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금지법에 대한 성명서 

 

  최근 우리 국회가 입법예고한 차별금지에 관한 포괄적 법안들은 '우리 사회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평등이라는 헌법이념을 실현하고 인권 향상과 사회적 약자의 인권보호를 도모하여 인권 선진국으로 발전하기 위해서 필요한 법'이라는 명분과는 달리 사회적인 갈등을 야기할 수 있는 문제가 있어서 다음과 같이 입장을 밝힙니다.
 

1. 법안들이 담고 있는 종교적 차별을 금지하는 조항은 종교 간의 변증과 건전한 비판까지 막아서 결과적으로 헌법에서 보장하는 종교의 자유를 제약하게 될 것입니다. 이는 도리어 불필요한 종교 간의 분쟁을 유발할 요소가 될 것입니다.
 

2. 성정체성에 대한 차별 금지와 같이 기존의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는 보편적인 문화와 윤리에 심각하게 반하는 조항을 법률로 규정하는 것은 도리어 사회적인 갈등과 혼란을 야기할 것입니다. 법률로 정하기보다 기존의 가치관을 유연하게 적용하여 사회적 합의를 도출하는 것이 더 바람직할 것입니다.
 

3. 사상 또는 정치적 의견에 대하여 차별을 금지하는 조항이나 전과에 대한 차별금지 조항과 같이 사회 각 부문의 의견이 크게 상이한 조항을 일률적으로 법률로 정하면 애초의 의도와는 달리 사회적인 갈등을 불러일으킬 것입니다. 사전에 다양한 분야의 의견을 충분히 수렴한 뒤에 법률을 제정하여야 할 것입니다.
 

만일 관련 법안을 졸속으로 제정하면 사회적 편견과 차별로 인한 갈등을 해소하려는 의도와 다르게 사회적 조화를 깨뜨리는 새로운 정부 최초의 악법으로 기록될 것입니다. 이 법안이 사회적으로 민감한 문제를 다루고 있음을 깊이 고려하여 사회적 분열의 원인을 제공할 갈등 요소 조항을 삭제하거나 법안의 발의를 철회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국회와 관련 정당이 이와 같은 점을 신중하게 고려하여 인권의 신장과 함께 사회적 통합도 추구하면서 우리 사회의 근간이 되어온 건강한 가치들이 보존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여 주시기를 당부합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장 손달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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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들의 영혼은 죽을 때 어디로 가는가(중간기 상태에 대하여)

중간기 상태란?


사람이 죽은 후 몸의 부활이 이루어질 때까지 그의 영혼이 머무는 장소와 그 영혼의 상태를 의미한다.

성도들의 영혼은 죽을 때 어디로 가는가?
성경은 신자들이 죽을 때 가는 곳을 "낙원", "천국", "아브라함의 품", "아버지의 집", "주님이 계신 곳" 등 여러가지 말로 표현하고 있다(눅24:42; 히9:24; 눅16:22; 고후5:1,8; 빌1:23; 요14:2,17:24; 고후12:2,4; 히11:10,16 시73:24,25) 위에서 말하는 표현들은 각기 다른 장소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천국을 묘사하는 여러 가지 표현일 뿐이다.

천국에 있는 성도들은 의식이 있는가?
초기교회에서는 영혼수면설을 주장한 자도 있었다. 즉 영혼이 부활할 때까지 무의식적인 수면 상태에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종교개혁시대에는 일부의 재세례파가 영혼 수면설을 옹호하였는데, 칼빈은 그 주장이 잘못됨을 반박하는 논문을 썼었다. 19세기에는 어빙파 중 일부의 사람들이 이 그릇된 교리를 지지했다. 지금은 여호와의 증인들이 이와 비슷한 주장을 하고 있는데 이드은 존재의 멸절까지 믿으며 그렇게 발전시켰다.
이러한 그릇된 주장의 근거는 인간의 의식은 감각과 인상에 의존한다는데 있다. 더 이상 보고, 듣고, 접촉할 수 없다면 사고나 감정의 작용도 멈추게 된다는 생각 때문이다. 즉 영혼이 뇌의 활동을 떠나서는 의식을 계속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주장의 성경적 근거로는 죽음을 잠자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는 성구들에 두고 있다. 성경에는 죽은 자들에게 의식이 없다고 말하는 구절들이 아래와 같이 있다(시30:9; 115:17, 146:4; 전9:10; 사38:18,19).
그러나 성경은 죽은 사람의 영혼이 잔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인간의 영은 신체적인 감각기관에 의존해서만 의식이 가능한 단순한 감각의 도구나, 감각 작용에서만 파생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다. 신체적 감각 작용에 의한 경험을 떠나서도 영의 작용이나 의식은 존재할 수 있다. 천사들은 몸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인간보다 탁월한 의식을 갖고 있다.
죽음을 자는 것으로 비유한 것은 영혼이 잔다는 뜻이 아니고 죽은 자는 떠난 세상에서의 활동이나 수고가 중지 되었다는 뜻이다. 잠잔다고 한 것은 영육으로 된 인간의 활동이 죽음으로 영원히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잠에서 깨어나면 다시 활동을 계속할 수 있음 같이 그리스도안에서 죽는 자들은 영광스런 깨어남(부활)이 있음을 가리켜 잔다고 한 것이다.

천국에 있는 영혼들의 상태는 어떠한가?
천국에 있는 영혼들은 최종적인 영화 상태로 있지는 않지만 상당히 영화로운 상태에서 부활의 날을 기다리고 있다. 이들은 행복한 상태에 있지만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게 될 지체들의 구원 완성을 기다리고 있으며, 그리스도의 재림과 몸의 부활로 완성될 최종적 영화를 기다리고 있다.

계7:9-17의 말씀이 구속 받은 자들의 현세적 삶과 최후의 영화로운 상태의 영생에도 적용될 수 있지만 중간기 상태의 묘사로도 볼 수 있음은 현세적 삶과 중간기 상태와 최종적 영화 상태는 각기 단절된 것이 아니고 연속성이 있기 때문이다.

천국에 있는 영혼들은 무엇을 하고 있나?
(1) 쉰다(계14:13참고)
(2) 그리스도의 얼굴을 뵙는다.(계22:4참고). 천국에 있는 성도들의 눈은 항상 그리스도께만 향하고 있다.
(3) 듣는다. 계시록에 있는 영광과 합창과 찬미의 소리를 들으며 그리스도와 구속받은 성도들과 천사들이 말해주는 것을 듣게 된다.
(4) 일한다(마25:21참고) 몸이 없는 동안 영혼들은 천사들처럼 구속해주신 하나님을 기쁘게 섬기는 봉사의 일을 하게 된다(계6:10참고)
(5) 기뻐한다.(마25:21참고)
(6) 살아 있다
(7) 찬송하며(계14:3, 15ㅣ2-4) 위로를 받는다(눅16:25).

죽은 자와 신자의 직접적인 접촉이 있는가?
강신술자들은 죽은 영혼들과 아직 살아 있는 사람들 사이에 직접적인 접촉이 실제로 발생된다고  믿고 있다.
로마카톨릭은 성모 마리아와 세상을 떠난 성자들이 살아 있는 자들의 기도를 들을 수 있고 또 중보의 역할을 한다고 믿는다. 이것도 일종의 죽은 자와 직접 접촉설을 지지하는 입장이라 할 수 있다.
일부 개신교도들도 죽은 자들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으며 우리의 말을 다 들으며, 우리의 하는 일을 정확하게 다 안다고 생각하는 자들이 적지 않다. 이것도 죽은 자와 산자의 직접 접촉설을 받아들이는 입장이다.
그러나 성경은 이러한 신념을 지지해 주지 않고 오히려 배격한다.(욥10:21,7:9,10; 삼하12:23; 신18:11; 레20:6;사8:19).
특히 신명기 18장을 참고하라. 삼상28:3-25에 나온 사무엘의 영혼은 실제 사무엘의 영혼이 아닌 사무엘을 가장한 마귀다. 악령은 광명의 천사로 가장 할 수 있다.

천국에서도 진보와 성장이 계속되는가?
천국에서는 회개를 통한 진보는 있을 수 없다. 비록 성화를 이룸에는 진보가 없을지라도 다른 면의 진보와 성장은 영원히 있을 것이다. 하나님을 아는 것, 믿는 것, 사랑하는 것, 소망하는 것은 영원히 있게 된다. 소망할 것이 영원히 있게 다함은 진보하는 것이 영원히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새 노래를 부른다고 한 것은 하나님께 대한 감사가 갈수록 새로워지고 기쁨이 점점 더 새롭고 충만해 진다는 뜻이라 볼 수 있다. 성장과 진보는 완전과 조화될 수 없다고 하지만 완전한 아이는 자라는 아이인 것 같이(눅2:52참고) 천국의 삶도 여러 면으로 더욱 충만해지는 삶일 것이다. 하나님의 완전하심은 진보나 성장이 없는 절대적, 불변적 무한적 완전이나 인간의 완전은 천국에서도 성장할 수 있는 무한한 목표를 가진 유한한 완전인 것이다(사40:25, 26, 44:6, 54:5).
천국에 가서도 하나님의 사랑의 높이와 깊이와 넓이를 영원히 다 해아릴 수 없다.

음부란 어떤 곳인가?
음부(구약에서는 스올, 신약에서는 하데스)라는 말은 항상 같은 의미로 사용되지 않고 있다. 스올은 구약에서 60회이상 나온다. 70인역에서와 신약에서는 "스올"을 일반적으로 "하데스"로 번역하고 있다.
스올은 "무덤" 또는 단순히 "죽음의 상태"를 나타내는 경우도 있지만, 또한 분명히 악인들을 위한 형벌의 장소인 "지옥"으로 번역해야 바른 번역이 되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신32:22; 시9:17,55:5. 잠15:24등참고).
단순히 죽음의 상태를 의미하거나(이 경우 의인들에게도 해당) 아니면 지옥을 의미하는 것이다.

신약에서 "하데스"란 어떤 의미로 쓰여지고 있는가?
(1) 죽은 자들의 처소
(2) 형벌의 장소
(3) 지옥
(4) 가장 낮은 장소 또는 상태라는 뜻을 가진다(마11:23; 마16:18; 눅16:23ㅣ 계1:18, 6:8 참고)

앞에서 본바대로 음부는 신앙의 인물들도 가는 곳으로(참42:38; 눅16:23; 행2:27,31)말하기도 하고, 악인들이 가는 곳으로 말하기도 한다(시9:17; 눅16:24). 성경에서 음부를 다양한 의미로 쓰고 있음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결과로 "음부"를 천국도 지옥도 아닌 죽은 자들의 영혼이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기다리는 중간기 처소라는 주장이 나오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 구약의 "스올" 또는 신약의 "하데스"라는 말이
(1) 무덤
(2) 단순한 죽음의 상태
(3) 지옥이란 의미로 쓰여지고 있음을 알았더라면..

