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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가 알아야할 모범적인 대표기도
    
열왕기상 8:20-60을 보면 솔로몬이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전을 건축하고"(왕상8:20), "여호와의 언약 넣은 궤를 위하여 한 처소를 설치하고"(왕상8:21) 여호와의 단 앞에서 이스라엘의 온 회중을 마주서서 하늘을 향하여 손을 펴고 여호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는 솔로몬의 대표기도(공중기도)를 볼 수 있다. 
  
그 기도의 내용을 살펴보면 먼저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하는 "찬양"이 있고(왕상8:22-23), 이어서 "하나님께서 하신 언약에 대한 확신" 곧 "말씀의 확신"이 있고(8:24-26),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종의 기도와 간구를 돌아보시며 종이 오늘날 주의 앞에서 부르짖음과 비는 기도를 들으시옵소서"하는 "기도와 간구"가 있고(8:27-29), "회개와 용서와 사죄의 은총과 사유하심"에 대한 간구가 있으며(8:30-40), "중보기도"(8:41-53)와 "이스라엘 온 회중을 위한 축복기도"(8:55-60)가 있다. 
  
솔로몬의 대표기도의 내용을 보면:
  
1) 하나님에 대한 찬양, 
2)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확신, 
3) 회개와 사죄에 대한 은총, 
4) 기도와 간구 
5) 중보기도 그리고 
6) 축복기도로 되어있다. 
  
일반적으로 기도의 내용은: 
  
1) 하나님에 대한 찬양(Adoration), 
2) 회개(Confession), 
3) 감사(Thanksgiving), 
4) 간구(Supplication), 
5) 중보기도(Intercession)로 되어있는데 
  
솔로몬의 기도는 구체적으로 감사의 구절은 별도로 나타나 있지 않으나, 기도의 전체적인 내용이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뜻을 담고 있다(8:27, 53, 61). 이와 같이 볼 때에 솔로몬도 일반적인 기도의 내용을 벗어나지 않은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성경에 나오는 공중기도의 다른 예를 살펴보면, 특별한 경우에 특별한 목적을 위하여 드린 공중 기도가 있다.
  
"12사도 중 결원을 보충하기 위하여 드린 기도"(행1:24-25), "안수집사를 세우기 위하여 드린 기도"(행6:6) 등 여러 형태의 대표기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대표기도를 드릴 때에 주의하여야 할 몇 가지사항을 살펴보면: 
  
① 대표기도는 자신을 위한 기도가 아니라 모든 회중을 대표하는 기도임을 명심해야 한다. 
  
② 대표기도 자는 자신의 개인적인 회개문제, 자신의 가정문제, 자신의 감정에 의한 문제 등 기도자의 개인적인 문제를 공중기도에 언급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 "기도할 자격"이 없다든지, "기도를 잘 할 줄 모른다"든지 그러한 말도 기도의 내용에 언급하지 않아야 한다. 
  
③ 만일 대표기도를 할 때에 기도자의 개인의 삶에, 또는 개인의 감정에 어떠한 문제가 있을 때에는 그 문제가 온전히 해결 될 때 가지 대표기도를 삼가 하는 것이 좋다. 
  
④ 대표기도 자는 먼저 깊은 회개기도와 성령 충만함(엡 5:18)을 확인하고 기도에 임해야 한다. 
  
⑤ 대표기도 자는 먼저 하나님을 찬양하고, 모든 회중의 죄와 감사와 간구와 도고를 도맡아 지성소에 들어가는 제사장과 같은 기도를 드려야 한다. 
  
⑥ 대표기도는 개인 기도가 아님을 명심해야 한다. 
  
⑦ 또한 대표기도는 설교가 아님을 명심해야 한다. 
  
⑧ 대표기도는 상황과 경우에 따라 그 내용을 다르게 기도하여야 하므로, 간결하고 명료하게 기도해야 한다. 주일대표기도, 헌금기도, 저녁 찬양예배, 수요성경공부, 금요철야기도, 식사기도 등 
  
⑨ 가장 중요한 것은 공중기도는 개인 기도가 아니므로 너무 길게 하지 않는 것이 좋다. 
  
⑩ 대표기도를 드릴 때에 기도문을 작성하여 가지고 나와서 기도를 읽는 예를 볼 수 있는데, 
  
(가) 가장 좋은 대표기도는 "작성된 기도문"을 읽는 것보다 직접 아뢰는 기도가 더욱 좋다. 
  
(나) 그러나 직접 아뢰는 기도가 힘들 때에는 기도문을 작성하여 읽는 것도 무방한 줄 안다. 
  
(다) 다만 대표 기도를 "작성된 기도문"을 읽을 때에는 아래의 사항에 주의하는 것이 좋다. 
  
- 깊은 회개와 감사와 기도가 있은 후에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기도문을 작성할 것 
  
- "작성된 기도문"을 읽고 또 읽어서, 거의 암송하여, 직접 아뢰는 기도같이 기도할 것 
  
- 하나님 앞에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그러나 담대한 마음으로 겸손히 기도 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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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개론] 성령론 성령이란 
 

놀라울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성령님의 본질을 오해함으로써 그분을 실재하시고 살아계신 인격체라기보다는 무슨 영묘(靈妙)한 영향력 정도로 여기고 있습니다. 성령님의 인격적 속성 또는 특징을 전체적으로 살펴봄으로써 삼위의 한 분이시며 인격체이신 성령님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성령님의 인성 

사람은 말하고 행동하고, 자기 의사를 표현할 수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행10:19,20에서 성령님은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분은 "내가 보냈다"고 하십니다. 계시록2장과 3장에서 우리는 일곱 번이나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에 대해 읽게 됩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의 의지를 갖고 있습니다. 성령님도 그러하십니다(고전12:11). 성령님은 사람과 겨루십니다(창6:3). 성령님은 하나님의 아들들을 인도하십니다(롬8:14). 또한 사람에게 감정이 있는 것처럼 성령님도 근심하실 수도 있으며(사63:10), 슬퍼하기도 하시며(엡4:30), 또 격분하기도 하십니다(히10:29). 뿐만 아니라 사람에게는 지성이 있습니다. 성령님도 생각하는 지성이 있으십니다(롬8:27). 그분은 하나님의 깊은 것을 통달하시며 하나님의 생각 또한 알고 계십니다(고전2:10,11). 
단순한 영향력이나 힘은 의지나 지성, 또는 감정이 없으며 자기를 가리켜 "나"라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성령님은 인격체이십니다. 우리는 절대 성령님을 "그것"이라고 하면 안됩니다(일부 성경구절에서 성령님은 "그것"이라는 대명사로 지칭되십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바람"과 "성령"을 가리키는 헬라어 단어가 똑같이 "프뉴마(Pneuma)"로서 중성이며 그렇기 때문에 중성대명사 "그것"을 썼을 따름입니다). 어떤 구절, 예를 들어 요14:26 같은 데서는 사실 저자가 엄격한 헬라어 문법을 어기고 대명사를 "그(He)"로 쓰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성령 하나님께서 인격체이심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성령님의 신성 

성경에서 천사들은 영(spirit)이라고 불리고 있으며, 그들 중 일부는 거룩한 영들(holy spirits)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볼 때 성령님(Holy Spirit)이 하나님의 속성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은 명백합니다. 바로 "성령"이라는 말부터(눅11:13)가 우리에게 그분은 영이시고 거룩하시다는 것을 가르쳐주는데, 이 두 가지는 바로 하나님의 속성인 것입니다. 성령님은 영원하십니다(히9:14). 모든 피조물이나 모든 천사는 다 시작이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영원하십니다. 성령님은 주권을 갖고 계시며 이 점은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이 가지신 주권과 동등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침례)를 받습니다(마28:19).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에게 삼위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복을 빌었습니다(고후13:14). 피조물을 하나님과 동등한 위치에 올려놓는다면 이 얼마나 그릇된 일이겠습니까? 
성령이 성부나 성자보다 더 뛰어나다거나 혹은 더 열등하다고 암시해주는 것 같은 구절들을 인용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성령님은 성부께로서 나오며 성자께서 보내신다고 했습니다(요15:26, 16:7). 반면에, 말로 그리스도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을 수 있으나 말로 성령님을 거역하면 결코 사하심을 얻지 못한다고 했는데(마12:32), 이 구절은 성령님이 그리스도보다 더 중요하다고 암시하는 것처럼 보일 수가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어떤 주제를 공부하든지, 같은 문제를 다루고 있는 다른 연관 구절들을 다 비교해 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성령님에 대한 모든 구절을 모아 상고해 볼 때, 우리는 다만 성령님이 성부와 성자와 더불어 동등하시다는 결론을 내리게 될 뿐입니다. 
성령님은 전능하십니다. 성령님은 창조사역에 있어 하나님과 함께 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 이적을 행하셨으며 또한 중생은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성령님은 전지하십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깊은 것들을 아십니다(고전2:10). 성령님은 무소부재하십니다. 시편139:7-10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성령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성령님은 의로우십니다. 그분은 죄에 대해, 의에 대해, 그리고 심판에 대해 세상을 책망하십니다(요16:8-11). 성령님은 은혜로우십니다. 그분은 은혜의 성령으로 불리십니다(히10:29). 성령님의 사랑이 로마서15:30에 나오고 있습니다. 
이상의 구절들과 또 그 외 많은 구절들이 보여주고 있는 것은 성령님의 속성이 곧 하나님의 속성이라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신성을 보여주는 데는 위에서 든 구절들만으로도 충분합니다. 하나님의 다른 속성 두 가지는 스스로 자기를 계시하시는 것과 자기 모순이 없으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알고 있는 모든 것은 성령님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성령님은 "진리의 영"(요14:17)이라고 불리우십니다. 성령님은 성경을 통해 자기를 나타내십니다만 그분이 주로 하시는 일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입니다(요16:13,14). 
자기 모순이 없다는 것은 성령님의 결코 변치 않으시는 속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분이 하시는 주된 일은 그리스도를 영광스럽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곱 영"(계3:1)이라는 표현은 성령의 충만함과 무소부재하심을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구절이나 이사야11:2 같은 구절은 하나님의 영들이 많다거나 성령님이 스스로 모순되시거나, 또는 성부나 성자와 일치되지 않게 행하신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말씀"이던 것이 신약에서 인용될 때는 "성령님의 말씀"이라고 되어 있는 것이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이사야6:9,10에서 선지자는 여호와의 말씀을 들었지만, 사도 바울은 사도행전28:25-27에서 성령님께서 말씀하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31:31에서 여호와는 이스라엘 집과 새 언약을 맺으시겠다고 약속하고 계십니다. 히브리서10:15-17에서 이 말씀은 성령님께서 하신 말씀이라고 합니다. 
최종적으로, 그리고 결론적으로, 성령님은 분명하게 하나님으로 불리어지고 계십니다. 사도행전5:3,4에서 베드로는 아나니아가 성령님에게 거짓말했을 때 그것은 사실상 하나님께 거짓말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 성령님의 사역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사역은 전부, 성령님이 하나님이시며 모든 면에서 성부와 성자와 함께 동등하시다는 것을 증명해 줍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성령이 바로 진실하고도 완전한 하나님이심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성령님의 사역 

하나님은 한 분이십니다. 그러나 그분은 여러 가지 다른 방법으로 일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 가운데 어떤 부분들은 성부께 속하고, 어떤 것은 성자께, 또 어떤 것은 성령께 속합니다. 어떤 일들은 몇 분이 같이 하시는 일이며 그리함으로써 아버지와 아들께서 같은 일을 하시고, 혹은 그리스도와 성령께서 같은 일을 하기도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한 분이심을 강조하는 것일 뿐입니다. 성령님은 결코 성부나 성자와 반대로 행하시지 않습니다. 특별히 성령님과 관련하여 성경에 언급되어 있는 일곱 가지 활동 영역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성령님의 창조사역입니다. 이것은 우주와 관련된 성령님의 사역입니다. 모든 것이 아들에 의해 창조되었지만 인간의 창조와(욥33:4) 동물의 창조에 대해서는(시104:30) 성령님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성령님은 "하늘을 단장하시는" 일에 참여하셨으며(욥26:13), 땅을 회복하시는 일에도 참여하셨습니다(창1:2). 

성령님의 영감과 조명사역입니다. 이것은 성경과 관련하여 성령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성경의 대 주제는 그리스도이지만, 성경의 영감은 특별히 성령님으로 말미암았습니다(벧후1:21). 삼하23:2,3, 행1:16, 28:25, 요14:26, 16:13, 고전2:10, 딤전4:1도 읽어보십시오. 이 주제는 성경론에서 이미 자세히 다룬 바 있습니다. 오늘날의 믿는 자들을 위해 성령님은 성경을 조명하는 일을 하고 계십니다. 이것은 어떤 사람이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받아들여서 "비췸"(조명)을 받을 때 비로소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성경본문이 완전히 이해될 때, 믿는 자는 최종적으로 영감의 유익을 받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믿든지 믿지 않든지 객관적으로 성경은 여전히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다음엔 성령님의 성육신 사역이 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와 관련해서 성령님께서 행하시는 일입니다. 성자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 사이의 긴밀한 관계는 지상에서 그리스도께서 겪으신 일에 대한 연구에서 더 보게 될 것입니다. 성령은 로마서8:9에서 "그리스도의 영"이라고까지 불리고 계십니다. 그리스도와 관련한 성령님의 사역은 다음 일곱 가지로 정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1. 동정녀 마리아는 성령님에 의해 예수님을 잉태했습니다(마1:18, 눅1:35). 
2. 성령님은 예수님께서 침례받으신 후 그 위에 강림하여 머무심으로 예수께 기름 부으신 바 되셨습니다. 성령님께서 이렇게 하심으로써 구약의 예언은 성취되었고, 예수님이 참 메시야이심이 요한과 다른 이들에게 증명되었습니다. 또한 이로 인해 예수님께서 곧 하나님으로 인정받으셨음도 나타났던 것입니다(마3:16, 막1:10, 눅3:22). 성령님께서 예수님를 통해 일하시는 데는 한계가 없었습니다(요3:34). 
3. 침례 받으신 후 예수님은 성령님에게 이끌려 광야로 가신 후 사단에게 시험을 받으셨습니다(마4:1, 막1:12, 눅4:1). 이것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시험하셔서 죄를 짓게 하셨다거나(약1:13), 또는 그리스도께서 혹 죄를 지을 수도 있었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4. 사단에게 승리하신 후 예수님은 삼 년 동안의 집중적인 활동을 시작하셨습니다. 여러 차례에 걸쳐 주님은 병든 자를 고치시고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이러한 일은 성령님의 능력으로 되어졌습니다(눅4:14,18, 마12:28).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는 전능하심을 지닌 채 성육신 하셨으나 성령의 능력 안에서 성부께서 정하신 삶을 살기로 결정하셨습니다. 
5. 주 예수님은 양들을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고 또 다시 취하실 권세가 있었습니다. 이 계명은 성부 하나님께로부터 받으신 것이었습니다(요10:18).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흠 없는 자신을 하나님께 드린 것은 영원하신 성령님으로 말미암은 것이었습니다(히9:4). 
6. 그리스도는 자기 목숨을 버리셨다가 그것을 다시 취할 권세가 있었습니다. 사도행전2:24과 다른 많은 구절에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다고 말합니다. 베드로전서3:18에는 그리스도께서 "성령님에 의해 살리심을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7. 성령님은 신부에게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간절히 기다리라"고 격려하십니다(계22:17). 

성령님은 죄를 깨닫게 하는 일을 하십니다. 이것은 세상과 관련한 성령님의 일입니다. 성령님은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 세상을 정죄하십니다(요16:8-11). 우리는, 오직 성령님께서 역사하실 때에만 사람들이 자기 죄를 깨닫게 되리라고 기대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한계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자유선택의 의지를 주셨으므로 이것을 취소하시거나 억지로 사람들의 뜻을 꺾지 않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님은 어떤 의미에서 인간의 완고한 마음에 의해 "제한"받으십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령님을 거스리며(행7:51), 혹은 은혜의 성령님을 노하시게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히10:29). 한편 성령님은 인간의 무분별한 저항이나 반역을 제한하시고 또한 막기도 하십니다. 성령님은 지금 교회 안에 임재하시는 특별한 방법으로 이 세상에서 옮기우실 때까지 이렇게 막는 일을 계속하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신 성령님은 결코 글자 그대로 "제거되실 수" 없는 분입니다(살후2:7). 

성령님은 중생시키는 일을 하십니다. 이것은 회개하는 사람과 관련된 성령님의 사역입니다. 성령님께서 놀랍게 역사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생명이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분을 영접하는 모든 이에게 주어지게 됩니다(요1:12-13, 3:5-6). 무엇이 자기 속에 들어왔는지는 몰라도 믿는 사람은 바로 그 순간 거듭나게 됩니다. 한 번 받은 영생은 영원히 잃어버릴 수 없게 됩니다. 

다음으로 성령님은 성화(聖化)의 일을 하십니다. 이것은 믿는 자와 관련해서 성령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이 주제는 구원론에서 더 깊이 있게 다루게 되겠지만, 성령님께서 하시는 기본적인 일이기 때문에 본과에서도 다루게 되었습니다. 한 사람이 거듭날 때 그는 거룩하게, 즉 하나님을 위해 구별되는 것입니다. 거듭나는 것은 단 한 번 일어날 뿐이지만, 성화는 그 사람의 남은 생애를 통해 이루어 가는 매일 계속되는 과정입니다. 신분적인 성화와 상태적인 성화는 모두 다 성령님의 사역입니다(벧전1:2). 날마다 깨끗케 하는 것도 그리스도의 사역입니다(엡5:26). 이 일을 완성하기 위해 성령님은 모든 신자 안에 영원히 거하시며(요일2:27), 삶 가운데 열매를 맺게 하시고(갈5:22), 또한 신자 각자를 충만케 하기 원하십니다(엡5:18). 한편 하나님의 참된 자녀가 성령님의 역사를 방해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성령님을 근심케 하며(엡4:30), 혹은 성령님을 소멸케 하기도 합니다(살전5:19). 
성령님과 신자 사이의 관계를 묘사해주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 따로 세 가지가 더 있습니다. 곧 인(印), 보증, 그리고 침례입니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소유라는 인(Seal)이십니다(엡1:13). 그분은 또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십니다. 곧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확신시켜 주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엡1:14). 오순절 날 이래로 우리가 그리스도께로 회심하는 순간에 일어나는 단 한번의 성령침례의 효력으로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됩니다(고전12:13). 이 역사적인 침례가 일어난 것은 "모든" 믿는 자들을 합하여 하나의 조화로운 유기체, 곧 그리스도의 몸으로 만들려 하신 분명한 목적을 이루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세 가지 용어는 각각 모든 믿는 자에게 베풀어주시는 성령님의 무조건적인 은혜를 묘사해주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믿는 우리들은 단 하나라도 우리 자신이 자격이 있어서, 혹은 노력을 한 덕택이나, 아니면 기도를 했다든지 해서 이런 복들을 받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그저 은혜로 우리들 각자에게 이런 복들을 주신 것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시작한 바로 그날부터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고 격려하시기 위함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가 이런 은혜에 대해 감사할 줄 알기를 기대하십니다. 
때로 성령 충만을 성령침례와 혼동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회심하는 순간 모든 신자에게 무조건적인 복으로 주어지는 성령침례와는 달리 성령의 충만은 조건적인 것이며, (다른 무엇보다도) 신자가 알 수 있는 모든 죄를 자백하고 성부, 성자, 성령께 철저하게 드려진 바 되었느냐에 달려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12:13에서 우리(믿는 자들)가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을 이루었다고 말하고 있으며 또한 에베소서5:18에서는 우리에게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문자적으로는 충만을 "받아가고 있으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충만은 놀라운 것입니다. 성령의 충만을 받으면 무엇보다도 성령의 열매를 맺습니다. 사랑, 희락, 화평, 인내,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가 바로 그것입니다(갈5:22,23). 하나님의 성령님은 믿는 사람 각자의 마음과 삶을 날마다 그리고 완전히 충만케 하기를 간절히 바라십니다. 그렇게 하실 수 있는 기회를 성령님께 드립시다. 

