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서신] 디모데 전서로 본 사도 바울
계시와 편지 (딤전 1:1-2)
특별한 것은 평범한 것에서 위대해진다. 사도 바울은 특별한 인물이다. 왜
냐하면 그는 계시의 사람으로서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살기 때문이다. 사
도 바울은 이 사실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딤전 1:1)라는 말로 설명한
다. 이것은 사도 바울의 자의식이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라는 말에는 두
가지 생각이 들어있다. 첫째로 그는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서 자신의 모
든 것을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설명한다. 예수가 없이 바울도 없다. 바
울은 단지 예수와 관련되어 있을 때 의미가 있다. 그는 예수께 부속된 사람이
다. 예수 그리스도은 사도 바울의 중심이다. 둘째로 그는 예수 그리스도
의 "사도"로서 자신의 모든 것을 세상의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이해한다. 그
는 사도이다. 따라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머물지 않고 세상의 사
람들과의 관계로 나아간다. 세상은 바울의 영역이다. 이렇게 예수는 바울의
중심이기에 바울은 예수에게 한없이 집중하며, 세상은 바울의 영역이기에 바
울은 세상으로 한없이 전진한다.
그런데 바울이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가 된 것은 원인을 가지고 있다. 그것
은 "우리 구주 하나님과 우리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명령을 따라" (딤전
1:1) 되었다. 바울이 사도가 된 것은 자발적인 의지에 의한 것이 아니다. 그
것은 명령에 의한 것이다. 명령이란 타의적인 것이며 강요적인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바울의 사도직은 필연성을 가지고 있다. 이 명령은 "우리 구주 하나
님과 우리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명령이다. 이 명령의 발령자는 하나님
과 예수이시다. 여기에 하나님은 "구주"로, 그리스도 예수는 "소망"으로 묘사
된다. 하나님은 구원의 주체자이시고, 예수 그리스도는 소망의 성취자이시
다. 하나님께만 구원이 있고 예수께만 소망이 있다. 따라서 하나님 밖에서 구
원을 찾고, 예수 밖에서 소망을 찾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사도 바울은 구
원이신 하나님과 소망이신 예수의 명령을 따라 사도의 삶을 산다. 사도 바울
은 하나님에 의존하여 사는 사람이며 예수에게 사로잡혀 사는 사람이다. 그
는 계시의 사람으로서 특별한 인물이다.
또한 사도 바울은 평범한 인물이다. 왜냐하면 그는 편지의 사람이기 때문이
다. 바울에게 특별함은 평범함으로 표현되고, 계시는 편지로 표현된다. 그는
디모데에게 편지를 보냈다. 편지란 예나 지금이나 그 자체가 일상적인 것이
다. 그것은 세상 속의 일이며 인간 사이의 일이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편지를 보냄으로써 지극히 평범한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사도
바울은 사람의 문제를 멀리하지 않고 사람의 문제에 참여한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으로부터 사람에게로 다가간다. 그는 하나님 쪽에만 서 있지 않고 사
람 쪽으로 접근한다. 하나님에게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사람에게 관심한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있기 때문에 사람을 가까이 한다.
사람에 대한 사도 바울의 관심은 무엇보다도 수신자인 디모데에 대한 표현
에서 두 가지로 나타난다. 첫째로 사도 바울은 다른 사람과 친근한 관계를 맺
을 수가 있다. 이 때문에 그는 디모데를 "믿음 안에서 참 아들" (딤전 1:2)이
라고 부른다. 바울과 디모데 사이에는 나이가 상이하다는 차이점이 있지만 그
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이 동일하다는 공통점이 있다. 사도 바울은 이런 공통점
으로 말미암아 차이점을 극복하고 디모데를 믿음의 아들로 가까이 한다. 둘째
로 사도 바울은 다른 사람에게 놀라운 축복을 말할 수가 있다. "하나님 아버
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
다" (딤전 1:2).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복이 사람에게 주어지기를 기원한다.
그가 보기에 사람은 하나님의 복을 받을만한 대상이다. 세상과 사람은 사도
바울의 관심사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세상에서 살며, 사람과 함께 산다.
그는 편지의 사람으로서 평범한 인물이다.
목회서신의 머리에서 바울은 사도라는 점에서 특별한 사람이며 편지를 쓴다
는 점에서 평범한 사람임을 보여주고 있다. 그에게서 가장 특별한 것이 가장
일반적인 것으로 표현되었다.
길과 벗 (딤전 1:3)
길은 가기 위하여 있는 것이며, 벗은 나누기 위하여 있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마게도냐로 간다. 그는 가는 사람이다. 그는 끊임없이 간다.
