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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와 설교 / 홍광현

 

목차

Ⅰ 서론       

  1. 연구의 목적       

  2. 연구방법        


Ⅱ 본론       

  1. 예배와 설교의 관계       

  2. 설교의 기본이해와 기능  

   ① 설교의 기본이해       

   ② 설교의 기능       

  3. 역사적으로 보는 예배와 설교       

   ① 신약시대의 예배와 설교       

   ② 중세시대의 예배와 설교       

   ③ 칼빈의 예배와 설교       


Ⅲ 결론       

 

Ⅳ 참고도서 

 

Ⅰ 서론


1. 연구의 목적


  도날드 밀러는 "교회의 본질과 사명"이란 글 속에 교회의 예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진정한 그리스도교 예배는 사람이 하나님을 위하여 행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하여 행하신 일에 대하여 인간이 행하는 응답임을 의미한다"

  예배란 의미를 어떤 특별한 행위에 촛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그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인간의 깊은 내면의 움직임인 것이다. 예배엔 '필연적인 요소가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말씀과 성례이다. 하나님은 예배를 통해 말씀을 주셨는데 주의 종이나 인물을 사용하신다. 말씀은 곧 예배의 요소 중 설교라 할 수 있고 수세기 동안 이 설교에 자세한 관심을 가져왔다. 이 설교에 관한 글을 준비하면서 놀란 것은 엄청나고 방대한 연구와 저작이라는 것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현대 교회는 말씀 선교에 대한 깊은 인식과 바른 가치관의 정립이 되어 있지 않은 것 같다. 한국 선교 백년이 훨씬 넘은 이 시점에서 우리들이 말씀 사역의 기능과 위치를 다시 한번 조명해 보아야 한다는 좀 다른 결심을 낳는다. 제임스 레인은 "하나님 말씀 선포에 대한 불신은 심지어 복음주의적인 목회자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현실이다.


  복음주의자들은 강당에서 그들이 전하는 내용을 볼 때 그들이 설교에 대한 소신은 잃고 있음을 역력히 말해 주고 있다"라고 하여 같은 우려를 보여 준다. 그러기에 이 소논문은 예배 속에서 설교의 제기능을 찾는데 그 목적이 있다고 할 수 있다.


2. 연구방법


앞서 말한 구조적인 어려움과 삶속에 부적응은 교회사의 역사적 교훈으로, 그것의 본질의 파악으로 접근해 보고자 한다. 먼저 예배와 설교의 관계를 살필 것이다. 예배 속에서 그 의미를 분명히 알고 있어야 그 요소인 설교에 대한 위치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어 설교의 기본이해로 시작하여 그 기능을 소고하여 볼 것이다. 말씀이 교회 안에서 예배 안에서의 바른 기능을 다 이야기하자면 너무 방대하기에 몇 가지만 언급하려 한다. 그리고 세번째로 역사 속에서 설교의 위치와 역할을 살펴본다. 신약시대, 중세시대 그리고 종교개혁시대의 칼빈을 통해 예배와 설교를 생각해 볼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현대 교회에서 잃어가는 예배에 있어서 설교의 본질을 바로 인식하고 세우는 계기를 만드고자 한다.

 

Ⅱ 본론


1. 예배와 설교의 관계


우리 대부분의 신자들에게 예배의 가장 중요한 요소가 무엇이냐 묻는다면 열 중에 아홉은 설교라 할 것이다. 많은 사람이 교회 가서 무엇하지요?라는 물음에 "말씀을 듣지요" 라고 대답한다. 현대 교회는 이처럼 예배의 중심은 말씀 선포인 설교에 두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설교는 예배라는 이해 속에서 이야기되어져야 한다. 회중들은 예배를 위해서 모인다. 말과 행동과 노래들을 통해서 교회라는 공동체가 지닌 기억을 되찾고 소망을 말하며 능력과 사랑으로 구원의 은총을 베푸시는 주께 영광을 돌린다.

예배는 이러한 하나님과 인간관의 관계를 은혜의 촛점에 맞춰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지듯 그 역할을 하는 수단이요 도구가 이 말씀 선포인 설교이다. 설교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뜻을 이해하며 우리의 감사를 드리며 삶으로 다짐하는 것이 설교이다. 이 점은 종교 개혁자들의 사상에서 더더욱 확인 할 수 있다. 루터는 다음과 같이 하나님의 임재와 강단의 역사 하심을 표현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한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다"(Praedicatio verbe dei est verbum dei). 칼빈은 이것을 좀더 직설적으로 표현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입과 혀가 주님께 드려저셔 사람의 입 안에서 하나님의 목소리가 공명될 수 있도록 설계하셨다"(기독교 강요 Ⅳ,1). 곧 설교는 하나님을 향한 인간

의 말이 아니라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인다. 이처럼 현대 교회의 예배 안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것은 개신교 교회에서 수많은 목사들에게 설교만을 위한 관심과 열정을 쏟아지고 예전에 대한 외면과 배격을 초래하는 심각한 부작용을 일으키기는 했어도 예배 안에서 설교의 중요성은 무시되어질 수도되어져서는 안되는 근원적 요소인 것이다.


2. 설교의 기본이해와 기능


  ① 설교의 기본이해

설교란. (Sermon)는 라틴어의 Sermo에서 나온 말로서 "담화"와 "연설"같은 뜻을 가지고 있으면, 근대적인 의미에서 교회의 예배의 중심이 되는 형식을 갖춘 연설(Formal address)로 이해되고 있다. 그리고 설교하다(Preching)라고 할 때는 그것을 설교하는 행위를 두고 쓰는 말이다. 그러나 헬라어의 설교에 해당하는 이 말은 차라리 말씀의 선포, 즉 '복음의 내용을 선포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사건에 대한 힘있는 증거를 가르친다.

설교는 이처럼 하나님이 성령의 내주와 그리스도의 은혜의 역사를 증거하고 선포하는 것을 말한다. 바울은 설교의 진정한 의미를 고린도전서 1장에서 잘 나타내어 주는데, 바울은 케리그마(kerygma)를 설교의 기본으로 보고 있는 설교신학을 세우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예배 가운데 행하는 설교는 그리스도 사건, 즉 예배 뿐 아니라 예배자들의 삶에도 의미와 형태를 부여하는 사건인 그리스도 사건을 재연하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특히 목회서신에서 설교 속에 디다케(didache, 교훈)도 포함되어 있음을 말하고 있다. 이 교훈은 바로 교훈(sound doctrine, 딤전 1:10), 혹은 좋은 선한 교훈(good theaching, 딤전 4:6)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여기서 디다케가 케리그마에 속하며 케리그마와 분리되어서는 안된다는 점을 우리는 발견한다. 다시 말하면 설교엔 이 두가지 기본 요소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다.

 

  ② 설교의 기능

그렇다면 설교의 기능은 어떤한가. 예배에 있어서 설교가 가지는 위치는 어떤가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현대 교회 아니 이 설교를 중시하는 경향이 뚜렷하다. 이 설교는 어느때부터 예배의 꽃으로 대두되었을까? 초대 교회때 중세때까지 일반교회에서는 오늘날과 같이 많은 설교가 행하여졌던 것은 아니고 종교개혁 이후에야 오늘날과 같이 많은 설교가 행하여졌다.


  a. 예언자적인 기능

말씀선포의 기능중 한가지가 이 예언자작인 기능이다.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설교는 위안, 개선, 개혁의 문제제기의 목적을 가지고 신자와 교회의 삶에 직접적인 예언적 개입이 일어나는 기본적 수단이다. 구약의 선지자들과 현대의 설교자의 임무가 동일성을 가지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오늘의 설교자들로 부름을 받아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때 이 예언자적인 설교는 피할 수 없는 설교자의 임무이듯이 이러한 설교는 이 흔들리고 어지러운 세상의 신본주의의 제자리로 돌리며 바른 윤리관을 확립해야 한다. 역할은 감당해야 한다. 다시 말해,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우리들에게 진리로 다가와 우리 현실의 삶 속에 깊이 관여한다는 것이다. 이로써 오늘의 사회적, 역사적 문제 속에 진리의 길을 여는 예언자적인 역할을 한다.


   b.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기능

만약 강단에서 선포되어지는 것이 한낱 인간의 삶의 경험에서 나은 이야기나 지적 수준을 펼쳐보이는 역할에 그친다면 그것은 생명력 없는 설교의 궁극적인 면이 될 것이다. 현대교회에 많은 목회자가 이 점을 또한 간과한다는 한 글귀에서 보듯 말씀의 진정한 가치와 기능에 대해 불감증에 걸려 있는 듯하다.

설교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 하나님과의 만남과 화해 그리고 하나님께로의 응답과 결단이 예배라고 볼 때 설교는 말씀을 통해서 위의 제반 사건을 경험케 하여 참다운 삶을 결단케 하는 가장 유효한 수단이다. 말씀은 하나님의 현현이며 나에게 주시는 바로 그 하나님의 음성인 것이다. 말씀의 권위가 없게 된 이유는 목회자의 설교가 성경을 기초한 영적 깨닮음이 삶에 적용이 안되는 경우가 많다고들 하나 그 이유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인간이 말씀에 대한 근본적인 면 즉 하나님의 자기계시 선포의 기능을 모르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3. 역사적으로 보는 예배와 설교


  ① 신약시대의 예배와 설교

신약시대의 예배와 설교를 이해하려면 무엇보다도 회당예배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지 않으면 안된다. 그 이유는 설교가 비록 구약의 선지자들에 예언활동에서부터 그 근원을 찾을 수 있기는 하지만 예배의 중심된 순서로서의 설교는 역시 바벨론 포로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졌던 회당예배를 들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성전을 잃어버려 회당(synagogue)에 모여 간단한 예정을 갖추고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해서 배려주셨던 말씀들을 다시 상고하고 반복하여 들음으로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했다. 바로 이 예배의 형태는 설교를 수반한 기독교 예배의 시발이라고 하겠다.

예수님과 제자 베드로, 그리고 사도 바울의 회당 및 서원에서의 설교를 그 예로 찾아볼 수 있다. 신약에서의 설교는 하나님의 구속사의 실현을 증언하는 일이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그 생애와 교훈과 십자가의 수난과 부활과 승천을 선포하는 일을 주로 하게 된다. 그들은 이 그리스도의 사건을 과거적인 사건으로 보지 않고 현재적이고 전체적인 사건으로써 창조 때부터 재림까지를 이어주는 사건으로 외치고 있다.

신약시대 및 초대교회 많은 복음 전파자들의 설교는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주제로 설교했으며 "주 여호와의 말씀이 이러하니라",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주님은 이러하셨다"는 순수한 전달을 하였고, 자기주관적인 "바랍니다" 라든가, "…라고 생각합니다" 등의 표현을 찾아볼 수 없었다. 신약시대 초대교회는 이러한 말씀의 사실적 증거를 바탕으로 한 설교는 수많은 영혼을 깨우쳤다.


  ② 중세시대의 예배와 설교

사도바울의 말씀에 기초한 예배와 설교는 아쉽게도 중세기에 온전히 전달되지 못하였다. 종교개혁이전까지 어둠과 암흑속에서 예배와 예전 그 맥락을 간신히 지켜갈 뿐이였다. 실로 말씀을 들음은 예배자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도 "마음에 심긴 도를 온유함으로 받으라"(약 1:21). 하나님의 말씀은 들음이 없는 신앙생활은 있을 수 없다고 하듯이 말씀은 큰 부분을 차지했다.

그러나 중세의 카톨릭교회는 초대교회가 물려준 성찬예전의 균형을 유지하지 못하고 말았다. 말씀보다는 성체성사의 지나친 신비와 미신적 신앙으로 교인들을 이끌어간 나머지 하나님 말씀과의 만남을 차단시키는 예전으로 전락되는 결과를 낳고 말았던 것이다. 이들은 교회 구조부터 성례전 중심으로 장식했으며 상대적으로 말씀을 전하고 그 말씀을 경청하도록 하는 구조를 외면해 버렸다. 이처럼 말씀이 없었던 중세 교회는 생명력을 잃게 되었고 성직자의 탈선을 가져오고 말았다. 이것은 중세의 예배와 설교에 대해 서글픈 역사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과 성례전에 균형있게 서있고 설교자나 회중이 말씀으로 새로와지는 역할을 방해하는 사탄의 역사도 보지 않을 수 없다. 말씀이 사장되어 버린 시기가 바로 이 중세때의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 말씀의 권위를 다시 세우시는데 그것이 종교개혁자들에 의한 예배와 설교의 역사창조이다.


  ③ 칼빈의 예배와 설교

칼빈의 예배와 설교는 사실 살펴보자면 큰 논문의 주제와도 같이 엄청나게 많은 사고와 노력이 있어야 가능하는 것을 알고 있다. 여기서는 그 작은 부분, 즉 일국면을 소개할 수 밖에 없음을 먼저 밝힌다. 종교개혁 당시에 설교는 번창했다. 교회와 강단 설교자들은 "너희는 듣는 자는 내 말을 듣는 것"이라는 사실을 확실히 믿고 있었기 때문에 강단은 교회 내에서 또 세속적인 사회 내에서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 칼빈의 설교의 입장과 그에 비추어진 사실에 대해 정성구 교수는 6가지로 요약한다.


첫째, 칼빈은 자기가 행하는 설교의 일이 성직자의 처지에서 하는 것이라고 생각지 않고 "말씀의 사역자" 또는 "말씀의 종"으로 생각했다. 칼빈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다고 생각되는 것, 즉 복음을 증거하였지 회중의 변덕스런 기분에 맞추기 위해서 설교하지 아니하였다. 칼빈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인간의 가치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고 오직 인간은 성령님의 도구임을 말하였다. 칼빈이 설교자로서 활동은 스트라버그에서의 3년간(1538-1541)과 다시 제네바(Geneva)에 돌아가서 약 20년간이었다 라고 정성구 교수는 말한다. 일반적으로 칼빈은 주일에 두번씩 설교를 했다. 한 번은 새벽이고 다음은 오후 3시에 있었다. 평일에는 월, 수, 금요일에 설교를 하였다. 설교시간은 약 1시간 정도였는데 그 안에서는 기도와 찬송이 포함되어져 있으므로 말

은 비교적 빠른 편이었고, 칼빈의 설교는 연속적 성경강해인데 깊은 명상과 기도로 준비하고 조용하고 조심스럽게 설교를 했다. 그는 설교단에서 하나님의 말씀 전달하는 것을 설교자의 의무로 여겼고 주일 아침에는 신약을, 주일 저녁에는 시편을, 평일에는 구약을 강해하였으나 결코 어떤 엄격한 규칙에 얽매이지 아니하였다. 칼빈은 주장하기를 설교자가 성경의 해석만하고 청중의 감화를 귀하지 않는다면 그러한 설교는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고 하였다. 듣는 자들에게 감화를 끼치고 회개를 위해서는 먼저 설교를 듣는 자들의 형편과 성질을 잘 살펴서 거기에 합당한 어법과 비유를 선택해야 된다는 것이다.


둘째, 주께서 말씀하신 이것을 칼빈은 성경 속에서 발견하였다. 이 사실 때문에 성경은 그에게 있어서 다른 기록 문서처럼 여러 가지 서류의 집합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살아있는 뜻"의 기록이다. 그러므로 칼빈의 설교에서 성경은 인간의 영혼 깊이 파고드는 살아있는 말씀이 되었다. 그는 말하기를 "우리는 설교할 때 우리가 하나님께서 앞에 계시는 것처럼 설교해야 하며, 서기가 임금 앞에서 말하듯 하며, 천지의 대권을 가지고 하나님의 도구임을 자각해야 한다. 따라서 설교자는 항상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통하여 말씀하신다"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위의 인용들 중에 하나님 앞에 선 것처럼의 "마치…처럼(as if)"이란 표현은 칼빈에게 있어서는 허구나 가장의 뜻이 아니라 사실로 해석되어야 한다.


  셋째, 설교를 하면서 칼빈은 우선 청중들의 의지에 호소했다. 하나님이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며 돌아오기를 기다리는가 하는 하나님의 약속을 들려주는  것이다. 칼빈의 설교할 때 첫째 회개에 강조점을 둔 이유가 여기 있다. 이것이 효과적인 설교의 비결인 것이다.


넷째, 설교자의 임무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며 이 말씀은 성경이며 설교의 목적은 지식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회개에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원어로 강해하고 연구하는 근면성을 보이는데 성경을 연구하는 것은 설교할 자료를 얻기 위함이 아니요 자신을 통해서 교회에 전파될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함이었다.


다섯째, 칼빈은 효과적인 설교를 위해 듣는 청중을 깊이 연구하였다. 그리스도를 위해 저들을 이해하려 했기 때문이다. 그 뿐 아니라 청중이 잘 깨닫기 위해 예화를 사용하기도 하였고 일상용어, 속담도, 유모어도 섞었다. 또한 칼빈은 그 시대에 대한 연구와 풍속, 시사적인 문제까지도 대단히 민감하였다.


여섯째, 칼빈은 주로 강해설교를 하였는데 성경해석뿐만 아니고 영적감화를 동시에 주장하였다. 성경해석만 하고 영적감화가 없다면 그 설교는 죽은 것이라고 하였다.

 

Ⅲ 결론


맨 앞서 글을 이끌면서 이야기 했지만 현대 많은 교회는 말씀의 권위가 없는 교회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 계시적 말씀에 불감증을 안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고민 속에서 예배에 있어서의 설교를 고찰해 보았다. 특별한 주장도, 내용의 심오성도 없다. 일선 지도자로서 그리고 이제의 강단 사역자로서 설교의 진정한 위치가 무엇인가를 보려고 이 책 저 책 찾아 깨닫고 좋았던 것을 정리하는 글이 된 것 같다. 설교는 예배의 요소 중 빼놓을 수 없는 위치와 기능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기능이요 예언자적인 삶의 구체적인 실천적인 기능을 설명하였다. 그외에도 서술하지 않았지만 교육적인 면 도덕윤리적인 면 다양한 기능을 가지고 있음을 본다.

무엇보다도 그러기 위해서는 신약시대나 중세시대 종교개혁 시대의 설교를 보아야 했고 그속에서 기본 중심된 설교관을 확립할 수 있었다.  첫째, 성경에 근거한 온전한 말씀 선포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와 하나님의 섭리의 은혜를 전파하는 것이요. 둘째는 성령의 강한 인도를 따라 삶 속에 기도와 묵상으로 인간들에게 하나님은 온전히 계시하는 것이다. 칼빈의 설교들이, 그의 삶이 좋은 교과서가 되리라 의심치 않는다.


현재 우리가 사는 이 다양한 세상의 수많은 문제가운데 말씀의 예전이 바로 서고 교회가 바로 서고, 하나님의 권위의 재정립은 이 설교의 올바른 가치와 목적을 수행함에 있다 하겠다. 아무쪼록 하나님 앞에서 함께 노력하고 고민하는 강단 사역자가 되었으면 한다.


Ⅳ 참고도서


김희보. "목회자로서의 칼빈." [신학지남] 제29권, 제1호. 1962.

방지형. [기초예배학] 서울: 성광문화사, 1992.

엄필형. [예배의 갱신과 목회] 서울: 감신출판부, 1991.

정성구. [실천신학개론] 서울: 총신대출판부, 1980.

정장복. [예배학개론] 서울: 종로서적, 1985.

J.J. 폰 알멘. [예배학원론] 정용섭 외 역. 서울: 대한기독교출판사, 1979.

도날드. G. 밀러. [교회의 본질과 사명] 박상증 역.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62.

제임스 레인. [능력있는 설교] 이태웅, 송헌복 역. 서울: 두란노, 1986.

로버트 웨버. [예배학] 편집부 역. 서울: 생명의 말씀사, 1988.

죤 맥닐. [칼빈주의 역사와 성격] 정성구, 양낙홍 역. 서울: 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0.


  <논문>

박봉원. "한국교회 설교의 형태 연구." 석사학위논문, 감리교신학대학원,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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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시편의 현대적 이해  / 황성일 교수


1. 서론: 문제 제기


구약 신앙을 대표하는 인물이라 할 수 있는 다윗은 복수심에 불타서 나발을 죽이려 달려가며 (삼상25), 옛 원한을 잊지 못해 솔로몬에게 요압과 시므이를 죽여라고 유언한다 (왕상1:4-9). 나아가 다윗은 시를 통해서 적에 대한 강한 증오심을 나타내며 또 그를 저주한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이 신약의 정신이며, 구약의 정신도 동일하다 (잠20:22; 24:17; 레19:17-18).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복수심 혹은 저주와 관련된 구절들을 피하려 한다. 마치 그와 같은 구절들을 읽기만 해도, 내면 속에 가까스로 감추어 두었던 분노, 증오와 원한이 폭로될 것 같은 은밀한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읽어서는 안되는 금서를 대하듯 넘어가 버린다.

저주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지만, 저주를 표현하고 있는 시편의 부분들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5:8-10; 6:10; 7:12-16; 10:15; 12:3; 17:13; 18:43-48; 28:4-5; 31:17-18; 35:4-9, 26; 37:2, 9-10, 15, 20; 40:14-15; 41:10; 44:5-7; 54:5; 55:9, 15, 19, 23; 58:6-8; 59:12-14; 63:9-11; 64:7-9; 68:21-23; 69:22-28; 70:2-3; 71:13; 74:11; 79:6, 10-12; 83:9-17; 109:6-20, 29; 119:78; 120:3-4; 129:4-6; 137:7-9; 139:19; 140:8-10; 141:10; 143:12.


2. 형식

2.1 용어 설명

구약 성경에 나타나는 저주의 형태는 크게 둘로 나뉠 수 있다. 하나는 선언적 저주이며, 다른 하나는 기원적 저주다. 선언적 저주란 어떤 대상에 대하여 재앙을 요청하는 것이 아니라, 재앙이 임하게 되는 원리를 선포하면서 재앙을 경고하는 것이다. 열방에 대한 경고 역시 선언적 저주에 속한다 (사13-23). 이와 같은 선언적 저주가 선포되었을 때, 그 경고를 무시한 자에게는 저주가 자동적으로 임한다 (창27:13; 신28:15; 슥5:1-4; 대하34:24). 저주에서 피할 수 있는 자는 없다 (슥5:3). 레26과 신28-20에서 27개의 저주가 선포되었고, 이는 6가지 형태로 간추릴 수 있다: 전쟁에서의 패배 (defeat), 질병 (disease), 땅의 황폐함 (desolation), 약탈 당함 (deprivation), 땅에서 추방 (deportation), 그리고 죽음 (death).

기원적 저주는 남에게 불행이나 재앙이 일어나도록 비는 것이다. 저주한 뒤, 회개를 요청할 수도 있다 (행8:20-24).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심판의 요청이 회개와 그로 인한 사죄의 가능성을 전혀 배제한 상태에서 어떤 대상을 향하여 주어질 때 그것을 기원적 저주라고 부를 수 있다. 이는 예언, 소원, 혹은 기도의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 여기에는 원수의 시기심을 일깨우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시23:5,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원수의 처참한 죽음을 소원하는 것, 더 나아가 원수의 어린 자녀가 비참하게 죽는 것을 소원하기까지 이른다 (137:9). 그러므로 저주에는 그리스도의 마음과 반대되는 복수심이 분명히 나타난다.


2.2 저주의 사회적 용례

저주는 앗수르 조약의 가장 핵심이며, 모든 조약에서 나타난다.

[에살핫돈의 계승 조약 414-420] 신들의 왕이며, 운명을 결정하는 신 앗수르가 네게 악하고 불쾌한 운명을 결정하기를 원하며, 네게 장수함을 허락하지 않기를 원하노라. 그의 사랑하는 아내 물리수가 그 입의 말들을 악하게 하며, 너를 위해 중재하지 않기를 원하노라. 신들의 왕인 아누가 네 모든 가족들에게 질병, 극한 피곤, 말라리아, 불면증, 근심, 허약함을 비처럼 내리기를 원하노라. 하늘과 땅의 광채인 신이 문둥병으로 네게 옷 입히고, 네가 신들과 왕 앞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기를 원하노라.

복수심에 의하여 신들에게 호소하며 자기의 원수들을 저주한다.

[히타이트 정복 기사] 오 아린나(Arinna)의 태양 여신, 나의 여주인이시여, 나를 '어린애'라 부르고, 나를 모욕하였던 이웃의 원수 나라들이 당신의 영토를 침범해 왔습니다. 오 아린나의 태양 여신, 나의 여주인이시여, 내 옆에 서셔서, 앞서 말한 이웃의 원수 나라들을 내 앞에서 무찌르소서.

[아캇 신화] 마라랏투굴랄아, 영웅 아캇이 네 옆에서 살해되었으니, 네게 화가 있으리로다. 너의 뿌리가 땅에 싹을 내지 못할 것이며, 그가 너를 뽑아 낼 때, 네 머리가 떨어지리라. 지금부터 영원히, 지금부터 모든 세대에 이르기까지, 피난민이 되리라.

구약 시대 이스라엘 사회에서도 저주는 보편적 현상이다. 흔히 보호를 위한 일종의 방책으로 저주를 사용한다. 하나님을 섬기고 (신28:47), 이웃에게 악을 범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백성들의 충성을 보장하기 위하여 저주를 선포한다 (신27:15-26; 28:15-19, 20-36). 이스라엘 지파들이 베냐민 지파와 결혼하지 못하도록 규정한 조약을 보장하기 위해서 저주한다 (삿21:18). 사울이 그의 군대에게 식사를 금하게 하기 위해 저주한다 (삼상14:24, 28). 여리고성 재건을 막기 위해 여호수아가 저주했다 (수6:26). 자신의 주장 혹은 행위의 진실성을 보증하기 위해 저주하며 (시7:3-5; 의심의 소제, 민5:19-31), 보복과 응징의 수단으로서도 저주한다 (창4:11; 삿17:2). 보복할 수 없는 현실적인 무능력으로 인해, 저주를 통해 보복하거나 자신의 감정을 표현한다 (삼하3:29). 절망적인 상황에 대한 비통함으로 인하여 구체적인 대상이 없이 저주하기도 한다 (욥3:1-10). 개인 혹은 국가의 원수들에 대해 저주한다 (시79:6-12). 모든 종류의 약속 혹은 계약에 있어서, 그것이 구속력이 있도록 만드는 보호수단으로 저주가 사용될 수 있다 (삿21:18; 왕상 9:6-9; 느10:29).


2.3 저주의 형식


3. 해석

3.1 잘못된 해석들

1) 저주는 나쁜 것이므로, 말시온처럼, 성경에서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저주 역시 성경의 한 부분이므로,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우리에게 유익이 있다 (고전10:11; 딤후3:16). 예수와 사도들이 저주시편의 권위를 인용한다. 그러므로 저주시를 기록한 시인들은 틀렸으므로, 신약의 성도들이 그들의 저주를 사용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은 말시온적인 이원론이다.

2) 시편의 저주가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는 유익이 있으므로, 저주 부분들을 성경에서 제거해서는 안되지만, 동시에 저주하는 시인들의 영적 혹은 도덕적 수준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되는 것보다 낮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견해의 문제점은 다윗이나, 바울과 같은 영성이 뛰어난 사람들을 저주하기를 즐기는,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간주한다는 점이다. 또한 성경에 기록된 저주에 관한 많은 내용들이 간접적인 유익만 주고, 그 자체로서는 좋지 않다고 본다면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의 권위가 손상될 수 있다는 것도 문제다.

3) 시인의 저주는 당대의 자기 원수들을 향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대적에 관한 예언일 뿐이다고 말한다. 신약에서 흔히 저주시들을 그리스도와 관련된 예언적 시로서 인용하고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와 같은 견해는 시인이 시를 기록하는 당시의 정황을 지나치게 무시하는 잘못이 있다.

4) 구약의 시인들은 내세에 대한 희망이 없었으므로 현세에의 정의를 원한다고 주장되기도 한다. 시인이 부활에 대한 혹은 내세에 대한 소망을 갖고 있었느냐 하는 것은 그가 저주를 할 수 있느냐 하는 것과 직접적인 관계를 갖지는 않는다. 만일 저주가 구약의 성도들에게 있어서 금지되어야 한다면, 그가 혹시 내세에 대하여 불확실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고 할지라도, 그의 저주를 정당화할 수는 없다.

5) 복수를 요청하는 것은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롬12:17, 19) 라는 사도의 교훈과 일치한다. 그러나 바울은 원수를 사랑함으로써, 하나님께 복수를 맡겨라고 권면하지만, 시편은 원수를 저주함으로써, 하나님께 복수를 맡기고 있다.

6) 이러한 저주들은 모두 집단적 성격이라고 간주하기도 한다. 원수 자신 뿐 아니라, 조상이나 후손에게까지도 저주가 임하길 바란다. 그러나 많은 시들에서 비록 개인의 이름은 언급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내 원수라는 표현에서 암시되는 것처럼 저주의 개인적 성격은 흔히 분명하게 나타난다.

7) 우리들 역시 아무런 제한 없이 시편과 같은 내용의 저주를 행해도 된다는 것도 잘못이다. 우리 개인을 핍박하는 자들, 혹은 교회와 인류에 큰 죄를 범한 자들이라 할지라도 그들을 저주해도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의 명령을 어기는 것이다.


3.2 이해의 방법

복수를 요청하는 목적은 원수들이 하나님께 승복하고 자신의 하나님으로 인정하게 하는 것이다. 시인의 분노는 저속하고 잔인한 복수심이 아니라, 여호와께 대한 정열적인 사랑에 기인한다. 하나님의 정의가 실현되기를 바라는 시인들의 열망이 표현되는 것이다. 이는 시인이 분노하고 저주를 요청하는 이유에서 나타난다. 시인은 개인적인 손실이나 상처로 인해 저주를 요청하지 않는다. 사회적 불의, 하나님께 대한 모욕, 불신과 불순종, 하나님의 영광이 가려짐과 같은 것들이다. 악인은 사람에게 죄를 지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죄를 지었다.

        비록 시인이 개인적인 상처를 입었다고 하더라도, 그는 자신의 고통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있다고 간주할 때만, 하나님의 편에 서서 저주한다. 이스라엘 백성과 여호와 사이의 특수한 관계, 즉 공동운명체 사상에 기초한다. 시인은 자기 백성을 대표하여 하나님의 원수에 관하여, 하나님의 원수를 향하여 저주한다. 그러므로 저주는 가장 영적인 행위다.

구약 시대는 영적인 것을 현세적인 것으로 표현하며, 인간 심성에 내재하는 복합성을 단순화시켜 흑과 백의 논리로 표현한다. 선인이 있고 악인이 있다. 그러나 선하기도 하고 악하기도 한 사람은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구약에서는 일반적으로 죄와 죄인을 구분하지 않는다. 한 사람이 죄를 지으면, 그는 그 죄에 관한한 저주를 받고 심판 받아야만 한다는 것을 시인은 선언한다. 그의 나머지 부분이 의롭다는 것은 시인의 관심 밖에 있다. 이것은 시인의 도덕적 수준이 낮아서가 아니라, 구약 시대의 일반적 계시 방법에 따른 것이다.

        도덕수준이 낮아서 저주한 것이 아니라, 그의 영이 맑게 깨어있기 때문에 저주한다.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원수 사랑이라는 그리스도의 정신을 실천할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에 저주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구약의 시인들만큼 혹은 신약의 바울처럼 하나님의 마음을 닮고 있지 않기 때문에 저주하지 못한다.


3.3 올바른 사용법과 유익

시편의 저주 부분들을 사용하는 세 가지 방법을 생각할 수 있다.

1) 개인을 저주하는데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다. 저주의 원칙을 선포함으로써 '나' 역시 같은 원칙 아래 있음을 인정하라 (7:3-5). 그리스도인은 구약의 저주를 사용하여 악한 영, 사탄을 저주할 수 있다. 사탄을 가장 잘 저주하는 방법은 전도다.

2) 조건적으로 사람을 저주할 수 있다. 우리가 사람을 저주하려 할 때,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첫 번째 조건은 이기심에서 완전히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개인의 원수가 아니라, 하나님의 원수를 향해 저주하라는 것이다. 칼빈은 이렇게 충고한다. 우리 자신에게 해를 입힌 사람들에게 이기심으로 인해 복수하려 하지 말라. 하나님의 영광과 자신의 충동적 감정을 혼동해서는 안된다. 자신이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대표하는 하나님의 대리인이라고 여겨질 때, 자기의 원수를 하나님의 원수라 여기고 저주할 수 있다.

두 번째 조건은 하나님의 마음에 자신의 마음이 완전히 일치했다고 여겨질 때 저주하라. 하나님이 저주하신다고 절대적으로 확신하는 경우에 그를 저주할 수 있다. 사람을 판단하는 일에는 거듭 신중하라. 하나님의 판단과 일치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이와 같은 조건들이 충족되지 않을 때, 저주하지 말아야 한다.

3) 저주하려 하지말고, 시인의 저주하는 소리를 들어라. 자신의 억울한 고통에 분노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상처 받은 자녀가 지켜보는 것처럼, 시인이 분노하여 저주하는 목소리를 들어라. 시인은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그들을 대표하여, 원수들을 향해 분노하고 있다. 시인은 하나님의 분노를 표현하고 있다. 그러므로 고통 속에 있다면, 시인의 말을 빌어서 저주하려 하지 말고, 의로운 시인의 분노를 듣기만 하라. 그것은 하나님이 고통 당한 그리스도인의 편에 서 계시며, 그의 고통에 참여하고 계시며, 그를 위해 일어나셔서, 그의 문제를 해결하시고, 그의 억울함을 풀어주실 것이라는 강한 확신을 가져다 줄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저주하기 위해 시편 시인의 저주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영을 정결케 하고, 저주심을 극복하기 위해 저주를 이용한다.

4) 저주의 원인이 되는 인간의 정황을 깊이 살피게 한다. 옳고 그른 것을 날카롭게 구분할 수 있게 한다. 신약의 교훈에 익숙해진 우리는 죄인 뿐만 아니라, 심지어 죄조차 사랑해 버린다. 유대인이 이방인보다 더 심한 저주를 한다면 그것은 유대인이 옳고 그름에 대해 훨씬 더 심각하게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58: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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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틴 루터의 종교개혁 3대 논문
 

1. 독일 크리스천 귀족에게 보내는 글

(To the Christian Nobility of the German Nation).


본서는 루터가 1520년에 기록한 논문이다. 루터가 이 책을 기록한 것은 그리스도계를 개혁시킬 필요성을 느낀 나머지, 개선해야 할 여러 가지 점을 들어 그 당시 독일의 크리스천 귀족에게 보낸, 하나의 뜻있는 권면과 충고의 글이라고 볼 수 있다.

본 논문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즉 기본적인 문제를 논하는 부분과 실제 문제를 취급하는 부분이다.


그 첫 부분은 1천년 가까이 서방세계의 사회, 경제, 정치, 법조, 종교계의 기반을 이루고 있었건 문제들을 이른바 “로마의 세 가지 담<Mauer>"에 비유하면서 신학적으로 논박한 것이다. 첫째 담은 세속적 계급 위에 있는 영적 계급의 담인데 이러한 계급은 조작된 것이라는 것이 루터의 주장이다. 루터는 모든 크리스천들이 참으로 하나님 앞에서 “영적인 계급”에 속하는 것이며 그들 가운데는 직무상의 차별 이외에는 아무것도 차별이 없다고 주장하였다. 사제는 그저 하나의 관리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며 크리스천은 모두 세례를 통하여 사제로서 성별을 받는다는 것이다. 루터는 세속적 계급에 대한 영적 계급의 우위성은 근거가 없는 주장이며 모든 크리스천은 다 사제라는 만인 제사장주의를 선언한 것이다.


둘째 담은 성서해석자인 교황과 교황의 무오설에 관한 내용이다. 루터는 교황이 성서의 유일한 교사가 되려고 한다고 비판하였다. 즉 교황은 스스로 유일한 권위자라고 생각하며, 교황은 악인이거나 선인이거나 간에 신앙문제에 있어서 오류를 범할 수 없다는 교황(敎皇) 무오(無誤)의 거짓 주장을 하여 우리를 납득시키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교황은 이 문제에 대하여 성서적으로 한 마디도 증거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이유들로 인하여 교회에는 이단적이고, 부자연스럽기까지 한 규정들과 교회법이 교회에 들어왔다. 이 문제에 대하여 루터는 성서적인 근거(고린도전서 14장 30절)를 제시하면서 모든 크리스천은 다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요한복음 6;45)고 하였다. 즉 성서 해석이나 그 해석의 확인이 홀로 교황에게만 속한다고 하는 것이 전혀 조작적인 이야기이며 그들은 여기에 대하여 한 글자도 증언하지 못한다고 비판을 가하였다.


셋째 담은 교황과 공의회의 담이다. 즉 공의회를 소집하거나 결의를 확인하는 것이 홀로 교황에게만 속한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주장에 대하여 루터는 아무런 성서적인 근거가 없이 자신들의 법령에만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이라고 비판하였다. 그러면서 루터는 실례로 공의회 가운데 가장 유명한 니케아 공의회가 주교에 의한 것이 아닌 콘스탄틴 황제에 의하여 소집이 되고 확인되었다는 역사적인 증거를 제시하였다. 그런데 이 공의회는 가장 그리스도교적인 공의회였다는 것이다. 만약 교황청이 주장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이런 공의회는 분명 이단적인 것이 되어야 하지만 니케야 공의회는 가장 그리스도교적이었다는 것이다. 루터는 이 논문의 첫째 부분에서 직업적인 차이가 있기는 하나 신자간의 근본적인 차이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주장함으로써 당시 교회의 세 가지 담을 파괴한 것이다.


둘째 부분에서 루터는 공의회에서 논의되어야 할 여러 가지 문제들과 반드시 개선되어야 할 당면한 실질적인 문제들을 27개 항목에 걸쳐서 광범위하게 취급하였다. 교회 내의 문제로부터 시작하여 정치, 경제, 사회, 교육 분야 등 다방면에 걸쳐서 문제의 핵심들을 다루어 개혁을 제안한 바 있다. 루터는 먼저 교황의 교만한 마음에 대하여 질타를 가하면서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마음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위하여 날마다 울고 기도하는 일과 모든 겸손의 본을 세우는 일 외에 아무것도 원하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교황은 교만하여 영혼 구원에 관하여는 관심을 지니지 못하고 오히려 권력을 잡기에 혈안이 되어 있다는 것이다. 추기경은 독일의 재산들을 독일로 가져가기 위하여 만들어진 직분이기에 하나님 예배를 땅에 떨어뜨리게 하였다고 질타한다. 루터는 추기경은 단 한사람도 없을 지라도 교회는 망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교황청 역시 다 없어지고 단 하나만 남더라도 신앙 문제에 있어서 결정을 내리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첫 수입세와 교황의 달, 자유 교구령, 성록령 등은 교황의 재정을 확보하기 위한 악법이었다는 것을 루터는 비난하였다. 그러면서 루터는 첫 수입세의 폐지와, 로마의 임명에 대한 금지, 그리고 개교회의 권리회복을 주장하였다.


교황은 이런 모든 고상한 상행위(교황의 생각에 비추어 볼 때)를 위하여 로마에 거래소인 교황청 내의 집을 세웠는데 성록령과 교구령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 다 이리로 오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는데 루터는 이러한 행위를 창녀의 집에 비유하였다.


루터는 또한 세속적인 문제를 가지고 교황의 법정에서 심판하는 것에 대한 배제를 주장하였으며, 주교 법정의 재판관들에 의하여 자행되는 난폭한 착취를 모든 주교가에서 금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루터는 결혼생활에 관하여도 자신의 견해를 보이고 있는데 결혼 생활을 자유롭게 행하고, 모든 사람이 결혼을 하든지 않든지 자유로이 선택할 수 있도록 하라고 하였다. 이외에도 루터는 죽은 자의 미사를 폐지할 것과, 성사금지를 폐기할 것, 성자의 날이나 순례도 금지할 것을 촉구하였다. 즉 루터는 본 논문에서 신학적인 것보다는 실제적인 개혁의 방침을 세웠는데 교황권의 악정과 직임 임명, 과세는 억제되어야 하며, 부담이 되는 의식은 철폐되어야 할 것이다고 하였다.


독일 교회는 마땅히 독일 민족교회 산하에 있어야 하며 교직자의 결혼은 허락되어야 하며, 수많은 성일은 줄여서 산업과 사회에 관심을 갖도록 하고, 탁발 교단들을 포함한 구걸은 금지되어야 할 것은 말하였다. 또한 사창가는 폐쇄되어야 하고, 낭비는 억제되어야 하며, 대학의 신학 교육은 개혁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루터는 마감말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내 주장이 바르다면 나는 지상에서는 정죄를 받아야 하고 다만 그리스도에 의하여 하늘에서만 인정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왜냐하면 크리스천들과 전 그리스도 교계의 주장은 홀로 하나님 한 분에 의해서만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모든 성서가 보여주기 때문이다.”


2. 교회의 바벨론 감금(Babylonish Captivity of the Church).

이 논문은 루터가 “독일 크리스천 귀족에게 보내는 글”을 발표한 2개월 후에 나온 글이다. 이 논문은 당시의 로마 카톨릭 교회의 잘못된 성례관을 신학적으로 조리 있게 설명하고 반박한 글이다.


“바벨론 감금”이란 말은 성례전의 왜곡된 가르침을 일례로 통칭하는 말이다. 곧,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이 싸움에 패하여 오랫동안 바벨론이 포로가 되어 있으면서 고난의 생활을 한 것처럼 그리스도 교회의 성례전이 중세기 로마 교회에 의하여 “포로”가 되었던 현실을 비유해서 붙인 표현이다.


루터는 본 논문에서 카톨릭 교회의 성례를 비판하였다. 즉 카톨릭 교회의 7가지 성례인 세례, 성찬, 참회, 안수례, 견신례, 결혼례, 그리고 임종시의 도유식을 포함한 것이다. 그러나 루터는 이 7가지의 성례 가운데서 세례와 성찬만을 성례로 보았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첨가한다면 참회까지도 성례로 보았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곳에는 참회와 같은 외부적으로 나타나는 표지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루터는 나머지에 대하여 말하기를 주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시고 인정하신 것이 아니면 성례전으로 취급할 수 없다고 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루터의 논점이다.


루터는 먼저 떡의 성례에 관하여 이야기한다. 루터는 성만찬에서 평신도들에게 성경의 말씀을 예로 들면서 포도주 잔을 금지하는 것을 비판하였다. 만일 교회가 평신도들에게 한 가지 요소인 포도주를 빼앗을 수 있다면, 역시 다른 한 가지 요소인 떡도 빼앗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평신도들에게서 성만찬의 두 가지 요소를 거부하는 것은 사악하고 전제적이며, 어떤 교황이나 공의회도 이러한 권한을 지닐 수 없다고 결론을 내린다.  루터는 성만찬에 있어서 화체설(化體說)의 미신적인 요소와, 성만찬을 희생으로 해석하는 점에 대하여 비판한다.


루터는 또한 희생의 미사를 비판한다. 중세 카톨릭 교회는 미사가 선행이고 희생제라는 의견보다 더 일반적으로 보유하거나 또는 확고하게 믿어지는 의견이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즉 미사 때마다 희생의 제사를 드리는 것으로, 또한 우리의 죄사함의 보속을 위해서 인간도 희생의 제물로 바쳐지는 노력과 공로가 있어야 함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루터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십자가에서 희생의 제사를 드렸기 때문에 더 이상 희생을 드릴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그 다음에 신앙이 따르며, 신앙 다음에 사랑이 따른다. 그리고 사랑은 모든 선행을 행한다. 왜냐하면 사랑은 악을 행하지 않기 때문이다.


루터는 세례가 성례에 관하여는 최대의 축복으로 여기고 있다. 루터는 세례는 하나님의 약속이며,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 곳에는 어디서나 반드시 신앙을 요구하며, 이 두 가지는 서로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약속이 없이는 믿을 수 없고, 믿음이 없다면 약속이 수립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도 성례에서 신앙이 필요 불가결한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이 성례가 본래의 의도에서 벗어난 것에 대하여 비판을 하고, 세례에 대하여 설명을 하는 가운데 중세기 수도원 제도를 비판하면서 세례의 언약 외에 다른 언약은 있을 수 없다고 가르쳤다.


루터는 성례에 관하여 말하면서 성례의 첫째가는 폐해는 참회를 완전히 폐기해 버린다는 것이다. 루터에 의하면 교황청은 참회를 회개와 고백과 보상으로 나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할 때 그 하나 하나에 있어서 좋은 것은 다 제거해 버리고 거기에다 자기들의 변덕과 횡포를 가져다 놓았다는 것이다.


3. 크리스천의 자유(On Christian Liberty).


