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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의 유래 


부활절을 뜻하는 영어의 Easter는 'Eastre' 라는 이교도적인 이름을 고대 영어에 맞추어 바꾼 말이다. 이는 튜튼족의 신 중 봄과 새벽의 여신의 이름이었다. 이 여신의 축제는 해마다 춘분에 열렸다. 부활절의 원래 명칭은 유월절을 뜻하는 히브리 말인 파스카(Pascha)였다.

주님의 고난과 부활이 유대인의 절기인 유월절과 같은 시기에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자연스러운 명칭이었다.
죽음과 부활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새로운 유윌절, 즉 죽음의 노예 상태로부터의 해방을 이루었다는 뜻을 부여했다. Easter가 일반적인 명칭이 되기 전에는 이날이 '주님의 부활절' 및 '부활의 유윌절(Paschal Day of the Resurrection)'이라고 알려져 있었다.

이는 유대인이었던 사도들과 개종자들이 그들의 옛 절기인 유월절에 대한 새로운 기독교적인 의미를 부여해 보고자 하는 노력으로 부활절을 지켰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6장 6, 9절에서 그리스도를 가리켜 "유월절 양"이라고 한 것은 이러한 사실을 잘 말해주는 말씀이다.

그런데 북부 유럽에서는 봄에 "이스트르(Eastre)"축제를 계속하고 있었다.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이 시기에 "파스카(Pascha)"를 경축하였다. 그 후 기독교인들은 이 파스카 축제를 "이스터(Easter)"라고 부르게 되었다. 어떤 의미로 '파스카'를 '이스터'라고 불렀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봄, 빛의 영광됨이 의미상 일치되고 있기 때문일 것이라는 짐작만 있을 뿐이다.

파스카는 거룩한 주간으로 지켜졌다. 부활주일 전(前) 주일은 종려주일로 정하고 주님의 승리의 입성을 기념하여 저녁 때 성도들이 감람산에 올라가 예배를 드리고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행진하여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며 '호산나'를 불렀다. 목요일에는 '성만찬‘과 금요일에는 ’성 금요일'을 생각하여 주님의 고난과 관련된 금식을 하였다. 그러므로 부활절 축제는 부활하신 그 날만의 축제가 아니라 사순절의 마지막 주간의 고난 주간과 연결되어 맞이하는 것이기 때문에 고난과 부활의 연결을 자연스럽게 하여야 부활의 기쁨이 보다 크게 체험되는 것이다.

"너희는 누룩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도 말고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도 말고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없는 떡으로 하자"(고전 5:7-8) 이 말은 신약 시대의 교회가 부활절을 지켰음을 알려주는 예이다. 고대 유대인의 출애굽 기념은 예수그리스도에 와서 새롭게 완성되어 그 십자가를 지심으로 죄와 죽음에서 놓여난 새로운 의미로써 말하여지게 되었다. 부활절은 기독교 축일 중 가장 오랜 것이며, 교회력에서 다른 축일의 근원이 된다. 그 주간의 첫 날에 예수가 죽은 자 중에서 살아나셨기 때문에 이것은 기독교의 사실과 헌신의 절정이었다. 따라서 매 주일이 '작은 부활절'로서 축하되었다. 결국 부활이 매주간의 첫 날에 지켜졌기 때문에 예배일이 안식일(토요일)에서 주일로 바꿔었다. 동방교회에서는 부활절이 교회력의 시작이다.

고대교회는 8일, 즉 다음 주일까지 매일 부활절을 축하했다. 부활절에 세례받는 사람들은 그 예배에 모두 참석해야 했다. 그들이 흰 세례복을 입었기 때문에 부활절 후 첫째 주일은 '백의 주일'이라고 일컬어 왔다. 원래 부활절은 부활절에서 오순절까지가 한 절기였지만 나중에 부활절, 승천절, 오순절로 나누어졌다.

현재 지키고 있는 부활절은 325년 니케야 종교회의에서 "부활의 날"을 정하여 주일에 지키기로 하였다. 그러나 이 날은 일정하지 않았다. 그 후 제8세기부터 3월 21일(춘분)이나 춘분 이후 만월(滿月) 첫 주일을 지키기로 하였으며 만월이 주일이면 그 다음 주일로 부활의 날을 정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이 원칙에 의해 부활주일은 3월 22일과 4월 25일 사이에 결정되는 것이다. 이 부활주일부터 40일째가 주님 승천하신 날이요, 50일째가 오순절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부활절이 항상 축일 중의 축일이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보다 더 중요한 사건은 없는 것이다. 그것의 우위성은 매주마다 부활이 축하되어진다는 사실로써 잘 알 수 있으며 그 때문에 교회력의 각 주일이 축하로 진행된다.
 

부활절의 중요성은 그것에 앞서 40일 간의 사순절이라는 준비기간이 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다른 축일과 절기가 해마다 바뀌어지는 것은 부활절의 날짜에 따라 정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아들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일으키신 하나님의 지상 행동에 근거한 부활절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중요한 사건임에 틀림없다. 그러므로 교회는 이 부활절을 통하여 교회의 새로운 생기를 되찾을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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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 루터 킹목사의 헌신된 생애

 

 

 


 

 

흑인 목사 마틴 루터 킹이 암살 당하기전 바로 두달전에 다음과 같은 설교를

 

 하였다.

 

"저는 가끔 저의 죽음에 대하여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의 장례식을 그려봅니다.

 

 만약에 여러분 중에 누가 혹시 저의 장례식에 계시다면 부디 길게 하지 말아

 

 주십시오.

 

또 저의 장례식 조사도 짧게 해달라고 말씀해 주십시오.

 

그리고 조사를 하는 사람에게 제가 노벨 평화상을 탄 사람이라는 것을 말하지

 

 말라고 부탁해 주십시오.

 

또 내가 그 외에도 삼백개 가량의 표창과 상을 받았다는 것을 말하지 않게 해

 

주십시오.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만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일에 삶을 바치려고 노력했다고 말해 준다면 감

 

사하겠습니다. 사람들을 사랑하려고 노력했고 굶주린 사람을 먹이려고 했으

 

며 헐벗은 사람에게 옷을 입혀 주려고 애섰으며 감옥에 있는 사람들을 방문하

 

려고 노력했고 인류를 사랑하여 봉사하려고 힘섰던 사람이라고 말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설교했다. "저는 남기고 갈 재물도 없습

 

니다. 또 제 인생에서는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것들을 남기고 갈 것도 없습니

 

다. 다만, 헌신된 생애를 남기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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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기 목사 번역 및 추천 도서 「천국은 확실히 있다」, 비성경적 위험천만

 


예장합동 소속, 성남시 분당구 한돌교회 담임목사 림헌원

onestone3@korea.com

 

 

 


「천국은 확실히 있다!」(HEAVEN is so REAL)

토마스 주남(여) 씀, 조용기 옮김, 서울 말씀사, 2004.

 


- ‘계시관. 천국관. 기독론’등이 비성경적, 비신학적으로서 ‘위험천만!’

그리스도의 거룩성에 흠집! 그리고 십계명의 제2계명과도 충돌되며, 성경계시의 최종성과 만족성을 위협하는 ‘제2의 계시록?’처럼 주장- 정통 기독교 신자들로서는 대부분의 내용이 용납하기 어려운 것들로 가득하다.

 


그런데도 조용기 목사는 ‘이 책은 신학적이거나 교리적인 저서는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 책에 담긴 내용을 신학적이거나 교리적인 논쟁의 대상으로 여기지 말고 주님과 함께 천국을 구경하신 토마스 여사의 진솔한 체험이 사실 그대로 담긴 기록으로 받아들이고 읽으면 좋을것’ 이라고 말한다.(4,5쪽)

 


신학적 또는 교리적 논쟁거리도 안 되는 것처럼 말하는 비성경적인 것을 어떻게 받아들이어 ‘주님의 크신 복’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할 수 있는가 의문이다. 저자인 토마스 주남은 자신의 천국 체험을 철저하게 성경적 사실이라고 주장한다.(17쪽)

 


이것은 성도들이 1세기의 초대교회 당시 베뢰아 교인들처럼 성경신학을 통해서 ‘옳음과 그름을 분별’하려는 노력을 사전에 봉쇄하여 거짓되고 악한 것에 ‘눈멀고 귀먹게’ 하려는 의도가 아닌가 의심받기에 충분하다.

 


바른 신앙은 바른 신학에서 나오며, 바른 신학은 바른 성경 해석에서 나오는 것이 아닌가?

 


번역한 책에 관해 다음 몇 가지의 문제점을 살펴보기로 한다.

 


Ⅰ. 계시관의 문제점 (- 제2의 계시록?’처럼 주장)

 

- 성경계시의 최종성과 만족성을 부인!

(16,17,96,117,152,178,182,203,205,206,291,338,348,354,394,491쪽 등)

 


‘그러나 주님은 내게 자신이 재림하시기 전에 자신의 백성들에게 스스로를 정결케 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주실 것이라고 확신을 주시면서 그 때문에 나를 택하여 이 책을 쓰게 하셨다고 설명해 주셨습니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성경이 말씀하는 것을 믿지도 않고 또 주님이 자신의 백성들을 위해 곧 오시리라는 것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또한 이 책이 수백만의 영혼들을 구원하는 도구가 될 것이라고 말씀 하셨습니다.’(354쪽)

 


이 책은 사도요한의 요한계시록과 하박국과의 ‘동등함’을 넘어서 마치 무능력해진 66권의 성경말씀을 능가하는 구원의 도구로서 예수재림직전에 마지막 기회로 주어지는 제2의계시록!? 인양 주님의 계획에 따라 명하여 쓰여진 책이라고 시종 주장하고 있으니 성경계시의 최종성과 만족성을 철저히 부인한다는 의심을 면하기가 어렵다.

 


하나님께서는 성경 66권의 말씀을 가감하지 말라고 신구약 전체를 통하여 엄히 경고 하시고 계신다.(신12:33 ; 잠30:6 ; 계22:18-19)

저자는 사도요한과 엘리야처럼 살아서 천국 체험을 했던 소수 중에 하나라는 사실을 드러내고 구약의 엘리야와 하박국 선지자, 그리고 신약의 사도 요한과 맞먹는 말세의 독특한 여선지자로서 제2의 계시록!?을 쓰는 정당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렇게 성경 계시의 최종성과 만족성을 부인하고 있으니 이는 다른복음(갈1:6-9)을 전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Ⅱ. 천국관의 문제점

 

-천국은 우리가 살아생전 왔다 갔다 하는 장소가 아니다.

(76,78,84,85,97,147,174,209,221,224,240,242,286쪽 등등)

 


‘나는 종종 왜 주님과 내가 다른 곳이 아니라 해변에서만 출발해야 하는지 의아해 했습니다. 그러다가 나는 그 장소가 보통 이른 아침 시간에는 사람의 왕래가 없기 때문일 것이라고 결론지었습니다. 나는 내가 주님과 함께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누군가 본다면 어떤 일이 생길까를 생각하니 재미있어서 소리 내어 웃었습니다. 십중팔구 그들은 외계인이 납치해 간다고 생각하거나 혹은 환각현상이라고 생각할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들은 아마 미쳤다는 소리를 들을까 겁이 나서 아무에게도 그 이야기를 하지 않을 것입니다.’(97쪽)

 


영적천국은 죽음 월편(越便)의 세계이다.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히11:1에서처럼 천국에 관한 내용이건 사후에 관한 내용이건 요한 계시록에 다 기록하지 않은 것은 우리 로 하여금 궁금증을 갖고 천국을 소망하고 내세를 소망케 하시려는 것이다.

또한 신약성경 다수 기록한 사도 바울이 천국의 낙원을 다녀온 경험이 있지만 구체적으로 표현하지 아니하고 침묵했던 이유를 깊이 묵상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고후12:1-7)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라서 사람들이 지나치게 생각하여 오해할 수 있기에’ 더 이상의 말을 그만 두겠다는 사도 바울의 겸손을 떠나서 오히려 그 사도 바울의 견해를 뛰어 넘어‘철저하게 성경적 사실이라’(17쪽)는 말로 호도해가며 천국 소개를 하고 있는 사실은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영적인 천국을 경험한 사도바울의 계시도 일반화, 보편화 시키지 않았다. 그런데 어찌하여 저자는 개인적 체험을 일반화 또는 보편화 시켜서 이 세상 마지막 구원의 도구로 직통계시를 받은 책이라 주장하고 또한 철저히 성경적이라면서 비성경적인 책을 마치 사실인 것처럼 전파하고 있으니 위험천만한 일이다.

 


살아있는 인간이 변화된 육체의 모습으로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도록 이른 아침에 천국으로 올라간다!(84,85,97,204,205,206,319쪽 등등) 그리고 영적천국에 도착하여서도 슬픔과 염려와 은으로 된 화장실의 욕조를 언급 하고 있다.(147쪽)

또 여성들이 화장하고 옷을 갈아입는 파우더 룸이 있다고 하였다.(197쪽 등) ‘화장’은 현세에서 연극을 할 때 돋보이게 하려는 일종의 얼굴 가면이요 위장술이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충만한 천국에서 무엇이 부족하여 화장을 하여 돋보이게 할 필요가 있겠는가?

영적 천국에는 육체의 정욕들이 자리 잡지 못한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 하였도다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마22:29,30)

마22:23절 이후에서 사두개인 들은 부활후의 천국세계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완전히 새롭게 되는 세계(요한계시록21:5)인 줄 모르고 단순히 현세(슬픔,욕정 등)의 연장인줄로만 알아 오해 했던 것이다.

 


문패가 달린 저택은 매우 특별한 자녀들을 위한 것이라 한다. (286쪽)

누구는 문패가 있는 대저택, 누구는 쓰러져가는 집, 또 누구는 개털, 소털 면류관을 쓰게 된다는 등등의 이야기는 지구촌 현세의 물질적 자본주의적 개념으로 오해된 생각들일 뿐이다.

