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강요 요약 (Instruction in Christianity)-2

 

제3장 회 심

 
제1절 회심의 성서적 용어

[1] 구약의 용어

구약은 회심을 묘사함에 있어서 두가지 단어를 사용하였는데, 그 첫째 말 nicham 은 “후회하다.”를 의미하는 말로, 이는 흔히 계획과 행동의 변화를 수반하는 회개를 가리킨다. 그 둘째 말 shubh 는 “돌아오다.” 특히 떠났다가 “돌아오다.”를 의미하는 말이다. 이것은 회심의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되는 것이다.

[2] 신약의 용어

신약에서 가장 자주 나타나는 metamoeo, metanoia라는 말은 근본적으로 “마음의 변화”를 가리킨다. 이 변화는 전적으로 지적인 것으로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도덕적인 변화로도 생각되어야 한다. 둘째로 중요한 말인 epistrepho, epistrophe는 “방향을 돌리다.”혹은 “되돌아가다.”를 의미한다. 이말은 능력적 생명이 다른 방향으로 움직인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으로 회심의 최종적 행동을 나타내주는 말이다. 세째로 metameiomai라는 말은 신약에 다섯 번이나 나타났는데, “후에 사람에게 걱정거리가 되다.”를 의미하는 말이다. 이 말은 회개의 요소를 강조한다.

 


제2절 성서의 회심관

[1] 국민적 회심

성서는 사사시대의 이스라엘과 열왕시대의 그리고 니느웨등의 국민적 회심에 대하여 반복적으로 말한다.

[2] 일반적 회심

성서는 또한 마음의 변화를 표시하지 않고 다만 일반적인 의미를 가지는 회심에 대하여도 말한다. 이러한 회심은 잠시 동안은 진정한 회심인 것처럼 보인다.

[3] 진정한 회심

이 회심은 중생의 외부적 표현 혹은 죄인의 의식생활에서 일으켜지는 변화인 것이다. 이 회심에는 두가지 면이 있다. 하나는 능동적인 면이요, 하나는 피동적인 면이다. 전자의 견지에서 볼 때, 회심이란 하나님께서 중생자로 하여금 자기의 의식생활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와, 믿음과 회개를 일으키게 하시는 하나님의 행위라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4] 반복적 회심

새 생명을 심어주는 것으로 해석되는 중생은 결코 반복될 수 없다. 엄밀한 의미에 있어서의 회심도 또한 반복될 수 없다. 동시에 반복되는 회심에 대하여도 말할 수 있다. 새 생활의 활동력은 세속, 부주의 관계심등을 통하여 가리워지게 된다. 그렇게되면 다시 여러번이라도 부름 받고 다시 새로워져야 하는 것이다.

 


제3절 회심의 요소

앞에서 이미 회심은 두 요소 곧 회개와 신앙으로 구성된다는 것이 나타났다. 전자는 성화와 직접 관련되어 있고, 후자는 절대적은 아니지만 칭의와 관련되어 있다.

[1] 회개의 요소

(a) 지적요소

과거의 생활이 죄와 오염과 절망을 안고 있는 죄의 생활이었음을 인식하는 것을 뜻한다.

(b) 감정적 요소 

거룩하고 의로우신 하나님을 반역하여 범한 죄에 대하여 슬퍼하는 것을 뜻한다.

(c)결의적 요소

이 요소는 죄에서 떠나는 내적전환, ?죄와 정화를 추구하는 성향을 뜻한다.

<2> 로마 교회의 회개의 개념

로마 교히는 고해성사에서 회개의 관념을 전적으로 형식화하였다.

(a) 통 회

이것은 죄에 대한 진정힌 비애를 말한다. 이것은 생득적인 죄에 대해서가 아니고, 개인적인 과실에 대하여 슬퍼함을 말한다.

(b) 고 명

이것은 고해성사에서 신부에게 고배하는 회개이다. 회개자가 만족한 고백을 할 때, 심부는 선언하기를 하나님께서 회개자의 죄를 용서할 뿐만 아니라, 자신도 그것을 용서한다고 말한다.

(c) 보 속

죄인의 행동의 회개이다. 고통스러운 일을 인내하거나 혹은 어렵고도 불유쾌한 일을 수행하는 것으로 되는 회개이다.

 


[3] 회개의 성서적 견해

회개의 성서적 견해는 로마는 캐톨릭의 그 외형적 회개관과는 전적으로 다르다. 성서는 회개를 전적으로 내적행위, 다시 말하면 통화의 행위, 혹은 죄로 인한 비애로 간주한다. 성서는, 진정한 회개는 항상 참된 신앙을 동반한다고 말한다.

 


제4절 회심의 특성

[1] 회심은 칭의와 같이 하나님의 법적 행위가 아니라, 중생과 같이 도덕적이며 재차조적인 행위이다.

[2] 회심은 중생과 같이 잠재의식에서 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의식생활에서 된다.

[3] 그것은 원리상 옛 사람을 벗어버릴 뿐만 아니라, 새 사람을 옷입음을 뜻하기도 한다.

[4] 만일 우리가 “회심”이란 말을 그 특수한 의미에서만 생각하게 되면, 이것은 순간적인 개변을 가리키는 것이요, 성화와 같이 한 과정을 뜻하는 것이다니다.

제5절 회심의 창시자

하나님만이 회심의 창시자이시다. 성령의 조명적이며 결실적인 감화를 통하여서만 발생되는 것이다. 그러나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일하시는 간접적인 사역도 있다.

그러나 중생에 있어서는 하나님만이 역사하시고 인간은 전적으로 피동적이지만, 회심에 있어서는 인간은 하나님과 협력하는 것이다. 인간의 이러한 능력은 항상 인간에게 행하시는 하나님의 선행적 사역에서 오는 것이다.

 


제6절 회심의 필요성

성서는 중생의 필요성에 대하여는 가장 절대적인 언사로서 말하고 있다. 그러나 회심에 대하여는 이같은 절대적인 표현은 발전되지 않는다. 이것은 어려서 죽은 아이들의 경우, 회심에 관하여는 말할 수 없고, 다만 중생에 관하여서만 말할 수 있다는 사실에 기인하는 것이다. 그것은 모든 어른들의 경우에서는 회심이 필요하다는 것일 것이다. 회심의 요소, 곧 진정한 회개와 진정한 신앙은 전생애에서 나타나야만 하는 것이다.

 


제4장 신 앙

제1절 신앙의 성서적 용어

구약 성서에는 신앙 행위를 여러 면에서 표시하는 말이 특히 셋이 있으나, 사실상 신앙을 위한 용어는 없다.“믿는다,”를 뜻하는 가장 공통적인 말은 지적요소를 강조하는 말로, 다른 사람의 증명하는 것에 대하여 참된 것으로 받아들임을 의미한다.

신약성서는 신앙을 위한 매우 중요한 말을 하나 가지고 있다. 이말은 한 인물에 대한 일반적인 신뢰, 이러한 신뢰를 근거해서 그의 증거를 쉽게 받아 들이는 것.미래를 위해서 그를 의뢰하는 것 등이다. “믿는다.”란 이 공통적인 용어는 여러가지 형태의 의미로 사용되었는데, 어떤 경우에서는 지식의 요소를, 또 다른 경우에서는 신뢰의 요소를 각각 강조하고 있다.

 


제2절 성서에서 말하는 신앙의 종류

 

[1] 역사적 신앙

역사적 신앙이란, 어떤 영적 목적도 가지지 않고, 순수하게 성서의 진리를 지적으로 받아들임을 의미한다. 이 신앙은 개인적으로 관심이 없는 역사라도 받아들이는 것처럼 성서의 진리를 받아들이나 진지하게 받지 않고 실제의 관심을 일으키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2] 이적의 신앙

이적의 신앙이란, 이적이 자기에 의하여 또는 자기를 위하여 일으켜지게 될 것이라고 하는 개인의 확신을 말한다. 이 신앙은 구원적 신앙을 수반할 수도 있고, 수반하지 않을 수도 있다. 로마 교회에 의하면 우리는 아직도 이 신앙을 시행하는데 보증을 받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반면에 프로테스탄트는 일반적으로 이것을 부정한다.

[3] 일시적 신앙

이 신앙은 양심의 어떤 자극이나 애정의 분발을 수반하고 있기는 하나 중생된 마음에 뿌리를 박지 못한 종교적 진리에 관한 확신이다. 이것이 일시적 신앙이라 불리워지고 있는 것은, 영속적 신앙이 없어서 환난과 핍박의 날에 그 자체를 유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물론 위선적 신앙이라 볼 수는 없다. 일반적으로 일신적 신앙은 감정에 뿌리를 박고, 하나님의 영광보다는 오히려 인간적인 기쁨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4] 참된 구원적 신앙 참된 구원적 신앙이란 그 자리를 마음에 두고, 중생한 생활에 그 뿌리를 박고 있는 신앙을 말한다. 이 시낭의 의식적인 활동은 점진적으로 하나의 습관을 형성하게 된다. 그리고 이것은 나아가서 신앙활동에 강력한 도움이 되어 준다. 구원적 신앙이란 성령으로 말미암아 마음에 일으켜진 바 복음의 진리에 대한 확신이며, 또한 그리스도안에서 행하신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성실한 신뢰라고 정의 할 수 있다.

 


제3절 신앙의 요소

 


[1] 지적 요소

구원적 신앙이란 단순히 진리를 지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어디까지아 하나님의 말씀 속에 계시된 진리를 적극적으로 인식하는데 있는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교의 진리에 대한 영적동제이요, 그러기 때문에 이들 진리는 죄인의 마음 속에서 응답을 얻게 되는 것이다.

 


[2] 감정적 요소(찬동)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신앙의 이 요소를 구별짓지 않는다. 이것이 “찬동”이라 불리워지는 것은, 사실은 구원적 신앙의 지식에 포함되어 있는 사실에 기인한다. 구원적 신앙속에 포함되어 있는 지식의 특징은 그것이 그 대상에 대한 최대의 확신을 지닌다고 하는데 있는데, 이것을 가리켜서 우리는 “찬동”이라 부른다. 진리에 대하여 인격적인 관심에서 의식하고, 그것에 대하여 진심으로 찬동하는 것이다.

 


[3] 결의적 요소(신뢰)

이것은 신앙에 있어서 최고의 요소가 된다. 신앙은 단순히 지식의 문제나, 또는 지식과 감정을 결합한 문제만은 아니다. 그것은 생활의 방향을 결정하는 의지의 문제요, 영혼이 그 대상으로 나아가서 그것을 붇잡는 영혼의 행위인 것이다. 이 제3의 요소는 구세주요, 주로서의 그리스도에 대한 인격적 신뢰를 의미한다.

 


제4절 구원적 신앙의 대상

[1] 일반적 의미의 구원적 신앙

일반적인 의미에서 구원적 신아의 대상은 하나님의 말씀속에 포함되어 있는 신적 계시의 전체라 할 수 있다. 성서에서 연택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나 다 바로 이 의미에 있어서의 신앙에 속한다고 말한다.

[2] 특수적 의미의 구원적 신앙

성서를 하나님의 말슴으로 받아 들이는 것은 필요하나,그렇다고 이 사실이 우리를 의롭게 하며 직접적으로 구원에 이르게 하는 신앙의 특수 해위라고 보지는 않는다. 간단히 말하면, 구원적 신앙의 대상은 예수 그리스도요, 또한 그리스도안에서 주어진 구원의 약속인 것이다.

 


제5절 로마 캐톨릭의 신앙관

로마 캐톨릭은 신앙을 단순히 진리에 대한 찬동으로 보고, 충분한 신앙 또는 구원하는 신앙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로마교회는 사실상 신앙에 있어서 지식의 요소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부정하고 있다. 지식을 소유하고 안하고를 막론하고 진리에 대한 이 찬동은 그것이 선한 일을 수행함에 있어서 ㅅ랑으로 역사하게 될 때에만 참된 구원적 신앙이 되는 것이다.

 


제6절 신앙과 확신

신앙에는 항상 구원의 확신이 수반되느냐 안되느냐 하는 문제가 일어 난다. 로마 캐톨릭파와 17세기의 알미나안파는, 신자는 아주 희구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자신의 구원에 대하여 확신할 수 없다고 가르쳤다. 더우기 그들은 이러한 확신은 대체로 요구되지 않는 것이라고 주장 하였다. 웨슬레주의 알미니안파, 혹은 매도디스트파는 회심이 곧 직접적인 확신이라고 주장하였다. 사람은 언제나 그가 은혜에서 떨어지기 쉽기 때문에, 이것은 메도디스트파가 일치하게 달성할 수 없었던 확신이었다. 정당한 견해에의하면, 참 신앙은 필연적으로 하나님 신뢰를 내포하고 있으며, 이것은 비록 정도에 따라 다르지만, 안전과 보증의 의식을 수반하고 있는 것이다. 확신은 기도에 의해서, 하나님의 약속을 명상함으로써, 또는 성령의 열매가 입증해 주는 참된 신앙생활의 발전에 의해서 가꾸어지는 것이다.

 


제5장 칭 의

제1절 “의롭게 하다”의 성서적 용어

구약성서에서 이 말들은 두 귀절을 제외하고는, 하나님께서 인간속에서 이루시는 도덕적 변화를 나타내는 말이 아니고, 인간에 관한 신적 선언을 정식으로 지적해 주는 말이다.

신약성서의 말도 꼭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성서의 “의롭게 하다”라는 말은, 의롭게 만든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고, 의를 선언한다는 것을 의미함이 매우 명백하다.

 


제2절 칭의의 본질과 특징

칭의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를 근거로 하여 죄인을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하나님의 법적 행위라 정의 할 수 있다. 칭의는 죄책을 제거하여, 죄인으로 하여금 영원한 유산과 함께 하나님의 자녀의 모든 권리를 갖도록 회복시켜 준다. 칭의는 그것이 신앙에 의하여 통용되는 것이지망, 하나님의 법정에서 죄인 밖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칭의는 단 한번만 일어난다. 그것은 반복되지 않으며, 또한 한과정도 아니다. 그것은 즉시로, 또는 영원히 완성된다.칭의와 성화는 다같이 그리스도의 공력이지만, 칭의의  사역은 특히 성부에게 돌려지고, 성화의 사역은 성령에게 돌려진다.

 


제3절 칭의의 요소

[1] 소극적 요소

칭의의소극적 요소는 예수 그리스도의 전가된 의를 기초로 해서 죄를 용서 해주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이 사실은 또한 하이델베르크 요리 문답서의 제60문에 대한 답변에도 포함되어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가 ?죄함을 받기 위하여 기도하도록 가르치셨다는 사실, 그리고 성서의 성도들이 자주 용?를 기원하여 실제로 사죄함을 받았다는 사실과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생각될런지 모른다. 이에 대한 해석은, 신자의 죄가 그 자체에 있어서 아직까지도 죄책을 구성하여 고백을 요구한다는 사실에 놓여 있다.

[2] 적극적 요소

(a)자녀로 되는 것

칭의에서 하나님은 신자를 그의 자녀로 삼으신다. 곧 신자를 자녀의 지위에 두시고 자녀의 모든 권리를 그에게 주시는 것이다. 양자로 디는 이같은 자녀의 자격은, 중생과 성화에서 오는 신자의 도덕적 자녀의 자격과는 구별되어야 한다.

(b) 영생에의 자격 

이 특권은 사실상 위에 포함되어 있다. 죄인이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될 때, 그들은 자녀의 모든 법적 권리를 받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후사 곧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가 되는 것이다.

 

 

 

제4절 칭의의 영역

[1] 능동적 칭의

능동적 칭의는 하나님의 법정에서 되어진다 하늘에서 하나님은 의로운 재판장으로 나타나시어 죄인을 그 자신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가 그에게 전가된 사실에 비추어서 이롭다고 선언 하신다.

[2] 피동적 칭의

피동적 칭의는 죄인의 마음이나 양심에서 일어난다. 죄인에게 확신을 주지 못하는 칭의는 그 목적에 응하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의 법정에서 선언되는 무죄선방의 판결은 죄인에게 전달되어 믿음으로 받아 들여지게 되는 것이다.

 


제5절 칭의의 시간

[1] 영원으로부터 오는 칭의

구속의 계획에서 그리스도의 의가 피택자에게 확실히 전가되었다고 하는데는 조금도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성서가 죄인의 칭의를 말할 때, 이것이 바로 성서의 이미하는 바라고 하는데는 의심이 없을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계획에서 단순히 이상적이었던 것과 역사의 과정에서 실현되는 것을 분명히 구별해야 하는 것이다.

[2]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오는 칭의

피택자는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이미 의롭다함을 입었다.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오는 칭의를 말하는 개혁파신학자들도 이것을 죄인의 칭의의 전체로서는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총괄하여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오는 그의 몸(교회)의 칭의가 있는 것을 말하기도 하지만, 그러나 이것은 순수하게 객관적인 것이어서 죄인의 개인적 칭의와 혼동하여서는 안된다.

[3] 신앙으로 말미암는 칭의

성서가 이 칭의에 관하여 말할 때에느 흔히 그것은 하나님의 칭의적 은혜의 주관적 적용과 통용을 말한다. 성서는 이것을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라 말하고 있다. 프로테스탄트 신앙고백에 있어서는 그것은 흔히 칭의의 기구 혹은 기구인으로 불리워 진다. 그것은 또한 자주 통용하는 기관이라 불리워 진다.

 


제6절 칭의의 근거

칭의의 근거에 관하여는 로마교회와 개혁자들 사이에 매우 중대한 의견의 차이가 있다. 로마교회에 의하면, 죄인은 중생에서 그 마음에 주인되는 자기 고유의 의를 기초로 하여 의롭게 된다고 한다. 그러나 칭의의 참 근거는, 칭의에서 죄인에게 전가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이에서만 발견될 수 있다.

제7절 칭의교리에 대한 이의

[1] 성서는 죄인이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받는 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으나, 칭의는 일종의 법적 가치이기 때문에 은혜를 배제한다고 말한다.

[2] 어떤 사람은 칭의를 하나님의 아무 쓸모없는 행위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죄인은 사실상 의롭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의롭다고 선언하시기 때문이다.

[3] 이 교리는 자주 사람을 방종하게 만든다고 한다.

 


제6장 성 화

 

그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속에 영적 갱신의 관념을 넣어주며, 또한 인간에게 도덕적, 영적 특질을 부여한다는 관념을 전달하여 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최초적인 관념은 아니다. 그 성서의 용어들은 마음 속에 일으켜진 영적 특질보다는 오히려 하나님과 사람사이의 위치와 관계를 나타내 주고 있는 것이다. 성화된 인간은 원리상 생활의 죄악적 관계를 떠나서, 하나님과 더불어 새로운 관계에 들어가게 되다. 이러한 관계에서 인간은 하나님께 자신을 바치고 또한 하나님께 예배드리게 되는 것이다.

 


제2절 거룩함과 성화의 성서적 개념

하나님께서 피조물과 분리되신다고 하는 관념은 모든 불결에서, 특히 죄에서 분리된다고 하는 관념에 이르게 되었다.

다음으로 거룩함의 관념은 하나님과 더불어 특별 관계를 가지는 이물과 사물에도 적용되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소유한 자만이 참으로 주앞에서 거룩한 것이다.

성서는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 있다. “성화란 성령께서 죄인을 죄의부패에서 깨끗하게 하시며, 그의 전본성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갱신하여 죄인으로 하여금 선한 일을 할 수 있게 하시는 성령의 은혜로우시며 계속적인 사역이라 할 수 있다.”

 


제3절 성화의 특징

[1] 성화의 창시자는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그라나 이것은 인간이 그 과정에서 전혀 피동적이라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2] 성화는 칭의와 같이 하나님의 법적 행위가 아니고 도덕적, 재창조적 행위이다.

[3] 성화는 오랜 기간의 과정이어서 현세에서는 결코 완전에 이르지 못한다.

[4] 성화의 과정은 그것이 영혼에 관한 한, 죽을 때 완성되든가 그렇지 않으면 죽음 직후에 완성된다.

제4절 성화의 성질

[1] 성화는 하나님의 초자연적 사역이다.

사실상 그것은 영혼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이며, 이 사역으로 말미암아 중생에서 심어진 거룩한 성향이 강화되고 그 거룩한 실천이 증대되는 것이다.

[2] 그것은 두 부분으로 되어있다.

(a)성화의 소극적인 면은 죄에서부터 온 인간성의 불결과 부패가 점진적으로 제거된다고 하는 여기에 있다.

(b)성화의 적극적인 면은 영혼의 거룩한 성향이 강화되고 그 거룩한 실천이 증진되어 생활의 새로운 과정이 일으켜 진다고 하는 여기에 있다.

[3] 그것은 전인에게 영향을 준다.

성화는 마음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그것은 필연적으로 전 조직에 영향을 미친다. 그것은 특별히 죽음의 위기에서 완성되며, 또한 죽은 자의 부활에서 완성되는 것이다. 성서의 교훈에 의하면, 성화는 오성, 의지, 감정 그리고 양심에 영향을 준다고 가르치고 있다.

[4] 그것은 신자가 협력하는 사역이다.

인간이 성화의 사역에서 협력해야 한다는 사실은 악귀와 유혹에 대항하여 싸우라고 하는 반복적인 경고에서 알 수 있다.

 


제5절 현세에서의 성화의 불완전성

성서는 죄없는 생활에 이른 신자의 실예를 하나도 포함하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그들은 비참한 죄에 빠져 허덕이는 실례로 언급되었다.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는 범죄치 않는다고 하는 요한 서신의 그진술은, 이같은 새 사람은 범죄하지 않든가, 혹은 신자는 죄에서 살지 않는다든가 어느 한쪽을 명백히 의미하는 말이다.

제6절 성서와 선한 일

[1] 선행의 성질

우리가 선행을 말할 때, 그것은 완전한 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원리상 하나님의 요구에 응하는 일이요, 또는 영적 의미에서 선한 일을뜻한다. 이 선행은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외부적 일치에서 뿐만 아니라 또한 하나님의 계시된 의지에 대한 의식적 순종에서도 행하여지는 것이다. 그리고 이 선행의 가장 가까운 목적이 무엇이든지간에 그 최종적인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인 것이다.

[2] 선행의 공로적 특징

신자의 선행은 엄밀한 의미에서 공로적이 아니다. 곧 그것은 보?에대한 정당한 요구를 필연적으로 수반하는 고유의 가치를 갖고 있지 않는 것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들의 선한 일에 상을 주신다고 하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할 의무하에 있기 때문이 아니라, 다만 그가 찬동할 수 있는 일에 상을 주시기로 은혜적으로 약속한 때문인 것이다.

[3] 선행의 필요성

선행은 구원을 공로있게 하는데 필요하지도 않고 또한 구원의 피요한 조건은 더욱 아니다  성서는 선한 일을 떠나서는  구원받을수 없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그러나 선행은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으로써 성인신자의 생활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제7장 성도의 견인

견인이란 “성령께서 신자의 마음속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를 시작하고, 계속하여, 마침내는 그것을 와성케 하시는 성령의 계속적 역사라 하겠다.

제2절 견인교리에 대한 증거

이 선택의 교리란, 단순히 구원의 어떤 수단이나 혹은 사람이 구원 받을 수 있는 어떤 방법에 대한 선택이 아니라 완전한 구원의 목적에 대한 선택인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공로와 중재의 효력에서 확실히 알 수 있다. 신자는 어떠한 때에도 은혜에서 멀어질 수 있다는 것은 전혀 있을 수 없는 일인 것이다.

제3절 견인교리에 대한 이의

견인의 교리는 거짓 평안과 태만과 방종과 부도덕으로 이끌어 간다는 비난을 가끔 받는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비난이다. 요한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저희가 우리에세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다면 우리는 함께 거하였으려니와”(요일 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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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강요 요약 (Instruction in Christianity)-2

 

제 2장 소명과 중생

 

제 1절 구원의 순서에 대한 일반적 관찰

우리의 출발점을 인간의 협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 하나님의 구원적 행위에 둔다.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구원의 창시자로 높이며 모든 구속적 행위의 기본적 원인으로 믿는 동시에 중생 후에도 인간은 믿음으로 구원의 축복을 충당한다는 사실 그리고 회개와 성화와 같은 약간의 구속적 행위에서는 하나님의 영과 협력하게 된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 것이다.

 


제 2절 소명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구원을 받도록 죄인을 초청하시는 하나님의 그 은혜로운신 행위에 대하여 말하게 된다.그것은 성부께 돌려지며 성자에 돌려지며 성령에게 돌려진다.

이 소명은 외적이기도 하고 내적이기도 하다.하나님은 이 양자의 창시자이시다.외적 소명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나 내적 소명은 피택자에게만 임한다. 이 내적 소명은 외적 소명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데 효과있게 한다.

 


[1]외적 소명

성서는 곳곳에서 외적 소명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곧 대명령에서 마28:19절 부름은 받았으나 오지않은 자들이 있음을 보여주는 귀절에서 마22:2-14 복음의 배척에 관련한 귀절에서 요 3:36마지막으로 불신의 무서운 죄를 말하는 귀절에서 요 5:40 요일 5:10각각 말하고 있다.

외적 소명이란 죄인들에게 그리스도의 구원을 선포,제시하며 속죄와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받아야 한다고 하는 진실한 권고라 정의할 수 있다.

 


[a]외적 소명의 요소

세 요소가 있다.복음적 사실과 이념의 제시,신앙과 회개로 그리스도를 받으라는 초청, 용서와 구원의 약속

[b]외적 소명의 특징

두 가지 특징이 있다.그것은 일반적이며 보편적이다.그리고 성실한 소명이다.하나님께서 복음을 통하여 죄인을 부르실 때 그는 선한 신앙으로 부르시며 또한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는 초청을 받아들일 것을 성실하게 원하시는 것이다.

[c]외적 소명의 의의

하나님은 이 외적 소명에서 죄인에 대하여 가지시는 자기의 권리를 주장하신다.이 소명은 역시 하나님께서 選民을 세계만국에서 모으시는 지정된 방법이기도 하다.

 


[2]외적 서명 혹은 효과적 소명

 

하나님께서 죄인을 부르시는 소명은 비록 우리가 외적 소명과 내적 소명으로 구분해서 말하지만 사실은 하나이다.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외적 소명이 발생되고 내적 소명에서 그 효력을 거두게 되는 것이다.내적 소명은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구원적으로 적용된 명령이다.이것은 능력있는 서명 곧 구원에 이르게 하는 소명이다.이것은 후회가 없으며 변화되지 않으며 취소되지 않는 소명이다. 이 소명을 받은 사람은 확실히 구원받게 될 것이다.

(a)이 소명은 도덕적 說誘의 방법으로 역사한다.

성령께서는 말씀을 통하여 창조적 방법으로 일하지 않으시고 설유적 방법으로 역사하신다.전도를 통하여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도록 설유하시는 것이다.

(b)그것은 인간의 의식생활에서 역사한다.

그 오성을 통하여 의지를 효과적으로 감화시키는 것이다.

(c)이 소명은 항상 한 목적지로 향하게 한다.

그것은 성령꼐서 피택자를 인도하여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교제하게 하는 소명이며고전 1:9 축복을 유업으로 받게하는 소명이며벧전 3:9  그리고 그것은 자유케하며 갈5:13화평을 가지게 하며 고전 7:15거룩하게 하며 살전4:7 소망을 갖게하며 엡4:4영생을 얻게하며 딤전6:12또한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에 이르게 하는 소명 살전2:12인 것이다.

 


제 3절 중생

[1]중생의 어의

칼빈은 회심과 성화를 포함하는 인간 갱신의 전 영역을 표현하기 위하여 사용했다.신앙고백서에서는 중생은 신생과 회심에 있어서 인간갱신의 시초라고 하였다.중생이란 말은 새 생명의 원리를 인간속에 심어주고 영혼의 주도적 성향을 성화시키는 하나님의 행위라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2]중생의 본질

(a) 중생은 근본적 변화이다.

중생은 인간속에 새로운 영적 생명의 원리를 심어 주어, 영혼의 지배적인 성향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켜 주는 것이다. 곧 이지와 의지, 그리고 감정에 미친다.

