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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신칭의 바로 이해하기

 

아무리 성경박사라 하더라도 기독교 교리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없으면 잘못된 판단을 하게 된다. 대표적인 예가 이신칭의 교리가 한국교회의 윤리의식을 저하시켰다는 주장이다. 이와 같은 주장은 이론상 그럴듯 해 보이지만 적어도 역사적으로 검증될 수 없다.

 

1. 개인적인 경험에서 판단해 보면 한국교회는 이신칭의의 교리를 제대로 가르친 적이 없다. 사실, 한국교회는 교리 자체에 대해서 무관심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법정적 칭의(forensic justification), 이중적 전가(imputation), 도구적 원인으로서의 믿음, 구원에 이르는 믿음, 칭의와 선행의 관계, 능동적 의와 수동적 의의 구분 등. 이런 것들에 대해서 제대로 이해하는 신자들이 얼마나 되겠는가?

 

 

2. 이신칭의의 교리를 가장 강조했던 시절에 교회는 윤리적으로 가장 높은 수준에 있었던 경우가 많다. 존 칼빈, 조나단 에드워즈, 조지 휫필드 등. 따라서 칭의 교리가 신자의 윤리를 오히려 강화시킬 수 있다.참고로 종교개혁은 선행이 구원에 필수적이라는 것을 거부한 적이 한 번도 없다. (논란의 핵심은 선행이 어떤 점에서 구원에 필수적이냐는 것이다.)

 

3. 교리의 내용과 교리의 사용을 구분할 수 있는 분별력이 있어야 한다. 아무리 옳은 교리라고 하더라도 얼마든지 잘못 사용될 수 있다.어머니 손에 있는 칼은 음식을 만들지만, 살인자의 손에 있는 칼은 사람을 죽인다. 바리새인들이 대표적인 예라로 할 수 있다. 칭의 교리를 통해서 자신의 윤리적 나태를 얼마든지 변명할 수 있다.

 

4. 칭의 교리가 틀렸다고 치자. 그리고 행위가 구원을 얻는데 믿음과 더불어 어떤 원인이 된다고 천주교식으로 가르쳐 보자. 그렇게 가르치면 신자들의 윤리의식이 올라갈까? 선행은 믿음의 결과이자 감사의 표시이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방식이라고 가르치면 윤리의식이 저하되는가?

 

5. 심지어 이방인들과 같이 믿음이 아니라 행함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가르치면 윤리의식이 더 올라갈까? 문제는 무엇인가? 선행을 하기 위해서는 율법을 통해서 선행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고,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그것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가져야 하는데,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하여 그것을 알지도 못하고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사실이다.

 

6. 그렇다면 무엇이 필요한가. 선을 행할 수 있는 지식과 능력이 어디에서 오는가? 믿음을 통해서 온다. 다른 방법이 있는가? 그렇다면 선을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이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도 없다. 더 나아가 믿음으로 행한 행위가 하나님께서 받으신다는 확신이 어디에서 오는가? 아무리 우리가 지극한 정성으로 선행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 역시 우리의 죄로 오염되어 있을 뿐이다. , 아무리 우리 눈에 선한 행위로 보이지만 하나님 앞에서 죄일 뿐이다.

 

7.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은혜는 무엇인가? 놀랍게도 칭의의 은혜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가 분명히 가르치듯이 우리의 보잘 것 없는 행위를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 안에서 보시기 때문에 우리는 선행을 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된다. 이렇게 보면, 칭의는 선행을 불필요하게 하기 보다는 그와 정반대로 선행을 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만든다.

 

8. 한국교회의 윤리의식의 저하는 칭의 교리 때문에 오는 것이 아니라 그와 정반대로 칭의교리를 전혀 혹은 제대로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9. 결론: 열심히 교리를 제대로 공부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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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 시대에 가장 논쟁이 되었던 교리가 바로 이신칭의의 교리이다. 이 참된 교리를 통하여 참 신자는 자유와 위안을 얻었고 로마 카톨릭교회의 속박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그런데, 이신칭의는 성경에서 명백히 가르치는 교리가 아닌가?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문제가 되었을까?

 

항상 그렇듯이 정확히 무슨 뜻인지를 살펴보자. 이신칭의의 정확한 뜻은 믿음을 통해서 의롭다 칭함을 받는다는 것이다.” 이 정의에 따라 몇 가지를 분명히 해두자.

 

1. 이것은 믿음을 통해서 의인이 된다 혹은 변한다는의미가 아니다. 이것은 로마 카톨릭이 주장하는 교리이다. 죄인은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서 법적인 의미에서 의롭다 선언을 받는 것이지, 그 죄인이 실제로성품이 변화해서 의인이 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이신칭의를 이신득의라고 하는 것은 혼동을 줄 수 있기때문에 쓰지 않는 것이 좋다. 이신득의는 우리가 믿음으로 의를 소유하게 되었다는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2. 이신칭의는 앞에서도 말했지만, 성경이 가르치는 바다. 따라서 모든 기독교라면 이 교리를 다 받아들여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명백한 이단이 될 수밖에 없다. 로마교 역시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을 부정하지않는다. 개신교와 로마교의 차이는 이것이다. 개신교는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다 칭함을 받는다라고 주장하지만, 로마교는 믿음 뿐만이 아니라 행함을 통해서 의롭게 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아브라함의 예를 보라. 그가 하나님께 의롭다 인정함을 받았을 때는, 어떤 행위도 하지 않았을 때다.

 

3. 이신칭의의 교리는 믿음을 통해서의롭다 칭함을받는다고 주장한다. 이신칭의의 교리는 믿음 때문에의롭다 칭함을 받는다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믿음을 통해서, 즉 믿음을 수단으로 칭의를 얻는 것이지, 우리의 믿음이 칭의에 대한 근거나 조건이 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칭의를 얻게 되는 것은 전적으로 우리밖에 있는 의, 즉 예수 그리스도의 의 때문이다. 요약하면, 우리를 의롭다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고, 우리가 의롭게 된 이유는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이고, 그구속사역의 의가 믿음만을 통하여 우리의 것이 된다.

 

4. 또 하나의 논쟁은 여기에서 말하는 믿음이란 어떤믿음인가에 관한 것이다. 개혁교회는 오직 믿음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말하는 믿음이란 항상 구원 혹은생명에 이르게 하는 믿음이다. 따라서 이 믿음은 우리의 행위와 구분이 되기는 하지만, 행위를 일으키지 않는 믿음은 아니다. 야고보서의 가르침 대로, 행위를 일으키지 않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칭의가 믿음과 믿음이 일으키는 행위 둘 다에 의해서 얻어지는 것이라고 해서는 안 된다. 칭의는 어디까지 구원에 이르는 참 된 믿음, 행위를 일으키는 믿음만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5. 칭의가 이루어지는 방식에 대해서도 많은 논쟁이 있었다. 로마교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안에 주입(infusion)이 되어 죄인인 우리가 의인으로 변화된다고주장한다. 따라서 로마교에 따르면, 우리가 의로운 이유는 우리가 실제적으로 의롭기 때문이다. 하지만, 개혁교회는 하나님의 은혜가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전가(imputation) 시켜서 우리를 의롭다고 선언한다.

 

6. 칭의와 성화.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로마교는 칭의와 성화를 구분하지 않는다. 칭의는 우리 안에 믿음으로 시작되어서, 소망에 의해서 굳건하게 되고, 사랑에의해서 완성되는 어떤 것이다. 이 의는 우리 안에 있는것이 때문에, 잃어 버릴 수도 있는 어떤 것이다. 이것을다시 회복하기 위해서 로마교는 특별히 고해성사 교리를 발전시켰다.

 

6. 1 칭의 교리와 관련하여 의미있는 질문이 있다. 우리는 의인인가 아니면 죄인인가? 이런 질문은 신자로 하여금 상당히 곤란하게 만든다. 로마서 8장은 그리스도예수 안에서는 정죄함이 없다고 선언한다. 하지만, 우리는 주기도문을 통하여 항상,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주옵시고라고 기도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측면에서는 의인이고, 또 다른 측면에서는 죄인이다. 이것을 보통 simul iustus et peccartor (의인이면서 동시에 죄인)이라고 한다. 즉 하나님 앞에서 (coram deo) 우리는 그리스도의 의를 덧입어 의롭다 선언을 받는다. 이 의는 완전한 의다. 하지만, 우리의 성품은 여전히 죄로 인해 오염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신자는 의인이면서 동시에 죄인이다.

 

예를 들어 보자. 어떤 성 범죄자가 정상 참작과 돌 보아야 할 자녀 때문에 형 집행이 정지되었다고 하자. 그는 신분 상으로는 더 이상 죄인이 아니다. 하지만 성품상 그는 완전한 의인이 된 것은 아니다. 전자가 칭의에해당한다면, 후자는 성화에 해당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7. 칭의의 교리가 주는 유익. 우리는 오직 믿음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은혜가 전가 됨으로 의롭다 인정을 받는다. 칭의는 과정이 아니라 상태이다. 성품의 변화가아니라 신분의 변화이다. 칭의의 교리를 잘 이해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확실하게 느낀다. 우리의구원의 확신에 대해서 흔들림이 없게 된다. 우리가 우리의 상태와 성품을 바라 볼 때, 우리는 절망할 수밖에없다. 하지만, 우리밖에 계신 그리스도의 의를 바라보면,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더 이상 죄인이 아니라 의인임을 확신하게 된다.

 

8. 선행과 칭의: 이신칭의가 선행을 약화시킬 수도 있다는 주장은 전혀 근거가 없는 주장이다. 선행은 칭의와 관련해서만 아무런 의미가 없을 뿐이다. 성경은 신자들에게 선행에 힘쓰라고 강력하게 권한다. 칭의가 중요한 교리이기는 하지만, 전부는 아니다. 칭의의 교리를 제대로 안 신자는 하나님께 감사의 삶을 살 수 밖에없을 것이다. 칭의가 구원에 필수적인 것이라면, 감사의 삶도 그에 못지 않게 구원에 필수적이다. 그리고 앞에서 언급했듯이, 여기서 말하는 믿음은 구원에 이르게하는 믿음, 즉 행함을 일으키는 믿음이라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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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서 안의 창세기

유 윤 종*

I. 서 론

전도자는 그가 살고있는 이 세상을 뛰어난 통찰력으로 모든 각도에서 관찰하였다. 이에 대하여 구약 학자들 또한 솔로몬으로서의 전도자, 까뮈로서의 전도자, 전도서에 나타난 그리스 사상의 흔적들, 전도서에 나타난 아람어, 후기 편집자들이 잡동사니들을 모아 모자이크한 것이라는 등 가능한 모든 각도에서 전도자의 세계를 연구해 왔다. 아울러 전도서의 저자에 끼친 모든 영향들도 탐구되어 왔다. 전도자의 정신 상태에 대한 연구에서는 심지어 집착증 및 신경증 환자, 성 불구자로 전도자를 설명하기도 한다. 그러면 어떤 연구분야가 아직 남아 있을까?

텍스트 상호간의 관계 (intertextual relations)에 대한 최근의 연구는 전도서의 텍스트 연구에 새로움을 더해준다. 광의적인 면에서, 텍스트 상호간의 연구란 각각의 텍스트를 저자, 독자, 그리고 그들이 살았던 문화적 배경에 잘 알려진 모든 텍스트에 대한 작용 및 반작용으로 다루는 분야이다. 전도서의 저자 및 독자는 유대인이었다. 그들의 삶속에 깔린 문화적 배경의 핵심은 모세오경(Torah)이었다. 토라는 전도자와 그의 독자들에게 공히 가장 중요한 의식 체계를 구성하고 있었으며, 유대 문화에 뿌리를 둔 문학세계에 개념, 예화들, 이미지(image) 등을 제공해 주는 샘물과도 같은 것이었다.

텍스트 상호간의 연구란 단지 어떤 특정한 책에 영향을 미친 이전의 자료들을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연구하고자 하는 그 책이 독립된 실체가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그 책은 저자와 독자에 공통되는 모든 책들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반 월드 (Ellen van Wolde)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텍스트 상호간의 접근은 어떤 저자의 작품을 다룰 때, 어떤 텍스트를 그대로 편집 각색한 것으로 보아서는 안되며, 관계의 복합이다…라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게다가, 하나의 텍스트를 텍스트 상호간의 분석 또는 해석하는데 있어서, 관심의 중심이 되는 것은 독자이지 저자가 아니다. 왜냐하면 어떤 텍스트를 다른 텍스트와 혼동, 방해받는 사람은 다름아닌 독자이기 때문이다.

본고는 전도서와 창세기 1-4장 사이의 관계 연구에 그 초점을 둔다. 전도서와 창세기의 자료들은 다양한 저자나 문서설과 같은 것을 고려하지 않고 각각 하나의 텍스트로 다룰 것이다. 많은 구약 학자들은 전도서는 창세기에 대한 많은 암시들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을 이미 지적하였다. 전도서의 저자는 그의 독자들이 창세기의 창조, 타락, 그리고 아담과 그의 가족 이야기에 대해 알고 있다고 가정한다. 전도서는 어떤 아이디어는 받아들이고, 어떤 것은 재해석하면서 창세기의 설명들과 상호 관계를 맺고 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전도서의 저자는 창세기의 뼈대와 신학에 매우 깊이 의존하고 있다. 포르맨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확신하고 있다.

창세기의 초반의 장들은 인간의 본질과 운명, 인간 존재의 성격, 하나님에 대한 전도서의 사상에 매우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고 보는 것이 나의 주장이다.

II. 전도서와 창세기: 그 상호관계에 관한 연구

1.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는 성문서 뿐만 아니라 구약성서 전반의 중심적인 주제이다. 창세기는 하나님과 인간 관계를 근본적인 관점에서 서술하였다. 전도서는 독자들이 알고 있는 이 선지식을 잘 이용하여, 전도자 자신이 만든 세상이 아니라 이 세상에 어쩔수 없이 던져진 수동적 참여자로서의 인간을 묘사하고 있다.

 

1)창세기에서의 하나님과 인간

창세기의 시작은 적극적인 창조자인 하나님과 수동적으로 창조된 세계에 독자들의 관심을 불러 일으킨다. 창조 작업이 하늘에서 땅으로 움직인다는 점에서 보아 창세기 1장의 방향은 땅을 향하고 있다고 주장할 수 있다. 창조의 각 문단은 하나님의 음성으로 시작하여 창조의 결과로 이어진다: 하나님의 영(םיהלא חור)은 “깊음 위에”(창 1:2) 있고, 또한 메리즘(merism)으로 사용된 “천지”는 창조작업이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순서로 진행되고 있음을 말해준다. 하나님은 우주를 정리하시고 구성하신다: 그는 나누시며(창 1:3, 1:6, 1:7, 1:14, 1:18), 이름에 따라 분류하시며 (창 1:5, 1:8, 1:10), 종류에 따라 구별하신다(창 1:11, 1:12, 1:16, 1:21, 1:24, 1:25). 창조 이야기는 행위에서 행위로, 저녁에서 아침으로, 날에서 날로 순환되면서 진행된다. 저녁에서 아침으로의 순환은, 넷째날 태양 창조 이전의 창조 작업에서도 나타나는, 하나님의 모든 창조 활동의 특징이다.

인간은 무대의 맨 마지막 주자이다. 인간은 그에 앞서 창조된 모든 것을 받는 수혜자이자 참여자이다. 인간은 음식으로 주어진 식물 (창 1:29), 동물에 대한 지배권 (창 1:26, 1:28), 창조된 세계 내에서 생육하고 번성할수 있는(창 1:28) 혜택을 받았다. 창세기 1장에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받았고, 창세기 2장에서 그의 창조자의 작업에 참여하게 된다. 하나님은 나무와 식물을 자라게 하시고, 아담으로 하여금 에덴동산을 경작하고 지키게 하신다. 하나님은 동물들을 만드시고, 아담은 그 이름을 지어줌으로 동물들을 구별한다. 아담은 그의 기원에 따라 이름 지어졌다 (그는 םדא 이라고 불리워졌다. 왜냐하면 그는 המדאה־ןמ “흙으로”지어졌기 때문이다). 아담은 또한 그의 돕는 베필에게 그녀의 기원에 따라 이름을 지어주었다 (그녀는 השׁא 라고 불리웠다. 왜냐하면 그녀는 שׁיאמ “남자로 부터 (만들어 졌기)” 때문이다).

창세기 2장은 인간에 앞서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인간을 새로운 상황에 도전하게끔 하시는 하나님을 자주 그려낸다. 하나님은 먼저 설계하시고 에덴에 동산을 만드시고, 그 동산을 잘 보살피라는 지시와 함께 아담을 그 동산에 두셨다 (창 2:8). 하나님은 당신께서 만드신 분류표에 따라 동물을 만드시고 이 동물들을 아담 앞에 불러 세우고 아담이 그들을 뭐라고 부르는지를 보셨다. 하나님은 아담을 잠들게 한 후 아담의 베필을 창조하였다. 하나님은 동산 가운데 선악과를 심으시고 (2:9), 아담에게 그것을 먹지 말라고 지시하셨다 (2:17).

 

2)전도서에서의 하나님과 인간

전도자는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를 인간의 각도에서 그려낸다. 하나님은 만물을 절대 주권으로 창조하셨고, 그의 작품들은 수정될 수 없다.

무릇 하나님의 행하시는 것은 영원히 있을 것이라. 더 할 수도 없고 덜 할 수도 없나니 하나님이 이같이 행하심은 사람으로 그 앞에서 경외하게 하려 하심인 줄을 내가 알았도다 (전 3:14).

그의 창조자에 대한 전도자의 태도는 겸허이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다분히 체념적이며 비관적이다.

하나님의 행하시는 일을 보라. 하나님이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전 7:13)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전 12:1)

 

절대 전능하신 창조자 앞에서 어찌할 수 없는 감정, 이것은 창세기에 이미 암시되어 있다는 것을 전도서는 말해준다.

םדא אוה־רשׁא עדונו ומשׁ ארקנ רבכ היהשׁ־המ

ונממ ףיקתשׁ םע ןידל לכוי־אלו

이미 있는 무엇이든지 오래 전부터 그 이름이 칭한바 되었으며, 사람이 무엇인지도 이미 안바 되었나니 자기보다 강한 자와 능히 다툴 수 없느니라 (전 6:10)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전 5:2)

그의 종을 사랑하고 변호하시며, 계약을 지키시는 다윗의 하나님은 전도서에 나타나지 않는다. 대신 우리는 전도서에서 준엄하고 완고한 심판관으로서의 하나님과 직면하게 된다.

내가 심중에 이르기를 의인과 악인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니 이는 모든 목적과 모든 일이 이룰 때가 있음이라 하였으며 (전 3:17)

너는 하나님의 전에 들어갈 때에 네 발을 삼갈지어다 (전 4:17)

 

네가 하나님께 서원하였거든 갚기를 더디게 말라. 하나님은 우매한 자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전 5:3)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시리라 (전 12:14)

 

전도서의 하나님은 단 하나의 잘못에 대하여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를 추방하신 하나님이다. 그는 가인이 만족시킬 수 없었던 분이셨다. 그는 인간이 동물보다 나을것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인간을 시험하신 분이셨다 (전 3:18-21).

전도자는 창조된 세계의 순환적인 패턴에 관심을 기울인다. 전도자에게 있어 인생은 아무리 노력해도 만족할 수 없는 다람쥐 쳇바퀴 돌기 같은 것이다. 인생의 순환은 냉혹한 것이며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보기에 새로운 것이란 전혀 없다.

땅은 영원히 있도다. 해는 떳다가 지며 그 떴던 곳으로 빨리 돌아가고 바람은…이리 돌며 저리 돌아 불던 곳으로 돌아가고 모든 강물은…그리로 연하여 흐르느니라 (전 1:4b-7).

전도서 1:4-7은 물질로 구성된 세계를 전도서가 처음으로 묘사한 부분이다. 구성 요소들 (땅, 태양, חור, 물)은 창 1:2의 혼돈된 질서 이전의 세계를 상기시킨다. 전도서의 이 구절에 대해, 페리는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한편에서 보아, 이 미묘한 암시는 전도자가 논박하기 시작하는 텍스트의 또다른 암시, 즉 창조 이야기를 제공한다. 둘째로, 그 암시는 전도자가 가장 부정적이고 위협적인 것으로 여기는 창조의 측면 (우주에는 가치 기준이 없으며 혼돈의 기슭에 떠다닌다…)에 집중할 수 있도록 허용해 준다.

 

아담처럼, 전도자는 그의 창조자의 작업에 참여한다.

 

창세기 전도서

그는 동산을 만드신다. 2:9 2:5

잘 적셔진 곳에서 2:10 2:6

그는 가축을 늘리신다. 1:24, 1:25 2:7

그는 자신을 금과 귀한 보석으로

감싼다. 2:11, 2:12 2:8

그는 인간에 대한 지배권을 행사하신다. 2:23 1:1, 1:12

그는 그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지식으로 구분하고 분류하신다. 2:20 1:13, 1:17


전도자는 또한 창조를 하나님께서 인간들이 출현하기 이전에 이미 완성해 놓은 것으로 파악한다. 하나님은 먹을 것과 마실것 (전 2:24), 낙을 누리는 것 (전 3:13), 지혜와 지식 (전 2:26), 재물과 부요 (전 5:19, 6:2), 장수 (전 5:18, 8:15)를 준비해 놓으셨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동산을 일하는 곳으로 주신 것처럼, 하나님은 현 세계의 물질들을 인간들이 정복할 수 있도록 해 놓으셨다.

וב תונעל םדאה ינבל םיהלא ןתנ ער ןינע אוה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생들에게 주사 수고하게 하신 악한 것들이다 (전 1:13).

וב תונעל םדאה ינבל םיהלא ןתנ רשׁא ןינעה־תא יתיאר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노고를 주사 애쓰게 하신 것을 내가 보았노라 (전 3:10).

전도자는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하여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를 끌어들인다. 인간은 연극에서의 배우이고, 하나님은 작가, 연출가와 감독이자, 비평가이다. 하나님은 무대를 만들고 인간에게 공연할 수 없는 역할을 맡기신다. 인간은 혹평에 대한 두려움을 안고 그가 맡은 부분을 연기할 뿐이다.

 

2. 선과 악

전도서의 마지막 문장 ער־םאו בוט־םא “선악 간에”은 이 책의 중심 주제인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를 강조한다.

 

1)창세기에서의 선과 악

세상을 살펴보고 무엇이 선한 것인지를 결정하는 일은 창세기의 가장 고전적인 주제이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은 그가 만드신 것을 보시고 (האר) 좋았더라 (בוט)라고 선포하신다. 빛(창 1:3), 마른 땅과 물(창 1:1), 식물(창 1:12), 천체들(창 1:17), 움직이는 생물들(창 1:21), 동물들(창 1:25), 그리고 아담과 그의 베필, 이 모든 것들에 대해 하나님은 “좋았더라”라고 선포하시며, 아담과 그의 베필을 추가한 뒤에는 “심히 좋았더라(창 1:31)”라고 선포하셨다. 창 2:18의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에서의 “좋지 못하니”와 2:17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와 관련된 악의 개념 사이에는 어떤 차이점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좋지 못하니”의 개념을 이해시킨다. 동물들이 아담 앞으로 불려오고 아담은 무엇이 적절하며 좋은 것인지, 무엇이 부적절하고 좋지 않은 것인지를 결정하는 연습을 하게 된다. 아담은 그를 위한 적절한 베필을 찾지 못할 때, 그의 현재 상태가 “좋지 못하다”는 하나님의 평가에 동의한다.

 

2)전도서에서의 선과 악

전도서에서 전도자는, 창세기에서의 하나님과 마찬가지로, 무엇이 선하며 무엇이 악한지를 결정하기 위하여 온 세상을 관찰한다 (전 2:3). בוט “선” 이라는 단어가 42번이나 전도서에 나타나며, 11번이나 동사 האר와 같은 절에서 발견된다. 전도서는 인생의 많은 부분은 “좋다”라고 선언한다: 먹고, 마시고, 일을 즐기는 것과 같은 단순한 쾌락 (전 2:24, 3:12, 3:13, 3:22, 5:18, 8:15, 9:7), 친구애 (전 4:9-12, 창 2:18),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 (전 7:18, 8:10, 12:13).

세상에는 좋은 일들이 있지만, 인생 그 자체는 어둡고 괴로우며, 공허하고 절망적이다. 전도서의 전도자는 그가 살고있는 세상에서 그가 발견한 악에 압도당한다: “이러므로 내가 사는 것을 한하였노니 이는 해 아래서 하는 일이 내게 괴로움이요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임이로다 (전 2:17).” 전도자가 악하다고 여기는 일들은 창세기의 가인과 아벨 이야기를 자주 연상하게 해준다.

 

창세기 전도서

어리석은 자들은 그의 희생제물이 악하다는

것에 무지하다. 4:3-6 5:1

의인은 그들의 의 때문에 죽으나, 아벨 7:15

악인은 오래 산다. 가인

즉각적인 응징이 없을 때 4:10-16 8:11

악은 증가된다. (창 4:23-24, 라멕의 뻔뻔함)

 

 

창세기의 관점에서 볼 때, 악은 창조된 세계에 뱀, 여자, 아담과 같은 창조물들의 개별적인 행동을 통하여 들어오게 된다. 전도서는 자신의 죄를 하나님에게 전가 시키는 아담의 관점 (창 3:12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하신 여자, 그가…”)을 표방한다. 아담의 주장은 하나님 당신께서 그의 앞에 선악과와 같은 악을 설치하였다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전도서에서 인생이란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주사 수고하게 하는 악한 일”이다 (전 1:13, 8:16, 8:17). 동사 הנע “종사시키다”와 “비천하게 되다” (Qal)가 “괴롭히다” (Piel)라는 의미로도 쓰일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 구절은 더욱 더 우리를 당황하게 한다.

וב תונעל םדאח ינבל םיהלא ןתנ ער ןינע אוה

“이것은 하나님이 인간들을 괴롭히기 위하여 주신 악한 것이다

(전 1:13).”

사실 하나님은 죽음, 살인, 미움, 전쟁과 같은 가장 악한 것들을 주셨다 (전 3:1-11). 하나님은 이 세상을 뒤틀리게 만드셨으며, 인간은 그것을 다시 똑바로 펼 수 없다 (전 1:15, 7:13). 전도자는 창세기에서 선포된 선과 악의 자료를 그가 알고 있는 세상에서의 선과 악의 정보에 비추어 재평가하고 있다.

 

3. 인식론

전도서는 넓은 범주에서 보아 지혜 문학에 속한다. 어떻게 지식과 지혜의 가치가 획득되는가에 대한 전도자의 의견은 전도서와 창세기간의 인식론적 관련성을 살펴볼 수 있게 해준다.

 

1)창세기의 인식론

창세기는 지식의 인지에 대하여 두 종류의 지식과 체계를 제시한다. 인간은 지식과 자기 인식의 능력을 가지도록 창조되었으므로, 인간은 경험적 방법을 통하여 배울 수 있다. 에덴 동산은 아담과 하와에게 볼 수 있는 시력과 맛볼 수 있는 음식을 제공하도록 설계되었다 (창 2:9). 아담은 그 자신에 관한 것들을 발견할 수 있는 동물왕국을 조사한다. 그후 사회적 존재인 자신이 동물과는 달리 혼자 있음을 알게 되며, 자신이 불완전하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창 2:18-20). 이런 경험에 의하여 얻어진 정보로 부터, 자신과 여자간의 분명한 차이에도 불구하고,아담은 자신과 여자 사이를 유비시켜 보기도 한다.

ירשׁבמ רשׁבו ימצעמ םזע םעפה תאז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창 2:23)

아담은 그의 성공을 통해서 뿐만 아니라, 실패를 통해 배운다. 복종의 실패를 통하여 그는 자신의 죄없는 상태를 상실하고, 자신에 대해 완전히 다른 관점을 얻게 된다. 즉 그는 자신이 벗었음을 인식한다.

창세기는 지식의 정반대되는 두 측면을 그려낸다. 하나는 인간은 겅험적인 방법으로 지식을 얻을 수 있다는 점이며, 또하나의 측면은 하나님은 인간의 지식 한계 너머로 숨어 계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이 보고 알 수 있는 능력에 한계를 정하셨다. 아담은 정원안에 닫혀 있었으며, 특히 일반적인 세계로부터 단절되어 있다. 아담은 다른 방법으로는 알 수 없는 정보를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대화, 즉 계시를 통해 하나님의 그에 대한 목적을 알 수 있었다. 아담은 선악과에 의해 보다 많은 지식을 얻을 수 있다는 유혹에 굴복했지만, 그는 그 지식을 얻을 수 없었다.

지식에 대한 인간의 갈증은 창세기 3장의 타락 이야기에 깔려있다. 다른 어떤 동물보다 영리한 뱀이 더 많은 지식을 소유하고 있었다.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무제한의 지식에 유혹된 여자는 선악과를 아담과 같이 따먹었다.

  

2) 전도서의 인식론

전도서는 창세기의 뼈대위에 그의 인식론적 틀을 짜고 있다. 전도자는 지식 욕구에 목말라 한다. 전도자는 아담처럼 그가 살고 있는 이 세계를 경험적으로 조사하고 탐구하기 위해 그의 마음을 쏟는다 (전 1:12). 아담처럼, 그는 경험이나 지식을 추구하는 데 어떤 한계나 경계를 인정하지 않는다. 전도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조사한다.

모든 행위 (전 1:14, 7:15, 8:9)

모든 억압, 학대 (전 4:1)

모든 수고 (전 4:4)

모든 인생 (전 4:15)

무엇이든지 내 눈이 원하는 것을 내가 금하지 아니하며 무엇이든지 내 마음이 즐거워하는 것을 내가 막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나의 모든 수고를 내 마음이 기뻐하였음이라…(전 2:10)

전도자는 지혜를 찾는 일에 실패한다. 하나님이 정답을 인간에게서 숨기시는 것도 발견한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전 3:11).

 

내가 이 모든 것을 지혜로 시험하여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지혜자가 되리라 하였으나 지혜가 나를 멀리하였도다. 무릇 된 것이 멀고 깊고 깊도다. 누가 능히 통달하랴 (7:23-24).

하나님의 모든 행사를 살펴보니 해 아래서 하시는 일을 사람이 능히 깨달을 수 없도다. 사람이 아무리 애써 궁구할지라도 능히 깨닫지 못하나니 비록 지혜자가 아노라 할지라도 능히 깨닫지 못하리로다 (8:17)

 

전도자는 그의 실패로부터 배우고 있다. 그는 지혜를 얻으나 지혜안에서 어떤 중요성이나 유익을 찾는데 실패한다.

지혜가 많으면 번뇌도 많으니 지식을 더하는 자는 근심을 더하느니라 (1:18).

그는 보고 알 수 있는 것들로 가득찬 세계에서 자신이 공허가운데 있음을 알게된다. 따라서 모든 것이 חור תוערו לבה.

 

4. 인간조건

전도서의 텍스트는 창세기에 나타난 인간의 본질, 목적, 그리고 인간의 조건을 받아들이나, 약간의 각색을 거친다.

 

 

1)창세기에 나타난 인간조건

창조 이야기에서, 인간은 다른 창조물과는 구별되는 독특한 류의 창조물이다. 모든 종류는 “종류대로” 재생산되며, 심지어 하나님 자신도 그 자신과 같은 것을 창조하고 싶어서, 인간을 “그의 형상대로” (창 1:26) 창조하신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인간은 특별한 존엄성을 가지고 있으며, 그의 생명은 결코 모독될 수 없는 내적가치를 가지고 있다 (창 9:5-7). 창세기 2장에서 인간은 땅의 먼지로 만들어졌으나, 그의 창조자로 부터 직접 생령을 받는다 (창 2:7). 인간의 목적은 명백하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 (창2:15)

여자는 남자로부터 창조되었으며 그녀의 목적은 남자를 돕는 자가 되는 것이다.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베필을 지으리라…(창 2:18).

창세기 3장은 남성과 여성에 대해 다른 모습을 제시한다. 남성은 말이 없고, 수동적이며, 무죄하다. 여성은 대화를 이끌고, 선택하며, 남성을 선악과를 먹는 일에 끌어들인다.

인간의 조건은 “그들의 눈이 밝아” (창 3:7)지는 순간 급격히 변하게 되었다. 존엄과 무죄 (창 1:25)가 있던 곳이 죄와 수치가 있는 곳으로 변하였다. 남자와 여자는 완전히 일치하였으나 (창 2:23), 지금 남자는 여성으로부터 자신을 분리시킨다 (창 3:12). 세상이 좋다고 선언하신 하나님은 지금 죄를 짓는데 참여한 피조물과 무고한 피조물 모두에게 저주를 선포한다 (창 3:14-18). 인간과 하나되고, 그에게 생명을 주신 하나님은 당신 스스로를 인간과 분리시키시고 인간에게 죽음을 부여한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창 3:19)

2)전도서에서의 인간조건

전도자는 인간은 원래 존엄성을 가진 채 창조되었으나, 그 존엄성을 스스로 떠났다고 믿는다.

나의 깨달은 것이 이것이라. 곧 하나님이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은 많은 꾀 (תונבשׁח)를 낸 것이니라 (전 7:29).

전도서는 여성에 대한 양면적인 태도에 있어서 창세기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ןובשׁחו המכח שׁקבו… יבלו ינא יתובס

내가 돌이켜 전심으로 지혜와 명철을 살피고… (전 7:25)

ןובשׁח אצמל תחאל תחא

내가 낱낱이 살펴…(전 7:27)

전도서 7:25, 7:27, 7:29, 이 세구절은 전도서 7:26, 7:27 두절을 둘러싸고 있으며, 창세기 3장에 묘사된 계산적이고, 유혹적인 여인과 관련된다

 

.הבל םימרחו םידוצמ איה־רשׁא השׁאה־תא תוממ רמ     הידי םירוסא

 

 

내가 깨달은즉 마음이 올무와 그물 같고 손이 포승 같은 여인은 사망보다 독한 자라.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는 저를 피하려니와 죄인은 저에게 잡히리로다 (7:26).

 

יתאצמ אלו ישׁפנ השׁקב־דוע רשׁא יתאצמ אל הלא־לכב השׁאו יתאצמ ףלאמ דחא םדא 내 마음에 찾아도 아직 얻지 못한 것이 이것이라. 일천 남자 중에서 하나를 얻었거니와 일천 여인 중에서는 하나도 얻지 못하였느니라 (7:28).

전도자는 왜 원래 정직한 자 (םדא)가 꾀를 생각해 내었는지, 이에 대한 이유를 낱낱이 살펴보았을 때, 그는 창세기 3장에 묘사된 여인의 유혹에서 답을 찾는다. 그러나 여성에 대한 이러한 성 차별적 특징화에도 불구하고, 전도자는 결혼 제도를 칭찬한다.

ךלבה ייח ימי־לכ תבהא־רשׁא השׁא־םע םייח האר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지어다. 이는 네가 일평생에 해 아래서 수고하고 얻은 분복이니라 (9:9a).

전도서는 여성에 대해 두가지의 관점을 유지한다. 즉 하나는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죽음으로 유혹하는 자라는 것인데, 이는 창세기 2장과 3장에 나타난 두가지의 관점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창세기와 마찬가지로, 전도서에서도, 일은 인간에게 할당된 몫 (קלח)이다 (전 2:10, 2:18, 2:24, 3:13, 5:18, 5:19). 그러나, 모든 인간사에서, 인간은 죽음의 확신에 직면하게 된다.

이는 네가 일평생에 해 아래서 수고하고 얻은 분복이니라. 무릇 네 손이 일을 당하는대로 힘을 다하여 할지어다. 네가 장차 들어갈 음부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음이니라 (전 9:9b-10).

인간의 기원과 운명에 대한 창세기의 설명은 전도자가 인간의 운명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하는 모형이 된다.

המדאה־ןמ רפע םדאה־תא םיהלא הוהי רצייו

היח שׁפנל םדאה יהיו םייח תמשׁנ ויפאב חפיו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창 2:7).

 

 

תחקל הנממ יכ המדאה־לא ךבושׁ דע

בושׁת רפע־לאו התא רפע־יכ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창 3:19).

 

היהשׁכ ץראה־לע רפעה בשׁיו

הנתנ רשׁא םיהלאה־לא בושׁת חורהו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신은 그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간다 (전 12:7).

 

전도서는 창 2:7과 3:19을 합하여, 몸과 영혼은 같은 운명-죽음-을 지게 된다고 주장하지만, 그것들이 같은 목적지를 지닌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전도서의 이러한 주장은 다음의 구절에서 많이 희석된다.

인생에게 임하는 일이 짐승에게도 임하나니 이둘에게 임하는 일이 일반이라. 다 동일한 호흡이 있어서…다 흙으로 말미암았으므로 다 흙으로 돌아가나니 다 한 곳으로 가거니와 인생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 (전 3:19-21)

창세기는 마지막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전도서는 남자와 여자, 삶과 죽음, 기원과 마지막 목적지에 관한 창세기의 주장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해 아래서 확실한 것은 단 하나뿐이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 (לבה).

 

5. 아벨과 לבה

아벨의 이름(לבה)은 창세기와 전도서를 연결짓는 가장 분명하고 확실한 증거이다.

 

1)창세기에서 아벨의 역할

비록 인간은 불복종에 대한 벌로서 죽음이 선고되었으나 (창 2:17), 그 죄의 결과를 준비할 만한 어떤 유사한 경험을 이전에 겪은 적이 없었다. 창세기 3장은 현재 타락한 세계의 근본적인 작용 원리가 무엇인지에 대해 자세히 설명한다. 절망감, 무의미, 육체적 죽음이 바로 그것들이다. 인간은 계속해서 일해야 하며, 그것은 절망감에 빠진 하기 싫은 일이다 (창 3:17-19). 여자는 자식을 계속 낳을 것이나, 고통 속에서 그 일을 해야한다. 여자는 그녀의 베필과 계속적인 관계를 가질 것이나, 그 역할은 훨씬 힘들게 되었다 (창 3:16).

가인과 아벨이 밖에서 일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아담의 후손들에 대한 저주가 실행되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이다. 장자가 형제를 살해하고 도망자가 되었다는 것을 슬픔과 고통을 불러 일으킨다. 아담과 하와는 둘째인 아벨로 말미암아 죽음을 경험하게 되었다. 아벨의 짧은 생애와 무의미한 죽음은 저주하에 있는 모든 인간 경험의 한 표상이 되었다. 창세기에서 아벨은 이해하기 어려운 인물이다. 우리는 그가 이야기하는 것도, 그가 자녀를 가졌다는 이야기도 결코 들을 수 없다. 그는 단지 “땅에서 호소하는 핏소리” (창 4:10)만 남긴다. 창세기는 아담 가족의 이름에 대해 미드라쉬적인 설명을 제공한다.

아담(םדא)המדא와 관련됨 (창 1:25, 2:5, 2:6, 2:7, 2:9,

3:17,3:19,3:23)

여자(השׁא)그녀는 שׁיאמ 이기 때문이다 (창 2:23).

하와(הוח) 그녀는 יח־לכ םא 이기 때문이다 (창 3:20)

가인(ןיכ) 하와는 아들을 얻었기(הנק) 때문이다 (창 4:1)

셋(תשׁ) 아벨을 대신하여 주어졌기 (תיא) 때문이다 (창 4:25)

아벨 (לבה)을 제외한 모든 이름을 설명하고 있다.

 

2)전도서에 나타난 아벨

전도서는 아벨의 이름을 설명하고 있다. לבה 이라는 단어는 전도서에서의 빈도가 구약 성서의 나머지 책들을 합한 것보다 더 많다. 라이트(Wright)는 לבה 이라는 단어가 전도서의 구조와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예시하였다. 전도서는 지혜서에 속한다. 하지만 그 주제는 지혜 (המכח)가 아니라 허무 (לבה)이다.

아벨의 짧은 생애와 그의 무의미한 죽음은 חור תוערו לבה 라는 문구로 잘 짜여져 전도서에 7번 나타난다. 모두 “숨, 호흡”을 의미하는 לבה과 חור의 조합은 추운 겨울날 아침 우리가 쉬는 숨을 보는 것처럼 짧고 순식간에 사라지는 어떤 것을 나타낸다. 다른 한편에서 חור תוער “바람을 쫒는것”은 무의미하나 결코 끝나지 않은 활동의 생생한 그림을 그려준다. 또한 תוער 라는 단어는 아벨의 직업인 창세기 4장의 הער (목자)에 대한 말재간일 수도 있다.

לבה의 의미에 대해서는 많은 연구들이 진행되어 왔다. 전도서의 저자는 이 단어의 수많은 의미 때문에 일부러 이 단어를 선택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아벨이라는 이름은 전도서를 읽게 될 유대인 독자의 마음속에는 아마 첫번째로 떠오를 인물 중의 하나일 것이다. 텍스트 간의 관계는 저자와 텍스트를 읽게 될 독자들에게 있어서 일종의 연상 작용의 회로망과 같은 것이며, לבה הנה 또는 לבה הו과 같은 어구들은 전도서의 저자가 창세기의 텍스트와의 문학적 관련성을 독자들에게 상기시키기 위해서 사용한 문학 기법이다.

Ⅲ. 결 론

이상에서 우리는 전도서와 창세기간의 상호 관련성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 관련성의 표현은 쉽게 드러나도록 나타나 있는 것이 아니라, 실타래처럼 교묘하게 얽혀있다. 전도서의 저자는 그 독자들이 될 유대인들을 겨냥하여, 그들에게 매우 친숙한 창세기의 이야기를 잘 드러나지 않게 각색하여 그가 전개시키고자 하는 신학사상을 표현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전도서의 독자들은 난해하고 일관된 신학적인 사상마져 결여된 전도서의 텍스트에 익숙하게 작용과 반작용을 거듭했을 것이다. 따라서 텍스트 상호간의 연구는 구약성서 내에서 독자들을 위해 저자가 그 당시에 이미 잘 알려졌던 특정한 텍스트를 분석하고 재해석하는 작업까지 진행하였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Abstract

Genesis in Ecclesiastes

Yoon Jong Yoo*

Recent studies in intertextual relations between Genesis and Qohelet present a fresh approach to the study of Qohelet. This paper focuses on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book of Qohelet and the first four chapters of the book of Genesis. The author of Qohelet assumes that his readers are aware of the Genesis account of creation, the fall, and Adam and his family.

The relationship between man and God is a central focus of the Old Testament. Unlike Genesis account, Qohelet presents the creation of the Genesis account from the perspective of man. Qohelet's attitude toward his creator is not submissive, rather it is resigned and pessimistic. By utilizing the creation account of Genesis, Qohelet develops the relationship of God and man in his own perspective: God has set the stage and cast man in an unperformable role. Man can do nothing but play out his part with the fearful anticipation of bad reviews.

The preacher in Qohelet, like God in Genesis, surveys the entire world with a view toward deciding what is good and what is evil. As a result, the preacher asserts that there are good things in the world, but life itself is dark and troubling, empty and frustrating. The pronouncement of good and evil in Genesis finds new expression in Qohelet's re-assessment of the sources of good and evil in the world which he knew.

Qohelet builds his epistemological framework upon the framework of Genesis. Qohelet sets his mind to empirically search and explore the world around him just as Adam had. Like Adam before him, he refused to acknowledge any limits to his search for knowledge or his experiences. Qohelet learns from his failure. He gains wisdom, but he fails to find any significance or profit in it.

The text Qohelet adopts and adapts the assertions of Genesis about the nature of man, his purpose, and the human condition.

The name of Abel(לבה) is the most obvious and powerful link between Genesis and the text of Qohelet. The word לבה occurs more times in the book of Qohelet than the rest of the Old Testament combined. The brevity of Abel's life and the pointlessness of his death are woven together in the formula חור תוערו לבה which occurs seven times in the book of Qohelet. The combination of לבה and חור, both of which mean “breath" conveys the idea of something as brief and transient. The name of Abel is one of the first associations that would have come to mind for the Jewish readers of the book of Qohelet.

In conclusion, the apparent relationship between Genesis and Qohelet cannot be found easily. Rather it is saturated in the text of Qohelet, so that the preacher of Qohelet may advance his theological perspective. He adopts and adapts the creation, fall, and Adam and his family account in Genesis. Qohelet interacts with these accounts, accepting some ideas and reinterpreting others; but overall, the author of Qohelet is heavily dependent on the framework and theology of Genesis in his own observa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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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3년 콘스탄티노플 쇠퇴의 원인과 배경

 

주 승 민

<역사신학>

   

 

󰠆󰠏󰠏󰠏󰠏󰠏󰠏󰠏󰠏󰠏󰠏󰠏󰠏󰠏󰠏󰠏󰠏󰠏󰠏󰠏󰠏( 목 차 )󰠏󰠏󰠏󰠏󰠏󰠏󰠏󰠏󰠏󰠏󰠏󰠏󰠏󰠏󰠏󰠏󰠏󰠏󰠏󰠏󰠏󰠈

 Ⅰ. 머리말 󰠐

󰠐 Ⅱ. 콘스탄티노플 쇠퇴에 관한 역사적 자료 󰠐

󰠐 Ⅲ . 콘스탄티노플의 약사 󰠐

󰠐 Ⅳ. 쇠퇴의 내부적 원인 󰠐

󰠐 1.자체교회 내의 신학적 분열 󰠐

󰠐 2.정책의 부재 󰠐

󰠐 Ⅴ. 외부적 원인으로 동서로마 교회의 분열 󰠐

󰠐 Ⅵ. 결 론 󰠐

󰠏󰠏󰠏󰠏󰠏󰠏󰠏󰠏󰠏󰠏󰠏󰠏󰠏󰠏󰠏󰠏󰠏󰠏󰠏󰠏󰠏󰠏󰠏󰠏󰠏󰠏󰠏󰠏󰠏󰠏󰠏󰠏󰠏󰠏󰠏󰠏󰠏󰠏󰠏󰠏󰠏󰠏󰠏󰠏󰠏󰠏󰠏󰠏󰠏󰠏󰠏󰠎

 

Ⅰ.머리말


1453년 정확히는 그해 5월, 당시 세계사의 중심 무대인 지중해와 흑해를 연결하는 보스포포로스 해협에는 천년 이상 지속되어온 기독교의 역사적 운명의 날이 전개되고 있었다. (그때 한반도의 역사적 상황을 살펴보면 세조에 대한 아부, 단종에 대한 배신, 그리고 성삼문 등 사육신의 활동, 동료를 배신한 신숙주의 6진 개척과 한글창제의 시대와 동일한 시대임) 교회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세계성,보편성(ΚΑΘΟΡΙΚΉ)을 소유하고 있으면서 도 과거 기독교사의 천년을 단일 기독교 문화권으로 역사적 명맥을 이어온 BYZANTINE의 운명의 날에 관하여 무관심 한다면 교회사의 과거를 반추하며 오늘에 재음미하여 교회정신을 차세대에 재연① 하도록 해야 할 당연성을 망각하는 것이라고 사려된다.

그런 점에서 비잔틴 제국사의 종합적인 연구가 절실히 요청되지만② 이 논술에서는 비잔틴제국의 수도였던 콘스탄티노플의 쇠퇴에만 집중하여 천년간의 역사적 명맥이 끊어진 원인을 점검함으로써 비잔틴 제국은 축소되고 서방제국은 한쪽 날개를 잃어버린 상처입은 독수리가 되어버린 현역사의 조감도의 뒷배경을 살피고자 한다.

 

Ⅱ.콘스탄티노플 쇠퇴에 관한 연구자료

 

우리가 본론으로 들어와서 우선적으로 정리해야 할 중요한 과제는 과연 그처럼 기독교 역사의 흐름 속에서 지울 수 없는 경험(Πάθος)로서의 콘스탄티노플 쇠퇴에 관한 자료를 정리하는 것이라고 사려되어 다음과 같이 Steven Runciman 이 체계화한 내용을 정리하고져 한다.

 

1)헬라적 자료

 

헬라인으로서 논의하고져 하는 인물로 콘스탄티노플 쇠퇴와 동시대의 인물로서 도시가 포위되었을 때 그곳에 생존하고 있었던 이는 단지 한 사람 뿐이다. 그의 이름은 George Phrantzes인데 자신을 가족들이 Phrantzes(Frank? or France)라 불렀으나 Sphranzes라고 명명했다. 그는 펠로폰네소스에서 1400년이 바로 지난 직후 출생했으며 황제 Manuel 2세의 비서였으며 황제의 사망 후에는 그의 아들 Constantine에게 자신의 삶을 계속 봉사했다. 그는 Constantine의 가장 친한 친구였고 교회일치 운동(라틴교회 즉, 서방교회와의 정치적 일치운동; 필자 주)에는 별 좋은 감정을 갖고 있지는 않았으나 충성스럽게 그의 주인의 정책을 후원하는 데는 늘 준비된 자세였다. 그의 선입주견은 황제의 형제들 Theodore나 Demetrius를 싫어했으며 특히 궁궐에서 라이벌로 생각했던 Megadux Lucas를 질투 했으며 계속 그를 불공정하게 대하였다. 자연히 그를 싫어하는 이들이 많았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전해준 내용은 정직했고 확신할 만한 것들이 된다.

그가 남긴 작품들은 두가지 형태로 보전되어 있는데 1413년에서 1477년 그의 생애 동안의 기간을 다루고 있는 chronicum minus와 Palaeologan 왕조 전체역사와 chronicum minus를 첨가한 chronicum majus로 나눈다. 현대 역사가들은 Chronicum majus를 Macarius Melissenus가 편집 했다고 하나 콘스탄티노플 포위에 관한 역사적 내용은 원본을 포함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 자료에 관한 특이성은 Phrantzes가 터어키 점령시에 기록한 원본을 잊어 버렸다가 나중에 기억이 새로워졌을 때 재차 썼고 그의 기록은 정직 했으며 생동감이 있고 확신에 찬 분위기이며 허세가 없는 쉬운 스타일의 훌륭한 희랍어로쓰여졌다.

다음으로 헬라어로 된 자료는 그의 이름이 Michael인 Ducas란 성을 가진 저자의 책인데 그의 생애에 관하여는 알려진 바가 없고 다만 Genoese를 봉사하면서 콘스탄티노플이 포위 당하던 그 시기에는 Chios에 살고 있었다. 그는 Phrantzes와는 전혀 달리 열렬한 교회 일치주의자였으며 모든 것을 라틴계의 친구들이 소유한 안목으로 평가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의 저술은 1341년까지 세계사의 간단한 약술로 시작해서 1389년 이후의 일들을 더욱 상세하게 완전한 설명을 가하면서 1462년까지를 결론을 짓고 있는데 모두가 다 신문에서 사용하는 일상 생활용어로 기록이 되었는데 현대 역사가는 기대이상으로 그의 신빙성을 높게 평가해주고 있다.

Mehemet 2세의 궁궐에서의 일은 믿을만한 것이 못되었는데 아마 그는 그의 정보를 Genoese의 대리인이나 거기에 거주했던 상인들로부터 획득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그가 콘스탄티노플에 현존하지 않았으며 거기에서 일어났던 사건에 관하여 많은 양을 놓치고 있었으며 교회일치에 관해 자신의 견해와 다른 이들의 평가도 공정하지 못했다.

아덴 사람, Laonicus Chalcocondylas는 그가 매우 나이 많았을 때 1480년 이후까지의 얼마 기간 동안 그의 역사를 기술했다. 그는 미스트라에서 Plethon의 학생이었으며 그의 삶의 대부분을 펠로폰네소스에서 보냈다. Ducas의 것처럼 그의 저술은 세계사를 단편적으로 취급하고 있으면서 그것의 중요한 테에마는 오토만 제국의 출범이었다. 사실 그의 주제는 비잔틴 제국보다는 터어키 제국에 촛점이 맞춰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의 책은 콘스탄티노플에 관한 실제적 포위는 상세히 제시하지 못했어도 역사가로서 사건의 일반적 흐름은 놓치지 않았다.

다음으로 헬라적 자료로서 중요한 위치를 점유하고 있는 것은 4세기의 역사가 Christobulos인데 운명의 도시가 포위 될 때 Imbros에 관리로서 살고 있던 인물이다.

그는 동료 헬라인 중에서 터어키 정복을 비극일찌라도 피할 수 없는 것으로 본 그룹에 속했던 사람이다. 그의 역사서는 1451년에서 1467년까지 계속되었고 역시 그의 저술속의 영웅은 술탄이었다. Christobulos는 헬라인들의 영웅적 행동에 의해 감명되었으며 Mehmet 자신에 의해 이뤄진 야만적인 행위들을 불성실하게 간과하거나 변명하는 경향이 있었을찌라도 콘스탄티노플의 시민들이 당한 고난들을 가볍게 취급하지도 않았다. 그 도시의 포위에 관한 그의 설명은 현존하고 있었던 터어키인들이나 그리스인들로부터 정보를 얻었기 때문에 최상의 중요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술탄의 명성을 보전하는 경우를 제외하고서는 정직하고 선입주견에 얽매이지 않으며 확신에 차있다.

연대적으로 일치되고 있는 일련의 집단, Monemvasia의 Dorotheus와 Manuel Malaxos와 Ecthesis Chronicon은 콘스탄티노플의 포위에 관한 우리의 지식에는 더 나은 어떤 것도 첨부해 주지는 못하나 터어키 정복후에 즉시로 등장한 사건에 관해서는 유용한 정보를 제공한다.

마지막으로 현존하고 있는 헬라어로 된 서신 가운데 가장 중요한 자료는 1453년 바로 직전에 있었던 사건과 인물에 빛을 던져주는 George Scholarius Gennadius의 유물인데 그것은 특히 Lucas Notaras의 정책을 평가하는데 Phrantzes Ducas의 Latine 자료들이 일제히 불공정한 점에 비해 유익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2)슬라브 자료

 

콘스탄티노플 포위에 관한 자료 중 두개의 중요한 슬라브 자료들이 현존하고 있다. 그 하나는 일반적으로 불일치하지만 폴란드인 한 보병 병사(Janissary)의 일기로서 알려진 것인데 저자는 어떤 세르비아인 Ostrovica의 Michael constantinovic, 임시적으로 세르비아의 군주가 술탄을 돕기위해 보내서 그를 봉사하다가 훗날 폴란드에서 은퇴한 사람인데 그는 결코 보병병사(Janissary)가 아니었다. 그는 그의 문서를 폴란드어와 슬라브어의 이상한 혼합으로 썼는데 자세한 설명은 없지만 술탄쪽에서 자발적이 아닐찌라도 크리스챤 동맹군들이 누구였는가를 보여준 자료로써 흥미가 있다.

그 다음은 러시아어,루마니아어 혹은 불가리아어로 된 러시아적인 것보다는 오히려 발칸 반도에 속한 것으로 간주되는 고대 슬라브어 방언으로된 슬라브 연대기로서 역사 속에 빛을 본 것을 꼽을 수 있다. 그것은 분명히 콘스탄티노플에 현존하고 있었던 이의 정보에 기초하고 있었고 형식은 일기 형태로된 내용이나 현저히 변형된 상태로 보전되고 있다. 러시아 판의 기록은 저자가 어떤 Nestor Iskander로 나타나고 있다.

현대 학자들은 그가 원본의 저자가 아닐까하는 추정도 하고 있다.

 

3)서방자료

 

서방자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Nicolo Barbaro에 의해 보전되고 있는 콘스탄티노플 포위에 관한 일기이다. 원래 그는 의학을 공부했던 훌륭한 가정에 속한 베네치안(Venetian)이었고 콘스탄티노플이 포위되기 시작할 때 즈음, 가장 큰 베네치안 함대의 군의관으로 콘스탄티노플에 오게 되었다.그는 베네치안의 지휘관들과 자주 접촉 할 수 있었고 자신이 관찰자였으며 동시에 정보통에 속한 인물이었다. 그는 매일의 사건을 일기에 기록하고 있었고 어떤 때는 기록된 본문을 지나쳐 한 두가지 앞뒤 참조문을 삽입 하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2틀 정도 늦게 월식의 날짜를 변경시켜 놓고 있기도 하다. 그는 좋은 베네치안으로서 Genoese를 혐오 했고 일련의 사건들을 불신임하는 이들에게 기꺼이 보고했다. 그렇지만 그는 대부분 서방인들보다 헬라인들에게 적대감을 덜 가졌다.

우리가 사건의 연대기적 연속성을 알수 있는 것은 그의 덕택이다.중요한 점에 있어서 두번째는 Chios의 Leonard에 의하여 쓰여진 보고서인데 그는 그 도시의 쇠퇴후 약 6주만에 Chios에서 보고서를 작성할 때, Lesbos의 대주교였다. 그의 기억은 모든 헬라인들에 대한 그의 증오심과 함께 그의 기록은 생생했고 확신에 찬 것이었다. 그는 콘스탄티노플에 대하여 황제가 너무 쉽게 처리한 것 같다고 생각했으며 그의 상관, 추기경 Isidore는 너무 약한 정책을 쓴 사람이였다라고 암시하기도 했다. 동시에 그는 동료 Genoese를 비난하지는 않았으나 그의 위치를 져버린

Giustiniani를 비난하는 경향으로 흘렀다. 그는 거칠고 이기적인 사람이었으나 좋은 보고자가 되고 있다.

교황이나 모든 신자들에게 보낸 추기경 Isidore의 편지는 간단하여 많은 것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권위를 가진 기록이 되고 있다. Frorentine Andrea Cambini에게서 유용한 정보를 얻는데 그의 작품은 15세기말에 기록되었고 그 도시가 포위될때 생존한 이들을 향해 의견을 제시하는 것 같다.

Zorzo Dolfin은 Chios의 보고자인 Leonard에 의해서 기초되고 있는데 생존자들로부터 몇가지 첨부된 정보를 제시한다. 헬라인으로서 피난민인 Contacuzino Spandugino에 의해 쓰여진 터어키 역사는 도시를 포위한 사건에 관한 증인의 내용을 재차 기록한 것이다.

 

4)터어키 자료

 

특이할 만한 사실은 콘스탄티노플의 쇠퇴에 관한 터어키측 정보는 실망을 자아낼 정도이다. 혹자는 오토만 술탄의 가장 위대한 업적이 콘스탄티노플 점령이기에 오토만 역사가나 연대기적 작가에 의하여 완전히 기록되었으리라 기대 했었다. 그러나 이점에 있어서 그들 모두는 Rumeli Hisar에 성체를 세운것은 언급하고 있지만 콘스탄티노플 포위에 관한 것은 단지 터어키 함대의 육지여행과 최후공격에만 관심이 있었고 또한 깊이 술탄 법정의 음모나 정책에 관해서는 관심이 있었다.

Ashikpashazade는 Mehemet Ⅱ세의 통치말기 후를 기록 했는데 그의 동시대인으로서 Tursyn Bey와 Neshri인 Halil Pasha를 완강히 반대하는 입장에 서있다.술탄 제국의 BayezitⅡ를 칭송하는데 있어서도 Mahmud와 같은 그의 충신을 선호함으로

MehmetⅡ를 약간 경시하는 풍의 입장에 서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설명들은 터어키측의 정치적 분위기를 알수있는 한에서 가치가 있다.

맨처음으로 콘스탄티노플의 포위와 쇠퇴에 관하여 흥미를 보여주고 있는 터어키 역사가는 16세기 말에 비로소 기록에 착수한 SA'AD EDDIN이다. 그러나 의례히 모슬렘 역사가들이 하는 것처럼 전대의 역사가들의 설명을 단지 재생하거나 복사하는데 불가했다. 콘스탄티노플 포위에 관한 그의 기술들은 헬라 역사가들의 것과 꼭 들어 맞는다.

17세기 초에는 환상이 이야기로 변화되기 시작했다. Evliya

Chelebi는 그런 종류의 것을 아주 길게 설명하고 있는데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길 그의 고조 할아버지에 의해 전달된 내용 중에서 콘스탄틴의 신부가 될 운명의 프랑스의 한 공주가 술탄에 의해 체포되었다는 전설적인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가능성을 고려해 볼때 그는 그 얘기를 1204년 경에 한번 도시의 몰락이 있었던 때의 얘기를 친분있는 헬라인으로부터 전해 들었고 사실상 그 공주는 프랑스 루이 7세의 딸이며 Alexius Ⅱ세와 Andronicu-s Ⅰ세의 과부인 왕후 Agnes였다. 어떤 경우에는 자주 풍문이나 소문을 의지했지 이미 초기에 쓰여진 자료를 무시하고 있다. 그보다 후에 나타난 터어키의 자료들도 역시 단순히 선구자들의 작품을 재생산한 것 뿐이었다.

 

 

 

 

III. 콘스탄티노플의 약사

 

 

4세기 말, 한 전승에 의하면 비잔티움 주교구는 성 안드레아스가 세웠으며(그의 순교지는 이탈리아를 서쪽으로 건너다 보는 헬라의 서부 해안 도시 파트라스이다.) 그의 제자였던 스타키스가 초대주교가 되었다고 한다.(38년-54년)특히 콘스탄틴 대제가 330년 (406-337) 로마 제국의 수도를 로마에서 비잔티움으로 옮긴 후에 그 도시명을 ‘콘스탄티노플’① 또는 ‘신로마’로 개명하면서 주교구는 대주교구로 바뀌어 Ecumenical Patriarchate of Constantinople, "에큐메니컬 총 대주교“,‘로마’ 총대주교 (터어키어론 Rum Patriarkhanesi)로 명명된다.

4세기초에 고트와 페르시아 족에 대항하는 북동쪽 전선에서의 전투,경제적위기, 제국의 무기력으로 인한 연속적인 위기 상황에 로마제국은 완전히 기울어지기 시작 했다. 그래서 콘스탄틴 대제의 전 황제였던 Diocletian(284-305)은 회복을 위한 노력을 시도 했는데 그는 분봉왕 제도를 도입 했다. 즉, 제국을 두 명의 상위 황제와 그들을 돕는 후배 황제를 세워서 그 뒤를 잇도록 했다.

305년 그의 동료 Maximian과 Diocletian 퇴위와 함께 하위의 황제 위치에 있던 콘스탄틴 대제의 부친(Junior empero), 콘스탄틴 흐로로스는 그들 뒤를 이었고 다음해 그가 죽자 아들 콘스탄틴 대제는 뒷전에 물러 앉아 있지 않고 왕으로 자신을 높였을 뿐 아니라 18년 동안 내전을 겪게 되며 Maximian 의 아들

Maxentius 와의 싸움에서 312년 밀비안(Milvian) 다리에서 패권을 장악하게 되고 동방의 분봉왕이었던 Licinius 와의 북 에에게 지역 전투에서 324년 승리와 함께 전 로마의 명실상부한 황제가 된다. 321년에는 그가 황금동전과 2중으로된 화폐를 발행 했는데 거기에는 두명의 아들, Crispus 와 ConstantineⅡ세의 연합된 집정관이 한쪽 면에 나타나 있고 다른 면에는 아폴론 신에게 바쳤던 그의 초기의 헌신을 상기하는 태양 광선을 가진 왕관으로 자신을 장식한 모습이 등장한다.

그것은 역사적으로 황제,Diocletian의 출생으로 황제직이 세습 되어 가는 것을 포기하고 후임자의 공적에 의해 지명되는 왕위 계승 방법을 우리에게 보여주며 다시 콘스탄틴에 의하여 왕위가 세습되는 일련의 변화들을 볼 수있다.

Licinius 와 전투를 벌리는 동안 승리의 순간을 기념키위해 콘스탄틴 대제가 도시,콘스탄티노플을 미래의 수도로 정하긴 했으나 그같은 의도는 처음 발생한것이 아니다.② 이같은 위치의 콘스탄티노플은 4세기 동안 걸쳐 발전을 계속했는데 A.D 451년 칼케돈 회의는 A.D 381년 콘스탄티노플 회의의 결정 사항이었던 ‘로마의 주교구와 동등한 권리’(콘스탄티노플 주교구)를 인정 했고 ‘신로마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 에큐메니컬 총 재주교’라 불려졌으며 7세기 모슬렘의 영토정복과 함께 그 권한이 한층 더해졌다. 왜냐하면 모슬렘 점령 지역에서 성직자들이 모두 난을 피하여 콘스탄티노플에 집결하자 자연히 그 세력이 강화되고 그와 동시에 불가리아, 세르비아, 루마니아, 러시아③ 등으로 확산 되어갔다.

1054년은 동서 로마 교회의 분열이 대주교 Michael

Cerularius 와 추기경 Humbert 사이에 성만찬 금지와 함께 실현화 되었으며 12세기까지는 간신히 비잔틴 내의 평신도가 서방의 신도를 순수히 동료 크리스챤으로 이해하는 정도로 내려오다가 십자군 전쟁 시에 성직자 마져 전투에 임하는 서방교회의 모습을 직시한 동방교회는 불신임과 혐오감으로 인해 정치적인 면에 있어서나 종교적인 면에서 양 진영은 서로 균열의 아픔을 맛본다.

1453년에 오스만 제국의 수도로 콘스탄티노플은 전락이 되고 1833년 그리스의 독립과 함께 각 민족 교회들이 독립하여 자치권을 선포 하면서 콘스탄티노플은 축소가 되고 그 당시 분리된 상황을 보면 1)모스크바 자치교회(1593) 2)루마니아(1865) 3)세르비아 (1879) 4)불가리아(1870) 5)알바니아(1937)로 분할 되어 그 역사적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1964년은 뜻 깊은 날인데 거의 어림잡아 920년 가까이 분리되어 있던 양 교회가 서방의 파울로스 6세와 아테나고라스 총 대주교 사이에 화해가 이루어진 상황까지 이르게 된다.

 

 

 

 

Ⅳ.쇠퇴의 내부적 원인

 

 

위에서 우리는 콘스탄티노를 쇠퇴의 원인과 배경을 알려주는 자료와 그리고 그 도시의 역사에 관하여 간략히 살펴 보았다. 그러면 우리 논의의 촛점을 직접 관계된 사건에 맞추어서 내부적 원인과 외부의 원인을 분석하면서 그 운명의사건을 좀더 명백히 조명하고자 한다.

 

 

1. 자체 교회 내의 신학적 분열

 

 

콘스탄틴노플의 운명의 날에 가장 먼저 취급되어야 할 원인 규명에는 자체 교회 내의 분위기라고 생각된다. 1204년, 제4차 십자군 전쟁으로 초 강대국이었던 옛 동 로마제국이 쇠퇴하게 되고 니케아에 반세기동안 후퇴하여 제약을 받다가 Micael Palaologus에 의해 다시 재건되었으나① Anatolia라고 불리워지는 동방지역을 터어키족에게 빼앗겨 군사모집과 곡물생산지를 잃게 되었으며 1347년에 찾아온 긴 내전 후의 흑사병(The black death)은 인구의 절반 이상을 잃게 되는 참담함을 겪게 된다.②그같은 위기적 상황에 비잔틴교회의 정통성을 유지하려는 반일치주의자들과 현실의 중압감을 극복하기 위해 서방교회의 요청에 자연스런 수락으로 로마의 우월권을 긍정함과 동시에 서방교회와 일치된 입장에서 우상숭배의 대명사인 터어키 족과의 대응을 극복하자는 입장에 선 사람들과 정신적 분위기가 양극화되고 있었다.③ 다시말해 반일치주의자들은 비잔틴의 신앙과 전통을 고수하려는 입장에 서 있었고 이들은 라틴황제 치하에서 라틴 제국의 통치 권력하에 있었던 조상들의 고통을 기억하면서 일치운동은 도덕적으로 해로운 것이며 영원한 심판을 자처하는 것이라고 충격을 가하고 있었다.

반면에 일치주의자들은 비잔틴과 라틴문화의 통합을 위한 사상을 키우면서 그런 경우에만이 헬라적 전승이 안전히 보전되면서 당시에 나타나고 있었던 바 이탈리안의 삶의 위대성과 찬란한 로마의 옛 영화를 다시 세우게 되는 폭넓은 문화형성이 이뤄질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비운의 왕, 1391년에 왕위를 물려받은 Manuel 2세는 자기아버지 John 4세의 뒤를이어 기울어져가는 제국을 건지기 위해 1400년에 서양세계를 향하여 원조의 요청을 떠났으나 기본적으로 교회일치운동에 반대하고 있었기에 얼마되지 않는 돈을 모금하여 1402년 술탄이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한다는 소문과 함께 귀국하고만다.

1432년 Sultan Murad 2세가 실제적으로 콘스탄틴노플을 향해 거의 단번에 가족적인 배반행위와 배신의 루머 등 때문에 포위될 수 밖에 없었던 때까지 20년 동안이나 제국내의 다툼은 지속적이었다. 이런 와중에 Manuel 2세는 1432년에 공적인 삶에서 물러났고 2년후에는 세상을 떠났는데 그의 술탄의 친구, Mehemet 1세도 사망했고 새로운 술탄왕 Murad 2세 치하에 오토만 제국은 더 강국이 되었고 비쟌틴 제국에서는 Manuel의 셋째아들 Adronicus가 데살로니카를 차지 하고 있었는데 그도시를 지탱하는데 실패하고 베네치아 인들에게 팔아버리게 되나 그들도 역시 그 도시를 안전히 지키지 못하고 1430년에 터어키에 점령 당하고 만다. 제국의 풍전등화와 같은 위기가 감도는 순간이었다.

Manuel의 장남 John8 세는 남달리 아버지의 견해에 반하여 서방의 도움만이 동방을 도울 수 있음을 감지하고 로마와 일치의 정책을 펴기에 이른다. 교황 Eugenius 4세는 황제를 그의 대표단들과 함께 초대하여 1438년 Ferrara에서 동서 양교회의 의회를 열었고 이듬해는 Florence로 옮겨가서 계속되기에 이르는데 회의의 결과는 기대 이하로 교회 교부들 사이에 불일치와 모순이 계속되었으며 끊없는 언어상의 어려움만 있었다. 그때 John 8세가 그 회의에 참석하게 했던 이들은 세명의 메트로폴리탄교구에 속한 학식있는 감독④ 니케아의 메트로폴리탄, Trebizond의 Bessarion, 키에프와 전 러시아에 걸친 메트로폴리탄 Isidore, 에배소의 메트로폴리탄인 Mark Eugenicus이며, 4명의 평신도 철학자Geoge Scholarius, George Amiroutzes, Trebizond의 George 와 노령의 Plethone이 있었으며 그때의 대주교는 불가리아 왕과 그리스의 어떤 부인 사이에 태어난 서자며, 요셉이라고 불리우는 현명하지도 못하고 건강도 좋치못한 노령의 인물이었으며 회의에 큰비중을 차지하지 못한 실정이었다.

결과적으로 일치의 정책이 억지로 통과되었고 세명의 토마스 아퀴나스의 추종자들은 Plethone이 명백히 그 회의의 결과에 조인하는 것을 억제한 것을 제외하고는 그것을 수락했고 라틴의 지도자들은 Plethone을 플라톤 학파로서 독보적인 존재로 환영하면서 Cosimo de' Medici 같은 이는 그의 영예를 따라 플라톤아카데미를 세우는 전략으로 그의 입을 침묵하게 하는데 일조 했다.

에베소의 Mark Eugenius만이 반 일치주의 자(Anti-Unionist)의 대표적 인물로 남고 대주교 요셉은 회의록에 조인후 병들어 사망하고 말지만 성령에 관한 로마의 견해를 동의하여 헬라의 입장과 동일한 것으로 인정하는 일치의 정책이 결정되었다.

1440년 교황 Eugenius는 십자군 운동을 선포했고 1444년 다뉴브강을 건넜던 헝가리 군으로 구성된 십자군은 Sultan Murad와 격전을 벌이게 되고 황제는 일치의 조약후 어머니, Helena의 영향으로 일치운동에 박차를 주춤거리고 있던 차 별 어려움이 없이 술탄이 흑해 연변 Varna에서 십자군을 격퇴하게 된다.

이같이 민간신앙으로 널리 퍼져 있는 비잔틴의 교회만의 독립적인 전통유지는 계속 일치운동에 박차를 가하기는 커녕 오히려 “모든것이 영원하지 않다”는 예언서를 암송함으로 기울어져 가는 제국의 운명을 낙관적으로 보지않는 침울함이 급기야는 콘스탄티노플의 쇠퇴에 가장 큰 원인이 되고 있었다. 그리고, 많은 서방의 역사가들도 이미 비잔틴제국이 일치를 꺼려하는 것은 자기 멋대로 완고하게 자살을 시도하는 것과 같다고 예견하고 있었다.

