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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톨릭은 왜 이단인가? <1> 

 

유일한 참 교회? 교황은 페트로의 후예? 


김삼 교회의 진리 전달력이 약화되면서 종교 문제로 방황하는 젊은이들이 나날이 늘어간다. 얼마전 필자에게 온 한 편지는 혼기가 찬 젊은 아들이 천주교 여성과 사귀는 데 대한 한 신자 어머니의 고민 내용이었다. 드물지 않은 사례들이다. 나름대로 해결하기란 수월치 않은 문제다.

이런 현상은 신교회가 카톨릭의 문제점에 대한 적절히 대처하지않고 있는 탓이다. 마치 한국이 친북 좌경 세력들에게 이렇다할 대처를 하고 있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진리의 바위 위에 굳건히 서있지 않고 모래 위에 선 교회들은 언젠가 무너질 날이 올 것이며 그 날은 결코 멀지 않다.

 

 


▲바티칸 교황청 산 피에트로 광장에 서있는 \'초대교황\' 페트로 상.     © 김삼 

대다수 이단비평가들은 한국의 소규모 이단들을 열렬히 비판하면서 정작 카톨릭에 대해선 입을 다무는 경우가 흔하다. 일부 기독교단체나 신학자/목회자들은 "요즘이 어떤 세상인데 감히 함부로 카톨릭을 이단이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런 의미에서 카톨릭은 이단비평의 마지막 수순인지도 모른다.명심할 것은 카톨릭은 중세 종교개혁 때부터 지금까지 우리를 '이단'시 한다는 사실이다. 적반하장 격이지만 말이다. 

오해 말라. 필자는 천주교 사람들을 미워하지 않는다. 잘 아는 친지들도 있다. 여느 신자와 비신자의 영혼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영혼을 사랑한다. 사랑하기 때문에 올바른 길로 이끌고 싶다. 필자가 이단시하는 대상은 비성서적인 바티칸 교황청과 카톨릭교회의 교리다. 약10억 된다는 세계 카톨릭 신도들은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 이 교황청의 교리와 제도에 매인 노예들이나 다름없다. 

이단은 별 게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과 다른 방향이면 이단일 수밖에 없다. 하나님은 그분의 이름에 버금가게 말씀을 높이셨다. 성경은 성령이 친히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시어 기록하신 것임을 우리는 믿는다. 더 나아가 예수 크리스토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성경말씀에 추호라도, 파리똥 만큼이라도 가감하는 사람은 저주받아 마땅하다.

그렇다면 성경말씀을 있는 그대로 승복하기보다 자기 뜻대로 맘대로 '자유자재'로 가감해온 바티칸 신학자들과 역대 교황들도 저주 받아 마땅한 대상이다. 이건 필자자신의 생각과 말이 아니라 성경말씀 자체의 증언이다(계22:18,19). 할렐루야, 심판주 야훼 하나님과 재판장 예수 크리스토, 분별하시는 성령님께 영원히 영광!

카톨릭이 '이단'으로 규정받기엔 조건이 충분하다 못해 넘쳐날 정도다. 알고보면 카톨릭은 그 어느 기독교 계열 종파보다도 이단시비 여지가 있는 대표적 '문제집단'의 하나다.
그런데도 신교 일각에서, 특히 교계단체들이 카톨릭교회를 마치 험한 세상 길에 다정한 길벗이라도 되는 양 어정쩡한 태도를 취하는 이유는 뭘까? 몇가지로 분석될 수 있다.

우선 카톨릭의 규모가 너무 크기에 단순하지 않다는 점일 것이다. 기독교계의 어느 이단종파보다도 더 규모가 큰 집단이다. 그래서 "10억이나 되는 카톨릭이 다 이단일까? 그들은 구원받지 못할까?"라고 생각하게 된다. 이에 대해서는 앞으로 차차 논할 것이다.

둘째로 개신교가 카톨릭으로부터 그대로 물려받은 전통을 '공통요소'로 지닌다. 예를 들면 일부 예배의식의 유형, 사도신경, 사도신경/주기도의 의례적 사용, 물방울 세례, 어린이 세례, 일부 교파의 '사제' 제도 등이다. 또 성삼위일체 개념과 용언도 카톨릭과 공유한다. 그러기에 많은 교회들이 카톨릭과 '공통점'을 느끼는지 모른다.

셋째로 신교는 카톨릭에서 배태되어 갈려나온 존재로 자처하면서 카톨릭을 '모교회' 쯤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도 중요한 원인일 것이다. 하기야 마르틴 루터, 장 칼뱅 등이 본래 카톨릭 사제였다. 하지만 거듭난 사람들의 모임인 참된 하나님의 교회는 로마에서 배태돼 나온 게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왔다. 교회의 근원은 로마가 아닌 예루살렘임을 우린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 예루살렘교회는 하늘에서 오신 성령으로 태동됐기에 교회의 뿌리는 하늘이지 로마가 아닌 것이다.

  카톨릭은 유일한 참 교회?

로마교황 보니파체 8세는 바티칸 칙서 'Unam Sanctam'(1302년)에서 "..하나의 거룩한 카톨릭, 사도적 교회가 있을 뿐..이 교회 밖엔 구원이나 죄의 보속이 없다.." 라며 "..구원을 위해서는 모든 인류가 절대로 로마교황에게 복종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보니파체 자신이 교회의 머리 즉 크리스토가 된 셈이다. 카톨릭 유일주의의 이 기본원칙은 현재까지 변함 없다. 


▲교황 보니파체 8세 무덤 앞 석상.     ©김삼 

자고로 지상의 제도적 교회가 "우리 교회밖엔 구원이 없다"고 주장할 경우 이단이다. 바꿔말하면 "어떤 교회건 다른 교회엔 구원이 없다"고 주장하는 지상교회는 이단이다. 그런 이단이 어디 한둘인가. 구원이 있는 교회는 지상의 제도적 교회가 아니라 명실공히 크리스토를 머리로 하며 그의 몸된, 눈에 보이지 않는 비가시적 교회 즉 거듭난 신자들의 연결체일 뿐이다.

바티칸 카톨릭은 제도적, 가시적 교회에 불과한데도 짐짓 우주에 단하나뿐인 공교회, 유일한 교회로 행세하기 때문에 이단이다. [카톨릭교회=거듭난 신자집단], [가시적 교회제도=비가시적 우주교회], [카톨릭교회=천국교회] 같은 주장은 카톨릭 신학자들과 교황들만 할 수 있는 황당한 헛소리고 망언중 망언이다! 

이런데도 교황에게 조아리며 아부하는 신복음주의자들은 "당신은 우리를 이단으로 보셔도 우리는 여전히 당신을 받드나이다"라며 제 머리를 숙이고 들어가고 있으니 어찌 통탄하지 않으랴! 마치 상어아가리로 머리를 들이밀며 "우리는 당신의 것이니 제발 잡숴주시옵소서" 하는 물고기들과 다름없는 것이다. 그것은 제대로 된 대응방식이 아니다. 상어(카톨릭신학)엔 범고래(말씀중심 신학)로 대처해야 한다.

   교황은 '페트로의 후예'?

카톨릭 교회는 페트로를 '초대교황'으로 받들어왔고 이를 빌미로 역대 교황을 페트로의 후예로 믿어왔다. 성경은 물론 교회사적으로도 증명되지 않는 헛소리다.
먼저 페트로가 바티칸의 주장처럼 과연 로마교회의 '감독'이었나 쉽게 알아보자. [이 부분은 헨리 헛슨, 데이빗 클라웃의 연구를 참조했음을 밝혀둔다. 성구엔 원어발음에 더 가까운 성경 각권 약호를 쓴다. 즉 '페a'은 페트로알파(베드로전서), '페b'는 페트로베타(베드로후서)를 뜻한다. 기타 이름도 이에 준한다. 그 이유는 필자의 딴 글들을 참조해주기 바란다.] 

성경엔 페트로가 로마에 있었다는 증거가 없다(로마서 16장 참조). 또 신약성경 전체에 로마교회의 특수성/우위성 따위를 내비친 구석이 단 한군데도 없고 로마에서 교황이 다스린다거나 '모교회'라고 한 부분이 눈 씻고 봐도 없다.


▲페트로를 \'초대 교황\'으로 묘사한 독일 \'뉘렘베르크 역대기\' 속 삽화.     © 김삼 

페트로의 첫 편지 페트로알파(벧전)는 로마가 아닌 바빌론에서 쓰여진 것이다(페a 5:13). 페트로 당시의 '바빌론'은 로마를 의미한다는 교황들의 주장은 정말 웃기면서도 딴엔 자가당착이랄까 의미있는 얘기다. 왜냐하면 사실 로마교회는 계시록의 음녀 바빌론에 종종 비유되기 때문이다.

   파울은 '로마의 페트로'를 언급한 적 없어

사도 파울은 당대 로마 신자들에게 편지(로마서)를 보내면서 페트로를 언급한 흔적조차 없다. 당시는 주후 58년쯤이다. 그는 로마에서 특별한 은사를 나누길 원했고(롬1:11) 거기서 말씀 전하기를 원했다(1:15). 그러면서 그곳 성도중 27명에게 일일이 문안한다. 그러나 페트로는 이름조차 언급되지 않았다. 주후 61년 파울이 로마 죄수로 갇힌 중 몇몇 형제들을 만나지만 그 가운데 페트로는 없다.

이런 사실만 봐도 페트로는 로마 교황이나 로마교구의 감독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아니 로마교구란 제도 자체도 당시에 존재하지 않았다. 단지 파울이 돌보던 로마의 가정 교회만이 있었을 뿐이다.

로마에서 파울은 갈라티아 교인들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페트로에 관해 언급한다. 그러나 페트로가 로마에 있다거나 [바티칸 주장처럼] 그곳에서 20년간 교황 직위에 있던 페트로에 관한 언급이 아니다.
에페소/필리포/콜로사이/필레몬 등의 서신서는 모두 로마에서 기록된 것이다. 이 서신서에서 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언급되지만 페트로에 관한 언질은 단 한건(!)도 없다. 로마에서 파울이 보낸 마지막 서신서인 티모테 베타에서 파울은 "나의 첫 답변 때 아무도 나와 함께 하지 않고 오히려 모두 나를 버렸다"(티b 4:16)고 밝힌다. 만일 페트로가 로마감독이었다면 왜 파울과 함께 하지 않았겠는가? 만일 그가 있었는데도 딴 사람들처럼 파울을 버렸다면 그 엄청난 죄책을 어찌 면하겠는가!

순교 직전인 당시 파울은 이 편지(티모테 베타)에서 "오직 루카스(누가)만 나와 함께 있다"(티b 4:11)고 했지, "페트로도 나와 함께 있다"고 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떻게 페트로가 로마감독/교황이었을 수 있겠는가? 이것만 봐도 바티칸이 얼마나 거짓말덩어리인지 알수있다. 성경을 제멋대로 가감수정하는 것, 그것이 이단이다.

  페트로와 교황, 어느 쪽이 맞나?
-역대 교황들의 거짓


▲스승 크리스토께 \'열쇠\'를 받는 것으로 잘못 묘사된 카톨릭 그림. 주님은 \'초대 교황\' 페트로가 아닌 교회에 열쇠를 주셨다.     © 김삼 

페트로는 기혼자였다(마테오 8:14). 예수님과 모든 사도들이 다 아는 사실이었다. 장모도 있었고 사역 때 아내를 대동하기도 했다. 그러나 역대 교황들은 모두 미혼자/독신자다. 이 사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나? 특히 코린토알파(고전) 9:5은 카톨릭에 커다란 충격을 안겨준다. 도무지 적절한 대답을 하지 못한다. 한번 잘 살펴보자.
"우리는 딴 사도들, 주님의 동생들, 케파(페트로)처럼 믿는 자매인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리가 없단 말이오?"(코a 9;5)
파울이 쓴 편지의 이 부분이 확실히 밝혀주는 바는 다음과 같다.

1. 사도들 다수가 결혼했다.
2. 주님의 동생들이 있었으며 그들도 결혼했다.
3. 케파도 아내가 있어 사역 시 대동했다. 

위 세가지중 그 어느 것에도 카톨릭은 해당되지 않는다. 카톨릭은 결혼하지 않은 사제/수녀들만이 일반 평신도보다 거룩하고 제대로 사목을 할 자격이 있고 권위가 있다고 생각한다. 성경과는 반대다! 또 카톨릭은 주님의 친동생들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마리아를 영원한 처녀/정녀로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리아가 '영원한 처녀'란 근거가 성경에 전혀전혀전혀(!) 없다는 것은 카톨릭 신도들에게 충격을 주는 놀라운 진리다.

이 구절 딱 하나만으로도 카톨릭이 얼마나 거짓된 종교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교황청은 자기네 나름의 '성서' 또는 '성서해석'이 절대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바티칸 교황청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는 대상이다(계22:18,19).

성경을 맘대로 가감하니 말이다.
결혼한 페트로가 264명이라는 미혼자 교황들의 선배요 '초대 교황'이라니 얼마나 모순된 주장인가? 그러고도 페트로의 올바른 계승자/후계자/후예일 수 있는가? 카톨릭의 거짓은 여기서 그치질 않는다.

페트로는 성경은 확실히 하나님의 말씀이며 이것을 주목해야한다고 가르친다(페b 1:19~21). 그러나 교황들은 바티칸의 영감 없는 전통도 주목해야 한다고 보태어 주장한다.

페트로는 하나님의 백성을 상품화 하는 거짓교사들을 경계한다(페b 2:1~3). 그러나 교황들은 미사/기도/면죄부 등을 팔아먹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는 역사적으로 증명돼온 사실이다.

페트로는 침례/세례가 상징적일 뿐 성령과 예수 크리스토의 부활이 곁들여져야만 구원이 가능하다고 일러준다(페a 3:21. 이 구절의 한글번역은 개역이 제일 낫다). 그러나 교황들은 로마 카톨릭교회가 주는 세례(영세) 자체가 구원을 갖다주며 세례는 단순한 상징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페트로는 그에 대한 사람들의 숭상을 거부했다(행전 10:25,26). 그러나 역대 교황들은 천주교도들로부터는 물론 정치가/지도자들로부터의 영예/배례/키스/숭배를 기꺼이 수용하며 거의 신과 같은 대우를 받는다.

페트로는 구원이 오로지 예수 크리스토의 의를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말한다(페b 1:1). 그러나 교황들은 구원엔 영성체(성체를 받음)도 필요하다고 곁들여 주장한다.

페트로는 교권제도와 함께 목회자들의 권위주의적 자세를 경고하고 양떼의 본이 될 것을 권고했다(페a 5:3. 이하 성구들 모두 페a 즉 베드로전서). 또 장로 외엔 어떤 교회직분도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교황들은 교권체계를 세우고 신약에 언급되지 않은 수많은 제도와 직책을 만들어냈다.

페트로는 신약시대의 유일한 사제(제사장)직은 예수 크리스토의 하늘 대사제직 뿐이라고 가르치며 모든 신자들의 영적/보편적 사제직을 말했다(2:5~9). 그러나 교황들은 성체를 나눠주도록 서품된 카톨릭만의 특수 사제제도를 보유했다고 주장한다.

페트로는 기초이자 바위이신 예수 크리스토 위에 교회가 세워졌다고 말한다(2:4~8). 그러나 교황들은 페트로가 곧 반석이요 교회의 기초라고 주장한다. 페트로 자신을 거짓말쟁이, 모순된 사람으로 내모는 격이다.

페트로는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듭난다고 가르친다(1:23). 그러나 교황들은 사람이 영세(세례받음)로 거듭난다고 주장한다.


▲상 피에트로 바실리카 안의 페트로 동상. 로마주신 주피터 상을 닮았다는 설이 있어왔다. 발은 키스로 닳아있다     © 김삼 

페트로는 크리스토께서 죄를 위해 한번 희생되셨다고 가르친다(3:18). 나무(십자가)위에서 자기 몸으로 우리 죄를 지셨다고 가르친다(2:24). 그러나 교황들은 매번 미사 때마다 크리스토께서 새로 희생되며 예수 크리스토와 그 십자가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로마카톨릭교회와 영성체와 사제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페트로는 신자가 산 소망과 하늘 유업을 지녔다고 가르친다(1:2~5). 그러나 교황들은 신자가 하늘나라에 제 집이 있는지 확신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페트로는 신자가 살인자/도둑/악행자와 남의 일 간여자가 되지 말라고 훈계한다(4:15). 역대 교황 대다수는 이 모든 죄를 골고루 저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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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다원주의의 심각성

 

기독교 역사와 전통을 가진 유럽과 미국의 교회에서는 종교다원주의가 타종교도 기독교와 대등한 종교로 인정하는 정도이지만, 한국을 위시하여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다종교 사회에서는 종교다원주의가 혼합종교의 형성을 유발하고 촉진한다. 한국에 종교다원주의가 확산되고 혼합종교가 성행하고 있는 현실은 참으로 심각하다.

“오소서 성령이여, 만물을 새롭게 하소서”라는 주제 아래 열린 WCC 총회에서 무당굿을 하며 해방신학에 초점을 맞춰 읊은 정현경의 초혼문(招魂文)의 내용을 보면 실로 황당할 뿐이다.

“오소서, 우리들의 신앙의 조상 아브라함과 사라에 의하여 이용당하고 버림받은 검둥이 여종, 이집트 여인 하갈의 영이여, 오소서렁렁렁” 하는 말로 시작하여, 다윗에게 죽임을 당한 우리아의 영, 입다의 딸의 영, 헤롯의 군사들에 살해당한 남자 아이들의 영, 잔 다르크의 영, 마녀사냥으로 말미암아 불타 죽은 중세기 여인들의 영, 십자군 전쟁 때 희생된 사람들의 영, 기독교가 식민주의 시대와 이교도 세계에 대한 우월 의식을 지니고서 선교하던 시대에 학살된 토착민들의 영을 차례로 불러들인다(미출판된 자료집: WCC, 천주교, WEA 관련자료,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고려), 7).

KNCC의 홈페이지 기도자료실에 버젓이 올려있는 모 기독교대학의 교수이며 서울 모 교회 교육목사가 작성한 “생명의 강 살릴 종교 여성 공동기도문”을 보면 혼합종교화의 심각성을 실감하게 된다.

 

오, 하느님, 부처님!

살려 달라 매달려야 하는 건 우리 자신인데,

거꾸로 당신이 우리를 향해 애원하시다니요?

무력한 당신, 한없이 작은 당신, 아직도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못하는 당신,

한 중생이라도 더 구제하기 위하여 극락 언저리를 서성대는 당신.

땅바닥에 납작 엎드려 아래로 아래로 오랜 세월 흐르는 강물은 바로

당신의 눈물입니다. 사랑이고 자비입니다.

.............

 

하늘에 계신 하느님, 부처님,

성모 마리아님과 소태산 대조사님의 마음에 연하여

오늘 4대 종단의 종교여성이 일심(一心)으로 간구하오니

부디 이 땅에서 죽임의 굿판 대신에 신명나는 살림의 굿판이 벌어지도록 인도해 주십시오.


.............
 

나무아미타불, 아멘.

 

그뿐 아니다. 2009년 6월 18일의 한 시국 성명에는 “부엉이 바위에 묻어 있는 핏자국에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진 예수의 죽음을 봅니다”고 하는 말이 있는데, 여기에 1,024명의 목사들이 서명하고 있다는 사실은 충격적이다.

 

=====

 

지난 50년의 역사를 보면 WCC 지도부의 교회 통일에 대한 이상에는 변함이 없다. 그리고 WCC 신학은 우리 선배 목사님들이 우려했던 것보다 훨씬 급격하게 극단적인 방향으로, 즉 탈기독교적인 종교다원주의로 발전해 왔으며 그것이 세계 교회에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이다.

 

1960대 초반에 한국에서 선교적인 차원에서 토착화 신학을 주장하던 이들이 1990년대에는 종교다원주의 입장에 서 있음을 보게 된다. 그들의 입으로 종교다원주의는 토착화 신학의 종착점이라고 실토하고 있다. 그것은 혐오스런 일이긴 하나 그렇게 놀랄 일은 아니다. 종교다원주의는 역사적인 예수를 부정하고 칼케돈 신조를 폐기하는 자유주의 신학의 종착점이기 때문이다.

 

WCC가 추진해 온 사회 참여와 사회봉사만 하더라도 급진적인 자유주의 신학의 견지에서 추진하는 것이어서 전통적이며 보수적인 신앙과 신학을 가진 교회들은 따르기 힘들다.