 


현세에서 열심히 주의 일을 잘 한 사람에게 베푼다는 천국의 상급(영광)개념은 천국이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으로 충만하게 채워진 곳이기 때문에 현세처럼 더 이상 물질의 양으로 판단하는 소유적 개념이 아니다.(고전15:40,41)

 


천국에서 고기 굽는 그릴, 자동문, 주님이 버튼을 누르자 달리는 배들, 오븐 옆에 달린 버튼을 누르는 주님!(78,209,221,224쪽 등) 현대 최근 문명의 수준이 버튼을 누르는 정도 보다 더 발전이 된 최첨단 전자동화 인텔리전트(intelligent,인공지능) 수준에까지 발전되어 마음이 생각하는 전파나 말로 명령만 내려도 집안의 모든 것이 자동 검색이 되고 움직이는 수준인데 계시된 천국은 너무 문명이 낙후되어있는 후진국 문명이다. 마치 현대 지구촌문명의 이기의 일부를 천국으로 직수입한 느낌을 준다. 오히려 이 땅(지구촌)이 더 천국 같다는 역전 현상이 나올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롬14:17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하셨다. 그런데 이 책의 저자는 의와 평강과 희락보다 천국에서 먹을 것이 많다고 한다

 


Ⅲ. 기독론의 문제점

 


(-그리스도의 거룩성에 흠집! 그리고 십계명의 제2계명과 크게 충돌!)

저자는 주님과 팔짱도 끼고 어깨에 기대고 서로 안기도 하였다고 한다.

(이와 유사한 표현이 이 책 전체에서 주류를 이루며 연애 소설 같은 느낌으로 천국계시록(?)을 쓰고 있다.)

138,145,176,182,185,186,199,210,211,218,230,238,242,244,254,260,266,277,278,282,309,322,323,324쪽 --- 등등 외 다수

 


“우리는 서로 끌어안았고, 주님은 ‘딸아, 사랑한다’라고---‘저도 주님을 사랑해요’(266쪽),”주님은 나를 불러서 옆에 앉으라고--- 나는 주님의 팔에 손을 끼고 얼굴을 주님의 어깨에 기댄 채 ---“(210쪽))

 


예수그리스도와의 사랑은 아가페적 사랑 곧 영적인 거룩한 사랑인데도 남.녀 간의 애정행각처럼 에로스적 사랑 곧 상대적 사랑으로 거룩한 아가페적 거룩한 사랑을 지상의 남녀관계의 만남수준으로 끌어내려 표현하는 시도는 아주 불경건하며 매우 위험천만한 발상인 것이다.

그것은 거룩한 성자하나님이신 예수그리스도의 거룩성에 흠집을 내려는 시도이자 그리스도에 대한 모욕이며, 비성경적인 것이다.

역사적으로 이단들이 하나님과의 아가페적 거룩한 사랑의 관계를 남.녀간 애정행각 수준으로 격하시키는 작업을 자주하여 온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또 주님의 생김새(머리카락, 키, 나이, 손, 옷차림, 입)를 구체적으로 보았다고 한다. ‘골격이 크고, 머리카락은 구불구불, 목은 비단같이 희고, 손의 피부는 올리브 색깔, 손가락은 길고 날씬, 나이는 30-40사이의 젊은이, 키는 약 180센티미터를 약간 넘는 것 같다?’(14쪽)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고 오신 몸은 고고학적으로도 증명을 못한다. 예수님의 몸이나 천사의 몸을 서양의 백인 우월주의 시각과 얼짱!과 몸짱!으로 존재하는 세계라고 한다. 그것은 동양아시아계 여인의 한계가 보이는 것으로서 그동안 서양인들의 외모 앞에 상대적 박탈감에 대한 보상심리는 아닌가? (이사야53장과, 마가복음16:12 을 통해 주님을 보라)

 


예수님의 생김새를 거론하는 것은 십계명의 제 2계명과 연결하여 상고할 때 심각하게 충돌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이 단호한 진술은 하나님을 우리가 아는 가장 고귀한 피조물인 인간으로 묘사하는 그림들과 상과 환상들을 사용하는 것 역시 배제되어야 한다.(출24:9,10; 신4:15,16; 요4:24; 롬1:20; 딤전6:16; 약1:17)

그것은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인간으로 묘사한 그림과 상을 사용하는 것을 배제한다.

 


비록 하나님(제2위이신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 자신이 과거에 인간의 몸을 입으셨고 아직도 여전히 그 몸이 부활하시어 뼈와 살을 갖는 인간의 몸을 갖고 계시지만 말이다. 왜냐하면 모든 환상체험과 그림과 형상은 필연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인간됨을 ‘닮은 모습’으로 만들어지거나 상상이 되며 따라서 제2계명에서 금하고 있는 범주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칼빈은 이렇게 썼다.

“하나님의 참된 형상은 세상 속에서 발견되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하나님이 눈에 보이는 형태로 우리 앞에 보일 때 하나님의 영광은 더럽혀지며 그 분의 진리는 거짓에 의해 타락해 버리게 된다.---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을 고안해 내는 것은 그 자체가 불경스러운 일이다. 하나님의 존엄성이 훼손되며, 하나님은 실제의 하나님이 아닌 다른 어떤 존재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하나님 또는 예수님에 대한 상상, 그림들과 형상들을 반대하는 핵심적인 이유는?

그것들이 자신이 묘사하는 신적 존재의 인격적 본질과 특성에 대한 진리의 대부분을-전부 는 아니라 하더라도-불가피하게 숨기게 되기 때문이다. 아론의 금송아지가 어떻게 하나님의 도덕적 성품, 의로우심, 선하심, 오래 참으심 등에 대해 생각할 수 있겠는가?

 


성경 말씀의 계시이외에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히 계시를 받았다면서 성경이외의 또 다른 특별계시를 운운 하거나 철학적 추론에 의거하고 있는 모든 사변적인 신학은 이 점에서 잘못 되어 있다.(이러한 문제는 주의 말씀을 특히 주목하라 ☞ 마24:4,5,11-14,23-27; 요8:47)

 


바울은 이런 유의 신학이 결국 어떻게 되는가를 말한다.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고전1:21).

요점은 분명하다. 하나님이나 예수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눈에 보이는 환상적 체험이나 상징을 보여 주신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롬10:8-17(---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시48:12; 빌2:12; 약2:22; 고전4:20; 요일1:1; 눅16:19-31)을 주목하라.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환상과 상징들이 아니라, 단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인간이 만든 하나님의 모든 형상은 주물을 부어서 만든 것이건 정신적인 것이건 환상적인 것이건 실제로 죄 많고 불경건한 세상의 도구들로부터 빌려 온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과 조화를 이룰 수 없다,

어떤 형상을 취한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하나님으로부터가 아니라 인간적 출처나 물리적 현상에서 취하는 것이며, 바로 이것이 형상이나 환상과 상상을 취하는 일이 잘못된 까닭임을 밝혀두는 것이다.

 

 

끝으로 저자와 번역자 그리고 독자들에게 고한다. 그동안 신.구약 성경(66권)이 천국에 대한 소망과 신앙생활의 독려함에 얼마나 부족 하였기로 주 예수 그리스도께오서 말세의 여선지자를 통하여 새로운 천국소망과 구원의 길라잡이를 주셨다는 것인가? (신명기13장을 묵상하라)

 


신.구약 성경(66권)말씀을 통해서‘천국이 확실히 있음’을 믿기가 불충분하던가? 신.구약 성경(66권)을 통해서 신앙생활(흔히 기성교회가 좋은 신앙이라고 말하는 기준 곧 십일조 잘 내고, 교회 봉사, 헌신, 기도 등의 목표)에 독려받기가 너무나 부족하였는가?

 


성경(66권) 자체로는 충실한 신앙생활을 하라는 메시지가 부족하므로 새로운 유익을 찾아 주는 말세 계시의 책을 쓰게 되었다는 의도로 해석이 가능한가?

 


이 책 서두의 ‘번역에 부쳐’에서 번역자가 교리적, 신학적인 논쟁의 대상으로 여기지 말자라고 선언한 것은 뭔가의 의도를 감추고 있음을 느끼게 한다.

 

 

이렇게 비성경적인 책을 출판하여 세상에 내놓았다는 것 자체가 마치 종교적 흥행을 염두에 둔 상업적 발상이라는 오해를 받을 소지가 있을 수 있으므로 마땅히 자제 했어야 할 일이었다.

 


성경적신학과 교리 등을 도외시하고 신비체험만을 강조하면 신비주의로 빗나갈 뿐 아니라 결국 만신이 우글거리는 원시종교로 회귀하자는 것밖에 안되며,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명령’ 즉 너희는 가서 ‘빛과 소금’이 되어 ‘하나님의 나라 사상’에로의 문화변혁을 추구하라는 ‘제자의 도’는 어디에 가서 찾겠느냐는 것이다.(마태복음5장과 28장을 주목하라)

 


혹여 다음과 같은 해괴한 생각은 안 했을 것이라 보지만 단지 신앙생활(흔히 기성교회가 좋은 신앙이라고 말하는 기준 곧 십일조 잘 내고, 교회 봉사, 헌신, 기도 등의 목표)을 독려하기위해서 영적인 천국을 이 땅에 있는 형이하학적 수준으로 끌어내려 표현하려고 했다면 신.구약 성경 말씀과 바른 신학의 객관적인 측면에서 하나님과 영혼들을 두 번 속이는 무책임한 발상인 것이다. 바른 신앙 올바른 신학을 위해서는 주관적, 객관적, 역사적 방법이 동시에 조화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주시는 계시라고 빙자하여 어린 하나님의 백성들을 유인하여 비성경적으로 빗나간 계시 안에 포로가 되게 하려는 의도라면 얼마나 무섭고도 섬뜩한 일일까?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까닭이라 저희가 가만히 들어 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갈2:4)

그러므로 신.구약 성경말씀과 비교하여 비판을 하는 진위작업은 주 예수님께오서 다시 오시는 그 날까지 계속되어야 할 일이다.

혹자는 말하기를 색안경을 끼고 비판한 것이라고 할 수도 있겠으나 색안경은 불편하다.

이제 진실로 부탁하는 것은 다음의 내용을 깊이 묵상(meditation)하길 권하는 것이다.

 


희생의 어린양이 되신 주 예수그리스도의 죽으심의 대가로 얻은 구속역사를 죄인인 자신과 분명한 관계가 있음을 회개하고 믿으면 성령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받게 될 것(행19:2,고후1:20-22)이며 그 때 신.구약 성경 66권을 읽거나 듣고 믿으면 감동과 영적인 깨우침이 분명하고 비로소 정상적인 성도들과 같아질 것이다.(주목해야할 성경 ☞ 요8:47,요16:4,7,13,14,요18:37,고전2:9-16) 그것은 성령하나님이라는 같은 영을 비로소 받았기 때문인 것이다.

 


이제는 기회를 놓치지 말고 올바른 감동과 영적인 깨우침을 위해서라도 이미 기록된 신.구약 성경 66권의 성경계시가 말씀하는 성령하나님을 받아 구원에 이르기를 기원한다.

 


그리고 세상과 교회들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번역자와 저자가 이러한 책과 관련하여 반성과 사과 그리고 하나님 앞에 회개할 용기를 갖는다면 신.구약 성경 안에서의 바른 복음을 전파하는데 있어서 이 보다 더 아름다운 일이 있을까하여 기대하여 본다.

 


1992년 10월 28일 시한부 종말론의 예수 재림(휴거계시 사건)에 대한 빗나간 예언 직전에 한국교회에 선전되어 절찬리에 판매되던 ‘내가 본 천국-펄시콜레 씀’이라는 책의 영향력이 한국 교회들의 종말론적 영성을 혼란스럽게 만들어 놓지 않았던가?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과 성경 그리고 한국 교회를 향하여 허구와 거짓이라며 모욕을 주 던 그 시절을 잠시라도 기억을 하는가?

 


그 당시에 예수그리스도의 재림(휴거사건)에 대한 빗나간 예언과 잘못된 종말관에 대하여 그래도 영향력이 있다는 교회와 교단들 그리고 개신교 4인방 리더를 자처하는 사람들조차 비판다운 비판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벙어리가 되었던 악몽이 되살아난다.

 


진실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제자라고 한다면 바른 복음을 위한 시대의 나팔수로 광야의 들 소리를 내질러야 할 시대의 사명자가 아니던가? 그래도 늦지는 않았다. 무엇이 교회의 위기를 불러들인다고 생각하는지 성경적 기독교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그 심각한 오류들을 이끌어내어 뜨거운 가슴과 냉철한 이성을 갖고 혁신하여야 할 것이다.

 


“Protestant always protest"

교회 자신의 정체성을 새롭게 갱신(Renewal)하기 위하여 Protest(항변, 이의주장)가 절실히 필요한 때이다.

 


* 간혹 놓친 부분도 있겠으나 성령론 등 그 외의 문제점들이 다수 발견되었었다. 그러나 지면 관계상 가장 크게 문제가 되는‘계시관’,‘천국관’,‘기독론’만 정리한 것임.

 


출처 : http://cafe342.daum.net/_c21_/home?grpid=19Y4A

      http://cafe.daum.net/cia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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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본질을 왜곡하는 기복주의 비판

 

기복주의는 신앙의 본질을 영혼의 성장이나 구원에 두지 않고,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거나 물질적인 축복을
받는 것을 위주로 하는 신앙 습성입니다.
특히 한국인은 뿌리 깊은 기복주의적인 습성으로 인해 모든 종교에서 기복주의적인 습성을 보임으로써
종교의 본질이 왜곡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있는 진리를 탐구하거나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성을 유지하는 것보다 당장의 현안을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을 찾고 매달리는데 연연합니다.
세상적인 교회에서는 교인들의 이러한 습성에 편승하여 교리적인 설교보다는 축복적인 설교를 하고, 교회에
많이 바쳐야 더 큰 복을 받는다는 비성경적인 관습을 만들게 됩니다.

