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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박해의 역사. (10대 박해)

 

로마제국의 기독교박해는 주로 황제들의 주도 하에 일어났는바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을 요약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네로<Lucius Domitius Ahenobar-37-68.>의 박해.

 

기독교에 대한 로마의 박해 서곡은 네로황제<54-68재위>에 의하여 울려 퍼졌다.

 

네로의 본명은 루키우스도미티우스아헤노바르부스<Lucius Domitius Ahenobar-37-68>로서 클라우디우스황제의 양자였다. 클라우디우스황제는 가이우스도미티우스아헤노바루스의 부인이었던 아그리피나를 두 번째 부인으로 맞아 들였는데 네로는 가이우스도미티우스아헤노바루스와 아그리피나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었다. 네로의 어머니인 그리피나는 황제의 근위병들을 매수하여 남편인 클라우디우스황제를 독살하고 17세의 네로를 황제로 추대했다. 네로는 즉위 후 초기5년 동안은 근위대 장관이었던 브루루스와 철학자이며 스승이었던 세네카의 후원을 받아 훌륭하게 황제의 직무를 행사했다. 그는 해방된 노예들을 정부 기관에 등용했고 세금을 감면했으며 매관매직을 근절시키고 원로원의 의견을 존중하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그러나 네로는 여자를 좋아하고 술과 가무를 즐겨하게 되면서 타락하기 시작했다. 네로는 점점 잔인하고 폭력적인 사람이 되어가면서 재위 5년째인 58년부터는 국정을 돌보지 않고 문란한 생활에 빠져들었다. 네로는 포페아사바나를 아내로 맞이하기 위하여 의붓 동생인 브리타니쿠스와 황후인 옥타비아와 어머니까지 살해했고 나중에는 포페아사바나마져 살해했다. 네로는 특히 근위대장관인 브루루스가 병사<病死>하고 세네카마저 은퇴하자 거의 반미치광이가 되어갔다. 네로는 헬라문화에 크게 심취하여 헬라의 체육, 예술을 로마에 도입했고 스스로 예술가를 자처하여 직접 무대에 섰다. 그는 그리스를 여행하면서 4대제전<四大祭典>을 개최하고 직접 경기에 출전했다. 네로는 당시의 로마시를 없애고 헬라니즘적인 예술적 로마시를 건축하겠다는 야심에 불타 64년에 로마시 전체에 불을 질렀다. 이때에 네로는 로마로부터 수마일 떨어진 안티움궁전의 옥상에서 시인의 복장을 하고 칠현금을 뜯으며<트로이의 파괴>를 노래했다. 로마의 화재는 무려7일간이나 계속되었고 불길이 잡힌 뒤에도 3일간이나 계속되었다. 이때에 로마시의 14구역 중 10구역이 화재로인 하여 소실되었다. 로마의 화재가 진압되는 과정에서 네로가 헬라니즘적인 새로운 로마시를 건설하기 위하여 계획적으로 방화했다는 소문이 나돌았고, 그가 시적 감흥을 얻기 위하여 방화했다는 소문도 나돌았다. 로마 시민들은 분노하였고 네로의 궁전으로 달려갔다. 범시민적 폭동이 일어나게 되자 네로는 당황하여 그것을 부인했으나 시민들은 납득하지 않았다. 이때에 네로의 측근들 중에 기독교인들을 증오하는 자들이 계책을 내 놓았다. 그것은 방화의 책임을 기독교인들에게 뒤집어씌우자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네로는 로마의 화재가 기독교인들이 로마의 각종 우상숭배를 증오하여 방화한 것이라고 선포하고 기독교인들에 대한 체포명령을 내렸다.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체포되었고 그들은 네로의 잔학한 방법들에 의하여 죽어갔다. 네로는 기독교인들을 때로는 짐승들에게 찢기워 죽게 했고 때로는 십자가에 매달아 처형하거나 또는 화형에 처했으며 심지어는 자신의 정원에 나무를 세워 그들을 묶어놓은 후 기름을 발라 화형에 처함으로서 그들이 인간봉화가 되게 하였다.

 

당시에 로마화재의 현장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역사가 타키투스는 당시의 상황들을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황제의 거듭된 부인과 신들에게 바쳐진 희생제사에도 불구하고 황제가 화재를 명령했다는 의심은 그치지 않았다. 그리하여 네로는 이 소문을 없애기 위하여 이미 배덕적 행위로 인하여 시민들의 증오를 받고 있던 기독교 신자들에게 혐의를 뒤집어씌우고 이들을 잔혹하게 처형하기로 결정했다. 네로가 희생양으로 삼고자한 그리스도인들은 티베리우스<디베료>재위 기간 중에 폰티우스필라티우스<본디오빌라도>에 의해 처형된 인물을 추종하는 자들이다. 이 악한 미신은 한동안 주춤했으나 곧 유대뿐 아니라 전 세계의 모든 사교들이 모여들었던 로마에 다시 출현하였다. 그리하여 우선 스스로 기독교인이라고 고백했던 자들이 체포되었고 이들의 증언에 의하여 더 많은 숫자가 정죄 받게 되었다. 그 이유는 화재 자체라기보다는 이들이 인류를 증오했기 때문이었다.>

 

<네로는 기독교인들을 죽이기 전에 시민들을 위한 오락에 이용했다. 신자들 중 일부는 털옷을 덮어씌워 개들이 찢어 죽이게 하였고 또 다른 자들은 십자가에 처형하였다. 또 다른 이들은 몸에 불을 질러서 밤에 등불처럼 밝히게 하였다. 네로는 자기의 정원을 열어 이러한 쇼를 연출하였고 그는 마치 전차경주자처럼 옷을 입고 전차를 타고 돌아다님으로서 원형경기장에서 비참한 광경을 연출하였다. 이 때문에 시민들은 벌을 받아 마땅한 이 사람들에게 자비심을 느끼기도 하였다. 왜냐하면 이들은 일반인들의 분노를 가라 않히기 위해서가 아니라 한 인간의 잔인성을 만족시키기 위해 죽어갔기 때문이다.>

 

타키투스는 친 로마적인 역사가였으나 대체적으로 공평한 역사가로 정평이 나 있다. 그는 비록 기독교인들에게 우호적인 입장은 아니었으나 네로에 의한 기독교의 박해가 계획적이고 의도적인 만행이었음을 증언했다. 그러나 네로에 의한 기독교 박해는 로마시로 한정되었다. 로마시 외의 기독교인들은 네로의 박해로부터 면제되었다. 그러나 로마시 외의 기독교인들이 네로의 박해에서 면제되었던 것은 네로의 칙령이 로마시내로 한정되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네로의 칙령은 당연히 전 로마적인 칙령이었다. 그러나 화재가 로마 전역의 화재가 아니라 로마시 만의 화재였기 때문에 로마시 외의 기독교인들이 로마시의 화재에 대한 책임을 질 이유도 없었지만 네로의 통치권은 이미 로마시내를 벋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로마의 원로원을 비롯한 지식인들은 드디어 네로를 불신하였고 따라서 네로를 더 이상의 황제로 인정하지 않았다. 이러한 와중에서 68년에 갈리아에서 네로에 대한 반란이 일어났고 그 반란 이전 로마지역으로 확산되어 갈 때에 히스파니아<스페인>총독이었던 갈바가 로마로 진격했다. 이때에 원로원을 비롯한 각계각층이 갈바를 지원했고 심지어는 황제의 근위병들까지도 이에 합세했다. 네로는 측근 몇 명의 도움을 받아 시골로 달아나 어느 지하실에 숨어 있다가 군대가 몰려오자<세상이 나 같은 예술가를 잃는 구나>하고 비통해 하면서 부하의 칼에 스스로 목을 찔러 자살했다.

 

2)도미티아누스<Domitianus, 81-96 재위>의 박해.

 

네로가 퇴위된 후 정치적인 불안이 계속되는 가운데 69년 한 해에 네 명의 황제가 교체되었다. 이러한 정치적 불안정은 베스파시안<Vespasian>황제에 의하여 종식되었고 로마는 안정을 되찾았다. 네로의 기독교탄압에 대한 칙령이 철회된 것은 아니었으나 베스파시안황제는 더 이상 기독교를 탄압하지 않았다. 기독교는 베스파시안황제 치하에서 평안을 누렸으며 이 평안은 그의 아들 티투스<Titus>의 치하에서도 계속되었다. 그러나 티투스의 동생인 도미티아누스가 황제에 등극하였을 때 상황이 달라졌다. 도미티아누스는 처음에 기독교인들에 대하여 무관심했다. 그러나 그가 로마의 종교적 전통을 고집하면서 자신을 신격화 했을 때부터 문제가 시작되었다. 도미티아누스는 로마의 전통적인 종교를 자신의 정치적 수단으로 이용했다. 그리하여 로마 시민들에게 로마의 전통적 신들을 특별히 섬기게 했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을 신으로 선포하기 위한 하나의 과정이었다. 그는 우선적으로 로마의 시민들이 로마의 전통적 신들을 특별히 섬기게 한 후 황제가 신들의 신이라고 선포하여 황제숭배를 강요했다. 로마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각종 서약서들에는<황제의 천재성에 걸고>라는 문구가 관습적으로 사용되었는데 도미티아누스는 그 문구를 황제의 공문서에 의무적으로 적용했다. 역사가들 중에는 도미티아누스의<황제->발상이 유대교인들이 예루살렘에 보내던 헌금을 황제에게 드리게 하려는 것에서 시작되었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역사학자들은 고대 애굽왕 바로의 신격화를 모방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유지를 위하여 매년 또는 수시로 예루살렘에 헌금을 보냈는데 기원70년에 이르러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자 도미티아누스는 유대인들에게 그 헌금을 황제에게 바치라고 명령했다. 황제의 강압에 의하여 일부 유대인들이 황제에게 헌금했지만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그것을 거절했다. 황제는 유대인들을 제압하기 위하여 자신을 신으로 선포하고 황제 즉 신에게 헌금을 바치지 않는 자들을 가차 없이 처형하겠다고 선포했다. 황제는 자신의 명령의 지엄함을 증명하기 위하여 자신의 인척 중에 기독교인이었던 플라비우스 클레멘스<Flavius Clemens>와 그의 아내 플라비아도미틸라<Flavis Domitilla>를 처형했다. 이때에 로마에 다시금 기독교 박해의 열풍이 불어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순교했는데 유대교도 황제숭배를 거부했기 때문에 함께 탄압받았다. 기독교인들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신앙의 자유를 찾아서 로마를 떠나거나 또는 지하로 은둔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도미티아누스의 박해를 통하여 또 하나의 특별한 역사를 이루시었다. 그것은 황제의 박해에 의하여 밧모섬에 유배된 요한을 통하여<요한계시록>을 집필하신 것이다.

 

3)트라야누스<Trajanus-97-117.재위>의 박해.

 

기독교에 대한 박해는 트라야누스황제 때에 이르러 더욱 극심했다. 이때에 새로운 법령이 발표되었는데 기독교인만 아니면 아무리 극악무도한 흉악범이나 살인범이라 할지라도 극형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순교자 저스틴<Justin>은 자신의 저서인 변명론<apologia>에서<기독교인이라는 단어는 곧 죽음이라는 단어의 대명사가 되었다.>라고 증언했다. 기독교인들에게 가해진 박해는 점점 극심해져서 심지어는 그들을 산채로 소금에 절인 때도 있었고 길가의 높은 나무에 매달아 밤새도록 불로 태워 죽인 일도 있었다. 그러나 트라야누스황제의 기독교박해는 비시니아지방 총독의 기독교박해에 대한 사건으로 인하여 크게 완화되었다. 기원112년 소아시아의 비시니아<Bithynia-비두니아-현재의 터키북부지방의 해안도시>지방 총독이던 소<>플리니<Pliny the Younger>는 기독교인들에 대한 처벌을 시행하는 와중에서 로마의 법치주의와 종교적 현실이 대립하게 됨에 따라 갈등을 느끼게 되었다. 그는 트라야누스황제에게 기독인들에 대한 처벌문제를 문의하는 공문을 보냈다.

 

전승에 의하면 플리니는 전형적인 로마인으로서 로마의 법과 전통을 존중하였던 공의로운 귀족이었다. 그가 비시니아지방 총독으로 부임했을 때 전혀 예상치 못한 문제가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 비시니아 지역에는 많은 기독교인들이 살고 있었고 기독교 이외의 이교도들은 거의 없다시피 했기 때문에 이교도들의 신전이 남아 있지 않았을 정도였다. 그가 부임했을 때 기독교를 증오하는 어떤 자가 새로운 총독에게 환심을 사기 위하여 기독교인들의 명단을 고발했다. 총독은 기독교가 불법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조사에 들어갔다. 이때에 소환된 자들은 자신들이 기독교 신자가 아니라고 주장하거나 또는 과거에는 기독교신자였으나 현재는 아니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었다. 총독은 그것을 확인하기 위하여 그들로 하여금 황제의 신상에게 향불을 피운 후 절하고 그리스도를 저주하라고 했다. 총독은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차라리 목숨을 버릴지언정 그와같은 배교 행위는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때에 소환된 사람들 중에 기독교인이 아니라고 주장한 자들은 총독이 하라는 대로 한 후에 기독교인이 아니라는 판정을 받고 석방되었다. 그러나 기독교인임을 자처하는 자들은 목숨을 버릴지언정 배교행위를 하지 않았다. 총독은 그들에게 세 번의 구명 기회를 주었으나 그들은 끝까지 배교를 하지 않고 스스로 죽음의 길을 택했다. 총독은 그러한 자들을 처형했고 그 중에 로마시민권을 가진 자들은 로마법에 따라 처결하기 위하여 로마법정으로 이송했다. 당시에 로마시민은 오직 로마의 법정에서 재판을 받게 되어있었다. 이때에 총독은 두 가지의 의문을 갖게 되었다. 하나는 과연 기독교인들의 범죄 한 내용이 어떠한 것인가? 하는 것과 다른 또 하나는 기독교인들이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자신들의 신앙을 고수하려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총독은 기독교인들의 신조와 신앙생활을 자세하게 추적했다. 그러나 총독이 조사한 바에 의하면 기독교인들은 범죄자들이 아니라 오히려 사회의 모범적인 삶을 살고 있었다. 그들은 소문대로 인육을 먹거나 영아를 살해하여 제물로 바치거나 하지 않았으며 근친상간을 비롯한 부도덕한 성행위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다만 동이트기 전에 함께 모여서 그리스도라는 사람을 찬양하고 그에게 기도하며 절도와 간음과 폭력 등등의 부도덕한 범죄들을 저지르지 않고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며 성실하고 정직하게 살 것을 피차에 맹세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또한 과거에는 공동식사를 하기 위하여 함께 모였었으나 로마당국이 비밀집회를 금지한 후로는 그 모임도 중지했다. 총독은 조사결과에 만족할 수 없었다. 소문과 조사결과가 너무 대조적이었기 때문이다. 총독은 진실을 알아내기 위하여 두 명의 여신도들을 심하게 고문해 보았다. 그러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총독은 매우 당황했다. 아무런 범죄도 저지르지 않고 오히려 사회에 유익한 모범적 삶을 사는 자들을 단지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처벌한다는 것은 로마의 법 정신에 위배되는 일이 거니와 로마의 정의로움에 크게 위배된다는 것이 그의 개념이었다. 총독은 기독인들에 대한 처벌문제를 일단 중지시킨 후 황제의 의견을 알아보기 위해 트라야누스황제에게 다음과 같은 공문을 보냈다.