(b) 중생은 즉각적 변화이다.

이것은 영혼안에서 점진적으로 준비되는 변화가 아니다. 생과 죽음 사이에 중간 계단이 없음과 같다. 이것은 성화와 같은 점진적 과정이 아니고, 순간적으로 완성되는 것이다.

(c) 중생은 잠재의식 생활에서 일어나는 변화이다.

중생은 은밀한 것이며 또한 가히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역이어서 인간으로서는 직접 이를 지각할 수 없고 다만 나타난 결과로서만 알 수 있는 것이다.

 


[3] 소명과 중생의 차서관계

말씀 전파에서 되는 외적소명은 새 생명을 일으키는 성령의 역사보다 먼저 있거나 혹은 그와 동시에 일어난다. 다음으로 하나님은 창조적인 행위로 새 생명을 발생하여 영혼의 내적성향을 변화 시키신다. 중생에서 인간은 영혼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소명을 들을 수 있는 영적인 귀를 받게 된다. 마지막으로 이 효과적 소명은 영혼에 태어나 새 성향을 처음으로 거룩하게 운영하게 한다.

[4] 중생의 필요성

중생의 필요성은 역시 인간의 죄적 상태에서 생겨진다. 성결 혹은 하나님의 율법과 일치하게게 사는 것,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얻고, 양심의 평화를 이루며 하나님과 더불어 교제를 즐김에 있어서 불가결의 조건이 되는 것이다.

[5] 중생의 기구로서의 하나님의 말씀

중생에 있어서 말씀이 기구로 사용된다는 것은 약1:18과 벧전1:23이 입증해 준다고 가끔 말하고 있다. 그러나 야고보가 말하고 있는 중생은 분명히 새 출생 혹은 새 생명의 첫 현현을 포함하고 있는 넓은 의 미의 중생인 것이다. 아마 베드로가 말하는 중생도 이와 같은 것이다. 그리고 다욱 포괄적인 의미에서 중생은 의심할 여지도 없이 말씀의 방편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6] 중생은 독점적으로 하나님의 사역이다.

하나님은 중생의 창조자이다. 이것은 중생에 있어서, 하나님만이 일하시고 죄인의 협력은 조금도 필요없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알미니안파는 이 견해에 찬성하지 않는다. 엄밀히 말해서 그들은 인간의 일이 하나님의 일보다. 앞선다고 보는 것이다. 인간은 성령의 감화에 반항할 수 있고, 굴복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7] 세례의 중생

로마교회에 의하면, 중생은 영적갱신만이 아니라, 칭의 혹은 속죄도 포함하는 것이며, 이것은 세례에 의하여 효력이 발생된다고 주장한다. 영국교회의 한 유력한 교파는 이 점에서 로마교회와 일치하고 있다. 그리고 다수의 루터파 까지도 일종의 세례중생을 가르친다. 그러나 루터파의 일부는 이것을 단순히 수세인을 교회와 새로운 관계에 들어가게 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모든 교파는 중생의 축복이 상실될 수 있다고 하는 교훈에 일치를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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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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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강요 요약-1

 <기독교 강요>는 신앙생활의 지첨서일 뿐만 아니라 성경적 경건의 이론과 실천을 명제와 변증을 통해 체계적으로 다룬 신학생들의 조직신학 교과서이다

이 번 포스팅을

 

소망이란 참으로 하나님께서 약속하셨다고 믿는 모든 것에 대한 기대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이처럼 신앙은 하나님께서 신실하심을 믿는다. 소망이란 하나님께서 미래의 적당한 때에 그의 진실하심을 나타내시리라고 기대한다. 신앙이란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이심을 믿는다. 소망은 하나님께서 미래에도 항상 우리를 위한 아버지로서 행동하실 것이라고 기대한다. 신앙이란 영생이 우리에게 주어질 것을 믿는다. 신앙이란 소망이 그 위에 서있는 초석이요 소망은 신앙을 양육하고 유지시켜준다.


진정한 기도란 마음에서 나오는 순수한 느낌이요 이 느낌을 가지고 하나님을 접근해야 한다고 한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영광, 우리 자신의 자존심 및 모든 자만심과 신념을 버리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기도란 우리 자신의 의로운 행동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엄청난 자비에 근거한 것이어야 한다고 한다. 왜냐하면 이 주님께서는 그의 사랑으로부터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며 우리는 바로 이 주님의 이름을 부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주기도문에서 하나님에게 어떤 법이나 그 어떤 조건도 부과시켜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배운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서 기도하기 전에 그리고 그 모든 것에 앞서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것을 기도해야 하기 때문이다.


본 최종판(1559) 기독교 강요는 사도신경의 순서를 따라 4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즉,

1.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지식,

2.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구속주 하나님에 대한 지식,

3. 그리스도의 은혜를 수용하는 방법,

4.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와의 사귐에로 부르시며 이 사귐 속에 있게 하시는 외적인 수단 혹은 보조자이다.

환언하면

1. 신론 2. 기독론 3. 성령론 4. 교회론 및 국가론이다.

그런데 교회론을 다루면서 끝에 국가론을 첨부한 이유는

국가 역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유익을 주는 도구이기 때문이다.

 

제 1 권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지식

 

히브리서 11:3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인간은 자연계시를 통해서는 구속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가질 수 없으며 성령의 경험도 할 수 없고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지식조차 단편적이라는 뜻이다. 즉 인간은 자연계시에 의해서만은 ?구원의 신 지식?이나 구원의 신앙을 가질 수 없다. 그러나 이 자연계시를 통해서 자연인은 하나님 앞에서 핑계할 수 없다. 그래서 칼빈은 제 6 장에서 성경이야말로 창조주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사람에게 길잡이와 선생 노릇을 하기위해서 꼭 필요하다“라는 제목을 다루고 제 13장에서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본격적으로 다룬다.


제 1 장  우리는 신약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엄청난 명령과 요구들 앞에서 혹은 복음이 성령을 통하여 우리 마음에 와 닿을 때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인식과 아울러 우리 자신에 대한 인식을 할 수 있다. 특히 예배하는 공동체인 교회에서 말씀 설교와 세례와 성만찬  및 봉사활동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인식한다. 인간은 하나님의 위엄과 자기를 비교하지 않고서는 자기의 낮은 신분에 대하여 결코 깨닫지 못한다.


제 2 장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구속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이 성령으로 가능케 된다는 것이 칼빈의 주장이다. 칼반의 하나님 지식은 단순히 주지주의 적이거나 이론적인데 머물지 않고 양심, 의지, 감정 등 전인적인 신뢰와 경외 그리고 전인적인 사랑을 경험하는 신앙의 하나님의 지식이다.


제 3 장  인간의 지성 속에는 하나님에 대한 직관이 있다. 이는 자연적 본능이다. 종교의 씨앗이다. 이는 성경을 읽거나 설교를 듣기 이전에 모든 인간이 지닌 종교성으로서 양심의 빛과 긴밀한 관계를 갖는다. 즉 하나님의 존재를 의식하고 하나님을 두려워 하면서 양심의 자세를 가다듬는 태도를 의미한다. 이 종교성이야말로 학교에서 배워서 아는 것이 아니다. 이 하나님 지식은 인간의 무지와 보도덕에 의하여 질식되고 있다. 이것은 타락의결과인 인간의 본성의 부패 때문이다. 이 하나님 지식은 결코 인간을 구원에로 인도할 수 없다.


제 4 장 경험에 의한 즉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간 속에 종교의 씨앗을 뿌리셨다. 그러나 백 사람 가운데서 한 사람도 그 씨앗을 그의 마음 속에서 잘 배양하지 않으며 때를 따라 열매를 맺지 않는다. 이 뿐 아니라 어떤 이는 이 종교의 씨앗을 미신으로 표출시키고 또 다른 이들은 의식적으로 그리고 악의로 하나님을 저버린다. 이 세상에 하나님에 대한 참 지식에서 떨어지지 아니한 사람은 하나도 없다. 즉 이 세상에서 우리는 진정한 경건을 찾아볼 수 없다는 말이다.


제 6 장 자연계시를 통해서는 다만 핑계할 수 없을 정도로만 창조주 하나님이 계시되었으며 성경 안에 들어와야 비로소 참된 길잡이요 선생은 성경이라고 주장한다. 이 성경에는 창조주 하나님의 참 모습과 아울러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하는 생명의 말씀 혹은 말씀의 빛도 있다.  우리는 이 셩겅에 전하는 하늘의 가르침에서 출발하지 않고는 결코 참된 경건을 조명받을 수 없으며 이 성경의 학생이 되지 않고는 올바르고 건전한 가르침을 결코 추호도 맛 볼 수 없을 것이다.


제 7 장 칼빈은 기록된 말씀과 설교 말씀이 성령의 사역과 긴밀한 관계에 있음을 주장한다. 이 성경 말씀의 진정한 증인은 하나님 자신이다. 이성과 교리 전승 보다 성령이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지성과 의지, 그리고 양심과 감정에 와닿는다. 성령을 통해서 전해지던 말씀이 기록된 후 다시 성령을 통하여 그 말씀내용이 밝혀진다.

 


제 8 장 칼빈은 성경의 표현양식이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우아하고 장엄하며 명쾌하고 빛나는 것이라고 하나 경우에 따라서 거칠고 세련되지 않은 스타일도 포함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문장보다 내용이라고 못박았다.


제 11장 칼빈은 출 20: 4을 근거로하여 모든 우상들을 금한다. 즉 나무, 돌, 금, 은 등 생명없는 혹은 썩어질 물질로 만든 우상은 물론 태양숭배, 별숭배, 동물숭배 등을 철저히 배격한다. 결국 우리가 접근할 수 없는 초월적인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통하여 나타나셨다. 이인간이 되신 하나님은 결코 우상이 아니시다.

 

제 13 장 성경이 계시하는 하나님은 무슨 형상이나 우상이 아니라 무한한 본질이요 영적인 본질로서 단순하고 나누어질 수 없으며 통일성을 지닌 한 분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동시에 이 한 분 하나님은 세 위격을 지니셨다.

   계시된 예수 그리스도는 성경 해석의 열쇠라고 해야 한다. 즉 구약의 예언자들과 신약의 사도들은 그리스도의 영에 의하여 말씀하셨다. 이 그리스도의 영은  말씀의 영으로서 이 말씀은 하나님이시다. 이 말씀이 창조의 중보자요,계시와 구 속의 중보자이시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말씀을 통하여 창조의 세계를 지탱하신다.  

  인간과 우주 만물은 성자의 작품인 동시에 성령의 작품이기도 한다. 즉 하나님의 창조 역사와 구속 역사 및 섭리와 종말 사건에 있어서 성삼위일체 하나님이 동일하게 역사하신다.

 

제 14 장 성경에 의하면 거짓 신들과 구별되는 참 하나님의 모습은 이 창조주의 우주와 인간 창조를 통해서 나타났다. 창조주 하나님은 천사를 포함한 모든 인간과 우주만물 위에 군림하시는 주님이시다. 천사는 하나님의 피조물이요, 하나님을 섬기는 종으로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한다.

   마귀들은 믿는 자들을 공격하고, 불화를 가져다 주고, 피곤케 하고, 공포와 파멸에 이르게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믿는 자들을 눈동자같이 지키신다. 그러므로 믿는자들은 악마에게 발붙일 기회를 주지 말아야 한다. 우리의 대적 악마가 우는 사자처럼 으르렁대고 우리를 삼키려할 때 우리는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대적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믿는 자들을 보호하신다고 하는 사실도 있으나 악마를 대적하여 싸워야 한다는 명령도 있다.

 


제 15 장 인간은 몸과 영혼 내지는 정신으로 구성된다. 대체로 영혼과 정신이 개별적으로 사용될 ?에는 동일시뙤나, 양자가 함께 사용될 때는 정신이 영혼보다 우월한 기능을 갖는다.

한 인간안의 인격적 통일성, 한 인격 내에서의 두 본성의 교류를 칼빈은 보고 있다. 영혼은 몸이 아니고 몸은 영혼이 아니다. 그래서 영혼의 고유한 특성은 모에 적용될 수 없고, 몸의 고유한 특성은 영혼에 적용될 수 없 다. 그리고 전인이라고 하는 것은 영혼에게만 해당되는 것도 아니며 몸에만 해당되는 것도 아니다. 결국 마음의 특성이 몸으로 이월되고 몸의 특성은 영혼으로 이월된다.

인간의 영혼 혹은 정신은 주로 두가지 능력과 기능을 나타낸다. 곧 지성과의지이다. 그런데 지성은 영혼 혹은 정신의 지휘관 내지는 통치자요, 의지란 항상 저 지성의 지시와 정보에 따라 움직인다. 칼빈은 또한 주로 지성을 Mind로 의지를 heart로 표현한다. 인간의 정신적 능력은 주로 이 두가지 기능에 해당된다. 지성없는 의지는 맹목적이 되고, 의지없는 지성은 행함이 없다. 의지는 지성의 손을 잡고 길을 가야 한다.

 

제 16장 하나님께서는 그가 창조하는 세계를 자신의 능력으로 양육하시고 지탱시키시며 그의 섭리에 의하여 이 세계? 각 부분을 통치하신다.


제 18장 칼빈은 하나님이 그가 창조하신 우주를 통치하시고 그의 작품에 대하여 세심한 배려를 기울이신다고 한다. 성부와성자는 처음부터 함꼐 일하신다. 고 할 때 이성부와 성자의 명령 안에서 우리는 살고 움직이고 우리의 존재를 찾는다. 이것이 하나님의 보편적인 섭리라고 하였다. 그러나 칼빈은 하나님의 특수섭리를 말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의 계획 뜻, 노력이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것을 믿으며 하나님의 선택의 의지에 의하여 자기들이 움직인다는 것을 믿는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특별히 자신들을 섭리하신다고 믿는다. 믿는 자들은 제 이차적 원인들을 무시해서는 안된다. 즉 어떤 사람을 통해서 큰 유익을 얻었을 때 이는 하나님이 이들을 통해서 축복하셨다는 사실을 믿고, 주님이 이 선행하는 원초적 원인임을 알고 그를 경외하고 찬양해야 한다.

 

제 2 권


그리스도 안에 나타나신 구속주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구약에 계시되었고 그 다음 신약에서 계시되었다.


제 1 장 원죄론 전인류는 아담의 타락과 반항에 의하여 저주를 받았고, 원초적인 상태에서 떨어졌다. 인간의 소외는 전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인식된 인간의 모습이요,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본 인간의 모습이요, 나아가서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 회복을 표준으로 하는 인간의 비본래적인 모습이다. 칼빈에게 있어서 죄란 인간의 육체에서만 나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보다 고상한 부분인 지성, 양심 및 의지에서 나온 것이다. 칼 빈 역시 이런 의미에서 노예의지론을 주장한다.


제 3 장 인간의 의지가 하나님의 원하시는 뜻을 따라 움직이며 선을 실현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다. 인간의 의지를 묶어버린 죄의 쇠사슬 때문에 인간은 선을 향하여 지향할 수도 없고, 이 선을 성취하지도 못한다.

 

제 4 장  인간의 자유의지의 성취가 추호도 구원에 공헌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밝힘으로써 이미 언급한 바 있는 은혜의 선행에 의한 인간의지의 회심을 재확인하려는 것이다.

제 6 장 이처럼 인간은 구원과 거룩한 삶에 관한 한 전적으로 타락하였음으로 창조주 하나님을 아는 것으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다. 인간은 중보자 예쑤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 아버지와 관계 맺어야 구원에 이른다.

  구원에 통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요, 이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지 않는 모든 예배는 유익이 없다. 심지어 구약성경까지도 중보자를 떠나서는 은혜로우신 하나님에 대한 산앙이없다고 한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 해석의 열쇠요 구약은 신약의 빛에서 풀이되어야 하고, 또한 신약은 구약의 빛에서 풀이되어야 한다.

 


제 7 장 구약에 주어진 율법은 옛 언약의 백성을 이 안에서의 소망을 그리스도의 오심까지 키워나가기 위한 것이었다. 율법은 거울과 같다. 거울은 우리의 모습을 그대로 반영한다.

십계명은 모든 하나님의 요구를 대변한다. 양심법과 실정법 역시 결국 이 십게명에 내포될 수 있을 것이다. 칼빈은 이 십곕명의 묘지를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첫부분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에 대한 종교적 의무에 대한 것이요, 둘째 부분은 이웃을 향한 사랑의 의무에 관한 것이다.


제 8 장 칼빈은 십계명의 기능이 우선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을 신뢰하고 그 분의 자비와 거룩하심을 경외하면서 예배하도록 촉구하는 것이요, 그 다음 인간이 얼마나 불의하며 의를 행하기에 얼마나 무능하고 불완전한가를 말한다고 한다. 우리는 이처럼 하나님을 올바로 의식하고 자기의 무능을 깨닫지 못한다면 이 십계명의 명령 사항을 결코 아름답게 수행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전 계명의 목적은 하나님의 순결의 원형에 의하여 우리의 생을 숭응시켜 형성시켜야 할 의의 완성에 있다. 하나님은 그의 모습을 이 율법으로 묘사하였기 때문에 누구든지 이 율법이 명하는 바를 행동화할 경우 그는 하나님의 형상을 그의 삶의 나타내는 것이다.

성도의 완전함은 사랑에 있으며 사랑은 율법의 성취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이룬 사람이다.


제 9 장 그리스도는 이미 율법 하에 있었던 유대인들에게 알려지셨으나 급기야는 오직 복음 안에서 명쾌하게 계시되셨다.

칼빈은 복음이란 그리스도의 신비의 분명한 계시라고 하아였다. 구약에서 발견되는 바 하나님과 인간의화해를 약속하는 은혜로운 속죄들은 복음의 한 부분으로 신앙의대상이라고 한다. 칼빈은 이 복음 신앙을 공로주의와 율법 주의에서 오는 위협과 공포와 대조적으로 나타낸다. 넓은 의미에서 복음이란 하나님꼐서 족장들에게 베푸셨던 그의자비와 그의 아버지다운 호의에 대한 증거를 포함한다. 그러나 보다 높은 의미의 복음이란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은혜의 선포라고 칼빈은 말한다. 사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나라를 설교하셨고 마가는 그의 복음서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고 하는 말로 시작하였다.

 

제 10 장 첫째로 육적인 번영과 행복은 유대인들이 갈망하는 바 유대인들 앞에 놓여있던 목표가 아니였다. 이들이 영생에의 소망을 가질 수 있게 되었던 것이 더 중요하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양자되었다는 확신이, 신탁, 율법, 그리고 예언자들에 의하여 확인되었다.  두 번째로 저들이 주님과 맺은 언약과 사귐은 저들의 공로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오직 저들을 부르신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이었다. 세 번째로 구약의 하나님의 계약백성은 그리스도를 중보자로 지녔으며 그리스도를 중보자로 알았다. 이들은 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에게 연합되었고 하나님의 약속에 동참활 수 있었다.

 

제 11 장 구약은 영적인 축복을 지상적인 축복으로 표현한다. 두 번째 다른 점은 구약의 진리는 형상들과 의식법에 의하여 전달되었으나 신약에서는 진리이신 그리스도께서 직접 등장하셨다. 세 번째 다른 점은 구약은 다분히 율법적이고, 신약은 다분히 복음적이라는 것이다. 네 번째 다른 점은 구약은 인간을 속박하며 신약은 인간을 자유케 한다는 것이다.다섯번째 다른 점은 구약은 하나의 민족을 지향하며 신약은 모든 민족을 포함한다.

 


제 12 장 누가 어떻게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중보할 수 있으며 화해시킬 수 있을까? 거룩하신 하나님과 인간을 중보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인간은 모두 죄인이기 때문이다. 오직 하나님의 위엄의 보좌에서 내려오신 인간이어야 한다. 곧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이 되셔서 우리와 함꼐 하심으로 인간에게 구원이 일어난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아들이면서도 동시에 사람의 아들이라는 절대 역설적 위격이 우리를 위한 구 속의 사업을 펼치셨다.

 


제 13 장 축복의 약속을 받은 자는 하늘의 씨앗도 아니요 환상적인 인간도 아니라 아브라함과 야곱의 씨앗이다. 영원한 중보자를 약속받은 자는 다윗의 아들이요 그의 허리에서 나온 열매다. 주님께서는 단순히 인간이라고 하는 말로 만족하시지 않고 종종 자신을 인자라고 부르셨으니 그 뜻은 인간의 씨에서 탄생하신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제 14 장 칼빈은 정통 기독론을 따라 신성과 인성의 교류를 말하는데 그의 공헌은 이 신비한 교류를 한 인간의 인격 안에서 영혼의 특질과 육체적 특질이 서로 교류하는 것에 유추하였다. 즉 영혼은 육체가 아니고 육체는 영혼이 아니다. 그러나 영혼과 육체가 전인을 이룬다. 이 전인으로서의 한 인간의 인격 안에서 영혼의 특질과 육체의 특질은 서로 교류한다. 이 둘은 서로 분리될 수 없으며 나뉘어질 수도 없다. 그리고 이 둘은 하나가 다른 하나로 변해도 안되며 이 둘은 서로 혼돈되어도 안된다. 이는 곧 예수 그리스도 라고 하는 하나의 인격 안에 있는 신성과 인성의 관계와 비슷하다.

 


제 15 장 아버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신 목적을 알기 위하여 그리고 이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것이 무엇인가를 알기 위하여 우리는 무엇보다 그리스도의 3 중의 직책을 이해하여야 한다. 즉 예언자적 직책, 왕의 직책 및 제사장의 직책이다.

 


제 17장 칼빈은 인간의 소외와 예수 그리스도의 화해 사업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되었고, 하나님의 진노의 자식이다. 따라서 영원한 사망의 저주를 받아 구원의 소망이 전혀 없다. 하난미의 축복은커녕 사탄의 노예와 죄의 멍에 아래서 무시무시한 파멸 속에 떨어져있다. 이와 같은 때에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변호자로서 하나님과인간 사이에 개입하셨다. 즉 하나님과 의로운 심판 하에 모든 죄인이 위협받고 있는 모든 형벌을 그리스도께서 홀로 감수하시어 하나님과 인간을 소외시키는 모든 죄악을 그의 피로써 씻어버리셨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는 이 화목제에의하여 하나님 아버지의 진노를 잠잠케 하셨다. 그리하여 하나님과 인간의 평화와 화해는 바로 이 사건에 근거한다.

 


구원의 완성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케 되었다.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이 만족되었으며 그의 저주는 제거되었고 죄의 값이 완전히 지불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의 부활을 통해서 중생하고 영생의 소망을 갖는다고 말하지 그의 죽음을 통해서 그렇게 된다고 하지 않는다. 그의 죽음으로 죄가 제거되었고 그의 부활에 의하여 의가 다시 살아났고 회복되었다고 하는 말이나 다름없다.

빌라도는 하나의 죄인에 불과하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마치 사형수나 되는 것처럼 이 빌라도의 법정에 나아가셨다. 그는 우리 대신 저주를 받으셨다. 인간이 받아야 할 형벌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인간의 아들에게 전가된 것이다. 우리의 죄가 그리스도께 전가되었고 그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었다. 우리는 그의 부활을 통해거 중생했으며 나아가서 살아있는 소망을 갖게 되었다.

 


제 3 권 우리가 그리스도의 은혜를 수용하는 방법

 


제 2 장 남녀가 결혼하여 뼈중의 뼈요 살중의 살이 된다. 이 둘은 하나가 된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을 통해서만 우리와 연합하신다. 이 성령의 은혜와 능력에 의하여 우리는 그리스도의 지체들이 된다. 그 결과 우리는 그리스도에 예속되고 또한 우리는 그리스도를 소유한다. 인신칭의, 회개, 성화, 기도, 교회와 성례는 이와같이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연합을 일으킨다. 그런데 여기에서 성령의 역할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는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예수 그릿도와 연합했으나 장차 종말의 날에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남아있다.

 


신앙이란 성령의 주요 일이다. 성령은 말씀을 통해서 일하신다. 신앙이란 성령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지성을 조명시키시고 우리의 의지를 선택과 결단,확고부동한 신뢰에이르게 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신앙에서 신뢰가 나온다고 말하며, 여기에서 담대함이 생긴다고 말한다. 동시에 이 신앙은 양심의 평화라고도 일컬어진다.

 


제 3 장 나는 신앙의 결과로서 따라오는 것이 회개라고 생각한다. 뿐만 아니라 회개는 신앙으로부터 탄생하는 것이 확실하다. 복음의 은혜를 받아들이는 사람이 아니고는 과거의 죄악된 삶으로부터 올바른 삶에로 옮겨갈 수가 없으며 회개를 실천하는 일에 노력을 기울일 수 없다.

칼빈은 회개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우리들 자신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 회개요, 우리의 옛정신을 벗어버리고 새 정신을 입는 것이 회개이다. 회개란 우리의 육 혹은 옛사람의 죽음과 성령의 소생케 하심에 있다.

 


제 5 장 고해성사란 무엇인가 그것은 회개를 위한 잘못된 메카니즘이다. 그가 죄를 지을 때 마다 1.신부 혹은 사제 앞에 나아가 죄를 통회하며 2. 죄를 항목화하여 낱낱이 신부 앞에 고백하고, 3. 죄책은 용서받으나 형벌은 면제받지 못하여 어떤 선행이나 여러 종류의 보상하는 고행을 통하여 하나님에게 만족을 드려야 하며 4. 끝으로 사제는 미사행위를 통하여 이러한 사람들의 모든 죄책과 형벌을 면제시켜 준다.

칼빈은 이 교리에 반대하였다. 죄의 용서는 인간인 신부가 아니라 복음 말씀을 통하여 성령의 조명으로 그리스도 자신에 의하여 사죄받는다.

 


제 7 장 칼빈에게 있어서 성화는 삶의 현장, 직업의 현장, 혹은 세상 한 복판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하는 것인 바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기 위하여 전생애를 불 태울 수 있는 것은 자기 자신이 자기자신의 것이 아니며 하나님의 것이라고 하는 확신 때문이다. 칼빈은 자기 부정이 먼저 일어나야 남을 위해서 무엇인가 할 수 있다고 말한다. 만약에 당신이 당신 자신에 대한 생각을 포기하지 못한다면 당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제 8 장 십자가를 지는 것, 그것은 자기부정이다.

 


제 10 장 우리 기독교인들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나? 칼빈은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들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것같이 하며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이 세상 형적은 지나감이니라.를 인용함으로써 초월적 하나님과 관계하며 은혜와 신앙으로 구원을 받아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두고 이 세상을 초월적인 사랑과 공의로 살아가야 할 기독교인들의 세상에서의 삶에 대한 태도를 말한다. 기독교의 하나님이 초월이면서도 내재이시듯이 우리 기독교인들은 초월의 영역을 지향하면서도 동시에 이 땅에서 올바른 삶을 살아야 한다.

제 11 장 이신칭의 : 이 말의 정의와 그 주제 칼빈은 이신칭의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하나님의 존전에서 하나님의 판단에 의하여 의롭다고 여겨진 사람 그리고 하나님의 의로 말미암아 용납받은 자가 바로 칭의받은 사람이다. 행위의 의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를 신앙으로 포착하고 이 의로 옷입고 하나님 앞에서 죄인으로 여겨지지 않고 의인으로 여겨지는 사람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것이다.

칭의란 하나님께서 그의 호의로 우리를 의인처럼 용납하시는 용납이다. 그리고그것은 죄들의 속죄와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이다.

 


제 13 장 이신칭의에 있어서 두 가지 유의할 사항 여기에서 우리는 두 가지 점에 유의해야 한다. 하나는 주님의 영광이 감소되어서는 안된다는 것, 즉 주님의 영광의 손상이 회복되어야 한다는 것과, 다른 하나는 우리의 양심이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평화로운 안식과 평온을 가져야 한다는 점이다.

 


제 14 장 이신칭의의 시작과 그 지속적인 진전 결국 그리스도와의 사귐이 없이는 결코 성화는 있을 수 없다. 자연인은 나쁜 나무이다. 이들은 보기에 아름답고 맛좋은 열매를 맺으나 이것들이 결코 좋은 열매는 못된다. 여기로부터 우리는 하나님과 화해하기 이전의 자연인이 하는 계획, 생각 및 일들은 모두 의를 위해서 쓸데없는 짓이요, 저주와 정죄받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있다.