요한 6/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전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한 말들은 영이요, 생명이라.

고전 15/50 그러나 형제들아, 이제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을 수
없으며, 썩을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상속받을 수 없느니라.

로마서 8/13 너희가 육신을 따라 살면 죽을 것이나 성령을 통하여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라.

그러나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영의 구원을 위한 것이지 육신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포함한 모든 복음은 영에 관한 말씀이지 육신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썩을 육신은 영원한 천국을 상속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육신을 따라 살면 구원을 받을 수 없고, 성령을 통하여 몸의 행실을 죽이면 영혼이 살게 됩니다.

또한 신앙의 본질은 나를 위해 예수님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위해 내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뜻을 위해 육신을 희생하고 예수님을 위하고 섬기고 사랑하면 예수님이 내 앞날을 책임져 주십니다.
그러나 내 육신을 위해 예수님을 이용하는 이기적인 신앙은 예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위해 아무 사심 없이 헌신할 때 예수님은 내가 필요한 것을 알아서 채워 주십니다.

갈라디아서 4/16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진리를 말함으로써 너희의 원수가 되었느냐?

사람들은 진리를 알고 싶어하면서도 막상 진리를 듣기는 싫어합니다.
바울 사도도 진리를 전파하기 시작하니까 오히려 교인들과 원수가 되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참된 진리는 육신의 본성과 반대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육신이 원하는대로 살면서 천국에 가고자 하는 경향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 여기서는 한국 기복주의의 원조라 할 수 있는 S 교회의 교리에 대해 살펴 보겠습니다.

S 교회 교리의 가장 큰 문제는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이 육신적인 축복을 받기 위함이라고 가르친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목적이 육신이 건강해지고, 돈을 많이 벌고,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처럼 오해하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참된 목적은 예수님의 죽으심에 믿음으로 연합해 죄의 몸을 멸하고, 예수님과 함께
일으켜진 거듭난 새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S 교회는 성령체험과 기복주의로 크게 성장했는데 이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을 교회에서 충족시켜 주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교회에서 죄 짓지 말고 경건하게 살라는 말씀보다는 영적 체험을 주거나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산다는 설교에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인간의 본성은 악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보통 하나님의 진리 말씀을 듣는 것을 싫어합니다.
구약시대에도 많은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이스라엘의 잘못을 지적했지만 대부분 듣기는 커녕
귀를 막고 싫어하거나 잔인하게 선지자들을 죽였습니다.
이 시대에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진리보다는 거짓을 좋아하고, 금욕보다는 쾌락을 추구하며, 영적인 것보다는 물질적인 것을
좋아하고, 예수님의 재림보다는 이 세상을 사모하게 됩니다.
세상적 교회는 기업과 같은 마케팅 전략으로 운영되며, 성경적 진리에 대해 잘 알려주지도 않고, 자신들이
만든 교리를 주입시켜 우민화 함으로써 말 잘 듣는 목사 추종 세력으로 양성시킵니다.

디모데후서 4/4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이 건전한 교리를 견디지 못하고, 그들 자신의 정욕에 따라 가려운 귀를
즐겁게 해 줄 선생들을 많이 두리라. 또한 그들이 그들의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꾸며낸 이야기로 돌리리라.


빌립보서 3/18~19 내가 자주 너희에게 말하였고 지금도 눈물로 말하지만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들로 행하고 있느니라. 그들의 종말은 파멸이며 그들의 하나님은 자기들의 배요, 그들의 영광은 자기들의
수치 속에 들어 있고 그들은 땅의 것들을 생각하느니라.

성경은 마지막 때 이러한 현상에 대해 명확히 명시하는데, 사람들이 기독교의 근본된 교리가 믿어지지 않고
하지 말라는 것이 많으므로 싫어하고, 자신의 정욕을 충족시켜 주는 축복적이고 향락적인 설교를 해 주는
선생(목사)들을 많이 둘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진리에서 돌이켜 성경에 근거 없이 목사의 사업을 위해 꾸며낸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이익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는 것은 십자가의 원수가 되는 것이고, 파멸의 길입니다.

골로새서 3/5 그러므로 땅 위에 있는 너희의 지체를 죽이라. 곧 음행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색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성경에 있는 진리대로 믿지 않고, 내 욕심에 따라 내가 믿고 싶은대로 믿는 것이 바로 다름 아닌 우상숭배란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을 하고 광야에서 모세가 십계명을 받으러 간 사이 참지 못하고 금송아지를 만들었는데
이는 사탄의 형상이 아니라 출애굽 시킨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만든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금 송아지를 보고 십계명 돌판을 내 던지며 대노했고, 금 송아지를 만든 사람들은 참혹하게
죽어갔습니다.


마태 7/21~23 나에게 ‘주여, 주여.’ 하고 부르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라야 되느니라. 그 날에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예언하지 아니하였으며, 주의 이름으로 마귀들을 쫓아내지 아니하였으며, 또 주의 이름으로 많은 경이로운
일들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라고 말하리니, 그때 내가 그들에게 분명히 말하되 ‘나는 너희를 전혀 알지
못하니, 너희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고 하리라.

 

S 교회는 삼중축복을 중심교리로 내 세우고 있습니다.
S 교회의 홈페이지에 게시된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영적 축복

죄 없으신 주님께서 십자가 형벌을 받으신 것은 바로 우리 모두의 죄와 허물을 대속하기 위함이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라고 외치셨을 때, 우리는 우리의 모든 과거, 현재, 미래의 죄를 청산받고 마치 단 한 번도 죄를 짓지 않은 사람처럼 부끄러움 없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법적 자격을 얻게 되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원수 되었던 관계가 청산되고 올바른 관계로 회복된 것이다.
이로써 인간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다시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 영의 창문이 활짝 열려 성령이 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해 예비해 놓으신 그 모든 지식이 창문을 통해 비치는 밝은 태양처럼 우리 마음속에 들어오게 된다.
그리하여 우리는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깊은 지식을 깨닫게 되고(고전 2:9,10), 그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분별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롬 12:2).

 

2. 환경적 축복

아담은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동산 에덴에서 쫓겨났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렇게 쫓겨난 인류를 구원하시려고 십자가에 달리시고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으셨다(마 27:46).
성경은 예수님의 환경적인 난과 저주의 대속에 대하여 분명하게 선언하고 있다(고후 8:9; 갈 3:13).
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 대신 저주를 짊어지시고 피 흘리심으로 저주의 세력을 멸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으면 미움, 불안과 초조, 공포와 절망, 좌절감과 죽음, 죄책, 정죄 등 모든 가시들이 제거된다.
그리고 마음속에 평화의 강물이 흐르고 삶 속에 축복의 강물이 흐르게 된다.

 

3. 육체적 축복

아담의 타락으로 다가온 육체적 질병과 죽음은 예수님의 대속으로 완전하게 회복되었다.
이제 우리는 육체의 남은 생애를 사는 동안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에 입각해서, 우리를 도적질하고 파괴하는 질병에 대한 치료와 건강의 회복을 단호하게 주장할 수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죽은 우리의 육체를 부활시킴으로 우리는 연약함과 죽음을 완전히 극복하고 영생의 축복을 누리게 된다.

예수님께서 죽으셨다가 부활하셔서 살려 주는 영이 되었으므로 예수님을 구주로 모신 사람, 즉 그리스도의 영이 있는 사람은 그 육체가 부활할 생명의 씨앗을 얻게 된다(고전 15:42-45).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죽어서 썩어 없어지지 않는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실 때 주 안에서 죽은 자가 먼저 일어나고 살아 남은 자도 변화되어 공중 으로 끌려 올라가 주와 함께 영원히 살게 되는 것이다(살전 4: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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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복주의 비판(1)

 

 (기획) 20세기 한국의 부끄러운 자화상 ­기복주의­

 

 

 


신광철(한신대학교 종교문화학과 교수)

 

 기복신앙과 기복주의

 한국종교가 기복주의의 양상을 보인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이를 이해하기 위해 우선 세 가지 종교적 동기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있다. 사람들은 어떤 동기를 가지고 종교적 행동을 취하게 된다. 다시 말해서 사람들은 분명한 목적하에 믿음을 수행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종교적 행동을 취하게 되는 동기는 크게 기복적 동기, 구도적 동기, 개벽적 동기로 짜여져 왔다.1)

 

 첫째로, 기복적 동기란 말 그대로 현세적 복을 기원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이 동기에서는 시간적 초점이 현세에 맞추어지고, 공간적 초점은 ‘이 땅’에 맞추어지게 된다. 다시 말해서 ‘지금 이 곳’에 종교적 관심이 집중되는 것이다. 이 때문에 기복적 동기하에서는 현실적인 사회 질서에 대한 변혁 가능성보다는 그것의 안정의 필요성이 강조된다. 둘째로, 구도적 동기란 진리를 추구한다는 것을 뜻한다. 이 동기에서는 인간 실존의 제약성에 대한 끊임없는 회의와 함께 그것을 초월하는 또 다른 세계에 대한 동경이 중요한 종교적 동기로 부각된다. 현실을 뛰어 넘는 또 다른 세계, 즉 내세의 중요성이 부각되기에 이르는 것이다. 셋째로, 개벽적 동기란 현실세계의 조건을 보다 능동적으로 바꾸고자 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동기에서는 현실조건을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아예 그 조건 자체를 변혁하려는 적극적인 의지가 중요한 종교적 동기를 이루게 된다. 이 동기에서는 역사의 황금시대가 상정되고, 그때를 준비하기 위한 삶에 초점이 맞추어지며, 나아가 그 때를 더욱 앞당기기 위한 투쟁이 중요하게 부각된다.

 

  위에서 소개한 세 가지 종교적 동기들은 각기 분명한 지향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어떠한 종교 전통이든지 위에서 제시한 세 가지 동기 모두를 지니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하나의 종교 전통에는 위의 세 가지 동기가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다만 시대에 따라, 지역에 따라 특정의 동기가 더 강조되어 나타나는 것이다. 예컨대 한 시대에서 다른 시대로 전이하는 과도기에는 종교가 시대변혁의 이념으로 제시되면서 개벽적 동기가 상대적으로 부각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종교경험에 기복·구도·개벽의 동기가 깔려 있다고 한다면, 유독 기복주의가 문제시되는 현상은 보다 세심하게 해명되어야 할 것이다. 실제로 종교현상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기복 행위가 함께 존재한다. ‘복을 비는 행위’, 즉 기복 행위는 종교현상의 기본 양상이다. 그렇다면 기복주의가 문제시되는 것은 어떠한 맥락과 의미를 지니는가? 이를 위해서 아래의 자료들을 검토해 보기로 하자.

 


<자료 1>

  (A) 10월에 제천을 하는데 국중대회(國中大會)로 동맹(東盟)이라고 한다. (중략) 나라 동쪽에 큰 동굴이 있는데 수혈(隧穴)이라 한다. 10월 국중대회 때 이 수신을 맞이하여 나라 동쪽‘강’ 위에 모시고 가 제사를 지내는데, 나무로 만든 수신을 신의 자리에 앉힌다.2)

  (B) 항상 10월이면 제천을 하는데, 밤낮으로 술마시고 노래하고 춤춘다. 이를 무천(舞天)이라 한다. 또 호랑이를 신으로 여겨 제사한다.3)

 

<자료 2>

  극단적인 예이지만 어느 부흥사는 ‘하나님께서 되로 퍼서 드리면 말로 갚아 주시고, 말로 퍼서 드리면 가마니로 갚아 주시며, 가마니로 퍼서 드리면 트럭으로 갚아 주신다’고 말하여 양식 있는 기독교인들의 빈축을 사기도 하였다.4)

 


  위에 제시한 <자료 1>은 고대 한국의 제천의례에 관한 기사이며, <자료 2>는 어느 교회에서 있었던 부흥집회의 광경에 대한 기사이다. 위의 인용을 통해서는 분명하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우리의 상식을 동원해서 두 자료의 배경을 이루는 종교현상의 양상을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다. <자료 1>의 고대 제천의례에서 “밤낮으로 술마시고 노래하고 춤”추는 모습은 오늘날의 대동 굿과 대체로 유사하였을 것이다. 더욱이 음주가무가 며칠에 걸쳐 지속되었다면, 상당히 열정적이고 신비적인 양상을 띠었을 것임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자료 2>의 부흥집회의 경우 매우 열정적이고 신비적인 양상을 띠었을 것이다. 일부 부흥집회는 그 양상에 있어 무속의 굿판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사례도 있어왔다. 그렇다면 두 자료의 배경을 이루는 종교현상은 어느 정도 비슷한 양상을 띤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밖으로 나타나는 형식에서만 비슷한 것이 아니다. 둘은 그 동기에 있어서도 비슷한 내용을 보여준다. 둘은 모두 ‘복 빌기’, 즉 기복이라고 하는 동기를 공유한다.

  그런데 우리는 <자료 1>의 경우를 ‘기복주의’라고 규정하지는 않는다. 거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고대 제천의례는 하늘을 중심으로 여러 신을 모시는 공동체 의례의 성격을 지닌다. 그것은 어떤 개인만의 복락을 빌기 위한 것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의 복락을 빌기 위한 것이었고, 공동체 전체의 삶에 대한 감사의 제전이었다. 그래서 제천의례는 중앙집권적인 고대국가로 전이하는 길목에서 여러 소국이나 부족의 연합체의 성격을 띠던 당시 사회를 통합시켜주는 기능을 담당했던 것이다. 이에 대하여 <자료 2>의 부흥 집회의 경우는 대체로 개인의 복락을 빌기 위한 것이 많다. 기껏해야 개교회(個敎會)의 부흥을 위한 것이지, 교회 바깥의 공동체까지를 아우르는 경우는 그다지 많지 않은 것이다.