구약에서 성령님은 이따금씩 특별한 일을 위해 특정 개인에게만 임하셨습니다(출28:3, 민27:18, 삼상16:13). 성령님은 발람처럼 경건치 않은 사람에게 역사하시기도 하고 또 그러한 자를 통해서도(민24:2) 일하실 수 있습니다. 성령님은 사울에게서 떠나셨으며(삼상16:14), 영감을 받았던 시편 기자조차도 죄를 지었을 때 자기한테서 성령을 취해가지 마시라고 기도 드렸습니다(시51:11). 주 예수님은 성령님에 대해 말씀하심으로써 구약과 신약의 경륜이 어떻게 다른 것인지 가르쳐주셨습니다. 곧 "그가 너희와 함께 거하시며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14:17)고 하셨습니다. 

성령님에 대해 더 공부하기 원하는 분은 성령님을 상징하는 기름, 물, 바람, 불, 비둘기 등에 대해 상고하면 더 유익이 될 것입니다. 성령님에 대한 가르침을 공부할 때 우리는 성령님의 능력을 우리 삶 가운데서 체험할 책임이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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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론(終末論:ESCHATOLOGY) 장래 일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베푸시는 구원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구원입니다. 성령님은 쉬지 않고 믿는 자를 죄의 권세에서 구출해내시지만, 옛 성품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아무리 성숙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때때로 죄를 지으려는 내적인 충동이 있습니다. 이 옛 성품은 주 예수님께서 오실 때에 영원히 없어지게 될 것입니다.

구약성경은 메시야가 이 세상에 오실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구절들은 메시야가 고난을 받을 것이라고 했으며(예를 들어 시편22편, 69편), 또 어떤 구절은 그분의 영광에 대해 말씀했습니다(시2편, 72편). 선지자들은 이런 두 가지 상반된 예언이 어떻게 성취될 것인지 몰랐습니다(벧전1:10,11). 여기에 대해 설명을 하자면 그리스도는 초림하셔서 고난을 받으시고 재림시에 다시 영광 중에 오신다는 뜻입니다. 구약의 많은 구절들이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와 바울과 요한 모두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신다고 여러 차례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친히 "내가 다시 와서…"(요14: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상고해 보면 한 가지 사실이 더 밝혀집니다. 초림에 두 가지 국면이 있었던 것과 똑같이, 재림도 두 가지 양면성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초림에 대해서, 한 선지자는 말하기를 그리스도께서 베들레헴에 오실 것이라 했으며(미5:2), 또 다른 선지자는 말하기를 그가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오실 것이라고 말했습니다(슥9:9). 이 두 예언은 글자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마2:1, 21:1-11). 재림에 대해서도 어떤 구절들은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성도들을 위해 오신다 했으며(살전3:13), 다른 구절들은 그분의 성도들과 함께 오신다고 했습니다(요14:3). 그러므로 이 두 사건 사이에는 어느 정도 시간적인 간격이 있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앞으로 우리는 장차 일어날 사건들을 그 시간적인 순서대로 상고하게 될 것입니다.

교회의 휴거

그리스도께서 자기 성도들을 위해 다시 오실 때, 성도들은 공중으로 들림받게 될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휴거"라고 합니다. 영어 성경에는 "휴거"라는 말이 나오지 않지만, 이 말은 "잡아채다"라는 뜻을 지닌 말에서 유래하는 것입니다. 이 표현은 데살로니가전서4:17을 라틴어 성경에서 "우리가 들림받아 … 공중에서 주를 만나게 될 것이라"라고 번역한 데서 볼 수 있습니다.
구약에서는 휴거의 진리를 가르치고 있지 않은데 이는 휴거가 그리스도인들로 된 교회와만 관계있고, 이 교회는 이스라엘에게 감추인 "비밀"이었기 때문입니다(엡3장). 바울은 또 휴거를 "비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고전15:51). 그는 이 진리를 "주의 말씀으로", 즉 직접적인 계시에 의해 받은 것입니다(살전4:15). 성경 전체를 통해 우리는 영광 중에 오시는 그리스도에 대해 읽을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주께서 먼저 성도를 위해 오신다는 것을 밝힘으로써 이 진리를 상세히 설명했습니다.
이 진리에 대한 가장 중요한 부분 두 가지는 고전15:51-56과 살전4:13-18에서 발견됩니다. 이 말씀들로부터 우리는 주께서 호령과 더불어 강림하신다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이미 죽은 신자들이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일어날 것입니다. 살아있는 신자들은 변화되어 새로운 몸을 입게 될 것입니다. 이들은 공중으로 들림 받게 되는데 이 일은 갑작스럽게, "눈 깜빡할 사이에"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이 일은 언제 일어날까요? 주님은 우리가 예비하고, 언제나 깨어 있어 주님을 기다리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므로 그 날을 가르쳐주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는 주님 오실 때가 가깝다는 약속이 기쁘고도 놀라운 "복스러운 소망"입니다(딛2:13). 그러나 이런 즐거움과 더불어 우리로 정신을 차리게 만드는 것은 우리들 각자가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게 된다는 것입니다(롬14:12).

그리스도의 심판대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5:10).
믿는 자들은 이 일이 일어날 때 자기 죄에 대해 심판을 받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정죄함이 없기 때문입니다(롬8:1). 그리스도의 심판대에서 믿는 자들은 충성스럽거나 헌신적으로 봉사한 것에 대해 상급을 받게 될 것이지만, 어떤 이들은 비록 자신은 구원 얻되 자기가 한 일이 불꽃 가운데서 살라지는 것을 슬퍼하며 보게 될 것입니다(고전3:13-15). 만일 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휴거와 그리스도의 심판대를 염두에 두고 산다고 하면, 삶이 놀랍게 변화될 것입니다!

어린양의 혼인잔치

충성스럽게 섬긴 것에 대해 상을 주실 때 어린양의 혼인잔치가 벌어지게 됩니다(계19:1-8). 주님과 주님께 속한 자들은 말할 수 없는 즐거움에 참예할 것입니다. 성경이 여기에 대해 세부적으로 말씀하고 있지는 않지만, 혼인잔치야말로 우리를 영원한 복락으로 인도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있도록 하기에 적절한 방법입니다.

대환난

죄가 이 세상에 들어온 이래로 사람은 슬픔과 고통을 겪어왔습니다. 지진과 태풍, 기근, 전염병 등은 인간이 흔히 겪는 것이며 전쟁은 유사(有史)이래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앗아갔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런 것과 비교할 수 없는 대환난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계7:14). 마태복음24장에서 예수님은 "재난의 시작"이라고 알려진 장차 오게 될 고통의 시기에 대해 가르치셨습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세상이 알고 있던 것 중 가장 큰 환난의 때까지 잇따르게 될 것입니다(마24:8,21). 많은 세부적인 내용들이 마치 그림처럼 계시록6장부터 18장에 묵시적인 형태로 나타납니다. 아마도 이 환난은 우상에게 무릎을 꿇으려 하지 않는 유대인들이 공격을 받는 것으로 시작될 것이며, 그 다음에 모든 유대인에게로 확산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에 대해 유대인들을 심판하려고 그들이 핍박을 받도록 허락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방인들의 유대인들에 대한 핍박이 정도에 지나게 될 것이고, 이것과 다른 이유로 인해 하나님의 진노가 열방에게도 쏟아지게 됩니다. 처음에 사람들은 온통 두려움에 휩싸이게 됩니다(계6:15-17).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가기를 거부합니다. "…회개치 아니하고 … 회개치 아니하였더라… (그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훼방하며… 하나님을 훼방하고"(계9:20,21, 16:9,11).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목적이라는 거대한 범위 속에서 이 환난의 주된 이유를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늘 사람에게 자비하시지만, 사람은 계속 죄 가운데 행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만일 사람이 아직 살아 있는 동안 하나님께서 그의 죄에 대해 심판하신다면, 사람은 진노하시는 하나님을 알아차리고 회개하여 그분께 돌아갈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진노를 남김없이 다 보여주셔도, 사람은 회개하지 않습니다. 대환난이 이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대환난은 교회가 떠난 후에(계3:10 원래 의미는 "그 때를 피하게"),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영광 중에 다시 오시기 전에 일어납니다. 이 환난은 너무도 끔찍해서 하나님은 "그 날들을 감하실 것"입니다(마24:22). 선지자 다니엘은 칠년 간의 황폐에 대해 말했습니다(단9:27). 처음 삼년 반은 비교적 조용하고 번영도 합니다만, 나머지 삼 년 반은 무서운 날들이 될 것입니다. 참 그리스도인들은 이 칠 년간의 환난기간이 시작되기 전에 끌어 올려 영광 중에 거하게 될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영광 중에 주님과 함께 안전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대환난 중에도 진리를 증거하는 자들을 일으키셔서 많은 사람들이 구원받게 하실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재림

대환난은 그리스도께서 땅에 임하실 때 돌연 멈추게 됩니다. "그 날 환난 후에 즉시 …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마24:29,30). 환난 전 휴거는 우리 주님의 재림에 대한 전체 모습 중 한 부분일 뿐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 먼저 이스라엘에게 나타나실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자기 민족이 메시야를 어떻게 배척했었는지를 기억하고 애곡할 것입니다(슥12:10). 주님께서 승리 가운데 나타나실 때 그리스도의 통치에 대한 모든 열방들의 반대는 중지될 것입니다(계19:11-21).

살아 있는 민족들이 받는 심판

다음으로 살아 있는 민족들이 심판을 받게 됩니다(마25:31-46). 신실한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인 하나님의 백성들을 도움으로써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믿음을 나타낸 이방인들은 그리스도의 나라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 외의 사람들은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됩니다. 모든 악한 것들이 정결케 되어질 때, 그리스도는 지상왕국을 세우실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신다"는 그 소망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큰 위로의 근원이 되어왔습니다. 이 진리가 사단의 특별 표적이 된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조롱하는 자들은 항상 재림을 비웃어 왔으며, 훗날에 이런 사람들의 공격은 더더욱 맹렬해질 것입니다(벧후3:3,4). 더욱이 많은 잘못된 사상들이 난무함으로써 주님을 욕되게 했는데, 그런 사상 가운데는 성경을 모르기 때문에 생겨난 경우도 더러 있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사람이 믿을 때 주님께서 그 마음에 들어가심으로써 주님의 재림이 성취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죽을 때 그리스도께서 그 영혼을 위해 재림하신다고 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이 말들이 전혀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재림하시는 것은 개인적으로, 문자적으로 이루어질 것이고, 눈으로 볼 수 있게 일어날 사건입니다."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다시 오시리라"(행1:11). 오히려 신자들은 죽으면 그리스도께로 가는 것입니다.

교육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것이 교회의 의무며 그 이후에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신다는 대중화된 교리가 있는데, 이것을 가리켜 "후천년설"이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한 세대에 두 번의 세계대전은, 복음이 점진적으로 세상에 변화를 줄 것이라는 이론에 전혀 도움이 안됩니다.

일부 그리스도인들 가운데는 교회가 "그 죄를 씻기 위해서" 환난을 통과하거나 혹은 최소한 그 일부를 겪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환난은 "개신교의 연옥"이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믿는 자에게 징계가 있기는 하지만, 이는 그로 하여금 계속 죄를 짓지 않게 하려는 것일 뿐입니다. 환난은 이 악한 세상을 징벌하기 위한 것입니다.

"부분휴거설"에 따르자면, 교회의 일부는 반드시 환난을 통과하게 되는데, 이 말은 곧 이 세상에서 주님께 순종하지 않은 성도들이 환난을 당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리스도의 몸은 그 일부만이 영광스럽게 부활한 몸을 입고 혼인잔치를 즐기게 되는 반면, 몸의 나머지 부분은 이 땅에 남아 불시험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모든 자기 사람들이 그가 계신 곳에 함께 거하게 될 때까지 만족을 얻지 못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환난이 있기 전에 이미 육신적으로 살다가 죽은 신자들은 어떻게 된다는 것입니까? 이들도 다 부활해서 고난을 받아야만 된다는 것입니까?

아직도 주님이 몇 날 몇 시에 재림하신다고 날짜를 정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날짜 중에는 성경에 나오는 숫자와 이름들을 놓고 온갖 상상을 동원하여 신비적으로 해석하여 정한 날짜와, 점성술이나 심지어 피라미드를 측량해서 얻은 자료로 정한 날짜들까지 있습니다 ! 이런 노력은 언제나 실패하고 맙니다. 인자이신 주님조차도 땅에 사실 때 그 날과 시간을 모른다고 하셨습니다(막13:32). 하나님의 지혜로 보건대 우리가 주 예수님의 재림의 때를 모르는 것이 더 나은 것입니다. 주님이 오늘 오실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재림을 예비할 마음이 생기게 될 것입니다.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일3:3).

천년왕국

구약성경의 예언은 메시야가 왕으로서 온 땅을 다스리게 될, 미래에 있을 황금시대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계시록 20:4에서 그분이 천년 동안 다스리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 기간을 "일 천년"을 의미하는 두 단어로 된 라틴어에서 유래해서 "천년왕국"이라고 부릅니다. 땅은 아담의 죄로 인하여 저주 아래 있게 되었으며(창3:17,18), 지금 그 땅은 가시와 엉겅퀴를 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낙원은 다시 회복될 것이며(계2:7), 사막은 백합화처럼 필 것입니다(사35:1). 야생 짐승들이 길들여지고(사65:25), 모든 피조물이 고통으로부터 해방될 것입니다(롬8:19-22).
천년왕국 기간 중에는 세계 열방이 번영하게 될 것입니다. 전쟁도 없을 것이며(사9:7), 범죄도 최소로 줄어들 것입니다. 평화시에도 치안과 국방을 위해 엄청난 예산을 투자하던 일들이 그때는 사라지게 됩니다. 한편 오늘날 거짓종교는 그 복잡한 의식을 유지하느라 엄청난 돈을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계시록17장과 18장에서 우리는 상업화된 종교의 멸망을 보게 됩니다. 천년왕국에서는 단순한 영적 질서로도 충분합니다. 그 때에는 병과 죽음이 흔한게 아니라 오히려 극히 적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대단히 오래 살게 될 것입니다(사65:20). 천년왕국에 들어가게 되는 사람들은 숫적으로 얼마 되지 않겠지만, 천년왕국 기간 중에 인구가 증가하게 될 것이며, 왕이신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의 필요를 공급하실 것입니다. 이 나라에 들어가는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의 자녀가 될 것입니다(요3:5, 마25:34). 이 사람들에게서 태어나는 자식들은 거듭날 기회를 갖게 될 것이며, 많은 사람들이 거듭나게 됩니다. 실제로 믿지 않고 있는 사람들조차도 마지못해 겉으로는 의로운 척할 것입니다(사11:4,5). 사단은 결박될 것이며(계20:2), 그를 따르는 수많은 악령들도 활동하지 못할 것이 틀림없습니다.

우리는 이사야60:12에서 이스라엘이 세계를 이끄는 최강국이 될 것을 보게 됩니다. 이러한 지위는 이스라엘의 왕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이스라엘에게 주실 것입니다. 열두 사도는 주님과 함께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됩니다(마19:28). 이 환난 기간동안 신실함이 입증된 유대인들도 권세를 받게 됩니다(눅19:17).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지체며, 그분의 신부로서 그분이 가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가게 될 것입니다(요14:3).
천년왕국 기간동안 그리스도께서 보좌에 계시는 한 모든 사람은 그분께 복종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회가 오면 많은 사람들이 왕을 대적하여 반란을 일으킬 것입니다. 천년의 세월이 끝나는 때 사단은 잠시동안 풀려나게 됩니다(계20:3). 그는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로 군대를 이루어 하나님의 보좌를 전복시키려는 마지막이자 최대 규모인 반란을 감행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군대는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불에 의해 전멸 당하게 됩니다. 또 마귀는 불못에 던지우고(계20:10), 하나님의 통치를 거스리던 모든 것이 영원히 끝이 나게 될 것입니다.

둘째 부활과 크고 흰 보좌

이 일 후에 둘째 부활이 있습니다. 우리는 천년 왕국이 세워지기 전, 휴거 때에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날 것을 앞에서 살펴보았습니다만, 그리스도의 부활은 모든 사람들이 다시 살아난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는 것입니다(고전15:22). 모든 사람은 몸과 영과 혼을 온전히 다 가진 채 하나님 앞에 서게 됩니다. 그런데 크고 흰 보좌 앞에는 오직 구원받지 못한 자들만이 서게 되며, 그 앞에는 책들이 펴지고 모든 사람들이 자기 행한 것을 따라 심판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심판자로서 앉으실 것입니다(요5:22).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배척한 사람들에게는 절대 구원이 없습니다. 이들의 이름은 어린양의 생명책에서 찾을 수 없습니다. 이 사람들은 본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해 예비된 불못 속으로 던지우게 될 것입니다(계20:11-15).
지옥은 무엇이며 또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주 예수님은 잃어버린 바 된 자들이 겪게 되는 고통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두려움, 슬픔, 분노" 등과 같은 말로 묘사해 주셨습니다. "바깥 어두운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마22:13, 25:30). 사악한 자는 "영원히 예비된 캄캄한 흑암에 돌아갈 유리하는 별들"입니다(유13). 우리는 지옥이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있다는 것 말고는 어디 있는지 아는 바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 나의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8:21).
성경은 천국이나 지옥에 대해 많은 말씀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천국에는 슬픔, 우는 것, 고통, 저주, 사망 등이 없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곳에는 빛과 생명 그리고 사랑과 영광이 있을 것입니다(계21:22- 22:5).