 

<저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어린 소년소녀들도 어른들처럼 가혹하게 처벌해야 합니까? 누구든지 기독교도가 되면 꼭 그렇게 처형되어야만 합니까? 그들은 실제로 무슨 나쁜 일을 한 것이 틀림없는 사실입니까? 만일 피고 스스로 기독교가 아니라고 한다면 그를 놓아 주어도 되겠습니까? 스스로 그리스도인임을 시인하는 자들에 대해 저는 그들이 로마시민일 때에는 로마로 보내도록 하고 로마시민이 아닐 경우에는 죽이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허나 저는 그들은 고집이 너무 세기 때문에 벌을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하는바 입니다. 저는 그들이 폐하의 제단에 분향하고 그리스도를 욕하면 살려주려고 세 번이나 기회를 주었습니다. 저는 진짜 기독교인들은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라고 들어 왔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어떤 특정한날 동이트기 전에 서로 만나서 그리스도에게 찬송을 드리는 것 외에는 결코 나쁜 짓을 하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남의 것을 훔치거나 거짓말을 하지 않을 것을 약속합니다. 제가 비밀집회를 금지한 후 그들이 그것을 포기하기는 했지만 그러나 공동식사를 하기 위하여 계속 모입니다. 제게는 집사라고 불리 우는 여자 노예들이 몇 명 있는데 저는 그들을 고문했습니다. 저는 그들에게서 몇 가지 미친 생각들 이외에는 나쁜 것을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런 어리석은 것에 감염되어 우리의 신전은 거의 텅 비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사람들이 돌아오고 있습니다.>

 

비시니아총독의 질의 공문에 대하여 트라야누스황제는 간단하게 대답했다. 황제의 답변을 요약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로마통치 영역에 거주하는 모든 주민들은 로마의 법령에 따라야한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의 처벌에 관해서는 별도로 규정한 법이 아직은 없다. 따라서 그들이 특별한 죄를 범하지 않는 한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그들을 색출해 낼 필요는 없다. 그것은 시간과 국력을 낭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단 고발된 자들은 로마법대로 처벌하라. 황제 신상에 분향하고 예를 올리는 자는 방면하되 그것을 거부하는 자들은 처벌하라. 그러나 익명으로 고발하는 것은 받아들이지 말라. 그것은 로마의 법 정신에 어긋나는 것이다.>

 

트라야누스황제의 칙령은 고도의 정치적인 방책이었다. 황제는 정치적 차원에서 로마의 법을 세워 로마제국과 황제의 위신과 자존심을 세우는 한편 불필요한 학정을 시행한다는 논란의 여지를 제거하였고 동시에 계속되는 기독교인들과의 마찰을 피했다. 황제신상에 예를 갖추지 않는 자들을 처벌해야 하는 것은 당시로서는 절대 필요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비록 그것이 황제들의 욕심에 의해서 세워진 비진리적인 법령이라 할지라도 일단 세워진 이상에는 지켜져야 로마제국의 권위가 흔들리지 않기 때문이다. 황제는 로마제국과 황제의 권위를 위하여 그것을 여전히 고수하게 하는 반면에 특별한 죄를 범하지 않는 한 기독교인들을 고의적으로 색출하여 탄압하지 않게 함으로서 정치적인 안정을 도모하였다. 트라야누스황제의 칙령은 비시니아총독에게만 전달되었을 뿐이었고 다른 지역에는 전달되지 않았으나 그것은 비시니아에만 적용되지 않고 다른 지역으로도 확산 적용되었다. 이로서 로마사회의 기독교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게 되었다. 기독교인들의 신앙이나 그들의 신앙적 삶이 국가나 사회에 어떤 위험적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졌고 때문에 기독교를 적대시하던 자들이 오히려 기독교에 입문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리고 아울러 기독교에 대한 박해도 당분간은 주춤했다.

 

4)하드리아누스<Hadrianus-117-138.재위>의 박해.

 

기독교에 대한 트라야누스의 칙령은 트라야누스의 양자인 하드리아누스가 황제에 등극했을 때에도 여전히 유효했다. 그러나 하드리아누스는 로마의 전통적인 다신론주의 자였고 특히 황제신격화에 주력했다. 그는 오직 그리스도만을 고집하면서 하나님 이외의 어떤 신을 신으로 인정하지 않고 거부하는 기독교를 심히 증오했다. 그는 소아시아의 총독 미누키우스폰다누스<Minucius Fundanus>에게 칙령을 내려 기독교인으로 고발되는 자들을 반드시 처형하라고 할 정도로 기독교를 박해했다. 그는 로마통치 하의 전역에 황제 신상을 비롯한 신상들을 세우고 그것들에게 경배하라고 명령했으며 그것을 거절하는 자들을 가차 없이 처형했다. 그러나 하드리아누스의 기독교 박해는 황제가 직접적으로 주도한 것이 아니라 대부분 지방 총독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것은 비시니아총독의 질의를 받은 트라야누스황제 때부터 이미 시작된 현상이었는데 이때에 황제들은 명분 없이 무고하고 모범적인 기독교인들을 탄압하는 것이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어렵게 한다는 판단 하에 기독교에 대한 문제를 직접적으로 해결하지 않고 지방의 총독들에게 일임했다. 이와같은 상황에서 지방총독들의 통치 개념과 방법에 따라 기독교탄압의 양상이 달랐다. 어떤 지방의 총독은 무조건 기독교를 증오하고 탄압하는가 하면 또 어떤 지방의 총독은 기독교도들에게 뇌물을 받으면서 적당히 그 문제를 조율하였고 어떤 지방의 총독들은 기독교인들에게 매우 우호적인 입장을 취하여 기독교도들을 자유롭게 해주었다. 이때에 심지어는 남몰래 기독교를 받아들인 총독도 있었으나 정치적인 이유에서 그것을 철저하게 은폐했다.

 

5)마르쿠스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161-180.재위>의박해

 

하드리아누스의 통치가 끝나고 안토니우스피우스<Antonius Pius-138-161.재위>통치시대에 이르러 기독교는 일시적이나마 자유를 누렸다. 안토니우스황제는 기독교에 대하여 관대한 정책을 취하였다. 그러나 마르쿠스아우렐리우스의 치세 하에서 기독교박해가 재현되었다. 마르쿠스아우렐리우스는 오랜 전쟁을 종식시킨 후 로마의 영광을 재현하기 위하여 로마의 전통적인 종교적 관습을 회복했다. 이러한 그의 정책에 가장 걸림돌이 된 것은 역시 기독교였다. 그는 황제에 의한 군주정치를 종식시키고 원로원에 의한 민주적, 공화적 정치체제를 구축했다. 그의 기독교 박해는 기독교인들이 황제를 숭배하지 않는다는 것 때문이 아니라 로마의 전통적 종교관습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의 기독교박해는 처참할 정도로 잔인하고 공격적이었다. 그는 론<Rhone>계곡의 리용<Lyons>과 비엔나<Vienna>에 거주하던 기독교인들을 모두 고문하고 죽이라고 명령했으며 로마시민권을 가진 기독교인들은 목을 베어 죽였고 로마시민이 아닌 기독교도들은 짐승들의 밥이 되게 했다. 심지어는 감옥에서 죽은 기독교인들의 시체를 굶주린 개들에게 던져주어서 장례조차 지내지 못하게 할 정도였다. 마르쿠스아울렐리우스 치세 때에는 역병이 극심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흉년과 가뭄으로 인하여 기근이 극심하여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사람들은 그것이 기독교 때문이라고 생각하여 기독교에 대한 박해를 가중시켰다. 사람들은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섬기는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않는 기독교인들을 유일신 신앙인들로 보지 않고 신들을 인정하지 않는 무신론자들로 보았다. 그들은 기독교인들이 신들을 무시하고 섬기지 않음으로 신들이 진노하여 역병과 흉년 가믐 등등의 재난을 내렸다고 생각했다. 기독교박해에는 유대교인들도 한 몫 거들었다. 유대교인들은 기독교와는 달리 로마당국과 적당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기독교탄압에 일조했다. 유대교인들이 기독교탄압에 동조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기독교가 유대교의 모든 전통들과 특히 율법을 무시하고 모독하여 훼파했기 때문이었고, 다른 또 하나는 기독교인들이 자신들을 메시야 처형의 주범들로 몰아세우면서 유대인들의 국가적, 민족적, 종교적, 멸망과 붕괴의 비극이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메시야를 처형한 것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조치라고 했기 때문이었다.

 

6)셉티미우스세베루스<Septimius Serverus.191-211.재위>의 박해.

 

로마제국은 마르쿠스아우렐리우스황제가 사망한 뒤 극심한 혼란에 빠졌다. 나약하고 변변치 못한 반면에 허황되고 욕심 많은 황제들이 연이어 등극하여 정치체계 질서가 제대로 잡히지 않았던 것이다. 황제들이 무능하여 정치체계가 혼란하고 무질서하자 각 지역 원주민들의 반란이 도처에서 일어났다. 로마제국은 그들을 진압하기 위하여 전쟁을 계속했으나 황제들은 환락과 사치에 빠져 쾌락추구에 여념이 없었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기독교에 대한 관심은 격감되었고 기독교인들은 한동안 자유와 평안을 누렸다. 이 무렵에 기독교는 놀라울 정도로 발전하고 확장되어 로마 전역이 기독교의 물결로 출렁대었다. 그러나 셉티미우스세베루스가 황제에 올랐을 때 기독교박해가 다시 시작되었다. 셉티미우스황제는 아프리카의 군인 출신으로서 종교에 대하여 무관심하였으므로 기독교에 대해서도 별반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셉티미우스황제가 기독교를 탄압하게 된 동기는 당시의 로마제국 정세와 그의 왕비 돔나<Domna>때문이다. 셉티미우스황제는 황제에 등극한 후 그동안의 군인적 경륜을 살려 지역들의 반란들을 제압했다. 그러나 황제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지역적 반란들이 완전히 평정되지 않았다. 특히 라인강과 다뉴브강 건너에 살고 있던 민족들이 계속하여 로마제국에 저항했다. 반란세력은 제국의 내부에도 존재했다. 특히 기존의 군부세력은 아프리카출신의 황제를 불신했다. 언제 군부가 반란을 일으켜 새로운 황제를 옹립하고 자신을 축출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때에 왕후가 황제에게 방법을 제시했다. 왕후 돔나는 에메사<Emesa>출신으로서 태양신을 섬기는 엘가발<El Gabal>사원의 대제사장 딸이었다. 그녀는 황제에게 로마의 전통적 종교들을 부활시켜 로마의 정치체제를 종교적, 정치적 통일체제로 만들어 반란세력을 와해시키라고 했다. 황제는 왕후의 조언을 받아들여 우선적으로 로마의 전통 종교들을 부활시켰다. 그는 로마 전지역에<솔인빅투스-Sol inbictus-정복되지 않은 태양>을 예배하도록 명령했다. 황제는 태양신을 지존의 신으로 세운 후에 다른 모든 신들을 그 아래 두어 섬기게 함으로서 종교적 통일을 이루었다. 그것은 친정에서부터 태양신을 섬겨온 왕후의 계략이었다. 그러나 황제의 명령은 기존의 종교인들로부터 불신을 받았고 특히 유대교와 기독교로부터 거부되었다. 황제는 종교인들을 힘으로 제압했고 그 중에 가장 강력한 반대 세력인 유대교와 기독교를 혹독하게 탄압했다. 황제는 유대교와 기독교를 말살시키기 위하여 두 종교들이 더 이상의 신자를 받아들일 수 없는 법령을 공포했다. 누구든지 유대교와 기독교에 가입하면 사형에 처한다는 법령을 공포한 것이다. 이 법령은 트라야누스황제의 칙령과 병행하여 적용되었기 때문에 유대교와 기독교는 다함께 무차별적 탄압을 감수해야 했다. 이때에 로마통치 하의 전 지역에 대한 대대적인 기독교 탄압이 시작되었는데 특히 애굽과 북아프리카에서 극심한 탄압이 있었다. 알렉산드리아의 위대한 신학자였던 오리겐의 부친 레오니다스가 참수되었으며, 카르타고에서는 귀부인이었던 퍼폐튜아가 충직한 몸종 펠리시타스를 비롯한 5명의 시종들과 함께 짐승에게 던져져 순교했다.

 

7)막시미누스<Maximinus.235-238.재위>의 박해.

 

셉티미우스세베루스의 치세 말년에 이르러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중단되었다. 이때에 왜 박해가 중단되었는지에 대해서는 공식적인 기록이 없다. 그러나 전설에 의하면 황제가 기독교를 박해한 것을 몹시 후회했다는 이야기와 왕후인 돔나에게 어떤 불행한 일이 발생하여 그것이 기독교박해 때문인 것으로 여겨져서 박해를 중단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러나 로마에서의 박해는 중단되었으나 유럽일대에서는 산발적인 박해가 계속되었다. 셉티미우스세베루스가 사망한 후 카라칼라<Caracalla-211-218.재위>가 황제로 등극했다. 이때에도 박해는 중단되었으나 북아프리카지역에서는 산발적인 박해가 계속되었다. 그 뒤에 엘라가바루스<Elagabalus.218-222.재위>황제와 알렉산더세베루스<Alexander Severus.222-235.재위>황제는 셉티미우스세베루스황제의 정책을 답습하여 종교 혼합정책을 추구했으나 그것을 강요하지는 않았음으로 기독교박해는 거의 중단되었다. 전설에 의하면 알렉산더 세베루스황제는 자신의 개인적인 신전에 수많은 신들과 함께 그리스도와 아브라함의 신상들을 만들어 세웠다고 한다. 실제로 황제의 모친인 줄리아맘메아<Julia Mammea>는 오리겐의 강의를 듣기 위하여 알렉산드리아까지 갔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 후 막시미누스<Maximinus>황제 치하에서 다시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있었다. 당시에 로마교회는 두 사람의 감독들-폰티아누스<Pontianus>와 히폴리투스<Hippolytus>에 의하여 분열되어 있었는데 황제는 그들을 모두 사르디니아<Sardinia>의 금광광산으로 유배시켰다. 그러나 막시미누스황제 치하의 박해는 간헐적이었으며 기독교인들을 처형하지 않고 유배형에 처했기 때문에 순교역사는 거의 없었다. 이때에 이르러 기독교에 대한 오해들이 거의 풀렸고 기독교가 참 진리의 종교라는 인식이 퍼져 나가면서 오히려 많은 귀족들이 기독교에 입문했다.

 

8)디키우스<Dicius.249-251.재위>의 박해.

 

막시미누스황제 치하에서 안정을 누렸던 기독교에 다시 무서운 폭풍이 불어 닥쳤다. 기원 249년에 데시우스가 황제에 올랐을 때에 로마의 정치적, 경제적 상황은 매우 심각했다. 국경 넘어 사는 민족들은 호심탐탐 제국을 넘보고 있었고 수시로 국경을 침범하여 제국을 위협했다. 로마 식민통치 하의 각 지방에서도 독립을 원하는 반란과 폭동들이 수시로 일어났고 이러한 혼란 속에서 경제도 위기로 치닫고 있었다. 황제는 로마의 영광을 재현하기 위하여 고심했다. 황제는 로마가 영광을 상실하게 된 동기를 종교적 차원에서 찾았다. 그는 로마가 전통적인 신들을 배신했기 때문에 신들 또한 로마를 버렸다고 생각했다. 국민들이 신들을 극진하게 섬길 때에는 신들이 로마를 절대적으로 보호하고 도와주었기 때문에 로마가 번영과 영광을 누렸던 반면에 국민들이 신들을 배반하고 섬기지 않게 되자 신들이 진노하여 로마를 돌보지 않음으로 로마에 위기가 닥쳐왔다는 것이 그의 판단이었다. 따라서 황제는 로마가 전통적인 신들을 다시 극진하게 섬기면 신들이 마음을 돌려 로마를 보호하고 지켜줌으로서 로마의 영광이 재현될 것으로 믿었다. 그리하여 신들의 형상들을 다시 정비하여 세우고 황제의 신상도 재정비하여 세웠다. 데키우스황제의 의지는 매우 단호하고 결연했다. 신들 앞에 제물을 드리지 않거나 황제의 신상 앞에 분향하지 않는 자들은 체포되었다. 황제는 신들 앞에 제물을 바치고 황제의 신상에게 분향하는 자들에게는 증명서를 발급했다. 증명서가 없는 자들은 황제의 칙령을 거부한 죄로 체포되었다. 그러나 황제는 죄인들을 처형하지 않고 그들을 회유하는데 주력했다. 황제는 불순종하는 자들을 체포한 후 무서운 고문과 회유정책을 통하여 그들을 개종시켰다. 당시에 많은 자들이 체포되었으나 황제의 회유정책에 의하여 마음을 바꾸어 풀려나는 자들이 속출했다. 이때의 양상은 다양했다. 어떤 자들은 아예 일찌감치 마음을 바꾸어 황제의 명령에 따르는가 하면 어떤 자들은 버틸 수 있을 때까지 버티어 보다가 체포되면 할 수 없이 명령에 순종했고 또 어떤 자들은 관리들을 매수하여 돈을 주고 증명서를 구입하여 순종을 위장했다. 때문에 순교자들은 별로 많지 않았으나 끝까지 신앙의 지조를 지킨 자들도 많았다. 이러한 상황 아래서 두 가지의 신조어가 생겼다. 하나는 끝까지 신앙을 지킨 자들로서<고백자>라는 칭호를 얻었고 황제의 명령에 복종하여 신앙을 버린 자들은<배교자-Apostat>라고 호칭되었다.