  복을 비는 행위는 종교현상에서 무시할 수 없는 비중을 지닌다.5) 그러나 복을 비는 행위가 그것 자체로 목적일 수는 없으며, 그것이 자신만의 복 빌기로 그쳐서는 안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 두 가지 사례를 통해서 기복의 방향성을 생각해 보았는데, 종교적 동기로서의 기복적 동기 자체가 부정적인 것은 아니다. 문제는 공동체성을 상실한 복 빌기이다.

 


  기복주의의 현상

  오늘날 한국 종교계가 그 기복주의 성향을 비판받고 있다면, 그 비판의 초점은 공동체성을 상실한 복 빌기, 즉 개인적 복락의 추구에 함몰되어 있다는 데에 집중되어 있다. 그렇다면 한국 종교계는 어떠한 연유에서 기복주의적 성향을 비판받고 있으며, 그러한 기복주의적 성향은 무엇에 기인하는 것인지를 살펴보기로 하자.

  한국의 종교계에 나타나고 있는 기복주의 성향에 대한 논의는 그것 자체로 방대한 과제를 이루게 된다. 여기에서는 논의의 효율성을 위하여 개신교의 경우를 예로 들고자 한다. 현재 개신교는 사회문화적 영향력이 가장 큰 전통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신교는 올곧은 사회적 공신력을 얻지 못하고 있다. 개신교가 신자의 규모나 제반 역량에서 강력한 사회적 영향력을 지니면서도 그에 걸맞는 사회적 공신력까지를 담보해내지 못하는 까닭은 대체로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로, 개신교가 스스로의 한국적 전통을 창조해내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개신교가 과연 우리의 전통문화의 한 축을 형성하고 있는가? 다시 말해서 개신교가 명실상부한 한국종교로서 거듭났는가? 아니면 개신교는 여전히 하나의 외래종교인가? 이러한 물음들이 문제의 심각성을 잘 설명해주고 있다. 둘째로, 개신교의 일부 흐름이 기복주의의 경향을 나타내고 있다는 점이다. 개신교의 기복주의의 경향은 개개 신자들에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한국 개신교의 문제 가운데 하나로 지적되고 있는 ‘개교회주의’는 기복주의의 문제가 확산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 개신교의 기복주의 경향은 여러 가지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우리는 한국 개신교의 기복주의 경향을 개신교의 의례 및 신행, 헌금, 커뮤니케이션 구조 등을 통해 살펴 볼 수 있다. 기복주의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개신교 의례는 정기 의례보다는 특별 의례인 경우가 많다. 부흥 집회는 그 대표적인 예이다. 부흥 집회의 양상은 정기 의례(예배)의 경우와는 사뭇 다르다. 부흥 집회는 과도하게 감정적으로 몰입하는 면에서 마치 한 판의 흐드러진 굿과도 같은 양상을 나타내는 경우가 많다. 문제는 이러한 부흥 집회의 양상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이러한 부흥 집회가 행해지는 목적이 무엇인가에 있다. 부흥 집회는 교회의 건축 등 교회 내적인 필요에 의해 열리는 경우가 많다. 즉 철저하게 개교회주의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종교(교회)가 갖는 사회적 봉사의 기능은 뒷전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다. 개교회주의가 갖는 결정적인 한계는 전체 한국 교회가 아닌 ‘내’ 교회의 발전만이 중요

하게 간주된다는 데 있다. 오직 자기 교회의 복락만이 중요할 뿐, 한국 교회나 한국 사회의 복락은 부차적인 것이다.

 

 개교회주의는 한국 교회의 대형화 현상의 배경을 이루기도 한다. 우리는 주위의 경관을 압도하는 거대한 교회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실제로 세계 50대 교회 가운데 23개가 한국에 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단일 교회 가운데

세계에서 제일 큰 교회(여의도 순복음교회),

장로교회 가운데 세계에서 제일 큰 교회(충현교회),

감리교회 가운데 세계에서 제일 큰 교회(광림교회) 역시 한국에 있다.

한국 교회가 이처럼 대형화된 것은 무엇보다도 복락을 전체 교회, 나아가서는 전체 사회와 함께 나누기보다는 ‘내’ 교회의 복락만을 추구해 온 결과인 것이다. 그 결과 한국 개신교는 100년이 훨씬 넘는 역사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체 한국 교회를 아우를 수 있는 ‘문화’를 형성하지 못하고 있다.

  개신교의 기복주의 경향은 ‘내’ 교회의 식구들의 복락을 비는 데서 절정에 달한다. 가장 대표적인 현상이 ‘대학입시를 위한 특별기도회’일 것이다. 해마다 입시철이 되면 거의 모든 교회가 특별기도회를 갖는다. 심지어 ‘100일 기도회’를 열기도 한다. 새벽기도회가 성황을 이루는 것도 바로 입시철인 11월이다. 신도들은 오직 ‘내’ 자식의 합격을 위해서 기도에 매달리는 것이다.

  개신교의 기복주의 경향은 헌금 부분에서 매우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헌금이란 말 그대로 어떠한 상황에서도 자신의 삶과 꿈을 지켜 주는 신의 은총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바치는 것으로서, 그것을 계기로 더욱더 신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겠다는 헌신의 표현이다. 이러한 의미를 지녀야 할 헌금이 앞의 <자료 2>의 경우에서처럼 더 많은 물질적 보상을 받기 위한 투자가 된다면, 그것은 전형적인 기복주의의 양상을 나타내는 것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 개신교의 현실은 어떠한가?

 

  한국 개신교의 헌금은 우선 종류에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대부분의 교회 헌금 봉투에는 줄잡아 10종 이상의 헌금 내역이 세분되어 있다. 이들 다양한 종류의 헌금은 실상 신도들의 삶의 전방위에 걸친 복락과 연관된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것은 신과 인간 사이의 ‘복 주고받기’의 효과를 겨냥한 것이기도 하다. 한국 교회는 헌금이 지니는 복 주고받기의 효과를 신앙적으로 정리해 주기보다, 오히려 그것을 부추기고 있다.

강단에서는 목회자들이 ‘복 받기 위한’ 헌금의 필요성을 누누이 강조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일부 교회에서는 이른바 힘있는 자들이 대접을 받는 풍조마저 자리잡고 있다.6) 이러한 현상은 결국 신도들의 신앙을 마비시키는 효과를 발하게 된다. 우리는 영화 <투캅스>에서 매우 희화적인 장면을 목격할 수 있다. 뇌물과 부정으로 점철된 일상을 살아가는 부패한 경관(안성기 분)은 헌금을 바치면서 스스로 정화(淨化)됨을 느끼고 또다시 자신의 복락을 간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 부패한 경관의 복락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고통의 씨앗이 된다. 그렇다면 이러한 복 빌기는 정도(正道)를 벗어난 것일 수밖에 없다.

  개신교의 기복주의 경향은 교회의 커뮤니케이션 구조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한국 교회는 전형적인 목회자 중심주의의 양상을 나타내고 있다. 한국 교회는 목사(특히 담임 목사)를 중심으로 운영되는 경향이 매우 강하며, 신도들의 목사에 대한 의존도가 상당히 높은 편이다. 이러한 현상은 설교를 중시하는 프로테스탄트의 전통과도 연관되는 것이겠지만, 이 현상의 이면에는 종교직능자에 대한 한국인의 전통적인 사유 체계가 깔려 있다. 한국 교회에서 목사가 차지하는 위상은 무속에서 무격(巫覡)이 차지하는 위상에 비견될 수 있을 것이다. 무속은 신과 인간, 그리고 둘 사이를 중재하는 무격의 관계 구조로 이루어지는 전통이다. 무속에서 인간은 신과 직접 만나지 못한다. 신과 인간의 만남은 언제나 무격이라는 중재자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7) 그런데 한국 교회의 경우 이 중재자의 개념이 종교직능자인 목회자 쪽에 집중됨으로써 그리스도교 본래의 중재자인 예수 그리스도와의 직접적인 만남에 오히려 장애가 될 수 있는 소지가 발생했다는 데 문제가 있다. 실제로 한국 개신교 신도들에게는 목사들의 말이 지상 명령이 되는 경우가 많으며, 그러한 현상은 때때로 신도들로 하여금 신과의 직접적인 만남을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예컨대, 한국 개신교 신도들은 성경을 통해서 신의 뜻을 직접 발견하기보다는 강단에서 이루어지는 목사의 설교를 통해서 신의 뜻을 감지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현상은 한국 개신교가 나름의 ‘평신도 문화’를 형성하기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 되고 있으며, 평신도들의 주체적 신앙 형성을 어렵게 함으로써 목사에게 의존해서 복을 비는 기복 현상이 한층 심화되는 요인이 되고 있다.

  이밖에도 한국 개신교의 기복주의 현상은 치병(治病)에 대한 관심과 기도원 현상, 축귀 현상 등 귀신에 대한 과도한 관심 등을 통해서도 나타나고 있지만, 지면 관계상 구체적인 논의를 미루기로 한다. 이상에서 서술한 기복주의 경향의 내용은 개신교 외의 다른 종교 전통들에도 대체로 적용되는 것이다.

 


  한국 종교 기복주의의 배경

  한국 종교의 기복주의 경향의 원인에 대해서는 많은 논의가 있어왔다. 이들 논의는 대체로 그 원인을 한국 종교를 관통하는 무속적 사유 체계에서 찾고 있다.8) 이러한 견해는 무속적 사유 체계가 갖는 현세구복적 성격을 전제할 때 일견 타당해 보인다. 무속은 한국 사회가 유교․불교․도교 등 동양고전종교로 대표되는 고전문화(古典文化)를 수용하기 전까지 한국인의 영성을 주관해온 세계관이었으며, 무속의 세계관이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행위, 즉 기복을 주된 지향으로 삼았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문제가 그렇게 간단한 것은 아니다. 무속을 기복주의의 주요 원인으로 상정하는 것은 무속에 대한 부정적인 관점을 토대로 한 것이다. 무속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입장은 그것이 비합리적·비과학적·비윤리적·이기적이라는 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리고 무속에 대한 비판적인 입장은 무속에 내재한 기복성을 드러내는 데에 집중되어왔다. 그러나 이른바 기복적인 것은 인간 삶의 정직한 반영이며, 인간은 누구나 현실적인 문제에 부닥칠 수밖에 없고 또 그것을 풀어야 하는 존재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무속은 제장공동체(祭場共同體)로서의 성격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그렇다면 문제는 무속적 사유체계 자체가 아니라 그것의 운용이다. 즉 무속적 사유 체계 자체가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그것이 현실 속에서 작동하는 방식이 문제인 것이다. 앞에서도 이미 지적했듯이, 공동체성이 결여된 채 개인의 복락만을 추구하는 행위가 문제인 것이다. 우리 종교계에 만연한 공동체성이 결여된 개인의 복 빌기는 무엇에 기인하는 것일까? 그러한 현상의 이면에는 한국 특유의 가족주의가 놓여 있다.9) 가족에의 영원한 회귀, 그것은 우리 의식의 저변을 관류하는 종교적 동기를 이루어왔다. 가족주의는 기본적으로 ‘내’ 집안, ‘내’ 가문의 중요성을 전제하는 것으로서, ‘남의’ 집안, ‘남의’ 가문에 대해서는 ‘울타리’를 치는 현상이다. 우리 사회가 세계화 또는 지구화 담론으로 팽배해 있으면서도, 지연․혈연․학연의 굴레를 쉽사리 벗어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은 다름아닌 가족주의의 폐해인 것이다.

  오늘날 인류사회가 고도의 정보화시대·신문화시대를 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와 종교문화가 기복주의의 양상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으며, 어떠한 면에서는 기복주의의 경향이 더욱 심화되고 있는 현실은 무엇 때문인가? 한국인의 종교적 생활이 다른 나라에 비해 느슨한 것인가? 한국 그리스도교인들의 교회출석 빈도는 세계적으로도 대단히 높은 편이다. 그렇다면 한국 그리스도교(다른 종교들도 마찬가지이다)의 종교생활은 교회의 울타리 안에서만 의미를 지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 종교는 스스로의 목소리를 사회 바깥으로 확산시키지 못하고 있다. 달리 말하자면, 한국 종교는 현대사회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하고 내부적인 활동 속에서 자족감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종교적 차원에서 중요하게 생각되어야 할 사회적 변화를 두 가지 만남을 통해서 살펴볼 수 있다. 현대 사회의 각 종교 전통은 세속 문명과의 만남과 다른 종교들과의 만남이라는 양대 과제에 직면하게 되었다.10) 종교적 영역에서 이 양대 과제는 종교의 세속화와 다원화 현상을 빚어내기에 이르렀다. 종교의 세속화와 다원화는 현대 종교전통들에 대한 심각한 도전으로 작동하게 되었다. 그러한 현상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함으로써 야기되는 현상이 종교의 물상화(物像化)와 사사화(私事化)이다.

  종교가 세속 문명의 조류에 휩쓸리게 되면 본래의 성스러움을 상실한 채 현세적 이익을 좇는 데에 급급하게 된다. 그리하여 종교가 지니는 본래의 구원적 기능이 물상화되고 만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이른바 영적 복지(spiritual welfare)의 구현은 무망할 수밖에 없다. 한국 종교의 기복주의가 극에 달했던 것은 산업화 기조가 사회 전반을 지배했던 때였음을 상기할 때, 종교가 세속화의 물결에 능동적으로 대처해야만 하는 필요성은 더욱 강조될 수밖에 없다. 다원화 현상 또한 종교 영역에 커다란 변화를 불러 일으켰다. 다원화 현상으로부터 빚어진 현상 가운데 하나가 종교의 사사화, 즉 종교가 사사로운 선택이 되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입맛에 맞는 종교들을 ‘골라서’ 믿기에 이른 것이다. 이른바 ‘카페테리아식 종교’(a kind of cafeteria religion) 현상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종교전통은 보다 큰 ‘구원’을 논하기보다는 개인의 작고 사사로운 ‘복락’에 봉사하게 될 가능성이 커진다. 결국 종교의 물상화와 사사화는 종교의 기복주의 경향을 강화하는 효과를 나타내게 되는 것이다. 현재 한국의 종교계는 이러한 물상화와 사사화 현상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근대 한국 사회의 종교 변동에 직면해서, 당대의 종교적 지성들이 나름의 담론을 모색했던 전통을 간직하고 있다. 이제 한국의 지성계가 다시금 오늘의 현실에 걸맞는 종교담론을 모색해야 하지 않겠는가?


