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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성한 예배를 향하여

 

개혁주의 예배관 / 개혁주의를 말하다

이성호 교수

 

1. 서론: 예배의 대상이신 삼위 하나님

예배의 현장에는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과 예배를 드리는 그의 백성이 존재한다. 둘 중에 누가 중요하냐고 묻는다면, 그 질문에 대한 답은 당연히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이시다. 예배를 받으시는 분에 대한 정확한 이해 없이 온전한 예배는 불가능하다. 그런데 오늘날 예배에 관한 논의에 있어서 예배를 받는 분에 대한 논의는 진지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 같지 않다. 마치 예배를 받는 분에 대해서는 이미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예배를 받는 분에 대한 논의가 없으니 예배학이 하나의 인간학이 되어 버린다. 예배학이 범주 상 신학에 속한다면 예배의 주된 관심사도 예배를 받는 분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좋은 예배와 나쁜 예배를 나누는 기준도 내가 얼마나 예배 속에서 은혜를 받았는가?”가 아니라 하나님이 얼마나 나의 예배를 기쁘게 받으셨는가?”가 되어야 한다. 또한 예배학에 있어서 핵심 질문도 우리가 어떻게 예배를 드릴 것인가?”가 아니라 하나님은 어떤 예배를 받으시는가?”가 되어야 한다.

 

우리의 예배의 대상은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시다. 삼위일체 교리는 기독교를 거짓 종교와 구분 짓는 핵심교리이다. 이 교리가 이해하기 힘든 교리라고 해서 아예 제쳐 놓아서는 안 된다. 비록 이해하고 설명하기는 힘들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체험할 수는 있기 때문이다. 예배는 그것을 가장 분명하고 확실하게 체험할 수 있는 현장이다. 예배의 부름 속에서 삼위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당신이 베푸신 잔치로 초대하시고, 우리는 송영을 통하여 그 분의 이름을 영화롭게 한다; 삼위 하나님은 설교를 통하여 당신의 백성에게 말씀하시고 우리는 그 분에게 찬송과 기도로 응답한다; 삼위 하나님은 성찬 속에서 굶주리고 배고픈 우리의 영혼에게 참된 양식과 음료를 주시고 우리는 믿음으로 그 양식을 받아 먹는다; 삼위 하나님은 축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복을 주시고 우리는 아멘으로 화답한다. 예배를 이렇게 이해한다면 예배는 왕이신 삼위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이 함께 누리는 언약적 친교(covenantal communion)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 신학과 예배

 

웨스트민스터 소교리문답 제1문은 사람의 제일된 목적에 대해서 질문한다. 여기에 대한 답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그분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 고신교회의 진정한 고백이라면 예배는 교회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심에 위치한다. 참된 예배보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분을 즐거워하는 것이 존재할 수 있겠는가? 소교리문답이 가장 첫 질문에서 예배가 신자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심이라는 것을 두드러지게 교회에 선포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교리문답은 교리 그 자체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교리 혹은 신학은 예배를 위해서 존재한다.

 

신학과 예배는 분리되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예배가 신학이고, 신학이 예배라고 할 수 있다. 신학을 테오로기아(theologia)라고 하는데, 이것은 하나님(theos)’(logos)’의 합성어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말혹은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로 번역될 수 있다. 신학을 이렇게 정의한다면 예배야 말로 신학이라고 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예배 속에서 하나님은 설교를 통해서 자기 백성에게 말씀하시고, 그 말씀을 들은 백성이 하나님께 기도와 찬송으로 응답하기 때문이다. 굳이 차이가 있다면, 신학은 이성적인 성격이 강하다면 예배는 경험적 혹은 체험적 성격이 강하다고 할 수 있다. 신학적 작업을 통하여, 우리는 보다 분명하고 풍성한 이해를 가지고 예배에 임하게 되고, 그 예배의 결과 우리가 고백하고 있는 신학에 대하여 보다 굳건한 확신을 얻게 된다.

 

예배가 본질적으로 체험적이기 때문에 올바른 신학적 작업이 없다면 원래의 순수성에서 벗어날 위험성을 항상 안고 있다. 이것은 성경 자체가 그렇게 증거하고 있고, 교회 역사 속에서도 입증되어 왔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상 숭배의 늪에서 완전히 해방되지 못하였으며, 신약 이후의 교회에서도 순수한 예배 속에 세속적인 누룩이 항상 침투해 들어 왔다. 중세 로마 교회가 교리적으로 타락했을 때, 문제는 교리에서만 끝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예배의 타락으로 이어졌다. 만약 교리 자체만이 신*구교 사이에 문제였다면 종교개혁은 단지 교리의 개혁으로 끝났을 것이고 교회의 분열까지 이어지지는 않았을지 모른다. 개혁파 교회가 출현하게 된 결정적이 이유는 하나님을 올바르게 예배하고 싶은 거룩한 열정 때문이었다. 그 결과 이전의 예배 형식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예배가 교회에서 드려지게 되었고, 참 성도는 그 예배 안에서 참 자유와 기쁨을 누리게 되었다.

 

3. ‘오직 성경과 예배

 

일반적으로 종교개혁 당시 카톨릭과 개신교의 근본적인 교리의 차이를 이신칭의에서 찾는 경우가 많다. 어떤 이들은 성찬에서 찾기도 한다. 처음에는 그렇게 보였을지 모르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두 그룹의 본질적인 차이는 권위에 관한 것이 분명해졌다. 개신교의 교리가 맞는지 아니면 로마교회의 교리가 맞는지 그것을 결정할 수 있는 최종 권위가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어떠한 사소한 교리적 문제도 해결될 수가 없었다. 두 그룹이 결국 하나가 되지 못한 이유는 바로 이 최종 권위에 대한 생각이 달랐기 때문이었다.

 

이 두 그룹은 모두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 들였으나 카톨릭은 성경의 충분성을 인정하지 않았고 교회의 전통을 성경과 동일한 권위로 인정하였다. 반대로 개신교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충분하며, 모든 종교적 논쟁에 있어서 최종적 권위를 가진다고 주장하였다. 이것은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이라는 말로 요약될 수 있는데, 언뜻 보면 별 차이가 없어 보이지만, 이 원리 때문에 두 교회가 결국 분리의 길을 걷게 되었다.

 

오직 성경은 특별히 예배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개혁교회는 이전에 전통의 이름으로 관습화되어 왔던 예전들을 비평적으로 검토하여 성경의 가르침에 어긋나거나 부족한 것이 있으면 철저하게 개혁을 하기를 원하였다. 그리하여 개혁교회의 예배는 철저하게 성경의 가르침에 충실한 예배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개혁교회의 예배를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성경에 충실한 예배라고 할 수 있겠다. 개혁교회의 역사는 바로 이 예배를 교회 안에 올바르게 정착시키기 위한 긴 투쟁의 역사였다.

 

4. 규범적 원칙(Regulative Principle): 개혁교회 예배원리의 독특성

 

오직 성경의 원칙을 교회에 구체적으로 적용시키는 것은 그렇게 쉽지 않았다. 특히 이것은 예배의 경우에 더욱 그러하였다. 개신교 교회가 모두 오직 성경의 원리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각 교파들 사이에 예배는 다양성이라는 말로 설명하기에는 부족할 정도로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루터파와 개혁파의 예배가 다르고, 개혁파와 재세례파 사이에도 큰 차이가 있다. 이 말은 오직 성경이라는 원칙을 각 교파마다 달리 이해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루터파의 경우 성경의 명시적인 가르침과 충돌하지 않는 한 성경이 허용한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 결과 루터파는 성경의 가르침과 상충하는 로마교회의 화체설은 거부하였지만 로마 교회의 성만찬 예식은 거의 그대로 받아들였다. 한편 재세례파의 경우에는 성경이 직접적으로 명령한 것만을 받아들였다. 따라서 성경에서 직접적이고 명시적인 가르침이 없는 유아세례는 예배에 있어서 거부되었다. 반면, 개혁파는 성경이 명시적으로 명한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성경의 전체 가르침과 조화를 이루고, 성경의 가르침으로부터 추론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필연적이고 선하다면 성경의 가르침으로 인정하였다. 유아세례는 성경 전체의 가르침, 특히 언약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과 너무나 조화를 이루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예배에 대한 논쟁은 영국교회에서 보다 복잡한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영국교회의 교권주의자들은 예배의 일치는 교회의 일치를 위해서 필수적인 것으로 보았다. 그리하여 영국교회는 영국 안의 모든 교회들이 따라야 할 공동 기도서(The Book of Common Prayer)를 작성하였다. 이름과 달리 이 책 속에는 기도에 관한 가르침뿐만 아니라 예배에 필요한 모든 것이 담겨 있다. 이 책은 예배 형식에 관한 세세한 규정을 담고 있는데 영국교회의 머리라고 불린 영국 왕들은 모든 영국교회 회원들이 이 책의 규정에 따라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엄하게 명하였다.