 

역사에 사신 나사렛 예수가 곧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부인하는 사람들이 성경을 지엄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지 않으면서, 그리고 잘못된 신앙을 가진 자들을 경계하고 교회에서 축출함으로 교회의 성결을 지키라는 말씀은 외면한 채 교회더러 하나가 되라는 말씀은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지켜야 하는 말씀이라고 강변하는 것은 모순이다.

 

WCC의 회원이 되고 있는 교회에는 복음적이며 보수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WCC도 그러하지만 그 어떤 단체나 기관을 불건전한 신앙과 사상을 가진 개인이나 지도부가 관장했을 경우 그 단체나 기관은 대체로 지도자나 지도부의 지도를 받고 따르게 되어 있다. 특히 기독교 학교나 신학교의 경우 지도자 한 사람의 영향으로 학교가 잘못되어 가는 것을 역사와 우리의 주변에서 목격하고 경험하면서 우리는 안쓰럽고 통분한 마음을 금하지 못한다.

 

오늘에 보수적인 신앙을 가진 이들도 ‘성령 충만’과는 다른 개념인 ‘영성’이란 말을 즐겨 사용하는 것은 유감스런 일이다. 이 말이 유행하게 된 것은 1990년대부터이다. 그것은 기독교의 전통적인 교의와 교파 교회들이 가진 신앙고백을 외면하거나 폐기하고 그 대신에 모든 교회들에 통할 수 있는 막연한 ‘영성’을 강조하는 WCC 신학의 영향이다.

 

‘영성’은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추구하는 ‘종교성’과 같은 말로 모든 종교에서 발견할 수 있는 공통적인 요소이다. 좀 더 좁혀서 기독교에 국한하여 좀 더 긍정적인 의미로 이해하려고 하더라도 ‘영성’은 성령에 호응할 수 있는 우리 인간이 가진 영적 속성이라거나 영적 상태 혹은 영적 분위기 정도의 개념을 가진 말이다. 중세의 신비주의자들이 즐겨 쓴 말이다. 그러므로 ‘영성’은 ‘우주적 그리스도’, ‘하나님의 선교’라는 말과 함께 종교다원주의와 혼합종교로 유도하는 말들 가운데 하나일 수 있다.

 

박형룡 목사님과 박윤선 목사님이 일찍이 WCC의 신학과 목적을 직시하고 경고를 발해 준 데 대하여 우리는 그들의 혜안과 신앙을 높이 평가하며, 그들의 지도력에 감사해야 한다. 그리고 교회 분립의 아픔을 무릅쓰고 그들의 경고에 호응하여 WCC에 대치하는 선을 구축함과 동시에 교회의 전통적인 신앙고백을 보수해 온 선배 목사님들을 치하하며 그들에게 감사해야 한다.

 

우리는 바울이 에베소의 장로들에게 하나님이 피로 사신 교회를 노략하는 이리떼들로부터 지키라고 간곡히 부탁하는 말씀(행 20:27-31)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증언하는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 1:7, 8)고 하는 경고의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하여 선배들이 구축한 방어선을 확고히 지켜야 한다.

 

문화를 배경으로 기독교 교파 교회들을 넘어서서 모든 종교들과 연합하여 엄청난 세력으로 몸을 불리고 있는 WCC에 대항하거나 그것과 경쟁하려면 연합 전선을 펴야 하고, 능동적으로 복음을 전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넓히는 일에 힘을 다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전통적인 정통 신앙을 표방하는 동일한 신앙고백을 가진 교단들은 명분 없는 분열과 분립을 지양하고 교단들의 연합과 일치를 추구하며 선교에서 협력을 도모해야 할 것이다.

 

- 출처: 기독교 개혁신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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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연합과 에큐메니칼 운동(WCC)에 대한 소고


 

김영재 교수(합동신학원)

 

 

시작하는 말

 

2013년 세계기독교연합회(WCC)가 한국에서 개최되는 일을 앞두고 한국기독교협의회(KNCC)가 거기에 속하지 않은 회원 교회에 동참을 권유하며 협조를 요청하고 있어서, 이러한 요청에 한국 교계가 어떻게 대응해야 하느냐 하는 문제를 두고 논의를 거듭하고 있다.

현재 한국기독교협의회에 속한 교단 교회는 기독교 장로회(기장), 예수교 장로회(통합), 기독교 감리회, 성공회, 구세군, 복음교회, 정교회, 순복음교회(기독교하나님의성회)의 8개 교단이다.

KNCC와 양립하는 교회 연합 조직으로는 한국기독교총연합회가 있다. 거기에는 보수적인 장로교회를 비롯하여 보수적인 복음주의 교회들이 속해 있으나, 통합측 장로교단과 기독교하나님의성회가 양 기관에 다 회원이 되어 있으므로 한기총이 WCC에 반대하는 기관이라고는 할 수 없다.

한국 교회 여러 교단을 상대로 한 여론 조사에서는 WCC에 대한 찬반의 의견이 거의 반반이었다. 그것은 KNCC에 속하지 않은 교회 사람들 가운데서도 찬성하는 사람들이 상당 수가 된다는 뜻이다. 보수적인 교회 교단 사람들도 꽤 많은 사람들이 찬성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교회 연합의 명분이 따르기 때문일 것이다.

교회가 하나 되는 것은 주 예수께서 소원하시고 명하신 것이며, 사도 바울도 교회에 관하여 말씀할 때 간곡이 부탁하는 것이다. 반면에 교회가 하나이기를 힘쓰라는 말씀에도 불구하고 WCC를 반대하는 이들은 무엇 때문에, 무슨 명분으로 반대하는 것인지 알아야 할 것이다.

 

1. 역사 속에 나타난 교회의 분열

 

그리스도의 교회는 이단으로 정죄 받은 교회들이 분립하는 경우들이 더러 있었다. 1054년 콘스탄티노플을 중심하는 동방교회와 로마를 중심하는 서방교회로 크게 둘로 분열하였다. 교회가 동방과 서방으로 나누진 원인은 언어, 문화, 역사적 배경의 차이가 너무 커서 더 이상 하나로 싸맬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양 교회는 15세기에도 하나가 되려고 회의를 열어 노력하기도 하였다.

동방과 서방의 교회가 각기 유지해 오던 중, 16세기 종교개혁이 여러 지역에서 일어나면서 서방 교회는 여러 교파와 국민 교회들로 분열하게 되었다. 종교개혁의 교회들이 각 나라 사람들이 자기 나라 말로 성경을 읽고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예배를 하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분열된 것이다.

중세 가톨릭교회는 사람들이 알아듣든 말든 라티어로 예배하고 성경도 라틴어 성경만 허용하였다. 그러한 처사는 교회를 하나로 유지하는 데는 도움이 되었으나 사람들은 무지에 내버려둠을 당하였으며, 그럼으로 말미암아 교회가 부패하게 된 것이다. 로마 가톨릭과 종교개혁 교회는 서로 다시 연합해 보려고 더러 시도하였으나 그럴 때마다 교황주의 및 사제주의와 성찬에 대한 이해의 차이를 재확인할 뿐이었다.

개신교 교회들이 다시 연합해야 하겠다고 생각을 강하게 갖게 된 것은 19세기 후반부터였다. 18세기 말에 일어난 경건주의 운동으로 말미암아 시작된 부흥이 교파를 초월하여 확산 되고, 교회들이 교파를 초월하여 부흥에 참여하면서부터이다. 특히 아직 교회 전통이 없는 선교지에서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들은 누구보다 더 교회 연합에 대한 이상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교파를 초월한 선교회들이 서게 되었으며, 선교지에서 선교사들이 하나의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우는 일도 있었다.

선교사들이 전하는 복음, 예수 그리스도, 회개, 중생, 새 사람으로 사는 일 등의 교리는 실은 모든 교파 교회들이 갖고 있는 공통적인 신앙이다. 분수를 두고 말하자면 공통분모인 셈이다. 그래서 교회 연합의 이상을 가지게 된 것이다.

많은 선교 단체들이 교회 연합을 모색한 결과 드디어 1948년 암스테르담에서 제1회 WCC 총회가 열렸다. 그런데 그리스도교의 세계에는 복음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들만 있는 것이 아니고 자유주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도 많이 있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자유주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의 수가 더 많아졌다. 그리고 이런 자유주의 신앙을 가진 이들이 교회 연합에 주도권을 잡게 되었다. 그것이 WCC가 출발할 때부터 안게 된 문제였다.

자유주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순전한 마음으로 믿고 받아들이지 않으며, 전통적인 신앙고백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나사렛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시인하지 않으며 예수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시요, 참 사람이시라고 고백하지도 않으면서 기독교의 종교적 가치는 인정하고 윤리적인 교훈 만을 높이 평가하는 사람들이다.

 

2. 1950년대의 한국 교회와 WCC

 

한국에서는 WCC가 있기 이전, 즉 1924년 9월에 한국기독교협의회가 결성되어 복음을 공동으로 증언하는 일에 힘을 썼다. 1930년대 이후 신사참배의 시련을 당하면서부터는 그 기능을 다하지 못했으나 해방을 맞이한 이듬해 1946년 10월 9일 제1회 한국기독교연합회총회를 열었다.

거기서 KNCC는 1948년 암스테르담에서 열리는 세계기독교연합회 창립총회에 장로교회의 김관식 목사와 엄요섭 목사, 감리교회의 변홍규 목사를 파견하여 참석케 하였다. 진보적인 기장측은 처음부터 WCC 운동에 적극 참여하여 KNCC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여 왔다. 하지만 1950년대 중반에만 하더라도 WCC의 정체가 어떤 것인지 관망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한국의 보수적인 장로교회를 주도해 오고 개혁주의 신학의 기초를 공고히 한 분이 조직신학자 박형룡 목사님과 성경신학자 박윤선 목사님이다. WCC에 대하여 제일 먼저 경종을 울린 이는 박윤선 목사님이다. 이미 1950년 고려신학교에 재직할 때였다. 그는 ‘한국 교회는 어디로?’라는 소책자를 발간하여 WCC에 반대하는 견해를 다음과 같이 선명하게 밝힌 바 있다.

 

“우리 장로회는 세계기독교연합회(World Council of Churches)에 참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회에 참가하고 있는 것이 우리 장로교 교리에 대한 위반인 것입니다. 그 이유는 위의 세계기독교연합회의 움직임이 전통적인 정통주의 그대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정통주의가 아닌 사실은 누구나 다 인정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장로교회더러 그 옳지 않은 회(세계기독교연합회)와 보조를 같이 하며 합류하라고 가르치는 분들도 그것을 자증하고 있습니다.

세계기독교연합회에는 신신학자(新神學者), 위기신학자, 사회복음주의자 등이 그 주동 인물이 되어 있습니다. 그 회의 주요한 목적은 세계 교회의 사교를 위한 것이라기보다, 세계 교회의 진로(進路)를 교도(敎導)하려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이미 암스테르담 회의에서 결정한 것입니다.

그들은 급속히 처음부터 각 교파의 교리를 그들의 그릇된 주장대로 통일하려는 행동은 취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세계적으로 먼저 교회 실권(교회 정치력, 다대한 사람 수 내지 국가의 권력) 잡기를 노력하는 듯이 보입니다. 그들은 이런 실권을 잡은 후에 그것으로 세계 교회를 장악하려 합니다. 사태가 결국 그렇게 되는 때에는 세계 교회의 각 교파는 성경과 교리에 의거하여 행동을 취하지 못하고 그런 세계 교회 운동의 실권에게 포로 되어 버리고 말 것입니다.”

박형룡 목사님은 그 이후 8년이 지난 1958년 초 “신학지남”에 ‘에큐메니칼 운동의 교리와 목적’이란 글을 씀으로써 그의 견해를 밝혔다. 그의 글은 장로교회뿐 아니라 다를 교파 교회에도 WCC의 정체를 관망하던 사람들에게 각자의 견해에 따라 헤쳐 모여 하는 신호탄이 되었다.

박형룡 교수는 글을 맺는말에서 우리 교회는 결코 자유주의자들이 주도하는 에큐메니칼 운동에 순응할 수 없으며 교회 합동과 단일 교회를 바라보는 목적에 찬동할 수 없다고 단호하게 자신의 견해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우리 대한예수교장로회는 1948년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WCC 총회에 남한 총회의 대표가 가서 참여하고 그 후 WCC의 지부인 대한기독교연합회(NCC)의 일원이 되어 오므로 이 에큐메니칼 운동에 참여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 교회는 칼빈주의 개혁파 장로교회의 전통적 복음주의 신앙을 충실히 보수하여 오는 입장에 있으니 이 WCC 에큐메니칼 운동에 방심하고 무조건 참여할 수 없는 형편이다. 우리 교회는 결코 이 에큐메니칼 운동의 자유주의 지도에 순응할 수 없으며 교회합동 단일 교회를 바라보는 목적에 찬동할 수 없다.

1957년 제42회 총회는 에큐메니칼 연구위원회의 보고에 의하여 우리 교회는 이 운동의 교회친선과 사업협동에만 참여하고 교파합동에는 반대한다는 결의를 지었다. 이것은 상술(上述)의 대책에 적응하는 결의라 할 수 있으니 우리 교회는 세계적 교회친선의 중요함을 생각하여 이 운동에 참여하나 교리상 경계와 비타협의 태도를 취할 것이며, 장차 어떤 날 교파합동의 계획이 구체화할 때는 이 운동으로부터 단연 탈퇴할 것이다.”

 

그 당시 한국 장로교회는 세 교단으로 나뉘어 있었다. 한국 장로교회는 1952년에 분립한 고신측과 1953년에 분립한 기장측이 있었다. 그리고 1959년에 총회측이 WCC 회원으로 잔류하기를 찬성하는 통합측(연동측)과 반대하는 합동측(승동측)으로 분열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에큐메니칼 운동에 대한 박윤선 목사와 박형룡 목사의 정보가 정확했으며 그 운동의 진로에 대한 예측은 적중했는가?

 

3. WCC의 역정(歷程)

 

WCC는 제1차 총회 때부터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교회는 정치적 및 사회적인 이념을 초월해야 한다면서 공산주의를 용납하였다. 그리고 교회가 하나 되는 데 걸림돌이 되는 교리나 신앙고백은 덮어두기로 했다.

제2차 총회에서도 일치된 선교의 공동체가 되기 위하여 각 교파와 교회의 전통과 특성을 부인하는 결단을 해야 한다고 했다. 선교도 사람을 교회 안으로 끌어들이는 선교보다는 교회가 세상 속으로 들어가 세상을 변화시키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1961년 제3차의 뉴델리 총회에는 러시아의 그리스정교의 대표들을 비롯하여 루마니아, 불가리아, 폴란드 대표들이 참가하였다. 그리고 타종교와의 대화가 제안되었으며 ‘우주적 그리스도’ 혹은 ‘익명의 그리스도인’을 강조하는 말이 나오게 되었다.

1968년의 제4차 총회에서는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가 강조되어 교회의 사회 참여가 첨예화되었다. 마르크스주의 등 사회학적인 통찰을 기독교 신학에 적극 수용하였으며, 불의에 대항하는 폭력을 정당하고 가능한 것으로 수용함으로써 비폭력적 혁명을 교회가 도와야 한다는 목소리를 높였다. 해방신학의 탄생과 때를 같이한 주장이었다.

이어 1969년 3월 WCC의 주최로 제네바 근방의 까르티니(Cartigny)에서 22명의 회교도와 기독신자들이 모임을 가졌으며, 1970년부터는 본격적으로 타종교와의 대화를 효과적으로 추진하기 위하여 기독교와 타종교의 대화국(對話局)을 신설하고 본격적으로 ‘대화의 신학’을 발전시켰다.

1975년의 제5차 나이로비 총회에는 90개국에서 대표들이 참석했으며, 로마 가톨릭, 불교, 힌두교, 이슬람, 유대교 등이 옵서버로 참석하였으며 영성의 문제를 두고 각 문화의 전통적 경건과 극단적 성령 운동의 체험, 동양의 신비주의 등 다양한 종교 요소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혼합 종교의 성격을 여실히 보여 주었다.

제7차 총회는 1991년 2월 호주 캔버라에서 “오소서 성령이여, 만물을 새롭게 하소서”라는 주제로 개최되었고 온 지구를 구원하는데 성령 현존의 중요성 또는 영성의 중요성을 언급하였다. 한국인 참가자 정현경은 성령의 강림을 부르느라 무당의 강신굿도 행하였다. 이처럼 종교다원주의와 혼합종교에 문을 활짝 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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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와 WCC

 

- 문병호 목사, 총신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이 원고는 2013년 합신총동문회수련회 특강 원고이며 “우리는 왜 WCC를 반대하는가?”를 다음과 같은 순서로 연재합니다. 1. 한국교회와 WCC. 2. 아홉 차례 총회를 중심으로 본 WCC의 정체성. 3. WCC 에큐메니칼 신학. 4. WCC의 삼위일체론과 기독론의 허구. 5. WCC의 가시적, 기구적 교회일치론 비판. / 편집자 주>

 

1. 제10차 부산 총회의 실상

 

세계교회협의회(World Council of Churches, WCC) 제10차 총회가 2013년 10월 말부터 약 열흘간 부산 벡스코에서 “생명의 하나님, 우리를 정의와 평화로 이끄소서”(God of Life, Lead Us to Justice and Peace, 사 42:1-4)라는 주제로 개최될 예정이다.

 

 

부산 총회는 140개국 349회원 교회에 속한 5,000명이 넘는 참석자들이 모이는 명실상부한 기독교의 유엔총회가 될 것이라고 한다. 그들은 모임에서 150명의 중앙위원을 선출하고 차기총회 때까지 수행할 주요정책을 결정할 것이다. 그리고 ‘마당’이라고 부르는 몇몇 행사들을 선보일 것이다.

 

 

부산 총회는 ‘생명의 하나님’이라는 주제로 지구촌의 생태 문제, 신자유주의 시장경제를 극복할 경제정의 실현 문제, 새로운 동서간의 냉전 기류를 극복할 군비축소 문제 등을 다룰 것이다. 이러한 취지는 “세계교회협의회(WCC) 제10차 총회의 의의와 준비”라는 그들의 문건에 분명하게 드러난다.

 

WCC에서는 폭력극복 10년 운동에 연이어 가난퇴치와 기후변화를 위한 새로운 운동을 전개하자는 논의를 하기 시작했다. 부산총회는 이 새로운 운동의 발전과 함께 하나님이 주인이신 생명중심의 문명(Life-giving civilization)을 건설하기 위한 선교적 행진을 시작하는 계기가 되어야 할 것이다. 생명중심의 문명은 우주공동체를 관계적이고 유기적인 상생의 생명공동체로 인식하는 아시아적 사고로 신학을 새롭게 조명하고 실천하는 기본 방향이 될 것이다

 

이렇듯 부산총회가 주제로 삼고 있는 “생명의 하나님”은 이 땅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문명’의 도구에 불과할 뿐이다. 폭력을 뿌리뽑고, 가난을 퇴치하며, 기후변화를 되돌려 지구 환경을 개선하는 일은 중요하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데 있지 않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주어지는 구원의 능력에 있다고 성경은 분명히 가르친다(롬 14:17; 고전 4:20).

 

 

그들이 말하고 있는 “우주공동체를 관계적이고 유기적인 상생의 생명공동체로 인식하는 아시아적 사고”는 무엇인가? 혹시 그것이 서로간의 원한을 풀고 함께 살아가자는 일부 토속 종교의 상생해원(相生解寃) 사상을 흉내 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리고 그들이 말하고 있는 “관계적이고 유기적인 상생”은 무엇인가? 혹시 모든 것이 궁극적으로 하나라는 동양적 범신론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아닌가?

 

WCC는 제10차 총회의 주제와 관련하여 2012년 5월 22-25일 ‘부산 커뮤니케이션 선언문’(Busan Communication Statement)을 채택하였다. 여기에서 그들은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사역 전부를 “커뮤니케이션”의 역할로 여긴다. 그리고 복음을 “커뮤니케이션(소통)”으로, 복음전파자를 “커뮤니케이터(communicator, 전달자)”로 정의하고, 생명의 핵심이 “커뮤니케이션”에 있다고 선언한다.

 

커뮤니케이션이 없다면 생명도 없는 것이다. 창조는 커뮤니케이션의 행위였으며 지금도 그러하다. 커뮤니케이션은 창조의 행위였으며 지금도 그러하다.

