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개혁의 역사 – 고대 교회로부터 16세기까지
“개혁된 교회는 또 다시 개혁되어야 한다.” (Reformed Church Should Be Reformed)
2000년 교회 역사에 있어서, 지속적으로 제기되어온 주제가 있다면 그 가운데 하나는 “교회의 개혁”(혹은 교회의 갱신)이다. 그리고 오늘날 한국 교회와 미국의 한인 교회 역시 교회 개혁이라는 화두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어떤 이들은 목회자의 자질 문제로부터 교회의 갱신이 일어나야 한다고 주장하며, 어떤 이들은 복음에 대한 열정이 다시금 새로워져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그리고 다른 이들은 교회가 처해 있는 사회적, 문화적, 정치적 환경을 분석하며 교회의 개혁과 갱신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고 주장했던 어느 역사학자의 경구를 굳이 인용하지 않더라도, 신학으로서의 역사 공부는 오늘날 우리 시대가 직면한 시대적 과제에 대한 해법 찾기와 결코 무관할 수 없다. 결국, 16세기 종교개혁을 공부하는 것 역시 21세기 개신교 목회자인 우리에게는 신학적이고 목회적인 통찰력을 얻기 위함이다.[1] 개신교 목회자라는 자기 정체성의 뿌리를 살펴보는 것만이 아니라, 개신교 신학의 강조점을 살펴보는 것뿐만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당면한 “교회 개혁”이라는 화두를 접근함에 있어서도 그렇다.
이 글에서는 그레고리우스의 시대로부터 16세기 종교개혁의 시기까지, 교회의 개혁(갱신)을 위한 노력들이 어떠했는지를 살펴본다. 짧은 글에 그 오랜 시기의 사건들을 정확하게 묘사하기란 불가능하다. 다만, 교회를 개혁하려 했던 중요한 움직임을 대략적인 개관하며 그러한 움직임을 유형론(typology)적으로 서술함으로써, 오늘날 일어나고 있는 교회 개혁이라는 화두에 대한 보다 창조적인 접근을 시도한다.
대(大) 그레고리우스
그레고리우스가 로마의 주교로 재위하던 시기(590년 9월 3일부터 604년 3월 12일까지)에는 서방 기독교 공동체에 많은 위기가 있었다. 이탈리아는 고트족 왕국이 되었다가 비잔틴 제국에 속주로 편입되었다. 이 과정에서 치러진 수많은 전투로 국토가 피폐하였다. 그런데 조금 후에는 롬바르드족에게 짓밟혔다. 그들은 이탈리아의 교회를 불태우고 성직자들을 학살하고 수도원을 약탈하고 수녀들을 범하고 잘 경작된 밭들을 황무지로 만들어 놓았다. 로마는 약탈에 노출되었고, 전염병과 기근에 시달렸다. 유럽 전체가 무정부 상태나 다름없는 혼돈에 빠져 있었다.
부유한 원로원 가문에서 탄생했으나 세상과 인연을 끊고 수도원의 수사가 되었던 그레고리우스는 본인의 강력한 고사에도 불구하고 성직자단과 원로원과 백성의 만장일치로 로마 주교로 선출되었다. 그는 교황이 된 뒤에도 수도원 시절과 다름없이 매우 검소하게 살았으며 위기에 처한 기독교 공동체를 새롭게 세우기 위해 수많은 노력을 쉬지 않았다. 조촐한 음식을 차려놓고 식사를 하려다가도 가난한 사람들이 생각나면 그 음식을 그들에게 보냈다. 억울한 일을 당한 과부들과 고아들을 위해서 항상 개입했다. 노예들과 포로들을 속량해 주었고, 축성(祝聖)된 그릇들을 자선의 목적으로 판매하도록 허용하였다.
그레고리우스는 교회 의식을 체계화하고 완성했다. 자신의 이름이 붙은 새로운 찬송 형식으로써 미사와 예배의 형식을 개선했다. 능력 있는 설교를 했으며, 당시의 재앙들을 근거로 겸손과 경건을 역설했다. 선교사들을 독려하고 그들에게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서방 세계의 수장으로서 이탈리아 ․ 갈리아 ․ 스페인 ․ 브리타니아의 교회들을 보살폈고, 몇몇 수도대주교들에게 팔리움(대주교가 착용하는 영대<領帶>)을 보냈다. 하지만 법적 관할권을 주장하지는 않았다. 의무에 태만하거나 범죄를 저지른 주교들을 견책하고 면직시켰다. 당대에 만연하던 성직 매매 관행을 단호히 반대했으면, 성직자들에게 사역의 대가로 수수료를 징수하거나 혹시 주더라도 받지 말라고 경고했다.