 

 

2.정책의 부재


1448년 10월 31일 일치운동으로 제국의 운명을 살리려하던 John 8세는 세상을 떠나고 자녀를 남기지 않아서 6명의 형제들사이에 왕권 다툼이 계속있었다. 그는 Florence의 회의에 참석키위해 콘스탄티노플에서 부재할때 그의 후계자를 삼기위한 실질적 목적으로 그의 형제 콘스탄틴을 그 도시에 불러 콘스탄티노플을 통치하게 했다.

하지만, Theodore는 자신을 왕의 후계자로 생각하고 John이 사망할 시기에 가까운 거리에 있어야 한다는 일념으로 수도에서 40마일 안되는 Thrace에 정착하고 있었으나 황제가 사망하기전 3개월전에 1448년 6월에 운명이 그를 속이기나하듯이 Thrace에서 사망하고, 다른 형제, Demetrius는 황제 사망후에 정확히 두주후에 Selymbria,속령에서 자신을 왕으로 등극하는 일화가 발생한다.

그러나, 황제 부재시에는 황후가 차후의 황제를 임명할 주권을 갖고 법적인 실행을 할 수 있기에 연로한 황제의 어머니 Helena는 콘스탄틴, 그녀의 생존한 아들 중 최연장자인 그를 지명하였고 여론도 그를 지지하였다.Demetrius의 희망도 좌절되고 Thomas 는 제국의 북서쪽,Clarenza 와 patra 지역의 군주로 콘스탄틴에게 충성을 맹세한 후 Demetrius 와 Thomas가 콘스탄티노플에서 떠나자 왕권이 1449년 1월6일에 안정을 회복한다.

1450년 3월 23일 어머니, Helena의 사망까지 그는 반 일치주의자들의 입장을 고수하다가 그의 형의 조언을 기초하여 그의 정책을 펴나가기 시작했다. 한편 왕의 장관이었던 Phrantzes는 Sultan Murad의 사망과 접하여 Murad는 근본적으로 전쟁의 고통을 원치 않았던 평화의 사람인데 새로운 Sultan 은 크리스챤제국을 공격하여 파괴하려고 하는 자이다라고 평가하여 제국 내의 위험을 경고했다. 새로운 Sultan, Mehemet 2세는 19세였고 1432년 3월30일에 하녀였던 Huma Hatun이란 여인에게서 출생 하였으며 형 Ahmet의 갑작스런 죽음과 두번째 형, Ala Eddin이 6년 뒤에 비밀스럽게 살해된 후에 Murad의 뒤를 이어 오토만제국의 왕이 될 사람으로 유일한 존재였다. 아버지 Murad의 영향으로 그는 과학, 철학, 이슬람과 희랍의 문학에 조예가 깊었고 희랍어, 아랍어, 라틴어, 페르시아어, 희브리어까지 능통한 자가 되었고 앞에서 언급한 1444년의 Varna 전투에서 승리하고서도 은퇴하려고 했던 뜻을 굽히지 않고 왕권을 양도한 아버지의 뜻을 따라 제국의 통치자로 군림했다.

1452년 여름, Urban이라 불리우는 헝가리 기사가 콘스탄티노플에 왔을 때 황제에게 대포 제작을 통해 봉사하고 있었는데 콘스탄티노플은 그에게 합당한 봉급을 지불할 수도, 필요한 원료를 충분히 제공해 줄 수도 없는 어려움에 봉착하게 된다. 그때에, 공교롭게도 이탈리아계 유대인인 Gaeta 의 Jacobo란 의사에 의해 과학에 관심을 자극받고 있었던 Sultan Mehmet은 기다리기나 했듯이 그를 고용하여 그가 요구한 액수의 4배를 지불하면서 3달 안에 대형 대포를 만들어 Rumli Hisar에 있는 성곽에 대포를 장착하여 봉쇄령이 내린 지점을 통과하는 베네치아의 배를 격파한 승전을 이루게 된다.

그런 전과와 함께 Mehmet은 전보다 두배 크기의 대포를 만들도록 명령하고 후에 완성하자 700명의 군인으로 그 대포를 관리하게 했으며 이동하는데만도 15쌍의 마차가 필요할 정도로의 규모가 되었다.

위와같은 정황은 바로 콘스탄티노플의 쇠퇴에 직접적인 중요한 원인이 되고 있는데 그들의 정책은 너무 비현실적인 것이 분명하고 더나아가 성을 지키는데 무엇이 최상의 방법인지 모르는 사람들처럼 자가당착에 빠지고 있었음이 나타나고 있다.

 

 

 

 

Ⅴ.외부적인 원인으로 동서로마교회의 분열

 

 

전장에서 우리는 콘스탄티노플의 쇠퇴에 내부적 요인을 (1)자체내의 분열과 (2)현실에 부딪힌 문제에 봉착한 정책의 부재에서 분리해 생각해 보았는데 이제는 그 외부적 원인들을 찾아서 정리하고자 한다. (1)동서 로마 교회의 신학적 분열 (2)모슬렘의 팽창 (3)십자군 전쟁 등으로 구분이 가능한데 이 소논에서는 첫번째 것에 집중하여 기술하고져 한다.

콘스탄티노플의 포위가 현실화 되어가는 과정에서 콘스탄티노플의 황제는 그의 최선을 다하였다.① 예를들면 1452년 가을에 절박한 도움을 간청하기위해 이탈리아에 대사들을 보냈다. 그러나 반응은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새로운 대사가 다시 베니스에 보내졌으나 의회는 동방이 접수한 뉴스에 의해 깊이 실망할 정도로 11월16일에 대답을 제시했으며 교황과 다른 세력들이 행동을 보였다면 기쁘게 협력이 가능했을 터인데도 현실은 전혀 기대 이하였다. 사절단이 같은 달 Genova에 보내졌는데 단지 배한척을 지원선으로 약속을 받고 형편에 따라 또다른 도움을 주겠다고 하는 언질을 받았으며 프랑스왕과 프로렌스 공화국에 호소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의 반응은 한결같이 냉담 했다.아라곤의 약속에 속한 Alfonso왕의 원조는 더 모호했는데 콘스탄티노플에 운송을 위해 시실리에서 밀과 약간의 양식을 모으겠다는 내용이었다. 이같은 노력을 기울였던 사절단은 해외에서 무척 바쁜일정을 보냈으나 1453년 4월1일 부활절기간②에 몰락한 콘스탄티노플에 돌아가지 못하는 실정이 되었다. 전반적인 서양의 분위기는 당시 교황 니콜라스의 태도에서③ 잘나타나고 있는데 그는 기울어져가는 콘스탄티노플의 운명을 도우려고 했으나 교회일치운동의 현안이 현실화될 것이라는 확신을 느낄 때까지는 돕는 손길을 펴길 주저하고 있었다. 바로 이점은 9세기에 발생했던 동서로마교회의 갈등이 평정되지 않고 라틴교회는 정치적 교만으로, 비잔틴교회는 전통을 향한 완고함을 고집하다가 결국은 교황 니콜라스와 같은 지도자가 보여준 의도 표출로 사건은 결론 되었다고 평가 되어진다.

그러면 그 양교회 사이에 날카롭게 대두된 갈등요소들을 여기에서 점검해 보아야 하리라 사려된다. 14세기부터 이탈리아의 지적분위기가 동방과의 잦은 접촉이 초래되게되자 콘스탄티노플의 골든혼을 넘으면 바로 소재한 Genoese 영지, 페라에서 살면서 스페인 도미니안회로부터 라틴어를 공부한 젊은학자 Demetrius Cyclones는④ 토마스아퀴나스를 희랍어로 번역하길 평생의 사업으로 생각했으며 그 번역본은 비잔틴 지성인들 사이에 애용되었고, 삼위일체 개념의 토미즘적 이해 즉, (1)본질의 일치 (2)세인격의 분리를 동방교회에서는 의문을 제기하게 되었다.

동시에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복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한 이해가 동방이 주장한 대로 󰡔본다󰡕는 대상은 하나님의 본질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적 에너지’를 보게 되는 것이다라는 이론과 반대되는 서방의 견해를 크레테의 베네치안 식민지에 한 수도원에서 로마교회의 한 멤버로 자신을 취급하면서 일생을 보낸 Demetrius Cyclones가 추종하면서 양교회는 의견이 조정되지 않고 분열 양상을 띄게 되었는데 이와같은 류의 동서간의 의견차는 모슬렘 제국의 부흥과 함께 동서 교회를 위기로 몰고간 종요한 요인들이 되었다.

그 밖의 요인들은 다음과 같다.⑤ (1)성령의 유래에 관하여 (2)성례전에서의 빵과 다른 예전의 차이에 관해서 (3)연옥설에 관해서 (4)교황청의 의치에 관하여인데 1390년 비잔틴왕 John 5세를 이어 왕이 된 Manuel은 1425년에 John 8세에게 왕권을 노령에 세습했는데 그는 친서방정책을 쓰게되었고 앞에서 언급한 프로렌스회의에서 외부상황에 억눌려 일치운동에 조인하고 만다. 양측의 기본입장들의 토의와 토론의 기초는 성서와 교회 공의회의 표준 규칙과 범세계 교회에 의해 성자들로 인정된 교회 교부들의 저술에 의하여 형성되어야 한다고 했으나 누가 보아도 프로렌스회의의 결정 과정은 영원한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 만족할 만한 수단이 될 수 없는 과정으로 그 회의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우선 의견의 차이는 하나님의 본질과 하나님의 에너지에 관한 구별을 확실히 하지 않았던 서방교회의 견해는 약간 배타적인 점으로 나타났을찌라도 연옥설에 관한 견해에 있어선 양측이 서로 그렇게 극단적인 입장은 아니었다.동방교회 역시 최후심판 때까지 인간의 최종 운명에 도달한 것이 아니라는 점은 긍정하고 있었고 다만 한정적인 교리문으로 채택되지만 않았을 뿐이고 죽음과 심판 사이에 있는 사람들에게 무슨일이 일어나고 있었는지는 우리가 무지할 따름이라고 정리하고 있다.

그러나 서방에서 주장하던 연옥설에 관해서 특별한 반대가 없었고 그것을 수락할 준비까지 되어있을 정도였다. 그다음 여러 단계의 토의를 거쳐 의식적인 면들이 정착되었는데 서방교회에서는 성찬에 쓰는 동방교회의 Zeon(누룩)사용을 동의하고 허락했다는 내용으로 요약 된다. 한편 성례전에 삽입되는 성령임재의 부름(Epiklesis)의 절차인 동방교회의 입장이 더 이상 불필요한 것으로 양보되는 상황이 나타났다.

좀더 어렵게 의견이 진행되었던 것은 성령의 유래에 관한 내용인데 공식적인 동로마교회의 입장은“성부로부터”(ex patre) 즉, 성령의 유래가 “εκ τον θεον δια του Ιησου인데 반해 서방은 filiogue 즉,”아들로부터“(εκ τον υιον)란 귀절을 삽입함으로 “라틴철학은 처음에 본질 그 자체를 생각하고 거기에서 유래한 대행자(agent)를 고려한 반면 동방교회 철학은 처음에 대행자(agent)를 생각하고 후에 그것을 통해 본질을 고려하는 입장에 섰다고” Steven Runciman은 그의 저서에서 V.Lovsky의 저서 󰡔The Mystical Theology of the Eastern󰡕의 내용에 나타난 주장을 동의하고 있다.

다시말해,성령의 유래에 관하여 서방교회의 입장은 2중 유출(dual procession )의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으며,종래 Ferrar-Floren 회의에 이르러서는 급기야 “from ”이란 단어와 “through ”이란 단어가 서로 의미상 동일한 뜻이라는 방향으로 의견이 모아지면서 어색한 동서로마 교회의 관계는 더욱 이혼의 길로 가고 위기만 조장되었다.

그리고, filioque 문제와 함께⑥ 더나아가 υποθεσεις - Substantia, persona-προσωπον의 번역 상 문제인데 삼위일체의 본질(substance)를 논하면서 서방은 삼신론(Tritheism)의 입장에 서서 사벨리안적인 상황으로 기울어 졌는데 희랍어의 προσωπον은 번역 할 때 “인격체”라기 보다는 “외관”이란 뜻이 강하기에 υποθεσεις 와 προσωπον의 번역 상의 문제가 동서 양 진영에 나타나게 되었다.⑦ 그리고, 필요에 따라 여기서 잠깐 filioque의 역사를 조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맨처음, 6세기의 스페인 교부들이 visigoths의 아리안주의와 숨가쁜 투쟁속에서 성령에 관한 내용이 더 부언되어야 할 것을 느껴 ‘filioque’ 를 사용하기 시작했다가 이 귀절이 Orlean의 감독이며 학식있는 스페인 출신, Theodulphus에 의해 샤르마뇽 법정에까지 이르게 되었다고 한다. 9세기 중엽에는 독일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었으며 슬라브에서 선교 활동하던 독일 선교사들이 그 용어를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 Photius에게 전달했다.

그때, 그는 성령에 관한 요한복음 15장 26절 “όταν έλθη ό παράκλητος όν εγώ πέμψω ύμιν παρά του πατρός, το πνευμα της αρηθειας ματυρησει περι εμου ”의 귀절들을 라틴교회에서 잘못 이해했고 다음장, 13절과 15절에서 논의되고 있는“Έκτού εμού“와 바울의 ‘그리스도의 영’이란 개념은 결코 요한복음 15장 26절의 내용과 불일치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면서 이중유출설을 부정했으며 교황 Leo 3세 마져도 로마의 성베드로 사원 벽에 신조(Creed)를 부착하려고 할 때 filioque를 생략하기도 했다. 그러나, 11세기 초 독일 태생의 황제들이 로마에다가 그 귀절을 사용하기를 명령한 사태도 발생한바 있었다.

이같은 모든 문제들 배후에는 번역상의 문제가 대두된 것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런 것들을 통해 서방교회와 동방교회의 관계는 사실 정신적으로 이혼의 상태에서 별거중인 부부와 같은 상황이 되어있었다.

마지막으로, 가장 첨예화 되어 있었던 교황권에 관한 양교회의 잘못된 견해차인데 A.D 381년 콘스탄티노플 회의에서 결정된 로마와 콘스탄티노플의 동등권 문제였다. 그러나 신앙과 훈련의 문제에 있어서 교황은 전교회의 마치도 제일원로의원(princeps senatus)처럼 위치하게 되었는데 A.D 343년 불가리아의 사르디키 회의에서 현실화된바 있었으며 그런 우월적 위치는 381년에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콘스탄티노플이 처한 위기 상황에, 동방교회의 사기를 건드리는 폭탄의 도화선 같은 문제에 서방교회는 불을 당겼다. 즉, 교황이 교리적 우월권을 갖는다든지 교회 훈령의 권위를 소유한다면 여타 다른 교리 문제의 향방은 고려대상이 되지 않는 처지였는데 라틴교회는 동방교회에 교황이 전교회를 훈련할 뿐아니라 교리 문제를 취급하며, 전 교회를 그 새로운 교리에 묶기 위한 공의회소집 권한을 교황에게 이양 하자고 Florence 회의에서 요구하였으며 황제는 원래 이런 권한이 황제에게 있었던 점을 감안하여(John 8) 처음에는 모호하게 변증했으나 결국은 로마감독이 전체 교리와 전체 크리스챤을 다스리고 통치하기 위한 모든 권한을 차지하게 된다.더구나 그 같은 입장이 ‘공의회의 행동강령과 거룩한 규칙이 인정하는’것으로 확정이 되었다.

훗날, Florence 회의에 참여한 모든이들이 예배소의 감독Mark Eugennicus만 제외하고 회의결정에 형식적인 일치를 선언을 했으나 1448년 John 8세가 피로와 환멸로 세상을 떠나고, 1452년 로마의 추기경이 된 Isidore는 일치의 법령을 갖고 콘스탄티노플에 와서 12월 12일 아기아 소피아 성당에서 대중 앞에서 낭독하려 했으나 그의 동료 이탈리아인 Mytyrene의 대감독이며 Chios의 레오나르드는 그 때의 상황을 참석자가 적었으며, 많은 동방의 공직자들도 그 의식을 배척한 사실을 전달 해주고 있고 심한 분노로 그 때의 상황을 기록해 놓고 있다. 물론 Isidore는 성공적인 의식을 기대했을찌라도 말이다.

그해 몇달 동안 아기아 소피아 성당은 라틴인과 서방과의 일치를 지향하는 성직자에 의해서 예배가 인도 되었고 대다수의 성직자, 그 도시의 회중들은 함께 그 의식에 참여하지 않았다. 새로운 공의회가 개최될 가능성을 남기고 콘스탄티노플에서 회의가 있었으나 Chios의 Leonard에 의해 인도된 라틴 성직자들의 비타협적인 태도는 어떤 도움도 기대 할 수없는 상황이었으며 그들의 지나친 강요는 당시 동로마 교회 측의 Lucas Notaras의 입에서 “로마의 추기경의 모자 보다는 술탄의 터어반을 곧 보기 원한다”는 비참한 언급이 흘러 나오게까지 되었다.

1453년, 콘스탄티노플이 쇠퇴할려고 하는 위기의 순간에 동방과 서방의 두 교회 관계에서 어느 편이 더욱 정당 했던가를 논하기 전에 서방의 이같은 불편 한 분위기와 함께 편승된 그들의 이교도들과의 전투는 동방을 향한 도움의 단절을 가져왔고 급기야 “달이 지더라도 이 도시는 사라지지 않으리 했던” 콘스탄티노플의 쇠퇴에 중요한 이유가 되고 있다.

 

 

 

 

Ⅵ.결론

 

 

지금까지 5장에 걸쳐 콘스탄티노플 쇠퇴의 내적 요인과 외적인 요인을 살펴보면서 400년간이나 모슬렘치하에서 유대 바벨론 포로기처럼 교회의 포로기간을 겪게 된 원인을 살펴보았다. 하나님의 섭리가 지배하는 세계사 속에서 우리의 질문은 왜 그처럼 철저한 신앙의 도시가 하루 아침에 폐허가 되고 이교도의 말바굽아래 짓밟히게 되었는가? 왜 하나님께서 그들을 멸망시키셨는가? 아니면, 그 멸망의 요인이 콘스탄티노플 자체에 있었던가? 우리가 이러한 질문을 안고 논술되어온 과정을 다시 재검토 해 보면 현실을 무시한 신앙의 방향설정, 지나친 피안주의로 현실을 장식하려는 무책임성이 쇠퇴해가는 크리스챤 도시민들의 구원에 결코 도움되지 않았다는 모습으로 들어났다.

그같은 모습은 이미 앞에서 살펴본 대로 십자군 전쟁과 오토만제국의 확장 엎친데 덮친 격으로 찾아온 흑사병으로 전 인구의 절반이 죽어간 폐허위에서 건설을 위한 사랑의 옴모니아로 자신을 무장하지 않고 내분과 도움이 될 수 밖에 없는 서방 교회와의 관계에서도 협조체제를 형성하지 못한 완고함과 동전의 양면처럼 동서 양 교회의 두세계로 구성된 크리스챤 세계 끼리의 우열 다툼, 특히 형제의 위기에서 자신의 유익을 취해 보려는 라틴 교회의 속셈 즉, 1439년에 나타난 프로렌스회의의 결과 등은 오늘의 Ecumenical운동 중에도 시사하는 바가 많다.

독일의 문호 괴테는 일찌기 ‘인류는 부단히 진보하지만 인간은 언제나 하나다.’고 말한 적이 있다. 무엇이 동일한가? 과거의 역사속에 나타난 인간의 역사와 삶과 문화를 대하는 삶의 양식은 오늘도 여전히 이기적인 면으로 얼룩져 있는데 그것은 또한 어거스틴이 통찰력있게 지적한 세속나라의(civitas terena ) 모습이며 어쩌면 인간의 굴레이기도 하다.

그러나, 더욱 우리가 비판해야 하며 더욱 콘스탄틴 쇠퇴에서 역사적 교훈을 뼈저리게 느끼게 되는 것은 크리스챤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역사적인 파행국면이 주는 비참함이 얼마나 큰가를 보여준다. 다시금 믿음과 사랑이 외형적이 아닌 내실있는 실천으로 스며들어야만 된다는 사실을 역사가 전개 되었던 과정 속에서 다시 한 번 그 당위성을 찾아보게 된다. 그러면 우리의 위치를 어디에다 설정해야만 역사의 비운이 낙관으로 정립 될 수있을까? 괴테에게 있어서 “인간의 정신이 지금까지 어떠한 가치체계를 형성하고 진보해 왔을찌라도 기독교가 이룬 가치체계를 어떤 것도 능가할 수 없다”라는 깊은 성찰이후에 도달한 결론은 콘스탄티노플의 쇠퇴 속에서 그 높은 크리스챤의 가치가 또 우리의 삶에 실현화 되지 않는다면 얼마나 우리의 삶이 황폐화되는지를 생생히 교훈 받을 수 있다.

특히, 형제 교회간 화목의 파괴는 긴 세월이 지나서야 상처가 겨우 치료된다는 사건의 정리도 명백히 발견 할 수도 있었는데 그점은 바로, 1054년에 발발된 교회의 대분열이 1964년이 되어서야 콘스탄티노플대주교 아테나고라스 1세와 로마교황 파울로스 6세 사이에 비로소 형식적이나마 화해되는 상황은 교회의 분열은 곧 우리 생명을 나누는 것같은 아픔이요, 그 만큼 댓가가 지불된다는 명백한 진리도 역사적 경험으로 우리에게 분명히 드러난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그의 「신의 도성」에서 로마의 풍전등화같은 역사적인 위기속에서 다시 새로운 하나님의 도성이 동터오는 희망을 제시하길 역사의 Cul-de-sac에서도 결코 비극의 역사를 향한 하나님의 선한 손은 거두어지지 않고 계속 행동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성을 밝혔다. 그의 견해에서처럼 역사의 주로써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행동하심은 콘스탄티노플이 비록 멸망하였으나 르네상스로 연결되는 새로운 역사의 도래를 초래 했으며 그리고 모슬렘치하에서 보여준 기독인들의 생명력은 바로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동일하신 분”의 선한 역사의 경륜을 읽게 함을 보여주고 있다고 사려된다.

 

 

 

 

 

 

미 주

 

 

Ⅰ. 머릿말

①Adolf von Harnack.기독교의 본질. 윤성범역. 서울:삼성문고. 1975. p. 15.

②비잔틴 제국사의 연구 이유로는 다양한 면이 있지만 그 중에 우선 되는 것은 문화사의 배경 중 특히 문예부흥의 끼친 영향이 크다는 점이다.이 견해는 Dene John Geannakopoulos의 책 <Constantinople and west> 1986년 판에 상세히 기술되고 있는 바다.

 

Ⅲ. 콘스탄티노플의 약사

①B.C 312년 메가스 알렉산더 대왕의 동방 정벌로 70여개의 동방에 속한 도시들이 ‘알렉산드리아’라는 이름으로 명명 되면서 동서문화의 일치성을 꾀하게 되었던 전통을 따라 원래'Byzantium'이었던 지명을 그 지역 거주민들의 자신들을'Romaioi'라고 불려지기를 선호하는 경향성과 함께 '콘스탄티노플‘이라고 불려졌다.

②사실 당시에 로마의 내륙지방은 점점 비현실적인 지역이 되어갔고 이태리는 점점 방어가 불가능한 지역이 되었고 발칸반도 그리고 소아시아 지역은 로마군대를 위한 중요 징병 자원 출처였고 그래서 콘스탄틴은 유럽과 아시아의 중간에, Marmara(대리석)해의 바닷물로 삼면이 둘러쌓인 보스포러스 해협이며 깊은 물로 특징을 이루어 “황금의 뿔”이라고 불리워지는 난공불락의 지역을 택해 6년 동안 건축하여 330년 5월11일을 기념일로 삼으면서 로마 제 2의 도시로 건설 했다.

③러시아와 콘스탄티노플 관계는 866년 대 주교 “포티오스”의 회람서신을 통해 10세기 중엽 전에 이미 러시아 대표 “이고르”와 비잔틴 황제 “로마누레키피누”와의 관계에서 조약협정이 체결되고 러시아에 예언자 “엘리야 교회”가 등장 함으로 콘스탄티노플의 선교의 결과로서 러시아가 역사의 무대에 등장함을 보여준다. 원래 러시아의 헬라적 명칭은 ρωσια 이고 라틴 형태는'Russia'인데 러시아에 988년에 정부의 공식 종교로 기독교가 인정된 것은 13세기 초에 기독교 선교를 시작한 캐톨릭보다 훨씬 이전에 비잔틴 교회의 러시아 진출이 이뤄졌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 점에 있어서 “러시아인의 삶의 방법은 세가지 1)로마의 정치적 전통 2)헬라의 문화적 유산 3)정교회적 신앙에 영향 되었고 이 세가지 없이는 러시아의 삶의 방법을 이해 할 수없다고 본다는 말은 설득력이있다.

 

 

Ⅳ쇠퇴의 내부적 원인

①Steven Runcinan. The Fall of Constantinople 1453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69, p. 2

②이때의 왕 John4세와 그의 왕관에 사용된 다이아몬드는 시대적 비참을 알려주듯 유리로 된 것이었다. Ibid. p. 5.

③일치주의자들 1340년 Demetrius Cydones는 토마스아퀴나스의 저술을 희랍어로 번역해 기초화 했다. Ibid., p. 5.

④Steven Runcinan. op. cit., p. 15.

⑤Steven Runcinan. op. cit., p. 19.

⑥비잔틴 제국의 최후의 장관 Lucas Notaras는 ‘추기경의 모자보다는 술탄의 터어반이 더 좋다’라고까지 밝힌 적이 있다.

Ⅴ.외부적 원인

①Steven Runcinan. The Fall of Constantinople 1453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69, pp. 80-81.

②비잔틴교회, 정교회는 교회력 중에서 부활절을 가장 큰 절기로 여기고 있으며 그 주간을위대한 주간(μεγάλη εβδομάδα) 라하여 수난일, 금요일을위대한 금요일(μεγάλη παρασκευή) 라고 명할 정도로 전 시민들의 축제였다.

③Steven Runcinan. The Great Church in Captivity. Cambridge: Cambrige Univ., 1985, p. 103.

④Ibid., p. 101.

⑤Ibid., p. 105.

⑥A. Palmieri, ‘Filioque’, 카톨릭신학사전 참고

⑦이런점에서 Hippolitus의 신학적인 방법론은 라틴어 사용권인 로마지역일찌라도 희랍어로 신학을 전개하는 고집을 편 것은 상당히 우리에게 시사하는 면이 있다.

⑧Steven Runcinan. The Great Church in Captivity. p. 91.

 

 

 

 

 

 

참고도서

 

 

1.희랍어 자료

 

 

Αρβελερ,  Ελενη Γλυκατζη. Η πολιτικη ιδεολογία της Βυζαντινη Αυτοκρατορίας. Αθηνα: Αθανασιος ψυχολογιος.1992.

Βασιλεια, Νικ.Π.Ορθοδοξια και παπισμός. Αθηνα: Σωτηρ.1981.

Μεγεντορφ, Ιωαννου. Βυζαντιο και ρωσια. Αθηνα : Δομος.1981.

 

 

2.영어자료

 

 

․Geanakoplos, Deno John. Constantinople and the West. U.S.A: The Univ. of Wisconsin Press. 1989.

․Loverance, Rowena. Byzantium. London: British Museum. 1988.

․Runciman, steven. Byzantium. Great Britain: Richard Clay Ltd. 1975.

----------------. The Fall of Constantinople 1453. Cambridge: The Univ. of Cambridge. 1969.

----------------. The Great Church in Captivity. Cambridge: The Univ. of Cambridge. 1985.

 

 

3.한국어자료

 

 

․아돌프 본 하르낙. 기독교의 본질. 윤성범역. 서울: 삼성문화문고 67호. 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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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관복음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

목          차

   

    서                  론

    I.  문제 제기 및 연구목적

    II. 연구 방법......................................... 2

   

    본  론.............................. 4

    I.어휘의 문제

       A.나라

       B. 하나님 나라 와  하늘나라(천국)

    II. 하나님 나라 사상의 역사적 변천과정

       A.구약시대의  하나님 나라

       B.묵시문학의  하나님 나라

       C.예수님 시대의  하나님 나라

    III. 하나님 나라 에 대한 학자들의 견해

    IV. 공관복음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

       A. 하나님 나라 와 비유

        1.씨 뿌리는 비유

        2.겨자씨 비유

        3.밀과 가라지 비유

        4.그물 비유

        5.감추인 보화와 귀한 진주의 비유

        6.스스로 자라나는 씨의 비유

        7.자비롭지 못한 신하의 비유

        8.포도원 농부의 비유

        9.혼인잔치의 비유

        10.열 처녀의 비유

        11.달란트의 비유

        12.무화과 나무의 비유

         13.양과 염소의 비유

      B. 하나님 나라 와 교훈

         1.선포와  하나님 나라

         2.산상수훈과  하나님 나라

         3.어린아이와  하나님 나라

         4.세례 요한과  하나님 나라

         5.바리새인의 물음과  하나님 나라

         6.세상일과  하나님 나라

         7.유월절과  하나님 나라

        C. 하나님 나라 와 이적

       

        결  론

       

        참     고     문    헌

           

    서      론

   

    I.문제제기및 연구목적

    

       성서의 중심사상은 하나님의 통치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왕권을 가지고 택하신 자들을 다스리는 것을 말한다. 이를 성서에서는  하나님 나라라는 어휘로 표현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이와 같은 사상을 내용으로 하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고 또한 가르치셨다. 신약성서 전체에 이와 같은 어휘가 나타나고 있지만, 공관복음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 의 어휘를 택한 것은 예수님께서 직접으로 이 어휘를 사용하셨으며, 예수님 당시의 상황을 살펴보아야 이 어휘를 사용하신 의미를 바르게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  하나님 나라 의 사상은 세상의 인간 역사와의 갈등 속에서 변천 되었기에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하나님 나라 의 사상은  공관복음에 나타나 있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 의 사상과는 차이가 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 를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참된  하나님 나라 에 결코 들어갈 수 없다.

      공관복음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 의 어휘가 사용되고 있는 본문 가운데서도 어느 한 부분에서  온전히  하나님 나라 의 본질이 무엇이라고 명확하게 보여주지 않고 있다. 때로는 적대시 하는 사람과의 논쟁 가운데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 의 특징을 하나 밝히시고, 또 이적을 행하신 후에  하나님 나라 의 다른 특징을 말씀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 의 특징들을 하나씩 나열한 뒤에 그 특징들 사이에 흐르고 있는 공통된  하나님 나라 의 본질을 발견하는 것이 예수님이 선포하신 올바른  하나님 나라 를 이해하는 것이며, 참된  하나님 나라 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지금까지 여러 신학자들이  하나님 나라 에 대하여 여러 견해를 주장하고 있는데, 과연 그와같은 견해들이 공관복음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를 온전히, 정확하게 이해하고 난 뒤의 주장인지를 검토하며, 교회로 하여금 확실한  하나님 나라 의 사상을 이해하여 지금 현실 가운데 해야할 일이 무엇인가?에 대한 방향을 제시하고자 한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가운데  하나님 나라 에 대한 이해의 부족으로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 의 사상이 팽배 하면서 교회 내의 문제와 함께 사회 문제까지 야기되고 있는바 예수님께서 직접 사용하신  하나님 나라 의 어휘가 나타나고 있는 공관복음의  하나님 나라 를 연구하여 성서적인  하나님 나라를 바르게 이해하고자 한다.

   

    II.연구방법

   

      공관복음 전체가  하나님 나라 사상으로 가득하기에 전체를 다루는 것은 너무나 방대한 분량으로 여겨진다.

      그러므로 본 논문은 I장에서 어휘의 문제로  나라에 대한 것을 살펴보는 것과 동시에  하나님 나라 와  하늘 나라 어휘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살펴보면서  차이점이 어디에서기인 되었는가를 탐구하고자 한다. 또한 II장에서는  하나님 나라 사상의 근원이 어디에서 부터 시작되었으며, 이 사상이  이스라엘 역사와의 갈등 속애서 어떻게 변천 하였왔는지를 구약시대, 묵시문학시대, 예수님 당시의 시대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한다. 한편 III장에서는  하나님 나라 에 대한 여러 학자들의 해석을 살펴보며, 이 사상에 대한 연구사를 더듬어 보고자 한다. IV장에서는  하나님 나라 가 사용되고 있는 장과 절을 찾아 살펴보고자 한다. 이와같이 하는 이유는 이 어휘가 나타나고 있는 장과 절의 대부분이  예수님께서 직접적으로  하나님 나라 에 대하여 설명을 하시거나  하나님 나라 의 특징을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이와같은 방법으로 각각의 장절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 에 대한 특징을 살펴본 후에 전체적으로  하나님 나라 가 무엇인가를 밝히고 이것이 당시의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하나님 나라 사상과의 차이가 무엇인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본론


I.어휘의 문제


공관복음에는 하나님 나라( :the Kingdom of God) 와 하늘나라(:the Kingdom of Heaven)'라는 두 어휘가 함께 사용되고 있는 것을 우리는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이 두 어휘의 공통어인나라 를 살펴본 후에 이 두 어휘의 차이점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하자.


A. 나라


이 단어는 하나님 나라 에 관해 해석하는데 매우 중요한 논점이다. 그러므로 언어학적인 출발에서 이 단어를 고찰해야 한다.

신약성서에서나라 라는 단어의 우선적인 의미는왕국 이나 백성 보다 통치의 개념이다

1 ) Kettel, 왕, 왕권  고영민, 월간목회 1990년 10월호, pp.46-47.

.최근에 이 주제에 대하여 비평 학자들에 의하여 많은 관심이 모여졌으며, 의 뜻으로 왕국 혹은 백성 보다 왕의 능력, 권세 란 개념이 더 기본적이라는데 실제적인 의견의 일치를 보고 있다. 일반적인언어 사용에서 보통 왕국, 나라로 번역되는 라는 말은 모든 다른 용례보다 먼저 왕의 성격, 지위 등을 지칭한다는 것을 유의해야 한다. 그것은 왕에 관한 말이므로 우리는 먼저 그의 위엄, 그의 권세를  말한다.)"Zum allgemeinen  Sprauchgebrauch von basileia  ist zu  bemerken, dass das Wort, das wir meistens mit K nigreich, Reichbersetzen, vorerst nur das Sein, das Wesen, den Zustand des K nigs bezeichnet. Da es sich um einen K nig handelt, sprechen wir am besten von seiner W rde, seiner Gewalt." Karl Ludwig Schmidt, Theologisches W rterbuch zum Neuen Testament (hrsg,von Gerhard Kittel; Stuttgart: Kohlhammer,1949),I,p.579.를 G.E.Ladd, 하나님 나라에 관한 중요한 문제들 신성종,(서울: 성광문화사,1982),p.84에서 재인용.

이 추상적 의미는 아마도 우리 주께서 그의 가르침에서 사용하셨던 아람어 말쿠트(malkuth)에서도 발견된다. 최근의 연구는 다음과 같은 달만의 판단을 확증한다. 구약 성서와 유대 문헌에서 말쿠트가 하나님에게 적용될 때는 언제나 왕적 통치를 의미하며, 그것이 왕이 다스리는 영토를 의미한 것처럼 결코 그 나라를 의미하지 않는다는데 추호의 의심도 있을 수 없다.)Gustaf Dalman, The Words of Jesus (Edinburgh:T.and T.Clark,1909),p.94.

 


바실레이아의 이 추상적 의미에 대한 몇 개의 실례가 신약성서에서 발견된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오셨을 때 백성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곧 나타날 것으로 생각하였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바실레이아를 받기 위해서 먼 나라로 갔다가 돌아온 한 귀인의 비유를 말씀하셨다. 여기서 바실레이아는 영토나 백성이 아니며, 그 백성에 대하여 주어진 영토에서 왕으로 통치할 권세임이 명백하다.(눅 12:19) 이와 동일한 용법이 계시록 17:12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바실레이아라는 단어의 이 정의는 복음서에서하나님 나라 의 뜻을 위한 출발점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그러나 바실레이아가 나오는 모든 곳에 통치, 왕권, 주권 을 대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때로는 추상적인 의미를 초월하여 이 단어가 사용되기 때문이다. 정상적으로 왕적 권세는 그 백성을 포함하며 어떤 영역이나 영토로 표현된다. 바실레이아의 의미의 정상적인 확장은 세속적 영역과 종교적 영역에 있어 모두 신약성서에서 발견된다.)그 예로는 마4:8의 사탄의 시험 가운데 만국의 영광을 보여준 것과 막6:23의 헤롯이 살로메에게 약속한 것은 통치하고 있는 모든 지역과 그것에 포함된 모든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도 주기도문을 가르치실 때 하나님 나라를 이 세상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뜻에다 연결시키는 것을 보게 된다. )D.Guthrie, 그리스도, 그리스도의 사역 이중주,(서울:2판, 한국성서유니온,1988),p.307.


이와같은 연구에서 우리는나라 의 단어가 우선적으로는 주권을 뜻하는 것임을 알게 되었으며, 이 주권에서 의미가 확장되어 다스리는 영토를 포함한 모든 것을 가리키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주권자의 의도가나라 라는 단어에 가장 중요한 요소임을 알아야 한다.


B. 하나님 나라 와하늘 나라(천국)


이 두 어휘의 사용을 공관복음 어디에서나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 나라어휘가 마태복음에는 4번, 마가복음에는 16번, 누가복음에는 32번이 사용되고 있는 반면에 6 ) 윌리암 바클리, 예수의 사상과 생애 정용섭,(서울 :대한기독교서회,1979),p.68.하늘 나라어휘는 마태복음에 30번이 사용될 뿐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서는 전혀 사용되지 않고 있다. 7 ) Ibid., p.68. cf. Feine는 Theologic des Neuen Testaments.1936.p.73에서 32번 이라고 하며 G.E.Ladd는 신약신학 이창우,(서울:성광문화사,1986), p.118.에서 34번 이라고 한다.


마태복음 4장 17절에서는 예수님께서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선포하심으로 예수님의 공생애를 시작하셨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마가복음 1장 15절에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고 선포하심으로 공생애를 시작하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마태복음 10장 6절,7절에서는 예수님께서는 12제자에게 천국 에 대하여 가르치고 계시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누가복음 6장 20절에는 예수님께서 12제자에게 하나님 나라를 전하고 계시며, 마태복음 13장에는 하늘나라 의 비밀을 비유로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계시나, 누가복음 8장 11절과 마가복음 4장 11절에서는 마태복음과 동일한 비유를 하나님 나라 로 표현하고 있다. 8 ) G.E.Ladd, 하나님 나라에 관한 중요한 문제들 신성종,(서울: 성광문화사 1982), pp.118-119. 이와 같이 각 복음서에서 어휘가 다르게 사용되고 있는 까닭은 무엇인가? 복음서 저자들이 두 어휘에 대한 개념과 이해가 없었기 때문인가? 이와 같은 의문점을 가지고 이 두 어휘에 대한 의미의 차이점을 발견하고자 하는 많은 연구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 두 어휘를 사용하고 있는 저자들에게 있어서는 두 어휘의 개념에 대한 이해가 분명함을 우리는 알 수 있다. 그 증거로 마태복음에 사용된 하나님 나라 의 어휘가 하늘나라 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음을 보아서 알 수 있다. 마태복음 19장 23절,24절을 예로 살펴보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 에들어 가기가 어려우니라.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 나라 에 들어가는 것 보다 쉬우니라.

천국과 하나님 나라를 동일한 의미로 사용하고 있음을 우리는 발견한다. 천국과 하나님 나라 의 의미가 동일함에도 불구하고 왜 복음서 저자들은 편협 된 어휘로 복음서를 저술 하였

을까? 이와 같은 의문점은 복음서를 저술하게 된 동기와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고려할 때 쉽게 이해된다. 복음서는 기록되기 이전에 Kerygma를 내용으로 한 것을 이어서 저술되었다. 9  ) 이상훈, 신약개론 (부천: 서울신학대학출판부,1981),p.27.

그러므로 복음서를 읽거나 듣는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하기 위한 목적이 복음서에는 있다. 때문에 복음서가 읽혀지거나 보는 사람들에게 좀 더 친숙한 표현과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당연하리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복음서가 기록되기 이전에 흩어진 주님을 믿는 사람들이 각기 독특한 복음의 내용을 전하고 있었다는 사실 10 ) Ibid.도 다른 어휘를 사용하게 하는데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마태가 하나님 나라 의 어휘 보다는 하늘나라 라는 어휘를 사용한 이유는 그의 복음서가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저술되었으며 11 ) Ibid.,p.53.

, 복음서 저자들 중 가장 유대적인 인물이기 때문이다.

하늘 나라 의 표현은 히브리어의 말쿨 샤마임(malkuth shamaim) 을 문자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이름을 직접 사용하기를 회피하는 고정된 유대식 언어사용과 관련이 있다) Herman Ridderbos, 하나님 나라오광만,(서울: 엠마오,1989), p.55.

.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직접 사용하기를 회피하는 간단한 방법 중 하나로 하늘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 또한 마태가 하늘 나라어휘를 사용한 것은 마태 자신이 유대적인 사람이기에 하나님 나라대신에 습관적으로 하늘나라를 사용한 것이다) G.E.Ladd, 신약신학p.88.라고 말하기도 한다. 마가나 누가의 경우에 있어서는 그들의 복음서가 이방인들을 대상으로 저술된 것 ) 이상훈, Op.cit.,p.34.이기에 오히려 유대적인 표현을 사용하지 않고 직접적인하나님 나라어휘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 Herman Ridderbos,Op.cit.

. 심지어 누가가 그 나라 라고만 기록하였을 때도 이는 하나님 나라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 12:32 ;22:29

. 그러나 유대교적 표현으로는 이와같은 용법을 찾아볼 수 없다. 유대교에서는 단독적으로 사용되는 나라는 당시의 통치권을 가진 로마제국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Hans Conzelmann, 신약성서 신학 김철손 외2인,(서울: 한국신학연구소,1982),p.131.

.

이상에서 우리는 이 두 어휘의 차이점은 의미의 차이가 아니라 당시의 성서를 기록한 사람의 출신이나, 그 복음서를 누구에게 보낸 것인가? 가 어휘의 선택을 가져왔음을 보게 되었다.

 

II. 하나님 나라사상의 역사적 변천과정


세례 요한과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가장 먼저 선포하신 말씀은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이다.(마4:17 ;3:2)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선포 뒤에 하나님의 나라가 어떠한 곳인지에 대하여 본질이나 존재를 증명하는 설명이 전혀 나타나고 있지 않다)

Kettel,Op.cit.,p.56.

. 이는 당시의 유대인들이 하나님 나라사상에 매우 친숙하고 있었음을 우리에게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유대인들은 이와같은 선포에 대하여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반응을 나타내어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기 위하여 예루살렘을 비롯하여 요단강 사방에서 나아오고 있었다 ) Hermann Ridderbos,Op.cit.,p.38.

. 그러나 후에 예수님께서 점차적으로 비유를 통하여서 하나님 나라 의 본질과 특징을 설명하시는 장면이 등장한다. 이는 하나님 나라 의 사상이 유대인들에게는 친숙한 사상이지만 예수님께서 선포하시는 하나님 나라 와는 의미에 있어서 상이점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우리는 짐작할 수 있다. 그러면 하나님 나라 의 사상이 어떻게 변천하여 왔는지를 역사적인 흐름에 맞추어 살펴보기로 하자.


A. 구약시대의 하나님 나라


고대 근동의 종교의 일반적인 특징 가운데 하나는 자신들의 신을 자신들의 왕으로 인정하고 찬양하는 것이었다.)  G.V.픽슬레이, 하나님 나라 정호진,(서울: 한국신학연구소,1986),p.25.

그러므로 전쟁은 부족간의 전쟁인 동시에 부족 신의 세력 싸움으로 그들은 이해하였다. 이스라엘에 있어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대로 구약성서 가운데하나님 나라 라는 어휘를 발견할 수 없다. 그러나 신약성서에 나타나고 있는 하나님 나라 의 어휘가 내포하고 있는 사상의 뿌리는 구약성서에서 출발하며, 구약성서 전체의 흐름이다. 도래하는 하나님 나라 를 기다리는 사상은 구약성서의 신적 계시와 신앙의 대망 가운데 숨겨져 있다) Hermann Ridderbos,Op.cit.,p.39.

. 때문에 구약성서 가운데서 하나님의 종으로 부름을 받은 모든 선지자가 하나님 나라 에 대한 개념을 가지고 있었으며 또 이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포하고 있기에 구약성서는 하

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다스리는 것으로 가득 차 있다 22 ) J. Bright,하나님 나라 김철손,(서울:컨콜디아사,1987),p.251.

. 이와 같은 하나님 나라 의 사상의 출발점은 근원적으로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사실에 근거할 수 있으나 좀 더 구체적인 출발점은 히브리 종교사상에 있어서 실현 되었던 신정정치의 이념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다른 신들을 심판하시는 분이심과) 시 82:

동시에 지상의 왕국을 다스리시는 것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 시 47:

이와 같은 사상이 이스라엘 역사와 함께 여러 세기를 지나는 동안에 발전하게 되었다) 전경연외 4인, 신약성서신학(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77),p.76.

.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들이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백성이 되어야 한다는 여호와의 계약을 알리어 주었으며(출19:5), 사사 기드온은 여호와만이 유일하게 이스라엘을 지배하실 수 있다는 이유를 내세워 자신에게 주어지는 통치권을 거절 하였으며(삿8:23), 사무엘의 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다른 나라와 같이 강한 왕정정치를 요구한 이스라엘 백성이 사울을 왕으로 세웠을 때, 하나님께서는 친히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버려 이스라엘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였다 고 말씀하셨다.(삼상 8:7 ; 12:12)

이와 같이 구약성서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 하나님의 통치하심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나라나 하늘 나라 라는 어휘가 구약성서 가운데 나타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는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을 피한 것과 같이 하나님을 주어로 사용하는 문장도 피하였기 때문이다) H.Conzelmann,Op.cit.

. 둘째는 이스라엘이 신정왕국이라는 사상이 구약성서 전체에 깔려 있기에 굳이 이 어휘들을 사용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 H.Ridderbos,Op.cit.,p.40.

. 대신에 자주 사용하는 어휘는 말락야웨(Malak YHWH )인데 이는 하나님의 통치를 나타낸다. 이 통치는 이스라엘의 왕이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통치하심 (출 15:18, 민 23:21, 신 33:5, 사 43:15 )은 물론이요, 온 세상의 통치자이심을 의미하는 것이다. ( 왕하 19:15, 사 6:5, 렘 46:18, 시 29:10 ; 99:1- 4 )

이와 같은 사상은 이스라엘의 실제 역사 가운데서 많은 갈등을 가져오면서 변천하게 된다. 이스라엘에 아직 왕이 있지 아니하고 청동기 시대에 있을 때 인접 국가인 불레셋은 강한 왕권과 함께 철기 문명을 가지고 있어 강한 군사력을 앞장세워 이스라엘을 자주 침략하자, 이스라엘은 이에 대응하기 위하여 당시의 선지자인 사무엘에게 강한 중앙 집권 체제인 왕정을 요구하게 되었고 사무엘은 자연히 군사적 승리로 인하여 인기가 많은 사울을 왕으로 등극 시켰다. 그러나 사울의 왕권은 과도기적인 왕권 이었으며, 다음으로 이어지는 다윗 왕조에 가서야 비로서 이스라엘의 군주체제가 확립된다. 다윗은 자신의 왕조를 확고히 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통치 사상을 국가의 부흥과  연결을 지었다. 28 ) 삼하 6:2 ; 시132: 에서 하나님의 계약궤를 다윗성에 안치하여 이스라엘의 발전이 곧 하나님의 통치하셔서 부강하게 되었다는 건국 이념화 하였다. 이에 대한 것은 G.V.픽슬레이, 하나님 나라op.cit.,pp.37 -40에 기록되어 있다.

 

이와 같은 변천된 하나님 나라의 사상은 이스라엘이 찬란한 영광을 누릴 때에는 이와 같은 사상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나 바벨론이나 그 밖의 강대국에게 이스라엘이 속국이 되었을 때 그들의 왕이신 하나님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와 함께 하나님의 통치가 강대국의 압박 밑에서도 유효한 것인가? 라는 물음이 나오게 되었다. 이와 같은 갈등 가운데 예언자들을 통하여 미래의 하나님 나라소망이 싹텄다. 이스라엘의 통치자이신 하나님께서 미래에는 왕권을 가지고 오셔서 이스라엘을 압박하는 강대국을 물리치시고 자유를 주신다는 소망을 예언자들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었다. ( 사 24:23 ; 33:22 ; 52:7 , 습 3:15, 슥14:9 ) 미래에 오는 그 나라는 이 땅위의 역사 가운데 한 지역을 배경으로 하여 다윗의 후손에 의하여 성취될 것이다 라고 예언자들은 선포하였다) G.E.Ladd, 신약신학p.84

. 그러나 다윗의 후손들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는 것을 목도한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들의 역사 가운데 다시금 그 나라가 일어날 것이라는 소망이 점차로 사라지게 되었으며 하나님 나라의 소망이 묵시문학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B.묵시문학의 하나님 나라


구약시대에는 하나님 나라나 하늘나라 의 어휘가 없으나 신약시대에는 이 어휘들이 아무런 거부감이 없이 친밀하게 사용되고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것은 이 어휘들이 신약시대와 구약

시대의 중간기인 묵시문학 시기에 정립된 것이라고 우리는 생각할 수 있다

H .Ridderbos,Op.cit.,p.39.

.

포로기 이후에는 예언활동이 점차로 사라진다. 그 뒤를 이어서 묵시문학이 새롭게 등장한다. 이 묵시문학은 구약시대의 예언과 상이한 점이 많으나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왕이시다 라는 사상은 지속적으로 계승하고 있다) G.E.Ladd, 하나님 나라pp.98-99.

. 구약시대에서 이스라엘이 정치적, 종교적 상황이 어려움 가운데 있었지만 언젠가는 다윗의 후손 가운데 강한 힘을 소유한 절대적인 왕이 등장하여 현실에 처해 있는 정치적, 종교적 어려움들을 해결하여 하나님을 마음 놓고 섬길 수 있는 나라를 이룩한다고 하는 것이 유대인의 바람이며 ,또한 그와 같은 믿음을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살펴보았다. 그러나 현실의 역사 가운데 이와 같은 소망이 사라지자 예언자들의 외침은 호소력을 상실하게 되었고 백성들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 나라사상도 바뀌게 되었다. 즉 하나님 나라가 자신들의 민족 가운데 왕의 후손으로 태어나는 자를 통하여 임한다고 하는 생각에서 현실의 역사를 포기한 역사 밖에서 강권적으로 임하시는 하나님 나라 를 기대하게 되었던 것이다) G.E.Ladd, 묵시문학 . 기독교백과대사전 (서울: 성서교재간행사,1982).

. 그러므로 다윗의 왕국이 지상의 팔레스틴 지역에서 회복 되리라는 종래의 사상을 바꾸어 장차 앞으로 올 하나님 나라 는 초자연적인 특성을 가지는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직접적으로 행하시는 일이기에 현실의 역사적 발전이 아니라 갑자기 이 현실 가운데로 임하는 것이기에 현실 세계는 종말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라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생각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사상의 변화는 이전까지 이스라엘을 억압하는 강대국인 바벨론이나 이집트를 이 세대 속에서 이스라엘의 적이라고 간주하여 그들과 현실적인 투쟁을 행하던 것을 중단하게 하였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을 억압하는 강대국이 적이 아니라 강대국들을 주관하는 사단이 적이라고 판단하였고 이를 물리치는 것은 현실적인 투쟁이 아니라 영적인 투쟁에 의한 것이어야 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전경연 외4인,Op.cit.,p.77.

. 이와 같은 묵시문학에서의 하나님 나라사상의 변천은 현실에 대하여 매우 부정적인 생각을 갖게 하였다. 즉 현실은 악의 세력에 의하여 지배를 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묵시문학가들은 현실에 희망을 가질 수가 없으며 지상에서의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기를 포기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 이 내용은 외경인 마카비 1 서에 잘 나타난다.

.

이와 같은 사상이 묵시문학 전체에 일관되게 흐르며 기록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구약시대의 사상을 전통적으로 그대로 담아 이스라엘 백성의 회복과 다윗의 집이 다시금 일어날 것이라고 하는 작품도 있다) 솔로몬의 시편..또한 이 세상에 마지막 세대의 메시야가 통치한 후에 초역사적인 메시야가 나타나 새로운 천상의 세계가 된다고 하는 과도기적인 사상을 지닌 작품도 있다 ) 바룩의 묵시록, 제 4 에스드라서.

그러나 이와 같은 형태의 하나님 나라 가 나타나고 있으나 묵시문학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 의 특징은 어떤 인간의 노력도 결코 하나님  나라  의  도래와는  무관하다는  것이다  37 )  J.Bright,  The  kingdom  of  God (Tennessee: Abingdon, 1953),p.220.

. 하나님 나라는 오직 하나님의 계획 아래에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묵시문학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 의 사상이 절대적으로 옳은 것은 아니다. 그 이유는 묵시문학은 이스라엘 민족이 암울한 역사의 현실 속에 있을 때 미래에 대한 밝은 소망을 주기 위하여 기록된 것이기에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신하나님 나라와는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C.예수님 시대의 하나님 나라 .


예수님이 출생할 때의 팔레스틴 지역은 매우 혼란을 겪고 있었던 곳이었다. 당시의 강대국 로마는 급기야 팔레스틴까지 그 영역을 확장하였다. 그러나 오랜 역사와 전통을 고수하고 있던 팔레스틴 지역은 쉽게 헬라의 문화에 동화되지 아니하였다. 물론 외형적인 건축물 등은 헬라화 되어 갔지만 내면적이라고 할 수 있는 의식과 가정제도에서는 자신들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었다.

여기에 로마의 융화정책이 이를 가능하게 하는데 일익을 담당하였다.) 윌리스턴 워커, 세계기독교회사 강근환 외 3인,(서울: 대한기독교서회),p.11.

헬라문화가 사유재산 제도를 기본으로 하는 개인주의적인 문화인 반면에 팔레스틴 지역의 문화는 공납제 생활양식 (a tributary model of production)의 문화로 촌락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이와 같이 상이한 문화의 양식 가운데 이 지역을 통치하는 사람은 많은 갈등을 하여야 하였다. 무조건적으로 헬라문화를 이식하고자 하였던 통치자와 전통을 지키려는 유대인들 사이의 충돌이 빈번히 발생하는 사례가 있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기원전 2 세기 초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가 무리한 개혁을 단행하다가 마카베오 형제와 그의 후계자들이 단합하여 민란을 일으킨 것이다. 또한 때로는 팔레스틴 지역의 문화를 잘 이해하여 엄청난 부를 축적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지역의 유대인들로부터 합법성을 인정받는 경우도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헤로데이다. 그는 무력과 공포로 통치를 하여 부를 축적하는 한편, 큰 성전을 건축하였기에 유대인들로부터 어느 정도 합법성을 인정받았다.

이와같은 혼란의 시기에 유대인 안에서도 이 혼란에 대처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그 첫째가 엣센파 이다. 이들의 지대한 관심사는 성전 정화에 있었다. 이들은 부당한 사제직에 의하여 성전이 더럽혀졌다고 단정하고 도래 할 하나님 나라 를 위하여 민족적 생활과 성전 생활을 떠나 공동체 생활을 하며, 기도와 성서 연구에 치중하였다. 이와 같은 생활은 하나님 나라 에 들어가는 준비라고 이들은 생각 하였다. 다음은 사두개파 사람들로 이들은 로마와의 타협을 모색하여 위기를 극복하고자 하였다. 이들은 로마에서 파견하는 관리들의 행정적인 조처들을 인정하고 지지하였다. 이들이 기다리는 하나님 나라 는 현실 세상으로 오는 것이며, 현실의 이스라엘을 통한 도래였다. 다음은 바리새파 사람들로 모세의 율법을 지켜야한다고 백성들을 가르치면서 하나님 나라를 기대하고 있었다)

G.V.픽슬레이,Op.cit.,pp.92-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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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이 시대의 유대인들은 구약적 배경의 하나님 나라 의 사상을 모두 가지고 있었다) Norman Perrin, The kindom of God in the Teaching of Jeaus (London:S.C.M. Press,1985), p.113.

 

.묵시문학적 입장에서는 초자연적인 인물을 통하여 인간역사 가운데로 하나님 나라가 도래한다는 것이었다) G.E.Ladd, 예수와 하나님 나라pp.98-99.

. 즉, 현실의 역사를 종식 시키고 전혀 다른 차원의 역사가 시작된다고 보는 것이다. 또한 유대인에게는 다윗의 후손으로 오시는 메시야에 매우 큰 관심과 희망을 표시하는 것이 당연한 일로 여겨진다. 현실의 역사를 종식 시키는 것이 아니라 개선하여 현실 안에서 하나님 나라를 일으키기를 유대인들은 원하고 있었다 ) N.Perrin,Op.c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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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에는 이와 같은 두 개의 사상이 양립되어 있었으며 사상적인 정리가 되지 않은 혼란의 시기였다. 예수님에 대한 유대인들의 반응을 살펴보면 이 두 가지를 모두 기대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전자의 모습을 기대하는 것은 요 7:26-27에 ,후자의 모습을 기대하는 것은 마 2:5 ; 21:9 ; 22:4 ,요 7:40 - 42 에 기록되어 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들어오실 때의 환호성으로 다가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에 복이 있도다.(막 11: 10) 고 외친 사실과 유대인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였기에 조롱의 어구로 십자가 위의 죄패에 유대인의 왕 이라고 기록한 사실은 당시의 유대인들은 후자의 모습을 더 많이 기대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지금까지 하나님 나라 에 대한 사상의 변천을 역사적인 맥락에서 살펴보았다. 이를 종합하면하나님 나라 의 사상은 이스라엘이 왕정이 시작되기 이전인 신정정치 시대까지 거슬려 올라

간다. 이때는 하나님 나라라는 사상 보다는 하나님의 통치의 개념이 더욱 강조되었던 의미를 가지고 있었으며, 이 통치는 어느 한 국가만을 그 영역에 두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 모든 것을 영역으로 하는 것에 더 큰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통치가 왕정으로 넘어오면서 이 사상이 이스라엘 국가의 이념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렇게 바뀐 사상은 계속하여 전통적인 사상으로 후세에 전달되었고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국가적 강성함을 기대하게 하였다. 그러나 다윗 왕조의 몰락은 이와 같은 하나님 나라 사상에 일대의 변혁을 가져오게 하였다. 그것은 세상의 인간의 힘에 의하여 하나님 나라 가 성취되는 것이 아님을 새롭게 인식된 것이다. 묵시문학에서는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다른 방법의 하나님 나라 의 도래를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 는 국가적인 도래가 아니라, 개인적인 의로 말미암아 참여하는 것임을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구원도 국가적인 구원이 아니라 개인의 의에 의한 것임을 밝히 말하고 있다. 이 구원은 하나님의 통치가 우주적임을 밝히는 것이다. 묵시문학에서는 이방인의 구원이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다.)유대 묵시문학에 있어 이방인의 시판과 구원 , 이형의, 교회와 신학(서울:장로회신학대학 출판부,1989), pp.106-119.

이와 같은 사상의 변화는 이스라엘의 민족의 개념을 바꾸었다. 예수님 시대에는 정치적, 종교적, 경제적인 혼란기와 함께 하나님 나라에 대한 사상도 혼란을 거듭하고 있던 시기였다.

전통적인 국가의 이념으로서의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가 하면 묵시 문학에서 새롭게 등장한 개인적인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무리들이 함께 있었던 것이다.


III. 하나님 나라 에 대한 학자들의 견해.


하나님 나라 에 대한 학자들의 견해는 매우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 견해들을 종합하면 종말론적인 견해와 비종말론적인 견해로 나누어진다.

오리겐( Origen )과 어거스틴( Agustine )은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비종말론적인 해석을 내린 학자들이다. 특히 어거스틴은 하나님 나라 와 교회를 동일시하여 교회를 신의 도성( City

of God ) 으로 여겼으며, 천년왕국은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이미 세상에 들어왔으며 진행하고 있는 과정이므로 더 이상의 아무런 미래적 성취를  기대할 수 없다고 가르쳤다)  G.E.Ladd, 하나님 나라에 관한 중요한  문제들 신성종,p.23. 이와 같은 어거스틴의 주장은

개혁주의자들에게 이르기까지 아무런 비판 없이 수용 되었다.

이들에게 있어서의 하나님 나라 는 하나님의 통치 영역을 의미하는 것이었기에 구속받은 성도들의 각자의 마음속이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영역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는 미래에 일어날 사건이 아니라 현재적인 실제였으며 전적으로 종교적인 의미에 해당되는 것이다) H.Ridderbos,Op.c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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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이전까지는 이와같은 견해가 지지를 받았으나 근대에 오면서 지지를 상실하게 되었고 다시금 하나님 나라 에 대한 새로운 견해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근대의 비종말론적인 견해는 알버트 리츨( Albert Ritschle )로 부터 시작하고 있다. 리츨은하나님 나라 는 구약에서 온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창안한 사상으로 복음의 사랑의 법을 실행하기를 원하는 모든 사람들로 구성되는 윤리-종교적 공동체 ( Ethical- Religious )로 이해하고 있다. 이 공동체는 이미 세상 가운데 있으며 사람들의 상호관계 속에서 생산

되는 것으로 내재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 는 강한 힘에 의한 외부적인 도래가 아니며 이 세대의 종말도 아니며 이미 이 세상 가운데 온 것을 사람들의 사랑에 의하여 완성되는 것이다) H.Ridderbos,Op.cit.,p.13.

라고 리츨은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은 주장은 하르낙 ( Harnack )에게 영향을 주었다. 하르낙은 그의 저서 기독교는 무엇인가 ? ( What is christianity ) ' 에서하나님 나라 는 하나님께서 아버지가 되시며 모든 사람들이 형제가 되며 영혼의 무한한 가치를 인식 시키어 사랑의 윤리적 교훈을 인식하는 순수한 예언 신앙으로 이해 하여야 한다고 말하면서 하나님 나라 는 인류의 모든 사람이 함

께 알 수 있게 임하는 객관적인 사실이 아니며, 오히려 각 개인이 우선적으로 체험해야 하는 것이라고 이해 하였다)  G.E.Ladd, A Theology of New Testament (Grand Rapids : Eerdmands Publishing Co.,1974),p.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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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트만 ( Bultmann )은 성서 가운데서 역사적인 것이 아니라 초대 교회에 의하여 창조된 신화를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 하면서 그 중에 하나님 나라 도 포함 된다고 말한다. 그는 하나님 나라 에 대하여 현실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결단을 촉구하는 것이라고 이해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 나라 는 외부로부터 사람들의 역사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 살고 있는 사람이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 의 요청이라고 이해하였다.

그에게 있어서 하나님 나라 의 도래는 사람이 하나님 말씀을 듣는 가운데 요청이 올  때 결단함으로 실현된다는 것이다)

Carl.E.Breaten, 역사와  해석학채 위,(서울:대한기독교서회,1969) ,p.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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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반하여 종말론적인 견해를 주장하는 학자들도 나타났다. 기독교 역사의 처음 2 세기 동안 교부들 사이에서는 하나님 나라 는 전적으로 종말론적인 사건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이에 대하여 G.E.Ladd는 전형적인 종말론적 문구가 디다케 초대교회의 교부들이 성도들의 신앙교육을 위하여 기록한 교육도서. 에서 발견 되는데 그곳에 -주여, 당신의 교회를 기억하사 사면으로부터 당신을 위하여 예비하신 당신의 나라로 거룩함 가운데 불러 모으소서 - 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가운데 불러 모으소서의 기원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아후에 경험될 미래적 축복임을 나타내고 있다. 고 말한다 ) G.E.Ladd, 하나님 나라에 관한 중요한 문제들 신성종,p.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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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요하네스 바이스 (Johannes Weiss)는 리츨이 주장하는 하나님 나라 는 윤리-종교적 공동체 라는 사상을 반박 하면서 예수님이 말씀하신하나님 나라 는 예수님이 창안한 사상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는 유대의 묵시문학적 배경을 갖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 를 이해할 수 없다고 전제 하면서 하나님 나라는 이 세상의 종말을 뜻하기에 이는 전적으로 미래적인 사건이요, 종말론적이다 라고 말한다. 그는 이어서 아직까지 이 세상에 종말이 오지 않았으므로 아직 하나님의 나라는 현실 세계에 도래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H.Ridderbos,Op.cit.,p.14.

. 그는 1892년 하나님 나라 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 이라는 책자를 통하여....그 나라에 대한 예수의 견해는 유대인들의 계시 사상와 같으며, 유대인이 이해하고 있는 하나님 나라 와 예수님이 말한 하나님 나라둘 모두는 미래에 이루어질 것이다 ) G.E.Ladd,신약신학p.119. 고 주장하였다.

한편 종말론적 견해에 동조하는 학자 가운데 한 사람인 알버트 슈바이처 ( Albert Schweitzer )는 바이스가 연구한 예수님의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이해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역사적인 예수의 행동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 를 이해 하고자 하였다. 그는 예수의 행동을 살펴보면 예수에게 항상 종말론적인 미래를 바라보면서 살아온 행동이 있음을 알 수 있다고 말한다) H.Ridderbos,Op.c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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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서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 의 도래는 거대한 종말론적 파국의 발단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이와 같은 양쪽의 주장이 팽팽한 가운데 이를 종합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도드 ( C.H.Dodd )는 그의 저서왕국의 비유 에서하나님 나라 가 이미 세상에 도래하였다는 전제하에 예수님의 비유와 말씀을 해석하고 있다. 하나님 나라 는 사람들의 인정 여부와는 상관없이 현재적 사실로 선포되어 졌음을 보게 되며, 그 종말은 미래에서 현실로, 대망에서 경험의 영역으로 옮겨 왔다고 그는 주장한다) G.E.Ladd, 하나님 나라에 관한 중요한 문제들신성종,p.35.

. 그는 또한 하나님 나라 는 예수의 인격을 통하여 현실의 세계로 들어옴을 의미하는 것이며, 또한 앞으로의 세대 속으로도 예수의 인격을 통하여 들어갈 것이라는 실현된 종말론 ( Realized Eschatology )를 주장한다.

신성종, 신약신학(서울: 예수교문서선교회,1981),p. 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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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아스 ( J.Jeremias )는 예수의 사역 안에서 이미 하나님 나라 가 실현 되었다고 이해하였다. 그러나 그 실현은 완성된 실현이 아니다. 다시 오시는 예수님이 소유할 보좌와 권세의 하나님 나라 가 있다. 그러므로 현실 세계 안에 실현 된 하나님 나라 는 실현 과정에 있는 나라이다) G.E.Ladd, 신약신학p.81. ( Eschatology in process of Realigation ) . 이것이 그의 주장이다.

브루스 M 메츠거 ( Bruce M. Metzer )는....본질상 하나님 나라 는 하나님의 통치를 의미한다. 이 통치는 주권적인 하나님과 각 개인의 인격적인 관계를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 가 현재적이냐 ? 미래적이냐 ? 하는 질문은 하나님 나라에 대해 올바르게 인식하지 못한 이유에서 제기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 는 이 두 가지 모두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가르침을 통해 하나님의 주권을 믿고 인정하도록 촉구하시는 동시에 또한 사람의 강팍한 마음으로 인해 하나님의 주권이 보편적이고도 완전한 수용이 더 이상 방해받지 않게 될 새 시대를 소망하도록 인도하신 것은 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고 주장한다) Bruce M. Metzger,

신약성서개설  라채운,(서울: 대한기독교출판사,1986),p.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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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첼만 ( Hans Conzelmann )은 하나님 나라 가 현실세계에 임한 것으로 완성이 되고 끝났다고 한다면 이미 회개의 기회도 함께 사라진 것이 아닌가 ? 하는 질문을 제기하면서 하나님 나라는 임박 하였으나 표징들은 이미 현실세계 가운데 나타나고 있다

고 주장한다.

H.Conzelmann, 신약성서신학 김철손외2인,(서울:한국신학연구소,1982),p.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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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그는 신약성경에서의 하나님 나라 와 교회에서는 항상 추상적인 의미의 통치를 포함하고 있으며, 결코 왕국이나 백성들로 구체화 되지 않는다.... ) G.E.Ladd, 하나님 나라에 관한 중요한 문제들 p.35.고 주장하면서 미래의 통치가 현실에서도 일어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지금까지 하나님 나라 에 대한 학자들의 견해를 종합해 보면 비종말론적인 해석과 종말론적인 해석, 그리고 이 두 해석을 종합하는 해석으로 분류된다. 그런데 최근에 와서는 지금까지의 개인적인 구원과 미래가 하나님 나라 와 관련되어 있다는 주장을 부인하는 견해도 생겨났다. 이 견해는 현재의 사회질서를 이상적인 사회 질서로 만들기 위하여 노력하며 가난, 질병, 노사관계, 사회적 불평등, 인종관계 등 여러 가지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하나님 나라 를 건설한다는 것이다)

G.E.Ladd, The Gospel of the Kingdom (Michigan :W.B.Eerdmans,1981),p.16.

.그러나 이 견해는 현실의 입장과 문제만을 바라보았기에 예수님께서 의도하시는 하나님 나라 와는 거리가 있다.


IV.공관복음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


공관복음 안에서 나라() 의 의미가 하나님의 통치, 영역을 가리키고 있는 부분에 대하여 탐구한다는 것은 구약성서 전체가 하나님의 통치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과 같이 매우 방대하기에 어려움이 있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는 직접적으로 하나님 나라나 하늘나라( 천국 ) 로 어휘를 사용하고 있는 부분들을 뽑아서 그 의미와 본질, 특히 현실적인 하나님 나라와 미래적인 하나님 나라 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공관복음에 나타나는 하나님 나라 의 어휘는 거의 대부분이 예수님의 입을 통하여 사용되고 있음을 우리는 주시 하여야 한다. 마태복음에서는 세례요한의 선포 (3:2),제자들의 복음선포

(10:7) 그리고 제자들의 자리다툼의 사건을 설명함(18:1)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예수님의 입을 통하여 사용되고 있으며 마가복음은 아리마대 요셉의 인물됨을 묘사하는 장면 (15:43)을 제외하고는 모두 예수님의 입을 통하여 사용되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이와 같은 이유는 하나님 나라 의 본질이 제자들의 해석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심에 근거를 두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또한 예수님께서 직접 사용하신 이 어휘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비유로 가르치실 때, 또는 교훈과 선포 하실 때, 이적과 함께 복음을 전하심을 나타낼 때로 구분되어진다.


A. 하나님 나라 와 비유


예수님은 하나님의 통치는 숨어 있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하나님의 나라는 본질적으로 초월적인 것이다. 왜냐하며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인간의 영역을 넘어서기 때문이다. 숨어있는 하나님 나라 는 묵시문학에서 말하는 오는 세대 안에 숨어있기에 현실세계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현실 속에서 통치되고 있는 하나님의 역사가 숨어있는 것이다) 전경연 외 4인, Op.cit.,p.82.

. 예수님께서 비유라는 가르침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 의 본질과 성격, 그리고 도래의 메세지를 선포한 것은 매우 적절한 방법이라고 하겠다. 왜냐하면 이 비유는 예수님께서 스스로 창안하신 교수법은 아니라 히브리적 전승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히브리어의 마살(masal)이 이 단어에 해당한다. 로버트 슈타인(Robert H. Stain )에 의하면 이 단어는 구약에서 일반적으로 잠언, 풍자 또는 야유, 수수께끼,  알레고리 등의  의미로 사용된다고  한다.)

Robert H.Stein,The  Method of  Jesue Teachings( Philadelphia: Westminster Press,1978),pp.35-36.을 이한수, 비유와 해석학(서울: 한국로고스연구원,1989),p.11.에서 재인용.

이와 같이 전통을 가지고 있는 교수법을 사용함으로 듣는 사람들이 친근감을 가지고 수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 교수법은 당시의 랍비들도 교의의 해명이나 성구의 의미를 해석하기 위하여 사용하고 있었던 교수법이었다. 때문에 대중들에게 더욱 친숙하게 하나님 나라 의 본질을 가르칠 수 있었다. 비유의 교수법은 가장 평범하고 친밀한 배경을 통하여 하나의 진리에 대한 촉구를 하는 것이기에 바로 결단과 대답을 할 수 있게 하였다 ) G.Bornkamm, 나사렛 예수 강한 군사, (서울:대한기독교서회,1985),p.68.