 

모든 생명체들은 무수한 세포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들 세포들이야말로 자기들 간에 커뮤니케이션이 없다면 생존할 수 없다. 동아시아와 여러 토착 민족들의 전통적인 세계관에 따르면, 우주는 하나로 통합되어 있는 전체이자, 서로 연관된 하나의 유기체이다. 이러한 견해에 따라 우리는 바로 커뮤니케이션이야 말로 생명의 핵심인 것과 인간들은 모든 창조물과 커뮤니케이션을 하며 살아가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

 

이렇듯 낯설고 급진적인 이론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WCC는 “동아시아와 여러 토착 민족들의 전통적인 세계관”을 거론한다. 여기에는 창조의 하나님도, 생명의 하나님도 없다. 다만 ‘세포’와 ‘유기체’로 표현된 자연이 있을 뿐이다. 성경은 말씀 안에 생명이 있다고 가르치는데(요 1:4), 어찌 그들은 피조물의 ‘커뮤니케이션’이 생명의 핵심이라고 말하는가?

 

부산 총회가 다룰 주제인 “생명의 하나님”은 단지 자연적인 -육체적이고 물리적인- 생명을 돌보시는 분일 뿐,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말미암아 특별한 은혜의 선물로 주어지는 구원의 영생과는 무관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들은 철학적 개념들인 ‘통전성’(通典性, wholeness)과 ‘공동 선’(common good)을 거론하면서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예수의 방식을 따르는 커뮤니케이션이란 통전성과 공동선을 추구하는 것이어야 한다. 빌립보 2:7에 따르면, “예수는 자신을 비우셔서, 종의 모습을 취하셨다.” 이 말은 그분께서 모든 사람을 섬기셨으며, 특별히 가난한 이들, 고난 받는 이들, 차별 받고, 연약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편드셨다는 뜻이다. 정의를 위한 의사소통자들은 자기 자신을 비워 복음의 종으로 행동할 것이다- 이것이 기존의 권력 구조에 대한 도전을 뜻한다 하더라도.

 

WCC는 예수를 무리의 지도자로, 그 무리를 억압에 반항하여 일어나는 민중으로, 지도자와 민중 간의 커뮤니케이션을 복음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기존의 권력 구조에 대한 도전”을 그 커뮤니케이션의 일부로 여기고 있다. 과연 여기에서 아들을 통하여 계시하신 “생명의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겠는가?

 

WCC는 부산에서 총회를 열기로 결정하면서 그 이유 중의 하나로 한국교회가 “타종교와 평화로운 공존과 협력을 해 오고 있다는 점”을 들었다. 과연 이러한 이유가 설득력이 있는가? 한국교회의 제일 특성은 일체 타협 없이 십자가의 도만을 믿는 성도의 믿음에서 찾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부산 개최의 또 다른 이유 중의 하나로 “한국교회는 복음주의 교회와 오순절 교회가 공존하며 협력적이라는 점”을 든다. 그러나 실상 개혁주의 보수신앙에 바로 서 있는 많은 한국교인들은 오순절 신앙을 오히려 거부해 오지 않았던가?

 

대다수 한국교회 성도들은 다른 신을 멀리하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 인정하는 일사각오(一死覺悟)의 신앙을 지니고 있다. 그들은 “십자가의 도”가 “하나님의 능력”이 됨을 굳게 믿는다(고전 1:18, 21).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되어 전혀 오류가 없음을 믿는다. 그리하여 오직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서 오직 믿음으로, 오직 은혜로, 오직 그리스도로 성도의 삶을 살아가고자 한다. 그러므로 WCC는 한국교회에 대한 비뚤어진 시각을 버리고 그들과 함께 손잡고 있는 몇몇 국내 회원교단들이 성경적인 한국교회의 보편적인 정서를 제대로 대변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WCC는 지금까지 추구해왔던 것들을 부산 총회를 통하여 더욱 강화해나갈 것이다. 물론 한국교회의 정서를 고려하여 어떤 것은 아예 감추고 어떤 것은 덜 드러내려고 하겠지만, WCC 본래의 색깔은 더욱 선명해질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의 일회적 행사와 의식(儀式)에 미혹되지 말고, 예리한 시각을 갖추어 모호한 언어에 숨어있는 그들의 사상을 꿰뚫어보도록 해야 한다.

 

2. WCC를 반대하는 한국교회의 입장

 

WCC는 처음에 147개 회원교회들로 출발했으며 현재 8개 권역으로(유럽, 아프리카, 북미, 아시아, 중동, 남미, 카리브지역, 태평양 지역) 나뉜 140개국 349개 교단에 속한 5억 7천만의 회원들을 두고 있는 초대형 단체이다. WCC에는 정교회를 비롯해서 성공회, 루터교회, 개혁교회, 침례교회, 감리교회, 연합교회, 오순절 교회 등 20개 이상의 다양한 교파들이 회원교회로 참여하고 있다. 그 중 정교회가 거의 절반을 차지한다.

 

한국교회에서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에 속한 대한성공회, 한국기독교장로회,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기독교대한감리회가 가입했다. NCCK에 속한 구세군대한본영, 기독교대한복음교회,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 정교회한국대교구는 WCC에 동의하고 적극적으로 참여하지만 회원으로 가입은 하지 않고 있다.

 

WCC 문제는 한국교회 장로교 교단 분열의 기폭제가 되었다. 이를 찬성하는 측과, 51인 신앙동지회를 중심으로 한 이를 반대하는 측의 대립으로 인하여 1959년 대한예수교장로교 합동측과 통합측이 분열되었다. 합동측은 WCC가 비성경적인 에큐메니칼 운동으로 단일한 교회를 추구하고, 이를 주도하는 사람들이 급진적인 자유주의 신학자들이며, 특정 정치 이념에 빠져있다는 사실 등을 들어서 반대하였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측은 제44회 총회(1959년, 대전중앙교회-승동교회)에서 “WCC와 그 노선의 에큐메니칼 운동은 우리 교회의 거룩함과 또 그리스도의 합일의 속성을 저해함을 확인하였음으로 대한예수교장로회는 이에 WCC에 항구히 탈퇴하고 그 에큐메니칼 운동에 관계치 않기로 함을 총회에 선언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제45회 총회(1960년, 승동교회)에서는 “WCC를 탈퇴하고 WCC의 에큐메니칼 운동을 전폐하고”라면서 이를 다시 확인하였다. 그리고 교단의 목사들이 “WCC 및 WCC적 에큐메니칼 운동이 비성경적이고 위태로운 것”이라고 서약하게 한 후 목회하게 하였다.

 

이러한 혼란 가운데, 당시 보수신학을 대표했던 죽산 박형룡 박사는 WCC를 “자유주의 광장”이라고 부르면서 그들이 무분별하게 사회복음을 끌어들이고 경계를 넘어서 타종교와의 교통을 추구한다고 비판하였다. 죽산은 교회가 아닌 세속적 기구를 통하여 교회의 연합을 이루고자 하는 생각 자체가 비성경적이라고 간파하고 WCC가 추구하는 것은 교회의 하나 됨이 아니라 하나의 모양내기에 불과하다고 비판하였다.

 

WCC 제10차 총회의 부산 개최가 결정되면서 한국교회에는 다시금 이 기구의 정체성에 대한 논쟁의 회오리가 일고 있다. 행사를 유치한 측에서는 이를 한국교회 전체가 경사로 여길 “기독교 올림픽”이라고 자축하고 있으나, 반대편에서는 WCC 자체를 순수한 기독교단체로 인정하지 않으며 부산 유치를 몇몇 교단의 합작품 정도로 여기고 있을 뿐이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측은 이 시점에 한국교회를 진리의 터 위에 더욱 굳건하게 세우고 이를 계기로 교회의 진정한 연합과 부흥을 도모하고자 “WCC대책위원회”(위원장 서기행 목사)를 구성해서 중앙위원회를 두고 전국적인 조직을 갖추었다.

 

그 결실로 2010년과 2011년에 「WCC 신학 비판」과 「WCC는 우리와 무엇이 다른가?」라는 제목으로 두 권의 책을 출판하여 총회에 배포하였다. 그리고 2012년 총회를 통하여 「‘교회의 하나 됨’과 ‘교리의 하나임.’ WCC의 ‘비성경적,’ ‘반교리적’ 에큐메니즘 비판: 정통 개혁주의 조직신학적 관점에서」 라는 제목의 책과 이를 쉽게 풀어 쓴 본서를 함께 배포할 계획에 있다.

 

본 대책위원회가 주도하여 2010년 1월 25일에 19개 교단이 서울 앰배서더 호텔에 모여서 채택한 다음의 결의문은 한국교회 전반의 정서를 잘 보여주고 있다.

 

함께 동참한 교단은 다음과 같다: 예장(합동), 예장(고신), 예장(고려), 예장(합신), 예장(대신), 기성, 예성, 예장(웨신), 예장(개혁국제), 기침, 예감, 예장(재건), 예장(합동중앙), 예장(합동진리), 예장(고려개혁), 예장(합동총신), 예장(합동동신), 예장(보수합동), 예장(합동보수).

 

1. 우리는 오직 성경, 오직 예수, 믿음만이 성경이 가르치는 복음의 진리라고 굳게 믿으며, 한국교회 보수 교단들은 힘을 합해 공동으로 한국교회 정체성을 사수하며, 한국교회를 보호할 것을 다짐한다.

 

2. 우리는 종교다원주의와 혼합주의는 성경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인본주의 신앙이므로 이를 단호히 배격하고, 초혼제 등 무당굿을 신앙의 행위로 정당화하며, 이를 용납하는 그 어떠한 단체나 기관과의 연합도 단호히 거부할 것을 굳게 다짐한다.

 

3. 우리는 한국교회 극히 소수의 교파(NCCK)가 참여하는 세계교회협의회(WCC) 한국 개최를 마치 한국교회 전체가 유치하는 대회로 과장 보도하고, 이를 한국교회 올림픽이라고 선전하는 것에 매우 유감을 표하며, 자제해 줄 것을 주최 측과 언론 등에게 엄중히 주문한다.

 

무엇보다도 한국교회 대다수 목회자들과 성도들이 신앙의 순수성을 회복하고 말씀에 집중해서 교회를 회복하자는 소망이 높아지고 있는 시점에서, 이것을 거스르는 WCC 부산 총회가 세속주의, 혼합주의, 다원주의를 확산시켜 한국교회가 서구교회와 같이 몰락의 길에 접어들지 않을까 염려하고 있다.

 

WCC 총회의 부산 유치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주로 WCC의 과거 행적이나 교리적인 성향이 비성경적이라는 점을 이유로 든다. 반면에 유치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교회의 연합과 일치에 대한 시대적, 문화적, 인류적 필요성을 부각시키면서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WCC 가입 문제로 한국교회는 교단이 분리되는 큰 아픔을 이미 경험하였다. 금번 부산 총회 유치로 그 갈등의 골이 더욱 깊어지게 되었다.

 

3. 마치는 말

 

에큐메니즘은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서 교리로 하나가 되는 것을 본질적인 목적으로 삼는다. 교회의 연합과 일치는 진리이신 그리스도의 사랑 가운데서만 구현될 수 있다. 진리가 없는 사랑은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는 모양과 다름없다.

 

‘에큐메니즘’(ecumenism)은 헬라어 ‘오이쿠메네’(oikoumene)에서 나온 말로서 헬라어 ‘코스모스’(kosmos)와 의미가 통한다. 그것은 ‘우주’ 혹은 ‘전 세계’를 뜻하는 공간적 개념뿐만 아니라 ‘진리’ 혹은 ‘질서’를 뜻하는 원리적 개념을 함축하고 있다. 이러한 말뜻에 비추어 본다면, 에큐메니즘 혹은 이를 구현하기 위한 에큐메니칼 운동은 진리를 떠나서는 논의될 수도, 추구될 수도 없다.

 

진정한 에큐메니즘은 말씀의 진리에 서서 하나님의 시대적 섭리를 구하는 겸손한 자세에서 비롯된다. 대다수 한국교회 교인들은 성경무오(聖經無誤)를 믿고 참 교리의 터 위에서 경건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추구하고 있다. WCC는 신학적, 신앙적 모호성에 물든 자신들의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 한국교회와 성도들의 순수한 열심을 이용하려 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들은 입버릇 같이 ‘WCC 반대자들은 잘 몰라서 그럴 테니까 직접 와서 체험해 보면 오해가 풀릴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WCC의 실체를 바로 알게 되면 될수록 더욱 비판적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많은 한국교회가 WCC를 반대하는 이유는 이 기구가 성경의 진리에 바로 서 있지 못함을 직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WCC 문제는 타협할 수 없는 진리의 문제이다. 이를 먼저 해결하지 않은 채 그저 와보라고 재촉만 하고 그 초대에 응하지 않으면 마치 분파주의나 되는 듯이 매도하는 것 자체가 진리와는 무관한 WCC의 현주소를 분명하게 알려준다. 그들은 먼저 주님의 다음 말씀을 잘 새겨보고 자신의 입장부터 분명히 해야 할 것이다.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마 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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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권 사역자가 이슬람에 대해 알아야 할 것

모하메드 칼리프 카리지파 쉬아파 순니파 무타질라 메카 히즈라 / 알라위파 드루즈파

 

"이슬람교"는 모하메드의 종교를 가리키는 정확한 이름으로 아랍어의 동사"복종하다"의 부정사(不定詞)이고, "무슬림"은 그 종교를 추종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정확한 이름으로 같은 동사의 현재분사이다. 이슬람교는 역사의 주목할 만한 현상들 중의 하나이다. 이 종교의 창시자가 죽은 지 일세기 이내에 무슬림 제국은 남부 프랑스로부터 스페인, 북 아프리카, 레반트,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국 국경까지 이르게 되었다. 오늘날 이것은 동유럽, 아프리카, 인도, 동남 아시아 그리고 대서양에서 필리핀, 코카서스 산맥(Caucasus)에서 케이프 타운까지에 널리 퍼져 있고, 유럽인들로부터 하우사 폴라니족, 아리안 인디언족으로부터 필리핀 종족에 이르기까지 서로 다른 다양한 인종들로 이루어진 약 12억의 신자들을 가지고 있다.


※ 이슬람교의 기원


1. 모하메드의 초기 삶


이슬람권 사역자가 이슬람에 관해 알아야 할 것들에 관하여


A.D.570년 메카에서 태어난 모하메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 아버지의 유복자였고, 그의 어머니는 그가 겨우 6세였을 때 죽었다. 그의 소년 시절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전설이 있다. 그는 홀로 떨어져서 묵상하기 위해 동굴에 들어가곤 했다. 그는 자주 금식을 했고 쉽게 꿈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그는 그의 고향 메카의 다신교와 조잡한 미신들에 대해서 대단히 불만족했으므로, 한 참된 하나님의 존재와 초월을 열정적으로 확신했던 것처럼 보인다. 그가 이러한 확신의 얼마나 많은 부분을 기독교나 유대교에 힘입고 있는가를 결정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그 당시 핫산의 아랍 왕국에는 단성론적 기독교리가 널리 퍼져 있었다. 동방 정교회는 히자즈의 주변에 흩어져 있던 은자들로 대표되었는데, 그가 그들과 접촉했을 것은 당연하다. 네우토리우스 교인들은 알 히라와 페르시아에 자리를 잡았고, 유대교 신자들은 알 메디나, 예멘 아랍 공화국 그리고 그 밖의 곳에서 강세를 보였다. 더구나 그의 삶의 어떤 시기에 탈무드적인 원천으로부터 많은 가르침을 흡수했고 모종의 기독 교리와 접했다는 것은 의심할 수가 없다.


그의 계시


코란의 첫번째 계시가 그에게 온 것은 약 40세 때이었다고 한다. 한 목소리가 세 번 그에게 "그대의 주(主)의 이름으로 낭독하라......."고 명령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후 상당 기간 동안 아무런 계시도 오지 않았다. 그리고 나서 깊은 영적 우울, 불확신의 기간을 지난 후에 갑자기 천사 가브리엘의 환상을 보았다고 한다. 그는 카디야에게서 위로를 받고 숨기 위해 떨면서 집으로 갔지만 한 목소리가 "오 망투를 두르고 있는 그대여, 일어나서 외치라......"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고 한다. 그는 아랍의 시인들과 점장이들의 경우와 같이 자신이 귀신에 들리지 않았나 두려워했다. 그러나 카디야와 다른 사람들이 그에게 용기를 주었고 그는 곧 점점 더 자주 신의 계시를 제시하기 시작했다. 정통적인 무슬림에게 코란에 있는 모든 구절은, 천사장 가브리엘에 의해서 예언장에게 전달된 하나님의 말씀이다. 코란의 가장 초기 수라(계시)들은 개념의 현저한 단순성을 드러낸다. 거기에는 알라에 의해서 창조된 인간의 도덕적 반응을 촉구하고, 심판의 날을 예언하며, 저주받은 자들의 고통과 처음 보기에는 대단히 감각적인 것 같은 낙원의 즐거움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3.헤지라


모하메드에 대한 메카에서의 반응은 여전히 미미한 것이었고, A.D 622년에 모하메드는 그의 추종자 약 200명과 함께 알 메디나로 철수하는 결정적인 조치를 취하였다. 순례 동안에 그를 만났었고, 그의 주장들을 받아들였으며, 그들의 동료 시민들에게 그가 올 것에 대해 일단의 그 곳 주민들이 그를 초대했던 것이다. 이러한 도피(혹은 헤지라)는 모하메드의 경력에서 전환점이 되었고 적절하게 회교 기원의 시작으로 선택되었다. 메카에서 그는 그의 동향인들에게 참된 한 하나님을 가르쳤으며 앞으로 올 심판에 대해서 경고했던, 거부당한 예언자이었다. 알 메디나에서 그는 곧 정치가, 입법자, 재판관-즉 새로운 신정 정치의 대변인뿐만 아니라 행정관이 되었다.


모하메드가 처음에는, 유대인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는 그의 메시지를 선포하기만 하면 된다고 믿었다는 점은 거의 의심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의 메시지는 아브라함과 모든 가부장들과 선지자(예언자)들이 설교해 온 유일한 참된 종교로서, 계속 부패해 온 것을 단지 새로이 선포한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가 초기에 성경의 백성들에 대해서 언급한 것들이 한결같이 우호적이었고, 그가 처음에 유대인의 몇 가지 관습들을 받아들인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그러나 알메디나에서 그는 곧 유대인들이 그의 주장들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더구나 그들은 구약 사건들을 하나님의 직접적인 계시로 설명했었고, 그가 그것들을 인간적인 근원에서 배웠다는 것을 부인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코란의 수라들은 그가 전에 믿을 만한 것이라고 확정했었던 동일한 사건들에 대한 구약의 기록들과 일치하지 않음이 명백히 드러났을 때, 그는 유대인들이 그들의 성경을 개악했거나 아니면 최소한 잘못 인용했었다고 주장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따라서 이 때부터 유대인들에 대한 그의 비난, 유대인 종족들에 대한 그의 추방 혹은 대학살 그리고 그의 가르침에서 분간할 수 있듯이 유대적인 것들로부터 아라비아와 메카로의 결정적인 전환이 시작된 것이다. 이후 무슬림 공동체가 기도 할 때 향해야 하는 곳은 예루살렘보다는 차라리 카바가 되었고 이교도의 순례 의식이 순화되어 이슬람교속으로 통합되었다.

 

4. 모하메드의 인격


(한때 유럽에서 널리 퍼졌던) 모하메드가 처음부터 끝까지 사기꾼이었다는 사상은 다행히도 없어졌다. 그리고 최소한, 그의 초기의 진실성에 대해서는 의심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그의 초기 계시들을 희망적 관측의 관점에서 설명한다. 즉 그들은 다음과 같이 그에 관해서 묘사한다. 그의 초기 삶의 불행과 좌절, 아랍인들도 유대인들이나 그리스도인들처럼 신의 사자와 경전이 필요하다는 그의 깊은 확신, 그를 그들의 예언자로 특징지어 줄 어떤 계시의 혜택을 받고자 하는 그의 갈망 그리고 다양한 내외적 자극이 그의 잡재 의식적인 마음에 불러일으킨 생각들과 이야기들이 이러한 연속되는 계시를 구성하는 것이라는 그의 확신이 그 설명이다. 그는 때때로 간질 환자, 히스테리 환자, 병리상의 환자, 혹은 계시에 대한 에비온적- 마니교의 상속인으로 간주되어 온 것은 사실이다. 다른 사람들은 이따금 대단히 비판적인 견해를 취함으로써 계시의 징후들이 때때로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믿을 만한 이유가 있다는 의견을 제시해 왔다. 물론 그 현상들은 현대의 교령술 무당들이 주장하듯이, 간헐적으로 영에 사로잡힌 증후들로 설명될 수 있다. 코란의 초기 수라들에서 볼 수 있는 날카로운 스타카토 스타일은 이러한 가정들 중의 어느 하나로 설명될 수 있다. 그러나 그 후에 그의 선지자적 주장들에 대한 기적적인 증거를 보여 달라는 자연적 요구를, 이야기들에 대한 그의 지식이 오로지 신의 계시에서 나온 것으로 함으로써 충족시키고자 했다는 사실에 직면하게 된다. 그런데 그 이야기들은 너무 세밀하게 탈무드와 일치하여 그것들이 본질적으로 유대적인 원천에서 나왔음은 거의 의심할 수가 없다.