 


제 15장 우리들이 행위의 공로를 자랑하고 자만할 경우 우리는 은혜로 베풀어주신 의와 구원의 확신을 가진 사실에 대하여 하나님을 찬양할 수 없다. 바울의 말에 의하면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보내지신 것은 우리가 의를 성취하도록 돕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분 자신이 우리의 의가 되시기 위함이었다. 진실로 바울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에 우리의 공로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정하셨다.

우리 자신이 아직 어리석을 때 그리스도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지혜시오, 우리가 아직 죄인일 때 그리스도는 우리의 의요, 우리가 아직 더러울 때 그는 우리의 깨끗하심이요, 우리가 연약하여 사탄의 힘에 노출될 때 하늘과 땅의 권세를 부여받으신 그리스도의 능력이 우리의 것이요.

 


제 17 장 율법의 요구가 무조건적 사죄를 선포하는 복음으로 대치되었을 때 이 복음이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용납되게 하며 우리의 선행까지도 기뻐 받으신다.    따라서 나는 주님께서 그의 율법에 기록한 바 의와 거룩함을 성취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바가 믿는 자의 선행의 대가로 주어진다는 것을 인정한다.

 


제 18 장 상급을 받는 다는 것 때문에 행위에 의한 의가 가능할 수는 없다. 상급이라는 개념은 결코 우리의 구원이 우리의 행위에 달렸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제 19 장 칼빈은 기독교적 자유를 3 가지로 본다. 율법으로부터의 자유, 율법의 멍에를 벗은 자만이 율법의 요구에 순응하는 자유 중요하지  않은 것들로부터의 자유.

 


제 20 장 기도 : 그것은 신앙을 훈련시키며 우리는 기도에 의하여 매일 매일 하나님꼐로부터 은혜를 받는다. 기도란 하나님의 계명 중에 하나로서 구원론적 근거를 갖는다. 다시 말하면 은혜와 신앙과 무관한 불신자들이 기도한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우리는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섭리와 우리를 지탱하시는 그의 능력의 현존을 부르는 것이요, 죄에 눌린 우리를 은혜로 용납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심의 현존을 부른다.

 


칼빈은 4 가지의 기도의 법칙을 제시한다.

1) 우리의 지성 양심 의지 및 정서는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는 성향을 갖추어야 한다.

2) 곤궁을 절감하면서 우리는 기도해야 하고 참회하는 마음으로 우리는 기도해야 한다.

3)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한 신뢰를 버리고 겸허하게 용서를 빌어야 한다.

4) 확고부동한 소망을 가지고 우리는 기도해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으로 담대하고 확신있게 하나님 앞에 나간다. 이처럼 신앙과 소망은 사랑의 실천을 위하여 기도할  때 꼭 필요하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과 약속에 근거하여 기도해야 한다.

 


제 21 장 영원 전의 선택 : 하나님은 어떤 사람들은 구원받도록 택정하셨고 또 어떤 사람들은 멸망받도록 택정하셨다.

 


제 24 장 선택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의하여 확인된다. 유기된 자들의 멸망은 하나님이 정하신 바이다. 칼빈은 성도들의 견인에 관하여 말했다. 하나님은 그의 택정하신 성도들을 영생에 이르도록 끝까지 참고 붙드신다.

 


제4권 하나님께서 우리를그리스도와의사귐에로초대하시고 이 사귐에 머물게하시는 외적인 수단

 


말씀 설교 세례 성만찬등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매개시키는 수단인 바, 우리를 그리스도와의 사귐에로 초대하며 이 사귐 안에 머물러 있게 한다. 그런데 칼빈은 그의 기독교 강요 가장 끝 부분에 국가론을 다루는데 국가 역시 원칙상 하나님의 은혜를 매개시키는 기관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제 1 장 참 교회 : 우리는 모든 믿는 자들의 어머니인 이 참 교회와 하나되어야 한다. 칼빈은 루터와는 달리 신앙고백과 삶의 모범을 요구한다. 즉 이것이 교회의 표지에 가산되고 있다. 우리는 신앙고백과 삶의 모범으로 우리와 더불어 동일한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사랑의 판단에 의하여 하나님의 교회라고 판단한다.

 


제 2 장 참 교회를 분별하는 표준은 즉 말씀을 순수하게 설교하며 세례와 성만찬을 주님이 제정하신 의도대로 베풀며 이에 대한 반응으로써 순종, 성화, 혹은 삶의 모범이 있어야 참 교회가 거기에 있는 것이다.

 


제 3 장 교회의 교사들과 교역자들 및 이들의 선출과 직책 칼빈은 하나님의 봉사자들을 가리켜 세상 속에 있는 하나님의 사절, 하나님의 성전들, 주님의 전언자, 그리스도의 봉사자들 혹은 하나님의 신비를 맡은 청지기 등으로 표현한다.

하나님은 사람의 입을 통하여 그의 말씀을 설교하신다. 따라서 사람의 입술이 마치 하나님의 거룩한 지성소인양 우리는 이 사람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하늘나라의 보물이 이 연약한 질그릇 속에 담겨있는 것이다.

 


제 5 장 폭군적인 교황주의는 고대교회의 교직체제를 완전히 뒤엎어 버렸다.

 


제 6 장 로마 카톨릭 교회의 교황의 지상권. 칼빈은 베드로의 수위권에대하여 반론한다.

 


제 8 장 로마 카톨릭 교회의 교리 결정권 : 이 권한에 의하여 교회는 그동안 모든 교리의 순수성을 얼마나 타락시켰던가? 저들은 성경 이외에 전통(교리들, 교황의 칙령들)을 말한다. 사도들의 글 이외에 전해지는 구전도 말한다. 종교개혁 당시에 이들은 이 전통을 거의 성경과 같은 비중으로 보았다. 즉 기록된 말씀인 신, 구약 성경만이 진리의 표준은 아니라고 이들은 본다.

 


제 9 장 칼빈은 종교회의들이 성경으로부터 떨어졌으며 심지어 니케아 회의와 칼케돈 회의 역시 논쟁과정에서 목사들이 결점을 가지고 있었다고 본다. 칼빈은 어느 종교회의의 교리 결정이든 그것을 성경에 비추어 판단해야 하며 그 회의가 언제 어디에서 모였고 무슨 문제로 모었으며 누가 무슨의도를 가지고 무슨 말을 했는지를 우리는 알아야 한다고 한다. 칼빈은 신앙의 내용 중 중요한 것을 성경에 근거하여 결정한 니케아 회의(325), 콘스탄티노플 회의(381), 에베소 회의(431)칼케돈 회의(451) 같은 종교회의의 교리 결정은 성경의 순수하고 진정한 해석이었다고 하였다.

그런데 칼빈은 교리 문제 혹은 성경 해석의 문제로 교회가 싸울 때 노회나 총회 차원에서 결정하되 말씀과 성령을 따라 그렇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의미에서 칼빈은 위의 회의등의 존재 이유와 존재 의미를 인정하였고, 아타나시우스 등 많은 고대 교회의 교부들의 역할을 칭찬하였다.

 


제 10 장 교황은 그를 지지하는 감독들과 더불어 법을 제정하는 권한을 가졌는데 이로 말미암아 뭇 영혼들이 야비한 폭정과 유린 하에 억눌리고 신음하고 있다.

 


제 11 장 칼빈은 교회의 권한은 전적으로 영적인 것으로 특징지우면서 국가가 지닌 칼의 권한과 구별한다. 그리고 교회의 치리는 한 사람의 결정을 따라 이루어지지 않고 합법적인 회중의 결정을 따라 이루어져야 한다. 교회의 출교는 구형이니 투옥과 같은 것이 아니다. 칼빈은 카톨릭 교직자들의 경우 영적 권한의 한계를 넘어서 국가권력의 일까지 했다고 지적한다.


제 12 장 치리는 왜 필요하며 그 목적은 무엇인가? 칼빈은 한 가정이나 사회가 살아가는데도 치리(Discipline)가 반드시 필요한데 교회가 질서를 유지해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더욱 이 치리회가 필요하지 않겠느냐고 말한다. 그러면 이 치리의 목적은 무엇인가? 칼빈은 세가지 목적을 제시한다. 첫째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더럽혀지지 않기 위함 둘째로 고전 5:6,11에 근거하여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지체 중 악한 사람들이 일어나기 시작하면 온 그리스도의 몸이 더럽혀지므로 이 치리가 필요하다. 셋째로 결국 최종의 목표는 악한 자들을 회개시키는 데 있다. 치리의 의도와 목적이 죄인을 회개시키는 데 있기 때문에 이것이 죄인을 파멸시키는 결과를 가져와서는 안된다고 한다.

 

금식과 기도에 대해서 논한다. 첫째로 우리는 우리의 육체를 어거하기 위하여 금식해야 하는데, 이는 공적인 금식에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신체적인 조건이 개인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둘째로 개인이든 교회 공동체 전체이든 이 금식은 기도를 위한 준비 작업으로 필요하다. 셋째로는 하나님의 존전에서 자기를 낮추어 참회하기 위하여 금식이 필요한데 이는 기독교인 개인으로서 교회나 국가의 차원에서까지 타당하다. 왜냐하면 개인이나 교회나 국가가 하나님의 심판을 당할 때에 모두 금식하며 통회 자복해야 하기 ?문이다.

제 13 장 서원 : 누구든지 무모하게 서원하면 비참한 자승자박에 말려든다. 서원에 있어서 오류를 피하려면 3 가지 점에서 유의해야 한다. 1. 우리는 누구에게 서원을 해야 하나 2. 이 서원을 하고 있는 우리는 누구인다. 3. 어떠한 의도를 가지고 우리는 서원을 하는가?

 


  1. 하나님이 그의 말씀 안에서 인정하는 서원 이외에 다른 서원을 감히 하나님께 올리는 방종스러운 일을 행하지 말자. 2. 우리는 우리의 능력한계를 알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소명을 항상 염두에 두고 명심함으로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자유를 소홀히 여겨서는 안된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의 능력 한계를 벗어나서 혹은 그의 소명에 배치하여 서원을 일삼는 사람은 무모한 사람이다.그로 하여금 만물의 영장이 되도록 축복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경멸하는 사람은 배은망덕하다. 3. 서원하는 사람의 의도가 중요하다.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의도가 중요하다. 만약에 여러분이 술을 끊는 서원 그 행동 자체가 거룩한 것인양 생각한다면 그것은 미신적이다.

 


제 14 장 성례란 정부문서나 다른 공문에 찍힌 도장이라고 하면서 도장 그 자체보다 그 문서에 기록된 글의 의미가 중요하다고 한다. 내용인 즉 아브라함의 은혜의 언약을 신앙함으로 의롭다함을 얻고 나서 받은 할례는 저 언약을 인치는 도장에 해당된다는 것이다. 칼빈은 성례를 언약들의 보증이어서 하나님의 복음 말씀의 신빙성을 더 분명하게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 보이는 말씀이다. 그래서 이 성례전은 풍요로운 하나님의 은혜를 연상케하는 거울이라고 한다. 떡과 즙을 통하여 은혜를 받는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자기를 낮추어 우리의 능력에 알맞는 매체를 통하여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제 15 장 세례는 물 자체가 깨끗케 하고, 중생시키며 새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대속의 피가 우리 인간의 죄를 깨끗이 씻었는데, “ 복음을 통하여 우리의 죄를 깨끗이 씻고 성화시키는 메시지가 위리에게 와닿는다. 이 때에 세례는 이 메시지가  와닿았다는 것을 인치는 것이다.

 


제 17 장 그리스도의 거룩한 만찬 : 그것이 우리에게 주는 유익이란 무엇인가? 성만찬의 중심사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이 떡과 즙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눈에 보이듯 그리고 손으로 만져지듯 제시된다. 에수 그리스도께서 유일회적으로 우리의 구속과 구원을 위하여 주어지지 않았다면 이 떡과즙이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교류 혹은 그리스도에 참여함으로 영혼이 생기를 얻는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먹고 마심이라는 표현으로 이 관계를 나타내셨다. 마치 떡을 보는 것만으로는 몸에 유익이 없고 먹어야 유익이 있듯이 우리의 영혼은 그리스도와 깊은 영적 교류를 나누어야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영생에로의 생기를 얻게된다.

 


칼빈은 루터와 달리 성만찬 교리에서 성화의 측면을 강조하고 있다.

 


제 18 장 교황주의 교회의 미사 : 그것은 그리스도의 성만찬을 속되게 할 뿐만 아니라 형편없는 것으로 만든다.

 


제 19 장 로마 카톨릭 교회가 사용하는 5 개의 성례(저들은 세례와 성만찬을 더해 7 성례전을 사용한다.) : 이것을 성례라 함은 성경적이 아니다.

 


제 20 장 국가와 정부 (교회와의 관계) 칼빈은 물과 태양과 공기가 필요하듯이 국가가 필요하다고 한다. 국가는 공공질서를 유지하고 각 개인이 재산 소유의 권리를 갖도록 하며, 인간 상호간에 사귐을 갖게 하고, 덕망과 근엄이 사람들 사이에서 유지되게 한다. 즉 인간성의 확립을 도모하는 것이다. 이것은 십계명 중 둘째 돌판에 속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와 함께 첫째 돌판에 속하는 의미도 수행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칼빈은 공직자란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것이요 모든 국가의 권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한다. 이들은 하나님의 봉사자로서 선행을 한 사람들에게는 상급을 주고, 악행을 범한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진노를 보이는 것이라고 한다.

구원론

제 1장 성령의 일반적 사역

 


제 1절자연계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일반적 사역

성령께서는 자연의 영역에서 유기적이며 지적이며 도덕적인 모든 생명에 생을 주시며 ㅁ든 변화속에서도 그것을 보존하시며 또는 그것을 이끄어 발전하게 하시고 자신의 운명의 길에서 걸어가게하시는 것이다. 성령의 일반적 사역은 자연과 인간생활의 기성질서에 속한다.다시 말하면 그것은 창조에 근거를 두고 피조물의 성장과 완성을 보증하는 것이다.성령의 일반적 사역 없이는 그의 특별 사역을 위한 진정한 영역도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제 2절 보통은혜

성령의 일반적 사역의 열매 중에서 특히 고려할 만한 것은 보통은혜이다.

[1]보통은혜의 서술

보통은혜와 특별은헤의 구별은 하난님의 속성으로서의 은혜에는 적용되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사역에 또는 이 사역이 자연과 인간 생활에서 나타나는 결과에만 적용된다.보통은혜를 말할 때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a.이 사역에서 성령께서는 인간을 도덕적으로 감화시켜 죄를 제재하시며 사회질서를 유지하시며 시민의 도덕을 증진시킨다.b.이것은 하나님의 일반적 축복이다.모든사람에게 구별없이 자기에게 선하게 보이시는 대로 그 축복들을 나누어주시는 것이다. 그러나 알미니안파가 주장하는 만큼 영적 회개까지는 가져오게 하지 않는다.보통은혜는 인간의 전적 부패를 제거하기에 불충분하며 인간을 영적 갱신의 길로 인도하기에도 충분하지 못하다.

보통은혜와 특별은혜와의 상이점 a전자는 사람의 마음속에 영적 변화를 일으킬 수 없으나 후자는 가능하다.

b 전자는 이성적 도덕적 방법으로 역사하며 후자는 영적 창조적 방법으로 역사하여 인간의 전성질을 갱신 또는 영적 과실을 맺게 하는 것이다.c 전자는 반항적이며 항상 다소 저항을 받지만 후자는 불가항력적이어서 사람이 자발적으로 굴복할 수 있도록 사람을 변화시킨다.

 


[2]보통은혜와 그리스도의 속죄사역

아마 하나님께서 죄에 대하여 진노를 발하시지 않으시는 그 선하신 뜻이 곧 보통은혜의 축복들로 충분히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그러나 이러한 축복들도 그리스도의 죽음과 어느 면에서 관계되어야 한다는 것은 사실이다.그리스도의 속죄사역에서 간접적으로 결과한 이들 일반적 축복을 하나님께서는 미리 아셨을 뿐 아니라 온 인류를 위한 축복으로 계획하기도 하였다.

 


[3]보통은혜의 방법

(a)하나님의 계시의 빛

이것은 기본적인 것이다. 여기서는 주로 자연계에서 사람을 비추어 주며 자연인의 양심을 인도해 주는 하나님의 일반계시를 염두에 두고 말하고 있다.

(b)정부

하나님께서는 악마의 세력과 인간의 방탕을 억제하기 위하여 또는 선한 질서와 단정함을 증진시키기 위하여 정부를 제정하였다고 가르치고 있다.

(c)여론

자연계에서 비치는 하나님의 빛이 특히 특별계시의 빛으로 보강될 때 이것은 하나님의 율법과 일치하는 여론을 형성하게 된다.

(d)하나님의 형벌과 상급

하나님은 현세에서도 인간의 죄악을 벌하시고 율법과 외면적으로 일치한 행위에는 상급을 주신다. 이같이 현세에 있는 도덕적 선은 무엇이든지 크게 격려를 받는 것이다.

 


[4]보통은혜의 효과

[a]형의 집행유예

하나님께서 죄인에 대하여 죽음의 선고를 즉시 집행하지 않으셨고 지금도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인간의 자연적 생명을 유지 연장하여 그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시는 것은 보통은혜에 의하는 것이다.

[b]죄의 제재

죄는 그 부패의 요소가 그 파괴적 활동을 수행하는 데에 제재를 받는다.

[c]진리 도덕 종교의 의식

인간은 보통은혜에 의하여 진,선,미에 대한 의식을 다소 가지게 된다.진리와 외부적 도덕성 나아가서는 종교의 어떤 형태에 대해서 까지도 욕구를 나타내게되는 것이다.

[d]세속적 의

보통은혜는 인간으로 하여금 능히 세속적 의 혹은 자연적 선이라 불리워지는 것들을 실행케한다.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율법과 외면적으로 일치한 것을 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물론 그것들은 참된 영적 성질을 전적으로 결여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e]자연적 축복

인간이 이 세상에서 누리는 모든 자연적 축복은 보통은혜로 말미암는다.비록 인간이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이지만 그는 매일같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풍부하게 받고있는 것이다.

 


[5]보통은혜의 성서적 증거

하나님께서 죄를 여러 방법으로 제재하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창 20:6,31:7;욥1:12;2:6등

아직 중생하지 못한 자가 선과 의를 행한다고  말하고 있다.왕하 10:29,30;12:2 롬 2:14

마지막으로 어떤 귀절들은 하나님께서 과분한 축복을 모든 사람들에게 아무 차별없이 내리신다고 표현하고 있다.시145:9,15,16;마5:4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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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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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단을 분별하는 43가지 방법

 

1. 기성교회의 간판을 붙여도 성경에 있는 진리의 말씀보다 개인의 사상을 전파한다.
미신적인 요소가 많다. 성경에 없는 말을 하면 무조건 이단으로 간주해야 한다.

2. 성경을 가감한다.(성경을 완전히 곡해하면서 자기들의 교파확장을 위하여 소책자 및
전도용 책자를 만든다)

3. 이단들은 거짓예언, 환상을 좋아하며 신도들을 황홀경에 빠지게 한다.

4. 한때 교단의 교파에 몸 담았던 자들이 신흥교파를 만들어 낸다.

5. 하나님의 절대섭리를 인간의 자유의지로 조정하려고 한다.

6. 종말론 교리 중에 시한부 재림 및 휴거와 재림일자를 못박아 놓는다.
(성경의 마태복음 24장에 분명히 예수재림을 아무도 모른다고 말씀하셨다)

7. 구원교리 중에도 하나님의 예정론을 부인하며, 창조이전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8. 절기와 때 그리고 음식물에 대하여는 특히 율법적이다.

9. 이단들은 자기들만 구원받았다고 주장한다.

10. 주관적 개인 체험을 하나님께서 자기에게만 비밀로 주셨다고 주장한다.

11. 성경에 있는 말을 많이 인용하되 선지지나 사도들의 말을 자기들의 교주의 말과 동등시한다.
그리고 자기들의 교리 정립을 위한 수단으로 삼는다.

12. 그들의 경전과 교리가 시시때때로 환경에 따라서 변한다.

13. 대부분의 이단들은 가정을 버리도록 유도하는 결과를 가져오며 부녀자들과 청소년들을 유혹하여
노예취급을 한다.

14. 이단들은 거의가 다 과대망상 환자, 내리는 영웅주의나 인기주의에 심취해 있다.

15. 이단들은 분리주의자라고 자처한다.

16. 신흥이단들은 사랑을 외치는 팜플렛을 돌린다. 전도지는 기성교단을 은근히 꼬집는 내용으로
꽉 차 있다.

17. 이단들은 언제나 도피할 성을 찾고 있으며 항상 마음이 불안하여 나중에는 죽음도 불사하며
함께 망하는 것도 공동의 운명으로 알자고 강조한다.

18. 이단들은 새로운 신자들을 전도대상으로 삼지 않고 오히려 기성교인들을 상대로 포교활동을 전개한다.

19. 이단들은 언제나 성경전체를 사용치 않고 성경의 몇 구절만 외워서 사용하기 때문에 깊은 논쟁을 피하고
자기들 집단에 한번만 와 보라고 강조한다.

20. 대부분 사회지도층 인사 및 정계의 인사들을 영입하려고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거금의 돈을 뿌린다.

21. 이단들은 청소년들에게 흥미와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프로그램을 기성교회가 하지 못하는 것을 개발하여
포교활동을 전개한다.

22. 이단들은 처음에는 헌금을 강요하지 않고 있다가 나중에는 서서히 자기들의 본색을 들어내면서 자기들만이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기성교회에 헌금을 하는 대신에 자기들 집단에는 재산까지라도 팔아서 바치도록
강요한다.

23. 이단들은 성경에 없는 말들을 함부로 하면서 또 성경을 자기들 마음대로 해석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24. 이단에 빠지는 자들은 교회관이 분명치 않기 때문에 Para Church Movement에 지나치게 흥미를 느끼고
교회안의 활동이나 봉사는 거의 하지 않는다.

25. 이단들 중에 기복사상을 심취되어 귀신론이나 샤머니즘 사상만을 강조하는 교파도 있다.

26. 이단들 중에는 전인격적인 기독교 교육보다는 사람에게 즉흥적 기쁨을 구하는 임기응변식의 전도를 하는
무리들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27. 이단의 정의에서 밝힌대로 성도들의 신앙 즉 정통적 교리 및 역사적인 정통성에서 이탈된 무리들은
이단으로 간주한다.

28. 이단들은 예수 외에 다른 이름, 다른 창조주를 나타내고 있는데 이단교주가 메시야라고 주장하기도 하고
재림주라고도 하며 죽어도 부활한다고 외친다.

29. 시한부 종말설에 심취된 이단들은 학생들은 공부도 중단하고 가정은 파괴 될 뿐만 아니라 정서적으로
사회를 크게 혼란케 한다.

30. 이단들은 지역사회에 있는 교회들과 연합하여 교계의 행사하는 일을 기피한다.

31. 이단 교파의 교주들은 쇼맨쉽(showman-ship)이 매우 강하다.

32. 이단파의 교주들은 성령의 불 받은 종, 특히 은사 받은 종, 특별계시를 받은 종으로 자처하고 있다.

33. 이단교파의 교주들 중에는 마귀의 힘을 빌어 병 고치는 일을 자행하면서도 ‘예수가 고치셨습니다’라는
말을 자주 인용하기도 한다.

34. 이단들은 666이나 14만 4천 등 숫자들을 자기의 편의대로 많이 사용한다.

35. 이단교파의 교주들은 거의 대부분 신학교육이 결여 돼 있다.

36. 이단에 빠진 무리들은 괴상한 행동이나 이상한 영음을 자기들만 받았다고 주장하며 늘 영음만을 강구한다.

37. 이단파들의 카리스마적인 수법이나 행정 및 재산과 조직 관리는 거의가 저들의 소속돼 있었던 이단 교파에서
배운 것이다.

38. 최근의 이단들 중에는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 및 삼위일체를 강요하면서도 은사면에 더 치중하여 하늘의
비밀을 깨달았다고 강조하는 무리들도 있다.

39. 이단교주들은 과거의 전과기록이 있거나 사기성이 많은 것이 특성이며 거짓말을 잘하는 습관이 있다.

40. 성경을 자기들에게 편리하도록 고쳐서 사용한다.

41. 이단들이 하는 상투적인 말은 “하나님을 보았다. 하나님께서 보내셨다. 하나님께서 비밀을 알려주었다.
꿈에 보았다”라는 말들을 자주 사용하여 초신자들에게 공포감을 주는 버릇이 있다.

42. 이단의 무리들은 기성교계의 좋은 이름들을 거의 다 도용하고 있다.
특히 통일교에서는 “기독교나 국제 및 세계”라는 단어를 앞에 쓰고 있어서 기성교계와 혼동을 일으키고 있다.

43. 이단들도 “깨어라”라는 말을 많이 사용함으로써 지금 말세의 교회를 어지럽히며 혼란케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찾고 있는 마귀들’을 대적하기 위해서 모든 기성교회의 건전한 성도들은 참으로
깨어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 이단에 관한 판별법을 종합하여 요약하면 이단무리는 지나친 시한부 종말론 사상에 심취하여
그 신비에 빠져든 무리들이다. 이들 이단 교주들은 성경 외에 사상을 도입하여 엉터리 예언이나 점장이
식으로 선량한 교인들을 유인하여 탐심을 채운다. 그리고 이들은 성경해석을 제멋대로 하며 건전한
교계를 혼란시키는 무리들이다.

이제부터 이단을 쉽게 구분하려면
사도신경 고백 부인 외에 예수 십자가 대속과 부활, 그리고 성경을 다 믿지 않는 무리들이 교주를 신격화시키면
이단으로 간주해야 한다.

그리고 말씀 없이 지나친 은사에 매력을 느끼도록 유도하면 문제가 있는 것으로 간주해도 좋을 것이다.
더 나아가 은밀히 자칭 하나님처럼 심판주, 말세의 참종, 참어린양 등의 명칭이 따라다니면 반드시 이단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마지막 때에 교계를 혼미케 하는 이단무리들에게 현혹되지 않기 위해 건전한 교회에서 목회자들을 도우며 조용히
그리고 뜨겁게 성실히 신앙 생활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할 때에 주님은 자기 눈동자 같이 사랑하는 양들을 지켜 보호할 것이다.

 

/탁지원 전도사님(현대종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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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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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바울의 이야기 전도여행 Paul's missionary trips

 

1. 첫 번째 전도 여행/13-14

 

2년 동안

 

갈라디아 지방(사도 바울의 1차 전도지역을 갈라디아라고 부른다.)

 

이렇게 갈라디아 지역에 복음을 전하고 보니 자꾸 이방인들을 유대인들처럼 만들려고 하는 일이 일어났다. 이렇게 논쟁을 일으킨 사람들은 유대인이었다가 복음을 믿은 사람들이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방인 신자들을 할례를 받게하고, 모든 율법의식을 지키게 하려 하였다.

 

그러자 사도 바울은 복음은 예수 + nothing이라고 하였다.

* 예루살렘

* 총회

* 율법? 아니요!

 

그러나 계속해서 유대인들이 문제를 일으키게 되자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대표를 보내어서 이 문제에 대하여 복음이 무엇인지를 규정하게 하였다. 이때에 사도들이 예루살렘에 모여서 이 문제를 놓고 의논한 결과 그들은 구원을 받는 데에는 예수 외에는 아무 조건도 없다고 결론을 맺었다.

 

구원받기 위해서 이방인들이 유대인들의 법을 지켜야 하는가?

 

그것은 아니다. 그러나 믿은 후에 자원하여 말씀에 순종할 수는 있다. 복음을 구체적으로 요약을 해서 들려주면 듣고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 여기에 율법은 끼어 들 자리가 없다. 우리가 은혜로 구원받은 것을 깊이 깨닫게 될 때에 참다운 삶이 나타나게 된다.