영원한 상태

시간은 영원이라는 무한한 바다에 둘러싸인 작은 해변과도 같습니다. 우리는 시간이 얼마나 오래 계속될 지 알지 못합니다. 세상이 지음 받기 전 영원이라고 하는 무한한 기간이 있었습니다.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시90:2). "영원"이라는 낱말은 끝이 없거나 무한정한 기간 동안의 "시간"을 의미합니다. 바울과 베드로와 요한은 다 한결같이 "영원무궁한 세월"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영원에는 결코 끝이 없을 것입니다.
영원무궁한 역사 동안 하나님은 여러 가지 면으로 자신을 계시해오셨습니다. 예를 들어 율법 시대, 은혜 시대, 천년왕국 시대가 있는 것입니다. 장래에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엡2:7). 또한 성경과 역사, 그리고 자연에 대해 풀 수 없었던 수수께끼들에 대한 답을 알게 될 것이 틀림없습니다. 물론 하나님만이 모든 것을 아시지만, 영원 가운데 거하게 될 구속받은 자들은 지금처럼 한계를 갖지 않을 것입니다.

죄로 인해 더럽혀진 이 우주는 불로 멸해지고, 하나님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실 것입니다(벧후3:10-13). 이사야는 말하기를 이전 것은 기억되지 않을 것이라고 했습니다(사65:17). 요한은 새 하늘과 새 땅의 이상을 보았습니다(계21:1). 현재의 땅에서 천년왕국 기간동안 의가 통치할 것이지만(사32:1), 새 땅에서는 의가 거하게 됩니다(벧후3:13).
악인은 멸절을 당하거나 아니면 아마 하나님과 화목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더러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영원"이란 말을 써서 세세토록 계신 하나님을 묘사하고 또 동일한 말로써 끝없는 형벌을 묘사하고 있습니다(계14:11과 15:7). 끝끝내 그리스도를 저버린 사람들은 하나님과 영원히 분리될 것입니다. 그들이 받을 형벌은 구원받은 사람들의 영생과 마찬가지로 "영원할 것"입니다.
믿는 자들은 세세토록 왕노릇할 것입니다(계22:5).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것입니다(요17:24).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후사가 될 것입니다(롬8:17). 우리는 그리스도와 같게 될 것입니다(요일3:2). 우리는 영원토록 주의 우편에 있게 될 것입니다(시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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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력이란 : 세상의 달력이 아닌 또하나의 달력 그리고 대강절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세상의 달력이 아닌 또하나의 달력이 있는데, 곧 교회력입니다.

교회력이란 그리스도의 일생을 근거로 하여 매주일 예배가 진행되고,

성도는 한 주간 그에 따른 신앙 고백적 삶을 사는 것입니다. 교회력에서 새해는 대강절로 시작됩니다. 대강절은 이미 오신 예수 왕을 기뻐하는 것이고, 동시에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큰 기쁨으로 기다리는 절기 입니다. 28일부터 시작되는 대강절을 맞이하여 예수 왕을 내 안에 새롭게 다시 모시므로 내 인생을 진실로 새해가 되는 것입니다. 언제나 새해 새일 새역사가 시작되려면 무엇보다 예수 왕의 이름으로 기도해야합니다. 대강절 기간 동안 아기 예수가 베들레헴의 마구간이 아니라 내 안에 다시 태어나길 기다리십시오! 진정 아름답고 행복한 성탄절기가 되기 위해서 우리 크리스천은 5W를 구하며 살기를 소원합니다.


With Jesus (1)
사랑의 주님! 금년 성탄절엔 그 날의 예루살렘 사람처럼 공연히 소동하지 않게 하소서. 행여 바쁘고 번잡한 세상 속에서 주님을 잃어버린 성탄절을 맞을까 두렵사오니 오직 선탄의 주인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소서. 가난한 마음으로 더욱 그리스도를 사모하게 하시고 성육신의 비밀, 말구유의 표적의 의미을 깨달아 기쁨과 감격이 넘쳐나게 하소서. 예수의 놀라운 그 이름-기묘자, 영존하신 아버지, 평강의 왕, 임마누엘로 인하여 하늘에 영광 땅엔 평화, 진정 은혜의 절기가 되게 하소서.

 

With Holiness(2)

거룩하신 주님! 욕심으로 눈가리운 세속의 비늘을 벗고, 티 없이 천진한 거룩의 옷을 입게 하소서. 성탄의 계절 세상과 구별되는 아름다운 삶의 예물을 주님께 드리고 싶습니다. 모든 것들고 아름다운 관계를 맺게 하시되 하나님께는 예배자로, 사람들과 섬기는 자로, 물질에 대하여는 선한 청지기로 살게 하소서. 거짓됨이 없고 진실하며, 교만하지 않고 겸손하며, 이기적이지 않고 이타적인 삶이 되게 하소서. 이모든 것이 나의 힘으로 불가하오니 무엇보다 당신 앞에 무릎 꿇는 기도의 계절이 되게 하소서

 

With Family(3)

가정의 주인 되신 하나님! 우리의 가정을 주께서 항상 함께 하시는 작은 교회로 삼으로서. 가족이라는 따스한 이름으로 모인 우리, 서로 주님을 찬송하며 칭찬과 격려로 보듬어 주는 사랑의 둥지가 되게 하소서, 형제 자매우애하고, 부모와 자녀가 존중하며, 주님 보여주신 사랑의 완성을 향해 성속해 나가는 믿음의 가정을 이루사 웃음과 눈물, 시련과 실수, 애정과 훈계를 통해 인생의 지혜를 배우고 무엇보다 하나님 아버지와 한 가족 됨을 감사히 여기게 하소서.

 

With Neighbor(4)

긍훌의 하나님! 주께서 우리를 얼마나 소중히 여기시는지를 생각하여 우리도 한사람의 고귀함을 깨달게 하소서. 이웃의 장점만을 보게 하시며 약자를 감싸주고, 억울

자를 변호하며, 슬픈자와 아픔을 나누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호의로 사랑과 존경을 마음속 깊이 보존케 하옵소서. 이웃의 성공을 기뻐하고 영혼의 아름다움을 깨닫는 혜안을 주셔서 봉사할 때에는 자신을 잊으며 결코 갚음이나 감사를 바라지 않게 하소서.

 

With Mission (5)

절망의 세상, 소망의 빛으로 오신 주님! 쌀쌀한 바람보다도 정치, 사회, 경제, 교육 총체적인 위기에 처한 이 현실이 더욱 춥게 느껴지는 겨울입니다. 기름이 모자라고 쌀이 모자라 신음하는 춥고 메마른 땅, 그러나 정작 모자란 것은 말라버린 우리의 가슴임을 알게 하소서. 답답한 세상 가운데 길이요, 진리요, 생명으로 오신 주여! 끊임없이 당신을 부르며 기도하고 일하느 한국교회가, 그리고 우리 자신이 희망의 복음을 온 누리에 전하는 사랑의 울림이 되게 하소서.

서윤석 목사 (세계선교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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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5경의 이해 Understanding the Five Sects of Moses

 

 
 

앞에서도 언급하였으나 모세5경은 성경전체의 길잡이가 되므로 다시 한 번 각권(卷)별로 살펴봅니다. 복잡한 것을 단순화시켜 체계적으로 볼 수 있는 안목을 갖기 위함입니다. 모세5경을 바로 이해하면 성경 전체를 쉽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역으로 말씀드린다면 모세5경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성경 전체의 감을 잡을 수 없다는 말이 됩니다.

 

[1] 창세기


•책 이름의 의미 : 세상을 창조한 이야기
•핵심 단어 → 시작,기원
•나의 경우 : 내가 출생하여 하나님을 알지 못한체 죄인으로 살아갑니다.
 

만물의 시작을 기록한 책입니다. 나의 출생과 나의 범죄 그리고 에덴동산으로 부터 쫓겨나 엉겅퀴와 잡초가 우거진 거친 광야에서 하나님 없이 살아가려는 패역한 모습으로 우상 앞에 절하는 나를 향해 하나님께서 친히 찾아 오시는 이야기 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기나긴 구원의 여정이 시작됩니다. 쉬지 않고 끈질긴 사단의 방해 속에서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과 열심으로 이 구원의 역사를 이끌어 가시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적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인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창12:1-3) 


[2] 출애굽기


•책 이름의 의미 :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해 에집트를 떠나는 이야기 (과거를 청산하고 미래를 향해 출발)
•핵심 단어 → 구원,구속
•나의 경우 : 나를 불쌍히 여기신 하나님께서 내 삶에 개입하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의 은총을 통해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불러 주십니다.
 

성경에서 애굽이라는 말은 하나님을 등진 세상을 의미할 때 사용됩니다. 출애굽이란 오랜 세월 애굽의 종살이 하던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으로부터 구출해 내신다는 뜻으로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죄 아래서 종노릇하며 고통받는 나를 불쌍히 여기신 하나님께서 크신 이적과 기사를 행하시며, 나를 죄에서 이끌어 내십니다. 그리고 참 자유와 행복을 주시기 위해 준비된 약속의 땅을 향해 친수로 나를 붙잡고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자행자지하며 내멋대로 세상을 살던 죄인된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죄로부터 건짐받는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기를 나는 여호와라 내가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어 내며 그 고역에서 너희를 건지며 편 팔과 큰 재앙으로 너희를 구속하여, 너희로 내 백성을 삼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니 나는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어낸 너희 하나님 여호와인줄 너희가 알찌라.(출6:6-7)

•나의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찌니라. (출19:4-6)
 

[3] 레위기

 

•책 이름의 의미 : 제사의 직무를 맡은 레위지파에게 주신 거룩과 예배에 관한 규정들을 기록한 책(죄인된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과 교제하는가를 가르친 책 )
•핵심 단어 → 성결 (예배,거룩)
•나의 경우 : 죄인 되었던 내가 순전히 공짜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은 즉, 이제는 과거를 청산하고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그 방법과 기준을 하나님께서 친히 제시해 주십니다.
 

야곱의 12아들 중 세째 아들인 레위와 그 후손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제사장의 직분을 맡게 되었는데, 레위기는 이들에게 주어진 하나님께 대한 제사법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켜야 할 생활규범을 기록한 책입니다. 이것은 나와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이제 죄의 종으로부터 해방되어 신분이 바뀌어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자유인이 되었으니 자유인으로서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다운 모습으로 살아 갈 것인가 즉, 하나님의 백성이 마땅히 지켜야 할 법을 가르치고 있는 책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으니 이제부터 하나님을 어떻게 섬기며 세상에서는 어떻게 구별되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배우게 됩니다. 그래서 레위기의 핵심은 성결입니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께서 거룩하시므로 그의 자녀된 우리들도 거룩하게 살아야 하기때문입니다. 거룩이란 "구별된 것"을 의미하는데 성경적으로는 죄를 멀리하고 세상과 구별되게 살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의미합니다.

레위기를 꿀처럼 달게 읽을 줄 아는 자가 참된 성도라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그만큼 이책은 초신자들이 읽기에 너무 지루하고 따분하며 어려워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많아 끝까지 제대로 읽기가 참으로 힘든 책이라 하겠습니다. 온통 짐승잡는 이야기와 어렵고 까다로운 의식과 규범들로 가득차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실상은 성경중의 성경이 바로 이 레위기라고 말합니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최고의 본분이 바로 하나님을 올바르게 예배하며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가는 일인데 이것을 가르치고 있는 책이 바로 레위기입니다. 우리가 누리는 복은 하나님을 올바르게 섬길 때 반드시 뒤따라오는 부차적인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따라서 만복의 원천이 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것이 인간이 누릴수 있는 최고의 복인 것입니다.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레17:11)

•너희는 스스로 깨끗케 하여 거룩할찌어다.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너희는 내 규례를 지켜 행하라 나는 너희를 거룩케 하는 여호와니라. (레20:7-8) 

 

[4] 민수기


•책 이름의 의미 : 인구 조사를 기록한 책
•핵심 단어 → 방황,훈련
•나의 경우 : 예수 믿고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백성답게 사는 법까지 배웠으니, 이제는 삶의 현장에서 그 법대로 살도록 훈련과 방황을 통한 대가를 철저히 치루면서 성화되어 나가게 됩니다.
 

인구조사를 했다고 해서 책이름이 민수기(백성 民,헤아릴 數)라고 되어 있으나 이 책의 원명은 "광야에서" 입니다. 바로 거칠고 험하여 살기 힘든 세상을 광야에 비유한다면 이 원명이 훨씬 더 은혜롭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그래서 광야교회(행7:38)라는 말이 생겨난 것입니다. 우리는 아무 자격도 없이 그리고 아무런 공로도 없이 순전히 공짜로 종에서 해방되어 자유인이 되었고, 더우기 감사하게도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영광된 신분이 되어 마땅히 지켜야 할 법도를 배웠습니다. 이제는 배운대로 하루 하루 살아가는 삶을 통해 실천을 해야 합니다. 종의 습성을 버리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훈련은 그리 쉬운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어도 다 제 성질대로 믿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교회에 나간다고 해서 하루 아침에 사람이 변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어린아이가 걸음마를 배울 때 넘어지는 것 부터 배운다는 말이 있듯이 신앙은 생활속에서 철저한 대가를 치루고 조금씩 성장해 나가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실패와 좌절, 타락과 범죄, 탄식과 고통 그리고 원망과 불평...인간의 내면속에 숨겨진 죄의 본성이 그대로 나타납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대가를 치루고 마침내 거듭나야 하는 훈련의 책이 바로 민수기 내용입니다.

결국 출애굽한 1세대는 40년간 광야애서 모두 죽습니다. 출애굽 1세대 중에서는 하나님을 철저히 믿음으로 신뢰하였던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만이 그리고 광야에서 태어난 출애굽 2세대들 만이 약속의 땅을 밟습니다. 광야에서 죽고 새로 태어난 세대 - 이것이 바로 신약에서 말하는 중생(重生:거듭남=born again) 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 광야교회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변화되는 훈련을 받으며 영적인 약속의 땅 천국을 향해 하루 하루 걸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곧 그들이 여호와의 명을 좇아 진을 치며 여호와의 명을 좇아 진행하고 또 모세로 전하신 여호와의 명을 따라 여호와의 직임을 지켰더라 (민수기9:23)
•나의 영광과 애굽과 광야에서 행한 나의 이적을 보고도 이같이 열번이나 나를 시험하고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한 그 사람들은 내가 그 조상들에게 맹세한 땅을 결단코 보지 못할 것이요 또 나를 멸시하는 사람은 하나라도 그것을 보지 못하리라.(민14:22-23)
 

[5] 신명기


•책 이름의 의미 :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켜 복을 누릴 것을 신신당부(申申當付)하는 책
•핵심 단어 →언약(...하라, 그리하면...하리라.)
•나의 경우 :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면 복이요 거부하면 징계가 따른다는 사실을 삶을 통해 철저히 깨닫게 됩니다.
 

신명기는 약속의 땅 가나안 입경 바로 직전에 모세가 이스라엘 총회에서 행한 3편의 고별설교입니다. 申(거듭신)命(명할명)記라는 말을 쉽게 표현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켜 복을 누릴 것을 신신당부(申申當付)하는 책"이라는 의미가 됩니다. 모세는 이 설교를 마지막으로 꿈에도 그리던 가나안 땅을 밟아보지 못한채 바라만 본 후 느보산에서 파란만장한 120년의 생을 마감합니다.

하루 하루 삶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나갈 때 마음의 안식과 육신의 평강과 범사에 형통하는 복을 누리게 되며, 말씀에 순종하지 못할 때는 고통이 따르며 하나님의 엄정한 공의의 심판을 받게 된다는 내용이 신명기의 주제입니다. 그래서 "...하라. 그리하면...할 것이다"가 신명기의 영적공식입니다. 복을 받으려면 먼저 반드시 복받을 짓을 먼저 해야 합니다. 그리고 죄를 지으면 반드시 벌을 받아야 합니다. 이것이 신명기의 주제입니다. 따라서 모세 5경 이후의 성경의 모든 내용은 신명기적 관점에서 읽어야 합니다. 특히 불순종으로 얼룩진 이스라엘 역사의 부침은 바로 이 신명기적 관점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신명기적 역사관이라고 말합니다.
•보라 내가 오늘날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곧 내가 오늘날 너를 명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 그리하면 네가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요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얻을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임이니라. 그러나 네가 만일 마음을 돌이켜 듣지 아니하고 유혹을 받아서 다른 신들에게 절하고 그를 섬기면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선언하노니 너희가 반드시 망할 것이라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서 얻을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치 못할 것이니라. 내가 오늘날 천지를 불러서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말씀을 순종하며 또 그에게 부종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시니 여호와께서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네가 거하리라. (신명기30:15-20) 
 

[6] 여호수아


•책 이름의 의미 : 모세의 후계자인 여호수아의 지휘로 투쟁하여 약속의 땅을 차지하는 과정을 기록한 책
•핵심 단어 → 투쟁,정복
•나의 경우 : 이렇게 자신과 투쟁하며 훈련되어 성화(聖化)된 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의지하여 요단강을 건너(육신의 죽음을 의미함) 영적인 땅 천국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광야에서 40년간 말씀의 실천과 훈련을 거듭받아 자유인으로서의 최소한의 자격을 갖추고 약속의 땅을 향해 싸우며 진군해 들어가는 내용이 여호수아서의 주제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약속을 지키시는 여호와이시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끝없이 불평과 원망을 하는 백성들을 끝까지 참으시고 사랑으로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 - 그분을 우리는 삶의 최고 목표로 삼고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또한 꼭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땅을 하나님께서 약속하셨다고 하여 거져 손쉽게 들어 가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믿기만하면 공짜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지만 신앙은 철저한 대가를 지불하면서 내가 이루어 가야하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의 31명의 왕들과 혈투를 벌이면서 하나님을 신뢰하며 마침내 땅을 차지하게 됩니다. 이것은, 구원받았다고 해서 천국을 손쉽게 거져 얻는 것이 아니라 앞에 가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나를 거스리는 사단의 세력과 내 안에 잠재된 죄와 철저히 투쟁하는 영적전쟁 속에서 피를 흘리며 "마침내" 차지하게 된다는 교훈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여호수아1:8)
•이와 같이 여호수아가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신 말씀대로 그 온 땅을 취하여 이스라엘 지파의 구별을 따라 기업으로 주었더라 그 땅에 전쟁이 그쳤더라.(여호수아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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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

 

 

 

 

이는 우리가 원수였을 때에 ... <로마서 5:10>

 

타락 이전에 선을 행할 수 있었던 인간은 선을 행할 능력을 상실 합니다. 이제는 사탄이 우리의 마음에 죄를 넣지 않아도 우리 안에 죄가 생겨 하나님도 알아 볼 수 없고, 함께 할 수도 없게 됩니다. 그리고 선의 기준 되시는 하나님께서 창조주로써 만드신 이 세상의 법이 아닌 인간의 자의적인 선악 기준을 통해 법을 정하고 그것을 옳다고 여기게 됩니다.

