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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장로교회 역사

 

1. 17세기 초부터 영국,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프랑스, 독일, 화란 등지로부터 미국으로 이민이 이루어진다. 이들은 처음에 각기 독자적인 교회를 설립한다.

 

2. 이 중에서 장로교회는 미국장로교회의 아버지라 불리는 프란시스 매케미에 의해 1706년 12월 26일에 뉴저지 주 프리홀드에서 최초의 필라델피아 노회가 조직되었고, 이후 지속적인 성장으로 다시 4개의 노회가 되었다가 1717년 9월 17일 3개 노회가 모여 최초의 대회를 조직하였다.

 

3. 이후 장로교회는 알미니안주의, 아리안주의, 소시니안주의와 같은 이단신앙으로부터 신앙의 동일성을 지키기 위하여 많은 논쟁 끝에 모든 목사들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대소교리문답에 서명해야 한다는 규칙을 채택한다(1729년 대회).

 

4. 이후 1730년대에 조지 휫필드와 조나단 에드워드를 중심으로 하는 대각성(부흥) 운동이 일어난다. 그러나 이 운동의 결과는 전혀 예기치 않게 장로교회의 분열의 빌미를 제공한다. 즉 부흥 운동을 지지하는 파(신파, new side, 예일대학과 로그대학출신)와 이를 반대하는 파(구파, old side, 하버드 대학출신)로 나뉘고 이 두 파는 결국 1745년에 분열한다. 이 명분 없는 분열이 아무런 유익이 없자 다시 1758년에 연합한다. 그리고 독립전쟁 후 1789년 5월 21일 최초의 미국 장로교회 총회가 조직된다.

 

5. 이후 서부개척과 그 지역의 선교 및 교회설립에 목회자 수급 문제로 인하여 장로교회 총회는 1801년에 회중교회 총회와 통합을 결행한다. 교회가 성장하던 중 여전히 목회자 수급에 문제가 있자, 컴벌런트 노회가 자격 없는 자들을 목사로 세우는 일로 켄터키 대회로부터 징계를 당하자 1810년 분리하여 컴벌런트 장로교회를 조직한다. 이 교회는 1906년 미국장로교회(PCUSA)와 합동한다. 컴벌런트 노회의 이탈 이후 장로교회 총회는 수준 높은 목사 양성을 위하여 1811년 뉴저지에 프린스톤 신학교를 설립한다(어번, 유니온, 웨스턴, 컬럼비아, 레인, 멕코믹, 유니온 신학교 설립).

 

6. 1801년 장로교회는 회중교회와의 통합으로 말미암아 내적 갈등을 갖게 되었는데, 구학파(old school)와 신학파(new school)가 그것이다. 신학파는 신앙고백서를 교리의 요지로만 이해하고, 회중교회적 정치를 추구하고, 구학파는 신앙고백서를 교리의 체계로 믿고, 장로교회정치를 주장하였다. 다수를 차지한 구학파는 1837년 총회에서 투표로 통합계획 통합계획, 첫째, 새 개척지에서 모든 선교사는 상호 협력한다. 둘째, 회중교회에서 장로교회 목사가 일하다가 문제가 발생할 경우, 그가 속한 장로교 노회에 보고하여 문제를 해결하도록 한다. 셋째, 장로교회가 회중교회 목사를 초청할 경우 장로교회 헌법을 따라서 하도록 한다. 그러나 그 목사와 교회 사이에 문제가 발생할 경우 그 목사가 속한 회중교회 연합회에 보고하도록 한다. 넷째, 상임위원회를 둔다. 회중교회는 모든 남자 회중에 보고하여 문제를 해결하고, 장로교회는 장로교회 헌법에 따라 치리하도록 한다(Amstrong 1956, 30-32, 오덕교 장로교회사, 198-199).

 

을 폐기하여 장로교회에서 회중교회의 요소를 제거하였다. 다음해 총회에서 구학파는 신학파를 총대로 받아들이지 않자 따로 총회를 조직하게 된다. 그래서 미국장로교회는 두 개의 장로교회로 분열한다(.

 

7. 1861년 노예해방문제로 인하여 남북전쟁이 발발하자, 노예제도폐지를 반대했던 남부지방에 있는 구학파에 속한 교회가 북부지방의 구학파 총회에서 분리되어 미국 남 장로교회를 조직한다. 또 남북전쟁이 끝난 후, 노예제도폐지를 찬성했던 북부지방에 있던 신학파와 구학파도 통합하여 미국 북 장로교회를 조직했다(1869년). 이 통합으로 인하여 북 장로교회는 오히려 신학파의 영향력이 증대되어 신학적, 교리적 포용주의가 강화되었다. 결국 1903년 북장로교회 총회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수정하고 첨가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예정과 관련된 장들(3, 10, 11장)을 위시하여 어러 장에 수정을 가하고, 34장(성령), 35장(하나님의 사랑과 선교에 관하여)을 첨가한다. 이 두 장의 내용은 제한적 구속과 효과적 부르심을 피해간다. 35장에서 모든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주장하고, 유아로 사망한 아이가 불신자의 자녀라도 구원을 얻게 된다고 선언하여 보편 속죄론을 지지한다. 또 작정 부분에서 예정교리를 삭제하였다.

 

이 수정으로 인하여 1906년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를 합성한 교리를 가진 컴벌런트 장로교회와 통합한다.

 

8. 이 신학파가 주장한 교리적 포용주의가 북 장로교회 안에 대세를 이루면서 유럽으로부터 건너 온 자유주의(현대주의) 신학을 받아들이게 되고, 100년 동안 신학적 전통을 지켜 오던 프린스톤 신학교가 자유화된다. 이때 메이첸을 중심으로 하는 몇몇 교수는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를 설립한다(1929). 또 메이첸은 해외 선교부가 자유주의와 되는 것을 막기 위한 노력이 허사로 돌아가자 독립선교부를 조직한다. 총회는 이 문제로 메이첸을 면직하자 그는 100여명의 목사들과 함께 미국 정통장로교회를 조직한다(1936년).

 

9. 정통장로교회에서 천년설에 대한 논쟁이 일어나, 무천년설을 주장하는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를 대항하여 전천년설을 주장하는 멕킨타이어를 중심으로 페이스 신학교를 설립하고 동시에 성경장로교회를 조직한다.

 

10. 한편, 남 장로교회는 1880-90년 사에 불어 온 진화론과 자유주의 사상에 굳건히 서서 북 장로교회처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수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1886년 죽은 배우자의 형제나 자매와의 결혼을 금한 부분을 삭제하였고, 1939년 로마천주교회를 사탄의 회중으로, 교황을 적그리스도로 표현한 것을 삭제하였고, 1942년에는 9장에 성령론을, 10장에 복음을 첨가하였다.

 

남 장로교회는 1873년 이후로 계속 교회연합을 시도해오는 북 장로교회를 노예제도를 찬성한 죄를 회개할 것을 촉구하면서 받아들이지 않는다. 또 1878년 다시 연합의 물꼬가 트였다가 북 장로교회가 1906년 컴벌런트 장로교회와 연합하는 바람에 무산된다. 그러다가 남 장로교회는 나중에 북 장로교회가 1958년 북미장로교회와 연합 한 후에 조직된 미국연합장로교회와 교단을 통합하게 된다. 북미장로교회는 스코틀랜드 계약파에 의해 1753년 설립된 연합대회(Associate Synod)와 연합개혁대회(Associate Reformed Synod)라는 두 교단이 1848년에 합동하여 생겨난 교단이다.

 

11. 남북통합을 이룬 연합장로교회는 20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 초교파적 교회 연합 운동 및 일치 운동을 하기 시작했다. 1961년 연합장로교회는 성공회, 감리교, 연합 그리스도 교회를 초청하여 교회 연합회를 조직하여 교단 통합 운동을 펼쳤다. 그러나 아직 통합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이 운동은 로마교회까지 포함시키고 있다. 급기야 1967년 로마교회와 북미 세계 개혁교회 연맹 사이에 교류가 이루어져 신학, 예배, 선교에 대한 광범한 대화로 인하여 연합장로교회는 모든 면에서 로마교회의 영향을 받아 개신교의 존재 가치를 상실하였다.

 

12. 미국 연합장로교회는 교회연합운동을 하면서 타교단과의 막힌 담을 헐기 위하여 1967년에 신앙고백서를 두 번째 수정을 하였다. 188개의 노회 중 19개 노회가 반대하고, 3개 노회가 기권하여 166개 노회의 절대적인 동의를 얻어 신조가 수정되었다.

 

중요한 수정내용은 삼위일체라는 단어와 성경무오교리가 삭제되었고, 대신에 하나님과 인간 사이, 인간과 인간 사이의 화해가 강조되었다. 두 번째로, 그리스도가 한 인격 안에 두 개의 품성 곧 인성과 신성을 가진다는 교리가 부인되었고, 단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로 인간이 되셨다”고 선언되었다. 셋째로, 인종, 전쟁과 가난, 성 문제를 시대적인 과제라고 지적하면서 이런 것들을 바로잡기 위하여 교회의 화해 능력이 요구된다고 하였다. 넷째로, 사도신경, 니케아 신조,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1560년),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제2스위스 신조, 웨스트민스트 신앙고백서, 소교리문답을 인정하고, 대교리문답은 삭제하였다. 그 대신에 독일 고백교회의 신앙고백서인 바르멘 신학 선언을 포함하였다.

 

13. 여성평등사상은 1869년 북부지역의 북 장로교회 조직과 함께 시작되었다. 여성 해외 선교부 조직(1870년), 여성 국내 선교부 조직(1879년), 여집사 제도 인정(1915년), 모든 초교파기관과 교회회의의 임원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인정(1923년), 여 장로제도 인정(1930년), 여 목사 제도 승인(1956년).

 

 

기타 미국의 교회들

 

1. 미국개혁교회(Reformed Church in America): 뉴욕의 네덜란드 개혁교회를 중심으로 시작되었고, 벨직, 하이델베르크, 도르트 신경을 신앙의 표준으로 채택하고 있고, 1970년대 말 21만명의 교인이 있었다.

 

2. 기독개혁교회(Christian Reformed Church): 네덜란드 개혁교회에 기초를 두고 있는데, 1970년대말 28만명의 교인이 있었다.

 

3. 북미개혁장로교회(Reformed Presbyterian Church of North America): 하나님의 주권과 성경의 권위를 신봉하면서 성경을 신앙과 생활의 유일한 지침서로 고백하는데, 펜실베니아를 중심으로 활동하며 1989년 현재 5,000명의 교인이 있고, 제네바 대학을 운영하고 있다.

 

4. 개혁장로교회, 복음대회(Reformed Presbyterian Church, Evangelical Synod): 1965년 북미개혁장로교회와 정통장로교회와 성경장로교회로부터 나온 신자들로 조직되었는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수정없이 받아들이고 있다. 이 교회는 테네시주 룩아웃 마운틴에 커버넌트 대학과 세인트 루이스에 커버넌트 신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5. 미국장로교회(Presbyterian Church in Ameriaca): 이 교회는 미합중국장로교회 즉 이전에 노예해방문제로 북 장로교회와 결별했던 남 장로교회에서 1973년 교리적, 사회적인 문제로 나온 교회이다. 처음에는 전국장로교회(National Presbyterian Church)라고 하였으나 2차 총회에서 미국장로교회로 개칭하였다. 이 교회는 1647년에 결정한 전통적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대소교리문답, 교회정치형태, 치리서, 예배모범서를 모두 채택하고 있다. 1989년 현재 19만명의 교인이 있으며, 미국연합장로교회 다음으로 미국에서 큰 교단으로 성장하고 있다.

 

6. 참고로, 1936년에 메이첸을 중심으로 조직된 정통장로교회는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를 두고 있고, 1989년 현재 교인은 19,000명 정도이고, 칼 메킨타이어를 중심으로 금주운동과 전천년설로 인하여 정통장로교회에서 나간 성경장로교회는 1989년 현재 8,000명의 교인이고, 이 교회가 운영하는 페이스 신학교는 폐교 위기에 있다.

 

 

 캐나다와 호주 개혁교회

 

1. 캐나다에는 화란에서 이민을 간 사람들을 중심으로 세워진 캐나다 개혁교회가 있다. 이 교회는 해밀턴에 캐내다 개혁교회신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참고로, 캐나다에는 장로교회, 회중교회, 침례교회가 연합하여 조직한 캐나다 연합 교회가 있다.

 

2. 호주에는 역시 화란에서 이민을 간 중심으로 세워진 호주 자유 개혁교회가 있다. 이들은 화란 자유개혁교회, 캐나다 개혁교회, 그리고 한국의 고신과 자매교회 관계에 있다. 참고로, 호주에는 동호주장로교회가 있는데, 자유개혁교회는 이들과 연합을 위한 긴밀한 대화를 진행 중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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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 장로교회

 

1. 아일랜드는 처음에 패트릭에 의해 복음화되어 켈틱 교회(Celtic Church)라 불려졌다. 1170년 로마교회의 영향권 아래 들어가면서 영국의 지배를 받았다.

 

2. 종교개혁 때 헨리8세가 수장령을 선포하여 영국교회의 교권을 장악하자 아일랜드는 반대하였다. 제임스1세 때 아일랜드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하여 반란을 일으켰으나 곧 진압이 되었고, 이 때 프란시스 베이컨의 조언에 따라 영국과 스코틀랜드 접경의 청교도들이 이 곳에 이주되면서 북아일랜드는 스코틀랜드화된다.