.그러나 단지 이와 같은 이유 만에서 예수님의 비유가 사용되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예수님의 비유는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메세지를 예증하고 나타내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예수님의 사역과 인격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예수님의 메세지를 반대하려는 사람들에게는 메세지를 은폐시키려는 목적으로 사용되었다. 이는 단순히 은폐만이 아니라 죄 용서의 초대로부터 제외 되었기에 그 자체가 하나의 심판임을 뜻한다. 또한 예수님의 비유는 논쟁 가운데서 행하여 진 것으로 이는 상대방에게 도전을 하는 행위인 것이다.) 이한수, Op.cit.,pp.23-26.

이와 같은 예수님의 비유는 랍비들이 사용하였던 비유와는 커다란 차이점이 있다. 랍비들의 비유가 독립된 하나의 교훈을 주는 것이라고 한다면 예수님의 비유는 그것과 함께 그 자체가 메세지라는 것이다 ) 전경연 외 4인, Op.cit. ,p.82.

. 그러므로 예수님의 비유를 문자 뒤에 숨겨진 의미를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깊게 탐구하는 이른바 알레고리 ( Allegory )적 해석은 오히려 예수님의 비유의 참된 의미를 알게 하는데 방해가  되었다) C.H.Dodd, The Parables of the Kingdom ( New York :Charles Scribner's Sons, 1961),p.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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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하나님 나라어휘가 사용되고 있는 비유들을 하나씩 살펴보기로 하자.

 


1. 씨 뿌리는 비유 ( 마 13:11, 막 4:11, 눅 8:10 )

이 비유는 공관복음 모두에 기록되어 있는 비유이다. 또한 이 비유가 가지는 중요성은 이 비유를 깨닫지 못하면 능히 다른 비유도 깨달을 수 없는 가장 기초적인 비유이기 때문이다. 이 비유가 기록된 뒤에왜 비유로 말씀하십니까? 묻는 제자들에게 비유를 통하여 은밀히 숨어있는 하나님 나라 의 비밀을 알 수 있는 사람만 깨닫게 하기 위함이라고 공관복음 모두는 기록하고 있다. 이 비유의 핵심은 무엇인가 ? 대부분의 경우 이 비유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이 4가지의 밭이라고 말하고 있으나 예레미아스는이 비유의 핵심은 헛수고로 보이는 씨 뿌리는 자의 행위가 마지막에 ( 종말론적으로 )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게 되는 하나님의 충만을 암시하는  것으로 바꾸어져야 한다) J.Jeremias,The Parables of  Jesus( New York:Charles Scribners,1972),p.119.. 고 말하면서 이와 같은 하나님의 충만은 사람들의 이해를 넘어서서 다가오는 것으로 보고있다.

윌리암 레인 ( William Lain )도 예레미아스의 견해에 찬동을 표하면서 이 비유의 핵심은 4가지의 토양이 아니라 농부의 파종 행위에 있다) W.Lain,마가복음 상(上)이상훈,(서울:생명의 말씀사,1983),p.200.

."고 말한다. 이는 땅에 씨를 뿌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 나라 가 이 세상의 현장에 돌입하여 왔다는 것을 알려주며 또한 하나님의 충만으로 결실할 때가 있음을 지적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하나님 나라 는 사람의 힘에 의하여 이룩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관 하시어 이루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비유의 중심적 관심사는 하나님께서 행동 하신다는 것에 있다. 이 비유의 시작은....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뿌릴쌔.... ( 마 13:3-4 )이다. 씨를 뿌리는 자의 행위가 그 어떤 것에 지배를 받지 아니하고 자신의 행동을 행하고 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 나라 의 도래는 엄청난 큰 재난 후에 강압적으로 임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기에 이와같이 전하는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도래를 용납할 수 없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심이 바로 씨를 뿌리는 농부의 행위인 것이다) G.E.Ladd, 신약신학 p.134. 이 비유에서 나타나는 하나님 나라 의 본질은 하나님의 주권 하에서 시행 된다는 것이다.


2.겨자씨 비유( 마 13:31, 막 4:30, 눅 13:18 )와 누룩의 비유( 마 13:33, 눅 13:20 )

이 두 비유는 우리에게 같은 근본 진리를 전해주고 있다.

천국은 마치 ... 겨자씨 한 알 같으니 .... 천국은 마치 ... 누룩과 같으니라. 스테인 ( Stein )은 이 비유들에 대하여서 구적 개념으로 성장의 비유를 보아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헤겔의

철학적 사고로 보면 이 비유는 하나님 나라 의 진화론적 발달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 의 통치가 온전히 이루어질 때 까지 점진적으로 하나님의 통치가 확산 되어야 하는 것이 서구의 사상으로는 타당한 것 같으나 이 세계가 경험한 여러 가지 전쟁들과 불일치, 부조화 등은 하나님 나라 의 진화론적 발달과는 차이가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 비유는 오히려 동양적 사고에서 이해 하여야 한다) Robert H.Stein,An Introduction to the Parables of Jesus (Philadelphia:The Westerminster Press,1981),p.94.."고 말한다. 이 비유의 촛점은 처음과 나중의 대비이다. 미비한 출발에 비하여 결과는 엄청나다. 유대인들이 생각하고 있었던 큰 영광후의하나님 나라 의 도래와는 차이가 심하다. 미비하게 도래하여 세리와 창기, 가난한 자, 눈 먼 자에게 있는 하나님 나라를 유대인들은 볼 수 없었다.


3.밀과 가라지 비유.( 마 13:24 )

이 비유는 불현듯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 를 잘 설명하고 있다.....천국은 ...뿌린 사람과 같으니 ....한때 이 비유는 촛점을 벗어나 추수하는 밭이 세상인가 ? 아니면 교회인가 ? 하는 해석으로 많은 논쟁이 있었으나 대부분은 세상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Ibid.,pp.145-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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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비유는 두 가지의 씨앗과 성장이 하나의 밭에 있는 것과 후에는 이것이 분리될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당시의 사람들은 분리를 몹시 갈망하고 있었다. 정치적으로 로마의 멸망은 열심당원에게는 분리로 받아들여지기에 충분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의 천국 선포는 이와 같은 분리가 없이 하나님 나라 가 임하였다 하는 것이기에 유대인들은 예수를 비난하게 되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는 심판이 이미 이 세상 가운데 임하였다. 그 심판은 마지막 날에 확연한 분리로 나타날 것이다. 그러나 그 분리는 추수꾼들의 할 일이다. 하고 말씀을 하시는 것이었다. 하나님 나라 가 이 세상에 도래 하였으나 인간의 세계는 아직 와해되지 않았다. 그러나 종말론적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에 분리는 반드시 이루어 질 것이며 현재에 임한하나님 나라 는 미래에는 영광 가운데 밝히 드러날 것이다) G.E.Ladd, 신약신학p.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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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그물비유. ( 마 13:47 )

이 비유의 촛점은 그물 안에 있는 물고기의 종류와 후에 가려내는 행위에 촛점을 두어야 한다. 또 천국은 ...그물과 같으니 ....옛날의 주석가들은 이 그물을 교회로 여기고 하나님께서 교회 안에 선인과 악인을 함께 있게 하시지만 종말에 가서 가려내시는 것을 비유로 말씀하신 것으로 생각하였으나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실 당시에 교회라는 것이 아직 존재하지 않았기에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비유에서 이와 같은 의미를 가지고 말씀하셨다는 것은 적합하지가 않다. 이 비유는 앞서 살펴 본 밀과 가라지의 비유와 비슷하나 한 가지의 요소를 더 가지고 있다. 그것은 종말론적 심판이 있기까지는 이 사회 안에 악이 존재하고 있

다는 것이다) Ibid.,p.142. 이미 그물이 드리워졌으나 물고기들이 그물 안에 있음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 나라 도 예기치 못하게 임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5. 감추인 보화와 귀한 진주의 비유.( 마 13:44, 45 )

이 두 비유는 동일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비유이다. 이 비유들 가운데 나타나는 하나님 나라 의 본질은 그 어떤 것 보다 먼저 소유햐야 하는 귀중함을 알려주고 있다. 천국은 ...보화와

같으니 .... 천국은 ... 장사와 같으니 ....이 비유에 대하여 예레미아스는 기뻐서 행하는 헌신에 촛점이 있다)전경연, 예수의 비유 (서울: 대한기독교서회,1973),p.67.고 말한다. 그들이 모든 것을 팔아 밭과 진주를 살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기뻤기 때문이라고 이야기 한다. 한편, 미헬리스는 발견에 중요점을 두고 잇다. 예상치 못하던 때에 귀한 것이 제공 되었기에모든 것을 팔아 를 강조하고 있다고 말한다) Ibid.

도드 ( C.H.Dodd )는 이 비유를 해석하기를 예수는 자신의 사역 가운데서 하나님 나라 의 도래를 보았다. 이 근본적인 진리를 마음에 새긴다면, 천국은 최고의 가치가 있는 것이며, 또한 지나가는 소리처럼 들리는 나를 따르라 는 소리에 보화를 발견한 사람이나 진주 장사같이 귀를 기울인다면 당신은 즉각적으로 천국을 소유할 수 있다) C.H.Dodd, The Parables of the Kingdom p.87.."고 말한다. 이 비유에서는 하나님 나라 의 현재성이나 미래성이 명확히 드러나 있지 않다. 오히려  천국 을 소유하는 사람들이 행한 행동의 결과를 말하고 있는 비유이다.


6.스스로 자라나는 씨의 비유. ( 막 4:26 )

이 비유는 마가복음에만 기록되어 있다. 이 비유의 강조점을 찾는 것은 그리 쉽지않다.....하나님의 나라는 ...뿌림과 같으니 ....이 비유에 대한 해석으로C.H.Dodd는3가지로 나누어 말한다. 첫째는 하나님 나라 는 씨와 같이 내적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인격 전체가 발전으로 변형할 때 까지 지속 되는 것아요, 둘째는 하나님 나라 는 전체의 성장 과정으로 하나님이 공급해 주심을 가지고 하나님의 목적을 점차로 이루는 것이며, 마지막은하나님 나라 는 수확과 같이 종말론적인 사건이 있으며 절대적인 하나님의 개입이 필수요건이라고 그는 주장한다) Ibid., pp.14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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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와 같은 해석은 그릇된 것이다. 왜냐하면 이 비유의 강조점은 뿌리는 행위에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미 이 세상 가운데하나님 나라 가 도래하였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는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는 것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행위로 세상에 도래한 것과 같이 마찬가지로 종말론적인하나님 나라 도 사람들의 선택 여부에 관계없이 도래할 것이다.


7.자비롭지 못한 신하의 비유. ( 마 18:23 )

이 비유는 다른 비유들 보다 쉽게 하나님 나라 의 성격을 찾을 수 있게 한다.....천국은...임금과 같으니 ....이 비유를 리네만 ( Eta Linnemann )은 정의의 명령 안에 자비가 포함되어 있는  자비의 법령으로  해석하고 있다  78 )  Eta Linnemann,  Parables of  Jesus (London: Society for Promoting Christian Knowledge,1966),p.72.. 그에게는 이제 자비가 하나의 법령이 된 이상 그 누구도 예외가 될 수는 없게 되었다. 법령에서 벗어나는 것은 용서를 받을 수 없다. 자비의 법령을 어긴 사람은 책임을 회피할 수도 없다. 그 사람의 태만을 지적 받을 수밖에 없다. 이 비유에 나타난 신하는 누구에게나 지탄을 받는다. 이 비유에서의 핵심은 하나님께 자비와 은혜를 받아 용서를 받은 사람은 이웃을 용서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8.포도원 농부의 비유 ( 마 20:1 )

왜 포도원 주인은 하루에 몇 차례씩 사람을 구하러 갔는가? 에 촛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포도원에 시급한 일이 발생하였다고 이야기를 하나 이 비유의 핵심은 끝 부분에 명확하게 나타나 있다. 천국은 마치 ...집 주인과 같으니 ....스테인에게 있어서 이 비유는 예수님 당시의 상황과 분리 시켜서 해석하는 것은 타당치 않는 것으로 보고 있다. 스테인은 주인의 처사에 대하여 불평을 하고 있는 처음 포도원에 온 농부들과 주인과의 관계가 비유의 촛점으로 여기며, 여기서 불평하는 농부들을 유대인으로 보아 가난한 자들에게 그리고 버림받은 자들에게 은혜를 베풀고자 희생당하시는 예수님을 반대하고 있는 모습을 비유로 말하는 것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Robert H. Stein,Op.cit.,p.127.. 또 예레미아스는 예수님의 이 비유는 자신들의 지식이나 권위를 앞세워 사랑이 없으며 무자비하게 이웃을 비난하고 있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그들의 상태를 지적해 주시려는 예수님의 의도에서 출발한 것으로 보고 있다. ) Ibid.,p.128.

끝 부분의 선언인 나중 된 자가 처음 되고 처음 된 자가 나중 된다. 는 바로 예수님 시대에 살고 있었던 자들의 상태를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하나님 나라 가 버림받았다고 생각되는 사람

들에게 도래하고 있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9.혼인잔치의 비유.( 마 22:2, 눅 14:15 )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동시에 기록된 이 비유는 서로 다른 상이점을 또한 내포하고 있다. 천국은 마치 ...어떤 임금과 같으니 .... ....하나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많은 사람을 청하였더니 ....이 상이점에 대하여 C.H.Dodd는 복음서 저자들이 서로 다른 전승을 추구하기에 같은 이야기 가운데서도 다른점이 나타나며 다소의 사상이 차이가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비유의 공통적인 것은 초대받은 손님들이 잔치에서 제외되고 그 대신 하층민들이 어떻게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는지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C.H.Dodd,The Parables of the Kingdom p.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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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비유는하나님 나라 의 잔치는 앞으로 도래할 좋은 시대의 행복에 대한 전통적인 상징으로 여기게 하였다. 마태와 누가가 서로 다른 전승을 따르고 있다는 증거는 첫째로 잔치를 배설한 사람의 신분이 서로 다르며, 둘째로 그 잔치의 성격이 어떠한 것인가? 에서 차이를 보이며 마지막으로 사람을 불러 모으기 위하여 사람들을 내어 보내는데 보냄을 받은 사람들이 간 곳에서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마태는 그의 복음서가 유대인이 대상이었기에 하나님 나라 는 하나님이 왕이 되셔서 택하신 민족들을 불러 모으시는 잔치 자리라고 여기는 유대인들의 관점에서 기록하였고, 누가는 전적으로 이방인을 위하여 성서를 기록 하였기에 잔치 자리에 참여할 사람을 불러 모으기 위해 멀리 길과 산울가 까지 사람을 보냈다고 하는 전승을 따르고 있다.


10.열 처녀의 비유. ( 마 25:1 )

이 비유의 촛점은 미련한 다섯 처녀가 과연 구원을 받았을까 ? 하는 것이 아니다.....천국은 마치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이 비유에 대하여 Dodd는 마태는 이야기의 교훈으로써 친근한 격언을 후반부에 첨가하고 있다.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 마태에 있어서 이 비유는 인자의 장차 나타나심에 대하여 준비를 하도록 경고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므로 이것이 그에게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인 것이다) Ibid.,p.136.

."

이 비유에서는 준비하지 못한 미련함과 준비하는 지혜로움을 대조 시키면서 이것이 결국 혼인잔치에 참여함과 참여치 못함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 비유에서의 준비는 예수님의 사역의 실제 과정에서 성장을 위한 준비를 지적한다. 하나님 나라 는 미련함과 지혜로움이 밝히 드러나는 순간이 있음을 알려주고자 하는 것이 이 비유의 핵심이다. 이 비유는 그렇기에 종말론적인하나님 나라 를 강조하고 있다.


11.달란트의 비유. ( 마 25:14, 눅 19:11 )

이 비유의 장면 가운데 반전이 되는 부분이 나타난다. 자신의 사려 깊음과 올바른 판단을 대견하게 생각하던 종의 자신만만함이 주인으로부터 아주 심한 책망과 함께 벌을 받아야만 하는 좌절을 경험하게 된다. 이 비유는 사람들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과의 차이가 있음을 지적하는 동시에, 평상시에 자신에 대하여 자만심을 가진 자들이 결국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소유를 맡긴 주인이 돌아와서 반드시 회계할 날이 있다. 주인이 돌아오는 것은 소유를 맡은 종들의 의사와는 상관없는 종말론적인 사건이다. 그러나 주인의 소유가 현실 가운데 맡겨진 것을 함께 알려주고 있는 비유이기도 하다.


12.무화과 나무의 비유.( 눅 21:31 )

마지막 날에 어떠한 일들이 이 세상 가운데 일어날 것인가 를 말씀하신 후에 이 비유를 말씀하고 있다. 여기서는하나님 나라 가 결코 전혀 인식하지 못하게 갑자기 임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대 속의 일과 연관되어 징조가 있음을 가르쳐 주고 있다. 혹자는 무화과 나무가 이스라엘의 국화(國花)라 하여 이스라엘의 국가적 역사와 이 비유를 연관하여 종말을 예견하나, 이는 비유의 특징인 가장 친밀하고 일상적인 것을 가지고 하나의 진리를 밝히고 있다는 것을 망각 하였기에 이와 같은 오류에 빠진 것이라고 여겨진다. 이 비유를 통해서 인간의 역사의 진행은 결코 원하는 대로 되어지지 않는 것을 보여 주면서 종말론적으로 임하는  하나님 나라 가 있음을 또한 가르쳐 주고 있다.


13.양과 염소의 비유.( 마 25:32)

이 말씀은 마태복음 25장의 천국 비유 가운데 마지막으로 나오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 의 현재성이 곧 미래성과 연결되는 것을 보여주시기를 원하는 것이다. 양과 염소는 그 당시의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선한 짐승과 악한 짐승의 대표적 동물이었다. 이 비유에서 순전하다고 생각한 양이 누구인가? 를 예수님께서는 밝히 보여 주고 있다. 양은 당시의 유대인들의 생각과 같이 하나님으로부터 선택을 받은 이스라엘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또한 모세 이후로 당시까지 전해오는 전통과 규례를 잘 지키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었다. 단순하게 이웃에게 선을 행하는 자들이

하나님 나라에서 양으로 택함을 입는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유대인들이 기다리던 메시야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그 메시야는 유대인들이 기대한 것과 같이 영광과 권세 가운데 임한 것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이 전혀 기대하지 않은 방법으로 이 세상에 임하였음을 보여 주고 있다. 이와 같은 비유 속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는 현실과 미래가 관련이 있음과 동시에 이미 이 땅위에 도래하였음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다시 온전한 하나님 나라 의 도래를 포함하고 있다.

지금까지 하나님 나라 의 어휘가 사용되고 있는 비유를 살펴보았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마태복음 13장은 하나님 나라 비유로 이루어져 있는데, 항상 하나님 나라를 사람이나 물건에 비유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다른 복음서에서는 행위에 더 많은 비중을 두고 비유를 전개한다는 특이성을 발견하게 된다.

그 이유는 마태는 예수님의 초림이 이미 하나님 나라의 도래로 여겼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곧 하나님 나라 의 표징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보게 된 이유는 유대인에게 있어서 다윗의 후손으로 오시는 메시야는 하나님의 통치권을 가지고 오시는데 그것은 곧 하나님 나라 가 도래함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가나 누가는 예수님의 선포 행위로 하나님 나라 가 도래 하였다고 보고 있다. 예수님의 선포 행위는 곧 이방인들을 하나님의 통치로의 초대이기에 초대에 응하든지 응하지 않던지는 불문에 붙이고 초대된 상태를 하나님 나라 의 도래로 보기에 행위에 관심을 두고 비유를 기록하고 있다.

비유를 통해서 본 공관복음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 는 그 시대성을 무시하지 않으면서도 하나님 나라 가 현실 속에 이미 들어와 있으며, 또한 종말론적 사건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는 것을 보여준다. 현실 속에 도래한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의 노력에 의하여 인간이 추구하는 유토피아 ( Utopia )적인 확장으로 발전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악의 세력과 함께 있으며, 때로는 악의 세력이 득세하는 현상이 현실 세계에 나타나기 까지 한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은 현실 세계에 도래한 하나님 나라를 보지 못하며 종말론적으로 임하는 하나님 나라를 기대하지 않게 되는

것이 쉽기에 예수님께서는 비유로 하나님 나라 의 본질과 특성 그리고 현재성과 미래성 모두를 말씀하셨다.


B. 하나님 나라 와 교훈.


예수님의 가르치심은 당시에 가르치는 일을 직업으로 하고 있던 서기관들의 가르침과는 대조를 이루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 그것은 예수님의 가르침 가운데는 권위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하나님 나라에로의 초청이었으며 선포는 종말론적인 메시지이지 묵시문학적인 것이 아니었기에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전경연 외 4인, Op.cit.,p.80.

.예수님의 모든 설교의 주제는 하나님 나라였다. 여기서는 공관복음 가운데하나님 나라 의 어휘가 직접 사용되고 있는 교훈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 의 성격과 현실성, 미래성을 살펴보고자 한다.


1. 예수의 선포 ( 마 4:1아7, 막 1:15, 눅 4:43 ), 세례요한의 선포(마 3:2 ),파송된 자들의 선포 ( 마 10:7 )와 하나님 나라 .

예수님의 교훈을 요약하면 바로 예수님의 선포라고 말할 수 있겠다. 예수님의 선포나 세례요한의 선포가 그 내용에서는 일치하는 것 같이 보이나 실제적으로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 가 가까이 온것 만이 아니라 이미 출현하고 있다고 친히 말씀하고 있다. 그러나 위의 구절에서 나타난 하나님 나라 는 미래적으로 임할 것을 의미하는 한편 회개를 촉구하고 있는데, 회개는 객관적인하나님 나라 의 도래가 주관적이며 개인적인하나님 나라 의 도래를 경험하는 길임을 알려 주고 있다.


2.산상훈과 하나님 나라 .( 마 5:-7: )

이 부분에서하나님 나라어휘가 집중적으로 많이 사용되고 있다. 심령이 가난한 자 ( 마 5:3, 눅 6:20 ),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 ( 마 5:10 ), 지극히 작은 계명이라도 행하며 가르치는 자 ( 마5:19 ), 바리새인의 의 보다 더 의로운 자 ( 마5:20 ),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 ( 마 7:21 )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며 큰 자라고 일컫음을 받을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이 여러  지로 차이점을 가지고 있지만 이 부분의 공통점은  나님 나라 는 현실 세계의 만족을 위한 것이 아니라 미래에 오는 것을 대망하며 준비함으로 성취하는 것임을 알려주고 있다. 이와  은 교훈은  나님 나라 의 본질과 특성이 무엇인가를 밝히 보여주고 있다.

 

3.어린 아이와 하나님 나라 . ( 마 19:14, 막 10:14, 눅18:16 )

이 교훈은 뒤에 이어서 나오는 교훈인 부자와 하나님 나라( 마 19:23, 막 10:23, 눅 18:18 )와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다.

공관복음 모두가 이 두 교훈을 대조시키고 있는 것은 참으로 흥미롭다. 서로 다른 전승을 따르며, 서로의 복음서를 읽는 대상이 다르며, 서로의 상황이 다른 공관복음이 왜 이 부분에서는 일치를 이루고 있을까? 하나님 나라 의 본질을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은 아닐까? 부자와 하나님 나라와의 관계에서 예수님은 부자는 재물이 많기에 하나님 나라 에 들어가기가 어렵다고 말씀하고 계신다.

물질이 많으면 왜 하나님 나라 에 들어가기가 어려운가? 물질이 많은 것이 하나님 나라 에 들어가기가 어려운 조건이 된다면 하나님 나라 에 들어가기를 원하는 모든 사람들은 가난하게 살아야 하는 것인가? 이와 같은 논리라면 이 현실의 세계는 발전과 풍요로움을 향하여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가난하게 살아 배고픔의 상태로 가는 것이 하나님 나라 에 들어가는 길이 되지 않겠는가? 이와 같은 물음에 대한 답은 위에 있는 어린 아이와 하나님 나라 의 교훈에서 해결된다. 공관복음서 저자들이 이 두 개의 교훈을 대조하여 어린 아이와 부자를 서로 대조하고 있다. 여기서 부자와 어린 아이는 외견상의 부자와 어린아이가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어린 아이와 대조하기에 적절한 단어는 어른이며 부자와 대조하기에 적절한 단어는 거지이기 때문이다. 부자와 어린 아이를 대조하는 것은 사람의 내면세계를 대조하여 하나님 나라 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의 내면적 특성에 대하여 교훈하고자 하는 것이 기록된 저자의 의도이다.

그리고 이것은 곧 예수님께서 교훈하시고자 하시는 것으로 모든 것을 포기하여 자신을 낮추는 겸손함이 없이는 그 도래를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 나라로 오신 예수님을 의지하여야만 갈 수 있는 것이다. 이 교훈은 또한 하나님 나라 가 미래에 도래할 것을 가르치고 있다) H.Ridderbos,Op.cit.,p.128.

  이와 함께 하나님 나라는 영접하는 자만이 갈 수 있다고 하는 교훈에서 영접하는 행위는

바로현실 세계 가운데에서 행하여야 하는 현재적인 행동인 것이다. 이 행위가 하나님 나라 에 들어가는 것이며 앞으로 종말론적으로 임하는 하나님 나라에도 들어갈 수 있는 길이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예수님의 교훈은 바로 메시지로 그 메시지 가운데 이미 하나님 나라 는 도래한 것이다.


4.세례요한과 하나님 나라 . ( 마 11:11, 눅 7:28 )

이 교훈을 통하여 예수님은 이미하나님 나라 가 현실 세계에 왔음을 말씀하고 계신다. 이 교훈은 세례요한이 감옥에서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님께 당신이 오리라고 예언된 메시야 입니까? 질문을 하였을 때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행한 일들 가운데 이미 메시야의 통치가 일어나고 있으며 예언자들의 예언이 성취되고 있음을 말한 후에 세례요한과 하나님 나라의 사람과 비교하여 교훈 하신다. 하나님 나라 는 객관적으로 이미 세상 가운데 들어왔다. 이제부터는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 에 들어가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육신의 여자가 낳은 가장 큰 사람인 세례 요한 보다도 큰 자가 된다.


5.바리새인의 물음과 하나님 나라 . ( 눅 17:20 )

하나님 나라 가 어디 있습니까? 하고 묻는 바리새인에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 는 볼 수 있게 오는 것이 아니며 또한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 지역을 가리킬 수도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 는 너희의 마음 속에 있기 때문 이라고 답변하고 계신다. 바리새인은 구약적 배경과 묵시문학적 배경 아래서 하나님 나라를 묻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 가 현실 세계 가운데 한 지역을 택하여 건설한 후에 점차로 그 영역을 넓혀가는 것으로 이해하였고 바로 그 한 지역이 자신들의 영토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교훈은 장소적인하나님 나라 가 아니며, 가시적인 건설이 하나님 나라 가 아니며, 오히려 보이지는 않지만 하나님의 주권이 나타나는 것이 곧 하나님 나라라는 사실을 가르쳐 주고 있다. 하나님의 통치는 왕권을 의미하는데 가 공간적인 영역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 이 교훈을 통하여 분명히 나타난다. 그 통치는 사람의 마음 속을 주관하기에 사람들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 는 이 세대에 임한다. 예수님은 이미 이와 같은 왕권의 통치가 세상 사람들 속에서 이루어졌음을 선언하신다.


6.세상의 일과하나님 나라 . ( 눅 9:60 - 62 )

예수님을 따르기를 원하는 사람이 아버지의 장사(葬事)를 지낸 후에 따르기를 원하였으나 예수님은 단호히 이를 거절하며,  하나님 나라 를 전파하라고 말씀하신다. 또한 가족과의 작별을 요청하는 사람에게는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 에 합당하지 않다 말씀하신다. 이 교훈은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 의 절대성을 가르쳐 주고 있다.하나님 나라 는 세상의 여러가지 일과 함께 그 중의 하나로 취급 되어서는 안 된다. 그 이유는 하나님 나라 는 생명이기 때문이다. 세상에 생명보다 귀한 것은 없다. 그러기에 생명을 소유하는 일과 이 생명을 전하는 일은 세상의 그 어떤 일 보다 귀중하고 긴박한 일임을 예수님

께서 우리에게 가르치고 계신다.


7.유월절과 하나님 나라 . ( 막 14:23, 눅 22:16,18 )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 가 임하기 까지 포도나무 열매를 마시지 않으며, 유월절 식사를 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 나라 가 이미 이 세상 속에 온전히 이루어졌다면 예수님의 이 말씀은 그릇된 것이다. 또한 하나님 나라 가 단지 개인에 의한 주관적 성취의 성격만을 가지고 있다면 예수님은 이와 같은 선언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제자나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에게  너희 안에 하나님 나라 가 이루어질 때까지 유월절 식사를 하지 말아라 고 말씀하셔야 한다. 그러기에 유월절 식사 자리에서 선언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하나님 나라 의 영역이 종말론적으로 객관적으로 임하는 성격이 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지금까지 하나님 나라 의 어휘가 예수님의 교훈과 함께 사용된 부분들을 살펴보았다. 여기에서 나타난하나님 나라 의 성격은 비유에서 나타난 것과 동일하게 현재성과 미래성 모두를

가지고 있으며 또한 하나님 나라 는 그 어느 것 보다 중요한 것이라는 사실과 예수님의 인격을 통해서 이 세상에 임한 것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이와 같이 임한하나님 나라 는 구약시대의 예언의 성취이며, 이 하나님 나라 는 사람들을 통하여 이 세대에 지속적으로 확장되는 것이다.

 


C.하나님 나라 와 이적.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선포하신 말씀과 비유를 통하여 이미하나님 나라 가 이 세대 가운데 임하였다는 것을 우리는 앞에서 살펴보았다. 이제 이와 같은 비유와 말씀들이 사실로 증명되는 것이 이적이다.

하나님 나라 의 어휘가 이적과 함께 사용되고 있는 부분은 유일하게 한 곳뿐이다. ( 마 12:28, 눅 11:20 ;이 둘은 하나의 동일한 사건이다. ) 이 부분을 통하여 분명히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이적이 하나님 나라 의 이적이며 하나님의 통치하심이라고 인식하고 계셨다) R.H.Fuller,Interpreting the Miracles(London:S.C.M Press),pp.4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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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이적은 여러 가지가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다. 마귀를 쫓아내며, 문둥병자를 깨끗케하며, 폭풍과 성난 물결을 잔잔케 하셨으며, 바다 위를 걸으셨으며,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명을 먹이시는 등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이적을 행하신 예수님이시다. 이와 같은 이적은 과학적 사고양식을 가진 현대인에게는 과연 가능한가? 라는 질문을 유발하고 있지만 당시의 사람들이나 초대 교회의 교임들에게는 전혀 문제 될 일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두 이적의 가능성을 믿었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12장에서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낸다는 사실에 대하여 바리새인들이 거짓이라고 몰아 부친 것이 아니라 누구의 권능으로 이와 같은 일을 행하느냐 ? 가 관심의 촛점이었으며 예수님께서도 바리새인들이 귀신을 쫓아내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계셨다. ( 마 12:27 )

이적은 자연과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간섭이요, 하나님의 주권 행사로 초대 교회는 받아들이고 있었으며, 또한 예수님의 이적은 예수님이 곧 메시야이심을 나타내는 것으로 여겼다)  R.H.풀러, 이적-성서적 이해 진연섭,(서울: 대한기독교서회,1983),p.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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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은 실제로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낸 사건과 연결하여 바리새인들과 논쟁을 벌이고 있는 반면에, 마가복음 3장 20절 부터 30절까지에서 단순히 예루살렘에서 파견된 바리새인들과의 논쟁으로 기록하고 있다. Otto Betz는 예수님의 귀신축출 현상은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징조( proxy )로서의 행동이다) Otto Betz,What do We know about Jesus? (London: S.C.M.Press,1969),p.61. ."고 이해 하였다. 한편, 이적 행위가 복음의 선포행위와 병행으로 나타나고 있는 곳은 세례요한이 사람들을 보내 예수님이 오실 메시야인가? 예수님께 질문을 하였을 때와 예수님이 제자들을 파송하실 때, 제자들이 해야할 일 가운데하나님 나라 의 복음을 전파하는 것과 이적을 함께 행하라고 명하실 때이다. 이와 같은 것은 구약의 예언이 성취됨을 증거하는 것이라고 구약성서 사 35:5 -6; 61: 1 를 인용하는 장면까지도 나타난다. 예수님은 당시의 사람들이 예수님이 행하시는 이적에 대하여 단순한 두려움이나 놀라움을 느끼는 것을 기대하지 않으신다. 예수님은 오히려 이와 같은 감정적 반응 보다는 이적을 통해 하나님 나라 가 이 세대 안에 임하는 것을 보아서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 것을 바라고 계셨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적은 비유나 교훈과 마찬가지로 하나님 나라에의 초대이다. 예수님의 이적을 경험한 사람은 비유나 교훈을 듣고 즉각적인 결단을 내린 것과 같이 결단을 하여야 한다. 이와 같은 예수님의 행적은 바로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선포하신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와 동일한 메시지이다. 이는 예수님께서 많은 이적을 행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회개하지 않은 도성을 향하여 책망하시는 부분에서도 잘 알 수 있다.

화가 있을찐저 고라신아, 화가 있을찐저 벳새다야  너희에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 였더면 저희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두로 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 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 까지 낮아 지리라. 네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 더라면 그 성이 오늘날까지 있었으리라. 내가 너희 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마 11:21참고 눅10:13 )

그런데 우리는 때때로 예수님의 이적 뒤에 숨어있는 비밀을 보게 된다. 그것은 이적을 행하시고 난 뒤에 누가 이적을 베풀었는지 말하는 것을 금하시거나 예수님을 따르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돌려 보내시는 것에서 나타난다. 왜 어느 사람에게는 가서 이적이 발생한 것을 보이며 증거 하라고 하는가 하면, 한편으로는 어떤 사람에게는 증거 하지 말라고 말씀을 하시는가? 예수님의 이적이 하나님 나라로의 초대라면 모든 사람들을 따르라고 하며, 또한 가서 이적이 일어난 것을 증거하라고 해야 맞지 않는가? 이와같은 것에 의문을 가진 브레데 ( William Wrede )는 메시야의 비밀 W.Wrede, The Messianic Secret J.C.Geig역, (Greenwood :The Attic Press,1971),pp.9-150. 이라고 명명한다. 이 메시야 비밀을 초대교회나 마가의 창작으로 브레데는 규정을 하고 있으나 마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이 처음부터 왕의 통치를 가지고 행동하시기에 그 규정은 그릇된 것이다. 그러면 예수님이 행하신 이중적인 행동은 어떻게 이해될 수 있을까? 예수님이 악령들에 대하여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하는 것을 금지 시킨 것은 악령들의 말이 인격적인 고백이 아니라는 것과 예수님이 자신의 실체를 자신의 사역을 통해서 각 사람과의 인격적 만남을 통해 밝혀져야 하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W.Lane, Op.cit.,p.171.

 

.또한 치유의 이적을 경험한 사람들에게 증거 하는 것을 금지 시킨 것은 그들이 아직 이적에 포함되어 있는 메세지를 깨닫지 못하고 이적 자체에 대한 경이로움만 보고 매료되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예수님의 인격을 볼 수 없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전하는 것을 금지시켰다) R.Mcl Wilson,Mark in Peake's Community on the Bible(London: Nelson,1962),p.801.

. 또한 아직까지 하나님 나라를 자신들의 영토에서 화려한 영광과 함께 도래할 것을 기대하고 있는 당시의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이적 메세지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기에 침묵을 명하신 것이다.

 


지금까지 하나님 나라 의 어휘가 이적과 함께 사용된 부분을 살펴보면서 이적이 가지는 의미를 생각해 보았다. 이적은 하나님의 통치가 이 땅위에 실현되고 있음을 증명하는 표시인 동시에 사람들로 하여금 이적을 경험하여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초대의 메세지이다. 초대의 메세지가 전해 졌다는 것은 이미 객관적인하나님 나라 가 도래하였음을 뜻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모든 그의 행위를 통하여 사람들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추구하셨다. 이 만남은 곧 하나님 나라 의 주관적인 도래를 의미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이적을 통해서도 인격적인 만남이 있어야 한다. 예수님이 원하신 것이 이것이기에 이적은 우리를 예수님과의 인

격적 만남으로 인도한다.

 


   

    결      론

   

    공관복음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를 살펴보면서 이 세상이 하나님의 주권에 의하여 창조 되었으며 운행 된다고 하는 사상이  하나님 나라 와 연관된 것임을 우리는 알았다.                                 --

 


    현대를 살고 있는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 의 의미를 제각기 내리고 있지만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하나님 나라 의 의미를 바르게 분별하는 일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리고 그 결정은 성서의 어느 한 부분을 편협하게 택하기 보다는 전반적인 흐름 가운데서 이해하며 결정을 내리는 것이 타당하다.  하나님 나라 의 어휘가 포함하고 있는 의미를 우리는 다시금 생각을 하여야 한다. 그 어휘 속에는 유대인들의 신앙적 고백이 담겨져 있는 것이다. 세속의 역사가 변천하기에 처음 주어졌던 의미가 많이 현실적인 요소로 차용되어 본질이 퇴색된 의미를 다시 발견하여 현실 가운데서 하나님의 통치를 경험하며 고백하면서 살아가는 일들이 있어야 한다.

    비유와  하나님 나라와의 관계에서는 항상 주의를 해야 한다. 비유는  하나님 나라 의 본질적인 특성에 대하여 다양한 설명과 암시를 제공하고 있지 않다. 아주 간단하고 핵심적인  하나님 나라 의 특징을 전해주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어느 하나의 비유로  하나님 나라 의 전체 특성과 본질을 파악할 수는 없다. 여러 개의 비유를 통해서 전체적인  하나님 나라 의 특성과 본질을 파악해야 한다.

     하나님 나라 에 대한 견해가 여러 가지 분분하였으나 근래에 와서는 현실적인 측면( 비종말론적인 측면 )과 미래적인 측면  ( 종말론적인 측면 )의 연합을 이루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이와같은 연합 속에서도 기록된  하나님 나라 의 어휘가 구약성서와는 단절된 예수님의 창안된 어휘라고 하는 주장들은 단호히 배격 되어야 한다.

    본 논문에 살펴본 바에 의하면  하나님 나라 는 그것이 종말론적 견해로 해석 되든지 비종말론적 견해로 해석 되든지 항상 객관적인 하나님의 도래를 토대로 전개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객관적인  하나님 나라 의 도래는 인간의 선택이나 노력과는 별개의 것으로 하나님이 친히 왕권으로 이 세대의 역사 안으로  하나님 나라 를 보내시는 것을 의미한다. 종말론적 견해에서는 이것이 이 세대의 종말을 의미하며, 영광스러운 새로운  하나님 나라 가 도래 하는 것을 의미하며, 악의 세력이 모두 근절 되는 것을 뜻하며,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있어서 방해 하였던 모든 세력들이 추방을 당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속하는 일이기에 그 때와 그 시를 사람은 알 수 없다. 그러나 세상의 역사 가운데 징조가 있어  하나님 나라 의 도래를 느끼게 해 준다.

    비종말론적 견해에서 이 객관적인  하나님의 나라 가 도래 하는 것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심을 의미한다. 이는 하나님의 통치가 사람들의 마음속에 이루어진 것을 뜻하기 전에 예수님의 공생애 자체가  하나님 나라 의 도래인 것이다. 말씀을 선포하시며, 교훈을 가르치시며, 비유로  하나님 나라 의 본질을 말씀하시며, 권능으로 이적을 행하시는 것 자체가 이미  하나님 나라 의 도래인 것이다.

    이와 함께 객관적인  하나님 나라 의 도래만으로는 온전한  하나님 나라 에 들어갈 수는 없는 것이다. 객관적인  하나님 나라 의 도래와 함께 주관적인  하나님 나라 의 도래가 있어야 한다. 객관적인  하나님 나라 가 인간의 현실 속의 역사 가운데 임하시는 것이라면 주관적인  하나님 나라 는 그와 같은 객관적인  하나님 나라 의 임함을 인정하며 따르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한 가지 특이한 상황은 주관적인  하나님 나라 의 임함은 항상 비종말론적인 견해 위에 서 있다는 것이다. 종말론적인 견해에서 주관적인  하나님 나라 의 도래를 경험할 수 없다. 그러나 비종말론적인 견해에서 주관적인  하나님 나라 의 도래를 경험하는 것이 종말론적인 견해의 주관적인  하나님 나라 의 도래를 경험하게 해 준다는데 중요점이 있다. 그러므로 현 세대에서  하나님 나라 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객관적인 차원이 아니라 주관적인 차원에서 경험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주관적인  하나님 나라 의 도래를 경험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의하여 강제적으로 임하는 객관적인  하나님 나라 의 도래와는 다르다. 이는 예수님과의 인격적 만남이 필수적인 요소이다. 예수님이 세상에서 행하신 모든 행동과 언어는 바로 인격적인 만남을 위한 것이었다. 이적을 행하셨을 때도 이적 자체가 목적이 아니며 이적을 경험한 사람들이 가지는 단순한 호기심과 존경의 마음이 목적이 아니었다. 이적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 의 주관적 도래로 초대하고 있었음을 우리는 바르게 보아야 한다.

    이와 같은 연구로 우리는 예수님이 사용하신  하나님 나라를 바로 초대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어휘로 이해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비유, 교훈, 이적은 같은 맥락에서 다루어져야 한다. 예수님이 살아 있을 때  당시의 사람들은  예수님으로부터 이와 같은 인격적 만남의 메세지를 언어와 행동을 통하여 전해 들었다. 이와 같은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사상은 당시의 유대인들로부터는 배척을 당하였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다음의 3 가지 이유가 주된 이유이다. 첫째는 묵시문학의 배경 아래서 이해하였던 장차 큰 권세와 함께 임할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사람들 속에 임하였다는 것은 유대

인들에게는 충격이었기 때문이다. 둘째는 유대인들이 그들의 국가적 상황 아래서 이해하였던 하나님께서 그들의 왕이 되시기에 하나님 나라가 임할 때에 그들이 우선적으로 참여한다고 하는 기득권적인 생각에 대하여 예수님이 전파하고 가르치신 하나님 나

라는 오히려 소외된 자들의 것이라고 말하며, 조상의 유전을 지키는 유대인들만이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을 증거 하셨기에 전통을 중요시 하며, 선민사상으로 우월감을 가지고 있던 유대인들은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셋째로 앞의 두지 사실로 인하여 수용할 수 없는 하나님 나라를 예수님은 믿는 자에게는 구원의 축복이 있으나 믿지 아니하는 사람에게는 저주가 있다는 것을 말씀하셨기에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처형하기에 이른 것이다.

    현 세대는  하나님 나라 에 대한 다양한 견해가 무성하고 있다. 특히 일자까지 규정하여  하나님의 나라 가 임한다고 하여 사회의 문제까지로 확산되고 있는 것은  하나님 나라 에 대한 본질을 잘못 이해하였기 때문이다. 객관적으로 임하는  하나님 나라 는 사람들의 기대와는 무관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또한 종말론적으로 임하는 객관적  하나님 나라 에 대한 준비는 이미 객관적  하나님 나라 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 분이 공관복음을 통하여 전파하시고 가르치신  하나님 나라 를 믿고 따르는 일인 것이다. 당시의 유대인들처럼 유전과 전통에 얽매여 나름대로의 기득권을 유지하고자 하는 교회는 예수님께서 증거하시는  하나님 나라 에 들어갈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본 논문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우리의 마음에 경각심과 긴장이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   참 고 문 헌

 

 

 

  I.국내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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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I.외국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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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I.번역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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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문화사,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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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V.정기 간행물

 


명신홍, 예수의 천국관(II)" 신학지남 34권 4집

성종현, 하나님 나라와 예수의 비유언어 장로회신학대학

        논문1집,1989.

이형의, 유대 묵시문학에 있어 이방인의 심판과 구원 장로회

        신학대학 논문1집,1989.

Kettel,G.  왕, 왕권  고영민, 월간목회 1990.10.부록.

 

 

 

  V.사전

 


Kittle(ed) Theology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vol1 Mi-

           chigan:Eerdmans  Publishing  Co.,1964.

The Interpreter's Dictionary of the Bible New York:Abing-

           don Press.,1962.

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Michigan:Eerdmans Press.,19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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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 민족의 법 사상과 고대 근동의 법전과의 비교연구

 

目             次

Ⅰ.  序   論

Ⅱ. 히브리 法文化의 背景

1.古代에서 디아스포라까지

2.이스라엘의 獨立

 Ⅲ. 히브리民族의 法思想

1.히브리 法思想의 발전과정

1)第1期 모세法  時代(약 B.C.1230-B.C.300년)

2)第2期 랍비에  의한 裁判時代(B.C.300-A.D.200년)

3)第3期 탈무드 時代(A.D.200-500년)

4)第4期 Diaspora의 中世時代(A.D.500-1500年)

5)第5期 히브리 法 近代化 時代(1500-현재)

6)히브리 法文化의 精髓-Torah


2. 法思想의 特徵

1)여호와와의 契約思想 

2)信仰的 遵法精神

3)人間平等思想

4)人間尊重思想

5)豫言精神과 正義思想


    Ⅳ. 古代 近東의 法典

1.이집트 地域의 古代法

2. 메소포타미아 地域의 古代法

1)메소포타미아 法의 硏究

2)메소포타미아 古代法의 자료들

3)메소포타미아 古代法의 일반적 특징

4)함무라비 法典

5)헷  法典

6)앗수르 法典

 

    Ⅴ. 히브리 法과 메소포타미아의 法典과의 比較

1.言語的 差異

2.歷史的인 差異

1)王政時代

2)宗敎 및 信仰

3)思想과 生活

3.內容的인 差異

1)함무라비 法典과의  比較

(1)果樹園法

(2)姦淫罪

(3)疑妻症에 대한 解決方法

(4)性行爲

(5)辨償問題

2)헷法典과의 比較

3)앗수르 法典과의 比較


    Ⅵ.  結   論


參考文獻

 

   히브리  民族의   法思想과   古代    近東의   法典과의   比較   硏究                

  
        Ⅰ.  序   論 


    本 論文은  셈系에 속하는  히브리民族의 아브라함時代(약 主前   2000-1500年)로부터  히브리民族이   팔레스타인에 정착하여   본격적인 이스라엘   역사를 시작했던   모세시대(약   B.C. 1300년) 까지의 히브리人들의 생활을 지배한  法律을 모세오경, 특히 신명기를중심으 로 硏究하고  아울러 모세오경과 古代 近東의   여러民族들이 가졌던 法典의  생성, 法思想  및  특징을 比較硏究함으로써  近東 古代法의 모습을 考察하고  동시에 聖書속에  나타난 古 代法의 痕迹을 찾아보려는데 그 목적이 있다.

    논자가 다루려는 문제가  국내에 그 문헌이 워낙 희유한 古代에   속하고, 新舊約 全般 은 물론 神學一般에 관한 지식과 言語 즉 히브리語에  대한 상식과 古代 近東 및 중동문화 에 관한 資料 입수문제  등으로 본 論文의 작업이 難工事에 속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감히 本 硏究를시도해  본 것은 오늘날 세계문화의 主流를 형성하고  있는 서양문화의 근 원에는 날카로운 希臘의  지성에 못지않게 세계를 융화시키는 히브리의 양심이  모태를 이 루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溫故之新의 學的 關心을 갖게 된데 있다.


    Hebraism의 가슴 속 깊은데서 나온 法정신은  도덕과 法과 宗敎로서 일체가 되어 히브  리民族의 삶 안에   표현되었고 이것이 서양문화 형성에 크게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 또한   法史上 古代 法典의 硏究는 인류가 가진 최초의   法典이라는데 그 중요성이 크고 현대法을  硏究하는데 필수적인 硏究임에도 불구하고  논자가 일기로는  국내에 이같은 방면의  硏究가  그다지 흔하지 않음을 느끼게 되어 본논문을 시도한 것이다.


    원래 古代 히브리法思想은 구체적으로 모세의 出애굽 무렵부터 바빌론流配에서 돌아 온 히브리人들이 팔레스티나로 歸還하여 느헤미야 및 에즈라의 改革때까지(B.C.1203-300 년)  약 900년간에 걸친 시기로 히브리法상 가장 중요한 모세의 律法을 탄생시킨 시기와 法思想 古典

時代로 히브리人 사이에 法이 재판소에 의한 실제 裁判에 의해 전개된 시대 (B.C.300-A.D.200년)까지를 말하지만,  본논문에서는 古代 近東의 法典과   比較하기 위하 여 일단 같은 시

기에 있는 모세의 律法시대만을  [古代히브리]  개념에 넣었다. 또 比較 대 상이 된 古代  近東法은 이에 대한 자료가 法學的으로나 神學的,  考古學的으로 워낙  稀有 하여 부득불 국내에 소개된 文獻과 외국의 학술자료를  통해 논자가 입수한 자료에 한하여  그 범위를 국한하였다.

    물론 히브리 法思想을  硏究하기 위해서는 성경에 나타난 모세의  律法을 먼저 자세히  분석하여야 할 것이나 그 내용이 방대하고 또  신학적인  지식을 필요로 하는 까닭에 본 硏 究에서는 모세의 律法의 자세한 硏究는 생략하고 필요한   경우에 한하여 聖書의 내용을 인 용하는 정도로 그쳤다.  또한 古代 近東의  法典도 자세한 내용을  파악하기에는 국내 硏究   여건이 불비하므로 그  자세한 內容硏究는  차후로 미루고 여기서는 대략의  개요와  히브리  法思想과의 차이점 및 法思想의 類似性을 살펴보는 것으로 하겠다.

 


    본 論文은 크게 다섯부분으로  나누고

Ⅰ.  序論에서는 본 論文을 다루게  된 目的 즉, 古代 히브리法硏究가 희소하여 온고지신을 통해 현대法思想의 대연원의 일부를 古代  히 브리法制度, 그 중에서도  구약성서에 나타난  모세의 律法속에서 탐구하고, 이를  古代 近 東의法典과 比較 硏究함으로써 우리 法文化의 창달에 기여해보려는 동기로  논술의 구성 내용의 輪廓을 잡았으며 

Ⅱ. 히브리法文化의 배경에서는  히브리 法文化의 시대적  배경을  中東의 周邊史와 연관지우면서 서술하여 히브리 法의  생성과정상의  특성을 짐작하게 하였 다. 

Ⅲ.  히브리民族의 法思想에서는 우선 히브리 法思想의  발전과정을  시대별로 구분하 여 살펴본 다음,  히브리法만이 가지는 특징을 도출하였다.  

Ⅳ. 古代近東의 法典에서는 이 집트, 함무라비, 헷,   앗수르 등등 히브리民族 주변문화권의 法典을 硏究  그 개괄적인 내 용과  규모 그리고 法思想을 一考하고, 이것을 바탕으로

Ⅴ. 히브리法과 메소포타미아 法 典과의 比較에서  모세律法과의 관계를 설명하여 모세의 律法과의 관계여부를   밝히고, 差 異點을 고찰하였으며  

Ⅵ. 결론에서 히브리 民族의 法은 주변 近東의 法典의 영향을 주고   받은 단지, 進化論的인 法의 계수와 승계의 소산물로   볼것이 아니라, 히브리 民族의 여호  와 信仰과 결부된  독특하고도 우수한 法思想의  結晶體이었다는 점을 들면서  結論을 맺고 자 한다.

 


    본 논문에서  인용한  주된 문헌은  舊約聖書의 창세기․출애굽기․레위기․민수기․신 명기

이며 1961년 발행된 개역한글판 성경전서를 사용하였고, 人名  및  地名에 있어서는 필 요한 경우에는 比較的 原語에 가깝게 표기된  공동번역의 표기를  취하였다. 또 자료 중 제 1차  자료가 없거나 구할 수 없는 경우는 부득이 제2차 자료를 쓸 수 밖에 없었다.

 


    여기서 한가지 언급할  문제가 있다. 그것은 히브리民族과 역사에  관한 문제이다. 상 하 4천년동안  유대敎, 天主敎,  基督敎 3대  종교를 산출한 히브리 民族을   길러낸 중동은  세계 어느 지역 못지않게 역사가 복잡하고 열강의  興亡盛衰가 빈번했던 지역이므로,  중동 의 역사 이해 없이 히브리 民族을 이해할 수  없고  히브리 民族의 사상이나 사상의 결정체 인 모세의 律法을 이해할 수 없다. 논자가 히브리  法文化의 배경사에 상당한 지면을 할애 한 것도 이때문이다.

 

        Ⅱ. 히브리 法文化의 背景 

 

    1.古代에서 디아스포라까지 


    이스라엘이라는 民族명은 이집트와  메르엔프타하(Merenptah)의  戰勝碑文(B.C. 13세기  후반)에, 메르엔프타하에게 정복된   한 종족의 이름으로 처음   나타난다. 이스라엘人(히브 리人)이 메소포타미아에서 가나안  땅(팔레스티나, 오늘날 이스라엘의  땅)에  들어온 것은  약 4000년 전으로,  이 곳에 정착하여 農耕生活에 종사하고 여호와의  信仰을 확립하였다. 주위의 강대한 씨족에게 압박당하여 일부 부족은 이집트로  이주하였으나,  그 후 이집트의  생활에 견딜수 없어   모세의 인도로 팔레스티나로 귀국하였다. 전술한  메르엔프타하가  이 스라엘을 격파한 것은 이 때였을 것이다.

 


    B.C.11세기 사울은  이집트의 지배가 쇠약하여진  틈을 이용하여 가나안  땅의 先住民  펠리시테인과 싸워 이스라엘  王國을 세웠다. 사울의 뒤를   이어 다윗은 예루살렘을 왕국의   수도로 정하고 이 곳에 王宮과 여호와의 聖殿을 세웠다.  그 뒤부터 다윗  왕가와 여호와의  성전과 예루살렘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民族的 자각의 중심이 되었다.   다윗시대의 이스라 엘 왕국은 전성시대를 이룩하였으나 그 뒤를 이은  솔로몬王이  죽은 뒤 왕국은 사마리아를  수도로 정한  북쪽의 이스라엘왕국과 남쪽의  유대왕국으로 나누어졌다. 이스라엘  왕국은  B.C.722년에 앗시리아왕 사르곤  2세에게 멸망당하였고, 유대 왕국도   B.C.586년 新바빌론 의 왕인  네부카드넷자르(느부갓네살)에 의하여 수도 예루살렘을  점령당하고 멸망하였다. 유대인은 사로잡혀 유명한 바빌론 포로생활에 들어갔다.


    B.C.538년 바빌론을 정복한 페르시아의  다리우스왕  때 유대인들은 해방․귀국하여 예 루살렘 성전을  재건하고 유대교를  성립시켰으나  B.C.4세기에는 알렉산더  대왕의 군대의  통치 하에 들어갔으며,  B.C.1세기에는 로마의  屬州로 편입되었다. 로마  지배하에 있기는  하였어도 半獨立政權을 형성하고 로마제국에 저항하였으나 티투스  황제 때 탄압당하여 세 계 각지로 흩어져 오랫동안 표류하며 박해받는 생활을 하기에 이르렀다 .

 

    2.이스라엘의 獨立 


    19세기에 들어서자, 세계 각지의   내셔널리즘이 발흥하는 가운데, 동유럽․러시아에서  유대인에 대한 民族抑壓이 드세지자, 유대인을  성서시대부터 연속적으로  존재하는 단일民 族으로 여호와로부터 조상이  약속받은 성지 팔레스티나로 돌아가 그 곳에  자기들의 조국 을 세워야만 유대인에  대한 박해는 끝난다고  하는 시오니즘이 삭트기  시작하엿다. 이 시 오니즘은  1887년 오스트리아의  테오도르 헤르첼이 시오니스트  대회를  스위스의 바젤에서  개최함으로써 정치운동이  되었다. 그러나 시오니즘  운동은  당초 지지부진, 발전을  보지  못하고 1882년 최초의 유대인 移民이 팔레스티나로 들어서기   시작한 지 35년 뒤인 1917년 까지 겨우 3만 2,000명  밖에 移民하지 못하였다.


    그러던 중 제  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7년 英國이 당시  중동에서 영국군 작전기 지 역할을  맡고 잇던 팔레스티나  땅을  지키기 위하여 전세계의 유대인의  협력을  얻고자  <발포아 선언>을  발표하고,  戰後 팔레스티나로  유대인의  民族的 조국건설을  허락한다는   약속과, 또 전후  동유럽 여러 나라에서 유대인 압박이 심하여졌고,   30년대로 들어와서는  獨逸에서 히틀러의 나치즘이 등장,  유대인에 대한 대  학살을 개시하면서  시오니즘 運動은  급속히 발전하였다. 팔레스티나는  1918년 영국의 군정하에 놓여 있었고  20년에는  영국의  委任統治 하에 있었으나,  그 무렵, 팔레스티나에의 유대인 이민은 격증하여  제 1차 세계 대전  당시 7만  정도였던 팔레스티나의 유대인 인구는  세계 각지로부터  돌아온 이민을 맞  아들여 제2차 世界大戰 直前에는 약 40만으로 늘어났다.

    유대인 이민의 증대는 아랍인과의 對立․抗爭을  자져오게 하였다.  소수파로의 전락과  토지상실을 두려워한 아랍인은 1919년부터 종종  反영국․反유대 폭동을  일으키고, 38년부 터 제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는 39년까지는 전국적으로 게릴라戰을 전개하였다.


    제2차 世界大戰 中 두 民族의 대립은  한때  가라앉기도 했으나 대전 말기에는 다시 격 화되어, 이번에는 유대인   쪽이 독립을 억제하려는 영국에  대하여  반발하여 反英․反아랍   투쟁을 하게 되었다. 전후에 대립은 한층 격화되었다.   영국은 두 民族의 대립을 진압하여  전략적 요충지인  팔레스티나에 대한 지배권   유지를 위하여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였으나   결국 실패하고, 위임통치  방기를 결의, 1947년 문제를  유엔(UN)에  이관하였다. 국제연합 총회는 47년 11월, 팔레스티나에 아랍․유대 연방을 조직   하게 하는 연방화안과 아랍․유 대의 개별국가를 건설하여 예루살렘을 국제사장리하에 두도록 하는 분할안  가운데, 후자 를  3분지 2이상의  다수로 채택하였다. 이 案에는 팔레스티나를 대소  전략의 일환으로 삼 으려는 미국과, 시오니즘에  반대하면서도 유대․아랍 양  民族의 民族자결을  승인하는 소  련이 吳越同舟의 모습으로  찬성하였다.  이 案에 유대인은 찬성하였으나  아랍쪽은 반대하 고 팔레스티나 각지에서 게릴라전을 시작하였다.

    1948년 5월 14일, 영국의 위임통치가 끝나고,  영국의 철수완료와 함께 유대 국가건국 위원회 의장 벤  구리온이 텔아비브에서 이스라엘 건국을 선언하였다.   동시에 아랍연맹에  가입한 아랍제국의 정규군이 팔레스티나로 침입하고,  제1차 중동전쟁(팔레스티나  전쟁)이  개시되었다. 이스라엘쪽은 처음에는 열세였으나  이것을  견디어내 드디어 아랍을 압박하여   49년 마침내 정전이  실현되었다. 그러나 그 뒤에도 아랍 대  이스라엘의 대립은 계속되어   56년 10월 제 2차  중동전쟁(수에즈 전쟁), 67년 6월  제 3차  중동전쟁(6일전쟁), 73년 10 월 제  4차 중동전쟁(10월전쟁)등 모두 네차례에 걸친 戰火를 교환하였다 .

 

        Ⅲ. 히브리民族의 法思想 


    1.히브리 法思想의 발전과정 

 

    法思想에 있어서의  사상의 담당자는 一次的으로는 法律제도이고   二次的으로는 學文,  藝術作品, 考古學的 資料  등등이 되겠다. 본론에서는 주로 法律제도를 중심으로  살펴 보 면서 그 제도 속에 흐르는 사상을 상고해 보겠다.

    히브리法의 발전과정을 法史的으로 다음 5기로 나누어 설명한다 .


    1)第1期 모세法時代(약 B.C.1230-B.C.300년) 

    모세의 出埃及 무렵부터 사막의 流浪을 마치고  가나안에서 定着生活을 하다가 바빌론 에 유배된 히브리  사람들이 다시  팔레스티나에 귀환하여 느헤미야  및 에즈라의 개혁  때까지(약 B.C.1203-B.C.300년),약 900년에 이르는 시대로서 히브리法상 가장 중요한 모세의  律法을 탄생시킨 시대인데 이 시기에는 族長, 帝王, 判官, 豫言者 등의 활동이 전개된다. Sem系에 속하는  히브리 사람들은  半遊牧民으로서 아브라함이 B.C.  20세기에 시날의王 아므라벨과 싸운 기사가 있는데(창세기 14:1-16), 시날은 바빌론이며(동 10:10) 아므 라벨은 함므라비王으로  추측할 수 있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시초부터 함므라비와  접촉이  가능했다고 추론된다. 아브라함의  曾孫 요셉은 이집트의 나일(Nile)강 河口에  있던 어느  지방에  오래 살았었고 이윽고 이집트王 파라오의 심한  학대로  民族의 지도자인 모세에 의 한 히브리 民族의  이집트 탈출(B.C. 1203년경)이 감행된다. 모세와 그  형 아론이 이집트 에 滯在하는 동안에 아론이 파라오 면전에서 던진  지팡이가 뱀으로 변한 기적이 기록되어  있는데(출애굽기 7:8-10) 그때에 파라오는 아마 유명한 라므세스Ⅱ世(B.C.1300- B.C.1233)로 추정된다.  모세  일행은 수에즈 해협을 경유하여 홍해 오른편  기슭을 迂廻하 고 아라비아의 땅에  건너와 방황을 계속하다가 시나이 산록의 황야에서   유목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이  때에  十誡命을 받는(神授)다. 이어서 여호수아가 뜻을 세워  B.C.  1200년경  [약속의 땅] 가나안(지금의 팔레스니나 지방)을 征服하여 정착하게 되며 예루살렘을 도읍  으로 정하였고, 가나안  정복후 약  200년경까지에 유목생활에서 점차적으로 農耕定着生活 에로의 이행이 이루어진 전환기가 형성된다.

    이 시대의 정치형태는 대제사장의  권력하에 이루어진  判官政治 이었다. 젖과 꿀이  흐 르는 땅은  북․중․남으로 나누어져 갈릴레아․ 사마리아․유다 지방으로 분립했다.  히브리 民族 최초의 統一을  한 Saul(약   B.C.1030-11)의  뒤를 이어,  David(약 B.C.1010-972)   및 그  아들  Solomon(약 B.C.972-33)이  統治하던 시대를  히브리王國의 黃金時代(이른바   솔로몬의 榮華)라 부른다.  그 후 왕국분립, 사마리아에  도읍을 정한  북방 10지파의 이스 라엘과 예루살렘에 도읍을 정한 남방 2지파의 유다가 형성되어  결국 남북 두 왕조가 성립 한다.(B.C.922년)    그러는 동안 동방의  강국 앗시리아가 기흥,  먼저 이스라엘이  망하자(B.C.722년), 다 음으로 바빌로니아의 느브갓네살에 의해 유다가   함락(B.C.587년)되고 많은 히브리 民族은   敵都  바빌론에 포로가  되어 끌려가는   운명(이른바  바빌론 유배:  1차 B.C.597년,   2차  B.C.587 -예루살렘 함락-3차   B.C.582)이 되었으나  페르샤제국이 성립했을  때  느헤미야 를 필두로  귀환이  허락된다(B.C.538). 이 후 이스라엘은 페르샤의 속령으로서  페르샤 시 대에 속하며 律法학자  에즈라가 行政官 느헤미야와 협력하여, 예루살렘에  히브리 民族의  律法공동체를 재건하고, 재건된(B.C.516년) 성전에서 모세律法을  백성에게  낭독․해설 하 였다. 여기서 모세律法은  히브리 民族의 기본法이 되었다(B.C.444년, 느헤미야  8장). 페  르샤 지배 200년을 끝으로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의 패권이  형성되고 이에 페르샤는 멸망 한다(B.C.331년).

    기원전 1150년 이전, 즉  가나안 정착이전의  이스라엘의 사회구조는 족장 중심의  부족 사회 였다. 部族社會를 지도한 사람은  족장이며 여호수아가  정복한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  의 관습에 따라  Jacob의 열두 아들들에 귀속되는 12支派에  분배했기  때문에 전民族의 정 치적 통일과 결합은 그다지 공고하지 못했던 것으로  추론된다. 지파의 수장인 족장(판관) 은 자기 지파에  대한 合法的인 수장이면서 제사장의 지배에 복종했고,  행정의 집행은 여  호와의 뜻을 받들어  행한다는 제사장이 지배하는  신정통치, 祭政一致의 정치였다.  이 같  은 부족사회는 부족들의  생존을 가능케 하는 연대의식과 부족구성원 간의  일체감 때문에  貧富의 출현이 불가능한  平等한 사회였다. 이 부적은 생활공동체이면서   동시에 제의동맹 체 또는 여호와신앙으로   맺어진 契約共同體였다. 이것이 이스라엘로 하여금,  같은 혈통,  중앙정부, 혹은 국가기구에  의해 통일되어 있지 않았는데도 200년간   同秩序을 유지하게  했다.

     이 부족동맹 정치형태는 B.C. 1050년경에  필리스테(블레셋)人들의  침공을 저지할 수  없게 되어 결국  사무엘이 백성들의 승인을 얻어 政體를  변경하고(B.C.1030년)  12지파 중  벤야민 지파의  族長인 사울을 국왕으로 삼은  후 王政確立에 이른다.  王政이후 바빌론유 배, 페르샤의 지배하에서 그 속령으로 전락한다 .

 


    2)第2期 랍비에 의한 裁判時代(B.C.300-A.D.200년)  

    이 시대는 法이 재판소에 의한 제판과  律法학자(Rabbi)의 활동에 의해 발전한 시대였 다. 랍비는 히브리法의 專門家로서, 後代의   탈무드法은 랍비法學의 소산이다. 정치적으로 는 알렉산더가 페르샤를 정복한  이후 시작하는  시대로 헬레니즘문화와 동방문화가  융합하 는 시대였고 그 침투로 헤브라이즘의 헬레니즘화를  가져와 팔레스티나에 있어서나 재외각 지에 분산된 유대인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었던  때였다. 이윽고 로마시대에  와서 200년간  自治가 허용되  있었기 때문에 히브리法의 적용이  가능했다. 그 때문에 헤로데(B.C.74년- A.D.4년)는  로마의 안토니우스에  의해 유다의  태수로   임명을 받을  후 스스로  유대王 (B.C.39-4)이라 칭했다(그의 아들이 헤로데  안띠파스  치하(B.C.4년-A.D.39년)에서 그가  베들레헴의 유아 예수그리스도를   살해하고자 한 사건은  마태복음 2장에  기록됨).  그러나  유다의 자치제도도  오래가지 못하고 기원전  70년에는 로마의 황제 베스파시아누스(B.C.69 -79년)의 장자   티토가 이끈 로마군이  유대의 폭동을 진압하여  예루살렘을 함락시켰다.

이로써 고유의  히브리法은 끝을 맺는다. 티토가  예루살렘을 공격했을 때   모세의 십계가  새겨진 두장의 돌판을  담아둔 성궤가 전리품으로 로마에 운반되었으며,   히브리의 패장은  정치범에게 과하는 고래의 처형관습에 따라 카피톨 언덕,  타르페야의 바위에서 던져져 사 형에 처해졌다.

여기에서 소멸하였으며 그 후는  겨우  지방적 慣習法으로서의 효력을 지속 한  것에 불과하였고, 히브리法이라고 하더라도 주로 종교적․제의적  규정이었다 볼 수 있 다.

    이 무렵 정치형태는  여전히 신정체제  였으나 왕정은 벌써  히브리人이 페르샤, 희랍,  로마의 지배에  연이어 귀속됨으로써 정치적인  신정은 소멸했다.  무엇보다  국내적으로는  히브리人의 사회적, 종교적  정치적 최고권력은   大산헤드린(Sanhedrin,  Synedrium)에 속 했다. 아 말은 희랍의  Synedorin(회의)의 뜻으로 히브리語化 되어  산헤드린이라 불리우 게 되었다.  원래는 예루살렘의 市議會에서 기원한  것인데 점차 그 권한을  확대, 히브리  民族의 내정상의  최고회의, 특히 최고재판소의  성격을 띠게되어, 예루살렘에  소재했다.

그 구성은 71명의 제사장,  학자, 장로로 이루어지고  로마시대에는 대제사장이 그 장을  겸 했다. 大신헤드린에 대해서 보통의 산헤드린(지방적  산헤드린)은 지방의 대도시마다  설치 되어 있었으며, 大산헤드린에  의해 23명의 의원이 임명되어 있었다. 결원이된  의원의 보 충은 히브리法  敎授의 학교를 통해 채용되었다.  즉, 法學校를 履修한 후  랍비로 임명된  자가 의원에 선출될  자격을 갖는다. 이러한 類의 학교는  권위가  대단하여 개중에는 1200 명의 학생을 수용한   학교도 있었다 한다. 재판관은 法정이 개정되어  있는 경우도 타직업 에 종사할수 있었다. 우수한 재판관은 法學校를 主宰했고   그 때문에 재판소와 法學校와의  관계는  밀접하여 학교는  바로 후세를 위한 法의 보호소와 같은   역할을 앴다, 산헤드린에 는 서기가 있었다고는  하나  재판기록이 전해진 것은 없다. 후대에   성립한 학교의 규칙․ 판결은 法학교에 있어서의  토론의  보고를 통해서 알려졌다. 이 같은   토론은 오랬동안 口 傳的 記憶形式으로 전승하여 후술하는 바와  같이 나중에 편찬된 것이다 .

 

 

 

    3)第3期 탈무드 時代(A.D.200-500년) 

 


    모세 오경과 雙肩을  이루는, 히브리法의 가장 중요한 탈무드가  성립한 시대이다. 탈 무드法은  약 B.C.3세기  이래의 決定․註釋類를  수집한   것이며 200년경  편친하여 성문화한   본문(Mishnah)과 300년 내지 500년에  편찬된  보충적 註釋(Gemara)을 합친 것이다.  舊約聖 書와 탈무드는 유대인에게 있어 실로 聖殿을 이루고 있다.

    먼저 Mishnah라는 말은 반복 또는  교훈이라는  뜻이며 구약의 法의 발전형태인 종교적  또는 法的 결정을  체계적으로 집록한  것으로, 新히브리語로 기록되어 있다.  원래 히브리 法의 발전은  法의 적용  또는 해석을  담당하는 재판관 또는 法律학자(랍비)에   힘입은 바  심히 크며, 그 의견(판단)의 기록이 잔존하고 개개의   律法문학명이 전해지고 있다 . 탈무 드에 나타난 랍비의 수는 100명에 가깝다.   이들 랍비중 Hillel(B.C. 110년-A.D. 10년)은  大산헤드린의  長이었으나, 히브리의   전통적 法학에 하나의 유형을  부여한  것으로 주목할  만한 것  외에 그는  종래  전해 내려온 결정들을  하나로 統一集錄케 하려던  것으로 후에  Mishnah 編纂의 기초가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Akiba(A.D.50-142년)는  그 생애는  未詳 이나 종래의 諸決定을  체계화하여 Mishnah 편찬을 쉽게  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그 는 Rome人의 박해를  받아 살해되었다. 다음으로 Juda   Hakkadosh(A.D.120-190년)가 나타 나 Mishnah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편찬물을 작성했다.  이렇게 해서  이루어진 Mishnah는 탈 무드의 일부를 형성하여   종전의 랍비 결정(학설)의 집성이 된다. 히브리法의   신학 및 철 학을 대성하고  모세의 律法  즉 成文法(Written or Mosaic Law)에 대한   補充法 즉 註解法 으로서의  追加法으로서 不文法인  口傳傳承의 法(Oral Law)을 통일적으로  편찬한 것이다.

그   편찬체제는  면저   여섯   편(sedarim)으로    나누어지고  각편은   다시   약간의   논제 (massekhoth)로 나뉘어져  전부 63논제를 갖고  있다. 각 논제는   약간의 장(perakim)으로  세분되어 전부 523장으로  되어  있고 각 장은 또한  조항(mishnayot, halakot)으로 나누고   있다. 그 여섯 편명은 아래와 같다.

