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틴 루터 종교개혁


“개혁은 내가 한 것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것”

하루 3시간 이상 기도, 무기는 오직 ‘성령의 검’
직업소명관과 사유재산제로 자본주의 토대 구축
“사탄은 분노를 나타내고 있다. 경건치 않은 수도사들이 공모하고 있으며 우리는 궁지에 몰리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믿음과 기도로써 담대히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라고 권할 것이다. 그리하면 원수들은 하나님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정복되어 잠잠하게 될 것이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하고 급한 것은 기도이다. 이 싸움에 사용되어야 할 무기는 오직 성령의 검 뿐이다.”

 

이 기도문은 종교개혁 당시 강력한 개혁 반대파들이 온 힘을 합하여 개혁파의 신앙을 뒤집으려 했을 때 마틴 루터(Martin Luther·1483~1546)가 했던 기도이다. 세계를 움직인 위대한 종교개혁의 큰 능력은 밀실의 기도에서 나왔다. 루터는 하루 3시간 이상 기도하지 않는 날이 없었다. 그것도, 연구하기에 가장 좋은 시간을 그렇게 했다.

마틴 루터는 1483년 11월 10일 독일의 작센안할트주 아이슬레벤에서 출생했다. 아버지 한스 루터는 광산업을 경영, 성공하여 중세 말에 한창 득세하던 시민계급의 한 사람이다. 한스 루터는 엄격한 기독교 신앙의 소유자였으며 자식의 교육에도 많은 관심을 가졌다.

루터는 1501년 에르푸르트 대학교에 입학, 1505년 일반교양 과정을 마치고 법률공부를 시작했는데, 이때부터 자신의 삶과 구원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루터가 왜 성직에 입문하기로 결심했는지 알려주는 증거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다만 그가 만년에 쓴 <식탁담화·Tischreden>에는 1505년 7월 2일 루터가 친구와 함께 부모를 방문하고 돌아가는 도중 천둥을 동반한 폭풍우를 만나게 된 것으로 적혀 있다. 이 때 루터는 친구가 벼락에 맞아 죽는 것을 목격했다고 한다.

친구의 죽음을 계기로 루터는 불안과 번민에 휩싸였으며 구원의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된다. 그는 아버지의 만류를 뿌리치고 학업을 중단, 에르푸르트의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에 들어갔다. 이후 사제가 되어 1511년 비텐베르크대학교로 옮겨 1512년 신학박사가 되고 1513년부터 성서학 강의를 시작했다.

루터는 수도원 생활에서 중세교회가 제시한 고해성사나 신비주의적 구원의 방법들을 하나씩 부정하게 된다. 절망적으로 구원을 구하던 루터는 로마서를 연구하다가 복음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는 믿음을 통해 우리를 의롭다 하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당시 루터는 “즉시 다시 태어나서 열린 문들을 통해 낙원 바로 그 자체에 들어온 느낌을 스스로 가졌다”고 말했다.

신약 독일어번역 통해 독일통일 기여

당시 로마가톨릭교회는 아비뇽 교황과의 대립으로 생긴 분열결과로 14세기경부터 안팎에서 쇠퇴의 기미를 보이고 있었다. 특히 가톨릭교회는 죄를 완전히 참회하고 다시는 죄를 범하지 않을 결심으로 고백할 때, 죄를 용서받는다고 가르치면서도 죄의 벌은 남게 되므로 그것을 기도나 선업(善業)으로 갚을 것을 권했다.

가톨릭교회는 성당건설과 포교를 위해 많은 돈이 필요해지자 헌금을 권하면서 면죄부(免罪符) 발행을 남용하여 많은 폐단을 가져왔다. 루터는 이에 대해 하나님은 인간에게 행위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에게 은혜를 베풀어 구원해주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렇게 해서 루터는 당시 교회의 관습이 되어 있던 면죄부 판매에 대한 비판으로 <95개조 반박문>을 통해 종교개혁의 깃발을 들게 되었다.