“크리스천은 더할 수 없이 자유로운 만물의 주이며 아무에게도 예속되지 않는다. 크리스천은 더할 수 없이 충의로운 만물의 종이며 모든 사람에게 예속한다.”는 이 두 가지 명제에 대하여 루터는 서로 모순된 것처럼 보인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것은 모든 기독교인의 두 가지 모습을 기술한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하였다. 기독교인의 두 가지 모습이란 서로 모순되는 두 사람이 한 사람 안에 있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하나는 내적이고 영적인 사람이고 하나는 외적인 사람 즉 옛 사람이다. 우선 외적인 것은 어떤 것이라도 기독교적인 의나 자유를 만들어 내거나 또는 반대로 불의나 종속됨을 만들어 내는 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우리들은 우리들이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다. 그러나 기독교인의 삶과 의와 자유에 필요한 것은 하나님 말씀, 즉 그리스도의 복음 한 가지 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복음이 신앙을 창조한다는 것이다.


신앙은 인간의 의와 구원을 위하여 율법이나 공적이 필요치 않도록 만드는 능력이 있다고 루터는 말한다. 이것이 신앙의 첫 번째 능력이요, 하나님께 드리는 가장 고귀한 예배는 우리가 진실성과 정직성과 그리고 신뢰하는 사람에게 돌리는 모든 것을 하나님에게로 돌리는 것이 신앙의 두 번째 능력이고, 영혼과 그리스도를 결합시키는 것이 신앙의 셋째 능력이라는 것이다. 결국 루터는 이 논문에서 만인 제사장직을 주장하고 나섰다. 즉 그리스도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었기 때문에 더 이상 율법 아래 얽매여 있지 않고, 그리고 그리스도인은 그의 삶을 하나님의 뜻에 맞도록 그리고 이웃에 도움이 되도록 사랑으로 묶을 수 있기 때문에 종이라는 것이다.


루터는 선행이 선한 사람을 만들지는 못하지만 선한 사람은 선한 일을 행한다고 하였다. 즉 선행이 선한 사람을 따르고 그에게서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선을 행하는 사람은 어떤 공적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선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신앙이라는 것이다. 신앙 외에는 아무 것도 사람을 선하게 만들지 못하며 불신 외에는 아무 것도 사람을 악하게 만들지 못한다고 하였다. 이 논문에서 루터는 마지막에 이런 말을 잊지 않았다. “그리스도시여! 우리로 이 자유를 이해하고 보존하게 하옵소서. 아멘.”


◈ 평가

본 종교개혁 3대 논문은 루터의 저서 가운데 가장 빛나는 책들이라고 여겨진다.

루터는 이 책들을 통하여 위대한 종교개혁을 이룩할 수 있었으며, 참된 신앙의 사람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본인은 이 책을 읽으면서 때로는 화가 치밀기도 하였고 때로는 무엇인가 가슴을 꽉 막고 있었던 체증이 풀리는 듯한 인상을 받기도 하였다.

당시대의 교회가 너무나 부패하여 교회로서의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고 무너져 가는 모습을 보면 정말 답답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이런 사악한 세상에서 루터와 같은 인물이 나와서 꺾이지 않는 정열로 당시의 권력에 담대히 맞설 수 있었다는 것을 보면서 그나마 위안을 삼을 수 있었다.

본 논문을 읽으면서 오늘 21세기를 목전에 둔 우리들의 모습이 마음 한 구석에 영상으로 나타났다. 그러면서 오늘의 우리 교회에 루터가 나타나면 무엇이라고 말할 것인가 하는 생각이 스친다. 자신이 없다. 루터 앞에서 우리는 떳떳하다고 큰 소리로 말할 수 있는 자신이 없다.

한 가지 소망을 지닌다면 아직은 우리가 무너지지 않았으니 이 시대의 루터가 나타나기 전에 우리의 신앙과 삶을 재정립하였으면 하는 생각을 지니게 한다. 우리는 말씀 중심의 신앙으로 거듭나야 하겠다. 루터 당시에도 말씀이 없어서 무너지고 있었지 않았던가! 물론 우리들에게 체험도 중요하고 신비주의적인 신앙도 중요하다. 그러나 말씀이 없는 체험은 소용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 중심의 신앙으로 거듭나야 하겠다는 다짐을 하여본다.

물량주의, 성공주의 신앙에서 십자가 신학의 신앙으로 거듭나는 모습이 되었으면 한다. 우리는 너무 물량주의화 되어가고 있다. 그래서 교회도 큰 교회, 버스도 큰 버스, 모든 것이 큰 것은 좋은 것이라는 생각에 젖어 있다. 그러면 소외와 빈곤과 억눌림의 아픔은 누가 함께할 것인가? 교회가 함께 하여야 한다. 그럴러면 교회는 십자가의 신학의 신앙으로 거듭나야 하는 것이다. 자본주의 이기적인 신앙에서 더불어 살고 더불어 주는 신앙의 모습을 보이기는 소망한다. 이것이 바로 루터가 바라는 진정한 신앙인의 삶일 것이다.

 

◈함께 나누고 싶은 이야기.


1. 오늘 우리들의 교회는 너무 자본주의화 되어 가고 있다는 느낌을 자아내게 한다. 주님의 지상 명령인 선교보다는 내 교회 늘리기에 혈안이 되어 있다. 멀쩡한 건물을 때려 부숴 새로운 교회 건물 짓고, 교회 묘지 터를 사고, 차를 바꾸고 너무 자본주의에 물들어 가고 있는 느낌이다.

이런 교회의 모습에서 함께 더불어 사는 생활의 모습으로 실천할 수 있는 방안은 무엇일까?


2. 교회의 진정한 성공의 지표는 무엇일까?

교인의 증가인가? 교회 재산이 증식인가? 오늘날 교회가 진정으로 선호할 수 있는 신앙의 목표는 무엇일까?

 

[자료] 송 용석 (San Francisco Theological Semin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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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기독교의 가정교회
 
An Analysis of Documents for the Early Family (House) Churches


(by Dr.theol. Byoung Soo Cho)


  1939년에 Filson이 초기 기독교 가정교회의 의미에 관하여 발표한 짧은 논문1)은 비록 당시에는 큰 반응을 얻지 못하였지만2) 이 주제에 관한 논의의 시발점을 놓았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Filson이 가정교회에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는 가정교회들의 공헌을 염두에 두지 않고는 사도 교회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3). 그 이후로 가정교회에 관한 관심은 꾸준히 고조되면서4) 결국 1980년대를 전후로 하여 이 주제는 폭발적인 인기를 끌게 되었다5). Klauck은 이 시기에 가정교회의 주제가 갑자기 붐을 일으키게 된 이유를 위하여 여러 가지 추측이 가능하다고 말하면서 특히 현실적인 문제들, 예를 들면 오늘날의 가정에 대한 염려라든가 새로운 생동력있는 교회형태에 대한 추구가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6).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볼 때 신약학계에서 1980년대를 중심으로 초기 기독교에 대한 사회학이 활성화되면서 가정교회에 대한 관심이 더욱 촉진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 아니다7). 이제는 가정교회에 관한 문헌이 엄청나게 되었다8). 이 주제는 신약학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것이 되었다9). 본고는 초기 기독교의 가정교회를 면밀히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이 글에서는 사도행전과 서신서들 그리고 속사도 문서에 나오는 가정교회에 관한 자료들을 수집하여 분석하고, 이후 다음 글에서는 자료분석에 근거하여 가정교회의 의미를 파악하며 문제점을 제시해보고자 한다. 이 논문의 유익은 두 가지이다. 첫째로 이 논문으로 말미암아 초기 기독교의 교회현실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둘째로 이 논문은 오늘날의 교회들이 지향해야 할 성경적인 교회관을 설정하는데 일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I. 자료분석


  초기 기독교에서 가정교회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었는지 살펴보기 전에 자료를 수집하여 분석하는 것이 우선적이다. 우리는 신약성경으로부터 능력에 따라 자신의 집을 전교회의 회집이나 개별 그룹모임을 위하여 제공할 수 있었던 그리고 제공할 준비가 되어있었던 남자와 여자들의 이름이 구별없이 언급되는 것을 볼 수 있다10). 이들을 사도행전, 바울서신, 기타서신, 속사도시대 문서의 순서대로 정리해보자.


1. 가정교회에 대한 사도행전의 증거


  사도행전은 초기 기독교의 가정교회에 관한 역사적인 사실들을 상당수 제공하고 있다11). 사도행전에 의하면 초기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정 중심활동과의 연속성 속에서 예루살렘 교회에서부터 가정집회를 중시하였다. 사도행전은 처음에 다락 (u`perw|/on)에 관한 진술 (행 1:13)과 마지막에 셋집 (mi,sqwma)에 관한 진술 (행 28:30)로 괄호법 (inclusio)을 이룸으로써 마치 가정 (집)이 없으면 기독교도 없다는 듯한 인상을 제공한다12).


1) 팔레스타인의 가정교회 (사도행전 1-12장)


  누가는 사도행전에서 초기 기독교의 모습을 진술하면서 가정을 기반으로 하는 교회의 상황을 여러 곳에서 언급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 후에 제자들은 감람산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한 집의 일부인 “다락” (u`perw|/on)에 올라갔다 (행 1:13)13). 그러나 머지않아 집회는 한 집의 일부가 아니라 전체를 사용하는 규모로 발전하였다. 누가는 사도 베드로가 사도보충설교를 할 때 120명의 성도가 모인 것과 오순절에 성령께서 강림하실 때 제자들이 모인 것을 가리켜 evpi. to. auvto, (행 1:15; 2:1)라고 한다. 문맥을 살펴볼 때 분명한 것은 누가는 이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의식적으로 기독교 공동체의 집회 (한 장소에 모인 그룹이건 전체 공동체이건)를 가리키고 있다는 것이다14). 이 표현이 건물의 일부가 아니라 전체를 의미한다는 사실은 성령강림의 현상이 “온 집에 가득하였다” (evplh,rwsen o[lon to.n oi=kon)는 것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15). 

  처음에는 그리스도인들의 가정집회가 성전회집과는 상이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성전에서 행한 일과 가정에서 행한 일이 선명하게 구별되어 진술되고 있기 때문이다. 성전에서와 달리 가정에서는 주로 식사교제가 이루어졌던 것 같다. 이것은 행 2:46f.의 구조를 살펴보면 선명하게 드러난다.


행 2:46f.의 구조:


2개의 분사 (46a)    주동사 (46b)    2개의 분사 (47a)

proskarterou/ntej                      aivnou/ntej

                    metela,mbanon

klw/ntej                              e;contej


첫째로 두 개의 분사 (proskarterou/ntej, klw/ntej)가 나오고 다음에 주동사 (metela,mbanon)가 따르고 결국에 두 개의 분사 (aivnou/ntej, e;contej)가 이어진다. 처음 두 개의 분사는 장소 (성전과 가정)를 지시하고, 나중 두 개의 분사는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태도 (찬미와 칭송)를 묘사한다16). 이것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성전에서 한 일과 가정에서 한 일이 달랐다는 것을 입증한다. 성전에서의 집회는 모든 신자의 공개적인 모임인 반면에 가정에서의 집회는 식사교제에 치중해있었다17). 본 절의 주동사 (metela,mbanon)에 의하면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공동식사가 매우 중요한 것으로 나타나는데, 이 공동식사는 주로 집에서 떡을 떼는 일로 시행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경과하면서 초기 기독교에서 가정집회의 성격은 상당히 변화 또는 발전한 것 같다. 가정에서도 교육이 이루어졌다. 이런 사실은 행 5:42에서 분명하게 엿보인다. 이 구절에서는 가정이 성전과 마찬가지로 교육과 전도가 시행된 장소로 소개된다. dida,skein과 euvaggeli,zein은 하나의 개념으로서 설교를 가리키는 것이었을 것이다18). 이런 이중표현은 행 15:35에도 등장한다. 또는 euvaggeli,zein은 dida,skein을 내용적으로 자세히 규명하는 것일 수 있다19). 이제 가정집회는 단순히 교제의 차원을 넘어서 교육의 차원으로 전진하였다.

  누가는 스데반의 순교사화를 마무리하면서 회심 전의 사도 바울의 기독교 핍박사건을 압축적으로 묘사한다. 사도 바울은 회심 전에 “교회를 잔멸할 때 각 집마다 다니며 남자들과 여자들을 끌어다가 옥에 가두었다” (행 8:3). 이 구절은 교차대조의 구조가운데 각각 하나의 분사를 지닌 두 개의 동사로 이루어져있다20). 첫째로 “교회를 잔멸한 것” (evlumai,neto th.n evkklhsi,an)과 “각 집마다 다닌 것” (kata. tou.j oi;kouj eivsporeuo,menoj)이 연결되어 있으며, 둘째로 “남자들과 여자들을 끌어간 것” (su,rwn a;ndraj kai. gunai/kaj)과 “옥에 가둔 것” (paredi,dou eivj fulakh,n)이 연결되어 있다. 후자의 경우에서 중요한 것은 남자들과 여자들이 교회의 구성원으로 나란히 등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잠시 멀리하고 먼저 주목해야 할 사실은 전자의 경우에 나타난 교회와 가정의 관계이다. 이것은 초기 기독교가 가정 복음화에 얼마나 주력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을 뿐 만 아니라, 초기 기독교의 교회가 가정을 근거로 하여 형성되어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중요한 진술이다21). 누가는 회심 전의 사도 바울이 교회를 파괴한 것과 성도의 각 집에 진입할 것을 동일한 것으로 제시하고 있다. 여기에 언급된 교회는 예루살렘 교회를 가리킨다 (행 8:1 th.n evkklhsi,an th.n evn  `Ierosolu,moij). 예루살렘 교회는 성도의 가정들로 형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 가정들은 일종의 가정교회였을 것이다. 이 구절에서 동사들을 제외한다면 th.n evkklhsi,an kata. tou.j oi;kouj는 가정교회를 나타내는 바울의 표현법과 거의 다를 바가 없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22). 누가에 의하면 회심전의 사도 바울은 가정집회를 파괴하는 것이 예루살렘 교회를 파괴하는 지름길이라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가정교회와 관련하여 특히 주목을 끄는 것은 로마군대의 백부장 고넬료의 회심사건이다. 고넬료는 기독교의 진리에로 회심하기 전에도 “온 집이 더불어” (su.n panti. tw/| oi;kw| auvtou/) 하나님을 경외하던 사람이었다. 고넬료는 기독교의 진리를 듣기 위하여 사도 베드로를 자신의 집으로 (행 10:22,30; 11:12) 초대하였다. 이때 고넬료는 자신의 집에 그의 “일가와 가까운 친척들” (tou.j suggenei/j auvtou/ kai. tou.j avnagkai,ouj fi,louj)을 모았다 (행 10:24). 고넬료는 사도 베드로를 통하여 구원을 얻을 말씀을 들어야 할 대상이 자신 뿐 아니라 “온 집” (pa/j o` oi=koj, 행 11:14)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그것을 매우 폭넓은 범위로 이해했던 것이다. 이것은 고넬료의 가정이 실제로 그의 집에서 살지 않았던 사람들까지 포함하는 확대가정이었던 것을 의미한다23). 그들은 사도 베드로의 구원설교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기독교에 입문하였다 (행 10:48)24).

  사도행전에서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 (oivki,a)은 예루살렘 교회에서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으로 진술된다. 그 집에서 “여러 사람이 모여 기도하였다 (ou- h=san i`kanoi. sunhqroisme,noi kai. proseuco,menoi)” (행 12:12). 이 구절은 마리아의 집이 두 가지 목적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선 마리아의 집은 그리스도인들이 모이는 집회소로 사용되었다25). 여기에 집회를 위하여 사용된 동사 sunaqroi,zein는 누가에게서만 나타나는 것으로서 특별한 모임을 서술하고자 할 때 사용되는 것이다26). 이 집에서 충분한 수의 사람들이 집회할 수 있었던 것은 이 집이 상당한 규모를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실제로 이 단락이 대문과 여종을 언급하는 것으로부터 이 사실은 분명하게 입증된다27). 둘째로 마리아의 집은 그리스도인들이 기도하는 기도처로 사용되었다. 이것은 마리아의 집이 핍박의 시기에 그리스도인들에게 은밀한 예배처소로 제공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28). 마리아의 집은 예루살렘 교회에 속한 여러 가정교회들가운데 하나였을 것이다. 헤롯은 예루살렘 교회 (h` evkklhsi,a, 행 12:1)를 파괴시키기 위하여 야고보를 처형하고 (행 12:1), 베드로를 체포하였다 (행 12:4). 이때 예루살렘 교회 (h` evkklhsi,a)는 체포당한 베드로를 위하여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였다 (행 12:5). 예루살렘 교회의 기도는 여러 개의 가정교회에서 행해졌던 것이 틀림없다. 베드로가 천사의 도움으로 해방되어 찾아간 마리아의 집은 분명히 여러 개의 가정교회들 중에 하나였을 것이다. 이것은 베드로가 마리아의 집에 도착한 후에 자신의 해방에 관하여 “야고보와 형제들에게 전하라 하고 다른 곳으로 갔다” (행 12:17)는 사실로부터 명확하게 알 수 있다. 여기에서 두 가지 점이 돋보인다. 첫째로 “야고보와 형제들에게” ( vIakw,bw| kai. toi/j avdelfoi/j)는 다른 가정교회들이 집회장소와 예배처소로 제공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둘째로 베드로가 “다른 곳으로” (eivj e[teron to,pon) 갔다는 것은 제3의 가정교회를 의미할 수 있다는 것이다29). “누가는 (오순절 후에) 공동체 전체가 한 장소에 회집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의 기록이 정확하다고 할 때, 신자의 수는 오순절의 결과로 3000명에 달하였다 (행 2:41; 참조. 4:4; 5:14; 6:7). 이렇게 많은 숫자는 신자들이 한 집에 모이지 못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베드로 자신이 마리아의 집에 모인 그룹에게 자신이 해방되었다는 것을 아마도 다른 곳에서 모이고 있는 야고보와 형제들에게 말하라고 지시한 것은 집회장소가 여러 곳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것은 예루살렘의 초대교회 내에 (잠정적으로건 그밖에 무엇으로건) 분쟁이 있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해석해서는 안된다. 이것으로부터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은 모든 신자 (심지어 다수를 이루고 있는)를 한 지붕 아래 모이게 하는 것은 불가능하였다는 사실이다”30).


2) 이방선교의 가정교회 (사도행전 13-28장)

 

  누가는 이방선교에서 가정교회의 형성을 팔레스타인의 가정교회보다도 훨씬 더 분명하게 기록한다. 이에 대한 대표적인 예가 루디아의 경우이다31). 빌립보에서 사도 바울의 말을 듣고 기독교 신앙에 들어오게 된 루디아는 집과 함께 다 세례를 받았다 (행 16:15 “저와 그 집이 세례를 받고” evbapti,sqh kai. o` oi=koj auvth/j). 여기에서 누가 “집” (o` oi=koj)의 구성원이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32). 어쨌든 루디아가 자신의 집과 함께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이 사건으로 이미 가정교회가 건설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33). 루디아의 집은 사도들이 빌립보에서 활동하는 동안 거점이 되었고, 나아가서 빌립보 초대교회의 본부가 되었으며34), 빌립보에서 선교교회의 중심이 되었던 것이 틀림없다35). 이러한 사실은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 감옥에서 나온 후에 “루디아에게 가서 형제들을 보고 위로하였다” (eivsh/lqon pro.j th.n Ludi,an kai. ivdo,ntej pareka,lesan tou.j avdelfou,j, 행 16:40)는 말에서 분명하게 입증된다36).

  사도 바울이 복음사역에서 가정을 매우 중요시하였다는 것은 빌립보 감옥의 간수장과의 대화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감옥의 간수장에게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행 16:31 swqh,sh| su. kai. o` oi=koj sou)고 말하면서 “그 사람과 그의 집에 모든 사람에게” (행 16:32 su.n pa/sin toi/j evn th|/ oivki,a| auvtou/)37) 복음을 전하였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개인전도만큼이나 가정전도에도 총력을 기울였다는 것을 증명한다. 이로 말미암아 빌립보 감옥 간수장은 “자기와 그 권속이 다 세례를 받았다” (행 16:33 evbapti,sqh auvto.j kai. oi` auvtou/ pa,ntej). 결국 간수장과 함께 그의 “온 집이 하나님을 믿게” (행 16:34 panoikei. pepisteukw.j tw/| qew/|) 된 것이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 감옥의 간수장을 대상으로 사역한 가정전도는 그의 온 집이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는 놀라운 열매를 맺었다.

  사도행전은 가족이 복음화되었다는 증거를 많이 제시한다. 사도 바울이 드로아에서 작별하기 전에 마지막 집회를 가졌을 때 (행 20:7-12), 청년 (행 20:9 neani,aj)이자 아이 (행 20:12 pai/j)인 유두고가 그 집회에 참석한 것은 가족이 함께 참석한 것임을 암시한다. 이런 의미에서 드로아 집회는 가족교회들의 연합집회였을 것이다. 사도 바울이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을 방문하기 위하여 두로를 통과하였을 때 (행 21:4-6), 두로의 제자들은 “다 그 처자와 함께” (행 21:5 su.n gunaixi. kai. te,knoij) 사도 바울을 전송하였다. 이것은 두로의 신자들에게 가족이 복음화되어 있었던 것을 보여준다. 결국 가족의 복음화는 가족교회 (Family church)를 형성하게 되었다. 가족교회는 신약성경이 제시하는 교회의 가장 기본적인 조직이다38).

  누가는 사도 바울이 전체 집회만큼이나 가정집회를 중시했다는 것을 증거한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장로들에 대한 설교 (행 20:18-35)에서 자신의 사역을 요약하면서 자신의 목회는 전파 (avnaggei/lai)와 교훈 (dida,xai)이라는 두 가지 방식으로 표현되었다고 말한다 (행 20:20). 사도 바울이 거리낌없이 전파하고 가르친 것은 “유익한 것들” (행 20:20)이었다. 그런데 이 전파와 교훈은 “공중 앞에서나 집에서나” 행해졌다 (행 20:20)39). “공중 앞에서” (dhmosi,a|)는 아마도 전체집회를 의미하는 것이며40), “집에서” (kat v oi;kouj)는 가정집회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은 자신의 목회에서 전체집회 뿐 아니라 가정집회도 대단히 중요하게 여겼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


2. 가정교회에 대한 바울서신의 증거


  사도행전 못지 않게 바울서신도 가정교회에 관하여 상당히 많은 자료를 제공한다. 이것을 성경의 순서대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로마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 16장에서 초기 기독교의 가정교회에 대한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41). 로마서 16장은 로마에 여러 개의 가정교회들이 존재했다는 것을 증거한다42).


(1) 발신자의 상황에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를 기록할 당시에 아마도 최소한 두 개의 지역교회와 관련이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첫째로 겐그레아 교회이다. 이 교회는 겐그레아 교회의 일군 (집사)으로서 여러 사람과 사도 바울의 보호자가 되었던 뵈배의 집을 거점으로 형성되었을 것이다 (롬 16:1-2)43). 둘째로 고린도 교회이다. 이 교회는 가이오의 집에서 형성되었던 것이 분명하다 (롬 16:23). 그래서 가이오는 “온 교회의 식주인”이라고 불린다. 바울의 동역자 디모데를 빼더라도 바울의 친척 누기오, 야손, 소시바더를 비롯하여 (롬 16:21), 대서인 더디오 (롬 16:22), “이 성의 재무” 에라스도와 형제 구아도 (롬 16:23)이 한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 외에도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자신의 주위에 또 다른 교회들이 있다는 것을 명시한다 (롬 16:4 “이방인의 모든 교회들”; 롬 16:16 “그리스도의 모든 교회들”). 이것은 지금 사도 바울이 로마서를 쓰고 있는 지역의 가족교회들을 염두에 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2) 수신자의 상황에서

  사도 바울은 이 단락에서 “문안하라”는 말을 16번 사용하고 있다 (롬 16:3, 5, 6, 7, 8, 9, 10a, 10b, 11a, 11b, 12a, 12b, 13, 14, 15, 16). 사도 바울은 이러한 인사의 말을 가지고 때로는 한 개인에게44), 때로는 두 인물에게45), 때로는 여러 사람에게46) 문안을 한다47). 그런데 중요한 것은 “문안하라”는 말은 아마도 로마교회 안에 있던 여러 가족그룹들을 대상으로 삼고 있는 듯이 보인다는 것이다. 로마교회 안에는 여러 개의 작은 교회들이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48). 이 사실을 가장 분명하게 입증해주는 것은 다음과 같은 가정들이다.

  첫째로 브리스가와 아굴라의 가정에 교회가 있었다 (th.n kat v oi=kon auvtw/n evkklhsi,an, 롬 16:5). 브리스가와 아굴라는 본래 본도에서 출생하여 로마에 거주하다가 클라우디우스 (Claudius) 황제의 추방령에 의해 로마를 떠나 고린도에 체류한 후에 (행 18:2) 에베소로 이동하였고 (행 18:18f.) 결국은 다시 로마로 돌아간 것 같다. 고린도에서 사도 바울은 처음에 체류와 직업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사용했던 이 부부의 집에서 고린도의 도시선교를 전개하였고 그로 말미암아 바울과 이 부부를 중심으로 하는 가정교회가 형성되었다. 사도 바울의 직업은 생계유지를 가능하게 했을 뿐 아니라 선교사업을 결실시키는 사회적인 접촉을 가능하게 만들었던 것이다49). 이 부부는 사도 바울과 함께 에베소로 건너가서 또 다시 가정교회를 설립하였는데 (고전 16:19), 여기에서 심지어 아볼로와 같은 인물을 깊은 신앙으로 양육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행 18:26)50). 어떤 이들은 브리스가와 아굴라에 대한 인사에 이어 언급된 에배네도 (롬 16:5)가 이 부부의 일군 또는 노예로서 복음을 받아들여 이 부부와 함께 가정교회의 일원이 되었다고 추정한다. 왜냐하면 이 구절에서 에배네도는 “그리스도를 위한 아시아의 첫 열매” (avparch. th/j  vAsi,aj eivj Cristo,n)로 소개되고 있기 때문이다51). 이것은 가능한 해석이다. 그렇다면 에배네도는 브리스가와 아굴라가 로마로 귀환할 때 동행하였을 것이다 (이 때문에 에배네도는 이들과 함께 사도 바울의 로마교회 문안목록에 등장하는 것이다). 브리스가와 아굴라는 로마에 도착하여 새로운 가정교회를 설립하고 로마방문을 계획하고 있는 사도 바울을 영접할 준비를 했을 것이다52). 브리스가와 아굴라는 이 가정교회를 근거로 하여 두 가지 헌신적인 노력을 기울였던 것으로 보인다. 첫째로 그들은 사도 바울을 위하여 자기들의 목이라도 내놓았고, 둘째로 이방인 교회들이 감사할 정도로 봉사를 하였다 (롬 16:4). 이렇게 볼 때 브리스가와 아굴라의 가정교회는 사도 바울의 선교본부로서 충실한 임무를 감당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여기에서 한 가지 놓여서 안될 사실은 사도 바울이 아내 브리스가를 남편 아굴라보다 먼저 언급하는 것으로 보아 그녀가 더욱 뛰어난 활동을 전개했다는 것이다53).

  둘째로 사도 바울은 “아리스토불로의 권속에게” (tou.j evk tw/n

vArisobou,lou, 롬 16:10b) 문안한다. 아리스토불로가 헤롯 가문의 일원이라면54), 그가 기독교인 노예들을 이끌고 유대로부터 로마에 옴으로써 기독교가 로마에 유입되었을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55). 바로 이어서 언급되는 헤로디온은 유대인으로서 (바울의 suggenh,j) 아리스토불로의 권속과 모종의 관계가 있었을 것이다 (롬 16:11a).

  셋째로 사도 바울은 “나깃수의 권속 중에 주안에 있는 자들” (tou.j evk tw/n Narki,ssou tou.j o;ntaj evn kuri,w|, 롬 16:11b)에게 문안하고 있는데, 이것은 정확하게 설명하자면 나깃수의 사람들 (evk tw/n Narki,ssou)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주님 안에 있게 (tou.j o;ntaj evn kuri,w|)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 의 사람들” (oi` NN)이라는 표현은 가족 또는 가솔을 가리킨다.

  넷째로 아순그리도, 블레곤, 허메, 바드로바, 허마에게는 “그들과 함께 있는 형제들” (tou.j su.n auvtoi/j avdelfou,j, 롬 16:14)이 있었다. 이 이름들 가운데 몇은 신화적인 이름들이다 (허메와 허마). 이것은 이 사람들이 노예이거나 노예상태로부터 풀려난 사람들임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이 가정교회는 부분적으로 이런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다섯째로 빌롤로고, 율리아, 네레오, 그의 자매, 올름바를 중심으로 하는 가정교회가 있었다. 그들에게는 “그들과 함께 있는 모든 성도들” (tou.j su.n auvtoi/j pa,ntaj a`gi,ouj, 롬 16:15)이 있었기 때문이다56). 네레오와 그의 자매가 이 가정교회에 속했다는 사실로부터 이 가정교회가 부분적으로 가족들로 구성되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이것은 만일에 빌롤로고와 율리아가 부부라면 더욱 확실한 일이다57).

  이로부터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끄집어 낼 수 있다. 무엇보다도 로마에는 전면에 드러난 가정교회 지도자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둘째로 이러한 가정교회 지도자들은 로마의 여러 신앙지도자들은 먼저 자신들의 가족을 중심으로 최소단위의 교회를 이루고 있었다. 이것은 가족교회 (Family church)이다. 셋째로 이 가족교회에 방문자들과 손님들이 가담하여 가정교회 (House church)가 되었다. 특히 위의 마지막 두 경우를 살펴볼 때 가족교회가 가정교회로 확대되었다는 사실은 더욱 분명해진다. 아순그리도, 블레곤, 허메, 바드로바, 허마에게는 “그들과 함께 있는 형제들” (롬 16:14)이 있었고, 빌롤로고, 율리아, 네레오, 그의 자매, 올름바는 “그들과 함께 있는 모든 성도들” (롬 16:15)이 있었다. 여기에 언급된 “형제들” (롬 16:14)과 “성도들” (롬 16:15)은 불특정인을 가리키는 표현처럼 보이지만 분명하게 이름을 제시하고 있는 사람들의 집에 예배하러 모여 두 개의 가정교회를 이룬 방문자들과 손님을 의미한다58). 이 사람들과 함께 사도 바울이 중요하게 여기는 로마의 여러 신앙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집에 로마에 가정교회를 건설했던 것이다. 이것은 처음에 가족으로 시작된 교회가 가정교회로 발전하여 성장한 증거를 보여준다. 넷째로 로마에 있는 가족교회들 또는 가족교회들로부터 발전한 가정교회들은 연합하여 한 지역교회를 이루었다. 이것이 로마교회이다 (롬 1:7). 이렇게 로마 교회에는 여러 개의 작은 가족교회들 또는 가족교회들로부터 발전한 가정교회들이 소속되어 있었다59).


2) 고린도전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의 도입부분에서 분쟁의 소식을 전달해준 “글로에의 사람들”에 관하여 언급한다 (고전 1:11). 글로에는 성별이 분명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인이었는지도 분명하지 않다. 따라서 글로에의 집이 가정교회로 사용되었는지는 확실하게 말할 수 없다.

  또한 사도 바울은 그리스보와 가이오에게 세례를 주었다는 것을 명시한다 (고전 1:14). 사도행전에 의하면 그리스보는 회당장으로서 “그의 온 집으로 더불어” 주를 믿었다고 한다 (행 18:8). 이것은 그가 자신의 집을 가정교회로 제공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60). 가이오는 로마서에서 “온 교회의 식주인” (롬 16:23)으로 소개되었다. 이것은 가이오의 집이 가정교회로 사용되었지만 때때로 전체 교회의 회집장소로 제공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61). 만일에 이런 추측이 옳다면 고린도에는 하나의 지역교회와 여러 가정교회들이 병존했으며 다양한 회집형태가 있었다고 결론을 내리게 된다62). 이것은 지역교회가 성장하게 되어 여러 가정에서 집회를 가지게 되었다는 의미보다는63), 여러 가정교회들이 연합하여 지역교회를 이루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다시 말하자면 가정교회가 지역교회보다 시간적으로 우선한다는 것이다. 아마도 가정교회들은 중요한 결정이나 성찬을 위하여 전체교회의 모임을 가졌을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고전 14:23에서 잘 드러난다64).

  고린도전서에서 가정교회 개념은 스데바나와 관련하여 가장 분명하게 발견된다65). 사도 바울은 고린도에서 스데바나의 가족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고전 1:16 “내가 또한 스데바나 집 사람 [오이코스]에게 세례를 주었고” to.n Stefana/ oi=kon; 참조. 고전 16:15 “스데바나의 집” [오이키아] th.n oivki,an Stefana/)66). 마찬가지로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의 집도 가정교회로 사용되었다 (th|/ kat v oi=kon auvtw/n evkklhsi,a|, 고전 16:19)67).


3) 갈라디아서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게 자선을 강조하면서 특히 “믿음의 가정들에게” (tou.j oivkei,ouj th/j pi,stewj) 착한 일을 하라고 권면하고 있는데 (갈 6:10), 이것은 가족교회들을 고려할 것을 말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4) 골로새서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에서 골로새와 라오디게아와 히에라볼리에 그리스도인들이 있다는 것을 언급한다 (골 4:13,16). 특히 라오디게아에는 최소한 여러 개의 가정교회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68). 왜냐하면 눔바라는 여성의 집에 있는 교회가 설명되고 있기 때문이다 (“라오디게아에 있는 형제들과 눔바와 그녀의 [auvth/j]집에 있는 교회에 문안하고”, 골 4:15). 라오디게아 교회는 눔바라는 여성의 가족교회가 확대된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만일 이 구절을 사본읽기에 따라서 “라오디게아에 있는 형제들과 눔바와 그들의 [auvtw/n] 집에 있는 교회”라고 읽는다면 라오디게아 교회는 형제들의 집을 거점으로 삼은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와 골로새서에서 가정규칙 (Haustafel)을 제시한 것은 가정교회를 전제로 한 것일 수 있다 (엡 5:22-6:9; 골 3:18-4:1). 다시 말하자면 가정규칙은 가정교회들의 생활과 윤리를 위한 지침이다69). 특히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에서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로 설명한 것은 가족교회의 정당성을 더욱 확실하게 해준다 (엡 5:22-33)70).


5) 빌레몬서

  빌레몬서에서도 가정교회가 발견된다. 사도 바울이 문안하는 동역자 빌레몬과 자매 압비아와 군사된 아킵보가 한 가족이라고 생각할 때, 빌레몬의 집에 있는 교회 (몬 2, “네 집에 있는 교회”)는 일차적으로 가족교회를 가리킨다. 빌레몬의 가족교회는 “성도들” (몬 5,7)이 가세하여 가정교회가 되었다. 빌레몬서가 골로새서와 서로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할 때 골로새 교회는 빌레몬의 가족교회가 확대된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71).


6) 데살로니가전서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전서를 마치면서 “모든 형제에게 이 편지를 읽어 들리라” (살전 5:27)고 권면한 것은 전체집회를 염두에 두었다기보다는 각각의 가정교회에 있는 부분집회를 고려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72).


7) 목회서신

  사도 바울이 디모데전서에서 직분자들을 세우는 일과 관련하여 집을 잘 다스리는 것을 조건으로 삼은 것은 가족교회의 지도를 말하는 것일 수 있다 (딤전 3:4,12). 이때 사도 바울이 감독의 직분을 위하여 “사람이 자기 집을 다스릴 줄 알지 못하면서 어찌 하나님의 교회를 돌아보리요” (딤전 3:5)라고 말한 것은 가족교회를 지도하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교회 (“하나님의 집” 딤전 3:15)도 지도할 수 없다는 의미로 보아야 한다. 또한 사도 바울이 디모데후서에서 축복했던 오네시보로의 집도 가정교회의 경우에 속할 것이다 (딤후 1:16; 4:19). 특히 사도 바울이 거짓 교사들은 신자들의 집에 침투하여 (딤후 3:6 오이키아) 전복시킨다 (딛 1:11 오이코스)고 말한 것은 단순히 신자의 가정을 의미한다기보다는 가족교회를 의미한다고 보아야 한다.


3. 히브리서

  히브리서에서 가정교회에 관한 자료를 찾을 수 있는 가능성은 열어두어야 한다73).


4. 요한서신

  만일에 요한이서의 수신자인 evklekta,를 교회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지 않고 실제인물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한다면74) 자녀들과 함께 (요이 1,13) 이룬 가정교회를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요한삼서에는 발신자인 장로의 교회 (요삼 6) 외에 수신자가 속해있는 교회가 언급된다 (요삼 9)75). 그런데 후자의 교회는 최소한 두 개의 가정교회로 구성된 것처럼 보인다. 이 교회에는 장로를 지원하는 가이오 (요삼 1)와 장로를 반대하는 디오드레베 (요삼 9)가 중요한 역할을 점유하고 있었다. 가이오와 디오드레베는 각각 가정교회의 지도자로서 활약을 했던 것이다. 가이오의 가정교회에는 데메드리오를 비롯하여 “친구” (fi,loi)들이라고 불리는 신자들이 포함되어 있었고 (요삼 15), 디오드레베의 가정교회에는 “그들” (auvtw/n)이라는 총칭 하에 디오드레베의 추종자들이 있었다 (요삼 9). 그런데 이 두 가정교회는 장로의 선교정책에 대하여 서로 다른 입장을 취했다.

 

5. 속사도시대


  가정교회 (또는 이보다 앞선 형태로서의 가족교회)는 신약성경 직후의 속사도 시대에도 계속되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디다케 (Didache)는 기독교의 교사들이 순회하는 중에 어느 가정에 숙박하게 되었을 때 세례와 성찬을 갖춘 예배를 인도했던 것으로 증거한다 (Did 11). 이것은 순회전도자들의 방문을 받는 가정들이 가족교회와 같은 형태를 지니고 있었다는 것을 입증한다. 가족교회 또는 가정교회의 모습이 이그나티우스의 서신들 (IgnSmyr 13:1-2; IgnPol 8:2)76), 헤르마스의 목자 (Sim 5,3,9), 빌립행전 (ActPhil 69)에서도 언뜻 발견된다77). 저스틴의 순교사에 의하면 2세기 경 로마에 가정교회가 있었다. 저스틴은 모든 성도가 한 장소에 모일 수 없었다고 말하면서 “나는 Timiotinian 목욕소 근처에서 어떤 Martinus라는 사람의 윗층에 살고 있는데 그의 집 외에 다른 곳에도 모임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MartJustin 3,3)고 증언한다78). 이 말은 로마에 여러 개의 가정교회가 있었다는 것을 설명한다. PsClemRecg 71,2는 안디옥의 Theolphilus에 관하여 말하면서 “아주 큰 열정을 가지고 자기 집의 큰 공간을 교회의 이름 하에 헌물했다”고 한다. 이 말로부터 예배를 드리도록 자신의 집을 내놓은 경우들을 발견하게 된다79).


결론


  초기 기독교는 지역교회와 가정교회라는 이중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초기 기독교에서 지역교회와 가정교회는 서로 별다른 관계없이 존재하는 단순한 공존을 넘어서 때로는 단절을 보이고 때로는 연결을 보이는 복잡한 상생을 실현하였다. 지역교회는 가정교회들에 의하여 구성되면서 동시에 가정교회들은 지역교회에 의하여 보호되었다. 가정교회들이 상합하여 전체적인 지역교회로 발전하였고, 지역교회는 가정교회들에 개별적인 가치를 인정하였다. 그런데 이와 같은 이중구조 속에서 가정교회는 보다 근본적인 형식으로부터 유래하였다. 그것은 가족교회이다. 가정교회의 근간에는 가족교회가 있었다. 가족교회는 초기 기독교에서 최소단위의 교회였다. 가족교회는 더 이상 분할될 수 없는 가장 작은 교회형식이었다. 초기 기독교에서 지역교회가 강력한 인상을 표현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배경에 가정교회가 있었기 때문이며, 가정교회가 강력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그 근간에 가족교회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초기 기독교가 가정복음화에 힘을 기울인 이유이다. 신약성경 (그리고 속사도시대 문서)을 살펴보면 초기 기독교가 가정집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는지 발견하게 된다80). 가정에서 교회가 시작되었다81). 그러므로 초기 기독교는 가정교회의 시기였던 것이다. 이제 이와 같은 자료분석에 이어 초기 기독교에서 가정교회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었는지 포괄적으로 살펴보고 문제점을 생각해보면서 오늘날의 교회를 위하여 어떤 의미를 제공하는지 고찰해야 할 과제가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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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의 구원론


제1장 서론


  1-1 문제 제기

  현대 사회는 한 마디로 표현하면 최첨단의 문명이 지배하는 사회이다. 그리고 이러한 문명은 모든 인류를 하나의 생활권으로 묶어 주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 사회는 가장 뛰어난 이지적 문화를 가지고 있으며, 모든 사람들의 관심도 최상의 지적 성찰을 하는데 관심이 집중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공동체를 중심으로 그 무엇을 얻으려고 하기보다는 개인의 독특한 사고방식에 더욱 집착되어 개인주의가 팽배하고, 이기적인 가치관에 따라 자유로이 행동하기 때문에 종교에 대한 관심도가 떨어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현대의 최첨단 문명은 또 다른 면에서 인류에 크게 공헌하고 있다. 특히 기독교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그것은 대중 매체를 통해서 산간 벽지 뿐만 아니라 타문화권에까지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현대 사회는 다원주의적 다변화 사회이다. 또한 종교에 있어서도 다원주의 경향이 팽배하고 있으며, 특히 포스트 모더니즘이라는 신사조가 기독교에 도전을 하고 있다. 즉 다원주의, 포스트 모더니즘 신학을 추구하는 신학자들이 기독교 전통인 구원의 유일성을 정면으로 부인하고 수정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대 사회를 살고 있는 신앙인에게 그리스도로부터 위임된 것은 이미 신앙의 선진들이 살아왔던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할 의무가 있는데, 그것은 땅끝까지 복음을 선전하여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도록 구속사적인 역사적 사명을 완수하는 일이다.

  그런데 현대 문명은 사람들의 마음으로부터 종교적인 심성을 파괴하고 있으며, 극도의 이기주의, 개인주의를 창출해 냄으로써 기독교 신앙 공동체에 적지 않은 위기감을 고조하고 있음을 볼 수 있으며, 사람들의 종교적 가치관마져 전자 문명에 의해서 위기를 맞고 있음을 보게 된다.

  따라서 첫째로, 중요한 문제는 기독교 신앙 공동체를 중심으로 구속을 성취해야 할 인류가 현대 문명에 의해 심각한 위기에 놓이게 된다는 점이다. 즉 미래보다는 현실에 집착되어 종교적 사색과 사고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둘째로, 중요한 또 하나의 문제점은 현대인들에게 기독교 신앙 공동체의 핵심인 구속에 대한 보편적인 이해가 없다는 것이다. 즉 성경을 현대인들은 하나의 좋은 양서 정도로 이해하고, 그 속에 담겨진 깊은 의미는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현대인들이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고 경험하기에 너무 동떨어져 있는 것이다. 셋째로, 가장 중요한 문제는 기독교 신앙 공동체 안에 내재되어 있다. 즉 신앙 생활을 통하여 구속을 성취해야 할 신도들이 구속에 대한 본질적인 의미를 잘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의례히 신앙 생활을 하면 복을 받거나, 병을 고치거나, 사업에 성공한다는 식의 계산적인 안목을 가지고 기독교 신앙의 본질인 구속사적 구원의 복음이 잘못 전이 되는 경향이 있다고 하는 점이다. 넷째로, 가장 심각한 문제는 다원주의, 포스트 모더니즘 신학 풍조에 의해서 기독교 전통이 파괴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으로만 구원을 얻는 유일한 구원의 길이, 이제는 모든 종교 안에도 그 나름대로 그들의 신앙을 통해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신학 풍조는 예수의 동정성, 빈 무덤, 부활 등을 부정하기에 이르렀으며, 기독교의 정통성을 송두리체 부정하는 모순을 가져왔다.

  이러한 모든 문제들은 성서가 말하는 구원의 확실성에 대한 구속사적인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그래서 논자는 이러한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 성서로 돌아가 성서가 말하는 구속사의 의미를 파악하고 기독교 복음의 우월성을 피력함으로써 금세기를 살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올바른 구원의 길을 제시해 주고자 한다.


  1-2 연구 목적

  본 연구의 목적은 금세기의 최첨단 문명 사회를 살고 있는 인류에게 기독교 복음의 핵심인 구속에 관한 이해를 바울의 로마서를 통해서 폭넓고 깊이 있게 연구함으로써,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 들려지고 적용되었던 복음의 보편성, 즉 구속에 관한 개념과 구속사를 오늘의 문명 사회를 살고 있는 인류와 기독교 신앙 공동체에게 어떻게 적용하고 이해해야 할 것인지에 그 목적이 있다.


  1-3 연구 방법 및 범위

  본 연구의 방법은 현재적 종말을 살고 있는 인류와 기독교 신앙 공동체에 구속에 관한 이해, 삶에 적용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먼저는 성서를 기본 택스트로 하고, 구속에 관련된 문헌들을 통해서 다양한 신학자들의 의견을 듣고, 복음주의 입장에서 그리고 자유로운 견지에서 비교, 분석, 정리하고, 논자의 견해를 구속의 현재성에서 제시하고자 한다.