 

공동기도서는 내용에 있어서 로마교회의 반성경적 혹은 비성경적 예배를 배척하였고, 심지어 어떤 부분에 있어서는 대륙의 개혁교회의 영향을 많이 반영하기도 하였지만, 보다 더 철저하게 예배가 개혁되기를 원하였던 사람들을 만족시킬 수는 없었다. 이들은 청교도라고 불렸는데, 그들에게 있어서 공동기도서의 가장 큰 문제는 개 교회의 자유가 박탈당하였다는 사실에 있었다. 청교도는 성경이 명시적으로 규정한 것만이 신자의 양심을 구속할 수 있고, 그렇지 않은 것은 개 교회의 자유에 맡겨져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것을 전문적인 용어로 규범적 원칙이라고 하는데, ‘오직 성경이라는 종교개혁의 모토가 예배의 영역에 적용된 것이다.

 

예를 들어 성직자가 어떤 옷을 입어야 하는가와 같은 문제는 성경에서 침묵하고 있는 비본질적인 영역(아디아포라)이기 때문에 청교도들은 각 교회가 알아서 판단할 문제라고 보았다. 그리고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각 교회에 주신 자유의 영역이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침범할 수 없다고 보았다. 반면 영국교회 지도자들은 각 교회에 그와 같은 자유가 주어지게 되면 교회의 가시적 일치가 상실되는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기 때문에 성경과 명백히 상충하지 않는 한 비본질적인 문제는 교회의 지도자, 보다 구체적으로 주교회의에 의해 결정되어 통일성 있게 실천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이렇게 예배에 대한 이해가 달랐기 때문에 청교도들은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위해 오랫동안 투쟁을 하였고 마침내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의 예배모범에서 그 결실을 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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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개혁의 역사 – 고대 교회로부터 16세기까지

 

“개혁된 교회는 또 다시 개혁되어야 한다.” (Reformed Church Should Be Reformed)

 

2000년 교회 역사에 있어서, 지속적으로 제기되어온 주제가 있다면 그 가운데 하나는 “교회의 개혁”(혹은 교회의 갱신)이다. 그리고 오늘날 한국 교회와 미국의 한인 교회 역시 교회 개혁이라는 화두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어떤 이들은 목회자의 자질 문제로부터 교회의 갱신이 일어나야 한다고 주장하며, 어떤 이들은 복음에 대한 열정이 다시금 새로워져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그리고 다른 이들은 교회가 처해 있는 사회적, 문화적, 정치적 환경을 분석하며 교회의 개혁과 갱신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고 주장했던 어느 역사학자의 경구를 굳이 인용하지 않더라도, 신학으로서의 역사 공부는 오늘날 우리 시대가 직면한 시대적 과제에 대한 해법 찾기와 결코 무관할 수 없다. 결국, 16세기 종교개혁을 공부하는 것 역시 21세기 개신교 목회자인 우리에게는 신학적이고 목회적인 통찰력을 얻기 위함이다.[1] 개신교 목회자라는 자기 정체성의 뿌리를 살펴보는 것만이 아니라, 개신교 신학의 강조점을 살펴보는 것뿐만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당면한 “교회 개혁”이라는 화두를 접근함에 있어서도 그렇다.

 

이 글에서는 그레고리우스의 시대로부터 16세기 종교개혁의 시기까지, 교회의 개혁(갱신)을 위한 노력들이 어떠했는지를 살펴본다. 짧은 글에 그 오랜 시기의 사건들을 정확하게 묘사하기란 불가능하다. 다만, 교회를 개혁하려 했던 중요한 움직임을 대략적인 개관하며 그러한 움직임을 유형론(typology)적으로 서술함으로써, 오늘날 일어나고 있는 교회 개혁이라는 화두에 대한 보다 창조적인 접근을 시도한다.

 

대(大) 그레고리우스

 

그레고리우스가 로마의 주교로 재위하던 시기(590년 9월 3일부터 604년 3월 12일까지)에는 서방 기독교 공동체에 많은 위기가 있었다. 이탈리아는 고트족 왕국이 되었다가 비잔틴 제국에 속주로 편입되었다. 이 과정에서 치러진 수많은 전투로 국토가 피폐하였다. 그런데 조금 후에는 롬바르드족에게 짓밟혔다. 그들은 이탈리아의 교회를 불태우고 성직자들을 학살하고 수도원을 약탈하고 수녀들을 범하고 잘 경작된 밭들을 황무지로 만들어 놓았다. 로마는 약탈에 노출되었고, 전염병과 기근에 시달렸다. 유럽 전체가 무정부 상태나 다름없는 혼돈에 빠져 있었다.

 

부유한 원로원 가문에서 탄생했으나 세상과 인연을 끊고 수도원의 수사가 되었던 그레고리우스는 본인의 강력한 고사에도 불구하고 성직자단과 원로원과 백성의 만장일치로 로마 주교로 선출되었다. 그는 교황이 된 뒤에도 수도원 시절과 다름없이 매우 검소하게 살았으며 위기에 처한 기독교 공동체를 새롭게 세우기 위해 수많은 노력을 쉬지 않았다. 조촐한 음식을 차려놓고 식사를 하려다가도 가난한 사람들이 생각나면 그 음식을 그들에게 보냈다. 억울한 일을 당한 과부들과 고아들을 위해서 항상 개입했다. 노예들과 포로들을 속량해 주었고, 축성(祝聖)된 그릇들을 자선의 목적으로 판매하도록 허용하였다.

 

그레고리우스는 교회 의식을 체계화하고 완성했다. 자신의 이름이 붙은 새로운 찬송 형식으로써 미사와 예배의 형식을 개선했다. 능력 있는 설교를 했으며, 당시의 재앙들을 근거로 겸손과 경건을 역설했다. 선교사들을 독려하고 그들에게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서방 세계의 수장으로서 이탈리아 ․ 갈리아 ․ 스페인 ․ 브리타니아의 교회들을 보살폈고, 몇몇 수도대주교들에게 팔리움(대주교가 착용하는 영대<領帶>)을 보냈다. 하지만 법적 관할권을 주장하지는 않았다. 의무에 태만하거나 범죄를 저지른 주교들을 견책하고 면직시켰다. 당대에 만연하던 성직 매매 관행을 단호히 반대했으면, 성직자들에게 사역의 대가로 수수료를 징수하거나 혹시 주더라도 받지 말라고 경고했다.

 

보쉬에(Bossuet) 주교는 그레고리우스의 공적 생애를 다음과 같이 간결하게 요약하였다. “이 위대한 교황은 황제들에게 아무런 지원을 받지 못했음에도 롬바르드 족을 굴복시켰고, 로마와 이탈리아를 구원했고,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들의 느닷없는 교만을 꺾었고, 자신의 교리로써 온 교회를 깨우쳤고, 겸손이 뒷받침된 열정으로 동방과 서방을 지도했으며, 세계에 교회 정부의 완벽한 예를 남겼다.”

 

또한 박스만은 이렇게 평가했다. “롬바르드족이 이탈리아 전역에서 동요와 불안을 일으키는 가운데 한 사람이 영원한 도성에서 자신의 지위에 굳게 서서 아무리 높은 파도가 휩쓸고 지나가도 요동하지 않았다. 루터가 유언에서 자신을 가리켜 천국과 지상과 지옥에서 그 이름이 잘 알려진 하나님의 대변자라고 부르듯이, 그레고리우스의 비문에는 그가 하나님의 집정관(consul Dei)으로 다스렸다고 적혀 있다. 그는 교회 공화국의 수석주교이자 라틴 교회의 다른 유력한 신학자들과 기둥들인 암브로시우스, 아우구스티누스, 제롬에 이어 제 4대 교회 박사(doctor ecclesiae)였다. ‘의식의 아버지’(pater ceremoniarum), ‘수도원의 아버지’(pater monachorum), ‘대’(the Great)라는 칭호가 그에게 부여되는 것이 정당하다. 그는 이전 시대의 라틴 교회가 교회 정치와 교의, 목회와 예배에 관하여 쌓아놓은 것을 집대성하여 다음 시대를 위해서 어지간해서는 빗나가지 않은 규범들을 세워놓았다.”