때때로 그는 자신의 영적 중심지인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지만 대체로 자신의
복음 사역지를 향해 나아갔다. 소아시아로, 그리스로, 로마로, 그리고 스페인
으로. 지금 사도 바울은 마게도냐로 간다. 마게도냐는 그에게 잠시의 행선지
일 뿐이다. 그의 발은 멈추지 않으며, 그의 길은 끝나지 않는다. 바울은 자신
의 발에 삶을 실었고, 자신의 길에 힘을 드렸다. 그는 서지도 않고 쉬지도 않
는다. 바울의 발은 정지하지 않는 발이며, 바울의 길은 휴식하지 않는 길이
다. 그의 기쁨은 걷는 발에 있다. 만일 바울이 운동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고
통이 될 것이다. 그의 휴식은 가는 길에 있다. 만일 바울이 여행하지 않는다
면 그것은 노동이 될 것이다. 바울에게는 일하는 것이 휴식이며, 쉬는 것은
노동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가고 또 간다.
디모데는 에베소에 남는다. 바울은 마게도냐로 가면서 디모데를 에베소에
남겼다. 마게도냐로 가는 바울에게 에베소는 여전히 그가 책임져야 할 대상이
었다. 에베소에는 아직도 일할 것이 많이 남아있다. 사도 바울이 마게도냐로
떠날 때쯤에 에베소에는 많은 문제거리들이 발생하였다. 특히 다른 교훈을 가
르치는 자들이 생겼다. 그렇다고 해서 에베소는 내버려야 할 도시가 아니며,
에베소 교회는 팽개쳐야 할 교회가 아니다. 비록 그곳에 수많은 문제가 벌어
진다고 해도 그곳은 여전히 사역해야 할 대상이다. 에베소는 사도 바울에게
사랑과 관심의 대상이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에 관심과 사랑을 보이기 위하
여 디모데를 남겨두었다. 그는 디모데가 가야 할 길을 보여주었고, 해야 할
일을 알려주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길을 고집하면서도 타인의 길을 열어주
었다. 나의 길을 고집하는 사람은 남의 길도 책임져야 한다.
바울에게는 에베소를 맡길만한 동역자가 있었다. 디모데는 바울의 길에 함
께 가는 사람이다. 디모데는 바울의 생각을 닮고, 언어를 닮고, 인생을 닮은
사람이다. 디모데는 바울의 뜻에 동의할 수 있는 사람이며, 바울의 길에 동행
할 수 있는 사람이며, 바울의 삶에 동참할 수 있는 사람이다. 디모데는 바울
이 일을 맡겼을 때 의심하거나 거부하지 않고 맡아줄 동역자이다. 디모데는
바울이 에베소를 맡기면 에베소를 맡고, 골로새를 맡기면 골로새를 맡을 사람
이다. 그는 바울이 맡기는 곳에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문제가 있어도 기꺼이
맡을 사람이다. 디모데는 신뢰가운데 바울과 함께 일하는 동역자이다. 사도
바울에게는 이렇게 함께 길을 갈 수 있는 디모데가 있었다. 그러므로 사도 바
울은 자신의 길을 혼자서 가지 않고 더불어 간다. 바울이 가는 길에는 함께
가는 벗이 있었다. 그는 일을 분배하며 사역을 나눈다. 그는 홀로 모든 것을
다하지 않는다. 권면을 받는 동역자를 가지고 있는 바울은 행복한 사람이다.
디모데에게는 에베소를 맡겨주는 지도자가 있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를
신뢰하였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뜻에 디모데가 동의하게 하며, 자신의 길에
디모데를 동행시키며, 자신의 삶에 디모데를 동참시켰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
를 도전하고 자극하는 지도자였다. 그는 디모데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았
다. 디모데에게 일을 시키고 일하도록 만들었다. 사도 바울은 다른 사람이 주
님을 위해서 움직이도록 만드는 지도자이다. 역으로 말하자면 디모데에게는
의심하지 않고 일을 맡기는 사도 바울이 있었던 것이다. 디모데에게는 이렇
게 함께 길을 가도록 요청하는 바울이 있었다. 디모데는 자신의 뜻을 정리해
주는 지도자, 자신의 길을 결정해주는 지도자, 자신의 삶을 인도해주는 지도
자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디모데는 자신의 길을 혼자서 가지 않고 더불
어 간다. 권면을 하는 지도자를 가지고 있는 디모데는 행복한 사람이다.