  연구 범위는 제1장에서는 서론으로 현대 사회와 기독교 신앙 공동체가 앉고 있는 당면 문제를 제시하고, 연구 목적, 방법, 범위를 다룬다. 제2장에서는 구 속의 개념과 구속사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먼저 어원적 고찰을 통해 명확한 의미를, 그리고 성서를 통해서 예수 이전의 구약; 언약을 중심으로 한 구속사적 개념을, 그리고 신약; 언약의 성취를 중심으로 초기 기독교 신앙 공동체에 선포된 구속의 개념을, 그리고 신학자들의 구속(구원)에 대한 이해를, 그리고 구속사란 무엇인지를 역사와 구속사 사이의 관계에서, 그리고 구속사 이해에대해서 다룬다. 제3장에서는 로마서를 중심으로 본 바울의 구속사를 죄의 선언, 칭의, 성화, 정죄 없음, 영광의 교리 순으로 깊이 있게 다룬다. 제4장에서는 실천적 측면에서 구속받은 성숙한 신앙의 삶에 대하여 먼저 세상에 속한 백성으로서 세상 권세에 대한 의무와 책임, 개인의 삶에 대한 의무와 책임을 다루고, 다음으로 천국 시민으로서 교회 중심의 의무와 책임을 예배, 봉사, 교육, 연보 등을 다루며, 끝으로 하나님 나라의 복음 선포와 성령의 열매에 관하여 다룬다. 제5장에서는 결론으로 이제까지 내용을 간략하게 먼저 요약, 비판, 그리고 제언을 함으로써 본 논고를 맺고자 한다.


제2장 구속의 개념과 구속사란?


  2-1 구속의 개념

  구속이란 무엇인가? 구속이 무엇인가를 알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구속의 개념부터 고찰해 보아야 한다. 그리고 구속은 "성경의 주제이다. 그래서 성경을 구속의 책 이라 할 수 있다. 구속에 대한 설명은 매우 아름다우면서도 어려운 것이다. 그리고 구속이란 단어는 그 자체가 어렵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쉽게 이해를 못하는 말이다. 그리고 기독교 밖에서는 잘 사용하지 않는다. 설령 사용한다 해도 기독교가 말하는 개념과는 거리가 멀다." 또한 구속이란 말은 필요와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서 그 개념이 달라지는데 특히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말과 종교적으로 사용되는 말, 그리고 성경에서 사용하는 말 사이에는 근본적으로 개념적인 차이가 있다. 따라서 어원적으로 말하는 구속의 개념을 이해하고 그리고 성경적 구속의 개념과 교회사적인 교부 및 신학자들의 구속의 개념을 고찰하고자 한다.


    2.1.1 어원

  구속의 일반 통념상 개념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고비에서 도와주고 건져주는 것", 혹은 "위험에 빠져있는 사람을 구하여 주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여러 종류의 어려움과 문제에 직면해 있는 사람들을 도와주거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물론 정신적이고 각종의 사고,질병,재앙,절망에서 생명을 보호하고 구출해 주는 것 등을 의미한다.

  구속의 종교적인 개념은 모든 종교의 궁극적인 관심이라고 할 수 있다. 구속은 여러 종교에 따라서 각기 다른 방법으로 표현되고 있기는 하나, 모든 종교는 어느 의미에서 일종의 "구원의 수단"이라고 할 수 있다.

  구속은 영어로 Redemption이다. Redemption은  N.I.V Holy Bible 신.구약 전체에 15회(민3:49,시49:8,111:9,렘32:7,8,눅2:38,롬3:24,8:23,고전1:30,엡1:7,14,4:30,골1:14,히9:12,15) 사용되었는 데, 특히 바울 서신에서 주로 구속이란 용어가 앞도적으로 쓰여졌다. Redemption의 뜻은 "다시 사들이기, 되찾기, 약속의 이행, 구조, 구출, 몸값을 주고 빼내기, 범죄에 대한 대가, 예수의 희생에 따른 죄의 갚음, 속죄, 구원, 변제, 상환"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특히 기독교에서는 그리스도의 희생에 의한 구속(救贖), 구원(Salvation)의 뜻으  로 사용되고 있다.

  구속은 히브리어로 여러 가지 단어가 있다. 즉  (名) 사63:4절에 사용 되었는데, 그 의미는 "되찾음, 저당물찾기, 상환, 회수, 보상, 이행, 면제,구출" 등의 뜻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動) 구약에  21회 사용되었는 데, 그 의미는 "더럽히다, 상징적으로 신성을 더럽히다,  모독하다" 등의 뜻으로  쓰여졌다. 또한 (名) 시111:9,130:7,사50:2절에 사용되었는데, 그 의미를  살펴보면 "구별, 구원, 분리, 시간의; 간격, 장소의; 간격, 거리 분할, 구출, 구속" 등의 뜻을 가지고 있다.  특히 시49:9절에 (名)는 동사에서 유래한 것으로 "속전, 속량된 것, 속량, 구속"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구약 성경에서 이 구속의 개념은 이스라엘 백성의 애굽의 압박으로부터의 해방과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으며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애굽의 노예 생활로부터의 해방은 그들의 역사에 있어서 하나님의 최대의 개입이었다.

  "내가 편 팔로 너를 구속하리라""주께서 그 구속하신 백성을 은혜로 인도하셨다." "여호와께서 너를 그 종되었던 집에서 속량 하셨다." 거듭 거듭 이러한 본문은 똑같은 형태로나 또는 다른 형태로 나타난다.

  그리고  Salvation 으로 신.구약 성경에 545회가 사용되었는 데, 그 중에서 신약에 쓰인 것은 163회가 사용되었다. 그리고 N.I.V Holy Bible에는 구원(Salvation)이 390회 쓰였는데, 그 중에 신약에는 40회나 사용되었다. 또한 구약 성경에서 히브리어로 가장 중요한 단어를 어근으로 하는 것인데, 이것은 그 파생어와 함께 353회나 사용되었다. 그리고 이 단어가 지니고 있는 뜻은 "자유, 해방, 번영, 구원"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또한 희랍어로 구속은 (名) 로 롬3:24,8:23절에 쓰였는데, 이는 "구속 행위, 벗어남, 속전의 지불에 의해 해방을 가지게 되다, 또  기독교에서 구원, 해방, 구속"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즉 그리스도의 피로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 죽으심으로 불법, 죄와 사망의 법에서 풀어 놓아 주신 것을 의미한다.

  이제까지 어원적인 고찰을 통하여 구속의 개념을 살펴보면서 구속은 스스로 얻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구속은 우리를 대신하여 속량해 주지 않으면 불가능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구속적 섭리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이제 어원적 개념을 넘어 언약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구약의 구속 개념을 고찰해 보기로 한다.


2.1.2 구약; 언약을 중심으로

  구약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그림자와 같은 역할을 해 왔다. 다시 말해서 구속의 완성인 메시야에게 초점이 마추어져 있다. 그래서 구약과 신약은 하나의 목적을 향해 연결되고 있다. 논자는 바로 이런점에서 구약 성경을 이스라엘의 선택된 백성의 역사에 관심을 집중시키지 않고, 온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 역사에 초점을 두고 구속사적인 견지에서 구약 성경에 약속된 언약을 중심으로 구약에 흐르고 있는 구속의 개념을 파악하고자 하는 것이다. 

  언약이란 무엇인가? 성경은 분명히 하나님의 언약의 중요성을 증언하고 있다. 하나님은 특정한 사람들과 언약 관계를 자주 맺으셨는데, 그 예로는 노아(창6:18), 아브라함(창15:18), 이스라엘(출24:8), 다윗(시89:3)과의 언약 수립에서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은 "새로운" 언약(렘31:31)이 성취될 날을 예언했으며, 예수 그리스도 자신은 최후의 만찬을 언약적인 언어로 설명하고 있다(눅22:20).

  그리고 O.Palmer Robertson은 언약이란 " 주권적으로 사역되는 피로 맺은 약정이다. 즉 하나님은 인간과 언약 관계를 수립할 때 주권적으로 삶과 죽음의 약정을 세운다. 그렇기 때문에 언약은 피로 맺은 약정, 또는 주권적으로 이루어지는 삶과 죽음의 약정이다."고 말한다.

  그리고 구약에서의 구속의 개념은 주로 물질적인 구출 또는 구체적인 구출을 말한다. 즉 구속은 개인이나 백성이 처해 있는 환경속에서 영위하는 생활과 관계가 있다.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사람이 재난이나 곤긍이나 환난이나 대적이나 질병이나 사망의 위험이 있는 형편 가운데서 벗어나 안전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구약에서의 구속은 신약과 달리 죄로부터 구원이라는 의미가 매우 약하다.

  그러나 죄로부터 구속을 받는다는 것을 간과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구속의 본질적 차원은 근본적으로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찾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구약을 간과할 수 없는 것이다. 인류는 첫 사람 아담의 타락의 결과로 죽음을 선사 받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첫 인류에게 인애를 베풀어 주셨다. 죄의 결과로 부끄러워 수치를 가리기 위해 나뭇잎을 사용한 인류에게 언약의 상징인 양을 잡아 그 가죽으로 부끄러움을 가리워 주신 것이다.   하나님은 타락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시고, 타락한 인류와 첫 번째 언약을 맺으신다. 인류의 가장 비극적인 상태가 창3장 1절로 24절까지에 잘 묘사되어 있다. 창3장15절은 인류에게 소망을 주고 그리고 구약에 전반적인 메시야적 약속에 근거를 제공한다.

  그리고 두 번째 언약은 인류가 온갖 죄악으로 가득차 하나님의 심판 아래 놓이게 된 상황에서 하나님은 노아와 언약을 맺으신다. 노아는 순종의 사람이다. 그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방주를 건조하였고 하나님의 심판은 세상에 약 일년 동안 임하였으며 노아는 방주에 갇혀 있었다. 죄로 가득찬 인류를 멸하려는 하나님의 계획이 성취되었다. 당시 심판의 척도는 국지적인지, 세계적인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방주를 떠나라는 명령을 받은 인간은 새로워진 세상에서 새로운 기회를 맞게 되었다. 그리고 노아와의 언약은 모든 혈육 있는 자와의 언약으로 매우 일반적인 성질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이것은 단지 자연적인 축복이므로 흔히 자연의 언약 또는 일반 은총의 언약이라고 불리운다. 그리고 홍수 이후의 인류의 문명은 인종적으로 언어적으로 하나의 단일체였기 때문에 확실히 알 수 없는 어느 기간 동안 한 지역에 머물러 있었으며(창11:1-9), 이 문명은 희생 제물로부터 시작된다. 이에 대한 응답으로 하나님은 노아와 그 후손에게 항구적인 무지게 언약을 맺으신다. 그리고 인류에게 온 땅에 편만할 것을 축복한다.

  그러므로 노아 와의 언약은 창조 언약과 구속 언약의 면밀한 상호관계 즉 창조에서 하나님의 목적과 구속에서 하나님의 목적을 연합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구속의 특이성과 언약 관계에서 가족을 말하고, 보편적인 면과 언약의 은혜로운 특징을 강조하면서 보존하는 것으로 특징지을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이제 세 번째 언약을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맺으신다.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상대는 먼저 이스라엘 민족이다. 하나님은 족장들을 불러 그와 언약 맺음을 통하여 이스라엘 민족을 택하신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여호와 자신이 족장들 곁에 나타나셨다는 것인데, 후에 신의 현현(顯現)으로 칭하였다(창18:1). 살아계신 하나님의 현존의 실재는 그의 언약의 말씀과 위로와 지시의 중요성과 신빙성을 뒷받침하였다. 그리고 세 사람의 족장들(아브라함, 이삭, 야곱) 모두가 그들의 삶에서 하나님의 현존을 경험하였다. 아브라함과의 언약은 언약의 형식적인 확립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 언약은 구약의 특수한 통치의 시작인데 이것은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에게만 국한한다. 그리고 신앙은 뚜렷하게 언약의 필연적인 요구로 나타나며, 할례는 언약의 백성이 되는 증표로 행하여진다. 그리고 그의 후손들은 애굽에서 번성하며, 애굽의 종이 되어 430년 동안 종살이 한다. 하나님은 그의 언약의 백성들이 부르짓는 고통을 들으시고 모세를 지도자로 세워 애굽으로부터 유월절 어린양의 피를 통해 장자의 재앙으로부터 구속하여 출애굽 하게 한다.

  그리고 40년 광야 길에서 네 번째 언약을 하나님은 모세와 시내산에서 맺으신다. 이 언약은 여호와의 사랑과 자비와 은혜로 시작되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신4:37, 7:7-9, 10:15절외 여러 곳). 시내산 언약은 출애굽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경험했던 사람들에게 순종의 필요성을 강조하였으며 여호와 하나님은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으시다(출34:6)"는 진리를 강조한다. 하나님은 출애굽을 통하여 이스라엘을 국가적으로 형성시킨 후로, 끊임없이 이스라엘을 돌보고 도우시며 인도하셨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대하여 구원의 하나님이셨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며 구원에 이르는 자였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천막을 치고 성막 또는 성소를 중심으로 생활하였으며, 시내산에서 받은 제사법을 따라 제물을 통하여 자신의 죄를 속량받는 의식을 행하였다. 제사법에는 크게 번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 소제가 있으며, 안식일을 거룩히 구별하였고, 삼대 절기로 칠칠절, 초막절, 속죄일을 지켰으며, 율법은 이스라엘을 하나의 행동 방식으로 이끌어 주었는데, 이러한 방식은 이스라엘이 주변의 이방 문화와는 대조적으로 하나님의 언약 국가라는 구별을 짓게 했다.

  이처럼 모세 언약을 신학적 배경에서 보면 세 가지 면을 강조할 수 있다. 먼저 율법 언약은 하나님의 구속 목적의 전체와 유기적 기능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즉 구속역사 전체에 걸쳐 율법이 존재했음을 인식해야 한다. 법은 모세 이전에도, 이후에도 중요했던 것이다. 다음으로 모세 언약은 하나님의 구속 목적에 있어서 전체와 점진적으로 관련된다. 즉 하나님의 뜻이 점진적으로 전개된 하나님의 율법 계시의 특징은 각 시대에 하나님의 진리가 점점 더 명백해졌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새 언약의 법의 특징은 내부적 성격에 있다.

  인류를 구속하려는 하나님의 목적은 구약에서는 다섯 번째 언약으로 하나님과 다윗과 맺은 왕국의 언약이다. 언약의 관점에서 다윗 언약의 수립은 그리스도 자신이 실제로 나타나기 이전의 구속 역사에서 최고의 완성적인 면을 나타낸다. 다윗 왕권은 새 기원을 끌어들였으며, 동시에 그리스도의 메시야적 왕권을 전형적으로 예언한다. 그리고 다윗 언약의 수립에서 "다윗의 아들"과 "하나님의 아들" 사이에 세워진 관계는 메시야가 올 때 완성된다. 그리고 다윗 언약들의 규정들은 두 가지 약속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한 가지는 다윗의 계열에 관한 것이고, 또 한 가지는 예루살렘 땅에 관한 것이다. 백성을 구원하는 데에서 하나님의 목적은 다윗의 계열과 예루살렘의 왕권, 이 두 가지에 모이게 된다. 그리고 다윗의 나라는 영원하리라는 선포가 여섯 차례에 걸쳐 사무엘하7:13,16,24,25,26,29절에 나타난다. 다윗은 이와 동일한 언약을 삼하23:5절에서 회고하여 그것을 "영원한 언약" 이라 하였다. 그리고 시89:28-37절에서 또한 이 영원한 언약의 불변성에 대하여 말한다. 그것은 영원하며, 하늘의 날과 같으며, 해와 같고, 궁창의 확실한 증인 달 같이 아니할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조건성에 대한 문제는 남아 있다. 여기서는 무조건적이니 조건적이니 하는 문제는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이러한 질문에 대한 충분한 통찰은 구약 성경 자체에 나타난 다윗과 그 후손의 왕권을 검토함으로써 얻어질 수 있다. 그리고 이 질문의 진정한 성경적 통찰이 이루어지려면 이스라엘 왕권과 하나님 왕권의 실제적인 통일성을 인식해야 한다.

  앞에서 이미 지적한 것처럼 다윗 계약의 중심이 되는 두 가지 양상은 이스라엘 왕권과 하나님 왕권을 곧바로 연결한다. 다윗 혈통과 예루살렘 지역은 하나님 자신의 주권과 상호 관계한다.

  이제 우리는 이상의 다섯 개의 언약 뭉치를 통해서 하나님의 자기 백성을 구속하시는 개념들을 살펴보았다. 구속이란 말은 구약 성경을 통틀어서 구원이라는 일반적인 의미로도 사용되었고, 구원이란 모든 종류의 "악한 운명과 국가적인 불운""역병, 사망과 공포, 사자의 입"또는 전쟁과 악한자 환란 죄 그리고 모든 종류의 재난으로부터 놓임받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구속이란 말은 가족법의 영역에 속하는 것으로써 환란에 빠진 친척을 구원하는 책임있는 말로써 하나님께 적용되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구속해 낸 분 이라는 의미에서 이스라엘의 구속자이시며, 온 인류의 구속자가 되시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언약의 구조적인 통일성은 아브라함, 모세, 다윗의 언약에서 잘 나타난다. 먼저는 역사 경험에서 언약 수립의 내용이 통일성을 나타낸다. 그리고 언약 아래서의 백성들의 삶의 역사에 통일성이 있다.

그리고 혈통적인 민족적 사역에서 통일성을 찾아 볼 수 있으며, 새 언약을 연합시키는 통일성을 가지고 있다. 즉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에 의해 약속된 새 언약은 하나님의 앞선 사역과 무관한, 구별된 언약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오히려 이스라엘에게 약속된 새 언약은 먼저 수립된 언약의 완성을 의미한다. 그리고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아담에서 노아에 이르는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이다. 창조 당시 세워진 언약과 하나님의 구속 언약과의 관계가 문제시 되기는 한다. 그럼에도 인간은 시대를 통하여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존재로써 창조주에 대한 의무를 가지는 것으로 존재해 왔다. 이처럼 창조자에 대한 피조물의 계속적인 관계를 볼 때 인간에 대한 최초의 하나님의 약속은 계속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성경의 언약적인 구성은 놀라운 통일성을 나타낸다. 따라서 아담부터 그리스도까지 언약적 구속 사역의 통일성은 하나님과 그의 백성과의 관계에 대한 구속사를 나타내 준다.


    2.1.3 신약;언약의 성취를 중심으로

  이제 예언자들이 예언한 새 언약 즉 완성된 언약을 신약 성경에서 고찰해 보고자 한다.

  구약 성경과 신약 성경의 계시는 근본적으로 일치되며 서로 구속의 관계로 연결되어 있다.  예수께서는 구약의 진리를 수납하시고 이것을 모든 교훈의 전제로 삼으셨다. 구약의 어떤 진리는 신약에서 성취된 관계가 있음을 보여주며 신약의 어떤 진리는 구약의 어떤 진리를 더 풍부하게 발전시키는 관계를 가지고 있다. 신약의 진리는 구약에 예언된 진리를 선행적(先行的)인 진리에 비하여 생각할 때에 신약에서 성취되거나 혹은 더 풍부하게 하는 관계를 가짐이 분명하다. 구약의 교리적 진리가 신약에 성취된 것은 구속의 대진리를 생각할 때에 더욱 명백하다.

  구약의 구속 경험은 언약 관계를 중심으로 하였으며 율법을 순종하는 것도 언약의 관계와 분리할 수 없다. 이 언약의 관계는 사람의 죄와 허물을 전제로 하는 것이며 또한 하나님의 은혜를 표현하는 것이다. 그래서 구약의 신자들은 하나님과 교통함으로 마음의 평화를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구약의 구속의 경험은 성질상 선행적이며 예상적인 것이다. 장래의 그들 자신이 하나님의 율법을 완전히 지키고 성령으로 인하여 죄를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실 구주를 바라 보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구속은 신약에 있어서 근본적으로 중대한 의의를 가지게 된다. 그리스도의 속죄하심은 그의 인격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죽으심에 더욱 관계된다.

  신약 성경에서 구원을 나타내는 단어는 주로 헬라어 동사(구원하다)와 명사 (구원)인데 약150회 이상(동사가 106회, 명사가 45회)쓰였다.

      는 육체적인 의미에서의 구원뿐만 아니라 영원한 의미에서의 구원이라는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는 육체의 질병(마9:27,눅8:36)과 위험(마8:25,14:30), 미혹(눅19:10), 죄와 분노(롬5:9)로부터의 구원을 뜻한다. 특히 이 말은 종말론적 의미를 함의하는데, 그 완전한 성취는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재림하실 때에 비로서 실현될 것이다(롬13:11,고전5:5,히9:28).

  이상에서 본 것처럼 신약에서 구원 용어는 매우 다의적으로 사용되었다. 곧 병, 자연의 위험, 귀신의 압박, 죽음 등에서의 해방, 치유, 구조, 구출, 해방을 의미하며 또한 죄와 멸망으로부터 영적 구원을 뜻하는 것이다.

  신약에서 제시하는 구원은 주로 죄로부터, 그리고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징벌로부터의 구원에 초점을 맞추었다.그리고 구약에서의 구속의 경험은 민족이라는 집단을 중심으로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신약의 구원은 개개인이 현재적으로 경험하는 것이다. 따라서 신약에서의 복음의 선포는 개인의 영혼을 대상으로 하며, 복음을 받아 들이면 사회적 민족적 상황과 관계 없이 개인적으로 영혼의 구원을 받게 된다. 이런 점에서 역시 역사적이다. 그리고 신약의 성도들은 종말적인 구원을 지향하고 대망한다. 그리고 이 구원의 역사는 구약에서, 신약에서 모두 하나님의 구속적 섭리에 의한 것이다. 그리고 모든 시대에 구원은 오직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받게 된다. 즉 구약의 백성들이 오실 메시야를 기다리며 믿음으로 희미한 구원을 받았다면, 오늘날의 성도들은 계시의 빛 아래 이미 오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 그리고 신약의 구원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취하신 업적과 근본적으로 일치한다.

  예수께서 강조한 것은 하나님 중심의 생활이다. 산상수훈 역시 하나님 중심의 생활을 강조하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교훈은 하나님 중심의 생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사랑으로 충만한 생활이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인간의 구속을 바탕으로하여 전개된다. 예수께서는 인류의 죄를 구속하기 위하여 예언의 말씀의 성취로 이 땅에 오셨고 죄인들에게 회개의 복음을 전파하시고 하늘나라의 축복을 강조하셨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인간의 본질적인 가치를 존중하는 교훈을 하셨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 민족이나 집단이 아니라 개인을 중심으로 한 구속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중심 과제는 하나님의 나라였다. 이 하나님의 나라는 현재성과 미래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것으로 특별한 의미를 강조한다. 즉 하나님의 나라는 구속 사회에서의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 영역이다. 구속 사회란 하나님의 통치를 인정하고 그의 뜻에 순종하는 생활을 실현하려고 노력하는 개인들로 구성된 사회를 말한다.

  구원 사건 안에 도래하는 통치자는 사랑하는 아버지로써 현재속으로 들어온다. 예수에게는 모든 윤리적 요청 안에 언제나 하나님 중심이 된다. 예수의 윤리는 구원 시대의 윤리적 혹은 새로운 언약의 윤리로 적절하게 표현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예수의 구속사적인 힘은 예수의 인격 안에 시작되고 그의 완성을 기대하는 하나님의 구원 행동에 대한 신앙적인 승인에 달려 있다.

  새 언약의 수립은 그리스도께서 저주의 희생 제물로서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서 쪼개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복음서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새 언약 수립에 대한 기록을 자세히 검토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잔을 주면서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고 말한다. 바로 예수께서 피를 흘리는 것은 구약에서의 희생 제물의 언어를 반영하여 언약의 저주가 대속물 위에 얹져지는 과정을 나타낸다. 그리스도는 그의 죽음을 죄사함을 얻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즉 그리스도는 언약의 저주로부터 구원을 마련하기 위해 그의 피를 흘리셨다.

  그리고 누가복음서는 그리스도에 의해 세워지는 언약을 "새" 언약이라고 언급 함으로써 더 깊은 차원을 나타낸다.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피의 이런 이중적 의미는 구원의 언약이 처음 세워질 때 아담에게 하신 하나님 말씀의 이중적인 역할을 반영한다.

  그리고 구약 성경의 상징이 신약 성경에서 성취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아브라함과 맺은 상징적 표징이 신약 성경에서 성취된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할례의식이다. 영광스러운 새 언약이 시작되면서 옛 언약들이 쓸모 없게 되는 것이 아니라, 율법 아래 있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율법 아래 동정녀 탄생을 하게 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죄를 몰랐다. 그러나 모든 의를 이루기 위하여 그는 정결하게 하는 규정된 예식을 받았다. 예수 그리스도는 먼저는 할례를 받고 후에는 요한의 세례를 받았다.그리고 그는 천국 복음을 선포했으며 도래할 하나님 나라를 선험적으로 사시며 증언하였다. 그리고 인류의 죄를 속량하기 위하여 오랜 세월 동안 약속된 언약을 성취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다. 그리고 부활을 통해서 미래에 대한 밝은 희망을 주었다. 바로 새 언약은 우리를 위해 고난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시작된 것이며, 그에 의해서 완성된 것이다. 인류의 시조 아담이 죄로 말미암아 죽음을 가져왔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대속과 부활을 통하여 영원한 생명을 인류에게 언약의 성취자로써 선물로 주신 것이다.

  보른캄은 " 예수가 그의 말과 행동에서 이미 일어난 신의 나라의 시작을 선포하는 반면 부활절 이후의 소식에서는 그의 죽음과 부활, 승천에서 세대의 전환과 구원의 개시, 신의 도래와 지배가 이미 사건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신자의 경험은 그리스도와 연합이라는 개념과 연결되며, 신자가 죽어서 다시 사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다.  

  이제까지의 내용을 통하여 성경이 말하는 구원의 개념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결국 신.구약성경의 구속의 교리는 동일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모든 언약적 예언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되었으며, 완성된 것이다. 성경에서 구원은 육체, 정신, 생활, 사회, 그리고 영혼 등 인생의 모든 영역에 적용된다. 특히 성경에서 말하는 영적 영역의 구원은 구체적으로 "죄로부터의 구원, 형벌적 사망으로부터의 구원, 영혼의 구원, 장차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으로서의 구원 등이다. 따라서 성경적 의미의 구원 곧 기독교적 구원이란 죄로 인하여 멸망할 죄인이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공로를 통하여 죄의 사함을 받고, 죽은 영혼이 살림을 받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우고, 심판과 형벌에서 모면되고, 영생을 얻고, 장차 천국의 영원한 복락을 누리게 되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바로 이것이 본질적인 의미에서 구속이며 참 구원이라 할 것이다.


   2.1.4 신학자들의 구속(구원) 이해 

앞에서 논자는 구속의 개념에 대하여 어원적인 접근을 통해서 그리고 성경적인 접근을 통해서, 깊이 있게 다루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구속에 대한 이해를 증진시키기에는 충분할 만큼 구속에 대한 내용들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러면 신학자들은 구속에 대하여 어떻게 그 개념을 파악하고 이해하며 주장하는지에 대하여 고찰함으로써 구속에 대한 개념을 한층 깊이 있게 이해하고자 한다.

  Pelagius는 하나님의 창조 정신을 강조하고 인간의 타락 및 죄를 가볍게 본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이 인간을 자유롭게 창조했으며, 인간은 이 자유를 통해서 선을 이룰 수 있다고 보았다.펠라기우스는 타락한 후에도 원죄는 문제되지 않으며 자범죄도 인간에게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이 남아 있으며, 아담의 범죄나 마귀까지도 이 능력을 파괴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즉 아담 한 사람의 범죄로 인하여 전 인류가 정죄되었다는 것은 불합리하고 불공정하기 때문에 아담의 죄는 결코 인류의 죄악이 될 수 없고 또한 아담의 죄로 인해서 그 후손들이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자유의지가 완전히 파괴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그리고 아담의 타락은 그의 후손의 영혼과 몸에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그것은 타락 후에도 인간의 본성과 능력이 계속되어지는 한 태초의 아담과 같이 자유로이 善惡을 택할 수 있다.펠라기우스는 죽음의 문제에 있어서도 죽음이 죄의 형벌이 아니라 아담이 죽을 운명으로 창조되었고, 죽음은 모든 인간에게 당연한 귀결이라고 한다.따라서 그는 그리스도의 부활의 의미를 축소하여 그리스도의 부활에 의해 인간이 살아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며, 구원은 율법과 복음이 없이 얻을 수도 있는 것이지만 이것들은 구원을 얻는데 크게 도움이 되며 그리스도는 구원을 얻은 좋은 모범을 인간에게 보여주었을 뿐이라고 한다.

  Augustinus은 인간의 전적인 타락을 주장한다. 그에 의하면 아담이 타락한 후에는 선을 행할 수 없고 악에 대해서만 자유롭게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것은 아담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그이 후손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 아담의 타락으로 그의 후손들이 전체적으로 침해를 보았으므로 인간에게 완전한 의지의 자유란 더 이상 지닐 수 없게 된 것이다.이와 같이 어거스틴은 아담으로부터 유전되는 원죄를 주장한다. 그래서 원죄의 결과로 인간은 저주의 덩어리로 전락했으며, 사망과 무지와 현세욕에 얽매이게 되었다. 그리고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었고 하나님의 형상이 유실되어 자신에게 열려 있는 모든 선택도 결국 죄가 된다. 어거스틴에 의하면 이런 인간에게 하나님은 불가항력적인 은총을 베푸셨다.그래서 하나님의 은총으로 타락한 인간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으며, 선을 행할 수 있게 되었다. 하나님의 은총이 일단 인간에게 주어지면 은총이 의지 안에서 활동하여 의지가 선을 이루도록 움직인다.

  또한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은총으로만 인간이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이 인간과 더불어 구원한다고 하였다. 즉 하나님의 은총이 인간의 의지와 일치하게 응답하여 행동하도록 만들어 준다.그리고 어거스틴은 이런 은총은 세례에 의해서 주어진다고 하였으며, 유아도 세례를 통해 죄책이 제거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 은혜는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만으로 지속되는 것이 아니고, 죽는 날까지 신앙을 신실하게 지켜 나갈 때 최후의 면류관을 얻게 된다고하였다. 그것은 은총으로 주어진 견인의 선물에 의해 가능하다는 것이다. 어거스틴은 여기서 더 나아가 이 은총은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선택된 사람에게만 주어진다고 하였다.즉 선택된 사람은 하나님의 예정하심에 따라서 저주받는 무리에서 벗어나 구원을 얻게 된다. 이와 같이 어거스틴은 인간의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강조한다.

  Vitalis는 펠라기우스의 이론을 배격하고 어거스틴의 이론을 옹호한다. 그러나 어거스틴이 주장했던 이론을 그대로 따르지는 않았다. 그는 어거스틴에게 인간이 행하는 모든 선행은 하나님의 은총이지만, 구원을 받는 첫 걸음 즉 은총을 받아들이는 행위-신앙의 시작-은 순전히 인간의 것으로 하나님도 이것을 간섭하지 않으신다고 주장하여 은총이 인간의 공로와 관계없이 주어진다고 하는 어거스틴의 이론과 의견을 달리한다. 이 개념은 매우 중요한 것으로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하는 후대의 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Thomas Aquinas는 아담의 범죄로 인간이 부패되어 하나님께서 주신 원의를 잃어버렸으며, 인간의 자체 힘만으로는 선을 행할 수 없다고 하였다. 타락한 인간성의 희복은 하나님의 거져주시고 공로 없이 베푸시는 은혜를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한 점은 어거스틴과 같다. 이 은혜로 인하여 인간의 본성은 최초의 은사를 희복하고 죄사함을 받고 선을 행할 수 있게 된다. 토마스에 의하면 이 은혜는 교회의 성례전을 통해 인간의 영혼속에 창조된 사랑이며 참으로 인간적인 자비의 기질 혹은 습성이다. 그리고 토마스는 구원의 출발점으로서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을 들고 있으나 이는 보편적인 것이고 성례전을 통해 얻는 사랑의 습성을 시행할 때에 하나님 앞에서 그 공로를 인정받아 영생을 얻게 된다고 주장한다. 즉 하나님 앞에서 사람을 의롭게 하는 것은 사랑의 활동에 의하여 형성된 믿음이고, 이 믿음이 없으면 구원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토마스는 세례 이후에 지은 죄에 대해서 고해성사가 필요하다고 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사제의 사죄를 통해 고백하는 자에게 죄에 마땅한 죄과와 영원한 형벌을 사하지만 어떤 잠정적인 형별이나 보속은 죄의 결과로 고백자에게 계속 남는다. 그리스도의 대표자인 사제가 고백자의 통회, 고백, 보속을 기꺼이 치르려는 마음을 증거로하여 사죄를 선언해야 죄사함을 받고 사죄의 용서가 없이는 세례후 치명적인 죄를 지은 사람은 구원의 확신을 가지지 못한다. 중세의 면죄부는 이 잠정적 형벌의 일부 혹은 전부를 없애 주는 보속행위로 성행했던 것이다.

  John Duns Scotus는 구원이 오직 개인들과 그들의 공로에 대한 자유로우신 용납에 달려 있는 것이지, 그들의 영혼에 어떤 자질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고하여 토마스의 교리를 반대한다. 스코투스는 계시를 통하여 알려진 하나님의 작정하신 의지에 따라 교회의 성례 활동을 적절하게 이용하고 그들 자신의 구원에 충분히 협력하는 사람들은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한다. 스코투스에 따르면 영원전부터 선택된 자들은 한 번 거룩하게 하는 은혜를 입으면 계속하여 참되고 가치있는 선행을 수행하고 따라서 영원한 구원을 보상 받게 된다.

  William Ockam은 인간은 그 자신의 자연적인 능력이나 자유로운 의지에 의하여 도덕적으로 선행을 할 수 있는데, 이 선행은 적합한 공로로서 하나님의 은총의 주입을 일으키고 하나님은 다시 이 공로를 거룩하게 하는 은총으로 보상해 주셔서 구원을 얻게 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공로에 대한 하나님의 예지로 선택이 조건지워졌다고 하였다. 즉 예정은 인간의 행위에 대한 하나님의 예지와 동일하다고 주장한다.

  John Calvin은 스콜라 철학자들을 비난하면서 그들은 회개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회개를 마음의 통회와 입술의 고백과 행위의 보속으로 나누어 죄사함을 받기 위해서는 이 세 가지가 필요하다고 가르쳤다고 하였다. 그리고 칼빈은 죄사함의 문제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이므로 사람 앞에서가 아니라 하나님께 죄를 고백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리고 칼빈은 그리스도의 은혜만이 죄에 대한 진정한 보속을 제공하며 양심에 평화를 가져다 준다고 한다. 그리스도 이 외에 하나님의 노여움을 풀 만한 다른 보속은 없으며, 오직 그리스도만이 자신의 중재에 의해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회복시켜 주시는 영원한 대언자이시며, 우리의 죄를 속량하시는 영원한 화목 제물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칼빈은 인간의 공로나 보속에 의한 구원을 부인했고, 중세 캐돌릭교회의 면죄부가 성경에 위배되는 것이라고 반박했다. 그는 면죄부가 그리스도의 피를 더럽히는 것이며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에서 그리스도인들을 분리시켜 구원의 진정한 길을 벗어나게 하려는 악마적 간계라고 혹평했다. 그리고 연옥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무효로 만들며, 하나님의 자비에 참을 수 없는 경멸을 가하며, 우리의 신앙을 뒤집으며 파괴시키는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는 루터와 마찬가지로 오직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의지로 값없이 의롭다 함을 받는다고 주장한다. 칼빈의 이 칭의 교리는 매우 중요하다. 칭의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우리를 의인으로 받아 주시는 것이며, 우리의 행위의 어떤 공로도 이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하여 공로에 의해 인간이 의롭게 된다는 이전의 모든 학설을 부인한다. 인간의 마음은 불결하기 때문에 인가의 선한 행위는 하나님이 볼 때 근원부터 부패된 것이다. 인간은 오직 믿음에 의해서만 그리스도의 의를 붙잡을 수 있으며, 그 의를 덧입고 하나님 앞에 죄인으로서가 아니라 의로운 사람으로서 나타날 때에 구원이 가능하며,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하여 우리를 의롭다고 간주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칼빈은 영원한 선택 교리를 주장한다. 하나님께서 영원한 선택에 의해 어떤 사람은 생명의 소망을 가질 수 있도록 선택하고, 어떤 사람은 영원한 사망을 예정하셨다는 것이다. 그는 이 예정을 영원한 하나님의 작정이라고 한다. 즉 하나님의 은총은 선택된 제한된 소수만이 받게 되는 것이다. 칼빈은 선택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고 오캄의 주장과는 달리 선택이 하나님께서 각 사람의 공로를 미리 아시고 그것에 따라 사람을 구별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리고 칼빈은 세례를 우리가 용서를 받고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과 축복에 참여하는 표징이지, 은혜의 수단은 아니라고 한다. 그리고 세례는 우리의 모든 죄가 도말되고 용서되고 소멸되어 하나님 앞에 나타나거나 기억되거나 그 때문에 우리가 고발되는 일이 결코 없으리라는 것을 우리에게 확인하는 인을 친 문서와 같다.

  Jacobus  Arminius는 예정 교리를 철저히 반대하는 입장이다. 그는 타락전 예정론이 하나님을 죄의 창시자로 만들었다고 비난하고, 하나님은 처음에 예수 그리스도를 죄로부터의 구속주와 구원자로 임명하시고 신자들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구원으로 예정되게 하셨다고 가르쳤다. 개개인의 예정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를 영접하느냐 거부하느냐에 달려 있으며,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믿고 신앙 안에서 견인 할 것을 미리 아신자들을 구원하기로 결정하셨다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예지를 예정의 기초로 본 것이다. 알미니우스는 인간의 선택에 예지를 두었다. 그러나 믿는 행위는 오직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지 공로적인 것으로 생각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는 은총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모든 사람에게 유용한 도덕적 에너지라고 하였고, 수동적인 사람에게 부과되는 하나님의 의지적 독단적인 강요가 아니라고 하였다.    

  John Wesley는 인간의 완전 타락을 주장하는 점에서 어거스틴이나 칼빈과 같다. 그러나 웨슬레는 타락한 인간이 어느 시점부터 하나님의 형상을 부분적으로 회복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었는가? 타락한 인가는 아담 이후로 전혀 선행을 할 수 없었는가? 인간의 양심은 무엇인가? 등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으려고 노력한다. 그는 알미니우스의 선재 은총 개념을 발전시켜 인간이 타락하자마자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부분적으로 회복시켜 주었다고 주장한다. 인간은 완전 타락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나아갈 수도 없고, 선을 행할 수도 없으나, 아담에게 하나님이 여인의 후손을 통해 구원의 은총을 약속하셨고, 그 은총으로 인하여 인간이 광명의 세계를 인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웨슬레는 선재 은총으로 인간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다고 한다. 즉 인간이 응답하느냐 거부하느냐에 따라 구원과 영원한 죽음으로 갈라지는데 그것은 전적으로 인간의 책임이라고 한다. 그러나 인간의 응답은 성령의 역사하심에 의한 것이라 했다. 따라서 인간은 선재 은총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고 그리스도의 구속을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점에서 칼빈과 같다. 그러나 칼빈이 말하는 하나님의 주권적 은총에 의한 믿음에 반해, 웨슬레는 성령의 역사하심에 의해 인간이 응답함으로써 믿음을 가지게 됨을 강조한다. 그리고 은총이 주어지는 방법에 대해서 웨슬레는 선재적 은총의 경우 타락 직후에 주어졌고, 구속의 은총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때에 주어진다. 유아의 경우는 선재 은총으로 태어날 때 원죄가 사해지며, 세례로 의롭게 된다. 그러나 자의지로 죄를 지은 사람은 회개를 통해 믿음에 의해 의롭게 된다. 즉 칭의와 동시에 거듭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성인이 세례를 받았다고 모두가 거듭난 것은 아니라고하여 실제적인 믿음에 의한 칭의를 강조한다. 그리고 세례 후에 자범죄에 대해서 웨슬레는 성결 교리를 주장한다. 웨슬레는 거듭남에 의해 성화가 시작되고 점진적인 성결 과정을 통하여 영화로 성화가 완성된다고 한다. 그러나 거듭난 사람도 죄성이 남아 있으므로 거듭 죄를 짓게 되나 회개와 내적인 체험을 통해 마음 속에 남아 있는 죄성을 깨끗이 씻을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성화의 결과는 사랑과 봉사로 나타나게 된다.

  그러나 웨슬레는 하나님의 선행 은총으로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얻었다 해도 만일 계속해서 성화의 삶을 살지 못하면 구원을 상실할 수도 있다고 함으로써 성결의 생활을 할 것을 강조하였다.

  Karl Barth는 기독론 전개에 있어서 "만인구원론"적 경향을 보이고 있는데 이것이 현대 신학에 만인구원론적 경향을 초래하게 되었다. 그러나 바르트 자신은 어느 곳에서도 보편적 구원을 직접 가르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사람을 구원받은 자와 버림받은 자로 구분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모든 사람들은 버림받고 동시에 구원받은 자로 간주한다. 모든 사람은 유일한 선택자인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선택되었다고 간주한다. 따라서 바르트의 견해에 의하면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서 궁극적으로 구원받게 된다는 결론을 피하지 못한다.

  Rudolf Bultmann은 비신화화의 신학으로 유명하다. 그는 실존주의적 구원 해석을 한다. 그에 의하면, 인간은 과거와 미래 사이에 끼어 있는 영원한 긴장속에 존재하며, 항상 구체적 자연 세계에 사로잡혀 그 자신의 개성을 상실하여 버리든지 아니면 모든 외적인 안전을 포기하고 미래를 향하여 용감히 투신함으로 참사람다운 존재가 되든지 결단해야 한다. 그리고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사는 것이 죄의 본질이며, 육신에 속한 삶의 결과는 불안뿐이다. 고로 인간은 이런 불안의 상태에서 벗어나야 하는데 인간 스스로는 여기서 해방될 수 없다. 다만 인간 나사렛 예수의 십자가 사건으로 말미암아 육신에 매여 사는 불안의 삶이 변하여 자유로운 삶, 곧 참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다. 이것이 곧 구원이다. 그리고 이것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신앙에서만 얻어지는데, 이 구원의 은혜는 구원의 메시지, 즉 케리그마가 전파되고 믿어질 때에만 얻어질 수 있다.

  Jurgen Moltmann은 과거와 현재보다 미래에 관심을 둔다. 그 미래는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이루어지는 종말 및 천국이 아니라 변혁과 혁명으로 이루어지는 종말이요 지상에서 이루어지는 천국이다. 그는 특히 구속론에 있어서 하나님과 죄인 사이에 일어나는 수직적인 측면에서 화해가 아닌 인간과 인간 사이의 평면적이고 역사적인 화해를 강조한다. 화해는 오직 역사적 평면 위에서 계급간의 투쟁이 끝나고 눌린자가 해방되어 하나님의 나라가 지상에 실현되는 날 이루어지며, 이런 사회적 구원이 곧 오늘의 구원이며 이 구원이 성취될 때 만인 구원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몰트만에게 있어서의 구원은 미래가 아닌 오늘에, 천국이 아닌 이땅에서, 하나님이 아닌 인간이 이루는, 개인적이 아닌 사회적이요 만인의 구원이다.

  Paul Tillich는 인간의 실존의 문제를 그리스도와 결부한다. 곧 그에게 있어 그리스도는 새로운 실재인데, 불완전하고 허무한 존재인 인간은 실재인 그리스도에게 접붙여짐으로써 새로운 실재에 참여한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은 만인에게 구원을 가져왔는데, 그 구원은 새로운 존재 속의 참여로서의 구원-중생, 새로운 존재를 수용하는 구원-칭의, 새로운 존재에 의한 변화로서의 구원- 성화 등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해방 신학과 민중 신학 및 다원주의, 포스트 모더니즘 신학에서 말하는 구원관은 여기서는 간과 하도록 한다.  

  이상에서 신학자들의 구원에 관하여 여러 가지 주장들을 살펴보았다. 한 가지 주목할 점은 구원은 하나님의 은총에 의한 것이며, 인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대속물로 십자가에서 희생하신 속죄주 즉 그리스도를 믿고, 신앙을 고백하는 행위를 통하여 주어지는 것임을 볼 수 있다. 결국 구원에 이르는 길은 오직 메시야 한 길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러나 현대 신학자들의 구원관은 성경의 가르침과 전통 신학에서 크게 벗어나 있으며, 성경적인 구원의 진리를 간과하고 있음을 유념해야 한다.

  이제까지 구속의 개념에 대해서 이해를 촉진했다. 이제 구속사란? 무엇인가를 고찰함으로서 바울의 구속사를 준비하고자 한다.


  2-2 구속사란?