 

이때에 총회 장이 예수님의 동생인 야고보였다. 그리고 이때에 사도들과 바울이 교제의 악수를 하였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이제 두 번째 전도여행을 떠나게 된다.

 

2. 두 번째 전도 여행(15:-)

 

* 3년 동안

* 마게도냐

아가야

그리이스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북서쪽으로 흘렀고, 남서쪽인 아프리카로 흘러 들어갔다. 그래서 2-5세기에 유명한 신학교와 신학자들이 많이 일어났다. 사도 바울은 두로와 시돈을 거쳐서 수리아의 안디옥으로 갔다. 이 곳에서 길리기아 지방으로 돌아서 더베, 루스드라, 이고니온, 안디옥으로 가서 드로아에 이르렀다. 이때에 성령께서 이 곳으로 더 이상 가지 못하게 하셨다. 그리고 마게도니아에서 바울을 부르는 환상을 보게 되었다. 그리하여 유럽으로 복음이 전해지게 된다. 그래서 바다를 건너서 네압볼리, 빌립보(감옥에 들어감-찬송과 지진으로 간수가 자살 하려고 함-그를 구원함-그 밤에 그 간수와 가족들이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았다. 이 곳에서 루디아라는 여인-데살로니가에서 온 여인-이 복음을 듣고, 점치던 여인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 곳에 빌립보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다. 빌립보서에는 계속 기쁨이란 단어가 등장함. 그 후에 반대에 부딪혀서 데살로니가와 베뢰아를 거쳐서 아덴과 고린도(서울)와 겐그레아(인천 같은 도시) 지방으로 여행하였다.)

 

빌립보가 있는 지역을 마게도니아라고 불렀다.(지금의 알바니아) 소아시아는 지금의 터어키 그리고 남쪽은 아가야(지금의 그리이스)라고 불렀다. 바울이 바로 이 아덴에 이르러 논쟁과 논란을 벌였다.

 

고린도에 약 16개월간 있으면서 데살로니가 전, 후서를 썼다. 이때에 죽은 가족들로 인해 슬퍼하는 사람들에게 안 믿는 사람들처럼 슬퍼하지 말고, 소망을 가지고 슬퍼하라고 하였다. 그들은 이미 주님의 재림이 지나가고 자신들은 다 버림받은 것이 아니냐고 걱정을 하였다. 이때에 사도 바울은 죽은 자들이 먼저 살아나고 살아있는 자들과 함께 공중으로 들림을 받을 것이므로 서로 위로하라고 하였다.(살전후)

 

그리고 겐그레아에서 에베소로 건너가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복음이 전파되게 하시려고 이미 곳곳마다 회당을 준비해 놓으셨다. 주님께서 오실 때에 상당히 준비가 잘 되어 있었다. 알렉산더가 헬라 문화를 전 세계에 퍼뜨렸다. 그래서 전세계 공용어는 헬라어였다. 그래서 주전 150년 구약 성경을 그리이스 성경으로 번역을 하였다. 알렉산드리아에 유대인들이 많이 살았는데 유대 사람이면서 유대 말을 잘 몰랐다. 그래서 헬라어로 성경을 번역했는데, 이것을 70인경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이 때에는 사도들이 헬라어로 쓴 신약 성경을 썼으며 구약 성경도 헬라어로 기록되었다.

 

그리고 주전 4-500 년경 에스라를 통해서 10명만 있는 마을에는 곳곳에 회당을 지어 놓았다. 사도 요한이 에베소에서 95년에 죽게 되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에베소를 통하여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미 고린도 등에서 예루살렘을 위한 구제 헌금을 모아서 예루살렘에 전해 주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다시 안디옥으로 돌아가서 선교 보고를 하였다.

 

잠시 쉬었다가 바울은 또 다시 출발을 하게 된다. 그러나 이때에 마가를 데리고 가는 문제로 인해서 다툼이 있었다. 바나바는 마가를 데려가기를 원했고, 바울은 그를 데려가기를 원하지 않았다. 마가가 어려서 일차 여행에서 돌아간 것이 그 싸움의 문제였다. 그래서 바울파와 바나바 파가 갈라졌다. 바울은 누가를 데리고 다시 전도한 지역으로 갔고, 바나바는 또 다른 지역으로 따로 전도여행을 떠났다. 이것을 보면 꼭 한국교회와 같다. 장로교가 수십 개가 된다. 한국 교회는 교단이 생육하고 번성했다. 그러나 인간은 싸워도 하나님께서는 결코 손해를 보시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는 이 싸움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뜻으로 이루셨다. 단결하고 문제를 해결하며 성숙해 가는 재미있게 목회 하는 교회가 필요하다. 한국 사람들은 가는 곳마다 싸우고 분열은 하는데 그 문제를 해결하고 성숙해 가는 교회는 드물다.

3 세 번째 전도여행

 

* 4년 동안

* 소아시아

 

이제 바울은 세 번째로 전도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이번 여행은 약 4년간 하게 되는데 1차 전도 여행을 했던 갈라디아 지역은 들리지 않고 직접 에베소로 갔다.

 

그래서 이곳에서 드로아, 네압볼리, 데살로니가, 베뢰아, 아덴, 고린도를 방문을 하였다. 이때에 드로아에서 바울이 고별 설교를 밤늦게까지 하다가 한 청년이 창문에서 떨어져서 죽은 일이 발생을 하였다. 예나 지금이나 교회에 오면 조는 사람들이 있다. 호롱불에서 나오는 탄산가스를 창문에 앉은 사람이 다 마심-그리고 고린도에서 56-7년에 로마서를 썼다. 하나님께서 그 동안에도 많은 열매를 주셨는데, 이제는 스페인까지 가야하겠다. 그래서 로마에 있는 여러분들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이때에 이미 로마에는 교회가 있었다. 로마에 가서도 복음의 열매를 맺고 싶다고 한 유명한 로마서가 이때에 쓰여졌다.

 

그리고 다시 돌아갈 때는 2차 여행과 같이 바다로 가는 것이 아니라, 거쳐 온 모든 지역들을 다시 돌아서 갔다. 그리고 드로아에 이르러서 밀레도에 이르렀을 때에 에베소에 있는 장로들을 다시 초청하여 고별 설교를 하였다. 그리고 다시 배로 여행하여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예루살렘에 있을 때에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이 때에 약 2년간 있는 동안에 누가를 데려왔다. 이때에 누가는 사람들을 만나고 또 자료를 수집하여 누가복음을 쓸 자료를 수집한다.

 

* 재판

* 벨릭스

* 베스도

* 아그립바

 

바울이 예루살렘의 환영을 받자마자 사도들은 바울에게 이렇게 말한다. 지금 유대인들이 당신이 모세도 금하고 할례도 금하고 율법도 금하고 있다고 하여 단단히 벼르고 있다고 알려준다.

 

결국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에 잡혀서 공회에 끌려가게 되었다. 그래서 여기에서 바울은 자신이 이렇게 된 배경에 대하여 유명한 간증을 하게된다.(22) 유대인들은 그를 죽이고자 하였으나 사형을 할 권한이 없었기 때문에 당시의 로마 총독이었던 벨릭스에게로 끌고 갔다. 그래서 벨릭스가 심문을 하였으나, 바울이 자신이 로마 시민임을 밝히고 황제에게 항소하였다. 그리하여 바울은 감옥에 약 2년 동안 있게 되었다. 24장 맨 마지막 절을 보면 "이태를 지나서 보르기오 베스도가 벨릭스의 소임을 대신하니..." 베스도가 와서 보니까 아직 미결된 죄수가 하나 있다고 하여 조사를 해보니 아무 잘못이 없어 보였다. 그리하여 당시에 유대인의 왕이었던 아그립바 왕에게 심문을 받게 하였다. 그러자 아그립바 왕이 조사를 해보니 아무 잘못이 없었다. 그리하여 아그립바 왕이 바울이 가이사에게 항소하지 아니하였으면 놓아줄 뻔 하였도다. (26:31-32)고 말함. "이 사람은 사형이나 결박을 받을만한 행사가 없다 하더라. 아그립바가 가로되 이 사람이 만일 가이사에게 호소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놓을 수 있을 뻔 하였도다. 그리하여 할 수 없이 로마로 호송할 것이 결정이 됨.

 

그리하여 바울은 로마로 호송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중간에 풍랑을 만났으나 바울이 그들을 격려하고 인도해 준다. 위기 속에서의 사도 바울-하나님과 친하니까 풍랑 속에서도 담대하다. 정말 신앙이 있는 사람은 풍랑을 만나야 알 수 있다.-평상시에는 모두 다 신자 같으나 정말 어려움이 당하면 진짜가 나타난다.-일제 시대에 다른 목사님들이 다 포기할 때에 주기철 목사님같이 고난을 당한 사람이 있다. 하나님을 전심으로 신뢰하고 의뢰하는 사람들은 시련이 올 때에 그 진가가 발휘된다. 바울은 한 명도 안 죽는다고 하였다. 그러나 배가 산산조각이 났다. 그래서 배 한 조각씩 붙잡고 살아났다.

 

* 첫 번째 감옥살이(27-28)

* 석방됨

 

그리하여 그들은 살아난 후에 로마에 도착하였다. 2823절을 보면 결론 부분이 나타난다. "저희가 일자를 정하고 그의 우거하는 집에 많이 오니, 바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하여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들의 말을 가지고 예수의 일로 권하는지라"(28:23) 바울은 감옥에 갔다가 잠깐 놓였을 때에 이와 같이 하나님의 나라와 복음을 전하였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어디에 데려다 놓아도 문제가 없다. 그 곳에서 복음을 전하면 된다. 그래서 어디 가서 무엇을 하면서 살든지 믿는 사람은 복음을 전하는 것이 목표가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람들은 어디에 가서 무엇을 하면서 살아도 문제가 없는 것이다. 진짜 신앙 생활은 삶 속에서 나타난다. 사도 바울이 바로 이러한 사람이었다. 그는 어디를 가도 예수님을 전하는 일만 하였다. 우리의 인생의 목표도 이와 같이 되어야 한다. "그 말을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않는 사람도 있어 그 말이 서로 맞지 아니하니..."(28:24) - 사도 바울은 이러한 현상을 보고서 이사야의 예언을 빌려서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의 눈과 귀를 받지 못하게 하셨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자세하게 설명만 하면 된다. 믿느냐 안 믿느냐 하는 것은 우리 책임이 아니다.

 

* 두 번째 감옥살이

* 확장

 

사도 바울은 이때에 집을 하나 세를 내어서 가택 연금 상태로 이년간 있었다. "담대히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의 권한 것을 가르치되 금하는 사람이 없었더라."(28:31-) 사도 바울은 이 곳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을 가르쳤으나 아무도 금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때가 바로 62년쯤 된다. 60년경에 로마에 와서 62년까지 복음을 전했다. 그리고 이 곳에서 에베소 빌립보 골로새 빌레몬서를 쓰게 되었다. 여기까지가 사도행전의 이야기이다

 

전설에 의하면

 

바울이 로마 감옥에서 무죄로 석방되었는데, 그때에 그는 스페인에 가서 복음을 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후에 그는 다시 로마에 와서 네로 때에 순교를 당하게 되었다(베드로는 64년경에 순교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바울은 이 곳에서 마지막 편지(디모데후서)를 썼다. 그는 디모데후서에서 자기가 세상을 떠날 때가 되었음을 알리고 (누가만 그와 함께 있었다) 마가를 데려오고, 추위를 가릴 겉옷과 성경책을 가져오라고 했다. 그리고 바울은 68년 봄에 순교를 당하게 되었다.

 

그리고 2년 뒤인 709월에 이스라엘은 로마 장군 디도에 의해서 멸망당하게 된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은 나라도 없이 떠돌아다니다가 1948년에 독립하게 된다. 이스라엘인은 약 1500만 정도인데 이스라엘 본토에는 약 300만 명이 살고 있다. 우리도 사도행전을 보면서 도전을 받아야 할 것이다.

우리들도 사도 바울과 같이 어디를 가든지 무엇을 하든지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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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위일체(Trinity-Introduction)

 

하나님은 본질상 한분 이시나 이 한분 안에 성부, 성자, 성령으로 불리워지는 삼위가 존재 한다고 말한다. 솔직히 성경에는 삼위일체란 단어는 없지만 삼위일체 교리는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성경적 교리로서 신비로운 진리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겸손한 신앙의 자세로 성경을 근거로 하여 공부해 보기로 하겠다.

 

(1)삼위일체의 정의 ()

 

삼위일체의 영어 TrinityTri-Unity의 단축형이고 라틴어 Trinitas에서 인출된 바 [하나에서 셋, 셋인 하나, 하나인 셋]이란 뜻이다(28:19). 즉 한 본체가 영원한 삼위로 실존한다는 표현의 교리적인 술어이다(3:16).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본질상 한분 이신데 이 한분 안에 세분의 인격 <성부> <성자> <성령>이라고 불리는 삼위(三位)가 존재한다는 말이다(4:5). 그러면서도 그것은 세 하나님을 말하지 않고 일체(一體) 즉 한 본질되신 한 하나님을 지칭한다.

 

*소요리문답 제6문에 [하나님의 신격에 삼위가 계시니 <성부> <성자> <성령>이신데, 이 삼위는 한 하나님이며 본체는 하나요 권능과 영광은 동등 하느니라]고 하였다. [어떻게 한 하나님이 셋으로 나누어지는 것일까?]하고 논리적으로 따지려 들면 삼위일체 이해는 수포로 돌아간다. 그러나 겸허한 신앙의 자세를 가지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하면 삼위일체만큼 흥미롭고 확실하며 은혜가 넘치는 일이 없는 것이다.

 

(2)삼위일체의 성경적 근거

 

성경에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밝혀 주는 구절이 너무도 많다. 그 대표적인 것만 골라서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1) 구약의 근거

구약에는 하나님에게 한 위 이상이 존재함을 지적해 주는 구절이 있다. 하나님은 자신을 복수로 나타내시기도 했으며(1:26,11:7), 여호와의 천사는 한 신적위로 나타났으며(16:7-13,18:1-21,19:1-22), 여호와의 영도 또 다른위로 표현되었다(48:16,63:10). 이외에도 메시야에 대해 말하고 있으며 다른 두 인격에 대하여도 말하는 구절들이 있다(48:16,61:1).

 

1.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할 때 우리(We)라는 복수로 표현하였는데 그것은 바로 삼위되신 하나님을 표현한 것이다. 1:26에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라고 하였다. 그 외에도 창11:7,6:8에 기록되어 있다.

 

2. 구약 창18:1-24에 보면 여호와의 사자(천사)가 사람의 모양으로 세 명 혹은 두 명으로 나타나곤 하였는데 그것은 바로 삼위 하나님의 다양한 출현으로 여겨진다.

 

3. [48:16]에 주 여호와(성부)께서 나(성저)와 신(성령)을 보내셨느니라라고 하였다.

 

2) 신약의 근거

 

신약의 증거는 구약의 증거보다 더욱 명백한 증거를 갖는다. 가장 유력한 증거는 구약의 사실에 잘 나타나 있다. 성부는 성자를 세상에 보내시고, 성자는 성령을 보내신다. 신약성경속 에서는 삼위가 명백하게 언급되어 있는 곳이 여러군데 있다. 즉 예수님의 명령(28:19)과 사도적 축복(고후13:13)에서 또는 눅1:35,고전12:4-6,벧전1:2등에서 언급되고 있다.

 

1. [3:16-17]에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 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서 소리(성부)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성자)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고 하였다.

 

2. [28:19-20]에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성부)와 아들(성자)과 성령(성신)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고 하였다.

 

3. [1:1]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고 하였는데 요1:14절에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하였다.

 

4. [1:18]에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니(하나님)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나셨느니라고 하였다.

 

5. [고전12:4-6]에 은사는 여러가지나 성령(성신)은 같고 직임은 여러가지나 주(성자)는 같으며 또 역사는 여러가지나 모든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성부)은 같으니라고 하였다

 

6. [고후13:13]에 주 예수 그리스도(성자)의 은혜와 하나님(성부)의 사랑과 성령(성신)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고 하였다.

 

7. [2:5-8] 너희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하였다.

 

(3)삼위일체 교리의 예증

 

삼위일체 교리의 이해를 돕기 위해 예증을 들었으니 참고하기 바란다.

1. 태양의 경우: 본체(성부), (성자), (성령).

2. 사람의 경우: (성부), (성자), (성령).

3. 물의 경우: 고체(성부), 액체(성자), 기체(성령).

4. 나무의 경우: 뿌리(성부), 줄기(성자), 열매(성령).

5. 꽃의 경우: 본체(성부), 색깔(성자), 향기(성령).

6. 곤충의 경우: (성부), 애벌레(성자), 나비(성령).

7. 심리적 합일: (성부), (성자), (성령).

8. 논리적 합일: (성부), (성자), (성령).

9. 형이상학적 합일: 주관(성부), 객관(성자), 주객관(성령).

10. 삼각자의 경우: 삼각자는 3각과 세변이 모여서 하나의 삼각자라고 부른다. 이와같이 하나님도 한분 이시지만 그의 사역에 있어서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의 형태로 나타난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 어떤 지식으로도 신비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을 설명하기에 불충분하다.

성 어거스틴은 [하나님은 말물을 초월한 존재로서 실체와는 구별되기 때문에 만약 인간이 스스로 신을 이해 한다면 그것은 참신이 아니다]고 하였다.

 

(4)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

 

1. 성부 하나님은 구원을 계획하시고(예정, 선택) 만물을 창조하셨다(고후8:6,1:4).

 

2. 성자 하나님은 계획된 구원을 십자가를 지심으로 성취하셨다(6:35-40,9:5).

 

3. 성령 하나님은 성취된 구원을 인간의 마음과 생활에 적용시켜 완성(온전)케 이루신다(5:3,8:14).

 

(5)삼위일체의 동일성

 

삼위는 세 개체가 아니라 오히려 신적 본질이 그 안에 존재하는 세가지 양상이요, 형태이다. 동시에 이들은 서로 인격적 관계를 확립할 수 있는 성질을 각각 가지고 있다. 성부는 성자에게 말씀하실 수 있고, 성부와 성자는 성령을 보내실 수 있다.

 

삼위일체 교리의 오묘한 신비는 삼위 중 각 위가 신적 본질의 완전성을 소유하고 있으며 삼위의 테두리를 벗어나 밖에서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1. 본질상으로 동일하시다(2:6)

1) 성부 하나님.(고전8:6,1:1,4:6,2:11)

2) 성자 하나님.(1:1,18,20:28,9:5,8,요일5:20)

3) 성령 하나님.(15:26,5:3-4,고전2:11)

 

2. 능력상으로 동일하시다(요일5:20).

1)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성부 하나님.(1:1,2:10)

2)창조 당시에 함께 계신 성자 하나님.(1:26,1:3)

3)창조 때 운행하신 성령 하나님.(1:2,8:16)

 

3. 시간상으로 동일하시다(13:8).

1)태초에 계신 영원하신 하나님.(1:1,33:27)

2)태초에 계신 영원하신 예수님.(1:1,7:24)

3)태초에 계신 영원하신 성령님.(1:2,9:14)

 

4. 하나님의 사역

 

하나님께서 장차 발생할 모든 일들을 미리 정하시는 그의 영원하신 목적이다. 우리가 사람을 알려면 그 사람이 무슨 일을 하는지 자세히 알게 될 때 비로소 알 수 있게 된다. 예를 들면 농부는 농사짓는 일을, 어부는 고기잡는 일을 하듯이 [하나님이 어떠한 일을 하시느냐?]를 자세히 연구해 보면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11:36에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고 하였다.

 

즉 하나님의 사역은 예정하시는 일, 창조하시는 일, 섭리하시는 일, 심판하시는 일로 일을 하신다. 예정, 창조, 섭리, 심판이 하나님의 절대주권 안에 있다.

 

(1) 예정 하시는 일

예정은 도덕적 피조물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이요, 그 모든 부분에서 도모와 의지가 동일하신 하나님 삼위의 일치한 행위이다(9:13,벧전2:8).

그러나 구원의 경륜에 있어서 구속은 성자에게 성화는 성령에게 특별히 귀속시킴 같이 예정의 주권적 행위는 성부에게 특별히 귀속 시키는 것이 성령의 분명한 교훈이다(17:6-7,8:29).

 

1.예정의 뜻(37:5,18:6,19:24).

인류의 구원을 위해 예수를 미리 정하신 것(3:20)과 하나님의 기쁘신 뜻과 경륜을 위하여 미리 정하신 것이다(1:5,9).

 

2. 예정이란 선인과 악인, 남녀 노소의 모든 인류, 집단과 개인에게 까지 관계하시는 하나님의 관계이시다(4:28,8:29,1:4-6)

 

선한천사와 악한 천사 까지도 포함하며(8:38,9:26,벧후2:4,딤전5:21,1:6), 신적 예정의 대상에는 중보자 그리스도까지 포함한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중보자로서 하나님의 선하신 기쁨의 대상이 되셨음을 의미하고 있을 뿐이다(벧전1:20,2:4)

 

3. 예정의 종류

1) 선택:*하나님의 구약 백성인 이스라엘의 선택(4:37,13:5)

*특별한 직무와 특별한 봉사를 위한 인물의 선택(18:5,삼상10:24).

*하나님의 자녀와 영원한 영광의 계승자로 삼으시기 위한 개인의 선택(11:5,1:4)

 

2) 유기:*유기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의 작용속에서 어떤 사람을 간과하시고, 그들의 죄를 따라 그들에게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이라고 정의 할 수 있다.

*거듭남과 구원의 은총을 하사하실 때 어떤 사람들을 버려두신다는 것이고, 그들의 죄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느끼시는 수치와 진노를 그들의 탓으로 돌려야 한다는 것이다(19:24,1:24,6:4,10:29,21:8).

*하나님의 원하심과 예수님의 부르심과 성령의 도우심을 물리치지 않고 구원의 문에 들어선 자는 너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란 축복을 받게 된다.

 

(2) 창조 하시는 일

창조란 하나님께서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기 위해 부분적으로는 먼저 있었던 물질을 사용하지 않고 창조하시고 한편으로는 본질상 충분한 물질로부터 우주와 그 안에 있는 만물을 산출해 내신 하나님의 사역이다.

 

1. 창조의 뜻

창조는 없는 데서 형상을 이루게 하는 것이고(1:1), 있는 것으로 새로운 것을 만드는 것이며(1:27), 기존 물질로 번성해 나가는 것이다(1:28).

 

2. 창조의 시기와 방법

태초에 창조하시고(1:1) 계속하여 창조하셨다(4:13). 그리고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셨다(65:17). 창조 사역의 첫 부분은 엄밀히 무에서의 창조이며, 기존 재료를 사용치 않은 창조였다.

  

3. 창조의 분류와 순서

 

1) 천사의 성질(28:15,24:39)

천사란 말은 [사신(messenger)]이란 의미이다. 천사의 계급에는 그룹(3:24,25:18,37:16), 스랍(6:2,6), 미가엘(10:13, 21, 12:1,12:7), 가브리엘(8:16), 사단(28:12-15,벧후2:4,요일3:8,12:9)등을 들 수 있다.

2) 만물의 창조(1:1-2:3)

(1:1-5), 궁창 위의 물과 아랫물(1:6-8), 육지, 바다, 식물(1:9-13), . . (1:14-19), 새와 물고기(1:20-23), 육축과 사람(1:24-31), 안식하심(2:1-3), 우주의 삼라만상, 천지만물은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6일 동안 창조하셨다(1:1-31). 그러므로 창조란 [무에서 유를 만든 것] 곧 전혀 없는 것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있게 하셨다는 말인데, 유형(물질)세계 뿐아니라 무형(영적)세계는 물론이고 천사(영물)까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천지만물은 하나님의 예술작품이요 하나님의 위대하신 솜씨인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은 이 세상 모든 예술가와 설계사보다 뛰어난 위대하신 예술가이시며 설계사인 것이다.

 

* 6일 창조 단계 (서로 관계 있고 질서있게 창조함) *

1-빛과 어두움 분리 완 4-일월성신(..)

2-궁창과 하늘 분리 성 5-새와 고기

3-바다와 육지 분리 단 6-육축과 사람

*7일은 안식하셨다.

 

(3) 섭리 하시는 일

섭리란 하나님께서 그의 모든 피조물들을 보존하시며 세상에 발생하는 모든 사건 속에서 활동 하시며, 만물을 정해진 목적에 맞도록 이끄는 하나님의 역사이다.

 

특히 인간이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 사역에는 협력할 수 없지만 하나님의 섭리 사역에 있어서 피조물이 창조주를 협력 할 수 있다는 점이다.

 

예를들면, 인간이 성화되는 과정에서 거룩하게 살려고 노력하고 진실하고 선하고 의롭게 살려고 애를 써야 되며, 가만히 앉아서 거룩하기를 바란다든가 달란트를 파묻어 놓고 주님의 능력만을 고대해서는 않된다는 말이다(14:17,8:28,2:13).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창조하신 만물의 본래 존재 목적대로 친히 다스리고 계신다(103:19). 하나님은 세상의 통치자 이시니 만왕의 왕이시다(19:6).

 

1) 섭리의 뜻

섭리란 창조물을 보존하고(9:6), 인간의 쓸것을 채우시며(4:19), 인생에게 구원을 베푸시는 것을 말한다(74:12).

 

2) 섭리의 종류

1. 보통 섭리:*만유를 자연법을 통해 통치하고(103:19), 보호하며(34:20) 채워주신다(4:19).

*기본적 섭리-햇빛과 비를 공평히 내려 주신다(5:45).

*개별적 섭리-구하는 자에게 주신다(7:7).

2. 특별 섭리:*자연 법칙을 초월해서 일어나고(2:9), 인력으로 불가능한 이적기사(2:1)와 인간의 구원을 위해 특별한 능력을 행사하게 된다(14:21)

 

3) 섭리의 목적

모든 섭리는 선의 성취(12:35-41)와 마귀를 대적하고 인류를 구원하며(벧후3:9), 인생에게 부활에 대한 영생을 주시기 위함이다(고전15:54).

 

4) 심판하시는 일

모든 사람이 최후에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는 것은 인간 심리의 가장 심오한 확신중의 하나이며, 이것은 기독교에서만 국한되는 것이다. 성경은 최후 심판이 궁극적으로 있을 것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25:31-46).

 

농부가 씨앗을 뿌렸으면 거둘 때가 있고 아침이 있으면 밤이 있으며 학생이 입학 했으면 졸업때가 있듯이 종말론적 의미에서 역사의 시작이 있었으니 반드시 역사의 끝이 있는 것이다. 역사의 종말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이뤄지는데(9:27) 선한 청지기와 불의한 청지기에게 각각 응분의 댓가가 주어질 것이다(25:14-30).

 

11:9에 청년이여 네 어린 때를 즐거워하며 네 청년의 날을 마음에 기뻐하여 마음에 원하는 길과 네 눈이 보는대로 좆아 행하라. 그러나 하나님이 모든 일로 인하여 너를 심판하실 줄 알라고 하였고, 3:15에도 이제 있는 것이 옛적에 있었고 장래에 있을 것도 옛적에 있었나니 하나님은 이미 지난것을 다시 찾으시느니라고 하였다. 이 말씀은 인간이 종착역에 도착해서 하나님의 공의에 심판대 앞에 서게 되는데 그때엔 우리 자신도 까마득하게 잊고 있는 과거에 자신이 살아온 과정이 밝히 드러나고, 하나님께서 선악간에 보응하신다는 말씀이다. 그때 하나님 앞에서는 변명도 소용없고 뇌물도 통할 수 없다. 얼마나 두렵고 떨리는 말씀인가?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대 앞에 자기 자신의 의()로 설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고, 오직 대속의 피를 흘려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믿고 의지하는 성도이어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다.

 

사람은 유한하나 하나님은 무한하시고 인간은 변해도 하나님은 불변하신다.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지 아니하시며 무소부재 하시고 전지전능하신 분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기에 악을 미워하고 죄인을 공의로 심판하시는 분이시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성도에게는 인자하시고 자비로우신 아바 아버지가 되셔서 세상 끝날까지 인도하시고 보호해 주시는 분이시다. 이처럼 좋으신 안버지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인 성도에게 경배(예배)를 받기를 원하신다. 우리 모두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영광을 돌리시기 바란다.

