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로교회사] 스코틀랜드 장로교회

 

1. 스코틀랜드의 장로교회는 존 낙스로부터 시작된다. 칼빈이 세운 제네바 아카데미에서 수학한 존 낙스는 1555년 스코틀랜드로 돌아가 6개월간 스코틀랜드 전역을 돌면서 개혁신앙을 전파한다. 낙스가 고향방문을 하고 있을 때, 칼빈은 제네바에서 영국 피난민을 위한 교회를 열었다(1555년 11월 1일). 나중에 낙스는 이 교회를 섬기기도 한다.

 

낙스가 제네바로 돌아간 후, 정치지도자들은 1557년 12월에 첫 번째 계약(the first bond)에 서명함으로써 장로교회 운동을 시작한다.

 

2. 1559년 낙스가 다시 귀국하여 개혁운동을 펼치고 있을 때, 프랑스의 군대가 파견되어 개혁자들을 소탕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곤경에 빠진 낙스와 개혁자들을 구출하기 위하여 영국의 군대가 파견되어 프랑스군과 영국군이 싸우게 되었다. 그러던 중 1560년 6월 귀즈가의 메리가 사망함으로써 영국과 프랑스는 7월 6일 에딘버러 조약을 맺고 스코틀랜드에서 철수한다. 그해 8월 낙스는 동료들과 함께 교회의 전면적인 개혁을 위하여 의회에 청원서를 제출하였고, 의회는 낙스가 제출한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25개조항)를 받아들이면서 로마교회를 포기하고 장로교회를 인정하게 되었다. 그해 12월 20일에 에딘버러에서 스코트랜드 장로교회를 조직하게 된다. 그리고 1560년 총회에서 낙스가 작성한 제 1치리서를 채택한다.

 

3. 그러나 1561년 귀즈가의 메리를 계승한 스콧트의 메리가 왕이 되면서 로마교회를 회복하려 하자 다시 한번 교회는 곤란에 봉착하였으나 결국 그녀가 1567년에 폐위되고 한 살 밖에 안 된 제임스 6세가 왕위에 오르면서 스코틀랜드는 강력한 장로교회 국가가 되었다.

 

4. 불행히도 1572년 낙스가 사망하면서, 어린 제임스 6세의 섭정이었던 모톤 백작이 다시 스코틀랜드에 감독주의로 돌이키려 했을 때 또 다시 위기를 겪는다. 이때 장로교회를 견실하게 세워갔던 지도자가 앤드류 멜빌이다. 그가 만든 제2치리서는 1578년 총회에서 채택이 된다.

 

5.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이 후사가 없이 죽자(1603), 스코틀랜드의 제임스6세가 영국의 왕위를 계승한다(제임스1세). 그는 영국의 청교도와 스코틀랜드의 장로교도를 모두 박해하였고, 그의 아들 찰스1세는 청교도 박멸운동을 전개하고 스코틀랜드에는 영국국교회를 따를 것을 강요하였다. 1637년 7월 23일 장로교회가 폐지되고 영국교회의 의식에 따라 예배가 실시되던 날, 스코틀랜드는 봉기하여 장로교회를 사수할 것을 결의하는 “국가계약”을 맺었다.

 

6. 이 국가계약은 찰스1세에게는 선전포고였으므로, 그는 스코틀랜드와 싸우기 위하여 의회를 열었는데, 이때 많은 청교도들이 의회에 진출하게 되자, 왕이 의회를 해산하는 과정에서 의회파와 왕당파 사이에 싸움이 일어났다. 이 때 스코틀랜드는 영국과 아일랜드와 함께 신성 동맹과 계약을 맺고 스코틀랜드에 장로교 신앙을 보존하고, 영국과 아일랜드 교회가 성경을 따라 개혁할 것을 약속하였다. 그리고 1643년의 웨스트민스트 회의에 참석한다.