    (1)제라임(種子)= 供物․祈禱詩․십일조에 관한것.

    (2)모에드(祭祀)= 安息日․祝宴․斷食에 관한 것.

    (3)나심(婦女)= 婚姻 및 離婚에 관한 것.

    (4)네지킨(損害)= 私法․刑法 및 우상숭배에 관한 것.

    (5)코다심(聖物)= 祭物 및 犧牲에 관한 것.

    (6)테하룻(淸潔) = 淸淨한  事物 및  사람과, 不淨한 事物 및  사람과의 關係에 관한것  등이다.

    또한 이 여섯편  외에도 토세프타스(補充)  및 바라이타스(附加)라  불리는 二種이 추가 되어있다.

    다음으로 Gemara는 完成 또는 決定이라는  뜻을  가지고 Mishnah를 기초로 하여 해석한 것으로서 Aameic어로 기록되어 있다. Mishnah가 완성된   후 약 300년간 法學校에 있어서의  강의는 이것을 통해서  활발하게 이루어졌으며 여기서 전개된 것이 Gemara의   본체를 이룬 다. 이것이  탈무드의 제 2부에  該當하는  부분이다. 이렇게 하여 Mishnah와  Gemara의  두  부분이 종합되어 편찬된것이 탈무드이다. 탈무드는 두개의 다른  큰 부분을  합친 편찬물로 서 때와 장소를  달리하여 성립한 것인데, 하나는 예루살렘 탈무드요  다른 하나는 바빌론  탈무드이다. 먼저 예루살렘 탈무드 는 팔레스티나의 法學者의   주석을 모은 것으로서 삼세 기말경에 성립하였으며  바빌론 탈무드는 바빌론  法學者의 주석을 붙인 것으로  예루살렘   탈무드보다 분량도 훨씬  많고, 정돈되 있으며, 그것이 완성된  것은  5세기 말경이라고 한 다. 필경 탈무드는  法 以外에도 歷史, 數學,  神學, 形而上學을  포함하는 방대한 百科事典 이라 할만한 것이다.  法에  관해서는 히브리 法學者가 전개한 정밀한  論證및 決定의 集成 에 불과하다 .

    히브리法의 발전과정 중에서 제4기와 제5기는 본논문과  직접관계는 없으나 그 내용을  참고로 약술한다.

 


    4)第4期 Diaspora의 中世時代(A.D.500-1500年)  

    Diaspora의 확산기인 중세의  시대로, 法學者에 의한 法書, 註釋書가   많이 나온 시대 다. 이 시대에 랍비중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은 Maimonides(1135-1203)였다.  코르도바(스 페인) 출생으로 카이로에  移住,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을   받은 신학자로서 탈무드  전체에  대한  주석서․Mishnah의 주석서 등 다수의 작품이  있으며,  후대에 미친 그의 학적 영향은  막대하다. 그래서 [모세(律法의 제정자)로부터 모세(Mose   Ben Maimon)에 이르기까지  따로  모세는 없다](From Moses unto Moses there arose  not one like Moses.)라고 칭송된 위인 이었다 .

 


    5)第5期 히브리法 近代化 時代(1500-현재) 

 


    히브리法 近代化의 時機는 여러나라에 散在한 유대인  法학자에 의한 탈무드法의 비판 적 硏究가 성행한  시기로,  근세이후에 해당하는 시대로서 특히 탈무드法의 번역 및 간행 본(인쇄술발달에 의한 최초간행본은 1475년)의 출간에 그 특색이 있다. 히브리法 근대화 의 중심인물은 상술한 두 Moses에 대해서  [제2의  모세]라 불리우는 멘델스존(모세 멘델스 존;1729-86, 同名의 大作曲家 멘델스존은 그의 孫子에 해당함)은 가장 뛰어난 근대 유대 인 학자로서 신학․철학에 능하여 유대인 근세사의 신시대를  개척한 인물로  불리우고 있 으며 탈무드, Maimonides의   硏究, 특히 모세 5경의 독일어역(1780-93)을   내 놓았다. 또  유대의 옛 땅   팔레스티나에 유대국의 건설을 기도한 정치운동으로서의  Zionism은 19세기 말(1896)부터 힘차게 전개되어  제2차 세계대전 후 이른바  팔레스티나  문제로서 國際政治 史上 새로운  각광을 띠고 1948년 5월 드디어  이스라엘공화국의 독립선언을 보았지만  이후  히브리民族과 Arab民族간의 民族的   싸움은 심각한 양상을 띠어 오늘날 최대  세계문제 중  하나가 되어 있다 .

    현재 이스라엘공화국의 政體는  共和國이며,  成文憲法은 없으나  選擧法․政府組織法․ 兵役法 등의 基本法 이 있어서 국가의 法律體制의 골격을 이룬다.

 


    6)히브리 法文化의 精髓-Torah 

 


    히브리 法文化의  내용은 궁극적으로는 Torah로   집약될 수 있으나  Torah라는 개념이  모세 5경(Penateuch)를 칭하는  경우와, 舊約聖書 자체를  지칭하는 경우와  구약과 탈무드 에 포함된 유대의  全律法體制를 가리키는 경우가 있어,  본논문에서는 주로  모세5경의 내 용(특히 신명기에 나타난  내용)을 중심으로 論述하였다. 또 하나  法律․法․律法등과 같 은 용어를 사용함에 있어 편의상 밝히고  넘어가야  할 점은 히브리人, 즉   이스라엘人 에  있어서  法이라는 개념은 근대적 의미의 國會立法적 의미가   아니고, 여호와가 이스라엘 백 성과의 契約을  통하여 지키도록 명한 여호와의 말씀으로서의   法이다. 따라서 그것은 이스 라엘의 良心의 반영이고   그들 삶의 規範이며 道德의  命令이고 동시에  그들 政治共同體의   존재양식이기도 하다. 그런   뜻에서 法律이라는 용어보다 法 또는 律法이  더 적절한 용어 라 생각된다. 律法, 즉 모세오경은  사실 유대인 공동체의  大憲章이며  이스라엘 民族을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역사적,   이교적 시련 속에서 살아 남게하고 그   뿌리에서 이스라엘 종교(유 대교)오 그리스도교와 마호멧교라는 세계3대 종교가 성장했다고 보겠다.  히브리 法系에   있어 가장 중요한 法源인  Torah라는  말 자체는 히브리어로  敎訓,  裁 判, 債權,  物權, 親族,  심지어는 自然(동물)에  대한 倫理的  規範까지도 該當한다.  이  Torah를 또는 모세法(혹은 모세의  律法)이라 부른 것은  구약성서에  있어 모세5경에 그 내 용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Torah는 法神授思想에   根據한다(신명기5:22). 여호와가 시나이山에서   모세에게 주었 다는 두장의 돌판(석판), 즉 律法의 석판․계약의  석판은  神法의 서 또는 契約의 서라 한  다. 모세는 이 계약의  서를 여호와의 명에 의해  만든 櫃안에 수장했기  때문에 이것을 계 약의 櫃 혹은 律法의 櫃라 하고, 이를 일정한  천막, 작 律法의 장막에 안치하여 有事時에  이것을 받들고 앞으로 나아갔다. 모세法의 중핵을 이룬  십계명은 모세法 중 최고부분인데   이스라엘 사람들의  가나안 정착후의 편찬물이며 B.C.12세기에서  B.C.8세기사이에 성립된  것으로 보고 있다. 모세律法은 그 내용상  그리고 성질상 도덕성과 제의적 律法과  재판에 관한 律法으로  나눌 수 있다.

    도덕法의 중심은  모세 십계명이고 대상은  유대인이지만 내용은 만민에게  통용될 수  있는 보편성을 지닌다.  십계명은 純粹 道德律이 아니고 종교규범과   도덕규범과 法규범이  일체가 되어 있었다. 法을 여호와의  請約形式의 명령형적  표현 또는 여호와와의 계약이행  이라는 사상에서 이해하였기 때문이다.

    祭衣的 律法은 聖殿을 중심으로한 여호와  숭배의식을  규정한 것으로 후에는 그리스도 교회의 신앙, 예배,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를  규율하는 敎會法(Canon Law)으로 발전하였  다. 재판에 관한 律法은 소위 市民法으로서 民法,  商法, 刑法 등이며,  특별히 유대인만을  위한 것은 유대인만을 구속하고, 유대인 뿐만  아니라  타국․타인에게도 유효한 조문은 自 然法的  性格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서 원리적으로는 모든 사람을 구속한다 .

 

    2. 法思想의 特徵 


    1)여호와와의 契約思想 


    인류사상 특이한 히브리 민족은  古代에서 가장  完成된 契約思想을 가지고 있었다.  이 것을 法史學的 관점에서  볼때 세계의 三大宗敎 특히 기독교를 통한  서양문화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  대단히 주목할만한 일이다.  그러나 법학적  입장에서  이 문제를   다루고 있는 문헌은 稀少하다. 주지의 사실이지만 법의  역사적 발전은 불문에서  成文으로   그리고 成文에서  法典化에로 진전되어 왔다. 그런데   법의 紀元前에 이미  히브리 민족이  하나의  완성된 성문법 내지   법전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은  흥미 있는  중대한  문제가 아 닐수 없다.  히브리민족은  舊約聖書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과 이  舊約聖書안에 규정되어   있는 도덕성과 律法(法律) 이외는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사회제도는  法․道德․宗敎 가 渾然一體가  되어 있었고 그  통치형태는 완전한 祭政一致(theocracy)였다.   이와 같은   사회의 국가제도는  유일신인 여호와와 이스라엘  사이에 체결된 [契約]에 근거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 되었다. 舊約聖書라는 名稱은 이 契約意識의 중대함을 나타내고 있다.

    歷史的으로 보았을 때  고대의 계약에 관한 가장 유용하고  광범위한 자료는 청동기시 대 말기 Hitites 제국의 문헌들인데 이 문헌들에는   주로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와의 관계  및 북부시리아의 도시국가들에 대한 메소포타미아의  宗主權에 관한 내용이 기록되어있다.

히브리 법의 시나이계약은 이와 표현양식에 있어서  유사하지만 종주권계약은 宗主國과 屬 國 또는 휘하  封建諸侯의 服從과 不服從關係를  계약의 형식으로 표현한  일종의 國際間의  保護條約으로 히브리 契約槪念과는  그 정신과 성격에 있어   판이하다. 고대 히브리 민족은   어원적으로 종교적인 의미가 아닌 일반적인 법률용어에서  이 계약이라는 말을 借用했을따 름이며 성서를 보면 神과 人間(이스라엘 民族)과의 관계를 나타낸 것으로 되어 있다.

    히브리 민족의 獨創性은 여호와의 율법을 [계약]으로 본  것이며  고대 근동 세계에 있 어 그 類를 찾아 볼 수 가 없다.  대체로 神授法說에 근거한 이집트나, 楔形文字權의 법이 나 바빌론 법이나 고대 東洋法도 정의를 상징하는 신  또는 황제의 명령으로 보는 것이 일 반적이고 히브리민족처럼 계약개념으로  이해한 경우는  없다. 히브리 민족은  여호와를 어 떤 강력한  입법자 또는 法制定者 乃至 契約의 保證人으로 보지 않고  자기들과 맺는 계약 의 상대자 또는 當事者로 보는데 그 특징이 있다.   여호와가 계약을 체결하려 내려오는 것 은 일방적 명령이나  자기의 명령을 보장한다거나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자신도  친히  이 계약안에 스스로를  얽어매어 또한 이 계약을 통해 이스라엘  민족을 해방하기 위 한데 있었다.  이와같이 계약을 통해  등장한 율법은 이스라엘 민족의 양심과   도덕률이며 동시에 사 회적, 정치적, 법적규범이었기 때문에  국가형태도 완전한  신정국가이며 법이라는 것도  人 定法(=實定法)이 아니라  神定法이었다. 따라서  인정법의  지도원리 내지  가치척도로서의  또는 이와 대립개념으로서의  자연법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 라 하겠다.  그리고  이같은 여호와와의 계약이라는 사상으로 부터  여호와로부터 선택받은   백성, 즉 신의  선민이라는 의식이 또한 뿌리깊어서  동족에 대한  연민에서 여러가지 예외  적 법적 배려가 규정된 것도 이 選民意識에 근거하고  있다. 그리고 이같은 선민의식 또한   고대의 어떠한 민족들에게도 찾아보기 어려운 특성이 되어 있다.

 

 

 

    2)信仰的 遵法精神 

 


    히브리人에게 있어서는 法(Torah)을  지킨다는 것은 곧 신앙을 지킨다는  뜻이 였으며  반대로 신앙을 지킨다는  것은 동시에 法을 지킨다는 것이었다. 그들에게   있어 여호와 하 나님의 뜻은 계약으로 표현됐고 계약은 곧 法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호와신앙을 지키 기 위해서 法의 준수가 무엇보다도 강조되었다. 遵法은  단순한 외적 강제규범으로서가  아 니라 히브리人의 양심의 응답으로서 지켜야 될 생명있는  규범이었다. 그들은 여호와가  그 들의 역사와 운명을 어떻게 인도했으며  어떻게 위험에서 보호하고 이끌어내었는지(출애굽 기 19:4-6)를 그들의  파란만장한 생애에서 체험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있어 信仰規範 은 곧  生活規範이고  生活規範이 信仰規範이었다. 이스라엘民族이  시나이山에서 여호와와  맺었다는 계약자체가 바로   이 같은 法的 상호기속관계에 들어선 것이라고  보겠으며 法을   지키는 것은  그들에게 있어서 구속이라기 보다  구원과 해방을 실현시키는  일이었다. 이  점이 다른 주변  法文化와 특이한 점이다. 法을 지킨다는 것은  여호와의 기쁨이고 그들에 게는 이교에서의 구원이었다.

    요시아 통치(B.C. 640-B.C. 609년)때 단행된  大改革의 계기가 된 성전수리중에 발견 되 [律法冊](B.C. 622년)을 요시아왕에게 가져가  공보대신  [사반]이 읽었을 때 이를 들은   요시아왕은 봅시 경악하여   옷을 찢고 통곡하였고(열와기하 22:10-20참조)   "왕이 유다국 민과 예루살렘의 시민들,  제사장들과 예언자들, 신분이 높고  낮은 모든  백성들을 데리고  여호와의 전에서 찾은 계약의  法典을 읽어 조목 조목 다  들려주고․  왕은 여호와를 따르 며 마음을 다 기울이고  목숨을 다바쳐 그 계명과 훈령과 규정을 지켜  그  책에 기록되 있 는 言約을 이루기로  여호와 앞에서 誓約하였다. 백성들도 모두   따라서 서약하였다"(열왕 기하 23:2-3)고 하는  대목에서 우리는 法에 대한 그들의   태도가 어떠했는가를  알 수 있 다. 法은 히브리民族을 계속  결정적 회심의 계기를   지어 주면서 전통신앙(여호와 신앙)으 로 돌아오게   하곤했다. 국가제의는 法없이는 불가능  했고 전통과  律法의  준수는 신앙의  신앙의  동질성과 히브리 民族의 동질성을 달성한 유일무이한  생명력이었다.

    히브리 民族의 신앙적  遵法精神은 또한 예언자들의   法精神을 통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예언자들의 法精神은  法秩序의  本質에 향한다. 예언자들은 法秩序에 대한  경시와  犯 法行爲를 가차없이 비판하고  공격하였다. 여호와 신앙을 지키고 수호하던   예언자들은 法 을 경시하고 法을  어기는 것은 단지 윤리적․정치적 퇴폐풍조를 조성하는데  그치지 않고  죄악 그것을 조장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질서있는 사회생활을 모든사람의  지위와  고하를  막론하고 法을 지킴으로서 비로소 가능하지만 그러나   바람직하고 소망스러운 法秩序가 보 장하고 실현하는 사회생활은 그것만으로 부족하다.  여기에 이스라엘은 그들의 예언자들을   통해 反律法主義 노선을 끈질기게 주장한다. 아모스는 하나밖에  없는  외투를 合法的 담보 로 貧者에게서 저당잡을  수  없고 부유한자가 法秩序를 구실로 빈자의  생존권마저 탈취하 거나 채무이행이 불가능하다고 해서 그를 노예로  하는것은  부당하다(아모스 2:6-8)고 외 친다. 여기에   法을 지킨다는  것과 法의  참뜻을  실현하는 遵法精神의 차이가  나타난다. 

法을 恣意的으로 해석하고  적용하는 律法主義는 法의 뜻과 그 정신을   저버리게 된다. 法 은 정의를 실현하는  이념이면서 동시에 정의는 法을 보완하고 지키는  파수병으로의 구실 을 하는 것이다. 여기에  그들의 진정한 遵法精神이 있었다.  法이  죽어있는 문자가 아니 라 살아서 움직이면서  끊임없이 진정한 法이 되려는데 法을 지키는  진정한 정신이 있다.

外的 法遵守와 形式的인 遵法精神이 가치를 지니려면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는 기본태도와  연결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은 法으로 표현됐지만 法은   여호와와 이웃을 사랑하는 사랑 의  계명(신명기 6:5-6)의 구체적 실현의 조건이 된다 .

 


    3)人間平等思想 

    히브리 法思想의  底邊에는 신 앞에서의  人間平等의 사상이 흐르고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과의 계약을  전제하는  법정신이기 때문에 계약의  법전이 제시하는   법령들을 또한 법앞에 인간이 평등함을 처음부터 요구하고 있다.

    이방인과의 婚姻을  금지하는 경우라든지  同族인 債務者로부터 利子取得을  금지하는  경우 또는 동족의  채무를 免除하는 경우(신명기 15:4)등 계약의 법전에서  특히 민족주의 적인 색채가 짙은 인상을 받으나 이것은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과 계약을 맺었다는 選民 意識과 血緣的 純潔이라는 同族意識에서 나온 듯하며   또한 원시사회에세 보편적이었던 동 족의식에 기인한 것이기도  하나, 신명기 법전과 예언자들은 보편적인  인도주의적 vision 을 제시하여 결국 이러한 혈연적인 민족주의를 극복하게 된다.

    여기에 히브리인들의 우수한 사회윤리사상이 법률의  원리로 나타난다.  계약의 법전이  강조한 가난한 사람들의  권리와 인간의  존엄성, 이민자와 떠돌이의 보호,  노예해방의 원 칙은 인간이 맺는 계약의 정신을 실현하는 원칙들이라 할 수 있다.

    他法系에서는 異邦人을 차별규정했을 뿐아니라  그들을 권리보호에서 제외하고 있는데  반하여 모세 율법은  異邦人(여기서는 이민자를 뜻함)을 잘 대접해주도록  강조하고 있다.

裁判에 관해서도 "너희는  떠돌이와  고아의 人權을 짓밟지 말라"(신명기  24:17)라고 명하 여 떠돌이, 즉 이주자와 외국인도 인격적 존재로서 평등하게 재판하라고 하고 있다.

    또 히브리  법사상에서는 이자취득은  처음부터 하나님과의 계약위반으로  보아 죄앗시 했고 더우기 高利貸附  等은 형제를 착취하며  인간을 奴隸化시키는 것이라  하여 엄격하게  금지되었다. 이 점은 주목할만 하다. 또 상환불능의  채무에 대하여 制裁를 加하지 못하게  하고 債務免除의  해 를 설치하고 가난한  이가 없도록 하라고(사회적,경제적  평등) 명한 다.

    떠돌이를 괴롭히거나 虐待하지  말라고 명하는 한편, 고부와 고아를   학대하지 말라고  명하는데 [虐待]라는 히브리語는  강제노역을 暗示하며 또 다른 곳에서는 强姦의  뜻을 가 지고 있다. 이렇게  빈자와 약자들과 하나님이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사실을 계속적으 로 강조하고 있는 법전은 고대 근동에 있어서 이스라엘에 특유한 것이다.

 

 

 

    4)人間尊重思想 

 


    히브리法思想의 底邊에는  인간존중사상이 깔려있다. 律法이 공동체를   강조하고 있기 는 하지만 동시에 또한 개인 한사람 한사람을   여호와와의 동등한 계약체결의 권리있는 자 격자로 인정하여 그  품위와 권리를 지키고 신장하려는 정신에 차있다.  예를  들면 토라는  誘拐犯은 지위의 고하를 막론하고 사형에 처하도록  되어 있다.  이것은  인간의 존엄을 보 장하고 인간은 어린이건 成人이건 全的으로  자유로운  개인이라는 사상이 밑바침되어  있 다. 같은 경우 바빌론法이나 로마法에서는 사형에 처한 사실이 없고  다만 노예를 유괴하 여 팔았을 때는 벌금형에 과했을 뿐이었다. 함무라비法典   제14조에는 "남의 아들을 도적 한 자는  사형에 처한다"라고 되어 있는데  이 규정은  wardum이나  muskenum에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awilum(자유인)의 아들을 유괴하여 매도했을 때 사형에  처한다는 것이었다.

함무라비法典에서 아들은  父의 所有物이기 때문에  아들의 유괴는 父의 소유권의  침해로  간주되어 어린이를 유괴할 때는  노예의 유괴와 同價의 벌금을 과하고 있다.    또 다른 法 典에서 노예를 傷害致死케 한 경우 노예는 소유주의   재화로만 간주하여 그 치상사는 소유 주에게 상당액의 보상을 하게 함으로써 끝나는 데 비해 토라는 이를 사형에 처했다.

    특히 인권사상은 유대의  예언자들을 통해 고취되었고   실랄한 사회비판의 내용이 되었  다. 그들의  인권사상은 이른바 희랍적인 人道主義  또는 人本主義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정의와  양심을 대변하여 힘없고 가난하고 약한 자들의   인권을 짓밟 은 자들을, 위로는 왕으로부터 수탈하는 관리, 부자에   이르기까지 가차없이 비판했다. 예 언자들의 비판의 소리는 참된 인간의 가치와 권리에 집중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 언급하고  넘어갈 것은  奴隸制度에 관한 문제이다. 노예제도와  인 권사상은 서로 모순되나 그같은 제도가 역사상 등장한  발생학적 근거는 이러하다고 본다.

즉, 노예는 주로   정치․경제․사회적 요인 즉, 전쟁과 정복이라는  모순, 경제적․사회적   불평등관계의 형성에 의해  노예신분으로 전락될 수 밖에 없었던 채무자의  발생 등등에서  유래했고 그 노예의 生死與奪은 권리있는 자 즉,전승자(포획자)  또는  채권자의 자유처분  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노예제도는 이같은 소유주의  恣意的 비인도적인  취급 을 지양하고 비록 노예의 신분이기는 하지만 일정한  法규범에 의해 노예를 보호하고저 하 는 이념이 그 제도의 성립의 저변에 깔려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노예제도가 정립된  사 적의의의 일면이 된다고 생각한다. 노예를 사회 제도안에   포용하고 있는 古代사회에 있어  그 제도 안에는 노예에   대한 부당한 침해, 가혹한 학대 또는 혹사로   부터 보호하려는 정 신이 역력하며, 특히  히브리法思想에서는 그 제도안에 자유인으로서의 해방의  정신이  노 예에 관계된  모든 律法의 규정들에  나차나 있다는 점은  특기할 만한  사건이라고 본다.

즉, 일찌기 정의론을 체계화시킨  Aristoteles도 노예제도를  정당화시킨 점은 이같은  제도 의 발생론적 당위성을 고찰할 때 비로소 이해될 수 있는 타당성을 지님다.

    히브리 法에서의  安息年의 奴隸解放宣言, 禧年의  債務免除宣言 등은   약 3000년전에  이미 나타났던 인도선언이라고  볼 수 있겠다. 따라서 개인의 인권과  자유의  개념은 근대 적  프랑스혁명(1789)이나  영국의 大憲章(1215)나   미국의  독립선언(1776),세계인권선언 (1948) 등에서  처음으로 나타난  사상이 아니라 이미 古代 히브리 法思想에  그 효시를 찾 을 수 있는 사상이라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

 

    5)豫言精神과 正義思想 

 


    히브리인의 豫言精神은 豫言者들의 메시지를 통해 법의  정신과  정의의 사상에서 나타 난다. 豫言者들이  예고한 여호와의 심판은 법조문이  규정한 범죄에 대한  형벌이 아니며  실존적이면서 동시에 인간들의  죄악이  가져온 피할 수 없는 심판이었다.  그 죄악은 여호 와의  뜻을 어기고 유한한 지상적인 사물에서 구원을  얻으려는 인간들의 우상숭배에  그 본 질이 있다. 예언자들의 메시지의 중심사상은 죄악으로 말미암아  죽음에 부쳐진 인간의 구 원을  "悔改하라"또는  "너희는 돌아오라"라는 주제에  집중된다.  회개가  여호와의 정의의  심판을 면하는 유일의 길이다.

이 회개는  법을   법답게 실천하는 관문이며 정의가 곧게서 는 바탕이된다. 여기서   예언정신과 정의의 사상은 서로 밀접,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나 타난다.

    시민적 정의에 대한 사회적 정의의 사상은  舊․新約에  망라되어 있지만 또한 고대 히 브리의 토라는 물론  예언서, 지혜문학, 시편 속에서도   보편적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히브 리민족이 자민족간은 물론 이방신들과의 생활관계에서도  끊임없이 정의로운 사회적관계가  문제로서 대두되어 있었다는 것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여호와의  진정한 관심사는 여호 와의 인간에  대한 사랑과  인간의 여호와에 대한 敬畏의 태도  못지  않게 인간과 인간사이 의 관계에 있었기 때문이다.

    초원이나 사막이라는  특이한 조건속에서의  유목민족인 히브리민族은 약속된  땅에 들 어가기 전까지는 씨족  공동체를 형성하고  어느정도 共産生活을 영위하였다. 즉,  이 같은  사회에서는 근대적 의미의 사유재산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더우기 사유재산을 개인의 영리 의 도구로 이용할 수 없었다.  사실 사회적 정의의  문제는  가나안 땅을 정복하여 유목생활 에서  정착생활로 넘어간 후에 문제로 등장하였으며  구약시대  입법의 원리가 되었다. 가나 안  정착이라는 역사적인  생활양식의 변화는 토지와 포도원등의 소유로 인하여  평등과 호 혜의 사회관계가 무너질 수 밖에 없었다.

    가나안 땅을 정복한  뒤 여호수아는 土地를 공평한 몫으로  나누어 部族들에게 배당했 고 부족은 또다시 氏族에게 분배했다. 그리고  시족은  소속된 各家族에게 토지를 배당하였 다. 그러나 토지의 소유권은 개인에게  귀속되지 않았으므로  근대적 의미의 私有財産이  있 었다고 말할 수  없다. 토지는 사실상 한  동동체가 총유하면서  각개인에게 사용편익을 위 해  배분하는 원칙이었고 개인에게 배분된 몫을  양도배분할 권리가 없었다(레위기 25:23).

이러한 생활양식인 기회균등과 호혜평등의 원칙은 정착후에도 당분간 유지되었다.

    그러나 이같은 소유관계가 파괴되기  시작한것은 첫째로 히브리인들의 가나안원주민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살면서 점차 그들의  부동산과 도시들은 인수해  가면서 부터였다.

가나안 사람들은 자기들의 개인소유인 不動産을  商品으로  취급했기 때문에 이스라엘 농부 들이 가나안人들의 不動産을 사들이게  되었고,  이때에 사회적평등이라는 전통적인 원리가   무너지기 시작하었다.

    둘째로 경제생활의 중심이 大都市로이행되면서   도시에는 무역시장(열왕기상 20:36)이  개설되었고 상인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세째로 시골의  부동산들이 도시인들의  소유로 되고 도시인들에게로  經濟力이 집중되 어갔다.

    네째로 왕은 最大地主로서  큰  재산을 買入할 능력이 있었고, 어떤  이유로 주인을  잃 게된 이스라엘재산을 사들일 수 있었다.

    이 같은 과정을  거치면서 옛 이스라엘의 질서와는 상반되  새 사회적․경제적 질서에 로 전환되어갔고, 빈부의 격차가 생기면서 사회적 종교적호혜,  평등,  공동체의 전통이 무 너지게 되고  만인을 평등하게 보는 여호와의  백성중에 가난한 계층이  등장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본래의 계약정신을  회복하고 가난한 이들을 擁護하기 위한  세가지  반응이 나차 난다. 그 첫재가  立法이요, 둘째가 豫言이요,  세째가 그와 같은  입법자와 예언자의 理想 을 수용하는 문학(지혜문학)이었다.

    토라의 경제원리에  관한 구절들 에서는 히브리인들이 입법적인  대응이 어떠했는가를  엿볼 수 있다.

    또한 이스라엘의 경제원리가 가장 문란해지고 경제적  강자들의 횡포가 극심해진 때에 는 어김없이 豫言者(先知者)들이  나타나 富者들을 질책하였는데 오바댜, 요엘,  요나, 아 모스, 호세아,  이사야, 미가, 나훔, 하박국,  스바냐, 예레미야, 에스겔,  다니엘, 학개,   스가랴, 말라기 등(활동시대순)이 대표적인 예언자들이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이스라엘의 法은  특히 가난하고 무력한 약자를  위한 사회적  정의의 具現을 강조하고 있었던 것이다.


        Ⅳ. 古代 近東의 法典 

 

    1.이집트地域의 古代法 


    19세기 전반기에  楔形文字와 象形文字들의 실마리가 풀리기 시작하자  학자들은 이미  출토되었던 방대한 文獻들을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집트에서는 法에 관한 자료는 거의 나오지  않았고  [死者의 書 ]등의 문서를  토대로 당시의  法思想을 추론할 수  밖에 없다. 이집트인이  바샤(Persian)시대 이전에는  거의 法文獻을 남기지 않는 이유는 그들이  바로(Pharaoh)를 곧 태양신 라(Ra)의 化身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즉,  바로는  어떠한 비판도 허용하지 권위주의적 정부를  소유하고 있었  고, 神들에게조차도 해명할  의무가 없었다. 어떤  특정한 때의 바로의  말이 慣習法이었고  따라서 과거의 法的 결정들은 거의 의미가 없었고, 따라서 法文書들은   거의 가치가 없었 다. 그러므로 우리는  法文書가 아닌 다른 단편적인 문서를 통해서  이집트의 法을 유추해  볼 수  있는 데  [死者의 書]와 같은 것이 좋은 자료가 된다.

 

 

 

    2. 메소포타미아 地域의 古代法 

 


    1)메소포타미아法 의 硏究 

 


    메소포타미아와 그 지역과 관련된  나라들에서는 상황이  매우 달랐다. 여기도 왕을  신격화하는 경향이 있었지만,  종교적으로 왕은 징조들을 통한 裁可와 神의  저주들 아래 있 었고, 정치적으로는 지난 수세기 동안 도시와 지방의   法정들에서 만들어진 法적 결정들의  傳統을 중시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B.C.  3000년대 초에 교역, 정치,  가정생활, 법정 판 결들에 있어서  기록된 문서들이 일반화  되었다.  출토된 많은 토판  들이  수메르아, 바빌 론,  앗수르에서 후리인과 아모리인과 헷인 사이에 행해진 法的 慣習을 설명해 준다 .

    古代法에 관한 서판들의  硏究는 1901년 소위 함무라비 法典(the  Code of Hammurabi) 라고 불리우는 法典이 발견되고 나서는 일반적인 관심이  촉진되기 시작했다.  그때 이후로  더 오래된 "法典"  혹은 法의 法의 편집물이  세개 발견되었고, 法적인 내용을  담은 많은  서판들의 발견이 추가되었다. 모세시대 이전에 속하는 다른  法典들과 法을 기록한 서판들 이 발견되었다.


    2)메소포타미아 古代法의 자료들 

 


    古代法 자료들의 연대기는 다음과 같은 형태로 구분될 수 있다 .

    ①B.C. 3000년대, 수메르의  개인들과 가문들, 왕궁과 신전의 法文書들.

    ②라가스(Lagash)의 왕,  우루카키나(Urukagina)의수메르어로 쓴  단편적인 法들(B.C.

      2300년).

    ③B.C. 21세기의 우르 제3왕도의  창설자인 우르남무(Ur-Nammu)왕에 의한 수메르어        로  된 우르남무法典.

    ④B.C. 1952년경, 아카드어로 쓴 에쉬눈나(Eshnunna)의 빌라라마(Bilalama)의 法典.

    ⑤B.C. 1900년경,  이신(Isin)의 리피트(Lipit)에   의해  수메르어로 쓰여진  리핏-이        슈 타르 (Lipit-Ishtar)法典.

    ⑥B.C.1728넌경, 舊바빌론 제국의 창시자인 함무라비에 의해 아카드어 설형문자로 쓰        여진 함무라비 法典.

    ⑦B.C. 15세기에 아카드어  설형문자로 쓰여진, 아나톨리아(Anatolia)의 헷족속에게서 

      나온 法들.

    ⑧B.C.15세기 말, 아카드어 설형문자로 쓰여지고 누주(Nuzu)에서 발견된 法에 관한 서

      판들

    ⑨B.C. 14세기, 아카드어 설형문자로 기록된 중기 앗수르 法들.

    ⑩B.C. 14-13세기에 속하고 설형 아카드어로 기록된 우가릿에서 출토된 法에 관한 

      서판들 몇개.

 


    이상의 메소포타미아 지역   주요한 족속의 法典에 관한  역사,  규모, 내용에 관하여는   [4) 함무라비法典]이하에서, 입수된 자료를 토대로 가능한 상세히 다루기로 하겠다.

 

    3)메소포타미아 古代法의 일반적특징 

 


    이상의 法 문헌 대부분에 공통적인 세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 이 문헌은 대부분 楔形文字로 쓰여졌다(수메르法을   제외하면 모든 法들은 사실 상 아카드어로 쓰였다).   둘째, 그리고  대개 이것은 메소포타미아  문화에 있어서 기록된  문서에 대한 강한 강조를  설명해 준다. 즉 계급사회에 있어서 法을 어기는  것에  대한 처 벌은 이들 계급에 따라 달랐다. 그러나 전수된  法들은  왕들의 권력을 제한시키고 어느 정 도의  民主主義를 허용하는데  기여했다.  세째, 제국들이  시작될 때,  주요한 法典들이 수 집된 듯하고, 그것들은 그들을 다소 안정된 기초 위에 세우는데 도움을 주었다 .

 


    4)함무라비 法典 

 


    함무라비 法典은  바빌론왕 함무라비시대의 法典으로   함무라비왕은 바빌론 제 6대왕이  다.

학자의 고증에 의하면  그 치세는 B.C. 1728-1680년으로 잡기 때문에 그  法도 그 당 시를 넘지  못한다. 함무라비 法典에는  함무라비왕이  그가 섬기던 태양신   앞에서 法典을  받는  광경으로 짐작되는 장면이 陽刻으로  조각되어 있으며,  전면에는  18행 후면는 28행으 로  되었으나 5행은 마멸되어  알 수 없다. 이 法典은 1901년  수사에서 몰겐과 쉬케이네에  의해 발견되었다 .

 

    5)헷 法典 

 


    이 法은 모세의 律法보다  수백년 후대의 것으로  B.C. 1300년 이후로 추정된다.  헷 法 典은 1906-1912년에 할투시스 또는 바가즈 코이마  윈켈러에 의하여 발굴되었다.  어떤 학 자는 헷 法典의 시기를  B.C. 1200년으로  잡고 있어서 헷 法典은 B.C.  130년을 넘지  못하 고 B.C. 1200년을 내려가지  못한며 따라서  그 시기를 1300년 이후로  보는 것이 원만하다 고 보겠다.  헷 法典을 사용한 헷 족속은   가나안 족속으로 인정된다. 法典의 내용은  함무 라비 法典과 매우 근사하지만 그 짜임새에 있어서는 함무라비   法典만 못하다. 또 죄에 대 한 형벌의 정도도   차이가 있다. 또 함무라비  法典이 282조인데 비해  헷  法典은 200조에  불과하다. 헷이 거주하던  가나안은 바빌론과 소아시아와 이집트의 교역과  교통의 교차로  였기에, 바빌론과   헷 사이엔 오랜 교류의  흔적이 보인다. 그러므로 헷  法典은 함무라비  法典등  바빌론 法典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생각된다 .

 

    6)앗수르 法典 

 


    앗수르는 티글랏 필레셋 1세 (B.C. 1116-1078년)때에   대 제국을 건설하고 명성을 떨 쳐 그 나라에 法典이 있었는데, 그 法典이  소위 앗수르 法典(Assyrian Code)이다. 앗수를  法典의 연대는 B.C.  1300-1200년경으로 본다. 그 法典의 성격은 함무라비  法典과 헷 法 典과는 상대적이며 차이가 나는데 그 차이는 구조와 내용면에서의 차이이다.

    예를 들면 A토판에서 제목을 "부녀에  관한  法律"이라 하고, 제1조에 "만일 사람의 아  내인 한  여자가 또는 사람의 딸이  신전에서 어떤 물건을 도적질하려고  제단에 들어가면  그들은 그 여자에게 …할  것이다"했다. 또 12조에는  여자가 단독으로 범한  되에 대한 형 벌이 있고, 13-22조까지는 부부가  공동으로 범할  수 있는 죄, 29조  이하에는 음행과 부 모에 대한  윤리 등이다 .

 


        Ⅴ. 히브리 法과 메소포타미아의 法典과의 比較  

 


    1.言語的 差異 

 


    모세의 律法과 메소포타미아의  法典들 사이에는 언어적 차이가 크다.   먼저 함무라비  法典은 바빌론어인 楔形文字이었다.  앗수르 法典과 헷 法典들도 역시 그  民族의 어로 기 록했다. 모세의 律法도 예외없이 모세가 속한 히브리 民族의 言語인 히브리語였다.

    메소포타미아의 法典들은 유감스럽게도 원어적인 比較硏究가  되지 못하고  있다. 원어  사본도 구할 수  없고 오직 번역판에 의존해야  하는데 더욱 문제 되는 것은  많은 번역판  가운데서 어떤 것이  원문에 근사한것인가 하는 것이다. 이에 비해  모세의  律法은 히브리 어로 기록된 성경이 있으므로  比較硏究의 좋은 자료가 되며 또 성경의  많은 古代 사본이  있으므로 유리하다.

 


    문체상의 차이를 살펴보면 잘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모세의 律法은  제 2천년기  메 소포타미아의 法典들과의  수많은 유사점을 보여준다 .   어떤 연관성을 추론하지  않을 수  없다. 오경의 法들은  형식에 있어서 두가지 주요 범주, 즉   명확하고 必然的인 範疇(必然 法  또는 歸納的인  法  ;  apodictic)와 決疑論的인  範疇(경우법  또는 演繹的인  法  :  casuistic)로 나뉜다 .

    후자의 범주는 형식과  내용에 있어서 古代의 다른 法典들과 매우   유사한 것으로, 결 코 특수하게  이스라엘 다운 점이라고는  없다. 메소포타미아 法문서들에서도   결의론적인  法은 널리 사용되었다. 그것은 보통 "만일 어떠어떠하면   …, 일정한 벌"이란 공식으로 표 현되었다. 모세의 律法의 경우 法은 종종 필연적인 범주와  혼합되어 있는 점이 다를 뿐이 다.

 


    이와 반대로 前者는("너는  …할지니라/…하지 말지니라") 앞에서 언급한 바  있는 宗 主權條約들과 가장 밀접한   유사점들을갖고 잇으며, 아마 이것은  계약의식에  맞추어 제정 된  것으로 추측되고, 그 의식에서 신적 계약조건들을  표명하는데 사용되었을  것이다.  十 誡命은 형식에 있어서 전적으로 필연적이고,  대부분 부정적으로 언명되어 있는데,  바로  전자의 범주를 보여주는 두드러진 예이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法典이 아니다. 왜냐 하면,  이것은 발생가능성이 있는  모든 사건들을 들고 있지도 않고, 또  -신의 진노를 示 唆하고  있는 것  외에는- 아무런 제재규정도 정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것은  요구되는 행위의 범위를 정하고   다른 범위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은 채  그대로 둔 신적  계약조건들을 언명하고 있을 따름이다 .

 

 

 

    2.歷史的인 差異 

 


    모세의 律法과  메소포타미아의 法典 간에는 연대적인 면으로만  아니라 역사․지리적 인 면에서도 차이가 발견된다. 연대적인 차이는 학자들이  공인함과 같이 함무라비 法典은  B.C.20-17세기  사이로, 헷  法典은 B.C.14세기-13세기  로  추정되지만 모세의  律法은  B.C.15세기 中葉으로 고증한다.  즉 모세의  律法은 함무라비 法典과 헷  法典 사이에 끼어  있으니  함무라비 法典의 영향을  받았을 수 있고 헷 法典에 영향을  주었어야 하는데 그러 한 痕迹을 찾기 힘들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라 아니할수 없다 .

 


    1)王政時代 

    시대상 메소포타미아 法典은 왕정시대이다. 왕을 모시고  왕의 통치에  왕정의 法이 많 고 계급의 차이가 크게  나타나  있으나  모세의 律法은 왕이나 왕정이  흔적이 없고 ,계급  의 차이도  역시 평등사상으로 극복하였으며,  하나님의 통치로 기록되었다. 즉  하나님이  세운 인물은 하나님의 백성을 위임받아 그 法에 따라 다스리고 인도했다.

 


    2)宗敎 및 信仰 

    종교에 있어서도 차이가  있다. 바빌론과 이집트는 다신론적인데 비해   모세의 律法은  唯一神的이다. 모세의 律法이 이방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면  밀접한 다른 분야, 즉 종교 에도 영향을 받은 흔적이 있어야 하는데 이스라엘의  종교에는 그러한 흔적이 전혀 발견되 지 않고 오히려 排他的이며 獨特하다 .

 


    3)思想과 生活 

    모세의 律法에 배타적인  사상이 강하게 나타나 있어서 이방것에  대한 경멸을 보이고  자신의 것을 절대시하는  것은 사상과 생활에서도 드러난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틀어 이 방의  것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풍습 혹은 종교)을 배격 내지는  소멸하는 운동이  늘 있어왔다. 이스라엘 民族의 사상과 생활이 독자적이고  비 타협적이고 비융화적이며 매 우 이질적이다 .

 


    3.內容的인 差異 

 


    언어적인 면과 역사적인 면에서의  차이가 있듯이  내용적인 면에서도 차이가 있다.  法 條文에는 유사한 것이 있으나 이는 인류가 공통적으로   가지는 풍습과 사상이 유사한 면이  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1)함무라비 法典과의 比較 

 


    B.C. 20-17세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함무라비 法典은  그 내용이  구약성경 출애굽기,  레위기, 신명기 의  法내용과 유사성이 있다고 하여 Wellhausen과 Kyle은  모세의 法이 함 무라비 法典의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함무라비    法典에서는 결의론  적인  法(casuistic) 은 모세의 律法과 유사한  내용이 발견되지만 필연적인 法(apodictic) 은 찾아볼 수 없다.  함무라비 法典을 보면 제1조도 "만일 사람이  …하면  그때 형벌은 … 한다"는 식으로  가정적이고 상대적인데 비하여 모세의  律法의 대표격이라고 할  수 있는  십계명은 전부가 필연적인 범주에 속하는 네용들이어서 성질상의   차이가 뚜렷하다.  아래 에서는 결의론적인  내용상의 차이를 사례별로 살펴보기로 하겠다.

 


        (1)果樹園法 

    이에 대한 모세의 律法은 구약성서 레위기   19:23-25에 기록되어 있다. 내용은 3년까 지 먹지말고 제 4년에는  하나님께 드리고 제 5년에 먹으라 하여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는  문제가 선행된다. 함무라비 法典의  제 60조에 "만약  어떤  사람이 과목을 정원지기로 들에   심게하고 그 정원지기가 과목을 심을 수 있고   그것을 4년동안 가꾸었다면 제5년에 果木의  소유주와 정원지기는 서로  그것을  분배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취할것이라"고  하여  비 종교적이고 人間的이며 倫理的이다. 또 전자는  자주적이고 비계급적이나 후자는 의타적이  고 계급적인 것이 짙게 나타나 있다 .

 


        (2)姦淫罪 

    레위기 20:10 에는 姦淫한  여자와 남자는  둘 다 죽이게 되어있다.  이는 죄의 근절을  목적으로 하여 죄의 형벌이 막중하고 그 형벌은 신의 뜻에 근거를 둔 것이다.

    함무라비法 제 129조에서는  "만약 어떤 사람의 아내가 다른  사람과 누웠다면 그들을  붙들어 매고 그리고 물에   그들을 던질 것이다. 그 여자의  남편은 그  여자를 살릴수도 있  고 죽일 수도 있고 또 왕도 그렇게 할 수  있다"   모세의 것에 비해 죄의식도 輕하고 형벌 도 가벼울 뿐아니라 형벌의 여부가 인간의 의사에 좌우되게 되어있다 .

 

 

 

        (3)疑妻症에 대한 解決方法 

    민수기 5장 11-18절 에는  한 사람의 아내에 대하여 그 정절에 관한  의심이 있을 때 는 제사장의 앞에서 神判(ordalium)의 方法으로  판결받게  되어 해결책을 종교적인 측면에  서 구하고 있다.  이에 대해 함무라비 法典은 역시 인간적이고  감정적이며 해결점이 밝지  못하다 .

 

 

 

        (4)性行爲 

    레위기 20장 12절 이하에 나타난  性行爲에 대하여는  가차없이 죽임을 당하게 되어 있다 .

함무라비 法  제 154-157조에는 "딸과 性行爲를 했으면 도시는  그 사람을 쫓아내고  子婦와 관계했으면 물속에  던지라"고  했다. 역시 형벌의 輕重과 處方法이나  종교적인  면 에서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

 


        (5)辨償問題 

    레위기 24: 19-22에는 "만일  사람이 그  이웃을 상하였으면 그 행한대로 파상은  파상 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고 손상을 입힌대로  그에게 하고 짐승을 죽이면 그렇게 하 라  했으나  함무라비 法典은 제 196조, 제  197조 제 200조에 "만일 한   사람의 자유인의  아들의 눈을 상하였으면 그들은  그 눈을 상할 것이요,  뼈를 상하게 했으면  뼈를 상케 할  것이라"고 하여 종교, 사회, 경제적인 측면에서 차이를 볼 수 있다 .

 

 

 

 


    2)헷 法典과의 比較 

    B.C. 1300년 이후로  추정되는 헷 法典은 200條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고 하나 자세 한 내용은 알기 어렵다. 그러나 헷  法典이 바빌론  法典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생각되지만   이스라엘에게 영향을 주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것은  시대적인 면에서  모세의 律法이  앞서있고, 출애굽때의  승승장구한 이스라엘이 심리적으로   헷의 영향을 받았다고  보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

 

 

 

    3)앗수르 法典과의 比較 

    앗수르 法典은  B.C.1300년-1200년경으로 보는데 이 역시 여타  메소포타미아의 法典 의 특징을 지니고 있으며  따라서  모세의 律法과도 다른 메소포타미아의  法典에서 볼 수  있는 것과 유사한 차이가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Ⅵ.  結   論 

 


    히브리 民族史와 히브리人의 법사상의 파악에서 歷史와  인식의  함수관계를 파악해 보 았다.

히므리의 역사속에서 되풀이되는 것은 언제나 하나님과  그들 히브리人들 사이의 부 름과 응답이었고 그 형식은 계약(律法)을 表現되었다.

    히브리 법사상은 법을  하나님과의 계약으로 이해한데서 발전한다. 그   계약은 일화적 인 것 이 아니라 영속적으로  지속되는 대등한 계약당사자  사이의  계약이었다. 또 이 예약   당사자는 唯一神과 選民이라는  관계를 前提하는 것이기 때문에 여기에 신학과  법학의 대 화의 장이 전개된다. 일반적으로 법학은 인간사이에  관계하는  것이지 신과의 관계를 대상 으로  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히브리 법사상에 있어서는 이같은 인간과   신과의 관계에서  출발하고 있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히브리인의 유일신 여호와는 전술한 바와 같이  처음에는  씨족 또는 부적적 성격을 띠 으나 차차  보편적, 인격적, 유일절대적,   구원적, 동참적 역사적  하나님으로 전개되었고  서양문명사상 유대인은 유일신 사상에 도달한  최초의 민족이었다. 히브리인과  유일신과의  관계는 왕과 신하와의 관계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부자관계로  묘사되어 있다는 데 또한 히 브리인의 유일신사상을 이해하는 관건이  있다.  父子關係가 不平等者間의  종속관계가 아니 라 혈연적  곤동체관계인 것 처럼 비천한  자에서  王에 이르기까지를 똑같이 계약의  하나님 에게 귀속시키는 히브리人과 여호와와의 계약사상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이같은 건실한  사상적바탕을 배경으로 히브리민족의 법은 인간존중사상을  그 저변에  심을 수 있었으며,  율법과 제의에  두드러지게 나타난 순결에 관한  규범등이 여타 주변민  족의 법사상과는 특유한 발달된 법문화를 소유할 수 있었다.

    재판소의 구성, 의장과  배심원의  위치, 협의재판에 있어서의 판결정족수,  그들의 임 무, 인구에  비례한 산헤드린의 설치기준, 법정개정일,  형사 및 민사재판의  절차 등등은  현대의 제도에 비해 손색이 없다고 할 수 있다.

    고대 히브리법의 인간존중사상은 법율의 여러 규정에 배어있지만 이것은 Hellenism 的 humanism과는 본질에 있어서  다르다 전자가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임에 반하여  후 자는 인간의 인간에  대한 사랑이기  때문이다. 참으로 인간을 옳게  자극하는 사랑은 하나  님이지 인간은 아니다. 범법자를 처벌하는  데에도 함무라비법전이나 앗시리아법전과는  아 주 다르게 인도적이었다. 함무라비법이나 앗시리아   법에서는 손자르기, 코(또는 귀)베기, 혀자르기, 가슴자르기, 불쇠낙인을 찍는 등 잔인하고  極한 형벌이 있었으나 히브리법에는  그런 것이 없었다.

   그 외에도 히브리인의   법에는 외국인과 경제,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는  사회적  정의사 상이 두드러지게 표현되어있다.

    고대 히브리 법사상은  유대교의 왕성하고  유능한 랍비들의 꾸준한  토라에 대한 연구 활동과 신약시대의 기독교의  교회법전을 통해 현대서양법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고  본다. 토라에 나타난 여화와와의 계약사상, 신앙에  기초한  법정신  그리고 인간존중과 정 의  및 박애의 정신은 그대로 만인은  신앞에  평등하며 여호와는 정의와 사랑의  源泉이라는  기독교의 원리가 되어 이것이 교회법의  모체가 되었으며  이 원리가 교회법에  의해서 효과 적으로 실현되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즉 노예제도의   완화 내지 폐지, 강자의 책임강 화, 약자의 보호, 여성의 법률적 지위 提高와  더불어 성년여자에게 결혼의 자유를 인정했  고, 로마법이나 게르만법과는  반대로 婚姻의 純潔과 不可解消性을 확보했으며   또 중세의  사적 복수나 형벌을 완화하기 위하여 決鬪를 금지하고  신의 휴전, 敎會保護權等을 인정하 는 등 그 영향이 지대하다.

    교회법은 서양법제사에  중요한 위치를 점유하고  있으며 로마법 및  자연법과 더불어  현대의 西洋法思想의 成立의  기초를 형성하고  있다고 할 것이므로 로마法을  제외하고 서 양법제사나 法思想史를 이해할 수는 없다고 할 것이다.

    이와 같이 히브리 법사상은 서구인들의 사회생활과  정신세계에 있어서 깊이 침투되어  그들의 법은 물론 정치, 사회등 모든 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음은  오늘날 서구문화를 그리 스도교 文化라고 규정하고 있는 것만을 보더라도 쉽게 알 수 있다.

    本 硏究는 원래  히브리 法思想을 간단히 고찰하고 이와  비교하여 히브리민족 주변의  古代近東의 法思想과 제도를 비교하여 양 법체제 간의  차이나 유사점을 발견하고 그 이유 를 찾아보고 히브리  民族의 法思想이 갖는 우수성을 입증하려는데 그  주안점이 있었으나  히브리 法思想에 앞서  히브리 民族의 역사, 종교에관한  基礎說明이 다소  길어졌고, 이와  비교할 만한  고대 근동의 法典에 관하여는  그 寫本은 물론  短篇的인  모습조차도 충분히  入手할 수 없없던 관계로 히브리 法思想의 고찰에  많은 비중이 두어지고 정작 比較硏究는  단편적이 되었던 것에 아쉬움을 느낀다.

    앞으로 本主題에  관한 硏究가 진전되면서  그러한 未備點이 보완될것을  기대하며 이  분야에에 대한 연구는  法學徒나 神學徒들이 새롭게 개척할 만한 가치있고  흥미있는 領域 임을 提示하며 本論文을 끝맺는다.

 

 

 

 


                               參     考     文     獻  

     [韓書]

金性叔, 舊約家族法, 서울 : 숭실대학교 출판부, 1989.

文熹錫, 聖書와 考古學, 보이스사, 1984.

徐仁錫, 聖書의 가난한 사람들, 분도출판사, 1979.

정진석, 敎會法源史, 분도출판사, 1975.

원용국, 모세오경, 서울 : 지혜문화사, 1992.

박창환, 聖經의 形成史, 현대신서9, 서울 : 大韓基督敎書會, 1989.

金熙相, 中東戰爭, 서울 : 日新社, 1977.

월요신학서당編, 새롭게 열리는 舊約聖書의 세계, 서울 : 한국신학연구소, 1987.

대천덕, 기독교는 오늘을 위한 것, 서울 : 도서출판 무실, 1990.

대천덕, 산골짜기에서 온 편지, 서울 : 신앙계, 1983.

 

 

 

    [譯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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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브라이트, 이스라엘 歷史, 下, 金允柱(譯), 분도출판사, 1983.

G.허버트 리빙스톤, 모세五經의  文化的 背景, 김의원(譯), 서울  : 기독교문서선교회,1990 페터 F.

엘리슨, 모세오경, 김윤주(譯), 분도출판사, 1987.

E.L.에리히, 要點이스라엘歷史, 배제민(譯), 서울 : 기독교문사, 1988.

C.F.파이퍼, 舊約歷史槪論, 배제민(譯), 서울 : 기독교문사, 1990.

강병도, QA시스템 聖經硏究시리즈 Vol.2 레위기~신명기, 서울 : 기독지혜사, 1991.

아놀드로드스, 通讀을 위한 聖書解說 - 하나님의   위대한 行爲, 문희석.황성규(共譯), 서 울 : 大

韓基督敎出版社, 1987.

헨리에타 미어즈, 성경의 파노라마(수정판), 서울 : 생명의 말씀사, 1992.

윌리엄 헨드릭슨, 헨드릭슨 聖經핸드북, 김경신(譯), 서울 : 아가페출판사, 1990.

S.G.DE.그라아프, 約束 그리고 救援 Vol.1  天地創造에서  가나안征服까지, 박권섭(譯), 서 울 : 크

리스챤서적,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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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 신구교공동번역, 대한성서공회, 1977.

현대인의 성경, 서울 : 생명의 말씀사,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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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 on Epsztein, Social Justice in the Ancient   Near East and the people of the Bible,  Lond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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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Clements, Deuteronomy, London : JSOT Press,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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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論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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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근, 히브리   律法과 메소포타미아  法典들과의   比較硏究, 碩士學位論文, 서울신   학대 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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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재원, 신명기法典의  法律的  理解  - 우리나라  現代 民.刑法과의   比較, 감리교신학대학 원,

1992.

 

 

 

    [辭典類]

大韓基督敎書會, 그리스도교 大辭典, 1972.

서울서적(편), 聖句辭典, 서울 : 서울서적, 1992.

동아출판사(편), 동아원색세계대백과사전, 서울 : 동아출판사,1984.

라이너널 캐슨, 古代이집트, 라이프 人間世界史, 서울 : 한국일보타임-라이프, 1983.

Yaacov Shimoni, Political Dictionary of the Arab World, New York : Macmillan,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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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주의 신학에서의 이원론의 극복

 

                       Ⅰ. 서  론

                       Ⅱ. 본  론

                           A. 이원론

                           B. 계시와 이성

                           C. 교회와 국가

                           D. 그리스도와 문화

                           E. 초월과 내재

                           F. 은총과 자연

                       Ⅲ. 평가와 결론

 

                           *** BIBLIOGRAPHY

I. 서  론


실로, 역사적으로 이원론처럼 명쾌하고 분명한 대답을 주는 논리가 다시 없다.

그리하여 고대의 類似 기독교적 집단들은 한결같이 이원론의 입장을 취하고있는 것이다. 類似 기독교 이단만이 아니라 성서적인 정통에 서 있다고 하는 교부들과 신학자에게서도 이원론은 이루 다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발견된다. 사도 바울은 그의 학문적 배경으로 이미 플라톤적인 이원론자로 여겨지고 있는가 하면1) 1세기 후반, 2세기 初 헬라 문화권을 상대로 선교했던 요한에게서도 이원론적인 면은 얼마든지 나타난다.2)

사도 바울 이래 기독교 신학을 실제적으로 형성한 아우구스티누스는 어떠한가.

A. von 하르낙은 아우구스티누스를 新플라톤주의자로 규정한다. 즉 그에게는 두번의 회심이 있었는데 386년의 첫번 째 회심은 新플라톤주의에로의 회심으로서 기독교와 복음으로의 회심은 391년에 가서야 일어난다는 것이다.3) 이러한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 이원론은 하나님-세상, 하나님의 도성-땅의 도성, 보이는 교회-보이지 않은 교회, 아가페-에로스, 카리타스-큐피디타스 ... 등의 다양한 형식을 취하면서 그의 전 저작을 관통하고 있다.4)

칼 바르트는 언젠가 자신의 신학적 전통에 대하여  예레미야 - 바울 - 아우구스티누스 - 루터, 칼빈 - 키에르케고르라고 말한 바 있다.5) 우리는 예레미야(하나냐),바울(스토이씨즘  또는 유대주의), 아우구스티누스(펠라기우스), 루터(에라스무스, 후기 중세 인문주의), 칼빈(알미니우스), 키에르케고르(헤겔).... 의 목록에서 보여 주는 ꡔ보편주의에 대한 특수주의ꡕ ꡔ역설과 합리ꡕ ꡔ위로 부터와 아래로 부터ꡕ, ꡔ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질적인 차이와 유한과 무한의 화해ꡕ, ꡔ계시와 이성ꡕ  ꡔ초월과 내재ꡕ 그리고  ꡔ그리스도와 문화ꡕ..... 의 극명한 긴장과 대립을 보게 되는데 그 중심 軸은 이원론이다.

이러한 긴장과 대립은 우리 교회사에서 계속적으로 반복되는 것이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가혹한 핍박과 무신론 운동보다 더 위협적인 것으로서 기독교 형성 이전에는 헤브라이즘-헬레니즘의 구조로, 기독교-스토이씨즘, 그리고 신약성서 內에서는  바울과 공동서신의 저자들 사이의 대립으로 나타나 있고 아우구스티누스-펠라기우스에서 절정에 이른다.

그러나 토마스 아퀴나스로 대표되는 중세 카톨리씨즘은 신학과 이성의 ꡔ화해ꡕ로서, 제베르크의 말대로 아우구스티누스 主義의 약화 과정이었다. 르네상스 운동,에라스무스로 대표되는 후기 중세 인문주의에 대한 루터의 극복, 그리고 칼빈-알미니우스 주의자들의 싸움,17세기 정통주의와 자연주의, 낭만주의의 대립, 그리고 최근의 칼 바르트와 자유주의자들 사이의 투쟁으로 이어지는데 우리 개혁주의 전통은 이러한 첨예한 대립의 최 전선에 있어 왔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이원론적인 구조는 다양한 용어와 개념을 채용하는데 계시-이성, 교회-국가, 그리스도-문화, 초월-내재는 대표적인 것이고 무엇보다도 ꡔ자연과 은총ꡕ이다. 이에 이 小考에서는 이러한 이원론적인 대립가운데 몇가지 개념에서 ꡔ이 세상적인 것ꡕ과 ꡔ저 세상적인 것ꡕ이 어떻게 극복되고 통일되고 있는가 하는 것을 살펴보고자 한다.

 

II. 본 론

 

A. 이원론6)

 


형이상학적인 이원론에서는 두 가지(kinds)의 구별되는 實在가 있다고 본다. 곧 플라톤에게서 보여지는 것처럼 보이는 감각 세계와 우리가 알 수 없고 볼 수 없는 Idea의 세계가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은 사람들을 매료시켰고 전 사상 체게를 통하여 용어를 달리 하면서 계속 반복하여 나타난다. 가령, 데카르트는 思惟와 延長, 칸트는 Phenomena의 세계와 Noumena의 세계로 말하기도 한다.

기독교 신학에서 이 말이 처음 쓰여진 것은 토마스 하이드(Thomas Hyde)가 1701년, 그의 저서 HistoriaReligionis Veterum Persarum에서 빛과 어둠, 선과 악, 생명과 사망을 대조시키면서이다.

그러나 기독교에서 이 말이 성서적인 근거를 가지는 것은 하나님과 그의 창조 세계와의 관계를 말하는 제한적인(qualified) 이원론이다.7) 즉, 하나님은 chaos로부터 이 자연 세계를 창조하셨다. 그리고 이 창조 세계에 신적인 질서가 있음으로 하여 ꡔ보시기에 아름다웠다.ꡕ 그리고 하나님은 흙으로 인간을 빚으시고 생령(nephesh)를 불어 넣으심으로 자신의 형상을 만드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의 창조 세계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자유가 주어졌고 그 자유의 誤用으로 인하여 죄를 짓고 하나님께서 원치 않는 사망의 길을 가고 있지만 이것으로 신적인 형상(divine Image)을 지닌 자녀로서의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권리 주장(claim)까지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이렇게 기독교의 제한적인 이원론은 선과 악, 하나님의 은총과 인간의 죄, 인간의 타락의 비극과 하나님 나라의 궁극적인 성취라는 변증법적인 관계와 함께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안에서 초월과 내재의 방법으로 인간의 歷史안에서 일하신다는 것을 말함으로서 하나로 통합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B. 계시와 이성

 


하나님은 인간이 스스로 말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인간에게 가르쳐 주시고 이해하시도록 하신다. 하나님의 말씀은 ꡔ밖으로부터ꡕ 인간에게 다가오는 ꡔ사건ꡕ이다. 이것이 계시이다. 곧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말씀하신다. 일종의 인격적인 관계를 형성하시는 것이다.8)

문제는 이 계시를 인간이 어떻게 받아들이고, 이해할 수 있고 또 남에게 전달하느냐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인간의 ꡔ무엇ꡕ때문에, 인간의 무슨 힘과 능력에 의하여 인간은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들일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계시는 인간의 모든 능력을 초월하여 작용하시기 때문에 그 말씀을 이해할 능력이 인간에게는 없고 단지 그러한 능력이 밖으로부터 먼저 인간에게 주어져야 하는가, 아니면 인간에게는 그 계시를 받아들이고 이해할 만한 이성의 능력이 있는가.9)

사실, 이러한 문제는 이미 고대 기독교가 헬라 철학과 대화하면서(헬라 세계로 선교되면서) 제기되었다. 신약의 정경에서도 그 고심의 흔적이 보인다.10)

더우기 이 문제가 절실하게 된 것은 성서와 성령으로부터 지도받지 않는 철학이 신앙적인 사고와 비슷한, 또는 동일한 사상을 가지고 사색한 것 같이 보이기 때문이다. 가령, 하나님에 대한 이해, 인간 구원의 도식 등이 그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 인간의 능력에 대한 질문은 신학과 철학, 신앙과 이성의 관계로 종종 논의되었는데 여기에는 대체로 두 가지의 입장이 있어왔다.11)

먼저, 신학은 철학으로부터  아무것도 가져 올 것이 없다는 주장이다. 즉 인간은 전적인 他者인 하나님의 계시를 이해하는데 아무런 접촉점이 없기 때문에 인간이 이룩한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계시하실 때 성령을 통하여 인간에게 이해를 돕는 조건까지 주시는 것이다. 터툴리안이 “아테네와 예루살렘이 무슨 상관이 있느뇨, 아카데미와 교회 사이에 무슨 조화가 있느뇨. 우리의 가르침은 솔로몬 行閣에서 나왔느니라. 저 스토아주의는 무엇이고 플라톤은 무엇이뇨, 모두 물러가거라.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한 후에 그 어떤 희한한 논쟁도, 복음을 즐기는 외에 어떤 思辨도 필요가 없나니, 우리의 신앙을 원하는 외에 다른 믿음이 필요하지 아니하니라.”라고 말한 것은 그러한 입장을 잘 말해 준다.

다른 하나는 철학적 사고와 인식은 비록 제한은 있으나 신학적인 사고와 인식의 근거가 된다는 입장이다. 즉,“자연 신학은 계시 신학의 기초가 된다.” 아퀴나스에 의하면 “은총은 자연을 파괴하지 않고 완성한다.” (Gratianon tolit natrum, sed supponit et perficit.) 아퀴나스는 나아가 이성 홀로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다고 본다. 인간은 이성과 철학적인 사고를 통하여 하나님에 대하여 실질적이고 타당한 지식을 획득한다는 것이다.12) 인간 이성이 성령의 역사없이도, 하나님에 대하여 어느 정도까지 인식할 수 있다는 이러한 입장은 카톨릭 신학의 기초가 된다.

카톨릭에서는 자연적인 신 인식에 이의가 없다. 중세 신학 전통은 바로 인간의 합리성 위에 서 있고 제 1 차 바티칸 공의회는 이에 대하여 명확하다.13) 그리하여 神存在證明도, 神人同形論(Anthropomorphism)도,analogia entis도, 자연 신학도 가능한 것이다.

루터이래 우리 개신교 신학은  sola fide의 엄격한 입장을 세워가지만 이성이 완전히 배제되는 것은 아니었다.신앙은 인식적인 요소(cognitive element)를 포함하는 것으로 단순한 belief(fiducia)의 차원이 아니라 fides이다. 그것은 논증되지 않는 도그마를 믿는 것이 아니라 신뢰(trust)라고 보았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이다.” 곧, 믿고 또 아는 것에 대한 자신의 생명을 위탁하는 것이다.14)

개혁주의는 전통적으로 이성을 신앙의 "whore"로 여기고 신앙을 높이는(extoll) 경향이 있어 왔다. 합리주의자들은 이들을 fideist 라고 부르는데 슐라이에르마허의 종교적 감정, 리츨의 도덕적 경험,  가치 판단, 그리고 하나님께서 역사를 통하여  계시하신다는 역사적 상대주의자들은 인간의 이성을 주체적인 것으로 여긴다. 곧, 이성은 계시를 판단하는 합리적인 기준이 된다.여기에 계시가 자리할 가능성은 없다.15)

이에 대하여 키에르케고르는 우리의 신앙의 요체를 비합리, 역설이라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역사, 이성에 의하여는 결코 소화될 수 없으며 보편적인 삼단논법으로는 변조될 수 없는 ꡔ역설(The AbsoluteParadox)ꡕ이다.16) 우리의 이해의 영역을 넘는다는 점에서 ꡔ비합리ꡕ이다. R. 오토가 누미노제(nouminous,das Heilige)를 말하면서 ꡔ비합리ꡕ라고 말했을 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계시의 비합리성이라기 보다는 그 逆說性을 의미하는 것이다. 신앙은 어처구니없는, ꡔ어리석은 일(das Absurde)ꡕ로서 ꡔ거치는 것(Ärgernis)ꡕ이다.17)  그리스도는 ꡔ그러함에도 불구하고ꡕ의 영역, 곧 이성이 정지되는 그 곳에 있는 신앙의 대상이다. 그에 의하면 신앙의 내용은 이성에 의해 파악될 수 없는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는 오직 신앙의 대상일 뿐이다.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이나 이론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그에 대하여 아무 것도 알 수 없다. 다만 신앙할 뿐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에 대하여 탐구하기를 계속하는 한 입증하려는 일 때문에 그 존재는 드러나지 않는다. 그는 거기에 없다. 그러나 탐구하기를 그만 둘 때 그는 신앙의 대상으로 문득 거기에 있는 것이다. 신앙과 이성, 신학과 철학이 일치되는 종합의 체계를 키에르케고르는 상상할 수 없는 것이다.

여기에 양자 택일의 결단과 ꡔ신앙의 도약(Leap offaith)ꡕ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역사적 계시라는 역설을 믿는 것으로 이것은 인간의 사유를 넘어있는 신비이다.18)

이러한 키에르케고르의 엄격한 초월을 이어받은 바르트는 이성의 ꡔ적(foe)ꡕ으로 비난 받지만 바르트가 신학에서 이성이 필요없다고 말한 적은 없다.19)

계시, 신앙이 이성적인 기반 없이는 피상적이고 비도덕적일 수 있다. 신학이 이성을 사용하지 않으면 또 다른 암흑 시대를 도래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티누스와 개혁주의 전통이 “믿음은 이해를 추구한다, 나는 이해하기 위하여 믿는다.”라는 명제에 충실한 것은 이성과 신앙의 관계, 곧 이성의 한계를 잘 말해주고 있다.그리하여 우리 개혁주의 신학은 성경을 통하여 나타난 계시의 객관성 안에서 종교 개혁의 신앙을 보존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것이다.

문제는 계시가 이성을 활용하느냐라기 보다는 자연신학이 가능하냐의 문제이다.

자연신학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계시나 신앙에 터하지 아니하고 이성과 그 작용에 의존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바르트는 자연 신학을 거부하는 것이다. 자연 신학은 중세적인 Anthropomorphistic에 기초한,analogia entis로서 자연적인 신인식은 적 그리스도적인 ꡔ하나님을 세계화ꡕ하는 것일 뿐이다.20)

바르트에 의하면 하나님에 관한 질문도 신앙 안에서만 가능하다. 바르트는 칼빈의 ꡔ하나님을 아는 이중 지식(duplex cognito Domini)ꡕ에 대한 논리를 발전시켜 신앙의 유비를 말한다. 곧 이성이 하나님으로부터 조명된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하나님께 이를 수 없다. 인간에게는 하나님에 관하여 질문할 수도 없다. 질문의 주체 역시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질문하신다. “너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 하시는 하나님의 이 질문에 우리는 신앙으로 응답할 뿐이다.

베드로가 바르게 신앙을 고백하였을 때 예수께서 “이를 알게 하신 이는 혈육이 아니라 하늘의 아버지이니라.” 하시는 말씀은 곧 계시의 주체를 말씀해 주시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의 계시가 우리에게 이를 때 그것은 이성의 몫이 아니라 ꡔ가슴(heart)ꡕ을 자극하여 인격 전체에 호소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현명한 자여, 복이 있도다. 너희는 하나님의 존재를 논리적으로 증명할 수 있을 것이니라.” 하시지 않고 “마음이 깨끗한 자들은 복이 있나니, 저가 하나님을 볼 것이라.”(마태 5:8)라고 하셨다.21)

인간은 철학적으로 하나님을 창조주, 전지전능을 생각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개념이 곧 하나님의 현실성을 인식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을 현실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 곧 신앙 안에서만 가능한 것으로 인간은 자신의 능력과 인간의 가진 조건으로는 그러한 만남을 이루지 못하는 것이다. 사실, 절대적이고 추상적인 이성 그 자체는 있을 수는 없다. 이성은 정적으로 주어진 것으로 인간의 어떤 가능성이 아니라 다른 인격적인 존재와의 관계에서 정신적으로 대화하고 관계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것이다.22) 그러므로 자연적인 신 인식이란 없다.

그런 의미에서 아우구스티누스가 그의 신학의 전제로 삼았던 이사야 7 : 9는 오늘도 우리의 신학적 사고의 규범이 되어야 하겠다. “너희가 믿지 못하면 정녕 깨닫지 못 하리라 !” (Nisi crederitis non intelligetis)

 

 

 

C. 교회와 국가

 


국가 권력과 교회, 그것은 원시적인 제정일치 문화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계속적으로 가장 중심적인 문제였다. 특별히 콘스탄티누스의 기독교 공인과 데오도시우스의 기독교의 국교화 이래, 기독교와 로마 황제 사이에서 시작되어 중세 천년을 계속해온 Caesaropapalism과 Papalcaesarianism 사이의 긴장은 그것을 보여준다.

국가와 종교는 시대와 장소를 따라 다양한 형태, 다양한 기능을 가져왔다. 신학자들의 다양한 국가관 역시 자신이 경험한 역사적 체험의 범주에서 비롯된 것이다.

