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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티기독교인들이 출간한 <우리는 왜 기독교를 반대하는가> 
    
안티기독교, 어떻게 볼 것인가


   들어가며
 

   1990년대 이후로 본격적인 다양한 시민사회가 형성되면서 종교 진영에도 많은 변화가 생겼다. 사실 90년대 후반만 해도 종교비평이라는 용어는 내 기억 상에 없었던 것으로 안다. 그렇기에 종교인 단체가 아닌 일반 시민사회단체가 결성되어 ‘종교인의 소득세 문제’를 제기한 것도 상당히 이례적인 것이라 할 수 있겠다.
 

   동시에 기독교와 관련해서 특기할 만한 사항은 <안티 기독교>Anti-Christianity의 폭발적인 증대 현상이다. 초창기에 안티 기독교 사이트는 여기저기서 생겨났었다. 그러다가 2002년경에 여기저기 산재해 있던 군소 안티 기독교 그룹들을 현재의 <반기독교시민운동연합>(이하 ‘반기련’, www.antichrist.or.kr)으로서 통합한 것이다.


   내가 경험했던 안티 기독교
 

   아주 오래 전이지만 나 자신은 우연히 안티 기독교인을 처음으로 접했었던 경험을 기억하고 있다. 어느 날 ―기억상으로는 현재의 반기련 통합 이전인 듯― 우연히 안티기독교 사이트의 글을 발견하고 읽은 적이 있는데, 그 내용들은 대체로 기존 기독교는 독선적이고 배타적이며, 성경을 통해 온갖 날조와 허구를 가르치고 있고, 십일조의 명목으로 돈을 모아서 교회당을 크게 짓고 자기 배만 불리고 있기 때문에, 이제 기독교는 몽땅 망해야 한다는 것이 그 골자였다. 사람들의 접속수도 매우 높았었다.
 

   그냥 지나칠 수도 있었지만, 그래도 일말의 안타까움도 있어서인지 나는 약간의 답변을 남겼다. 즉, 기존의 보수 기독교의 그러한 폐해들이 있긴 하지만, 그렇지 않은 소수의 건강한 진보 기독교의 흐름들도 있으니 기독교에 대해 좀더 깊게 공부를 하실 필요도 있다고 얘기하자, 당시 그 안티기독교 사이트에 많은 글을 쓰고 또 이를 만든 운영자이기도 했던 그 안티 기독교인은 나의 그러한 코멘트에 대해 매우 인상적인 첫 답변을 주었다. 날더러 “거짓말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열린 종교관을 가지고 있고 성서비평을 받아들이고 있으며, 또한 나름대로 이 땅에 생명과 평화와 정의를 위해 사회운동에도 힘쓰는 진보적인 기독교에 대해서도 좀더 상세하게 소개를 하니까, 그게 무슨 기독교냐고 반문하면서 그런 기독교가 있다는 사실 자체를 아예 믿으려 하지 않는 반응을 보였었다. 물론 그럴 만도 한 게 그러한 진보 진영은 소수이기도 하니까. 
 

   재밌게도 나의 그 글은 올린 지 얼마 되지 않아 눈에 잘 띄지 않는 해우소 같은 곳으로 보내어졌고, 자유게시판은 나 같은 사람이 더 이상 못들어 오도록 아이피를 막아놓았었다. 그리고서 여전히 또 일방적으로 남겨놓은 얘기는, 기독교는 무조건 망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른바 이를 <기독교 박멸론>이라고 부른다. 마치 바퀴벌레 박멸을 떠올리듯 말이다.
  
   안티 기독교의 발생과 형성은 기존 기독교의 폐해가 가장 큰 원인
 

   그리고 그 사람은 자신이 안티 기독교로 돌아선 이유에 대해서도 살짝 얘기를 했었는데, 결정적인 것은 자신의 사랑하는 사람이 기독교에 빠져서 종교가 다르다는 것 때문에 헤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안티 기독교인은 교회를 계속 다니다가 어느 날 목사에게 성경에 의문이 있어서 질문을 했는데 그것이 결정적인 원인이 되어서 교회를 나오게 되었다는 사람들도 있었다.
 

   어쨌든 내가 보기에도 대부분의 안티 기독교인들은 직간접적으로 기존의 보수 기독교의 폐해를 경험한 사람들이라 할 수 있겠다. 그렇기에 우리는 안티 기독교의 발생이 기존 기독교와 아무 상관없이 그냥 생겨난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곤란하다는 사실부터 분명하게 인지할 필요가 있다. 즉, 안티 기독교의 발생은 기존 기독교의 끔찍한 폐해들로 인해 생겨난 것이다.
 

   안티 기독교인들이 성토하는 내용들은 크게 보면, 주로 보수 근본주의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독선적인 배타성 및 ‘무조건 믿어라’고 말하는 강압적인 신앙으로 인한 폐해들이 거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기존 기독교에 대한 안티를 표방하고 있기 때문에 <반감>과 <증오>가 아주 강하다. 이들은 기독교인을 부르는 명칭부터 기독교인을 ‘개독교인’이라고 부르고, 목사를 ‘먹사’라고 종종 부른다.
 

   그래서인지 안티 기독교인들은 기존 기독교의 사회적 행태에 대해선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고 꼬집어내는 측면이 있다. 예를 들면, 목사가 불륜을 저지르는 사건이 터지면, 그에 대한 기사거리 뿐만 아니라 자료 사진과 풍자 그림들이 온갖 동원된다. ‘에어장 사건’은 오랫동안 이들에게 안주거리이기도 했었다. 이들은 일상적 삶 속에서 발견되는 기독교인들의 행태도 곧잘 꼬집어 낸다.
 

   때때로는 그 관찰력이 아주 탁월한 느낌마저 들 때도 있다. 나는 건강한 기독교인이라면 안티 기독교 사이트도 충분히 가볼만 하고 이들의 주장과 소리에도 귀를 기울여 볼 필요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만큼 이들이 기존 기독교의 행태를 비판적으로 매우 예리하게 꼬집어내고 발견해내는 지점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개인적으로 안티 기독교의 주장들을 모두 동의하진 않지만, 적어도 안티 기독교의 입장에서 기존의 주류 기독교를 비꼬며 풍자하는 측면들도 알아둠이 좋다는 얘기다. 사실 그들의 영혼들 역시 상처받은 영혼들이긴 마찬가지 아닐까 싶다.
 

   안티 기독교의 한계
 

   그렇기 때문에 안티 기독교는 기존 기독교의 폐해를 경험한 자들에겐 그 사이트를 접할 경우, 희열을 느낄 만큼 매우 통쾌한 카타르시스를 제공한다. 그 매력을 느끼는 데에는 시간이 그다지 오래 걸리지 않는다. 여과 없이 적나라하게 기존 기독교를 까발리는 행태들은 마치 그동안 억누르고 금지되었던 욕구들을 마음껏 발산시키는 해방구 노릇을 하기도 하는 것이다.
 

   하지만 안티 기독교의 한계는 바로 그것이 현재로선 존재의의이자 한계이기도 하다. 즉, 안티 기독교는 기존 기독교의 폐해로 인해 발생하였지만, 기존 기독교가 “무조건 믿어라”의 폭력성을 지니고 있었다면, 안티 기독교는 “기독교는 무조건 망해라”는 신념이 무차별적으로 전제되고 신봉된다는 점에서, 적어도 그 폭력성만큼은 그대로 이어받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그러한 사례들은 아주 많다.
 

   예컨대, 순진한 기독교인 한 명이 안티 기독교 사이트에 들어와서 “샬롬~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저는 당신들이 예수님을 영접하길 바라며, 지옥에 가지 않길 기도합니다”라는 정말로 순진한 메시지를 남겼다면, 이는 안티 기독교인들의 집단 먹잇감이 되기엔 딱 안성맞춤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인에게는 다짜고짜 반말부터 깔고 나가는 모습들도 자주 눈에 띄었다.
 

   게다가 안티 기독교 사이트에서 순진한 기독교인 한 명에게 뭇매를 가할 때 그나마 동원되는 비난의 근거들은 대체로 기독교인들의 사회적 행태에 대한 지적들 외에도 <바이블>(안티 기독교인들은 성경이나 성서라는 단어를 안쓰고, 바이블이라는 표현을 잘 쓰는 것도 특기할만한 사항)에서 찾았다는 이상한 말들 이를테면 바이블의 오류와 모순, 비과학적으로 보이는 황당한 얘기, 반인륜적인 얘기 등등 이런 것들에 기인한다.
 

   기존 기독교가 <기독교 절대주의>라는 도그마를 가졌다면, 안티 기독교 역시 <기독교 박멸주의>라는 절대 교리를 가지고 있다. 그렇기에 둘은 결국 평행선이요 폭력적 대결이 되기 십상이라고 하겠다.
 

   재밌게도 반기련이라는 안티 기독교 사이트의 취지를 읽어보면, 이들 “최종의 목적이 현실적인 기독교 집단의 반성을 촉구하는 것인지, 혹은 기독교 집단의 최종적인 붕괴나 괴멸인지 그것은 사실 정해지지 않았습니다.”라고 쓰여 있다(그러면서도 이는 관리진의 생각일 뿐이라고 한편으론 발을 빼는 듯한 문구도 첨가). 하지만 실제로 반기련 게시판 대부분의 내용들은 기독교 박멸 문구들이 분명하게 지배하는 것 역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미 이들의 정체성과 한계는 <안티 기독교>라는 그 명칭에서부터 더 없이 잘 드러난다. 안티라는 것은 결국 반대라는 의미인데, 그 어떤 사안에 대한 반대 자체가 설득력을 가지긴 힘들다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생각해보라. ‘A’와 ‘not A’가 함께 공존한다는 것은 상대방에 대한 설득의 여지자체가 이미 시작에서부터 봉쇄되어 있는 상태에서의 공존인 것이다.
 

   어떤 방에 ‘개를 좋아하는 사람’과 ‘개를 싫어하는 사람’이 같이 산다고 생각해보자. 이미 그러한 사람인데 무슨 대화의 접점이 있을까? 안티 기독교인들도 이성적 설득을 얘기하지만, 내가 보기엔 그저 기독교의 폐해를 받은 만큼 똑같이 기독교들에게도 되돌려주겠다는 식으로 그렇게 취급하는 성향이 강하다. 예컨대, “기독교는 예수를 안믿으면 지옥 간다고 협박하는데, 만일 우리가 너희들에게 단군 혹은 부처를 무조건 믿어야 지옥에 안갈 수 있다고 협박하거나 강요한다면, 기독교인들 너네들은 기분이 어때?”라는 식인 것이다.
 