 

3. 열렬한 로마교회의 신자들이었던 원주민들은 영국과 스코틀랜드인의 유입에 분개하였고, 1641년에 폭동을 일으켜 장로교도들을 살해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어려움 가운데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계통의 장로교회가 이 곳 아일랜드에서 1642년 최초의 노회를 조직하게 되었고, 1660년에는 10만명의 신자와 80여개의 교회로 성장하였다.

 

4. 이 후 찰스2세와 제임스2세의 박해 가운데서도 꾸준히 성장하였고, 1683년에는 미국에 이민을 간 스코틀랜드-아일랜드 계통의 이주민들을 위해 미국 장로교회의 아버지라 불리는 프란시스 매케미를 파송하였다.

 

 

 화란개혁교회

 

1. 당시 모든 유럽의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로마교회의 영향 아래에 있었던 화란이 개혁교회로 설 수 있었던 것은 존 칼빈의 영향이었다. 제네바에서 칼빈을 통해서 교육을 받아 목사가 된 기도 드 브레가 고국에 돌아와서 1559년 벨직 신앙고백서를 작성한다. 이 고백서는 안트베르프에서 1563년 비밀리에 모인 대회에서 화란교회의 신앙고백서로 채택이 된다.

 

2. 스페인의 식민지배하에 있었던 화란은 계속되는 종교재판과 학정에 항거하였다. 화란은 북부 7개주가 연합하여 독립을 선포하고, 윌리엄 오렌지 공을 공화국의 왕으로 세웠다(1584년). 그리고 오랜 투쟁 끝에 스페인으로부터 완전한 독립하였다(1608년). 이로써 화란의 개혁교회도 로마교회로부터 완전한 자유를 얻게 되었다.

 

3. 화란 개혁교회는 스페인과의 투쟁 속에서 성장하는데, 1568년 베젤에서 교회규칙을 제정하고, 다시 1571년 엠덴에서 다시 교회 규칙서를 채택하는데, 이때 벨직 신앙고백서와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과 제네바교리문답을 사용할 것을 채택한다. 그러다가 알미니우스파의 주장은 결국 1618-19년의 도르트 총회를 모이게 하였고, 여기서 도르트 신경과 도르트 교회질서가 탄생하게 된다. 이때부터 벨직 신앙고백서,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도르트 신경은 화란개혁교회의 일치신조가 된다.

 

4. 도르트회의 이후 18세기 말까지 화란은 잠시 경건주의의 영향에 들어간다. 그리고 19세기 초 프랑스의 나폴레옹이 화란을 합병하였으나(1810) 화란이 나폴레옹을 격퇴하고 오렌지의 윌리암 프레데릭을 왕위에 앉힌다(1813). 윌리암 1세는 개혁교회를 화란의 국교로 선포했으나 영국 망명생활 중에 영국국교회에 깊은 영향을 받은 그는 1816년 교회질서를 장로체제에서 귀족정치로 바꾸었으며, 또 신앙고백서를 받아들이는 것을 개인의 자유에 맡겨버렸다.

 

5. 이런 상황에서 헨드맄 드 콕 목사는 도르트 신경을 고수하였는데, 이로 인해 자기가 목회하고 있던 교회의 당회로부터 면직을 당한다. 결국 콕 목사는 1834년 10월 14일 분리를 선언했고, 또 이사야8:11-15을 본문으로 윌리엄 1세를 아합 왕에 비교하여 설교한 일로 추방된 핸리 스홀트 목사가 지도하는 교회와 함께 1840년에 암스텔담에서 대회를 열었고, 또 1869년 미델부르크 대회에서 십자가 아래에 있는 개혁 교회(Reformed Congregations Under Cross)라는 교회와 합동하여 기독개혁교회를 조직하였다.

 

6. 1886년에 아브라함 까이퍼에 의해서 또 다시 분리가 이루어졌다(돌레앙티, 고소). 아브라함 카이퍼(1837-1920), 그는 얀 헨드맄 카이퍼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초등학교 시절에 모자라는 아이로 취급받았지만, 레이든 대학을 졸업할 때는 최우수 학생으로 졸업했다. 대학시절에는 종교 자유주의자였다가 신앙을 회복하면서 정통 개혁파 신학자가 되어 기독교 사회 건설에 관심을 나타내었다. 그는 1864년부터 국가개혁교회의 비스트, 우트레히트, 암스텔담에서 목회하였고, 1870년에는 종교 주간지 De Huraet 의 편집인이 되었고, 1872년에는 화란이 당면한 문제를 개혁주의 신앙의 입장에서 조명하기 위하여 일간신문 ‘드 슈탄다르트’를 편집하였다.또 그는 프린스터러가 창당한 반혁명당을 재결성하여 1874년 하원 의원에 당선되었다. 1880년에 자유대학을 설립하여 교수가 되었고, 후에 화란의 수상이 되기도 하였다(1901-1905).

 

카이퍼가 정치에 참여할 때 목사가 아닌 장로로서 암스텔담 교회를 섬겼는데. 그때 카이퍼를 비롯한 암스텔담 교회의 당회는 자유주의적인 신앙을 고백하는 신자들을 받아들이는 것을 금하였다. 이 일로 1886년 교회당국은 카이퍼와 다수의 장로들을 제명 처분하였고, 이 징계 파동으로 카이퍼를 중심으로 200여 교회가 국가개혁교회를 떠나 돌레앙티 교회를 세웠다. 이 교회는 앞서 분리한 기독개혁교회와 1892년에 연합하였다(“화란개혁교회들”). 이 연합에 합류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그대로 (기독개혁교회)라고 한다.

 

7. 후에 카이퍼에 의해 이루어진 교회의 다원성 문제, 일반은총 문제, 가정 중생설 문제가 1942년 총회에서 결정되었고 이를 반대한 흐레이다누스와 스킬더 등 많은 교수와 목사 장로들이 면직되면서 1944년 8월 새로운 교회가 분리된다. 이 교회는 화란자유개혁교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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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로교회사] 영국의 교회 개혁

 

1. 영국의 국왕 헨리8세가 수장령을 발표한 후 영국은 로마교회와 단절하고, 독자적인 국교회를 세웠으나 이 교회는 완전한 개혁교회가 아니었고, 단지 교회의 머리만 교황에서 국왕으로 바뀐 것 뿐 교리와 예배, 교회질서는 여전히 로마교회와 동일하였다.

 

2. 영국교회의 개혁에서 특별히 장로교회와 중요한 사람은 존 위클리프와 켄터베리 대주교 토마스 크랜머 그리고 스코틀랜드의 존 낙스이다. 이들은 감독정치를 반대하고, 장로회 정치가 성경적인 것임을 주장하였다. 이들은 헨리8세와 에드워드 6세 때에 활동하였다.

 

3. 1570년대에 토마스 카터라이터가 공개적으로 영국의 감독정치를 반대하다가 쫓겨나서 1572년 월터 트래비스와 함께 완즈워드에 최초의 영국장로교회를 설립하였다. 이때로부터 장로교회가 영국에서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여 엘리자베스 여왕과 제임스1세의 통치기간인 17세기 초 윌리엄 에임스에 의해 급속하게 퍼져나간다. 한다.

 

4. 찰스1세가 영국의 청교도를 박해하고, 스코틀랜드조차 감독교회로의 전환을 요구하자 스코틀랜드는 국가계약을 맺고, 또 영국과 아일랜드와 신성동맹과 계약을 체결한다. 이에 찰스1세는 스코틀랜드와 전쟁을 하기 위해 영국의 의회를 소집했는데, 청도교 의원이 대거 진출하자 4번씩이나 의회를 해산하였다. 4번째 의회를 해산하였을 때, 의회파는 자위대를 구성하여 왕당파와 싸움에 돌입한다. 이 혼란의 시기에 청교도들은 영국 교회의 신앙고백, 예배, 교회 정치를 로마교회의 잔재로부터 완전히 개혁하기 위하여 웨스터민스터에서 교회 회의를 소집하였다(1643.7.1-1649.2.22). 이 회의의 결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대교리문답, 소교리문답, 예배모범서, 교회정부형태, 교회행정을 위한 지침서 등이 탄생하게 되었다. 이 회의의 총대는 의회가 파송한 상, 하원 각15명과 전국에서 모인 121명의 목사들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장로회 정치를 주장하는 장로파로만 구성된 것이 아니라 감독제와 장로제를 가미하는 중도파, 또 개교회의 독립을 주장하는 회중파, 국가가 교회를 통치할 것을 주장하는 에라스투스주의자들로 구성되었다.

 

5. 웨스터민스터 교회회의 이후 영국 장로교회는 1660년 왕정복고와 함께 왕위에 오른 찰스 2세의 통일령, 5마일령, 시의회령으로 인해 큰 박해를 받았다. 통일령은 영국교회는 장로정치가 아니라 감독정치로 회귀하는데, 모든 목사가 3개월 이내로 영국교회로 개종하든지 아니면 사직할 것을 요구하는 내용의 칙령이다. 5마일령은 통일령에 반대한 목사를 전임지와 도시로부터 5마일 이내에 출입을 금지함으로써 청교도 목사의 활동을 제한하는 법이었고, 시의회령은 국교신자가 비국교신자로 개종하지 못하게 하는 법이다.

 

그러다가 1688년 명예혁명으로 찰스2세는 축출된 후 왕위 계승을 한 메리에 의해 발표된 관용령(1689)으로 장로교회는 종교의 자유를 보장받았으나 교세는 급격히 줄어들었다.

 

6. 18세기의 영국 장로교회는 더욱 약화되었고, 스코틀랜드 교회의 신학적인 도움을 받은 북부의 교회들만이 겨우 명맥을 유지하는 수준이었다. 그러다가 19세기에 스코틀랜드에서 이주한 장로교인들에 의해 다시 소생되었다. 1836년 스코틀랜드 장로교회가 영국에 대회를 조직하였고, 1843년 스코틀랜드 장로교회가 분열하면서 영국에 스코틀랜드 자유교회의 계통의 교회들이 세워졌다. 그러다가 1876년에 영국 안에 있는 이 두 교회가 연합하여 영국장로교회를 조직하였다. 1921년에 최초의 총회를 구성하였고, 나중에 개혁주의 신학을 고백하는 다른 교회들과 연합하여 지금은 연합개혁교회(the Unite Reformed Church)라는 이름을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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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교회사] 스코틀랜드 장로교회

 

1. 스코틀랜드의 장로교회는 존 낙스로부터 시작된다. 칼빈이 세운 제네바 아카데미에서 수학한 존 낙스는 1555년 스코틀랜드로 돌아가 6개월간 스코틀랜드 전역을 돌면서 개혁신앙을 전파한다. 낙스가 고향방문을 하고 있을 때, 칼빈은 제네바에서 영국 피난민을 위한 교회를 열었다(1555년 11월 1일). 나중에 낙스는 이 교회를 섬기기도 한다.

 

낙스가 제네바로 돌아간 후, 정치지도자들은 1557년 12월에 첫 번째 계약(the first bond)에 서명함으로써 장로교회 운동을 시작한다.

 

2. 1559년 낙스가 다시 귀국하여 개혁운동을 펼치고 있을 때, 프랑스의 군대가 파견되어 개혁자들을 소탕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곤경에 빠진 낙스와 개혁자들을 구출하기 위하여 영국의 군대가 파견되어 프랑스군과 영국군이 싸우게 되었다. 그러던 중 1560년 6월 귀즈가의 메리가 사망함으로써 영국과 프랑스는 7월 6일 에딘버러 조약을 맺고 스코틀랜드에서 철수한다. 그해 8월 낙스는 동료들과 함께 교회의 전면적인 개혁을 위하여 의회에 청원서를 제출하였고, 의회는 낙스가 제출한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25개조항)를 받아들이면서 로마교회를 포기하고 장로교회를 인정하게 되었다. 그해 12월 20일에 에딘버러에서 스코트랜드 장로교회를 조직하게 된다. 그리고 1560년 총회에서 낙스가 작성한 제 1치리서를 채택한다.

 

3. 그러나 1561년 귀즈가의 메리를 계승한 스콧트의 메리가 왕이 되면서 로마교회를 회복하려 하자 다시 한번 교회는 곤란에 봉착하였으나 결국 그녀가 1567년에 폐위되고 한 살 밖에 안 된 제임스 6세가 왕위에 오르면서 스코틀랜드는 강력한 장로교회 국가가 되었다.

 

4. 불행히도 1572년 낙스가 사망하면서, 어린 제임스 6세의 섭정이었던 모톤 백작이 다시 스코틀랜드에 감독주의로 돌이키려 했을 때 또 다시 위기를 겪는다. 이때 장로교회를 견실하게 세워갔던 지도자가 앤드류 멜빌이다. 그가 만든 제2치리서는 1578년 총회에서 채택이 된다.

 

5.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이 후사가 없이 죽자(1603), 스코틀랜드의 제임스6세가 영국의 왕위를 계승한다(제임스1세). 그는 영국의 청교도와 스코틀랜드의 장로교도를 모두 박해하였고, 그의 아들 찰스1세는 청교도 박멸운동을 전개하고 스코틀랜드에는 영국국교회를 따를 것을 강요하였다. 1637년 7월 23일 장로교회가 폐지되고 영국교회의 의식에 따라 예배가 실시되던 날, 스코틀랜드는 봉기하여 장로교회를 사수할 것을 결의하는 “국가계약”을 맺었다.