그는 교황으로부터 ‘파문칙령’을 받았으나 이를 불태워버렸다. 1521년에는 신성로마제국의회에 환문되어 그의 주장을 철회할 것을 강요당했으나 이를 거부, 제국에서 추방되는 처분을 받았다.

당시 루터는 이렇게 대답했다. “성서의 증거에 의해서나 아니면 분명한 이성에 의해 나를 설복시키지 않는다면, 내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철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양심에 역행하는 것은 안전하지도 않고 올바르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거대한 제국의 권위에 대한 역사적인 양심선언이었다.

그로부터 9개월 동안 작센 선제후(選帝侯:중세 독일에서 황제 선거의 자격을 가진 제후)의 비호 아래 바르트부르크성에서 숨어 지내면서 신약성서의 독일어 번역을 완성하였다. 이것이 독일어 통일에 큰 공헌을 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후 루터는 비텐베르크로 돌아오자마자 새로운 교회 형성에 힘썼는데 처음에는 멸시의 뜻으로 불리던 호칭이 마침내 통칭이 되어 ‘루터파 교회’가 성립되었다.

루터는 종교개혁에서 파생된 과격파나 농민의 운동, 농민전쟁에 대해서는 철저히 성서 신앙적 입장을 취함으로써 이들과의 구분을 지었다. 그 뒤 만년에 이르기까지 가톨릭교회와 종교개혁 좌파 사이에서 이들과 논쟁·대결하면서 성서강의·설교·저작·성서번역 등에 헌신함으로써 종교개혁운동을 추진했다. 그는 영주(領主)들 간의 분쟁 조정을 위해 고향인 아이슬레벤에 갔다가 병을 얻어 그곳에서 소천(召天)하였다.(1546년)


인간은 하나님께 신앙으로 응답해야

그는 신학의 근거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신의 철저한 은혜와 사랑에 두고 인간은 이에 신앙으로써 응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 하나님께 반항하고 자기를 추구하는 죄인이지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를 용서받고, ‘자유로운 군주’이면서 ‘섬기는 종’이 되는 것이며, 신앙의 응답을 통해 봉사를 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특히 소명을 받고 수도자나 성직자가 되어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는 일뿐만 아니라, 신앙 안에서 어떤 직업에 종사하면서 사는 기독교인은 모두가 특별한 소명을 받았다고 주장한 루터에 의해 개신교에서는 새로운 소명관(召命觀), 즉 직업관이 형성되었다.

이러한 루터의 직업 소명설은 근대 자본주의의 발전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당시 일부 재세례파(再洗禮派)가 주장하던 공유재산제도를 비판하고 사유재산제도를 옹호했다. 루터는 상업활동을 필수적인 것으로 인정하고 기독교적 방식으로 실시될 수 있다고 봤다.

루터의 이러한 사상은 이후 칼빈(Jean Calvin)과 칼빈주의자들을 거쳐 근대자본주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루터는 또 구걸을 금지시키고 가난한 자들을 제도적으로 보살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어린이들에 대한 무상교육을 주장했다. 특히 공중도서관을 세우되 거기에는 성서뿐만 아니라 기독교 고전과 희랍, 로마의 고전, 법률, 의학, 예술, 역사서적의 비치도 주장했다. 루터는 스스로 과학의 발전과 기계의 발명에 감탄을 보냈다.

우리는 루터를 말할 때 당연히 ‘종교개혁자’라는 칭호를 붙인다. 그러나 루터 자신은 스스로를 ‘개혁자’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종교개혁은 하나님에 이끌려 했던 일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개혁’은 오로지 하나님의 궁극적인 개입이기 때문이다.

루터는 자신을 하나님의 도구로 보았다. 종교개혁 당시 사람들은 “개혁!”의 구호만을 외쳤다. 그러나 우리가 루터에게서 접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이 그것을 원하신다.”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것을 하신다.”였다. 면죄부 논쟁으로부터 시작하여 새로운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그는 자신의 탁상담화와 편지에서 밝혔다. “이 일에 나는 하나님에 의해 이끌려왔습니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나는 던졌습니다.”