 

그레고리우스는 롬바르드족이 로마를 점령하던 시대, 곧 서방의 기독교 공동체가 그 근거지를 유린당하고 있던 시대에 교회와 수도원을 바른 원리와 규칙에 따라 통치하였던 인물이다. 그는 아리우스주의 기독교를 받아들였던 롬바르드족을 정통 가톨릭교회의 교인이 되도록 하는 한편, 군대를 양성하여 롬바르드족과 평화협정을 맺으며 기독교 공동체를 보호하였다. 그레고리우스의 활약으로 위기에 빠진 기독교 공동체는 스스로를 지킬 수 있었다. 그러나 그레고리우스의 눈부신 활약이 중세 교황권의 확립으로 이어진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이다. 이때부터 중세 가톨릭교회는 교황 수위권 및 교황 무오설로 나아가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샤를마뉴의 카롤링 제국

 

그레고리우스 시대 잠시 로마를 점령하였던 롬바르드족 왕국은 743년 아스톨프가 왕위에 오르면서 다시금 로마에 대한 공격을 재개하였다. 이에 위협을 느낀 자카리아스 교황은 754년 프랑크족의 왕 피핀에게 거룩한 기름부음으로 임명하며 그에게 기독교의 심장 로마를 롬바르드족으로부터 구하도록 요청하였다. 피핀은 군대를 이끌고 직접 이탈리아까지 출정하여 롬바르드족을 격퇴했다. 그가 돌아간 뒤 롬바르드족이 다시 전쟁을 일으키자, 교황은 그에게 거듭 서신을 보내어 베드로와 하나님의 성모의 이름으로 로마 시를 저 지긋지긋한 원수들의 손에서 건져달라고 훈계도 하고 명령도 한 뒤, 만약 신속히 순종해 준다면 이생에서의 장수와 내세에서의 영광스러운 거처를 보장하겠다고 약속했다. 755년 피핀은 군대를 이끌고 다시 알프스를 넘어 롬바르드족을 격퇴하고 그들에게 빼앗은 영토를 교황에게 넘겨주었다. 피핀의 뒤를 이어 프랑크 왕국을 통치한 인물이 샤를마뉴(r. 768-814)이다.

 

샤를마뉴는 콘스탄틴을 그의 모델로 삼았다. 콘스탄틴이 통일된 로마제국을 기독교 위에 세웠듯이 샤를마뉴 역시 유럽 대륙을 교황의 영적 통치와 긴밀히 연결된 자신의 세속적 통치 아래서 통일시키려는 포부를 품었다. 그는 평생을 전쟁으로 보내다시피 했다. 군대를 직접 지휘하기도 하고 참모들을 보내기도 하면서 그는 53번이 넘는 정복 전쟁을 수행함으로써 프랑크 왕국은 카롤링 제국이 되었다. 샤를마뉴는 자신이 정복한 지역에서 교역을 장려했고, 도로를 개설했으며 마인 강과 도나우 강을 운하로 연결했다. 제국에 질서를 정착시켰으며 이교도들과 이슬람교의 침공과 약탈로부터 유럽대륙을 보호하였다. 샤를마뉴의 출현으로 기독교 공동체를 보호하는 울타리가 강력해졌다.[2]

 

샤를마뉴의 업적은 이교도들에 대한 정복전쟁만이 아니었다. 그는 교육과 종교에 많은 열정을 쏟았다.[3] 라틴어 성경의 오역을 바로잡기 위한 조치를 취했으며, 신학 문제에 관심을 두었다. 신학자들과 학자들과 시인들과 사기들을 불러보아 곁에서 지내게 했다. 그는 궁정 학교와 수도원 학교들을 세웠으며, 자신이 직접 학교들을 방문했다. 그가 제정한 법률 가운데는 모든 남자 어린이들에게 보통 교육을 실시하도록 명하는 법률도 있었다.

 

샤를마뉴는 성직자들에게 매우 관대했다. 제국 전역에서 거둬들인 십일조를 그들에게 주었고, 자격을 갖춘 사람을 주교와 대수도원장으로 임명했고, 교회들에 기부했고, 화려한 대성당을 지었다. 그가 성직자들에게 품은 존경은 로마 주교를 성 베드로의 계승자로 존경한 데서 절정에 달했다. 그는 교황들에게 큰 선물을 셀 수 없이 많이 보냈다. 그가 재위 기간 내내 품었던 간절한 소원은 자신의 보호와 영향 하에 로마 시의 옛 권위를 재확립하고, 성 베드로의 교회를 방어하고 보호하며, 자신이 비용을 들여 그 교회를 다른 어떤 교회들보다 아름답고 화려하게 장식하는 것이었다.

 

476년 서로마제국의 마지막 황제가 퇴위한 이후 324년이 흐른 800년 샤를마뉴는 교황 레오 3세로부터 황제의 왕관을 받았다. 샤를마뉴는 위기의 중세 기독교 공동체를 정치적 황제의 위치에서 보호하고 부흥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세속 정치인을 기독교의 수호자로 인정하였던 콘스탄틴 황제의 모델은 이미 고대 교회에서 실패를 경험하였다. 샤를마뉴의 카롤링 제국은 잠시 기독교 공동체의 강력한 보호막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교회는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카롤링 왕국을 의존하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교회 공동체는 자신 스스로를 정화하려는 노력보다는 세속 권력을 활용하려는 정치적 노력에 더 집중하였다.

  

중세 수도원 운동

 

그레고리우스는 수도원의 규율을 엄격하게 적용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도 한 때였다. 유럽 사회가 온통 혼란과 격동에 휩싸여 있던 9-10세기를 지나면서 수도원의 기강도 해이해졌다. 근면하고 고결한 삶의 보상으로 축적된 수도원의 많은 재산이 악의 올무와 뿌리가 된 경우가 허다했다. 탐욕스러운 평신도들이 그것을 가로챈 뒤 가산으로 물려주었다. 심지어 공주들조차 대수녀원장의 직함과 수당을 받았다. 이러한 혼돈과 탐욕의 시기에 수도원 운동 안에서 새로운 몸부림이 등장하였고, 이러한 움직임은 가톨릭교회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중세 대표적인 수도원 운동을 꼽으라면 첫째는 프란치스코를 선봉으로 한 프란시스칸 수도회요, 둘째는 도미니쿠스를 선봉으로 한 도미니칸 수도회이다.

 

프란치스코가 활동하던 시기(1181-1226)는 교황청의 전성기였다. 그 정점에 있었던 교황 이노센트 3세는 하나님께서 태양과 달을 창조하시어 낮과 밤을 각각 주관하도록 하셨듯이, 이 세상을 다스릴 두 개의 빛, 곧 교황과 황제를 창조하셨다고 주장했다. 태양이 달보다 위대한 존재인 것처럼, 영혼을 지배하는 교황은 육체를 지배하는 왕실보다 존귀한 존재라는 것이다. 이렇듯 황제의 권한이 왕권을 넘어 서유럽 전체를 뒤덮고 있을 때,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는 스스로 자신의 모든 소유를 버리며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일에 헌신하게 된다. 그는 한평생 스스로 가난하게 살면서 가난한 사람들과 병자들을 돌보는 전도여행을 떠났다.