  구속사는 모든 사람이 성경이 말하는 위대한 사건들과 직접 결부되어 있다는 신념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리고 이 사건들은 그리스도 안에 집약되어 있으며,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 속에서 전개 되고 있다. 따라서 역사와 구속사 사이의 관계를 살펴보고, 구속사 이해를 통해서 본 논고의 주제에 자연스런 접근을 하고자 한다.


2.2.1 역사와 구속사 사이의 관계

  역사란 우리의 언어로 구별이 분명하지 않으나 독일어에 있어서는 역사란 말이 두 가지 낱말이 있다. Historie와 Gechichte이다. 여기서 Historie는 세계사나 민족사, 정치사나 경제사와 같은 사람이 관찰하여 헤아릴 수 있는 "사학적 역사"요, Gechichte는 사람이 관찰하거나 헤아릴 수 없으되 실제에 있어서는 깊은 데에서 엄연히 일어나고 있는 "사건"으로서의 역사이다.

  인류역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원년으로 하고 그 이전과 그 이후로 역사를 구분한다. 서구 사회에서는 18세기 이후, 우리 나라도 단군을 기원으로 하지 않고 서기를 쓰게 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실에서 역사의 참 의미를 깨닫게 된 결과일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불신자에게도 역사의 의미가 주어졌다"고 한 브룬너의 말이 적용된 셈이다. 기독교적 역사관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 이전의 시대는 준비의 시대요, 예수 그리스도 이후의 시대는 역사의 의미를 받아들여서 그것을 실현할 시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속사는 현대 신학의 논쟁에 있어서 중요한 신학적 문제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날 때부터 여러 가지 "역사들 속에" 속해 있다. 즉 가문의 역사, 민족의 역사 등에 속해 있다. 우리는 신앙의 결단으로 이 특별한 역사인 구속사와 관련되어 있다. 즉 일련의 신적 사건을 우리는 더 좋은 표현이 없어서 구속사라고 부른다 . 그것은 또한 죄와 심판 때문에 멸망사(Unheilsgeschichte)일 수도 있다.

  불트만 학파는 신약의 실존적인 문제를 구속사 문제와 구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주관과 객관의 분열을 미숙하게 폐기시킨 이 학파는 이렇게 해서 잘못 오도되어, 신약의 사실상의 본질을 인격이 자기의 실존 이해에 있어서 오늘날 자기가 말씀을 듣는다고 여기는 점에서 보게 된 것이다.

  성서적 사신을 구속사적으로 해석하는 것을 가장 최근에 반대한 사람 중의 하나였던 Fichte는 자기의 저서를 이렇게 끝맺었다. "형이상학적인 것만이 축복하는 것이지, 결코 역사적인 것은 축복하지 못한다. 후자는 이해만을 줄 수 있을 뿐이다." 형이상학이란 말 대신에 실존적이라는 말이 현대적 사고에 적합할 것이다.

  우리는 2세기에 있었던 영지주의와의 싸움의 의미를 바로 이해해야 한다. 즉 기독교의 계속성의 문제이다. Marcion과 영지주의는 상호종속적이다. 공통된 점은 구약에 대한 공격이다. 마르키온은 계시와 구원을 점적인 사건으로 보았다. 그래서 그는 복음도 하나의 점적이고 속박되지 않는 사건이며, 수직적이기는 해도 수평적이 아니다. 그리고 영지주의는 구약을 부인하고 기독교의 영역 안에서 신약을 해석하여 구속사를 제거한다. 즉 예수의 역사적 실존을 가현설의 희생물로 만들어 버렸다. 그러나 초기 기독교는 계시와 구원의 사건을 일관성 있는 구원의 발생사에서 찾아보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초기 기독교인들은 모두 구약을 인계 받았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그들의 신앙이 구속사를 믿는, 즉 그리스도의 이야기를 믿는 신앙이지. 점적인 구원의 사건을 믿는 신앙만이 아니라는 것을 지시한다. 구속사는 시종일관 발생사로서 가장 내적인 본질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는 것은 역사학적으로 추적이 가능한 가장 확실한 역사적 사건이며, 예수의 탄생과 그의 복음의 선포가 그 당대의 역사적 인물들, 가령 헤롯대왕, 아우구스트황제, 로마 총독 등과 관련된 것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시는 구속의 행동은 역사적 컨텍스트를 갖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일 역사학적 예수와 케르그마적 그리스도 사이에 연속성을 부정하지 않는다면,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삶과 하나님의 구원 행위의 사건이 역사적 Context에서 말해질 수 있다고 본다. 즉 구속사가 역사에 속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불트만에 의하면 역사적 예수 즉 그리스도만 중요하다는 것이다. 사적인 예수는 신앙의 근거가 될 수 없고 예수의 Kerygma만이 신앙의 근거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사전인 예수의 처녀 탄생기사나 부활, 승천같은 기사는 예수를 숭배하는 초기 신앙 공동체가 만든 신화적 이야기며 이같은 신화는 비신화 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바르트학파의 계시 중심 주의는 역사비판 논구의 홍수로부터 안전하다고 생각되는 원역사(原歷史)의 영역으로 도피한다. 즉 그리스도의 구속사건을 원역사의 범주로 해석, 본래의 역사가 초기의 사역 내지 원역사의 반영으로만 의미를 가지게 된다.

  그리고 Pannenberg의 역사 신학과 라이너학파의 보편구속사 신학은 신의 계시와 동시에 객관적 역사 과정을 진지하게 다루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파넨베르크는 구원을 계시의 종속적인 것으로 본다. 그러나 파넨베르크 자신이 지나치면서 계시와 구속사와 관계를 인정했듯이 두 개념은 거의 구별할 수 없다. 논자가 보기에는 신약성서에 나타나는 주요 개념은 구원의 개념인 듯하다.

  따라서 구속사는 신앙적으로 구원의 사건으로 인정된 사건들을 단순하게 첨가함으로써 생기는 것은 아니다. 그 대신에 그 때마다 과거의 구원의 사건에 대한 해석을 새로운 사건에 조명하여 수정하려고 시도하는 것이다. 그리고 예언자들이 계시에다 귀속시킨 해석의 행위는 구속사 자체에 속한 것으로 여겨진다. 계시의 중개자는 구약에서는 예언자이고 신약에서는 사도가 된다. 계시의 중개자는 그가 맡은 계시를 새롭게 해석하고 구속사와 결부시킨다. 우리는 이처럼 구원의 사신을 구원 사건에다 포함시키는 것이 신약을 위해 본질적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여전히 구약에도 현재적이다. 계시의 역사와 해석의 역사는 구속사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나, 구속사는 여전히 양쪽을 건너짚는 개념이다. 그리고 사실상 성서의 역사 전개는 사건과 사건 사이에 간격이 있고, 비합리적인 도약에 의해 이루어진다. 창조, 선민의 선택, 남은자,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순으로 좁아진 구속사의 선은 다시 제자들, 신앙 공동체, 세상으로 확대된다. 그러므로 성서적 구속사는 하나님의 선택에 의한 구원 섭리의 과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좀더 구체적으로 구속사에 접근하여 이해를 돕고자 한다.


    2.2.2 구속사(Heilsgeschichite)의 이해

  많은 신학자들은 구속사"라는 표현에 대해 비동정적이다. Heilsgeschichite란 말을 다른 말로 번역할 수 없고 그리 좋은 표현이 아니라는 점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사실 신약 어디서도 "구속사"라는 표현은 찾을 수 없다. 그러나 신약에 나오는 희랍어          는 세속적인 용법에서 계획, 관리, 가사(家事)라는 사상을 포함하고 있다. 능동적인 뜻으로 "집안 일을 돌봄"이란 의미가 있다. 그리고 이 말은 더 좋은 표현이 없어서 "구속사"라고 부르는 것에 가깝다.그리고 영어로 번역 하면 management  of  a household; task, work,  responsibility; (divine) plan의 의미이다. 그리고 이 말은 바울이 로마서와 고린도서에서 구원의 신적인 계획에 대하여 그가 받은 초자연적 계시에 대해서 말할 때 사용한 신적인 신비의 개념과 관련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바울 사도 자신과 그의 직분이 이에 속한다는 것은 고린도전서 9장 17절에 "나는 를 위임받았다"는 구절 및 골1:25절과 엡3:2절 등에 지적되어 있다. 사도에게 나타난 신적 계획의 계시 및 그에게 맡겨진 위임은  그 계획에 속하고 따라서 구속사 자체 안에 속한다. 사도는 하나님의 신비의 청지기이다(고전4:1).

  구속사란 그리스도의 죽음과 구원을 중심으로 하는 하나님의 구원 행위를 말한다. 성경은 단순한 말씀이나 진리를 담은 것이 아니라 창조라는 역사적인 사건을 근원으로하여 재창조의 완성에 도달하기까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하나님의 구원 행위를 기록한 것으로 보는 구원사 신학이라 할 것이다. 구원사 신학이라는 말은 교회사적으로 Ireneaus가 최초로 주장했다. 그는 주로 노스틱 이단을 반박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세계 창조, 그리스도의 성육신, 천국재림을 주장했다. 그리고 17세기에 와서는 Cocceius가 그의 계약 신학에서 세 가지 계약 시기 즉 아담과의 행위 계약, 모세와의 은혜 계약, 그리스도와의 새 계약으로 나누어 구약 시대의 죄사함과 신약 시대의 죄사함이 서로 다르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19세기 신학자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성서 뿐만 아니라 교회사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의 역사까지도 구속사의 개념을 가지고 해석하기에 이른 것이다. 19세기의 구속사 학파를 대표하는 Hoffmann은 자유주의 신학을 배격함과  동시에 약속과 성취에서 성서의 통일성을 구속사적으로 다룬다.

  그리고 20세기에 Oscar Cullmann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단순한 점으로서가 아닌 선으로 이해하고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도 계속되는 사건으로 보았다. 또한 Hunter는 구속사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실 목적으로 메시야를 보내어 그로 하여금 구원의 방편을 삼아 구속 사업을 완성하신다는 일관된 이야기이다"라고 말한다.

  마지막으로 유의해야 할 점은 신약의 구속사가 생길 때 과거와 현재의 모든 사건과 장차 일어날 것으로 기대되는 사건이 그것들의 장점과 중심적인 하나의 사건속에 요약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 사건이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다. 그리고 구속사에 대한 구성적인 역할을 하는 사실은 구속사의 발로를 성경에서 그 자신의 저자들이 특별한 사건 및 그 사건과 다른 사건의 관계에 대한 영적으로 파악된 계시에 귀속시켰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구속사는 역사의 예언과 관계된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그 정점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속 섭리 가운데 구속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죄의 공포와 장래의 유혹에서까지 극복할 수 있는 능력으로 나타난 것이며, 그의 구속 사역으로 인하여 영벌이 제거되고, 죄의 세력이 타파되고, 영원한 노예 상태로부터 해방과 자유를 온 인류에게 선재 은총의 선물로 주신 것이다.


제3장 로마서를 중심으로 본 구속사


  이미 앞에서 구속사의 개념과 구속사 이해를 통해서 개괄적인 의미를 다양한 각도에서 다루었다. 여기서는 이러한 외형적인 측면보다는 구체적으로 구원에 이르는 하나의 과정으로서의 구속사를 모든 사람은 죄인이라는 죄의 선언과, 칭의, 성화, 정죄 없음, 영광 순으로 다루려 한다.

  바울은 기독교 신도들을 위하여 하나님이 준비하시고 복음이 계시하는 義를 주제로 제시한 후에 전 인류가 보편적으로 또는 절실히 이같은 의를 가져야 할 것을 강조하였다. 먼저 義를 입기 전에 죄를 회개해야 할 것을 가르친다.


  3-1 죄의 선언(In Sin)

  구속이란 긍정은 죄악이란 부정에서 시작된다. 신적 부정이 없는 곳에 신적 긍정이 없기 때문이다. 바울은 로마서1장 18절-3장20절에서 인류가 죄 아래 놓여 있음을 선언한다. 먼저 그는 이방인의 죄를 종교적인 죄와 도덕적인 죄로 나누어 역설한다. 그리고 유대인의 죄를 지적하고, 전 인류의 죄에 대하여 선언을 한다.

  전반적으로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나"있다. 자연의 빛과 율법의 빛 모두가 죄에서부터 죄에 이르는 하나님의 진노를 드러내 보여 주고 있다. 여기에 따르는 대조법이 흥미롭다. 인간들의 죄악성의 묘사를 "경건치 않음과 불의"라는 끔직한 두 가지로 간추리고 있는 것이다. 곧 율법에 대한 불경건과 불의인 것이다. 이러한 죄악성의 근원은 "불의로 진리를 막는"데 있다. 즉 하나님의 존재와 선악간의 차이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고는 있으면서도 그들은 불의로 진리를 막고 있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진노가 죄인들에 대한 심판으로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즉 인간들은 피할 수 없이 참혹하고 불가피한 상황에 놓여지게 되는 것이다.  Brunner는 하나님의 진노란 "하나님을 반역하여 돌진하는 자가 느끼는 하나님의 의지의 역풍이다"고 말했다. 인간의 진노는 개인의 발동적인 경우가 보통이지만, 하나님의 진노는 공의성과 사랑의 표현이다. 그리고 시편 기자는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여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 사람이 회개치 아니하면 저가 그 칼을 갈으심이여 그 활을 이미 당기어 예비하셨도다"라고 하였다. 박윤선 박사는 하나님은 분명히 상선벌악의 심문을 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거듭나지 못한 자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깨닫지 못하고 다만 그 진로 아래서 그들의 심령이 늘 불안한 중에 있다고 하였다. 이상근 박사는 하나님의 진노란 "인간에게 경건과 의를 요구하시는 그의 깊은 사랑의 표현이다"고 하였으며, Meyer는 "하나님의 진노란 악에 대해 역사하시는 거룩하신 자의 사랑과 선이다"고 하였다. 강병도 목사는 "하나님의 진노는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거룩과 의의 계속적이고도 불변한 반응을 의미한다"고 하였으며, 우찌무라 칸조우는 사람의 노는 허다한 경우에 있어서, 감정의 흩어짐을 의미하는 매우 싫은 말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노하심의 상태가 사람의 그것과 다르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리고 하나님의 노하심의 표현은 사실로서 이 세상에 임하는 것을 우리들은 인정한다. 그리고 "불의로써 진리를 막는 사람들"은 즉 이른바 죄인이다. 선을 선으로 알고, 이것을 행해야 할 것인줄 알면서, 굳이 이것을 억지하여 불의에 행하는 자이다.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알면서, 마음 가운데 실험되는 이 진리를 막고 그 발동(發動)을 억제하는 자이다. 환언하면, 진리를 진리로서 알면서 이에 따르지 않고, 불의를 알면서 이에 따르는 자가 바로 죄인이다. 불경건과 불의에 대하여 하나님의 노는 하늘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그리고 우찌무라는 18절이 이방인만을 가리키는 것인지, 또는 인류 전체를 가리킨 것인지는, 학자들 사이에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본다. 그러나 그는 바울은 먼저 인류의 전부를 멀리 넓게 보고서 이 총괄적인 단정을 내리고, 그런 후에 인류를 이방인과 유대인으로 2분하고, 19절 이하에서 이방인의 죄를 지적하고, 다음으로 2장에서 유대인의 죄를 지적한 것으로 말한다. 조두만 교수는 불의에 대하여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부정당(不正當)한 행위 즉 도덕적 결함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주석한다. 즉 불의 곧 부도덕한 일들을 행하느라고 진리, 곧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지배를 받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눌러 둔다는 의미인 것이다. 이상훈 박사는 바울이 경험한 죄는 악한 영향 악한 분위기 따위로 외부에 단순히 머물러 있는 것이 나니라 인간의 내부를 향하여 침입한 세력이라고 하였다. Murray는 죄는 하나님께 대한 반항이며 따라서 하나님은 거룩한 진노로 죄를 다스리신다. 이 말은 죄는 하나님의 심판을 면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죄로부터의 구원이란 속죄와 화목제 없이는 생각할 수 없다.

  이제 성경으로 돌아가 율법 아래놓여 있는 이방인과 유대인의 죄에 대하여 생각해 보려고 한다. Bornkamm은 율법은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에게 그들이 신 앞에서 죄인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인간의 파멸은 어디에 있는가? 로마서1장18절-3장20절이 이 물음에 "신의 진노의 계시"라는 주도어(主導語)로 대답하고 있다. 즉 파멸은 인간이 신을 모른다는 데 있지 않고 신의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그것을 "불법 중에 가두어 두는"(롬1:18)데 있다. 그리고 율법에 열심인 유대인이 바로 바울에게는 죄에 갇혀 있는 자의 좋은 표본이었다. 그는 자신의 경건에 대한 환상에 의해, 의에 대한 추구에 절망적으로 막힌 신을 향한 길을 여 수 있다고 오해한다. 율법이 전해 주는 인식은 오직 죄의 인식 뿐이다(롬3:20). 죄는 바울에게 있어서 분명히 개인적인 도덕적인 과오일 뿐 아니라, 행위와 노예와 세력의 일치에 있다.큄멜은 바울이 모든 인간의 죄의 타락성(롬3:23,갈3:22)을 현재적인 것으로 주장한다. 그리고 그는 한때 인간적인 존재의 시초에 관해 말한적이 있다(롬5:12-19). 그리고 이 구절의 목표는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들어온 죄의 보편성에 하나님의 크신 은사로서 한 사람 예수를 통하여 온 생명을 대조시키려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는 죄의 시작이 중심 문제이다(롬5:12). 그리고 죄의 삯은 사망(롬6:23)이다. 결국 아담이 죽음의 형벌을 받은 이래로 모든 인간이 죽어야 한다는 사실을 말하는 한편 모든 인간은 자신의 죄로 죽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사상의 결합은 모순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바울은 단지 유대적인 표상을 따르고 있을 뿐이다. 이 유대적인 표상에 의하면 아담이 죄와 형벌의 결합에 책임을 지지만, 그러나 모든 인간은 자기 자신의 죄를 통하여 이러한 벌을 받는다. 따라서 바울은 죽음의 사상은 철저하게 주장하지만 결코 원죄는 주장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바울은 유대적인 사유와 전적으로 일치하게 하나님 앞에서 자기 행위에 대한 모든 인간의 책임성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논자는 이제 신약 성경에서 차지하는 죄에 대한 통계를 살펴보고, 이방인의 죄와 유대인의 죄를 구체적으로 열거해 보고자 한다.

  우리말 신약 성경에는 죄에 관한 기록이 342회나 언급되어 있다. 그 중에서 바울이 쓴 일곱 개의 서신에는 81회나 언급 되었는데, 그 중에 로마서에는 57회, 고린도전서에 12회, 고린도후서에 5회, 갈라디아서에 6회, 데살로니가 전서에 1회가 죄에 대하여 직접 말하여졌다. 특히 바울은 로마서에서 집중적으로 죄를 다루고 있다. 바울은 로마서1장 18절 - 32절에서 이방인들의 죄상을 면밀하게 지적하고 있다. 종교적으로는 우상 숭배를, 도덕적으로는 성적으로 타락한 죄상과 제반의 악덕을 지적하고 있다.

  우찌무라 칸조우는 로마서1장18-32절을 3단으로 나누어 말한다. 제1단 19-23절 오성의 혼란-우상 숭배, 제2단 24-27절 정성의 혼란-더러움, 제3단 28-32절 의지의 혼란-불의, 즉 바울은 이방인의 죄를 오성, 정성, 의지 삼자의 혼란으로 본것이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5장 19절-21절에서 육신의 죄를 열거한다. 즉 불품행, 더러움, 호색, 우상 예배, 마술, 적의, 분쟁, 시기, 분노, 당파, 분열, 분파, 질투, 살인, 술취함, 연락 등이다. 그리고 그는 로마서 1장 29절-31절에서 하나님이 없는 제반의 추악상을 폭로 하는데, 이상근 박사는 이것을 표로 나타낸다.

    a.근본적인 죄 : 불의, 추악, 악의, 탐욕

    b.사람에 대한 심적인 죄 : 시기, 살인, 분쟁, 악독, 교만

    c.사람에 대해 표현된 죄 : 수군수군함, 비방,하나님의 미워하심, 능욕,자랑

    d.비인간적인 죄 : 악을 도모, 부모를 거역, 우매, 배약, 무정, 무자비 등.

  우찌무라 칸조우는 마가복음 7장 21,22절과 갈라디아서 5장19-21절을 로마서1장 29-31절을 비교하여 죄의 목록을 설명하는데, 마가복음은 예수에 의해 주어진 것으로서 가장 조직적인 것으로 본다. 그리고 여기서 제시한 죄의 수는 13이다. 그리고 갈라디아서에서 죄의 수는 16이다. 그러나 로마서에는 21의 목록을 싣고 있다. 이것을 우찌무라 칸조우는 표로서 다음과 같이 나타낸다.

   * 죄의 총칭=불의

   * 죄의 총체=악의, 악, 탐욕

   * 질투의 죄=투기, 살인, 분쟁, 사기, 악념

   * 참무의 죄=참언, 욕(훼방)

   * 교만의 죄=불손, 교만, 대언장어, 악사를 도모함

   * 불신의 죄=불효, 무지, 불성실, 무정, 무자비 등.

  이 목록 중에 마가복음에 있어서 예수께서 주신 죄의 목록에 포함되어 있는 것은 살인, 탐욕, 악의, 사기, 투기의 다섯이다. 그리고 다른 16개의 죄상은 모두 바울이 새로이 든 것임에 주의할 것이다.

  그리고 유대인의 죄에 대하여는 로마서 2장 1-29, 3:9-20절에서 말하고 있는데, 대체로 보아 유대인의 죄는 심리적인 것들이다. 즉 이방인의 죄가 육체적이요 외형적인 것임에 비하여, 유대인들의 죄는 심적이며 내적인 죄라는 의미이다.

  바울은 유대인들의 죄를 공격함에 있어서 먼저 그 죄에 대한 심판의 확실성을 지적한다. 첫째로, 종교적 우월감에서 남을 판단하는 유대인을 하나님은 심판한다. 둘째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차별하지 않고 하나님은 심판한다. 셋째로, 표준은 유대인에게는 율법이며, 이방인에게는 율법을 떠난 양심에 따라서 하나님은 심판한다. 그리고 반율법적인 죄 즉 하나님을 모독하는 죄, 율법을 범한 할례를 질책한 다음, 로마서 3장 9-20절에서 전 인류의 죄를 다룬다. 바울은 이처럼 개별적으로 유대인의 죄상과 이방인의 죄상을 구체적으로 논한 후에 그 결론으로 전 인류가 죄 아래 놓여 있다는 사실을 단정한다. 바울은 먼저 구약을 인용하여 인간의 죄성을 신랄하게 규명한다. 그리고 이미 전 인류는 죄 아래 있다고 선언한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Meyer은 로마서 3장10-18절의 배합은 "죄의 일반적 상태(10-12), 말의 죄(13-14), 행위의 죄(15-17), 죄의 전체적인 원천(18)으로 되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이상에서 살펴 본 바에 의하면 이 세상에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롬3:10)"는 말씀과 같이 모든 사람이 죄인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로마서 1장 20절과 2장 1절은 죄에 대하여 아무도 핑계 할 수 없다고 단호히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바울은 전 인류가 죄 아래 멸망의 대상임을 전제로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을 기대하면서 로마서 3장 21절-8장 39절까지에서 구체적으로 구속의 교리를 전개하고 있다. 이제 하나님께서 2단계로 우리 죄인들을 위하여 의의 기초를 세우심을 살펴 보고자 한다.

  3-2 칭의(Justification)

  바울은 앞에서 모든 사람은 죄인이라고 선언을 하고, 율법을 떠나서 하나님의 義가 나타난 것,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에 대하여 설명을 한다. 그리고 이 의는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義니 차별이 없다"고 말한다. 즉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으로 인해, 하나님은 그 義를 구별 없이 누구에게나 주신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의는 사람의 의는 아니다. 즉 사람의 자력으로서 달성한 의가 아닌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며 은총인 것이다. 하나님은 이 義를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 믿는 자에게 주셔서 그를 의롭다 인정하시고 선언하시는 것이다.

  Augustin은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의를 율법의 일이나 율법의 도움을 떠나서 은혜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신자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을 가리킨다"고 했다. 즉 불의한 자를 의롭게 하시는 義에 대하여 설명을 하고 있다.

  바울은 신적인 칭의에 관한 복음을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상세하게 논술하고 있다. 로마서 전체의 주제에 대한 상론을 로마서 3장 21-30절에서 찾게 된다. 그리고 믿음이 중심적 역할을 한다. 그리고 그는 다른 곳에서도 그리스도인의 의인이나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인(롬5:9,18, 8:30,33, 10:4,10, 고전1:30, 6:11) 그리고 하나님의 의(롬3:5, 5:17, 10:3, 고후5:21)에 관해서 여러번 간단하게 언급한다. 믿음에 의해 하나님의 義가 주어진다는 역설적인 표현은 바울이 인간적인 율법의 행위 대신에 인간의 믿음을 신의 의롭다 함을 위한 인간의 선행동으로 요청한다는 오해를 언제나 일으킨다.

  그러나 황현숙 박사는 이 믿음이란 "하나님의 행위에 대한 응답, 승인, 인정, 포기이며, 하나님의 행위에 의해서 의롭다는 것을 수용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선재 행위에 반응하는 인간의 행위이다. 그리고 이러한 행위는 대가를 바라지 않고 구원의 은혜에 응답할 뿐이다"라고 정의 하였다. 논자의 견해도 전적으로 동의 한다.

  로마서3:21-26절은 믿음에 의한 칭의에 관한 바울의 가르침의 중심이다. 로마서1:16절은 하나님의 義의 계시의 필요성을 나타내고, 로마서3:21절은 하나님의 義의 역사적 현현의 본질과 의미를 밝힌다. 

  그러면 이제 좀더 깊이 있게 하나님의 義란 무엇인가?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義의 계시의 맥락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가? 또한 의인과 신앙은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에 관하여 살펴 보고자 한다.

  하나님의 義란 무엇인가? 바울은 "하나님의 義" 개념을 비교적 드물게 사용하고 있으나(롬1:17, 3:5,21-22, 25-26, 10:3, 고후5:21, 빌3:9은 다르다) 언제나 하나의 규정된 개념으로 사용하는데 그 의미는 바울의 의인론의 맥락에서 합성어의 전승된 의미에서 생긴다. 하나님의 義라는 합성어는 묵시문학적 유대교에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표현하기 위해서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바울에게 있어서도 "하나님의 義"는 하나님의 본질에 대한 진술이 아니라 하나님의 행동에 대한 진술이다. 이러한 진술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모든 믿는 자들에게"(롬3:21-22,26-27) 하나님의 義는 나타났다. 이러한 진술을 근거로 하나님의 義는 현재에 나타나게 된 하나님의 행동을 표현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을 의를 밝히시는 분으로 나타내신 것이다. 그리고 이 행동은 선포되어진다. "행한 것이 없지만 불경건한 사람을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는 그의 믿음이 의로 인정된다"(롬3:26, 4:5).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불경건한 자를 의로운 자로서 선포함으로써 하나님의 의는 일어난다. 따라서 바울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義"가 죄있는 인간을 현재적인 종말에서 의롭다고 선포하시며 그럼으로써 새롭게 창조하는 하나님의 구원 행동을 뜻한다면, 이러한 신의 행동이 그리스도와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를 파악할 때에 좀더 명확해 질 것이다. 박윤선 박사는 "하나님의 義"는 명백하게 율법의 의에 대립시켜 하나님의 의를 가르치고 있다(롬3:20-21). 즉 율법의 의는 사람이 하나님의 율법을 실천하여 이루는 의니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 자신이 이루신 의니 절대로 완전하고 또한 믿는 자에게 거져 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義는 의가 없는 자에게 임하여 그로 하여금 그 의 때문에 영생과 하늘나라의 영광을 누리게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보른캄은 하나님은 자신의 의를 죄인에게 즉 스스로 의롭지 못한 인간에게 제공한다. 하나님은 의롭기 때문에 믿는 자를 의롭게 하면서 자신의 의를 제시한다(롬2:26). 그리고 하나님의 義는 언제나 능동적이며 반면에 인간은 수동적이다. 즉 인간은 의롭다는 선언을 받고 의롭게 만들어진다. 그러므로 바울은 하나님의 의가 율법 없이 나타났다(롬3:21)고 말할 수 있었다. 이것은 신앙을 위한 하나님의 의는 그리스도의 속죄제물에 근거를 두고 율법 없이 계시되었다. 이러한 바울의 사상은 율법의 행위 없이 오직 신앙에 의해서만 의롭게 되는 것으로 여기기 때문이다(롬3:27-28).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그는 단순히 일반적인 하나님의 마음씨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죽음의 사건으로 나타난 하나님의 행위를 지적한다. 은혜는 새로운 질서, 새로운 언약을 세워 준다. 구원하는 하나님의 행위는 구원의 분신, "우리가 처해 있는 은혜"에 근거를 제공한다(롬5:1-2).

  이제 바울은 그리스도와 의인의 관계에 관하여 하나님의 의롭다 인정하시는 행동을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일어난 사랑의 행동이라고 표현한다(롬5:6, 8-9). 즉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이 그리스도로 하여금 우리를 위해 죽게하신 것이며, 이러한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우리가 이제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선포되었으며, 그래서 우리는 종말에 있는 하나님의 진노에서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바울은 믿음을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구원 행동의 결과로 분명하게 이해한다. 믿음은 설교자의 설교와 보냄에 근거하여 완성된다(롬10:14-16, 고후5:18-19). 그러므로 우선 믿음은 들은 설교에 대한 동의이다. 그리고 믿음은 본질상 복종이다(롬6:17). 따라서 믿음은 복음의 선포 안에서 하나님의 義를 만들어 내는 구원의 복음과 마지막 날에 만났으며, 복종으로 붙잡힌 바된 인간의 응답이다. 즉 선포된 의롭다 함에 대한 모든 감사의 신앙고백에서 종국적인 의롭다 함은 하나님의 선물의 희망으로 남아 있다. 인간을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의 행동은 이미 일어났으며, 믿는 자에게 받은 바 은혜의 선물로서 확실한 현재이다. 그리고 Murray는 "칭의는 응답이며 또한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의 행위이다"고 언급한다. 그리고 중생은 우리안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행위와 판사의 행위와 흡사하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칭의는 신앙 때문에 되어지는 일은 아니다. 성경은 언제나 "신앙으로 말미암아(by Faith)" 혹은 "신앙을 통하여(through Faith)" 또는 "신앙 위에서(upon Faith)"의 칭의를 말하나 결코 "신앙 때문에(an account of Faith)" 혹은 "신앙을 이유로 해서(because of Faith)"를 말하지 않는다.

  칭의는 영생에 대한 주제이며 또한 영생을 확보하는 것이다. 또한 칭의는 우리에게 있어서 실행의 義로서가 아니고, 그것이 행위에서도 아니다. 다만 우리가 의롭다 함을 은혜로 얻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 안에서 이루어진 신앙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그것은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선물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의롭다 함을 얻은 곳은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이다. 또한 칭의는 그리스도의 희생과 구속적 사업을 통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보른캄은 신앙은 복음에서 선포되는 하나님의 구원 행위를 순종적인 신뢰와 신뢰적인 순종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롬1:5, 6:16, 고후10:5). 그리고 신앙은 구원의 조건이지만 미리 인간적인 결심에 의해 믿고 그후에 구원에 참여하는 양식에 속하지 않는다. 바울은 신앙이 뜻하는 것을 아브라함에 의거해서 설명한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다. 그런데 그것이 그에게 의로  간주되었다"(롬4:3, 갈3:6)에 한정시킨다. 그리고 하나님에 의한 아브라함의 의인은 경건의 최고의 증거를 위한 적절한 보상이다. 바울은 이것을 "은혜의 보상"으로 이해했다(롬4:4-5).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약속한 것을 이룰 수 있다는 확신 가운데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렸다(롬4:19이하). 이 신앙이 하나님에 의해 의로 간주되었는데 이것이 아브라함이 미래의 언약을 대망한 신앙이고 이것으로 믿는자들은 지금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서의 그 언약의 성취에 자신의 근거를 둔다(롬4:23이하). 그러므로 신앙은 공격적일 수 없으며 오히려 자신의 공적의 포기이고, 결코 '자랑' 즉 하나님 앞에서의 자기 주장의 근거일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신앙은 옛 실존의 마지막인 동시에 새로운 실존의 시작이다.

  그리고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에 따라서 결정되는 사실을 보아 온 대로 믿음은 하나님이 그의 도움을 찾는 이들에게 제시한 하나의 조건으로 이 조건을 수락함으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 서게 되는 것을 말한다.

  또한 히브리에서 義는 고정된 개념이 아니고 움직이는 관계 개념이었듯이 우리가 의롭게 된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고 선포한 것 뿐 아니라 우리안에서 의로운 행동을 하도록 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소유하는 새로운 존재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즉 하나님은 자신이 의롭다고 선언한 사람에게 하나님의 의를 계속적으로 지켜 나갈 힘을 주신다. 성령은 신자안에서 하나님의 의를 성취시키고 지속시키는 그리스도의 영이신 것이다.

  성령은 하나님의 칭의의 결과로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사랑이다. 그리스도는 죄인을 위해 십자가의 죽으심을 취하셨다 . 이것이 곧 하나님의 사랑이다. 죄로 단절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가 이 십자가의 구속의 사랑으로 화목된 것이다. 이 화목은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실존의 삶을 살게 하였으며, 진정한 평화와 자유를 영원한 선물로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모든 이들에게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화평을 얻으며, 은혜의 생활을 누린다. 생활이란 환란에서 인내로, 인내에서 연단으로, 연단에서 소망으로 진보하는 것을 의미한다. 로마서 5장 1절-11절에는 삼위일체 교리 및 믿음 소망 사랑 신앙의 삼요소 및 은혜 평강 기쁨 등 은혜의 세 방면의 중요한 사실들이 나타나 있다. 이같은 결과는 믿음으로 주어진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현재의 구원과 미래의 구원이 대조되어 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으로 인해 그를 믿는 자가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은 현재의 구원이며, 신령한 구원이다. 그리고 아담과 그리스도를 비교하면 아담은 범죄 함으로 인류에게 사망을 가져왔지만 그리스도는 은사로 많은 범죄에서 의인으로 영생을 가져왔다. 우리는 여기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로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었던 우리가 그를 믿음으로 의롭다 칭하심을 받고 은혜로 구원을 받아 영생의 삶을 살게 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제 윤리적인 면에서 의는 점점 전진하여야 한다. 이것을 바울은 성화(Sanctification)라 했다.


3-3 성화(Sanctification)

  성화는 구속 적용의 한 부분이다. 성화는 구속 적용의 첫 단계는 아니다. 즉 성화는 유효적 소명, 중생, 칭의, 양자와 같은 다른 단계를 전제로 한다. 이 중에서 성화와 관련된 두 가지 단계는 소명과 중생이다. 성화는 "우리 안에" 이루시는 하나님의 사역이다. 소명과 중생은 그들의 즉각적인 효과를 "우리 안에" 이루시는 하나님의 행위이다. 소명은 우리 의식을 향하여 우리의 의식에서 응답을 끌어낸다. 중생의 그 자체가 우리 의식 속에 신앙과 회개, 사랑과 순종을 일으키게 하는 갱신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은 소명이며, 실제 효과를 나타내는 것은 성화에 의해서다. 중생은 성령에 의해 이루어 지고, 백성들은 성령에 의해 살게 된다.

  성화는 사람의 마음속에 이룩되는 성결하기를 바라는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이다. 즉 하나님의 영이 사람의 심령속에 역사하여 죄와 더러움을 지적하고 이것을 제거하는 길을 가르치며, 죄의 뿌리, 죄의 세력, 죄의 결과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아들이 갖추어야 할 모든 덕과 하나님의 능력을 채우고, 나아가 그리스도 예수의 모습을 우리 속에 완성하시려는 은혜의 일이다.

  성결에 대하여는 두 가지 문제가 있다. 하나는 성결해지는 상태와 다른 하나는 성결케 되는 과정이다. 성결로 역되는 영어의 Sanctification과 희랍어 명사         는 깨끗함, 성결, 성, 상태와 과정의 두 가지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Wesley는 성결이란 사람의 내심의 문제이다. 성결해진 사람은 "끊임없이 기도하고, 항상 기뻐하며, 범사에 감사하는 언제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채워진 사람이다"(살전5:16-18). 그리고 웨슬레는 그리스도의 완전 중에, 성결해졌다는 사람에게 특질이 있다면,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항상 기뻐하고 쉬지말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가 실행해야 할 하나님의 뜻이다"고 하였다.

  우찌무라 칸조우는 성결이란 "하나님의 은혜의 경륜이며, 인심의 속 깊은데 있는 본원이며, 자녀가 받을 수 있는 절대적인 은사이다"라고 하였다.

  Murray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중생했다 하더라도 신자에게 아직도 죄가 있다(롬6:20, 7:14-25 참조). 신자는 아직도 그리스도의 형상에 일치하리 만큼 그렇게 거룩하고 악이 없고 순결한 것도 아니며, 또 죄인들로부터 분리된 것도 아니다. 성화는 모든 죄를 감소시키고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과 완전 일치가 되는, 즉 주님이 거룩하심 같이 거룩하게 되어야 할 목적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성화의 중요성을 알아야 한다. 신자들에게 있어서 모든 죄는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모순된 것이다. 신자 안에 있는 죄는 그의 마음과 생활의 싸움을 의미한다(롬7:14). 비록 죄가 아직 남아 있을지라도 그 죄가 왕노릇하지는 못한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죄가 왕노릇하지 못하게 되는 이 신앙은 우리가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게 하며 마지막은 영생을 얻게 하려고 하나님과 의에게 종노릇하게 하는 힘이 된다(롬6:17,22)고 말하였다.

  그리고 성화에 있어서 성령의 역사의 방식은 신비에 싸여 있다. 우리가 성령께 전적으로 의존해야 한다는 것은 명령적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영이면서 또 죽은 자 가운데 그리스도를 살린 영이신 성령이 성화시킨다(고후3:17,18).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만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며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시게 하나니"(빌2:12,13). 여기서 말하는 구원은 이미 소유된 구원이 아니라 종국적인 구원이다(살전5:8,9).  

  성화의 구속 교리는 로마서 6:1-8:17절에서 말하고 있다. 이 부분을 대체로 삼대분 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성화의 생활의 기초로서 그리스도와 같이 죽고 같이 사는 중생을 말하고 있다(롬6:1-11).

    둘째는 성화의 생활 형태로 새 주종 관계와 새 혼인 관계를 말한다(롬 6:12-7;6).

    셋째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새 길을 장려한다(롬8:1-17).

  성화의 기초인 중생은 세례와 관련된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하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세례란 그리스도와 함께 내가 죽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의 부활하심 같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사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Denny는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죄에 대하여 죽은 자요,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자인 것이다"고 하였다.

  그리고 성화의 형태는 새 주종 관계와 새 혼인 관계로 나타난다. 새 주종 관계는 성도가 죄의 지배 아래 있지 않은 것은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다. 여기서는 두 가지 종을 대조하고 있다. 그것은 불신때의 죄의 종과 현재의 義의 종이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종은 또한 사망과 영생이란 두 가지 결과를 가져온다. "거룩함에 이르라" 바로 성화를 표시하는 낱말이다. Calvin은 "성도는 현세에서 성화를 향해 노력하나, 그 완성은 죽은 후에나 되어진다"고 말한다. Wesley도 칼빈과 성화론에서 같은 견해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현세에서 그리스도의 완전에 도달하지 못하면 구원을 상실할 수도 있다고 주장하면서, 성도들이 계속해서 성화의 삶을 살 것을 권고한다. 논자의 견해도 웨슬레의 입장을 지지한다.

  바울은 로마서 6장 23절에서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고 선언한다. 사망과 영생은 모두 영적인 것이며 영원한 것이다. 단순한 존재적 의미에서는 양편이 다 영생이다. 그러나 전자는 참 생명의 근원되시는 하나님과 단절된 저주의 생의 영속이요, 후자는 하나님과 결합에서 축복의 생의 영속인 것이다. 그러므로 후자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것이라 하였다.

  그리고 바울은 로마서 7장1-6절에서 결혼관을 은유적으로 말하는 것으로 법적인 부부가 그 어느 한 쪽이 죽거나, 이혼한 경우에는 자유로운 상태가 되는 것처럼,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고 그리스도로 연합하여 자유인이 될 때에 이 생활을 성화의 생활이라 할 것이다. 모세의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우리가 변화 받기 전에는 율법 아래 죄 가운데 있어서 육신은 죄의 법을 마음은 하나님의 법을 섬기는 것이다. 그러나 성화의 과정을 가는 성도는 이제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을 밝혀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에 의하여 새로운 남편인 그리스도를 섬기는 길이 곧 성화의 길이다. Barth는 로마서 6장 22절을 들어 "네 자신을 성결케 하라! 하나님의 종이 되라! 이것이 은혜의 명령이다."고 말했다.

  이제 바울은 성화에 이르는 길이 율법에는 없다는 것을 단정하고, 나아가서 성령 안에서 비로서 성화의 길이 있음을 로마서 7장7절 - 8장17절에서 옛 길과 새 길 두 가지로 제시한다. 전자는 율법을 말한다. 율법은 그 본질이 죄를 깨닫게 하는 것으로 살게 하려는 율법은 결과적으로 죽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변화전에는 내 육신에 선한 것이 있지 아니하여 죄가운데 행하였으나 한 법을 통하여 죄 가운데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므로 바울은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은 죄의 법을 섬긴다"고 고백 함으로써, 한 마디로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는데 그 목적이 있음을 볼 수 있다. 따라서 율법의 행위로는 성화에 도달할 수 없음을 실존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즉 옛 길은 율법으로 정죄하는 역할을 할 뿐이다. " 마음과 육신, 하나님의 법과 죄의 법이 대립된다. 이 두 가지 계통과 역사가 내 자신 속에서 실존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성령 안에서 새로운 길을 제시 하는데 이 새 길은 정죄함이 없는 생명의 길인 것이다.

 


  3-4 정죄 없음(No Condemnation)

  "성서를 한 개의 지환으로 본다면 로마서는 그 보석이고 제8장은 그 보석의 반짝이는 첨단이다"(Philip Jacob Spener)고 하였다. 이제 7장을 통과하여 8장에 들어서는 사람은 이미 고뇌의 밤이 지나고 광명한 찬란한 아침을 맞이하는 신선함을 느끼게 될 것이다. 우리는 어느듯 바울의 구속사의 정점에 다다르고 있는 것이다. 앞에서 논자는 모든 사람이 죄 아래 놓여 있다고 하는 선고로 인하여 참으로 인류의 실존이 참으로 비극이라고 생각하고 참으로 무겁고 우울함 속에서 출발했는데, 어두운 긴 터널을 지나 오는 동안 이 어둠의 겁풀을 하나씩 제거하는 작업을 통하여 영화를 바라볼 수 있는 희망의 빛에 도달하게 되었으니, 그것이 바로 로마서 8장1절의 이제는 다시 정죄 없다고 하는 이기는 자들이 받게 되는 선언을 통하여 본질적인 자유함을 얻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율법이 연약하여 육신으로 말미암아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의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라". 정죄는 칭의의 반대 개념이다. 칭의는 정죄가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본 서신의 주제인 칭의는 불경건한 자를 완전히 그리고 다시 취소할 수 없이 의롭다 한 것이기 때문에, 따라서 칭의는 모든 정죄가 취소된 사실을 내포한다. 이것이 1절의 사상이다. 부정적인 표현은 강조를 띠고 있다. "그러므로"라고 하는 말이 이렇게 완벽하게 정죄가 없는 이유는 이미 앞에서 말한 문맥에서 나온 추론임을 뜻한다. 만일 사도가 죄책에서부터와 죄책이 부과하는 정죄에서부터의 자유만을 단지 칭의로 생각하고 있다면, 그 땐 우리는 특별히 그 주제를 다루고 있는 서신 중에서 그런 추론의 기초를 발견해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정죄에서부터의 자유가 죄책에서부터의 구출뿐만 아니라 죄의 권세에서부터의 구출까지 포함된다고 본다면 "그러므로"라는 접속사는 바로 앞의 문맥과도 아주 적절하게 관계될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앞장의 투쟁에서 명백히 나타난 것과 같이 죄 및 육신의 세력이 엄연히 존재하는 만큼 그리스도 예수와 연합한 까닭에 신자의 소유물이 되어진 승리를 감상해 보는 것은 더욱더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우찌무라 칸조우는 로마서 8장을 구원의 완성으로 보고 구속사의 절정이라고 한다. 우찌무라 칸조우도 앞에서 인용된 Spener의 말을 인용하면서 실로 이는 성서의 최고 점이다고 하였다. 그리고 정죄되는 일이 없다고 하는 것은 참으로 은혜이다. 그리고 그는 로마서 권위의 한 사람인 고데의 분해 법을 소개한다.