사도 바울에게는 기꺼이 가야 할 길이 있고, 사역을 나눌 수 있는 벗이 있
다. 그의 길은 그의 벗이 함께 가는 길이며, 그의 벗은 그의 길에 함께 가는
벗이다.
빛에 가까운 어둠 (딤전 1:3-4)
그림자는 항상 빛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있다. 양지와 음지 사이의 거리는 그
리 멀지 않다.
정말 두려운 것은 거짓 교훈이 바른 교훈에 즉시 이어진다는 것이다. 곁길
(샛길)은 언제나 큰길에서 갈라진다. 거짓 길은 바른 길에서 시작된다. 이런
현상은 사도 바울이 세운 교회에도 나타났다. 사도 바울이 세운 교회에 다른
교훈이 일어난 것이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를 떠나 마게도냐로 가려고 할 때
이미 거짓 교훈이 교회에 발생하였다. 어떤 사람들이 다른 교훈을 가르쳤던
것이다. 이것이 얼마나 신속한 일인지 사도 바울은 마게도냐로 떠나면서 디모
데에게 명령을 할 수밖에 없었다. 더욱 두려운 것은 때로 거짓 교훈이 바른
교훈보다 더 강한 매력을 발휘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바른 길을 가는 것을
싫어하고 다른 길에 곁눈질을 한다. 사람들은 정로 (正路)보다 사로 (斜路)
에 이상한 매력을 느낀다. 몰래 먹는 떡에서 야릇한 맛을 느끼듯이 몰래 배우
는 거짓 교훈에 홀딱 넘어가며 형언할 수 없는 쾌감을 누린다. 이 땅에 이렇
게 끊임없이 거짓 교사들이 등장하는 것은 사람들의 이와 같은 경향 때문일
것이다. 사람들에게 곁길을 향한 강한 동경심이 있지 않고야 어떻게 이처럼
계속해서 거짓 교사들이 등장할 수 있겠는가. 사도 바울의 시대에 그랬다면
우리 시대에는 오죽하랴.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어떤 사람들을 명하여 다른 교훈을 가르치지 말게
할 것을 권면하였다 (딤전 1:3). 그러면 다른 교훈은 무엇인가. 사도 바울 자
신이 이에 대하여 설명을 주고 있다. 그것은 신화와 족보이다. 이 두 말은 상
이한 것이라기보다는 보충적인 것이라고 보는 것이 좋겠다. 신화의 성격은 신
약성경에 네 차례 나오는 진술을 살펴볼 때 어느 정도 발견할 수 있다. 무엇
보다도 신화는 망령되고 허탄한 것이다 (딤전 4:7). 망령되다는 것은 신화가
경건하거나 신앙적이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마치 할머니가 손주에
게 들려주는 옛날 이야기와 같이 별로 믿을만한 것이 되지 못한다 (본래 헬라
어에서 "허탄하다"는 말은 나이 많은 노파와 같다는 뜻이다). 따라서 신화는
진리와 반대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불구하고 말세에는 사람들이 진리에서 돌
이켜 신화를 좇게 된다 (딤후 4:4). 왜냐하면 신화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로 교묘하게 꾸며지기 때문이다 (벧후 1:16). 참으로 놀라운 것은 심지어 유
대인들 가운데서도 신화가 횡행한다는 사실이다 (딛 1:14). 위에서 말한 바
와 같이 신화와 족보가 서로 보충적인 것이라면, 신화의 내용은 족보에 관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족보는 사람의 계보를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고, 창
조의 설화를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다. 아마도 본문에서는 후자를 말하는 것
이라고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셨
다는 것을 믿지 못하고 다른 창조신화를 따르는 처사를 의미한다. 이런 처사
는 결국 변론과 분쟁과 다툼을 불러일으킬 뿐이다 (딛 3:9).
밝은 빛에 가장 근접하는 어둔 그늘이 사람들을 유혹하고, 바른 길에서 즉
시 파생하는 거짓 길이 사람들을 유인하는 힘은 대단히 강렬하다. 신화와 족
보로 이루어진 다른 교훈의 매력은 보통 강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마약과 같
은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신화와 족보에 맛이 들면 거기에서 헤어나지 못
하고 착념하게 된다. 다른 교훈에 대한 사람들의 집착력은 상상을 초월할 정
도로 억센 것이다. 그것은 마약중독과 같은 것이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거
짓 교훈을 바른 교훈보다 더 열정적으로 고집스럽게 추구한다. 본래 악에 대
한 추구는 선에 대한 추구 보다 지독하다. 그래서 사람을 바른 교훈에 들어서
게 하는 일보다 사람을 거짓 교훈에서 벗어나게 하는 일이 훨씬 더 어려운 것
이다. 이런 까닭에 사도 바울은 디모데를 에베소에 남겨두어 사람들이 신화
와 족보에 착념하지 않도록 바로 잡을 것을 엄중히 명령했던 것이다 (딤전
1:4).