루터가 살았던 15세기에는 종교개혁과 함께 르네상스가 일어났던 때이다. 그러나 르네상스적 인문주의와 종교개혁과는 본질적으로 성격을 달리한다. 르네상스적 인문주의는 예술적이고 귀족적일 뿐이어서 역사를 변혁할 힘을 갖지 못했다.

그러나 루터의 종교개혁운동은 사람들의 마음에 깊이 스며들어 역사를 움직였다. 그러므로 근대의 서곡이라 할 수 있는 르네상스와 종교개혁과는 그 출발점과 역사상 미친 영향면에서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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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개혁하는 교회’(ecclesia semper reformanda)

“하나님의 힘만이 괴로움의 무거운 짐을 견디게 하고 우리를 굳건히 서게 할 것이다.”<존 칼빈Jean Calvin*1509~1564>

마틴 루터와 더불어 세계사를 움직인 위대한 신학자이자 종교개혁가인 칼빈은 1509년 7월 10일  노용(Noyon*프랑스)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원래 노동자였으나, 부지런함과 조직력을 인정받아 노용관구의 여러 가지 업무를 보다가 최종적으로 교회의 재정을 관리하는 일을 하였다. 칼빈의 어머니 즈앤(Jeanne)은 음식점을 경영하던 노용시의 온건파 유지급 인사의 딸로 경건한 부인이었다.

칼빈은 ‘걸어 다니는 종합병원’이라는 별명이 말해 주듯이 어린시절부터 안색이 좋지 않았으며 몸이 허약하고 수줍어하는 편이었다. 그러나 그는 사리 판단이 정확했으며 지적 능력이 아주 뛰어났기 때문에 아버지 제럴드 칼빈(Gerald Calvin)으로부터 깊은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그래서 그는 칼빈을 파리에 있는 대학으로 보냈다.

14세 때 그는 파리로 가서 라 마르세(La Marche) 대학에 등록했다. 이후 그는 몽테규(Montaigu)대학으로 옮겨 금욕적이고 엄격한 교육을 받으며 장시간 공부하는 습관을 익혔다. 그의 최종학위는 1531년 오를레앙(Orleans) 대학에서 받은 법학 박사이다. 칼빈은 5년간의 대학 생활 동안 수 많은 프로테스탄트 동역자들과 교제를 나누는 과정에서 종교 개혁의 새로운 사상을 접하게 된다.  

1533년경 20대 초반의 칼빈은 프로테스탄트로 개종했다. 이 시기 그는 하나님의 은혜에 완전히 압도당하여 갑작스러운 회심을 체험했으며 이것이 계기가 되어 그는 성직자로서 종교 개혁에 헌신하기 시작했다. 1534년 5월 4일 공식적으로 로마 교회와 결별 했다. 1534년에 그는 제세례파의 영혼 수면설에 반대하여 ‘심령 수면설’이라는 소제목의 책자를 발간했다. 당시 프랑스의 통치자였던 프란시스 1세는 종교개혁에 대해 불분명한 태도를 취하고 프로테스탄트 교도들을 박해했다. 그의 박해 이유는 프로테스탄트 교도들의 로마교회 미사와 교리 그리고 부패한 성직자에 대한 비난 때문이었다. 따라서 로마교회와 이미 결별한 칼빈도 프랑스를 떠나 스위스로 망명하여 신학을 연구하게 된다.

 

제1차 제네바 종교개혁

제네바에서 칼빈은 성 베드로 성당에서 바울 서신을 강해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 제네바는 외국인에 대한 텃세가 강한 도시였기 때문에 칼빈은 처음에 ‘저 프랑인’이라며 멸시를 받았다. 그러나 1536년 10월 로잔에서 벌어진 성찬에 대한 논쟁 이후로 사정은 달라졌다. 당시 그는 논쟁에 참석하여 로마 가톨릭의 오류인 성찬론에 관해 교부 신학을 인용하여 하나하나 반박했는데, 결과적으로  논쟁은 칼빈을 비롯한 개혁자들의 승리로 돌아갔다.  이로 인해 이듬해인 1537년 칼빈은 비로소 제네바에서 정식으로 설교할 수 있게 됐다.

