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3년 콘스탄티노플 쇠퇴의 원인과 배경

 

주 승 민

<역사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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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Ⅰ. 머리말 󰠐

󰠐 Ⅱ. 콘스탄티노플 쇠퇴에 관한 역사적 자료 󰠐

󰠐 Ⅲ . 콘스탄티노플의 약사 󰠐

󰠐 Ⅳ. 쇠퇴의 내부적 원인 󰠐

󰠐 1.자체교회 내의 신학적 분열 󰠐

󰠐 2.정책의 부재 󰠐

󰠐 Ⅴ. 외부적 원인으로 동서로마 교회의 분열 󰠐

󰠐 Ⅵ. 결 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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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머리말


1453년 정확히는 그해 5월, 당시 세계사의 중심 무대인 지중해와 흑해를 연결하는 보스포포로스 해협에는 천년 이상 지속되어온 기독교의 역사적 운명의 날이 전개되고 있었다. (그때 한반도의 역사적 상황을 살펴보면 세조에 대한 아부, 단종에 대한 배신, 그리고 성삼문 등 사육신의 활동, 동료를 배신한 신숙주의 6진 개척과 한글창제의 시대와 동일한 시대임) 교회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세계성,보편성(ΚΑΘΟΡΙΚΉ)을 소유하고 있으면서 도 과거 기독교사의 천년을 단일 기독교 문화권으로 역사적 명맥을 이어온 BYZANTINE의 운명의 날에 관하여 무관심 한다면 교회사의 과거를 반추하며 오늘에 재음미하여 교회정신을 차세대에 재연① 하도록 해야 할 당연성을 망각하는 것이라고 사려된다.

그런 점에서 비잔틴 제국사의 종합적인 연구가 절실히 요청되지만② 이 논술에서는 비잔틴제국의 수도였던 콘스탄티노플의 쇠퇴에만 집중하여 천년간의 역사적 명맥이 끊어진 원인을 점검함으로써 비잔틴 제국은 축소되고 서방제국은 한쪽 날개를 잃어버린 상처입은 독수리가 되어버린 현역사의 조감도의 뒷배경을 살피고자 한다.

 

Ⅱ.콘스탄티노플 쇠퇴에 관한 연구자료

 

우리가 본론으로 들어와서 우선적으로 정리해야 할 중요한 과제는 과연 그처럼 기독교 역사의 흐름 속에서 지울 수 없는 경험(Πάθος)로서의 콘스탄티노플 쇠퇴에 관한 자료를 정리하는 것이라고 사려되어 다음과 같이 Steven Runciman 이 체계화한 내용을 정리하고져 한다.

 

1)헬라적 자료

 

헬라인으로서 논의하고져 하는 인물로 콘스탄티노플 쇠퇴와 동시대의 인물로서 도시가 포위되었을 때 그곳에 생존하고 있었던 이는 단지 한 사람 뿐이다. 그의 이름은 George Phrantzes인데 자신을 가족들이 Phrantzes(Frank? or France)라 불렀으나 Sphranzes라고 명명했다. 그는 펠로폰네소스에서 1400년이 바로 지난 직후 출생했으며 황제 Manuel 2세의 비서였으며 황제의 사망 후에는 그의 아들 Constantine에게 자신의 삶을 계속 봉사했다. 그는 Constantine의 가장 친한 친구였고 교회일치 운동(라틴교회 즉, 서방교회와의 정치적 일치운동; 필자 주)에는 별 좋은 감정을 갖고 있지는 않았으나 충성스럽게 그의 주인의 정책을 후원하는 데는 늘 준비된 자세였다. 그의 선입주견은 황제의 형제들 Theodore나 Demetrius를 싫어했으며 특히 궁궐에서 라이벌로 생각했던 Megadux Lucas를 질투 했으며 계속 그를 불공정하게 대하였다. 자연히 그를 싫어하는 이들이 많았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전해준 내용은 정직했고 확신할 만한 것들이 된다.

그가 남긴 작품들은 두가지 형태로 보전되어 있는데 1413년에서 1477년 그의 생애 동안의 기간을 다루고 있는 chronicum minus와 Palaeologan 왕조 전체역사와 chronicum minus를 첨가한 chronicum majus로 나눈다. 현대 역사가들은 Chronicum majus를 Macarius Melissenus가 편집 했다고 하나 콘스탄티노플 포위에 관한 역사적 내용은 원본을 포함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 자료에 관한 특이성은 Phrantzes가 터어키 점령시에 기록한 원본을 잊어 버렸다가 나중에 기억이 새로워졌을 때 재차 썼고 그의 기록은 정직 했으며 생동감이 있고 확신에 찬 분위기이며 허세가 없는 쉬운 스타일의 훌륭한 희랍어로쓰여졌다.

다음으로 헬라어로 된 자료는 그의 이름이 Michael인 Ducas란 성을 가진 저자의 책인데 그의 생애에 관하여는 알려진 바가 없고 다만 Genoese를 봉사하면서 콘스탄티노플이 포위 당하던 그 시기에는 Chios에 살고 있었다. 그는 Phrantzes와는 전혀 달리 열렬한 교회 일치주의자였으며 모든 것을 라틴계의 친구들이 소유한 안목으로 평가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의 저술은 1341년까지 세계사의 간단한 약술로 시작해서 1389년 이후의 일들을 더욱 상세하게 완전한 설명을 가하면서 1462년까지를 결론을 짓고 있는데 모두가 다 신문에서 사용하는 일상 생활용어로 기록이 되었는데 현대 역사가는 기대이상으로 그의 신빙성을 높게 평가해주고 있다.

Mehemet 2세의 궁궐에서의 일은 믿을만한 것이 못되었는데 아마 그는 그의 정보를 Genoese의 대리인이나 거기에 거주했던 상인들로부터 획득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그가 콘스탄티노플에 현존하지 않았으며 거기에서 일어났던 사건에 관하여 많은 양을 놓치고 있었으며 교회일치에 관해 자신의 견해와 다른 이들의 평가도 공정하지 못했다.

아덴 사람, Laonicus Chalcocondylas는 그가 매우 나이 많았을 때 1480년 이후까지의 얼마 기간 동안 그의 역사를 기술했다. 그는 미스트라에서 Plethon의 학생이었으며 그의 삶의 대부분을 펠로폰네소스에서 보냈다. Ducas의 것처럼 그의 저술은 세계사를 단편적으로 취급하고 있으면서 그것의 중요한 테에마는 오토만 제국의 출범이었다. 사실 그의 주제는 비잔틴 제국보다는 터어키 제국에 촛점이 맞춰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의 책은 콘스탄티노플에 관한 실제적 포위는 상세히 제시하지 못했어도 역사가로서 사건의 일반적 흐름은 놓치지 않았다.

다음으로 헬라적 자료로서 중요한 위치를 점유하고 있는 것은 4세기의 역사가 Christobulos인데 운명의 도시가 포위 될 때 Imbros에 관리로서 살고 있던 인물이다.