그는 다른 신자들과는 다르게 네 명 이상의 아내를 소유할 권리를 인정받았고, 그의 시간을 그 여자들 사이에서 균등 분배해야 하는 정상적인 의무로부터 면제받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가 그의 양자의 이혼한 아내와 결혼했을 때 아랍의 관습에 상관없이 비판을 모면했던 것이다. 또한 그는 그의 첩 메리와 더 이상 관계를 갖지 않겠다는 맹세로부터 면제되었고, 그럼으로써 그의 몇몇의 아내들 사이에서 야기될 문제로부터 해방되었던 것이다. 그의 아내들은 베일을 쓰도록 명령받았고 부정한 행위에 대해서는 이중 벌을 받는다고 위협받았으며 그의 사후에는 재혼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었다. 다른 학자들은 모하메드의 본질적인 진실성에 대해서 깊이 확신하고 있어서, 그가 어떤 의식적인 사기도 하지 않았다는 가정을 하고 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것은 가능할 수도 있을 것이다. 즉 나이가 좀 든 후에 그는 그가 신의 계시를 받은 자라고 지나치게 확신하고 하나님의 예언자라고 지나치게 믿게 되어, 주위 상황과 그 자신의 성향이 일으킨 협박을 그가 너무 자주 들었다고 믿는 신의 목소리로 진지하게 오해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우선적으로 심리학자의 문제이지 역사는 아무런 해결책도 제시할 수 없다.


그 밖의 점에 대해서 말해 보면, 그의 성격은 많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이상한 혼성물이었던 것처럼 보인다. 그는 신학자라기 보다는 시인이었고 조직적인 사상가라기보다는 뛰어난 즉흥 시인이었다. 그가 취향에 있어서는 주로 단순했고 기질에 있어서는 상냥했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다. 그는 관대하고 단호했으며 친절하고 빈틈이 없었다. 또한 그는 날카로운 심판관이었고 타고난 지도자이었다. 그러나 때때로 그는 잔인해지고 깊은 앙심을 품은 사람이 될 수 있었고 수치를 무릅쓰고 암살할 수도 있었으며 관능적인 경향을 띠기도 했던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그의 하림(후궁)의 규모는 솔로몬의 것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고, 다윗의 것에 비하면 좀더 나은 것이다. 그의 덕망은 그의 동시대인들의 것보다 뛰어났으며 그의 결점은 거의 시대에 이런저런 비판을 불러일으키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수많은 참된 개혁들을 도입하기도 했다. 만약 그의 추종자들이 그를 그가 자신에 대해서 내린 평가대로 받아들였다면, 그의 성격에 대한 다른 견해는 대부분 적절하지 못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코란은 그의 예언자적 존엄성에 대해서 확실한 용어로 주장하고 있지만, 반면에 그의 소멸성과 불완전성에 대해서 명백하게 언급하고 있는 부분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은 어떤 전설들에서 보이는 그의 언행에 대한 반 신성화와 양립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의 언행은 곧 이론상으로는 코란 다음 가는 중요성을 띠게 되었던 것이다.

 

5. 전설들

 


그 종교의 창시자가 그리스도에게 존경심을 바치는 것은 나쁘다고 가르쳤고 그 자신은 단순한 인간에 불과하다고 솔직하게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종교가 마침내 기독교나 그 박의 다른 것에서 그와 유사한 것을 볼 수 없을 정도로, 창시자의 개인적인 습관들에 대한 노예적인 모방을 주창한 것은 이슬람교의 여러 모순들중의 하나이다. 따라서 호가르드(D.G.Hogarth)의 다음과 언급은 정당하다.


중요한 것이건 사소한 것이건 간에, 그의 일상적인 행위는 오늘날까지 수백만이 의식적으로 흉내내서 지키는 법규가 되었다. 인간에 의해서 완벽한 인간으로 간주되어 온 사람들 중에 아무도 이처럼 세밀하게 모방되어 본 적은 없었다.


잘 알려진 전통주의자 아마드 이븐 한발은 결코 수박을 먹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예언자가 수박을 먹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가 껍질 채 먹었는지 혹은 그가 부수어서 깨물어 먹었는지 혹은 잘라먹었는지를 확실히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예언자가 말했고 행했던 것에 대한 전설들을 모으는 것이 곧 신앙 고백이 되었고, 그의 흩어진 동료들이 여러 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털어놓았다고 하는 것을 듣기 위해서 사람들이 무슬림 세계 전체를 여행했던 것은 당연지사이다. 그것은 영감 받은 말들과 행위들에 대한 영감 받지 않은 기록으로 간주되었고, 많은 일련의 서술자들에 의해서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왔다. 그 서술자들의 이름은 주제의 진실성에 대한 보장으로서 전설의 첫 부분에 항상 기록되었다. 그러나 날조된 전설들이 범람하게 되었는데, 한 사람은 그가 죽기 전까지 약4,000개의 전설들을 꾸며냈다고 고백했다. 그리고 모든 엉뚱한 정치적 철학적 혹은 신학적 사상은 예언자의 진술이라고 함부로 주장된 것에서 그것의 증거를 찾곤 했다. 나중에 위대한 전통주의자들은 전설들은 모아서 정리하였고, 그들 중의 몇 명은 위조된 것과 참된 것을 구별하려고 무척 노력하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들은 그들의 비평을 실제의 전설이 그럴 듯한가 하는 것보다는 그 전설에 있는 이름들의 신빙성을 검토하는 데에 한정했다. 오늘날 서로 다른 수집물들이 이슬람교의 다른 분파들에 의해서 각각 권위있는 것으로 받아들여 지고 있지만, 모든 경우에 그러한 전설들은 무슬림 신학, 율법, 관습의 1차적 원천으로서 코란 곁에 위치하고 있다.


6. 기독교에 대한 모하메드의 관점

 


모하메드는 기독교의 교의에 대해서 대단히 피상적인 그리고 어떤 부분에 대해서는 완전히 틀린 지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그의 초기 삶에서 그는 유대교인들에게처럼 그리스도인들에게 우호적이었다. 그리고 그의 후기 삶에서도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인들보다 덜 심한 비난을 받았던 것처럼 보인다. 예수에 대한 코란의 이름인 이사(I'sa)는 메시아이었고 처녀에게서 태어나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 이라고 불리었다. 그는 위대한 기적을 일으키는 자이었고, 가장 위대한 예언자들 중의 하나이었다. 그러나 코란은 명백하게 그의 신성을 부인한 것으로 묘사하고 있고 그가 십자가상에서 죽었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것처럼 보인다. 대신에 코란은 "그렇게 보이도록 만들어졌다."(혹은 "그는 그들을 속이기 위해서 위조되었다.")고 말하고, 하나님이 그를 자신(하나님)에게로 끌어올렸다고 말하고 있다. 정통적인 무슬림들은 항상 이것은 실수로 누군가 다른 사람이 예수 대신에 십자가에 못박힌 것을 의미한다고 해석해 오고 있다


※ 이슬람교의 발전


1. 칼리프(Caliph)의 직위

 


가장 잘 입증된 견해에 의하면, 모하메드는 어떤 후계자(Caliph)도 지명하지 않고 죽었다고 한다. 물론 예언자들 중의 마지막이고 가장 위대한 자인 그가 다른 사람으로 대체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세웠던 공동체는 정치와 종교 사이의 명확한 구분이 없는 신정국이었고 그러므로 누군가가 법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시행하기 위해서, 전쟁시에 이끌고 평화시에 인도하기 위해서 확실하게 계승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므로 칼리프가 임명되어야 한다는 것이 공통된 의견이었고, 마침내 우마르 이븐 알 하타프(자신은 제 2대 칼리프가 됨)가 최초의 신자들 중 하나인 나이 지긋한 아부 바크를 급히 뽑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칼리프 직위의 문제는 이슬람교의 어떤 다른 문제보다도 많은 분열을 일으켰고 유혈이 나게 했다. 그리고 거의 처음부터 최소한 미발달의 상태에 있던 3개의 적대 파가 구분될 수 있었다. 우선 코라이쉬족 가운데 적절한 "초기신자"가 적임이라고 믿은 예언자의 동료들이 있었고, 칼리프직을 우마이야가에 주고 싶어한 메카의 귀족들이 있었다. 그리고 선거는 필요 없고 예언자의 사촌이며 사위인 알리가 신에 의해서 그의 후계자로 지명 받았다고 믿는 "합법주의자들"이 있었다.


아부 바크르의 2년간의 짧은 통치는 주로 "탈퇴의 전쟁들"과 코란의 첫 편찬으로 유명하였다. 예언자가 죽자 많은 종족들은 세금낼 것을 거부했으나, 아부 바르크는 칼로써 순종케 했다. 죽기전에 아부 바크르는 우마르를 그의 후계자로 지명했고, 그의 선출은 아무 탈없이 통과되었다. 그는 이슬람교의 제 2의 창시자로 불리었는데, 그 이유는 그가 칼리프로 있을 때에 시리아, 메소포타미아, 페르시아, 이집트 등이 무슬림의 무력 아래 함락되었고 많은 중요한 결정적 조치들이 취해졌기 때문이다. 그는 계승자를 임명하지 않고 죽었다. 그리고 마침내 우투만이 선출 되었다. 그 자신은 나이든 신실한 "초기 신자"이었지만, 거의 끝까지 예언자를 반대했던 우마이야의 귀족 집안 자손이었다. 그의 명령으로 현재의 개정판 코란이 준비되었고 모든 상이한 판들은 제거되었다. 그러나 그의 가족은 그의 파멸의 원인으로 증명되었고 그는 암살자의 칼에 의해서 살해되었다.

 

2. 카리지파(Kharijis)

 


사실상 최초의 분열은 "올바르게 인도된" 칼리프들 중 네 번째이며 마지막으로 우트만을 계승했던 알리('Ali)가 칼리프 직위에 있는 동안 일어났다. 두 지도급 동료, 탈하(Talha)와 알 주바이르(al-Zubayr)는 예언자의 과부인 아이샤('A'isha)의 지지를 받아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은 일만 명의 무슬림들이 생명을 잃은 카멜(Camel) 전쟁에서 패하였다. 이 사건은 경건한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다. 왜냐하면 코란은 정당한 이유 없이 형제 무슬림을 살인한 사람들은 영원한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선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알리는 곧 훨씬 단호한 적을 만났다. 왜냐하면 시리아의 통치자 무아위야가 그의 친족 우트만의 암살에 대해 복수한다는 구실로 그에게 쳐들어 왔기 때문이다. 알리는 우트만의 죽음에 공모했다는 비난을 듣고 있었다. 처음에는 알리가 다시 승리하는 것처럼 보였으나, 전쟁의 중요한 때에 무아위야는 교묘하게 알리로 하여금 칼리프 직위의 문제를 중재에 붙이도록 하는데 성공했다.


이에, 알리 자신의 추종자들은 대단히 화가 났다. 그들은 알리가 그렇게 되는 것에 동의함으로써 그들의 충성을 저버렸다고 느꼈다. 그리고 무아위야에게는 더욱이 충성할 수 없었다. 따라서 그들은 탈퇴했고 자신들은 "배교적인" 이슬람교로부터 분리시켰다(따라서 그들의 이름이 카리지파가 되었다).

 


3. 쉬아파(shi'a)

 


칼리프직의 말썽 많은 문제는 곧 훨씬 더 중요한 분열을 일으켰는데, 쉬아파(알리의 "추종자들" 혹은 "종파")가 순니 이슬람교로부터 떨어져 나갔던 것이다. 알리를 신이 임명한 예언자의 후계자로 간주한 합법주의자들의 존재에 대해서는 이미 언급한 바 있다. 그리고 중재하려는 시도가 불행하게도 거의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했고, 알리가 한 카리지의 칼에 죽을 때까지 무아위야와 칼리프직에 관해서 계속 논쟁했는데도, 혹은 심지어 그의 장남 알 하산이 왕자의 연금을 받는 교환 조건으로 알리를 계승할 권리를 포기하고 물러나서 알 메디나에서 방탕한 생활을 하다 죽었는데도, 그들은 헌신적으로 그들의 주장을 밀고 나갔다. 그들은 알 하산이 무아위야의 명령으로 독살되었다고 주장했고, 그에게 "순교자자들의 주"라는 명칭을 주었으며 그의 동생 알 후세인에게로 그들의 충성심을 옮겼다. 동생은 좀 더 좋은 자질을 가지고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가 무아위야의 아들 야지드 1세에 반대하여 일어났을 때, 그는 그의 가족의 대부분과 함께 카르발라에서 살해되었다. 그러나 예언자의 집안에 대한 이러한 도살의 참사는 쉬아파의 교리에 대한 많은 뒷받침이 되었고, 점차 증가하는 수가 하나님은 결코 경건치 못한 지도자들에게 그의 백성을 버려 두시지 않을 것이고 항상 하나님이 선택하신 이맘(Imam), 즉 지도자가 있을 것임에 틀림없다고 믿게 되었다.


이후에 칼리프직은 우마이야가에서 세습되었고, 무아위야와 그의 계승자들은 대부분 이슬람교에 대해서는 구식의 아랍 왕들처럼 다스렸다. 그런 상황에서 쉬아파의 선전은 극히 성공적었다. 특히 페르시아인 "예속민"들 가운데에서 더욱 성공적이었던 것은, 그들이 그것에서 아랍의 거만함으로부터 도피할 길이 발견했고 이맘직의 교리가 이슬람교 시대 이전에 왕에 대해 가졌던 태도에 좀더 적합했기 때문이다. 많은 반란이 진압되었지만, 쉬아파의 지지자들은 마침내 우마이야조를 몰락시키는데 상당한 역할을 하였다. 하지만 왕위는 알리나 예언자의 자손에게 돌아간 것이 아니라 예언자의 삼촌 압바스에게 돌아갔다. 따라서 쉬아파는 압바스조하에서 막대하고 부분적으로는 비밀적인 공동체로서 지속되었고, 여러 책략들은 유혈이 낭자한 반란의 형태로 간헐적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그러나 쉬아파는 무수한 아류 종파들로 갈라지는 경향 때문에 계속적으로 약화되었다.


대다수의 쉬아파는 코란의 해석에 있어서 흔히 순니파와 다르고 심지어는 칼리프 우트만이 알리에게 유리한 많은 절들을 삭제했다고 그를 비난하기는 하지만, 코란을 완전히 받아들인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것을 지지하는 순니파의 수집물을 거부하기는 하지만, 전설의 권위를 받아들인다.


4. 4개의 순니파들


논쟁이 불붙은 것은 칼리프직에 관해서만이 아니었다. 이성의 제자들과 전통의 제다들 사이에 영원한 갈등이 이슬람교에서도 법과 신학의 분야에서 가차없이 나타났다. 순니파 이슬람교가 압바스조 시대 초기에 지금처럼 4개의 정통 법률학파들로 나뉘어 진 것은 부분적으로 이러한 갈등 때문이었다. 그 네 학파를 살펴보면, 전설적 창시자가 아부 하니파이고 오늘날 대부분의 구 오토만 제국, 북인도에서 지지받고 있는 하니파 혹은 이라크 학파, 이름은 말리크 이븐 아나스에서 나왔으며 북 아프리카와 서 아프리카, 상부 이집트 그리고 수단에서 우세한 말리키 혹은 히자즈학파, 무슬림 법률학의 "아버지"인 알 샤피에 의해 창시되었고, 하부 이집트, 동 아프리카, 남 아라비아, 동남 아시아에서 추종되는 샤피학파, 주로 중앙 아라비아의 와하비족에게 국한되어 있는 한발리 학파 등이 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이론적인 법학자들(그들의 적들이 하나피 학파를 그렇게 불렀다)과 전통주의자들(그들에게 이 이름을 어느 정도 붙일 만한가 하는 것은 그들간에 큰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그밖의 모든 다른 학파들이 자기들에게 붙여진 명칭이라고 주장한 용어)사이에 쓰라린 갈등이 발전되었다. 실은 아부 하니파와 말리크의 시대에는 그러한 갈등이 발전하지 않았었다. 그리고 체계를 세울 때 후자가 전통에 약간 많이 의존하고 전자가 이론에 의존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 즉 말리크는 예언자의 바로 그 도시와 환경에서 살았지만, 아부 하니파는 이라크에서 예언자의 선례가 없는 상황들을 다루지 않으면 안 되었다는 점에 의해서 충분히 설명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리크는 상황에 따라서는 공공복지에 관한 자신의 견해나 판단을 자유롭게 따를 수 있다고 느꼈다. 그러나 이것은 극단적인 전통주의자들이 제거하고자 한 바로 그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계시된 말씀 자체가 밑바탕이 되는 원리를 가르쳐 주지 않는다면, 인간이 이성이 구체적인 명령이나 금지 사항으로부터 일반적 법칙을 추론해 낼 수 없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이간은 추론하지 않고 순종해야 한다. 마침내 중도 노선이 우세하게 된 것은 알 샤피파의 영향이었다. 이 학파는 예언자로부터 온 "믿을 만한" 전설들의 가장 중요한 권위를 인식했지만, 항상 변하는 일상 생활의 예측 못할 사건들을 포함시키기 위해서 조심스럽게 정의된 유추법에 의해 신성한 말씀의 의미를 확장해야 한다는 필요를 충분히 받아들었다. 마침내 네 학파는 모두 코란, 순나 즉(전설들 속에 보존되어 있는) 예언자의 관습, 이즈마 즉 무슬림 공동체의 동의 그리고 키야스 즉 이러한 세 가지로부터 유추적으로 연력한 것을 법의 주용한 네 원천들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러나 특별히 하나피 학파는 필요에 따라서 유추의 엄격한 적용을 통해 이르게 된 결론으로부터 벗어나서 그들이 "좀더 좋은 방향으로 이끈다고 생각한" 해결책을 취할 수 있는 권리를 옹호하였다.


5.무타질라(The Mu'tazila)


이성과 전통간의 동일한 갈등이 신학의 영역에서 훨씬 더 가열되었다. 회교 기원2세기 초에 벌써 무타질라라고 알려진 어느 정도 뚜렷이 구분되는 사상가들이 집단이 있었는데, 그들은 전통적인 견해들에 반대하고 코란의 교리에 이성의 완화제를 적용시켰다. 그들은 신앙과 불신 사이에(그러므로 축복과 멸망 사이에도) 중간 단계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들보다 앞선 카다리파의 영적 후계자들읜 그들은 인간 의지의 자유를 주장했고 신이 인간이 악과 불신을 예정했다는 것을 부정했다. 그리고 그들은 신이 반드시 정의에 따라 행동하여야 하고 항상 그의 피조물들에게 가장 좋은 것을 행애야 한다고 가르쳤다. 반면에 정통파는 어떠한 중간 상태도 부정했고 인간이 모든 행동들은 영원부터 "간직되어 있는 서판"에 정해져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신이 정의를 행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고 그가 행한 모든 것은 의심하지 않고 받아들여져야 한다. 더군다나 그들은 인간 사색의 기초를 부인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인간이 지성으로 선악을 감지하거나 구분할 수 없을 것이라고 가르쳤기 때문이다. 선악의 본질은 단지 신이 뜻에서만 나왔고 그의 명령과 금지에 의해서만 그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계시로부터 벗어난 신학이나 윤리학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신적인 속성들(아는 것, 의지를 갖는 것, 말하는 것 등)과 신이 본직간의 관계에 관한 문제의 논쟁 그리고 코란이 창조된 것인가 혹은 영원한 것인가에 관한 유사한 논쟁이 불붙었다. 무타질라는 그러한 속성들이 신의 본질에 내재해 있지 않고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는 분리 가능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코란은 확실히 창조된 것인데, 그 이유는 이와 다른 주장은 어떻든 코란을 제 2의 신으로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6.철학자들


이성의 옹호자들로서 무타질라의 위치는 알 킨디, 알파라비, 이븐 시나, 이븐 러쉬드 등과 같은 철학자들이 대신 차지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람들은 대부분 진지한 무슬림의 위치에서 출발했던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은 또한 전심으로 그리이스 철학을 그것의 모든 모순적인 이론들과 함께 진리의 형식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었다. 그들의 근본적인 태도는 매우 단순했다. 코란은 진리였다. 그리고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도 모두 진리를 설명했다. 그러므로 코란과 철학은 모두 서로 조화시키는 일에 착수했던 것이다. 그리고 고대 희랍의 철학 및 지식이 보존되고 유럽으로 재도입된 것은 주로 이러한 사람들을 통해서였다.