   안티 기독교가 진보 기독교를 싫어하는 이유
 

   사실 우리가 기존의 보수 근본주의 기독교인들에게 튼튼한 논리를 기대하기 힘든 것처럼, 정확히 말해서 안티 기독교인들에게도 튼튼한 논리를 기대하기란 매우 힘들다. 실제로 안티 기독교 사이트를 가보면 알겠지만, 이들이 비판하는 주 대상들은 기존 기독교의 주류를 차지하고 있는 보수 근본주의 기독교에 대한 것들이지 그 이상의 깊이로 좀처럼 나아가진 않는다. 예컨대 진보적인 기독교 사상에 대해서는 비껴 있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이들 안티 기독교인들은 진보 기독교(안티 기독교인들은 이들을 기독교 개혁파로 이해)에 대해서도 별로 좋아하질 않는다. 어떤 안티 기독교인은 개혁적인 진보 기독교는 보수 기독교보다 훨씬 더 얄밉고 더 암적인 존재라고 말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망해야 하는데, 그나마 망하지 않도록 여전히 건재할 수 있는 또다른 기반이 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안티 기독교인에게 기독교는 망해야만 하고, 또 그렇게 되어야만 하는 대상이다.
 

   그렇기에 앞에서 나 자신이 경험했던 그 안티 기독교인도 나 자신이 소개했던 그 기독교를 믿으려 하지 않았던 그 맥락도 충분히 이해할 만한 것이라고 하겠다. 이들이 진보 기독교를 단선적이고 단편적으로 이해하는 맥락도 다음에서 엿볼 수 있다.
 

   진보 진영의 경우 그 편차들을 좀더 다양하게 볼 수 있는 점도 있지만, 적어도 그 안에는 <기존의 보수 기독교가 아닌 새로운 대안으로서의 기독교>를 추구하는 흐름들도 있기 때문에 기존 기독교의 해체를 촉구하는 점도 없잖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안티 기독교는 바로 이러한 맥락들을 간과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그 나이브함을 엿볼 수 있다. 분명히 말하지만, 대안을 가지고 해체를 말해야지 해체 자체가 대안이 되긴 힘들다고 본다.
 

   앞서 보았듯이, 안티 기독교인들에게는 진보 기독교가 얄미울 수밖에 없으며 어떻든지 상대하기 손쉬운 보수 기독교를 상대로 해야 그 존재의의를 가질 수 있는 점이 있다. 이들이 비판하는 바이블 내용들이나, 창조론이냐 진화론이냐 하는 것들은 현대 학문의 축적된 성과들을 받아들이고 있는 진보 기독교인들에겐 전혀 별문제꺼리도 안되는 내용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마치 전체 기독교가 몽땅 다 박멸되어야 한다고 부르짖기에 진보측 기독교인들로선 조금 시큰둥하게 나올 수밖에. 실제로도 내가 알았던 주변의 안티 기독교인들도 진보측 기독교에 대해선 자세히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런데도 이들은 여전히 “개독교 박멸하는 그 날 진실로 하늘이 열리리라!”는 외침은 곧잘 한다.
 

   시민단체인가? 동호회 클럽인가?
 

   안티기독교 사이트인 반기련은 <반기독교시민운동연합>이다. 그렇다면 말그대로 이들은 시민단체의 성격이 강할 것으로 본다. 하지만 뚜껑을 열어보면 오히려 시민단체의 성격보다는 오히려 동호회의 성격이 강하다. 그나마 간헐적으로 하는 행사들은 기독교를 반대하는 자신들의 취지를 알리는 홍보나 기독교인들의 만행과 추태를 알리는 사진행사전 같은 것들을 꼽을 수 있겠다.
 

   반면에 반기련과 다르게 종비련(종교비판자유실현시민연대, www.gigabon.com)이라는 곳이 있는데, 흥미롭게도 이들 본래 반기련을 함께 세웠던 주요 핵심 멤버들이었지만, 다시금 반기련을 나와서 종비련을 형성했던 것이다. 어차피 서로 파당이 이뤄질 때는 워낙 구구절절 뒷얘기들이 많으니까 그러한 의사소통들의 불협화음 문제들까지 여기서 일일이 거론하진 않겠다. 단지 여기서는 안티 기독교 그룹이라는 반기련과 여기서 다시 나온 종비련이라는 그룹의 차이에 대해서만 지적하고자 한다.
 

   가장 뚜렷한 차이는 반기련이 안티 기독교를 표방한다면, 종비련은 종교의 순기능도 인정하는 건강한 종교시민사회를 지향한다는 점이다. 이때 종비련은 단지 종교비판도 허용될 수 있도록 성역 없는 건강한 시민사회를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종비련 사이트에도 안티 기독교 성격의 글들도 더러는 함께 올라오긴 하지만 그 지향성만큼은 분명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또 다른 차이 하나는 시민단체 운동의 유무이다. 반기련은 시민단체 운동을 한다고 보기엔 힘들만큼 조직적이거나 그러한 점이 희박하지만, 반면에 종비련은 ‘종교인 소득세 운동’이나 ‘종교의 성차별 반대 운동’에 대해서도 나름대로 움직이고 있다고 판단된다. 특히 ‘종교인 소득세 운동’의 경우는 사회적으로도 매우 반향이 커서 현재는 재경부에서 검토 중일만큼 정부에 대한 견제와 압박의 효과까지 일궈냈었다.
 

   물론 반기련 자체가 동호회 성격을 가진다고 해서 그것자체가 잘못된 것이라고는 결코 보질 않는다. 단지 <반기독교시민운동연합>이라는 그 이름을 볼 때, 이들의 모임을 시민운동이라고 이름 붙이기엔 그 성격상 좀 그렇다는 얘기며, 그저 클럽의 성격이 더 강하다고 볼 뿐이다. 차라리 애초 ‘안티기독교까페’나 ‘안티기독교클럽’이라고 이름을 짓는 것이 더 적절하지 않을까 싶다.
 

   나오며
 

   우리 사회에 안티 기독교가 형성되었다는 것은 어쩌면 기존 기독교에겐 또다른 기회일 수 있다고 본다. 우리는 안티 기독교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성찰하고 이를 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저들이 왜 그토록 기독교에 대해 반감을 가지게 되었는지 분명하게 알아 둘 필요가 있다.
 

   내가 보기엔 기존의 보수 기독교가 안티 기독교를 뭐라고 탓하기는 참으로 힘들다고 본다. 왜냐하면 기존 기독교가 제대로 똑바로 처신하고 있다면 더 이상 안티 기독교가 지지받기도 힘들뿐더러 그렇게 나오기도 힘들다고 보기 때문이다. 반면에 만일 기존 기독교인들이 무지와 배타성과 사회적인 부덕의 행태를 보이면 보일수록 오히려 안티 기독교인들은 더욱 기뻐 날뛰며 좋아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안티 기독교는 기존 기독교와 적대적 공생관계이기도 하다.
 

   정확히 말해서 안티 기독교는 기존 기독교가 낳은 또 다른 괴물인 것이다. 아마도 ‘괴물’이라는 이 표현을 두고 안티 기독교 당사자들은 기분 나빠할 진 모르나, 그 의미는 기존 기독교의 배타적 폭력성을 똑같이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는 것이다. 즉, ‘기독교 박멸주의’ 혹은 ‘기독교 반대’가 자신들의 근본 신념으로서 깔려 있는 한, 거기에 새롭고 건강한 대안 기독교를 말할 자리란 근본적으로는 봉쇄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만일 안티 기독교 운동을 하다가 새로운 대안 기독교를 모색한다고 할 경우, 그것은 안티 기독교에 대한 변절로 취급받을 수 있다. 저들에게 기독교란 그저 안봐도 뻔한 집단일테니 말이다. 그렇지만 저들이 아는 기독교의 세계란 너무나 짧기 그지없다. 물론 워낙 한국 기독교의 대부분이 보수 근본주의 기독교로 지배되어 있는 현실이니 그 부분도 충분히 짐작할 만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로서는 안티 기독교가 이제 자신들의 존재 의미나 한계에 대해서도 그리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깊은 숙고가 필요하다고 본다. 물론 안티 기독교의 존재의의를 기존의 보수 기독교에 대한 반박과 반감 및 이를 통한 카타르시스 제공에 그 존재의의를 둔다면 나로서도 더 이상 할 말은 없다.
 

   그럴 경우 안티 기독교로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문제만 부여잡은 채 그저 감정의 배설만 뱉어낼 따름일 뿐이며, 그들의 논리가 전체 기독교를 설득하기엔 여전히 미흡할 뿐이라는 사실도 함께 직시되어야 할 것이다. (2007. 2. 13. 크리티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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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단종파들, 인터넷을 좀먹고 있다 
                              ‘지식검색’ 이용한 이단들의 진리 왜곡 심각


   기독교의 진리를 왜곡하고, 성경말씀을 거짓으로 치장하여 인간의 영혼을 병들게 하는 이단들의 활동이 인터넷 공간에서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도에 대해 아세요?’라는 말이 한때 유행어로 불릴 만큼 이단들의 적극적인 포교활동은 이미 사회에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들의 활동은 외적인 포교활동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인터넷 안에서의 활동도 매우 전략적이고 치밀하다.


   홈페이지에 이어 지식검색은 이단들이 더 우세


   사이버 공간에서 이단들의 활동은 우선 자신들의 ‘홈페이지’에서 매우 활발하다. 홈페이지를 만들어 자신들의 종파를 홍보하는 한편, 거짓된 흑색 진리를 선전하는 도구로 적극 사용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세련된 디자인과 유연한 글 솜씨로 딱딱하고 거친 예전의 이미지를 벗어나, 편하고 낯설지 않은 이미지를 세상에 알리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 역력하다.


   그러나 사이버에서 이단들의 활동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더 전략적이고 공격적인 사이버 포교는 ‘공식 홈페이지’보다는 각 포털 사이트의 ‘지식검색’과 ‘블로그(Blog)’, ‘인터넷 카페’ 등에서 더욱 활발하다. 특히 이들은 자신들의 거짓 진리와 궤변적인 논리를 ‘지식검색’을 통해 교묘히 전하고 있다.


   유명 포탈 사이트들은 예외없이 ‘지식검색’을 활성화하여 많은 정보를 나누고 있다. ‘지식검색’이란 자신이 궁금해 하는 지식에 대해 사이트에 ‘질문’을 올려놓으면 그에 대한 정보나 지식을 알고 있는 다른 사람이 ‘답변’을 올려놓는 방식으로 운영되는, 포털 사이트의 대표적인 메뉴 중 하나이다.


   이단들은 이 점을 이용하여 자신들이 ‘질문’을 올려놓고, 자신들이 스스로 ‘답변’을 하는 방식으로 거짓 진리를 인터넷에 퍼트리고 있다. 예를 들면 ‘○○○ 교회는 어떤 교회인가요?’, 또는 ‘재림 예수를 ○○○라고 하는데 맞나요?’와 같은 형식으로 ‘질문’을 하면, 자신들의 교리를 아주 긍정적인 방식으로 ‘답변’에 올려놓는다.