보쉬에(Bossuet) 주교는 그레고리우스의 공적 생애를 다음과 같이 간결하게 요약하였다. “이 위대한 교황은 황제들에게 아무런 지원을 받지 못했음에도 롬바르드 족을 굴복시켰고, 로마와 이탈리아를 구원했고,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들의 느닷없는 교만을 꺾었고, 자신의 교리로써 온 교회를 깨우쳤고, 겸손이 뒷받침된 열정으로 동방과 서방을 지도했으며, 세계에 교회 정부의 완벽한 예를 남겼다.”
또한 박스만은 이렇게 평가했다. “롬바르드족이 이탈리아 전역에서 동요와 불안을 일으키는 가운데 한 사람이 영원한 도성에서 자신의 지위에 굳게 서서 아무리 높은 파도가 휩쓸고 지나가도 요동하지 않았다. 루터가 유언에서 자신을 가리켜 천국과 지상과 지옥에서 그 이름이 잘 알려진 하나님의 대변자라고 부르듯이, 그레고리우스의 비문에는 그가 하나님의 집정관(consul Dei)으로 다스렸다고 적혀 있다. 그는 교회 공화국의 수석주교이자 라틴 교회의 다른 유력한 신학자들과 기둥들인 암브로시우스, 아우구스티누스, 제롬에 이어 제 4대 교회 박사(doctor ecclesiae)였다. ‘의식의 아버지’(pater ceremoniarum), ‘수도원의 아버지’(pater monachorum), ‘대’(the Great)라는 칭호가 그에게 부여되는 것이 정당하다. 그는 이전 시대의 라틴 교회가 교회 정치와 교의, 목회와 예배에 관하여 쌓아놓은 것을 집대성하여 다음 시대를 위해서 어지간해서는 빗나가지 않은 규범들을 세워놓았다.”
그레고리우스는 롬바르드족이 로마를 점령하던 시대, 곧 서방의 기독교 공동체가 그 근거지를 유린당하고 있던 시대에 교회와 수도원을 바른 원리와 규칙에 따라 통치하였던 인물이다. 그는 아리우스주의 기독교를 받아들였던 롬바르드족을 정통 가톨릭교회의 교인이 되도록 하는 한편, 군대를 양성하여 롬바르드족과 평화협정을 맺으며 기독교 공동체를 보호하였다. 그레고리우스의 활약으로 위기에 빠진 기독교 공동체는 스스로를 지킬 수 있었다. 그러나 그레고리우스의 눈부신 활약이 중세 교황권의 확립으로 이어진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이다. 이때부터 중세 가톨릭교회는 교황 수위권 및 교황 무오설로 나아가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샤를마뉴의 카롤링 제국
그레고리우스 시대 잠시 로마를 점령하였던 롬바르드족 왕국은 743년 아스톨프가 왕위에 오르면서 다시금 로마에 대한 공격을 재개하였다. 이에 위협을 느낀 자카리아스 교황은 754년 프랑크족의 왕 피핀에게 거룩한 기름부음으로 임명하며 그에게 기독교의 심장 로마를 롬바르드족으로부터 구하도록 요청하였다. 피핀은 군대를 이끌고 직접 이탈리아까지 출정하여 롬바르드족을 격퇴했다. 그가 돌아간 뒤 롬바르드족이 다시 전쟁을 일으키자, 교황은 그에게 거듭 서신을 보내어 베드로와 하나님의 성모의 이름으로 로마 시를 저 지긋지긋한 원수들의 손에서 건져달라고 훈계도 하고 명령도 한 뒤, 만약 신속히 순종해 준다면 이생에서의 장수와 내세에서의 영광스러운 거처를 보장하겠다고 약속했다. 755년 피핀은 군대를 이끌고 다시 알프스를 넘어 롬바르드족을 격퇴하고 그들에게 빼앗은 영토를 교황에게 넘겨주었다. 피핀의 뒤를 이어 프랑크 왕국을 통치한 인물이 샤를마뉴(r. 768-814)이다.