 

죄가 있으면 심판하셔야 하는 하나님의 공의에 대항하여, 하나님을 적으로 규정하고 대놓고 반란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기준에 따른 인간의 죄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노력과 인간의 방법으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배제하고 유토피아를 만들려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만든 세상에서 하나님이 없는 유토피아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에녹 성을 쌓은 가인, 바벨탑을 쌓은 니므롯, 공산주의 체제를 다진 스탈린, 모든 사람이 주인이 되자는 

 

십자가 복음

 

그럼에도 하나님은 인간의 구원 계획을 갖고 계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스스로 이 땅에 오셔서 육신을 입고 인간을 대신해서 모든 죄를 뒤집어 쓰는 것 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분명합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입니다. 인간의 죄에는 반드시 형벌이 뒤따라야 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에게는 어떠한 소망도 없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반란을 일으킨 모든 죄에 대해서 심판을 받아야 마땅 합니다. 인간은 영원한 형벌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존재 였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누군가가 그 죄값을 대신 받겠다고 나선 것 이었습니다. 그것은 육신을 입으신 하나님 자신이셨습니다.


유월절에 십자가에 달린 것은 유대인 지도자들의 의지가 아니였습니다. 십자가에서 심판을 내린 것은 빌라도가 아니였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에게서 버림을 받은 것 이었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것을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마가 복음 15:34>

반역자가 달리는 십자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가 달리는 나무에서 예수님은 우리 대신에 하나님의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신명기 21:23>

이로써 하나님의 공의가 이루어졌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이 십자가에 동참하는 사람들과 연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죄로 인해 교제할 수 없었던 하지만 너무나 사랑했던 사람과 교제할 수 있게 되셨습니다. 그 둘 사이를 연결한 것은 그 둘을 갈라 놓았던 벽을 허문 것은 십자가의 사랑 이었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화평이시니라. 그분께서 둘을 하나로 만드사 우리 사이의 중간 벽을 허무시고 <에베소서 2:14>

이 구원은 인간의 행위나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이루어지는 것 입니다. 이 구원은 오직 예수님의 믿음을 얻음으로,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힘으로 그래서 예수님과 하나됨으로 얻을 수 있는 것 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노라. 그러나 내가 아니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느니라. 나는 지금 내가 육체 안에서 사는 삶을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자신을 주신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으로 사노라. <갈라디아서 2:20>

 

나는 이제 죄와 상관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죄를 멸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께서 우리의 죄들을 제거하려고 나타나신 것을 너희가 알거니와 그분 안에는 죄가 없느니라. 누구든지 그분 안에 거하는 자는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누구든지 죄를 짓는 자는 그분을 보지 못하였고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요한 1서 3:5~6>


- 기독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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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과 십자가

 


요한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영생을 얻기 위해선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분께서 인류를 위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해 알아야 기도로 대화할 수 있고, 하나님과 예수님을 닮아 온전해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그분이 어떤 분이고 어떤 삶을 사셨는지 잘 모릅니다. 그럼 구원의 유일한 문이요 길이신 예수님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예수님의 이름


요한 1/17 이는 율법은 모세를 통해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온 것이기 때문이라.
(For the law was given by Moses, but grace and truth came by Jesus Christ.) kjv


신약 성경에 나오는 '예수스'(Jesus, 지저스)라는 이름은 히브리 이름 '여호수아'의 단축형 '예슈아'의 헬라어 형태입니다. 이 예수님의 이름 '여호수아' 속에는 하나님의 성호 네 글자 야훼(YHWH)가 축소되어 담겨져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 있는 하나님의 이름인 YHWH의 정확한 발음은 알 수 없으나 보통 '야훼' 또는 '여호와'로 발음합니다. 여호수아는 '여호와는 구원하신다' 또는 '여호와는 도우신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하나님이 인류 구원의 주체요, 모든 도움과 은혜의 주체적 행위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주(主)로 고백하는 신앙공동체는 예수님의 이름을 부를 때 예수님의 영이 성령의 능력으로 함께 하는 것으로 확신했습니다.

 

요한 14/13~14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것은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 안에서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마가 16/17~18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들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마귀들을 내쫓으며 새 언어들을 말하며 뱀들을 집어 올리며 어떤 치명적인 것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들에게 안수한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사도행전 4/12 다른 이에게는 구원이 없나니 이는 하늘 아래 사람들 가운데 우리를 구원할 다른 이름을 주신 적이 없기 때문이니라, 하였더라.

 

로마서 10/13 이는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임이라.


예수님은 우리가 예수님 이름으로 무엇이든 구하면 아버지의 영광을 위하여 예수님이 시행하실 것이라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능력을 받아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새 언어(방언)를 말하며, 악한 것으로부터 해를 받지 않고, 병든 사람을 안수하여 치료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예수님 이외에 다른 구원자가 없으며, 하나님이 인간에게 구원할 다른 이름을 주신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누구든지 예수님의 이름을 나의 구원주로 부르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라 했습니다.

 

2. 예수님은 구약의 예언을 성취하신 구세주 그리스도(메시야)입니다.


구약시대 4000년은 아담의 범죄에 대한 형벌 기간으로 죄와 율법에 얽매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메시야를 인류에게 보내 주셔서 온전한 구원을 이룰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이사야 11/1~2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의 뿌리들에서 한 가지가 자랄 것이라. 주의 영이 그의 위에 머물리니 지혜와 명철의 영이요, 계획과 능력의 영이며, 지식과 주를 두려워하는 영이라.

 
다니엘 9/25~26 그러므로 알고 깨달으라. 예루살렘을 복원하고 건축하라는 그 명령이 나오는 때부터 메시야 통치자까지 칠 주와 육십이 주가 될 것이요, 그 거리와 그 성벽이 재건되리니 곧 고난스런 때들이라. 육십이 주 후에는 메시야가 끊어질 것이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요, 또 장차 올 그 통치자의 백성이 도성과 성소를 파괴하리니 그 끝은 홍수로 뒤덮일 것이요, 그 전쟁의 끝에는 황폐함이 정해졌느니라.

 
이사야 선지자는 다윗의 아버지인 이새를 뿌리로 하여 메시야가 다윗의 혈통에서 나실 것을 예언했는데 마태복음 1장에서는 자세한 족보를 들어 이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또한 '주의 영'(성령)이 그에게 강림하심으로써 지혜와 능력을 가지고 이상세계를 이루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구약 성경에는 세상을 구원할 구세주인 메시야가 활동하고 죽는 시기까지 예언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10/38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께 성령과 능력으로 기름 부어 주셔서 그가 두루 다니시면서 선한 일을 행하시며 마귀에게 억압받는 모든 자를 치유하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계심이라.

 
누가 23/3 빌라도가 그에게 물어 말하기를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고 하니, 주께서 그에게 대답하여 말씀하시기를 “그렇도다.”라고 하시니라.

 
히브리서 4/14 우리에게는 위대한 대제사장, 곧 하늘들로 올라가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계시므로, 우리는 우리의 고백을 굳게 붙들어야 하리라.

 
마태 21/11 그 무리가 말하기를 "이분은 갈릴리 나사렛의 선지자 예수시라"고 하더라.

 
하나님 영이 강림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명자 역할을 한다는 것인데, 기름이 성령을 상징함으로 구세주를 그리스도(Christ, 기름 부음 받은 자, 헬라어) 또는 메시야(마쉬아흐, Messias, 기름 부음 받은자, 히브리어)라고 합니다. 구약 시대에서 기름 부음 받은 세 종류의 사람이 있는데 왕, 제사장, 선지자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이자, 신약시대의 대제사장이자, 말씀을 전하는 선자자(대언자)의 역할을 모두 하셨습니다.

 
미가 5/2 그러나 너 베들레헴 에프라타야, 네가 비록 유다의 수천 가운데서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통치할 자가 너로부터 내게로 나오리라. 그의 나오심은 예로부터요, 영원부터였느니라.

 
누가 2/4~7 요셉도 갈리리 나사렛 성읍에서 유대 다윗의 성읍, 즉 베들레헴이라는 곳으로 가니 (이는 그가 다윗 가문의 계열이기 때문이더라.) 그가 자기와 정혼한 아내 마리아와 함께 등록하러 갔는데, 그녀는 아이로 인하여 배가 불렀더라. 그들이 그곳에 있는 동안 날이 차서 그녀가 해산하게 되었더라. 그리하여 그녀가 자기의 첫아들을 낳아 그를 포대기에 싸서 구유에 누이니, 이는 여관에 그들이 들 방이 없었기 때문이라.
 

미가 선지자는 유다의 작은 마을인 베들레헴에서 이스라엘을 다스릴 통치자가 나실 것을 예언했습니다. 유대인 요셉이 로마황제의 명령에 따라 조세 등록을 위해 갈릴리 나사렛에서 고향 베들레헴으로 정혼한 아내 마리아와 함께 갔습니다. 그곳에 있는 동안 날이 차서 마리아가 아들 예수를 낳음으로써 메시야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난다는 예언이 이루어졌습니다.
 

누가 2/11 이는 다윗의 고을에서 너희에게 구주가 나셨으니, 그분은 주이신 그리스도시니라.
(For unto you is born this day in the city of David a Saviour, which is Christ the Lord.) kjv

 

예수님이 태어날 당시 주위에 있던 목자들에게 천사가 나타나서 다윗의 고을인 베들레헴에서 구주가 나셨는데 그분은 주(主)이신 그리스도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을 이끌어 주는 주인이라는 의미에서 구주(救主, Savior, 구세주, 구원주, 구원자) 또는 주님(the Lord)으로 불립니다.

 
이사야 7/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한 표적을 너희에게 주시리라. 보라, 한 처녀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마태 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한 아들을 낳으리니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해석하면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이라.
 

마태 1/18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이러하니라. 그의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였으나 동침하기 이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그녀에게 나타났더라.
 

이사야 선지자는 한 처녀가 남자와 동침하지 않고 임신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라 예언하였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표적(sign)으로 하나님이 역사하신 징표입니다.
아들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는데 임마누엘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란 뜻입니다. 예언대로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요셉과 정혼(약혼)한 사이였지만 동침하기 전에 임신을 했습니다.

 

마태 1/20~21 그가 이 일들을 생각하고 있을 때에, 보라, 주의 천사가 꿈에 그에게 나타나 말하기를 “너 다윗의 아들 요셉아, 마리아를 네 아내로 삼는 일을 두려워 말라. 그녀에게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그녀가 한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의 이름을 주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들에서 구원할 것이기 때문이니라.”고 하니라.

 
이에 요셉이 파혼하려고 하자 천사가 요셉의 꿈에 나타나 아기는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요셉은 하나님께 순종하여 마리아와 결혼했고, 마리아는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리고 아기의 이름을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들에서 구원해 줄 것이기 때문에 '예수'라 하라고 했습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히브리어로 '하나님(여호와)은 구원해 주신다'라는 뜻입니다.
 

히브리서 4/15 이는 우리의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할 수 없는 분이 아니요, 모든 점에서 우리와 마찬가지로 시험을 받으셨지만 죄는 없으신 분이기 때문이라.
 

벧전 1/19 흠도 점도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기 때문이라.

 
예수님이 인간 유전이 아닌 처녀 상태에서 성령의 잉태로 세상에 오신 것은 아담의 원죄를 상속 받지 않고 하늘이 주신 깨끗한 몸으로 오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죄 없이 태어나셨고, 죄를 짓지도 않으셨기 때문에 우리의 모든 죄를 가져갈 흠 없는 어린 양이 되신 것입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고, 생명을 낳으시며, 흙으로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에게는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이사야 53/5 그러나 그는 우리의 허물로 인하여 상처를 입었고, 그는 우리의 죄악으로 인하여 상하였도다. 우리의 화평을 위한 징계가 그에게 내려졌고, 그가 맞은 채찍으로 우리가 치유되었도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실 것을 암시하는 구절로 우리 죄를 대신해 고통을 받으실 것을 예언합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악으로 몸이 상하셨고, 이를 믿는 사람은 저주에서 벗어나 치유되고 평안을 누리게 됩니다. 예수님은 메시야 초림에 관한 구약의 예언 48가지를 성취하셨는데, 이는 확률적으로 우연히 일어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많은 메시야에 대한 예언을 정확히 성취한 것은 예수님이 메시야란 가장 큰 증거입니다. 이밖에 예수님이 하신 진리의 말씀, 그가 행한 다양한 기적, 십자가 죽음 이후의 부활과 승천 등도 증거가 됩니다. 예수님이 성취하신 대표적인 구약의 예언은 다음과 같습니다.
• 그리스도는 이스라엘로부터 오실 것이다(민 24:17-19). 
• 그리스도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자손이 될 것이다(창 12:3 ;17:19, 민24:17). 
• 그리스도는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실 것이다(미 5:2). 
• 그리스도는 처녀에게서 태어나실 것이다(사 7:14). 
•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실 때는 상세히 예언되어 있다(단 9:25). 
• 그리스도의 오심은 그의 선두주자에 의해서 선포될 것이다(사 4:3-4). 
• 메시야는 육신으로 나타나신 하나님이시다(사 9:6). 
• 그는 어린 시절을 이집트에서 보내실 것이다(호 11:1). 
• 그는 고난을 받고 속죄를 이루실 것이다(사 53장). 
• 그는 나귀의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실 것이다(슼 9:9). 
• 그가 고통 중에 있을 때 쓸개즙과 식초가 주어질 것이다(시 69:21). 
• 그의 뼈는 부러지지 않을 것이다(시 43:20). 
• 사람들은 그의 옷을 나눠 갖기 위하여 제비를 뽑을 것이다(시 22:18). 
• 그는 죽음의 고통 가운데서 그가 태어나기도 전에 기록된 어떤 말들을 할 것이다(시 22:1). 
• 그는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켜질 것이다(시 16:10). 
• 그리스도는 친구에 의해 배반당한 것이다(시 41:9). 
• 그는 은 삼십에 팔릴 것이다(슼 11:12). 
• 그는 거짓 증인에 의해 모함받을 것이다(시 35:11). 
• 그는 침 뱉음을 당하고 사람들에게 맞을 것이다(사 50:6). 
• 그는 이유없이 미움을 받을 것이다(시 35:19). 
• 그는 멸시와 조롱을 당할 것이다(시 22:7,8).

 

 

 
3. 예수님은 새로운 시대 생명의 말씀을 선포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인류에게 각 시대마다 새로운 계명을 주시는데 그 계명을 지키면 구원 받고, 지키지 못하면 심판을 받습니다. 아담과 이브 때는 선악과를  따 먹지 말라는 계명(명령)을 주셨고, 노아 때는 방주를 짓고 타라는 계명을 주셨으며, 모세 이후에는 율법과 제사법을 주어 지키게 하였습니다.


신약시대에 예수님이 오신 것은 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법, 즉 인류에게 생명의 말씀을 주시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누가 5/37~38 또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붓는 사람은 아무도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그 가죽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도 쏟아지고 가죽 부대도 망가지리라. 그러나 새 포도주는 새 가죽 부대에 부어야만 하나니, 그리하면 둘 다 보존되느니라.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왜 금식하지 않는냐고 물으니 예수님께서 새 포도주는 새 가죽 부대에 넣어야지, 낡은 가죽 부대에 넣으면 가죽 부대가 터져 못 쓰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낡은 가죽 부대는 구약시대, 새 가죽 부대는 신약시대, 헌 포도주는 율법, 새 포도주는 생명의 말씀을 의미합니다. 새로운 시대가 왔으니 이전 시대의 법인 율법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요한 6/68 그때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기를 "주여,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까? 주님께는 영생의 말씀이 있나이다.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을 믿고 따른 것은 영생의 말씀 때문이었습니다. 영생이란 영원한 생명(Eterner Life)으로 죽었던 우리 영이 살아나 천국에서 영원히 사는 것을 말합니다. 이에 반해 구약 시대에는 영이 죽었기 때문에 육신의 계명에 관한 율법과 육신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법밖에 받을 수 없었으며 이로 인해 영의 온전한 구원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 그럼 구약 시대의 율법과 제사법이 신약 시대에 어떻게 바뀌었는지 알아 보겠습니다.
 
 

a) 형식에 얽매었던 육적인 제사가 하나님을 영적으로 섬기는 경배(예배)로 바뀌었습니다.

 

요한 4/24 하나님은 한 영이시니 그 분께 경배드리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경배드려야만 하리라.고 하시니라.
(God is a Spirit : and they that worship him must worship him in spirit and in truth.) kjv


 사마리아 여인이 꼭 예루살렘에서 제사를 드려야 하느냐고 묻자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은 한 영이시니 영과 진리로 경배드려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영이 살아 났기 때문에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영적으로 하나님을 찬송하고 감사드리며 영광 돌리면 되는 것입니다. 제사(offering)는 신께 헌물을 드리는 의미가 있지만 경배(worship, 예배)는 신을 공경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마태 7/7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너희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라.

 
신약시대에는 영이 살아 났기 때문에 제사장을 통하지 않고도 당당히 하나님께 우리가 원하는 것을 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대화하듯이 기도로써 우리의 소원을 말하면 아버지가 자녀의 소원을 들어 주듯이 우리의 소원을 들어 줄 것이라 하셨습니다. 영이 죽었던 구약시대에는 하나님께 필요한 것을 구하기는커녕, 죄로 인해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기에 급급했었습니다.

 

b) 육신에 관한 율법이 영에 관한 생명의 말씀으로 바뀌었습니다.
 

율법은 육체가 도덕적으로 타락하지 않기 위해 주신 법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십계명인데 우상 섬기지 말고, 살인, 간음, 거짓말, 도적질 하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하지만 육신에 관한 법으로 영을 구원할 수는 없습니다. 영에 관한 진리 말씀이 바로 생명의 법이며, 예수님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말씀을 주셨습니다.
 

Ⅰ) 주 예수를 믿어야 구원 받습니다.

 
구약 시대 때는 모든 율법을 지켜야 복을 받고, 그 중 하나라도 어기면 저주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율법은 그 종류가 613가지나 되어 외우고 실천하기가 무척 어려웠습니다. 그 중에는 안식일법이나 제사법이나 정결례 같은 지키기 까다로운 법도 있습니다. 사람이 율법을 모두 지키기도 어렵지만 모든 율법을 지켰다 하더라도 영의 구원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요한 3/16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그의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마태 16/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말씀드리기를 "주는 그리스도, 곧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하더라. 

