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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과 기독교 비교

 


우리나라가 이제는 이슬람에 대하여 전혀 안전하지 않다는 데 모두 공감하는 듯하다. 2007년 아프가니스탄에서의 한국인 피랍과 살해, 그리고 2008년 모 공영방송의 <신의 길 인간의 길>은 이슬람도 기독교도 모두 왜곡된 채 방영되었고 2010년과 2011년은 정부가 면세를 골자로 한 수쿠크(이슬람 채권) 법을 통과시키려다 이 법안의 내용이 우리나라 세법에 안 맞는다하여 아직까지 본회의에 상정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정작 기독교인들은 무엇을 어떻게 하여야 할까? 이슬람이 참 중요하다고 하나 모두가 다 이슬람을 배워야 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이슬람에 대하여 전혀 지식이 없다보니 누군가이슬람에 대하여 말하면 금방 그쪽으로 쏠리고 만다. 심지어 아랍어를 전공하는 대학원 학생들도 이슬람에 대하여 정확하게 모른다. <이슬람은 반대하고 무슬림은 받아들이어야 한다>는 이상한 논리가 있다. 말이 그럴 듯하다. 그러나 무슬림들을 만나면 이슬람이 무슬림이고 무슬림이 이슬람이라고 한다. 다른 것은 이슬람이 종교를 가리키고 무슬림은 그 종교를 믿는 사람을 가리킨다. 그래서 우선 이슬람과 기독교의 비교는 다음과 같은 사항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 첫째, 무슬림이 본 이슬람과 기독교인이 본 이슬람을 따로 적어보는 것이다. 이슬람에 대한 기독교인과 무슬림의 시각이 다른 경우가 많다. 둘째, 기독교의 장점을 이슬람의 약점과 비교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동등한 저울 위에 올려놓고 서로를 비교하는 것이 공정한 태도이다. 셋째, 이슬람과 꾸란에서 사용되는 용어를 기독교용어로 바꾸지 말고 꾸란에 나오면 꾸란 그대로 사용하고, 성경과 기독교에서 사용하는 용어를 이슬람용어로바꾸지 말고 성경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다. 가령 꾸란에는 <이싸>라고 되어 있는데 성경의 예수와 다른 이싸를 굳이 <예수>라고 부를 필요가 없다. 꾸란의 알라와 기독교의 하나님이 서로 다른 부분이 있으므로 꾸란의 알라는 <알라>라고 하고 기독교의 하나님은 <하나님>이라고 한다. 성경의 아브라함과 꾸란의 이브라힘, 성경의 솔로몬과 꾸란의 술라이만 등으로 구분한다. 이슬람의 <지하드>는 <성전: 거룩한 전쟁>이 아니고 <이슬람식 투쟁>이고, <버즈 두바이>는 아랍어 그대로 <부르즈 두바이>라고 해야 한다.