역사적 경험으로 볼 때 네 가지의 관계가 가능하다.23)곧, ① 교회와 국가 중 어느 한 쪽이 다른 한 쪽을 지배하는 관계, ② 양자의 상호 협력 관계 ③ 양자가 무관심하게 병립되어있는 관계, ④ 양자의 적대관계인데 여기서 ③은 불가능한 것은 한 나라 안에 두 개의 정부가 있는 격이 되는 것이다.  교회의 독립성이 지나치게 강조될 때 이러한 기형적인 관계가 성립되지만 인간은 이중적인 정부(duplex in homine regimen)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24)  그런 의미에서 ④ 역시 불가능하다. ①은 국가의 교회화, 또는 교회의 국가화, 세상화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바르트가 그 온 몸을 던져 반대한 것은 바로 이러한 관계라 하겠다.

가장 바람직한 것은 물론 ②의 경우이다.

칼빈에게는 아우구스티누스가 두 사랑에 기초한 두 왕국 사상의 틀이 있다. 그러나 칼빈의 국가관은 국가의 존재 근거를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한 도구라고 하는데서 좀더 적극적이다. 칼빈에게서 국가의 존재 이유는 1차적으로 영적인 정부, 그리스도의 왕국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다. 이는 중세의 로마 천주교에서처럼 국가가 교회에 예속되는 식의 두 왕국도 아니요 19 세기의 국가주의나 히틀러 치하에서의 교회가 국가에 예속되는 것도 아니다. 이들은 모두 한 왕국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25)

칼빈은 국가를 구축하는 세 가지의 요소로서 국가의 공직자, 국가의 법, 국민의 순종을 들고 있다.26) 그에게서 국가는 하나님의 보편적인 은총을 매개시켜주는 매체요 국가의 공직자는 하나님의 대리자, 하나님의 위탁 명령과 권위를 부여받은 자, 하나님의 봉사자로 신적인 진리의 도구들이다.

그러나 근대 계몽주의 이후, 18-19 세기에는 국가의 신적 기원이 희박해지고 그리스도의 왕국과의 유기적인 관계가 단절되고 근대국가가 성립되면서 국가지상주의가 대두된다. 이는 헤겔의 국가관에 힘입는다. 헤겔에게서 국가는 절대 정신의 실체로서 인륜의 총체이며 윤리적 정신의 완전한 형태이다. 국가는 신적인 절대 정신의 구체적 실현체로서 지상에서의 하나님의 나라이다. 국가는 본질상 종교적이다. 따라서 “국가는 정치와 종교의 종합이다.”27)

이에 대하여 바르트의 국가관은 헤겔에 대한 反題(antithese)이다. 1934년 바르트의 주도 하에 선언된 ꡔ바르멘 신학 선언(Die Barmer TheologischeErklärung)ꡕ은 그것을 잘 보여준다.28)

그 선언의 제 5 항에서 그는 먼저 베드로 전서 2장 17절을 인용,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왕을 공경하라.”고 한다. 그리고 이어 말한다.

 


“성서는 우리에게 말한다. 국가는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다음과 같은 과제 즉

교회도 속하여 있는 아직 구원 받지 못한 세상에서 인간의 통찰과 능력의 분량

에 따라 권력으로서 위협하고 권력을 행사하면서 정의와 평화를 보호할 과제를

지닌다고. 교회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 분을 경외하면서 이러한 그 분의 섭리

의 은혜를 인정한다.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계명과 義 그리고 통치자

들과 피통치자들의 책임을 상기시킨다. 교회는 하나님게서 만물을 유지하시는

수단인 말씀의 능력을 신뢰하고 이에 복종한다.

우리는 마치 국가가 그 특별한 위임을 넘어서서 인간 생활의 유일하고 전적인

조직이 되고 그래서 교회의 사명까지도 성취해야 하고 또 그렇게 할 수 있는 것

처럼 가르치는  그릇된 敎說을 배격한다.

또 우리는 교회가 그 특별한 위임을 넘어서서 국가적 형태, 국가적 과제 및 국

가의 위엄을 취하고 그리하여 자신이 유일한 국가의 기관이 되어야 하고 또 그

렇게 할 수 있는 것처럼 가르치는 그릇된 敎說을 배격한다.”

 


바르트는 그리스도인의 국적, 또는 속한 도성은 현세가 아닌, 미래의 세계, 지상이 아니라 하늘에 있다고 본다.(빌 3:20, 히 11:10, 11:13-16, 12;22, 13:14)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실 생활에서 교회와 국가는 지상에서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으면서도 다른 한 쪽으로 넘어갈 수 없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는 것은 교회와 국가는 그 목적이 다르기 때문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선택의 은총 안에서 사람들을 신앙으로 초대한다. 지역 안의 사람들을 그 안에 모으고 권력에 의하여 확립된 질서에 의해 보존한다. 국가는 인간의 필요를 따라 만들어진 상대적인 제도로서 인간의 죄를 반영하는 현실이지만 하나님의 넓으신 통치의 섭리 안에 허용된 제도이다. 당시의 나찌 정권은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이 권한의 한계를 넘었다고 그는 본 것이다.29)

국가는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본래의 목적대로 유지되도록 할 때 그 가치가 尊崇된다. 그러므로 ꡔ靈ꡕ, ꡔ罪의 容恕ꡕ에 대하여는 알지 못하는 국가는 교회의 지도를 받아야 하는 것이다.30)

이와 관련하여 바르트와 쿨만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교회와 국가라는 두 개의 同心圓的 구조를 말한다.內圓은 교회이고 外圓은 세상과 국가이다. 교회는 지상에서 그리스도의 몸으로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지배를 받고 있는 또 하나의 원, 세상에 이 사실을 전파한다. 이 두 圓은 그리스도가 재림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될 때까지 존속된다.

여기서 문제는 동일화가 아니라 상호 연관이다. 국가는 하나님의 용서의 使信을 갖지 못하기 때문에 은총에 호소하지 못한다. 교회는 교회로 존속하면서 국가의 과제에도 참가한다. 여기서 교회는 이 세상의 영역 속에 뛰어들어 이 세상과 連帶를 맺게 된다. 그러나 이 때에도 이 두 개의 원은 종속적인 것이 아니라 부단히 동적이다. 즉, 교회와 국가는 다 같은 목적과 대상을 향하여 상호 연대의 관계에 있으면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각자의 사명과 기능을 수행하여야 한다는 점에서 동적이고 내적 연대성을 지닌다. 이는 교회가 세상을 향해서 할 수 있는 기능은 제사장적 기능이다.31)

이러한 동심원적 구조는 물론 아우구스티누스와 칼빈이 보여주는 두 왕국 사상은 결코 이원론적인 적대 관계나 서로를 부정하는 배타적인 관계가 아니다. 여기서 국가와 교회는 대립과 투쟁, 불신과 박해의 관계가 아니라 힘을 합하여 공동의 목적이요 예배의 대상인 하나님을 향하여 공동으로 노력하는 것으로 기독교인의 문화와 학문, 직업 등 모든 삶의 현장에서의 태도를 결정한다.32)

물론 은총과 신앙은 문화적, 학문적 성취에 의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아들)을 통하여 성령으로 역사하실 때 일어나는 복음적인 사건이다. 그런데 은총과 신앙으로 구원얻은 기독교인과 교회 공동체는 문화와 학문, 그리고 직업의 영역에서 크나큰 개변(transformation)을 일으킨다. 특히 칼빈은 문화와 학문, 직업의 영역에서 나타나냐 할 성령의 열매를 강조하였다. 그리하여 우리 개혁주의는 문화와 학문, 직업에 대하여 영지주의적 적대관계를 말하지 아니한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과 성령의 계속적인 복음의 역사는 이 창조의 세계를 개변시키는 것이다.

이처럼 교회는 국가와 사회, 문화와 학문 직업, 그리스도인의 모든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나가는 것이다. 그리하여 기독교의 선교활동에 비례하여 이 세상은 주님의 통치를 받게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개혁신학은 참된 의미의 세속화 신학이라 할 수 있다.

 

 

 

D. 그리스도와 문화

 


Charles Kraft는 “모든 문화 속에는 인간의 죄가 반영되어 있다.”33)고 말하는데 과연 그리스도는 인간이 이룩한 문화에 대하여 적대적인가, 이 둘은 본질상 이원론적인가.

여기서 ꡔ그리스도ꡕ라 할 때, 니버에 의하면, 2천년 전 팔레스타인에서 살았던 예수 안에 나타난 한 인격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리스도께서 각 사람에게 행사한 권능과 감화력으로 형성된 도덕적인 것, 정신적인 모든 것 그리고 그에 복종케 하는 가르침의 체계, 나아가 그를 믿고 그에게 복종하는 관계에 들어간 사람, 겸비와 온유로서 하나님에 대한 신뢰, 산이라도 옮길만한 믿음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랑의 행위를 소유한 모든 그리스도인 총체를 말한다. 곧 기독교적 믿음과 세계관에 대한 총칭이다.34)

이에 대하여 ꡔ문화ꡕ는 그리스도의  교훈의 체계에 대립되는 세속적이고 본질상 無神的인 것만은 아니다. 문화를 종교나 국가와 같이 강제적이고 권위적인 것과 구별하는 Jakob Buckhardt와는 달리 니버는 인간의 정신적, 도적적인 생활의 향상을 위하여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나는 모든 것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한다. 여기에는 인간이 이룩한 가치의 체계, 삶의 모든 양식을 포함하여 신약 성서에서 ꡔ세상ꡕ이라고 부르는 모든 영역이다. 이러한 문화에는 어떤 특징이 있는가.

먼저 문화는 인간이 자연적인 것 위에 인공적으로 덧입힌 제 2의 환경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사회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어서 사회 구성원들에게 外化-內化-一般化의 과정을 거쳐 축적된 사회적 유산으로 생성-성장-소멸의 輪廻를 한다. 곧 문화는 끊임 없는 변화의 도상에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언어, 교육, 전통, 신화, 과학, 예술, 정치, 법률, 의식, 신앙이 포함된다. 문화가 인간의 노력의 결정으로 이루어진 것들이듯 이것을 받는 사람도 자신의 노력과 성취 없이는 얻을 수 가 없다. 인간의 별다른 노력 없이 얻을 수 있는 자연의 선물과는 다른 것이다. 문화는 인간이 어떤 목적을 가지고,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고안한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을 위하여 유용하며 인간에게 유익하다. 인간에게 좋은 것, 인간 중심적(anthropocentric)이다. 나아가 문화 그 자체는 優劣이 없다. 곧 문화는 그것을 향유하는 사람에게 적절한 것으로 ꡔ문화는 多元的이다.ꡕ35)

문제는 우리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권위 아래에 사는 동시에 문화 아래서, 문화 안에서 살면서 이 문화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과 생각에 영향을 끼친다는데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물론 사도 바울 역시 당대의 문화 가운데서 문화적 제한과 틀 속에서 한정적인 언어와 개념을 가지셨다. 아우구스티누스 역시 당시의 그레코 로만 문화가 한정해주는 문화적 제약에서 사고하였다. 칼빈도 문화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특히 그의 후예들인 칼빈주의자들은 기독교 문화의 暢達과 발전을 위하여 많은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다만 바르트는 문화가 인간 중심의, 인간을 위한, 인간의 자아 긍정의 성격을 띄고 있다는 이유로 비판한다.36)

 


여기서 우리는 문화와 그리스도에 대한 이러한 니버의 정의에 유의하면서 양자간의 관계 역시 니버의 다섯 유형을 살펴 보기로 한다.37)

첫째 가능성은 ꡔ그리스도와 문화의 대립ꡕ을 말한다.그것을 그는 ꡔ문화와 투쟁하는 그리스도(Christagainst culture)ꡕ라고 말한다. 여기서 그리스도는 문화가 어떠하든지간에 인간이 만든 것으로 그리스도의 복음과는 관계가 없는 것으로 일반 문화나 종교에는 희망이 없으며 근본적으로 악한 것이기 때문에 기독교는 적극적으로 싸워야 한다는 입장이다. 여기서는 ꡔ세상ꡕ을 포기하고 양자 택일의 선택만 강요된다. 신약의 요한 1 서의 내용이나 터툴리아누스, 중세의 수도원 운동, 근세의 신비주의 운동, 그리고 문화 부정론자 톨스토이 등이 여기에 속하는데 이들은 그리스도의 절대적 우월성을 비타협적으로 주장한다.

둘째는 ꡔ문화의 그리스도(Christ of culture)ꡕ이다.그리스도는 문화의 일부로서 양자 사이에는 근본적 일치가 있다. 이 입장에서는 교회와 세계, 사회 법과 복음, 하나님의 은총과 인간의 노력 간에 아무런 긴장이나 부조화와 대립은 없다. 창조주와 그 피조 세계 사이에 질적인 단절은 없다. 그리하여 아래에서 위로 올라 갈 수 있는 가능성이 언제든지 있다. 초기 교회의 영지주의, 중세의 아벨라르(P. Abelard), 근대의 문화개신교주의(Kulturprotestantismus), 리츨의 윤리주의, 라우쉔부시의 social gospel이 이러한 관계이해 위에 서 있다.

셋째로 ꡔ문화 위에 있는 그리스도(Christ aboveculture)ꡕ라는 관계이다. 그리스도와 문화는 연속적이면서 비연속적이다. 문화는 그리스도에게까지 올릴 수는 있으나 인간의 예측과 판단을 넘어서 그리스도는 그의 방법과 원하는대로 문화를 이룬다. 그러나 배타적이거나 융합적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문화를 긍정적으로 용납하면서 그것을 지배한다. 일종의 종합주의이다.  중세의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해 주장되었으며  지금의 로마 천주교회는 바로 이러한 관계이해의 선상에 있다.여기에서 시도되는 그리스도와 문화,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 시간과 영원, 율법과 은총....을 하나의 실체로 통일시키려는 노력은 불가피하게 상대적인 것이 절대화되고 나아가 무한이 유한으로 해소되는 위험이 있다.

넷째로 ꡔ역설적 관계의 그리스도와 문화(Christ andculture in paradox)ꡕ이다. 일종의 이원론적 관계이다. 즉, 하나님과 인간의 실존적 상극관계로 ꡔ하나님의 의와 인간의 의가 싸운다.ꡕ 여기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이룩된 화해와 사죄의 역사, 하나님의 은총과 인간의 죄의 행동 사이에 긴장과 역동적인 삶의 모습을 보게 된다. ꡔ은총은 하나님께 있고 죄는 사람 안에 있다.ꡕ 그리하여 인간은 ꡔ의인인 동시에 죄인(iustus etpecator)ꡕ이다. 만약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서 이 세계를 그 죄 안에서 유지하지 않으면 세계는 한 순간도 존재할 수 없다고 보는 변증법적 이원론으로 바울과 루터, 키에르케고르, 트뢸치가 여기에 속한다.

다섯째로 ꡔ변혁자로서의 그리스도(Christ astransformer of culture)ꡕ이다. 이 관계에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아직도 죄인으로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인 인간에 대하여 그리스도가 현존으로 사역하고 있기 때문에 그 인간은 생존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인간과 사회, 문화를 떠나서 사역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 한 가운데서 역사하신다. 문화 안에서 그리스도는 속죄적 사역을 통하여 문화를 변혁시키신다. 창조와 타락은 연속적인 것이 아니라 둘의 관계는 단절, 逆轉, 顚倒이다. 문화 그 자체는 악한 것이 아니라 ꡔ왜곡된 선ꡕ이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단지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는 분일 뿐만 아니라 문화 안에서 사는 인간을 질적으로 변화시켜 주며 문화 자체를 재생산하는 분이다. 신약의 요한 복음, 아우구스티누스, 칼빈, 웨슬리 등이 여기에 속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유형들로서 ꡔ이것이 기독교인의 해답이다.ꡕ고 단언할 수 있는 결론에는 이를 수 없다. 이러한 유형들은 전적으로 서로 배타적인 것이 아니며 다양한 입장들 중에서 많은 점이 서로 화해될 수 있는 가능성을 피차에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38) 우리의 견해를 따라 우리는 토마스 주의자 루터주의자, 톨스토이 주의자, 어거스틴주의자라고 선언한 후에도 우리는 부분적이며 불완전하며 단편적인 지식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상대적이다.

문화, 또는 문명이라고 번역한  civis, civilis, civitavilis는 모두 ꡔ시민ꡕ, ꡔ시민에 적합한ꡕ, ꡔ시민의 자격이 있음ꡕ을 의미하는데 이는 인간 개인이 가지는 어떤 자격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조직 생활, 공동 생활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문화가 우리 인간의 삶을 총체적으로 규정하고 역시 은총의 질서 가운데 있다. 이 말로 결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절대성이 약화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에게 문화를 ꡔ위탁ꡕ하신 것이다.(창1:26)

그러므로 우리는 적극적인 문화의 창조자로, 개변자로서 새로운 문화 창달의 담지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E. 초월과 내재

 


하나님의 초월과 내재는 근본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 사이의 논쟁에서 가장 중심적인 주제이다. 실로 Neo-Orthodoxy, 新正統主義는 하나님의 초월, 타자성에 대한 재발견이라 할 수 있다. 계몽주의와 낭만주의의 아들, 자유주의자 곧 문화개신교주의(Kulturprotestantismus)는 하나님께서 그의 지으신 세계 안에 내재하여 계신다는 확신에 기초하고 있다. 이에 반해 정통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초월, 초자연성을 강조하였던 것이다.39)

우리 성서는  하나님과 이 세상에 대한 철학적인 정의를 보여주지는 않는다.

하나님의 초월과 내재를 동시에 보여 주는데 초월은 주로 하나님의 창조에서 나타난다. 하나님은 초월적인 창조자로서 플라톤에서처럼 先在하는 이데아로부터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無(nihil)로 부터 창조하시고 절대적 주관으로 이 세상을 통치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process의 하나가 아니라 이 세상의 어떤 것(any aspect)과 동일시 되지 않는다.

이러한 하나님의 초월성은40) 기독교 교리에서 일찍부터 강조되었는데 구약에서 보여주는 하나님은 인간 존재와는 구별되는 최고의 존재(supreme entity)이다.(이사야 45:15, 58:8 등) 헬라 철학에서는 보다 초 역사적이고 무시간적이며 靜態的인 존재로 이해되어졌다.즉, 플라톤에서의 Idea는 우리의 지식과 존재를 넘어 있는 것이고 아리스토텔레스의 不動의 動者(Unmoved Mover),  新플라톤주의의 一者(TheOne) 등이 대표적이다. 이러한 철학적인 사고가 기독교 신학과 접촉하면서 교부들과 그 이후의 신학  형성에 큰 영향을 끼친다.41)

하나님은 그 창조 세계에 대하여 절대 타자로 존재하시면서 우리 인간 존재와는 불연속성을 지닌다는 하나님의 초월성이 강조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개혁자들은 하나님의 초월성과 함께 그의 역사성을 말한다. 즉, 루터에게서 하나님은 그의 진노로는 ꡔ숨어있는 하나님(Deus absconditus)ꡕ이고 그의 은총으로는 ꡔ계시하시는 하나님(Deusrevelatus)ꡕ이 되는 것이다.42)

칼빈은 하나님께서는 이 우주가 시작하였을 때만 창조자가 아니라 지금도 계속적으로(continually) 창조적으로(creatively) 이 세상에서  역사하시는 분임을 강조한다. 그는 ꡔ비 한방울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내리지 않는다.ꡕ 그의 절대 예정론은 이러한 섭리론이 극대화된 것이다.

하나님의 초월은 이 세상의 우상적인 존재에 대한 성서의 거부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은 제 2 계명에서 ꡔ너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지 말라.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ꡕ고 하신다. 이는 이른 바, 神人同形論的(Anthropomorphistic) 신관에 대한 거부이다.

내재주의가 극대화된 것이 범신론적, 자연주의 낭만주의이다. 여기서 우주, 자연은 이 세상의 만물이 신적인 것이 되고 예배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나아가 성서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초월은 그의 절대적인 도덕, 거룩하심의 의미이며 특별히 ꡔ역사에서의 그의 자유로움ꡕ을 의미한다. 즉, 하나님은 어떤 필요나 결핍에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이 아니다. 세상의 창조가 그의 필요라거나 부족한 것을 메꾸기 위한 것이 아니다. 더우기 하나님은 그의 창조로부터 자유하신다.(God is not bound by his creation) 가령, 회개한 죄인은 용서 받는다. 그러나 이 용서는 하나님의 기계적이요 의무적인 용서가 아니라  개별적인 용서와 사랑이다. 죄인에 대한 용서와 구원, 그것은 완전한 하나님의 자유로운 사랑의 행위일 뿐이다.43)

우리 개혁주의는 물론 엄격한 초월주의이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내재적인 섭리까지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세계를 ꡔ하나님의 세계ꡕ와 ꡔ인간의 세계ꡕ로 나누어 보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이렇게 초월주의자들은 2층 구조적 우주상을 견지한다.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그 만드신 세상을 초월하여 계신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초월적인 창조자 하나님은 이 우주를 전능하신 섭리(providential guideance)와 기적적인 개입(miracoulous intervention)을 통하여 유지하신다. 이 ꡔ기적ꡕ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간섭하시는 것으로서 여기에 특별한 과학적인 설명이 필요없이 하나님의 神性을 보여 주시는 창문이 되는 것이다.

초월주의자들의 우주관은 개방적이다. 하나님은 우주를 초월하여 계시되 자연적인 제한은 없는 것이다. 극단적인 초월주의에 理神論(Deism)이 있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창조는 하셨지만 간여는 하지 않으신다. 이는 성서에서 보여주는그의 이 세계와 끊임 없이 관계되어 있고 계속적으로 관심을 나타내시는 하나님, 곧 인격적인 하나님의 모습과는 상당히 다르다.

이에 대하여 내재주의자들은 폐쇄적인 우주관을 갖고 있다. 이 우주, 시간과 공간은 그 자체로서 미래에 대한 가능성을 잠재적으로 배태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연법칙에 대하여 간섭하지 않으실 뿐 아니라 오히려 자연법칙 안에 계신다.

내재에 대하여는 두 가지의 의미가 관계되어 있다.44)

먼저, 내재의 원리는 이 세상의 모든 현상이나 사건들은 이 세상 안에서의 다른 사건에 의해 이해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원리이다. 가령, 트뢸치에게서 내재의 원리는 역사 탐구의 기본적인 원리로서 현대의 많은 학자들이 따르고 있다. 이들은 초자연적인 개입으로서의 기적의 가능성이나 하나님에 의한 이 세상에의 직접적인 작용(work)을 부인한다. 슈트라우스가 그랬고 불트만은 이 원리를 성서 해석의 원칙으로 삼아 그의 ꡔ非神話化論ꡕ을 세워 나간다.

또 한 가지는, 하나님께서 그 창조 세계에 직접 내재하신다는 것으로 하나님은 그 창조물과는 떨어져서 독립하여 계신 external power가 아니라 그 자체로서 이 세상에 계시하시는  world process의 내재적인 원리라는 것이다. 슐라이에르마허는 근대 자유주의의 아버지로서 그에 의하면 기적은 단순한 ordinary event이고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 창조의 완성이라는 것인데 이것은 ꡔ하나님은 곧 만유ꡕ라는 스피노자에게서 깊이 영향받은 것이다. 이러한 내재의 원리는 범신론, 무신론, 또 panentheism(萬有內在神論)이 된다.

바르트가 하나님과 인간, 세상 사이에는 극복할 수 없는 질적인 차이, 곧 큰 간격(crevasse), 深淵, 죽음의 線(Todesline), 빙하의 계곡(Gletscherspalte), 極地域(Polarregion), 사막의 지역(Verwüstungszone)이 있다고 말한 것은 바로 이러한 역사적 상대주의, 인간의 종교적 경험을 중요시하는 인간중심의 신학, 자연 속에 混和되어 버린 하나님을 재발견하려는 외침이었다.45)하나님의 세계와 이 물질 세계가 아무런 경계없이 混和된 신비주의적, 유물론적 일원론을 거부한 것이다. 이 둘 사이를 건너는 다리란 없다.46)

바르트의 이러한 ꡔ수직적ꡕ 신학의 최대 관심은 하나님의 자유와 주체성(Aseität)이다.

후일 바르트가 ꡔ하나님의 인간성ꡕ을 말함으로서 우리 인간 여사 속에 내재 하시는 하나님을 말하게 되는데 여기서 바르트는 초월과 내재의 통일을 계시 속에서 그 뿌리를 찾는다.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는 하나님의 자유(초월)와 사랑(내재)을 본 것이다.47)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에서 초월적인 ꡔ하나님 그 자신(Gottan sich)ꡕ이 내재적인 ꡔ우리를 위한 하나님(Gott füruns)ꡕ가 되신 것이다.48)

하나님은 초월적이시면서 그리스도 안에서 이 세상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49) 실로 하나님의 초월과 내재는 ꡔ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ꡕ 안에서 기초(통일)되어 있는 것이다. 전적으로 타자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ꡔ우리를 위한 하나님(Deus pro nobis)ꡕ이 되셨다. ꡔAdonaiꡕ가 ꡔAbbaꡕ가 되신 것이다. 신약 성서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보여주는 하나님은 nouminous(das Heilige), 초월적인 하나님이 아니라 ꡔ비하의 하나님ꡕ이다. 이로서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더 이상 이 세상 안에서, 이 세상과 대립하신 분이 아니다.50)

그리하여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나라를 지향할 수 있게 된다. 그것은 분명히 위엣 것이요, 또 보이지 않는 세계로서 저 세상적일 수 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인의 삶은 이 역사적 지평을 포기하지 않는다. 이역사로부터의 무시간적, 무아적  도피로 약속하는 대신 적극적으로 역사를 변화시키는 역동적인 역사의 성취를, 완성을 추구한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는 것이다.51)

 

 

 

F. 은총과 자연

 


칼 바르트와 에밀 브룬너 사이의 자연 신학 논쟁은 1934년, 브룬너가 발표한 논문, ꡔ자연과 은총(Naturund Gnade)ꡕ과 이에 대한 바르트의 응답, ꡔ아니오!(Nein  !)ꡕ로 구성된 것으로 이는 결국,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문제, 존재론적 구조의 문제이다. 즉 ꡔ유한은 무한을 포함할 수 없고(Finitum non copax infiniti)ꡕ ꡔ죄인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알 수 없다(Homopeccator non copax verbi Domini)ꡕ는  바르트의 입장과 인간의 죄와 타락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 곧 하나님의 형상(imago Dei), 접촉점(Anknupfungspunkt)이 남아있다는 브룬너의 입장이 극명하게 대립된 논쟁이다.

브룬너는 이 논문을 통하여52) 바르트가  sola gratia에 충실한 나머지 하나님과 타락된 인간 사이의 ꡔ存在의 類比ꡕ, 곧 자연과 양심, 일반 역사에 나타난 신적 계시를 거부하고 창조와 유지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은총을 부인하며 하나님과의 접촉점을 부정하고 있음을 비판한다.

물론 브룬너가 자연과 은총을 동등하게, 같은 평면 위에서 병립시키고자 한 것은 아니고,53) 하나님의 독자적 행위(Alleinwirksamkeit)를 보존하면서 무엇보다 자신이 개혁주의 전통에 있음을 누누이 강조하는 것은 물론 칼빈의 충실한 해석자로 자처한다. 즉  자신이 sola gratia에 굳게 서있으면서 십자가의 그리스도만이 세계의 구원자로, 오직 신앙을 통하여만 의롭게 되며(sola fide), 성서만이(sola scriptura)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유일의 규범임을 인정한다. 나아가 인간의 의지는 노예의지로서 그의 구원을 위하여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며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자유로운 은총으로부터만 가능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54) 그러나 비록 인간은 죄인이지만 인간 속에는 하나님의 형상이 남아 있어서 이  형상은 ꡔ창조의 중심이요, 정점ꡕ이다. 이것은 죄와 타락으로 완전히 폐기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이 죄를 지을 수 있는 전제로 존속한다.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형식적(formal) 형상과, 내용적(material)형상이 있는데 내용적 형상은 완전히 파괴되었다. ꡔ그런 면에서 인간은 죄인이다.ꡕ55)

그러나 형식적 형상은  인간의 죄와 타락으로  교란되기는 하였어도 파괴되지는 않고 남아 있다. 그것은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순수 형식적인 것으로 ꡔ언표성(Wortmachtigkeit)ꡕ과  ꡔ책임성(Verantwortlichkeit)ꡕ이라는 두 가지 특성의 ꡔ인간성(Humanitas)ꡕ이다. ꡔ이로서 인간은 주체적으로 하나님과 또한 자기 자신과 대화할 수 있다... 이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능케 하는 것으로 창조적으로 주어진 것이다.ꡕ56)  이 ꡔ죄로 인하여 훼손 되었으나 완전히 파손되지는 않은ꡕ 대화의 가능성 (Ansprechbarkeit), 언어의 수용성(Wortempfanglichkeit)은 접촉점이 되어 하나님의 말씀을 수용하면서 믿음을 창조한다. 이로서 새 사람의 창조는 ꡔ회복(reparatio)ꡕ을 의미한다.  ꡔ..... 만일 인격성이  완전히 없어졌으면 회복도 불가능할 것ꡕ이라는 것이 브룬너의 입장이다.57)

어떠한 형태의 자연신학도 철저하게 거부한  바르트에 비하여 브룬너는 오히려  ꡔ현대 신학자의 참다운(prosper)과제는 자연 신학을 발견하는 일ꡕ이라고 본다. 그리하여, 브룬너는 창조의 계시,  곧 자연에서의 계시를 중요한 부분으로 인정한다. 즉 ꡔ세계의 창조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요, 자기 전달이다.ꡕ58)

나아가 브룬너는 하나님께서 그 피조물에게 주시는 지속적으로 주시는 ꡔ維持의 은혜(Erhaltungsgnade)ꡕ를 말한다. 인간은 그 영적인 삶 이외에도 자연적이고 역사적인 삶을 도외시할 수 없는 것이어서 인간은 그의 삶과 사회 속에서 획득하는 모든 것, 세계를 유지하시는 하나님의 선물, 곧 ꡔ하나님의 維持(保存)의 은혜ꡕ에 참여하게 된다. 즉 인간은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안에서 그 구원의 은혜를 깨달아 알기 전에 이미 부지중에 그 은혜 가운데 있었다는 것으로 이 유지의 은혜가 필요한 이유는 ꡔ모든 인간이 범죄에 있기 때문이다.ꡕ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범죄와 타락에도 불구하고 피조물을 보존하시려는 이 유지의 은혜를 주시는데  여기에는 부모, 결혼, 민족, 역사 ....... 자연법(lex naturae),국가, 제도 등이 있다.59)

이에 대하여 바르트는 즉각적으로 “아니다( Nein !)”라고 대답한다.

즉 브룬너의 이러한 생각은 비성서적이요, 毒性이 있는(pious) 아퀴나스의 카톨릭적인 것으로 반 종교개혁적인, ꡔ적 그리스도ꡕ의 주장일 뿐이다.60)

바르트는 묻는다. 과연  복음적 신학과 자연 신학이 공존할 수 있는가.. ?

바르트의 대답은 물론 ꡔ아니다!(Nein)ꡕ이다.  바르트는 인간의  본성적 경험과 계시 사이의 어떠한 접촉점도 거부하는 키에르케고르적인  ꡔ간격ꡕ, ꡔ심연ꡕ, ꡔ전적 타자ꡕ, ꡔ역설ꡕ.... 로 그리고, ꡔ계시의 유일성ꡕ,  ꡔ그리스도 중심의 신학ꡕ으로  인간이 지니는 신적 관계의 가능성을 부인하는 것은 물론, 창조 관계의 연속성을 인정하지 않은다. ꡔ인간 속의 그 어느 것도 하나님의 계시의 가능성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으며ꡕ 창조자 자신이 그의 은혜를 관철시키기 위하여 필요로 하는 어떤 ꡔ인간적인 행위ꡕ를 바르트는 상상할  수가 없는 것이다.61)

analogia entis를 철저하게 거부하는 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계시와 은총 외에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어떤 연결성, 연속성도 허락지 않은다. 비록 하나님과 화해되고 의롭다 함을 받은 인간이라도 인간은 여전히 죄인으로(simul justus et peccator) 존재하기 때문이다.62)

바르트에 의하면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이 하나님과 교제를 가질 수 있고 하나님을 알고 예배할 수 있는 특권이었다. 그러나 “아담의 타락으로 이 특권은 폐기되고 인간으로 부터 하나님께 이를 수 있는 어떤 길도 막혔다.” 바르트는 인간의 타락을 역사적 사건으로가 아니라 超 역사적 진리로 이해한다. 이 사건은 두 형이상학적 대립의 현실화이며, 유한과 무한, 시간과 영원,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를 구별하는 근거가 된다. ꡔ이 타락은 각 개인에게 동시적으로 작용, 어느 누구도 제외되지 않은다.ꡕ 이는 인간이 ꡔ근본적으로ꡕ ꡔ전체적으로ꡕ 불가피하게 ꡔ철두철미하게 죄인ꡕ이라는 것으로 인간에게 접촉점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 자신 속에 있는 어떤 가능성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이며, ꡔ기적ꡕ으로서 이를 통하여 자기 자신의 무력함에 대한 인간 실존의 절망과 함께 신앙을 고백하게 되고 은혜로우신 하나님 앞에서 죄인으로 인식하게 하는 능력은 하나님 자신의 말씀, 성령의 역사인 것이다.63)

바르트는 나아가 펠라기우스적 인간의 자기 高揚(Self-exaltation)을 규탄한다.

그에 의하면 기독교의 자연신학은 ꡔ크나큰 유혹ꡕ으로 ꡔ오류의 원천ꡕ이다.64) 바르트는 자연 신학을 ꡔ종교(religion)ꡕ로 부르는데 종교는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이 하나님을 알 수 있고 자신의 노력으로 의롭게 되고 거룩하게 될 수 있다고 믿게 하며, ꡔ너도 하나님처럼 될 것이다!(eritis sicut Deus)ꡕ 하던 사탄의 속삭임일 뿐으로 ꡔ사람은 종교를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바벨탑을 세우는 것이다.ꡕ 그것은 하나님을 길들여(domesticate) 자연적인 존재로, 우상으로, 추상적인 존재로(abstracto) 전락시키기 때문이다.65)

ꡔ인간의 종교야말로 인간에게서 가장 위험한 원수ꡕ이다. ꡔ종교는 신앙의 적이다.!ꡕ66) 그것은 시간과 세계에  있으면서 인간은 죽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을 기억시키며 결국 자기 자신을 의존케 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종교는 인간의 장엄(grandeur)이자 비참함(misery)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율법에서 처럼  종교에서도 그 스스로의 한계와 존재와 비존재의 간격을 확인하게 되기 때문이다.

기독교 신학에서의 모든 오류의 근원은 이른 바, 仲裁,媒介神學(Vermittlungstheologie)으로서 그는 자연과 은총, 이성과 신앙, 역사와 계시, 현대와 實證(positive),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와 히틀러.... 에서 보여주는 ꡔ...와(und)ꡕ를 반대하면서 이 둘 사이의 어떤 연결점(하이픈,--)도 거절하였던 것이다.67)

이렇듯, 바르트는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의 은총의 절대성, 역설성이라는 근본원리로 수행한다. 바르트에게서 은총론은 그의 모든 신학의 공통분모가 되는 ꡔ은총 보편주의ꡕ가 되는데 “하나님의 은총은 괄호 앞에 붙은 부호처럼 하나님의 모든 행위와 성품을 규정한다.” 즉,하나님의 초월성은 바르트의 신학의 심장부에 자리잡고 있으면서 바르트의 신학을 관통하는 ꡔ원리ꡕ로서 하나님은 우리의 지식이나 행위의 대상이 아닌 것이다.“하나님은 형이상학적 사변이나 인간의 자연신학적 추구로는 포착되지  아니한다.” 물론 하나님의 이러한 초월은 공간적인 의미나, 하나님을 저 세상적인(otherworldly) 존재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인간과의 관계에서 전적으로 자유롭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연에서 은총으로의 길은 없으며, 인간에게는 하나님에 대하여 말할 수 있는 어떤 가능성도 없다.” 유일의 길은 ꡔ은총 그 자체ꡕ요 그리스도 뿐이다.68)

바르트의 이러한 극단적인 초월주의적 입장은  ꡔ영지주의,  새로운 마르시온 주의ꡕ(하르낙), ꡔ懷疑(Skepsis)ꡕ(고가르텐), ꡔ천상의 독백ꡕ(챠른트), ꡔ신학의 역사의 상실ꡕ(판넨베르크),..... 등의 비판이 제기된다.

그러나 우리는 바르트가 그의 신학에서 역사적 지평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기억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바르트의 역사적 경험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아니된다. 즉, 타락한 자본주의, 한계를 모르는 무절제한 방종에 빠진 자유주의.... 더우기 참다운 하나님의 나라의 실현이라고 생각했던 사회주의가 전쟁을 위한  이념적 도구가 되어 버리고 자연신학을 기초로 하는 나찌즘 안에 있는 악마적, 죄악적 요소를 바라 보면서 이 모든 역사적 상대주의에 대한 ꡔ해독제(anidote)ꡕ로서 절대 부정적인 초월적 은총주의를 세워나가는 것이다.69)

 

 

 

Ⅲ. 평가와 결론

 

 

 

이상에서 우리는 우리 기독교 신학에서 자칫, 이원론으로 여겨질 수 있는 몇가지 개념에 대하여 그것들이 갖는 의미의 한계와 함께 이것들이 배타적이고 양자 택일적이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개혁주의 전통에서 어떻게 통일되고 극복되는지를 알아보았다.

각각의 주제는 먼저 의미를 규정해주고 문제가 되고 있는 주장들을 대별해 보면서 이에 대한 개혁주의의 통합적인 해결을 제시하였다. 그 내용이 매우 빈약한 것은 말할 것 없고 또 개혁주의 입장이라는 것이 칼 바르트로 집중된 것이라는 제한적 것이다. 또 그것도 primarysource가 아닌 2차 자료에 의존하였다. 이것은 본 연구자의 한계이기도 하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계시와 이성, 내재와 초월, 그리스도와 문화, 교회와 국가, 자연과 은총 .... 등은 2천년 교회의 역사를 통하여 계속적으로 논의되어 온 중심적인 과제로서 다양한 용어와 개념으로 나타나고는 있지만 이것은 곧 하나의 맥락으로 관통하고 있다고 하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계시와 초월, 은총... 그리스도, 문화 이런 용어들은 서로 바꾸어 사용할 수도 있는 것으로서 관점, 시대적 관심을 달리 한 것일 뿐이다. 모든 신학적 논쟁은 바로 그 시대 정신과 관심사를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신학자들 역시 그들의 역사적 경험의 범주에서 사고하고 말하였던 것에 불과한 것이다.

우리 성경은 분명 계시의 주관성, 또 하나님 주도적인 특성을 말하면서 동시에 계시의 객관성과 자연을 통한 하나님 인식을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초월을 말하면서 또 내재를 너무도 분명히 말하고 있다. 문화에 대해서도 그 입장이 분명한 것만은 아니다. 이중적인 이해가 가능하다.

여기서 우리는 어느 한 쪽을 취하고 어느 한 쪽은 버리는 것이 아니라 ꡔ구원 받은 이성ꡕ, ꡔ세례 받은 문화ꡕ, ꡔ거듭난 국가ꡕ... ꡔ초월을 경험한 내재ꡕ라면 문제 될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바르트적인 ꡔ위기ꡕ와 ꡔ하나님의 불벽 앞에서의 죽음과 심판ꡕ ꡔ하나님과 인간의 질적인 차이ꡕ를 경험한 후에 ꡔ하나님의 인간성ꡕ에 이를 수 있어야지 이러한 자기 부정, 자기 규탄, 철저한 자기 파산선고에 의한 절망의 경험없이는 인간 스스로 높아진 것으로 거부되어 마땅한, 인간의 자기 高揚(self- exaltation) hybris, superbia에 다름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바르트의 정당성은 아우구스티누스와 함께 확보된다 하겠다.

현대의 Missio Dei 선교 신학은 종래의 하나님-교회-세상의 도식을 하나님-세상-교회로 바구어 놓았다. 이것은 만물을 새롭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으로 성서적 타당성을 지닌다 하겠다.

우리가 편협된 교회 울타리를 넘어 선교적 과제로서 세계를 포용함으로 현존하는 세계의 온갖 부조화된 모습을 개변시켜 해소하는 한편 하나님의 새로운 세계를 역사화는 임무야말로 우리 하나님께서 위탁하신 참다운 기독교의 과제라 할 것이다. 이것이 참다운 세속화 신학이겠기 때문이다. 다만 이 과정에서 교회와 복음의 자기 정체성에 충실하여야 할 것은 물론이다.

 

 

 

 

 

 

*** BIBLIOGRAPHY

 


김 광식,  현대의 신학 사상  서울 : 대한 기독교 출판사,  198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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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______,  헤겔과 바르트  서울 : 대한 기독교 출판사, 19862

김 영한,  바르트에서 몰트만까지 - 현대신학의 개혁주의적 조명 -  서울 : 대한

          기독교 출판사, 19866

이 장식,  기독교 신조사(II)  서울 : 컨콜디아사, 19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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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형기,  종교개혁 신학사상  서울 : 장로회 신학 대학 출판부, 1984

_______,  ꡔ죤 칼빈에 있어서의 교회와 국가ꡕ 박창환 박사 주선애 교수 화갑 논문집 

           서울 : 장로회 신학대학 출판부, 1984

한 철하,  고대 기독교 사상  서울 : 대한 기독교 서회, 198512

 


Berkouwer, G. C. The Triumph of Grace in the Theology of Karl Barth 조 동진  역,  칼 발트의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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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dern, William.  The Case for a New Reformation Theology  Philadelpia : The Westminster Press, 19893

_______________,  Potestant Theology. 이 정욱 역, 프로테스탄트 신학 개요  서울 : 대한 기독교 서회, 19804

Jaspers, Karl. Augustine 김 쾌상 역, 어거스틴의 생애와 사상  서울 : 전망사, 1981.

Muller, David. Karl Barth 이 형기 역, 칼 바르트의 신학 사상 서울 : 양서각,   1986

Neve, J. L. A  History of Christian Thought(II)  서 남동 역, 기독교 신학사  서울 : 대한 기독교 서회, 19848

Niebuhr, Richard. Christ and Culture 김 재준 역, 그리스도와 문화 서울 : 대한 기독교 서회, 19837

Ott, Heinrich. Die Antwort des Glaubens 김 광식 역, 신학해제. 서울 : 한국 신학 연구소, 198911

Pohlman, Horst. G.  Abriss der Dogmatic.  이 신건 역, 교의학 서울 : 한국신학   연구소, 1989

Richardson, Allen.(Ed) The Westminster Dictionary of Christian Theology.     Philadelpia : The Westminster Press, 1983

Scott, Willam. Historical Protestantism.  김 쾌상 역, 개신교 신학 사상사.   서울 : 대한 기독교 서회,  1988

Zahrnt, Heinz. The Question of God(ET).  New York : Harcourt Brace & World   Inc. 1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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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세드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  


       I.  서  론


1.  문제의 제기와 연구목적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요일 4:8-9)고 성경은 말한다.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하여 말씀하시는데, 특히 구약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역사속에서 살아 역사하시고 행하시는데, 특별히 하나님께 선택받은 백성으로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게 하는 언약속에서 하나님 자신을 드러내시는 것을 보았다(출34:6).이에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사랑이 언약을 통하여 나타났다고 보아 구약의 언약에 관하여 연구하게 되었고 그것을 연구하는 동안 언약을 맺게하는 그 동인은 무엇인가? 왜 언약을 맺으시는가? 그리고 그 언약이 어떻게 발전되어가며 그 언약이 어떻게 유지되는가를 관찰하게 되었다. 하나님 자신이  헤세드이시면서 헤세드가 많으신 분이라고 말씀하심을 보고 헤세드의 의미에 관해 질문하게 되었다.이 단어에 나타난 의미는 무엇이며 언약과의 관계는 무엇인가? 신약과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이러한 질문들을 제기하면서 언약개념을 중심으로 그 언약의 본질이며 언약을 끝까지 지키시고 이루시는 하나님의 속성으로 나타난 헤세드를 연구하고자 한다.

구약의 통일성에 관하여 많은 의견이 있다.   혹자는 구약은 통일성이 없다고 말하며 혹자는 주제의 다양성을 듣고 있으며 혹자는 신약과 전혀 관계가 없는 것으로 말하고 있으며 혹자는 단지 이스라엘의 역사책에 불과 하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폰 라트(Von Rad)는 구약신학의 핵심을 ‘구속사(Heilsgeschichte )1)로 보았으며 아히로트(W.Eichrodt)는 구약의 핵심을 ‘언약’으로 보고있다.1)  그 이외도 많은 학자들이 자기 나름대로의 구약의 중심 주제를 말하고 있다.   젤린(E.Sellin)은 ‘하나님의 거룩성’을 1), 코러(Ludwig Koehler)는 ‘하나님의 주권’1)을 신약성서의 핵심으로 보며, 프리젠과 포러는 같은 입장으로 이중적인 개념으로 ‘하나님의 통치와 하나님과 인간과의 교제’1)를 신약신학의 중심 주제로 보고있다.

이와같은 단일 개념들을 통합할 수 있는 새로운 미래를 제공하는 입장들이 있는데 그들 주장의 논지를 보면 구약성서는 세상이나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행위라고 전제하면서 신약이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되어 있는것과 마찬가지로 구약도 그 본질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언급하면서 하나님은 역동적으로 통합하시는 구약의 중심이라고 제안하며 하나님은 세상과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써 나타내 보이시고 그 안에서 하나님은 선택과 언약을 통한 특별한 방법으로 이스라엘과 사람에게 계시 하신다고 주장한다.1)

본인은 이러한 입장에 서서 구약의 주제는 무엇이든간에 결국은 하나님과 관련을 맺고있다는 사실에 촛점을 맞추었다. 구약의 하나님은 행동하시는 하나님으로 그 행동은 언약을 통하여 나타나고  그 언약의 본질은 무엇인가? 그 행동의 동인은 무엇이며  하나님의 사랑의근원은 무엇인가?  구약에서 언약의 본질은 무엇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사랑인 아가페와의 관계는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들에 대하여 구약의 전체에서 큰 맥락으로 흐르고 있는 언약을 중심으로 하여 그 언약의 근원을 찾아보고자 한다.


2. 연구 방법


본문 2 장에서는 헤세드의 의미를 찾아보려고 한다.   먼저 어원적인 의미를 알아보고 구약에서 헤세드가 사용된 것을 찾아보며 이 단어가 지니고 있는 신학적 의미를 고찰하고자 한다.

제 3 장에서는 헤세드와 베리트의 상관관계를 살펴 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베리트의 어원적 고찰과 유형을 살펴보면서 헤세드는 언약의 본질로서 언약과 깊은 관계가 있음을 알아보려고 한다.

제 4 장에서는  구약에 나타난 대표적인 언약들과 그안에서 헤세드를 살펴볼 것이다.

제 5 장에서는 결론으로 본문을 간단히 요약하려고 한다.



                   II. 헤세드의 의미

이 장에서는 헤세드라는 단어의 의미를 알아보기 위하여 이 단어의 어원적인 의미를 사전들을 중심으로 알아보며, 구약에서 사용된 용례를 연구하여 구약에서의 헤세드의 용례와 의미를 파악하고, 이 단어를 연구한 학자들의 견해를 살펴봄으로 헤세드의 의미를 파악코자 한다.


1.  어원적 의미


구약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완전하게 표시하는 단어가 있다면 그것은 ‘헤세드’가 될 것이다.1)  이같은 입장에서 외스터레이(Oesterley)도 이 헤세드를 설명하여 말하기를 “구약에서 헤세드란 말이 나오는 본문을 살펴보면, 이 말이 얼마나 다각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를 알 수 있다.   이 말은 히브리어가 우리에게 알려 주고 있는 가장 위대한 말의 하나이며, 영어로서는 이것을 도저히 올바르게 번역해 낼 수가 없다”1)고 말하고 있다.

명사로서의 헤세드는 중기 히브리어 (Middle Hebrew), 유대 아람어 (Jewish Aramaic),  옛 시리아어에서 그것의 사용이 발견되는 히브리어이다.   그러나 이것의 어원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강조 재귀 미완료태에서 단지 두번 나타나는 어근  -----   는 형용사에서 파생한 것이 분명하다.   “상호 도움을 위해 끈으로 동이다”라는 뜻의 아리비아 어근인 ------- 는 s 에서 s 로 요구된 변화때문에  헤세드의 어원적 의미에 도움을 줄 수 있다고 하겠지만 불확실한 점이 있다.1)

스네이쓰(Norman H.Snaith)역시 어원학적 난점을 지적하면서  헤세드란 단어는 이중적 내지는 모순적 어의를 가진 말로 설명하였는데 그에 의하면1) 헤세드에는 “수치”( 레 20:17 ) “질책”( 잠 14:34 )등의 의미가 있다.  시리아어에서는 " d "음을 강하게 하면 “질책”이 되고 부드럽게 하면 “친절”이라는 의미가 된다.1)

사전에서 그 의미를 살펴보면 A Hebrew and English Lexicon of the Old Testament1) 에는 선(goodness), 친절(kindness), 인간이 인간을 향한 친절(kindness of men towards men), 자비(mercy), 애정(affection), 경건(piety), 사랑스런 친절(loving kindness), 하나님의 친절(kindness of God), 영원한 사랑(everlasting love), 친절한 행위(deeds of kindness)등으로 번역되어 있다.

The Interpreter's Dictionary of the Bible1)에는 견고한 사랑(steadfast love), 친절(kindness), 충성(loyalty), 자비(mercy), 충실(faithfulness), 친절한 사랑(kind love), 동정(pity)으로 번역되어 있다.

Gesenius' Hebrew-Chaldee Lexicon to the Old Testament1) 에는 좋은 의미의 헤세드는 어떤 사람을 향한 열의(zeal towards anyone), 사랑(love), 친절(kindness), 인자(benignity), 자비심(benevolence), 자비(mercy), 동정(pity),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경건(piety of men towards God),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grace of God towards men),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자비(mercy of God towards men)와 같은 뜻을 지니며, 나쁜 의미로는 질투(zealousness), 어떤 사람을 대항하는 열정(ardour against anyone), 시기(envy), 비난(reproach)의 뜻을 갖고 있다고 한다.

Nelson's Expository Dictionary of the Old Testament는1) 사랑스런 친절(loving kindness), 견고한 사랑(steadfast love), 은혜(grace), 자비(mercy), 충실(faithfulness), 선(goodness), 헌신(devotion)등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The Interpreter's Dictionary of the Bible1)는 견고한 사랑(steadfast love), 영원한 사랑(everlasting love), 생명(life), 영혼(spirit), 진리(truth)로 번역하고 있다.

Dicionary of the Bible1)에는 자비(mercy), 친절한 사랑(loving kindness), 은혜(grace), 은총(favor), 선(goodness) 등으로 번역되어 있다.

홀라데이(W.Holladay)는 그의 사전에서 종종 친구, 손님, 주인과 종과의 관계에서의 충성(loyalty), 충실(faithfulness), 은총(favor), 친절(kindness), 은혜(grace), 신의 행위(godly deeds), 은혜의 사건(evidence of grace)등으로 풀이하고 있다.1)

와드(James M.Ward)는 생명(life), 자비(mercy), 경건(piety), 충성(loyalty), 변치 않는 사랑,(constant love) 선(goodness), 견고한 사랑(steadfast love)등으로 번역하며, 그것은 사랑과 강한 애정과  견고한 충성, 그리고 헌신과 연결된다고 말한다.1)

개역 성서에서의 헤세드에 대한 번역어로는 여러가지가 있다.  이것을 사용 빈도에 따라 기록하자면, 인자, 은혜, 긍휼, 인애, 은총, 선대, 후대, 자비, 우의 등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헤세드에는 여러가지 뜻이 번역되고 있다.   친절, 자비, 충성등과 함께 질투, 시기, 비난, 질책등의 뜻도 포함하고 있어서 하나의 뜻으로 나타내기는 어려운  단어임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이 단어가 구약성서에서는 어디에서 어떻게 쓰였는지 살펴보고 이 헤세드의 단어의 뜻을 알아보도록 하겠다.


2.  구약의 용례


구약 신학 사전 (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Old Testment)에 의하면 헤세드는 구약성서에서 245번 나온다.   각 책에 나오는 것을 보면 창세기에 11번, 출애굽기에 4번, 민수기에 2번, 신명기에 3번, 여호수아에 3번, 사사기에 2번, 룻기에 3번, 사무엘상하에 16번, 열왕기상에 5번, 역대상하에서 15번, 에스라에 3번, 느헤미야에 5번, 에스더에 2번, 욥기에 3번, 시편에 127번, 잠언에 10번, 이사야에 8번, 요나에 2번, 미가에 3번, 스가랴에 1번 나온다.   레위기, 열왕기하, 전도서, 아가, 에스겔, 아모스, 오바댜, 나훔, 하박국, 스바냐, 학개, 말라기에는 나오지 않는다.1)

에벤 쇼샨(A.Even-Shoshan)은 그의 성구 사전에서 구약에서 헤세드가 246번 쓰인것을 제시하고 있다.1)  그의 책을 근거로 하여 구약에서 헤세드가 쓰인 것을 보면 아래표와 같다

모세

오경

21회

창세기 12회

19:19 20:13 21:23 24:12,14,27,49 32:1,10, 39:21  40:14  47:29

출애굽기 4회

15:13  20:6  34:6, 7,

민수기   2회

14:18, 19

신명기   3회

5:10, 7:9,12

역사서

50회

여호수아 2회

2:12, 14

사사기   2회

1:24  8:35

룻  기   3회

1:8  2:20  3:10

사무엘상 4회

15:6  20:8,14,15

사무엘하11회

2:5,6  3:8  7:15  9:1,3,7  10:2  15:20 16:17 22:51

열왕기상 4회

2:7  3:6  8:23  20:31

역대상   4회

16:34,41  17:13  19:2

역대하  10회

1:8  5:13  6:14,20,21,42  7:3  24:22 32:32 35:26

에스라   3회

3:11 7:28 9:9

느헤미야 5회

1:5  9:17,32  13:14,22

에스더   2회

2:9,17

시가서

지혜서

141회

욥  기   3회

6:14  10:12   37:13

시  편 128회

5:8  6:4  13:5  17:7  18:51  21:7  23:6 외 다수

잠  언  10회

3:3 11:17 14:22,34 16:6 19:22 20:6,28 21:21 31:26

선지서

30회

이사야   7회

16:5  40:6  54:8,10  55:3  57:1  63:7

예레미야 6회

2:2  9:23  16:5  31:3  32:18  33:11

예레미야애가

2회/ 3:22,32

다니엘   2회

1:9  9:4

호세아   6회

2:21  4:1  6:4,6  10:12  12:7

요  엘   1회

2:13

요  나   2회

2:9  4:2

미  가   3회

6:8  7:18,20

스가랴   1회

7:9


위의 본문들을 살펴보면 헤세드가 성경에 많이  등장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특히, 시편에 가장 많이 언급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헤세드가 개역 성서로 번역된 것을 살펴보면 인자, 은혜, 긍휼, 인애, 은총, 선대, 후대, 자비, 우의등이다.   역시 뜻이 여러가지로 번역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헤세드가 쓰인 본문을 보면 크게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서 사용됨을 볼 수 있다.  그래서 헤세드를 인간의 헤세드와 하나님의 헤세드로 구분해서 보고자 한다.


1)  인간의 헤세드


먼저 인간의 헤세드를 살펴보는 것은 하나님의 헤세드를 더욱 더 이해하기 쉽게 하기 위함이다.

A Hebrew and English Lexicon of the Old Testament에서는 인간의 헤세드를 크게 네가지로 보아,  첫째는, 사람들이 사람들을 향한 헤세드 즉, 호의와 자선을 행하는 헤세드이다.1)  둘째는, 특별히 낮고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에게 베푼 헤세드 즉, 자비이다.1)  세째로, 드물게 사용되기는 하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스라엘의 애정과경건으로써의 헤세드이며1)   네째로, 사랑스런 모습의 헤세드이다(사 40:6).

글뤽(N.Glueck)은 개인간 관계를 크게 다섯가지로 나누어 보고 있다.   첫째, 친척간의 관계 - 사라와 아브라함( 창 20:13), 라반과 브두엘과 이삭( 창 24:39 ), 요셉과 이스라엘( 창 47:29 ), 오르바, 룻, 말론, 기룐, 나오미( 룻 1:8 ) , 겐사람-이스라엘 사람( 삼상 15:16 )    둘째, 주인과 손님간의 관계 - 사람들과 롯( 창 19:19 ), 아비멜렉과 아브라함( 창 21:23 ), 정탐과 스파이들( 수 2:12,14 )  세째, 친구 사이의 관계 - 다윗과 요나단( 삼상 20:8,14 ), 다윗과 므비모셋(삼하 9:1,3,7 ),  다윗과 하눈( 삼하 1:2 ), 후새와 다윗( 삼하 16:17 ), 솔로몬과 바실래( 왕상 2:7 ),  네째, 왕과 신하들과의 관계 -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과 사울( 삼하 2:5 ), 아브넬과 사울의 집( 삼하 3:8 ), 여호야다와 요하스( 대하 2:22 )   다섯째, 두 편간에 한편에서 이례적인 친절한 행위를 시작할 때 - 죄수와 요셉( 창 40:14 ), 요셉 족속과 벧엘에서 나온 사람( 삿 1:24 ), 이스라엘과 여룹바알( 삿 8:35 )등을 들어 헤세드의 일반 개념을 호혜성과 공동 부조와 충성이라고 하였다.1)

헤세드의 의미를 좀 더 알아보기 위해 헤세드가 사용된 본문을 관찰해 보면 헤세드의 행위를 받은 사람은 받은 헤세드에 상응하는 헤세드로 반응한다.   마치 다윗이 요나단에게 요청했던 헤세드의 행위와 같이 요나단도 다윗에게 다윗의 헤세드를 요구한다( 삼상 2:8,14 ).   다윗과 요나단은 우정으로 결속하였다.   그들에게는 신성한 언약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맺은 사이이다( 삼상 18:3, 삼하 21:7 ). 이 언약 때문에 그들의 우정은 형제애로 변화되었다.   다윗과 요나단간에 있는 헤세드와 언약은 타자를 위해 책임을 져야 하는 행위의 양식이고 친구의 복리와 안전을 돌봐 주는 책임하에 있는 것이다.1)   이러한 언약으로 다윗은 요나단에게 헤세드를 요청하였다( 삼상 20:8 ).

요나단은 다윗에게 자기의 생애중에 “하나님의 헤세드”를 베풀것과 자기 가정에 영원히 헤세드를 베풀것을 요청하였다.   요나단이 요청한 헤세드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된 헤세드이다( 삼상 20:14 ) .  다윗은 왕으로 등극한 후 요나단의 가정에 헤세드를 베풀었다.   다윗과 요나단이 맹세한 헤세드는 은혜(Grace)도 자비(Mercy)도 아니고 언약적 충성에 의해 요청된 형제애였으며   헤세드는 동맹자간의 공동 관계에서 요청되는 행위이다.   언약에 의하여 요구되는 책임과 권리는 헤세드에 의한 일치된 행동으로 해석된다.   이런 의미에서 헤세드와 언약의 관계에 있어서 헤세드는 언약의 참 본질이다.1)

이스라엘은 하나의 공동체로 발전되면서 하나된 사람들 - 친척,친구,주인과 종 - 사이에 상호 책임이라는 관계성 속에 인간 관계를 맺게되었고 이러한 관계성 속에서 헤세드는 성실성과 신실성으로 나타났다( 출 34:6 ).


2)  하나님의 헤세드


인간의 헤세드는 서로에게 헤세드를 받은것에 상응하는 헤세드를 베품으로 서로에게 책임을 갖는 것임을 볼 수 있다.   그러면 이 인간을 만드신 하나님의 헤세드는 어떤 것일까? 여기에서는 하나님의 헤세드를 살펴보고자 한다.

하나님의 헤세드는 그의 피조물의 필요에 은혜를 베푸시는 자비, 친절, 하나님의 자비하심이다(loving kindness)1).    하나님의 사랑, 자비를 구체적으로 보면, ① 적과 어려움에서의 구출, 구원이다.1)  사람들은 헤세드안에서 믿어야 한다( 시 13:6 , 52:10 ).   그것안에서 즐거워해야 한다.1)   그안에 소망을 가져야 한다.1)   ② 죽음으로부터 생명의 보존1)  ③ 영적 생활의 생명을 주는것1)   죄에서 구원 ( 시 25:7, 51:3 )  ⑤ 언약을 지킴에서 나타난다. 아브라함과( 미 7:20 ),모세와 이스라엘과 함께, 언약과 하나님의 사랑을 지킨다.1)  다윗과 그 왕국과 함께1), ꇴ내 시온과 함께( 사 54:10 ) 언약 헤세드를 지킨다.

또한, 헤세드는 하나님의 다른 속성들과 함께 분류된다. 즉, 헤세드는 하나님의 속성중의 하나이며, 하나님의 속성으로는 자비와 충성1), 진리( 삼하 2:6, 15:20 ), 진실1), 긍휼1), 공의(렘 9:24, 시 10:1 )등이 있다.

여호와 헤세드는 성경 본문으로는 아브라함의 언약 이후에 나타난 것으로써(창 2:14) 하나님의 언약의 충실하심( 창 32:9-10, 39:21 )을 나타낸다.   모세시대에 이르러서는 헤세드는 더욱 여호와의 선택의 관념과 밀접하게 관계됨이 드러났다.   여호와는 그 본성이 헤세드이신데 언약 이전에 이미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을 택하셨으며 언약하신대로 택한 백성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셨다.1)  하나님께서는 다윗과 다윗 자손에게 헤세드를 베푸실 것을 약속하셨다( 삼하 7:14-16 ).   하나님의 헤세드는 인간을 향하신 무한하신 사랑과 은혜로서 특히 이스라엘 백성과 영원한 관계로 그의 헤세드를 보여주신다.


3.  신학적 의미


여러 신학자들은 헤세드라는 단어를 여러 각도에서 해석하고 있다.   이들 신학자들의 신학적  해석을 살펴봄으로써 헤세드의 의미를 좀 더 알아보기로 한다.

다드(C.H. Dodd)는 LXX의 역자들이 헤세드를 어떻게 번역 하였는지를 검토 하였는데, 일반적으로 헤세드가 신인간( 神人間 )에 언급되기는 하였으나 ελεοs, ελεθημοσυνη, ελεημων,  πολυελοs로 번역 되었음을 발견하였다. 이 중에 ελεοs,ελεημοσυνη는 히브리어의(      )  (은혜스럽다)와   (       )(불쌍히 여기다)의 어근에서 나온말로 사용 되었음을 지적하고 오경에서는 특히 “kindness”의 의미로 지배적으로 사용되고 있음을 밝혀 냈다.1)

린드블롬(J.Lindblom)은 고통당하고 억압받는 약한 사람에 대한 동정심(compassion), 자비(mercy)라고 하며, 충실(faithfulness), 결속(solidarity), 충성(loyalty)이기도 하고 그것은 우정과 헌신의 행동으로서 나타난다고 말한다. 1)

젤린(E.Sellin)은 헤세드를 구체적 관계에서 나타나는 사랑이라고 하면서 부부, 부자, 하나님과 예배자 사이에서 나타나는 사랑이라고 설명하였다.   그러므로 의무적 요소가 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인격 관계에 있어서 모든 바른 행동의 원천과 동기가 되는 영혼의 본질이라고 말한다.1)

아히로트(W.Eichrodt)는 여호와 헤세드는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사건 속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자발적 의지의 발로요 행동으로 보았다.1)

귈레(Jaques Guillet)는 헤세드는 어떤 사람에 대한 감상이나 감정이 아니고 책임 혹은 의무의 진정한 감성이라고 한다.   이는 특별한 행동의 요청을 강요하며 헤세드는 결혼이나 주객간의 관계, 주종간의 관계, 우정이나 은혜의 빚에서 생기는 결합으로 연합된 사람들 간에 존재하는 자세를 지적하는 것이며  이와 같이 헤세드는 이스라엘의 도덕적 사회생활의 구조에 있는 충성과 신뢰의 기본요소를 구성하는 것이다고 주장한다.1)

스네이쓰(Snaith)는 헤세드의 기본적 의미를 “kindness” 혹은 “맹렬심”이라고 하였다.   그는 충성과 신뢰의 태도를 지시함을 알았으나 신실성 보다는 오히려 “kindness”를 더 좋아 하였다.   그는 헤세드의 가장 좋은 번역은 “순애” 또는 “언약적 사랑(covenantal love)”이라고 한다.1)

김 정준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남다르게 사랑하신 그 사랑이 이 헤세드란 말로써 표시되었는데, 우리 말로 번역하자면 단순히 ‘사랑’이라고 함보다 ‘은혜’ 또는 ‘은총’이라 함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고  말하고 그 이유는 이 헤세드는 하나님이 사람을 먼저 사랑하심을 나타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1)  곧“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냈음이니라”( 요 14:10 )

신학적 의미로의 헤세드는 인간과 인간사이의 다양한 관계속에서의 충성과 자비, 서로간의 책임, 친절(kindness)이라고 말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사랑의 속성으로서 의지의 발로이며 행동으로 또는 계약적 사랑, 은혜, 은총의 의미가 있음을 보았다.

지금까지 헤세드의 의미를 어원적으로, 구약의 용례에서, 신학적인 의미를 통하여 고찰해 보았다.   이 고찰을 통하여 헤세드의 의미는 인간 상호간의 헤세드와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헤세드로 크게 구분됨을 알았다.   인간의 헤세드는 상호간에 언약의 관계를 통하여 서로 주고 받으며 서로 요구하는 것으로 서로에게 그 언약에 대한 충성과 신뢰의 관계를 갖게 된다.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헤세드는 하나님이 먼저 인간을 선택하시고 인간과 구체적인 관계를 맺으며 그 관계를 지속시키는 것으로 이해했다.   하나님의 자발적 의지의 발로와 행동으로써 인간과 언약을 통한 사랑을 보여 주시는 것이다.



            III.  헤세드와 베리트의 상관 관계

      

     하나님의 구원은 선재적 은총에 기인하고, 그 선재적 은총은 하나님의 독자적인 선택 사건으로 나타난다.   선택 사상은 구약 성서의 가장 중요한 사상의 하나로서,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과 특별관계를 맺고 있다1) 는 사상이다.   이사야 51장 1절에서 2절에 “아브라함이 혈혈단신으로 있을 때에 내가 부르고 그에게 복을 주어 창성케 하였느니라”하여 하나님의 주권적 자유하심의 선택을 천명하신다.   하나님의 독자적 축복으로 아브라함의 씨가 창성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온다1)는 것이다.

     선택의 직접적 동기는 하나님의 사랑에 기인한다.1)  ꇴ이스라엘에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언약 상태에 대한 근거가 되는 단 하나의 원인이 된다.1)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도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것도 그리고 아들을 세상에 구세주로 보내신 것도 하나님의 사랑에 기인한 것이다1)( 요 3:16 ).   하나님의 구원사는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을 통해서 이뤄져 간다.   그것은 하나님의 선택의 섭리가 이끌어 가는 씨의 흐름이다.   이 선택은 언제나 하나님의 언약에 의한 계약 관계를 맺게 된다.1)  이선택은 하나님의 독자적 선재 은총에 의해 근본적 사건을 형성한 것으로 계약이라는 틀안에서 활동되어진다.    선택은 자연히 양자 (하나님과 선택받은 자) 사이에 새로운 관계에 돌입되는 것을 의미한다.   거기에는  계약이라는 줄을 통해 서로를 묶게 된다.   구약의 씨흐름은 계약이라는 구조안에서 전개되어간다.   씨의 흐름을 이끌어가는 구속력은 계약의 언약이었다.1)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계약 사상 혹은 계약에 따른 하나님의 약속 성취에 대한 주제는, 이스라엘 전체 역사는 물론 특별히 민족 형성사를 구축하고 있는 중심 주제이다.1)  ꇴ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이 계약에 기초해 있다고 할 수 있다.1)

이와같은 관점에서 이 장에서는 헤세드와 베리트와의 상관 관계를 밝혀 보고자 한다.  이를 위하여  베리트의 의미를 어원적으로 고찰하고 베리트의 유형과 구약적 의미를 살펴봄으로 헤세드와 베리트의 관계를 규명할 것이다.    먼저 어원적인 의미를 알아보고 그 베리트의 유형과 구약에서의 베리트의 의미를 알아보고자 한다.


1.    베리트의 의미


1)    어원적 의미


계약을 나타내는 히브리어는              (berith)로서 언약,계약으로 대개 번역하고 있다.1) 70인역은 베리트를 διαθηκη(diatheke:testament)라 번역했다.   베리트의 동사 어근은 히브리어에서는 분명치 않고 아카드어 baru(속박하다, 의무를 지우다:fatter, bind)에서 찾는다.1)

구약성경에서 계약의 어원에 관한 연구 결과들은 그 의미를 확정짓기가 어려움을 보여 준다.1)  곧, 이  단어의 어원에 관해서 여러가지 주장이 있는데 크게 3가지로 나눠 볼 수 있다.

첫째, 올브라이트 (W.F.Albright)등은 베리트는 아카디어의 ‘사슬’, ‘속박’을 의미하는  birit에서 온 것이라고 주장하는데1)  ꇴ 경우 베리트는 결속, 속박, 구속력의 의미를 암시하게 된다.

둘째, 퀼러(L.Koehler), 야콥(E.Jacob)등의 학자는 ‘먹다’의 뜻을 가진 동사          와 관련을 짓는다.   이 의미가 발전해서 식사를 함께 하는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 되었고 그 후에 계약이라는 용어는 이 어근에서 분리되었다고 말한다.1)

셋째, 마르틴 노트(M.Noth)는, “계약”(berith)이란 히브리어 단어는 히브리어 전치사      (between)에 해당하는 아카디아어‘birit'{to kill and ass between(birit)the Hanu and Idamaras}에서 유래했다고 주장한다.1)  즉, 위의 문장에서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짐승의 이름이 탈락되자, “to kill xxx between the Hanu and Idamaras"(하누와 이다마라스 사이에 살해한다)로 단축되었다.   뒤이어 계약 당사자 이름이 빠져나가 "to kill between(birit)"(사이에 살해하다)로 단축되었다가 마침내 ‘사이에’(between=birit)가 명사화가 되어 본래 뜻과는 다른 “계약”이라는 용어가 되어 이것이 히브리어의 베리트로 전래되었다고 본다.  그래서 계약을 맺는다는 것이 --------  --------(to Cut a Covenant)로 사용됐다고 보는 주장이다.1)

베리트의 어원에 관한 주장이 상이하나 창세기 15장에서 아브라함과 하나님과의 계약 체결 의식이 바로 마리 문서에 나타나는 풍습에 근거하고 있다고 볼 때, 노트의 주장이 타당하다고 보는 견해1)에 이르기로 한다.


2).  계약의 유형


멘덴홀(George E.Mendenhall)은 구약의 모세 계약과 주전 15세기에서 12세기의 옛 헷족속(Hittites) 조약의 구조를 비교함으로써 계약의 성격을 규정하고자 하였다.1)  그는 옛 헷족속들에게는 동등적 조약(Parity treaties)과 종주권적 조약(Suzerainty treaty)이 있음을  발견했다.

첫째, 동등권적 쌍무 계약(Parity Covenant) : 멘덴홀(George E.Mendenhall)은, 옛 헷족속(Hittites:1500-1200 B.C.)의 계약 형태를 연구하여 구약성서에 있는 계약과 비교했다. 동등 조약이란 당사자간의 동등한 쌍무 계약으로, 똑같은 입장의 특권과 책임을 가지고 계약을 맺는 것을 말한다.   사무엘상 18장3절,4절에서 요나단과 다윗의 언약에서 보듯이 개인적인 차원일 수도 있고, 집단적인 차원(수9:15)일 수도 있다.   페데르센은 이 계약을 “참여 당사자들에 부과하는 권리와 의무를 다같이 지니는 상호 관계”라고 본다.1)

둘째, 종주권적 일방적 계약(Suzerainty Covenant) : 옛 헷족속(Hittites)의 조약에도 나타나는 형태로 강자가 약자를 자신에게 이끌어 은혜를 입히고, 그대신 일정한 조건을 부과하는 행위를 통해 그 효력이 발생하는 관계이다.1)  종주권적 계약은 종주국과 그 종속국 사이에 형성되는 정치적 계약이다.   종주국이 종속국에게 계약을 제시하면, 종속국은 그 계약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일방적 계약이다.   그래서, 종속국은 종주국의 보호를 받고, 종속국을 향한 스스로의 자선 행위를 나타낸다.1)

이 조약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들은 다음과 같다.