 

7. 사변 신학자들


그러나 무타질라 견해의 후기 발전과 함께 정통파 가운데에서도 한 집단이 성장해 갔는데, 그들은 코란의 진술들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져야 하며 어떤 의문도 없다라고 주장하는데 더 이상 만족할 수 없었다. 대신에 그들은 비정통파와 칼람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칼람을 사용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이슬람교의 사변 신학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물론 학문적 체계는 점차적으로 발전해 나갔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알 아샤리가 전통적으로 주요 공적을 이룩한 사람으로 간주되고 있다. 그는 무타질리로 자라나고 약 40세까지 그들의 견해를 주장했지만, 갑자기 다른 편으로 급회전했다. 그리고 무타질라의 합리주의와 좀더 극단적인 한발리 학파의 조잡한 신인동형론에 반했다. 그의 추종자들에 의해서 발전된 아야리 체계는 극단적인 원자 형이상학을 신학에 응용한 것이었다. 그들에게 공간은 수많은 단자로 구성되어 있고, 이 각각의 단자는 부피가 아닌 위치를 가지고 있으며 다음 단자와는 절대 공간에 의해서 분리되어 있다. 그리고 그들은 이와 유사하게 시간은 무수한 연결되지 않은 시간 단자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인과 관계에 대한 어떤 사상도 전면적으로 부정했다. 그러나 그들은 자연에서 분간할 수 있는 한 사물과 다른 것과의 조화 및 명백한 연관 관계를 어느 정도 해명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들은 절대적으로 자유롭고 어떤 법이나 필연성에 의해서도 제한 받지 않는 하나님의 뜻에서 이러한 해명의 길을 발견했다. 즉 하나님은 계속으로 원자들과 여러 특징들을 창조하고 제거하며, 그럼으로써 모든 움직임과 모든 변화를 창조한다는 것이다.


8. 신비주의자들

 

신비주의는 이슬람교에서 처음부터 어느 정도 자리잡기 시작했던 것처럼 보인다. 모하메드 자신은 비록 신비주의적인 면이 가장 적은 사람들 중의 하나이기는 하지만, 때때로 고독과 단식에의 욕구에 강하게 이끌렀다. 그리고 그가 세운 종교에서 신비주의가 처음으로 드러난 것은 금욕주의, 세상 및 세상 악에 대한 부정의 맥락에서였다. 아라비아에 흩어져 있던 기독교 은둔자들은 그러한 태도를 고무시키는데 많은 영향을 미쳤다. 또한 원시 이슬람교의 근본적 요소인 지옥에 대한 두려움의 발전과 먼저 어떤 경건한 사람들이 우마이야조 칼리프들에게서 분명히 나타난 불경함과 그리고 나서 압바스조의 매우 제한된 경건함으로부터 물러선 것도 그러한 태도를 대단히 고무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초창기부터 방랑하는 금욕주의자가 그의 제자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것은 비교적 흔히 보는 광경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들은 모두 단순한 모직 의복을 입고 있었는데, 여기에서 궁극적으로 이슬람교의 신비주의자들 즉 수피파의 이름이 나오게 된 것이다.


그러나 신비주의는 곧 좀더 사색적이고 철학적인 맥락에서 발전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발전에 있어서 그것은 희랍의 교회로부터 많은 힘을 입었고 참으로 페르시아와 인도의 영향은 막대한 것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플로티누스와 신플라톤 학자들에게 많은 힘을 입었다. 무슬림 철학자가 코란의 어떤 가르침들과 희랍 철학의 추상적 개념들을 조화시킬 수 있었고, 사변 신학자들이 아샤리 형이상학의 전면 부정으로부터의 도피처를 발견할 수 있었으며, 보통의 순니 무슬림이 자기의 종교에서 시와 따뜻함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신비주의에로의 도피를 통해서만이 가능했다. 사변 신학자들이 그러한 학문적 업적을 달성하여 영향을 미치게 되자, 정통파에게는 이제 하나님의 계시된 뜻을 통해서가 아니면 "자연법칙"도 인과 관계도 없어지고, 신학과 윤리학의 가능성도 없어진다. 그들은 코란과 전설들의 예언적 계시에 철저히 의존하는데 만족하거나, 아니면 신이 그를 진실로 찾는 자들에게 계속적으로 내려주는 "보다 작은 영감"에 의해서 그것을 보충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진실한 수피는 이것에 확고 부동하게 헌신했다. 그리고 인간의 마음은, 비록 흐릿하고 희미하기는 하지만 신이 거울이라고 믿었다. 그렇다면 신비주의자의 의무는 감각의 세계로부터 그 자신을 근절하여, 이 거울을 깨끗하게 하고 그것을 신 쪽으로만 향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그는 신의 비추임을 받게 될 것이다.

 

 

※ 모하메드를 중심으로 본 이슬람교의 성립 배경과 과정


이슬람교 와 코란


-<셈>계 일신교 계통의 종교로 추종자인 모슬렘은 약 12억정도이며 발흥시기는 7세기 초이다. "이슬람"의 뜻은 "복종"이며 "모슬렘"의 뜻은 "복종하는 사람"이다.


경전은 "코란"이며 114장, 6239절로 되어있다. 코란의 내용은 신관념(神觀念), 천지창조, 인류의 역사와 이에 대한 신의 지배, 종말(終末), 부활과 심판, 천국과 지옥, 예배등 의례 적인 규범에서부터 법적 규범까지 포함한다. 또 코란은 알라에 대한 신앙을 언제나 인간 의 구체적인 윤리적 행동을 통하여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윤리적인 면을 강조하는 경전이라 할 수 있다.

 


1. 이슬람 이전의 아랍부족사회

 


이시기를 자할리야시대 또는 무명시데, 영웅시대라고하며 6~7세기초 까지를 지칭한다. 이 시기의 특징은 아랍 유목부족의 생존경쟁, 부족적 혈연집단의 연대의식으로 요약할수 있다.


이당시 아랍인은 까흐탄및 아드난이란 두 조상에 기원을 둔다고 여겼다. 까흐탄은 구약의 요그탄에, 아드난은 이스마엘의 자손으로 여겨지며 전자는 남아라비아의 예멘의 여러부족으로 아라비아의 서남부, 후자는 북부 아라비아 출신이라 한다. 그러나 이런 인종상의 차이는 현실적으로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실제로 아라비아 반도의 주민은 크게 유목민과 정주민으로 나뉜다. 유목민(베드윈)은 방목생활과 수렵, 전투, 약탈등으로 생계를 꾸려갔고, 반면 정주민은 중부 아라비아의 오아시스나 해안가에 살며 농업과 상업으로 생계를 꾸렸다. 당시의 부족은 대개 경우 생각하는 그런 커다란 집합체가 아니라 일반적으로 비교적 작은 집단이었다. 집단의 기본은 혈연을 유대로 하며, 노예와 해방노예가 있었고 차별을 받고있는 비 자유민인 미왈리, 그리고 다른 부족 출신의 자유민인 할리프가 있었다. 즉 혈연이 바탕이나 그 내부에는 동족이외의 자유민이 스스로의 의사로 공동체를 형성하기도 했다.


유목부족은 풀과 물을 찾아 이동하는 데다 때때로 인근의 다른 부족과 싸우기도 했다. 그들에겐 약탈을 받았다 생각되면 받은 만큼 되갚는 동해복수(同害復讐)가 행해졌다. 부족내에는 뚜FUT한 정치적제도나 조직이 없었고 정치적 권력을 가진자도 없었다. 물론 부족장이 있긴하나 그의 영향력은 그가 부족민에게서 어느 정도의 존경을 받는가에 의존하며, 자국민인 부족민은 부족내의 중요문제를 부족집회를 개최하여 결정했다.


그러나 같은 부족민은 같은 조상을 갖고있다는 강한 부족의식인 아사비야-집단 연대의식-를 갖고있어 부족내에선 서로 보호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혈연은 모든이가 복종해야하는 유일절대의 권위로 여겼다. 이것이 종교적이고 도덕적인 것과 연계되어 부족정신을 이뤘다. 이런 부족정신은 자신의 부족민이 살해당하면 가해자가 속한 부족에게 같은 수의 복수를 행하는 것-피의 복수:이를 피하기 위해선 배상금으로 낙타 100마리-을 의무로 여기게 했다. 한편 그들에겐 지와르란 것이 있었는데 이것은 찾아온 손님을 환대하는 유목 베드윈의 관습으로, 보통의 경우 부족밖의 다른 사람의 권리를 침해하거나 약탈하는 것을 허용하나 이 지와르관계에 있는 사람의 재산에 손을 대는 것은 수치스런 행위로 여김으로 그의 재산을 보호하게 했다.


앞에서도 말했듯 유목부족은 방목과 약탈로 생계를 유지했으므로 재산에 대한 소유권도 극히 유동적이었고 (강한 부족은 언제든 약한 부족의 재산을 뺏을 수 있다.) 따라서 그들에겐 빈부격차도 크지않아 부족내 개인은 평등하고 상당한 정도의 자유를 누렸다.

 


2. 이슬람 발흥시기의 메카

 


그러다 이슬람이 발흥하기 직전, 6세기 후반 히자즈 지방의 메카에 경제적 변화가 생기고 있었다. 메카는 대상 교역의 교통 요로에 위치했고 또 성소 카바신전-오늘날 이슬람이 가장 신성한 신전. 코란에 의하면 카바의 건설자는 아브라함과 그 아들 이스마엘로 되어있다. 카바란 입방체를 의미-이 있어 아라비아의 유목민은 매년 일정시기 이곳을 순례했으며 순례기간인 신성월에는 성역으로서의 메카 및 그 주변에서 모든 전투행위가 금지되었다.


이시기(6세기 후반)아라비아 반도의 각 부족사회는 각기 숭배하는 우상신 갖고 있었는데 이들은 메카이 카바신전에 두고 매년 특정 달에 희생을 바치고, 또 매년 많은 사람들이 순례했기 때문에 메카는 언제나 축제의 분위기였다. 이런 신앙은 (우상신) 메카의 중요 소득원이었다. 즉, 땅이 척박해 농사를 할 수 없는 메카는 목축을 했는데 양, 산양, 낙타 등을 순례자에게 팔고, 가축의 생산물, 양모, 가죽등 제사에 남은 것은 상품화하여 타지방의 특산물과 교환하는 것이다.


메카는 교통요충지였기 때문에 상업의 중심뿐 아니라 금융의 중심으로 경제활동이 왕성해졌고, 이결과 유목내지 반유목경제에서 상업경제로 이행하게되며 급기야 6세기후반엔 아라비아의 최대도시로 성장한다. 그러나 사회조직 및 그들의 의식면에서는 부족적 연대성이나 동해복수와 같은 유목생활에 적합한 사회제도나 의식이 여전히 자리잡고 있었다.

메케의 대다수 주민은 쿠라이쉬라는 부족에 속해 있었다. 쿠라이쉬부족은 스스로 대상을 조직하고 교역을 하면서 전에 가졌던 유목부족적인 부족연대의식은 희박해지고, 개인주의적 이기주의의 풍조에 물들어 부족내 유력자들은 약소자를 돕는 부족적 의무를 망각해갔다. 부족적 집단 지향형에서 개인적 이익 지향형으로의 이런 변화는 유목적 의식구조와 새로운 상업경제적 환경의 모순과 갈등을 가져와 이슬람이 발생하는 사회적 경제적 요인이 된다.

 

3. 모하멧드

 


모하멧드는 쿠라이쉬부족의 일원으로 570년경 메카에서 유복자로 태어났다. 어머니 역시 6살 때 잃은 그는 할아버지의 보호하에 있다가 그의 숙부 아부 앗딸리브에게 위탁되어 성장한다. 그의 청년 시절은 잘 알려져 있지않으나, 메카의 대상활동에 참가하여 성실한 사람으로 인정을 받고 25세엔 약 15세 연상의 거부 미망인 카디자와 결혼한다. 그후 40세 정도되었을 610년경 그는 처음 알라의 계시를 받아 최초의 3년간은 그에게 찾아오는 특정인을 상대로 전도를, 614년에는 대중전도에 나서게된다. 그는 예언자로서의 스스로를 자각한 후 13년간을 메카에서 10년을 메디나에서 지냈는데 코란의 2/3가 메카에서, 1/3메디나에서 받은 계시이다.


코란은 예언자 모하멧드에게 계시된 유일신 알라의 말씀을 기록한 것으로, 그가 처음 계시받은 610년경에서 623년 타계할 때까지 약 23년에 걸쳐 간헐적으로 계시된 장구(章句)를 모은 것이다.


그가 처음 계시를 받은 것은 라마단(9월)말 히라동산에서 명상을 하다 대천사 가브리엘로 부터라고 전승-모하메드의 언행록-은 전한다. 초기계시는 ①신의 은총과 권능. ②부활과 최후 심판. ③절대자에 대한 감사와 예배. ④베풂과 너그러움으로 요약된다.

 

4. 박해

 


모하메드에 대한 메카 반대자들의 주된 이유는 이 종교와 교리를 수락함으로 발생되리라 예상되는 정치 경제적 영향 때문이었다.


코란은 내세에 궁극적 가치를 둠으로 현세적인 것을 상대화하면, 부의 적대적 가치를 부정하고 신앙과 선행을 강조했다. 이 선행은 부족적 연대의식의 발로가 아닌 오히려 종교적 개인주의의 가치기준에서 나온 것으로, 비록 메카가 변화과정에 있었다해도 부족조직은 여전히 강했던 당시로선 종족의 전통을 파괴한다고 여겨 반발이 더했다. 그러나 어떤의미에선 코란의 상부상조원리는 사라져가는 옛 부족적 윤리의 좋은점의 재생이라 할 수 있다. 암튼 코란의 종교적 개인주의는 부족적 집단주의와 정면으로 대립하게 됐고, 코란의 내세주의는 아랍부족의 현세주의를 부정하며 지상의 모든 권위를 상대화하고 대상인(大商人)층을 정점으로하는 메카 사회 체제의 기반을 허물어뜨리는 중대사였다. 모하메드와 대상인층은 사이가 나빴지만 당시 그를 양육한 숙부의, 족장으로서의 비호로 신변에 위협을 느낄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615년경 자신들이 제시하는 교리를 첨가하면 입교하겠다는 메카 대상인층의 제안을 거절함으로 둘 사이 대립은 더욱 격화되었다. 게다가 그를 비호하던 숙부 아부 앗딸리브가 619년 별세하고, 잇달아 부인 카디자도 사망한데다, 또다른 숙부 아부 라하브가 씨족장으로서의 그의 보호를 취소하자 모하메드는 치명적인 타격을 받고 메카 동쪽 약 60㎞ 떨어진 고원도시 띠아프로 가나, 거기서도 배척당한다.

 


5. 히즈라

 


620년경 야스리브-현재 메디나-에서 메카를 방문한 여러명의 순례자들이 모하메드의 설교에 감명을 받고 다음해엔 다른 동료를 데려와 아까바에서 모하메드의 가르침에 따를 것을 맹세했다.-아까바의 맹세.


야스리브, 즉 메디나는 오아시스를 중심으로 농업을 주요생업으로 삼은 도시이다. 경제적 실권은 유태족이 장악했고, 그외 두 아랍부족 아으스와 하즈라즈가 있었는데 둘의 계속적인 상쟁으로 메디나의 정국은 불안정했다. 즉, 여기서도 새로운 정주사회에 적합치 못한 관습에 대치할 새로운 윤리의 필요성을 알면서도 이를 확립치 못하는 괴로움이 있었다. 모하메드는 그의 이상을 실현코자 알라를 궁극의 주권자로, 자신을 지상의 대리인으로 인정하는 공동체인 움마를 현실세계에 건설해야한다고 생각하여 메디나로 이주(이를 히즈라라고 함)한다.


한편 그를 초청하는 메디나 사람들은, 물론 그를 예언자로 인정하는 자들이지만 또한 모하메드가 아랍부족간의 분쟁조정자 역할을 해주길 기대했다. 메디나출신은 공정한 입장을 취하기 힘들며, 보통사람으로는 사람을 설득시키기 힘들것이나 모하메드는 메카의 망명자이고, 알라의 사도이므로 적격자란 생각에서였다.


이렇게 모하메드의 히즈라와 함께 메디나로 이주한 메카의 이슬람교도들은 무하지룬, 메디나의 아랍인으로 이슬람교로 개종한 자를 안사르라 불렸으며 이들은 하나의 신앙 공동체 움마를 형성했다. 또 메카에 삶의 기반을 다 두고 와야했던 무하지룬을 위해 모하메드는 안사르의 자택에 무하지룬을 생활하도록 했다.

 


6. 바드르 전투와 우후드 전투

 


안사르의 도움으로 생활하던 무하지룬은 그들의 생활보장 방법으로 "대상 습격"을 택한다. -당시 아랍 유목부족에게있어 대상 습격은 합법적이며 명예로운 생활수단이었다.


모하메드는 메카의 쿠라이쉬 부족이 파견하는 대상을 습격할 계획을 세웠다. 이것은 메카측과의 전면대결을 의미한다. 메카측에선 상업활동이 방해받는 것은 사활의 문제이고, 쿠라이쉬 부족의 체면과 권위에 관한 일이기도 했다. 반면 메디나의 이슬람교도측에선 약탈은 경제적 자립의 토대가 될 수있고, 또 그들을 박해했던 불신앙자들에 대한 성전(聖戰-지하드)이라는 대의명분도있었다. 유목민이 아닌 모하메드가 약탈을 결의한 것에는 경제적 이익뿐이 아니라 쿠라이쉬 부족의 세력을 약화하고자 하는 의도가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초기의 습격은 무하지룬이 주를 이루나 곧 안사르의 참가도 늘어나 바드르 전투에선 무하지룬 86명 안사르 238명이 참여했다 한다. 이 전투는 두배에 달하는 쿠라이쉬 부족의 대군을 완전격파하여 이슬람 교도에겐 자심감을 심어주고, 모하메드는 예언자적 위치가 고양되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 실제로 "예언자"란 칭호는 바드르 숭리의 후로, 바드르 전투에 관한 코란 계시인 8장에 처 음 나온다. 그 이전까진 "알라의 사도"로 칭한다.)


코란 8장 전리품의 장에선 이날을 "구제의 날"로 부른다. 이 승리로 이슬람교도들은 알라가 모하메드와 이슬람교도의 편임을 확신하게 된다. 더구나 전리품의 1/5을 모하메드의 집안의 경비와 이슬람교도의 궁핍한 자의 구제비로 모하메드가 취할 수 있게한 것은 그가 일반 신도와는 다른 특수한 지위에 있음을 스스로 인정한 것으로, 가장 원초적인 형태이긴 하나 교단국가(교단國家)의 통치와 비슷한 정치가 시작됐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바르드 전투의 승리로 이슬람 세력은 메디나에서 자리를 굳히고 모하메드와 그의 공동체는 확고부동해지나, 메카는 전쟁에서 패배한 후 잃어버린 위신 회복에 전력을 기울여야 했다. 625년 3월 유목민을 포함하는 메카군 약 3천명이 메디나를 공격해왔다. 이에 대응하기위해 이슬람군은 메디나의 교외 우후드 언덕에 진을 치나 전투가 개시되기 얼마전 일부의 신자들이 전열을 떠나고, 또 메카 기병대의 활약으로 이슬람군은 이 우후드전투에서 고전을 면치 못한다.


메카의 이전투의 중요목적은 모하메드가 메디나에 건설한 이슬람 공동체인 움마를 파괴하고, 바드르 전투에서의 손실의 몇곱을 갚아주는 것이었다. 이런 메카군은 우후드 언덕에서 돌연 전투를 중지하고 메디나로의진격 대신 메카로 회군한다. 이것은 메카의 사상자도 많았거니와 메디나의 이슬람군 이탈자인 사이비 이슬람 신자의 세력증대를 기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드르 전투의 승리로 알라의 도움을 확신하던 이슬람교도둘은 우후드 전투의 결과를 자신들의 불신앙에 대한 알라의 처벌과, 신앙의 견고함을 확인하기위한 수단으로 내린 시련으로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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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힌두교도 순례자들 )

 

힌두교란 무엇이며, 무엇을 믿는가?