 

6. 이 국가계약은 찰스1세에게는 선전포고였으므로, 그는 스코틀랜드와 싸우기 위하여 의회를 열었는데, 이때 많은 청교도들이 의회에 진출하게 되자, 왕이 의회를 해산하는 과정에서 의회파와 왕당파 사이에 싸움이 일어났다. 이 때 스코틀랜드는 영국과 아일랜드와 함께 신성 동맹과 계약을 맺고 스코틀랜드에 장로교 신앙을 보존하고, 영국과 아일랜드 교회가 성경을 따라 개혁할 것을 약속하였다. 그리고 1643년의 웨스트민스트 회의에 참석한다.

 

7. 찰스 1세가 1647년 1월 의회군에 체포되어 처형되고, 독립교도인 올리버 크롬웰이 지배하면서 독립(회중)파를 편애하자 반감을 느낀 스코틀랜드는 오히려 민족주의를 발흥하였다. 그래서 크롬웰이 죽자, 스코틀랜드는 화란에 피신가 있었던 찰스1세의 아들 찰스2세를 왕으로 옹립했다. 그는 “국가 계약”과 “신성동맹과 계약”에 서약하였기 때문에 영국의 청교도들까지 감동하여 영국의 왕으로도 추대받았다. 영국과 스코틀랜드의 왕이 된 찰스 2세는 그 서약을 무표화하고 장로교회를 탄압하였다. 이때, 스코틀랜드는 국가계약과 신성동맹과 계약을 재확인하고, 찰스2세에 항전하기로 선포한다. 이들을 “계약파(Covenanters)”라고 부른다. 계약파는 왕권신수설을 부인하였다. 왕은 백성에게 제한된 충성만을 요구할 수 있고, 백성이 왕과 맺은 계약을 어길 때 벌을 받는 것처럼, 국왕도 계약을 어길 때 백성에 의하여 제재를 받아야 한다. 이 계약파의 정치 사상은 조지 부캐넌에 의하여 다듬어지고 러더포더에 의해 완숙되어졌다.

 

이에 대한 찰스2세의 박해는 끔찍하고 잔인했다.

 

8. 1685년 찰스2세기 죽자 그의 동생 제임스2세가 왕위에 올랐는데, 그는 영국과 스코틀랜드를 아예 로마교회로 돌이키고자 했다. 결국 그는 1688년 명예 혁명으로 왕위에서 쫓겨났다. 그가 축출된 후, 그의 딸 메리가 화란에서 귀국하여 영국과 스코틀랜드의 왕이 되었는데, 그녀는 오렌지의 윌리암 공과 결혼하여 상당히 개혁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종교 관용령을 선포하여 청교도와 장로교도에 대한 살육의 시기를 종식시키고, 1653년 이후 폐지되었던 장로교 총회를 다시 열 수 있게 했다(1690).

 

9. 1710년 영국과 스코틀랜드는 의회를 통합하게 됨으로, 정치적으로는 한 왕실, 한 의회가 되었지만, 종교적으로는 영국은 성공회를, 스코틀랜드는 장로교회를 각각 유지하였다. 두 의회의 통합을 추진한 사람은 윌리암 카스테어스 목사이다.

 

성공회의 영향을 받은 스코틀랜드는 1712년에 지역 시찰회나 대지주가 지역 교회의 목사를 임명할 수 있는 임명권을 의회로부터 인정받게 된다. 이것은 장로교회 정치를 떠나는 것으로서 장로교회의 분열을 예고하였다.

 

10. 스코틀랜드에서 최초의 장로교회 분열은 1733년 에벤에셀 어스킨 목사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가 평신도의 목사 임명권을 반대하였고, 시찰장이 회중이 원치 않는 목사를 파송하는 것에 반대한 이유로 노회에서 제명당했고, 총회에서 면직되었다. 결국, 그와 동료들은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를 떠나 스코틀랜드 자유 교회의 전신인 “분리교회(Secession Church)”를 창립했다. 그러나 이 교회는 기존의 장로교회를 참 교회로 인정할 것인지의 여부로 인하여 논쟁이 일어나 서약파와 반서약파로 분리되었다(1747년).

 

11. 또 1752년 토마스 길레스피 목사도 평신도의 목사 임명권을 거부하다가 총회에서 면직되었고, 1761년 동료들과 함께 구원교회(Relief Church)를 조직했다.

 

12. 데이빗 흄의 합리사상에 영향을 받아 18세기말과 19세기에 신학자들이 중도주의 신학운동을 일으켰을 때, 장로교회의 순수성을 유지하고자 하는 운동이 토마스 찰머스에 의해 일어난다. 중도주의 신학이란 교리와 체험 이 중간에 있는 윤리적인 삶을 표방하는 신학을 말한다.

 

그러나 그도 역시 평신도의 목사 임명 제도를 폐지할 것을 주장하다가 결국 1848년 정부 교회를 떠나 스코틀랜드 자유교회를 조직한다(1843). 이 자유의 의미는 교회가 정부로부터 자유할 뿐만 아니라 정부가 지명한 목사를 섬길 의무로부터의 자유이다.

 

13. 이후 1847년 길레스피의 구원교회와 어스킨의 분리교회가 합동하여 연합장로교회를 조직하였고, 다시 1900년에 이 연합장로교회와 찰머스의 자유교회가 합동하여 스코틀랜드 연합 자유교회를 조직하였다. 그러나 찰머스의 자유교회의 소수파는 자유주의를 수용하는 연합을 거절하고 스스로 작은 교회로 남아 신앙을 보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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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안이상촌과 김용기 / 전정희

 

일제강점기 경기도 남양주 기독교공동체 봉안이상촌의 성소였던 봉안교회. 일가 김용기 장로는 젊은 시절 이 봉안이상촌을 모델로 가나안농군학교를 설립한다. 지난 19일 찾은 예배당 외벽에는 담쟁이가 무성했다.

조국이여 안심허라이상촌 꿈꾸다

한국기독역사여행, 봉안이상촌과 김용기

 

지난 19일 새벽 서울 도심을 빠져나와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다산로 407번길 봉안교회를 찾아 나서는 길이었다. 팔당댐을 지나 양수리 방향으로 향하자 다산 정약용 생가 마재마을을 안내하는 팻말이 이어졌다. 이제 수도권 사람들에게 다산 생가는 유명관광지가 됐다. ·북한강이 만나는 두물머리 마재마을의 생태자연환경과 다산의 반듯한 삶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때문이다.

 

 

김용기 장로(1909~1988)

 

봉안교회는 다산삼거리에서 2.5더 가면 자리한다. 능내리 봉안마을이다.

 

일가 김용기(1909~1988) 장로는 바로 이 봉안마을에서 농사꾼의 아들로 태어나 농민운동으로 한평생 산 크리스천 선각자다. 1954년 경기도 하남시(당시 광주군)에 성서에 기반한 생활 및 의식 개혁 지도자 양성소 가나안농군학교를 설립한 김용기는 한국사회 근대화에 앞장선 인물로 평가 받는다. 가나안농군학교는 강원도 원주와 경기도 양평 두 곳에서 이어지고 있다.

 

김용기는 세계 최빈국으로 꼽혔던 우리나라를 가난에서 벗어나게 하는 게 제일 목표였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 개척적이고 진취적인 인재를 농군학교를 통해 길러내 민족을 세우고자 했다. 그러한 그의 방향은 1960~70년대 조국근대화라는 박정희 정부의 정책과 맞아떨어졌다. 그 시대 가나안농군학교라는 고유명사는 새마을운동과 함께 조국근대화의 상징적 언어가 됐다.

 

가나안농군학교의 뿌리 봉안이상촌

 

그런데 크리스천이 일반인보다 깊이 들여다봐야 할 김용기의 사상은 하나님 나라였고 그 하나님 나라의 실현을 고향 봉안촌에서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는 우리가 구약의 이스라엘 민족처럼 종살이를 하는 것과 같다고 보았다. 복음을 받아들이고 구세주 예수를 기다리면서 믿음 생활에 힘쓰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일제강점기 봉안이상촌건설은 이러한 믿음으로 시작됐다.

 

이날 찾은 봉안교회는 참 신앙을 찾아 서부를 개척한 청교도들이 제일 먼저 교회와 학교를 세운 것과 같은 회당이었다

 

남양주 일제강점기 봉안이상촌 그림지도

 

봉안교회는 1912년 설립됐다. 김용기의 아버지 김춘교가 남양주 용진교회의 한 교인이 전해준 전도지를 보고 예수를 믿은 후 마을에 기도처를 둔 것이 출발점이었다. 마을 안동김씨 문중은 김춘교를 축출 결의하는 상황에까지 이르렀으나 그는 신앙을 버리지 않았다.

 

어린 김용기는 부모로부터 엄격한 신앙훈련을 받으며 미션스쿨 광동학교에 입학했다. 양평 군 양서면 신원리에 있던 이 학교는 몽양 여운형(1886~1947·독립운동가)이 고향에 설립한 근대교육기관이다. 김용기는 나룻배를 이용해 두물머리를 건너 통학했다. 김용기 사상의 밑바탕이 됐던 곳이 광동학교인 셈이다.

 

김용기는 이 학교에서 신앙인의 자세와 민족의식을 교육 받았다.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려면 근로 봉사 희생이라는 예수의 정신이 이 땅에서 생활로 실천돼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그리고 고향에 남아 에덴향을 세우기로 결심했다.

 

그의 저서 나의 한길에 나타난 이상촌에 관한 대목.

 

나라를 빼앗긴지 20여년, 일제의 수탈정책에 농토마저 빼앗겨 가던 암담하던 그 시절안창호 선생이 모범촌을 계획했고, 이승훈 선생이자면회를 조직했으며, 춘원은 소설 ’, 심훈은 상록수를 써 흙에 대한 사상, 곧 잠자는 의식을 일깨웠다. 내 젊은 피도 잠자고 있을 수 없었다. ‘상록수에서처럼 모범 이상촌을 계획했다.”

 

봉안이상촌 건설을 위해선 자금이 필요했다. 그는 공사판에서 장사를 하며 돈을 벌었다. 당시 청량리-양평을 잇는 중앙선(1939년 개통) 공사가 한창이었는데 봉안촌 인근으로 그 철로가 지나갔다. 그는 인부들에게 음식과 잡화를 팔아 3500원이란 거금을 벌었다. 이상촌 건설에는 토지 79338(24000)가 필요했고 총 5000원의 자금이 있어야 했다. 그러나 김용기는 부족한 금액을 쉽게 벌기 위해 폐광이나 다름없는 광산을 인수, 돈만 날리고 만다. 그는 땀 흘리지 않고 얻어지는 것이 없다는 평생의 교훈을 얻었다. 김용기 부부는 각고의 노력 끝에 9917(3000)의 토지를 매입, 개간하는 것으로 이상촌의 첫발을 디뎠다.

 

식민지 기독청년의 고뇌와 비전

 

19382월에 찍은 한 장의 사진은 식민지 기독청년의 고뇌와 비전을 잘 보여주고 있다. 김용기보다 열 살 적은 평생 동지 여운혁(2014년 작고)과 나란히 찍은 사진이다. 여운혁은 중앙선 공사장을 찾은 손님으로 여운형과 육촌지간이다. 서울서 공부하던 그는 요양차 고향 신원리에 내려왔다가 김용기의 뜻에 반해 이상촌 운동에 나선 인물이다. 둘의 사진엔 이런 문구가 새겨져 있다.

 

1930년대 말 이상촌 마을 풍경

 

祖國이여 安心허라’.

 

1930년대 들어 일제의 무단통치와 신사참배 강요가 노골화된 시점에 겁 없는 젊은이들이 조국 운운하며 소리 없는 아우성을 친 것이다.

 

이상촌 건설은 본격화됐다. ‘중앙에는 예배당이요, 언덕 아래는 한강물이 유유히 흐른다.12년 전 두 청년이 이 황무한 구릉에 찾아와 성심과 땀으로 싸워온 것이 오늘날 피어난 이 이상적인 마을이다.’(이일선 당시 서울 신일교회 목사 저서 봉안이상촌)

 

이상촌에선 산양키우기, 비료와 연료 개선, 고수익 과실농사, 고구마 재배, 양봉 등을 통해 농업발전을 꾀했다. 혼식장려, 의생활 개선, 조혼 개선, 청결 강조, 금주금연운동, 건전오락 보급, 야학운영, 서울 유학 권유 등 생활 전반에도 혁신을 꾀했다. 이일선 목사 등 수많은 기독교 엘리트들이 이상촌을 도왔다. 당시 40~60명에 이르는 신앙공동체이자 생활공동체였다.

 

그 봉안촌의 오늘 풍경은 그저 한적한 시골마을이다. 다만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마을 좌우 산을 뚫어 터널을 만들고 터널과 터널을 잇는 공중 다리(봉안대교)가 마을의 풍경을 바꿔 놓았을 뿐이다. 고속화도로가 된 6번 국도다.

 

이날 봉안교회 위 반듯한 농가주택에서 이 교회 김영구(64) 장로를 만났다. 평생 고향 봉안을 떠난 적 없는 토박이다.

 

김용기 장로님이 제 작은할아버님입니다. 그런 선대를 둔 것은 하나님의 은혜죠. 부끄럽지 않은 후손으로 살아가고 싶습니다.”