지금도 어두움은 빛에 가장 가까이 있다. 진리와 가장 가까운 곳에 거짓이
있다. 우리가 잠시라도 경성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진리
곁에는 항상 거짓이 있다.
(딤전 1:4) 인생을 걸다
우리는 무엇에 인생을 걸고 있는가? 우리의 심장을 뜨겁게 만들고, 우리의 언
어를 힘있게 만들며, 우리의 행동을 강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쓸
데없는 것을 추구하는 데 아까운 시간을 허비한다. 아무런 유익한 결론이 나
지 않을 것을 논의하면서 귀중한 인생을 낭비한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에게도
이런 위험이 접근하였던 것이다. 신화와 족보에 관하여 논쟁하느라고 많은 시
간을 써버리고 귀한 인생을 소모하는 불행한 일이 초대교회를 망치고 있었
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신화와 족보가 무가치한 천착 (穿鑿)을 낳는다는 것
을 알지 못하였던 것이다. 신화와 족보는 부질없는 공상을 일으키고 무의미
한 추측을 자아낸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런 것은 변론을 내는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여기에 언급된 변론이란 무익한 연구를 가리킨다. 이것은 얼마
나 어리석은 소치인가? 게다가 신화와 족보가 결론없는 연구를 야기시킬 뿐
아니라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지 못하는 것이라면 얼마나 쓸모
없는 것인가?
사도 바울이 신화와 족보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은 이것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
이다. 그의 초점은 "하나님의 경륜 (오이코노미아)"에 놓여져 있다. 하나님
의 경륜이란 무엇인가? 사도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여러 차례 "하나님의 경
륜"에 관하여 말한다. 하나님의 경륜은 은혜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래서 그
는 이것을 "하나님의 은혜의 경륜" (엡 3:2)이라고 설명한다. 그런데 하나님
의 경륜은 본래 비밀이었다. 그래서 이것은 "비밀의 경륜" (엡 3:9)라고 불린
다. 이 비밀은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취었던 것이다. 하지
만 하나님의 경륜은 시간 속에서 성취되었다. 그래서 이것은 "때가 찬 [시간
의 충만의] 경륜" (엡 1:10)이다. 하나님의 경륜은 인간의 구원을 위한 것이
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것이 "너희를 위하여" (엡 3:2; 골 1:25) 주어진
것이라고 역설한다. 하나님의 경륜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기 위
하여 그의 사역자들에게 주어진다 (엡 3:2; 골 1:25). 정리해서 말하자면 하
나님의 경륜은 은혜로 말미암아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영원한 세계에서
세우시고 시간의 세계에서 실현하시는 하나님의 우주적인 법칙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경륜은 누구든지 찾아서 깨닫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경
륜은 오직 믿음으로만 알게되고 이해된다. 이 때문에 사도 바울은 "믿음 안
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이라고 말한다. "믿음 안에 있는"이란 말은 "믿음 안
에서 발견되는" 또는 "믿음 안에서 인식되는"이라는 의미이다. 믿음 없이는
결코 하나님의 경륜이 발견되지 않으며, 믿음 외에는 결코 하나님의 경륜이
인식되지 않는다. 믿음 밖에서는 어떤 노력도 하나님의 경륜에 도달하는데 실
패할 뿐이다. 오직 믿음이라는 행동반경 안에서만 하나님의 경륜을 추적하고
파악하는 것이 가능하다.
사도 바울이 신화와 족보는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지 못한다
고 말하는 것은 그의 관심이 어디에 있는지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사
도 바울은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는 일에 인생을 걸었다. 그
는 은혜로 말미암아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영원한 세계에서 예정하시고
시간의 세계에서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우주적인 법칙에 인생을 맡겼다. 하나
님의 경륜이 사도 바울의 심장을 차지하고, 언어를 지배하고, 인생을 다스린
다. 그에게는 사는 이유도 분명하며 죽는 이유도 분명하다. 사나 죽으나 사
도 바울의 유일한 위로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경
륜을 이룰 수 있다면 사는 것에 연연하지 않으며 죽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경륜에 인생을 걸었다.
우리는 무엇에 인생을 걸고 있는가? 우리의 심장은 왜 뛰고 있으며, 우리
의 육체는 왜 움직이고 있는가? 왜 우리의 몸에 는 피가 흐르고 있으며, 왜
우리의 입에서 말이 나오고 있는가?