※ 출전:역사비평, 1999년 여름호, 350-36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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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증하고 있는 반기독교 감정 대처법

 

최근 몇 년 전부터 유럽과 미국에서 하고 있는 것처럼 한국에서도 버스에 반기독교 광고를 부착하려는 시도가 계속 이루어지고 있는 것 같다. 기독교를 비판한다면서 유태인 과학자 아인슈타인이 말한 "나는 자신의 창조물을 심판한다는 신을 상상할 수가 없다" 등과 같은 문구를 버스 광고처럼 부착하는 것은 사실상 사회의 기독교에 대한 공격 성향을 드러낸 것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께 대한 반역 성향을 드러낸 것이다. "아마도 신은 없는 것 같다. 인생을 즐겨라!" 등과 같은 무신론자들의 주장은 대부분 기독교 자체보다는 하나님 자신을 겨냥한 반발이며 도전이다. 인간은 결코 자신의 죄성을 먼저 성찰하지 않는다. 인간이 하나님께 대한 자신의 반역적인 성향과 인간 상호 간에 저지르는 사악한 죄악들과 홀로코스트와 같은 만행들에 대해서 먼저 생각한다면 하나님께 대한 모독적이고 교만한 말들을 결코 할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께 대한 이러한 반역적인 태도는 머지 않아 세계에 무서운 만행들을 저지를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위의 문구들을 다른 식으로 생각해 보면, "나는 자신의 창조주를 비난하고 반역하는 피조물을 상상할 수가 없다" 혹은 "의로우신 창조주 하나님은 반드시 계시기 때문에 결코 인생을 방탕하게 살 수 없다" 로 바꿀 수 있을 것이다. 창조주를 부정하면서 기독교를 공격하는 성향은 단지 기독교에 실망한 사람들이나 무신론자들만이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한국의 경우 대부분 불교와 무슬림(이슬람은 세계에서 가장 노골적으로 기독교에 적대적인 감정을 드러내는 가장 큰 종교 집단이지만 한국에서도 무슬림 인구가 증가하고 있으며, 기독교에 대한 적대 감정도 증가하고 있다), 심지어는 사이비 이단들과 같은 다른 종교에서 매우 적극적으로 반기독교적인 감정을 드러내고 있다.

 

앞으로 반기독교적이며 창조주 하나님을 대항하는 감정 표현은 전세계적으로 더 많이 표출될 것이다. 살후 2:1-4절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전에 반드시 일어날 일로서 배도하는 일(하나님께 반역하는 일)과 불법의 사람, 즉 멸망의 자식이 나타나야 한다. 계 13장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전세계적의 많은 나라에서 적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기독교를 잔멸하려는 시도가 일어날 것이 분명하다. 이러한 시기가 오면 기독교의 전도와 선교는 한계 상황에 이르게 될 것이지만, 사실상 이것은 마 24:14에서 분명하게 선포하고 있는 것처럼 선교가 정점을 지나 완성 단계에 이르고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마 24:14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세상의 기독교에 대한 적대감정은 이미 2000년 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적대감정으로부터 출발하고 있다. 요 15:18-20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은즉 너희도 박해할 것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것이라” 이 말씀 외에도 요한복음에서는 세상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핍박할 것에 대해 미리 경고하는 말씀을 무수히 찾아볼 수 있다. 마 24:9 “그 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 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 때문에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 그 때에 많은 사람이 실족하게 되어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겠으며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지난 두어 세기 동안 오늘날 기독교 선교는 절정에 도달했다. 역사상 유래가 없을 만큼 선교가 활발하게 진행되었고, 복음이 들어가지 않은 나라가 거의 없을 만큼 편만하게 복음이 전파되었다. 반면 기독교는 역사상 유래가 없는 핍박과 순교의 시기를 지나고 있다. 지난 한 세기 동안에 전체 교회 시대에 발생했던 순교자의 숫자보다 더 많은 순교자가 발생했다. 제 1, 2차 세계 대전과 공산주의의 억압, 이슬람 지역의 반발 등으로 인해 기독교는 역사상 가장 혹독한 시절을 보냈으며, 현재까지도 기독교에 대한 핍박은 진행 중이다. 서구 민주주의가 발달한 국가들에서 그리스도인들은 매우 평화로운 시절을 보내고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전 발생할 역사상 전무후무한 핍박의 때를 생각해 볼 때 이러한 평화의 시기도 그렇게 오래 지속되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태도를 가지고, 급속히 증가하고 있는 반기독교 감정을 어떻게 직면해야 하는가?

 

1.  교회가 도덕성을 회복해야 한다.

교회가 핍박에 부딪히고 있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전도와 선교에 대한 반발 때문이다. 하지만 교회가 세상에 대한 책임과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지 않고 개교회 성장에만 관심을 기울이고, 교회가 이기적인 집단으로 변질되고 있는 것도 비판을 받는 매우 중요한 이유이다. 더군다나 교회의 재정 사용에 대한 불투명성과 부정직, 그리고 목회자들의 신뢰성의 하락도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지탄을 받고 있는 중요한 이유이다. 그리스도인들의 윤리는 세상의 윤리 기준을 뛰어 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사람들 앞에서 정직하고 신실한 삶을 사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사람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깨끗하고 진실해야 한다.

 

2.  인생의 본질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사람의 생명과 삶이란 매우 짧은 것이다. 모든 죄악의 뿌리와 근본은 욕심에 있다. 교회의 타락도 결국에는 욕심과 허영심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자기의 세속적인 삶을 위해 필요 이상으로 많은 재산을 축적하고 그것을 자녀들에게 유산으로 물려 주려는 물질에 대한 가치관은 하나님께 대한 불신앙에서 출발하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오늘날 교회 안에는 자신이 모든 것을 완벽하게 준비해 놓지 않으면 자신들의 삶이나 자기 자녀들의 삶이 불행하게 될 것처럼 생각하고, 하나님의 돌보심을 신뢰하지 못하는 인본주의적인 사고 방식을 가지고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대부분이다. 그러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약속해 주신 천국의 복락과 영원한 생명보다는 이 세상에서의 삶에 더 많은 비중과 가치를 두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위하여 자신이 가진 것을 아낌 없이 투자하지 못한다. 그리스도인들이나 교회들이 자기들만을 잘 살아보겠다는 이기적인 욕심과 허영심을 포기하고 세상을 위해 자신이 가진 것을 아낌 없이 내어 주며 헌신하고 봉사할 때 세상은 교회를 비난할 근거를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의 교회에서는 그러한 비방거리들이 가만히 있어도 저절로 노출이 될 정도로 흔하게 나타나고 있다.

 

3.  본질적인 사역에 모든 에너지를 쏟아 부어야 한다.

구제와 전도와 선교의 기회가 항상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전도와 선교는 세상의 비방을 피할 수 없는 사역이지만, 교회가 결코 뒤로 미룰 수 없는 가장 중요한 사역이다. 그리스도인들과 교회가 세상에서 아무리 많은 것을 축적하고 아무리 많은 업적을 이루어도 그것들은 모두 세상의 멸망과 함께 사라지고 말 것들이다. 아무리 크고 웅장한 교회 건물들을 쌓아 올리고 아무리 좋은 물건으로 그 건물 안을 가득 채우고 장식해 놓아도 그것들은 그렇게 가치 있는 것들이 아니다. 교회의 성도들이 목회자들에게 속아 교회 건물이 마치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성전을 건축하는 일인 것처럼 모든 재산을 다 바쳐도, 그것은 한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전도하는 일에 비교해 보았을 때 아무 것도 아니다. 천하보다 귀중한 것은 한 사람의 영혼이지 세상 안에 있는 금은보화나 교회 재산인 건물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주님의 재림은 모든 민족들에게 복음이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될 때 있을 것이지, 세상에 교회 건물들이 세워졌을 때 있을 것이 아니다. 역사상 존재했던 무수한 교회 건물들은 모두 폐허로 변하거나 파괴되었다. 현재 교회들이 세우고 있는 건물들도 모두 파괴될 때가 반드시 온다. 따라서 교회는 사람들을 훈련하고 세워서 전도하고 선교하는 일을 위해 세상으로 파송해야 한다. 이것이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무덤에서 부활하신 후, 즉 하늘로 올리워 가시기 전에 하신 일이다.

 

4.  온유한 태도를 가져야 한다.

세상의 비판과 핍박을 받을 때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는 그리스도처럼 대항하지 않아야 한다. 반기독교 감정은 예수님이 사역하실 때부터 나타났던 것이다. 사실상 그리스도의 계보를 끊어 놓고 그리스도의 초림을 방해하려던 사탄 마귀의 노력은 구약 시대에도 계속되었던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사탄 마귀와 그의 추종 세력들의 핍박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있음을 알리는 것에 불과하다. 이러한 적그리스도의 행패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직전에 절정에 달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 나타나고 있는 현상들은 점점 최후의 사탄의 발악이 폭발 직전에 있음을 보여주고 있으며, 그리스도의 재림이 멀지 않았음을 나타내 주는 것이다.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은 매일 자기를 부정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묵묵히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는 자들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취해야 하는 온유한 태도란 직접 악에 대항하지 않고 모든 심판을 하나님께 맡기는 태도를 의미한다. 요한계시록을 보면 세상에서 핍박을 받고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하나님께 탄원하는 내용을 보게 된다.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은 스스로 세상을 변화시키려고 시도하는 헤롯당이나 오늘날 기독교 사회운동가들과는 달리 하나님의 주권과 심판에 모든 것을 의탁하고 맡기는 사람들이다.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은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순전한 마음으로 따라가는 사람들이다.

이제부터는 우리들의 생명을 이 세상에서 잃어버리지 않고 악착같이 살아남으려는 구차한 태도로 살지 말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것 하나 만으로 행복을 삼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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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부흥 역사

기독교 역사는 부흥의 역사다. 성령의 역사는 시대와 공간을 초월하여 이 땅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계속되었다. 오순절 성령강림부터 1995년 휘튼 리바이벌까지 끊임없이 비상한 성령의 역사,영적각성운동이 발흥하여 교회에 생명력을 더했다. 프랭크 비어즈리가 언급한 것처럼 부흥운동의 역사는 교회의 역사였다.로이드 존스의 말을 빌린다면 분명히 교회의 진행과 발전 역사는 주로 부흥의 역사였고 성령의 강력하고 예외적인 부으심의 역사였다.

#오순절부터 종교개혁시대까지

신약의 교회는 오순절 성령강림을 통해 비로소 하나의 교회로써 출발했다. 마가 다락방의 성령강림은 바로 요엘 선지자의 약속 성취였다. 구약과 신약을 잇고 다시 신약과 교회사를 잇는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사건이었다.

암흑의 시대라고 일컫는 중세시대에도 수도원을 중심으로 간헐적이지만 영적 각성의 움직임이 있었다. 그러나 부흥이 하나의 뚜렷한 신앙운동으로 교회사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것은 종교개혁 이후의 현상이었다.

루터 츠빙글리 칼뱅 낙스 등으로 대변되는 종교개혁은 신앙을 재발견한 일종의 영적각성운동이었다. 종교개혁자들은 전통이 아닌 성경과 교부들의 작품을 연구하면서 하박국이 언급하고,바울이 재확인하고,어거스틴을 비롯한 교부들이 확신했던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사실을 재발견했다. 이들이 발견한 ‘오직 믿음’(sola fide) ‘오직 성경’(sola scriptura) ‘오직 은혜’(sola gratia)는 잠자고 있던 수많은 사람들을 깊은 영적 잠에서 깨우는 역할을 했다. 종교개혁 이후 부흥이 일어난 곳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칭의론이 강도 높게 선포됐다.

 

청교도 부흥운동과 경건주의 운동

 

부흥운동은 미국 청교도와 경건주의 시대에 이르러 현대적인 의미로 처음 사용되기 시작했다. 청교도는 인간의 전적 타락을 믿었고 성경에 계시된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 인간의 구원을 이룰 수 없다고 확신했다. 철저한 회개를 통한 죄 사함은 이들이 강조한 중요한 교리 가운데 하나였다.

경건주의 운동은 성경을 읽고 연구하고 성경대로의 삶을 실천에 옮겼다. 양로원 고아원 학교 병원을 설립해 대 사회적 책임을 충실하게 감당,교회에 생명력을 더해주었다. 경건주의에서 강조하는 경건과 청교도에서 강조하는 영적인 실천은 서로 맥을 같이했다.

 

18세기 영적각성운동

 

17세기 영국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즈 등에서 간헐적으로 일어난 부흥운동은 18세기에 들어서면서 좀 더 강력한 형태의 영적각성운동으로 이어졌다. 이 시대 일어난 가장 강력한 부흥운동 가운데 하나가 18세기 웨일즈 부흥운동과 1734∼1736,1740∼1742년 사이에 일어난 미국의 1차 대각성운동일 것이다. 이 운동들은 이전의 크고 작은 부흥운동을 하나로 엮어 폭발한 성령의 강력한 역사였다.