 

김영구 장로는 옛 교회자리, 일제 탄압으로부터 독립운동가들을 숨겼던 곳, 여운형 선생 회갑잔치집터 등을 소개했다. “6·25전쟁 때 폭격으로 마을 집들 대개가 폐허가 돼 이상촌 건설 당시의 한옥 원형 건물이 남아있지 않다고 했다.

 

신사참배와 창씨개명 거부, 공출 거부 등이 이어지자 이상촌은 요시찰 지역이 됐어요. 더구나 항일독립운동 마을로 알려지면서 봉안교회에 부임하는 교역자조차도 없었지요. 집사였던 작은할아버지를 장로장립해 교회를 이끌어야 했지요.”

 

1970년대 봉안교회 앞에서 찍은 김용기 장로(왼쪽에서 세 번째)와 그 아들들

 

그 장로장립예배에서 김용기는 황군장병무운을 비는 묵도를 거부했다. 그 결과 양주경찰서에 끌려가 일주일간 모진 고문을 당했다. 생전 김용기는 경찰서 차석은 홍상혁이란 자였는데 물 먹이기와 공중 매달기, 손톱 밑 찌르기, 손가락 사이 막대끼워 비틀기 등을 해댔다고 증언했다.

 

1940년대 들어 이상촌에는 여운형을 비롯, 애국지사와 학병징집 거부자 등이 은신을 위해 찾아왔다. 김용기는 그들을 고구마 창고와 기도굴 등에 숨겼다. 항일투사 전사옥에게는 미치광이 흉내를 내도록 가르쳐 보호했다.

 

김영구 장로는 산자락을 가리키며 기도굴의 위치를 설명했다. 해방의 분위기가 무르익자 독립운동가, 징용 징병 거부자들은 산에 숨어 필리핀에서 방송하는 맥아더의 단파방송을 들으며 그날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그 시각 김용기는 이집트 노예생활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해방시킨 하나님이 우리 민족에게도 그 영광을 주리라는 믿음으로 봉안교회 마루에 엎드려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아들 김평일 교장이 기억하는 이상촌

 

-“군인이 군인 노릇 잘해야 한다부친, 박정희 대통령에게 권면”-

 

 

김용기 장로의 아들 김평일 가나안농군학교 교장이 아버지가 막사이사이상 수상식 때 입은 삼베옷을 보여주고 있다.

 

“19625·16직후(5·16군사정변)62일 당시 국가재건회의 박정희 의장이 하남 가나안농군학교를 방문했어요. 일행이 30여명이었죠. 그들은 종일 머물며 잘살기 위한 방법을 아버님께 물었어요. 여론을 들어보니 김용기 장로를 만나보랬다는 거죠. 제가 군 제대 후 아버님 밑에서 일했기 때문에 현장에 있었어요. 아버님은 군인이 군인노릇 잘해야 한다고 권면했어요.”

 

 

1966년 막사이사이상 수상식에서의 김용기.

 

지난 18일 경기도 양평 가나안농군학교에서 만난 김평일(75) 교장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새마을운동이 가나안농군학교를 이끌던 김용기 장로로부터 영감을 받아 실현됐다고 강조했다. 박정희는 그날 찐 고구마와 감자, 호박잼을 바른 식빵으로 식사를 했다. 박정희는 내가 생각했던 대로 선생은 많이 이루었다그런(가나안농군학교 교육 내용) 방식으로 하면 나라가 잘 살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고 한다.

 

박정희는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했으나 김용기는 안 도와주는 것이 돕는 것이라고 답했다는 일화도 전했다.

 

 

식민지 청년의 결의를 담아 찍은 사진에 조국이여 안심허라글귀가 인상적이다. 신앙공동체의 주역 김용기(왼쪽)와 여운혁.

 

김용기 장로 연보(1909~1988)

1929년 양평 광동학교 졸업

1931~45년 남양주 봉안이상촌 운동

1950년 용인 에덴향 개척

1954년 하남 가나안농장 개척

1962년 가나안농군학교 설립

1966년 막사이사이상 수상

1973년 인촌상 수상, 원주 농군학교 설립

1988년 별세, 농민단체 농민장

(2017.9.22. 국민일보/ 남양주·양평=·사진 전정희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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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교 역사 1장 장로회의 기원과 교회의 조직

Chapter 1

1장 장로회의 기원과 교회의 조직

장로교회란 무엇을 말하는가? 장로교회란 장로회 정치제도하에 유형 교회의 통일성을 이루는 교회 형태를 말한다. 이 제도는 일반적으로 우리가 아는 것처럼 칼빈이나 낙스에 의해서 처음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사실은 구약성경에 이미 나타나 있는 제도였다.

1. 성경에 나타난 장로회의 기원

A. 구약에서의 사용: 구약에서는 장로라는 말이 백번 이상 사용되었다. 그 중 모세 오경에만 절반 이상이 사용되었는데 그 어의들을 보면 두 단어로 집약된다.

 

) 손윗사람, 형이란 뜻으로 원래는 큰, 위대한, 대단한, 등의 의미를 지닌 말로서 나이가 많은 사람을 가리킬 때도 사용되었다. )10:21, 27:42, 삼상18:17, 왕상2:22, 16:64, 61, 23:4

 

)연장자, 장로, 수염 있는 등의 뜻으로 가장 많이 사용된 말이다. 그러나 이 단어는 한정적인 형용사로 쓰일 때 주로 젊은 자와 구별되는 늙은 사람을 지칭 할 때 사용되었다. (19:32, cf. 렘애 5:12). 이렇게 성경은 노인을 존중하며, 백발은 노인의 영화요 자녀들은 그의 면류관이라고 하였다(20:29, 17:6).

 

그러나 자켄이 실명사로 쓰일 때는 전문적인 용어로서 그 문맥에 따라 한 사람의 장로를 가리키기도 하며 또 장로회라는 지역통치기구를 지칭하기도 한다. 50:7, 시편 105:22, 삼하1 2:17, 22:4,7, 9:11 등에 나타난다.

 

모세 오경에서 이스라엘의 장로들은 모세가 반석을 쳐서 물을 내게 하는 것을 목격한 증인들이었고(2:16,18:12,17:5-6). 광야에서는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 70인의 장로들을 데리고 하나님 앞에 나아갔던 일이 있는데(24:1-9) 이러한 현상들은 장로회란 바로 통치기구의 성격을 강하게 부각시키는 증거인 것이다.

 

장로들은 바벨론 포로기간 중에서도 계속하여 큰 영향력을 발휘하였다(29:1, 8:1, 14:1, 20:1). 또 포로 이후에도 장로의 권한은 여전히 존재하였다(10:8, 14). 그들의 역할은 회당에서도 존재하였고 신약시대 까지도 존재하고 있었다. 구약에서의 장로회제도는 민의(民意)를 수렴하는 의회제도의 모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원래의 장로직은 구약에서 종교적인 제사제도와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니고시행정과 관계있는 것으로 언제나 민의(民意)를 표현하는 자치 (또는 代議)기구의 대의원의 역할을 하였다. 이스라엘에서의 장로직의 존재와 그 영향은 자치성의 원리와 습성을 배양시켰던 것이다.

   

B. 신약에서는 70인역이 번역되면서 구약의 자켄을 πρεσβύτερος 번역하여 사용하였는데 그 의미는 손윗사람, 공직에 있는 사람, 영광을 얻을 자들로 묘사되고 있다. 그러나 신약에서 장로라는 말은 주로 교회와 연관되어서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이것은 교회직분을 나타내는 용어이다. 여기서 장로 혹은 장로교회(Presbyterian Church)라는 말이 파생된 것이다. 장로의 기능을 의미하는 말은 έπίσκοπος라는 말로 이것은 감독하다또는 치리한다는 의미이다. 이 단어에서는 감독교회 (Episcopalian Church)라는 말이 나왔다.

 

2. 초대 교회의 시작과 조직

 

초기 기독교의 시작은 이미 앞장에서 살펴 본 것처럼 유대교회 배경을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구약시대부터 유대인들이 대망하여 온 메시아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로부터 시작된 교회는 오순절 사건을 통하여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된 것이다. 그러므로 본 장에서 우리는 예수의 사역의 시작과 더불어 기독교가 이방에까지 진출하는 과정을 살펴보려고 한다.

 

1) 유대인과 기독교인의 관계

 

기독교적인 입장에서 볼 때 초기 기독교의 출현과정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실은 유대교로부터 기독교의 분리이다. 예수의 메시지는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바른 해석과 아울러 불순종에 대한 회개를 촉구하였다. 무엇보다도 율법의 진정한 의미는 하나님을 사랑하되 입으로만이 아니라 마음과 뜻과 목숨과 힘을 다하여 사랑하는 것이라야 하며 또한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것이다. 초기 예수의 추종자들은 예수의 이러한 새로운 가르침을 유대교적인 틀 안에서 어디까지 수용해야 되는지에 대한 문제에 직면하였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유대교인들은 그리스도의 교훈이 가장 훌륭한 유대교회의 진수와 다른 것이 아닌 윤리적 근본원리들로 받아들였고 또 예수 자신도 율법을 파괴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시키려 왔다고 선언하심으로서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메시아인 이 예수를 다른 유대인들에게 전해 주어야 할 것으로 이해한 것이다. 따라서 예수의 죽음은 단순히 순교자로서의 죽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율법에 완전한 순종을 보이는 자에게 충만한 생명을 주시는 구속의 죽음이었고, 이 죽음을 통하여 누구든지 예수를 믿는 자에게 영생을 얻게 해 주는 길을 연 것이다. 또한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며 무릇 살아서 그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함을 전하는 것이다(cf. 3:16, 11:25-26). 그러므로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은 종교적으로 그리스도안에서 유대인이나 헬라인 모두가 다 하나인 것을 선포한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 기독교인들과 이방인 기독교인들 사이의 다툼은 오순절 사건 이후에도 지속되었다.

 

오순절 사건은 해리보더가 그의 책 초대교회사에서 지적하고 있는 대로: 신약의 교회는 성전과 회당에서 모였던 엄밀한 이스라엘의 성전중심에서 벗어나 회중 중심의 색채를 띠게 되었고, 하나님의 자녀들이 국수적인 모습에서 벗어나 국제적이고 우주적이어야 함을 보여주었으며, 설교자가 제사장을 대신하였고 강단은 제단을 대신하여 선포의 사역을 강하게 부각시킨 것이다.

 

그러나 초대 교회는 핍박에 직면하게 되었는데, 교회에 가해진 핍박이 예루살렘에 모인 많은 신자들을 흩어지게 만들었다. 이것이 복음의 확장을 꾀하게 된 것이다. 빌립은 사마리아로 베드로는 욥바와 가이사랴지역에까지 갔다.

 

그러나 예루살렘 교회는 여전히 유대의식을 버리지 못하였고 또 이방교회를 자기들 수하에 두려고 했다.

 

이러한 예루살렘 교회의 태도는 결국 팔레스타인 안에서 기독교회의 쇠퇴를 가져왔다. 유대의식을 과감하게 떨쳐버리지 못한 그들의 모습은 복음의 능력을 제한시켰고 교회의 힘을 약화시켰던 것이다.

 

갈라디아서에서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라는 사실을 단호히 선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66년경에 벌어진 독립운동과 같은 유대인들의 반란은 70년 예루살렘의 멸망으로 이어진 것이다. 이것이 헬라파 유대인들과 히브리파 유대인들 사이를 크게 갈라놓은 것이 되었다. 예루살렘에 남아있던 기독교인들은 민족주의자들로부터 강한 압력을 받게 되었고 따라서 그들은 예루살렘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독립을 위한 반란에 가담해 주지 않은 기독교인들을 유대인 국수주의자들은 저주하였으며, 결국 이것이 기독교회와 유대인들이 지금까지 갈라서게 된 원인이 되었다.

 

2) 초대 교회의 생활과 조직

 

오순절 사건 이후 초대교회의 생활은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도들의 지도 하에 성장해갔다. 이 때는 어떤 특별한 조직이 따로 없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매일 늘어감에 따라 조직의 필요성이 교회 안에 부각되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사도행전 6장에 나오는 7명의 대표선출이다. 이들은 집사들이 아니었다. 후에 바울이 목회서신에서 교회 직분자들에 대한 자격을 논할 때 언급한 부분이 7명의 평신도 대표들이 한 역할과 유사한 것 때문에 대부분 집사라고 부르지만 스데반이나 빌립과 같은 사람은 집사로서 역할을 한 것보다 도리어 전도자로서 사역을 감당한 것을 볼 수 있다.

 

따라서 교회의 외적 성장에 따라 사도들의 명령과 인준에 의한 직분자 선출 문제는 오늘날 사도들이 없는 현실 교회에서는 사도들이 남겨놓은 신약 성경을 통해서 직분자 세우는 근거를 가져야 하며 반드시 주님께서 주신 은사에 따라 선출되어야 한다는 대원칙이 세워져야 하는 것이다.

 

초창기의 예루살렘 교회에는 사도들의 가르침에 따라 움직여져 특별한 조직의 형태는 갖추지 않았으며 오직 7명의 대리인들을 선출하여 사도들이 감당해왔던 구제의 임무를 맡겼을 뿐이다.