   지식검색창에 ‘하나님’ 또는 ‘재림’ 등의 기독교적 단어를 이용하여 검색을 하면 수많은 이단 추종자들의 글을 쉽게 볼 수 있다. 이런 방법이 아니더라도 일반인 또는 기독교인들이 관심을 갖고 올려놓은 ‘질문’에 대해 이단들은 거짓된 이단교리로 ‘답변’을 올려놓아 ‘지식검색’을 혼란에 빠지게 하고 있다. 블로그 역시 여러 개를 운영하면서 이단의 교리를 진리인양 말하고 있다.


   일부 기독교인이 잘못된 교리에 대해 ‘리플’을 달면 이단들의 공격이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심하게 올라온다. 또한 지식검색에서 기독교인의 답변 글도 자주 찾아 볼 수 있는데, 기독교인의 답변 글 밑에는 의례 이단들에 의한 ‘악플’이 가득하다.


   여기에 ‘개독교’ 운운 하는 안티 기독교 네티즌들과 ‘다른 사람의 종교를 인정하라’는 종교다원주의적 주장을 펴는 사람들이 가세를 하다 보면, 이들의 비난과 반박 공격을 당하던 기독교인들은 ‘뭐가 무서워서 피하는 것이 아니라 더러워서 피한다’는 생각으로 논쟁에서 그냥 빠져나와 버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결국 지식검색 안에서 기독교인이 쓴 글이 오히려 ‘거짓 진리’가 되고, 이단들의 글이 ‘진짜 진리’가 돼버리는 상황이 비일비재하다.


   문제는 사회적 혼란과 병드는 영혼이다


   이단들의 이런 인터넷 포교활동은 기독교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에 큰 문제를 야기시킬 수 있다. 거짓 진리로 일관된 글들이 인터넷에 가득하게 되면 무엇보다 ‘진리에 대한 혼란’을 일으키게 된다. 그래서 분별력이 부족한 기독교인이나 일반 사람들은 이단의 글을 구별하지 못하게 된다. 거짓된 글이 다수를 이루어 인터넷을 장악하게 되면, 정확하고 올바른 글은 소외되어 억울한 누명을 쓰게 된다.


   또 다른 문제는 이단의 글에 의해 젊은이와 청소년들의 영혼이 병들어가고, 결국 소중한 영혼을 잃을 수도 있다는 점이다. 진정한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 신앙이 성숙되어야 하는데, 거짓과 왜곡으로 가득한 이단의 글을 통해 영혼은 더욱 메마르고 피폐해진다. 더욱이 청소년들이 장래 사회에 진출하여 끼칠 영향력을 생각한다면 이는 개인의 문제가 아닌 공동체, 사회적 문제가 될 것이다.


   말씀으로 진리를 견고히 해야 거짓이 사라진다


   지난해 미국의 한 인터넷 기업의 조사에 의하면 한국은 세계에서 6번째로 많은 인터넷 인구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이 조사는 우리나라에서 약 2천5백만 명이 인터넷을 사용하고 있고, 지금도 급속히 증가하고 있다고 밝혔다. 한국 인구의 절반이 인터넷을 이용하고 있으며, 인터넷 속에서 많은 정보를 공유하고 전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올바른 정보가 아닌 왜곡된 정보, 거짓으로 가득한 정보가 떠돌고 있는 것이 문제다. 인터넷에 거짓을 걸러낼 수 있는 거름종이를 부착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지만 그럴 수는 없다. 또한 2천5백만 명의 인터넷 이용자들에게 거짓과 진리의 구별에 대해 일일이 설명하는 것은 더 어려운 일이다.


   기독교에서도 인터넷을 통해 적극적으로 진리를 알리고, 지키는 활동이 요구되고 있다. 전도를 위한 활동뿐만 아니라 인터넷 세상의 청결과 성결을 위한 방법을 간구해야 할 것이다. 기독청년들이 중심이 되어 ‘사이버 감시단’ 같은 것을 운영하여 이단들의 글에 대해 적절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


   거짓이 거짓임을 확실히 밝힐 수 있는 방법은 성령의 검(劍)인 말씀을 가지고 거짓을 쪼개면 된다. 성경 말씀으로 기독교의 진리를 더욱 견고히 하고, 그 진리를 담대히 전하고, 나눌 때 이단들의 거짓 진리는 뒤로 물러서게 될 것이다.


   크리스천 인터넷 이용자들은 지식검색이나 블로그 등을 이용할 때 각별히 주의하는 태도도 필요하다. 충분한 준비없이 이단 추종자들에게 허술하게 대처하면 오히려 큰 낭패를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거짓 논리에 신중한 태도로 대응해야 한다. 그리고 분별할 수 없는 글이 있을 때는 교회의 목회자나 기독교 상담소에서 상담을 받도록 해야 한다.


   거짓 진리가 사리지고, 깨끗하고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이 인터넷에 가득하기를 소망한다. (2007. 1. 28. 구굿닷컴 / 이원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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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지 터키 이야기 ] 제3차 공의회가 열렸던 대도시 ‘에베소’

 

세계 최대의 도시 유적이 남아 있고, 바울의 2~3차 전도여행지였으며, 아데미를 숭배하던 ‘여신의 땅’ 에베소. 옛 역사와 마리아기념교회에서 열린 제3차 공의회에 대한 ‘성지 터키 이야기’ 두 번째다.


한국은 지금 ‘여교주’ 전성시대라고 합니다. 문선명의 뒤를 이은 통일교의 한학자, 안상홍의 뒤를 이은 하나님의 교회의 장길자, 그리고 이만희의 뒤를 이를 것처럼 급부상하고 있는 신천지의 김남희 등이 마치 트로이카처럼 각축을 벌이고 있습니다.


에베소 지역은 예로부터 ‘여신의 땅’이었습니다. 그 여파는 지금부터 약 1500년 전인 AD 431년에 기독교 안에까지 미치게 됩니다.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등 에게해 인근에 살던 사람들이 섬기던 대모신(大母神)인 아데미(Artemis) 신(神)이 예수님의 어머니인 마리아로 대체되어 버렸습니다. 431년 에베소의 마리아 기념교회에서 열린 에베소 3차 공의회에서 결정된 교리 때문입니다.


오늘 날 한국교회 이단사이비들의 여교주 등장과 에베소의 뿌리 깊었던 여신 숭배의 결과가 묘한 동질감 느낌이 있습니다.


에베소의 개관


에베소(Ephesus) 도시 유적은 버가모(Bergama) 유적과 함께 ‘에게해의 두 개의 장미’로 격찬 받았던 세계 최대 규모의 도시 유적을 볼 수 있는 곳입니다. 에베소는 소아시아의 수도였을 뿐만 아니라 로마, 알렉산드리아, 안디옥과 더불어 로마 제국의 4대 도시 중 하나로 손꼽히는 도시였습니다.


신약성서 ‘에베소서’나 요한계시록의 수신지로 소아시아 7교회 중 하나로 등장하며, 고대 그리스 시대, 로마제국 시대에 번성한 도시였습니다. 이 도시의 황금기는 기원전 133년, 로마 제국의 지배 아래에 들어가면서부터인데, 수많은 국제회의가 열리고 각지의 물산이 집합되는 무역 항구이자 동서양을 연결시키는 교통의 요충이었고, 에베소의 최전성기는 AD 1~2 세기경으로 도시 인구가 30만 명에 달하면서, 당연히 초대 기독교인에게도 에베소는 중요한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항만을 끼고 번영한 상업도시 에베소가 쇠퇴한 것은 카이스터(Cayster) 강의 토사 퇴적으로 항구가 묻혀져 가면서 항구로서의 기능을 상실했기 때문이며, 전염병이 도는 등 도시 기능이 점점 저하되어서 현재의 장소(Selçuk)로 도시를 이전하게 되었습니다. AD 612년의 지진으로 부분적인 파괴를 겪으면서 에베소는 급속하게 기울어졌습니다.


사도 바울은 2, 3차 전도여행 때 이곳을 방문했고 3차 전도여행 때에는 성령의 강림으로 방언과 예언의 이적이 일어나서 그것을 본 마술사들이 마술책을 불사르고 기독교로 개종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또한 바울은 고린도에 보낸 3통의 편지(먼저 쓴 편지, 고린도전서, 눈물로 쓴 편지)를 에베소에서 쓰기도 했습니다.


에베소의 역사


에베소(Ephesus)의 기원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그리스의 역사가요, 철학자인 타키투스(Tacitus)에 의하면 에베소 도시는 흑해로부터 건너 온 여인(女人)족인 아마존족이 BC 1,400년경에 마을을 처음으로 세웠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리학자이자 역사가인 스트라보는 에베소는 아마존족 언어로 ‘꿀벌’이라는 뜻의 ‘아빠소스’라는 아마존족의 여왕 이름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그 후 BC 1,100년경 이오니아인(Ionians)인 아테네 왕자 안드로클레스(Androcles)가 여인들이 다스리는 아마존 토착민들을 추방시키고 에베소를 건설하였습니다. 이 시기는 많은 그리스계인들이 척박한 그리스 본토와 섬을 떠나서 비옥한 아나톨리아 서부 지역(버가모, 에베소, 서머나 등)으로 대거 침략하여 그리스계 도시들을 건설하였던 시기였는데, 안드로클레스 왕자도 당시의 전통에 따라 새 도시를 세우기 위해 델피의 아폴로 신전으로부터 신탁을 받고자 했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생선과 산돼지와 불이 함께 만나는 곳에 도시를 세우라’는 신탁을 받았다고 합니다. 안드로클레스는 에베소 지역에 이르러 바다가 인접한 미지의 땅을 발견하고 그가 부하들과 함께 생선을 구워 먹던 중에 갑자기 불어온 바람에 불똥이 튀어 코레소스(Koressos) 산에 불이 나고 말았습니다. 바로 그 때에 그 숲속에서 산돼지가 달려 나왔는데 그것을 보고 사람들은 이곳이 ‘신이 원하는 장소’라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이곳에 도시를 세우고 그것을 기념하는 ‘산돼지 상’을 건립하였습니다. 이 지역은 바로 에베소 원형대극장이 위치한 언덕 쪽이었습니다.

 

안드로클레스가 그리스계 이오니아 도시 국가를 건설하면서 에베소는 점차 항구 도시로서 발전을 거듭하며 성장하기 시작했고, 후에 페르시아와 리디아의 크로이소스 왕의 침략, 그리고 알렉산더 대왕의 헬라 제국, 로마 제국, 셀축 투르크, 오스만 투르크 등으로 이어지는 동양에서 서양으로 진출하려는, 반대로 서양에서 동양으로 진출하려는 세계 열강의 각축장으로 변모했습니다.


여신 숭배


재밌는 것은 에베소는 아주 오래 전부터 대대로 여신을 섬겨 왔었습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아데미 여신 이전에는 대모신인 키벨레(Cybele) 여신을 섬겼고, 키벨레의 또 다른 형태의 아데미(Artemis) 여신이 그 뒤를 이었으며, 재밌는 것은 기독교가 들어온 후에는 예수님의 어머니인 마리아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는 것입니다.