웨일즈 부흥운동은 1735년 ‘능력의 세례’를 받은 하월 해리스와 다니엘 로랜드에 의해 일어나 여러 해 동안 계속 됐다. 거의 같은 시대 조나단 에드워즈,길버트 테넨트,조지 휘트필드,프릴링하이젠 등이 이끈 미국의 1차 대각성운동은 뉴잉글랜드를 중심으로 강하게 일어나 근대 부흥운동의 가장 중요한 모델이 되었다. 1734년 미국의 1차 대각성운동부터 웨슬리부흥운동이 정리되는 1790년까지의 기간은 넓은 안목으로 보면 ‘부흥의 시대’였다.

 

19세기 영·미부흥운동

 

웨일즈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미국에서의 부흥운동은 19세기로 이어졌다. 미국 버지니아의 조그만 두 장로교 대학인 햄프던 시드니 대학과 워싱톤 앤드 리 대학에서 1787년 영적 각성이 일어나 곧 동부 전역으로 확산됐다. 1802년에는 예일대학 학생 3분의1이 회심하는 놀라운 역사가 나타났다. 그 후 50년간 제2차 대각성운동으로 알려진 일련의 각성운동이 주기적으로 일어나 동부의 대학들과 교회들이 영적인 깊은 잠에서 깨어났다. 근대 부흥운동의 선구자 찰스 피니가 등장하여 미국인의 부흥개념을 완전히 바꾸어 준 것도 이 때였다.

한 때 중단되는 듯 했던 영적각성운동이 1857년 미국에서 또 다시 놀랍게 발흥했다. 1857년 9월23일 제레마이어 람피에르가 뉴욕 풀턴가 북화란개혁교회 3층에서 가진 정오기도회는 불과 4개월 만에 보스턴 워싱톤 시카고를 비롯하여 미국 전역으로 확산됐다. 수많은 도시에서 매일 정오기도회가 열렸다. 그 결과 1857∼1859년 미국 전체 인구 3000만명 중 200만명이 회심했다.

이 놀라운 성령의 역사는 곧 영국으로 확산됐다. 1858∼1859년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웨일즈에서 로이드 존스가 참된 부흥이라고 말한 놀라운 영적각성운동이 일어났다. 이미 여러 차례 영적각성을 경험한 웨일즈는 1859년 험프리 존스와 데이비드 모건을 통해 또다시 놀라운 부흥을 경험했다.

1873∼1875년,1881∼1884년 두 번의 강력한 영적 파장을 동반한 무디 부흥운동은 수많은 젊은이들을 깊은 잠에서 깨웠다. 그의 메시지를 통해 형식적인 신앙인들,술주정꾼들,회의론자들,탕자들,대학생들,상인들,부자와 가난한 자 등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주께로 돌아왔다.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웨슬리와 휘트필드 이래 런던이 그렇게도 깊은 감화를 받은 때가 없었다”고 증언했다.

무디 성경학교와 학생자원운동을 통해 수많은 젊은이들이 세계 선교를 꿈꾸며 아시아 아프리카 남아메리카 등 전 세계로 흩어졌다. 이 시대 은둔의 나라 조선에 도착한 언더우드 아펜셀러 스크랜턴 모페트 게일을 비롯한 대부분의 초기 선교사들은 19세기 영적각성운동의 산물이었다. 영국이 낳은 위대한 설교가 스펄전이 휘트필드 풍의 회개와 웨슬리의 열정으로 수많은 영혼들을 잠에서 깨우며 부흥운동을 지폈던 것도 이 시대였다.

 

20세기 근대 부흥운동

 

20세기에 접어들면서 세계 여러 곳에서 놀라운 영적각성이 일어났다. 이반 로버츠로 대변되는 1903∼1904년의 웨일즈부흥운동,웨일즈 부흥운동의 영향으로 발흥한 1905년 호주부흥운동,인도 카시아에서 일어난 1905∼1906년의 인도부흥운동,하디와 길선주에 의해 주도된 1903∼1907년 원산부흥운동과 평양대부흥운동,1906년 아주사 오순절부흥운동,1908년 만주·중국부흥운동은 그 전형적인 사례다. 사도행전 이후 이 시기만큼 전 세계가 부흥을 경험한 때도 없었던 것 같다. 우리는 감히 이 시대를 가리켜 ‘부흥의 시대’라고 명명할 수 있을 듯 하다.

20세기 후반 빌리 그레이엄의 출현은 미국만 아니라 전 세계에 복음주의 부흥의 불을 지피는 계기였다. 1970년대 대중전도운동으로 특징되는 한국교회 부흥 역시 빌리 그레이엄이 점화시켰고,한경직 김준곤 조용기 목사가 널리 확산시켰다. 이후 30년의 침묵을 깨고 1995년 휘튼대학교 학생들 가운데 놀라운 부흥, 영적각성이 발흥하여 또 다시 미국 전역의 여러 대학교 학생들을 깊은 영적 잠에서 깨웠다.

이처럼 성령의 역사가 지난 2000년 동안 교회사 속에서 중단되지 않고 계속되어 교회의 생명력을 더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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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특강 / 종말론적 신앙이란?

 

"사랑하는 자녀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일3:2,3)

 

다섯 달만 연기된 종말

 

미국 패밀리라디오 운영자 해롤드 캠핑이 지구의 종말이 닥친다고 예언한 521일이 아무 문제없이 자나갔습니다. 그러자 영적인 종말은 그날부터 시작되어서 눈에 보이지 않게 진행되다 (금년 1021일이 )진짜 마지막 날이 될 것이라고 수정했습니다. 며칠 동안 잠적했다 고작 꺼내 놓은 변명치고는 너무 초라하다 못해 불쌍하기까지 합니다.

 

이 거짓 예언에 속아 자살한 자가 미국에서 2명이고 정신적 경제적 피해를 입은 자는 부지기수입니다. 패밀리라디오 측에선 경제적 피해는 가능한 보상해주겠다고 약속했지만 실현이 의심스러운데다, 그 정신적 영적 피해는 어떻게 회복시킬 것인지 참으로 걱정입니다.

 

예수님이 "그냥 두어라 저희는 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다 구덩이에 빠지리라"(15:14)는 경고가 생각날 뿐입니다. 주님 말씀대로 그냥 두는 수밖에 없습니다. 언론의 자유가 미국에선 거의 완벽하게 보장되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아무리 말리거나 깨우쳐주려 해도 한번 왜곡된 종말관에 빠지면 헤어나기 심히 힘들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멀쩡한(?) 신자들 가운데도 이런 비성경적 종말관에 완전히 빠지지는 않지만 잠시나마 미혹되는 경우를 봅니다. "그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24:36)는 예수님 말씀에 따라, 한갓 헛소리에 불과하다는 것은 잘 압니다. 그럼에도 종말은 어떤 날이라도 될 수 있기에 혹시 진짜 그날에 종말이 오면 어쩌나싶어 관심을 갖거나, 마음에 각오라도 단단히 한다는 뜻입니다.

 

바꿔 말해 대부분의 신자들은 종말론적 믿음을 그야말로 종말을 미리 대비하며 사는 것으로 잘못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의도적으로 세상사에 크게 관심을 가지지 않고, 생업에도 열정적으로 종사할 필요 없고, 자연히 재산 관리에는 무관심 내지 문외한이 되고, 매일이다시피 교회에 모여 성경과 기도에 전무하며 경건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캠핑은 겨우 지난 5/21에서야 영적 종말이 시작되었다고 말했지만, 사실은 그 훨씬 전부터 그랬기에 정말 이 땅에 대한 미련을 완전히 버려야 한다고 여깁니다.

물론 죄는 아담의 타락 이후부터 세상에 들어왔습니다. 인류가 번성함에 따라 그 죄는 확장 발전하여 다양 교묘 음흉 치사해졌지 그 반대로 된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지금 세상 돌아가는 형편을 보아도 모든 면에서 더 꼴이 아닙니다. 영적 종말은 실은 창조 당시부터 시작된 셈입니다.

 

거기다 하나님은 아담의 배교를 묵과하지 않고 그 즉시 벌을 주되 종말론적 심판을 하셨습니다. 세상은 계속해서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며 인간들은 평생을 두고 이마에 땀 흘리는 수고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땅이 있는 동안, 또 사람이 살아가는 동안에, 다른 말로 종말까지 그 벌을 감수해야 한다면 최초의 벌이 바로 종말론적 심판이었던 것입니다.

 

나아가 인간은 죄의 본성이 시퍼렇게 살아있는 채 낙원에서 쫓겨났기에 그 후손들 사이에는 아무리 세대가 오래 지나도 온갖 죄악이 번창할 수밖에 없습니다. 죄의 원흉인 사단도 함께 벌을 받았지만 완전한 멸망은 미뤄지고 원죄 하에 태어난 인간들을 여전히 농간할 수 있도록 잠간의 유예를 받았습니다. 당연히 인간이 가는 곳, 하는 일마다 죄의 냄새가 무럭무럭 날 것입니다.

 

창조가 바로 종말이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사실은 인류의 타락과 동시에 하나님의 구원 또한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한 여자의 후손이 나타나 사단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인데, 그 일은 이천년 전 골고다 언덕에서 완성되었습니다. 그 이후로는 그 십자가 은혜를 믿는 자에게는 그분께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갖고 신자가 행하는 땅 끝까지, 살아가는 세상 끝 날까지 함께 하실 것입니다. 그러다 언제인지 아무도 모르지만 그분이 다시 오시면 사단과 죄악에 대한 진짜 마지막 심판이 이뤄질 것입니다.

 

요컨대 인류의 역사는 종말을 향해 가기도 하지만 그와 동시에 구원의 완성을 지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역사가 시작되었음은 그 종말이 있음을 전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시작과 끝에는 삼위하나님이 계십니다. 세상 시작과 끝의 주인공은 하나님이지 절대 사단이나 인간이 아닙니다. 세상을 창조하든 심판하든 오직 그분의 영광만 드러날 뿐입니다. 물론 시작과 끝을 잇는 그 중간에도, 당연히 인간의 타락도 포함하여, 마찬가지입니다. 이는 영원불변한 진리입니다.

 

역사 연대표는 항상 인간에게만 문제가 됩니다. 하나님의 시간표에는 창조와 종말이, 타락과 구원이 짝을 이루어 같은 항목에 속해 있습니다. 인간이 살아가는 역사의 현장 속에선 단지 그 둘이 아직은 미완성인 상태로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이 초림하신 뜻은 그 둘의 완성을 사람들로 미리 보고 알게 해주려고 골고다 언덕에 십자가를 높이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또 그 둘의 완성이 오직 당신을 통해서만 이뤄진다는 진리를 믿는 자는 하나님의 참 생명을 이 땅에서부터 누릴 수 있게끔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앞으로 언젠가 주님이 다시 오시면 심판의 완성과 구원의 완성이 동시에 이뤄질 것입니다. 그 사건은 인간 역사에는 종말이 될 것이며, 하나님 시간표에는 새 하늘과 새 땅의 창조가 될 것입니다. 다른 말로 이 땅의 이 세대에 지옥의 심판은 이미 내려졌고, 동시에 천국의 구원도 벌써 도래했지만 완성만 되지 않았을 뿐입니다. 말하자면 인간은 사단에 묶여서 심판의 완성으로 가는 부류와 하나님께 속해 구원의 완성으로 가는 부류, 둘 뿐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정표 안에는 태초부터 영원까지 구원과 심판이 이미 완벽하게 다 성취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골고다 십자가는 시공간 안에 제한 받는 인간에게 역사의 한 시점과 한 장소와 한 인물을 통해 그 둘의 완성을 모든 이가 보여 알도록 한 것입니다. 십자가만이 이미 완성되어 있는 하나님의 영원한 구원과 심판으로 인간을 나누는 유일한 분기점이라는 뜻입니다. 다른 길은 아예 존재하지 않습니다.

 

십자가를 통과한 자는 영원한 구원 안에 이미 든 것이며, 그렇지 못한 자(그 중에는 언젠가 십자가를 통과할 자도 분명 있지만 누가 언제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는 아무도 모름)는 영원한 심판 안에 벌써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번 십자가를 통과해 버리면 더 이상 되돌아 갈 길은 결코 없습니다. 그분의 대속죽음은 영단번의 완전한 희생이었기 때문입니다. 해마다 제사를 지낼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그럼 예수를 믿은 신자는 어떤 신분과 특권을 가진 것입니까? 한마디로 천국과 구원의 완성 안에 이미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하나님의 일정표에는 완성되어 있지만 단지 인간이 실제로 체험하는 완성만 인간이 지각하는 시간표상의 미래 일로 남겨져 있을 뿐입니다. 요컨대 모든 인간이 인식하든 못하든 이미 종말을 맞았으며, 종말 안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불신자는 심판의 완성과 지옥의 비참함을, 신자는 구원의 완성과 천국 영광을 이 땅에서 미리 맛보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영주권 받고도 불법체류자 같은 신자

 

요한 사도는 본문에서 신자의 종말관에 대해 어떻게 설명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지금부터 이미 하나님 자녀입니다. 장래의 종말이 어떻게 될지는 단지 인간의 시공간 안에 눈에 보이게는 아직은 나타나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안다"고 합니다. 믿는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미 확정된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종말 즉, 신자에겐 구원의 완성은 실현될지 안 될지 의심할 수 있는 성질이 절대 아니며, 아직 잘 모르기에 계속 공부하면서 알아가야 할 진리도 아니며, 머리로는 알지만 가슴으로는 불안하기에 단순히 소망하거나 기대하는 상태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비유컨대 미국에서 영원히 살겠다고 영주권신청을 했는데 이민국에서 허락이 떨어졌다는 편지는 도착했는데 아직 영주권카드는 받지 못했고 한국여권에 스탬프가 찍혀지지 않은 상태일 뿐입니다. 신자란 예수를 믿음으로써 천국의 영주권신청만 한 것이 아니라 그를 허락한 편지와 영주권카드(성령님의 내주로)까지 날라 왔지만 그 입성만 잠시 미뤄진 것입니다. 영주권 승인 편지를 받은 후로는 영주권자 자격으로 모든 권리와 혜택을 누리며 살 수 있듯이, 신자도 이 땅에서 천국 시민권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올바른 종말론적 신앙이란 단순히 종말을 대비하며 사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종말을 소유한 자로 종말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궁극적이고 영원한 구원은 확보되어 있습니다. 자기 존재와 삶과 인생으로 세상과 사람들 앞에 그 종말을 확실히 보여주는 일만 남은 것입니다. 또 그러도록 바로 천국으로 입성시키지 않고 이 땅에 아직 남겨져 있는 것입니다. 요한만큼 천국에 빨리 올라가고 싶은 사람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서로 사랑하며 열심히 살라고 하지 않습니까? 신자는 이미 천국 안에 있음을 세상에 보여주라고 남겨두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요한이 말하는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란 단지 예수 믿고 죽으면 천국갈 수 있다는 차원을 훨씬 뛰어넘는 것입니다. 종말에 "주와 같이 될 줄을 아는" 소망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요한이 누구입니까? 천국을 확실하게 보고 온 자입니다. 역사상 그만큼 천국을 자세히 볼 수 있었던 자는 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영원히 없을 것입니다. 그가 본 천국에는 예수 안에서 먼저 죽은 자들이 한 명도 빠지지 않고 그분처럼 되어서 그분의 영광을 누리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말로 예수 믿는 자는 아직 그곳에 가지만 않았을 뿐 이미 그와 똑 같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신자는 정말 이 땅에서부터 종말 안에서 천국의 모든 신령한 복락을 미리 누리고 주위에 나눠주고자 하는 열망을 가져야 하고 실제로도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신자의 능력으로 그럴 수 있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그런 앎과 열망 속에서, 조금 단계를 낮추어 확신과 소망으로만 살아도 주님이 그런 하늘의 풍성한 은혜를 채워주십니다.