 

칼빈은 제네바 시민의 종교교육과 교회조직을 관할하게 됐다. 그는 신앙고백을 하지 않는 자에게도 성찬을 베풀었던 제네바 교회에 대한 개혁에 박차를 가했다. 사실 칼빈은 주의 성찬을 매우 중요한 것으로 여겼다. 그는 성찬과 관련하여 “주님의 성찬을 부끄럽게 더럽히느니 차라리 죽기를 결정하겠다”는 고백을 자주하곤 했다. 따라서 칼빈은 제네바 시의회에 매주일 성만찬을 거행할 것과 제네바 각 행정구역에 특정인을 임명하여 목사를 도와 함께 교회를 치리하자는 ‘제네바 교회의 조직과 예배에 관한 조항’을 작성하여 제출했다. 그러나 가톨릭의 성찬에 대해 호의적이던 당시 제네바 시 의회는 성찬 조항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으며 이로인해 1538년 칼빈은 스위스에서 추방당했다.

제네바에서 추방된 후 1541년까지 칼빈은 현재 프랑스 영토인 독일의 스트라스부르크에서 사역을 시작했다. 당시 스트라스부르크는 수 많은 프랑스 종교 망명자들의 피난처였다. 칼빈은 종교개혁가였던 마틴 부처(Martin Bucher)의 초청으로 스트라스부르크에서 400~500여명에 이르는 프랑스 종교 피난민들의 목회자가 되어 한달에 한차례 성만찬을 베풀며 기독교 교리를 가르쳤다. 스트라스부르크에서 그는 비로소 제네바에서 실행할 수 없었던 교회와 국가의 분리 문제를 실행할 수 있었다. 특히 칼빈은 이 시기 그의 필생의 역작이라 할 수 있는 ‘기독교 강요’의 개정판을 저술하였으며 1540년 8월 마틴 부처의 소개로 만난 이델레트라는 두 아이를 가진 과부와 결혼했다. 그녀는 자신의 건강이 매우 좋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순복의 성품으로 1548년 그녀가 죽을 때까지 칼빈을 도와 모범적인 가정을 이뤘다.

 

제2차 제네바 종교개혁

1539년 칼빈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정치적 혁명이 제네바에서 일어났다. 당시 프랑스와  베른(Bern)이 제네바의 독립을 위협하고 있었기에 제네바는 용기 있는 지도자를 필요로 했다. 바로 제네바 시민들이 칼빈을 다시 부른 것이다. 3년 전 그를 추방했던 시민들은 기마대까지 동원해 칼빈을 열렬히 환영해 주었다.

칼빈은 제네바를 하나님의 도성으로 만들고 싶었다. 성경의 원리로 국가의 기반을 세우고 교회와 국가가 서로 분리된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서로 협력하는 세계를 만들고자 했다. 그는 1541년 ‘제네바 교회의 법령’을 제정, 공포하고 1542년 방대한 양의 ‘제네바 교리문답’을 완성했다. 칼빈은 교인들을 철저히 교리적으로 훈련시켰다. 칼빈의 엄격한 노선에 반대하는 자들도 있었지만 결국 제네바 시에는 도박이 사라지고 춤이 금지됐으며 사치와 방탕한 생활이 자취를 감추게 됐다. 특히 당시 많은 사람들을 영혼을 황폐화시켰던 미신과 교황주의도 사라졌다. 수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찾아 나왔고 칼빈의 설교를 듣기위해 성 베드로 교회는 사람들로 항상 가득 차게 됐다. 그는 1559년 현 제네바 대학의 전신인 제네바 아카데미를 세운다. 처음 162명으로 개원했으나 5년 만에 1300명이 넘는 학생들이 칼빈의 신학 강의를 들으러 몰려왔다. 그는 아카데미를 통해 제네바를 종교개혁운동의 거점도시로 만들었다.

