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박해의 원인.
1)정치적 원인.
이스라엘 남북왕조 멸망 후 세계 각지로 계속하여 흩어져 이주해간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로마에도 상당수가 거주하고 있었다. 기원 후 1세기경의 로마정부 기록을 보면 로마시내에 12개정도의 유대교회당들이 있었다. 당시의 유대인들은 로마통치 하의 전 지역에서 매우 뜨거운 감자였다. 유대인들은 유일신앙을 고수하여 로마의 종교정책에 정면으로 항거했다. 그들은 특히 자신들의 예루살렘 성전을 시온성전이라고 불렀고 자신들의 종교적 사상을 시오니즘이라고 주장했으며 예루살렘 성전을 순례하거나 성전 보수에 사용될 헌금을 보냈는데 그 헌금 액수가 과다 하여 때로는 한 지방의 경제사정을 어렵게 만들기도 했다. 때문에 로마통치 하에 있는 각 지방의 통치자들은 유대인들을 미워했고 때때로 그와같은 사정을 로마정부에 보고하여 어떤 특별조치를 내려 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로마정부로서는 유대인들을 함부로 홀대할 수가 없었다. 유대인들은 탁월한 상술을 통하여 각 지방의 경제권을 쥐고 있었으므로 그들을 함부로 대했다가는 경제가 악화 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은 황제숭배라던가 만신전 봉례행사 같은 종교적 행사에는 참석하지 않았지만 그러한 행사에 소용되는 막대한 비용들을 헌금하는 것은 거절하지 않았으며 각종 빈민구제와 병자 치료 및 장례에 부조하는 등등의 사회적 봉사를 많이 했다. 때문에 로마정부로서는 그들을 탄압하기에 여러 가지 어려움이 많았다. 로마정부는 그들이 특별한 반란적 행위를 하지 않는 한 그들의 종교적 자유를 보장해 주는 것이 오히려 그들을 다스리는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하여 유대인들의 종교를 합법적인 종교로 인정해 주었다. 따라서 기독교도 유대교의 그늘 아래에서 어느정도의 편의가 제공되었다. 왜냐하면 기독교가 로마에 들어간 초창기에 로마는 기독교와 유대교를 같은 종교의 분파로 인식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유대교와 기독교에 대한 구분이 이루어지고 특히 유대교와 기독교사이에 갈등과 대립이 첨예화되면서 심지어는 폭력이 수반된 충돌이 계속되자 유대교와 기독교 모두를 탄압하게 되었다. 특히 유대 본토의 마카비우스가<家>에 의한 폭동에 영향을 받은 유대인들이 독립자금을 보내거나 반란에 직접적으로 참여하게 됨에 따라 더 이상 방관할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2)종교적 원인.
로마제국 정부는 로마의 정치적 안정을 위하여 종교를 이용했다. 로마정부는 식민통치 하에 있는 여러 지방에서 유입되어지는 민족들의 종교들을 모두 인정하고 연합시키는 정책을 펴 나갔다. 로마정부가 종교 다원화 정책을 세운 것은 정치적인 이유도 있었지만 로마의 종교적 자존심의 발로이기도 했다. 로마는 자신들의 종교에 대한 자부심과 긍지가 대단했다. 로마는 그 어 떤 신도 배타하지 않고 섬기는 다신론적 종교 국가였다. 원래 로마는 전통적으로<쥬피터><마르스><퀴리노스><다이아나><넵튠><쥬노><플라멘다알리스>등등의 신을 최고의 신으로 받들어 섬겼다. 로마정부는 정부 산하에 승원이라는 종교기관을 신설하고 승려제도를 만들어 종교를 조직적으로 관리했다. 로마가 세계정복에 나섰을 때 그들은 대부분의 국가들이 일정한 소수의 신들만을 구별하여 섬겼기 때문에 전쟁에서 패한 반면에 자신들은 신들을 구별하여 섬기지 않고 모든 신들을 다 함께 섬겼기 때문에 그 많은 신들이 자신들을 승리하게 도와주었다고 믿었다. 따라서 로마정부는 정복지 주민들이 로마에 이주해 살면서 들여온 그들의 신들을 배타하지 않고 모두 수용하였다. 로마정부는 모든 신들이 결국은 하나의 최고적 신들 밑에 존재하는 다양한 신들이라는 논리를 세웠다. 그리하여 만신 전을 만들어 모든 신들을 그곳에 모신 후 사람들이 자유롭게 신들을 선택하여 섬기게 했다. 그러나 이때에 유대교와 기독교는 그러한 로마정부의 종교정책에 순응하지 않았다. 그들은 오직하 나님만을 섬기었으며 하나님 이외의 다른 신들을 섬기지 않았고 신으로 인정하지도 않았다. 로마정부 당국은 유대교와 기독교를 다 함께 불순종하는 무리로 간주했다. 그러나 로마정부는 아직은 그것 때문에 기독교를 탄압하지 않았다. 앞장에서 이미 논증한바 있듯이 아직은 기독교를 유대교의 한분파로 인식하 고있 었던 반면에 유대교를 함부로 다스리는 것보다는 그들의 종교를 인정해 주는 것이 오히려 로마의 이익이 된다는 계산 때문이었다. 로마정부가 기독교를 탄압하게 된 것은 기독교와 유대교가 완전히 구분되어진 후에 발생 한기독교에 대한 부도덕한 소문들 때문이었다. 유대인들이 기독교 유대인과 유대교 유대인으로 구분되어진 후에 기독교에 대한 아름답지 못한 소문이 로마에 퍼지기 시작했다.