힌두교는 가장 오래된 조직화된 종교 중 하나입니다. 그 종교의 경전은 기원전 1400-1500 년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또한 수백만 개의 신을 가지고 있는 가장 다양하고 복잡한 종교 중 하나입니다. 힌두교도는 다양한 핵심 신앙을 가지고 있으며 많은 다른 종파로 존재합니다. 힌두교는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종교이고 인도와 네팔에 주로 존재합니다.

힌두교의 주요 책자는 베다(Vedas)(가장 중요하게 여겨짐), 유페니샤다(Upanishdas), 마하바라다(Mahabharata) 및 라마야나(Ramayana)입니다. 이 글들에는 힌두교도가 그들의 신앙을 두는 찬송, 주문, 철학, 의식, 시 및 이야기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힌두교에서 사용되는 다른 책자들은 브라마나(Brahmanas), 수트라(Sutras), 그리고 아랴나카(Aranyakas)가 있습니다.

힌두교는 종종 3억 3천만 개의 신을 인식하는 다신교로 이해되지만, 최고의 하나의 신 브라마(Brahma)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브라마(Brahma)는 우주 전체의 존재와 실체의 모든 부분에 거하는 독립적인 존재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들은 브라마는 무 인격적이고 알 수 없는 존재이며, 흔히 브라마(창조주), 비쉬누(보존자), 쉬바(파괴자)의 세 가지 형태로 존재한다고 믿습니다. 브라마의 이러한 “양태들”은 또한 각 양태의 또 다른 많은 화신들을 통해 알려져 있습니다. 다양한 힌두교 학교가 거의 모든 다양한 신학 체계의 요소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힌두교 신학을 요약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힌두교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일원론적 - 오직 한 가지가 존재함. 산카라 분파

2) 범신론적 - 하나의 신성한 존재만이 있기 때문에 신은 세상과 동일함. 브라만교

3) 만유내재신적 - 세상은 신의 일부이다. 라마누야 분파

4) 유신론 - 창조와 구별되는 단 하나의 신. 바티 힌두교

 다른 분파들을 관찰하면 힌두교는 또한 무신론, 이신론, 심지어 허무주의도 있습니다. 그러한 다양성이 "힌두교"라는 제목 아래에 포함되어 있다면, 무엇이 가장 먼저 "힌두교"가 되도록 하는지 궁금할 것입니다. 참으로 중요하고 유일한 관건은 신앙 체계가 베다를 신성한 것으로 인정하는지의 여부입니다. 인정하면 힌두교도이고 그렇지 않으면 힌두교도가 아닙니다.

베다는 신학 서적 이상의 것입니다. 그 책자들은 풍부하고 다채로운 “하나님-신화”(theo-mythology), 즉 신화와 신학과 역사를 의도적으로 엮어서 이야기 형식의 종교적인 뿌리를 이루는 종교 신화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 "하나님-신화"는 인도의 역사와 문화에 깊게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베다를 거부하는 것은 인도를 대적하는 것으로 간주됩니다. 그러므로 인도 문화를 어느 정도 받아 들일 수 없다면 그러한 신앙 체계는 힌두교에 의해 거부됩니다. 만일 그 신앙 체계가 인도 문화와 인도의 ‘하나님-신화’ 역사를 받아들인다면 그 신앙 체계는 그 신학이 유신론, 허무주의 또는 무신론이라 할지라도 "힌두교"로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상충되는 모순에 대한 이러한 개방성은 종교적인 견해에 있어서 논리적인 일관성과 합리적인 옹호를 추구하는 서양인에게 머리 아픈 것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공평하게 말하자면, 그리스도인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다고 주장하면서 삶으로는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무신론적인 삶을 산다면 이것 역시 더 이상 논리적이지 않습니다. 힌두교도의 문제는 참으로 논리적인 모순이지만, 그리스도인의 문제는 위선이 더 큽니다.

힌두교는 인류를 신성한 것으로 봅니다. 브라마는 모든 것이기 때문에 힌두교는 모든 사람이 신성하다고 확언합니다. 아트만, 즉 자아는 브라마와 하나입니다. 브라마 외의 모든 현실은 단순한 환상으로 간주됩니다. 힌두교도의 영적인 목표는 브라마와 하나가 되어, "개인적인 자아"의 환상적인 형태로 존재하는 것을 중단하는 것입니다. 이 자유는 "해탈"(moksha)이라고 불립니다. 해탈이 성취될 때까지 힌두교도는 그 진리(오직 브라마만 존재하고 다른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진리)의 자아-실현을 향해 수고하기 위해 반복적으로 윤회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사람이 어떻게 환생하게 되는지는 카르마에 의해 결정됩니다. 카르마는 자연의 균형에 의해 지배되는 원인과 결과의 원리입니다. 과거에 행한 일은 과거와 미래의 삶을 포함하여 미래에 일어나는 일까지 영향을 미치고 또한 연관됩니다.

이것은 단순한 개요일 뿐이지만 힌두교는 거의 모든 신앙 체계에 있어서 성경적인 기독교에 반대되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기독교는 우리가 알 수 있는 인격적이신 한 분 하나님이 있고(신 6:5; 고전 8:6), 한 권의 성경이 있습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이 땅과 그 위에 사는 모든 것들을 창조하셨다고 가르치며(창 1:1; 히 11:3),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고, 오직 한 번 살수 있다고 믿고(창 1:27; 히 9:27-28),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만을 통하여 이루어진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요 3:16, 6:44, 14:6; 행 4:12). 종교 시스템으로서의 힌두교는 예수님을 유일하게 성육신하신 하나님이자 사람이시며, 인류의 구원을 위한 전적으로 유일한 원천이신 구세주임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설 수 없습니다.
출처: https://www.gotquestions.org/Korean/Korean-hinduism.html

힌두교 : Hinduism  /힌두교도 : Hindu (Hindus)
힌두교사원 : Hindu temple  / 힌두교 경전 / Hinduism scriptur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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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는 무엇이며 불교도들은 무엇을 믿는가?

불교는 지지자들, 지리적 분포 및 사회 문화적 영향 면에서 대표적인 세계 종교 중 하나입니다. 불교는 대체로 ‘동양’ 종교이지만, 서구 세계에서 점점 대중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업보(원인과 결과 윤리), 마야(세상의 환상적인 특성), 윤회(환생의 주기)를 가르치는 점에서 힌두교와 공통점이 있지만 나름대로 유일한 세계종교입니다. 불교도들은 삶의 궁극적인 목표가 “깨달음"을 얻어 그것을 인식하는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불교의 창시자 고타마 싯다르타(Siddhartha Guatama, 석가)는 주전 600년경 인도에서 왕족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바깥 세상에 거의 노출되지 않은 채 화려하게 살았습니다. 그의 부모는 그가 종교의 영향을 받지 않도록 모든 노력을 하였고 통증과 고통으로부터 그를 보호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피난처는 어느새 침투되었고 그는 노인, 병자, 시체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가 네 번째로 본 사람은 평화롭게 보이는 수도승(사치와 편안을 거부한)이었습니다. 그는 수도승의 평화를 보고는 자신도 수도자가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는 금욕을 통해 “깨달음”을 추구하기 위해 부요하고 풍성한 삶을 포기했습니다. 그는 이런 종류의 자기 고행과 강도 높은 명상에 능숙하여졌습니다. 그는 동료들 사이에서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결국, 그의 노력은 하나의 마지막 몸짓으로 절정에 달했습니다. 그는 한 그릇의 쌀에 자신을 몰입한 다음 무화과 나무(또는 보리수 나무라고도 불립니다) 아래 앉아서 "깨달음"에 도달하거나 또는 노력하다가 죽으려고 명상하였습니다. 그는 고행과 유혹에도 불구하고 다음날 아침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따라서 그는 “깨달음을 얻은 자” 또는 “부처”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고 이미 그에게 큰 영향을 받고 있던 동료 수도승들을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동료 다섯 명이 그의 첫 번째 제자가 되었습니다.

고타마(석가)는 무엇을 발견했습니까? 깨달음은 호화로운 방종이나 자기 고행이 아니라 ‘중용’에 놓여 있었습니다. 더욱이 그는 '네 가지 고귀한 진리'를 알아냈습니다. 1) 사는 것은 고통이다(두카). 2) 고통은 욕망에 의해 생긴다(탄하, 또는 ‘집착’). 3) 모든 집착을 제거함으로 고통을 제거할 수 있다. 4) 이는 고귀한 8개의 길을 따름으로 이루어진다. 여기서 "여덟 개의 길”은 1) 관점, 2) 의도, 3) 말, 4) 행동, 5) 생활(수도사), 6) 노력(바른 방향으로 향하는 에너지), 7) 마음을 씀(명상) , 8) 집중(초점)입니다. 부처의 가르침은 “삼장” 또는 "3개의 바구니"로 모아졌습니다.

이러한 구별된 가르침 뒤에는 힌두교에 공통적인 가르침인 윤회, 카르마, 마야와 현실을 그 방향에 있어서 범신론적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불교는 또한 신(神)과 고귀한 존재에 대한 정교한 신학을 제공합니다. 그러나 불교 역시 힌두교처럼 하나님에 대한 견해에 있어서 명확하지 않습니다. 불교의 일부 흐름은 합법적으로 무신론으로 불릴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범신론으로 불릴 수 있고, 정토 불교와 같은 유신론도 있습니다. 그러나 고전 불교는 궁극적인 존재의 실체에 대해 침묵하는 경향이 있으므로 무신론으로 간주됩니다.

불교는 오늘날 매우 다양합니다. 그것은 대략 소승 불교(작은 그릇)와 대승 불교(큰 그릇)의 두 부류로 나뉠 수 있습니다. 소승 불교는 승려가 궁극적인 깨달음과 열반에 이를 수 있도록 준비된 수도원의 형태이며, 대승 불교는 깨달음의 목표를 일반인들, 즉 비 승려들에게까지 확장시킵니다. 이러한 두 범주 내에는 텐다이, 바지라나(밀교), 일련 정종, 진언종, 정토, 선종, 료부 등의 여러 분파들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외부인들이 불교를 이해하고자 할 때 그들이 공부한 것이 고전적이며 역사적인 불교일 때 그 외의 특정 불교학의 모든 세부 내용을 알고 있다고 착각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부처는 결코 자신을 신이나 어떤 종류의 신성한 존재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자신을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길을 보여주는 자'로 여겼습니다. 그는 죽음 이후에야 그의 추종자들 중 일부에 의해 신의 지위에 올려졌지만, 모든 추종자들이 그렇게 여긴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기독교에서는 성경 안에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분명히 진술되어 있습니다(마 3:17,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성경은 또한 그리스도와 하나님은 하나(요 10:30)라고 말합니다. 그 누구도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고백하지 않고는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으로 여길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4장 6절에서처럼 자신이 단지 그 길을 보여주는 사람이 아니라 바로 그 길이라고 가르쳤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고타마(석가)가 죽을 때 불교는 인도에서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 후 300년이 지난 후 불교는 대부분의 아시아에 퍼졌습니다. 부처에게 속한 경전과 말씀은 그가 죽은 후 400년 정도 지난 뒤에 기록되었습니다.

불교에서 죄는 주로 무지로 이해됩니다. 죄는 "도덕적 오류"로 이해되지만, "악"과 "선"을 이해하는 문맥은 도덕과 무관합니다. 카르마(업보)는 자연의 균형으로 이해되며 개인적으로 강요 당하지 않습니다. 자연은 도덕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업보는 도덕적 규범이 아니며, 죄는 궁극적으로 부도덕한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불교의 사상에 따라 말하면, 우리의 실수는 궁극적으로 무인격적인 실수이기 때문에 도덕적인 문제가 아니며 대인 관계의 위반도 아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이해의 결과는 파괴적입니다. 불교도에게 있어서 죄는 거룩한 하나님의 본성에 반하는 범법이라기 보다 실수에 더 가깝습니다. 죄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사람들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그들의 죄 때문에 정죄 받았다는 선천적인 도덕 의식과 맞지 않습니다(롬 1-2).

이처럼 불교는 죄를 비인격적이고 교정될 수 있는 오류라고 주장하기 때문에, 기독교의 기본 교리인 타락의 교리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인간의 죄는 영원하고 무한한 결과를 가져오는 문제라고 말합니다. 불교에서는 사람들을 저주스러운 죄에서 구할 구세주가 필요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예수님은 영원한 저주로부터 구원을 얻는 유일한 수단입니다. 불교도에게는 깨달음과 궁극적인 열반에 이르기를 소망하면서 고양된 존재가 되기 위한 윤리적인 생활과 명상만이 있을 뿐입니다. 아마도 어떤 사람이 자신의 엄청난 업보의 빚을 갚으려면 수많은 환생을 거쳐야 할 것입니다. 불교를 진심으로 추종하는 자들에게는 그 종교는 자아를 부인하는 삶으로 포장된 도덕과 윤리 철학입니다. 불교에서 실체는 비인격적이며 비관계적입니다. 그러므로 실체는 사랑을 하지 않습니다. 불교에서 하나님은 단지 환상이며 죄는 도덕과 무관한 오류이고 모든 물질적인 실체는 마야("환영")로 거부되기 때문에 우리 자신도 우리 ‘자아’를 잃어 버리게 됩니다. 인격 그 자체도 환상이 됩니다.

세상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누가 우주를 창조했는지 물으면, 불교에서는 시작과 끝이 없기 때문에 침묵을 지켜왔다고 말합니다. 그 대신 출생과 죽음에는 끝없는 원이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어떤 존재가 우리를 살도록 만들었고, 이렇게 많은 고통과 괴로움을 당하도록 했는지, 또한 왜 계속 죽고 또 죽게 했는지 물을 필요가 있지 않습니까? 고통은 우리로 하여금 그 원인이 무엇인지, 왜 괴로움을 주는지 생각하게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영원한 고통을 받을 필요가 없도록 하기 위해 그분의 아들을 보내셔서 우리를 위해 단번에 죽게 하신 것을 압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홀로 있지 않으며 사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 그분의 아들을 보내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고난과 죽음보다 더 많은 것이 생명에 있다는 것을 압니다.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그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딤후 1:10).

불교는 열반이 존재의 최고 상태이며 순수한 존재의 상태로, 그것은 각 개인과 관련된 수단에 의해 달성된다고 가르칩니다. 열반은 이성적인 설명과 논리적인 질서를 무시하므로 배울 수 없고 오직 깨달을 뿐입니다. 반면에 하늘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매우 구체적이었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몸은 죽지만 우리의 영혼은 하늘에 계신 그분과 함께 하기 위해 위로 올라간다고 가르치셨습니다(막 12:25). 부처는 각 개인의 자아 또는 존재는 환상이기 때문에 사람은 개인의 영혼을 갖고 있지 않다고 가르쳤습니다. 불교도들에게는, 우리의 영혼과 구원과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도록 길을 마련하기 위해 죽으시는 자기 아들을 보내신 자비로우신 하늘 아버지가 없습니다. 궁극적으로 바로 이 이유 때문에 불교는 거절되어야 합니다.

출처: https://www.gotquestions.org/Korean/Korean-buddhism.html

불교 : Buddhism  / 불교도 : Buddh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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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대의 종말, 새 시대의 탄생’ 에딘버러 회의


본지에 ‘배본철 교수의 성령론 Q&A’를 연재 중인 배본철 교수(성결대)가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세계교회협의회(WCC)와 관련, WCC의 태동과 그 역사적 배경, 신학적 실체 등을 분석한 글을 본지에 보내왔습니다. 배 교수는 “현재 WCC 논쟁이 과다한 정치적 논리와 교계 분열의 양상으로 치닫는 것을 보면서, 이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학문적이고도 교회사적인 입장에서 차분하게 WCC를 비평해 정리해야 할 때가 바로 지금임을 느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또 “이 글은 단지 반대를 위한 반대는 아니며, 어떤 정치적인 목적이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며 “오직 바람이 있다면 한국교회가 바른 복음적 의식 안에서 일치를 이루는 것”이라고 이 글을 쓰게 된 배경을 설명했습니다. 배 교수의 글은 ‘WCC, 그 실체를 밝힌다’는 제목으로, 매월 1회 총 5부에 걸쳐 연재될 예정입니다.  -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① 교회연합운동의 태동
② 세계대전의 격랑 속에서
③ WCC 창립 총회와 Missio Dei
④ 왜곡된 복음의 뒤안길을 걷다
⑤ 간과될 수 없는 역사적 과오

  

무엇이 문제인가?

 

최근 한국 기독교계의 뜨거운 이슈로 떠오른 WCC 문제는 교회사를 전공하는 필자의 입장에서 현대교회사 영역에서 빼놓을 수 없는 터라 늘 관심 있게 연구하고 있었다. 그런데다 최근 불거진 2013년 WCC 총회 한국 유치 관계로 WCC 진영과 복음주의 사이의 향후 관계에 대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던 중, 최근 복음주의신학회에서 WCC에 대해 발표한 필자의 논문은 교계에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다.(배본철, “WCC 선교론의 변천과 논제”, <WCC에 대한 역사신학적 고찰> (2010.4.3); “복음주의자들이 제시한 WCC 논쟁 종결의 길: 배본철 박사 NCCK, 설득하려 하기 전에 숙고를” <크리스천투데이> (2010.4.3); “WCC, NCCK, 불신 허물려면 과거행적 고백 먼저”, <국민일보> (2010.4.6))

 

이러한 과정 속에서 <크리스천투데이> 지를 통해 WCC의 전반적인 역사와 신학에 대해 기고할 수 있게 된 것은 한국교회의 신학적 정체성과 교회의 발전을 위해서 큰 의미가 있는 일이라고 본다. 필자는 앞으로 5부에 걸쳐서 WCC의 왜곡된 역사를 파헤침으로서 WCC에 대한 아물지 않은 상처를 안고 있는 대부분의 한국교회가 나아갈 길을 다시 한 번 굳건히 하고자 한다.

 

2009년 8월 31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WCC 중앙위원회에서는 2013년 WCC 제 10차 총회를 대한민국 부산에서 열기로 확정하였다. 이에 따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는 이 총회가 한국교회의 자랑이 될 뿐 아니라 한국 기독교의 위상을 세계교회 앞에 높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NCCK에서는 한국교회 대부분 교단들의 반(反) WCC적 정서를 의식해서인지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을 통하여 WCC에 대한 긍정적 이미지 확산하기에 분주한 상황이다. NCCK에서는 2010년 2월부터 4월까지 세 차례에 걸쳐 ‘WCC에 대한 오해와 이해’라는 주제로 신학토론회를 마련하였다.(‘WCC에 대한 오해와 이해’의 제 1차 토론회는 2월 19일 열렸고 발제자는 장신대 이형기 교수였다. 제 2차 발제는 3월 25일 열렸으며 전주대 김은수 교수와 이화여대 장윤재 교수가 담당하였다. NCCK에서는 제 3차 토론회를 4월 26일 갑론을박 형식으로 열기로 예정하였다.)

 

그러나 WCC를 바라보는 복음주의 교단들의 시선은 매우 따갑다. 뿐만 아니라 NCCK에 가맹되어 있지 않은 대부분 개신교 교단들의 WCC 대회 유치 반대 내지는 WCC 비판론이 점차 거세지고 있는 실정이다. 이에 월간 <목회와신학>에서는 2009년 10월호와 2010년 1월호에서 WCC 문제를 다룬 바 있다.(<목회와신학>에서는 WCC를 긍정하는 이형기 교수의 글과 WCC를 부정하는 평택대학교 양광호 외래교수의 글을 차례로 실었다.) 그리고 ‘미래목회포럼’에서는 2010년 3월 25일 서울 종로 기독교연합회관에서 ‘한국교회, WCC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를 주제로 정기포럼을 개최하였다. 이 포럼은 최초로 WCC에 대한 진보주의와 복음주의적 시각에서의 학문적 논쟁의 시간이었다. 이런 중요한 시점에서 2010년 4월 3일 ‘한국복음주의역사신학회’에서 개최한 WCC 문제에 대한 복음주의신학자들의 논문발표회는 한국 복음주의적 교단들의 확실한 입장 정리의 차원에서 큰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필자의 글은 WCC를 대하는 복음주의신학의 시각을 소개하려는 데 그 첫 번째 목적이 있다. 일각에서 보는 대로 정말 복음주의자들은 WCC의 진면목을 크게 오해하고 있는 것인가? 필자는 오히려 복음주의자들이야말로 WCC가 마땅히 걸어 나가야 할 길을 뚜렷이 인식하고 그 바른 길을 가도록 촉구하고 있다는 점을 밝히려 한다. 이 글의 두 번째 목적은 WCC가 원래 선교적 연합을 위한 초기 의도에서는 벗어나 점차 우려할 만한 길을 걸어 온 역사를 정리하고자 함이다. 문제는 신학적인 면에서 볼 때 WCC의 행보가 원래 그 헌장과 취지에 부응하지 못해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선교론의 문제가 있다. 이런 점에서 WCC 선교론의 변천을 가져온 중요한 몇 가지 대회들의 특징을 살펴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2013년 WCC 부산 유치의 과제를 안고 있는 NCCK가 풀어나가야 할 당면 과제를 지적하고 그 하나의 해결 방안을 제시하려 한다.