①  지배하는 군주의 주재권을 선포하는 서두 (Preambulatory)

②  과거의 자비로운 행적을 강조하는 역사서문 (Prologue)

③  마음의 충성과 구체적 행동  사건을 나타내는 넓은 범위의 규정들 (stipulations)

④  군주와 봉신이 각각 자기들의 신 앞에서 두 개의 조약 사본을 보관하는 조항들 (provisions)

⑤  생명이 없는 것 (inanimate objects)까지도 소환시킬 것을 포함한 증인을 세우는 조항

⑥  계약의 충성과 관련된 축복과 저주의 말

이와같은 형태의 조약 문서를 분석한 결과 멘덴홀은 출애굽기와 신명기에 나오는 십계명을 야웨와 이스라엘간의 조약문과 같은 일부로 볼 수 있다고 한다.1)  즉, 출애굽기 20장 2절의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다”는 구절은 조약 문서에서 계약을 체결하는 주권자로 소개하는 전문과 같으며 이것 역시 역사속에서 군림하시고 그가 역사를 통해 베푼 아량으로 백성들의 충성심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같은 역사적 서언 다음에는 주권자의 의사가 표시되는데, 이 의사는 상세한 내역 보다는 절대적인 원칙으로 천명된다.1)

멘덴홀의 뒤를 이어 많은 학자들이1) 구약성경의 계약과 고대 근동 지방의 조약 사이의 유사성을 찾는 시도를 했다.

그러나 한스 요아킴 크라우스(H.J.Kraus)는 이스라엘의 예배와 고대 동방 조약 사이의 어떤 유사성의 비교 연구는 오히려 구약 성경의 진실된 개념을 왜곡시키거나 또는 도외시할 우려가 있다고 그의 연구 결과를 밝혔다.1)

또 쉬탐 (Stamm)도 「계명의 최근 연구 동향」 제 2판에서 거의 같은 결론을 내렸다.   그는 계약 자체가 이같은 조약 형태로 설명되거나 또  표현되어 있지 않다고 보고 단지 이스라엘 의식 절차 진행에 있어 일종의 유사성이 있다는 점만 시인할 뿐이다.1)

이상의 계약의 어원에 관한 사전적 내지 철학적 탐구와 고대 근동 지방의 비교 문헌을 통한 연구 결과는 계약의 개념에 관해 만족할 만한 답변을 제공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계약의 유형에는 동등권적 쌍무 계약과 종주권적 일방적 계약이 있으며 이 유형이 구약 성경의 계약과 유사성이 있는가 없는가에 대한 시도들이 있었음을 보았다.

그러면 구약에서 사용된 계약은 어떤 의미로 쓰였는지 살펴보기로 하겠다.


3)  구약적 의미


베리트라는 말이 여러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구약에서는 거의 대부분이 하나님과 사람간의 종교적 계약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개인적인 계약(아브라함과의 계약)일 수도 있고, 민족적인 계약(시내산 계약)일 수도 있다.   그러나 한가지 공통점은 하나님이 계약의 당사자로 출현하신다는 점이다.1)  이런 의미에서 베리트  는 종교적 계약이라 할 수 있다.

이 계약은 계약 체결이 항상 하나님께로부터 사람에게로 향하고 있다.1)  ꇴ또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간의 계약 형태는 독특한 면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계약을 맺으실 때, 언제나 계약 관계의 규칙과 규정을 입안하는 권리를 가지신 주권자로 나타난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계약에 있어 하나님은 언제나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이중적 의미를 부각시키신다. “너는 야웨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야웨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신7:6-11).   이것은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이 일방적으로 먼저 이스라엘 조상인 족장들과 계약을 체결하셨기 때문에, 거기에 근거(매이심)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택하신 것으로 언급하신다.(출 7:8).  여기에 근거한 이스라엘과는 “야웨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은 야웨의 백성이다”는 이중 표현 형식, 즉 양쪽이 다 책임을 져야 하는 법적인 조약 관계로 야웨와 이스라엘을 끌어들이는 형식으로 결합 되었다고 본다.1)  그러나, 여기서도 주도권은 하나님이 가지고 계심을 볼 수 있다.

계약 체결의 구체적 형식은 율법이라는 계약법을 통해 존속되어 간다.   그리고,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간의 계약 체결시 후렴과 같이 반복되는 조건, 즉, 만약 이스라엘 백성이 그 계약을 충실히 준행하면 하나님의 보호와 축복이 보장되며, 불충실로 계약을 파기하면 저주, 심판, 포로 생활 등이 임한다는 내용을 제시한다.  즉, 구약 성서에서 하나님과의 계약은 모두 ‘상호 협약’이 되는 뜻을 내포한다.  일방적인 법규를 암시하면서 하나님의 약속에만 한정되어 있지 않다.  즉, 그것은 역시 신성한 명령을 포함하고 있다.   그래서, 사람은 순종으로 반응을 보여야 한다.1)

보스(Geerhaardus Vos)가 말한대로 이 계약의 특성은 이스라엘 종교가 하나님과 그 백성 사이에 참되고 의식이 있는 그리고 영적인 교제의 종교임을 드러내 주고 있다.1)  그리고 이 계약의 성격속에는 하나님의 의지와 목적을 드러내주는 계시가 포함되어 있다.   에드몽 쟈꼽(Edmond Jacob)은 선택, 계약, 선교는 분리될 수 없다고 지적하였는데, 이 셋 모두는 구속의 역사 가운데 나타내신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일부이라고 말한다.1)

또한 이 계약은 피로 맺은 약정 또는 삶과 죽음의 약정이라 할 수 있다.1)  이는 하나님과 인간과의 결속의 궁극성을 표현하며, 계약관계의 공식적인 시작을 표현하는 전문 용어는 삶과 죽음의 깊이를 생생하게 나타낸다.   계약 수립의 시점에서 동물의 절단은 계약을 서약할 “죽기까지의 서원”(Pledge to death)을 상징한다.1)  그렇다면 베리트는 죄인을 구원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부과하신 의무가 되며 또한 하나님의 선택적 사랑을 초래키 위하여 그들이 상속받은 도구가 된다 ( 출 3:6-8, 시 89:3-4 ).  그러므로 존 머래이(John Murray)는 “계약을 자른다”는 성경의 구절은 계약을 처음으로 정초하는 문맥에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말한다.1)

마지막으로 베리트가 피로 맺은 약정 혹은 삶과 죽음의 약정으로서, 하나님과 인간과의 결속의 궁극성을 의미한다는 것은, 그것이 구원의 도구 또는 필수요소임을 뜻한다.   베리트를 통하여 하나님은 성서 전체에서 발견되는 은혜의 약속, 곧,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는 약속을 성취하셨다.

베리트의 구약적 의미는 하나님께서 계약의 당사자로서 먼저 사람에게 향하여 계약의 입안자로서 주도권을 가지며 율법을 통하여 계약을 존속해가며 이스라엘 백성은 그것에 대하여 순종으로 반응하는 것이다.   이 계약은 삶과 죽음의 약정으로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과 하나님과 인간과의 겸손의 궁극성을 의미한다.   그래서 계약을 통하여 하나님과 인간이 결속되며 그 결속은 구원의 도구로써 하나님의 은혜의 약속을 성취하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2.  헤세드와 베리트의 관계


지금까지 베리트의 의미와 유형을 살펴보았다.   여기에서는 헤세드와 베리트의 상관 관계를 알아보고자 한다.

김 정준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에 있어서, 사랑의 선수(initiative)를 보여 주심이 이스라엘 편에 있지 아니하고 하나님 편에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은 신명기 7장 7절 ( 여호와께서 너희를 택하심을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가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 이라며 이같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된 이유가 이스라엘에게 있지 아니하고 하나님 자신에게 그들을 사랑하고자 하시는 긍휼의 심정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시편 136편에서 이 시인은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적 행동을 노래하고 그 민족 역사상에 있었던 여러가지 사실을 노래하면서 그 노래 한마디 한마디 끝에는 반드시 ‘후렴’과 같은 말 한마디  --------------------------  ‘ki-leolam hasdo'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시다”(이보다는 그 은혜로우심은 영원하시나이다)를 한다.   참으로 하나님과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바로 이해한 사람의 입에서는 -------------------------‘ki-leolam hasdo’란 노래가 나오지 않을 수 없을 만큼 하나님은 그들에게 헤세드를 베푸신 분이시라고 말하며1)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관계에서 하나님의 사랑의 주도권을 밝히고 있다.

패터슨(John Paterson)은 헤세드를 언약의 본질로 보고 헤세드 없이는 언약 체결과 계속을 할 수 없다며 헤세드는 언약자 양자중 한편이 상대에 주는 충성이라1)고말한다.

존슨(Aubrey R. Johnson)은 헤세드를 분석하면서 인간의 언약중에 있는 헤세드는( 삼상 20:8,  삼하 9:1 ) 헤세드가 언약적 술어에 대한 충성을 함축하고 있다고 밝혔다.    존슨은 헤세드가 “충성”으로는 적당한 번역이 될 수 없고 “충성”의 원의를 잃지않는 말로는 “헌신”(devotion)이란 말이 적절하다고 언급한다.1)

스네이쓰(Snaith)는 헤세드의 본질을 언약으로 보고 그 깊은 내용적 요소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헤세드는 언약의 사상과 연결하여 사용된다.   그 어간은 “열심”, “성실”과 “자비”, “친애”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언약안에 있다.   이것은 결코 각 개인 전부에 대한 일반적 사랑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언약 개념과의 이같은 밀접하고 끊을 수 없는 관계를 인식하지 않고서는 헤세드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할 수 없다.  이는 하나님과 인간간에 적용된다.   이는 구약의 하나님의 헤세드, 곧 이스라엘을 향한 그의 계약적인 사랑을 의미한다.   헤세드는 처음에는 히브리어에서 계약 당사자가 상호간에 지켜야 될 충성과 진실한 태도를 표시하였다....... 이말이 여호와와 이스라엘간의 언약 의미로 사용되었을 때 예언자들은 이러한 언약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유지될 수 있다고 깨달았다고 말한다.1)

앤더슨(B.W.Anderson)은 헤세드라는 용어는 하나님과 그의 백성과의 관계를 맺는 측면에서 고대 사회에 있었던 조약, 결혼, 친구 관계와 같은 정치적, 사회적 인간 상호 관계성의 맥락에서 이해하여야만 한다고 말한다.이 헤세드는 하나님이 그의 백성과의 관계에 특별히 적용되고 있는데 하나님의 충실성은 그의 백성과의 계약 체결에 근거를 두고 있고 백성들이 궁핍할 때 하나님께 도움을 호소하면 그분은 자발적인 의무, 즉, 은혜를 행하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계약에 대한 충실함은 개인 관계에서 볼 때 더 힘이 강한 편이 약한 편에 대해 나타나고 있다고 말한다.1)

김 정준은 헤세드와 베리트의 상관 관계를 다음과 같이 더욱 분명하게 말한다.   이 헤세드는 단순히 하나의 개념적인 것이 아니고 사실이며 행동인것이 출애굽 사건에서 나타났으며 또한 그들과 시내산에서 맺은 계약에서 더 명료해졌다.   여러 민족 중에서 특히 이스라엘만 택하심은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헤세드 이외에 아무러한 것으로라도 설명할 수가 없다.   그가 이스라엘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들을 애굽의 속박에서 건져내었고 이렇게 해방을 시킴을 받은 백성으로 살 방향과 그 생의 목적이 밝혀진 것이 시내산에서 맺은 하나님과의 계약이다. 이 시내산 계약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완전히 자기의 것으로 만들고 말았다.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은 그의 백성이란 관계가 맺어졌는데 이 계약의 중심이 하나님의 헤세드에 기인한다.   즉, 그의 헤세드가 이런 밀접한 관계로 하나님과 이스라엘을 결속하고 말았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고 이 율법을 통하여 이런 계약을 할 때 하나님께서 친히 그 계약의 중심이 헤세드인 것을 출애굽기 34장 6절에 이렇게 말씀하셨다.1)  “여호와께서 그 앞으로 지나시며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다.  이 구절은 하나님의 헤세드를 표시할 때는 언제나 나오는 일종 공식적인 어구이다.1)

이와같이  많은 학자들이 헤세드를 언약의 본질 혹은 중심으로 보고 있으며 언약의 체결과 유지에 밀접한 관련성을 말하고 있음을 볼때 헤세드는 언약과 끊을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다.   이렇게 볼때 헤세드와 베리트는 깊은 상관관계가 있음을 알수 있다.   특히 스네이쓰는 헤세드를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계약적 사랑임을 말하고 있다.   이와같은 입장에서 구약의 언약들 속에  나타난 헤세드를 살펴보면 헤세드와 베리트의 상관 관계를 더 깊이 알 수 있겠다.



         IV.  구약의 언약들 속에 나타난  헤세드

구약에는 많은 인물과 사건들이 등장하며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다.   특히 구약에는 중요한 계약 사건이 있는에 그것을 최 종진의 분류1)에  그 계약들에 나타난 헤세드를 고찰하고자 한다.


1.   아담과의 시작의 계약 ( 창 3:14-15 )


팔머 로벗슨(O.Palmer Robertson)은 하나님의 아담과의 계약을 시작의 계약 이라고 표현한다.   하나님은 특별한 창조 질서로서 자신과 인간을 결속하셨다.   그러나 인간은 금지된 선악과를 먹음으로써 이 관계를 깨뜨렸다.   그러나 하나님과 피조물과의 관계는 죄로 인하여 끝나지 않고 심판 가운데에서 구속의 희망이 나타난다.   즉, 저주의 말씀인 동시에 구속의 계약을 시작하시는 것이다.1)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육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종신토록 흙을 먹을지니라 네가 너로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창 3: 14-15 ).

위 구절은 하나님이 아담과 맺은 구속 계약의 시작을 잘 타나내 주고 있는데 하나님은 타락한 인간의 완전 타락에서 보호하시기 위하여 계약을 세워, 인간과 뱀에게 축복과 저주로 규제하였고 결국 하와의 후손이 인류의 원수에게서 최종적인 승리를 얻을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특히 창 3장 15절은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에 나타난 여자의 후손이 ‘씨-메시야예언’ 즉, 그리스도에 대한 원복음 (Proto-Gospel, Protevangelium)을 뜻하기  때문에1)그리고 이 원복음 속에는 첫 예언과 은혜 계약이 포함되어 있고 이 후에 창세기 3장 14절에서 19절은 구속 언약에서 아담과 맺은 언약 규정들을 기록하고 있다.1)

또한 본구절에서 ‘여인의 후손’은 누구를 지칭하는 것인가?  하는 문제는 논란의 대상이 되어온 구절이다.   카이져(W.Kaiser)는 여기에 사용된 히브리어 단어 ----(it, they)는 남성 독립인칭 대명사로 사용되었으며 그것은 선행사를 ‘자손’(seed)과 일치하는 문법적인 성을 사용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자손’(seed)이 집합적인 개념인가 단수적 개념인가를 묻고있다.

죤 밀턴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석의하고 있다.   창세기 3장 15절에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과 매우 유사한 예를 보게 되는데 그 씨는 개인적이며 복수적인 적용1)도 적용 된다고 보았다.   에드워드 영(E.J.Young)은 ‘여인의 후손은 보다 일반적인 의미에서 모든것의 처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궁극적이고 가장 깊은 의미에서는 동정녀 마리아와 그의 후손은 그리스도를 의미한다1)고 명했다.

결론적으로 아담의 언약에 나타난 강조점은 사랑과 믿음이며 은혜의 언약이며 구속의 언약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과 아담과는 계약이라는 말이 언급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금지된 선악과를 먹음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진 인간을 향해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계획을 실행하셨다.   그것은 구속의 약속으로써 창세기 3장 15절에 나타난 여자의 후손, 즉 그리스도를 약속하셨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 헤세드인 것이다.   이 언약에 나타난 헤세드는  여자의 후손인 그리스도의 약속하심과 그의 승리인것이다.


2.  노아와의 보존의 계약( 창 6:18, 9:8-17 )


      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한 아들들에게 일러 가라사대  내가 내 언약을 너희와 너희 후손과 너희와 함께한 모든 생물 곧 너희와 함께한 새와 육축과 땅의 모든 생물에게 세우리니 방주에서 나온 모든것 곧 땅의 모든 짐승에게니라  내가 너희와 언약을 세우리니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아니할 것이다 땅을 침몰할 홍수가 다시있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나와 너희와 및  너희와 함께하는 모든 생물 사이에 영세까지 세우는 언약의 증거는 이것이라 내가 내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나니 이것이 나의 세상과의 언약의 증거니라 내가 구름으로 땅을 덮을 때에 무지개가 구름속에 나타나면 내가 나와 너희와 및 혈기 있는 모든 생물사이의 내 언약을 기억하리니 다시는 물이 모든 혈기 있는 자를 멸하는 홍수가 되지 아니할찌라( 창 9: 8-15 ).

노아의 언약의 특징을 살펴보면   첫째, 실제적으로 언약이라는 단어인 베리트가 처음 사용되었다.1)   더욱이 노아의 베리트는 특별히 언어적인 것으로써 그리스도의 죽음을 의미하는 한 유형으로 표현된 피의 제사가 드려진후에 드려졌다.    둘째, ‘나는 너와 함께 나의 언약을 세운다.’    ‘보라! 내가 내 언약을 너희와 너희 후손과 세우리라’    이 두 구절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중요한 사실은 ‘우리  언약’이 아니라 ‘나의 언약’, ‘내 언약’으로 나타난 사실이다.   이는 모세의 시내산 언약과도 다르며  독특한 것임을 보여준다.   즉, 노아의 언약은 조건적이 아니며   주권적으로 맺어진 영원한 언약이다.

세째로, 노아계약은 하나님 구원의 특이성을1) 말해주고 있는데 홍수전 인간의 죄악은 하나님으로 하여금 지면에서 인간을 멸해 버리도록 결정하게 했다.   그러나 노아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그 시대 사람들의 타락 상태로 빠지지 않게 되었다.   노아에게 베푸신 그 은혜는 그 말의 뜻이 죄악된 상황에 자비를 베푸는 식의 의미가1) 아니라 하나님이 용서받지 못한 죄인에게 거저 주시는 자비로운 태도를 뜻한다.1)  따라서 노아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는 그의 의로움에서가 아니라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의 특이성에서 찾을 수 있다. 1)

네째로, 노아와의 계약은 보존의 계약이라 특징 지을 수 있다.1)  노아 시대에 인간의 죄악은 극심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셨다.” 에서 히브리 단어 “마음” (    )이란 말에는 내적 인간 전부(그의 생각, 뜻, 그리고 감정)가 포함되어 있다.   하나님께서는 상황의 심각성을 표현하기 위하여 매우 인간적인 표현으로 말씀하시기를 “땅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한다.” 고 하셨다.   그러나 아담의 타락시와 마찬가지로 노아에게도 하나님의 심판이 실행되기 전에 구속의 활동이 선행되었다.  노아와의 보존적인 하나님의 계약은 하나님의 은혜로( 창 6:8 ) 시작되어 방주를 준비 시킴으로 구체화 되었다( 창 6:4).

홍수 심판 후에 하나님은 이제 그의 자유롭고 치우치지 않은 은혜의 목적을 표현하기 위해 구름과 무지개를 연결하시는데  무지개를 계약의 표적으로 제시한 것은 매우 의미있는 일이다.   왜냐하면 무지개라는 히브리어는 문자적으로 전쟁의 무기인 “활”을 가르키고 있기 때문이다    번개는 하나님의 활에서 쏘아진 그의 화살로 생각되었다.(시7:12-13 ; 8:14).   그러므로 보통 전쟁 및 하나님의 심판과 관련된 것이 바로 자비의 표적으로 나타났음은 심판중에서도 노아의 가족과 일부 짐승들을 통하여 인류와 세계를 보존하시려는 계약이라 할 수 있다.   결국 하나님이 노아와의 맺은 계약은 임마누엘 원칙이 충분히 실현될 수 있는 역사적 기초를 제공해 주고 있으며 하나님은 심판을 가져 오셨지만 또한 구원의 은혜가 행해지도록 보존이라는 뼈대를 마련하셨다.   노아계약으로보터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은 그의 백성에게 은혜를 주는 것 뿐아니라 사탄의 후손에게는 화를 내리시는 것을 포함하게 된다.

노아와의 보존의 계약속에 나타난 헤세드는 헤세드와 상관 관계를 가지고 있는 베리트가 처음으로 사용되었다는 것과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언약을 맺으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의로운 행위로 구원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그의 은혜로 구원하신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노아를 통하여 방주를 준비케 하셨고 홍수 심판후에는 무지개를 통하여 다시는 물로 멸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신다.   하나님은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신 분이지만 죄악을 그냥 간과하시지 않으시는 공의로운 분이시다.   인간의 죄가 관영함을 보시고 그 죄를 심판하시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인 헤세드인 것이며 심판중에서도 노아의 가족과 짐승들을 통하여 인류와 세계를 보존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바로 헤세드인것이다.


3.  아브라함과의 후손의 계약 (창 15장, 17장)


하나님과 아브라함이 맺은 계약은 창세기 12장 1절부터 3절에서 처음으로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12장에서 언급되는 말씀은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맺은 계약의 기초로서 부르심에 대한 보상이나 결과는 될 수 있으나 공식적인 계약은 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약을 명시하고 발전시킨 것은 12장에서 시작하여 15장, 17장 그리고 22장에서 아브라함에게 향한 계약을 구체적으로 볼 수 있으며 아브라함과 맺은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구체적인 계약을 “약속의 계약”이라고 부를 수 있다.1)  창24장에서는 아브라함의 자부 선택에 있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볼 수 있다.


1)  소  명 ( 창 12:1-3 )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창 12: 1-3 )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고 명령하셨다.   이 명령은 “동의”(agreement)나 “협정”(Contract)의 여지가 없는 주권적인 명령이며1)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오염되고 더러워진 사회로 부터 구별을 요구하신 것이다.   그것은 다만 외향적 또는 육체적인 구별을 뜻하는 것만이 아닌 내부적인 것까지도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인간적인 면, 야망과 열정, 인간의 욕심과 안목의 정욕등에서도 분리되어야 한다고 볼 수 있다.   또한 구별은 헌신을 의미하기도 한다.


2)  아브라함과 맺은 계약 ( 창 15장 )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그 사람은 너의 후사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 하시고 그를 이끌로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또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업을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낸 여호와로라(창 15:4-7 ).

창세기 15장에서는 자손에 대한 약속과 땅에 대한 약속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크나 큰 약속을 허락하셨지만, 그는 이제 늙어가고 그의 아내에게는 후사를 얻지 못하였다.  그런데 그 당시 풍속에는 후사가 없는 부모의 경우에 한 규정이 있었는데1)  가인을 양자 삼는것이 가능했고 이 양자된 아들이 법적 상속자가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후사가 없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해석하는 방법은 오직 이런 양자를 법적으로 입적시키는 과정 뿐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주권적인 의도를 명확히 말씀하신다.   아브라함의 몸에서 난 후사 외에는 그의 언약을 소유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땅에 대한 소유권 문제를 질문하자, 답하시면서 하나님은 엄숙한 의식을 통해 그 약속에 대한 계약적 유대를 공식적으로 세우심으로 아브라함의 마음에 확신을 주신다.   쪼개는 제물 사이로 친히 지나 가시면서 맺는 이 계약은 계약 당사자들의 삶과 죽음의 서약이며, 약속을 어길때는 쪼개진 동물처럼 되리라는 자기 저주의 맹세로서 이 약속의 확실성을 강하게 해주고 있다.1)


3)  아브라함의 할례 ( 창 17장 )


창세기17장 1절-10절

아브람의 구십 구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세워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라 하시니 아브람이 엎드린대 하나님이 또 그에게 일러 가라사대 내가 너와 내 언약을 세우니 너는 열국의 아비가 될찌라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로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함이니라 내가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니 나라들이 네게로 좇아 일어나며 열왕이 네게로 좇아 나리라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와 네 대대 후손의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너의 우거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일경으로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그런즉 너는 내 언약을 지키고 네 후손도 대대로 지키라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창세기 17장에서는 총괄적인 계약이 나오고 있다.   “너로 심히 번성케 하라라”와 “열국의 아비”의 2절과 4절 말씀은 자손에 대한 육체적, 영적인 축복의 계약이며, 7절,8절에서는 가나안 일경을 영원한 기업으로 주시겠다는 땅에 대한 계약이 나오며,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는 영적인 계약이 포괄적으로 나오기 때문이다.   이것은 물질의 번영만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종교적인 교제를 하시겠다는 계약이다.   이 계약은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들이 지켜야만 했다.  이것의 표적으로 모든 남자는 할례를 받아야 했고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누구든지 백성으로 부터 끊쳐질 것이었다.   여기에서 할례는 계약의 표징이요, 여호와의 맹세가 유효함을 시간 속에서 증명하는 보증이다.   또한 할례는 하나님의 계약에 참여하는 자의 표식이다.   이러한 예식을 통하여 하나님의 계약이 영원히 자손들에게 이루어진다는 것을 인식시켜 주며, 이를 통하여 성결된 계약 백성과 교제를 나누기를 원하는 욕망의 표현인 것이다. 1)


4)  아브라함의 씨 ( 창 22장 )


하나님께서는 22장에서 아브라함에게 큰 시험을 주셨다.   계약의 자식으로 얻은 이삭을 하나님은 번제물로 바치라고 하셨다.   이 명령에 대하여 아브라함은 굳센 신앙을 가지고 순종을 하였더니 하나님은 이로 인하여 축복의 약속을 갱신하였다.   16절에서 18절의 선언에 의해서 이 장 전체가 계약과 관계된 것임을 알게 된다.   이는 계약의 갱신이나 재확인이라 할 수 있다.   12장에서는 아브라함을 통하여 복을 얻게 할 것이라고 했지만 22장에서는 “희생제로 드려졌고 그러면서도 보존되어 남게 된”1)  약속의 아이인 이삭을 통하여 천하 만민이 복을 얻을 것이라고 하여 계약의 축복이 발전한 것을 보게된다.  이삭이  아브라함의 축복의 새로운 출발점이 되었고 자손에 대한 계약은 씨에 대한 강한 표현을 사용 하였지만, 종래의 계약에 대한 재확인이 되었다.   아브라함의 순종을 통해 아브라함에게 하신 하나님의 약속의 형태가 더욱 견고해지고 그 범위가 확대 되었다.1)


5)  아브라함과  하나님의 헤세드 (창 24장)


아브라함은 나이 많아 늙어지자 노복을 시켜 고향에 가서 자부감을 택하여 오도록 분부하였다.   그 종은 주인의 분부에 따라 약대 10필을 이끌고 주인의 고향인 메소포타미아로 향하여 떠났다.   나홀의 성에 도착하여서 종은 하나님께 기도하였는데 그 기도중에 하나님의 헤세드가 언급되어 있다.

     그가 가로되 우리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여 원컨대 오늘날 나로 순적히 만나게 하사 나의 주인 아브라함에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   성 중 사람의 딸들이 물길러 나오겠아오니 제가 우물 곁에 있다가 한 소녀에게 이르기를 청컨대 너는 물 항아리를 기울여 나로 마시게 하라 하리니 그의 대답이 마시라 내가 당신의

약대에게도 마시우리라 하면 그는 주께서 주의 종 이삭을 위하여 정하신 자라 이로 인하여 주께서 나의 주인에게 은혜 베푸심을 내가 알겠나이다 ( 창 24:12-14 ).

아브라함의 종이 기도한 대로 일 이 잘 성취되어 졌다.   그 종은 아주쉽게 주인의 친척을 상면하게 되었다.   종은 다음과 같은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이 기도 중에도 헤세드가 나타나고 있다.

   나의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하나이다.  나의 주인에게 주의 인자와 성실로 끊이지 아니 하셨사오며 여호와께서 길에서 나를 인도하사 내 주인의 동생집에 이르게 하셨나이다 (  창 24:27 ).

이상 두 구절에는 신인간( 神人間 )의 한 특별한 관계가 나타나 있다.   즉, 아브라함과 하나님과의 관계의 특별함이다.   아브라함의 종은 자기 주인과 하나님과의 이 특별한 관계를 벌써부터 알고 있기 때문에 모든 일의 성사를 위하여 그 하나님께 구하였고 기대하였으며, 또 그 일이 성사되었을 때도 하나님께 감사의 찬송을 드렸다.

여호와와 아브라함의 관계는 주종간의 관계이다.   여호와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종이다.1)  이러한 관계임을 안 종은 기도할 때 자기의 하나님으로 생각지 않고 “주인의 하나님”으로 부르며 기도하였다.

아브라함의 종은 이러한 상호관계에 근거하여 자기를 통하여 아브라함에게 헤세드를 베푸실 것을 하나님께 요구한 것이다.   아브라함과 리브가의 상호관계의 기초는 혈연이고 여호와와 아브라함과의 관계의 기초는 아브라함을 선택한 하나님의 선택행위와 아브라함과 그 자손을 돕는 언약이었다.1)  이러한  특수한 호혜관계에 있는 자 간에는 공동적으로 헤세드를 실행하여야 할 책임이 있다.1)   그러므로  야웨의 헤세드는 “Grace”나 “Favor”나 “Kindness”로 이해 될것이 아니고 하나님과 아브라함간의 언약관계로써 이해되어야 한다. 또한 아브라함의 자손을 낳을 그의 자부의 선택에서 하나님의 구체적이고 세밀하신 인도하심을 볼 수있다.

또 다른 성경에서 아브라함과 그 자손들에게 나타난 헤세드를 볼 수 있다. 시편에서 105편 6절에서 10절에서

그 종 아브라함의 후손 곧 택하신 야곱의 자손 너희는 그의 행하신 기사와 그 이적과 그 입의 판단을 기억할찌어다 그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시라 그의 판단이 온 땅에 있도다 그는 그 언약 곧 천대에 명하신 말씀을 영원히 기억하셨으니 이것은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이며 이삭에게 하신 맹세며 야곱에게 세우신 율례 곧 이스라엘에게 하신 영영한 언약이라.미가서 7장20절에서

주께서 옛적에 우리 열조에게 맹세하신대로 야곱에게 성실을 베푸시며 아브라함에게 인애를 더하시리이다.

창세기 32장9절에서 12절에서야곱이 또 가로되 나의 선조 아브라함의 하나님, 나의 아버지 아삭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전에 내게 명하시기를 네 고향,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네게 은혜를 베풀리라 하셨나이다  나는 주께서 주의 종에게 베푸신 모든 은총과 모든 진리를 조금이라도 감당할 수 없사오나 내가 내 지팡이만 가지고 이 요단을 건넜더니 지금은 두 떼나 이루었나이다  내가 주께 간구하오니 내 형의 손에서 에서의 손에서 나를 건져내시옵소서 내가 그를 두려워하옴은 그가 와서 나와 내 처자들을 칠까 겁냄이니이다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정녕 네게 은혜를 베풀어 네 씨로 바다의 셀 수 없는 모래와 같이 많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아브라함의 언약은 족장사 전체에 나타난 언약에 대해 모체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이 약속은 계속해서 모세 언약과 다윗 언약을 통하여 진행되며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완성된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이 약속은 미래까지 뻘쳐간다.   지금도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 모든이들을 위한 구속의 근거를 제공하는 ‘영원한 언약’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1)  죤 밀턴은 ‘아브라함의 언약은 신구약 성서 안에서 원래의 단 하나의 언약, 즉, 하나님의 하나로 통합된 언약의 목적을 해석해주는 열쇠’1) 로보았다.   죤 브라이트는 족장사에 나타난 언약은 족장 신앙의 근본적인  요소로써 그 ‘원형적’ 특색을 이루고 있으며 그들의 후손들은 이러한 배경을 계속해서 물려 받았고 이스라엘의 전역사를 통해 언제나 그러했지만 세월이 지남에 따라서 여러모로 발전도 하였다.   그러나 그 본질적인 언약의 성격은 한번도 바뀐적이 없다고1)하였다  말텐스(E.A.Martens)는 언약 공동체(Covenant Community)를 형성케 하였다1)고 한다.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하나님은 자손과 땅을 약속하시며 할례를 통하여 언약을 세우신다.   하나님의 헤세드는 그의 종의 기도에서도 나온것처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헤세드를 끊이지 아니하신 것이다.   그의 부르심에서부터 그의 자부의 선택에 이르는 세미한 부분까지도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헤세드을 베푸셨으며 그의 자손에게도 베푸실 것이다.   하나님의 헤세드는 아브라함의 언약을 통하여 모세, 다윗언약으로 진행되며 예수 그리스도에 와서 완성이 된다.   하나님의 헤세드는 이 모든 언약을 지키시며 이루시고 끝까지 그 말씀하신바를 실행하시는 것이다.


4.  모세와의 선택백성의 계약


출애굽기 1장 7절에 간략하게 기록된 내용에서 “생육하고 중다하고 번성하고 심히 강대하여”왔다는 것은 창세기에서 아브라함과 맺은 계약의 축복의 성취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제는 단순한 한 가족이 아닌 한 민족과의 계약의 성립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세운 그의 약속을 “기억”하시는 것으로 요약되고 있다( 출 2:24 ).

시내산에서 선택 백성의 계약은 아히로트(W.Eichrodt)가 강조하듯이 하나님의 중심 계획 중에 가장 중요한 사건이며, 모든 구원사가 이 사건을 기점으로 이루어진다.1)  출애굽기 19장에서 24장의 위치는 이스라엘 역사를 제시하는 점에 있어서나 이스라엘의 예배 구조면에서 아주 중요한 의의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시내산은 이스라엘이 애굽의 종살이에서 가나안 땅의 입주까지의 역사적 과정을 이해하는데 아주 중요하다.1)   약속의 땅을 기다리던 이스라엘이 이제는 노예에서 해방되고 하나의 국가로 등장하게 되면서 헌법의 기초, 통일을 유지하기 위한 근거, 목적을 명시하는 일이 필요하게 되었다.1)  이처럼 시내산의 선택 백성의 계약은 중대한 시기에 나타나고 있다.

출애굽기 19장에서 31장을 대분하면, 서론(19장), 계명(20장), 심판(32:1-24:11), 규례(24:12-31:18)이다.1)  하나님은 약속의 증표로 모세에게 나타나셨고, 유월절과 출애굽의 선택적 구원을 기초로 이스라엘과 계약을 맺으시고 약속과 각종 규례를 제시하신다.1)   시내산의 계약에는 두가지 본질적 요소가 나타난다.   먼저 모세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해 행하신 위업을 상술하자(19:4),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에게 선택의 은총에 대한 응답을 요구하신다(19:5).   그리고 계약에 앞선 성결 준비(19:9-15), 율법 제시(20:1-23), 중재자 모세의 말씀 선포가 이어지자, 백성들은 그를 예배하며 계약을 성실히 지키겠다고 응답한다(19:8, 24:7).

이 계약은 출애굽과 분리될 수 없고 계약 체결이 하나님의 무조건적 선택에 의해 이뤄지나 이스라엘편의 아브라함같은 순종과 믿음의 응답을 요구한다.출애굽기 19장 3절에서 6절은 시내산에서의 선택 백 성의 계약의 서론 역할을 하는데 그 내용을 보면 계약의 조건,약속,그리고 사명으로 구분할 수 있다.

모세가 하나님앞에 올라가니 여호와께서 산에서 그를 불러 가라사대 너는 이같이 야곱 족장에게 이르고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라 나의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속하여 제사장 나라라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지니라( 출 19:3-6 ).

출애굽기 20장6절에서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시느니라

출애굽기 34장 6절에서 10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반포하시되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애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나 형벌 받을 자는 결단코 면죄하지 않고 아비의 악을 자여손 삼사대까지 보응하리라 모세가 급히 땅에 엎드리어  경배하며 가로되 주여 내가 주께 은총을 입었거든 원컨대 주는 우리 중에서 행하옵소서 이는 목이 곧은 백성이니이다 우리의 악과 죄를 사하시고 우리로 주의 기업을 삼으소서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가 언약을 세우나니 곧 내가 아직 온 땅 아무 국민에게도 행치 아니한 이적을 너희 전체 백성 앞에 행할 것이라 너의 머무는 나라 백성이 다 여호와의 소유를 보리나 내가 너를 위하여 행할 일이 두려운 것임이니라

위 구절에 선택 백성의 계약이 잘 나타나 있다.

그리고 신명기 7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열조에게 맹세하신 헤세드가 나온다.너희가 이 모든 법도를 듣고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열조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지켜 네게 인애를 베풀 것이다.  곧 너를 사랑하고 복을 주사 너로 번성케 하시되 네게 주리라고 네 열조에 맹세하신 땅에서 네 소생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 신 7:12-13 ).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 하심을 인하여서 또는 너희 열조에 행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을 인하여 자기의 권능의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되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애굽왕 바로의 손에서 속량 하셨나니 그런즉 너희는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  그를 사랑하고 그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그 언약을 이행하시며 인애를 베푸시되( 신 7:8-9 ).

이상의 성구에서 특별한 것은 언약 다음에 헤세드가 출현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언약은 맹세에 의하여 생겼고, 하나님과 족장들과의 관계에서 결과된 헤세드를 가지고 있으므로 헤세드는 모든 언약의 용량이 된다.1)  헤세드가 충성(Loyalty)으로 해석되어 온 것은 누누히 언급한 것이나 헤세드가 “야웨와의 헤세드”가 됨을 강조하기 위해서는 사랑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이런 특별한 사랑은 충성과 책임을 일치시킬 뿐 아니라 언약의 제 조건들을 성취시키기도 한다.

야웨와 이스라엘 사이에 맺어진 계약의 포괄적인 의미와 목적을 알기 위해서는 반드시 “선택” 개념을 다루어야 한다.   계약과 선택 양자 사이의 관계에 대해 라울리(H.H.Rowley)는 선택과 계약은 서로에게 속하여서 계약에 대한 충성은 선택의 유지에 본질적이었다 라고 했고, 롸이트(G.E.Wright)는 계약은 이스라엘의 선택의 의미와 본질을 설명하는 한 방법이라고 했다.1)  계약은 선택에서 분리하여 독립적으로 다룰 수가 없는데, 그 이유는 계약은 구체적 용어로 선택에 포홤된 관계에 대한 의미를 표현하기 때문이다.   계약은 그 자체가 구속 행위가 아니라 이 행위를 표현하고 확증하는 것이다.1)  그는 또 선택이 남녀 사이의 관계의 시초라면, 계약은 부부를 법적으로 묶는 결혼식으로 볼 수 있다.   부부가 결혼을 통하여 법적으로 결속되듯이 계약은 쌍방을 위한 법적 효력을 발생케 한다.   그러므로 계약은 선택을 법적으로 효력있게 하는 행위라고 말할 수 있다.   계약은 선택에 대한 권위있는 인침(확인)이다.1)

야웨와 이스라엘 사이의 선택과 계약 개념에 대해 니콜슨(Ernest W.Nicholson)은 “야웨의 백성”(The people of Yahweh)이란 독특한 개념으로 설명하였다.   야웨와 이스라엘 사이의 계약 개념은 “현찰 가치”(cash value)의 관점에서 볼 때 신적 영역과 인간 사이의 자연적 혹은 존재론적 동치(natural or ontological equivalence)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바로 선택(choice), 즉, 신의 자기 백성 선택과 백성들이 하나님을 선택하고 하나님께 순종하고 충성하리라는 그들의 자유로운 결단이다.   그러므로 계약은 “야웨의 백성”('am Yahweh)으로서의 이스라엘의 독자적인 신앙 표현이라고 말한다. 1)

롸이트도 성서에 의하면 이스라엘은 계약 관계에 들어감으로써 야웨의 백성이 되고, 야웨의 명령에 따라 살 것이라는 계약에 들어감으로써 야웨의 은혜에 응답하였다고 하며  이스라엘이 야웨의 백성으로 세워진 것은 계약을 통해서였다1)고 말한다.

계약과 선택의 관계가 이런 것이라면 그러면 선택의 목적은 무엇인가?  야웨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선택하시고 계약을 세우신 목적은 무엇인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것은 이스라엘에 충성을 요구하시고 거룩한 계약으로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결속되며 충성을 서약하기 위함이었다.1)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약하고 무가치한데서 선택하셔서 그의 사랑을 베푸신 것을 신적 은혜의 기적1)  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이스라엘 자체만을 위한 것이가?   결코 그렇지 않다.   선택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신적 목적과 계획을 위한 선택과 그것을 확고히 하기 위한 계약이었다.

구약 성서 전체를 통해 하나님의 이스라엘 선택과 애굽에 있는 지파들을 구출하신 첫째 목적은 이스라엘의 봉사를 요구하기 위함이었다.1)  환언하면 하나님의 선택은 배타적으로 하나님을 위한 봉사에 관심을 둔다.   그리고 이 봉사는 선교의 의무와 관련되어 있으며 그 선교의 의무는 이스라엘을 통하여 땅 위의 모든 백성이 하나님께로부터 복을 받는 것이다.   밀턴은 이에 대해 잘 서술하였다. 이스라엘의 선택은 선교적 의무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즉, 사명없이는 하나님의 선택이나 언약이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의 선택이나 언약은 이기적인 영적 특권이나 축복의 목적에 있는 것이 아니다1)고 한다.

이뿐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선택받은 백성 또한 하나님의 인격을 반영하도록 거룩해야 하며 윤리적, 도덕적으로 거룩한 생활을 해야하는 요소를 발견할 수 있다.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고 땅에 기는 바 기어다니는 것으로 인하여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출 11:44-45 ).

그러므로 선택에서는 선교적 사명과 윤리적, 도덕적으로 거룩한 생활을 하여야 하는 신적 요구가 포함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모세와의 선택 백성의 계약에 나타난 헤세드는 이스라엘의 고통을 들으시고 그들을 출애굽하게 하시고 그들을 무조건적으로 선택하셔서 시내산에서 계약을 맺음으로 이스라엘을 야웨의 백성으로 삼으시고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의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이 되어 선교와 봉사를  하게 하시는 것이다.   만일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법도를 듣고 지키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열조에게 약속하신 언약을 지키시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 언약을 끝까지 이루시며 지키게 하는 헤세드를 베풀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과 순종을 요구하시는 것이다.


5.   다윗과의 영원한 왕조 계약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다윗과의 영원한 왕조 계약에서 최고의 실현 단계를 맞게 된다.   지금까지 하나님은 계약의 주로서 분명히 자신을 나타내셨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은 이동하는 성소로부터 다스리기보다 예루살렘 시온산에 그의 왕권을 공공연히 세우시고 통치하신다.   법궤가 개선 장군처럼 예루살렘에 오면서 하나님 자신의 왕권을 다윗 왕권과 연결시킨다.1)

사무엘하 6장 12절의 다윗의 왕권에 관한 언급은 ( 6장에서 처음 언급됨 ) 언약궤 운반을 위한 두번째 시도가 성공하리라는 암시이며, 법궤의 돌아옴은 다윗과 그 집안의 운명에 있어 새로운 시작을 예고하고 있다.1) 하고자 하는 사업의 필요성이 충분히 주지된 상태에서 다윗은 선지자 나단에게 성전 건축의 계획을 정중하게 털어놓았다( 삼하 7:2 ).  사무엘하 7장 5절은 하나님의 응답을 세가지 각도에서 요약하고 있다.   먼저 요청자에 대한 언급 (‘내 종 다윗’)이 나오며, 다음으로 요청 사항의 내용(성전건축) 및 건축 계획의 목적 (여호와의 거하실 곳을 마련하기 위함)이 언급된다.

다윗에게 허락한 위대한 약속은 먼저 하나님이 다윗 왕조를 세우시고, 그 다음 다윗 왕조가 하나님이 거할 집을 세우게 된다.1)  ꇴ즉, 다윗의 통치를 하나님의 통치에 연결시키며, 하나님은 다윗 계열의 왕권을 통해 왕으로서 그의 영원히 거할 집을 통해 왕으로서 그의 영원히 거할 집을 이스라엘에 유지 시킬 것이다.1)  이 다윗 왕조 계약의 핵심 속에는 임마누엘의 원칙이 나타나 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로 오셔서 영원히 거하시게 되는 것이다.   이를 요약하면 먼저 다윗이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땅의 영역에로까지 확장시키는 과업을 완수하고, 다윗의 메세야적 계보가 보장된 연후에  12절의 “자식”과 창세기 15장 3절,4절의 “씨”,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솔로몬에 의해 건축될 것이라는 것이다.1)

시편 89편 27절에서 34절을 보면 다윗의 언약속에 헤세드가 언급된다.내가 또 저로 장자를 삼고 세계 열왕의 으뜸이 되게 하며 저를 위하여 나의 인자함을 영구히 지키고 저로 더불어 한 나의 언약을 굳게 세우며 또 그 후손을 영구케 하여 그 위를 하늘의 날과 같게 하리로다 만일 그 자손이 내 법을 머리며 내 규례대로 행치 아니하며 내 율례를 파하며 내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면 내가 지팡이로 저희 법과를 다스리며 채찍으로 저희 죄악을 경책하리로다 그러나 나의 인자함을 그에게서 다 거두지 아니하며 나의 성실함도 폐하지 아니하며 내 언약을 파하지 아니하며 내 입술에서 낸 것도 변치 아니하리로다.

하나님은 사울을 거부하시고 다윗을 선택하셨다.   하나님이 다」윗을 선택한 사실은 헤세드을 요하는 관계를 창조한 것이다.   하나님이 다윗에게 맹세하신 약속은 왕위의 승계이며 그 조건은 자손들이 하나님의 언약을 잘 수호하는 것이었다 ( 시 132:11-12 ).  하나님은 다윗 자손에게 헤세드를 베푸실 것을 약속하셨다.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 저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의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내가 네 앞에서 패한 사울에게서 내 은총을 빼앗은것 같이 그에게서 빼앗지 아니 하리라 네 집과 네 나라가 네 앞에서 영원히 보존되어 네 위가 영원히 견고 하리라 (삼하 7:14-16) ( 대상 17:13-14 ).

솔로몬이 야웨의 단 앞에서 백성을 향해 하나님의 도움을 탄원 ( 대하 6:114-17, 왕상 8:23-25 ) 하는 기도 중에 “주의 종 내 아비 다윗에게 허하신 말씀을 지키소서”가 두번 나오는데 이는 다윗에 관한 언약과 헤세드가 암시되어 있음이 분명하다.   솔로몬이 등극하여 하나님께 일천번제를 드릴때 이렇게 간절히 기도하였다.주의 종 내 아비 다윗이 성실과 공의와 정직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주의 앞에서 행하므로 주께서 저에게 큰 은혜를 베푸셨고 주께서 또 저를 위하여 이 큰 은혜를 예비하시고 오늘 날과 같이 저의 위에 앉을 아들을 주셨나이다 ( 왕상 3:6 ).

이 약속의1) 결과로써 야웨는 언약에 따라 실행하셨고 또 그 자손 솔로몬에게 언약과 헤세드를 실행하셨다.   상기 성구에서 언급되지 않은 언약에 의한 헤세드의 성취가 역대하 1장 8절,9절에서 설명되었다.주께서 전에 큰 은혜를 나의 아비 다윗에게 베푸시고 나로 대신하여 왕이 되게 하셨으니 여호와 하나님이여 원컨대 주는 내 아비 다윗에게 허하신 것을 이제 굳게 하소서.

하나님은 다윗과의 약속에 따라 성실하게 언약적 충성의 명령을 솔로몬에게 행사하셨다.

사무엘하 7장 14절은 또한 다윗의 아들과 하나님의 아들과의 관련을 강조하며 다윗과 그의 후손은 이 계약에 의해 그들의 왕권안에 세워지게 된다.  다윗과의 영원한 왕조 계약에서 “다윗의 아들”과 “하나님의 아들”사이에 세워진 관계는 메시야가 옴으로 완성되며, 예수 그리스도는 이 두 아들 직분의 최종 성취로써 나타난다.   예수님은 육신으로는 다윗의 아들이며 동시에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 롬 1:3,4 ).

다윗과의 계약에서 헤세드는 다윗을 선택하시고 그를 왕으로 삼아 다윗의 왕조를 세우시고 다윗의 자손을 통한 메시야의 약속이다.  하나님은 다윗을 왕으로 삼으시고  그의 자손이 영원한 왕으로서 이스라엘을 다스리시도록 약속하셨는데 그 자손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시며 예수 그리스도가 영원한 왕으로 오실것이다.하나님은 이를 성취하실것이며 성취하셨다.이것이 다윗과의 계약에서 헤세드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이다.


6.  예언자를 통한 완성의 메시야의 언약 (렘 31:31-34)


예레미야 31장 31절에서 34절에는 새 계약의 출범에 관한 선지자의 서술이 담겨 있는데 이 단락은 30장,31장의 구조 내에 설정되어 있다.   이 두개의 장들은 분단된 민족이 포로에서 돌아오는 사건과 돌아온 결과 야기될 결말을 다루고 있다.1)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하였음이니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것이라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새 계약 성립에 관한 예레미야의 말은 이 예언이 생기게 된 역사적 상황과 떨어져서 다룰 수 없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심판이 이스라엘에게 불가피 하였다는 것을 주장하였다.   이스라엘은 돌이킬 수 없는 죄를 계속함으로 인해 계약적 저주의 멸망을 경험해야 했고 계약파괴에 대한 이 심판은 단순히 특정한 특권을 제거하는데서 온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 과정의 완전한 역작용을 수반할 것이다.   하나님이 갈대아 우르로부터 아브라함을 불러 땅에 대한 약속을 주셨던 것과 같이, 이제 아브라함 자손은 약속의 이 땅으로부터 추방 당해야 한다.   그들은 “나의 백성이 아니다”라고 포고 되어야 한다.1)

구약 성서에서 예레미야의 이 내용만이 “새 계약”을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지만, 새 계약의 개념은 이 하나의 예언에 제한될 수 없다.   이들 개념은 예레미야와 에스겔에 나타난 일단의 예언들 속에서 보다 광범위하게 발전되며 새 계약에 관련된 이런 광범위한 배경에서만 예레미야 31장 31절에서 34절의 메시지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으며 이 예언자들에서 새 계약 개념과 근본적으로 관련되는 몇 가지 주요 주제가 생겨나며 이 주제들은 다음과 같다.1)

첫째, 예레미야의 새 계약 예언에 대한 광범위한 배경에서 하나님은 그들의 조상에게 주었던 땅으로 돌아오게 할 것이라고 선언한다1)

둘째, 이 새 계약을 하나님의 이전 계약 약속들과 연관시키고 있다.   새 계약에 의해 하나님은 이전에 그의 백성과 세운 계약들의 모든 약속을 성취하실 것이다.1)

셋째, 새 계약의 독특한 점으로 하나님의 율법이 내면적으로 기록되는 점이다.   계약 공동체 구성원속에 있는 육신의 마음은 율법이 새겨지는 돌판이 될 것이다.   즉, 시내산에서의 율법이 씌여진 계약의 돌판은 반 영구적인 돌이 되어 있으나1) 다가올 구원에서는 하나님의 백성이 더 이상 그 마음의 패역한 대로 행하지 아니할 것이라고 예레미야는 선언한다.1)

넷째, 이 새 계약은 죄에 대한 완전한 용서를 포함한다.   새 계약의 “피”가 무한가치를 지니고 있는 하늘에 계신 새 계약의 중보자이신 예수는 하나님과 동등한 권능을 지니고 계시기 때문에 그 새 계약에는 하나님께서 그 죄를 뽑아 내리셔서 기억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 약속되어 있다 ( 렘 31:31 ).  예레미야 선지자는 영원한 계약과 관련해서 이스라엘의 죄악을 찾을지라도 발견할 수 없을 것이라고 선언한다.

다섯째, 새 계약은 이스라엘 나라와 유다 나라의 통합을 증명한다.   예레미야는 구체적으로 이 두 나라에 대한 약속을 말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찾는 유다의 아들들과 함께 돌아올 것이다( 렘 50:4 )    새 계약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계약의 하나님과 묶여지는 것처럼 그들도 서로 불가불 묶여지게 된다.1)

여섯째, 새 계약의 독특함을 충분히 이해하는 근본은 “그의 영원한 성격”을 인식하는 것이다.   실제로 이런 특징은 이전 하나님의 사역들에게 할당 되었다.   아브라함 계약은 영원한 것으로 특징을 이루며 모세와의 선택 백성의 계약도 그렇다.    그러나 새 계약의 성격은 “종말론적인 차원”을 나타내는 것같다.1)

새 계약과 옛 계약의 또 하나의 관계성은 연속성이다.   새 계약에 대해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구속 사역에서의 새 차원을 예견한다.  예레미야 3장 31절에서 34절의 구조를 가장 잘 분석한 사람은 앤더슨(B W,Anderson)이었다.   그는 새 계약에서 발견된 연속성의 항목들을 이 귀절에서 다음과 같이 열거하였다.1)

첫째, 동일한 계약 창시자 하나님의 “나의 계약”이다.

둘째, 동일한 율법, “나의 율법”이다.

셋째, 과거의 삼부형식에서 계약된 동일한 하나님의 친교,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넷째, 동일한 자손과 백성,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다섯째, 동일한 용서,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할 것이다.”( 렘 31:33 )

이상과 같은 동일성을 볼때 새 계약과 옛 계약은 연속성을 갖고 있음을 잘 알 수 있다.   오히려 새 계약은 하나님의 축복을 선언한 이전의 모든 선언들을 능가한다.   그러므로 새 계약은 옛 계약보다 더욱 포괄적이며 효과적이며 더욱 영적이며 영광스럽다.   그리고 비교하여 볼 때 너무 월등히 과거의 계약과는 전적으로 다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실상은 계시의 진보에 지나지 않는다.1)

새 계약은 또한 옛 계약과 서로 대조되는 관계성을 가진다.   예레미야는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이전 계약관계 전체를 새 계약과 대조 시키고 있다.   그는 표면적으로는 새 계약을 모세와의 계약과 대조하고 있지만 내면적으로는 또한 아브라함과 다윗과의 계약과도 대조하고 있는 것이다.1)

그러나 새 계약이 그 목적을 성취하는 효과에 관하여는 옛 계약과 근본적인 불일치에 있다 하더라도 구원적 의도에 있어서 이 두 계약들의 내용은 동일하다.   실제로 하나님은 그의 율법을 돌판에 새긴 옛 계약과 대조해서 육체의 마음 돌판에 그의 뜻을 새길 것이다.   그러나 새기는 내용은 근본적으로 똑같은 하나님의 율법일 것이다.   구원을 이룩하는데 필요한 하나님의 모든 사랑이 이 옛 계약 관계에 포함되었다.

하나님의 헤세드는 예언자를 통하여 이전의 모든 계약들을 통합하는 완성의 계약으로써  그를 통하여 새 계약에 대한 예언과 기대를 하게한다.새 계약이면서 종말적인 특징을 가진 이 계약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과 세우신 계약들의 모든 약속을 성취하실 것이며 죄를 용서하시는 권세를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성취된다.   이것이 바로 이 새 언약이 나타난 하나님의 헤세드이며 하나님의 헤세드는 이를 이루실 것이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때가 차매 여자의 몸에서 나시고 십자가에서 희생의 죽음을 당하시고 부활하심으로 사탄의 권세를 깨뜨림으로 성취된다.



              V.  결  론

지금까지 헤세드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한마디로 헤세드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기는 어려우나 구약에 나타난 중요 언약을 통해 나타난 사랑으로서  그 언약을 지키시고 끝가지 이루시는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말 할 수 있다. 그 언약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완성되는 것이다.   헤세드라는 뜻을 파악하기 위하여 제 2장에서는 어원적 의미와 구약에서 사용된 용례와 여러 신학자들의 견해를 살펴보았다.    헤세드의 어원은 불분명하며 의미상 여러 의미로 사용되었음을 보았고 구약에서는 구약에 널리 사용되었으며  헤세드는 인간 상호간에 하나님과 인간사이에 관계하는 상호적인 것으로써 인간 사이에는 서로 주고 받고 요구하며 서로에게 언약이 되어 그 언약에 충성을 하는 뜻으로 쓰였고 하나님과 인간사이에는 하나님이 주도권을 잡으시고 먼저 사랑하시며 인간을 선택하시고 관계를 맺는 것으로 이해했다.   그러한 하나님의 행동은 하나님의 헤세드에 기인한 것으로 언약을 통한 사랑임을 살펴보았다.

제 3장에서는 헤세드와 베리트와의 상관 관계를 밝혔다.   이를 위해 베리트의 의미를 어원적으로 고찰하면서 베리트의 유형과 구약적 의미를 상고해보았다.   베리트의 어원은 불확실했으며 계약의 유형은 베리트의 동등권적 쌍무 계약과 종주권적 일방 계약이 있음을 보았고 이 계약의 유형들이 구약에서 사용된 계약과 유사성을 찾는 시도가 있음을 밝혔다.   구약적인 의미에서는 하나님께서 계약의 당사자로서 먼저 사람에게 향하여 계약의 입안자로서 주도권을 가지며 율법을 통하여 계약을 존속해가며 이스라엘 백성은 그것에 대하여 순종으로 반응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의 약속을 성취하는 계약은 인간과 하나님을 결속시킨다.   헤세드와 베리트의 상관 관계에서는 헤세드는 베리트의 본질로써 헤세드가 없이는 언약 체결을 할 수 없는 것으로 헤세드와 베리트는 상관 관계가 있음을 보았다.

제 4장에서는 구약에 나타난 중요 계약들을 통하여 나타난 헤세드의 의미를 밝히고자 했다.   아담, 노아, 아브라함, 모세, 다윗, 예언자 예레미야를 통한 계약들과 그 계약안에서의 헤세드의 의미를 살폈다.  아담과의 계약은 계약이라는 말이 언급되지는 않으나 구속의 약속, 그리스도를 약속하심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보았고 노아와는 은혜와 인간의 죄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인류와 세계를 보존하시는 헤세드, 아브라함과는 그의 부르심과 자손과 땅의 약속, 그 자손을 잇게 하는 자부의 선택에 까지 그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헤세드를 살폈고 아브라함의 언약을 통하여 모세, 다윗 언약으로 진행되며 예수그리스도에서 완성이 되는 것임을 보았다. 모세와의 선택 백성 계약에서 이스라엘의 고통을 들으시고 출애굽하게 하시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시내산에서 언약을 맺어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시고 하나님의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이 되어 선교와 봉사를 감당하도록 했다. 다윗과의 계약에서 헤세드는 다윗의 형통과 왕권의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의 다윗의 자손을 통한 메시야의 약속임을 보았다.  예언자를 통한 완성의 메시야의 언약이며 헤세드는 새 언약이며 마지막 언약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약속을 성취하신다.

본 소고에서는 하나님의 언약을 통한 사랑으로 헤세드를 보았고 그 언약속에 나타난 헤세드를 파악하려고 했다.   이런 과정속에서 헤세드에 대한 의미를 한마디로 말하기는 어려우나 언약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말 할 수 있다. 서론에서 제기되었던 문제점들을  해결하려는 시도속에서 헤세드가 언약의 중심, 하나님의 행위의 본질임을 밝혔다는 점이 새로운 시도였다고 생각하며  처음에,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인 아가페와 헤세드의 관계성을 살펴보려고 했으나 다루지 못하게 됨을 아쉽게 여기며 앞으로 기독론 중심으로 구약과 신약의 통일성과 새로운 전망을 가지고 접근을 하고싶다.   그리고 하나님의 속성에 관하여, 헤세드의 병행구에 대하여 언어학적인 접근과 조직 신학적인 방법론으로 깊이 연구해 볼만한 주제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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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서에 나타난 희년사상 

 

   목          차

   Ⅰ . 서            론

         A. 문제제기 및 연구목적

         B. 연구방법 및 절차


   Ⅱ . 희년의 성서적 근거

        A. 희년의 어원    

        B. 희년의 성서적 내용 (레위기 25:8 - 55을 주해 중심으로) ꠜꠜ

        C. 희년과 연관된 성서적 내용


   Ⅲ . 희년의 사회적 의미

        A. 토지 무르기

        B. 가옥환원

        C. 이식 없는 대부

        D. 노예해방


   Ⅳ . 희년의 신학적 의미

        A. 야웨 하나님 - 희년의 선포자

        B. 이스라엘 - 희년의 수혜자

        C. 예수 그리스도 - 희년의 성취자


   Ⅴ . 결            론


       * 참 고 문 헌


Ⅰ . 서            론

         A. 문제제기 및 연구목적

         B. 연구방법 및 절차


Ⅱ. 희년의 성서적 근거


구약성서 안에 전승된 이스라엘 전승들은 대개 고대 근동 지방에서 통용되었던 다양한 관습법에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희년법은 신학적 성격에 있서서 고대 근동의 관습법들과는 전혀 다른 매우 특이한 성격을 띤 법이다.1) 즉  희년의 주요 내용인 채무의 면제와 노예 석방 및 토지의 새로운 분배에 대한 요구는 고대 근동 세계의 수많은 사회개혁 시도 속에서도 찾아볼 수 있으나, 항상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이러한 사회개혁 요구를 제도화하려고 한 것은 오로지 희년제도 뿐이었다.2)

그러므로 희년제도 연구는 성서에서 시작하여, 성서가 희년제도에 대해 무엇이라 말하고 있는가를 살피는 것이 우선된다 하겠다.  이에 필자는 본 장에서 희년제도에 대한 성서적 근거를 살펴보겠다.


A. 희년의 어원


우리말의 ‘희년’이란 영어의 ‘Jubilee'를 번역한 것이고, Jubilee는 히브리어의 ‘요벨’:yobel)을 음역한 것이다.  문자적으로는 ‘세낱 하요벨’ :수양의 뿔의 해)3), 이는 단순히 ‘하요벨’ :수양의 뿔)4)의 하요벨’)에서 유래하였다.5) 이러한 희년의 명칭이 붙게 된 이유는 이 독특한 50번째의 해가 ‘요벨’의 나팔소리에 의해 선포되었기 때문이다.6)

여호수아 6장에서는 ‘요벨’과 보통 나팔인 ‘쏘파르’를 구분하고 있다.  ‘요벨’은 제사장만이 소지하여 불렀던 것이고, 가나안 정복시 여리고 성을 무너뜨릴 때 사용하던 나팔이었던 반면에, ‘쏘파르’는 대부분의 백성이 갖고 다니며 불렀던 것이었다.   그러므로 전자에는 보다 큰 성결성과 초자연적인 효과가 부여 되었다.   이사야 27:13의 큰 나팔도 바벨론에게 정복당하여 분산되었던 이스라엘에게 새롭고 행복한 시대를 알려주는 ‘요벨’이었을 것이다.7)

이처럼 ‘요벨’은 특별한 성격을 띠고 있는 것으로 특별한 시기, 그리고 어떤 특별한 용도로만 사용되었다.8)따라서 속죄일인 7월10일에 불리워짐으로 희년의 시작을 알리고, 온 땅의 모든 주민에게 자유를 선포했던 ‘온 소리의 나팔’은 구체적으로 지적되지는 않았지만 레위기 25장10절 후반부에 암시된 바와 같이 ‘요벨’ 임이 확실하다.9)

그러므로 희년이라는 말은 ‘요벨’에서 유래되었다 하겠다.


B. 희년의 성서적 내용


희년에 대한 성서의 내용은 레위기 25장 8 - 55절에 나타나 있다.  필자는 본문은 크게 희년제도의 규정인 8 - 22절과 희년제도의 구체적 내용인 23 - 55절로 구분하여 본문 주해식으로 살펴 보겠다.

 

1. 희년제도의 규정(8-22절)


여기서는 희년의 정확한 때를 계산하는 방법과 그 날의 기본 성격을 정의한 부분(8 - 12절), 그 희년에 취할 기본 행동(13 - 17절)10), 그리고 희년을 지킴으로 얻어지는 유익(18 - 22) 들을 다루고 있다.

8 - 12절 : “너는 일곱 안식년을 계수할지니 이는 칠년이 일곱번인즉

            안식년 일곱번 동안 곧 사십 구년이라.  칠월 십일은 속

            죄일이니 너는 나팔소리를 내되 전국에서 나팔을 크게 불

            지며 제 오십년을 거룩하게 하여 전국 거민에게 자유를

            공포하라.   이 해는 너희에게 희년이니 너희는 각각 그

            가족에게로 돌아갈지며 그 오십년은 너희의 희년이니 너

            희는 파종하지 말며 스스로 난 것을 거두지 말며 다스리

            지 아니한 포도를 거두지 말라.   이는 희년이니 너희에

            게 거룩함이니라.   너희가 밭의 소산을 먹으리라.”

레위기 25장은 1 - 7절에 안식년을 소개하는 것으로 시작하고 있다.  이것은 안식년과 희년사이에 깊은 관련이 있음을 시사해 주는 것이다.  8 - 9절은 희년의 시기에 대한 정확한 날짜를 규정한다.   즉 7년에 한번씩 오는 안식년이 일곱번이 지난 49년째 7월 10일인 속죄일에 큰 나팔을 부는 것으로 희년이 선포되었다.   희년이 속죄일에 선포되었다는 것은 속죄의 과정을 통해 하나님과의 화해가 필요함을 암시한다.   10 - 11절에는 희년을 ‘50년이 되는 해’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시작되는 해와 마지막 해를 동시에 함께 세는 방식에 의해서 오십년이 된것이다.11) 10절에 의하면 이 해는 ‘거룩한 해’이며 ‘드로르’( :자유 또는 해방)가 선포되었다.12)

‘드로르’라는 단어는 아카디아어의 ‘안두라루’(An-duraru:부채로 부터 해방)에서 온 차용어인데, 메소포타미아에서는 때에 따라서 왕이 이러한 면제령을 내리곤 하였다.13) 켈로그(Kellogg)에 의하면 다음과 같이 3가지면에서 드로르가 선포되었다.14) 첫째는 생활의 어려움 때문에 조상으로부터 물려 받은 땅을 빼앗겼던 사람들에게 ‘드로르’가 선포되어 그 땅을 돌려 받았다.  둘째는 모든 히브리인 노예에게 ‘드로르’가 선포되어 희년에 자유의 몸이 되었다.   셋째는 땅에 ‘드로르’가 선포됨으로 땅을 경작하지 않고 땅에 해방을 주었다.

이러한 자유의 규정은 그 땅에 사는 모든 주민, 즉 경작지를 소유한 정착민들에게 주어졌다.   이들은 희년이 되면 그 사이에 떨어져 있었을 자기들의 소유지와 지파로 돌아 가야 했다.   이들이 소유지와 지파로부터 떠나야 했던 이유가 흔히 부채때문이었으므로, ‘부채로부터의 해방’은 ‘귀환’의 전제가 되었으며, 그와 더불어 원래적인 것으로 생각되는 질서의 복귀를 위한 전제 조건이었다.15)

13 - 17절 : “이 희년에는 너희가 각기 기업으로 돌아갈지라.   네 이

           웃에게 팔든지 네 이웃의 손에서 사든지 너희는 서로 속이

           지말라.   희년후의 연수를 따라서 너는 이웃에게 살 것이

           요.   그도 그 열매를 얻을 연수를 따라서 네게 팔 것인즉

           연수가 많으면 너는 그 값을 많게 하고 연수가 적으면 너

           는 그 값을 적게 할지니 곧 그가 그 열매의 다소를 따라서

           네게 팔 것이라.   너희는 서로 속이지 말고 너희의 하나

           님을 경외하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14절에는 땅을 사고 파는데 있어서 다른 사람을 ‘억압’하는 것, 즉 다른 사람의 곤궁한 처지를 악용하여 이익을 취하는 것을 금지한다.   그리고 15 - 16절에서는 희년이 되면 ‘해방되는 것’을 고려하여 매매 가격을 정하는 문제가 논의되어 있다.

이스라엘에서는 땅은 하나님의 것이고 인간은 그것을 위탁받은 자로 여겼기 때문에 땅을 사고 파는 것이 없었고, 구매자가 살 수 있는 것은 오직 그 땅을 경작하는 권리였다.16) 그러므로 소출을 거둘 수 있을 햇수에 따라, 희년까지의 햇수가 많이 남았으면 비쌌고, 적게 남았으면 값이 싸게 되었다.17)

18 - 22절 : “너희는 내 법도를 행하며 내 규례를 지켜 행하라.   그

           리하면 너희가 그 땅에 안전히 거할 것이라.   땅은 그 산

           물을 내리니 너희가 배불리 먹고 거기 안전히 거하리라.

           혹 너희 말이 우리가 만일 제 칠년에 심지도 못하고 그 산

           물을 거두지도 못하면 무엇을 먹으리요 하겠으나 내가 명

           하여 제 육년에 내 복을 너희에게 내려 그 소출이 삼년 쓰

           기에 족하게 할지라.   너희가 제 팔년에는 파종하려니와

           묵은 곡식을 먹을 것이며 제 구년 곧 추수하기까지 묵은

           곡식을 먹으리라.”

여기서는 희년을 지키는 것이 저들에게 손해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큰 이익을 얻는 것임을 확신시켜 주고 있다.   약속의 내용은 첫째, 그들이 땅에서 안전히 거할 수 있고(18,19절), 둘째, 그들이 그 땅의 충분한 소출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이다.(19절)18) 특  20절 - 22절에는 율법을 내리시는 야웨가 율법을 받아 준수하는 자들과 토론을 하는 것 같은 문구가 나온다.   여기서 야웨는 안식년에 먹을 것이 없을 거라는 항의에 대해, 6년째 해에는 두곱의 소출을 베푸는 복을 내릴 것을 약속한다.

18 - 22절에는 희년에 대한 말씀과 안식년에 대한 말씀이 겹쳐 나오는데, 이는 희년이 7번째 안식년과 동일한 해라는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또한 21절에 야웨가 안식년에 먹을 것이 없을 거라는 항의에 대해 “삼년 쓰기에 족할 소출”을 주신다는 의미는 처음과 마지막 해를 계산에 넣는 히브리인의 계산법하에서 이해할 수 있다.19)


2. 희년제도의 내용 (23 - 55절)


23 - 55절은 희년제도의 내용에 대해 크게 4부분으로 설명해 준다.  첫째는 ‘토지무르기’에 대해서 23 -28절에서, 둘째는 ‘가옥환원’에 대해서 29 - 34절에서,셋째는 ‘이식없는 대부’에 대해서 35 - 38절에서, 넷째는 ‘노예해방’에 대해서 39 - 55절에서 설명한다.

a. 토지무르기 (23 - 28절)

23 - 28절 : “토지를 영영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라 너

           희는 나그네요 우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너

           희 기업의 온 땅에서 그 토지 무르기를 허락할지니 만일

           너희 형제가 가난하여 그 기업 얼마를 팔았으면 그 근족이

           와서 동족의 판 것을 무를 것이요.   만일 그것을 무를 사

           람이 없고 자기가 부하게 되어 무를 힘이 있거든 그 판

           해를 계수하여 그 남은 값을 산자에게 주고 그 기업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그러나 자기가 무를 힘이 없으면 그

           판 것이 희년이 이르기까지 산 자의 손에 있다가 희년에

           미쳐 돌아올지니 그가 곧 그 기업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23절의 서언은 다음에 열거되는 토지무르기 법령을 지배하는 근본 원리이다.20)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땅’은 신명기 26장 9절과 여호수아 21장 43절이 말하듯이 야웨께서 주신 것이고, 각 지파에게 야웨께서 분배하신 것이다.   즉 땅의 원(原)주인은 야웨이시고 이스라엘은 그 야웨의 땅에 몸 붙여 사는 식객에 불과하므로 이스라엘인이 땅을 매매할 수 없다는 것이다.21) 만일 한 이스라엘인이 빚을 져서 억지로 소유지를 팔아야 했을 경우에는 25절에 의하면 우선으로 ‘기업무를자’가 나서야 했다.   이는 가까운 친척 중 하나가 그 땅을 산 사람에게 땅을 팔 때 치룬 액수를 물어주고 그 판 땅을 다시 되찾아서 그것을 그 자신이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원래의 소유자에게 돌려 줌으로써 대가족이나 지파의 연대감을 증명해 보이는 것이었다.  만일 그러한 ‘기업무를자’가 없거나, 있다해도 그 자신이 그것을 되돌려 살만한 능력이 없을 경우에는 26 - 27절에 의하면 그 땅을 판 사람 자신이 나중에 그것에 필요한 액수를 조달할 능력이 되면 그 땅을 되돌려 사려고 노력할 수 있었다.   이 액수는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로 낮아지게 되었다.   왜냐하면 27절에 의하면 땅을 판 것이 아니라 해마다 나는 소출을 판 것이므로 다시 되돌려 살 때에는 지나간 햇수만큼의 가치를 공제해야 하기 때문이다.22)27절에 나와 있는대로 되돌려 사는 것이 불가능한 경우 희년이 되면 제 소유지로 복귀되었다.

b. 가옥환원 (29 - 34절)

여기서는 가옥환원에 대한 희년제도의 내용을 다룸에 있어, 일반인의 가옥 (29 - 31절)과 레위인의 가옥 (32 - 34절)을 구분하여 말한다.

