulihii wa Jibriila wa Miikaala fa-'innallaaha 'aduwwullil-kaafiriin. (Sura 2:98)12

메디나 “계시”는 특성 면에서 메카 “계시”와 많은 차이가 있다. 꾸란 114개 장중에서 메디나 “계시”는 20개이고 나머지 94개의 장은 메카 “계시”이다. 그런데 장과 절의 길이를 보면 꾸란 전체의 3분의 1이 메디나 “계시”이고 3분의 2가 메카 “계시”이다. 그런데 초기에 “계시”된 메카 “계시”에 비하면 메디나 “계시”는 그 장과 절의 길이가 길다. 왜냐하면 메카 “계시”가 단지 우상숭배의 부정과 알라에 대한 유일신 신앙의 확립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메디나 “계시”는 이슬람 공동체인 ‘움마’의 건설로 인하여 ‘움마’의 개념이 메디나 “계시”속에 나와 있으며 ‘움마’의 질서를 어떻게 이룩하여야 할 것인가가 메디나 “계시”에 기술되어 있다. 따라서 메디나 “계시”는 군사를 포함한 정치적, 사회적 요소가 포함되어있다. 특별히 사회성이 풍부한 것이 메디나 “계시”의 특색이라고 한다. 즉 메카 “계시”가 우상숭배의 부정과 알라에 대한 유일신 신앙의 확립이었다고 한다면, 메디나 “계시”는 정치적 시기를 맞아 대외적인 요소와 함께 대내적인 사회성을 풍부히 한 것이다. 무함마드가 “예언자”로서 메디나에서 살았던 시대는 10여년에 지나지 않지만 이때의 “계시”적 특성은 군사를 포함하는 정치성 때문에 “계시”의 구절이 산문조로 되고 내용도 훨씬 구체적이라는 것이다. 메카 “계시”처럼 암시적, 종교적, 상징적 이라기보다는 현실성이 많이 보인다.

메디나 “계시”는 기독교의 교리서와 같은 특성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Sura 2 : 97-98은 “계

시”로서의 꾸란의 권위를 설명하기 위하여 쓰여진 것이라고 보인다. 무엇보다도 Sura 2 : 97-98은 꾸란의 “계시”가 “가브리엘 천사”로부터 전해 진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는 구절이다.14 이 구절은 메카에서 최초로 “계시”되었다는 Sura 97과는 다른 입장에서 서술되었음을 볼 수 있는데 Sura 97에서는 ‘the Rū�ḥ€(the Spirit)’를 한국어로 “성령”과 “가브리엘 천사”로 해석하여 혼용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메카“계시”에서는 확신이 없게 기술되었던 “계시”전달자가 메디나 이주 이후에 주위의 여러 가지 환경적 요인과 사회적 필요에 의하여 더욱 확고해 졌음을 보여준다. 메디나 이주 이후에 쓰여진 꾸란 구절들이 산문적이고 상징적 이기보다 구체적인 것은 이슬람공동체 ‘움마’를 견고히 하기위한 교리작업의 일환이며 이러한 맥락에서 Sura 2 : 97-98은 꾸란 “계시”전달자로서 “가브리엘 천사”를 확고히 주장하고 있는 구절이다.

B. Sura 66: 4

Sura 66은 메디나에서 “계시”된 12절로 선지자의 가정에 관계되는 규범을 소개하면서 무슬림여성들에게 교훈을 주고 있다. 무함마드와 그의 아내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으로 하여 순결을 지키고 믿음에 충실한 여성만이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것과 믿는 사람으로서 실수하고 , 과오를 범했을 때는 즉시 참회하고 선행으로 속죄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배경에서 “가브리엘 천사”가 언급되고 있는데, 무함마드에게 누를 끼쳤다는 부인 ‘하프사’와 ‘아이샤’가 회개하지 않고 이로 인하여 무함마드가 이혼하게 된다 하여도 “가브리엘 천사”가 무함마드를 떠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Sura 66:4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만일 너희 둘이 하나님께 회개하면 너희에게 복이 될 것이라 또한 너희 마음도 이미 그렇게 기울었노라 너희 서로가 그분께 거역한다 하여도 하나님과 가브리엘천사와 믿음으로 의로운 자들이 그분을 도울 것이며 천사들도 더욱 그러하리라.