 

그러나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해야하는 사명을 망각하였기에 예루살렘교회에 일어난 핍박이 그들을 사방에 흩어지게 만들었고, 각 지역에 교회를 설립하게 된 것이다. 이 때부터 지교회에 필요한 직분자들을 임명하게 되었다. 따라서 바울 사도가 각 서신에서 언급한 직분자들을 고찰하면서 성경에 명시된 초대교회의 조직과 직분자들의 기능을 생각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3) 교회의 직분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섬기는 일과 관련하여 자연스럽게 등장하는 것이 교회의 직분(Office)이다. 직분이라는 말을 사용할 때 직임에 해당되는 기능(Function)’ 문제가 자연스럽게 대두된다.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교회에 대한 이해를 전제로 하여 유기체적인 측면에서 볼 때 기능적인 차원을 논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 기능적인 측면에서 신약성경에 의거한 교회의 직분이 무엇인지 살펴보자. 전통적으로 개혁교회가 언급해온 직분은 크게 목사, 장로, 집사 세 가지이다. 사도는 초대교회의 특별직으로 보로 초대교회 이후로 교회의 항존직(桓存職)1)에 해당하는 장로와 집사직에 대하여 살펴보려고 한다.

 

(1)장 로(presbyter or elder)

 

초대 교회에서의 장로직은 사도행전 11:30에 처음으로 나타난다. 예루살렘교회 형제들의 기근 문제로 말미암아 구호품을 전달하고자 안디옥교회는 바울과 바나바를 예루살렘교회 장로들에게 보냈다. 또 사도행전 14:23절 이하에 보면 바울과 바나바가 교회에 (루스드라, 이고니온, 안디옥) 장로들을 세우는 것을 볼 수 있다. 초대교회의 기록을 보면 예루살렘교회에서부터 장로직은 교회의 지도적인 위치에 해당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장로직이 어떻게 하여 생기게 되었는가? 신약성경은 그 시작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처음부터 교회의 대표격으로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유대인 회당제도에 근거한 것이라고 추정된다. 유대인의 장로들은 회당에서 주로 행정적인 업무에 종사하였다. 따라서 신약교회가 설립된 이후 사도들의 설교사역을 통해서 제사장들을 비롯하여 허다한 무리들이 회개하고 돌아오게 되었는데(6:7) 그 중에는 회당에서 행정적인 업무들을 맡아보았던 장로들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의 명칭이 신약에서 공직에 있는 자 손윗사람, 존귀한자의 뜻을 지닌 πρεσβύτερος이고 이들의 기능을 의미하는 말은 έπίσκοπος이다. 이 뜻은 감독한다또는 치리한다는 말이다. 따라서 장로들은 감독들이었고 감독은 치리하는 일을 맡은 장로였다.

 

신약교회에서 장로를 말할 때 다음 다섯 가지 직무를 내포하고 있다.

 

첫째, 장로는 하나님의 교회의 목자들이다(20:28, 벧전 5:2), 이 용어 사용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나타나셔서 내 양을 치라"(21:15절 이하)명령하신 말씀에 그 근원을 둔다.

 

둘째, 장로는 감독자이다(20:28 cf. 1:1, 딤전 3:2).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를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셋째, 장로는 감독직과 더불어 치리자이다(딤전 3:5, 5:17, 벧전5:3, cf. 13:7), 그러므로 장로란 잘 다스리는 자격을 요구하는 것이다.

 

넷째, 장로는 하나님의 청지기이다(1:7). 청지기직이란 하나님의 것을 위임받아 수행하는 자를 말한다. 위의 세 가지 기능은 성도들을 돌보는 직책에 더 초점이 있다면 청지기직은 하나님의 자산을 잘 관리하는 임무에 더 강조점이 있다.

 

다섯째, 장로는 그의 직임을 수행하는 일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잘 가르치는 교사이며 권위자이다(딤전 3:2, 5:17, 1:9). 모든 장로는 잘 다스려야 하며 잘 가르쳐야 하되 모든 장로가 다 잘 가르치는 장로는 아닌 것이다.

 

따라서 목사와 장로라는 구분은 역할분담측면에서 이해되어야 하지 직위적인 차원에서 이해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목사와 장로는 다 하나님 앞에서 평등한 위치에 서 있으며 단지 기능면에서만 서로 주된 업무가 다를 뿐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초대교회에서 7명의 대표인들을 선출했을 때 당시 교회의 지도자들이었던 사도들이 구제하는 일까지 취급했었던 것처럼 목사는 잘 다스리는 일을 소홀히 해서는 결코 안 되는 것이다.

 

바울도 장로회에 대하여 언급하였다(딤전 4:14). 이렇게 장로들을 임명할 때 장로회에서 그들을 안수하여 세웠다. 안수행위는 신령한 은혜와 복을 내리며, 은사를 수여할 때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cf. 9:18, 19:13, 6:5, 7:32, 8:23, 13:13, 8:17, 9:12, 17, 13:3, 19:6, 딤전 5:22). 초대교회의 7명의 대표들을 뽑을 때도 그들 위에 손을 얹고 기도함으로 확정지었다. 그들은 회중에 의하여 선출되었고, 사도들 앞에 세워졌을 때 사도들이 안수하였다. 사도행전 20:28에서 바울이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을 불러서 엄숙히 장로직, 감독직에 대하여 말한 것을 보면 교회를 돌보고 감독하는 임무야말로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일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장로들이 명심해야할 것은 그들 역시 대 목자장인 그리스도의 감독과 지도를 날마다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2) 집 사 (deacon)

 

집사라는 말은 이라는 개념과 관련이 있다(12:26, 13:4, 고전 3:5, 고후 6:4, 11 :23, 3:7, 살전 3:28, 딤전 4:6). 집사직은 διακονία 라는 추상명사에서 독특성을 찾는다. 이 단어는 집사로서 잘 섬기는 측면을 강조하고 있다(딤전 3:10, 13). 교회의 처음 조직이 생긴 사도행전 6장에서 구제하는 일과 먹이는 일을 7명의 대표들을 통해서 집사란 용어를 사용했다. 교회가 성장하면서 자연스럽게 양들을 돌보는 일, 특히 가난한 성도들을 돌보는 일은 교회의 가장 중점 되는 사업 중 하나였기 때문에(15:25-26, 2:10), 자연스럽게 집사직이 교회 안에 형성된 것 같다. 따라서 바울은 장로직을 말하면서 집사의 의무를 말하기보다는 집사의 자격을 언급하였다. , 장로직과 집사직이 이미 초대교회에서 명확히 구분되었다고 볼 수 있다. 집사직의 자격은 무엇보다도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 (딤전 3:9)여야 했다.

   

3. 교회 정치 형태

 

지금까지 살펴본 내용은 교회조직이나 직분자들은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그리스도에 의하여 세움을 입은 자들이며, 주님으로부터 은사를 받은 자라야 회중들이 은사의 됨됨이와 신앙인격을 보고 선출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제 우리는 현존하는 각 교파의 정치 제도를 살펴보려고 한다. 현존하는 각 종파의 정치형태는 교리적인 차이와 성경 해석적인 이견에 의하여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서 크게 나누어 감독정치, 회중정치 또는 독립정치및 장로정치이다.

 

1) 감독정치

 

흑자는 교황정치와 감독정치를 구분하지만(장로교화사 오덕교저, pp. 14) 교황정치는 감독정치에 포함된다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 감독정치란 대주교, 주교 사제, 부주교, 집사 등의 여러 직분자들에게 교회를 통솔하게 하는 권력기반을 바탕으로 한 것으로 보통 로마 카톨릭과 성공회 등에서 유지하고 있는 정치제도이다. 다만 이 둘의 차이는 전자는 모든 권력이 교황 한 사람에게 집중되어 그가 지상의 모든 카톨릭교회를 통치하는 것이요 후자는 교회의 수장권이 군주에게 있다는 사실이다. 이처럼 감독정치는 한 사람의 최고 통치권자 밑에 여러 계층의 직제에 의하여 움직이는 교회정치이다. 이러한 정치제도는 분명히 성경의 가르침과 어긋나는 인본주의적 정치인 것이다. 교회의 모든 직분자는 위치상 그리스도 안에서 동일하며 다만 기능상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리스도만이 교회의 머리이며 직분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세운 자들이요 회중들의 선출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2) 회중 정치 또는 독립 정치

 

독립정치를 지향하고 있는 회중교회의 정치인 회중정치는 교회의 계층구조에 대한 반발로 생긴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정치에 대한 성경적인 교리나 가르침을 그들의 공식문서에 언급하지 않고 있다. 다만 이들은 정교분리 원칙을 고수하며 회중에 의한 목사 청빙과 교회운영 및 지교회의 자율성을 최대한으로 내세운다. 이들은 성경에 나오는 장로회’(딤전 4:14)를 부정하는 것이다. 이들은 모든 외부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모든 일에 개교회의 결정이 최고의 결정이 최고의 결정이기 때문에 이것은 곧 개 교회의 무흠한 능력으로까지 비화될 수 있는 소지가 많은 것이다.

 

3) 장로 정치

 

이것은 지금까지 앞에서 직분자들을 다루면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장로정치라고 본다. 장로정치제도는 교회와 교회 및 직분자들과 직분자들 사이에 계급구조를 인정치 않으며 회중교회의 정치의 자율과 평등사상을 수용하지만 모든 지교회들이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에 교회는 연합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장로회주의는 성경이 말하고 있는 교회 정치형태가 무엇인지에 초점을 두는 것이다. 감독주의나 교황의 통치권에서처럼 교회가 성경을 판단하고 인정하는 원리가 아니라 성경에 의하여 교회의 모든 것을 판단하고 다스리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장로회주의는 개교회의 당회와 지교회의 연합을 이루는 노회, 일정 지역권의 노회를 의미하는 대회와 전국적인 총회로 나누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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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교회의 역사와 신앙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 역사의 주류를 형성해 온 신학사상은 칼빈주의, 또는 개혁주의 신학이었다. 칼빈주의 신학이란 칼빈의 가르침이 그 전부가 아니다. 개혁주의 신학은 루터주의와 구별되는 것으로 프로테스탄트 교회 안에서 발전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종종 칼빈주의 신학으로 부르는 것은 개신교의 형성에 있어서 칼빈의 탁월한 영향 때문이다. 개혁주의 신학의 특징인 언약신학사상이 칼빈 이후에 생긴 것이기는 하나 칼빈의 기독교강요에 나타난 가르침들은 개혁신학을 규정하는 중요한 역할을 해온 것임을 부인할 수 없다. 서구 사회에서 교회 체제나, 교회의 기능 및 교회법, 교회 직분자들을 세우는 것 등 교회에 관한 전반적인 사항들 뿐 아니라 시민들의 생활 문제까지 깊은 영향을 준 것이 칼빈주의 사상이다.

 

장로 교회사를 배우는 것은 적어도 세 가지 중요한 이유가 있다.

 

하나는 장로교가 성경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구약 성경에서부터 장로회 제도를 언급하고 있고 신약성경에서도 교회의 중요한 정치제도로 설명하고 있는 장로교에 대한 자부심을 장로교 목사와 신학생들이 가지고 있지 않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더구나 우리는 개혁교회이다. 성경대로 믿고 성경대로 가르치고 성경대로 살자고 하는 신학을 따르고 있다.

 

하나님께서 주의 종들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은 성경에 기록된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신구약 성경 66권을 주셨다. 그것은 우리 인간들이 반드시 알아야 할 진리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장로 교회사를 공부하는 것은 우리를 알자는 것이지 교회사의 한 부분을 더 소개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알아도 되고 알지 못해도 상관없는 것이 결코 아니다.

 

둘째로, 장로 교회사는 교단적인 정체성 확립에 아주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에서도 집안에 귀족이면 귀족일수록 족보를 따지고 뿌리를 중요시하는데, 하물에 아브라함의 후손이랴! 단순한 지식의 한 축적이 아니라 기초를 든든히 다진다는 차원에서 장로교회사를 배우는 것은 절대로 필요한 것이다. 교회의 외적 모습은 신학의 입장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기 때문에 장로교회의 외형 역시 개혁신학 사상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지 아닌지 점검하는 입장에서도 장로교회사는 매우 중요한 과목이다. 장로교회의 뿌리를 찾아 우리 선조들이 지니고 있었던 고위한 신앙과 신학적 전통을 새롭게 정립하고 발전시키는 노력의 일환으로 본 장로 교회사를 준비하게 된 것이다. 적어도 성경에 가장 근접한 교회의 외적 형태가 장로교회 그것도 개혁주의 사상에 뿌리는 둔 개혁 장로교회라 한다면 장로교회의 원리가 무엇이며 실체가 어떤 것인지 분명히 배워야 하는 것이다.

 

셋째는 장로 교회사는 교회 역사의 중요한 한 축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개신교 역사에 있어서 장로 교회 역사를 빼놓고 교회사를 논하는 것은 설명이 불가능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장로 교회사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역사 흐름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교회를 이끌어 오셨는지를 아는 중요한 자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이유를 바탕으로 하여 필자는 장로회주의(Presbyterianism), 또는 장로 제도가 성경에 근거한 가장 오래된 제도(모세 시대 때부터 존재했음)라고 확신하다. 따라서 본 책을 통하여 성경에서 가르치는 장로회주의의 원리를 체계적으로 세운 칼빈의 가르침과 장로회주의의 원리를 한 국가에 구체화시킨 존 낙스의 가르침을 살펴보려고 한다. 그 다음에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 원리를 보면서 개혁된 교회는 날마다 개혁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한다.