29 - 31절 : “성벽에 있는 성내의 가옥을 팔았으면 판지 만 일년 안에

            는 무를 수 있나니 곧 그 기한 안에 무르려니와 주년 내

            에 무르지 못하면 그 성내 가옥은 산자의 소유로 확정되

            어 대대로 영영히 그에게 속하고 희년에라도 돌려 보내지

            아니할 것이니라.   그러나 성벽이 둘리지 아니한 촌락의

            가옥은 나라의 전토 일례로 물려주기도 할 것이요.   희

            년에 돌려 보내기도 할 것이니라.”

일반인의 경우 성벽 내에 있는 가옥과 성벽 밖에 있는 가옥이 구분되어 설명된다.   성벽 밖에 있는 가옥에는 희년법을 적용하여 희년이 되면 팔았던 가옥이 자동으로 복귀되도록 하였는데, 성벽 안에 있는 가옥은 1년 이내로 무르지 못하면 영원히 무르지 못하도록 되어 있다.   이에 대해 ‘켈로그’(Kellogg)는 희년법이 목축이나 경작에 사용되는 땅에만 연관되기 때문이라 주장한다.   즉, 성벽 밖에 있는 집의 거주자들은 땅의 목자와 경작자이고, 그들의 집은 땅에 부수되는 필수품이며, 그들의 집이 없다면 그 땅도 사용 불가능하기 때문에 희년법이 적용된다23)는 것이다.   반면에 M.Noth는 이를 가나안의 도시법과 이스라엘의 토지법 사이의 대조라는 사회적 배경 하에서 설명한다.   즉 이스라엘인중 어떤 사람들은 가나안 정착 이전부터 벌써 가나안 도시에 살고 있었고, 거기서 그들의 가옥도 갖고 있었고, 자신들이 세운 성곽 도시까지 소유하고 농사를 짓고 살고 있었기에 그들에게도 고대 가나안의 도시법이 적용되었고 성벽 밖에 살던 사람에게는 희년법이 적용되었다.24)

32 - 34절 : “레위 족속의 성읍 곧 그 기업의 성읍의 가옥은 레위 사

            람이 언제든지 무를 수 있으나 레위 사람이 만약 무르지

            아니하면 그 기업된 성읍의 판 가옥은 희년에 돌려 보낼

            지니 대저 레위사람의 성읍의 가옥은 이스라엘 자손 중에

            서 얻은 기업이 됨이니라.   그러나 그 성읍의 들의 사면

            밭은 그의 영원한 기업이니 팔지 못할지니라.”

도시 안에 있는 가옥이라 할지라도 레위인이 소유한 가옥들에는 희년법이 적용되었다.  이것은 33절에서 지시하는대로 가나안 입주 당시 레위인들이 야웨로부터 분배받은 기업은 농토가 아니라 도시들이었기 때문이다.25) 34절에는 레위인이 도시 주택을 소유할 때 그 도시 구역으로 간주되는 ‘들의 사면 밭’도 거기에 딸린 배당으로 차지하고 있었는데, 그 밭은 전혀 사고 파는 것이 금지 되었다.   이 규정은 레위인의 소유를 보존하기 위한 관심사에서부터 내려진 것이다.26)

c. 이식없는 대부 (35 - 38절)

35 - 38절 : “네 동족이 빈한하게 되어 빈 손으로 네 곁에 있거든 너

            는 그를 도와 객이나 우거하는 자처럼 너와 함께 생활하

            게 하되 너는 그에게 이식을 취하지 말고 네 하나님을 경

            외하여 네 형제로 너와 함께 생활하게 할 것인즉 너는 그

            에게 이식을 위하여 식물을 꾸이지 말라.   나는 너희 하

            나님이 되려고 또는 가나안 땅으로 너희에게 주려고 애굽

            땅에서 너희를 인도하여 낸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여기서는 주로 동족끼리 서로 금전으로 도와줄 때는 이자나 장리를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가르친다.   즉 동일한 고난의 경험을 공유했던 히브리인 형제끼리는 이식을 전제한 꾸어 주는 일과 빌리는 일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27) 이스라엘 사람이 어쩔 수 없이 남에게 무엇을 빌려 와야 할 때, 그는 자기의 씨족이나 동족의 범위 안에서 지원자를 찾아야 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빌려 주는 것은 좋은 일이다.28)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꾸어 주는 것을 거절하였다.   왜냐하면 빌려간 자들이 자신들에게 부과된 임무들을 충실하게 지키지 않았으며, 또 반환할 능력이 되어도 갚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대금’이란 이자없이 빌려주는 것을 의미한다.   무이자 대출만을 계약서는 허용하고 있으며, 그것은 이스라엘 중에서만 시행될 것을 규정하고 있다.29) 반 에 외국인에게는 이자를 받을 수 있었다.30) 이스라엘의 이웃 백성들에게서는 모두 이자를 받으면서 대금하는 풍속이 획일적으로 통용되었다.31)

38절에는 그들이 계약의 하나님을 다시 강조하므로 이식없는 대부에 대한 명령을 확고히 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자비로우심처럼 동족에게 자비로와야 한다.32)

d. 노예해방 (39 - 55절)

여기서는 노예된 자의 사면 또는 해방에 대한 희년제도를 다루면서 이스라엘 민족 안의 노예 (39 - 46절)와 이방인에게 팔려간 이스라엘의 노예 (47 - 55절)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39 - 46절 : “네 동족이 빈한하게 되어 네게 몸을 팔리거든 너는 그를

           종으로 부리지 말고 품군이나 우거하는 자같이 너와 함께

           있게 하여 희년까지 너를 섬기게 하라.   그 때에는 그와

           그 자녀가 함께 네게서 떠나 그 본족에게로 돌아가서 조상

           의 기업을 회복하리라.   그들은 내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

           여 낸 바 나의 품군인즉 종으로 팔리지 말 것이니라.   너

           는 그를 엄하게 부리지 말고 너의 하나님을 경외하라.  너

           의 종은 남녀를 무론하고 너의 사면 이방인 중에서 취할

           지니 남녀 종은 이런 자 중에서 살 것이며 또 너희 중에

           우거한 이방인의 자녀 중에서도 너희가 살 수 있고 또 그

           들이 너희 중에서 살아서 너희 땅에서 가정을 이룬 그 중

           에서도 그리할 수 있는즉 그들이 너희 소유자가 될지니 너

           희는 그들을 너희 후손에게 기업으로 주어 소유가 되게 할

           것이라.   이방인 중에서는 너희가 영원한 종을 삼으려니

           와 너희 동족 이스라엘 자손은 너희 피차 엄하게 부리지

           말지니라.”

여기서는 이스라엘 사람이 빚 때문에 자기 몸을 팔아야만 했던 경우를 다룬다.   그렇게 해서 그는 기본적으로 그를 산 사람의 소유물, 즉 노예가 된 것이다. 그러나 그를 종처럼 대우해서는 안되며 ‘품군’이나 ‘식객’처럼 대우해야 했다.   즉 그들의 노동력을 요구할 수는 있었지만 그의 인격을 마음대로 할 수는 없었다.33) 왜냐하면 그들은 어디까지나 단지 ‘가난하게 된 형제‘ 불과할 뿐이고 (39절), 그들도 역시 야웨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야웨의 종들’(42,55절)일 뿐 ‘인간의 종’은 아니기 때문이다.34)

히브리어 어휘 자체도 노예신분을 강조하지 않는다.   노예의 주인은 가장의 의미를 지닌 ‘아돈’ : 바깥어른)이라 불러지며, 소유주의 뜻을 가진 ‘바알’이라 불리는 일이 없다.   즉 이스라엘의 주종 관계는 소유주와 노예 (상품인) 의 관계가 아니라 부자주의 (Paternalism)의 특성을 지니고 있다.35)

이스라엘인은 다른 민족에게서만 진짜 종을 사들일 수 있었다.   그 외에는 이스라엘인들에게 몸 붙여 사는 ‘식객들’의 자손중에서 종을 사들일 수 있었는데, 이 식객들도 역시 대개는 외국인들로서 이스라엘 영역에서 상인이나 수공업자로 일하던 사람들이었다.36)

47 - 55절 : “너희 중에 우거하는 이방인은 부요하게 되고 그 곁에 사

            는 너희 동족은 빈한하게 됨으로 너희 중에 우거하는 그

            이방인에게나 그 족속에게 몸이 팔렸으면 팔린 후에 그를

            속량할 수 있나니 그 형제 중 누구든지 속할 것이요 그가

            부요하게 되면 스스로 속하되 자기 몸이 팔린 해로부터

            희년까지를 그 산자와 계산하여 그 연수를 따라서 그 몸

            의 값을 정할 때에 그 사람을 섬긴 날을 그 사람에게 고

            용된 날로 여길 것이라 만일 남은 해가 많으면 그 연수대

            로 팔린 값에서 속하는 값을 그 사람에게 도로 주고 만일

            희년까지 남은 해가 적으면 그 사람과 계산하여 그 연수

            대로 속하는 그 값을 그에게 도로 줄지며 주인은 그를 매

            년의 삯군과 같이 여기고 너의 목전에서 엄하게 부리지

            못하리라.   그가 이같이 속하지 못하면 희년에 이르러

            그와 그 자녀가 자유하리니 이스라엘 자손은 나의 품군이

            됨이라.   그들은 내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나의 품

            군이요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여기서는 궁색해진 한 이스라엘인이 이스라엘인들 가운데 사는 부유한 외국인에게 몸을 팔았을 경우를 다룬다.   이 경우 외국인 주인은 노예의 속죄의 권리를 인정해야 한다.   그래서 노예의 몸 값을 지불하고 살 수 있는 노예의 친척이 요구할 때, 또는 노예자신이 힘이 생겨 비용을 갚을 수 있을 때 그를 자유롭게 해야 한다 (48 -49절). 값을 치루지 못할 경우에는 문제가 되는 그 노예를 희년에는 자유롭게 풀어 주어야 한다는 것이 외국인에게 요구되었다.   50 - 52절에는 종의 몸 값을 물고 되돌려 살 때 희년까지 남아있는 햇수를 따져서 그 가격을 매기는 것이 다루어지고 있는데, 이는 16, 17, 27절에 나오듯이 토지매매를 조정하는데 희년을 참작했던 것과 유비된다.37) 53절에는 노예를 혹사 (40,43,46절)하지 말고 인간적으로 대우해야 한다는 요구가 나와 있는데, 이는 외국인이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이스라엘인인 종을 악하게 다루면 그것이 모욕적인 것이 된다는 암시와 더불어 나와 있다.38) 55절은 이스라엘인이 야웨의 종이지 사람들의 종이 아님을 다시 한번 단언함으로, 사람들의 노예가 되서는 안됨을 강조한다.


c. 희년과 연관된 성서적 내용


희년은 안식년이 7번 지난 후 50년째 되던 해 7월 10일인 속죄일에 선포되었다.   그리고 희년의 복음은 이사야 61장 1 - 2절과 예수님의 공생애 초기의 말씀인 누가복음 4장 18 - 19절과 연관되어 성서 전반에 흐르고 있다.   이에 필자는 여기서 희년과 연관된 성서적 내용을 안식년, 속죄일, 그리고 ‘은혜의 해’ (사 61:1 - 2, 눅 4:18 - 19)로 구분하여 살펴 보겠다.


1. 안식년 (출 21:2 - 6, 23:10 - 11, 레 25:2 - 7, 신 15:1 - 18)


안식년(Sabbatical Year)은 7년을, 1주기로 할 때의 그 마지막 해, 곧 7년째 되는 해로써 이것은 고대 이스라엘의 시간 계산 제도였으며, 종교, 사회, 경제적 관습의 제도이기도 했다.   이것은 본래 ‘제 7 년’(Seventh year)이라고 표현되었고 (출 23:11, 느 10:31), 신명기 기자에 의해 ‘면제년’: senat hasmita : 부채를 삭제하거나 면제해 주는 해)39)이라고 불리게 되었으며, 레위기에서는 ‘땅의 안식년’( senat sabaton : 농업 활동을 중지하는 안식년)40)이라 도 불렀다.41)

a. 출애굽기 21장 2 - 6절, 23장 10 - 11절

출애굽기 21장 2 - 6절의 종에 관한 법령에 따르면, 히브리인을 종으로 삼았들 경우 칠년이 되면 자유를 주어 내보내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이 때 주인은 종에게 어떤 보상을 해 줄 의무는 없다(2절). 만일 그가 그의 종으로 들어올 때 아내를 데리고 왔었으면 아내도 함께 데리고 나가게 해야 하며, 주인이 그 종을 장가들여 그 아내가 아들이나 딸을 낳았을 경우에는 그 아내와 자식들은 주인의 것으로서 남종은 자기 혼자만 자유인이 될 수 있다.   종이 자유인이 되기를 싫어하면 귀바퀴에 구멍을 뚫어 영원히 종으로 남게 된다는 것이다(6절).42)

출애굽기 23장 10 - 11절은 매 7년째 준수해야 할 농경지의 휴경을 설명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땅의 휴식’만에 관심을 둔 것이 아니라, 도리어 휴경지에 저절로 자라난 곡식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강조한다.  그것은 백성 중의 가난한 자들이 거두어 먹도록 밭 주인은 손대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법을 지키도록 매어 있는 이들은 밭 주인이며 그 본래 강조는 토지 소산물에 대한 부자들의 독점을 견제하는 데 있다.43)  또한 땅을 놀린다는 것은 그 땅위에서 일하던 종들과 가축들의 휴식까지도 제공하는 것이다.

b. 레위기 25장 2 - 7절

레위기 25장 3 - 5은 출애굽기 23장 10 - 11절과 완전히 일치한다.  둘 다 토지의 안식을 말하고 있다.   안식년에는 땅을 쉬게 해야 되므로 파종도 금지되었고, 추수도 금지되었다.   여기서는 ‘땅의 휴식’의 동기가 종교적으로 나와 있다.   즉, 안식일이 되면 사람이 야웨 앞에서 쉬는 듯 안식년이 되면 땅이 야웨 앞에서 쉬어야 한다는 것이다.   땅은 야웨의 것이다.   그러므로 야웨는 인간이 땅에서 휴식을 주지 않고 계속 파종하고 수확하여 땅을 쇠약하게 하는 것을 그대로 버려 두시지 않으신다.   이와 같이 땅을 묵히는 것은 땅으로 하여금 새 힘을 얻게 하여 보다 소출을 오래 내도록 하기 위함이며 사람들은 주인이나 종이나 할 것 없이, 심지어는 가축과 온갖 짐승들 마저도 땅이 내는 소출을 먹게 되는 혜택을 입게 되리라는 것이다(6 - 7절).44)

c. 신명기 15장 1 - 18절

여기서는 7년째 되는 해를 면제년이라 칭하고 있다.(1절) 2 - 11절에는 빚의 면제에 대해 설명한다.   이 명령 역시 야웨의 이름으로 선포되고 있으며, 이 요청에 응해야 할 대상은 약속의 땅을 유산으로 받은 백성들이다.   이는 땅은 하나님의 것이고, 백성은 그 위에 몸붙여 사는 색객에 불과 한 것이라는 희년법 정신과도 일맥상통한다.45) 1절 - 18절에는 종에게 자유를 주는 규정이 있다.   동족인 히브리인이 남자건 여자건 종으로 팔려 왔거든 육년만 부리고 칠년째 되는 해에는 자유를 주어 내보내야 한다는 규정은 출애굽기 21장 2,5절의 것과 같다.   그러나 여기서는 종에게 자유를 주어 내보낼 때 빈손으로 내보내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즉 양 떼와 타작마당에 거둔 것과 손틀에서 짜낸 것을 한 밑천 되게 마련해 주어 내보내야 한다는 것이다.46)


2. 속죄일 (레위기 16장)


희년이 속죄일에 선포되었다는 것은 희년과 속죄일과의 깊은 연관성을 암시한다.  속죄일이란 히브리어로 ‘욤 하키푸림’ (레 16:27 - 28절, 25장 9절)이다.   유대교에서는 레위기 16장에서 시사해 주는 대로 7월 10일을 속죄일로 지켰다.   이 날은 성소에 있는 대제사장이 모든 이스라엘의 죄를 속하기 위해 지성소로 들어가는 날로 오늘날에는 ‘욤 키푸르’로 알려져 있다.   신약에서는 이 날을 ‘헤 네스테이아’(η νηστεια)라 불리워졌다.   이 날에 대한 다른 명칭으로는 ‘금식의 절기’(필로)와 ‘중대한 날’(미쉬나)등이다.47)

일년에 한번씩 지켜지는 이 속죄일은 모세의 율법이 규정하고 있는 유일한 금식일이다.   이 날에 지켜야 할 의식은 레위기 16장에 잘 나타나 있다.   그리고 이 날에 대한 보충적인 규정들은 레위기 23장 26 - 32절, 민수기 29장 7 - 11절에서 발견된다.48)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하고” (레 16:29, 23:27, 29; 민 29:7)라는 말은 이 날이 금식일임을 암시한다.   그런데 이 날은 또한 ‘큰 안식일’(레 16:31, 23:32)로써, 아무 노동도 하지 말고 안식일을 준수해야 한다(민 29:7).  이 날이 지닌 복잡한 의식과 다양한 기원은 모두 ‘이스라엘 족속 가운데 영원히 거하실 처소로 성전을 택하실 거룩한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고 그의 보호 아래 거한다.’는 단일한 목적을 위한 것이다 (겔 43: 7 - 9, 48: 35).  속죄 염소의 피를 성소에 뿌리거나 광야로 추방하는 의식의 목적도 ‘이스라엘과 제사장들과 성전을 더러운 죄에서 깨끗게 한다’는 것이다.49)


3. 은혜의 해 (이사야 61장 1 - 2절, 누가복음 4장 18 - 19)


예수님은 자신의 공생애를 시작하시며 사역 목적을 누가복음 4장 18 -19절에 밝히고 있다.   즉,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 했는데 이는 이사야의 예언(사 61:1 - 2)을 인용하신 것이다.  여기서 ‘은혜의 해’란 레위기 25장에서 언급한 희년을 가리킨다.50)

a. 이사야 61장 1 - 2절

본문의 표상은 레위기 25장에 있는 희년전승에서와 같이 하나님이 백성들 가운데 공의를 수행하는 창조주와 주권자로 묘사하는 시편 146편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51) 여기서 나오는 희년의 표상은 세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하나는 성령에 의해서 사신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선포하는 ‘하나님의 통치’이며, 또 하나는 ‘가난한 자에 대한 복음선포’이고, 마지막 하나는 여러가지 억압과 포로됨으로 부터의 ‘해방’이다 (1,2절).  이표상의 핵심은 ‘희망을 전혀 가질 수 없었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로운 통치에 의해 희망이 부여된다’는 것이다.   즉, 나쁜 소식만을 듣고 살던 가난한 자들이 좋은 소식을 듣고, 갇혀있는 자가 풀려나며, 앞을 못보던 이가 눈을 뜸으로써 신체의 자유를 획득하고, 노예상태에 있거나 억눌린 자가 자유롭게 된다는 것이다.52)

이사야의 선언은 포로된 자를 자유케하고 경제적 이유로 노예가 된 자를 해방시키는 선언이다.   또한 그 선언은 이스라엘과 그 백성 개개인에게 해방과 자유를 가져오는 사역에 헌신할 것을 촉구하는 부름이다.   마침내 이사야는 하나님이 그의 구원의 실현을 위하여 은혜롭게 정하신 ‘주의 은혜의 해’를 선포한다.   이것은 하나님이 인간 사회 속에서 지정하신 ‘해방의 해’이다.53)

b. 누가복음 4장 18 - 19절

신약성서에서 희년의 표상이 가장 명백하게 반영되어 있는 본문은 누가복음 4장 18 - 19절이다.   이 구절은 누가복음의 주제를 나타내 주고 있다.   여기에서는 예수의 정체성과 그의 선교의 동기를 정의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수행되는 선교활동의 본질을 밝혀주고 있다.54) 18절- 19절의 맥락인 4장 16 - 21절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예수는 광야에서 사단의 시험을 받은 후, 고향 나사렛으로 돌아 오신다.   어느 안식일날 예수는 동네의 회당에서 성서를 낭독하신다.   낭독한 본문은 이사야 61장 1 - 2절 말씀으로 회당의 회중이 익히 잘 알고 있는 희망과 약속으로 가득찬 구절이었다.   다 읽으신 후 예수는 그 말씀이 이 자리에서 성취되었다고 선언하신다.   이로인해 예수는 회중으로부터 배척을 당하시게 된다.55)

예수는 그의 선교 서두에서 이사야의 선언을 인용하고 있다.   예수의 선교는 희년전승의 영향을 받았다.   또한 예수는 “이글이 오늘날 너희귀에 응하였느니라.”(4:21)고 선언한다.   이 말은 ‘주의 은혜의 해’가 도래했다는 말이다.   즉, 희년의 복음이 예수와 그의 선포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56)

 

Ⅲ. 희년의 사회적 의미

 

희년은 노예와 토지와 가난한 자의 빚을 사면하고 해방시키는 위대한 해로 노예가 된 인간과, 빚 때문에 빼앗긴 땅과 빚 자체에 관해 모든 경제적 사면을 해 주었다.  그러므로 이 해는 기쁨과 사면의 해라고 불린다.  이 희년법은 토지 소유의 무한한 팽창을 금지하고, 잃었던 집을 되찾고, 무겁고 괴로운 부채에서 해방되고, 절망적인 노예상태에서 벗어나 자유와 평등을 향유하는 사회를 이룩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57)

그러므로 희년법은 자유와 평등을 향한 사회적 요소를 강하게 내포하고 있는 사회적인 법이다.

이에 본 장에서는 희년이 지닌 사회적 의미를 희년의 4가지 내용인 토지무르기, 가옥환원, 이식없는 대부, 노예해방 측면에서 살펴보겠다.


A. 토지무르기


희년의 궁극적 의미는 해방이며 그 구체적인 것은 경제적 요인으로 인한 소유권 박탈을 회복시켜 주는 것이다.58) 그중 토지에 관한 소유권 회복은 땅이 이스라엘의 삶의 터전이기 에 그 무엇보다 우선된다.

이에 여기서는 토지무르기의 사회적의미를 살펴보겠다.  먼저 배경적인 고찰로 이스라엘의 토지(땅) 개념을 살펴보고, 희년의 토지무르기가 이스라엘 공동체에 어떤 사회적 의미를 주었는지 고찰하겠다.


1. 이스라엘의 토지


구약성서는 땅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기록이다.59)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의 두 발을 이 땅 위에 굳게 디디고 서서 이 땅의 삶을 그들 관심의 촛점으로 삼은 것이다.  그런 면에서 폰 왈도우 (Von Waldow) 는 “구약성서의 토지 개념이 계약 개념보다 구약성서에서 더 많이 다루어지고 있다”고 말하면서 구약성서의 토지 신학론을 주장한다.60)

a. 이스라엘 초기의 토지

이스라엘 민족 역사의 중요한 사건 - 가나안 정복, 왕국 출현, 바벨론 포로이송 - 들은 모두 땅과 연관된다.  땅에 대한 약속은 오경의 중요한 주제이다.  이것은 “내가 장차 보여줄 땅”(창12:2)으로 가라고 아브라함에게 지시한 야웨의 약속으로부터 시작된다.  출애굽기 서두에 야곱의 후손들이 자신들의 땅이 없어서 에집트인들에게 학대 받는 내용이 나오는데, 바로 그러한 때에도 야웨 하나님은 모세에게 땅의 약속을 해 주신다.

“내가 내려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

에 이르려 하노라.” (출 3:8)

이처럼 땅에 대한 약속은 5경 전체를 꿰뚫고 있는 하나의 커다란 주제이다.  폰 라드 (Von Rad)는 구원사적인 입장에서 야웨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 땅을 허락해 준 것을 야웨의 커다란 구원 행위라고 간주한다.61)그러므로 그는 여호수아를 포함한 육경 전체가 하나의 단위를 이룬다고 보았다.  즉 아브라함에서 주어진 약속이 여호수아에게서 성취되었다는 것이다.62)

신명기 26장에서 이스라엘은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이 곳으로 인도하사 이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셨나이다” (신 26:9).이 신앙 고백은 농사의 첫 열매를 거두어 하나님께 바치는 감사 예배 중에 읊은 것이다.  그러므로 땅의 선물은 처음부터 이스라엘 예배에 중요한 몫을 차지한 것이다.  이처럼 야웨는 모든 토지의 주인이고 이스라엘은 그것을 위탁받은 자라는 이해는 이스라엘 초기부터 있어왔다.  특히 여호수아서 13장부터 21장의 ‘토지 분배’ 내용은 이를 잘 설명해 준다.  즉 토지는 하나님으로부터 유업으로 받은 것이기에 골고루 나누어 가져야 하고 이를 잘 관리해야한다는 의식아래 그들은 제비를 뽑아 토지를 분배하였고, 유목민들의 관습을 그대로 보존하려 했다.  토지의 소유권은 씨족이 갖고 있었으며, 토지를 관리하는 자는 그 땅을 외국인들에게 팔 권리가 없다는 유목민적 관습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정착 이후에도 그대로 보존되었다.63)

그러나 모든 지파들에게 주어진 영토의 경계선은 명확한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각 지파 사이의 관계가 좋을 때는 영토를 함께 사용하기도 했으나 그렇지 않을 때는 온갖 분쟁의 이유가 되었다.64) 이러한 전쟁에서 승리한 지파는 다른 지파의 토지를 약탈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생활양식과 사회조직 안에서는 사회계층의 차이는 거의 있을 수 없었으며 더구나 빈부의 격차는 실제로 불가능하였다.65) 씨족 전체가 가난하거나 부하거나 하는 차이는 있을지언정 아직은 그 씨족 내에서 개인 간의 빈부 격차는 없었다.

이와 같이 이 시기에는 아직 토지의 빈부 격차는 없었으며 모두가 분배받은 땅은 경작하던 평등한 사회였음을 알 수 있다.

b. 왕정시대와 그 이후의 토지

이집트에서는 모든 토지가 바로나 신전들의 소유였다.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왕과 성소들이 아마 광대한 토지들을 소유하고 있었다.  공동체들과 개인들도 일정한 토지에 대하여 소유권을 지니고 있었으며, 그런 토지에 대하여서는 왕도 소유자로부터 매입함으로써만 사용권을 발동할 수 있었다.  왕은 이런 식으로 구입한 토지들이나 자기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토지들을 통하여 자기의 영지를 구성하였다.  영지는 어느 개인에게 할양하여 주지만, 그가 마음대로 타인에게 양도할 수 없다는 조건 하에 주는 땅이요, 그는 이에 더하여 개인적으로 토지를 할양한 자에게 봉사할 책임을 지게 된다.  이런 봉건제도는 근동에 아주 만연되어 있었다.66)

이스라엘은 후기에 와서야 비로소 근동의 이러한 발전과 연결되었고, 중앙집권화된 국가가 된 것도 후기에 와서야 비로소 나타난 현상이었다.67) 사무엘이 백성들에게 시사한 사실도 왕이 백성들에게 자기의 토지를 경작하도록 부려먹고 그들을 시켜서 자기의 농산물을 거두어들이게 할 것이며 백성들의 포도원들과 감람원들을 빼앗아 자기 하인들에게 넘겨줄 것이라는 경고였다.68)

이것은 사울 통치하에서 현실화되었다.  그가 왕이 되기 전에는 근소한 부모의 재산만을 소유하고 있었으나,69) 왕이 된 후 그는 밭과 포도원들을 자기의 하인들에게 분배할 수 있었으며70) 또 그가 죽을 때에는 상당한 재산을 남겨 놓았다.71)  그들은 처음에는 이스라엘 민족이 아닌 가나안 사람들의 토지를 사들였으나,72)후에는 처형된 자의 토지,73) 나라를 떠난 사람들이 남겨 놓은 토지,74) 예물로 들어오는 토지75), 열매나는 토지의 징발76)등으로 이스라엘의 땅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토지를 관리하기 위해서 관리를 임명하였고, 이를 유지하기 위해서 과세를 부과했다.77)  반면에 이스라엘의 소작농들은 빈궁에 쫓긴 나머지 자기 조상의 토지를 매각하게 되었고, 이는 대지주 또는 왕에게 예속되는 결과를 초래했다.78)

이처럼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땅을 왕들과 대지주들이 마음대로 다루었다.   그러나 그 결과 그들은 그들의 땅을 바벨론에게 빼앗기게 되었다.79)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스라엘 초기는 토지란 하나님께서 선물로 분배해 준 것이라는 이해 하에 평등한 사회였으나, 그 후 왕정이 시작되면서 왕과 대지주들이 토지를 더욱 많이 소유하였고, 하나님의 뜻이 아닌 자신들의 뜻대로 사용하였다.  그 결과 빈부의 격차가 심화되었고, 종국에는 토지를 잃는 아픔을 당하게 되었다.


2.토지 무르기의 의미


희년의 토지 이해는 이스라엘은 하나님에게 몸붙여 사는 식객에 불과하며, 따라서 분배받은 땅은 하나님의 것이고 팔 수 없으며 가난 때문에 팔았다해도 다시 되돌려 살 수 있어야 한다80)는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도로 찾을 힘이 없을 경우에는 희년에 자동적으로 원래의 소유자에게 돌아오게 되었다.81)

여기서는 토지무르기의 의미를 “야웨의 소유로서의 토지”와 “토지를 되돌려 사는 것”으로 구분하여 살펴보겠다.

a. 야웨의 소유로서의 토지

“땅과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중에 거하는 자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시 24:1)라는 시편 기자의 표현은 레위기 25장의 희년에 관한 규정인 “토지를 영영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것임이라.  너희는 나그네요 우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 ( 레 25: 23) 라는 땅에 대한 야웨의 소유권을 잘 드러내주고 있다.82) 이처럼 토지무르기의 의미는 토지에 관한 야웨의 소유권이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성이다.  이스라엘은 야웨의 명령과 도움에 따라 가나안 땅을 정복했으므로 야웨를 그 땅에서 땅의 주인으로 섬기는 것은 당연했다.83) 이스라엘은 땅에 대한 아무런 권리 주장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생계와 생존과 안전은 모두 땅 주인인 야웨 하나님께 달려 있는 것이었다.  이처럼 토지무르기는 땅이 개인의 소유가 될 수 없음을 나타낸다.  땅은 어디까지나 유업이었다.  유업(    )이란 말은 소유 재산, 상속 재산 등이란 의미로 야웨가 가나안을 이스라엘에서 약속으로 준 것, 각 부족들이 서로 분배받은 땅, 또는 선조에게 물려받은 상속 혹은 분깃의 의미로 쓰이고 있다.84)

이와같이 토지무르기란 야웨가 이 땅의 소유주라는 것을 다시 확인하고, 하나님의 소유권을 회복하는 것이다.

b. 토지를 되돌려 사는 것

레 25:25절은 파산하여 가족을 잃을 위기에 처하여 재산을 회복하려는 동족의 의무인 토지를 되돌려 사는 것에 대해 말해준다.  불(Buhl)은 저당물을 대신주는 사람이 가난한 자에게 그것을 되돌려 주기 위해서 부동산을 사는 것이 아니고 씨족 또는 공동체를 위해서 사는 것이라 한다.85) 이는“되돌려사는 것”은 가족 안정을 표현한 것이며 외부의 압력으로부터 가족을 지키기 위한 것이다.  유산을 분배할 때 토지는 다른 동산과 같이 분배된 것이 아니라 오로지 장자에게만 전부를 주든가 또는 아들이 없을 경우 그 토지가 그의 딸에게 양도된 것,86) 딸이 자기 종족안에서만 결혼하도록 통제한  것, 또한 자식이 없는 과부가 자기 시동생의 아내가 되도록 규정한 결혼법등은 모두 그 가족의 토지가 다른 집안으로 넘어가는 것을 막으려는 의도였다.

이와같이 토지를 그의 가족이나 씨족이 되돌려 사는 것은 가난한 자와 나그네를 보호하고 개인의 사유 재산을 극대화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다.87)


B. 가옥 환원

1. 이스라엘의 가옥 개념


고대 이스라엘에 있어서 한 개인은 어떤 공동체안에 예속되어 있을 때만 생존이 가능했다.  이러한 공동체의 가장 기본적이고도 중대한 단위가 곧 가족(   ) 이였다.  가족이 모여서 씨족이 되고, 씨족이 모여 지파가 되고, 지파가 모여 민족이 되었다.  여호수아 7장 16절 - 18절은 민족 - 지파 - 가족 - 개인이라는 사회구조의 계통을 분명히 설명해 주고 있다.88)

여기서 가족을 나타내는 히브리어 ‘바이트’(   ) 는 보통 두가지 의미로 사용되었다.  하나는 가시적인 집인 ‘가옥’을 의미했고, 다른 하나는 불가시적인 집인 ‘가족’을 의미했다.89) 특별히 가족을 의미할 때는 “아버지의 집”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90) 이것은 한 가족에 있어서 아버지가 책임을 진 주요 인물이라는 뜻이다.91)

또한 가족은 혈연공동체와 동시에 거주공동체를 통하여 결속된 모든 자들로 구성된다.  ‘가족’이란 ‘한 집’을 가리키며, ‘한 가정을 건설한다’는 것은 ‘한 집을 세운다’는 표현으로 나타난다.(느 7:4)  가족에는 자녀들 뿐만 아니라 그 집에 함께 우거하는 자, 즉 남녀 종들과 그 집의 최고 어른의 보호하에 있는 실향자, 과부, 고아들을 포함한다.92)

이처럼 가정은 거의 모든 자들의 생활보장을 전담했고, 가정의 밖에서는 거의 일자리를 찾을 수가 없었으며, 더우기 가정이 없는 개인이란 생존의 수단이나 보호자가 없는 것과 같았다.

이스라엘인들이 처음 정착하고 토지를 분배받았을 때 그들은 대체로 사회적인 처지가 균등했다.  모든 부는 모든 가족에게 골고루 분배되었고, 모든 가족은 거의 균등한 집을 짓고 살았다.  그러나 이스라엘 왕조 이후 일종의 관리 계급이 출현했고, 이들은 자신들의 지위와 왕이 베푸는 호의를 바탕으로 온갖 이익을 누리며 막대한 토지와 호화스런 가옥을 지었다.  이러한 현상은 왕조말기에 더욱 확연히 나타나며 특별히 예언자들의 규탄의 대상이 되었다.  아모스는 “겨울 궁과 여름 궁을 치리니 상아궁들이 파멸되며 큰 궁들이 결판나리라” (암 3:15)라고 말함으로 백성들 사이에 불의한 재물을 축적하여 호화스런 주택을 짓은 자들을 경고하고 있다.93)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스라엘에 있어서 집이란 개인의 생존을 보장하고 보호처가 되는 가족의 기본적, 거처였다.  그러나 왕정이후 집이란 대지주와 왕들의 부의 축척의 수단이 되었다.


2. 가옥환원의 의미


가옥환원에 대한 희년의 적용은 토지 무르기와 기본적으로 흡사하다.  그러나 여기서는 성벽안과 밖을 구분하여 성밖의 가옥에만 희년법을 적용한 것과, 특별히 레위인들의 소유인 도시 가옥에 희년법을 적용한 것이 특이하다.  이는 가난한 도시 밖의 시골 사람들과 경제적 타산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레위족을 보호하기 위함이다.94)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땅이 주어지면, 그곳에서는 결코 집을 팔지 말 것을 명하신다.  이는 집을 팔게 되면 그 가족은 파괴되고 노예로 전락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쩔수 없이 집을 팔았을 경우 희년이 되면 모두 원주인에게 돌려주어야 했다.

레위인의 기업과 도시 밖의 가난한 사람들의 가옥은 생존의 마지막 보루이다.  또한 그것은 하나님으로 부터 분배받은 유산이었다.  그러므로 생을 출발할때 주어진 원 자본인 그 유산은 절대로 지켜져야 했다.95)

이와같이 희년에 가옥이 환원된 것은 힘이 없는 도시 밖의 가난한 자와 레위인들의 최소한의 기본적 삶을 보호하기 위함이요, 야웨로부터 물려받은 기본 유산을 회복하기 위함이다.


C. 이식없는 대부


1. 이스라엘의 대부


기원전 2천년기 초부터 셈족들 간에 공통된 관행이 되었던 이자를 부과하는 행위는 5경에 의해 위축되었고 정죄되었다.  그런 관습들은 씨족내 친족들 사이에서 이자없이 혹은 개인적인 이익을 고려하지 않고 서로 돕고 도움을 받는데서 유래했을 것이다.96) 하지만 이런 일들에 있어서 위법행위는 빈번했고, 이런 범법행위들은 예언자들에 의해 격렬하게 정죄되었다.  에스겔과 느헤미야는 자기시대 사람들에게 돌이켜 율법을 엄격히 지키라고 요구했다. 97)

“이자”는 히브리어로 ‘네섹’(   ;neshek), 문자적 의미로는 ‘물기’를 나타내며, ‘타르비트’(     ;tarbit)는 문자적 의미로는 ‘증가’를 나타낸다.  아마 처음에는 네섹이 모든 종류의 대부를 묘사한 것 같다(비교,신 23:20).  그러다가 후에 가서는 돈으로 빌려주는 것에 제한되었고 타르비트는 곡물의 대여를 표시했을 것이다.98)

고대 근동의 높은 이자율이 만연한 것과는 달리 이스라엘은 동족끼리 돈을 꾸거나 이식을 취하는 것을 금했다.99) 그러나 이자받기를 금하는 대상은 ‘내 백성’(출 22:24)과 ‘너희 동족’(레 25:35)으로 제한하고 있으며 신명기에는 외국인에게는 이자를 받아도 된다고 하였다.  이는 본래 동족의 가난한자를 위하여 대부를 하여야 하나, 상업적 목적으로 외국인에게 대부를 하는 것도 허용되었다는 의미이다.100) 이처럼 이스라엘 초기에는 공동체가 어려움에 빠졌을 때 서로 무이자로 동족 간에 도와주었다.

그러나 왕정 이후에는 경제적 발전과 외국인들의 새로운 풍속들을 율법에 제시된 규정을 위반하였다.  시편 15:5에서는 여호와의 장막에 유할 자는 “변리로 대금치 아니하며 뇌물을 받고 무죄한 자를 자를 해치 아니하는자”라고 하였다.101)  즉, 의인은 이자를 받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러나 나중에는 이 제재도 무시되었고, 차용자에게 가혹하게 되어 그의 자녀를 노예로 삼기도 하였다.102) 이러한 상황은 바벨론 포로 이후에도 개선되지 않았다.  성전재건 후 느헤미야는 고리의 이자 때문에 유다의 가난한 자들이 집과 재산을 잃게 되었다고 말한다.103)


2. 이식없는 대부의 의미


레위기 25:35 - 38에서는 동족끼리 금전으로 도와줄 때는 이자나 장리를 취해서는 안된다고 가르치고 있다.  반면에 신명기 15:1 - 6의 면제년에 대한 법규에서는 안식년에 채무자들의 빚이 탕감된다고 가르친다.  이러한 법의 목적은 살기위해 자신을 팔 수 밖에 없는 극단적인 가난을 방어하는 것이다.  빚은 어떤 경우건, 특별히 가난한 사람에게는 짐이 된다.  그런데 이자가 붙여진다면 빚은 채무자에게 더욱 무거워진다.  따라서 희년법은 고리대금을 금지한다.  뿐만 아니라 동족에게 어떤 형태로든 이자를 취하는 것을 금지한다.104) 똑같은 구원을 경험했던 평등한 동족 사이에 고리대금업은 결국 가난한 자를 노예로 전락시키므로 신분의 계층화가 생겨나고, 그들의 소망인 평등사회 이념을 깨어지게 한다.105)

오히려 이스라엘은 면제년법 ( 신 15:1 - 18)과 희년법 ( 레 25:35 -38)을 연결시킴으로써 ‘사면의 해’에 가서는 이식은 물론 빌려준 자의 원금까지도 탕감, 소멸되게 해 버린다.  물론 이러한 경우에는 안식년이나 희년이 가까와지면 꾸어 주는 일을 기피하는 현상이 생기므로, 안식년법은 오히려 그러한 기피 행위도 금지하고 있다.106)

이러한 면제를 강조한 이유에 대해 맥켄지 ( R.A.F.Mackengie)는 “안식년이 상업적인 실용규칙을 위해서 경직된 의미로 만들어진 법이 아니라 우정 깊은 자선을 권면하는 인도주의적 의미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107)라고 도덕성을 강조한다.  이는 레위기 25:38에 나타난 출애굽 신학, 즉 이스라엘이 야웨의 인도하심으로 애굽의 종살이로부터 해방을 얻은 민족이므로 이스라엘도 역시 가난의 질곡 속에 있는 형제를 적극적으로 도와야 하고, 형제를 통해 이득을 얻기 보다는 그들을 돕는데 관심해야 한다는 것과 연결된다.108)

이상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이식없는 대부와 대부의 면제에 대한 사회적 의미는 동족의 경제적 파산을 구제하므로 그들 사이의 공동체 의식을 더욱 견고케하기 위함이라 하겠다.


D. 노예해방

1. 이스라엘의 노예제도

 


노예제도란 한마디로 사람이 사람을 소유하는 제도를 말한다.109) 이것은 고대 근동에 널리 통용되던 제도였으며 구약의 많은 부분도 노예에 관한 법을 다루고 있다.  노예는 엄격히 말해서 ‘물건’이었다.  노예가 불구가 되거나 살해되었을 때 그 손실에 대한 보상은 상전이 받게 되어 있다.  노예 자신은 절대로 피해 당사자로 인정되지 않았다.110)

‘에베르’(   : 종, 섬기는 자)는 본래적인 의미에서 ‘노예’를 의미한다.  여기서 노예란 부자유하고 타인의 세력하에 사는 사람을 가리키지만, 이 단어는 왕의 권력이 절대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근거에서 왕의 하인들, 특히 왕의 용병들과 왕의 군인 장교들과, 고급 관리들과 왕에 대한 봉사의 의무로 인하여 여타의 사회적인 모든 구속력을 단절시킨 자들을 의미한다.  또한 이 개념은 의미의 확대를 통하여 겸손을 나타내는 단어도 된다.111)

이스라엘인은 다음과 같은 경우에 노예로 전락할 수 있었다.  첫째는 경제적인 어려움에 빠진 경우이다.  곤경에 빠진 자가 노예로 전락하는 경우는 대부분 부채를 지불할 수 없게 되었거나 자신의 몸을 담보로 내어놓고 빚을 얻는 경우에 해당한다.  이스라엘 사람들중 부채를 지불하지 못하는 채무자를 강제로 데려다가 노예로 삼는 경우는 여러 자료를 통하여서도 증명된다.  예를 들면 아둘란 동굴에서 다윗에게 가세한 자들 가운데는 채권자에게서 도망한 채무불이행 채무자들이 다수 있었고,112) 어느 여인이 부채로 인하여 자기 두 아들이 채권자의 노예로 될 형편에서 엘리사가 나타나 그들을 위하여 기적을 행한 사건도 있다.113)  또한 이사야 50:1 에서 야웨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내가 어느 채주에게 너희를 팔았느냐”고 질문하신다.  포로후기에도 부모는 채무지불에 대한 담보물로서 자기의 아들과 딸을 저당잡힌다.  이 경우 빚을 갚지 못하여 저당잡힌 아들, 딸이 노예가 되었다.114) 이와같이 자유인이었던 이스라엘인이 경제적 어려움에 빠질 경우 노예로 전락하곤 하였다.   둘째는 도둑질을 하였으나 변상할 능력이 없을 경우이다.115)  여기서 도둑이 노예로 팔리도록 제정된 이유는 도적질한 것에 대한 벌이 아니라 재산손실에 대해 주인에게 보상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116) 세째는 전쟁의 포로들의 경우이다.  전쟁포로들과, 어떤 경우에는 전쟁에서 패한 국가의 국민들이 큰 무리의 노예로 전락했다는 사실은 고대근동의 전쟁사에 충분히 인정되고 있다.  전쟁포로들을 노예화하는 수법은 이스라엘 사람들에 의해서도 사용되었다.117)

이와같이 성서에도 이스라엘인이 노예가 되는 경우가 있음을 인정하고 있으나 성서의 법 규범은 제한적이기는 하나 노예의 인간성을 인정하고 있다.  상전이 종을 학대할 경우는 있겠으나, 매질을 해서 종이 영영 불구가 되면 사지를 잃게한 댓가로 종에게 자유를 주어야 한다.118) 만일 매질로 인해서 종이 즉사하면 상전은 처벌을 받아야 한다.119) 더나아가 성서는 노예제도를 인정하기는 하지만 노예해방을 제도적으로 규정하고 있다.120)

출애굽기 21:2 - 6에 의하면 6년 동안의 노예생활이 지난 다음에 남자 노예들은 해방되어야 하고, 신명기 15:12 - 17에 의하면 남녀 노예들이 똑같이 6년동안의 노동을 한 다음에는 해방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 사람이 자유인이 되는 것을 거부하면 일평생 노예로 머물게 되었다.121) 이러한 경우에는 주인이 집의 문기둥에 종의 귀를 대고 송곳으로 구멍을 뚫어 그 노예가 자기 집에 영구히 머물게 할 수 있었다.122) 레위기 25장에 의하면 희년이 되면 이스라엘의 모든 노예가 해방되었다.  희년에는 이스라엘의 노예들이 자신의 자녀들과 함께 해방되었다.123)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스라엘인은 여러 경우에 노예로 전락될 수 있었으나 율법은 무제한적인 노예의 존재를 거부하며, 부분적이기는 하나 노예의 인간성을 인정하고 있다.


2. 노예해방의 의미


희년은 그 적용범위가 한 개인에 국한되지 않으며 그 파급 효과는 사회 전반에 걸치고 있다.  이는 안식년과 희년의 본래적인 성격이 개인적 차원의 인도주의 정신에 머무르지 않고 사회적 특성을 지닌 사회적 구속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인간 본연의 자유에로의 희구를 반영한 것이라 하겠다.124)

희년의 노예해방은 고대근동이나 희랍의 노예제도에서는 살펴볼 수 없는, 이스라엘인인 형제와 동족 사이에는 본질적으로 ‘노예’라는 것을 있을 수 없다는 사상이다.  그러한 종 또는 노예상태는 단지 ‘빈곤’이라는 것 때문에 생긴 하나의 결과이기 때문에 종으로 자신을 판형제라고 해서 ‘종 부르듯 엄하게’다스려서는 안되고 단지 ‘품꾼’이나 ‘식객’으로만 대하라고 희년법은 명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어디까지나 단지 ‘가난하게 된 형제’에 불과 할 뿐이고, 그들도 역시 야웨 하나님께서 애굽으로부터 인도하여 낸  ‘야웨의 종들’일 뿐 인간의 종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125)

이스라엘은 출애굽 이전에 노예의 굴레를 경험하면서 노예제도의 불합리성, 이에 대한 거부감들을 의식적으로 지니고 있었다.  즉, 노예 소유자가 인간을 완전소유하여 노동력을 혹사하고 나아가서 매매, 양도 심지어는 살상까지 임의로 할 수 있는 인신지배권을 가지고 최대한 그들의 가치실현의 대상으로 다룬 것이 노예라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이에 대한 반영은 가나안 정복 이후, 초기 이스라엘 ( 1250 - 1050 B.C )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사회,경제적 평등사회 구조를 실현하려 했던 것이다.126)

희년의 노예해방은 자유를 갈구하는 인간의 기본적인 동기를 법을 통해 실현시켜 주는 것이다.  인간존중의 사상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며, 어떤 형태로든 그것이 역사 가운데 실현되는 것이 중요하다.  비록 노예를 부리는 주인의 개인적인 선택에 의존하지만 이것이 제도화되고 사회 전체적으로 파급될 때, 정의사회, ‘샬롬 (    )공동체’는 이루어 지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어디까지나 형제들로 구성된 백성이므로, 이 희년의 노예해방은 이스라엘 백성들 간의 단절된 관계를 회복시켜 주고, 하나님의 한 백성으로 묶어주는 역할을 했다.

 

Ⅳ. 희년의 신학적 의미


구약에 규정된 희년법은 단순히 ‘인도주의’(Humanitarianism)에만 근거한 것이 아니다.  이는 근본적으로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어떠하신 분이신가?’라는 문제와 깊은 연관을 갖는다.127) 이스라엘 백성은 에집트에서 노예살이를 경험할 때 야웨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구해주셨다.  그러므로 그들은 야웨의 종이었다.  만약 그들이 다른 사람들의 종이 된다면, 이는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권리가 노예 소유주들에 의해서 침해 당하게 되는 것이다.128)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섬기며 그의 종을 억압할 수는 없다.  가옥과 토지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다.

이와같이 희년은 백성들에게 평등성을 회복시켜 주며 경제적 파산으로 몰락한 그들에게 자유와 새로운 삶의 기회를 준다.  뿐만 아니라 희년을 선포하신 하나님은 어떠한 분이시며, 이 명령을 받아들여야 할  이스라엘은 어떤 공동체인가를 설명한다.  이러한 면에서 볼 때 희년은 신학적 동기에서 출발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본 장에서는 희년의 신학적 의미를 논함에 있어서, 희년의 선포자이신 야웨 하나님은 어떠한 분이시며, 이 희년법을 받는 대상인 이스라엘은 어떤 공동체인가를 살펴보고, 마지막으로 희년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희년의 성취자129)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 희년의 신학적 의미를 고찰해 보겠다.

 

A. 야웨 하나님 - 희년의 선포자

 

짐멀리 (W. Zimmerli)는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 사상에 대해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과 모든 백성을 다스리시는 주인이시며, 억눌린 자의 부르짖음을 들이시고 그들에게 구원을 베푸시는 분이시다.”130)라고 말한다.  이러한 하나님 사상은 희년법에도 나타나 있다.  희년법에 나타난 하나님 사상은 양면성이 있는데, 그것은 창조주와 구속주라는 것이다.  희년이 안식일과 깊은 연관이 있으며, 토지의 주인이 야웨라는 것131)은 하나님이 만물의 주이시며 창조주이심을 나타낸다.  또한 희년이 속죄일과 연관이 있으며 야웨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에집트에서 구해내신 것, 그리고 ‘기업무를자’(   )가 궁극적으로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하나님이 구속주이심을 보여준다.132)

이에 여기서는 희년의 선포자이신 하나님을 창조주와 구속주로 살펴보겠다.


1. 창조주 하나님


희년법은 안식년에서 안식년은 안식일제도에서 유래되었다.133) 안ꃯ일에는 가족, 노예, 가축 모두가 일을 하지 않고 쉬었다.134) 즉, 안식일에는 모든 것들 - 남자와 여자, 부모와 자녀, 고용자와 피고용자, 원주민과 이주민, 가축과 땅등 - 이 함께 안식했다.  이는 하나님이 창조한 모든 만믈을 하나님께서 처음 창조하신 모습대로 회복시키는 것을 의미한다.135)

또한 신명기 10장 14절을 보면 “하늘과 모든 하늘과 땅과 그 위의 만물이 본래 하나님 여호와께 속한 것이로되”136)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야웨 하나님께서 눈에 보이는 모든 피조물에 대한 소유권과 통치권을 갖고 계시다는 것을 나타낸다.137) 야훼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셨기에 이에 대한 통치권과 소유권을 갖는 것은 당연하다 이러한 야웨 이해는 땅, 가옥, 사람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그러므로 희년에 모든 유업을 원 주인에게 돌려주는 것, 토지를 쉬게한 것은 야웨가 그 유업의 주인이라는 ‘모노 야웨이즘’(Mono - Yahwism) 에 부합된다.138) 초대 이스라엘이 가졌던 이 사상은 혁신적이고 비 철학적인 ‘실천적 유일신론’(Practical Monotheism)이요, 땅과 가옥과 몸으로 요약될 수 있는 인간의 기본 유산의 주인이 오직 야웨 뿐이라는 것이다.139) 하나님께서 6일간 창조하셨고, 7일째  안식하셨으므로 너희도 남종과 여종, 집안에 머무르는 식객이라도 일을 시키지 말라140)는 안식일 사상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시요, 이 세상을 통치하시는 분이시라는 창조주 사상에 근거한다.

이와같이 희년에 모든 유산을 원 주인에게 돌려주고, 토지를 쉬게하는 것은 야웨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의 창조주이심을 드러낸다.


2. 구속주 하나님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려고 또는 가나안 땅으로 너희에게 주려고 애굽 땅에서 너희를 인도하여 낸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레 25:38)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여 구원하신 분이시다.  이 구원 사건은 하나님이 구속주이시라는 것을 온 이스라엘로 하여금 고백하게 만들었다.  레위기 25장의 희년법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했다는 사상을 근거로 한다.141)

출애굽 구원 사건은 인간의 역사 행위가 아닌 하나님의 활동하심이다.  출애굽은 하나님께서 그의 구속 역사의 준비, 전개, 구원 역사의 완성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완전한 계시한 사건이었다.  또한 출애굽 신앙은 구약의 신앙고백의 근원이며, 야웨 하나님이 그들의 삶 속에 현존하심을 인정하는 것이었다.142)

출애굽 전 이스라엘은 사회 경제적으로 애굽에서 소외당했던 어려운 상태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야웨께 그들의 고통과 억압당함을 울부짖음으로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을 얻었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정치적 해방사건이 아니었다.  이것은 종교적 해방을 포함한 총체적 구원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이스라엘 전 역사의 핵심이요, 이스라엘 공동체를 새롭게 출발시킨 창조 사건이었다.143)

이 출애굽 사건은 모세의 작품도, 바로왕의 선의도, 히브리 사람의 혁명적 성과도 아니었다.144)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한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역사요, 하나님의 은혜였다.  이러한 사유로 인해 이스라엘 사람들은 애굽의 종살이를 기억하여 종을 무조건 석방하도록 명령받았다.145) 신명기 15장 12절에는 여종도 그와 같이 하되 새 생활을 위한 밑천을 그 손에 쥐어주며 내보내라고 하였을 뿐 아니라, 희년에는 전쟁 포로로 끌려온 이방인 종에게도 자유를 선포할 것을 명하였다.146) 이와같이 희년법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구속자이시라는 역사적 체험과 신앙적 고백을 근거로 하고 있다.147)

또한 희년에는 이스라엘 사람 가운데 형제가 빚을 져서 자기 소유지를 팔아야 했을 경우에 우선적으로 ‘기업 무를자’(   )가 되돌려 샀다.  ‘고엘’이 지닌 의무 중 하나는 어쩔 수 없이 매각된 땅을 사들이는 것이었다.  그래서 예레미야가 자기 조카 하나므엘의 밭을 샀고,148) 보아스는 엘리멜렉의 토지를 샀다.149) 이는 고엘이 매각된 토지를 다시 매입하는 것이 아니라 매각하도록 내어놓은 토지에 대해 선매권을 지니고 있다는 것과 고엘이 다시 매입한 토지를 파산된 자에게 돌려주는 것이 아니라 고엘 자신이 그 토지의 소유주가 된다는 것을 알려준다.150)

이사야서 (사 43:1 ; 44:21 - 23 ; 52:9등)에서는 고엘을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칭호로 사용한다.  이는 야웨께서 그의 백성 이스라엘을 구원하신다는 사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을 그의 백성으로 선택했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구속할 의무가 그에게 있다는 것이다.151) 린드불럼 (J.Lindblom)은 “야웨가 이스라엘의 구속자라고 말할때, 이것은 그가 자기 민족을 특히 압제자의 손에서 구원하심으로 그들의 권리를 옹호하는 것을 의미한다.”152)고 지적한다.

이스라엘 백성을 압제자로 부터 구출해 내신 야웨와 이스라엘의 관계는 인격적이기는 하나 동등하기 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소유물에 대한 구원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고엘은 소유자와 소유물 사이의 관계 회복을 나타낸다.153)

이와같이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야웨는 고엘이다.  그는 이스라엘을 최종적으로 구속할 주이시다.

또한 희년이 선포되는 날이 속죄일(Day of Atonement)이라는 것은 인간의 죄된 모습을 하나님께 회개함으로 온전한 구속을 이룰 수 있음을 나타낸다.154)


이상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희년법은 하나님께 의해 선포된, 하나님이 주도하신 법으로, 이 법은 선포자이신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만물을 통치하시는 분이시요, 이스라엘을 온전히 구속할 자이시라는 사상을 근거로 한다


B. 이스라엘 - 희년의 수혜


하나님께서 희년법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포하셨기에 이스라엘은 그 법의 수혜자이다.  수혜자인 이스라엘은 그 법을 준수해야할 책임이 있다.  여기서는 희년법을 준수해야할 이스라엘 공동체를 ‘하나님의 형상’과 ‘계약공동체’로 구분하여 살펴보겠다.

 


1. 하나님의 형상인 이스라엘

 


희년은 야웨의 평등사상을 기초로 한다.  하나님 앞에서 모든 인간은 같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평등하며, 인간은 본래 가지고 있는 자유를 누릴 권리가 있다.  창조주가 만드신 자연의 질서와 인간 사회의 질서는 결코 파기되어서는 안된다는 신학적 명제는 이스라엘 백성이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신앙을 갖고 이 창조질서를 지킬 것을 요구한다.155)

창세기 1장 27 - 28절을 보면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라고 말하고 있다.  오토 밥(Baab)은 여기서 ‘하나님의 형상’이란 다른 여러 생물을 지배할 수 있는 능력, 선악을 구별할 수 있는 윤리적 판단력, 동물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인격의 특수한 신적 성질을 인간이 갖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156)고 말한다.  최근 고고학의 연구는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개념이 에집트의 종교사상 내지 정치사상에서 유래되었음을 증거한다.  에집트의 종교 및 정치사상에 의하면 에집트의 왕 파라오는 땅 위에 있는 신의 형상이요 대리자이다.  그는 신에게서 땅을 통치해야 할 사명을 부여받았다.  그는 땅 위에서 신의 영광을 나타내며, 그를 통하여 신이 이 땅위에 나타나며 이 땅을 다스린다.  파라오의 상이 서 있는 곳은 그의 통치영역을 나타낸다.  따라서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창조된 인간은 땅 위에 있는 하나님의 대리자이며 땅을 다스려야 할 사명을 부여받았다.157)

또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요 제사장 나라이다.158) 하나님이 이와같이 이스라엘을 자신의 거룩한 백성으로 삼으신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야웨 자신의 주권적이 선택에 의한 것이다.  “세상이 다 네게 속하였나니” (출 19:5)고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께서 자신의 존귀한 소유물인 이스라엘을 자기 백성으로 삼으신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였다.159) 또한 신명기서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은 이스라엘이 특별히 위대하기 때문이 아니라 “야웨께서 너희를 사랑하심을 인하여”(신 7:8)라고 강조한다.160) 즉, 이스라엘의 선택은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때문이다.  더불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선택 백성으로서의 책임을 요청한다.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 내 소유가 되겠고”(출 19:5)와 같이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율법준수를 요구하신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충성심(Royalty)을 요구하시고 거룩한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결속되며 충성을 서약하는 것을 요구하신다.

이와같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형상이요 하나님의 백성이다.  이 신앙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위탁하신 모든 것 -  토지, 가옥, 몸 - 을 하나님의 청지기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따라 잘 다스려야 한다는 것과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허락하신 모든 율법 - 희년법을 포함한 - 을 준수해야할 충성심을 요구한다.

 


2. 계약공동체인 이스라엘

 


성서의 이야기들은 야웨께서 광야에서 인도하셨고 또 이스라엘 백성들이 궁핍하거나 위기에 처했을 때 간청하는 소리를 듣고 은혜를 베풀었다는 사실을 다양한 방법으로 강조하고 있다.161) 이러한 성서의 이야기들에 있어서 근원이 되는 두 사건이 있는데 그것은 선택과 계약사건이다.  특히 출애굽 사건은 시내산의 계약 체결 사건과 연이어 일어남으로써 근본적으로 야웨의 선택 행위로 간주되고 있는데, 이 선택의 사건은 계약의 이미지와 분리시키기 어렵다.  야웨는 시내산 기슭에서 이스라엘과 계약을 맺으셨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출 19:5 - 6)는 시내산 계약을 통하여 이스라엘과 하나님은 불가분의 관계가 맺어지게 되었다.162)

이러한 이스라엘의 계약사상은 희년법과도 깊이 연관된다.  레위기 25장 17 - 18절을 보면 “너희는 서로 속이지 말고 너희의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너희는 내 법도를 행하며 내 규례를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그 땅에 안전히 거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레위기 25장의 희년법이 이스라엘과 하나님과의 계약을 근거로 하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의 계약의 의미와 목적을 충분히 알려면 계약과 율법의 관계, 그리고 율법의 의미와 범위를 잘 알아야 한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율법을 낭송한 후에 백성들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겠나이다.”(출 24:3 ; 7 ; 19:8)라고 선언하였다.  그런 뒤 모세는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기록하였다.”(출 24:4)고 말한다.  이런 점에서 시내산 계약은 하나님의 뜻을 외형적으로 기록한 구체화된 최종 요약의 특징이 있으며 총 요약은 두 돌판에 기록된 것이다.  그러므로 야웨의 율법과 계약은 시초부터 한데 묶였다.163) 또한 이 계약은 은혜의 성격과 율법의 성격 양면을 지닌다.  전자는 인격적이며 친근한 관계를 강조하는 반면 후자는 법적 의무와 충성을 강조한다.164) 이 율법은 단지 십계명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야웨가 하신 모든 말씀”(출 24:3, 19:8, 20:1)에서 알 수 있듯이 이는 이스라엘이 준수할 십계명을 포함한 모든 계명을 뜻한다.  이런점에서 희년법도 율법의 의미 하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카이저 (W.C.Kaiser) 는  “율법은 야웨와의 교제를 지속시키는 수단이다”165)라고 말함으로 율법이 언약안에서 백성들에게 주어진 생활 법칙이요, 이스라엘에게는 하나님에 대한 순종과 충성의 표임을 말해준다.

말텐스 (E.A.Martens)는 율법이 이스라엘 공동체가 하나님께 충성해야할 책임이 있다는 것 외에 결속의 의미가 있다고 말한다.  즉 율법이 이스라엘 공동체를 하나로 묶어주는 역할과 종교적 유대감을 주었다는 것이다.166)

또한 율법은 애굽으로부터 구원 받은 이스라엘에게 구원이후 시대에 대한 야웨 지배 하의 생활의 근거가 되었다.167)

이와같이 계약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준 율법은 계약 공동체의 법이며, 그 공동체의 구성원 모두에게 적용되었다.  또한 이 율법은 대규모 집회에서 정규적으로 낭송되므로168)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유지시켰다.  그리고 율법은 계약공동체의 결속과 평화, 그리고 거룩함을 유지하는데 요구되었다.169)

희년법은 하나님께서 계약공동체인 이스라엘에게 준 율법 중 하나이다.  그러므로 율법이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로 묶어주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계속 지속 시키는 근거가 되었다는 것은, 곧 희년법도 계약공동체인 이스라엘에게 동일한 의미가 있다는 것을 뜻한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스라엘 백성이 계약공동체라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준수해야 됨을 의미한다.  특히 희년법의 수혜자인 이스라엘이 계약공동체라는 것은 그들이 희년법을 반드시 지켜야 할 책임이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희년법을 포함한 모든 율법은 계약공동체인 이스라엘을 결속시켜주었으며, 다가올 이스라엘의 역사가 이 계약적 결속력의 시험과 실천의 장이 될 것임을 시사한다.

 

 

 

C. 예수 그리스도 - 희년의 성취자

 


희년법의 본문 (레 25장) 과 예수의 나사렛 선언 (눅 4:18 - 19)은 서로 조화와 대칭관계를 보여주고 있다.  예수의 공생애는 나사렛 회당에서 ‘주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

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

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다”      (눅 4:18 - 19)

 


위의 내용은 예수님의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하신 말씀으로, 그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명백하게 보여준다.  그것은 이사야서 61장 1 - 2절을 인용하면서, 자신이 온 것은 ‘주의 은혜의 해’, 곧 희년을 선포하기 위함임을 보여준다.170) 특히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오셨다는 사실은, 가난한 자에게 기쁨의 소식을 선포한다는 차원에서 희년의 선포와 같은 목적이다.171)

그러나 누가복음의 특이한 점은 예수 그리스도가 희년의 성취자로 희년을 선포한다는 것이다.“이 글이 오늘날 너희귀에 응하였느니라”(눅 4:21)는 말씀은 누가복음 4:18 - 19의 말씀이 단순히 이사야 61:1 - 2의 내용을 인용한 것이 아니라 그것의 성취였음을 보여준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의 모든 사건이 종말론적인 사건이었던 것처럼 심판과 구속의 은혜로 나타나지는 희년에 대한 현재적 선포이자 실현이었다.172) 즉, 여기서 예수가 말하는 ‘오늘’은 이 복음서를 읽는 독자들을 향한 것으로 희년적 구원이 현실적으로 실현되고 있음을 의미한다.173)

희년의 성취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희년의 사신이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에서 나타나듯 예수는 희년의 사신(Messenger)으로서의 그리스도이다.  이 사신의 권위는 “주의 영이 내게 임하셨으니”에서 나타나듯, 자신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그를 보낸 주권자를 대표하도록 위임받은 권위이다.  그러므로 희년전승에 근거한 그리스도론은 하나님 중심적이다.174)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 초기에 희년의 복음이 선포되었다는 것을, 이것이 곧 예수 그리스도의 선교사상임을 나타낸다.  예수 그리스도의 선교는, 이 희년의 복음을 통해서 볼 때 인간의 삶의 모든 측면과 관련된다.  희년의 복음에서 하나님의 통치는 “가난한 자들을 위한 기쁜 소식”에 의하여 예고되는데, 그 “가난한 자”들이란 눈먼 자, 절름발이, 귀머거리등 신체적 질병과 사회적 소외로 고통받는 자들, 포로된 자, 감옥에 갇힌 자, 또는 억눌림을 당하는 모든 자와 연관된다.  그리고 하나님의 통치와 하나님의 축복의 기쁜 소식은 예수의 선교와 관련된 “가난한 자”들을 돌보는 구체적인 행위에서 구현된다.  이 가난한 자들을 돌보는 행위들은 단순히 자선의 차원에 속하는 것이든지, 빈곤에 대한 위로가 아니라 빈곤 상황의 실질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행위들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통치와 구원의 영향이 경험되는 영역은 삶의 정신적, 내적 세계만이 아니라, 삶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현실들을 포함한다.  예수의 선교에서 성(聖)과 (俗)의 구별이나 분리는 전혀 불가능하다.  예수의 희년적 선언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선교는 내적, 영적, 개인적 차원 뿐만 아니라 현실적,사회적, 경제적 변혁에도 관심을 갖는 총체적 선교이어야 한다.175)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희년의 성취자로 오셨다.  그 분은 하나님의 사신으로 희년의 복음을 선포하셨으며, 그 복음은 내적, 영적, 개인적, 차원 뿐만 아니라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차원을 포함한 총체적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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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서에 나타난 선택사상 

 

목     차

Ⅰ.  서    론

    A. 연구의 목적

    B. 연구의 범위와 방법


Ⅱ.  구약 성서에서 선택의 개념

    A. 어원적 의미

    B. 신학적 의미


Ⅲ. 선택과 관련된 개념들

    A. 언약

    B. 축복

    C. 구속


Ⅳ. 구약 성서에서 선택 사건들

    A. 아브라함의 선택

    B. 이스라엘 백성의 선택

    C. 선택의 변천


Ⅴ. 아브라함의 선택과 이스라엘 선택의 관계

 

Ⅵ. 구약 성서에서 선택의 기능


Ⅶ. 결론


    참고문헌

 

Ⅰ.서론


   A. 연구의 목적    


성서 전체를 흐르고 있는 중요한 종교적 개념들 중의 하나는 하나님께서 개인, 종족, 민족, 도시, 또는 권위를 부여해 주었다는 선택 개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이히롯트(Walther Eichrodt)가 지적한 바와 같이 구약 성서 전체가 선택사상을 증거하고 있다고 하여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1) 그렇기 때문에 선택 사상은 구약 성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상중의 하나인 것이다.  즉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과 특별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고 함이 성서의 중심 사상이라고 본다.  따라서 선택 사상을 자세히 고찰하지 않고서는 성서의 신앙과 이스라엘 구원의 역사를 바르게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이사야 55:1, 2에 의하면 “아브라함이 혈혈단신으로 있을때에 내가 부르고 그에게 복을 주어 창성케 하였느니라”하여 하나님의 주권적 자유하심의 선택을 천명하고 있다.  즉, 하나님의 독자적 축복으로 아브라함의 씨가 창성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이다.2) 또한 신명기 7:6에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느니라”를 미루어 이스라엘이 선택받은 백성, 즉 선택받은 나라였다는 것이 구약 신앙의 기본적 조항이라 할 수 있다.  이렇듯 구약 성서 저자들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선민이라고 확신했다.

구약 성서에 나타난 선택 사건중 가장 핵심적인 것은 아브라함의 선택과 모세를 통한 이스라엘 선택이라고 생각된다.  구약 성서에 나타난 선택 사상을 바르게 이해하게 될때 기독인으로 자신이 택함을 받은 이유와 세계속에서 우리 한국을 향한 하나님의 섭리와 뜻을 바르게 인식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본 연구에서는 아브라함의 선택과 이스라엘의 선택을 고찰함으로써 선택의 의미, 두 선택사건의 상호 관계 그리고 선택의 기능을 살펴보고자 한다.


   B. 연구의 범위와 방법


구약 성서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는 선택 사건으로서 아브라함의선택, 족장들의 후손의 선택, 유다, 아론, 레위, 다윗의 선택, 이스라엘의 선택, 희생 장소의 선택, 그리고 예루살렘과 시온의 선택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본 논문에서는 아브라함의 선택과 이스라엘의 선택에 대해서만 고찰하려고 한다.

본 논문의 연구를 다음과 같은 절차와 방법에 따라서 전개하려고 한다.

제 Ⅱ 장에서는 구약 성서에 나타난 선택의 의미를 개관하려고 한다.  선택의 어원적 의미를 찾아 본 후에 학자들의 견해를 탐구할 것이다.

제 Ⅲ 장에서는 선택과 관련된 개념들 중에서 언약, 축복, 그리고 구속의 어원적, 신학적, 종교적 의미를 살펴볼 것이다.

제 Ⅳ 장에서는 아브라함의 선택과 이스라엘 백성의 선택을 차례로 논술하되, 다음 장에서 두 선택 사건의 관련성의 토대를 마련하는 데 주력할 것이다.

제 Ⅴ 장에서는 아브라함의 선택과 이스라엘 선택의 관계를 고찰하되 두 선택 사건이 별개의 선택 사건이 아니라, 동일한 하나님의 통일성 있는 선택이라는 측면에 주안점을 두고 연구할 것이다.

제 Ⅵ 장에서는 구약 성서에 나타난 선택의 기능을 살펴 본 후 제 Ⅶ 장에서 결론을 맺으려 한다.