그는 동료 헬라인 중에서 터어키 정복을 비극일찌라도 피할 수 없는 것으로 본 그룹에 속했던 사람이다. 그의 역사서는 1451년에서 1467년까지 계속되었고 역시 그의 저술속의 영웅은 술탄이었다. Christobulos는 헬라인들의 영웅적 행동에 의해 감명되었으며 Mehmet 자신에 의해 이뤄진 야만적인 행위들을 불성실하게 간과하거나 변명하는 경향이 있었을찌라도 콘스탄티노플의 시민들이 당한 고난들을 가볍게 취급하지도 않았다. 그 도시의 포위에 관한 그의 설명은 현존하고 있었던 터어키인들이나 그리스인들로부터 정보를 얻었기 때문에 최상의 중요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술탄의 명성을 보전하는 경우를 제외하고서는 정직하고 선입주견에 얽매이지 않으며 확신에 차있다.

연대적으로 일치되고 있는 일련의 집단, Monemvasia의 Dorotheus와 Manuel Malaxos와 Ecthesis Chronicon은 콘스탄티노플의 포위에 관한 우리의 지식에는 더 나은 어떤 것도 첨부해 주지는 못하나 터어키 정복후에 즉시로 등장한 사건에 관해서는 유용한 정보를 제공한다.

마지막으로 현존하고 있는 헬라어로 된 서신 가운데 가장 중요한 자료는 1453년 바로 직전에 있었던 사건과 인물에 빛을 던져주는 George Scholarius Gennadius의 유물인데 그것은 특히 Lucas Notaras의 정책을 평가하는데 Phrantzes Ducas의 Latine 자료들이 일제히 불공정한 점에 비해 유익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2)슬라브 자료

 

콘스탄티노플 포위에 관한 자료 중 두개의 중요한 슬라브 자료들이 현존하고 있다. 그 하나는 일반적으로 불일치하지만 폴란드인 한 보병 병사(Janissary)의 일기로서 알려진 것인데 저자는 어떤 세르비아인 Ostrovica의 Michael constantinovic, 임시적으로 세르비아의 군주가 술탄을 돕기위해 보내서 그를 봉사하다가 훗날 폴란드에서 은퇴한 사람인데 그는 결코 보병병사(Janissary)가 아니었다. 그는 그의 문서를 폴란드어와 슬라브어의 이상한 혼합으로 썼는데 자세한 설명은 없지만 술탄쪽에서 자발적이 아닐찌라도 크리스챤 동맹군들이 누구였는가를 보여준 자료로써 흥미가 있다.

그 다음은 러시아어,루마니아어 혹은 불가리아어로 된 러시아적인 것보다는 오히려 발칸 반도에 속한 것으로 간주되는 고대 슬라브어 방언으로된 슬라브 연대기로서 역사 속에 빛을 본 것을 꼽을 수 있다. 그것은 분명히 콘스탄티노플에 현존하고 있었던 이의 정보에 기초하고 있었고 형식은 일기 형태로된 내용이나 현저히 변형된 상태로 보전되고 있다. 러시아 판의 기록은 저자가 어떤 Nestor Iskander로 나타나고 있다.

현대 학자들은 그가 원본의 저자가 아닐까하는 추정도 하고 있다.

 

3)서방자료

 

서방자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Nicolo Barbaro에 의해 보전되고 있는 콘스탄티노플 포위에 관한 일기이다. 원래 그는 의학을 공부했던 훌륭한 가정에 속한 베네치안(Venetian)이었고 콘스탄티노플이 포위되기 시작할 때 즈음, 가장 큰 베네치안 함대의 군의관으로 콘스탄티노플에 오게 되었다.그는 베네치안의 지휘관들과 자주 접촉 할 수 있었고 자신이 관찰자였으며 동시에 정보통에 속한 인물이었다. 그는 매일의 사건을 일기에 기록하고 있었고 어떤 때는 기록된 본문을 지나쳐 한 두가지 앞뒤 참조문을 삽입 하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2틀 정도 늦게 월식의 날짜를 변경시켜 놓고 있기도 하다. 그는 좋은 베네치안으로서 Genoese를 혐오 했고 일련의 사건들을 불신임하는 이들에게 기꺼이 보고했다. 그렇지만 그는 대부분 서방인들보다 헬라인들에게 적대감을 덜 가졌다.

우리가 사건의 연대기적 연속성을 알수 있는 것은 그의 덕택이다.중요한 점에 있어서 두번째는 Chios의 Leonard에 의하여 쓰여진 보고서인데 그는 그 도시의 쇠퇴후 약 6주만에 Chios에서 보고서를 작성할 때, Lesbos의 대주교였다. 그의 기억은 모든 헬라인들에 대한 그의 증오심과 함께 그의 기록은 생생했고 확신에 찬 것이었다. 그는 콘스탄티노플에 대하여 황제가 너무 쉽게 처리한 것 같다고 생각했으며 그의 상관, 추기경 Isidore는 너무 약한 정책을 쓴 사람이였다라고 암시하기도 했다. 동시에 그는 동료 Genoese를 비난하지는 않았으나 그의 위치를 져버린

Giustiniani를 비난하는 경향으로 흘렀다. 그는 거칠고 이기적인 사람이었으나 좋은 보고자가 되고 있다.

교황이나 모든 신자들에게 보낸 추기경 Isidore의 편지는 간단하여 많은 것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권위를 가진 기록이 되고 있다. Frorentine Andrea Cambini에게서 유용한 정보를 얻는데 그의 작품은 15세기말에 기록되었고 그 도시가 포위될때 생존한 이들을 향해 의견을 제시하는 것 같다.

Zorzo Dolfin은 Chios의 보고자인 Leonard에 의해서 기초되고 있는데 생존자들로부터 몇가지 첨부된 정보를 제시한다. 헬라인으로서 피난민인 Contacuzino Spandugino에 의해 쓰여진 터어키 역사는 도시를 포위한 사건에 관한 증인의 내용을 재차 기록한 것이다.

 

4)터어키 자료

 

특이할 만한 사실은 콘스탄티노플의 쇠퇴에 관한 터어키측 정보는 실망을 자아낼 정도이다. 혹자는 오토만 술탄의 가장 위대한 업적이 콘스탄티노플 점령이기에 오토만 역사가나 연대기적 작가에 의하여 완전히 기록되었으리라 기대 했었다. 그러나 이점에 있어서 그들 모두는 Rumeli Hisar에 성체를 세운것은 언급하고 있지만 콘스탄티노플 포위에 관한 것은 단지 터어키 함대의 육지여행과 최후공격에만 관심이 있었고 또한 깊이 술탄 법정의 음모나 정책에 관해서는 관심이 있었다.

Ashikpashazade는 Mehemet Ⅱ세의 통치말기 후를 기록 했는데 그의 동시대인으로서 Tursyn Bey와 Neshri인 Halil Pasha를 완강히 반대하는 입장에 서있다.술탄 제국의 BayezitⅡ를 칭송하는데 있어서도 Mahmud와 같은 그의 충신을 선호함으로

MehmetⅡ를 약간 경시하는 풍의 입장에 서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설명들은 터어키측의 정치적 분위기를 알수있는 한에서 가치가 있다.