에베소를 비롯한 아나톨리아의 에게해 연안 도시들은 가나안 원주민들이 아스다롯과 아세라 여신을 섬겼던 것처럼, 예전부터 달의 여신인 키벨레(Cybele)라고 하는 여신을 숭배했었습니다. 에베소도 예외는 아니어서 풍요와 다산의 상징인 키벨레를 전통적으로 섬겨왔었습니다.


그러다가 아마존족이 추방되고, 아테네에서 이주해 온 그리스인들은 에베소에 정착하면서 그들이 그리스에서 섬기던 아데미를 아나톨리아로 가져온 것입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에베소는 다산과 번성을 주관하며 출산과 갓난아기의 발육을 관장하는 신인 아데미를 숭배하였습니다.

 

그래서 전통적으로 에베소를 비롯한 아나톨리아 에게해 인근 도시들은 모신(母神), 즉 ‘어머니 신’에 대한 사모하는 마음이 항상 사람들 마음 한 켠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에베소의 처음 거주자들이 아마존 여인족이었던 것도 무관치 않아 보입니다.

그러다가 바울이 3차 전도여행(AD 53~56년)을 하면서 에베소에서 약 3년 동안 사역을 하면서 에베소 시민들이 아데미에 대한 신앙심이 떨어지면서 은으로 만든 아데미 상의 판매 부진으로도 이어지기도 했지만, ‘은장색 조합’(Guild)의 폭동이 일어나고 네로 황제를 비롯한 이후의 황제들의 기독교 탄압과 박해가 시작되면서 기독교는 위기를 맞게 되고 자연스럽게 아데미를 숭배하는 신앙은 더욱더 활발해졌습니다.

하지만 기독교는 로제 제국에서 박해를 가하면 가할수록 제국 내에 더 깊이 더 넓게 뿌리를 내리며 퍼져갔습니다. 바울이 제국 내에 기독교 복음의 씨앗을 심은 후 약 250년이 지난 313년에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밀라노 칙령’에 따라 마침내 기독교가 로마 제국의 공식 종교로 지정되었으며, 380년에는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테살로니키아 칙령’에 따라 로마제국의 국교(國敎)로 지정되기에 이릅니다.

313년 밀라노 칙령 이후에는 그동안 지하에서 제국의 박해를 피해 몰래 예배를 드리며 숨죽여 왔던 기독교가 이제는 지상으로 올라와서 웅장하고 아름답게 교회 건물을 짓고 예배를 드리며 나래를 활짝 펴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기독교가 로마 제국 전체로 퍼져가며 외면적으로 성장을 해 갈 때에도 아나톨리아의 에게해 인근 도시의 시민들은 항상 예전부터 그들의 조상, 조상들의 조상 때부터 섬겨오던 여신(女神) 혹은 모신(母神)에 대한 그리움은 사라지지 않았고 계속 그들 마음 한켠에 남아 있었습니다. 복음을 영접하고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들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다가 여신을 향한 그들 안에 내재되어 있던 욕구와 욕망에 불을 지피는 사건이 발생하게 됩니다. 바로 431년도에 에베소 마리아기념교회에서 있었던 3차 에베소 종교회의가 그것입니다.

 

에베소 3차 공의회

기독교가 로마 제국의 정식 종교로 공인받은 후 교회가 지상으로 올라와서 제국의 메이저급 종교가 되어가면서 교회는 여러 가지 문제로 내홍을 겪습니다. 주된 이슈는 바로 예수의 신성과 관련되어진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당연한 듯 자연스럽게 믿고 있는 ‘삼위일체’(Trinity)라든가, ‘성육신’(Incarnation) 같은 중요한 신학적 개념들도 그 당시에는 가장 뜨거운 감자였고 수많은 논쟁을 일으키는 이슈였습니다. 물론 지금까지도 이 논쟁은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이것 때문에 327년에 1차 공의회가 니케아(Nicea, 현재 이즈닉)라는 곳에서 열려서 ‘하나님과 아들 예수는 동일 본질’이라는 교리가 확정 되었고, 381년에는 2차 공의회가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 현재 이스탄불)에서 개최되어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성령은 한 분’이라는 삼위일체 교리가 확정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의 신성에 관한 논의의 연장선상에 있는 ‘마리아는 누구인가?’에 대한 주제를 놓고 3차 공의회가 431년에 에베소에 있는 마리아 기념교회에서 개최된 것입니다.


당시는 성모에 대한 신심이 고조되던 때라 교우들이 마리아를 ‘하나님을 낳으신 분’이라고 부르곤 했는데, 사실 이 존칭은 그리스 교부들이 자주 사용해 오던 관용어였습니다. 네스토리우스는 ‘그리스도를 낳으신 분’이란 뜻의 ‘크리스토토코스’(Christotokos)라고 부르라고 했습니다. 그의 논리인즉, 예수는 신격과 인격을 갖춘 분인데, 성모는 인간 예수를 낳으신 예수의 어머니지 결코 신(神) 예수의 어머니는 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키릴은 예수의 신성과 인성은 한 위격으로 합치되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데오도시우스 2세 황제가 안디옥 학파의 대표자인 콘스탄티노플 대주교 네스토리우스와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알렉산드리아 총 대주교 키릴 간의 그리스도론 논쟁을 종식시키려고 431년 6월 7일 성모 마리아 기념교회에서 공의회를 열어 네스토리우스를 출교시키고 마리아에게 ‘하나님을 낳은 어머니’라는 뜻의 ‘테오토코스’(Theotokos)라는 존칭을 드리기로 결의했습니다. 출교된 네스토리우스는 이집트로 유배되었는데, 436년 사막에서 쓸쓸하게 그의 생을 마감했습니다.

 

‘하나님과 아들 예수는 동일 본질이다’라는 명제에서 끝냈어야 했는데, 사고의 지평을 의미 없는 마리아에게까지 넓힌 것이었습니다. 마리아가 신성의 원천이 되었다는 해석에서 마리아가 예배의 대상이 되었고 마리아 숭배사상이 출발한 것이었습니다. 3차 에베소 공의회를 통하여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로 숭배할 것을 결의했던 것입니다.


에베소 공의회의 결의가 <테오도시우스 법전>에 수록되어 로마 국법이 되었으며, 지금까지도 로마 가톨릭에서는 마리아를 단순한 예수의 어머니가 아닌, 그 이상의 신적 능력을 소유한 분으로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입니다.


공식적으로는 알렉산드리아의 주교였던 키릴이 정치적인 수완이 네스토리우스 보다 뛰어났는데, 그 능력을 가지고 황제 및 다른 주교들을 이용하여 자신의 주장을 여러 사람들 앞에서 관철시키고 자신의 주장에 대해 반박하던 네스토리우스를 출교시키는 일을 저지른 것입니다.

    
그런데 겉으로 드러난 것만이 전부일까요? 필자는 전부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위에 상기했듯이 에베소를 비롯한 에게해 연간 도시들은 전통적으로 여신을 숭배하던 지역이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가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되어 사람들이 기독교라는 종교를 믿고 교회를 다니고 있었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 마음 속에는 여신에 대한 마음이 항상 남아 있었는데, 이 부분은 기독교가 채워주지 못하는 부분들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의 마음에는 이 점이 불만으로 남아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갑자기 알렉산드리아 주교인 키릴이 여신을 사모하는 많은 사람들의 염원을 들어주기 위해서, 혹은 본인의 제국 교회에서의 정치적인 입지를 위해, 아니면 더욱더 많은 사람들을 기독교 포교의 대상으로 삼고 그들을 포교할 목적으로 마리아를 전면에 내세워 마리아의 신성에 관한 것을 이슈로 부각시켜서 이 안건을 에베소 공의회로 가져가고 공의회에서 공식적으로 마리아 숭배 교리를 통과시킨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에베소 지역에 아마존 여인족이 처음 터를 잡은 후로 전통적으로 여신인 키벨레를 섬겨왔고, 그리스 이오니아인들이 점령한 후에는 키벨레에서 그들이 섬겨오던 아데미로, 기독교가 제국의 공식 종교로 공인된 후에는 아데미에서 마리아로 여신의 계보가 이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3차 공의회가 열렸던 장소도 여신에 대한 감성이 가장 큰 에베소였고, 에베소 중에서도 마리아 기념교회를 공의회 장소로 잡은 것도 어떤 의도가 배후에 짙게 깔려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됩니다.


어쨌거나 이유와 목적이 무엇이든 간에 분명한 것은 예수님의 어머니인 마리아는 3차 공의회를 통하여서 로마 제국 내에서 공식적으로 ‘인간 예수의 어머니’를 넘어서, ‘하나님을 낳은 하나님의 어머니’로서 지위가 수직 상승되어 본인의 의중과는 상관없이 그때로부터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의 숭배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또한 개신교와 가톨릭이 하나가 될 수 없는 분명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요즘같이 교회적으로 어수선하고 혼란스러울 때 일수록 우리는 하나님 말씀으로 돌아가야 할 것 같습니다. 항상 이단과 사이비는 말씀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자기에게 유리한대로 적용시키는데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바로 알고 바로 믿어서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는 신앙생활만이 우리 자신과 가정, 사랑하는 사람들을 이단과 사이비 집단에서 지키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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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단의 이해] 꾸란에서 이싸는 알라의 아들이 아니다

 

 

이슬람에는 계시(revelation of God)가 있는가?

 


일부 무슬림들은 성경의 하나님과 이슬람의 알라가 같다고 한다.

성경의 하나님과 꾸란(코란)의 알라가 같으냐 다르냐라고 물으면 우리는 <예> 아니면 <아니오>라고 답해야 한다는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다. 그러나 우리는 이슬람의 알라가 기독교의 하나님과 같다고 말하려는 함정에 빠져서는 안 된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하여 우리는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계시라는 세 가지 범주에서 살펴보려고 한다.

만일 꾸란을 아랍어로 읽어본다면 꾸란의 내용이 기독교의 하나님을 알라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을 암시하는 꾸란 구절들을 만나게 된다.

이슬람의 알라는 구름으로 가려진 태양을 보는 것과 같고

성경의 하나님은 맑은 하늘에 선명하게 볼 수 있는 태양과 같다.

무함마드가 사람들의 질문과 자신의 요청 사항을 알라에게 고하면 알라가 그 답을 주었다고 무함마드가 말한 것을 적어 놓은 책이 꾸란(코란)이다.

꾸란에는 무슬림들이 직접 알라를 만나 계시를 받았다는 내용이 없다.

성경은 사무엘 3장에서 하나님이 사무엘에게 직접 자신이 나타난다.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하신 것이다.

그러나 꾸란은 알라가 무함마드에게 명한 내용이 있을 뿐 직접 나타나신 것은 아니다.

 

성경의 구약에서는 하나님에 의하여 눈과 귀가 열리고 신약에서는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사람들에게 나타나시었다.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저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딤후 1:10)".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나타나신다(디도 2:11;3:4).

그러나 꾸란은 알라 자신이 나타나 무슬림들이 알라를 직접 보았다는 말은 없다.