Ⅱ. 구약성서에서 선택의 개념

 

   A. 어원적 의미


성서에 나타난 선택사상이란 하나님께서 개인을, 민족들, 종족들, 성들 또는 성전들 중에서 하나를 택하여 그 하나와 유일하고 독점적인 관계를 맺고, 그것에 특수한 역할, 의무 또는 권위를 부여 해주었다는 종교적인 확신을 가리킨다.  가장 중요한 용례들은 이스라엘의 조상들, 왕들과 제사장들, 그리고 예루살렘성과 관련 되어있다.  이스라엘의 조상들, 왕들과 제사장들의 두 용례는 신약에서 계승되어 예수와 열 두 제자 및 종교공동체로서의 교회의 선택에 사용되고 있다.3)

선택이라는 개념과 관련된 용어를 우선 히브리어 어근 bahar와 이 어근의 파생어들인 bahir, bahor 그리고 mibbar를 포함하고 있다.4) 마ꃯ가지로 신약성서 안에 있는 “택하다”라는 뜻을 가진 헬라어 eklegomai(εκλεγομαι)라는 동사와 거기에서 파생된 형태들인 “택함 받은”의 뜻을 가진 ekletos(εκλεκτοσ)와 “선택”이라는 뜻의 ekloge(εκλογη)라는 말도 선택이라는 말에 대한 진정한 해당어들은 아니다.  히브리어나 헬라어 이 두 언어에서 다 “하나님”이 주체적으로 “택하신다”는 뜻을 가진 술어는 다른 어떤 어휘로도 전달되지 않는 특수한 의미를 가지므로, 특수한 용법으로만 그 뜻을 나타낼 수 있다.5)

     bahar가 사용된 구약성서의 용례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6) 

(1)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선택하실 때 (느 9:7)

     “주는 하나님 여호와시라 옛적에 아브람을 택하시고 갈대아 우르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을 주시고”

(2)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선택하실 때 (신 7:7; 사 44:1)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신 7:7)

(3)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선택하실 때 (신 7:6; 14:2)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신 7:6)

(4) 하나님이 족장들의 후손을 선택하실 때 (신 4:37; 10:15)

     “여호와께서 네 열조를 사랑하신 고로 그 후손 너를 택하시고 큰권능으로 친히 인도하여 애굽에서 나오게 하시며”(신 4:37)

(5) 하나님이 유다 (시 78:68), 아론(시 105:26), 레위(렘 33:24), 왕

  특별히 다윗을 택하실 때 (신 17:15; 삼상 10:24; 16:8, 9, 10; 삼하 6:21; 왕상8:16; 대상 28:4, 5; 29:1; 대하 6:5; 시 78:70)

     “다윗이 미갈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 앞에서 한 것이니라 저가 네아비와 그 온 집을 버리시고 나를 택하사 나로 여호와의 백성이스라엘의 주권자를 삼으셨으니  내가 여호와 앞에서 뛰놀리라” (삼하 7:21)

(6) 하나님이 희생의 장소를 선택하실 때 (신 12:11,18; 14:25; 16:7, 15; 대하 7:12)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한 곳을 택하실 그곳으로 나의 명하는 것을 모두 가지고 갈지니 곧 너희의 번제와 너희 희생과 너희 십 일조와 너희 손의 거제와 너희가 여호와께 서원하는 모든 아름다운 서원물을 가져가고”(신 12:11)

(7) 하나님이 도시를 선택하실 때 (왕상 8:16, 44)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날부터 내 이름을 둘 만한 집을 건축하기 위하여 이스라엘 모든 지파 가운데서 아무 성읍도 택하지 아니하고  다만 다윗을 택하여 내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하였노라 하신지라”(왕상 8:16)

(8) 하나님이 예루살렘을 선택하실 때 (대하 6:6; 사 14:1; 슥 1:17;2:16)

     “예루살렘을 택하여 내 이름을 거기 두고 또 다윗을 택하여 내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하였노라 하신지라”(대하 6:6)

(9) 하나님이 시온을 선택하실 때 (시 132:13)

     “여호와께서 시온을 택하시고 자기 거처를 삼고자 하여 이르시기를”

(10) 사람이 어떤 물건을 선택할 때 (욥 7:15; 9:14)

     “하물며 내가 감히 대답하겠으며 무슨 말을 택하여 더불어 변론하랴” (욥 9:14)

(11) 사람이 사람을 선택할 때 (출 17:9; 삿 5:8)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우리를 위하여 사람들은 택하여 나가서 아말렉과 싸우라 내일 내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산꼭대기에 서리라” (출 17:9)

bahar와 유사한 것으로는 min과 결합된 yada가 있는데 아모스 3:2에 나타나 있다. “땅의 모든 족속중에 너희만 알았나니 그러므로 내가 너희 모든 죄악을 너희에게 보응하리라 하셨나니” 여기 나타난 “안다”라는 말은 단순히 지적인 의미로만 이해해서는 안된다.  이것은 “인정하다”는 뜻과 “채택하다”는 의미를 다 지니고 있다.7) bahar가 사용되는 선택은 철저한 조사에 의한 것으로 되어 있으며 어느 곳(렘 26:44; 암 5:21; 사 33:8)에서는 “가치있게 평가하다”로 사용된다.8)

히브리어 동사 bahar와 관련된 다음 동사들은 bahar가 내포하고 있는 요소들을 설명해 준다.  qara(부른다); qanoh(속한다); hibdil(분리시킨다); hiqdish(떼어놓다)9) 또한 다음 히브리 낱말들도 선택사상과 관계를 가지고 있다.  Hashaq(부착시킨다 = to be attached to); 'ahab(사랑하다);  raham(긍휼히 여긴다)10)


B. 신학적 의미


이사야 51:1, 2에 “아브라함이 혈혈단신으로 있을 때에 내가 부르고 그에게 복을 주어 창성케 하였느니라”하여 하나님의 자유하심의 선택을 천명하였다.11) 하나님의 선택은 주권자의 자유로운 행위의 표현이며 결코 피택자에게 어떤 의무(빚)가 있어서 선택한 것은 아니다.

야곱(Edmond Jacob)은 선택을 “여호와가 자기의 백성과의 관계를 맺으시고 그 처음의 행위, 또는 그 결속의 계속성을 확신시키는 영원한 실재라고 정의하였다.12) 그에 의하면, 역사에서 하나님에 의한 모든 간섭은 선택이라 할 수 있다.  그가 자신의 임재를 나타내시려는 장소나 그의 의도를 수행하기 위한 백성을 선택하시거나 그의 종과 사자가 될 사람을 선택하시거나 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선택하셨다는 것은 그가 어떤 특별한 목적을 위해서 다른 사람은 선택에서 제외시킨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이스라엘의 선택이 반드시 하나님이 다른 민족의 역사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도 역시 아니다.

선택교리의 종교적인 함축적 의미는 다양하고도 의미심장하다.  그것은 초월적인 의지와 은혜로우신 의도를 가지고 역사속에서 한번만 아니라, 종종 행동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암시한다.13) 하나님은 존재하시고 하나님은 행동하신다.  그는 아직도 오늘날 자신의 소유가 되기 위해서 자기를 섬기도록 하기 위하여 사람을 선택하신다.  선택은 하나님의 계속적 행위를 의미한다.  이에 대해, 그의 백성의 신앙이 담겨 있고 이로써 그의 목적의 결과가 보장된다.  왜냐하면, 선택은 인간의 역사에 대해 신의 목표가 있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14)

선택의 직접적이 동기는 무엇인가 ?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기인한다.  신명기 7:7, 8에 “사랑”이란 말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처음에는 명사로, 그 다음엔 ’ahab란 원형을 가진 동사로 쓰여 있다.  ‘ahab는 어떠한 언약의 조건에 제한받지 않는다.  다만 사랑하는 자의 뜻과 성품에만 달려 있다.15)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사랑이 아브라함을 부르신 동기였다.  또 그것은 이스라엘의 선택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아들을 세상의 구세주가 되도록 보내시는 동기가 되기도 하였다.16)

이스라엘 민족의 선택은 특별히 하나님의 사랑에 의한 것이면서 바로 족장들 (조상들), 특별히 아브라함에 맹세한 언약을 지키기 위한 것으로 나타난다(창 12:2 - 3; 13:15 - 17; 15:13 - 21등; 신 7:8).17)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을 인하여 또는 너희 열조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을 인하여 자기의 권능의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되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애굽왕 바로의 손에서 속량하셨나니”(신 7:8)  하나님의 이러한 사랑은 이스라엘의 힘과 의가 탁월했기 때문에 주어진 것이 아니었다(민 4:37; 7:6 - 8; 9:4 - 6).  이스라엘은 모든 민족 중에서 가장 작은 민족이었으며 또한 반역을 일삼고, 목이 곧은 백성이었다(민 9:7 - 13).  그러므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하고 그들을 기뻐하신 것은 오로지 하나님 자신의 선한 뜻 때문이다.

하나님의 선택사건이 선택받은 자에게 어떤 의미를 주고 있는가를 숙고해 볼 필요가 있다.

첫째, 선택은 분리를 위한 것이다.  선택은 모든 다른 나라들로 부터 이스라엘을 분리시켜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의 기업이 되는 백성, 즉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백성을 삼으시려고 한 것이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에게 특별한 가치가 있는 하나님의 특별한 소유이다.18)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야곱 곧 이스라엘을 자기의 특별한 소유로 택하셨음이로다”(시 135:4) 이러한 구별은 “거룩”이란 말로 바꿀 수 있는데, 이 거룩이란 말은 결코 어떠한 윤리적 의미에서 쓰여진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특별한 소유로 구별된 존재라는 뜻이다.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신 7:6 = 14: 2).

둘째, 선택은 순종을 위한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출애굽기 19:5이하의 기록이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여기에는 언약을 지키라는 요구를 내포하는 조건이 제시되어 있다.19) 여기서 중요한 것은 특별한 소유요 거룩한 백성의 자격을 “제사장 나라”로 표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말에서 이스라엘이 제사장적인 중재자의 역할을 위해서 구별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스라엘의 특권은 그에 상응하는 의무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었으며 또한 불충성에 수반되는 저주와도 불가분의 관계가 있었다(신 27;1 - 26).

세째, 선택은 선택받은 자 속에 포함되어 있는 모든 사람에 대한 영원한 구원을 보장해 주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자연히 여기서의 선택은 구원을 위한, 보다 더 특별하고 특수한 선택과는 구별된다.  이것은 구약에 예시되어 있으며(참조 왕상 19:18; 시 95:8 - 11; 사 1: 9; 10:22, 23) 신약에서 더 분명히 나타나 있다.  “이스라엘에서 난 자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롬 9:6; 참조, 롬 9:7 - 13; 11:7 - 10히 4:2 - 7).20) 하지만 주목해야 할 중요한 점이 있다.  비록 민족 선택이 구원을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것은 경시되어서는 안된다.  “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뇨 범사에 많으니 첫째는 저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라”(롬 3:1, 2).  이스라엘의 선택은 그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기꺼이 자신의 구원의 은혜를 베푸시고, 또한 때가 되면 만민에 대한 하나님의 구속의 목적을 이루시려는 하나의 매개체였다(창 12:3; 22:18).  이러한 맥락에서 그리스도가 오셨다(롬 1:3; 9:5; 갈 4:4).21)

비록 민족 선택이 구원을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니지만 민족 선택을 구원을 위한 특수한 선택과 분리해서 생각해서는 안된다.  민족 선택을 받은 자 중에는 언제나 구원에 이르는 선택을 받은 사람들이 있었고, 민족 선택에 의해 부여된 축복과 특권은 특수한 구원이 나타나 그 구원의 목적을 성취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해 주었다.22) 밀턴(John P.Milton)은 선택에 관한 구약성서의 내용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23)

1) 구약에서 선택의 교리는 직접적으로는 개인의 구원과 관련이 되어있지는 않다.  다만 역사에 있어서 하나님의 행동과 전체적인 구원의 계획에 관련되어 있다.  그는 여러가지 방법을 제각기 다른 때 자신의 목적에 사용하기 위하여 사람과 민족을 택하시고 부르시고 위임하신다.

2) 구약에서 선택의 교리는 하나님의 뜻의 성취와 이미 예정된 구원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역사 속에서 활동하시는 인격적 하나님에 대한 개념, 혹은 신앙과 같이 광범위하게 적용된다는 것이다.


Ⅲ.선택과 관련된 개념들

 

   A. 언약


구약성서에 있어서 선택사상은 언약이라고 하는 구체적 표현으로 나타난다.  언약사상은 선택 사건을 위해서 하나의 형태(Form)와 내용을 제시하려는 것이다.24) 선택은 하나님의 독자적 선재 은총에 의해 근본적 사건을 형성한 것으로 언약이라는 틀(Formework)안에서 활동되어진다.25) 선택은 자연히 하나님과 선택받은 자 사이에 새로운 관계에 돌입되는 것을 의미한다. 거기에는 언약이라는 줄을 통해 서로를 묶게 된다.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언약에 따른 하나님의 약속 성취에 대한 주제는 이스라엘 전체 역사는 물론 특별히 민족 형성사를 구축하고 있는 중심 주제이다.26)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이 언약에 기초해 있다고 할 수 있다.27)

구약성서에서 언약의 뜻으로 berith를 사용하고 있으며 278회 이상 발견된다.  70인역에서도 이 말과 비슷하게 사용되고 있어 헬라어는 diatheke(διαθηκη)이다.  diatheke는 히브리어 berith가 표현하는 개념과 같은 내용을 갖고 300회 이상 언급되고 있으며 신약에서도 33회가 발견된다.28) 또한 그외에도 같은 내용으로 사용되어 지고 있는 단어가 있다.

(1) 헤두트:“증거”의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출 27:21, 31:7,32:15). “모세가 돌이켜 산에서 내려오는데 증거의 두판이 그 손에 있고 그 판의 양면 이편 저편에 글자가 있으니”

(2) 다발:말씀이라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신 9:5).

   “네가 가서 그 땅을 얻음은 너의 의로움을 인함도 아니며 네 마음이 정직함을 인함도 아니요 이 민족들의 악함을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심이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하심은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맹세를 이루려 하심이니라”

(3) 카툽:기록된 것으로 사용되고 있다(대하 25:4).

   “저희 자녀는 죽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모세의 율법책에 기록한

   대로 함이라…”

(4) 토라:율법으로 사용되고 있다(단 9:13).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이 모든 재앙이 이미 우리에게 임하였사오나…”29)

종교적이고 신학적인 의미에서의 언약에 대한 사전의 정의는 “순종, 회개, 믿음 등과 같이 인간측에게 어떤 규정을 조건부로 하는 성서에 나타나고 있는 하나님의 약속”이라고 한다.30) 이것은 데이비스 (John D.Davis)의 정의와 어느면에서 일치한다.  즉 그에 의하면 “인간과 맺으신 신의 언약은 일반적으로 인간이 어떤 조건부를 완성한 것을 근거로 하여 주시는, 하나님측에서는 전혀 자유로운 약속이다”라고 했다.31) 이는 근본적으로 동일한 생각이 보다 구체적으로 라일(Herbert E. Ryle)에게서 나타났다.  그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언약에서 하나님은 약속을 만드시고 조건을 설정하신다.  하나님은 규정들을 세우시고 인준하시는 반면, 사람은 그 규정들을 무조건 받아들이게 된다.  사람 사이의 계약 협의에서와 같이 관계의 평등성이 거기에는 없다.  사람은 하나님의 축복에 대한 약속의 힘에게 복종해야만 한다”라고 주장하였다.32)

히브리어 berith와 헬라어 diatheke의 공통 분모는 하나님과 사람사이의 언약에 있어서 하나님으로 부터의 발의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  berith와 diatheke는 모두 “상호협약이 되는 것에 뜻을 둔 일방적인 법규를 암시한다.  berith는 믿음으로 받는 신의 약속에만 한정되어 있지 않다.  즉 그것은 역시 신성한 명령을 포함하고 있다.  여기에 사람은 순종으로 반응을 보인다.  그리고 믿음의 순종에 의하여 신의 berith는 상호협약이 된다.33)

몇가지 예에서는 berith라는 말이 구약 성서에서 사람 사이의 관계를 지칭하는 것으로 사용되고 있으나, 거의 모든 경우에 있어서 이 말은 하나님과 사람사이의 관계를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berith는 근본적으로 종교적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34) 사실상 성서에서 berith가 사용될 때, 그 내용은 여러 개의 신적인 언약 가운데 하나를 지칭한다.  즉 노아와 아브라함과 이스라엘과 (시내산에서) 이스라엘과 (모압땅에서) 레위인들고 다윗과 또 다시 이스라엘과 맺으신 언약(렘 31:31 - 34 의 새언약)들이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중재하심으로 맺어진 새 언약을 지칭하고 있는 것이다.35) berith는 또 여러 개의 의미 심장한 복합어와 함께 사용되고 있다.  이를 테면, “언약서”(출 24:7), “언약의 피”(출 24:8), “언약의 말씀, 곧 십계”(출 34:28), “언약의 두 석판 ”(신 9:15), “언약 궤”(민 10:33), “언약의 소금”(레 2:13), “언약의 사자”(말 3:1), “하나님의 언약”(대하 34:32), “우리 열조의 언약”(말 2:10), “나의 평화의 언약”(민 25:12; 사 54:10), “밤낮으로 나의 언약을 ”(렘 33:20, 25)등이다.

berith의 어근은 히브리어에서는 분명치 않고 아카드어 baru(속박하다, 의무를 지우다:fetter, bind)에서 찾는다.36)

berith의 개념은 어원학적 연구나 단어의 용도와 의미에 국한하여 재정의나 개념을 발전시키려는 노력이 많이 있었는데, 이 중에서 크게 공헌한 학자가 베그리히(J.Begrich)이다.  그는 berith의 근본적이고 원시적인 의미를 법적 결합(Rechtsgemeinschaft)을 뜻하는 것이라고 했으며, 이것은 강한 자 편이 임의로 체결한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이같은 경우는 구약성서에 나오는 아브라함이나 다윗의 경우에서 볼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단순히 그의 가호를 약속함으로서 신과 인간이 특별관계를 수립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37)

쇼트로프(W.Schottroff)도 이스라엘 백성이 언약을 준수하는 것과는 상관없이 상전인 신이 언약을 관대하게 하사할 것을 호소하는 것인 만큼 언약 개념의 일방적인 면이 있다고 주장하였다.38)

퀼러(L.Kohler)는 언약이란 단어의 어원학적 연구를 더욱 발전시켰는데, 그에 의하면 krth berith (cut a covenant)란 대표적 문구는 양편이 동등한 위치에서 맺는 언약이고 krth brith le~/'im (cut a covenant for/with)란 강자가 약자에게 언약을 허용하는데 쓰인다.39)

또 하나 많이 쓰이는 haqym berith (raise up a covenant)라는 문구는 하나님과 언약을 맺을 때 쓰는 말이며 그 뜻은 하나님이 언약을 지켜주실 것이라는 것이다.berith란 단어 그 자체는 음식과 식사를 뜻하는 barah란 단어의 어근과 관련 되었다고 보며 퀼러는 언약에 수반된 제의된 식사(Covenant meal)에서 나왔다고 보고 “언약을 자르다”란 문구 역시 언약 식사를 할 때 음식을 자르는데 연유된 것으로 본다.40)

그러나, 노트(N.Noth)는 위의 견해에 반박하여 구약원전에 “언약을 맺다”, “언약을 수립하다”를 karath berith로 쓰고 있으며 이것의 직역은 “언약을 자르다” (cut a covenant)가 된다고 주장하였다.41) 그는 이것을 설명하기 위하여 고대 마라문서에 나타난 언약풍습을 추적했다.  여기에 의하면, 두 사람이 언약을 체결한다는 사실을 “‘하누’와 ‘이다마라스’사이에 나귀를 살해한다”(to kill an ass between the Hanu and Idamaras)라고 표현하고 있다.42) 대체로 알려진 바에 의하면 고대 근동에서 계약을 맺을 때는 계약 당사자들이 어린 나귀나 당나귀를 살해한 (to kill a young donky)다음 그 사체를 양분하여 마주 대하여 놓고, 계약자 쌍방이 그 사이를 같이 걸어 지나가는 풍습이 있었다는 것이다.43) 그래서 구약에서 “언약을 체결하다”를 karath berith(언약을 짜르다:to cut a covenant)라고 쓴 것은 동물을 짜르던 언약체결 의식에 그기원을 두고 있음을 아모리인의 자료가 확인해 주었다44)

상기와 같이 어원적인 의미 교찰을 통하여 언약의 개념을 파악하였지만, 언약에 대한 중요한 견해를 학자들을 통해 고찰해 보아야 한다.

페데르센(Johs. Pedersen)이 주장한 정의로써,berith란 “이 관계가 참여 당사자들에게 부과되는 권리와 의무를 다같이 지니는 상호관계”를 지칭한다고 했다.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피차간의 태도인데, 그 관계는 신분상의 어떠한 동등성을 적용하는 것처럼 보이는 상호간의 관계이다.  berith가 때때로 일방적인 (비동등적인) 성격을 갖고 있는 것 처럼, 성서에서 사용되고 있는 이유는 특수한 언약, 특별히 신과 인간간의 언약의 내용이 일반적인 berith의 형식을 변칙적으로 따르는데 기인한다고 주장했다.45)

멘덴홀 (George E, Mendenhall)에 의하면, 이는 구약의 모세 언약과 주전 2천년대의 서방 아시아의 종주권 조약 사이에는 형식에 있어서 식별이 되는 유사성이 있다고 한다.  이것은 종주국과 속국사이의 정치적인 계약이었다.  종주국이 속국에게 계약을 제시하면 속국은 그 계약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조약을 세움에 있어서 종주국은 자기측의 힘의 소유에만 근거하지 않는다.  즉 속국을 향한 자기들의 자선의 행위를 회상시키는 것이다.46)

트럼벌(H.Clay Trumbull)은 쌍방의 언약을 통해서 형제들이나 친구들, 또는 형제들 이상과 같은 아주 가깝고 가장 영구적이며, 가장 신성한 관계를 맺는 상호적 입장의 언약 체결형식, 다시 말하여 피로 언약을 맺은 원시적인 의식이 널리 퍼져 있었다는 증거를 제시하였 다.47)

언약에 대한 일반적인 뜻이나 어원적인 뜻, 그리고 여러학자들의 견해들을 하나님과 인간사이에 모두 적용할 수는 없다.  berith라는 말은 구약에서 사용될 때 거의 하나님과 인간사이에 관계되는 단어로 사용된다.

로빗슨(O.Palmer Robertson)은 berith를 “주권적으로 사역되는 피로 맺은 약정”이라고 했다.48) 또는, “하나님의 초월적인 처분권” 혹은 “협정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적인 재가”라고 정의할 수 있다.49)

포스(Geerhardus Vos)에 의하면 berith의 특징적인 표시는 그것이 합의에 관계되는 것이 아니라, 그 합의가 어떤 특별한 종교적인 재가에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berith는 사람의 협력없이도 존재할 수 있으나, 이것은 사람을 절대적으로 묶고 있다는 것이다.50) 또한, 데이비스(John D.Davis)는 “일반적으로 사람이 어떤 조건을 이루었을 때를 근거해서 세워진 하나님측의 자유로운 약속”이라고 정의했다.51)

야콥(Edmond Jacob)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과의 언약 체결에 있어서 다음 세가지 면을 나타내고 있다고 한다.  첫째, 언약은 하나님이 그의 백성에게 주는 선물이다.  둘째, 언약으로서 하나님이 그의 백성과의 관계속에 들어오는 친교의 결합(a bond of communion)을 창조한다.  세째, 언약은 율법이라고 하는 구체적 형체를 가지고 책임을 창조한다.52) 즉, 언약이란 이스라엘 백성의 존재의 의미, 목적, 책임과 하나님과의 근본적이 관계를 말해 주고 있다.53)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 생활 속에 들어와서 그의 공동체가 존재하는 근본적 의의를 보여 주신 것이다.  주님이시고 또 통치자이신 하나님은 언약을 그의 은혜로서 주신 것이다.  그 언약의 선물을 받아들일 때 이스라엘 백성은 많은 유산을 받을 것이고 적들로부터 안전을 누릴 것이고, 법과 질서를 유지하게 될 것이다.  이스라엘 공동체는 평화(Shalon)을 경험하게 되어 건전하고 조화된 삶을 갖게 될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자유 의사로서 하나님과 언약 가운데 들어 갔고 하나님을 섬겼다.  이 언약의 조건으로서 율법(Torah)를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었다.  그 율법 안에 살때 평화와 정의와 안전을 갖게 된다.54)


   B. 축복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선택 사건으로 시작하여 언약 사건을 통해 구체화 되는데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방법을 인하여 성취되어간다.  그래서, 선택과 언약 사건에는 항상 “축복”이 공통적으로 나타난다.55)

성서에 “복”과 관련된 말이 387회 나타나며 “축복”과 관계된 말이 102회 나타난다.  이상 두가지를 종합하면 모두 489회이며 신약에 93회가 구약에 396회가 나타난다.56)

“축복”과 관계된 단어는 구약에서 barak(   )와 에세르(   ) 신약에서 율로게오 (ευλογεω)와 마카리오스 (μακαριοσ)이다.

barak의 본래의 뜻은 “무릎을 꿇다”(Kneel)는 뜻으로 낮은자가 높은자를 경배하고 찬미할 때 사용되었다(시 72:15,95:6, 대하 6:13). 또 축복을 빌때나 (대상 4:10), 이미 받은 축복을 감사하며 찬양할 때 (시 145:1 - 2, 대상 29:10; 느 9:5; 출 18:10; 룻 4:4; 삼상 25:32; 삼하 18:28; 신 8:10) 사용되었다.57) 흔히 “경배하다, 숭배하다, 찬양하다” 또는 “축복을 기원하며 인사한다”는 이차적인 의미로도 쓰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비와 호의를 보임으로써 인간을 축복할 때(창1:28, 9:1, 12:2, 22:16 - 18; 신 7:12 - 16)에 나타나 있다.58)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축복하실 것을 약속할 때는 영적이며, 물질적이며, 동시에 후손이 받을 먼 훗날의 축복까지 포함하였다.  멜기세댁의 축복기사는 양면적인 면을 모두 내포하고 있다 (창14:19 - 20).  인간이 하나님의 축복을 불러 일으킴으로서 다른 사람을 축복할 때도 이 말이 쓰였다(창14:19).

에세르는 “복으로 주는 행복과 성도의 바른 행동에서 얻어지는 행복”을 의미한다.59)에세르는 동사 “아사르”(   ) 에서 나온 파생어이다.  이 동사는 “똑바르다”, “올바르다”, “인도하다”(사 1:17; 잠 23:19), “지위가 향상되다”, “전진하다”의 뜻이다.60) “행복하다”를 뜻하는 두 동사 “barak”와 “아사르”는 그 출발이 다르다.  “barak”이 사용될 때, 그 주도권은 하나님께로 부터 나오는데, 이는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받을 자격이 없는 축복도 주실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비하면 “아사르”는 인간에게만 사용되는 단어로 복을 받기 위하여는 인간의 갈망과 행동이 요구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복을 받을 자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시 2:12, 34:8; 잠 16:29)이며 그의 율법에 지배되는 자(시 1:2, 119:1)이며, 그의 법도에 지배되는 자(시 128:1)여, 가난한 자를 돌보는 자(시 41:1; 잠 14:21)인 것이다.61)

율로게오는 히브리어  “barak”을 헬라어로 번역할 때 사용되었다.62) 그런뜻은 “칭찬하다”, “찬양하다”(마 14;19; 막 6:41; 눅 24;30; 고전 14:16), “축복하다”(눅 24:50; 히 7:1; 출 23:25)이다.63) 또는 “예배하다”, “무릎을 꿇다”라는 뜻으로도 많이 사용되었다(롬 12:14; 눅 24:50).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하나님이 축복하시는 영적인 축복에 사용되었다(행 3:26; 히 6:14; 갈 3:8; 엡 1:3).64) 그런예로, 초대기독교에서 축도형식으로 사용되었고(고후 13:13) 서신에서는 하나님과 그리스도로 부터 은혜와 평강을 기원하는 경우에도 사용되었다(롬 1:7; 벧전 1:2). 65)

마카리오스는 “행복한”, “복있는” 이란 뜻으로 보통 하나님께서 수여하시는 복에서 오는 행복한 인간의 상태나 정의에 대한 하나님의 보상 같은 것을 의미한다.66)마카리오스는 구약의 “아스레이”를 헬라어로 번역할 때 사용되었다.  마카리오스는 사람에 대하여는 종교적 의미에서 사용되었고 (요 3:17), 비인격체에 대하여도 사용되었으나 (행 20:35),67) 주ꃯ 신령한 축복을 나타내는데 사용되었다(마 5:3 - 11; 눅 11:28; 요 20:29; 행 20:3 - 5; 약 1:12; 계 1:3, 14:13, 20:28)68)


   C. 구속


성서에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선택하셨다고 말할 때 거기에는 하나님의 축복과 더불어 하나님의 구속도 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구속이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의 활동을 묘사하는데 있어서 기본적인 관념 중의 하나이다.  구속이란 말은 본래 “폭을 넓히는 것”, “방해를 받지 않고 발전하는 것”, “전쟁에서 승리를 얻는 것”, 또는 “필요한 능력과 힘을 소유하고 그 힘을 행동화하여 명성을 떨치는 것”등의 세속적인 개념이었으나 구약, 특히 신명기, 시편, 이사야에서 매우 중요한 신학적 중요성을 지니게 되었고, 신약에서도 역시 사용되었다.69)

구속하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ga'el, padah, koper이 해당한다.

동사 go'el은 “구원하다”, “도로사다”, 또는 “가까운 친족, 동족으로 행하다”의 뜻이 있다.  이 동사의 분사형 go'el은 본래 어떤 사람의 죽음이나 채무를 대신 갚아 주어야 할 의무가 있는 사람을 지칭함으로서, “구속자, 보응자, 친적”등으로 사용되는 바 히브리어의 가정법에서 유래한 말이다.70) 또,  린드블럼(J.Lindblom)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구속자라고 말할 때, 이것은 그가 자기 민족을 특히 압제자의 손에서 부터 구원하심으로 그들의 권리를 옹호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였다.71)

이스라엘 백성을 압제자로 부터 구출해 내신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인격적이기는 하나 동등하다기 보다는 오히려 하나님 자신의 소유물에 대한 구원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go'el은 소유자와 소유물 사이의 관계회복을 나타내고 있다.72)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해 속전으로 어떤것을 지불하셨다고 하는 개념을 피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애굽의 압제자에게 값을 치르었다고 보기보다는 강력한 힘의 행사에 대한 개념이 도처에 나타남으로 구원의 행위에 있어서 하나님의 노력은 가격 혹은, 댓가로서 비유 된다고 본다.73)

padah의 뜻은 “가격을 지불하고 도로 사다”의 뜻으로 번역된다.  그런데 이말은 상업적인 교역활동에 있어서 아무런 채무 이행의 요구가 없이 행해지는 거래를 나타내기도 한다.74) 또한, padah는 이스라엘 가운데서 장자의 구전으로 돈의 가치를 요구할 때 사용했다(출 13:2, 11 - 16).  예를들면 출애굽후에 하나님을 섬기는 일중에 모두 처음난 아들과 동물을 드려야 하는 의무가 있었는데 이 때 그 값을 내고 그 의무에서 놓임을 받을 때 이 말을 사용했다(출 21:8; 레 25:47 - 49; 민 3:46 - 49, 18:15).75)

모리스 (L.Moris)에 따르면, 얼핏 보기에 padah의 뜻은 단지 “구조”혹은 “구원”에 지나지 않는 듯 하지만, 사실은 go'el과 마찬가지로 padah역시 댓가를 치룬 구원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이같은 견해는 대리의 개념에 포함되어 있다.  물론 동사의 주어가 하나님일 때에는 대리의 개념이 약간의 수정을 요구하지만, 댓가를 치룬다는 의미를 여전히 그대로 함축되어 있다.76)

koper의 동사형인 kopur는 “덮다”, “가리다”, “달래다”, “용서를 얻게 하다”를 뜻하고 명사형인 koper는 “속죄의 댓가”, “죄를 가리움”, “속전”의 뜻을 나타낸다.  “소가 남자나 여자를 받아서 죽이면 그 소는 반드시 돌에 맞아 죽을 것이요 그 고기는 먹지 말 것이며 임자는 형벌을 면하려니와 … 만일 그에게 속죄금을 명하면 무릇 그 명한 것을 생명의 속으로 낼 것이요(출 21:28 - 30)” 여기서 이 단어는 법률적 용도로 사용된다.  “속죄금”이라고 표현된 이 법정적 상황에서 볼 때 koper는 제의에 관한 한 의식에 의한 죄를 보상한다는 특별한 신학적 의미를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엄격히 말하면 속죄 보다는 대리(substitution)의 느낌이 강하다.77)

 

Ⅳ.구약성서에서 선택사건들


   A. 아브라함의 선택


노아 홍수이후 4세기 동안 노아의 아들들은 수 많은 족속들로 성장하였으며, 성장한 후손들은 각기 살 장소를 찾아 흩어져 가고 있었다.  민족들의 분산은 언어와 생활 방식, 습관이 다르고, 서로 엉켜진 여러 나라를 필연적으로 발생시켰으며, 나누어진 여러 민족들이 하나님께 대해 가지는 상이한 태도 속에 내포된 우상숭배는 점점 자라서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어 버린 이방주의의 다신교적 종교로 타락시켰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택하신 사건을 통하여 계시의 새로운 출발을 시작하셨다.  이 계시의 출발은 창세기 12장과 더불어 시작되어 성서기사 가운데 주요한 전환점을 이루고 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본토와 친척과 아비집을 떠나라고 명령하셨다. 이 명령은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오염되고 더러워진 사회로 부터 구별을 요구하신 것이다.  그것은 다만 외형적, 혹은 육체적인 구별을 뜻하는 것만이 아닌 내부적인 면까지 포함한다.  그의 인간적인 면, 야망과 열정, 인간의 욕심과 안목의 정욕등에서도 분리되어야 한다고 볼 수있다.  종교적인 의미에서 볼 때 분리는 부정적인 의미라기 보다는 본질적인 면에서 긍정적 이라고 보아야 한다.  “가라”는 하나님의명령속에는 하나님의 요구가 포함되어 있다.  그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믿고 순종하며 그에게 자기 자신을 전폭적으로 위임하라는 요구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본토, 친척, 아비집을 버림으로 철저한 분리를 하였다.77) 이사야는 이 분리를 아브라함의 구속이라고 기록하였다(사 29:22).

스팁스(A.M.Stibbs)는 아브라함의 순종은 아브라함의 구원사역에 있어서 결정적인 단계이었으며 하나님의 놀라우신 사랑과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었고, 또한 그에 대한 부르심은 한 남자가 한 여자에게 결혼을 요청하는 것과 같은 요구였다고 하였다.78)

아브라함의 소명은 바벨탑 사건 후 인간 문명이 위기에 부딪쳤을 때이다.  그 때는 이미 달과 별을 숭상하는 우상종교가 편만해 있었다.79) 아브라함의 고향인 우르는 명칭 본래의 뜻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빛” 혹은 “불”이라는 뜻으로, 불을 숭상하는 우상 종교의 의식에서 생겨진 단어라고 한다.80) 우르에 대한 조직적인 발굴 작업이 1922년에 울리(Leohard Woolley)의 지도하에 대영 박물관과 펜실바니아 대학 발물관의 합동 탐구로 이루어졌다.  탐사한 결과 많은 유적지를 발굴 하였는데 그 중에는 거대한 신 바빌로니아 궁전이 있다.  이 궁전의 남쪽에서 신 바빌로니아 신전이 발견되었다.  이 우르의 성역은 대체로 직사각형으로 이루어졌는데, 북서 지역에서는 달신, 난나(Nanna), 아키드어로는 신(Sin)에게 봉사하는 성읍의 주요 신전인 에테메니 구루(E-Temen-ni-guru)가 있다.81)

또한 와이즈만(Donald I.Wiseman)은 1959년 캠벨 몰간 기념 강연에서 이 시대의 바벨론 종교는 가장 조잡한 형태의 다신교이었으며, 적어도 삼천 가지 이상의 수메르(Sumer:유프라테스 하구의 고대 지명)사람의 신들이 있었다고 한다.  유대인의 전통에 의하며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이러한 우상을 사고 팔았으며 이 다신교는 아브라함이 어렸을 때의 가정 환경이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이것을 버렸다고 하였다.82)

종교적으로, 도덕적으로 타락하고 부패한 지방 우르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떠났다는 것은 아브라함에게 얼마나 큰 결단과 결심이 요구되었는지 알 수 있다.

밀톤(John P.Milton)은 창세기의 소명기사는 땅에 대한 약속, 민족, 위대한 이름, 그리고 물질적인 축복과 같은 세상적인 모습이 제시되어 있다고 하였다.83)

카일(C.F.Keil)은 아브라함의 소명기사를 네가지 축복으로 보았다.  1) 수많은 백성으로 증가됨. 2) 물질적이며 영적인 번영. 3) 그의 이름의 고양 즉, 아브라함이 영예롭고 영광스럼게 됨. 4) 축복의 소유자와 시여자로 임명됨이며, 이는 아브라함이 축복을 받게 되었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대한 축복의 매개체가 되었다는 것이다.84)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명령에는 약속이 부가되어 있다.  아브라함에게 가장 필요하며 고대하였던 후손에 대한 약속과 이에 부응하여 있어야 하는 땅의 약속과 끝으로 아브라함에게 주시고자 하셨던 축복의 약속이 있다.

첫째, 후손에 대한 약속

창 12:2에 의하면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라는 말씀이 나온다.  아브라함에게는 지금까지 오랜 결혼 생활을 사라와 하였지만, 그에게 아직도 대를 이어줄 자식이 없었다.  아브라함은 누구에게나 있었던 자식이 없음으로 인간적으로 실망과 실패를 안고 있었다.  이러한 자에게 하나님은 인격적으로 그의 고민과 부족함을 채워주신다고 언약을 하셨다.

     시편 127:3 - 5에는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젊은 자의 자식은 장사의 수중의 화살 같으니 이것이 전통에 가득한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기록되어 있다시피, 많은 자손은 하나님의 축복된 모습임이 성서에 기록되어 있다.85)

     창세기 3:16에도 롯과 헤어져 허탈한 마음으로 돌아오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다시 언약을 상기시키고 있다.  “내가 네 자손으로 당의 티끌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데 네 자손도 세리라.”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택하셔서 그의 자손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시기를 원하셨으며, 그의 통치를 원하는 나라를 건설하시길 바라셨다.  하나님께서는 롯도 엘리에셀도 거부하셨으며, 비록 아브라함의 씨라고 볼 수 있는 이스마엘까지도 부정하시고 창 21:2에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씨라 칭할 것임이니라”하셨다.  이러한 하나님의 선택의 목적은 즉 아브라함과 그의 씨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이 하나님에게 예배를 드리기 위한데 있다.86)

     둘째, 땅에 대한 약속

후손에 관한 약속가 밀접한 관계가 있는 약속이다.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약속된 땅에 대한 약속으로 창세기 12:1에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속에는 땅에 대한 약속이 암시되어 있는 것이다.  이 명령에 순종하여 가나안 땅에 들어갔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재 약속을 받았다.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창 12:7).  막연히 보이던 땅에 대한 약속이 확실한 하나님의 언약에서 구체화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롯과 헤어져 돌아오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땅에 대한 언약을 구체적으로 하신다.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의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창 13:14, 15)

     마이어(F.B.Meyer)는 “이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마치 그의 손에 권리 증서를 쥐어져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유롭게 지내기를 바라셨다는 뜻으로 말한 것이라”하였다.87)

     창세기 15장에서 가나안 땅을 아브라함의 4대 후에는 차지하리라는 언약은 공식적인 예식에 의해 주어졌고, 17장에서는 그 유업의 영원함을 말씀하셨다.  그후 야곱의 후예들이 애굽에 건너갔다가 거대한 민족이 되어 애굽을 나와서, 여호수아의 지도 아래 그 땅에 정착하게 됨으로 언약이 성취되었다.  신명기 30:19 - 20에 의하면 “내가 오늘날 천지를 불러서 너희에게 증거를 삼았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 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말씀을 순종하며, 또 그에게 복종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시니 여호와께서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네가 거하리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말씀에서도 여호수아가 강 건너가서 땅을 정복할 때 아브라함의 언약이 이루어진 것이다.  느헤미아 9:7, 8에서도 “주는 여호와시라.  옛적에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갈대아 우르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을 주시고 그 마음이 주 앞에서 충성됨을 보시고 더불어 언약을 세우사 가나안 족속과 헷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여부스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의 땅을 그 씨에게 주리라 하시더니 그 말씀대로 이루셨사오니 주는 의로우심이로소이다”라고 기도함으로 땅에 대한 언약이 이루어졌음을 재확인하였다.

     세째, 복의 근원이 되는 약속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에게 주신 축복의 약속이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내용을 갖고 있을 뿐 아니라, 영적인 축복도 포함하고 있다.  이러한 두 가지 양태의 언급이 창세기 12장 부터 50장 까지 사이에 의미심장하게 제시되어 있다.

창세기 12:2에 기록된 세 구절은 동일한 개념으로 연결되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라”고 되어 있다.  “이름”에 대한 문제, 즉, “명성”, “신망”, “우월”에 대한 야망이 창세기 6:1 - 4의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불리우는 전제 군주적인 왕들과 창세기 11:4의 바벨탑을 건축한 자들을 자극했었다.  이제 하나님은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도 이기적으로 추구하였으나 얻지 못했던 것을 하나님 자신의 독자적인 의도에 의해서 한 인물에게 직접 주시고자 하셨다.88)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라” 다음에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고 되어 있다.  아브라함은 구속사에서 위대한 인물 중의 한 사람이다.  아브라함을 비롯한 족장들을 모든 민족을 위한 복의 근원, 하나님의 은총의 통로로 세우신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 복을 내리고 저주하는 자에게 저주하리니”했으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해 복을 얻을 것이니라”고 했다.  아브라함은 단순히 축복의 주체가 되었을 뿐 아니라, 또한 다른 사람에 대한 축복의 매개체가 되었다.  비처 (Willis J.Beecher)는 이 약속이야말로 “단 하나의 약속의 교리”를 위한 기본이 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또 “이 사건을 성서가 일반화한 것은 이러한 식으로 이루어졌을 것이다.  즉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주셨고, 그를 통하여 온 인류에게, 그리고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영원히 이루어졌고 또 이루어질 약속을 주셨다.  그리고 이스라엘 역사의 원칙이 되시는 분인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졌다”고 하였다.89)

     창세기 22:16 - 18은 언약의 갱신이나 재확인이라 할 수 있다.  12장에서는 아브라함을 통하여 복을 얻게 할 것이라고 했지만, 22장에서는 희생제로 드려졌고 그러면서도 보존되어 남게 된 약속의 아이인 이삭을 통하여 천하만민이 복을 얻을 것이라고 했다.  이삭이 아브라함의 축복의 새로운 출발점이 되었다.  아브라합의 순종을 통해 아브라함에게 하신 하나님의 약속은 형태가 더욱 견고해지고 그 범위가 확대되었다.90)

     “축복의 개념은 창세 때부터 주어지는 중요개념이다.  특별히 족장이야기에서 계속 반복되는 언약에는 선택과 축복이 중요요소로 등장하는데 이는 하나님의 절대 은총소유”가 될 것을 강조하였다.91)

하나님의 구속사의 현장은 가나안 땅에서 아브라함을 비롯한 그의 후손들에 의해서 이루어 가게 된다.  결국, 그 땅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사가 성취된다.92)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선택을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행위”에 속한다고 본다.

 


   B. 이스라엘 백성의 선택

 


야곱의 열 두 아들과 요셉의 두 아들은 애굽의 속박기간 동안 그들이 큰 민족이 되기 까지 번성하였다.  430년의 노예 생활 후에(출 12:40) 야곱의 아들들은 증가하였다.  이제 단순히 한 가족이 아닌 한 민족이 되었다.

대개의 학자들은 모세를 통한 선택사건을 통하여 이스라엘 공동체가 형성되었다고 본다.93) 라지트(G.E.Wright)는 선민 사상이란 출애굽이라고 하는 역사적 사실에 근거를 두고 있다고 주장한다.94) 라울리(H.H.Rowley) 역시 출애굽 사건이 모든 구약 사상에 가장 깊은 자국을 남겼다고 본다.95)

허버트(A.G.Herbert)는 구약성서에 있어서 가장 중심되는 것은 출애굽 전승이고, 아브라함과 족장들의 이야기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탄생하기 위한 서론이라고 했다.96)

예언서들을 보면 대개의 경우 출애굽 사건을 통한 이스라엘 선택을 언급했다.  호세아 11:1에 의하면 “이스라엘의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 내었거늘”이라 했다.  예레미야도 출애굽을 통한 이스라엘의 선택을 주장한다.  “네 소년때의 우의와 네 결혼 때의 사랑, 곧 씨뿌리지 못하는 땅, 광야에서 어떻게 나를 쫓았음을 내가 너를 위하여 기억하노라”(렘 2:2).  호세아 예레미야와 같은 내용으로 에스겔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땅에서 택했다고 주장했다(겔 20:5).  가장 중요한 귀절을 출애굽기 6:2 - 3이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나는 여호와로다.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 하였다.”고 말한다.  따라서 예언서나 모세오경의 귀절들을 출애굽사건이 이스라엘 역사와 신앙에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고 증거한다.  이처럼 출애굽을 통한 구원의 사건에 중점을 두고 증언하는 것은 역사적 과정이 구체적 사건을 통한 선택의 섭리를 말해 주고 있다.97)

선택은 하나님의 은총의 행위이다.  하나님은 구원하시기 위해 연약한 상태에 처해 있는 이스라엘을 택하셨고 애굽에서 노예상태로 있는 그들을 구원하셨다.  이스라엘의 선택은 이스라엘 백성이 특별한 방법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그의 영광과 주되심을 세상에 나타내게 하려고 그들을 만민으로 부터 구별한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통해 열방들에게 그 자신을 나타내시고 이스라엘을 통해 열방들에게 그 자신을 나타내신다(신 4:5 - 8, 35).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자기 현시(Self - disclosure)는 이스라엘의 사명에 대해 하나님께서 요구하실 수 있는 근거가 된다.98)

하나님의 선택 사건은 선택받은 자에게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다.  즉, 이스라엘의 특이성인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특별한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특별한 소유이다.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야곱 즉, 이스라엘을 자기의 특별한 소유로 택하셨음이로다”(시 135:4).99) 이스라엘의 가치는 이스라엘에 마음을 쏟은 하나님의 사랑과 애정에서 왔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그의 소유가 되었다.  후에 신명기에서 이스라엘은 “기업의 소유” 뿐 아니라 “거룩한”으로 불리었다.  그러나 이 귀절들은 항상 “백성”(신 7:6; 14:2; 26:18, 19)이란 개념과 연결되어 있다.100)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만민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신 7:6).  AJV(American Jewish Version)은 “자기 기업의 백성”을 “내 자신의 보화”라고 번역하고 있다.101)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그의 소중히 여기는 소유물, 그의 특별한 보화, 그의 참된 소유물이 되게 하시기 위해서 부르셨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 언약에서도 마찬가지이다.102)

가장 중요한 것은 출애굽기 19:5이하의 기록이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여기에는 언약을 지키라는 요구를 내포한 조건이 제시되어 있다.  또한 특별한 소유, 거룩한 백성의 자격을 제사장 나라로 표시하고 있다.  그들의 사명은 열방을 대신해서 제사장직과 왕권의 위치에 있게 되는 것이었다.  선교와 봉사를 통해 인류를 영적으로 통치하게 되리라는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고 있다.  저희가 순종치 아니함으로 넘어지나 그리스도안에서 믿음으로 순종하는 자들에게는 “택하신 족속, 왕같은 제사장, 소유된 백성, 거룩한 나라”라고 부른다.  그 목적은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기이한 빛에 들어가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는 것이다.  즉, 세상에 대한 영적인 사역이 언약의 목표이다.  이사야는 이것을 특별히 강조하여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종으로 부른다.  “나의 종, 야곱 나의 택한 이스라엘아 이제 들으라.  너를 지으며 너를 모태에서 조성하고 너를 도와 줄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종 야곱, 나의 택한 여수룬아 두려워 말라”(사 44:1이하).  이 말은 하나님께서 속한 이스라엘 백성이 이방인에게 나타날 때를 생각하면서 특별히 강력하게 표현되어 있으며 동시에 모든 이교적인 것으로 부터 분리해야 할 의무도 강하게 요구하고 있다.103) 이스라엘은 단순히 하나님의 축복의 수취인이 되도록 선택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도록 선택된 것이다.

언약은 하나님의 자유스러운 은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성을 선택하고 나서 하나님은 그들에게 윤리적 의무를 부과 하셨다.  신명기 27:9 - 10은 이러한 내용을 잘 말해주고 있다.  “오늘날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백성이 되었으니 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복종하여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명령과 규례를 행할지니라.”

시내산 언약은 하나님의 뜻이 외형적으로 기록된 최종 요약이라는 특징이 있다.  족장들은 일반적인 말로써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있었다.  때때로 그들은 하나님의 뜻의 구체적인 면에서 직접 계시를 받았다.  그러나 모세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의 뜻의 총요약이 율법을 돌에다 기록함으로써 뚜렷하게 되었다.

출애굽기 24:1 - 2에는 시내산 언약을 수립함에 있어서 이스라엘 백성의 참여가 있었음을 말해준다.  또한 신명기 5:2에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호렙산에서 우리와 언약을 세우셨나니”라고 하여 이러한 사실을 재확인하고 있다.  이 때까지 하나님의 선택 그리고 언약 관계는 개인이나 가족과 이루어졌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은 하나의 국가를 이루는 백성의 참여 하에 언약을 체결하신다.  시내산 언약을 특징짓는 요소는 “언약의 피”라고 할 수 있다.  출 24:8에서 “모세가 그 피를 취하여 백성에게 뿌려 가로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고 하여 언약의 피가 시내산 언약의 특징적인 요소임을 나타내 주고 있다.  죽음과 언약은 분명히 연결되어 있다.  새 언약을 세운 그리스도의 죽음은 첫 언약의 파괴로 인한 저주로 부터의 구원을 제공하였다.104)

출애굽기 24:3에는 “모세가 와서 여호와의 모든 말씀과 그 모든 율례를 백성에게 고하매 그들이 한 소리로 응답하여 가로되 여호와의 명하신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라고 하며 이스라엘 백성이 자신들에게 부과된 언약상의 의무를 준수할 것을 서약하고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 언약의 의무를 위반하고 이해하지 않았다.  그럼으로써 그들 위에 하나님의 진노와 벌이 임하게 되었다.

 


   C. 선택의 변천

 


창세기 1 - 11장에서 사람과 더불어 하나님의 길을 조명해 주는 불빛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특별히 창세기 3:15의 경우는 이 사실을 더욱 증명해 준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이 원복음 안에서 구원의 전체적인 역사와 질서의 윤곽이 드러나고 그 내막이 줄줄이 풀려나온다.105) 델잇취(Franz Delitzsch)는 이 귀절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스핑크스와 같이 그것은 거룩한 역사의 시작이었다.  이 고대의 예언이 목적하였던 바가 무엇이었는가는 바로 오직 그에 의해서만 그리고 그 안에서, 그를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다.106) 이는 비슷한 설명으로서 리차드슨(Alan Richardson)은 그 성서의 기자가 분명한 메시아적 예언을 염두에 두었다는 것을 부인하면서도 인정하기를 “아마도 그는 이곳 자기의 비유를 통하여 인류의 궁극적인 구원을 암시하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기독교인들은 죄와 사망을 이기신 그리스도의 승리에서 그 실현을 발견함으로써, 그의 아직 구체화 되지 않은 희망을 올바르게 해석하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107) 창세기 11장까지는 하나님이 특정민족이나 국가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열국의 하나님임을 기록하고 있다.  성서의 증거에 따르면 특별한 의미에 있어서 거룩한 역사를 형성하고 있는 하나님의 구속의 행위와 약속의 참다운 시작을 표시해 주는 것은 아브라함의 선택사건인 것이다.  아브라함의 이야기 전에 나오는 이야기는 서론의 성격을 띠고 있다.108) 묄러(Wilhem Möll- er)는 창세기의 의미를 이렇게 요약하고 있다.  “처음 11장까지는 인간이 구원받을 수 있는 것, 구원 받아야 할 필요성, 그리고 하나님이 자신의 구원의 사업을 성취하시기 시작하셨다는 것을 보여준다.  인간의 역사가 족장 가족의 역사로 넘어가는 부분에서 누구도 정확히 이해할 수 있는 서론적인 귀절, 곧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12:3)고 아브라함에게 하신 하나님의 약속 앞에 서게 된다.”109)

비처(Willis J.Beecher)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그를 통하여 인류에게 주어질 약속을 선언하셨다는 것, 그리고 이스라엘의 역사는 이 약속의 풀려나감이라는 것, 또 그 약속은 다윗에게서 갱신되었고 모든 선지자에 의해서 전파가 되었다는 것, 언약이 세워진 후 곧 그것이 이루어지기 시작했으며 그 이후로 계속 이루어져가고 있었으며 그 언약의 가장 큰 성취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업 속에서 실현되었다는 것, 또 그것의 성취의 과정은 결코 그치지 않을 것이라는 점 그리고 이 약속의 교리는 예언자들이 성서에서 가르친 것을 요약한 것이라고 했다.110)

아브라함의 약속을 특별히 명쾌하게 언급하는 귀절이 시편속에 두군데 있다.  그 하나는 시편 47:9이다.  “열방의 방백들의 모임이여, 아브라함의 하나님의 백성이 되도다”라고 한다.  이것은 보편성에 대한 놀랄만한 단언이다.  물론 아브라함의 하나님은 역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다.  RSV의 번역은 백성들이 언약 아래의 약속된 축복 속에 아브라함의 하나님에 속한 백성과 동참한다는 선언으로 되어 있다.  이 귀절은 “너와 너의 씨 안에서 땅위의 모든 백성들이 복을 받을 것이다”라는 아브라함에게 한 약속을 반영하고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려 함이니라”(갈 3:14)는 바울의 선언을 예상하고 있다.111)

그 다음 귀절은 시편 105편에 있다.  “여호와께 감사하며 그 이름을 불러 아뢰며 그 행사를 만민 중에 알게 할지어다”(시 105:1)은 권면에 해당하고 “그 종 아브라함의 후손 곧 택하신 야곱의 자손”(시 105:5)에게 말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어서 시편 105:7 - 11인 하나님의 놀라운 사업에 따라 불리워진 영창속에는 민족의 역사뿐만 아니라 족장의 역사로 부터의 선택을 포함하고 있다.112) “그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시라.  그의 판단이 온 땅에 있도다.  그는 그 언약 곧 천대에 명하신 말씀을 영원히 기억하셨으니 이것은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이며 이삭에게 하신 맹세며 야곱에게 세우신 율례, 곧 이스라엘에게 하신 영영한 언약이라.  이르시기를 내가 가나안 땅을 네게 주어 너의 기업의 지경이 되게 하리라 하셨도다.”

아브라함의 선택사건 이전에는 하나님이 특정민족이나 국가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열국의 하나님임을 기록하고 있으나 아브라함의 선택사건을 통하여 이스라엘을 선택하시는 하나님 즉, 보편주의에서 특수주의로 전환한다.  아브라함의 선택 사건 없이, 광의의 보편주의 없이, 땅위의 열방들과 관련해서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과 종이 될 이스라엘의 선택과 구원을 적절하게 설명할 길이 없다.113)

아브라함의 선택사건은 한 개인의 선택이라는 점에서 모세를 통한 이스라엘의 선택 사건보다도 더 극단적인 특수주의를 나타내는 것처럼 보이나 두가지 점에서 궁극적인 보편주의를 포함하고 있다.  첫째,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축복을 다른 사람들도 공유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 예로 롯의 경우나 하갈의 경우를 들 수 있다.  둘째, 아브라함의 선택 때문에 지상의 모든 족속이 복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창 12:3; 18:18).114)

구약성서에서의 선택 사건은 처음에는 개인적인 선택115)(Individual Election)으로 이뤄져 나가다가 다음에 민족적 선택(Nat- ional Election)인 모세를 통한 이스라엘 선택에서 절정을 이룬다.  그러다가 이스라엘의 배신과 하나님의 심판에 의해 남은자(Remnant)와 메시야 사상에 이르고, 세계 선교와 관련하여 예수 그리스도에 이른다.116)

 
Ⅴ.아브라함의 선택과

 

                     이스라엘 선택의 관계

  

아브라함의 선택과 모세를 통한 이스라엘의 선택 사건을 연결시켜 주는 귀절은 구약성서에 상당히 많고 또 기술적으로 배열되어 있다.  즉, 출애굽기 1:5에 70인으로서 야곱의 자손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는데 창세기 46:27에 더욱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애굽에서 요셉에게 낳은 아들이 두명이니 야곱의 집사람으로 애굽에 이른 자의 도합이 칠십명이었더라.” 즉 하나님의 축복 아래서 큰 민족으로 성장한 아브라함의 씨를 지적한다.  애굽에 내려갈 때에(창 12:2) 70인을 하나님의 백성의 전체로 이해한 것과 출애굽기 1:7에 “이스라엘 자손은 생육이 중다하고 번식하고 창성하고 심히 강대하여 온 땅에 가득하게 되었더라”고 묘사된 상황 사이에는 의도적인 대조가 있다.117)  ꃯ명기 저자는 이와 동일한 대조를 명기하고 있다.  “애굽에 내려간 네 열조가 겨우 칠십인이었으나 이제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하늘의 별같이 많게 하셨느니라”(신 10:22).

하나님이 불타는 가시덤불의 현현을 통하여 모세에게 자신을 알리시기를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출 3:16)고 한 것은 중요한 내용이다.  “너희 조상의 하나님”이라는 지칭은 출애굽기 3장과 4장에서 네 번이나 반복된다(출 3:13, 15, 16, 4:5).118)

출애굽기 6:2 - 9은 아브라함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을 강력하게 회상시켜 주고 있다.  “나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으나 가나안 땅, 곧 그들의 우거하는 땅을 주기로 그들과 언약하였더니,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으로….” 하나님이 여기에서 의도하시는 것은 집요하게 과거로 부터 계속 언약의 성취자로서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 씨는 이제 이스라엘 백성으로 대표된다.  축복의 약속은 출애굽기 6:7에서 창세기 17:7 - 8의 귀절을 회상하는 언어로 이렇게 반복되고 있다.  “너희로 내 백성을 삼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니 나는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어낸 너희 하나님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지라.”  복있는 자로서의 부르심은 “너의 하나님”과 “나의 백성”의 관계에 내포되어 있다.119)

라울리(H.H.Rowely)는 아브라함의 선택 사건과 이스라엘의 선택 사건과의 관계를 설명하기를, “이스라엘 백성이 아브라함안에서 선택함을 받고 또한 모세를 통하여 선택함을 받았다”고 했다.120) 야곱은 아브라함 안에서의 선택을 존재라는 낱말로, 그리고 모세를 통한 선택을 행동이라는 낱말로, 설명했다.  즉, 하나님은 아브라함 안에서 선택된 백성의 존재성을 선언하였는가 하면, 모세를 통해서는 그 선택성의 선언이 역사적 과정에서 구체적인 행동으로 옮겨져 갔다.121) 이것은 창세기 15장에서 아브라함의 선택과 모세를 통한 이스라엘의 선택이 연결되어짐에서 알 수 있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의 언약의 징표로 주어진 것 중에 출애굽 사건이 분명히 예시되고 있다.(창 15:13 - 14).122)

출애굽기의 저자는 족장들과 출애굽기 시기를 직접적으로 연결하였다.  그에게 있어서는 시내산 언약이 신학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아브라함 언약의 연장일 수 밖에 없는 것이었다.  애굽과 시내산을 이전 언약의 중단으로 취급하기보다 그들이 요망하는 바는 반복적인 언약을 준수하시는 하나님의 신적인 성실성(God's Divine Loyalty)을 선언한 새로운 기회로 삼는 것이었다.123)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을 선택하고 맺으신 시내산 언약은 아브라함을 선택하고 맺으신 언약 관계에 기초를 두고 수립되어졌다는 점에서 연관성이 있다.  즉, 시내산 언약은 먼저 세워진 아브라함과의 언약 관계에 그 근거를 두고 체결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124)

하나님은 족장들과 언약을 맺으셨고, 그들에게 가나안 땅을 주시기로 약속하셨다.  이 약속 때문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주권적으로 모세 시대에 역사하셨다.  속박된 애굽에서의 구원 사실은 십계명의 기초가 되었는데 (출 20:1), 시내산 언약의 중심을 이루는 십계명은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언약의 성취로 이루어진 출애굽의 구속 역사에 굳건한 기초를 두고 있다.

시내산에서의 언약 수립과 관련해서 모세가 세운 제단은 그 언약이 아브라함 언약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는 증거를 보여준다.  “모세가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기록하고 이른 아침에 일어나 산 아래 단을 쌓고 이스라엘 십이 지파대로 열 두 기둥을 세우고”(출 24:4).125) 시내산 이후의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도 아브라함과의 최초의 약속을 중심으로 계속된다.  금송아지 문제에 처했을 때, 모세는 아브라함의 언약의 약속 위에서 하나님의 자비를 구한다.  모세의 간청은 아브라함과의 약속을 근거로 한다.  “주의 종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주를 가리켜 그들에게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너희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고 나의 허락한 이 온 땅을 너희의 자손에게 주어 영영한 기업이 되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여호와께서 뜻을 돌이키사 말씀하신 화를 그 백성에게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언약에 대한 성서의 기록을 통하여 볼 때에, 언약 관계의 최종 결론으로서 한 구절이 되풀이 된다.  즉, “나는 너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이다.  이 구절은 언약의 임마누엘 원리(Immanuel Principle)이라 부를 수 있다.126) 이런주제는 아브라함 언약과 시내산 언약과의 관계에서 명확히 나타난다.  이 구절은 아브라함 언약의 표적으로서 할례를 행하는 것과 관련되어 창세기 17:7에 나타난다.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와 네 대대 후손의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시내산 언약하에서 이 구절은 뚜렷하게 강조되어 자주 나타난다.  출애굽의 구원과 관련하여 하나님은 “너희로 내 백성을 삼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고 말씀하신다(출 6:6, 7).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는 주제는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거하신다는 말로써 특히 전개된다.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거하신다는 사실은 그 의미가 점점 중요하게 전개된다.  장막의 모양이 성전의 모양으로, 또 하나님 나라의 모형으로 옮겨지며, 성육화된 그리스도의 교회, 성도의 최후의 영광으로 발전된다.127)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는 주제는 한 사람에 의해 실현됨으로서 절정에 이르게 된다.  장막안에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안에서 이 주제는 완전한 성취를 보게 된다.

아이히로트(Walther Eichrodt)에 의하면 아사야 선지자는 이 독특한 주제를 잘 전개하고 있다.  즉 언약의 핵심은 이스라엘의 메시아 대망과 일치되는 것이다.  이 대망은 자기 자신 속에서 언약의 핵심을 구현하고 동시에 메시아로서 사역을 하는 한 개인에게 초점이 맞추어진다.128) 이는한사람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목적은 결정적인 완성을 보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 그는 하나님 왕국의 머리가 되시며 언약의 실현자이다.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는 약속이 이 한사람 속에서 구체화된 사실이 된다.129)

 

Ⅵ.선택의 기능

 

하나님의 선택은 주권자의 자유로운 행위의 표현이며 결코 피택자에게 어떤 의무가 있어서 선택한 것이 아니다.  즉, 하나님 이스라엘에서 보신 어떤 점에 영향을 받아 선택하시는 것처럼 밖으로 부터 동기가 된 것이 아니다.  동기가 없는 자유로운 선택이다.  그러므로 구약성서에서 선택이라는 말이 이스라엘에서 쓰여질 때마다 수동태로 쓰여진 적이 없이 언제나 능동태로 쓰여졌다는 것은 매우 중대한 의미가 있다.  즉, 이스라엘이 선택받은 백성으로 언급된 곳은 없고 선택하신 백성으로 일컬어지고 있는 것이다.130)  고린도전서 1:26 - 29에 진술된 하나님의 행동의 원칙은 이스라엘 선택에 대한 신약에서의 병행귀절이라고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또한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중요한 이유는 이 땅의 모든 백성들이 이스라엘의 이름으로 축복을 받기 위함이라.  즉, 하나님은 전 인류의 축복을 위해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셨다는 것이다.130)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선택의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의 선택에 근거하여 요구하시는 봉사의 주체이다.  다시 말해서 선택을 통한 봉사가 아닌 봉사를 위한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선택이란 근본적으로 하나의 특권이기 보다는 책임이므로 이 책임을 저버리게 되면 선택은 형벌의 이유가 될 수 있다.  “내가 땅의 모든 족속 중에 너희만 알았나니 그러므로 내가 너희 모든 죄악을 너희에게 보응하리라”(암 3:2)

그러므로 아스라엘 선택으로 부터 민족주의, 혹은 우월 민족이라는 민족 개념을 이끌어내는 것은 구약 성서의 분명한 선언을 잘못 이해하는 것이다.  구약성서는 순수한 혈통, 영토나 문화의 통일 같은 문제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다.  구약 성서가 강조하는 것은 하나의 민족으로서의 이스라엘이 아니라 하나의 백성으로서의 이스라엘인 것이다.  이스라엘의 선택은 세상만민에게 하나님을 알리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하신 첫 역사이다.  이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 이스라엘을 다른 민족들과 분리시켰다.  이스라엘의 전역사를 통해서 이스라엘의 구별이 강조되었으나,  이것은 결코 편애에 대한 구약 성서의 표현이라고는 볼 수 없다.  하나님이 주되심을 온 세상에 알리는 선구자로서 하나님께만 계속 소속하고 다스림을 받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의도로 해석되어져야 한다.131)

페인(J.Barton Payne)은 이스라엘의 선택의 목적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하나님의 인간 선택은 당신을 영화롭게 하는데 있다.” (롬 11:36)

성서의 선택은 이중적인 목적이 있다.  1) 방황하는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것이요, 2) 구원받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위하여 섬기는 데 있다(딤 2:14).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선택은 첫째 수단이다.  즉 이스라엘 민족에 의해 그리스도 이전의 사람들이 구원받으며, 또한 그리스도의 오심을 준비하기 위한 수단이 되기 위함이다.  이 특수주의는 특권과 함께 봉사와 선교의 책임이다.132)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선택의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며 잃은 영혼을 하나님께로 인도함과 동시에 이스라엘을 통하여 메시야가 오시도록 준비하기 위한 수단이다.

선택은 선택받은 자 속에 포함되어 있는 모든 사람에 대한 구원을 보장해 주지는 않았다.  이것이 구약에 예시되어 있으며 (왕상 19:18; 시 95:8 - 11; 사 1:9; 10:22, 23) 신약에서 더 분명히 나타나 있다.  “이스라엘에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롬 9:6; 9:7 - 13; 11:7 - 10; 히 4:2 - 7) 하지만 주목해야 할 두가지 중요한 점이 있다.  첫째, 비록 민족 선택이 구원을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것은 경시되어서는 안된다.  “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헬라인의 유익이 무엇이뇨, 범사에 많으니 첫째는 저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라”(롬 3:1,2).  이스라엘의 선택은 그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기꺼이 자신의 구원의 은혜를 베푸시고, 또한 때가 되면 만민에 대한 하나님의 구속의 목적을 이루시려는 하나의 매개체였다(창 12:3; 22:18).  이러한 맥락에서 그리스도가 오셨다(롬 1:3; 9:5; 갈 4:4).  둘째, 민족 선택을 구원을 위한 특수한 선택과 분리해서 생각해서는 안된다.  민족 선택을 받은 사람들 중에는 언제나 구원에 이르는 선택을 받는 사람들이 있었고 민족선택에 의해 부여된 축복과 특권은 특수한 구원이 나타나 그 구원의 목적을 성취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해 주었다.133)

이스라엘이 그 사명을 마침내 다하지 못하여 실격할 때, 이 백성중에서 백성의 사명을 한 몸에 담당하고서 이를 성취하시는 분이 나타나셨다.  그가 그리스도 예수이시다.  그리스도는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시고(마 1:21)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신데(눅 2:32)동시에 이 분에 의해 만민에 대한 축복이 마침내 확립되었던 것이다(눅 2:31, 32).  그리고 그리스도의 제자들로 시작된 교회는 새로이 이 축복을 전하는 사명을 받는 자이다.134)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는 이스라엘의 선택적 전통의 상속자이다.  기독교회가 하나의 새로운 공동체로서 하나님의 계약을 이스라엘 선택적 사건의 상속자가 되었다.135)

초대교회는 예레미야의 새 언약과 관련시켜서 그리스도의 피를 통한 새언약을 받아 들였다(히 8:8 - 12; 고후 3:4 - 6).  사도바울은 또한 ‘남은 자’ 사상의 입장에서 교회를 생각했다(롬 9:6; 9:29).136) 베드로는 신자가 하나님의 특혜를 누리는 특수공동체임을 역설한다.  신자는 택한 자요(벧전 1:1 - 2, 12, 25) 세례로 변화된 자이며(벧전 1:14, 18; 4:3)왕같은 제사장이며 거룩한 나라요 하나님의 소유이다(벧전 2:9).  이것은 신자의 신분을 재확인해 주는 것으로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진 특권과 은혜가 신자공동체인 교회에 주어졌다는 것이다.  교회의 특권에는 책임이 따른다.  하나님께서 교회에게 이러한 신분상의 우대를 해 주시는 근본목적은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기 위함이다.  신자들의 공동체인 교회가 불신자들과는 다른 가치관과 생활원리로 인하여 박해를 받으면서도 그로부터 발산되는 광채가 이방사회를 밝힘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하는 선교적 의무가 부여되었다.  유기적 지체로서의 성격을 지니는 교회가 집단으로서의 제 기능과 역할을 수행하지 못할 때 동시에 선교적 기능도 상실 하게 된다.137)

 

 

 

Ⅶ.결   론

 


   

구약성서에 나타난 선택사건들 중 가장 대표적이라 할 수 있는 아브라함의 선택과 모세를 통한 이스라엘의 선택을 고찰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그에게 고향과 친척과 아비의 집을 떠나라고 명하셨다.  이 명령은 단순히 외형적 혹은 육체적인 구별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즉, “가라”고 하는 하나님의 명령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며 그에게 자신을 전폭적으로 위임하라는 요구를 내포하고 있었다.  이 명령을 받은 아브라함은 약속된 미래의 영광을 위하여 현재의 즐거움을 포기하며 나아간 것이다.

아브라함의 선택에 부가된 언약으로서 후손의 약속, 땅의 약속, 축복의 약속을 살펴보았다.  이 약속들은 그것 자체가 목적이라고 볼 수 없으므로, 하나님의 전체적인 구원의 목적에 관련해서 이 약속들을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사건은 하나님의 은총의 행위이다.  하나님은 구원하시기 위해 연약한 상태에 처해 있는 이스라엘을 택하셨고 애굽에서 노예상태로 있는 그들을 구원하셨다.  이스라엘의 선택은 이스라엘 백성이 특별한 방법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그의 영광과 주되심을 세상에 나타내게 하려고 그들을 만인으로 부터 구별한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택하사 그 자신을 이스라엘에게 나타내시고 이스라엘을 통해 열방들에게 그 자신을 나타내신다.

이처럼 구약에서의 선택 사건은 처음에는 개인적인 선택으로 이루어져 나가다가, 다음에 민족의 선택인 이스라엘의 선택에서 절정을 이룬다.  아브라함의 선택 사건과 이스라엘의 선택 사건은 동일한 하나님의 통일성 있는 선택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안에서와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하셨다.  즉, 아브라함이 땅의 모든 족속들을 위한 복의 근원이 되게 하기 위해 부르심을 받았다면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제사장 나라가 되기 위해서 부르심을 받았다.  그것은 하나님께 속한 세계를 위해서이다.  따라서, 제사장의 역할을 알면 제사장 나라의 역할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제사장의 엄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일과 백성과 하나님 사이에 중재자로서 제사 업무를 수행하는 일이다.  즉, 제사장이란 자신을 위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과 백성을 위한 봉사자의 역할을 담당하는 자이다.

그러므로 제사장 나라로서 이스라엘은 이스라엘 자체를 위한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과 이스라엘 외의 세계 모든 나라를 위한 제사장적인 봉사의 일을 위해 선택된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자기를 자랑하며 하나님을 높이지 않고 불의를 행하므로 그 사명을 다하지 못해 실격하였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이스라엘 민족의 사명을 한 몸에 담당하고서 이를 성취하셨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로 시작된 교회는 새로이 구원의 역사를 이룩하기 위한 이스라엘 민족의 상속자로 등장했다.

교회는 자기를 사랑하는 일 없이, 자기 위해 사는 일 없이 그리스도를 전파하고 그리스도를 본받아 세상에 쓰이는 때 선민이며, 계속될 수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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