      제1단 1-4절 죄에서 해방되는 일

      제2단 5-11절 죄와 그 결과인 죽음에서 해방되는 일

      제3단 12-17절 하나님의 아들로 되는 일

      제4단 18-30절 후사로 되는 일

      제5단 31-39절 대찬미

  제1단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정죄함이 없다고 단정하고, 그 근거로 2,3,4절을 기록하고 있다. "살리시는 영의 법"으로 율법을 대신하고, 성령의 역사에 무게를 둔 것이 특징이다.

  제2단은 죄의 결과인 죽음에서 해방되어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행복을 말한다. 이것이 성령에 의하는 것이다. "만약 예수를 죽음에서 다시 살리신 이의 영, 너희에게 거하면, 그리스도를 죽음에서 다시 살리신 이는, 너희안에 거하시는 바의 영으로서,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실 것이다"(11절)라고 한다.

  제3단은 성령에 의해 하나님의 아들로 되는 것을 주안으로 한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되는 자는, 이는 즉 하나님의 아들이다"(14절), 또한 "성령께서 친히 우리들의 영과 함께 우리들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한다"(16절)  인류는 모두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은 흔히 듣는 일이다. 하지만 바울에 의하면 어떤 특별한 상태에 있는 자만이 하나님의 아들이다. 즉 그리스도를 믿어 죄와 죽음에서 해방되는 특별한 은혜에 접하는 자만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이다.

  제4단은 상속자가 된 것을 말한다. "우리가 만약 자녀라면 또한 후사로 될 것이다"(17). 하나님의 아들로서 머물러 있는 이상은, 반드시 어떤 실물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상속자로서, 그리스도와 함께 상속자로 되는 것이다. 아버지로부터 물려 받는 것은 새로운 우주-전세계 만물-모두 주어진다는 것이다. 이는 실로 하나님의 아들된 자가 그리스도와 함께 후사가 되어 받게 되는 것이다. 이에 이르러 바울의 신앙, 사상, 희망은 절정에 달한 것이다. 신자들은 부활하여, 영광을 입고서, 새로 완성된 우주의 주인공으로 된다. 이것이 신자들을 기다리는 최고의 영예 또한 구원의 완성이다.

  제5단은 대희망 대감사가 가득 넘치는 마음에서 자연히 흘러 나온 대환희의 토로이다.

  여기서 주의할 것 한 가지를 짚고 넘어 가야 한다. 그러면 7장 이전의 전부와 8장과의 상위점 문제이다. 비교해 보면, 7장까지의 구원은 대체로 외부적인 것이다. 물로 구원을 영혼에 받는 점에서 말하면 내부적이지만, 그래도 8장이 아주 내부적임에 비하면, 7장까지의 구원은 사람의 겉에 주로 있는 것이다. 즉 십자가의 그리스도의 속량을 믿는 것이다. 예수를 우러러 보고, 그것을 원형으로하여 성결케 되는 것이다.  그러면 이것으로 구원은 완성케 되는지? 아니 보다 더, 내부적인 것이 필요하다. 그것은 하나님 자신이 성령으로 우리 안에 임하여, 우리들의 영과 합체하고, 그리하여 우리를 도와 주고, 우리들의 구원을 완성시키는 일, 이것이 반드시 있어야만 한다. 실로 8장의 주제인 것이다. 하나님은 내외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7장까지는 죄로부터 칭의 사건을 통하여 성화의 과정을 통해 구속을 바라 본다면, 8장의 시작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에 몰입하기 위해서는 다시는 정죄함이 없는 본질상의 하나님의 형상으로의 회복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거룩의 최종의 목적지인 영화의 단계를 마지막으로 준비하는 단계가 반드시 필요한데 그 역할을 8장이 해주고 있는 것이다. 8장은 단순히 취급되기에 가장 난해한 부분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누구도 바울의 실존을 체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일생을 고난과 함께 십자가를 중심을 살아온 바울의 경륜을 쉽게 이해 한다고 하는 것은 큰 모순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이제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 정죄없음의 특성과 특권을 살펴봄으로서 그 의미를 명확히 하고자 한다.

  바울은 여기서 참된 그리스도인의 한 가지 주목할 만한 특권과 함께 강론을 시작하면서 그 특권을 받은 자들의 특성을 묘사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것은 우울한 한탄과 갈등에 뒤따라 오는 그의 승리이다. 이제 정죄함이 없다는 사실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모든 자들의 큰 특권인 것이다. 그리고 특성은 생활 전체를 통해서 나타나는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와 연합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이러한 특권을 얻으며 이 특성에 부합할 수 있는가? 우리가 어떻게 이 특권들 즉 칭의와 성화의 특권을 얻을 수 있는가? 그것은 "율법으로는 할 수 없다" 우리가 율법을 지키지 못했을 때 행위 언약인 율법은 아무런 대책을 마련해 주지 못했다. 율법은 우리를 유죄 판결을 내린 채로 내버려 두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그 일을 한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언약은  은혜와 공로의 보고인 것이다. 여기서 그 일은 우리를 "죄의 권세로부터 곧 죄와 사망의 법"에서부터 우리를 구출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율법에 실패한 인류를 구출할 방법을 간구하신다. 그것은 바로 자기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이다. 이 결과로 우리에게 미치는 일의 복된 결과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즉 율법을 어긴 보상을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의 전가로 하신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순종하심으로 불완전한 율법을 완성하신 것이다. 그것은 바로 사랑이 율법의 완성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사랑은 성령에 의해서 우리의 마음에 새겨질 때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이러한 특성에 부합될 수 있는가? 먼저는 우리의 마음을 살핌으로써 할 수 있다. 우리가 육신의 일을 따르는지 영의 일을 따르는지. 하나님의 은총, 영혼의 복지, 영원에 대한 관심 등은 영의 일이다. 따라서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다. 즉 영혼의 죽음인 것이다. 영혼의 생명은 하나님과의 연합과 교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육신적인 영혼은 비참이며 철저하게 죽은 영혼이다. 그러나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다. 다시 말해서 성화된 영혼은 살아 있는 영혼이며 영원한 생명과 평안의 시작인 것이다. 또한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그래서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Murray는 "하나님을 향해 원수가 되는 것은 육신의 생각의 실제적인 원리이며 지배적인 경향이다. 그러므로 율법에 불순종하는 것은 하나님을 향해 적의의 기질을 드러내 보이는 구체적 방법"이라고 말한다. 이상근 박사는 육을 좇는 자와 영을 좇는 자의 차이에 대하여 지적하는데 "유혹의 육체는 그가 살아 있는 한 범죄의 그릇이  되고 영혼의 싸움은 계속된다. 그러나 육 본위의 생활 원리에서 영 본위의 생활 원리로 결단의 선을 넘어선 자에게는 문제가 달라진다. 이 선 이전에는 육의 일을 생각하고 이후에는 영의 일을 생각하는 것이다. 여기에 육을 좇는 자와 영을 좇는 자의 차이가 있다"고 한다. 박윤선 박사는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곧 사람이 마땅히 위할 하나님을 위하지 않고 자기만을 위함을 말함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도적질 하는 것은 하나님의 원수가 하는 짓이다. 하나님에 대하여 적성행위를 하는 이유는 아주 부패하여 악의 근성이 된 까닭이다. 성령으로 중생한 사람도 부패의 잔재가 있으나 그것의 지배는 받지 않는다"고 한다. 결국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을 진노케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하나님의 영 곧 그리스도의 영이 있는지 없는지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즉 우리가 이 두 원리 중 어느 한쪽에 정복되고 굴복 한다는 의미이다. 만일 우리가 육을 택한다면 앞에서 살펴본 결과에 도달할 것이고, 만일 영에 속한다면 하나님의 성령에 인도함을 받는 것이며,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을 가졌다는 것과 똑같은 것이다. 박윤선 박사는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 이는 그리스도 신자들의 성격을 말함이니, 곧 성령으로 말미암아 중생하고 성령의 지배를 받아서 성화의 도상에 있는 자들이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영으로 사는 참된 신자들에게는 탁월한 두 가지 은혜가 있는데 그것은 생명과 양자의 영이다. 몸은 죽은 것이다. 몸은 생리적 신체를 의미하지 않고 부패의 총체를 의미한다. 신자의 몸은 갈보리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 그러나 영은 부패한 사람 속에서 생명의 역사를 한다. 그리고 영은 신자의 마음을 의미하며(10절), 그것은 義 때문에 생명을 얻는다. 여기서 義는 그리스도의 칭의의 의와 성화의 운동을 말하며,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하나님의 의이다. 그러므로 영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라(13). 여기 "영"은 성령을 의미한다. 성령의 사람은 악행을 떠나 하나님과 더욱 가까워지는 것이다. 마침내 생명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에게 속한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새로운 관계가 된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에게는 영이 존재한다. 여기 영은 성령을 의미한다. 성령의 인도에 대한 신자의 순응에 대하여,  Luther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것은 감심으로 옛 사람을 버림이다. 그것은 하나님께 합당하지 않은 것은 무엇이든지 심지어 자기 자신까지라도 유쾌하게 거부함이다. 그것은 죽음, 혹은 죽음에 소속된 것들 앞에서도 놀라지 않음이다. 그와 동시에 그것은 땅에 속한 기쁨이나 보배까지도 경히 여김이다. 그것은 보배를 자발적으로 내어버리며 재앙을 환영하며 포응함이다. 그것은 인간의 본성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고 신자의 속에 계신 성령의 역사로 되는 일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 된 자들은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는다. 그리고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 하신다. Calvin은 말하기를 "성령이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라고 증거하여 주심과 함께 우리에게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짖는 담력이 생긴다"고 하였다(Commentary upon the Epistle to the Rommans,p.313).

  그러므로 칭의와 성화의 생활을 계속하는 사람들에게는 정죄함이 결코 없다고 하는 것이 영광이라고 하는 정점을 향해 전진하는 신자들에게는 절대적인 하나님의 은혜이며 은총의 수단인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선언을 통하여 우리는 비로서 그리스도의 영, 하나님의 영인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특권을 누리며, 하나님의 인간에 기대하는 목표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3-5 영화(Glorification)  

  바울은 신자의 다섯 번째 행복 곧 미래의 영광을 누릴 수 있는 자격 요건을 말한다. 하나님의 백성을 기다리는 생명이 "하나님의 후사, 곧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라는 말로 정의되고 있다. 하나님의 후사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하나님 자신께서 그들을 위해 세워 놓으신 유업의 후사라는 사실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치만 유업의 범위는 더 광대하다. 그의 자녀들에게는 하나님 자신이 곧 유업이시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라는 사실을 생각해 볼 때 이런 사상을 지지하게 된다. 그리스도의 보상은 무엇보다 그가 아버지와 함께 영광을 받은 사실이며, 여호와께서 그의 유업의 몫이 된 사실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리스도 위에 부여된 유업을 그리스도와 함께 소유하게 된 것을 뜻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와의 연합 및 친교를 통하여 영광의 상태에서 바라본 측면이다.

  이 세상의 상속에 있어서는 이 법칙은 적용되지 않는다. 장자만 상속을 받기 때문이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모든 성도들이 상속자로서 누리는 유산이다. 그들은 무슨 공로이든지 자기들의 공로로 천국을 상속하는 것이 아니다. 순전히 하나님의 행위에 의한 상속자로서 그것을 누리는 것이다. 그들의 현재 상태란  상속을 받기 위한 교육과 준비의 상태이다.

  그리고 현재 그의 형제로서 그리스도의 영에 참여한 자들은  장차 그의 영광에 참여할 것이다. 이 장래의 영광은 현재의 고난의 보상이며 현재의 소망의 성취인 것이다. 바울은 로마의 형제들에게 그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았으니 또한 틀림없이 그와 함께 영광을 받을 것이라고 말하며, 그는 현재의 고난과 장래의 영광을 비교하는데 저울을 사용한다. 그리고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은 현재 상태에서 그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 그 영광은 장차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한다는 대립적 개념을 역설한다. 즉 그의 고난에 동참이 없이는 영광에의 동참도 없다. 고난과 그 후의 영광은 그리스도 자신을 위해 정해 놓은 순서이다. 그리스도의 메시야적 계획과 고안에는 이런 순서 외에 다른 것이 있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순서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에게도 적용된다. 그리고 이런 연합적 참여는 영광의 경우처럼 고난의 경우에도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신자들이 속죄, 화해, 화목, 그리고 구속의 달성을 위해서 기여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의 죄과를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지우셨고,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하나님은 세상을 자기 자신과 화해케 하셨다. 즉 그리스도만이 그의 피로 우리를 구속하신다.

  박윤선 박사는 로마서8:17절은 "우리가 현세에서 고난을 받은 값으로 장래에 영광을 받는다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와 우리가 일체임으로 동고동락하게 되는 사실을 가리킨다."

  Butler는 말하기를 "우리의 이 세상 생활이 캄캄할수록 영생은 더욱 명랑해진다."고 하였다. 그렇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고통을 많이 당하면 당할수록, 성령의 위로와 감화의 역사가 더욱 강화된다. 그런데 여기서 "그와 함께 영광을 받는다" 함은 부활의 영광을 가리키지만 죽은 후의 천국 생활도 가리키는 것이다. 이유는 바울은 자기가 별세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있음을 영광으로 알았기 때문이다.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바울은 여기에서 "생각건대." 이 말의 헬라어 원어          는 상상이 아니고 구체화한 확신을 말한다. 이것은 이 세상 고난보다 내세의 영광이 말할 수 없이 큰 사실을 확실성 있게 여긴다.

  그러나 Murray는 로마서8:18절의 "현재"는 앞으로 다가올 시대와는 대조를 이루는 "이 시대" "현 세대"인 것이다. 앞으로 다가올 시기는 부활과 영광이 나타날 시기이다. 여기서의 대조는 죽음에 앞서 이생에서의 한 신자가 격어야 하는 고난과, 그가 죽어서 들어가는 지복과의 대조가 아니다. 여기서 생각하고 있는 영광은 부활의 영광이며 장차 볼 세상의 영광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이라고 언급되어 있다. 그리고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다" 이것은 소망의 목적을 의미한다. 즉 피조물이 해방되는 소망이다. "썩어짐의 종노릇"은 부패의 종노릇을 말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 안에 존재하는 자유이다. 따라서 이 자유는 썩어짐의 종노릇과 현저한 대조를 이룬다. 그리고 여기 "영광"은 17,18절에 제시된 그 영광이다. 그러므로 피조물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부여될 영광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은 피조물도 포함하는 영광이며, 우주적 갱신과 무관하게 생각할 수 없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영광은 만물의 회복과 관계된 것이다. 그리고 기대와 소망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라는 목적을 기대한다. 그리고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돕는다.하나님의 백성들을 현재의 고난과 탄식 가운데 버려두지 않고, 영광을 바라보는 신자들의 필요를 따라 구체적으로 간구해 주시는 것이다. 그리고 로마서8:28,29절은 하나님의 영원하고도 초현세적인 경륜을 다루고 있다. 28절의 뜻은 29절에서 예지(豫知) 및 예정(豫定)의 용어로 설명되고 있다. 그런데 예정은 구원 경륜의 최종 목표를 정의하고 있다. 30절은 우리에게 현세적인 영역을 소개하며, 그 영원한 경륜이 하나님의 자녀들 가운데 실제로 결실되는 행위를 가리킨다. 여기에 세 가지 행위가 언급되는데 소명, 칭의, 영광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구속사의 정점적 표현으로 로마서8:31-39절에서 영광에 대한 개가를 부른다. Godet는 이것을 "구원의 확실성에 대한 찬미"라고 격찬하였다.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의인, 그리스도의 중보를 들어 신자들의 미래의 구원의 확실성을 댓귀법을 사용하여 고조시키고, 확고한 구원의 개가를 부른다. 결국 이 사상은 로마서8:18절로 돌아가 현재의 고난과 미래의 영광을 비교하고, 현재의 가지가지의 고난이 미래의 영광을 빼앗지 못한다는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

  논자는 이제까지 구속의 개념과 구속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속의 경륜을 성숙에 도달하는 하나의 과정으로 이해하고, 그런 관점에서 본 연구를 진행해왔다. 그렇기 때문에 제4장에서 다루게 될 구속받은 성숙한 신앙의 삶은 본 연구와 무관한 느낌을 주는 듯 하지만, 논자는 죄로부터 구원 받았다는데 머무르지 않고, 한 걸음 더 진보하여, 구원받은 성도들의 실천적인 삶의 방식을 통하여, 결실하는 바울의 구속사를 이해하는 것을 목표로 구속사의 연장선에서 제4장을 다루고자 한다.

 


제4장 구속받은 성숙한 신앙의 삶

 


  바울은 앞에서 신앙의 본질적인 구속의 측면을 다룬 후에, 이어서 신자들의 실천적 삶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즉 신앙과 현존의 삶이 공존하고 있기 때문에 신앙을 떠난 삶, 삶을 떠난 신앙은 현재라는 현존에서 서로에게 필요 충분조건을 충족시켜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현존의 삶의 현장에서 즉 현재의 시점에서 이미 구원을 선취하셔서 살았던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구원은 이미 성취된 것이며, 우리는 이 구원의 은총 안에서 하나님의 신민으로써 뿐만 아니라 우리의 현존 세계에서 백성으로서의 의무와 책임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구원받은 성도들이 나아가야 할 길이며 열매 맺는 생활인 것이다. 따라서 먼저 세상 백성으로서 구속받은 성숙한 신앙인의 삶을 살펴 보고, 다음으로 천국 시민으로서 구속받은 성숙한 신앙인의 삶을 고찰하므로써, 현존에서의 신앙인의 삶의 자세를 확고히 하는 기초를 제공하고자 한다.

 


  4-1 세상 백성으로서

  우리는 지금이라는 현재에 존재하는 인간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현재를 벗어날 수 없으며, 세상의 권력의 주체이며, 우리의 삶의 울타리인 국가를 벗어날 수 없다. 우리가 속해 있는 현실이 설령 참혹하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것을 부인 할 수 없으며,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가 처해 있는 삶의 환경에서 신앙을 통하여 이와 같은 요소들을 극복해야만 하는 것이다. 우리는 세상이라고 하는 영역에 속해 있으며, 지역적으로 국가라고 하는 민족의 공동체 속헤 존재하며, 작개는 가정이라고 하는 환경속에 내(吾人)가 존재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세상 권세에 대하여, 개인의 삶에 대하여 신자로서 뿐만 아니라 국민으로서의 의무와 책임이 있는 것이며, 특별히 신자로서 빛과 소금의 삶을 통하여 이 세상에서 사명을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이 세상에서도 이루어지게 하는 것이 신자로서, 세상에 속한 백성으로서, 구속받은 성숙한 신앙의 삶을 사는 것이다.

 


    4.1.1 세상 권세에 대한 의무와 책임

  우리는 이제 관원들과 우리를 다스리는 권세자들에 대해 어떻게 처신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알게 될 것이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리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림이니 거스리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 관원들은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나니 네가 권세를 두려워 하지 아니하려느냐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그에게 칭찬을 받으리라. 그는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네게 선을 이루는 자니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위하여 보응하시는 자니라. 그러므로 굴복하지 아니할 수 없으니 노를 인하여만 할 것이 아니요 또한 양심을 인하여 할 것이라. 너희가 공세를 바치는 것도 이를 인함이라 저희가 하나님의 일꾼이 되어 바로 이 일에 항상 힘쓰느니라.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공세를 받을 자에게 공세를 바치고 국세 받을 자에게 국세를 바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

  Murray는 말하기를 "바울은 합법적인 권위에 대하여 복종할 것을 말한다. 우리가 정부 당국에 순종해야 한다는 의무는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로마서 13장 1절-7절에서 그리스도인들이 행정관의 손에 의해서 고난을 받거나 또는 행정관에 의해 적절하게 보복당하는 문제 등을 다루고 있는데, 앞에 기록된 본문이 나타난 이유를 이런 것들과 관련해서 인위적으로 찾아보려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로마서13:1-7절은 신자들의 생애와 증거에 영향을 끼치는 매우 중대한 관계가 있다. 그래서 바울이 이러한 관계를 다루어야 할 이유가 있는 것이다. 바울은 당시 로마 교회의 신자들에게 관원의 대권과 백성의 의무에 대해서 교훈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고 하였다. 박윤선 박사는 로마서13:1-7절은 "정부에 순종할 것을 말하는데, 여기서 우리가 발견하는 원리는, 신본주의 윤리이다. 곧 정권 순종의 이유는,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이 정하셨기 때문이다(1절). 물론 정권만이 하나님이 정하신 바는 아니다. 신약 성경에 의하면, 인류 사회에 모든 필요한 제도는, 모두 다 하나님의 제정하신 것이다. 만일 침해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권위를 침해함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권세에 대한 순종의 요청은, 모든 다른 사회 생활 분야의 자유를 무시하는데까지 이르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이것은 정권이 하나님을 반역하는 일을 명령할 때에도 무조건적으로 순종하라는 의미가 아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하나님의 계명과 위배되는 정부의 시책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순종을 거절할 수 있다. 그러나 정치 문제에 있어서는 신자가 개인적으로 폭군이나 정권을 반역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Calvin은 "다만 공무원이나 혹은 부속 관원들이 폭군이나 혹은 기타 집권자의 방종을 막으려고 합법적으로 운동할 때에, 기독 신자도 가담할 수는 있다" 그리고 "우리 국가를 폭군에게서 건져내는 것처럼 아름다운 일은 없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정치 권력이 하나님 앞에서 신성하고 정당할 뿐만 아니라 유한한 인생에게 있어서 모든 면중 가장 존중할 만한 것임을 아무도 의심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러므로 통치자들은 하나님의 섭리와 보호와 은혜와 인애와 공의의 어떤 형상을 자신에게 再現해야 한다. 그리고 국민은 집권자들을 하나님의 사자로 알고 저들의 권세를 존중히 여기며 정부가 합법적으로 하는 일에 대하여 정부가 국무를 정당하게 집행하는데 있어서 국민이 반드시 순종해야 하며 정부를 위하여 봉사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상근 박사는 "사회생활의 첫째 문제는 역시 국가적 권세에 대한 의무이다. 먼저 원리적으로 권세에 복종할 것을 권하고 그 이유로서 권세가 하나님의 정하신 바인 것과 하나님의 인간 지배의 사자로서 상성벌악하는 것을 든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국가에 대한 각종의 의무를 열거하며 권장하고 있다. 같은 사실은 웨스터민스터 신경에도 계승되었고 그것은 모두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마22:21) 하신 그리스도의 교훈에 입각한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국가에 대한 태도는 흔히 좌우에 치우쳐 성서의 근본 정신을 그룻 반영하였다. 바울 당시에도 헤롯당 같은 것이 있어 권세에 아부하며 타락한 것은 그 한가지였고, 정면 항거했던 열심당, 소극적으로 도피했던 옛세네파 등은 다른 한 경향이다. 이런 태도에는 참된 그리스도교의 윤리는 있지 않다.

  Matthew Henry는 "우리 머리 위에 권세를 가지고 있는 자들을 가리켜 '위에 있는 권세들'이라고 부르는 것은 왕과 그 밑에 따르는 모든 권력자들의 권위와 위엄을 두고 하는 말이다. 공의로운 권세는 복종하고 순종해야 한다. 그리고 임무 부과의 이유는 기독교 신앙이 이 세상에서 사회 안녕과 질서, 정부에 원수요, 가이사의 원수요, 공적 권세에 대해 달리 생각을 품기 쉬운 유혹 때문이다. 따라서 바울은 이러한 증상을 제거하기 위해서 공적 권세에 순종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율법의 하나라고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임무 실천의 이유로,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신앙 때문에 권세자들의 칼을 받기가 쉬웠는데 그들의 반역으로 이걸 더 악화할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우리는 양심을 위해서 복종해야 한다. 이것이 일반 공공 임무를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아들이는 이유이다.

  이제 우리의 신앙의 양심으로 하여금 세상의 권세에 복종케하는 의무와 책임을 위한 몇 가지의 이론을 전개하면 다음과 같다(로13:1-6).

  첫째로, 권력의 제도적 측면에서.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권세'라는 말은 보다 문법적인 번역으로서, 이에 관련된 사람들에게 속하는 통치권을 가리키며 또 백성들편에서 요청되는 순종을 가리킨다. 바울이 편지를 쓴 당시에는 정부의 통치권은 로마 정부에 의해 행사되고 있었으므로 따라서 여기서는 정부의 집행자를 직접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제기되는 문제는 '권세'가 인간 정권자 배후에 있는 불가시적 천사의 능력을 가리키고 있느냐는 것이다. Oscar Cullmann은 이 경우에서 권세라는 말은 이중적인 언급, 즉 천사적 능력과 인간적 집행자 양자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그리고 이상근 박사는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이 어조는 현정권을 부정하려는 경망한 태도에 대한 경계조가 보인다. 권세가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는 것은 성경에 일관된 사상이다. 그러므로 주권자를 위해 기도하는 것은 신자의 가장 신성한 의무로 생각되었던 것이다.

  또한 박윤선 박사는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이것을 구약의 인용절 단2:21, 4:25, 사10:5-6절 등을 보면, 모든 정권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것이 확실하다고 주석한다.

  그리고 우찌무라 칸조우는 로마서13장1절은 이 세상의 정치적 권능에 복종하라는 권면이다. 그 이유는 이 세상의 정치적 권능이라 해도 모두 하나님께서 세우신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하나님께만 복종하고 세상 권세에는 복종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는 자들을 경계하기 위한 권면이다. 그리고 이 권능에 복종은 질서이며 평화이다. 따라서 이 국권 복종의 근저에 놓여 있는 것은 그리스도적 사랑의 대정신이다. 바울의 로마 정부에 대한 태도는 복종을 권한 것이다. 이것은 그의 박애의 정신에서 나온 것이다. 제국도 하나님의 섭리중에 나타나는 것이다.

  둘째로, 권력의 의도적인 측면에서. "관원들은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나니" 이 말씀은 복종의 대상이 되는 정권의 성격을 밝혀 준다. 우리가 복종할 만한 정권은 그 원칙에 있어서 악을 방지하고 선을 장려하기 위하여 보복을 정당하게 실시하는 정권이다. 그리고 권력은 악한 행위와 악인들에게 무서운 존재이며, 선을 행하는 자들에게는 칭찬이다. 그리고 여기서 집중되고 있는 사상은 악행에 대한 형벌이며, 정부 관원들의 행위이며, 우리가 국가의 구성원으로 봉사에 의해 취할 수 있는 선에 대한 중대한 정의를 마련해 준다. 즉 국가 관원이 촉진하고 있는 선은 경건의 유익에 도움이 된다. 따라서 우리는 양심을 위해서 거기에 복종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이런 것으로부터 얻는 유익의 측면에서. "그는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네게 선을 이루는 자니라" 우리는 정부의 혜택을 받고, 보호를 받는다. 그러므로 우리가 정부에 충성을 하고 복종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이며 책임인 것이다. 우리가 공세를 바치는 것도 이것 때문이다(6절). 곧 양심에 따라 복종과 감사의 표로 바치는 것이다. 우리가 공세를 바치는 것은 마치 축복과 혜택을 돌려 받을 것을 알고 빌려 주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이것을 배워서 실천해야 한다.

  박윤선 박사는 "국가의 명령이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 아닌 한, 신자들은 그것을 하나님의 내신 제도인 줄 알고 관원의 감시가 있든지 없든지 성의 있게 복종해야 한다. 그리고 공세는 인구세로, 국민으로서 나라의 유지를 위해 세금을 잘 바쳐야 한다." 그리고 권세에 복종하는 구체적인 길은 공세를 바치는 것이다. 즉 국가에 대한 양심적 순종의 증거로 납세의 의무와 책임을 충실히 수행하는 것이기 대문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 속한 현존을 경시하지 말고 세상의 권세와 정치를 무용한 것으로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공의와 평화를 보증하는 자로서, 확립된 정부를 존중하고, 성실로써 사랑하며 복종해야 한다. 이 복종은 하나님께 복종하는 마음의 자세로 복종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만약 국가의 권력이 부패한다면 인내하며, 모든 사람을 위해 기도하며, 중보하고, 감사함으로 복종해야 한다.

 


   4.1.2 개인의 삶에 대한 의무와 책임

  바울은 로마서 12장 9절-21절에서 모든 신자들이 준수해야 하는 공통적인 의무와 책임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즉 개인이 실천해야 할 사랑 (우애, 열심, 소망, 인내, 기도, 자선, 관용, 미덕)을 중심으로 개인의 삶에 대한 의무와 책임을 살펴보려고 한다.             

  사랑. 이것은 도덕에 있어서 요긴한 것이다. 사랑만 있다면 그것은 계명 전부를 지킴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제일 결핍된 것은 참된 사랑이다. 사람들은 제각기 남을 사랑한다고 하지만, 실상은 남을 사랑한다는 명목으로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랑은 참 사랑이 아닌 거짓 사랑이다. 세상을 향한 신자로서의 가장 중요한 의무가 있다면 논자는 서슴치 않고 거짓이 없는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라 말할 것이다.

  "사랑엔 거짓이 없나니"(12:9절) 같은 교훈이 고린도 후서 6장 6절에는 "거짓이 없는 사랑" 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사랑은 그리스도교 전체의 윤리를 표시하는 낱말이다. 일역 성경에는 "사랑은 거짓이 없도록 하라. 악은 미워하고, 선은 가까이 하며, 형제의 사랑으로서 서로 사랑하고, 예의로써 서로 양보하라"(롬12:9-10)고 되어 있다. 그리고 사랑은 전적인 사랑이다. 가면적 또는 얕은 사랑은 악을 증오할 줄을 모른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깊고 참된 사랑이다. 하나님께 대하여 진리에 대하여 열애를 품고, 또 사람에 대하여서도 깊은 사랑을 가졌던 것이다. 참된 사랑은 악을 미워하고 선을 강하게 사랑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랑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표시하는 "믿음"과 대응된다. 그리고 이 사랑 "     "는 그대로 믿음의 이면을 말한다. 아가페는 부단히 하나님께로부터 받고 사람에게 주기 때문이다. 이와 대조되는 사랑 "    "는 인간적인 것으로 이웃 관계로서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

  서로에 대한 우리의 모든 의무는 달콤한 한 마디 곧 사랑이라는 말로 요약된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 말을 제일 먼저 언급한다. "사랑에 거짓이 없나니" 진정한 사랑은 거짓이 있을 수 없다. 이 말은 아첨이나 겉치레가 아니라 실제로 사랑하라는 말이다. 사랑에는 "벗들에게 베풀어야 할 사랑과 원수들에게 베풀어야 할 사랑"이 있다.

  첫째로, 우리의 벗들에 대하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서로가 빚지고 있고 갚아야 하는 상호간의 사랑이 있다. 정다운 사랑은 "형제애를 가지고 서로 사랑하라(새번역), 육친의 사랑으로 서로 다정하게 대하며"(표준새번역), 이것은 부모의 자식에 대한 사랑과 같은 것이니 더 없이 부드럽고 더 없이 자연스런 사랑이다. 이러한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더없이 겸손하고 공손하게 말과 행동으로 우리 자신을 나타내게 한다. 그리고 존경하는 사랑은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이것은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는 말씀으로 설명될 수 있다. 우리는 사람을 대할 때에, 그의 재능이나 소유물에 의하여 그를 잘못 평가한다. 사람의 가치는 그의 재능이나 그의 소유물에 있는 것이 아니고 그의 영혼에 있다. 한 영혼은 천하보다 귀한 존재이다. 그리스도께서 그 한 사람의 영혼을 위하여 피 흘려 주신 것이다.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아니한다. 예의를 겸전한 사랑만이 오래도록 지속하며 결실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은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란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는 생활을 하도록 한다. 그리고 풍성한 사랑으로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손 대접하기를 힘쓰라"고 말한다. 여기에 사랑의 구체적인 실천 방법이 두 가지 제시되어 있다. 교회 내부의 어려운 교우를 돕는 일과 지나가는 나그네의 대접이다. 유무상통은 초대 교회의 미덕이다(행2:44). 시대와 생활 방식의 변천에 따라 그 방법은 변할지라도 그 사실만은 지속되어야 한다. 특히 "공급하며(        )"는 ' 를 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가진 자들은 필요로 하는 자들에게 "공급"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바울은 빌립보 사람들이 자신에게 베푼 사랑을 그는 자신의 고통에의 동참이라고 부르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능력과 기회가 주어지는 대로 궁핍한 자들을 도와주고, 짐을 덜어 주어야 할 뿐만 아니라 그런 사람들과 동거동락할 의무가 우리에게 있는 것이다. 그리고 동조적인 사랑, 연합된 사랑 또는 통일된 사랑, 공손 또는 겸손한 사랑,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롭게 사는 사랑이다.

  둘째로, 우리의 원수에 대한 사랑을 보면,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 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라." 결론적으로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이는 우리가 선한 것에 대한 선택과 진지한 애착 그리고 그 안에서의 부단한 인내를 표시한다. 그리고 우리가 감정을 이길 때에, 원수의 악독이 역시 감소되고, 그 원수는 점차로 친구로 변화 되어질 수가 있는 것이다.

  이상에서 논자는 세상 백성으로서 실존의 삶의 문제를, 그것도 현재라는 시점을 염두에 두고 구속 받은 사람이면서 동시에 현존 세계에 속해 있다고 하는 차원에서, 그리고 사랑의 실천적인 덕목을 중점에 두고 성화의 길을 통하여 구원을 이루어 가는 한층 성숙한 삶의 차원을 심층적으로 고찰하여 보았다.      다음으로 천국 시민으로서 교회 중심의 성숙한 신앙의 삶에 대한 의무와 책임, 하나님 나라의 복음 선포, 성령의 열매 등을 살펴보려고 한다.   

 


4-2 천국 시민으로서

  논자는 앞에서 구속받은 성숙한 신앙의 삶에 대한 세상 백성으로서의 실천적인 삶의 태도로서 사랑을 실천할 의무와 책임이 있는 인간 실존의 문제를 취급하였다. 여기에서는 현존의 삶 속에서 미래의 천국 시민으로서의 선취된 실존의 삶의 모형으로써 교회 중심의 의무와 책임, 하나님 나라의 복음 선포, 성령의 열매 등에 대하여 천국 시민으로서의 기본 자세에 대하여 논하려고 한다.

 


4.2.1 교회 중심의 의무와 책임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신앙 공동체에 속하여 신앙의 성장을 위하여 노력을 한다. 그리고 가시적인 교회 또는 불가시적인 교회를 중심으로 하나님을 경배하며 봉사와 교육과 연보로 신자의 교회에 대한 의무와 책임을 수행한다.

  첫째로, 예배에 대하여. 진정한 의미에서 예배는 하나님께 대한 신자들의 의무이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우리는 먼저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이것이 여기서는 우리의 신앙의 모든 의무와 순종의 원천으로 강조되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롬12:1). 이 몸은 희랍어     인데, 이 몸은 인간의 생리적 신체를 의미한다. 그리고 여기서 영혼 없는 몸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 말이 여기서 가르치는 것은 신자들이 이상으로만 하나님 봉사를 꿈꾸지 말고, 몸으로 거룩되이 구체적 생활을 가져야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몸은, 과거에는 더러움의 기계가 되었으나(롬1:24), 이제는 성결의 생활을 위한 기능을 한다. 이제 이 몸은 그리스도의 지체이며, 성령의 전으로서, 거룩한 제물이 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는 "거룩한 산 제사"인 것이다. '산 제사'는 구약의 죽은 제물, 즉 레위기의 규례를 따라 제단에 죽여 바친 제물의 상대되는 것이다. 신자의 생애가 그대로 하나님께 제사가 되리라는 뜻이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몸을 하나님께 제물로 드린다. 진심으로 하나님께 바쳐진 몸이 곧 산 제물이다. 그리고 몸을 산 제물로 만드시는 분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 영혼 속에 살아계시는 그리스도이시다(갈2:20). 거룩한 사랑이 제물을 불태우며 의무에 활기를 불어 넣어 준다. 살아 있다는 것은 곧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있다는 말이다(롬5:11절). 그리고 제물은 하나님께 드려진 것이기에 상대적인 거룩이다.그러나 우리 마음과 생활이 강직하며 마음과 몸이 하나님의 성품과 뜻에 일치 하는 데서 찾을 수 있는 그러한 진정한 거룩이 뒤따라야 하는 것이다. 참으로 성전의 그릇들이 하나님께 바쳐져 거룩하듯이 하나님께 구별되어야 한다. 거룩의 주체는 영혼이다. 그러나 성화된 영혼은 몸에 거룩을 가져다 준다. 몸의 행동이 거룩하면 그 몸도 거룩한 것이다. 이 몸은 "성령의 전"(고전6:19)이니 만큼 "몸을 성결하게 간직해야 한다"(살전4:4,5). 우찌무라 칸조우는 이것을 "하나님의 뜻에 합한 산 제물"이라고 한다. 그리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희생 제물은 하나님이 거룩하시니 거룩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희생 제물은 산 것이라야 한다. 이 점에서 신약의 희생 제물은 구약의 그것과 다르다. 구약에 있어서는 소나, 양이나, 염소는, 잡아 화제로서 여호와 앞에 드려졌으나 신약에 있어서는, 신자는 그 몸을 산채로,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즉 신자는 살아서 선행의 선한 열매를 맺는 희생 제물로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며, 거룩하신 하나님의 거룩한 그릇으로 쓰이기 위한 희생 제물인 것이다. 성화된 몸과 영혼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다. John Murray는 바울은 '몸'이란 말을 온 인격을 대표하는 데에 쓰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산 제사로 바쳐야 할 것은 죄의 몸이나 범죄한 몸은 아니다. 로마서6:13절은 이것의 부록으로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려라." 신자가 드려야 하는 것은 죽음에서 살아난 몸이다. 그리스도의 속죄로 말미암아 죄의 몸이 멸했기 때문에 죽음에서 살아난 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드려야 할 몸은 그리스도의 한 지체며 성령의 전이다(고전6:15,19).

  그리고 예배는 영적인 것이다. 이 예배는 이성의 행동이 요구된다. 몸을 바치는 것은 영혼이기 때문이다. 너희의 영적 예배란 말씀은 희랍어인데, 이것은 '말씀에 입각한 너희의 예배'라고 읽을 수도 있다. 말씀에 입각한 예배라야만 하나님께서 기쁘시게 받으실 만한 예배인 것이다. 이것이 복음적인 예배요 영적인 예배인 것이다. 하나님은 이성적인 피조물로서의 우리를 상대하고 계신 만큼 우리 또한 그런 신분에서 하나님과 대면하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바울은 이 말을 다른 곳에서는 결코 사용하지 아니했고, 여기서만 이 분명한 용어를 쓰는 데에는 어떤 이유가 분명히 있다. 여기서 말한 예배는 경배적 예배이다. 바울은 그것을 합리적이라고 특징짓는다. 그 이유는 그것이 우리의 정신과 지성을 열거하고 사실로 보아 하나님께 합당한 성질을 이끌어 오고 있는 예배이기 때문이다. 이 예배는 기계적이고 자동적인 것과는 대조적인 합리적인 예배이다. 이처럼 우리의 몸과 영혼이 하나님께 드려져야 한다. 이것이 천국 시민으로서 하나님께 대한 신자들의 의무이며 동시에 책임인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이 부르시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응답하며 그 응답에 책임을 지는 존재이다.

  둘째로, 봉사에 대하여. 우리는 하나님께 자신을 드린 후에 그분을 섬겨야 한다. 우리는 "오직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나눠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롬12:3),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롬12:6-8), 하나님을 섬기며 봉사해야 한다.

  그런즉 우리는 이제 마음 속에 생각하고 있는 재능, 은혜, 직분, 믿음에 관한 다양성을 인식해야 한다. 이러한 다양성은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서 성화에 관련된 지침(指針)을 보게 된다. 바울은 자신의 사도직임에서 그에게 수여된 특별한 은혜를 언급하고 있다(롬1:5, 15:15,16, 고전3:10, 15:9,10, 갈2:9). 바울은 적절하게 이 은혜를 활용했다. 그리스도의 몸의 통일성 안에서 다양성을 인식케 하며, 질서와 조화 유지 및 맡은 바 직분을 행해 내는 지침을 내릴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하나의 과정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는 많은 지체가 존재한다. 인간의 몸은 지체 자체의 특수한 기능을 지닌 많은 지체를 소유하고 있다.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롬12:5). 그리스도 안에서의 한 몸으로서의 교회에 대한 개념이 나타난다. 다시 말하면 지체는 많으나 그 지체들이 동일한 기능을 이행해 내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신자의 공동체 속에 투입하려는 것이다. 지배적인 사상은, 곧 피차 의존의 조화 속에서 믿음의 분량에 따라 역사되어지고 있는 은사와, 직분의 다양성이 표현양식을 결정하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에 따라 분배해 주셨던 성령의 모든 은사들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봉사로 나타난다.

  따라서 그들은 피차간의 은사 및 은혜를 공유하고, 다양성은 각 지체들을 부요하게 한다. 초대 교회의 공동체는 철저하게 분배가 이루어진 공동체이다. 그리고 신도들은 자신이 받은 은사에 따라서 교회를 중심으로 봉사하는 생활을 통해서 자신들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에 헌신적으로 참여 하였다. 그러므로 시대와 환경은 다르다 할지라도 현재를 살고 있는 신자도 자신이 받은 은사와 믿음의 분량 대로 천국 시민으로서 하나님의 교회를 중심으로 봉사해야 할 의무와 책임이 자율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일을 거절하는 것은 내 속에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 조심해야 할 문제는 믿음의 분량이다. 어떤이는 5달란트, 혹은 2달란트, 혹은 1달란트의 분량이다. 교회생활에서 빠지기 쉬운 과오는 자기의 받은 은사를 과대시하고 남의 것은 무시하는 데서 일어나는 신앙적 교만이다. 여기에서 교회의 분규와 혼란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을 품지 말고 -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를 가지고, 각자가 자기의 본분을 지키는 겸손의 미덕이 필요하다. Augustine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첫째 중요한 것은 겸손이요, 둘째 중요한 것도 겸손이요, 셋째 중요한 것도 겸손이다"고 했다. 진정한 아름다움 봉사는 자기를 나타내지 않는 겸손에 있다.       

  셋째로, 교육에 대하여.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오직 한 번 교육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그것은 디모데 후서 3장 16절에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신자들의 교육을 위한 택스트를 바울은 성경에 기초하고 있다.

  현대 사회는 교육의 홍수 시대라할 수 있을 정도로 각종 교육이 다양성을 띠고 이루어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신학 교육에 있어서도 다양하게 폭넓은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리고 교회에서도 각종 교육 프로그램을 통하여 교육하는 행위가 이루어지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처럼 다양성을 띤 교육이 학교에서 교회에서 가정에서 사회에서 이루어지고는 있지만 우리의 신앙 생활에 새로운 변화를 주지 못하는 것이 심각한 문제이다. 그리고 현대인들은 교훈, 책망, 바르게 함, 의 등을 말하면 잘 받아 들이지 못하는 것이 특징이다. 오직 자기와 직접 관련이 없으면 접하려 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천국 시민으로서 하나님의 백성된 신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택스트로하여 신앙의 질적인 성장과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자질을 갖추기 위하여 자신에게 부여된 교육을 받을 권리로서의 의무와 책임이 있는 것이다. 우리는 알고 있는 것만큼 믿을 수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성화의 성숙은 교육적인 과정을 통해서 완성되어 가는 것이다. 교육은 우리의 신앙을 윤택하게 하며 하나님의 구속받은 자녀로서 하나님의 목표에 도달하게 하는 지름길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신앙의 기초 교육은 매우 바람직하며, 신자들은 더 나은 교육을 받을 권리를 포기해서는 안된다.

  넷째로, 연보에 대하여. 바울은 연보에 대하여 고린도 전서에 2회, 후서에 5회 언급하고 있다. 바울은 성도를 위한 연보에 대하여 언급한다. 바울은 유대에 있는 교인들의 고난과 빈곤을 도울 특별한 연보를 걷도록 권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이 권면을 하면서 신중하게 갈라디아 교회를 언급한다. 이것은 교회 간의 경쟁을 피하면서 그들이 자유롭게 연보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연보하는 방법은 모든 각 사람이 얻은 대로 저축하여 두는 것이다.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내려 주신 축복의 결과이다. 따라서 연보금은 하나님께서 축복 하신 대로 하면 된다. 그리고 연보를 하는 때는 매주일 첫날에 즉 주의 날에 한다. 이 날은 거룩한 안식일이다. 이 날의 모든 일은 자비의 실천에 집중된다. 자비의 일은 하나님께 대한 참 사랑의 열매이다. 바울은 그가 갈때까지 모든 것이 준비 되기를 원했다. 이처럼 준비된 연보는 고난 당하는 형제에게 사랑을 더 잘 전할 수 있는 방법이다.

  그리고 바울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연보에 동참할 것을 권면한다.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이 마게도냐 교회들의 관대함을 알개 한다. 마게도냐 사람들은 그들이 곤궁한 처지에 있으면서도 사랑으로 구제하는데 동참을 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자원하는 마음으로 넘치게 연보를 하였다. 마게도냐 교회의 신자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연보를 드렸다. 이 교훈을 들은 고린도 교회의 신자들은 거액의 연보를 가난한 사람을 위하여 드렸다. 그리고 바울은 약속한 연보를 미리 준비하도록 권면하는 것이 필요한 줄로 알고 미리 준비케 한다. 이것은 연보가 억지가 아니라 참 연보답게 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모든 일에 부요하여 너그럽게 연보를 함은 저희로 우리를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복종하는 것과 저희와 모든 사람을 섬기는 너희의 후한 연보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다.