 

15:16에 가산이 적어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크게 부하고 번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하였고,

 

19:23에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사람으로 생명에 이르게 하는 것이라 경외하는 자는 족하게 지내고 재앙을 만나지 아니하느니라 약속하셨으며,

 

6:4에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하셨다.

 

*생각하는 코너*

하나님이 안보이니 못 믿겠다고 하는 형제 자매여! 그대는 태양을 똑바로 쳐다볼 수 있는가? 아니요! 하나님이 지으신 창조물 가운데 태양도 제대로 볼 수 없다면 어떻게 의에 태양되신 위대하신 하나님을 한 눈에 볼 수 있겠는가?

 

사물을 관찰해 보면 안 보이는 것이 보이는 것보다 더 귀하고 더 크고 귀중한 것이 많이 있다.

 

생명, 공기, 사랑, 지식, 전자, 원자등은 눈(육안)으로는 보이지 않아도 분명히 존재하고 또한 귀중한 것처럼 하나님도 육안으로는 안 보이지만 실존하고 계심을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사물에 따라 보는 방법이 각기 다르다. 예를 들면 물체는 눈으로 확인해 보아야 하고, 음성은 귀로 들어보아야 하고, 음식을 입으로 먹어 보아야 하고, 냄새는 코로 맡아 보아야 하고, 사람은 겪어 보아야 알 수 있듯이 하나님은 영이신 고로 믿어 보아야 알 수 있다. 만일 사람이 청결한 마음으로 영의 눈(믿음의 눈)을 갖고 보면 거룩하시고 영광스럽고 신령한 하나님의 성상(聖像)을 우러러 볼 수 있는 것이다.

 

! 주여, 영의 눈을 열어주소서!

 

1. 기독교의 하나님과 범천 사상의 하느님, 하늘님, 할얼님은 엄연히 다르다. 그러므로 애국가를 부를 때에는 하나님이 보호하사 우리나라 만세라고 해야 한다.

2. 일본인은 하나님을[가미], 아랍인은 하나님을 [알라], 중국인은 하나님을 [상제], 영어는[] 이라고 부른다.

3. 기독교의 하나님은 엘로힘, 아도나이, 여호와, 아버지로써 하늘에만 있는 하늘님도 하느님도 아니고 [하나님] 즉 유일신(唯一神)이며 무소부재 하셔서 어디에나 아니계신 곳이 없으신 전능하신 분 이시다. 한마디로 기독교의 하나님은 [여호와]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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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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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론(Theology)

 

엄밀한 의미에 있어서 하나님(God)의 정의를 내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그의 존재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서술한다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하나님의 정의에 대하여 여러가지 표현이 있으나 하나님은 무한한 완전성을 지닌 순수한 영으로 표현하는 것이 적합할 것이다. 이와같은 서술은 다음과 같은 몇가지 요소들을 내포하고 있다.

 

(1)하나님은 순수한 영이시다.

성경은 하나님의 존재를 정의하려고 시도하지 않으나 그리스도는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에서 [하나님은 영이시다](4:24)라고 규정하였다. 이것은 하나님이 본질적으로 영이시며 영의 완전한 관념에 속하는 모든 특질들이 하나님안에 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이 순수한 영이라고 하는 사실은 하나님은 어떤 종류의 육체를 가지셨거나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있는 분이라는 개념을 부인하는 것이다.

 

(2)하나님은 인격적이시다.

[하나님은 영이시다]고 하는 사실은 또한 그의 인격성을 포함해서 표현하는 말이다. 왜냐하면 영은 지성적이며 도덕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인격적 존재라고 말할때 하나님이 자신의 생활과정을 결정할 수 있는 이성적 존재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인격성을 부인하고 하나님을 비인격적인 세력인 힘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의 하나님은 인간들과 교제 할 수 있고 인간들이 의지할 수 있으며, 인간들의 생활속에 들어와 인간의 어려움을 도우시는 인격적인 하나님이시다. 더우기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인격적 존재로 나타내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가 빌립에게 말씀하실 수 있었던 그러한 완전한 방법으로 아버지를 예시하셨다(14:9).

 

(3)하나님은 무한히 완전 하시다.

하나님은 무한한 완전성에 의하여 그의 모든 창조물과 구별된다. 하나님은 그의 존재하심과 선하심에 있어서 제한을 받지 않으시며 완전하시다. 하나님은 한계나 제한이 없으실 뿐 아니라 도덕적 완전성과 영광스러운 존엄으로 모든 피조물위에 뛰어나신 분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넌후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여호와여 신중에 주와같은자 누구니이까 주와같이 거룩함에 영광스러우며 찬송할 만한 위엄이 있으며 기이한 일을 행하는 자 누구니이가?(15:11)

 

(4)하나님과 그의 완전성은 동일하시다.

단일성은 하나님의 근본적 특성중의 하나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이질적인 요소들로 이루어지신 분이 아니시며, 그의 존재하심과 속성이 동일하신 다른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완전성은 인간에게 계시해 주신 하나님 자신을 말하는 것이며, 단순히 하나님의 존재를 뜻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진리이시고 생명이시며, 빛과 사랑이신 분이심을 성경이 증명해 주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는 [하나님이 계신다]고 주장하는 유신론과 [하나님이 없다]고 주장하는 무신론이 서로 대립하고 있다. 장님이 태양을 볼수 없다고 하여 태양이 없는 것이 아니듯 하나님을 볼 수 없다고 해서 하나님이 안 계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영이신고로 인간의 오감으로 보거나 만지거나 느낄 수 없고 그림으로 그릴 수도 없으며 저울이나 자로 달거나 잴 수 없지만, 우리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이 계심을 분명히 확신하고 있다. 장님이 태양을 볼 수 없다고 하여 태양이 없는 것이 아니듯, 하나님은 육안으로 볼 수 없지만 우리는 지금 이 시간도 하나님과 대화하며, 날마다 응답해 주시는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가는 것을 지상의 가장 큰 축복이요, 행복이라고 믿는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려고 시도된 교과서는 아니지만 성경공부는 반드시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14:1에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고 하였고, 10:4에는 악인은 그 교만한 얼굴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치 아니하신다 하며 그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하나이다고 하였다.

 

이 말씀은 아무리 지식이 많은 학박사라도, 천하를 호령하는 권세자라도 돈 많은 백만장자라 하여도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는 사람은 교만한 자요 어리석은 자이며, 악인이라고 하신 말씀인 것이다.

 

1.하나님의 존재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가능성은 몇가지의 다른 근거 위에서 부정되어 왔다. 어떤 의미에 있어서 이같은 부정은 인간이 하나님을 알 수 없다고 하는 주장과 흡사한 것이다. 물론 이것은 틀림없는 사실인 것이다. 절대적으로 완전한 지식을 가지고 인간이 무한한 깊이를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존재를 측량한다는 것은 엄두도 못 낼 일이다. 하나님을 부분적으로 알 수 있다고 할 경우 그 지식은 참되고 진실한 지식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은 천둥이 치거나 위급한 일을 만날때 [아이구! 하나님]하고 하늘을 향해 도움을 청하는 선천적 지식 즉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에 대한 일정한 지식을 갖고 태어나고(11:9), 후천적 지식 즉 일반계시와 특별계시를 통해 배움으로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일반계시(자연계시)로서는 구원자되시는 하나님을 확실히 알기에 불충분하고 성경(특별계시)을 통하여 하나님을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이다(1:1, 요일5:20).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이런 논증을 간략하게 공부해 보기로 하겠다.

 

(1)성경론적 논증: 성경은 아주 분명하게 하나님의 존재를 가르쳐 준다. 누구나 하나님을 알고자 하면 성경을 상고하여야 한다.

11:6에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고 하였다.

 

(2)본체론적 논증: 모든 사람은 직관적으로 하나님에 관한 관념을 지니고 있으며, 그 관념 자체에서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증명을 찾으려고 한다.

 

이름이 있으면 실체가 있듯이 하나님이라는 개념(이름) 자체가 하나님의 존재를 증거한다( 3:14).

 

(3)우주론적 논증: 우주론적 논증이 증명하고 있는 내용은 우주는 적절한 원인에 의해 존재하게 되었으며, 이 원인은 우주 밖에 있는 것으로서 지적이라는 것이다. 원인없는 결과가 없듯이 우주안에 모든 것이 우연히 생기거나 진화된 것이 아니고 조물주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다(19:1,1:20).

 

(4)목적론적 논증: 물건마다 목적이 있고 반드시 누군가에 의해 설계되어 만들어졌다면 우주만물의 움직임과 생명체의 조직이 시계처럼 질서와 목적이 있어 움직이는 것을 볼때 삼라만상 역시 창조주 하나님의 특별한 목적속에 설계된 작품임을 알 수 있다.

(1:3, 14:17). 그러므로 우리는 목적론적 논증은 제일 원인이 지적이고 지적이고 자유적이며 상상할 수 없이 위대하다는 것을 입증한다고 결론을 내린다.

 

(5) 도덕론적 논증: 도덕적인 법칙은 인간이 스스로 인간에게 부과한 것이 아니며 또한 심판의 공포도 인간 스스로 집행한 것이 아닌 이상, 이 법칙을 부과하는 하나의 거룩한 의지와 이 도덕적 성품의 위협을 자아내게 하는 하나의 형벌적 능력이 있다. 우리의 양심은 이렇게 외친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6:8)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 하시리라(12:14). 환언하면 양심은 위대한 율법 수여자이신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의 율법의 파괴에 대해 내리는 형벌의 사실을 인식한다. 그뿐 아니라 선악을 알게 하는 양심의 소리를 들을때 하나님이 계심을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2. 하나님의 이름

 

성경은 하나님의 이름을 [20:7,8:1]에서 가끔 단수형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그 명칭은 자기 백성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을 나타내는 명칭이다.(18:10,50:10) 하나님의 명칭은 인간이 조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에게서 주어진 신적 기원을 가지게 되므로 우리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공부해 보기로 하겠다.

 

(1)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이름

구약에서 하나님은 높으시고 찬양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 초월의 하나님이란 뜻을 나타내는 명칭이다.

하나님은 히브리어로 엘로힘(Elohim), 헬라어로 데오스(Theos),인데 전능하신 하나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신비로우신 하나님, 영원하신 하나님, 유일하신 하나님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즉 하나님은 전지 전능 하셔서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신다는 말이다.

영어에서 하나님을 갇(God) 대문자로, 잡신(귀신)을 갇(god) 소문자로 표기하여 구분하지만, 한글 성경에는 [하나]라는 숫자에다 []이라는 인격적 표현으로써 [하나님]이라고 번역하였으니 [하나]는 절대성, 유일성, 위대성을 나타내고 []은 생명이 있고 인격을 갖춘 존경사인 것이다.

 

1. 엘로힘(Elohim): 창조와 능력의 하나님(1:1). 즉 하나님께서 강하시고 권능이 있는 분으로 두려움을 줄 수 있는 대상이라고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2. 샤다이(Shaddai): 영원 불변하시고 신실하신 하나님(17:1).

3. 엘욘(Elyon): 숭고하고 존귀하시며 가장 높으신 하나님(14:19,24:16,14:14). [올라간다. 높아진다는 뜻]

4. 아도나이(Adonai): 모든것의 주인이시고 전능하신 하나님(6:2,83:18) [재판하다. 통치한다는 뜻]

5. 여호와(Jehovah): 영원 자존자이시고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3:14). 성경에 여호와라는 말(단어)은 약 7000번 이상 사용 하였는데, 모세가 호렙산에서 하나님께 소명(부르심)받을 때 하나님의 이름을 물었더니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3:13-15)고 가르쳐 주었다.(6:2,42:8참고) 옛날 성경원본을 사본으로 베끼던 서기관들은 [여호와]란 명칭이 나오면 밖에 나가 손을 깨끗이 씻은 후에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기록했다고 한다. 요엘2:32에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자가 있을 것임이니요, 남은자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자가 있을 것임이니라.고 하였다.

 

(2) 신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이름

 

신약에서 데오스(Theos)는 구약의 엘(El), 엘욘(Elyon)과 동의어로서 하나님에 대하여 사용하는 보통 명칭이다. 이 명칭은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모든 자녀들과 각 자녀의 하나님으로 인정된 것을 표시한다.

 

1. 데오스(Theos): 전지 전능하신 하나님(5:7).

2. 큐리오스(Kurios):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1:8).

3. 로드(Lord):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20:28).

 

(Lord)는 히브리어로[아도나이] 헬리어로[큐리오스]인데, 하나님은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시요, 인간의 생사 화복과 다스리시는 소유주시요, 지배자이신 주(주인)이라는 의미이다. 즉 인간은 종(청지기)의 입장에서 주인 되시는 하나님을 숭배하는 이름이다.

 

3. 파더(Father): 영원의 아버지이신 하나님(3:15).

 

 

이스라엘을 대하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관계를 표현하기 위한 것으로 구약에서도 사용되었다(32:6,63:16,3:4). 신약의 명칭은 모든 성도들의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을 자칭하므로 보다 개인적인 명칭이다. 어떤때는 만물에 창조주 되신 하나님을 가르키기도 하고(고전8:6,3:14,1:17), 그리스도의 아버지 되시는 삼위의 제 1위를 가리키기도 한다(14:11, 17:11).

 

8:15에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고 하였고,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1:12)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지은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그리스도인에게 인자 하시고 친절하시고 자비로우신 아버지가 되셔서 항상 지켜주시고 인도하시며 책임져 주신 분이시다.

 

4. 하나님의 속성

 

하나님은 그의 이름에서 뿐만 아니라 특히 그의 속성들에 있어서까지 그 자신을 계시하고 계신다. 하나님의 속성에는 크게 두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는데, 하나님만이 가지는 고유한 성격인 [절대적 속성]과 인간에게도 비슷하게 찾아 볼 수 있는 [보편적 속성]이 있다.

 

1) 절대적 속성

일반적인 분류순서에 의하면 절대적 속성은 영원 자존성, 영원불변성, 영원 무한성, 무소 부재성, 전지전능성의 다섯가지 이다. 이와같은 속성들은 하나님의 절대성을 기초로하여 형성된다.

 

1. 영원 자존성: 자기 자신외에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으신다는 것(3:14,6:4,90:2,17:3,고전8:6), 즉 하나님은 모든 덕행과 행위에 있어서 독립적이므로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에게 의존하도록 하신다(33:11,17:25,4:11)

 

2. 영원 불변성: 자신의 신적 존재, 완전성, 목적과 약속에 있어서 언제나 동일하다는 것(6:26,딤전1:17,13:8,1:17), 즉 인간들은 변화무상한 것이 특징이지만 하나님은 영원불변하시다. 1:17에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고 하였고, 23:19에는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라고 하였다. 찬송가에도 내주와 맺은 언약은 영 불변 하시니 그 나라 가기까디는 늘 보호하시네라고 하였다.

 

3. 영원 무한성: 하나님은 어떠한 제한도 받지 아니하시는 분이라는 것(11:7,37:23,102:12,렘애3:22), 즉 인간은 불완전 하지만 하나님은 완전하시고 인간은 유한 하지만 하나님은 무한하시며, 인간은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지만 하나님은 육체가 아니고 영이시기 때문에 시공을 초월하여 어디에나 아니 계신곳이 없으신 분이다. 1:8에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고 하였다(139:7-10참조).

 

4. 영원 유일성: 하나님께서는 영과육으로 형성된 것처럼 여러 부분의 성질로 이루어지신 분이 아니시므로 나누이지 않으시는 분임을 의미한다(4:35). 하나님과 그의 속성은 하나이고, 또 하나님은 생명과 빛이 되시고 사랑과 의로우시며, 진리라고 할 수 있다.

 

5. 전지전능성: 모든 만사를 다 알아 무엇이든지 완전무결하게 행하실 수 있다는 것이다(18:14,대상28:9,9:6,42:2,32:17,6:8,9:23,1:37).

 

하나님의 보편적 속성은 인간에게도 비슷하게 찾아볼 수 있는 속성이다. 인간에게 있는 속성은 유한하며, 하나님의 무한하고 완전한 속성에 비할 때 불완전한 속성임을 기억해야 한다.

 

2) 지적 속성

하나님의 지성에 속한 속성(21:27,40:5,10:4).

 

1. 영적 속성: 하나님은 영이라는 속성, 즉 하나님은 물질적 실체가 아니라 영적인 실체다. 하나님은 영이시라(4:24)고 예수께서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성품이 영적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2. 지적 속성: 하나님의 지성(12:13,2:20,11:33,1:6), 즉 인간의 지식은 배워서 아는 것이요 한계가 있지만 하나님의 지혜는 스스로 가지는 것이요 그의 지성 안에 항상 존재하신다(139:1-4,11:33,고전2:10).

 

3. 판단 속성: 하나님의 결정(대상16:14,2:1-2). 즉 그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 이시요 그의 판단이 온 땅에 머물러 계신다. 2:1-2에 남을 판단하는 사람이 무론 누구든지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고 하였다.

 

3) 정적 속성

하나님의 본질에 속한 속성(6:6,20:5,9:19,3:16).

 

1. 사랑의 속성: 하나님의 성품의 완전성(요일4:16). 즉 하나님은 사랑이시다(요일4:8). 인간의 사랑은 상대적인 사랑이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아카페]사랑 즉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죄인을 향한 은혜와 긍휼을 베푸신 십자가의 사랑인 것이다(3:16,5:6).

 

2. 신의 속성: 신적 완전성(36:6,119:68,1:7,5:45,14:17). 즉 하나님은 악인과 선인에게 해를 비취게 하시고 의로운자와 불의한 자에게 비를 내리워 주신다(5:45).

 

3. 긍휼의 속성: 하나님의 선하심(103:8,145:9,3:12). 즉 죄의 결과로 짊어진 비참함과 비통속에 빠져있는 자들에게 향해질 하나님의 사랑이시다.

 

3) 의지적 속성

하나님의 의지에 속한 속성(대하25:16,7:13,7:8).

 

1. 거룩한 속성: 하나님의 완전성(39:7,17:11,벧전1:16). 즉 하나님은 죄와는 완전히 구별된 도덕적으로 순결하고 거룩한 성품을 갖고 계신다(15:11,34:10,6:5,1:13,4:8).

2. 공의의 속성: 거룩한 존재성(11:5,30:18,1:18). 즉 하나님은 공의 하셔서 결코 불의를 용납하지 않으시고 순종하는 자에게는 상을 주시며, 불순종하는 자에게는 벌을 내리시는 심판 주이시다(99:4).

3. 진실의 속성: 하나님의 신실성(32:4,15:8,고후1:12,딤후2:13).즉 하나님은 진실 하심으로 거짓이 없으시고 그의 언약을 반드시 이루신 분이시다(23:19,고전1:9,딤후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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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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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력의 중요성 및 각 절기의 기원과 의미 

 

I. 교회력의 중요성

 

기독교는 시간의 종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기독교에서 시간은 매우 중요하다. 시간을 벗어나서는 하나님을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시간은 하늘에서 떨어진 어떤 특별한 시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일상적으로 살아가는 구체적인 시간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시간은 인간이 살아가는 그 시간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역사적인 시간 안에서 발생하는 사건들을 통해서 자신을 계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독교는 일반적인 구원이 아니라 구체적인 시간과 장소에서 일어났던 하나님의 특별한 행동에 의해 성취된 구원을 증거 한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구체적인 시간에, 즉 우리가 일상적으로 대하는 바로 그 시간 안에서 발생했기 때문이다.

 

시간을 중시하는 기독교의 태도는 예배에도 반영된다. 예배의 구조는 하루, 한 주, 혹은 한 해 동안의 리듬을 갖는다. 기독교 예배는 시간으로부터의 회피가 아니라 시간을 자신의 기본 구조로 사용한다는 것이다. 현재는 과거에 일어났던 그리고 미래에 일어날 하나님의 행위와 만남의 장이 된다. 우리가 예배에서 경험하는 구원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시는 시간적 사건들에 근거된 실재이다. 시간을 구성하는 방식은 구원의 근거가 되는 행위들을 상기하고 다시 경험할 수 있게 해 준다. 한마디로 기독교 예배는 시간 위에서 설립된다.

 

교회력은 이처럼 시간을 중시하는 기독교의 특성을 반영한 것이다. 즉 교회력은 특정한 시간 안에서 발생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 사건을 일정한 주기에 따라 반복함으로써 그 구원사건을 회상1)할 뿐 아니라 다시금 새롭게 경험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력은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삶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영위되고 있음을 자연스럽게 확신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교회력의 중요성은 여기에 있는 것이다.

 

II. 각 절기의 기원과 의미 

 

절기는 교회력을 구성하는 핵심이다. 절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동안 일어난 사건들을 회상하고 기념하기 위해서 만들어 졌다. 그러므로 각 절기들이 어떻게 만들어 졌으며, 또한 그것들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이해한다면, 교회력의 중요성을 더욱 인지할 수 있을 것이다.

 

  1. 주의 날

   

교회력은 주의 날(the Lord's day; 1:10)부터 시작된다. 유대교에서는 하나님이 6일간 창조하시고 7 일째 날 안식하셨다는 것에 근거하여 율법이 제시하는 안식일을 지킨다. 그러나 신약성서는 한 주의 첫 째 날을 예배를 위한 특별한 날로 제시한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한 주의 첫날을 연보를 위한 날로 성별 시키라고 말했다 (고전 16:2). 바울은 또한 트로아에서 토요일 자정까지 설교한 뒤에 일요일 새벽까지 기독교인들과 대화하였다(20:7, 11). 계시록의 저자도 자신이 성령에 의해서 사로잡힌 날이 주의 날이라고 말한다(1:10). “주의 날1세기 말엽 한 주의 첫째 날로 이미 기독교인들에게 친숙해 져 있었다. “주의 날을 지키는 것은 초대교회가 자신의 신앙을 증거 하는 방식이었다. 복음서는 모두 빈 무덤이 발견된 날이 안식 후 첫날 아침이라고 증언한다(28:1-6, 16:2-6, 24:1-3, 20:1-8). 안식 후 첫날은 창조의 첫째 날로써 하나님이 어두움과 빛을 갈랐던 바로 바로 그 날이다.2) 복음서는 또한 부활한 그리스도가 한 주가 시작되는 첫째 날 제자들에게 나타났다고 증언한다(28:9이하, 24:13이하, 20:14이하).

 

AD 115년경 익냐시우스(Ignatius)는 매그네시아에 있는 기독교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안식일을 금하고 주의 날을 기준으로 사는사람들에 관하여 언급한다. 2세기 초에 쓰여진 것으로 보이는 디다케(the Didache) 역시 기독교인들에게 주의 날에 함께 모여서 떡을 떼며 성만찬을 행하라고 권고한다. 심지어 이교도들도 기독교인들은 특별한 날(주의 날) 동트기 전에 성만찬을 위해 모이는 습관이 있다는 사실을 보도했다.

 

또 주의 날의 다른 용어인 “Sunday"(태양의 날)2세기 중엽 등장했다. 순교자 저스틴은 155년 경 이교도 청중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Sunday에 함께 모인다. 그 날은 하나님이 어두움을 물리치고 우주를 창조한 첫 날이며, 우리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가 무덤에서 일어난 날이기 때문이다.” 기독교인들은 곧 이교도 용어이지만 태양이 떠오르는 것을 그리스도의 부활의 의미로 해석하여 Sunday를 받아들였다. 바나바 서신은 Sunday8, 즉 그리스도가 죽은 자 들에게서 부활한 새로운 세계가 시작된 날이라고 불렀다. 초대 교인들은 Sunday를 창조의 제 8일로 생각했다. 8일은 하나님이 안식하신 뒤 새로운 창조를 시작한 날이란 의미를 갖는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의미가 여기에 들어 있다 (고후 5:17). Sunday는 휴식의 날이 아니라 예배의 날이었다.

 

Sunday는 다른 날들보다 상위의 개념을 지녔다. 그 날은 부활을 기념하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초대 교회에서 Sunday는 주의 수난, 죽음, 그리고 부활을 회상하는 날이었지만, 무엇보다도 구세주가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한 것을 기념하는 날이었다. 터툴리안은 기독교인들은 Sunday, “주께서 부활한 날에 무릎 꿇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Sunday는 부활의 신앙을 입증한다. 따라서 Sunday는 매주 지키는 부활절이라고 볼 수 있으며, 부활절은 한해의 가장 큰 Sunday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2. 부활절

   

예수와 그의 제자들에게는 그가 유월절에 십자가형을 받는 것이 매우 중요했다. 유대인들에게 유월절은 하나님이 그들의 조상을 에집트에서 구하여 안전하게 홍해를 건너게 하고 자유로운 백성으로 만들어 준 사실을 기억(historical anamnesis)하는 절기였기 때문이다. 초대 교인들은 자신들 역시 하나님의 구원을 받았으며, 따라서 더 이상 죄와 죽음의 노예가 아니라는 사실을 믿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수난, 죽음, 그리고 부활을 통해 자유로운 백성이 되었다고 확신했다. 유월절에 잡는 어린양을 가리키면서, 바울은 다음과 말한다: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 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으로도 말고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으로도 말고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떡으로 하자” (고전 5:7-8). 이 말씀은 옛날 유대인의 구원 사건이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새롭게 되었다는 것을 가리킨다. 노예와 구원의 도식은 같지만,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그리스도께서 이룩하신 사역에 의해 죄와 죽음으로부터 구원받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초대 교인들이 매 주일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기념했지만, 연중 최고의 주의 날을 기념하는 것은 유월절3) 때가 적절했다. 한 주의 초점이 주의 날에 맞추어진 것처럼, 한해의 초점은 파스카(유월절)에 맞추어 졌다. 기독교인들은 적어도 2세기까지 이 파스카를 지켰다.

 

2-3세기 교회 역시 이 파스카를 준수했는데, 이때 세례와 안수 그리고 첫 성찬을 통해서 새롭게 기독교인이 되는 것을 의미하는 예배를 드렸다. 파스카가 홍해를 건넘으로써 노예로부터 해방된 것을 회상하는 절기였던 것처럼, 교회 역시 세례를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는 것으로 여겼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6:4-5). 처음 3세기 동안 그리스도의 수난, 죽음, 부활은 파스카때 함께 회상되었다. 터툴리안은 유월절은 세례예식이 행해지는 날 보다 훨씬 더 엄숙하다. 왜냐하면 유월절은 우리의 세례의 근거가 되는 주의 수난이 이루어진 때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초대 교인들 사이에서는 기독교의 파스카가 유월절에 대한 유대력을 좇아야 하는가에 대한 긴 토론이 있었다. 유월절 어린양의 희생은 유대력으로 닛산월 14일에 일어났는데, 유대력은 음력이기 때문에, 유월절은 보름날 시작되었다. 325년 니케아 회의에서 교회는 결국 유대의 유월절과 달리 교회의 파스카는 항상 Sunday에 지킬 것을 결의하였다. 이는 Sunday의 상징적 의미를 인식한 결정이었다. 나중에 서 유럽에서는 파스카가 보름 이후 혹은 춘분인 321일 이후의 Sunday로 고착되었고, 로만 캐톨릭과 개신교회는 부활절을 이 방식으로 설정하였다.4) 이것이 부활절이 매년 다른 날(322일부터 425일 사이)로 된 이유이다.5)

 

4세기 무렵, 예루살렘에서 지낸 예수의 마지막 사건들 전체를 회상했던 파스카는 몇 개로 구분되었다. 이는 세계 각지에서 모여든 순례자들을 배려하기 위해 각각의 거룩한 장소들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분리해서 예배할 필요 때문이었다. 유게리아(Eugeria, 스페인여성으로 384년 순례자중 한 명)의 노트가 한 예로 제시될 수 있다. 그녀의 순례 노트에는 다음의 이야기가 실려있다: “수난/종려 주일, 혹은 수난 주간(Holy Week, Great Week으로 불려지기도 함)의 시작은 부활절의 시작이었다. 이 주일에 모든 사람들은 시편과 교창 성가집(antiphone)을 들고 감독 앞에 가서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에게 축복 있으라라는 말을 계속 반복했다.” 다음 3일 간은 작은 예배들이 있었는데, 수요일은 예외적으로 장로(평신도가 아닌 목회자를 가리킴)가 예수를 배반한 유다의 음모에 관해서 읽을 때, 사람들은 신음하며 한탄했다. 목요일은 성만찬을 행한 후 모두가 감독을 겟세마네로 이끌어 갔다. 금요일에는 골고다에서 예배가 이루어 졌는데, 거기서 모든 이들이 행진하면서 나무 십자가에 입 맞추었다.