 

프란치스코는 그의 구걸승단의 목적과 실천의 초점을 선교에 맞추었다. 그는 이탈리아를 누비면서 설교했다. 그는 이슬람교 지역에도 선교하기를 원했고, 성지여행도 원했으나 파선으로 좌절되었다. 그는 모로코로 들어가려고 스페인으로 갔고, 이곳에서 최근 기독교 영주들의 연합세력에 의해서 패배하여 피난하고 있는 이슬람교 사람들에게 설교했다. 1210년의 수도회칙과 프란치스코의 유언에 따르면 프란체스코회 수사들은 구체적인 규율들로 얽매인 폐쇄 조직이 되기보다, 복음적 청빈과 사도적 실천에 헌신하는 자유로운 형제회가 되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도미니쿠스(1170-1221)는 10년 동안 팔렌시아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했는데, 우수한 학생이었다고 전해진다. 1217년 그는 수사들을 보내 수도원을 세우도록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수도회는 파리와 볼로냐, 로마 같은 대도시들에 뿌리를 내렸으며 파리 대학교의 유명한 교회법 교수 레지날이 그 수도회에 가입했다. 이처럼 도미니쿠스는 프란시스코에 비하여 학문의 전당인 대학과의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고, 그가 세운 도미니칸 수도회는 학문 연구를 분명한 과업으로 채택한 최초의 수도회였다. 프란시스칸들과는 달리 도미니칸들은 처음부터 설교뿐만 아니라 가르치는 일과 학문연구를 강조했다. 로마 가톨릭의 신앙을 지적으로 체계화시킨 토마스 아퀴나스가 바로 이 승단 출신이다. 도미니칸들은 청빈의 삶을 영위했지만, 프란치스코와 그의 추종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모든 세상적인 좋은 것을 몽땅 거부하는 수도원적 삶의 이상을 추구하지는 않았다.

 

프란시스칸과 도미니칸은 서로 성격이 달랐다. 프란시스칸이 청빈과 선교를 강조하였다면, 도미니칸은 학문 연구를 중요하게 여겼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는 중세 기독교 공동체의 영성을 서로 다른 각도에서 풍성하게 만들었다. 나아가 프란시스칸과 도미니칸과 같은 수도원은 당시 세속 권력과의 투쟁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있던 중세 로마 가톨릭 교회에게 복음의 역동성을 불어넣어주는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프란시스칸이나 도미니칸과 같은 수도원 운동은 교회 조직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그 안에 복음의 능력을 확보하려는 움직임이었다.

 

16세기 종교개혁

 

교황청의 전성기로 평가받는 이노센트 3세의 시대 이후 약 100년이 흐르면 교황청은 최대의 위기를 맞이한다. 이른바 교황청의 바빌로니아 유수 혹은 아비뇽 유수이다. 약 70년 동안(1305-1378) 교황청이 로마를 버리고 프랑스 아비뇽으로 이전하였다. 아비뇽 교황청은 기독교 세계에서 교황에 대한 존경을 뿌리째 흔들었다. 교황청이 프랑스의 일개 기관이 될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아비뇽 체류 기간 교황청의 도덕상은 유럽 전역에서 악명이 높았다. 세속 군주의 궁정과 다름없이 시기와 경쟁으로 분열되었고, 각종 음보로 시련을 겪었다. 이 시기, 교회의 타락은 단지 교황청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일반적으로 종교개혁이란 16세기에 일어난 일련의 사건을 가리킨다. 그러나 기독교 역사가들은 종교개혁 이전의 개혁자들이 존재했음을 상기시킨다. 그 중의 한 사람이 존 위클리프(1324-1384)이다. 위클리프는 대체로 옥스퍼드대학에서 학생시절과 교사시절을 보냈다. 위클리프가 개혁자로 나선 것은 그의 생애 마지막 8년 혹은 9년 동안의 일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주권과 국가 권력에 관하여 글을 썼는데, 여기서 모든 것의 소유주는 하나님이시고, 하나님께서 재산을 개인에게 허락하시는 이유는 이웃을 위해서 사용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이 같은 이론을 고위성직자들과 고위공직자들에게 적용했다. 특히 그는 고위성직자가 재산을 남용했을 경우 세속 권력에 의하여 처벌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세속화된 교황을 이단으로 보고 그를 교황직으로부터 축출시켜야 할 것을 주장했다. 아비뇽 교황청의 세입징수로 골치를 앓던 영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 같은 위클리프의 주장들을 환영했다.

 

위클리프는 그의 신념을 확고히 하기 위하여 라틴어로 된 불가타 성경을 영어로 번역하였다. 그는 성경이 최고의 권위를 가진다고 믿었고, 주교들과 사제들이 이 성경을 익히 알아야 하고, 심지어는 글을 모르는 사람들까지도 이 성경을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위클리프는 복음을 확산시키기 위하여 순회 설교자들을 많이 파송했다. 이들은 누구에게든 자신들의 설교를 듣는 사람들이 있다면 어디에서든 설교했다. 많은 사람들이 위클리프의 글을 읽었고, 순회 설교자들의 설교를 들었다. 어떤 이들은 위클리프와 순회 설교자들이 당시의 교회와 성직자들의 부패를 비판했기 때문에 그들을 따랐고, 어떤 이들은 그들의 일상 언어에 성경을 많이 인용했기 때문에 저들을 따르기도 했다. 주교들은 기성 가톨릭교회의 교리과 행습을 뿌리째 흔들고, 주교 자신들의 교권에 정면 도전하는 위클리프와 순회 설교자들의 운동의 확신을 두려워했다.

 

보헤미야의 종교개혁을 주도한 인물은 후쓰(1367-1415)였는데, 위클리프의 작품들이 이 종교개혁에 가세하였다. 보헤미아는 영국과 친밀한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후쓰가 영국의 옥스퍼드에서 공부할 수 있었고 위클리프의 작품들이 자유롭게 보헤미아로 유입될 수 있었다. 프라하의 가톨릭 대주교는 교황으로부터 모든 위클리프의 저서들을 소각하고 후쓰를 잠잠케 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후쓰는 순응하기를 거부했다. 급기야 요한 23세는 후쓰를 공식적으로 파문시켰고 프라하에서의 모든 활동을 법적으로 금지했다. 그는 1425년 7월 6일 이단이라는 죄목으로 화형에 처해졌다.

 

프란시스칸이나 도미니칸이 교회 밖에서 영성수련을 통하여 복음의 능력을 회복하려고 노력했다면 위클리프나 후쓰는 교회 안에서 교회의 잘못된 교리를 바로잡아 복음의 능력을 회복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14세기와 15세기에는 아직 그들의 개혁이 성공을 거둘만한 배경이 형성되지 못하였다. 1519년 루터의 개혁 운동이 시작되면서 교회 개혁은 새로운 불길을 내뿜기 시작하였다. 평신도들이 성경과 복음의 능력을 스스로 깨달으면서 비로소 기독교 공동체가 중세의 터널을 빠져 나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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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James Whitehead와 Eaton Whitehead는 목회자들이 신학교에서 목회자가 아닌 신학자들에게 신학 수업을 받기에, 신학적 지식에 대한 목회적 적용에 어려움을 느끼게 된다고 분석한 바 있다. “Generally, ministers are educated not by ministers, but by scholars whose tools of inquiry and criteria of effectiveness pertain more to academic theology than to theological reflection in ministry.” James D. Whitehead and Evelyn Eaton Whitehead, Method in Ministry, Theological Reflection and Christian Ministry (San Francisco: Harper & Row, publishers, 1980), 32.

[2] 샤를마뉴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It is my duty, with the help of the divine Mercy, to defend the Holy Church of God with my arms, everywhere.”

[3] 샤를마뉴의 이러한 업적을 “Carolingian Renaissance”라고 부르기도 한다.
출처: 창골산봉서방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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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서강해
 
넘치도록 풍성한 은혜 (디모데전서 1:12-17)

Exceedingly Abundant Grace

 

1. 은혜 이전 (Before Grace)

* 비방자 박해자 폭행자

(Blasphemer/ persecutor/ violent aggressor)

* 무지 때문에 범죄(레 5:15-19)

(Because of ignorance)

* 율법주의 도표

(Diagram of Legalism)

 

2. 은혜 이후 (After Grace)

* 긍휼과 은혜 (Mercy and grace)

* 은혜의 파문 (The ripple of grace)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을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1:15-16).

* 죄인의 괴수 (Chief of sinners)

* 은혜의식의 도표 (Diagram of grace-consciousness)

 

3. 항상 은혜 (Always Grace)

* 겸손 (Humility) (1:15)

* 감사 (Gratitude) (1:12)

* 선포 (Propagation) (1:15)

 
디모데전서를 통해서 우리는 바울이 주님에게서 받은 은혜을 상기하며
넘치도록 풍성한 하나님의 은혜라고 표현합니다.
그 은혜를 받기 전후로 나누어 살펴보겠습니다.
 