로마의 탄압 때문에 기독교인들은 로마정부의 눈길을 피하여 주로 새벽이나 깊은 밤에 지하 동굴이나 카타콤<Catacombs-지하묘지>등에서 집회를 가졌는데 그것이 새로운 박해의 원인이 되었다. 로마정부는 기독교의 비밀집회를 정치적 차원에서 우려했다. 유대인들이 비밀지하결사대를 만들어 폭동을 일으키려는 것으로 의심한 것이다.
3)사회적 원인.
로마인들은 로마제국에 대한 특별한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로마는 곧 자신이었으며 종교였다. 그들의 로마사랑은 애국차원을 넘어서 신앙이었다. 그러한 로마인들에게 오직 하나님만을 고집하며 군대복무를 거부하고 때로는 로마제국과 황제까지도 거부하는 기독교는 증오의 대상이었다. 로마인들은 천재지변이 일어날 때마다 그것을 기독교인들의 불충성에 대한 신의 노여움이라고 믿었다.
한편 로마인들이 기독교를 증오한 이유 중에는 기독교인들의 특별한 사생활도 포함되었다. 당시의 로마인들은 향락과 사치를 추구했으며 노예제도를 실시했고 특히 노예들을 검투사로 양성하여 검투사 시합을 즐겼다. 반면에 기독교인들은 인간의 평등을 주장하면서 노예제도에 반대했고 특히 노예들이 검투시합을 통하여 속절없이 죽어가는 것을 매우 안타까워했다. 기독교인들은 또한 성적으로 부도덕한 로마인들의 삶을 거부했으며 절대적 가부장제도 하에서 실시되는 각종 부도덕한 악행<예를 들면 여자아이를 낳았을 때 가장이 그를 싫어하여 내다 버리는 관습이나 아내를 마음대로 버릴 수 있는 관습>들을 거부했다. 이러한 기독교인들의 차원 높은 윤리적, 도덕적 삶은 로마인들의 자존심을 무너뜨렸고 그것이 기독교를 증오하는 원인으로 작용했다.
4)황제들의 음모.
로마정부가 처음에 종교 다원화정책을 세운 것은 로마 거주민들이 종교적인 문제로 사회적 혼란을 일으키지 않게 하려는 정치적인 책략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정책이 나중에는 종교들을 하나로 묶는 정책으로 바뀌었다. 로마정부는 만신전의 신들 위에 로마황제를 좌정시켰다. 즉 로마황제가 신들 중의 신으로서 최고의 신이며 따라서 모든 신들은 로마황제의 통치 하에 있는 하급신이라는 종교체계를 세운 것이다. 로마가 이러한 종교적 체계를 세운 것은 대략 두 가지 이유로 전해진다. 하나는 고대 애굽의 바로 왕조가 시행했던 정치체제를 모방한 것으로서 황제를 신격화 하여 신정치 체제의 제국을 건설하려한 것이고, 두 번째는 모든 신들 위에 황제를 좌정시킴으로서 로마제국의 종교적인 통합을 이루려 한 것이다. 그러나 로마정부의 종교정책은 로마집권자들의 정치적 계략에서 산출된 것이었다. 당시의 로마는 황제에 의한 군주정치를 옹호하는 정치세력과 원로원 위주의 공화정치를 옹호하는 정치세력간에 보이지 않는 암투가 계속되고 있었다. 원로원 위주의 공화정치 체제를 원하는 정치세력들은 황제의 군주정치가 독재적일 위험성이 있기 때문에 결국은 로마제국을 붕괴시키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여 황제에 의한 군주 정치체제를 막으려고 노력했다. 이에 반하여 사사건건 황제의 정책에 이의를 제기하는 원로원들에 대한 불만이 있는 황제와 황제의 측근들은 원로원의 힘을 약화시키거나 또는 아예 원로원 자체를 붕괴시키고 황제에 의한 군주정치 체제를 세우려고 했다. 황제와 황제의 측근들은 이러한 계략 하에서 황제의 신격화를 주장했고 드디어는 황제의 신적 지위를 만신전 위에 둠으로서 로마 전역에 대한 황제숭배를 강요했다. 원로원은 처음에 황제의 신격화를 단호하게 반대했으나 황제의 강압적인 권위에 눌려 그것을 허락했다. 그러나 원로원은 그 대신에 황제가 신으로 추대되는 것은 황제 생존시에는 불가하고 황제가 죽은 후 원로원의 결의를 거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황제는 그것을 받아들여 원로원의 체면을 세워주었다. 그러나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황제들은 계속하여 원로원을 몰아 부치어서 황제들이 생존시에 신으로 추대하게 하였고 황제들의 무력적 권위 앞에 원로원은 어쩔 수없이 굴복했다. 로마시내 전역은 물론이고 로마통치 하의 모든 지역에는 수많은 황제<신>들의 동상들이 건립되었으며 사람들은 그 앞에서 분향하고 경배해야 했다.
그러나 기독교는 이러한 황제숭배에 순종하지 않았다. 그들은 차라리 목숨을 버리는 한이 있어도 결코 황제를 신으로 받들어 섬기거나 경배하지 않았다. 때문에 황제는 그러한 기독교도들에 대하여 크게 분노하였고 그것이 기독교를 탄압하는 직접적인 동기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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