 

그러나 4세기 말에 와서 이런 방식의 수난주간 행사는 중단되었다. 어거스틴은 예수가 어느 날 십자가에 달렸고 어느 날 묻혔는지 그리고 어느 날 부활했는지 복음서에 분명하게 나온다. 그러므로 교회는 그 날들을 지켜야 한다라고 말했고, 이때부터 고대의 파스카는 다음과 같이 분리되어 지키게 되었다: 성 목요일(Holy Thursday), 성 금요일(Good Friday), 성 토요일(Holy Saturday), 그리고 부활주일(Easter eve and Day), 또한 수난주간에 앞선 수난/종려 주일과 수난주간의 작은 날들.

 

  

3. 성령강림절(오순절)

 

 

파스카에 이어 두 번째로 중요한 절기는 오순절이다. 오순절은 레위기 23:15-16에 나오는 유대교의 추수 절기였다: “안식일 이튿날 곧 너희가 요제로 단을 가져온 날부터 세어서 일곱 안식일의 수효를 채우고 제 칠 안식일 이튿날까지 합 오십 일을 계수 하여 새 소제를 여호와께 드리되.” 그러나 1세기에는 때때로 오순절이 시내 산에서 토라를 받은 것을 기념하는 절기가 되기도 했다. 기독교인들에게 오순절은 성령이 강림하여 교회가 탄생된 기념일로 여겨졌다.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성령이 유대절기인 오순절날 강림한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었다. 토라를 받은 것과 성령 받은 것이 대비되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과의 계약을 시내 산에서 완성하신 것처럼, 하나님은 오순절날 그리스도의 제자들과 계약을 맺었다고 그들은 믿었다. 적어도 2세기까지는 오순절이 세례를 위해 적절한 날로 여겨졌다. 미쳐 준비를 못해 부활절날 세례 받지 못한 자들은 오순절날 세례를 받았다. 이것은 교회의 탄생 기념일인 오순절날 새 기독교인들의 영적인 탄생을 축하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4세기까지는 오순절이 성령의 강림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승천을 기념하는 날이기도 했다. 터툴리안은 그리스도가 오순절날 승천하셨다고 말했다. 그러나 4세기 말에 이르러 성령강림과 그리스도의 승천은 분리되어 기념되었다. “사도헌장”(Apostolic Constitution)에는 그리스도의 승천 기념일이 부활절 후 40일째 되는 날이 적절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부활한 예수가 제자들을 40일간 가르쳤다는 사도행전 1:3에 근거한 것이다.

 

파스카(수난절/부활절)와 오순절(성령강림절)은 교회력에서 가장 오래되고 최고로 중요한 절기의 시작이며 마지막이다. 오순절은 부활주일부터 50번째 날을 지칭할 뿐 아니라 부활주일부터 시작하는 50일 전체를 가리키기도 한다. 유대력에서는 오순절, 첫 열매의 날”(the Day of First Fruits)을 유월절부터 시작된 한 주기의 결론으로 여겼다. 이 주기 동안 출애굽 자체와 그것을 둘러싸고 일어난 사건들이 기념되었다. 오순절은 추수의 성별에서 시작되는 추수시즌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오순절이란 용어는 50일 주기의 마지막날과 50일 주기 전체를 지칭했다.

 

기독교인들 역시 오순절을 오순절의 날 하루 뿐 아니라 부활절에서 시작된 50일 전체를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했다. 즉 오순절은 예수의 부활에서 시작하여 제자들이 성령을 받고 교회가 탄생된 때까지의 50일을 가리켰다. 어거스틴은 주의 부활후 이 날들은 평화와 기쁨의 기간이다. 그러므로 금식해서는 안되고 부활을 상징하여 서서 기도해야한다. 이는 매 주일 지켜져야 하고, 알렐루야 송을 불러야 한다. 알렐루야 송은 장차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우리의 위치라는 사실을 가리키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즉 오순절은 부활절기의 일환으로 지켜졌고, 성령강림과 교회의 탄생은 부활절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니케아 공의회(AD 325)Lent(사순절)“40로 정했다. “40은 금식하고 사역을 준비했던 예수의 광야 40일과 비교될 수 있다. 어거스틴의 시대에 사순절은 세례를 위한 준비 뿐 아니라 모든 신자들이 주의 수난에 동참할 준비를 하는 기간이었다. 사순절은 회개의 기간이었고, 영적인 훈련의 수단인 금식은 사순절 기간 중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그러나 사순절 기간에도 매 주일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했다. 주의 날은 사순절 기간보다 훨씬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사순절 기간 중 6번의 주일은 40일에 포함되지 않았다. 사순절은 따라서 재의 수요일(부활주일 전 7번째 수요일)에서 시작되어 부활절 바로 전날까지 총 46일이 되었다.

 

재의 수요일부터 시작되는 사순절, 부활절, 그리고 오순절에 이르기까지의 기간을 일러서 부활절 기간이라고 부르며, 이것이 교회력의 중심이다. 이 기간은 교인들이 재로부터 정화에 이르는 순례의 행진을 하는 동안 도전 받고 갱신하는 중요한 시간이다.

  

 

4. 성탄절과 주현절

   

 

또 하나의 중요한 절기는 성탄절이다. 성탄절은 부활절보다 오래되지 않았고, 또한 구약의 절기에서 유래된 것도 아니다. 그러나 성탄절은 부활절과 함께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주현절(epiphany, 16)은 오늘날 성탄절만큼 중요하게 취급되지는 않지만, 성탄절보다 오래되었고, 초대 교회력에서는 주현절이 부활절과 오순절 다음으로 중요한 절기였다. 주현절의 기원은 불분명하지만, 2세기 후반 에집트에서 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epiphany"현현”(manifestation)을 의미하는데, 기독교에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현현한 것을 지칭한다. 주현절은 예수의 탄생, 그의 세례, 그리고 갈릴리의 가나에서 행한 첫 기적 등을 기념하는데, 이 모든 사건의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신을 드러내셨다는 것이다. 초대 교회는 종종 이날을 “The Theophany"(하나님의 현현)라고 명명했는데, 이 명칭은 지금도 동방 정교회에서 사용되고 있다.

 

부활절과 마찬가지로, 주현절은 4세기에 몇 개로 나뉘어 졌다. AD 354년부터 그리스도가 유대의 베들레헴에서 탄생한 날이 1225이라는 기록이 나온다. 이 날짜가 인정된 것은 아프리카에서는 312년 보다 앞서고, 로마에서는 336년 무렵으로 추정된다. 점진적으로 크리스마스가 주현절의 일부로 지켜지게 되었다. 386년 크리소스톰은 안디옥에서 성탄일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날은 최근 빠른 시간 내에 발전되어 절기로 지켜지게 되었다.” 뒤에 오는 주현절에 관하여 그는 왜 이날을 주현절이라고 부르는가? 예수가 모두에게 알려진 것은 탄생된 때가 아니라 세례 받은 때이기 때문이다. 세례 받기 전까지 그는 알려지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16일 지켜지는 주현절이 동방전통에서는 예수의 세례를 기념하는 날로, 서 유럽에서는 동방박사들이 예수를 방문한 것을 기념하는 날로 각각 지켜지고 있다. 동방박사들이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이 현현 하셨다는 사실을 이방에 알렸기 때문이다. 주현절과 성탄절을 분리해서 기념하게 된 이유는 예수의 생애 동안 발생한 사건들을 좀더 구체적으로 기념하려는 초대교인들의 열망 때문이었다. 성경에는 예수가 언제 태어났고, 어느 날 세례 받았는지, 또 동방박사들이 어느 날 방문했는지 등이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지 않다. 16일과 1225일은 고대 이집트와 줄리안(로마) 달력에 따라 동지를 기념하는 데서 유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기독교가 로마 제국의 종교가 됨에 따라, 성탄절은 동지를 표시했던 이교도의 정복되지 않는 태양의 축제를 대신하게 되었다. 어두움을 정복하는 빛이라는 주제는 항상 주현절과 성탄절의 주된 개념이었다. 다른 한편으로 이 날들은 예수가 죽은 날과 그가 잉태된 날을 일치시키는 전통에서 나온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부활절 준비를 위해서 사순절이 필요 했던 것처럼, 성탄절과 주현절 역시 준비기간을 필요로 했다. 스페인의 한 공의회는 1217일부터 주현절(16)까지 교회에서 벗어나는 것을 허용치 않았는데, 이는 대강절(Advent)의 전신이라고 볼 수 있다. 5세기에 가울(Gaul) 에서는 주현절을 준비하는 기간으로 40일을 두었는데, 이것은 Lent 기간이 40일이라는 점에 착안한 것이었고, 그 시작은 지금의 대강절 즈음이었다. 결국 로마는 1225일 보다 4주 앞선 주일부터 대강절로 정했다.

 

대부분의 중요한 기독교 절기들은 4세기에 마무리되었다. 존 크리소스톰은 386년 행한 설교에서 예배력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그리스도가 육체로 태어나지 않았다면 그는 세례를 받지 않았을 것이고 (주현절), 그는 십자가에서 죽고 또한 부활하지도 않았을 것이고(파스카), 성령을 보내지도 못했을 것이다(오순절).” 4세기에 세 개의 중요한 초대 절기들-주현절, 부활절, 오순절-은 다시 다음과 같이 나뉘어 졌다: 성탄절, 성금요일, 승천일, 그리고 대강절, 사순절 같은 절기들. 4세기 이후 생긴 중요한 절기 가운데 하나는 삼위일체 주일(Trinity Sunday)이다. 삼위일체 주일은 오순절 후의 주일을 가리키는 것으로 약 1000년 경 도입되었다. 여타의 절기들과 달리, 이 절기는 역사적 사건과는 무관한 신학적인 교리를 나타낸다

 

III. 성서일과 (Lectionary)

 

  

성서일과는 교회력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lectionary” 란 말은 넓은 의미에서 교회력에 있는 특별한 절기의 예배를 위해 선택된 본문들의 체계를 지칭한다. 이러한 성서일과에는 lectio continualectio selecta의 두 원리가 있다. 전자는 창세기부터 요한 계시록 까지 읽든지, 성서의 어느 특정한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 가는 방법을 가리키고, 후자는 절기에 따라 선택해서 읽는 것을 말한다. 유대교의 회당에서는 각 절기에 해당하는 성서의 본문들을 규정해 놓고 일상적인 안식일에 lectio continua의 원리에 따라 선택된 성서 본문을 읽는다. 이 원리는 개인적으로 성서를 꾸준히 읽을 때는 도움이 된다. 그러나 성경의 각 구절들의 맥을 찾지 못한다는 단점이 있다. 더욱이 교회력에 따라 성서의 본문을 찾을 때는 크게 도움이 되지 못한다. 이에 반하여 lectio selecta는 성서의 본문을 선택하여 읽는 방법이므로 교회력과 관련해 볼 때 유용한 원리라고 할 수 있겠다.

 

기독교의 성서일과에 대한 기원은 분명치 않지만, 유대교의 유월절에 읽었던 출애굽기 12장은 로마에서 200년 경 사용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특히 325년 이전에 이미 기독교의 주요 절기들을 위해 특별히 지정된 성서 본문이 있었고, 일반적인 주일에는 lectio continua의 원리에 의해 성서의 본문을 읽었다. 서 유럽에서는 다양한 성서일과들이 발달되었다. 9세기 초 성서일과들이 표준화되어 최근까지도 로만 캐톨릭, 성공회, 루터 교회 등에서 사용되었다.

 

   

성서일과는 3년 주기로 되어 있으며 그 본문의 예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대강절

 

1) 첫주: 122 (1, 4, 7), 80:1-7 (2, 5, 8), 25:1-10 (3, 6, 9)

 

둘째주: 72:1-8 (1, 4, 7), 85:8-13(2, 5, 8), 126 (3, 6, 9)

 

셋째주: 146:5-6 (1, 4, 7), 1:46b-55 (2, 5, 8), 12:2-6 (3, 6, 9)

 

넷째주: 24 (1, 4, 7), 시편 89:1-4, 19-24 (2, 5, 8), 80:1-7 (3, 6, 9)

 

2) 첫주: 24:36-44 (1, 4, 7), 13:32-37 (2, 5, 8), 21:25-36 (3, 6, 9)

 

둘째주: 3:1-12 (1, 4, 7), 1:1-8 (2, 5, 8), 3:1-6 (3, 6, 9)

 

셋째주: 11:2-22 (1, 4, 7), 1:6-8, 19-28 (2, 5, 8), 3:7-18 (3, 6, 9)

 

넷째주: 1:18-25 (1, 4, 7), 1:26-38 (2, 5, 8), 1:39-55 (3, 6, 9)

 

2. 성탄절

 

1) 9:2-7 (매년), 시편 96 (매년), 디도서 2:11-14 (매년), 2:1-10 (매년)

 

2) 62:6-7 (매년), 시편 97 (매년), 디도서 3:4-7 (매년), 2:8-20 (매년)

 

3) 52:7-10 (매년), 시편 98 (매년), 1:1-12 (매년), 1:1-14 (매년)

 

3. 주현절

 

구약: 42:1-9 (1, 4, 7), 1:1-5 (2, 5, 8), 61:1-4(3, 6, 9)

 

복음서: 3:13-17 (1, 4, 7), 1:4-11 (2, 5, 8), 3:15-17 (3, 6, 9)

 

4. 재의 수요일

 

시편 51:1-12, 고후 5:20b-6:2, 6:1-6, 16-21 (매년)

 

5. 사순절

 

1) 첫 번 주일: 2:4b-9, 15-17, 3:1-7; 5:12-19; 4:1-11 (1, 4, 7)

 

9:8-17, 25:1-10, 벧전 3:18-22, 1:9-15 (2, 5, 8)

 

26:1-11, 91:9-16, 10:8b-13, 4:1-13 (3, 6, 9)

 

2) 두 번째 주일: 12:1-4b(4b-8), 33:18-22, 4:1-5(6-12), 13-17, 3:1-17 혹은 마 17:1-9 (1, 4, 7)

 

17:1-10, 15-19, 105:1-11, 4:16-25, 8:31-38 혹은 막 9:1-9 (2, 5, 8)

 

15:1-12, 17-18, 127, 빌립보서 3:17-4:1, 13-31-35 혹은 9:28-36 (3, 6, 9)

 

3) 세 번째 주일: 17:3-7, 95, 5:1-11, 4:5-26[27-42] (1, 4, 7)

 

20:1-17, 19:7-14, 고전 1:22-25, 2:13-22 (2, 5, 8) 3:1-15, 103:1-13, 고전 10:1-13, 13:1-9 (3, 6, 9)

 

4) 네 번째 주일: 삼상 16:1-13, 23, 5:8-14, 9:1-41 (1, 4, 7)

 

역대하 36:14-23, 137:1-6, 2:4-10, 3:14-21 (2, 5, 8)

 

5:9-12, 34:1-8, 역대하 5:16-21, 15:1-3, 11-32 (3, 6, 9)

 

6. 종려주일

 

50:4-9b, 31:9-16, 빌립보 2:5-11 (매년)

 

수난 이야기: 26:14-27:66 (1, 4, 7); 14:1-15:47 (2, 5, 8); 22:14-23:56 (3, 6, 9)

 

7. 성금요일

 

52:13-53:12 (매년), 4:14-16, 5:7-9 (매년)

 

8. 부활절

 

28:1-10 (매년), 16:1-8 (매년), 24:1-12 (매년)

 

9. 성령강림절

 

2:1-21 (매년), 고전 12:3b-13 (1, 4, 7), 8:22-27 (2, 5, 8), 8:14-17 (3, 6, 9)

 

20:19-23 혹은 7:37-39 (1, 4, 7), 15:26-27, 16:4b-15(2, 5, 8),

 

14:8-17, 25-27 (3, 6, 9)

 

10. 삼위일체 주일

 

4:32-40 (1, 4, 7), 6:1-8 (2, 5, 8), 8:22-31 (3, 6, 9)

 

33:1-12 (1, 4, 7), 29 (2, 5, 8), 8 (3, 6, 9)

 

고후 13:5-14 (1, 4, 7), 8:12-17 (2, 5 8), 5:1-5 (3, 6 9)

 

28:16-20 (1, 4, 7), 3:1-17 (2, 5, 8), 16:12-15 (3, 6, 9)

   

이상과 같이 살펴본 교회력에 따른 성서일과는 무엇보다도 설교와 예배를 준비하고 주관해야하는 목회자에게 유용하게 쓰일 수 있다. 교회력에 따르는 성서일과를 사용하지 않을 경우, 일정한 기준 없이 설교자의 주관에 따라 본문이 선택되므로, 설교자 자신의 편견과 선입관이 개입될 여지가 많다. 이런 경우 일관된 말씀의 진수를 맛보고 싶어하는 교인들의 불만을 살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예배의 경우에도 찬송가, 교독문 등을 임의로 선택하지 않고 교회력에 맞추어서 선택함으로써, 교인들이 미리 준비하여 생동감 있는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된다. 성서일과에 따라서 설교하고 예배할 경우, 정장복 교수는 그 장점을 다음과 같이 설파하고 있다. 첫째, 설교자의 개인적인 의도보다는 말씀 중심의 사역이 가능해 진다. 설교자 개인의 편견과 선입관을 배제하고, 일관된 말씀의 사역을 할 수 있다. 따라서 교인들이 말씀의 맥을 짚을 수 있게 된다. 둘째, 교회력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사역 중심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교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과 그분의 구속의 은총을 실감하는 효과를 경험할 수 있다. 신앙생활을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이라고 말할 수 있는바, 교회력에 따라 설교할 경우, 그분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이 갖는 깊은 의미를 새기게 되어, 자신들의 삶 속에서 재현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셋째, 모든 교회가 성서일과를 사용할 경우, 동일한 말씀을 들을 수 있음으로써 교회 일치에 많은 도움이 된다. “모든 교회는 하나이다라는 것이 교회의 중요한 모토인데, 어디서나 같은 말씀을 들을 수 있다는 사실은 교인들 스스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임을 확인하고 확신할 수 있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다. 넷째, 설교자들이 일정한 주기로 말씀을 연구할 수 있어서 말씀에 질서가 형성될 수 있다. 사실 설교자들의 최대의 고민은 이번 주에는 무슨 말씀을 전해야 하는 가라는 것이다. 말씀을 준비하기 위해서 성서의 여기저기를 살펴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교회력에 따라 설교하게 되면, 이런 고민이 해소될 수 있다. 다섯째, 설교 뿐 아니라 목회의 전반적인 계획 수립에 도움이 된다. 교회력이란 일정한 기준이 주어지기 때문에, 임의로 목회계획을 수립해야 하는 부담에서 벗어날 수 있다. 여섯째, 교인들이 설교의 방향을 미리 알 수 있게 되어 준비할 수 있다.

 

교회력에 따라 목회계획을 세우고 설교하게 되면, 현장성이 약화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할 수도 있다. 이는 목회 현장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에 따라서 말씀을 준비하기가 어렵게 되지 않겠는가 하는 우려이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성탄절, 수난절, 부활절, 오순절 등 중요한 절기를 제외한 나머지는 목회자가 현장에 맞게 설교의 주제를 자유로이 선택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교회력은 결코 교회가 서 있는 자리, 즉 문화, 사회, 환경을 제한하지 않는다. 오히려 교회력은 목회자가 목회 환경에 맞게 자유로이 목회 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고 있다. 이점에서 성서일과와 목회현장의 갈등은 얼마든지 해결될 수 있다. 그러므로 교회력에 따라 예배하고 목회 계획을 수립하는 것은 목회와 설교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 최승태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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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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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교육방법

1. 선생의 예수

니고데모가 조용한 밤에 예수님을 찾아와서 이렇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 오신 선생이신줄 아나이다](3:2).그의말은 매우 정확한 판단이다. 예수의 교훈 비록 전세계 많은 사람이 이 교훈과 관계없이 지내고,그의 추정자들 까지도 그 교훈에 무관심하고 , 또 실천에 옮기지 못하고 있지만 그 교훈은 실로 세상에 어떤 선생이라도 예수님만큼 감화를 끼친 스승은 없다. 그분은 홀로 모든 선생들 중에 가장 위대하신 분이다. 복음서를 읽는 사람은 누구든지 예수의 생애중에 많은 시간과 정력이 교훈하는 일에 바쳐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그의 교육 방법을 연구하는 것은 의의가 있는 일이다.

 

그는 어떤 교안을 작성했는가? 그는 자기에게 교육 받는 사람들을 어떻게 접촉했는가? 어떤 방법으로 그가 받고 있는 진리를 제출했는가? 그리고 결과는 어떠했는가! 이런 질문들은 예수의 교육 방법 연구에 있어서 필요할 뿐 아니라 현대 교육 방법 혁신에 있어서도 의미가 있는 일이라 하겠다. 또는 이런 내용과는 달리 그는 그리스도 자신의 마음을 우리에게 보여 주기도 한다. 그러나 예수의 교육 방법을 논함에 있어서 다음 두가지 조건을 먼저 생각할 필요가 있다. 첫째, 여기서 말하는 [방법]이란 말은 분명한 설명이나 형식화 한 어떤 체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특징 있는 교육 방법은 자연스러운 분위기를 활용하시는 그것이다. 이것이 모든 규칙을 능가하는 방법이다. 둘째, 예수님은 한분의 선생이었다. 나면서부터 선생이었으며, 가장 위대한 선생이었으나 그분은 선생 이상의 존재임을 항상 기억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신약성경에 전해오는 교훈만이 그분의 전부라고 생각한다면, 그리고 그 이상의 기대할 것이 그에게 없다고 생각한다면 그가 세상에 오신 것은 특별한 의의가 없는 일이요 따라서 세상은 이미 파멸의 심연에 빠져 버렸을 것이다. 이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자신은 그 교훈보다 훨씬 뛰어난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류의 교훈은 예수님의 교훈이기에 앞서 예수님 자신이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예수님은 복음이 무엇인가를 설명하려 오신 이라기 보다는 전할 복음이 있다는 것을 그 자신으로서 보여 주시기 위하여 오셨다고 말한 테일 박사의 뜻깊은 주장이 결코 무리가 아니다.

 

이 두가지 점을 인식하고 예수님의 교육 방법을 연구하자.여기에서 두 가지 점을 밝혀야 한다. 즉 예수의 교육 방법의 특수한 점이 무엇이었던가? 또 그 교육의 일반적인 원칙은 무엇이었던가 하는 점이다.

 

2. 예수의 교육 방법의 특성

 

그는 무엇보다 구전교육 방법을 사용했다.글로 써서 가르치지 않고 이야기로 가르쳤다. 그는 단 한번 글씨로 쓰신 일(8:18)이외에는 모든 경우에 친히 말씀으로 가르치셨다. 그가 가르치신 아름다운 금언, 명구,신앙과 도덕 등 결정적으로 규정 지은 모든 말씀 곧 [하나님의 신학] 은 모두 갈릴리 농부와 어부들의 기억을 정리하여 문자로 기록된 말들이다.

 

그 구전식 교육에 위험부담은 없었는가? 시간이 흘러가면 그렇게 말로만 전해들은 교육이 망각되어질 위험성은 없었는가? 절대로 그렇지 안다.씨를 뿌린 농부는 그 곡식이 결실할 때까지 항상 돌보아야 한다. 하나님은 땅과 또 다른 결실을 한다. 예수님은 한번 사람의 마음 속에 뿌린 말씀은 뿌린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아니하시고 그것을 항상 돌보아 주셨다. 그 말씀은 해가 거듭할수록 사람들의 마음에 깊이 박혀 영원히 자라는 생명이 되었다. 그의 말씀은 종이에 기록할 필요가 없었다. 생명을 가진 씨앗을 마음에 뿌리쳤다. 이 씨앗은 한번 마음 속에 뿌리를 박으면 세기에서 세기를 연결하여 죽지 않는 세력으로 성장한다.

 

노르웨이의 문호 입센은 [황제와 갈릴리 사람]이란 작품에서 제 4세기 로마황제 줄리안의 독백을 이렇게 표현했다. [그가 지금 어디 있느냐? 골고다의 사건이 일어난 후 그는 어디서나 일하고 있느냐? 그는 지금 어디 있느냐? 그가 고통을 받고 죽고,또 세계에서 세게로 계속하여 정복하고 있지 않은가?] 이런 말로써 예수의 기사를 썼다.

 

둘째로 예수의 교육 방법의 특성은 그의 교훈 대부분은 충분한 원인을 가진 사건과 현장에서 추출되어 나왔다는 점이다.다시 말하면 어떤 특수한 사건에도 미리부터 생각하고 목적한 사실을 말하고, 그 특수한 진지를 설명했다. 회당에서 반신불수를 만난 일(12:10).길에서 만난 귀족청년과의 대화(21:16)제자들의 돌연한 논쟁 (9:46),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이 옮으냐,그르냐 하는 바리새인들의 질문(22:17), 이 모든 사건들을 통하여 예수님은 자기가 목적하는 교훈을 주셨다.

 

이런 교훈은 그 적응성이 순전히 지방적이며 일시적이기 때문에 그것이 오늘날에도 꼭 그렇게 하라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그 사건의 교훈을 통하여 가르쳐주신 진리는 변함이 없다. 예수의 교훈 대부분은 분명히 어떤 특별한 사건에 관련하여 주신 것이지만 지금도 그 교훈은 진리이다. 교리나 철학은 가르치는 방법으로 체계를 세운 어떤 것을 말씀하셨다면 벌써 오래전에 없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선명하게 빛나는 말씀은 예수님을 만나고 또 그와 친히 사귄 남녀들의 가장 절박한 현실에 응하여 주신 말씀이기 때문에 그것은 영원토록 확실하게 남아 있다.

 

사상의 체계는 시대를 따라 변한다. 그러나 곤란한 문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의 마음을 변하지 않는다. 인간이 눈은 유혹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눈물은 여전히 눈에서 흘러 나온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교훈은 오늘날에도 세계 모든 사람들의 현실적이고 직접적인 일정한 요구에 응하고 있다.

 

세째로 그의 교육 방법의 특색은 언제나 그가 가르치신 교훈은 듣는 청중들로부터 환영을 받았다는 데 있다. 그는 무엇보다 먼저 자신이 말씀을 듣는 청중의 입장이 되어 피교육자의 처지에서 교훈을 시작하셨다. 모세의 율법이 과연 그들에게 활동적인 종교였는가?에 의문을 가지기 때문에 예수님은 율법으로서 자기의 말씀을 전개했고, 거기서 또한 하나님의 더 좋은 율법의 높은 말씀을 전하셨다. 청중은 또한 이스라엘의 회복에 관심을 쏟고 있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자신이 나라 없는 백성의 처지에서 영적 국가인 하늘 나라에 대하여 말씀 하셨다. 언제나 그는 그 말씀을 듣는 사람의 처지에서 이야기를 시작했고 또 거기서부터 발전해 나갔다.

 

그러므로 자연히 그가 쓰시는 말씀은 단순했다. 직접적이고 단순하고 박력있는 그의 용어는 - 분명히 그가 쓰시는 용어는 그 당시 직업 종교가들의 것과는 달랐다 - 듣는이에게 쉽게 이해되었고 또 사람들이 잊어버리거나 등한시 할 수 없으리만큼 사람들의 마음을 끌어 당겼다. 그리고 그는 또 성급하게 말씀하시지 않았다. 그는 제자들을 결코 조급하게 만들지 않았다. 한걸음씩,한걸음씩 그들을 인도했다.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16:12). 그는 거룩한 보류의 마음과 침묵으로서, 그는 그의 계시를 미리 다 말씀하시지는 않았다(예를 들어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 등). 그리하여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시기까지 보류했다.