 

요한 14/6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사람이 아무도 없느니라.

 

하나님이 그의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 가운데 보내신 이유는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멸망(심판, 지옥행)하지 않고 영생(구원, 천국행)을 얻게 하려 하심이었습니다. 신약시대에는 예수님이 하나님이 보내신 유일한 아들이자, 나의 유일한 구원주임을 믿어야 구원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럼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할까요?

 

요한 5/24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자는 영생을 얻고,  정죄에 이르지 아니할 것이며,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느니라.


요한 1/14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므로,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으로)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한 6/48~51 나는 그 생명의 빵이라. 너희의 조상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 죽었으나 이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니 그것을 먹는 자는 죽지 아니하리라.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니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리라. 또 내가 줄 이 빵은 세상의 생명을 위하여 줄 나의 살이라."고 하시니라.

 

마태 7/24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그대로 행하는 사람은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현명한 사람과 같아서
 

예수님을 나의 구원주로 믿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주신 말씀을 들어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이며, 그 말씀이신 예수님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빵이니 나를 먹으면 죽지 않고 영원히 산다고 하신 것은 예수님의 실체가 말씀이니 예수님의 말씀을 영의 양식이자 진리로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듣고 믿어 그대로 행하는 사람은 신앙의 집을 반석 위에 지은 현명한 사람입니다.


Ⅱ) 하나님과 이웃 그리고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마태 22/37~39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네 마음을 다하고, 혼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것이 첫째며, 큰 계명이니라. 둘째는 이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예수님이 주신 계명 가운데 가장 핵심은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형식적으로 섬기는 것이 아나라 나의 마음과 혼과 생각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십니다. 늘 하나님을 마음의 중심에 두고 생각하고 의지하며 사랑해야 죄와 사탄이 틈을 타지 못합니다.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은 가까운 사람 뿐만 아나라 불우한 이웃들까지 사랑해 도우란 것입니다.

 
출애굽기 21/23~25 만일 어떤 피해가 따르면 그때는 생명은 생명으로 갚아야 하며,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데인 것은 데임으로, 상처는 상처로, 매질한 것은 매질한 것으로 갚을지니라.

 

마태 5/44 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을 축복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해 주고, 너희를 천대하고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라.

 

구약시대에는 내게 해를 끼치는 사람은 그대로 갚아 주었지만, 신약시대에는 나의 원수를 사랑하고. 나를 저주하는 자를 축복하며, 나를 미워하는 자를 잘해 주고, 나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내게 해를 끼치는 원수를 미워하지 않기도 힘든데 사랑한다는 건 불가능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낳고 원한은 나를 악하게 만든다는 걸 생각할 때 오히려 원수를 불쌍히 여기고, 더 이상 죄 짓지 않도록 기도하는 것이 예수님을 본받은 그리스도인의 자세입니다. 진정한 영의 사랑은 육신의 감정적 사랑과는 다릅니다.


육신의 사랑은 외모나 일시적 기분에 의해서 좋아지고 시간이 지나면 싫증나며 여러 이유로 실망하거나 미워하게 됩니다. 하지만 영의 사랑은 하나님이 주신 가장 거룩하고 숭고하며 순수하고 아름다운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무조건적이고 희생적이며 무한하고 영원한 사랑입니다.

 

고전 13/4~7 사랑은 오래 참고 친절하며 사랑은 시기하지 아니하고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고 무례하게 행하지 아니하며 자신의 유익을 추구하지 아니하고 급히 성내지 아니하며 악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를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뎌 내느니라.


고린도전서 13장을 보면 사랑은 인내하고, 친절하고, 온유하고, 시기 질투하지 않고, 교만하지 않고, 이기적이지 않고, 예의 바르며, 화내지 않고, 선하고, 진리를 기뻐하며, 모든 것을 바라고 믿고 참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이 세상에 점점 미움과 시기와 타툼이 심해지고, 이혼율이 높아가는 이유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악하거나 이기적이지 않고, 선한 진리와 겸손과 인내와 믿음과 희생으로 다져진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Ⅲ) 내게 죄 지은 자를 무조건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마태 18/21~22 그때 베드로가 주께 나와 말씀드리기를 "주여, 내 형제가 내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그를 용서해 주어야 하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리이까?"라고 하니,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나는 너에게 일곱 번까지라고 말하지 않고,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라고 하노라.

 

누가 17/4 그가 하루에 일곱 번이나 너에게 죄를 짓고, 또 하루에 일곱 번이나 너에게 돌아와서 '내가 회개한다.'고 말하면 그를 용서하라."고 하시더라.

 

베드로가 예수님께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일곱 번 정도 용서해 주면 되겠습니까? 라고 물어 보니 예수님은 일흔 번씩 일곱 번 즉 490번이라도 용서해 주라고 했습니다. 또한 형제가 하루에 일곱 번이나 자신에게 죄를 짓고, 일곱 번 회개한(잘못했)다고 말하면 그를 용서해 주라고 하십니다. 이는 형제가 내게 행한 죄에 대해 복수하거나 원한을 품지 말고 무조건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마태 18/33 내가 너를 가엾게 여김 같이 너도 네 동료 종을 불쌍히 여기는 것이 당연하지 아니하냐?

 

그리고 그 이유를 마태 18/23~35 에서 빚 탕감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겨 우리의 큰 죄(빚)를 은혜로 용서(탕감)해 주셨는데 우리가 형제의 작은 죄(빚)를 용서치 않는다면 하나님의 진노를 사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받지만 구원 받은 자는 최소한의 도리를 지켜야 계속 은혜 가운데 거하게 됩니다.


 

마태 6/12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를 용서해 준 것같이 우리의 빚진 것도 용서해 주옵시며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에서도 우리에게 빚진 자를 용서해 준 것같이 우리의 빚진 것도 용서해 달라고 합니다. 다윗은 사울왕에게 쫓겨 다니면서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맞았는데도 그를 미워하지 않고 용서했습니다. 사울왕을 죽일 기회도 있었지만 죽이지 않고, 그가 회개하고 돌이키기를 바랬습니다.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도 악행을 반복하던 사울왕은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비참한 최후를 맞았습니다.

 

로마서 12/19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 스스로 복수하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은 나의 일이니 내가 갚으리라. 주가 말하노라."고 하였느니라.
 

로마서 12/21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벧전 2/21~23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시고, 우리에게 한 본을 남겨 놓으시어, 너희로 그의 발자취를 따르게 하셨느니라. 그는 죄를 짓지도 아니 하셨고, 그 입에는 간사함도 없으셨으며, 모욕을 당하셨으나 다시 모욕으로 갚지 아니하셨고, 고통을 당하셨으나 다시 위협하지 아니하셨으며, 오직 의롭게 심판하는 분께 자신을 의탁하셨느니라.

 

이와 같이 악인에 대한 심판은 하나님이 하는 것이지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악에 대해 악으로 대항하면 악에게 지는 것이고, 악에 대해 선으로 대응하면 악에게 이기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욕을 당하셨으나 다시 모욕으로 갚지 아니하시고, 고통을 당하셨으나 다시 위협하지 않음으로 원수를 사랑하고, 죄를 용서하며, 선으로 악을 이긴 본을 친히 우리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Ⅳ) 남을 함부로 판단하지 말고 겸손하라고 하십니다.


마태 7/1~3 "판단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도 판단받지 않을 것이라. 너희가 판단하는 그 판단으로 너희도 판단받을 것이며, 너희가 재는 그 자로 너희도 다시 측정을 받으리라. 어찌하여 네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자신의 눈 속에 있는 들보는 생각지 못하느냐?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남의 허물을 비웃고 함부로 판단하거나 정죄해 상처를 주는 일이 많습니다.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다 똑같은 죄인인데도 자신의 잘못은 깨닫지 못하고 남의 탓만 합니다. 이는 남의 흉을 보면서 자신은 우월감을 느끼려는 심리적인 작용에서도 비롯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 판단받지 않고 긍휼을 입으려면 나도 상대방을 판단하지 말고 불쌍히 여겨야 합니다.


학교에서는 마음에 안들거나 연약한 급우를 집단으로 따돌림 하고 괴롭힙니다. 집단 따돌림 당한 학생은 마음에 심한 상처를 입고 우울증에 걸리거나 자살하기까지 합니다. 남을 언어나 행동으로 괴롭히는 것은 간접적인 살인행위로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일 중 하나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상대의 허물을 드러내지 않고, 이해하려고 노력하며, 오히려 덮어주고 감싸줘야 겠습니다.

 

 

Ⅴ) 마음으로 범죄하지 말아야 합니다.

 
누가 6/45 선한 사람은 마음에 쌓은 선한 보화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마음에 쌓은 악한 보화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그 입이 말하기 때문이라.


선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결국 선한 행동을 하고, 악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결국 악한 행동을 하게 됩니다. 누군가에게 미운 마음이나 서운한 마음을 가지면, 결국 나도 모르게 그 사람에게 상처 주는 말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죄의 발생지인 마음을 바르게 다스리라고 하십니다. 구약시대에는 행동으로 범죄한 것이 것이 죄이지만, 신약시대에는 마음으로 범죄한 것도 죄가 됩니다.

 

야고보서 1/15 그러므로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면 사망을 낳느니라.

 

사람이 마음에 욕심이 생기면 죄를 짓게 되고, 점점 더 큰 죄를 지어 결국 영혼육의 파멸(사망)에 이르게 됩니다. 인간의 모든 욕심(물욕, 명예욕, 권력욕, 식욕, 성욕)은 한도 끝도 없습니다. 자전거 타면 소형차라도 타고 싶고, 소형차 타면 중형차 타고 싶으며, 중형차 타면 외제차 타고 싶어집니다. 그리스도인은 저급한 육신의 감정에 얽매이지 말고, '차원 높은'(영적인) 진리를 추구(사모)하며 살아야겠습니다.

 

4. 유대인은 왜 예수님을 배척했나?

 

유대인들은 자신을 구원할 왕이자 기다리던 메시야인 예수님을 믿지 않고 오히려 핍박하며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믿게 하기 위해 문둥병자를 고치시고,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시며, 죽은 사람까지 살리셨습니다. 그런데도 바리세인 서기관 같은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나사렛 이단의 괴수라며 시기하고 미워했습니다. 죄인, 세리, 창녀, 어부 등 그시대 하층민만 예수님을 선지자로 여기고 따랐을 뿐입니다.

 

* 그럼 유대인들이 왜 예수님을 배척했는지 이유를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a) 위선과 탐욕에 빠진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잘못을 예수님이 지적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23장에서는 예수님이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잘못을 신랄(辛辣)하게 비판하십니다. 대표적인 잘못은 형식주의와 위선에 빠져서 겉으로는 경건한 체 하고 높임을 받지만 속으로는 각종 죄악과 탐욕이 가득한 회칠한 무덤과 같다는 것입니다. 또한 자신은 희생하기 싫어하면서 남에게는 무거운 짐을 지우고, 말과 행실이 다른 것 등을 지적하셨습니다.

 

 

마태 23/14 위선자인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아, 너희에게 화 있으리라! 이는 너희들이 과부들의 집을 삼키며 남들에게 보이고자 길게 기도하기 때문이라. 그러므로 너희는 더 큰 심판을 받으리라.

 

마태 23/25 위선자인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아, 너희에게 화 있으리라! 이는 너희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하게 하나 속은 약탈과 방탕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라.

 

마태 23/27 위선자인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아, 너희에게 화 있으리라! 이는 너희가 회칠한 무덤들처럼 실로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도다.


누구든지 자신의 잘못을 들추어 내면 싫은 법입니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지적을 겸손한 마음으로 받아드리지 않고 오히려 분개했습니다. 민중의 마음이 언행 일치하는 예수님에게로 쏠리자 이에 밥줄이 끊길 것을 염려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죽일 음모를 세우게 됩니다.

 

b) 예수님이 자신을 하나님 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 것이 신성모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요한 10/33 유대인들이 주께 대답하여 말하기를 "선한 일로 인하여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모독하기 때문이라. 이는 네가 사람이면서 하나님으로 자처하기 때문이라."고 하니라.

 

요한 19/7 유대인들이 그에게 대답하기를 "우리에게는 율법이 있는데 우리의 율법에 따르면 그는 마땅히 죽어야 하나이다. 이는 그가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기 때문이니이다."라고 하더라.

 

레위기 24/16 주의 이름을 모독하는 자는 반드시 죽을지니, 모든 회중이 분명히 그를 돌로 칠지니라. 타국인도 그가 주의 이름을 모독하면, 그 땅에서 난 자와 마찬가지로 죽을지니라.


예수님이 "나와 아버지는 하나니라"고 하자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사람이면서 하나님으로 자처한 것은 신성모독이라며 예수님을 돌로 치려 했습니다. 또한 유대인들은 빌라도 앞에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 것은 율법에 따르면 죽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예수님이 하나님 내지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말이 쉽게 이해가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요한 14/10 너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는 것을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에게 하는 말들은 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거하시는 아버지께서 그 일들을 하시는 것이라.

 

빌립이 하나님을 보여달라고 하자 예수님은 나를 본 것은 하나님 아버지를 본 것과 같다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하시는 모든 언행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 안에 계셔서 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어 병자를 고쳐 주고 죽은 사람을 살리는 등 엄청난 능력을 행하셨습니다. 또한 성령(아버지께서 보내신 영)의 감동을 통해 우리를 구원할 온전한 진리 말씀을 전해 주셨습니다.

 
마태 16/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말씀드리기를 “주는 그리스도, 곧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하더라.

 

시편 8/4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깊이 생각하시오며 사람의 아들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찾아오시나이까?


마태 27/54 백부장과 그와 함께 예수를 지키고 있던 사람들은 지진과 그 일어난 일들을 보고 크게 두려워하며 말하기를 "참으로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고 하더라.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가 성령의 감동을 받아 예수님이 그리스도이고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임을 고백합니다. 인간은 엄밀히 말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부모(사람)로부터 태어난 '사람의 아들'(the son of man, 人子)입니다. 예수님은 외모로는 사람의 아들이지만 내면으로는 하나님의 성품과 능력과 형상을 그대로 닮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 지진과 기적이 일어나자 백부장과 지키던 사람들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인정합니다.

 

 

c) 율법을 지키지 않는 예수님을 율법 파괴자라고 생각했습니다.


누가 6/7 그때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주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치시는가를 지켜보고 있었으니, 이는 그에게서 고소할 구실을 찾으려 함이더라.


유대인들은 예수님과 제자들이 율법을 지키지 않는 것을 보고 분하게 생각했습니다. 예수님 제자들은 일하지 말라는 안식일에 이삭을 잘라 먹었고, 떡 먹을 때 손을 씻지 않았습니다. 예수님도 일하지 말라는 안식일에 손마른 사람, 귀신들려 꼬부라진 여자, 38년된 병자 등을 고쳐주셨습니다. 유대인은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을 보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기 보다는 율법으로 그를 트집 잡았습니다.

 

마태 12/8 인자는 곧 안식일의 주니라."고 하시더라.

 

예수님은 새시대의 주인으로 새로운 말씀을 선포하러 오셨기 때문에 정권이 바뀌었으니 이전의 법은 효력을 잃었습니다. 예를 들어 박정희 군사정권에서는 밤 12시 이후에 다니는 것이 통행금지 죄에 해당했지만 지금은 죄가 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새로운 시대 새로운 법을 선포하신 예수님은 구약시대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죄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신약시대라 하여 율법 모두를 폐하신 것은 아닙니다.


로마서 3/31 그렇다면 우리가 믿음으로 율법을 폐하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오히려 우리가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로마서 6/6 우리가 이것을 아나니 곧 우리 옛 사람이 그와 함께 십자가에 처형된 것은 죄의 몸을 멸하여 더 이상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니라.

 

율법 중 제사의식이나 형식적인 규례는 지킬 필요가 없지만 신앙과 도덕적인 계명은 여전히 지켜야 합니다. 예수님은 육신으로 지킬 수 없는 율법을 폐하시고, 더 높은 차원의 영의 법인 생명의 말씀을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죄의 근원이 되는 육신을 십자가에 못 박고, 우리가 성령으로 거듭난 새 생명이 되게 하셨습니다. 사랑으로 가득찬 사람은 형제에게 거짓말 하거나 도적질 하거나 해를 끼치지 않으므로 율법이 저절로 지켜지게 됩니다.

 
마태 5/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서를 폐기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기하러 온 것이 아니라 이루려고 왔노라.


따라서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신 것이 아니라 더 이상적으로 발전시켜 완성시킨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4/3 이와 같이 우리도 어린 아이였을 때에는 세상의 초등학문 아래서 종 노릇 하였으나


율법은 초등학문이고, 초등학문을 거쳐야 고등학문인 생명의 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사람들도 초등학교를 나와야 중고등학교와 대학교에 진학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육신에 관한 율법은 차원 높은 영의 법을 익히기 위한 과정이지 목적은 아닙니다. 또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이 지키지 않는다고 지적한 것은 율법도 아닌 장로들이 만든 전통인 유전이었습니다.


마태 15/2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어기나이까? 그들은 음식을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라고 하니,


d)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교만에 빠져 예수님을 무시했습니다.

 

요한 7/52 그들이 대답하여, 그에게 말하기를 "너도 갈릴리에서 왔느냐? 갈릴리에서는 어떤 선지자도 나오지 않는다고 했으니 찾아보라."고 하더라.

 

당시의 엘리트인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교만과 위선에 빠져 유대의 변방 지역이었던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스스로 학식을 갖추고 위엄 있다고 생각한 이들이 시골 출신이자 정통교육도 받지 못하고 누추한 차림의 예수님께 머리를 굽힌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마가 2/17 예수께서 그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건강한 사람들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지만 병든 사람들에게는 필요하니라. 나는 의인들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들을 회개에 이르게 하려고 왔노라."고 하시니라.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왜 예수님이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지 물으니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건강한 자가 아닌 병든 자에게 의사가 필요하듯이 예수님은 의인이 아닌 죄인을 불러 회개케 하려고 오셨다고 하였습니다. 암환자가 암세포가 온 몸에 퍼지고 있는데도 나는 건강하다고 버티면 의사가 치료할 수 없을 것입니다. 아무리 잘나고 똑똑한 사람도 이런 상황에선 의사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지시에 따라야 합니다.

 

야고보서 4/6 그러나 그가 더 많은 은혜를 주시느니라. 그러므로 그가 말씀하시기를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들을 거절하시고 겸손한 자들에게 은혜를 주신다.”고 하셨느니라.