맨처음으로 콘스탄티노플의 포위와 쇠퇴에 관하여 흥미를 보여주고 있는 터어키 역사가는 16세기 말에 비로소 기록에 착수한 SA'AD EDDIN이다. 그러나 의례히 모슬렘 역사가들이 하는 것처럼 전대의 역사가들의 설명을 단지 재생하거나 복사하는데 불가했다. 콘스탄티노플 포위에 관한 그의 기술들은 헬라 역사가들의 것과 꼭 들어 맞는다.

17세기 초에는 환상이 이야기로 변화되기 시작했다. Evliya

Chelebi는 그런 종류의 것을 아주 길게 설명하고 있는데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길 그의 고조 할아버지에 의해 전달된 내용 중에서 콘스탄틴의 신부가 될 운명의 프랑스의 한 공주가 술탄에 의해 체포되었다는 전설적인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가능성을 고려해 볼때 그는 그 얘기를 1204년 경에 한번 도시의 몰락이 있었던 때의 얘기를 친분있는 헬라인으로부터 전해 들었고 사실상 그 공주는 프랑스 루이 7세의 딸이며 Alexius Ⅱ세와 Andronicu-s Ⅰ세의 과부인 왕후 Agnes였다. 어떤 경우에는 자주 풍문이나 소문을 의지했지 이미 초기에 쓰여진 자료를 무시하고 있다. 그보다 후에 나타난 터어키의 자료들도 역시 단순히 선구자들의 작품을 재생산한 것 뿐이었다.

 

 

 

 

III. 콘스탄티노플의 약사

 

 

4세기 말, 한 전승에 의하면 비잔티움 주교구는 성 안드레아스가 세웠으며(그의 순교지는 이탈리아를 서쪽으로 건너다 보는 헬라의 서부 해안 도시 파트라스이다.) 그의 제자였던 스타키스가 초대주교가 되었다고 한다.(38년-54년)특히 콘스탄틴 대제가 330년 (406-337) 로마 제국의 수도를 로마에서 비잔티움으로 옮긴 후에 그 도시명을 ‘콘스탄티노플’① 또는 ‘신로마’로 개명하면서 주교구는 대주교구로 바뀌어 Ecumenical Patriarchate of Constantinople, "에큐메니컬 총 대주교“,‘로마’ 총대주교 (터어키어론 Rum Patriarkhanesi)로 명명된다.

4세기초에 고트와 페르시아 족에 대항하는 북동쪽 전선에서의 전투,경제적위기, 제국의 무기력으로 인한 연속적인 위기 상황에 로마제국은 완전히 기울어지기 시작 했다. 그래서 콘스탄틴 대제의 전 황제였던 Diocletian(284-305)은 회복을 위한 노력을 시도 했는데 그는 분봉왕 제도를 도입 했다. 즉, 제국을 두 명의 상위 황제와 그들을 돕는 후배 황제를 세워서 그 뒤를 잇도록 했다.

305년 그의 동료 Maximian과 Diocletian 퇴위와 함께 하위의 황제 위치에 있던 콘스탄틴 대제의 부친(Junior empero), 콘스탄틴 흐로로스는 그들 뒤를 이었고 다음해 그가 죽자 아들 콘스탄틴 대제는 뒷전에 물러 앉아 있지 않고 왕으로 자신을 높였을 뿐 아니라 18년 동안 내전을 겪게 되며 Maximian 의 아들

Maxentius 와의 싸움에서 312년 밀비안(Milvian) 다리에서 패권을 장악하게 되고 동방의 분봉왕이었던 Licinius 와의 북 에에게 지역 전투에서 324년 승리와 함께 전 로마의 명실상부한 황제가 된다. 321년에는 그가 황금동전과 2중으로된 화폐를 발행 했는데 거기에는 두명의 아들, Crispus 와 ConstantineⅡ세의 연합된 집정관이 한쪽 면에 나타나 있고 다른 면에는 아폴론 신에게 바쳤던 그의 초기의 헌신을 상기하는 태양 광선을 가진 왕관으로 자신을 장식한 모습이 등장한다.

그것은 역사적으로 황제,Diocletian의 출생으로 황제직이 세습 되어 가는 것을 포기하고 후임자의 공적에 의해 지명되는 왕위 계승 방법을 우리에게 보여주며 다시 콘스탄틴에 의하여 왕위가 세습되는 일련의 변화들을 볼 수있다.

Licinius 와 전투를 벌리는 동안 승리의 순간을 기념키위해 콘스탄틴 대제가 도시,콘스탄티노플을 미래의 수도로 정하긴 했으나 그같은 의도는 처음 발생한것이 아니다.② 이같은 위치의 콘스탄티노플은 4세기 동안 걸쳐 발전을 계속했는데 A.D 451년 칼케돈 회의는 A.D 381년 콘스탄티노플 회의의 결정 사항이었던 ‘로마의 주교구와 동등한 권리’(콘스탄티노플 주교구)를 인정 했고 ‘신로마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 에큐메니컬 총 재주교’라 불려졌으며 7세기 모슬렘의 영토정복과 함께 그 권한이 한층 더해졌다. 왜냐하면 모슬렘 점령 지역에서 성직자들이 모두 난을 피하여 콘스탄티노플에 집결하자 자연히 그 세력이 강화되고 그와 동시에 불가리아, 세르비아, 루마니아, 러시아③ 등으로 확산 되어갔다.

1054년은 동서 로마 교회의 분열이 대주교 Michael

Cerularius 와 추기경 Humbert 사이에 성만찬 금지와 함께 실현화 되었으며 12세기까지는 간신히 비잔틴 내의 평신도가 서방의 신도를 순수히 동료 크리스챤으로 이해하는 정도로 내려오다가 십자군 전쟁 시에 성직자 마져 전투에 임하는 서방교회의 모습을 직시한 동방교회는 불신임과 혐오감으로 인해 정치적인 면에 있어서나 종교적인 면에서 양 진영은 서로 균열의 아픔을 맛본다.

1453년에 오스만 제국의 수도로 콘스탄티노플은 전락이 되고 1833년 그리스의 독립과 함께 각 민족 교회들이 독립하여 자치권을 선포 하면서 콘스탄티노플은 축소가 되고 그 당시 분리된 상황을 보면 1)모스크바 자치교회(1593) 2)루마니아(1865) 3)세르비아 (1879) 4)불가리아(1870) 5)알바니아(1937)로 분할 되어 그 역사적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1964년은 뜻 깊은 날인데 거의 어림잡아 920년 가까이 분리되어 있던 양 교회가 서방의 파울로스 6세와 아테나고라스 총 대주교 사이에 화해가 이루어진 상황까지 이르게 된다.

 

 

 

 

Ⅳ.쇠퇴의 내부적 원인

 

 

위에서 우리는 콘스탄티노를 쇠퇴의 원인과 배경을 알려주는 자료와 그리고 그 도시의 역사에 관하여 간략히 살펴 보았다. 그러면 우리 논의의 촛점을 직접 관계된 사건에 맞추어서 내부적 원인과 외부의 원인을 분석하면서 그 운명의사건을 좀더 명백히 조명하고자 한다.