  논자는 연보의 본래적 의미를 바울 서신을 통하여 볼 수 있었다. 이와 같은 연보는 시대를 초월하여 현재 우리 시대에서도 장려되어야 한다. 교회가 고난 당하는 자기 민족을 외면하고, 가난한 이웃을 돌아보지 못한다면 참 불행이 아닐 수 없다. 교회가 자교회 성장에만 관심을 치중하지 말고, 이제라도 바울 서신을 통하여 볼 수 있었던 것처럼 고난 당하며, 가난한 이들을 위하여 연보를 하고, 우리 주변에 소외된 민중들을 구제하는 일에 앞장서는 것이 천국 시민의 의무이며 책임이 아닌가? 이제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구속받은 천국의 시민으로서 자부심을 가지고 실천이 요구된다.

  이제까지 교회를 중심으로 하는 천국 시민의 의무와 책임에 대해 실천적인 측면에서 예배의 기본적 의미와 봉사와 신앙 교육 그리고 연보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이제 하나님 나라의 복음 선포에 대하여 선교적인 측면에서 다루어 보려고 한다.

 


    4.2.2 하나님 나라의 복음 선포 

  "성경은 전 세계가 하나님의 피조물임을 설명한다. 또한 하나님이 전 세계     의 창조주 사상과 하나님이 전 세계의 통치자이기에 하나님을 숭배한다. 그     리고 이스라엘의 구별은 만민에 대한 관심을 배제한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     의 주변 이방인들은 그들의 신들이 자기 나라 속에 성육되어 있는 것으로     본다. 이스라엘 역사는 주변 국가들의 눈 앞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표     본적으로 역은 것이다." 모든 것이 하나님 중심적이다.

  바울이 선교를 시작하면서 가장 중점을 둔 것은 세계화다. 유대교가 유대 지역적 한계를 가지고 또 유대 문화적 한계를 가지고 그것을 고집하고 있었지만, 바울은 그것을 과감하게 탈피하여 복음을 세계화하려고 했다. 원그리스도 교회의 어떤 선교자도 자신의 목표를 그렇게 넓게 정하고 복음을 사람이 사는 세계의 끝까지 전하려고 하지 못했다. 바울은 그의 희심 이후 선교사로서 이방인들 사이에서 활동을 했었다. 바울은 아직 그 자신의 활동은 세계적으로 확대되는 기미를 보여주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에게 확실한 것은 늦어도 소아시아 지방 이래 또는 마게도냐 지방을 통해 데살로니가에 이르는 도중에서 로마가 먼 목표로 그에게 떠올랐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시사해 주는 것은 후에 쓴 로마서에서의 자신의 진술이다. 즉 그는 이미 오래 전에 로마에 가서 그곳에서 복음을 선포할 것을 계획했으나 방해를 받아 왔다(롬1:13, 15:22)는 것이다. 바울의 기본 신념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이미 전해진 곳에서는 설교하지 않는다는 원칙이 있었다(롬15:20, 고후10:15,16). 그러나 로마는 그에게 서방을 향한 그의 더 넓은 선교 여행을 위해 주요한 곳으로 남아 있었다(롬15:24,28). 바울의 선교 계획들은 스페인에 이르는 전세계를 자신의 선교에 맺어 놓으려는 의도가 있다. 그는 반복해서 '온 땅'(롬10:18), '땅 끝'(롬10:18), '모든 백성'(롬15:11)에 관해 말하고 있다. 바울로 하여금 이 거대한 구상을 하게 한 근거는 십자가에 달린 자, 즉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다. 그가 도래하여 그의 주권을 신에게 넘겨줄 때 신은 그를 만물의 主로 높이고 그의 주권은 임박한 종말까지 지속된다는 신념이 있었다(롬15:16, 고전15:24, 고후2:14). 바울의 독특성은 철저한 종말 의식과 위기의식을 가지고 복음의 세계화를 추구한 것이다. 바울이 主에 관해 말할 때는 언제나 그는 예배에 모이는 개체 교회의 主일 뿐만 아니라 전 우주의 세력들의 主이기도 하고(빌2:6-11), 부활하여 올리움으로 죽은 자와 산 자들의 主가 되었다(롬14:9)고 하는 것을 의미한다.

  바울이 복음의 세계화를 추구하면서 당장 부딪치게 된 것이 바로 토착화의 문제이다. 유대 문화권에서 출발한 기독교가 이질 문화권에 들어가서 그들의 문화에 복음을 이식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바울은 전통적, 묵시적 사상 체계로 복음을 해석하지만, 문화의 이질적 요소를 극복하기 위해 복음을 해석학적으로 변용하여, 그 지역의 사람들이 가장 잘 수용하면서도 뿌리를 깊게 내릴 수 있는 것으로 복음을 해석한다.

  논자는 바울의 해석학을 전적으로 지지한다. 현대 사회는 다양한 문화를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의 토착화는 필연이다. 문제는 토착화하는 과정에서 복음의 본질이 변화될 위험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은 세계를 향해 선포되어야 한다. 바로 바울의 토착화에 대한 복음 선포의 전략은 그 시대의 문화권에 적절하게 본질을 유지하면서 가장 쉬운 의미가 전달되도록 복음을 재해석한 것이다.

  이러한 토착화 과정에서 바울은 두 가지 반대에 직면한다. 예루살렘에서는 복음의 유대적 근원을 무시한다고 비난하고, 헬라 지역에서는 지나치게 복음을 자신들의 에토스로 해석하는 어려움이다. 그러나 복음은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 동등하게 적용되는 것이다.

  그리고 바울은  역시 영광 중에 오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임박한 출현의 기대 속에서 그의 생전에 종말의 구원을 희망한다. 그러므로 그는 "현재적인 약한 세대"와 현재적인 "구원의 날"에 관해서 언급한다. 그의 임박한 출현의 기대는 바울에 따르면 현재가 종말 이전의 구원의 때임을 보여주며, 이러한 구원의 현실에 의해서 믿는 자들의 실존이 결정된다. 그러므로 바울도 역시 현재를 구원의 시대와 구원 완성의 희망의 병행으로, 그 둘을 구체적으로 그리스도 사건과 결합시키고, 잠정적이며 또 완성을 지향하고 있는 것으로 본다.

  그리고 바울은 - 원시 공동체의 체험과 관련하여 - 구원의 현재를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공동체의 실존에서와 개개 그리스도인의 영의 체험에서 본다.

  또한 바울의 복음 선교에 대한 전략은 먼저 헬라 세계의 도시를 축으로 하는 도시 중심의 선교 전략을 펴 나갔다. 그리고 그는 복음의 세계화의 마지막 중요 거점 도시로 로마의 역할을 분명히 하기 위해 로마서를 집필하게 된다. 그리고 바울은 재정 문제에 대해서는 선교지마다 적절하게 자기의 입장을 정리한다. 대표적인 교회는 빌립보 교회이다.

  바울은 시대의 문제를 직시하는 능력과 기존 종교의 문제점을 분명하게 파악하는 안목을 가진 인물이었다.

  21세기를 바라보고 세계 복음화를 위해 그리스도의 복음을 이식시키려는 그리스도인들은 바울의 선교 현장을 통해 오늘의 선교에 대한 교훈을 배워야 한다. 그래서 우리에게 위임된 하나님 나라의 복음 선포의 사명을 수행하여 하나님께 대한 의무와 책임을 완수하는 것이 구원받은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는 것이다.

  이제 성숙된 그리스도인으로서 부끄럽지 않은 구속을 위한 준비로서 성령의 열매를 살펴보고자 한다.

 


    4.2.3 성령의 열매

  성령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제3위가 되신다. 또한 성령은 인격자로서 지적인 요소와 정적인 요소 그리고 의지적인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그리고 성령은 유일한 영이시다. 성령은 구원의 역사를 완성하시기 위해서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의 의지적 행동과 정신적 활동을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도록 이끌어 주는 역할을 하신다. 그리고 구원받은 천국 시민으로서 열매 맺는 삶을 살도록 우리를 격려해 주시고 인도해 주신다. 참 신앙은 열매로 그 나무를 알 수 있듯이 성령 안에서의 삶을 통하여 신령한 열매 및 윤리적 열매를 보아 가늠하여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논자는 무엇보다 성령에 대한 인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성령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없이 성령의 열매를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첫째로, 성령의 인격성에 대하여. 이단자 Arius는 그리스도의 인격과 성령의 인격에 관한 성경적 교훈에 대하여 성령은 단지 피조된 세계에 나타난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에네르기"에 불과한 것이라고 말하면서 그리스도의 영원성과 성령의 인격성을 부정했다. 그러나 성령의 교리와 변천은 실로 여러 세기 동안 계속되었지만 복음주의 정통 기독교 신앙의 주류는 성경에 나타난 계시에 따라 성령은 한 인격자이심을 주장한다. 즉 성령의 속성이 그의 인격성을 증거하며, 성령의 사역이 그의 인격성을 증거한다. 또한 인칭 대명사의 사용이 그의 인격성을 증거한다. 이처럼 성령은 인격자이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은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로 하여금 바르게 행동하게 하며, 성령의 의지에 따라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성숙한 천국 시민으로 살게 하시는 것이다.

  둘째로, 성령의 신성에 대하여. 정통적인 기독교는 성령의 신성과 인격성을 함께 긍정하여 왔다. 핫지는 "제4세기 이래 성령의 참된 신성은 그의 인격성을 받아 들이는 사람들에 의해 부정된 일이 결코 없었다"고 말했다.

  Cummings는 "구약에 성령에 관한 언급이 86회, 신약에 261절수 중에서 복음서에 56구절, 사도행전에 57구절, 바울서신에 103구절, 그밖에 다른 곳에 36구절에, 성령에 대한 기록을 포함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처럼 거룩한 성경에는 성령의 신성의 증거가 넘치도록 풍성하다.

  셋째로, 성령의 속성에 대하여. 성령의 속성에 대한 성경적 계시는 완전한 신성을 소유하고 계시다는 오류없는 결론으로 인도한다. 바울에 의하면 성령은 생명을 소유하고 계신 것으로 계시되어 있다. 또한 인격의 속성에 대한 증거는 이미 열거한 바 있다. 성령은 무소부재하시며(시139:7), 전지하시며(고전2:10-11). 전능하시며(창1:2), 거룩한 영이시며, 영원하시다(눅11:13, 히9:14).

  논자는 앞에서 성령에 대한 이해를 구했다. 이제 바울이 말하는 성령의 열매란? 무엇인지에 대하여 살펴 보도록 한다.

  바울은 로마서 8장 2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고 했다. 죄로 말미암는 사망의 법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 생명의 성령이라고 말한다. John Murray는 "생명의 성령의 법"은 우리 안에 역사하며 작용하는 하나의 권세라는 말로 해석되어야 하며, 지배적인 사상은 죄책에서의 구출보다는 죄의 권세, 곧 "죄와 사망의 법"에서부터 우리의 구출이라고 주석한다. 이러한 사상은 내적인 작용의 영역에서 움직이는 것이지, 객관적인 성취의 영역에서 움직이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이러한 내적 작용이 바울에게서 멀리 떨어진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바로 다음 구절에서 분명해 지기 때문이다. "율법이 할 수 없는 그것"(3절)을 하나님은 생명의 성령을 통하여 행하셨다.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어려운 문제를 생명의 성령의 내적인 작용에 의해서 할 수 있게 하신 것이다. 우리를 억압하는 본질적인 요소는 죄이다.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생명의 열매를 맺도록 우리를 자유케 하신 것이다.

  바울은 로마서 5장에서 구체적으로 성령의 열매를 말하고 있다. 그것은 믿음, 소망, 사랑의 열매이다. 이는 신자들에게 있어서 기본적인 신앙의 덕목들이다. 바로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이와 같은 열매를 맺도록 내성으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갈라디아서 5장에서 그리스도인의 참 자유를 논한다. 인간이 참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말한다. 그리고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라고 선언한다. 그리고 신자에게 있는 자유는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사랑으로 종노릇하며, 이웃을 사랑하기를 자기 몸"같이 하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음으로 의롭게 된 성도는 성령의 소욕을 덧입어 내성의 변화를 가져와야 한다. 그 결과로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신자들이 성령의 열매를 맺는 이유는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령으로 행하기 위함이다. 다시 말하면 성령 안에서 새 생활의 정정당당한 모습을 말하는 것이다. 

  성령의 열매라는 것은 성령을 받은 사람들이 맺는 삶의 열매를 가리키며 또 그러한 열매들을 맺을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상태를 의미한다. 그리고 성령의 열매들을 대적할 율법도 없으며, 어느 누구도 성령의 열매를 소멸할 수 없다. 왜냐하면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는 인간이 자신의 힘으로 맺는 것이 아니고 성령에 의하여 성령을 힘입고 맺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성숙한 신자에게 남겨진 의무이며 책임인 것이다. 우리의 미래는 우리가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서 어떤이는 영벌에, 어떤이는 영생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이제 논자는 긴 여행을 마치고 결론으로 나가고자 한다.

 


제5장 결론

 


  5-1 요약

  본 논고는 몇 가지의 문제점을 가지고 출발했다. 현대 사회의 특성상 기독교 신앙 공동체의 중심인 구속에 대한 위기의식, 구속에 대한 일반적인 보편적 이해 결여, 특히 기독교 신앙 공동체 속에 있는 성도들의 구속에 대한 본질적 의미의 이해 결여, 현대 종교의 특징인 종교 다원주의와 포스트 모더니즘, 범신론적 구원관에 의한 기독교의 구원관의 유일성 파괴 등이 논제로 제시 되었다.

  구속의 개념 및 구속사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먼저 어원적 접근을 통해 구속에 대한 의미를 파악하고, 성경적으로 구약 성경에서는 인류의 시조, 노아, 아브라함, 모세, 다윗 등과 맺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언약을 중심으로 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구속사의 맥락에서 보았으며, 신약 성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에 초점을 두고 예언의 성취로서의 구속사를 예수의 사역과 가르침에서 그 개념을 파악, 통일성 있게 구속에 대한 개념을 이해했으며, 다양한 신학자들의 구원관을 폭넓게 약술함으로서 보다 깊이 있게 구속에 대한 개념을 이해했으며, 본 논고의 주제에 자연 스러운 접근을 위하여 역사적인 측면에서 구속사란 무엇인지를 일반 역사와 관계해서 역사와 구속사 사이의 관계를 언어적으로 역사적 예수에 초점을 두고 불트만 계열을 중심으로 접근해서 실존적인 문제에 취급했다.

  그리고 본 논고의 주제문으로 로마서 본문을 중심으로 바울이 제시한 구속의 교리를 구속사의 흐름에서 접근하여 논자의 견해가 투영된 점층적 구조로 모든 사람은 죄인이라고 하는 유죄 선언 즉 죄의 선언, 하나님의 부르심에 의한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롭다 하심 즉 칭의, 하나님이 의롭다 인정하심에 의하여 중생한 신자들이 나아가야 할 성결의 생활 즉 구원의 완성으로 나아가는 성화, 성화의 삶을 통해서 얻게 된 무죄 선언 즉 정죄 없음, 구원의 완성을 통하여 얻게 될 최종의 목표인 영광에 이르는 길에 대하여 본문을 중심해서 여러 신학자들의 주석을 참고하여 구체적으로 깊이 있게 다루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바울의 구원 선포가 종말의 미래의 현재성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끝으로 이렇게 구속 받은 성도들이 성숙한 신앙의 삶을 위해 나아가야 할 실천적인 문제를 세상 백성의 입장에서 국가에 대한 구성원으로서의 의무와 책임, 개인으로서의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의무와 책임을, 그리고 천국의 시민권자로서 교회 중심의 예배 생활, 봉사 생활, 교육을 통한 제자의 생활, 연보를 통한 구제하는 생활 등을 살펴 보았으며, 더 나아가 그리스도의 위임령을 실천하기 위한 복음 선포와 성령 안에서 열매 맺는 성숙한 신앙인의 삶을 성경을 중심으로 윤리적이고 실천적인 측면을 다루었다.

 


5-2 비판 및 제언

  바울의 구속사를 연구함에 있어서 난해한 어려움이 있었다. 그것은 바울이 희심한 후, 그의 사역 말기에 로마에 있는 신앙 공동체의 신앙 훈련을 위하여 이 서신이 구속의 교리를 중심으로 쓰여졌는데, 그 핵심은 바울 자신의 경험에 의한 신학에 근거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시대도 다르지만 바울과 똑 같은 경험을 할 수는 없기 때문에 바울이 본래 의도했던 정확한 의미를 파악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의 의도와는 상관이 없는 방향성을 가지게 될 우려가 있다. 그리고 종말의 미래의 현재성에서 이 구속사 교리를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어려움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논자는 객관적이면서도 어느 정도의 주관적인 입장에서 본 논고를 종말의 미래의 현재성을 염두에 두고 다루었다고 생각을 한다.

  이제 본 연구를 통해서 앞으로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바람직한 방향성을 두 가지만 제시한다.

  첫째는, 많은 신학도들이 바울의 구속사 연구에 관심을 가지고, 새로운 관점에서 좋은 논문을 많이 남겨서 후학들이 바울을 이해하고 성서 전체의 주제인 구속사의 흐름을 꿰뚫어 볼 수 있는 능력을 가졌으면 한다.

  둘째는, 실천적인 측면에서 구속사를 이해하는데 머무르지 말고 실존의 삶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세계화가 실현되도록 오늘의 신학도 및 신자들이 바울의 영성과 신학을 새롭게 정립해 주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다시 말하면 과거의 사건이 아닌, 미래의 사건이 아닌 현재의 사건으로 이 시대의 언어와 환경에서 바울의 구속사가 재해석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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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 

종교 개혁(宗敎改革, 영어: Protestant Reformation)은 1517년 마르틴 루터가 당시 로마 가톨릭 교회의 부패와 타락을 비판하는 내용의 95개조 반박문을 발표하여 시작된 사건으로, 부패한 교회를 성경의 권위와 하나님의 은혜와 믿음을 강조함으로써 새롭게 변혁시키고자 했던 신학운동이다. 종교개혁 운동의 결과, 모든 기독교는 개혁교회와 개신교(루터교,침례교,성공회 등) 그리고 로마 가톨릭교회와 동방정교회로 구분되어 발전해 오고 있다.
95개조 반박문

개요
루터
로마 가톨릭 사제였던 마르틴 루터신부는 비텐베르크 대학교의 교회 정문에 95개조 반박문을 붙였으며, 신약성서와 구약성서를 독일말로 번역하여 누구나 성서를 읽을 수 있도록 하였다. 하지만 95개조 반박문을 교회 정문에 못 박았다는 것에 대해서 역사적 상상력에 불과했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루터의 반박문을 증명하는 유일한 문서인 요하네스 슈나이더(Johannes Schneider)의 육필원고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1517년 루터는 엘베 강변 비텐베르크에서 대학의 오랜 관습에 따라 모종의 명제를 논쟁용으로 제출했으나, 너무나 조심스러운 형태라서(modeste) 누군가를 비방·중상할 의도를 찾아볼 수 없었다". 이에 따르면, 신앙개혁은 가톨릭 체제에 대한 급진적인 도전에 의해서가 아니라 조심스러운 형태로 촉발되었을 것이으로 보인다.
칼뱅
독일에서 루터를 중심으로 개혁 운동이 일어남과 더불어 스위스에서는 츠빙글리에 의해 프로테스탄트 개혁운동이 일어났다. 이러한 가운데, 제네바에서는 칼뱅의 세속적 신앙운동이 꽃을 피웠다. 칼뱅의 제자였던 낙스는 스코틀랜드로 가서 개혁교회(Reformed Church) 신학을 전함으로써 스코틀랜드에 장로회 전통을 심었다. 지금도 스코틀랜드의 국가 신앙은 장로회이다. 가톨릭의 십자가를 통한 신앙이 세속과 권력이 대신하게 되면서 세계의 역사는 달라지게 된다.
토머스 크랜머
케임브리지 대학교 학생때부터 신앙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사상의 영향을 받은 토머스 크랜머 대주교는 1549년 영문 성공회 기도서를 작성하고, 아침, 저녁기도와 감사성찬례 때마다 라틴어 성서가 아닌 영문 성서를 쓰도록 하여서 성공회 신앙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하지만 로마 가톨릭 신자인 메리 1세가 집권하여 영국의 국가 신앙을 로마 가톨릭으로 다시 바꾸고, 그에 따라 성공회와 프로테스탄트에 대한 탄압으로 이어지자, 크랜머 대주교는 휴 레티머, 니콜라스 리들리 주교등과 함께 화형으로 순교하였다. 이러한 영국의 신앙 개혁 전통은 세계 성공회 공동체 성격 형성에도 영향을 주어, 현재 각 지역 성공회 교회들은 자신들이 속한 지역말로 만든 성공회 기도서와 성서를 사용하고 있다.
프로테스탄트개혁의 영향
이렇게 유럽이 점차적으로 교황청의 억압으로부터 서서히 벗어나면서 인문주의도 더 활발해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훗날 문예부흥을 불러왔다. 신학의 시녀로서 빛을 보지 못했던 철학이 과학적인 방법의 도입과 더불어서 독자적인 길을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연과학의 발달과 더불어서 무조건적인 신앙의 강요가 호소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신대륙의 발견과 더불어서 박해 받던 유럽의 프로테스탄트 신자들에게 탈출의 기회가 마련되었으며, 지금까지 억압받던 노동자와 농민들이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서 조용한 시위를 일으키는 등 사회 전반에 걸친 새로운 양상의 변화가 일어났다.
공격을 받은 로마 가톨릭 내부에서는 조용하게 자신들에 대한 반성과 더불어서 프로테스탄트에 반격할 수 있는 철갑을 더욱 단단히 함으로써 내부 개혁을 실시해 쇄신하였으며, 다른 한쪽에서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전통을 굳건하게 지키고 프로테스탄트를 탄압하고 파괴하기 위해 예수회가 창설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후로 프로테스탄트는 수백 개의 다른 파로 분열되었고, 그로 인해 프로테스탄트 교회들사이의 갈등을 가중시켜 신앙상 혼란을 일으켰다는 비판을 프로테스탄트 개혁파에게 내리는 사람들도 있다.
개혁자들의 사상
개혁자들의 신학적 사상은 다섯 솔라(Five Solas)로 요약된다:
Sola Scriptura (오직 성경) : 진리냐 아니냐의 최종 권위는 오직 성서에 있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성경만이 그리스도 교리의 유일한 원천이며 성서 밖에서 해석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Solus Christus (오직 그리스도): 인간은 스스로 구원할 수 없고, 오직 십자가에서 억조창생의 죄값을 다 받고 하나님의 의를 완전히 이룬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을 덧입는 것뿐이라는 뜻이다.
Sola Gratia (오직 은혜) : 구원에 필요한 예수 그리스도의 공효를 덧입는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선물로써 하나님이 인간 쪽에 아무런 조건을 찾지 않는다는 뜻이다. "믿음" 역시 하나님의 선물이며, 믿음은 구원의 은총를 받는 '통로' 역할을 할 뿐이며 행위의 '대가'로 구원을 받지는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오직 은혜와 오직 믿음 교리는 인간의 신앙적 행위를 강조하는 업적의를 비판하는 데 목적이 있다.
Sola Fide (오직 믿음) : 하나님이 내리시는 은혜는 오직 믿음을 통하여 받을 뿐이지 다른 어떤 것이 요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Soli Deo Gloria (오직 주만 영광 받으심) : 구원은 하나님이 시작하고 완성하시는 일이며 거기에 인간이 참여하는 부분은 없기 때문에 모든 영광을 하나님이 받으신다는 내용이다.

 

 

프로테스탄트 개혁 운동은 개혁자들의 양심과 지성에 뿌리를 둔 교회개혁운동이었다. 마르틴 루터등의 개혁자들은 옳지 못한 것을 보고 분노를 느끼는 단순한 정의감이 아닌, 로마 가톨릭의 문제점들을 논박할 수 있을만큼 뛰어난 신학실력을 갖춘 지성인들이었다.실제로 마르틴 루터는 어거스틴 수도회(아우구스투스 수도회)에서 신학과 성서를 연구하였다. 그리고 그런 곳에서 얻은 신학적 지식으로 교회를 정면 반박하며 95개조 반박문을 내걸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16세기의 신앙개혁의 모습을 보면 루터만이 아니라 예전에도 그런 조짐을 보였다. 예전에도 수도원 운동을 통해 교회를 개혁하고자 했다. 방탕한 생활을 지탄하며 금욕적 생활을 추구했다.

도덕적 요인

교회가 구원을 돈 받고 파는 장사를 하면서도 그것을 성경에 나오지 않은 내용임에 불구하고 교황의 경제적 이익을 위해 합리화 시키려 할 때 루터의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그 외에도 성직매매가 성행했고 성직 매매로 얻은 수익도 교회의 타락에 박차를 가할 뿐이었다. 그리고 로마 가톨릭 신부는 독신으로 생활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성적으로 방탕해 음란한 생활과 사회의 지탄을 받는 생활을 했다. 이러한 도덕적 타락은 일부 수녀나 주교들이 교회 개혁을 교황 바오로 3세에게 정식으로 건의하기에 이르기까지 했다.

지적인 요인

르네상스는 유럽의 지적인 생활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오게 했다. 고대 문학에로의 복귀, 개인주의적 각성, 몽골 제국의 서진과 지리상의 발견에 따라 동서 문화의 교류, 봉건 제도의 붕괴에 뒤따른 상업인구의 격증, 스콜라 철학의 퇴조와 함께 득세한 신학자 오캄의 사상의 득세, 이 모든 것들이 중세의 사상적 기초를 흔들었다. 북유럽에서는 인문주의가 대학가를 휩쓸었다.

르네상스에 뒤따른 새로운 학문열은 바울등의 사도들과 그들의 제자들인 속사도들과 더불어 초대교회의 교의를 세운,그래서 교회의 아버지로 존경받는 교부들의 신학과 성서 원어인 히브리어와 헬라어 연구를 장려했으며, 종교개혁의 사상적 배경을 제공하여 주었다. 중세의 지식사회는 성서적 인문주의의 세찬 도전을 받기에 이르렀다.

사회적 요인

십자군 이후 봉건 사회가 점차 무너지면서 상업의 발달로 농업 경제가 상업 경제로 옮겨지는 과정에서 사회의 구조에 변화가 생겨났다. 국가주의의 등장으로 스페인과 프랑스에서는 교회가 국가의 지배 아래 들어오게 되고 교황청의 "아비뇽 유수"로 인한 교황권의 몰락은 교회 개혁을 가속화했다. 교황청이 부과하는 조공의 상승과 지나친 사치는 백성들의 원망을 사게 했고 루터가 개혁의 봉화를 들자 독일의 농민들은 일제히 봉기했다.

 

?독일의 개혁

독일의 개혁은 먼저 정치적 상황과 교회의 각종 모습을 살펴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루터의 외침이 독일인들, 그 중에서도 특히 세속 제후들에게 호소력이 있었던 것은 어디까지나 교황청으로부터의 경제적·정치적 자유를 얻는 데에 있었기 때문이다.

개혁 이전의 독일의 정치적 상황

개혁 이전의 독일의 상황은 다른 나라들과는 차이가 있었다. 이탈리아는 교황청이 위치한 나라로 십자군 전쟁 이후로 도시의 발달과 봉건 제도에 도전하는 단계에 있었다. 프랑스는 십자군 파견으로 전쟁 이후의 세력권에서 크게 부상하였다. 스페인은 1492년 이래로 통일 왕국 시대를 맞이해서 해상무역권을 독차지하고 있었다. 잉글랜드는 스페인의 위성 국가였으며, 스코틀랜드는 프랑스의 위성국가로서 힘은 발휘하지 못했으나 지리적인 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황청의 힘이 가장 강력히 미칠 수 있었던 곳은 독일뿐이었다. 그리고 독일인들의 보수적인 기질마저 겹쳐져서 교황청의 시녀 노릇을 자처하였다. 각종 세금성 헌금을 바치는 등 독일은 교황청의 재정적 수입의 원천이었다. 그러나 독일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의 통치 아래 대봉건 영주들의 총회의를 두고서 제국을 통치하였다. 공동의 주전법으로 화폐를 통일시키고 관세법을 통일시킴으로써 하나의 의회 아래에서 통일 국가의 형태를 가지고 운영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486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선출되었던 막시밀리안이 15191월에 죽고 부르군디의 필리프의 아들이며, 스페인의 왕페르디난도와 이사벨라의 손자인 카를 5세가 15196월 선제후들의 손에 의해서 새로운 황제로 선출되었다. 카를 5세는 독일계 스페인 사람이었다.

신의 이름으로 자행된 교황청의 착취

문예부흥과 더불어서 각종 예술의 부흥이 유럽 전역에서 일어남과 동시에 교회도 예술적인 감각을 도입하였다. 역대 교황들은 취임과 더불어서 자신의 임기 동안에 거대한 성당과 궁전을 짓고 그 곳을 예술적으로 아름답게 치장하는 것을 일생의 보람과 업적으로 생각하였다. 이러한 큰 사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자금이 필요하였다. 그 자금원은 광활한 토지를 소유하고 있는 세속 제후들이었다.

루터가 그의 논문 "독일 그리스도 귀족에게 보내는 글"을 통하여 독일 내에서 개혁되어야 할 폐단 27종류를 열거하였는데 이것은 모두 이러한 로마 교황청의 수탈과 관련되어 있었다. 그 가운데에서 대표적인 것으로 폐해가 컸던 초입세, 팔리움, 보류권, 사라센세 등은 각종 공물 제도에 관한 것들이었다.

이 밖에도 조달비, 공석금, 기부금, 십자군 자금 등이 있었다. 그런가 하면 교황청은 십일조를 강요하였다. 이때 건축되거나 제작된 작품 중 유명한 것은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 그림 등과 함께 로마 교황청의 베드로 대성전이다. 종교개혁자들의 눈에는 이러한 광경이 신의 이름으로 개인의 호주머니를 털어가는 흡입기를 제도화 하고 있는 것으로 비쳐졌다.

마르틴 루터

마르틴 루터

95개조 명제 발표까지

대사 논란

종교개혁의 기폭제는 대사(indulgentia)(이른바 면벌부)에 대한 논박이었다. 대사는 교회가 고해성사의 보속을 면제받는 것을 뜻한다. 초대교회에서는 배교, 우상 숭배, 살인, 간통등의 죄를 지으면 성만찬에 참여할 수 없고, 교회로부터 추방되었다. 그런데 박해를 받은 신자들이 배교를 하는 일이 생기자 교회에서는 공개적으로 죄를 고백하고 교회에서 부과하는 형벌을 받으면 다시 교회안으로 받아들여지는 고해성사를 실시하였다.

중세교회에서는 고해성사가 개인이 사제에게 죄를 고백하고 자신의 죄를 부끄러워하면, 사제가 죄의 용서를 선언하고 기도, 금식,자선, 교회에 대한 기부등의 일정한 벌을 주는 보속(Satisfacio)를 하도록 한 개인고해로 바뀌었다. 가톨릭교회에서는 고해성사의 형벌 즉 보속을 다 이루지 못하고 죽으면, 연옥에서 벌을 받아서 죄를 정화한 후 천국으로 간다고 믿는다. 그리고 이 보속이 면제되는 것이 흔히 면벌부라는 명칭으로 알려진 대사이다.

대사는 일정한 조건을 완수하면 주어지며, 대사를 얻은 사람은 보속이 면제된다. 이러한 행위는 오늘날의 가톨릭교회에서도 존재하며, 주로 기도나 성지순례 등이 대사의 조건으로 제시된다. 그러나 11세기 말부터 '헌금으로 인해 주워지는 대사'가 본격적으로 출현했고, 르네상스 시대에 극에 달했다. 교황 레오 10세는 베드로 대성당을 짓기 위해 1506년 헌금을 통한 대사를 선포하였으며특히 독일 지방에 선포된 다음 조건들이 논란에 휩싸였다.

1. 지은 죄를 회개하고 다시 죄짓지 않기로 마음먹은 뒤 사제에게 가서 고해성사를 보아야 한다.

2. 적어도 지정된 일곱 개 성당을 순례하여야 하며, 순례할 때마다 우리 죄를 대신 속죄하여 주신 주 예수의 오상(양손,양발,옆구리)을 기념하고 공경하는 뜻으로 주의 기도와 성모송을 다섯 번씩 열심으로 바치거나 또는 "하느님, 자비하시니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시편 50)을 바쳐야 한다.

3. 성 베드로 성당 건축비로 응분의 헌금을 바치는 것이 좋다. 그러나 하늘 나라는 가난한 사람이나 부자나 다 같이 갈 수 있도록 열려 있으므로, 돈이 없는 사람들은 헌금 대신 기도와 대재로 대사를 받을 수 있다.

여기서 문제가 된 것은 세번째 조건이다. 이 조건만 본다면 헌금은 의무가 아니며, 교황 역시도 "헌납자는 각자의 형편에 따라 헌납해야한다"라고 언급하였으나, 일부 성직자들이 대사를 이용해서 부를 축적하였고, 대사 전문 판매원이 등장하는 등 많은 폐단이 발생하게 된다. 한편 세번째 조건의 헌금이 강제였다는 오해가 많이 퍼져있으나 원칙적으로는 자발적인 헌금이였고, 루터의 비판 역시도 '대사의 강제성'이 아닌 '대사의 효력'에 대한 것이다.

이 시기 대사 전문 판매원의 예로 다음 사례를 들 수 있다. 독일의 마인츠 대주교 알브레히트는 그의 초입세를 납부하기 위해 대사 수입에 열을 올렸다. 알브레히트의 대사 판매원인 도미니크회의 수도사 테첼을 시켜서 대사를 팔게했다. 테첼은 "단순히 대사를 산 사람만의 죄가 아니라 그의 부모 친지의 영혼조차 대사를 산 돈이 금고에 떨어져 짤랑거리는 소리와 함께 연옥으로부터 튀어나온다"는 식의 과대선전을 하면서 대사 판매에 열을 올렸다.

테첼과 같은 대사 판매원들은 "대사 헌금을 내는 순간 그만한 교회의 영적인 은혜를 얻기 때문에 자기 죄를 회개할 필요가 없다"는 식으로 설교를 하였고 "이미 죽은 사람을 위해서도 대사를 살 수 있으며 이때도 고해성사나 회개의 필요가 없이 오직 돈만을 가지고 오면 연옥의 영혼이 구제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리하여 종교개혁 직전의 당시에 대사가 엄청난 숫자로 팔렸으며 이는 당시의 교인들의 신앙심과 미신적인 요소에 대해 측정을 가능하게 하는 지표가 되었다.

결국 이는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을 초래했다. 마르틴 루터는 가톨릭교회가 현세의 소유와 권리를 포기해야 하며 초입세와 대사 판매, 십자군 전쟁세, 등 부조리한 관행을 없애야 한다고 선언했다.

95개조 명제

대사_(가톨릭)로 구원을 거래하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타락에 분노한 마르틴 루터는 15171031일 대사_(가톨릭) 판매에 반대하는 95개 조항이 담긴 서신을 작성하여 마데부르크의 알브레히트 주교에게 건의하였다. 그가 보기에 "모든 주교는 하느님의 백성이 복음과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을 배우도록 도와야 하는" 사람이었다.그는 자신이 생각하는 내용을 당시 관습에 따라 성 교회의 북쪽 문에 붙였는데 이 날이 1031일인지는 논란이 많다.

루터는 대사 판매, 교황청의 수입원이었던 고해성사의 문제점을 논박하고 교황의 권위도 부정함으로써 로마 가톨릭 교회를 유지시키던 기존 질서에 대해 투쟁하였다. 그의 혁명사상은 14일안에 95개조 논제가 독일 전역에 깔린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독일 사람들의 찬성을 받았다.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는 루터가 위험한 인물임을 알고는 아우구스부르크에 소환하여 심문하였고, 1521년 보름스 국회로 불러들여 루터의 책들이 불온서적임을 시인하라고 강요하였다.

95개조 논제의 주요내용

루터는 95개조 논제에서 회개를 강조하였다. 루터는 신약성서의 가르침에 따라 회개한 신자는 십자가를 멀리하지 않는다고 선언함으로써 구원을 돈을 주고 사는 대사의 값싼 은혜가 아닌,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수난과 죽음을 통한 값비싼 은혜를 구해야 한다고 보았다. 또한 그는 그리스도인은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듯이 우리의 잘못을 용서하시고'라는 주기도문의 내용에 따라 일생동안 회개를 함으로써 육신의 정욕을 억누르고 성령의 열매를 맺고자 하는 새로운 삶을 살려고 한다고 보았으며, 회개한 자에게는 하느님께서 징계의 뜻으로 주시는 형벌이 부과되지 면제되지 않는다고 논박했다.

라이프치히 논쟁

1519년 에크와 루터 사이에 라이프치히 신학 논쟁이 개최되었는데, 논쟁에서 루터는 구원받기 위해 교황을 인정해야 할 필요는 없다고 반박하였고, 콘스탄스 공의회(1414 - 18)가얀 후스를 잘못 정죄한 것을 들어 교회의 공의회조차도 과오를 범할 수 있다고 보았다. 또한 제2바울 서신인 즉,기독교가 예수 운동(Jesus Movement)에서 직제를 형성한 제도적신앙으로 발전하면서 바울의 이름을 빌려서 등장한 서신인 에베소서 1:22-23을 논거로 하여 교회의 머리는 교황이 아니라 오직 만물의 우두머리이신 그리스도뿐이라는 논박을 하였다. 그는 교회의 권위보다 그리스도의 권위를 더 중요하게 생각한 자신의 주장이 가톨릭(보편적)이라고 확신했다.

마침내 루터는 교황과 로마 가톨릭교회로부터 독립을 선언했으며 교황에게 반감을 가진 독일의 기사 및 시민들이 그를 열렬히 지지하였다. 이날 이후로 루터는 확고한 신념으로 개혁을 추진하였으며, 교황은 로마 가톨릭으로부터 탄압받았던 개신교 신자들에 의해 적 그리스도(Anti-Christ)의 상징이며, 가장 악마적인 존재로 묘사되었다. 당시 독일의 정세는 루터의 개혁을 단순히 영적 차원에만 국한시키지는 않았던 것이다. 상황은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가 보름스에서 소집한 제국의회에 루터가 소환될 정도로 확대된다.

보름스 회의

루터는 자신의 개혁 사상을 변호할 수 있는 기회인 보름스 회의에 참여하여 1521418일 독일의 황제 카를 5세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성서의 증거와 명백한 이성에 비추어 나의 유죄가 증명되지 않는 이상 나는 교황들과 공의회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겠습니다. 사실 이 둘은 오류를 범하여 왔고 또 서로 엇갈린 주장을 펴왔습니다. 내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철회할 수 없고 또 그럴 생각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양심에 반해서 행동하는 것은 안전하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현명한 일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여, 이 몸을 도우소서, 아멘.””

보름스 회의로 추방령이 내려진 이후 루터는 작센의 제후 프리드리히의 보호로 바르트부르크 성에 은거해 신약성서의 독일어 번역에 임하며, 당시 그의 신약성서 번역은 독일 문학사와 특히 현대 독일어 발전에 주춧돌이 된다. 루터의 과격한 설교와 저서는 곧 독일 교회를 혼돈으로 빠뜨리게 된다.

독일 농민 전쟁과 루터의 좌절

어떠한 일에든지 돌발적인 현상이 잠재적으로 내재해 있다가 시간이 되면 뜻밖의 현상인 것처럼 돌출하기 마련이다. 루터 개인이 보름스회의에 참석할 때까지만 해도 죽음을 각오하고 뒷일을 멜란히톤에게 위임했다. 그러나 루터가 바르트부르크 성에 은신해 있는 사이에 비텐베르크의 분위기는 예상 밖에도 칼슈타트가 주도하면서 시위적 양상이 곁들어 들자 지배계급들의 억압과 착취에 맞선 민중항쟁이 일어난다.

독일 농민혁명

14세기부터 16세기의 대변혁기에 이르기까지 독일을 비롯한 유럽 전역에 농민들이 자신들의 권리 회복을 부르짖기 시작했는데 이는 농민들이 지배계급으로부터 착취를 받으며, 신분상 농노에 가까운 취급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농민들의 사회개혁의지가 루터의 힘을 얻고 1524년 터져 나왔다. 독일 농민들이 지배계급의 착취에 맞서 투쟁한 독일 농민혁명은 더욱 거세게 몰아치면서 도시의 빈민층까지 가세하게 되었다.

루터의 보수반동적인 모습

그러나 사회개혁 운동에 농민들이 가담함으로써 가장 피해를 입은 사람은 다름 아닌 루터였다. 지금까지 루터가 교회 개혁을 주도하는 데에는 프리드리히의 막강한 힘이 있었다. 그러나 농민 편에서 프리드리히는 착취자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루터는 힘없는 농민들보다는 힘 있는 선제후들을 지지해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루터는 지지자들을 잃게 되었으며, 결과적으로 로마 가톨릭측과 타협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아우구스부르크 협상으로부터 시작해서 자신의 주장이 여러 동조자들과 함께 수정되어서 제출되는 등 혼자의 힘으로 개혁운동을 이끌어 갈 수 없게 되었다.

1524년 혁명을 일으킨 농민들은 파리코뮌같은 근·현대 사회주의 운동처럼 정치, 사회적 비평사상을 가지고 단결한 것이 아니라, 단지 지배계급의 착취와 억압에 대한 분노때문에 짧은 시일 내에 결성된 모임체였다. 그래서 내부적인 결속력이 없었으므로 농민혁명 자체나 외부의 대항 세력을 지속적으로 이끌어 갈 수 없었다. 농민들의 혁명은 독일 북부로부터 진압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1526년에 거의 진압이 되었다.

진압 과정에서 농민군의 사망 수는 100,000-150,000명에 이르렀다. 여기에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사람은 루터였다. 루터는 농민들이 잠잠해짐으로써 원하는 독일교회의 개혁이 달성할 수 있었다. 그래서 루터는 소요 지역들을 찾아다니면서 농민 운동을 당장 그만두라고 하였다. 이것이 실패할 경우 자신의 신앙개혁 운동에 큰 걸림돌이 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설교 여행을 떠났으며, 이 기간 동안에 그토록 자신을 지지했던 프리드리히가 사망했다.

루터는 비장한 각오를 하고 비텐베르크로 돌아와서 "농민들로 이루어진 살인과 도적 떼를 반대하며"라는 소책자를 발표했다. 심지어 루터는 이 책자에서 제후들이 농민혁명을 무력으로 진압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가 자신에게 힘이 되었던 제후들, 특히 선제후 프리드리히에게 진 빚을 갚기 위해서 선무 설교 여행까지 감행했던 것을 볼 때에 손을 씻은 빌라도를 연상케 된다. 아무튼 농민 소요가 루터에게 치명타를 가한 것은 사실이다.

'루터의 개혁' 평가

사회문제에 대한 보수성

현실권력인 로마 가톨릭에 저항한 루터를 믿고 혁명에 나선 농민들에게 "인간은 신 앞에서는 평등하다"라는 말만 되풀이했다는(현실에서 차별은 있다고 하는 의미) 고사에서 알 수 있듯이 루터에 대한 개인적인 평가와 상관없이 귀족 기반의 개혁을 추진하게 된 관계로 일반 민중들에게 깊숙이 파고들지는 못했다.

종교개혁의 원천,신학

루터의 종교개혁은 정의감에 근거한 열정이 아닌,체계를 갖춘 신학에 근거한 것이었다. 만약 그가 단순히 정의감만으로 나섰다면 탄탄한 신학과 교의로 무장한 로마 가톨릭에 저항할 수 없었을 것이다.

 

스위스의 개혁

스위스는 역사적으로 유럽의 오지에 속하는 척박한 땅으로써 산업이 발달할 수 없는 곳이었다. 그렇지만 자유를 원하는 농민들이 몰려들기 시작하면서 자주정신을 가지게 되었다 여기에다 각종 박해받던 신앙인들이 몰려들게 되었고, 어느 누구에게도 간섭을 받지 않고 1291년 연방체계로 발전하였다.

스위스는 남쪽으로는 이탈리아의 영향을 받았으며, 서쪽의 프랑스어 사용권 지역과 북쪽의 독일어 사용권 지역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개혁 즈음에 이르러서는 프랑스의 프란시스 1세의 박해를 피해서 많은 프로테스탄트신도들이 피난 와서 슈트라스부르크를 중심으로 이민사회를 형성하기도 하였으며, 제네바도 이들에게 안식처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산업의 발달이 거의 불가능한 지역이었으나, 지리적인 조건 아래에서 단련된 신체적 강인함으로 인해서 스위스인들은 오래전부터 교황청의 용병으로 일해서 재정적 수입을 충당하였다. 이러한 전통적인 용병제도는 프랑스의 아비뇽 교황청 시절에 양쪽으로 용병이 팔려가는 바람에 민족 간에 편이 갈려 전투를 했던 고난을 겪었으며, 카를 5세와 프랑수아 1세 사이의 전투에 다시 한 번 용병으로 팔려가서 동족끼리 살상하는 모순을 겪었다. 그래서 스위스의 개혁은 용병제도의 근절이라는 재정적 수입원의 차단으로부터 시작된다고 해도 크게 틀렸다고 말할 수 없다.