이후 제네바의 개혁과 정치는 안정되어 갔다. 그러나 칼빈의 건강은 그에 비해 더욱 악화되어 갔다. 칼빈은 평생 위궤양, 관절염, 천식, 폐병 등으로 고통을 받으면서도 열정적인 사역을 계속했다. 그는 연 200회의 설교와 200회의 강의를 하였으며 성경 각 권의 주석을 썼다. 그는 필생의 역작인 ‘기독교 강요’를 계속 재편집했으며 20편에 달하는 신학 논문을 썼다. 그의 저작전집은 모두 59권에 달한다. 그는 임종이 가까울 무렵 비명(碑銘)없는 무덤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1564년 5월 27일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갔다. 그의 나이 55세였다.

 

서구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영향

칼빈의 개혁 운동은 그의 생존시 이미 세상에 큰 영향을 미쳤다. 프랑스의 위그노(Huguenot) 운동이 칼빈의 사상을 받아들여 1152년 파리대회에서 칼빈주의적 신조를 채택했고, 네덜란드에서는 칼빈주의자 브라이(Bray)에 의해 1561년 벨직 신앙고백이 채택됐다. 그리고 스코틀랜드에서는 1560년 그의 제자에 의해 장로교 신조가 채택되어 장로교 국가가 됐다. 특히 영국교회는 칼빈주의의 영향 하에 ‘39개 신조’를 채택하여 청교도 운동의 효시가 되었다. 독일 남부 지역은 칼빈주의의 영향력으로 인해 1563년에는 하이델베르크 교리 문답이 채택됐다. 스위스에서는 취리히, 바젤, 베른 등이 칼빈주의를 따르게 됐다.

 

칼빈의 신학은 매우 실용적이며 시대적인 신학이었다. 그는 인간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우선하는 역할을 강조하면서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예정’을 강조했다. 칼빈의 신학은 성찬론과 예정론을 제외한 많은 부분에서 마틴 루터의 신학과 일치한다. 믿음과 은혜를 통한 구원, 그리스도 속죄의 절대성, 진정한 앎을 위한 계시의 필연성, 강력한 인격적 신앙을 강조하는 점은 루터를 계승했다. 단지 차이점이 있다면 루터는 당시 사람들을 교권으로부터 해방하려는 데에 관심을 가졌던 반면 칼빈의 사상은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중심으로  했다. ‘오직 주께 영광’(soli deo gloria)이라는 명제가 이러한 칼빈의 하나님 중심적 신학의 모습을 잘 드러낸다.

 

칼빈의 사상은 인류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칼빈신학의 영향을 받아 ‘개혁교회’(the Reformed Church)가 성립됐다. 160년 전 결성된 ‘세계개혁교회연맹’(WRAC)에는 현재 107개국 215교단 7500만의 신자가 소속돼 있다. 한편 서구자본주의와 민주주의라는 거대한 두 이념이 모두 칼빈의 사상에서 유래했다. 일례로 목사 외에 장로, 집사, 교사 등의 평신도들을 교회의 리더십으로 세운 대의적 교회정치 형태는 이후의 민주주의 사상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사회학자 막스 베버(Max Weber)는 그의 책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서구 자본주의가 칼빈주의의 금욕주의 정신에서 유래했다고 주장했다. 또 서구 시민민주의의 정치체계의 사상적 기반인 로크와 루소 등의 자연권 사상, 근대의 시민혁명이 모두 칼빈의 신학과 내용적으로 연관성이 있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항상 개혁하는 교회’(ecclesia semper reformanda)’를 주장한 칼빈은 오늘날에도 우리의 교회와 신학이 주님의 말씀과 뜻에 따라 계속적으로 거듭나야 함을 일깨우고 있다


“개혁은 내가 한 것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것”

하루 3시간 이상 기도, 무기는 오직 ‘성령의 검’
직업소명관과 사유재산제로 자본주의 토대 구축
“사탄은 분노를 나타내고 있다. 경건치 않은 수도사들이 공모하고 있으며 우리는 궁지에 몰리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믿음과 기도로써 담대히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라고 권할 것이다. 그리하면 원수들은 하나님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정복되어 잠잠하게 될 것이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하고 급한 것은 기도이다. 이 싸움에 사용되어야 할 무기는 오직 성령의 검 뿐이다.”