샤를마뉴는 콘스탄틴을 그의 모델로 삼았다. 콘스탄틴이 통일된 로마제국을 기독교 위에 세웠듯이 샤를마뉴 역시 유럽 대륙을 교황의 영적 통치와 긴밀히 연결된 자신의 세속적 통치 아래서 통일시키려는 포부를 품었다. 그는 평생을 전쟁으로 보내다시피 했다. 군대를 직접 지휘하기도 하고 참모들을 보내기도 하면서 그는 53번이 넘는 정복 전쟁을 수행함으로써 프랑크 왕국은 카롤링 제국이 되었다. 샤를마뉴는 자신이 정복한 지역에서 교역을 장려했고, 도로를 개설했으며 마인 강과 도나우 강을 운하로 연결했다. 제국에 질서를 정착시켰으며 이교도들과 이슬람교의 침공과 약탈로부터 유럽대륙을 보호하였다. 샤를마뉴의 출현으로 기독교 공동체를 보호하는 울타리가 강력해졌다.[2]
샤를마뉴의 업적은 이교도들에 대한 정복전쟁만이 아니었다. 그는 교육과 종교에 많은 열정을 쏟았다.[3] 라틴어 성경의 오역을 바로잡기 위한 조치를 취했으며, 신학 문제에 관심을 두었다. 신학자들과 학자들과 시인들과 사기들을 불러보아 곁에서 지내게 했다. 그는 궁정 학교와 수도원 학교들을 세웠으며, 자신이 직접 학교들을 방문했다. 그가 제정한 법률 가운데는 모든 남자 어린이들에게 보통 교육을 실시하도록 명하는 법률도 있었다.
샤를마뉴는 성직자들에게 매우 관대했다. 제국 전역에서 거둬들인 십일조를 그들에게 주었고, 자격을 갖춘 사람을 주교와 대수도원장으로 임명했고, 교회들에 기부했고, 화려한 대성당을 지었다. 그가 성직자들에게 품은 존경은 로마 주교를 성 베드로의 계승자로 존경한 데서 절정에 달했다. 그는 교황들에게 큰 선물을 셀 수 없이 많이 보냈다. 그가 재위 기간 내내 품었던 간절한 소원은 자신의 보호와 영향 하에 로마 시의 옛 권위를 재확립하고, 성 베드로의 교회를 방어하고 보호하며, 자신이 비용을 들여 그 교회를 다른 어떤 교회들보다 아름답고 화려하게 장식하는 것이었다.
476년 서로마제국의 마지막 황제가 퇴위한 이후 324년이 흐른 800년 샤를마뉴는 교황 레오 3세로부터 황제의 왕관을 받았다. 샤를마뉴는 위기의 중세 기독교 공동체를 정치적 황제의 위치에서 보호하고 부흥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세속 정치인을 기독교의 수호자로 인정하였던 콘스탄틴 황제의 모델은 이미 고대 교회에서 실패를 경험하였다. 샤를마뉴의 카롤링 제국은 잠시 기독교 공동체의 강력한 보호막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교회는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카롤링 왕국을 의존하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교회 공동체는 자신 스스로를 정화하려는 노력보다는 세속 권력을 활용하려는 정치적 노력에 더 집중하였다.
중세 수도원 운동
그레고리우스는 수도원의 규율을 엄격하게 적용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도 한 때였다. 유럽 사회가 온통 혼란과 격동에 휩싸여 있던 9-10세기를 지나면서 수도원의 기강도 해이해졌다. 근면하고 고결한 삶의 보상으로 축적된 수도원의 많은 재산이 악의 올무와 뿌리가 된 경우가 허다했다. 탐욕스러운 평신도들이 그것을 가로챈 뒤 가산으로 물려주었다. 심지어 공주들조차 대수녀원장의 직함과 수당을 받았다. 이러한 혼돈과 탐욕의 시기에 수도원 운동 안에서 새로운 몸부림이 등장하였고, 이러한 움직임은 가톨릭교회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중세 대표적인 수도원 운동을 꼽으라면 첫째는 프란치스코를 선봉으로 한 프란시스칸 수도회요, 둘째는 도미니쿠스를 선봉으로 한 도미니칸 수도회이다.