츠빙글리의 개혁

울리히 츠빙글리

츠빙글리는 독일의 개혁자 루터와는 많은 점에서 차이가 있었다. 루터는 개인의 구원의 확신을 위한 영적 투쟁으로부터 출발해서 복음 안에서 구원의 확신을 가진 다음에 로마 가톨릭의 부정과 부패를 발견하는 순서를 밟았었다. 그러나 츠빙글리는 처음부터 교회의 부정과 부패를 발견하고서 이것들을 에라스무스적인 풍자와 학문적인 공격으로 해결하려고 하였다.

그러므로 츠빙글리는 개인의 구원과 말씀 안에서의 구원의 확신이 처음부터 약했다. 그렇지만 그는 나중에 목회자로서의 경륜이 쌓여감에 따라서 교회와 교인들의 요구 사항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되었으며, 본인도 점차적으로 복음의 진수를 깨닫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의 복음 이해는 인문주의적인 합리적 요소가 끝까지 있었다. 여기에 불만을 품은 재세례파 사람들이 취리히를 중심으로 반기를 들면서 재세례를 베푸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그렇기 때문에 츠빙글리는 과격 재세례파 사람들과도 싸워야 하는 이중 고통이 있었다.

츠빙글리의 개혁은 민족주의적인 요소가 루터보다 훨씬 강하였다. 그는 용병으로 벌어들이는 수입보다는 한 사람의 동족의 생명을 더욱 안타까워했다. 그래서 그의 개혁은 재정적 수입원의 차단이라는 고육책으로 모범을 보이는 데서 인정을 받았다. 츠빙글리는 루터만큼 활발한 저술 활동을 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그의 글은 개혁교회의 기초가 될 수 있는 복음 이해와 화체설에 반대하는 영성체 신학을 확립시켰다.

그러나 47세라는 인생의 황금기에 죽음으로 인해서 자신이 벌여 놓았던 많은 일과 사업의 뒷마무리를 후배인 칼뱅에게 양보하고 말았다. 이러한 면에서 같은 인문주의자로 출발해서 개혁주의로 바뀌었던 칼뱅은 가장 적절한 후계자이며, 또한 완성자였다고 말할 수 있다.

제네바의 개혁이 이루어지기까지

제네바는 1387년 이래로 도시의 군주로서 주교, 도시의 소유자로서 사보이 가문의 백작, 그리고 자유 시민들로 이루어진 3원 체제에 의해서 통치되어 오다가 1444년 이후로는 사보이 가문에서 주교까지 세습적으로 계승함으로써 자연히 자유 시민들의 반발에 부딪히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제네바의 시민들은 스위스의 자치주들과 동맹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프라이부르크와 제휴하였지만 베른은 이에 동의하지 않아서 적잖은 대결상태를 유지했다.

이렇게 변화하는 상황에서 제네바 시는 소의회와 대의회 제도로 바뀌었으며, 모든 중대사는 대의회에서 결정하였다. 베른은 제네바가 개혁되기를 바라는 눈치였으나, 공개적으로 요구하지는 못했다. 그러다가 그 유명한 현수막 사건이 발생 했다. 현수막에는 "누구든지 자신이 죄를 회개하면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약속을 진실하게 믿으면 모든 죄에 대한 완전 대사를 수여 받을 수 있다"라고 쓰여 있었다.

이로 인해서 1532년 가을에 제네바에 도착해서 조용하게 가정집에서 설교하던 파렐, 사우니어, 올리베탄은 추방당하고 말았다. 그렇지만 파렐은 제네바를 포기할 수가 없어서 프로망을 불어선생의 자격으로 제네바에 잠입 시켜서 불어교습과 더불어서 개혁적 복음주의를 설교케 하였다. 그러다가 점점 수적 불어난 복음주의자들과 가톨릭주의자 사이에 시민전쟁을 방불케 하는 격렬한 몸싸움도 있었다. 여기에서 윌리라는 이름의 가톨릭 사제가 희생되었다.

가톨릭 측은 대대적인 반격을 시도하려고 하였으나 베른은 복음주의자 편에 서서 옹호하고 나섰다. 프로망의 활동으로 가톨릭 수도자와 공개 토론회가 실시되었으며 파렐은 공개 토론회 참가자로서 15321220일 에 다시금 제네바에 발을 딛을 수 있었다. 그래서 15332월에는 최초의 복음주의식 세례를 베풀었으며, 31일부터는 공개적으로 복음주의식 예배를 드렸으며, 수도원의 교회를 빌려서 사오천 명씩 한꺼번에 예배를 드렸다.

이렇게 제네바시는 기사도 정신에 뛰어난 프랑스인 파렐을 맞이해서 개혁을 이끌어 갈 준비를 마쳤다. 이제는 길이 닦인 도로 위에 복음주의 마차를 이끌어갈 마부가 필요하였다. 바로 이러한 요구 조건을 충족시켜 준 사람이 바로 칼뱅이었다.

칼뱅의 개혁

시작

15371월에 칼뱅은 제네바의 대의회 앞에서 자신의 개혁안이 담긴 비망록을 전달하였다. 성만찬, 공중 예배에서의 찬양, 어린이의 종교 교육, 결혼 등 4가지였다. 성만찬은 가급적으로 자주 집행하는 것이 좋으나 현재적인 형편으로는 한 달에 한 번씩 행하는 것이 좋다고 하였다. 그리고 불합당한 자는 주님의 몸을 오염시키지 못하도록 출교에 관한 치리를 제정해서 참여치 못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회중에게는 시편찬송을 적극적으로 권장함과 동시에 가르치도록 하였다. 그리고 어린이들에게 순수한 교리를 가르치기 위해서 간략한 신앙고백이나 요리문답을 작성해서 목회자가 직접 가르치도록 했다. 결혼은 지금까지 악하고 비성경적인 교황청의 법에 의해서 이루어 졌으므로 하나님의 말씀에 일치하는 새로운 규정을 제정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상과 같은 칼뱅의 새로운 제안은 교회의 행정에 관한 조항으로서 소의회와 대의회를 통과하였다. 성만찬은 일 년에 4차례 집행하며, 결혼광고는 예식거행에 앞서서 3주 동안 광고하여야 한다고 규정하였다.

제네바시는 칼뱅과 그의 동료 파렐의 가르침에 따라서 종교 개혁을 추진하였으나 모든 사람이 다 같이 개혁에 찬동하는 것은 아니었다. 15381월에 시의회는 원치 않는 사람에게는 성만찬을 베풀지 않는다고 결정하였으며, 2월의 시의회 선거에서는 칼뱅과 파렐을 반대하는 4사람이 특별 평의원으로 당선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베른시의 간섭과 더불어 개혁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재세례파와 손을 잡았으며, 파렐과 칼뱅은 아리우스주의자 이며, 자유방임주의자라고 비난하였다. 베른 의회는 제네바를 위시한 전지역을 그들의 손에 넣으려고 하였으며, 정치적으로 군사적으로 연약한 제네바 시의회는 3월에 이르러서 베른의 예전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하였다. 이러한 사태변화 가운데서 코로우, 파렐, 칼뱅은 제네바시를 떠날 것을 명받았다.

파렐과 칼뱅은 제네바를 떠났으며, 칼뱅은 허탈감에 빠져서 슈트라스부르크에서 연구에 전념하기로 하였다. 그간 파렐과 더불어서 3년 동안 개혁을 시도 하였던 모든 일이 허사로 끝난데 대한 분노와 갈등을 이겨 내면서 연구와 동시에 프랑스 난민들을 돌보는 목회일에 전념하였다.

다시 돌아온 칼뱅과 그의 개혁

파렐과 칼뱅이 떠난 제네바의 상황은 예전보다 좋아지지 않았으며, 오히려 악화되는 것 같았다. 새로 부임한 목회자를 특별평의원들은 자기의 종같이 부렸으며, 모든 가장들에게 교회에 참석토록 하는 의무규정을 부과 하였으며, 주의 만찬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으며, 도시의 도덕적 수준은 날로 저하되어 갔다. 이렇게 해서 평의원들은 인기가 떨어지고 다음해 선거에서 재당선하지 못했다. 이때로부터 칼뱅을 다시 초청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153910월 대의회에서 대표자를 보내 뜻을 전했다.

그러나 이 기간 동안 칼뱅은 보름스의회에 참석 중이었기 때문에 답장을 유보한 채 번민에 있었다. 이때 파렐의 충고가 크게 작용하였다. 파렐은 제네바가 차지하는 지역적인 중요성을 들어서 제네바가 개혁되면 인근 이탈리아, 프랑스, 스위스의 복음화가 가속화 된다고 강력하게 설득하였다. 칼뱅은 3년여 동안 제네바를 떠나 있다가 1541913일 다시금 제네바로 돌아왔다. 그리고 제네바 교회규범을 제정해서 의회에서 통과 시켰다. 이제는 개혁이 순조롭게 진행되었으며, 엄격한 훈련과 경건생활 실천을 위한 각종제도와 이단을 색출해서 처리하는 데 이르기까지 칼뱅은 정열적으로 개혁을 추진하였다.

제네바의 개혁 추진과 칼뱅의 신학

칼뱅은 제네바에서 소위 말하는 외국인이었다. 이런 그가 제네바에서 세력을 얻어 확장시키기까지의 과정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힘들었다. 다시 돌아온 칼뱅과 그들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마찰이 끊임없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칼뱅의 사상을 율법적인 독선이라고 비난하였다. 마치 루터에게 농민전쟁이 예기치 않는 결과를 초래하였듯이 칼뱅도 이들을 맞이해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제네바의 현지인과 자유주의자.

칼뱅의 개혁은 이단을 색출하고 처단하는 데에서 다른 사람과 특이한 점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이단성이 있는 것은 정죄하였으며, 자유주의자들을 맞이해서는 전통신앙과 신학을 고수함으로써 조금도 빈틈을 보이지 않았다.

칼뱅의 신학

칼뱅 역시 신앙 본래의 모습의 회복이라는 관점에서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을 많은 부분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미사를 폐지하였고, 교계제도를 장로제도로 바꾸었으며, 교회의 성 미술을 우상이라며 배척하고 파괴하였다. 그의 신학은 저서 신앙강요에 잘 나타나고 있다. 칼뱅과 그의 신앙강요만큼 기독교 신학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 예는 드물다. 개혁이 유럽 전역으로 퍼지면서 개신교회의 신학은 점차 칼뱅 쪽으로 수렴되었고, 지금도 개혁의 전통을 고수하는 신학적 유파를 가리키는 개혁주의라는 말은 칼뱅주의라는 말과 동의어로 쓰이고 있다.

칼뱅주의의 핵심 주장은 '칼뱅주의 5대 강령'이라는 다섯 가지 요점으로 요약된다. 이것은 칼뱅이 만든 것은 아니고 훗날 개혁주의에 반대하는 알미니안주의자들의 이론에 반박하기 위해 도르트 총회에서 정해진 것이다. 하지만 칼뱅주의의 사상을 잘 요약하고 있다.

전적 타락 : 육체적인 생명만 갖고 있는 모든 자연인은 그 본성이 타락하여 구원에 필요한 믿음을 만들어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전혀 믿음을 갖지 못한다는 말이 아니라, 믿음은 그 질()이 달라서 그 중에는 구원 받을 수 있는 참 믿음도 있고 받을 수 없는 유()의 믿음도 있는데, 다른 종류의 믿음은 사람이 스스로 발휘할 수 있으되 구원에 필요한 믿음은 사람이 스스로 발휘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주장을 '전적 무능력'이라고 하기도 하는데, 주의할 것은 그 '무능력'이라고 함은 사람이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기능을 잃었다는 뜻이 아니라 그의 영혼이 타락하여 참된 믿음을 갖기 싫어한다는 것이다. 성경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로 보건대 하나님이 참된 믿음을 주시기 전에는 아무도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되게 못 믿는다는 것이다.

무조건적 선택 : 앞의 '전적 타락'설에 의하면 참된 믿음은 하나님이 주셔야만 얻게 되는 것인데, 누구에게 참된 믿음을 줄 것인지에 대한 하나님의 선택에는 아무런 조건이 없다는 것이다.

제한 속죄 : 앞의 '무조건적 선택'을 받은 사람이 결국 '구속에 언약' 또는 '은혜의 언약'에서 그리스도의 백성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실효는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는 내용이다.

불가항력적 은혜 : 성경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로 보건대 하나님이 믿음을 주시기로 작정하신 사람이 그리스도를 아니 믿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구속의 언약'과도 연관이 있다.

성도의 견인 : 성경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로 보건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자리로 결코 떨어지지 않고 구원이 반드시 성취된다는 것이다. 이것 역시 '구속의 언약'과 연관이 있다.

이들 주장은 개혁주의를 반대하는 많은 프로테스탄트 종파들로부터 공격을 받고 있다. 또한 장로회도 시간이 지나면서 여기에서 완화된 입장을 취하고 있다. 또 칼뱅은 세르베투스를 신학적 관점 차이로 처형시켰다는 오해로 비난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세르베투스는 칼뱅을 만나기 전 이미 스페인과 프랑스의 로마교회 재판소로부터 공석 상태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으며, 이로 인해 칼뱅이 있던 제네바에서 체포되었으나 제나바 시의회의 재판을 다시 받게 된다.

프랑스인으로서 시민권이 없던 칼뱅은 신앙회의(이단 심문은 아님)에서 세르베투스의 이단성을 증명하는 것 외에는 재판에 다른 영향력이 없었다. 결국 제네바 시의회는 세르베투스를 이단자라는 명목으로 화형에 처했고, 이리하여 세르베투스는 칼뱅 생전에 제네바에서 종교적인 이유로 사형 당한 유일한 인물이 되었다.

칼뱅과 신정정치

제네바는 본래적으로 자유스러운 분위기였고 자유가 강조되는 도시였다. 그러나 칼뱅은 타락한 사람들을 바로 잡기 위해서는 강력한 생활규범과 훈련이 필요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부임하자마자 4가지 개혁안을 부르짖었으며, 그는 신학이 사회권력에 영향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의 사상은 제네바 행정 사법에 영향을 주었다. 몇 가지 예를 들면, , 도박, 주정, 술집 출입의 횟수, 방종, 사치, 접대 행위, 지나치게 화려하거나 분수에 넘치는 의복 착용, 음란하거나 비신앙적인 노래 등에 금지, 혹은 비난, 구금형을 가하였다.

심지어는 잔치집의 접시까지 세며 규제했다. 주민들의 교회 참석 여부를 감독하는 사람이 파견되었으며, 교회법원의 사람들이 가정을 1년에 한 차례씩 찾아가서 신앙상태를 점검 하였으며, 심지어는 길거리에서 무심코 뱉은 말까지도 책임져야 했다. 이상과 같은 엄격한 규율은 네덜란드와 스코틀랜드, 그리고 영국의 퓨러턴에 이르기까지 개혁교회의 주된 윤리가 되었으며, 현재까지도 전통으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칼뱅의 개혁' 평가

칼뱅의 가장 큰 업적으로 평가 받는 것은 개혁 운동의 신학이 사상적 체계를 잡는 데 그가 미친 영향이다. 이것은 그의 저서 신앙 강요가 갖는 의미라 해도 무방하다. 개혁을 이끈 많은 인물들이 있었지만 결국 개혁교회의 신학은 점차 칼빈 쪽으로 수렴되었고, 지금도 개혁의 전통을 고수하는 개혁주의 신학은 칼뱅주의라는 별명으로도 불리고 있다. 장 칼뱅의 사상은 유럽교회사에 영향을 주어 불란서,스코틀랜드,네덜란드,잉글랜드등에 영향을 주었다.

칼뱅에 대한 비난 중엔 그가 자신과 이념을 달리하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종교적인 비관용했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그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루터와 칼뱅이 신학적으로 차이가 있었음에도 서로 비난하지 않았다는 점을 내세운다.

영국의 개혁

 

잉글랜드 종교개혁의 정치적 동기

헨리 7세는 잉글랜드 내부의 결속을 어느 정도 다진 다음에 종주국이었던 에스파냐와의 우호관계를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해서 에스파냐 왕페르디난도와 이사벨라 사이의 셋째 딸인 카타리나를 맞이해서 큰아들 아더와 결혼시켰다.

15011114일 화려한 결혼식을 올렸으나 15024월에 신랑이 사망하고 말았다. 그러자 이사벨라는 강력한 압력을 가해서 아더의 동생 헨리 8세와 재혼시킬 것을 요구했다. 만일 듣지 않으면 결혼 지참금을 회수하겠다고 했다 이렇게 해서 캐서린은 1509년 시동생인 헨리 8세와 결혼하였다.

철이 들면서 헨리 8세는 어쩔 수 없는 결혼이었지만 아들을 낳아서 왕위를 계승하려고 했으나 캐서린과의 사이에는 딸만 낳았고 그것도 다 죽고 오직 메리 튜더만 살아남았다. 왕자가 없이 딸만 있다는 것은 자칫 영국이 후계자 문제로 외세의 간섭을 받게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런 과정에서 헨리 8세는 궁녀 앤 볼린과 사랑에 빠진다. 그리고 아이를 갖고 만다. 그래서 자신과 캐서린의 결혼은 근친혼을 금지한 성서에 어긋나는 결혼이므로 혼인을 무효화하고 앤과 결혼하기를 원했다. 월시 추기경은 이 일을 추진하기 위해 잉글랜드를 떠난다.

그러나 헨리 8세의 혼인무효 요청은 교황 클레멘스 7세의 불허로 거부되었다. 이에 월시는 그 책임을 물어 실각되고 그의 뒤를 이어 토머스 크랜머캔터베리 대주교(Archbishop Thomas Cranmmer)가 영국의 실권자가 되었다.

토머스 크랜머는 헨리 8세의 요구에 따라 교황권 제한령과 사전 보호법을 발동시킨다. 이 두 가지 법으로 로마교회 지도자 교황의 권한이 영국 내에 들어오지 못하고 국왕의 허가 없이 교황에게 항소할 수 없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헨리8 세와 앤과의 결혼이 적법하다고 공포되고 앤은 왕비가 되었다.

왕위지상권

15339월 앤이 공주 엘리자베스를 낳았으며, 1534년에는 왕위지상권(Royal Supremacy, 흔히 수장령이라고 잘못 말한다.)이 잉글랜드 의회에서 통과되었다. 왕위지상권은 잉글랜드 종교개혁이 루터사상의 영향에 따라 진행되었음을 말해준다. 국가권력을 하느님께로부터 나온 신성한 것으로 이해한 루터의 영향이 잉글랜드 교회가 왕위지상권으로써 로마 가톨릭교회로부터 독립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왕위지상권은 "신앙상의 권위 또는 잉글랜드 성공회 교구가 개혁 또는 수정을 시도할 경우, 그 과오, 이단, 죄악을 검열하고 개혁과 수정을 가하여 근절한다"는 권리가 왕권에 있다는 선언이며, 민주주의가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는 현대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더구나 교회가 세속 정치권력을 갖고 있거나 정치인들과 곁탁한 당시 유럽교회에서 왕위지상권은 전혀 이상한 게 아니었으므로, 민주주의에 익숙한 현대인의 관점에서 이를 비판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수도원 해산

1536년에는 부패의 온상이던 수도원을 해산시키는 수도원 해산법을 통과시킴으로써 6세기이후 로마교회의 지배를 받던 잉글랜드 성공회는 로마교회에서 독립하였다.이에 교황청은 격노하여 헨리 8세를 비롯해 앤 볼렌, 크랜머 등을 파문하였다.

왕위계승법

앤의 두 번째 임신과 더불어서 왕위 계승법을 통과시켰는데 이 법은 누구든지 왕자를 낳으면 계승권을 가지고 그 다음으로는 메리, 그리고 그 다음에는 엘리자베스라고 명기하였다.

1536년 앤이 두 번째도 아들을 낳지 못하자 헨리 8세는 간통죄를 적용해서 처형시키고 그의 눈길은 세 번째 여인인 제인 시무어에게로 향했다. 그는 아들 에드워드 6세를 낳고서 죽고 만다. 그 후 헨리 8세는 클리브즈의 앤과 결혼하였으나 이혼한다.

그러자 보수파에서 캐서린 하워즈를 왕비로 내세우면서 로마 가톨릭 6개 조항을 발표시켰다. 그러나 보수파도 얼마가지 못하여 헨리 8세는 캐서린 하워즈를 간통 혐의로 처형하고서 마지막이자 여섯 번째 부인인 캐서린 파아와 결혼하였다. 1547년 헨리 8세가 죽음으로써 에드워드 6세가 왕위에 오른다.

중도노선

헨리 8세는 6번을 결혼하면서 각 권력의 암투에 휘말리면서 개혁보다는 권력 유지에 부심했다. 즉 개혁을 향한 의지 따위는 없었다. 그러나 어느 쪽에 치우치지 않고 지리적인 이점을 이용해서 독립을 유지하였다.

그래서 영국 성공회는 신앙적 극단을 피하는 중용(Via Media) 입장을 유지하고 있었으며, 지금도 성공회는 신앙적 극단을 피하는 중용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

에드워드 6

1596년판 성공회 기도서

개신교 노선의 종교개혁

에드워드 6세는 너무도 어린 나이인 10세에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그래서 자연히 외척이 힘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삼촌이었던 헤르포드의 백작은 섭정으로 선출됨과 동시에 서머셋 공작으로 승진 하여서 국가의 총사령관직을 수행하게 되었다. 실권을 장악한 서머셋은 프로테스탄트 추종자였다. 따라서 잉글랜드 성공회는 프로테스탄트 사상에 따라 잉글랜드 종교개혁을 진행하였는데, 당시 개혁방향은 다음과 같다.

로마 가톨릭 6개 조항을 파기시킴과 더불어서 로마 가톨릭과 관련된 모든 법을 파기했다.

국회는 성만찬 집전시 보혈과 성체(聖體)의 분배를 허용하였으며, 성직자의 결혼을 금하는 법령을 무효화 시켰다.

에드워드 제1기도서가 작성되었다.

금서로 지정되어 있던 영문성서의 출판과 판매의 자유가 허락되었다.

에드워드 제2기도서가 마련되었다.

잉글랜드 성공회의 대헌장이라고 할 수 있는 42개 조항이 발표되었다. 이 헌장은 엘리자베스 1세 여왕 시절에 영국 성공회 39개조 신조로 대체되기는 하였으나, 영국 성공회의 근본적인 신앙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

새로운 헌금법을 발동하여서 교황청으로 가던 모든 헌금을 국왕의 수입으로 돌려 놓았다.

 

 

유럽 종교개혁자들의 영향

이상과 같은 변화가 영국에서 일어나자 로마 가톨릭교회의 탄압을 피해 유럽으로 피난 갔던 개혁추진파들이 급거 귀국하였으며 동시에 유럽으로부터 신앙의 자유를 찾아서 영국으로 망명 오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렇게 해서 대륙으로 피난하였던 사람들이 새로운 학문과 개혁적 전통을 영국 교회에 소개하기 시작함으로써 영국의 대변화가 일기 시작하였다.

메리 1세의 반동

토마스 크랜머

에드워드 6세의 사망은 영국의 왕위 계승 문제를 야기시켰다. 영국인들은 메리에게 눈길을 돌렸으며 왕위에 오른 메리는 자연스럽게 영국의로마 가톨릭화를 추진하였다. 메리 1세는 한 많은 어린 시절을 보냈었다. 그래서 그녀는 헨리 8세의 시절과 에드워드 6세의 시절 법령을 상당 수 번복하였다. 헨리 8세와 캐서린의 결혼은 적법한 것이었으며, 메리 자신은 적법한 왕위 계승자라고 선포하였다.

에드워드의 6세의 모든 신앙적 법안을 폐기시켰으며, 헨리 8세 시절의 반-교황적인 법을 무효화 시켰다. 영국 교회의 수장으로서 메리 1세는 중세적인 예전을 그대로 복구하였으며, 성공회의 감사성찬례가 아닌 로마 가톨릭 미사를 다시금 실시하였다.

메리 1세는 에스파냐 왕 펠리페 2세와 결혼하였다. 그와 동시에 로마교회 성직자들이 속속 복귀하였으며, 교황청 사절이 공식적으로 다시 파견되었다. 교황청 사절은 순종법을 발동시킴과 동시에 이단 규제법도 발동시켰다. 이때부터 개신교 신자와 성공회 신자들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었다.

메리 1세는 피의 여왕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많은 개신교 지도자들과 토머스 크랜머 대주교,휴 래티머 주교 등의 성공회 성직자들을 처형하였다. 역사학자 앙드레 모로아의 영국사에 따르면, 휴 래티머 주교는 순교를 앞두고 "오늘 영국은 하느님의 빛, 영원히 꺼지지 않을 영원한 빛으로 밝게 될 것이다."라는 말을 하였다.

토머스 크랜머 대주교는 성공회 전례와 성사의 기준인 성공회 기도서를 1549년 작성한개혁자였다. 그는 휴 래티머 대주교가 순교한 뒤에 순교하였는데, 정부의 공작에 의해 한때 성공회 신앙을 버렸다. 하지만 자신의 비겁함을 부끄럽게 여기고 신앙을 버리지 않았음을 공언하였으며, 화형으로 순교하였다. 순교 당시 크랜머 대주교는 신앙철회서에 서명한 자신의 오른손을 불태웠다.

엘리자베스 1세의 수습

엘리자베스 1

=중도노선

엘리자베스 1(1559- 1603)의 즉위 이전부터 영국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개신교 쪽으로 흐르고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1559115일 대관식을 거행하고서 왕위에 올랐다. 엘리자베스1세는 매우 지혜로운 여왕이었다. 그는 1603년에 이르기까지 영국과 영국 성공회를프로테스탄트쪽으로 이끌어 갔으나 어느 한 쪽으로도 과도하게 흐르지 않았다. 종교 개혁 이후의 대립을 막기 위해 엘리자베스 1세는 프로테스탄트와 로마 가톨릭간의 극단을 피하는 중용노선(Via Media)을 걷기 시작했다.

청교도

일부 개신교 신자들은 이에 불만을 가졌는데, 이들을 청교도라고 한다. 청교도들은 장 칼뱅의 개혁 사상을 따르는 프로테스탄트 신자들을 말한다. 이들은 잉글랜드 성공회의 로마 가톨릭 잔재들을 청산하기를 바랐으며, 청아에서 만든 역사책인 영국사에 따르면 성공회 교회안에서 활동한 청교도들과 성공회 교회밖에서 활동한 청교도들이 있었다.

통일법

엘리자베스 1세는 여러 번의 반대를 물리치고서 429일 여왕의 영국 교회 지존법을 통과시켰다. 이렇게 해서 모든 성직은 여왕에 종속되었다. 이 권한을 바탕으로 영국 교회 통일법을 통과시켜, 사제나 주교등의 영국 성공회 성직자들의 예복과 교회의 장식을 비롯한 모든 것을 통일시켰다.

칼뱅주의 사상의 영향

엘리자베스 1세는 1563년 두 번째 의회 소집으로써 제2차 통일령을 통과시켰는데 이번에는 훨씬 더개혁을 강하게 추진하였으며, 많은 점에서 칼뱅주의의 영향을 받는 쪽으로 기울어져 갔다. 1556년 매슈 파커 캔터베리 대주교에 의해, 에드워드 6세의 42개 조항을 영국 성공회 39개조 신조로 개정하였는데,프로테스탄트의 영향을 받아서 로마 가톨릭의 교리에 대해서 비판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분열

그러나 1563년 두 번째 의회는 영국 성공회의 통일법을 놓고 분열을 초래하였으며, 통일법에 저항한 청교도 측의 패배로 끝났다. 교황청은 엘리자베스 1세를 파문시켰으며 여기에 맞선 엘리자베스 1세는 반 교황법을 통과시켰다. 그리고 1585년 예수회 사람들을 영국에서 강제로 추방하였다.

중도노선

엘리자베스 1세는 1588년 에스파냐의 무적함대를 무찌름으로써 교황권과 로마주의로부터 영국을 보호하였으며, 동시에 해상권을 장악함으로써 화려한 대영제국 건설의 기초를 마련했다. 엘리자베스 1세의 영국 종교 개혁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중용의 실천이었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종교분쟁을 해결하고자 노력한 지혜로운 정책이었다고 생각된다.

 

과격파 개혁

종교개혁은 루터회, 장로회, 그리고 성공회로 대변되는 3대 보수적 개혁과 재세례파, 성령주의파, 그리고 반 삼위일체파로 이어지는 3대 급진적 종교개혁이 있다. 후자에 속하는 종교개혁을 흔히 과격파 종교개혁이라고 부르는데, 그 이유는 전자가 이룬 개혁에 만족하지 못하고 한쪽으로 너무 기울어지며, 성서에 어긋났기 때문이다. 이들은 로마 가톨릭 교회뿐만 아니라 보수파들에게도 배척을 받았다. 그래서 이들은 한시적인 운동에 불과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들에게는 온건한 보수파들에게서 볼 수 없는 신선함이 있었고, 이들은 집단적인 공동체를 거점으로 해서 카리스마적인 권위를 가진 사람들의 운동이었다는 점에 특징이 있다.

재세례파

재세례파는 유아세례를 부정하는 개혁의 분파를 지칭하며, 유아세례를 받은 이는 재세례를 통해야 하느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다고 보았다. 교회와 국가 사이에 상호 긴장 관계 수립, 정치 참여 금지 등을 설교하여 국가를 신뢰하지 않았다.

재세례파의 주요 분파는 다음과 같다.

스위스 형제단

재세례파의 활동의 시작은 스위스로부터 일어났다. 콘라도 그레벨은 츠빙글리의 개혁안에 만족하지 못하고 보다 더 철저한 개혁을 원했다. 그래서 그들은 형제단을 조직하여 사람들을 규합하였다. 그들은 예배와 신학과 교회 행정에서는 초대교회를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교회라는 용어를 배제하고 공동체라는 용어로 대체하였고, 찬송가도 성서적 근거가 없다고 반대하였다. 이들은 유아세례의 반대, 세속적인 직업 거부, 정치 참여 금지 등을 주장하였다.

그러다보니 로마 가톨릭 교회와 루터교회 그리고 스위스의 개혁교회들로부터 박해를 받게 되었다. 이들은 모든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려고 했다. 비폭력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들 공동체의 일원이 되기 위해서는 죄 회개, 그리스도에 대한 확신, 그리고 거듭난 생활의 모범을 보여야 했다.

뮌스터의 은거자들

호프만은 본래 루터교회에 입문했다가 츠빙글리를 거쳐 재세례파로 옮겼다. 그는 초대교회의 영지주위에 가까운 이론을 가르쳤다. 그리스도의 몸이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이론과 묵시적인 종말론을 가르쳤다. 그리고 예수는 스트라스부르에 재림해서 새 예루살렘을 건설한다고 하였다. 이런 소문이 네덜란드까지 퍼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러자 시 당국은 멜기호프를 감금하자 더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다. 그리고 그를 처형하자 이제는 장소를 뮌스터로 옮겨서 임박한 그리스도의 재림을 설교하였다. 이렇게 전개되자 도시 밖의 재세례파들을 처형하기 시작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도시 내의 재세례파 종말론자는 로마 가톨릭 전통의 모든 유산들을 파괴하고 소각하고 도시 내의 비 재세례파 사람들을 축출하였다. 급기야는 전쟁으로 번져서 남자들의 죽음으로 일부다처제를 실시하였다. 그러나 여기에 불만을 품은 내부 반동자들이 교황청에서 파견한 군대와 내통하고서 성문을 열어 주었으며, 결국 그들은 무참히 살해되어 갔다.

메노나이트

메시몬스는 네덜란드 출신의 로마 가톨릭 사제로 일하다가 재세례파에 가담한 사람으로서 기독교 교리의 기초라는 일종의 변증서를 저술하였다. 그는 이 책에서 과격파가 부르짖었던 칼(폭력), 일부다처제도 등을 반대하면서 재세례파의 새로운 신학을 정립하였다. 뒤에 메노 시몬스의 신학을 따르는 사람들을 메노나이트(영어: Mennonite) , 메노파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들은 스위스형제단과 관점이 유사하며 원하는 자에게 세례를 베풀었으며, 교인들의 성서 중심적인 훈련을 강조하였다.

 

성만찬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상징하며, 비신자와는 결별하고 정직하게 살아가도록 했고 공직을 거부하게 했다. 특히 그리스도의 사랑과 고행을 실천하는 길을 강조하였다. 또한 그리스도인은 평화를 위해서 부름을 받았으므로, 폭력이외의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기독교 평화주의에 근거, 전쟁과 폭력에 반대했다. 그래서 메노나이트는 병역을 사회봉사로 대신하는 양심적 병역거부로 평화주의를 실천해오고 있다.

유아세례를 반대함으로써 재세례 금지법을 어겼으며, 이원론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교회와 세상을 분리했다. 메노나이트에서 자의적인 세례를 통해 인간의 공로를 강조하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주장도 있으나, 이는 오해이다. 교회역사속의 메노나이트는 인간의 공로가 아닌 믿음을 강조했으며, 세례를 베푼 것도 본인의 의지와는 무관한 유아세례에 반대하는 의미를 갖고 있다.

성령주의자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로부터 종교 개혁이 한창 무르익을 때까지 개인적인 영적생활을 강조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은 교권적인 기도문에 의한 형식적인 기도보다는 하느님과의 직접적으로 영적인 교제를 바람으로써 자연적으로 반() 교회적인 공동체를 형성했다. 이들은 종교 개혁의 대원리인 성서와 은총과 믿음을 거부하고서 대중 속에 파고들어서 조용하게 활동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대표적인 신령주의자가 토마스 뮌처이다. 토마스 뮌처는 루터의 오직 성서(라틴어: Sola Scriptura)를 비판하며, 그리스도인이 직접 성령을 경험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성서가 하느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다면, 그리스도인은 성령을 직접 경험하면 충분한 것이 아니냐는 것이 토마스 뮌처의 견해였다.

이들은 성서보다는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교제에서 얻은 영감 즉, 주관적 종교경험을 더욱 권위 있는 것으로 보면서 기록된 성서의 권위를 무너뜨렸다. 그리고 오직 각 개인이 하나님을 직접 경험하는 주관적 종교경험을 가장 가치 있게 보았다. 그러다보니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불필요한 것으로 보므로 삼위일체와 성육신을 부인하는 쪽으로 흐르기 쉽다. 어떤 면에서는 이들은 합리주의적인 면을 많이 내포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 대표적인 사람들로서 캐스타슈벵크펠트(1489-1561), 세바스티안 프랑크(1499-1542), 후안 데 발데스(1490-1541)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모두 체계적인 교권을 부인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신비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이 주장하는 내면적인 영적인 교제는 언제나 가장 합리적인 방향으로 흐르기 마련이었으므로 어떠한 면에서는 이들이 19세기에 활발하게 진행되었던 자유주의 신학의 선구자라고 말할 수 있다.

반삼위일체파

루터는 종교개혁을 하겠다고 처음부터 부르짖은 것이 아니었다. 이러한 면에서 루터는 기독교의 기본적인 교리와 예전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잘못 시행되고 있는 면을 바로잡자고 외쳤을 뿐이다. 그런데 루터로부터 시작된 개혁의 바람을 타고서 기독교의 가장 핵심적인 기본 교리를 부인하는 무리들이 있었다. 이들은 이탈리아와 에스파냐를 중심으로 활동하다가 유럽의 자유지역이라고 할 수 있는 폴란드, 모라비아 지역으로 도피하였다.

그리고 네덜란드를 거쳐서 영국으로까지 퍼졌으며, 신대륙의 발견과 함께 미국으로까지 퍼져 나갔다. 이들의 신학적인 이론은 "라코비안 요리문답"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이들의 신학적 구조는 속죄론에 있다. 이들은 전통적인 속죄설을 부인하는 틀 안에서 삼위일체를 부인한다. 그래서 이들은 예수의 대속적인 희생을 통해서 구원받는 것을 반대하고, 예수가 도덕적인 스승으로 뛰어난 삶을 살았기 때문에 신적인 능력을 받았다고 했다.

그러므로 인간의 구원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 것보다는 도덕적 스승으로서의 예수의 삶의 모범을 따라서 거룩한 생활을 하는 데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을 배제하였기 때문에 삼위일체론자가 아니라 일위일체론자였다. 흔히 유니테리언이라고 부른다.

반삼위일체론자들은 인격적으로 매우 존경할 만한 사람들이었다. 높은 학식과 지식을 소유한 사람으로서 도덕적으로 칭찬 받을 만하였다. 이런 도덕적인 윤리관 덕택에 지금까지 존재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이들이 기독교의 핵심인 예수그리스도를 인간으로 전락시켜 초대교회의 에비온주의와 비슷한 면이 있다는 비판도 있다. 여기서 에비온주의는 예수는 완전한 인간이며, 하느님께서 그를 양자로 삼음으로써 하느님의 아들이 되었다고 본 고대교회의 이단종파를 뜻한다.

로마 가톨릭교회의 대응

종교개혁은 단순하게 신앙적인 개혁에 그치지 않았다. 유럽의 문화와 문명을 온통 뒤바꿔 버린 분기점이었다. 유럽의 각 나라들이 로마 교황청의 통제에서 벗어나 독립을 얻었으며, 예술에서도 인문주의와 더불어서 신앙적인 주제를 떠나서 인간을 중심으로 삼았으며, 과학에서도 신앙적인 면에서 벗어나서 합리적인 요구를 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종교 개혁은 각 나라의 경제적 자립을 확보해 줌으로서 교황청의 재정적 압박과 더불어서 권위를 상실케 하였다.

교황청으로서는 어떻게 해서든지 잃어버린 권위를 회복해야만 했다. 이러한 절대적인 필요성에서 로마 가톨릭교회의 신학적 입지를 확보하려는 트리엔트 공의회를 개최하였으며, 새롭게 조직된 예수회라는 종단의 창설을 허락하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러한 쇄신 운동은 실천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시도에 그쳤다. 그것은 개혁을 주도해야 할 교황이 교회 문제에 관심을 두기보다는 세속 문제에 몰두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교황청은 오스만 제국 등 이슬람 세력의 유럽 침공에 반격하기 위해 십자군을 조직해야 했고 유럽 각 나라들의 정치적 분쟁에 일일이 개입하여 중재해야만 했다.

게다가 1572년에 신성로마제국의 개신교를 신봉하는 용병들이 교황령에 쳐들어 와 로마를 약탈하는 사건이 일어나는 등의 일로 가톨릭교회도 그에 따라 종교개혁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기보다는 오히려 태도가 강경해질 수밖에 없었다. 결국 가톨릭교회는 자유주의가 절정에 이르렀던 1869-1870년의 제1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더욱 더 보호망을 강하게 하였다가 1962-1965년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보호막을 벗어 버리고 개방을 허락함으로써 비로소 종교 개혁에 도전장을 던졌다고 말할 수 있다.

로마 가톨릭의 교황 바오로 6세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개막식에서 옵서버로 참석한 비가톨릭 종교자들에게 가톨릭이 기독교의 분열의 책임을 함께 지고 있다고 말하였다.

트리엔트 공의회

15451213일에 교회 개혁을 수행하려는 강한 의지를 지닌 교황 바오로 3세의 주최 아래 트리엔트에서 공의회가 소집되었다. 18년 동안 열린 트리엔트 공의회는 세 시기 즉, 교황 바오로 3세 치세에 속하는 제1(1545-1547), 교황 율리오 3세가 속개한 제2(1551-1552), 교황 비오 4세 치세 때 열린 제3(1562-1563)로 구분된다.

트리엔트 공의회의 목적은 개신교가 점차적으로 강성해 가는 것과 교회 내부의 부패상을 개혁하는 것이었다. 이런 것은 주교들의 태만으로부터 야기되었다고 밝히며 새로운 각성을 촉구하였다. 이들에 따르면 교회의 증가하는 부패는 영적 이상의 상실, 교리 문제에 관한 신학적인 불명확성, 그리고 교황청의 타락에 그 원인이 있었다. 따라서 회의에서 교회 개혁에 관한 중요 안건으로는 교회의 무능, 성직자 중임제, 그리고 감독 소홀 등이었다. 교리 문제에서는 불가타판 성서를 정경으로 재확인하였다.

그런데 15521월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주선으로 회의장에 도착한 개신교측 사절들은 새로운 공의회 소집, 이미 결의된 신앙 교리의 취소, 교황 수위권 거부, 공의회 우위사상의 인정과 같은 요구사항을 내놓았다. 게다가 루터교회를 신봉하는 독일인 기사들이 갑자기 회의장 안으로 난입해 난동을 일으키자 교황은 공의회를 서둘러 중단하였고 더 이상 로마 가톨릭 교회와 개신교의 대화는 있을 수 없게 되었으며 기독교 세계의 분열만 두드러졌다. 결국 트리엔트 공의회는 개신교를 이단으로 규정짓고 예수회를 앞세워 개신교를 수백년간 가혹하게 탄압하기 시작했다.

예수회의 창설

영성가 로욜라

이냐시오 데 로욜라는 피레네 산맥에 접한 로욜라에서 태어났다. 그는 가문의 출세와 명예를 위하여 일찍부터 군대에 입대하였다. 그러나 전투에서 큰 부상을 당해 오른쪽 다리를 절단하는 수술을 하고나서 그는 성서와 여러 성인들의 전기를 읽으면서 영적 지도자로서의 꿈을 끼웠다. 그리고 영성 훈련과 은둔 생활, 고행, 대학에서의 공부, 신학 공부를 하였다.

수도회

1541414일 예수회는 로욜라를 공식적인 대표자로 선출하고 422일 새로운 수도회로 출발하였다. 예수회의 창설 목적은 분명했다. 헌장에서 밝히는 대로 종교 개혁으로 인해서 실추된 교황의 절대권 회복을 위해서 싸우는 군대 교단이 될 것과 해양 개척으로 인해서 발견된 신대륙에 그리스도의 진정한 복음을 전하는 선교 집단이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하나 더 붙인다면 학문을 발달시킴으로서 선교의 사명을 달성하는 것이었다. 이 과업을 달성하기 위해서 군대적인 절대 복종이 가장 절실하게 요구되었다.

지혜로운 선교방식

예수회는 신앙의 토착화라는 새로운 선교 방법을 개발하였다. 예수회 선교사들은 선교 지방의 관습과 생활을 이해하려고 부단히 노력하였고, 원주민들과 의식주를 함께하면서 그들이 기독교 신앙을 올바로 받아들이게 하기 위하여 그들의 언어로 교리서를 번역하거나 저술하였다.예수회의 토착화 선교는 선교지역의 전통을 존중함으로써 원주민들의 반발을 줄이는 매우 지혜로운 선교방법이라고 생각된다.

종교재판

한때 중세 유럽에 유행했었던 종교재판을 16세기에 자신들의 전제적 통치에 일대 위협을 느낀 교황청이 강경일로로 돌아서서 개신교 박멸의 수단으로 부활시켰다. 용의자로 지목되기만 하면 교황청에서 파견된 심문관의 철저한 고문으로 강요한 고백이 강요된 후 정죄되면 세속 정권에 의하여 형이 집행되었다. 재산 몰수, 투옥, 유배 및 사형 등의 형이 내려졌다. 교황 바오로 4세의 영도 아래 소위 '거룩한 이단심문소(Sanctum Officium Sanctissimae)'라 불리는 악명 높은 신앙교리성성이 모든 나라들의 종교재판 중심기관으로 설립되어 수많은 이단심문관들을 양성하여 전 유럽의 개신교 탄압의 기수로 삼았다.

끝내면서

15171031일을 계기로 일어난 유럽의 이른바 종교개혁 운동은 기독교 역사상 가장 큰 파문을 일으킨 일들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운동은 긍정적 시각에서 보는 이들도 있는 반면, 부정적 시각으로 보는 이들도 있다.