다음은 아랍어 꾸란의 음역으로 아랍어 원전에 “Jibriilu (가브리엘)”가 분명히 언급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처럼 메디나에서 쓰여진 구절은 아랍어 원전에서 ‘the Rū�ḥ€(the Spirit)’가 아닌 “Jibriilu (지브릴-가브리엘의 아랍어 격변화)”라고 분명히 명시되어 있다. 이는 Sura 2 : 97-98에 관한 설명과 같이 ‘움마’공동체의 확립과 사회적 필요에 의하여 이슬람의 교리를 설법하고 꾸란 “계시”의 권위를 세우고자 메디나 이주 이후 후대에 이르러 “가브리엘 천사”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고 있는 구절들이라고 볼 수 있다. 본 장은 메카에서 “계시”된 5절로 이루어져 있다. 메카에서 내려졌다는 꾸란 구절들은 이와 같이 메디나에서 “계시”되었다는 구절들에 비하여 짧은 특성이 있다. 그러므로 구절의 길이에 따라 구성된 꾸란의 특성상 꾸란의 뒤쪽에 있는 장들이 주로 메카에서 “계시”되었다는 구절들이다. 97장의 특징은 “계시”의 전달자인 “가브리엘 천사”가 주석에만 간접적으로 언급되어 있다는 것이다. 앞에서 살펴보았던 구절들과 달리 메카에서 “계시”되었다는 Sura 97에는 “Jibrill(가브리엘)”이라는 단어가 아랍어 원전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Tanassalul-malaaa-'ikatu war-Ruuhu fiihaa bi-'iẓ�ni Rabbihim-min-kulli' ‘amr:”(Sura 97:4)17 여기서 ‘한 영(the Spirit by Allah's permission - Ruuhu)’ 이라는 표현만 있을 뿐 “가브리엘 천사”라는 말은 찾아 볼 수 없다. 그러나 한국어 꾸란에 “가브리엘 천사”, “성령”이라고 표현된 것은 메디나 “계시”의 영향을 받아 꾸란 주석가들의 해석에 의한 것일 뿐이다.

본장의 명칭은 제1절의 “실로 하나님은 거룩한 밤에 이 계시를 내리나니”에서 언급된 ‘까다르’란 어휘

에서 기인된 것으로 보고 있으며,

꾸란 97장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자비로우시고 자애로우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1. 선실로 하나님은 거룩한 밤에 이 계시를 내리나니

2. 거룩한 밤이 무엇인지 무엇이 그대에게 설명하여 주리요

3. 거룩한 이 밤은 천개월보다 더 훌륭한 밤으로

4. 이 밤에 천사들과 가브리엘 천사가 주님의 명령을 받아 강림하여

5. 아침 동녘까지 머무르며 평안하소서 하고 인사하더라

Sura 97의 주제는 “경이로운 권능(능력)의 밤”이다. “계시”가 이 세상에 내려와 멋진 세상과 각 개인의 삶속에서 천사들을 통하여 알라의 영적 능력이 나타나면서 그릇된 행실들을 바로하고 평화와 화합을 이루어 나간다는 것이다.19 한마디로 새로운 시대가 이 밤에 시작된 것을 의미한다. 이는 꾸란이 “계시”된 것은 기독교에서 그리스도의 탄생과 비교되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셔서 새 시대가 도래 하였으나 이슬람에서는 그렇지 않다. 알라는 이 세상에 온 것이 아니고 그의 말씀을 대신하여 보냈고 그 말씀이 꾸란(책)이 된 것이다. 그러나 복음서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a person)이 되었다. 여기서 무슬림들은 알라가 꾸란에서 현현되었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임마누엘 하시면서 우리와 함께하신다. 여기서 가장 큰 차이점은 꾸란 이라는 생명이 없는 글들과 생명을 주시는 그리스도의 차이이다. 이 점에서 우리는 이슬람교와 기독교 사이에서의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다.

 

손주영도 그의 책에서 “기독교에서는 신의 말씀이 ‘육신화 되었음’을 믿는데, 무슬림들은 신의 말씀이 ‘꾸란이 되어 내려왔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무슬림들이 ‘신의 말씀’인 꾸란을 일생동안 부단히 읽고 암송하면서 신에 대한 믿음과 복종을 표현한다.”22고 한다. 여기서 “계시”전달자에 관하여 해석상의 문제를 살펴 볼 때 같은 저자인 최영길이 각각 달리 “가브리엘 천사”라고 했다가 “성령”이라고 해석한 것은 독자들에게 적지 않은 혼란을 야기 시키고 있다. 물론 기독교의 삼위일체론을 이해하지 못하는 입장에서 “가브리엘 천사”를 “성령”으로 이해하고 기술 한 것으로 보이는데 오히려 원문의 ‘Ruuhu - the Rū�ḥ€(the Spirit)’를 생각 할 때에 “성령”이 아닌 ‘영’으로 표현하는 것이 바른 표현일 것이다. 왜냐하면 ‘Ruuhu - the Rū€ḥ�(the Spirit)’를 ‘성령’으로 해석하고 표현한다면 ‘Ruuhu- the Rū€ḥ�(the Spirit)’가 하나님의 영이 되므로 삼위일체론을 받아드리는 것이 되고, 그들의 주장처럼 하나님은 아들도 없고 동반자도 없다고 할 때에 ‘Ruuhu - the Rū€ḥ�(the Spirit)’는 ‘창조된 영’으로서 성령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D. Sura 53:1-18