꾸란은 알라의 뜻이 책이 된 것이라서 하나님이 육신을 입으시고 우리에게 나타나신 성육신은 찾아볼 수 없다.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성경의 사도들은 그들의 손으로 예수님을 만져보고 직접 보고 들은 것을 사람들에게 선포하였다.

그러나 꾸란의 구절을 지브릴 천사가 무함마드에게 하나 하나 알려주었을 때 무함마드는 오직 타자기 역할만 했다고 무슬림들은 전한다.

자신의 생각과 인격이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을 입증하려고 무슬림들은 무함마드가 문맹이었다는 것을 강조한다.

다시 말하면 알라가 지브릴 천사를 통하여 무함마드에게 전해주었을 때

무함마드가 듣고 그가 들은 말을 당시 메카 사람들에게 전해 주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의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보았다.

사도들이 본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이시다.

말씀(예수 그리스도)이 육신이 되셨다(요 1:14).

그러나 꾸란에서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말은 없다.

공관 복음에서 예수는 이방을 비추는 빛(눅2:32)이라고 하여 예수가 신적 계시의 소지자bearer인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두 번째는 요한 12:38에서 예수가 신적 계시의 중개자mediator라고 하여 공관복음에서 보다 더 설득력있게 설명한다. 아버지를 알게끔 해 주시는 분이 독생자 예수이시고(요한 1:18) 그가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요 3:32)을 우리에게 알려주셨다.

 

꾸란에서 이싸는 단지 예언자에 불과하고 인간이며 알라의 아들이 아니다.

세 번째, 계시의 중심 내용은 그리스도 자신Christ himself이다.

예수의 제자들은 그들에게 계시된 것과 예수님이 그들에게 말한 것을 공개적으로 선포하였다.

그러나 꾸란은 <계시되었다>는 말을 사용하지 않고 알라가 <내려보냈다>라는 말을 사용하여 성경의 계시 개념과 달리 하였다.

이슬람관련 책들을 보면 꾸란의 와히가 간혹 <계시>라는 말로 번역되어 있는데

와히는 비밀을 전한다는 말은 있지만 성경의 계시와는 전혀 다르다.

꾸란에서 와히는 책이나 메시지 혹은 알라의 말 혹은 알라의 메시지를 휴대하고 온 천사를 가리킨다.

와히는 말이나 메시지를 통하여 내려준 것이고

알라가 와히를 통하여 무함마드에게 내려준 책이 꾸란(알라의 말씀)이다.

이런 와히의 정의는 성경이 말하는 계시의 내용과 다르다.

무슬림들은 이슬람의 알라를 영Spirit라고 하지 않기 때문에 성경의 하나님과 다르다는 것도 잊어서는 안 된다.

꾸란의 알라는 성경의 계시,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이란 개념에서 고찰해 볼 때 성경의 하나님이 아니다.

꾸란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다.
출처 : 공주일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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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리뷰. 유대교·기독교·이슬람교 갈등과 반목의 역사

 

세 종교 이야기. 홍익희.

 

오늘날 지구상에는 종교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온갖 비극적 상황에 많은 사람이 고통에 빠져 있었다. ‘하느님이라는 동일한 신을 믿는 형제 종교이자 세계적인 거대 종교의 대표 격인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가 내세우는 사랑, 자비, 복음, 구원과 달리 현실은 갈등과 반목으로 점철되어 있다.

 

책은 세 종교의 시작을 연 인물인 아브라함의 뿌리가 되는 고대 수메르 문명부터 기독교를 국교로 제정한 로마제국, 기독교와 이슬람교 간에 치러진 십자군전쟁과 일방적인 유대교 박해가 행해진 중세 암흑기를 거쳐 홀로코스트와 팔레스타인 분쟁까지 전 방위적으로 세계사를 다룬다.

세 종교의 가장 큰 차이점은 바로 예수에 대한 관점의 차이다. 유대교와 이슬람교는 예수를 신의 아들로 보지 않고 선지자 중의 한 사람으로 보고, 기독교는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로 인정한다. 이 차이로 각 종교가 그동안 반목했던 것이다. 즉 로마제국이 기독교를 국교화하면서 유대교에 덮어씌운 죄, 즉 예수를 인정하지 않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했다는 죄는 로마제국에 이어 십자군 원정으로 이어지며 중세와 근대의 유럽 지역에서 유대인에게 행해진 박해를 초래한 가장 큰 원인이었다.

 

선민사상이 강한 배타적인 유대교의 특성상 예수의 보편성을 띤 교리들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고, 무함마드가 창시한 이슬람교 역시 유대교에서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것이다. 기독교와 이슬람교 세력이 점차 강성해지고 세계사의 주역이 되었지만 유대인들은 박해를 피해 이곳저곳을 떠돌았을 뿐이다. 이들에게 공동체 내의 활발한 정보교환은 필수였고 유대인들은 이를 상업에 활용, 부의 축적을 이루어낸다. 책은 객관적인 태도를 유지하며 세 종교의 방대한 역사를 간명하게 설명하려 노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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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결혼·인터넷 채팅이슬람, 한국여성 집중 포교

 

FIM국제선교회 크리스천을 위한 이슬람 세미나

 

유영대 기자 국민일보

 

"30대 여성 A씨는 파키스탄에서 온 무슬림 남성과 2004년 결혼했다. 남편은 결혼 전에 자신의 종교에 대해 말하지 않았지만 결혼 후 이슬람 경전인 꾸란(코란)을 읽도록 강요했다. 꾸란을 공부하지 않는다며 언어·신체적 폭력을 휘둘렀고 한국국적을 취득한 뒤 이혼하겠다고 했다. 10B양은 중학생 때이던 2010년 여름 인도네시아 무슬림을 인터넷 채팅으로 만나 신앙고백을 하고 무슬림이 됐다. 20대 중반의 여성 C씨도 인터넷 이슬람카페 회원들에게 궁금한 것을 묻다가 무슬림이 됐고 2011년 회원 3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신앙고백을 했다."(소윤정 아세아연합신학대 선교대학원 교수)

 

이슬람이 한국여성들을 집중적으로 포교하는 등 한국인에 대한 포교를 강화하고 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FIM국제선교회는 28일 서울 서초구 나루터로 신반포중앙교회에서 크리스천을 위한 이슬람 세미나를 갖고 이슬람의 한국 내 포교 현황과 한국교회의 대처방안 등에 대해 논의했다.

FIM국제선교회 유해석 대표는 영국의 이슬람화 과정이 한국에 주는 교훈을 제목으로 한 강의에서 한국의 이슬람 인구는 10년 안에 100만명에 육박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법무부 출입국외국인정책본부에 따르면 지난해 12월 현재 OIC(이슬람이 국교이거나 주요 종교인 국가의 연합체) 57개국 출신자 128698명이 국내에 체류하고 있다. 불법 체류자 23653명을 포함하면 전체 체류인원은 15만명이 넘는다. 또 한국이슬람교중앙회에 따르면 한국인 무슬림은 19703700명에서 8022000, 200535000, 20097만명으로 급증했다. 이를 종합하면 현재 국내의 내·외국인 무슬림 수는 최소 23만명에 달하며 현재 추세대로면 100만명 돌파도 멀지 않았다는 게 유 대표의 관측이다.

 

소윤정 아세아연합신학대 선교대학원 교수는 이슬람과 한국여성이라는 제목의 강의에서 무슬림 외국인과 결혼한 한국여성은 지난해 12월 현재 1638이라며 이 중 45.8%(750)의 한국여성은 파키스탄 무슬림과 결혼한 것으로 집계됐다고 밝혔다. 소 교수는 이슬람이 특히 인터넷과 방송 등을 통해 한국 여성들을 집중 포교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무슬림들은 이들 매체를 통해 이슬람을 믿는 것은 행복하게 살기 위한 길이고 기독교의 하나님과 이슬람의 하나님은 같은 존재라고 주장한다면서 교회는 헌금을 요구하지만 우리는 돈을 달라는 것도 아니고 단지 봉사하는 것이라며 기독교를 의식한 발언을 통해 이슬람을 홍보한다고 소개했다. 이어 일부다처제는 구약성경에서 나온 것이고 남편이 이혼하지 않도록 부인을 4명까지 두게 함으로써 여성을 철저히 보호한다는 교리도 적극 옹호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유 대표도 꾸란에 따르면 무슬림 여성은 반드시 무슬림 남성과 결혼해야 하며 무슬림 여성의 90% 이상은 같은 민족과 결혼한다면서 반면 무슬림 남성은 무슬림 유대인 기독교인 등 어떤 종교의 여성과도 결혼할 수 있으며 이슬람법에 따라 자녀를 낳으면 아버지의 종교를 따르게 한다고 밝혔다. 이로 인해 세대가 갈수록 이슬람 인구는 늘어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소 교수는 무슬림과 결혼한 여성은 이슬람교의 교세확장을 위한 도구가 된다이러한 결혼관의 차이를 모르고 결혼한 많은 한국여성들의 결혼생활이 파국으로 치닫는 것은 교육과 홍보의 부재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이날 강연자들은 한국교회가 이슬람의 포교에 적극 대처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소 교수는 무엇보다 무슬림 여성 전도와 한국 여성들의 복음화를 위해 이슬람에 관한 전문성을 갖춘 여성목회자 리더십을 세우고 무슬림 선교기관을 설립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유 대표는 "영국 등 기독교가 발전하고 융성했던 곳들이 이슬람화되고 있는 현실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해야 한다"면서 "한국교회는 교회에서 상처받은 사람들이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일이 없도록 건강성을 회복하고, 다문화 선교에 힘을 모으며, 신앙 전승률을 높여야 한다"고 제안했다. 김성봉 신반포중앙교회 목사는 "이슬람은 기독교의 구원 진리를 심각하게 왜곡하고 있기 때문에 당연히 경계의 대상"이라며 "그들이 미사여구를 동원해 접근할지라도 정체를 바로 알고 경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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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는 과연 하나님인가? 

 

이슬람에서 말하는 가장 큰 거짓말은 알라는 기독교의 하나님과 같다는 주장이다.

이를 증명하기 위해서 그들이 주장하는 홍보용 자료는 아래와 같다.

 

1) 알라는 아랍어로 하나님이라는 뜻이고 이것을 영어로는 God, 헬라어로는 데오스(Deos), 일본어로는 가미사마(Gamisama)라고 부르는 것이지 원래는 같은 신이라는 주장.

 

2) 성경의 다니엘(Daniel), 사무엘(Samuel) 등에서처럼 중동에서 보편적으로 인정하는 엘(el) 혹은 엘라(ella) 라는 최고의 신이 있었는데, 이것이 아랍어 정관사 알(al)을 붙여서 알-일라(al-ella)가 변해 알라(Allah)가 된 것이라는 주장.

 

3)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이삭을 통해서 전수 받은 것이 기독교 유대교이고, 이스마엘을 통해서 받은 것이 이슬람이다.

결국은 같은 신이라는 주장.