 

7. 찰스 1세가 1647년 1월 의회군에 체포되어 처형되고, 독립교도인 올리버 크롬웰이 지배하면서 독립(회중)파를 편애하자 반감을 느낀 스코틀랜드는 오히려 민족주의를 발흥하였다. 그래서 크롬웰이 죽자, 스코틀랜드는 화란에 피신가 있었던 찰스1세의 아들 찰스2세를 왕으로 옹립했다. 그는 “국가 계약”과 “신성동맹과 계약”에 서약하였기 때문에 영국의 청교도들까지 감동하여 영국의 왕으로도 추대받았다. 영국과 스코틀랜드의 왕이 된 찰스 2세는 그 서약을 무표화하고 장로교회를 탄압하였다. 이때, 스코틀랜드는 국가계약과 신성동맹과 계약을 재확인하고, 찰스2세에 항전하기로 선포한다. 이들을 “계약파(Covenanters)”라고 부른다. 계약파는 왕권신수설을 부인하였다. 왕은 백성에게 제한된 충성만을 요구할 수 있고, 백성이 왕과 맺은 계약을 어길 때 벌을 받는 것처럼, 국왕도 계약을 어길 때 백성에 의하여 제재를 받아야 한다. 이 계약파의 정치 사상은 조지 부캐넌에 의하여 다듬어지고 러더포더에 의해 완숙되어졌다.

 

이에 대한 찰스2세의 박해는 끔찍하고 잔인했다.

 

8. 1685년 찰스2세기 죽자 그의 동생 제임스2세가 왕위에 올랐는데, 그는 영국과 스코틀랜드를 아예 로마교회로 돌이키고자 했다. 결국 그는 1688년 명예 혁명으로 왕위에서 쫓겨났다. 그가 축출된 후, 그의 딸 메리가 화란에서 귀국하여 영국과 스코틀랜드의 왕이 되었는데, 그녀는 오렌지의 윌리암 공과 결혼하여 상당히 개혁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종교 관용령을 선포하여 청교도와 장로교도에 대한 살육의 시기를 종식시키고, 1653년 이후 폐지되었던 장로교 총회를 다시 열 수 있게 했다(1690).

 

9. 1710년 영국과 스코틀랜드는 의회를 통합하게 됨으로, 정치적으로는 한 왕실, 한 의회가 되었지만, 종교적으로는 영국은 성공회를, 스코틀랜드는 장로교회를 각각 유지하였다. 두 의회의 통합을 추진한 사람은 윌리암 카스테어스 목사이다.

 

성공회의 영향을 받은 스코틀랜드는 1712년에 지역 시찰회나 대지주가 지역 교회의 목사를 임명할 수 있는 임명권을 의회로부터 인정받게 된다. 이것은 장로교회 정치를 떠나는 것으로서 장로교회의 분열을 예고하였다.

 

10. 스코틀랜드에서 최초의 장로교회 분열은 1733년 에벤에셀 어스킨 목사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가 평신도의 목사 임명권을 반대하였고, 시찰장이 회중이 원치 않는 목사를 파송하는 것에 반대한 이유로 노회에서 제명당했고, 총회에서 면직되었다. 결국, 그와 동료들은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를 떠나 스코틀랜드 자유 교회의 전신인 “분리교회(Secession Church)”를 창립했다. 그러나 이 교회는 기존의 장로교회를 참 교회로 인정할 것인지의 여부로 인하여 논쟁이 일어나 서약파와 반서약파로 분리되었다(1747년).

 

11. 또 1752년 토마스 길레스피 목사도 평신도의 목사 임명권을 거부하다가 총회에서 면직되었고, 1761년 동료들과 함께 구원교회(Relief Church)를 조직했다.

 

12. 데이빗 흄의 합리사상에 영향을 받아 18세기말과 19세기에 신학자들이 중도주의 신학운동을 일으켰을 때, 장로교회의 순수성을 유지하고자 하는 운동이 토마스 찰머스에 의해 일어난다. 중도주의 신학이란 교리와 체험 이 중간에 있는 윤리적인 삶을 표방하는 신학을 말한다.

 

그러나 그도 역시 평신도의 목사 임명 제도를 폐지할 것을 주장하다가 결국 1848년 정부 교회를 떠나 스코틀랜드 자유교회를 조직한다(1843). 이 자유의 의미는 교회가 정부로부터 자유할 뿐만 아니라 정부가 지명한 목사를 섬길 의무로부터의 자유이다.

 

13. 이후 1847년 길레스피의 구원교회와 어스킨의 분리교회가 합동하여 연합장로교회를 조직하였고, 다시 1900년에 이 연합장로교회와 찰머스의 자유교회가 합동하여 스코틀랜드 연합 자유교회를 조직하였다. 그러나 찰머스의 자유교회의 소수파는 자유주의를 수용하는 연합을 거절하고 스스로 작은 교회로 남아 신앙을 보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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