 

 

1. 자체 교회 내의 신학적 분열

 

 

콘스탄틴노플의 운명의 날에 가장 먼저 취급되어야 할 원인 규명에는 자체 교회 내의 분위기라고 생각된다. 1204년, 제4차 십자군 전쟁으로 초 강대국이었던 옛 동 로마제국이 쇠퇴하게 되고 니케아에 반세기동안 후퇴하여 제약을 받다가 Micael Palaologus에 의해 다시 재건되었으나① Anatolia라고 불리워지는 동방지역을 터어키족에게 빼앗겨 군사모집과 곡물생산지를 잃게 되었으며 1347년에 찾아온 긴 내전 후의 흑사병(The black death)은 인구의 절반 이상을 잃게 되는 참담함을 겪게 된다.②그같은 위기적 상황에 비잔틴교회의 정통성을 유지하려는 반일치주의자들과 현실의 중압감을 극복하기 위해 서방교회의 요청에 자연스런 수락으로 로마의 우월권을 긍정함과 동시에 서방교회와 일치된 입장에서 우상숭배의 대명사인 터어키 족과의 대응을 극복하자는 입장에 선 사람들과 정신적 분위기가 양극화되고 있었다.③ 다시말해 반일치주의자들은 비잔틴의 신앙과 전통을 고수하려는 입장에 서 있었고 이들은 라틴황제 치하에서 라틴 제국의 통치 권력하에 있었던 조상들의 고통을 기억하면서 일치운동은 도덕적으로 해로운 것이며 영원한 심판을 자처하는 것이라고 충격을 가하고 있었다.

반면에 일치주의자들은 비잔틴과 라틴문화의 통합을 위한 사상을 키우면서 그런 경우에만이 헬라적 전승이 안전히 보전되면서 당시에 나타나고 있었던 바 이탈리안의 삶의 위대성과 찬란한 로마의 옛 영화를 다시 세우게 되는 폭넓은 문화형성이 이뤄질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비운의 왕, 1391년에 왕위를 물려받은 Manuel 2세는 자기아버지 John 4세의 뒤를이어 기울어져가는 제국을 건지기 위해 1400년에 서양세계를 향하여 원조의 요청을 떠났으나 기본적으로 교회일치운동에 반대하고 있었기에 얼마되지 않는 돈을 모금하여 1402년 술탄이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한다는 소문과 함께 귀국하고만다.

1432년 Sultan Murad 2세가 실제적으로 콘스탄틴노플을 향해 거의 단번에 가족적인 배반행위와 배신의 루머 등 때문에 포위될 수 밖에 없었던 때까지 20년 동안이나 제국내의 다툼은 지속적이었다. 이런 와중에 Manuel 2세는 1432년에 공적인 삶에서 물러났고 2년후에는 세상을 떠났는데 그의 술탄의 친구, Mehemet 1세도 사망했고 새로운 술탄왕 Murad 2세 치하에 오토만 제국은 더 강국이 되었고 비쟌틴 제국에서는 Manuel의 셋째아들 Adronicus가 데살로니카를 차지 하고 있었는데 그도시를 지탱하는데 실패하고 베네치아 인들에게 팔아버리게 되나 그들도 역시 그 도시를 안전히 지키지 못하고 1430년에 터어키에 점령 당하고 만다. 제국의 풍전등화와 같은 위기가 감도는 순간이었다.

Manuel의 장남 John8 세는 남달리 아버지의 견해에 반하여 서방의 도움만이 동방을 도울 수 있음을 감지하고 로마와 일치의 정책을 펴기에 이른다. 교황 Eugenius 4세는 황제를 그의 대표단들과 함께 초대하여 1438년 Ferrara에서 동서 양교회의 의회를 열었고 이듬해는 Florence로 옮겨가서 계속되기에 이르는데 회의의 결과는 기대 이하로 교회 교부들 사이에 불일치와 모순이 계속되었으며 끊없는 언어상의 어려움만 있었다. 그때 John 8세가 그 회의에 참석하게 했던 이들은 세명의 메트로폴리탄교구에 속한 학식있는 감독④ 니케아의 메트로폴리탄, Trebizond의 Bessarion, 키에프와 전 러시아에 걸친 메트로폴리탄 Isidore, 에배소의 메트로폴리탄인 Mark Eugenicus이며, 4명의 평신도 철학자Geoge Scholarius, George Amiroutzes, Trebizond의 George 와 노령의 Plethone이 있었으며 그때의 대주교는 불가리아 왕과 그리스의 어떤 부인 사이에 태어난 서자며, 요셉이라고 불리우는 현명하지도 못하고 건강도 좋치못한 노령의 인물이었으며 회의에 큰비중을 차지하지 못한 실정이었다.

결과적으로 일치의 정책이 억지로 통과되었고 세명의 토마스 아퀴나스의 추종자들은 Plethone이 명백히 그 회의의 결과에 조인하는 것을 억제한 것을 제외하고는 그것을 수락했고 라틴의 지도자들은 Plethone을 플라톤 학파로서 독보적인 존재로 환영하면서 Cosimo de' Medici 같은 이는 그의 영예를 따라 플라톤아카데미를 세우는 전략으로 그의 입을 침묵하게 하는데 일조 했다.

에베소의 Mark Eugenius만이 반 일치주의 자(Anti-Unionist)의 대표적 인물로 남고 대주교 요셉은 회의록에 조인후 병들어 사망하고 말지만 성령에 관한 로마의 견해를 동의하여 헬라의 입장과 동일한 것으로 인정하는 일치의 정책이 결정되었다.

1440년 교황 Eugenius는 십자군 운동을 선포했고 1444년 다뉴브강을 건넜던 헝가리 군으로 구성된 십자군은 Sultan Murad와 격전을 벌이게 되고 황제는 일치의 조약후 어머니, Helena의 영향으로 일치운동에 박차를 주춤거리고 있던 차 별 어려움이 없이 술탄이 흑해 연변 Varna에서 십자군을 격퇴하게 된다.

이같이 민간신앙으로 널리 퍼져 있는 비잔틴의 교회만의 독립적인 전통유지는 계속 일치운동에 박차를 가하기는 커녕 오히려 “모든것이 영원하지 않다”는 예언서를 암송함으로 기울어져 가는 제국의 운명을 낙관적으로 보지않는 침울함이 급기야는 콘스탄티노플의 쇠퇴에 가장 큰 원인이 되고 있었다. 그리고, 많은 서방의 역사가들도 이미 비잔틴제국이 일치를 꺼려하는 것은 자기 멋대로 완고하게 자살을 시도하는 것과 같다고 예견하고 있었다.

 

 

2.정책의 부재


1448년 10월 31일 일치운동으로 제국의 운명을 살리려하던 John 8세는 세상을 떠나고 자녀를 남기지 않아서 6명의 형제들사이에 왕권 다툼이 계속있었다. 그는 Florence의 회의에 참석키위해 콘스탄티노플에서 부재할때 그의 후계자를 삼기위한 실질적 목적으로 그의 형제 콘스탄틴을 그 도시에 불러 콘스탄티노플을 통치하게 했다.