음부를 천국도 지옥도 아닌 제 3의 처소라든지 죽어 소멸되는 상태로 오해도지 않게 되었을 것이다.

출처: 개혁주의조직신학(송용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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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 성화는 가능한가? 


완전 성화는 가능한가? / 박영돈목사님

제2의 축복을 주장하는 이들은 이 은혜를 체험한 후에는 우리가 다시는 죄와 침체의 수렁으로 미끄러져 떨어질 수 없는 영적 고봉에 계속 머무르게 될 것처럼 말한다. 마치 영 단번에(once-and-for all) 약함과 패배와 탄식의 삶이 능력과 승리와 기쁨의 삶으로 바뀌게 될 것같이 말한다. 과연 그러한 삶이 가능한 것인가? 전통적인 입장은 이에 대해 매우 부정적이다.
  칼빈은 “거듭난 자 안에도 연기가 피어오르는 탄 재와 같은 악이 남아 있어서 끊임없이 그를 죄 짓도록 유혹하고 자극한다”고 했다. 그래서 신자는 죄의 세력으로부터 구원하는 성령의 은혜를 받았지만, 그는 결코 죄에 대한 완전한 승리와 모든 약함으로부터 자유를 누리는 단계에 이를 수는 없다. 신자의 최선의 행위도 여전히 죄의 자국으로 얼룩져 있기에, “이생의 가장 탁월한 최상의 상태마저도 오직 하나의 과정에 불과할 따름이다.”
  이런 칼빈의 가르침을 따라 칼빈주의 신앙고백서들은 성화의 불완전성을 크게 부각시켰다.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은 십계명을 자세히 해석하면서 신자는 이 계명을 철저히 지키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리고는 지금까지 강조해 온 것을 깡그리 부인하기라도 하듯이 이렇게 결론짓는다. “자신의 힘으로나, 이생에서 받은 어떤 은혜로 하나님의 계명들을 완전하게 지킬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으며, 우리 모두는 매일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이것을 범할 뿐이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에서도 이와 비슷한 언급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생에서는 가장 거룩한 사람일지라도 이 순종의 미미한 시작만을 했을 뿐이다.”
  이런 표현은 성화에 대해 매우 부정적이고 회의적인 것처럼 들린다. 자연히 많은 의문과 반론을 불러일으킨다. 안토니 후크마는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표현방식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며 이렇게 반문한다. “만약 가장 거룩한 사람마저도 다만 순종의 작은 시작밖에 할 수 없다면, 어떻게 신자가 자신에 대해 부정적인 자아상을 갖지 않을 수 있겠는가?” 후크마의 지적대로, 이런 신조의 진술에 의하면 거룩함의 성취도와 죄로부터의 구원에 대한 기대치가 너무 낮다는 인상을 피할 수 없다. 또한 아무리 힘써도 지키지 못 할 것을 애써 지키려고 노력할 필요가 꼭 있느냐는 자포자기적 심리를 조장할 수 있다. 교육심리학적으로 매우 부정적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신자들을 낮은 윤리적 수준에 만족하게 하며, 거기에 안주케 하기 쉽다. 더불어 거룩함을 간절히 추구하는 이들은 이런 전통적인 가르침에 실망하여 좀 더 나은 성화론을 찾아 방황하게 된다. 그 대표적인 예가 웨슬리라고 할 수 있다.
 
완전주의
  웨슬리가 특별히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추구하게 된 배경에는 성화의 불완전성을 강조하는 전통적인 교리에 대한 그의 불만이 깔려 있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불완전 교리가 거짓된 삶을 합리화하는 방편으로 남용되는 것을 염려하였다. 칼빈주의에서 가르치듯이 하나님의 계명을 결코 온전히 지킬 수 없으며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는 고정관념은 “우리의 부패한 마음에 온갖 종류의 합리화”를 제공한다. “얼마나 우리 마음은 항상 준비된 핑계로서 이 ‘어쩔 수 없음’(inevitability)에 초점을 맞추기가 쉬운가? 도저히 이룰 수 없는 것을 자신감을 가지고 흔들림 없이 계속 추구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웨슬리는 엄밀한 의미에서 절대 무오한 완전을 주장하지 않았다. 그는 온전한 성화의 은혜를 경험한 이도 연약함과 무지와 실수가 있으며, 그에 대한 용서의 은혜가 필요함을 인정하였다. 그는 생의 말년에 이렇게 고백했다. “나는 내가 완전하지 않다는 것을 온 세상에 말해왔다.… 나는 내가 묘사한 성품에 아직 도달하지 못했다.” 웨슬리는 성화를 점진적인 과정으로 보는 칼빈의 견해에 전적으로 동의한다고까지 말했다. “칼빈이 그랬던 것과 꼭 같다. 이 점에서 나는 그와 털끝만큼도 다르지 않다.”
  웨슬리는 칼빈주의 입장에서 볼 때 불완전한 상태에 불과한 성화의 수준을 완전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묘사함으로써 큰 혼란을 야기하였다. 이 외에도 그의 견해에는 여러 가지 문제점이 내재해 있다. 그중에 하나는 죄를 “아는 계명을 고의로 범한 것”으로 정의한 점이다. 그런 식으로 죄를 규정함으로써 웨슬리는 죄가 신적계명의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요구보다 인간의 상대적이고 주관적인 인식 여부에 근거하여 결정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나아가, 칭의 후 ‘즉각적 성화’(instantaneous sanctification)가 일어난다는 그의 가르침은 죄책으로부터의 구원과 죄의 세력으로부터의 구원을 이단계적으로 분리함으로써 성결운동과 케직 사경회가 강조한 제2의 축복과 오순절운동이 주창한 중생 후 성령세례의 가르침에 초석을 제공한 셈이 되었다.
‘이미’와 ‘아직도’의 균형
  '완전에 대한 추구’는 웨슬리에게만 특유한 것이 아니다. 죄에서 자유하여 온전히 거룩하게 사는 것은 모든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이 바라는 바이다. 칼빈 또한 웨슬리 못지않게 거룩에 대한 열망과 온전한 삶에 대한 염원을 가진 사람이었다. 이렇게 같은 성화에 대한 관심과 갈망을 가졌음에도 그들의 성화론은 대조적인 특색을 띤다. 칼빈은 온전한 거룩함을 이루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갈망이며 목표이지만 그 소원은 오직 종말론적으로 성취될 뿐이며, 그 전까지의 신자의 삶은 죄의 세력에서 벗어날 수 없는 아주 불완전한 삶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반면에 웨슬리는 성령의 은혜는 신자를 죄의 결박에서 획기적으로 자유케 하는 ‘완전 성화’(entire sanctification)에 이르게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강조점의 뚜렷한 차이는 그들이 성화론을 썼던 상황에서 직면했던 요구와 도전과 대적이 다른데서 기인했다고 본다. 칼빈은 로마 가톨릭과의 논쟁 속에서 성화의 불완전성을 크게 부각시킬 필요가 있었다면, 웨슬리는 불완전교리가 남용되는 상황 속에서 ‘온전한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관심과 추구를 새롭게 불러 일으켜야 할 사명을 느꼈다.
  웨슬리의 완전성화론이 안고 있는 근본 문제는 현재 실현된 것과 아직도 성취되지 않은 것 사이에 균형 잡힌 시각을 견지하지 못한 점이다. ‘이미’(already) 쪽으로 편중되므로 과장된 승리주의에 빠질 수 있는 위험을 극복하지 못했다. 대조적으로, 칼빈은 ‘아직도’라는 종말론적 포커스를 통해 성화를 고찰함으로써 이미 이루었다고 생각하는 완전주의적 망상과 영적 우월주의를 추방해 버린다. 동시에 성화의 참된 다이내믹인 겸손을 불러일으킨다. 우리 안에 계속 내재하는 죄성에 대한 강조는 우리의 죄와 불완전에 대해 좀 더 사실적인 안목을 갖게 하며 그로 인해 경성하는 삶의 자세를 취하게 한다. 칼빈에게 있어서 영적으로 성숙한다는 것은 자신의 부패성에 점점 더 예민해짐을 의미한다. 더 거룩해지고 은혜가 충만해질수록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성결의 높은 수준을 더욱 선명하게 보게 되며, 동시에  상대적으로 자신이 이룬 거룩함과 거리가 멀다는 것을 점점 더 깊이 인식하게 된다. 그러므로 은혜 안에서 성숙한다는 것은 자신의 불완전함을 더 깊이 절감하며 생생하게 볼 수 있는 겸손의 밑바닥으로 점점 내려가는 것이다. 만약 ‘겸손을 통해서 거룩해진다’(holiness through humility)는 역설적인 진리를 제대로 깨닫지 못하면, 우리는 쉽게 영적교만과 자기기만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아직도’의 측면, 즉 신자의 죄성과 불완전에 역점을 둔 칼빈의 가르침은 간혹 그 문맥 속에서 이해되지 못하고 칼빈의 본래의도와는 달리 성화에 대해 염세적이고 부정적인 견해로 오도되곤 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불완전 교리가 온전히 주님의 뜻을 따라 살아야하는 신자의 중대한 의무를 교묘히 회피하는 좋은 구실로 남용되는 경우가 많았다. 불순종의 삶을 살면서 그것을 불완전하기 때문이라고 합리화하기 십상이다. 현대교회는 칼빈이 불완전을 강조해야만 했던 종교개혁의 상황과 대조적인 국면에 처해있다. 지금은 웨슬리가 가졌던 관심과 강조점이 필요한 때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웨슬리가 치우친 또 다른 극단적 오류를 답습해서는 안 될 것이다.
  전통적인 교회가 성령안의 승리와 역동적인 성화에 대한 믿음을 잃고 있는 한, 이러한 도전을 통해 우리 신앙의 ‘불완전’과 ‘완전’, ‘이미’와 ‘아직도’사이의 균형을 회복하는 노력이 절실하게 요구되고 있다.
 
자료출처: 선지동산 49호 게재 / 박영돈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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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임재에 들어가는 방법    

 

기다림이란 결국 하나님의 임재 속으로 들어가기 위한 과정이다. 하나님의 임재 속으로 들어갈 때 우리는 나 자신의 욕망, 뜻, 일정에서 벗어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할 수 있다. 내 힘으로 내려놓을 수 없는 것들을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의 임재에 녹아 나도 모르게 다 놓아버리게 된다.

1. 하나님의 임재를 사모하라

임재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하나님의 임재를 사모해야 한다.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생존하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시 84:2).

“저가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시 107:9).

“나의 영혼이 주의 구원을 사모하기에 피곤하오나 나는 오히려 주의 말씀을 바라나이다”(시 119:81).