넘치도록 풍성한 은혜 (디모데전서 1:12-17)

1. 은혜 이전

바울은 '넘치도록 풍성한 은혜’를 고백했지만, 그것은 바울이 하나님의 은혜에 부딪힌 후의 고백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부딪히기 전 바울의 모습은 어떠했습니까?

13절에서 바울은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다고 했습니다.
“비방자”란 ‘신성 모독자’란 뜻입니다. 바울은 언행으로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도록 강요했습니다.

“박해자”는 사냥꾼이 맹수들을 사냥하듯, 교회를 사냥한 사람입니다.
바울은 살기(殺氣)와 위협이 등등(??)했습니다(행 9:1).
스데반 집사를 돌로 때려죽이는 일에 찬동했습니다.
바울이 그리스도의 교회를 박해한 것은 결국 그리스도를 박해한 것이었습니다(행 9:4).

“폭행자”란 거드름을 피우는 지독한 박해자입니다.
바울은 기독교 신자들이 수치와 고통을 당할 때에 고소하게 생각했습니다.
바울은 기독교 신자들을 때려잡는 깡패였습니다.

2. 은혜 이후

바울은 주님의 긍휼과 은혜에 대해서 이렇게 감격하고 감탄했습니다.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1:14).
주님을 믿게 된 것이 주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받고 주님을 사랑하게 된 것이 주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긍휼이 풍성하십니다(엡 2:4). 하나님은 은혜가 풍성하십니다(엡 2:7).
바울을 긍휼히 여기신 하나님은 우리를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바울에게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우리도 바울처럼 “우리 주의 은혜가...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긍휼과 은혜로 바울을 구원하실 뿐 아니라, 박해자(persecutor)를 설교자(preacher)로,
살인자(murderer)를 목회자(minister)와 선교사(missionary)로 바꾸셨습니다.
하나님이 바울을 변화시키신 것은 너무도 전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예루살렘 사도들과 교인들이 바울을 받아들이는데 상당히 힘들 정도였습니다(행 9:26-31).


하나님은 바울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맡기실 뿐 아니라,
그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도 주셨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나약한 질그릇 같은 바울이지만, 오뚝이 같은 능력을 받았습니다(고후 4:7-12).


바울은 세월이 가면 갈수록 태양보다 더 밝은 주님께 가까이 다가가는 삶을 살았습니다.
주님 앞에 선 자신의 모습을 볼 때 너무 크신 주님에 비해 너무 작은 자신을 보았습니다.


바울은 세월이 흐를수록 주님을 더 가까이 하면서 자신의 죄악을 더 깊이 보았습니다.
교만할래야 교만할 수 없는 자신의 추한 모습을 보았습니다.
주님의 긍휼과 은혜가 아니면 한시도 살 수 없는 자신을 보았습니다.
태양보다 더 밝은 주님 앞에서 바울은 “나는 죄인 중에 괴수이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바울은 죄인의 괴수인 자기까지도 구원하시는 예수님이 어떤 죄인이라도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구원하신다는 복음의 무한한 능력을 확신한 것입니다.

복음이 좋은 소식인 것은 하나님이 사람들을 변화시키시는 능력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3. 항상 은혜

신앙생활은 주님의 은혜에 부딪힌 사람이 그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 살아가는 생활입니다.
이미 앞에서 나왔지만, 바울은 항상 겸손했습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더하십니다(1:15; 벧전 5:5).

바울은 주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했습니다(1:12). 주님의 은혜를 망강하고 불평하면 주님의 은혜에 부딪히지 않습니다.
주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할 때에 주님의 은혜에 부딪힙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은혜를 항상 기억하고 감사해 보십시오.
주님의 은혜에 더욱 강하게 부딪힐 것입니다(신 8:11-18).


바울은 주님의 은혜의 복음을 선포했습니다(1:15).
주님의 은혜의 복음을 자신만 간직하고 있으면 주님의 은혜에 부딪히지 않습니다.
주님의 은혜의 복음을 선포할 때 주님의 은혜의 복음에 점점 더 강하게 부딪힙니다.
우리는 주님의 축복의 통로입니다. 복음을 전할 때 축복이 우리를 통해서 계속 흘러갑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은 정말 능력이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주님이 쏟아 부어주시는 은혜에 감격하여 주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생활입니다.
율법에 매여 있으면, 스스로 교만하고 남을 정죄하여 남을 죽입니다.
은혜에 부딪혀 살 때는 주님의 은혜에 감격하여 말씀대로 살면서도 겸손하고 남에게 은혜를 전하여 남을 살립니다.


‘넘치도록 풍성한 주님의 은혜’에 부딪혀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영원하신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영원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 (1:17).

출처 : 총회 목회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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균형적인 시각에서 본 신약의 영성
1.영성에 대한 정의
복음주의 진영의 대부분은 어거스틴과 칼빈의 영성을 지지하며, 영성이란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새 사람이 된 신자가 일상생활에서 성령을 쫓아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지칭한다. (막 12:30-31)
2. 균형적인 시각에서 본 영성
최근 영성개념의 혼란은 신약성경 교훈에 기초한 '균형성'을 상실하고 부분적인 진리를 극대화하거나 왜곡하여 그것을 배타적으로 강조하는 데 원인이 있다. 이런 영성개념의 왜곡 현상은 역사적으로 심령부흥회의 감정적 열광주의, 상속이원론, 은사제일주의, 말씀객관주의, 차가운 지성주의, 금욕적 세상도피주의, 개인영혼 구원사상, 신비주의 등의 요인들에 의해 야기된다.
1) 삼위일체 신론에 기초한 영적 균형성
참된 영성 개념은  삼위일체 신론에 함당하게 기초하여 정립되어야 한다. 삼위일체 신론 중에서 한 분만을 강조하는 영적 생활은 영성에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한다.
2) 회심 경험과 영적 균형성
그리스도인의 영적 생활의 출발점은 오순절주의자들이 말하는 '제2축복' 경험에서 시작하지 않고 '믿음의 들음으로'(갈 3:2,5) 성령을 받는 일에서 시작된다.
3) 윤리와 은사 사이의 균형성
영적인 사람은 성령의 열매와 성령의 은사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는 사람이다. 전자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게 하는 성령의 내면적 사역이고 후자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 은혜의 외면적 작용이다.
4) 올바른 신앙과 바른 실천 사이의 균형성
정통신앙(Orthodoxy)와 정통실천(Orthopraxy)의 균형을 이루지 못하는 영적 생활은 참된 영적 생활이 아니다.
5) 영광의 신학과 십자가 신학의 균형성
현실 교회들이 영적 균형을 잃기 쉬운 또 다른 영역은 '영과의 신학과 십자가 신학 사이의 균형성이다. 후자없는 전자만을 강조하는 신앙 자세는 영적 생활의 치명적 결과를 초래한다.
6) '이미' 와 '아직' 사이의 균형성
기독교의 영성 구조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already) 이루어진 것과 '아직' (not yet) 이루어 지지 않은 것 사이를 살아가는 종말론적 긴장 구조와 관련이 있다. 영성 두축들 가운데 '이미' 쪽만을 강조하게 되면 위에서 말한 영과의 신학이나 변영의 신학을 추구하게 되고 교회의 영성은 쉽사리 현세지향적인 성향을 띠게 된다.
7) 감성주의와 지성주의 사이의 균형성
현실 교회들 가운데서 영적 균형을 잃기 쉬운 또 다른 영역은 감성주의와 지성주의 사이의 균형성을 유지하지 못하는 것이다.
9) 사랑과 공의 사이의 균형성
기독교인의 영성은 사랑과 공의 사이에도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 죄인들을 뜨겁게 사랑하는 태도를 나타내야 하면서도 동시에 모든 것을 은혜롭게 넘어가면서 불의에 눈 감으려는 태도는 잘못된 것이다.
10) 결어
오늘날 한국교회 속에서도 성령운동이나 은사집회 같은 것들이 교회나 기도원 마다 수없이 유향하고 있지만 성령께서 신자들 속에 재현하고자 하시는 십자가의 형상은 잘 나타나 않고 있다. 오늘날 교회가 직면한 위기는 복음이 없이 영광의 신학만을 추구하는 세속화의 위기이며 십자가 공동체로서의 정체성을 상실한 위기이다.  참된 기독교 영성은 십자가 신학을 회복하는데서 발견되어야 한다.