 

9)발레리아누스<Varerianus.257-259.재위>의 박해.

 

디키우스의 뒤를 이어 갈루스<Gallus.251-257.재위>가 황제가 되었을 때 그는 기독교박해를 중지 시켰다. 그러나 그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된 발레리아누스황제에 의해서 다시 박해가 시작되었다. 그의 박해는 불과 3년 정도 밖에 안 되었지만 기독교에 많은 어려움을 주었다. 당시에 질병과 흉년이 발생하자 황제는 그 책임을 기독교에 돌렸다. 기독교가 로마의 전통적인 신들을 섬기지 않았기 때문에 신들이 노여워서 그러한 사건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황제는 기독교인들의 집회를 금지했고 그들의 토지와 재산을 몰수했으며 감독, 목사, 장로, 집사 등등의 지도자들을 처형하거나 유배시켰다.

 

10)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ctianus.284-305.재위>의 박해.

 

발레리아누스황제의 박해는 그가 페르시아인 들에게 포로 되었음으로 종료되었고 향후 40여년간 더 이상의 박해는 없었다. 그러나 4세기 초 마지막이 가장 조직적이고 가혹적인 박해가 발생했다. 기원284년에 디오클레티아누스가 황제에 등극하였는데 그는 로마제국을 재정비했다. 그는 로마제국에 새로운 황제제도를 수립했다. 그는 황제를 두 가지로 구분했다. 하나는 아우구스투스<Augutustus>황제이고 다른 또 하나는 시저<Caesar>황제이다. 아우구스투스황제는 로마제국을 동서로 나누어 통치하는 최고의 황제이며 시저황제는 아우구스투스황제들의 휘하에서 그들의 명령을 받는 휘하 황제 이다.이때에 로마 전체에 대한 최고의 통치권은 동로마를 통치하는 황제에게 있었다. 아우구스투스황제는 오직 시저황제들이 계승하게 되며 시저황제들이 아우구스투스황제를 계승하여 황제 자리가 결원되면 새로운 시저황제를 선출하여 보강한다.

 

디오클레티아누스황제가 이러한 정책을 시행한 것은 거대한 제국이 분열되지 않고 질서 있게 통치되게 하기 위함 이었다. 로마제국은 황제계승 문제로 인한 암투 때문에 끊임없는 내란과 부란을 겪어왔다. 디오클레티아누스황제는 이러한 황제 계승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2중적인 황제제도를 세워 황제 계승을 법통대로 이어가는 동시에 황제계승을 둘러싼 암투와 내란을 종식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 정책은 처음에는 잘 지켜졌으나 나중에는 권력 쟁취를 위한 황제들 간의 암투로 인하여 더욱 혼란이 가중되는 결과를 이루었다. 이때에 아우구스투스<Augutustus>황제는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ctianus>와 막시미아누스<Maximianus>로 서디오클레티아누스는제국의 동방을 맡았고 막시미아누스는 제국의 서방을 맡았다. 시저황제<Caesar>는 갈레리우스<Galerius>와 콘스탄티우스클로우스<Constantius Chlorus>로 서갈레리우스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휘하의 황제였고 콘스탄티우스클로우스는 막시미아누스 휘하의 황제였다. 그러나 로마제국의 최고황제는 디오클레티아누스황제였고 나머지 세 명의 황제들은 디오클레티아누스황제 휘하의 황제들이었다. 세 명의 휘하 황제들은 디오클레티아누스황제의 탁월한 권위적 지도 하에 맡은 지역을 질서 있게 다스렸다. 디오클레티아누스황제가 건재 하는 동안에 로마제국은 권력문제로 인한 암투가 없었고 제국은 비교적 평안했다. 다만 갈레리우스가 다뉴브강 유역의 내란을 진압하기 위하여 출정했고 페르시아 원정을 위해 또 한번 출정한 것 외에는 별다른 사건도 없었다. 4명의 황제 치하 초기에 기독교는 평안함을 누렸다. 황제들은 기독교에 대하여 별로 나쁜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아내인 프리스카<Prisca>와 그의 딸인 발레리아<Valeria>가 기독교인이었기 때문에 디오클레티아누스황제는 기독교에 대하여 매우 우호적이었다. 그러나 기독교에 대한 엄청난 박해가 군대 문제로부터 시작되었다. 당시에 기독교 성도들 중에는 자원하여 군대에 입대하는 자들이 많았는데 대부분의 기독교 지도자들은 성도들의 군 입대를 반대했다. 때문에 군 입대한 성도들 중에 군에서 이탈하려는 움직임들이 있었다. A.D.296년경, 군대에서 병영을 이탈한 기독교 신자들이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처형당했다. 갈레리우스황제는 기독교인들의 병영 이탈 문제를 좌시하지 않았다. 그는 결정적인 시기에 기독교 신자들이 병영을 이탈하여 군대의 사기가 와해될 것을 크게 염려했다. 때문에 그는 군대에서 모든 기독교 신자들을 축출할 것을 디오클레티아누스에게 건의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황제는 그 건의를 받아들여 모든 기독교 신자들을 군부로부터 축출하는 칙령을 내렸다. 이때에 다뉴브강 주둔군의 현지 지휘관들 중에서 황제의 칙령대로 행하지 않고 기독교 신자들에게 신앙을 거부하도록 강요하는 일이 있었는데 그로인하여 기독교 신자들이 반발하자 다뉴브강 주둔군 사령관이 기독교신자들을 명령 불복종 죄로 처형하였다. 이 사건 이후로 갈레리우스는 기독교인들을 더욱 불신했다. 그는 303년에 이르러 로마제국내의 모든 관직에서 기독교인들을 축출하게 해달라는 건의서를 디오클레티아누스황제에게 올렸다. 디오클레티아누스황제는 그 건의를 받아 들였다. 그리하여 기독교 신자들을 모든 관직에서 파면할 것과 기독교 건물들을 모두 파괴하고 기독교에 관한 문서들도 모두 파괴하라는 칙령이 내려졌다. 그러나 처음에는 황제의 칙령이 단호하게 시행되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에 대하여 우호적이었고 많은 기독교인들이 로마제국의 관직에 있었으며 그 중에는 고위관직에 있는 자들도 상당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독교인들이 성스러운 경전 문서들이 파기되는 것을 결사반대하여 정부의 탄압에 맞서자 상황이 악화되어 도처에서 고문과 처형이 자행되었다. 이러한 와중에서 황궁에 두 차례에 걸친 화재가 발생했는데 갈레리우스는 그것이 기독교 신자들이 박해에 대하여 복수한 것이라고 주장했다.<그러나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은 갈레리우스가 기독교를 탄압하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화재를 일으켰다고 증언한다.> 디오클레티아누스황제는 크게 진노하여 황실에 근무하는 모든 기독교 신자들로 하여금 로마의 신들에게 제사를 올리라는 엄명을 내렸다. 이때에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아내인 프리스카와 그의 딸인 발레리아는 황제의 명령에 순종하였으나 당시의 로마 수상이었던 도로테우스<Dorotheus>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순교의 길을 택했다. 로마제국 전체에 걸쳐서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진행되었다. 수많은 교회들과 기독교 문서들이 파괴되고 불탔으며 기독교를 증오하던 관리들은 이때다 싶어 기독교인들을 무참하게 살해했다. 이러한 박해의 와중에서 제국 내에 내란이 일어나자 상황은 더욱 나빠졌다. 황제는 그것이 기독교 신자들에 의한 반란이라고 의심하여 더욱 혹독하게 기독교를 탄압했다. 모든 기독교인들이 체포되어 고문 당하거나 처형되었다. 신앙을 거부하고 황제를 숭배하는 자는 방면하기로 되어 있었고 그것을 거부하는 자는 로마의 시민권과 모든 법적인 권리를 박탈하는 차원에서 방면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그러한 법령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기독교를 증오하는 관리자들은 법을 지키지 아니하고 기독교인들을 무조건 고문하고 처형했다. 많은 사람들이 신앙과 목숨을 지키기 위하여 다시 지하로 숨었고 일부는 국경을 넘어 페르시아로 탈출했다. 이에 황제는 더욱 분노했고 탄압은 더욱 극심하게 자행 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갈레리우스의 권위는 최고에 올라 로마제국 전체를 장악하게 되었다. 304년에 이르러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중병에 걸려 허약해지자 그의 황제로서의 권위도 따라서 약화되었다. 갈레리우스는 기원305년에 디오클레티아누스를 협박과 회유로 설득하여 황제의 자리에서 퇴진시켰다. 이때에 아우구스투스황제였던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막시미아누스가 퇴위하고 갈레리우스와 콘스탄티우스클로우스가 아우구스투스황제자리에 올랐다. 갈레리우스가 동로마를 다스리는 황제로서 로마의 최고황제가 된 것은 당연하다. 시저황제의 자리에는 세베루스<Severus>와 막시미누스다이어<Maximinus Daia>가 등극했는데 그들은 실권이 전혀 없는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갈레리우스의 계략적인 황제 등극에 대하여 군부는 강력하게 반발했다. 이때에 로마군부의 차기 실세 자는 콘스탄티우스클로우스의 아들인 콘스탄틴<Constantine>과 막시미아누스의 아들인 막센티우스<Maxentius>였다. 그들 중에 특히 콘스탄틴을 지지하는 세력이 막강하였다. 이때에 갈레리우스는 콘스탄틴을 황궁에 머물게 했다. 갈레리우스가 콘스탄틴을 황궁에 머물게 한 외적 명분은 황제의 정치적, 군사적 보좌였지만 내용은 콘스탄틴의 아버지인 콘스탄티우스클로우스와 콘스탄틴을 지지하는 군부세력의 반란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콘스탄틴은 사실상 볼모로 연금된 것이다. 그러나 콘스탄틴은 지지 세력의 도움을 받아 황궁을 탈출하여 부친과 합류했다. 콘스탄틴을 지지하는 군부세력은 기원306년에 콘스탄티우스클로우스가 사망하자 갈레리우스를 거부하고 콘스탄틴을 아우구스투스황제로 추대했다. 한편 막센티우스는 자신의 지지 세력을 규합하여 로마로 진격해 세베루스황제를 폐위시켰다. 세베루스는 자살하였고 갈레리우스는 막센티우스를 제거하기 위하여 군사를 일으켰으나 휘하 장군들이 오히려 막센티우스편에 합류하므로 실패했다. 궁지에 몰린 갈레리우스는 이미 은퇴한 디오클레티아누스에게 도움을 청했으나 거절당했다. 이러한 와중에서 로마제국은 매우 혼란스러운 정치적 공백을 맞이했다. 로마 속령의 지방에서는 야심찬 군부세력들이 힘을 비축하며 틈을 노리고 있었고 서방지역에서는 콘스탄틴과 막센티우스 두 황제가 각각 황제를 자처하면서 세력을 키우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도 기독교에 대한 박해는 계속 되었다. 갈레리우스와 막시미누스다이어는 계속하여 기독교 신자들을 박해했다. 특히 막시미누스다이어는 기독교 신자들의 신체를 절단하고 그들을 채석장에 보내어 강제노역을 시키는 악행을 저질렀다. 그러나 이에 맞서는 기독교인들의 신앙적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그들은 채석장의 강제노역 현장에 교회를 세우고 신앙적 삶을 고수했다. 진노한 막시미아누스는 그들을 가차 없이 처형했으나 기독교 신앙의 불길은 그럴수록 더욱 거세게 타 올랐다. 어쩌면 로마의 기독교가 완전히 종료될지도 모른다는 절망적인 우려 속에서 뜻밖의 사태가 벌어졌다. 갈레리우스가 갑자기 급환으로 쓰러진 것이다. 황제는 외음부에서 화농증이 발발하여 점점 발진하면서 창자의 내부로 퍼져들어 갔기 때문에 치료가 불가능했다. 상처에는 벌레가 들끓었고 냄새가 지독하여 곁에 서 있기가 역겨울 정도였다. 고통 중에 신음하는 그에게 측근이 조언했다. 그의 조언은 황제의 급병이 기독교인들을 탄압한 것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임으로 빨리 기독교인들에 대한 탄압을 멈추어야 된다는 것이었다. 황제는 자신의 악행에 대하여 크게 후회했다. 황제는 서둘러서 기독교에 대한 관용령을 발표했다. A.D.311430일의 일이었다. 다음은 갈레리우스가 발표한 라틴어 칙령의 헬라어 번역문을 요약한 것이다.

 

<우리들은 이제까지 제국과 백성들의 공익을 위해 여러 가지 조처를 강구했다. 먼저 우리는 모든 일들을 로마인들의 전통과 공적인 제도에 따라 질서를 복구하고자 하였다. 이것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들은 특별히 자기 선조들의 종교와 신앙을 저버린 기독교 신자들이 진리로 돌아오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들은 각기 자신들의 뜻과 의지에 따라 법률을 만들어 쫒기 시작했으며 따라서 다른 의견들을 가진 여러 계열의 분파들이 생기게 되었다. 때문에 우리가 황제의 칙령을 통하여 그들에게 옛 조상들이 세워놓은 관습으로 되돌아가라고 했을 때 많은 이들이 생명을 구하기 위해 이에 복종하였으나 많은 사람들이 위협을 받고 여러 가지 형태의 죽음을 택했다. 그러나 아직도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어리석은 생각을 버리지 않고 자기들의 고집을 꺾지 않으며 이들은 불멸의 신들에게 합당한 영광을 돌리지도 않고 기독교인들의 하나님에게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있다. 우리는 저들이 여전히 우리가 만백성에게 용서를 베풀어 온 자비함과 변함없는 관습에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음을 알고 있으나 우리는 이일에 있어서도 모든 죄를 묻지 않고 용서하기로 결정했다. 따라서 만인들을 향한 자비의 눈으로 볼 때에 이들을 사면하고 이들이 공공질서를 해치지 않는 한 자기들끼리 집회 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것이 옳을듯하다.

 

그럼으로 기독교인들은 다시 자신들의 모이는 장소를 재건하며 자신들의 신앙에 어긋나는 일은 하지 않아도 좋다. 우리는 또 다른 칙령을 통해 공직자들이 이 문제를 어떻게 취급해야 할지를 지시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이처럼 양보하였음으로 이러한 은혜에 보답하여 기독교 신자들은 제국이 번영을 누리고 자기들 스스로가 평안하게 그 생명을 보존할 수 있도록 우리들과 공공복리와 자기 자신들을 위해 자기들의 신에게 기도해야만 한다. 그리고 사방에서 공공의 복지가 보존되며 그들이 각기 자기 집에서 무사하게 살게 되기를 기원해야 한다.>

 

갈레리우스황제는 칙령을 발표한 후 5일 후에 사망했는데 그는 운명하기 전에 다음과 같이 고백하였다.<나는 참으로 미친 짓을 했다....물론 공포에 질린 수천 명의 기독교인들이 그들의 신앙을 저버린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반면에 또 다른 수천 명의 기독교인들은 의연한 모습으로 그들의 신앙을 피로서 입증했다.>

 

갈레리우스의 칙령으로 인하여 로마 전역에서 시행되어 졌던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공식적으로 해제되었다. 모든 지역의 감옥 문이 열리고 감금되어 있던 모든 기독교인들이 석방되었으며 몰수 되었던 교회 및 개인들의 재산이 환수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기독교 박해가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었다. 다른 황제들은 박해를 종식시킨 반면에 막시미누스다이어황제는 여전히 박해를 계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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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박해의 원인.

 

1)정치적 원인.