하지만, Theodore는 자신을 왕의 후계자로 생각하고 John이 사망할 시기에 가까운 거리에 있어야 한다는 일념으로 수도에서 40마일 안되는 Thrace에 정착하고 있었으나 황제가 사망하기전 3개월전에 1448년 6월에 운명이 그를 속이기나하듯이 Thrace에서 사망하고, 다른 형제, Demetrius는 황제 사망후에 정확히 두주후에 Selymbria,속령에서 자신을 왕으로 등극하는 일화가 발생한다.

그러나, 황제 부재시에는 황후가 차후의 황제를 임명할 주권을 갖고 법적인 실행을 할 수 있기에 연로한 황제의 어머니 Helena는 콘스탄틴, 그녀의 생존한 아들 중 최연장자인 그를 지명하였고 여론도 그를 지지하였다.Demetrius의 희망도 좌절되고 Thomas 는 제국의 북서쪽,Clarenza 와 patra 지역의 군주로 콘스탄틴에게 충성을 맹세한 후 Demetrius 와 Thomas가 콘스탄티노플에서 떠나자 왕권이 1449년 1월6일에 안정을 회복한다.

1450년 3월 23일 어머니, Helena의 사망까지 그는 반 일치주의자들의 입장을 고수하다가 그의 형의 조언을 기초하여 그의 정책을 펴나가기 시작했다. 한편 왕의 장관이었던 Phrantzes는 Sultan Murad의 사망과 접하여 Murad는 근본적으로 전쟁의 고통을 원치 않았던 평화의 사람인데 새로운 Sultan 은 크리스챤제국을 공격하여 파괴하려고 하는 자이다라고 평가하여 제국 내의 위험을 경고했다. 새로운 Sultan, Mehemet 2세는 19세였고 1432년 3월30일에 하녀였던 Huma Hatun이란 여인에게서 출생 하였으며 형 Ahmet의 갑작스런 죽음과 두번째 형, Ala Eddin이 6년 뒤에 비밀스럽게 살해된 후에 Murad의 뒤를 이어 오토만제국의 왕이 될 사람으로 유일한 존재였다. 아버지 Murad의 영향으로 그는 과학, 철학, 이슬람과 희랍의 문학에 조예가 깊었고 희랍어, 아랍어, 라틴어, 페르시아어, 희브리어까지 능통한 자가 되었고 앞에서 언급한 1444년의 Varna 전투에서 승리하고서도 은퇴하려고 했던 뜻을 굽히지 않고 왕권을 양도한 아버지의 뜻을 따라 제국의 통치자로 군림했다.

1452년 여름, Urban이라 불리우는 헝가리 기사가 콘스탄티노플에 왔을 때 황제에게 대포 제작을 통해 봉사하고 있었는데 콘스탄티노플은 그에게 합당한 봉급을 지불할 수도, 필요한 원료를 충분히 제공해 줄 수도 없는 어려움에 봉착하게 된다. 그때에, 공교롭게도 이탈리아계 유대인인 Gaeta 의 Jacobo란 의사에 의해 과학에 관심을 자극받고 있었던 Sultan Mehmet은 기다리기나 했듯이 그를 고용하여 그가 요구한 액수의 4배를 지불하면서 3달 안에 대형 대포를 만들어 Rumli Hisar에 있는 성곽에 대포를 장착하여 봉쇄령이 내린 지점을 통과하는 베네치아의 배를 격파한 승전을 이루게 된다.

그런 전과와 함께 Mehmet은 전보다 두배 크기의 대포를 만들도록 명령하고 후에 완성하자 700명의 군인으로 그 대포를 관리하게 했으며 이동하는데만도 15쌍의 마차가 필요할 정도로의 규모가 되었다.

위와같은 정황은 바로 콘스탄티노플의 쇠퇴에 직접적인 중요한 원인이 되고 있는데 그들의 정책은 너무 비현실적인 것이 분명하고 더나아가 성을 지키는데 무엇이 최상의 방법인지 모르는 사람들처럼 자가당착에 빠지고 있었음이 나타나고 있다.

 

 

 

 

Ⅴ.외부적인 원인으로 동서로마교회의 분열

 

 

전장에서 우리는 콘스탄티노플의 쇠퇴에 내부적 요인을 (1)자체내의 분열과 (2)현실에 부딪힌 문제에 봉착한 정책의 부재에서 분리해 생각해 보았는데 이제는 그 외부적 원인들을 찾아서 정리하고자 한다. (1)동서 로마 교회의 신학적 분열 (2)모슬렘의 팽창 (3)십자군 전쟁 등으로 구분이 가능한데 이 소논에서는 첫번째 것에 집중하여 기술하고져 한다.

콘스탄티노플의 포위가 현실화 되어가는 과정에서 콘스탄티노플의 황제는 그의 최선을 다하였다.① 예를들면 1452년 가을에 절박한 도움을 간청하기위해 이탈리아에 대사들을 보냈다. 그러나 반응은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새로운 대사가 다시 베니스에 보내졌으나 의회는 동방이 접수한 뉴스에 의해 깊이 실망할 정도로 11월16일에 대답을 제시했으며 교황과 다른 세력들이 행동을 보였다면 기쁘게 협력이 가능했을 터인데도 현실은 전혀 기대 이하였다. 사절단이 같은 달 Genova에 보내졌는데 단지 배한척을 지원선으로 약속을 받고 형편에 따라 또다른 도움을 주겠다고 하는 언질을 받았으며 프랑스왕과 프로렌스 공화국에 호소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의 반응은 한결같이 냉담 했다.아라곤의 약속에 속한 Alfonso왕의 원조는 더 모호했는데 콘스탄티노플에 운송을 위해 시실리에서 밀과 약간의 양식을 모으겠다는 내용이었다. 이같은 노력을 기울였던 사절단은 해외에서 무척 바쁜일정을 보냈으나 1453년 4월1일 부활절기간②에 몰락한 콘스탄티노플에 돌아가지 못하는 실정이 되었다. 전반적인 서양의 분위기는 당시 교황 니콜라스의 태도에서③ 잘나타나고 있는데 그는 기울어져가는 콘스탄티노플의 운명을 도우려고 했으나 교회일치운동의 현안이 현실화될 것이라는 확신을 느낄 때까지는 돕는 손길을 펴길 주저하고 있었다. 바로 이점은 9세기에 발생했던 동서로마교회의 갈등이 평정되지 않고 라틴교회는 정치적 교만으로, 비잔틴교회는 전통을 향한 완고함을 고집하다가 결국은 교황 니콜라스와 같은 지도자가 보여준 의도 표출로 사건은 결론 되었다고 평가 되어진다.