 

그리고 장로회제도를 없이하려 했던 왕정정치의 모든 탄압에서 벗어난 교회가 새롭게 장로회주의를 정립하는 18세기 초엽의 역사와 그 뒤에 찾아온 고등 칼빈주의 사상의 여파로 인하여 메로논쟁(Marrow Controversy, 1718-23)1)으로 이어진 교회의 갈등과 분열 및 영적 대각성 운동을 일으킨 부흥운동의 면모를 조명하려고 한다. 이어서 19세기 장로교회의 대 분열의 역사와 자유주의 신학 논쟁을 살펴보며 20세기 교회 역사를 간략하게 다루고자 한다.

 

또한 미국으로 건너간 장로교회의 생성과정과 역사를 간략하게나마 조명하고 한국교회의, 특별히 개혁주의 한국 장로교회의 과제가 무엇인지를 다루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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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장로교 총회 100년 역사, 역사적 개관/ 박용규 교수

 


이것은 이미 총회 설립 이전부터 예고된 일이었다. 미국 북장로교 내지 선교사 총무 아더 브라운(Arthur J. Brown)이 한국장로교 총회 설립 2년 전, 1910년에 학생자원운동(Student Volunteer Movement)의 로체스터 대회(Rochester Convention)에서 보고한 “가난하고 천대받으며 보잘것없는 이 나라가 이제 비기독교 국가들 중에서 복음화 되어 더 거대한 사역을 위해 하나님께 쓰임 받는 최초의 국가가 될 것처럼 보인다”는 예상은 1세기가 지난 오늘 사실로 입증되었다.

 한국교회의 성장은 세계 기독교 역사에서 그 유래를 찾아보기 힘들만큼 드문 일이다. 특히 장로교회는 한국교회의 성장을 주도하는 중심 세력으로 처음부터 그 위치를 톡톡히 감당해왔다. 비록 ‘한국장로교가 한국이라는 사회적 역사적 상황 속에서 교회로서의 사명을 다하여 왔는가’라는 문제를 제기할 때 항상 긍정적인 면만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지난 100년 동안 장로교는 하나님이 베푸신 놀라운 은혜에 힘입어 장족의 발전을 이룩하였다. 새로운 세기로 접어들면서 틀을 다지기 시작한 한국장로교회는 그간의 수많은 대 사건들과 역사의 질곡 속에서도 한국교회를 주도하는 중심세력으로 흔들리지 않고 역사를 이어왔다. 1904년 러일전쟁, 1905년 을사조약과 1910년 한일합방의 치욕, 이어 진행된 일제의 36년의 식민 통치 그리고 1945년 해방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굴곡 많은 민족사 속에서도 교회는 여전히 생명력을 지니며 오늘에 이르렀다.

 

 하나님께서는 고난 가운데서도 1903년 원산부흥운동,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 1920년대 김익두 부흥운동, 6.25 직후 회개운동 그리고 1970년대 대중전도운동과 민족복음화 운동을 통해 한국교회의 영적 생명력을 지켜주셨고, 해외 선교열을 불어 넣어 주셔서 한국교회로 하여금 세계 선교를 주도하는 교회로 성장시켜 주셨다. 그리고 이 일에 예장총회를 그 중심에 세워주셨던 것이다. 때로는 신사참배에 굴복하고 일제의 식민통치의 시녀로 전락했던 암울한 시대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한국장로교회는 민족과 사회의 선도 기관으로서의 면모를 지켜올 수 있었다.

 

 지난 역사를 회고할 때 그동안 한국장로교회는 크게 선교사 입국과 장로교 설립(1884-1900), 대부흥운동과 노회 및 총회의 조직(1901-1910), 해외선교 및 사회 변혁과 한국장로교 성장(1910-1930), 도전과 응전의 시대(1930-1945), 대립과 분열의 시대 (1945-1960) 그리고 개혁과 재편의 시대(1960-2000)로 대별될 수 있다. 이런 역사적인 맥락 속에서 어떻게 한국장로교회 총회가 지금까지 이어져 왔는가를 고찰하려고 한 것이 본서의 목적이다. 이를 위해서는 장로교 총회는 물론 교회가 처한 시대적 역사적 환경도 충실히 반영되어야 할 것이라고 본다. 
  

한국 최초의 소래교회  
 
 1884년 9월 20일 중국에서 활동하던 북장로교 소속 의료선교사 알렌이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로 한국에 입국하면서 개신교 선교가 공식적으로 시작되었다. 그 다음해 1885년 4월 5일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그리고 스크랜톤이 입국하여 한국의 선교는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로부터 4년 후인 1889년에 헨리 데이비스와 그의 누이동생 메리 데이비스가 내한함으로써, 호주 장로교 선교가 시작되었고, 1892년에는 언더우드 선교사의 노력의 결실로 남장로교 선교사인 레이놀즈, 전킨, 테이테 선교사가 파송되어 남장로교의 한국 선교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남장로교 선교가 시작된 이후 6년 후인 1898년에는 캐나다 장로회가 공식적으로 한국선교를 시작하였다. 한국에 파송된 장로교 선교회는 1893년 장로교 공의회를 일찍이 형성하여 한국의 복음화를 위해 협력선교를 자신들의 선교의 모토로 삼았다. 4개의 장로교 선교회는 한국선교를 위해 구체적인 계획을 설정,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장로교 공의회는 네비우스 선교정책, 성경번역, 자립, 자치, 자전을 통한 한국인에 의한 복음전도 그리고 효율적인 복음의 확산을 위해서 선교지 분할 협정을 채택하였던 것이다. 선교사들의 이런 선교정책이 대단한 효과를 거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성경중심의 선교에 기초한 선교정책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은 1890년 중국 산동성에서 활동하던 존 리빙스톤 네비우스 선교사의 조언을 받아들여 네비우스 선교정책을 한국 장로교 선교정책으로 채택했다. 네비우스 선교정책이 성공을 거둔 것도 저변에 뿌리내린 성경공부 때문이며 성경번역이 조기에 완성된 것도 선교사들과 한국인들의 성경에 대한 사랑 때문이며 자립, 자전, 자치가 성공한 것도 성경공부를 통한 개혁주의, 복음주의 신앙에 기초하였기 때문이다. 감리교와는 달리 장로교는 성경중심의 선교가 상당한 결실을 맺었으며 초기의 한국교회를 성경중심의 교회로 형성하는 계기를 마련하여 주었던 것이다. 일부 진보주의 한국의 신학자들과 교회사가들은 한국의 초기 선교사들이 1930년대 길선주 목사나 박형룡 박사와는 달리 상당히 개방적인 성경관을 소유하였다고 주장하는데 이것은 근거 없는 주장이다.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 특별히 평양을 중심으로 한 서북지역 주재 선교사들과 평양신학교 신학 교육을 맡았던 선교사들은 구학파 출신으로 상당히 보수적인 신앙을 소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둘째, 초기 선교가 성공한 것은 균형 잡힌 선교를 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단순히 복음만 전하지 않았다. 복음전파와 함께 의료선교 및 교육선교를 중요한 선교정책으로 삼고 추진하였다. 선교초기에 의료와 교육은 상당히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학교와 병원의 설립은 천주교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쇄신하고 개신교에 대한 긍정적인 이미지를 심어주었다. 1914년까지 선교사들은 14개의 병원을 설립하였고 1910년대까지 37개의 학교를 설립하였다. 더불어 1900년에 신약성경 시험역본을, 1906년에 신약성경 공인역을, 그리고 1911년에 구약성경의 번역을 완성하여 출간하였다.

 

 이북지역의 교회는 평양의 마포삼열을 비롯하여 맥코믹신학교 출신 선교사들을 중심으로 원산과 함경도 지역에서는 캐나다 장로교 선교사들을 중심으로, 중부지역에는 언더우드와 그의 매서인들을 중심으로, 부산과 경남은 호주 빅토리안 장로교 선교사들과 베어드를 중심으로, 경상도 지역에서는 게일, 베어드, 아담스 그리고 그 후에 입국한 호주 장로교 선교사들을 중심으로, 전라도 지역은 레이놀즈, 전킨, 테이트를 비롯한 남장로교 선교사들을 중심으로 교회가 설립되기 시작하였다. 이들 장로교회 선교사들을 통해 복음이 전국적으로 놀랍게 확산되었고, 자연스럽게 장로교회는 한국선교를 주도하는 중심 세력으로 굳게 자리를 잡아갔다. 이즈음에 서상륜, 김흥경, 박태선, 유흥렬이 경성에서, 신화순, 도정의, 이춘경 등이 고향 김포에서 전도를 하여 교회를 개척하여 갔다.

 

 1883년에 소래교회, 의주교회가 설립되었고, 서울 경성지역에는 새문안교회(1887), 남대문교회(1887), 승동교회(1893)가 세워지고, 연동교회 전신 연못골 교회(1894), 행주교회 그리고 김포읍교회가 각각 1894년에 설립되었다. 감리교 선교구였던 강원도에는 1901년에 와서야 양양군의 양양교회(1901)를 시작으로 춘천중앙교회(1902)등이 설립되기 시작하였다. 강원도 지역에서는 장로교의 웰본 선교사와 감리교의 하디선교사가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역시 감리교 선교구였던 충청지방은 경성지방이나 북한지역보다 교회설립이 늦었다. 1901년에 와서야 청주 강서에 신대교회가 그리고 2년 후인 1903년에 괴산에 괴산읍교회가 설립되어 교회의 틀을 형성하기 시작하였다.

한편 영남권의 선교는 상당히 일찍 진행되었다. 1893년에 한위량, 소안론, 호주 빅토리안 선교회 선교사의 노력의 결실로 설립된 초량교회와 부산진교회를 시작으로 부산지역에 교회들이 세워지기 시작했고, 1895년 대구에 처음으로 베어드와 아담스가 이 지역 선교에 헌신한 결과 수많은 교회들이 설립되고 놀라운 복음전파가 이 지역에서 나타났다. 대구 제일교회의 전신인 대구의 남성정교회(1894), 울산의 병영교회(1895), 밀양의 춘화교회(1897), 함안의 신혼교회(1897), 김해읍교회(1898), 합안군 이령교회(1899), 군위군 매성교회(1900) 그리고 영천군 조곡리교회(1900)가 1900년 이전에 영남권에 설립된 교회들이다. 특히 평양대부흥운동을 거치면서 대구는 남부지역 교회 성장을 견인할 만큼 놀라운 성장을 이룩했다.

 1893년부터 전라도 지역에도 테이트, 레이놀즈, 전킨 등의 헌신적인 선교 노력에 힘입어 박해 가운데서도 놀랍게 복음이 전파되기 시작, 전주서문교회를 시작으로 군산, 김제, 목포, 광주, 순천에 교회들이 세워지기 시작했다. 
  

평양신학교 
  
 이 기간 동안은 한국교회가 가장 놀라운 성장을 이룩하고, 교회로서의 틀을 다진 기간이기도 했다. 1895년의 청일전쟁, 1904년의 러일 전쟁, 1905년의 을사조약, 1910년의 한일합방은 이 민족에게 위기를 가져다 준 참으로 불행한 사건들이었지만, 동시에 이 민족이 소망을 하나님께만 두도록 하는 자극제가 되기도 하였다. 당시는 러시아와 중국, 일본과 미국 등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주변의 강대국들이 한반도에서 기득권을 차지하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러시아는 태평양으로 이어지는 아시아 발판기지로, 중국은 한국에 대한 전통적인 기득권으로, 패권주의 일본은 대륙의 발판기지로 그리고 미국은 동아시아의 전초기지로 한반도를 노리고 있었다. 미국의 외교 전문가 포스터가 말한 대로 당시 한반도는 강대국들이 노리고 있는 ‘나봇의 포도원’이었다. 이러한 시대에 영적각성운동이 한국에서 일어났던 것이다. 1903년의 원산부흥운동, 1907년의 평양대부흥운동 그리고 1909년의 백만인 구령운동이 바로 그것이었다. 이들 한국에서 일어난 부흥운동은 한국교회의 성장과 틀을 다져준 한국교회사상 가장 중요한 축복의 사건이었다.

 

 사경회 운동은 한국교회 부흥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다.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이 발흥했던 것은 1907년 1월 2일부터 15일까지 진행된 사경회 기간 동안이었다. 1890년 네비우스 선교정책을 채택하고 바로 그 해부터 언더우드 집에서 네비우스 선교정책의 일환으로 사경회가 시작된 후 사경회는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한국장로교 선교의 중요한 근간을 형성했다. 일 년에 한차례 혹은 두 차례씩 일주일에서 한 달 동안 열리는 사경회에서 전국의 거의 모든 교우들이 오전에는 말씀을 공부하고 정오에는 기도하고 오후에는 전도를 나가고 저녁에는 이들을 대상으로 전도 집회를 열었다. 이 전도 집회는 기성 신자들에게는 영적각성의 기회가 되었고, 새 신자들에게는 주님을 영접하는 계기가 되었다. 함께 모여 말씀을 체계 있게 연구하고 개인과 교회와 민족을 위해 진심으로 기도하는 가운데 성령께서 말씀을 통해 말씀과 더불어 놀랍게 역사하셨다. 한국교회의 대부흥운동은 이러한 사경회 운동과 매우 밀접하게 연계되어 진행되었다. 1903년의 원산부흥운동도 하디를 주강사로 한 1903년 8월 24일부터 30일까지 열린 원산 기도회에서 시작된 것이다. 이 기도회는 말씀을 공부하고 함께 기도하는 일종의 선교사 사경회였다. 역사적인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도 1907년 1월 2일부터 15일까지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열린 평안남도 도 사경회에서 일어났다. 1890년부터 1910년까지 한국장로교회는 말 그대로 폭발적인 성장을 하였다. 이 기간 동안에 세례교인 수는 매년 30%씩 증가하였다. 이처럼 부흥운동이 성경공부를 중심으로 하는 사경회에서 기원되었다는 사실을 간과하여서는 안 된다.