 

그래서 요한은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신자니까 불신자보도 더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장래 완성될 구원에서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데" 어찌 지금 그와 같이 살지 않을 수 있습니까? 아니 천국 안에 이미 들어와 있는 자인데 어찌 깨끗하게 살지 않을 수 있습니까? 성령님이 믿은 후의 신자에게 영원토록 내주하신다는 것은 문자 그대로 몸이 들어붙은 샴쌍둥이와 같은 형상입니다. 말하자면 주님이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보고 있는 앞에서 감히 더럽고 추하게 살 수 있겠습니까?

 

다시 같은 비유를 들자면 영주권 승인서를 받아놓고도 불법체류자처럼 추방당하면 어쩌나 싶어 경찰차만 보면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바보는 없을 것 아닙니까? 그런데 말입니다. 캠핑의 종말 예언에 간 졸였거나 혹시나 싶었던 것과 이 경우와 무엇이 다릅니까? 그것도 예수님 재림으로 최후 심판이 있지만 그 날짜만은 아무도 모른다고 익히 알고 있는 신자들 가운데서도 그러니 말입니다.

 

세상이 알 수 없는 신자

 

물론 신자라고 이번 사태에 망부석처럼 완전 무심하게 지냈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관심 호기심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염려했어야만 한다는 뜻입니다. 종말이 닥칠까 염려하는 것이 아니라, 틀림없이 닥치지 않을 텐데 그 이후에 기독교가 또 욕먹을 사태를 걱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성경전문가라도 특정날짜를 지정하면 결코 그 날에 오실 리는 없으니까 말입니다. 그나마 이번에 다행인 것은 신자에게는 날짜 지정한 종말론에 더 이상 속지 말라는 또 다른 증거가 되었고, 불신자에겐 하도 세상이 흉흉해서 종말에 대해 한번쯤은 상기시키는 반사적 유익은 있었으니 말입니다.

 

분명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거의 눈앞에 이른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딤후3:1-5)되고 있습니다. 인간 역사의 모든 세대가 다 그러긴 했지만 이 구절에서 열거한 모든 사항이 하나 빠짐없이 철저히 해당되고, 특별히 마지막 경건의 모양만 있고 능력이 없는 모습은 바로 오늘 이 세대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세상이 흉흉할수록 신자가 붙들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뿐입니다. 예수 믿었으니 천국 가는데 지장이 없다고 안심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또 세상이 아무리 악해도 내 혼자만 착하게 지내면 된다는 것도 아닙니다. 나아가 경건의 모양보다 능력을 구하라고 해서 초자연적 은사만 실행하거나 힘든 일에 기적 같은 보상만 소망하라는 뜻도 아닙니다.

 

요한이 신자가 가져야 할 종말론을 본문에서 언급하기 바로 전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우리가 그러하도다."(1a) 십자가 사랑을 신자에게 주셔서 당신의 자녀라 일컬음을 이미 얻게 하셨다고 합니다. 앞에서 누차 말씀드린 대로 천국 안에 벌써 들어오게 하신 것입니다. 신자에겐 구원의 완성만 남았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라.”(1b) ‘세상은 아직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과하지 못해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지 못한 자를 말합니다. 예수님의 메시아 됨을 부인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세상의 시작과 종말이 그분으로 말미암은 줄을 전혀 알지 못합니다. 사단에 미혹되어 그 종으로 살고 있기에 타락의 완성으로 자기들 인생이 흘러가고 있는 줄도 꿈에도 생각 못합니다. 그러면서 오히려 예수 믿은 우리를 처량하게 여깁니다. 오지도 않을 종말을 심심하면 끄집어내어서 세상을 시끄럽게 구니까 아예 상종도 못할 광신자들이라는 비난과 함께 말입니다.

 

요한은 신자더러 종말을 선전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세상이 예수를 잘 모르듯이 예수를 모시고 사는 우리들 또한 그들에겐 잘 모르는 자로 인식 되어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들과 전혀 다른 소망을 안고 살기에 그들이 확연히 감지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뭐라고 하든, 이해하든 말든, 심지어 오해하고 뜯어 말려도 신자는 그 소망대로 살아야만, 아니 자연스레 그렇게 살아져야 합니다. 비유하자면 날씬하고 예뻐져서 마음에 드는 남자를 사로잡고야 말겠다는 소망이 있는 여자는 남들이 저러다 병원 신세 지는 것 아닌가 염려해도 다이어트나 운동에 열중합니다. 자기가 번 돈 모두를 예뻐지는데 다 털어 넣지 않습니까? 신자도 이미 종말 안에 사는 모습을 감추려야 감출 수 없어야 합니다.

 

예수만 붙든다는 것은?

 

예수만 붙든다는 것은 흉흉하고 고통스런 세상일에 자신이 완전히 지쳐 있어도, 고난은 끝이 없고 도저히 나아질 기미가 안 보이고 기도할 힘조차 없어져도, 심지어 제발 빨리 이 고통만 끝내고 싶은 심정이 생겨도 내가 그분의 사랑 안에 있음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내가 아니라 그분이 나를 붙들고 있음을 아는 것입니다. 열심히 또 더 강하게 믿음을 세워서 염려를 없애려고 노력하는 차원과는 다른 것입니다.

 

세상의 종말이 언제 어떤 모습일지 아무도 모르듯이, 한 개인의 종말도 전혀 알 수 없습니다. 신자는 종말이든 죽음이든 그 자체를 대비해서 살아선 안 됩니다. 다시 말하지만 종말 안에서, 죽음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물론 우리의 영원한 참 생명이 그리스도 안에 감춰져만 있는 것이지 때가 되면 반드시 너무나 풍성하고 신비로운 모습으로 신자 앞에 활짝 펼쳐질 것입니다. 결국 믿음의 요체는 이런 확정된 그러나 아직은 실현되지 않은 사실을 "믿는 것이 아니라 알고 있기에" 그곳을 향해 매일 한걸음씩 실제로 걸어가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종말의 날자만 적시하지 않았을 뿐 곧 다가올 심판에 대비해 예수 믿으라고 전도하는 것도 엄밀히 따지면 캠핑이 벌린 짓과 크게 다를 바 없습니다. 종말의 두려움만 강조했거나 전도의 가장 유용한 수단으로 사용했으니까 말입니다. 오해 마시기 바랍니다. 전도에 종말은 아예 언급도 하지 말라는 뜻은 아닙니다. 종말만 강조하면 자칫 그들로 신자마저 종말을 두려워하고 있다고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그들이 심판의 완성으로 치닫고 있어도 그들이 전혀 믿지도 알지도 못하는 예수님 재림에 대해 말로 설명해주어야 큰 효과가 없다는 뜻입니다.

 

물론 세상 사람들을 향해 때로는 타락의 완성, 심판의 종말을 경고하면서 전도해야 될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보다는 그들 앞에서 신자가 이미 도래된 천국 안에서 구원이 완성되어져 가는, 그래서 자기들과는 다르지만 함께 따르고 싶은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바꿔 말해 신자는 종말이 다가갈수록 이 땅에서부터 예수님과 동행하며 더욱 열심히 성실히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니 실제로 그렇게 살고 있다면 자연히 사람들이 우리가 자기들과는 다른 사람임을 발견할 것입니다.

 

종말이 앞으로 언제 닥칠지 모르고 또 어떤 큰 재앙과 환난을 동반할지 짐작도 못하기에 믿음을 강하고 담대하게 가꾸어서 그 종말을 대비하는 것이 종말론적 신앙이 아닙니다. 매일 매일을 이미 도래한 그리스도의 종말 안에서 살고 있기에 주님의 재림이 언제 어느 때 어떤 모습으로 닥친다 해도 전혀 요동치 않아야 합니다. 아니 나를 영광된 구원의 완성으로 이끌 것이므로 오히려 크게 기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른 말로 그러기에 종말과 전혀 무관하게 이 땅에서 더욱 성실하고 깨끗하게 열심히 살아가는 것입니다. 당신은 어떤 종말론적 신앙을 갖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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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서 말하는 행복이란? -전도서를 중심으로-

 

법치적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모든 개개인은 행복추구권이 있으며, 누구나가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며 목표를 세우고 살아간다. 개인마다 행복해지는 방법은 다양하며, 행복을 느끼는 조건도 다양하다.

 

자본주의적 현대사회의 행복의 중심 조건은 돈, 쾌락, 권력, 명예로 특징지워지며, 그 밑으로 파생되는 행복의 조건은 경제적 여유로움을 통해서 기반으로 얻을 수 있는 상대적 우월감, 욕망의 분출, 사회적 성공, 자아실현 등이다.

특히 성경에서 죄악으로 규정하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통해서 쾌락과 행복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 왜나하면 이러한 죄악과 탐욕과 욕망은 자극적이고 큰 쾌감을 주기 때문이다.

요일 2: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그렇다면 성경에서 말하는 행복의 정의, 행복의 조건은 무엇인가?

 

A)먼저 죄, 부패, 욕망, 탐욕, 사망을 품고 있는 세상은 허무하다 라는 인식을 가져야 한다. 이러한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과 이러한 세상에서 살아가는 각 개인은 허무하다. 욕망과 부패와 탐욕의 결국은 남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 그렇다고 무조건적인 허무주의는 아니다. 하나님과 인격적 교제가 없는 삶에 한정된다. 즉 성경은 세상에 대해 조건적 허무주의를 표방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1)하나님이 없는, 또는 하나님을 떠나서 세상에서 행복을 추구하고 욕망을 목표로 하는 모든 수고와 행위들은 허무한 것이다.

각자가 야망을 꿈을 가지고 삶의 투쟁의 최전선에서 열심히 살아가지만 결국은 허무한 것으로 결론되어 진다. 헛되고 헛되며 너무나 헛된 것들이다.

1:2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1:3 사람이 해 아래서(하나님이 없는 죄 아래의 세상을 의미)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

2:1 내가 내 마음에 이르기를 자, 내가 시험삼아 너를 즐겁게 하리니 너는 낙을 누리라 하였으나 보라 이것도 헛되도다

2:11 그 후에 내가 생각해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내가 수고한 모든 것이 다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며 해 아래에서 무익한 것이로다

2)인간은 유한하고 결국 죽음을 맞이하기 때문에 인간의 모든 노력과 추구하는 것은 허무하다.

내가 지금은 영원히 살 것 같지만 결국 서서히 약화되어 죽어가고 있음을 깨닫고 있는가? 인간의 생명을 저 광대하고 유구한 자연과 비교해 보라.

   

인간은 자연을 개발하고 자연 속에서 막대한 이익을 얻으며 마치 자연의 주인인척 자만해 하지만 결국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고, 저 자연은 훨씬 오랫동안 지속된다. 인간은 자연을 정복하고 자연을 연구하고 기록하고 관찰하여 학문을 발전시킨다. 하지만 자연이 인간 역사를 보고 기록한 진정한 관찰자인걸 알고 있는가? 자연만이 인간이 어떻게 생겨났으며, 어떻게 살아왔는지 알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자연을 부분적으로 관찰하였지만, 자연은 인간 역사의 전체를 관찰하여 왔다. 인간의 역사는 자연과 우주의 삼라만상에 비교하면 한 줌의 재와 같다.

1:4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

1:5 해는 떴다가 지며 그 떴던 곳으로 빨리 돌아가고

1:6 바람은 남으로 불다가 북으로 돌이키며 이리 돌며 저리 돌아 불던 곳으로 돌아가고

1:7 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하며 어느 곳으로 흐르든지 그리로 연하여 흐르느니라

1:14 내가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보았노라 보라 모두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3)인간의 욕망은 채울 수 없고 만족을 모르기 때문에 허무하다.

오늘 그대에게 최상의 행복을 주었던 조건들이 내일 가면 약효가 떨어질 수 있다. 어쩌면 마약처럼 더욱 자극적이고 강한 행복의 조건들을 추구하기 위해 동분서주 하지만 늘 마음 한 구석은 공허함으로 가득하다. 그대에게 주는 행복의 쾌감은 너무나 짧고 허무와 공허는 너무나 길게 지속된다.