프란치스코가 활동하던 시기(1181-1226)는 교황청의 전성기였다. 그 정점에 있었던 교황 이노센트 3세는 하나님께서 태양과 달을 창조하시어 낮과 밤을 각각 주관하도록 하셨듯이, 이 세상을 다스릴 두 개의 빛, 곧 교황과 황제를 창조하셨다고 주장했다. 태양이 달보다 위대한 존재인 것처럼, 영혼을 지배하는 교황은 육체를 지배하는 왕실보다 존귀한 존재라는 것이다. 이렇듯 황제의 권한이 왕권을 넘어 서유럽 전체를 뒤덮고 있을 때,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는 스스로 자신의 모든 소유를 버리며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일에 헌신하게 된다. 그는 한평생 스스로 가난하게 살면서 가난한 사람들과 병자들을 돌보는 전도여행을 떠났다.
프란치스코는 그의 구걸승단의 목적과 실천의 초점을 선교에 맞추었다. 그는 이탈리아를 누비면서 설교했다. 그는 이슬람교 지역에도 선교하기를 원했고, 성지여행도 원했으나 파선으로 좌절되었다. 그는 모로코로 들어가려고 스페인으로 갔고, 이곳에서 최근 기독교 영주들의 연합세력에 의해서 패배하여 피난하고 있는 이슬람교 사람들에게 설교했다. 1210년의 수도회칙과 프란치스코의 유언에 따르면 프란체스코회 수사들은 구체적인 규율들로 얽매인 폐쇄 조직이 되기보다, 복음적 청빈과 사도적 실천에 헌신하는 자유로운 형제회가 되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도미니쿠스(1170-1221)는 10년 동안 팔렌시아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했는데, 우수한 학생이었다고 전해진다. 1217년 그는 수사들을 보내 수도원을 세우도록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수도회는 파리와 볼로냐, 로마 같은 대도시들에 뿌리를 내렸으며 파리 대학교의 유명한 교회법 교수 레지날이 그 수도회에 가입했다. 이처럼 도미니쿠스는 프란시스코에 비하여 학문의 전당인 대학과의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고, 그가 세운 도미니칸 수도회는 학문 연구를 분명한 과업으로 채택한 최초의 수도회였다. 프란시스칸들과는 달리 도미니칸들은 처음부터 설교뿐만 아니라 가르치는 일과 학문연구를 강조했다. 로마 가톨릭의 신앙을 지적으로 체계화시킨 토마스 아퀴나스가 바로 이 승단 출신이다. 도미니칸들은 청빈의 삶을 영위했지만, 프란치스코와 그의 추종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모든 세상적인 좋은 것을 몽땅 거부하는 수도원적 삶의 이상을 추구하지는 않았다.
프란시스칸과 도미니칸은 서로 성격이 달랐다. 프란시스칸이 청빈과 선교를 강조하였다면, 도미니칸은 학문 연구를 중요하게 여겼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는 중세 기독교 공동체의 영성을 서로 다른 각도에서 풍성하게 만들었다. 나아가 프란시스칸과 도미니칸과 같은 수도원은 당시 세속 권력과의 투쟁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있던 중세 로마 가톨릭 교회에게 복음의 역동성을 불어넣어주는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프란시스칸이나 도미니칸과 같은 수도원 운동은 교회 조직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그 안에 복음의 능력을 확보하려는 움직임이었다.
16세기 종교개혁
교황청의 전성기로 평가받는 이노센트 3세의 시대 이후 약 100년이 흐르면 교황청은 최대의 위기를 맞이한다. 이른바 교황청의 바빌로니아 유수 혹은 아비뇽 유수이다. 약 70년 동안(1305-1378) 교황청이 로마를 버리고 프랑스 아비뇽으로 이전하였다. 아비뇽 교황청은 기독교 세계에서 교황에 대한 존경을 뿌리째 흔들었다. 교황청이 프랑스의 일개 기관이 될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아비뇽 체류 기간 교황청의 도덕상은 유럽 전역에서 악명이 높았다. 세속 군주의 궁정과 다름없이 시기와 경쟁으로 분열되었고, 각종 음보로 시련을 겪었다. 이 시기, 교회의 타락은 단지 교황청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일반적으로 종교개혁이란 16세기에 일어난 일련의 사건을 가리킨다. 그러나 기독교 역사가들은 종교개혁 이전의 개혁자들이 존재했음을 상기시킨다. 그 중의 한 사람이 존 위클리프(1324-1384)이다. 위클리프는 대체로 옥스퍼드대학에서 학생시절과 교사시절을 보냈다. 위클리프가 개혁자로 나선 것은 그의 생애 마지막 8년 혹은 9년 동안의 일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주권과 국가 권력에 관하여 글을 썼는데, 여기서 모든 것의 소유주는 하나님이시고, 하나님께서 재산을 개인에게 허락하시는 이유는 이웃을 위해서 사용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이 같은 이론을 고위성직자들과 고위공직자들에게 적용했다. 특히 그는 고위성직자가 재산을 남용했을 경우 세속 권력에 의하여 처벌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세속화된 교황을 이단으로 보고 그를 교황직으로부터 축출시켜야 할 것을 주장했다. 아비뇽 교황청의 세입징수로 골치를 앓던 영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 같은 위클리프의 주장들을 환영했다.