그러면 그 양교회 사이에 날카롭게 대두된 갈등요소들을 여기에서 점검해 보아야 하리라 사려된다. 14세기부터 이탈리아의 지적분위기가 동방과의 잦은 접촉이 초래되게되자 콘스탄티노플의 골든혼을 넘으면 바로 소재한 Genoese 영지, 페라에서 살면서 스페인 도미니안회로부터 라틴어를 공부한 젊은학자 Demetrius Cyclones는④ 토마스아퀴나스를 희랍어로 번역하길 평생의 사업으로 생각했으며 그 번역본은 비잔틴 지성인들 사이에 애용되었고, 삼위일체 개념의 토미즘적 이해 즉, (1)본질의 일치 (2)세인격의 분리를 동방교회에서는 의문을 제기하게 되었다.

동시에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복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한 이해가 동방이 주장한 대로 󰡔본다󰡕는 대상은 하나님의 본질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적 에너지’를 보게 되는 것이다라는 이론과 반대되는 서방의 견해를 크레테의 베네치안 식민지에 한 수도원에서 로마교회의 한 멤버로 자신을 취급하면서 일생을 보낸 Demetrius Cyclones가 추종하면서 양교회는 의견이 조정되지 않고 분열 양상을 띄게 되었는데 이와같은 류의 동서간의 의견차는 모슬렘 제국의 부흥과 함께 동서 교회를 위기로 몰고간 종요한 요인들이 되었다.

그 밖의 요인들은 다음과 같다.⑤ (1)성령의 유래에 관하여 (2)성례전에서의 빵과 다른 예전의 차이에 관해서 (3)연옥설에 관해서 (4)교황청의 의치에 관하여인데 1390년 비잔틴왕 John 5세를 이어 왕이 된 Manuel은 1425년에 John 8세에게 왕권을 노령에 세습했는데 그는 친서방정책을 쓰게되었고 앞에서 언급한 프로렌스회의에서 외부상황에 억눌려 일치운동에 조인하고 만다. 양측의 기본입장들의 토의와 토론의 기초는 성서와 교회 공의회의 표준 규칙과 범세계 교회에 의해 성자들로 인정된 교회 교부들의 저술에 의하여 형성되어야 한다고 했으나 누가 보아도 프로렌스회의의 결정 과정은 영원한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 만족할 만한 수단이 될 수 없는 과정으로 그 회의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우선 의견의 차이는 하나님의 본질과 하나님의 에너지에 관한 구별을 확실히 하지 않았던 서방교회의 견해는 약간 배타적인 점으로 나타났을찌라도 연옥설에 관한 견해에 있어선 양측이 서로 그렇게 극단적인 입장은 아니었다.동방교회 역시 최후심판 때까지 인간의 최종 운명에 도달한 것이 아니라는 점은 긍정하고 있었고 다만 한정적인 교리문으로 채택되지만 않았을 뿐이고 죽음과 심판 사이에 있는 사람들에게 무슨일이 일어나고 있었는지는 우리가 무지할 따름이라고 정리하고 있다.

그러나 서방에서 주장하던 연옥설에 관해서 특별한 반대가 없었고 그것을 수락할 준비까지 되어있을 정도였다. 그다음 여러 단계의 토의를 거쳐 의식적인 면들이 정착되었는데 서방교회에서는 성찬에 쓰는 동방교회의 Zeon(누룩)사용을 동의하고 허락했다는 내용으로 요약 된다. 한편 성례전에 삽입되는 성령임재의 부름(Epiklesis)의 절차인 동방교회의 입장이 더 이상 불필요한 것으로 양보되는 상황이 나타났다.

좀더 어렵게 의견이 진행되었던 것은 성령의 유래에 관한 내용인데 공식적인 동로마교회의 입장은“성부로부터”(ex patre) 즉, 성령의 유래가 “εκ τον θεον δια του Ιησου인데 반해 서방은 filiogue 즉,”아들로부터“(εκ τον υιον)란 귀절을 삽입함으로 “라틴철학은 처음에 본질 그 자체를 생각하고 거기에서 유래한 대행자(agent)를 고려한 반면 동방교회 철학은 처음에 대행자(agent)를 생각하고 후에 그것을 통해 본질을 고려하는 입장에 섰다고” Steven Runciman은 그의 저서에서 V.Lovsky의 저서 󰡔The Mystical Theology of the Eastern󰡕의 내용에 나타난 주장을 동의하고 있다.

다시말해,성령의 유래에 관하여 서방교회의 입장은 2중 유출(dual procession )의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으며,종래 Ferrar-Floren 회의에 이르러서는 급기야 “from ”이란 단어와 “through ”이란 단어가 서로 의미상 동일한 뜻이라는 방향으로 의견이 모아지면서 어색한 동서로마 교회의 관계는 더욱 이혼의 길로 가고 위기만 조장되었다.

그리고, filioque 문제와 함께⑥ 더나아가 υποθεσεις - Substantia, persona-προσωπον의 번역 상 문제인데 삼위일체의 본질(substance)를 논하면서 서방은 삼신론(Tritheism)의 입장에 서서 사벨리안적인 상황으로 기울어 졌는데 희랍어의 προσωπον은 번역 할 때 “인격체”라기 보다는 “외관”이란 뜻이 강하기에 υποθεσεις 와 προσωπον의 번역 상의 문제가 동서 양 진영에 나타나게 되었다.⑦ 그리고, 필요에 따라 여기서 잠깐 filioque의 역사를 조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맨처음, 6세기의 스페인 교부들이 visigoths의 아리안주의와 숨가쁜 투쟁속에서 성령에 관한 내용이 더 부언되어야 할 것을 느껴 ‘filioque’ 를 사용하기 시작했다가 이 귀절이 Orlean의 감독이며 학식있는 스페인 출신, Theodulphus에 의해 샤르마뇽 법정에까지 이르게 되었다고 한다. 9세기 중엽에는 독일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었으며 슬라브에서 선교 활동하던 독일 선교사들이 그 용어를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 Photius에게 전달했다.

그때, 그는 성령에 관한 요한복음 15장 26절 “όταν έλθη ό παράκλητος όν εγώ πέμψω ύμιν παρά του πατρός, το πνευμα της αρηθειας ματυρησει περι εμου ”의 귀절들을 라틴교회에서 잘못 이해했고 다음장, 13절과 15절에서 논의되고 있는“Έκτού εμού“와 바울의 ‘그리스도의 영’이란 개념은 결코 요한복음 15장 26절의 내용과 불일치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면서 이중유출설을 부정했으며 교황 Leo 3세 마져도 로마의 성베드로 사원 벽에 신조(Creed)를 부착하려고 할 때 filioque를 생략하기도 했다. 그러나, 11세기 초 독일 태생의 황제들이 로마에다가 그 귀절을 사용하기를 명령한 사태도 발생한바 있었다.

이같은 모든 문제들 배후에는 번역상의 문제가 대두된 것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런 것들을 통해 서방교회와 동방교회의 관계는 사실 정신적으로 이혼의 상태에서 별거중인 부부와 같은 상황이 되어있었다.