Sura 53은 메카에서 "계시"된 62절로 구성되어 있으며 꾸란의 메시지와 부활에 대한 믿음 그리고 다른 메카 "계시"와 유사한 내용과 목적을 다루고 있다.23 무함마드가 받은 "계시"는 한 점의 흠도 없고 무함마드의 이기적인 의도나 다른 사람들의 속이는 것으로부터 온 것이 절대 아니라 분명히 알라로부터 왔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Sura 53의 주제는 꾸란 “계시”는 환상이나 착각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환상이나 착각은 알라를 의심하고 알라에 대한 잘못된 인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알라는 모든 것의 원천이요 목적으로 꾸란 “계시”는 착각이 아닌 사실이라는 것이다. 그 중 1절부터 18절까지는 무함마드에게 영에 대하여 두 가지 비젼(vision)을 주고 있다. 다음은 1절 부터 18절까지의 내용이다.

1. 지는 별을 두고 맹세하사

2. 너희의 동료는 방황하지도 않고 유혹 되지도 아니했으며

3. 그의 욕망을 말하고 있는 것도 아니라

4. 그것은 그에게 내려진 계시라

5. 그는 능력의 있으신 분25으로부터 배웠노라

6. 그는 지혜를 가지고 나타났으니

7. 그는 지평선 가장 높은 곳에 있었노라

8. 그런 후 그는 가까이 다가왔으니

9. 그 거리는 활 양쪽 끝 사이의 길이 혹은 그보다 더 가까웠더라

10. 그렇게 하여 하나님은 그의 종에게 전하고자 한 계시를 내렸으매

11. 그의 마음은 그가 본 것에 대하여 거짓함이 없더라

12. 그래도 너희는 그가 본 것에 관하여 논쟁하고 있느뇨

13. 실로 그는 다시 한 번 그를26 보았으니

14. 마지막 시드라 나무 옆에 있었더라

15. 그곳 가까이에는 영주할 천국이 있으니

16. 보라 시드라 나무가 가리워지매

17. 그의 시선은 흩어지지 아니하고 한계를 넘지도 않더라

18. 실로 그는 가장 위대한 하나님의 예증들을 보았노라

우리는 메카에서 “계시”된 Sura 53:5에서 “계시” 전달자의 이름을 분명히 밝히지 않고 다만 주석가들이 “계시” 전달자를 “가브리엘 천사”라고 해설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무함마드는 대부분의 “계시”들을 말로 받았으나

Sura 53은 본 것을 기록하고 있다. 특별히 ‘순니’파 사람들이 “가브리엘 천사”가 무함마드를 찾아와서 영감으로 비젼을 주었다고 한다. 무함마드는 그가 들었던 음성과 그가 본 비젼을 알라로부터 온 “계시”라고 해석하였다. 그렇지만 본문을 통하여 우리는 이슬람교에서의 영감과 기독교의 영감은 같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무함마드는 그가 “계시”를 받은 경험에 대하여 여러 차례 그의 친구들에게 설명하였는데27 “계시”적 현상에서도 확연한 차이를 볼 수 있다. Sura 53에 의하면 무함마드는 “가브리엘”을 약 30-50 미터 떨어진 거리에서 보았다고 한다.

그는 그 영에 대하여 자세히 묘사할 수 없었다. 다만 그 영을 힘세고 권능 있는 영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표현들이 ‘가브리엘’의 특성28을 설명하게 된 것이다. 본문에서 해석상 문제가 되는 구절은 5절과 13절인데, “능력이 있으신 분”과 “그를”은 영어 꾸란을 살 펴볼 때 “one mighty in power”와 “him”으로만 언급하고 있을 뿐이고 아랍어 꾸란에는 “'Allamahuu Shadiidul-Quwaa” (Sura 53: 5), “Wa laqad ra-'aahunazlatan 'ukhraa”(Sura 53: 13)29라고 나와 있을 뿐 “가브리엘 천사 - Jibrill”을 직접 언급한 구절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어 꾸란과 영어 꾸란 각주에서는 ‘“가브리엘 천사”라고 일컬어진다.’ 라는 해설을 덧붙이고 있는데 이것은 후에 메디나 “계시”에서의 확실한 언급에 영향을 받아 주석가에 의하여 재해석되고 있는 부분으로 보인다.

출처 :  소윤정 (서울기독대학교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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