이들에 대하여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그 중에서도 위클리프, 후스를 위시한 신학적 도전은 중세 기독교의 기초에 균열을 가져오게 하였으며, 신비주의 개혁자들의 집단적 운동은 점차 하나의 범시민 운동으로 번져서 교황청의 단일 체제에 커다란 위협을 주었다. 거기에다 교회의 위신은 교황청의 분열로 이어져 땅에 떨어졌으며, 교황청의 지나친 과세는 일반 시민들의 원망을 자아내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부조리는 16세기 유럽 대륙 중에서 독일의 경우가 제일 심했다. 또한 독일은 연방제이므로 교황의 세력이 왕권을 통하여 직접 미치기가 힘들었으며, 르네상스를 통한 인문주의의 영향이 지성인들 사이에 컸기 때문에 어느 곳보다도 개혁을 원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오늘날 루터의 개혁운동을 보다 폭넓은 동기에서 해석하려는 경향이 있지만, 루터 개인의 입장에서는 종교적 관심에서 출발했던 교회 개혁 운동으로만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루터 자신은 어떻든 그를 둘러싼 인물들의 동기는 결코 종교적 신념과는 큰 관계가 없고 정치적 동기가 더욱 강하게 작용했으며, 칼뱅의 개혁은 경제적 동기가 주요한 동기가 되어 그의 개혁에 참여한 것으로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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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약신학


언약은 성경에 등장하는 개념으로서 하나님이 택하신 자녀들에게 하신 약속이다, 그 내용은 지켜야할 의무 조항들로 이루어지며 의무를 불이행할 경우 언약은 파기된다. 칼빈주의자들은 인간의 요구조건 없이 하나님의 선언과 함께 바로 체결된다고 말한다. 칼빈주의자들은 성경의 여러가지 언약이 결국 세 가지로 요약된다고 본다:

?구속 언약 (covenant of redemption): 삼위일체 중 아버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사이에 맺은 언약이다. 그리스도 쪽에서는 모든 사람의 죄값에 해당하는 심판을 맛보고 구원에 필요한 조건을 자기 백성들을 대신해서 이행하겠다는 것이며, 아버지 하나님 쪽에서는 그리스도를 그의 백성들의 머리로 인정하며 그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의로움을 백성들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의로움으로 인정하여 그들을 구원해 주시겠다는 내용이다. 이 언약이 창세전에 체결되었으며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완수된 것으로 본다.

?행위 언약 (covenant of works): 하나님과 아담 사이에 맺은 언약이다. 아담은 인류의 대표로서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며, 하나님은 그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는 내용이다. 아담은 실패했으며 이로써 인류에게는 죽음이 왔다고 본다.

?은혜 언약 (covenant of grace): 아담이 실패한 이후로 곧바로 모든 인류와 하나님이 맺은 언약이다. 사람 쪽에서는 하나님이 그리스도에게서 구원에 필요한 모든 조건을 받으실 것이란 사실을 받아들이라는 것이며, 하나님 쪽에서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사람을 그리스도의 백성으로 삼아주신다는 내용이다.

 

5대 강령[편집]

?전적 타락 (Total Depravity): 육체적인 생명만 갖고 있는 모든 자연인은 그 본성이 타락하여 구원에 필요한 믿음을 만들어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전혀 믿음을 갖지 못한다는 말이 아니라, 믿음에는 다른 질(質)이 있어서 그 중에는 구원 받을 수 있는 참 믿음도 있고 받을 수 없는 유(類)의 믿음도 있는데, 다른 종류의 믿음은 사람이 스스로 발휘할 수 있으되 구원에 필요한 믿음은 사람이 스스로 발휘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주장을 '전적 무능력'이라고 하기도 하는데, 주의할 것은 그 '무능력'이라고 함은 사람이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기능을 잃었다는 뜻이 아니라 그의 영혼이 타락하여 참된 믿음을 갖기 싫어한다는 것이다. 성경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로 보건대 하나님이 참된 믿음을 주시기 전에는 아무도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되게 못 믿는다는 것이다.

?무조건적 선택 (Unconditional Election): 앞의 '전적 타락'설에 의하면 참된 믿음은 하나님이 주셔야만 얻게 되는 것인데, 누구에게 참된 믿음을 줄 것인지에 대한 하나님의 선택에는 아무런 조건이 없다는 것이다.

?제한적 속죄 (Limited Atonement): 앞의 '무조건적 선택'을 받은 사람이 결국 '구속에 언약' 또는 '은혜의 언약'에서 그리스도의 백성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실효는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는 내용이다.

?불가항력적 은혜 (Irresistible Grace): 성경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로 보건대 하나님이 믿음을 주시기로 작정하신 사람이 그리스도를 아니 믿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구속의 언약'과도 연관이 있다.

?성도의 견인 (Perseverance of Saints): 성경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로 보건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자리로 결코 떨어지지 않고 구원이 반드시 성취된다는 것이다. 이것 역시 '구속의 언약'과 연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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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신학 1. 『칼빈의 5대 교리』에 대하여 설명하시오.

 

서설

 

1) 칼빈은?

1517년 로마 카톨릭에 대한 루터의 ‘95개조 항의문’이란 종교개혁이 있은 후,

칼빈(1509-1564)은 이를 더욱 조직적이고 논리적으로 개혁주의 신학을 확립했다.

 

따라서 ‘루터 없이 칼빈 없고, 칼빈 없이 루터 없다’는 평가가 따르는 것은

“루터는 바위산을 폭파한 사람이라면 칼빈은 루터가 깬 바위에 글을 새긴 사람”이란

찬사를 받는다. (Philip Schapp)

 

그의 작품으로는 <기독교 강요>(1536초판과 1559년의 최종판; 평생 보완)

<주석> <설교> <신학논문> <편지> <예배서> <교리문답> 등이 있다.

 

이같은 저술에 나타난 칼빈의 성경관,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사상, 칭의관, 교회관,

성례론, 기도론, 목회원리 등은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 도르트 신조, 웨스트민스

신앙고백, 존 낙스 등에 영향을 끼치고 네덜란드에 최초의 개신교 국가가 세워지며

17세기 교리 지상주의에, 18세기 영성운동에, 19세기 자유주의에 영향을 준다..
 

2) 칼빈주의가 우리나라에 미친 영향

1884년 최초로 이 땅에 미북장로교 의료선교사 알렌이 입국하고,

1885년 미북장로 목사인 언더우드와 감리교목사인 아펜젤러가 선교사로 들어왔다.

 

그 후 1890년 평양신학교 마포삼열이 세워지고, 주기철, 이기선, 손양원, 박관준

안이숙 등 시대적 환경에 따른 순교자들이 잇따랐으며,

칼빈의 영향을 받은 목회자로 박형용, 박윤선, 명신홍 등 신학자들이 배출되었다.

 

3) 칼빈주의 교리는

⓵ 오직 말씀 (Sola Scriptura)

⓶ 오직 은혜 (Sola Gratia)

⓷ 오직 믿음 (Sola Fide)

⓸ 오직 그리스도 (Sola Christo)

⓹ 오직 하나님께 영광 (Sola Deo Gloria) 이었다.
 

2. 칼빈주의 5대 교리와 알미니안 주의 5대 교리와의 비교
 

1) 신학의 2대 사조

기독교 역사 속에서 논쟁이 되고 정의되어 왔던 어울릴 수 없는 2개의 신학사조가

존재한다. 오늘날은 칼빈주의는 정통, 알미니안 주의는 이단으로 치부되어 있다.

2) 2개 사조의 비교


칼빈주의 5대교리 (TULIP)
 
 
알미니안 주의 5대 교리
 

전적 부패 혹은 전적 무능력

Total Depravity
 
자유의지 혹은 인간의 능력

1) 인간의 타락은 인간의 지. 정. 의

모두가 무력해져 전적 부패하게 되었다

(롬3:10-12, 엡2:1-3)

2) 전적으로 부패하여 무능력한 인간은 스스로 구원을 성취할 수 없다.(요8:44)

3)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믿고

구원함을 얻을 수 있다.(엡2:4-9)
 
1) 인간의 타락에도 불구하고 영적으로

전적 무력해진 것은 아니다.


2) 인간의 자유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베풀어진다.


3) 인간의 자유의지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선택할 수 있다.

2. 무조건적 선택

Unconditional Election
 
2. 조건적 선택
 

1) 하나님의 선택은 인간의 행위여하에

달려 있지 않고, 오직 그의 주권적

의지에 따라 예정되고 결정된다.

 

2) 하나님께서는 택한 백성들에게

성령을 통하여 자발적으로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게 한다.

 

3) 하나님께서 죄인을 선택하신 것으로

예정에 따라 구원이 이루어진다.

 
 
1) 인간이 하나님의 소명에 의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예지에 의해

특정한 개인들을 선택하셨다.

 

2) 하나님의 선택은 궁극적으로

인간의 자유의지에 따라 결정되며

제약된다.

 

3) 믿음은 오직 인간 의지의 결과이다.

4) 구원은 죄인이 그리스도를

선택하므로 이루어진다.
 

3. 제한 속죄 혹은 특별구속

Limited Atonement
 
3. 일반 속죄 혹은 보편구속


1)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은 절대적 예정으로 선택된 자들에게만 제한되어 있다.

2) 그리스도의 속죄는 특별히 택한

자들의 죄를 사하신다.

3) 그리스도의 구속은 성령의 사역을

통해 모든 택한 백성에게 믿음으로

구원함에 이르도록 한다.

(마1:21, 10:5-6, 눅19:10)
 
 

1)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은 모든 자에게

해당된다.

2) 믿음으로 응답하는 자에게만

구원이 이른다.

3) 그리스도의 구속은 인간이 그것을

받아들이고 선택할 때에 유효하다.

4. 불가항력적 은총 혹은

성령의 효과 있는 부르심

Imesistible Grace
 
4. 성령은 실제로 거스러질 수 있다.
 
1) 인간의 외적 소명은 때때로 거부될

수 있으나, 효과적으로 성령의 사역을

통해 내적으로 부르시고 구원에 이르게

한다.


2) 성령의 내적 소명은 인간에 의해

거부되어질 수 없다.


3) 성령은 인간 스스로 죄인임을 깨닫게

하고 회개시키며, 기쁜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영접케 한다.


4) 이와 같은 성령의 은총은

인간으로서는 불가항력적이며, 마땅히

순종하기에 이른다.
 
1)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해 성령의

부르심을 거스릴 수 있다.

2) 성령은 죄인이 믿을 때까지

그를 중생시킬 수 없다.

3) 우리가 믿음으로 중생이 가능하게

된다.

 
4) 인간의 자유의지는

성령의 구속사역을 제한한다.
 

5. 성도의 견인

Perseverance of Saints
 
5. 은총으로부터의 타락
 

1) 하나님에 의해 책정되고 구속함을

받은 성도는 때때로 시험에 빠질 수는 있으나, 영원한 하나님의 은총에서

타락할 수 없다.(한번 구원은 영원구원)

 

2) 성령의 사역은 택함을 받은 성도들을

끝까지 견디어 영광에 이르도록 하며,

성도는 이와 같은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끝까지 인내하게 한다. (딤후4:18)


 
1) 참 믿음을 소유한 자임에도 불구하고

인내하지 못해 하나님의 은총으로부터

타락할 수 있다.

 

2) 하나님의 은혜는 사람을 죄와 유혹

에서 능히 지키시고 보존해 주지만,

이 은혜가 상실되지 않는다는 것은

성경에 의하여 증명되지 않는다.


3) 과연 칼빈주의는 무오한가?

 

칼빈이 위대한 신학자이자 목회자인지는 몰라도 하나님 곧 예수님은 아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그 당시의 선지자들에 의해 쓰여짐으로써

교훈(교리)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기에 그 무오성이

인정된다.(딤후3:16)
 

하지만 칼빈주의나 알미니안 주의 등 시대흐름에 따른 신학과 사상은 하나님 말씀을

대신할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하물며 오늘날에는 하나는 정통이고 또 하나는 이단이라는 이분법적인 논리는 더욱

위험한 발상이다.
 

따라서 모든 것은 성경에 비추어 진정 성서적 교리로서 하나님의 구원계획과

그 뜻에 합당한지를, 무엇을 받아들이고 버려야 할 것인지를 분별해야 한다.

 

‘십자가의 도가 하나님의 능력이요(고전1:18),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고전4:20).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갈1:7-8)


3. 칼빈의 5대 교리에 대한 성서적 고찰

 

1) 제한 속죄와 무조건적 선택---> 예정론과 결부된 논쟁

당시 예수님은 예정에 의하여 선택된 사람들만을 위해 십자가를 지셨다는

제한적 속죄론이 문제가 되었다.

 

특히나 하나님을 죄의 창시자로 오도한 ‘타락 전 예정설’에 대해

알미니우스는 ‘하나님의 은혜는 모든 선한 일의 시작이요, 계속이요, 마침이다.

그러나 이 은혜는 저항할 수 없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여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는 자율적인 사랑의 관계이지 일방적으로 선택에 의하는

기계적인 관계가 아님’을 강조하였다.

 

또한 존 웨슬리는 인간의 이성과 의지가 죄로 인하여 비록 어두워지고 약화되어

스스로 선을 택하고 의를 행하기에는 무력하게 되었지만,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은총이 임할 때 믿음으로 반응할 수 있는 것이다. 라고

항변하였다.

 

2) 도르트 종교회의-개혁교회의 종교재판이라 칭한다.

1610년 알미니우스를 지지하는 46명의 개혁교회 목사들은 5개 신조를 공인해줄

것을 국회에 제출하고, 이에 엄격한 칼빈주의자들은 즉시 반대의 입장을 표명했다.


3) 성서적 고찰과 사견

 

로마서 8장 말미에 ‘미리 정(예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8:30)

이는 어디까지나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요 지혜이시며 긍휼하심이다.

 

또한 우리 인간의 입장에서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는(합2:4, 롬1:17

갈3:11, 히10:38) 「믿음에서 난 의」요(롬9:30-32) 선택이기에, 그에 따른 선한

행위가 있음으로 온전해지는 것 아닌가!? (약2:22)

 

따라서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을 의뢰하고 여호와의 성실을 먹을거리로 삼아 선을

행할 수 있는 것이다. (시37:3) (롬12:2) (엡2:10)

 

그러므로 칼빈주의자들의 주장처럼 극단적인 예정론을 고집하여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거나 어떠한 경우에도 성령은 성도를 견인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를테면 기록된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을(롬9:13)

극단적인 하나님의 선택(예정)이고 유기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우린 성경을 읽음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관점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보는 사람이 있는

반면, 미련할 정도로 고집스럽게 자기 관점에서 자기를 위해 읽는 사람이 있다.

 

따라서 칼빈의 5대 교리는 하나님 중심의 하나님 관점에서 바라보는 입장이고,

알미니안의 5대 사조는 실제 하나님의 예지와 은혜 속에서 인간이 살아갈 수

밖에 없는 나약한 존재이지만, 창조주로부터 자유의지를 허락받은 인간의 입장에서

얼마든지 가능한 주장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인본주의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알미니안 주의에서 예수님의 구속사역은 모든 자들의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대속이고, 이를 믿고 응답하는 자에게만 구원이 이른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4. 결어

 

칼빈의 5대 교리에 대해서 결코 부정하지는 않는다.

구원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이기에 그분께서 자신이 예정하시고, 또한 부르시고,

또한 의롭다 하시고, 또한 영화롭게 하신다는 것도 확신한다. (롬8:30)

 

다만 지나친 칼빈주의자들로 자신들만 옳고 정통이며, 나머지는 다 이단이라고

배격하는 것은 현 한국 교회에 은혜와 덕이 되지 못한다.

 

지금도 OOO에 의한 세월호 사건으로 아직도 피해자들은 농성 중이고

​5대 교리 중 한번구원은 영원구원이라는 무조건적인 구속과 구원 후 죄를 지어도

끝까지 견인해 영광에 이르도록 한다는 주장은 재고되어야 한다.

 

더더욱 진정한 기독교인으로서 타 종교에 본이 되지 못하고,

나만 예수 믿어 천국 가면된다는 이기적 논리는 이제 맘먹고 믿어 보려고 교회에

발을 들여 놓는 초보자들이나 불신자들에게 염증을 느끼게 하여

믿음의 뿌리도 내리기 전에 떠나가도록 해서는 안 된다.

 

또한 우리는 WCC 등 다원주의에 동참하고 특히나 예수회 학자들의 기독교학계의

침투와 물타기 작전에도 영적 분별력을 키워 철저히 대비하고 척결해 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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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주의 5대 교리와 5대 강령

 

칼뱅주의의 근간을 이루는 것은 다섯 솔라, 언약신학 그리고 칼빈주의 5대 강령이다. 도르트신조에서 나온 5대 강령의 경우 앞 글자를 따서 영어로는 TULIP이라고도 한다. 이것들은 개신교의 다른 여러 신학 유파와 칼뱅주의를 구분짓는 내용들이 된다.

다섯 솔라[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다섯 솔라입니다.

Sola Scriptura (오직 성경) : 진리냐 아니냐의 유일한 권위는 기독교 교리의 유일한 원천인 성경에 있다는 뜻이다.

Solus Christus (오직 그리스도) : 구원의 유일한 길은 십자가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덧입는 것뿐이다.

Sola Gratia (오직 은혜) :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선물'로서 하나님이 인간 쪽에 아무런 조건을 찾지 않는다는 내용이다.

Sola Fide (오직 믿음) : 하나님이 주시는 구속의 은혜는 오직 믿음을 통하여 받을 뿐이지 다른 어떤 공로를 요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Soli Deo Gloria (오직 주만 영광 받으심) : 구원은 하나님이 시작하고 완성하시는 일이며 거기에 인간이 참여하는 부분은 없다.

5대 강령[편집]

전적 타락 (Total Depravity): 육체적인 생명만 갖고 있는 모든 자연인은 그 본성이 타락하여 구원에 필요한 믿음을 만들어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전혀 믿음을 갖지 못한다는 말이 아니라, 믿음에는 다른 질(質)이 있어서 그 중에는 구원 받을 수 있는 참 믿음도 있고 받을 수 없는 유(類)의 믿음도 있는데, 다른 종류의 믿음은 사람이 스스로 발휘할 수 있으되 구원에 필요한 믿음은 사람이 스스로 발휘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주장을 '전적 무능력'이라고 하기도 하는데, 주의할 것은 그 '무능력'이라고 함은 사람이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기능을 잃었다는 뜻이 아니라 그의 영혼이 타락하여 참된 믿음을 갖기 싫어한다는 것이다. 성경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로 보건대 하나님이 참된 믿음을 주시기 전에는 아무도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되게 못 믿는다는 것이다.

무조건적 선택 (Unconditional Election): 앞의 '전적 타락'설에 의하면 참된 믿음은 하나님이 주셔야만 얻게 되는 것인데, 누구에게 참된 믿음을 줄 것인지에 대한 하나님의 선택에는 아무런 조건이 없다는 것이다.

제한적 속죄 (Limited Atonement): 앞의 '무조건적 선택'을 받은 사람이 결국 '구속에 언약' 또는 '은혜의 언약'에서 그리스도의 백성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실효는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는 내용이다.

불가항력적 은혜 (Irresistible Grace): 성경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로 보건대 하나님이 믿음을 주시기로 작정하신 사람이 그리스도를 아니 믿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구속의 언약'과도 연관이 있다.

성도의 견인 (Perseverance of Saints): 성경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로 보건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자리로 결코 떨어지지 않고 구원이 반드시 성취된다는 것이다. 이것 역시 '구속의 언약'과 연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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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기독교강요/ 인간론

  인간론

 

(제1권 15장)


제15장: 창조된 인간의 본성, 영혼의 기능, 하나님의 형상, 자유 의지, 인간성의 원래의 모습에 대한 토론

(타락한 인간의 본성 : 그의 영혼은 거의 부패하였으나 아직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다. 1-4)

1. 인간이 하나님 손에 의해 창조되었을 때 한 점의 죄도 없었다. 그러므로 인간 자신의 죄를 창조주에게 돌릴 수 없다

이제부터 인간의 창조에 대하여 이야기해야 하겠는데,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모든 창조물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의, 지혜, 선함을 보여 주는 가장 고귀하고 가장 두드러진 실례일 뿐만 아니라, 우리가 처음에 말한 대로 우리 자신에 대한 인식이 없이는 하나님에 대한 분명하고 완전한 지식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 자신에 관한 지식에는 이중적인 면을 가지고 있다. 첫째는 인간이 처음 창조되었을 때 우리의 모습은 어떠했는가에 대한 지식이며, 둘째는 아담이 타락한 후 인간의 상태는 어떻게 되었는가에 대한 지식이다. 한편, 만일 우리가 이 비참한 파멸로 우리의 본성이 어떻게 부패되었고 어떻게 변형되었는가를 인식하지 못한다면 우리가 인간 창조를 이해한다 해도 그것은 그렇게 거의 유익이 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최초의 고결한 인간성을 설명하는 것으로 만족하려 한다. 실로 인간이 지니고 있는 현재의 비참한 상태를 논하기 전에 먼저 인간이 처음 창조되었을 때 어떠했는가를 인식한다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그런데 인간의 이 자연적인 악을 지적하는 가운데 그것을 인간 본성을 만드신 창조주께 책임지우는 일이 없도록 우리는 주의해야 한다. 왜냐하면, 불경건은 모든 결함이 어떤 방법으로든 하나님으로부터 나왔다고 주장할 수만 있다면 이로써 그 자체의 충분한 변명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비난을 받으면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하나님과 싸우며, 마땅히 비난받아야 할 자기네 죄과를 하나님께 전가시킨다. 그리고 신격에 대해서 자기가 남보다 더 경건하게 말하는 것처럼 보이기를 원하는 자들 또한 고의적으로 타락의 책임을 본성에 돌리므로 비록 애매하기는 하지만 그들 역시 하나님을 모독한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본성에 어떤 결함이 있었다는 사실이 입증된다면 이것은 하나님께 수치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육은 모든 구실을 다 찾아 이것으로 자신의 악에 대한 책임을 어떤 방법으로든 자신에게서 다른 사람에게로 전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 악한 의도를 열심히 반대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체의 간계를 버리고 하나님의 의를 일체의 비난에서 변호하기 위해서 인류의 불행을 다루어야 한다. 우리는 나중에 적당한 자리에서, 아담에게 부여된 순결에서 인간이 얼마나 멀리 떠나갔는가를 살펴보게 될 것이다. 우선은 인간이 흙으로 지음을 받았다는 사실은 인간의 교만에 대하여 견제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한다(창 2 : 7, 18 : 27). 왜냐하면, "흙집에 살며"(욥 4 : 19) 부분적으로는 흙과 티끌에 지나지 않는 인간이 자신의 탁월함을 자랑한다는 것처럼 어리석은 것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흙으로 만든 그 그릇에 생명을 주시기로 계획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 그릇이 불멸의 영혼이 거주할 수 있는 집이 되기를 원하셨기 때문에, 아담은 당연히 창조주의 그 크신 관대함을 자랑할 수가 있었다.

 

2. 육체와 영혼의 차이

더우기 인간이 영혼과 육체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에는 논쟁의 여지가 없다. 내가 아는 바로는 "영혼"이라는 말은 불멸적이면서도 창조함을 받은 본질을 의미하며, 이것은 인간의 보다 고귀한 부분이다. 이 말은 가끔 "영"(靈, spirit)이라고 불린다. 이 명사들이 결합되는 경우에는 서로 그 의미를 달리하지만, "영"이라는 말이 단독으로 사용될 때에는 솔로몬이 죽음에 대하여 말하면서 "신은 그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리라"(전 12 : 7)고 말한 것처럼 이 말은 "영혼"과 같은 의미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영을 성부께 부탁하셨고(눅 23 : 46) 스데반이 그리스도께 자기 영혼을 위탁하였다는 사실은(행 7 : 59), 영혼이 육체라는 감옥에서 해방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 영원한 보호자가 되신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영혼이 "영"으로 불려지고 있는 이유는 그것이 호흡, 혹은 하나님께서 육체에 주입하신 힘일 뿐 실재가 없기 때문이라고 상상한다. 그러나 그 사실 자체로 보나 성경 전체로 보나 저들은 어리석게도 큰 과오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인간이 지나치게 세상에 애착을 갖고 사는 동안에는 우둔하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실로 그들은 "빛들의 아버지"로부터 멀리 떠났기 때문에(약 1 : 17), 흑암으로 눈이 어두워져서 죽음 후에도 생존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생각하지 못한다. 그러나 동시에 이 빛은 흑암 속에서도 소멸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오히려 자기네 불멸의식에 그대로 머물게 된다. 확실히 양심은 선과악을 분별하여, 하나님의 심판에 응하는데, 바로 이 양심은 불멸의 영이 있다고 하는 의심할 수 없는 증거가 된다. 그렇다면 실체가 아닌 운동이 어떻게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까지 들어설 수 있으며 자신의 죄책 때문에 스스로 공포를 느낄 수 있겠는가? 육체는 오직 영혼에게만 내려지는 영적인 형벌의 두려움을 입지 않기 때문이다. 이 사실에서 영혼이 실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면 하나님에 관한 지식 자체는 이 세계를 초월하는 혼이 불멸한다는 것을 충분히 입증해 준다. 왜냐하면, 일시적인 힘은 생명의 근원에까지 도달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요컨대, 인간 마음에 부여된 그 탁월한 여러 은사들은 신적인 무엇이 여기에 새겨져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즉, 이 모든 것들은 불멸적 실재에 대한 증거가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짐승들이 소유하는 감각은 육체의 한계를 넘지 못하며, 혹은 육체에 속한 물질적인 것 이상을 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 마음의 민첩함은 천지와 자연의 비밀을 찾아내며 이해와 기억으로 모든 시대를 알고 모든 사물을 적절한 순서에 따라 배열하며 또한 과거사에서 미래사를 추론하는 데, 이것은 분명히 육체와는 분리된 어떤 무엇이 인간에게 감취어 있다는 것을 명백하게 보여 준다. 우리의 지성으로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천사들을 이해하지만, 육체는 전혀 그러한 개념을 형성하지 못한다. 우리는 옳은 것과 의로운 것 그리고 존경할 만한 것들을 파악하지만, 이것들은 육체적 감각에는 감취어 있다. 그러므로 영은 틀림없이 이 지성의 중심이다. 실로 사람을 혼미하게 하며, 생명마저 빼앗아 가는 듯이 보이는 잠자는 것 그 자체도 불멸에 대한 충분한 증거가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잠자는 것은 발생하지 않은 사건의 관념뿐만 아니라 미래에 대한 예감도 암시하기 때문이다. 세속적인 저자들이 매우 화려한 언어로 훌륭하게 찬양, 묘사한 이러한 사실에 대하여 나는 간단하게 다루었다. 그러나 경건한 독자들에게는 이 단순한 주의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그런데 영혼이 육체와 구별되는 본질적인 무엇이 아니라고 한다면, 우리가 "흙 집"에 살다가(욥 4 : 19), 죽을 때에는 육신의 장막을 벗어나 각각 몸으로 행한 행위에 따라 마지막 날에 보상을 받기 위해서 썩어질 것을 벗어버린다는 것을 성경은 가르치지 않았을 것이다. 확실히 이상의 여러 구절들, 또는 자주 성경에 나타나는 그와 비슷한 구절들은, 영혼을 육체와 분명히 구별할 뿐만 아니라 "사람"이라는 명칭까지 그 혼에 붙여줌으로써 이것이 인간성의 주요 부분이라는 것을 나타내 주고 있다. 바울은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라고 신자들을 권고하면서(고후 7 : 1), 죄의 더러움이 머무는 두 부분을 지적해 준다. 베드로 또한 그리스도를 "영혼의 목자와 감독"(벧전 2 : 25)이라고 불렀지만, 만약에 그리스도께서 그 직무를 수행할 수 있는 영혼이 없었더라면 베드로의 이 말은 잘못된 말이었을 것이다. 만일 영혼이 자신의 고유한 실재를 가지지 못했다고 하면, 베드로가 말한 바 영혼의 영원한 구원(벧전 1 : 9) 혹은 영혼을 깨끗하게 하라는 명령 그리고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벧전 2 : 11)는 주장은 의미를 상실하게 될 것이다. 이와 똑같은 원리는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같이 하느니라"(히 13 : 17)는 히브리서 저자의 말에도 적용된다. 바울이 "내 영혼을 두고 하나님을 불러 증거하시게 하노니"(고후 1 : 23)라고 한 사실도 이상과 똑같은 결론을 시사한다. 왜냐하면, 영혼이 만일 형벌에 대해 책임을 질 수 없다면 하나님 앞에 유죄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사실 역시,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마 20 : 28; 눅 12 : 5)고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에서 한층 더 명백하게 표현되었다. 그런데 히브리서의 저자는 하나님을 "우리 육체의 아버지"와 "영의 아버지"로 구별하였는데(히 12: 9), 그는 더 이상 더 명백하게 영혼의 실재성을 단정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영혼이 육체라는 감옥에서 해방된 후에 생존하지 못한다면 나사로의 영혼이 아브라함의 품에서 행복을 누리며 부자의 영혼이 무서운 고통 속에 있다고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눅 16 : 22-23)은 불합리하다고 하겠다. 바울도, 우리가 육신에 그대로 머무는 동안에는 하나님과는 떠나는 것이요, 육신에서 떠날 때에만 비로소 우리는 주님과 더불어 동거하게 된다고 가르침으로써 이 점을 확언하였다(고후 5 : 6, 8). 크게 어렵지 않은 문제를 이 이상 더 길게 다루지 않기 위해서 나는 누가에게서 다음의 말만을 인용하여 첨가하고자 한다. 즉, 천사들과 영들의 존재를 믿지 않은 것은 사두개인들의 오류라는 사실이다(행 23 : 8).

 

3.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

이 문제에 대한 믿을 만한 증거는 역시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사실에서 얻을 수 있다(창 1: 27).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광이 인간의 외형에서 빛나고 있지만 그러나 그 형상의 본래의 자리가 영혼에 자리잡고 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실로 나는, 인간의 외형이 우리를 동물과 구별하고 분리시키며 동시에 우리를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결합시켜 준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리고 만일 누구든지 "다른 짐승들은 땅을 내려다보도록 되어 있으나 인간은 얼굴을 똑바로 들고 하늘을 응시하며 별을 바라보도록 되어 있다"는 사실을 하나님의 형상과 결합시키기를 원한다면, 나는 그 사람에 대하여는 격렬한 논쟁을 하지 않겠다. 그러나, 이들 외부적 특성에서 보여지고 또 번쩍이는 하나님의 형상이 바로 영적이라는 것을 확고한 원리로 삼아야 한다. 왜냐하면, 오시안더(Osiander)는 자신의 저서에서 무익한 생각을 만들어 냄으로써 그가 그릇된 재간꾼임을 증명해 보였는데, 그는 무분별하게 하나님의 형상을 육체와 영혼 양자에게 확대함으로써 하늘과 땅을 혼합하였던 것이다. 성부, 성자, 성령은 그 형상을 인간에게 두었다고 그는 주장하였다. 그것은 아담이 비록 자신의 완전함을 그대로 보존하였다 해도 그리스도는 그리스도대로 인간이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그가 말한 바에 의하면, 그리스도를 위하여 정해진 육체는 그것이 형성된 육체적 외모의 표본이요 전형이었다. 그러나 오시안더는 그리스도께서 성령의 형상이시라는 것을 어디서 찾아낼 것인가? 실로 나는 중보자의 위격에서 모든 신성의 영광이 빛나고 있음을 인정하지만, 그러나 순서상 앞서는 그 영원하신 말씀이 어떻게 성령의 형상이라고 불릴 수가 있겠는가?

요컨대, 성자가 성령의 형상으로 표현된다면 이때 성자와 성령의 구별은 없어지고 말 것이다. 더우기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의 육신을 입으셨는데, 어떻게 그가 성령과 닮았으며 어떤 특징과 어떤 모양으로 성령과 유사함을 표현하셨는가를 나는 그에게서 듣고 싶다. 그리고 "우리의 형상을 따라……우리가 사람을 만들자"(창 1 : 26)고 하신 말씀은 성자의 위격에도 속하기 때문에, 자연히 그리스도는 자신의 형상이시라는 결론이 나온다. 그러므로 이것은 전혀 이유가 되지 않는다. 더우기 오시안더의 견해를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면, 인간은 다만 사람으로서의 그리스도를 전형으로 하거나 표본으로 해서 형성된 데 불과하다. 이렇게 하여 아담이 만들어진 그 원형은, 그가 육신을 쓰기로 되어 있는 한 그리스도였다는 것이 된다. 그러나 성경은 이와는 전혀 다른 의미에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고 가르친다. 아담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의 유일하신 형상이신 그리스도와 일치하게 창조되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는 자들의 그 영리함은 한층 그럴 듯하지만, 그러나 여기에도 역시 견실성이 결여되어 있다.

"형상"이라는 말과 "모양"이라는 말에 대해서는 주석가들 사이에 적지 않은 논쟁이 있는데, 그것은 그들이 이 두 말의 차이점을 까닭 없이 찾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모양"이라는 말은 설명을 위해서 첨가된 것일 뿐 그 두 말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첫째, 말을 반복하는 것은 히브리인들에게 흔히 있는 일이어서 그들은 한 가지 일을 두 번 연거푸 표현하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둘째, 이 문제 자체에서 볼 때 인간이 하나님을 닮은 까닭에 단순히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불린다는 것은 조금도 모호하지 않다. 따라서 이 두 말을 더욱 난해하게 철학적으로 해석하는 자들이야말로 어리석은 것이다. 그들은 "젤렘"(zelem) 곧 형상이라는 말을 영혼의 실체에 적용하고, "데무트"(demuth) 곧 모양이라는 말을 영혼의 성질에 적용하기도 하며 혹은 다른 해석을 제시하기도 한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하기로 결정하셨을 때, 그 표현이 모호했던 까닭으로, 설명을 위해서 "모양대로"라는 말을 추가하여 동일한 관념을 반복하셨다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시고, 그 속에 자기의 모양의 특징을 새겨 넣으심으로써 그 형상 안에서 자신을 반사하려 하셨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모세는 조금 후에 이와 똑같은 것을 말하면서 "하나님의 형상"을 두 번이나 반복하였지만 "모양"에 대하여는 전혀 말하지 아니하였다.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불리는 것은 인간의 일부분이나 혹은 여러 가지 은사를 소유한 영혼이 아니라 그가 만들어진 흙에서 그 이름을 받은 아담 전체라고 한 오시안더의 반대는 무익한 것이다. 건전한 마음을 소유한 독자라고 하면, 어느 누구도 그러한 반대를 무익한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을 죽을 존재로 말한다고 해서 영혼도 죽음에 종속된다고 할 수는 없으며, 인간을 "이성적 동물"이라고 말한다고 해서 또한 이성이나 지성이 육체에 속한다고 말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영혼이 인간은 아니라 하더라도 인간을 영혼과 관련시켜서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부르는 것은 모순이 아니다. 그러나 나는 바로 앞에서 주장한 원칙을 고수하여, 하나님의 모양은 모든 종류의 동물을 훨씬 능가하는 인간성의 탁월성 전체에까지 확대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은 아담이 처음에 받았던 그 완전함을 의미한다. 아담은 처음에는 바른 이해력을 충분히 소유하였고 감정을 이성에 종속시켰으며 일체의 감각을 적절한 질서에 따라 조절하였다. 그때 그는, 자신의 탁월함을 창조주께서 그에게 주신 예외적인 은사에서 기인된 것으로 여겼다.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의 주요 좌소가 가슴과 마음, 혹은 영혼과 그 능력에 있다고 하더라도, 그러나 인간의 어느 부분에도, 심지어는 육체 자체에도 그 광채의 얼마가 빛나지 않는 곳은 없다. 확실히 하나님의 영광의 어떤 흔적들은 세계 도처에서 빛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에게 하나님의 형상이 있다고 말할 때 거기에는 인간을 모든 다른 피조물 이상으로 높이는 것 곧 인간을 범속(凡俗)에서 구별하는 무언의 대조가 있다고 추측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천사들이 하나님의 모양에 따라 창조되었다는 것을 부정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증거하신 대로 우리들의 최고의 완성은 천사들과 같이 되는 데 있기 때문이다(마 22 : 30). 그러나 모세가 이러한 특수한 호칭으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은총을 찬양한 것은 당연하였다. 그는 특별히 인간을 다만 눈에 보이는 피조물과만 비교하였던 것이다.

 

4. 하나님은 형상에 대한 참된 본질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회복된다고 말하는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탁월하며, 하나님의 영광의 반영으로 간주되어야 할 기능들을 보다 명백하게 알지 못한다면, 아직 이 "형상"에 관한 정의는 충분히 내려졌다고 볼 수 없다. 참으로, 이것을 타락한 인간성의 회복에서보다 더 잘 알 수 있는 곳은 없다. 아담이 그의 원래의 상태에서 타락했을 때, 이 변절로 말미암아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졌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이 전적으로 소멸되거나 파괴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아주 부패했기 때문에, 남은 것은 다만 무섭도록 추한 것 뿐이다. 따라서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해서 새롭게 되는 것이 구원의 회복의 시초이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참되고 완전한 본래의 순전한 모습으로 회복시키신다는 이유에서 제2의 아담이라고 불려진다. 바울은, 신자가 그리스도에게서 받는 "살려 주는 영"과 아담이 지음을 받을 때 받은 "산 영"을 대조하고(고전 15 : 45) 중생(重生)의 은혜의 부요함을 찬양하였으나, 그렇다고 해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시키시는 것이 중생의 목적이라고 하는 다른 중요한 점을 배제하지는 않았다. 그리하여 그는 다른 곳에서,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골 3 : 10)고 가르치고 있다. 이 말씀은 다음과 같은 권고와 서로 일치하는 데가 있다.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 4 : 24).

우리는 이제 바울이 이 갱신에 대하여 주로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던 가를 알게 된다. 그는 첫째로는 지식을 말하며, 둘째로는 순결한 의와 거룩함을 말한다. 여기서 우리가 추론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은 처음에는 지성의 빛과 마음의 바름과 모든 부분의 건전함에서 뚜렷이 빛나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표현 형식이 제유법(提喩法)이라는 것을 나는 인정하지만 그러나 이 원리는 전복될 수 없는데, 하나님의 형상의 새롭게 하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창조 자체에 있어서도 역시 최고의 위치를 차지하기 때문이다. 바울은 다른 곳에서도 이와 같은 것을 가르치고 있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고후 3 : 18). 지금 우리는 그리스도야말로 하나님이 가장 완전하신 형상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가 그 형상과 같게 될 때에, 우리도 그와 같이 회복되어 참된 경건, 의, 순결, 지성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게 된다.

이러한 주장이 확립되면 육체의 모양에 대한 오시안더의 공상은 즉시 스스로 소멸되고 만다. 그러나 바울이 남자만을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고전 11 : 7)이라고 하고 여자를 이 명예로운 지위에서 제외하고 있는 것은 전후 문맥상으로 보아 정치적 질서에 제한시키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위에서 말한 형상이 영적이며 영원한 생명에 관계되는 것을 모두 다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은 지금 충분히 입증되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요한은 그와 똑같은 사실을 다른 말로 단정하여, 태초로부터 하나님의 영원하신 말씀 안에 있었던 "생명"이 바로 "사람들의 빛"(요 1 : 4)이라고 주장한다.

그의 의도는, 인간을 다른 동물보다 뛰어나게 창조하신 하나님의 특수한 은총을 찬양하는 것으로, 그는 인간이 평범한 생명을 부여받지 않고 지성의 빛이 결합된 생명을 부여받았기 때문에 일반적인 동물들과는 구별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따라서 그는 동시에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어떻게 창조되었는가함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성의 완전한 탁월성으로, 이것은 타락 이전에는 아담 안에서 빛나고 있었으나 후에는 부패하여 거의 지워졌기 때문에, 파멸 후에 남은 것이라고는 오직 혼란하고 이지러지고 오염된 것뿐이다. 이것은 지금 부분적으로 피택자들에게서 보게 되는데, 그것도 성령으로 말미암아 중생한 자에게서만 그러하다. 그러나 그것은 장차 하늘나라에서 완전한 광채를 발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형상이 어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가를 알기 위해서 영혼의 모든 기능을 논한다는 것은 가치 있는 일이다. 영혼이 오성과 의지와 기억을 내포한다고 해서 그것을 삼위일체의 반영이라고 본 어거스틴이 이론은 결코 건전한 것이 못 된다. 또한 하나님의 모양이 인간에게 주어진 지배권에 있다고 주장하는 자들의 견해도 개연성이 없다. 이것은 마치 인간이 만물의 상속자요 소유자로 정해졌다는 이 특징에 있어서만 하나님을 닮았다는 말과 같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형상은 당연히 인간의 내부에서 찾아야 하는 것으로, 밖에서 찾아서는 안 된다. 실로 그것은 영혼의 내적 선(善)인 것이다.

 

8. 자유 선택과 아담의 책임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영혼에 마음을 주시어 선을 악에서, 정의를 불의에서 각각 분간해내며, 또한 이성의 빛을 안내자로 하여 마땅히 추구해야 할 것과 마땅히 피해야 할 것을 구별하도록 하셨다. 이러한 이유로 철학자들은 이 지도적인 부분을 "토 헤게모니콘(toj hgemonikovn, 지도력)"이라고 불렀다. 하나님께서는 여기에 의지를 결합시킴으로써 의지의 통제아래 선택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인간의 최초의 상태는 이와 같은 탁월한 은사들로 뛰어난 품위를 지니고 있었으며, 때문에 그의 이성과 지성, 분별력, 판단력은 지상생활을 지배하는 데 있어서 충분하였을 뿐만 아니라 인간이 이것으로 하나님과 영원한 행복을 찾아 올라갈 수도 있었다. 여기에 선택이 추가되어, 욕구를 조정하고, 모든 기관의 활동을 조정하며 그리하여 의지로 하여금 이성의 지도에 완전히 따르게 하였다.

이러한 완전한 상태에서, 인간은 자기가 원하기만 하였더라면 자유의지로 영생에 도달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는 지금 어떠한 일의 발생 여부를 논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참된 본성이 어떤 것이었는가를 말하고 있는 것이므로, 하나님의 은밀한 예정의 문제를 여기서 소개한다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 그러므로 아담은 자기가 원하기만 했더라면 넘어지지 않을 수도 있었는데, 그는 다만 자신의 의지로 타락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의지는 어느 쪽으로도 기울어 질 수 있었으며 따라서 항구적인 인내성을 받지 못했던 까닭으로, 그는 아주 쉽게 타락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선악을 선택하는 일은 자유로웠다. 그러나 이뿐만이 아니었다. 그가 자신을 파멸시킴으로써 자신의 축복을 부패시키기 전에는 그의 마음과 의지는 최고의 공정을 지니고 있었으며 그의 모든 유기적인 부분들은 순종할 수 있도록 바르게 조직되어 있었다.

그런 까닭으로 철학자들은 흑암 속에서 크게 헤매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폐허 속에서 건축물을, 흩어진 조각들 가운데서 균형이 잘 잡힌 구조물을 찾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인간에게 선과 악에 대한 자유로운 선택이 없다면 인간은 이성적 동물일 수가 없을 것이라는 원리를 고수하였다. 그들은 또한, 인간이 자신의 계획에 따라 생활을 조정하지 못한다면 덕과 악덕의 구별은 없어졌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만일 인간에게 아무런 변화도 없었더라면 인간은 지금까지 올바른 판단력을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에게 감취어 있었으며, 따라서 인간이 천지를 혼동한다고 해서 놀랄 것은 없다. 그런데 스스로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자처하면서 철학자들의 사상과 하늘나라의 교리를 절충함으로써 타락하여 영적 파멸에 들어간 인간에게서 여전히 자유 선택을 찾는 자들이야말로 분명히 어리석음을 저지르고 있는 자들이며, 하늘과 땅 어디에도 그들의 이 절충 사상은 접할 수가 없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하여는 앞으로 적당한 곳에서 보다 충분히 다루게 될 것이다. 이제 우리는, 인간이 처음 창조되었을 때 그는 그의 모든 후손과는 많은 차이가 있었으며, 아담의 후손은 아담의 부패한 상태에서부터 기원하여 유전적인 오염을 물려받았다는 것을 유의해야 한다. 왜냐하면, 아담의 영혼의 각 부분은 올바르게 형성되었으며 마음은 건전하였고 의지는 선을 선택할 자유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일 누군가가 아담의 의지의 힘이 약했던 까닭에 그것은 불안정한 상태에 놓였다고 반론을 제기하면, 아담의 신분 그 자체가 어떠한 변명도 물리치게 해 줄 것이라고 나는 답변할 수 있다. 그러므로 범죄할 수 없거나 범죄를 원하지 않도록 인간을 만들 필요가 있었다고 하나님께 강요한다는 것도 잘못된 것이다. 실로 그러한 인간성은 한층 탁월하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마치 이런 본성을 사람에게 주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 불평한다는 것은 매우 악한 행위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기뻐하심에 따라 자유롭게 주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왜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인내의 힘을 주셔서 그를 붙들어 주지 않으셨는가 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계획 속에 감취어 있다. 그리고 근신하여 이를 캐내지 않는 것이 우리로서는 지혜로운 일이다. 실로 아담이 의지를 행사하였더라면 그는 그 능력을 받을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그 능력을 사용하려는 의지가 없었다. 왜냐하면, 이 의지의 행사가 있으려면 인내가 따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담으로서는 조금도 변명할 여지가 없으니, 그는 자신의 파멸을 자발적으로 초래하였을 정도로 아주 많은 힘을 받았던 것이다. 참으로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평범하고 변하기 쉬운 의지를 주시어 그를 타락하게 하고 이 타락에서 자신의 영광의 기회를 얻으려고 할 필요가 없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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