 

에딘버러 회의

 

19세기를 위대한 선교의 세기였다고 할 것 같으면, 20세기는 초교파적인 교회연합운동(敎會聯合運動), 즉 에큐메니칼운동의 세기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러한 20세기의 초교파적인 교회연합운동은 모트(John R. Mott; 1865-1955)라는 위대한 인물을 필두(筆頭)로 발전되었으며, 1910년의 에딘버러 회의(Edinburgh Conference, 1910)라는 최초의 선교회의를 시작으로 전세계적으로 확산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와 같은 생각은 앤더슨(Gerald H. Anderson)에게서도 잘 나타나는데, 그는 20세기의 선교를 7개의 층으로 구분하면서, 그 첫 번째 단계를 1910년의 에딘버러 회의로 들고 있다.(Gerald H. Anderson(ed.), The Theology of the Christian Mission (Nashville: Abingdon Press, 1961), 5.)

 

그런 의미에서 세계 최초의 선교회의인 1910년의 에딘버러 회의는 교회연합운동의 기원이며, 또 이런 점에서 교회사에 있어서 하나의 커다란 이정표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에딘버러 회의는 하나의 렌즈로 묘사될 수 있겠다. 이 렌즈는 선교 협력을 위한 일 세기 간의 모든 시도로부터 비추어진 여러 빛들을 받아 그것들을 모아서 미래를 향해 발하게 맞춘 렌즈라고 할 수 있다.(David J. Bosch, 「선교신학」, 전재옥 역 (서울: 두란노서원, 1985), 191.) 결국 1910년은 에큐메니칼운동이나 선교운동을 위해서나 결정적인 해이며, 에딘버러는 세상에 복음을 전하려는 목적으로 개신교가 함께 모이게 된 초창기 연합의 시발점이요 결정인 것이다.

 

에딘버러 회의는 비록 선교단체를 위해 권위 있는 입법기관의 역할은 못했을지라도, 연합한 행동의 준비를 위한 공감대를 형성할 수는 있었다. 이 최초의 세계선교회의에서 던져진 중요한 물음은 ‘어떻게 선교할 것인가?’라는 것이었다. 즉 선교는 복종되어야 할 그리스도의 명령(마 28:19)으로 받아들여졌으므로, 자연히 선교의 전략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다.

 

1908년에 채택된 국제위원회에서 8개의 주제가 총회의 주제목으로 선정되었다. 이 주제들을 위해 위원회가 결성되었는데, 이러한 과정은 후에 교회일치운동의 좋은 전례를 만들어 주었다. 이들 위원회는 여러 방면의 통신교환을 통해 다양한 의견과 정보를 교환하였다. 최초 위원회장인 모트(Mott)는 전 세계의 600명 이상에게 개인적으로 편지하였다. 이렇게 유인물과 의견을 수집하는 동안 일치운동의 분위기는 고조되었으며, ‘에큐메니칼 대화’(Ecumenical Conversations)라는 전례를 만들었다.

 

다음은 에딘버러 회의의 주제들을 다룬 것이다;

-복음을 모든 비기독교세계에 전파한다(Carrying the Gospel to all the Non-Christian World)
-선교지에서의 교회(the Church in the Mission Field)
-각 나라의 고유한 생활의 기독교화와 관련된 교육(Education in relation to the Christianization of National Life)
-비기독교 종교와 관련된 선교 메시지(the Missionary Message in relation to the Non-Christian Religions)
-선교사들의 준비(the Preparation of Missionaries)
-선교의 본부기지(the Home Base of Missions)
-선교와 정부(Missions and Governments)
-협동과 연합의 증진(Co-operation and the Promotion of Unity)

 

위의 주제들 가운데 세 개는 교회연합운동의 성장에 특별한 기여를 하였다. 그중 첫 번째는 교회의 범세계적인 선교를 강조하였고, 두 번째는 신생교회(the Young Churches)라 불리는 선교지 교회에 대한 선교사업의 목적인 자치(Self-governing), 자립(Self-supporting), 자전(Self-propagating)하는 선교지 교회의 발전에 중점을 두었다. 마지막 것은 제목이나 의도에 있어서 분명한 에큐메니칼운동의 정신이 깃들어 있음을 알 수 있다.

 

1910년의 에딘버러 회의는 독창적인 사건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1854년 뉴욕과 런던, 1860년의 리버풀대회, 1878년 런던, 1879년 런던, 그리고 1900년의 뉴욕대회 등으로 계승된 것이다. 그러나 비록 과거의 총회들을 계승했지만, 에딘버러 회의는 많은 면에 있어서 전례를 뒤엎고 명백한 진보를 나타내었다.

1888년과 1900년에 있었던 초기의 2개 총회는 여러 선교기구에 의해서 대표단이 임명되었으며, 오고자하는 사람에게는 개방되어 있었다. 그러나 에딘버러 회의는 기구에서 파견된 대표단으로 그 숫자가 제한되었으며, 해외에 선교사를 파송중인 선교단체만이 참가할 수 있었고, 대표단도 선교비를 지원하는 액수의 비율에 따라 정해졌다. 또한 종전과 같은 성회의 성격보다는, 이 회의는 각 교회가 대변하는 권위있는 공식기구로 변해가고 있었다. 그렇지만 아직은 선교단체의 총회였지 교회의 총회는 아니었다. 또한 이 총회는 모든 선교단체가 초청된 것은 아니었고, 비기독세계에서 일하는 단체만이 포함되었다. 이러한 규제는 총회가 그 목적을 위해 날카롭게 초점을 맞춘 면에서 온당한 것으로 보였다. 비기독교세계에서의 선교를 목적하는 수많은 선교단체들이 그들이 지닌 저마다의 신앙적 확신과 신학적 다양성을 가지고 들어오게 되었다. 이러한 에딘버러 회의의 성격은 에큐메니칼운동에 더욱 넓은 포용성을 지니게 해주었다.

 

에딘버러 회의에서 신생교회(新生敎會)들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다. 신생교회들의 잠재적인 중요성은 그들이 보낸 지도자를 훈련하는데 보여진 관심에서 잘 나타났다. 한 신생교회의 지도자는 1860년 리버풀회의의 토론에 참가하여, 더 많은 나라가 성경 번역의 일에 참여해야 한다는 중요한 발언을 하였다. 그러나 1888년 영국에서 개최된 개신교 선교 백주년 세계대성회에서 신생교회는 거의 대표되지 못했으며, 1900년 뉴욕의 에큐메니칼 선교총회에서는 6명 정도가 발언하였고, 1907년 상하이의 중국 선교 백주년 선교총회에서는 1170명 중에서 불과 6,7명이, 그것도 방문객으로서만 신생교회 지도자들이 참석했다.(Ruth Rouse, A History of the Ecumenical Movement, 1517-1948 (Philadelphia: The Westminster Press, 1967), 359-60.) 에딘버러 회의에도 신생교회 대표자들의 숫자는 매우 적었다. 그러나 비록 17명밖에 안 되는 숫자였으며 47회의 연설 가운데 겨우 6회의 기회를 가졌지만, 이들은 토론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큰 일을 해냈다. 이들 가운데 3명은 계속되는 총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되었으며, 이러한 진보는 미래의 에큐메니칼운동에 대해서 신생교회가 차지하게 될 위치에 대한 예언이기도 했다. 즉 앞으로의 에큐메니칼운동은 신생교회나 기존의 교회를 동등한 입장에서 수용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1910년의 에딘버러 회의는 대부분의 구성원이 Anglo-American 계통의 사람들이었다. 신생교회가 극히 적을 뿐 아니라, 유럽대륙 출신의 대표도 역시 극소수였다. 또한 로만 가톨릭과 정교회의 대표가 참석하지 않았기 때문에(사실은 가톨릭과 정교회는 이 회의에 초대 받지 못했다.) Anglo-American이 주구성원을 이루었다. 그 결과로 에큐메니칼운동이 아일랜드, 미국 그리고 영국 등지에 주로 영향을 주고 유럽 대륙으로 퍼져 나가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자 전세계적인 에큐메니칼운동을 위해서 다음 총회에서는 로만 가톨릭과 정교회 그리고 신생교회들의 참여가 언급되었다. 1910년의 에딘버러 회의는 후에 에큐메니칼운동의 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한 훌륭한 훈련의 장소였다. 그러한 인물로는 모트(John R. Mott), 올드햄(Joseph H. Oldham), 아자리아(V. S. Azariah), 브렌트(Charlse H. Brent), 템플(William Temple) 등을 들 수 있다. 

모트는 초대 준비위원장이자 국제선교위원회의 회장으로서 모든 회의를 주관하였다. 그는 신앙 대부흥운동의 영향을 받은 영적 인물로서, 지도자로서의 역량과 설득력 있는 연설 능력 등을 구비한 사람이었다. 감리교의 평신도로서 신학도 하지 않은 그는 모국어인 영어 밖에는 사용하지 못했지만, 수많은 국가와 종족 그리고 교회를 연결시켰으며, 또 많은 사람들에게서 존경과 협력을 얻어내었다. 그리고 모트의 행정 비서인 스코트랜드인인 올드햄은 모트와 함께 총회의 창의적인 일들을 도왔는데, 기독학생운동과 인도의 YMCA운동의 산파 역할을 하였다. 에딘버러 총회와 그 실행에 있어서의 범세계적인 기독교 연합은 1908년부터 26년 동안 올드햄의 주된 관심사였다. 그는 1905년 할레신학교에서 공부한 관계로 독일인의 심성을 잘 알았고, 이를 토대로 독일 지도자들의 신임을 얻어 종전의 Anglo-American이 압도적이었던 회의 분위기에 대륙적인 힘을 가입시키는 데 큰 힘을 쏟았다.

 

이러한 에큐메니칼운동의 발전은 서구에서보다는 신생교회에서 더욱 급속히 발전되었는데, 이는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긴급한 불모지의 상황이 기존의 교파나 신앙고백의 장벽을 초월하여 연합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가 하면 에딘버러 회의는 유럽 대륙과 영-미의 서로 다른 선교신학을 융합하지 못했으며, 신학적 열매를 거두는데 큰 성과를 이루진 못했다. 그러나 에딘버러 회의는 한 시대의 종말과 또 다른 시대를 탄생케 한 분수령(分水嶺)이 되어 주었다. 왜냐하면 에딘버러 회의가 남긴 발자국은 앞으로 진행될 에큐메니칼운동의 발전과 조직을 위한 커다란 전례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1910년의 에딘버러 회의는 20세기 에큐메니칼운동을 위한 새로운 예언자적 운동이었다는 평가를 받는 것이다

출처 : 크리스천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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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 그리고 WCC 투쟁의 역사

본지에 ‘배본철 교수의 성령론 Q&A’를 연재 중인 배본철 교수(성결대)가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세계교회협의회(WCC)와 관련, WCC의 태동과 그 역사적 배경, 신학적 실체 등을 분석한 글을 본지에 보내왔습니다. 배 교수는 “현재 WCC 논쟁이 과다한 정치적 논리와 교계 분열의 양상으로 치닫는 것을 보면서, 이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학문적이고도 교회사적인 입장에서 차분하게 WCC를 비평해 정리해야 할 때가 바로 지금임을 느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또 “이 글은 단지 반대를 위한 반대는 아니며, 어떤 정치적인 목적이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며 “오직 바람이 있다면 한국교회가 바른 복음적 의식 안에서 일치를 이루는 것”이라고 이 글을 쓰게 된 배경을 설명했습니다.  

① 교회연합운동의 태동
② 세계대전의 격랑 속에서 
③ WCC 창립 총회와 Missio Dei 
④ 왜곡된 복음의 뒤안길을 걷다
⑤ 간과될 수 없는 역사적 과오

1910년 에딘버러 회의는 그 동기와 목적에 있어서 복음적인 색채를 띠고 있었다고 한다면, 그 이후 WCC가 창설되기까지의 과정 속에서 여러 가지 제설혼합주의적인 영향을 받게 되었다고 본다. 그 주된 배경은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교회는 인간의 실존 문제와 국가의 평화 등의 논제에 깊이 몰두하게 된 점을 들 수 있다. 이 글은 WCC가 거쳐 온 이러한 고민과 투쟁의 과정을 살펴보려 하는 것이다.

 

1910년 에딘버러 회의가 오늘날 에큐메니칼운동의 기점이긴 했으나, 이로부터 38년이 지나서야 WCC는 창설되기에 이르렀다. 에딘버러 이후 20세기 중반까지의 에큐메니칼 운동의 약사(略史)는 다음과 같다; 1921년에는 국제선교협의회(International Missionary Council)를 창설하였다. 이 모임은 에딘버러 회의가 남긴 가장 두드러진 결과였다. 1925년에는 생활과 활동(Life and Works)이 창설되었다. 이 운동은 기독교 신앙을 인간생활 전반에 적용시키려는 관심에서부터 시작했다. 1927년에는 신앙과 직제(Faith and Order)가 창설되었다.

 

에딘버러 대회 이후 국제선교 협의회(IMC), 신앙과 직제(Faith and Order), 생활과 활동(Life and Works) 등 세 단체가 각기 나름대로의 모임을 가지고 내려오다가, 1937년에는 에딘버러(Edinburg)에서 이 세 가지가 하나로 묶어져야 한다는 제안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그 이행은 WCC가 창립되던 해인 1948년까지 지연되었다. 그러면 1910년 이후 WCC가 창설되기까지의 에큐메니칼운동의 역사를 제 2차 세계대전을 전후로 하여 살펴보자.

1. 제 2차 세계대전 이전(1918-1939)

 

제 1차 세계대전의 종전(終戰)은 세계 여러 분야에 큰 영향을 주었으나, 그것이 기독교 세계에 영향을 준 하나는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교회연맹(League of Churches)을 형성하게 된 점이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국제선교협의회, 신앙과 직제, 신앙과 활동 운동도 그와 같은 영향 아래서 시작된 것이었다. 이것은 이제부터의 교회운동은 개교회(個敎會), 개교파(個敎派)의 운동의 차원을 넘어야 한다는 것을 교회 지도자들이 발견했다는 것을 뜻한다.

 

1919년에 이미 쇠더브롬(Söderblom) 대감독은 어떤 형태의 에큐메니칼 조직을 제안했으며, 1920년 올드햄은 IMC운동의 규약을 작성하고 있었다. 1925년 스톡홀름에서 열린 생활과 활동 위원회에서 벨(G. K. Bell) 교수는 국제기독교연합회의 조직을 제의한 바도 있었다. 1930년 첵스브레스(Chexbres)에서 모인 생활과 활동 계속위원회는 보편적교회협의회(Universal Christian Council)란 이름으로 모이기도 했다.

 

이와 같은 분위기 속에서 조직되고 모임을 갖던 기독교 여러 단체들 가운데서 신앙과 직제, 생활과 활동 두 위원회는 1930년대에 와서 따로 모일 이유가 없게 되었다. 왜냐하면 두 위원회의 대표들이 대부분 같은 사람들이었으며, 같은 교회의 재정적 후원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두 위원회는 ‘교리는 교회를 분열시키나, 봉사는 교회의 연합을 가져온다’(Doctrine divides, but Service unites)는 정신 아래서 신앙 또는 신학의 문제가 현실의 실제적인 문제를 떠나서 연구될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것은 지금까지의 신학이 추상적인 이론에 치우쳤음에 대한 반성의 시작이 된 것이다.

그래서 1934년에 두 위원회는 ‘교회와 세계’(The Church and the World)라는 주제를 내걸고 함께 모임을 가진 바 있었다. 이때 세계는 이미 제 2차 세계대전의 조짐이 보이고 있던 때였다. 독일의 나치즘, 이태리의 파시즘, 일본의 군국주의(軍國主義)가 세계를 위협하게 되었다. 이때 세 나라에 있던 교회들은 에큐메니칼운동 같은 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들은 정치적인 강요에 의해서 국가주의(國家主義) 또는 민족주의(民族主義)를 강조해야 했었다. 그러므로 교회도 민족주의를 위해 있어야 했다.

 

그러나 반면에 그와 같은 위기를 감지한 세계교회 지도자들은 이러한 난국(難局)이야말로 오히려 교회의 세계성(universality)을 강조해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교회의 본질, 즉 ‘교회란 무엇이냐?’ 또는 ‘교회는 무엇을 위해 있느냐?’는 문제를 묻게 되었다. 이와 같은 흐름에 의해서 1937년 생활과 활동 위원회 옥스포드 모임은 그 주제를 ‘교회로 하여금 교회되게 하라’(Let the Church be the Church)라고 하였다. 이것은 당시의 교회가 비교회적이 되었음을 인정하는 것이며, 그 비교회적인 것으로부터의 교회의 해방을 주장하는 것이었다.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ecclesis semper reformanda)는 16세기 종교개혁의 원리의 재발견이라고도 할 수 있다. 여기서부터 에큐메니칼운동, 즉 교회일치운동은 교회의 본질에 속하는 것이지 첨가적인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재발견속에서 에큐메니칼운동의 일차적 동기는 교회들 사이에 일종의 영적 일치를 창조하거나 교회들 사이에 협동을 촉진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교회의 하나됨과 보편성과 사도성과 그리고 예언자적 증인(its oneness, its universality, and its apostolic and prophetic witness)이라는 참된 본질을 증명하는 것이라는 사실이 명백하게 되었다. 1936년에 올드함은 “현 세계를 깊이 살펴보면 볼수록, 교회의 일치적 본성을 더욱 깊이 이해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고 하였다.

 

1937년에 에딘버러에서 모였던 신앙과 직제 위원회에서 템플(William Temple) 감독은 개회연설에서 “하나의 거룩한(Una Sancta) 교회를 선포해야 함이 절실히 필요하다. 그러나 이것은 모든 교회들이 저들의 공동과업을 수행하기 위하여 서로 도우며 다른 교회들과 완전한 영적 교제들을 가지도록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역설했다. 그는 이보다 2년 전인 1935년에 미국을 방문하여 IMC 지도자들과 프린스톤에서 만났을 때, “모든 교회들이 초교파적이며 초국가적인 교회 회합을 가져야 할 때가 바야흐로 돌아왔다. 이 회합을 통하여 오늘의 세계 모든 단체들이 국제적으로 전개되고 있는 에큐메니칼운동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도록 할 기회가 온 것이다”고 말했다. 여기서 에큐메니칼 운동을 전개하는 문제는 결코 한 교회나 한 교파의 문제가 아니라 전 세계교회의 과제임이 인식되게 된 것이다.

 

1936년 7월 영국 런던에서는 생활과 활동, 신앙과 직제, IMC운동의 대표자 35명이 모여 에큐메니칼 협의회(Ecumenical Consultative Group)를 구성했고, 이 모임에 YMCA, YWCA, WSCF 대표들도 함께 참석을 했다. 이때 모인 대표들은 세계 모든 교회들이 공동과업을 수행하기 위하여 하나의 영구적인 기관으로서의 세계교회연합회를 조직할 때가 되었다는데 일치하였다. 이 모임의 중심인물은 템플, 올드햄, 브라운(W. A. Brown), 카버츠(S. M. Caverts) 등이었고, 지금 세계교회협의회(World Council of Churches)의 명칭은 당시 미국교회연맹 총무였던 카버트의 제안에 의한 것이다.