 

 이들 부흥운동은 한국교회의 성장을 가속화시킨 중요한 요인이었다.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이 발흥하던 그 해 한국의 장로교 독노회가 조직되어 장로교회가 민족교회로서 발돋음 할 수 있게 되었고, 1909년 백만인 구령운동이 일어나 민족복음화가 진행된 후 1912년 총회가 조직되었다. 러일전쟁부터 한일합방 그리고 이듬해 105인 사건에 이르기까지 한반도는 위기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이와 같은 민족의 위기 속에서 일련의 부흥운동이 발흥하고, 교회가 틀을 다짐으로써 한국교회가 양적, 질적으로 한 단계 도약할 수 있는 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이런 일련의 주변 환경은 한국인으로 하여금 진정한 이 민족의 미래를 인도하실 분은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며, 그 분만이 참된 소망이라는 확신을 심어주었다. 이 시대 시대적 환경은 정치적 독립 소망에서 기독교의 영적 소망으로 방향을 전환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돌이켜 볼 때 한국교회의 성장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역사에 개입하고 계셨던 것이다.

 

이런 한국교회의 급성장은 한국장로교회의 제도적인 틀을 촉진시켜 1907년 독노회 설립에 이어 1912년 총회의 설립으로 이어지는 자연스런 분위기를 만들어주었다. 드디어 1907년 9월 17일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평북, 평남, 황해, 함경, 경충, 경상, 전라대리회가 모여 대한예수교장로회 독노회를 구성하고 그로부터 5년 후인 1912년 9월 1일 평양장로회신학교에서 총회를 결성하기에 이르렀다. 총회의 결성은 한국개신교 선교가 시작된 지 28년만의 일이며 노회가 결성된 지 5년만의 일이다. 미국의 장로교가 1706년에 노회가 결성된 지 83년만인 1789년에 가서야 총회가 결성된 것에 비하면 한국의 장로교총회는 상당히 조기에 형성되었던 것이다. 총회의 결성을 통하여 한국장로교회는 한국민족의 교회로서 공식 출범하게 된 셈이며 장로교 성장의 도약을 위한 틀을 마련한 셈이다.
1884년부터 1912년까지 한국장로교회의 성장을 주도한 것이 평양을 중심으로 한 이북 지역이었지만 어느 정도 지역적인 균형을 맞추면서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다음은 1910년의 한국 장로교회의 지역별 세례 교인 수이다.
 
 총회가 설립되던 1912년부터 1945년 해방이 되기까지 한국장로교회는 3?1운동, 자유주의 도전, 신사참배문제 등 일련의 위협적인 사건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평양신학교를 중심으로 상당히 안정된 성장을 계속하고 있었으며 한국개신교를 주도하는 교단으로 손색이 없을 만큼 괄목할 만한 성장을 계속하였다. 부흥운동을 통해 한국교회가 놀랍게 성장하자 일제는 교회를 경계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 한국장로교회는 많은 어려움을 만났다. 1911년 105인 사건, 1919년 3·1운동, 1935년부터 1945년까지 신사참배 강요와 일제의 신민화 정책으로 인한 직 간접적인 교회의 탄압은 그 대표적인 사례들이다. 1911년에 발생한 소위 105인 사건은 일제가 기독교를 탄압하고 궁극적으로 선교사들을 한국에서 추방하려는 전혀 근거 없는 음모였다. 이후 선교사들은 일제의 한국 통치를 긍정적으로 보던 이전의 견해에서 돌아서 일제의 한국 통치에 대해 내심으로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기 시작했다. 종교와 지역과 신분과 연령을 초월하여 이 민족이 결집하여 민족의 독립을 전 세계에 선포했던 1919년 3?1운동은 기독교의 힘이 하나로 모여 태동된 자랑스런 민족의 독립운동이었다. 이로 인해 교회가 엄청난 피해를 입었지만 1919년 삼일운동이라는 민족적 위기 속에서도 한국장로교회는 흔들리지 않고 전국적인 교회 성장을 주도했고, 일련의 사회개혁운동도 전개했다. 금연, 금주를 비롯, 절제운동, 농촌운동, 청소년운동, 의료, 고안원운동 등을 통해 일제의 수탈로 인한 농어촌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길선주와 김익두는 부흥운동을 통해 어두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백성들에게 우리의 참된 소망이 어디에 있는가를 선명하게 제시하였다. 이런 가운데서도 총회는 국내외 선교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한국교회는 선교하는 교회였다.

 제주도에 이기풍 선교사를 파송한 이후 일본, 간도, 중국, 시베리아 선교를 총회적인 차원에서 전개하여 처음부터 한국장로교회는 선교하는 교회로서의 진면을 보여주었다. 당시 일본의 식민지 수탈로 인한 피폐된 경제 상황 속에서도 교회는 복음의 빚진 자의 사명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1930년대 일기 시작한 자유주의 도전 앞에서도 교회는 결연하게 대처, 전통적인 신앙을 재확인하고 처음 선교사들로부터 전해 받은 정통개혁주의 신앙을 계승하려고 하였다. 그 후 찾아온 신사참배 요구로 한국교회가 너무도 쉽게 배도의 길을 택했을 때에도 한국장로교회는 결연한 자세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1938년 한국장로교 총회 역시 집요하고 줄기찬 일제의 신사참배의 강요 앞에 무너지고 말았다. 그 후 한국장로회는 여느 교단처럼 그 정통성을 상실하고 말았다. 만약 이 시대 주기철, 손양원, 박관준, 한상동을 비롯 신사참배 강요 앞에 끝까지 굴하지 않았던 양심의 소리가 없었다면 한국교회는 일제에 의해 도태되었을 것이다. 이들은 참으로 한국장로교회의 자랑일 뿐만 아니라 한국교회의 영광이었다.

 

1936년 5월 교황청이 신사는 종교적인 예식이 아니라 국민의례일 뿐이라는 교황청의 발표가 있은 후 한국천주교는 신사참배를 수용하고 제사제도도 수용하면서 배도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 이듬해 1937년 한국감리교회가 무너졌고, 다시 1938년 제 27회 총회에서 총회장 홍택기 목사와 총대들이 신사참배를 가결했다. 이런 가운데 외롭게 생명을 내걸고 신사참배를 반대했던 이들은 한국교회의 신앙의 자존심을 지켜준 이 시대 폴리갑이었고, 존 낙스였다. 1938년 이후 한국장로교회가 정통성을 상실하고 일제의 신민화 정책의 시녀 역할을 자처하고 있을 때 이들은 다니엘과 사드락 메삭 마벳느고 친구의 신앙으로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맞섰던 것이다. 기실, 이들 외에 얼마나 많은 양심의 소리들이 일선 현장에서 신사참배문제와 고투했었는가? 해방 후 무너진 제단을 다시 재건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생명을 무릅쓰고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 앞에 당당히 맞섰던 순교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초대교회 터툴리안이 말한바 “순교는 교회의 씨”라는 진리는 여전히 한국교회, 특별히 한국장로교회 안에 그대로 적용될 역사적 진실이었다.

 획일화시킬 수는 없지만 끝까지 신앙을 지킨 이들 대부분이 처음 전해 받은 성경적인 신앙을 그대로 간직하려고 했던 이들이었다는 사실이다. 바른 신앙이 바른 행동을 태동시킨 것이다. 참된 신앙은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행동으로 이어지도록 되어 있다. 그런 면에서 신사참배는 한국교회의 시금석이었고, 이 시대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끝까지 신앙을 지킨 이들이야말로 이 시대 민족의 자존심을 지켜준 주인공들이었다.

 이 시대 한국교회는 생존을 위해 싸워야 하는 상황에서 본래 가졌던 직접선교와 간접선교의 균형, 곧 복음전파와 사회적 책임을 동시에 구현해야 한다는 역사적 소명에 충실할 수 없었다. 1920년대에 접어들면서 네비우스 선교정책의 정착, 종말론 중심의 타세적인 신앙의 강조, 사경회의 확산, 신사참배문제 등 시대적인 요인과 선교정책의 변천으로 말미암아 전기(1884년에서 1912년까지)에 찾아 볼 수 있었던 복음의 균형 잡힌 발전이 상당히 줄어들면서 교회의 사회적인 책임을 간과하는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특별히 1930년대 총회가 일련의 자유주의의 도전과 신사참배의 문제로 갈등을 겪던 그 시대에 두드러졌다.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라는 민족적 위기 앞에 교회는 대 사회적인 문제에 귀를 기울일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민족적 위기 속에서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교회를 친히 이끄시고 성장시키셨다. 이 기간 동안 한국장로교를 주도한 곳은 평양신학교가 자리 잡고 있던 평양을 비롯하여 서북지역이었다. 특히 이 기간 동안에 평양은 한국장로교의 센터 역할을 톡톡히 감당했다. 총회설립 후 1942년까지 31회의 총회 중에서 22회가 북한에서 개최되었으며 총회장 31명중에서 거의 70%인 20명이 이북 출신이었다. 선교사 출신 4명의 총회장을 제외한다면 단지 7명만이 남한 출신이었던 것이다. 총회의 개최지나 총회장의 연고지만을 가지고 평가하는 것이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만큼 북한지역이 한국장로교회의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노회의 수에 있어서도 북한지역이 단연히 앞서고 있었다. 북한에 14개의 노회가 있었으며 남한에 10개 그리고 만주에 4개의 노회가 있었다. 교역자 수에서도 분명히 차이가 있다. 1940년을 기준으로 할 때 장로교 전체 925명의 교역자 중에서 북한에 551명 남한에 374명이 있었다. 이것은 북한의 교세가 단연 남한의 교세를 압도하고 있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북한의 장대현교회, 서문밖교회, 창동교회, 산정현교회가 교세에서 서울의 새문안교회, 승동교회, 연동교회, 남대문교회를 압도하고 있었다. 이 기간에 지역별 교세는 다음과 같다.
   

 위의 통계가 보여주듯이 1912년부터 1945년 해방되기까지 한국장로교회의 세례인 수 110,002명중 북한 지역에 약 67%에 해당하는 74,528명이 있었다. 그러나 경기. 충청, 경상도, 전라도 지역도 성장속도에 있어서는 북한 지역의 교회성장에 크게 뒤지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남쪽지역에서 두드러지게 급성장한 곳은 경상도 지역이다. 1912년 총회 설립 시에 7,817명이던 세례교인수가 1938년에는 무려 22,697명에 이르며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그러나 신사참배문제 등으로 1942년에 16,284명으로 줄어들었다. 지역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었지만 대체로 1945년 해방 이전까지는 북한의 교회가 한국장로교회를 주도하고 있었다는 것은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그러나 해방이후 이 상황은 더 이상 계속되지 않았다.
  

 해방 이후 한국장로교회는 정치적인 분단에 의하여 불가피하게 남쪽과 남쪽으로 나뉘어졌다. 해방 이후 한국장로교회는 자신들의 문제를 정립하기도 전에 신사참배와 자유주의 문제로 일련의 대립과 논쟁의 시기를 맞이하여야 하였다. 1946년에 남쪽 총회에 의하여 조선신학교가 공식적으로 총회의 인준을 받았고 이에 반대하던 출옥한 신사참배 반대자들이 중심이 되어 진해에 고려신학교를 설립하였다.

 1947년에 조선신학교의 자유주의 교육을 우려한 51명의 복음주의 학생들은 조선신학교의 진보주의 신학 문제를 총회에 건의하게 되었고 총회는 이 문제를 진지하게 다루지 않을 수 없었다. 그 해 만주에서 박형룡 박사가 귀국하면서 한국의 장로교회는 전통적인 신앙을 고수하려는 보수주의 세력과 세계적인 학문의 조류를 과감하게 수용하려는 진보주의자들 사이에 일련의 신학적인 논쟁이 발생하였다. 진보주의 노선에서는 김재준 박사가, 보수주의 노선에서는 박형룡 박사가 자리 잡고 있었다.

  이 신학적인 논쟁은 신학교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총회의 지도자들과 교회들이 중립을 지키기에는 이 신학적 논쟁이 너무도 심각하였다. 계속된 논쟁 후 한국장로교회는 세 차례의 대 분열의 아픔을 겪어야 하였다. 신사참배문제로 인한 1952년의 고신총회의 분열, 조선신학교 문제로 인한 1953년 기장의 분열은 한국교회의 뼈아픈 사건이었다. 그러다 1959년에 W.C.C.문제로 인하여 또다시 W.C.C.를 옹호하는 통합측이 분열 한국장로교회는 세 번 째 분열을 경험했다.