 

 

이와 같이 우리가 예수님 앞에 나아갈 땐 나는 구제불능의 죄인이고, 결국 죽을 수밖에 없으며, 내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니 오직 예수님만 믿고 의지한다는 마음을 가져야 예수님께서 우리를 치료하고 구원해 주십니다. 지극히 거룩하시고 능력이 많으신 하나님은 교만하고 마음이 부유하며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절하시고,  겸손하고 마음이 가난하며 죄를 애통해 하는 자를 찾아 은혜를 부어 주십니다.

 
5. 유대인의 배역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거부인가?

 

예수님께서는 여러 비유를 통해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했음을 알려주셨습니다. 마태복음 22장에서는 혼인잔치 비유가 나오는데 임금이 아들 혼인잔치를 위해 종들을 보내서 사람들을 초청하나 다 자기 일에 바뻐 무관심 할 뿐만이 아니라 보낸 종들을 잡아 능욕하고 죽이니 임금이 진노하여 군대를 보내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동네를 불사르게 됩니다.


이는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님의 천국 복음을 거부한 유대인들의 심판을 나타냅니다. 마태 21/33~41에서는 포도원 비유가 나오는데 포도원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고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나가서 열매가 익을 때 소출을 받으려고 종들을 보내니 심히 때리고 죽이므로 '내 아들은 공경하겠지' 라고 생각하고 아들을 보내나 상속자 아들을 죽여 포도원을 차지하려고 아들도 죽이니 포도원 주인이 돌아와 이 악한자들을 진멸하고 다른 농부들에게 농장을 줍니다. 이 역시 하나님이 보낸 선지자들과 예수님을 죽이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를 거부한 유대인들의 심판을 나타냅니다.

 

 

살전 2/15 유대인은 주 예수와 선지자들을 죽이고 우리를 쫓아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아니하고 모든 사람에게 대적이 되어

 

계시록 2/9 내가 너의 행위와 궁핍을 아노라. 자칭 유대인이라고 말하는 그들의 모독을 아노니, 그들은 유대인이 아니요, 오히려 사탄의 회당이니라.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이 주 예수와 선지자들을 죽이고 사도들을 핍박한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아니고 모든 사람에게 대적이 되는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초대교회 성도들을 복음사역을 훼방하고 박해한 유대인들의 모독을 아신다고 하시면서 그들은 유대인이 아니라 사탄의 회당(synagogue, 유대인의 집회장소)이라고 합니다.


에스라 7/13 내가 칙령을 내리노니 내 영토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과 그의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 중에서 자원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고 마음먹은 자들은 다 너와 함께 갈지어다.
(I make a decree, that all they of the people of Israel, and of his priests and Levites, in my realm, which are minded of their own freewill to go up to Jerusalem, go with thee.)

이렇게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와 명령을 거부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이 가진 '자유의지'(freewill) 때문입니다.


freewill은 '자유의지'로 내가 누구의 간섭 없이 내 마음대로 행할 수 있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원격조종 로봇으로 만들지 않았습니다. 아담과 이브도 자신이 가진 자유의지로 하나님의 계명을 어길 수 있었습니다.

 

 

사무엘상 15/11 내가 사울을 세워 왕으로 삼은 것을 후회하노니, 이는 그가 나를 따르는 것에서 돌이켜 내 계명들을 이행하지 아니하였음이라." 하신지라. 사무엘이 슬퍼하여 밤새도록 주께 부르짖더라.

 

사무엘상 16/7 주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나 키의 크기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이는 주가 보는 것이 사람이 보는 것과 같지 아니하기 때문이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주는 마음을 보느니라.


하나님은 사울을 세워 왕으로 삼은 것을 후회하였습니다. 사울이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고 자신의 마음대로 행했기 때문입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도 후회를 하십니다. 왜냐하면 부모가 자식 잘 못 되는 것을 어쩔 수 없듯이 하나님도 인간이 자유의지에 관여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이후에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outward appearance) 보다 마음(heart)을 보시고 다윗을 왕으로 삼으십니다.

 

출애굽기 19/5~6 그러므로 이제 만일 너희가 참으로 내 음성에 복종하고 나의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백성보다 나에게 독특한 보물이 되리니, 이는 온 땅이 내 것임이라. 너희는 나에게 제사장들의 왕국이 되며 거룩한 민족이 되리라.' 이것이 내가 이스라엘의 자손에게 고할 말이니라." 하시니라.

 

이사야 49/6 그가 또 말씀하셨도다. 네가 나의 종이 되어 야곱의 지파들을 일으키며, 이스라엘의 보존된 자들을 돌아오게 하는 것은 쉬운 일이라. 내가 또한 너를 이방인들에게 빛으로 주리니 네가 땅 끝까지 나의 구원이 되리라.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그들이 하나님의 음성에 복종하면 모든 백성보다 독특한 보물이 되고, 제사장 왕국이자 거룩한 민족이 되게  해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또한 이스라엘을 이방인의 빛으로 삼아 땅 끝까지 구원을 베풀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아 온갖 죄악과 우상숭배에 빠졌고, 결정적으로 구원주이자 왕인 예수님을 받아 들이지 않아 심판을 받게 되었으며, 이방인에게 그 모든 복락이 돌아갔습니다.
 

로마서 5/10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도 그의 아들의 죽음으로 인하여 하나님과 화해하게 되었으니 더욱더 화해하게 된 우리는 그의 생명으로 인하여 구원받게 되리라.

 

2,000년전 유대인의 불신과 무지로 예수님이 돌아가셨지만 유대인은 죄 많은 우리 인간을 예표합니다. 즉 죄인된 인간이 의인인 예수님을 미워하여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인간을 용서하셨고, 우리는 우리 죄를 대신해 흘리신 그의 피로써 죄사함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인된 나를 구원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신 예수님의 깊은 사랑에 감사해야 합니다.


* 유대인의 배역은 다음 두 가지 결과를 초래합니다.


첫째는 유대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마태 23/35~36 그리하여 의로운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모든 것이 이 세대에게 돌아가리라.

 

마태 27/25 모든 백성이 대답하여 말하기를 "그의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리라."고 하더라.


누가 19/43 그 날들이 너에게 닥칠 것이니, 너의 원수들이 흙언덕을 쌓고, 너를 에워싸고, 사면으로부터 너를 공격하여서,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죽인 의인과 선지자들의 의로운 피가 당세대에 유대인에게 돌아갈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스스로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죽이는 무죄한 피(보응)를 자신과 자손들에게 돌린다고 하였습니다. AD 70년에 로마 군대가 반란을 일으킨 유대민족을 진압하기 위해서 예루살렘 성을 포위하는데 주위에 흙언덕을 쌓고 입성합니다.

 

 

마가 13/2 예수께서 대답하여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이 거대한 건물들을 보느냐? 돌 위에 돌 하나도 남기지않고 다 무너지리라."고 하시니라.

 

로마군은 성전의 금을 약탈하기 위해 성전을 모두 무너뜨리고, 유대인들을 대량학살 했으며, 나라 자체를 없애고, 남은 자들을 노예로 팔아 넘겼습니다. 또한 유대인은 2000년 가까이 전 세계를 유랑하며 온갖 핍박과 수모를 당했고, 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600만명이라는 기록적인 학살을 당했으니 메시야를 죽인 죄가 얼마나 큰지 알 수 있습니다.

둘째로 이방인(비 유대인)에 대한 선교입니다.


로마서 2/28~29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체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요, 할례는 마음의 할례이니 영에 있고 법문에 있지 않은 것이라. 그들의 찬사는 사람들에게서가 아니라 하나님에게서니라.

 

혼인잔치 비유와 포도원 비유에서도 알 수 있듯이 예수님의 죽음 이후에 본격적으로 이방인 선교가 시작됩니다. 사도 바울은 이방인 선교를 위해 지중해 인근 여러 나라를 순회하였고, 많은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믿고 따랐습니다. 유대인은 구세주인 예수님을 죽임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민족으로서의 특권을 잃어버렸습니다. 신약시대에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는 혈통적 유대인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요한 4/19~20 이것이 정죄라. 즉 빛이 세상에 왔으나 사람들이 빛보다는 오히려 더 어두움을 사랑하니 이는 그들의 행위가 악하기 때문이라. 악을 행하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며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혹 자기의 행위가 책망받을까 함이라.

 

고전 9/27 내가 내 몸을 억제하여 복종하게 함은 다른 사람들에게 전파한 후에 어떻게 해서든지 내 자신이 버림을 받지 않게 하려는 것이라.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육신의 본능과 쾌락과 욕심에 빠져서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유대인은 육신을 예표하는 민족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였고, 참혹한 심판을 받았습니다. 어두움(죄, 거짓, 사탄)을 좋아하는 육신은 본능적으로 빛(의, 진리, 하나님)을 멀리하고자 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온전한 구원을 위해서는 반항적이고 이기적인 자기 육신을 억제해 복종시켜야 합니다.


6. 예수님의 십자가가 가지는 의미


예수님을 메시야로 받아드리면 구원이고, 거부하면 심판인데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받아드리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은 온 인류를 심판하고 사탄에게 내어 줄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유대인과 인류의 죄를 용서하시고 새로운 구원의 길을 여셨습니다. 그 대신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써 내 모든 죄가 씻어진다는 것을 믿어야 구원받습니다.


요한 3/14~15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같이 인자도 그렇게 들려올려져야만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갈라디아서 3/1 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가운데서 너희 눈 앞에 분명하게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어 진리에 순종하지 못하게 하더냐?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이유를 설명한 구절로 출애굽 때 이스라엘 민족이 모세를 불신하고 불평 불만을 늘어 놓아 하나님으로부터 심팜을 받았지만 놋 뱀을 쳐다 보아야 불 뱀에 물리지 않았던 것처럼, 신약시대에 예수님을 불신했던 인류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쳐다 보아야지만 구원(멸망치 않고 영생)을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이 눈 앞에 보이므로 거짓에 속지 말라고 합니다.

 

갈라디아서 1/7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너희를 교란시키는 어떤 사람들이 있어서 그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개시키려는 것이라.
 

사도 바울은 십자가 복음 이외에 다른 복음은 없다고 잘라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각 시대마다 구원 받을 수 있는 계명을 주시는데 이는 인간 스스로 바꿀 수 없습니다. 아담 때에는 선악과 따 먹지 말라는 계명이 있었고, 노아 때에는 방주에 타라는 계명이 있었으며, 모세 이후에는 십계명과 율법을 지키는 것이 계명입니다.
 

에베소서 1/7 그 사랑하시는 이 안에서 우리가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보혈을 통하여 구속 즉 죄들의 용서함을 받았느니라. 

 
신약시대에는 예수님을 유일한 구원주이자 그리스도로 시인하고, 그가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대신해 죽으셨으며,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써 내 모든 죄가 씻어져 죄사함 받는다는 것을 믿는 것이 구원 받을 수 있는 계명입니다. 예수님은 멸망할 수밖에 없는 죄인인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우리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서 모진 고초를 당하셨습니다.

 

고전 1/22~24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들은 지혜를 찾지만 우리는 십자가에 처형되신 그리스도를 전파하노니 이것이 유대인들에게는 거치는 것이 되고 헬라인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 되지만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유대인들에게나 헬라인들에게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또 하나님의 지혜니라.

 

계시록 7/14 내가 그에게 말씀드리기를 "주여, 당신이 아시나이다." 하니 그가 내게 말하기를 "이들은 대환난에서 나온 사람들이며 자기들의 옷을 씻어 어린 양의 피로 희게 하였느니라.

 

사도 바울은 십자가 복음이 표적을 구하는 유대인에게는 걸리는(stumblingblock, 장애물) 것이고, 지혜를 찾는 헬라인에게는 어리석게 들리지만 누구든지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라고 합니다. 계시록에서는 말세 때 대환난을 피하는 사람은 어린 양(예수님)의 피로 자기 옷을 씻어 희게 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즉 말세 때 구원 받는 사람은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죄사함 받아 거룩하고 의롭게 된 사람입니다.

 

*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이 가지는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a) 대속 (代贖, substitution)

 

대속은 죄를 대신 받는다는 말로 예수님이 우리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다는 의미입니다. 구약시대에 자신의 죄를 하나님으로부터 용서 받기 위해서는 성막에서 자신의 죄를 무죄한 염소나 양에게 안수해 전한 다음 제사장이 암염소나 어린 암컷양을 잡아 피를 번제단 뿔에 바르고 단 밑에 쏟은 다음 나머지를 번제단에 불살라 죄를 용서 받았습니다.

 

마태 26/28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골로새서 1/14 그 안에서 우리가 그의 보혈을 통하여 구속, 곧 죄들의 용서함을 받았느니라. 

 

히브리서 9/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신의 피로 한 번 성소에 들어가셔서 우리를 위하여 영원한 구속을 이루셨느니라.

 

이와 같이 예수님께서 스스로 '흠 없는'(죄 없는) 어린 양이 되어서 우리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피를 흘리심으로써 우리의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죄사함을 얻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내 모든 죄가 깨끗이 씻어져 용서 받는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b) 구속 (球贖, redemption)

 
구속이란 죄인을 속전을 내고 건져낸다는 말로 예수님이 죄인된 우리를 마귀로부터 건져내기 위해 피로써 죄값을 치루었다는 말입니다. 이는 죄로 감금된 사람을 보석금을 내고 석방시켜 주는 것이나, 노예로 예속된 사람을 '몸 값'(ransom)을 주고 해방시켜 주는 것과 같습니다.

 
마태 20/28 인자가 온것은 섬김을 받으려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사람을 위하여 자기 생명을 몸값으로 주려고 온 것이라."고 하시더라.
 

고전 6/20 너희는 값을 치루고 산 것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의 것인 너희 몸과 너희 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딤전 2/6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신을 몸 값으로 내어 주셨으니 때가 이르면 증거되리라.
 

우리가 예수님의 희생과 은혜로 사탄의 권세에서 건짐을 받았으니 우리 모두 예수님에게 빚진 자입니다. 멸망할 수밖에 없었던 우리를 구하기 위해 예수님은 엄청난 희생과 고초를 감수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 전 우리를 용서하지 않았다면 인류는 이미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피로써 값을 치루고 산 존재이니 구원 받은 우리가 예수님을 위해 사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외아들에게 아버지의 성령이 임하시어

삼위 하나님으로 십자가를 통하여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감사와 영광을 받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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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교리 신론]삼위일체(Trinity)

 


 삼위일체(Trinity)
 


지금까지는 하나님의 신적 본질을 다룬 반면, 여기서는 하나님의 존재 양식을 규명한다. 즉 하나님께서 성부 성자 성령으로 지칭되는 독립된 개체로서의 삼위(三位)로 계시며, 그 본질에 있어서는 완전히 동일한 일체(一體)이시다. 이처럼 하나님은 그 존재 양식에 있어서 한 분으로서의 유일신(唯一神)이시나 그 유일하신 분이 삼위로 존재하신다는 사실은 계시가 아닌 일반 사고로써는 발견될 수 없는 신비이다.
 

1. 삼위일체의 교리적 정의(定義)
 

삼위일체란 인간의 합리적 사고로는 완전히 이해될 수 없는 신비이지만, 이 신비는 다음과 같이 정의될 수 있다.
 


1) 하나님의 본체(本體)는 단 하나로서 절대 나뉘어질 수 없다(신 4:25; 슥 14:9; 고전 8:6; 딤전 2:5).         
 

2) 한 신적 실유(實有)에 성부 성자 성령이라는 세 개체적 실존(實存)이 있다.         
 

3) 절대로 나뉘어질 수 없는 본체의 모든 속성이 삼위 안에 각각 완전하게 존재한다(요 10:30; 14:11; 골 2:9).         
 

4) 한 신적 실유(divine) 안에 존재하는 삼위는 그 실존(subsistence)에 있어서나 사역(事役)에 있어서 일정한 순서가 있다. 그런데 이 순서는 다음과 같이 구분될 수 있다.         
 

  (1) 존재론적 순서 - 이것은 인출(引出,derivation)의 논리적 순서로서, 성자는 성부에게서 영원부터 발생(發生)하시고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영원부터 발출(發出)하시되 성부는 다른 위에서 인출되시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2) 경륜적 순서(經綸的 順序) - 외향적 사역(外向的 事役)의 순서로서, 만물은 성부 ‘에게서’ 나오고(‘of’ or ‘out of’), 성자로 ‘말미암고’(‘through’ or ‘by means of’), 성령 ‘안에’(‘in’) 있다(요 1:3,14).

  (3) 사역적 순서 - 이것은 인간의 구속에 관한 논리적 순서로서, 성부는 구속을 계획하시고(요 17:6), 성자는 죽으심으로 구속을 성취하시며(롬 5:8), 성령은 그 효과를 개인에게 적용하신다(고후 3:18)는 것이다.
 


2. 삼위일체의 성경적 증거
 

삼위일체 교리는 인간적 사색이 아니며 절대 오류가 없는 성경의 계시에 근거한다.
 


1) 구약의 증거         
 

신약 성경에는 미치지 못하나 구약 성경에서도 희미하게 삼위일체를 계시한다.
 

  (1) ‘우리’라는 하나님 스스로의 표현(창 1:26,27; 3:22; 11:17; 사 6:8).

  (2) ‘여호와’와 ‘주’에 대한 동시적 언급(시 110:1).

  (3) ‘여호와의 천사’와 ‘여호와’의 동일시 혹은 구분(창 16:7-13; 18:1-19; 출 3:2-5).

  (4) 성자이신 ‘하나님의 지혜’ (잠 3:19; 8:1) 및 ‘말씀’(시 33:4, 6; 119:89)과 하나님과 동시적 언급.

  (5) 성령에 대한 인격적 묘사(창 6:3; 느 9:20; 시 51:11; 사 40:13).
 

2) 신약의 증거         
 

신약에서는 또 다른 하나님이신, 성육(成肉)하신 그리스도에 대하여 주로 언급을 하는 만큼 삼위일체에 관한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신약에서도 삼위일체에 관한 직접적인 언급은 없다.
 

  (1) 하나님의 유일성에 대한 단일표현과 더불어 삼위 각 위에 대한 구별적 묘사(행 5:3,4; 롬 9:5; 고전 8:6).

  (2) 삼위 각 위간의 인격적 유대관계에 대한 묘사(요 3:35; 15:10; 16:14).

  (3) 특별히 강조되어야 할 사항에서의 삼위 이름의 언급(마 28:19; 고후 13:13).
 


3. 삼위의 개별적 연구
 

  삼위(三位)로서 존재하시는 하나님을 종합적으로 이해하기는 힘들지만, 각 위별로 개별적으로 연구하는 일은 어느 정도 용이하다. 그러나 삼위는 완전히 구분되는 존재가 아니다.
 