출처 : 총회목회대학원,총회 목회대학원,개혁신학,개혁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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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교회사 역사적 개관


초대교회사를 통해 하나님은 초기 기독교 500년 동안 성도들의 고난과 박해를 잊지 않으셨습니다. 교회는박해에도 불구하고 무럭무럭 성장하여 소아시아와 유럽을 넘어 로마제국을 뒤덮었습니다. 그리하여 복음은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편만하게 전파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초대 교회사에 대한 이해는 목회자나 성도들에게도 필수 입니다.
또한 초대 교회사를 모르면 이 시대와 교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분명하게 이해할 수 없습니다. 초대 교회사는 교회사의 기초요 모판입니다. 초대교회는 언어적으로는 헬라어와 라틴어이고 지리적으로는 지중해 중심이며 정치적으로는 로마제국의 지배아래 있었습니다.
1.제국의 통치 아래 기독교는 고난과 박해를 받았지만 교회는 결국 고난을 이겨 냈습니다.
박해 이후 많은 이단들이 등장하여 교회는 대 혼란에 빠지게 되었지만 속사도들과 변증가들이 등장해 바른 신학을 지켜 냈습니다. 그러므로 초대 교회사 500년은 교회의 건설과 신학적 체계를 확립한 시기입니다. 초대 교회사는 펀의상 3기로 구분됩니다.
시도시대, 사도 후 시대, 니케아 공의회 시대
이 시기의 교회사적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 이후 그의 부활. 2. 오순절 성령 강림과 사도들의 전도 활동
3.속사도들의 신앙전승, 4. 로마 황제들의 박해, 5. 기독교 변증가들의 논쟁. 6. 배교자와 여러 이단들의 등장, 7. 성경의 정형 과정, 8. 수도원의 태동과 발전, 9. 기독교 공인과 국교 선언, 10. 동서로마의 분리, 11. 니케아와 예베소 공의회, 12.칼게돈 공의회를 통한 삼위일체와 기독론 교리의 체계화, 13. 아우구스티누스와 동서방교부들의 신학, 14. 사도직의 전승과 교황권의 학립, 15. 초기 기독교 선교,
사람들은 초대 교회를 정신적으로, 정치적으로 종교적으로 구분하기도 합니다.
정신적으로는 예수님의 죽음 이후부터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우(430년)까지입니다.
정치적으로는 476년 서로마의 멸망까지입니다. 종교적으로는 예수님의 죽음 이후 590년 그레고리우스 대제의 등장까지입니다. 이 시기는 다시 사도 시대, 사도 후 시대, 니케아 공의회 시대로 구분됩니다.  사도시대는 예수님의 죽음 이후 제자들이 활동하던 초기 100년까지의 기간으로, 신약교회가 태동하고 초대 교회의 조직과 예배가 형성된 시기입니다.
사도 후 시대는 100년부터 313년 기독교가 공인되기까지의 기간입니다.
이 시기에 교회는 로마의 박해을 받았으나 초기 교부들과 변증가들의 헌신을 통해 사도적 전통을 지켜 냈습니다. 또한 교회는 여러 이단과 분파주의 등장으로 매우 혼란했으나 정경을 채택하고 신조를 체계화함으로써 교회 제도들이 정착되었습니다.
니케아 공회 시대는 313년부터 590년 그레고리우스 대제의 등극까지로 이때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었으나 교회 내부에서 신학 논쟁들이 대거 발생했습ㄴ다.
이런 논쟁들이 공의회를 통해 정리 되면서 신학적 체계가 구체화되었습니다. 이어서 선교 운동의 확장과 수도원 운동. 동서방 교부들의 신학체계 확립 및 예배와 교회 직제의 조직화
로마 교황의 교권 강화와 교회의 발전이 활발하게 전개되었습니다.
초대 교회의 교회 역사를 체계적으로 저술한 사람은 유세비우스입니다. 그는 교회사의 아버지로 알려져 있는데 323년 완성된 10권의 '교회사'는 그의 대표작입니다. 유세비우스 이후 그의 교회사를 계승한 사가들이 곳곳에서 등장했습니다. 대표적인 역사가는 아우구스티누스입니다. 그는 초대 교회의 완성자로 기독교 신학 전반에 많은 저술을 남긴 목회자요 신학자요 역사가였습니다. 많은 저술 중에 기독교의 역사를 잘 정리한 '신국론'은 히포의 감도으로 있을 때 13년에 걸쳐 기록한 대작입니다. 당시 로마는 야만족의 침입으로 함락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러자 모든 책임을 기도교에 떠넘겼습니다. 그런 주장에 많은 기독교인들이 침묵했습니다.  이 같은 비판에 맞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적극적으로 기독교를 변호했습니다.
그는 신국론에서 모든 세속적문화와 사건들을 구속사적 관점에서 재조명했습니다.
이로써 지금까지 고대 헬라인들이 갖고 있던 순환 개념 대신 하나님의 구속 계획의 단회적 사건과 획일적 역사관을 주장했습니다.
결어
초대 교회의 교리적 체계 확립은 이후 교회 역사의 산실이 되었으며
오늘날처럼 교회가 세상의 지탄의 대상이 되고 교리적으로 혼탁한 때에 교회는 초대 교회
성도들 처럼 바른 교리의 체계 확립에 힘써야 할 것이다.

출처 : 총회목회대학원,총회 목회대학원,개혁신학,개혁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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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약신학과 그리스도

여호수아 6-8장의 언약적 의미

1.들어가는 말

여호수아서는 모세 오경의 언약과 유기적이며 점진적으로 연결되며, 아브라함의 언약이 하나님이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인 은혜 아래 역사 속에서 성취되었음을 보여 준다.따라서 가나안 땅의 정복 및 분배조차도 여호와의 전쟁을

통해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언약의 성취의 한 과정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2.여호수아서의 주제 및 특징

여호수아서의 주제는 성경 전체의 주제와 동일한 하나님의 구원이다. 즉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은

하나님의 의로움에 의한 무조건적인 은혜의 결과임을 보여 준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그 언약은

여호수아의 인도로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감으로써 비로소 성취되었다.

3. 여호수아서의 언약적 위치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애굽에서 한 민족으로 성장한 아브라함의 후손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해방되어 다시

언약의 땅 가나안에 들어갈 것이라는 약속에 따라 이곳 가나안 동편 모압 평지까지 오게되었다(15:13-16).

모세의 후계자가 된 여호수아가 이곳에서 언약의 백성을 이끌고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것은

단순한 가나안 입성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언약 성취라는 큰 언약적 의미가 있다.

4. 여호수아와 그리스도

여호수아서의 메시아 사상은 우선 여호수아의 이름에서 엿볼 수 있다. 이 이름의 문자적 의미는 구원과 연관되어

있으며 호세아(13:6)와 같은 의미를 갖고 있다. 여호수아라는 이름은 구원자라는 의미의 헬라어 예수(예수스)

의미와 같으며 자기의 백성을 구원하고 부요하게 하기 위해 오신 메시아의 다른 호칭이었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였듯이 예수 그리스도는 그를 믿는 자를 하나님 나라의 안식으로

인도하신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의 중재자이었듯이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도 믿는 자들의 유일한 중보자이시다.

여리고성을 바치라(6장 원문강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 성을 점령한 역사적 사실은 몇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 아브라함의 언약이 역사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시사한다. 즉 아브라함의 후손이 애굽에 내려간 후

사대 만에 가나안 땅으로 다시 올라오게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언약을 하나님께서 이루고 계심을 보여 준다.

둘째, 여리고 성 주위를 도는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그 성을 무너지게 하신 것은 이미 그 성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셨음을 증명한다.

그러므로, 여호수아서 전체적인 내용은 요단을 건너라(1-4), 가나안 땅을 취하라(5-12),가나안 땅을 분배하라

(13-21), 그리고 여호만 섬기라(22-24)는 네 부분으로 요약된다.

여호수아서의 내용은 단순한 한 민족의 역사가 아니라 성경 전체의 주제인 언약의 역사 곧 하나님의 구원 역사

가운데 한 부분을 담당하고 있는 언약사인 것이다.

결론

여호수아를 통해 낭독되는 하나님의 말씀은 축복 및 저주의 형태로 역사 속에서 반드시 성취될 언약이었다.

