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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들의 영혼은 죽을 때 어디로 가는가(중간기 상태에 대하여)

중간기 상태란?


사람이 죽은 후 몸의 부활이 이루어질 때까지 그의 영혼이 머무는 장소와 그 영혼의 상태를 의미한다.

성도들의 영혼은 죽을 때 어디로 가는가?
성경은 신자들이 죽을 때 가는 곳을 "낙원", "천국", "아브라함의 품", "아버지의 집", "주님이 계신 곳" 등 여러가지 말로 표현하고 있다(눅24:42; 히9:24; 눅16:22; 고후5:1,8; 빌1:23; 요14:2,17:24; 고후12:2,4; 히11:10,16 시73:24,25) 위에서 말하는 표현들은 각기 다른 장소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천국을 묘사하는 여러 가지 표현일 뿐이다.

천국에 있는 성도들은 의식이 있는가?
초기교회에서는 영혼수면설을 주장한 자도 있었다. 즉 영혼이 부활할 때까지 무의식적인 수면 상태에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종교개혁시대에는 일부의 재세례파가 영혼 수면설을 옹호하였는데, 칼빈은 그 주장이 잘못됨을 반박하는 논문을 썼었다. 19세기에는 어빙파 중 일부의 사람들이 이 그릇된 교리를 지지했다. 지금은 여호와의 증인들이 이와 비슷한 주장을 하고 있는데 이드은 존재의 멸절까지 믿으며 그렇게 발전시켰다.
이러한 그릇된 주장의 근거는 인간의 의식은 감각과 인상에 의존한다는데 있다. 더 이상 보고, 듣고, 접촉할 수 없다면 사고나 감정의 작용도 멈추게 된다는 생각 때문이다. 즉 영혼이 뇌의 활동을 떠나서는 의식을 계속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주장의 성경적 근거로는 죽음을 잠자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는 성구들에 두고 있다. 성경에는 죽은 자들에게 의식이 없다고 말하는 구절들이 아래와 같이 있다(시30:9; 115:17, 146:4; 전9:10; 사38:18,19).
그러나 성경은 죽은 사람의 영혼이 잔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인간의 영은 신체적인 감각기관에 의존해서만 의식이 가능한 단순한 감각의 도구나, 감각 작용에서만 파생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다. 신체적 감각 작용에 의한 경험을 떠나서도 영의 작용이나 의식은 존재할 수 있다. 천사들은 몸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인간보다 탁월한 의식을 갖고 있다.
죽음을 자는 것으로 비유한 것은 영혼이 잔다는 뜻이 아니고 죽은 자는 떠난 세상에서의 활동이나 수고가 중지 되었다는 뜻이다. 잠잔다고 한 것은 영육으로 된 인간의 활동이 죽음으로 영원히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잠에서 깨어나면 다시 활동을 계속할 수 있음 같이 그리스도안에서 죽는 자들은 영광스런 깨어남(부활)이 있음을 가리켜 잔다고 한 것이다.

천국에 있는 영혼들의 상태는 어떠한가?
천국에 있는 영혼들은 최종적인 영화 상태로 있지는 않지만 상당히 영화로운 상태에서 부활의 날을 기다리고 있다. 이들은 행복한 상태에 있지만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게 될 지체들의 구원 완성을 기다리고 있으며, 그리스도의 재림과 몸의 부활로 완성될 최종적 영화를 기다리고 있다.

계7:9-17의 말씀이 구속 받은 자들의 현세적 삶과 최후의 영화로운 상태의 영생에도 적용될 수 있지만 중간기 상태의 묘사로도 볼 수 있음은 현세적 삶과 중간기 상태와 최종적 영화 상태는 각기 단절된 것이 아니고 연속성이 있기 때문이다.

천국에 있는 영혼들은 무엇을 하고 있나?
(1) 쉰다(계14:13참고)
(2) 그리스도의 얼굴을 뵙는다.(계22:4참고). 천국에 있는 성도들의 눈은 항상 그리스도께만 향하고 있다.
(3) 듣는다. 계시록에 있는 영광과 합창과 찬미의 소리를 들으며 그리스도와 구속받은 성도들과 천사들이 말해주는 것을 듣게 된다.
(4) 일한다(마25:21참고) 몸이 없는 동안 영혼들은 천사들처럼 구속해주신 하나님을 기쁘게 섬기는 봉사의 일을 하게 된다(계6:10참고)
(5) 기뻐한다.(마25:21참고)
(6) 살아 있다
(7) 찬송하며(계14:3, 15ㅣ2-4) 위로를 받는다(눅16:25).