 

이스라엘 남북왕조 멸망 후 세계 각지로 계속하여 흩어져 이주해간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로마에도 상당수가 거주하고 있었다. 기원 후 1세기경의 로마정부 기록을 보면 로마시내에 12개정도의 유대교회당들이 있었다. 당시의 유대인들은 로마통치 하의 전 지역에서 매우 뜨거운 감자였다. 유대인들은 유일신앙을 고수하여 로마의 종교정책에 정면으로 항거했다. 그들은 특히 자신들의 예루살렘 성전을 시온성전이라고 불렀고 자신들의 종교적 사상을 시오니즘이라고 주장했으며 예루살렘 성전을 순례하거나 성전 보수에 사용될 헌금을 보냈는데 그 헌금 액수가 과다 하여 때로는 한 지방의 경제사정을 어렵게 만들기도 했다. 때문에 로마통치 하에 있는 각 지방의 통치자들은 유대인들을 미워했고 때때로 그와같은 사정을 로마정부에 보고하여 어떤 특별조치를 내려 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로마정부로서는 유대인들을 함부로 홀대할 수가 없었다. 유대인들은 탁월한 상술을 통하여 각 지방의 경제권을 쥐고 있었으므로 그들을 함부로 대했다가는 경제가 악화 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은 황제숭배라던가 만신전 봉례행사 같은 종교적 행사에는 참석하지 않았지만 그러한 행사에 소용되는 막대한 비용들을 헌금하는 것은 거절하지 않았으며 각종 빈민구제와 병자 치료 및 장례에 부조하는 등등의 사회적 봉사를 많이 했다. 때문에 로마정부로서는 그들을 탄압하기에 여러 가지 어려움이 많았다. 로마정부는 그들이 특별한 반란적 행위를 하지 않는 한 그들의 종교적 자유를 보장해 주는 것이 오히려 그들을 다스리는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하여 유대인들의 종교를 합법적인 종교로 인정해 주었다. 따라서 기독교도 유대교의 그늘 아래에서 어느정도의 편의가 제공되었다. 왜냐하면 기독교가 로마에 들어간 초창기에 로마는 기독교와 유대교를 같은 종교의 분파로 인식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유대교와 기독교에 대한 구분이 이루어지고 특히 유대교와 기독교사이에 갈등과 대립이 첨예화되면서 심지어는 폭력이 수반된 충돌이 계속되자 유대교와 기독교 모두를 탄압하게 되었다. 특히 유대 본토의 마카비우스가<家>에 의한 폭동에 영향을 받은 유대인들이 독립자금을 보내거나 반란에 직접적으로 참여하게 됨에 따라 더 이상 방관할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2)종교적 원인.

 

로마제국 정부는 로마의 정치적 안정을 위하여 종교를 이용했다. 로마정부는 식민통치 하에 있는 여러 지방에서 유입되어지는 민족들의 종교들을 모두 인정하고 연합시키는 정책을 펴 나갔다. 로마정부가 종교 다원화 정책을 세운 것은 정치적인 이유도 있었지만 로마의 종교적 자존심의 발로이기도 했다. 로마는 자신들의 종교에 대한 자부심과 긍지가 대단했다. 로마는 그 어 떤 신도 배타하지 않고 섬기는 다신론적 종교 국가였다. 원래 로마는 전통적으로<쥬피터><마르스><퀴리노스><다이아나><넵튠><쥬노><플라멘다알리스>등등의 신을 최고의 신으로 받들어 섬겼다. 로마정부는 정부 산하에 승원이라는 종교기관을 신설하고 승려제도를 만들어 종교를 조직적으로 관리했다. 로마가 세계정복에 나섰을 때 그들은 대부분의 국가들이 일정한 소수의 신들만을 구별하여 섬겼기 때문에 전쟁에서 패한 반면에 자신들은 신들을 구별하여 섬기지 않고 모든 신들을 다 함께 섬겼기 때문에 그 많은 신들이 자신들을 승리하게 도와주었다고 믿었다. 따라서 로마정부는 정복지 주민들이 로마에 이주해 살면서 들여온 그들의 신들을 배타하지 않고 모두 수용하였다. 로마정부는 모든 신들이 결국은 하나의 최고적 신들 밑에 존재하는 다양한 신들이라는 논리를 세웠다. 그리하여 만신 전을 만들어 모든 신들을 그곳에 모신 후 사람들이 자유롭게 신들을 선택하여 섬기게 했다. 그러나 이때에 유대교와 기독교는 그러한 로마정부의 종교정책에 순응하지 않았다. 그들은 오직하 나님만을 섬기었으며 하나님 이외의 다른 신들을 섬기지 않았고 신으로 인정하지도 않았다. 로마정부 당국은 유대교와 기독교를 다 함께 불순종하는 무리로 간주했다. 그러나 로마정부는 아직은 그것 때문에 기독교를 탄압하지 않았다. 앞장에서 이미 논증한바 있듯이 아직은 기독교를 유대교의 한분파로 인식하 고있 었던 반면에 유대교를 함부로 다스리는 것보다는 그들의 종교를 인정해 주는 것이 오히려 로마의 이익이 된다는 계산 때문이었다. 로마정부가 기독교를 탄압하게 된 것은 기독교와 유대교가 완전히 구분되어진 후에 발생 한기독교에 대한 부도덕한 소문들 때문이었다. 유대인들이 기독교 유대인과 유대교 유대인으로 구분되어진 후에 기독교에 대한 아름답지 못한 소문이 로마에 퍼지기 시작했다.

 

로마의 탄압 때문에 기독교인들은 로마정부의 눈길을 피하여 주로 새벽이나 깊은 밤에 지하 동굴이나 카타콤<Catacombs-지하묘지>등에서 집회를 가졌는데 그것이 새로운 박해의 원인이 되었다. 로마정부는 기독교의 비밀집회를 정치적 차원에서 우려했다. 유대인들이 비밀지하결사대를 만들어 폭동을 일으키려는 것으로 의심한 것이다.

 

3)사회적 원인.

 

로마인들은 로마제국에 대한 특별한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로마는 곧 자신이었으며 종교였다. 그들의 로마사랑은 애국차원을 넘어서 신앙이었다. 그러한 로마인들에게 오직 하나님만을 고집하며 군대복무를 거부하고 때로는 로마제국과 황제까지도 거부하는 기독교는 증오의 대상이었다. 로마인들은 천재지변이 일어날 때마다 그것을 기독교인들의 불충성에 대한 신의 노여움이라고 믿었다.

 

한편 로마인들이 기독교를 증오한 이유 중에는 기독교인들의 특별한 사생활도 포함되었다. 당시의 로마인들은 향락과 사치를 추구했으며 노예제도를 실시했고 특히 노예들을 검투사로 양성하여 검투사 시합을 즐겼다. 반면에 기독교인들은 인간의 평등을 주장하면서 노예제도에 반대했고 특히 노예들이 검투시합을 통하여 속절없이 죽어가는 것을 매우 안타까워했다. 기독교인들은 또한 성적으로 부도덕한 로마인들의 삶을 거부했으며 절대적 가부장제도 하에서 실시되는 각종 부도덕한 악행<예를 들면 여자아이를 낳았을 때 가장이 그를 싫어하여 내다 버리는 관습이나 아내를 마음대로 버릴 수 있는 관습>들을 거부했다. 이러한 기독교인들의 차원 높은 윤리적, 도덕적 삶은 로마인들의 자존심을 무너뜨렸고 그것이 기독교를 증오하는 원인으로 작용했다.

 

4)황제들의 음모.

 

로마정부가 처음에 종교 다원화정책을 세운 것은 로마 거주민들이 종교적인 문제로 사회적 혼란을 일으키지 않게 하려는 정치적인 책략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정책이 나중에는 종교들을 하나로 묶는 정책으로 바뀌었다. 로마정부는 만신전의 신들 위에 로마황제를 좌정시켰다. 즉 로마황제가 신들 중의 신으로서 최고의 신이며 따라서 모든 신들은 로마황제의 통치 하에 있는 하급신이라는 종교체계를 세운 것이다. 로마가 이러한 종교적 체계를 세운 것은 대략 두 가지 이유로 전해진다. 하나는 고대 애굽의 바로 왕조가 시행했던 정치체제를 모방한 것으로서 황제를 신격화 하여 신정치 체제의 제국을 건설하려한 것이고, 두 번째는 모든 신들 위에 황제를 좌정시킴으로서 로마제국의 종교적인 통합을 이루려 한 것이다. 그러나 로마정부의 종교정책은 로마집권자들의 정치적 계략에서 산출된 것이었다. 당시의 로마는 황제에 의한 군주정치를 옹호하는 정치세력과 원로원 위주의 공화정치를 옹호하는 정치세력간에 보이지 않는 암투가 계속되고 있었다. 원로원 위주의 공화정치 체제를 원하는 정치세력들은 황제의 군주정치가 독재적일 위험성이 있기 때문에 결국은 로마제국을 붕괴시키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여 황제에 의한 군주 정치체제를 막으려고 노력했다. 이에 반하여 사사건건 황제의 정책에 이의를 제기하는 원로원들에 대한 불만이 있는 황제와 황제의 측근들은 원로원의 힘을 약화시키거나 또는 아예 원로원 자체를 붕괴시키고 황제에 의한 군주정치 체제를 세우려고 했다. 황제와 황제의 측근들은 이러한 계략 하에서 황제의 신격화를 주장했고 드디어는 황제의 신적 지위를 만신전 위에 둠으로서 로마 전역에 대한 황제숭배를 강요했다. 원로원은 처음에 황제의 신격화를 단호하게 반대했으나 황제의 강압적인 권위에 눌려 그것을 허락했다. 그러나 원로원은 그 대신에 황제가 신으로 추대되는 것은 황제 생존시에는 불가하고 황제가 죽은 후 원로원의 결의를 거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황제는 그것을 받아들여 원로원의 체면을 세워주었다. 그러나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황제들은 계속하여 원로원을 몰아 부치어서 황제들이 생존시에 신으로 추대하게 하였고 황제들의 무력적 권위 앞에 원로원은 어쩔 수없이 굴복했다. 로마시내 전역은 물론이고 로마통치 하의 모든 지역에는 수많은 황제<신>들의 동상들이 건립되었으며 사람들은 그 앞에서 분향하고 경배해야 했다.

 

그러나 기독교는 이러한 황제숭배에 순종하지 않았다. 그들은 차라리 목숨을 버리는 한이 있어도 결코 황제를 신으로 받들어 섬기거나 경배하지 않았다. 때문에 황제는 그러한 기독교도들에 대하여 크게 분노하였고 그것이 기독교를 탄압하는 직접적인 동기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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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박해의 역사

 

사도시대교회는 기독교의 세계화를 위하여 준비되어진 하나님의 교회 역사이지만 참으로 파란만장한 것이었다. 사도시대에 이르러 수많은 하나님의 종, 하나님의 자녀들이 인간으로서는 참아내기 어려운 지경의 각종 박해를 받았으며 때로는 십자가에서, 때로는 단두대에서, 그리고 심지어는 로마의 원형경기장에서 속절없이 죽어갔다. 그러나 그들은 오직 하나님을 위하여 그 모진 박해를 기쁨으로 받아들였고 타오르는 화염 속에서 죽어가면서도, 사나운 맹수들에게 찢기어 삼키 우면서도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의 찬송을 드림으로서 박해자들을 전율하게 만들었다. 기독교에 대한 무서운 박해는 기독교 역사가 본격적으로 진군하기 시작하였던 로마교회를 통하여 시작되어 졌다. 우리는 사도시대의 기독교박해를 고찰하면서 그 박해가 발생하게 된 이유와 배경을 신학적으로 분석하며 또한 그 박해를 허락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신학적으로 정립한다.

 

1.유대인들에 의한 박해.

 

사도시대 기독교교회에 대한 박해는 유대교로부터 시작되었다. 이때에 유대인들은 같은 하나님을 섬기면서도 유대교와 기독교로 갈라져 서로 대립하는 형편이었다. 유대교와 기독교의 대립은 이스라엘 본토에 국한 된 것이 아니라 세계 전역에 흩어져 있는 디아스포라 유대인 전체에 확산 되었다.

 

1.유대교와 기독교의 대립.

 

초기 기독교 당시 유대인들은 매우매우 혼란스러운 입장에 처해 있었다. 유대인들은 수세기 동안 외세의 침략과 정복에 의하여 국가 없는 조국을 마음 속에 지키고 그리며 살았다. 그러 그들에게는 조상대대로 전승되어 온 메시야사상에 의한 시온니즘적 대망이 있었고 그 대망이 이루어지는 날을 기다리며 살았다. 그러한 유대인들에게 예수그리스도의 출현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었다. 가난한 일개 목수의 아들이 메시야를 자처한 것도 민족적 자존심에 상처를 주었는데 그 목수의 아들이 점점 오만방자해 지더니 이제는 아예 하나님과의 내선일체를 주장하고 나섰다. 유대인들은 심히 분노하였고 그를 로마법정에 세워 처단해 버렸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난줄 알았던 예수그리스도의 잔영<殘靈>이 그의 제자들을 통하여 되살아 났다.그리고 그를 추종하는 세력들이 점점 늘어가면서 상대적으로 유대교 세력이 약화되었다. 이미 국가의 멸망으로 민족 전체가 전 세계에 뿔뿔이 흩어졌고 본토에 남은자 마져 교리적 문제로 사분오열되었으며 밀려들어오는 헬라니즘, 그레꼬로만니즘 등등의 이방문화로 인하여 전통적인 시온니즘이 와해되고 있는 상황 하에서 가볍게 보았던 신흥종파가 유대인 사회 전체를 위협했다. 이러한 상황은 본토 예루살렘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로마, 그리스, 이집트, 팔레스틴 등등의 지역에 흩어져 있던 디아스포라 유대인 사회 전체에 만연되었다. 특히 디아스포라 유대인 사회는 본토 유대인 사회보다 더욱 심각한 상황이었다. 여러 가지 사연으로 인하여 조국을 떠나 살고 있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조상대대로 계승되어 온 시온니즘 하에서 회당을 중심으로 하는 신앙적 삶을 살았다. 그러한 유대인들에게 어느 날 뜻밖의 소식이 전해졌다. 드디어 고대하던 메시야가 탄생하였다는 희소식이 전해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전해들은 소식들은 정확한 것이 아니었다. 어떤 경우에는 진실보다 많이 오류 되어 있거나 무시되어 있어서 신경 쓸 것 없는 가벼운 이야기였고 어떤 때는 너무 과장되어 놀라운 소식일 때도 있었다.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처음 전해들은 이야가는 참으로 놀라우면서도 실망스러운 이야기였다.

 

*베들레헴의 어느 마구간에서 목수의 아내가 사내아이를 낳았는데 그 아이가 유대인의 왕이라고 해서 동방의 박사들이 경배했다. 이에 헤롯이 놀라 당시에 태어난 사내아이들을 모두 살해하였다.*.

 

이러한 이야기를 전해들은 유대인들은 한편으로는 놀라움과 기대감을 가졌고 한편으로는 실망하였다. 그들은 조상대대로 전해 내려온 구세주가 드디어 왔는가? 하는 점에서 놀라움과 기대감에 부풀었다. 그러나 구세주가 목수의 아들로 태어났다는 사실에 의문과 실망을 하였다. 그들은 구세주가 헤롯왕조의 후예로 태어날 수 없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헤롯은 유대인이 아닌 이두메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의 상식대로라면 구세주는 목수의 아들이 아닌 다윗가문 중에 명망 있는 어느 집안에서 태어나게 되어 있었다. 때문에 그 후로 30여년이 흐르도록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이야기가 더 이상 전해지지 않음에 따라 그들은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잊어버렸다. 그러나 30여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 목수의 아들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가 다시 들려왔다. 그가 세례요한에게 세례 받은 후 광야에서 시험받은 이야기를 비롯하여 각종 이적과 기적을 행한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은 그들은 크게 놀랐고 흥분하였으며 메시야에 의한 조국과 민족의 영광이 재현될 것을 열망하게 되었다. 특히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임을 선포했다는 대목에서 그들은 크게 고무되었고 새로운 시온니즘에 대한 정열이 불타올랐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다시 실망스러운 소식이 들려왔다. 그것은 예수님의 죽음이었다. 비록 그가 약속한 대로 다시 살아났다는 소문이 함께 전해졌지만 그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의 부활소식은 믿을 수 없는 낭설로 받아 들여졌다.