1) 성부(聖父)         
 

  (1) 명칭 - 그분에 대한 주요한 이름인 ‘아버지’는 만물의 창조자이시며(욥 1:6; 2:1; 눅 3:38), 구약 선민(選民)을 보호하시며(신 14:1; 사 63:16), 신약 신자들의 구원자이심(요 1:12; 롬 8:15)을 표현한다.

  (2) 사역 - 성자를 발생하시며 성령을 발출하신 내향적 사역과 만물 창조와 구속을 계획하며 보전 섭리하시는 외향적 사역이 있다.
 

2) 성자(聖子)         
 

  (1) 명칭 - 제 2위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가장 중요한 명칭은 ‘아들’이다. 그는 성육신 이전부터 아들로 언급되며(요 1:14,18; 갈 4:4), 성육신에서 아들되심이 증명되었다(요 3:17). 또한 스스로 성부를 ‘아버지’로 부르심으로써 당신의 아들됨을 확증하셨다(마 6:9; 요 20:17).

  (2) 사역 - 만물은 근본 성부로 말미암지만, 성자는 그것의 실제적 창조와 보전을 담당하신다(요 1:3,10; 히 1:2,3). 한편 인간 구속의 경우, 하나님은 계획하시나 그것의 성취는 성자로 말미암는다.
 

3) 성령(聖靈)         
 

  (1) 명칭 - ‘하나님의 영’(고전 2:11) 혹은 ‘그리스도의 영’(갈 4:6)이라는 명칭은, 성령이 성부와 성자의 외향적 사역을 담당하신다는 증거이다. 그러나 ‘성령’의 ‘성’(聖)은 그분이 성부와 성자에 대하여 열등하지 않음을 증명한다.

  (2) 사역 - 성령의 사역은 성자의 사역을 뒤따른다. 따라서 성령의 사역은 신적 경륜을 피조물에게 직접 전달하는 마지막 단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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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종말론과 거짓된 종말론을 구별하는 최소한의 확실한 기준

 

오늘날 한국 개신교는 이단들로 몸살을 앓고 있다. 그 이단들을 조금만 살펴보면 그들의 교리가 대부분 거짓된 종말론에 근거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많은 성도들이 이들의 거짓된 가르침에 속아 넘어가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교회가 참된 종말론을 가르치지 않기 때문이다. 적어도 성도들에게 참된 종말론과 거짓된 종말론을 구별하는 최소한의 확실한 기준을 알려 주어서 성도들이 미혹을 받지 않도록 해야 할 책임이 교회에 있다.


하지만 이단들의 종말론을 반박하기가 쉽지 않다. 그 이유는 그들이 자신들의 가르침이야말로 성경에 가장 충실하다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의 오류를 일일이 지적하는 것이 그렇게 효과적인 방법은 아니다. 성도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런 세세한 반박문이 아니라 거짓된 종말론을 쉽게 분별할 수 있는 몇 가지 중요한 원리들이다. 


1. 거짓된 종말론은 공포심을 조장한다.


종말론은 소망에 관한 교리이다. 따라서 참된 종말론은 성도들에게 소망을 갖게 하고, 그와 정반대로 거짓된 종말론은 성도들에게 공포심을 조장하여 두려움의 상태에 빠뜨린다. 성경은 어느 곳에서도 신자들에게 공포심을 주기 위해서 종말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 물론 악인에 대한 무시무시한 심판을 말하는 곳이 있지만 그것을 말하는 궁극적 목적은 신자들에게 참된 평안을 주기 위해서이다. 이 소망이야 말로 거짓된 종말론을 분별하는 가장 확실한 기준이라고 할 수 있다. 아무리 종말에 대해서 자세하고 그럴듯하게 가르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공포심을 일으킨다면 그것은 거짓된 종말론이다.


2. 거짓된 종말론은 세상에 대해서 무관심하게 만든다.


모든 교리에도 적용되지만 사도신경이야말로 종말론에 대한 가장 기초적인 가르침을 제공한다. 이 보편적 신경은 주님께서 재림하는 목적을 분명하게 밝힌다. 성부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는 마지막 날에 살아있는 자들과 죽은 자들을 심판하러 오실 것이다. 즉, 심판이 재림의 최종 목적이다. 그렇다면 누가 재림을 간절히 사모하겠는가? 재판을 사모하는 자들이다. 그렇다면 왜 그리스도의 재판을 사모하는가? 그 재판은 가장 의로운 재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누가 의로운 재판을 사모하겠는가? 바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서 핍박받는 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거짓 종말론은 신자들로 하여금 현실에서 도피하라고 가르치지만, 참 종말론은 그와 반대로 이 세상에서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가르친다.


3. 거짓된 종말론은 종말에 대해서 다 아는 것처럼 선전한다.


종말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은 많은 상징으로 묘사되어 있다. 따라서 그런 부분들은 오늘날 현대인들이 쉽게 이해할 수 없다. 하나님은 종말에 대해서 다소 모호하게 계시하셨다. 그렇게 하신 것은 그 방법이 신자들에게 유익하다고 하나님께서 판단하셨기 때문이다. 사실 성경의 모든 부분이 명확한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서 성경에 기록된 과거의 역사 중에서 우리가 모르는 것이 상당히 많다. 마찬가지로 성경에 기록되었지만 앞으로 미래에 일어날 일에 대해서도 우리가 모를 수 있다. 성경은 우리가 모든 세세한 일을 다 이해하도록 하기 위해서 기록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하지만 거짓된 종말론은 그런 것들을 정확하고 세세하게 다 안다고 자랑하면서 그것들을 모르는 신자들을 무시한다. 종말론에 대해서 완벽하게 가르쳐 준다고 선전한다면 그것은 거짓 종말론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4. 거짓된 종말론은 성경이 과거의 성도들을 위해서도 기록되었다는 사실을 무시한다.


모든 성경은 아주 오래 전에 기록되었다. 종말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들도 마찬가지이다. 기록된 지가 2000년 가까이 된다. 성경은 일차적으로 성경이 쓰인 당시의 성도들을 위해서 기록되었다. 따라서 가장 기본적으로 이 성경을 처음으로 읽었던 독자들의 입장에서 성경을 보아야 바른 해석을 할 수 있다. 베리 칩이나 144,000명과 같은 숫자들이 초대 교회 성도들에게 어떤 의미를 가졌는지를 깊이 있게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런데 오늘날 상당수의 종말론적 이단들은 이런 역사적 상황들을 완전히 무시하고 오늘날 일어나고 있는 구체적인 사건들을 2000년 전에 기록된 성경내용과 자꾸 연결시키려고 한다.


5. 거짓된 종말론은 몸의 중요성을 간과한다.


기독교와 다른 종교의 중요한 차이점은 몸을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종말론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거짓된 종말론은 이 점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사도신경에서 우리는 “몸”의 부활을 믿는다. 우리는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적” 재림을 믿는다. 하지만 거짓된 종말론은 이런 이해들을 하나의 신화로 치부해 버린다. 그들은 몸의 부활이 그렇게 큰 의미가 없다고 본다. 부활 신앙에 있어서도 중요한 것은 실제 몸이 부활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의 가르침을 오늘날 되살려 이웃들에게 실천하는 것이다. 특별히 자유주의 신학에 물든 이들이 이런 식으로 종말을 해석하는 경향을 강하게 보이고 있다.


6. 거짓된 종말론은 종말의 때를 알 수 있다고 주장한다.


성경은 분명히 종말의 때를 오직 하나님 아버지만 알고 계시다고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교회 역사 속에는 끊임없이 그 때를 알 수 있다고 가르치는 이단들이 있었다. 결국 성경을 어떻게 보는가의 문제이다. 모든 이단들이 그렇듯이 거짓 종말론자들은 성경의 충분성을 믿지 않는다. 비록 예수님과 사도들은 그 당시에 어떤 이유 때문에 몰랐다고 하더라도 성령께서 오늘날에는 계시를 통해서 특별한 사람들에게 그 날을 알려 줄 수 있다고 그들은 주장한다. 겉으로 보기에 그들은 성령의 능력을 대단히 높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자신들만이 성령을 소유하고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자신들을 높이는 것이다.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지 않는다(살전 5:4)는 말은 성령께서 그 날을 알려 주셨기 때문이 아니라 참된 신자는 날마다 깨어 있으면서 믿음으로 그 날을 준비하기 때문이다.


이 6가지의 기준만 가지고 있어도 신자들이 거짓 종말론을 쉽게 구분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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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주의 정통신학자들|종교개혁자들
 
 

<16-17세기>

1. J. Calvin(1509~1564)

- 1536~1559 <기독교강요>: 1권)신론, 2권)기독론, 3권)성령론, 4권)교회론

- 1537 <기독교신앙안내>, 1542 <제네바교회문답서>, 요한계시록을 제외하고 성경전체를 주석했다.

- 칼빈의 신학사상은 모든 종교개혁자들과 같이 어거스틴의 사상을 재생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칼빈은 오직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역사적 기독교회의 공동신조(사도신경)의 기초 위에 있는 어거스틴의 신앙과 신학사상에 입각하여 기독교의 교리체계를 확립했다. 단, 하나님의 절대주권, 성경의 유일무오, 예정, 하나님의 섭리, 인간의 타락, 신앙칭의, 구원의 단계, 교회제도 등은 칼빈만의 독특한 교리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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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T. Beza(1519~1605)

- 제네바아카데미 초대원장이자 칼빈의 후계자로서 칼빈 이후 40년간 제네바의 정통신앙의 입장을 견고하게 만들기 위해 헌신했고 칼빈의 사상을 체계화하는데 기여했다.

- 1570 <신앙고백>, 1575 <기독교의문답서>외 100여 편의 저술 및 논문(예정론도표)

 

3. J. Knox(1513~1572)

- 스코틀랜드 출신으로 1540년에 목사 안수 받음. 칼빈을 만나기 전부터 개혁주의적 신앙과 사상을 견지함. 1554년~1567년까지 스위스로 망명생활.

- 1555년 제네바에서 피난민교회를 담임하면서 칼빈을 만나 제네바아카데미에서 수학.

- 1560년 스코틀랜드의회가 낙스와 윌로크 등이 작성한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를 승인하고 낙스가 세운 개혁교회를 공식적으로 승인함. 이후 스코틀랜드는 로마카톨릭주의를 버리고 프로테스탄트주의를 국교로 정함.

- 1561년 <권징서>에서 교회회의의 단계적 구성과 교회의 직제를 규정하여 장로교회의 기틀을 쌓았다.

 

4. Zanchius(1516~1590)

- 이탈리아 알차노 태생.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에서 수학. 1551년 제네바레 9개월간 체류하며 칼빈의 설교와 강의를 들었다. 이후 스트라스부르크대학(1553-1556), 하이델베르크대학의 교수(1568-1577)로 재직.

- 1566 <혼합>에서 개혀파적 관점에서의 기독론과 성만찬론, 성도의 견인론을 저술하고, 1572년 <삼위일체의 엘로힘>과 <하나님의 본성>에서 칼케돈신조의 정통신앙적 입장을 철저하게 논술했고, 1591 <영적 교통>에서 그리스도의 편재성을 주장하는 루터파의 개념을 반박하며 그리스도 인성의 유한성을 주장.

- 그는 개혁파 스콜라주의 형성에 중심적 역할을 했다. 즉 개혁파의 교리를 조직적으로 해설하고 변호하기 위해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들과 스콜라철학의 작품들을 활용하여 결론을 도출하려고 했고, 토마스주의와 칼빈주의를 조화시키는제 노력했다.

 

5. Polanus(1561~1610)

- 개혁파신학의 초기 형성기에 중심적인 역할을 한 사람으로, 베자와 도르트회의의 진행과정에서 논의된 정통 개혁파의 신앙문제에 대하여 중요한 교리적 사ㅓㄹ명의 글을 발표하였고 예정론의 논문과 로마서 주석을 썼다.

- 그의 <기독교 신학통론,1609>은 개혁파 신앙에 대한 광범위한 변증서이다. 여기서 로마 카톨릭교회의 견해들을 비판하고 개혁파교회의 교리들을 확립했다. 그는 인간의 타락 이전의 하나님의 행위 계약에 관해 최초로 거론한 인물로서 계약신학(Feteral Theology)의 기초가 되었다.

 

6. Gomarus(1563~1641)

- 스페인 태생의 개혁파 목사이자 신학자. 라이덴대학 조직신학 교수, 프로테스탄트 신학교수 역임

- 1618년 도르트회의에 참석하여 아르미니우스주의를 논박하고 칼빈주의를 승리로 이끄는데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다. 그의 신학은 베자와 플란키우스의 영향을 받았으며 타락전 선택설과 이중예정론을 주장했다. 그는 엄격한 칼빈주의자로서 오직 하나님께 영광, 오직 성경만을 강조하며 '당신의 말씀은 빛입니다'라는 말을 즐겨 사용한 것으로 유명하다.

 

7. Wollebius(1568~1629)

- 독일 태생의 스위스 개혁파 신학자. 바젤에서 폴라누스의 문하생으로 신학공부. 1611년 목사 안수(43세). 1518년 바젤에서 구약 강의.

- 1626년 <기독교신학개론> 저술로 일약 유명세. 이 책은 기독론이 특징이며 그리스도의 이성일인격교리에 관한 정확한 해설을 했다. 그는 타락후 선택설을 지지했다.

 

8. Voetius(1588-1676)

- 화란의 개혁파 신학자. 라이덴대학에서 고마루스와 아르미니우스에게서 수학. 평생 아르미니우스와 논쟁하고 도르트회의에 참석하여 아르미니우스를 정죄했다.

- 1648-1669년 <신학논쟁전집>, 1663년 <교회정치>, 1664년 <수도 또는 경건의 연습>을 저술했다.

 

9. Turretini(1623~1687)

- 제네바의 목회자이자 신학자. 라이덴대학에서 폴리안더와 부티우스에게서 수학.

- 대표적인 저서는 <논쟁신학강요, 1670-1685>이다. 그는 토마스 아퀴나스가 사용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논증법을 채용하여 개혁파신학을 체계적으로 진술했다. 이 책은 1812년부터 1871년 찰스 핫지의 <조직신학>으로 대체될 때까지 약 100년간 프린스턴대학의 교과서로 체택되어 미국 정통 장로교회의 신학과 신앙을 보존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10. John Owen(1616~1683)

- 영국의 청교도 목사이자 신학자. 1654년 논문 '성도의 견인'에서 아르미니우스를 비판했고, 1657년 '하나님과의 교통'에서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교통의 중요성을 강조했고, 1674년 <성령론>에서 개혁파신학의 입장을 증명했다. 특히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주제를 강조하여 성령의 내주를 각인시켰다.

 

<18세기>

 

11. Jonathan Edwards(1703~1758)

- 13세 이전에 라틴어, 히브리어, 헬라어를 터득하고 철학 관련 논문을 쓴 천재. 1720년 예일대 졸업, 1722년 대학원 수료한 후 26년까지 모교에서 강의하고, 1726부터 50년까지 메사추세츠의 노샘톤의 회중교회에서 목회. 휫필드의 영향을 받아 대각성운동의 주역이 되었고, 1758년 프린스톤대학의 총장에 취임한지 한 달 만에 천연두 접종의 후유증으로 사망.

- 그는 칼빈주의 정통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입장에 충실한 신학자요 목회자요 철학자로서 뉴잉글랜드 칼빈주의의 수호자요 18세기 미국 개혁주의의 중심이었다. 아르미니우스주의를 차단키 위해 <원죄론>을, 지나친 부흥운동의 열정을 경계키 위해 <종교적 정서>를 저술했고 그는 19세기의 노예폐지, 선교주의, 윤리적 개혁주의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특히 그의 활약으로 국교회가 비국교회가 되었다.

- 그의 후계자들, 조셉 벨라미, 사무엘 홉킨스, 조나단 에드워즈 2세, 에몬슨, 테일러 등이 뉴잉글랜드 신학파를 형성했다. 위필드는 에드워즈가 칼빈주의를 변호한 것이 100년 동안 미국 땅에 알미니우스주의가 뿌리를 내리지 못하게 된 결정적인 원인이라고 평가했다.

 

<19-20세기>

- 미국의 정통 프로테스탄트의 신학은 장로교회와 화란 개혁파의 신학자와 목회자들, 그리고 (구)프린스턴 신학교와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역할로 말미암아 계승 발전해 갈 수 있었다. 자유주의의 영향으로 1812년 개설된 프린스톤신학이 오염되자 메이첸, 반틸, 머레이 등이 중심이 되어 1920년 9월에 필라델피아에 따로 칼빈주의 신학을 보존 계승하기 위해 웨스트민스터신학교를 세웠는데 지금까지 이를 중심으로 하나님의 정통신학의 맥이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12. Alexander(1772~1851)

- 뉴저지 대학(현. 프린스턴)의 위더스푼(1723-1794)과 윌리엄 그라함(1746-1799)에게서 수학한 미국 북 장로교회 목사이자 신학자로 스코틀랜드의 보편실재론의 대가이다. 아쉬벨 그린, 사무엘 밀러와 함께 프린스턴 설립자 중의 한 사람으로 교수 취임식 설교에서 '성경을 찾으라'고 역설하여 큰 감흥을 일으켰고, 이후 찰스 핫지, 벤자민 워필드 등과 함께 프린스턴 신학을 형성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감당했다.

- 그는 이신론에 대항하여 참된 지식은 이성과 종교적 체험에서 오는 것이라고 했고, 성경영감론을 성령의 감독과 성령의 암시, 성령의 상승으로 구분했으며, 성경의 권위를 증명키 위해 객관적인 외적 기준을 찾는 한편 종교적 체험과 성경의 내적 증거를 정립하는데 주력했다. 저서로 <기독교의 내적 증거, 1825>, <종교적 경험론, 1841>, <인생의 본질>이 있다.

 

13. C. Hodge(1797~1878)

- 투레틴의 영향을 받았고 알렉산더 문하에서 수학했으며,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의 입장에 충실한 신학자이자 스콜라적 칼빈주의자로서 19세기 프린스톤신학교의 지도적인 신학자였으며 그의 조직신학 전3권(1871-1873)은 투레틴의 <논쟁신학요강>에 이어 프린스턴의 교과서가 되었다. 그는 시대적으로 진화론과 자유주의의 영향으로 성경의 절대적 권위가 훼손될 무렵, 성경의 초자연적 축자영감과 무오를 주장하여 정통적 칼빈주의를 수호했다.

- 저서로는 <로마서주석, 1835>, <미합중국장로교회 조직의 역사,1840>, <생명의 길,1841>, <다윈주의란?,1873> 등이 있으며 그의 대표작은 단연 <조직신학 전3권>이다.