“주를 향하여 손을 펴고 내 영혼이 마른 땅 같이 주를 사모하나이다(셀라)”(시 143:6).

목마른 사슴 시냇물을 찾아 헤메이듯이
내 영혼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
주님만이 나의 힘 나의 방패 나의 참 소망
나의 몸 정성 다 바쳐서 주님 경배합니다.

주님, 저의 입을 넓게 여오니 채워주시옵소서(시 81:10).

2. 기다리는 방법, 임재에 들어가는 방법

앞에서는 임재 기도를 통해 마음을 평정하고 조용한 명상 기도로 하나님의 임재 속에 들어가는 법을 살펴보았다. 그 외에도 유용한 방법이 몇 가지 있다.

-성경 기도(praying the Scripture)

말씀을 묵상하는 중에 하나님의 임재로 들어가는 방법이다. 이때 기록된 말씀을 통해 나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사모하고 감사하고 신랑이신 예수님을 애정 어린 눈으로 집중하라. 기록된 말씀을 통해 예수님께로 초점이 옮겨져서 임재를 느끼면 이제 그분을 애정 어린 마음의 눈으로 응시하라.

-방언 기도

방언은 우리가 하나님께 하는 비밀의 말이자(고전 12:2), 성령으로 하는 기도이다(롬 8:26-27). 따라서 우리가 모르는 비밀을 하나님은 아시고 우리는 모르지만 성령이 친히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 간구하여 하나님의 뜻이나 지혜를 알려주신다. 방언 기도, 방언 찬양 또는 신령한 노래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 속에 들어갈 수 있다. “그러면 어떻게 할꼬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미하고 또 마음으로 찬미하리라”(고전 14:15).

-찬양

기도는 하나님을 일하시게 만들지만 찬양은 하나님을 싸우시게 만드신다(사 42:12-13; 시 149:6-9; 출 15; 수 6:16; 삿 5; 계 19:1-8).

특히 하나님의 임재를 돕는 달콤하고 사랑을 고백하는 찬양을 감정을 넣고 마음으로는 주님을 응시하면서 나지막하게 불러보라. 어느덧 당신은 주님의 임재 속으로 들어갈 것이다.

-성령의 임함이나 안수를 통해

안수를 통해 성령이 나누어질 때 안수 받은 자는 바로 하나님의 임재 속에 들어갈 수 있다.

-예수 기도(Jesus Prayer)를 통해.

예수 기도란 예수님의 이름을 단순하게 반복하여 부르면서 자신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임재 속으로 들어가는 기도를 말한다.

여러 가지 형태가 있지만 표준형은 “하나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시여, (죄인인)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Lord Jesus Christ, Son of God, have mercy on me a sinner)이다.

이 기도는 성경의 여러 구절에 근거하고 있다.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욜 2:32; 행 2:16-21).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시 51:1).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막 10:47).

이 형태가 다소 변형되어 “주 예수여, 사랑을 베푸소서” 또는 단순히 “주 예수여!” “주여, 도우소서”라고 하기도 한다.

이 기도 속에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까이 오셔서 그의 빛으로 우리 심령을 채우신다. 거울인 예수 속에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이 밝게 비친다. 이 빛은 우리 심령에 반사된다. 순수한 영혼은 마치 사진판과 같다.

예수 기도는 최근 수십 년간 서방의 교회에서 특히 관심을 끌고 있다. 마음을 예수께 고정하고 자신의 불쌍한 처지를 처절하게 인식하면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와 사랑을 구할 때,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의 임재 속에 들어가서 물밀 듯이 밀려오는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거나 병이 낫거나 심령이 치유되기도 한다.

-성막을 통해

우리는 영적으로 성막의 뜰에 있는 번제단에서 희생 제물을 드리고(속죄), 물두멍에서 몸을 씻고(회개), 성소 안에 있는 진설병을 먹고(말씀), 금촛대의 빛을 받아(성령의 조명), 향을 피운 후(찬양과 감사의 기도), 지성소에 들어가서 법궤 위에 계시는 하나님의 임재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

-하나님의 보좌를 응시하기

하나님의 임재에 들어가기 위해 계시록 4장을 본문으로 한다. 우리가 하늘 보좌를 응시하며 영광의 보좌에 앉아 계신 사랑과 위엄의 하나님을 묵상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

“그 생물들이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보좌에 앉으사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돌릴 때에 이십 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지며 가로되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계 4:9-11).

하나님의 은혜로 충만한 이 보좌야말로 가장 위엄스러운 곳이다. 이곳은 창조된 질서의 기초이며 모든 것이 중심지이다. 모든 것을 창조하신 이가 앉아 계시기 때문에 이곳은 모든 것의 목적이며 모든 것이 그분의 기쁨을 위해 존재한다(계 4:11).

우리는 예배를 통해 그분의 보좌 앞에 나아가서 그분과 개인적이고 친밀한 교제를 누려야 한다. 많은 신자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오는 삶을 살지 못하는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우리가 이런 식으로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삶을 살면 비록 다른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지 않더라도 쉽게 이겨나갈 수 있다.

많은 신자들이 이처럼 하나님의 보좌를 응시하며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제대로 이해하고 하나님을 뜨겁게 추구하고 사모한 결과 그들의 마음에 뜨거움이 되 살아나고 메마른 심령이 소생되었다는 간증을 많이 했다.

-성찬식을 통해

역사적으로 성만찬을 통해 하나님의 크신 능력이 임한 기록이 많다. 성만찬도 성령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은혜의 방편이기 때문에 이를 통해서도 하나님의 임재에 들어갈 수 있다.

-일터나 사업장에서

하나님의 임재 속으로 들어가는 일은 특수한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누구나 어디에서나 할 수 있다. 만일 당신이 매일 어느 정도 기도에 시간을 들여서, 주변의 시끄러움에서 차단되어, 내면을 고요하게 하여, 하나님을 응시하면서 하나님의 임재를 사모하는 삶이다.

로렌스 형제로 알려진 니콜라스 에르망은 17세기초에 불란서에서 태어났다. 그는 정규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자신에게 맡겨진 수도원의 주방 일을 통해 하나님의 임재를 누린 영성가이다.

수도원에서 식당 일을 하면서 하나님의 임재 연습에 힘썼던 로렌스 형제는「하나님의 임재 연습」에서 크리스천이 신앙적으로 성숙하고 죄에서 보호되는 가장 쉽고 가까운 길은 하나님의 임재를 연습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임재에 들어갈 수 있느냐 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수도원에 들어갔을 때 나는 하나님을 나의 생각과 영혼의 모든 느낌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간주했다. 지정된 기도 시간 중에 나는 시간을 들여 묵상하고 읽기보다는 우리가 믿음의 빛으로 받아들여야 할 하나님의 진리와 성품을 묵상했다. 예수님 자체를 묵상함으로써 나는 내가 항상 그분 속에 거하기로 결정한 이처럼 사랑스러운 분에 대한 나의 지식이 더해갔다.”

“하나님의 위엄에 완전히 몰두하여 나는 부엌에 내 자신을 가두었다. 거기서 내가 할 일을 다한 후에 나는 혼자 남은 시간을 기도에 몰두했다.”

“기도의 시간은 실제로 일하기 전과 일한 후에 가졌다. 일을 시작하기 전에 나는 확신을 가지고 주님께 나의 하나님, 주님께서 저와 함께 계시며, 주님의 뜻에 의해 저는 외부의 일을 해야 하므로 주님과 함께 거하고 주님의 임재 속에 거할 수 있게 해주시옵소서. 저와 함께 일하셔서 제가 최선의 일을 하게 해주옵소서. 저의 일과 저의 사랑을 사랑의 제물로 받아주옵소서.”

“일을 하는 동안 나는 항상 주님이 마치 나와 함께 계시는 것처럼 주님께 계속 말을 하곤 했으며 주님께 나의 일을 바치고 도와주심에 대해 감사를 드렸다. 그리고 일이 끝났을 때는 그것을 조심스럽게 점검하곤 했다. 만일 잘한 일이 발견되면 하나님께 감사하고 만일 잘못을 발견하면 낙심하지 않고 주님의 용서를 구하고 난 후 주님 속에 거하면서 일을 계속했다.”

“이렇게 매일 주님과 지속적으로 대화를 나누는 연습을 계속하고 잘못하면 즉시 주님의 용서를 구하였기 때문에 한때는 어려웠지만 지금의 나에게 주님의 임재는 쉽고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다.”

그렇다.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 속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계속 주님과 동행하면서 주님 안에 거해야 한다. 주님 안에 거해야 열매를 맺을 수 있다(요 15:4-6). 임재 연습은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할 수 있는 최상의 방법 중의 하나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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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안에서 살아가는 방법 


1. 삼위일체 하나님께 집중한다.

   세상에 많은 주제들이 있고 마음을 끌고 유혹하는 것들이 많을지라도 다 다루지도 말고 마음이 끌리지도 말려면 먼저 나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바쳐야 한다. 하나님께 헌신하는 것이 제 일이다. 그리고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우리의 하나님을 사랑한다.


2.  말씀과 기도를 하루에 아침에 한 시간 이상 한다.

  말씀은 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을 목표로 한다.

  기도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령의 임재가 있도록 하는 것을 목 표로 한다. 하나님앞에 있는 시간이다.


그리고 성경연구와 간구의 시간은 따로 연장하여 갖도록 한다.


3.  말씀충만은 성령충만이다.
말씀을 묵상하고 늘 말씀에 순종하는 의로운 삶을 살아간다. 의로운 삶은 말씀에 순종하는 삶인데 이 삶이 성령충만을 유지하고 다시 받는 최적의 조건이다.

고넬료의 성령받은 사건을 생각할 것. 예수님을 전할 때에 의인이었던 고넬료는 설교를 듣는 중에 성령을 받는다.


4. 날마다 말씀을 양식으로 먹으라.

먹지 않고 지내는 날이 없도록 하라.


5. 예수님의 피를 뿌려서 회개하고 이로 인하여 죄사함을 받으며 우리는  정결하여지고 그때에 성령을 선물로 주신다. 선물이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의 대가이다. 선물은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주시는 것이다.


6. 언제나 예수님의 피를 뿌려서 성령의 역사속으로 들어간다.

성령의 다스리심안으로 들어간다. 나의 힘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살아가게 되고 열매맺게 된다.


이때에 성령의 주시는 방언을 하게 되는데 계속 방언을 한다.

이는 중보기도로서 마땅히 제사장이 해야하는 기도인 것이다.

사무엘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범치 않겠다고 하였다. 이는 제사장으로서는 기도하는 것이 당연하며 그것을 하지 않는 것은 자신에게는 죄가 되는 것이다.