 

이런 실제적인 문제들은 오늘날에도 강조되어야 한다.그리스도께서는 처음부터 모든 것을 완전하게 이해하고 믿으라고 요구하지는 아니하였다. 그러면서도 또 한편 불완전한 신조 때문에 따르는 제자들로 하여금 돌아서게 하지는 않았다. 오늘날 교회는 이런 면에서 결점을 지니고 있다. 그는 그 자신을 자기 민족들의 입장에 서서 가르치므로 주민들은 할 수 있는대로 예수에게로 모이고 있었다. 초신자들도 예수를 환영했다. 처음 만날 때는 중요시 하여 누구에게든지 제자들을 처음 가르치실 때처럼 친구로 삼고 한 걸음 두 걸음 그 자신의 깊은 신비에 까지 인도해 가며 제자로서의 안전한 영광을 누리게 했다.

 

그의 방법의 특색 하나는 그의 교훈에는 비유적인 요소가 많았다는 것이다. 그의 설명, 그의 경우, 역설이나 어떤 무엇보다도 비유를 가장 순직한 예술적 수완보다 은총의 산 계시로 그린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기사로서 생명, 운명,하나님등, 이 모든 문제에 대한 해결과 설명의 창문을 열어 자신이 실제로 말하고 있는 그 진리를 청중으로 하여금 확실히 보게했다.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 그의 이야기가 듣는 사람의 심중에 한 그림으로 화하도록 하는 경우가 여러번 있었다고 하겠다. 그리하여 상상력이나 생각하는 두뇌가 별로 없는 사람이라도 그 말씀에서 나타나는 신비의 광경을 보게하여 [내가 본다] [나도 본다]는 부르짖음을 가지도록 했다.예수 앞에 나오기까지 인생 문제에 대하여 눈이 어둡던 사람이나 잠든 사람처럼 몽롱하여 인생의 영광스러운 문제에 한번도 접하지 못한 사람들도 예수에게 나와서는 자기들의 신앙을 고백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영안이 밝아져서 생명의 원리를 알고 하나님을 알아 그에게 감사를 드렸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누구보다도 사람들에게 환상을 주시는 분이었다.

 

그리스도의 교육방법의 원칙

 

이제 우리는 그의 특수한 교육방법으로부터 시선을 옮겨 그 일반적인 원칙을 연구해 보자. 첫째,그의 교육은 무엇보다도 권위가 있었다. 마태가 그의 복음서에 기록한대로 [무리가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이라](7:28).예수님의교훈에는 [아마]라든지 [그럴 것이다], 혹은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는 등의 불확실한 상상적인 이야기는 없다. 언제나 [진실로 내가 네게 이르노니]와 같이 자신의 말슴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명확히 했다.[서기관들과 같지 않았다]는 말은 서기관들은 항상 [모세는 이렇게 말했다]라든지 [랍비 000는 이렇게 말했고, 율법과 예언자는 이런 말을 했다]고 인용했다.

 

이렇듯 서기관들은 자기들의 이름과 의견을 자신 있게 밝히지 못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의 종교는 낡은 책에 의존하는 종교였다. 반드시 다른 사람의 손을 거쳐서 말하게 되는 종교였다. 서민층까지도 그 종교가 다른 사람의 손을 거쳐온 대변이라는 것을 알았고, 진실하지 못한 것으로 느꼈기 때문에 마음속으로는 서기관들을 매우 멸시하고 있었다. 에머슨이 세네카(로마 철학자,B.C.54-A.D.39?)를 평가한 말이 서기관들에게도 해당될 것이다.

 

[그는 자기의 사상을 자기 스스로 말할 수만 있었다면 대단히 훌륭한 사상가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왜냐하면 서기관들은 자신들이 경험하지 않은 사실을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갈릴리 나사렛 사람 예수님에게서는 새로운 말씀이 흘러나왔다. [옛 사람도 그렇게 말했지만, 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이렇게 그는 서기관들의 사상과 그 처지를 일축해 버리고 전설을 기초로 삼고 있는 그들의 사상을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 옮겨 놓았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비웃고, 또 놀라고, 경이롭게 바라보았지만,확신을 가지고 자신 있게 말씀하시는 권위 있는 그 태도에 결국 군중은 감격하고야 말았다. 그가 말하고 있는 사실은 친히 체험 가운데서 나온 말씀이며 정말로 하나님의 이야기를 하는 분을 만났다고 믿어주고, 그분이야 말로 다른 사람을 교훈하실 수 있는 분이며 하나님에게서 직접 오신 분인 것을 믿게 되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다시 예수님의 교육이 지방적이거나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우주적이고 영원성을 지닌 것임을 재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점이 정치나 사회문제 내지는 도덕과 종교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옛 전통의 구습을 깨뜨리고 권위 의식에 대한 새로운 도전에 부딪친 시대지만 그러나 그리스도가 취하신 원칙을 외면하고서는 어떤 항해도나 나침판도 존재할 수 없게 되었다.

 

우리의 정신상태와 양심에 주신 그의 교훈은 지금도 권위 있는 하나님의 말씀임을 부인할 길이 없다. 그러나 다음의 사실에 주의하여야 한다. 예수의 교훈이 비록 권위가 있기는 하였지만 그러나 그 교훈이 어떤 지나친 의미의 교훈이거나 교리적이거나, 또는 강제로 동의를 요구하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볼 수 있다.

 

복음서를 자세히 읽어보면 한 가지 뚜렷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즉 그가 가르쳐야만 할 사람에게 대하여 놀랄만한 인내를 지니고 계셨다는 점이다. 강제성을 띠고 이끌기를 거절하시고,그들에게 자기의 의지대로 강요하시지 않고, 한 사람, 한 사람의 인격을 매우 존종하셨다는 점이다. 예수님은 자신이 베풀 수 있는 기적의 힘을 아무렇게나 쓰시지 않았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마음에 현혹을 주고 판단을 그르치게 하지 않으시려는 의도에서였다. 길지 않은 기간 훈련을 시키시고는 제자들을 지방으로 파송하신 일이 있었는데 그 일은 실로 위태로운 일이었다. 왜 그렇게 위험 부담이 있는 모험을 시도 하셨는가? 그 이유는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교훈이 얼마나 실제적인 효과를 발휘할 수 있는가 보기 위해서였다.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교훈의 기본되는 말씀은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너희를 친구라 하리라](15;15)였다. 만일 제자들이 이 말씀을 기억할 수만 있었다면 그들이 다른 사람에게 말씀을 전할 때 강요의 방법을 써서 무오의 교리를 짊어지게 하여 사상적으로 질식시키는 실수를 범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종이 아니고 친구라] 그는 결코 [이것이 진리이니 이것을 받으라. 그렇지 아니하면 멸망하리라]고 말씀하시지 않고,[나는 진리이니 나와 함께 있으면 너는 진리를 발견하리라]고 권유로 하셨다.[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면 이 교훈을 알리라](7:17).그의 교훈은 참으로 권위 있었으며, 결코 강압적이거나 독단적이 아니었다.

 

그는 또한 개인의 인격을 무한히 존경했다는 점에서 사람들로 하여금 각자가 자기의 결정을 자기가 하도록 하는 것이 예수의 교육 원칙이라는 중요한 사실을 가르치고 있다. 이 점은 모든 교육가가 본 받아야 한다. 교육자가 이 점에 실패하면 자기의 모든 일을 실패한다. 예수님은 그의 교훈으로서 세계가 일찌기 경험한 사실을 상기하게 하고 또 의문을 가지도록 크게 자극을 시키기도 했다. 예수님은 어떤 문제에 해답을 주셨다기 보다는 세계에 문제를 제시하고 세계로 하여금 거기에 관심을 가지도록 자극 하셨다고도 말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그는 언제나 직접적인 질문에 대하여 항상 직접적인 대답을 주시지 아니하셨다.

 

한 교법사가[누가 우리의 이웃입니까?]고 물었을 때에는 [어떤 사람이 여리고고 내려가는데...]로 시작하여 사마리아 사람의 착한 행실을 전해주셨다(10:29이하).베드로가 요한을 가리키며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21:21) 라는 물음에는 [너는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다. 또 어느때는 [주여 구원을 얻는 자가 적으니이까?]라는 물음에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13:23)고 하셨다. 그가 말씀하신 비유는 모두 이런 방법이었다. 즉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들 자신의 영적 통찰력과 영적 실제에 대한 지각력을 사용하도록 했다.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하셨다(11:)

 

예수님 교훈의 목적은 모든 인생 문제에 대하여 미리 준비해 두었던 해답을 주시려는 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만일 인생 문제에 대하여 미리부터 그 답을 제공할 수 있었다고 하면 안식일 문제, 종교와 정치, 주인과 고용인, 그밖의 여러 가지 문제의 해답이 대단히 많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세상에 단순한 입법자가 되려고 오신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모든 어려운 문제에 대하여 칼로 베는듯한 규칙적이며 무미건조한 해답을 주시려고 육체를 입고 인간 사회에 오시지 않았다. 예수님이 해답을 주신 목적은 그가 살으신 일과 또 죽으신 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명랑하고도 힘있게 모든 곤란한 문제를 해결하게 하는 새로운 상념적인 해결 방법을 주시는데 있다.바울은 [의문은 죽이고 영을 살린다](고후 3:6)고 말하낟. 이것이 곧 예수께서 사람들에게 주시는 그리스도적 자유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사용하신 방법은 자신이 교훈하신대로 실천했다는 것이다. 제자들은 에수님으로부터 애매하거나 추상적이거나 불확실한 것을 찾을 수 없었다. 그것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전모가 그들의 눈에 구체적으로 실현되었고,사는 사실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이것이 그가 주신 교훈을 통하여 하나님에의 신앙이었다. 그가 생활에서 그렇게 가르치셨다는 것은 얼마나 영광스러운 교훈인가?그의 용서는 그의 마음 전체를 모두 주셔서 용서하시는 것이었다. 단순히 어떤 잘못에만 관계하여 그 부분만을 해결하는 것이 결코 아니었다.

 

그는 기도에 대하여 교훈만 하신 것이 아니라 자신이 친히 밤이 새도록 기도하셨다. 그는 사랑과 봉사에 대한 말씀을 제자들에게 하는 교육만으로만 그친 것이 아니다. 자신이 친히 허리를 동이시고 수건을 들고 제자들의 발에 묻은 먼지를 씻어 주셨다. 형제라는 제목으로 웅변만 하신 것이 아니라 친히 실망한자의 집을 찾아가서 형제요 친구라고 위로하셨다.

 

그리스도는 진실로 최고의 선생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가 가르치신 일에 대하여는 최대의 성의를 기울여 실천하셨고, 형식이 아니라 진실로 성심을 다하여 자연스럽게 그대로 살았기 때문이다. 이 점이 그를 따르는 모든 사람에게 영원한 가르침을 주고 있다.

 

자신을 종교에 바치지 않은 사람의 종교운동은 사람들에게 감화력을 전하지 못하며 예수의 말씀대로 산증거가 없으면 사람을 설복시킬 아무런 힘이 없다. 그러나 반대의 경우에서, 즉 그가 전하고 가르친대로 살아갈때, 그 종교는 가는 곳마다 감화를 끼친다.

 

이제 마지막 한 가지 더 말할 수 있는 예수의 교육방법은 자기에게 배우는 사람들과 친밀한 교제를 가지고 그들을 사랑한다는 점이다.[사랑의 정신은 다른 사람에게 불을 붙인다]고 어거스틴이 외쳤다. 이 점에서 예수님은 영원히 거룩한 선생으로써의 성공을 거둔 것이다. 그의 사랑의 정신 때문에 그의 모든 제자들은 항상 그 심령에 뜨거운 불을 가지고 있었다. 서로가 사랑했다는 사실은 그들 사이를 단순히 법적인 것과 같이 딱딱하게 한 것이 아니고 기쁨과, 영광으로, 그리고 로맨스로 실수하는 학생들은 그 제자들이었다. 그래서 그 선생으로 하여금 실망케 하고,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큰 교훈에 항상 장애를 주고 있었다. 그러나 비록 이런 실수를 할찌라도 예수께서 그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에,또 그들이 예수를 사랑하는 마음, 서로가 얽혀져서 신앙은 항상 사랑으로 자라가고 있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사랑하는 그 정신은 그들 속에 있는 모든 장애물을 넉넉히 제해 주었다. 갈보리와 오순절이 다 지난 후에야 비로소 저들이 배운 교훈이 일층 구속의 중심 사명이 가장 완전하게,그리고 확실하게 그들에게 알려졌고, 그 교훈 때문에 저들은 생의 의의를 발견했고, 그 구속의 복음을 땅끝까지 전하기 위하여 그들 전부를 바쳐 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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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박해의 종료.

 

1)기독교박해와 콘스탄틴의 전쟁역사.

 

갈레리우스가 사망한 후 로마제국은 리키니우스, 막시미누스다이어, 콘스탄틴, 막센티우스 등등에 의하여 4개로 분할 통치되었다. 이때에 리키니우스, 막시미누스다이어, 콘스탄틴 등등은 서로를 인정하면서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고 막센티우스를 반역자로 규정하여 적대했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완전하게 종료되어지는 역사적 순간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로마제국의 기독교 박해는 콘스탄틴에 의해서 종료되었다. 그리고 콘스탄틴에 의하여 로마 기독교가 국교로 공식화 되며 로마교회를 통하여 기독교의 세계화가 추진된다. 따라서 우리는 콘스탄틴에 대한 역사를 정리한다.

 

콘스탄틴은 기원274년에 다뉴브강 남쪽의 나이수스에서 출생했다. 부친은 디오클레시우스의 서로마 부황제였던 콘스탄티누스클로루스였고 어머니는 헬레나였다. 장남인 그는 부친이 293년에 서로마의 부황제가 되자 디오클레시우스의 황궁에서 비잔틴식 군주정치를 수업했다. 그는 부왕이 사망하자 측근들에 의해 서로마 제국의 아우구스투스황제 자리에 등극했다. 콘스탄틴은 로마제국의 맹주가 되려는 야망을 품고 있었다. 때문에 그는 자신이 통치하는 지역을 확장하면서 군부를 강화시켜 나갔다. 그는 특히 고울지방과 영국 일대에 튼튼한 기반을 조성했다. 그는 당시 만족<蠻族-오랑캐>로 알려진 민족들이 출몰하던 라인강유역의 방위를 강화하고 선정을 베풀어 그 지역 주민들로부터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다. 그는 원래 이상적이고 도덕적인 인격을 소유한 군주는 아니었으나 매우 현명하고 지혜로운 정치가였다. 그는 자신이 통치하는 지역의 주민들을 최대한으로 보살피어 그들로부터 절대적인 지지를 받는 대신 치외권에 속하는 자들에게는 혹독하고 잔인한 정복자였다. 당시에는 각종 경기장에서 격투기를 비롯한 각종 경기들이 유행하였는데 그것은 당시의 사람들이 격렬한 경기를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콘스탄틴은 사람들의 흥미를 만족하게 채워주기 위하여 수시로 경기를 열었는데 이때에 격투기, 검투기, 또는 짐승들과의 싸움에는 주로 전쟁포로나 노예들이 사용되었고 특히 만족출신의 전쟁포로들이 동원되었다. 역사가 들이 전하는바에 의하면 이때에 죽어간 만족 출신의 전쟁포로들의 숫자가 엄청났다고 하며 심지어는 짐승들마저도 사람을 죽이는 일에 싫증을 냈다고 한다. 특히 그는 노련하고 치밀한 군사 전문가로서 전쟁을 할 때에 철저한 사전 준비와 전략을 세워서 속전 속결적인 전투로 아군의 피해를 최대한으로 줄이는 대신에 최대한의 전과를 올리는 승리의 귀재였다. 콘스탄틴은 오랫동안 준비를 갖춘 후에 자신의 통치지역을 먼저 철저하게 방비하여 내란이나 반란을 사전 차단하면서 군대를 고울<갈리아>지역에 집결시켰다. 그리고 순식간에 알프스산을 넘어 막센티우스가 다스리는 로마로 진격했다. 이때에 투입된 군대는 전체 병력의4/1이었다. 그는 로마 전투에서 패할지라도 본국에서의 내란으로 인하여 더욱 큰 실패를 하지 않으려는 계산을 철저하게 하였다. 콘스탄틴과 막센티우스의 한판 승부는 매우 불가사의 한 의문적 전쟁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전쟁 역사가들의 연구조사에 의하면 그 싸움은 처음부터 막센티우스가 절대적으로 승리하게 되어 있었다. 로마는 자체적으로 완벽한 수비능력을 갖추고 있었고 콘스탄틴의 군대는 험준한 알프스산을 넘어 오느라 이미 지쳐 있었다. 뿐만 아니라 콘스탄틴의 군대는 후방 보급로가 알프스산을 넘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원할 한 보급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는 약점이 있었다. 콘스탄틴이 예상치 못한 때에 갑자기 공격한 것과 속전속결로 전쟁을 마무리하려고 하는 것에는 이와같은 약점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막센티우스가 철통같은 방어만 하고 기다리는 지구전으로 나갔으면 콘스탄틴은 스스로 무너지거나 후퇴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막센티우스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막센티우스는 콘스탄틴이 진격해 오자 즉시 군사회의를 소집했는데 이때에 의견이 엇갈렸다. 대부분의 장군들은 콘스탄틴이 저절로 지칠 때 까지 아우렐리안의 성벽<Aurelian`s wall>에서 기다리기만 하면 다급해진 콘스탄틴이 무리한 공격을 하게 될 것이라고 판단하여 방어 후 공격을 주장했다. 그러나 주술가들은 반대의 의견을 내 놓았다. 그들은 콘스탄틴군이 이미 지쳐있을 때 공격하여 그들을 패배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저들에게 휴식의 기회를 주면 피로가 회복되고 또한 후방에서 보급물자가 도착하면 저들의 사기가 올라 무찌를 수 없게 된다고 주장한 것이다. 아울러 그들은 자신들의 주술로 콘스탄틴군을 이길 수 있다고 호언장담<好言壯談>했다. 그들은 전쟁의 장소를 구체적으로 지정하여 티베르강의 밀비안<Tiber`s Milvian Bridge>다리가 승리의 격전장이 될 것이라고 까지 했다. 막센티우스는 당연히 군사 전문가들인 장군들의 의견을 따랐어야 하는데도 비 군사 전문가들인 주술사들의 의견을 따랐다. 한편 콘스탄틴은 결전이 있기 전 날에 하나님께로부터 계시를 받았다. 콘스탄틴이 하나님께 받은 계시는 여러 가지로 전승되어지기 때문에 과연 어떤 것이 정확한지 알 수 없다. 소아시아의 니코메디아<Nicomedia>에서 웅변학을 가리키던 라틴계의 변증가이며 기독교 역사가였던 락탄티우스<Lactantius>의 증언에 의하면 콘스탄틴은 꿈속에서 기독교의 상징을 병사들의 방패에 부착하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한다.

 

이때에 콘스탄틴은 꿈속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병사들의 방패와 군기에 승리를 보증하는 표식으로 헬라어 알파벳 중에”CHI<X>”RHO<P>를 결합한 장식무늬를 그려 넣으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한다. 그 문자는그리스도”<CHRIST>의 처음 두 문자 임으로 그 표식은 기독교를 상징하는 것이 될 수 있다. 315년에 로마에서 발행된 동전 화폐에 이 무늬가 새겨져 있으며 4세기 후반의 역사가들은 이 무늬를 라바룸<Labarum>이라고 명칭 하였다. <이러한 전설에 영향을 받은 일부 교회들은 XP를 기독교 상징의 문자로 사용하였고 이러한 관행은 오늘 날에도 일부 교회들에 의하여 지켜진다.>

 

한편 유세비우스의 증언에 의하면<이것으로 정복하리라>하는 단어들과 함께 공중에 그 깃발의 환상이 나타났다고 한다. 또 어떤 전승은 십자가 깃발을 앞세우고 전투하라는 음성이 있었다고도 한다. 콘스탄틴이 계시를 받게 된 사연에 대한 증언들도 다양하다. 어떤 사람은 콘스탄틴이 하나님께<이번 전쟁에서 승리하게 해주시면 기독교 핍박을 종식시키고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하겠다.>고 기도한 후에 계시를 받았다고 하고 또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서<네가 승리하면 기독교인이 되겠느냐?>라고 하문하시어 콘스탄틴이<제게 승리를 주시면 반드시 하나님의 종이 되겠나이다.>라고 대답한 후 계시를 받았다는 등 여러 가지가 있어서 과연 어떤 것이 진실인지 알 수가 없다. 콘스탄틴이 하나님께 받은 계시의 진위성을 우리가 확인할 수는 없으나 결과는 한가지로 전해진다. 콘스탄틴과 막센티우스의 전투는 로마근교 북방의 작은 마을인 삭사루브라<Saxca Rubra>에서 벌어졌다. 그들은 티베르강의 밀비안<Milvian>에서 최후의 격전을 벌였는데 이때에 막센티우스가 밀비안다리 위에서 싸우다가 강물 속으로 떨어져 빠져 죽었다. 이로서 콘스탄틴이 로마제국의 서부를 완전히 장악하였고 제국의 동부지역은 리키니우스와 막시미누스다이어가 공동으로 통치했다. 콘스탄틴은 로마제국의 서부를 장악한 뒤 동부를 공격하려는 야심을 감추고 리키니우스와 평화 동맹조약을 체결하였다. 콘스탄틴과 리키니우스는 밀란<Milan>에서 동맹 협정을 체결했는데 이때의 협정서 중에 기독교에 대한 조항이 들어 있다. 그 협정서에는 기독교에 대한 모든 탄압을 즉시 중지할 것과 몰수 된 교회와 개인들의 재산들을 환원한다는 조항이 들어있다. 역사가들은 그 협정조약을<밀란칙령-Edict of Milan-A.D.313>이라고 명칭 하였다. 역사가들 중에는 이 칙령을 관용의 칙령<Edict of Toleration>이라고 명칭하기도 하였는데 이 칙령은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선포한 것은 아니었고 종교적 양심에 의한 절대 신앙의 자유를 보장해 준 것으로서 기독교를 여타의 종교들과 대등한 위치에 올려놓은 것이었다.<밀라노 칙령은 분실되었음으로 현재에는 존재하지 않으나 당시에 니코메디아 관리들에게 기독교에 관한 세부규정을 설명한 리키니우스황제의 포고문은 남아있다.>

 

그러나 막시미누스다이어는 갈레리우스의 칙령에 따른 기독교 박해를 계속했다. 콘스탄틴은 동부를 공격하고자 하는 야심을 철저하게 은폐하면서 리키니우스와 막시미누스다이어가 전쟁을 하도록 은밀하게 유도했다. 콘스탄틴은 리키니우스가 안심할 수 있도록 자신의 사촌 여동생 콘스탄스를 리키니우스와 결혼시켰다. 콘스탄틴은 마지막 결전에 대비하여 전력을 비축하면서 여러 경로를 통하여 그들이 전쟁을 하도록 계략을 꾸몄다. 콘스탄틴의 계략에 휘말린 그들은 드디어 전쟁에 돌입했다. 전쟁은 막시미누스다이어가 먼저 시작했다. 콘스탄틴과 리키니우스의 동맹에 불안을 느낀 막시미누스는리키니우스가 밀란에서 콘스탄틴과 함께 있을 때에 리키니우스의 영토에 침입하여 비잔티움을 함락시켰다. 그러자 리키니우스가 즉시 반격하여 막시미누스다이어를 패퇴시켰다. 막시미누스다이어는 도주했고 얼마 후 사망했다. 이로서 로마제국은 리키니우스와 콘스탄틴이 동서를 양분하여 통치하게 되었다. 리키니우스는 이탈리아 전체와 이집트를 통치했고 콘스탄틴은 서부유럽과 북아프리카를 통치했다. 사람들은 두 황제들이 사촌 매부 처남 관계였기 때문에 이제 더 이상의 전쟁은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두 황제는 다 함께 제국의 유일한 황제가 되고자 하는 야망을 불태우고 있었다. 두 황제는 전력을 정비하고 다듬으면서 호심탐탐 기회만을 엿보고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전쟁의 불꽃이 튀었다. 콘스탄틴을 암살하려는 음모가 발각되었는데 조사결과 배후에 리키니우스의 친척이 있었음이 드러났다. 그는 도망하여 리키니우스에게로 갔고 콘스탄틴은 리키니우스에게 그를 송환 할 것과 납득할 수 있는 해명을 요구했다. 그러나 리키니우스는 그것을 거부하고 전쟁을 선포했다. 이미 전쟁의 구실을 찾고 있었던 콘스탄틴은 즉시 군대를 동원하여 리키니우스를 공격했다. 두 차례의 격전 끝에 콘스탄틴이 비잔티움을 정복했다. 비잔티움을 빼앗기면 아시아와의 교통이 두절되어 보급로가 차단될 것을 두려워한 리키니우스는 비잔티움을 돌려받는 대신에 유럽영토 대부분을 콘스탄틴에게 양도하기로 하고 평화협정을 맺었다. A.D.314년의 일이었다. 그 후 두 황제 사이의 권력 투쟁은 한 동안 소강상태에 들어갔고 제국은 평안했다. 그러나 A.D.322년에 이르러 최후의 승부를 판가름하게 되는 전쟁이 일어났다. 콘스탄틴은 야만족들을 토벌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다뉴브강을 건너 리키니우스의 영토를 침략했다. 리키니우스는 이것을 고의적인 도발로 간주하고 즉시 대항했다. 이때에 콘스탄틴의 군대병력은 리키니우스 군대병력에 비해서 극히 소수였다. 그러나 전투는 콘스탄틴의 승리로 끝났다. 이때의 전투에서 리키니우스의 군대가 콘스탄틴의 군대보다 훨씬 더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패전한 것에 대하여 당시의 역사가들이 매우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전해준다. 이때에 도콘스탄틴군은 기독교를 상징하는 깃발들을 앞세우고 전투에 임했는데 리키니우스의 군대가 그 깃발을 몹시 두려워하여 전의를 상실하게 되자 리키니우스는 병사들에게 그 깃발을 바라보지 말고 고개를 숙인 채 전투에 임하라고 명령했다. 그리하여 리키니우스군은 모두 고개를 숙이고 전투에 임했으므로 전투다운 전투 한번 못해 보고 패전하였다는 것이다. 또 어떤 역사가는 리키니우스군이 콘스탄틴군의 깃발을 보면 아예 그 자리에 얼어붙어 버림으로 전투가 매우 싱겁게 끝났다고도 한다. 그러나 또 다른 역사가는 당시의 전투가 매우 치열했으나 수적인 우세에도 불구하고 리키니우스가 패했으며 패배 이유는 깃발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전략과 전술적 차이 때문이었다고 전한다. 리키니우스가 많은 병력으로 소수의 콘스탄틴군을 포위하여 활과 창으로 공격했으면 충분하게 이길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안일하게 맞대결 하여 칼로 전투를 벌였기 때문에 정예군인 콘스탄틴군에게 패했다는 것이다.

 

리키니우스는 비잔티움으로 패주하였으나 콘스탄틴의 추격을 견디지 못하고 바다를 건너 소아시아 지방으로 도주했다. 그러나 계속되는 콘스탄틴의 추격으로 연전연패 하면서 최후의 순간을 맞이하였다. 이때에 콘스탄스와 니코메디아<Nicomedia>의 감독 유세비우스<Eusebius>가 리키니우스의 구명을 탄원했다. 콘스탄틴은 리키니우스가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나는 조건으로 그의 목숨을 살려주었다. 이로서 드디어 전쟁은 끝났고 콘스탄틴은 전 로마제국의 유일한 황제가 되었다.

 

2)콘스탄틴에 대한 역사적 평가.

 

콘스탄틴에 대한 평가는 역사가들의 역사적 평가 기준에 따라 각기 다르다. 그 중에 특히 기독교 역사학자들과 기독교를 거부하는 역사학자들 사이의 평가가 첨예한 대립을 이룬다. 콘스탄틴에 대한 역사학자들의 평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기독교 역사학자들의 평가.