즉 신명기 27장의 에발산을 향한 저주 선포는 역사 속에서 반드시 성취될 하나님의 언약이었다. 이 축복과 저주의

선언대로 이스라엘 백성은 훗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축복을 받기도 했으나 불순종함으로 심판을 받아

이방인에게 사로잡혀 가서 저주를 받았다. 마침내 축복과 저주의 언약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를 믿는 자의 축복 및 그리스도 예수를 믿지 않는 자에 대한 저주로 역사 속에서 성취되었다.

이스라엘 백성의 여리고 및 아이 성 점령은, 가나안 거민들에게는 하나님의 심판이며 동시에 노아의 언약 및

아브라함의 언약을 역사 속에서 이루시는, 하나님의 언약 성취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십자가 사역 이후에는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영적 이스라엘이며 아브라함 자손이

됨으로써 이방인과 이스라엘의 구분이 사라졌다. 구약의 축복과 저주 선언은 오늘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구원과 영생이,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들에게는 저주와 심찬이 선언되는 모형과 그림자이다.

출처 : 총회목회대학원,총회 목회대학원,개혁신학,개혁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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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학 강의안

1총론

1.설교자로서 구비요소

설교는 하나님이 말씀을 전달하는 행위이다. 그 행위는 여러 가지 다양한 방법들이 있겠지만 가장 빠르고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방법은 설교일 것이다. 설교는 인간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영혼을 바르게 세우는

성령의 역사를 수반해야 한다.

2. 설교의 개념

설교는 인간에게 자신을 나타내시는 하나님의 말씀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자기 사진을 인간에게 주신 그리스도를 인간들에게 전파하는 것이다.

3.설교의 원리

설교가 말씀의 선포라는 원리가 설교의 내용을 결정적인 것이 되어야 함에는 재론의 여지가 없다.

이러한 원리는 또한 설교를 구성하는 방법론을 규정케 하는데 성경적 설교 내용은 성경으로만 이라는

말과 성경 전체를 이중적인 것으로서 수용되어져야 한다. 기독교적 예배에 있어서 설교는 예배의 핵이다.

. 설교의 역사

1.한국교회의 설교사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언제 전래되었는가 하는 문제는 명확하게 답변하기는 대단히 어렵다.그러나

실제적인 복음의 싸앗은 1884920일 미국 북장로교 소속의 의료선교사 호레이스 알렌이

서울에 입국해서 영국과 미국 공사관과 서양공사관의 부속의사의 신분으로 선교사업을 시작한 것이

한국선교의 효시하고 있다.

2.한국의 설교

흔히 60년대의 설교는 신비적인 경향으로 흘렀고, 70년대에는 신비주의적인 기복사상이 흥왕하여 이러한 추세에

편승한 경향이 심화되어 갔다. 80년대 들어서면서부터 하나님의 나라의 확장이라는 선교적 명제가 대두되었다

근래에는 차원높은 교육수준과 보편화된 편의주의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샤머니즘적인 기복사상에서

정신적이며 영적인 안위를 찾고 있는 경향이 농해지고 있다.

설교의 종류

주해설교 : 본문 가운데서 주제가 발췌되어지는 설교 중의 하나이며 설교의 전 내용이 본문의 해석과 논의로써

끝난다. 설교란 언제나 하나의 단위성을 가진다. 명제가 있어야 하고 논의의 분명한 목표가 있어햐 하며 전개에

따르는 주해는 그 명제의 설명을 위하여 사용되어져야 한다. 주해설교는 본문과 설교의 전재, 그리고 대부분의 그 보조

자료를 상고한 성경의 한 단원에서 얻는다.

2.본문설교 : 설교자가 의도한 목적에 따라 여러 가지 다양한 방법으로 분류될 수 있으나, 일반적으로 청중의 특색에 따라 구분될 수 있다.설교의 목적이 설교의 유형을 조정하는 요소가 되므로 이 설교의 근본적인 요소가 되는 본문의

활용에 따라 설교의 유형들이 이러진다.

3. 제목설교 : 제목설교의 형태은 하나의 주제나 제목이 설교의 전체적인 전개를 지배하는데서 그 명칭이 유래된다.

다시 말하면 설교의 전반적인 전개를 하나의 주제로 축약시킨다는 것이다. 본문설교는 보편적으로 제목설교가 되기 쉬운데 그 이유는 본문이나 주제는 결정적인 연관성을 가지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4.설교의 효과

설교자가 청중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귀가 없다면 효과적인 설교의 적용은 기대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설교에 있어서

커뮤니케이션이 단절되기 때문이다. 이와같이 전통적인 설교의 단점은 바로 커뮤니케이션의 부적절한 개념에서 연원하고 있음은 분명해진 것이다.

 

결어 : 설교의 일방적인 목적은 청중으로 하여금 설교자의 말을 듣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대화를 성립시키고 가르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설교는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대화를 활성화시키고 가르쳐 주는

컴뮤니케이션이 될 때에만 의미있는 설교가 된다. 설교는 기독교 신조, 의식과 생활에 대한 관념들을

전달하는 과정 이상의 행위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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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주의 목회연구] 복음전도와 제자도를 실천하는 교육목회

 

교육목회와 교회부흥
오늘날 교육목회는 다양하게 펼쳐지고 있느나 마땅히 지향해야 할 목표를 놓치고 있는 경우가 많다. 교육의 프로그램은 다양해졌으나 목표를 상실한 교육목회 활동이 진행되고 있다. 신앙교육을 시행할 때 지녀야할 기본구조를 살펴보면 교육목회가 무엇을 긍극적으로 포함해야 하며 지향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다.
1. 교육목회에서의 일차적인 목표인 복음전도의 실제
교회가 그리스도께 신앙서약을 못한 사람들에게 복음전도의 관심을 갖는 것은 근본적 과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복음전도가 교회 천체의 사역이어야 하며 교회의 교육의 중요한 실체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복음전도의 실체
1) 복음을 구체적으로 알려주라. 2)복음전도 대상을 정확히 이해하라 3)복음전도에 대한 책임을 져라. 4) 전한 복음 그대로 실철하라 5) 다양한 반응을 인정하라.
2.교육목회에서의 실제적 목표인 제자도 실제
최초의 신앙서약을 한 성도에 대해 관심을 갖는 제자도로서 교육목회의 목적은 세계속에서 그리스도의 뜻과 가르침, 그리고 사랑 등의 가치들에 관하여 더 배우게 되는 것이다.
최근 제자도의 동향은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지만 교육목회에서 제자도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첫째, 그리스도를 향한 최초의 신앙서약을 함으로서 제자로서의 신분을 갖는 성도를 기본적 대상으로 한다. 둘째, 제자도는 신앙공동체에서 나오는 의무이며 과업이다. 셋째, 제자도는 전도와 선교를 성취함으로서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복음전도의 실체
1)전한 복음을 지속적으로 구체적으로 설명해주라. 2)예상치 못한 사람들이 복음에 반응함을 기억하라. 3) 성령의 도우심을 의지하며 전도하라. 4) 복음전도 대상자와 함께 하는 사람이 되라. 5) 강압적 분위기로 복음을 전하지 말라.
복음전도의 실체
3.결론 : 복음전도와 제자도를 통합한 교육목회를 실천하라
목회자들이 교육목회 사역에서 복음전도나 제자도를 실패하는 이유중의 하나가 둘을 각각 독립적으로 시도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복음전도와 제자도 그리고 그 교육방법들을 분리하여
교육목회사역을  계획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성경은 복음전도를 위한 그룹과 제자도를 위한 그룹으로 성도들을 나누는 것을 지지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전도와 제자도의 통합적 차원에서 항상 교육목회를 계획하고 시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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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가지 신학체계와 루터의 신학

1 근본주의, 복음주의,그리고 개혁주의

1.서론

우리는 근본주의, 복음주의, 그리고 개혁주의라는 용어를 자주사용한다. 그러나 이러한 용어들을 깊이 이해하고

각각의 차이점을 분명히 없이 무분별하게 사용함으로써 많은 혼란이 야기되고 있다.

2. 근본주의 역사

근본주의 운동은 192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근본주의 운동을 형성하는 주된 요소들은 그 이전부터

형성되어 있었다. 1871년 신구파의 여낳ㅂ 이후, 북장로교 안에서는 자유주의 도전이 점점 더 거세지기 시작했다.