  1950년대 한국장로교회의 분열을 두고 한국교회사가들은 평가를 달리하고 있다. 적지 않은 이들이 자기 교단이나 교파 중심적으로 분열의 원인을 분석하고 교파주의적이고 교단사적인 평가를 내리는 것이 일반적이다. 물론 자신이 서 있는 교단과 교파를 넘어설 수 없겠지만 이제 한국교회는 객관적이고 공정한 평가를 내려야 할 역사적 시점에 와 있다. 분명 1952년의 분열의 원인은 신사참배 문제였고, 1953년 기장의 분열은 조선신학교와 신학적 변천, 그리고 1959년 통합의 분열은 WCC와 에큐메니칼이 분열의 일차적인 요인들이었다. 그 외 다른 여러 가지 요인들이 작용한 것이 사실이지만 그것들은 부차적인 요인들이었다.

 이제 한국장로교회는 과연 자신이 서 있는 교단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면서도 한국교회와 사회 앞에 자성의 기회를 찾아야 할 것이다. 확실히 세 차례의 분열을 맞은 후 한국장로교회는 서로 다른 길을 걷기 시작했다. 반세기가 흐른 오늘의 시점에서 볼 때 고신, 기장, 통합, 그리고 본 교단은 신학적 방향을 달리하며 교회를 이끌어가고 있음이 분명하다. 다만 본 교단과 고신의 경우 큰 신학적 차이 없이 서로 유대를 가지며 지내오고 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각기 가는 방향이 다르다.

 1950년대 한국장로교회가 경험한 일련의 분열의 경험을 통해 한국장로교회는 해방 이전에 가졌던 통일성을 잃어버리고 문화적으로 교회에 대한 부정적인 인상을 심화시키고 말았다. 그리하여 한국교회는 사회적인 주도력을 점점 상실하게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실수를 통해 거룩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한 도구로 사용하셨다. 1945년부터 1960년까지 한국장로교회는 꾸준하게 성장하여 한국개신교의 주도적인 위치를 지켜갔다. 물론 이 기간 동안에 한국 장로교회는 북부를 제외하고는 고른 성장을 하였다. 1953년에 예수교장로교 세례인 수는 250,000명이고 기장 세례인 수는 16,944명이었다. 고려파를 합친다면 장로교회의 세례교인 수는 10년 동안에 약 3배가 증가한 셈이다. 이처럼 한국교회는 내외적으로 6.25전쟁, 교회분열, 신학적 논쟁, 이단의 등장 등 일련의 어려운 문제들을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꾸준하게 성장을 계속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개입이라는 사실 외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총신대학교 100주년 기념관 

 

 이 기간 본 교단은 한국교회 성장을 견인하는 중심축이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광활한 양지캠퍼스 조정, 강남 대치동의 총회회관 건립, 한국 전체를 하나로 만든 통일찬송가 발간 등을 통해 한국교회 안에 중요한 리더쉽을 구축하며 성장을 거듭했다. 1960년 이후 새로운 환경 속에서 신앙의 정체성을 잃지 않으면서 국내외 선교를 통해 한국교회 성장을 견인했던 것이다.

 분명 1960년대 이후 한국교회는 새로운 시대를 맞았다. 1950년대에 일련의 분열을 겪은 한국장로교회는 신학적 색깔을 분명히 표방하면서 자신들의 독자적인 길을 걸어왔다. 자신들의 정체성에 따라 한국장로교회는 토착화신학, 신정통주의 그리고 정통주의로 대별되기 시작하였다. 일찍이 진보주의를 표방하던 기장은 1960년 이후 기독교 사상 등 일련의 신학지를 통해 자신들의 개방적인 신학적 입장을 뚜렷이 표방하면서 진보주의 신학을 추구하였다. 1960년대 이후에 발흥한 토착화 논쟁, 민중신학 등 일련의 신학적인 작업을 통하여 전통적인 장로교 신학을 수정하고 한국적 장로교라는 기치 아래 토착화신학을 추구하기 시작하였다. 이점에 있어서는 감리교와 맥락을 같이하였다.

 한편 통합측은 에큐메니컬이라는 세계적인 교회 연합운동 속에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파악하고 W.C.C.가 추구하는 신정통주의를 자신들이 걸어갈 새로운 장로교 신학의 방향으로 정립하기 시작하였다. 획일화 시킬 수는 없지만 상당수의 교수들이 신정통주의야말로 현대 한국 장로교의 신학적 방향이라고 생각하였다. 통합의 일부의 교수들과 목회자들은 민중신학 등 토착화 신학에 매력을 느끼기도 하였다. 1960년 이후 한국장로교회는 더 이상 신학적인 통일성을 찾아 볼 수 없다. 일련의 장로교 분열을 통하여 이전에 갖고 있던 신학적 통일성을 상실하고 만 것이다. 한철하 박사, 마삼락 선교사 등 이런 신학적인 입장에 반대하는 소수의 사람들은 아세아연합신학원을 설립하여 좀더 복음주의적이고 보수적인 입장에서 자신들의 신학을 표방하기 시작하였다.

 1960년 이후에도 본 총회는 여전히 성경이 오류 없는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정통 개혁신학에 기초하여 신학교와 교단이 운영되어 왔다. 본 교단은 장로교의 전통적인 입장을 고수하기 위하여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본 교단은 평양신학교의 사상을 전수하려는 충실한 장로교 교단이라는 자의식을 갖고 초대 선교사들이 전수한 성경중심의 신앙을 고수하면서 현대의 변천하는 한국의 상황에 복음을 능동적이고 효과적으로 전하기 위하여 끊임없는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우리의 신학적 입장은 “수정되지 않은 칼빈주의”라는 표현이 적합할 것이다. 구 프린스턴 신학자들이 자신들의 신학적 정체성을 이야기할 때마다 자신들은 구 칼빈주의를 계승한다고 고백하였던 것처럼, 본 교단은 수정되지 않은 정통 칼빈주의를 교단의 신학적 입장임을 천명하고 있다. 이것은 성경의 절대적 권위를 존중하면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포함되어 있는 역사적 개혁주의 신앙고백을 계승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 한국의 장로교회의 남아있는 과업은 옛 프린스턴의 찰스 핫지가 성공적으로 했던 것처럼 신학교와 총회를 긴밀하게 연결하여 한국장로교회를 위한 신학교, 신학교를 구심점으로 하는 한국장로교회를 형성하는 것이다. 신학교가 교회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신학교는 신학교로서의 생명을 다한 것이다. 신학교는 한국교회에 도움이 되어야 하며 또한 그런 방향에서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지난 100년간의 총회의 역사는 우리에게 훌륭한 교훈을 제시한다. 우리의 신앙의 선조들로부터 성경 중심의 신앙을 전수받은 한국장로교회는 성경의 근본신앙을 파괴하는 현대주의를 관용하여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면서도 복음전파와 교회의 대 사회적, 민족적, 문화적 책임을 동시에 완수하여야 할 사명을 부여받았다. 지난 총회 100년의 역사를 돌아볼 때 한국장로교회는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 1909년 백만인구령운동, 1920년 김익두 부흥운동, 1950년대와 1970년대 대중전도운동에 이르기까지 한국교회의 놀라운 부흥운동을 공유하였다. 부흥운동을 통해 한국교회 성장을 견인하는 구심점의 역할을 톡톡히 감당한 셈이다. 특별히 통합측이 분열되어 나간 후 본 교단은 1만 교회운동과 국내외 선교에 전념하여 놀라운 교세의 신장을 이룩할 수 있었다. 한국교회가 침체를 맞고 있는 이 시기에 본 교단은 그 옛날의 복음의 생명력과 구령의 열정을 회복하여 다시 한번 복음전도에 매진하여야 할 때가 되었다.

 복음전파 노력 못지않게 교회가 소홀할 수 없는 것이 복음의 대 사회적 문화적 민족적 책임 구현이다. 근래 교단 일각에서 여기에 대한 자성이 일면서 이 일에 자의식을 가지고 동참하는 교회들이 상당히 늘고 있음은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예를 들어 오랫동안 반포사회복지관을 운영해온 옥한흠 목사의 사랑의 교회(현 오정현 목사)나 안산동산고등학교를 설립하여 기독교학교의 새로운 장을 열어간 안산동산교회(김인중 목사), 그리고 근래 국가적인 태풍과 재난이 있을 때마다 헌신적으로 앞장서는 광염교회(조현삼 목사)는 이 일에 있어서 본 교단만 아니라 한국교회의 중요한 모델 역할을 충실히 감당해왔다. 이들 외에도 우리 교단의 수많은 교회들이 복음전파와 더불어 대사회적 책임 구현을 위해 피나는 노력을 아끼지 않고 있는 것은 참으로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지금에 만족하지 말고 앞으로 본 교단은 이 일에 있어서 사회와 민족을 선도하는 구심점 역할을 충실하게 감당해야 할 것이다. 성경적인 신앙이 삶의 실존 속에서 표출되지 않는다면 그 신앙은 얼마가지 않아 생명을 상실한 것이다. 교회는 세상 속에서 존재하고 있다. 한국장로교회는 개혁주의의 균형 잡힌 실천이 결여되었기 때문에 교회가 사회적인 책임을 다하지 못하였다. 미국의 개혁파 복음주의 역사가 나단 해취(Nathan Hatch)가 지적한 것처럼 “그리스도의 복음은 단순히 교회의 영역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고 사회를 포용하며 개인의 경건만 아니라 사회의 거룩함까지 포함하여야 된다.” 기독교인의 신앙을 표방하면서도 교회의 사회적인 책임을 외면하는 이런 이중적인 태도는 청교도들의 신앙관과는 차이가 있다. 청교도들은 경제, 직업, 사회, 정부 등 삶의 모든 분야를 성경적인 규범 아래로 가져가려는 일에 헌신적이었다. 한국장로교회도 세상 속에서 교회의 책임을 총체적으로 완수하여야 할 것이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총회 100년사를 점검하면서 한국장로교회사가 반성하며 얻어야 할 중요한 교훈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장로교의 역사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역사가 없는 교회, 역사를 도외시한 교회는 성장할 수 없고 존재할 수도 없다. 한국장로교회는 한국장로교회의 역사를 정리하여야 할 중요한 시점에 와 있다. 정확한 역사사료에 근거한 한국장로교 역사의 정립이 있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총회적인 차원에서 역사사료를 수집, 정리할 필요가 있다. 뿐만 아니라 한국장로교회의 역사 정리를 위해서는 지역을 초월하여 총회 산하 전국교회들이 총체적으로 협력해야 할 것이다.

 총회 100년을 마무리하면서 우리가 발견하는 분명한 사실은 선교 초창기나 1959년 통합이 분립된 후 너무도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본 교단이 짧은 기간 동안 그토록 놀라운 성장을 이룩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성경관을 비롯한 역사적 청교도 개혁신앙을 견실하게 견지해왔기 때문이다. 성경 중심의 네비우스 선교정책과 초기선교사들의 개혁파 복음주의 신앙이 한국장로교회의 성장의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자립, 자치, 자전의 실현도 성경중심의 신학교육이 그 저변에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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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로교회사  / 장로 정치의 성경적 배경 


성경에 나타나는 교회 정치의 형태가 무엇이었는지 살펴보자.

 

스데반에 의하면, 구약 시대, 곧 모세 시대에는

"광야 교회"가 있었다(행 7:38).

  

이 교회는 신약 교회의 모형이며,

어떤 면에서 신약 시대의 교회와 동일한 것이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시대 경륜과 교육 방법에 있을 뿐이다.

  

그래서 바울은 구약 교회와 신약 교회의 연결성을 논하면서,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라고 하였다(갈 3:29).

  

그리고 그는 신약 시대의 교회를

구약에서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감람나무에 비유하면서,

이방인의 교회가 구약 이스라엘 백성의 교회에

접붙임을 받았다고 하였다(롬 11:17~21).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교회는 "사도들과 선지자의 터"(엡 2:20),

곧 사도들과 구약의 배경 위에 세워졌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성경의 가르침을 통하여,

우리는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은 신약 교회의 모델이며,

구약 시대의 교회 정치 사상은 신약 시대의 정치 모델이 된다고 믿는다. 

- 오덕교 <장로교회사>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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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 정치  장로교회사


장로 정치주의자들은

계급적인 구조가 교회를 구성할 수도 없으며

교회의 본질이 될 수도 없다고 믿는다.

 

교회 구조는

그리스도의 공동체를 섬기기 위하여

존재하기 때문이다.

  

장로교도들은

모든 교회의 구성원의 만인 제사장직에 근거하여

모든 성도가 하나님 앞에 평등하다고 믿는다.

 

그리고 장로와 장로 사이,

 교회와 교회 사이의 평등을 강조한다.

   

장로교회는 이와 같이 회중교회의 정치의 자율과

평등 사상을 수용하지만,

모든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에

교회는 연합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이 점이 장로교회와 회중교회와의 차이점이다.

 

또한 회중교도처럼 교회와 정부 영역을 구분하지만,

두 기관이 서로 적대적인 관계에 있다고 보지 않는다.

 

두 기관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서로 돕는 기관이며,

그 권위는 서로 동등하다고 본다.

  

장로교도는 교회의 연합을 강조하지만,

영국의 성공회 교인이나

로마 천주교도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

  

성공회나 로마 천주교회는 교회의 전통에 초점을 맞추고

니케아 회의 이전의 교회가 어떤 정치를 취하였는가에

관심을 두지만,

 

장로교도들은

성경이 어떤 교회 정치 형태를 취하고 있는지에

초점을 둔다.

  

교회가 성경을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교회를 다스려야 하기 때문이다. 

 

- 오덕교 <장로교회사>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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