 

4) 아랍인들이 다 무슬림은 아니다. 아랍어를 사용하는 기독교인들이 사용하는 성경에 보면 하나님을 알라(Allah)라고 번역하고 있으므로 같은 신이라는 주장.

 

이슬람의 알라는 적그리스도의 영이다.

 

그러나 위의 주장들은 다 홍보용 거짓 주장이다. 같은 이름을 사용하더라도 동명이신(同名異神)일 뿐이다. 이슬람의 알라는 여호와 하나님과는 전혀 다른 적그리스도의 영이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근거는 아래와 같다.

 

1) 알라는 삼위일체를 부인하는 영이다. (코란 573)

2) 알라는 예수의 신성을 부인하는 영이다. (코란 572)

3) 알라는 예수의 십자가를 부인하는 영이다. (코란 4157)

4) 알라는 예수의 부활을 부인하는 영이다. (죽지 않고 승천했다고 함. 코란 4158)

5) 알라는 유대교와 기독교를 적으로 여기는 영이다. (코란 551)

6) 알라는 일부다처를 허용하는 영이다. (코란 43)

7) 알라는 이혼을 두 번까지 허용하는 영이다. (코란 2229)

8) 알라는 배신자를 위해 70번 용서를 구해도 용서하지 말라는 영이다. (코란 980)

 

이 정도만 확인을 해봐도 알라가 우리 하나님과는 전혀 다른 영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다.

 

메카에서의 평화로운 계시들

 

이슬람의 알라(Allah)가 기독교의 하나님과 같은 신이라고 주장하는 말은 무함마드가 초기에 아직 정치적인 권력이나 군사적인 힘이 없을 때 기독교와 유대인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 메카에서 계시를 받았다면서 한 말이다.

코란 262절에 보면 진실로 믿음을 가진 사람들과 유대교도, 기독교도, 사이바교도 누구든지 알라와 최후의 심판 날을 믿고 좋은 일을 행하는 자들은 그들의 주로부터 보상을 받을 것이며 두려움도 없고 슬픔도 없을 것이다는 말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코란 2136절에 보면 아래와 같은 구절이 이 있다.

 

말하라. 우리는 알라를 믿고 우리에게 계시된 것과 아브라함과 이스마엘 및 야곱과 그 종족들에게 준 계시를, 모세와 예수에게 준 것을, 모든 예언자들에게 주로부터 주어진 것을 믿는다. 우리는 그들 사이에서 아무도 구별치 않았다. 우리는 알라에 귀의한다고

 

너희는 우리의 신이요 너희의 신인 알라에 관해 논쟁을 하느뇨” (코란 2139절 최영길 역)

 

이 말은 기독교도와 유대교도를 인정하겠다는 말이며, 또한 그들이 믿는 하나님과 알라가 같은 신이라는 것을 주장하고 있다. 또한 무함마드는 신 구약 성경이 진리임을 확증시켜 주기 위해서 자기가 왔다고 주장했다. (코란 1037, 코란 469~12, 코란 33)

 

또한 경전의 백성들이라고 하면서 기독교인들과 유대교인들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주기 위해서 계시를 빙자해 평화로운 메시지를 선포했다.

메디나로 넘어온 무함마드의 계시는 달라졌다. 그러나 무함마드가 아라비아의 제2도시인 메디나의 통치자가 된 후로는 강력한 힘이 생겼으므로 부드럽던 태도가 완전히 바뀌었다.

코란 2120절에 보면 유대교도나 기독교도는 당신이 그들의 종교를 추종하지 않는 한 만족치 않을 것이다. 말하라. 알라의 인도만이 진실한 인도이다라고 한다.

이 구절은 유대교나 기독교인들이 알라의 인도를 받고 있지 않은 것으로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러니까 알라는 기독교인들이 믿는 하나님과 다른 신이라는 것을 코란이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코란 551절에 보면 이런 말이 기록되어 있다.

 

믿는 사람들아, 유대교도나 그리스도교도를 벗으로 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t로 서로가 벗이다. 너희들 속에 그들을 벗으로 하는 자가 있으면, 이 자도 그들과 한 통속이다. 알라께서는 무지막지한 백성을 인도하지 않으신다

 

여기서는 유대교도나 기독교도들을 무지막지한 자들로 몰아붙이고 있다. 목숨을 걸고 신앙을 지키는 초대교회의 성도들과 유대인들처럼 철저하게 하나님 앞에 충성하는 사람들을 무지막지한 백성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그들이 섬기는 신이 자기들이 섬기는 알라(Allah)와 다르기 때문이라는 이유 외에 어떤 설명을 붙일 수 있을까? 그 당시의 기독교인들과 유대교인들은 알라가 자신들이 섬기는 하나님과 다른 신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고 무함마드를 배척했기 때문에 무함마드는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는 그들을 가만히 둘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미 살펴본 대로 이슬람의 이름으로 유대교인들을 수없이 죽였다. 625년에는 유대인들 중 네이디르(Neydir)족에 보복을 가했으며, 627년에는 유대인 꾸라이저(Qurayzah)족을 수 백명 학살하고 부근에 케이바르(Kaybar) 마을로 도망간 유대인들을 추격해 전멸했다. (끝나지 않은 2000년의 전쟁, 마크A 가브리엘 지음, 김명신 옮김, 퉁크, p143)

 

지하드는 방어 전쟁이 아니다.

 

이슬람은 평화의 종교이며 무함마드 당시에 무력을 사용한 것은 생존을 위한 방어 전쟁이었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이슬람 태동 이후 확장의 과정에서 이집트의 콥틱 기독교인들을 얼마나 잔인하게 학살했던가?

이집트인들은 이슬람을 위협한 일이 없으며 그들을 공격할 의도도 없었을 뿐 아니라 무슬림들의 정체도 잘 몰랐다.

그들은 당시 국민의 대다수가 기독교인이었던 이집트를 점령하자 마자 그들의 언어인 콥틱어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고

아랍어를 사용하도록 강요하며 콥틱어를 사용하는 자는 혀를 베어 죽였다.

그들이 이집트를 점령한지 100년 동안 400~600만의 이집트인들을 죽였다.

더구나 알렉산드리아에서는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의 도서관이 있었는데,

이슬람 이것들을 불살라 버렸다. 이것을 방어 전쟁이라고 한다면

그들은 스스로 속고 있는 것이다.

이슬람이 이란과 터키를 점령했을 때의 피로 점철된 역사를 조금만 노력하면 확인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무슬림들이 기독교인들을 미워하는 것은 십자군 전쟁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11세기 말에 발생한 십자군 전쟁 때문에 7세기부터 무함마드가 기독교인들을 미워했다는 것이 정당한 주장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가? 

 

맺는 말 

무슬림들이 말하는 알라라는 신은 없는 것이다.

어떻게 전혀 다른 속성의 두 개의 창조주가 존재할 수 있겠는가?

이는 다만 무함마드가 자기의 종족신을 합리화시키기 위해 기독교와 유대교의 하나님을 빌려다 사용한 것이다.

많은 학자들이 이슬람의 알라가 달 신(Moon god)이라는 것에 동의한다.

이것은 본인이 하는 말이 아니라 이집트 출신이며 12세 때 이미 코란을 전부 암송했으며,

이슬람의 하바드 대학이라고 하는 10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알 아자르 이슬람 신학대학에서

이슬람 역사와 문화 분야의 박사학위(Ph. D.)를 하고 교수로 봉직하다가 후에

개종해 미국의 플로리다 주에 가서 공부해 기독교 교육학 박사(Ph. D.)를 취득한 마크 가브리엘 박사의 말이다.

(Mark Gabriel, Isalm & Jews, 2003, Front Line A Strang Company, p85)

 

우리는 무슬림들을 미워해야 할 이유가 없다.

그들은 잘못 배웠기 때문에 흉악한 범죄를 하면서도 죄의식을 느끼지 못한다.

그것은 그들의 책임을 추궁하면서 응징하기 보다는 용서하면서 위해서 기도하며

그들이 실질적으로 느낄 수 있는 사랑을 베풀어 주어야 한다.

 

그들도 사랑 받고 싶은 사람들이다.

그들도 우리와 같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하나님의 피조물이며, 우리의 사랑의 대상들이다.

 

이슬람권에 대해서 조금 아는 사람들은 무슬림을

마치 세계 복음화의 장애물로서 반드시 없애버려야 할 거침돌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시각이다.

그들 중 대부분은 이슬람이라는 문화권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그것이 선인지 악인지 분별을 못하는 상태에서

무조건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던 순진한 피해자들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민족과 혈통과 피부색을 초월할 뿐 아니라

타종교를 믿는 사람들까지도 품을 수 있는 사랑을 동반할 때

위대한 구원과 행복의 역사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슬람의 종교와 그들의 잘못된 교리를 품자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종교로 인해 악한 영에게 속아 알라가 참 하나님인 것으로 오해하고 있기에

구원의 길에서 원천적으로 봉쇄당하고 있는 영적 피해자인 무슬림들을

사랑과 기도로 품어줘야 한다는 말이다.

출처:   (이만석) / 이슬람 측의 홍보용 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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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이 성장하게 된 원인

유해석 선교사(FIM선교회 대표)

제가 1990년 처음 영국에 공부하러 왔을 때, 영국 무슬림 인구는 110만 명이었습니다. 2001년 인구조사에서 종교를 쓰도록 했는데 무슬림 인구는 150만 명이었습니다. 그런데 2011년에 280만 명으로 늘었습니다. 10년 사이에 이슬람 인구는 130만 명이 늘었습니다. 인구조사에 응한 사람들은 합법적인 시민들입니다. 불법체류자를 포함하면 약 5백만 명으로 추산됩니다.

이슬람이 성장하게 된 원인은

첫째, 이민입니다.

2000년에 들어서서 평균 매년 10만 명 이상이 이민왔습니다. 이민자 가운데 무슬림 인구 비율이 높았습니다.

둘째, 다산입니다.

영국에서 무슬림은 평균 6-7명의 자녀를 낳습니다. 무함마드가 마지막 설교에서 “자녀를 많이 낳아 이슬람을 번성케 하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셋째, 결혼입니다.

쿠란에 의하면 무슬림 여성은 무슬림 남성과 결혼해야 하지만, 무슬림 남성은 유대인·기독교인·무슬림 여성과 결혼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녀를 낳으면 이슬람법에 의하여 아버지의 종교를 따릅니다.

넷째, 개종입니다.

유럽과 미국에서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사람들의 80% 이상이 기독교인이었던 사람들입니다. 테러가 증가한다는 것은 이슬람 인구가 늘어가면서 생기는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이슬람의 세계관에 의하면 평화의 집(Dar al-Salam)과 전쟁의 집(Dar al-Harb)이 있는데, 이슬람을 믿는 사람은 평화의 집에 살고 믿지 않는 사람은 전쟁의 집에 살기 때문에 전쟁의 대상이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슬람 인구가 늘어나는 곳마다 테러가 일어납니다.