- 그의 아들 에이 하지는 1877년 그의 부친을 계승하여 프린스톤에서 조직신학을 강의했으며, 부친이 대중을 상대로 강연한 신학내용을 문답식으로 간결하게 편찬한 <신학개요,1879>는 불후의 교리서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또 1881년 워필드와 공동으로 <장로교회 평론>을 저술했는데 여기서 그는 성경원본에는 오류가 없다고 분명히 선포하여 성경무오설을 지키는 보수주의 장로교회의 입장을 명확히 했다.

 

14. Thornwell(1813~1862)

- 19세기 남 장로교회의 대표적인 칼빈주의 신학자를 들자면 돈웰, 댑니, 지라르데우(1825~1898, 콜럼비아대 교수)를 꼽는다. 돈웰은 사우스 캐롤라니나 대학을 졸업하고 하버드와 앤도버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한 후 1835년에 목사가 되었으며, 1847년 35세의 최연소의 나이로 미국 장로교회의 총회장이 되었으며, 1861년 장로교회가 남과 북의 총회로 분리될 때 남장로교회의 대변인 역할을 담당했다. 1873년 사우스 캐롤라이나 대학의 교수가 되어 1855년까지 윤리학을 가르쳤다. 이후 콜럼비아 대학으로 옮겨 실천신학과 변증학을 가르쳤다.

- 그는 보편실재론적 사고방식을 사회와 자연을 하나의 통일적 세계로 이해하는데 적용하였다. 그는 자연의 성장 발전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점진적인 과정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회의 개혁도 하나님 뜻 안에서 되어지는 것이며 신자 개개인은 이에 적합한 역할을 하게 된다고 주장했다.

- 그의 신학체계는 지라르데우가 완성했고 지라르데우의 조직신학은 콜럼비아대의 신학교재로 사용되었다. 일본의 고베개혁파신학교를 설립한 사무엘 피터 풀톤(Fulton, 1865~1938)이 그의 문하생이며, 풀몬의 제자가 일본 개혁하신학자의 대표자인 오카다 미노루(1902~1992)이다.

 

15. Dabney(1820~1898)

- 남 장로교회의 목사, 신학자, 정치가, 사회평론가이다. 유니온신학교에서 공부하고 목사가 되었고 모교에서 교회사와 교회정치를 강의했다. 그는 인본주의적 알미니안주의를 강도높게 비판했으며, 스코틀랜드의 보편실재론을 그의 신학적 방법론으로 채용했다. 저서로는 <19세기 감각주의 철학>, <조직신학, 1878>이 있다. 이 책은 887족 분량에 74장으로 구성되었으며 특히 73장의 '국가의 위정자론'에서 모든 권력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고 역설하여 주목을 받았다. 유니온신학교는 그의 조직신학을 신학교재로 사용했다.

 

16. B. Warfield(1851~1921)

- 프린스톤에서 찰스 핫지에게 수학하고 라이프치히대학에서 2년간 유학(1876-77)한 다음 웨스턴신학교에서 신약학 교수로 있으면서 디다케연구로 일약 유명해 졌으며 이후 프린스턴에서 스승의 후임이 되어 변증학을 가르쳤다.

- 그는 성경의 외적 증거(학문적 논증)과 내적 증거(주관적 체험의 요소)를 다같이 중요하게 여겼고, 당시 미국에서 성행하던 자유주의자들의 성경 고등비평적 연구의 경향에 대해 비판하며 성경의 권위와 신적 영감성과 무오성을 확증하여 강력하게 변증했다. 그는 유니온신학교의 자유주의신학자인 Briggs, Smiths등과 오앳동안 논쟁했다. 그는 칼빈의 하나님의 예정과 인간의 원죄, 제한적 속죄를 주장했다. 특히 장로회 총회에서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의 수정논의에 대해 논문을 발표하고 신앙고백서를 함부로 수정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를 경고하여 그 논의를 중단시킨 바 있다. 약 100권의 저서를 남겼다.

 

17. A. Kuyper(1837~1920)

- 바빙크와 함께 화란의 대표적인 개혁주의 신학자. 1880년 암스텔담의 자유대학을 설립하고 초대 총장과 조직신학 교수를 역임. 추임강연에서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의한 영역주권의 원리를 제창하여 유명한 '일반은총론'이라는 이론을 생성했다. 일반은총에 따르면 모든 인간의 삶의 영역이 하나님의 주권영역임을 말하고, 모든 인간이 전적으로 타락했으나 하나님께서 인간의 본성적 부패에 대하여 섭리적으로 어느 정도 억제케 하심으로 인류의 역사를 지속되게 하셨다고 주장했다.

- 카이퍼는 루터의 출발점을 인간론적 이신칭의에 있다고 보았으며, 칼빈 사상의 출발점은 포괄적이며 보편적이며 우주적이며 객관적인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있다고 보았다. 그는 칼빈의 세계관적 입장에서 철저히 하나님 중심의 일원론적 관점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의 인각관은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다 같이 동등한 죄인이며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서만 구원받는다고 믿었다. 특히 그의 <성령론,1900>에서 제1은총과 제2은총을 논했는데, 제1은총은 죄인을 중생케 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이며, 제2은총은 성령을 받아 참된 그리스도인이 된 인간이 하나님의 은총에 협력하게 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223권의 저술을 남겼다.

 

18. H. Barvink(1854~1921)

- 카이퍼의 후계자. 화란개혁파신학교의 교의학 교수. 1904년 자유대학의 총장 취임하고 1908년 프린스턴대 초청강연에서 '계시철학'을 발표.

- 그의 신학적 방법론의 특징은 튼튼한 성경신학의 기초 위에서 역사신학을 철저히 파악하고 그밖의 신학체계의 요소들을 종합하여 개혁파신학 자체의 다양한 견해들을 종합하여 새롭게 정리하고 체계화하려는 종합적 접근법이라 할 수 있다. 특히 개혁신학 내의 이견으로 양립되었던 타락전 선택설과 타락후 선택설의 경우 다 같이 하나님의 선택교리를 충분히 설명할 수 없는 것으로 보고 어느 쪽도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말하며, 하나님의 예정에는 선후가 없으며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비밀에 속한 것이라고 결론지었으며, 인간의 영혼의 기원관에 있어서 창조설과 유전설의 문제도 하나님의 비밀에 속한 것으로 보았다. 또 성경관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영감에 의해 성경 저자들의 인격 뿐만 아니라 문자와 역사적 사실에 관한 기록과 하나님의 모든 계시적 사실에 관한 기록에 있어서 유기적으로 영감되어 성경이 기록되었다고 결론지었다.

- 그는 정치와 교육의 문제에도 깊은 관심으로 적극적으로 관여하였으며 대표적 저술로 화란 개혁파 교회의 신학적 기반을 확고히 하고 발전시키는데 결정적 기여를 한 것으로 평가 받는 <개혁파 교의학 전 4권>이 있다.

 

19. G. Vos(1862~1949)

- 화란 태생의 미국 북장로교회의 목사로 프린스턴에서 신학교수 역임. 미시간 그랜드 래피즈에 있는 칼빈신학교에서 수학하고 프린스턴에 진학하여 모세오경을 연구한 다음, 독일 베를린대학과 스트라스부루그대학에서 유학하고, 1888년 귀국하여 칼빈신학교의 조직신학, 주경신학 교수를 역임했고, 1893부터 프린스톤에서 성경신학 교수로 생을 마쳤다.

- 그는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 1903>에서 예수님은 새로운 종교의 창시자가 아니라 이전에 이미 예언된 사실을 실현시킨 분이임을 상기시키며,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과 구약의 계시 사이에 역사적 통일성이 있으며, 하나님 나라의 본질은 하나님의 주권과 구원의 범위와 중생된 인간의 모습에서 찾게 된다고 주장했다. 이를테면 하나님의 통치의 세계가 아니면 참된 인간의 행복은 없다는 것이다. 그는 '교회로서의 하나님나라'(the kingdom as the church)를 주창했다. 또 <예수님의 자기계시, the self-disclosure of Jesus, 1926>에서는 정통 기독교회가 전통적으로 믿어 온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의 일치성에 대한 자유주의자들의 공격에 맞서기 위해 집필된 것으로 중보자의 다양한 명칭들을 구약적 맥랙에서 주석하였고, 예수님은 처음부터 자기의 죽음에 대해 메시야적인 해석을 하였다고 결론지었다. 이것은 예수님이 모든 사역에 있어서 메시야로 행하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울의 종말론,1930>에서는 바울의 종말관을 구원관과 연관지어 검증을 시도했다. 그는 바울의 종말관이 바울사상의 핵심이자 전부라고 했다.

- 보스는 성경신학자로서 성경에 대한 포괄적이며 정통적인 개혁파 성경신학을 체계화한 장본인이다. 즉 보스 이전까지 개혁파 신학은 특별계시의 역사에 초점을 맞춘 성경적 이해에는 거의 무관심했다. 이에 보스는 <성경신학-구약과 신약, 1948>을 출판하여 보수주의 개혁파 성경신학을 완성시켰다. 그는 여기서 구원사적인 방법에 의한 성경신학적 구조를 고안하여 발전시켰는데 성경의 계시사상과 예언사상은 구약과 신약을 일관하여 통일적으로 유기적인 관점에서 점진적으로 발전하여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명쾌하게 설명하였다. 그는 또 기존의 주경신학, 역사신학, 조직신학, 실천신학으로 된 네 분류의 신학범주를, 주경신학을 단순히 성경을 주석만 하는 것이 아니고 성경신학을 포함하는 것으로 봄으로서 주경과 성경신학을 따로 분류하게 되었다.

 

 

20. G. Machen(1881~1937)

- 존스 홉키스대학과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프린스턴에서 카스파르 하지, 패톤, 워필드에게서 수학한 다음, 독일 마르부르그대학과 괴팅겐대학에서 요한네스 바이스, 빌헬름 헤르만, 부셋 등 자유주의 신학자들로부터 수학했다. 이 때 배운 자유주의신학으로 인해 잠시 갈등했지만 암스트롱과 패톤 등의 도움으로 8년 만에 회복했다. 이후 프린스턴에서 1906년부터 1929년까지 신약신학을 강의했다. 그는 점점 성경에 대한 고등비평적인 방법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깨달아 그 때부터 자유주의의 입장에 대해 정면으로 비판하게 되었다. 그로 인해 프린스톤 내에 마찰이 생겨 1929년 교수직을 사임하였으며 Oswald Allis, R.D.Wilson, C.Vantil 등과 함께 그해 가을에 필라델피아에 웨스트민스터신학교를 설립, 1937년까지 학장 겸 교수로 역임했다.

- 그는 개교강연을 통해 두 가지를 분명히 강조했다. 첫째, 성경은 평범한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평범한 책으로서 정확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며 둘째, 프린스턴은 이제 더 이상 복음주의의 입장이 아니므로 이제 웨스트민스터가 그 권위를 대신한다는 것이었다.

- 그의 신학사상은 기독교 변증론이다. 그는 기독교 교리를 해설하는 일과 기곡교 신앙을 체계적으로 설명하는 일에 일생을 바쳤다. 저서로 <기독교와 자유주의, 1923>, 바울종교의 기원, 1925>, <기독교 인간관, 1965>, <동정녀탄생,1967>등이 있다.

 

21. C. Van Til(1895~1987)

- 화란 태생의 미국 개혁파 변증신학자이다. 프린스턴에서 보스, 카스팔 핫지, 윌슨, 오스왈드 알리스, 메이첸 등에게서 신학을 배우고, 워필드, 아브라함 카이퍼, 바빙크 등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1928년에 프린스턴에서 변증학을 강의하다가 사임하고 메이첸과 함께 WM에서 변증학을 가르치다가 생을 마감했다.

- 그는 전제론적 방법이라는 새로운 변증학적 방법론을 체계화했다. 기존에는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것과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과 합리적인 논증으로 불신자들을 설득하여 기독교를 거부할 수 없도록 하기 위하여 모든 다른 사상에서 증거와 논증을 제시하는 것이었으나, 밴틸은 하나님은 존재하시며 인간은 하나님께 반응하여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계시되어 있다는 것을 변증하는 것이었다. 즉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이미 영감된 성경에 계시되어 있으므로 성경 이외의 어떤 인간의 사상에서 기독교진리를 변증하기 위한 증거를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가지나 성경에서 출발하여 성경에서 논증과 논거의 근거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 밴틸은 철저하게 성경적 기독교 진리를 믿는 신앙을 지키기 위해 거의 모든 저서에 'In Defence of the Faith'(신앙의 방어에 있어서)라는 표제를 달았다. 그이 제자인 William White는 밴틸을 소개하는 책자에 '신앙의 방어자 밴틸'이라고 소개해 화제를 낳았다. 밴틸의 저서 <조직신학 서론>, <변증학>, <험증학>, <신앙의 방어>, <기독교 인식론>, <칼빈주의의 변호>, <복음의 지적 도전>, <신근대주의> 등은 오늘날 개혁파 신학의 주요한 지침서가 되어 있다.

 

22. L. Berkhof(1873~1957)

- 화란 태생의 미국 개혁파 목사로서 20세기 초 신정통주의와 지유주의 신학의 조류를 막기 위해 온 몸을 불사른 위대한 신학자이다. 칼빈신학교에서 보스와 뵈커 하에서 수학했고, 1902-1904까지 프린스턴에서 워필드와 보스 등에게서 신학을 배웠다. 이후 칼빈신학교에서 1906년부터 14년까지 신구약을 가르쳤고, 1937년에 <성경해석의 원리>를 집필했다. 다시 1928년부터 44년까지 칼빈신학교에서 조직신학을 강의했다.

- 그는 많은 경우 헤르만 바빙크의 영향을 받았다. 바빙크의 용어와 구절들을 문자 그대로 복사하기도 했다. 그의 저서 <조직신학, 1941, 58, 60, 63>은 칼빈, 풀러, 루이즈빌, 남침례신학, 고든, 웨스턴, 밥 존스, 무디신학교 등에서 교과서가 되었고, 한국은 신복윤 박사에 의해 1958년 <기독교신학개론>으로 번역되어 지금까지 칼빈주의 신학교들의 교과서로체택되고 있다. 한편 신복윤 박사는 벌콥의 <기독교교리사,1937>를 1979년에 번역하기도 했다.

- 그는 무엇보다 체계있는 조직신학을 설립한 공로가 크다. 수많은 자료를 이해하고 그 주요한 내용들을 잘 분류하여 함축된 형태로 재생시키는 능력을 가진 신학자로 평가받는다. 그이 대표적 저서인 <조직신학>은 분명하고, 간결하고 조리있게 저술되었으며 천성적으로 논쟁을 싫어하여 다른 신학적 입장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공정하게 평가하는 작업을 실천했다. 그의 이 책은 칼빈의 <기독교강요>, 투레틴의 <논증신학강요>과 함께 개혁파신학의 불후의 명작으로 꼽힌다.

 

23. Jhon Murray(1898~1975)

- 스코틀랜드 출신의 미국 개혁파 목사이며 신학자. 1923년 프린스턴에서 카스파르 핫지, 윌슨, 보스, 메이첸 등에게서 수학했다. 당시 미국의 사정은 자유주의가 위세를 떨치면서 '성경의 완전영감, 그리스도의 동정녀탄생, 그리스도의 대속적 속죄, 그리스도의 육체적 부활, 그리스도의 기적'의 다섯 가지를 부인하는 이른바 "오번확인서(1924)"가 출현했는데, 여기에 장로교 목사 1,292명이 찬성하는 서명을 했고, 급기야 프린스턴은 자유주의신학의 본산지로 개편되고 말았다. 그는 메이첸, 밴틸 등과 함께 프린스턴을 나와 웨스트민스터를 설립하고 1966년 은퇴할 때까지 강의했다. 이 때 그의 동료인 R.B.Kuiper, B.Stonehouse, Paul Wooly, Allan MacRae 등이 함께 가세했다.

- 그의 일관된 신학적 특색은 성경해석에 있어서 경건함과 진지한 태도로 성경 원문을 정밀하게 해석함을 근거로 하여 신학적 연구를 더하면서 조직신학적 논리를 전개한 것이다. 그는 보스의 영향을 받아 주경신학에서의 성경신학에 관심을 기울였고, 그 결과 로마서를 중심으로 한 <구원론,1955>과 <로마서 주석,1959>을 발표했다. 여기서 그는 죄인을 위한 그리스도의 객관적 속죄사역을 죄인에게 주관적으로 적용하는 성령의 내적 사역에 의해 죄인이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구원에 이르게 되는 과정을 논술하고 있다. 이외 <칼빈의 창조교리,1954>와 <성경과 하나님의 주권에 관한 칼빈의 견해,1960>를 발표했다.

 

24. 박형룡(1897~1978)

- 프린스톤에서 메이첸과 보스 등에게서 수학하고 평양신학교, 고려신학교, 총회신학교(현 총신대)에서 조직신학을 강의하며 한국의 정통 칼빈주의의 확립에 공한한 신학자이다. 그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교리와 성경의 무오성, 성경의 영감교리를 주장했다. 저서로는 <교의신학 전7권>외 14권의 주요 저서들과 100여 편의 주요 논문이 있다.

 

25. 박윤선(1905~1988)

- 웨스트민스터에서 메이첸, 밴틸, 에드워드 영 등으로부터 언어학과 변증학을 배우고, 화란 자유대학에서 신약학을 연구했으며, 고려신학교를 설립했으며, 총신대와 합동신학교 교장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한국인 최초의 주석집인 <신구약성경 주석>과 <성경신학>, <교회헌법주석>외 250여 편의 논문이 있다. 그는 한국에서 칼빈주의 정통 보수주의 주경신학을 확립하고 계승함에 있어서 혁혁한 공헌을 한 세계적인 신학자이다.

 

26. 오카다 미노루(1902~1992)

- 고베중앙신학교에서 사무엘 풀튼에게서 신학을 수업받은 후 웨스트민스터에서 수학. 특히 워필드로부터 영향을 받음. 일본 코베개혁파신학교 조직신학 교수로 일생을 헌신하며 일본의 개혁파신앙의 중심이 되었다. 대표적인 저서로 <개혁파교리학교본,1969>이 있다.

 

27. 최순직(1923~1999)

- 평양신학교를 거쳐 총회신학에서 박형룡으로부터 조직신학을 배운 후 코베신학에서 오카다 미노루에게서 수학하고 탈봇에서 공부했다. 특히 미노루 교수의 신학을 그대로 전수했다. 대한신학교(현 대신대학원대)에서 조직신학을 강의했고, 기독신학교의 학장을 역임했다. 대표적 저서로 <6일의 신학-기독교 노동론>, <플러스의 인생>, <크리스찬의 생활규준-복음 하의 율법>이 있다. 그는 철저한 칼빈주의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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