이 기도문은 종교개혁 당시 강력한 개혁 반대파들이 온 힘을 합하여 개혁파의 신앙을 뒤집으려 했을 때 마틴 루터(Martin Luther·1483~1546)가 했던 기도이다. 세계를 움직인 위대한 종교개혁의 큰 능력은 밀실의 기도에서 나왔다. 루터는 하루 3시간 이상 기도하지 않는 날이 없었다. 그것도, 연구하기에 가장 좋은 시간을 그렇게 했다.

마틴 루터는 1483년 11월 10일 독일의 작센안할트주 아이슬레벤에서 출생했다. 아버지 한스 루터는 광산업을 경영, 성공하여 중세 말에 한창 득세하던 시민계급의 한 사람이다. 한스 루터는 엄격한 기독교 신앙의 소유자였으며 자식의 교육에도 많은 관심을 가졌다.

루터는 1501년 에르푸르트 대학교에 입학, 1505년 일반교양 과정을 마치고 법률공부를 시작했는데, 이때부터 자신의 삶과 구원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루터가 왜 성직에 입문하기로 결심했는지 알려주는 증거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다만 그가 만년에 쓴 <식탁담화·Tischreden>에는 1505년 7월 2일 루터가 친구와 함께 부모를 방문하고 돌아가는 도중 천둥을 동반한 폭풍우를 만나게 된 것으로 적혀 있다. 이 때 루터는 친구가 벼락에 맞아 죽는 것을 목격했다고 한다.

친구의 죽음을 계기로 루터는 불안과 번민에 휩싸였으며 구원의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된다. 그는 아버지의 만류를 뿌리치고 학업을 중단, 에르푸르트의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에 들어갔다. 이후 사제가 되어 1511년 비텐베르크대학교로 옮겨 1512년 신학박사가 되고 1513년부터 성서학 강의를 시작했다.

루터는 수도원 생활에서 중세교회가 제시한 고해성사나 신비주의적 구원의 방법들을 하나씩 부정하게 된다. 절망적으로 구원을 구하던 루터는 로마서를 연구하다가 복음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는 믿음을 통해 우리를 의롭다 하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당시 루터는 “즉시 다시 태어나서 열린 문들을 통해 낙원 바로 그 자체에 들어온 느낌을 스스로 가졌다”고 말했다.

신약 독일어번역 통해 독일통일 기여

당시 로마가톨릭교회는 아비뇽 교황과의 대립으로 생긴 분열결과로 14세기경부터 안팎에서 쇠퇴의 기미를 보이고 있었다. 특히 가톨릭교회는 죄를 완전히 참회하고 다시는 죄를 범하지 않을 결심으로 고백할 때, 죄를 용서받는다고 가르치면서도 죄의 벌은 남게 되므로 그것을 기도나 선업(善業)으로 갚을 것을 권했다.

가톨릭교회는 성당건설과 포교를 위해 많은 돈이 필요해지자 헌금을 권하면서 면죄부(免罪符) 발행을 남용하여 많은 폐단을 가져왔다. 루터는 이에 대해 하나님은 인간에게 행위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에게 은혜를 베풀어 구원해주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렇게 해서 루터는 당시 교회의 관습이 되어 있던 면죄부 판매에 대한 비판으로 <95개조 반박문>을 통해 종교개혁의 깃발을 들게 되었다.

그는 교황으로부터 ‘파문칙령’을 받았으나 이를 불태워버렸다. 1521년에는 신성로마제국의회에 환문되어 그의 주장을 철회할 것을 강요당했으나 이를 거부, 제국에서 추방되는 처분을 받았다.

당시 루터는 이렇게 대답했다. “성서의 증거에 의해서나 아니면 분명한 이성에 의해 나를 설복시키지 않는다면, 내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철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양심에 역행하는 것은 안전하지도 않고 올바르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거대한 제국의 권위에 대한 역사적인 양심선언이었다.