저는 지난 3월 18일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 ‘한국 주요 이단 및 이슬람 대책 세미나’에서 논문 발표를 했습니다. 이 자리에서 저는 앞으로 10년 안에 한국 무슬림 인구는 약 100만 명에 육박할 것이라고 발표했습니다.

10년 전에(2003년) “우리 곁에 다가온 이슬람”이라는 책을 처음 출판했습니다. 그 서문에 “우리 주변 사람들이 이슬람으로 개종했다는 이야기를 듣기 전에 이슬람에 대하여 알아야 한다”고 썼습니다. 더블어 앞으로 10년 안에 한국 무슬림 인구는 약 20만 명이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10년이 지난 2013년 말 통계에 의하면, 한국에 거주하는 이슬람 인구는 약 23만 명입니다. 영국에 2000년대에 매년 약 10만 명의 이민자가 들어왔는데 이슬람이 이렇게 급증했습니다.

한국은 지금 저출산과 고령화로 인하여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전체 인구의 약 14%(643만 명)를 수입해야 한다는 예측으로 인하여, 매년 약 30만 명의 이민자가 들어오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한국의 이슬람화는 가속화될 가능성이 큽니다.

이제는 기독교인들이 이슬람에 대하여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슬람은 기독교 이단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저의 생각이 아니라 마틴 루터, 츠빙글리, 그리고 존 칼빈 등 종교개혁자들의 견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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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관광공사 / 할랄관광업소에서 / 무슬림예배실 마크 ?

 

한국의 무슬림 그리고 이슬람교


하나님은 우리와 무슬림을 모두 사랑하신다.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 생명의 원천이신 하나님을 믿고 사는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지만 아직도 무슬림에게 예수는 예언자요 선생일 뿐이다.

지금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이슬람이 확장되고 있다. 아시아의 2/3가 무슬림이다. 그곳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 the poorest unreached people들이 사는 곳(극빈국은 10/40에 82%가 있다)이다. 10/40에서 이슬람의 인구가 1위를 그 다음이 힌두교이어서 아시아 전체가 복음화의 대상 지역이다.

이슬람의 인구는 산아제한이 없어서 연 5천만명이 늘고 있다. 오스만 제국의 전성기때 이슬람 문명의 핵심국이 되었다. 그후로 오늘날까지 이슬람 세계에는 핵심국이 없지만 이슬람은 부흥의 기회를 얻었다. 이슬람의 부흥은 서구화에 대한 반작용이지 근대화에 대한 반작용은 아니다. 지금은 이슬람의 부흥이 이슬람 사회의 중심에 놓인 주제다. 그러나 이슬람의 부흥운동도 어느 시점에 가서는 역사의 뒤안으로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인구증가도 21세기의 20년대와 30년대 사이에는 한풀 꺾이기 때문이다.

지난해 한국에 입국한 아시아 사람 수는 200만명이 넘고 있다. 한국의 이슬람은 5개의 모스크와 2개의 문화 센터를 두고 약 4만명의 신도들이 현재 포교활동을 하고 있는데 그 지도자들의 대부분이 원리주의 색채를 가진 학자, 중산층, 지식인으로서 국내대학을 중심으로 중동 이슬람권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20여명의 박사들이 활동하고 있다. 이것은 지금 중동의 원리주의자들이 모두 젊은 청년, 대학 졸업, 전문인 의사, 박사 등이 주류를 이루는 것과 그 궤를 같이 한다. 그들의 대외 활동에는 1989년 서울 지역 중고교 역사 담당 교사들을 초청하여 이슬람 역사 바로 잡기라는 모임을 가졌고 1987년부터 1989년까지 대우재단 지원 ‘이슬람 세계의 이해’라는 이슬람 연속 강좌를 열었다. 1989년에는 대우 재단 빌딩에서 이슬람학을 선보인다는 명목으로 많은 학자들을 모여 한국 이슬람학회 총회를 가졌고 그 뒤 꾸란 번역을 실시하고 이슬람에 대한 책을 윤독하였다. 현재는 중동 각국 역사의 연구와 이슬람 종파 연구를 하고 있다.

한국 이슬람 중앙회측은 1990년대에는 <선교>라는 용어를 도입하여 <이슬람 선교>라는 말을 대외 홍보 책자에 사용하여 우리 기독교인들이 보기에 이 책자가 기독교인의 책인지 이슬람교의 책인지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이슬람 세미나 “이슬람과 한국 그리고 세계”(1994), “이슬람과 평화”(1995), “이슬람과 다른 이념”(1996), “동아시아의 이슬람-역사와 문화적 조화(1997)”라는 제목으로 이슬람 세계의 여러 학자들을 초청하였는데 세계 이슬람 연맹과 한국 학술진흥재단이 후원하고 주한 사우디아라비아 왕국 대사관과 대우와 한국 아랍 친선협회가 협찬하였다. 이런 활동은 곧 이슬람이 <배움>을 통해 포교의 기치를 내결었던 이슬람의 역사와 맥을 같이 하고 있다. 무슬림은 <믿으라>하지 않고 <배우라>고 말한다. 거기에다가 사무엘 헌팅턴의 이론을 빌려 앞으로 21세기에는 이슬람이 새로운 역할을 다방면에서 갖고 그 중심축이 유고 문화권과 이슬람이 만나는 아시아라고 강조한다.

금년 한국 이슬람 중앙 연합회는 한국 이슬람 문화 연구소를 개원하고 수석 연구원 1명, 책임 연구원 3명이 이슬람에 대한 종합소개서를 발간할 계획을 세워놓고 있다. 연합회측은 이슬람 대학 대학원을 설립할 계획을 세우고 한국에서의 이슬람 선교 방안을 제시한다.

이상의 한국 이슬람교 중앙회의 활동을 살펴보면서 무슬림에 대한 선교 방안과 대책을 생각해보자.

첫째, 이슬람 연구는 단지 이슬람 위주의 연구에서 떠나야 하겠다.

한국의 무슬림은 단지 강의 초청에는 응해 줄 수 있으나 이것이 진정한 화해와 공존의 장이라고 보기에는 미약하다. 더구나 한국인 중에 이슬람을 전공한 기독교인 학자는 극소수다. 이슬람 연구는 앞에서 보았듯이 한국 이슬람교 중앙회 측과 한국 이슬람 학회에서 활발히 연구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슬람측이 연구해 놓은 자료를 재검토하고 그리스도의 빛으로 바라볼 수 있는 성경적 안목과 이를 선교에 유의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가를 물어야 한다.

둘째, 한국 이슬람교 중앙회는 한국인들이 이슬람을 오해와 편견으로 바라보고 언론매체가 이를 오도하고 있으며 기독교인들이 이에 일조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한국의 무슬림은 아랍어로 된 꾸란을 정확히 번역하지 않거나 이슬람을 사실적으로 기술하지 않아 앞으로 기독교인 이슬람 학자들의 양성이 절실히 요구된다. 중고등학교에서 이슬람을 과목으로 가르칠 때에도 이슬람 학자들이 호교론적으로 이슬람을 전달할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이다.

현재 아세아 연합신학대학과 성결 대학교에서만 아랍어가 강의되고 있을 뿐 대부분 신학대학에서는 이슬람권 선교에 대한 강의가 충분히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 기독교인도 아랍어를 배워야 할 이유가 있다.

셋째, 아랍어가 2001년에 중학교에서 생활 아랍어로, 2002년부터는 고등학교에서 제2외국어로 개설될 계획으로 이미 교육부에서 발표한 바 있고 현재 교재 집필을 위한 준비를 하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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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의 한국을 향한 포교 전략!

 

요즘 이단들이 곳곳에서 소란을 피우곤 한다.

주님께서 말씀하신대로 마지막 시대에 나타나는 극단의 종말론적인 사상과 이단 등이 영적인 혼란을 야기한다.

이러한 현상을 보며 정말 깨어 있고 정신 차려야 한다는 사실을 실감 한다.

신천지를 비롯한 신옥주 추종세력 들은 마치 기독교 정신을 심하게 훼손시키고 있다.

그런 틈에 소리없이 등장하여 각 분야를 잠식시키려는 세력들이 있다.

바로 이슬람이다.

사람들은 별로 이슬람에 대해 잘 모를 뿐만 아니라.미래에 심각한 영향을 끼칠 것이란 생각을 전혀 하지 못하고 있다.

금 번 기독교 신문 편집부가 정리한 내용을 소개하려 한다.

 

기독교신문 이슬람의 한국을 향한 포교전략들편집부 | 2013.12.28 19:56

 

이슬람 인구가 세계 인구의 1/4에 육박하 고 17억 명에 달하는 무슬림들이 세계 도 처에 퍼져 살고 있기 때문에 온 세계가 매 일 무슬림들의 테러로 몸살을 앓고 있다. 이들이 어느새 한국에 들어와 세력을 형성 하여 한국을 이슬람화 하겠다고 공공연히 말하고 다닌다. 혹자는 무슬림들이 우리 중에 많아지면 우리가 중동으로 나가지 않 고도 이웃에서 선교할 수 있으니 얼마나 좋으냐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그러나 이 슬람의 경전인 꾸란에서는 이 세상의 모든 종교가 알라의 이름으로 통일될 때까지 계 속 싸우라(꾸란8:39)고 명하고 있으며, 비 무슬림을 친구로 삼는 자는 지옥에 갈 위 선자들이라고(꾸란4:237-145)한다. 이런 경전의 가르침을 진리로 믿고 따르는 사람 들이 어떻게 우리와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이제 정신 차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후손들에게 평화로운 미래를 물려줄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무슬림들이 한국을 이슬람 화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전략 은 무엇일까?

 

첫째는 거짓 홍보선전이다.

이슬람에는 타 끼야(Taqiyya)라는 교리가 있는데, 이는 이슬람에 유익이 된다면 무슨 거짓말이나 맹세를 해도 좋다는 것이다.(꾸란2:225, 꾸란16:106) 한국 최고의 이슬람 학자 라고 하는 학압두 박사는 전주MBC와의 인터뷰에서 이슬람에서는 이혼이 절대로 안 된다고 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혼은 두 번까지 허용되며(꾸란2:229), 이혼하는 법을 알려주는 이혼장(꾸란65)도 있다.

 

꾸란에 불신자들의 목을 치라는 구절(꾸란 8:12, 꾸란47:4)들 때문에 열심 있는 무슬 림들이 매일 테러를 저지르지만 소위 이슬 람학자라는 사람들은 '이슬람은 평화의 종 교'라며 타끼야 교리를 적용하여 손바닥으 로 하늘을 가리려 한다. 심지어는 이슬람 의 경전인 '꾸란'까지 혐오스러운 부분을 숨기고 타끼야를 적용해 미화시켜 한국어 로 번역 출판해 놓았다.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하는 KBS를 비롯해서 학생들만 보는 EBS교육방송 뿐 아니라 한국에서 최고의 시청률을 자랑하는 MBC, SBS등 공중파 방송들이 앞 다투어 이들의 거짓말을 대신 홍보해 주고 있고 순진한 국민들은 별 생 각 없이 속고 있다.