 

그러나 계속하여 전해지는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소식으로 인하여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두 개의 서로 다른 종교적 집단으로 나누어 졌다. 그들에게 전달되는 예수그리스도는 전해주는 자의 성향에 따라 크게 달랐고 경우에 따라서는 심히 대조적이었다. 민족적 시온니즘 자들이 전하는 예수그리스도는 십자가에 허무하게 죽어간 허약하고 나약한 가난뱅이였으며 혹세무민<惑世誣民>의 위선자이며 사기꾼이었고 매국노였다. 반면에 평화주의자들이 전하는 예수그리스도는 각종 기적과 이적을 일으키는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이었고 죽는 순간까지 모든 죄인을 용서하는 사랑의 메시야였으며 사망권세를 물리치고 부활 승천한 왕중의 왕이었다. 그리고 그는 다시 오시어 세상을 심판하실 심판주였다. 때문에 유대인들은 전해주는 자들의 성향과 전해 받는 자들의 성향에 따라 두 가지로 구분되었다. 전달하는 자나 전달받는 자가 모두 민족적 시온니즘자들인 경우에 그들은 유대교에 머물면서 예수그리스도와 그의 후예들을 증오하고 적대하였다. 반면에 전달하는 자와 전달받는 자가 다 함께 평화주의자일 경우에 그들은 새로운 평화주의적 시온니즘을 형성하면서 기독교로 개종하였다. 그런데 또 다시 놀라운 소식이 전해졌다. 오순절 성령임재 사건이 전달된 것이다. 성경은 그 때에<천하 각국으로부터 온 경건한 유대인들이 그 사건에 동참했다-2:5>고 증거 한다. 그때에 천하 각 국으로부터 온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을 통하여 성령임재 사건을 전해들은 유대인들은 민족적 시온니즘에서 탈피하여 평화주의적 시온니즘으로 돌아섰고 그리하여 기독교로 개종하였다. 그러나 수 십 세기 동안 계승되어진 시온니즘 주의자들은 여전히 그 소식을 낭설로 받아들였다. 때문에 그들은 기독교로 개종하는 유대인들을 반역자로 몰아 증오하고 적대하였다.

 

2.민족적 개념에 의한 대립.

 

당시에 유대인들은 자신들만의 야훼하나님이 세계의 하나님으로 전파되는 것에 분노하였다. 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께 선택된 백성은 오직 히브리민족 이스라엘 뿐 이었다. 수천 년 간 조상대대로 계승되어온 선민사상과 자신들만의 하나님에 대한 자부심과 긍지로 살아온 그들에게 세계적인 하나님을 주장하는 기독교 유대인들은 이제 더 이상 동족이 아니라 매국노였고 역적이었다. 특히 같은 유대인들임에도 불구하고 유대교와 기독교사이에는 조국과 민족의 멸망과 비극에 대한 역사관에 커다란 차이가 있었다. 기독교인들은 조국과 민족의 비극적 멸망에 대한 책임이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예수그리스도를 처형한 유대교인들에게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그러한 책임을 다윗과 솔로몬에게까지 소급하였다. 이러한 개념은 일반인들에게서는 별로 나타나지 않았지만 성경에 밝은 지도자 계열에서는 단호하게 나타났다. 저들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중심의 신정 국가적 정치체제를 세우지 아니하고 인간주의적 정치체제를 이루었기 때문에 하나님께 버림받았으며 특히 다윗이 밧세바를 왕비로 취하기 위하여 우리야를 살해한 것과 밧세바가 낳은 솔로몬을 왕위에 앉힘으로서 이스라엘이 남북왕조로 분단되었고 솔로몬이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숭배 하는 이방여인들과 통혼함으로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국가와 민족이 멸망했다고 주장하였다. 유대교인들은 기독교인들의 그러한 주장에 크게 진노하였다. 그들에게 있어서 다윗과 솔로몬은 이스라엘국가를 부국강병의 국가로 발전시킨 위대한 성군이었다. 따라서 그러한 주장을 국가와 민족에 대한 배신행위로 간주하였고 기독교인들을 증오하고 저주하였다. 한편 유대교인들은 자신들의 조국과 민족적 패망이 하나님을 바로 섬기지 아니한 이단적 유대교 분파들 때문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기독교라는 새로운 이단분파로 인하여 유대민족에게 하나님의 더 큰 진노가 있게 될 것을 두려워하였다.

 

2.교리적 개념에 의한 대립.

 

유대교인들은 기독교가 조상대대로 전수되어 온 자신들의 신앙적 구심이었던 율법을 소홀히 여기고 함부로 간과하는 것에 크게 분노하였다. 그들은 이미 안식일 문제를 비롯한 율법문제로 예수그리스도를 공격하였다가 번번이 참패당한 상처와 감정이 있었다. 그런데 이번엔 바울이 아예 율법을<기독교를 안내하는 몽학선생>이라고 폄하 하였다. 유대교인들은 크게 경악하였고 무너진 자존심과 극심한 상처에 심히 분노하였다. 그들은 기독교를 그대로 방치하면 유대교 자체가 송두리째 와해 될 것이라는 위기감과 불안감에 전전긍긍 하였다. 이때의 유대교는 로마당국으로부터 공인받은 종교<religio licita>였던 반면에 기독교는 아직 신흥종교로서 그러한 지위를 확보하지 못했다. 때문에 유대교는 기독교를 사정없이 몰아 세워 로마정부에 고소하였고 기독교는 오히려 로마정부의 보호를 요청해야 하는 형편이었다. 한편 로마정부는 이때까지만 해도 아직은 기독교를 본격적으로 탄압하지 않았다. 로마정부는 처음에는 기독교와 유대교의 갈등을 유대인들 사이의 종교적 갈등 정도로만 이해하였다. 따라서 로마정부는 유대교와 기독교의 갈등에 관여 하려 하지 않았다. <18:12-17>에는 그와같은 당시의 상황이 증거되고 있다.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세웠을 때에 유대인들이 기독교를 핍박하기 위하여 아가야의 총독 갈리오<마르쿠스 안네우스 노바투스-Marcus Annaeus Novatus>에게 바울을 고소하였으나 갈리오총독은<너희 유대인들아 만일 무슨 부정한 일이나 괴악한 일이었으면 내가 너희 말을 들어주는 것이 가하거니와 만일 문제가 언어와 명칭과 너희 법에 관한 것이면 너희가 스스로 처리하라 나는 이러한 일에 재판장 되기를 원치 아니하노라>하고 그들을 재판정에서 쫒아내었다.<18:12-17> 로마정부는 폭동이나 난동이 생길 때에는 치안유지를 위하여 군대를 동원하고 주모자를 색출하여 체포했지만 종교적, 민족적 갈등에는 되도록이면 간섭하지 않았다. 당시의 기독교는 오직 복음전파에 주력하였으며 따라서 로마정부의 심기를 거슬리는 일이 복음전파에 지장을 준다는 차원에서 로마정부를 자극하는 어떤 행동을 삼갔다. 반면에 유대교도들은 여전히 로마에 대하여 적대적이었다. 그들은 로마로부터의 정치적 자유를 쟁취하려 했으며 기회만 있으면 로마에 저항했다. 때문에 기독교가 유대교와는 다르다는 사실이 점점 들어나게 됨에 따라 로마정부는 기독교에는 어느정도 호의적인 반면에 유대교는 우려의 눈길로 예의 주시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기독교에 대한 유대교의 감정은 더욱 나빠지게 되었다.

 

로마의 역사학자 수에토니우스<Suetonius>의 저서<클라우디의생애-Life of Claudius>에 의하면 A.D.50년경에 로마에서 유대교와 기독교사이에 폭력이 동원되는 마찰이 있었다. <18:2>은 아굴라와 브리스길라가 글라우디오의 명령에 의하여 로마를 떠나 고린도에 이주한 것을 증거 한다. 이때의 글라우디오는 로마제국의 제4대 황제였는데 그는 이때에 기독교와 유대교를 구분하지 않고 모든 유대인들을 로마로부터 추방시켰다. 수에토니우스는 글라우디오황제가 유대인들을 로마에서 추방시킨 것은 크레스투스<Chrestus>라는 사람의 선동으로 인하여 유대인들이 계속하여 폭동을 일으켰기 때문이라고 증언한다. 학자들 중에는 크레스투스가 예수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해석하여 기독교인들이 유대교도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유대교인들이 폭동을 일으킨 것으로 이해한다.

 

이토록 오랫동안 서로 반목하고 갈등하던 기독교와 유대교는 <A.D.70>에 일어난 예루살렘 붕괴와 성전의 파괴를 계기로 하여 더욱 심화되었다. 기독인들은 그러한 민족적, 국가적 비극의 종말에 대한 책임을 하나님께 불순종 하고 예수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처형한 유대교에게로 돌렸다. 때문에 유대교인들은 더욱 분노하였고 그리하여 <A.D.85>년에 이르러 드디어 엄청난 사태가 일어났다. 유대교도들은 회당예배 의식을 통하여 기독교인들의 파문을 공식적으로 선포하였다. 그들이 선포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나자렛인들(Nazarenes-기독교인들을 가리킴)과 다른 모든 이단들은 순식간에 멸망을 받고 생명의 책(Book of Life)으로부터 지워질지어다.>

 

이로서 기독교 유대인들과 유대교 유대인들은 같은 민족임에도 불구하고 완전한 결별을 이루었으며 로마에 의한 기독교 탄압의 와중에서 기독교인들에 대한 유대교인들의 박해도 여전히 계속되었다.

 

2.이방인들에 의한 박해.

 

로마를 제외한 지역들에서는 기독교가 다양한 종교들 중의 하나에 불과했다. 로마제국의 종교정책 하에서 다신론 종교사상이 만연되었고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비록 기독교가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섬기는 특별성을 고집함으로서 다소 이상하기는 했지만 이미 디아스포라 유대교인들을 통하여 그들의 하나님 유일신앙을 경험하였기 때문에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들은 오히려 하나의 하나님을 섬기면서 동족끼리 서로 대립하고 마찰하는 유대교와 기독교를 이상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로마의 상황은 달랐다. 다른 지역의 기독교와 달리 로마의 기독교는 각종 이방민족들에 의한 박해에 시달려야 했다. 로마제국 정부는 두 가지 차원에서 다신론적 종교정책을 시행하였다. 첫째는 주변을 정복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다신론적 종교사상이다. 로마의 정복자들은 자신들 앞에 패배한 자들이 섬기는 신들이 매우 연약한 신들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강한 능력을 소유한 신들의 후원이 절대 필요하며, 하나 또는 소수의 신들에게 의존하는 것보다는 많은 신들의 후원이 효과적이라고 생각했다. 다른 또 하나는 정복지를 관리함에 있어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정복지 주민들의 종교를 탄압하지 않고 오히려 장려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두 가지 차원에서 로마제국 정부는 정복지의 종교와 신들을 모두 인정하고 받아들였으며 로마시에 만신전<모든 신들의 신전-Pantheon>을 설립하여 정복지에서 유입한 모든 이방민족들이 자신들이 섬기는 신들의 형상을 만들어 세우게 했다. 만신전에 세워진 신들은 유대교와 기독교의 하나님과는 성격이 달랐다. 그 신들은 오직 유일하신 하나님이 아니었기 때문에 자신만을 고집하지 않고 모든 신들과 어울려 사이좋게 지냈다. 로마의 종교인들은 지금까지 자신들이 섬기던 신만을 고집하지 않고 마음에 드는 신들을 골라 섬기는 다신숭배적 신앙생활을 했다. 이러한 와중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유대교와 기독교를 증오하게 되었다. 유대교와 기독교는 신의형상이 없었기 때문에 만신전에 그들의 하나님 신상을 세우지 않았고 신을 세우라는 종교행정 당국의 지시에도 절대 불응했다. 종교행정 당국은 유대교와 기독교에게 신의 형상이 없음으로 신을 세울 수 없다는 저들의 변명을 이해했지만 이교도들은 그것을 자신들에 대한 종교적 모독으로 간주했다. 그들은 유일신을 고집하는 유대교와 기독교가 다신론적인 자신들의 신들과 자신들을 동시에 무시한 것으로 생각하여 유대교와 기독교에 대한 좋지 않은 감정을 갖게 된 것이다. 그들은 특히 기독교를 이상하게 보았다. 그들에게 있어서 유대교는 이미 어느정도 알고 있었던 종교였다. 그러나 기독교는 동족인 유대교로부터도 배척되어진 종교로서 여러 가지 차원에서 생소했고 이해할 수 없는 요소들이 많았다. 당시에 로마에는 기독교에 대한 오류 된 소문들이 많았다. 기독교에 대한 소문들은 주로 그들의 신앙적 생활에 대한 오해로 인한 것이었다. 기독교 신자들은 매일 같이 애찬<love feast>을 위한 모임을 가졌다. 그것은 성도들의 특별한 모임이었는데 모두가 다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대부분 세례를 받은 자들만의 모임이기도 했다. 모임에 참예한 기독교 성도들은 서로를 형제, 또는 자매라고 불렀으며 자신의 배우자들에게도 이러한 호칭이 사용되었다. 사람들은 이러한 기독교인들의 모임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자신들 마음대로 상상하여 이야기하였고 그것들이 입에서 입으로 옮겨지는 가운데 이상한 소문으로 발전하였다. 그리하여 기독교인들의 예배는 비밀리에 한데 모여 먹고 마시며 방탕을 즐기며 나중에는 불을 끈 다음 남녀노소가 어울려 혼음<club sex>을 하며 심지어는 근친상간까지 한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기독교에 대한 또 다른 나쁜 소문은 성찬식 때문에 생겨났다. 기독교신자들은 성찬식을 거행할 때에 예수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취한다고 했으며 또한 예수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는데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은 기독교인들이 새신자의 입교식 때에 유아를 커다란 빵 속에 감추어 두고 입교자에게 그 빵을 자르게 한 후 아직도 따뜻한 유아의 살을 함께 먹는다는 소문을 낸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사실을 알지 못하고 그것을 먹은 자들은 자신의 범죄가 탄로날까봐 침묵을 하게 되고 어쩔 수 없이 기독교에 머무르게 된 다는 소문이 추가되었다. 이때에 로마에는 실제로 그러한 종교집단이 있었기 때문에 기독교도 그러한 의심을 받게 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인들이 온 인류를 증오하고 저주한다는 소문도 나돌았다. 그것은 유대교인들과의 갈등 때문에 생겨난 소문이었다. 사람들은 같은 유대인이면서도 유대교적 유대인들을 거부하는 기독교인들을 보면서 그들이 동족까지도 미워하는 자들이기 때문에 당연히 온 인류들을 증오하고 저주할 것이라고 소문낸 것이다. 이러한 헛소문들에는 유대인들도 관여되어 있었다. 유대인들은 기독교인들이 예수그리스도를 처형한 유대인들을 경멸하자 그것을 기독교인들이 전 인류를 증오하고 저주하는 것으로 오류 시켜 확산했다. 때문에 네로 통치시대에 로마에 화재가 나고 그것이 기독교의 소행이라는 소문이 퍼졌을 때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인들을 고발하거나 또는 직접 위해를 가하는 일이 도처에서 발생했다. 또 어떤 자들은 아기 예수께서 마구간에서 태어났다는 이야기를 와전시켜서 기독교인들이 당나귀 또는 송아지에게 예배한다고 소문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기독교인들을 형편없이 무자비하고 무식한 종교집단이라고 믿었으며 따라서 기독교인들은 탄압받아 마땅한 자들이라고 비웃고 증오했다. 기독교에 대한 비난과 비판은 지식층, 또는 학자들에게서도 나왔다. 그들은 기독교에 대한 것을 다각도로 연구조사 했다. 때문에 기독교인들이 소문과 같이 패역하고 부도덕한 종교 단체가 아니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그러나 그들은 기독교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하나님 이외에 다른 신이 없다는 것과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을 구하기 위해서 구세주로 오셨는데 그가 목수의 아들로서 마구간 말구유에 태어났고 십자가에 죽은 후 부활하여 하늘로 올라갔으며 나중에 세상을 심판하러 온다는 이야기는 그들에게 도저히 납득되지 않는 이야기들이었다. 로마인들은 본래 지극히 합리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힘을 강조하는 군사문화 속에 살아온 사람들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헬라문화를 받아들여 철학적이고 논리적인 개념을 그들의 합리적인 라틴니즘과 연합시켰다. 때문에 그들은 신을 인식함에 있어서 강하고 능력 있는 신만이 최고의 신이라고 믿었다. 그러한 로마인들에게 최고의 능력을 가졌다는 유일한 신의 아들이 마구간 말구유에 태어났다는 것 자체가 이미 상식 밖의 일이었고 더구나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었다는 이야기는 도저히 말이 않되는 이야기였다. 그들의 상식으로는 그렇게 변변치 못한 구세주란 용납되지 않는 것이며 그가 살아서 하늘로 올라갔다는 것과 나중에 세상을 심판하러 온다는 이야기들은 모두가 허황된 거짓말 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기독교를 유대교에서 갈라져 나온 종파들 중에서 가장 저급한 종파로 보았다. 로마인들은 원래 유대교와 기독교의 주장을 어불성설<語不成說>로 간주하였다. 그들은 유대교와 기독교인들이 하나님 이외의 모든 신들을 만들어 세운 가짜라고 무시하는 것을 종교적인 논리로 다음과 같이 반박했다.