무슬림들은 " 이슬람 역시 구약을 인정하고 이로부터 파생되었다. 이슬람 유대교 기독교의 뿌리는 같다"고 하는데 이 역시 정확하지 않다. 오늘날 무슬림들은 기독교인들의 성경이 변질되어 있다고 믿고 이슬람의 꾸란만이 최종 진리라고 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오직 우리가 알고 있는 성경 이외에 진리는 없다. 유대교와 기독교는 뿌리가 같을 수 있으나 이슬람은 그 뿌리가 다르다. 무슬림들은 이슬람과 기독교와 유대교가 아브라함의 종교라고 하지만 무슬림들이 믿는 꾸란 본문에는 < 이브라힘은유대교인도 아니고 기독교인도 아니고 하니프(일신론자)>라고 했다. 무슬림들은 자신들이 믿는 꾸란 속에 이브라힘이 유대교도 아니고 기독교도 아니라고 하면서 오늘날 무슬림이 기독교, 이슬람, 유대교의 3 종교가 뿌리가 같다고 하는 것은 서로 모순되는 말이다. 결국 우리의 이슬람에 대한 연구는 꾸란에서 뭐라고 하는지, 그리고 과거 이슬람학자들이 뭐라고 하는지 그리고 오늘날 무슬림들은 뭐라고 하는지 총체적으로 알아야 우리가 이슬람에 대한 정답을 말할 수 있다. 또 아랍 땅에 살고 있는 기독교인 혹은 무슬림이 아닌 사람들의 자료들도 참고해야 하고 서구 학자들의 이슬람에 대한 책들도 참고해야한다. 무슬림이 말하는 내용에는 왜곡된 부분도 있기 때문이다. 한 가지 더 우리가 알 것은 모든 무슬림이 이슬람을 다 잘 아는 게 아니고 한국말로 번역된 꾸란이 부정확한데도 기독교인들이 이 틀린 꾸란을 인용하는 것은 <이젠 그만 두어야 한다>. 제발 틀린 꾸란을 인용하여 글을 쓰지 마시라. 만일 쓰고 싶다면 그 틀린 인용문을 빼고 여러분이 이해하는 내용을 그냥 쓰시라. 넷째, 이슬람에 대하여 말할 때 오직 무슬림들의 생각만을 전하면 이슬람의 참 모습을 알기 어렵다. 그러므로 무슬림이 말하는 이슬람과 무슬림이 아닌 사람이 이슬람에 대하여 말하는 내용을 모두 써 보아야 한다. 꾸란을 읽어보면 메카에서 무함마드는 평화적인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만 메디나로 간 뒤에는 무함마드는 여러 차례 전쟁을 통하여 이슬람을 알리고 이슬람을 믿으라고 했다. 그러므로 이슬람을 전체적으로 보아야 한다. 어느 한 시기가 아니라 역사와 오늘의 이슬람을 모두 통털어 살펴봐야 그 본색을 알 수 있다. 다섯째, 우리가 이슬람연구를 하면서 이슬람만이 갖는 문화가 기독교에 미치는 영향 그리고 한국인들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들을 연구하고 또 자주 언급해야 한다. 오늘날 한국에서 이슬람이 왜곡된 것은 이슬람과 무슬림에 대하여 한쪽 면만 보여주는 매스컴의 영향이 크고 무슬림이 이슬람을 왜곡하고 비무슬림이 이슬람을 잘 모르고 쓴 내용이 이슬람을 바로 알지 못하게 한다. 여섯째, 우리의 이슬람, 무슬림에 대한 접근이 성경적인가를 확인해 보아야 한다.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인격적이고 감정적인 면까지도 다루셔서 성경을 통해서 기독교인들이 이슬람을 바르게 이해하도록 도와주실 것이다. 무슬림과 이웃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것이 뭘까? 꾸란, 이슬람의 용어는 성경, 기독교의 용어와 다른 경우가 많다. 일곱째, 이슬람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 등의 통합적인 제도(system)이지만 무슬림을 사람(People)으로 만나는 것이 필요하다. '무슬림'으로 그들을 만나기보다는 '사람'이라는 차원에서 만나는 것이다. 즉, 무슬림을 이슬람교의 대표로서 인식하고 만나는 것이 아니라 한 개인으로 그들과 인사를 나누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무슬림을 종교(이슬람)가 아닌 한 <인간people>으로 다가가서 어떻게 그들과 관계를 맺어갈 것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렇다고 우리가 이슬람의 진실fact을 왜곡해서도 안 되고 그 진실을 덮어두어서도 안 된다. 그렇지만 우리가 이웃을 알고자 하면 그의 지적인 수준 뿐만 아니라 그의 삶까지도 살펴봐야 한다. 무슬림에게 기독교를 그저 소개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무슬림의 마음 속 깊이 자리 잡고 있는 편견과 잘못된 선입견까지도 복음이 다루어줘야 한다. 우리의 삶이 그리스도의 인격과 삶이 드러난 모습으로 다가가면 어떨까? 무슬림들과 순수한 마음으로 만나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다음 누가복음의 말씀이 도움이 될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적용할 만한 원리는 무엇인가?(콜린 채프만,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pp. 20-22) 그들 사이에 앉으시고: 우리가 무슬림의 가정을 방문하거나 대학 내 동료로서 같이 앉아서 이야기하려 할 때 우리 관계에 영향을 미칠 정치, 문화적 요인 등 때문에 그들이 나에게 어떻게 반응할 것인지를 알고 있는가? 그들이 느끼는 감정까지도 속속들이 알고 있는가?

들으시고: 나의 신앙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그들의 이야기(그들의 신앙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고 그들을 알아가는데 도움이 되는 삶의 이야기)를 기꺼이 들어 줄 여유가 있는가? 묻기도 하시니: 우리가 그들을 알기 위해 꼭 필요한 질문은 무엇인가? 이해하셨다: 이슬람에 관해about Islam 아는 것과 이슬람 Islam을 직접 공부하고 이해하는 것과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뉴스에 나오는 정보와 우리의 통찰력으로 본 이슬람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가? 이런 통찰력을 우리가 어떻게 얻을 수 있는가? 대답하시고: 그들이 알고 싶어하는 의문이나 그들이 반드시 알아야 한다고 생각되는 그런 질문에 대한 답을 우리가 가지고 있거나 우리가 대답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는가?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우리 이웃을 사랑하라"(마 22: 37-40)는 명령은 "가서 모든 족속을 제자 삼으라"라는 명령보다 앞선 것(마 28:19-20)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만일 우리가 무슬림을 알지도 못하고 사랑하지도 못하고 그들을 우리 이웃으로 돌아 보지 않고서 무슬림들에게 복음을 나눌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는가? 그동안 우리가 공부한 이슬람에 대한 모든 연구가 도움이 될 때는 언제이겠는가?
출처 :공주일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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