6.1 몸이 아픈 곳에, 무거운 곳에 예수님의 피를 뿌려서  하나님의 다스리심과 치유안에 거하라. 우리는 몸과 영과 혼이 다 거룩하게 보존되어야 한다.


7. 타인을 위하여 중보기도를 하라.

기도할 때에 타인이 생각나거든 그를 위하여 충분히 기도한다. 마음속에 되었다 할 때까지 기도한다.


8. 죄의 종이 되어서는 안된다.

죄의 종이 되면 즉시 회개하고 다시 하나님께 나를 헌신한다. 재헌신하는 것이다. 이는 죄를 지으면서 나를 죄의 종으로 내가 주었기 때문이다.


9. 평안과 기쁨을 확인하라.
이는 하나님의 나라가 내가 임하여 있다는 증거이다.


평안은 어떤 상태에서든지 하나님의 임재의 증거이며 기쁨은 내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의를 행함으로 하나님이 나를 기뻐하시는 증거이다. 이때에 우리의 기도가 응답이 잘 될 것이다.

 

10. 시대를 분별하라.

유혹케 하는 것과 귀신의 가르침이 횡행하는 시대이다. 교회의 부정적 운명론에 빠지지 말라. 그렇게 성경을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것은 어리석음이고 잘못된 것이다.


10.1  이제는 전도를 하는 시대가 아닌 닫힌 문의 시대라고 하는 자들도 있다. 개척교회가 너무 어렵기만 하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 아는 것이다. 환란 때에 교회가 고통을 당한다고만 주장하는 이들은 너무 부정적이다. 교회는 승리한다. 성령충만한 사람을 하나님은 보호하시고 승리하게 하신다. 예수님의 몸이기 때문이다.


10.2  교회의 통합을 말하면서 혼합주의 정책을 쓰는 것은 사단의 전술이다. 1년 전인가 2005년 세계일보에 “내 것 고집버려야 종교갈등 치유“라는 기사의 글이 실렸는데 어떤 신부가 종교혼합정책을 쓰는 것을 지지하는 것이었다. ”부처님 오신 날을 앞두고 성당에 봉축 연등을 내걸고 108배 행사를 갖는 등 대거 고산성당 정 홍규 (51세) 신부의 종교간 벽 허물기 노력이 보도된적이 있다. 그는 대구 지하철 참사희생자를 위하여 장승굿을 치르기 위하여 승려와도 만났다고 하는 신부이다.  이것은 귀신들린 행위밖에는 안된다.


성경은 다른 종교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것은 우상숭배이다.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라고 십계명에 나온다. “그것은 기독교라는 종교안에서나 하는 이야기지 그런 구태의연한 소리 하지 마쇼“라고 세상은 말한다. 그렇다. 세상은 우상숭배라고 하지 않고 타종교라 한다. 말도 안되는 소리임이 분명하지 않는가? 당신이 거듭난 기독교인이라면 이러한 구분은 당연히 되어있을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당신은 엄청 잘못 가는 것이다.

게다가 이 신부는 굿까지 하자고 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상숭배뒤에 사단과 귀신의 세력이 주장하고 있음을 안다. 그런데 굿을 하자고 찾아다니는 것은 끌려다니는 것이다. 영적 전쟁에서 승리는 못하고 오히려 이미 첩자같은 일을 하는 것이다.


우리 기독교인은 내 것을 가지고 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을 가지고 외쳐야 하며 그것으로 세상에 나가야 한다. 그러려면 말씀의 정확한 해석이 필요하다. 그러면 목숨을 걸어도 되지만 말씀의 정확한 해석이 없다면 목숨을 걸라고 해도 걸 확신이 없어지는 것이다.


개신교 안에서도 이러한 구분이 없고 유야 무야가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들은 속고 있는 것이다. 오래전 2005년 8월 옥 한흠 목사님이 승려를 만났다고 한다. 그것은 좋은 것이 아니다. 조용기 목사님은 성경해석이 부족하여 잘못 말한 것이 있다고 하자.(휴거의 시기에 대하여도 말한 바가 있다가 취소함.) 그러나 성경을 가르치고 올바르게 가르친다는 소문이 난 옥한흠 목사님이 대화를 하기 위하여 승려를 초빙하였다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다. 그가 구원을 얻지 못하였다면  옥 목사님은 당연히 구원의 문제부터 짚고 나가야 한다. 사회의 정화나 이런 문제를 같이 논의할 입장이 아닌 것이다. 혼합주의는 배타주의의 반대말이 아니라 정결한 삶의 반대말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성령충만은 아무에게나 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정하신 신앙과 헌신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성령충만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지 신앙의 어떤 노력이나 방식으로 취득하지 않는다. 선물이기 때문에 우리가 회개하고 올바로 할 때에 나를 헌신할 때에 종으로 드릴 때에 목숨을 바칠 때에 성령충만을 주신다.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할 때에 성령충만을 주신다.


11. 오직 삼위일체 하나님을 섬기라.

오늘날 세상에는 너무나 많은 주제들이 있다. 배울 것, 볼 것, 구경할 것이 너무 많다. 그러나 우리는 오직 삼위일체 하나님께 집중하여 그분과의 교제를 가장 중요시하고 실제적으로 교제하면서 살아가야 한다. 세상의 모든 것을 다 맛보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단순하고 맹목적이라고 사람들이 말할지 몰라도 최소한 맹목적인 것은 아니다. 눈감은 장님이 아니라는 것이다. 단순한 것은 좋은 것이다. 성령 안에서만 거하라. 그것이 답이다.


말씀대로 믿어라. 사단은 이제 세부적으로 이래 저래 말씀을 안 믿고 부정하고 의심하게 만들려고 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를 정확히 해석하고 그대로 믿어야 한다.


12. 교회와 사역자는 신앙안에서도 잘못된 것들은 다 구별하고 정결함을 유지해야 한다.


에스겔은 하나님이 부흥을 말씀하시는데 해골조차 살리신다.  이때에 하나님은 에스겔 44장에서 제사장들을 다시 세워주시고 교육하시는데 그중에 부과된 것이 다음이다.


에스겔

44:23 내 백성에게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의 구별을 가르치며 부정한 것과 정한 것을 분별하게 할 것이며


1) 거룩과 속된 것을 구별하라.  : 거룩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며 속된 것은 피조물의 세계이다.  하나님이 거룩한 분이며 그분을 거룩히 섬기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아야 한다. 되는 대로 가 아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면 전부라는 생각을 떠나서 누구든지 하나님을 거룩하게 섬기는 것을 가르치고 훈련해야 한다. 이것이 예수님의 대위임명령에 포함된 것이다. 가르쳐 지키게 해야 한다. 교회가 그렇게 하지 않으니 세상이 갈 길을 몰라 죄악속에서 헤미이는 것이다.


2) 부정한 것과 정한 것을 가르쳐야 한다.

부정하게 사는 사람은 성령의 역사속으로 들어갈 수 없다.  부정은 정결하지 않은 곧 더러운 것이다. 예수님의 피로 씻고나서 그는 정결하게 되어 성령의 임하심을 체험하고 그렇게 하여 그는 성령안에서 살아가게 된다.

모든 부정한 생각을 버리고, 부정한 영(귀신)을 쫓아내고 부정한 영상들을 버리고 부정한 행위와 습관들을 버리고 의롭고 정결한 삶을 살아가야 한다.


13. 거짓이 없고 흠이 없는 삶을 유지하라.

계시록 14장의 144000의 기준이다. 거짓이 없다는 것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말도 되는데 또한 진리가 아닌 것을 말하지 않는 것이다. 진리만을 말하는 것이다.  카톨릭은 기독교가 아니고 우상숭배의 하나이다. 이것이 참이라면 이 말을 해야한다. 그렇게 함으로서 그 안에서 분별력이 없는 사람들이 진리를 듣게 된다.

다 같이 한 사회, 행복한 나라를 위하여 사는데....... 라는 것이 기독교의 목표가 아니다. 기독교의 목표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게 하는 것이다. 그것이 싸우자는 것도 아니다. 단지 회개할 사람들이 회개하라는 것이다.

 

14. 나의 약점을 보강하고 약점 때문에 넘어지지 않게 하라.


자신을 관리해야 한다. 자기가 죄를 짓지 귀신이 원인이 아니다. 귀신과 사단은 유혹을 하지만 사실상 죄를 짓는 존재는 바로 우리 자신인 것이다. 그러므로 스스로를 관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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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예정(豫定)과 인간(人間)의 자유(自由)  
 
일반적으로 성도들이 이해하기 어려워하는 부분이 자유라고 하는 개념과 예정이라는 교리이다. 그러나 신앙생활을 하면서 믿음의 경륜이 깊어 갈수록 하나님의 예정하심과 인간의 자유에 대하여 조금씩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혼자서 생각하기에는 벅찬 주제라고 생각되어 하나님의 말씀과 권위 있는 학자들의 가르침을 따라 이해 할 수 있는 데까지 이 문제를 알기 쉽게 정리함으로 우리의 믿음의 터를 더욱 돈독하게 하려고 한다.
자유(ejleuqeriva, Freedom)라는 말은 매우 흔하게 쓰이고 있는 말이면서도 우리가 잘못하면 오해할 수 있는 말이다.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자유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그 자유가 어디까지 자유한 것인지를 밝히 앎으로써 우리가 참 자유를 누리게 된다.