 

<만약에 로마의 만신전에 있는 신들이 모두가 가짜라면 유대인들은 그 가짜를 무시하지 못하고 왜 두려워하여 그들 곁에도 가지 않는가? 그리고 또한 그토록 강하고 최고의 능력을 가진 신의 아들이 어찌하여 십자가에 죽었으며 그토록 전능하신 신께서 어째서 자신을 추종하는 자들을 망하게 하고 돌아보지 않는가?>

 

로마의 지식인들은 기독교를 어리석고 무식한 자들의 종교적 집단으로 규정하고 조롱했다. 그들 중에 가장 기독교를 무시하고 조롱한 자는 마르쿠스아우렐리우스의 치세 기간 중에 명성을 날린 지식인 들 중 하나였던 켈수스<Celsus>였다. 그는 예수그리스도께서 마리아와 로마병사 사이에 태어난 사생아라고까지 하면서 기독교를 조롱했다. 그는<진정한 말씀-The True Word>이라는 저서를 통하여 다음과 같이 기독교를 조롱했다.

 

<개인들의 가정에서도 우리들은 옷감과 자갈을 가지고 일하는 자들, 즉 가장 무식하고 교양 없는 자들을 찾아 볼 수 있다. 집안의 가장 앞에서는 이들은 감히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침묵을 지킨다. 그러나 기회만 있으면 어린아이들과 혹은 무지한 여인들을 황당무계<荒唐無稽>한 이야기로 꼬이기 시작한다.....따라서 내가 진정 진리를 알기 원한다면 스승들과 아버지를 떠나 여인들과 아이들을 쫓아 목공소나 철공소, 혹은 여인들의 사랑방으로 가라. 거기서 완전한 생활의 지혜를 배울 수 있으리라. 이것이 곧 소위 기독교인들이 자기들을 쫓는 자들을 기만하는 방법이다.>

 

<도대체 하나님이 이와같은 방법으로 지구를 방문할 이유가 어디 있단 말인가? 과연 인간들 가운데 일어나는 사건을 알아보기 위해서였을까? 그렇다면 그가 이미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지 못한단 말인가? 그렇지도 않다면 그가 아시기는 하지만 직접 내려오시기 전에는 세상에서 벌어지는 악행을 처리하실 수 없기 때문이었을까?>

 

<기독교인들은 자기들이 죽은 후에 다시 부활할 것을 믿으며 가르친다. 이러한 신앙의 기반 위에서 다른 이들이 믿을 수 없는 완강한 고집으로 죽음을 맞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공정하게 보아도 그 존재가 불확실하다고 밖에 할 수 없는 내세를 위하여 그 존재가 분명한 현세를 포기하는 것은 비논리적이다. 더욱이 최후의 부활이야말로 기독교가 갖는 웃음거리 중 대표적인 것이다. 인간이 부활한다면 불에 탔거나 혹은 짐승이나 물고기 등에 의해 먹혀버린 시체들은 어떻게 될 것인가?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시체의 흩어진 부분을 찾아 세상을 헤매야 하실 것인가? 이를 다 찾아 꿰매지 못하는 경우에는 부활한 육체에 부족한 것이 생길 것인가?>

 

****

 

로마지식인들의 이러한 반박들은 기독교의 신학원리를 깨닫지 못함에서 비롯된 것이었지만 그것은 현대 종교학에서도 때때로 제기되는 질문들이다. 기독교 신학자들은 이러한 질문에 대한 대답을 분명하게 해주어야한다. 그것이 신학자들에게 주어진 변증의 책임이며 의무이다. 그러나 현대 목회자들 중에는 이러한 질문에 해답을 주기는 고사하고 오히려 더 많은 불신을 당하는 논리를 주장하는 자들이 있다. 그 중에 하나가 기독교인들은 부활해야 하기 때문에 사망했을 때 화장해서는 않되고 반드시 매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에 저들의 주장대로라면 전쟁이나 화재 등등을 당하여 시신 자체가 완전히 훼손되어 버린 성도들은 결코 부활 할 수없게 된다. 뿐만 아니라 수백 년 전에 사망한자들은 비록 매장했다 할지라도 완전히 사라져 흔적조차 없으며 비록 그들이 흙으로 남아 있다 할지라도 개발, 건축 등등을 통하여 이미 흩어져 버린 상태이므로 부활할 수 없다. 인간의 부활은 하나님의 능력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죽은 자의 상태는 아무의미가 없다. 기독교성도의 죽음을 매장으로 고집하는 자들은 이러한 원리를 모르는 무식한자들이다. 저들은 초기 기독교시대의 로마인들과 같은 어리석은 자들인 것이다.

 

3.로마정부에 의한 박해.

 

기독교에 대한 행정적, 법적 구속력이 없는 유대교나 일반 종교들의 박해는 지엽적인 것에 불과하였다. 보다 확실한 박해는 로마정부 당국에 의한 박해였다. 로마정부 당국은 기독교에 대하여 수세기 동안 그리고 무자비하게 탄압하고 박해하였다. 로마정부 당국의 박해는 로마 통치 하의 전 지역에서 시행되었으며 그 유형과 사례도 매우 복잡하고 다양했다. 따라서 그것을 일일이 다 소개할 수 없기에 그 중에 대표적인 사례들을 선별하여 정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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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 루터 종교개혁


“개혁은 내가 한 것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것”

하루 3시간 이상 기도, 무기는 오직 ‘성령의 검’
직업소명관과 사유재산제로 자본주의 토대 구축
“사탄은 분노를 나타내고 있다. 경건치 않은 수도사들이 공모하고 있으며 우리는 궁지에 몰리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믿음과 기도로써 담대히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라고 권할 것이다. 그리하면 원수들은 하나님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정복되어 잠잠하게 될 것이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하고 급한 것은 기도이다. 이 싸움에 사용되어야 할 무기는 오직 성령의 검 뿐이다.”

 

이 기도문은 종교개혁 당시 강력한 개혁 반대파들이 온 힘을 합하여 개혁파의 신앙을 뒤집으려 했을 때 마틴 루터(Martin Luther·1483~1546)가 했던 기도이다. 세계를 움직인 위대한 종교개혁의 큰 능력은 밀실의 기도에서 나왔다. 루터는 하루 3시간 이상 기도하지 않는 날이 없었다. 그것도, 연구하기에 가장 좋은 시간을 그렇게 했다.

마틴 루터는 1483년 11월 10일 독일의 작센안할트주 아이슬레벤에서 출생했다. 아버지 한스 루터는 광산업을 경영, 성공하여 중세 말에 한창 득세하던 시민계급의 한 사람이다. 한스 루터는 엄격한 기독교 신앙의 소유자였으며 자식의 교육에도 많은 관심을 가졌다.

루터는 1501년 에르푸르트 대학교에 입학, 1505년 일반교양 과정을 마치고 법률공부를 시작했는데, 이때부터 자신의 삶과 구원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루터가 왜 성직에 입문하기로 결심했는지 알려주는 증거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다만 그가 만년에 쓴 <식탁담화·Tischreden>에는 1505년 7월 2일 루터가 친구와 함께 부모를 방문하고 돌아가는 도중 천둥을 동반한 폭풍우를 만나게 된 것으로 적혀 있다. 이 때 루터는 친구가 벼락에 맞아 죽는 것을 목격했다고 한다.

친구의 죽음을 계기로 루터는 불안과 번민에 휩싸였으며 구원의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된다. 그는 아버지의 만류를 뿌리치고 학업을 중단, 에르푸르트의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에 들어갔다. 이후 사제가 되어 1511년 비텐베르크대학교로 옮겨 1512년 신학박사가 되고 1513년부터 성서학 강의를 시작했다.

루터는 수도원 생활에서 중세교회가 제시한 고해성사나 신비주의적 구원의 방법들을 하나씩 부정하게 된다. 절망적으로 구원을 구하던 루터는 로마서를 연구하다가 복음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는 믿음을 통해 우리를 의롭다 하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당시 루터는 “즉시 다시 태어나서 열린 문들을 통해 낙원 바로 그 자체에 들어온 느낌을 스스로 가졌다”고 말했다.

신약 독일어번역 통해 독일통일 기여

당시 로마가톨릭교회는 아비뇽 교황과의 대립으로 생긴 분열결과로 14세기경부터 안팎에서 쇠퇴의 기미를 보이고 있었다. 특히 가톨릭교회는 죄를 완전히 참회하고 다시는 죄를 범하지 않을 결심으로 고백할 때, 죄를 용서받는다고 가르치면서도 죄의 벌은 남게 되므로 그것을 기도나 선업(善業)으로 갚을 것을 권했다.

가톨릭교회는 성당건설과 포교를 위해 많은 돈이 필요해지자 헌금을 권하면서 면죄부(免罪符) 발행을 남용하여 많은 폐단을 가져왔다. 루터는 이에 대해 하나님은 인간에게 행위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에게 은혜를 베풀어 구원해주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렇게 해서 루터는 당시 교회의 관습이 되어 있던 면죄부 판매에 대한 비판으로 <95개조 반박문>을 통해 종교개혁의 깃발을 들게 되었다.

그는 교황으로부터 ‘파문칙령’을 받았으나 이를 불태워버렸다. 1521년에는 신성로마제국의회에 환문되어 그의 주장을 철회할 것을 강요당했으나 이를 거부, 제국에서 추방되는 처분을 받았다.

당시 루터는 이렇게 대답했다. “성서의 증거에 의해서나 아니면 분명한 이성에 의해 나를 설복시키지 않는다면, 내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철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양심에 역행하는 것은 안전하지도 않고 올바르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거대한 제국의 권위에 대한 역사적인 양심선언이었다.

그로부터 9개월 동안 작센 선제후(選帝侯:중세 독일에서 황제 선거의 자격을 가진 제후)의 비호 아래 바르트부르크성에서 숨어 지내면서 신약성서의 독일어 번역을 완성하였다. 이것이 독일어 통일에 큰 공헌을 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후 루터는 비텐베르크로 돌아오자마자 새로운 교회 형성에 힘썼는데 처음에는 멸시의 뜻으로 불리던 호칭이 마침내 통칭이 되어 ‘루터파 교회’가 성립되었다.

루터는 종교개혁에서 파생된 과격파나 농민의 운동, 농민전쟁에 대해서는 철저히 성서 신앙적 입장을 취함으로써 이들과의 구분을 지었다. 그 뒤 만년에 이르기까지 가톨릭교회와 종교개혁 좌파 사이에서 이들과 논쟁·대결하면서 성서강의·설교·저작·성서번역 등에 헌신함으로써 종교개혁운동을 추진했다. 그는 영주(領主)들 간의 분쟁 조정을 위해 고향인 아이슬레벤에 갔다가 병을 얻어 그곳에서 소천(召天)하였다.(1546년)


인간은 하나님께 신앙으로 응답해야

그는 신학의 근거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신의 철저한 은혜와 사랑에 두고 인간은 이에 신앙으로써 응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 하나님께 반항하고 자기를 추구하는 죄인이지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를 용서받고, ‘자유로운 군주’이면서 ‘섬기는 종’이 되는 것이며, 신앙의 응답을 통해 봉사를 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특히 소명을 받고 수도자나 성직자가 되어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는 일뿐만 아니라, 신앙 안에서 어떤 직업에 종사하면서 사는 기독교인은 모두가 특별한 소명을 받았다고 주장한 루터에 의해 개신교에서는 새로운 소명관(召命觀), 즉 직업관이 형성되었다.

이러한 루터의 직업 소명설은 근대 자본주의의 발전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당시 일부 재세례파(再洗禮派)가 주장하던 공유재산제도를 비판하고 사유재산제도를 옹호했다. 루터는 상업활동을 필수적인 것으로 인정하고 기독교적 방식으로 실시될 수 있다고 봤다.

루터의 이러한 사상은 이후 칼빈(Jean Calvin)과 칼빈주의자들을 거쳐 근대자본주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루터는 또 구걸을 금지시키고 가난한 자들을 제도적으로 보살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어린이들에 대한 무상교육을 주장했다. 특히 공중도서관을 세우되 거기에는 성서뿐만 아니라 기독교 고전과 희랍, 로마의 고전, 법률, 의학, 예술, 역사서적의 비치도 주장했다. 루터는 스스로 과학의 발전과 기계의 발명에 감탄을 보냈다.

우리는 루터를 말할 때 당연히 ‘종교개혁자’라는 칭호를 붙인다. 그러나 루터 자신은 스스로를 ‘개혁자’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종교개혁은 하나님에 이끌려 했던 일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개혁’은 오로지 하나님의 궁극적인 개입이기 때문이다.

루터는 자신을 하나님의 도구로 보았다. 종교개혁 당시 사람들은 “개혁!”의 구호만을 외쳤다. 그러나 우리가 루터에게서 접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이 그것을 원하신다.”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것을 하신다.”였다. 면죄부 논쟁으로부터 시작하여 새로운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그는 자신의 탁상담화와 편지에서 밝혔다. “이 일에 나는 하나님에 의해 이끌려왔습니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나는 던졌습니다.”

루터가 살았던 15세기에는 종교개혁과 함께 르네상스가 일어났던 때이다. 그러나 르네상스적 인문주의와 종교개혁과는 본질적으로 성격을 달리한다. 르네상스적 인문주의는 예술적이고 귀족적일 뿐이어서 역사를 변혁할 힘을 갖지 못했다.

그러나 루터의 종교개혁운동은 사람들의 마음에 깊이 스며들어 역사를 움직였다. 그러므로 근대의 서곡이라 할 수 있는 르네상스와 종교개혁과는 그 출발점과 역사상 미친 영향면에서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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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개혁하는 교회’(ecclesia semper reformanda)

“하나님의 힘만이 괴로움의 무거운 짐을 견디게 하고 우리를 굳건히 서게 할 것이다.”<존 칼빈Jean Calvin*1509~1564>

마틴 루터와 더불어 세계사를 움직인 위대한 신학자이자 종교개혁가인 칼빈은 1509년 7월 10일  노용(Noyon*프랑스)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원래 노동자였으나, 부지런함과 조직력을 인정받아 노용관구의 여러 가지 업무를 보다가 최종적으로 교회의 재정을 관리하는 일을 하였다. 칼빈의 어머니 즈앤(Jeanne)은 음식점을 경영하던 노용시의 온건파 유지급 인사의 딸로 경건한 부인이었다.

칼빈은 ‘걸어 다니는 종합병원’이라는 별명이 말해 주듯이 어린시절부터 안색이 좋지 않았으며 몸이 허약하고 수줍어하는 편이었다. 그러나 그는 사리 판단이 정확했으며 지적 능력이 아주 뛰어났기 때문에 아버지 제럴드 칼빈(Gerald Calvin)으로부터 깊은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그래서 그는 칼빈을 파리에 있는 대학으로 보냈다.

14세 때 그는 파리로 가서 라 마르세(La Marche) 대학에 등록했다. 이후 그는 몽테규(Montaigu)대학으로 옮겨 금욕적이고 엄격한 교육을 받으며 장시간 공부하는 습관을 익혔다. 그의 최종학위는 1531년 오를레앙(Orleans) 대학에서 받은 법학 박사이다. 칼빈은 5년간의 대학 생활 동안 수 많은 프로테스탄트 동역자들과 교제를 나누는 과정에서 종교 개혁의 새로운 사상을 접하게 된다.  

1533년경 20대 초반의 칼빈은 프로테스탄트로 개종했다. 이 시기 그는 하나님의 은혜에 완전히 압도당하여 갑작스러운 회심을 체험했으며 이것이 계기가 되어 그는 성직자로서 종교 개혁에 헌신하기 시작했다. 1534년 5월 4일 공식적으로 로마 교회와 결별 했다. 1534년에 그는 제세례파의 영혼 수면설에 반대하여 ‘심령 수면설’이라는 소제목의 책자를 발간했다. 당시 프랑스의 통치자였던 프란시스 1세는 종교개혁에 대해 불분명한 태도를 취하고 프로테스탄트 교도들을 박해했다. 그의 박해 이유는 프로테스탄트 교도들의 로마교회 미사와 교리 그리고 부패한 성직자에 대한 비난 때문이었다. 따라서 로마교회와 이미 결별한 칼빈도 프랑스를 떠나 스위스로 망명하여 신학을 연구하게 된다.