죽은 자와 신자의 직접적인 접촉이 있는가?
강신술자들은 죽은 영혼들과 아직 살아 있는 사람들 사이에 직접적인 접촉이 실제로 발생된다고  믿고 있다.
로마카톨릭은 성모 마리아와 세상을 떠난 성자들이 살아 있는 자들의 기도를 들을 수 있고 또 중보의 역할을 한다고 믿는다. 이것도 일종의 죽은 자와 직접 접촉설을 지지하는 입장이라 할 수 있다.
일부 개신교도들도 죽은 자들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으며 우리의 말을 다 들으며, 우리의 하는 일을 정확하게 다 안다고 생각하는 자들이 적지 않다. 이것도 죽은 자와 산자의 직접 접촉설을 받아들이는 입장이다.
그러나 성경은 이러한 신념을 지지해 주지 않고 오히려 배격한다.(욥10:21,7:9,10; 삼하12:23; 신18:11; 레20:6;사8:19).
특히 신명기 18장을 참고하라. 삼상28:3-25에 나온 사무엘의 영혼은 실제 사무엘의 영혼이 아닌 사무엘을 가장한 마귀다. 악령은 광명의 천사로 가장 할 수 있다.

천국에서도 진보와 성장이 계속되는가?
천국에서는 회개를 통한 진보는 있을 수 없다. 비록 성화를 이룸에는 진보가 없을지라도 다른 면의 진보와 성장은 영원히 있을 것이다. 하나님을 아는 것, 믿는 것, 사랑하는 것, 소망하는 것은 영원히 있게 된다. 소망할 것이 영원히 있게 다함은 진보하는 것이 영원히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새 노래를 부른다고 한 것은 하나님께 대한 감사가 갈수록 새로워지고 기쁨이 점점 더 새롭고 충만해 진다는 뜻이라 볼 수 있다. 성장과 진보는 완전과 조화될 수 없다고 하지만 완전한 아이는 자라는 아이인 것 같이(눅2:52참고) 천국의 삶도 여러 면으로 더욱 충만해지는 삶일 것이다. 하나님의 완전하심은 진보나 성장이 없는 절대적, 불변적 무한적 완전이나 인간의 완전은 천국에서도 성장할 수 있는 무한한 목표를 가진 유한한 완전인 것이다(사40:25, 26, 44:6, 54:5).
천국에 가서도 하나님의 사랑의 높이와 깊이와 넓이를 영원히 다 해아릴 수 없다.

음부란 어떤 곳인가?
음부(구약에서는 스올, 신약에서는 하데스)라는 말은 항상 같은 의미로 사용되지 않고 있다. 스올은 구약에서 60회이상 나온다. 70인역에서와 신약에서는 "스올"을 일반적으로 "하데스"로 번역하고 있다.
스올은 "무덤" 또는 단순히 "죽음의 상태"를 나타내는 경우도 있지만, 또한 분명히 악인들을 위한 형벌의 장소인 "지옥"으로 번역해야 바른 번역이 되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신32:22; 시9:17,55:5. 잠15:24등참고).
단순히 죽음의 상태를 의미하거나(이 경우 의인들에게도 해당) 아니면 지옥을 의미하는 것이다.

신약에서 "하데스"란 어떤 의미로 쓰여지고 있는가?
(1) 죽은 자들의 처소
(2) 형벌의 장소
(3) 지옥
(4) 가장 낮은 장소 또는 상태라는 뜻을 가진다(마11:23; 마16:18; 눅16:23ㅣ 계1:18, 6:8 참고)

앞에서 본바대로 음부는 신앙의 인물들도 가는 곳으로(참42:38; 눅16:23; 행2:27,31)말하기도 하고, 악인들이 가는 곳으로 말하기도 한다(시9:17; 눅16:24). 성경에서 음부를 다양한 의미로 쓰고 있음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결과로 "음부"를 천국도 지옥도 아닌 죽은 자들의 영혼이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기다리는 중간기 처소라는 주장이 나오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 구약의 "스올" 또는 신약의 "하데스"라는 말이
(1) 무덤
(2) 단순한 죽음의 상태
(3) 지옥이란 의미로 쓰여지고 있음을 알았더라면..

음부를 천국도 지옥도 아닌 제 3의 처소라든지 죽어 소멸되는 상태로 오해도지 않게 되었을 것이다.

출처: 개혁주의조직신학(송용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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