마지막으로, 가장 첨예화 되어 있었던 교황권에 관한 양교회의 잘못된 견해차인데 A.D 381년 콘스탄티노플 회의에서 결정된 로마와 콘스탄티노플의 동등권 문제였다. 그러나 신앙과 훈련의 문제에 있어서 교황은 전교회의 마치도 제일원로의원(princeps senatus)처럼 위치하게 되었는데 A.D 343년 불가리아의 사르디키 회의에서 현실화된바 있었으며 그런 우월적 위치는 381년에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콘스탄티노플이 처한 위기 상황에, 동방교회의 사기를 건드리는 폭탄의 도화선 같은 문제에 서방교회는 불을 당겼다. 즉, 교황이 교리적 우월권을 갖는다든지 교회 훈령의 권위를 소유한다면 여타 다른 교리 문제의 향방은 고려대상이 되지 않는 처지였는데 라틴교회는 동방교회에 교황이 전교회를 훈련할 뿐아니라 교리 문제를 취급하며, 전 교회를 그 새로운 교리에 묶기 위한 공의회소집 권한을 교황에게 이양 하자고 Florence 회의에서 요구하였으며 황제는 원래 이런 권한이 황제에게 있었던 점을 감안하여(John 8) 처음에는 모호하게 변증했으나 결국은 로마감독이 전체 교리와 전체 크리스챤을 다스리고 통치하기 위한 모든 권한을 차지하게 된다.더구나 그 같은 입장이 ‘공의회의 행동강령과 거룩한 규칙이 인정하는’것으로 확정이 되었다.

훗날, Florence 회의에 참여한 모든이들이 예배소의 감독Mark Eugennicus만 제외하고 회의결정에 형식적인 일치를 선언을 했으나 1448년 John 8세가 피로와 환멸로 세상을 떠나고, 1452년 로마의 추기경이 된 Isidore는 일치의 법령을 갖고 콘스탄티노플에 와서 12월 12일 아기아 소피아 성당에서 대중 앞에서 낭독하려 했으나 그의 동료 이탈리아인 Mytyrene의 대감독이며 Chios의 레오나르드는 그 때의 상황을 참석자가 적었으며, 많은 동방의 공직자들도 그 의식을 배척한 사실을 전달 해주고 있고 심한 분노로 그 때의 상황을 기록해 놓고 있다. 물론 Isidore는 성공적인 의식을 기대했을찌라도 말이다.

그해 몇달 동안 아기아 소피아 성당은 라틴인과 서방과의 일치를 지향하는 성직자에 의해서 예배가 인도 되었고 대다수의 성직자, 그 도시의 회중들은 함께 그 의식에 참여하지 않았다. 새로운 공의회가 개최될 가능성을 남기고 콘스탄티노플에서 회의가 있었으나 Chios의 Leonard에 의해 인도된 라틴 성직자들의 비타협적인 태도는 어떤 도움도 기대 할 수없는 상황이었으며 그들의 지나친 강요는 당시 동로마 교회 측의 Lucas Notaras의 입에서 “로마의 추기경의 모자 보다는 술탄의 터어반을 곧 보기 원한다”는 비참한 언급이 흘러 나오게까지 되었다.

1453년, 콘스탄티노플이 쇠퇴할려고 하는 위기의 순간에 동방과 서방의 두 교회 관계에서 어느 편이 더욱 정당 했던가를 논하기 전에 서방의 이같은 불편 한 분위기와 함께 편승된 그들의 이교도들과의 전투는 동방을 향한 도움의 단절을 가져왔고 급기야 “달이 지더라도 이 도시는 사라지지 않으리 했던” 콘스탄티노플의 쇠퇴에 중요한 이유가 되고 있다.

 

 

 

 

Ⅵ.결론

 

 

지금까지 5장에 걸쳐 콘스탄티노플 쇠퇴의 내적 요인과 외적인 요인을 살펴보면서 400년간이나 모슬렘치하에서 유대 바벨론 포로기처럼 교회의 포로기간을 겪게 된 원인을 살펴보았다. 하나님의 섭리가 지배하는 세계사 속에서 우리의 질문은 왜 그처럼 철저한 신앙의 도시가 하루 아침에 폐허가 되고 이교도의 말바굽아래 짓밟히게 되었는가? 왜 하나님께서 그들을 멸망시키셨는가? 아니면, 그 멸망의 요인이 콘스탄티노플 자체에 있었던가? 우리가 이러한 질문을 안고 논술되어온 과정을 다시 재검토 해 보면 현실을 무시한 신앙의 방향설정, 지나친 피안주의로 현실을 장식하려는 무책임성이 쇠퇴해가는 크리스챤 도시민들의 구원에 결코 도움되지 않았다는 모습으로 들어났다.

그같은 모습은 이미 앞에서 살펴본 대로 십자군 전쟁과 오토만제국의 확장 엎친데 덮친 격으로 찾아온 흑사병으로 전 인구의 절반이 죽어간 폐허위에서 건설을 위한 사랑의 옴모니아로 자신을 무장하지 않고 내분과 도움이 될 수 밖에 없는 서방 교회와의 관계에서도 협조체제를 형성하지 못한 완고함과 동전의 양면처럼 동서 양 교회의 두세계로 구성된 크리스챤 세계 끼리의 우열 다툼, 특히 형제의 위기에서 자신의 유익을 취해 보려는 라틴 교회의 속셈 즉, 1439년에 나타난 프로렌스회의의 결과 등은 오늘의 Ecumenical운동 중에도 시사하는 바가 많다.

독일의 문호 괴테는 일찌기 ‘인류는 부단히 진보하지만 인간은 언제나 하나다.’고 말한 적이 있다. 무엇이 동일한가? 과거의 역사속에 나타난 인간의 역사와 삶과 문화를 대하는 삶의 양식은 오늘도 여전히 이기적인 면으로 얼룩져 있는데 그것은 또한 어거스틴이 통찰력있게 지적한 세속나라의(civitas terena ) 모습이며 어쩌면 인간의 굴레이기도 하다.

그러나, 더욱 우리가 비판해야 하며 더욱 콘스탄틴 쇠퇴에서 역사적 교훈을 뼈저리게 느끼게 되는 것은 크리스챤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역사적인 파행국면이 주는 비참함이 얼마나 큰가를 보여준다. 다시금 믿음과 사랑이 외형적이 아닌 내실있는 실천으로 스며들어야만 된다는 사실을 역사가 전개 되었던 과정 속에서 다시 한 번 그 당위성을 찾아보게 된다. 그러면 우리의 위치를 어디에다 설정해야만 역사의 비운이 낙관으로 정립 될 수있을까? 괴테에게 있어서 “인간의 정신이 지금까지 어떠한 가치체계를 형성하고 진보해 왔을찌라도 기독교가 이룬 가치체계를 어떤 것도 능가할 수 없다”라는 깊은 성찰이후에 도달한 결론은 콘스탄티노플의 쇠퇴 속에서 그 높은 크리스챤의 가치가 또 우리의 삶에 실현화 되지 않는다면 얼마나 우리의 삶이 황폐화되는지를 생생히 교훈 받을 수 있다.