 

기독교 역사학자들은 콘스탄틴을 훌륭한 기독교인으로 추대한다. 그들은 심지어 콘스탄틴을 신앙적 영웅 황제로 추대한다. 그들이 콘스탄틴을 신앙적 영웅 황제로 추대하는 이유는 그를 통하여 로마제국의 기독교 박해가 사실상 종료되었고 기독교가 제국의 국교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콘스탄틴이 밀비안전투 이전에 하나님께 계시를 받았을 때 회심하여 기독교인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모든 전투에 하나님의 군대를 이끌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출전하였으며 하나님의 이름으로 승리하였다고 주장한다. 저들은 특히 밀비안다리에서 막센티우스를 패퇴시킨 것과 아드리아노플에서 리키니우스를 패퇴시킨 것을 하나님의 군대의 승리라고 말하며 따라서 콘스탄틴을<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황제><하나님의 황제><기독교의 수호황제>라고 명칭했다.

 

(2)일반 역사학자들의 평가.

 

기독교 역사학자들이 콘스탄틴을 영웅시 하는 것과는 달리 일반적 역사학자들은 콘스탄틴을 종교인<특히 기독교인>으로 보지 않고 노련하고 출중한 정치적 역량을 가진 탁월한 정치가로 본다. 그들은 콘스탄틴이 치밀한 계산적 정치 책략에 의한 고도의 정치 기술을 발휘하여 제국을 통치했다고 본다. 저들이 그러한 주장을 하는 이유는 콘스탄틴이 추구한 종교적 정치 노선이다. 콘스탄틴은 기독교 박해를 종식시킴과 동시에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까지 추대했음에도 불구하고 퇴위하기 직전까지 여전히 로마의 전통적인 종교를 인정했고 그 중에<정복되지 않는 태양신>을 가문적 수호신으로 받들어 섬겼으며 심지어는 이방종교들의 제사장 역할까지 했다. 뿐만 아니라 콘스탄틴은 비잔티움을 새로운 로마의 수도로 건설한 후에 그곳에 기독교적 유물들만 건설하거나 옮겨 놓은 것이 아니라 제국 전체에 산재해 있는 모든 종교들의 각종 종교적 유물들을 거의 다 옮겨놓았다. 때문에 일반 역사학자들은 콘스탄틴은 기독교인이나 종교인으로서가 아니라 다만 정치가로서 모든 종교를 공평하게 수용하고 적절하게 아우르는 정책을 수용한 정치가 였다고 보는 것이다.

 

(3)기독교에 적대적인 역사학자들의 평가.

 

기독교에 적대적인 역사학자들은 콘스탄틴을 기회주의자이며 교활한 거짓말쟁이 사기꾼이라고 평가한다. 저들은 콘스탄틴이 밀비안 전투에서 막센티우스에게 승리할 때와 아드리아노플에서 리키니우스를 패퇴시킨 것은 기독교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서 승리한 것이 아니라 모두가 계산된 사기극에 의한 승리라고 주장한다. 즉 꿈속에서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한 것과 환상 속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는 것은 모두가 치밀하게 계산된 거짓말이고 사기라는 것이다. 저들의 주장에 의하면 콘스타틴은 당시에 이미 기독교인들에 대한 개념이 옛날과는 많이 달라져서 사람들 중에는 기독교의 하나님은 정말로 살아계신 하나님이라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는 사실과 기독교인들을 박해한 황제들의 말로가 하나같이 비참하였고 특히 전임 아우구스투스황제였던 디오클레시아와 갈레리우스가 비참한 종말을 고했다는 점에 착안하여 자신이 직접적으로 기독교의 하나님께 계시 받았다고 거짓 유포하고 기독교를 상징하는 깃발들을 만들어 전투대열의 선봉에 세움으로서 적군의 사기를 꺾어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을 하는 자들은 막센티우스와 리키니우스를 불운한 황제로 보았고 특히 리키니우스를 더욱 불운한 황제로 동정하였다. 저들의 주장에도 일리가 있다. 사실상 막센티우스나 리키니우스는 특별히 기독교를 탄압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크게 학정을 베풀지는 않았다. 리키니우스가 콘스탄틴과 대결하기 직전에 한때 기독교를 탄압하였지만 그것은 고의적인 탄압이 아니라 기독교인들이 그를 배척했기 때문이었다. 당시에 리키니우스 통치 하의 기독교는 여러분파로 분열되어 있었고 그들의 분파적 갈등과 다툼은 사회적 질서를 파괴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리키니우스는 할 수 없이 친위대를 동원하여 기독교의 종교적 갈등을 진압했는데 이때에 기독교인들은 그것을 기독교에 대한 탄압이라고 생각했다. 때문에 그들은 리키니우스를 배척하고 콘스탄틴을 지지했다. 이에 리키니우스는 콘스탄틴 지지자들을 색출하여 처벌했는데 이로 인하여 콘스탄틴 지지자들은 점점 늘어가는 반면에 군대의 사기는 점점 저하되었고 때문에 결국은 패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4)객관적차원에서의 평가.

 

콘스탄틴에 대한 객관적 역사학자들에 의하면 콘스탄틴은 개인의 권력에만 집착했던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로마제국의 영광을 복원하기 위해 모든 것을 바친 사람이었다. 그는 로마제국의 영광을 위하여 원로원과도 과감히 맞섰고 심지어는 자신의 아들조차도 제거했던 사람이었다. 그는 과거의 데키우스나 디오클레시안 황제들처럼 로마의 영광을 재현하려 했지만 방법에 있어서는 그들과 달랐다. 과거의 황제들은 로마의 전통적 종교 위에 로마의 영광을 세우려고 했지만 콘스탄틴은 기독교의 토대 위에 로마의 영광을 복원하려 하였다. 콘스탄틴의 이러한 정책은 원로원을 비롯한 귀족들의 결사적인 반대를 받았고 심지어는 콘스탄틴을 제거하고 새로운 황제를 옹립하려는 음모까지 있을 정도로 심각한 반대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이에 굴복하지 않고 힘으로 원로원을 제압하였으며 황제퇴위 사건에 연루된 자신의 큰 아들 크리스푸스<Crispus-리키니우스와의 전쟁에서 함대 사령관이었다>까지도 과감히 처형하였다. 때문에 객관적 역사학자들은 콘스탄틴을 로마를 사랑한 아름다운 황제로 평가한다.

 

(5)우리의 평가.

 

역사란 보는 사람의 견해에 의하여 얼마던지 다르게 평가될 수 있다. 하나의 사건을 어떠한 개념에서 어떠한 눈으로 보는가? 하는 것에 따라서 반역이 혁명이 될 수도 있고, 반대로 혁명이 반란이 될 수도 있다. 충신이 역적이 될 수도 있고 역적이 충신이 될 수도 있으며 간적이 영웅이 될 수도 있고 영웅이 간적이 될 수도 있다. 우리는 당시의 상황을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다만 전승들에 의하여 당시의 상황들 살펴보게 될 뿐이다. 때문에 과연 어떠한 견해가 바른 견해인지를 알 수 없으며 어떠한 상황이 사실적인 역사인지를 함부로 정립할 수도 없다. 따라서 콘스탄틴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내린다는 것은 참으로 조심스러운 일이다. 더구나 기독교인의 한 사람으로서 기독교역사에 많은 아름다운 역사를 제공한 콘스탄틴을 평가한다는 것은 자칫하면 편파적인 것이 될 수 있기에 더욱 조심스럽다. 따라서 그 점을 미리 밝히면서 기독교 박해역사를 종식시킨 콘스탄틴과 당시의 기독교와 당시의 로마의 상황을 역사적 차원에서 조명한다. 아울러 다음부터 기록하는 것들은 모두가 개인적인 차원에서의 추론일 뿐 그것이 정확한 실제적 역사는 아니라는 사실을 미리 밝혀둔다.

 

*우리는 당시의 상황들과 그의 정치적 결과들을 근거로 하여 콘스탄틴을 노련하고 탁월한 정치가로 인정한다. 그리고 그의 야심 찬 로마영광 재현의 꿈도 사실로 인정한다. 아울러 우리는 그가 막센티우스와의 전투전에 받았다는 계시도 인정한다. 역사가들의 전승들이 서로 약간씩 다르기는 하지만 우리는 오히려 그 모든 것들을 다 함께 인정한다. 왜냐하면 계시의 내용이 똑같아야 한다는 이유도 없지만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의 계시를 다양하게 내려주셨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한편 우리는 그가 분명한 기독교인이었음을 확신한다. 그가 기독교인이 된 것은 밀비안 전투에서 였을 것이다. 그 이전의 콘스탄틴은 다만 로마제국의 맹주가 되어 로마제국을 과거의 화려하고 웅장하고 강하고 영광스러운 로마제국이 되게 하려는 야심 찬 정치가였다. 그가 야만족 포로들을 경기장에서 무참하게 죽도록 한 것은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보면 분명 악한 행동이었다. 그러나 당시 로마제국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은 대로마제국의 황제로서 비난받을 수 없는 통치적 행위에 속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콘스탄틴이 밀비안 전투를 통하여 기독교인이 되었을 때부터 그에게는 새로운 삶이 있었을 것으로 본다. 그가 죽음에 임박할 때까지 세례를 받지 않은 점과 이방 신상들을 섬긴 것은 그가 기독교인이 아니기 때문이거나 또는 기독교인이 되는 것을 망서렸다거나 또는 계산된 정치적 계략에 의한 양다리 걸치기식의 비열한 태도는 아니었을 것으로 본다. 우리는 그가 기독교인이 되었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그의 삶이 인격적인 기독교인의 삶이 되어야한다고 생각해서는 않된다. 그가 비록 회심하고 기독교인이 되었다 할지라도 로마의 귀족으로서 수십 년간 생활해 온 그가 하루아침에 성경이 요구하는 차원의 기독교인이 될 수는 없는 것이며 뿐만 아니라 대로마제국의 황제인 그가 순식간에 전형적인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당시의 그의 신앙적 삶에 대하여 많은 욕심을 내서는 않된다. 또한 우리는 당시의 로마제국과 기독교의 상반된 입장을 역사학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로마제국은 세계를 호령하는 대제국이었던 반면에 기독교는 아직 로마제국에 어떤 영향을 줄 수 있는 아무런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경제적, 군사적, 정치적, 분야들은 전통적인 로마의 귀족들에게 편중되어 있었고 따라서 황제는 그들을 무시할 수 없었으며 로마에는 또한 수많은 종교들이 산재해 있었기 때문에 종교적인 배려도 당연히 요구되어지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황제가 기독교라는 어느 한편에 치중하는 정치적 노선을 택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따라서 그가 말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서 세례를 받고 정식 기독교인이 되었다는 사실과 그가 이방종교들과 계속하여 꾸준히 교류를 가졌다는 것을 당연히 이해해야 한다. 우리는 오히려 그때에 콘스탄틴이 오직 기독교만을 주장하지 않고 보편적인 종교정책을 펼친 것에 대하여 그의 탁월한 지혜를 칭찬한다. 만약에 그가 오직 기독교만을 주장하여 기독교 이외의 종교들을 탄압했다거나 또는 비잔틴 건설을 오직 기독적인 도시로 건설하여 다른 종교들의 접근을 일제히 차단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것은 분명 콘스탄틴의 몰락을 가져다주었을 것이며 더욱 극심한 기독교 탄압의 역사를 재현하는 결과를 만들었을 것이다. 콘스탄틴이 기독교인의 입장에서 먼 장래를 내다보는 지혜로움으로 그러한 정책을 펼쳤는지 아니면 다만 정치적인 차원에서 그렇게 했는지를 우리는 함부로 말할 수 없다. 그러나 그의 통치 방법은 분명히 기독교 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콘스탄틴의 통치 하에서 기독교는 다방면에 걸친 발전을 이루었던 것이다.

 

4.로마제국의 박해와 하나님의 섭리역사.

 

많은 역사 학자들은 로마제국에 의한 기독교 박해를 보면서 많은 의혹을 품었다. 특히 기독교역사학자들은기독교에대한로마제국의박해를보면서참담한심정을토하였다.

 

저들의 공통적 의문은 참으로 하나님은 살아 계신가? 하는 것과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다면 어찌하여 저토록 오랜, 그리고 극심한 박해에도 불구하시고 하나님께서 여전히 침묵하시는가? 하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살아 계시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인들이 저토록 오랫동안 고통을 겪는다는 것이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았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하거나 불신하게 되었고 한편으로는 기독교인들이 불쌍하고 어리석어 보였다. 한편 사람들은 또 다른 차원에서 기독교에 대한 의문을 갖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박해를 전혀 돌아보지 않는 하나님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리지 아니하고 여전히 섬기는 기독교인들을 이해 할 수 없었다. 특히 경기장에서 불에 타 죽거나 맹수들에게 찢기워 죽어가면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밝고 평안하고 의연한 자세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기독교인들이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토록 길고 극심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기독교가 멸절되지 않고 오히려 더욱 확장되어 가는 것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사실상 이러한 의문은 기독교인이나 비기독교인이나 모두를 막론하고 박해를 받던 당시의 사람들이나 그것을 역사 속에서 보고 알게된 대부분의 모든 사람들이 갖는 공통된 의문이었다. 따라서 우리는 신학자로서 이러한 의문에 대한 답을 시원하게 풀어 주어야할 책임과 의무를 갖는다.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정립한다.

 

1)하나님의 주권적 섭리.

 

기독교에 대한 로마제국의 박해는 기독교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를 증명한다. 로마제국의 박해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급속하게 발전하는 기독교의 역사는 일반상식으로는 절대로 이해될 수 없는 상황이다. 일반적인 상식대로라면 박해가 극심하면 극심할수록 기독교는 움츠러들어야 하고 기독교 성도들의 숫자도 줄어 들어야한다. 기독교인들에 대한 가공할만한 박해를 보면서 기독교인이 되려는 사람이 있을 수도 없고 죽음과 고통을 이겨 내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이며 따라서 기존의 기독교 성도들 가운데서도 여러 가지 이유에 의하여 기독교를 포기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기 때문에 기독교인의 숫자가 자연적으로 줄어들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참으로 불가사의한 것은 그토록 심한 박해 속에서도 기독교인의 숫자가 오히려 증가되며 뿐만 아니라 박해가 심하면 심할수록 기독교가 오히려 확산 되어갔다.

 

그러나 그것이 기독교의 원리이다. 기독교의 발전이나 기독교인들의 증가는 기독교에 대한 박해에 어떤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에 대한 박해로 인하여 기독교의 발전이 영향을 받아 침체 되거나 또는 답보적 상태를 갖는 것이 아니며 반대로 박해에 대한 상대적인 자극을 받아 기독교 전체 또는 기독교 개인들의 신앙이 성장하거나 분투하는 것도 아니다. 기독교의 발전과 기독교인들의 신앙은 박해를 비롯한 외부적인 것들에 전혀 영향 받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에 의하여 진군된다. 하나님께서 이미 선택한 자들은 박해와 전혀 관계없이 하나님께서 정한 때가 되면 하나님께 나오게 되어있다.

 

때문에 로마제국의 그토록 극심한 박해와 관계없이 하나님의 백성들은 정해진 때에 하나님 앞에 나왔고 기독교는 유유히 그 역사를 진행해 나갔던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 역사는 당시의 기독교역사를 통하여 증명 받는다. 그토록 극심한 박해 속에서도 복음의 특전사들은 로마 전 지역을 비롯한 세계 전 지역에 교회들을 설립해 나가면서 하나님의 진리를 가르치고 전파했다. 그리고 진리의 기록자들은 자신들이 보고 들은 하나님의 진리를 기록하였고 아울러 복음전파의 현장들에 있었던 크고 작은 사건들을 하나하나 세세하게 기록해 나갔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각종 철학 사상가들과 사이비이단들을 비롯한 비진리자들의 끊임없는 교리적 공격을 진리로 변증하는 가운데 기독교의 진리, 기독교의 교리를 체계적으로 다듬어 정리해 나갔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정하신 섭리에 따라 훗날에 성경이 완성되고 정립되었으며 또한 조직신학이 완성되고 정립되었으며 하나님의 기독교역사가 기록으로 남겨져 후세에 전승되는 역사를 이룩해 나갔던 것이다.

 

어떤 역사가들은 하나님께서는 로마제국의 박해 없이도 주권적으로 기독교역사를 확장하고 진군 시킬 수 있었지 않느냐? 라는 이의를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 로마제국의 박해 없이도 하나님의 주권에 의하여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에 의하여 얼마든지 기독교역사를 발전시킬 수 있었을 것 아니냐? 하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섭리적 특성과 또한 인류역사의 특성을 이해하지 못함에서 비롯되어진 우문<愚問>이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실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하게 정립해야 할 것이 있다. 먼저 하나님의 섭리역사에 대한 문제이다. 하나님께서는 역사를 진행시키심에 있어서 주로 두 가지의 방법을 사용하신다. 하나는 의도적, 고의적 차원의 주권적 역사를 창출하시는 것이며 다른 또 하나는 허용적 차원에서 인간들의 역사를 주권적으로 적용하시는 것이다. 그 점에 있어서 기독교역사는 대부분 의도적, 고의적, 주권인 반면에 일반역사는 대부분 허용적 주권이다. 물론 기독교 역사에도 허용적 주권이 적용되며 일반 역사에도 고의적, 의도적, 주권이 적용된다. 그러나 특별한 역사를 제외한 대부분의 경우 기독교 역사는 대부분 의도적, 고의적, 주권인 반면에 일반역사는 대부분 허용적 주권이다. 이와같은 차원에서 볼 때에 로마제국의 기독교 박해는 하나님께서 의도적, 고의적으로 그것을 창출하신 것이 아니라 다만 필요에 의하여 그것을 허용하신 것이다. 즉 로마제국의 기독교 박해는 로마제국 당국자들이 로마를 위하여 일으킨 사건들이었고 유대인들의 박해나 로마시민들 및 이방종교인들의 박해 역시 그들의 입장을 위하여 일으킨 사건들이었다. 반면에 하나님께서는 기독교의 발전적 진군을 위한 차원에서 그것들을 허용하셨고 적용하셨다.

 

2)기독교의 발전.

 

로마제국의 기독교 박해는 기독교인 개인들에게는 참아내기 어려운 고통들을 주었지만 결국은 하나님기독교의 역사적 발전을 크게 도와주는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하였다. 기독교를 박해한 로마제국의 황제들은 물론 네로와 같은 정신병자도 있었지만 제국의 입장에서 보면 대부분 정상적인 황제들이었고 개중에는 훌륭한 현제<賢帝>들도 있었다.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마르쿠스아우렐리우스 등등의 황제들은 로마제국의 입장에서는<5현제>들에 포함되는 훌륭하고 영민한 황제들이었다. 또한 황제들의 박해도 개인적인 유익을 위한 박해나 사적인 감정을 위한 박해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로마제국의 영광과 평안을 위한 정치적, 종교적, 차원에 의한 박해들이었다. 로마제국을 통치하는 황제의 입장에서 볼 때에 기독교는 다양한 차원에서 암적 존재였기 때문에 그들은 로마제국을 위해서 기독교를 탄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로마의 기독교박해는 기독교를 멸절시키기 보다는 오히려 기독교를 로마제국의 전역과 나아가서는 세계 전역으로 확산시키는 결과를 만들어 주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신앙의 박해를 피하기 위하여 로마를 떠나 로마제국의 각 지역과 세계의 전역으로 흩어지면서 가는 곳마다 기독교를 전파하고 교회들을 세워 나감으로서 기독교는 자연적으로 로마제국 전 지역화, 세계 전 지역화를 이루었던 것이다.

 

따라서 로마제국의 입장에 의한 기독교박해는 일반 역사적 차원에서는 로마제국을 위한 필연적인 것이었지만 그것이 바로 기독교역사의 진군을 크게 추진하고 후원하는 절대적인 요소가 되었다.

 

한편 로마의 기독교 박해가 로마제국 전체에서 행하여졌지만 로마시내의 박해는 극심했던 반면에 로마시외 각 지방의 박해는 그다지 심하지 않았으며 로마시로부터 멀어질수록 박해의 정도가 상대적으로 약했다. 이러한 상황 역시 하나님의 섭리에 따른 것이었다. 만약에 로마제국이 기독교를 박해하지 않고 오히려 보호하고 장려하고 확장했더라면 어떠한 결과가 나왔을까? 물론 그러한 경우에도 기독교의 확장과 발전은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하에서 당연히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었을 때에 기독교가 확장되고 발전하는 속도와 범위는 박해로 인한 확장과 발전 속도와 범위보다 상대적으로 더디고 제한적인 것이 될 것이다. 인간들의 기본적인 특성은 대체적으로 어려움 속에서는 더욱 진취적이고 전투적인 반면에 평안할 때에는 오히려 누리고 즐기며 안주<安住>하려고 한다. 그리고 특히 인간의 종교적 특성은 위기적 일 때에는 진리를 위하여 투쟁하고 희생하는 반면에 평안할 때에는 오히려 비진리에 빠져 안주하고자한다. 따라서 만약에 로마제국이 기독교를 보호하고 후원하는 입장이었다면 기독교의 세계화는 그 속도에 있어서 매우 완만하였을 뿐만 아니라 내용에 있어서도 비진리적인 것으로서의 확산이 되었을 것이다. , 수많은 비진리적인 교리들의 난무 속에서 수많은 분파를 이루는 가운데 기독교 아닌 기독교들로 분산되어 졌을 것이다. 그것은 기독교역사의 현장들이 증명해준다. 기독교가 박해 하에 있을 때에도 물론 비진리적 교리들과 분파와 분당들이 난무하였지만 그것은 미약하고 지엽적인 것으로서 인간들이 사는 세상이라면 어떤 영역 어떤 사회에서도 언제나 있게 되는 흔하고 보편적인 현실들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기독교박해가 끝나고 신앙적 평안이 허용되었을 때를 기점으로 하여 전개되어진 기독교역사를 보면 참으로 안타까움과 분노를 금할 길이 없다. 수많은 기독교인들의 참담한 신앙적 순교위에 세워진 기독교역사는 그때를 기점으로 하여 타락되고 변질되어져 갔으며 수많은 비진리적 교리들의 출현 속에서 수많은 분당과 분파로 갈라지고 흩어지는 역사를 계속하였다. 그리고 그러한 부끄럽고 안타까운 역사는 지금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3)박해받은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께서 기독교의 확장과 발전을 위하여 로마제국의 박해를 허용하셨다. 라는 우리의 주장에 대하여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가혹하신 하나님이 아니신가? 라는 질문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로마제국의 박해 때에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견뎌내기 힘든 고통과 수난을 당했으며 심지어는 비통하고 비참하게 죽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또한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선포한다. 로마제국의 박해로 인하여 고통 받은 것은 시간적으로 볼 때에 아무리 길어도 잠시의 일이며 최고의 고통은 고문이나 형벌 등등에 의한 육체적 고통과 죽음이라고 할 때에 그것을 상태적인 차원에서 말한다고 할지라도 역시 한시적인 것이지 영원한 것은 아니다. 반면에 하나님께서는 당시를 비롯한 기독교인들이<주를 위하여 받는 고통과 핍박>에 대하여 참으로 많고 영원하고 아름다운 최상의 상급과 면류관들을 선물로 하사 하신다. 성경은 도처에서<주를 위하여 받는 고통과 핍박>을 받은 자들에게 내리시는 하나님의 상급들과 면류관들을 선포한다. 따라서 그들은 잠시의 고난과 고통에 대하여 계산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로 보상 받았음으로 오히려 하나님께 무한하고 영원한 감사와 찬송을 드려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상급과 면류관의 선물이 없었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최소한 네 가지 기본적인 이유에서 하나님께 무한한 감사의 찬양과 경배를 영원히 드려야한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원하고 완전한 최상의 하나님나라 국민으로 세워 주셨으며

 

둘째는 창조주하나님, 통치주하나님, 섭리주하나님, 심판주하나님을 아바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게 하셨으며

 

셋째는 하나님을 위하여 일할 수 있는 하나님의 종으로 불러 세워주셨으며

 

넷째는 이 모든 것들을 이루어 주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 내려오시어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그와 같은 고난을 겪으시었는데 우리의 고통과 고난이 무엇이 그리 대단하다고 단 한마디 말이라도 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다만 말로나 글로서는 표현조차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에 다만 무한히 그리고 영원히 감사하고 찬송해야 할 것이다.

 

4)박해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

 

로마제국의 박해에 동원된 황제를 비롯한 모든 자들은 당연히 그리고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징계와 심판을 받았다. 역사가 그것을 증명하거니와 기독교역사가 중의 한 사람이었던 락탄티우스<Lactantius>는 기독교를 박해한 황제들의 비참한 말로를 기록으로 남기면서 갈레리우스황제의 회개가<너무 늦었다>고 지적했다. 기독교를 박해한 황제들을 비롯한 모든 자들의 비참한 말로는 하나님의 섭리역사에 또 하나의 역사적 의미를 선포한다. , 누구든지 하나님의 섭리역사에 반대하고 저항하는 자들은 그에 대한 댓가를 내생<來生>에서도 당연히 받게 될 것이지만 그전에 이미 금생<今生>에서도 필연적으로 받는다는 것이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네로, 마르쿠스아우렐리우스, 셉티미우스세베루스, 갈레리우스 등등의 최후이다. 네로는 신하의 칼에 엎어져 자살했고 마르쿠스아우렐리우스는 아들에 의하여 암살되었으며 셉티미우스세베루스는 황후와 함께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였고 갈레리우스 역시 중병에 걸려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그리고 그 외의 황제들도 모두 한결같이 비참한 말로<末路>를 당했다. 그러나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기독교 역사를 통하여 그와같은 불변의 진리를 보고 들어 알고 있는 자들<심지어는 기독교 지도자들>중에도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종들을 핍박하고 탄압하는 자들이 부지기수로 있다는 것이다. 물론 저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종들을 결코 핍박하고 탄압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며 따라서 그와같은 자신의 행위가 악한 것이 아니라고 믿고 있을 것이다. 저들은 오히려 자신에게 순종하지 않는 자들이 하나님의 종에게 감히 순종하지 않는 악한 자들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핍박과 탄압의 양상은 달라도 하나님의 종, 하나님의 자녀들을 괴롭고 슬프게 하는 자들은 곧 하나님의 섭리를 거부하고 반대한 악한자들, 핍박자들, 탄압자들, 박해자들임을 명심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자들은 회개하지 않는 한 하나님의 심판을 면하지 못 할 것이며 내세의 심판뿐만 아니라 현세에서의 심판도 당연히 받게 될 것이다.

 

5)사단의 심정.

 

로마제국에 의한 기독교 박해의 역사를 마무리 지으면서 우리는 다시 한번 불쌍하고 가엾은 사단의 처지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미 지나간 역사적 이야기들이지만 로마제국의 기독교 박해가 완전히 종료된 순간 사단은 얼마나 처참한 심정이었을까? 초기 기독교에 무자비한 박해들이 진행되었던 배후에는 사단의 극성스러운 활약이 있었음을 우리는 안다. 사단은 아마도 박해의 극심한 상황을 일일이 점검하면서<이제 거의 끝나간다><조금만 더>를 연발했을 것이고 한편으로는<이번만은 절대로>라는 각오를 새롭게 하면서 고군분투 했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이 끝나고 기독교승리의 팡파레가 온 천하에 울려 퍼질 때에 사단, 그는 어떠한 모습, 어떠한 심정이었을까? 목숨 걸고 고군분투한 3백여 년의 사투에 온 몸은 만신창이가 되었을 것이고 박해에 총 동원된 졸개들은<이번에도 또?>라는 한심한 눈으로 사단을 바라다보았을 것이 아니겠는가? 얼마나 참담한 심정이었을까? 연전연패, 단 한번도 이겨보지 못한 하나님과의 승부, 사단은 어쩌면 졸개들 앞에 부끄럽고 창피하여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 숨고 싶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 좌절감과 무력감에 젖어 차라리 자살이라도 해서 그 처참한 일생을 마감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찌하랴? 사단은 영적 존재라 하나님께서 조치하여 주시지 아니하면 죽을 수도 없는 존재인 것을.....! 가엾은 사단이여! 불쌍한 사단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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