 

제1차 제네바 종교개혁

제네바에서 칼빈은 성 베드로 성당에서 바울 서신을 강해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 제네바는 외국인에 대한 텃세가 강한 도시였기 때문에 칼빈은 처음에 ‘저 프랑인’이라며 멸시를 받았다. 그러나 1536년 10월 로잔에서 벌어진 성찬에 대한 논쟁 이후로 사정은 달라졌다. 당시 그는 논쟁에 참석하여 로마 가톨릭의 오류인 성찬론에 관해 교부 신학을 인용하여 하나하나 반박했는데, 결과적으로  논쟁은 칼빈을 비롯한 개혁자들의 승리로 돌아갔다.  이로 인해 이듬해인 1537년 칼빈은 비로소 제네바에서 정식으로 설교할 수 있게 됐다.

 

칼빈은 제네바 시민의 종교교육과 교회조직을 관할하게 됐다. 그는 신앙고백을 하지 않는 자에게도 성찬을 베풀었던 제네바 교회에 대한 개혁에 박차를 가했다. 사실 칼빈은 주의 성찬을 매우 중요한 것으로 여겼다. 그는 성찬과 관련하여 “주님의 성찬을 부끄럽게 더럽히느니 차라리 죽기를 결정하겠다”는 고백을 자주하곤 했다. 따라서 칼빈은 제네바 시의회에 매주일 성만찬을 거행할 것과 제네바 각 행정구역에 특정인을 임명하여 목사를 도와 함께 교회를 치리하자는 ‘제네바 교회의 조직과 예배에 관한 조항’을 작성하여 제출했다. 그러나 가톨릭의 성찬에 대해 호의적이던 당시 제네바 시 의회는 성찬 조항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으며 이로인해 1538년 칼빈은 스위스에서 추방당했다.

제네바에서 추방된 후 1541년까지 칼빈은 현재 프랑스 영토인 독일의 스트라스부르크에서 사역을 시작했다. 당시 스트라스부르크는 수 많은 프랑스 종교 망명자들의 피난처였다. 칼빈은 종교개혁가였던 마틴 부처(Martin Bucher)의 초청으로 스트라스부르크에서 400~500여명에 이르는 프랑스 종교 피난민들의 목회자가 되어 한달에 한차례 성만찬을 베풀며 기독교 교리를 가르쳤다. 스트라스부르크에서 그는 비로소 제네바에서 실행할 수 없었던 교회와 국가의 분리 문제를 실행할 수 있었다. 특히 칼빈은 이 시기 그의 필생의 역작이라 할 수 있는 ‘기독교 강요’의 개정판을 저술하였으며 1540년 8월 마틴 부처의 소개로 만난 이델레트라는 두 아이를 가진 과부와 결혼했다. 그녀는 자신의 건강이 매우 좋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순복의 성품으로 1548년 그녀가 죽을 때까지 칼빈을 도와 모범적인 가정을 이뤘다.

 

제2차 제네바 종교개혁

1539년 칼빈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정치적 혁명이 제네바에서 일어났다. 당시 프랑스와  베른(Bern)이 제네바의 독립을 위협하고 있었기에 제네바는 용기 있는 지도자를 필요로 했다. 바로 제네바 시민들이 칼빈을 다시 부른 것이다. 3년 전 그를 추방했던 시민들은 기마대까지 동원해 칼빈을 열렬히 환영해 주었다.

칼빈은 제네바를 하나님의 도성으로 만들고 싶었다. 성경의 원리로 국가의 기반을 세우고 교회와 국가가 서로 분리된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서로 협력하는 세계를 만들고자 했다. 그는 1541년 ‘제네바 교회의 법령’을 제정, 공포하고 1542년 방대한 양의 ‘제네바 교리문답’을 완성했다. 칼빈은 교인들을 철저히 교리적으로 훈련시켰다. 칼빈의 엄격한 노선에 반대하는 자들도 있었지만 결국 제네바 시에는 도박이 사라지고 춤이 금지됐으며 사치와 방탕한 생활이 자취를 감추게 됐다. 특히 당시 많은 사람들을 영혼을 황폐화시켰던 미신과 교황주의도 사라졌다. 수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찾아 나왔고 칼빈의 설교를 듣기위해 성 베드로 교회는 사람들로 항상 가득 차게 됐다. 그는 1559년 현 제네바 대학의 전신인 제네바 아카데미를 세운다. 처음 162명으로 개원했으나 5년 만에 1300명이 넘는 학생들이 칼빈의 신학 강의를 들으러 몰려왔다. 그는 아카데미를 통해 제네바를 종교개혁운동의 거점도시로 만들었다.

이후 제네바의 개혁과 정치는 안정되어 갔다. 그러나 칼빈의 건강은 그에 비해 더욱 악화되어 갔다. 칼빈은 평생 위궤양, 관절염, 천식, 폐병 등으로 고통을 받으면서도 열정적인 사역을 계속했다. 그는 연 200회의 설교와 200회의 강의를 하였으며 성경 각 권의 주석을 썼다. 그는 필생의 역작인 ‘기독교 강요’를 계속 재편집했으며 20편에 달하는 신학 논문을 썼다. 그의 저작전집은 모두 59권에 달한다. 그는 임종이 가까울 무렵 비명(碑銘)없는 무덤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1564년 5월 27일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갔다. 그의 나이 55세였다.

 

서구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영향

칼빈의 개혁 운동은 그의 생존시 이미 세상에 큰 영향을 미쳤다. 프랑스의 위그노(Huguenot) 운동이 칼빈의 사상을 받아들여 1152년 파리대회에서 칼빈주의적 신조를 채택했고, 네덜란드에서는 칼빈주의자 브라이(Bray)에 의해 1561년 벨직 신앙고백이 채택됐다. 그리고 스코틀랜드에서는 1560년 그의 제자에 의해 장로교 신조가 채택되어 장로교 국가가 됐다. 특히 영국교회는 칼빈주의의 영향 하에 ‘39개 신조’를 채택하여 청교도 운동의 효시가 되었다. 독일 남부 지역은 칼빈주의의 영향력으로 인해 1563년에는 하이델베르크 교리 문답이 채택됐다. 스위스에서는 취리히, 바젤, 베른 등이 칼빈주의를 따르게 됐다.

 

칼빈의 신학은 매우 실용적이며 시대적인 신학이었다. 그는 인간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우선하는 역할을 강조하면서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예정’을 강조했다. 칼빈의 신학은 성찬론과 예정론을 제외한 많은 부분에서 마틴 루터의 신학과 일치한다. 믿음과 은혜를 통한 구원, 그리스도 속죄의 절대성, 진정한 앎을 위한 계시의 필연성, 강력한 인격적 신앙을 강조하는 점은 루터를 계승했다. 단지 차이점이 있다면 루터는 당시 사람들을 교권으로부터 해방하려는 데에 관심을 가졌던 반면 칼빈의 사상은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중심으로  했다. ‘오직 주께 영광’(soli deo gloria)이라는 명제가 이러한 칼빈의 하나님 중심적 신학의 모습을 잘 드러낸다.

 

칼빈의 사상은 인류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칼빈신학의 영향을 받아 ‘개혁교회’(the Reformed Church)가 성립됐다. 160년 전 결성된 ‘세계개혁교회연맹’(WRAC)에는 현재 107개국 215교단 7500만의 신자가 소속돼 있다. 한편 서구자본주의와 민주주의라는 거대한 두 이념이 모두 칼빈의 사상에서 유래했다. 일례로 목사 외에 장로, 집사, 교사 등의 평신도들을 교회의 리더십으로 세운 대의적 교회정치 형태는 이후의 민주주의 사상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사회학자 막스 베버(Max Weber)는 그의 책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서구 자본주의가 칼빈주의의 금욕주의 정신에서 유래했다고 주장했다. 또 서구 시민민주의의 정치체계의 사상적 기반인 로크와 루소 등의 자연권 사상, 근대의 시민혁명이 모두 칼빈의 신학과 내용적으로 연관성이 있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항상 개혁하는 교회’(ecclesia semper reformanda)’를 주장한 칼빈은 오늘날에도 우리의 교회와 신학이 주님의 말씀과 뜻에 따라 계속적으로 거듭나야 함을 일깨우고 있다


“개혁은 내가 한 것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것”

하루 3시간 이상 기도, 무기는 오직 ‘성령의 검’
직업소명관과 사유재산제로 자본주의 토대 구축
“사탄은 분노를 나타내고 있다. 경건치 않은 수도사들이 공모하고 있으며 우리는 궁지에 몰리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믿음과 기도로써 담대히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라고 권할 것이다. 그리하면 원수들은 하나님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정복되어 잠잠하게 될 것이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하고 급한 것은 기도이다. 이 싸움에 사용되어야 할 무기는 오직 성령의 검 뿐이다.”

이 기도문은 종교개혁 당시 강력한 개혁 반대파들이 온 힘을 합하여 개혁파의 신앙을 뒤집으려 했을 때 마틴 루터(Martin Luther·1483~1546)가 했던 기도이다. 세계를 움직인 위대한 종교개혁의 큰 능력은 밀실의 기도에서 나왔다. 루터는 하루 3시간 이상 기도하지 않는 날이 없었다. 그것도, 연구하기에 가장 좋은 시간을 그렇게 했다.

마틴 루터는 1483년 11월 10일 독일의 작센안할트주 아이슬레벤에서 출생했다. 아버지 한스 루터는 광산업을 경영, 성공하여 중세 말에 한창 득세하던 시민계급의 한 사람이다. 한스 루터는 엄격한 기독교 신앙의 소유자였으며 자식의 교육에도 많은 관심을 가졌다.

루터는 1501년 에르푸르트 대학교에 입학, 1505년 일반교양 과정을 마치고 법률공부를 시작했는데, 이때부터 자신의 삶과 구원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루터가 왜 성직에 입문하기로 결심했는지 알려주는 증거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다만 그가 만년에 쓴 <식탁담화·Tischreden>에는 1505년 7월 2일 루터가 친구와 함께 부모를 방문하고 돌아가는 도중 천둥을 동반한 폭풍우를 만나게 된 것으로 적혀 있다. 이 때 루터는 친구가 벼락에 맞아 죽는 것을 목격했다고 한다.

친구의 죽음을 계기로 루터는 불안과 번민에 휩싸였으며 구원의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된다. 그는 아버지의 만류를 뿌리치고 학업을 중단, 에르푸르트의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에 들어갔다. 이후 사제가 되어 1511년 비텐베르크대학교로 옮겨 1512년 신학박사가 되고 1513년부터 성서학 강의를 시작했다.

루터는 수도원 생활에서 중세교회가 제시한 고해성사나 신비주의적 구원의 방법들을 하나씩 부정하게 된다. 절망적으로 구원을 구하던 루터는 로마서를 연구하다가 복음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는 믿음을 통해 우리를 의롭다 하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당시 루터는 “즉시 다시 태어나서 열린 문들을 통해 낙원 바로 그 자체에 들어온 느낌을 스스로 가졌다”고 말했다.

신약 독일어번역 통해 독일통일 기여

당시 로마가톨릭교회는 아비뇽 교황과의 대립으로 생긴 분열결과로 14세기경부터 안팎에서 쇠퇴의 기미를 보이고 있었다. 특히 가톨릭교회는 죄를 완전히 참회하고 다시는 죄를 범하지 않을 결심으로 고백할 때, 죄를 용서받는다고 가르치면서도 죄의 벌은 남게 되므로 그것을 기도나 선업(善業)으로 갚을 것을 권했다.

가톨릭교회는 성당건설과 포교를 위해 많은 돈이 필요해지자 헌금을 권하면서 면죄부(免罪符) 발행을 남용하여 많은 폐단을 가져왔다. 루터는 이에 대해 하나님은 인간에게 행위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에게 은혜를 베풀어 구원해주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렇게 해서 루터는 당시 교회의 관습이 되어 있던 면죄부 판매에 대한 비판으로 <95개조 반박문>을 통해 종교개혁의 깃발을 들게 되었다.

그는 교황으로부터 ‘파문칙령’을 받았으나 이를 불태워버렸다. 1521년에는 신성로마제국의회에 환문되어 그의 주장을 철회할 것을 강요당했으나 이를 거부, 제국에서 추방되는 처분을 받았다.

당시 루터는 이렇게 대답했다. “성서의 증거에 의해서나 아니면 분명한 이성에 의해 나를 설복시키지 않는다면, 내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철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양심에 역행하는 것은 안전하지도 않고 올바르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거대한 제국의 권위에 대한 역사적인 양심선언이었다.

그로부터 9개월 동안 작센 선제후(選帝侯:중세 독일에서 황제 선거의 자격을 가진 제후)의 비호 아래 바르트부르크성에서 숨어 지내면서 신약성서의 독일어 번역을 완성하였다. 이것이 독일어 통일에 큰 공헌을 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후 루터는 비텐베르크로 돌아오자마자 새로운 교회 형성에 힘썼는데 처음에는 멸시의 뜻으로 불리던 호칭이 마침내 통칭이 되어 ‘루터파 교회’가 성립되었다.

루터는 종교개혁에서 파생된 과격파나 농민의 운동, 농민전쟁에 대해서는 철저히 성서 신앙적 입장을 취함으로써 이들과의 구분을 지었다. 그 뒤 만년에 이르기까지 가톨릭교회와 종교개혁 좌파 사이에서 이들과 논쟁·대결하면서 성서강의·설교·저작·성서번역 등에 헌신함으로써 종교개혁운동을 추진했다. 그는 영주(領主)들 간의 분쟁 조정을 위해 고향인 아이슬레벤에 갔다가 병을 얻어 그곳에서 소천(召天)하였다.(1546년)


인간은 하나님께 신앙으로 응답해야

그는 신학의 근거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신의 철저한 은혜와 사랑에 두고 인간은 이에 신앙으로써 응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 하나님께 반항하고 자기를 추구하는 죄인이지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를 용서받고, ‘자유로운 군주’이면서 ‘섬기는 종’이 되는 것이며, 신앙의 응답을 통해 봉사를 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특히 소명을 받고 수도자나 성직자가 되어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는 일뿐만 아니라, 신앙 안에서 어떤 직업에 종사하면서 사는 기독교인은 모두가 특별한 소명을 받았다고 주장한 루터에 의해 개신교에서는 새로운 소명관(召命觀), 즉 직업관이 형성되었다.

이러한 루터의 직업 소명설은 근대 자본주의의 발전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당시 일부 재세례파(再洗禮派)가 주장하던 공유재산제도를 비판하고 사유재산제도를 옹호했다. 루터는 상업활동을 필수적인 것으로 인정하고 기독교적 방식으로 실시될 수 있다고 봤다.

루터의 이러한 사상은 이후 칼빈(Jean Calvin)과 칼빈주의자들을 거쳐 근대자본주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루터는 또 구걸을 금지시키고 가난한 자들을 제도적으로 보살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어린이들에 대한 무상교육을 주장했다. 특히 공중도서관을 세우되 거기에는 성서뿐만 아니라 기독교 고전과 희랍, 로마의 고전, 법률, 의학, 예술, 역사서적의 비치도 주장했다. 루터는 스스로 과학의 발전과 기계의 발명에 감탄을 보냈다.

우리는 루터를 말할 때 당연히 ‘종교개혁자’라는 칭호를 붙인다. 그러나 루터 자신은 스스로를 ‘개혁자’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종교개혁은 하나님에 이끌려 했던 일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개혁’은 오로지 하나님의 궁극적인 개입이기 때문이다.

루터는 자신을 하나님의 도구로 보았다. 종교개혁 당시 사람들은 “개혁!”의 구호만을 외쳤다. 그러나 우리가 루터에게서 접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이 그것을 원하신다.”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것을 하신다.”였다. 면죄부 논쟁으로부터 시작하여 새로운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그는 자신의 탁상담화와 편지에서 밝혔다. “이 일에 나는 하나님에 의해 이끌려왔습니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나는 던졌습니다.”

루터가 살았던 15세기에는 종교개혁과 함께 르네상스가 일어났던 때이다. 그러나 르네상스적 인문주의와 종교개혁과는 본질적으로 성격을 달리한다. 르네상스적 인문주의는 예술적이고 귀족적일 뿐이어서 역사를 변혁할 힘을 갖지 못했다.