특히, 형제 교회간 화목의 파괴는 긴 세월이 지나서야 상처가 겨우 치료된다는 사건의 정리도 명백히 발견 할 수도 있었는데 그점은 바로, 1054년에 발발된 교회의 대분열이 1964년이 되어서야 콘스탄티노플대주교 아테나고라스 1세와 로마교황 파울로스 6세 사이에 비로소 형식적이나마 화해되는 상황은 교회의 분열은 곧 우리 생명을 나누는 것같은 아픔이요, 그 만큼 댓가가 지불된다는 명백한 진리도 역사적 경험으로 우리에게 분명히 드러난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그의 「신의 도성」에서 로마의 풍전등화같은 역사적인 위기속에서 다시 새로운 하나님의 도성이 동터오는 희망을 제시하길 역사의 Cul-de-sac에서도 결코 비극의 역사를 향한 하나님의 선한 손은 거두어지지 않고 계속 행동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성을 밝혔다. 그의 견해에서처럼 역사의 주로써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행동하심은 콘스탄티노플이 비록 멸망하였으나 르네상스로 연결되는 새로운 역사의 도래를 초래 했으며 그리고 모슬렘치하에서 보여준 기독인들의 생명력은 바로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동일하신 분”의 선한 역사의 경륜을 읽게 함을 보여주고 있다고 사려된다.

 

 

 

 

 

 

미 주

 

 

Ⅰ. 머릿말

①Adolf von Harnack.기독교의 본질. 윤성범역. 서울:삼성문고. 1975. p. 15.

②비잔틴 제국사의 연구 이유로는 다양한 면이 있지만 그 중에 우선 되는 것은 문화사의 배경 중 특히 문예부흥의 끼친 영향이 크다는 점이다.이 견해는 Dene John Geannakopoulos의 책 <Constantinople and west> 1986년 판에 상세히 기술되고 있는 바다.

 

Ⅲ. 콘스탄티노플의 약사

①B.C 312년 메가스 알렉산더 대왕의 동방 정벌로 70여개의 동방에 속한 도시들이 ‘알렉산드리아’라는 이름으로 명명 되면서 동서문화의 일치성을 꾀하게 되었던 전통을 따라 원래'Byzantium'이었던 지명을 그 지역 거주민들의 자신들을'Romaioi'라고 불려지기를 선호하는 경향성과 함께 '콘스탄티노플‘이라고 불려졌다.

②사실 당시에 로마의 내륙지방은 점점 비현실적인 지역이 되어갔고 이태리는 점점 방어가 불가능한 지역이 되었고 발칸반도 그리고 소아시아 지역은 로마군대를 위한 중요 징병 자원 출처였고 그래서 콘스탄틴은 유럽과 아시아의 중간에, Marmara(대리석)해의 바닷물로 삼면이 둘러쌓인 보스포러스 해협이며 깊은 물로 특징을 이루어 “황금의 뿔”이라고 불리워지는 난공불락의 지역을 택해 6년 동안 건축하여 330년 5월11일을 기념일로 삼으면서 로마 제 2의 도시로 건설 했다.

③러시아와 콘스탄티노플 관계는 866년 대 주교 “포티오스”의 회람서신을 통해 10세기 중엽 전에 이미 러시아 대표 “이고르”와 비잔틴 황제 “로마누레키피누”와의 관계에서 조약협정이 체결되고 러시아에 예언자 “엘리야 교회”가 등장 함으로 콘스탄티노플의 선교의 결과로서 러시아가 역사의 무대에 등장함을 보여준다. 원래 러시아의 헬라적 명칭은 ρωσια 이고 라틴 형태는'Russia'인데 러시아에 988년에 정부의 공식 종교로 기독교가 인정된 것은 13세기 초에 기독교 선교를 시작한 캐톨릭보다 훨씬 이전에 비잔틴 교회의 러시아 진출이 이뤄졌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 점에 있어서 “러시아인의 삶의 방법은 세가지 1)로마의 정치적 전통 2)헬라의 문화적 유산 3)정교회적 신앙에 영향 되었고 이 세가지 없이는 러시아의 삶의 방법을 이해 할 수없다고 본다는 말은 설득력이있다.

 

 

Ⅳ쇠퇴의 내부적 원인

①Steven Runcinan. The Fall of Constantinople 1453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69, p. 2

②이때의 왕 John4세와 그의 왕관에 사용된 다이아몬드는 시대적 비참을 알려주듯 유리로 된 것이었다. Ibid. p. 5.

③일치주의자들 1340년 Demetrius Cydones는 토마스아퀴나스의 저술을 희랍어로 번역해 기초화 했다. Ibid., p. 5.

④Steven Runcinan. op. cit., p. 15.

⑤Steven Runcinan. op. cit., p. 19.

⑥비잔틴 제국의 최후의 장관 Lucas Notaras는 ‘추기경의 모자보다는 술탄의 터어반이 더 좋다’라고까지 밝힌 적이 있다.

Ⅴ.외부적 원인

①Steven Runcinan. The Fall of Constantinople 1453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69, pp. 80-81.

②비잔틴교회, 정교회는 교회력 중에서 부활절을 가장 큰 절기로 여기고 있으며 그 주간을위대한 주간(μεγάλη εβδομάδα) 라하여 수난일, 금요일을위대한 금요일(μεγάλη παρασκευή) 라고 명할 정도로 전 시민들의 축제였다.

③Steven Runcinan. The Great Church in Captivity. Cambridge: Cambrige Univ., 1985, p. 103.

④Ibid., p. 101.

⑤Ibid., p. 105.

⑥A. Palmieri, ‘Filioque’, 카톨릭신학사전 참고

⑦이런점에서 Hippolitus의 신학적인 방법론은 라틴어 사용권인 로마지역일찌라도 희랍어로 신학을 전개하는 고집을 편 것은 상당히 우리에게 시사하는 면이 있다.

⑧Steven Runcinan. The Great Church in Captivity. p. 91.

 

 

 

 

 

 

참고도서

 

 

1.희랍어 자료

 

 

Αρβελερ,  Ελενη Γλυκατζη. Η πολιτικη ιδεολογία της Βυζαντινη Αυτοκρατορίας. Αθηνα: Αθανασιος ψυχολογιος.1992.

Βασιλεια, Νικ.Π.Ορθοδοξια και παπισμός. Αθηνα: Σωτηρ.1981.

Μεγεντορφ, Ιωαννου. Βυζαντιο και ρωσια. Αθηνα : Δομος.1981.

 

 

2.영어자료

 

 

․Geanakoplos, Deno John. Constantinople and the West. U.S.A: The Univ. of Wisconsin Press. 1989.

․Loverance, Rowena. Byzantium. London: British Museum. 1988.

․Runciman, steven. Byzantium. Great Britain: Richard Clay Ltd. 1975.

----------------. The Fall of Constantinople 1453. Cambridge: The Univ. of Cambridge. 1969.

----------------. The Great Church in Captivity. Cambridge: The Univ. of Cambridge. 1985.

 

 

3.한국어자료

 

 

․아돌프 본 하르낙. 기독교의 본질. 윤성범역. 서울: 삼성문화문고 67호. 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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