그로부터 9개월 동안 작센 선제후(選帝侯:중세 독일에서 황제 선거의 자격을 가진 제후)의 비호 아래 바르트부르크성에서 숨어 지내면서 신약성서의 독일어 번역을 완성하였다. 이것이 독일어 통일에 큰 공헌을 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후 루터는 비텐베르크로 돌아오자마자 새로운 교회 형성에 힘썼는데 처음에는 멸시의 뜻으로 불리던 호칭이 마침내 통칭이 되어 ‘루터파 교회’가 성립되었다.

루터는 종교개혁에서 파생된 과격파나 농민의 운동, 농민전쟁에 대해서는 철저히 성서 신앙적 입장을 취함으로써 이들과의 구분을 지었다. 그 뒤 만년에 이르기까지 가톨릭교회와 종교개혁 좌파 사이에서 이들과 논쟁·대결하면서 성서강의·설교·저작·성서번역 등에 헌신함으로써 종교개혁운동을 추진했다. 그는 영주(領主)들 간의 분쟁 조정을 위해 고향인 아이슬레벤에 갔다가 병을 얻어 그곳에서 소천(召天)하였다.(1546년)


인간은 하나님께 신앙으로 응답해야

그는 신학의 근거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신의 철저한 은혜와 사랑에 두고 인간은 이에 신앙으로써 응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 하나님께 반항하고 자기를 추구하는 죄인이지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를 용서받고, ‘자유로운 군주’이면서 ‘섬기는 종’이 되는 것이며, 신앙의 응답을 통해 봉사를 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특히 소명을 받고 수도자나 성직자가 되어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는 일뿐만 아니라, 신앙 안에서 어떤 직업에 종사하면서 사는 기독교인은 모두가 특별한 소명을 받았다고 주장한 루터에 의해 개신교에서는 새로운 소명관(召命觀), 즉 직업관이 형성되었다.

이러한 루터의 직업 소명설은 근대 자본주의의 발전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당시 일부 재세례파(再洗禮派)가 주장하던 공유재산제도를 비판하고 사유재산제도를 옹호했다. 루터는 상업활동을 필수적인 것으로 인정하고 기독교적 방식으로 실시될 수 있다고 봤다.

루터의 이러한 사상은 이후 칼빈(Jean Calvin)과 칼빈주의자들을 거쳐 근대자본주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루터는 또 구걸을 금지시키고 가난한 자들을 제도적으로 보살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어린이들에 대한 무상교육을 주장했다. 특히 공중도서관을 세우되 거기에는 성서뿐만 아니라 기독교 고전과 희랍, 로마의 고전, 법률, 의학, 예술, 역사서적의 비치도 주장했다. 루터는 스스로 과학의 발전과 기계의 발명에 감탄을 보냈다.

우리는 루터를 말할 때 당연히 ‘종교개혁자’라는 칭호를 붙인다. 그러나 루터 자신은 스스로를 ‘개혁자’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종교개혁은 하나님에 이끌려 했던 일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개혁’은 오로지 하나님의 궁극적인 개입이기 때문이다.

루터는 자신을 하나님의 도구로 보았다. 종교개혁 당시 사람들은 “개혁!”의 구호만을 외쳤다. 그러나 우리가 루터에게서 접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이 그것을 원하신다.”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것을 하신다.”였다. 면죄부 논쟁으로부터 시작하여 새로운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그는 자신의 탁상담화와 편지에서 밝혔다. “이 일에 나는 하나님에 의해 이끌려왔습니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나는 던졌습니다.”

루터가 살았던 15세기에는 종교개혁과 함께 르네상스가 일어났던 때이다. 그러나 르네상스적 인문주의와 종교개혁과는 본질적으로 성격을 달리한다. 르네상스적 인문주의는 예술적이고 귀족적일 뿐이어서 역사를 변혁할 힘을 갖지 못했다.

그러나 루터의 종교개혁운동은 사람들의 마음에 깊이 스며들어 역사를 움직였다. 그러므로 근대의 서곡이라 할 수 있는 르네상스와 종교개혁과는 그 출발점과 역사상 미친 영향면에서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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