 
하나님의 예정(豫定)

예정론은 신학적인 교리로서 무엇보다도 칼빈주의와 연관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칼빈주의자들은 주장하기를 영원 전부터 하나님께서는 미래에 일어날 모든 일들을 정해 놓으셨는데 그 중에는 궁극적인 구원과 인간의 유기(遺棄)도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예정 교리는 수많은 복음적 교회들의 신조들 속에 포함되어 있으며, 교회와 국가에 현저한 영향을 끼쳤다. 아마도 예정에 대한 가장 완전한 표현은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the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에 나타나 있는데, 이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이란 전세계 대부분의 장로교회들과 개혁교회들에 있어서는 권위 있는 신조(信條)이다. 또한 영국 국교회와 미국의 감독 교회는 39개항의 온건한 칼빈주의 신조(信條)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침례교회와 회중교회는 일반적으로 공식적인 신조를 가지고 있지 않지만, 이러한 교회들의 수많은 대표적인 신학자들의 저서들 속에는 이 예정교리가 나타나 있다.
기독교회의 처음 3세기 동안에 교부들의 글 속에는 이 예정교리가 주로 미 개발된 상태로 되어 있었다. 이 예정 교리는 어거스틴에 의해 처음으로 적극적으로 드러나게 되었는데,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은혜가 인간 구원의 유일한 근거라고 했다. 중세 시대에 안셀름(Anselm)과 롬바르드(Peter Lombard)와 아퀴나스(Thomas Aquinas)는 다소 어거스틴의 견해를 따랐으며, 예정이란 하나님께서 만물을 개괄적으로 섭리하고 통치하는 것과 어느 정도 동일시됐다. 종교 개혁의 선구자들인 위클리프(Wycliffe)와 후스(Huss)는 엄격한 예정론적 견해들을 주장했다.
개신교 종교 개혁 시대에는 이 예정 교리가 루터(Luther)와 칼빈(Calvin)과 쯔빙글리(Zwingli)와 멜랑크톤(Melanchthon)과 낙스(Knox)와 그 당시의 모든 탁월한 지도자들에 의해 강력하게 주장되었다. 그런데, 멜랑크톤은 이후에 자기의 견해를 수정하였고, 그의 지도를 받은 루터 교회는 이 예정 교리를 반대하게 되었다. 루터의 주요한 저서인 [의지의 굴레](The Bondage of the Will)와 [로마서 주석](the Commentary on Romans)에는 루터가 칼빈과 같이 이 예정 교리를 충성스럽게 받아들였다는 것이 나타나 있다. 그러나 이 예정 교리를 분명한 논리로써 강조한 사람은 칼빈이었기 때문에, 그때부터 이 교리는 '칼빈주의'라고 명명되었으며 개혁 신학 체계에 없어서는 안될 필수적인 교리가 되었다. 영국의 청교도들과 미국에 처음으로 이주한 사람들, 그뿐만 아니라 스코틀랜드의 계약파들(the Covenanters)과 불란서의 위그노들(the Huguenots)도 철저한 칼빈주의자들이었다. 근래에 이 예정 교리는 휫필드(Whitefield), 핫지(Hodge), 댑니(Dabney), 커닝햄(Cunningham), 스미드(Smith), 쉐드(Shedd), 스트롱(Strong), 카이퍼(Kuyper), 워필드(Warfield)에 의해 주장되어 왔다.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에는 이 교리가 다음과 같이 언급되어 있다.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그 자신의 뜻의 가장 지혜롭고 지극히 거룩하신 계획에 따라 장차 되어질 모든 일을 자유롭고 변함없게 예정하셨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이 죄의 창조자라는 것도 아니요, 모든 피조물들의 의지가 강압을 받는다는 것도 아니요, 제 2인자(因者)들의 자유나 우연성을 빼앗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들을 성립하는 것이다".
예정 교리에는 이처럼 하나님의 목적이 모든 유한한 피조물에 대해서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이고 독자적인 것으로 나타나 있으며, 오직 그 뜻의 영원한 계획에서 비롯된 것으로 나타나 있다. 또한 하나님은 자연의 운행을 지시하시며 역사의 진행을 가장 세밀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주관하신다. 그러므로 그의 뜻은 영원 불변하고, 거룩하고 지혜로우며, 주권적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은 미래 모든 사건에 대한 하나님의 예지(豫知,foreknowledge)의 근거가 되며, 또한 하나님의 뜻은 미래 사건에 대한 지식이나 미래 사건들 자체에서 비롯되는 어떤 것에 의해 좌우되지 않는다.
만일 우리가 하고자 하는 것을 자신이 알고 있다면, 그 이전에 우리가 하고자 하는 것에 대해 결정을 했던 것이 분명하고, 우리의 예지(豫知)는 우리의 결정보다 앞서는 것이 아니라 결정에 뒤따르는 것임이 분명하므로, 우리의 예지는 우리의 결정에 근거한 것이 확실하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도 미래를 예지하고 계시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미래를 예정하셨기 때문이다.
이 예정 교리가 나타나 있는 몇몇 성경의 참고 구절들은 다음과 같다. ". . .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1:5), ". . .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엡1:11), ". . .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동하여 하나님의 기름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스려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성에 모였나이다"(행4:27, 28), ". . .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대로 내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박아 죽였으나"(행2:23)등이다. (행13:48; 롬8:29, 30; 9:11, 12, 23; 고전 2:7; 엡2:10; 시139:16참조)
심지어는 인간의 범죄 행위조차도 이 하나님의 계획 속에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인간의 범죄 행위도 예견되고 허용되어 정확한 곳에서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그것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통제되고 다스려지게 된다. 그리스도의 못박히심은 인류역사상 최악의 범죄임에 틀림없지만, 우리가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그것도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정확히 꼭 필요한 곳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행2:23; 4:28)
선택(選擇)교리는 특정한 사람들의 선택과 관련된 것으로서, 일반적인 예정 교리를 특별하게 적용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이는 마치 예정의 교리가 죄인의 구원과 관계되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성경은 일차적으로 죄인의 구원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이 선택의 교리는 자연히 특별한 곳에서만 언급되는데, 이 선택이라는 단어가 신약 성경에만 약 48회 나온다. 이 선택을 통해서 영원하신 하나님의 뜻이 드러나는데, 이것은 인간에게 있어서 어떤 차이점과 공로보다 앞선 것으로서 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인류는 두 부류로 나뉜다. 즉 그 한 부류는 영생을 얻도록 선택된 자들이며, 다른 한 부류는 영원한 사망에 버려지게 된다.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이러한 뜻은 아담 안에서 구원 얻을 만한 절대적인 호기(好機)를 가졌지만 그것을 놓쳐 버린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의도를 가리킨다. 이런 자들은 타락의 결과로 죄책에 사로잡혀 있고 부패해 있다. 따라서 그들의 동기는 그릇되어 있고, 그들은 하나님의 자비를 얻을 모든 권한을 상실해 버려서, 모든 타락한 천사들처럼 그들의 불순종에 대한 형벌을 당연히 받게 될 것이다. 그 반면에 인류의 한 부류인 선택받은 자들은 죄와 죄책의 상태에서 구원을 받고 거룩함과 축복의 상태에 들어간다. 선택받지 못한 사람들은 단지 파멸된 그들의 이전 상태대로 그냥 남아 있을 뿐이다. 그들은 근거 없는 처벌은 아무 것도 받지 않는데,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단지 사람으로 취급하실 뿐만이 아니라 죄인들로 취급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구원 문제에 있어서 선행(good works)이란 구원에 종속되어 나타나는 것이고, 구원을 얻기 위한 공로는 아니다. 그리스도께서도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 . "(요15:16)라고 했다. 그리고 바울도 말하기를,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2:10)라고 했다.
그러므로 선행은 구원의 열매요, 증거이다.
칼빈주의자들 간에도 신적 계획 속에 있는 사건들의 순서에 관하여 서로 다른 몇 가지의 견해들이 있어 왔다. 그 문제점은 이것이니,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피조물들을 그 섭리의 대상으로 생각하셨는가, 아니면 하나님께서는 단지 그 창조하신 인간들을 모두 동등한 섭리의 대상으로 생각하셨는가 하는 것이다.
타락 후 선택설 학자들(Infralapsarians)은 말하기를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인간들의 일부분만 구원하시기로 선택하셨다는 것이다. 그들이 주장하는 사건들의 순서는 다음과 같다. 하나님께서는 계획하시기를, (1)창조하시고, (2)타락을 허용하시고, (3)이 타락한 사람들 중의 일부를 구원하기로 선택하시고, 나머지 타락자들을 그대로 버려두시며, (4)선택자들을 위해서 구속주를 예비하시며, (5)성령을 보내사 이 구속을 선택자들에게 적용하신다는 것이다. 이 계획에 의하면 선택은 타락에 뒤따르는 것이다.
타락 전 선택설 학자들(supralapsarians)의 견해에 의하면, 그 사건들의 순서는 다음과 같다. 하나님께서는 계획하시기를, (1)창조될 인간들 중 일부는 생명을 주시기로 선택하시고 다른 일부는 파멸하기로 선택하시고, (2)창조하시고, (3)타락을 허용하시고, (4)선택자를 구속하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5)성령을 보내사 이 구속을 선택자들에게 적용하신다는 것이다. 이 계획에 의하면 선택은 타락에 앞선다.
그리고 토기장이는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리가 있다고 했다(롬9:21). 즉 선택받은 자와 선택 받지 못한 자가 원래는 동일하게 불행에 처한 존재들로 간주되었다.