3. 근본주의 해석

근본주의는 일반적으로, 20세기초 미국에서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을 중심으로 일어난 반현대주의적 기독교 운동이다

근본주의란 일차적으로 미국에서 일어난 현재주의와 진화론과 자유주의에 대항해서 정통 기독교를 보수하려는

보수적인 기독교 인들의 광범위한 연합 운동이었다. 근본주의자들이 제시한 다섯가지 기본교리들 성경의 무오성,

동정녀 탄생, 대속, 부활과 재림, 이적의 역사성-은 정통 기독교 신학의 핵심 교리들임에는 틀림이 없다.

우리가 반드시 수호해야 할 교리들이다.

4. 근본주의 다른 면

근본주의 운동이 나중에는 분리적이고 전투적인 모습을 띠게 된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이것이 근본주의자들의

기본적인 특성으로 간주되었다. 이러한 부정적인 측면에서의 근본주의적 특성을 가지고 있는 기독교 집단들은 아직도

존재한다. 이것은 우리가 극복해나가야 할 모습이다. 근본주의의 부정적 모습과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 이미 복음주의

운동이 시작되었고, 복음주의는 21세기 기독교의 주류를 형성해나가고 있는 중이다.

복음주의

복음주의의 역사

복음주의를 예수는 그리스도시라는 복음의 중심 메시지를 믿음을오 받아들이고 성경의 무오한 신적 권위를 받아들이는 입장으로 규정한다면, 복음주의는 예수 그리스도에 근원을 두고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볼 때 복음주의 운동은

18세기 영미 부흥운동을 그 시작으로 삼는다. 미국의 복음주의 운동은 20세기 초반의 근본주의 운동과의 관련성 속에서 파악되어야 한다. 근본주의 운동은 복음주의적 개신교들이 중심이 되었던 운동이였기 때문이다.

2.복음주의자의 특성

일반적으로 복음주의자임을 자처하는 사람들은 대개 복음주의란 2000년 기독교의 역사적 전통성을 보수하는 입장으로

규정하는 입장을 규정한다. 복음주의자는 성경의 신적 권위와 영감과 무오성을 믿으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셨다. 또한 교회와 그리스도인 개개인의 대사회적 책이과 봉사를 강조한다.

. 개혁주의

1.개혁주의 역사적 뿌리

스위스의 쯔빙글리와 제네바의 칼빈과 스코틀란드의 낙스 등의 종교개혁자들의 개혁사상이 개혁주의의 역사적 뿌리라고 할 수 있다. 이후 개혁파는 화란(네델란드)과 영국까지 확산된다. 유럽에서는 스코틀란드와 화란이 개혁주의 전통을

가장 충실하게 계승해왔다고 볼 수 있다. 영국의 경우, 개혁파드은 본국의 종교적 핍박을 피하여 미국으로 건너가서

새로운 종교공동체를 건설했다. 이들이 청교들이다. 청교도들의 개혁신앙은 미국 국가 정신의 기초를 이루었다.

결어

근본주의, 복음주의, 및 개혁주의와 한국교회

근본주의란 말은 일차적으로 미국 내에서 일어난 개신교 운동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현재에는 주로 부정적인 의미로

, 신학적으로 편협하고 비관용적이고 전투적이고 분리주의적이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한국 교회 내의 진보주의 자들은 보수주의 자들을 향해서 무차별적으로 근본주의자라고 비난한다. 이러한 경향은 진보주의자들이 기독교 역사에 대하여 정확한 지식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다. 개혁주의는 일정한 신학체계를 가리키는 말이고, 복음주의란 신학적 체계라기 보다는 신학적인 운동 또는 신학적인 성향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므로 개혁주의자들은 복음주의 운동의 특성과 방향을 예의주시해야 할 필요가 있다. 개혁주의도 본래 교리적인 측면에서나 교회적인 측면에서 폭이

좁지 않다. 개혁주의의 문화 신학적 측면이 충분히 계발되면 복음주의적인 여러 특성들 중의 상당 부분을 포용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개혁주의 자들은 복음주의라는 큰 흐름 안에서 개혁주의의 특성을 견지하면서 복음주의의 장점을

흡수해나감으로써, 개혁주의가 현대의 정통 기독교 운동의 주류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출처 : 총회목회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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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 모더니즘과 개혁신앙

(Postmodernism and Reformed Faith)

 

1.포스트모던이란

 

1.정의의 문제

포스트 모던이란 말은 어느 뚜렸한 이데올로기를 지칭한다기보다 주로 시대에 대한 뜻을 언급하는 것이다.

하나의 세계관 뒤에 또 다른 세계관이 등장한다. 18세기 계몽사상은, 서구 문명을 지배하고 있던 성서적

통일성에 맞서고 나왔으며, 19세기가 되면서 낭만주의와 과학적 유물론이 동반해 왔다. 20세기는 우리에게 마르크시즘과 파스즘, 실존주의와 콩트의 실증주의를 가져다 주었다. 지금 21세기를 들어서면서 또 다른 세계관이 등장하고 있다.

2. 절대 진리는 없는가 ?

진리가 상대적이라고 믿는 자들에게 진리를 증거 하기는 쉽지 않다. “예수가 당신을 도왔지만, 그녀에겐 보석이

도움이 되었다는 경우처럼 도덕성이라는 것이 상대적이므로 용서할 죄도 없다고 믿는 이에게 구속의 진리를 선포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최근 조사에 따르면, 미국인 66퍼센트가 절대 진리 따윈 없다고 믿는다. 초기 청소년 층으로 가면 그 비율이 더 커져서, 18세에서 25세의 미국인 72퍼센트가 절대 진리는 없다고 믿는다.

한 때는 모든 인간이 근본적인 기독교 사상을 인정하고 있었으나 이제는 소수만이 받아들이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도덕, 종교적 변동만 접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인으로서 순수주의자인 리스 앤더슨은, “우리는 국가와 세계에

엄청난 구조적 변화를 겪고 있다. 그 변화는 인쇄술의 발명이나 산업혁명보다 힘이 클 것이다.”라고 말한다.

 

. 포스트 모던과 다원주의 문제

다원주의의 뿌리

영국이 다원주의 사회라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여러 인종적 배경과 다양한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공존하면서 공적인 삶에 동참하고 있다. 이런 다원성은 다원주의 이데올로기와 구별될 필요가 있다. 다원주의 내에서도

문화적 다원주의와 종교적 다원주의를 구별할 필요가 있다. 종교적 다원주의란 종교간의 차이가 진리와 거짓의 문제가

아니라 동일한 진리에 대한 인식의 차이에 있다고 믿은 신념이다. 그러므로 종교적 신념을 참이나 거짓의 문제인 것처럼 이야기하면 안 된다고 한다. 종교적인 믿음은 사적인 문제다 우리는 각기 자기 신앙을 가질 자격이 있다. 이것이

종교 다원주의로서의 오늘날 영국사회에서 널리 수용되는 견해다.

 

2. 다원주의(pluralism)개념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 ?

누군가 우리 다원주의 사회라고 말한다면 먼저 그가 무슨 의미로 그런 말을 하는지 알아야 그에게 제대로 반응할

수 있다. 이 말은 사실 여러 다양한 방식으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우리 다원주의 사회’‘ 운운할 때 또

다른 종류의 무리를 염두에 두고 있는 경우도 있다. 우리 모두는 하나의 문화적 장소‘’에 서 있다. 우리의 안목은

인종, 종속, 지역, 언어, 경제적 지위, 성 등과 같은 요인에 의해 형성된다.

 

3.결론

인류가 기초를 파괴할지도 모르지만 하나님의 주권에는 아무런 영향도 줄 수 없다. 통치자는 여전히 하나님 이시다.

그분은 하늘에서 초월적이면서도 공의롭게 다스리신다. 게다가 그 분은 하늘에만 계시지 않고 이 땅에서도 계신다.

그 분은 하늘 보좌 위에만 계신 것이 아니라, 그 성전, 즉 그의 교회에도 계신다. 문화가 하는 일이 무엇이든지

상관없이 하나님의 자녀들은 절대 보장을 받고 있다. 주께서 통치하시고 백성들과 함께 하시는 것이다.

그리스도 인들은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덧없이 인간지식과 문화와 역사에 의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그와 반대로,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13:8) 따라서 오직 주님을 사모하고

그를 향한 열정이 식어지지 않도록 해야할 것이다.

  출처 : 총회 목회 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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