 

이 런던 회의에서 초안된 WCC의 원칙적인 규정이 후에 WCC 창립총회에서 채택되었는데, 중심되는 정신은 ‘이 협의회는 모든 교회를 감독하는 법적 권리를 가진 기관이 아니며, 또 모든 교회들의 동의 없이는 어떤 일이든지 하지 않는다’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 것이었다. 이 원칙이 1937년 7월 12일부터 26일까지 있었던 생활과 활동 모임인 옥스포드 회의에 상정되었다. 템플 주교와 다른 여러 명의 위원들은 이 새로운 계획의 채택을 권유했다. 주교는 the Voice of non-Roman Christiendom에 도움을 줄 기구의 필요성을 강조했고, 모든 에큐메니칼 운동이 교회 자체 위에 근거를 두고 있음은 바람직한 것이라고 역설했다. 이 제안은 단지 두 명의 반대자를 가진 가운데 채택되었다. 1937년 8월 3일부터 18일에 있은 신앙과 직제 에딘버러 회의에서도 곧 채택되었고, 각 위원회에서 14명의 위원이 선출되어 그 원칙에 의해 일을 추진하도록 했다.

 

이 14인 위원회는 WCC 창립을 위한 전권위원회였다. 14인 위원회의 첫 번째 모임은 1937년 8월 런던에서 개최되었으며, 세계교회협의회의 본질과 구조 그리고 구성 문제를 주로 다루었다. 이들은 WCC의 헌장에 명시된 그 책임을 다하기 위해 14인 위원회를 도와줄 특별자문기관을 함께 소집하기로 했다. 1938년 5월에 우트레헤트에서 제 2차 모임을 가졌으며, 이때 토의의 초점은 앞으로 조직될 WCC의 권위와 그 기초에 관한 것이었다.

 

가장 중요한 구조적 의문은 권위와 협의회의 헌장에 관한 것이었다. 권위에 관해서는 어려움 없이 완전히 동의에 이르렀다. 세계교회협의회는 초교회(Super- Church)가 아니라는 점을 명백히 했다. 이 가장 기본적인 원칙은 후에 다시 확인되고 강조되었다. 이 모임에서 템플 감독은 “WCC는 일반적인 성격의 연맹이 아니다. 그 총회와 중앙위원회는 그 지지하는 회원들을 헌법적으로 제지하는 아무런 권위도 갖지 않는다. 그것이 가진 권위가 있다면 그것은 교회들이 지혜롭게 처신하도록 조언을 준다는데 있다”고 했다.

 

헌장에 관한 이견은 그리 쉽게 합의되지 못했다. 신앙과 직제가 소집된 신학적 기초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이요 구세주라고 하는 신앙고백 - 가 대체로 WCC를 위한 기초가 되어야 하는가? 아니면 다른 것이 공식화되어야만 하는가? 하는 것이었다. 많은 연설가들은 신앙과 직제 공식의 채택을 원했다. 그 때문에 이것은 실로 교회 모임을 위한 적합한 기초임이 입증되었다. 우트레크트에서 그헌장은 채택되었고, 제 1차 WCC 총회에서 확정되었으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세계교회협의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이요 구세주로 받아들이는 교회들의 친교이다’(The World Council of Churches is a fellowship of churches which accept our Lord Jesus Christ as God and Saviour).

 

5월 13일 우트레크트에서 열린 첫 번째 회의에서 의장에 템플 대주교가, 그리고 비서트 후프트(W. A. Vissert Hooft)가 임시위원회의 대표 총무로 선출되었다. 이렇게 WCC의 창설 준비가 신앙과 직제, 생활과 활동 두 위원회의 대표들에 의해 추진되고 있을 때, WCC와 IMC와의 관계 문제가 대두되었다. 이 문제가 1938년의 IMC 회의에서 토의되었을 때, 패톤(W. Paton)은 말하기를, “여러 교파 간에는 조직적인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참으로 살아있는 동적인 그리스도인들의 우주적인 교제가 여러 교회들 간의 참된 교회의 상징으로서 존재한다는 사실을 보이는 점에서 WCC의 위치가 중요하며..... 또한 IMC는 우리의 세계에서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에 대한 책임을 항상 기억해야 한다는 점에서 그 위치가 중요하다”고 했다.

 

1939년 1월 준비위원회는 두 번째 회의를 게르마인(Germain) 성에서 개최하였다. 정치적 긴장과 전쟁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그 모임은 미래를 기대하였다. 잠정적으로 1941년 8월을 WCC 창립총회를 위한 날자로 결정지었다. 이때 독일에서는 나치 정권과 대립하여 싸우는 독일교회의 투쟁의 역사가 있었고,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나치 당에 유착되어 교회를 정치 권력의 도구화로 만든 독일 기독교당이 있었다. 독일 기독교당은 초국가적, 국제적인 교회기구는 어떤 것이든 간에 거부한다고 선언하였다. 이것은 WCC 창립에 대한 분명한 반대를 의미한 것이다. 그러나 WCC 준비위원들은 인종, 국가, 성의 차별 없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누구나 똑같은 영적 연합을 가진다고 선언함으로서 독일 기독교당의 입장에 대항했다.

 

1939년 7월 24일부터 8월 2일까지 암스텔담에서는 기독청년 세계대회가 개최되었으며, WCC 준비위원들은 72개국에서 모여든 청년 대표들과 세계교회 대회 문제를 토의했다. 이때는 이미 제 2차 세계대전의 전운(戰雲)이 짙어가고 있을 때였다. 이 대회의 메시지 속에는 “오늘날 세계 모든 나라의 민족들은 서로 나누어지게 되었으나, 그리스도의 교회는 한 곳으로 모이게 되었다. 이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본질적으로 하나가 되어야 함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기 위함이다”라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분열되어 싸움이 시작되는 세계 속에서 하나를 지향해 간다는 것은 분명히 세대의 풍조를 따르지 않는 모습이었다. 제 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인해서 1941년에 모이려던 WCC 창립총회는 부득이 연기할 수밖에 없었다.

2. 전쟁 기간(1939-1945)

 

제 2차 세계대전의 발발은 모처럼 무르익어가고 있던 세계교회연합운동에 크나큰 시련을 가져 주었다. 만일 세계교회운동의 지도자들이 그 시련을 극복하지 못했었다면, 오늘의 WCC는 창설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어떤 의미에서 제 2차 세계대전은 세계교회운동을 보다 강하게 해주었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전쟁 중에 교회 지도자들은 ‘이 전시(戰時)에 교회는 무엇을 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초점을 맞추게 되었다. 어떤 이는 침략과 자유를 억압하는 국가에 대해 강력한 저항적 태도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으나, 템플 같은 이는 교회가 적대국가들 사이의 화해를 위한 일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래서 교회들은 정치를 떠나서 세계 평화를 위해 노력하는 길을 모색하였다. 전쟁에 의한 시련은 교회들로 하여금 그 어느 때보다도 더욱 긴밀하게 관계를 갖게 하였다. 베그라브(Berggrav) 감독은, “이 시련기에 우리는 서로 더욱 친밀하게 지냈으며, 우리는 더 많이 기도했고, 하나님의 말씀에 더욱 귀를 기울였고, 우리 마음은 더욱 굳게 한데 뭉쳤다”라고 술회하였다.

 

전쟁 기간에 교회들은 세계적인 교회(Universal Church)를 파괴하는 힘을 공동의 적으로 인식하면서, 그 힘을 저지하고 파괴하기 위해 공동의 노력을 하였다. 교회는 피난민을 구호하는 일, 포로들을 돌보는 일들을 통하여 ‘하나의 거룩한 교회’임을 더욱 실감하게 되었다. 각국 교회 지도자들은 제네바를 통하여 연락하고 만났으며, Ecumenical Press Service 지를 통하여 서로 정보를 교환하기도 했다. 전시에 교회가 이와 같은 일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은 전쟁이 일어나기 전 교회 지도자들이 이미 마음에 다짐하고 일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생활과 활동 위원회의 옥스포드 대회(1937년)는 그 메시지에서, “만일 전쟁이 일어나면 교회는 무엇보다도 참으로 교회가 되어야 한다. 비록 그 나라는 다른 나라와 싸우고 있다 해도, 교회는 적국의 교회와 그리스도의 한 몸으로서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전쟁 당시 독일 국가 사회주의 당국은 교회의 에큐메니칼협의회를 위험시했고, 그 협의회의 활동을 방해하고 있었으나, 독일교회는 적국의 교회들과도 친교를 나누고 연락을 하고 있었다. 본훼퍼(Ditrich Bonhoeffer)는 제네바와 스톡홀름을 방문하여 미래 국가질서에 대해서 교회의 책임이 무엇인지를 토의하기도 했다.

 

전쟁이 한 고비를 넘기고, 미국을 비롯한 연합국에게 유리하게 전세가 바뀌어감에 따라 1942년 미국의 카버츠(Caverts)는 제네바를 방문하여, 전후의 재건과 교회의 원조 문제를 토의하기 시작했다. 이처럼 교회는 제 2차 세계대전이라는 비극과 시련 속에서도, 그것을 오히려 ‘교회로 하여금 교회되게끔 하는 계기’로 삼았던 것이다.

 

그러나 전쟁 기간에 교회는 에큐메니칼운동의 위대한 지도자들을 잃었다. 로잔(Lausanne) 대회 이후 신앙과 직제 모임에 주동적인 역할을 했으며 IMC운동과 1937년 옥스포드 대회의 메시지를 작성한 템플, 패톤(W. Paton), 신앙과 직제 그리고 생활과 활동 위원회를 하나로 통합하는데 공을 세운 브라운(W. A. Brown), 그리고 본훼퍼(Dietrich Bonhoeffer) 등이 모두 전쟁 기간에 타계했던 것이다.

3. 전쟁 이후(1945-1948)

 

이 전쟁은 교회에 큰 교훈을 남겨주었다. 교회는 전쟁 중에 ‘역사의 비극 속에서도 성도들이 그 종파나 교리나 신학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서로 교제하고 이해하고 또 협조하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이 땅에 선포함에 공동으로 보조를 취하는 것이 얼마나 긴요하고 귀한 일인가’ 하는 것을 더욱 절실하게 깨닫게 되었다. 

전쟁의 종말이 결정적으로 가깝게 다가왔음을 알게 되었을 때, WCC 준비위원들은 뉴욕에서 소모임을 갖고 전후의 문제를 논의했다. 그들은 복구사업이 무엇보다도 우선되어야 하는데 일치했으며, 세계의 모든 교회가 이 일에 함께 동참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모든 교회가 강한 에큐메니칼 연대의식(Ecumenical solidarity)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1945년 5월에 모인 뉴욕 회의에서는 ‘적과 동지의 차별 없이 주를 섬기는 모든 그리스도인들 간에는 허심탄회하게 의견이 교환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이룩된 하나님과 사람의 화해를 통하여 사람과 사람사이의 화해가 가능하다는 것이 복음의 핵심이다’고 확인하였다. 그 결과 같은 해 10월에 WCC 준비위원들의 대표들이 독일교회 대표자들을 만나게 되었으며, 이때 독일교회는 ‘슈투트가르트 고백선언’(Stuttgart Declaration)을 했던 것이다. 그 선언은 교회는 죄책을 깨닫고 고백하고 스스로 그 책임을 지는 인간들의 공동체인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1946년 2월에 WCC 준비위원회는 제네바에서 모임을 갖고 WCC 창립총회를 암스텔담에서 1948년에 모일 것과 그 총회의 주제를 ‘인간의 무질서와 하나님의 계획’(Man's Disorder and God's Design)으로 결정했다. 1947년 WCC 준비위원회는 대회 초청장을 보내면서 다음과 같이 대회의 목적을 간결하게 밝히고 있었다;

 

과거 수년간의 시련과 환란, 박해의 경험에서 교회는 새로운 친교의 의식을 강하게 갖게 되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교회는 인간의 무질서를 막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새로운 소식 보다는 교회의 갱신(更新)과 참된 교회의 재생(再生)이다. 그러므로 WCC의 임무는, 그리스도인들과 그리스도의 교회들이 주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라는 것을 알게 하고, 또 언제나 하나 되어 피차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고 도우며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공동의 회원 의식을 가지고 값있게 살도록 하는 것이다.

4. 비평

 

1910년 에딘버러 회의는 진보적인 신학의 씨를 심는 계기가 되었다. 이 대회는 교리적인 정립이 되어 있지 않은 지도자들이 과거의 일들을 비평하면서, 더욱 포괄적인 신학, 더 넓고 포용성 있는 대회를 주장하여 진보적인 신학과 종교혼합주의(宗敎混合主義)로의 문을 여는 계기가 된 것이다.

 

1928년 예루살렘 대회는 에딘버러 회의의 결과로 1921년에 조직된 국제선교협의회(IMC)의 최초의 세계대회였다. 이들은 복음의 선포보다는 그것을 어떻게 적용하느냐에 더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행위가 선포에 선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복음적인 의미에서의 영혼 구원의 관점보다는 그 대신 사회복음이 강조되었다. 그리고 개인적인 책임으로서의 죄(罪) 관념을 상실했다. 또한 이들은 타종교에도 어느 정도 구원의 빛이 있는 것으로 설명하였다. 이 대회에서는 복음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 배제된 것이 분명하다. 이 대회는 복음전도에 있어서 성서의 권위를 약화시키고, 증거의 수단으로서 교회의 사업이나 조직적인 일치를 필요하게 되었다. 다음과 같은 선언문의 내용은 이 대회에서 복음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 약화되기 시작한 것이 분명한 것을 보여준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빛의 완전한 광채가 모든 사람에게 비치시는 빛이라고 생각하고 우리는 그 같은 빛이 그를 알지 못하거나 또는 거절하는 사람들에게까지도 비치는 것을 발견하고 기뻐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자신이 증거 되지 않는 곳이 없다는 것과 비기독교인들 개인과 조직들의 모든 훌륭한 특성들이 그 아들을 보내주신 아버지의 한층 더한 증거임을 환영한다. 따라서 다른 종교들의 영적 가치에 대한 평가를 시도하지 않고 단지 예를 들어왔었다.

그리스도를 주와 구주로 받아들이지 않고 진리 추구에 무관심한 사람들에 대하여서와,

 예배의 엄격함으로 유명한 이슬람교과,

세계의 비참함에 대한 연민과 해탈의 길을 위한 무아(無我)를 추구하는 불교와,

영을 통한 궁극적 실재와의 접촉을 소원하는 힌두교와,

우주의 도덕적 질서에 대한 믿음과 도덕적 실천에 대한 논리를 강조하는 유교 등이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진리의 한 부분으로 인식한다.

출처: 크리스천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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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도 요한도 구약을 인정하였다
- 도올 김용옥의 구약폐기론 반박 

허호익 교수(대전신학대학교)
www.theologia.pe.kr 

도올 김용옥 교수(세명대 석좌)가 저서 [요한복음강해]와 EBS의 강의와 언론인터뷰를 에서 ‘구약폐기론’를 주장하여 물의를 빚고 있다.
도올의 구약 폐기론의 요지는 세 가지인 것 같다.

 

첫째는 “예수의 메시지의 핵심은 율법의 부정”(31쪽)이고, “예수는 율법을 폐하러 왔으며, 구약성경은 폐기돼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도올이 말하는 구약은 율법의 행위이고 신약은 복음의 은총이라는 도식 역시 이미 폐기된 천박한 이론이다. 구약 안에도 출애급의 구원의 은총이 있으며, 신약의 경우는 율법의 정신을 망각한 율법주의를 부정한 것이지 율법 자체를 부정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 루터와 칼빈같은 종교개혁자들도 복음을 율법의 대립 개념으로 보지 않고 율법의 3가지 용도를 통해 율법의 필요성을 인정하였다. 예수는 구약의 한시적인 시민법과 제사의식법들의 조문들은 폐기하였지만, 저 유명한 율법에 대한 반명제 6가지(마 5:21 이하)가 말해주듯이 예수는 율법 본래의 정신을 오히려 철저히 하고 강화하여 가르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율법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마 5:17)”고 선언한 것이다.

 

둘째로 구약은 민족신 야훼(여호와)가 유대인들의 민족해방을 약속 또는 조건으로 한  “유대인만을 대상으로 한 계약”이기 때문에 폐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구약의 율법은 민족 해방의 조건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십계명 서언에 기록된 것처럼 은총의 결과로 주어진 것이다. 애급의 압제에서 해방시킨 출애급과 하나님의 백성 삼은 은총(Gabe)이 먼저 주어진 후 하나님의 백성의 도리와 과제(Aufgabe)로서 십계명이 주어진 것이다. 그리고 구약은 유대민족에게만 의미 있는 것이 아니라, 역사상 모든 약소국가나 피식민지국가들에게 주어진 민족해방의 놀라운 약속과 비전이 담긴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그래서 일제는 구약을 읽거나 설교하는 것도 금했지만 한국교회는 구약을 통해 항일운동의 정신과 민족해방의 희망을 키워온 것이다. 근래의 남미해방신학을 비롯한 제3세계의 신학의 성서적 근거 역시 구약의 출애급 해방 전승이라는 것을 도올은 알지 못하고 ‘구약을 믿는 것은 성황당을 믿는 것’으로 폄하한 것 같다. 도올의 그런 논리가 정당하다면 플라토의 [공화국](Republic)은 희랍인들만의 이상국가론이기 때문에 폐기되어야 한다는 치졸한 논리가 된다.

 

셋째로 “예수의 출현으로 새로운 계약(신약)이 성립된 만큼 구약은 당연히 효력이 없다”고 하였다. 현대의 상법상 계약 논리로는 맞는 말이겠지만, 이 역시 신구약을 관통하는  계약신앙의 핵심을 몰라서 하는 말이다. 하나님의 주도로 이스라엘 백성과 맺은 시내산 계약은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는 것’이었다. 식언(食言)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편에서는 한번 계약은 영원한 계약이므로 이 계약에 신실하였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늘 이 계약을 위반하였기 때문에 해마다 유월절에는 계약갱신이 필요했다. 새 계약은 하나님 편에서는 이제까지의 이스라엘의 계약 위반의 ‘죄를 다 사해주고 기억도 아니 하시는’(렘 33:34) 은총으로 구약에서 이미 약속된 것이다. 그러므로 신구약 성서가 말하는 새 계약은 옛 계약의 폐기가 아니라 옛 계약의 갱신이요 성취요 완성인 것이다. 

 

기독교가 유대교의 구약을 정경(正經)에 포함시킨 것은 예수 자신이 구약을 수용하여 회당에서 읽기도하고 인용하고 설교하였기 때문이다.

 

예수는 구약 즉 “모세와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를 “자기에 관한 것”(눅 24:27)이라 하였다. 그래서 기독교에서는 구약은 ‘오실 메시야 즉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약속’이며, 신약은 구약의  약속의 성취이며 동시에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약속’이라고 한 것이다.

 

저 유명한 유대인 학자 G 버미스 조차도 [유대인 예수의 종교]라는 책에서 예수가 유대인으로서 구약을 여러 방식으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1)구약성경의 단어나 구절을 재사용하고, (2) 구약의 선례를 인용하고, (3) 구약과 관련하여 강조나 대조를 통해 새로운 의미를 유출하고, (4) 구약을 예언의 성취로서 해석하고  그리고 (5) 새로운 교리를 지지하기 위하여 여러 구약의 구절을 모아 연결시키는 미드라쉬적 양식을 사용한 것이다. 

무엇보다도 도올이 강의하는 요한복음서 자체에도 구약의 인용이 적지 않다. 요한복음에는  구약의 직접인용을 적지만 구약의 개념에 매우 친숙하였다(요 1:23, 51; 2:17; 6:31, 10:34; 12:13; 15, 27, 38, 40; 12:40; 13:18; 15:25; 19:24; 36, 37)  
결국 도올 김용옥 교수는 예수가 인정한 구약마저 폐기하자는 것이고, 무엇보다도 그가 강의하는 [요한복음]이 인정하여 인용한 수많은 구절의 구약을 무시하고 구약의 폐기를 주장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교회사를 보면 구약폐기론을 들고 나온 이들이 가끔 등장한다. 구약폐기론의 원조는 로마교회의 장로 마르키온(Marcion)이다. 그는 영지주의의 이원론에 따라 구약성서의 여호와 하나님은 열등한 조물주 신이며, 신약성서의 아버지 하나님과는 다른 하나님이라는 이유로 구약의 폐기를 주장하다가 144년 7월에 파문당하였다. 155년경 서머나의 주교 폴리캅은 마르키온을 만나 토론한 다음, “나는 네가 확실히 사탄의 맏자식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단죄하였다. 기독교 신앙의 기준인 사도신경은 사실상 당시의 마르키온의 구약폐기론을 반박하고 구약성서의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신(하나님)’이 신약성서의 ‘아버지 하나님’과 동일한 분이라는 것을 고백하기 위해 형성된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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