예정(豫定)이란 무엇인가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예정을 하셨다고 하면 인간의 자유는 무슨 의미가 있는가?"하고 묻고싶어한다.
만약 하나님께서 예정하시는 폭이 두 사람도 피할 수 없이 좁은 예정이라면 거기에는 아무런 자유도 없고 선택의 여지가 없다. 자유가 없다면 거기에는 책임도 물을 수 없다. 그렇다고 하면 인생은 그야말로 숙명론적인 것이 된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협소하고 협착한 예정을 하신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오히려 예정(豫定) 즉 제한(制限)은 극히 작은 부분이고 인간에게 주신 자유(自由)는 충분(充分)하게 주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넘치도록 부여받은 자유를 누릴 때에는 그 후에 책임이 따른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그러나 진리로 인도하는 문은 언제나 좁아 보인다. 그리고 그 길이 협착해 보인다. 그래서 사람들이 많이 찾지 않는다.
그러나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우선 보기에 넓고 많은 사람들이 그 길로 접어들고 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른 후에 보면 진리의 길 생명의 길에는 자유가 있고 갈수록 넓어지고 자유롭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많이 찾는 그 넓어 보이는 문은 들어갈 때는 넓어 보이나 갈수록 협착해서 나중에는 돌이킬 수도 없는 곳에 이르게 되고 마지막에는 막힌 곳에 당도하게 되는데 거기서 그는 위를 쳐다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발 밑이 빠지면서 밑이 없는 갱속(無低坑)으로 들어가게 된다.
처음에 좁은 문으로 들어온 우리가 걸어 갈 수 있는 길의 폭은 생각했던 것보다는 상당히 자유롭고 넓다. 우리가 허락하신 길 위를 걸어가면서도 좌편으로 걸어 갈 수도 있고 우편으로 걸어 갈 수가 있다. 결코 선택의 여지가 없이 비좁은 것은 아니다.
우리가 그 길을 걸어가면서도 천천히 갈 수도 있고 부지런히 갈 수도 있다. 열심히 일하면서 갈 수도 있고 빈둥빈둥 놀면서 갈 수도 있다. 사치하면서 갈 수도 있고 근검 절약하여 남을 도와 가면서 갈 수도 있다. 겸손히 걸어갈 수도 있고 교만한 걸음으로 갈 수도 있다. 불평 불만과 원망을 토로하면서 갈 수도 있고 찬송하면서 갈 수도 있다. 위를 쳐다보면서 걸을 수가 있고 땅만 보고 걸을 수도 있다. 앞을 보고 걸을 수도 있고 계속하여 뒤를 돌아다보면서 걸을 수도 있다.
진리를 따라 살수도 있고 욕심을 따라 살수도 있다. 주님께서 주신 사명을 따라 살수도 있고 유행을 따라 살수도 있다. 주님의 뜻을 따라 계명을 따라 살수도 있고 기분대로. 제멋대로 살수도 있다.
이처럼 우리 주님께서 예정하셨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자유가 없이 속박되거나 억압되지 않았다. 오히려 시간이 흐르면서 자유로 인한 책임 때문에 오히려 너무 많은 자유가 부담이 될 수도 있다.
솔로몬의 일생을 보면 그를 향하신 하나님의 예정과 솔로몬이 걸어갔던 자유로운 길과 그 결과로 말미암은 타락과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를 버리지 않고 회개하게 하시는 은혜의 구원을 볼 수 있다. 그는 하나님께서 사랑하신 사람이었다.
사실 솔로몬이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솔로몬을 사랑하셨다. '사랑은 내리사랑'이란 말도 있듯이 언제나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이제 내 종 다윗에게 이처럼 말하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처럼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목장 곧 양을 따르는 데서 취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를 삼고 네가 어디를 가든지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 모든 대적을 네 앞에서 멸하였은즉 세상에서 존귀한 자의 이름같이 네 이름을 존귀케 만들어 주리라 내가 또 내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한 곳을 정하여 저희를 심고 저희로 자기 곳에 거하여 다시 옮기지 않게 하며 악한 類로 전과같이 저희를 해하지 못하게 하여 전에 내가 사사를 명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때와 같지 않게 하고 너를 모든 대적에게서 벗어나 평안케 하리라 여호와가 또 네게 이르노니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집을 이루고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잘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자식을 네 뒤에 세워 그 나라를 견고케 하리라 저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 나라 위를 영원히 견고케 하리라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 저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내가 네 앞에서 폐한 사울에게서 내 은총을 빼앗은 것 같이 그에게서는 빼앗지 아니하리라 네 집과 네 나라가 네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 하라"(삼하7:8-16)
다윗이 무슨 좋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고 다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솔로몬이 태어나기도 전에 하나님께서는 "내가 그에게. . . . . . . 하리라"하신 것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作定이며 예정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실제적으로 그렇게 하신 것을 역사를 통하여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시고는 반드시 이루시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디까지가 하나님의 예정 속에 포함되었는지는 사람이 알 수가 없다. 그러나 구원받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원한 作定속에 이미 확정되어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쫓지 아니하리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또 가라사대 이러하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
(요6:37. 요6:44. 요6:65)
이 말씀들은 다 요한복음 6장에서 하신 말씀이다. 벳새다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본 후에 제자들이 부쩍 많아지고 있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굿이나 보고 떡이나 얻어먹으려고 따라다니는 사람들은 원치 않으셨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하신 말씀을 잘 새겨서 들어보아야 한다.
37절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44절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라도 올 수 없으며
65절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올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셨다. 다시 이를 정리하면 아버지께서 주시고. 이끄시고. 오게 하여 주시는 사람만이 예수님을 믿을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다.
바울은 말하기를 "원하는 자로 말미암는 것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는 것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께로 말미암는다"고 기록하고 있다. (롬 9:16)
원하는 자라고 되는 것이 아니오 힘쓴다고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긍휼에 의하여 구원하시는 것이어서 구원의 문제는 인간이 어떤 조건을 충족시켜서 구원받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에 의하여 구원받게 된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8:29-30)
잠16:33 사람이 제비는 뽑으나 일을 作定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
잠29:26 주권자에게 은혜를 구하는 자가 많으나 사람의 일의 作定은 여호와께로 말미암느니라
단05:23 도리어 스스로 높여서 하늘의 주재를 거역하고 그 전 기명을 왕의 앞으로 가져다가 왕과 귀인들과 왕후들과 빈궁들이 다 그것으로 술을 마시고 왕이 또 보지도 듣지도 알지도 못하는 금. 은. 동. 철과 목. 석으로 만든 신상들을 찬양하고 도리어 왕의 호흡을 주장하시고 왕의 모든 길을 作定하시는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지 아니한지라
눅22:22 인자는 이미 作定된 대로 가거니와 그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하시니
행13:48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作定된 자는 다 믿더라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작정하신 사람은 우리가 전도하기 전에 이미 작정되어 있다. 바울이 처음 고린도에 가서는 그 분위기에 압도되어 상당히 위축되어 있었던 것 같다.
이때 주님께서 바울에게 나나나셔서 말씀하시기를 이 성에 내 백성이 많다고 하셨다.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행18:9-10)
아직은 바울이 전도를 하지도 않아서 주를 영접한 사람들이 별로 없는 때였다 누가 아직 중생한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성령의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 있는 때도 아니다. 그런데 이미 주님은 이 성에 내 백성이 많다고 하셨다. 물론 바울은 누구누구가 주님의 백성으로 예정되었는지를 알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성에는 주님의 백성이 많이 있다고 주님은 말씀하시고 있다. 우리가 전도하러 가는 것은 지옥 가기로 작정된 사람들을 향하여 가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누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예정되었는지 모르기 때문에 아무에게나 전도해야 하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가 전도해서 믿음을 가지게 되는 사람들은 영생 주시기로 작정된 사람들이었다. 우리의 전도를 통하여 주님을 영접하는 사람들은 지옥 가기로 작정된 사람들이 아니라 천국의 백성으로 예정되었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믿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기독교가 선포하는 교리들 중에 예정론은 많은 사람들의 찬성과 반대의 격렬한 논쟁이 있었던 교리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지금은 거의 이러한 교리적인 논쟁을 하는 사람은 없다. 다만 신앙의 경륜이 깊어질수록 하나님의 예정을 체험하게 되는 것은 거의 공통적인 것 같다.


이 논의는 본래 에베소서 1장3-14과 로마서 8장29-9장에 기록된 내용을 중심으로 연구되어진 이론이었다. 그러나 성경을 깊이 연구하면 할수록 하나님의 예정이 확실해지는 것을 알게 된다. 예정론의 원리는 '하나님이 하나님이시라면 그는 절대적인 주권자이셔야 한다'는 전제하에서 출발하게 된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전지성(Omniscience)과 전능성(Omnipotence)은 미래에 이루실 모든 일을 예정하셨다는 필연적인 결론으로 귀결된다. 이러한 이론은 귀납법적인 방법으로 유추할 수 있는 것이요. 성경의 선포는 연역법적인 방법으로 드러나게 된다. 초기에 이 예정을 말한 사람은 사도 바울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를 가지고 논의하기 시작한 학자는 어거스틴이었다. 그는 자신의 신앙적인 체험을 통하여 하나님의 예정을 깨닫게 되었고 학문적인 이론으로 주장하였지만 많은 사람들이 주목하지 않았다.
이 예정론이 다시 보강되어 완성된 것은 그 후 천년의 세월이 지나서 칼빈에 의하여 완성된 이론이다. 그러나 근대를 넘어서 현대인들은 거의 관심을 가지고 이 문제를 논의하는 사람들이 없다. 그러나 보수적인 입장에서 신학을 하고 있는 사람들은 잘 알지도 못하면서 양보 없이 예정론을 고수하려고 한다. 일반적으로 예정론을 고수하려는 사람들도 예정론에 대하여 깊이 알고 있는 사람들은 거의 찾아 볼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잘 알지도 못하는 교리를 신봉하려는 자세는 마치 바리새인들의 교리와도 같았다. 율법의 참 의미를 알지도 못하면서 그것을 고수하기 위하여 사람들을 죽이기까지 했던 사람들이 바로 바리새인들이었다. 예정이라는 말만 듣고 그 내용을 진지하게 알아보려고 하지도 않는 사람들이 이 교리에 대하여 거부하는 자세나 잘 알지도 못하면서 고수하겠다고 하는 사람들의 자세는 다 잘못되었다. 그래서인지 요즈음은 조용히 덮어둔 교리처럼 되었다. 이러한 교리는 사실 이해하기 쉽지 않은 교리라 할 수 있다. 현대인들은 대체로 까다로운 것은 기피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이단들이 성도들을 독특한 교리를 조작하여 유혹하면서 자기들을 추종하지 않으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할 때는 예정론과 같은 교리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게된다. 교회사적으로 경험된 대부분의 이단들은 예정을 부인하여 왔던 것을 알 수 있다.
칼빈의 예정론에 기초한 신학은 네델란드와 스코트랜드에서 정착되었고 후에는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한국의 기독교가 미국 선교사들에 의하여 그 기초가 닦아졌기 때문에 대부분 이 예정의 교리를 받아들였다.
일반적으로 예정론을 몇 가지로 나누어 생각하는데 그 중에 극단적인 예정론을 슈프라랖싸리안(Supralapsarians)이라 한다. 이 주장은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것이 인간이 타락하기 전부터 이 모든 일들이 이미 예정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구원받을 자와 멸망될 자가 이미 다 예정되었다고 본다. 죤 칼빈이 이러한 극단적인 예정론자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칼빈을 추종하는 사람들은 거의가 다 이 이론을 신봉한다. 에베소서의 경우는 바로 이러한 예정을 시사하고 있다. 그리고 유명한 도르트 회의(Synod Of Dort 1618-1619)의 결정은 이러한 교리를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이를 요약하면.
1. 무조건적인 선택
2. 제한된 속죄
3. 완전 타락
4. 불가항력적인 은혜.
5. 보존의 확실성 등으로 정리할 수 있는 교리였다