(딤전 1:5) 더욱 근본적으로
동력이 없으면 동작도 없다. 그래서 동작보다 더 근본적인 것은 동력이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가 어떤 사람들에게 명령을 하도록 에베소에 머물게 하였
다. 디모데의 명령은 다른 교훈을 가르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면 디모데가
이런 명령을 내리는 근본적인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사랑이었다. "경계
(명령)의 목적은 ... 사랑이거늘". 명령하는 위치에 서 있는 디모데는 무작
정 다른 교훈을 말하는 사람들을 추방하고 말살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아서는
안된다. 오히려 디모데가 사도 바울에게서 받은 명령의 지위는 다른 교훈을
말하는 사람들까지도 치료하고 회복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디모데에게
있어서 사랑은 권위보다 더욱 근본적인 것이다. 사랑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
니고서는 권위가 교회를 안전하고 안정되게 만들 수가 없다. 사랑은 교회를
움직이는 동력이다. 사랑을 동력으로 하여 교회가 동작한다. 이렇게 볼 때 교
회의 문제는 권위가 없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 기반을 둔 권위가 없는 것이
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야기를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또 한가지 질
문을 던지려는 듯이 보인다. 사랑이 명령하는 권위의 동력이라면, 사랑의 동
력은 무엇인가. 다시 말해서 사랑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사도 바울은 이 사랑
에 어떤 출처가 있다고 설명한다. 사랑은 "정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
이 없는 믿음으로부터" 나온다. 사도 바울은 사랑의 기원을 세 가지로 나누
어 말한다. 이 구절 외에도 사도 바울은 목회서신에서 자주 마음과 양심과 믿
음에 관하여 언급한다 (마음 - 딤후 2:22; 양심 - 딤전 1:19; 3:9; 4:2; 딤
후 1:3; 딛 1:15; 믿음 - 30번 이상 나옴). 이 세 단어는 짝을 이루어 사용되
기도 한다 (딛 1:1; 딤전 1:19). 사도 바울은 정확하게 알고 있다. 사랑에는
동력이 있다는 것을. 그가 말하는 사랑은 마음과 양심과 믿음에서 나오는 것
이기 때문이다. 마음은 외면과 반대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랑은 외면적인
동기로부터 실천되어서는 안된다. 사랑은 내면적인 이유에 의하여 실천될 때
가치가 있다. 일반적으로 양심은 상식을 비롯하여 기억력을 넘어 자의식에 이
르기까지 포괄적인 의미를 가지는 단어이다. 목회서신에서는 양심이 대체적으
로 옳은 것을 따르려는 비판적인 의식을 가리키는 것을 사용된다. 사랑은 반
드시 진위를 분별할 수 있는 양심을 동인으로 삼아야 한다. 믿음은 단순한 신
뢰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구원론적인 성격을 가지는 단어이다. 왜냐
하면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와 연관이 있는 것으로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
게 하기 때문이다 (참조. 딤전 3:13; 딤후 1:13; 3:15). 사도 바울이 말하는
사랑은 이와 같이 구원론적인 믿음을 출처로 삼는다. 사랑 그 자체가 동력이
지만, 사랑은 또한 동력을 필요로 한다. 참된 사랑은 마음과 양심과 믿음에
서 나온다. 우리가 자주 잊는 것은 사랑에 동력이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망
각증세 때문에 우리는 사랑보다 더 근본적인 것으로 들어가지를 못한다. 따라
서 우리의 사랑은 당연히 값싼 사랑이 되고 마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근본적인 것을 추구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는 사랑의 동력
인 마음과 양심과 믿음을 말할 때도 그것들이 무엇을 동력으로 삼고 있는지
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마음은 정결함을, 양심은 선함을, 믿음은 거짓이
없음을 동력으로 삼는다. 사랑이 내부에서 출원한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
라, 정결함을 근본성으로 삼는 내부에서 출원하는 것이 중요하다. 마찬가지
로 사랑은 선함에 바탕을 둔 양심과 거짓 없음에 바탕을 둔 믿음에서 출원해
야 하는 것이다. 아는가? 정결함과 선함과 거짓 없음은 오직 하나님의 속성이
라는 것을. 사도 바울은 근본적인 것을 추구하는 여정의 마지막 자리에서 하
나님을 발견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의 가장 궁극적인 동력은 하나님에게
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살 수 있을 뿐이다. 동력이 없으면 동작
도 없다. 사도 바울이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이다. 하나님이 없으면 우리도 없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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