그러나 루터의 종교개혁운동은 사람들의 마음에 깊이 스며들어 역사를 움직였다. 그러므로 근대의 서곡이라 할 수 있는 르네상스와 종교개혁과는 그 출발점과 역사상 미친 영향면에서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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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뱅주의(영어: Calvinism) 또는 개혁주의(영어: Reformed Theology), 장 칼뱅이 주창한 기독교의 사상 및 신학 사조로서[1] 종교 개혁을 통해 체계화되어 개신교의 주요 신학으로 자리잡은 사상을 가리킨다.[2] ‘칼뱅주의란 말은 칼뱅 개인의 사상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기도 하나 이는 매우 드물다.[3] 다만 그 사상이 체계적으로 정리되고 발전하게 된 데에 칼뱅이 미친 지대한 영향에 칼뱅주의란 이름이 연유한다. 칼뱅주의가 종교 개혁 당시 개신교 주류의 신학으로 자리 잡아가면서 유럽 각지에 개혁교회(영어: Reformed Church)가 발생하였다. 이들 개혁교회를 통해 칼뱅주의는 꽃을 피우게 되었고, 이렇게 해서 개혁교회 전통을 계승하는 교파의 하나로서 칼뱅주의를 말할 때에는개혁주의라는 표현을 쓴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의 별칭들이 있는데,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절대적 은혜를 강조하기 때문에 은혜의 교리라고도 불린다. 칼뱅주의를 표방하는 개신교 교파들로는 종교개혁 때부터 시작된 장로교회와 개혁교회, 개혁 침례교회가 대표적이다. 칼뱅주의는 문화, 경제, 교육, 정치 그리고 복지를 포함한 근대 사회를 형성 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평가 받는다.[4]

 

역사적 배경[편집]

 

종교 개혁[편집]

 

16세기 로마 가톨릭교회의 교리와 전통을 비판하며 이를 바꾸고자 한 종교 개혁은 결국 개신교회의 분리를 가져왔다. 종교개혁의 주요 인물에는 다수가 있지만, 그 중에서도 장 칼뱅의 영향은 상당히 크다. 이는 그의 저서 기독교 강요(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의 영향력을 통해 볼 수 있다. 이 책에서 장 칼뱅은 개혁교회(Reformed Church)의 시각에서 그 때까지 드러난 기독교 진리를 종합적이고 체계적으로 논술하려고 하였다.[5]

 

장 칼뱅은 주로 스위스 제네바에서 활동하였는데, 그와 같은 시대의 사람들 중 루터는 주로 독일에서, 그리고 쯔빙글리는 스위스 취리히에서 활동하였다. 종교개혁의 열풍이 유럽 전역으로 번져가면서 개신교의 신학은 점차 칼뱅의 신학 쪽으로 기울었다. 그 결과 루터교가 주류로 뿌리내린 독일 및 스칸디나비아의 몇 곳을 제외하고 칼뱅주의가 개신교 신학의 주류로 자리잡게 된다.[6] 이렇게 하여 유럽에 자리잡은 개신교회가 개혁교회이며, 칼뱅주의의 영향을 받은 존 낙스가 스코틀랜드에 개혁주의를 전파함으로써 설립된 교회가 장로교이다.[7] 이들 교회의 성장과 더불어 체계화 된 신학 사상 및 그 전통을 개혁주의라고 부른다. 포함하여 오늘날까지 칼빈주의를 표방하는 교회를 개혁교회라고 부를 뿐만 아니라 칼뱅주의 신학을 '개혁주의'라고도 부르게 되었다.

 

개혁교회의 신앙고백[편집]

 

개혁주의를 잘 나타내는 문서는 개혁교회의 역사적 문서들인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독일), 네덜란드 신앙고백, 도르트 신조(네덜란드)이며, 이외에도 제2스위스 신앙고백(츠빙글리 전통), 프랑스 신앙고백, 제네바 요리문답(제네바 전통),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스코틀랜드) 등이 있다. 장로교회의 신앙고백으로 주로 채택되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및 그 대/소요리 문답 또한 개혁주의를 잘 반영하고 있으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기초로 작성한 개혁 침례교회의 제2차 런던신앙고백은 침례신앙 위에서 개혁주의를 표방하고 있다.

 

개혁교회의 가지들[편집]

 

초기 미국 이주민들은 잉글랜드의 청교도들과 네덜란드 이주민들을 포함하여 대부분 칼빈주의를 따르는 개신교회의 신도들이었다. 네덜란드 이민자들은 17세기 초 남아프리카에도 개혁주의를 전파하였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남아공의 개혁교회는 인종차별이라는 지배질서를 바벨탑 이야기에 사람들이 흩어지는 이야기가 나온다고 해서 백인은 백인끼리, 흑인은 흑인끼리, 아시아 사람은 아시아 사람끼리 흩어져서 살아야 한다는 자의적인 성서해석이나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와 주권을 강조하는 진짜 의미에는 상관없이 백인은 구원이 예정되어 있으나, 흑인은 그렇지 않다는 개혁파 교회 교리의 악용으로 정당화하는 오류를 범하였다. 물론 이러한 잘못에 대해 개혁교회에서는 흑백통합정부가 들어선 뒤에 사과함으로써 과거사 청산을 위한 죄책고백을 실천하였다.[8]

 

핵심 교리[편집]

 

칼뱅주의의 근간을 이루는 것은 다섯 솔라, 언약신학 그리고 칼빈주의 5대 강령이다. 5대 강령의 경우 앞 글자를 따서 영어로는 TULIP이라고도 한다. 이것들은 개신교의 다른 여러 신학 유파와 칼뱅주의를 구분짓는 내용들이 된다.

 

다섯 솔라[편집]

Sola Scriptura (오직 성경) : 진리냐 아니냐의 유일한 권위는 기독교 교리의 유일한 원천인 성경에 있다는 뜻이다.

Solus Christus (오직 그리스도) : 구원의 유일한 길은 십자가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덧입는 것뿐이다.

Sola Gratia (오직 은혜) :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선물'로서 하나님이 인간 쪽에 아무런 조건을 찾지 않는다는 내용이다.

Sola Fide (오직 믿음) : 하나님이 내리시는 구속의 은혜는 오직 믿음을 통하여 받을 뿐이지 다른 어떤 것이 요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Soli Deo Gloria (오직 주만 영광 받으심) : 구원은 하나님이 시작하고 완성하시는 일이며 거기에 인간이 참여하는 부분은 없다.

 

언약신학[편집]

 

언약은 성경에 등장하는 개념으로서 하나님이 택하신 자녀들에게 하신 약속이다, 그 내용은 지켜야할 의무 조항들로 이루어지며 의무를 불이행할 경우 언약은 파기된다. 칼빈주의자들은 인간의 요구조건 없이 하나님의 선언과 함께 바로 체결된다고 말한다. 칼빈주의자들은 성경의 여러가지 언약이 결국 세 가지로 요약된다고 본다:

구속 언약 (covenant of redemption): 삼위일체 중 아버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사이에 맺은 언약이다. 그리스도 쪽에서는 모든 사람의 죄값에 해당하는 심판을 맛보고 구원에 필요한 조건을 자기 백성들을 대신해서 이행하겠다는 것이며, 아버지 하나님 쪽에서는 그리스도를 그의 백성들의 머리로 인정하며 그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의로움을 백성들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의로움으로 인정하여 그들을 구원해 주시겠다는 내용이다. 이 언약이 창세전에 체결되었으며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완수된 것으로 본다.

행위 언약 (covenant of works): 하나님과 아담 사이에 맺은 언약이다. 아담은 인류의 대표로서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며, 하나님은 그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는 내용이다. 아담은 실패했으며 이로써 인류에게는 죽음이 왔다고 본다.

은혜 언약 (covenant of grace): 아담이 실패한 이후로 곧바로 모든 인류와 하나님이 맺은 언약이다. 사람 쪽에서는 하나님이 그리스도에게서 구원에 필요한 모든 조건을 받으실 것이란 사실을 받아들이라는 것이며, 하나님 쪽에서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사람을 그리스도의 백성으로 삼아주신다는 내용이다.

 

5대 강령[편집]

전적 타락 (Total Depravity): 육체적인 생명만 갖고 있는 모든 자연인은 그 본성이 타락하여 구원에 필요한 믿음을 만들어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전혀 믿음을 갖지 못한다는 말이 아니라, 믿음에는 다른 질()이 있어서 그 중에는 구원 받을 수 있는 참 믿음도 있고 받을 수 없는 유()의 믿음도 있는데, 다른 종류의 믿음은 사람이 스스로 발휘할 수 있으되 구원에 필요한 믿음은 사람이 스스로 발휘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주장을 '전적 무능력'이라고 하기도 하는데, 주의할 것은 그 '무능력'이라고 함은 사람이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기능을 잃었다는 뜻이 아니라 그의 영혼이 타락하여 참된 믿음을 갖기 싫어한다는 것이다. 성경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로 보건대 하나님이 참된 믿음을 주시기 전에는 아무도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되게 못 믿는다는 것이다.

무조건적 선택 (Unconditional Election): 앞의 '전적 타락'설에 의하면 참된 믿음은 하나님이 주셔야만 얻게 되는 것인데, 누구에게 참된 믿음을 줄 것인지에 대한 하나님의 선택에는 아무런 조건이 없다는 것이다.

제한적 속죄 (Limited Atonement): 앞의 '무조건적 선택'을 받은 사람이 결국 '구속에 언약' 또는 '은혜의 언약'에서 그리스도의 백성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실효는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는 내용이다.

불가항력적 은혜 (Irresistible Grace): 성경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로 보건대 하나님이 믿음을 주시기로 작정하신 사람이 그리스도를 아니 믿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구속의 언약'과도 연관이 있다.

성도의 견인 (Perseverance of Saints): 성경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로 보건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자리로 결코 떨어지지 않고 구원이 반드시 성취된다는 것이다. 이것 역시 '구속의 언약'과 연관이 있다.

 

예배의 규정적 원리[편집]

 

칼뱅주의는 예배의 규정적 원리에서 예배를 성경, 기도, 찬송, 헌상, 성찬 과 세례와 더불어 하나님께서 그 분의 백성들에게 특수한 은혜를 내리시기 위해 정하신 방도라고 본다. 이것들을 은혜의 방도라고 부르는데, 어떠한 것들이 은헤의 방도인가 뿐만 아니라 그 방도들을 사람이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또한 성경에 계시 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 칼빈주의의 특징이다. 이는 물론 Sola Scriptura 정신과 부합된다. 특히 예배에 해당하는 도리들을 묶어 예배의 규정적 원리라고 부른다. 예를 들어 예배할 때 예수님이라고 상상하여 만든 그림이나 조각상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이 대표적인 규정적 원리의 하나이다. 그 원리들이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칼빈주의 신학자들 사이에도 이견이 있다. 그러나 칼뱅주의를 표방하는 교파별로 이러한 규정적 원리를 갖고 있다는 것은 공통적이다.

 

예배의 규정적 원리에 대한 근거로 사용되는 성경 구절에는 십계명 중 둘째 계명인 "우상을 만들어 그것을 예배하지 말라"[9]이다. 둘째 계명이 야훼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뜻이 아닌 것은, 다른 신을 두지 말라는 것은 이미 첫째 계명[10]에서 명시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둘째 계명의 뜻은 야훼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할 때 그분의 형상이라고 무엇을 만들지 말라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훼 하나님의 형상을 만든 역사가 성경 출애굽기 324절에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둘째 계명에서 발견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예배 하는 방식에 대해서도 어떤 기준을 내리고 계시다는 것이다.

 

자유의지와 칼뱅주의[편집]

 

칼뱅주의와 관련된 흔한 오해 중 하나는 칼뱅주의가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을 막는다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위의 '전적 타락'설에서 언급되었듯이 칼빈주의는 자연인이 믿을 수 있는 기능을 잃어버렸다든지 선택의 자유를 잃었다는 것이 아니라, 자연인은 하나님을 싫어하는 심성 때문에 자신의 자유로운 선택권을 가지고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기로 선택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언제까지 계속되냐면 하나님이 그 사람의 심성을 바꾸어 주실 때까지라는 것이다.

 

종교개혁 당시 이러한 칼뱅주의 원죄론에 반대하고 '사람은 하나님이 심성을 따로 바꾸어 주시지 않아도 스스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한 사람 중 대표적인 사람이 에라스무스다. 여기에 반박하고 '전적 타락'설을 주장한 것이 루터의 노예의지론(Bondage of the Will)이다. 이러한 사상들은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과 사람의 역할과 관련된 것으로서, 이에 대한 기독교의 내의 주장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지을 수 있다:

합력설(synergism)하나님이 구원의 길을 마련하시지만, 사람이 그것을 취하느냐의 여부는 인간에게 달려있다. , 구원은 하나님과 사람의 합작이라는 것이다.단독설(monergism)하나님이 구원의 길을 마련하실 뿐만 아니라, 사람이 그것을 취하는 것도 그리 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해주셔야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 구원은 하나님께만 달려있다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에라스무스의 주장은 합력설에 해당하며, 마르틴 루터의 주장은 단독설에 해당된다. 합력설과 단독설의 논쟁은 기독교 초창기에 이미 있었고, 잘 알려진 것이 4~5세기에 있었던 펠라기우스와 어거스틴의 논쟁이다. 펠라기우스는 합력설을 주장하고 어거스틴은 단독설을 주장하였는데, 카르타고 회의에서 교회는 펠라기우스 사상을 정죄하였다. 종교개혁 이후로는 17세기에 알미니우스를 따르는 알미니안주의자들이 합력설을 주장하였다. (이 때 알미니안주의자들의 주장에 반박하면서 도르트 총회에서 작성된 것이 '칼빈주의의 5대 강령'이다.) 18세기에는 웨슬리가 합력설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합력설/단독설과 관련해서 잘 알려진 신학자 또는 목회자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다음을 들 수 있다.

 

 

그 누구라도 구원을, 아무리 작은 일부분이라도, 사람의 자유의지와 연관짓는다면, 그는 은혜를 전혀 알지 못하는 것이며, 또한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배우지 못했습니다. ”

마틴 루터(Martin Luther), Bondage of the Will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그 무엇이라도 우리가 행할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십자가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무효로 만드는 것입니다. ”

존 오웬, Works of John Owen, Vol.3, p.433  

 

사람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는 지옥으로 가고자 하는 자유의지는 있으나 천국으로 가려는 것은 전혀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 사람 안에 그분의 선하신 뜻을 따르려는 의지와 힘을 만들어 주실 때까지 계속됩니다. ”

   

죽은 사람이 자기 능력으로 무덤에서 일어나는 것을 만일 우리가 볼 수 있다면 아마 죄인이 자기 자유 의지로 그리스도께 돌아서는 것 또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  

 

“ (하나님의 주권은) 수많은 사람들이 넘어지고 멸망하는 걸림돌입니다; 그리고 만일 우리가 그분의 주권과 맞선다면 그것은 우리의 영원한 멸망이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 우리의 영혼에 대한 주권에 습복하는 것입니다; 곧 그 분께서 자비를 베푸시고자 하는 자에게 자비를 베푸시며 강퍅케 하시고자 하는 자에게 그렇게 하시는 분으로서입니다. ”

조나단 에드워즈, The Works of Jonathan Edwards, Vol.2, The Banner of Truth Trust, Reprinted 1995, pp.849-854

 

  칼빈주의와 극단적 칼빈주의[편집] 

칼빈주의와 극단적 칼빈주의(hyper-Calvinism)의 가장 큰 차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선포 대상과 속죄의 유효성과 범위에 대한 인식에서 나타난다. 칼빈주의는 복음의 유효성에 있어서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인 동시에 제한적 속죄를 말한다. 여기서 제한적이라는 것은 계량적인 뜻만이 아니라 한정적(definite) 또는 특정적 (particular) 의미를 모두 포함한다. 그러나 극단적 칼빈주의는 인류에 대한 복음의 유효성과 제한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는 계량적으로 선택 받은 사람들만을 위해 유효하다고 주장하며 예배의 전통과 형식 그리고 신앙 생활에 있어서 초기 종교개혁 시대의 전통을 고수한다.

 

신정통주의와 자유주의자들은 칼빈주의 자체를 극단적 칼빈주의로 해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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