다소 온건한 입장의 예정론은 예정의 시기를 타락한 후라고 본다. 이를 인프라랖싸리안(Infralapsarians)이라고 한다. 즉 하나님은 타락을 허용은 하셨으나 그것까지 하나님이 예정하셨던 것이 아니기 때문에 타락은 하나님의 책임이 아니라 인간의 책임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입장이다. 그리고 멸망을 예정하신 것은 아니고 단지 함께 타락한 후에 그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신 것뿐이다.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들은 이미 정죄 된 그대로 버려 두신 것이라고 보는 견해이다. 이 이론의 핵심이 되는 예정된 자의 경로는 .
1. 타락 2. 선택 3. 부르시고 4. 의롭다 하시고 5. 영화롭게 하신다. 이러한 이론은 다 로마서 8장29절을 중심으로 정리한 것인데 이들은 이 경로는 변경할 수 없는 황금사슬(Goldn Chain)이라고 부른다.
어거스틴은 이 이론의 대표자가 된다. 그러나 칼빈주의자들 중에서도 많이 수용하는 이론이다.
제 삼의 예정론(Predestination)은 위의 예정론과 자유의지를 조화시켜서 수정한 이론인데 이를 수브랖싸리안(Sublapsarin)이라고 한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타락을 허용하신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구원받을 자를 예정하신 것은 아니고 모든 사람들 중에서 믿는 자들만 선택을 입게 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세 가지의 예정론이 다 성서적인 근거를 가지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어느 한 편만이 진리라고 잘라서 확정하기는 어려운 난제에 속한다. 이 신비는 인간의 이성으로 다 파악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신자가 감격 속에서 충성하는 자세로서만 이해 될 수 있다.
사람이 구원되는 것은, 사람의 의지, 능력에 의하지 않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선택에 기초한다는 성서의 교리를 예정론이라 한다. 즉, 하나님께서 영원부터 영원까지 그 은혜로 구원하실 모든 사람들을 정해 놓으셨다는 것이다. 구약에는 예정이라는 말이 쓰여 있지 않으나, 신약에는 로마서 8:29-30 과 에베소 1:5, 11에 나와 있다.
예정의 예(豫, 이전)란 어떤 논리적, 시간적 이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을 나타내는 것이다. 로마서 9:11-13에 이 하나님의 선택, 선행규정에 대한 의미가 나타나 있다.
이삭의 두 아들, 에서와 야곱의 출생 이전에, 선도 악도 행하기 전에, 에서는 하나님께 선택받은 동생 야곱 아래 종속되어야 했다. 이것은 아우구스티누스, 칼빈의 신학에도 보여진다.
어거스틴, 루터, 칼빈의 예정론은 미리 예정되어 도저히 변경할 수 없다는 관점이 아니라, 창조 이전에 하나님의 마음속에 있었던 영원한 목적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주의 모든 계획과 가장 세밀한 점까지 그 마음 속에 미리 결정하고 계셨을 뿐만 아니라 그 결과까지 미리 내다보셨다는 것이다. 시간은 이 계획을 온전히 실행시킬  뿐이다.
성경에는 사람이 하나님의 뜻에 대해 선택한다는 견해가 나온다. 상벌간 그 결과는 각 사람의 영혼에 돌렸다. (롬 2:1-16) 이스라엘이 버림을 받은 것은 그 원죄 때문이 아니라 선택과 신뢰가 관계되는 불신앙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부르심 (갈 1:15)에 대한 순종 (고전 9:26)과 구원을 위한 노력 (빌 2:12)을 권하였다. 복음은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며 그 사랑 안에서 행할 것을 요구한다. 하나님의 영원하신 뜻은 무조건이 아니다. (엡 1장, 골 1장) 하나님의 영원하신 뜻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 인간의 역사도 예정을 넘어서 그 사랑 안에 비추어 보아야 할 것이다. 인간의  불행한 운명은 조상의 죄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최고의 은혜를 거절하는 불신앙으로 결정된다.

하나님의 예정은 하나님의 고유의 권한이다.
(사 29:16) 너희의 패리함이 심하도다 토기장이를 어찌 진흙같이 여기겠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어찌 자기를 지은 자에 대하여 이르기를 그가 나를 짓지 아니하였다 하겠으며 빚음을 받은 물건이 자기를 빚은 자에 대하여 이르기를 그가 총명이 없다 하겠느냐
(사 30:14) 그가 이 나라를 훼파하시되 토기장이가 그릇을 훼파함같이 아낌이 없이 파쇄하시리니 그 조각 중에서, 아궁이에서 불을 취하거나 물웅덩이에서 물을 뜰 것도 얻지 못하리라
(사 41:25) 내가 한 사람을 일으켜 북방에서 오게 하며 내 이름을 부르는 자를 해 돋는 곳에서 오게 하였나니 그가 이르러 방백들을 회삼물같이, 토기장이의 진흙을 밟음같이 밟을 것이니
(사 45:9) 질그릇 조각 중 한 조각 같은 자가 자기를 지으신 자로 더불어 다툴진대 화 있을진저 진흙이 토기장이를 대하여 너는 무엇을 만드느뇨 할 수 있겠으며 너의 만든 것이 너를 가리켜 그는 손이 없다 할 수 있겠느뇨
(사 64:8) 그러나 여호와여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라
(렘 18:2) 너는 일어나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라 내가 거기서 내 말을 네게 들리리라 하시기로
(렘 18:3) 내가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서 본즉 그가 녹로로 일을 하는데
(렘 18:4) 진흙으로 만든 그릇이 토기장이의 손에서 파상하매 그가 그것으로 자기 의견에 선한 대로 다른 그릇을 만들더라
(렘 18:6) 나 여호와가 이르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이 토기장이의 하는 것같이 내가 능히 너희에게 행하지 못하겠느냐 이스라엘 족속아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음같이 너희가 내 손에 있느니라
(롬 9:21)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인간(人間)의 자유(自由)
처음에 주신 자유
창조하신 후에 우리를 에덴에 두실 때부터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다. 우리를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인격으로 창조하시고 그 인격의 기초를 자유 위에 세워 주신 것을 알 수 있다. 거기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만 주의하면 완전하고 참된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거기는 선악과 외에는 아무런 제한이 없는 자유가 보장되어 있었다. 우리가 알 것은 거기 한가지 제한이 있었다는 것을 잘 유의해야만 한다. 그 후에 인간은 뱀의 유혹을 받아 결국 그 제한의 선을 넘어서고 말았다. 사람들은 제한의 선을 넘어 설 수 있는 자유를 추구할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제한된 선을 넘지 않은 쪽이 더 많은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곳이요 제한의 선 건너편은 훨씬 좁은 자유밖에 없다는 점이다. 우리가 이 문제를 이해 할 수만 있다면 남은 이론은 아주 쉽게 넘어 갈 수 있다. 우리는 언제나 제한 된 선 너머에 있는 자유를 탐내는 어리석음에 빠지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제한의 선을 넘어서 보고야 깨닫는 것은 그 선을 넘지 않았을 때가 훨씬 더 자유 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본래의 곳으로 돌이킬 수 없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처음에 우리에게 주어졌던 자유가 충분한 자유였다는 사실이다. 아무런 부족함이 없는 자유가 주어졌음을 깨닫는 마음이 중요하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진정한 자유를 주셨고 임의로 행할 수 있게 하였다. 다만 한 가지의 제한을 둔 것뿐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넘으면 정녕 죽으리라고 하셨다. 완전한 자유란 제한이 없는 자유가 아니라 제한이 최소화된 자유였다. 어떤 사람들은 "선악과의 제한마저도 없는 완전한 자유를 주실 수 없었을까?. . . 하고 묻는 사람도 있다. 만약 그렇게 된 자유가 주어지면 하나님과의 관계마저 없어지고 말았을 것이다.
그래서 관계에서는 제한이 따른다. 만약 아무런 제한이 없는 자유라면 거기에는 서로 아무런 간섭도 할 수 없고 또한 아무런 책임도 없다. 그러한 존재는 인격도 아니고 방향도 없는 존재가 되고 말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실 때 자유만을 위하여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사랑하시기 위하여 창조하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므로 성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자유는 의지의 자유와 선택의 자유였다. 의지의 자유를 다른 말로는 자유의지라고도 한다. 그리고 선택의 자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할 수도 있고 뱀의 말을 믿고 순종할 수도 있는 완전한 선택의 자유였다. 선택의 자유를 가졌을 때는 신중에 신중을 다해야 한다. 왜냐하면 선택을 하고 난 후에는 결과에 대한 책임이 따르기 때문이다.


자유선택(自由選擇)의 한계(限界)
1.내가 나의 아버지를 선택할 수 없다
2.내가 나의 어머니를 선택할 수 없다.
3.내가 나의 형제 자매를 선택할 수 없다.
4.내가 사의 성(性)을 선탤할 수 없다.
5.내가 태어나는 시대(時代)를 내가 선택할 수 없다.
6.내가 나의 태어나는 민족(民族)과 장소(場所)를 선택할 수 없다.
7.나를 나되게 하는 선생님을 대학가기 전까지는 선택할 수 없다.
8.내가 나의 성격(性格)을 어느 정도 교정할 수 있지만 선택할 수 없다.
9.내가 나의 환경(環境)을 약간 개선할 수 있지만 내 마음대로 선택할 수는 없다.
10.내가 나의 외모(外貌)를 성형수술을 할 수 있지만 내 마음대로 선택할 수 없다.
11.음성(音聲)도 내가 선택할 수가 없다.
12.지능(知能)이나 예능(藝能)이나 체능(體能)을 내 마음대로 선택할 수가 없다.
13.체질(體質)도 어느 정도 개선이 가능하지만 제한적이다.
14.직업(職業)은 선택할 수 있지만 그것도 내가 하고싶은 대로 다 되지 않는다.
15.배우자(配偶者)를 내가 선택할 수 있지만 상대가 나를 선택하지 않으면 허사다.
16.친구(親舊)를 내가 선택할 수 있지만 그 친구가 나를 친구로 받아줘야만 가능하다.
17.취미생활(趣味生活)은 내가 선택할 수 있지만 성격자체가 이미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별로 의미가 없다.
18.종교(宗敎)는 내가 선택할 수 있지만 제한적이다.
19.나의 죽는 날도 자살(自殺)을 하지 않은 한 내 마음대로 선택할 수 없다.
20.천국(天國)과 지옥(地獄)도 내가 선택할 수 없다.

우리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에는 의지의 자유와 선택의 자유가 주어져 있지만 이미 결정되어 버린 것이 많고 실제로 우리가 임의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나의 인생을 시작하신 분이 나 자신이 아니고 창조주 하나님께서 목적과 계획을 가지고 우리를 창조하시되 때에 따라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겸손이란 내 멋대로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젊은 날에 나를 지으신 창조주와 나를 구원하신 구세주와 나를 종신토록 인도하시고 도와주실 하나님을 찾는 것이 겸손이다.