 

둘째 아랍어 공교육화 운동이다. 이슬람의 언어는 아랍어이다. 1972년 리비아 주재 이슬람 종교성에서 발표한 선교전략 중 두 번째 항에 보면 "아랍어를 공용어를 채택 하든지 아니면 아랍어를 각급학교에 필수 과목으로 가르치도록 하라"고 되어 있다. 그래서 한국의 무슬림들은 2005년부터 아 랍어를 대학 입학 수능시험과목으로 집어 넣는 전략에 성공했다. 한국의 중, 고등학 교에서 아랍어를 가르치는 학교가 하나도 없는데 어떻게 아랍어가 수능과목에 들어 가게 되었는가? 난이도가 쉬워 아랍어에 서만 백점짜리가 쏟아져 나오자 학생들은 쉽게 고득점을 얻기 위하여 8개 언어 중 아 랍어를 선택하는 학생들이 2013년 수능시 험 때는 45.8%까지 이르게 되었다.그러자 무슬림 교수들은 인기 좋은 아랍어를 공교 육에 포함시키자고 주장하고 있다. 그렇게 되면 고등학교마다 아랍어 교사를 채용해 야 하는데, 한꺼번에 수천 명의 아랍인 무슬림 선교사들을 교육부 재정으로 채용해 야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그들은 성적이라 는 칼자루를 잡고 학생들을 손쉽게 이슬람 으로 개종시킬 수 있게 될 것이고 그들이 사회에 진출하게 되면 대한민국의 이슬람 화는 순풍에 돛단배처럼 급진전 될 것이다 .

 

셋째 한국의 교육제도와 교과서를 통해서다.

이슬람권에서 장학금을 받아 박사학위 를 받아 온 한국인 무슬림들이 대학교수로 강단에 서서 젊은이들에게 미화된 이슬람 사상을 주입시킨다. 심지어 모 대학 아랍 어과에서는 수강생들 모두에게 아랍어로 꾸란을 암송하는 것을 테스트하는 동영상 도 유튜브에 올라와 있다. 또한 한국이슬 람교중앙회는 해마다 중, 고등학교 사회 및 역사 교사들을 초청하여 그들에게 미화 된 홍보용 이슬람을 소개하고 가르친다. 그들은 "듣고 보니 좋은 종교군요"라면서 학생들에게 이슬람에 호감을 갖도록 대신 홍보해 준다. 한손에 칼을! 한손에 꾸란을! 이라는 것은 사우디아라비아 국기에 새겨 넣을 정도로 이슬람의 핵심사상임에도 불 구하고 한국 무슬림들은 대한민국의 모든 교과서에서 이미 이런 혐오스런 표현을 삭 제하는데 성공했다.

 

넷째 결혼 출산전략을 통해서다.

이것은 느린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유럽에서 확 실히 성공했던 방법이다. 민주사회는 모든 것이 투표로 결정되기 때문에 일부다처에 낙태를 금하는 이슬람 율법 덕분에 압도적 인 출산율로 숫자가 급증하는 무슬림들이 투표로 국회의원 장관 대통령 등을 배출하 여 헌법을 이슬람 율법으로 대체하면 전쟁 도 하지 않고 이슬람국가가 된다. 특단의 조치가 없다면 우리가 죽기 전에 유럽에서 이슬람 국가의 탄생을 보게 될 것이다.무 슬림들이 한국여인들과 결혼하여 살다가 대한민국 국적을 얻으면 본국의 처자식을 초청하여 같이 사는 경우가 있다. 그 때 한 국 여인은 법적으로 이혼하고 동거하면서 본처를 호적에 등재하여 국적을 받게 한다 . 아내는 무슬림이기 때문에 알라께서 허 락하신 일부다처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 한국인 아내가 본처를 초청하여 동거하 는 것을 원치 않으면 이미 국적을 얻었기 때문에 미련 없이 이혼하고 본처를 데리고 와 같이 살아도 항의할 방법이 없다. 이 경 우 한국 아내는 국적을 얻기 위한 도구였 을 뿐이다.

 

다섯째 할랄 식품을 통해서다. 할랄(Halal) 이란 이슬람 율법인 샤리아에 의해 허락된 것을 말한다. 한국의 대기업들이 세계 17 억 무슬림들을 고객으로 삼을 수 있다는 꿈에 부풀어 너도나도 할랄 인준을 받으려 고 혈안이 되어 있다. 매스컴에서는 이것 이 공인된 웰빙 식품이라든지 위생과 관계 가 있다는 거짓 홍보로 국민을 속이며 이 런 분위기에 일조하고 있는데 사실은 이슬 람 율법인 샤리아를 지켰느냐의 문제이지 위생이나 건강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할 랄 식품은 짐승이 죽을 때 메카를 바라보 며 죽어야 하며 목을 칠 때 "비스밀라(알라 의 이름으로)"라고 말해야 하는 것이 핵심 이다.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그 '샤리아'라 는 기준은 지역마다 다를 뿐만 아니라 언 제든지 바뀔 수 있는 가변적이라는 것이다 . 더 중요한 것은 이슬람국가에서도 기독 교인들이 경영하는 음식점들이 있는데 음 식이 맛있다고 소문이 나면 무슬림들도 와 서 사먹는다는 점이다. 그러나 원리주의자 들만은 샤리아를 철저히 지키고자 한다. 그러므로 많은 돈을 투자하여 할랄 인증을 받으려는 것은 무슬림들도 제대로 지키지 않는 이슬람 율법을 우리는 철저히 지킬 것이니 우리 물건을 팔아달라고 원리주의 무슬림들에게 돈을 바치는 행위라고 본다.

 

여섯째 모스크 및 이슬람 학교 건립을 통 해서다.

이슬람의 모스크는 교회처럼 예배 만 드리는 곳이 아니다. 이슬람은 종교가 아니라 총체적인 삶의 시스템이기 때문에 이슬람의 창시자 무함마드는 모스크에서 자신을 비방하는 자들을 암살하라는 명령 을 내리기도 했고 이웃마을을 공격하라는 전쟁을 명하기도 했다. 그래서 지금도 무 슬림들이 테러를 저지를 때 무기를 보관하 는 장소로 쓰기도 하고 테러 계획을 세우 는 본부 역할도 하고 있다. 유럽에서 종종 이슬람의 자금으로 세워진 학교에서 가르 치는 교과서 내용 중에 지하드라는 이름으 로 테러를 정당화하거나 이교도들에 대한 증오를 가르치는 것이 발견되어 충격을 주 기도 한다.

 

일곱째 수쿠크(이슬람 채권)를 통해서다. 이슬람 채권(수구크)을 받아들이자는 것 은 넘쳐나는 오일 달러를 유치하여 외화 조달을 다변화하겠다는 그럴듯한 명분이 있기는 하지만 이는 사실 테러를 지원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진정한 무슬림은 생명 과 재산을 바쳐 지하드 하는 자들이라고 꾸란이 말하고 있다.(꾸란49:15) 생명을 바쳐 지하드하는 방법을 테러라고 한다면 재산을 바쳐 지하드 하는 방법이 이슬람 금융으로 유혹하는 수쿠크라고 보면 틀림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슬람 율법에 따 라 '이자를 받지 않는 대신에 세금을 면제 해 달라'는 것이 그 핵심인데, 현재 이슬람 권의 은행에서는 모두 이자를 주고받고 한 다.그러나 진짜 큰돈을 가진 원리주의자들 은 은행에서 율법이 금한 이자를 주기 때 문에 예금을 하지 않는다. 은행은 이들의 돈을 유치하기 위해서 이자를 주지 않는 특별계좌를 만들어 주었다. 그러므로 이자 를 안 받는다는 것은 스스로 '원리주의자' 임을 선언하는 행위이며 이들은 이자에 관 련된 율법만 지키고자 하는 사람들이 아니 라 도둑질하는 자들은 손을 자르고(꾸란5: 38) 간음한 자를 돌로 쳐 죽이고 이슬람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은 어디서든지 살해 하라(꾸란9:5) 등 모든 율법을 다 지키려 하는 위험한 자들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 그런 자들이 가지고 있는 재물을 탐하는 것은 국가에 재앙을 초래하는 일이라는 것 을 알아야 할 것이다.

 

여덟째 다문화정책을 통해서다. 다문화정 책이란 많은 문화가 섞여 살지 않으면 안 되는 21세기에 모든 문화가 서로 존중하 며 보호해 주고 평화롭게 공존한다는 정책 이다. 2001911일 미국 뉴욕에서 엄 청난 테러가 발생하여 수천 명이 살해되었 을 때, 유럽인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다문 화정책으로 무슬림들에게 법과 제도를 바 꿔가면서까지 최선의 복지를 제공했으니 까 유럽에서는 테러가 일어나지 않을 것이 라고 생각했으나 그것은 순진한 착각이었 다.20043월 스페인 마드리드의 3개 열 차 역에서 폭탄테러가 발생하여 200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20057월 영국 런던의 3개 지하철역에서 발생한 테러는 약250여 명의 사상자를 냈으며, 20051 1월 프랑스 파리에서 시작된 전국적 무슬 림 폭동으로 8973대의 차량이 불탔고 프 랑스 정부는 결국 3개월간 국가비상사태 를 선포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그래서 유 럽의 정상들은 다문화정책은 무슬림들 때 문에 불가능하다고 선포했다. 대한민국이 이슬람의 무서운 흉계를 모르고 다문화정 책을 계속 고집한다면 이슬람의 세력이 유 럽처럼 커졌을 때 서울 지하철에서 테러가 일어나지 않는다고 누가 보장할 수 있겠는가?

 

무슬림들은 우리 곁에 와 있는 이웃이 틀림없다. 그러나 이슬람은 타문화를 경멸 하기 때문에 힘이 없을 때는 위장하여 평화주의를 내세우지만 힘이 생기면 폭력과 테러를 통해서라도 정치적으로 점령하여 독립하고자 하는 독특한 문화를 가지고 있 다. 파키스탄과 방글라데시, 보스니아 등 은 대표적인 성공 사례이며 중국의 신장성 , 필리핀의 민다나오 지역, 태국의 남부 3 개 주, 나이지리아 북부 등 세계 도처에서 이 계획은 진행 중이다.한국의 무슬림 인 구는 2005년에 한국인을 포함하여 15만 명이라고 발표했는데 2009년 발표를 보니 20만 명이라고 한다.(한국일보 2009.8.12 .)

 

4년 사이에 5만 명이 늘어난 것이다. 이 슬람이 이렇게 빠른 속도로 세력을 늘려 나가는데 우리가 그 정체를 바로 알지 못 하고 미화된 그들의 홍보자료만 보면서 속 고 있으면 원치 않는 피해를 볼 수가 있다.

유럽처럼 이슬람화 되는 것을 안타까워하면서도 이미 만들어 놓은 법과 제도 때문 에 앉아서 당할 수밖에 없는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한국교회가 국가안보차원에서 이 일을 적극 홍보하여 그 위험성을 알려 지혜롭게 대처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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