인간의 행복의 조건은 늘 상대적이다. 상대방과 비교하여 우위를 가질 때만이 행복을 느낀다(우월적 행복감). 내가 가지고 있거나 누리는 조건들이 좋을 지라도, 상대와 비교하여, 상대보다 못하고, 상대보다 밑에 있다고 생각하면 행복하지 않다. 내가 가진 조건들이 나쁘지 않지만 상대적 빈곤을 느끼기에 공허하고 허무하다.

1:8 만물의 피곤함을 사람이 말로 다 할 수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차지 아니하는도다

2:1 내가 내 마음에 이르기를 자, 내가 시험삼아 너를 즐겁게 하리니 너는 낙을 누리라 하였으나 보라 이것도 헛되도다

5:10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풍요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하지 아니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4)인간이 추구하는 학문과 지식의 결론은 인간이 허무하다는 것으로 도달한다.

왜 허무로 결론되어질까? 파면 팔수록 더 어려워지고, 연구하면 할수록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들이 계속해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 새로운 이론을 만들어 내지만 결국 인식론적 한계를 느끼고 더욱 절망하게 된다.

인간의 학문과 지식은 하나님이 창조한 세상의 이치를 다루는 것이기에, 결국 하나님의 시각으로 결론되어 진다. 인간은 학문과 지식발전을 통해 신으로부터 도피하여 인간의 자유와 능력을 갈망하지만, 오히려 인간의 자유와 능력은 더욱 제한되어진다.

인간의 학문과 지식은 자연과 우주 앞에 인간의 무능과 연약함을 여실히 보여주고, 인간의 지적 능력에는 인식론적 한계가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따라서 학문을 하는 자들은 이를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우주와 이 세상에 대해 거만한 자세를 낮추어야 한다. 그러기에 인간의 학문과 지식이 만능이며 신적 능력에 도전하여 결국 이것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거만한 생각은 버려야 한다.

 

1:13 마음을 다하며 지혜를 써서 하늘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궁구하며 살핀즉 이는 괴로운 것이니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주사 수고하게 하신 것이라

 

B)하나님이 없는 세상, 죄 아래의 세상에서 인간이 추구하는 모든 것은 허무하다. 그러나 성경은 새로운 낙관적 희망을 제시하며, 참으로 행복을 느낄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다.

1)이 세상은 허무하지만 하나님을 인정하는 자에게는 새로운 낙관적 희망이 보인다.

성경의 낙관주의는 죄 아래 세상의 허무주의를 뼈저리게 느끼고 통탄할 때 비로소 다가오며 느낄 수 있다. 성경의 낙관주의는 허무주의와 미묘한 긴장관계를 두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세계는 영구한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신적 목적을 품고 있으며, 인간은 유한하기 때문에 신의 의지와 신의 목적을 모두 알 수 없지만 하나님 안에 있는 영원한 세계를 추구함으로써 행복을 느낄 수 있다. 그렇다고 물질적 세계는 유한하고, 영적 세계만이 영원하다는 이원론적 세계관(플라톤적 이원론)은 비성경적이다. 성경은 물질과 영적 세계 모두 하나님의 계획과 주권 아래 있을 때 영원함을 갖는다고 말한다(예를 들면 주님의 재림시에 있을 새로운 부활의 몸과 이 세상이 파괴되는 것이 아니라 새롭고 완전하게 회복되는 것)

사람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으며, 이것이 충족되어질 때 행복을 느낀다.영원한 것을 추구하는 것은 자신의 본질을 찾는 것과 같다. 그러나 일부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부인하면서, 무신론적 물질적 세계관을 갖거나, 또 다른 일부는 타종교의 신앙으로 방향을 돌리고 만족을 추구한다.

3:11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2)사람은 하나님 안에서 선을 행할 때 행복을 느낄 수 있다.

인간은 무한경쟁을 통해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가고자 하는 싸움을 할 때 공허함을 느끼지만 좋은 일, 선한 일을 할 때에는 기쁨을 느낄 수 있다. 인간의 존재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 안에서 선을 행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남이 모르게 선을 행하여 보라. 그대에게 진정한 행복이 파도처럼 밀려 올 것이다.

3:12 사람이 사는 동안에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는 줄을 내가 알았고

3)하나님은 각자에게 몫을 할당해 주셨다(분복). 이러한 자기의 분복에 만족해하는 자는 행복하다.

어떤 이는 더 많이 가질 수 있고, 어떤 이는 더 유명해 질 수 있듯이 각자의 분복 즉 할당된 양이 있다. 하지만 하나님은 공평하시기에 남이 없는 것이 나에게 있을 수 있으며, 나에게 없는 것이 남에게 있을 수 있다. 이것은 하나님이 각자에게 주신 각자의 고유의 몫이기 때문에 서로 비교해서는 안되는 고유의 영역이다.

각자 개인은 하나님이 주신 분복-할당된 몫-에 만족해 하며 감사해야 한다. 그리고 서로를 비교하여 시기와 질투를 하는 것은 사탄의 속성이기에, 마땅히 이를 지양해야 한다. 인간은 하나님 안에서 각자의 이러한 분복을 누리고 수고해서 만족해야 참다운 행복을 느낄 수 있다. 인간은 하나님 안에서 자기 몫에 대하여 자기만족을 해야만 참다운 행복을 누릴 수 있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주신 분복-할당된 몫-을 넘어서는 과도한 욕심을 과감히 버려야 한다.

3:13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줄을 또한 알았도다

 

5:18 사람이 하나님의 주신 바 그 일평생에 먹고 마시며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 중에서 낙을 누리는 것이 선하고 아름다움을 내가 보았나니 이것이 그의 분복이로다

5:19 또한 어떤 사람에게든지 하나님이 재물과 부요를 그에게 주사 능히 누리게 하시며 제 몫을 받아 수고함으로 즐거워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라

4)인간은 인식론적 한계, 지식과 학문의 한계를 겸허히 인정할 때 행복을 느낄 수 있다.

그렇다고 학문과 지식의 발달과 연구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학문과 지식을 연구해서 발전시켜야 한다. 그러나 어짜피 인간의 학문과 지식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연구하는 것이다. 결국 학문과 지식의 결국은 하나님을 향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인간은 학문과 지식을 통해 인간이 만드는 유토피아적 세상을 세울 수 있다고 낙관적 희망을 갖지만, 세심히 보면 아직 많은 문제가 남아있으며, 그러기에 더욱 겸허해지는 자세를 배워야 행복해 질 수 있다(20세기 초 산업혁명과 과학기술의 발달로 인간은 낙관적 유토피아를 꿈꿔왔다. 그러나 안타깝지만 현실에서는 반대로, 더 많은 식민지가 건설되어 생명을 유린하고 자본을 약탈하였으며, 영토확장과 정치적 충돌은 과학기술로 말미암아 가속화되었고, 이로 인한 1,2차 세계대전은 오히려 인간의 잔인과 무지, 파괴적 본능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8:17 또 내가 하나님의 모든 행사를 살펴 보니 해 아래에서 행해지는 일을 사람이 능히 알아낼 수 없도다 사람이 아무리 애써 알아보려고 할지라도 능히 알지 못하나니 비록 지혜자가 아노라 할지라도 능히 알아내지 못하리로다

5)참다운 행복은 수많은 성적 파트너와 성적 탐욕을 추구하지 않고 부부와의 온전한 관계를 통해서만 얻어질 수 있다.

하나님이 각자에게 주신 할당된 몫은 배우자이지 또 다른 성적 파트너가 될 수는 없다. 세상의 무료함에서 일탈하고자 성적 탐닉에 빠져 수 많은 파트너와 쾌락을 즐기는 것은 결코 행복을 줄 수 없으며 육신의 질병과 심한 심적 공허함을 더할 뿐임을 알아야 한다. 오늘도 또 다른 파트너와 모텔에서 광난의 시간을 보냈는가? 그러나 마음은 더욱 공허해질 것이다.

9:9 네 헛된 평생의 모든 날 곧 하나님이 해 아래에서 네게 주신 모든 헛된 날에 네가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지어다 그것이 네가 평생에 해 아래에서 수고하고 얻은 네 몫이니라

 

6)참다운 행복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들을 지킬 때 온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키는 것은 인간을 결박하고 옥죄어서 자유를 빼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을 자유롭게 만드는 원동력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감시하는 분이 아니며, 오히려 죄악과 사망과 욕망의 감옥에서 탈출하여 진정한 자유와 평화를 누리기 원하신다.

하지만 세상의 죄악 가운데에 있는 사람은 신의 속박으로 부터 해방을 누리기 위해 신을 부정하며, 신으로부터 멀리 멀리 도망을 가지만 결국 그들이 얻는 것은 죄악의 쇠사슬로 묶여 지는 것이다. 인간의 자유와 행복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결박당하고 구속당할 때 찾아오며, 하나님으로부터의 도피는 오히려 절망과 허무, 공허함을 더 할 뿐이다.

12:13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

7)참다운 행복은 종말론적 심판을 준비하는 삶의 자세에서 나온다.

종말론적 심판을 부정하는 자들은 인간은 죽으면 끝이며 더 이상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의 근원은 물질론적 세계관이다. 인간은 물질이기에 인간이 죽으면 물질은 사라지며 더 이상 아무것도 없고, 아무 것도 느낄수 없는 의 세계라고 말한다.

하지만 인간은 물질만의 존재가 아니며 비물질적 존재이기도 하다. 비물질은 사라지지 않으며 인간의 물질부분(육체)이 사라진다 할지라도 영구히 지속된다. 영구한 비물질이 존재한다는 세계관에는 선과 악에 대한 종말론적 심판이 있다. 종말의 심판을 준비하는 자는 마치 회계(accounting 會計)하는 자처럼 철저하고 꼼꼼하게 자신의 삶을 준비한다.

그리고 하나님 안에 있는 자들은 이러한 종말론적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믿음 안에서 철저히 준비한다. 성경에서 말하는 이 세상의 종말은 파괴가 아니라 새롭고 완전하게 되는 회복이며, 그러한 회복에 앞서 먼저 선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이루어져야 한다. 종말론적 심판의 의미는 하나님 만이 절대기준이며, 이러한 기준에 따라 모든 사람은 공정하게 평가를 받아야 한다는 의미이다. 이 세상의 그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공정한 심판대 앞을 그냥 스쳐 지나갈 수는 없다.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심판을 부인하며 자신의 정당성을 보장받고 싶어하지만 안타깝게도 피해갈 사람은 아무도 없다.

12:14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시리라

 

결론

인간의 행복은 허무주의와 낙관주의의 긴장관계에 있다. 인생사는 허무하면서도 낙관적이다. 어떻게 보면 비참하고 허무한 것이 인생사이지만, 어떻게 보면 희망과 낙관이 있다. 행복은 세상이 허무하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이 세상에서 추구하는 모든 가치와 행동, 그리고 얻어지는 부와 명예와 탐욕과 쾌락은 너무나 공허하며 허무하다.

진정한 행복은 이처럼 죄 아래의 세상은 허무하다는 것을 깊이 인식하며, 하나님 아래서 주어진 각자의 몫을 발견하고 각자 수고하며 그 결과물에 만족하고 누릴 때 찾아온다. 각자의 분복-할당된 몫-은 절대적 가치를 지녔기에 타인과 절대 비교불가이다. 어떤 사람은 죄악 가운데서 부를 누리지만 허무한 인생을 살고, 어떤 이는 하나님 안에서 가난하지만 참다운 행복을 누리며 살고 있다. 과연 믿는 자들은 세상에서 어떤 행복을 추구하며 살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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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별금지법에 대한 성명서 

 

  최근 우리 국회가 입법예고한 차별금지에 관한 포괄적 법안들은 '우리 사회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평등이라는 헌법이념을 실현하고 인권 향상과 사회적 약자의 인권보호를 도모하여 인권 선진국으로 발전하기 위해서 필요한 법'이라는 명분과는 달리 사회적인 갈등을 야기할 수 있는 문제가 있어서 다음과 같이 입장을 밝힙니다.
 

1. 법안들이 담고 있는 종교적 차별을 금지하는 조항은 종교 간의 변증과 건전한 비판까지 막아서 결과적으로 헌법에서 보장하는 종교의 자유를 제약하게 될 것입니다. 이는 도리어 불필요한 종교 간의 분쟁을 유발할 요소가 될 것입니다.
 

2. 성정체성에 대한 차별 금지와 같이 기존의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는 보편적인 문화와 윤리에 심각하게 반하는 조항을 법률로 규정하는 것은 도리어 사회적인 갈등과 혼란을 야기할 것입니다. 법률로 정하기보다 기존의 가치관을 유연하게 적용하여 사회적 합의를 도출하는 것이 더 바람직할 것입니다.
 

3. 사상 또는 정치적 의견에 대하여 차별을 금지하는 조항이나 전과에 대한 차별금지 조항과 같이 사회 각 부문의 의견이 크게 상이한 조항을 일률적으로 법률로 정하면 애초의 의도와는 달리 사회적인 갈등을 불러일으킬 것입니다. 사전에 다양한 분야의 의견을 충분히 수렴한 뒤에 법률을 제정하여야 할 것입니다.
 

만일 관련 법안을 졸속으로 제정하면 사회적 편견과 차별로 인한 갈등을 해소하려는 의도와 다르게 사회적 조화를 깨뜨리는 새로운 정부 최초의 악법으로 기록될 것입니다. 이 법안이 사회적으로 민감한 문제를 다루고 있음을 깊이 고려하여 사회적 분열의 원인을 제공할 갈등 요소 조항을 삭제하거나 법안의 발의를 철회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국회와 관련 정당이 이와 같은 점을 신중하게 고려하여 인권의 신장과 함께 사회적 통합도 추구하면서 우리 사회의 근간이 되어온 건강한 가치들이 보존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여 주시기를 당부합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장 손달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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