예수님이 주신 자유
우리의 조상 아담과 이브가 제한된 선을 넘어가서는 결국 제한 없는 완전한 자유를 누리게 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죄의 권세 아래 팔리게 되었다. 죄 아래 팔린 인격은 죄를 지을 수 있는 자유는 있지만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자유는 제한되고 있었다. 죄는 우리에게 오직 한 가지를 제한한다.
"모든 것을 임의로 하되 하나님을 믿지는 말아라!"
믿는 날에는 정녕 살아 버리기 때문이다. 사실 사탄은 우리에게 무슨 일이든지 제한하지 않는다. 그리고 무슨 종교든지 제한하지 않는다. 다만 생명을 알게 하는 예수 그리스도만 믿지 않으면 만사가 자유이다. 사탄은 사람들에게 선행을 가르쳐서 기독교인들 보다 더 선하다는 소문을 들을 수 있도록 살게 하여 마치 광명의 천사와도 같이 가장하게도 한다. 우리가 영적인 눈을 뜨고 사탄의 열심을 보게 되면 정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사탄은 그야말로 열심이 특심하고 또한 그 끈기와 인내와 뻔뻔스러움에 있어서는 추종도 모방도 불허한다.
그리고 변신과 둔갑의 천재여서 온 천하를 꾀는 자다. 사탄이 젊은이들을 꾀이는 기상천외의 방법들이 많이 개발되었다. 그 중에 하나가 '性 自由'(Free Sex)라는 것이다. 젊은이들이 그러한 올무에 걸려들면 성 자유가 아니라 성의 노예. 죄의 종이 된다. 사탄은 그것을 '성 자유'라는 용어로 미화시켜서 젊은 영혼들을 타락시키고 있다.
그러한 사탄의 올무와 죄의 장벽에 사로잡혀 일생을 종노릇하는 우리를 자유케 하시려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다. 우리가 이 비밀을 알게 되면 어렵던 성경이 그냥 보이게 되고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게 될 뿐만 아니라 참 자유를 누릴 수 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저희가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케 되리라 하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요 8:31-36)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오신 구세주 되신다는 뜻을 우리가 올바르게 알아야 한다.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말씀은 상당히 포괄적인 말씀이다. 단지 죄 용서 받고 천국 가는 것만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의 구원은 전인적인 구원이었다. 죄의 권세로부터 구원받게 되는 것은 가장 중요한 진리이다. 우리가 범죄 한다는 것은 죄의 종이 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죄를 범하는 사람을 볼 때 우리는 나쁜 놈이라고 정죄하기가 쉽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죄의 종이 되어 죄에게 눌려서 죄를 이길 수도 없고 벗어날 수도 없고 죄를 짓지 않을 수 없는 상태에 빠져 있는 인간을 보실 때 오히려 불쌍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신 것이다.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은 그러한 죄의 종노릇하는 데서 우리를 자유케 하사 죄에 대하여 죽은 자가 되고 의에 대하여. 하나님을 향하여 살게 하셨다.
사람이 살아가는 길은 두 가지가 있다. 많은 길이 있는 것 같아도 결국은 두 가지 길이 있다. 우리의 육신적인 생각 속에 숨어 있는 사욕. 즉 욕심을 따라 살아가는 길이요 다른 하나는 그러한 사욕을 죽이고 우리 속에 거하시는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아 성경 말씀을 따라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길이 있다. 우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멸망을 받게 된다. 그 멸망은 처음에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한 삶으로 출발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뱀이 말하는 것을 잘 들어야 한다.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 3:4-5)
이 말은 잘 들어보아야 한다. 뱀은 서투르거나 어리석은 제안을 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 뱀이 말하기를 "그 열매를 따서 나에게 제사를 지내라! 이는 내가 먹고 하나님처럼 되어야겠노라!"하고 말했다면 하와가 순종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사탄을 그렇게 어리석은 것이 아니다.
사탄은 말하기를. "네가 따서. 네가 먹으면. 네 눈이. 밝아져서 네가 하나님처럼 될 것"이라고 했다.
다시 말하자면 "네가 너 자신을 위하여 살아라"고 했다. 사탄은 지금도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욕심을 따라서 살도록 가르치고 있다. 사탄은 언제나 그렇게 해 왔다. 그래서 때로는 人本主義. 人道主義. 人間主義의 탈을 쓰고 나타나게 된다. 휴매니즘이라는 이념 뒤에서 사탄이 무슨 장난을 하고 있는지 잘 알지도 못하고 사람을 위하는 척 하면 거기 쉽게 유혹을 받게 되는 것이 소위 말하는 지성인들이다.
그래서 인간들은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사는 삶. 즉 사욕을 좇아 육신대로 사는 것이 곧 실질적으로 현명한 삶인 것으로 착각을 하고 있다. 성경은 그러한 인간을 두고 구원받아야 할 대상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사람이 利己主義에서 벗어나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결국은 죽음만이 사람들을 욕심으로부터 자유하게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사실 죽음이라는 것이 필요한 것이기도 하다.
젖소가 만약 우유를 짜서 자기가 다 마셔버린다면 그런 소는 푸주간으로 끌려가게 된다. 암탉이 달걀을 낳아서 번번이 자기가 깨어 먹어버린다면 그런 닭은 그날로 폐계 처분해버릴 것이다. 인간도 자신만을 위하여 살려고 한다면 그런 인간은 존재할 가치가 전혀 없다. 그러므로 바울은 말하기를.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만일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고후 5:13-15)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자유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자유를 얻게 하신다. 그 길이 곧 죄의 종으로부터 자유로 가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는다.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 것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하였느니라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뇨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니라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6:16-23)
다시 말하자면 그리스도께서 대신 죽으시지 않았다면 소유는 고사하고 목숨이 붙어 있지도 못했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러한 사실을 바르게 안 후에야 비로소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과 나를 대신하여 죽으신 분을 위하여 살게 된다. 그리하여 비로소 욕심으로부터 자유로와지게 되고 욕심에서 해방되면 죄로부터도 자유 하게 될 수 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통한 자유를 주시고 진리를 알아야 누릴 수 있는 자유를 주셨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 5:1)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갈5:13)
"자유하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우는 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벧전 2:16)


성령께서 주시는 자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욕심과 죄로부터 자유 하게 하시는 반면에 성령께서는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를 누리게 하여 주신다. 우리가 영원히 누릴 수 있는 자유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님과 함께 있다.
성령님은 우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항상 자유를 누릴 수 있게 하신다. 하나님의 아들이 누리는 자유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보장되는 자유이다. 우리가 만사에 자유하다가도 예수 그리스도를 벗어나게 되면 우리의 자유는 보장되지 않는다. 그러나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기만 하면 우리는 필요한 자유를 충분하게 누릴 수 있다.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고후 3:17)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2)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전파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 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사 61:1-3)
그러므로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성령님의 인도를 받으며 진리의 말씀을 배우는 나라는 모든 면에서 자유로와 지고 선진국이 되며 문명과 문화가 창달되고 예술의 꽃을 피우게 되고 윤리가 바르게 세워지며 범사에 복을 받게 된다. 이러한 사실은 이치적으로만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개관적으로도 확인 할 수 있는 사실이다.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이러한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 거하시는 생명의 성령께서 자율(自律)이라는 양심의 법을 부활시켜 문자적이거나 제도적인 타율에 저촉을 받지 않는 존재로 변화되기 때문에 자유를 주어도 사고가 생기지 않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러한 자유를 누릴 수 있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람들에겐 결코 정죄함이 없다. 참 자유란 결코 정치적으로 만들어 낼 수 없다. 진정한 자유는 진정한 자율(自律)이 그 자신의 가슴속에서 제 기능을 발휘 할 때만 주어진다. 만약 자율이 없는 곳에서 제한 없는 자유가 주어지면 그것은 자유한 상태가 아니라 무법천지(아노미아=ajnomiva)가 되고 말 것이다.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요일3:4)

 

예정과 책임
예정(Predestination)을 바르게 이해한 사람은 하나님께 감사해야 하고 마땅히 자유에 대한 책임도 이행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격으로 지으시고 의지의 자유와 선택의 자유를 주셨기 때문에 결과에 대한 책임을 물으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정하신 것은 사실이지만 그 예정 속에서도 우리에게 충분한 자유를 주셨기 때문에 실제로는 매우 자유롭게 예정하셨다는 것을 깊이 명심하고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는 우리의 욕심이나 소원을 이루기 위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예정되신 대로)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기도해야 한다. 그리고 그 일에 우리 자신의 몸과 재능과 재물을 드려서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
우리는 이 교리를 잘못 해석하여 예정 자체를 부정하거나 아니면 예정을 숙명론과 혼돈하여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특별한 경륜을 위한 하나님의 예정을 인간이 다 알려고 하는 것은 인간으로서 매우 불경스러운 자세라고 한다. 우리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예정 속에서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라는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을 받아들이면서도 어떤 사람들은 선택되지 못한 사람들에 대하여 염려를 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그러한 점은 우리가 염려할 문제는 아니다. 다만 하나님의 하시는 일은 옳지 않으심이 없다는 것을 믿는 믿음이 중요하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실 절대적인 권리가 있다. 토기장이는 진흙 한 덩어리를 가지고 귀하게 쓸 그릇을 얼마든지 만드실 수 있다. 반면에 임시로 당분간만 쓸 그릇을 만들 권리가 있다.
목수가 한 나무를 가지고 어떤 부분으로는 문짝을 짜고 어떤 부분으로는 기둥을 다듬고 다른 부분으로는 거푸집을 제작하여 임시로 쓰다가 불태워버릴 권리가 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불공평에 대하여 불신자들이 항의 할 것이라고 염려를 한다. 그러나 염려할 것이 없는 것은 불신자들은 예정은 고사하고 하나님이 계신 것 마저 믿지 않기 때문에 그러한 불평은 전혀 하지 않는다. 아직까지 불신자가 목사를 찾아와서 "왜 하나님은 나를 예정하지 않았느냐?"고 시비를 걸어 온 사람을 만날 수가 없었다.
하나님은 진정한 토기장이가 되신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흙으로 우리를 만드셨기 때문이다. 그 때에 인간의 몸으로 쓰이지 않은 남은 흙들이 하나님을 향하여 "왜 우리들만 소외시키십니까 ?!"하고 항의하지 않은 것과 같은 원리다.
그리고 우리는 실로 질그릇과 같은 존재이다. 하나님께서 귀하게 쓰실 수도 있고 천하게 쓰실 수도 있다. 그것은 전적으로 창조주 하나님께 절대적인 권리가 있다.
우리가 진정으로 마음을 기울여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시고 예정하신 목적이 무엇인지를 깨닫는 일이다. 하나님의 목적이 곧 나의 사명이며 그 사명을 위하여 우리의 삶을 바칠 수 있어야 한다. 그 사명을 완수하기 위하여.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자유를 인하여 실수하지 않도록 지혜를 구한다. 사람이 아무리 육체적으로 장성해도 영적인 성장이 없이는 지혜가 없어서 자신의 책임을 다하지 못한 채로 하나님 앞에 서게 된다.
인생의 실패는 예정하신 하나님의 잘못이 아니라 어리석고 게으르고 불충한 사람의 잘못이기 때문이 일생에 대한 책임을 하나님께서 물으실 것이기 때문이다.

 

인격이 파탄된 사람은 구제불능이다.
1.하나님을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
2.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 불가능한 사람
3.믿음이 생기지 않는 사람
4.거듭나지 못하는 사람
5.영적으로 죽어서 전혀 감각이 없는 사람
6.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
7.끝까지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는 사람
8.전도자의 전도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

우리가 분명하게 인식해야 할 사실은 어떤 사람이 예정과 선택을 받았는지 아무도 모른다는 점이다. 사람이 죽음 직전에 회개하고 구원받는 사람도 있기 때문에 섣불리 판단하는 것은 금물이다.
우리 성도들이 명심할 일은 아무런 기초 지식이 없는 사람에게 이러한 깊은 교리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오해만 불러일으킨다는 점이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마 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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