위클리프는 그의 신념을 확고히 하기 위하여 라틴어로 된 불가타 성경을 영어로 번역하였다. 그는 성경이 최고의 권위를 가진다고 믿었고, 주교들과 사제들이 이 성경을 익히 알아야 하고, 심지어는 글을 모르는 사람들까지도 이 성경을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위클리프는 복음을 확산시키기 위하여 순회 설교자들을 많이 파송했다. 이들은 누구에게든 자신들의 설교를 듣는 사람들이 있다면 어디에서든 설교했다. 많은 사람들이 위클리프의 글을 읽었고, 순회 설교자들의 설교를 들었다. 어떤 이들은 위클리프와 순회 설교자들이 당시의 교회와 성직자들의 부패를 비판했기 때문에 그들을 따랐고, 어떤 이들은 그들의 일상 언어에 성경을 많이 인용했기 때문에 저들을 따르기도 했다. 주교들은 기성 가톨릭교회의 교리과 행습을 뿌리째 흔들고, 주교 자신들의 교권에 정면 도전하는 위클리프와 순회 설교자들의 운동의 확신을 두려워했다.
보헤미야의 종교개혁을 주도한 인물은 후쓰(1367-1415)였는데, 위클리프의 작품들이 이 종교개혁에 가세하였다. 보헤미아는 영국과 친밀한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후쓰가 영국의 옥스퍼드에서 공부할 수 있었고 위클리프의 작품들이 자유롭게 보헤미아로 유입될 수 있었다. 프라하의 가톨릭 대주교는 교황으로부터 모든 위클리프의 저서들을 소각하고 후쓰를 잠잠케 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후쓰는 순응하기를 거부했다. 급기야 요한 23세는 후쓰를 공식적으로 파문시켰고 프라하에서의 모든 활동을 법적으로 금지했다. 그는 1425년 7월 6일 이단이라는 죄목으로 화형에 처해졌다.
프란시스칸이나 도미니칸이 교회 밖에서 영성수련을 통하여 복음의 능력을 회복하려고 노력했다면 위클리프나 후쓰는 교회 안에서 교회의 잘못된 교리를 바로잡아 복음의 능력을 회복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14세기와 15세기에는 아직 그들의 개혁이 성공을 거둘만한 배경이 형성되지 못하였다. 1519년 루터의 개혁 운동이 시작되면서 교회 개혁은 새로운 불길을 내뿜기 시작하였다. 평신도들이 성경과 복음의 능력을 스스로 깨달으면서 비로소 기독교 공동체가 중세의 터널을 빠져 나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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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James Whitehead와 Eaton Whitehead는 목회자들이 신학교에서 목회자가 아닌 신학자들에게 신학 수업을 받기에, 신학적 지식에 대한 목회적 적용에 어려움을 느끼게 된다고 분석한 바 있다. “Generally, ministers are educated not by ministers, but by scholars whose tools of inquiry and criteria of effectiveness pertain more to academic theology than to theological reflection in ministry.” James D. Whitehead and Evelyn Eaton Whitehead, Method in Ministry, Theological Reflection and Christian Ministry (San Francisco: Harper & Row, publishers, 1980), 32.
[2] 샤를마뉴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It is my duty, with the help of the divine Mercy, to defend the Holy Church of God with my arms, everywhere.”
[3] 샤를마뉴의 이러한 업적을 “Carolingian Renaissance”라고 부르기도 한다.
출처: 창골산봉서방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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